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자기 계발? ‘기종’도 모르고 ‘스펙’ 쌓으면 뭐해?

미셸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

김정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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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 없는 ‘자기 계발’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펴냄)에서 권보드래와 천정환은 자기 계발서 수요의 구조적인 조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근대’는 모든 개인에게 ‘입신’과 ‘출세’를 과제로 삼게 했다. 봉건적 신분제가 해체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권리와 기능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학교직장에서 남들과 교통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인정과 성공이라는 재화는 제한되었으므로 남들보다 나은 개인의 자원(즉 학벌과 교양 같은 상징 자본, 화법과 사교술 같은 테크닉)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필요의 총칭이 ‘처세’이다. (…)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대학생이나 재테크에 열중하는 주부만이 아니라,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는 모든 ‘자기’들은 ‘자기’의 모든 것,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아보고(알기, 성찰), 관리하고(관리, 경영), 발전하게 하기 위해(계발, 자조) 노력한다.” (<1960년을 묻다>, 377~379쪽)

흔히 말하는 ‘각자도생’의 일환으로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을 읽는 셈이다. 그런데 관리하든 발전하든 간에 매뉴얼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제품 인식이 먼저이다. 무턱대고 엉뚱한 기종에 다른 매뉴얼을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인데, ‘자기 계발서’라는 실행 지침서를 적절히 사용하려면 자신의 ‘기종’부터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계발’하려면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낸다고 할 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될 수 있을까.

미셸 푸코는 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의 강의에서, 성의 금기와 제약 등을 다루면서 금기를 위해서는 자기 인식이 선결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강의가 담긴 책 <자기의 테크놀로지>(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은 금지를 지키든 위반하든 간에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해야하는 의무를 갖게 됨을 들춰낸다. 그렇지만 자기 계발에 대해서도 그러할까. 우리는 각자도생을 위한 ‘자기 계발’의 강요 앞에, 자신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먹고 살려고 하는 수 없이 내맡겨 버리는 체념은 아닐까.

 

▲(미셸 푸코 지음, 이희원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근대 개인들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요구되는 ‘자기 계발’은, 푸코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자기 해석‘과 관련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 없이 무엇을 어떻게 스스로 계발할 수 있단 말인가. 뭔가가 계발된다고 해도 계발되는 것은 ‘처세’이지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한 진리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장치가 강제되지 않는 한 진실만을 말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란 도무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자신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막상 성취되니 실은 그걸 원한 게 아닌 경우를 겪곤 하지 않는가.

대번에 연상되는 금언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흔히 주제 파악을 하라는 즈음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델포이의 이 신탁은 인생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기술적인 권고, 즉 신탁을 듣기 위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네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지 말라’를 의미하였다. 다른 해설자의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신탁소에 조언을 청하러 갈 때 정말 질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을 의미했다.” (38~39쪽)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신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당연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1960년을 묻다>에서 전형화되어 드러나듯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는 것이다. “즉 돈과 경력, 라이프스타일과 몸, ‘마음’과 ‘관계’ 및 ‘사랑'”을 돌보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이 배려해야 하는 자기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기를 해석하는 일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I>(김주일?정준영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에 주목한다. 고대에 자기인식이 자기 배려에 따른 것이며, 이때의 자기 배려란 영혼을 돌보는 행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고 정리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몸이지 자신이 아니며, 하물며 몸이 사용하는 옷이나 신발 같은 것들은 더욱이나 거리가 멀다. 그런데 누구나 의문을 갖는, 영혼을 돌본다는 게 대체 무얼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얼마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혼을 돌보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제시한 점이다. 얼핏 자신을 돌보는 건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무관심일 듯싶은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배려야말로 정치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영혼은 신성한 요소(영혼의 원리, 혹은 본질)에 대하여 관조해야 한다. 이렇듯 신성한 관조 속에서 영혼은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기반을 설립하는 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그 자체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정당한 정치 행동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원리이며,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영혼이라는 신성한 요소를 관조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가가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행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은 정치 활동과 결합되었다.” (48~49쪽)

한나 아렌트가 ‘말하기의 무능력, 생각하기의 무능력, 판단하기의 무능력’이 만연하는 악을 만든다고 말했듯, ‘정당한 행위와 정치 행동의 규칙’을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보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인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의 양자택일

 

겉보기에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관심은 흔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고,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구분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과연 얼마나 현재 정치 활동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이익 추구와는 별개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뤄볼 문제이다.

푸코에 따르면,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스I>에서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영혼에 대한 인식이고, 이는 정당한 행위 혹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관조와 연관됨을 드러냈음에도 이미 고대에도 플라톤의 해결책과는 달랐다고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전념하는 일과 정치 활동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말기 헬레니즘과 제정시대에 이 문제는 별도의 대안책으로 제시되었다. 즉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 (49쪽)

흔히 연상되는 자기에의 전념이 내면으로의 침잠하는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배려는 새로운 자기 체험을 포함한다. 자기 체험의 새로운 형식이 출현한 시대는, 내성이 점차 세분화되었던 기원전 1, 2세기이다. 글쓰기 작업과 의미심장한 관찰 사이에 연관관계가 생겨났다. 생활과 기분, 독서에 세부적인 주의가 기울여졌고, 자기 체험은 글쓰기 행위에 의해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체험 영역의 문이 열린 것이다. (…)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 정신의 움직임, 자기 분석에 대한 (…) 세세한 관심이다.”(52쪽)

이제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배려는 일상생활의 “하찮고 세부적인 사항이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세부사항이 바로 우리 자신-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55쪽)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인간의 올바른 행위나 정당한 행위를 사색하며 관조하는 일이 제거된다. 이는 로마 제정이라는 시대적인 배경도 있겠지만,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이제 “자신을 보다 잘 배려하려면 정치와 결별하여야 했다.” “정치 생활과 무관계한 자기 자신에의 배려의 보편성”(57쪽)이 등장한다. 이것을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는 “영구적인 의학적 배려가 되었다. 한순간의 그침도 없는 의학적 배려는 자기에의 배려의 핵심 사항의 하나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57~58쪽)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자기 배려 모델이 “언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자기에의 관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나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기 계발 그리고 그 대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볼 시간이다. 아마도 큰 무리 없이 ‘자기 계발’에의 몰두는 몰정치적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을 듯하다. 올바른 행위를 숙고하고 판단하며 고민하는 일은 매우 불편할뿐더러 인간관계의 갈등을 초래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 개발과 원만하고 인상적인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에서 어떻게 올바름에 대한 고민의 틈이 있겠는가. 당장 능률적인 일처리와 협력 관계를 재고한다면, 올바름을 머릿속에 떠올릴 새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잘못되거나 그릇된 일이라는 클레임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지는 식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돌볼 만큼 한가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삭제할수록 일처리는 능률적이다. 정당한 행위의 관조도 없이, 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배려도 없이 ‘자기 계발’되고 있는 셈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사하고 진정한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중세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거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이미 결별한 시대에 살고 있는 대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한다면, 자기 계발되면 될수록 자기 배려와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지만, 그것은 글쓴이의 능력을 벗어나 있는 일임을 고백하면서 다음의 문제제기를 음미하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푸코가 자기를 다루는 기술의 역사 혹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역사를 탐구하게 된 것은 베버의 의문에서부터였다고 한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을 진실된 원리에 기초하여 규제하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금욕에 대한 이성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금욕에 승복해야 하는가?”

푸코의 의문은 이러했다.

“특정한 종류의 금기가 어떻게 특정한 종류의 자기 인식의 대가를 필요로 하는가? 자진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에 관하여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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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다 더 ‘행복한’ 우리 마을에 놀러오세요![철학자의 서재]

유창복의 <우린 마을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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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부산대학교 비정규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춤추는 숲>과 함께 사는 삶

 

지난 2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 나는 동료들과 공부 모임을 하는 공간이자 매월 마지막 목요일이면 ‘초록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 초록’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여유가 없어 공부 모임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 영화제는 (육아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언감생심이었죠. 2월 말 영화제를 기점으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모든 곳에 가능한 한 참여하겠다고 목표로 삼았지만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두 돌 된 아이를 달고 간 길이라 영화가 시작되고는 30분을 넘기기 어려웠거든요.

보고 싶었으나 다 보지 못했던 그 영화는 서울 마포의 성미산 공동체에 대한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이었지요. 공동체 문제는 현재 나의 삶이나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내게 언제부턴가 새롭게 풀어가야 하는 오래된, 그러나 미지의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또 덮어 두었던 문제가 성미산 아래 마을의 골목골목을 여기저기 소개하는 경쾌한 자전거의 속도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어차피 영화를 다 보지 못했으니 영화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사는 삶을 모색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실천해온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만 말해 둡시다.

애초에 그들은 공동 육아를 위해 모였고 그것이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그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의 시발점이었습니다. 요컨대 성미산 공동체 사람들은 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그냥 감내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적인 공적 영역 속으로 휘발시켜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미지의 공동의 삶의 방식을 발굴하려 했고, 또 그 이후의 것들(도시에서 마을을 이뤄 산다는 새로운 공동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7년의 지난한 시간을 아마도 영화는 매우 함축적으로밖에 보여주지 못했을 겁니다.

같은 것을 소유/소비하는 것과 공유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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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복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물론 성미산 공동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산에도 화명동에, 반송에, 물만골에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삶 가운데 공통적인 것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얼핏 생각해도 이 함께 살아가는 존재 조건에서 면제된 이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를 볼까요? 우리들은 동일한 물건들을 소유/소비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스마트폰, 스키니진, 백팩, 브랜드 러닝화 등의 동일한 물건들로 공통적인 외형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동일한 종류의 물건을 소유/소비하는 방식은 아주 개별적일 뿐입니다. 이때 개별성이란 서로 소통되지도 않고, 관계 맺지도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소유/소비 방식은 싸고 질 좋은 물건이거나 비싸더라도 브랜드가 품질을 보증해줄 수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공통적인 가치는 삼성이냐 애플이냐, 나이키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어디서 왔고(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도 공통적이네요)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는 모르기도 하지만 관심사 밖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기적 소유와 묻지 마 소비는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즉, 나도 동일한 물건을 소유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요(물론 이런 관점이 스마트폰이 우리 삶의 내용과 형식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개별화하는 이 도시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찾은 공통적인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나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고,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결국 유창복이 쓴 <우린 마을에서 논다>(또하나의문화 펴냄)을 들추어보게 되었습니다.

글쓴이 유창복은 사고로 부모 형제를 잃은 처형의 아이 아빠가 되면서 공동 육아의 터전으로 성미산 자락을 찾아든 이들 중 한 사람이지요. 그는 처음부터 마을 일에 참여적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모인 이들은 아이들 먹을거리와 아이들 교육을 남다르게 고민하면서 마포두레생협, 도토리방과후학교를 만들면서 조금씩 마을의 기본적인 삶이 구성되면서 함께 해나게 되죠.

그런데 그 터전이 갑자기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명목은 서울시상수도본부에서 성미산에 배수지 건설 사업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당시 성미산 땅주인이었던 한양대학교재단의 부동산 개발을 위해 성미산이 헐린다는 것이었죠. 그때 글쓴이는 자신은 몇 번 오르지 않던 성미산이 아이의 “꿈과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동산”이라는 것을, 아이의 고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성미산 지키기는 주민 서명에 들어간 2001년 8월부터 상수도 사업본부가 서울시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업 철회를 밝히는 2003년 10월에 이르는 지난한 시간을 겪습니다. 그동안 마을에 들어온 이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공감과 지지는 120일 동안의 산상 철야 농성 과정에서, 서울시가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보낸 용역 깡패를 막아내고 끝내 성미산을 지켜내면서 새로운 이웃으로, 다정한 마을 주민으로 다시 만나게 되지요.

물론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성미산의 위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거든요. 이후 새로운 땅주인이 된 홍익대학교재단이 주민 반대 끝에 홍익대학교 부속 초·중·고등학교를 짓게 되고 그 갈등과 민원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근 또 다시 기숙사를 설립한다고 해 새로운 갈등을 예고하고 있지요.

‘성미산 마을 축제‘, 마을 문화 공간인 ‘성미산 극장‘,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 대안 카센타인 ‘성미산차병원’, 동네 유기농 식당 ‘성미산밥상’, ‘마포FM’, 공동주택전문기획사인 마을 기업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등 이 마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새로운 공간과 실험적인 시도들에 대한 찬사나 부러움은 여기서 접어둘게요.

애초에 나의 의문으로 돌아가면 성미산 마을 공동체의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 ‘성미산’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자연재로서의 산인 성미산이 아니죠. 함께 살며 놀며 기억을 만들고 오랜 시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하고 투쟁하며 함께 지켜냈던, 시간과 함께 보냈던 장소로서의 성미산이지요. 그런 것은 손에 잡히는 유형의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변치 않는 동일한 것으로 유폐되어 있을 수도 없는 것이죠. 같이 기억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매번 달라지고 공유하고 있지만 또 다른 시간과 공존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계속해서 덧붙여갈 수 있을 뿐이죠.

 

뜻은 있으나 목적은 없는

 

우리는 그동안 숱한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시대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가 이념적 공동체와 종교적 공동체였다면 전자는 이미 그 생명을 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귀농을 꿈꾸는 이들은 소비와 쓰레기의 순환에 갇힌 도시를 피해 농촌으로 가지만 그들이 거기서 또 다른 마을 공동체를 꿈꾸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성미산 공동체에서 주목하는 것은 “성미산 마을은 비전 세우고 쫓아간 게 아니라, 일상의 필요에 따라 마을 일을 하면서 능력들이 성장한 사례”라는 점입니다. 20~30명 규모의 공동 육아 울타리만으로 육아가 끝나는 것이 아니듯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결국 이들은 “아이 하나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깨닫는 과정에서 애초에 생각지 않았던 일들을,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고 있는 것일 뿐인 거죠.

최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방식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의 내용을 논의하고, ‘공통적인 것’을 규명하는 데 관심이 많고 저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은 인간을 개별적인 존재로 개인화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이 처음부터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인 공통성을 토대로 연결되고 구성된 존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나의 토대를 이루고 내가 연결되어 있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 공통적인 것을 이미 주어진 것이며 사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 역시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삶의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니 어느 하나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더군요.

그렇지만 “육아·교육·먹을거리·생활필수품·놀이·소통 등 어느 것 하나 도시의 빠듯한 살림살이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절실한 생활의 필요를 느껴 시장에 가 보니 마땅한 해결책도 없다. 있어도 지나치게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국가를 쳐다보니 아예 관심이 없거나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채다. 어떻게 하나? ‘시장과 국가가 해 주지 않으면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다’.” 이것이 바로 성미산 마을의 역사를 만드는 뜻이었다고 봅니다.

“절실한 필요를 느낀 사람들이 직접 해결하는 거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질 않지만 여럿이라면 가능하다. 공동의 필요를 느낀 여럿이 협동하면 뭐든 된다. 한 번의 성공적인 협동은 또 다른 협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협동이 오히려 번거로울 때도 많다. ‘차라리 혼자 하고 말지’할 때가 많을 정도로. 원활한 소통 경험은 협동의 성능을 높이고 성공률을 높인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삶을 원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지만 성미산 공동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가능성이, 그 가능성의 모델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허나 책을 읽을수록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현재의 삶의 방식에 불만이 많다면, 그래서 나-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의 이야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더 읽을거리

윤태근의 <성미산 마을 사람들-우리가 꿈꾸는 마을, 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을>(북노마드 펴냄), <우린 마을에서 논다>가 마을 1세대의 투쟁과 소개에 많이 할애되어 있다면 마을을 이루는 공동체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두 번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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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랑 원한다면, ‘하나 되자’고 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뤼스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

 

김세서리아(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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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랑, 하나가 된다는 것?

 

사랑해요”란 말이 아직도 서툴고 낯설게 느껴진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사랑’은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말이 되었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홈쇼핑 교환인의 멘트에서부터 유치원 아이들의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재잘거림,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 카피 등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층위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고 그 대상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할 때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의미는 가까움, 친밀함의 의미이다.

이러한 때문에 우리에게 종종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 이해된다. 너와 나 사이의 다름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뭉쳐지고 거듭나는 것, 내 것이 네 것 되고 네 것이 내 것 되는 경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이해하는 속에서는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되는 것, 그들 간의 차이가 남아 있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한 때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불완전하다. 자연히 우리는 완전하였던 상태로의 복원을 소원한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됨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의 추구이다.

▲(뤼스 이리가레 지음, 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 ⓒ동문선

플라톤의 <향연>(천병희 옮김, 도서출판숲 펴냄)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에 대한 논리는 하나됨의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일 것이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사랑에 의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힘입어 사랑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리된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는 생각은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만큼 혼자인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민족애, 동포애, 형제애는 각 구성원이 하나임을 과시하는 사랑의 표식이며,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큰 거부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한 몸 이미지를 지닌 상상의 공동체가 된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것은 자주 혹은 때때로 가장 최상의 원리처럼 생각되곤 한다. 동일함을 추구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떠한 대립도 나타나지 않는 통일적인 힘을 상정하며,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힘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한 몸 되기의 힘이고, 사랑은 소통의 힘이며, 한 몸이 되어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차이, 사랑

 

하지만 통일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하나’의 원리는 사실은 자신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하나’가 되는 방식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이룰 수 없다. ‘하나’라는 영원하고 통일적인 힘은 유일무이한 진리를 등장시키고, 그것과 다른 종류의 것들은 강제로 흡수해버리거나 아니면 미리 마련된 기준에 의해 나머지 것들을 지평 밖으로 내쳐 버리는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하나 됨은 가까움의 극단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움을 최극단까지 몰고 가면 결국 그 가까움에는 어떤 거리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가까움이나 다가감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그런 속에서는 진정한 소통을 이룰 수 없으며, 그러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내 방식대로 길들이거나 나에게로 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항간의 말은 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나 됨이 폭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부자가난한 자, 어린이와 어른,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여성과 남성, 제1세계 백인 중산층 여성과 유색 무산자 계급의 여성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사실은 평등이 아니라 평등을 가장한 차별이며 온전한 소통도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소통을 가장한 하나 됨의 막힘 논리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을 동일화하는 의식은 종종 노인들이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이나 잠재력을 얼마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노인과 젊은이 간의 소통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인생의 어느 특수한 단계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의미를 무시하고 간과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사실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을 동일화하려는 사고는 노인들의 특수성이나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가치를 젊은 사람의 기준에서 측정하기 때문에 젊은이에 못 미치는 체력 혹은 능력을 가진 노인은 유용성의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노인들이 갖는 혜안이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니는 감정의 특수한 효과들은 무시되고, 노년은 개인적인 발전이 침체되는 운명으로 낙인찍힌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일화하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일화하는 것, 예컨대 젠더를 고려하지 않는 것 역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빚어낸다.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우하지 않는 것은 어린이를 그저 작은 어른으로 취급해버림으로써 어른의 일에 어린이를 가담시킨다. 또 장애인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화하는 것은 장애인의 상황을 더 열악한 데로 전락시켜 버린다. 남녀의 같음을 강조하는 것 역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일성 혹은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젠더의 관점에서 가장 비판받을 수 있다.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 이성이 전제된 남성의 유형을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요구하면서 여성의 특수한 경험을 무시하게 되고, 그러한 속에서 남녀 간의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간격, 소통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자와 나의 접촉이 핵심일 것이다. 이때 가까움, 친밀성을 뒤섞는다든지 융합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 다름을 인정하고, 거리두기, 간극을 상정하는 방식으로 접촉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타자가 나와 차이난다는 것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자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각각을 우리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닿아왔던 그 부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식을 이리가레는 감각적인 어루만짐, 가까움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움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에 다다랐다가는 다시 그것을 닫고 물러나야 함에서 찾는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접촉, 어루만짐, 가까움 이런 단어 옆에 간격, 차이, 다름이라는 단어들을 함께 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간격이란 이미 드러난 것을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그저 삼켜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자신을 재발견하고 타자를 재발견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으로서의 간격, 안-사이, 사이-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에게 향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즉 나에게 익숙한 공간-시간이 아닌 다른 공간-시간들을 만들어야 한다.

소통이라는 말에는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포기되어야 함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고, 전체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은 소통을 불가능한 상태로 모는 것이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의 내밀함을 침해하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지킴으로써 사이의 친밀함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은 소통의 방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타자에게 말을 하면서도 어떻게 타자를 놓아둘 것인가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타자가 타자로 존재하고 계속 그렇게 남아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기 때문이다.

관계, 머물기 그리고 사랑의 도(道)
사랑하는 데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일종의 도를 터득해야 할까? 뤼스 이리가레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랑의 길>(정소영 옮김, 동문선 펴냄)에서 제시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 부분이 갖는 관계의 원래 자리를 일구어야 하며, 그 일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고, 이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 배경을 그려 보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리가레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은 우리가 현재 믿고 쓰는 묘사적이고 서술적인 언어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언어들로는 이미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물, 이미 과거의 사실이거나 말해진 것을 통해 과거로 밀려난 인물이나 사물에 상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무언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 과거의 것과 현재나 미래의 것이 서로 만나는 장을 마련하는 일, 또 그것을 표현할 말이나 몸짓, 맞아들이고 축하하며 지금 현재와 미래에 그것을 일굴 만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리가레에게서 이러한 작업은 인간 되기, 관계 맺기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의 주체와 함께 전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전체와의 연결이 아니다. 인간 되기, 관계 맺기란 맹목적으로 자신을 전체 안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를 공들여 만들어온 주체가 스스로 그 일을 해온 방식에 대해 질문하고, ‘어떻게’라는 방식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종의 제스처가 없이 타자와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가레는 타자와의 관계를 이루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몸짓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 나아가 자신의 존재에 상응하는 실제적 내용을 표현할 제스처,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차별화된 세계를 타자에게 제안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체가 타자에의 친근함, 세계에의 친근함을 찾는 것은 거리를 극복함으로써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다르게 자신의 자율성 속에서 존재하는 능력을 통해서이다. 또한 이것이 생겨나는 데 있어서 타자의 역할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일어나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임을 밝힌다. 이러한 속에서 주체는 구성되고 타자 역시 구성된다. 주체는 자신을 인간으로 구성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주관성의 객관성을 구성한다. 타자를 위한 자리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자리를 자신 안에 마련하면서 인간다움을 이루어낸다.

이렇게 보면 사랑이란 인간 되기의 작업이며 이는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는 두 주체에 의해 건설된다. 나와의 관계에서 네가 생겨나려면 나는 타자가 신뢰할 수 있는 그의 존재에 대한 성실함을 확보해야 한다. 그 시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는 너와 나 자신 모두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함께 전유하기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동반한다.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 우리 안의 타자와 우리 사이의 타자와 함께 갈 가까움의 장소를 마련하는 법, 그리고 자신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사랑의 도이며, <사랑의 길>이 보여주는 하나의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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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3월 월례발표회]

?[2013년 3월 월례발표회]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후기: 박영균 (건국대 HK 연구교수)

 

 

 

윤구병 선생의 <철학을 다시 쓴다> 강연을 들은 후 …

 

2013년 3월 8일 오후 5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윤구병 선생이 지난 2월 12일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라는 책에 담긴 그의 사유를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의 책, <철학을 다시 쓴다>는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있음과 없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윤구병 선생은 한철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7년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고자 했던 젊은 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보수철학계에 반기를 들고 한철연의 창립을 모색하던 시절, 그 주춧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한철연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그 후로 장시간 단독대표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당시, 청춘의 열정 속에서 반역의 철학을 꿈꾸었던 선배들도 이제는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으며 한철연의 회원들도 ‘출애굽세대들’로 채워졌다.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40-50여 명의 청중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는 보리출판사 관계자들과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탁자 위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윤구병 선생은 탁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칠판 위에 ‘時空間 四次元 連續體의 存在論的 根據’라고 썼다. 순간적으로 ‘뭐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선생은 이렇게 써야 사람들은 유식한 철학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수입된 언어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지웠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우리말로 하는 철학, 그것은 윤구병 선생이 평소에 추구해왔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고대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 속에서의 사유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놓았다. 존재와 무 대신에 ‘있음’과 ‘없음’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도 모두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운동과 생성, 그리고 ‘함’과 ‘됨’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참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좋은 것이며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한철연의 정신 또한 이로부터 출발했었다. <시대와 철학> 두 번째 창간호에서 한철연은 “현실로부터 출발하되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 초월적인 선천적인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독백이나 철학자들끼리의 속삭임, … 외국에서 차용”하기만 하는 반시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철학”의 길을 주창했다. ‘주체적 철학’은 근원적 실천이자 생산자적 철학이며 비판적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보적 핵심을 포착해 내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에 되돌려줌”의 철학이다.

그 선언이 있은 이후, 벌써 2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 동안 우리는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경험했으며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으로서 ‘포스트 87년 체제’와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거쳐 다시 2013년 현재 1972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또 다시 대통령이 된 2013년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한철연은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보면 한철연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신에 한철연은, 그 운동을 가능케 했던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으로 철학함의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윤구병 선생의 이번 강연과 2월에 있었던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 강연은 바로 이런 ‘한국에서의 철학함’의 의미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살리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처음 낙성대역에 있었던 한철연의 문을 두드렸을 때, 비좁고 초라해보였던 한철연은 철학적 사유함을 추동하는 열정과 낭만, 분노와 깨워있음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분노의 술잔과 탄식의 넋두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한국에서의 철학함’이라는 ‘주체적 철학함’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철연에서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도, ‘한국에서의 철학함’도 한철연의 기조가 되지는 못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음’에 대한 분노와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서양철학과 옥죄여오는 현실 속에서 ‘있음’을 사유하고 ‘없음’의 부정적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일깨움’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에서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들, 그리고 ‘함’과 ‘됨’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다시 부여잡아야 할 화두는 ‘한국에서의 철학함’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던 많은 진보학계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한철연보다 먼저 ‘비상’했으며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한철연은 가장 늦게 날개를 폈으나 아직도 그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을 지나 어두운 ‘밤’을, 그것도 동 트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칠흑의 밤을 잠 못 든 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철학함’을 보았다. 한철연의 20년 역사만큼이나 긴 시간이 흘러 이번에 우리는 다시 이규성 선생을 통해서 ‘시대모순’과 싸워야 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사상사적 고뇌’를, 그리고 윤구병 선생을 통해서 서구의 존재론이 한국적 사유의 독특함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주체적 철학함’의 열정과 길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한철연이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시작이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그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린 그들이 아니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나 그들과 다른 철학과 경험 속에서 살아왔던 한철연의 ‘동학들’이다. 거기에는 ‘하나(있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없음’에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했듯이 ‘철학’은 항상 소피스트나 라캉과 같은 ‘반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수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지 선언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선언’과 함께 이 새로운 시작을 사유해야 한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2월 월례발표회]

?[2013년 2월 월례발표회]

 

이규성 교수의 『한국현대철학사론』출판 기념 좌담회를 보고

후기: 김정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월 16일 저녁 이화여대 이규성 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최근 나온 『한국현대철학사론』의 출간기념 좌담회였다. 좌담회는 이름처럼 이병창 교수의 진행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필자 역시 전공이 한국철학이지만 좌담회의 주제는 낯설었다. 당연했다. 필자의 관심사는 주로 주자학과 조선에 머물러 있었고, 기존에 기술된 한국철학사 역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함께 더 이상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싶어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분야였다.

이규성 교수의 문제제기는 너무나 명확했다. “한국 근현대에도 철학이 있었는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의 철학사는 보통 19세기 말에서 끝나고 만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침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형태의 연구’의 모습으로 남아있지는 않아도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이 어떤 사유도 전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흔적은 남아있을 것이다. 학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항상 안고 있었음에도, 일부 연구들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저작이 거의 없었다. 사유의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되지 않으면 단절되고 만다. 이 단절은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책은 이러한 사유의 단절된 공간을 채워줄 의미 있는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강의에 귀를 기울이며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인물들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상대적으로 익히 들어보았던 박종홍과 함석헌도 있었지만, 이돈화, 김원주,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인물들은 관련 시대의 전공자들이 아니면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다.

 

이교수가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좌담회에서 발표한 글은 19세기 말 이후 대내외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당시는 안으로는 노론 중심의 부패 무능한 지배집단과 민중의 불평등한 분열이 첨예화되었고, 밖으로는 중국의 아편전쟁이 보여주듯 제국주의 열강의 군사적 자본주의가 가하는 위협이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정치체제와 경제제도에 대한 고민과 군사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1운동,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제기되었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진: 강지은 정보자료부장

여기에서 나아갈 수 있는 철학적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관점은 자유민주주의와 과학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대유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적 해명을 통해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이상은 우주와 인생의 연관성을 사유하는 우주론적 인생관과도 결합할 수 있다.

둘째는 고상한 낭만주의적 경향이다. 19세기 말 유럽과 1920년대 한국의 개인주의 미학사조에서 보이듯, 감각적 표면 인상에 집착하는 미적 유아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인상주의적 낭만주의는 모든 억압적 제도로부터 탈출극에 집착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퇴폐적인 허무주의로 발전해 나아간다. 권력의 심리적 원천이 되는 책임성으로부터의 탈출은 낭만주의의 독특한 비애감과 결합하여 개체적 자아에 몰입하는 인격형성을 촉진하였다.

셋째는 급진주의이다. 한국의 급진주의는 신남철과 박치우에게서 나타나듯 인간성의 문화적 향상과 민주와 자주의 제도적 실현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려는 건국방략을 추구했다. 이는 자기변형과 사회변형을 지향하는 맹자적 내외합일적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신칸트주의의 <파우스트적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인간적 완성을 지향하는 부정과 형성의 의비를 알려주었지만, 한국의 급진주의는 잠시의 수동적 타협을 허용할 수 있는 변증법적 종합보다는 부단한 능동성에 의거한 부정을 말하는 파우스트적 정신에 더 매료된다.

러셀은 과학적 세계상과 우주적 연대성[노장(老莊)사상과 유럽의 신비주의]의 결합을 통해 ‘어른스러운’ 인격을 함양하는 것을 ‘유치한’ 유럽인의 삶의 양식을 개선하는 길로 줄곧 주장했다. 이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송대 유학자인 주희(朱熹)의 체용(體用) 개념을 빌려 진정한 철학이란 무엇인지 정의한다. 진정한 철학은 자기변형을 통한 전인적 인간성의 형성을 체(體)로 하고 사회이상을 향한 제도적 구성을 용(用)으로 하는 세계상을 지향한다. 주희는 스승인 이연평(李延平)이 우주적 평등성(同)에 몰입하여 사물의 다양성(異)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자, 점차 용(用)의 영역에 관심을 두면서 유체유용(有體有用)의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서 우주적 평등성은 곧 모든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체(體)의 측면을, 사물의 다양성은 용(用)의 측면을 말한다. 다만 주희는 춘추사관과 중화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주희의 유체유용의 정신에 대해 이 교수는 오늘의 급진주의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교수는 바로 이러한 유체유용의 정신을 20세기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해낸다. 신남철과 박치우, 박종홍과 함석헌은 물론이고, 신채호와 박은식 역시 마찬가지다. 신채호의 경우, 대종교가 중시한 독립적 자아관을 대승불교를 통해 발전시켜 우주의 무수한 사물들과 자아의 평등성을 체화한 원융한 자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평등으로 이해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 해방 한국의 건국방략을 모색했다.

이러한 유체유용의 관점은 한국 현대철학을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적 기준이 될 수 있다. 유체유용의 내외합일적 관점은 현대적 맥락에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접점을 찾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와의 연관에서 지고의 자유를 추구하는 의지를 체로 하고 유아론적 경험주의를 넘어서 사회변형을 도모하는 의지를 용으로 하는 의지의 철학을 형성하려 할 것이다. 이 ‘관점’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존재의미를 추구한다.

단순히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재단하여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데 급급한 기존의 사상사 저작들에 비해, 철학현대의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을 분석해내면서 유체유용이라는 공통된 정신을 발견하고, 이를 기준으로 21세기의 철학이 나아가야할 지평을 제시했다는 점은 <현대철학사상사론>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것은 첫걸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저작을 시발점으로 다양한 ‘관점’이 나타나고 공유되어야만 한다. 물론 의문이 남는 부분도 있다. 이교수가 제시한 ‘유체유용’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서구에서 말하는 과학과 정신의 결합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혹 그 이상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여부는 여전히 궁금한 부분이다. 좌담회의 시간이 짧고, 필자의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찬찬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팔자걸음 고치는 법, 걸어야 한다![철학자의 서재]

에스트라 테일러가 엮은 <불온한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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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아(부산대학교 비정규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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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께 걷고 쓴다는 것

 

지독시리 걷고 또 걷는 한 친구는 ‘엉덩이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였고,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한 친구는 ‘발로’ 글을 쓰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굳히는 말을 했다. 그들의 각오와 다짐이, ‘발’과 ‘엉덩이’ 또는 ‘길’과 ‘방’ 사이에서 한참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질책한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미 공유하고 있었고, 각기 자신의 색깔로 도구로 자신의 생활 방식과 공부 방식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지난 2월 2일 부산 중앙동에 있는 ‘모퉁이 극장‘에서 니시야마 유지의 <철학에의 권리> 다큐멘터리 상영과 ‘문턱 없는 지식의 실험장’ 토론회가 있었다(☞바로 가기). 니시야마 유지와 함께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은 ‘연구 모임 aff-com’이었고, 토론자는 ‘공간초록‘에서 활동하는 ‘연구 모임 비판과 상상력’의 이수경과 나, 부산과 광주를 오가며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기채생 감독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엉덩이로 글을 쓰는 일과 발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친구들의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푹 하고 웃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그 부위로 글을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있으니 마음이 묵직했는데, 그건 그런 다짐을 하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일들과 고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설렘이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그들이 겪고 감당해야 할 노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손’으로만 하던 일을 ‘엉덩이’나 ‘발’로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고단함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이에 더해 손을 쓸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엉덩이나 발을 사용하는 것도 상상해보라. 손을 쓰고 싶은 유혹, 편한 대로 하고 싶은 유혹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참 힘든, 몸을 바꾸는 일. 대학의 공부방에 틀어박혀 오로지 자신의 전공 공부에만 급급해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닫힌 몸을, 가지각색의 경험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내뱉는 몸들을 향해 여는 일.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하며 홀로 있던 몸이, 성가시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몸들 사이로 들어가 서로 부딪히고 섞이는 일. 그와 더불어 쓴다는 것은 그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상처받은 채로(그리고 어쩌면 그와 동시에 상처주면서) 함께-있고 또 함께-걷는 그 고단한 과정을 기록하는 일. 그날 내가 친구들의 말을 통해 공유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몸의 변화, 함께 걷고 쓰는 몸으로의 변화를 향한 욕망(또는 두려움)이다.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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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 ⓒ이후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찾다가 근처에 꽂혀 있던 이 책 <불온한 산책자>(에스트라 테일러 엮음, 한상석 옮김, 이후 펴냄)를 펼치게 되었고 결국 찾던 책 말고 이 책을 빌렸다. 제목에 혹했던 것도 같은데, 결정적으로 1년 전쯤에 (아마도)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에서 기획한 강연 중에 조현준의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강연이 있었는데, 그 강연에서 봤던 영상이 기억나서 빌렸다(☞바로 보기).

그리고 <철학에의 권리> 상영과 토론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도 이 책을 빌리는 데 한몫했다. 이 책은 제목(원제는 Examined Life : Excursions with Comtemporary Thinkers)에서 알 수 있듯이 8명의 철학자들과 산책하며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며, 그 산책을 담은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도 있다. 감독인 애스트라 테일러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눈 철학자들(주제)은 코넬 웨스트(진리), 아비탈 로넬(의미), 피터 싱어(윤리), 콰메 앤서니 아피아(세계시민주의), 마사 누스바움(정의), 마이클 하트(혁명), 슬라보예 지젝(생태),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상호 의존)인데, 이 글에서 다룰 것은 마지막 장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뿐이다.

영상을 볼 당시에는 자막이 없어 거의 못 알아들었는데 책장을 펼쳐 주디스 버틀러와 수나우라 테일러의 대화를 읽으니, 그 사이 여러 장소에서 경험했던 것들과 그 경험이 가져다준 고민들이 떠오른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때 머물렀고 여전히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머물고 싶은 몇몇 장소들이 있다. ‘공간초록’과 ‘생각다방산책극장’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산대학교 분회’가 그것이다(‘헤세이티’와 ‘모퉁이극장’도 빠뜨릴 수 없다). 장소들마다 만남의 성격도 색깔도 다르지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갖가지 대화(간단한 소개에서부터 내밀한 고민까지)나, 무언가를 함께 시도하면서 나눈 즐거움과 주고받은 상처와 괴로움이 끊임없이 나와 우리의 자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 고민들 중 하나. ‘철학’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입 밖으로 꺼내지만, 꺼내자마자 나에게도 뭔가 어색한 말인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인 것처럼 그것을 다루면서 그것에 대해 물을 때면(이런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오늘의 책 제목에 있는 ‘철학이 사라진 시대’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때때로 “철학이 뭔가요?”라고 웃으며 묻는 이들에게 나는 거의 항상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한다. 속으로 ‘지금 이렇게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인지도’라고 웅얼거리기도 하는데, 가장 골치 아픈 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묻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질문. “전공으로 철학을 한다는 건 또 뭔가?” 학교에서 소위 철학 공부한다고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꽤나, 그것을 발음할 때 특히나 더, 과장되어 있다고 예전부터 느꼈는데, 요즘엔 더 그렇다.

또 하나. 이 시대가 또는 우리 사회가 혼자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곳이라는 것을, 무섭지만, 많은 이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상식이 통용되는 곳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역시나’ 둘러보니 곳곳에 이곳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들이 작은 섬들을 만들고 있다. 앞서 말했던 장소들이 그나마 나와 연이 닿은 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함께-사는-방식’을 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본이라는 격류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고집스레 그리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고, 고립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손을 내밀며 이 장소들을 지키고 있다.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이 만나면 조화보다는 갈등이 도드라지기 마련이다. 그곳에 오기 전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더 즐겁게 활동하고 더 공고하게 모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뭐 어쨌든 무난하든 곤란하든 이 장소들에서 사람들은 서로 말을 나누는 방법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삶을 나누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그 어느 장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에서 사람들이 생활하고 말하고 만나는 방식을 살펴보니 이곳만큼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곳이 없다. 말을 하는데 말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적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사회 구조를 비판해서 그런지 자기 자신을 여는 방법은 전혀 모르거나 열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고, 삶이 아니라 살아남음만이 남아 있는 시대를 한탄하며 문을 잠그고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논문을 (쓰는 게 아니라) 생산한다. 사는 곳과 사람은 닮는다.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 그런지 더 가혹하게 말하게 된다.

나는 대략 15년 동안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비정규교수노조 천막 농성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발이 아파 병원에 가니 신경이 눌렸단다.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데 의사가 결정적으로 걸음걸이를 바꾸도록 노력하란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의식하지 않아도 발 바깥쪽이 아프니 힘이 저절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좀 나아지니 걸음걸이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그렇게 걸으니 또 아파서 요새는 열심히 안짱걸음으로 걸으려고 노력한다(15년 간 안짱걸음으로만 걸었으면 팔자로 걷는 연습을 해야 됐을까?). 아픈 것도 싫지만 걷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일도, 아파서 다리를 저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귀찮다. 어쩌겠는가. 걷고 싶으면 괴로워도 다시 배우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걷기 위한 조건

 

“나는 걸으며 지나치는 모든 것을 즐깁니다.” (314쪽)

수나우라가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움직이는 데서, 움직이면서 느낄 수 있는 변화들에서, 그 변화들이 주는 앎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무엇보다 그 움직임 자체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 자족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는 게 두 사람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움직일 때 외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움직이려면 특정한 종류의 표면과 신발, 날씨가 필요하죠. 심지어는 내면적으로도 특정한 방식의 보행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보행력은 우리 안에서 충분히 작동할 수도,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315쪽)

수나우라의 말에 보태어 그는 우리 내부의 보행력마저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자족적인 몸이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있고, 함께 걸을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도 이 사회는 혼자 살아남으라고 윽박질하니 어찌 견뎌낼 거냐고, 거기서 버텨내기 힘드니 이런 곳을 만드는 것 아니겠냐고, 아까 말했던 장소들 중에 한 곳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이런 장소들을 ‘피난처’로 여기고, 누군가는 ‘진지’로 여기는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특정한 목적 또는 정체성을 정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것보다도 우선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새로운 일들을 감당하고 즐기면서 서로의 생각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게 가능해야 사람들도 다시 모이는데, 참 어려운 문제다. 모여야 방법도 익히는데, 모이려면 이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수나우라가 지적한 장애인 공동체딜레마와 유사하다. 우선 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커브컷(훨체어 사용자를 위해 인도와 도로에 설치된 장치)이 대부분의 장소에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등의 “물리적 접근성”에 대한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어 “사회적 접근성과 수용성”도 높아질 것인데, 사회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수나우라의 지적에 응수하며 버틀러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접근성이 보장된 다음에야 효과적인 주장도 할 수 있다.” (319쪽)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걷기 위한 조건을 갖춘 장소를 만들기를 바란다면, 괴로움을 감당하며 모일 수밖에 없고 오류를 반복하며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과 현실

 

부산에 있는 이 장소들은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만날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함께 있는 법을 배우기 힘든 사회에서 나와, 함께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생겨났다. 이런 활동을 누군가는 제도의 바깥으로 나간다고 표현하지만, ‘공간초록’에서 만난 J가 항상 지적하듯이, 소위 안과 바깥은 그렇게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또는 몸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방식에 따라 삽시간에 그곳은 안이 되기도 밖이 되기도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장소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타협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피폐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피로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거나 ‘우리와 안 맞으니까 또는 우리는 여력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몸짓과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몸이 ‘우리에게 맞지 않게’ 움직인다고 내치는 일은, 그곳이 제도 안이든 밖이든 보수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진보적이라고 내보이는 곳이든,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 같다. 특히 그 몸이 ‘우리보다 취약할’ 경우 그런 일은 더 쉽게 일어난다. 이런 극단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일을 함께 시작하고 진행시켜 나갈 때 어긋나는 의견들을 감당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아, 만나고 모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들지만, 만들어진 장소를 열고 지키는 일, 즉 함께 걷는 과정은 더욱 힘들다.

버틀러와 수나우라의 대화를 보고 듣고 읽으면서 그 대화에서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눈에 띈다. 그럴 때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곱씹으며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한걸음 더 밀고 나가는데, 이런 태도도 쉽게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버틀러가 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사회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일이에요.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움직임, 당신이 살 수 있게 돕고 다양한 방식으로 당신을 표현하게 하는 그런 움직임 말입니다. 이 사회적, 공적 공간에서 당신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요? 당신이 안고 있는 사회적 제약은 어느 정도인가요? 낙인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어떤 움직임 같은 것들, 그러니까 당신의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제약 같은 것 말입니다.” (320쪽)

수나우라는 질문에 딱 맞는 대답 대신, 카페에서 커피 잔을 입에 물고 테이블로 옮긴 일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일의 어려움은 입으로 잔을 물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입으로 잔을 무는 데서 온다. 그는 그 일이 힘든 이유가 “우리의 움직임에는 규범화된 기준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손은 물건을 주거나 집어 들거나 악수를 하는 데 사용하고 입은 마시거나 입을 맞추거나 이야기하는 데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카페에서 커피 잔을 손이 아니라 입으로 옮기게 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을 벗어난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배운 내용을 엉망으로 만드는 거죠. 우리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방식에 따라 몸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런 생각조차 잘하지 않죠.” (321쪽)

다시, 나는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 문득 술자리에서 누군가 반쯤은 비꼬듯이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 번역하면 이렇다. 함께 걷는 것은 온갖 어긋남을 수반하는 일이며 어긋남을 수용하기란 불편하고 힘든 일인데, 왜 혼자 걷지 않고 함께 걷는가? 당신도 편해지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 편해지기 위해 이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질문에 답하려고 하는데, 생각하니 질문만 하나 더 늘었다. 어긋나고 부딪히고 내쫓고 내쫓기고 상처받고 상처주면서도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세상 바꿀 청춘에게 ‘구라’ 치지 말자![철학자의 서재]

존 홀러웨이의 <크랙 캐피털리즘>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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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체제의 균열을 이해하고, 탐구하고, 넓혀 나가기

 

지난 5년의 삶이 너무나도 신산했기 때문인지 좌절감, 상실감, 분노, 환멸, 체념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마음속에서 시커먼 우물이 되어 고여 가는 것 같다. 48퍼센트의 국민들이 지지했던 ‘그’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사실 세계의 지배 권력이 우리들의 삶과 노동과 생각을 움직이는 방식은 달라질 게 없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정계에서 은퇴한 유시민의 다시 회자되는 말처럼 “군부 세력과 피 흘리도록 싸워서 투표권 찾아왔더니 국민들은 그 투표권으로 노태우를 뽑”았는데, 25년이 지나서도 51퍼센트의 사람들은 금방 깨어날 환각제 주사를 다시 맞으려고 했다.

시민과 다중이 활동할 정치 영역의 ‘틈’은 안개 속에 더 가려졌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지만, 여전히 대의 민주제에 대한 의존은 심하고 국민 주권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다. 그렇다. 이 세계의 ‘지배 원리’는 절대로 쉽게 안 변하는데, 사람들의 상상력은 침체되고 행동력은 세월에 못 이겨 쇠락해 간다. ‘멘붕’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 위안이나 새로운 상품이 된 ‘힐링’이 아니라 다시 토론하고 행위하고 연대하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만, 사람 노릇하려고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도시에서 발버둥 치다 보면 머리가 아득해진다.?

▲(존 홀러웨이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대선 이후 나 자신과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과 무기력함이 혐오스러워질 때쯤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의 저자 존 홀러웨이의 신작, <크랙 캐피털리즘>(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을 꺼내 들었다.

홀러웨이는 지금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 끊임없이 ‘균열’을 가하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중하면서도 명쾌하며, 토론을 부추기는 그의 이론은 힘차고 논쟁적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강력한 논거들은 학자들의 이론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반자본의 실험, 조직, 행동에서 산출된다. 저자가 말하는 ‘체제의 균열’이다.

홀러웨이가 보는 지금의 세계는 “이 매우 불공정하고 파괴적인 사회 조직의 변화를 상상하는 것보다 인류의 완전한 절멸을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운 단계에 도달”한 곳이다. 숨 막히는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원한다면 기존의 것을 부수어야 한다. 그 부수는 행위보다 더 평범한 것도, 더 분명한 것도, 더 단순한 것도, 더 어려운 것도 없을 만큼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벽을 그 견고함이나 강력함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위기, 모순, 취약함, 균열에서 이해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그 모순들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이 여행은 어디로 갈지 잘 알고 있고 손에 지도가 들려 있을 때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멈춰 서 있지 않고 그릇된 방향이더라도 계속 걸으면서 질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의 식별할 수 없을 것 같은 터널 밖의 풍경과 소리를 보다 잘 보고 듣기 위해 우리 안의 공포와 의심을 깨뜨리는 것이다. 매일 떠날 수 있는 이 여행은 “균열들로부터, 갈라진 틈들로부터, 찢어진 곳들로부터, 반란적 부정-과-창조의 공간들로부터, 총체성으로부터가 아니라 특수한 것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동시에 창조하는 존엄의 反-정치

 

그렇다면 그 균열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균열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다른 유형의 행위를 천명하는, 어떤 공간 혹은 순간의 아주 일상적인 창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불복종이지 미래를 위한 기투가 아니”며, 우리의 활동과 삶을 자본의 지배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또 할 것이고 할 수 있다”는 현재적인 기획이다. 그래서 그 균열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면서 존재하며 마치 ‘발 빠른 춤’처럼 우리들과 만난다.

그런데 자본에 대항하는 그 기획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창출하고 그 관계망 속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동료애, 존엄, 연정, 사랑, 연대, 우애, 우정, 윤리, 이 모든 이름들은 자본주의의 상품화되고 화폐화된 관계들과 대립”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예상하고 창조하는 것에 기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들이 어떻게 조직화로 번역되는가인데, 일반적으로 주요한 강조점은 관계의 ‘수평성’이다. 그것은 자신을 타인의 의사 결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직적 구조와 명령 사슬에 대한 거부이며,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기반 위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평의회 형식의 조직이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 맺음이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관철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수평성을 절대적 규칙으로서가 아니라 수직성에 대한 부단한 투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엄의 반-정치는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적 종합’, 즉 “자본주의 사회의 매우 단단한 사회적 응집의 논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이나 정의롭지 못한 권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내면화되어 반자본적 활동들 가운데서도 재생산되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다. 그래서 점차 벌어지는 ‘균열’은 자본주의가 규정한 우선적인 가치들의 지배와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라는 권력, 싼 상품의 매력, 화폐의 오만함, 이윤이 남는다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려는 욕망, 가난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대항 정치는 비국가적이고 틈새적인 지평에서 자유롭게 활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존엄의 확산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은 도시에서 딱딱한 마음으로 더 많은 지지자를 등록시키는 문제나 설교나 연설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감화, 모방, 공명 같은 단어들이 주는 느낌을 떠올려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했던 지난날의 ‘투쟁’들이 쇠파이프 대 곤봉, 스크럼 대 방패, 화염병 대 최루탄, 구호 외치기 대 체포의 싸움이었다면, 균열들을 벌려가는 새로운 반란에서는 연극과 시와 춤과 유머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 것들은 과거엔 운동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운동 자체의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

“낡은 혁명적 확실성들은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승리가 필연적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불확실성과 혼돈의 세계에 산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불확실성과 혼돈을 이해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역사에 확실성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균열들의 증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노동에 대한 행위의 반란

 

먹고살기 위해 타율적으로 수행하는 소외된 노동과, 필요하다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 행위를 향한 노력-저자가 ‘의식적인 삶-활동’이라고 말한 것-사이의 대립은 삶의 지형도를 은폐하는 노동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용 가치와 유용한 사물들을 생산하는 구체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에게 타율적으로 주어진 추상 노동을 뒤흔드는 구체적 행위가 관건이다. 추상 노동 내부에 존재하면서 그것을 넘어 자본주의적 노동 바깥에 서 보는 것이다.

“나는 교사이고 시장에서 팔 노동력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나의 학생을 가르친다. 나는 민간 병원의 간호사이며 내 고용주를 위해 이윤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나는 나의 환자들이 그들 삶의 가장 어려운 어떤 순간들을 살아내도록 도우려 한다. 나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이 자유로울 때에는 언제나 오늘밤 밴드에서 기타로 연주할 코드를 연습하느라 바쁘다. 나는 청바지를 만드는 바느질 기계에서 일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방을 만들면서, 딴 곳에 있다. 나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부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길 원한다.”

우리는 추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만든다. 저자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이라고 말하는 그 과정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울타리 치고, 노동 착취를 낳고 노동 계급을 형성시켰으며, 자연을 객체로서 구성했으며, 우리가 다른 생각과 ‘딴 짓’을 못하도록 우리의 역량을 외부화해 시민, 정치, 국가라는 총체성의 구조를 창출했다. 또 추상 노동의 지배 과정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규격화했으며 시간을 동질화시켰으며,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목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노동 운동은 추상 노동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이제 추상 노동에 대적하고 그것을 넘어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을 요청한다. 그것은 곧 추상 노동의 위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대와 갈등과 모순이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들은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못나고 약하고 ‘빽’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벌여내는 ‘행위’의 멜로디가 될 것이다. 이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일어나는 행위와 노동 사이의 더 깊은 갈등이 있다. “이 모순은 살아 있는, 고동치는 사회적 적대이며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투쟁이다.” 그 모순의 틈을 벌리는 행위의 연대는 총체성, 종합, 가치를 해체하는 숨어 있는 여성의 움직임이며, 근대적인 시간의 동질화를 해체하여 각자가 누릴 수 있는 각각의 순간을 열어젖힐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지하고 지연시키는 우리의 무기이자 행위의 원리가 존엄이라면,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시간, 관계, 가치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힘은 행위의 힘이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앞에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다.” 거부하고 창조하여 자본주의를 균열시켜라! 이 미쳐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의 작동을 멈추게 만들자!

이 책의 옮긴이인 조정환의 말처럼 국가, 화폐, 자본에 의한 우리 삶의 모든 소외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과 생동력을 추상화시켜서 통제하고 통합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욕망 체계의 산물이다. 이 시대의 ‘꼰대’들이여! ‘멈춰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속삭이며 역사와 사회에 대한 젊은이의 눈을 가리지 말자. ‘아파야 청춘’이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세상 올 거라고 ‘구라’치지 말자.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해 당신들의 낡은 가치와 경험으로 함부로 추상화시켜 말하지 말자. 그들은 공동체의 정치와 자신들 삶의 구경꾼이 아니라 각각의 주인공이니까. 우리 시대를 바꾸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상이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저기…”[철학자의 서재]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

김광식(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소리 없이 내 맘 말해 볼까 / 울어보지 못한 내 사랑은 어디쯤 있을까 / 때론 느껴 서러워지는데 /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 주오 나즈막히 / 말없이 그대를 보며 소리 없이 걸었던 날처럼….

김광석이 부른 노래 ‘말하지 못하는 내 사랑’이다. 이 노래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여학생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가’ 없었던 남자, 광식이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중간 시험 때가 다가왔다. 그때는 민주화 시위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많아 시험 때 노트를 빌려 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에게 노트를 빌리기로 결심을 했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노트를 빌렸고 돌려주며 데이트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그녀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고 나는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고맙다는 말만 하고 다시 돌아섰다. 또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일이 이어졌고 기말 시험 때가 되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노트를 빌렸고 고맙다며 초콜릿을 건넸다.

“저기…”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차마 못 잇던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 다음 학기에 고급 과정을 들을 건데, 같이 들을래요?” 나는 뜻밖의 제안에 고마워하며 돌아섰다. 고대하던 다음 학기가 시작되었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수업은 고급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우리들의 진도는 제자리에 맴돌기만 했다.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또 멀리서 바라보고 노트를 빌리고 돌려주고.

“저기…” 나는 끝내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와 사랑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녀도 다음 학기에 수업을 같이 듣자는 제안을 할 수가 없었다. 최고급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로 남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몸이다

 

현실 속 광식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남자가 또 있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라는 영화 속 광식이다. 그 또한 7년 동안이나 “저기…”만 되뇔 뿐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현실 속 광식이든 영화 속 광식이든 광식이가 자신의 삶을, 아니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는 영화를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거다. 그녀와의 사랑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 어리석은 생각만 딱 한 번 고쳐먹으면 그 사랑이 이루어졌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광식이 어느 날 아침 내 연애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그날부터 당장 365일 수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나눌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고맙습니다. 저기 커피 한 잔 어때요?” 라고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이어 사랑을 이룰 수 있었을까?

어느 날 아침 단 한 번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광식이가 카사노바 광태가 될 수 없다. 삶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단 한 번 고쳐먹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 달리 말하면 머리가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몸에 밴 몸의 성향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흔히들 머리로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은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행동을 선택하여 세상을 살아간다. “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뒷말을 이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은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몸이 머리의 명령을 듣지 않는 거다.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다고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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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쓴 <앎의 나무>(최호영 옮김, 갈무리 펴냄)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앎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을 안다’고 할 때의 앎과 ‘~을 할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있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앞의 것이고,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할 때의 앎이 뒤의 것이다. 앞의 것이 정보 지식이고 뒤의 것이 행동 지식이다. 하지만 정보 지식은 그것을 찾거나 만들거나 저장하거나 되찾을 줄 아는 행동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앎은 행동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이란 머릿속 정보 지식을 실현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행동 이론은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이 실현되거나 표현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 행동을 포함한 문화 행동도 마찬가지다.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머리 밖으로 표현된 정보 지식, 곧 텍스트라고 본다. 하지만 행동 지식에 초점을 맞춘 문화 이론은 문화 행동을 몸에 밴 행동 지식, 곧 행동 방식이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정보 지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식 이론을 행동 지식으로 방향을 돌리고자 한다. 그들은 행동 지식으로 문자 그대로 지식과 행동의 일치, 즉 ‘지행합일’을 이루고자 한다. 옛말에, 제대로 알면 그대로 행한다고 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릿속 정보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으로 알고 있다는 걸 뜻한다. 그것은 지혜라고도 하고, 덕이라고도 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인간의 문화 행동이 정보 지식의 표현이 아니라 몸에 밴 행동 지식의 표현인지를 그 생물학적 뿌리로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신기한 두 가지 앎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 현상을 직접 체험해보자. “왼쪽 눈을 감은 채 (아래 그림)의 십자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 약 40센티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얼굴을 앞뒤로) 움직여보라. 그러면 꼭 작다고는 할 수 없는 검은 점이 그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26쪽)

두 번째 현상도 몇 가지 장치만 준비하면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붉은색과 흰색의 두 광원을 가지고 (오른쪽 그림)과 같이 꾸며보자. (…) 전구에다 지름이 같은 마분지관을 씌우고 (…) 얇고 비치는 붉은색 종이를 필터로 쓰면 된다. 그런 다음 손 같은 것을 원뿔꼴의 빛 속에 넣고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살펴보자. 그림의 세 개 상황 가운데 (위의 손 그림자와 중간의 오른쪽 손 그림자)는 청록색으로 나타난다.” (28쪽)

외부 세계에는 분명히 ‘있는’ 점을 우리는 어떻게 ‘없는’ 것으로 보며, 외부 세계에는 ‘없는’ 청록색을 우리는 어떻게 ‘있는’ 것으로 보는 걸까? 도대체 외부 세계에 대한 앎이란 무엇일까? 그들은 이 현상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앎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특수한 인식 ‘행동’의 구조나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우리의 앎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이다. ‘그곳에 아무 것도 없다’는 앎은 곧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며, ‘그곳에 청록색이 있다’는 앎은 곧 청록색이 있는 것으로 ‘볼 줄 아는’ 인식 행동 방식(행동 지식)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앎이란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곧 행동 지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6쪽) 행동 지식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행동 지식이란 말이다.

우리의 인식 행동 방식 또는 구조가 우리의 앎을, 또는 우리가 아는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들의 앎의 이론을 구성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20세기의 칸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아간다. 우리의 앎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앎 또한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생명체의 앎과 우리의 앎은 근본에서 같다. 생명체든 우리든 어떤 세상(환경) 속에서 자신의 행동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행동’할 줄 알면’ 그 세상’을 안다’고 말한다. 신경계나 뇌의 발달은 그 행동 방식의 신축성과 다양성을 늘렸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장한다. “앎이란 곧 효과 있는 행위다.”(39쪽)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으로 행동을 한다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말 그대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52쪽) 생명체의 효과적인 행동은 자신의 세상(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생산하는 일이다.

자신의 환경과 상호 작용하며 스스로를 생산하는 그 일은 몸에 밴 고유한 행동 방식이나 구조(행동 지식)에 따른다. 단세포 생명체조차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구조에 따라 환경으로부터 나트륨이나 칼슘은 받아들이고 세슘이나 리튬은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안다.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도 몸에 밴 자신의 행동 방식에 따라 먹이가 다가오면 가짜 발로 감싸서 잡아먹을 줄 안다.

그들에 따르면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오랜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몸에 배고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몸에 밴 특정한 행동 방식(행동 지식) 때문이라고 한다.

아메바가 먹이를 감싸자는 생각을 해서 먹이를 잡아먹지 않듯이, 사람도 팔자 모양으로 걷자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걷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팔자 모양으로 걷지 말자고 생각을 해도, 그때만은 어찌어찌 되는 듯해도 똑바로 걷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팔자 모양으로 돌아와 있다. 자전거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는 행동 방식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타는 방법을 머리로 아무리 외운다고 탈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아메바와 사람의 행동이 같을 수 있을까? 사람의 행동 가운데 걸음걸이나 자전거 타기와 같이 습관에 의해 형성된 무의식적인 단순한 행동만 그렇고 고도로 발달된 복잡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은 주인인 머리가 내린 명령을, 즉 머리가 복잡한 정보를 의식적으로 처리하여 만든 생각을 하인인 몸이 단순히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의 단순한 행동으로부터 다세포 생명체를 거쳐 인간의 복잡한 행동에 이르기까지 진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 신축성과 다양성만 늘어났을 뿐, ‘머릿속 앎이 아니라 몸에 밴 앎에 의해 행동을 한다’는 생명체 행동의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책의 전부다. 여기서는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 가지 과학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지금 왼손을 들어보라.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을 몸이 단순히 수행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당신이 왼손을 든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왼손을 들겠다는 의식적인 생각은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이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진 것에 지나지 않다.

미국의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독일의 생리학자 한스 코른후버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에게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여보라고 했다. 실험 대상자들이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한 순간과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인 순간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뇌파 측정기로 측정한 결과,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0.8초 전에 이미 특정한 뇌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의식적인 뇌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무의식적인 뇌가, 즉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손가락이, 즉 다른 몸이 수행한 것이다. 의식적인 생각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주인인 몸이 스스로 내린 명령을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비쳐 알리는 앵무새 대변인의 역할을 할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화적인 의식적 행동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무의식적인 몸이고, 그 시나리오를 생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 보여주는 영화감독이 바로 의식적인 뇌인 거다.

그러므로 이야기 흐름을 바꾸려면, 스크린에 비쳐진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영화가 아니라 먼저 시나리오를 바꿔야 하는 거다. 아무리 착하게 살자고 의식적으로 생각을 고쳐먹어도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어, 다시 말해 덕이 쌓여 무의식적인 몸이 스스로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착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라

 

얼마 전에 투표가 있었다. 착하게 사는 방식이 몸에 배지 않은 사람은 투표를 안 하고 놀러 가면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도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투표장에 갔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사람을 찍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다른 사람을 찍었을 가능성이 많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다.

투표 근육을 단련시키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을 한 번 고쳐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아예 생각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자는 거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강조했던,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인지 철학으로 정당화했던 ‘덕의 철학’을 역설하는 거다.

아직도 말하지 못하는 사랑을 안고 비 맞은 채로 서성이고 있는가? 아직도 사랑했지만 그저 그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 설 수가 없는가? 당신의 인생을, 아니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인생이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러한 행동 방식이 몸에 배도록 몸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만 잔뜩 늘어놓은 연애 지침서만 읽고 있지 말고 “저기…커피 한 잔 어때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연애 근육을 단련시켜야 한다. 당신의 연애 근육은 튼튼한가?

 

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칼을 갈면 봄이 오리라![철학자의 서재]

황종희의 <명이대방록>

진보성(대진대학교 강사)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지금은 잠시 몸을 추스르고 기다릴 때

 

사람은 누구나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에는 움츠리고 다음에 곧 찾아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게 된다. 내가 볼 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시간 동안 몸과 정신이 성장한다. 이 말을 규명할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나의 경험이 그렇고 내 주변인들과 감각적으로 교유한 결과가 그렇다.

2012년 말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대선이 끝나게 되면 유권자의 반은 내가 지지한 후보가 ‘됐다’는 일종의 안도감에 기뻐하고 나머지 반은 심할 경우 ‘멘붕’ 상태로 스스로를 방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희망과 절망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종류의 안경을 쓴 사람이건 간에 곧 이 안경도 다시 벗어던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서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뽑은 사람이 됐으면 돼서 그만이고, 안 됐으면 안 됐기 때문에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은 일개 정치인에게 나의 삶 전체를 맡기고 나중에 찾아가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위험한 태도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을 일단 선출하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가 포함된 집단의 결과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유권자들의 희망과 절망의 태도는 맹목적인 희망이 되고, 더 무거운 절망이 된다.

그 동안의 역사에서 봐왔듯이 어떤 권력도 국민의 동의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고 판단하면 모든 정책과 행보는 정치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두고 민중이라는 정치적 대상은 일상이라는 사회의 영역 안에 철저히 가두어 버린다.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어 절연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선거 때만 민주’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 달성된 적 없는 민주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선거만 끝나면 민주주의를 잠깐 경험했다는 찰나의 환희를 기억하며 축제를 마무리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민주주의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당선자에게 정치적 기반은 주었지만 아직 권력의 전부를 양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당선자를 지지했던 사람이나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 모두 정치권의 행보를 찬찬히 지켜봐야 할 입장에 있다.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그가 민주적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지 간을 봐야 한다. ‘대통합’이라는 말, 마치 어린 백성이 전제군주의 즉위식을 희망에 들뜬 마음으로 축하하듯 다함께 힘을 모으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아직도 대한민국이 왕조국가인가? 국민 모두 선거 국면에 휘둘려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정치권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능력을 내적으로 고양시킬 때이다.

황종희의 역저 <명이대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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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 면에서 17세기 중국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가 쓴 <명이대방록(明夷待訪綠)>(황종희 지음, 김덕균 옮김, 한길사 펴냄)은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명말청초라는 시대적 혼란기를 살다 간 황종희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규정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에 대한 원칙론적 견해를 풀어낸 정치사상서이다. 중국의 근현대 사상가들이 극찬한 책이고 황종희를 두고 ‘중국의 루소’라고 명명하기도 했지만 간혹 비현실적인 책이라는 비판도 들었다. 그만큼 저술 당시와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평가될 만큼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책이기도 하다.

물론 <명이대방록>에는 현대의 사회ㆍ정치 상황과의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황종희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날카로운 통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부분이 분명 많이 있다. 특히 이 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저자의 태도는 바로 권력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의 날을 항상 꼿꼿이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황종희가 이 책을 썼을 당시 중국의 내부 상황은, 한족이었던 명왕조가 이민족인 청왕조로 교체되던 시기였고 패망으로 치닫던 명왕조의 부조리한 상황과 사회 전반의 모순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해 원칙적인 대안 의미를 제시하고 방책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자신의 염원은 물론, 그 염원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와 정치, 경제 부분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담았다.

책 제목에 보이는 ‘명이(明夷)’라는 말은 <주역> 64괘(卦) 중 하나로서 36번째 위치하는 ‘명이괘(明夷卦)’에서 따온 말이다. 이 괘의 모양새는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 坤上) 에, 해와 빛을 상징하는 ‘이(離)’가 아래(?, 離下)에 위치한다. ‘명이’라는 말은 땅 아래에 해가 있는 형상이니 밝은 태양이 땅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明入地中 明夷”) 괘의 의미는 “빛이 가려지면 현자의 명철함이 해를 입어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정도를 지켜 참고 인내하며 재능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효사(爻辭)가 상징하는 의미 중에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내하면서 저항 세력끼리 은밀한 규합을 이루고 옳지 못한 권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바르지 못한 정치는 결국 망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명이대방록>의 구성은 정치개혁론이 주를 이룬다. 원군(原君)·원신(原臣)·원법(原法) 등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 법이라는 국가운영 근거에 대한 원칙적인 개혁론을 전개한다. 이런 면에서 황종희는 민중의 혁명성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던 맹자(孟子)를 닮았다.

황종희는 <명이대방록> 서두에서 맹자가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혼란해진다”(一治一亂)고 한 말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왜 삼대(三代) 이후에는 혼란만 있었고 다스려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있다. 황종희는 또 다른 저서 <맹자사설(孟子師說)>(이혜경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그 원인을 통치자에게 돌리면서 통치자가 ‘불인(不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인은 의서(醫書)에 기(氣)가 관통하지 않아 ‘손발이 마비된 것’을 말한다고 정자(程子)가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서 불인한 통치자는 백성,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의 독락을 획책하다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통치자이다. 기론과 관련하여 황종희는 “기가 운행하는 모든 것은 동체(同體)”라는 우주론적 해석으로 확대한다. 바로 맹자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근거하는 것이다.

황종희는 인간이 자기의 ‘개인적인 것(自私)’과 ‘주관적인 이기심(自利)’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통치자인 군주가 공리(公利)를 추구하게 되면 오히려 개개인들의 자사와 자리를 만족시키며 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최고 권력을 가진 자가 사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종희는 “천하에 큰 해가 되는 것은 군주뿐”이라고 했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자로서 그 존재가치가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군주는 객이고, 백성이 주인이다

황종희는 ‘원군(原君)’ 편에서 고대 성왕(聖王)이라고 불리는 통치자들을 거론하면서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이 주인이고, 군주가 객이 되어 무릇 군주는 일생 동안 천하를 위해 경영했는데, 지금은 군주가 주인이고 천하 백성이 객이 되어서 무릇 천하의 어느 곳도 평안하지 못한 것은 군주만을 위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군객민주(君客民主)’라는 슬로건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동양의 유가 정치철학에서 보이던 전형적인 ‘군주민본(君主民本)’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현대의 민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기존의 민본과는 차별되는 급진적 민본주의로서 ‘민주적 민본’이라 부를 만하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기존에 있던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을 전도시킨다. 이미 황종희는 이자성의 농민봉기군에 의한 명왕조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민중의 힘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황종희의 급진적 민본주의가 당시로서 파격적인 면을 분명 갖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정치개혁과 사회 재편성의 주인공은 합리적인 엘리트로서 자신과 같은 사족계층이 담당해야 한다는 의식도 노출한다. 이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성에 의해 국민의 실질적 주권행사는 시기적으로 분할되어 한정되어 있고 여전히 정치적 주체는 따로 있다. <명이대방록>의 관점을 현대에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한계점이고 그 연장선에서 똑같은 고민이 현대에도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황종희는 ‘원신(原臣)’ 편에서 잘못된 통치 권력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사실 청왕조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펴서 그들을 양지로 끌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황종희는 청왕조의 지속적인 요청에 어떠한 관직도 수행하지 않았다. 과거 명나라에 대한 지조를 지키는 면도 있었지만 <명이대방록>이 명왕조의 회복이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쓴 저술임을 생각하면, 그의 이런 생각은 자신이 정치적 노선에 진출하는 것과 그 당위성, 그리고 물러나 처신할 때의 합당함을 증명하는 출처의리(出處義理)와 관계가 있다.

황종희는 명태조가 맹자의 “민이 귀하고 다음이 사직이고 군주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말을 폐기하고 재상까지 폐지했던 사실에서 환관이 득세하여 사족 계급은 물론 백성까지 고통스럽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학교, 서리, 환관에 대해 언급한 편에서 그의 이런 생각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바라는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며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현실의 모순과 잘못된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정도(正道)를 회복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것은 원래는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물론 구호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주장과 정밀한 근거를 갖추고 있기에 비중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황종희는 명왕조의 유산을 지니고 있던 지식인이었지만 청왕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자로 기억될 수 있던 점은 바로 어떠한 권력에도 협조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정치권을 가만두지 않고 간섭해야만 하는 유학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했던 점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사대부로서 가지고 있던 책임감은 황종희가 말한 민주를 놓고 보면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개념의 측면에서 민주의 주체는 사회구성원 개인들이 그 적임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치권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당당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황종희가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참여에 있어 실질적으로 제외되었지만 끊임없이 지배 권력에 대해 견제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던 점은, 현대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또 소외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치권과 관련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조언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민주사회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재의 우리는 과연 황종희가 말한 ‘군객민주’의 그 민주조차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든다. 황종희가 경제개혁론에서 주장했던 지방분권적 통치는 민 자체의 의식이 개선되거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주장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의식이나 개인의 정치참여에 대한 의식도가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치권에 대해 생각하고 발언하며 자기 삶의 자유와 여가를 확장하는 기회를 유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파가 모든 것을 움츠리게 만드는 이때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비록 시기적 간극이 넓은 책이지만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현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명이의 시기에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기에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공(公)’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의식의 지침서로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지금 혹 봄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명이괘’의 풀이처럼 그럴 때일수록 ‘연대’와 ‘의지’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묘(妙)를 느껴야 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연대하고 의지해야 할 것이 민중과 민중이라는 점이다. 정치권과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지 평생 단심(丹心)으로 종사(從事)할 대상이 아니다. 지지하고 응원했지만 권력을 획득한 정치권력에게는 그 순간부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황종희처럼 말이다. 지금은 모두 그 칼날을 갈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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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 과정)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1.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이었기에 수다도 금세 시들해졌고, 우리는 각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만 집에 가는 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만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며 친구는 몹시 당황했고,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눈물의 이유를 찾아야 할 텐데, 이유라고 할 만한 게 당최 없는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애꿎은 책을 탓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도 나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거라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이다. ‘최악의 저자 상’을 받을 정도로 문체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버틀러이니만큼, 책이 어려워서 짜증이 났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질질 짜면 어떻게 하냐는 둥, 서른 넘어 주책이라는 둥 핀잔을 주고받으며, 나와 친구는 그렇게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도 벌써 며칠이다. 그 사이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삶>은 이해불가인 채로 있다. 그럼에도 감히,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울었던 그날, 하필 읽고 있던 책이 그 책이었고, 책을 덮기 전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5쪽)”라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고, 눈물이 터져 나온 건 아마도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2.

그 문장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컥하게 만든 것일까? 겨우겨우 책을 읽고 난 뒤 이걸 확 던져버릴까 하다가 마침 그 일이 생각나서, 그 문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자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아”라든가, “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자질이나 능력, 조건 등을 평가할 때 “자격”이라는 낱말을 쓰는 게 아니던가? 혹시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자격(資格)
【명사】
1.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
2.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

역시,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다. “자격”이라는 낱말은 “과연 그럴 만한가?”를 물을 때 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 ⓒ경성대학교출판부

그래서인지 “삶으로서의 자격”이라는 구절이 영 마뜩치 않다. 삶에 대해 자격을 운운하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가? 삶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누군가의 삶은 살 만한 삶이고 누군가의 삶은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 자체는 가능할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묻는 것, 그것이 삶으로서의 자격을 따지는 거라면, 삶에 대해 자격 운운하는 것도 말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삶에 대해 자격을 논할 수 있다고 치자. 어떤 삶이 자격을 갖춘 삶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판단의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너에게는 삶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너의 삶은 살 만한 삶이 아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은 누가 갖는 것인가?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나만의 상상이니 조금은 낯간지러워도 남에게 귀감을 주는 삶으로 평판이 자자한 그런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으련만, 한낱 가십거리밖에 안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걔 아직도 여전하다며?” “어머 어머, 그 나이 처먹도록 뭐 하고 살았다니?” 수군수군 수군수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큰 죄를 지었다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군가 내 삶을 비웃지는 않을까,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이 빠진다.

아마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에 “일반적인 삶의 패턴”이라고 할 만한 게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모델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사회지표를 나타내는 통계청 자료만 봐도 어떤 삶이 보통의 삶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2012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균 여성”은 29.1세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첫 아이를 낳는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5세~29세가 71.4퍼센트로 가장 높고, 30세~39세는 “결혼·육아 등으로” 55퍼센트 대 수준으로 크게 하락하였다가 40대 초반부터 다시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인구가 증가한다.

“평균 여성”의 삶에 비추어 보자면, 30대 초반인 나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어야 하며,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거나 휴직을 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였다. 지금이야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지만, 매달 40만 원의 월세는 아직도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다. 아이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했고 향후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평균 여성”의 삶에서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괴감을 키우고 스스로 위축된다. 삶에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내가 꿈꾸는 “다른 삶”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긴 것뿐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 “다른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함을 들키기 싫어 괜히 센 척을 해본다. 내 삶이 아무리 비루해도,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뭐람! 너나 잘 하세요!

3.

“자격”이란 말에 너무 발끈한 나머지, 정작 <불확실한 삶> 얘기를 못했다. 이 책은 버틀러가 2001년에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사건인 9.11 이후에 쓴 다섯 편의 논문을 묶은 것이다. 9.11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해 사건의 현장을 본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충격공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폭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건 선정적으로 보도를 한 언론의 탓도 크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12쪽)”이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도 분명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든 예기치 못한 폭력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픔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버틀러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논문 중 특히 2장의 논문 ‘폭력, 애도, 정치’에서 그 주장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 어떤 슬픔은 사유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세계 무역 센터의 희생자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희생자”로 애도되고 신성하게 된다. 반면 미국의 “공정한 전쟁”에서 살해된 이들은 알려지지 않고, 따라서 애도되지 않는다. 애도될 수도 없다.

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인가? 누구의 삶이 삶다운 삶인가? 목적의 왕국의 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진데, 어째서 누군가는 애도되고 누군가는 애도 받지 못하는 걸까?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서사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사람들과 나란히 사라진 삶 역시 인간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터넷에 올라오고 주로 이메일 접촉을 통해 유포되었던 몇몇 보도를 제외한다면 어딘가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 아랍인들의 삶을 다룬 서사를 공적 매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애도할 수 있는 삶이 어떤 조건하에서 확립되고 유지되는지, 어떤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삭제와 탈명사화(denominalization)의 실천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69~70쪽)”

이런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배타적인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시킨다.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반응과,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가하는 차별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특히 그 범죄가 살인 등의 강력 범죄였을 경우 그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된다. 특정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외국인 범죄”로 기술됨으로써 불특정 외국인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가중된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 “한층 강화된 감시의 대상이 된다(71쪽).”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애도될 수 없기에 인간이 아니며, 인간이 아니기에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쉽게 그들에게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인종차별주의,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게 된다.(71쪽)”

4.

예기치 못한 폭력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포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드러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살아가면서 상처를 피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처받기 쉽다는 취약성,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 취약성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는 건 아닐까? 이 취약성으로부터 배타적이지 않은 “인간” 개념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나는 “평균적인 삶”에서 먼 삶을 산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고백했다. “자격”이라는 단어에 너무 꽂힌 나머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 하지만 그때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 어쩌면 삶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취약성, 폭력에 대한 공포.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훅 밀려온 것이다.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애도될 수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그 삶에 폭력이 가해진다고 한들 그것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쉽게 만연하듯이 말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폭력을 당했는데 나의 삶이 삶다운 삶이 아니어서 그 폭력이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폭력을 당했는데, 누구도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공포와 슬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기력해지는데, 버틀러는 바로 그 슬픔을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50쪽)”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반대 논증을 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49~50쪽).” 이러한 관계성,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49쪽)”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인간 공통의 취약성”이다.

인간 공통의 취약성은 “나”의 형성에 선행하는 조건, “우리가 붙잡고 논쟁할 수 없는, 처음부터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였다는 조건이다.(61쪽)”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의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윤리적인 책임감, 즉 “우리가 직접 겪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다른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게 만들 원칙(60쪽)”이 나오는 것이다. 슬픔이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슬픔을 통해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제안하고자 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폭력과 공모하는 우리,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 결과로서의 애도의 과제, 이런 조건에서 공동체의 토대를 찾는 것, 이 모두와 연관이 있는 정치적 삶의 차원을 고려하자(45쪽)”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슬픔이 정말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속 시원히 대답까지 해주면 좋으련만, 버틀러는 역시나 친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슬픔, 나의 불안, 나의 공포, 이 모두가 떨쳐버릴 수 없는 나의 취약성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제쳐두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이 다른 사유를 위한 첫걸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