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 – 동학에서 함석헌까지, 우리 철학의 정체성 찾기 –
저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현대철학분과)
동녘  2015.05.29

안녕하세요? 지난 5월 말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예정)에서 집필한 <처음 읽는 한국 현대철학>(동녘)이 출간되었습니다.

2013년 여름부터 이규성 선생님의 <한국현대철학사론> 윤독을 시작으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분과원들의 매주 노력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전공이 한국철학이나 중국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철학 전공자들과 함께 어우러졌기에 좀 더 다양하고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다루려는 인물들을 철학자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이 온전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특히 한철연에서는 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이 책에 대한 출판미디어매체의 소개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관심있는 회원 및 여러분들의 일독을 삼가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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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현대철학’이란 이름으로 여러 인물을 소개하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왜 철학자로 분류된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으며 널리 알려진 철학 저술이나 논문을 남기지도 않았다. 강단에서 철학교육에 임한 경험도 없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들을 ‘철학자’로 부를 수 있을까? 저자들은 우리가 ‘철학’에 관해 일정한 상(像)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철학은 대학 전공학과에서 전수되는 학문 체계인 만큼 엄밀하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인 학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고정관념 속 철학의 상을 완강하게 견지한다면, 사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 대다수는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의 상은 주로 근(현)대 서양에서 형성된 것이고, 그나마 일본을 통해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바로 이러한 철학의 상, 이 시대 우리에게 고착화된 철학의 상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이 책의 중요한 전제라고 강조한다.

저자 :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구태환 상지대학교 강사
김정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박사수료
이 지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진보성 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유현상 상지대학교 강사
조배준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박영미 한양대학교 강사

목차
머리말
1. 한국의 ‘철학’과 한국철학의 ‘현대’ – 이병태
2. 전통사회의 동요와 새로운 사유의 출현: 성리학 비판과 평등한 인간관 – 구태환
3. 최제우와 동학사상: 한울님을 모신 몸으로 산다 – 구태환
4. 나철과 대종교: 역사적 실천을 통한 한얼의 회복 – 김정철
5. 박은식의 민족주의적 양명학: 전통의 개혁을 통한 위기의 극복과 자주적 근대 모색 – 이지
6. 신채호의 민중중심사상: 민중의 주체성과 절대자유의 정신 – 진보성
7. 신남철의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이상을 꿈꾸다 – 유현상
8. 박치우와 위기의 철학: 철학의 당파성과 지식인의 실천 – 조배준
9. 박종홍과 국가주의: 강단 철학의 빛과 어둠 – 박영미
10. 함석헌의 ‘씨알 철학’: 씨의 세계를 꿈꾸다 – 유현상
11. 우리 시대의 철학 – 이병태
글쓴이 소개

우리에게도 ‘철학’이 있을까?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우리 철학을 한권의 책으로 만나다!

‘우리’ 철학 혹은 철학자는 있는가? 이 책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우리 철학자’들은 전통 지성의 세례를 받았지만 격변의 역사 앞에서 스스로 달리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자 애쓴 인물들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최제우, 나철, 박은식, 신채호, 박치우, 박종홍, 함석헌 등은 인간과 삶, 사회 및 역사, 자연과 우주 등, 현대철학의 주요 주제들을 진지하게 탐문하고 신중하게 답하여 실천함으로써, 종교지도자나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현대 ‘철학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책의 출간은 한국 철학사에서 나타난 기나긴 ‘수용’의 역사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지적 모험을 감행한 이들의 사유를 통해, ‘우리’ 철학의 빛나는 가능성을 엿보고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우리 철학자들을 ‘발굴’해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제우의 ‘동학’에서 함석헌의 ‘씨ㅇ·ㄹ 철학’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 현대 철학자들의 철학과 사상!

한국철학은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온 자연 조건과 사회 상황에서의 경험들을 추상화하고 체계화해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기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만들거나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상으로 다듬어 갔다. 이런 한국철학에 관해 나온 책들은 대부분 원효나 지눌 등 불교 사상가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성리학자부터 시작해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까지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동학사상 이전 까지만 주로 다뤄왔던 한국철학을 ‘현대’까지 이어나가고 있다. 그동안 학술서로는 한국 현대철학사상에 대한 연구와 함께 박종홍, 신남철, 박치우 등이 개별적으로 다루어지기는 했지만, 대중교양서로 한국현대철학이 체계적으로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의 의미는 깊다.

이 책은 ‘한국 현대철학’이란 이름으로 여러 인물을 소개하지만, 차례를 살펴보면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이 왜 철학자로 분류된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으며 널리 알려진 철학 저술이나 논문을 남기지도 않았다. 강…(하략)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도서출판 동녘의 신간 소개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넣기 하세요)
http://blog.naver.com/dongnyokpub/220380661486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8

제9장 잉여가치율[자본론강독]-18

정리 : 신준하

제1절 노동력의 착취도

최초 ; C=c+v, 500원=410원[c]+90원[v]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
C=410원[c]+90원[v]+90원[s], C=C’ 500원에서 590원으로 됨.
* C와 C’의 차이는 s, 즉 90원의 잉여가치

◯ 생산요소가치 = 투하자본 가치
생산물가치가 생산요소가치 보다 크기 때문에,
생산물가치의 생산요소가치 초과분 = 투하자본의 증식분 = 잉여가치 : 동어반복

◯ 가치 생산에 투하된 불변자본이라 말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생산 중에 실제로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생산 중에 마모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불변자본의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와 전체가 이전되는 경우 모두 잉여가치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ex1)불변자본 일부만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마멸된 기계가치 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500원

* 생산물 가치=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ex2)불변자본 전체가 생산물로 이전되는 경우

c=기계가치 1,054원+원료가치 312원+보조재료 가치 44원
v=90원, 생산요소가치=1,500원

* 생산물 가치=1,590원, 따라서 잉여가치=90원

◯ C=c+v → C’=(c+v)+s → C=C’
생산과정 속에서 실제로 창조된 새로운 가치[가치생산물]는 생산물의 가치와 다르다. 가치생산물은 590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90원[v]+90원[s]=180원이다.

c=0이라 가정할 필요가 있다.(잉여가치율을 계산해내기 위해서) → 가변량만을 계산하겠다.
ⅰ) 왜냐하면, 불변량과 가변량을 결합시키는 경우, 그 결과의 변동은 불변량을 제외 하더 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

ⅱ) 가변자본 부분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C’=410원 불변자본+90원 가변자본+90원 잉여가치
여기서 가변자본 90원은 주어진 양(불변량)이므로, 즉, [90원은 임금액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변량을 취급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 90원은 죽은 노동 대신 살아있는 노동이, 정지된 양 대신 유동하는 양이, 불변량 대신 가변량이 등장한다. (즉,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고, 새로운 가치 (영여가치)를 생산한다).

(임금액이 90원으로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90원의 가변자본”, 또는 “일정한 자기증식하는 가치”라는 표현이 모순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이 표현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교환은 등가교환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나,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노동력을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모순이다.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모순이다.

s/v : 1)가변자본의 가치증식 비율, 2)잉여가치율

필요노동시간 : 1노동일 중 노동력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부분필요노동 : 필요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잉여노동시간 : 노동일 중 필요노동의 한계를 넘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시간

잉여노동 : 잉여노동시간 중에 수행되는 노동

 

s/v = 필요노동/잉여노동,  잉여가치율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도의 정확한 표현
cf) 이윤율 = s잉여가치/c불변자본+ v 가변자본

* 잉여가치율 계산방법 요약

c=0으로 본다

잉여가치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잉여가치 = 가변자본
가변자본량이 주어져 있다면, 새로 창조된 가치-가변자본 = 잉여가치

제2절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 배분적 부분들로 표시

◯ 12노동시간 동안 30원의 가치를 가지는 20파운드의 면사를 생산
가치 구분 : 면사 가치30원=24원[c]+30원[v]+3원[s]
무게 구분 : 면사 20파운드=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2파운드[v]+2파운드[s]
노동시간 구분 : 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1시간12분[v]+1시간12분[s]

→16파운드의 면사(13파운드[면화]+2파운드[방추]) 및 9시간36분(8시간[면화]+1시간36분[방추])에는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이고, 뒷부분은 노동자가 공중에서 면사를 뽑아낸 것처럼 보인다.
→이 방식은 옳은 것이나, 매우 조잡한 사고방식을 야기할 수도 있다.

[서평] 우리의 고향은 어디오?

우리의 고향은 어디오?

김재현의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 불휘미디어, 2015

 

김재현은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라는 책을 냈다. 저자는 그의 책 마지막 페이지에 시 한 편을 그려내었다. 고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그의 시 앞 구절을 옮겨본다.(책 270쪽)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없다고 대답했지요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다시 물으면

출생지는 있지만 고향은 없다고

고향은 태어나 자란 곳

아늑하고 정겨운 추억이 있는 곳

부모와 가족, 친구들의 삶과 기억이 있는 곳

서평자 최종덕은 이 책의 저자 김재현을 1992년 독일에서 처음 만났다. 나의 기숙사 좁은 방에서 몇 날을 같이 지내면서 당시 최대의 문제였던 독일 통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독일 맥주로 시작해서, 성이 안 찼는지 시납스라는 독일 소주를 더 사다가 마시면서 말이다. 독일 통일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반도 통일로 이어졌다. 그는 술도 약한 것 같았고 말주변도 없는 것 같았는데 한반도 이야기가 나오니 열변을 토했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학위논문 막바지 준비를 했었는데, 김재현도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았다. 그 후 일 년이 지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김재현을 서울서 만났다. 역사와 사회로 본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학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 학회는 ‘한철연’이라는 짧은 이름으로 불려지던데, 그 학회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더불어 격정적인 논쟁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중에서 가장 조용했던 사람이 김재현으로 생각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도 겉보기와 다르게 꽤나 열정적인 모습을 비추었다.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도 나도 나이 좀 들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은 한철연 이라는 학술단체에 대한 애정이었다. 김재현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절감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철학적 글쓰기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저려낸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한철연의 역사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남들이 많이 하는 역사철학이 추상적인 관념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그의 철학은 한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간의 칼을 벼르고 있는 그런 역사철학이었다.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는 사별한 그의 아내 이연숙을 기리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 가운데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게 된 청년 시절의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이 숙연해졌다. 앞에서 올린 그의 시 나머지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당신이 떠난 지금 여기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당신이 없는 이 곳

더 이상

고향이 아니네요

이런 시를 쓴 김재현에게 나는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출생지는 한국이나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김재현이 이연숙을 만나 후, 1978년 이연숙이 자유민주선언’ 유인물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김재현은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성동구치소에서의 세 번째 면회,(철창 사이로 멀리 떨어져서) 오늘은 얼굴을 약간 동안이라도 더 볼 수 있었고 직접 얘기도 했다. 졸업논문을 다 썼냐고 물어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뿐…. 만나 체온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두 팔을 벌려 가슴에 안아 뜨거운 눈물을 마냥 흘리고 싶건만, 안타까움은 지속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고통받는 것이 낫지,,,”(책 253쪽) 이연숙의 아픔은 김재현의 아픔이었고, 김재현의 아픔은 우리 시대 모두를 대신했던 아픔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우시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투영되어진 청년의 삶, 바로 이연숙의 강건한 삶이었다. 김재현은 그 아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어를 잃어버리는 극한 상황, 좌절을 통한 새로운 삶에의 욕구, 시대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아니 淑(이연숙)의 고통이 머릿속에 온몸에까지 파고들어와 나도 온몸이 아프다”(책 252쪽) 그런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에의 욕구는 소거될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김재현에게 고향은 새로운 역사의 지평선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연숙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김재현도 삶은 이어갔다. “당시에 나는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니체의 글과 김수영의 시집, 시론집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책 254쪽)

나는 김재현의 책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을 읽으면서 이연숙을 잃은 그의 아픔이 그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고향으로 전화될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한번 읽어 보실 것을 추천한다. 김재현 개인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그 안에서 역사 그리고 삶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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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이파르1

 

■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개인적 고통과 기억에서 사회적 기억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창문 틈을 모포로 틀어막고,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골절되도록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애쓰다,

마지막 순간엔 학생증을 손에 꼭 쥐고 죽어간 아이들,

그 죽음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던 그 아픈 기억들.

세월호 참사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시각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지만, 1년

동안 가장 많이 접할 수 있었던 말은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였다.

 

잊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인간의 뇌 속에서 숙명처럼 반복되는 행위가 이처럼 중요했던 단일 사건이 또 있었을까.

이는 전대미문의 참사에 대한 기억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1년이 지난 이 순간에도 각종 언론 지상과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서 사건의 원인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분석, 애도, 진상 규명의 중요성에 대한 외침 등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의 실체와 폐기 요구에서 보듯,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진상 규명과 선체 인양도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신간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은 전국 곳곳에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사회적 망각과 사회적 기억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중견?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이에 대한 고찰과 분석을 시도한다. 이는 개인적 아픔과 기억들을 넘어 참사의 교훈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과 논의의 한 과정이다.

 

■ 망각과 고통의 바다에서

국가의 ‘인양’으로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개인의 기억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기억으로 자리잡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집단적 기억이 갖는 본질적 가치가 사회구조의 변화와 사회 발전에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가치와 질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대답과 합의 역시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1부 민주주의, 인간 그리고 공동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가 변용, 왜곡되어온 사회 속에서 윤리적 공동체의 건설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데올로기의 사슬과 지배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통한 정권 유지는 아직까지도 후진적 정치 환경의 핵심으로 기능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는 과정에도 미디어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부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참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나간 옛일이 되고 있고, 보수 정치권에서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기억을 위한 공감과 능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세월호 특별위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나 선체 인양과 진상 규명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왜곡하려는 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가족들과 사회 구성원들이 고통을 안고 그 주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매개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자신의 삶을 공적 담론 속에 새롭게 위치시키는 능동적 경험을 함으로써 단순한 망각과 고통을 넘어서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

억할 수 있다고 필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단일한 고통의 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공적 차원에서 바라볼 때 고통의 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억의 새로운 양식이 된다.

-3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

3부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방향과 지점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의식구조의 하나로, 배타적 편향성이 있고 이를 받쳐주는 편향적 유대 문화가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러한 은폐와 광신을 종식시키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공공적 앎을 확산시키는 것이요, 도덕적 직관주의와 공감의 확산이 필요하다.

한편 애도와 진실 규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또 다시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최근 상황을 바라보는 일부 젊은 세대의 시선과 의식이다. 경쟁 교육의 틀 속에서 자라난 그들에게 능력과 실적을 최우선으로 하는 메리토크라시적 규율은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인다. 우리 주변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교육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때, 과거의 시간을 멈추고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기 위한 움직임, 더 나은 삶을 위한 민주 시민 교육의 강화가 절실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 속에 걷혀지지 않는 갈등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더 나은 사회의 건설이라는 차원과 연결시켜 극복하기 위한 작업을 이야기한다. 이는 고통과 슬픔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져갈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묻고 대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필자들은 이 점에서 참사의 기억을 딛고 일어섬과 동시에 외상적 기억은 자연스럽게 망각하면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사회 진보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다시 끌어올리고자 하는 인양이 또 다시 중요해짐을 말하고 있다.

 

이파르3

 

 

세월호 1주기를 성찰하는 한철연 심포지움 및 기념 책 헌정식[한철연 소식]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도서출판 이파르

[망각과 기억의 변증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도서출판 이파르

세월호 1주기를 성찰하는 한철연 심포지움 및

기념 책 헌정식[한철연 소식]

 

강지은(편집주간)

 

지난 4월 11일 이화여대 인문관 111호에서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봄 제48회 정기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번 학술대회는 세월호 1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철학자들의 시대적 고찰에 관한 연구논문 발표가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글을 모은 <세월호, 그 기억과 망각의 철학적 성찰>(도서출판 이파르)의 헌정식을 가졌다.

헌정식은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으로 숙연하게 시작했다. 최종덕 교수는 거리투쟁도 중요하지만 철학자로서 2만에서 2만 5천의 학생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연구협력위원회?이현재 대외협력부장이 소속되어 활동중인?노래패 더한소리의 <미안해>라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영상과 노래를 함께 시청하며 헌정식을 마쳤다.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4기에 초대합니다.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4기

?– 인간을 이해하는 세 가지 시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설 강좌 안내

* 한철연 교육부 세미나- 인간을 이해하는 세 가지 시선

 

기간: 5월9일~7월25일 매주 토요일3시~6시
대상: 철학과 학부 3~4학년 및 대학원생, 한철연 신진회원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1. 류짜이푸, <인간농장>을 통해 본 인간의 맨얼굴

강사: 송종서(경희대 외래교수)

기간: 5월9일~5월 30일(4주)
교재: 류짜이푸, <인간농장>, 글항아리, 2014.

 

2. 헤겔의 역사철학과 현대
강사: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헤겔분과 회원)
기간:? 6월 6일~6월 27일(4주)
교재:? 헤겔, <역사철학강의>, 동서문화사, 2008.

 

?3. 라캉, 욕망의 변증법
교재: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2002.
강사: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기간: 7월 4일~7월 25일(4주)

 

*?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 교육부 세미나의 경우, 전 강좌에 참여해야 함.(부분 수강 불가)
?수업 방식: 강독 및 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 ?메일(pipjc11@naver.com)로 5월 7일까지 자기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공지사항)
?수 강 료:? 없음(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10명, 최소 수강인원 2명, 2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pipjc11@naver.com
?기 간: ?2015년5월 9일~7월 25일 매주 토요일 오후3시-오후6시
?장 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태복빌딩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진보성(방송대)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1. 삶과 죽음, ‘나’와 ‘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의 변화 현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 낮과 밤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구성은 크게 보면 낮과 밤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낮과 밤의 구분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잣대가 있을까요? 물론 기준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낮과 밤의 나뉨에 엄밀한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략 오후 2시를 ‘낮’이라고 할 때 1시간 후인 오후 3시는 오후 2시와 같은 낮이지만 오후 2시에 비하면 조금 더 ‘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낮’입니다. 또 밤 12시는 명백하게 ‘밤’이지만 새벽을 지나 아침을 맞으면 낮을 밝힐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것도 ‘낮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삶을 맞이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시에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삶’과 ‘죽음’이란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구성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간은 서로 분리된 채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른 인간 개체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체들이 모이면 인간 군집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개인성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 고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을 통틀어 우리는 개체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독립된 개체성에 의존해 삶과 죽음을 판단합니다. 인류,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자연적인 우주의 운행이라고 했을 때 이 커다란 구성의 관점을 떠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나’라는 외로운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해결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독립된 ‘나’가 고립된 ‘나’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나’만의 문제가 되면 그 문제에는 ‘나’의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삶’이라는 단어를 듣는 다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희, 생동감, 기쁨, 밝음 따위의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슬픔, 우울, 불안, 어두움과 같은 감정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적 대립은 ‘존재(being)’로써의 ‘삶’과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써 ‘죽음’에 대한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의 대입양상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보다 삶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가 인간에게 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무한한 추구와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둔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소멸해버리는 나약함에 서있는 인간이기에 불안합니다. 이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신(神;God)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 존재의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신은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입니다. 신의 세계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며 또한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하는 세계입니다.
 
 

2. 종교와 선·악의 개념

 
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두 세계를 설정한 기원은 주로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다르게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인간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신은 무한하며 완전하고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된 존재로써 일상의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구도에서 신의 영역은 선에 포함되고 인간의 영역은 악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종교에서 선과 악을 양분하여 구분하는 것을 선악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신론의 이란종교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선과 악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반대로 인도종교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분이 없는 선악 일원론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또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모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엄밀히 볼 때 선악을 둘로 나누어보는 관점과 하나로 보는 관점은 서양과 동양에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여 선악 이원론을 서양종교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된 서양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이분법적 선악 이원론의 전통이 서양종교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강한 이분법적 전통을 가진다고 전제했을 때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특징을 동양, 좀 더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 교단의 종지(宗旨)에 입각해 보았을 때 도교의 ‘도(道)’·불교의 ‘불성(佛性)’등 동아시아의 종교형태에서 말하는 만물의 운행 원리는 이미 모든 사물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자적 유일신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선악 이원론을 동아시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현 세상을 물리치고 새로운 선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미륵사상이나 선천이 가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민중적 혁명사상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서양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서양만 선·악을 논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설정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체제 안에서 강력한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가 종교적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유교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보편타당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면 건전하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극복해야 할 대상 ‘자기(己)’는 곧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극기’라는 개념은 사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욕망의 발단이 되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 ‘극기’하여 일반 인간 대상을 넘어 이상적 경지로 옮겨가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됩니다.

이상적 경지를 설정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BC347)이 현실이 모방하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Idea)를 설정한 것과 비교적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하늘과 같은 이상의 경지에 있는 추상적 선함을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선한 행위를 구현하는 자를 ‘어진 사람[仁者]’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 볼 줄 압니다. 이 때 말하는 ‘나쁨[惡]’이란 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어질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어진 사람이 나쁜 행실을 보이는 악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교화하려는 미움인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교의 예를 들어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선악관은 서양의 이분법적 절대 신의 존재에서 파생된 종교의 선악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종교적인 개념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종교개념 전파로 동서양의 전통적 차이가 현저하게 사라진 현대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상적 세계의 주재자인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됩니다. 악의 발원지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 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외부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며 삶을 고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귀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과거부터 인간을 위협하던 자연재해, 질병, 전쟁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은 유한하고 한계적인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을 만드는 것에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전횡도 한 몫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중들이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갔던 것이었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선을 행하는 대리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있는 가톨릭의 교황, 왕권신수설로 만들어진 국왕, 중국의 천자(天子)라는 명칭들은 신 또는 주재적(主宰的) 자연의 섭리를 대신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무겁습니다. 무거운 이름은 권위를 가진 이름입니다. 무거운 권위는 가벼움을 상쇄하고 짓눌러 버립니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생동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했지요. 중세의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과학과 예술을 장악한 것이 그렇습니다. 1632년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발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재판정에 세운 것도 종교였고, 예술은 종교와 권력 있는 절대자를 향한 찬미의 예술이 되었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그 이전 1600년에는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르네상스시기 자연철학자가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한 이유로 화형 당한 비극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무한 존재인 신의 섭리가 모든 자연물에 그 자체로 생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무한세계 절대자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겁니다. 이미 인간과 신을 나눈 종교는 선과 악을 나누고 현실의 사회정치에서 계급을 통해 인간 스스로를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분류된 인간들을 선별해 선과 악의 가치를 평가하고 소수의 힘 있는 자와 다수의 약자들을 나누어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선한 위치를 선점한 힘 있는 권력자들은 다수의 약자를 악의 영역에 두고 이들을 지배합니다.

[신간] 한중일의 유교문화담론

김예호 신간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사회 전통문화의 중심축인 유교가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유교와 유교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러한 논의들이 현 시점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전반적으로 개괄한 책

 

▣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중일의 유교담론과 유교문화의 정체성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글의 내용은 한중일 3국의 근대전환기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무력으로 충돌한 시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근대 전환기 이후 한중일 삼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유교문화 담론을 개괄하고 있다.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전통사회 유교문화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후, 근대 이후 각 국가의 사회·정치·경제의 흐름과 이에 대응하는 유교문화담론의 특징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구성도 주요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각 시기에 유행한 유교담론의 요지를 소개해 빠른 시간 안에 근대 이래의 한중일 유교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글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 분야의 유교문화담론에 더욱 엄격한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중일 각 나라의 문화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교가 위치한다. 이는 최근까지 중국적인 것과 중국 정체성, 일본적인 것과 일본 정체성, 한국적인 것과 한국 정체성 등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유교가 아직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유교도 미래 사회의 가치에 부응할 수 있게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가 아시아의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 들여다 보기

 

ㆍ 중국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에게 오늘의 ‘유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국 사상계나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인데,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 이 문제에 부쩍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국학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통 유교문화는 중국 문화 부흥론자들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현재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관심사는, ‘아시아적 가치’가 아닌 ‘중국적 가치’, ‘유교 민주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방안에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 공산당이 한편으로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란 이름 하에 유교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유교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화교의 자본력을 유인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 수단이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중화주의의 민족의식 코드로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향후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해 중국을 대표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서 유교부흥을 내세울 가능성은 농후하다.

 

ㆍ 일본 고유의 정체성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화혼’의식과 유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의 ‘화혼’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로 근대 전환기 이후로도 일본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즉, 일본의 ‘화혼’의식은, 막부시대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원시유교와 성리학을 일본화해 정착시키는 과정,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탈아입구의 기치 아래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 메이지유신 중반 이후로는 화혼(和魂)이 양재(洋才)를 주도하는 과정,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대 일본 사회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침체된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향수하는 극우세력의 등장과 이를 방조하는 상부의 정책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혼의식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유교를 포함한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상을 통섭하는 가운데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유학을 수용한 이후 한국과는 달리 중국 고전의 교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유교에서 벗어나 일본만의 유교를 만들고 또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냈다.

이와 같이 일본식 사회문화는 전통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가 긍정과 부정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중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이러한 중첩 과정의 중심에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으로 항상 ‘화혼(和魂)’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 사회를 평가하는 내부의 자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ㆍ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모범적인 유교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도덕과 정치의 결합’, ‘가족주의적 서열의 강조’ 등의 중국 유교문화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 유교문화와는 달리 더욱 철저하게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며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조선은 ‘개량된 중국형’의 유교사회 내지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유교사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황도유학의 본격적인 공세를 받는다. 즉,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천황 내지 국가 공동체를 강조한 일본식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고유한 자기수양의 형이상학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한 유교문화 정략과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박정희 정권의 충효 일본(一本)의 일본식 유교문화의 선전 작업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학문적으로는 최근까지 ‘공동체’ 의식의 강화라는 미명하에 ‘대동(大同)’ 이상의 실현이 한국 유교문화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논의하는 자리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일본 유학에 경도된 한국 유교문화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IMF 이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적 문제나 자아실현의 문제보다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 유행한 공동체라는 집단 곧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만을 중시한 유교자본주의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3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0과 1>에 덧붙임

0과 1의 논의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빠뜨린 사람이 있어요. Spinoza와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 Marx의 이론입니다. 저, 학사학위 논문을 스피노자의 Ethica, 석사학위 논문을 Epicuros 이론을 주제로 삼아 썼어요. Ethica는 다시 정독하고 싶고, 막스의 자본론은 나름으로 제법 꼼꼼히 정독했는데, 막스가 고대원자론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스 이론에 끼친 스피노자의 이론은 제가 알기론 우리 나라에서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 철학계의 동향은 잘 모르겠어요.

막스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세계 인식에 닿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길잡이 구실은 스피노자가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피노자가 말한 ‘natura naturans’와 ‘natura naturata’ 기억하시죠? 제 기억에 ‘能産的 自然’, ‘所産的 自然’으로 번역된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사람들 번역이 아닐까 싶어요. ‘Philosophia’를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이지요.

이 말, natura naturans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연’으로, 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으로 옮겨도 될 것 같아요. 이때 ‘자연스럽게 하는 것’(naturans)은 힘이에요. 이 힘은 동시에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힘이기도 하지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줄을 꼬는 힘을 가리킨다고 봐요. 이 운동의 저 밑바닥, ‘없는 것이 없을 것’과 하나가 되는, ‘없음’에 닿는 그 ‘한계점’(tangent)에서 이 운동의 저 꼭지점 ‘있는 것이 있을 것’과 둘이 아닌 ‘있음’에 닿는 그 ‘한계점’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2중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 ‘확산’하고, ‘응축’하는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마디’에서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 아닌가 해요. 이 ‘마디’는 저마다 ‘페라스’를 나타내지요. 겉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페라스’이기도 하고, ‘기억’(m′emoir)으로 드러났다 ‘망각’(oblibium-이 철자 맞나요?)으로 사라지는 한계점에서 형성되는 ‘페라스’이기도 해요. 크게 보면 모두 힘으로 ‘있는 것’ 1과, 힘으로 ‘없는 것’ 0의 접합점(tangent)에서 나타나는 ‘동요하는 평형’(equilbrium)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당구를 쳐 본 사람은 두 당구공이 한 점에서 맞닿아 있을 때, ‘떡’이다, 아니 ‘스위치’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거예요. ‘페라스’로 얼핏 드러나는 이 ‘점’은 ‘페라스’가 아니에요. 이 ‘점’은 빨간 공에도 안 속하고 하얀 공에도 안 속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무엇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아페이론’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것과도 잇닿아 있고, 저것과도 잇닿아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 붙는가 하면 저기에도 붙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힘, 생성과 소멸의 측면에서 보면 naturans인데,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naturata인 것, 1에서 0에 이르는, 또는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무한한 단계와 과정에서 꼬이고 마디를 이루는 ‘평형’을 드러내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꼬기, 여기에서 1을 원동자로 보느냐, 0을 원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형이상학’과 ‘세계관’이 달라지는데,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리자면 ‘기독교’는 1에 붙고, 불교는 0에 붙어요. 그렇게 보여요.

막스는 베르그송이나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의 힘을 더 크게 보아요. 막스를 ‘유물론자’로 보는데, 크게 보면, ‘물질의 규정성이 의식의 규정성에 앞선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치는 거예요. 밑에서 올라오는 힘을 더 크게 보았는데, 그 힘의 근원이 1에 있다기보다 0에 있다는 것, 아주 비속하게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없는 놈’의 숨은 힘이, ‘있는 놈’의 드러난 힘보다 더 쎄다는 것을,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인간적인 ‘결핍’과 ‘과잉’, ‘있을 것’(아직 ‘없는 것’), ‘없을 것’(군더더기로 ‘있는 것’)의 관계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 만들자.’ 그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평형’이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이 지향점은 ‘오래된 미래’를 꿈꾸었던 노자의 ‘과민소국’, 아주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예요. 그 세상 오면 ‘먹물’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요. ㅎㅎ

 

*다시 0과 1에 덧붙임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 1이 되는 지점에 ‘한계’(peras)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했나요? 이렇게 뭉뚱그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가 되는 지점은 무얼 가리킬까요? 여기에서는 ‘있는 것’, ‘하나’, 1이 앞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스스로는 안 움직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정지’이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 ‘순수형상’, ‘일자’(―者), 신, ‘하나님’이 앞서지요. 그러나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있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청이고, 당위이고,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이자, 우주의 한계인 이 ‘있음’ 밖에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있음’이 허공에 감싸여 있다면, 또 하나의 ‘페라스’인 ‘없음’은 ‘있는 것’에 감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빠지고 또 빠져서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텅 빈 그 무엇, 0집합, 무한한 것, ‘무규정적인 것’, ‘아페이론’의 극한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편에서 이 ‘없음’이라는 한계를 우주의 중심에 놓습니다. ‘있음’이, 1이 확장의 한계선이라면, 모든 ‘생성’이 그 한계선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라면, ‘없음’은, 0은 ‘소멸’이 그 한 점에서 멈추는 응축의 한계점입니다.

‘있음’이 ‘파이’(π)라면 ‘무산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 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소수’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수’가 어느 날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업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수학자들의 꿈은 수의 영역을 0과 1이 거꾸로 뒤집힌 10진법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 야바위 놀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모든 ‘형상’(idea)을 수로 환원시킬 때, 그리스 수학에는 0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을 3으로 나눈다는 터무니없는 셈법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한점으로 수렴되는 극한입니다. 이 극한과 맞닿아 있는, 어떤 것도 두 번 되풀이되지 않고, 어떤 순간도 두 번 지속되지 않는 이 한계점 바로 위에서 ‘여럿’은 숨은 채로 드러납니다. ‘있음’에서는 ‘있을 것’(없는 것)이, ‘결핍’이, ‘빠진 것’이 드러날 듯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지점에서는 ‘없을 것’(있는 것)이, ‘군더더기’들이, ‘과잉’이 ‘생성’의 이름으로 ‘평형’을 깨면서 이루는, ‘에셔’(Mauris Cornelis Escher)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모순의 통일’을 드러내는 그림에서 보여 주는 ‘혼돈’(chaos)이 싹틉니다.

‘드러날 듯이 숨어 있는 모순’과 ‘숨은 채로 드러나는 모순’이 ‘있는 것’을 ‘없음’의 극한까지 끌어내리는 ‘하강운동’을 일으키고, ‘없는 것’을 ‘있음’의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상승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한히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뒤틀리는 매듭, 마디마다 무한히 겹쳐 쌓이는 ‘흔들리는 평형’(equilbrium)의 연속 계단을, 크고 작은, 많고 적은 단계를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드러냅니다. 이 ‘매디’는 ‘마야의 베일’에 싸인 채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사유’의 파편으로 드러나지요. 감각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때로는 ‘흉내’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견해’로, ‘판단’으로, ‘말’로, ‘거짓’으로, ‘속임수’로, ‘믿음’으로 드러나면서 숨고, 숨으면서 드러납니다.

어쩌면 철학은 사람이라는 별난 생성과 소멸의 모순된 응결체가 생명의 탈을 쓰고 벌이는 가장 그럴싸한 거짓과 속임수의 말놀음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종교라는 아편을 키우고 있는 ‘믿음을 통한 세상 편가르기’의 빌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의 뒤통수를 목침으로 내려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여러분의 직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미처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와야겠지요.

‘아파, 이 씨팔놈아! 너 죽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