자기 계발? ‘기종’도 모르고 ‘스펙’ 쌓으면 뭐해?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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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 없는 ‘자기 계발’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에서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자기 계발서 수요의 구조적인 조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는 모든 개인에게 ‘입신’과 ‘출세’를 과제로 삼게 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권리와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와 직장에서 남들과 교통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는 재화는 제한되었으므로 남들보다 나은 개인의 자원(즉 학벌과 교양 같은 상징 자본, 화법과 사교술 같은 테크닉)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필요의 총칭이 ‘처세’이다. (…)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주부만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모든 ‘자기’들은 ‘자기’의 모든 것,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아보고(알기, 성찰), 관리하고(관리, 경영), 발전하게 하기 위해(계발, 자조) 노력한다.” (<1960년을 묻다>, 377~379쪽)
흔히 말하는 ‘각자도생’의 일환으로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을 읽는 셈이다. 그런데 관리하든 발전하든 간에 매뉴얼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제품 인식이 먼저이다. 무턱대고 엉뚱한 기종에 다른 매뉴얼을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인데, ‘자기 계발서’라는 실행 지침서를 적절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기종’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계발’하려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낸다고 할 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성의 금기와 제약 등을 다루면서 금기를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강의가 담긴 책 <자기의 테크놀로지>(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은 금지를 지키든 위반하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됨을 들춰낸다. 그렇지만 자기 계발에 대해서도 그러할까. 우리는 각자도생을 위한 ‘자기 계발’의 강요 앞에,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먹고 살려고 하는 수 없이 내맡겨 버리는 체념은 아닐까.
근대 개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요구되는 ‘자기 계발’은, 푸코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자기 해석‘과 관련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계발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계발된다고 해도 계발되는 것은 ‘처세’이지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진리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강제되지 않는 한 진실만을 말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성취되니 실은 그걸 원한 게 아닌 경우를 겪곤 하지 않는가.
대번에 연상되는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흔히 주제 파악을 하라는 즈음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델포이의 이 신탁은 인생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기술적인 권고, 즉 신탁을 듣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지 말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해설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신탁소에 조언을 청하러 갈 때 정말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을 의미했다.” (38~39쪽)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960년을 묻다>에서 전형화되어 드러나듯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이 배려해야 하는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기를 해석하는 일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주목한다. 고대에 자기인식이 자기 배려에 따른 것이며, 이때의 자기 배려란 영혼을 돌보는 행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몸이지 자신이 아니며, 하물며 몸이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누구나 의문을 갖는, 영혼을 돌본다는 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혼을 돌보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제시한 점이다. 얼핏 자신을 돌보는 건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무관심일 듯싶은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배려야말로 정치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영혼은 신성한 요소(영혼의 원리, 혹은 본질)에 대하여 관조해야 한다. 이렇듯 신성한 관조 속에서 영혼은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기반을 설립하는 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정당한 정치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영혼이라는 신성한 요소를 관조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은 정치 활동과 결합되었다.” (48~49쪽)
한나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력, 생각하기의 무능력, 판단하기의 무능력’이 만연하는 악을 만든다고 말했듯,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규칙’을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의 양자택일
겉보기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관심은 흔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구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연 얼마나 현재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볼 문제이다.
푸코에 따르면,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I>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혼에 대한 인식이고, 이는 정당한 행위 혹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관조와 연관됨을 드러냈음에도 이미 고대에도 플라톤의 해결책과는 달랐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말기 헬레니즘과 제정시대에 이 문제는 별도의 대안책으로 제시되었다. 즉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 (49쪽)
흔히 연상되는 자기에의 전념이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배려는 새로운 자기 체험을 포함한다. 자기 체험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한 시대는, 내성이 점차 세분화되었던 기원전 1, 2세기이다. 글쓰기 작업과 의미심장한 관찰 사이에 연관관계가 생겨났다. 생활과 기분, 독서에 세부적인 주의가 기울여졌고, 자기 체험은 글쓰기 행위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험 영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 정신의 움직임, 자기 분석에 대한 (…) 세세한 관심이다.”(52쪽)
이제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는 일상생활의 “하찮고 세부적인 사항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세부사항이 바로 우리 자신-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55쪽)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올바른 행위나 정당한 행위를 사색하며 관조하는 일이 제거된다. 이는 로마 제정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이제 “자신을 보다 잘 배려하려면 정치와 결별하여야 했다.” “정치 생활과 무관계한 자기 자신에의 배려의 보편성”(57쪽)이 등장한다. 이것을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는 “영구적인 의학적 배려가 되었다. 한순간의 그침도 없는 의학적 배려는 자기에의 배려의 핵심 사항의 하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57~58쪽)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기 배려 모델이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볼 시간이다. 아마도 큰 무리 없이 ‘자기 계발’에의 몰두는 몰정치적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올바른 행위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고민하는 일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 개발과 원만하고 인상적인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에서 어떻게 올바름에 대한 고민의 틈이 있겠는가. 당장 능률적인 일처리와 협력 관계를 재고한다면, 올바름을 머릿속에 떠올릴 새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클레임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돌볼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삭제할수록 일처리는 능률적이다. 정당한 행위의 관조도 없이, 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계발’되고 있는 셈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사하고 진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중세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이미 결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한다면, 자기 계발되면 될수록 자기 배려와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글쓴이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일임을 고백하면서 다음의 문제제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푸코가 자기를 다루는 기술의 역사 혹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역사를 탐구하게 된 것은 베버의 의문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실된 원리에 기초하여 규제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금욕에 대한 이성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금욕에 승복해야 하는가?”
푸코의 의문은 이러했다.
“특정한 종류의 금기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인식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가?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