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여름,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성이 ‘구원’(?)받는 법[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2011년 여름,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성이 ‘구원’(?)받는 법[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은주(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신문을 보다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20-30대 미혼여성 60%. 조건 맞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응답. 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여성은 비정규직이었지만,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갖춘 안정적인 정규직 남성과 결혼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독신을 선택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혹자는 이 기사를 보며, ‘여자들은 원래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해. 속물!’ 이라고 단정 짓고 끝낼지 모르겠다.

결혼이 행복한 로맨스의 결말이라는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렇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제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와 결혼은 완전히 분리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이제 점점 더 경제적 안정성의 담보물이자 계급 상승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확실하지 않다면, 미혼 여성에게 결혼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현실에서 결혼과 로맨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점점 더 무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소위 ‘로코’라고 불리는 로맨스 코메디와 일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은 여전히 로맨스에 몰입하며 결혼에 분투하면서, 답답한 일상과 현실의 시련으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2011년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앤서니 기든스에 따르면, 연예소설로서의 로맨스는 대중이 읽은 최초의 문학 장르이다. 특히 19세기에 혼인 관계를 경제적 가치와 분리하기 시작하면서, ‘로맨싱(romancing)’은 구애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로맨스 개념은 부르주아 집단에서 주로 지속되었던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사회에 확산되면서, 사랑의 이상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혼인 관계가 보다 폭 넓은 친족 관계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로맨스는 결혼으로 귀결되면서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낭만적 사랑인 로맨스에서 성공한 남편과 아내는 아이와 상관없이 부부 관계에 헌신하는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를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인 로맨스와 결혼의 관계는 현재의 트랜디 드라마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지는 않다. 하나의 변수를 더 넣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혼인 여주인공의 직업과 경제 사정이다.

요즘 ‘로코’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안정적이며 전문직인 여성, 경제 사정이 좋지 않지만 전문직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 별 볼일 없는 집안에 스펙조차 없는 여성. 첫 번째 부류가 무용과 졸업생이나 기생이 된 “신기생뎐”의 단사란, 두 번째는 재벌남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5급 행시를 패스한 공무원인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공아정, 세 번째는 스펙 자체가 없어 ‘식모’를 직업으로 택한 “로맨스 타운”의 노순금이다.

아직 종영을 하지 않은 로맨스 타운을 제외하고는 두 부류의 여주인공 모두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완전히 성공한 결혼으로 골인하는 전형적 로맨스는 첫 번째 여주인공에게 일어난다. “신기생뎐”의 단사란은 재능과 미모, 자존심도 있지만, 돈에 눈이 먼 계모의 강요로 결국 기생이 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재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여 구원받는다. 드라마의 주요한 내용은 결혼에 어떻게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사건과,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가장 바닥의 상황에서 시련을 겪는 품위 있는 여주인공이 가부장제의 처가 되는 결혼에 성공하여 행복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두 번째 분류인 공아정은 행시를 패스한 엘리트 여성이지만 ‘결혼’을 해보고 싶어서 거짓결혼을 하는 활극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거짓 결혼 상대자인 재벌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여주인공이 원했던 것이 낭만적 연애였음이 밝혀진다. 두 주인공 모두 경제적인 시련은 겪지 않는다. 그녀의 시련은 사랑으로 인해 직업을 잃을 뻔 하는 사건에 있다. 일이냐 사랑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일을 인정해주는 재벌남과 그의 배려를 사랑으로 이해하는 여주인공의 결혼 승낙을 통해, 드라마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이 드라마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로맨스는 경제적 현실을 고민하는 않은 주인공들에게 분명하게 보장된다. 문제는 결혼에 있다. 드라마의 엔딩은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확인으로 끝난다. 결혼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 장면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일과 사랑 모두를 붙잡는 것,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두 번째 부류의 여성에 있어서, 로맨스는 결혼과 무관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지 구체적으로 결혼은 아니다.

 

드라마 ‘로맨스타운’

 

위의 두 부류의 드라마에 비해, “로맨스 타운”은 로맨스와 결혼에 대해 냉소적이다. 여고 동창인 두 여성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식모가 되고 사모님(미모의 여성이 성공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모님은 트로피 사모님이라고 불린다.)이 된다. 드라마는 오히려 결혼이 계급을 구축하는 도구라는 사실만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이다. “로맨스 타운”은 점점 로맨스와 무관해진 채, 로또에 당첨된 식모들의 추리 복수극으로 나아간다. 스펙도 내세울 집안도 없는 여성에게 있어 로맨스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여주인공은 정서적 위로와 다정한 친밀감을 로맨스 상대에서가 아니라 식모들의 공동체에서 찾는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그녀, 노순금에게 있어서 사실상의 구원은 로맨스의 대상인 남자가 아니라 로또이다.

드라마에서 더 이상 로맨스와 결혼은 짝을 이루지 않으며, 여주인공들에게 구원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결혼은 더 이상 로맨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남자와의 로맨스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로맨스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여주인공은 누구인가? 위 세 부류에 해당하지 않은 번외편이자, 가장 적극적인 시청률을 자랑하는 저녁 8시 매일 연속극의 여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아줌마는 더 이상 남편의 불륜에 목매거나 이로 인해 망가지지 않는다.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주인공 아줌마는 캐리어 우먼이 되어 성공하고, 자신에게 목숨 거는 애교덩어리 식스팩 말 근육 총각과 사랑에 빠진다. 이제는 매일 연속극의 단골 소재가 되어버린 ‘줌마렐라’의 탄생! 아줌마는 결혼에 실패했지만, 로맨스에 성공한다.

여기서 로맨스가 결혼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로맨스만이 중요하다. 아줌마는 로맨스를 겪으면서 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이자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줌마렐라 소재가 인기를 끄는 것은 줌마렐라야 말로 낭만적 사랑, 다시 말해, 가족이나 계급, 돈과 상관없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정서적 친밀감에 이르는 데이트와 구애의 과정인 로맨스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불굴의 며느리”에서 아줌마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직후 비정규직인 콜센터 직원인 오영심(신애라 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하버드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서 펀드 매니저로 일하던 재벌 2세.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오영심 역을 맡은 신애라가 1994년에 방영된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성공한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사실에 있다. 신애라가 맡은 여주인공은 집안도 별 볼일 없고 심지어 백수 오빠까지 딸린 백화점 비정규직 직원이었지만 재벌 2세와 극적인 로맨스 끝에 결혼에 성공한다. 실제로 신애라는 이 드라마 후 남자 주인공인 차인표와 결혼하여 드라마의 실사의 주인공으로 이목을 끌은 바 있다.

성공한 로맨스 신화의 주인공인 신애라가 십 오년 후, 줌마렐라라는 새로운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2011년 여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여성은 결혼으로 구원받지 않고 로맨스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시청자 모두가 알고 있듯, ‘줌마렐라’의 로맨스는 환상이다. 구원은 그래서 거짓이다. 그래, 구원은 없다. 잔혹한가?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사랑, 배신 그리고 자살

송지선 아나운서의 투신자살이 5월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언론이 문제네, 악성댓글이 문제네, 우울증이 문제네, 야구선수 임태훈이 문제네 등등 말들이 많았다.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자살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송지선에게 임태훈은 함께 한 사랑에 책임질 줄 모르는 혹은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송지선은 그가 그녀를 배신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의 예의 없는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작고한 탤런트 최진실 역시 애정 관계에서 비롯된 배신감 때문에 자살을 했다. 결혼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조성민은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전했고 그의 사랑을 철석같이 믿었던 최진실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랑의 실패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지 않다. 경제적 파탄의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만큼이나 사랑의 실패로 인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살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애정의 문제로 슬픔에 잠기고 오랜 시간을 절망과 한탄 속에 ‘죽은 듯’ 혹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 평생 동안 바람피운 아버지를 원망하고 울분을 토했던 우리 엄마에서부터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자리에 누워버린 내 친구까지.

이러한 사건을 두고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누가 잘못을 했는가. 원인이 무엇인가, 뭐 이런 것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이나 원인은 경찰이나 기자들이 더 잘 파헤쳐 줄 수 있고, 누가 얼마만큼 잘못을 했는가는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점에서 답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강행하게 되었는가이다. 사랑의 실패는 왜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만드는가? 왜 그러한 사건은 삶의 의미와 생동감을 일거에 빼앗아 가는가?

나의 경험과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대화를 반추해 볼 때 배신은 언제나 심리적 자존감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었다. 평생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를 향해 우리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은 “나를 어떻게 보고!”였고, 자신의 애인이 동거하는 여자 친구에 대해 숨겨왔음을 나중에 알게 된 한 학생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괴로워했으며, 천청벽력과 같이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내 친구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고 호소했다. 그렇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 존재 전체, 나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다.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거절되는 느낌이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다면 왜 사랑은 이렇게 존재 전체와 관련된 사건이 되는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당사자의 존재를 뒤흔들고 삶의 의미마저 잃게 만드는가? 최근에 내가 본 한 권의 심리 에세이는 헤어짐이나 배신을 내 존재 자체가 거부되는 사건으로 보지 말 것을 권고한다. 자존심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 그럴 수 있는가?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랑을 “인정(recognition)”관계로 설명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친구 간의 사랑은 모두 내가 너를 그리고 네가 나를 구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로 배려하고 정서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행위라는 것이다. 호네트는 사랑이라는 인정관계를 두 사람의 절대적 합일상태로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 분리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대적 공생기를 지나 상대적 공생기에 아이는 엄마를 환상 속에서 파괴한다. 그러나 아이의 파괴행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곁에 남아 아이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계속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환상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이러한 독립된 어머니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서적 합일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는 제시카 벤자민을 인용해 사랑을 “자기주장과 타자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정행위로서의 사랑이 실패할 때 왜 우리는 존재 전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우리는 사랑을 통해 획득한 자신감(Selbstvertraun)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사랑을 통해 나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욕구가 배려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이와 함께 자신이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우리는 구체적 타자에 의한 정서적 인정의 경험을 통하여 나의 구체적인 존재가 가치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정서적 인정, 즉 사랑이 철회될 때 우리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훼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사랑의 실패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는 내 자존심과 자신감을 뒤흔든다.

이러한 존재의 상실감이 더욱 절망적인 것은 사랑이 바로 구체적이고 특별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심리학 에세이는 또한 이번에 사랑이 가면 아주 사랑이 안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하고 권고한다. 사랑의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은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의 실패를 통해 잃게 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형성한 특별한 자신감과 자손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사랑은 올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바로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사람의 정서적 인정, 그 사람을 통해 형성된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다. 사랑이 끝나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지우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버리는 이유는 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형성했던 그 특별한 나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의 존재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에.

이렇듯 사랑의 실패가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사랑이 나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구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패가 지독하게 절망적인 것은 그것이 대체될 수 없는 사람과 만들어낸 구체적이고 특별한 나의 존재의 의미를 한 순간에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의미를 부여했던 나 자신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생각, 자존심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무거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가볍게 수행된다. 예전과 달리 사람들은 쉽게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실패는 참을 수 없이 무겁다. 사랑이 깊을수록, 이별이 극단적일수록 사람들은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뒤흔든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 역시 정서적 인정이 되지 못하는 상태가 윤리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호네트는 아쉽게도 사랑이라는 인정형식이 구체적인 개인들 간의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확장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적인 관계는 보편적 학문의 담론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호네트의 생각일 뿐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사랑이 학적 가치를 갖지 않는 에세이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학문은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사랑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생각, 나아가 감정에는 어떤 윤리적 잣대도 들이댈 수 없다는 생각이 어떤 끔직한 풍경을 만들어 냈는가? 우리는 방금 전까지도 사랑했던 사람을 내팽개치고 거리와 공론의 장으로 나와 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다. 그가 혹은 그녀가 죽어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건 당사자가 겪어 내야할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래서 사회비판과 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나는 것일까?

『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 수 현(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몇 년 전에 나는 하이메 로살레스(Jaime Rosales) 감독의 <고독의 편린>과 훌리오 메뎀(Julio Medem) 감독의 <혼란스런 아나>를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두 영화 중 어떤 것이 좀더 ‘여성적인’ 감수성에 맞는 표현형식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혼란스런 아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어떤 불편함이 남았다. 반면, <고독의 편린>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 속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의 진행 과정에서 <혼란스런 아나>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고독의 편린>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스런 아나>가 ‘역사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조금은 추상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고독의 편린>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신비로운 존재’이거나 ‘성적 대상’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은 힘겹게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여성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의 대화는 허공을 맴돌며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표정 변화도 극적이거나 급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덤덤하거나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들의 고독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사물들이 인물들의 고독을 더 차갑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현란함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인물들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딱딱해 보이고 덤덤해 보이며 때론 무표정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표정 이면의 감정을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존재다. 주인공인 아나는 모든 여성을 대신해 ‘고통으로서의 여성의 역사’와 만난다. 그런데 <혼란스런 아나>와 함께 한 심연으로의 여행은 사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사고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아나의 무의식 여행에 동참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감독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여성이 처한 억압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혼란스런 아나>는 감독을 비롯한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영화가 특별히 여성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나 성을 묘사하는지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영화전체의 구조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중점에 두고 영화를 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들의 배치 및 표현방식이 얼나마 ‘영화적’인가를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인 감독이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문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보여준다면 ‘좋은’ 여성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과 감독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여성적’이라 생각하는 영화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 가운데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 그녀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화, 동>이 보여주는 ‘여성적인 것’

여성영화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고민이 있던 차에, 지난 3월에 본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은 다루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식이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여성적’인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영화는 한 여성의 마음 속 상처를 관조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감정의 변화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은 인물에게는 상처와 마주하여 치유하는 과정인데, 관객에게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혜화, 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혜화와 그녀의 마음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아이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보살핌으로서의 ‘모성성’이다. 가족을 둘러싼 해체와 파괴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영화의 소재나 주제가 진부한 데 비해 영화의 화법이 흥미롭다고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도 한 여성의 삶과 그녀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영화 ‘혜화동’ 포스터

1> 영화의 표현형식과 관찰하는 시선

혜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버려짐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우리의 주변에서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이다. 유기견을 돌보며 사는 애견미용사인 스물 세 살의 혜화에게 5년 전에 자신을 떠났던 한수가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이 때부터 그녀는 5년전 과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귀었고 혜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면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준비한다. 혜화의 어머니는 혜화를 잘 보살피려 하고 그녀를 데리고 한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의 장래를 걱정하며 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화는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수는 그 당시 혜화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작성했던 입양통지서를 들고 와서 혜화에게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이 아이를 둘러싸고 미스테리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혜화의 현재 삶에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묻혀진 상처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혜화를 향한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묻혔던 상처를 꺼내보는 혜화는 마치 고였던 감정이 흐르듯 혼란스런 감정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플롯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탈장된 개와 그들의 아이인데, 탈장된 개와 아이는 혜화의 ‘마음 속의 아이’를 상징한다. 이들이 과거 속 혜화의 집에서 사라진 그 강아지인지, 진짜 혜화의 아이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은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혜화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혜화와 한수의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마음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혜화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 다가가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혜화와 한수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입양통지서에 적힌 주소에서 한수가 본 아이는 다른 아이였음이 밝혀진다. 한수는 자신이 찾아갔던 집에서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사실을 전해들었어도 믿지 않는다. 결국은 혜화가 임신했던 당시에 태어난 자신의 조카(나연)가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혜화를 속이게 된다. 한수가 의도치 않게 꾸민 조금은 엉뚱한 일로 인해 혜화는 그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혜화의 집에서 세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혜화는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내기 전에 씻겨주고 대화를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에게 하듯 아이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와 탈장된 개와 함께 중요한 이미지는 폐허가 된 집터이다. 영화 초반에 혜화는 탈장된 한 유기견을 따라 폐허가 된 집터로 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 집터는 혜화와 한수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며, 마치 잃어버린 그들의 아이와도 같은 유기견의 흔적을 끝없이 찾게 되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두 사람의 단절된 관계와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주제일 법한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신적인 화자가 되어 혜화의 마음 속을 설명하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주변에서 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궁금증을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구성이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은 이런 식으로 혜화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아끼고 담담하면서도 건강한 캐릭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녀의 아픔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2> 아이, 모성성 그리고 관계를 맺어가는 법

영화를 보다보면 특별히 혜화라는 인물의 건강하고 강인한 면모가 돋보인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실제 여배우만큼이나 혜화라는 인물도 맑고 깨끗해 보인다. 어떤 관객은 혜화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관용하는 어떻게 보면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혜화의 강인한 면모는 그녀가 특별히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의 강인함은 처음부터 영화에서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혜화는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현웅)을 거의 3년 동안 돌봐왔다. 여섯 살인 이 아이를 향한 혜화의 시선은 흡사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도 돌보듯 사랑스런 눈길이다. 혜화는 현웅이 잠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집으로 간다. 현웅은 시시때때로 혜화의 가슴을 만지기도 하며, 때로 혜화는 잠든 현웅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놔두기도 한다. 또한 현웅이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한편, 혜화는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는데,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조금은 병이 든 것도 같은 유기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혜화가 이렇듯 버려짐에 대한 감정에 민감하고 그만큼 또 보살핌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그녀가 한 번 버려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혜화를 냉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잘 길러줬다. 혜화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머니는 혜화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잘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혜화가 지닌 이런 면모를 보면서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모성성’이란 말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 고통받는 타자, 헐벗고 굶주리는 타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한다. 고아나 과부, 굶주린 사람 등 비참한 타인의 얼굴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고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주체 안에 있는 이러한 타자성을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동일자 안의 타자’ ‘내재 속의 초월’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가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나를 키워내는 것을 일컬어 ‘모성성’이라 불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모성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함의들을 제쳐놓고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주는 유기견과 아이, 그리고 한수에 대한 태도를 ‘모성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모성성은 타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혜화에게서 그녀의 모성성을 길러냈던 타자는 무엇보다도 죽은 아이이다. 덧붙이자면 그녀의 첫 번째 버려짐의 경험과 그런 그녀를 거두고 돌봐준 지금의 어머니가 있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함께 기르던 개가 낳은 강아지들과의 이별의 경험이다. 한수의 가족에게 외면당한 혜화는 오랫동안 기르던 개 혜수와 혜수가 낳은 강아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기어코 가려 하지 않던 혜수를 억지로 새로운 주인에게 넘긴다. 그 때 아빠가 달랐던 꼬리가 노란 강아지는 어딘가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수의 집에서 거부를 당하고 절망감에 손목을 그으려던 순간에 그 어린 강아지가 집구석에서 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일이 있었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서 혜화와 한수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수에게 혜화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또 그 때 혜화가 찾아 헤매던 탈장된 그 개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혜화는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한수를 향해 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결론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감독이 전해주었다.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거나 회복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준 ‘모성성’은 한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한수는 영화에서 계속해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조금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그만큼 그녀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는 혜화에게는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집에는 가끔 들어오는 등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지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를 갔던 것도 가족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다리를 다쳐서 약간 절룩거리는 상태만큼이나 한수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탈장된 개와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가 해결되면서 혜화의 감정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혜화의 타자에 대한 보살핌의 ‘모성성’을 드러내고 또 한편 키워냈던 이 두 타자와의 만남 이후에 한수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물음으로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면서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성성의 문제가 어머니로서의 희생 이전에, 한 사람의 상처와 내면에 관한 것, 즉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출처: KBS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강지은(건국대 강사)

 

2002년 개봉한 영화에는 17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예쁜 여주인공 기네스 펠트로가 등장한다. 뭐 이렇게 예쁘고 날씬한 배우들이 헐리웃에만 있나? 우리나라에도 널렸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여성의 유전적 특성상 175센티미터의 키를 자랑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신 날씬한 여성들은 많은 편이다. 특히 학회 분과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하늘하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세미나를 하고 나면 왠지 모를 우울감에 시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나와 비슷한 40대의 넉넉한 체형도 얼마든지 널렸다. 아이 한 둘 낳고 운동량 부족한 주부들에게 운동이 왠말인가? 남편 직장보내고, 집안 살림에 재테크에 아이 학원 챙겨 보내기까지. 핑계같지만 정말 시간이 없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의사들의 말씀. 체중감량을 원한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라. 그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나를 비롯한 전세계의 주부들은 다이어트 식품에 주목한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대상폭을 문명화된 사회에 사는 현대인으로 넓히는 것이 좋겠다. 사실 다이어트니 살빼기니 하는 것들은 문명화된 삶의 고질적인 현대병 아닌가.에 나오는 조에족이 다이어트 식품 찾는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현대인은 바쁘다. 학생은 학생대로 바쁘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바쁘고 주부는 주부대로 바쁘다. 황혼을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 노인들도 요즘은 생계를 위해서 바쁘다.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영문판 포스터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늘씬하고 예쁜 여성을 이 영화에서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주인공 잭 블랙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설정이다. 영화에서 실제 여주인공의 모습은 136킬로그램의 여성이다. 그런데 잭 블랙에게는 그 여성이 완벽한 여신의 모습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최고의 몸매를 가진 여자와만 데이트를 하려는 잭 블랙은 번번이 연애에 실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기의욕고취 전문가를 만나 최면에 걸리고 만다. 전문가는 잭 블랙에게 여성의 외모가 아닌 내면만을 보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 만난 여성이 너무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기네스 펠트로였던 것이다. 그는 애인이 앉는 의자가 박살이 나고 속옷 가게에서 고른 팬티가 낙하산만 해도 개의치 않았다. 눈 앞의 애인이 너무나도 날씬하고 예쁜데 뭐 그런 사소한 일들이 대수이겠는가.

뚱뚱한 = 못생긴

그런데 사랑에 위기가 닥친다. 잭 블랙이 최면에서 깨어나 버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남성 여러분은 어찌하시겠는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장담 못할 것들이 영화에서의 해피엔딩이다. 특히나 여성에게 현실은 더더욱 암울하다. 2006년 개봉한 한국영화에서 주인공 김아중은 암울한 현실의 상징 그 자체이다. 믿었던 애인에게 사기 당하고 결국 자살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 주인공은 성형을 선택한다. 그녀가 여러 번의 연애에 실패한 이유는 단 하나 뚱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뚱뚱하다’와 ‘못생겼다’는 결코 동의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동급의 가치로 둘을 연관지어 생각한다. 사실 우리는 이목구비가 남들에 비해 좀 뚜렷하지 못하고 비율이 안 맞아 못생겼을지라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타고 난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요즘은 곱게 바라보아 주지 않는다. 돈만 주면 성형외과에서 어느 정도는 잡아주니. 하지만 뚱뚱한건 도대체 동정받을 만하지도 않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못생겼다는 덤까지 받는다.

미디어에 비치는 뚱뚱한 여성 혹은 남성을 떠올려보자. 뭔가 성격이나 직업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고 결코 주인공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최근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살빼기 프로젝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의 시청이 많은 아침 방송에서 단편적으로 편성하던 프로그램들이었는데 최근엔 케이블 티비를 필두로 살빼기 프로젝트 그 자체가 목적인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외국 케이블 채널에선 이미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프로그램들이었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었다.

초고도 비만인들을 선정해서 운동 과정과 살이 빠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눈물이 나는 감동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티비에서 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초고도 비만일 때의 실물크기 사진을 세워놓고 쉽게 사람 모습이 떨어져 나가게 설치해 놓았다. 20킬로그램을 뺀 비만 여성이 그 사진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다. 모두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그 옆에는 빨래비누를 20킬로그램만큼 쌓아 놓고 그 만큼이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그 빨래비누만큼의 부피, 지금의 몸보다 컸던 과거의 사진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몸에서 불필요했던 부분들이 빠져나간 것이다. 다시 말해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나에게서 나갔다.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인류는 모두 내 것이 아닌 것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신체와 분리되어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은 불멸성을 가지며 분리불가능하고 파괴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이 세상 어떤 자연 만물과도 다르지 않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근대의 자연학에서 보면 신체는 수학적으로 양화될 수 있으며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데카르트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기계적 운동이며, 이 운동은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생명체와 비생명체,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신체든 자연사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르는 기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 이후 근대 세계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육체와 육체의 분리

그러나 현대 또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설명에 역사적인 획을 긋는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신체는 다시 결합한다.에서 기계족들이 매트릭스라는 가상공간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만 살려 놓고 인간을 사육하니 오래 살지를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가상공간이 매트릭스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정신활동을 하며 통 속에 있는 육체를 지속시킨다. 결국 인간이라는 특별한 존재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서는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육체와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우리는 하고 있다. 긴장은 하지 마시라.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 영화에서 보는 육체의 분리는 아니니.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이라도 해본 사람, 뱃살 대신 초콜릿 복근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 모두 육체의 분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전적으로 질이 나쁘고 결코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내 안의 나이다. 내 안에 너는 있을지 몰라도 내 안에 있는 지방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자리가 없다.

내게서 분리되어야 하는 나는 자본주의와 대단히 친숙하다. 자본주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데도 무척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도 훌륭한 도움을 주고 있다. 스마트폰 앱은 전국의 맛집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깔끔한 시설에 가격마저 저렴한 피트니스 클럽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나보다는 내안의 나를 더 사랑한다. 이제 미디어는 눈부신 배우들만 영상에 담지 않는다. 자기 몸을 부담스러워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담아낸다.

미디어는 거식증에 걸린 해골같은 모델들도 담아내고 어린나이에 뱃살공주가 된 초등학생도 담아내며 20~30킬로그램씩 눈에 띄게 살을 제거할 수 있는 초고도비만의 사람들도 담는다. 왜냐하면 모두 훌륭한 시청률과 광고료를 보장하는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들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몸무게를 밝히며 카메라 앞에 나선다. 나 역시 오늘도 내 안의 나를 내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휴먼다큐를 찍는다. 물론 감독은 자본주의 선생이다.

당신은 친절하신가요?[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당신은 친절하신가요?[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1. 당신은 은행원입니다. 주 업무는 대출상담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대출 조건에 맞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있네요. 수입, 담보 등 대출 규정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대출을 해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상황이 어려운 건 알겠지만, 규정에 맞지 않는데 저라고 도리가 있겠어요?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발 다른데 가서 알아보시라고요!!!

#2. 당신은 운전 중입니다. 마침 신호 대기 중이라서 차도 한 가운데에 서 있지요. 그런데 맞은편 인도가 좀 소란스러운 것 같아요. 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지 도와 줄 사람을 찾고 있는 듯해요. 아니나 다를까, 뒤따라 온 한 무리의 남자들―서넛은 되는 것 같아요―이 여자를 잡아 마구 때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그냥 가던 길을 가고 싶어요.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의 일에 연루되는 건 귀찮기만 할 뿐이잖아요? 그런데 이놈의 신호가 참 기네요. 또다시 도망친 여자가 이번에는 당신 쪽으로 달려오는 것 같아요. 당신은 차 문이 잠기었는지 다시 확인을 합니다. 아, 마침 신호가 바뀌었어요. 재빨리 여기를 벗어나야겠어요.

#3.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아침부터 누군가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지난 번 운전 중에 보았던 그 여자가 결국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군요. 경찰들은 당신이 유일한 목격자이니, 증인 출석을 해 달라고 하고 있어요. 용의자는 있는데 물증이 없다나요? 다른 목격자들도 있을 텐데, 경찰은 왜 하필 당신을 찾아왔을까요. 당신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아, 마침 어린 시절 친구가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전부터 전화며 편지며 해대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서 며칠 푹 쉬다 오는 것도 괜찮겠어요.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위의 상황에 처한 인물은 해원. 위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해원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신경 쓸 생각도 없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그런 인물이다. 이런 저런 상황이 복잡하던 차에 거의 해고 통보와도 다름없는 휴가를 받게 된 해원은 고향에 잠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마침 친구 복남이 오래 전부터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며 전화며 편지며 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원은 고향 무도에 가게 되고, 친구 복남의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포스터

타인의 외면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섬, 무도

복남, 복남의 딸, 복남의 남편(만종), 복남의 시동생, 복남의 시고모, 그 외에 친인척 관계로 여겨지는 할머니들 세 분, 치매에 걸려 하루 종일 이름 모를 풀만 씹어대시는 할아버지 한 분, 이렇게 아홉 명이 무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 전부이다. 이 섬에서 해원이 목격하는 것은 시동생의 성적 학대와 남편 만종의 폭력, 그리고 마을의 모든 중노동을 견디며 살고 있는 복남의 삶이다. 사실 복남이 해원에게 그토록 고향에 한 번 내려오라고 사정했던 이유도, 복남에게 있어 해원은 섬을 떠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외부의 끈이었기 때문이다. 복남은 중노동과 학대, 폭력, 멸시 등 모든 억압을 참고 살아왔지만, 자신의 딸이 만종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자 딸을 위해 섬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실제로 딸이 성폭행을 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딸이 유난히 아빠에게 집착을 하고, “가슴이 커야 남자한테 사랑받는다”는 식의 말을 하는 등, 복남이 의심 할 만 한 정황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해원은 복남의 의심에 대해 “너 미쳤니?”라고 말하며 사실을 확인해보려 하지 않고, 도시로 데려다 달라는 복남의 부탁에 대해 ‘도시에서의 삶도 여기랑 별반 다르지 않으며, 떠나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복남을 억압, 착취, 이용하는 마을의 질서가 해원의 방관으로 유지되는 순간이다.

무도에서는 법도 효력이 없다. 복남은 해원의 도움 없이 마을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복남의 계획은 이내 발각이 되고, 복남은 섬을 떠나기도 전에 만종에게 붙잡히고 만다. 바닷가에서 마을까지 질질 끌려오면서 복남은 만종에게 계속 구타를 당하고, 누구 하나 이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보다 못한 딸이 아빠에게 매달리지만 폭력은 멈추지 않고, 그러던 중 내던져진 딸은 돌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만다. 사건을 조사하러 경찰이 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놀다 넘어진 것이라고 둘러대며 오히려 복남이 돈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고 고발한다.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 본 해원도 자신은 그 시간에 자고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경찰을 돌려보낸다. 무도에서는 법도 무용지물, 부정의로부터 복남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복남은 태양을 노려보다 복수의 ‘낫’을 든다.

 

방관도 죄다

무도에서 복남에 대한 폭력 및 모든 학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것을 정당화하는 마을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엔 남자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그늘에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등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마을의 할머니들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마을의 유일한 남자인 만종 형제를 떠받들면서 복남을 억압?착취한다. 어떻게 보면, 마을에서 만종 형제는 일종의 신이요, 할머니들은 신을 모시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집단이고, 복남은 그 피해자인 것이다. 복남은 해원을 통해 그 억압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해원의 방관과 무시로 그것은 좌절되었다. 딸의 죽음은 복남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사회적 장치 또한 없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딸이 죽은 후 여느 때처럼, 아니 여느 때보다 더 일을 많이 하던 복남이 감자를 캐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태양을 노려보다가, “너무 참으면 병난다”고 태양이 그랬다면서 자신에게 “가해자”였던 마을 사람들에게 낫을 휘두르는 건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남의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압을 당해오던 한 사람이, 자신에게 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믿었던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회적?법적 장치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즉 복남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만일 해원이 복남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만일 해원이 경찰에게 딸의 죽음에 대해 목격한 그대로 말해주었더라면, 복남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인 복남은 이제 해원을 쫓는다. 난 이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난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인데 왜 나까지 죽이려 하는 거냐고 원망하는 해원의 물음에 복남은 대답한다. “넌 너무 불친절해.”

무도에는 가해자인 마을 주민들이 있었고, 피해자인 복남이 있었다. 타지에서 온 해원은 그 구도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복남을 외면하는 순간 그녀 역시 가해자가 되었다. 어떤 부정의가 저질러지고 있을 때, 그것을 방관하는 것은 그 부정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일조하는 것이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것, 그것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그 구도 속에 나는 없다고, 나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부정의의 피해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부정의를 방관하는 순간, 나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다.

서울로 돌아온 해원은 경찰서를 찾아가 용의자를 지목한다. 영화 초반 폭행 치사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도록 증언을 해 준 것이다. 누군가의 삶에 끼어드는 것도, 누군가가 내 삶에 끼어드는 것도 싫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삶에 끼어들고 연루되는 것은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버섯처럼 툭 튀어나온 홀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나와 상관없는 일,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도에서 살아남은 해원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점이 아닐까?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미용 성형, 외모지상주의? 자기 배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현대 사회에서 몸은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로 활용된다. 먹는 것, 입는 것, 사회적 의사소통 장치로서의 제스처, 보디랭귀지를 표현하는 것 등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체 튜닝’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미용성형은 외모지상주의의 산물”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압구정동에 가본 일이 있는가? “성형은 압구정으로!”이라는 광고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늘어선 성형외과들은 이 시대 성형에 대한 우리의 행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성형은 자연성에 위배되는 인위성이고 비정상성이라고 그래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혹 성형을 하더라도 드러내놓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성형외과 밀집지역(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보톡스, 턱 깎는 수술, 눈 트임 수술, 코 높이기, 가슴 성형 등의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비만 치료, 피부 관리, 날씬한 몸, 다이어트, 거식증, 폭식증 등의 단어 역시도 익숙하며, 이들은 오히려 현대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개념인 것처럼 이해된다. 얼굴을, 몸을 고치는 데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부터 앞으로 어디를 어떻게 더 고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흉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내 애인이 성형을 한다면 혹은 하였다면, 내 기분이 어떠한가?”는 질문이 심심치 않게 T.V. 버라이어티 쇼에 등장하였지만, 이제 이런 질문들은 식상하다. 성형을 하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로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은 이제 더 이상 주어진 대로 그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이용하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 흡입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여대생의 이야기, 쌍꺼풀 수술 이후 부작용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했다는 어느 여자 승무원의 이야기도 심각한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고 그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기 배려로서의 미용 성형

한 두 해 전, 몸짱 열풍을 일으킨 아줌마가 있었다. 주인공은 결혼 10년 차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삼십대 후반의 여성이다. 그 나이 대에 유지하기 어려운 신체적 조건인 162센티의 키에 50킬로그램의 몸무게, 게다가 탄탄한 근육을 지닌 몸매는 그 여성을 ‘봄날 아줌마’‘몸짱 아줌마’로 호칭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중년에도 20대의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다는 ‘봄날 아줌마’의 호칭은 한 때 전국을 강타한 화제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잘 관리된 몸짱 아줌마의 몸매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 사회에 몸매 관리 열풍을 일으키며 지방 흡입 수술, 유방 확대 수술 같은 몸매 관리 열풍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서 자기 관리를 잘한 주체적인 여성의 전형으로도 이해되었다. 젊음을 유지하거나 회복함으로써 단지 노화된 얼굴에 대한 거부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기획하는 주체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처럼 얼굴 가꾸기, 외모 만들기 등이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 버린 지금, 성형을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기 위한 욕망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미용 성형의 문제는 단지 외모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꽤나 설득력 있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의 사람들은 성형을 여성들이 자아와 맺는 관계성과 관련된 실천이라는 것에 입각한다. 미용 성형을 예뻐지기 위함으로만 이해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실제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삶과 몸의 서사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거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형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쁨과 설레임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단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몸을 혹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날 위해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이며 나만을 위해 계획하고 돈을 쓰는 것이라는 주체적 의식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미용 성형을 자기 주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용 성형을 하는 여성들이 구사해내는 다양한 서사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들은 몸을 자신이 배려해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소비문화의 담론 안에서 성형을 통해서 자기를 사랑하며 주체적으로 인식할 줄 아는 여성들이며, 이들이야말로 당당한 자기 배려를 하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신체 변형 행위 자체를 무조건 혐오하던 전통적 시선은 점차 사라지고 미용 성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담론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성형을 하는 여성들의 선택과 결정을 이해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모습으로 재현하기 위해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하는 하나의 새로운 긍정적인 담론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응의 몸짓인 미용성형

미용 성형이 그것을 선택하는 자아에게 자신감과 주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고 보고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구체적인 경험과 서사에 주목해보는 것은 미용 성형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통찰 지점을 준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몸을 주체 스스로가 온전히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쟁적이다. 미용 성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유와 수술 선택이 과연 전적으로 개인 내면에서 나오는 것인지, 미용성형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인지 등의 문제는 좀 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성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외모는 어디에서 오는가? 외모의 기준 역시도 스스로의 내면에서 산출되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아무리 그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외부적 압력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며, 그것에 저항하거나 대항하는 몸짓이 아니다. 수잔 보르도는 미용 성형에 대한 자기 배려 담론이 여전히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외모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못생겼다고 간주되는 외모로부터 벗어나고 늙어서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외모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외모를 성취함으로써 자신감, 자기 배려의 느낌 같은 것을 받으며 심리적 쾌락을 갖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미용 성형을 통해 얻게 된다는 허구적이고 불안정한 자기 주체성일 뿐이다.

잘 생긴 외모, 못생긴 외모의 구분은 누가 마련하는 것인가? 키가 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의식, 뚱뚱함과 날씬함의 상반된 가치, 이들은 누구의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못생김, 작은 키, 뚱뚱함을 열등감으로 느끼는가? 왜 외모가 항상 우리의 자신감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부여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아름다운 외모를 찾는 것을 자기를 위한 투자라고 간주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형 미용을 통해 획득된 외모는 일시적인 자신감일 수는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여성을 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성별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가부장적 권력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미용 성형을 선택하는 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자신감, 자기 배려라는 효과는 진정한 자기 사랑, 자기 배려가 아니라 가부장 사회가 부여하는 단일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향해 끝없이 질주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심리일 뿐은 아닌가? 또한 그것은 가부장제 의해 통제되는 억압적 쾌락이며 거짓 주체성일 뿐인 것은 아닌가?

 

키스방,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키스방,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다[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하이-테크 서비스/하이-터치 서비스

지구화와 함께 도시의 노동은 생산자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강남 테헤란로의 주요 건물들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법률, 금융, 광고, 컨설팅, 의료, 회계와 같은 서비스업의 간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생산자 서비스업에 초점을 맞추는 이러한 관점은 성별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서비스업의 또 다른 측면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노인 돌보미, 베이비시터, 가사 도우미, 마사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의 여성들은 성 서비스업이라는 고도의 신체적 접촉이 요구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맥다웰은 여성들의 서비스 노동이 갖는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하이-테크 서비스(high-tech service)와 하이-터치 서비스(high-touch service)개념을 구분하였다. 전자가 생산 서비스와 관련된 전문 기술, 지식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육체적, 정서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소비자 서비스 노동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하이-터치 서비스는 오늘날 여성의 노동에서 여성의 몸 뿐 아니라 몸 위에 작용하고 있는 친밀 감정, 성적 판타지, 사회적 욕망까지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하이-터치 서비스”의 부상과 함께 사람들은 육체적, 감정적, 성적 친밀성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국가나 자치 기구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회복지 사업은 가사 혹은 돌봄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서비스 노동으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마사지 업종의 출현은 긴밀한 신체적 혹은 성적 접촉을 전제로 하는 서비스가 시장에서 거래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의 접촉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성 서비스업 특히 직접적인 성기 접촉을 포함하는 매춘은 거래되어도 좋은 것인가? 키스방은 매춘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키스방과 성적 욕망의 경계 협상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필자는 최근 확대되고 있는 키스방 서비스에 주목하고자 한다. 키스방에 대한 분석은 성적 욕망이 경제, 법률, 도덕이 정해놓은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유흥가 및 대학가 주변 어디든 키스방 전단지가 난무한다. 잘 아시다시피 노래방이 노래를 할 수 있는 룸과 시설을 대여하는 업종이라면, 키스방은 주로 남성 고객이 젊은 여성 매니저와 제한된 성적 접촉 특히 키스를 즐길 수 있도록 주선하고 이를 위한 룸과 시설을 제공하는 업종이다.

▲ 성매매 암시 전단이 꽂힌 주차차량(위부터)과 폰팅 광고가 부착된 전신주 ⓒ 연합뉴스

우선 키스방의 등장은 사람들이 국가적 혹은 사회적 제도에 의해 규정된 성 서비스의 경계를 어떻게 피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과 함께 한국의 법은 직접적인 성교 및 유사 성행위를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 노동이 불법적인 것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그러나 성 서비스의 거래는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업주들은 법망을 피하면서 성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이중에 하나가 바로 키스방이다. 업주들은 법의 단속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직접적인 성교가 금지되어 있음을 고객에게 공식적으로 분명히 알리고 있다.

둘째로 키스방 서비스는 경제위기 이후 업주들과 구매자들이 성적 욕망의 실현방식을 어떻게 협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업주들은 키스방 확대가 저렴한 이용료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매춘이나 대딸방이 한 타임에 7-8만원, 안마시술소가 16-18만원임을 감안할 때 4만원하는 키스방은 저렴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키스방의 확장은 남성 고객의 성적인 욕망이 반드시 성교라는 하드코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가벼운 신체 접촉, 연애감정 등 점차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터넷 포털 웹사이트 Daum의 “지식”코너에서 “왜 키스방을 선호하는가”를 묻는 한 네티즌의 질문에 닉네임 Amati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달고 있다. “남성 또는 여성의 욕구가 오르가즘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님말 그대로 해당업소를 찾으면 되지만, 사람마다 개개인의 취향은 모두 다릅니다. 성인물의 장르도, 새도-매저키즘(SM), 페티시, 갱배앵(Gang-Bang) 등 다양하죠.”

마지막으로 키스방의 등장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여성들의 생활고 및 소비 욕망이 순결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타협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생활고로 인해 혹은 값비싼 소비재를 사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여성들은 매춘과 달리 키스방 서비스가 남성의 성기를 만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순결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준다고 말한다. 한 인터뷰에서 매니저 박양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여자들 치고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키스로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 규범의 잣대만을 들이댈 것인가?

그렇다면 성적 친밀성을 사고 파는 하이-터치 서비스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오랫동안 사회이론가들은 성 서비스뿐 아니라 친밀성 자체가 상품화되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이들은 전통적 도덕의 관점에 따라 친밀성과 경제적 거래를 서로 대립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고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두 영역이 상호 교차될 때 무질서, 혼란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19세기 경제 전문가들은 “가정”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면서 시장의 팽창이 친밀한 사적 관계를 냉혹하게 손상시켰다고 비판하였으며, 최근 비판이론가 레미 리프킨은 “‘초자본주의(hypercapitalism)’의 세계는 돈과 정보의 즉각적인 전달과 함께 본래의 인간적 관계를 위한 시장거래의 대용을 악화시키고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춘을 비판하는 반-매춘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왜 특히 성 서비스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 역시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들은 여성들이 매춘과 같은 하이-터치 서비스에서 일방적인 쇼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친절함이나 우정과 같은 친밀성과 달리 성적인 친밀성의 거래는 특히 경제적, 문화적 권력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강요되고 있으며 특히 매춘은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착취의 극단적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혼 중개업에서 룸살롱, 와인 바 혹은 키스방에 이르는 다양한 성적 거래들이 매춘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 하에서 특정 성 거래가 도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허용되었는지, 역사적으로 성적 욕망의 거래가 어떻게 협상되어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이 관점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성교가 있든 없든 모든 성적 친밀성의 거래가 비난되고 불법화되어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의 인터뷰에서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성기에 직접 자극을 주지 않는다는 법의 맹점을 이용해 윤락업소가 자극 아이템만 바꿔 늘어 가는 실정에서 돈을 내고 여성에게 육체적 향응을 받는 모든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계 협상의 방식과 전략들

그러나 문제는 성적 욕망이 혹은 현실적으로 협상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성 서비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성적 욕망의 경계가 어떻게 협상되는지,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젤라이저의 참신한 제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에 따르면 다양한 친밀성의 경계는 어떤 관계에서 어떤 매개물에 의해 무엇이 거래되는가에 따라 부단히 구분되고 협상되어왔다. 즉 사적 관계에서든 시장적 관계에서든 친밀성은 항상 거래의 논리와 함께 했지만 사람들은 관계, 매개, 거래의 매치에 따라 친밀성 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구분하는 데 몰두해 왔으며 그 구분법에 따라 특정한 친밀성의 거래를 인정하거나 비난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법은 성 서비스가 결혼 관계 내에서 이루어질 때 혹은 혼외 관계라도 그것이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이 돈과는 다른 상징적 매개물을 통해 교환될 때는 허용하였다. 상업적 관계 역시 세부적으로 구분되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향응(treating)”이란 노동계급의 여성이 애인 뿐 아니라 초면인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성적 행위에 대한 댓가로 재정적인 보조와 증여를 받는 것이었다. 젤라이저에 따르면 향응 역시 결혼 관계 밖에서 진행되는 친밀성의 거래형태이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받는 대가가 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점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허용적인 향응과 불법적인 매춘을 구분했다고 한다.

 

키스방이 제기하는 협상의 문제는?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키스방은 상업적 관계에서 선물이 아닌 돈을 매개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스방은 성교가 아니라 키스와 같은 가벼운 육체적 접촉과 연애관계에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구분될 수 있다. 키스방의 서비스는 대딸방의 서비스와도 구분된다. 대딸방이 손을 통한 성기접촉을 제공한다면 키스방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러한 유사 성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스방의 등장과 함께 협상되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른 것은 매춘이나 대딸방과는 구분되는 키스방에서의 성서비스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것인가이다.

물론 키스방의 협상 전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키스방의 법적 허용을 반대하는 법조계, 언론계, 여성계의 담론은 키스방이 매춘이나 대딸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키스방 서비스가 결국 성교와 다름없는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해 키스방에서 성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키스방을 매춘과 구분하고자 하는 업주들과 고객들은 키스방은 매춘과 다른 “건전한” 거래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협상 전략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 문제에 대답하기보다는 키스방이 성 서비스의 경계를 협상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유교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구화가 교차하고 있는 도시공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성적 친밀성 거래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이를 허용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관습적 한계 내에서 친밀성의 거래방식, 매개물, 관계의 매칭을 새롭게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모성 신화, 그 불편함에 대하여[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모성 신화, 그 불편함에 대하여[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연효숙(연세대)

 

무한 경쟁 시대의 모성

왜 나는 요즘 여성주의(페미니즘)에 시큰둥하는가? 여성주의의 가치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패배주의에 빠졌기 때문에? 여성주의에 힘을 보탰던 진보의 목소리를 사그라지게 만든 지금의 상황 때문에? 미래를 짊어질 젊은 층이 스펙 쌓기에 여념 없고 정치적인 무관심을 넘어서서 아예 보수화되는 듯한 모습이 목도되기 때문에? 혹은 여성주의를 못난 여성들의 푸념거리로 치부해 버리는 냉소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에?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낙관주의적 열정이 시들어버린 지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기력감이 여전한 즈음이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길고 더웠다. 가마솥 더위, 불볕 더위, 찜통 더위에 부엌에서 가스불을 켜고 매일 밥해 먹는 것은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이었다. 당장 부엌문을 닫아 집안 살림 다 팽개치고 북극이든 남극이든 줄행랑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예전에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집 제목인 『밥벌이의 지겨움』이 나에게는 정말 엄마 노릇하기, 주부 노릇하기의 지겨움으로 다가 왔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 삼복 더위에 어땠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어머니상은 언제나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 자신을 지워가면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감수하는 엄마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당당한 현대 여성의 모습이 주류인 이 시대에 박물관에나 전시되고 말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자립적으로 성장한 현대 여성들은 이러한 어머니와 다른 것일까? 희생의 대명사였던 전통적 어머니와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요즘의 현대 엄마들은 모성에서 과연 차이가 있을까? 무한 경쟁 시대, 자식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현대의 엄마들은 더 지독한 모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모성 이데올로기는 표나지 않은 채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막강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미래를 바꿔 보려고 몸부림치는 여성주의자들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 산성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무한 경쟁 시대, 내 자식만 잘되고 남의 자식은 어떻게 되더라고 상관없다는 막가파식의 모성 이데올로기가 나를 숨막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모성을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나는 주변에서 별로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강한 모성과 강한 엄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살벌한 경쟁의 시대, 그리고 무능한 엄마를 질타하는 사회.

나는 왠지 엄마가 주인공이거나 제목인 것은 나도 모르게 외면해 버리고 마는 의식적, 무의식적 습성이 있다. 나도 모르게 ‘엄마’라는 상표로 포장된 많은 드라마, 소설, 영화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왜일까? 이러한 것들이 모성 신화를 부추길 것이 뻔해서, 왠지 ‘엄마’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샘에 자극되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에? 누구나 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엄마가 있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엄마는 영원한 소재가 되고 있다.

 

잃어버린 모성 신화를 찾아서

작년 2009년 인터넷에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은밀하게 독자들에게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소설의 경우, 출판사들이 앞다퉈 베스트셀러를 만들려고 요란한 광고를 해 대는 것과는 달리, 독자들 스스로가 자기 고백, 고해 성사 식으로 『엄마를 부탁해』를 읽은 소감을 인터넷에 토해 낸다는 것이다. 이런 입소문을 타고 조용히 『엄마를 부탁해』는 10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나는 이러한 기사가 영 마땅치가 않았다.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커녕, 이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미묘한 심리가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떤 마음의 뒤틀림이 있었다. 흥! ‘엄마’라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상징이 우리의 정서를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 것일까….. 하는 꽁한 마음이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그 책을 읽지 않고 계속 피해 다녔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책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었던 것일까? 왜 나 혼자서 그 책에 대한 일종의 마녀사냥(?)을 해대고 있었던 것일까?

예전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문단에서는 신경숙 특유의 지독히도 섬세하고 내면을 긁는 문체를 놀라와 했다. 나는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는 그다지 감응을 얻지 못했는데, 우연히 손에 넣은 『외딴 방』을 읽고서는 신경숙의 또 다른 신선한 충격과 감동의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방학 때 미뤄 놓았던 숙제를 해 내야 하는 의무감에서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드디어 손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 내가 산 책은 벌써 137쇄를 거듭하고 있었으니, 137만부 이상 팔려 나갔다는 소리가 된다.

이 책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1인칭인나, 3인칭인 그, 그녀가 아니라, 2인칭 ‘너’가 등장함으로써 일단 독자의 호흡을 확 밀어 당긴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개월째다.”로 시작해,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로 막을 내린다. 소설 속에서 엄마는 아버지, 장남, 장녀 등 가족들의 무관심과 방치로 이미 실종된,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만 가족들의 기억의 편린 속에서만 엄마는 아련하게 혹은 선명하게 떠올려질 뿐이었다.

우리의 현실에서 엄마는 언제나 당연히, 우리가 호출하면 금방 달려 와 줄 존재로 각인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고 망각한다. 엄마에 대한 이러한 미안함, 죄책감이 독자들을 다 한꺼번에 엄마의 실종 사건의 공범으로 만든다. 독자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엄마를 부탁해』를 한 번 손에 넣고 읽기 시작한 독자는 쉽게 책을 놓지 않는다. 이 독자들이 이 소설의 조용한 신드롬에 일조한 것이다.

이렇게 처연한 심정으로 이 소설을 읽었을 많은 다양한 독자들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좀 불편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엄마의 희생적이고 감동적인 모습보다는, 엄마를 희생양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모성 신화’의 혐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하필 힘빠지는 이 시절에 ‘엄마를 부탁해!’ 일까 하는 짜증도 섞여 나왔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는 매우 강한 엄마이다. 현대의 젊은 유능한 엄마와 속성은 다르지만, 마치 가제트 형사처럼 부엌에서 뚝딱 어떠한 것도 만들어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다만 가끔 끝없이 이어지는 농사일과 부엌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항아리 뚜껑들을 신나게 깨서 풀고, 헛돈 들여 다시 사는 일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슬쩍 웃음이 나오는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나는 『엄마를 부탁해』의 신드롬 현상을 조망하는 몇몇 평론들을 읽어 보았다. 이 소설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대체로 남성 평론가들은 이 소설 속의 감동어린 엄마의 모습을 그린 작가의 노고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에 여성 평론가들은 조금은 인색하게 엄마의 감동을 담거나, 엄마 바이러스, 엄마라는 유령, 엄마에 대한 비판적 읽기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모성의 의미를 재평가하였다.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서 이 책을 읽고 올린 독자들의 댓글을 대강 주욱 훑어 보았다. 이 소설의 그 엄청난 독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다 점검할 수는 없었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알 듯도 했다. 이 책의 독자들은 누구인가? 그야말로 다양한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중년층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도 했다. 장남, 장녀인 중년층은 유년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눈물을 훌쩍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도 장남 콤플렉스, 장녀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불러낸 엄마 바이러스가 전염이 되어 엄마의 유령이 출몰하고 실종된 엄마를 애도하면서 자신 속 깊이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씻어 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모계 사회로의 회귀인가?

한국 사회 현대 여성의 모성성은 전통적인 어머니상과 결별했는가? 혹시 현대판 새로운 모성 신화가 창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우리는 엄마라는 유령을 신격화해서 모성 신화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고달프고 힘든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엄마를 희생양으로 삼는 교묘한 공범자들은 아닌가? 엄마라는 영원한 고향을 아우라로 만들어 엄마를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권이 무너진 사회 속에서 여전히 우리들은 누군가 의지하고픈 도피처를 찾는 것일까? 아버지 없는 사회에서 이제 대신 어머니를 내세우고 있는가? 그러나 이 방법은 좀 비겁한 것은 아닐까? 전통적인 어머니를 불러내, 그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세우고 그 희생양 속에 죄의식을 떨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피에타상의 성모마리아에 비유되는 어머니. 짐짓 모성 신화의 냄새가 나지 않은가. 불편하다. 성모마리아의 온화함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권위의 상징인 대타자를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이 피곤한 시대에 영원한 안식처로 인식되는 어머니 품! 고단한 일상 때문에 어머니 자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본능 회귀가 있는가?

왜 『엄마를 부탁해』에 많은 독자들이 빠져 드는가? 권위적인 아버지가 사라진 시대, 사람들은 뭔가 허전해 하는 것일까? 우리는 피에타상에 각인되어 있는 성모마리아, 희생의 화신인 어머니를 다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신드롬 현상에 심드렁하다. 새로운 모계 사회로 가고픈 대중들의 열망을 슬쩍 엿보았기 때문일까?

여성주의자들은 미래 어떤 사회를 희망하는가? 대중은 어떤 사회를 희망하는가?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가 하루바삐 멸망하기를 희망한다. 대중의 바람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고단함과 불안함을 보듬어 줄 새로운 권위인 대타자를 희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열망이 새로운 모계 사회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모계 사회로의 회귀! 여성주의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달갑지 않다.

시중에 여성주의자들은 모계사회로의 회귀를 반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하다. 이것은 전혀 오도된 일임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 드센 여성들의 이미지를 한껏 받고 있는 여성주의자들이 부권을 패스받아 새로운 강권한 모권 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고 생각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나도 뜯어 말리고 싶다. 어떤 신화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 어떤 우상도 내세우지 않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진짜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닐까?

여성주의에 시큰둥한 요즘, 그래도 나는 모계 사회로의 회귀를 꿈꾸지는 않는다.

 

‘OO녀’에 대한 ‘꼴페’의 단상[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OO녀’에 대한 ‘꼴페’의 단상[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주영(서울시립대)

요즘 여자애들 왜 이래?

전국민의 일촌화에 힘쓰는 모 사이트 뉴스 페이지에 가면 하루가 멀다 하고 남녀가 편을 갈라 싸운다. 남성들은 요즘 여성들이 자기들 편의에 따라 남녀평등을 부르짖었다가도 남성들에게 남성다움을 요구하는 이중인격자 된장녀 혹은 꼴페(꼴통 페미니스트의 줄임말)라고 비난하고, 여성들은 자신들이 직장생활 가사노동 육아까지 도맡아 하느라 괴로운데 남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비난한다.

만약 그 기사가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그 내용에 상관없이 댓글의 단골 메뉴는 군가산점제와 출산, 가사 분담, 명품과 된장녀 등이다.

이 싸움에 적극적인 건 남성 쪽인데, 남성들은 온갖 성폭력적 언어와 욕설까지 섞어가며 여성들을 이기적이고 개념 없고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최근에는 ‘OO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젊은 여성에 대한 비난이 보다 강화되고 가시화되는 듯하다. 비난을 당하던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은 이제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그 존재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된장녀, 루저녀, 군삼녀, 개똥녀, 발길질녀에 월드컵 열기를 타고 응원녀까지 도덕적 비난을 받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인터넷 뉴스와 게시판을 장식하고 있다.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주거나 (특히 남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젊은 여성들에 대해 사람들은 “요즘 여자애들 왜 이래?”라고 묻는다.

왜 젊은 (특히 비혼의) 여성들이 비난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단순히 여자들이 잘못을 더 많이 저지르기 때문일까? 혹시 이 현상의 이면에 다른 맥락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행위를 한 여성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남성이라고 그만한 ‘나쁜 짓’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응당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요즘 여자들한테 왜 이래?”

 

‘OO녀’ 비난: 성별화된 윤리

어떤 행위의 당사자가 남성일 경우에는 대체로 그 ‘악’의 수위가 높아서 법적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OO남’이라는 별명을 붙여 사회 구성원들이 도덕적 비난을 가할 필요성이 낮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잔혹한 살인사건의 가해자나 조직폭력 가담자들은 거의 남성이며,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가해자도 대부분 남성이다. 전 국민을 상대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정치인과 자본가도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 역시 강도 높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법을 통해서 처벌을 할 수 있고 시민들이 나서기 전에 국가와 언론이 공론화를 하기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의 도덕적 비난이 처벌을 대신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OO녀들은 대부분 법적 처벌이 곤란한 행위를 했지만, 공공질서를 해하거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관습 또는 가치를 따르지 않은 경우이다. 개똥녀나 패륜녀가 그랬다.(*개똥녀 사건 당시인 2005년에는 처벌 근거가 없었다. 이제는 동물보호법에 따라 동물의 배설물을 치우는 것이 의무화되어 이를 어길 시 벌금을 물게 된다.)

하지만 발길질녀나 고양이 학대녀는 상황이 다르다. 남성이 벌건 대낮에 길거리에서 여성을 때리거나 임신한 여성에게 심각한 폭력을 휘둘러 유산에 이르게 한 사건들은 적지 않지만, ‘발길질녀’ 사건처럼 공론화되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그 가해 남성에게 따로 별명을 붙여주지도 않았다. 또 많은 남성들이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들을 심각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지만, ‘고양이 학대남’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적은 없었다.

법적 처벌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동일한 유형의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 주체의 성별에 따라 비난과 낙인찍기는 그 방식과 강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OO녀’ 현상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한 일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통해 처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어떤 행위에 대한 도덕적 가치판단과 그 판단에 따른 비난의 방식이 이처럼 성별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필자가 당장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OO녀 현상을 여성의 변화와 이에 대한 남성들/남성적 사회의 반응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위 순종적이어서 그동안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의 비도덕적 행위가 상대적으로 큰 충격을 준다고 보는 것이다.

남자들의 비도덕적 행위는 워낙 빈번해서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지만, 남성에 비해 공공질서를 잘 지켜왔고 또 폭력과 관련해서는 주로 피해자였던 여성들이 규칙을 어기고 가해자가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이 가하는 ‘폭력’의 피해자가 남성일 경우, 남성들은 거의 공황에 빠지고 적극적이고 거칠게, 그리고 발 빠르게 이에 대응한다. 된장녀와 루저녀에 대한 비난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제 된장녀라는 말은 행위 당사자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여성들을 싸잡아 이르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된장녀와 루저녀는 OO녀의 유형 중 남녀 간의 대립적인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들인데, 이들의 죄목은 간단히 말해 ‘남성감정상해죄’이다.

이들의 ‘잘못’은 사실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방송에서 표현한 자신들의 생각이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뿐,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된장녀는 돈 많은 남자를 노골적으로 밝힌 죄, 루저녀는 남성의 외모를 능력과 결부시켜 평가한 죄 때문에 비난을 당했다.

페미니스트로서 이 여성들의 사고방식에 결코 동의할 수도 없고 남성들이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는 것은 이해할만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들의 반응은 사실 좀 호들갑스럽다. 텔레비전에서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쇠고기 돼지고기처럼 부위별로 평가하고 여자는 예쁜 게 곧 착한 거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예쁘기만 하면 왕자님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어리고 젊은 여성들을 거울 앞에 묶어두는 것은 가부장제이고, 그 거울에 비친 여성의 모습이 바로 된장녀 아닌가? 전세계의 수많은 여성들이 매일 겪어내는 일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도 되지 않는 말 몇 마디에 남성들은 상처를 받고 화가 나고 인격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여주는 분노의 가장 큰 이유는 외모와 능력 면에서 이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그렇듯이) 특정한 젠더 역할과 이상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각종 OO녀들에 대한 비난의 이유가 아니라, 그런 현상이 최근 몇 년 간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사회문화적 혹은 심리적 맥락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성/ 여성적인 것의 배제와 편집증적 남성 주체

OO녀 비난 현상은 단순히 여성들이 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거나 여성들의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 구성원들의 비난 말고는 달리 처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성의 ‘타자화’와 관련된다.

여성의 타자화는 이중적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사회와 문화는 여성을 배제한 채로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며, 나아가 이 가부장제 질서는 여성/여성적인 것이 남성/남성적인 것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자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이 질서에서 여성은 남성과는 다른 여성으로서 존재해야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차이가 아니다. 이는 남성이 가진 것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거나 또는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의 차이이다.

OO녀 현상은 최근의 일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남성과 유사한 행위를 하고서도 늘 더 비난받고 낙인찍히며 나아가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아왔다.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은 타락한 ‘윤락녀’로 불려왔지만, 남성인 성구매자들에게는 어떤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양상도 있다. 똑같이 록밴드를 좋아해도 남자애들이 좋아하면 마니아, 여자애들이 좋아하면 그루피라고 한다. 스포츠 신문이나 자동차 관련 잡지들을 사서 읽는 남자들은 패션잡지를 읽는 여자들만큼 할 일 없고 생각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남자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나라걱정을 하면 그저 뉴스에서 귀동냥 한 걸 그대로 읊어도 토론이지만, 여자들이 커피를 마시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덜어낼 때 그것은 쓸데없는 수다가 된다.

여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문화적 현상들과 여성들의 욕망은 저급한 것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그것이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젠더 정체성으로부터 길러진 것이든 아니면 진정한 여성 고유의 것이든 또는 그 둘 사이에서 개별 여성들이 겪게 되는 갈등과 협상과정으로부터 선택된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여성들을 낙인찍거나 가치절하하는 것은 남성중심의 문화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최근에 좀 달라진 점이라면 소위 요즘 여성들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순종적이고 조신하고 착하지 않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했거나 독립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만 하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달라진 여성들의 모습을 페미니스트 주체라고 일반화할 수도 없거니와 앞에서 본 OO녀들은 오히려 남성중심 문화의 폐해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경우라고 말 하는 게 오히려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라도 우리는 여성들이 ‘히스테리’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주장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였을 때 히스테리가 여성의 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없는 여성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히스테리아의 위치에 있었다. OO녀들의 욕망이 비록 ‘진정한’ 자기 욕망, 혹은 여성적 주체의 욕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들이 발화를 한다는 것은 분명 작은 변화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남성들은 이런 변화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변화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그동안 감춰져 있던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편집증이다. 사실 편집증에 걸리는 것이 주로 남성이라는 점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다. 편집증은 과도한 나르시시즘의 극단적인 경우의 하나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망상을 갖는 증상을 보인다. OO녀 현상에서 어쩌면 남성들의 편집증적 징후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의 변화에 남성들은 과도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적인 남성 주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구성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그 문화 자체를 위태롭게 할 때, 남성 주체는 그 주체의 자리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낌으로써 엄청난 피해의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그저 망상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대개의 남성들이 편집증적 징후를 보일 뿐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들의 항의가 단지 몇몇 여성들에 대한 맹비난에서 그치지 않고, 남녀 모두에게 압박을 주는 젠더 정체성의 가부장적 규정들을 바꿔내자는 주장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은 역시 너무 큰 바람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