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②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②

 

강사 : 연효숙(연세대 외래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 ⓒ프레시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현대철학을 개시한 장본인이다. 그는 근대철학을 마감하고 현대를 새롭게 여는 경계에 서 있던 사람으로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른다. 근대를 마감하면서 플라톤(Plato) 이후 2,500년간 서구인들이 가져왔던 중심 가치를 가차 없이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한 철학자이다.

 

전통적 가치의 전복

 

현대성은 아직까지 정체가 명확하지만은 않다. 20세기의 시작을 현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좁게는 1968년 5월 프랑스 ’68혁명’이 진정한 현대의 분기점이며 현대성을 구현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니체의 철학의 길안내를 도와줄 연효숙 교수는 “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니체가 그 징후들을 포착했고 그것들을 니체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한다.

헤겔(Hegel)은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의 시대’를 말했다. 그러나 니체는 그 이성 중심의 시대를 마감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점이 니체가 당시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가 된다. 소크라테스(Socrates) 이후 헤겔에 이르는 중심 가치는 이성의 사유를 중시하는 전통이었기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의지’ 같은 개념은 당시 서구인이 이해하기에는 생소했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 또한 같은 맥락에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니체의 저작이 헤겔의 저작에서 보이는 일목요연한 체계와는 정반대의 특징을 보이는 점도 그의 사상이 당시에 평가절하 될 수밖에 없던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초기 예술적인 관점에서 쓴 저작 『비극의 탄생』(1871) 이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도덕의 계보학』(1887), 『힘에의 의지』(1887), 『니체 대 바그너』(1888) 등 그의 에세이적 글 속에 보이는 주옥같은 말과 통찰력 있는 문구들이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창조적 발상의 길을 열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현대적 사상의 기원으로서의 니체 : ‘신은 죽었다’가 의미하는 것

 

서양의 19세기 말, 서구인들은 스스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일종의 ‘위기감’이다. 헤겔이 말한 ‘역사의 주인’이었던 인간이 근대의 막바지에는 오히려 ‘악마적’인 성향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다는 이중적 측면이 드러났고 역사를 지배하던 낙관주의적이고 통일적이었던 근대의 문화가 정점에 있다가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800년대 말 서구 유럽의 모습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당시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그것을 예술 활동을 통해 드러냈듯이 니체는 이 징조들을 감지하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다. 이른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는 니체의 말은 근대적 주체인 ‘인간’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이다. 『안티 크리스트』(1888)에서 니체는 실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기독교 절대존재의 허구성과 기독교적인 덕(德)의 체계는 절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진리를 구현하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고 했다. 마르크스(Karl Marx)가 “종교(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했던 또 다른 요지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하게 하는 거짓된 모순에 있었다.

근대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기독교 중심의 삶의 가치는 더 이상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삶의 허무함이 드러나게 된다.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Nihilism)’은 바로 근대 주체의 사망을 선고하는 신호탄이었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대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통해 미학ㆍ심미적인 것과 예술적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부상시킨다.

 

미학주의와 반관념론(anti-idealistic)적 경향

 

연효숙 교수는 니체 이전 서양에는 ‘진선미(眞善美)’의 위계가 뚜렷했다고 한다. ‘진(眞)’은 소크라테스부터 헤겔에 이르는 진리체계를 지칭하고 ‘선(善)’은 인간이 지녀야 할 윤리적 덕목의 가치이며 ‘미(美)’는 인간의 심미성과 미적 감각을 말한다. 니체는 가장 하위에 있던 미학적인 것을 가장 우위에 두면서 서양 고대의 형이상학, 근대의 인식론, 진리 위주의 경향을 전복시킨다.

니체는 이러한 가치의 전복을 통해 플라톤적 이상주의의 종말을 고하면서 근대까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만이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지는 실체라는 생각을 버린다. 인간 외의 사물(생명)에 대해 그 존재가치를 평가 절하해 버렸던 것이 근대까지 서양 인식론의 기본이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서양은 서양 이외의 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의 가치도 ‘인간 이외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의식을 확고히 했다. 니체는 ‘반인간주의(anti-humanitarian)’를 주장하면서 ‘인간주의(humanism)’가 오히려 인간을 더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보았다.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의 비판이다.

연효숙 교수는 이런 니체의 사상이 현대철학에 지적 영감을 불어 넣었던 작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그리고 현대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와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위시한 중심가치의 전복과 전도를 시도했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한다.

니체는 또한 탈근대(post-modern)사상으로의 전환에 있어 맹아를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대까지 서구의 철학이 보편성에 기초하여 전체를 아우르려는 ‘동일성(identity:정체성)’의 철학이었다면 니체는 개체의 ‘차이(difference)’를 중시하는 철학을 전개하면서 개체성을 확보한다. 수직적인 사고에서 수평적인 사고로의 전환이다. 이 모든 것은 전통의 ‘해체’이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 니체 ⓒ위키피디아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비극은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이 평가 절하하던 예술가와 예술을 오히려 높게 보고 예술 중에서도 ‘음악’에 대해 강조한다. ‘그리스 비극’은 소크라테스가 탄생하기 이전 시대를 풍미했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을 연원으로 하는 ‘그리스 정신’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던 이성 중심의 주지주의(主知主義)와 상관없다. 삶의 원초적인 힘과 본능이 오롯이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 정신이며 ‘충동(힘)과 본능과 격정(pathos)의 홍수 속에서 예술 창조의 원동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 비극의 의미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미학의 전형으로 보았고 이 ‘고전 비극의 예술’을 독일에서 재창조 하려 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처럼 ‘음악예술’은 삶의 부속물이 아닌 “상이한 매체를 이용해 삶을 총체적으로 새롭게 재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원래 인간은 비극의 정신 속, 인간의 충동 속에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체험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성이 등장하여 인간의 자각을 통해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통일성에 균열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소크라테스이고 그리스 정신이 쇠퇴하는 지점이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이 세계의 원리 혹은 인간의 원리로서 두 가지 상반되는 원리가 잘 조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그 원리가 ‘아폴론적 원리’와 ‘디오니소스적 원리’이다. 아폴론은 질서 정연한 형식의 신, 꿈의 신으로 조형적인 미, 질서, 형식의 예술을 통해 미를 창조하는 힘을 가지며 개별적인 것의 원리가 된다. 조각, 회화 등 조형 예술에 관련한다. 반면 디오스소스는 카오스(chaos)와 황홀경의 신, 술의 신이다. 도취적이고 형식을 파괴하며 통제되지 않는다. 비조형적인 음악 예술의 영역과 관계한다.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것은 개인을 중시하지 않고, 개인을 말소시켜 신화적인 일체감 속에서 개인을 해체시킨다. 이 원리는 그리스 비극을 살아 있게 하는 주요 원리로 자리매김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아폴론적 원리보다 더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 연효숙 교수는 “그러나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원리를 강조했지 거기에 치우친 것은 아니었다”고 부연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를 들면서 후자로 갈수록 점점 아폴론적인 색채가 강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비극적 감정이 희미해지는 사이 비극은 쇠퇴하고 퇴장하게 되고 만다. 감성이 퇴장하고 이성이 등장하면서 디오니소스적 원리는 퇴조하고 아폴론적 원리가 지배적이 된다. 그리스 비극은 쇠퇴되고 이성의 등장 이전에 있었던 인간과 세계가 합일되는 황홀경의 경지는 억압받고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니체가 바라본 그리스 비극과 소크라테스 등장 사이의 관계이다.

 

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다는 기준에 의문을 제기한다. 연효숙 교수는 강의 내내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니체는 자신이 그리스 비극과 그리스 정신을 규명하기 위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갔듯이 도덕이라고 하는 기준을 설정하고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의 계보는 결국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도덕 기준을 정하는 자에 의해 설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그 결정자는 니체에 의하면 역사의 승리자이며 권력자라고 말할 수 있고 도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선악의 절대적인 기준은 어디에도 없으며 당사자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변적이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근대의 보편적 인간,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거부한다. 연효숙 교수는 “니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규범’들과 칸트나 헤겔 철학에서 얘기하는 이른바 ‘인간의 보편적인 선(善)’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도덕의 실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봤다”고 설명한다. 그 하나가 ‘주인의 도덕(master morality)’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의 도덕(slave morality)’이다.

‘주인의 도덕’은 귀족계층과 같은 고매한 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을 담고 있다. 주인의 도덕이란 가치의 창조자, 가치의 결정자가 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에 있어 주인의 도덕을 소유한 자들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연민과 동정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풍요로운 ‘힘’에서 나오는 배려의 차원에서 관심을 가진다. 반면 ‘노예의 도덕’은 사회의 최하 계층들의 도덕을 대변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독교의 도덕’이다. 노예를 만드는 도덕이다. 그들의 선은 단지 고통 받는 자들의 고통을 ‘줄여주기만’하는 행위이다. 동정, 자비, 인내, 박애, 친절이라는 덕목을 가진 자들은 선한 자들이고 악인은 고통을 주고 공포를 조장하며 억압하는 자들이 된다. 선한 자들은 악한 가해자들을 물리치고 이겨내야 한다는 스토리를 제공하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다.

니체가 보기에 서구의 도덕은 이 노예의 도덕이 주인의 도덕에 대해 도전하면서 노예들의 평범한 가치를 추켜 올린 것이다. 니체 당시는 물론 지금 현대에 있어서도 동정과 연민을 받는 대상자들이 선한 가치를 점유하고 ‘당신은 핍박받고 있고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주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노예의 도덕은 인간을 더욱 ‘약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가치만이 우리 삶의 선함에 대한 기준으로 적합하다고 착각 하게 만든다. 이것이야 말로 노예의 도덕이 지배하고 있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연효숙 교수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 이 대목에서 니체가 오해를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특히 “니체가 ‘금발의 야수’라는 표현을 써서 창조적이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인간상을 설정했는데 이 표현이 마치백인 우월주의를 강조하는 듯이 보이고 히틀러, 나치에 영향을 주었다는 오해를 받는다. 일면 이 말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노예가 주인을 딛고 진짜 주인이 되는 얘기를 하지만 이것은 헤겔의 이야기”이다. “니체는 동정과 연민을 통해 선한 가치를 획득한 노예의 도덕이 일어선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기독교의 잣대에 맞추어 그런 식의 도덕을 강요하는 사회가 정말 억압받는 자들을 구원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적 사회가 몰락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주인의 도덕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고 모든 도덕적 가치들은 인간의 참된 본성과 환경 위에서 재평가되고 재정립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주인의 도덕에 대한 이해에 있어 우리가 조선 당시의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반문화의 정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로 바라보는 사대부의 실상과 문화적 측면에서 문화적 표본으로써 바라보는 사대부의 문화는 다르다는 점을 상기할 만하다.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bermensch)’

 

니체는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비판하면서 이 둘을 형용하기를 ‘이성만 남아서 살과 근육은 다 발라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형태’라고 표현한다. 이 두 문화는 동정과 연민을 유발하면서 인간을 ‘약함’을 계속 강조한다.

그래서 니체는 ‘삶(Leben)’에의 의지 강조한다. 그 삶은 창조적인 삶이고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과 정신이 삶의 원초적인 힘과 본능이 살아있고 충동(힘)과 본능과 격정(pathos)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원동력이 됨을 볼 때 삶의 의지가 사라져 버린 근대의 신은 죽어야 마땅한 것이 된다.

근대적 주체에 오르고 이성적 사유만을 통해 뼈만 남아버린 인간을 니체는 극복하기를 바랐고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을 ‘위버멘쉬(?bermensch)’라고 했다. 흔히 ‘초인(超人)’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위버멘쉬는 삶의 원초적인 본능과 의지가 살아서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해나가는 능동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독일어 ‘?bermensch’의 동의어가 ‘Supermann’이고 영어로는 ‘Superman’이 된다. 이를 보면 니체가 당시 서구 현실에 대해 느꼈던 위기감의 경중(輕重)과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의지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니체 사상의 의의

 

연효숙 교수는 근대는 이성이 너무 과하게 강조된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특히 헤겔과 쇼펜하우어가 서로 같은 장소와 시간에 강의를 하면서 헤겔의 수업에는 사람들이 넘쳐 났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에는 파리만 날렸다는 설명을 통해 당시 이성주의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이성의 과잉포장을 파토스, 감성, 미, 예술, 직관이 승리해서 깨부숴야 함을 역설했다. 연효숙 교수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말도 있듯이 플라톤이 제시한 철학에서의 모범답안과 플라톤주의가 주는 서양철학의 ‘진리 강박증’은 사람들을 서열화 하고 줄 세워 한 가지 방식과 가치만을 기필하게 만든다. 이러한 척박한 시대에 인간의 숨통을 틔운 것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라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데서 니체의 철학이 출발한다.

니체의 철학 속에는 ‘분열(균열)된 주체’가 등정한다. 통일된 주체가 허구라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너무 어려운 사안이다. 그러나 근대는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냈다. 도대체 통일된 주체로서의 ‘나’가 어디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니체이고 이런 문제는 이미 현대 철학에서 증명하고 있다.

연효숙 교수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가 헤겔의 철학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헤겔은 세계의 체계를 거머쥐는 큰 철학을 세웠는데 비유하자면 큰 집을 지어 놓고 헤겔 자신은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조그만 문 앞 수위실에 망만 보는 형국이다. 왜 그는 그 큰 집에 안 들어가고 있나? 왜냐하면 그 집은 실속이 없는 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니체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해석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니체주의자들은 ‘관점주의(Perspektivismus)’라는 말을 써서 설명한다. 상대주의와 비슷한 말이다. 플라톤적 철학이 제시한 관점과 해석이 전부가 아니라 각자 자기의 눈에 맞게 도출된 의견과 해석은 존중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이 니체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주목받는 철학자가 되는 이유이다.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 -쇼펜하우어①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 -쇼펜하우어①

 

강사 : 박은미(건국대 교수)
후기 :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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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부터 헤겔까지가 근대철학의 영역이라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현대철학을 시작한 세 줄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는 서양 현대철학 분기점 중 하나인 니체를 중심으로 니체 계열의 철학줄기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고 탄식했지만 후에 자신의 말을 귀담아 준 수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이번 강의는 그들을 읽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니체 바로 이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부터 시작한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대학 강단은 물론 일반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할 기회가 그만큼 적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니체 계열의 철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비합리주의로서 ‘의지’를 말하지만 선배 철학자에 있어서는 플라톤(Plato)과 칸트(Kant, 1724~1804)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계열에 영향을 받았다. 일면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어찌 보면 반대로 충분히 흥미로운 철학자이기도 하다.

▶ Arthur Schopenhauer

궁핍하거나 권태롭거나! 어쨌든 삶=’苦’

쇼펜하우어를 두고 염세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이런 평가는 아마도 쇼펜하우어 자신이 이래도 저래도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긍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욕망이 있으면 채우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에게 불행은 행복보다 항상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장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단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느리다고 한다. 이 둘의 시간차가 항상 부부간, 형제간, 고부간 또 직장 동료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괴로움의 대상이 되고 아픔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열일곱 살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20대 초반에는 “삶은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칸트의 ‘물(物) 자체’와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존재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 자체(Ding an sich)’란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 자체’는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를 지칭한다. 칸트는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인가? 라는 질문을 상정하고 존재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진짜 그 세계’를 ‘물 자체’라고 표현했다. 이 물 자체의 영역을 ‘예지계’라 하고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현상계’라고 한다. 현상계를 다시 말하면 ‘드러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드러난 세계’라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빛을 통해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보고 대상 사물의 색깔을 그대로 인식할 때 형성되는 그 세계이다. 인식하는 대상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나의 주관적 인식으로 오염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 이것은 일반 물리학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이고 칸트 이전에 사물을 인식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는 바뀐다. 인간이 대상 사물의 고유한 색을 인식하는 것은 원래 사물의 색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인식주체인 ‘내’가 그 사물의 색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청주파수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 영역을 말한다. 보통 16~20Hz의 영역이다. 이를 기준으로 사람은 돌고래나 박쥐의 초음파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이들 생물이나 곤충, 파충류 등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들리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칸트의 용어로 다시 돌아오면 물 자체에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분명 있다. 그러나 인간의 현상계에는 그 소리가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물 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 밖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어떤 영역이 존재함을 알게 되더라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신은 물자체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상계에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유의미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칸트 사유에서 보이는 일련의 이 과정은 대상중심에서 주관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칸트가 현상계와 예지계를 나누어 인간 인식의 한계를 증명한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칸트가 말한 현상계 내에 한정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의 특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세상을 본다고 말했다. 이것이 인식 대상을 이미지로 떠올려 표상하는 인간 인식의 ‘선택적 경향성’이다. 이런 표상방식은 결국 존재방식을 규정하게 된다.

충분근거율과 표상으로 드러나는 세계

쇼펜하우어는 표상을 말하면서 ‘의지’의 작용을 말하는데 이성이 단순한 두뇌현상이라면 ‘의지’는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이성은 의지에 기여하는 2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박은미 교수는 이 대목에서 쇼펜하우어가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의식이 있어 스스로를 인식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다. 이 자의식은 ‘표상’의 능력이다. 표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성으로 스스로를 인식 대상으로 삼고 그 능력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목도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고통 자체 보다는 고통의 표상 때문에 고통 받게 되는 셈이다. 세계의 고통이 모두 나의 표상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영 열심히 하던 박태환 선수에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달리기운동하면서 볼 풍경이라도 있지만 매일 수영장 바닥만 보면서 운동하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농담조의 얘기를 했는데 그 날부터 박태환 선수는 수영이 괴로워졌다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이 고통이 표상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여 표상해내고 ‘의지의 세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인간의 인식과 관련하여 칸트는 12범주를 드는데 이 범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과범주’이다. 즉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포착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이것을 ‘충분근거율(충족이유율)’이라고 한다. 인간은 사유방식의 특성상 근거를 찾아서 인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서 ‘충분근거율’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표상’해 내는 것이 된다. 칸트가 “현상계는 ‘물자체’가 현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비교해보면 <‘물자체’-‘의지의 세계’>, <‘현상계’-‘표상의 세계’>, <‘현상’-‘표상’>정도로 도식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 ‘충분근거율’을 정리해보면 인간이 ‘충분근거율’에 의지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원래 세상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의 생성-인식-존재-행위의 네 가지 특성에 입각해 세상과 관계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표상의 세계를 경험할 뿐 세계 자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박은미 교수는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압축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세계는 ‘의지’의 세계인데 인간에게는 이 의지의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을 쇼펜하우어의 말로 이어보면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고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드러나는 세계일뿐이다.

의지의 작용과 삶의 맹목성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이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객관화되고 다양한 표상들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에 작용하여 그 존재를 다양성 속에 드러나게 한다.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가 나의 마음에 드러난 것은 또 ‘의욕’이라고 한다. 의욕을 통해 인간은 행위 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몸[육체]’은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인간은 높은 정도의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고 동물은 그 반대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의 객관화 정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유물론적 입장과는 반대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으로서의 의지이다.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맹목성에 대한 극복의 주체가 나 자신일 때 비로소 그 극복의 고유한 가능성과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자기 인식이 되어야 의지는 실현되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인 의지의 움직임이 표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필연에 빠지게 된다.

박은미 교수는 만일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잘 이해가지 않는다면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개념을 대입시켜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기라는 것의 변화성, 우연성이라는 속성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개별적인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의지가 객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치 장자(莊子)가 삶과 죽음을 기의 ‘이산취합(離散聚合)’이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의지’가 맹목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자기 인식의 선택적 경향으로 내게 좋고 나쁨을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들도 나와 같이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 하는 동지이자 동료임을 깨닫게 된다. 피아(彼我)의 세계가 모두 고통임을 알게 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 탈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경향성이 있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기대치는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인식하는 시간차와 마찬가지로 차츰 높아져 간다. 세계의 경향성과 다양한 인간의 취향은 어차피 서로 다 접합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구조적으로 언제나 불가능한 삶을 바라는 존재로써 미래의 모순적인 상황에 희망을 걸고 거기에 행복을 유보시킨다.

인간은 ‘자기중심성’에 기인하여 곧잘 나의 의지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침탈한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서 침탈된 의지는 곧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고통이란 것이 그렇다. 이 개별자와 저 개별자에게 체현된 의지는 본래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개별자들에게 체현되면서 충돌하고 이 때 고통이 생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 개개인은 모두 하나의 ‘의지’에서 표상으로 드러난 구현체이므로 서로가 서로의 의지를 이해하고 그 각각의 존재방식이 분명하게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개별화의 원리에 갇혀서 근거율에 구속되고 그 인식에 갇힌 시선을 통해 세상의 표상만이 관조될 뿐이다.

이념을 보는 힘과 정관(靜觀) : 순수한 인식 주관과 의지의 부정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을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의 다음 단계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념은 의지의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이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의지를 본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절대 ‘의지’를 볼 수 없다.

이념은 이성에 의한 주객의 분리와 시공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직관 할 수 있고 ‘더 이상 근거율에 따르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대상을 응시하는 정관(靜觀) 속에 침잠되어 동화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순수하고 의지가 없으며 고통이 없고 시간에 매이지 않는 인식주관”이라고 설명했고 다시 표현하자면 ‘순수한 인식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정관’을 통해 욕망의 세계가 수반하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태연함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다.

아마 ‘예술‘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자기 자신에 속박되지 않아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경험을 준다. 예술은 의지의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을 직관한다. 그러기에 의지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한다. 자신이 직관한 이념을 예술작품에 구현해놓는 사람이 ‘천재’이고 천재는 표상들의 원형이 되는 이념을 직시하는 성찰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습득된 성격‘이라는 표현으로 자기의 성격과 경향성을 벗어나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습득된 성격은 스스로 일궈낸 성격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향성을 조절해 나감을 의미한다. 연장선에서 ‘덕(德)’이란 “피아가 의지의 구현체일 뿐이므로 나의 고통을 미루어 타인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개별화의 원리에 갇히지 않고 의지의 큰 흐름을 느끼면 ‘동정심’이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이것을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의지의 맹목성에 의해 의지가 나에게 의욕을 너무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가 나에게 다가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견뎌내야 함을 역설했다. 이른바 ‘덕에서 금욕으로의 이행’이며 ‘의지의 부정’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 ‘의지를 부정’을 내가 부정하려는 의지작용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면 일체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참선하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번뇌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리하자면 의지의 부정은 개별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인들을 통해 나타나는 의지작용의 흐름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해서 얻게 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 전환이 성공한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아야”하는 이상적 경지가 현실화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성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복잡하게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가 아닐까.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11월 6일 개강[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11월 6일 개강

니체, 푸코, 들뢰즈 등 12명의 현대철학자

프레시안 기사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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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일찍 왔다.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 우리가 신을 죽인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방황 중이다. 이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니체는 탄식했다.
19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그는 1900년, 20세기의 문이 열리기 직전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일찍 온 21세기의 철학자였다.20세기 초반, 과학기술생철학, 실존철학, 현상학, 윤리학, 해체론, 후기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팍팍한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자유와 삶의 근거를 갈망하며 새로운 소리를 손으로 더듬거리고만 있다.?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고자 니체 계열의 사상가 열두 명의 향연을 마련하고자 한다.

니체를 비롯해서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화이트헤드,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까지
열두 명의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에 여러분을 초대하니
이 노래를 가슴으로 듣기를 희망한다.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진행하는 <우리 눈으로 본 서양철학사>의 3번째 강좌가 오는 11월 6일 시작됩니다.
지난해 시작된 이 강좌 시리즈는 지금까지 2차례의 서양근대철학사 강좌(10강 및 8강)와 마르크스주의사상사 강좌(16강)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니체를 비롯한 현대 철학자 12명의 사상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관심 있는 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강좌 : 우리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일시 : 2012년 11월 6일 ~ 12월 18일 까지(11월 27일 휴강),
2013년 1월 8일 ~ 2월 12일 까지 (매주 화요일, 12강)

-시간 : 오후 7시30분-10시

-장소 :
서울마포구 서교동 민족의학연구원 2층 강당(약도 참조)

-수강료 : 24만원(
커플 수강료: 36만원, 두 분이 함께 신청하실 경우) 개별 강의 수강료는 3만원

-수강 신청: 수강료를 계좌로 입금 하신후
이메일 혹은 전화연락을 주시면 등록이 가능 합니다. (계좌 :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 프레시안)

-강의 문의 및 수강신청 연락 :
admin@pressian.com(문의02-722-8546 민정훈)으로 부탁드립니다.
?-강의실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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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실 찾아오는 방법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출구로 나와 뒤돌아보면 빵집과 옆으로 샛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10분정도 걸어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거기서 편의점이 있는 오른 쪽으로 30M 지점에 태복빌딩(민족의학연구원)이 있습니다. 그 건물 2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강의 일정
1강 : 11월 6일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

2강 : 11월 13일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연효숙, 연세대 외래교수)

3강 : 11월 20일 베르그송: 직관, 즉 내재적이고 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 권능 – 신비주의자, 권능의 구현자 (류종렬, 창원대 외래교수)

4강 : 12월 4일 하이데거: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시도, 그리고 나치즘 (서영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5강 : 12월 11일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김성우,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6강 : 12월 18일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최종덕, 상지대 교수)

7강 : 2013년 1월 8일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이순웅, 숭실대 외래교수)

8강 : 1월 15일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조광제, (사)철학아카데미운영위원)

9강 : 1월 22일 데리다: 해체란 무엇인가 – 글쓰기와 차이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10강 : 1월 29일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문성원, 부산대 교수)

11강 : 2월 5일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박민미, 대진대 외래교수)

12강 : 2월 12일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김범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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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강사 선생님들이 미리 밝히는 강의 요지입니다

1. 쇼펜하우어: 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자신은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철학자이다. 니체는 허무주의자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운명애를 말하는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닮은 듯 다른 두 철학자는
모두 삶을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삶을 긍정해낼 방법으로 각각 동고(同苦, 고통을 함께 함)와 운명애를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이성이 아닌 의지에 주목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부정을. 니체는 의지의 긍정을 주장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관조하는 자’가 될 것을, 니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해가는 ‘초인’이 될 것을 주장한다. 현대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의지’에 대한 두 철학자의 다른 접근은 현대철학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꼭 넘어야 할 산이다. 자신의 이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현대인들에게 의지의 관조, 동고나 초극은 궁금한 그 무엇일 것이다.

2. 니체: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철학자

흔히
망치를 든 철학자로 불리는 니체. 니체의 망치에 의해 소크라테스 이래 전통 서구 철학의 중심 가치는 해체되고 뒤집혔다. 니체는 이성 우위의 철학적 전통에 감성을, 로고스 중심주의에 미학적 가치를 내세웠다. 또한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진단하여 새로운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였다. 그의 철학을 통해 서양 근대까지의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셈이다. 흔히 현대를 ‘포스트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러한 포스트 시대의 새로운 가치의 지평을 열어 준 장본인 역시 니체이다.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도 각기 니체 철학이 보여준 영감을 통해 철학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 ‘신은 죽었다’의 외침과 초인의 등장이 현대인의 삶에 어떤 울림과 의미를 줄지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할 것이다.

3. 베르그송: 직관, 즉 내재적이고 심층적 의식의 생성과 변전으로서 권능 – 신비주의자, 권능의 구현자

일반적으로 니체와 베르그송은 생철학자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니체의 생은 도덕을 기준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인격을 중심으로 한다면, 베르그송의 생명은 자연 내재의 깊이 있는 근원적인 의식을 토대로 삼고서, 이 내재적 본성으로서 의식의 표출이자 생성의 인격을 중심으로 한다. 니체가 인간의 의지의 권능에 의해 현재의 고착된 삶을 전복하고 새로운 인격인 초인을 추구하였다면, 베르그송에서는 내재적 권능의 발현이 어떤 사람에서도 발현될 수 있으나, 이는 권능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에 달려있으며, 이를 실현하는 자를 신비주의자라 한다. 니체에서 초인이 출현이 지난하듯이 베르그송에서 신비주의자는 드물고 어렵다. 그런데도 두 철학자는 새로운 인격상을 구축하려 했다.

4. 하이데거: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시도, 그리고 나치즘

하이데거는 그동안 문학가로 알려져 왔던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 내에서 본질적인 사상가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그런가하면 니체는 서구 형이상학과 기독교를 ‘힘에의 의지’라는 사상으로 해체한 망치의 철학자로 알려져 왔지만,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자이자 니힐리즘의 완성자라고 평가한다. 한편 하이데거가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을 10개월 남짓 역임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 나치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1936년부터 4년간 니체에 대한 강의를 통해서, 하이데거는 나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본 강의에서는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에서부터 나치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적 입장을 니체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통해 생각해 보려 한다.

5.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와 삶

이번
강연은 언어분석철학자로만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을 쇼펜하우어 계열의 삶의 철학자로 소개하려고 한다. 참혹한 1차 대전의 참호 아래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썼다. 수학과 언어의 한계는 삶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언어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유아론과 본질주의와 같은 문법적 환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진정한 서양의 선사이다. 기이한 그의 삶과 철학을 그의 번득이는 통찰과 단호한 침묵과 연결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6. 화이트헤드: 존재의 계보 – 화이트헤드의 발생학적 생성

니체 도덕의 계보는 실체론적 도덕 기원에 대한 반거였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 역시 전통의 플라톤 실체 존재론을 부정하고 과정 존재론을 제시하는 반거이다. 실체 기원론에 대한 부정은 그 두 철학자 사이에서 공통되는 존재-인식론적 계보학의 출발이다. 본 강의는 니체로부터 현대
생물학까지를 관통하는 통합적 시선을 통해 ‘과정(process) 사유’를 잉태하게 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을 바라본다.

7.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 비판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말하는 ‘무’는 인간의 자유의 근거이다. ‘무’란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힘이다. 인간은 저마다 누가 뭐래도 ‘아니야’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주체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가 관습적으로,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선포된 인간에 대한 본질적 규정을 거부한다면, 이런 주체가 곧 실존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며 ‘초인’에 대해 말한 데 대해 사르트르는 ‘무화하는 힘을 가진 실존’으로 응답한 것이다.

8. 메를로퐁티: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서양 근대 철학에서 데카르트 이래 그어진 주체-대상의 이분법은 나와 타자가, 나와 세계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니체가 육체의 중요성을 선언했다면, 메를로퐁티는 현상학을 통해 육체와
감각 및 인식의 관계를 정교하게 논증했다. 메를로퐁티가 현대회화의 역사는 형이상학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 그는 화가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깊이, 색, 선, 운동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탐구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살’로서의 몸으로 연결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9. 데리다: 해체란 무엇인가 – 글쓰기와 차이

데리다는 단지 서양 근대 철학만이 아니라, 서양 철학 대부분이 그리고
지식 체계 대부분이 이성 중심적으로 그래서 로고스 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비판한다. 그 비판의 근거로 ‘차이를 만드는 차이’로서 ‘차연’을 제시한다. 이것은 흔적, 유보, 원문자와 같은 다양한 용어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철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소문자 a’에 대한 언급 내지 역할을 추적하면서 나아간다. 이성 중심주의적, 로고스 중심주의적 체계 안에 ‘흔적’처럼 남아있는 그리고 작용하는 ‘차연’의 가능성을 소문자 a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이성 중심주의적 체계를 해체하려고 한다. 이런 발상은 데리다 고유의 것이기는 하지만, 과거 철학사를 거슬러 가면, 하이데거도 니체도 그런 발상의 근간이 되는 것을 이미 제시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보다는 니체가 차연의 가능성을 먼저, 제대로 파악하여 철학자의 ‘웃음’, ‘유희’, 등을 사용하여 주장했음을 인정한다.

10.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성 중심의 전체성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니체 철학의 정신과 함께 한다. 특히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비롯하여 존재론 중심의 서구 철학을 극복하고자 한다. 존재론은 세계에 대한 명료한 파악을 지향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동일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 삶의 근본적인 면모는 그런 테두리 밖의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부터 성립한다. 타자는 우리에게 이미 다가와 있지만 우리가 장악하지 못하는 낯선 자이고, 우리 삶은 이 낯섦을 궁극적으로 떨쳐버릴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삶의 가장 우선적인 국면은 이런 타자의 부름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꾸려진다. 이것이 존재론에 앞서는 윤리적 관계다. 서구적 계몽이나 이성의 횡포는 이와 같은 타자적 측면을 무시하는 뻔뻔함에서 비롯한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11. 푸코: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이어받고, 니체의 계보학을 더 철저하게 구현한다. 니체의 계보학은 사건이나 제도, 이념이나 가치 발생의 의미, 목적, 유용성이 우연적으로 교체되고 재배열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기호에 대한
해석학이다. 푸코는 니체의 생각을 이어받아 계보학적 방법론을 구축한다. 푸코는 서구 근대인의 사유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권력망에 주목한다. 그는 광기, 범죄, 성욕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면서 전통적인 역사학이 지향해 온 거창하고 거시적인 총체적 담론 체계를 확립하려고 하지 않고, 미시적 비판 형식과 방법을 취한다. 그리고 광기, 범죄, 성욕에 대한 서구 근대인의 사고 방식에 대해 보여주는 과정에서 푸코는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권력의 촘촘한 그물망을 폭로한다.

12. 들뢰즈 :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말이다.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은 질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는 남들이 이미 자신의 철학을 구축했을 시기에 앞선 시대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재미없는 학자였다. 그 시기동안 그는 베르그송, 흄, 니체,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중 니체 연구는 매우 흥미롭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가 그 당시까지 다져왔던 여러 철학자들의 존재론을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엮으면서 하나의 철학으로 확장시킨다. 들뢰즈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를 담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다른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이다. 그런데 이 차이는 궁극적으로 반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반복을 말하면서 영원회귀의 반복을 제시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긍정과 기쁨의 철학을 들뢰즈가 사용하면서 미래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반복은 이름 없는 평민들, 익명으로 불려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신이나 영웅에 의해 형성되었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시도일 것이다. 들뢰즈의 영원회귀의 반복, 그것은 지금 도래하고 있는 세계의 이정표일 수 있지 않겠는가. 문명의 발달로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던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쓰라리게 겪었다. 이 잔혹한 경험으로 인해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확신이 흔들렸다. 이 믿음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믿음에는 본래부터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니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그의 때가 온 것일까?구조주의 등으로 불린 이질적인 사조들이 니체라는 샘에서 물을 길어 올렸다. 니체가 ‘내 말은 귀를 갖지 못했구나!’라고 탄식했지만 20세기에 그가 한 말의 ‘귀’들이 수도 없이 출현했다. 우리는 니체의 말과 그 ‘귀’들을 새로이 읽으며 서양 현대 철학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