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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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철학을다시 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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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농경공동체 지혜의 함수: 시간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설 쓰고 있고, 허튼 수작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사람과 이웃사촌인 오랑우탄을 예로 들어서 왜 최초의 공동체가 모계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하지요.

오랑우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비루테 갈디카스라는 여자입니다. 비루테 갈디카스는 평생 동안 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해서 뛰어난 학문적인 성과를 쌓아 왔습니다. 오랑우탄도 암컷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 동안 새끼를 몇이나 낳는 거 같아요?”

“10마리요, 50마리.”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많이 낳을수록 더 원시적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오랑우탄이 좀 더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낳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이 낳는 오랑우탄 암컷이 일생동안 낳는 새끼는 많아야 세 마리쯤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몇 년을 사는데요?”

“대개 40년에서 50년 정도쯤 삽니다. 오랑우탄 새끼가 태어나면 그 새끼한테 나무꼭대기에다 집 짓는 법,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는 법을 포함해서 먹이를 찾고, 나무 타고 오르내리는 법, 그리고 새끼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르치는 데 칠 년이 걸립니다. 400가지 정도의 먹을 것을 자연에서 얻는 법을 새끼에게 가르쳐줘서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먹을 것 백 가지쯤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만만치 않죠? 모든 생명체가 생명체인 한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그 힘을 길러주는 데 오랑우탄은 칠 년이 걸리는 겁니다. 그 기간 동안에 애를 혼자서 키우기 힘들고 해서 암컷끼리 연대를 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삽니다.”

공동체 가운데서 농경공동체는 두 뒷발로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먹고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이루어 낸 공동체입니다. 여자로 태어나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아서 애를 낳아야 하고 갓난애를 길러야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삶의 영역이 개척되었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만들어져 왔고……. 그런데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잖아요. 애를 낳을 때나 갓난애를 안고 젖을 먹일 때는 속수무책이잖아요. 도움이 필요한 수컷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가 버리고, 그러면 이웃여자에게 같이 도와서 살자고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초기 공동체는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그 공동체는 유목공동체가 아니라 농경공동체였다, 여러분들은 유목공동체가 먼저 생겨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믿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또 농경공동체는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권위를 더 갖게 되고 늦게 태어난 사람은 꼼짝 못하게 되는 위계질서가 서열화된 사회라고 보기 쉽습니다. 굉장히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나이 어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생각, 바른 판단을 가지고 있어도 어른들의 억지에 꼼짝 못하는 불평등한 사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농경공동체는 그 나름으로 엄격하게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사회입니다. 다만 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 확보를 생각하느냐, 통시적인 측면에서 평등성을 보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를 뿐이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어느 연령대 이상이 되면 모두 투표권을 가지고 있어서, 바보가 되었든 미친 사람이 되었든 한 장의 표를 행사하고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농경공동체는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 꽥! 하면 모두 죽여 주십시오, 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한 마을이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우주였습니다. 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서, 죽고, 뒷산에 묻힙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백 년 전까지도 대부분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다만 여자는 한번 거주지를 옮기죠. 옛날에는 남자가 장가를 들어서 거주지를 옮겼는데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서 거주지를 한번 옮깁니다. 그런데 여자도 거의 마찬가지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죠. 농경공동체에서는 공간적인 경험의 확장이 지혜의 함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마을로 가봐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농기구 이용해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배울 게 없습니다. 어디를 가 보니 다른 삶의 형태가 꾸려져 있고 거기에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게 있더라 하는 일깨움을 얻을 수 없어요. 다시 말하면 농경공동체에서 지혜는 시간의 함수입니다. 오래오래 한마을에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 가뭄이 되었든 큰물이 되었든 그 밖의 여러 가지 농작물 정보에 가장 밝은 사람은 오래오래 걸쳐서 경험을 쌓은 노인들입니다. 하다못해 늙으면 관절에 중풍 비슷한 게 있어서 비가 오려면 쑤셔요. 일기예보보다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노인네들에게 의논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아가서 이런 일이 있고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으면 대체로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이 노인들에게 집중이 됩니다.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슬기로워지지 않습니까? 지혜가 시간의 함수가 되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슬기로워지니까 규범 윤리가 확립되죠. 웃어른이 하신 말씀 틀리는 게 없다, 그리고 이건 어른들이 오랜 경험들을 통해서 확립해 놓은 윤리관이니까 이걸 벗어나면 안 된다, 다 삶의 경험이 응축돼서 이렇게 우리 잘되라고, 잘 살라고 윤리 도덕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다, 그것을 어기면 안 된다 해서 규범 윤리가 거기서 확립이 되고, 역사적으로 보면 상고주의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지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문명화되고 더 개명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농경 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옛날이 훨씬 더 살기 좋았다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고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마다 옳았던 ‘정법시대’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임기응변이 생겨난 ‘상법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말법시대’라고 하죠. 도대체 혼란하기 그지없는 세계라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과거 요순시대가 제일 좋았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서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시대(golden age)가 있었고 그다음에 은의 시대(silber age), 동의 시대(copper age)를 거쳐서 지금은 철의 시대(steel age), 인간 가운데 말종들만 살고 있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단 말이죠. 이것은 농경민의 독특한 사유방식입니다. 옛날이 좋았다, 노인네들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다, 우리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슬기롭고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가 더 슬기로운데,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얼마나 더 슬기로웠을까? 그렇게 자꾸 유추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아주 슬기로운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점점 종말로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농경민들의 사유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고 제사, 죽은 분들을 추모하는 제사가 관혼상제 가운데서 으뜸이고, 그 다음에 장례, 그다음에 혼례, 그다음에 관례, 이렇게 차례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윤리가 지배를 하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는 상고주의가, 그리고 계절이 순환하듯이 모든 것이 순환한다는 순환사관이 자리 잡습니다. 한 해가 가면 또 계절이 되풀이되듯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해와 달같이 한 해를 주기로, 한 달을 주기로 순환하는 것들이 시간을 규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평등의식은 현대인들의 평등의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농경사회가 어떻게 해서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노인네들 죽잖아요. 그러면 뒤이어 젊은 사람이 장년이 되고 또 노인이 되잖아요. 그리고 노인네들은 예외 없이 존경받잖아요. 그러니까 농경사회는 공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평등한 사회 구조지만 통시적으로 순환하는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지는, 그 나름으로 엄격한 평등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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