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한중일의 유교문화담론

김예호 신간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사회 전통문화의 중심축인 유교가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유교와 유교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러한 논의들이 현 시점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전반적으로 개괄한 책

 

▣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중일의 유교담론과 유교문화의 정체성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글의 내용은 한중일 3국의 근대전환기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무력으로 충돌한 시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근대 전환기 이후 한중일 삼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유교문화 담론을 개괄하고 있다.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전통사회 유교문화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후, 근대 이후 각 국가의 사회·정치·경제의 흐름과 이에 대응하는 유교문화담론의 특징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구성도 주요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각 시기에 유행한 유교담론의 요지를 소개해 빠른 시간 안에 근대 이래의 한중일 유교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글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 분야의 유교문화담론에 더욱 엄격한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중일 각 나라의 문화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교가 위치한다. 이는 최근까지 중국적인 것과 중국 정체성, 일본적인 것과 일본 정체성, 한국적인 것과 한국 정체성 등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유교가 아직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유교도 미래 사회의 가치에 부응할 수 있게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가 아시아의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 들여다 보기

 

ㆍ 중국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에게 오늘의 ‘유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국 사상계나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인데,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 이 문제에 부쩍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국학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통 유교문화는 중국 문화 부흥론자들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현재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관심사는, ‘아시아적 가치’가 아닌 ‘중국적 가치’, ‘유교 민주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방안에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 공산당이 한편으로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란 이름 하에 유교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유교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화교의 자본력을 유인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 수단이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중화주의의 민족의식 코드로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향후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해 중국을 대표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서 유교부흥을 내세울 가능성은 농후하다.

 

ㆍ 일본 고유의 정체성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화혼’의식과 유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의 ‘화혼’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로 근대 전환기 이후로도 일본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즉, 일본의 ‘화혼’의식은, 막부시대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원시유교와 성리학을 일본화해 정착시키는 과정,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탈아입구의 기치 아래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 메이지유신 중반 이후로는 화혼(和魂)이 양재(洋才)를 주도하는 과정,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대 일본 사회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침체된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향수하는 극우세력의 등장과 이를 방조하는 상부의 정책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혼의식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유교를 포함한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상을 통섭하는 가운데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유학을 수용한 이후 한국과는 달리 중국 고전의 교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유교에서 벗어나 일본만의 유교를 만들고 또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냈다.

이와 같이 일본식 사회문화는 전통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가 긍정과 부정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중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이러한 중첩 과정의 중심에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으로 항상 ‘화혼(和魂)’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 사회를 평가하는 내부의 자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ㆍ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모범적인 유교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도덕과 정치의 결합’, ‘가족주의적 서열의 강조’ 등의 중국 유교문화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 유교문화와는 달리 더욱 철저하게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며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조선은 ‘개량된 중국형’의 유교사회 내지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유교사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황도유학의 본격적인 공세를 받는다. 즉,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천황 내지 국가 공동체를 강조한 일본식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고유한 자기수양의 형이상학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한 유교문화 정략과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박정희 정권의 충효 일본(一本)의 일본식 유교문화의 선전 작업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학문적으로는 최근까지 ‘공동체’ 의식의 강화라는 미명하에 ‘대동(大同)’ 이상의 실현이 한국 유교문화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논의하는 자리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일본 유학에 경도된 한국 유교문화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IMF 이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적 문제나 자아실현의 문제보다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 유행한 공동체라는 집단 곧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만을 중시한 유교자본주의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3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0과 1>에 덧붙임

0과 1의 논의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빠뜨린 사람이 있어요. Spinoza와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 Marx의 이론입니다. 저, 학사학위 논문을 스피노자의 Ethica, 석사학위 논문을 Epicuros 이론을 주제로 삼아 썼어요. Ethica는 다시 정독하고 싶고, 막스의 자본론은 나름으로 제법 꼼꼼히 정독했는데, 막스가 고대원자론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스 이론에 끼친 스피노자의 이론은 제가 알기론 우리 나라에서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 철학계의 동향은 잘 모르겠어요.

막스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세계 인식에 닿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길잡이 구실은 스피노자가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피노자가 말한 ‘natura naturans’와 ‘natura naturata’ 기억하시죠? 제 기억에 ‘能産的 自然’, ‘所産的 自然’으로 번역된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사람들 번역이 아닐까 싶어요. ‘Philosophia’를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이지요.

이 말, natura naturans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연’으로, 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으로 옮겨도 될 것 같아요. 이때 ‘자연스럽게 하는 것’(naturans)은 힘이에요. 이 힘은 동시에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힘이기도 하지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줄을 꼬는 힘을 가리킨다고 봐요. 이 운동의 저 밑바닥, ‘없는 것이 없을 것’과 하나가 되는, ‘없음’에 닿는 그 ‘한계점’(tangent)에서 이 운동의 저 꼭지점 ‘있는 것이 있을 것’과 둘이 아닌 ‘있음’에 닿는 그 ‘한계점’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2중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 ‘확산’하고, ‘응축’하는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마디’에서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 아닌가 해요. 이 ‘마디’는 저마다 ‘페라스’를 나타내지요. 겉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페라스’이기도 하고, ‘기억’(m′emoir)으로 드러났다 ‘망각’(oblibium-이 철자 맞나요?)으로 사라지는 한계점에서 형성되는 ‘페라스’이기도 해요. 크게 보면 모두 힘으로 ‘있는 것’ 1과, 힘으로 ‘없는 것’ 0의 접합점(tangent)에서 나타나는 ‘동요하는 평형’(equilbrium)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당구를 쳐 본 사람은 두 당구공이 한 점에서 맞닿아 있을 때, ‘떡’이다, 아니 ‘스위치’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거예요. ‘페라스’로 얼핏 드러나는 이 ‘점’은 ‘페라스’가 아니에요. 이 ‘점’은 빨간 공에도 안 속하고 하얀 공에도 안 속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무엇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아페이론’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것과도 잇닿아 있고, 저것과도 잇닿아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 붙는가 하면 저기에도 붙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힘, 생성과 소멸의 측면에서 보면 naturans인데,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naturata인 것, 1에서 0에 이르는, 또는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무한한 단계와 과정에서 꼬이고 마디를 이루는 ‘평형’을 드러내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꼬기, 여기에서 1을 원동자로 보느냐, 0을 원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형이상학’과 ‘세계관’이 달라지는데,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리자면 ‘기독교’는 1에 붙고, 불교는 0에 붙어요. 그렇게 보여요.

막스는 베르그송이나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의 힘을 더 크게 보아요. 막스를 ‘유물론자’로 보는데, 크게 보면, ‘물질의 규정성이 의식의 규정성에 앞선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치는 거예요. 밑에서 올라오는 힘을 더 크게 보았는데, 그 힘의 근원이 1에 있다기보다 0에 있다는 것, 아주 비속하게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없는 놈’의 숨은 힘이, ‘있는 놈’의 드러난 힘보다 더 쎄다는 것을,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인간적인 ‘결핍’과 ‘과잉’, ‘있을 것’(아직 ‘없는 것’), ‘없을 것’(군더더기로 ‘있는 것’)의 관계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 만들자.’ 그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평형’이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이 지향점은 ‘오래된 미래’를 꿈꾸었던 노자의 ‘과민소국’, 아주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예요. 그 세상 오면 ‘먹물’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요. ㅎㅎ

 

*다시 0과 1에 덧붙임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 1이 되는 지점에 ‘한계’(peras)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했나요? 이렇게 뭉뚱그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가 되는 지점은 무얼 가리킬까요? 여기에서는 ‘있는 것’, ‘하나’, 1이 앞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스스로는 안 움직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정지’이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 ‘순수형상’, ‘일자’(―者), 신, ‘하나님’이 앞서지요. 그러나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있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청이고, 당위이고,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이자, 우주의 한계인 이 ‘있음’ 밖에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있음’이 허공에 감싸여 있다면, 또 하나의 ‘페라스’인 ‘없음’은 ‘있는 것’에 감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빠지고 또 빠져서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텅 빈 그 무엇, 0집합, 무한한 것, ‘무규정적인 것’, ‘아페이론’의 극한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편에서 이 ‘없음’이라는 한계를 우주의 중심에 놓습니다. ‘있음’이, 1이 확장의 한계선이라면, 모든 ‘생성’이 그 한계선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라면, ‘없음’은, 0은 ‘소멸’이 그 한 점에서 멈추는 응축의 한계점입니다.

‘있음’이 ‘파이’(π)라면 ‘무산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 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소수’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수’가 어느 날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업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수학자들의 꿈은 수의 영역을 0과 1이 거꾸로 뒤집힌 10진법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 야바위 놀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모든 ‘형상’(idea)을 수로 환원시킬 때, 그리스 수학에는 0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을 3으로 나눈다는 터무니없는 셈법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한점으로 수렴되는 극한입니다. 이 극한과 맞닿아 있는, 어떤 것도 두 번 되풀이되지 않고, 어떤 순간도 두 번 지속되지 않는 이 한계점 바로 위에서 ‘여럿’은 숨은 채로 드러납니다. ‘있음’에서는 ‘있을 것’(없는 것)이, ‘결핍’이, ‘빠진 것’이 드러날 듯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지점에서는 ‘없을 것’(있는 것)이, ‘군더더기’들이, ‘과잉’이 ‘생성’의 이름으로 ‘평형’을 깨면서 이루는, ‘에셔’(Mauris Cornelis Escher)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모순의 통일’을 드러내는 그림에서 보여 주는 ‘혼돈’(chaos)이 싹틉니다.

‘드러날 듯이 숨어 있는 모순’과 ‘숨은 채로 드러나는 모순’이 ‘있는 것’을 ‘없음’의 극한까지 끌어내리는 ‘하강운동’을 일으키고, ‘없는 것’을 ‘있음’의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상승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한히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뒤틀리는 매듭, 마디마다 무한히 겹쳐 쌓이는 ‘흔들리는 평형’(equilbrium)의 연속 계단을, 크고 작은, 많고 적은 단계를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드러냅니다. 이 ‘매디’는 ‘마야의 베일’에 싸인 채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사유’의 파편으로 드러나지요. 감각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때로는 ‘흉내’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견해’로, ‘판단’으로, ‘말’로, ‘거짓’으로, ‘속임수’로, ‘믿음’으로 드러나면서 숨고, 숨으면서 드러납니다.

어쩌면 철학은 사람이라는 별난 생성과 소멸의 모순된 응결체가 생명의 탈을 쓰고 벌이는 가장 그럴싸한 거짓과 속임수의 말놀음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종교라는 아편을 키우고 있는 ‘믿음을 통한 세상 편가르기’의 빌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의 뒤통수를 목침으로 내려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여러분의 직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미처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와야겠지요.

‘아파, 이 씨팔놈아! 너 죽고 싶어?’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자본론강독]-17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자본론강독]-17

정리 : 신준하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과 기술적 성격여하를 막론하고 노동대상에 일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함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한다. 다른 한편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보존되어 생산물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자가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노동의 이중성으로 인해) 노동의 단순한 양적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의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생산물에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어 원료와 보조 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 모습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도구, 기계, 공장건물, 용기 등은 죽은 뒤에도 모습을 가지지만, 생명이 다하면, 사용가치는 완전히 소비되고, 따라서 교환가치는 완전히 생산물로 이전된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의 소멸로 말미암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물에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적 노동이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 전환시킴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를 겪는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첨가할 수 없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 중의 노동력[살아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생산수단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이고 이 사용가치의 소비에 의해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생산수단의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기는 하나, 엄밀히 말해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원래의 교환가치가 그 속에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가치이다.

노동과정의 주체적 요소[즉, 스스로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노동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행해짐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해 보존하는 동안, 노동의 각 순간마다 추가적 가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노동자가 6시간 노동에 3원의 가치를 첨가했을 때 이 3원이라는 가치는 생산수단의 가치로부터 이전된 부분을 넘는 초과분이다. 생산과정에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이며,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 이 지출된 화폐 3원에 관해서 보면, 2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이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예컨대,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 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이다.

생산물의 총가치 중 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들의 가치총액을 넘는 초과분은, 증식된 자본 중 최초에 투하된 자본 가치를 넘는 초과분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최초의 자본가치가 [자기의 화폐형태를 벗어버리고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할 때] 취하는 상이한 존재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 중 생산수단[즉, 원료, 보조재료, 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입장에서는 객체적 및 주체적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불변자본의 규정은 그 구성부분의 가치변동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치변동이 더 많은 가치를 증식하거나 더 많은 가치를 이전할 수는 없다.

또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양적 관계 [다시 말해, 총자본이 불변적 구성부분과 가변적 구성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비율]을 변경시킬 수는 있지만,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본질상의 차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2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할게요.

1을 우리의 의식 안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있는 것’, ‘하나로 있는 것’(기독교에서는 ‘有-神’이라고 부르죠.)을 1로 표기합시다.

0도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없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없는 것’도 있다고 칩시다.

‘있는 것’ 하나, ‘없는 것’ 하나(없는 것을 하나로 놓는 건 무리가 있지만 어쨌던 극한치에서 볼 때는 하나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0=2가 돼요. 이때 ‘+’(더하기, 보태기)는 1과 0을 맺어 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는 실체가 없어요. 기능이에요. 운동이지요. 맺어 주는 그 무엇이지요. 제3의 것이에요. 1과 0을 떼어놓으면서 이어주는 것. 그러면서 1도 0도 아닌 것, 이게 바로 ‘아페이론’ 이지요. ‘아페이론’의 성격 아주 복잡해요. 복합적이에요. 이게 바로 ‘운동’의 근거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에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이에 들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생성과 소멸의 근거가 돼요.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결국 없는 것은 그 자체의 규정상 없는 것이니까 아무런 힘도 없다. 있는 것만이 두 순간 이상 지속되어 공간 표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두 번 이상 반복되어 공간화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있는 것만이 공간을 차지할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근거는 있는 것에 있다. 여기까지가 상식의 영역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은 바로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지만 몰상식에서 출발해요. 눈 믿지 마라, 귀도, 코도, 입도, 혓바닥도, 니 살갗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도 믿지 마라, 이거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에요. 데모크리토스도 같은 말을 해요.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말을 해요. 덧붙이는 말만 달라요. ‘믿어라’, ‘끝까지 왜냐고 물어라.’

철학은, 그 가운데서도 형이상학은 ‘아이티올로기’(aitiology), ‘원인학’이라고 부르잖아요. ‘끝까지 왜냐고 따지고 물어라’고 하잖아요. 죽을 때까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 삶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또 곁길로 들어서는데, 다시 ‘제3자’의 문제로, ‘아페이론’으로 돌아갑시다.

1+(+)+0=3

우리는 1과 0,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 2를 끌어냈어요. ‘여럿’의 최소단위가 끌려나온 거예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갈라놓아야 한다. 무언가 사이에 들어 이것들이 이어지지 않게 끊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놈은 한편으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있는 것’에도 끼어들고, ‘없는 것’에도 끼어드는 뚜쟁이 구실을 맡아야 한다. 이 역할을 ‘아페이론’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새끼를 꼬는 것, 초끈을 만드는 것,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운동과 정지를 주관하는 것, 다 이 3에게, 아페이론에게 떠넘겨요. 그런데 도무지 그 구실을 맡을 필연성이 아페이론에게는 없어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관계 맺을 필연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상승운동’만 있다면, ‘하나님’이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만 본다면, 문제가 간단하죠.

빠방,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고, ‘부동의 원동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 ‘유일신’이죠.(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은 대안이 아니에요. 2원자론자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세상 인정 않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없는 것’도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아페이론의 힘이 ‘있는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없는 것’에서도 나온다고 가정해야 해요. ‘생성’의 힘 못지않게 ‘소멸’의 힘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하는 ‘없는 것’의 정체가 뭐야?’

묻고 캐고 할 것 없어요.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없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다고요? 그러면 다 있게 돼요. 다라는 말은 ‘여럿’ ‘모두’라는 말이에요.

여럿 모두에는 ‘없는 것’도 들어가요. (유식하게 말하면 0집합도 집합이라는 말이에요. 칸토르가 이야기하는 ‘무한집합’도 ‘집합’이에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은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그 안에 ‘운동’, ‘미래’, ‘당위’까지 들어가 있는 모순되는 개념의 분석만 빼고, 제가 얼마쯤은 제 미완의 반쪽 이론 <있음과 없음>에 지겹도록 해 놓았어요.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없는 것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빈 것, 빠진 것, 이게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아요. ‘이제’와 ‘저제’를 나누어요. ‘여기’와 ‘저기’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요. 여기 있는 것이 저기에 없다, 이제 있는 것이 저제 없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은 이것에 빠진 것이 저것에 있고, 저것에 빠진 것이 이것에 있다……. 이렇게 돼요. 빠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모두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은 하나가 돼요. 수학에서 말하는 ‘합동’이죠. ‘하나’밖에 안 남아요.

‘있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없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하나가 되는데, 이걸 헤겔은 ‘순수 유’(reine Sein), ‘순수 무’(reine Nichts)로 보아 ‘개념의 운동’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똥친 막대기’로 그게 그거다 하고 개무시해 버리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거 뭐에다 쓰느냐는 거죠.

‘아페이론’은 ‘없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치가 없어요. ‘없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 ‘빠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 여기에서 양적인 규정이 나와요. 수치화될 수 있어요. 헤겔은 빠진 것의 양이 질을 규정한다고 봐요. 이른바 ‘양질전화의 법칙’이죠. 현대 물리학자들도 다 그렇게 봐요. 그래야 잴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고, 증명이 가능하니까요.

‘왜 없지’? ‘왜 빠졌지’? ‘뭐가 빠졌지’? 가끔 묻죠. 정지가 빠졌어? 운동이 빠졌어? 이런 질문 안 해요. 그냥 정지하지 않았어?? 그럼 운동하고 있구먼, 운동하고 있지 않아? 그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구먼, 이렇게 여겨요. 그게 ‘관성의 법칙’으로 둔갑해요.

자, 이제 1과 0의 극한치인 ‘정지’, ‘한계’(peras)의 최고 영역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로 뭉친 지점입니다. ‘있을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바로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운동이 사라집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하나인 지점이지요. 역시 여기서도 운동이 사라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크기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시간도 공간도 여기서는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과 현상계에서 겪는 온갖 변화와, 상승운동(없음→있음)과 하강운동(있음→없음)의 ‘평형’(equilibrium)상태에서 나타나는 공간지각은 모두 있음과 없음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인간세상을 우리는 ‘이상향’이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지요. 어디에도 없으니까 outopia입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이 ‘평형’상태에서는 현상계는 모두 사라집니다. 생명계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목숨’도 없고, 몸을 이루는 모든 것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의식도 마비됩니다.

이 ‘평형’이라는 말 ‘이퀼리브리움’(equilibrium)이라는 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상승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하강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평형’이라는 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형’이 없으면 공간지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먼저 ‘빠진 것’(privatio)부터 살펴봅시다. ‘군더더기’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빠진 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도 드러낼 수 있고, ‘있을 것이 없다’는 말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아페이론’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있을 것’은 현상적으로 보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없는 것’은 운동이 배제된 개념이지만 ‘있을 것’으로 ‘없는 것’은 운동을 전제합니다. 있음으로 가는 ‘상향운동’이 이 말 밑에 깔려 있습니다. ‘있을 것’을 ‘있는 것’으로 현실화시키는 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원동자’인 ‘순수형상’ Eidos, 1者, 神에게서 나옵니다. ‘무로부터 창조하는’ creatio ex nihilo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nihil’이 아예 없는 것이냐, 순수질료로서 있는 것이냐 입니다. 순수질료로서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은 것, 그러나 ‘없음’ 그 자체는 아니고 chaos 형태로 있는 것, 두 순간 지속되지 않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2원론을 밑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군더더기’로 ‘있는 것’을 잠깐 살피지요.

이 ‘군더더기’는 ‘없을 것이 있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없을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더더기’이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것, 없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신의 창조물이다 라는 관점에 서면 ‘군더더기’, ‘없을 것’은 없습니다. 그 나름으로 평형상태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도 빼면, 없애면, 곧 ‘빠진 것’(privatio)이 생기고, 이것은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강운동’을 뜻합니다. 현상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됩니다. 어떤 것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꾸는 것은 결핍을, ‘빠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강운동’의 관점에 서면, 빠질 것이 있어야 합니다. ‘빠질 것’, ‘없을 것’은 ‘군더더기’로,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과잉’으로 드러납니다. ‘없을 것’을 없애는 힘,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꾸는 힘, ‘형상’(eidos)을 ‘질료’(hyle)로 변화시키는 운동은 신인 ‘하나’, 1者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저 밑바닥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 ‘없음’ 그 자체에는 그 힘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무’의 ‘존재성’(유식한 말이어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요?^^)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0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힘으로 나타납니다. 변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근본원인, ‘하강운동’을 이끄는 중력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페라스’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고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렇지만 운동의 원인이 ‘모순’에 있다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과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이 말이 神을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이 말은 얼핏 들으면 단순한 privatio를 뜻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아페이론’은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을 엮어서 하나의 가닥으로 꼬는 ‘2중나사’입니다. ‘초끈’으로 보아도 좋고, ‘새끼줄’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꼬인 자리마다 순간적인 때로는 ‘지속’되고, ‘반복’되는 ‘평형’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속’ 속에서 시간성이 드러나고, ‘반복’ 속에서 공간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3자인, 1과 0사이에 있는 아페이론의 성격입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각 단계에서 무수히 드러나는 이 꼬임을 반영합니다. 이 꼬인 자리, 꼬임의 순간에 ‘비약’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삶’으로의 비약, 생성의 비약일 수도 있고 ‘죽음’으로의 비약, 소멸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e′lan d′amour’는 동시에 그 안에 ‘e′lan de mort’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형’으로, ‘페라스’로, 겉, 끝, 갓으로 드러나는(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현상계, 생명계와 물질계의 다양한 모습 뒤에는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페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로, ‘공’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페이론’이 일시적으로 ‘평형’상태를 이룰 때,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형평을 이룰 때,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페라스’의 형태로 현상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평형’을 이루는지, 또 이룰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느닷없는 순간, 느닷없는 곳에서 그 ‘평형’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Lucretius가 말하는 ‘원자의 경사운동’이고, 쟈끄모노가 이야기한 ‘우연’이고, 우리가 가슴 내밀고 뽐내는 ‘자유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여러분들 귀한 시간 빼앗고, 귀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이따가 술이나 풉시다.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신승철의 『욕망자본론』

신승철의 『욕망자본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녕하세요, 학술 1부입니다. 2015년 세 번째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이번에는 신승철 선생님의『욕망자본론- 욕망의 눈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다시 읽기』를 가지고 독서 토론을 진행해 주실 계획입니다. 지난 모임에 이어 맑스의 자본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접할 기회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2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 신승철

철학자의 서재 : 신승철, 『욕망자본론』

일?? 시 : 2015년 2월 25일(수) 오후 4시 ~ 6시

(*방학 마지막 주이기도 해서 시간을 조금 앞당겨 보았습니다)

장? 소:?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아래는 신승철 선생님이 보내준 책 소개글입니다.?

“이 책은 맑스의 『자본론』에 대한 재독해를 부제로 달고 있지만, 사실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의 「기계에 대한 단상」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가치론을 접속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욕망가치는 펠릭스 가타리에 의해 정동(affection)의 가치로 간략히 정의되지만, 사실은 사랑, 욕망, 정동, 돌봄, 모심, 보살핌, 섬김 등이 갖고 있는 비물질적인 가치 전반을 적시하는 개념이다. 이 책은 소수자의 욕망가치는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고, 이 속에서 싹트는 생태적 지혜는 일반지성(=집단지성)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 결국 우리 사회의 기계류의 혁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소수자와 비노동민중의 욕망가치를 긍정할 때 보다 생산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욕망자본론1

이 책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공동체’와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 재화를 모아서 재분배하는 ‘국가’ 를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는 폴라니, 가라타니 고진, 신이치 등의 노선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물건에 사랑과 욕망, 정성, 인격이 담겨 있는 선물이 오고가는 증여의 경제의 전통 속에서 성장이 아닌 성숙의 경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성장(growths)이 아닌 발전(development) 전략의 기초 역시도 공동체적 관계망이 소수자의 욕망에 의해서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성숙되는 것에 기반한 대안적인 경제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 통합된 세계자본주의가 외부를 소멸시킴으로써, 소수자, 공동체, 욕망 등의 내부의 구성요소에서 외부성을 찾고 이행의 원동력으로 삼는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이 국면에서 자본의 사회화와 사회의 자본화(=자본의 욕망화와 욕망의 자본화)라는 경향이 전면화되기 시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즉, 자본이 공동체의 집단지성이나 생태적 지혜, 공유자산에 대해 탐을 내고 그 속에서 질적인 착취를 추구하는 ‘코드의 잉여가치’와 공동체가 관계망 속에서 사랑과 욕망의 흐름이 갖는 시너지를 통해서 사회적 자본, 협동조합, 대안섹터를 형성하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책은 사회적 경제, 발전전략, 기본소득 등의 담론 등을 통해서 색다른 욕망화된 자본의 움직임을 전략적으로 지도그리기하려 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 이후 일정 :

* 4월 일정: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5월 일정: 5월 21일(목), 강도은(재야철학자), 주제 미정

* 6월 일정: 6월 11일(목), 송종서의 번역서 『인간 농장』

3월 월례발표회를 이월 말로 불가피하게 날짜를 위와 같이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yhseo2001@hanmail.net

학술 1부 드림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통일과 도덕(2)[대안도덕교과서]-12

 

 

이원혁(건국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3. 나와는 다른 사람과 친해지기로서, 남북 화해와 통일

 

제일 처음 소개했던 민서와 지훈이의 에피소드에서 이 둘을 강제로 화해시키고 매일 같이 생활하게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다고 둘의 다툼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둘의 성적은 올라갈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쉽게 되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다툼의 당사자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없이 진행되는 화해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요원할 것입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점점 커져왔던 상처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넘어져 다쳤을 때 무턱대고 반창고부터 붙이지 않듯이 상처의 치료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우선 상처를 물로 깨끗이 씻고, 소독약을 바른 후, 적절한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는 순서가 일반적이지요. 상처는 피가 멎으면, 부기부터 가라앉은 후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겠죠. 마음의 상처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듯합니다. 상처를 깨끗이 하고 소독을 하면 피가 멎고 부기가 가라앉듯이, 남과 북이 분단의 상처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부기가 가라앉듯이 상호간에 안정과 믿음이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분단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적대감과 이질감 그리고 분단된 각각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분열과 대결의식을 걷어내는 것은 상처에서 가장 중요한 처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무언가 불완전하고 부족해보여 마음 속 불안감을 자아냈던 우리나라는 비로소 백수십년 전 조상들이 바라던 서로 돕고 웃으며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방법을 알았으니 이대로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존중과 신뢰라는 말은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민서나 지훈이에게 단순하게 “너희는 서로 존중하고 믿어야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민서와 지훈이에게 가장 큰 문제점을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바라보고 상대가 자신과 닮기를 강요하는 것이죠. 그리고 둘 다 그 생각을 굽히지 않으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겠죠.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야할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남은 나와 대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참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평가할 때 나의 기준에서 남을 ‘내가 가진 것을 가진 사람 혹은 가지 않은 사람, 혹은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거나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내가 아닌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죠. 나와 다른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바로 나와 다른 사람은 내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즉 이럴 경우 모든 다른 사람은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평가받고 인정되기 때문에 내가 없이는 다른 어떤 사람도 ‘없는 사람’ 또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친구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민서와 지훈이는 자신의 가치관으로만 서로를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둘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에는 그 사람의 본질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찾아야지, 자신이 믿는 특정한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분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이며 나와 다르지만 용납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상처를 진정시키는 단계로 서로간의 안정과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쳐서는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정말 나와는 전혀 다른 그래서 나의 가치관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정말 ‘남’이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남’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불편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결국 서로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려 들거나, 반대로 숭배하거나 아니면 소통을 포기하는 외톨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진정되었다면 이제 그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이 중요하겠죠. 바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 그리고 동질성의 회복입니다. 역사책과 윤리교과서에서 많이 등장한 인물이죠. 원효대사는 ‘화쟁’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효는 “다름이 있어야 같음이 드러나고 같음이 있어야 다름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다른 점은 서로의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는 좋은 힌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닮은 모습은 서로의 다른 모습을 돋보이게도 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봄으로써 상대에 대한 더욱 냉정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며 ‘나’라는 작은 틀을 벗어나게 하여 ‘나’ 밖에 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나의 위치는 나 자신한테만 있지 않으며, 타인 속에 있지도 않게 되겠지요. 그리고 비로소 이때 우리는 바로 다른 사람과 나의 중간, 즉 경계 속에서 서로간의 조화를 그릴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드나들며 이루는 소통과 통일은 나의 입장으로 다른 사람들 묶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 나를 귀속시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논어 자로편에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진 사람은 조화를 이루지만 똑같아지지는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똑같아지면서도 조화를 이루지는 못 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조화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으며, 소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민서와 지훈이 간의 화해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는 개인 간의 관계를 남과 북에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www.segye.com

출처: www.segye.com

 

남과 북의 적대감과 불통은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상처, 그리고 그 상처의 방치 혹은 잘 못된 처치로 악화되어 왔습니다. 하나였던 것이 분열되니 이질성이 생기고 그것이 적대성으로 나아갔지만 오히려 이러한 이질성과 적대성은 통합을 위한 에너지이기도하다. 남과 북 사이의 차이의 인정은 밉고 싫지만 평화공존을 위해 인정한다는 인내의 차원을 넘어 밉고 싫은 마음이 분단체제가 낳은 비정상적 산물이라는 지각과 그 지각에 뒤이어 동반되는 상호존중이라는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냉정히 판단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상대도 나를 이해할 기회를 줌으로써 서로간의 조화가 가능해 질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조화를 이뤄간다면 그 순간이 바로 통일이 시작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4. 아름다운 통일의 모습

 

통일의 효과에 대해서 많은 장밋빛 미래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통일한국이 경제적, 군사적 대국이 될 수 있다는 꿈들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은 통일을 손익을 따지는 계산기 속에서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기업이 새로운 사업진출 여부를 가리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모습에서는 통일의 정당성이 현재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러한 상상의 이면에는 우리가 앞서 경계한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결정하고 둘의 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이런 모습은 결코 진짜 통일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것보다 조금 큰 이상과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은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평화를 종결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제입니다. 분단이라는 조건으로 남북 주민들에게 제시되었던 부담과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남북간의 화해와 통일은 한반도라는 작은 지역의 평화가 아닌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화합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마지막 대치 장소는 그 긴장을 품으로서 서로 다른 세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장소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남과 북은 ‘부국과 빈국’, ‘동양과 서양’, ‘근대와 탈근대’가 대립하는 장소입니다. 세계에는 다양한 나라가 있습니다. 남한과 같이 경제적 선진국 또는 자본주의국가 그리고 서구문화에 익숙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 북한과 같이 경제적으로 낙후되거나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을 고수하며, 아직 근대적 가치에 많은 비중을 두며 서구문명이 이질적인 나라들도 있습니다. 남북은 각자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다양한 대립을 축소해놓은 시험장이기도 합니다. 통일은 한반도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넘어 근대와 제국주의 시절에 자행되었던 세계 속의 수많은 대립과 갈등을 해소에 기여할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은 세계의 화해와 조화를 이끌고 그 미래를 제안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입니다. 이땅의 통일이 한반도와 세계 속에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어제와 오늘의 상처를 딛고 미래를 향해 웃을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해 봅니다.

2015 한철연 교육부 독일어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2015 한철연 교육부 독일어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 교육부에서 독일어 강좌를 안내해 드립니다.

기간은 1월 30일(금)부터 8주동안 매주 금요일에 진행됩니다.

독일어 공부에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강좌 관련 문의 사항은 pipjc11@naver.com(교육부장, 김정철)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강사 : 서유석
일시 : 매주 금요일 4시-7시
장소 : 한철연(서교동 태복빌딩 3층)
교재 : M. Bochenski, (번역본 <철학적 사색에의 길>), 문법책(정통종합독어, 최신독일어 중 택일 예정)
대상 : 철학과 학부/대학원생, 또는 철학과 대학원 지망자로 국한
수강료 : 무료

[신간] 철학, 문화를 읽다

철학 문화를 읽다

5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출간된 《철학, 문화를 읽다》

현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

철학의 일상성에 한걸음 쉽게 다가가다!

문화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불가피한 코드가 되었다.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는 문화의 자리에 ‘종교’가 들어가 있었고 근대에는 ‘예술’이 부흥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본격적으로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시점은 20세기를 넘어서다. 지금 우리는 대중문화를 비롯해 문화를 수월하게 만끽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문화에서 문화로 끝나는 시대, 문화를 읽는 키워드가 꼭 필요한 시대다. 그렇다고 문화라는 단일한 코드만으로 현대인의 삶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문화라는 커다란 날개 아래 숨겨진 핵심 코드를 찾아서 현대를 읽는다면 제대로 현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009년에 초판이 나온 《철학, 문화를 읽다》는 5년 만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 가운데 몇 개의 주제들은 빠지고, 몇 개의 주제들은 새롭게 첨가되었다. 변화하는 한국 사회 문화의 상황을 가늠해볼 때 좀 더 비중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새롭게 첨가했다. 또한 초판에 없었던 도판과 사진들을 넣어, 더 입체적으로 문화의 현장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 ‘인간관계’, ‘성차별과 페미니즘’, ‘다문화’, ‘노동 ? 여가 ? 놀이’, ‘대중음악’, ‘소비와 욕망’, ‘감시와 자유’, ‘위생 ? 건강 ? 웰빙’, ‘환경’, ‘시간과 공간’, ‘가상과 현실’, ‘전통과 현대’, ‘죽음과 노년’을 주제로 삼아 총 14꼭지의 글을 한 권으로 엮었다. 이 책에서 언급된 현 대한민국의 핵심 코드 14가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전반에 깔린 문화 현상을 직시하고, 그러한 환경에 놓인 우리 스스로 주체가 되어 문화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철학문화를읽다입체

 

■ 책 소개

문화 과잉의 시대를 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피곤하고 지쳐 있다. 견딜 수 없는 우울과 무의미한 허무함이 때때로 엄습하기도 한다. 위로와 힐링이 필요한 시간이다. 지친 심신을 한 잔의 차와 음악으로, 영화 감상으로 달래 본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쇼핑을 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더 이상 삶에서 의미를 찾기가 우스꽝스러운 허무의 시대에 현대인들은 문화적인 것으로 삶을 도배한다. 현대인은 넘쳐나는 문화의 과잉 영양으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너도 나도 문화인임을 자부하지만 메울 수 없는 공허함은 어쩔 수가 없다. 삶에서 의미를 찾던 시대는 가고 그 자리에 문화가 독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솔직히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지도 모른다. 문화를 이해하고 알려고 하지 말고 감각으로 느끼고 몸으로 만끽하면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굳이 문화를 머리로 따지고 정신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문화를 만끽할 수만은 없다. 우리의 몸과 감각을 무지한 상태로 방관하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감각이 지니는 ‘잠재력’에 한번 주목해본다면, 우리는 문화를 새롭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문화는 넘쳐나는데 우리는 여전히 문화에 대해 무지하고, 심지어 어떤 문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다양한 문화 현상은 있되, 문화를 읽는 성찰적 눈과 지식이 얕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문화를 즐기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기 십상이다. 문화의 풍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문화를 읽는 눈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골치 아픈 철학의 눈을 통해 문화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철학이 문화를 읽는 것, 문화를 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따로 철학을 처음부터 꼭 배워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철학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성찰하면 나올 수 있는 ‘깊이를 가진 눈’이다. 문화 현상을 보다가 그런데 ‘왜 그렇지?’ 하는 의문만 가져도, 이미 그 사람은 철학의 매서운 눈으로 문화 현상을 볼 줄 아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깊이를 가진 눈’을 지니고 ‘생각을 가진 사람’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실천’이다. 철학은 물론 ‘이론’이지만, 또한 이 이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염두에 둘 때 ‘깊이를 가진 눈과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옷을 사고 영화를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깨어 있는 주체로 감시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찰을 통한 문화 운동을 기대하다

이러한 실천적인 성찰력은 현실에서 다양한 문화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거대 문화 자본과 문화 권력에 맞서 각자 자리에서 서로 이웃과 연대해 소비자 불매 운동을 펼칠 수도, 공정 무역의 실천의 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억압적인 가부장제 문화와 불평등한 성 차별에 맞서 새로운 평등의 대안 문화를 꿈꿀 수도 있다. 감시 사회 속 노동의 현장에서 파열을 일으키며 자본주의 노동 문화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을 기획해볼 수도 있다. 게다가 무한 경쟁의 파시즘적 가속의 문화에 느림과 여유의 삶을 꿈꾸는 공동체를 꾸려 볼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주변에서 이러한 공동체를 꾸리는 이웃들을 만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대안 운동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풍요로운 문화를 우리의 새로운 삶의 코드에 맞게 얼마든지 다채롭게 가꾸어 나갈 수 있다. 넘쳐나는 문화는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성찰적이고 실천적인 깊이가 빠진다면, 문화는 가장 위험한 마취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철학을 통해 문화를 읽는다는 것은 이론과 지식의 측면을 증가시키기보다 철학이 갖는 성찰력을 실천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일상의 문화를 철학의 언어로 다시 읽다

문화는 궁금한데 철학은 궁금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을 모르고서는 문화를 아는 것이 피상적임을 깨닫게 된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의 한 꼭지만 읽어도 금세 터득하게 된다. 이 책은 청소년이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로 쓰여졌지만, 문화를 보는 철학적 시각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심오한 주제의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 시대를 살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떠한 현상들로 점철되어 있는지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소비에 대한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가 증대되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우리가 얼마나 더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웰빙을 부르짖으며 건강염려증이 만성화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건강이란 무엇인지 등 삶과 개인의 곳곳에 침투해 있는 문화의 다양한 현상을 짚으며 궁극적으로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자가 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권유한다. 2014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철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려운 일들이 2014년에 일어났다. 우리들은 삶에 당면한 어려움과 피폐함으로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의 관행으로 뿌리박혔던 낡은 문화의 틀을 과감히 깨어 버리고 이제 좀 더 성찰하는 실천적 자세로 나아갈 때인 듯하다. 고통받고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문화도 더불어 생각해볼 때다.

 

■ 내용 맛보기

다문화주의에서 소수 집단은 ‘다수 집단의 언어’ 아니면 ‘소수 집단의 언어’를 선택하는 양자택일에 놓인다. 문화적 선택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집단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집단이 주체가 되는 상호문화주의는 ‘다자간 열린 대화’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양자택일로 떨어지지 않는다. 동등한 위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대화 가운데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로 나아가기가 더 용이해진다.??97쪽

지문이나 DNA 정보는 각 개인마다 고유한 생채 정보를 담는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지문이나 DNA 정보는 개인 인증이나 국가의 범죄 정보 관리에 사용된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 대해 지문채취와 얼굴 사진 촬영 등 생채 정보 수집을 의무화한다. 테러에 대한 효율적인 대책으로 생체 정보를 수집한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에 입국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입국과 동시에 지문날인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17세 이상 모든 국민에 대해 열손가락 지문채취를 의무화한다. 우리나라에서 17세 이상의 전 국민에 대해 지문날인을 의무화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당시 김신조 등이 청와대를 기습한 1. 21사태의 여파로 남파간첩 및 불순분자 색출이라는 명목하에 17세 이상 국민에 대해 열손가락 지문채취가 의무화되었다. 현재 지문날인 제도는 애초의 범죄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한다는 목적보다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한 행정 조치의 일부가 되었다. 52쪽

잠은 게으름의 상징이었고, 산업 사회는 게으름을 적대시한다. 그르니에는 수면에 플러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아니면 마이너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망설이지만 산업 사회는 태생적으로 잠에 마이너스 기호를 붙이는 사회다. ‘산업 사회’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이다. ‘산업, 즉 industry’의 라틴어 어원은 ‘부지런함’을 뜻하는 ‘인두스트리아(industria)’다. 이 개념이 만들어질 당시 이 말은 비생산적인 귀족에 맞서서 산업 노동자의 자부심을 고취하고자한 투쟁적 개념이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는 노동자를 생산라인의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근면과 성실’을 소리 높이기 시작했고, 노동자의 밤 시간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58쪽

 

철학문화를읽다표지

 

■ 저자 소개

지은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자들의 자기 성찰과 실천적 모색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1989년에 창립했다.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진보적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며, 좁은 아카데미즘에 빠지지 않고 현실과 결합된 의미 있는 문제들을 통해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자 한다. 지역, 전공, 세대별로 흩어져 있던 구성원들이 커다란 강물을 이루듯 한데 모여 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철학을 공부하는 석·박사 및 대학원생들과 대학 강사, 교수 등 총 300여 명의 회원이 함께 한다.

펴낸 책으로는 《철학 대사전》, 《다시 쓰는 서양근대철학사》,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철학자의 서재》, 《청춘의 고전》,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열여덟을 위한 신화 캠프》, 《삶, 사회 그리고 과학》, 《철학의 명저 20》, 《논쟁으로 보는 한국 철학》, 《이야기 한국 철학》, 《지식의 바다에서 헤엄치기》, 《우리들의 동양철학》, 《철학, 문화를 읽다》, 《철학, 삶을 묻다》 등 다수가 있으며, 매년 네 차례에 걸쳐 학술지 《시대와 철학》을 발간하며 대중 웹진인 《ⓔ 시대와 철학》을 운영 중이다.

글쓴이(게재 순)

이철승? 조선대학교 교수

연효숙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현남숙?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박민미? 대진대학교 외래교수

박영욱?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김선희? 이화여자대학교 HK연구교수

서영화 서울대학교 외래교수

강신익 부산대학교 교수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서도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김교빈? 호서대학교 교수

이순웅? 경희대학교 강사

 

■ 차례

군자에서 시민까지: 유가적 인간과 근대적 인간

가족에서 디지털 촌수까지: 새로운 인간관계

제2의 성에서 사이보그 선언까지: 성 차별과 페미니즘

단일 민족 신화에서 결혼이주여성까지: 다문화 사회의 한국

소외된 노동에서 잉여인간까지: 현대 사회의 노동, 여가, 놀이

통기타에서 컴퓨터 음악까지: 대중음악

편의점에서 백화점까지: 소비 사회와 욕망

지문날인부터 디지털 파놉티콘까지: 감시 사회와 개인의 자유

기생충에서 아토피까지: 위생, 건강, 그리고 웰빙

핵발전에서 먹거리까지: 환경 위기와 생태학적 자연관

증기기관차에서 KTX까지: 시간 체험과 공간 이동

단성사에서 CGV까지: 가상과 현실

경복궁에서 아셈타워까지: 전통문화와 현대

타인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까지: 죽음과 노년의 문제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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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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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3. 연설기술(1)

연설기술(Rh?torike : Redekunst)은 소피스트 사상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철학자들을 살피기 전에 연설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 현상부터 간단히 정리 고찰해보기로 하자.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리스 말이 가지고 있었던 비상한 힘과 유연성이다. 그리스어는 상대에게 말하고 전해야 할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 점은 예를 들어 헤브라이어와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것은 일상생활이건 전시에서건 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연설이 가져다 준 큰 기여이다.

연설기술의 경우 우리는 고대 포이니키아(페니키아)나 카르타고, 고대 게르만 등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에 반해 호메로스의 작품은 현재 우리의 손 안에 있다. 호메로스의 신들이나 인간들의 연설은 최고의 자연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고 게다가 그러한 연설은 폴리스가 앞서 이룩한 큰 성취에 바탕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이미 모든 사안이 토론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을 위한 성대한 경기도 열려 말하는 일이 일의 성취와 목표 달성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민회와 민중 법정이 여러 가지 주요사안을 결정하게 되면서 연설은 갑자기 체계적인 학문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이 연설기술을 그리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하고도 중심적인 요소로서 육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대의 신문, 잡지와 달리 그리스의 말하는 행위는 특정 장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그 시점에만 결부되어 있어, 연설하는 사람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실감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했고 그 반대자 역시 제대로 된 반론을 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리스인의 경우 현재의 신문 잡지의 힘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연설의 힘과 비교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고대의 아테네인이 연설을 듣는 대신에 단지 열심히 신문 밖에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고 하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연설기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아테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색이나 지식, 학적 탐구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연설기술은 이후 이 시민들의 전체 에너지의 실로 방대한 부분을 빼앗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적인 탐구는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처지가 되었을 정도이다. 사실 연설기술에 동원된 막대한 노고 이를테면, 수사학을 위해서 작성된 대량의 안내서의 종류만 비교해보더라도 학적 탐구의 실적은 그저 어중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철학자들도 처음부터 연설기술을 철학의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 경우 가장 현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것처럼 그들 자신 이것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생애의 상당 부분을 수사학에게 바쳐 그 최대의 탐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실제 사변으로서의 철학은 연설기술에 대한 엄밀한 탐구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술과 시가의 손실은 돌이킬 수 것이었고 학적 탐구 또한 한참 뒤에 가서야 그 보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놀랄 만한 현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무엇보다도 보존되고 있는 연설 그 자체이다. 연설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그 가장 중요한 증인은 『브루투스(Brutus)』와 『연설가(Orator)』를 쓴 키케로(기원전 106-43)이다. 키케로는 양질의 자료와 그 자신 그리스에서 거둔 학업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수사학 내지 연설의 기술관련 지도서는 철학자 대부분이 하나 정도는 썼던 까닭에 그 수는 몇 백 권에 달하지만 이러한 기술 지도서 중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으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Rh?torike)』과 『알렉산드로스에게 주는 연설기술(Rhetorica ad Alexandrum』이고, 그 이후의 저작으로서는 람프사코스의 아낙시메네스를 들 수 있고 조금 작은 기술 지도서로서는 할리카르낫소스의 디오뉘시오스의 저작 『고대연설가론(de oratoribus antiquis)』등도 중요하다. 그 밖의 것은 발츠(Walz)와 슈펜겔(Spengel)에 의해서 출판된 『그리스 연설가들(Rhetores Graeci)』를 참조했으면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료 전부가 다루어지고 있는 근대의 저술로는 브라스(F. Blaβ)의 『아테네의 연설(die attische Beredsamkeit)』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적으로 연마된 연설의 목표는, 아직 독서 습관은 없었지만 민회나 법정 일에 길들여져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하는 민중들로 하여금 연설 내용이 ‘그럴 듯하다'(eikos)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듯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듣는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순진할 정도로 귀가 얇은 그리스인들로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 자기가 부정하는 견해이고 또 듣는 쪽에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여겨질지라도 내 몸을 구하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이 끌어다 댔고 게다가 그 연설이 소피스트들이 가르친 그대로 상대를 매료시킬 정도의 고상함을 갖추었을 경우에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섬세한 귀를 가지고 능숙하게 펼쳐지는 연설을 귀담아 듣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있었던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미 그 연설을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도 『새(Ornith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말은 정신에 날개를 돋게 하여 인간을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게 한다.” 이러한 말의 힘을 가장 풍부하게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으로 안티폰(기원전 480-411)의 생애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안티폰이 망명자 신분으로 코린토스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는 위자료를 벌기 위해 노점을 열고 다음과 같이 방을 써 붙였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말로 치료해드립니다”(1447) 이윽고 사람들이 찾아오자 그는 그 사람들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의 불행을 쫓아내 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데 말이 얼마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지금 이 시대에 과연 말로 슬픔을 치유할 정도의 사람이 있을지는 새삼 되물어 볼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연설은 그리스인에게서 이미 오랜 동안 다른 여러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훨씬 중시되고 있었다. 나랏일에서나 법정에서나 사실 옛 부터 가장 큰 효과를 갖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늘 감탄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를 가진 연설기술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말을 잘 하려는 어떤 대단한 의식적인 노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개개의 사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그것과 함께 그러한 화법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기록해두는 것은 아직 사람들의 염두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적 재판 제도가 발달하고 이 재판 제도가 연설의 기회를 습관적으로 제공하게 됨에 따라 마침내 그 노력들에 이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연설 기술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초로 행해진 것은 시칠리아에서였다는 것이 일치된 견해이다. 기원전 466년 시칠리아에서 참주들이 추방된 뒤 민주주의가 발흥 하여 “오랜 동안 권력에 의해서 억압되고 있었던 다수의 사법상의 요구가 크게 증대되었던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이 새로운 연설기술의 창시자로서 어느 정도 문제가 되는지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즈음 이미 시칠리아 땅 쉬라쿠사이의 코락스(Korax)가 민중 연설가로서 또 법정 변론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가장 초기의 『연설기술 안내서』혹은 단순히 『안내서』라고 불리는 책은 이 코락스가 지은 것인데 이 책은 적어도 연설의 형식과 구분에 대한 규범, 서두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등에 관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와 똑같이 연설 안내서를 쓰고 있었던 제자이자 경쟁자였던 티시아스(Tisias)의 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럴듯함”(eikos)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시칠리아의 연설 내지 연설기술은 이 티시아스와 소피스트인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에 의해, 기원전 427년 그 자신도 동행했던 시칠리아 사절단의 아테네 파견을 계기로 유입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연설과 더불어 예비지식으로서 철학, 그것도 앞서 본 것처럼 진리 인식을 부정하는 부정적 성격의 철학도 함께 유입되었다. 아테네에서는 프로타고라스(기원전 485?-414?)가 고르기아스에 앞서 연설기술의 기초는 만들어 주었던 터라 고르기아스 때부터 이미 연설기술은 소피스트들의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또 고르기아스 자신 이미 연설기술의 교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소피스트들 모두가 그랬듯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그곳 실정에 맞추어 체계적인 연설기술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연설 교사라는 게 하나의 직업으로 여겨졌다. 또 그들에게서 배우면 무엇인가 얻는 바가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부터 연설 교사는 고액의 사례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 떠올랐다.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Gorgias 기원전 483-376)


 
고르기아스는 재능이 남달라 아무리 내용이 진부해도 시적인 표현과 새로운 언어로 그 내용에 맞추어 훌륭하게 재구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가 이룬 진전은 의심할 바 없이 시의 운율을 도입하여 연설문에 균형 잡힌 구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연설의 각 부분은 서로 대응해서 어울리는 문장들로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말의 울림이 매우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방식은 기술된 사안을 보다 명료하게 해주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연설 각 부분들을 서로 대비하면서 생각들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같은 길이의 문장(isok?la), 형식상 서로 대응하는 문장(parisa), 그리고 특히 똑같은 말로 끝나는 문장(homoioteleuta), 그리고 같은 소리의 말, 서로 운율이 맞는 말(paronomasiai, par?ch?seis)을 활용하여 연설가로 하여금 한층 더 활기 있는 열변과 화려한 몸짓을 더하게 만들었다.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페리클레스(Perikles 기원전 495-429)


 
고르기아스 이래 아테네에서 연설의 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향상은 아테네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랜 동안 아테네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기반이 잘 마련되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페르시아 전쟁 이래 그리스의 위대한 정책과 제국의 패권을 둘러싼 당시의 정치현실이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미 테미스토클레스(기원전 528-462)부터 그 자신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위대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실제로는 고르기아스가 이룬 연설 기술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쳐 있었다. 물론 고대 사료들은 여러 곳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보여준 마술과 같은 효과(ep?dai)를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연설이 올림포스의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천둥과도 같이 전광을 발하며 그리스 전 국토를 뒤흔들었고, 그의 입술 위에는 연설의 여신이 머물러 있었으며 그의 연설은 청중의 마음속에 가시를 남겨두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연설은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의 저작을 통해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실제 그 자신이 쓴 것으로는 민회의 결의문 이외에 어떤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사실 플라톤도 말했듯이(『파이드로스』257d) 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후세의 평판이 두려워 자신의 이야기들을 쓰거나 저술을 남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투퀴디데스의 저작에 실린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분명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그의 연설의 특수한 부분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시적 형상을 이용하고 있었고 그 일부가 훗날 유명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가 연설하는 모습 자체는 나중 세대인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가 가지고 있던 것 같은 정열적인 면모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실 페리클레스는 망토로 몸을 둘러 싸맨 채 가만히 서서 연설을 하였고 목소리도 항상 같은 높낮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는 정치가는 물론 법정 변론가도 연설을 할 때 아직 단순한 말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르기아스가 아테네에 도착한 이후 30년 남짓의 세월의 사이에 연설 기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3. 연설기술(2) 다음에 계속)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1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apeiron이 중심입니다.

이 강의는 이 땅에서 여기 앉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사람만 귀를 기울일, 그 가운데서도 귀가 둘이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추상의 단계가 너무나 높아서 공기가 희박해 호흡곤란을 느낄지도 모를 그런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는 끊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 이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끊어진 것, 또는 끊어내는 것,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는 것, 겉이, 갓이, 끝이 있는 것을 ‘peras’라고 부릅니다. 이 ‘페라스’가 없으면 이것저것을 가를 수 없고, 죄다 이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혼돈이죠. 가르지 않으면 살길이 없는 게 목숨 지닌 것에 주어진 숙명이라고 해야겠지요. 갈라야죠. 금 긋고 나누어야죠. 바이러스, 박테리아 수준에서도 살아남으려면 가려야죠. 나누어야죠.

살길과 죽을 길, 갈림길, 그게 모두 사람 비슷한 것들이 맞닥뜨린 ‘한계’죠. 너도나도 ‘한계’는 아는 척해요. 잣대를 대고, 금을 그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페이론’은, 그어도 그어도 속에 남는 이건 무어죠?

이게 오늘 내 강의 주제예요.

졸라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를 말들이 횡설수설 겹칠 텐데, 그래도 듣고 싶나요?

먼저 ‘페라스’ 문제를 인간의 수준에서 어떻게 해결했는지 잠깐 살펴봅시다. 하나로 수렴하죠. 1의 문제, ‘-者’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이 문제를 아주 깔끔하게 처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에요. 플라톤은 정지와 운동의 원인을 나누었어요.(Parmenides의 수준에서는 엉켜 있었어요.) 플라톤은 idea의 세계와 Demiurgos의 역할을 나누어 보아요. Demiurgos는 우주를 창조하지만, idea의 세계는 우주 밖에 독립된 실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안에 idea들을 끌어들입니다. ‘순수형상’이라는 Eidos는 1입니다. 1은 스스로는 정지해 있으면서 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지요.(kinoun akineton).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교부철학은 Plotinus를 거쳐서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신학의 근거로 삼아요. 1에서 0에 이르는 과정은 두 가닥의 끈으로 꼬여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2중나사’라고 하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끌어올리는 과정만 보아요. 0은 ‘순수질료’라고 규정하지요. 0은 1에 끌려 상향운동을 해요. 물론 0도 1과 마찬가지로 ‘부동의 동자’(kinoun akineton)이에요. 나중에 헤겔이 reine Sein과 reine Nichts는 같은 거다. 그걸로 운동 설명 못 한다. 사유의 틀에서 벗어난다. Sein을 ‘있음’으로, Nichts를 ‘없음’으로 보지 말고, Sein을 ‘임’이고 Nichts를 ‘아님’의 측면에서 보자. 그러면 ‘긍정’, ‘부정’, ‘부정의 부정’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설명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게 헤겔 <대논리학>의 핵심이에요. 현상계의 운동을 사유의 전개과정에 맞추려고 해요. 개념(Begiff)의 자기 전개라고 하면서요. Marx는 이거 아니라고,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헤겔의 철학을 뒤집지만, ‘형이상학’ 때려치우라고 하지만 헤겔 아류이고, 속류 헤겔론자로 볼 수 있어요. 0과 1의 문제에 관심 없어요. 막스에게는 ‘형이상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현실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서양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막스도 ‘인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플로티누스가 중요한 건 ‘질료’에서 ‘형상’으로, 그리하여 마침내는 ‘순수질료’에서 ‘순수형상’으로 향하는 ‘상승운동’의 가닥만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위로 치켜 뜬 눈길을 아래로 돌리게 한 거예요.

‘유출설’이라고 하나요? <Eneades>에서 플로티누스는 “자, 봐라. 저기 눈부신 햇살로 빛나는 1이라는 해가 있다. 광명이 있다. 그런데 그 햇살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0이라는 어둠이 저 밑에 도사리고 있다. 1이 위로 위로 끌어올리면서 ‘페라스’를 증가시킨다면 0은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그 ‘페라스’들을 뭉개서 ‘아페이론’을 증가시킨다. 1에서 nous로, nous에서 psyche로, psyche에서 또 무엇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어둠에 이르는 길이다. 그야말로 ‘태양은 빛을 잃어’ 빛이 없는, 나중에 1의, ‘하나님’의 권능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흑암’이 저 맨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되면 운동은 ‘이중나선’, ‘새끼꼬기’, (그걸 요즘 물리학자들은 ‘초끈’(string)이라고 하나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라는 두 가닥 끈이 상호작용해서 각 단위, 1에서 0에 이르는, 또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단계에서 1과 0의 작용이 어떻게 ‘평형’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평형’ 상태를 ‘공간’화하는지, ‘정지’로 보는지, ‘운동의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는 ‘국면’들이 드러나요. Bergson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이론을 비판하는 데는 까닭이 있어요. 흐르는 물을 물방울로 해체시킨다고 해서 어느 순간 그 물이 멈추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지속’(dure′e)과 ‘계기’(succession)는 다르다. ‘계기’는 시계 문자판에 고정시킨 시간이고, 공간화된 시간이고, 사람의 의식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놓은 ‘페라스’일 뿐이다. ‘지속’은 순간순간 ‘아페 이론’을 그 안에 안고 있는 ‘페라스’를 뛰어넘는 ‘도약’이다. Zenon이 아무리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한 시간은 반시간이고, 두 시간’이다, 바보 같은 짓 걷어치우고 Parmenides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현상계’를 구제할 수 없다고 해서 플라톤이 나섰는데, 플라톤이, idea와 Demiurgos의 역할을 갈라놓았는데, 그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Demiurgos를 1로 놓고, 모든 운동을 그 정지 모델로 공간화했다, 그거 문제 있다. 나 베르그송은 그거 뛰어넘겠다. ‘생명’이라는 게 운동인데, 그 운동 멈추면 죽는데, 우주 전체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는데, 살아남으려는 이 몸부림을 ‘뛰어넘기’로 보자. 그게 ‘삶의 도약’(e′lan vital)이고, 그게 궁극으로는 ‘사랑의 도약’(e′lan d′amour)다. 뭐 이딴 이야기해요. ‘엘랑 비딸’까지는 그럴싸해요. 그러나 ‘엘랑 다무르’라니. 이거 다 ‘생명’이신 ‘하나님’, 1로 가자는 거예요. 물론 베르그송은 2원론자이기 때문에 ‘질료’의 측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hyle)를 무시하지 않아요. 늘 두 개를 나란히 놓아요. <물질과 기억>, <생각과 움직임>, 이처럼 1과 0을 나란히 놓아요. 0의 해체 기능 잘 알고 있어요. 아마 베르그송 철학의 밑바닥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상상력이 깔려 있을지 몰라요. 근현대 물리학자들의 의식의 밑바닥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에서 종합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공간, 단일한 우주의 이론이 눌러 붙어 있는 것처럼이요.

그러나 베르그송은 ‘생기론자’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아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 낙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는 해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페라스’와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에서 1과 0의 문제를 파고드는 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베르그송이나 모두 ‘인간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이 사람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박홍규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인데, 한때 교황청에서 베르그송 철학으로 신학이론을 바꿔치기하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바탕으로 한 신학이론은 근대 물리학의 성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진화론을 기독교 신학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다고 고심했던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테이야르 샤르뎅 같은 신부도 <인간현상>이라는 책에서 베르그송 이론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들지 않았나요?

참, 군소리가 길어졌네요. 그런데 이거 다 박홍규 선생님의 ‘형이상학 강의’에서 나왔던 말들이에요.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하나는 ‘우연’과 ‘필연’, 거기에서 파생되는 ‘자유의지’ 문제예요. 현상계를 운동 중심으로 파악하려면, 그리고 그 운동의 원인이 우주 밖에, 정지된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우주 안에 있다고 하려면, ‘우연’의 문제 회피할 수 없어요. 루크레티우스가 궁여지책으로 무한공간과 무한수의 원자를 놓고 ‘수직하강운동’(이거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뒤집으면 ‘수직상승운동’으로 보아도 돼요.)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원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게 원자의 ‘경사운동’(klinamen)인데, 이거 ‘느닷없는 때’ ‘느닷없는 곳’에서 ‘우연히’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느닷없는 이야기예요. 이 ‘우연’과 ‘필연’의 문제는 베르그송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해요. ‘도약’, 이거 우연이에요. ‘자유의지’라는 말로 분칠되어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밖에 다른 근거가 없어요. 물론 베르그송도 ‘자유의지’의 측면에서 우연과 필연 논쟁에 끼어들기는 해요. 그런데 그게 큰 설득력이 없어요. 감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적’ 근거는 부실해요. 박홍규 선생님의 고민도 거기에서 출발했다고 봐요. 끙끙대고 있는데 자끄모노(Jaque Mono) 책이 박 선생님 눈에 띄어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지요. 저는 안 읽었어요. 모노 이론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 책 안에서 박 선생님은 형이상학에서 골머리를 앓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셨을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