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도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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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 에픽테토스

 

Epictetus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도대체가 “내 인생은 살만해요.”, “내 인생은 유쾌상쾌통쾌해요.”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나만 이 모양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남들은 다들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인생이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지만 나의 부러움을 받는 그 사람은 또 자기 속을 몰라서 그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10권도 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사람도 세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사연이 만만치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의 하소연을 들을 새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면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기구절창하다. 차마 그런 사연들을 일일이 얘기하기 싫고 꺼내 보이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할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살면 살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이 “날자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구절을 읽으며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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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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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매학기 평균 150명의 학생의 인생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학생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자신의 인생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학생은 150여 명 중에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성격상 어떤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문제가 없는 유쾌상쾌통쾌한 삶이라고 하는 사람은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10여년 동안 2천여 명의 이 시대 대학생들의 삶을 만난 나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각자의 사연은 모두 소설로 10권이 넘는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는 별 일 아닌데도 본인이 너무 꼬아 생각해서 어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연예인들도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을 겪어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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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유쾌상쾌통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그런 사람을 보아야 기운이라도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저 인간은 뭐가 잘나서 저런 거야?’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당신도 그래요?”라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도 당신의 삶이 힘드세요?” 혹은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아내고 계세요?”라고 소리 질러 물어보고 싶은 심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쯤은 겪어본 그런 심정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학점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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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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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게 얻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것인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렇게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심지 않았다는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지금의 결과가 다소 억울하더라도 혹시 네가 충분히 원인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살펴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계속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가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첫 번째 일의 경우에는 5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두 번째 일의 경우에는 2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세 번째 일의 경우에는 3가지 가능한 결과 중의 하나이고, 네 번째 일의 경우에는 4가지 중의 하나라고 하자. 그러면 연이어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5X1/2X1/3X1/4’, 즉 1/120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일들로만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굵고 짧게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굵고 길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굵고 길게 살고 싶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굵으려면 짧을 수밖에 없고 길려면 가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던 것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확률상 너무 낮은 일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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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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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방송이나 일기예보 방송을 하는 리포터들은 끝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라는 사태기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확률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조건 상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라는 규정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4천만 원의 연봉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3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5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일어난 일보다 좋아야 우리는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좋은 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처음에는 7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맛있게 느끼지만 7천 원짜리 스파게티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맛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면서 1만3천 원 정도 하는 스파게티여야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싼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수입이 수십억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비싼 외제 자동차도 몇 대씩 가지고 있고 집도 몇 채이고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요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없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는 이 측면은 마음에 드는데 저 측면은 마음에 안 들고, 이 집도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제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쾌락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이다.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만족이 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역설이라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 쾌락을 얻어내는 속도보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37평 아파트를 얻기 위해 돈을 버는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42평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속도는 아주 빠른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니 쾌락의 역설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다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메우려 들면 메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기 때문에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 없음을 충격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대학생들이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핸드폰을 바꾸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가요?” 나는 그래도 “한 달”이라는 답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사흘이요!” 세상에나! 겨우 사흘을 만족시키자고 그 돈을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쾌락의 역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불만족을 줄이려면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보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주의인데 실제의 내용상으로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그러한 쾌락주의가 있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그래, 돈 열심히 벌어 저거 사자!’ 할 수 있는 서민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말한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은 그냥 일어나는데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 일이 반드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보다는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낄 때 ‘좋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이 순차적으로 이전보다 좋은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확률상 아주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인식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은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졸중에 걸리기 전에는 스스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뇌졸중에 걸리고 나면 자기 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난 일도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준다. 처음에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아이는 비록 그것이 이미 18만 킬로미터를 뛴 중고차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면 “우와! 차 타고 간다.” 하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을 불행해했다. 자동차로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것을 불편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도 적응이 빠르다. 좋은 것에 적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나쁜 것엔 노력해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사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가 시간이 될 때는 데려다주고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데려다주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더니 얼마되지 않아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인식 조건에서는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는 무척 공허한 말인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일들이 쌓여도 인간은 거기서 더 행복한 일과 덜 행복한 일을 나누고는 덜 행복한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네들이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지도 모르겠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속담은 ‘덜 행복한 일’을 곧 ‘불행한 일’로 등치시켜버리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을 교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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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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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인간은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만 많은 것 같은데도 그 중에 덜 좋은 일을 두고 불평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이 고도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아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불행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 중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는 신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문제에 시달리든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내서 문제에 시달리든 여하간 문제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으니 말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유명인은 유명인대로, 인기 있는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누구나 ‘누가 내 속을 알까?’ 하면서 한숨 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재벌은 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고민을 한다면 재벌은 몇 천억 원대로 고민을 할 뿐이다.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해주고 친절해도 자기에게 친절한 건지 자기 돈에게 친절한 건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형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앞에서 엄청난 불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관계가 주는 만족감을 통해서인데 돈 때문에 관계로 인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불행이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큰 문제없는 평범한 인생도 있다. 이들 중에는 불행의 능력을 상당히 줄인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대체로는 인생에서 각자가 겪어내는 고통의 수위는 그렇게 차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또 자신이 인생이 너무 밋밋하다고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을 살펴보면 인생 자체는 그리 굴곡지지 않았어도 본인의 마음이 볶아쳐서 그런 굴곡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생이 정말 굴곡져서 누가 봐도 입벌어지게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주관적으로 각자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인생이 힘겹다는 것, 그 점만큼은 정말이지 공평한 것 같다. 남의 인생, 모른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울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남의 인생이 부럽다면 질문해보자. ‘그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잘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힘들게 겪어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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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선우현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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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가격에 양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 정녕 좋아진 걸까?

예전만 해도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선, 명절이나 잔칫날에나 겨우 맛볼 수 있었던 ‘귀한’ 먹거리가 바로 ‘고기(육류)’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한우 정도면 모를까 수입산을 포함하면,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온 가족이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소고기 등심구이다. 돼지갈비와 삼겹살도 직장 회식이나 친구들 간의 모임에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가 된지 오래다. 치킨 또한 전화 한 통이면 콜라와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야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오늘의 풍요로운 현실에 대해, 그 옛날 보릿고개를 겪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경험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거참, 세상 좋아졌다!”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 즉 신자유주의로 새로이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가?

햄버거무서운이야기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에릭 슐로서?찰스 윌슨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증적 현상’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서술된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귀중한 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Chew on this)>(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슐로서는,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참깨가 박힌 빵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9쪽)고 역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널리스트가 아닌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철학자로서의 슐로서를 엿보게 된다. 왜? ‘철학(함)’이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현상 배후에 있는 ‘실체적 본질’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며 햄버거며 풍족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행복한’ 세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슐로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푸른 초원 대신 ‘똥 무더기’ 위에서 사육되는 가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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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 가운데 하나는 단연 햄버거다. 물론 어른들이 먹기에도 꽤나 맛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싼 가격에 간편하게 한 끼를, 그것도 맛있게 때울 수 있는 편리성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잠시 입을 호사하도록 해주는 햄버거 속에 들어 있는 고기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상태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 이 패티 뿐 아니라 주변에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고기들은 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식탁에 오른 걸까?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기를 제공해 주는 가축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축하면 우리는 흔히 ‘푸른 초원에서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적어도 미국과 같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난다. 실제로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은, 오직 더 많은 고기 생산을 위해 운동을 제한당한 채 특수 사료를 먹여 단기간에 살이 찌도록 의도된, 목장이 아닌 엄청난 규모의 ‘비육장(肥育場)’에서 판매용 고기 상품으로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들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신선한 풀을 뜯는 게 아니다. 도살되기 전 3개월 동안 소들은 (…) 특수곡물을 먹는다. 피부 아래 미리 이식한 성장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소를 빠르게 살찌우도록 설계된 곡물이다.”(151~152쪽). 온갖 오물과 배설물, 죽은 소들의 사체까지 있는 비육장에서 소들은 오직 먹기만 한다. 운동은 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똥 무더기 속에서”(177쪽).

?치킨용 닭들의 삶 역시 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 엄청난 수의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먼지와 깃털, 병균으로 득실대는 환경 속에서, 오직 식용으로 적합한 크기로 살찌우게끔 먹고 또 먹는 삶이 지속될 뿐이다. 그것도 “첫날과 마지막 날을 빼고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160쪽) 못하는 겨우 40일 동안의 삶이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생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직 살찌우기 위해 먹는 삶으로 인해 “다리는 체중 때문에 구부러지고 체액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기”(161쪽)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들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육장이나 비육장을 떠나 도축되는 과정에서도 그것은 계속된다. 가령 닭들을 도살 처리하는 도계장(屠鷄場) 내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닭들은 거대한 도계장에서 도살되는데, 빠르게 움직이며 수천마리의 닭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체인에 다리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다. 부품을 끼워 맞추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라인과 달리 현대식 도축장의 생산라인은 해체라인이다. 죽이고 재빨리 분해한다.”(162쪽)

하지만 이처럼 무시무시한 도계 시설에서 도살되는 것은 그나마 고통이 덜한 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슐로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닭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일꾼들이 닭의 다리를 일일이 잡을 시간이 없다. 그러면 머리 위 체인에 매다는 대신 일꾼들은 남은 닭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 여전히 꽥꽥대며 퍼덕이는 것도 있다. (…) 짜증 난 일꾼이 닭 위에서 뛰며 짓밟거나 잡아서 벽에 다시 던진다.”(164쪽)

ⓒ 오마이뉴스, 최병렬

ⓒ 오마이뉴스,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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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적 살처분’이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가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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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사람들에게 싸고 영양가 높은 맛난 고기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인 사육 동물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공포, 괴로움은 제대로 포착되기가 어려웠다.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육장이나 도축장의 실태는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가축들이 겪는 야만적인 학대의 실상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세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으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 닭과 오리가 살아 있는 상태로 생매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소위 ‘살처분’을 들 수 있다. 가축 학살 동영상을 통해 드러난, 구덩이 속에 내던져져 울부짖는 채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의 참상은 그야말로 가축 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한데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전국에서 닭과 오리가 또 다시 살처분 당하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비(非)생명윤리적인’ 만행이 재현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380여 만 마리! 정녕 이래도 되는 걸까? 그것들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닌가? 과연 그러한 가축들을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먹거리 상품’으로 간주하여, 경제적 손실을 줄인다는 이유로 그처럼 임의로 살처분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나 한 걸까? 설령 도축이나 살처분을 당하는 경우에도,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 고통과 두려움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들은,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고 사용하다 쓸모없거나 경제적 손실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전자제품처럼, 대규모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생산되어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동물들이 지닌 생명이나 그것들이 느낄 공포나 두려움, 아픔이나 고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도 그것들과 똑같이 느끼고 의식하는 ‘동물’인데도 말이다.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축장 내 노동자 세상

도축장은 사육 동물들에게도 무섭고 고통스럽지만, 작업하는 인간들에게도 끔직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정글’처럼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판치는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이미 100여 년 전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업튼 싱클레어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다. 그 일부에는 “일꾼 하나가 사고로 큰 통에 빠져 라드, 즉 돼지기름이 되어버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얘기도 있다.”(166쪽)

?문제는 지금도 도축장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서 비롯된 비윤리적인 정글의 세계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정육회사들이 패스트푸드 업계의 필요에 맞추느라 대형화하면서 임금을 깎기 시작했다. (…) 그리고 생산라인의 속도를 올렸다.”(168쪽) 소를 해체해 진공 포장육으로 만드는 생산 라인의 속도는 도축장을 두려움과 공포, 고통의 소굴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럼 왜 라인은 그처럼 빠르게 움직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속도가 빠를수록 회사의 수익은 커진다.”(171쪽) 분당 7마리 정도의 큰 소가 생산라인으로 보내지면 일꾼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을 자르고 저며 낸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의 ‘직업안전위생관리국’이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고기 가는 기계에 팔이 끼여 죽고, 컨베이어에 머리가 부서져 죽기도 한다. 암모니아 유출로 한 명이 죽고 여덟 명이 다치기도 했으며, 가축을 기절시키는 스턴총에 죽은 사람도 있다.”(169쪽)

하지만 노동자들은 부상이나 죽을 수 있는 위험 사태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다. 정육회사들은 그들을 “경고 없이 아무 때든, 무슨 이유로든 해고할 수 있다.”(172쪽) 멕시코 등에서 갓 이민 온 ‘불법 체류자’가 작업장 인부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부양할 가족이 있는 그들의 처지에서 불평이란 곧 “모든 것을 잃을”(172쪽)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알겠는가? 우리가 식탁에서 맛나게 먹는 고기는, 도축 작업장 내 인부들의 목숨 혹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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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광우병과 ‘O-157: H7’ 대장균: 가축의 역습 혹은 복수?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맛나게 먹었던 고기가, 가축들뿐 아니라 사육하고 도축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의 대가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희생은, 고기를 먹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전이된다. 이름 하여 ‘사육 동물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맛난 고기로 인해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대표적인 예로는 ‘인간 광우병’을 들 수 있다. “값이 싸게 치이는 단백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소’, 즉 “도축장에서 나온 부스러기 쇠고기와 피를 소에게 먹였던”(218쪽) 탓에 새로이 등장한 치명적인 불치의 병인 인간 광우병은, 한 순간의 고기 맛을 보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극도의 위험성과 두려움을 우리 인간들에게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넣은 광우병보다 ‘현실적으로’ 한층 더 위험한 것은 치명적인 ‘장출혈’을 일으키는 새로운 대장균 “E. 콜리 O-157: H7″(174쪽)이다. 실제로 이 병원균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 수만 해도 인간 광우병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에 의하면, 해마다 자국 내에서 대장균 O-157: H7에 감염되는 사람은 대략 7만 3000여 명이며 그 중 61명이 사망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제대로 익히지 않은 햄버거 속 고기 패티에 들어 있던 대장균으로 인해,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며 내장 기관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로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병원에 입원해 엄청난 고통과 세 번의 심장발작을 겪은 후 1992년 12월 28일 엄마의 품에서 죽었다. 겨우 6살이었다.”(174쪽)

그런데 이처럼 그 정체를 파악키 어려운 치명적인 병원균의 출현과 확산이 이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대규모 축사와 거대 도축시설을 갖춘 기업화된 ‘공장식 축육(畜肉) 생산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장균 O-157: H7만 해도 그 병원균의 서식지는 ‘소의 위장’임이 밝혀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축의 대량 사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는 반추동물로서 위가 4개이며 ‘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초식 동물이다. 방목하는 소들은 기계적인 되새김질과 위 속 세균의 작용으로 풀의 섬유소를 완전 소화하여 흡수한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산된 ‘옥수수’의 80% 이상을 가축 사료용으로 전용하고 있는, 기업화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방식은, 소들이 수천 년 동안 먹어 본적이 없던 새로운 사료, 즉 ‘죽은 소’ 사체의 육골분을 섞어 단백질을 보충한 옥수수 사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인간 광우병의 출현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소장에 남아 있던 옥수수가 발효하여 장내 미생물을 ‘악산성의 걸쭉한 액체’로 변질시켜 대장균 O-157: H7이 증식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도축된 고기나 배설물 등을 통해 해마다 미국 내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 중 수십 명을 사망케 하는 무시무시한 사태를?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방질 많은 맛있는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즐기기 위해, 우리 인간은 풀과 건초로 사육해야 할 초식동물인 소에게 비육을 위해 과도한 옥수수 곡물을 제공하고, 초식동물에 맞지 않는 동물성 사료를 공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른 대가로, 미쳐 날뛰는 ‘식우종(食牛種)’을 출현시켜 생태계 질서의 붕괴를 자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광우병’의 등장과 가공할 대장균의 출현 및 무차별적 확산에 따라 인간 종(種) 자체의 보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 사회’의 등장을 우리 인류는 현재 맞이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말이나 휴일이면 동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 엄마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 세트를 맛나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이 미소 짓는 모습에 다시 또 행복해 하는 부모들의 모습! 참으로 보기 좋고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닌가? 단 돈 몇 천원에 맛난 한 끼 혹은 간식으로 그처럼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처럼 웃음꽃 가득한 정경의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사육 동물들과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 고통과 좌절 그리고 너무나 슬픈 ‘이별’이 자리하고 있다. 고통 없이 사육되고 도축될 최소한의 ‘동물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는 야만적인 거대한 공장식 육류 생산 시스템, 생명체가 아닌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한갓 ‘상품’으로 취급되는 사육 동물들의 비애, 철저히 ‘돈의 논리’에 의거해 멀쩡히 살아 있는 가축들이 수백만 마리씩 생매장 당하는 반(反)생명윤리적인 비극적 참상, 살처분 작업에 참여한 관련 공무원들이 겪는 끔직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후유증,?소수 대기업이 독점한 기업형 고기 생산 방식으로 인한 수많은 축산농가의 몰락과 좌절,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횡포와 수탈 그리고 희생, “노조를 모르는”(84쪽) 햄버거 매장에서 거의 착취 수준으로 부림을 당하는 10대 청소년 종업원들의 환멸과 좌절, 끝으로 순간의 맛과 미소, 행복 뒤에 닥칠지 모를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 그리고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

이러한 실체적 진실에 접하여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슐로서에 의하면, 정부나 의회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와 그들의 공급업자들이 지닌 정치적 힘은 의회가 할 일에 대한 논의를 대부분 무의미하게 만들기”(229쪽)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요구를 지닌 더욱 막강한 집단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소비자들이다.”(229쪽)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극복 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일차적 실천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며 그 주도권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 점을 슐로서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향한 첫 걸음은 아주 쉽게 내디딜 수 있다. 사 먹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된다. 음식 값으로 쓰는 한 푼 한 푼은 투표할 때의 한 표와 같다.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그 회사의 정책과 행동에 지지표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229쪽)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구보 씨라는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그런데 제목이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이다. 박태원의 구보 씨, 최인훈의 구보 씨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알던 구보 씨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냥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도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다.고리타분한 얘기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만큼이나 꽤 잘 읽힌다. 물론 구보 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가끔 말이 늘어져 졸음이 오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Y라는 여성이 어김없이 나타나 구보 씨에게 독자의 생각을 속 시원히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철학자 구보 씨는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만 길게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Y의 돌직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구보 씨는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아마 독자들은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구보 씨와 Y, 구보 씨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소통, 뱀파이어, 크기, 사회, 철학 등 그가 일상에서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당연하다. 일상은 주제 따위는 상관없이 마구 포착되고 또 버려지기도 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통해 구보 씨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엿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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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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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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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박정하 (성균관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데카르트, 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 혹은 ‘근대성의 아버지’라 불린다. 데카르트가 산 시대는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는 중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근대라는 새 시대가 탄생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던 격변기요 과도기였다. 사회적으로는 종교 개혁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종교 세력이 복잡한 갈등 속에서 30년 전쟁(1618~48)을 치렀고, 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고통 받던 시대였다. 사회가 불안했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미신이 널리 퍼져 정신적으로도 혼미한 상태였다.

르네 데카르트(Rene-Descartes, 1596~1650)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전쟁터에 뛰어들기도 했고 세상을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방랑 생활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세상 온갖 일의 허무함, 무의미함을 느끼고, 혼자 숨어살면서 오직 진리 탐구를 위해 일생을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런 진지한 삶의 역정을 겪은 끝에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떠올라, 길 잃은 나그네처럼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세의 낡은 사고방식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체의 확립’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근대성의 기초를 닦고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였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 사상의 주제들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어서 그의 사상 전체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방법서설>의 제4부에서만 간략히 다룬 철학의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는 책은 1640년에 나온 <성찰>이다. <성찰>에 대해서는 당시 중세 철학을 고수하던 철학자는 물론이고 중세 철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철학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가세하여 열띤 찬반 논의를 펼쳤다. 이론적인 반박만이 아니라 무신론과 신성 모독죄로 공공연히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겪으면서 데카르트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2.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서광사 펴냄). ⓒ서광사

 

이 책들에서 데카르트는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이다. 흔히 중세의 신(神)중심주의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인간’은 개인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서양 고대도, 특히 그리스의 사상도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인간은 사회에서 독립된. 사회 이전에 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는 공동체적 인간이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안에서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충족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폴리스에서는 좋은 인간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흔히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는 정확한 의미를 따지자면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은 이러한 공동체적 인간, 즉 공동체 속에서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받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으로서의 원자적인 인간이 먼저 있고, 사회는 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 사회가 개인에 의해 의미 부여되는 것이다. ‘사회 계약론’이라 부르는 근대의 주류 사회철학 이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평가받는 칸트는 근대 주체의 모습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계몽이란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의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신체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 등으로 인하여] 이성의 결핍 자체에 있을 경우에는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의 표어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즉 ‘과감하고 지혜롭고자 하라!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어떤 다른 권위나 힘의 강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율적인 근대 주체의 모습이다. 결국 주체를 주체이게끔 만드는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이성인 셈이다.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주체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은 각 개인이 바로 이렇게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립했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스스로 사용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바로 데카르트는 근대성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초판본(1637) ⓒgreenbee.co.kr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양식(良識, good sense)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가지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 바로 양식 혹은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나면서부터 평등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확립을 선언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가지고 이에 기반해서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식이란 개념은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이야 너무 일상화되었지만 근대 전체를 떠받드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사실 중세까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세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토대 중에 하나가 인간은 날 때부터 능력을 다르게 타고나기 때문에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봉건 귀족 계급은 이성을 갖추고 양식을 타고난 계급이기에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노 계급은 이성을 갖추지 못한, 따라서 양식을 갖추지 못한 계급이기에 배워도 소용없고, 봉건 귀족의 지도와 지배를 받아야 하는 계급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식 여부에 따라서 신분을 나누던 시대의 끝자락에서 데카르트는 혁명적 선언을 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갖추고 있다”라고. 이는 중세 신분제에 대한 마지막 진혼곡을 울리는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선언 이후 근대 사회는 이른바 상식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실 근대 초까지도 많은 정치철학자는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이른바 ‘중우(衆愚) 정치’를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대중이 머릿수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갖추고 이를 스스로 사용하는 자율적인 주체라는 데카르트식 생각이 확보되면서, 그렇다면 다수가 찬성하는 쪽이 올바른 판단에 가까울 것이라는 결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저 선언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 방법적 회의

이러한 데카르트 사상의 핵심이 잘 응축되어 있는 책이 바로 <방법서설>이다. <방법서설>은 아주 짧은 책이다. 정식 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모든 학문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이다. 6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언뜻 엉성하고 치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상 전체를 쉽고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데카르트가 과학과 철학의 전문가들보다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쉽게 쓴 책이다. 당시에 학자들은 책을 쓸 때 어려운 라틴어로 썼는데 그는 이 책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썼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학자들이 한문으로 책을 쓰던 조선 중기쯤에 한글로 쓴 격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데카르트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문을 잘 모르는 부인네들조차 무언가 깨달을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데카르트가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대담하고 야심만만하게 철학의 기초를 새롭게 놓으려 했다. 그는 중세와 근세의 건널목에서 길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하고 있는 철학에서 새로운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방법의 철학자”라고 자주 부른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

둘째는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간에도 순서가 있는 듯이 단정하고 나아갈 것.

그리고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枚擧)와 전체에 걸친 통관(通觀)을 어디서나 행할 것.” (<방법서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진리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피할 것.
둘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쪼개서 탐구할 것. (분석의 규칙)
셋째, 가장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것에 다가갈 것. (종합의 규칙)
넷째, 문제의 요소들을 다 열거하고 그 중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 것.

그리고 유명한 이 4가지 규칙 외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으로 신중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규칙들을 보면서 실망 반, 비웃음 반으로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무슨 엄청나고 대단한 규칙인 줄 알았더니 그게 뭐냐면서 속았다고 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규칙들은 오늘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상식적인 것이니까 이 규칙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독단적이고 공허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지배하여 실제로 이 규칙들이 무시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규칙들을 철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철학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이때 그가 제시한 규칙 가운데 특히 첫째 규칙이 잘 통용되고 있는 전형이 수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을 중세의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암흑에서 끌어내고 철학을 수학, 특히 기하학과 같이 확실하고 명증하고 투명한 학문으로 확립하려 했다.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明證性)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참된 용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학이 기계적 기술에만 응용되고 있음을 생각하고서 그 기초가 아주 확고하고 견실한 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위에다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도덕을 다룬 고대 이교도들의 저술은 화려하고 웅장하나 모래와 진흙탕 위에 세운 궁전과 같다고 본다. 그들은 여러 가지 덕을 대단히 찬양하고,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도 더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가르쳐주지는 못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그토록 훌륭한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 가끔 냉혹이나, 교만이나, 절망이나, 친족 살해에 지나지 않는다.” (<방법서설>)

그렇다면 수학을 모델로 해서 얻은 새로운 방법으로 철학의 물음들을 다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데카르트도 신의 존재라든가 인간 정신의 본질과 같은 중세 철학이 제기한 물음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진정 학문으로 다루려면 신비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확실한 토대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이 엄밀한 학문일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또는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날 수 없다”와 같은 명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 공리들이다. 수학은 이러한 공리들에서 출발하여 구성된 체계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도형의 어떤 성질을 나타내는 ‘정리’가 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증명을 해야 한다고 배운다. 바로 이 증명에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공리’다. 그러나 ‘공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리는 스스로 명백히 참인 것이고 따라서 최초의 출발점, 제1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철학도 확실한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의 공리와 같이 직접으로 확실하고 명백해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절대 확실한 시작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 온 것들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대담하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 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철저한 의심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데카르트의 이런 작업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근세 철학의 결정적인 일대 변혁을 이룩한 과정이었다.

4. 제1원리를 찾아서

데카르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회의주의의 시대였다. 당시는 아직도 과학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방법이 없던 시대였으며,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던 시대였다. 이렇게 회의주의가 팽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종교였다. 단 하나의 종교적 진리만을 인정하던 중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다양한 문제제기가 등장함으로써 종교적 진리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에 대해 백가쟁명식 논쟁이 벌어졌다.

데카르트도 바로 이런 회의주의라는 시대의 분위기 중심에 있었음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알 수 있다.

“철학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겠다. 즉 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우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직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해 나아가리라는 자부심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에 관하여는 참된 의견이 하나 이상 있을 수 없을 터인데 실제로는 갖가지 많은 의견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학식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참인 듯 보이는 모든 것을 거짓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 (<방법서설>)

이런 회의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확고한 기초 위에 놓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지식을 획득하고 축적할 방법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을 확립하려는 관심이 17, 18세기 철학의 주된 관심으로 부각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이 문제를 해결하여 보편학(mathesis universalis)을 확립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인물이다.

방법적 회의는 바로 이런 보편학을 확립할 수 있는 토대를 찾는 작업이다. 어떤 회의주의보다도 저 지독한 회의를 통해 어떤 회의주의도 승복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토대를 확보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적의 무기로 적을 무찌르는 역설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문제마다 의심스럽고 잘못하기 쉬운 점들을 특히 반성하면서, 전부터 내 정신 속에 스며들어 있던 오류를 모두 차츰 뿌리 뽑았다.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 의심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회의론자를 흉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내 모든 계획은 내 스스로 확신하고, 무른 흙이나 모래를 젖혀 두고 바위나 찰흙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방법서설>)

그런 확실한 토대를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제1원리’라고 부른다. 바로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한 실험적인 작업이 방법적 회의인 것이다. 보편학의 토대가 될 제1원리는 어떤 회의주의도 무너뜨리기 힘들 정도로 ‘확실(certain)’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심정으로 이 확실함을 굉장히 강하게 규정한다. 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서설>)

현재 의심하지 않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이다”라는 주장은 확실한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대체로 이런 주장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도 데카르트에 따르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한테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어떤 이유 때문에 수도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그동안 우리가 참된 지식으로 믿고 있던 것들의 확실성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어떤 사람이 사과를 한 바구니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몇 개가 썩어 버려서 나머지 성한 사과도 썩게 될지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썩은 사과들을 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우선 모든 사과를 바구니에서 꺼내 놓고 나서 하나씩 자세히 검사하여 썩지 않은 것만 골라 다시 바구니에 담은 다음 나머지는 버리지 않겠는가?” (<성찰>)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의 토대를 의심해 보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거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 <방법서설/성찰/철학의 원리/정념론>(데카르트 지음,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우선 감각적인 지식부터 의심해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많은 사물이 정말 내가 보는 대로 내 밖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속의 막대기가 휘어져 보이는 빛의 굴절 현상이나 똑같은 색이 바탕색에 따라 밝기가 달라 보이는 착시 현상 등에서 종종 경험하듯이 감각은 우리를 자주 속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의심 속에서도 최소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 보면 그 확실함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꿈을 꾸면서 내 몸이 벼랑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땀을 흘리기도 하고 물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여 두려워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절대로 꿈일 리 없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흔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예컨대 “2+3=5″라는 수학의 진리나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는 과학의 진리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이런 진리마저도 데카르트가 근원적으로 철저히 회의하자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는 2+3=5가 아닌데 만일 신이 인간을 2+3=5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면, 즉 신이 인간을 근본적인 기만과 본질적인 왜곡과 비진리 속에서 살도록 창조해놓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이 과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주장해 온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기만하는 신’ 또는 더 나아가 ‘악의에 가득 찬 악마’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수학의 원리까지도 의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추론하면서 까지도 오류를 범하였으며, 지금은 오류라고 밝혀진 것을 이전에는 확실하고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창조한 신은 모든 것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물에 대해서까지 도 우리가 항상 속임을 당하도록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의 원리>)

이런 얘기는 억지 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데카르트도 신성모독의 위험 때문에 주춤거린다. 그러나 중세 전체를 통해 절대시된 신에 대해 감히 가설로라도 대담하게 의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근대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최고의 권위인 신조차도 비판적 이성의 회의 대상으로 놓고자 하는 진정한 근대적 자율적 주체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나는 진리의 원천으로서 최고선인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악령이 존재하며, 그 악령이 나를 속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가정해보겠다. 또한 나는 하늘, 대기, 달, 색채, 외형, 소리 그리고 모든 외계의 대상들이 단지 허황된 꿈에 불과하며 악령이 나의 고지식함을 이용해서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또 나 자신은 손도 귀도 살이나 피, 감각 기관도 없는데 단지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을 굳게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에 따를 참이다. 즉 이제껏 내가 생각해 온 것처럼 어떤 진리를 알아낼 힘이 내게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잘못된 것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 나를 속이는 자가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할지라도 그가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성찰>)

 

5. 주체의 확립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전부 의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의심하는 나에 대한 확실성은 신이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신이 나를 속일지라도 속는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기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야말로 반드시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진리,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견고하고 확실하여 아무리 과장이 심한 회의론자라도 이 진리를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찾아 헤매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이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방법서설>)

“나, 바로 내 자신은 어떤 것도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미 내가 감각과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였다. 이제 나는 이로부터 또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 주저하고 있다. 나는 육체와 감각들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가? 또한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즉 하늘도 대지도 인간의 정신과 육체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거꾸로 만일 내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전지전능한 기만자가 있어서 항상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가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나를 속여보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속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 본 후에 나는 결국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말하건 아니면 마음속에 품건 간에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성찰>)

데카르트가 철학의 기초로 세운 이 명제에 대해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말할 사람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 명제는 근원적인 확실성을 신에게서 찾은 중세 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사유, 인간의 자의식에서 철학의 토대가 되는 확실성을 찾음으로써 서양 사상의 새 장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명제가 갖는 사유하는 주체가 갖는 확실성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 되고 참된 사고 밑에 놓여야 할 기초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 안에 사고하기 위해서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참이라고 보증된 어떤 사실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우리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참이라는 점을 일반적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성찰>)

이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신이 아닌 인간이 진정한 주체로서 모든 확실성의 근원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바로 ‘내’가 출발점이고 기초임을 보여 주었고, “사고하는 나”를 제1원리로 하여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이 형이상학은 자연학, 기술학, 의학, 도덕학 등 실천학을 근거 짓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로써 인간이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솟아나는 확실성에 따라 진정한 주체가 되는 근대성의 특징을 데카르트는 최초로 정초하게 된다. 모든 것은 바로 또한 자연도 이제 중세 세계관에서처럼 신성한 피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며 토대인 인간이 적극으로 파악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결국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에 치명타를 먹이면서 근대의 인간에 대한 ‘주체성의 철학’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해서 근대 주체는 지금까지 발전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 자세한 내막을 여기서 다 추적하기는 힘들겠지만, 중요한 발전 단계들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데카르트가 최초로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지만 너무 개인 개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다보니 ‘나’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유아론(唯我論)적 성격에 빠져 버렸음은 잘 알려진 문제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 이성의 활동인 수학과 과학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하여 인간 이성이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여 주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구조를 밝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주체는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니 탈역사적이고 탈시간적인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주체에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여,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해명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 주체의 사회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노동하는 주체, 계급으로서의 주체 개념을 확보하였다. 하버마스는 다시금 한 차원 더 넓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는 관계가 중요한 측면임을 해명하면서 의사소통적 주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근대 주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발전되어 가는 첫걸음을 데카르트가 내디디고 있고,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 [철학자의 서재]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철학자의 서재]

 

신우현 (상지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알몸으로 학교가기

<알몸으로 학교 간 날>(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이라는 그림책을 소개하려한다. 주인공인 피에르는 어느 날 알몸으로 학교에 간다. 책가방은 챙겼지만 아이가 알몸인 것은 눈치 채지 못한 아빠 덕분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심각하게 따지지는 말자. ‘아무리 이야기의 배경이 정신없는 아침이더라도 아이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라든지 ‘도대체 엄마는 어디로 갔기에 아빠가 아이를 챙겨서 저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었지?’라든가 하는 질문은 잠시 멈추기로 하자. 어쨌든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갔다.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말을 잠자코 들어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는 신발을 잊진 않았다. 빨간 장화다. 신발은 신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덕분에 알몸인 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인사했어요. “피에르, 안녕” “피에르, 별일 없지?” “피에르,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 “어, 그런데 피에르, 너 장화 예쁘다.” “아, 그래, 장화 아주 멋있네!” “예쁜 빨간색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장화 속이 조금 갑갑했어요.(6쪽)

 

▲(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 출처: book.daum.net

 

알몸으로 등교한 피에르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다. 어느 누구도 알몸인 피에르에 대해 손가락질하거나 조롱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다만, 단짝 친구만이 에둘러 배려하지 않고 “안 추워?”라고 질문한다. 그런데도 피에르는 아무 말 없이 갑갑함을 느낀다. 선생님 역시 빙그레 웃으며 맞이해주셔도 ‘나무 의자가 너무 딱딱했지만 몸을 비틀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라며 위축된 마음을 드러낸다.

선생님 역시 선생님은 피에르를 배려한답시고 가리개로 몸을 덮어주거나 없는 듯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몸 상태 그대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피에르에게 발표를 많이 시킨다. 비록, “피에르, 피리새에 대해 아주 잘 설명했다. 꼭 이 교실 안에 피리새가 있는 것 같아” “피에르, 아주 잘 대답했다. 꼭 이 교실 안에 작은 수도꼭지가 있는 것 같구나”라는 칭찬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체육시간에 두발을 모으고 뛸 때가 가장 좋아요. 그렇게 뛰다 보면 걱정을 잊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옷차림 때문에 걱정이 있으니까 열심히 뛰기로 했어요. 나는 깡충깡충 뛰었어요. 있는 힘껏 뛰었어요. 그리고 웃었어요. 마음껏 웃었어요.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랐어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곧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만히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종이 울렸어요. 이제 점심시간이에요. (17~18 쪽)

사실 피에르가 체육시간에 열심히 뛰어오른 것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로 크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을 잊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면서 웃고,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라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자 곧 멈추고 만다. 결국 이어지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모두 왁자지껄 웃는 상황에서도 조금밖에 웃지 못한다.

더욱이 방학 때 가장 즐거웠던 일을 그리는 미술시간에 아이들은 모두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특이한 바닷가를 그린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마음 불편해한다. 쉬는 시간이 오자 친구들이 또 빨간 장화이야기를 할까봐 큰 덤불 뒤에 숨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던 피에르는 나뭇잎과 줄기로 몸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알몸인 채로 초록 장화만을 신고 있던 옆 반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 애 이름은 마리였어요. 나는 마리에게 내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마리도 나에게 제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우리는 깔깔 웃었어요. 우리는 함께 풀줄기를 찾았어요. 그러고는 각자 나뭇잎을 붙였어요. “고마워” 마리가 나에게 말했어요. “고마워” 나도 마리에게 말했어요. 우리는 또 웃었지만 아까처럼 실컷 웃지는 못했어요. 종이 울렸거든요. 쉬는 시간이 끝났어요. (27쪽)

마리와의 만남으로 이제 피에르는 자신감을 찾는다. 선생님이 천사에 관한 노래를 시키자 자신 있게 손을 들고 교단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감탄한 얼굴로 피에르를 보고 있었고, 손뼉 치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피에르는 그 자리에서서 멋진 빨간 장화를 신고 작은 나뭇잎을 붙이고 아주 자랑스럽게 인사를 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갔어요. 어찌된 일인지 길거리에서 가볍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어요. 체육시간처럼 말이에요. 나는 날듯이 달려갔어요. 지나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활짝 웃었어요. 알몸이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31쪽)

 

남과는 다른 피에르가 자유로워지기까지

‘알몸’은 이 세상의 수많은 ‘차이’이다. 그림책의 저자인 타이 마르크 르탄은 대부분의 사람과 다른 ‘차이’를 지닌 사람이 자유로워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책은 피에르의 감정을 덤덤한 듯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벵자맹 쇼의 재치 있고 상큼한 그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알몸으로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피에르는 망설이듯 몸을 숨기고 운동장을 들여다본다. 쑥스러웠지만 피에르는 친구들 앞에 선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친구들을 만났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갑갑해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지도 못한다.

웃음으로 맞아주신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에르에게 발표를 시키지만, 피에르와 선생님은 당황함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체육시간에 피에르가 걱정을 잊기 위해 깡충깡충 뛰고 순간이나마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러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카트린느 선생님이 피에르에게 여벌의 옷을 입혀주거나 다른 아이들처럼 옷을 입혀주었어야 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 상황에서 옷을 벗고 있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동학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다. 상징이고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이에게 옷을 주는 것은 다른 아이와 억지로 같아지라고 하는 것일 수 있다. 옷을 입지 않은 등교한 것도 선택일 수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피에르의 선택을 존중해준 것이다. 그런 선택을 왜 했느냐며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피에르를 받아들여준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의 갈등 상황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배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체육시간에 피에르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이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에르가 의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술시간에 피에르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그림에 벌거벗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는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불편해진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피에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과 같은 ‘차이’를 지닌 옆 반 아이를 만나고 나서다. 피에르는 마리와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만 다르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을 소외감과 불안함이 같은 처지의 마리와 만나고 해소되었을 테니 말이다. 마리를 만난 후 피에르는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 로 인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그 ‘차이’를 내가 지니고 있어서 좋다고 진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피에르는 ‘차이’로 인한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이다.

피에르가 ‘차이’를 긍정하고 세상과 화해하여 자유로워지게 된 데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와 같은 처지인 마리와의 소통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태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자, 상당수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변태!!!”라고 외쳤다. 재치 있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교묘하게 가린 그림에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아이들보다는 “말도 안 돼. 선생님한테는 혼나고 아이들한테는 놀림 받을 텐데, 다른 애들은 왜 아무 말도 안하지?”라며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어린이들이 더 많았다. 자기라면, 절대로 알몸으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란다.

우리 사회는 ‘차이’에 너그럽지 않다. 나와 다른 점은 이상한 것으로 치부된다. 심한 경우에는 적으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핑계로 진행된다. 사회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므로 옆의 친구나 동료의 ‘차이’는 약점이 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피에르의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는 다소 생경한 것이 된다.

‘동일성’만을 강조하면서 ‘차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대체로 ‘동일성’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다수이고 기득권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차이’는 ‘차별’이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거나 많다는 이유로, 키가 작거나 못생겼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력이 짧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배려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과 상상력,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공격하려는 충동을 절제하려는 이성으로부터 온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힘들다. 여기서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을 내 것으로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불편함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환경이 아이를 기르는데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불편한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해보지 않으면서 자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다른 사람의 불편함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훈련될 필요가 있다.

용산 참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중은 얼마나 싸늘했는가. 대다수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 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소수의 인권 요구는 냉정하게 묵살되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불에 타죽어도, 얼어 죽어도 무관심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배려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고 민주적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떤 보호를 받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그저 우아한 지식인이나 교양인의 제스처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다.

생각하는 게 달라도, 뚱뚱해도, 장애인이어도, 돈이 없어도, 외국인 노동자여도, 여자여도, 가방끈이 짧아도 주변의 배려로 자신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생활하며 결국 나에게 있는 ‘차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유토피아다. 피에르처럼 알몸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외칠 수 있는 사회가 어서 오기를.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0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10월 월례발표회]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발표: 조경란(연세대)
후기: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북아시아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분쟁에 이어 이어도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ADIZ)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중재자로 개입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영토분쟁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첨예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제3자의 일인마냥 이 문제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동북아 정세를 감안한다면 지난 10월에 있었던 월례발표회에서 장장 3시간 30분에 걸친 논의도 어찌 보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 발표회는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조경란 선생님이 들고 나온 문제의식은 단순 담론을 넘어 우리 주위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에서 그 중심 자리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이번 발표에는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중국의 부상에 대해 학자적 양심에 의한 견제와 비판이 담겨 있다. 특히 정치경제적인 중국의 부흥에 편승해 우러러 박수만치는 친중화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인문학적 분석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책으로 출간될 이번 논의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역사궤적에서 중국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던지는 질문이다. 바로 근대성 얘기이며 서구의 근대성과 동아시아에서 근대란 과연 무엇이었는지의 문제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북경거리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오와 마주보게 된 부활한 공자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중점적인 이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한 전초적인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 내부에서 중국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성장 이후 양지에 주목하는 낙관론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중국인들 스스로 자신감의 소산이다. 또 하나는 비관론으로 중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신좌파와 유교중국을 꿈꾸는 자들이 힘을 합해 세계문명으로써 바라마지 않는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이런 모습에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비관론자들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유럽적 보편주의(근대성) 문제에 대해 중국이 새로운 보편으로서의 근대적 민주주의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중국을 두고 “눈물의 계곡을 거쳤다”고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국가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능력은 이미 보통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의 차이와 화려한 도시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민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지금의 중국이 제대로 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동양에서 능력(能)은 곧 덕(德)을 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달성하자던 전면적 소강(小康)사회가 중국의 정치적 부흥과 경제적 성장만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면, 또는 청중들이 이것을 염두하고 소강을 이해했다면 현대 중국에서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의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확장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회에서 ‘인(仁)’은 이미 사회의 최소단위에서 형성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부에서 보는 중국은 굴기에 대해 고무적이지만, 외부에서 보는 중국은 위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중국의 정치사회권의 분위기를 보자면 신좌파는 극우가 되어가고 있고 이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의 관계는 서로 밀접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학의 ‘화(和)’개념을 통해 뒤에서 유가의 등을 밀고 있지만 동시에 통제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지난날 중국의 사회주의가 중국 내부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면서 지젝의 지적처럼 현재 중국 사회주의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주의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가 만나 결국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국은 과거 유교의 ‘천하’개념을 통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 인식을 포기한다. 아시아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아시아인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중국모델론은 ‘문명-국가(civiliz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중국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핵심문제이다. 중국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른바 유교사회주의공화국을 주장하는 간양(甘陽)과 같은 사람은 ‘대중화문명-국가’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21세기 중국 사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경란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중국 21세기의 핵심개념인 ‘문명-국가’의 논리가 과거 유교적 천하통치주의였던 ‘천하-문명’과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만약 중국모델론이 그 내용에 있어서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합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더니티와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국가와 ‘공모’한 중국모델론은 결국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박영미

 

마치 과거 중국 제국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19세기 말 서양의 제국주의의 형태와는 다르게 당시 조공제를 통해 어느 정도 평화적 체제를 유지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왕후이(汪暉)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이 조공체제를 재구성하여 현대에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혹시 중화문명으로서 중국이 편제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서구의 문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마치 B급 중화반점식 짬뽕논리와 같은 막무가내 낙관론은 아닐까? 조경란 선생님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역으로 서구도 중국과 같은 배경이었다면 국가 관계에 조공제를 썼을 것이고, 이 조공제라는 것 자체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상호필요에 의해 위선을 전제한 서로의 주고받기의 평화 유지 방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중국의 사회주의가 서구를 극복한 대안체제였는가? 라는 질문에 바로 ‘Yes’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중국 사회주의도 근대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중국의 상황이 독립적인 지식인들의 윤리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고, 사회 안에서 일정한 공론장도 형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강력하며 국방비 지출 보다 국가 통제 시스템을 위한 지출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신장에만 기대하여 교류를 위해 중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접근하면서 중국 내부의 문제나 중국과 우리 사이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소중화주의 아닌가.

실패한 서구의 극복 차원에서, 또는 서구의 대안으로써 근래 사람들은 중국을 주목한다. 이런 관심은 서방 중심의 세상은 이제 종결되었다는 전제 아래, 중국은 기존의 것들과는 뭔가 다르며 유럽적 보편주의와 미국적 보편의 가치를 뛰어넘은 새로운 보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서구의 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중국의 모순적인 현 상황을 눈감고 지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한국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언급처럼 보편성은 가치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을 견인해 내는 것이지만 보편적 보편주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닌가. 서양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거가 없다. 자기들의 사회와 체제는 문제제기하고 비판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에는 희망을 건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을까? 이들은 세계 중심의 힘이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이를 문명의 전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문명론은 매우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편주의라고 불렀던 서구식 지식구조가 동서양의 패권구도, 현실사회의 강약구도에서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양극화를 조장하고 유지해오는 데 어떤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와 함께 현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부의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 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발표문 중에서 –

중국이 향후 50년 동안 어떤 새로운 대안적인 틀로써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시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사실 어느 정도 지켜봐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통해 현 동북아시아 정세를 두고 본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미래를 둘러싼 이해방식은 곧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해방식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연구자로써 조경란 선생님 자신도 말한바 ‘또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이 도전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우리로써는 관심 있게 지켜볼만하다. 이번 발표회에서 논의된 내용들의 흥미진진함은 앞으로 출간될 책에서 더욱 풍부한 식견과 내용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조현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리듬 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음악에 관한 책일 것이라 생각해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은 분들이 계셨다면, 그런 걱정은 떨쳐 버려도 될 듯하다.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일상에 관한 책이며, 이론적 동기보다는 실천적인 관심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과 비판을 계승하고 보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책이며, 이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쓰인 책이다.

르페브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을 (…) 정초”(한국어판 55쪽)하려는 그의 원대한 꿈은 미완의 기획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이 책 곳곳에서 사회를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과 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각과 틀을 특징짓는 키워드가 바로 ‘리듬’이다.

 

리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분석

그럼 르페브르는 왜 리듬에 주목하는 것일까? 먼저, 리듬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 곧 “거대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된 프로세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극장”(202쪽)이기 때문에 르페브르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 부과되는 야간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 리듬을 깨뜨림으로써 일의 능률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리듬 분석은 일상생활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비판 작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또한 르페브르는 리듬 개념을 통해 불변하는 정적 존재가 가변적인 동적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존재론적 발상을 혁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56쪽 참조). “세계 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83쪽)으며, 결국 “느리거나 빠르고 매우 다양한 리듬들만이 있을 뿐”(앞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심장박동을 포함하는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인간이 먼저 있고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르페브르가 리듬 개념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각각의 리듬을 분리함으로써 무엇이 ‘자연’에서 왔고, 무엇이 후천적인 것, 관례적인 것,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86쪽)하고, 이를 통해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착각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천적이고 관례적인 리듬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리듬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르페브르에게 리듬은 일상생활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을 보완하고, 존재에 대한 관점을 혁신시키며,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분석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의 모순

르페브르는 거시적인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되는 절차간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이라는 개념 쌍을 도입한다. 순환적인 반복이란 “우주적·세계적·자연적인 것에서 오”(64쪽)는 것으로 “낮, 밤, 계절, 바다의 파도와 조수, 달 모양의 변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위와 같은 쪽). 반면, 선형적인 반복은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위와 같은 곳)으로 “주어진 틀에 따라 행위와 동작이 단조롭게 반복”(위와 같은 곳)되는 것을 말한다. 시계의 반복적인 똑딱거림이라는 선형적 반복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자연적 반복을 측정가능하게 할 때처럼, 양자는 때로는 통일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간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이 철저히 노동시간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형적인 반복과 순환적인 반복은 갈등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게 된다. 관행으로 굳어진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근무 형태의 반복은 삶의 자연적 리듬을 깨뜨리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은 이처럼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의 리듬의 족쇄를 풀고, 우리의 삶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우선성과 고통을 통한 리듬의 지각의 필요성

이렇게 볼 때,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리듬들과 사회적이고 선형적인 리듬들의 형태들을 분류하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리듬 분석>은 미완의 저작이기에 이런 작업의 단초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웅장한 기획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제이기에, 르페브르의 기획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주제와 함께 르페브르 철학의 실천적 의의를 논하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까 한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 자신을 이루는 리듬들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210쪽)고 주장한다. 이는 리듬 분석이 제 3자에 대한 관조나 관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임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 분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간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고통을 체험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고통이 리듬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인식 근거라면, 리듬은 고통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근거다.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깨져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리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균형이 깨지는 것을 지각하기 전이나 후 모두,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듬 분석>에서 고통의 문제는 두 가지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먼저 신체의 리듬들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균형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삶의 지상명령으로 설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개인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이런 개인적 차원의 신체 리듬들 간의 균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의 구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사회윤리적인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르페브르의 주장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손상이나 파괴를 가져오는 고통이나 죽음은 악이며,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

<리듬 분석>의 서론에서 르페브르가 공언하긴 했지만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은 실천적 방안 역시도 이런 스피노자적인 맥락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리듬 분석의 실천적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데, 예술적 리듬을 통한 카타르시스(192쪽)와 조화리듬성의 회복(196쪽)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리듬 분석의 실천적 효과가 좀 더 가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리듬들 간의 균형을 위한 개인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이 해명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페브르의 사유는 스피노자의 발상과 합류한다.

물론,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는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한 자연적이고 거시적인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미시적이고 인위적인 리듬의 반복에 기인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철학자의 서재]

파울로 코엘료의<11분> [철학자의 서재]

 

이한오(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성공회 신부)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 소설 <11분>(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과 표지 뒷면에 그려있는 매혹적인 그림 때문이었다. 남녀가 성교를 나누는 평균시간을 제목으로 단 것도 도발적이고, 아가씨의 누드도 단순히 에로틱한 것을 넘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했지만,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요인은 소설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었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코엘료는 “옛날 옛적에”와 “창녀”를 대조했는데, “옛날 옛적에”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이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이 명백한 모순을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 발은 동화에 한 발은 나락에 살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자며 그 첫 문장의 모순을 설명한다. 동화와 나락이라! 첫 페이지의 다른 문장도 범상치 않았다.

“모든 창녀가 그렇듯 마리아도 동정녀로 태어났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 <11분>(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우리는 성은 넘쳐도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산다. 섹스산업은 밤낮으로 돌아가고 단지 11분의 섹스를 위해 돈을 들여 약까지 먹지만 정작 사랑은 없는 시대다. 거짓과 냉소가 난무하는 관계에 사랑은 없는 법이다. 소설은 브라질 북부의 작은 지방에서 태어난 소녀 마리아의 학창시절과 짧은 직장생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1년 동안의 창녀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실제 인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소설이 끝나는 마리아의 나이는 23살이다. 겨우 스무 두세 살짜리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설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스토리텔링과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마리아의 일기가 두 축을 이룬다. 마리아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의 성장기는 “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니요”라고 말했던 것의 연속이었다. 10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등굣길에 연필을 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다 주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것을 늘 주저했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너무 쉽게 허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입술을 열지 못했고, 사흘이 지난 후 마리아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게 된다. 마리아의 성장기는 늘 이런 식이다.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는-.

 

소녀 마리아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섹스를 매개로 한 마리아의 성장사를 중심으로 보았다. 소녀 마리아, 여행을 떠나는 마리아, 창녀가 된 마리아,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과정을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한두 가지를 더 발견했다. 그것 역시 그림처럼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에 나오는 다음의 기도문이다.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자주 드리는 기도문의 일부인데, 성모 마리아를 통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융성하던 시대에 지어진 기도이다. 그래서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오니 들어주소서!’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기도해 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래 ‘렛 잇 비'(Let It Be)에 나오는 마리아도 이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이 소설 <11분>에, 그것도 창녀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앞쪽 간지에 들어왔을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움직이고,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던가.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꿈 많고 순수한 브라질 소녀 마리아는 창녀로 둔갑한다.

 

파울로 코엘료

코엘료는 이런 배치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저 기도문 이외에 소설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세 가지 글과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첫째는 머리말 성격의 글, 둘째는 기원전 3~4세기경 나그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로 시작하여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로 끝나는), 세 번째는 마리아가 나중에 창녀가 되어 지내는 제네바의 지도가 있고, 끝으로 신약성서의 루가복음의 일부도 옮겨놓았다. 이 자료들을 거기 그 자리에 놓았는지 별도의 설명은 없다.

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까지는 예수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죄지은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의 발을 닦아주는 이야기이다. 이 성서 속 이야기를 툭 제시해놓고 이후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풀어 가는데, (성서를 가까이 하며 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 전체가 성서 본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도 이야기이고, 소설도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실(팩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하고자 한다. 그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빚어지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가서 한 번 더 말하기로 하겠다.

나는 춘천에 산다. 내가 만난 춘천 학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울로 가려한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춘천이 너무 답답하고 일자리도 없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브라질 북부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마리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또 마리아에게 이제까지의 남자들은 늘 고통스런 기억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녀는 사랑은 항상 고통만 줄 뿐이라 믿었고 바다를 건너 더 넓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부모님께 집도 사드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 브라질의 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마리아는 여행지에서 스위스인 프로듀서 로제를 만난다. 그가 연예인으로 성공시켜 주겠다는 제안에 마리아는 ‘예스’라고 응답한다. 그녀는 1주일 만에 모든 것을 결정한 뒤 그를 따라 제네바로 떠난다.

 

돈과 모험을 찾아 나선 여행

꿈에 부풀어 스위스로 도착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1주일에 500달러를 준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값을 제해야 했다. 그녀가 할 일은 삼바댄서였다. 손님과 대화를 하면 안 되고, 사랑에 빠져 일을 그만 두면 해고당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 사랑을 피하는 것은 몰라도, 막상 타의적으로 ‘사랑금지’를 당하고 나니 그녀의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3주 만에 아랍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보기 좋게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서게 될 뻔하다가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고, 그 남자는 사라지고, 다른 일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일생일대 최대의 관문에 서게 된다. 연예인 프로듀서인 줄 알고 만난 아랍인이 호텔로 옮겨 포도주 한잔을 더 하면, 1000프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매춘을 제안 받은 것이다.

1000프랑이면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130만 원 정도 되는, 브라질에서 석 달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그 호텔에서 그 포도주를 마시기로 한다. 막상 몸을 팔고 보니,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닌가? 그녀는 본격적으로 창녀가 되기로 작정하고, 제네바의 텍사스촌 베른가를 찾아간다. 그렇게 마리아는 창녀가 되었고, 직업적 창녀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난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육체’라 불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진 영혼이다. 요 며칠 동안 나는 그 영혼을 아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비판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날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103쪽)

창녀도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이다. 첫째 밤 혹은 둘째 밤의 고비를 넘기면, 그것 역시 고된 일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다른 것과 똑같은 직업이었다. 창녀들도 직업적인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했고, 시간표를 준수했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손님이 너무 많으면 짜증을 부렸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또 “창녀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다.”(110쪽) 나는 작가가 ‘창녀들도’라고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창녀들은’이라는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했다. 그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일기를 붙들고 씨름했다”(111쪽)고 적었는데, 그럼으로써 몸을 파는 창녀가 잃지 않으려는 영혼이 독자의 그것과 다를 수 있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11분을 축으로 돌아가는 세상

작가는 머리말에서 “세상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책도 있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책도 있다”며, 이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코엘료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현실 중에 하나는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함께 제네바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수십 수백 명의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고, 자신을 위해 값비싼 옷을, 그 여자들을 위해서는 더 비싼 옷을 사고,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창녀를 사고, 피부 관리, 몸매관리, 체조, 포르노 등 거대한 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117쪽)

마리아가 제네바에서 만난 남자들은 자신이 세상과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고, 남자들의 외로움을 접하면서 자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섹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콘돔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고, 관계 후 즉시 샤워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깐만요”(128쪽)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나가는 마리아를 어떤 화가가 부른 외마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리아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소리였다.
“당신에게 빛이 있어요.”

“스케치라도 하게 해줘요.”(129쪽)

이 말은 지금까지 자주 듣던 “가슴이 정말 탱탱하군”, “허벅지가 정말 매끈해”, “아파트 한 채를 얻어줄게”하던 그런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모델 일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직업이 창녀인데 그래도 빛이 계속 나는지 따지듯 묻지만, 화가는 중요한 건 창녀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여자와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 화가는 그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겐 빛이 있어요.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것들의 이름으로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가진 의지의 빛이 눈, 그 빛은 당신의 눈을 통해 드러나요”(142쪽)

화가는 그녀를 육체적 미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으로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스에서 필리아로의 상승이랄까. 마리아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시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 남자와 결국 ‘산티아고의 길’을 따라 호수로 흘러드는 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144쪽)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 성인이 걸었던 길로, 지금도 순례의 길로 유명하다. 나는 그들이 첫 만남에서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것이 일종의 회개로 보인다. 성서에서 ‘회개’ 혹은 ‘회심’으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그 뜻은 ‘방향을 돌리다’는 뜻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길의 방향을 타락과 환락의 ’11분’이 지배하는 세상의 베른가로 향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길을 암시하는 성인의 순례길로 그들은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동안, 마리아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첫날 그들이 나눈 대화를 보면 그 길의 의미가 어떤 것일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 그러지 말아요. 난 곧 브라질로 돌아갈 거예요.
– 손님으로 당신을 찾아가겠소.
– 나에겐 굴욕일 거예요.
– 당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찾아가겠소.(149쪽)

물론 섹스에 권태를 느낀 화가가 다시 쾌감을 맛보고 싶은 뜻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기독교(신 구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한다. 회개란 시공간에 묶인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시공간을 창조한 절대자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자, 삶의 실천방식을 자기중심에서 점점 확대하여 이웃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생각을 조용히 따르고자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화가는 마리아에게 간청한 ‘구원’은 마리아를 직업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떤 빛을 가진 인격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날의 마리아의 일기는 자신에게 구원을 간청하는 남자로부터 신의 목소리로 여긴다.

나는 몇 시간 전, 한 카페에 들어갔고,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곳에 던진 것과 같았다. 나는 나에게 다른 종류의 관심을 보여준 첫 번째 사람에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행복한 하루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151쪽)

그들은 이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운명적인 만남에 이른다.

 

구원의 빛과 영원한 사랑

마리아는 그 화가가 자신이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자긍심과 ‘빛’을 찾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사랑이 체위에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체위의 변화는 춤의 스텝처럼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사랑은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성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은 놀이와 ‘연극’을 통해 그들의 시곗바늘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단순한 만남 이상이라는 것을, 생식기의 ‘포옹’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화가 랄프와의 새로운 만남 와중에도 사디즘에 빠진 영국 신사를 만난다. 가학적인 고통을 주고 받는 그와의 만남도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디즘이 추구하는 고통과 노예적 굴종을 통한 정화 그리고 거기서 오는 성적 쾌감은 또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허무함을 알게 된다.

화가 랄프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과 만난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화적 섹스를 시도하며 새로운 삶의 활기와 의미를 찾아가는데, 결국 그들은 생식기의 ‘포옹’을 통해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영원한 오르가슴을 맛보게 된다. 그녀의 뜨거운 고백은 이러하다.

“나는 그와 합류했다. 그것은 11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337쪽)

 

루가복음 7장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소설 <11분>에서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옮겨놓은 루가복음의 소제목은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이다. 예수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고 줄여 옮겨보면 이런 이야기이다.

예수가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살던 행실이 나쁜 여자가 그 소식을 듣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랬더니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가 시몬에게 묻기를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하자, 예수는 옳은 생각이라면서, 계속 말하기를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 요약, 공동번역 대본)

예수가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유대사회는 먼지가 많은 땅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발을 씻을 물을 대접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주인이 발을 닦아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인은 물을 내놓지도 않았다. 바리사이인은 스스로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종교적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아마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종교의 본질인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눈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비해 행실이 나쁜 처녀(아마 창녀일 것이다)는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셈이다. 보기에 따라 에로틱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여기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움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그녀에게 선포한다.

“네 죄는 용서받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장 30절)

화가도, 마리아도, 그녀의 배위에 올라와 ’11분’ 남짓 애를 썼던 수많은 남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한마디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1분>은 일종의 종교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보편적인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결국 사랑으로 구원하고, 사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철학자의 서재]

 

현남숙 (가톨릭대 초빙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상처받은 삶, 철학으로 치유하기

삶은 원래 상처를 포함하지만 그 상처는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외적으로 삶은 풍요로워지고 개인의 권리도 그 어느 시기보다 커졌지만 내실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의 경쟁과 시장원리는 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내면을 그 어느 때보다 동요시킨다.

경쟁에서 도태하면 가차 없이 모욕을 주는 이 낯선 문화에서 힐링 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다. 하지만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 없이는 근본적 치유도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힐링은 일시적 효과에 그치고 만다.

자신과의 근본적 대면은 철학, 특히 실존철학의 근본 주제였다.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박은미 지음, 소울메이트 펴냄)은 각종 힐링 산업의 시대에 철학의 정공법으로 자기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 실존철학을 전공하고 철학 카운슬링을 연구한 저자가 철학 상담의 목적과 방법을 염두에 두고 이 에세이를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에피소드들을 저자 자신의 경험과 철학으로 풀어낸다. 공감할만한 이야기들과 함께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살지 못하는지, 그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진짜 나’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해 준다.

박은미,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소울메이트, 2013


 

누구에게나 삶은 억울한 것

책의 소제목 중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는 대목이 있다. 한겨울에 꽁꽁 언 음식물 수거함을 뒤지는 고양이에게도, 등록금을 위해 시험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에게도, 불철주야 고생했지만 어느 날 조기퇴직당한 직장인에게도, 삶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기초적인 분배부터 인정욕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억울함을 느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기대치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주지 않는다.” (32쪽)

저자는 세상에 문제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자신이 겪는 일 중에서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누구라도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욕망의 상대성 때문에 행/불행을 느끼는 것은 공평하다는 저자의 통찰에 수긍이 간다.

저자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졌지만 그럼에도 내 의지로 나를,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가 처한 한계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좀 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있는 힘을 다해 그 상황을 수용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태클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나 태클 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비합리적 전제다. 남들은 다 겪는 태클을 나만은 겪지 않기를 바라다니! 그러나 태클 자체가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 태클을 어떤 방식으로 대결해내서 나의 삶을 진짜 나의 삶으로, 정말 내가 주인이 되는 진짜 나의 삶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만 남는다.” (228쪽)

태클을 끌어안고 나아가라는 저자의 이 말은 니체의 운명애를 연상시킨다. 저자 자신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인간을 강한 인간으로 보고, 그 운명을 자신의 발전의 기회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핑계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므로, 운명에 대면하여 초월이나 포기가 아닌 변화를 유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 삶의 방향키를 남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

하지만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해 보려 해도, 왜 우리는 ‘진짜 나’로 사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가? 왜 우리는 살던 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의 경향성도 세상의 문제들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가? 저자는 이처럼 우리를 고통에 머물게 하는 삶의 차원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는데, 그 중 자신의 편향적 시선과 세상의 일률적 시선에 대한 통찰에 대해 알아보자.

편향적 시각이란 사태를 특정한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만사를 자신에게 익숙한 한 가지 각도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편향적으로 인식하면 심리적, 지성적 노력이 덜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향적 시각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왜곡할뿐더러 자신과 연관된 타인과의 관계도 왜곡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자기의 문제는 모자람으로 보면서 타인의 문제는 나쁨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는 한다. 하지만 거꾸로 자신의 문제는 나쁨의 문제로 보면서 반성하고, 타인의 문제는 모자람의 문제로 보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지 않으면 타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기 쉽다.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170쪽)

또한 일률적 시선이란 세계를 세상 사람들이 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부, 성공, 권력 등이 좋은 것의 지표가 된다. 부, 성공, 권력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과한 기준에 맹목적으로 나를 맞추려 하면, 자신을 왜곡할뿐더러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사회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우리가 공허에 시달리는 이유인 즉, 남들의 기준이나 사회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면 타인의 시선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데, 자신이 충분히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인정을 획득하는 데 지나치게 종속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하면서 살면, 즉 자아실현을 하면 타인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264쪽)

저자의 말처럼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내 안에도, 밖에도 있다. 우리 자신이 만든 편향적 시선이든, 세상이 만들어놓은 고정된 시선이든,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으면 자기다운 삶을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따라서 이것들을 넘어서서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진짜 나’로 사는가의 판별기준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 날 묶어왔던, 사슬을 벗어 던진다, 지금 내겐 확신만 있을 뿐”

한 뮤지컬의 삽입곡을 들으면서 그런 순간을 살고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진짜 나’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또한 그 상황에서의 내가 ‘진짜 나’인지 어떻게 확신한다는 말인가?

저자는 ‘진짜 나’는 어떤 고정된 자아는 아니라 과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진짜 나’는 그때그때 나 자신으로 살려는 노력 속에서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짜 나’로 존재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한다.

“이것이 진짜 나다운 일인가, 지금 나의 삶이 진짜 삶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일 죽어도 이 일을 하고 싶은가? 내일 죽어도 오늘처럼 살고 싶은가? 입니다.” (332쪽)

자신이 죽을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 왜 자기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가? 저자는 하이데거를 따라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한계상황을 자기다움을 가장 잘 성찰하게 하는 존재론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어도 그러하겠는가라는 실존의 물음은 삶의 방향을 ‘진짜 나’로 향하도록 바꾸어준다는 것이다. 즉, ‘진짜 나’로 사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진짜 나’로 살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살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온전히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진짜 나’로 살아가려 해도 가까운 사람이 이해해 주지 않거나, 그 반대 상황이면 이러한 과정을 지속하기 힘들지 않은가? 가족이나 연인이 그런 삶을 반대해도 ‘진짜 나’를 쫒아 살아갈 수 있을까? 또한 가족이나 연인의 ‘진짜 나’에는 무심하면서 나만 그렇게 살아도 될까?

저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진짜 나’로 살려면 나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존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네가 서로 ‘진짜 나’의 너, ‘진짜 너’의 나가 되도록 그러한 삶을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야스퍼스의 철학에 근거해 일방적 ‘희생’이나 자신의 편향성에 치우친 ‘투쟁’이 아닌 두 주체간의 ‘사랑하면서의 투쟁’을 역설한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사랑의 과정은 우리 각자를 ‘진짜 나’가 되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그래서 충분히 네가 아닌데 너와 소통하는 내가 충분히 나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랑하면서의 투쟁 속에서 동시적으로만 나와 네가 함께 실존이 될 수 있다.” (315~316쪽)

실제로 부부나 연인이 서로 자신의 삶을 인정해 달라고 하면 갈등이 생기고 다투게 될 것이다. 나를 포기하고 너를 사랑하면 ‘진짜 나’를 희생하게 되고, 너를 포기해서라도 나를 사랑하겠다고 하면 ‘진짜 너’를 희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관계는 적어도 관계의 측면에서는 행복한 삶이 되지 못한다. ‘진짜 나’로 살기위해서는 타자도 그러한 본래적 삶을 사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진짜 나’로 사는 것은 유아론을 넘어 사회적 차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기

누구에게나 자기 마음 하나 챙기기 어려운 날이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나답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거나 달라질 것 같지 않아 내일 아침이 기대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자기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냐고들 하지만, 당사자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면 자신을 상처내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나는 나를 들고 다녔구나”라는 황지우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나를 들고 다니지 말고 놓아주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편향적 인식이나 세상의 인식에 맞추어진 ‘가짜 나’는 놓아주고,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와의 화해 속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의 마음을 가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해지려면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것은 한 번에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마음을 가누는 법을 배우는 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과제라 말한다.

마음에 관한 연구나 산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가 보다. 하지만 내 마음 하나 챙기자고 열 일 제치고 템플스테이로, 상담소로 달려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서로 ‘철학 카운슬링’을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적절한 상황에서 읽는 책은 가뭄의 단비처럼 마음을 평화롭고 쾌청하게 해 준다. 손에 가까이 두고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들춰보면 좋을 책이다.

의사소통은 없다! +와 -만 존재할 뿐! [철학자의 서재]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철학자의 서재]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텐베르크-은하계라는 다소 식상한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 매체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텐베르크 은하계 혹은 인쇄 매체, 선형적 문자 매체 등의 용어가 더 이상 생소하지만은 않다. 이미 마셜 맥루언이나 월터 옹의 매체이론이 널리 알려진 터라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책 제목이 심지어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 그러한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결론만 놓고 보자면 분명 뉴미디어가 과거의 인쇄 매체에 바탕을 둔 구텐베르크-은하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형세를 창출하고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이러한 새로운 형세의 출현 과정을 철학적인 담론을 통해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현란하면서도 현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이론과 관련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볼츠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정작 뉴미디어의 일반적 특성과 관련한 피상적인 언급만 발견될 뿐이다. 심지어 매체철학 혹은 매체미학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조차도 볼츠의 책에 전제된 철학적 담론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저자가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만 잘 읽어보더라도 이 책을 관통하는 커다란 사상적 실타래가 단순히 맥루언이나 옹처럼 뉴미디어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의 첫 부분부터 이 책에 깔린 기본적인 사상적 체계를 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관성 있게 고수하는 입장은 하버마스에 대한 거부감과 루만의 체계이론에 대한 우호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이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의 다소 진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의 밑바탕에 깔린 혹은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철학적 담론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볼츠만을 언급한 이른바 매체철학 연구자들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를 등지고 루만을 선택한 이유는? ? 대화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버마스 사상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이라는 점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비판이론의 계승자인 하버마스에 따르면 개선된 사회란 개방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이며, 이는 달리 말해서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대화란 단순히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이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기초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깔려있다.

현실 사회에서 대화는 얼마든지 왜곡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왜곡과 비이성은 인위적인 산물이다.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왜곡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대화는 이러한 왜곡과 비이성이 제거된 이상적인 대화 상태를 준거점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대화의 모델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화용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볼츠가 보기에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상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적 준거점인 이상적인 대화 상태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서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잘 숙고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족이나 배우자에게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벽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상대방도 자기가 이해한 방식대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란 이러한 믿음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에게 대화란 오히려 대화의 불가능성 때문에 만들어진 가교에 불과하다. 원초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내가 아무리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할지라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루만이 보기에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자체는 블랙박스와도 같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화란 서로 알 수 없는 참여자들 간에 블랙박스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소통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간이 살기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루만이 보기에 이성적인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화이자 소통이라는 하버마스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나 선생과 학생의 대화는 대화의 체계에 앞서서 존재하는 두 이성적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생과 학생이란 가족이란 소통 체계와 학교 제도라는 소통 체계의 산물이며 그 체계를 형성하는 두 항일 뿐이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에 앞서 주어진 주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할 따름이다.
 

이성 혹은 부정성이란 한갓 디지털의 이진법에 불과

 
비판이론 2세대인 하버마스는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 달리 미디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는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오히려 도구화되었으며 20세기 이후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서 하버마스는 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근대 사회에서 오히려 이성의 힘이 공론장을 형성하는 형태로 긍정적인 모습을 취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세계인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나 체계성이 배제될 경우 공론장을 형성하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에 따르면 1세대로부터 2세대에 이르기까지 비판이론을 관통하는 이성의 ‘부정성’이라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에 불과하다.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한 비판이론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지 않고 부정하는 힘이야말로 이성의 위대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사실상 있음에 대한 없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표식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것에 대한 긍정이나 지시를 나타낸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피분석자가 의사(분석가)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경우 그것은 진짜 부정이 아닌 무의식적인 증상을 은폐하고자 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의사에게 그것은 무의식의 징후이자 지시이다. 어쩌면 부정은 레비스트로스가 문화를 탄생시킨 기저를 ‘양항대립’으로 보았던 것처럼 있음에 대한 없음과 같은 이진법의 코드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1960년의 하버마스. 출처: http://blog.ohmynews.com/booking/176852


 
이렇게 보자면 하버마스가 계승하고 있는 그 위대한 전통인 부정이라는 사유의 힘은 궁극적으로 +와 ?라는 양항을 만들어내는 소통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원리일지도 모른다. 선천적으로 이성적 판단능력이라는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에 대한 믿음과 부정적 사유의 위대함은 볼츠의 이 책에서 그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원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상 ?라는 것이 ?가 아닌 +에 대한 대립적 기호이며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인 체계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원래부터 소통 불가능한 것을 소통하게 하는 모순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츠는 화폐라는 것 자체도 소통을 위한 하나의 중립적인 미디어일 뿐 비판이론가들의 주장처럼 이성을 왜곡시키고 생활세계를 뒤틀리게 만드는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화폐 또한 다른 소통체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모순적인 구조를 지닌 소통체계에 불과하다. 볼츠는 화폐란 재화를 잉여와 희소성이라는 모순적인 체계, 즉 잉여라는 +와 희소성이라는 ? 기호에 의한 소통체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재화가 잉여상태에 있지 않다면 화폐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잉여상태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면 화폐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소통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화폐이다. 화폐란 미디어로서 하나의 소통체계를 암시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체계에서 어느 항은 구매자가 되며 다른 항은 판매자가 될 것이며, 어느 항은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되며 다른 항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소통할 뿐이다.
 

디지털의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다

 

러시아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는 슈프레마티즘(suprematism)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말은 흔히 절대주의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의미는 어떤 한정된 대상이 아닌 절대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흰 배경 위의 사각형’이다.

이 고도로 추상화된 화면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흰 배경에 사각형을 그린 것은 말레비치가 자신의 그림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도 묘사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어떤 현실적인 대상을 묘사할 경우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왜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각형은 대상의 말소, 즉 부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상 자체가 없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무일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각형은 어떠한 대상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그러나 현실 대상의 단순한 묘사가 아닌 그러한 대상이다. 따라서 이는 현실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사각형이라는 대상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구성된 대상이며, 말레비치의 캔버스는 구성되고 기획된 세계를 암시한다.

볼츠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를 정확하게 디지털의 세계에 대한 은유로 읽는다. 디지털 미디어는 +와 ?라는 전기신호를 0과 1이라는 기호로 대체함으로써 수많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음을 만들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제 기호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도상적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며, 디지털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처럼 투사되고 기획된 세계이다. 더군다나 이미지나 문자, 소리와 같은 모든 정보가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단위의 알고리즘으로 창출되기 때문에 이 상이한 기호들 간의 인터페이스조차 가능하다. 말하자면 소리신호를 형태로 바꾼다든지 워드 작업된 문서 파일을 소리로 재생하는 것은 이론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워드로 시를 쓰면 그것이 동시에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이 가능하다. 구체시를 추구했던 아폴리네르의 꿈은 오래지 않아 한갓 놀이에 불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뉴미디어의 세계는 이렇게 세계의 재현이라는 인쇄 매체의 패러다임, 즉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인지 혹은 세계의 상실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볼츠 역시 이 책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