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 -쇼펜하우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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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 -쇼펜하우어①

 

강사 : 박은미(건국대 교수)
후기 :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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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조화될 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부터 헤겔까지가 근대철학의 영역이라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는 현대철학을 시작한 세 줄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하는 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는 서양 현대철학 분기점 중 하나인 니체를 중심으로 니체 계열의 철학줄기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귀가 없다고 탄식했지만 후에 자신의 말을 귀담아 준 수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다. 이번 강의는 그들을 읽는 여정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니체 바로 이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부터 시작한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박은미 건국대 교양학부 강의교수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가슴이 뛰었다고 한다. 대학 강단은 물론 일반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할 기회가 그만큼 적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문학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만큼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니체 계열의 철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할 때 비합리주의로서 ‘의지’를 말하지만 선배 철학자에 있어서는 플라톤(Plato)과 칸트(Kant, 1724~1804)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계열에 영향을 받았다. 일면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어찌 보면 반대로 충분히 흥미로운 철학자이기도 하다.

▶ Arthur Schopenhauer

궁핍하거나 권태롭거나! 어쨌든 삶=’苦’

쇼펜하우어를 두고 염세주의자 혹은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이런 평가는 아마도 쇼펜하우어 자신이 이래도 저래도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긍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욕망이 있으면 채우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욕망이 없으면 욕망이 없음으로 인해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것을 기본적인 인간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 인간에게 불행은 행복보다 항상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장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빠르지만 단점에 익숙해지는 속도는 느리다고 한다. 이 둘의 시간차가 항상 부부간, 형제간, 고부간 또 직장 동료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괴로움의 대상이 되고 아픔을 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열일곱 살 때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20대 초반에는 “삶은 불쾌한 것”이며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한다.

칸트의 ‘물(物) 자체’와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존재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 자체(Ding an sich)’란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 자체’는 ‘사물 그 자체(thing-in-itself)’를 지칭한다. 칸트는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인가? 라는 질문을 상정하고 존재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진짜 그 세계’를 ‘물 자체’라고 표현했다. 이 물 자체의 영역을 ‘예지계’라 하고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는 ‘현상계’라고 한다. 현상계를 다시 말하면 ‘드러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드러난 세계’라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빛을 통해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보고 대상 사물의 색깔을 그대로 인식할 때 형성되는 그 세계이다. 인식하는 대상 사물에서 반사되는 색을 나의 주관적 인식으로 오염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 이것은 일반 물리학으로 설명 가능한 세계이고 칸트 이전에 사물을 인식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칸트 이후에는 바뀐다. 인간이 대상 사물의 고유한 색을 인식하는 것은 원래 사물의 색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지만 인식주체인 ‘내’가 그 사물의 색이 그렇다고 인식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현대 물리학에서 가청주파수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 영역을 말한다. 보통 16~20Hz의 영역이다. 이를 기준으로 사람은 돌고래나 박쥐의 초음파를 들을 수 없고 반대로 이들 생물이나 곤충, 파충류 등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들리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칸트의 용어로 다시 돌아오면 물 자체에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분명 있다. 그러나 인간의 현상계에는 그 소리가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물 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고 이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다고 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 밖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어떤 영역이 존재함을 알게 되더라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신은 물자체에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상계에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에 대해 유의미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칸트 사유에서 보이는 일련의 이 과정은 대상중심에서 주관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칸트가 현상계와 예지계를 나누어 인간 인식의 한계를 증명한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칸트가 말한 현상계 내에 한정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의 특징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세상을 본다고 말했다. 이것이 인식 대상을 이미지로 떠올려 표상하는 인간 인식의 ‘선택적 경향성’이다. 이런 표상방식은 결국 존재방식을 규정하게 된다.

충분근거율과 표상으로 드러나는 세계

쇼펜하우어는 표상을 말하면서 ‘의지’의 작용을 말하는데 이성이 단순한 두뇌현상이라면 ‘의지’는 이성이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이고 이성은 의지에 기여하는 2차적인 것이라고 한다.(박은미 교수는 이 대목에서 쇼펜하우어가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의식이 있어 스스로를 인식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다. 이 자의식은 ‘표상’의 능력이다. 표상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성으로 스스로를 인식 대상으로 삼고 그 능력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목도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한마디로 고통 자체 보다는 고통의 표상 때문에 고통 받게 되는 셈이다. 세계의 고통이 모두 나의 표상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이다.

박은미 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영 열심히 하던 박태환 선수에게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달리기운동하면서 볼 풍경이라도 있지만 매일 수영장 바닥만 보면서 운동하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농담조의 얘기를 했는데 그 날부터 박태환 선수는 수영이 괴로워졌다고 한다. 바로 이 순간이 고통이 표상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여 표상해내고 ‘의지의 세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인간의 인식과 관련하여 칸트는 12범주를 드는데 이 범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인과범주’이다. 즉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포착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이것을 ‘충분근거율(충족이유율)’이라고 한다. 인간은 사유방식의 특성상 근거를 찾아서 인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의 세계에서 ‘충분근거율’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표상’해 내는 것이 된다. 칸트가 “현상계는 ‘물자체’가 현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비슷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비교해보면 <‘물자체’-‘의지의 세계’>, <‘현상계’-‘표상의 세계’>, <‘현상’-‘표상’>정도로 도식할 수 있겠다.

쇼펜하우어 ‘충분근거율’을 정리해보면 인간이 ‘충분근거율’에 의지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지 원래 세상 사물의 존재하는 방식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충분근거율’에 따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충분근거율’의 생성-인식-존재-행위의 네 가지 특성에 입각해 세상과 관계한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세계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근거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표상의 세계를 경험할 뿐 세계 자체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박은미 교수는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압축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세계는 ‘의지’의 세계인데 인간에게는 이 의지의 세계가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을 쇼펜하우어의 말로 이어보면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직접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고 인간은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만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우리가 인식하는 표상의 세계는 맹목적인 의지가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드러나는 세계일뿐이다.

의지의 작용과 삶의 맹목성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모든 사물의 내적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 생명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이 의지는 시간과 공간을 통해 객관화되고 다양한 표상들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에 작용하여 그 존재를 다양성 속에 드러나게 한다.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의지가 나의 마음에 드러난 것은 또 ‘의욕’이라고 한다. 의욕을 통해 인간은 행위 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몸[육체]’은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인간은 높은 정도의 의지가 객관화 된 것이고 동물은 그 반대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의 객관화 정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유물론적 입장과는 반대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으로서의 의지이다. 그리고 나를 지배하는 맹목성에 대한 극복의 주체가 나 자신일 때 비로소 그 극복의 고유한 가능성과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자기 인식이 되어야 의지는 실현되는 것이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세계가 표상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본질인 의지의 움직임이 표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관찰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필연에 빠지게 된다.

박은미 교수는 만일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잘 이해가지 않는다면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개념을 대입시켜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기라는 것의 변화성, 우연성이라는 속성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개별적인 인간의 죽음에 대해 “의지가 객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치 장자(莊子)가 삶과 죽음을 기의 ‘이산취합(離散聚合)’이라고 설명한 것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의지’가 맹목적으로 작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 삶의 맹목성을 인정하고 자기 인식의 선택적 경향으로 내게 좋고 나쁨을 따지는 ‘자기중심성’을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남들도 나와 같이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힘들어 하는 동지이자 동료임을 깨닫게 된다. 피아(彼我)의 세계가 모두 고통임을 알게 되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 탈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경향성이 있고 현실에 대한 인간의 기대치는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인식하는 시간차와 마찬가지로 차츰 높아져 간다. 세계의 경향성과 다양한 인간의 취향은 어차피 서로 다 접합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구조적으로 언제나 불가능한 삶을 바라는 존재로써 미래의 모순적인 상황에 희망을 걸고 거기에 행복을 유보시킨다.

인간은 ‘자기중심성’에 기인하여 곧잘 나의 의지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침탈한다. 그러나 ‘의지’는 하나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서 침탈된 의지는 곧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고통이란 것이 그렇다. 이 개별자와 저 개별자에게 체현된 의지는 본래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개별자들에게 체현되면서 충돌하고 이 때 고통이 생긴다.

박은미 교수는 인간 개개인은 모두 하나의 ‘의지’에서 표상으로 드러난 구현체이므로 서로가 서로의 의지를 이해하고 그 각각의 존재방식이 분명하게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개별화의 원리에 갇혀서 근거율에 구속되고 그 인식에 갇힌 시선을 통해 세상의 표상만이 관조될 뿐이다.

이념을 보는 힘과 정관(靜觀) : 순수한 인식 주관과 의지의 부정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가장 고차원적으로 객관화된 것”을 ‘이념’이라고 했다. 이념의 다음 단계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념을 직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념은 의지의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의지의 직접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이념을 파악한다는 것은 의지를 본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과 개별화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해 충분근거율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절대 ‘의지’를 볼 수 없다.

이념은 이성에 의한 주객의 분리와 시공제약에서 벗어나야만 직관 할 수 있고 ‘더 이상 근거율에 따르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대상을 응시하는 정관(靜觀) 속에 침잠되어 동화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순수하고 의지가 없으며 고통이 없고 시간에 매이지 않는 인식주관”이라고 설명했고 다시 표현하자면 ‘순수한 인식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 ‘정관’을 통해 욕망의 세계가 수반하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 태연함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다.

아마 ‘예술‘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자기 자신에 속박되지 않아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경험을 준다. 예술은 의지의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모습을 직관한다. 그러기에 의지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한다. 자신이 직관한 이념을 예술작품에 구현해놓는 사람이 ‘천재’이고 천재는 표상들의 원형이 되는 이념을 직시하는 성찰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쇼펜하우어는 ‘습득된 성격‘이라는 표현으로 자기의 성격과 경향성을 벗어나 계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습득된 성격은 스스로 일궈낸 성격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향성을 조절해 나감을 의미한다. 연장선에서 ‘덕(德)’이란 “피아가 의지의 구현체일 뿐이므로 나의 고통을 미루어 타인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긍정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또는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구분되지 않음을 알아 타인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개별화의 원리에 갇히지 않고 의지의 큰 흐름을 느끼면 ‘동정심’이 생긴다. 쇼펜하우어는 실제로 이것을 ‘조용하고 자신 있는 명랑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의지의 맹목성에 의해 의지가 나에게 의욕을 너무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조절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지가 나에게 다가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유혹을 견뎌내야 함을 역설했다. 이른바 ‘덕에서 금욕으로의 이행’이며 ‘의지의 부정’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 ‘의지를 부정’을 내가 부정하려는 의지작용과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면 일체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참선하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번뇌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리하자면 의지의 부정은 개별화의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인들을 통해 나타나는 의지작용의 흐름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해서 얻게 되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이 전환이 성공한다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의지가 맹목적인 삶의 충동임을 간파함으로써 그 의지가 표상으로 드러난 상태로 인해 지나치게 고통 받지 않아야”하는 이상적 경지가 현실화 될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성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복잡하게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 이유가 아닐까.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