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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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동』-‘여성적’인 영화에 대한 단상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김 수 현(서울시립대학교 박사과정)

 

 

몇 년 전에 나는 하이메 로살레스(Jaime Rosales) 감독의 <고독의 편린>과 훌리오 메뎀(Julio Medem) 감독의 <혼란스런 아나>를 약간의 시간간격을 두고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서로 다른 방식이 흥미로웠다.

두 영화는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특히, 나는 두 영화 중 어떤 것이 좀더 ‘여성적인’ 감수성에 맞는 표현형식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혼란스런 아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어떤 불편함이 남았다. 반면, <고독의 편린>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에 공감하게 되면서 나의 마음 속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듯했다. 거칠게 말하면 영화의 진행 과정에서 <혼란스런 아나>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고독의 편린>은 관조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삶을 지켜보게 만든다. <혼란스런 아나>가 ‘역사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조금은 추상적인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고독의 편린>은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신비로운 존재’이거나 ‘성적 대상’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은 힘겹게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 찾지 못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여성이다.

<고독의 편린>에서 여성들은 서로 소통하지도 못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인물들의 대화는 허공을 맴돌며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의 표정 변화도 극적이거나 급격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덤덤하거나 편안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그녀들의 고독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텅 빈 공간과 사물들이 인물들의 고독을 더 차갑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현란함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인물들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견 딱딱해 보이고 덤덤해 보이며 때론 무표정하기까지 한 인물들의 표정 이면의 감정을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혼란스런 아나>에서 여성은 무의식의 깊은 심연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한 죽음의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존재다. 주인공인 아나는 모든 여성을 대신해 ‘고통으로서의 여성의 역사’와 만난다. 그런데 <혼란스런 아나>와 함께 한 심연으로의 여행은 사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사고를 따라가는 것과도 같다. 아나의 무의식 여행에 동참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다음에 감독은 상투적이고 진부한 여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여성이 처한 억압에 대한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혼란스런 아나>는 감독을 비롯한 남성이 생각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이 두 영화가 특별히 여성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해 나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감독들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나 성을 묘사하는지에 대해 눈길이 가게 된다. 그렇지만 약간의 불편함을 뒤로 한 채 영화전체의 구조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중점에 두고 영화를 보게 된다. 또한 영화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들의 배치 및 표현방식이 얼나마 ‘영화적’인가를 두고 더 많은 생각을 하곤 한다. 여성인 감독이 여성을 소재나 주제로 다루면서 여성문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보여준다면 ‘좋은’ 여성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표현방식과 감독이 인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성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여성적’이라 생각하는 영화에서는 여성을 대하는 담담하고 관조적인 시선 가운데 어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 속 그녀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조금씩 치유하고 극복해가는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혜화, 동>이 보여주는 ‘여성적인 것’

여성영화에 대한 이런 개인적인 고민이 있던 차에, 지난 3월에 본 민용근 감독의 <혜화, 동>은 다루는 소재와 주제, 그리고 표현방식이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여성적’인 영화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반가웠다. 영화는 한 여성의 마음 속 상처를 관조적이고 담담한 시선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감정의 변화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 과정은 인물에게는 상처와 마주하여 치유하는 과정인데, 관객에게는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혜화, 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영화는 혜화와 그녀의 마음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하게 된 문제의식은 아이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보살핌으로서의 ‘모성성’이다. 가족을 둘러싼 해체와 파괴의 문제, 가족을 구성하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도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평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영화의 소재나 주제가 진부한 데 비해 영화의 화법이 흥미롭다고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도 한 여성의 삶과 그녀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들을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영화 ‘혜화동’ 포스터

1> 영화의 표현형식과 관찰하는 시선

혜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버려짐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우리의 주변에서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이다. 유기견을 돌보며 사는 애견미용사인 스물 세 살의 혜화에게 5년 전에 자신을 떠났던 한수가 찾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다. 이 때부터 그녀는 5년전 과거와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고등학생이던 혜화와 한수는 서로 사귀었고 혜화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면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준비한다. 혜화의 어머니는 혜화를 잘 보살피려 하고 그녀를 데리고 한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수의 어머니는 한수의 장래를 걱정하며 혜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화는 혼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몸이 약해서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한수는 그 당시 혜화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작성했던 입양통지서를 들고 와서 혜화에게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이 아이를 둘러싸고 미스테리한 플롯으로 전개된다. 혜화의 현재 삶에 과거의 기억들이 침투해 들어오면서 묻혀진 상처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혜화를 향한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 보여진다. 묻혔던 상처를 꺼내보는 혜화는 마치 고였던 감정이 흐르듯 혼란스런 감정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영화의 미스테리한 플롯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탈장된 개와 그들의 아이인데, 탈장된 개와 아이는 혜화의 ‘마음 속의 아이’를 상징한다. 이들이 과거 속 혜화의 집에서 사라진 그 강아지인지, 진짜 혜화의 아이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감독은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실제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혜화의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사실, 혜화와 한수의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는 한수의 건강하지 못한 마음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는 혜화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를 통해 다가가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면 혜화와 한수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입양통지서에 적힌 주소에서 한수가 본 아이는 다른 아이였음이 밝혀진다. 한수는 자신이 찾아갔던 집에서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사실을 전해들었어도 믿지 않는다. 결국은 혜화가 임신했던 당시에 태어난 자신의 조카(나연)가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혜화를 속이게 된다. 한수가 의도치 않게 꾸민 조금은 엉뚱한 일로 인해 혜화는 그 아이를 진짜 자신의 아이라 믿게 된다. 그리고 혜화의 집에서 세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혜화는 아이를 부모들에게 보내기 전에 씻겨주고 대화를 하면서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아이에게 하듯 아이와 작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이와 탈장된 개와 함께 중요한 이미지는 폐허가 된 집터이다. 영화 초반에 혜화는 탈장된 한 유기견을 따라 폐허가 된 집터로 가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 집터는 혜화와 한수가 자주 마주치게 되는 공간이며, 마치 잃어버린 그들의 아이와도 같은 유기견의 흔적을 끝없이 찾게 되는 곳이다. 폐허가 된 집터는 두 사람의 단절된 관계와 해체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한 편으로는 두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소재이거나 주제일 법한 이 영화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신적인 화자가 되어 혜화의 마음 속을 설명하고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주변에서 보게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고 궁금증을 품게 될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의 미스테리적인 구성이나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들의 연결 방식은 이런 식으로 혜화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가 말을 아끼고 담담하면서도 건강한 캐릭터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그녀의 아픔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2> 아이, 모성성 그리고 관계를 맺어가는 법

영화를 보다보면 특별히 혜화라는 인물의 건강하고 강인한 면모가 돋보인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실제 여배우만큼이나 혜화라는 인물도 맑고 깨끗해 보인다. 어떤 관객은 혜화라는 인물이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관용하는 어떻게 보면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혜화의 강인한 면모는 그녀가 특별히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의 강인함은 처음부터 영화에서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상처를 마주하고 그것을 치유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혜화는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의 아들(현웅)을 거의 3년 동안 돌봐왔다. 여섯 살인 이 아이를 향한 혜화의 시선은 흡사 자신의 잃어버린 아이라도 돌보듯 사랑스런 눈길이다. 혜화는 현웅이 잠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자신의 집으로 간다. 현웅은 시시때때로 혜화의 가슴을 만지기도 하며, 때로 혜화는 잠든 현웅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놔두기도 한다. 또한 현웅이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한편, 혜화는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을 하는데, 입양되지 못한 유기견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조금은 병이 든 것도 같은 유기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혜화가 이렇듯 버려짐에 대한 감정에 민감하고 그만큼 또 보살핌에 대해 민감한 까닭은 그녀가 한 번 버려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지금의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혜화를 냉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잘 길러줬다. 혜화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머니는 혜화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잘 도와주겠다고 말하였다.

혜화가 지닌 이런 면모를 보면서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모성성’이란 말을 떠올렸다. 레비나스는 주체에 대한 책임을 넘어서 고통받는 타자, 헐벗고 굶주리는 타자를 위해 나를 내어주고 책임을 다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강조한다. 고아나 과부, 굶주린 사람 등 비참한 타인의 얼굴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상처’를 받고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얼굴과의 마주침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든다고 한다. 그는 주체 안에 있는 이러한 타자성을 ‘내 안에 있는 타자’ 혹은 ‘동일자 안의 타자’ ‘내재 속의 초월’이라고 말한다. 내 안에 들어온 타자가 타자를 위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나를 키워내는 것을 일컬어 ‘모성성’이라 불렀다. 레비나스의 이러한 타자와 모성성 개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많은 함의들을 제쳐놓고 생각해 본다면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주는 유기견과 아이, 그리고 한수에 대한 태도를 ‘모성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모성성은 타자에 대해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것이다.

혜화에게서 그녀의 모성성을 길러냈던 타자는 무엇보다도 죽은 아이이다. 덧붙이자면 그녀의 첫 번째 버려짐의 경험과 그런 그녀를 거두고 돌봐준 지금의 어머니가 있다. 또한 그녀가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함께 기르던 개가 낳은 강아지들과의 이별의 경험이다. 한수의 가족에게 외면당한 혜화는 오랫동안 기르던 개 혜수와 혜수가 낳은 강아지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기어코 가려 하지 않던 혜수를 억지로 새로운 주인에게 넘긴다. 그 때 아빠가 달랐던 꼬리가 노란 강아지는 어딘가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한수의 집에서 거부를 당하고 절망감에 손목을 그으려던 순간에 그 어린 강아지가 집구석에서 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일이 있었다.

한편, 영화의 결말에서 혜화와 한수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구조하는 일로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아직도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한수에게 혜화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또 그 때 혜화가 찾아 헤매던 탈장된 그 개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혜화는 어린 강아지들을 데리고 혼자 집으로 가다가 다시 후진하여 한수를 향해 가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이런 결론을 두고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감독이 전해주었다.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거나 회복되는 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혜화가 보여준 ‘모성성’은 한수에게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한수는 영화에서 계속해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한수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조금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마도 어머니와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그만큼 그녀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면서 자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수는 혜화에게는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집에는 가끔 들어오는 등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지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를 갔던 것도 가족들이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정도이다. 다리를 다쳐서 약간 절룩거리는 상태만큼이나 한수는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탈장된 개와 아이를 둘러싼 미스테리가 해결되면서 혜화의 감정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 혜화의 타자에 대한 보살핌의 ‘모성성’을 드러내고 또 한편 키워냈던 이 두 타자와의 만남 이후에 한수라는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물음으로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인물의 삶을 하나하나 지켜보게 하면서 나에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 차근차근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모성성의 문제가 어머니로서의 희생 이전에, 한 사람의 상처와 내면에 관한 것, 즉 삶의 일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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