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의 ‘사회적’ 의미[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상품의 ‘사회적’ 의미-2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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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capital)’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생활이 영위되는 사회형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또는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자본’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본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해하여 이해한 다음, 그 단순한 요소들의 체계적인 조립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자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최초의 실마리 개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자본의 기본적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부(富)’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자본은 그 자체로 일정량의 부 또는 재산을 뜻할 뿐 아니라 더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 해당하는 ‘상품(commodity)’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상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분배-유통-소비의 전 사회과정을 관통하는 기본 요소로서, 사회적 부를 구성하는 ‘세포’ 형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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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의 두 요인: 사용가치와 가치

 

상품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용한 물품(또는 용역)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유용성을 가리켜 상품의 사용가치(use value)라고 한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가치 말고도 또 하나의 성질을 갖고 있는데, 바로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성질, 곧 교환가치(exchange value)를 갖고 있다. 교환을 전제하지 않는 상품은 ‘생산물(또는 생산품)’일 수는 있어도 ‘상품’이라고 불릴 수 없다.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아울러 교환가치라는 두 요인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래서 유용한 갖가지 감각적, 물질적 성질을 가리킨다. (쌀, 상의, 집 등의 사용가치) 그러나 상품의 교환가치는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자연적 성질이 아니다. 교환가치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교환가치는 우선 어느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양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두 개의 상품, 예를 들어 쌀과 상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쌀 20kg이 상의 1벌과 교환된다고 하면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데, 이 등식은 이들 상품의 교환가치가 같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쌀 20kg = 상의 1벌’이라는 이 등식은 같은 크기의 공통된 무엇인가가 두 가지 다른 사물 안에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물들의 양적 비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들이 공통의 질(質)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과연 쌀 20kg과 상의 1벌 속에 들어있는 ‘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란 무엇일까?

쌀과 상의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공통의 속성은 상품의 자연적 속성일 리는 없다. 다양한 상품들이 교환된다는 사실은 그 상품들의 사용가치, 곧 자연적 속성이 남김없이 제거(=抽象)되어 공통의 속성으로 환원되고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가 교환가치에만 주목하면 모든 상품들 사이에는 사용가치상의 어떤 차별이나 구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모든 상품을 같게 만드는 공통된 성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노동생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쌀과 상의는 둘 다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아무 차이가 없고 똑같은 사물이다. 단, 여기서 노동이라고 할 때 이 노동은 경작노동이라든가 재봉노동과 같은 유용한 물품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형태의 노동이 아니다.

구체적 유용 노동은 그 형태와 질이 서로 다르므로 상품들에 내재하는 문제의 그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없다. 곧 구체적인 지출 형태와 무관하게 단순히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의 지출이라는 의미의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 이것만이 모든 상품들의 공통의 속성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체노동을 추상한)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 모든 상품에 내재하는 공통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공통의 속성이 바로 가치(value)이다. ‘교환가치’는 한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가 다른 상품들과의 교환관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가치의 현상형태’를 말한다.
어떤 물적 존재는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가 있다. 천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과 같이 그 효용이 인간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특정한 물건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사용가치 곧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이라는 절차를 통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야 한다. 상품 가치는 이와 같이 상품과 상품을 만들어낸 노동의 ‘사회성’을 실증하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가치가 없는 생산물 또는 교환에 실패한 생산물은 사회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고, 나아가 그 생산물을 생산한 노동 역시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실증한다.

이제 분명해졌듯이, 어떤 상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그 안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추상적 노동의 양에 의해서 결정된다. 물론 노동의 양은 노동 시간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크기는 결국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단 이 경우 노동시간은 개별 생산자가 실제로 소비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표준적인 노동조건과 노동숙련 및 노동강도의 사회적 평균도를 가지고 어느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말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의 생산성이 변함에 따라 당연히 변동한다. 노동의 생산성 그 자체는 특히 노동자의 평균적인 숙련도, 과학과 그 응용의 발전단계, 생산수단의 이용범위 및 자연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떤 상품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단축되고 그 가치도 그만큼 작아진다.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의 양에 정비례하고 노동의 생산성에는 반비례하여 변동한다.

칼 마르크스(1818 ? 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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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치형태의 발전

 

앞서 확인했듯이, 상품은 사용 대상인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라는 이중적인 물건인 한에서 상품이다. 상품은 자연형태(natural form)와 가치형태(value form)라는 이중 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이다. 문제는 사용가치의 대상성과 달리 가치의 대상성(value-objectivity)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나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비틀고 세밀히 관찰해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가치물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가 순수하게 사회적 현실을 갖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성의 획득은 상품들이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가치라는 것이 상품과 상품의 사회적 관계로서만 나타난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진다. 이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점은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가치관계에 함축되어 있는 가치 표현의 발전과정을 추적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화폐의 수수께끼도 마침내 풀리게 될 것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단순한 가치형태에 주목해 보자.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x량의 상품 A는 y량의 상품 B의 가치가 있다

예) 쌀 20kg = 상의(上衣) 1벌
(쌀 20kg은 상의 1벌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보듯이, 쌀이라는 한 단일 상품의 가치 표현은 상의라는 다른 상품과의 가치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종류의 상품은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상의는 그 표현의 재료가 된다. 전자는 능동적 역할을 하고 후자는 수동적 역할을 한다. 즉 쌀의 가치는 (상대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relative value form)로 표시되고 있고, 상의는 (쌀의 가치를 직접 표현하는) 등가형태(equivalent form)로 존재한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서로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이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 표현의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적인 양극이다.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는 오직 상대적으로만, 즉 다른 종류의 상품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다른 어떤 상품이 그것에 대해 등가형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등가형태로 등장하는 이 다른 상품은 동시적으로는 상대적 가치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극단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가치형태의 양극인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위의 예에서 가치가 표현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쌀이라는 상품이다. 쌀 20kg의 가치가 자신과 상의 1벌의 가치관계 속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라는 양극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치 표현에서 쌀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존재를 상의라는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를 빌려 표현한다. 다시 말해, 쌀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상의라는 상품의 자연형태를 빌어 그 자신의 사용가치와 구별되는 ‘자립적’ 존재형태를 획득하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의 사용가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용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물질적, 감각적으로 구별되지만, 가치로서의 쌀은 상의와 동등한 것이며 따라서 상의와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쌀은 자신의 자연형태와 구별되는 가치형태를 획득하게 된다.

등가형태에서 보게 되는 첫번째 특성은 사용가치가 그 대립물인 가치의 표현형태로 된다는 점이다. 한 상품의 상대적 가치형태는 자신의 가치 존재를 그 물질적 속성과 완전히 구별되는 다른 상품과 등등한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이 표현 자체는 그것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감추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등가형태의 경우에는 그와 반대이다. 등가형태는 어떤 상품, 곧 있는 그대로의 물적 존재가 가치를 표현하고 따라서 그 자연 형태의 모습 자체로 가치형태를 띤다는 사실에서 성립하므로, 마치 그 등가형태라는 속성을 본래부터 지닌 듯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등가형태의 수수께끼이며, 이 등가형태가 완전히 발전되어 화폐의 형태로 전개될 때에 그 수수께끼는 비로소 모든 사람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참고: 구체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추상적 인간노동의 현상형태로 된다는 점 그리고 사적 노동이 그 대립물인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형태의 노동으로 나타난 점이 각각 등가형태의 두 번째, 세 번째 특징을 이룬다.)

상품 A의 가치는 상품 B가 자기 자신과 직접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 상품 B에 대한 가치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품 A의 가치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가치관계 속에서 상품 A의 자연형태는 사용가치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갖고, 상품 B의 자연형태는 가치형태나 가치 모습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한 상품 속에 갖추어져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대립이 하나의 외적 대립을 통해 표시된다. 즉 자신의 가치가 표현되어야 할 한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직 사용가치로서만 인정되고, 그 가치가 표현되는 다른 쪽의 상품은 직접적으로는 오로지 교환가치로서만 의미를 갖는 두 상품의 관계를 통해 표시된다. 따라서 어느 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그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내적 대립이 겉으로 드러난 외적 대립의 형태다.

모든 노동생산물은 어떤 사회 상태에서나 사용 대상이다. 그러나 사용물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을 그 물적 존재의 대상적 속성으로 표시하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하나의 발전단계에서만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轉化)된다. 그러므로 상품의 단순한 가치형태는 동시에 노동생산물의 단순한 상품형태이고, 그리하여 상품형태의 발전은 가치형태의 발전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치형태의 발전은 화폐형태를 거쳐 자본형태에 도달할 때 최고 단계에 이르게 된다.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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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강좌의 강의록을 연재합니다.

????| 운영기간 : 2013년 4월 4일(목) ~ 7월 18일(목) (총 15강)?????? 매주 목요일 19:30~21:30

?????| 장?? 소 : 광진정보도서관 도서관동 1층 이야기방
?????| 대?? 상 : 성인, 50명
?????| 주?? 최 : 광진정보도서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건국대학교
?????| 주?? 관 : 문화체육관광부 도서관정보정책기획단
?????| 후?? 원 : 알렙출판사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영향을 준 인물들을 물으신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분들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칼 맑스, 페르낭 브로델(아날 학파), 요셉 슘페터, 칼 폴라니, 일리야 프리고진(신과학 운동) 그리고 프란츠 파농.”

월러스틴은 세 영역에서 세계체제 분석에 관하여 글을 썼습니다.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지식의 구조가 그 세 영역입니다. 다음과 같은 책들이 이 각각의 세 영역에 대응합니다. <근대 세계체제 3부작>, <유토피스틱스, 21세기를 위한 역사적 선택들> 그리고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들>.

이매뉴얼 월러스틴 ?프레시안

·『세계체제 분석』(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이광근 옮김_ 당대)


이 소책자는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부터 세계화와 이에 대한 반작용인 테러리즘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 체제로서 이해하는 월러스틴의 연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입문서이다. 세계체제 분석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상자들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하여 부상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이다. 사회 현실은 신과학 운동에서 말하는 복잡성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다. 이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 세계체체 분석이다.

·『자유주의 이후』(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_ 강문구 옮김_ 당대)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이에 대해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 사건들은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그 자신의 논리 때문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궁지에 몰렸다. 자유주의는 인권의 정당성과 민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 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공개되면 이익을 많이 얻지 못하거나 손해 보는 계급들에게 이 체제는 정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체제의 정당성이 사라진다면 체제는 존속하지 못한다. 이러한 위기는 총체적인 것으로, 이를 극복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만들 새로운 역사 체제는 아마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체제는 아닐 것이다.

1. 월러스틴에 따르면 긴 16세기(1450-1640년)에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이후 세 번의 역사적 전환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1) 16세기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의 탄생, 2) 1789년 프랑스 대혁명, 3) 1968년 세계 혁명(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즉 중도 자유주의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 여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콩종크뒤르(국면)적인 역사적 전환점으로 1) 1989년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몰락(실은 자유주의의 몰락의 반증), 2) 2008년 美國發 세계 금융 위기가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려면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거한 개항,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민주화운동과 1961년 5?16군사정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IMF외환위기 등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들입니다.

2.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는 법칙정립적인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개성서술적인 실증주의적 역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구조와 역사의 변증법의 결과로 나타난 주기(cycle) 개념으로 19세기 사회과학의 기본 전제인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며,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근대 세계체제(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합니다. 그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론입니다.

3. 역사와 관련된 네 가지 시간 개념이 있습니다. 부수적이고 진정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실증주의적 사건적인 또는 에피소드적인 역사와 신화에 불과한 영원불변의 구조 대신에 역사적으로 장기 지속하는 구조적 시간과 그 구조 안에서의 중기적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조적 시간으로는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로 대변되는 근대 세계체제의 탄생과 소멸의 기간이 대표적이고, 주기적 과정으로서의 시간에는 콘트라티에프 주기(50-60년 동안의 상승과 하강의 두 국면으로 이루어진 장기 파동 주기)가 대표적입니다.

4.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재규정(맑스로 다시 돌아가기)을 시도하여 임금노동 중심의 생산 일변도와 교환관계라는 유통 중심의 일면적 분석을 넘어서 제3세계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핵심적인 생산과정과 주변적인 생산과정으로의 분업으로 세계체제를 분석함으로써 국민국가중심의 분석틀에서 벗어납니다. 상품이 독점적일수록 핵심에 속하고 경쟁적일수록 주변에 속하게 됩니다. 독점적일수록 자본가에게 돌아갈 잉여가치의 몫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를 시장과 동일시하고 않고 독점과 동일시합니다. 자본주의는 반시장입니다.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는 자유 경쟁 시장이란 ‘인민의 아편’에 불과하고 현실의 시장은 그런 모습을 띠지 않습니다.

5. 근대 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는 기존 체제에서 지구적인 잉여가치를 공유하는 인구의 수가 팽창되어 자본가들이 더 이상 이윤을 창출하기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신자유주의는 헤게모니를 잃어가고 있는 미국의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혁명을 빌미로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르고 기존의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보수주의자의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모순을 해결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 대신에 현실적인 역사적인 대안체제를 성찰함으로써 (물적인 불평등의 해소라는) 역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유토피아학이 있어야 합니다.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알렙

 

아프리카 연구에서 세계체제 분석으로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 Wallerstein)은 195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아프리카 연구로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전공과는 무관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발상과 ‘근대 세계체제’라는 개념 덕분이었어요. 이 개념들은 1968년에 일어난 세계 혁명*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대학 강단에 섰고, 1968년 세계 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면서 아프리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아프리카 신생국들에 대한 연구인지라, 항상 신문 표제(신문이나 잡지 기사의 제목)를 뒤쫓아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시사적인 성격이 강한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더욱 깊이 있는 역사적 시야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서유럽의 국가들도 신생국 시절이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신생국이던 시대의 서유럽 국가들을 연구해야겠다는 발상을 하게 된 거죠. 대략 16~17세기, 곧 근대적 국가 구조가 형성되던 시대 말이에요.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적인 관점에서 근대 세계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역동성을 밝혀 낼 수 있었던 겁니다.

한편 그가 연구에 몰두한 때는 정치적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어요. 게다가 1968년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서방 세계에서 대규모 사건이 최초로 터진 곳이 바로 컬럼비아 대학이었습니다. 파리의 학생 봉기보다 한 달 앞서 일어났지요. 학생들이 내세운 주된 쟁점은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베트남 전쟁 문제였는데, 대학이 국방부와 다른 정부 기관을 위한 베트남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등 전쟁에 연루되어 있다는 거였어요. 둘째는 인종 차별과 관련된 내용으로, 컬럼비아 대학이 흑인 지역 사회가 사용하는 공원 땅을 사들여 체육관을 지었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수들이 재빨리 모임을 만들어 중재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이때 월러스틴은 이 모임의 공동 의장이었습니다. 일주일 뒤 학교 당국은 경찰 개입을 요청했고, 경찰이 학생들을 대학 건물에서 내쫓으면서 그들의 더 큰 분노를 불러왔죠.

학생 운동 사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월러스틴은 컬럼비아 대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예일대 석좌 교수이자 뉴욕 주립대 산하의 ‘경제, 역사 체제 및 문명들의 연구를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뉴욕 주립대 빙엄턴 캠퍼스에 위치)의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죠.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현대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대표적인 역사가로, ‘프랑스 아날학파 세계 사회 학회(ISA)’의 회장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 ?1968년 세계 혁명- 1968년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이들은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베트남전 같은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드골 정부에 항의해 400여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68 혁명의 영향으로 체제가 흔들린 드골 정부는 이듬해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패배했다.
** 아날학파-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처음 만든 역사 잡지 〈경제 사회사 연보〉(Annales d’histoire ?conomique et sociale, ‘아날’은 연보라는 뜻임)를 중심으로 모인 역사학자 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은 근대 전통 역사학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해 생활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여, 1970년대 이후 세계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사회 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월러스틴이 1968년에 일어난 대규모 사태를 ‘세계 혁명’이라 부른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미국을 비롯해 서유럽과 아시아, 동유럽,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벌어졌죠. 형태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되풀이되는 두 가지 공통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구(舊)소련’이, 외견상으로는 대단한 적대자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공모 관계라는 사실이었어요. 그리고 둘째는 반항하는 모든 사람의 주된 과녁이 자유주의적 보수(우파)가 아니라 ‘공산주의적 진보(좌파)’라는 점이었죠. 곧 1968년의 혁명 세력은 구(舊)진보 세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았어요. 구진보는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한 거죠.

이러한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통 주제는 그의 표현대로 하면 ‘세계체제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geoculture, 전 지구적으로 대부분 받아들여지는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인종주의, 성차별)를 들 수 있어요. 이는 과거의 인종 혐오주의나 가부장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제체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실제로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의 세계 지도를 보면, 아주 많은 나라에서 진보를 대표하는 공산당 아니면 사회 민주당,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권력을 잡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1968년의 사태는 진보 세력이 권력을 잡아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거나 다름없었죠. 이로써 자유주의적 합의를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현실에서는 사라진 구(舊)자유주의가 다시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출현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방임주의와 시장 제도를 통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은 1968년 이전만 해도 미국 학계의 우스갯거리였어요. 그런데 1970년대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대하더니 1976년에는 노벨 경제학상까지 주었죠. 그 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프리드먼과 관점을 같이하는 경제학자들이었어요.

결국 1980년대 말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에 부활한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월러스틴은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진보 세력이 새로 대두할 공간도 열렸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제기한 ‘세계체제 분석(world-systems analysis)’ 작업이 호응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였죠.

월러스틴은 『세계체제 분석』에서 30년 동안 계속해 온 자신의 작업을 총괄적으로 요약하면서,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들에 대해 간략하지만 종합적으로 반대 입장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는 일련의 지적 개념들이 기존의 사회 과학 전반을 지배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회 과학을 ‘탈사고(unthink)’ 해야 한다고 말하죠. 탈사고란 기존의 지배 관념들로부터 사회 과학을 해방시키자는 의미로, 진보적 사회 과학의 출발점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계체제 분석’ 작업에서 월러스틴은 무엇보다도 분석의 단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어요. 종전에는 하나하나의 민족 국가를 분석의 단위이자 별개의 실체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각각의 나라가 일종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있다고 주장하는 서구 중심적인 발전 단계론에 알맞은 전제였죠. 낮은 계단에 있는 비유럽 국가들이 위에 있는 서유럽의 선진국을 학습하면서 위쪽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거였어요. 이러한 생각은 근대화 또는 선진화 논리의 핵심이 됩니다.

이와 달리 월러스틴은 어떤 국가들이 아래 있는 건 다른 국가들이 다른 곳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곧 위아래가 모두 하나의 체제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므로, 국가 단위의 분석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월러스틴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연구했어요. 더 나아가 세계체제에는 경제 외에 그 나름의 정치적인 구조, 곧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가 있고 주도권(hegemony)의 발흥과 쇠퇴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죠. 이와 더불어 그는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는 반체제 운동들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1세기의 역사적 선택

 

학문적 연구와 더불어, 월러스틴은 우리에게 정치적 실천에 나설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죠. 이와 관련해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 러시아 태생의 벨기에 과학자로, 197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음)의 ‘복잡성 연구(complexity studies)’ 분야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연구를 자연 과학, 곧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지식 운동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이 아이디어들을 자신의 작업에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지를 연구했습니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한 체제 또는 체계가 균형 상태로부터 멀리 움직여 갔을 경우 체계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아니, 못한다기보다 진동이 너무 커져서 분기(分岐, bifurcation)가 일어납니다. ‘분기’란 과학자들의 전문 용어인데, 갈라지면서 이쪽으로 갈 수도 저쪽으로 갈 수도 있어서 어느 쪽으로 갈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쪽이나 저쪽으로 약간의 힘이 더해지기만 해도 아주 그리로 가게 되는 거죠.

월러스틴은 현재 세계체제가 위기와 혼란의 상황을 맞았다고 진단하고 있어요. 이와 관련해 우리는 이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목격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에 대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 )의 영화 같은 공습은 물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투기 세력 등 곳곳에서 높은 수준의 폭력이 자행되고 있죠. 따라서 우리는 이런 체제의 위기 속에서 분기의 두 방향 가운데 어느 곳으로 진행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월러스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인 동시에,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이 뜻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