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2월 월례발표회]

?[2014년 2월 월례발표회]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

 

발표: 김은주(동덕여대)
후기: 김범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년 2월 26일. 한철연에서는 <들뢰즈의 행동학과 되기 개념의 실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의 논문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지금 시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매우 훌륭하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 코스프레와 함께 코드화된 폭력만 잘 활용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물론 취임 1년 후에도 안정적인 지지율 50%도 가능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 참으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위대하다. 또한 이런 사건도 기억해 볼 수 있다. 어떤 여성은 어머니의 심정(엄마 코스프레?)으로 회사의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시대에 여성되기는 오히려 구조적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코스프레가, 이런 어머니가 여성-되기일까?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여성-되기라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뢰즈의 행동학, 특히 되기의 문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라는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가짐과 문제의식으로 들뢰즈의 행동학을 해석하면서 여성되기의 가능성을 연구한 성과를 정리하는 김은주 선생님의 2월 발표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치부터 심상치 않았다. 2시간을 훌쩍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중주가 넘실거릴 수 있는 배치였다.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태도로 철학을 접근하는 사람들과 늘 대립각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늘 한편에서 조용하게 혼잣말을 한다. ‘문제제기부터 잘못됐어!’ 발표자인 김은주 선생님(이하 발표자로 명한다.) 오른쪽에는 가따리 전공자가, 반대편 왼쪽에는 여성철학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한 분이 앉았다. 이런 배치는 오묘한 이중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긴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표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윤리적 작업은 규범을 따르는 의무의 논리에서 벗어나, 힘을 실행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논의를 ‘~해야만 하는 바’라는 형식적 보편타당성을 따르는 자율적 의무의 입각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비판과 구축의 작업으로 접근한다. 그의 입장은 도덕을 비판하는 니체를 계승하고, 존재의 역량(puissance)으로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재단된 삶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생성해내는 행동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 서영화

ⓒ 서영화

문제 설정부터 많은 설명을 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표에서는 니체의 선악비판보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특히 신체의 역량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서 행동학의 의미를 접근했다. 발표 후 토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체의 의미부터 보충설명하고 싶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신체, 동물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신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제자인 일본 철학자 우노 구니이치는 corps(신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쓰는 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근대에서는 신체에 대해서 심과 신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피노자나 니체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나 심층적 의식의 지위를 신체 개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신체는 변이의 힘을 갖고 있는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발표자의 경우에는 이를 신체의 역량을 변용과 변용능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정의하면서 역량 강화의 윤리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생성하는 되기의 개념을 힘들(초기 존재론에서는 강도로 설명한다)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고 설명되는 지평으로 나아간다.

발표자는 이런 정리를 한다. “신체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경도는 신체들 간의 관계를 제시하며 신체들의 결합과 합성을 의미하는 변용(affection)이다. 위도는 한 신체에 있어서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강도적인 변화 상태와 그 정도를 보여주는 정동(affect)이다.” 그리고 이 정동은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개체성, 즉 이것임(hecc?it?)으로 나타난다. 이것임은 원래 둔스 스코투스 학파가 존재들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haecceitas에서 유래한다. 들뢰즈의 경우 이 개념을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하는데, 사건은 인칭적인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개체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임은 정동을 통해서 신체를 조성하는 생산하는 되기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발표자는 되기(devenir)의 의미에서 신체 결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즉 되기의 블록(bloc de devenir)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성으로 발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체화가 가능한 심층적인 접힘과 펼쳐짐을 해석할 수 있다. 발표자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할 수 있는 이중 포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되기 개념이 실재의 변화 ‘과정’이며 ‘상호 변용’의 결합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 안에는 신체의 역량 강화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여기서 비롯되는 의지적 주체의 도덕을 비판하는 함의가 깔려 있었다.

이 설명 안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되기가 마치 상대주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는 비판의 날이 설 수 있다. 특히 되기가 어떤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들뢰즈의 되기가 막연하게 신체적 역량 강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적 역량 강화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서 발표자는 되기의 구체적 실천의미를 정리했다. 되기는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벗어나서 그 구분의 경계를 횡단하고, 다수의 권력 지점이라는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적인 것의 되기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 방식에서는 자아 중심적 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고 도처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익명적 ‘아무개’로서 윤리 정치적 존재론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정치존재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합의체(합의라는 신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주어진 수동적인 역량, 혹은 이미 주어진 절대적 권력 앞에서 복종 대신에 도주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여성되기에 해당한다.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주인과 노예

겨울의 막바지,?봄이 오고 있다. P건설현장이다. H?인력회사에서 열 명 정도 함께 갔다.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조별 모임을 했다.?나는 헬멧과 안전벨트는 이곳 하청화사에서 받았으나 각반을 준비하지 못했다.?나는 반장에게 딱 걸렸다. “당신은 돌아가.”?라고 반장이 말했다.?나는, “알겠습니다.?좀 여쭙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반장이 말해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존할 권리가 있지요?”?다시 반장이 수긍했다.?나는 거칠게, “돌아가라 하면 나는 무었을 먹고 살지?”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인권과 정의에 대해 말 한 것이었다.?인권 차원에서 모든 이는 생존권이 있다는 것,?이에 따라서 노동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의미였다.?그리고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쯤으로 대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하기야 어떤 이들에게는 노예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날은 어찌 어찌 일했다.?함께 일하러 간 노인으로부터 들었다.?전에도 한번 모두 쫓겨 온 적이 있었다 한다.?그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있었단다.?그러자 반장이, “모두 돌아가고 싶으냐”라고 했단다.?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또다시 쫓겨 가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단다.?그 날은 분위기 썰렁해서인지,?모두들 쉬지도 않고 일했다.

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좋다.?노동은 인간 구원의 수단이자 해방의 도구로서,?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과정에 있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글이요,?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면서도 인간을 고양시키는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싸워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된다.?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처럼 비취진다.?주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한다.?그러나 어느 순간 변증법적 역전이 이루어진다.?노예는 노동하면서 물질 법칙을 알게 되고 자연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일종의 ?자유(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게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에 의해서 노예의 노동은 노예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그러나 주인은 물질시계의 혹독함을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세계의 중간에 노예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그러나 주인은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노예의 노예가 된다.

며칠간의 아파트 천정공사 무임노동과 일주일간의 저임금 노동도 이 변증법을 믿기에 시작한 것이었다.

외국인?L과 둘이서 지방이서 일하는 천정 시공 작업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그러나 우리를 일 시켜주기로 한 팀장?Y의 제안을 듣고,?현명한?L은 즉시 자기는 일을 포기하겠다,?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처음 며칠간은 무임금 노동으로 일을 배우라고 했다.?그것도 우리가 목수이므로,?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전제였다.?일을 배운 다음에는 때려먹기ㅡ일 한 만큼 공임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L이 돌아가자 상황이 변했다.?나는 졸지에 팀장?Y의 시혜대상이 되고 말았다.?나는?Y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2.?제골치기,?일명 때려먹기의 역사

농촌의 작업은 예전에는 모두 협동 작업이었다.?논의 김을 맨다 하자.?어렸을 때 본 광경이 눈에 선하다.?어디에서 그처럼 모여 들었는지 마을 앞 논들에 사람들이 가득,?일렬로 늘어서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김을 매어 나갔다.?그리고 내가 노동할 나이가 되어서는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물결치듯 작업해 나가는 것을 배웠다.?앞 물결이 나아가면 뒤 물결이 밀려오듯,작업속도가 늦은 사람을 옆 사람이 조금씩 도와주다 보면 작업 대형이 비슷해진다.

고향 농민들 중에는 객지로 품을 팔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배워온 작업방법이?<제 골 치기>이다.?누군가가?“제골 치기 해보자”고 제안 한다면 작업하는 사람들은 밭두둑 하나씩 맡아 오직 자기가 맡은 작업만 해 나간다.?다행히 이런 작업 방식은 그저 장난에 그쳤다.

사진-이재원

사진-이재원

제골치기는 지주들이나 마름들이 작업농민 등골 빼 먹기 위해 개발한,?농민 노동의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식이다.?지금도 남아있는 소작농 계약서에서 추측할 수 있다.?남쪽 지방의 지주들이 소작농과 맺은 계약에 지주는 소득의?7할을,?소작농은?3할씩 나누게 되어 있다.

풍성한 대지의 소작도 정작 당시의 농민들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저주였다.그토록 민란이 자주 일어난 것도 이유가 있다.?그리고 떨거지,?떼거지의 역사도 이런 소작 방식 때문이었다.?풍년 들면 소득의?3할로 근근이 연명하지만 흉년 들면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다.?굶어 죽으나 난리를 일으켜 죽으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아닌가??또는 저항 대신 흉년 들지 않은 동네로 줄지어 얻어먹으러 고향을 떠나간다.?그리고 해를 넘겨 다시 농사지을 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지주 일가의 신화 뒤에는 이처럼 농민들의 등골을 빼 낸 역사가 있다.

제골치기가 건축 작업 현장에 들어온 지는 정확치 않지만 오래 된 모양이다.일본인들이 말했다는,?노동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놈들 우께(도급노동)?주면 죽을까봐 겁난다.”

어쨌든 때려먹기는 인간개인의 능력과 구성원들의 합의와 협동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건축 현장에서는 원청에서 하청으로,?하청에서 각 노동자에게?<때려먹기>식 노동 계약이 이루어진다.?벽돌공의 도급 노동은 한 장당?150원,?미장은 한 석방 얼마,?목수 내장 공사 한 세대당 얼마,?이런 식의 때려먹기가 현장의 현재 모습이다.?그 분야에서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밥 값 치르기에도 바쁜 구조가 때려먹기이다.

 

3.?천정 시공

천정 시공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무척 복잡하지만 방 천정 공사 작업 순서를 간단히 요약해 보련다.

우선 각재와 석고보드 등,?작업 재료를 작업 장소에 옮겨놓는다.

시공 레벨(높이)?지접에 먹금을 놓는다.

방의 커튼 박스를 짜,?먹선에 맞춰 창틀 위에 고정시킨다.

먹선을 따라 벽체에?3cm?각재로 반자 돌림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을 기준으로 해서 우물 정자 형 반자틀을 만들어준다.

천정에 콘크리트에 못 밖는 타카를 사용하여 달대를 달아,?반자틀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에 석고보드를 붙인다.

거실 천정 작업은 방 천정 작업보다 한 공정이 더 있다.?등받이 틀을 추가해야 한다.

도급작업은 대개 한 세대에 한사람이 들어가서,?혼자서 작업한다.

20년 전에는 이와는 다른 작업 방식이었다.?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 밭으며 작업했다.

때려먹기 식의 노동에는 동료도 없다.?마치 월터 하프당크의 판화?“선차”(旋車?:Tretmuuhle)1)의 노예처럼,?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이 반자틀에 끼어있을 뿐이다.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1)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그것이 문제였다.?혼자 작업하는 경우,?작업자들의 이야기는,?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외톨이 작업 과정 때문일까,?작업이 끝나면 그들은?“저렇게 먹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생각이 들 정도로 소주를 마셔 댓다.

내가 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적어도 술 먹는 방식은 술 배울 때 선친이 당부한 것을 평생 따랐다.

<소주와 양주는 마시지 말아라.?맥주와 막걸리는 마셔라.>

왜 이렇게 나를 가르쳤는지 모르는 채 이 당부를 지켰다.?소주는 안 마셨다.한 잔에 기절한다.?선물 들어온 양주는 좋아하는 사람을 주었다(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늙어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소주,?독한 술일수록 중독이 빨리 된다는 것,?그리고 양주는 가짜가 많아 몸을 해친다는 의미이다.?고독하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그토록 몸을 해치도록 술을 마시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4.?정의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그리고 봉사노동

나는 우께,?때려먹기 천정 공사에 적응하지 못했다.?내가 기능이 떨어지고 작업 속도가 늦은 것이 큰 이유였다.?또한?6시 반에 시작해서 늦도록 작업하는 탓에 체력과 관절이 견디지를 못했다.?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내가 차지할 돈이 작았다.?능력대로 돈을 받는 사회라면 나는 때려먹기 노동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셈이었다.?따라서 나는 노동하지만 노동자는 아닌,?이상한 존재일 것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죽음으로 이 사회의 부당 노동 정책에 저항했다. “부의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비정당한 대가….?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부의 균형,?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게 자본주의,?민주사회인데.”(고 이남종씨 메모-한겨레신문)

인간 권리,?존엄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이것은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언사이다.?이에 비해?“능력에 따라서”?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입장이 될 것이다.?그러나 도급 노동,?때려먹기는 외향적으로는 능력에 따라서 임금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능력급도 아니고 인권의 입장에서 분배하는 것도 아니다.?그 출발점에서 원청,?하청,?재하청의 원환구조 끝에 자리 잡은 착취 구조가 있다.?애저녁에 공평한 분배 구조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 간에 정의에 대한 동의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출발이 공평하지 못한데,?계약 자체가 불평등을 가진 채 출발하는데 누가 이러한 노동 계약을 정의롭다고 할 것인가?

나는 극악한 시대에 있었던 노동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대 공황기 미국에서 있었던 사례이다.?캄보디아 한국 회사에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총을 쏘았듯이,?굶주린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고용한 총잡이들이 총알 밥을 먹이던 시대(포드 자동차)에, <노동 나눔 운동>이 있었다.?이 구성원들은 노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일을 해 주었고,자발적으로 녹색혁명을 이루는 노동에 참여했다.?봉사 노동이었지만,?이 노동이 사람들을 구했다.?뉴딜 정책은 이처럼 일하려는 사람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지,?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사노동의 분야는 지금도 무궁무진하다.?병든 사람,?늙은 사람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 노동도 있다.?또는?<아름다운 가계>에서 보듯이,?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한 봉사노동도 있다.?문제는 봉사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누가 제공할 것이냐의 여부이다.?간신히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정신을 나누는 노동이 있다면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마르크스의?<발췌>에서 보듯,?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활동은 우리를 삶의 표현으로,?인간적인 욕구 충족으로,?인간 공동 본질 실현으로 인도한다.?이는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 논리이다.

이윤추구로서의 노동이 아니라면,?각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상호 인정하게 된다.?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것이고,?이처럼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은 그에게 창조하는 기쁨을 맞볼 것이다.

상대방은 이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며,?기쁨을 느낀다.?모든 창조하는 이는 바로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기꺼워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이것이 노동하거나 창조하는 자의 진정한 욕구이다.

따라서 노동하여 창조한 사람이나,?이 생산물을 향유하는 사람은 상호간의 존재를 보충해 주는 사람이 된다.?서로서로 각 사람의 사유,?사랑 안에서 상호 승인한 셈이다.

제 3절 화폐[자본론강독]-11

제 3절 화폐

정리 : 나태영

 

 

‘가치척도로 기능하고, 따라서 스스로 또는 대리인을 통해 유통수단으로도 기능하는 상품이 화폐이다.’(202쪽)

가. 화폐축장 ‘상품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형태를 화폐형태로 바꾸기 위해서 상품은 판매된다.’ ‘이리하여 화폐는 축장화폐로 화석화하고 상품판매자는 화폐 축장자가 된다.’

‘상품유통이 처음 시작될 때는 사용가치 가운데 잉여부분만이 화폐로 전화한다.’(203쪽)

‘상품생산이 점차 발전하면 모든 상품생산자는 만물의 근원〔즉 ‘사회적 담보물’〕인 화폐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판매하지 않고도 구매할 수 있으려면 그는 그보다 앞서 판매만 하고 구매를 하지 않아야만 한다. 이러한 행태가 만약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상품유통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의 힘, 즉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절대적으로 사회적 형태의〕부의 힘이 증대한다.’(204쪽)‘금은 영물이다! 금을 가진 자는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금이라면 영혼을 천국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콜럼버스,『자메이카에서 보낸 편지』, 1503년)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콜럼버스, 출처:www.emersonkent.com

 

‘화폐 덕분에 모든 물건은 매매가 가능해진다.’ ‘화폐는 본래 상품〔즉 외형적인 물체〕으로서 누군가의 사유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이 된다.’“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며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서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Sophokles〕, 『안티고네』)(205, 206쪽)

‘화폐축장의 충동은 본래 무제한적이다. 화폐는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될 수 있으므로 질적으로나 형태적으로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화폐액은 모두 양적으로 제한되어있고 따라서 효력이 제한되어 있는 구매수단 일 뿐이다. 화폐의 양적인 제한과 질적인 무제한 사이의 이런 모순은 화폐 축장자를 끊임없는 축적이라는 시시포스의 노동으로 몰아넣는다.’ ‘근면과 절약 그리고 탐욕이 그의 주요한 덕목이 되었고, 많이 판매하고 적게 구매하는 것이 그의 경제학의 전부가 되었던 것이다.’(207쪽)

‘어떤 때에는 화폐가 주화로서 흡수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주화가 화폐로서 배척되기도 해야만 한다.’

“은제 장식품은 이자율이 상승하면 실려 나가 화폐로 주조되고 이자율이 하락하면 다시 은제 장식품으로 돌아간다.”(존 스튜어트 밀, 은행법 특별위원회 보고서, 1857, 제2084호와 제 2101호).(208쪽)

‘상품의 유통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의 양도를 상품가격의 실현에서 시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조건들이 발전한다.’

‘채권자 또는 채무자라는 역할이 여기서는 단순 상품유통으로부터 발생한다. 이 상품유통의 형태변화가 판매자와 구매자에게 그런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우선 판매자와 구매자라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역할이며, 또한 동일한 유통 당사자들에 의해 교대로 수행되는 역할이다. 그러나 이제 이 대립은 근본적으로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그대로 고착화할 가능성도 훨씬 크다.’

‘이제 화폐는 일차적으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 결정에서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을 한다. 계약에 따라 확정된 상품의 가격은 구매자의 채무, 다시 말해서 정해진 기한에 그가 지불해야 할 화폐액을 표시한다. 화폐는 둘째로 관념적인 구매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화폐는 단지 구매자의 지불 약속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상품의 소유자를 바꾸는 작용을 한다.’(209, 210쪽)

‘구매자는 상품을 화폐로 전화시키기 전에 먼저 화폐를 상품으로 재전화시킨다. 즉 상품의 제1형태변화에 앞서 제2형태변화를 수행한다.’

‘유통과정의 일정기간 내에 지불기한이 도래한 채무는 언제나 그 채무를 발생시킨〔판매를 통해서〕 상품들의 가격 총액을 나타낸다. 이 가격 총액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량은 첫째로 지불수단의 유통속도에 따라 정해진다.’(211쪽)

‘많은 판매가 동시에 병행하여 수행됨에 따라 유통속도에 의한 주화량의 대체는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것은 지불수단을 절약하는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여러 차례의 지불이 동일한 장소에 집중됨에 따라 그 지불의 결제를 위한 별도의 기관과 방법이 자연히 발달한다.’

‘여러 지불이 서로 상쇄되는 경우 화폐는 그저 관념적인 형태로 계산상의 화폐로만 또는 가치척도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불이 이루어지는 경우 화폐는 이제 유통수단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모든 일반적 생산?상업공황의 특별한 단계로 규정하고 있는 화폐공황은, 똑같이 화폐공황이라고 부르지만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즉 산업과 상업에 대해서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특수한 종류의〕 공황(금융공황)과는 당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화폐공황은 그 운동의 중심이 화폐자본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영역도 은행?증권?재정이다(엥겔스가 제3판에 실은 마르크스의 필사본 주〔註〕

‘화폐공황은 여러 지불의 연쇄와 그것의 결제를 위한 인위적인 체제가 충분히 발달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이 메커니즘에 전반적인 교란이 발생하면 그 교란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화폐는 계산상의 화폐라는 단지 관념적인 모습으로부터 갑자기 그리고 아무런 매개도 없이 경화(硬貨)로 돌변한다.’“여기에 60만 파운드스털링이 있는데 이것은 통화 긴축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넣어둔 것이지만 오늘 3시 이후에는 전부 시중에 풀려나갈 것이라네.”(로이, 『교환론: 1844년의 은행특별법』, 런던, 1864, 81쪽)….(212, 213쪽)

‘지불수단으로 기능하는 이런 화폐(신용화폐)는 독특한 존재형태를 취하고 주로 거액의 상거래 영역에서 사용되는데, 이에 반해 금화나 은화는 주로 소액 거래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된다.상품생산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상품유통의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 화폐는 계약상의 일반적인 상품이 된다. 지대나 조세 등은 현물납부에서 화폐로 납부하는 금납제로 바뀐다.’(214, 215쪽)

‘유럽에 의해 강요당한 대외무역 때문에 일본이 현물지대에서 화폐지대로 전환하게 된다면 일본의 전형적인 농업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즉 이 농업이 의존해 있던 협소한 경제적 존재조건들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다. 세계화폐‘세계시장에서 비로소 화폐는 완전한 범위에 걸쳐 상품으로 기능한다. 즉 자신의 현물형태가 곧바로 추상적 인간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실현형태가 되는 그런 상품으로 기능한다.’

‘국내 유통영역에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서〔즉 화폐로서〕 사용될 수 있다. 세계시장에서는 두 개의 가치척도, 즉 금과 은이 지배한다.’(216, 217쪽)

‘금?은이 국제적인 구매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주로 국가들 사이의 물질대사가 기존의 균형에서 돌연 교란을 보일 때이다. 끝으로, 금과 은이 부의 절대적인 사회적 물상으로 기능하는 것은 구매나 지불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부가 이전되는 경우이며, 특히 이 이전이 상품시장의 경기 변동이나 어떤 의도된 목적 때문에 상품형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이다.’

‘축장화폐의 기능 가운데 일부는 국내의 유통수단 및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나고, 또 다른 일부는 세계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에서 생겨난다. 이 후자의 역할을 위해서는 언제나 실제의 화폐상품〔즉 실물의 금?은〕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임스 스튜어트는 금?은을 단지 일정한 조건 아래서만 금?은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들과 구별하여 명확히 세계화폐(money of the world)라고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일면 금?은은 여러 나라의 유통영역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이것은 외환시세의 쉴 새 없는 변동이 불러일으키는 운동이다.’‘몇 몇 예외는 있지만, 축장화폐의 저수지가 평균수준을 넘어 현저하게 과잉상태가 되면 그것은 상품유통의 정체나 상품의 형태변화가 중단된다는 뜻이다.’(218-220)

도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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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 에픽테토스

 

Epictetus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도대체가 “내 인생은 살만해요.”, “내 인생은 유쾌상쾌통쾌해요.”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나만 이 모양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남들은 다들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인생이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지만 나의 부러움을 받는 그 사람은 또 자기 속을 몰라서 그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10권도 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사람도 세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사연이 만만치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의 하소연을 들을 새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면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기구절창하다. 차마 그런 사연들을 일일이 얘기하기 싫고 꺼내 보이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할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살면 살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이 “날자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구절을 읽으며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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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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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매학기 평균 150명의 학생의 인생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학생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자신의 인생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학생은 150여 명 중에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성격상 어떤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문제가 없는 유쾌상쾌통쾌한 삶이라고 하는 사람은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10여년 동안 2천여 명의 이 시대 대학생들의 삶을 만난 나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각자의 사연은 모두 소설로 10권이 넘는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는 별 일 아닌데도 본인이 너무 꼬아 생각해서 어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연예인들도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을 겪어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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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유쾌상쾌통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그런 사람을 보아야 기운이라도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저 인간은 뭐가 잘나서 저런 거야?’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당신도 그래요?”라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도 당신의 삶이 힘드세요?” 혹은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아내고 계세요?”라고 소리 질러 물어보고 싶은 심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쯤은 겪어본 그런 심정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학점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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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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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게 얻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것인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렇게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심지 않았다는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지금의 결과가 다소 억울하더라도 혹시 네가 충분히 원인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살펴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계속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가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첫 번째 일의 경우에는 5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두 번째 일의 경우에는 2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세 번째 일의 경우에는 3가지 가능한 결과 중의 하나이고, 네 번째 일의 경우에는 4가지 중의 하나라고 하자. 그러면 연이어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5X1/2X1/3X1/4’, 즉 1/120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일들로만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굵고 짧게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굵고 길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굵고 길게 살고 싶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굵으려면 짧을 수밖에 없고 길려면 가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던 것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확률상 너무 낮은 일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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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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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방송이나 일기예보 방송을 하는 리포터들은 끝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라는 사태기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확률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조건 상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라는 규정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4천만 원의 연봉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3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5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일어난 일보다 좋아야 우리는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좋은 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처음에는 7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맛있게 느끼지만 7천 원짜리 스파게티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맛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면서 1만3천 원 정도 하는 스파게티여야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싼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수입이 수십억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비싼 외제 자동차도 몇 대씩 가지고 있고 집도 몇 채이고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요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없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는 이 측면은 마음에 드는데 저 측면은 마음에 안 들고, 이 집도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제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쾌락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이다.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만족이 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역설이라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 쾌락을 얻어내는 속도보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37평 아파트를 얻기 위해 돈을 버는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42평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속도는 아주 빠른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니 쾌락의 역설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다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메우려 들면 메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기 때문에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 없음을 충격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대학생들이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핸드폰을 바꾸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가요?” 나는 그래도 “한 달”이라는 답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사흘이요!” 세상에나! 겨우 사흘을 만족시키자고 그 돈을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쾌락의 역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불만족을 줄이려면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보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주의인데 실제의 내용상으로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그러한 쾌락주의가 있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그래, 돈 열심히 벌어 저거 사자!’ 할 수 있는 서민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말한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은 그냥 일어나는데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 일이 반드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보다는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낄 때 ‘좋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이 순차적으로 이전보다 좋은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확률상 아주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인식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은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졸중에 걸리기 전에는 스스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뇌졸중에 걸리고 나면 자기 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난 일도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준다. 처음에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아이는 비록 그것이 이미 18만 킬로미터를 뛴 중고차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면 “우와! 차 타고 간다.” 하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을 불행해했다. 자동차로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것을 불편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도 적응이 빠르다. 좋은 것에 적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나쁜 것엔 노력해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사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가 시간이 될 때는 데려다주고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데려다주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더니 얼마되지 않아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인식 조건에서는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는 무척 공허한 말인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일들이 쌓여도 인간은 거기서 더 행복한 일과 덜 행복한 일을 나누고는 덜 행복한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네들이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지도 모르겠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속담은 ‘덜 행복한 일’을 곧 ‘불행한 일’로 등치시켜버리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을 교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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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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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인간은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만 많은 것 같은데도 그 중에 덜 좋은 일을 두고 불평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이 고도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아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불행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 중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는 신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문제에 시달리든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내서 문제에 시달리든 여하간 문제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으니 말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유명인은 유명인대로, 인기 있는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누구나 ‘누가 내 속을 알까?’ 하면서 한숨 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재벌은 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고민을 한다면 재벌은 몇 천억 원대로 고민을 할 뿐이다.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해주고 친절해도 자기에게 친절한 건지 자기 돈에게 친절한 건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형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앞에서 엄청난 불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관계가 주는 만족감을 통해서인데 돈 때문에 관계로 인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불행이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큰 문제없는 평범한 인생도 있다. 이들 중에는 불행의 능력을 상당히 줄인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대체로는 인생에서 각자가 겪어내는 고통의 수위는 그렇게 차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또 자신이 인생이 너무 밋밋하다고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을 살펴보면 인생 자체는 그리 굴곡지지 않았어도 본인의 마음이 볶아쳐서 그런 굴곡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생이 정말 굴곡져서 누가 봐도 입벌어지게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주관적으로 각자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인생이 힘겹다는 것, 그 점만큼은 정말이지 공평한 것 같다. 남의 인생, 모른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울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남의 인생이 부럽다면 질문해보자. ‘그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잘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힘들게 겪어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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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시대와철학>에 3년여에 걸쳐 연재한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인터뷰

 

한센인 할머니의 시, 삶을 치유하다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다 『꽃보다 붉은 울음』 저자 김성리

 

『꽃보다 붉은 울음』은 한 한센인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와 시를 기록한 글이다. 제목에서 할머니의 고통이 전이돼 오는 듯하다. 질병, 질병으로 인한 가난,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 죄의식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한스러움 등으로 할머니의 생애를 몇 줄로 요약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의 마음의 고통은 결코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한 한센인이 6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삶의 이야기를 시 11편에 담아 담담히 구술하는 동안,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글로 옮기면서 김성리 저자는 가슴 먹먹함과 눈물 아른거림을 어떻게 견뎠을까?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오랜 고통의 시간 속에 꽁꽁 묻혀 있었던 상처투성이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가?

 

“할머니의 자작시들, 그리고 저자가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아름다운 시(詩)들은 한센병이라는 단단한 갑옷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해맑은 영혼을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이 되어준다. 한하운과 김춘수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타인의 아픔’은 할머니의 말 못할 아픔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주기도 하고, 할머니의 아픔과 우리의 아픔을 함께 어루만지는 따스한 엄마의 손길이 되어주기도 한다.”(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자의 담담한 글로도 담기지 못한 할머니의 정서와 필자의 마음을 더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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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 어떤 심정이었나요.

 

저를 만난 할머니는 당신의 삶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을 떠나기 전에 마음 한구석까지 비우려 했었던 것 같아요. 60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죠.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아팠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글을 쓰다가 여러 번 멈추고 멍하니 앉아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한 줄 써놓고 밖으로 나가서 그냥 걸어 다녔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심지어 한 편의 글을 쓰는 데 한 달 가까이 걸린 적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더라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드러내게 도와드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마쓰시타(연인이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가 그 모진 삶을 이어온 동앗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왜 진작 이것을 몰랐을까요? 할머니가 저에게 당신의 삶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할머니를 만나는 내내 아팠던 것은, 할머니의 고통이 저에게 옮겨 와서였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는, 그런 차원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몰랐다는 자책에서 오는 아픔이었죠. 그리고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눈물입니다.

 

이 책을 쓴 계기가 할머니의 말씀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자신의 생애 이야기와 시를 남기시려고 한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요?

 

할머니는 한센병이 발병하던 19세 무렵에 이미 연인 마쓰시타(당시 대학생)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 마쓰시타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미혼모로 아이를 낳았죠. 젖먹이였던 아이를 도저히 혼자 키울 수 없어서 입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할머니는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아이를 보낸 거죠. 아들이 장성하면 병든 어미는 말고 일본에서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이 아들을 평생 동안 그리워했습니다. 당장이라도 할머니는 알아볼 수 있다고 했죠. 할머니는 아들에게 당신은 “너를 버리지 않았다. 잊지도 않았고, 너를 살리려고 입양 보냈다”,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에게 당신의 일을 소설로 쓰고, 그 소설이 일본에서도 출판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만일 아들이나 마쓰시타가 책을 통해 당신을 찾아오게 되면, 병든 몸으로는 만날 수?없으니, 당신이 죽은 후에 출판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가난과 병환으로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이 시를 쓴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할머니의 시는 어땠나요.

 

할머니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의식이 강하고 자존심도 대단한 분이었죠. 그래서 그분의 삶은 더 처절했습니다. 할머니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할머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번에 걸쳐 생을 마감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은인들의 손길에 구조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시를 쓴 것은, 발병 이후 당신의 의지로 행한 첫 사건이었습니다. 저와의 만남 자체, 그리고 저와 함께한 시간들은 할머니에게는 사건이었죠.

 

『꽃보다 붉은 울음』이라는 제목에는 할머니의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가장 화려하고 예쁘게 남아 있는 10대는 꽃처럼 살고 싶어 하던 소녀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넉넉한 살림이어서 당시(일제 강점기) 부산고녀에 다녔었죠. 일본인 대학생이 1년 넘게 구애하며 쫓아다닐 정도로 고왔고 순수했습니다. 그 10대가 끝날 무렵부터, 할머니의 삶은 질병으로 인해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할머니의 감정인 슬픔, 고통, 비애, 분노, 절망, 회한 등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죠. 그런데 할머니는 시에서 당신의 삶을 “핏자죽이 어린 길”이라 했습니다. 핏자죽 어린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말할 때 “피를 토한다”라고 하지요. 할머니의 울음은, 피를 토하다 못해 붉게 물들었을 울음입니다. 그 울음은 60년의 시간을 지나서 시로 재현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시에는 60년의 시간과 60년의 슬픔과 60년의 눈물이 담겨 있죠. 할머니의 시는 할머니의 삶입니다. 저에게 할머니의 삶과 시는 꽃보다 아름답고 꽃보다 더 붉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목을 “핏자죽이 어린 길”로 하고 싶었는데, 제목이 너무 선명하여 『꽃보다 붉은 울음』으로 했습니다.

편집자는 저에게?『꽃보다 붉은 울음』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미당 서정주의 시 「문둥이」에서 직접 표현된 것이라서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할머니의 삶을 그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디’라는 표현은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한센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입니다. 그런 시에 나온 표현이기 때문에 할머니의 삶에 더 적합한 표현으로 고쳐서 제목으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의 생애를 말로써, 시로써 풀어놓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과연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까요?

 

할머니가 처음에 구술한 시에서 당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습니다. 그렇지만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온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저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저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할머니 이야기는 잠시 두고, 본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간호학과를 나와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다시 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꿈이 두 개였습니다. 시인과 간호사. 중학생 때 스스로 꿈을 정리했습니다. 시를 쓰는 간호사가 되기로. 근데 간호사는 되었는데 시인은 되지 못했네요. 시를 공부하고 시의 치유력을 발견하면서 가장 먼저 한센인을 떠올린 건 아마도 간호사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 정형외과 병동에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때 치료는 끝났으나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더 큰 충격은 퇴원을 하신 분 가족의 초대로 그 분 댁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아내와 어린 딸을 사랑했던 환자가 거의 폭군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병원의 아빠 병상 옆에서 돌을 지내고 간호사실을 들락거리며 귀여운 말썽을 일으키던 아이는 겁에 질려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내는 죽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환자분은 내내 침대에 누워 스스로는 휠체어에 탈 수도 없고 대소변도 자유의지로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무서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과 휠체어에 의지해 퇴원하던 6살의 진아, 치료 후의 삶이 더 고통스러웠던 많은 환자분들은 저에게 지금도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그 분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할머니를 찾아간 것은 그 분들과 달리 한센인들은 추방과 격리, 그리고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답이 좀 길어졌네요. 제가 알고 있는 의학적인 지식과 인문학적인 시선에서 볼 때 한센인들만큼 고통스러운 삶은 없을 겁니다.

 

독자가 이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이 책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 여인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느 삶과 같이, 할머니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이를 품에 안고 키우면서 살고자 합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죠. 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는커녕, 평생 가슴에 묻어야 하는 비밀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삶입니다.

어머니로 살았지만 어머니로 살 수 없었고, 아내로 살았지만 여자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배우처럼 자신의 삶을 낯설게 살다가 생애 마지막 나날에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분입니다. 시 쓰기라는 도구를 통해서였지만, 그것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진짜 내면을 들려주고자 한다면, 자연히 소통의 언어는 따라올 것입니다.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시였고, 삶이었습니다.

 

가장 딱딱한 질문이라 가장 끝에 물어보네요. 지금 연구 주제로 삼은 “치유 시학”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아뇨, 딱딱한 질문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죠. 살아가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시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치유 시학”입니다. 시를 읽거나 시를 쓰거나 또는 서로 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의 문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고통의 기억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고 위로를 받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살아나지요. 하지만 그 기억이 현재 나의 삶을 흔들지 않으면 그 고통은 치유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완전한 치유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치유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시를 공부하니 시가 치유의 길을 인도하는 하나의 별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춤을 잘 춘다면 춤으로, 노래를 잘 부르면 노래로 치유의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숲길을 걷기만 해도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집니까. 시만 우리들의 삶을 치유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치유되지 않는 고통도 없습니다. 어떤 기억이, 어떤 경험이 계속 괴로움을 준다면, 그것들을 피하지 마세요. 모른 척하시지도 말구요.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면 고통도 나의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맨 얼굴로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때 시를 읽어도 좋구요, 노래를 들어도 좋습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이 글의 출처는 http://cafe.naver.com/gozone?임을 밝힙니다.

 

 

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선우현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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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가격에 양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 정녕 좋아진 걸까?

예전만 해도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선, 명절이나 잔칫날에나 겨우 맛볼 수 있었던 ‘귀한’ 먹거리가 바로 ‘고기(육류)’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한우 정도면 모를까 수입산을 포함하면,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온 가족이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소고기 등심구이다. 돼지갈비와 삼겹살도 직장 회식이나 친구들 간의 모임에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가 된지 오래다. 치킨 또한 전화 한 통이면 콜라와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야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오늘의 풍요로운 현실에 대해, 그 옛날 보릿고개를 겪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경험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거참, 세상 좋아졌다!”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 즉 신자유주의로 새로이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가?

햄버거무서운이야기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에릭 슐로서?찰스 윌슨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증적 현상’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서술된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귀중한 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Chew on this)>(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슐로서는,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참깨가 박힌 빵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9쪽)고 역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널리스트가 아닌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철학자로서의 슐로서를 엿보게 된다. 왜? ‘철학(함)’이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현상 배후에 있는 ‘실체적 본질’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며 햄버거며 풍족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행복한’ 세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슐로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푸른 초원 대신 ‘똥 무더기’ 위에서 사육되는 가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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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 가운데 하나는 단연 햄버거다. 물론 어른들이 먹기에도 꽤나 맛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싼 가격에 간편하게 한 끼를, 그것도 맛있게 때울 수 있는 편리성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잠시 입을 호사하도록 해주는 햄버거 속에 들어 있는 고기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상태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 이 패티 뿐 아니라 주변에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고기들은 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식탁에 오른 걸까?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기를 제공해 주는 가축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축하면 우리는 흔히 ‘푸른 초원에서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적어도 미국과 같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난다. 실제로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은, 오직 더 많은 고기 생산을 위해 운동을 제한당한 채 특수 사료를 먹여 단기간에 살이 찌도록 의도된, 목장이 아닌 엄청난 규모의 ‘비육장(肥育場)’에서 판매용 고기 상품으로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들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신선한 풀을 뜯는 게 아니다. 도살되기 전 3개월 동안 소들은 (…) 특수곡물을 먹는다. 피부 아래 미리 이식한 성장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소를 빠르게 살찌우도록 설계된 곡물이다.”(151~152쪽). 온갖 오물과 배설물, 죽은 소들의 사체까지 있는 비육장에서 소들은 오직 먹기만 한다. 운동은 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똥 무더기 속에서”(177쪽).

?치킨용 닭들의 삶 역시 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 엄청난 수의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먼지와 깃털, 병균으로 득실대는 환경 속에서, 오직 식용으로 적합한 크기로 살찌우게끔 먹고 또 먹는 삶이 지속될 뿐이다. 그것도 “첫날과 마지막 날을 빼고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160쪽) 못하는 겨우 40일 동안의 삶이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생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직 살찌우기 위해 먹는 삶으로 인해 “다리는 체중 때문에 구부러지고 체액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기”(161쪽)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들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육장이나 비육장을 떠나 도축되는 과정에서도 그것은 계속된다. 가령 닭들을 도살 처리하는 도계장(屠鷄場) 내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닭들은 거대한 도계장에서 도살되는데, 빠르게 움직이며 수천마리의 닭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체인에 다리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다. 부품을 끼워 맞추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라인과 달리 현대식 도축장의 생산라인은 해체라인이다. 죽이고 재빨리 분해한다.”(162쪽)

하지만 이처럼 무시무시한 도계 시설에서 도살되는 것은 그나마 고통이 덜한 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슐로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닭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일꾼들이 닭의 다리를 일일이 잡을 시간이 없다. 그러면 머리 위 체인에 매다는 대신 일꾼들은 남은 닭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 여전히 꽥꽥대며 퍼덕이는 것도 있다. (…) 짜증 난 일꾼이 닭 위에서 뛰며 짓밟거나 잡아서 벽에 다시 던진다.”(164쪽)

ⓒ 오마이뉴스, 최병렬

ⓒ 오마이뉴스,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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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적 살처분’이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가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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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사람들에게 싸고 영양가 높은 맛난 고기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인 사육 동물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공포, 괴로움은 제대로 포착되기가 어려웠다.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육장이나 도축장의 실태는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가축들이 겪는 야만적인 학대의 실상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세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으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 닭과 오리가 살아 있는 상태로 생매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소위 ‘살처분’을 들 수 있다. 가축 학살 동영상을 통해 드러난, 구덩이 속에 내던져져 울부짖는 채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의 참상은 그야말로 가축 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한데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전국에서 닭과 오리가 또 다시 살처분 당하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비(非)생명윤리적인’ 만행이 재현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380여 만 마리! 정녕 이래도 되는 걸까? 그것들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닌가? 과연 그러한 가축들을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먹거리 상품’으로 간주하여, 경제적 손실을 줄인다는 이유로 그처럼 임의로 살처분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나 한 걸까? 설령 도축이나 살처분을 당하는 경우에도,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 고통과 두려움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들은,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고 사용하다 쓸모없거나 경제적 손실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전자제품처럼, 대규모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생산되어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동물들이 지닌 생명이나 그것들이 느낄 공포나 두려움, 아픔이나 고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도 그것들과 똑같이 느끼고 의식하는 ‘동물’인데도 말이다.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축장 내 노동자 세상

도축장은 사육 동물들에게도 무섭고 고통스럽지만, 작업하는 인간들에게도 끔직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정글’처럼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판치는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이미 100여 년 전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업튼 싱클레어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다. 그 일부에는 “일꾼 하나가 사고로 큰 통에 빠져 라드, 즉 돼지기름이 되어버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얘기도 있다.”(166쪽)

?문제는 지금도 도축장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서 비롯된 비윤리적인 정글의 세계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정육회사들이 패스트푸드 업계의 필요에 맞추느라 대형화하면서 임금을 깎기 시작했다. (…) 그리고 생산라인의 속도를 올렸다.”(168쪽) 소를 해체해 진공 포장육으로 만드는 생산 라인의 속도는 도축장을 두려움과 공포, 고통의 소굴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럼 왜 라인은 그처럼 빠르게 움직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속도가 빠를수록 회사의 수익은 커진다.”(171쪽) 분당 7마리 정도의 큰 소가 생산라인으로 보내지면 일꾼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을 자르고 저며 낸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의 ‘직업안전위생관리국’이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고기 가는 기계에 팔이 끼여 죽고, 컨베이어에 머리가 부서져 죽기도 한다. 암모니아 유출로 한 명이 죽고 여덟 명이 다치기도 했으며, 가축을 기절시키는 스턴총에 죽은 사람도 있다.”(169쪽)

하지만 노동자들은 부상이나 죽을 수 있는 위험 사태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다. 정육회사들은 그들을 “경고 없이 아무 때든, 무슨 이유로든 해고할 수 있다.”(172쪽) 멕시코 등에서 갓 이민 온 ‘불법 체류자’가 작업장 인부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부양할 가족이 있는 그들의 처지에서 불평이란 곧 “모든 것을 잃을”(172쪽)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알겠는가? 우리가 식탁에서 맛나게 먹는 고기는, 도축 작업장 내 인부들의 목숨 혹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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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광우병과 ‘O-157: H7’ 대장균: 가축의 역습 혹은 복수?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맛나게 먹었던 고기가, 가축들뿐 아니라 사육하고 도축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의 대가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희생은, 고기를 먹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전이된다. 이름 하여 ‘사육 동물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맛난 고기로 인해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대표적인 예로는 ‘인간 광우병’을 들 수 있다. “값이 싸게 치이는 단백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소’, 즉 “도축장에서 나온 부스러기 쇠고기와 피를 소에게 먹였던”(218쪽) 탓에 새로이 등장한 치명적인 불치의 병인 인간 광우병은, 한 순간의 고기 맛을 보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극도의 위험성과 두려움을 우리 인간들에게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넣은 광우병보다 ‘현실적으로’ 한층 더 위험한 것은 치명적인 ‘장출혈’을 일으키는 새로운 대장균 “E. 콜리 O-157: H7″(174쪽)이다. 실제로 이 병원균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 수만 해도 인간 광우병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에 의하면, 해마다 자국 내에서 대장균 O-157: H7에 감염되는 사람은 대략 7만 3000여 명이며 그 중 61명이 사망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제대로 익히지 않은 햄버거 속 고기 패티에 들어 있던 대장균으로 인해,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며 내장 기관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로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병원에 입원해 엄청난 고통과 세 번의 심장발작을 겪은 후 1992년 12월 28일 엄마의 품에서 죽었다. 겨우 6살이었다.”(174쪽)

그런데 이처럼 그 정체를 파악키 어려운 치명적인 병원균의 출현과 확산이 이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대규모 축사와 거대 도축시설을 갖춘 기업화된 ‘공장식 축육(畜肉) 생산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장균 O-157: H7만 해도 그 병원균의 서식지는 ‘소의 위장’임이 밝혀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축의 대량 사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는 반추동물로서 위가 4개이며 ‘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초식 동물이다. 방목하는 소들은 기계적인 되새김질과 위 속 세균의 작용으로 풀의 섬유소를 완전 소화하여 흡수한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산된 ‘옥수수’의 80% 이상을 가축 사료용으로 전용하고 있는, 기업화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방식은, 소들이 수천 년 동안 먹어 본적이 없던 새로운 사료, 즉 ‘죽은 소’ 사체의 육골분을 섞어 단백질을 보충한 옥수수 사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인간 광우병의 출현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소장에 남아 있던 옥수수가 발효하여 장내 미생물을 ‘악산성의 걸쭉한 액체’로 변질시켜 대장균 O-157: H7이 증식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도축된 고기나 배설물 등을 통해 해마다 미국 내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 중 수십 명을 사망케 하는 무시무시한 사태를?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방질 많은 맛있는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즐기기 위해, 우리 인간은 풀과 건초로 사육해야 할 초식동물인 소에게 비육을 위해 과도한 옥수수 곡물을 제공하고, 초식동물에 맞지 않는 동물성 사료를 공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른 대가로, 미쳐 날뛰는 ‘식우종(食牛種)’을 출현시켜 생태계 질서의 붕괴를 자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광우병’의 등장과 가공할 대장균의 출현 및 무차별적 확산에 따라 인간 종(種) 자체의 보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 사회’의 등장을 우리 인류는 현재 맞이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말이나 휴일이면 동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 엄마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 세트를 맛나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이 미소 짓는 모습에 다시 또 행복해 하는 부모들의 모습! 참으로 보기 좋고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닌가? 단 돈 몇 천원에 맛난 한 끼 혹은 간식으로 그처럼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처럼 웃음꽃 가득한 정경의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사육 동물들과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 고통과 좌절 그리고 너무나 슬픈 ‘이별’이 자리하고 있다. 고통 없이 사육되고 도축될 최소한의 ‘동물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는 야만적인 거대한 공장식 육류 생산 시스템, 생명체가 아닌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한갓 ‘상품’으로 취급되는 사육 동물들의 비애, 철저히 ‘돈의 논리’에 의거해 멀쩡히 살아 있는 가축들이 수백만 마리씩 생매장 당하는 반(反)생명윤리적인 비극적 참상, 살처분 작업에 참여한 관련 공무원들이 겪는 끔직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후유증,?소수 대기업이 독점한 기업형 고기 생산 방식으로 인한 수많은 축산농가의 몰락과 좌절,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횡포와 수탈 그리고 희생, “노조를 모르는”(84쪽) 햄버거 매장에서 거의 착취 수준으로 부림을 당하는 10대 청소년 종업원들의 환멸과 좌절, 끝으로 순간의 맛과 미소, 행복 뒤에 닥칠지 모를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 그리고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

이러한 실체적 진실에 접하여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슐로서에 의하면, 정부나 의회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와 그들의 공급업자들이 지닌 정치적 힘은 의회가 할 일에 대한 논의를 대부분 무의미하게 만들기”(229쪽)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요구를 지닌 더욱 막강한 집단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소비자들이다.”(229쪽)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극복 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일차적 실천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며 그 주도권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 점을 슐로서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향한 첫 걸음은 아주 쉽게 내디딜 수 있다. 사 먹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된다. 음식 값으로 쓰는 한 푼 한 푼은 투표할 때의 한 표와 같다.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그 회사의 정책과 행동에 지지표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229쪽)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철학을다시 쓴다]-19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유목공동체 지혜의 함수: 공간

농경공동체에 특유한 관혼상제에서부터 가치관, 역사관, 그리고 사물을 해석하는 여러 가지 틀, 이런 거 하나하나 짚어보면 재미있는 점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틀어서 농경문화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문화’를 영어로는 ‘컬춰’(culture)라고 하죠. 이 말은 라틴어 cultus에서 나왔습니다. 독일어나 불어나 영어나 어원은 같습니다. cultus는 라틴어 colo라는 동사의 과거분사입니다. colo라는 말에는 논이나 밭을 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론 파생적인 여러 가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만 농사를 지으면서 농경민들 사이에서 최초로 문화가 나타났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기독교 창세기에 바탕을 두고 우리가 상상력을 펼쳐 보자면, 이브 계열은 카인을 거쳐 정착민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농사를 짓고, 아담 계열은 아벨을 본보기 삼아 유목민으로 집단을 이루어서 독특한 삶의 길을 걷게 되는데, 처음부터 유목민은 아니었던 걸로 여겨집니다. 유목민들이 주로 활약했던 공간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조상들도 유목민이라고 그러죠. 태어날 때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몽고인들이 우리 먼 조상이고, 거기서부터 한반도로 말 타고 이주해 왔다, 이런 식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몽고, 아라비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같은 고대문명, 히타이트 문명이 있었던 곳들, 이런 곳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지질학적인 공통점?”

“사막이요.”

“그렇지, 사막. 그 사막이 처음부터 사막이었을까요? 처음부터 사막이었다면 들어가서 살지 못했겠죠? 초원에서 사막으로 점점 바뀌었겠죠.”

초원은 사실 목축을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서 어느 순간 목초지가 점점 사막으로 바뀌는, 비가 내리지 않고 풀이 메마르고 하면서 사막으로 바뀌는 기간들이 지속되어 왔겠죠. 유목민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하죠? 공간 이동을 통해서 늘 푸른 철을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조성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위도에 따라서 풀이 자라는 철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면 짐승들 풀을 뜯기다가, 이를테면 말이나 소를 기르는 제주도 한라산 주민들이 그러듯이 풀이 먼저 자라는 차례에 따라 위쪽으로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가을이 와서 점점 풀이 말라가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다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게 하고, 그 다음 해에 또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렇게 해서 위도를 오르내리면서 목축을 합니다. 짐승들에게 가장 알맞은 먹이가 제공되는 지역을 찾아서 공간 이동을 하는데 목초지가 줄어든다면 어떻게 되죠? 생존권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목초지를 찾아다니고 짐승들을 빠른 시간에 움직이게 해서 남들보다 먼저 목초지를 차지해야 되니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누비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죠. 그게 뭐로 나타납니까? 말이나 낙타를 길들이는 걸로 나타나죠. 그런데 말이나 낙타는 여자들이 길들이기 힘든 짐승들입니다. 일정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길들일 수 있는 짐승이지요. 소나 돼지나 개 같은 경우에는 쉽사리 길들일 수 있지만 말이나 낙타 같은 것은 아무나 쉽사리 길들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어서 수컷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공간 이동이 빨라지는 거죠. 빨라진 발로 발 빠른 짐승들을 몰고 다니면서 삶의 길을 찾는데, 농경공동체가 여성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불평등 사회(?)’였다면 이 유목사회는 남성 위주의 불평등 사회로 전환됩니다. 짐승을 길들이는 과정에서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목초지가 줄어들고 서로 알맞은 목초지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다른 유목민이 먼저 목초지를 차지하고 있다고 물러설 수가 없잖아요. 그 많은 짐승 떼를 몰고 겨우 찾아갔는데 다른 데로 가는 중간에 짐승들 대다수를 잃어버릴 수가 있고, 실제로 굶주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한판 붙을 수밖에 없잖아요. 한판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싸우는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익혀야 강인한 체력, 정신력을 갖출 수 있죠.

농경민은 우리 나이로 열여섯이면 관례를 행하게 되고, 어른으로 인정받아 시집 장가를 가게 되는데, 농경민의 ‘관례’라는 것은 유목민에 견주어 단순합니다. 이를테면 마을 나무 밑에 들돌이 있어서 누가 그것을 쉽사리 번쩍 들어 올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 힘세다, 소 잘 몰겠다, 일 잘하겠다, 이렇게 관대하게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유목민들은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고 거기서 강인한 체력을 발휘해야 하고 적에게 붙들려도 굴복하지 말아야 하니까 관례가 굉장히 엄격합니다. 부족에 따라서는 자갈들을 불에 달궈 놓고 거길 지나가게 하기도 하고, 가슴에 꼬챙이를 꽂아서 24시간이나 48시간을 견디게 하기도 하고, 맨손으로 눈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가 며칠 동안 견디고 오라고 시키기도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젊은이가 되도록 혹독한 훈련을 시킵니다. 농경민 사회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을 통한 경험의 축적이 지혜의 함수가 된다고 했는데, 유목민의 경우에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력으로나 강인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사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본 사람이나, 맞닥뜨리는 적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자들이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 된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권력이 집중이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북유럽 신화를 보면 여기 살던 사람들은 바다를 목축지로 삼아서 헤매고 다니는 약탈자 무리로 유명합니다. 오딘 신화 같은 경우를 살펴보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자기 눈 하나를 자기가 뽑아서 신에게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는 싸우다가 눈알이 빠진 거겠죠.(일동 웃음.) 그걸 신화화하니까 눈알을 바치고 지혜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추고 있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사회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여기서 노인들이나 여자나 애들은 어떤 대접을 받습니까? 고려장은 워낙 농경민들의 풍습이 아니고 유목민들의 풍습입니다. 체력이 바닥나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늘 빨리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유목공동체에서 짐이 될 뿐이죠. 그래서 버리고 가요. 여러분들, ‘바렌’(The baren world)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에스키모(이누이트) 부족 사람들도 유목민입니다. 이 영화에서 나이 많은 할머니를 아들이 버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할머니는 저 멀리서 흰 곰이 나타나는 걸 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런 상상을 하죠. 저 흰곰이 곧 와서 나를 잡아먹을 텐데 그러면 내 영혼은 흰곰 속에 들어가 있다가 내 자식이나 손자가 저 흰곰을 잡아서 먹게 될 때 다시 내 핏줄과 한 몸이 된다는 그런 꿈을 꾸죠. 그래서 죽음을 아주 평온한 기분으로 맞이하죠. 버리고 가는 사람은 비정해 보이고 버림받은 사람은 비참해 보이지만 그 사람들 삶에서는 이것이 가장 슬기로운 선택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이죠.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윤리가 규범적이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꼭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서는 꼭 저렇게 해야 한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윤리관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행동을 할까요?”

“아니요.”

아니죠. 부딪히는 상황마다 유동적인데 그래서 이때는 이렇게 하고 저때는 저렇게 하라는 상황윤리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강자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보다도 강한 자들을 우러러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죠. 재물을 분배하는 데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농경공동체에서는 생산되는 것이 전부 유기물이고 일 년 이상 묵혀 놓으면 다 썩게 되고, 해마다 새로 씨를 뿌려야 거기서 싹이 트고 남새나 낟알이 자라게 됩니다. 씨앗을 2년만 묵혀도 싹이 잘 트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뿌릴 씨앗을 남겨두고는 모두 고루 나눕니다. 떡을 해 먹기도 하고 거지나 가난한 사람들한테 나눠 주기도 하고……. 어쨌든 다 나누죠.

유목민의 경우에도 나눔이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굉장히 너그러운데, 그 너그러움은 생존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삶터를 옮길 때는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니까요. 양이라든지 기르는 짐승들은 전부 유동자산이죠. 농경민들은 집이나 논밭이나 전부 고정 자산인데, 이건 유동자산입니다.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고정자산은 가치가 없습니다.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고정자산에 관한 관념이 희박하니까 마구 나줘 줘버리고 대부분이 떼 지어 가서, 도중에 만나는 농경공동체나 유목공동체에 조그만 약점이라도 보이면 때려 부수고 물건이나 짐승, 여자를 약탈해서 나눕니다. 농경민들은 하루 세끼 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두루 나눕니다. 더 먹어봐야 배탈만 나죠. 유목민들은 탈취해 온 것들 가운데 비교적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와서 분배를 하는데 고루 나누진 않죠. 약탈하는 데 앞장선 사람 중심으로 분배가 이루어지겠죠. 계속해서 목초지는 줄어들고 생존경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야 되니까 죽느냐 죽이느냐 밖에 길이 없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문화를 보는 관점도 굉장히 다르죠. 농경 사회는 붙박이 사회이기 때문에 문화들이 다양하게 발달을 하죠. 벽에 걸어놓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요해서 시골사람들도 집안에 민화를 걸어놓고 낙화나 가구 같은 여러 가지 손재주 부린 것들을 여기저기 남기게 되고, 청승맞은 시집살이 노래에서부터 일할 때 부르는 노래, 풍물치고 놀 때 부르는 노래 같은 여러 가지 노래들이 생겨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린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문화유산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유목민들도 문화가 없진 않지만 기억 속에 간직되고 입에서 입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승되는 것밖에 따로 간직해야 하는 문화는 많지 않고 지극히 한정되어 있죠. 유목민들이 악기를 만든다고 할 때 어떤 악기를 만들겠습니까? 전쟁을 부추기는 심장소리와 비슷한 타악기나 뿔피리 같은 것이 고작이고,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악기는 뒷전이겠죠. 이렇게 유목생활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문화관, 역사관,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회적인 모든 규범들이 농경민들하고는 상당히 다르게 됩니다.

사막화가 차츰차츰 진행되면서 목초지를 여기저기 찾아 해매고 다니는 과정 속에서 일부는 먹을 것을 구하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모래사막을 가로질러서 서로 부족한 물건을 바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나타나고 점점 머리를 쓸 일들이 늘어나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드는 온대지방에 살면 사람도 짐승도 머리가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못해 식물들도 머리가 좋아지죠. 식물들도 겨울에 겨울눈을 마련해서 봄에는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완전히 벌거벗어야 살아남는구나 하는 것들을 배우고, 다람쥐나 개미, 이런 온대지방에서 옮아온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거나 도토리 같은 먹이를 모아서 저장해 놓고 사는 삶의 양식을 새로 배운다든가……. 사람들도 가을철에 집중적으로 먹을 것이 나니까 그것을 어떻게 저장하느냐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릇을 빚게 되고 먹을 물을 담거나 낟알을 간직하는 항아리나 단지 같은 것을 만드는 기술들을 생각해내면서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유목민들도 농경민들만큼 머리 쓰는 일이 많을까요? 농경민들은 저마다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하고, 한마을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철이 바뀌는 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 변산공동체의 경우를 보면 농사짓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도시에서 와서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익히게 되는데 한 십여 년 지나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백여 가지 정도 익힙니다. 우선 콩만 해도 스무 종류 가까운 것들을 언제 심고 언제 거두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담는 것, 집짓는 것, 하우스 놓는 것, 지게 만드는 것, 등등 삶에 필요한 기술을 백여 가지 이상 익히게 되지요. 이와는 달리 유목민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대단히 강인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가자!’ 하면 ‘예, 따르겠습니다.’ 하면 되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아도 됩니다. 어떻게 보면 농경 공동체가 굉장히 단순하고 인간이 자연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소박하고 크게 머리를 안 써도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회가 단순화되고 한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판단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사회구조에 불평등이 자리잡게 됩니다. 저는 유목사회에서 최초로 사람과 사람사이에 불평등한 관계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누구나 빠짐없이 나이가 들면 어른대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통시적으로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성이 확보가 되는데 유목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렸듯이, 관혼상제에서 관례가 유목사회에서는 가장 중요시되고 농경사회에서는 제사가 중요시됐다, 이것은 성인식이 유목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에 상관없이 누가 우리 부족들을 곤경에서 빠져 나와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데 앞장서느냐가 중요하니까, 그에 따라서 그 부족의 운명이 그 사람에게 맡겨지죠. 이런 과정 속에서 생활양식이 달라짐에 따라 사고방식도 덩달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기서 제 이야기는 끝내고 질문을 받겠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도시 공동체가 이야기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인데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 지속과 변화의 변증법, 이것도 곁들여서 설명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농경사회에서도 불평등은 생기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측면에서 그렇다는 거죠?”

“지주와 소작 같은 것은 옛날부터 있었으니까요.”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려운 서양 학술 용어로 ‘아키티푸스’(archtypus)라는 것인데 ‘원형’을 이야기하는 거고, 실제로 계급사회가 나타나면서 원시 공동체에서부터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그리고 근현대사회로 바뀌어 오는 동안에 평등과 불평등을 가리는 단순한 기준을 찾기 힘듭니다. 복합적인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원초적인 형태, 아키티푸스라는 거죠. 계급관계의 얽힘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할 것이 꽤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데 윤리적으로 고정윤리다, 그리고 유목사회는 어떻게 보면 이동하는 것보다는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상황윤리라고 보고 굉장히 유동적이라던가……. 그래서 고정윤리를 끌어내는 논리를 따지면 맞는데, 고정윤리까지 가면 다시 느낌이 안정화되고 안착화되고 거꾸로 상황윤리 속에서는 권력자가 안정화가 안 되고 다음 힘센 놈이 올라서니까 어찌 보면 계급사회는 잘 안 맞아 보여서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다 맞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계급사회도 그렇고 시간적으로 보면 약간 충돌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예, 좋은 질문입니다. 실제로 제가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고 하다가 뒤로 좀 돌렸는데 우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하고, 전체로 큰 틀에서 보면 생명의 시간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진행이 되는데, 이 생명의 시간이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으로 나뉘거든요. 자연의 시간이란 것은 대체로 달과 별 같은 천체의 순환에 따라서 계절이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농경민처럼 거기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시간 속에 매몰됐다고 해야 할까? 순응한다고 해야 할까? 물론 농경민들도, 유목민도 자연의 시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측면이 있어요. 끊임없이 인간의 시간, 인간의 삶을 위해서 자연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항구적인 봄철이나 여름철을 나름대로 만들려고 애쓰고, 공간을 이동하는 속도를 조절하는 측면이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실제로 확보되는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그만큼 커지기도 해요. 자연의 시간 속에서 농경민들은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측면이 크고, 이 측면에서 보는 시간과 공간 문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에 속합니다. 좋은 질문인데 여기에서 다 토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은 유목민들이 드디어 철이 들거나 철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철들지 않고, 철나지 않고도 살 수 있는가 하는 길을 찾는 데에 앞장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연 원형으로서 농경공동체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후에 인간의 시간으로서 역사와는 다소 대비되는 역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농경민을 지배하고 있는 역사적인 관점은 순환사관입니다. 우리가 멋을 부려 니체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영원회귀, 이런 것들이 실제로는 농경민의 의식 속에 꽉 들어차 있지요.”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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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쓰고 있고, 허튼 수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사람과 이웃사촌인 오랑우탄을 예로 들어서 왜 최초의 공동체가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하지요.

오랑우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여자입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평생 동안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해서 뛰어난 학문적인 성과를 쌓아 왔습니다. 오랑우탄도 암컷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 동안 새끼를 몇이나 낳는 거 같아요?”

“10마리요, 50마리.”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많이 낳을수록 더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오랑우탄이 좀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낳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이 낳는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동안 낳는 새끼는 많아야 세 마리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몇 년을 사는데요?”

“대개 40년에서 50년 정도쯤 삽니다. 오랑우탄 새끼가 태어나면 그 새끼한테 나무꼭대기에다 집 짓는 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는 법을 포함해서 먹이를 찾고, 나무 타고 오르내리는 법, 그리고 새끼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치는 데 칠 년이 걸립니다. 400가지 정도의 먹을 것을 자연에서 얻는 법을 새끼에게 가르쳐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먹을 것 백 가지쯤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만치 않죠? 모든 생명체가 생명체인 한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 힘을 길러주는 데 오랑우탄은 칠 년이 걸리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애를 혼자서 키우기 힘들고 해서 암컷끼리 연대를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농경공동체는 두 뒷발로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먹고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공동체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애를 낳아야 하고 갓난애를 길러야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영역이 개척되었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만들어져 왔고……. 그런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잖아요. 애를 낳을 때나 갓난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속수무책이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수컷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가 버리고, 그러면 이웃여자에게 같이 도와서 살자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초기 공동체는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그 공동체는 유목공동체가 아니라 농경공동체였다, 여러분들은 유목공동체가 먼저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농경공동체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권위를 더 갖게 되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꼼짝 못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서열화된 사회라고 보기 쉽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나이 어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들의 억지에 꼼짝 못하는 불평등한 사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농경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엄격하게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만 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 확보를 생각하느냐, 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을 보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를 뿐이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이 되면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보가 되었든 미친 사람이 되었든 한 장의 표를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농경공동체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꽥! 하면 모두 죽여 주십시오,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한 마을이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우주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고, 뒷산에 묻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 년 전까지도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다만 여자는 한번 거주지를 옮기죠. 옛날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서 거주지를 옮겼는데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서 거주지를 한번 옮깁니다. 그런데 여자도 거의 마찬가지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죠. 농경공동체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마을로 가봐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농기구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울 게 없습니다. 어디를 가 보니 다른 삶의 형태가 꾸려져 있고 거기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게 있더라 하는 일깨움을 얻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농경공동체에서 지혜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오래오래 한마을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 가뭄이 되었든 큰물이 되었든 그 밖의 여러 가지 농작물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은 오래오래 걸쳐서 경험을 쌓은 노인들입니다. 하다못해 늙으면 관절에 중풍 비슷한 게 있어서 비가 오려면 쑤셔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노인네들에게 의논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이런 일이 있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대체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노인들에게 집중이 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슬기로워지지 않습니까? 지혜가 시간의 함수가 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기로워지니까 규범 윤리가 확립되죠. 웃어른이 하신 말씀 틀리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어른들이 오랜 경험들을 통해서 확립해 놓은 윤리관이니까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다 삶의 경험이 응축돼서 이렇게 우리 잘되라고, 잘 살라고 윤리 도덕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된다 해서 규범 윤리가 거기서 확립이 되고,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주의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지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문명화되고 더 개명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옛날이 훨씬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마다 옳았던 ‘정법시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임기응변이 생겨난 ‘상법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말법시대’라고 하죠. 도대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과거 요순시대가 제일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서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고 그다음에 은의 시대(silber age), 동의 시대(copper age)를 거쳐서 지금은 철의 시대(steel age), 인간 가운데 말종들만 살고 있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단 말이죠. 이것은 농경민의 독특한 사유방식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슬기롭고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운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슬기로웠을까? 그렇게 자꾸 유추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점점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농경민들의 사유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제사, 죽은 분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관혼상제 가운데서 으뜸이고, 그 다음에 장례, 그다음에 혼례, 그다음에 관례, 이렇게 차례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윤리가 지배를 하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상고주의가, 그리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순환사관이 자리 잡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계절이 되풀이되듯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해와 달같이 한 해를 주기로, 한 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식은 현대인들의 평등의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어떻게 해서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노인네들 죽잖아요. 그러면 뒤이어 젊은 사람이 장년이 되고 또 노인이 되잖아요. 그리고 노인네들은 예외 없이 존경받잖아요. 그러니까 농경사회는 공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지만 통시적으로 순환하는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그 나름으로 엄격한 평등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구보 씨라는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그런데 제목이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이다. 박태원의 구보 씨, 최인훈의 구보 씨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알던 구보 씨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냥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도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다.고리타분한 얘기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만큼이나 꽤 잘 읽힌다. 물론 구보 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가끔 말이 늘어져 졸음이 오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Y라는 여성이 어김없이 나타나 구보 씨에게 독자의 생각을 속 시원히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철학자 구보 씨는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만 길게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Y의 돌직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구보 씨는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아마 독자들은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구보 씨와 Y, 구보 씨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소통, 뱀파이어, 크기, 사회, 철학 등 그가 일상에서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당연하다. 일상은 주제 따위는 상관없이 마구 포착되고 또 버려지기도 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통해 구보 씨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엿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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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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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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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