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인간이 ‘짐승’ 아닌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철학자의 서재]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12월 19일, 대선이 불과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5년 만에 치르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또 누구는 절대 안 되는지 또 어떤 정당은 국민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또 무엇을 줄 수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정국이다.

물론 선거에서 정당이나 정치인이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모두 지켜진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우리도 그것을 안다. 그렇다면 선거란 거짓말쟁이들의 잔치이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해야 하며, 그 외면 자체가 정치적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사실 되돌아보면 우리는 별 의미 없이 진행되었던 선거의 역사를 숱하게 많이 경험했다.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지만 늘 결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같은 색 정당 깃발로 뒤덮였다.

수십 년을 같은 색깔 표시로 뒤덮인 한반도의 지도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지형도가 깨질 수도 있음을 이미 확인한 전례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보다는 희망이다.

공포의 사회, 전체주의 정치

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1951년),(1958년),(1961년) 등을 통해 격동의 20세기를 날카롭게 비판한 아렌트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흑인 인권 운동, 1968년 학생 운동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20세기를 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공포(terror)와 이데올로기를 지목한 부분이다(역자 서문, 8쪽). 전체주의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의존하여 판단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수용소나 집단 수용소와 같은 시설을 마련한다. 이렇게 대중화된 사람들에게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사고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본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전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폭력의 공포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은 어릴 적부터 움츠리고 조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간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안 된다. ‘묻지 마 살인’과 흉악한 범죄들 때문에 거리는 감시 카메라 속에 가두어졌다.

2012년 9월 12일 오후 1시 21분 현재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성폭행’ 키워드 기사는 8만1602건에 달한다. 같은 키워드의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5167건, 2008년에는 7627건 검색된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보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2011년 범죄 백서에 따르면, 강간(성폭력범 포함) 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1만3634건, 2008년 1만5094건, 2010년에는 1만9939건이었다.

범죄 발생 비율보다 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9월 6일자 인터뷰에서 여성학자 권인숙은 “성범죄 보도의 증가가 ‘공안 통치’를 향한 위정자의 욕망 그리고 언론의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정권은 성폭력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부활시키겠다고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전체주의적 정치 기조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박근혜 후보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으니 현 정권과 크게 정치색이 달라질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렌트가 살아있다면 21세기 한국이 전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할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 강의의 대부분은 칸트의?<판단력 비판>에 대한 재구성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칸트의 인간학 역사철학 등에서 보이는 정치사상을 고루 잘 소개하고 있다. 칸트가 미적 판단 대상을 예술작품, 자연과 같은 ‘사물’들로 한정시키는 것과 다르게 아렌트의 미적 판단 대상은 ‘정치 행위’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미 칸트의?<판단력 비판>에는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정치적인 것이 내재해있다고 보았다(첫 번째 강의).

아렌트는 자신의 관심사는 “복수의 인간(men)이며 진정한 목표는 사교성”(네 번째 강의)이라고 명확히 밝힌다. 이 복수의 인간에 관하여 칸트가?<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칸트의 미학이 단순히 철학의 한 분야로서 미학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향해있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복수의 인간을 아렌트는 다음처럼 정리한다.

“지상의 존재,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음, 상식과 공통감(sensus communis)과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음 ; 자율적이지 않음, 심지어 사유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동반을 필요로 함 =??<판단력 비판>제1부의 미적 판단.” (67쪽)

칸트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단수의 인간을<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에서 다룬다. 칸트의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비판하고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는 원자적 인간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보기에 <판단력 비판>의 인간은 이미 앞선 두 비판서의 대상인 원자적 인간이 아닌 복수의 인간이다.

아렌트는 만약 칸트에게 왜 단수의 사람(Man)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men)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칸트는 그들이 서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일곱 번째 강의)이라고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미를 향유하는 인간은 결코 자기 금고에 예술 작품을 가둬놓고 혼자서 음미하는 인간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하며 그 가슴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대상에서 타인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서로 소통하는 순간 예술 작품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며 인간은 복수의 인간이 된다.

일곱 번째 강의에서 아렌트는 칸트가 이미 정확하게 생각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음을 밝히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나’는 불완전한 자아일 뿐이다. 아렌트는 아래와 같은 칸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위해 공공성이 필수임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90쪽)
그렇다면 인간에게 필수적인 공적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렌트는 칸트 철학을 가져와 인간 정신의 확장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정신의 확장은 “우리의 판단을 타인의 실제적 판단이 아닌 가상적 판단과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이 상상력이다. 칸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미적 공감을 위하여 필요하지만 아렌트에게 정신의 확장은 정치적 사안을 공감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확장된 정신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도 바로 이 확장된 정신을 통한 공적 소통에 의해 가능했던 우리의 정치적 경험이었다.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만이 정치를 살린다

칸트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 핵심 사항 중의 하나는 ‘무사심적 관심(disinterested concern)’이다. 흔히 ‘무관심적 관심’으로 번역되는 칸트의 이 용어는 사적 이해관계를 떠난 관심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이다. 내가 갖고 싶은 신상품에 자꾸 눈길이 가거나 땅장사가 전국의 땅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적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면 결코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무사심적 관심을 미적 경험을 하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그림이라 하더라도 내가 재테크의 수단으로 거실에 걸어 놓는다면 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내가 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모나리자에게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모든 사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사심 없는 마음으로 미적 대상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일련의 미적 태도를 관찰자적 삶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112쪽). 관찰자만이 사태를 목격할 수 있고 통찰할 수 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는 행위자는 결코 자신의 사적 이익을 떠나서 전체를 통찰할 수 없다. 마치 고대철학자들이 철학은 노동하지 않는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사유하는 삶, 관찰하는 삶, 관조하는 삶만이 전체를 볼 수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 공적 사건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22쪽).

관찰자 앞에서 광경은 전체로서의 역사이며, 이 광경의 참된 주체는 어떤 “무한”을 향해 “진행하는 일련의 세대들” 가운데 있는 인류이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인류의 목적지는 영원한 진보이다.” (118쪽)
칸트의 역사철학의 중심에는 인간 종, 즉 인류의 영원한 진보가 그려져 있다. 비록 개별 인간은 후퇴하기도 하고 진보하지 못하는 듯도 보이지만 종으로서 인류는 진보한다는 믿음이 칸트에게 있으며 아렌트가 그것을 보았다. 그 종착지는 ‘누구도 자신의 동료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단순하고도 초보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인류의 통일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들 간의 평화’이다. 관찰자는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자이다.

어떤 정치가 필요한가

칸트는 사람들이 미적 대상을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보기에 관찰자는 오직 복수로만 존재하며 관찰자는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항상 동료 관찰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공통감이 있기 때문이다. 공통감을 잃어버린 인간은 칸트에게는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공통감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갖는 것이며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이 갖지 않는다. 본래 공통감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소통하지 않고서는 공통감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공통감을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이다. 나에게 다가 오지 않는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는 버려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들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만사가 형통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도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서 민중의 살림이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정치가 바뀌어야 먹고사는 것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공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표심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은 모두 경제를 정치 문제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살리는 경제란 자본가들의 경제일 뿐이다.

아렌트는 공통감을 공동체 감각이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여기에서의 감각이란 몸으로 부딪히는 행위자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반성에서 나오는 반성의 결과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설하고 싶은 비전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하여 함께 소통하는 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다.

한반도의 평화,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군 감축을 주장하는 것,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것, 교육은 사회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 그래서 대학 등록금은 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답게 살려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이는 나라의 기둥이기 때문에 나라가 돈을 들여 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통할 공동체 감각이다. 관찰자로서 반성해서 얻을 수 있는 이러한 감각들을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이며 아렌트가 칸트에게서 얻은 교훈이다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박정희가 그립다고? 홉스에게 물어봐![청춘의 서재]

안광복(중동고등학교 교사·철학 박사)

* 본 기사는 8월 10일자 [프레시안 books] 를 재게재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철학자 칸트는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를 나눈다. ‘도덕적 정치가’란 ‘정치꾼’이다. 한마디로, 도덕을 허울 삼아 자기 잇속만 좇는 치들이다. 반면, ‘정치적 도덕가’는 참된 정치인이다. 그들은 원칙과 명분에 따라 비전을 펼친다. 사람들의 미움을 사 벼랑 끝까지 몰리더라도, 그들은 해야 할 말을 한다.

도덕적 정치가와 정치적 도덕가,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끌릴까? 언뜻 보면 정치적 도덕가일 듯싶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파트값, 땅값 올려주겠다는 공약으로 표를 긁어모은 정치인이 얼마나 많던가. 어느 시대나 평등과 배려를 앞세우는 자들은 늘 ‘마이너리티’였다. 시민들은 이익을 채워주겠다는 정치가들에 혹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은, 세상은 더 살기 좋고 바람직하게 바뀔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기란 쉽지 않다. 지난 세월, 살림살이 피게 해주겠다며 큰 소리쳤던 권력자들을 많이 겪어봤던 탓이다. 물론,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타협을 이끄는 작업이다. 그러나 윤리와 비전을 좇지 않는 정치는 발전이 없다. 늘 ‘이익 나눠 먹기’ 수준에 머무르는 정치는 결국 주저앉고 만다. 칸트가 늘 도덕과 원칙을 강조했던 이유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오월의봄 펴냄)는 이런 식으로 울림을 준다. 책의 딸림 제목은 ‘우리의 눈으로 본 철학사’이다. 말 그대로, 책은 서양 철학자들의 이론을 우리 현실에 비추어 풀어낸다. 그만큼 설명은 절절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2010년, 유로존은 가입 국가들에게서 7000유로를 끌어 모으려 했다. 그리스의 국가 파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모금 계획은 점점 커져서, 지금은 무려 1조 유로를 마련하려 한단다. 왜 유로존은 그리스를 애써 도우려 할까? 그리스 국민들을 위해서?

책의 ‘로크’ 편을 쓴 박영균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구제 금융의 목적은 그리스의 국채에 투자한 은행들을 보호하는 데 방점이 있단다. 프랑스 3대 은행은 그리스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의 은행들은 여기에 빚보증을 섰다. 그리스가 무너지면, 손해는 고스란히 힘센 나라들에 돌아갈 테다.

이런 모습이 철학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본주의의 뿌리에는 로크의 ‘사회 계약설’이 깔려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졌다. 사람들이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권력자를 세우고 복종하기로 약속했다는 뜻이다.

만약 국가가 내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때는 어떨까? 나아가 내 재산을 빼앗으려 든다면? 로크는 당연히 국가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저항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명만큼이나 중요하다. 내 돈을 가로채려는 국가는 내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일 뿐이다.

로크의 저항권은 신자유주의와도 맥이 닿는다. 국가는 경제 활동에 주재 넘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규제와 통제는 경제를 죽일 뿐이다. 국가는 범죄를 막는 역할만 하면 된다. 능력껏 알아서 자유롭게 이익을 좇을 때, 살림살이는 가장 피어나게 되어 있다.

이 논리에 따라 지금의 ‘유럽 구제 금융 사태’를 바라보자. 거대 은행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금을 쏟아 붓는 일이 정당할까? 세금도 결국 시민들의 ‘재산’이다. 힘 센 몇몇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의 돈을 함부로 써도 될까? 시민들은 지금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 돈도 담겨 있을 공적 자금을 쏟아 붓는 국가에 ‘저항’해야 할까, 협력해야 할까? 로크의 ‘저항권’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행동은 달라질 테다.

로크는 시민들의 건전한 정신을 믿었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들은 ‘공적(公的) 이성’을 갖추고 있다.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도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해 양보와 타협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믿음 위에서 굴러간다.

하지만 지은이는 “로크는 더 이상 미국 독립 선언서’를 만들어냈던 혁명의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풀려난 경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과연 ‘공적 이성’에 따라 사회는 조화롭게 흘러갔던가? 오히려 고삐 풀린 탐욕이 세계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이다. 지금의 현실을 이겨내려면, 자본주의의 재산권,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뿌리가 되는 로크의 사상부터 제대로 짚어보아야 한다.
▲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이렇듯,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철학자들을 지금의 현실로 불러들인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가 피어나는 이유다. 책에는 2012년의 우리 현실을 빗대어 말하는 부분이 많다. 서양 근대는 절대 왕정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싹트던 시기였다. 우리 역시, 오랜 군부 독재 끝에 민주주의가 피어나는 시기를 살고 있다. 게다가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 서양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은 우리 현실과 절실하게 겹친다.

홉스를 예로 들어보자. 홉스는 사회 혼란을 두려워했다. 그는 사람들이 무질서와 폭력을 막기 위해 지도자를 세웠다고 상상한다. 이 지도자는 <성경> 속 괴물, ‘리바이어던’과 같다. 감히 맞서려 했다간, 누구라도 목숨을 잃을 만큼 무시무시하고 힘세다는 뜻이다.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옥죌 때 질서는 잡힌다.

홉스가 꿈꿨던 지도자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개발 독재 시대 권력자들이 이렇지 않았던가. 그들은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시민들이 독재에 지지를 보냈다. 홉스는 시민들의 강력한 독재자는 시민들의 ‘합의’에 따라 세워진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물론, 그에게서 독재자란 ‘왕’이었다.) 홉스의 주장은 개발 독재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일 수 있겠다.

하지만 ‘홉스’ 편을 집필한 한길석은 이는 ‘도착적 민주주의’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홉스의 주장이 맞다고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심각하다. 시민들은 독재자에게 따르겠다고 합의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기 보존(conatus), 즉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사회는 모래알처럼 되어 버린다. 국가는 나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줄 때만 가치가 있다. 국가와 나의 관계는, 보안 회사와 개인 간의 계약과 비슷한 모습이다. 당연히 절절한 애국심이 자라날 까닭이 없다. 사람들은 다른 시민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아도 애써 무관심하려 할 테다. 사회를 꾸리는 목적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독재 국가에서 이기적인 시민이 늘어나고 부패가 판을 치는 까닭이 분명하게 다가온다.

서양의 근대는 과학과 민주주의가 싹트던 때였다. 과학은 종교와 맞서며 ‘합리적인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민주주의는 절대 왕정과 힘을 겨루며 자유와 평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지배가 흔들리는 곳에는 혼란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양 근대의 철학자들은 질서를 잡아줄 ‘새로운 정치 원리’를 찾는 데 오롯이 매달렸다. 과학이 펼치는 합리적인 사고는 철학자들이 비전과 가치를 새로이 다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는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생생하게 살려내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고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다. 잘 살아보기 위해 강력한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가 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풍요가 곧 행복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우리에게는 사회를 이끌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책의 ‘루소’ 편을 집필한 김광호의 말은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를 이끄는 원리는) 주권자의 자의(恣意)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비전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과연 가슴 부풀게 하는 공통의 비전과 가치가 있을까? 이상(理想)이 없는 삶은 생존 논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돈과 이익만 좇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순간, 더 이상 행복은 곳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사회와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끌 가치와 이상을 고민하고 있다면,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를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김상현 [5월 월례발표회]

?[2012년 5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논문 제목: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
발표자: 김상현 (서울대)

 

칸트의 ‘숭고론’으로부터 칸트를 벗어나다

후기: 박영미(학술1부장, 한양대 외래교수)

 

 

서양의 근대를 대표하는 칸트에서 근대의 균열 또는 근대를 벗어날 새로운 모색이 보여진다고 발표자는 말한다. <숭고의 존재론-칸트 숭고론의 탈(반)칸트적 해석>에서 칸트의 숭고론에 숨어 있는 진리에 대한 재고찰 가능성을 논의한다. 칸트적 입장에 대한 반칸트적 또는 탈칸트적 해석을 통해 인식능력들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진리 규정에서 벗어나 인식능력들의 균열과 그 균열의 틈새에서 삐져나오는 존재 진리의 다른 국면들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표는 칸트 숭고론에 국한되지 않고 칸트의 판단 전반과 그 속에서의 상상력의 역할과 가능성을 토론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는 우리가 칸트를 이해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의미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칸트 속에서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진리를 반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론과 사회론의 새로운 길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이는 그에게도 아직 큰 숙제인 것 같았다. 아쉽지만 그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오고가는 대화에서 글에서는 다 읽어낼 수 없었던 한 연구자의 고민과 열정이 전해졌다.

 

2.

발표의 전반부 내용은 칸트의 숭고론에 대한 이해이다. 칸트에게 숭고의 감정은 불쾌가 쾌로 전환되는 데서 오는 일종의 환희이다. 숭고는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된다. 수학적 숭고는 대상의 공간적 크기에 대한 감정으로, 대상의 공간적 크기는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마주치는 감정상의 크기가 무한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숭고이다. 역학적 숭고는 대상이 가진 힘의 크기에 대한 감정으로, 매우 강력한 위력을 가진 대상과 만나게 되었을 때 감성적?신체적 능력은 이 대상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공포(불쾌)의 원천이 되며 이 불쾌감은 곧 존경(경외)로 전환된다. 역학적 숭고의 예로 칸트는 절벽에 서 있을 때, 거대한 폭풍우와 마주하게 됐을 때를 제시한다.

이러한 숭고판단은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에 의해 성립된다. 숭고판단은 인식판단에서 상상력이 지성의 개념에 적합하도록 직관의 다양을 종합할 뿐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고, 취미판단이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와 조화’에 의해 성립되는 것과 다르다. 숭고에 있어서 상상력은 무능력하다. 그러나 상상력의 무능력은 인식능력들 간에 적절한 위계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상상력의 무능력은 그 자체로 이성능력에게는 합목적적이며 이로써 위계의 조화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상상력과 이성의 조화는 수직관계의 조화이다. 이러한 숭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칸트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이성의 탁월성이자 상상력의 무능함 또는 이성과 상상력의 위계에 따른 질서이다.

발표의 후반부에서 발표자는 칸트 숭고론에 내재하는 역설의 탈근대적 가능성을 언급한다. 먼저 J. F.리오타르가 칸트의 숭고론을 인식능력들의 조화보다는 분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 이성이란 이념능력을 말하며, 이념이란 ‘직관으로 현시할 수 없는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상상력이란 ‘현시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이성의 이념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의 숭고론은 칸트 자신이 의도하고자 한 대로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을 많이 포함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진리와 가상의 문제이다. 발표자는 이로부터 리오타르가 지적했던 칸트의 인식론적 역설과 유사하게, 존재론적 역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에게서 판단이 성립하는 과정의 핵심은 상상력과 지성(또는 이성)의 관계이다. 사물 자체로부터 촉발된 직관을 감성이 수용하지만, 감성이 수용한 직관을 개념과 관련하여 종합하는 것은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념(이념) 능력인 지성(이성)은 상상력이 종합한 그 표상에 대해 규정을 내려 판단(인식)을 종결짓는다.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판단력을 ‘특수를 보편에 포섭시키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인 규정적 판단력과 ‘보편이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인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한다. 칸트의 반성적 판단력의 언급은 상상력이 지성이나 이성의 입법으로부터 벗어나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이 세계에 있어서 인간 경험의 모든 국면이 범주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경험의 도덕적 차원과 미감적(감성적) 차원은 이론적 지성에 의해 영원히 은폐된 존재의 어떤 국면을 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발표자는 초험적 진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숭고판단의 상상력이 가장 그 진리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 다시 묻는다. 우리는 진리가 항상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항상 이것과 저것의 다름 그리고 그 다름들 중에서 옳은 것과 틀린 것을 명확히 할 수 있음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만약 진리의 참모습이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고 이성으로도 확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우리 지산의 판단이나 인식들을 평가하고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력이 지성이나 이성으로부터 벗어날 때 일순간이나마 초험적 진리가 드러날 수 있듯이, 일체의 법칙이나 이념으로부터 벗어날 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의 우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3.

월례발표회는 새로운 글만을 발표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발표된 글도 다시 토론할 수 있다. 이번처럼. 김상현 선생님의 논문은『시대와 철학』제22권 1호(2011년 봄호)에 실려 있다. 발표형식은 4월부터 시도하기 시작한 새로운 방식이었다. 지루할 수 있는 논문 발제를 과감히 없애고 사회자가 준비한 질문을 통해 발표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번처럼 이미 발표된 논문인 경우 미리 논문을 읽고 온 후 사회자의 꼼꼼한 정리와 질문 그리고 발표자의 답변을 듣고, 중간 중간 참석자의 질문이 더해지면서 딱딱한 발표형식에서 벗어나 마치 세미나를 하고 있는 듯 편안하게 발표하고 참여할 수 있었다. 기존의 발표형식과 새로운 발표형식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앞으로 월례발표회는 새로운 발표형식을 토대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청춘의 서재]

세상의 모든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청춘의 서재]

소율(자유기고가)

 

간소한 문장은 깊이 우려낸 녹차의 맛과 비슷하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는다.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상대방의 손을 잡는 행위와 동일하다. 밑줄은 독자가 저자에게 보내는 공감, 동의, 지지, 환희, 동맹을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식이다. 당연히 좋은 책일수록 밑줄을 긋는 횟수도 늘어난다. 하지만 이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밑줄을 칠 문장보다 밑줄을 치지 않을 문장이 더 많을 때 밑줄을 긋게 된다. 왜냐하면 밑줄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길면 길수록 밑줄은 어느새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은 우승할 확률1%인 대책 없는 80년대 삼미 야구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미슈퍼스타즈는 프로야구 팀이기보다는 야구를 취미로 즐기는 사회인 야구 동호회 성격이 강한 팀이었다. 선수 이름도 슈퍼스타에 어울리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최강타, 전태풍, 백두산 같은 멋진 이름 대신 금광옥과 장명부 그리고 패전 전문 마무리 투수 감사용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광옥은 새로운 사과 품종 이름 같았고, 장명부는 일본의 인기 만화 데쓰노트를 한국식 이름으로 지으면 어울릴 만한 이름 같았다. 그리고 감사용은 감사용 다음에 선물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촌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다가오는 한가위엔 고객 여러분의 정성에 보답하고자 저희가 감사용 선물을 준비했어요.

슈퍼맨 망토 입고 야구를 하는 정신없는 구단답게 꼴찌는 삼미의 몫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기록은 대부분 삼미가 기록했다. 한 시즌 최다 연패, 한 시즌 최소 승률, 한 경기 최대 점수차 역전패,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한 경기 최다 홈런 허용, 한 경기 최다 사사구 허용, 특정 구단 상대 최다 연패 등등. 하지만 박민규는 승률 1%의 꼴찌 팀 삼미에 주목했다. “승리한 경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패배한 경기에서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특급 투수 크리스 매튜스의 말이다. 꼴지로 출발한 삼미는 다음 시즌에 기똥차게 변신을 한다. 최종 성적은 1위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놓친 2위였다. 그는 만화적 세계와 농담과 명랑으로 꼴찌와 실패의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은 개나 줘 버려! 낄낄거려도 좋고, 깔깔거려도 좋고, 데구르르 구르다가 벌떡 일어나 다시 데구르르 굴러도 좋은 소설이었다. 아, 재미있다 !

나는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책에 밑줄을 단 한 번도 긋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독자인 내가 저자인 박민규에게 보내는 야유가 아니며 그의 문장과 서사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아니다. 첫 페이지 첫 문장 첫 음절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길게 이어질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의 밑줄이 길다. 그만큼 박민규의 서사는 압도적이다. 그 동안 주류 문단의 젠체하는 문장, 뒷짐지고 훈계만 하려는 꼰대들의 서사, 당대를 외면한 낭만적 후까시와 후일담, 징징거리는 신경 쇠약 직전의 신파, 쓸데없이 무게 잡는 우울, 이 세상 모든 트라우마의 주범은 모두 폭력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뻔한 가족 서사에 진절머리가 났던 시절에 읽은 이 소설은 시시껄렁한 잡담과 명랑으로도 깊이 있는 문학의 향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작품이었다. 장정일의 소설들이 시시해질 무렵 등장한 박민규은 싱싱해 보였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박민규였다.

야구란 본질적으로 실패와 어긋남의 서사이다. 3할 타자란 10번 대결해서 7번 실패하고 겨우 3번 성공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의 법칙으로 보자면 3할은 실패한 승률이다. 10번 대결해서 3번 성공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결과는 아니지 않은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는 3할 타자를 훌륭한 타자라고 자랑한다. 이렇듯 야구는 백전백승의 세계가 아니고 승자 독식의 세계도 아니다. <3승 7패의 세계>이다. “7패나 했어?”의 세상이 아니라 “ 3승이나 했어!”의 세상이다. 맹추, 띨띠리, 멍충이, 해삼, 멍게, 말미잘의 세상이다.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라 !

1%의 승자가 모든 것을 삼키는 이 불행한 시대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등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꼴등에 대한 따스한 위로와 공감이다. 이상적인 사회란 일등이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꼴찌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 시대는 한 명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이다.

<삼미슈퍼스타즈 마지막 팬클럽 > 은 이 시대 청춘들에게 헛스윙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얼핏 이 위로는 상투적인 스포츠 서사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방점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한 지지에 있다. 사실 역경을 극복하고 이룬 기적 같은 성공 스토리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박민규는 성공이 아닌 실패에 밑줄을 긋는다. 7패 다음에 3승이 찾아온다고, 7패 다음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8패 뒤에 또 다시 1패가 찾아와도 걱정하지 말라고, 외로워도 슬퍼도 웃음을 잃지 말라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되라고, 말랑말랑한 것은 딱딱한 것보다 더 힘이 세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채찍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이 시대의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며 당신의 무능 또한 당신 탓이 아니다. 그런 위로의 말이 간절한 시점이다.

엄청나게 빠른 직구를 자랑하는 투수의 공이라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공은 딱딱한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으로 포수의 글러브에 들어온다. 니체는 말했다. 고통이 영혼을 갉아먹을수록 웃음을 잃지 마라. 나는 당신이 헛스윙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도 돌아서서 씨익 웃었으면 한다.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은 마른 잡초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조화로운 삶-스콧 니어링[청춘의 서재]

 

박지용(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혁명가의 삶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다. 노예혁명가 스파르타쿠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로베스 피에르, 파리코뮌의 극좌파 블랑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전사 체 게바라. 이 외에도 한참을 더 열거할 수 있는 이들 혁명가의 삶에는 혁명을 위한 열정과 저항의 파토스가 있다. 혁명가를 혁명가이게끔 하는 어떤 종류의 뜨거움이 있다. 이들 혁명가의 뜨거움이 대중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하고 진동시킨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분노로 떨려야 혁명은 일어난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살펴 본 혁명들은 저항하기 힘든, 압도적으로 거대한 체제를 적으로 삼고 있다. 폭력 혁명으로 전복된 체제는 폭력으로 반동화되며 이 과정에서 폭력의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지난한 폭력의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 파리코뮌의 몰락까지 근 1세기의 달하는 근대사에서 집약된다.

그런데 전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가 있다. 이 혁명의 다름은 ‘그게 무슨 혁명이야’라는 반응을 낳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피를 뜨겁게 하지 않는 냉철한 사유의 혁명, 적과 마주대해 무력으로 싸우지 않는 혁명, 그럼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 혹시 깊은 산 속에서 일으키는 자아의 혁명을 말하려는 게 아닌가라고 짐짓 의심할 수 있다. 이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는 스콧 니어링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에 철두철미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삶은 다른 의미에서 혁명적일 수 있다. 이 혁명은 정치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하지는 않으나 체제의 전복을 다르게 실천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체제의 부도덕성에 대한 분노라는 반대급부의 소진적인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냉철한 사유와 삶의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작은 혁명에 관한 모범적인 사례이다. 이 혁명은 자본주의적 삶을 거부하고도 삶이 가능하다는 상상력을 현실화시킨 그의 삶 자체이다. 어찌보면 니어링의 삶과 사상은 정치적인 투쟁이나 분노의 파토스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그가 미국 좌파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적인 성찰이나 계획에 대한 집착은 혁명적 파토스와는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다.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가치를 조화시키고 복원시키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것은 자연에 기초한 삶이었다. 노동에 대한 철저한 계획과 자연에 대한 신뢰와 지식이 있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을 그는 20년 동안의 전원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계획과 연구의 필요성은 자손대대로 농부로 살아온 이웃과의 대조에서 잘 드러난다. 이웃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만 어설픈 농부인 니어링보다도 못한 결실을 낳는다. 계획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관성대로 살아온 삶을 살게 되지만, 삶과 일을 계획하고 통제할 경우 더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교훈이 남는다. 물론 이러한 보편적인 행위 원칙들은 전원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혁명운동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점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대도시에서의 정치 투쟁을 포기하고, 전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그들의 삶이 혁명에 대한 발상의 새로움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버몬트의 전원생활에서 니어링 부부가 추구한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생활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농사를 짓고 작물을 키우는 목적은 자본축적이 아닌 단순히 먹고 사는 데 있었다. 이윤이 없는 생활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어찌보면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농사를 지어서 전혀 남는 것이 없는 바는 아닐테지만 남겨서 돈을 모아두고 그 돈으로 또 뭔가를 해서 또 남기고 하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이자 생활 습관일 따름이다. 이렇듯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이 감정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하면서 불안을 벗어나려는 축적의 몸부림에 허덕인다.

그런데 니어링은, 마치 성경의 한 대목처럼 ‘자연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라는 배포 큰 태도를 보인다. 사실 우리 주변의 모습을 볼 때, 불안한 삶을 더욱 불안하게 느끼게 하고 또 달래주는 것이 모두 그로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퇴 후의 삶? 실직 후의 삶? 미리부터 대비해야 한다는 불안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비하고 또 축적해야 한다는 외침은 실상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불안한 삶에 대한 위안은 자본의 축적과 투자로만 달래질 수 있지만 그도 녹록치는 않다.

20년의 삶 동안 니어링 부부는 스스로의 자기평가 속에서 그들의 선택이 정당했다는 점과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삶이 극복될 수 있음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부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농업공동체는 니어링의 제안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져갔다. 대안이라는 말 자체는 제한적인 가치를 갖는다. 말 그대로 대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혁명가가 목가적 전원생활에 도취한 것일 뿐이라거나, 혁명의 의미를 부정하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킨 혁명의 변절자라고 섣불리 재단해서는 곤란하다. 성공적으로 제시된 대안은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으로 확산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극복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작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그러한 삶의 가능성에 대해 다수의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해 보인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서, 하나의 대안적 사례로서 니어링의 삶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작은 혁명인 것이다. 실상 두려운 것이 자본주의 이후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상실감 혹은 공허감은 아닌가. 니어링은 도시를 떠나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보험과 저축이 없어도 삶은 만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체질적으로 충돌을 통한 돌파보다 우회함을 선호하는 성격들이 있다.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냉철한 분석과 진단을 선호하는 경향들도 각기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목표는 같으며, 그들이 공유하는 적대전선은 자본주의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농촌에 가서 살아볼까라는 생각에 그치지 말고, 니어링이 전해주는 사례를 예시로 삼아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청춘의 서재]

청춘들의 성공적인 연애를 위한 추천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이지영(광운대 강사)

 

 

 

길거리를 거닐거나, 요즘 유행하는 커피 전문점에서 차 한잔을 마시거나 캠퍼스를 지나갈 때 서로 손을 꼭 잡고 있거나 머리를 맞대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청춘들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은 분명 청춘만의 특권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이전까지의 사랑은 사실상 불법이다. 중고등 학생의 신분에 있는 이들의 연애는 기성 세대의 눈에는 아직도 금지의 대상이다. 암묵적인 합의이긴 하지만 연애 상대로서의 짝 만들기는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결혼 이전까지만 사회에서 환영받으며 허용된다. 10대의 사랑은 학업과 미래에 치명적으로 방해가 되는 일, 소위 싹수가 노란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금지되고 기혼자의 사랑은 실제로 불법이다. 결혼 서약은 법의 이름으로 보호되며, 기혼자의 사랑은 그러한 법을 위반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이 막 사회로 진출한 20대가 주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인 까닭이다. 청춘들이 사랑에 빠진 모습은 보기에 좋고, 달콤하게 느껴지지만 ‘사랑하기’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일이란 사실은 한두 번만 연애를 해봐도 알게된다. 즉 사랑은 애틋하고 달콤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럽고 쓰디쓴 것이다.

 

‘에로스’를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과 연애 경험담에 대해 글을 쓰게 한다. 짧은 에세이에서 이십 대 초중반 나이 대의 청춘들은 대체로 상대를 통해 정신적인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을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생각하며,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것보다는 잔잔하고 로맨틱한 사랑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 해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청춘들 또한 많다. 하지만 한 눈에 매료된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것도, 상대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도 모두 어렵다. 게다가 설사 짝 만들기에 성공하더라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설레임과 상대에 대한 집중력은 서서히 줄어들기 마련이다. 또 운명적 만남임을 증명하는 듯했던 마음의 일치는 불일치로 변화하며 이는 상호 불신과 불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전 같지 않은 태도에 연인의 마음이 변한 것 같아 섭섭하다, 또 변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편집증, 스토커 같아 답답하고 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연애

 
파이드로스 표지

초기의 두 사람의 마음의 일치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개성의 자연스러운 일치에서 온다기 보단,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략적(?)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헌신에 의해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춘의 연애 사업이 흔히 반복되는 실패, 실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즉 청춘의 연애 사업은 힘들고 괴롭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단지 외사랑의 가슴앓이로 끝나 괴롭고, 상대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힘들고, 상대의 사랑이 도에 넘치는 집착인 듯해서 두렵고, 잘 맞는 줄 알았던 서로의 생각이 달라서 문제가 된다. 생각이 이런 문제에까지 미치면 사랑이 과연 마음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로맨틱한 일인지, 과연 아름답기는 한 일인지 의문스럽다.

 

물론, 사랑은 분명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이란 짝을 찾고, 그러기 위해 이성 교제를 전폭적으로 허용 받은 청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마음의 진솔함, 진심, 헌신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랑은 분명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상호 작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 사회적으로 규제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규제의 대상에는 사랑하는 이들의 행위와 마음의 형식 또한 포함된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들의 정신과 행위, 생활 양식을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드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각자 변화무쌍한 마음을 가진 서로 다른 개성의 소유자들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직,간접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고 살아가는 이상 사랑은 그냥 진실된 마음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연구와 공부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의 사랑은 관념 안에서의 이상적 사랑의 모습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그토록 많은 갈등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등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여기 아름다운 사랑과 인생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일독하기 권하며, 간단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사랑 공부의 첫 걸음으로 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만한 것도 없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는 연애학의 고전으로 불릴만하다. 이 책의 반에 가까운 분량이 사랑하는 이의 악덕, 즉 연애의 부작용 분석으로 채워져 있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자 하며 자신을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 외의 것에 관심을 두어 그것을 탐구하고 연마하는 것을 싫어하고, 연인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들을 만나는 것도 못 마땅해 한다. 즉 말하자면 연애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발전과 전인격적 성숙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실컷 상대의 독립과 발전을 가로막다가 더 이상 연인에게 매력을 못 느끼게 되면 이별을 궁리하며 헤어지고 그때부터 갑자기 태도가 돌변, 그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준 것들을 아까워하며 후회할 뿐더러 사람을 잘 못 본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상대를 비난하기 일쑤이다. 이와 같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부덕함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읽다보면 이 책을 같이 읽은 대부분의 청춘들의 표정이 굳는다, 한두 번 쯤 연애를 경험 해본 이들 중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이 틀렸다고 부정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비난하는 사랑하는 이의 부덕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인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플라톤은 이런 사랑의 모습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정의한 사랑을 시적으로 풀이해보자면 에로스로서의 사랑이란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안 변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란 것이다.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신체는 비록 멀어지되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란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행태와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은 매우 날카로우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깨우침을 준다. 하지만 그 해법과 결론은 범상한 우리들이 따라가기엔 매우 어려운 것 아닌가. 나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그 따듯함을 느껴보고 싶을 뿐 아니라, 그의 앞날을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신체적, 정신적 욕망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발전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아름다운 사랑에 일정 정도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단 것은 사실일 테지만 어느 한 측면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기본 정서와 가치관에 부적합하다. 그렇다, 강물만 멈추면 썩는 것이 아니다. 탐구 및 연구 또한 멈추면 고리타분해지고 시대에 부적합한 것이 된다. 이때 필요한 책이 기든슨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이다. 기든슨은 이 책에서 사랑이 진실한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당한 일임을 보여준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 말했듯이 사랑과 연애, 결혼 등등의 모든 것이 사실은 시대적인 것이자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기든슨은 소설 등에 나타나는 사랑의 행태 뿐 아니라 풍부한 사회학적 데이터들을 전거로 들면서 시대와 사회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의 모습에 영향을 미쳐왔는가를 분석한다. 예컨대, 근대 이전까지 남녀 간의 평범한 결혼과 그 유지에 사랑의 요소는 거의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유 연애 자체가 부정된 시기였을 뿐더러, 사랑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가? 우리 시대에 사랑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성 혁명을 가능하게 한 과학 기술의 발전, 폭 넓은 사회적 자유의 허용,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등에 힘 입은 바가 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적인 남녀 간의 사랑과 결합을 위한 해법에 대해 기든슨은 여성들 보다는 남성들이 더 위기일뿐더러 남자들이 더 할 일이 많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더 이상 제도적인 것도 아니고, 어느 일방의 희생에 의해 가능할 수도 없다. 사랑은 남녀 간의 상호적 소통을 전재로 하는 것이자, 함께 둘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개인사를 재구성하는 능력과 자신의 이야기와 정서를 표현하는 능력인데, 사회에서 요구되고 부과된 교육 방식의 차이로 인해 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의 마음을 수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랑이 필요한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은가? 청춘이여, 공부하고 노력하라!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게 됨으로써 상대를 더욱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함께 아름다운 사랑과 생을 만들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책익는 마을 회원 / 원진호내과 원장)

 

얼마 전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의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읽었다.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 분 때문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요즘 책익는 마을에서 <노자도덕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강의자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하여 권하기에 뜻에 따라 행동에 옮긴다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천수를 누린 중국 철학자 펑유란

펑유란은 1895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사망하였다. 96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삼사와 육서는 이 분의 저작물로 삼사는 <중국철학소사>,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사신편>이고, 육서는 36년에서 48년 동안의 항일전쟁시기에 쓴 정원육서를 말한다. 삼사는 철학사 학자로서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 이었고 정원육서는 철학자로서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신리학은 펑유란의 사상체계를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

펑유란은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과정 시절에 논리학에 흥미를 갖으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특히 철학은 인기도 없고 돈도 안 되는 학문인가 보다. 베이징대학 입시원서를 받는 안내원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 걸 보면 말이다. 어떻든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1915년에 입학하고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죤 듀이의 문하에서 철학을 연구한다.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

펑유란의 초창기 철학적 고민의 출발은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였다. 중국이 왜 서양보다 뒤쳐졌는가 하면 당시 보통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은 중국이 서양에 비해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고 탐구하고 극복할 과제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행복은 맘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을 극복하고 개조하는 분야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중국이 당시에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정신문명을 중시하는 태도가 있고 동양에서도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본성은 본디 같은 것이고 사상도 모두 같다고 펑유란은 보고 있다. 이 논증을 그는 그의 박사논문에 쓰고 나중에 <인생철학>이라는 책에 싣는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주요 사상들을 개괄하면서 총 열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천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고 어느 쪽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유파들을 나누었다. 이 분류에서 동서양 사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본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새 것인 사회로 진화되면서 물질문명적인 문화가 주도적인 것이 되고, 중국은 헌 것에 머물면서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문명이 주도적인 체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가 되면 중국에도 옛 것과 다른 근대철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중국철학사의 구분: 자학(子學) 시대와 경학(經學) 시대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 가는 것이긴 하지만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반봉건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고민하였고, 중국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옛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고 중국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유심론자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혁명이후 많은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깊은 신뢰를 얻는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자학(子學)시대와 경학(經學)시대로 나누었다. 춘추전국시대인 子學時代는 지존이 없이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평등하게 각 학파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렇게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던 사회적 배경은 당시 통치를 담당했던 귀족이 쇠락하고 원래 있던 사회규범이 붕괴하고(禮崩樂壞), 사회제도가 해체된다.(天下無道) 당시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지식인 무리들이 원래의 자리를 잃고 민간으로 흘러든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최하층을 이루었지만 사민(四民)의 으뜸이 된다.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팔면서 생계를 도모하고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이 발전하여 학파를 이루고 백가쟁명의 국면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경학시대는 유교가 지존이 되고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면서 경직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철학이 계승해야할 시대로 자학시대를 꼽았다.

 

신리학: 보편과 특수

그의 철학체계인 신리학은 보편과 특수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리’(理)가 사물 속에 있다는 것, 즉 보편이 특수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사물의 보편과 그 사물은 있으면서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다. 사물의 특수는 감각의 대상이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사물의 보편은 사유의 대상이며 실험실 속에서 그런 보편을 추상해 낼 수 없다. 이를 개념화 하면 ‘구체적 보편’이라 한다. 구체적 보편의 내포는 ‘리’이고 외연은 ‘사물’이다. 리와 사물, 내포와 외연은 원래 함께 있다. 사람의 사유가 그것들을 분석할 때 분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두 분야를 헷갈려 해서 이의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란 사람의 사유가 추상의 방법을 통해 사물로부터 분석해 낸 것일 뿐이고 굳이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리’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고 사물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

 

항일 전쟁시기 시난연합대학의 교편생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5.4운동을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1923년에 중국으로 되돌아와 허난성 중저우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자신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찾아 베이징 옌징 대학으로 옮기고 28년 칭화 대학으로 옮겨 대학의 개혁에 참여 한다. 33년 휴식년에는 유럽을 여행하고 당시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방문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시기에 접어들고 그는 38년부터 45년까지 피난처인 시난연합 대학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국민당 정부 하에 있었는데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대학과 학생이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진다. 44년 12월1일에는 급기야 수류탄 피폭에 의해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펑유란은 교직을 맡고 있는 위치에서 당시 권위를 갖고 있는 교수회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강경파와 보수파의 주장을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국을 막은 것으로 스스로 자위를 한다.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이 혁명의 혼란 속에 빠져 들자 그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에 눌러 있기를 권고한다. 그는 왕찬의 등부루에 나오는 문구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ㅁ, 夫胡可以久留.)를 인용하며 48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펑유란은 자신은 반동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중국 공산정권하에서 철학자로 살아가기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사상개조를 해 나간다. 이 점에 있어 자서전에는 매우 솔직한 자기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역>의 건괘 문언전의 “글을 지어 진실함을 세운다”(修辭立基誠.)를 인용하면서 지식인의 글쓰기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정녕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73년 林彪비판운동에서 공자비판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대중노선에 따른 것인지 군중에 영합하기 위해서 행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 선(線)은 진실함(誠)과 거짓(僞)에 의해 나뉠 것인데 당시 자신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일보 전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한 점, 자신이 더 받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기쁜 마음도 있어 이는 군중에 영합한 측면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52년 중국당국이 대학의 모든 철학과를 없애고 베이징대학만 남겨두는 조치를 취하자 베이징대학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서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홍위병들의 지식인 탄압으로 시련을 겪는다. 책에는 이 상황이 담담히 서술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당히 심한 극좌적 횡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살아나는 중국을 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펑유란의 학문적 자세

그의 학문적 자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시경에 나오는 말 “주가 비록 오랜 나라이지만 그 사명은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 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오래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명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러했기에 보수파와 진보파 둘 사이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후배 학자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남길까? 그는 “불이 옮겨 가니 꺼질 줄을 모른다”(火傳也, 不知其盡也.) 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지식은 진리의 불꽃이라 그 연료를 끊임없이 대 주어야 계속 연소되고 이어질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이들이 철학자요 시인, 문학가, 예술가, 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피를 토하듯이 저작물들을 남겨 왔고 또한 본인도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한다. 후대에 남기는 저작물을 쓰는 각오는 이러 해야 한다.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더 뽑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촛농이 마른다.” 즉 누에는 생명을 바쳐 실을 토해내고 초는 목숨을 다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분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위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를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책을 덮으며 책의 겉면에 있는 펑유란의 초상화를 들여다본다. 청말 민국 초에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공산혁명을 보았으며 그 정권하에서 유심론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 그의 백년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 사람은 모두 같다는 평등의식, 여행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학자로서의 성찰과 분투, 삶에 대한 소박함, 낙관성 그리고 솔직함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 적응하는 현실주의와 타협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언행에서 중국 중심의 문화주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수차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이영희 선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알아 가는 것은 내게는 매우 유익하다. 반면교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이다. 가슴에 듬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을 간직한 채 책을 책장에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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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펑유란 지음,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관한 원진호(책익는 마을 회원/원진호내과원장) 님의 글입니다.

 

그게 과연 인류의 훌륭한 유물일까?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임명옥 (책익는 마을 주민)

 

런던의 대영박물관

4년 전에 나는 런던에 한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엄마와 아이와 나까지 세 여자가 짐을 꾸려 남동생 가족이 사는 런던에 갔던 것이다. 엄마는 아들이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해 하셨고, 나는 당시 5학년이었던 아이에게 이국적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는 내가 여태까지 배우고 누려 왔던 서구 문물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런던에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거의 다 돌아봤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대영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건물 자체가 문화유산이었고, 그 곳에 전시된 유물은 너무나 많고도 흥미진진했다. 이집트 관에는 로제타석을 비롯한 미이라와 석상, 오천 년 전에 만들어진 그림 문자 히에로클리프가 전시되어 있었고, 앗시리아 관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만들어낸 쐐기문자와 돌로 조각한 벽화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그리스 관에는 네레이드 신전을 그대로 옮겨 놓은 아름다운 이오니아식 기둥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대리석 조각들이 이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장엄함과 생동감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 밖에도 그리스 로마, 이슬람, 중세 유럽, 동남아시아와 한국, 일본, 중국, 아프리카에 걸쳐 옛 시대의 유물들이 석상과 도자기, 타일과 모자이크, 벽화와 그림 등의 형태로 남아서 박물관을 견학하는 많은 이들에게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배우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나는 이 박물관을 네 번 찾아 갔는데, 갈 때마다 이전에는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유물들이 눈에 띄어 보고 또 봐도 재미가 있고 흥미로웠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두 번째로 좋았던 곳이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였다. 이 미술관 역시 건물 자체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웅장함과 장엄함을 띠고 있었는데, 그림의 규모는 자그마치 2,300여 점이고, 그것도 13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인류의 문화를 빛낸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나는 이 미술관을 런던에 있는 동안 세 번 방문했는데,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구경하다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흐 그림은 7점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는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노란색 유화 물감이 한 잎 한 잎 해바라기 잎이 되어 액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붓터치가 마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비극적인 삶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렘브란트 그림 중에서는 그의 자화상 두 점이 인상적이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만만하고 부유했던 모습과 나이 들어서 가난해지고 인생살이에 지친 모습이 그려진 대조적인 두 그림이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 자꾸만 찾게 되는 그림이었다. 루벤스의 그림은 그리스 신화나 고대 로마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그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나를 매혹시켰다. 거대한 그림의 크기가 주는 웅장함과 그림의 내용에서 상상되는 이야기가 생동감과 화려함에 더해져 나는 루벤스 방에서 편안한 소파에 앉아 시대를 거슬러 올라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한 그의 그림을 넋을 잃고 감상하곤 했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비롯한 솔즈베리 성당과 성 폴 성당이 있다. 우리 나라의 문화 유산이 불교의 영향으로 절집이 많은 것에 비해 서양 건축 문화의 원동력은 단연코 성당이라 할 것이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은 웨스터민스터다. 천 년 정도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영국 왕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루는 장엄함과 화려함을 함께 갖춘 곳이며 뉴턴이나 세익스피어,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의 외양을 볼 것 같으면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양식의 첨탑이 건물 꼭대기를 균형 있게 장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과 함께 숙연함이 느껴지게 만들고, 사원 정문에는 성인들을 돌로 새긴 부조가 가득 해서 섬세함과 미려함이 조화를 이루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내부 역시 신의 영광을 찬미하고 숭배하기 위한 아름다운 장식과 석조물들로 가득하다. 가운데는 예배를 보는 장소이고, 양 옆으로는 옛 시대 영국의 위엄과 발전을 이룬 유명인들의 관이 전시되어 있다. 전체적인 건물 분위기는 몇 백 년 전 돌의 느낌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전통이 살아 숨쉬는 듯한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사실 영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빅벤이나 성당들, 박물관과 미술관을 보고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들이 부를 적나라하게 과시하는 것 같아 시샘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고, 고대 이집트나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침략자의 자기 과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런던에서 산다면 인류가 남긴 문화유산을 마음껏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부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나는 런던이 마음에 들었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는 도시였다.

 

훌륭한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나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읽었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널리 소개하고 대중화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저자를 통해 나 역시 우리 문화에 대해 새롭게 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 국토를 박물관이라 생각하고 우리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삶과 서양 문물에 익숙하고 서양식 교육에 전염되어 우리 것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태도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어려서 나는 공교육을 통해 민요나 아악보다 성악이나 기악곡을 더 많이 배웠고, 단원이나 혜원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를 더 많이 접했다. 이황이나 이이의 철학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더 자세하게 배웠으며, 홍대용이나 정약용보다 뉴턴이나 다윈과 같은 과학자에 대해 더 상세하게 배웠다. 또한 초가집과 기와집은 불편해 하고 양옥이나 아파트의 편리성에 더 일찍 눈을 떴다. 서양식 합리주의와 효율성에 힘입어 우리 문화는 불편하고 고루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관심은 그저 서양의 역사와 문화, 서양 것에 대한 호기심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내가 배워온 서양 문화의 원류를 찾아보고 싶어 런던에 갔었고, 나의 지식과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근원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문화유산이 한없이 부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이 불편했다. 서양의 박물관이라는 것이 대부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식민지 삼아 부를 축적하고, 그를 기반으로 남의 나라 유물을 약탈해 오거나 도둑질 해 온 결과물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나는 그들의 문화적 유산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크고 화려하고 장엄하고 사치스러운 게 도적질의 결과라면,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소박하고 검박하며 질박한 문화유산이 훨씬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엄하고 웅장하며,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주눅 들게 만드는 서양의 건축물보다 단아하고 고상하며 자연친화적인 우리의 건축물이 훨씬 더 인간적일런지도 모르겠다.

훌륭하다고 평가 받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일반 백성들의 고혈 속에서 혹은 식민지 백성들의 힘겨운 시름 속에서 탄생했다면 그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나는 생각해 본다. 무조건 크고 높고 거대하게 짓는 건축물들이 후세 사람들의 눈요기 거리가 되기 위해 혹은 그 당시 지배 계층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통으로 물들인다면 그건 과연 인류의 훌륭한 유물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잃어버린 보물찾기

저자가 140여 쪽을 할애해 설명한 경복궁에 대해서도 장엄함이나 웅장함보다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건축물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경복궁뿐만 아니라 순천 선암사에 대해서, 거창의 서원과 정자들에 대해서, 부여의 유물과 유적지에 대해서 산뜻한 비유적 표현과 깔끔한 문장으로 읽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과 식당 아주머니들,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소박한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다. 문화유산은 유형적인 것도 있겠지만, 무형적인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땀내와 유머와 노동과 놀이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싶은 저자의 의도가 행간에서 읽히는 것 같아 나는 사람들과 저자의 만남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경복궁을 여러 번 가 보았지만 여태껏 나는 근정전 어좌 뒤의 병풍에 일월오악도가 그려진 지도 몰랐고, 월대에 석견이 조각되어 있는 줄도 몰랐다. 영재교에 천록이 있어 메롱,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줄은 더더구나 몰랐다. 저자의 말대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다음 번 경복궁에 갈 때는 좀 더 자세히 궁을 보고 보인 만큼 많이 느꼈으면 싶다.

더구나 내가 사는 고장 보령의 유적지 성주사터와 가까이에 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절집 무량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에게 기쁨이었다. 전통 문화에 대한 어떤 분위기도 느끼지 못 하고 사는 나에게 성주사터와 무량사의 5층 석탑과 극락전은 보물찾기처럼 내가 잃어버리고 사는 나의 정체성이 생각날 때마다 들춰 보며 찾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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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유홍준 지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 펴냄>에 관한 임명옥 책익는 마을 회원의 글입니다.

똥구멍이 항문이 되면 병이 낫는다? [청춘의 서재]

–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서남희 옮김, 들녘)

윤은주(숭실대)

소통을 가로막는 낯선 글자들

언젠가 교정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을 하나 보았다. “교무처장님, 뭥미?” 난생 처음 보는 글자가 주는 당황스러움,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나중에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알아보니 대충 “교무처장님 뭐하는 것입니까?”라는 뜻이었다. 나름 신세대적 사고를 한다고 우겨대는 나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는데, 하물며 연배가 높은 교무처장님이 저 글자의 뜻을 이해하셨을까? 질문이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알 수 있게 써야 할 것은, 더구나 글이란 상대와 소통을 하기 위해 쓰는 것인데,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쓰면 그건 글이 아니라 그저 해석할 수 없는 외계어일 뿐이다.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였다면 현수막에 그런 외계어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 “뭥미?”, 그것은 “나는 당신과 소통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거부의 의미를 담은 음절들의 나열일 뿐이다. 물론 “그런 쉬운 단어도 모르세요?”라며 학생들이 세대 차이를 들어 한 마디 거든다면 뭐라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자기들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소통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문득 뭐든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이 떠올랐다. 우리말이 그리 대단한 글인가?

최근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한글 창제와 그 반포를 둘러싸고 세종 이도와 성리학 대표인 밀본 정기준 사이의 갈등과 쟁투를 보여주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그것이다. 신하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상소리를 해대는 세종의 모습은 광화문 광장에서 근엄하게 우리를 보고 계신 그 분이 아닌 다른 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상소리를 하는 임금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글을 반나절 만에 깨우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글자라고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던 평민이나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 쓱쓱 한글로 자기 생각을 써내려가는 모습이란 과히 놀라움의 극치이다. 아, 언어 수학 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위대한 조상님들이여! 요즘 아이들도 이런저런 학습지에 이야기책으로 한글을 깨치는데 꽤 긴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하는데, 그리 쉽게 익히고 사용하다니. 조상님들이 뛰어난 것일까, 우리가 어리석은 것일까, 그것도 아님 그만큼 한글이 쉬 배울 수 있게 만들어진 우수한 글자였던가?

뭐든 소리 나는 것이라면 다 적을 수 있게 너무 잘 만들어진 한글 덕에 ‘뭥미’라는 글자가 나왔을 수도 있으리라. 요즘 신세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듣거나 보고 있으면 해괴망측한 것들도 있으나 그 모든 것들을 쉽게 적어낼 수 있는 한글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뛰어난 한글 덕에 시간이 지날수록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새로 생겨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갈 것이다. 다만 그 단어가 모두가 받아들일 만큼의 소통어가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말 그대로 “뭥미?”하며 의사 불통의 시간을 한참동안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통의 시간, 그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 이 글자적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까?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똥구멍과 항문의 차이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글자가 그저 소통의 도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기본 줄거리는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성리학자들 간의 갈등이다. 성리학자들은 왜 한글 반포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글자가 가져다주는 권력을 피지배 계층과 나눠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글자를 독점하면 권력이 된다. 즉 글자를 알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만이 권력을 점할 수 있다. 문민의 나라, 이 땅에서 글자를 안다는 것은 힘을 가진다는 것이며,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라틴어 미사를 고집하였던 것을 기억해보자.

글자는 곧 권력이다. 그래서 글자를 누가 어떻게 알고 쓰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글자는 권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글자는 권력을 독점하는 기제가 되지만 사적 영역에 들어서면 자신을 지키는 기제가 된다. 더구나 글자는 신성한 그 무엇으로 신성시하여 높이 받들면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약이 되기도 한다. 이제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권력은 알겠는데, 약이라니?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치유의 능력을 가진 글자의 힘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무슨 소설? 바로 에펠리 하우오파의 소설 『엉덩이에 입맞춤을』이다. 아, 위대한 글자의 힘이여!

『엉덩이에 입맞춤을』은 파푸아뉴기니 출신으로 피지에서 인류학자로 살고 있는 에펠리 하우오파의 소설이다. “피지? 그곳에도 소설가가 있던가?” 하며 놀라움을 표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사는 이야기가 있을 터이고, 그것을 줄거리 삼아 소설 한 편 만들어지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인류학자가 쓴 소설이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다양한 문화적 관습과 생각들을 보여주는 인류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핵심은 낯선 땅의 문화적 충격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적 충격, 즉 어떤 글자를 선택하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추앙하느냐에 따라 삶의 고통도 치유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떠오른 하나는 바로 이것이었다. “똥구멍과 항문의 차이.” 점잖지 못하게 똥구멍이라니 말을 삼가라는 고상한 누군가의 질타가 잠시 들려오긴 하지만 다들 속으로야 항문이라 하지 않고 똥구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세종대왕 왈,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쓰는 것, 그것이 바로 한글이다. 그러니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다. 똥구멍과 항문.

왜 똥구멍이라고 말하면 지저분하거나 질이 낮은 것으로 생각할까? 그것은 우리가 글자에 부여하는 자격 내지 의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자기 몸이든 세상이든 쓰고 남은 것들이 배설되어 쌓이는 곳은 더럽다고 외면하려든다. 쓰레기가 모여 있는 곳, 배설물이 나오는 곳, 그곳만큼 악취가 나고 부패한 곳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몸의 찌꺼기가 마지막으로 배설되는 그곳, 똥구멍을 말하는 것 자체가 더럽고 냄새가 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이 아프면? 그곳에서 지독한 고통이 시작되면 삶 자체가 고통 속에 묻혀 버린다.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곳이 아프다고 입 밖으로 내뱉기가 민망스럽다. 그럼에도 하루 빨리 고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 오일레이 역시 그 똥구멍에 탈이 났다. 가뜩이나 섹스를 즐기는 그가 그곳이 탈이 났으니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었던 오일레이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곳을 고치려고 애를 쓴다. 그가 사는 곳이 아직 현대 문명이 발달한 곳이 아니기에 의학 기술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주술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수많은 도토레(일명 주술사)들을 만나 다양한 민간요법을 써보기도 하고 돈을 들여 도시로 나아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보기도 하지만 도대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곳이 바부를 만나면서 고통도 멈추고 치유되기 시작했다. 언제? 바로 똥구멍이 아니라 “항문”이라 칭하면서 부터이다.

“똥구멍과 항문”, 모두 같은 배설 구멍을 가리키는 글자인데 무슨 차이가 있어, ‘똥구멍’하면 낫질 않고 ‘항문’하니까 낫는가? 이것이라 단언하기엔 경험적으로 확인된 바가 아니지만, “똥구멍”이 되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쓰레기들이 배설되는 곳이 되지만, “항문”이 되면 배설을 통해 몸을 항상 청결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신체 부위로 모든 행동의 결과들이 집적되는 곳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곳은 단지 배설의 통로만이 아니라 인간 몸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늘 “똥구멍”을 외쳐 되는 오일레이의 고통을 멈추게 한 바부는 그곳을 “항문”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곳은 이제 더러운 것이 나오는 구멍이 아니라 인간 삶에 있어서 중요한, 그래서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부분으로 바뀐 것이다. 치료할 수 있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글자, 그 글자를 우리가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고통을 치유하는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의미가 세상을 바꾸다

이것은 단지 글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더럽고 악취 나는 문제에 대해 특별한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 한 외면하려 든다. 또한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혹은 빈곤층이나 소외된 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정상인 혹은 일반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 혹은 자신과는 다른 무엇을 가진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외면하려 든다.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태도, 장애가 없는 사람이 장애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한국인이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태도 등. 하지만 이들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손해를 입히려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려 든다. 사탕과 꿀로 그들을 달래기도 하고, 채찍과 몽둥이로 괴롭히기도 하고, 아예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거나 도려내고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방법도 소용은 없다. 왜냐하면 많이 가진 자가 있으면 하나도 가진 게 없는 자들이 있는 것이고, 장애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부가 똥구멍을 항문이라 바꿔 부른 것처럼, 부유하건 가난하건 그냥 사람, 장애가 있건 없건 그냥 사람, 피부색 서로 달라도 그냥 사람, 그냥 사람이라 부르면 될 것이다. 글자의 의미를 바꾸고 그 의미만큼 서로를 생각하고 존중하는 것, 모두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 여기는 것, 그것이 고통을 없애고 치료를 하는 근본적인 자세가 될 것이다.

세상을 세세하게 나누는 글자들을 바꿔보자. 존중하고 이해하는 글자들로, 그렇게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면 오일레이가 고통에서 벗어나듯 우리도 세상의 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화씨 451을 읽고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장윤성 (책익는 마을 주민)

 

1. 읽혀서는 절대 안 되는 책

몇 차례 쏟아지는 폭우에 결코 고개 숙이지 아니하고

제 마음 굽히지 않았더니 외꽃이 더욱 노랗다.

절대로 무릎 끓지 아니하고

제 뜻을 꺾지 아니 하였더니 능소화가 더욱 붉다.

저 꽃의 이유를 찬찬히 읽는데 가슴이 불시에 뛴다.

피가 갑작스럽게 끓는다.

단 며칠 세상에 목숨 내밀더라도

활짝 피는 것들이 生은 무기보다 더 위험하다고 한 줄도 읽지 못하게

자물쇠 단단하게 채워 놓거나

불을 지르면 지를수록 오히려 더 불온해지고 싶은 법이라네.

저 금지된 서적 같은 꽃에 물 들은 나도

짙은 빛을 내뱉으며 누군가에게 한달음에 읽혀지고 싶은 것이다.

–불온서적 (김종제님의 시)–

20 여 년 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 손에 이끌려 ‘금서’라는 책들을 읽으며 토론했다. 그 때 심장을 철커덕 거리며 읽었던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철학에세이, 맑시즘, 고리끼의 어머니라는 책들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도 광주사태로 배워왔던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며 큰 충격에 빠졌다. 그 책들은 군부 독재의 반공 교육에 길들여진 무지한 나를 변화시켰다. 군부독재가 끝나면서 금서와 금지가요들이 해금되었고 우리의 사상은 더 이상 정부에 의해 통제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전 국방부가 군인들에게 유해하다며 불온서적을 정했다는 기사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에도 온 국민을 분노로 연대하게 만든 ‘도가니’의 원작 소설가를 경찰이 조사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인권위의 얼빠진 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의 사상은 어떠하기에 국민의 사상을 검열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내가 그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싶다. 이 사회도 나도 아직까지 1980년대 이 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위정자들은 책을 두려워한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를 지니게 된다. 책은 사람의 생각을 바꿔 행동을 바꾸게 하며 현재를 바꿔 나가면서 미래까지 바꾼다. 그 사실을 위정자들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화씨 451’ 속의 위정자들도 책을 두려워한다. 책이 주는 거대한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 위정자들은 통치에 위험한 책을 없애기 위해 독서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책들을 불태운다. ‘유색인들은 <꼬마 검둥이 삼보>를 싫어하지. 태워버려. 백인들은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싫어하고. 그것도 태워버려. 누군가가 담배와 폐암과의 관련에 대한 책을 썼다면? 담배 장사꾼들 분통이 터지겠지. 그럼 태워버려.’

지금 우리 위정자들은 어떤 책들을 불태우고 싶어 할까? 그 위험한 책들이 타기 시작하는 온도가 바로 화씨 451도 이다. 책을 태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 Fireman 이다. 그러나 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수이다. 주인공 가이 몬테그도 방화수이다. 그는 클라리셰라는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하는 일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화수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법의 수호자라며 자부심을 가졌다. 클라리세는 비정상인 소녀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그녀는 텔레비전 수업,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역사 수업, 운동 시간 등을 수업하는 학교에 대해 비판 한다. 그런 수업을 하는 교실을 감옥이라고 말한다. 클라리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 아들은 감옥에서 공부하고 있다. 딱한 내 아들이다. 클라리셰는 사람들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아니에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 밖에 안 해요…..그저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기 일쑤죠. 멋있고 즐겁지만 그것뿐이죠.”

클라리셰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말초적일뿐 더 이상의 지성은 없다. 몬테그의 아내 밀드레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벽면 TV 앞에 앉아 일방적인 TV 방송만을 탐닉한다. 그녀가 이웃집의 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 얘기뿐이다. 그녀가 소망하는 것이라곤 그저 네 벽 전체를 헐어 내고 텔레비전으로 바꾸는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풍경이다. 텔레비전이 거실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우리 집, 커피를 마시며 어제 시청한 드라마로 열띠게 이야기하는 내 모습들이 겹쳐진다. 그래서 밀드레드나 이웃집 부인들을 차마 비웃지 못하겠다.

 

3. 책들을 읽으면……

클라리셰를 만나면서 몬테그는 책들을 태우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자신이 그토록 보람 있다고 생각해 온 일에 회의를 느낀다. 책 속에 어떤 것들이 있기에 모든 것을 버려가며 책을 지키고 책을 읽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 소녀가 사라진 후 몬테그는 자신들이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데도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는 그 진실은 책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 하루에 두 시간 씩만 이 책들을 읽으면, 어쩌면 …….”

이라고 절규한다. 몬테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변화 시켜 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 자신이 숨겨둔 책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 곳은 책을 필사적으로 지키며 살아가는 반사회적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책을 읽고 책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사회적 범죄인들이다. 픽션이라는 소설 속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80년대 금서를 읽었던 나도 반사회적 범죄인이었다. 몬테그가 사는 사회의 위정자들이 정말 두려워 한 것은 독서를 통해 국민들이 비판적 사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사고를 지니게 되면 국민들을 멋대로 통치하기 어렵고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몬테규의 절규처럼 책들을 읽으면 ‘앎’을 갖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되어 불의에 저항하게 만든다. 그래서 방화서장 비티의 말대로 책을 소유하는 게 범죄가 아니라 읽는 게 문제인 것이다. 나는 책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읽고 있는 지 되돌아본다.

 

4. 책이 사라지고 있다?

출판사 시장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단다. 우리 아들만 보아도 그럴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아들내미가 읽는 책이라곤 교과서와 문제집, 참고서가 전부이다. 책갈피를 넘겨가며 읽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어서 걱정이다. 이렇게 독서를 하는 경우는 국어 수행평가로 독서 감상문을 쓸 때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독서를 하라고 말하면 시간이 없다는 변명만 돌아온다. 토요일에도 밤에 귀가하는 아들을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건지 책 읽을 마음이 없는 건지 헷갈린다. 그러나 TV 앞에 앉아 낄낄거리는 걸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책 읽기는 괴로우나 TV 시청은 즐겁다는 아들놈을 보며 고민한다. 아들과 비슷한 아이들이 많다면 ‘책이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기우이다. 부디 우리 아들들이 TV가 주는 감각적 유희에서 빠져나와 책 읽기가 주는 이성적 사고에 빠져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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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래이 브래드버리 지음, <화씨 451>(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 관한 장윤성 책익는 마을 주민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