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다 더 ‘행복한’ 우리 마을에 놀러오세요![철학자의 서재]
유창복의 <우린 마을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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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부산대학교 비정규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춤추는 숲>과 함께 사는 삶
지난 2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 나는 동료들과 공부 모임을 하는 공간이자 매월 마지막 목요일이면 ‘초록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 초록’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여유가 없어 공부 모임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 영화제는 (육아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언감생심이었죠. 2월 말 영화제를 기점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모든 곳에 가능한 한 참여하겠다고 목표로 삼았지만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두 돌 된 아이를 달고 간 길이라 영화가 시작되고는 30분을 넘기기 어려웠거든요.
보고 싶었으나 다 보지 못했던 그 영화는 서울 마포의 성미산 공동체에 대한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이었지요. 공동체 문제는 현재 나의 삶이나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내게 언제부턴가 새롭게 풀어가야 하는 오래된, 그러나 미지의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또 덮어 두었던 문제가 성미산 아래 마을의 골목골목을 여기저기 소개하는 경쾌한 자전거의 속도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어차피 영화를 다 보지 못했으니 영화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사는 삶을 모색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만 말해 둡시다.
애초에 그들은 공동 육아를 위해 모였고 그것이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그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요컨대 성미산 공동체 사람들은 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그냥 감내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적인 공적 영역 속으로 휘발시켜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미지의 공동의 삶의 방식을 발굴하려 했고, 또 그 이후의 것들(도시에서 마을을 이뤄 산다는 새로운 공동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7년의 지난한 시간을 아마도 영화는 매우 함축적으로밖에 보여주지 못했을 겁니다.
같은 것을 소유/소비하는 것과 공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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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미산 공동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에도 화명동에, 반송에, 물만골에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삶 가운데 공통적인 것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얼핏 생각해도 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 조건에서 면제된 이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를 볼까요? 우리들은 동일한 물건들을 소유/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스마트폰, 스키니진, 백팩, 브랜드 러닝화 등의 동일한 물건들로 공통적인 외형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동일한 종류의 물건을 소유/소비하는 방식은 아주 개별적일 뿐입니다. 이때 개별성이란 서로 소통되지도 않고, 관계 맺지도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소유/소비 방식은 싸고 질 좋은 물건이거나 비싸더라도 브랜드가 품질을 보증해줄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공통적인 가치는 삼성이냐 애플이냐, 나이키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어디서 왔고(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도 공통적이네요)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는 모르기도 하지만 관심사 밖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기적 소유와 묻지 마 소비는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즉, 나도 동일한 물건을 소유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요(물론 이런 관점이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내용과 형식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개별화하는 이 도시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찾은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나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고,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결국 유창복이 쓴 <우린 마을에서 논다>(또하나의문화 펴냄)을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
글쓴이 유창복은 사고로 부모 형제를 잃은 처형의 아이 아빠가 되면서 공동 육아의 터전으로 성미산 자락을 찾아든 이들 중 한 사람이지요. 그는 처음부터 마을 일에 참여적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모인 이들은 아이들 먹을거리와 아이들 교육을 남다르게 고민하면서 마포두레생협, 도토리방과후학교를 만들면서 조금씩 마을의 기본적인 삶이 구성되면서 함께 해나게 되죠.
그런데 그 터전이 갑자기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명목은 서울시상수도본부에서 성미산에 배수지 건설 사업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당시 성미산 땅주인이었던 한양대학교재단의 부동산 개발을 위해 성미산이 헐린다는 것이었죠. 그때 글쓴이는 자신은 몇 번 오르지 않던 성미산이 아이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동산”이라는 것을, 아이의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성미산 지키기는 주민 서명에 들어간 2001년 8월부터 상수도 사업본부가 서울시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업 철회를 밝히는 2003년 10월에 이르는 지난한 시간을 겪습니다. 그동안 마을에 들어온 이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공감과 지지는 120일 동안의 산상 철야 농성 과정에서, 서울시가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보낸 용역 깡패를 막아내고 끝내 성미산을 지켜내면서 새로운 이웃으로, 다정한 마을 주민으로 다시 만나게 되지요.
물론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성미산의 위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거든요. 이후 새로운 땅주인이 된 홍익대학교재단이 주민 반대 끝에 홍익대학교 부속 초·중·고등학교를 짓게 되고 그 갈등과 민원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또 다시 기숙사를 설립한다고 해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고 있지요.
‘성미산 마을 축제‘, 마을 문화 공간인 ‘성미산 극장‘,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 대안 카센타인 ‘성미산차병원’, 동네 유기농 식당 ‘성미산밥상’, ‘마포FM’, 공동주택전문기획사인 마을 기업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등 이 마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새로운 공간과 실험적인 시도들에 대한 찬사나 부러움은 여기서 접어둘게요.
애초에 나의 의문으로 돌아가면 성미산 마을 공동체의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 ‘성미산’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자연재로서의 산인 성미산이 아니죠. 함께 살며 놀며 기억을 만들고 오랜 시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하고 투쟁하며 함께 지켜냈던, 시간과 함께 보냈던 장소로서의 성미산이지요. 그런 것은 손에 잡히는 유형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변치 않는 동일한 것으로 유폐되어 있을 수도 없는 것이죠. 같이 기억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매번 달라지고 공유하고 있지만 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계속해서 덧붙여갈 수 있을 뿐이죠.
뜻은 있으나 목적은 없는
우리는 그동안 숱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시대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가 이념적 공동체와 종교적 공동체였다면 전자는 이미 그 생명을 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귀농을 꿈꾸는 이들은 소비와 쓰레기의 순환에 갇힌 도시를 피해 농촌으로 가지만 그들이 거기서 또 다른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성미산 공동체에서 주목하는 것은 “성미산 마을은 비전 세우고 쫓아간 게 아니라, 일상의 필요에 따라 마을 일을 하면서 능력들이 성장한 사례”라는 점입니다. 20~30명 규모의 공동 육아 울타리만으로 육아가 끝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이 하나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깨닫는 과정에서 애초에 생각지 않았던 일들을,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고 있는 것일 뿐인 거죠.
최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방식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의 내용을 논의하고, ‘공통적인 것’을 규명하는 데 관심이 많고 저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은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개인화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인 공통성을 토대로 연결되고 구성된 존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나의 토대를 이루고 내가 연결되어 있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 공통적인 것을 이미 주어진 것이며 사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 역시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삶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니 어느 하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더군요.
그렇지만 “육아·교육·먹을거리·생활필수품·놀이·소통 등 어느 것 하나 도시의 빠듯한 살림살이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절실한 생활의 필요를 느껴 시장에 가 보니 마땅한 해결책도 없다. 있어도 지나치게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국가를 쳐다보니 아예 관심이 없거나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채다. 어떻게 하나? ‘시장과 국가가 해 주지 않으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다’.” 이것이 바로 성미산 마을의 역사를 만드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절실한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직접 해결하는 거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질 않지만 여럿이라면 가능하다. 공동의 필요를 느낀 여럿이 협동하면 뭐든 된다. 한 번의 성공적인 협동은 또 다른 협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협동이 오히려 번거로울 때도 많다. ‘차라리 혼자 하고 말지’할 때가 많을 정도로. 원활한 소통 경험은 협동의 성능을 높이고 성공률을 높인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삶을 원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지만 성미산 공동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이, 그 가능성의 모델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책을 읽을수록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현재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많다면, 그래서 나-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이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더 읽을거리
윤태근의 <성미산 마을 사람들-우리가 꿈꾸는 마을, 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을>(북노마드 펴냄), <우린 마을에서 논다>가 마을 1세대의 투쟁과 소개에 많이 할애되어 있다면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두 번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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