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신승철의 『욕망자본론』

신승철의 『욕망자본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녕하세요, 학술 1부입니다. 2015년 세 번째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이번에는 신승철 선생님의『욕망자본론- 욕망의 눈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다시 읽기』를 가지고 독서 토론을 진행해 주실 계획입니다. 지난 모임에 이어 맑스의 자본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접할 기회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2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 신승철

철학자의 서재 : 신승철, 『욕망자본론』

일?? 시 : 2015년 2월 25일(수) 오후 4시 ~ 6시

(*방학 마지막 주이기도 해서 시간을 조금 앞당겨 보았습니다)

장? 소:?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아래는 신승철 선생님이 보내준 책 소개글입니다.?

“이 책은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재독해를 부제로 달고 있지만, 사실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의 「기계에 대한 단상」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가치론을 접속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욕망가치는 펠릭스 가타리에 의해 정동(affection)의 가치로 간략히 정의되지만, 사실은 사랑, 욕망, 정동, 돌봄, 모심, 보살핌, 섬김 등이 갖고 있는 비물질적인 가치 전반을 적시하는 개념이다. 이 책은 소수자의 욕망가치는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고, 이 속에서 싹트는 생태적 지혜는 일반지성(=집단지성)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결국 우리 사회의 기계류의 혁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소수자와 비노동민중의 욕망가치를 긍정할 때 보다 생산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욕망자본론1

이 책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공동체’와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 재화를 모아서 재분배하는 ‘국가’ 를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는 폴라니, 가라타니 고진, 신이치 등의 노선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물건에 사랑과 욕망, 정성, 인격이 담겨 있는 선물이 오고가는 증여의 경제의 전통 속에서 성장이 아닌 성숙의 경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성장(growths)이 아닌 발전(development) 전략의 기초 역시도 공동체적 관계망이 소수자의 욕망에 의해서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성숙되는 것에 기반한 대안적인 경제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가 외부를 소멸시킴으로써, 소수자, 공동체, 욕망 등의 내부의 구성요소에서 외부성을 찾고 이행의 원동력으로 삼는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이 국면에서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의 자본화(=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라는 경향이 전면화되기 시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자본이 공동체의 집단지성이나 생태적 지혜, 공유자산에 대해 탐을 내고 그 속에서 질적인 착취를 추구하는 ‘코드의 잉여가치’와 공동체가 관계망 속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갖는 시너지를 통해서 사회적 자본, 협동조합, 대안섹터를 형성하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책은 사회적 경제, 발전전략, 기본소득 등의 담론 등을 통해서 색다른 욕망화된 자본의 움직임을 전략적으로 지도그리기하려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이후 일정 :

* 4월 일정: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5월 일정: 5월 21일(목), 강도은(재야철학자), 주제 미정

* 6월 일정: 6월 11일(목), 송종서의 번역서 『인간 농장』

3월 월례발표회를 이월 말로 불가피하게 날짜를 위와 같이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yhseo2001@hanmail.net

학술 1부 드림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이원혁(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나와는 다른 사람과 친해지기로서, 남북 화해와 통일

 

제일 처음 소개했던 민서와 지훈이의 에피소드에서 이 둘을 강제로 화해시키고 매일 같이 생활하게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다고 둘의 다툼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둘의 성적은 올라갈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다툼의 당사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없이 진행되는 화해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요원할 것입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점점 커져왔던 상처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넘어져 다쳤을 때 무턱대고 반창고부터 붙이지 않듯이 상처의 치료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선 상처를 물로 깨끗이 씻고, 소독약을 바른 후, 적절한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순서가 일반적이지요. 상처는 피가 멎으면, 부기부터 가라앉은 후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겠죠. 마음의 상처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듯합니다. 상처를 깨끗이 하고 소독을 하면 피가 멎고 부기가 가라앉듯이, 남과 북이 분단의 상처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부기가 가라앉듯이 상호간에 안정과 믿음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분단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적대감과 이질감 그리고 분단된 각각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분열과 대결의식을 걷어내는 것은 상처에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무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보여 마음 속 불안감을 자아냈던 우리나라는 비로소 백수십년 전 조상들이 바라던 서로 돕고 웃으며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이대로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존중과 신뢰라는 말은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민서나 지훈이에게 단순하게 “너희는 서로 존중하고 믿어야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민서와 지훈이에게 가장 큰 문제점을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가 자신과 닮기를 강요하는 것이죠. 그리고 둘 다 그 생각을 굽히지 않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겠죠.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남은 나와 대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참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평가할 때 나의 기준에서 남을 ‘내가 가진 것을 가진 사람 혹은 가지 않은 사람, 혹은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거나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내가 아닌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죠. 나와 다른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은 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이럴 경우 모든 다른 사람은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평가받고 인정되기 때문에 내가 없이는 다른 어떤 사람도 ‘없는 사람’ 또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친구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민서와 지훈이는 자신의 가치관으로만 서로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둘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에는 그 사람의 본질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찾아야지, 자신이 믿는 특정한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분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이며 나와 다르지만 용납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상처를 진정시키는 단계로 서로간의 안정과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쳐서는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정말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나의 가치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정말 ‘남’이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남’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려 들거나, 반대로 숭배하거나 아니면 소통을 포기하는 외톨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진정되었다면 이제 그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이 중요하겠죠. 바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 그리고 동질성의 회복입니다. 역사책과 윤리교과서에서 많이 등장한 인물이죠. 원효대사는 ‘화쟁’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효는 “다름이 있어야 같음이 드러나고 같음이 있어야 다름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다른 점은 서로의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는 좋은 힌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닮은 모습은 서로의 다른 모습을 돋보이게도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봄으로써 상대에 대한 더욱 냉정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며 ‘나’라는 작은 틀을 벗어나게 하여 ‘나’ 밖에 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나의 위치는 나 자신한테만 있지 않으며, 타인 속에 있지도 않게 되겠지요. 그리고 비로소 이때 우리는 바로 다른 사람과 나의 중간, 즉 경계 속에서 서로간의 조화를 그릴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드나들며 이루는 소통과 통일은 나의 입장으로 다른 사람들 묶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나를 귀속시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논어 자로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진 사람은 조화를 이루지만 똑같아지지는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아지면서도 조화를 이루지는 못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조화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으며, 소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민서와 지훈이 간의 화해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는 개인 간의 관계를 남과 북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www.segye.com

출처: www.segye.com

 

남과 북의 적대감과 불통은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상처, 그리고 그 상처의 방치 혹은 잘 못된 처치로 악화되어 왔습니다. 하나였던 것이 분열되니 이질성이 생기고 그것이 적대성으로 나아갔지만 오히려 이러한 이질성과 적대성은 통합을 위한 에너지이기도하다. 남과 북 사이의 차이의 인정은 밉고 싫지만 평화공존을 위해 인정한다는 인내의 차원을 넘어 밉고 싫은 마음이 분단체제가 낳은 비정상적 산물이라는 지각과 그 지각에 뒤이어 동반되는 상호존중이라는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냉정히 판단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상대도 나를 이해할 기회를 줌으로써 서로간의 조화가 가능해 질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조화를 이뤄간다면 그 순간이 바로 통일이 시작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4. 아름다운 통일의 모습

 

통일의 효과에 대해서 많은 장밋빛 미래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통일한국이 경제적, 군사적 대국이 될 수 있다는 꿈들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은 통일을 손익을 따지는 계산기 속에서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업이 새로운 사업진출 여부를 가리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모습에서는 통일의 정당성이 현재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러한 상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앞서 경계한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결정하고 둘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이런 모습은 결코 진짜 통일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것보다 조금 큰 이상과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은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평화를 종결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제입니다. 분단이라는 조건으로 남북 주민들에게 제시되었던 부담과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한반도라는 작은 지역의 평화가 아닌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화합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마지막 대치 장소는 그 긴장을 품으로서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남과 북은 ‘부국과 빈국’, ‘동양과 서양’, ‘근대와 탈근대’가 대립하는 장소입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나라가 있습니다. 남한과 같이 경제적 선진국 또는 자본주의국가 그리고 서구문화에 익숙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 북한과 같이 경제적으로 낙후되거나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을 고수하며, 아직 근대적 가치에 많은 비중을 두며 서구문명이 이질적인 나라들도 있습니다. 남북은 각자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다양한 대립을 축소해놓은 시험장이기도 합니다. 통일은 한반도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넘어 근대와 제국주의 시절에 자행되었던 세계 속의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에 기여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세계의 화해와 조화를 이끌고 그 미래를 제안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입니다. 이땅의 통일이 한반도와 세계 속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어제와 오늘의 상처를 딛고 미래를 향해 웃을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2015 한철연 교육부 독일어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2015 한철연 교육부 독일어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 교육부에서 독일어 강좌를 안내해 드립니다.

기간은 1월 30일(금)부터 8주동안 매주 금요일에 진행됩니다.

독일어 공부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강좌 관련 문의 사항은 pipjc11@naver.com(교육부장, 김정철)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강사 : 서유석
일시 : 매주 금요일 4시-7시
장소 : 한철연(서교동 태복빌딩 3층)
교재 : M. Bochenski, (번역본 <철학적 사색에의 길>), 문법책(정통종합독어, 최신독일어 중 택일 예정)
대상 : 철학과 학부/대학원생, 또는 철학과 대학원 지망자로 국한
수강료 : 무료

[신간] 철학, 문화를 읽다

철학 문화를 읽다

5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철학, 문화를 읽다》

현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

철학의 일상성에 한걸음 쉽게 다가가다!

문화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불가피한 코드가 되었다.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는 문화의 자리에 ‘종교’가 들어가 있었고 근대에는 ‘예술’이 부흥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본격적으로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시점은 20세기를 넘어서다. 지금 우리는 대중문화를 비롯해 문화를 수월하게 만끽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문화에서 문화로 끝나는 시대, 문화를 읽는 키워드가 꼭 필요한 시대다. 그렇다고 문화라는 단일한 코드만으로 현대인의 삶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문화라는 커다란 날개 아래 숨겨진 핵심 코드를 찾아서 현대를 읽는다면 제대로 현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009년에 초판이 나온 《철학, 문화를 읽다》는 5년 만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 가운데 몇 개의 주제들은 빠지고, 몇 개의 주제들은 새롭게 첨가되었다. 변화하는 한국 사회 문화의 상황을 가늠해볼 때 좀 더 비중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새롭게 첨가했다. 또한 초판에 없었던 도판과 사진들을 넣어, 더 입체적으로 문화의 현장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 ‘인간관계’, ‘성차별과 페미니즘’, ‘다문화’, ‘노동 ? 여가 ? 놀이’, ‘대중음악’, ‘소비와 욕망’, ‘감시와 자유’, ‘위생 ? 건강 ? 웰빙’, ‘환경’, ‘시간과 공간’, ‘가상과 현실’, ‘전통과 현대’, ‘죽음과 노년’을 주제로 삼아 총 14꼭지의 글을 한 권으로 엮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현 대한민국의 핵심 코드 14가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전반에 깔린 문화 현상을 직시하고, 그러한 환경에 놓인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문화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철학문화를읽다입체

 

■ 책 소개

문화 과잉의 시대를 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피곤하고 지쳐 있다. 견딜 수 없는 우울과 무의미한 허무함이 때때로 엄습하기도 한다. 위로와 힐링이 필요한 시간이다. 지친 심신을 한 잔의 차와 음악으로, 영화 감상으로 달래 본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쇼핑을 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더 이상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우스꽝스러운 허무의 시대에 현대인들은 문화적인 것으로 삶을 도배한다. 현대인은 넘쳐나는 문화의 과잉 영양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너도 나도 문화인임을 자부하지만 메울 수 없는 공허함은 어쩔 수가 없다. 삶에서 의미를 찾던 시대는 가고 그 자리에 문화가 독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솔직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문화를 이해하고 알려고 하지 말고 감각으로 느끼고 몸으로 만끽하면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굳이 문화를 머리로 따지고 정신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문화를 만끽할 수만은 없다. 우리의 몸과 감각을 무지한 상태로 방관하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감각이 지니는 ‘잠재력’에 한번 주목해본다면, 우리는 문화를 새롭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문화는 넘쳐나는데 우리는 여전히 문화에 대해 무지하고, 심지어 어떤 문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다양한 문화 현상은 있되, 문화를 읽는 성찰적 눈과 지식이 얕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문화를 즐기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기 십상이다. 문화의 풍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문화를 읽는 눈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골치 아픈 철학의 눈을 통해 문화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철학이 문화를 읽는 것, 문화를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따로 철학을 처음부터 꼭 배워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철학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성찰하면 나올 수 있는 ‘깊이를 가진 눈’이다. 문화 현상을 보다가 그런데 ‘왜 그렇지?’ 하는 의문만 가져도, 이미 그 사람은 철학의 매서운 눈으로 문화 현상을 볼 줄 아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깊이를 가진 눈’을 지니고 ‘생각을 가진 사람’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천’이다. 철학은 물론 ‘이론’이지만, 또한 이 이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염두에 둘 때 ‘깊이를 가진 눈과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옷을 사고 영화를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깨어 있는 주체로 감시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찰을 통한 문화 운동을 기대하다

이러한 실천적인 성찰력은 현실에서 다양한 문화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거대 문화 자본과 문화 권력에 맞서 각자 자리에서 서로 이웃과 연대해 소비자 불매 운동을 펼칠 수도, 공정 무역의 실천의 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문화와 불평등한 성 차별에 맞서 새로운 평등의 대안 문화를 꿈꿀 수도 있다. 감시 사회 속 노동의 현장에서 파열을 일으키며 자본주의 노동 문화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을 기획해볼 수도 있다. 게다가 무한 경쟁의 파시즘적 가속의 문화에 느림과 여유의 삶을 꿈꾸는 공동체를 꾸려 볼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공동체를 꾸리는 이웃들을 만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대안 운동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풍요로운 문화를 우리의 새로운 삶의 코드에 맞게 얼마든지 다채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다. 넘쳐나는 문화는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성찰적이고 실천적인 깊이가 빠진다면, 문화는 가장 위험한 마취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을 통해 문화를 읽는다는 것은 이론과 지식의 측면을 증가시키기보다 철학이 갖는 성찰력을 실천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일상의 문화를 철학의 언어로 다시 읽다

문화는 궁금한데 철학은 궁금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을 모르고서는 문화를 아는 것이 피상적임을 깨닫게 된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의 한 꼭지만 읽어도 금세 터득하게 된다. 이 책은 청소년이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로 쓰여졌지만, 문화를 보는 철학적 시각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오한 주제의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 시대를 살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떠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는지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소비에 대한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가 증대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우리가 얼마나 더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웰빙을 부르짖으며 건강염려증이 만성화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건강이란 무엇인지 등 삶과 개인의 곳곳에 침투해 있는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짚으며 궁극적으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자가 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권유한다. 2014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철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려운 일들이 2014년에 일어났다. 우리들은 삶에 당면한 어려움과 피폐함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의 관행으로 뿌리박혔던 낡은 문화의 틀을 과감히 깨어 버리고 이제 좀 더 성찰하는 실천적 자세로 나아갈 때인 듯하다. 고통받고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문화도 더불어 생각해볼 때다.

 

■ 내용 맛보기

다문화주의에서 소수 집단은 ‘다수 집단의 언어’ 아니면 ‘소수 집단의 언어’를 선택하는 양자택일에 놓인다. 문화적 선택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집단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집단이 주체가 되는 상호문화주의는 ‘다자간 열린 대화’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양자택일로 떨어지지 않는다. 동등한 위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대화 가운데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로 나아가기가 더 용이해진다.??97쪽

지문이나 DNA 정보는 각 개인마다 고유한 생채 정보를 담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지문이나 DNA 정보는 개인 인증이나 국가의 범죄 정보 관리에 사용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 대해 지문채취와 얼굴 사진 촬영 등 생채 정보 수집을 의무화한다. 테러에 대한 효율적인 대책으로 생체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에 입국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입국과 동시에 지문날인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17세 이상 모든 국민에 대해 열손가락 지문채취를 의무화한다. 우리나라에서 17세 이상의 전 국민에 대해 지문날인을 의무화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당시 김신조 등이 청와대를 기습한 1. 21사태의 여파로 남파간첩 및 불순분자 색출이라는 명목하에 17세 이상 국민에 대해 열손가락 지문채취가 의무화되었다. 현재 지문날인 제도는 애초의 범죄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한다는 목적보다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행정 조치의 일부가 되었다. 52쪽

잠은 게으름의 상징이었고, 산업 사회는 게으름을 적대시한다. 그르니에는 수면에 플러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아니면 마이너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망설이지만 산업 사회는 태생적으로 잠에 마이너스 기호를 붙이는 사회다. ‘산업 사회’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이다. ‘산업, 즉 industry’의 라틴어 어원은 ‘부지런함’을 뜻하는 ‘인두스트리아(industria)’다. 이 개념이 만들어질 당시 이 말은 비생산적인 귀족에 맞서서 산업 노동자의 자부심을 고취하고자한 투쟁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는 노동자를 생산라인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근면과 성실’을 소리 높이기 시작했고, 노동자의 밤 시간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58쪽

 

철학문화를읽다표지

 

■ 저자 소개

지은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자들의 자기 성찰과 실천적 모색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1989년에 창립했다.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진보적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며, 좁은 아카데미즘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결합된 의미 있는 문제들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자 한다. 지역, 전공, 세대별로 흩어져 있던 구성원들이 커다란 강물을 이루듯 한데 모여 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철학을 공부하는 석·박사 및 대학원생들과 대학 강사, 교수 등 총 300여 명의 회원이 함께 한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 대사전》, 《다시 쓰는 서양근대철학사》,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철학자의 서재》,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열여덟을 위한 신화 캠프》, 《삶, 사회 그리고 과학》, 《철학의 명저 20》,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이야기 한국 철학》, 《지식의 바다에서 헤엄치기》, 《우리들의 동양철학》, 《철학, 문화를 읽다》, 《철학, 삶을 묻다》 등 다수가 있으며, 매년 네 차례에 걸쳐 학술지 《시대와 철학》을 발간하며 대중 웹진인 《ⓔ 시대와 철학》을 운영 중이다.

글쓴이(게재 순)

이철승? 조선대학교 교수

연효숙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현남숙?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박민미? 대진대학교 외래교수

박영욱?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김선희? 이화여자대학교 HK연구교수

서영화 서울대학교 외래교수

강신익 부산대학교 교수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서도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김교빈? 호서대학교 교수

이순웅? 경희대학교 강사

 

■ 차례

군자에서 시민까지: 유가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가족에서 디지털 촌수까지: 새로운 인간관계

제2의 성에서 사이보그 선언까지: 성 차별과 페미니즘

단일 민족 신화에서 결혼이주여성까지: 다문화 사회의 한국

소외된 노동에서 잉여인간까지: 현대 사회의 노동, 여가, 놀이

통기타에서 컴퓨터 음악까지: 대중음악

편의점에서 백화점까지: 소비 사회와 욕망

지문날인부터 디지털 파놉티콘까지: 감시 사회와 개인의 자유

기생충에서 아토피까지: 위생, 건강, 그리고 웰빙

핵발전에서 먹거리까지: 환경 위기와 생태학적 자연관

증기기관차에서 KTX까지: 시간 체험과 공간 이동

단성사에서 CGV까지: 가상과 현실

경복궁에서 아셈타워까지: 전통문화와 현대

타인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까지: 죽음과 노년의 문제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
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3. 연설기술(1)

연설기술(Rh?torike : Redekunst)은 소피스트 사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을 살피기 전에 연설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 현상부터 간단히 정리 고찰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리스 말이 가지고 있었던 비상한 힘과 유연성이다. 그리스어는 상대에게 말하고 전해야 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 점은 예를 들어 헤브라이어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것은 일상생활이건 전시에서건 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이 가져다 준 큰 기여이다.

연설기술의 경우 우리는 고대 포이니키아(페니키아)나 카르타고, 고대 게르만 등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에 반해 호메로스의 작품은 현재 우리의 손 안에 있다. 호메로스의 신들이나 인간들의 연설은 최고의 자연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게다가 그러한 연설은 폴리스가 앞서 이룩한 큰 성취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이미 모든 사안이 토론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을 위한 성대한 경기도 열려 말하는 일이 일의 성취와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회와 민중 법정이 여러 가지 주요사안을 결정하게 되면서 연설은 갑자기 체계적인 학문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이 연설기술을 그리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하고도 중심적인 요소로서 육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대의 신문, 잡지와 달리 그리스의 말하는 행위는 특정 장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그 시점에만 결부되어 있어, 연설하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감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했고 그 반대자 역시 제대로 된 반론을 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리스인의 경우 현재의 신문 잡지의 힘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연설의 힘과 비교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고대의 아테네인이 연설을 듣는 대신에 단지 열심히 신문 밖에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하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연설기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테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색이나 지식, 학적 탐구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연설기술은 이후 이 시민들의 전체 에너지의 실로 방대한 부분을 빼앗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적인 탐구는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처지가 되었을 정도이다. 사실 연설기술에 동원된 막대한 노고 이를테면, 수사학을 위해서 작성된 대량의 안내서의 종류만 비교해보더라도 학적 탐구의 실적은 그저 어중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자들도 처음부터 연설기술을 철학의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 경우 가장 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것처럼 그들 자신 이것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을 수사학에게 바쳐 그 최대의 탐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제 사변으로서의 철학은 연설기술에 대한 엄밀한 탐구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술과 시가의 손실은 돌이킬 수 것이었고 학적 탐구 또한 한참 뒤에 가서야 그 보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놀랄 만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무엇보다도 보존되고 있는 연설 그 자체이다. 연설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그 가장 중요한 증인은 『브루투스(Brutus)』와 『연설가(Orator)』를 쓴 키케로(기원전 106-43)이다. 키케로는 양질의 자료와 그 자신 그리스에서 거둔 학업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학 내지 연설의 기술관련 지도서는 철학자 대부분이 하나 정도는 썼던 까닭에 그 수는 몇 백 권에 달하지만 이러한 기술 지도서 중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torike)』과 『알렉산드로스에게 주는 연설기술(Rhetorica ad Alexandrum』이고, 그 이후의 저작으로서는 람프사코스의 아낙시메네스를 들 수 있고 조금 작은 기술 지도서로서는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뉘시오스의 저작 『고대연설가론(de oratoribus antiquis)』등도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발츠(Walz)와 슈펜겔(Spengel)에 의해서 출판된 『그리스 연설가들(Rhetores Graeci)』를 참조했으면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 전부가 다루어지고 있는 근대의 저술로는 브라스(F. Blaβ)의 『아테네의 연설(die attische Beredsamkeit)』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적으로 연마된 연설의 목표는, 아직 독서 습관은 없었지만 민회나 법정 일에 길들여져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연설 내용이 ‘그럴 듯하다'(eikos)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듣는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순진할 정도로 귀가 얇은 그리스인들로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자기가 부정하는 견해이고 또 듣는 쪽에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내 몸을 구하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끌어다 댔고 게다가 그 연설이 소피스트들이 가르친 그대로 상대를 매료시킬 정도의 고상함을 갖추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섬세한 귀를 가지고 능숙하게 펼쳐지는 연설을 귀담아 듣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있었던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미 그 연설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도 『새(Ornith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말은 정신에 날개를 돋게 하여 인간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이러한 말의 힘을 가장 풍부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으로 안티폰(기원전 480-411)의 생애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안티폰이 망명자 신분으로 코린토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는 위자료를 벌기 위해 노점을 열고 다음과 같이 방을 써 붙였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말로 치료해드립니다”(1447) 이윽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그는 그 사람들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의 불행을 쫓아내 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말이 얼마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말로 슬픔을 치유할 정도의 사람이 있을지는 새삼 되물어 볼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연설은 그리스인에게서 이미 오랜 동안 다른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중시되고 있었다. 나랏일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 옛 부터 가장 큰 효과를 갖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늘 감탄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를 가진 연설기술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을 잘 하려는 어떤 대단한 의식적인 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개개의 사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그것과 함께 그러한 화법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록해두는 것은 아직 사람들의 염두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재판 제도가 발달하고 이 재판 제도가 연설의 기회를 습관적으로 제공하게 됨에 따라 마침내 그 노력들에 이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연설 기술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초로 행해진 것은 시칠리아에서였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기원전 466년 시칠리아에서 참주들이 추방된 뒤 민주주의가 발흥 하여 “오랜 동안 권력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수의 사법상의 요구가 크게 증대되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이 새로운 연설기술의 창시자로서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즈음 이미 시칠리아 땅 쉬라쿠사이의 코락스(Korax)가 민중 연설가로서 또 법정 변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장 초기의 『연설기술 안내서』혹은 단순히 『안내서』라고 불리는 책은 이 코락스가 지은 것인데 이 책은 적어도 연설의 형식과 구분에 대한 규범, 서두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등에 관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연설 안내서를 쓰고 있었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티시아스(Tisias)의 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럴듯함”(eikos)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연설 내지 연설기술은 이 티시아스와 소피스트인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에 의해, 기원전 427년 그 자신도 동행했던 시칠리아 사절단의 아테네 파견을 계기로 유입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연설과 더불어 예비지식으로서 철학, 그것도 앞서 본 것처럼 진리 인식을 부정하는 부정적 성격의 철학도 함께 유입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414?)가 고르기아스에 앞서 연설기술의 기초는 만들어 주었던 터라 고르기아스 때부터 이미 연설기술은 소피스트들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또 고르기아스 자신 이미 연설기술의 교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피스트들 모두가 그랬듯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그곳 실정에 맞추어 체계적인 연설기술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연설 교사라는 게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졌다. 또 그들에게서 배우면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연설 교사는 고액의 사례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는 재능이 남달라 아무리 내용이 진부해도 시적인 표현과 새로운 언어로 그 내용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가 이룬 진전은 의심할 바 없이 시의 운율을 도입하여 연설문에 균형 잡힌 구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연설의 각 부분은 서로 대응해서 어울리는 문장들로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말의 울림이 매우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방식은 기술된 사안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연설 각 부분들을 서로 대비하면서 생각들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같은 길이의 문장(isok?la), 형식상 서로 대응하는 문장(parisa), 그리고 특히 똑같은 말로 끝나는 문장(homoioteleuta), 그리고 같은 소리의 말, 서로 운율이 맞는 말(paronomasiai, par?ch?seis)을 활용하여 연설가로 하여금 한층 더 활기 있는 열변과 화려한 몸짓을 더하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고르기아스 이래 아테네에서 연설의 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향상은 아테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동안 아테네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기반이 잘 마련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페르시아 전쟁 이래 그리스의 위대한 정책과 제국의 패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현실이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8-462)부터 그 자신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위대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고르기아스가 이룬 연설 기술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쳐 있었다. 물론 고대 사료들은 여러 곳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보여준 마술과 같은 효과(ep?dai)를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연설이 올림포스의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천둥과도 같이 전광을 발하며 그리스 전 국토를 뒤흔들었고, 그의 입술 위에는 연설의 여신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의 연설은 청중의 마음속에 가시를 남겨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설은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의 저작을 통해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실제 그 자신이 쓴 것으로는 민회의 결의문 이외에 어떤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사실 플라톤도 말했듯이(『파이드로스』257d) 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후세의 평판이 두려워 자신의 이야기들을 쓰거나 저술을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투퀴디데스의 저작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분명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의 연설의 특수한 부분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시적 형상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 일부가 훗날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가 연설하는 모습 자체는 나중 세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가 가지고 있던 것 같은 정열적인 면모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페리클레스는 망토로 몸을 둘러 싸맨 채 가만히 서서 연설을 하였고 목소리도 항상 같은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는 정치가는 물론 법정 변론가도 연설을 할 때 아직 단순한 말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르기아스가 아테네에 도착한 이후 30년 남짓의 세월의 사이에 연설 기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3. 연설기술(2) 다음에 계속)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1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apeiron이 중심입니다.

이 강의는 이 땅에서 여기 앉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사람만 귀를 기울일, 그 가운데서도 귀가 둘이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추상의 단계가 너무나 높아서 공기가 희박해 호흡곤란을 느낄지도 모를 그런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는 끊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 이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끊어진 것, 또는 끊어내는 것,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는 것, 겉이, 갓이, 끝이 있는 것을 ‘peras’라고 부릅니다. 이 ‘페라스’가 없으면 이것저것을 가를 수 없고, 죄다 이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혼돈이죠. 가르지 않으면 살길이 없는 게 목숨 지닌 것에 주어진 숙명이라고 해야겠지요. 갈라야죠. 금 긋고 나누어야죠. 바이러스, 박테리아 수준에서도 살아남으려면 가려야죠. 나누어야죠.

살길과 죽을 길, 갈림길, 그게 모두 사람 비슷한 것들이 맞닥뜨린 ‘한계’죠. 너도나도 ‘한계’는 아는 척해요. 잣대를 대고, 금을 그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페이론’은, 그어도 그어도 속에 남는 이건 무어죠?

이게 오늘 내 강의 주제예요.

졸라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를 말들이 횡설수설 겹칠 텐데, 그래도 듣고 싶나요?

먼저 ‘페라스’ 문제를 인간의 수준에서 어떻게 해결했는지 잠깐 살펴봅시다. 하나로 수렴하죠. 1의 문제, ‘-者’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이 문제를 아주 깔끔하게 처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에요. 플라톤은 정지와 운동의 원인을 나누었어요.(Parmenides의 수준에서는 엉켜 있었어요.) 플라톤은 idea의 세계와 Demiurgos의 역할을 나누어 보아요. Demiurgos는 우주를 창조하지만, idea의 세계는 우주 밖에 독립된 실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안에 idea들을 끌어들입니다. ‘순수형상’이라는 Eidos는 1입니다. 1은 스스로는 정지해 있으면서 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지요.(kinoun akineton).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교부철학은 Plotinus를 거쳐서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신학의 근거로 삼아요. 1에서 0에 이르는 과정은 두 가닥의 끈으로 꼬여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2중나사’라고 하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끌어올리는 과정만 보아요. 0은 ‘순수질료’라고 규정하지요. 0은 1에 끌려 상향운동을 해요. 물론 0도 1과 마찬가지로 ‘부동의 동자’(kinoun akineton)이에요. 나중에 헤겔이 reine Sein과 reine Nichts는 같은 거다. 그걸로 운동 설명 못 한다. 사유의 틀에서 벗어난다. Sein을 ‘있음’으로, Nichts를 ‘없음’으로 보지 말고, Sein을 ‘임’이고 Nichts를 ‘아님’의 측면에서 보자. 그러면 ‘긍정’, ‘부정’, ‘부정의 부정’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설명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게 헤겔 <대논리학>의 핵심이에요. 현상계의 운동을 사유의 전개과정에 맞추려고 해요. 개념(Begiff)의 자기 전개라고 하면서요. Marx는 이거 아니라고,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헤겔의 철학을 뒤집지만, ‘형이상학’ 때려치우라고 하지만 헤겔 아류이고, 속류 헤겔론자로 볼 수 있어요. 0과 1의 문제에 관심 없어요. 막스에게는 ‘형이상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현실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서양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막스도 ‘인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플로티누스가 중요한 건 ‘질료’에서 ‘형상’으로, 그리하여 마침내는 ‘순수질료’에서 ‘순수형상’으로 향하는 ‘상승운동’의 가닥만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위로 치켜 뜬 눈길을 아래로 돌리게 한 거예요.

‘유출설’이라고 하나요? <Eneades>에서 플로티누스는 “자, 봐라. 저기 눈부신 햇살로 빛나는 1이라는 해가 있다. 광명이 있다. 그런데 그 햇살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0이라는 어둠이 저 밑에 도사리고 있다. 1이 위로 위로 끌어올리면서 ‘페라스’를 증가시킨다면 0은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그 ‘페라스’들을 뭉개서 ‘아페이론’을 증가시킨다. 1에서 nous로, nous에서 psyche로, psyche에서 또 무엇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어둠에 이르는 길이다. 그야말로 ‘태양은 빛을 잃어’ 빛이 없는, 나중에 1의, ‘하나님’의 권능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흑암’이 저 맨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되면 운동은 ‘이중나선’, ‘새끼꼬기’, (그걸 요즘 물리학자들은 ‘초끈’(string)이라고 하나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라는 두 가닥 끈이 상호작용해서 각 단위, 1에서 0에 이르는, 또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단계에서 1과 0의 작용이 어떻게 ‘평형’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평형’ 상태를 ‘공간’화하는지, ‘정지’로 보는지, ‘운동의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는 ‘국면’들이 드러나요. Bergson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이론을 비판하는 데는 까닭이 있어요. 흐르는 물을 물방울로 해체시킨다고 해서 어느 순간 그 물이 멈추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지속’(dure′e)과 ‘계기’(succession)는 다르다. ‘계기’는 시계 문자판에 고정시킨 시간이고, 공간화된 시간이고, 사람의 의식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놓은 ‘페라스’일 뿐이다. ‘지속’은 순간순간 ‘아페 이론’을 그 안에 안고 있는 ‘페라스’를 뛰어넘는 ‘도약’이다. Zenon이 아무리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한 시간은 반시간이고, 두 시간’이다, 바보 같은 짓 걷어치우고 Parmenides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현상계’를 구제할 수 없다고 해서 플라톤이 나섰는데, 플라톤이, idea와 Demiurgos의 역할을 갈라놓았는데, 그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Demiurgos를 1로 놓고, 모든 운동을 그 정지 모델로 공간화했다, 그거 문제 있다. 나 베르그송은 그거 뛰어넘겠다. ‘생명’이라는 게 운동인데, 그 운동 멈추면 죽는데, 우주 전체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는데, 살아남으려는 이 몸부림을 ‘뛰어넘기’로 보자. 그게 ‘삶의 도약’(e′lan vital)이고, 그게 궁극으로는 ‘사랑의 도약’(e′lan d′amour)다. 뭐 이딴 이야기해요. ‘엘랑 비딸’까지는 그럴싸해요. 그러나 ‘엘랑 다무르’라니. 이거 다 ‘생명’이신 ‘하나님’, 1로 가자는 거예요. 물론 베르그송은 2원론자이기 때문에 ‘질료’의 측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hyle)를 무시하지 않아요. 늘 두 개를 나란히 놓아요. <물질과 기억>, <생각과 움직임>, 이처럼 1과 0을 나란히 놓아요. 0의 해체 기능 잘 알고 있어요. 아마 베르그송 철학의 밑바닥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상상력이 깔려 있을지 몰라요. 근현대 물리학자들의 의식의 밑바닥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에서 종합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공간, 단일한 우주의 이론이 눌러 붙어 있는 것처럼이요.

그러나 베르그송은 ‘생기론자’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아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 낙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는 해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페라스’와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에서 1과 0의 문제를 파고드는 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베르그송이나 모두 ‘인간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이 사람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박홍규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인데, 한때 교황청에서 베르그송 철학으로 신학이론을 바꿔치기하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바탕으로 한 신학이론은 근대 물리학의 성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진화론을 기독교 신학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다고 고심했던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테이야르 샤르뎅 같은 신부도 <인간현상>이라는 책에서 베르그송 이론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들지 않았나요?

참, 군소리가 길어졌네요. 그런데 이거 다 박홍규 선생님의 ‘형이상학 강의’에서 나왔던 말들이에요.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하나는 ‘우연’과 ‘필연’, 거기에서 파생되는 ‘자유의지’ 문제예요. 현상계를 운동 중심으로 파악하려면, 그리고 그 운동의 원인이 우주 밖에, 정지된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우주 안에 있다고 하려면, ‘우연’의 문제 회피할 수 없어요. 루크레티우스가 궁여지책으로 무한공간과 무한수의 원자를 놓고 ‘수직하강운동’(이거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뒤집으면 ‘수직상승운동’으로 보아도 돼요.)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원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게 원자의 ‘경사운동’(klinamen)인데, 이거 ‘느닷없는 때’ ‘느닷없는 곳’에서 ‘우연히’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느닷없는 이야기예요. 이 ‘우연’과 ‘필연’의 문제는 베르그송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해요. ‘도약’, 이거 우연이에요. ‘자유의지’라는 말로 분칠되어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밖에 다른 근거가 없어요. 물론 베르그송도 ‘자유의지’의 측면에서 우연과 필연 논쟁에 끼어들기는 해요. 그런데 그게 큰 설득력이 없어요. 감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적’ 근거는 부실해요. 박홍규 선생님의 고민도 거기에서 출발했다고 봐요. 끙끙대고 있는데 자끄모노(Jaque Mono) 책이 박 선생님 눈에 띄어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지요. 저는 안 읽었어요. 모노 이론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 책 안에서 박 선생님은 형이상학에서 골머리를 앓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셨을지 몰라요.

 

 

통일과 도덕(1)[대안도덕교과서]-11

통일과 도덕(1)[대안도덕교과서]-11

 

 

이원혁(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서로 너무나 다른 남과 북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작은 상황극을 한번 살펴보는건 어떨까요? 한 책상을 쓰는 두 초등학생이 티격태격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해봅시다.

선생님 ? 지훈아 너랑 민서는 짝꿍인데 왜 그리 다투니?

지훈 – “제 짝꿍 민서는 저랑 너무 달라요. 도무지 한국인이라는 것 말고는 닮은 점이 없어요. 짝꿍끼리는 친하게 지내야한다고해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친하게 지내려하지만 저 고집불통은 참견 말라며 오히려 역정을 내네요. 이 답답한 친구랑 한 책상에 묶여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사실 이 친구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에요. 제가 이래봬도 공부를 쫌 하거든요. 그래서 제 공부 방법을 가르쳐주려하는데.. 세상에 그게 기분이 나쁘데요. 같은 책상을 쓰니 안 볼 수도 없고 그 친구랑 어떻게 지내야할까요?”

민서 – “지훈이는 이상한 친구에요. 말로는 친하게 지내자고하면서 항상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들거든요. 저는 저만의 공부방식이 있어요. 누가 뭐래도 이게 가장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비록 지금은 성적이 좋지 않지만 곧 좋아지리라 믿어요. 저는 이 방식을 바꿀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지훈이는 제 방식이 틀렸다고 비아냥거려요. 그리고 어색하기만한 자기 방식을 보여주며 우쭐되곤 해요. 그리고 제 짝꿍이지만 다른 친구들이랑 더 어울리곤하는데 가끔 제 험담을 하는 것 같아 속상해요. 그래서 한 소리를 했더니 적반하장으로 되레 제게 뭐라고 하네요.

선생님 ? “그런데 너희 둘은 저번에 반 아이들에게는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며? 둘이서 서로 조금 양보하면 안 될까? 둘이 쉽게 화해하기 힘든 이유가 있니?”

지훈 – “민서는 입이 너무 험해요.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불끈 쥐고 욕설을 해요. 이렇게 말을 너무 함부로 하니 다가가기가 어려워요. 사실은 저희가 예전에는 매우 친했어요. 그런데 크게 한번 다툰 뒤로 사이가 너무 멀어졌어요. 얼마나 심하게 다퉜냐하면 주먹다짐을 할 정도였어요. 그때 민서가 저를 먼저 때려서 크게 다퉜어요. 왜 싸웠냐고요? 민서가 저를 먼저 때렸다니깐요? 어떻게 짝꿍을 먼저 때릴 수가 있죠?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민서랑은 놀고 싶지 않아요.

민서 – “제가 먼저 때렸다구요? 그게 중요한가요? 그 싸움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 사정이 있으면 먼저 때릴 수도 있죠. 지훈이는 지금도 항상 그런 식이에요. 전후 사정보다 제 행동의 겉모습만 보고 뭐라고 해요. 그리고 제가 뭐만 하려고 하면 ‘공부도 못하면서 그런 것도 하려고해? 공부나 해’라고 핀잔을 줘요. 치.. 공부를 못하면 다른 건 하면 안 되나요?

선생님 – “지훈이는 민서의 행동을 존중해 주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민서는 지훈이의 조언이나 다른 친구들의 공부 방법을 참고해보는 건 어떨까?”

지훈 ? “민서가 공부를 너무 못하니깐 하는 소리에요. 물론 공부 말고 다른 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학생에게 제일 중요한건 공부 아니겠어요? 아무리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요?

제 말대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민서는 절대 말을 안 들어요. 민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지도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아요. 이래서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매일 꽁하게 있기만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화만 내니 도대체 쟤를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

민서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 제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요. 지훈이는 너무 자기마음대로에요. 자기랑 같은 방식이 아니라고 절 너무 이상한 아이취급해요. 사실 전 지훈이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해요. 이건 비밀인데 저번에 지훈이가 복도에서 주운 동전을 가지는 거 봤어요. 그런 아이의 방식을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 전 사실 지훈이가 저를 자기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까봐 걱정이에요. 그래서 지훈이의 겉으로 보이는 호의를 믿지를 못하겠어요. 왜냐면 저는 저만의 방식을 잃고 싶지 않거든요.”

남북의 상황을 티격태격하는 두 아이의 상황으로 엮어서 만들어봤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위 대화에서 지훈이과 민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생황에서 과연 통일은 가능할까요? 두 아이는 서로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받아있습니다.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하는만큼 자신의 방법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히 차있습니다.

이 에피소드와 남북관계에는 비록 같을 순 없지만 비슷한 문제점이 있죠. 남과 북은 항상 통일과 화해를 이야기하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과 상처가 이 화해를 가로막고 더 나아가 서로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어떻게 하면 서로의 상처를 딛고 서로를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상처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2. 분단의 상처와 그 발단

 

남과 북은 분단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마 ‘분단을 극복하자’, 또는 ‘통일을 하자’라고 주장하는 큰 이유는 이러한 상처들을 극복하자는 것일 겁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재산적 피해, 이산가족, 남북간의 긴장관계 그리고 이로 인한 여러 부차적 효과들은 남과 북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분명 이러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든 병으로 남과 북 모두의 몸과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단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조금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피해로만 분단의 상처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출처: ehistory.go.kr

사진출처: ehistory.go.kr


 
분단이 된지 벌써 60년을 넘어 70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우리는 분단 그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모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후 복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완료되어 전쟁의 상흔은 박물관과 오래된 기록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산가족들도 오랜 세월 속에 그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분단당시와 전쟁을 직접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분단의 상처가 쉽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분단은 일상에서는 완전히 잊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왠지 분단이라는 상황은 께름칙한 무언가를 계속 남기기도 합니다.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래식 무기의 대치장소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안보불감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70여년에 가까운 그 대치 자체보다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분단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께름칙한 무언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뭔가 부족한 나라, 뭔가 불안정한 나라’로 생각하게 합니다. 기존의 윤리교과서를 비롯하여 많은 책들은 분단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며, 통일은 우리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부족해왔던 것 같습니다. 냉전시대 남한에서는 ‘민족의 원수 빨갱이 김일성’을 무찌르기 위해서, 북한에서는 ‘미제의 앞잡이 남조선 괴뢰도당’을 몰아내기위해서 분단과 통일을 설명해왔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분단으로 인해 가로막힌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이러한 인식들은 분단의 상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적어보입니다. 다만 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이 순간을 단순히 벗어나기 위해 다급하게 통일을 이야기하고, 남과 북은 서로를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왔습니다. 따라서 분단을 해소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더욱 고착화시키는 모양새를 띠었습니다. 위에 소개되었던 민서와 지훈이의 다툼에서 우리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상황 자체에 대한 파악을 하지 않으려는, 또 그럼으로써 왜 상대가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두 아이의 안타까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두 아이의 화해를 위해서는 왜 두 아이가 다투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무엇인지 살펴봐야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서로 다른 그 둘이 어떻게 공존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하나가 되는지 보는 것이 좋은 순서가 될 것입니다.

혹시 ‘트라우마’라는 말을 아시나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심각한 기계적 충격이나 사고 그리고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는 기타 사고를 겪은 후에 발생하는 스트레스 장애’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그리고 한 세대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보통의 트라우마가 어떤 사고의 당사자의 개인적 체험에 그친다면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에 나타나는 트라우마는 그 당사자와 관계하고 있는 집단 내부로 옮아가는 독특한 점이 있죠. 이러한 트라우마를 조금 어려운 말로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설명이 조금 어려워졌는데, 조금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안전이나 살려고하는 에너지가 손상되었을 때 나타납니다. 즉 우리가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신체를 지켜가는 활동이 외부의 강제로 인해 손상되거나 박탈되었을 때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공유하는 집단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과 욕구가 좌절되거나 억압되면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위의 말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 우리나라사람들 사이에 공통된 욕망이 있었고 그 것이 좌절되어 큰 상처를 남겼다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구한말 조선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유학의 전통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고, 서양의 위력은 세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과학기술은 부러움을 넘어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 즉, 동양의 전통을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드리려 했으나, 이는 서양의 접시에 미역국을 담으려하는 것처럼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근대민족국가와 자본주의라는 형식에서 만들어진 기술을 전근대의 사회와 국가에서 담아내기는 힘든 것이었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서양과 같은 근대적 민족국가건설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래서 신민회도 만들고 독립문도 세우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을 진행하기도 했죠.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노력은 일제에 의한 한반도의 식민지화로 좌절되었습니다.

흔히 서양의 민족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봉건시대에 흩어져있던 여러 사람들을 묶고,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적 대립 극복하기 위해 민족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소위 ‘세계화’가 진행되고 새로운 가치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기존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장치이자 안식처로서 민족은 요청되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의 국가는 그러한 안식처이나 상호 호혜적 집단으로서 민족이 빠진 국가였습니다. 서양의 다른 나라들은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공동체의 공통된 욕망을 충족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그런 욕망이 제국주의 등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째든 그들은 집단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우리나라는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제가 강점한 국가는 민족을 억압하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 국가는 공동체가 욕망하는 국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욕망을 위해 제거되어야하는 국가였습니다. 숱한 탄압에도 우리네 선조들이 꿋꿋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요. 일제 강점기는 바로 아버지로서 국가가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자신이 아버지라 주장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가 과거에 좌절된 근대적 민족국가의 이상이 바로 자신이라며 대립을 하였고 다른 상대를 일제와 마찬가지로 민족국가 건국을 방해하는 적으로 삼고 타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은 지금과 같은 분단을 만들어 결국은 누구도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결손가정, 아니 결손국가를 만들었습니다. 100여 년 전부터 고대해온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집단적 욕구의 좌절은 남북 모두에게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상대에 대해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자신은 그 책임을 면제 받으려 해왔습니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김으로서 상대방을 대화와 타협의 상대가 아닌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남과 북은 구한말부터 내려오던 민족국가의 이상이 실패한 ‘원죄의식’을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시켜왔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도 누군가 나서 어떻게든 가정을 이끌어야겠지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결손국가가 되어버린 남과 북은 완성된 민족국가가 아닌 결손국가가 되어버린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김으로서 남과 북 각자의 내부를 통합하여 국가의 정당성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남과 북은 각자를 지금은 조금 부족하지만 곧 완전해질 이상적 국가에 자신의 모습에 대입하고 상대를 방해꾼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나쁜 편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남북의 적대감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형성되고 강화되어 왔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에 의해 한 집단 속에서 옮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트라우마는 요즘 일어나는 사건과 과거의 분단 또는 전쟁이 결합하면서 그 상처가 불쑥불쑥 표면으로 들어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미사일발사 실험은 과거 한국전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그 옛날 한국전쟁의 공포를 마치 오늘의 공포처럼 되살려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트라우마는 지나간 상처의 흉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됩니다. 과거에 집단적으로 좌절된 이상과 그 실패의 정점을 찍은 전쟁은 후대의 세대에도 상처로 유전되어 집단적 허전함과 불안감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과거에 할아버지가 본 자라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여 실제 자라와 크게 상관없고 겉모양만 닮은 솥뚜껑만 봐도 과거의 긴장이 되살아나는 신기한 유전병이 생겨난 것입니다. 즉, 분단의 상처는 우리가 평소에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세대를 넘어 전해져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남과 북의 화해와 통일은 이러한 서로간의 상처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이해, 즉 서로의 상처가 닮았다는 점 그리고 그 상처가 오래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서 비로소 그 논의의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책읽기-마이클 J. 로젠펠드의 『자립기』에 대한 단상

마이클 J. 로젠펠드의 『자립기』에 대한 단상

 

 

엄진희?(다중지성정원회원)

 

우리에게 개인의 자율성이나 자립, 독립 이라는 언어들은 무엇일까. 저 이름들은 언젠가는 부르주아적 가치라고 배제되었고 언젠가는 우리가 따라야할 가장 세련된 가치라고 부추겨졌다. 개인화된 시대, 이어폰이 등장하면서 친구와 소통하기 보다는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자라왔던 우리 세대에게 저 말은 사실 따지고 보면 낯설지도 않다. 하지만 저 말에 함축된 ‘자유’라는 게 억압 속에서의 자유, 규칙 속에서의 자유라면 우리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연아가 빙판 위에서 가장 자유로운 때는 그녀가 빙판의 모든 규칙을 가장 잘 준수 할 때에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 아닐까.

마이클 J. 로젠펠드는 1960년대 이후 젊은 세대들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특히 그들의 부모로부터. 대학을 빌미로 해서든 젊은이들은 그가 태어난 고장에서 이제 멀리 떨어져서 부모의 간섭없이 마을 공동체의, 이웃의 간섭없이 자유로워졌고 따라서 비전통적 결합 방식, 즉 이인종 결혼이나 동성애 간의 결합을 특별한 제약 없이 실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의 이러한 위반,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이제 더 이상 가족 통치 제도 안에서 부모나 국가가 더 이상은 손쓸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젊은이들이 부모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선언하고 ‘자립기’를 가지는 잠정적인 시기(자립기는 젊은이들이 부모를 떠나 대학도 가고 여행도 떠나며 직업을 찾는 성인 초기의 시기를 말한다)에 간섭 없는 자유를 만끽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근대가 유동하는, 액체 근대라는 특성이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라는 책에서 ‘안정적이고 견고한 고체와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액체 개념에 기초하여, 우리가 어떻게 무겁고 고체적이고 예측/통제가 가능한 근대에서 가볍고 액체적이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근대로 이동해왔는지 탐구’한다. 그는 ‘근대가 일체의 공간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전지구적 자본이 세계 각국의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동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는 개인 삶의 의미가 온통 개인의 어깨에만 걸리게 된 것과 그러한 고립 분산된 개인의 자아실현이, 자유롭고 가볍게 이동하는 전지구적 자본의 힘 앞에서 가능한 일인지’를 되묻는다.

우리는 대학에 간다면서 고향을 떠나고 어학연수, 유학 등을 빌미로, 직장 때문에 등등, 이런저런 이유들로 공동체를 떠나 부유한다. 이제 더 이상 부모의, 공동체의, 간섭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뒤르켐은 개인과 사회의 결합력이 약할 때의 자살에 대해서도 분석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급증하는 젊은이들의 자살 현상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최근에 함께 공부했던 시립대 박사과정 선생님 한분이 자살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모두가 적잖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다. 그는 평소에 쾌활해 보이고 농담도 잘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왜? 박사과정 논문 심사중이었던 그가? 우리는 그저 추측할 뿐이다. 논문의 스트레스와 얼마전 시간 강사 자리에서 해고도 당했고 심적 고통이 컸을 것이다. 정도만,,말이다.

모든 자살은 타살이며 사회적 죽음이라면 이 문제에서 우리는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기로에서 성공하지 못해서, 실패해서, 비관하다가 자살을 하는데(성적 비관 청소년부터, 파산한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성공, 잘나간다는 것, 지위 등등에 공모한 것도 우리 자신이다. 이런 우리 자신은 정말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성공이라는 사회적 잣대 안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진정한 자유, 자립, 독립은 그렇다면 어디에 있을까. 간섭받지 않는 곳에 있을까. 간섭 받지 않고 이인종 결합이나 동성 간 결합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립일까. 여전히 제도적 승인을 받기를 주장하면서? 제도적 억압을 자발적으로 요청하면서 말이다. 다른 길은 없을까. 가령. 너희 이성애자들의 결합처럼 우리를 인정해 줘, 라는 논리 말고(결국 이성애적 폭력이 했던 일-자신들의 결합을 ‘정상화’하고자 했던-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오히려 바틀비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서 기존의 질서, 제도 자체를 좀먹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말하면 할수록, 저항하면 할수록 기존의 제도와 권위에 편입하고자 하는 욕망만 넘쳐난다면 말이다.

마이클 J. 로젠펠드의 <자립기>는 분명 유의미한 저작이다. 기존의 사회학이 가족의 변화, 라는 측면은 제대로 주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젊은이들이 부모로부터 떨어져 지내면서 비교적 비전통적 결합 방식을 선호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되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이제, 동성애의 문제는 더 이상 소수의 문제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기존의 제도나 체제에 그토록 편입하길 원하는 이상, 우리의 상징계는 크게 달라질 수 없지 않을까 싶은 게 내 생각이다.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목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상징적 질서를 내파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스러운 생성의 흐름으로 동성애 문제나 이인종 결합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메시아적 순간은 항상 그렇게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진정한 자립이란 법적 승인이 없이도(대타자 없이도) 공동체의 최소한의 규칙과 질서 안에서, 나아가 윤리적 차원에서 스스로,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면서 유지해 나갈 때 획득되는 건 아닐까.

The Age of Independence_3D(500)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2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2

 

이재유(건국대)

 

1.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DSC09824-1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면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그 이익은 보통 일하는 사람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명칭이 보여 주듯이 자본(가)의 이익이다. 그러면 자본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화폐나 자본은 얼핏 보아 일반적으로 돈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폐와 자본은 특성이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화폐는 위에서 보았다시피 상품교환(유통)에서 신적인 역할을 하지만 단순한 유통수단일 뿐이다. 이 화폐로는 은행의 이자, 고리대금, 부통산 투기 이익, 주식배당, 재산의 재테크 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자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은 자기 증식(번식)하는 가치, 즉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이다. 그러나 화폐는 자기 증식하지 못하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은행에 돈을 10.000원 예금하여 100원의 이자를 낳았다고 하자. 100원의 이자가 어떻게 나왔을까? 10,000원이 은행 안에서 5,000원과 결혼하여 100원짜리 아이를 낳은 것일까? 유통수단으로서의 돈 그 자체인 화폐는 이렇게 자기 증식하지 못한다. 자기 증식하는 특성을 가진 자본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유통과정에서 출현하여 이 상품이 생산과정에 투입되었을 때 생겨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노동자가 한 자본가와 다음과 같이 계약조건으로 계약을 맺는다고 해 보자. 즉 이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해서 10원짜리 벽돌 20개를 만들면 하루 임금 100원을 받는다고 해 보자.

이재유 표

그러면 임금으로 받는 노동시간은 4시간인데, 이 4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하고 임금으로 받지 못하는 4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하며, 이 4시간을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착취’라고 한다. 이 잉여노동시간을 ‘잉여가치’라고 하고, 이 잉여가치가 바로 자본이 되는 것이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 100원을 투자하여 10원짜리 벽돌20개인 200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100원=200원이 되는 셈이다. 잉여가치의 100원 부분은 사회적으로 주식 배당, 은행이자, 고리대금,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이익, 지대 등으로 배분된다.

그런데 자본은 이러한 과정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서 잉여가치 부분을 더 많이 늘리고자 한다. 즉 8시간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10시간을 시키고, 4시간을 필요노동시간으로 6시간을 잉여노동시간으로 하여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뽑아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루는 24시간일 뿐이다. 무한정 일하는 시간을 늘릴 수는 없다. 또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은 일하는 시간을 법률에 의거하여 일정 정도로, 즉 하루 10시간, 8시간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러면 어떻게 잉여가치 부분을 늘려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이제 필요노동시간 부분을 상대적으로 줄여 나가는 것이다. 즉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8시간 동안 20개의 벽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30개의 벽돌을 만들어 내게 하거나, 3사람이 하던 일을 두 사람이 하도록 하거나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등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구조조정과 똑같은 모습이다. 이것을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이 잉여가치의 생산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불러왔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최대로 늘리려는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잉여노동시간을 최대로 늘리려는 것은 바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제한적인 생산만이 문제가 되는 상품의 가치의 경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 자본주의 경제의 양면성.

이러한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면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는 농장과 공장 및 사무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아주 정교화된 지식 분야에서만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만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죽어라 일하기를 강요당하는 산업사회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수가 엄청나게 줄어듦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동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계가 아주 불안정해지고, 이는 곧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재에도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쓰는“노동 유연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과 맞닿아 있다.

 

3. 분배, 교환의 기준 1-리프킨(노동시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경제에만 맡겨 두어서는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하나는 실업에 따른 범죄 계층의 증가에 대응한 경찰력의 증가와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를 위하여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제3부문의 영역은 사회?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을 포함하는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경제적 이익(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시장의 영역과 대립되는 모든 비영리적 자치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이 활동 또는 이 활동의 결과물, 그리고 정부의 재원이 이 이 영역에서 어떻게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으로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들에는 시간은행(time bank), 타임 달러(time dollar) 등의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인이 자진해서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노동)을 한 시간 제공하면, 한 시간 달러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 보상은, 여러 전문적인 활동들이 서로 질적으로 아주 다를지라도, 한 시간 달러로서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즉 각 활동(노동) 시간은 기여한 바의 특징과 종류에 관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이 제도 운영 방식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위의 자본의 생성(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과정에서 보았듯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는 기준 역시도 1시간, 2시간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 시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장 영역과 대립되는 제3부문 영역 사이의 교환, 분배 소통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점이 사라진다. 이는 곧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측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아질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 제도는 19C에? J.그레이, P.J.프루동, R.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노동화폐 제도와 유사하다. 노동화폐는 금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고 노동시간을 화폐단위로 하여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이 국립중앙은행을 매개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즉 몇 시간 노동을 했는가 하는 증명서로서의 노동화폐를 국립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이 노동화폐를 다시 중앙은행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언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 1832년 노동화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노동교환소가 설립되었지만 3년을 못 넘기고 실패로 끝났다.

DSC09823-1

 

4. 분배, 교환의 기준 2-맑스(각자의 필요)

이렇게 노동시간을 기초로 분배, 교환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는 내가 1시간을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1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노동시간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정도, 숙련 정도, 교육을 받은 정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있으며, 숙련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수치상)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을 받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비롯해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는 곧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시간은행 같은 경우는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은행에서의 시간 역시도 결국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수의 노동 1시간과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 1시간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연인, 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 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격려와 희망, 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쿠바는 베네주엘라로부터 석유를, 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 베네주엘레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 밀을, 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베네주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에로스와 삶 ? 『베니스의 죽음』과 『파이드로스』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1

에로스와 삶 ? 『베니스의 죽음』과 『파이드로스』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1

 

이지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토마스 만 ? 『베니스의 죽음』

토마스 만 : 토마스 만(Mann, Thomas 1875-1955)

– 뤼벡의 시민 계급 출신.

– 북부 독일의? 자유 시민 특유의 냉정, 명석, 자제의 정신 태도를 견지. 또한 일면 남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민감한 감수성, 공상력, 음악성,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신경을 물려받았다고 평가받음.

– 그는 작품 속에서 인간과 인생에 대한 단면이 아니라 세계와 인생을 깊이 있게 제시. 토마스 만의 작품은 이중적 의미 제시와 문장의 난해함으로 대중성을 얻는 것에는 실패. <<베니스에서의 죽음>>, <<마의 산>>, << 요제프와 그의 형제들>>, << 파우스트 박사>> 등의 주요 작품을 남김.

1) <<베니스의 죽음>> 내용 – 주인공 아셴바하는 시인으로 명성과 지위를 얻은, 도덕가의 풍모가 돋보이는 예술가였으나. 베니스에서 절대미를 가진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사랑과 미와 관계에 대한 통찰을 얻을 뿐더러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명성이 거짓된 광대짓, 허위였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절대미, 절대적인 에로스의 경험은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것, 그는 베니스에 만연한 콜레라에 전염되어 사랑하는 소년의 모습을 두 눈 속에 담은 채 사망한다.

….구스타프 아셴바하는 거의?탈진 상태에서 일하는 모든?사람들, 과중한 부담에?허덕이는?사람들,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사람들, 아직은 그래도 꼿꼿이 자신을 지탱해 가고 있는 사람들, 신체도 허약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 중에도 초인적인 의지와 현명한 자기 관리로 적어도 얼마 동안이나마?영향력을 발휘한 그 모든 업적주의 도덕가들의 시인이었다. 그런 도덕가들은 많았으며, 그들이 이 시대의 영웅들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하셴바하의 작품 속에서 그들 자신을 재발견했고, 자기 자신들이 그 속에서 인정받고, 고양되고 예찬되는 것을 알았으며 그에게 감사했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민음사 판,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 베니스의 죽음? p 430

2) <<베니스의 죽음>>을 지배하는 죽음의 이미지 :

소설 전반부: 산책에 나선 아센바하 죽음의 신을 닮은 남자를 만남

소설 후반부: 죽음의 전염병으로 가득찬 베니스

3) 죽음과 에로스의 만남 : 에로스, 즉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흔히 서구에서 죽음과 연결되어 왔다. 에로스는 유한자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극복하는 한 방식, 혹은 생은 언제나 죽음을 그 조건으로 하여 가능함을 역설

ex ) 바타이유(사상) – <<에로티즘>>, 슈베르트(음악), 에곤 쉴레, 클림트(그림) – 소녀와 죽음, 사신과 에로스

 

BB_DiV

 

2. 플라톤 (BC 427~BC 347)

–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 화이트 헤드

– 아테네 최고 정치 명문가 출신 : 아버지 아리스톤은 아테네 왕가의 후예, 어머니는 정치가 솔론의 후손

– 20살에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에 심취. 28살에 되던 기원전 399년 아테네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직접 민주제적 법정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욕했다며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 이후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衆愚 정치로 판단.

– 이후 인생 행로를 바뀌어 정치가가 아닌 철학자의 삶을 선택.

플라톤의 에로스론 ? 『파이드로스』

–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몰이성과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안 변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이성을 통해’ 발견하란 것.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신체는 비록 멀어지되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라 말한다.

– 플라톤은 에로스적 사랑이 육체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정신으로 포착해, 두 사람의 결합이 신체의 결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정신적 성숙을 돕는 정신의 합일, 정신의 승리로 승화되도록 이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 『향연』에서 플라톤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려 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지만, 결국 에로스를 생산의 힘, 생산의 원동력으로 표현한다. 남녀의 사랑이 자식 생산으로 귀결되듯, 정신에 대한 사랑은 정신의 자식을 낳는다. 플라톤의 사랑관은 이처럼 플라톤답게 육체적 매력, 육체의 홀림을 뛰어 넘어 정신의 고결함에 이르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파이드로스여,?잘 명심해라,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는 자의 길이란다, 어린 파이드로스여, 예술가가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 그렇지만 귀여운 애야, 이제 너는, 정신적인?것으로 가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 언젠가는 지혜와 진정한 품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너는 이것이 오히려(결정은 네게 맞기마) 위험스럽고도 쾌적한 길, 즉 필연적으로 잘못에 이르게 하고 마는 정말 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주지 않으면 아름다움의 길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야…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야…우리의 명성과 영예로운 지위는 일종의 익살극이고, 우리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예술로 국민과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금지해야할 계획이야…그 까닭은 말이지, 파이드로스, 인식이란?것이 결코 품위도 엄격함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건 뭔가를 알면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뿐 정신적인 태도나 형식을 지닌 것이 아니란다…새로운 엄격성과 제 2의 자유와 형식을 존중한다는 말이지. 그러나 파이드로스, 형식과 자유는 도취와 탐욕으로 치닫게 되고…?????<같은 책, p 525>

 

3. 『베니스의 죽음』과 에로스의 이중성

– 예술, 삶의 길

– 파멸, 죽음 : 사랑의 도취 속에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