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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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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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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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 이런 사회의 변화 때문에 정말 잘 사는 삶의 의미를 잊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던 원형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위세에 눌려 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은 어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현대라는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경오염, 문명오염, 정치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오염이 이미 퍼져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쓸려간 땅에도 그 다음 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죽어 가는 삶에 풀먹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고”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그러면서도 더불어 “함께 하는” 자연(自然)을 생각하고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삶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염된 틀에 너무 쉽게 면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억지로” 그리고 “남에 기대는” 그리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거나, 산업문명을 거부하여 원시생태로 돌아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작은 희망이고 구체적인 실현가능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억지로” 그리고 “남이 시키고 남에 기대는” 모순된 삶의 벽을 하나 하나씩 깨트리고, 그래서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같이 걷고 함께 마련하며 어울어 숨을 쉬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의 공간은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고 하는 문화공간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의 흐름대로 저절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삶, 그리고 우리의 자연과 함께 또한 남과 함께 두고두고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의 지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적게 쓰면 된다. 그리고 둘째로 이왕 썼으면 그 쓴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한 개인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공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접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을 말하기 전에?자연을 죽어 있는 물질로만 보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하나로서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모여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철학의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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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소외와 소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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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의 양상은 조심해서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서나 길거리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뉴스 감으로 되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인의 개성을 찾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매체에서 말하는 개성은 편협한 개인주의와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의 농락에 빠진 개성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이제 자기만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공격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가 지니는 관계의 끈을 모조리 끊어 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끈이 없어진 나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볼 때 쓰레기를 대충 버리고 마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자아상실 혹은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의 성곽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투영하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그물망이란 상업주의나 개인주의의 맹목적인 희생물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양식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 http://laborhealth.or.kr/28730

물론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서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합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적인 나를 찾기 위하여 먼저 할 일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도 포함합니다. 시간적으로 먼 남을 같이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환경을 생각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역사적 타인은 나의 자손과 지구 저편 사람들의 자손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멀리 있는 남까지도 생각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나도 비로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대를 보통 정보사회라고 말합니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과학의 산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교통과 통신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습니.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불필요한 소비만을 낳게 하는 거대한 상업주의를 거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만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세계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보통 신화적 자연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우리의 자연을 전부 그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형성되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팽배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오만함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자연을 갖고 자연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근대과학을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주의 전략에 빠져 이기적 개인주의를 마치 개성의 표현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주체성인 양,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의 흔적이 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정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위기와 더불어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해 가고 있다는 징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현재의 환경위기를 대처하는 일은 사실 눈감고 아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인간의 소외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성을 팽개치고 관계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끈을 쓸데없이 꼬거나 끊어버리고, 개인들의 경쟁과 탐욕으로 모인 어설픈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럴 뿐인데 뭘 야단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합니다.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인 것입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의식 오염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어떻게 헤쳐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 개량주의도 그 해결의 작은 방도일 수 있지만 환경위기가 인간위기의 한 단편임을 깨닫기에는 모자랍니다. 결국 궁극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문제, 사회민주화의 문제, 경제 정의의 문제 등을 올바르게 보고 그에 따른 실천의 생활관습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소비의 문제를 따져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왜 소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소비는 문제일 수도 없고 문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소비는 더 나은 문화적 창조를 위한 것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이러한 연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철학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산림을 무차별하게 깎아 먹는 골프장과 한강변이나 신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 축사오염, 염색공장의 폐기물, 과대포장, 일회용품 사용을 반대하는 실천적 운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시설물이나 제품이 나와야 하는 모순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성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소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피적 현상에 얽매어 있다면 결국 개발 최상주의라는 환상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를 다시 청소년 문화로 돌려봅시다. 소위 신세대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이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마취제 기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과소비 행태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소비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소비성향의 사회적 풍조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소비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고정된 정관사가 아니고 우리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부정관사의 모습입니다.?

소비 문제와 관련하여 에너지 생산과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존자원 에너지를 계속 늘려가자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존자원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 늘려 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구호를 계속 외치는 일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에너지 생산의 한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욕구이며 둘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된 에너지이며 셋째는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물질의 오염과 의식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의식의 오염은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낳게 되며 다시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대하여 오로지 앞의 둘째 문제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안전하다느니 발전소 건립의 충분한 경제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만을 하는 개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셋째 문제가 중요합니다. 순전하게 경제적 이유만을 따진다해도, 핵발전에서 생기는 저준위,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의 처리비용을 계산한다면 핵발전의 경제적 타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미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핵발전 시설계획을 전면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핵발전소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기 때문에 구조물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한 후에 아파트처럼 재건축할 수도 없고 폐기해야 하는데, 이 때 건축 폐자재인 콘크리트 조각 하나하나 모두가 영구히 보존해야할 방사능 누출오염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핵폐기물 처리에 드는 경제적 비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제적 이유를 떠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립으로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초과된 소비이며, 그 소비를 향유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회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파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의 오염은 핵 쓰레기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갖고 또 얼마나 많은 ‘문명의 잔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개발주의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지금 같은 소비형태와 문화양상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이어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의 근본 원인은 위기를 낳은 사회적 요인에 대하여 근원적인 치료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단순이론으로만 풀려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난국을 푸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경제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제단위인 주체인 소비자의 맹목적인 소비 행태들을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소비의 맹목성을 부채질한 기업의 소비 유도논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의식오염을 정화하기 전에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정착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이해 없이 개인의 환경구호만을 강조하면 지하철과 공원과 길거리는 깨끗해질지라도 기업의 일회용 포장지와 화학적 제품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도쿄의 길거리는 정말로 깨끗하지만 1인당 일회용품 사용량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쓰레기 분류가 잘 되기는 하지만 사회의식이 결여됐다면, 지금의 검측기로 측정이 어려운 다이옥신은 소각로 굴뚝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며, 원자력 에너지가 청정에너지라는 정부의 홍보가 승리하여 여기저기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님비현상을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라고 계속 몰아붙이면서 행정편의주의로 가거나 기업가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폐기물 이동금지협약은 유명무실해져서 국가간 기술이전과 경제원조라는 명목 아래 힘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우선한 특정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이동이 더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시장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FTA 체제 국제경제의 흐름은 시장경제기준을 몇몇 힘 있는 선진국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논리와 전체논리 사이의 괴리는 경쟁과 이기주의, 약육강식과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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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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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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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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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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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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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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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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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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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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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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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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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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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언어가 지워버린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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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준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외국유학을 갔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양육의 문제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 후에는 전업주부로 가사와 양육을 도맡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과외지도를 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아이의 학교에서 급식을 나누어주는 자원봉사도 한다.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아직 형편이 어려운 시간강사이다. 일하러 갈 때면 그녀는 이웃에 아이를 맡긴다. 대신 이웃의 아이들에게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다. 부모/시부모가 아플 때 간병을 담당하는 것은 항상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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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주의를 둘러보면 조씨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공식적인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GDP든 GNP든 어떤 경제적 용어도 조씨가 수행하는 종류의 노동을 생산 활동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통상 그녀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화폐의 거래나 공식적 시장과는 상관이 없기에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화폐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외지도 역시 공식적 시장거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씨가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양육, 과외지도, 자원봉사, 품앗이, 간병은 생산 노동이라고,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갖지 못하는 사적인 활동일 뿐인가? 조씨의 노동을 경제와 관계없는 사적인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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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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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굳어진 공/사 구분법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경제적 영역과 비경제적 영역이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봉건시대에 가정은 사회적 신분과 유산이 계승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경제활동의 공간이었으며 여기서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 중심의 임노동 영역으로, 가정은 시장중심의 경제관계 밖에 존재하는 친밀성, 인간관계, 사랑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관계는 친밀관계로부터 분리된다. 경제적 활동은 오직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노동을 사고파는 행위와만 연관되며, 가정은 경제활동이나 이해관계와는 동떨어진 숭고한 친밀성의 영역이 된다. 즉 가정에서의 활동은 노동이기보다 사랑의 표현이며, 가족, 이웃의 관계는 이해관계 중심의 경제적 관계이기보다는 규범적 태도가 중시되는 인간관계로 간주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담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가령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강력한 자본주의가 여성의 가내 노동 및 친밀관계를 자기존립의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시장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활동은 강력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된 것으로 혹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지지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 편으로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을 소비의 공간으로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가정이 자본주의에 의해 식민화되는지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분석은 강력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사적인 인간관계 나아가 사회적인 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의 근저에는 가정 내에서의 활동이 공식적인 경제활동과는 분리된 사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여전히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담론에는 가정에서의 활동이 생산 활동이라기보다는 생산 활동을 보조하는 재생산 혹은 소비활동이며, 이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경제 원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전제들로 인해 자본주의적 시장 밖에 존재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경제적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 수동적 대상이기에 그녀들의 정체성은 공식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맺고 있는 남편의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되곤 하였다.

만약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논리를 조씨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조씨의 다양한 활동은 경제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친밀성의 표현이다.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친밀성의 이름으로,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관계에서의 이러한 희생의 결과는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 한다. 그녀의 애정 어린 봉사와 희생으로 남편의 노동력은 재생산되며, 아이는 미래의 노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경제적 생산자가 아니다. 그녀가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자로서 혹은 소비자로서일 뿐이다. 그녀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할 어떠한 대안적 생산의 힘도 갖지 못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에 의해 이용되고 침탈되는 수동적 대상일 뿐이다.

결국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조씨와 같은 여성을 경제의 언어에서 지우거나 경제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강등시킨다. 이분법을 고수한 채 여성을 사적인 영역으로, 비경제의 영역으로 감금하는 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은 비존재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밀 관계 내에서의 여성 활동은 비경제적 활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분법 안에서 경제는 어떻게 정의되기에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노동으로, 경제활동으로 규정해 줄 수 없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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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본주의적 경제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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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blog.daum.net/yyy8525/124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경제에 대한 관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경제체제란 곧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깁슨-그래함(Gibson-Graham)이 분명하게 지적했듯 주류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도 경제적 분석의 대상은 곧 자본주의였고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유일한 그리고 본질적인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자본중심적 경제일원론으로 인해 여성의 일상적 활동은 경제 언어에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간파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였다. 델피는 논문 「주요한 적」(1980)에서 결혼 내에서 가사노동은 남편의 임금과 함께 가족 생존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상품생산과 관계없다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혹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진단한다.(Christine Delphy, “The Main Enemy”, in Feminist Issues, Summer 1980, p. 26.) 가사 노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모두를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가족 개개인의 고유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그 노동에 대한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는 레오나드와 함께 저술한 1992년의 논문 「가족적 착취: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결혼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서 가내 생산을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경제 일원주의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즉 델피는 “이중 체제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진 입장을 개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외에도 가부장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내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Christine Delphy and D. Leonard, “Familiar Exploitation: a new analysis of marriage”, in Contemporary Western Societies, Cambridge: Polity Press, 1992를 참고하시오.)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가사노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부차적인 체제가 아니라 독자적 관계 즉 가부장적 관계에 따르는 “생산” 양식이다. 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의 경제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델피의 이중 체제론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의 사례를 분석해 보자. 분명한 것은 조씨의 가정 내 노동을 순수 사적인 것 혹은 비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여기서 폐기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씨의 노동은 생산노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의 거래를 전제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생산 활동이다. 조씨가 가족을 위해서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이웃의 아이들에게 수행하는 영어,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그녀는 가내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의식하는 한 자신의 노동이 착취될 때 저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신의 잉여노동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의 모순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 모순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체제론”은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델피는 가부장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양자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만약 델피가 자본주의를 여전히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율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를 벗어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델피는 경제 이원론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당시 자본중심적 경제학에 정향된 경제 일원론자들은 여전히 가내 생산양식을 자본 연관적 이론형식을 통해 설명할 것을 그녀에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요구 앞에서 델피는 어려움을 가졌다. 예를 들어 그녀는 가내 생산양식 역시 자본의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경향을 갖는 경제시스템으로 설명해야한다는 요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즉 그녀는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이 있다는 생각에는 도달하였지만 이 다른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가들의 반론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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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의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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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경제형식과는 다른 경제형식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형식들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형식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내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활동을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야하며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대안적 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가능성을 이론화할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J. K. 깁슨-그래함(Gibson-Graham, 깁슨ㅡ그래함은 캐서린 깁슨(Katherin Gibson)과 줄리 그래함(Julie Graham)이 함께 만든 공동의 필명이다.)이 제안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깁슨-그래함은 그 누구보다도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는 정치경제학 이론들이 가정경제와 같은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들을 이론의 전면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남근중심적(phallocentric) 담론이 남근을 인간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표로 간주하면서 남근과 다른 모든 것들을 타자로, 결핍으로 배제해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이제 타자로 배제되어왔던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론화하고자 할 뿐 아니라 이러한 활동이 갖고 있는 긍정적 잠재력을 발굴하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의 이러한 작업은 델피의 이중 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편으로 그녀들은 델피가 가내 생산양식과 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형식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델피가 또 다른 본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 밖에 존재하는 한 여성은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또 하나의 본질에 따라 파악된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이 보기에 여성들은 가족 관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연루되어 있다. 여성들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은 여성을 가부장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보는 델피의 방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여성은 통일체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깁슨-그래함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여성의 타자성은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이다. 즉 여성의 타자성은 항상 복수이다. 버틀러가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시피, “여성”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수행성의 결과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본질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통일적 실체가 아니다. 이리가레가 여성을 “두 입술”로 비유했던 것도 여성이 단 하나의 매끈한 형태를 갖는 남근과는 다른, 그 자체의 내적 차이를 갖는 여성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어떤 내용적 동일성을 갖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은 단수로서의 여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의 관점에서 기존의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깁슨-그래함은 복수적 타자의 관점을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핵심으로 삼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여성을 가내 생산 양식과 같은 어떤 하나의 타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관련하여 다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의 <표1>을 통해 그녀들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경제형식들을 살펴보자(ibid. p. xiii. 이 표는 가로가 아니라, 세로줄 아래위로 읽는 것이다. 예컨대 비자본주의적 활동도 시장지향적일 수 있다.)

거래

노동

기업

시장

임금

자본주의

대안적 시장

공공재의 판매

윤리적 “공정무역” 시장

지역유통체계

대안 통화

지하시장

협동조합형 교환

물물교환

비공식시장

대안적 지급

자영업

협동조합

기식노동

호혜적 노동

현물지급

복지급여형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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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국영기업

녹색자본가

사회적 책임 기업

비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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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장

가계 흐름

선물

토착적인 교환

국가 할당

국가 전유

이삭줍기

수렵, 어업, 채취

절도, 밀렵

미지급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

마을 노동

자원활동

자기재충전형 노동

노예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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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본주의적

공동체적

독립적

봉건적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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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2. 삶-정치의 대안들: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 연계하기, 투명성 요구하기, 인권주장하기/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한 경쟁으로 형성된 현재의 경제적 결과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과 맞물리는 산업혁명을 근간으로 한다. 산업혁명 전후의 자본가는 청교도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엮어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루터나 캘빈의 소명론을 직업 소명론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촉발시키는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출발점을 지닌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발상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신의 소명’으로서 직업 소명은 어떤 경제 활동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무조건 부를 축적하고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의 순수한 노동 행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 격차 문제는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이 만민 평등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부르짖은 개념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점을 상기해도 이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자유와 평등만을 부르짖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박애’라는 용어도 동시에 작동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들이 중인 계급들이었고, 그들은 중인 계급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라는 발상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동체를 배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통해 빈부 격차가 생겨도 ‘박애’를 통해 ‘공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이미 프랑스 혁명에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중인 계급들이 결국 초기 자본가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야기하지만, 그 근간을 만든 초기 자본가들이 ‘박애’를 인간다움의 기본 개념으로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자.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처럼, 삶의 공동체로서 경제 공동체의 가능성, 공존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규모 집단의 행위를 통해 보편화하자는 발상은 역사적 문맥을 지닌다.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세계경제는 공동체적 삶, 공존의 삶을 거부하지만, 그 출발점에서 원래는 공존의 삶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 측면들이 희석되고 망각된 채 여기까지 흘러왔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세계 경제의 방향은 그런 발상들과 배치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빈부 격차가 어떤 상황으로까지 이어질까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경제가 악화된다면, 민주주의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찍부터 이것을 통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그의 정언명령의 근간인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말이 현실에서 철저히 관철되기를 바랐던 철학자이다. 그런데 당시에 펼쳐지는 상인 자본주의를 목도하면서, 그의 정언명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칸트는, 비록 어떤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이어도, 경제적 빈곤이 심하면 동시에 인간다움이 파괴된다는 점도 간파한다. 민주적 요소가 파괴되어도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며, 민주적 요소를 실현해도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을 철저히 고민한다. 그래서 칸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정치 역할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칸트는 공존하는 경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사회로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는 왜 자신이 그런 대안을 설정하는지를 역사철학 관련 글들(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을 참고하라.)에서 보여준다. 경제를 끌고 나가는 개인 하나하나의 본성을 살펴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본성을 ‘공존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유도할 수는 있다. 물론 그 유도는 인간 이전에 이미 자연이 그렇게 인간을 조직했지만,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면 정치적 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연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고진이 칸트로부터 이어받아서 ‘세계공화국’으로 발전시킨다. 고진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위기 가운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이다. 판매자와 생산자가 일치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고진은, 이런 대안은 자본주의가 없는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태도로는 이런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션은 고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준 칸트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중세 교회가 지니는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근대 도시 국가에서는 ‘자유 도시’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파리 꼬뮌, 즉 꼬뮌 같은 정치 공동체 형태로 논의되다가, 근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직업단체로 변형된다. 칸트와 헤겔의 어소시에이션은 협동조합 내지 직업단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루동이나 마르크스에게서도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나타난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존 공동체’라는 발상을 가지고서 철학사를 거슬러가면, ‘어소시에이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경제와 정치의 연결’이며, 그런 연결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경제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며,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이렇듯 고진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소시에이션의 주도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민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규모 공동체이다.

현재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세계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이론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론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인터넷 세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사이버 공간은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경제 문제 속에서 생겨나는 반 민주주의적 행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들, 정치적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에서 야기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공존 공동체의 유형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에 적용하려고 했던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특수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80년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여파로 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다양하게 형성된다. 여러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때 형성된 많은 NGO들은 한국 사회의 삶을 공존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웃과 연계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실현하는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뒤 끝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후세들이 양산되었다. 사실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고, 공권력이 우리네 삶을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압박감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노동 구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은 널뛰기를 하며, 불행 지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쏟고, 경제에 더 매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곧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 정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 스스로 이미 반증하고 있다.

<끝>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철학자의 착상은?-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1. 세계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21세기 우리네 한국인들의 삶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 어떤 단어가 금새 생각날까? 언론에서도 일상적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제 위기, 지하경제 활성화와 같은 말일 게다. 비록 현 정부가 지금은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대선 기간에는 복지 정책을 강조하고 통합진보당이 이슈화한 ‘서민들을 위한 복지정책과 경제 활성화’를 부각시켰었다. 여야 모두가 그때는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고 했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화두는 경제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도대체 경제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경제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가? 경제만 잘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 문제 이외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없는가? 다른 문제가 해결되면, 경제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번 강좌의 전체 제목이 떠오른다. 역시 경제이다! 공존 경제를 위하여! 물론 여기에서 강조점은 경제가 아니라 ‘공존 경제’이다. 그러므로 ‘공존’을 화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경제 문제에 집착해 왔다. IMF 때문이기도 하고, WTO 여파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철저한 경제 개방인 FTA를 단행하는 가운데서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FTA를, 중도 실용주의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http://blog.daum.net/j73lp7d3td/24

그러나 이 와중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금융 사건을 겪게 되었으니, 바로 모기지론이다. 미국인도 어엿한 자기 소유의 집을 마련한다는 꿈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이라는 소설 내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평생 동안 갚아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빚을 갚기가 어려워지자, 자살을 하고 그 보험금으로 빚을 완전히 갚으면서 집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 부인은 주인공의 무덤가에서 혼자 넋두리를 한다. ‘이제 빚을 다 갚아서 우리 집이 되었는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네!’

소설의 결말은 슬프지만, 현대인 모두가 일생을 그렇게 죽음으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고, 몇 십 년에 걸쳐서 갚아나가는 방법으로 손쉽게 집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것을 악용하여,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구입하고, 집값이 오르면 다시 되팔아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금융권에 문제가 생기면서 융자 금리가 오르고, 집 한 채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는 소박한 소비자들도 있다. 소위 한국에서 유행하는 깡통 전세라는 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은행 융자를 악용하여 여러 채의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도 모기지론 사태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여러 채의 집을 융자로 장만하는 사람들의 욕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모기지론을 언급한 것은 비난보다는 금융 상품의 허구성, 소위 버블(bubble), 거품이 어떻게 인간을 망치는가를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모기지론과 관련하여, 융자를 받은 시민들이 이자를 끊임없이 갚아나가면 금융권에 돈이 쌓이게 된다. 그러면 금융권은 쌓인 돈을 활용하여 금융 상품을 만든다. 금융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은행들 간에, 국가와 국가들 간에 파생 상품이 생겨난다. 금융 상품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모기지론은 집장만을 위한 융자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금융 상품 내지 금융 파생 상품의 역학 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은행과 은행의 관계로, 은행과 타국가의 관계로,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전개되면서 전 세계 금융권에 영향을 미치고, 전 세계 경제 활동에 파급 효과를 낳는 시스템이다.

모기지론 때문에, 미국 금융권이 흔들렸고, 그래서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역학 구조로 작용하면서 한국에도 그 여파가 있었다. 오마바 집권 초기, 이명박 정권 초기에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알았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 네 삶은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 이론가들은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고 하면서, 자유 규제, 금융 규제를 강화하라는 목소리가 한동안은 높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기존 정조를 깨는 것이라서, 시장 구조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를 포함하여 삶의 구조 모두가 궤도 전환을 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금융 파생 상품 문제이다. 우리가 자본, 즉 돈을 가지고 공장을 건설하면, 거기에서 ‘유형의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상품이 어떤 유통 경로를 통해 팔리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돈을 금융권에 투자하여 신용 상품이 만들어지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데, 파생 상품은 또 다른 파생 상품을 낳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공장을 짓는 돈과 동일한 흐름이라 해도 이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금융 상품으로 전환된 돈의 흐름은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돈이 돈을 낳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통제를 하여 원활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냥 앉아서도 돈이 돈을 벌어서,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부자가 되기도 했다가,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돈을 날리기도 한다.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들면, 부도가 나도 그 물건은 남는다. 그러나 금융 상품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경제 흐름, 자본 흐름, 금융 상품 흐름은 경제인들 스스로도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국가가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통제 아래 경제가 움직인다기보다는 경제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 FTA, 등은 국가 간의 장벽을 약화시키다 못해,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국가를 넘나드는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한다. 비록 그 사업체의 출발점은 뉴욕 내지 미국이라고 해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 때문에, 그 사업체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전 세계에 문어발식으로 확장되는 경제는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힘들 만큼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특정 국가가 그 사업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완벽하게 규제하거나, 완벽하게 미국 내 사업체로 흡수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오늘날 경제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경제 권력이 국가 권력이 되고, 경제가 국가 권력을 능가한다고들 한다. 경제가 곧 국가라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자본은 팽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산업 혁명을 통해 한 나라 안에서 팽창을 시도하였다. 한 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팽창을 시도했고, 이것이 제국주의 행태를 낳았다. 그 팽창이 유형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국한된다면 팽창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금융 상품이다. 무형의 상품으로서 금융 상품은 유형의 상품과 달리 파생 상품을 연속해서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닌다.

경제 팽창은 결과적으로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처음에는 ‘빈부 격차’로서 ‘빈익빈 부익부’가 대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80 대 20 사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규직이 점차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활성화되더니, 이제 파트 타임, 단순 아르바이트가 일상 유행어가 되었다. 예전에는 ‘투잡’, ‘쓰리잡’이 익숙했는데, 이제 ‘알바천국’이라는 광고가 익숙하다.

우리네 경제적 삶의 구조는 계속 악화된다고 느끼는데, 각 국가들은, 각 국가의 정부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손을 놓고 있는가? 경제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가? 어떤 국가이든, 노력하지 않는 국가 내지 정부는 없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제 경제가 중심이며, 국가는 자립성이 없는 상황, 즉 국가가 경제에 예속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팽창하는 속성을 지니는 자본의 흐름에 종속되고, 자본을 도와주는 국가로서 역할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경제 팽창 속에서 국가 역할이 약화되고 경제에 종속되는 행보를 계속할 것인가? 동등한 기회와 자유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시장주의 구조에서 평등 또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국가는 경제와 별개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재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재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국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박자 도식(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한다],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책들을 보라.)을 통해 국가는 자본보다 더 오래된 기원을 지니며,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고유 기능이 있어 왔다고 강조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지 경제 문제나 자본주의 팽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작용하며, 국가의 이해관계가 경제 상황을 재편하는 모습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국가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경제는 서로 독립된 항이면서 동시에 상호 작용하면서 변수들을 만들어낸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경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같이 아우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다음 질문과도 연결된다. 즉 자유시장주의에서 기회 균등, 평등,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빈익빈 부익부’나 ‘80 대 20 사회’ 같은 말이 풍미하는 상황에서 부를 획득한 사람들 모두가 기회가 불균등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특혜를 받거나 불공정 거래를 주도했기 때문에, 거부가 된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주의가 주장하는 것 또한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가운데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부를 획득한 것이라서, 현 경제적 상황이 기회 균등이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경쟁에서 이기거나 진 것이며, ‘무한경쟁’ 구조로 진행되면서 발생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무한경쟁 자체가, 아니면 팽창하는 자본의 속성 자체가 평등과 민주주의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령 이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그런 구조에서는 ‘공존’이 힘들다는 것이다. 자본이 팽창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할 때,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 유형의 상품이든, 무형의 금융 상품이든 –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현재 구조로 진행된다면 판매자는 있는데, 구매자는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부를 획득했어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사회적 부담 내지 책임을 지려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자유지상주의 내지 자유시장주의를 택하는 미국 안에서도 분배정의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낯설지 않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경제와 국가는 서로 독립된 항이며, 국가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면, 정치 차원에서 펼쳐지는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대안 개념으로, 고진은 어소시에이션 공동체를 주장한다.

마이클 샌들은 그런 것을 야기하는 도덕적 차원과 종교적 가치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가치의 중요성을 천명하고, 공동체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미덕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자유 경쟁, 무한 경쟁이 철저히 기회 균등, 개인의 능력 계발에 따른 공정 경쟁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악화일로에 있는 빈부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침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식을 독려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공존’을 위한 대안들을 ‘공동체’ 안에서 마련하려고 한다.

-다음에 계속-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10, 11강

 

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대안 화폐, 지역 화폐, 대안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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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

1. C-M-C(구매를 위한 판매목적=사용 가치)

2. M-C-M(판매를 위한 구매목적=교환 가치. 후자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 이미 자본. 유통에서 더 많은 화폐가 끌려 나온다.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의 M’=M+ΔM이다.

3. ΔM은 어디서 오는가? 노동력 대가로 지불되지 않은 잉여 가치. 기존 패러다임에서는 공장단위로 분석되었으나(Marx), 현대 패러다임에서는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잉여 가치가 붙는 단위가 단지 공장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편재한 비물질적 노동과 관련된 사이클을 돌면서 잉여 가치가 부가된다(Negri).

4. 더욱이 화폐가 금본위제에서 브레튼우즈 협정 체결로 미 달러 금본위제로 갔다가 1971년의 닉슨 쇼크 이래 화폐가 제국권력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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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John Protevi 정리 도표 번역 푸코 사회 권력 도표

(http://www.protevi.com/john/Foucault)

전성기

1650-1789

1780-1820

1820-1968

1850-현재

1980-현재

권력 양식

주권 권력

사회 권력

규율 권력

생명 권력

통제 권력

권력 이론

법률 이론

이데올로기

미시물리학

통치성

신자유주의적 이론

일차적 행위자

법률가

전문가

주체

자기 기업가

일차 타깃

신체들

영혼들/권리들

생산적정치적 능력들

삶들: 개체/인구

자기(개인) 자본

타깃에 접근하는 일차적 방법

고통

기호들

훈련

연구/고백

진단/시장 조사

목표 달성 위한 일차적 실천

의식(예식)

표상

연습/시험

규범화/위험 관리

치료/투자

최강 형식

신체형

극적 처벌

판옵티콘

약리유전학

희망 산출물

복종

공동체

유순함

자동통제

투자에 대한 최적 대가

지식 형식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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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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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적 과학

법률학

철학적 심리학

인간 과학들

정치 경제

미시경제학

통제의 경제적 형식

선취(단순세금)

공공 작업

벌금/보상

복지/보험

(공적/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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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 화폐

<!–[if !supportEmptyParas]–>?출처: http://edunstory.tistory.com/589

지역 화폐 운동은 1983년 캐나다의 마이클 린턴이 ‘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라는 지역 화폐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지역경제의 자립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특정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체계이다. 마음 맞는 이들끼리 서로의 용역을 살 수 있는 현대판 품앗이이다. 해당 지역과 공동체에서 회원들끼리 통용되는 지역 화폐와 현금을 적절히 섞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정에 기반한 합리적인 대안 화폐 시스템이다. 또한 지역 화폐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대량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의 악순환을 끊어보자는 취지로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생각한 녹색 운동이기도 하다.

현재 영국은 400개 이상, 프랑스는 250, 미국과 일본은 약 200개 등 세계적으로 2,500여 개의 지역화폐 제도가 있으며 점점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지역 화폐 운동을 활발히 시행하는 사례가 있다.

대전 한밭레츠

대전시 대덕구 법1동의 한밭레츠 (www.tjlets.or.kr)1999년 활동을 시작한 지역화폐 운동 조직으로 580여 가구의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의 지역 화폐 조직.

한밭레츠는 두루라는 한밭레츠만의 화폐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널리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우리말인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원화와 등가원칙을 적용해 1천두루= 1천원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해졌다.

한밭레츠 회원이면 누구나 두루로 거래할 수 있고,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 이상 두루를 쓰도록 되어 있다.

한밭레츠에서는 집수리·농사일·외국어·컴퓨터 교육·자동차 정비 같은 전문기술과 함께 편지쓰기·친구 되기·아이돌보기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서비스를 품앗이 품목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한의원 2곳과 의원 4, 치과, 동물병원, 약국, 채식식당, 건강학교, 카페, 포구사, 목공예점, 컴퓨터수리점, 자전거포, 유아용품점, 학원, 인쇄소 등의 가맹점이 있어 두루 거래를 활발하게 만드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

송파품앗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송파구민회관 2층의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에서는 지역화폐 운동인 송파품앗이 (www.songpavc.or.kr)를 운영하고 있다.

99년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송파 품앗이의 회원 자격은 18세 이상의 송파구와 인접 지역 주민이며, 품앗이 센터에 거래할 물품과 서비스를 신고함으로써 거래를 시작한다.

거래가 끝난 뒤에는 품앗이 센터에 거래 내역을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센터는 회원의 거래 내력을 정기 소식지에 실어 모든 회원에게 알린다.

송파품앗이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해 SM(송파 머니)을 단위로 하는 가상의 화폐를 사용한다.

SM의 가치는 현금과 동일하며, 현금과 혼합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거래내역은 자원봉사센터에 보고하고 거래자들은 각자의 통장에 +또는 SM 거래액을 기록한다.

서비스나 물건을 제공한 사람은 +로 저축을, 제공을 받은 사람은 로 빚을 지게 되는 시스템이다.

거래 품목도 자동차 수리, 학습 지도, 피부관리, 미용, 컴퓨터 교육과 수리, 피아노·미술 레슨, 사진 촬영, 버스 대여, 수지침 등으로 다양한 송파품앗이에서는 99년 이후 1767건의 거래가 이루어져, 현금 2432만원, 4550SM 등 모두 6982만원어치가 거래되었다.

경남 함안 녹색대학의 녹색화폐 사랑

지역과 괴리된 으로 전락한 대학을 지양하고 생명체로서의 대학을 만들자는 90년대 중반의 대안대학 운동 속에 잉태된 녹색대학 (http://www.green.ac.kr/)은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며 녹색문화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생태건축학, 등 독특한 분야의 전공수업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녹색대학의 가장 특별한 시도는 대안화폐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녹색대학은 야생화사업단, 천연염색염료 사업단, 생태마을사업단, 건강식품사업단 등으로 구성된 그린네트워크의 배후 지원을 받아 지역화폐(녹색화폐)를 통용시키고 있다.

은행도, 이자도 없는 이 녹색화폐의 액면가는 일반화폐와 11로 교환되며 사랑(SA)’이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녹색대학이 조폐공사에 의뢰해 액면가 30억원 어치의 녹색화폐 20만장을 인쇄하였고, 이 돈은 실제로 위조방지 처리까지 돼 있다.

교수와 교직원은 급여의 25%를 녹색화폐로 받고, 학생들은 등록금의 25%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녹색화폐로 낼 수 있으며, 녹색화폐는 학교 주변에서 이미 음식 값으로 치러질 정도로 지역화폐로 싹을 틔우고 있다.

특히 체인형태의 유기농 녹색가게인 신시(http://www.shinsi.com/)는 그린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전국 55개의 매장에서 녹색화폐를 통용한다고 한다.

각 가게에 설치된 중고 생활용품 교환 코너에 물건을 가져다주면 녹색화폐를 받을 수 있고, 그 녹색화폐로 유기농산물을 구입할 수도 있다.

서울시에서도 품앗이 화폐인 S(Seoul)-머니(가칭)를 도입한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남을 돕고 그 대가로 남의 도움을 받아 서로 돕는 나눔의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가 실현되려면 많은 사람의 공감이 필요하다.

에드가 칸의 <이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책은 타임 뱅크, 타임 달러를 소개하고 있다. 타임 뱅크는 영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한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을, 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동일한 가치로 쳐주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지역화폐 운동의 하나였다. 에드가 칸은 이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확인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나눌 것이 있다. 둘째, 1시간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셋째,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넷째, 공동체는 사회적 자본으로, 사회적 자본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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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밭 레츠-<지역 화폐와 여성주의>의 논의를 중심으로

지역 화폐의 대안성은 1. 경제적인 면, 2. 공동체, 3. 지역 사회 개발론, 4. 생태주의, 5. 소비자주의 등 다양한 면에서 주목된다. 대안성은 크게 대안 경제와 공동체, 두 축에서 설명된다. 지역화폐운동은 20세기 초 이래 국가통화의 대안으로 생겨났다. 대체로 시장경제가 위축되었을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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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Time Dollar

Hours

도입 시기

1983

1986

1991

시발 지역

캐나다 밴쿠버코트니

미국 워싱턴 DC

미국 이타카시

운영 실태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

미국 38개주 67개 시스템

북미에서 39개의 시스템이 운영 중

특징

교환 거래의 일반적인 유형을 말함

시간당 서비스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 노동 시간을 저축해줌. 서비스 중심 거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화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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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츠의 도입은 지역 경제 침체에 따른 지역 주민의 실업이 주된 요인이었다. 1983년 캐나다 벤쿠버 코목스 벨리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던 마이클 린턴(Michael Linton)이 실업으로 자신의 목수 기술과 일대일교환을 시도하다가 새로운 화폐제도인 레츠를 생각해냈다. 일대일교환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다자간 교환을 시도했고, 레츠 시스템 내에 있는 사람들 간 거래를 해나갔다. 1985년에는 500명의 회원이 연간 30만 달러 가치의 거래를 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의 레츠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 레츠가 소개된 것은 1996<녹색평론>이다. 19983월 신과학운동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을 시작으로 지역화폐운동이 확산되었다. 사회적 배경으로는 1998년의 IMF 체제로,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할 수 있다. 당시 신문, 방송, 시민단체들에서 지역화폐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고조되어 주로 실업자 구제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IMF 구제금융체제가 오지 않았다면 지역화폐제도로서의 레츠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소개되고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역 화폐를 복지관 등에서 사업으로 한 경우 대부분 사업비가 끊기면 바로 마감하는 식이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서서히 활동 중단이 되어가던 지역 확폐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와 세계 경제 위기 이후로 다시 지역화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을 전후로 지역화폐 활동을 시작한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대전의 어린이 도서관 중심의 동별품앗이(관저품앗이, 짜장마을 어린이도서관, 호숫가마을품앗이), 인천(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평화의료생협, 참좋은 품앗이 등), 서울(서울시 복지재단의 e-품앗이, 관악건강가족지원센터의 한마을 품앗이), 경기(과천무지개교육마을의 어울림품앗이, 성남문화재단의 성남문화통화, 의정부 시민단체 중심의 의정부레츠), 경상권(부산 여성회의 사하품앗이, 부산동원복지관의 가마골품앗이, 대구여성노동자회, 경주여성노동자회) 등 많은 지역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다음은 새로운 관심 이전의 지역화폐 상황에 대한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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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화폐 공동체

참여 주체

지역 화폐명

도입

시기

비고

미내사 FM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미래머니

(future money)

19985

활동 중단

민들레 교육통화

출판사 민들레

민들레

19991

활동 중단

서초품앗이

서초구청/주민

그린머니

(green money)

19992

중단 뒤

2009년 재개

작아장터

녹색연합 출판사

없음

19993

활동중단

송파품앗이

주민/자원봉사센터

송파머니

(songpa money)

19998

활동 침체기

동작 자원봉사은행

동작구 자원봉사센터

없음

199911

활동 중단

한밭레츠

주민

두루

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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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품앗이

주민

아리

200011

자원봉사센터와 연계

안산 고잔품앗이

고잔1동사무소

지역주민

고잔머니(GM)

20026

활동 중단

구미 사랑고리은행

구미 요한선교센터

고리

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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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품앗이

광명그루

주민/광명시

평생학습원

그루

20043

활동 중단

대구 지역화폐

늘품

대구 달서구 본동

종합사회복지관

늘품

20054

활동 침체기

대전은 본래 1990년대 들어서 금강 제2휴게소 건설 반대운동을 벌인 환경보전대전시민연합(1991), 녹색연합 전신인 배달환경연구소(1991)가 활동하며 환경운동의 텃밭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후 1997년에 대전·충남 녹색연합이 창립되어 재활용, 유해폐기물 적정 처리운동, 생태천 복원운동 등 활동을 하고 있었고, 아나바다 상설장터 녹색가게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1993년 창립된 대전환경운동연합 또한 설립되어 환경운동을 지속했고, 1990년 주부아카데미 수료생을 주축으로 구성된 살림의 집을 모태로 한 한밭살림소비자협동조합이 설립돼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운동과 지역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호회에 그칠 수 있을 정도의 취약한 출발이었으나, 2000년의 의약분업 논쟁 중에 2002년 민들레의료생협이 출범하면서 민들레의료생협에 가입했다가 한밭레츠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되었다. 내과, 치과, 한의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민들레의료생협은 지역화폐로 전액 진료를 받을 수 있는데, 실무자 급여를 두루로 지급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었다. 대안학교인 대전 꽃피는 학교또한 레츠와 상호작용하면서 커나간 터전이다.

거래 총액에서 두루 비율은 30% 이상이 원칙으로 자원 봉사나 재활용품 거래처럼 100% 두루로 거래되는 경우도 있고 농산물처럼 30%가 두루 거래인 경우도 있다.

철학자 와트는 ‘”돈이 없기 때문에 서로 가치를 교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측량 단위가 없어서 집을 짓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기존 화폐 시스템은 돈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나, 두루에서는 두루를 벌든 쓰든, + 거래든 거래든 거래 자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게 기본 생각이다. – 거래로 시작하더라도 이를 줄이기 위해 거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및 두루의 활성화 방법이라는 것이다.

두루의 교환 가치는 (1) 서로의 상황과 조건이 고려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내에 두루를 많이 가진 회원과 빚이 많은 회원 간에 자연스러운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2) 유용성과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만들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시장에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구분되었다. 물건과 노동력이 그 쓰임새에 따라 필요한 사람과 교환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두루 가격은 서로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조정해가며 사용 가치를 반영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3) 부담이 덜 되는 가치. 전문가가 레츠를 통해 회원들에게 자신의 재능과 노동력을 나누는 경우도 있고, 기존 시장보다 대여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4) 신뢰를 바탕으로 자원가 가치가 순환된다. 레츠가 매개되어 맞교환 방식이 아니므로 물건과 노동력이 순환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가지는 순기능의 또 다른 면은 기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저평가되었던 노동이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이나 동네의 여러 일들(가령 지역 주민을 위한 이동 영화 상영 자원 활동, 어르신 건강 교실 등)의 일이 가시화되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의 일자리 만들기가 가능해진다. 전업 주부였던 회원, 은퇴 후 어르신 등이 천연 비누 등 친환경 천연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이를 가르치면서 강사로서 활동하는 경우, 재활용 빨래비누를 만들고 냄비 받침을 만들어 제공하는 경우 등이다. 그리고 간호와 같은 보살핌 노동이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에서 기존 시장 체제에서는 감정 노동의 가치가 무시됨으로써 노동 소외를 낳았다면 지역 화폐의 호혜 시장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는 주체가 된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3) 반월가 시위

월가 점령 시위는 금융업계의 탐욕에 대해 누적되었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고, 다중의 창의적인 대응을 보여준 사례였다. 발단은 소비자의 직불 카드 사용에 수수료를 매기려 한 대형 은행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더 근원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끊임없이 채무를 지움으로써 부를 불려가는 은행의 비도덕적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의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 포스터.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벤자민 프랭클린이 얼굴에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살해하려던 화약음모 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한 인물로, 2005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재조명을 받으며 최근 전세계 99%의 시위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제공

5일은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가 금융권 탐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로 정한 날이다. 월가 시위대가 지난 929, 대형 은행의 계좌를 5일까지 지역의 소형 은행이나 주정부 및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 등으로 옮기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한달여 만에 신용협동조합에 65만명의 신규 계좌가 늘어났다고 신용협동조합 위원회가 이날 밝혔다. 이를 통해 신용협동조합에는 45억달러(5130억원)가 새로이 계좌에 편입했다.

이처럼 월가 시위대의 목소리가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호소하는 월가 시위대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데다, 특히 대형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내년부터 직불카드에 매달 5달러의 수수료를 물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소비자들이 거세게 반발한 영향도 크다. 실제 지난 9~10월 신용협동조합의 신규계좌 개설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8%나 늘어났는데, 새로이 늘어난 계좌의 상당수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넘어온 소비자들이다. 시티그룹, 제이피모건체이스, 웰스파고 등 다른 대형 은행들도 최근 몇 주 동안 계좌 폐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금융 쪽의 소비자 운동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형 은행들의 계좌 폐쇄가 이어지고 뱅크오브아메리카가 결국 직불카드 수수료 부과 입장을 철회한 것은, 월가 점령 시위가 구체적이고 합법적으로 거둔 첫 전리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로스앤젤레스의 자영업자인 크리스텐 크리스티안(27)은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를 폐쇄하고, 신용협동조합에 두 개의 계좌를 개설했다. 그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우리가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2011116일자 한겨레 신문)

(4) 신용권그라민 은행

그라민 은행의 사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p3project&logNo=10144861682

(UNESCO, http://www.unesco.org/education/poverty/grameen.shtml의 번역)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은 기존 은행 시스템과 다른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은 다른 은행들과 다르게 담보를 요구하지 않으며 대출자와 은행 간의 신뢰와 엄격한 관리를 통해 운영된다. 또한 대출자들의 창조성, 책임 의식, 참여 의식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그라민 은행은 초기 가입 시 고객의 신용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데, 이는 전반적인 사회발전 과정에서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이 신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신용을 얻음으로써 사회, 경제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은 은행과 관련된 업무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했었던 사회 빈곤층들에게 경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현재 그라민 은행 총재를 맡고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교수이다.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빈곤층을 위한 은행업무시설 확충

? 비합리적인 이자율로 빈곤층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 축출

?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실업자로 전락한 잉여 인력을 위한 자영업 일자리 창출의 기회 제공

? 가난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

? 이전까지 반복되었던 낮은 수입, 낮은 저축률, 낮은 투자악순환을 낮은 수입, 낮은 신용, 낮은 투자에서 높은 수입, 높은 투자, 높은 신용의 발전적인 선 순환체계 구축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시행된 이 프로젝트는 조브라(Jobra)마을(그라민 은행 프로젝트가 첫 번째로 시행된 곳으로, 치타공(Chittagong)대학이 위치한 곳)과 주변의 인근 마을들이 향후에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후, 중앙은행의 지원과 국가소속 상업은행의 협력을 받으면서,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탄가일(Tangail) 지역(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Dhaka)의 북부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라민 은행 설립자는 신용을 경제 발전을 위한 강력한 무기이자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한다. 신용이 높을수록 재원 확보가 용이해지며 그에 따라 경제적인 지위도 높아진다. 신용은 재정 자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해방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담보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신용권을 부정했다. , 담보대출을 요구하던 기존의 은행 시스템은 빈곤층이 그들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빈곤과 그에 따른 어려움에 끊임없이 대항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모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운영 방식은 모든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라민 은행은 대출을 재원 확보의 수단으로 삼는다. 대출을 재원 확보 수단으로 사용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성장 잠재력이 있는 기술들을 사용하여 임금과 고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더 높은 소득을 내며,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 또한 자영업을 통한 경제 활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자영업 운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급자족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도와준다. 유누스 교수는 자영업 운영을 통한 생계 유지는 실업 수당이나 복지 급여와 같은 복지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보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효과적입니다.”고 말했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도, 보증인도 없이 오로지 신용으로 대출을 해주는데, 그렇다고 무조건은 아니다. 채무자 5인이 모인 모임에 가입하고, 이 모임이 8개 모인 더 큰 모임에 소속되어 총 40인이 서로 관련된다. 만일 한 사람이 채무를 갚지 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대출이 제약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채무자는 자신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 모인 사람들의 신용권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채무를 상환해간다. 그래서 그라민 은행의 원금 회수율은 98%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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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2P 금융대출 및 투자

금융 소외 계층 대상의 품앗이 대출팝펀딩도 주목할 만하다. 팝펀딩은 신용도가 낮아 은행·카드사 등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금융소외계층에게 개인대출자들을 연결해주는 팝펀딩 사이트(www.popfunding.com)2007년부터 시작했다. 영국의 조파’(Zopa)와 미국의 프로스퍼’(Propser) P2P(Peer to Peer) 금융 모델에 착안했다. 이곳에서는 과거 두레에서 이뤄졌던 십시일반 품앗이처럼 품앗이대출이 이뤄진다.

대출 신청자가 신청 사유와 상환계획, 필요 금액을 제시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대출 금액과 이자율을 입찰하는 역경매 방식으로 대출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인투자자들이 모여 대출 신청자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거쳐 대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평가·심사 과정에서 집단 지성이 작동한 결과, 지금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의 상환율은 평균 93%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대형 대부업체의 상환율이 평균 89%라는 점과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한 결과다. 2012년말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 건수는 모두 1600여건에 금액은 30억원을 넘어섰고, 성사된 대출 금리는 평균 11%를 기록했다.

팝펀딩은 지난해 2월에는 자금과 고객이 필요한 소기업이나 프로젝트에 개인 후원자들을 연결해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굿펀딩(www.goodfunding.net)을 개설했다. 팝펀딩이 대출을 연결한다면, 굿펀딩은 투자(후원)를 연결하는 곳이다.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후원 형태로 지원하고, 성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함께 공유하는 형태다. 신생 벤처는 초기 자금을 확보하면서 상품을 판매하거나 홍보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외국에서는 킥스타터가 대표적이고 국내에서는 굿펀딩 외에도 텀블벅, 개미스폰서, 오마이컴퍼니 등이 있다.

(원낙연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원 2013326일자 한겨레신문)

돈에 눈 멀 것이 아니라, 돈이 행복한 삶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다양한 실천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함께 지혜를 모아 냉혹한 금융 자본의 겨울을 종식시키고 따뜻한 돈, 윤리적인 돈에 대한 대안을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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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⑥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8, 9강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 자본주의의 간단한 역사,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힘,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 – 신의 역할을 하는 화폐

 

중세와 근대는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 두 시대는 이질적이지 않다.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의 등장으로 세속적 역사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화폐가 신을 대신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 때는 사제가 신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누렸다. 그는 신의 대리자였다.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는 금융자본가가 화폐의 중요성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안착시켰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정치권력을 자기 앞에 내세운다. 그는 자신을 은폐하면서도 화폐가 신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만큼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세 시대에 신을 받아들인 것만큼이나 오늘날의 우리는 화폐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세 시대에는 신을 모르거나 믿지 않거나 부정하는 자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거나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신을 부정할 자유가 생겼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정치권력에 도전하는 자 그리고 화폐를 부정하는 자는 철저히 응징 당한다.

우리 시대의 지배자들은 정치권력에 도전하려면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합법적어서는 정치권력을 바꿀 수 없다. 법 자체가 정치권력을 쥔 자, 나아가서는 화폐를 쥔 자들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경멸하는 자조차도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어렵다.

새로운 대안은 정치권력을 쥔 자의 배후에는 금융자본가가 있다는 것, 금융자본가의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화폐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화폐는 비물질적 형태로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신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든다.

결국 새로운 대안은 정치권력의 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의 신적 성격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발생한다. 신은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것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화폐는 우리 생활 전체를 지배하지만 먹을 수도 없고, 아픈 것을 낫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창고에 쌓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통장에 써 있는 숫자의 형태로, 장부상으로만 존재한다. 신을 믿는 자에게 신은 자신의 모든 것이지만,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신이란 집에서 기르는 개만도 못하다. 화폐나 신의 실재성에 관해 의심해보기, 무의식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고정 관념의 파괴, 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화폐 없이 살 수는 없는 건지 생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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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Constantinus 1세(AD 274~337) – 고대 로마 황제(재위 306~337).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또는 콘스탄틴 1세. 원래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기독교에 깊이 경도, 기독교도가 되어 –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다고 함 –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Milan Edict)을 공포,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 기독교는 예수의 제자들이 만든 종교가 아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가 생기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울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렇다면 기독교(Christianity)의 의미는? 기독교는 예수 때문에 생긴 종교다.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종교를 만들라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바울의 노력으로 기독교도 생겼다. 기독교도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종교(religion)의 의미. ‘신과 인간을 다시 잇는다’는 뜻. 이때 신은 전지, 전능, 전선, 영원불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존재이다. 구약의 창조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신과 함께 있었으나 지혜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 후부터 인간에게는 신앙을 통해 신과 자신을 다시 연결해보려는 소망이 생겼다. 그런데 동양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관념이 없다. 종교라는 말 자체는 서양 사람들의 신 관념에서 나온 말이다. 기독교는 서양 문화를 형성하는 한 축이다. 그리고 이라는 영상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발전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녔다. 유대인인 레비나스는 기독교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유대교적 발상에서 일종의 대안을 찾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교와 불교적 발상의 결합이기도 하다. 유대교는 메시아를 믿고 기다리며, 불교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의 사법권, 재산권 등을 우대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한편, 독립적인 재판까지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적인 재판을 한다는 것은 교회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중세 말 또는 르네상스시기에 종교 재판의 힘이 막강해지는 데에도 기여한 셈이다.

갈릴레오는 정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을까? 부르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중세에는 왕권(세속 권력)과 교권(교회 권력. 교황)의 대결에서도 교권이 우위를 차지했다. 나폴레옹 대관식(1804년)은 이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밀라노 칙령의 정치적 의미 – 유일신교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1인 황제체제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1인 황제의 권력은 유일신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신앙은 사회 통합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박해를 받았나? 기독교는 육체, 지상의 문제는 덧없는 것이라 가르쳤다.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세속 권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유일신 신앙이 황제 1인의 유일한 권력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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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르네상스(Renaissance, 부활, 재생)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 고대 로마와 그리스 고전 문화의 부활, 재생. logos의 부활.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 신학과 철학, 천상과 지상, 영혼과 육체,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서 후자가 중요시되는 시기. 정치적으로는 로마 공화정, 그리스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짐.

예를 들어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그리스 신화, 기독교 창조 신화 등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벗은 육체를 등장시킨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영혼에서 육체로 관심을 돌림.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육체를 이용해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육체는 자본주의적 이윤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화장술, 성형수술의 중요성. 상품화가 전면화된 사회.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려면 재벌가 또는 유력 정치인의 딸이어야 하거나 절대 미인이어야 한다. 재력가끼리의 정략결혼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절대 미인은 미스코리아 출신이거나 주연급 탤런트 출신을 의미한다. 미인은 고가의 상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인이 아나운서가 되면 ‘현명함’이라는 인상이 보태져 그 가치(가격)가 더 높아진다. / 그러나 재력 없는 미인은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결혼이란 재산을 나누어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재력) 있는 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능력 없는 며느리에게 ‘열쇠를 많이 가져오라’ 요구하는 것은 등가교환을 하자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그녀에게 사랑은 ‘개에게나 줘버릴 것’에 불과하다. 부등가 교환은 강도요 도둑질이기에 정당하지 않다. / 보드리야르의 ‘과잉순응’ 이야기.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게 살 수 있는가. 여성은 남성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미셸 푸코(1926~1984), 사진출처: www.changetimes.org

근대주의자들은 개인의 시대가 열리면서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역사가 진보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

푸코는 왜 이성이 본래부터 억압적, 계급적, 당파적이라 했을까? <광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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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세

르네상스(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에서부터 절대주의(絶對主義, absolutism),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가 전개되는 17~18세기까지의 시기(즉, 15~6세기부터 17~8세기까지).
자본주의 발전사에서 보면 이 시기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기. 정치적으로는 신흥 상공인들과 왕이 일시적으로 결탁한 시기. 왕은 그들의 돈이 필요했고 그들은 왕의 법적 보호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중에 왕은 시민사회 형성의 걸림돌이 되어 상징적 존재로 전락하거나 제거된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이나 프랑스 혁명(1789)은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아메리카 대륙(신대륙)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유럽 자본 권력에 의해 침탈당한 것.
오만한 로크(John Locke, 1632~1704) – 소유권, 노동의 소중함을 강조한 그에게 신대륙은 주인 없는 땅. 그에게 인디언(원주민)은 없었다.

근대주의자들이 강조한 민주주의는 사실상 부르주아들만의 민주주의. 자유로운 자들만의 평등. 평등한 자들만의 자유.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강제. 법에 관해 되묻기

‘부자는 3대(代)를 못 간다’는 말은 허구.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의 (돼지치기 출신)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 ~ 1541)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 산다. 피사로 군대는 잉카 왕국으로부터 많은 황금을 빼앗았다. 이를 두고 피사로의 후손들은 잉카인들에게 금(화폐)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 말한다. 남미 진출이 피사로에게는 새로운 출세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문명의 몰락을 가져왔다.

벤야민의 예술사회학적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 서구 사회가 보여주는 물질문명은 야만적 행위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거대한 궁성도 마찬가지. 그러한 것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피땀을 흘렸을까 생각해야.

1854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일군의 백인 대표단을 인디언 부족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디언보호 구역을 제공할 테니 땅을 팔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소유관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들(백인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시애틀 추장 연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김종철 편, <녹색평론 선집 >, 녹색평론사, 2008, 23쪽)

테즈매니아의 비극 – 1876년 테즈매니아인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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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이나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7~18세기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시민혁명을 통해 자본가는 정치권력까지 거머쥐고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식민지라는 시장을 둘러싼 자본 간의 전쟁. 식민지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의 공급기지. 상품의 판매 시장. 자기 증식의 한계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한 것.

동학 농민군을 물리친 것은 일본군.

잉여가치의 생산과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식민지로부터의 초과 이윤에 의해 가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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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contemporary라고 할 때는 이 시기를 말한다.

1,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파국을 보여주었지만 변신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동서냉전의 시대의 시대가 열리는가 하면, 제3세계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은 시장경제 원리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시대.

1,2차 세계 대전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의 대결. 세계 대전을 다루는 영화나 다큐멘터리에는 식민지(민중)의 입장이 빠져 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인이 지혜로운 자였다. 그들은 정보의 보고(寶庫)였고 ‘도서관’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과 노동력이 요구된다. 노인의 지식이 쓸모없어졌고,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존경받기가 힘들어졌다. 돈이 있다고 해서 존경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식은 부모의 재산을 빨리 물려받기를 원한다. 재산을 물려주지도 않은 채 건강하게 오래 사는 부모는 자식이 출세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 게다가 정보도 없고 돈도 없는 노인은 ‘천덕꾸러기’ 신세. 최첨단 지식을 습득하기도 어려운 상황. 그렇지만 적어도 ‘세상은 이런 거 아니니?’라고 말했을 때, 젊은 세대가 수긍한다면 여전히 지혜로운 자.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으나 존경의 대상이 되기가 어려운 현실. 부자는 끊임없이 자애로운 이미지를 연출해야 한다. 기업 역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단, 이윤 추구 활동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
주택문제의 본질은? 기사 참고

가격과 상관없이 집을 여러 채 소유한 순서로 본 100대 집부자 현황을 보자. 대한민국 최고 집부자는 혼자서 1083채를 소유하고 있다. 2위는 819채, 3위는 577채, 4위는 512채, 5위는 476채, 6위는 471채, 7위는 412채, 8위는 405채, 9위는 403채, 10위는 341채를 각각 소유하고 있다.

행정자치부의 ‘다주택소유자 상위 100인 현황'(2005.8.12 기준)을 보면 ‘집을 여러 채 소유한’ 기준으로 집부자 100명이 갖고 있는 집은 모두 1만5464채로 나타났다. 최상위 집부자 10명이 소유한 집은 모두 5508채로 한 사람 평균 550채씩이다. 이들을 포함해 30명이 9923채, 50명이 1만1948채를 갖고 있다.

집을 200채를 갖고 있어도 집부자 20위에 들기 어렵고(21위가 212채), 100채 이상 소유한 사람도 37명에 달하며, 집을 가장 적게 갖고 있는 100위가 57채로 나타나 집 50채 소유한 사람은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303175324&Section=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으로 세워진 의회공화정은 4년도 안 돼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통해 독재체제가 되었다. 보나파르트는 ‘빵과 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너희들을 배부르게 해주겠다는 말은 마취제가 되어 민중들을 현혹할 수 있었다. (정치학의 ‘자본론’. 마르크스,, 최형익 역. 비루트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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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신화, 환상, 마취제는 무엇일까?

근대(modern)는 신의 자리에 인간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신학적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중세와 근대의 연속성. 화폐의 역할. 신화를 만들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근대 권력. 경제권력의 하수인이 된 정치권력.

오늘날 세계의 실제 주인은 월가(Wall Street)의 금융자본가. 미국의 정치판은 프로레슬링. 대중들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싸우는 척하다가, 싸움이 끝나면 맛있는 거 함께 먹으러가는 것. 케네디는 왜 죽었을까. 대통령 노릇 해보려다가 희생된 사람. 사실상의 마지막 대통령 (알렉스 존스 저,, 김종돈 역 노마드북스, 2010)

노암 촘스키 – 미국은 세계 최대의 테러리스트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가. 선거 때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것 아닐까.

내 손으로 뽑아놓고 그에게 고개 숙이는 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아감벤은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의 다른 이름이라 했다. 왜 그랬을까? 간접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탄생한 무솔리니, 히틀러 권력.

민주주의는 텅빈 기표인가?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 투쟁은 단어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숨어있는 권력, 자본권력의 외피로서의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열쇠.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⑤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6, 7강

 

이재유(건국대 외래교수)

 

제6강.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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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 가치론을 둘러싼 논쟁

 

(1) 아담 스미스(Adam Smith)

아담 스미스는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적 연관에 대한 탐구를 노동가치설의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스미스의 『국부론』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부는 국민이 매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이고, 그것은 매년 국민의 노동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이론이 구축되었던 것은 아담 스미스에 와서이다. 스미스는 이전의 중상주의, 중농주의가 단편적으로 파악하였던 상업노동, 농업노동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일반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상품 가치에 대한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즉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시간으로 정해진다는 명제를, 가치는 산 노동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상품의 양 또는 상품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명제와 혼동하였다. 전자는 스미스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특히 원시사회에서 노동자는 상품가치의 전액을 자기 노동의 보수로 받게 되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과 같게 됨을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등치시키기 때문에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임금과 잉여가치라는,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경제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전자로서는 임금과 잉여가치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자로서는 이들의 발생을 해명할 수 있다.

아담스미스,표지. 출처: anticap.wordpress.com

이러한 상품가치에 대한 이중적 혼란은 잉여가치론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잉여가치는 전자의 가치 규정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고 오로지 후자의 가치 규정에서만 나온다. 일단 스미스는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한 가치는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노동자에게 속하는 임금(노동의 가치)과 자본가에 속하는 이윤(잉여가치)이 그것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윤이 노동자가 그에게 지불된 임금과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초과하여 원료에 부가한 노동의 부분 즉 잉여노동임을 솔직히 나타내었다.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하는 가치는 (……) 두 개의 부분으로 분해된다. 즉 일부분은 그 노동자의 노동임금을 지불하고, 다른 부분은 그 고용주가 전대한 원료와 노임과의 전 자본에 대한 이윤을 지불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1쪽)

다시 말하면 이러한 잉여노동이 잉여가치의 기원임을 스미스는 분명히 밝혀 두고 있다. 또한 이윤, 지대가 모두 잉여가치의 분신임을 명확히 하였다.

“노동은 그 자신 노동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를 측정할 뿐만 아니라, 지대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 이윤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도 또한 측정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3쪽)

그러나 스미스는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오유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는 동일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전화될 때에는 상이한 자본의 생산 부문에 걸쳐 이윤율의 평균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윤과 잉여가치는 상이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잉여가치에서부터 이윤으로 나아가는 내적 연관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는 상품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 이윤, 지대의 합이라고. 스미스는 이 부분에서 또 다시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와 일치시키며, 따라서 이윤, 지대가 노동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 토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스미스는 그가 애초에 발견하였던 가치 명제를 스스로 버리게 되었다.

(2)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리카도는 스미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스미스에게서 보이는 이중적 혼란을 일소하고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내면적 분석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켰다. 리카도는 자신의 저서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노동에 의한 가치에 대한 스미스의 이중적 혼란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는 (가치의) 표준 척도로서 어느 때에는 곡물을, 또 다른 때에는 노동시간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시간은 어떤 물품을 생산하는 데 투하한 노동량이 아니라, 그 물품이 시장에서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인 것이다. 그는 마치 이것들이 두 개의 동일한 표현인 것처럼 (……) 논하고 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7쪽)

“한 상품의 가치, 또는 그 상품과 교환될 어떤 다른 상품의 양은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대적 노동량에 좌우되는 것이지, 그 노동에 지불되는 보수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5쪽)

리카도는 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발달된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가치의 외화 형태인 생산가격이 자본의 경쟁을 통해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리카도는 여기서 성립하는 생산가격이 어디까지 노동량에 의한 상품가치 규정과 부합하는지, 또 양자 사이의 모순이 무엇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와 생산가격을 조화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에 직접 투여된 노동량뿐만 아니라 기계나 건물 등의 고정 자본에 포함된 노동도 똑같이 가치결정의 요인이 되며, 따라서 그 속에 사용되는 고정자본의 비율에 비례하여 얻어지는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가치와는 달라진 생산가격이 성립한다. 또한 이러한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 자체의 변동의 요인이 됨을 리카도는 설명하고 있다. 즉 임금의 등귀는 필연적으로 이윤의 하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치가 노동량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과 모순된다. 물론 리카도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에 끼치는 작용이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의 변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비하여 비율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가치의 법칙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동시간과는 독립된 제 영향력이 가치 그 자체에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가치법칙의 폐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은 리카도가 단순한 상품가치의 결정으로부터 잉여가치나 이윤이, 또한 일반적 이윤율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애초부터 일반적 이윤율, 즉 생산가격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3) 칼 마르크스(Karl Marx)

마르크스는 상품가치의 근원, 실체가 노동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커다란 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스미스나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노동이 모든 상품 가치의 근원임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 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 ‘노동’ 자체이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 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과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 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 노동력과 기계, 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자본, 지대에서 나오는 것(스미스, 리카도)이 아니라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C(기계)V(노동력)S(잉여노동)C+V+S(단순가격)P(이윤)C+V+P(생산가격)P-S
자본가 Ⅰ90101011020120+10
자본가 Ⅱ802020120201200
자본가 Ⅲ70303013020120-10

<표1>: 같은 부문의 자본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시장에서의 가격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암시하고 있는 표.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 공장부지, 원료 등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 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 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 100원(C+V)을 투자하고, 잉여가치율(S`=V/S)이 모두 100%라고 가정한다. 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 120원에 팔리게 된다. 그러면 자본가 Ⅰ,Ⅱ,Ⅲ 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 즉 단순가격에 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 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 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 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 -10원을 손해보고 있다. 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 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 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 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 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 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 10/100이다. 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 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 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다. 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 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1) 노동의 가치와 소외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과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 자본가와 관계 맺는, 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 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2) 가치와 가격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 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의 가치이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이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며 또 내재적 척도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론』번역본(김수행 역), 726~7쪽)

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 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 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7강. 노동의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2)

1. 자본주의 경제의 양면성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면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의 저자)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는 농장과 공장 및 사무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아주 정교화된 지식 분야에서만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만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죽어라 일하기를 강요당하는 산업사회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수가 엄청나게 줄어듦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동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계가 아주 불안정해지고, 이는 곧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재에도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쓰는“노동 유연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과 맞닿아 있다.

 

2. 분배, 교환의 기준 1-리프킨(노동시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경제에만 맡겨 두어서는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하나는 실업에 따른 범죄 계층의 증가에 대응한 경찰력의 증가와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를 위하여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제3부문의 영역은 사회?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을 포함하는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경제적 이익(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시장의 영역과 대립되는 모든 비영리적 자치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이 활동 또는 이 활동의 결과물, 그리고 정부의 재원이 이 이 영역에서 어떻게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으로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들에는 시간은행(time bank), 타임 달러(time dollar) 등의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인이 자진해서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노동)을 한 시간 제공하면, 한 시간 달러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 보상은, 여러 전문적인 활동들이 서로 질적으로 아주 다를지라도, 한 시간 달러로서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즉 각 활동(노동) 시간은 기여한 바의 특징과 종류에 관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이 제도 운영 방식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위의 자본의 생성(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과정에서 보았듯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는 기준 역시도 1시간, 2시간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 시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장 영역과 대립되는 제3부문 영역 사이의 교환, 분배 소통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점이 사라진다. 이는 곧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측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아질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 제도는 19C에 J.그레이, P.J.프루동, R.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노동화폐 제도와 유사하다. 노동화폐는 금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고 노동시간을 화폐단위로 하여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이 국립중앙은행을 매개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즉 몇 시간 노동을 했는가 하는 증명서로서의 노동화폐를 국립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이 노동화폐를 다시 중앙은행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언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 1832년 노동화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노동교환소가 설립되었지만 3년을 못 넘기고 실패로 끝났다.
?

3. 분배, 교환의 기준 2-맑스(각자의 필요)

이렇게 노동시간을 기초로 분배, 교환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는 내가 1시간을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1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노동시간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정도, 숙련 정도, 교육을 받은 정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있으며, 숙련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수치상)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을 받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비롯해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는 곧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시간은행 같은 경우는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은행에서의 시간 역시도 결국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수의 노동 1시간과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 1시간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연인, 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 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격려와 희망, 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 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 밀을, 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배 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이 문제가 아니라이 문제이다. 분배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의 기초가 된다. 그렇지만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 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④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4강, 5강?

 

박영균(건국대 HK교수)?

 


1. 자본주의의 성장과 노동가치론

 

1-1. 자본주의의 성장: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13세기 인클로저운동 시작, 15세기 말―16세기에 절정, 14세기 후반-15세기 중반 르네상스운동, 15-16세기 종교개혁운동): 17세기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삶에 유용한 토지 생산물 중에서 10분의 9가 노동의 결과라고 말해도 그것은 대단히 낮추어 잡은 계산일 것”(로크),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부의 어머니’(1667년, 윌리엄페티→상품 교환의 공통 척도로서 노동량이라는 개념의 제시(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1-2. 정치경제학에서의 노동가치론: 정치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노동이 유용한 어떤 것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노동의 양적인 규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어떤 상품의 가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 가치의 개념을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사람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이다. 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부의 어머니는 자연이고 부의 아버지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용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가치’와 구별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명확한 개념 구분이 없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가진 쌀 한 가마와 B라는 사람이 가진 은 한 냥을 교환한다고 하자. 여기서 쌀과 은은 전혀 ‘쓰임’이 다른, 즉 질이 다른 물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교환할 수 있는가?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물품이 교환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 둘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매개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서 가치의 다른 한 측면이 드러난다.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가치’는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페티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페티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도 약 2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는 《정치학》에서 “교환을 위해서 생산되어지는 모든 상품 속에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고 그 공통적인 것 때문에 상품간의 비교가 가능하다”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노예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여 해상무역을 전개하였으며 상업이 발전하였다.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상인출신이 많다.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전개하면서 상품교환을 했으며 여기서 개별자들의 평등에 대한 관념과 민주정에 대한 관념이 싹 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리스에는 소수이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다. 상품교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이렇게 발전한 상업의 영향으로 제기되었던 것 같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고,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는 약 2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품 생산이 일반화되고 이런 상품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 교환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노동가치론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선구자는 1738년에 나온 소책자 《화폐 일반의 이자에 관한 몇 가지 성찰@Some Thoughts on the Interest of Money in General@》을 쓴 익명의 저자였다. 그 익명의 저자는 “모든 상품이 상호 교환될 때 여러 상품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반적으로 투하되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매매되거나 교환될 때, 그 상품이 지닌 가치 또는 가격은 ‘노동량’과 교환의 공통적인 ‘척도(화폐)’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페티는 ‘노동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상품이 가진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최초로 토지나 금과 같은 자연 상태 그대로가 아니라, 거기에 투하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을 정식화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제조업에 투자된 노동은 무익하며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금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중금주의적 환상에 대항하여 노동이 이윤과 축적의 원천이며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지배노동가치설’을 비판하고 ‘투하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1-3. 사회정치적 근대혁명(소유권과 근대민주주의): 캘빈의 구원예정설과 루터의 직업소명설(베버, 프로테스탄트윤리)→ “시민사회의 주요한 목적”은 “재산의 보존”(로크)


2. 자본주의생산양식과 근대적 패러다임: 노동가치론과 생산패러다임

2-1. 자본주의 생산양식: M-C(LP+MP)-M′
: 상품화(이중의 해방)-자연과 노동의 상품화
: 자본의 외부-노동력의 재생산과 자연의 수탈 메카니즘 → 자본주의적 지배메커니즘 확립

→ ① 자연의 수탈 메커니즘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생산력-MP, LP), ② 생산-소비 메커니즘의 확립(소비욕망의 창출), ③ 총자본의 대변자로서 국가의 조직화(교육, 의료, 주거 등)

2-2. 자본주의의 내부와 노동력 상품: 자본주의생산양식은 생산을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두 관계로 추상화한, 생산의 특정한 사회적 양식이다. 이 생산양식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노동이라는 두 존재의 상호관계이다.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축적된 화폐가 아니라 기계처럼 ‘생산수단’을 사는 데 소비된 화폐이며 ‘임노동’을 자신의 파트너로 고용하고 있는 ‘화폐’이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 내부의 지양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 ‘균열’과 ‘공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와 필요/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생산과정 내부의 모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것이 ‘상품’의 세계라는 점에 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 즉 “그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한 상품”(Marx, 1989: 211-212)의 출현은 이 상품의 세계를 보편적인 존재양식으로 만들었다.

2-3. 자본주의 내부와 생산적 노동: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자본에게 생산적인 노동이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이런 규정들은 노동의 소재적 특징에서, 즉 그 노동의 생산물의 본성에서도,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고유한 일정한 속성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노동이 실현되는 일정한 사회 형태, 여러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가져온 것”(Marx, 1965: 127)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것은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 의해 이해되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다.”(Marx, 1965: 128)고 논평한 바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을 상품화하는 방식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대립적 체계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이런 사용가치를 가지는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그런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노동을 투여할 수 있는 대상과 노동수단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자연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관점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상징체계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박되어 있는 인신을 인격적으로 독립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을 주체로 전화시켜 상품 계열화하는 근대자본주의생산양식의 작동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 및 지상의 주인으로 인간을 주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4. 자본주의적 가치계열화와 자본의 외부: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자연/인간의 분리와 ‘생산/비생산적 계열화’의 작동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의 내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부로 계열화된 자연/인간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착취의 가치계열화라는 점에서 근대자본주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분리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성-사랑’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 ‘근대적 가족제도’를 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생식’이라는 생산의 패러다임과 ‘인구학’이라는 국민경제학적 통제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은 노동력의 가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을 재생산하거나 ‘생식’을 통해 후속 인구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이전시키고 그것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가치 지불의 책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삶의 방식인 ‘공적/사적 영역’, ‘소비와 생산의 영역’의 이원화는 바로 이런 ‘생산/비생산’의 이원화에 상응한다.

– 자연과 인간의 분리: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이전의 생산양식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의 인공적인 힘을 분리함으로써 그 스스로 인간적인 세계, 인공적인 세계, 기술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있다. 애초 인간은 자연에 일부였으며 그 세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끊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인공적으로 구축한다. 그것은 자연-인간이라는 관계를 자연/기계(기술)-인간이라는 관계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접적인 세계로서의 기계”(Ihde, 1979: 63)를 생산한다. 여기서 기술은 인공적 시스템, 기계적 시스템, 기술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자동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맑스는 기계와 도구를 구분하고 “완전히 발전한 기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부분, 즉 동력기, 전동장치, 끝으로 도구 또는 작업기”(Marx, 1989: 477)로 이루어진, 여러 도구들을 통합하는 “자동장치”(Marx, 1989: 487)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산수단인 기계를 기계로서 생산”함으로써 “자신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가장 필수적인 생산조건은 어떠한 출력도 낼 수 있으며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원동기”(Marx, 1989: 491)를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따라서 문제는 에너지원이다.

자연의 생명 에너지와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를 소비할 때 발생하는 엔트로피를 그 스스로 ‘자정-정화’하면서 ‘생태적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은 이런 자연의 ‘자정능력’과 ‘생태적 균형’을 파괴한다. 자연의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의 균형과 생성소멸이라는 생명의 흐름에 의해 규정되며 자연적 물질들은 생명적 에너지들의 분배와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과학-기술은 ‘효율성’과 ‘인간중심’이라는 가치체계 하에서 작동하며 자연적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는 기계적 시공간, 또는 탈물질화된 시공간을 창출하며 자연에 없는 신물질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메커니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충돌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이라는 체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도시들의 성장과 파괴가 그 도시들을 발전시킨 에너지시스템의 성장과 파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을 ‘인간의 주체화-향락적 소비욕망’, 그리고 ‘생산/비생산의 가치계열’로 자연을 계열화함으로써 그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산양식보다도 더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지구의 에너지순환시스템과 생태계적 자정 및 균형능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대자본주의는 BT산업과 같이 그전에는 상품의 대상이 아니었던 ‘생명체’들을 자본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과 위기’를 ‘물의 사유화’ 및 각종 환경친화적 상품들로 바꿈으로써 ‘그린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가치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환경위기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생식의 자본주의적 포획: 근대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성은 비록 그것이 가부장제적 남성의 환타지와 결합된 ‘성의 상품화’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혈연의 재생산’이라는 성의 자연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성-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연적 성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 대한 대가 없는 지불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노동의 상품화가 함축하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 독립성이라는 환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종족 번식으로서의 ‘성=생식’이라는 자연성을 넘어서며 신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인간의 욕망과 감정, 성적 욕망을 포함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인문주의적 운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초과하는 ‘성-사랑’은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노동력이 노동과의 분리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성-사랑도 자본주의생산양식의 가치 메커니즘 안으로 포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과학기술이 테크노피아적 미래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대중을 포획해 왔듯이 근대가족제도도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들과의 공모를 통해서 가부장제의 자본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진다.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가치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가족제도 내에서의 권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구조 하에서 자본과 임노동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전체메커니즘을 이끌어가는 파트너일 뿐이다. 여기서 자본/임노동의 상호 투쟁적 메커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이성애적 권력이라는 또 다른 권력메커니즘에 의해 보완되며 전치된 환상체계를 만든다.

남성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그 책임에 대한 대가로 ‘가부장제적 권력’을 보존한다. 그는 힘들지만 그의 권력이 그의 책임에 대가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임노동자로서 노동자가 가부장제와의 공모를 통해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포획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임노동만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생산적 노동 개념을 고수하면 할수록 그의 얄팍한 지배 욕망 때문에 그의 노동력 가치는 더욱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임노동자로서 남성노동자들, 자본에 포획된 노동운동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성애적 가부장제는 단순한 성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역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의 노동을 포획하면서 발생하는 노동/노동력의 간극을 감추는 기제가 되며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임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제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팔아서 ‘사랑’이라는 의무와 책무 속에서 가족 전체를 재생산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의 ‘성-사랑’에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의 본성은 ‘가치증식’에 있기 때문에 오직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치-생존적 필요(need)로 줄이려고 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 반대편, 즉 전체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그들의 삶에 대한 향유라는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그의 노동력 가치 하락은 가족 전체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부족, 생존의 위기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본은 자본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와 대면”(Lebowitz, 1999: 109)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생산적 노동’이라는 자본의 가치양식으로부터의 이탈, 즉 ‘생식’ 밖의 ‘성-사랑’이다.


3. 생산의 사회화와 근대정치의 불가능성

 

3-1. 총체적 빈곤화와 노동가치론적 세계의 와해: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두 개의 세계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한편에는 극단적인 충동과 향유, 풍요의 세계가 존재한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이후 부자는 백만장자가 아니라 억만장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천 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에 맞먹는다(Frank, 2008: 175).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극단적인 결핍과 빈곤의 세계가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는 전 세계 인구의 두 배인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으며 그 중 12억 인구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고 있다. 따라서 ‘풍요 속의 결핍’은 자본주의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생존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빈곤은 문화적이고 환경적인 빈곤을 포함한 총체적인 빈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자원 및 부에 대한 분배의 문제이거나 자본/임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인간, 성-사랑/생식이라는 자본주의 내/외부의 변증법이 중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생태계의 파괴는 이중도시(duel city)와 같은 공간의 분절 속에서 ‘그린의 상품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제1세계와 부자들이 사는 공간에서 쾌적한 환경은 그 자체로 상품이다. 제1세계의 환경유해산업은 제3세계로 이전될 뿐만 아니라 ‘타워팰리스’나 ‘청담동’과 같은 그들만의 공간이 구획된다.

반면 제3세계의 특정 지역은 환경유해산업폐기물의 ‘쓰레기처리장’이 되며 생명공학은 이 이원화 속에서 GMO와 LMO를 생산하며 제3세계와 빈자들의 생존을 상품화하고 그들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빈곤화는 여성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여성노동의 상품화는 제3세계와 빈자들의 총체적인 빈곤화를 가족에 떠넘기면서 경제력의 격차를 여성의 노동이나 성애 등을 상품화하고 있다. 제3세계 여성은 제1세계 중산층 자녀에게 돌봄노동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할머니에게 맡겨놓는다. 따라서 여성의 돌봄노동은 제1세계의 여성을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으로 포획하면서 빈부격차에 따른 제3세계 여성의 노동을 착취한다.

따라서 빈곤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환경적 빈곤)과 자신의 몸과 상징 등 문화적 자산의 결핍(문화적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삼중적으로 중첩(경제-환경-문화적 빈곤)되면서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수탈 메커니즘을 강화하면서 그것을 자본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가치증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에 투자된 자본이 그 속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자본의 ‘가치증식메커니즘’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자본주의가 ‘노동/임노동’의 가치계열화를 ‘생산’ 영역에서 ‘소비’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탈메커니즘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생산적/비생산적이라는 ‘노동패러다임’을 부정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통제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확대되는 자기모순을 국가의 법-제도적 강제장치를 이용한 ‘경제외적 강제’로 대체하고 있다. 하비는 ‘노동의 재생산을 통한 축적’과 구분하여 ‘수탈에 의한 축적’을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맑스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의 특징으로 규정한 ‘경제적 강제’인 반면 후자는 ‘경제외적 강제’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점점 더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의 착취메커니즘인 ‘경제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이 더 이상 임노동만으로 자신의 이윤증식메커니즘을 가동시키지 않으며 자연/인간, 가부장제적 약탈메커니즘을 내부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EC혁명, BT혁명 등을 통해서 기존에는 가치증식 메커니즘으로 포획하지 않았던 영역들, 예를 들어 자연적 생명체들이나 정보-정서노동 등을 자신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급속히 빨아들이고 있다. LMO, RMO뿐만 아니라 전자네트워크를 통해서 구축된 삶 자체가 가치축적의 대상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포획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협력,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가치 생산’의 역할은 더욱더 떨어지고 있으며 직접적인 생산적 노동은 점점 배제되고 있다. 노동의 배제, 그것은 맑스가 이미 예견했던 바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대중의 잉여 노동이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듯이, 소수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 힘들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다.”(Marx, 2000b: 381)

3-2. 소결: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① 노동운동의 체제내화와 생산패러다임 벗어나기: 맑스 사후, 『자본』의 논리-역사적 추론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개입은 자본의 운동양식에 대한 일정한 수정을 가져왔으며 195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더불어 서구의 노동자계급은 정치-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지배체제 내부의 동맹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맑스가 말하는 ‘계급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는 핵심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민주주의로 흡수되었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서 자본가계급과의 ‘사회적 타협’을 만들어왔다. 따라서 노/자의 적대적 분열, 노/자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성에 기초한 자본주의 내부 또는 중심에서 그 밖으로의 도약이라는 ‘혁명의 정치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변혁을 모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애초 맑스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한, 적대적인 모순이라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극복 없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서구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을 극복하기보다는 자본가와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정치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당은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그들의 상대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몰두하였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자본/임노동의 생산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 주변부에 밀려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가 자본주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 또는 그 내부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지점, 주변, 경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오 네그리 ?한겨례

② 사회경제적 구성의 변화: 노동의 신화 대 노동의 종말→산업사회 대 탈산업사회(엘빈 토플러, 다니엘 벨), 물질노동 대 비물질노동(네그리), 착취 대 약탈(하비)→근대적 패러다임/탈근대적 패러다임

: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동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 사적 소유의 불가능성→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한계, 부르주아 정치의 불가능성

cf.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공통된 것의 강탈”: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3-3.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향유의 삶: 현재 진행되는 자본-기술-권력의 일체성이 지닌 양가성(ambivalence)을 볼 필요가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킨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맑스는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시킴으로써 개인의 발전을 위한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교양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에 의해 전유될 때, 과잉인구와 과잉생산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은 전혀 상이한 가치와 결과를 함축하는 두 가지의 길이며 선택지이다.(두 가지 길)

맑스는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의 세계사 전체의 노동”(Marx, 1991: 162)이며 “산업의 역사와 산업의 이미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는 인간 본질적 힘들의 펼쳐진 책이며 감각적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 심리학”(Marx, 1991: 163)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런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이러한 모든 감각들의 완전한 소외, 즉 가짐이라는 감각”(Marx, 1991: 160)으로 환원한다.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국민경제학, 이 부의 과학은 … 동시에 단념, 내핍, 절약의 과학이다. … 자기 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이 주로 가르치는 명제”(Marx, 1991: 173)이다. 따라서 그는 “풍부한 인간과 인간적 욕구”로 “국민경제학적인 부와 빈곤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감각들과 정신”이 나 자신의 전유”가 되는, “인간적인 생활의 자기화 방식”으로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Marx, 1991: 159).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제공하는 “곤궁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어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물질적 토대로,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들을 발전시킴으로써 “향유 수단의 발전” 및 “자유시간의 증대”시키는 사회적 생산력을 만들어놓는다(Marx, 2000b: 381). 따라서 맑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산적 노동’의 가치를 고수하거나 노동가치론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의 총체적인 위기는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며 생산의 사회화한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화될수록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자본의 증식 욕구로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정보화-자동화는 인간 노동의 배제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저하를 생산한다. 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다른 사회적 기반을 창출한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문화사회로의 길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개의 길에서 전선을 나누는 선은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화폐 및 자본의 ‘물신적’ 성격[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③

상품의 ‘사회적’ 의미-3강?

 

김우철(호서대 외래교수)

 

 

4. 가치의 화폐형태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이제 (전개된 가치형태를 건너뛰어) 일반적 가치형태로 시선을 옮겨보자. 일반적 가치형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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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의 상의 =
10 kg의 차 =
1 쿼터의 밀 = 20kg의 쌀
2 온스의 금 =
x량의 상품 A =
등등의 상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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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상품 세계로부터 분리된 한 종류의 상품, 곧 쌀로 표현되어 있다. 각 상품의 가치는 이제 쌀(의 사용가치)과 동등한 것으로서 모든 다른 사용가치로부터도 구별되며, 이를 통해 그 상품과 상품들의 공통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형태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모든 상품들을 가치로서 서로 관계 맺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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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형태와 달리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상품이 동일한 등가물로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에 일반적이고 통일적인 가치 표현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상품의 가치 대상성은 그것이 이들 물적 존재의 순전히 ‘사회적 현존재’인 까닭에 모든 상품의 전면적인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따라서 모든 상품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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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쌀의 자연형태는 상품 세계의 공통된 가치자체이며, 그래서 쌀은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적으로 교환될 수 있다. 물체형태로서의 쌀은 일체의 추상적 인간노동의 눈에 보이는 화신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곧 쌀을 생산하는 경작노동은 일간노동 일반의 ‘일반적’ 현상형태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상품에 대상화된 현실적 노동은 노동의 모든 구체적 형태 및 유용한 속성이 사상된 노동으로서 소극적으로만 표시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모든 현실적 노동을 그것들에 공통된 인간노동이라는 성격, 곧 인간노동력의 지출로 환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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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등가형태는 가치 일반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상품에도 귀속될 수 있다. 다른 한편 한 상품이 일반적 등가형태에 있는 것은 오직 그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에 의하여 등가물로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배제가 궁극적으로 한 특수한 상품에 한정되는 순간 비로소 상품 세계의 통일적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사회적인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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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연형태에 등가형태가 사회적으로 결합되는 특수한 상품은 이제 화폐상품(money commodity) 곧 화폐가 된다. 이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 쌀이라는 상품을 금이라는 상품으로 대체시키면 바로 가치의 화폐형태(네 번째 가치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금은 보편적 등가물이다. 화폐형태는 직접적인 일반적 교환가능성의 형태 또는 보편적 등가형태가 이제 사회적 관습에 의하여 금이라는 상품의 특수한 자연형태와 궁극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상품 세계의 가치 표현에서 금이 보편적 등가의 지위를 독점하자 금은 곧 화폐상품이 되고, 일반적 가치형태는 화폐형태로 전화(轉化)된다. 이미 화폐상품의 기능을 담당하는 상품, 곧 금에 의한 한 상품의 단순한 상대적 가치표현이 가격형태이다. 따라서 쌀의 ‘가격형태’는 ‘쌀 20kg = 금 2 온스’ 또는 ‘20kg의 쌀 = 2 파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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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Kapital]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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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품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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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형이상적인 좀스러움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찬 매우 기묘한 물건”이다. 상품이 사용가치인 한에서는 아무 신비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탁자가 상품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감성적인 동시에 초감성적인” 하나의 물품으로 전화한다. 상품의 이러한 신비적 성격은 그 사용가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거니와 가치 규정의 내용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 가치의 실체를 이룬다는 점, 그리고 가치의 크기가 노동 지출의 지속 시간 또는 그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위하여 노동하는 한 노동이 사회적인 형태를 갖는다는 점 등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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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품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이 ‘상품형태’ 자체로부터 나온다. 모든 인간노동의 동등성은 노동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사물적으로 표현되며, 생산자들의 사회성을 실증해 주는 생산자들의 상호관계는 노동생산물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형태의 비밀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상품형태는 인간에 대하여 인간 자신의 노동이 갖는 사회적 성격들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대상적 성격들로 보이게 만들거나 이 물적 존재들의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 비쳐보이게끔 만들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생산자들 외부에 존재하는 갖가지 대상들의 사회적 관계로 비쳐보이게끔 한다. 이러한 교체를 통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이 되고 사회적인 물적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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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형태나 이 형태가 나타나는 바의 노동생산물들의 가치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인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에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물체와 물체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마치 종교적 세계의 신비경에서 인간 두뇌의 산물들이 그 자신의 생명을 부여받아 독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 세계에서는 인간의 손의 생산물이 그렇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는 일종의 물신숭배(Fetischismus)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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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용 대상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영위되는 사적 노동(private labor)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사적 노동의 복합체는 사회적 총노동을 이룬다.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생산물을 교환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이 지닌 사회적 성격도 이 사물들의 교환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사적 노동은 교환을 통해 노동생산물과 그것에 의해 매개되는 생산자들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의 한 부분임을 실증받는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 또는 물적 존재와 물적 존재의 사회적 관계라는 ‘사물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상품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가 지니고 있는 핵심 원리는 서로 독립된 여러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 그 노동이 지니는 인간노동으로서의 동등성에 있으며, 이렇게 ‘동등한 노동’에 의해 매개되는 ‘노동의 사회성’이 노동생산물의 ‘가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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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노동생산물이 같은 종류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물적 외피로서 인정되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생산물을 가치로 관계 맺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종류가 다른 자신들의 생산물들을 서로 교환할 때 그것들을 먼저 가치로 등치시킴으로써 그들의 서로 다른 노동들을 인간노동으로서 서로 등치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행한다. 가치의 이마에는 가치가 무엇인가가 써 있지 않다. 오히려 가치는 각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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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내가 상의나 구두 따위가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사물화로서의 쌀과 관계한다고 말할 경우, 이 말의 괴상망칙한 성격이 곧바로 느껴진다. 그러나 상의나 구두 등의 생산자들이 이 상품들을 보편적 등가물로서의 쌀(또는 금이나 은)과 관계를 맺어줄 경우에는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그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 괴상망칙한 형태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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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모습은 그것이 자유롭게 사회화된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여질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사회의 물질적 기초, 곧 그 자체 또한 장구하고 고통에 찬 발전사의 한 산물인 일련의 물질적 존재조건이 필요하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불완전하게나마 차이와 가치크기를 분석하고 이 형태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왜 이 내용이 저 형태를 취하는가, 요컨대 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고 그 지속시간에 의한 노동의 계측이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로 표시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제기조차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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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폐의 물신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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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출현은 서로 다른 노동생산물들이 실제로 등치되고 따라서 상품들로 전화되는 교환과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교환의 역사적인 확대와 심화는 상품의 본성 속에 잠자고 있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을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상품과 화폐로의 상품의 이중화를 통하여 상품 가치의 자립적 형태가 얻어질 때까지 그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노동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가 성취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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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확인했듯이 화폐형태란 다른 모든 상품의 관계가 반사되어 하나의 상품에 고착된 것이다. 어려운 것은 화폐가 상품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 때문에 상품이 화폐가 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 표현에서 다른 어떤 물품의 가치크기를 표시해 주는 물품이 마치 이러한 관계로부터 독립된 ‘사회적인’ 자연속성으로서 등가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의 고정화 과정을 추적했다. 보편적 등가형태가 어떤 특수한 상품의 현물형태에 달라붙게 되거나 화폐형태로 결정화되자마자 이 외관은 완성된다. 다른 상품들이 각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어느 한 상품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그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들이 그 한 상품으로 각자의 가치를 일반적으로 표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을 매개하는 운동은 그 자신의 결과 속에서 소멸하여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상품들과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의 완성된 가치자태가 상품들 밖에 그리고 상품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금과 은이라는 화폐상품들은 대지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인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화폐의 마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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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본의 일반적 정식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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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유통은 자본(capital)의 출발점이다. 상품생산 및 상품유통, 즉 상업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 전제이다. 16세기 근대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의 형성으로부터 자본의 근대적 생활사가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자본은 어느 곳에서나 처음에는 우선 화폐 형태로서 (즉 상인자본 및 고리대 자본이라는 화폐재산으로서) 토지소유에 대립하지만, 그러나 화폐를 자본의 최초의 현상형태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본의 발생사를 일일이 살펴볼 필요는 없다. 동일한 역사가 날마다 우리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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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우선 양자의 유통형태의 차이에 의해 구별될 뿐이다. 상품유통의 직접적 형태는 C-M-C로서,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 및 화폐의 상품으로의 재전화, 곧 구매를 위한 판매로 나타난다. 반면에 M-C-M이라는 화폐유통은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 및 상품의 화폐로의 재전화, 곧 판매하기 위한 구매로 나타난다. 이 운동을 통해 후자의 유통을 담당하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그 사명으로 볼 때 그것은 이미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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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M-C-M은 (C-M-C의 유통과 달리) 최종 목적이 판매자로서 화폐를 취득하는 데 있다. 그가 처음에 화폐를 내놓기는 하지만 이는 다만 그것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함이다. C-M-C의 유통의 목적이 사용가치라면, M-C-M의 목적은 교환가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M-C-M은 양극의 질적 차이에 의해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극의 양적인 차이에 의해 그 내용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최초의 유통에 투입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에서 끌려나온다. 예를 들어 100파운드의 화폐로 구매한 면화가 100+10파운드로 다시 판매된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 M’=M+ΔM이다. 즉 M’는 최초에 투하된 화폐액+어떤 증가분과 동등하다. 이 증가분 또는 최초의 가치 이상의 초과분이 잉여가치(surplus value)이다. 최초에 투하된 가치는 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크기를 변화시키고 잉여가치를 덧붙인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가치증식시킨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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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M’에서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인 존재양식으로서, 상품은 그 특수한 존재양식으로서 기능한다. 이 운동 속에서 가치는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한 쪽 형태로부터 다른 쪽 형태로 이행하여 ‘하나의 자동적인 주체’로 전화한다.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시키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다. 그 운동은 자기목적적이며 그래서 무제한적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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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치는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실체로서 나타난다. 이 실체에 대하여 상품이나 화폐는 어느 쪽이나 단순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 가치는 갖가지 상품의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적 관계에 들어간다. 그것은 본원적 가치로서의 자기를 잉여가치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짓는다. 곧 아버지 신으로서의 자기를 아들 신으로서의 자기로부터 구별하는데, 아버지나 아들은 모두 같은 나이이고 게다가 둘은 한 몸인 것이다. M-C-M’, 이것이 자본의 일반적 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