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민철(동남보건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에게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고 3에 진입한 1997년 봄쯤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아주 잠깐 꾼 적이 있었다. 입시 관련 책보다는 다른 책을 보고자 동네 구립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손에 잡아든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보잘것없던 내 서재에서 가장 중앙에 꽂아둔 책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전환기를 함께 했던 그 책은 수백 권의 전공 책과 원서에 밀려 책장 맨 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옛날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던 저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마음 속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뻤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나의 사소한 고민을 덜어주길 바랐다. 솔직하게 말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석용산 지음, 고려원 펴냄)식의 통속적인 수양서 내지 에세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사회로의 적응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나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가 신문 논설문과 칼럼으로 잔뼈가 굵은, 한국 언론 운동을 이끌어 온 ‘손석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제안을 담고 있는 냉철한 논설문이다.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질문의 무게감은 꽤나 묵직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 그리고 이를 이끌고 있는 진보 세력에 대해 ‘돌직구’를 던진다.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7대강국’에 진입했다는 찬가가 울려 퍼지던 2012년 6월 어느 날, 달동네 월셋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 수당으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다.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는 참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삶을 부정하는 후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힘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후회들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특히 ‘진보’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꾸던 진보들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저자는 현실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는 진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16쪽)

 

진보를 후회와 패배감으로 옭아매는 몇 가지 프레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가 규정한 진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4월 혁명, 5월 항쟁,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8월 연세대항쟁에 몸으로 참여했거나 마음으로 지지한 모든 사람’을 진보라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진보’다. 저자의 폭넓은 규정 덕분에, 실천력이 부족했다는 과거 선배들의 비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진보를 생각보다 광범위한 범주로 규정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동단결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보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분단체제에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유·평등·자주·평화·복지·생태·인권·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만큼 진보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사회는 드물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진보 운동이 활발하던 그때는 ‘별이 빛나는 시대’였다. 루카치의 저 유명한 문장,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별이 빛나는 시대는 암울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진보가 집권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진보 세력의 집권에 필요한 1200만 표라는 기준은 비정규직 850만 명과 농민 300만 명, 청년실업자 100만 명,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의 유권자로 이미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렇듯 폭넓은 진보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내놓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프레임은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비틀어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이 대다수의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현실 권력에 대한 아집 때문에 2010년 ‘진보 대통합’이 분열로 나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의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이 무산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는 언론 권력의 작동과 연관되며, 두 번째 이유는 정치 권력, 세 번째 이유는 경제 권력의 교묘한 술책과 연관된다. 이른바, ‘철의 3각 동맹’인 정치 권력·경제 권력·언론 권력이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각종 권력 프레임이 진보의 후퇴를, 진보의 멀어짐을, 진보의 패배감을 불러왔다.

일상에 매몰된 진보들에 묻는 또 다른 질문, ‘그 깨끗한 꿈, 무덤까지 가져갈 셈인가?’

 

별이 저물어버린 시대는 별이 빛나는 시대를 살았던 진보 세력 자신들에게 삶에 대한 후회를 가져온다. 저자의 진단처럼 진보의 위기를 지나 진보에 대한 조롱어린 사망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올 줄 모른다. 별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억척스러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월을, 5월을, 6월을, 7~8월을, 8월을 감동과 보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경제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는 대안이 없다며 정치 현실 또는 정치 생활에서 눈 돌리고 경제생활에만 억척스럽게 매몰되어도 좋은가.”(103쪽)

 

이는 젊은 날의 깨끗한 꿈에 대한 자조적인 자포자기이거나, 몰감성적인 외면이다. 저자는 진보의 패배감이 커질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보의 꿈이 포기되는 순간, 나를 포함한 민중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진보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내몰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 된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가 자신의 꿈을 무덤까지 가져갈 듯이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민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원천적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맞아 죽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민을 떠올리면, 오늘 진보정치 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도덕적 나태를 넘어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다. 그런데 과연 ‘나태한 공범’이라는 비판의 과녁은 진보정치 세력만일까? 혹시 모든 진보가 성찰해야 마땅한 자기 가슴의 ‘화살’이 아닐까.” (30~31쪽)

 

그렇다. 저자의 인식은 옳다. 자기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프다. 분명 나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라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70년의 ‘전태일’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진보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전태일’에 무감각하다. 저자가 가슴 시리게 기억하는 고(故) 허세욱·박영재 동지는 2000년대의 ‘전태일’이다. 이렇듯 진보의 무력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잃게 만들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진보는 별을 찾는 마음으로 이 둘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보이는 진보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그러한 애정에 나는 감사한다. 저자는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개인적 무력감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시작은 객관적인 현실 파악과 그에 기반을 둔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그러한 자기반성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진보 세력이 잊고 있었던 문제, 다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대중적인 소통’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수구-기득권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이 쓰는 그것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통은 그네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97쪽)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것은 저자의 두 가지 질문에 호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문(自問)이다. 우리는 무덤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젊은 날의 그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패배감과 우울감을 가져갈 것인가?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더러는 세월의 이끼 탓에 정의롭고 깨끗했던 꿈에 곰팡이가 피거나 아예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에 잠기거나 우울할 일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잊었기에 우울했던 나날에서 벗어나 체념의 곰팡이를 툴툴 털어내고 일상의 정치경제생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옳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38쪽)

그렇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보의 만장(輓章)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부낀다고 해도 우리는 그 상여행렬을 조용히 따라갈 수만은 없다. 나, 나의 어머니, 내 아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가 우리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꿈을 꾸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내 아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좀 더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세상이 되기를. 이제 귓가에 울리는 듯한 저자의 마지막 외침을 딱딱한 글로 전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학습하라, 대안사회를 토론하라, 국민과 소통하라.” 이 땅의 모든 진보들에게 전한다.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을.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진보 위기론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응답과 진보의 내적 성찰을 위한 냉철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및 정책들을 제외했다. 그것이 정의로운 꿈을 꾸었던 모든 사람들과 가슴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와 더불어 한편에 밀어놨던 <신문 읽기의 혁명>을 책장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시금 꿈을 꿀 때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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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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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1분에 100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데 생각은 400단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 300단어에 해당하는 만큼 생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300단어에는 자칫하면 거짓말이 섞여 들어간다. ‘세상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무 못나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너의 실체를 알면 너를 조롱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나 많이 섞여 들어간다.

꾸미기_ST830089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만의 소설을 ‘망집’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의 허상을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식의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자꾸 살피게 되면 인식의 편향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의 인식의 편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의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허상을 덧씌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소망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객관을 객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인식하면서 허상을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저러한 소망으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식이 대박이 나기를 바라다 못해 대박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는 깡통계좌를 차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도 자신만은 그 대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믿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편파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적용된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편향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기고양적 편향이 너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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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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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딱 나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이 괴로움을 일으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그 성향이 그 사람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은 성향일 뿐이다. 다만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되기도 하고, 나쁘게 발휘되기도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해보자.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모두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정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을 넘어서까지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좋게 발휘되면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것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나쁜 성향이란 없다. 성향 자체는 어떠한 경향성일 뿐이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나쁜 특성을 없애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특성 자체가 나의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라서 그 특성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γν?θι σεαυτ?ν그노티 세아우톤)

그러니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은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될 때뿐만 아니라 나쁘게 발휘될 때도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것을 흔히 ‘성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히는 ‘성향을 바꾼다’가 아니라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조절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나의 성향은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되는데 갑자기 그 성향만 딱 빼서 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너의 지방만을 빼서 버려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요구이다. 지방이 나의 몸 전반에 걸쳐 있는데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내 몸에서 지방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지방이 잘 분해되는 음식을 먹고 지방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방이 과다하게 되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지방만을 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칼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부분까지 같이 빠져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아무리 특별한 다이어트 방법이라 해도 지방만 추출해서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하나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성향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좋게 발휘될 때와 나쁘게 발휘될 때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나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나의 성향을 적절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성향이 어떨 때 좋게 발휘되고 어떨 때 나쁘게 발휘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자신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자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성향을 조절하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성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그 성향이 발휘되는 방식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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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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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발현을 통제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나는 잘난 인간이어야 하는데’와 같은 전제에 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며 ‘그래, 나는 이런 전제에 매여 있는 것 같아.’ 하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대하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 나빴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주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만만해보이나?’ 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철학적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바’이다. ‘내가 잘난 인간이어야 한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매이게 되는 전제이다. 그래서 이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제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고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에 더 생각이 매이게 된다. 그러면 객관적 인식과는 멀어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꾸미기_회전_사진 152인식을 객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면서 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내가 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고 저럴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인식의 편향성의 특징을 느껴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경향성을 알고 조절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성격이 팔자”라고까지 하겠는가. 역술에서는 ‘팔자(八字)’로 사람의 경향성을 말하고, 인도에서는 ‘구나(guna, 공덕 또는 덕)’라는 말로 사람의 경향성을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바로 이 ‘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결국은 구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소리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자신의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막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자신의 경향성을 알아야 자신을 가누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좋다. 나의 성향은 문제가 아니다. 나의 성향은 장점으로도 발휘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성향 자체를 문제시하지 말고 성향이 발현되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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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오지석 (루터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곳”?!

 

1983년 한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고 계층 이동이 열려있다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흡사 미국을 향해 이민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아메리카 드림’을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에 이어 제5공화국 시절 우리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그렇다보니 아네트 라루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회 계층이라는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개인이건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는 개인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노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스펙 쌓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귀족 인맥 쌓기’에 내모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삶의 경험과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부와 지위의 불평등이 사회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이유, 다음 세대에게 갖고 있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세습’ 또는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한국 사회가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 속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세습 또는 대물림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핏줄’을 통한 전수라고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주장하며, 자식의 경쟁자들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대물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한다. 전통 사회에서 세습이라는 말 자체는, ‘왕권 세습’에서 보듯이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재산 세습은 특별히 ‘상속’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세습은 혈연, 지연, 학연 각각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같은 방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핏줄에 의한 세습, 대물림이다. 우리말에서 ‘대물림’, ‘세습’, ‘상속’, ‘전수’, ‘사사’, ‘물려주다’의 용례를 살펴보다보면 ‘~을 에게’, 혹은 ‘~에(에게) ~을’이라고 나온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것이 삶의 목적 또는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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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라루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특히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계층 및 불평등의 대물림 문제를 들여다본다.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를 이끄는 지배 및 불평등의 패턴에 주목한다. 또한 개인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 혹은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러한 특권의 세습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나 특권은 자신의 지능이나 재능 또는 노력 같은 역량을 통해 자신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의 결과물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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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루는 이 책에서 교육을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라는 방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활동, 언어 사용, 가정생활과 공공기관이라는 분류에 따라 아홉 사례를 소개한다. 각각 등장하는 사례를 읽다보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책은 학교 또는 교육기관의 정보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중산층과 그렇지 못한 노동자 및 빈곤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녀의 스케줄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중산층 부모들, 이와 반대로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익숙한 노동자·빈곤층 부모들을 마주하다보면 유럽과 같은 자녀 양육 수당이라든지 무상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하면 조선시대부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탄압하거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 쉽게 사용했던 패턴을 통해 ‘자기검열’ 하게 하는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습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에 필요를 요구하고 공급받기도 한다. 아네트 라루는 자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에 주목한다. 자녀와의 언어생활을 보면 계층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가령 중산층은 자녀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정에서 제공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준비를 갖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거나 협상하는 법을 숙지해나간다.

 

이에 비해 노동자 및 빈곤층의 언어생활은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 제한적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타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가족의 삶에서 언어란 논리적 대화 기술이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학습 수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의사 전달 수단의 역할만 하고 있다. 중산층의 언어생활과 노동자 및 빈곤 계층의 언어생활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간극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계층,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상생,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경쟁’이라는 말이 익숙하고 그것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 계층 사이의 이동이 상당히 얼어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 세대(70세 이상)가 아직도 믿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단지 드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 실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이런 물음에 한국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도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앞에 그리고 학원 앞에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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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몰입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 이동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경제력을 집중한다. 하지만 이것도 부모 자신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노동자, 빈곤층일 경우 누구라도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대물림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누군가에게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사회를 지양하고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까? 이런 물음을 남기고 아네트 라루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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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출신 가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그 개인이 인생에서 겪게 될 일이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 계층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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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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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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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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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꾸미기_유럽2013.01 478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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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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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크기변환_꾸미기_DSCN0697“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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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2월 월례발표회]

?[2014년 2월 월례발표회]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

 

발표: 김은주(동덕여대)
후기: 김범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년 2월 26일. 한철연에서는 <들뢰즈의 행동학과 되기 개념의 실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의 논문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지금 시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매우 훌륭하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 코스프레와 함께 코드화된 폭력만 잘 활용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물론 취임 1년 후에도 안정적인 지지율 50%도 가능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 참으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위대하다. 또한 이런 사건도 기억해 볼 수 있다. 어떤 여성은 어머니의 심정(엄마 코스프레?)으로 회사의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시대에 여성되기는 오히려 구조적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코스프레가, 이런 어머니가 여성-되기일까?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여성-되기라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뢰즈의 행동학, 특히 되기의 문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라는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가짐과 문제의식으로 들뢰즈의 행동학을 해석하면서 여성되기의 가능성을 연구한 성과를 정리하는 김은주 선생님의 2월 발표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치부터 심상치 않았다. 2시간을 훌쩍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중주가 넘실거릴 수 있는 배치였다.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태도로 철학을 접근하는 사람들과 늘 대립각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늘 한편에서 조용하게 혼잣말을 한다. ‘문제제기부터 잘못됐어!’ 발표자인 김은주 선생님(이하 발표자로 명한다.) 오른쪽에는 가따리 전공자가, 반대편 왼쪽에는 여성철학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한 분이 앉았다. 이런 배치는 오묘한 이중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긴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표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윤리적 작업은 규범을 따르는 의무의 논리에서 벗어나, 힘을 실행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논의를 ‘~해야만 하는 바’라는 형식적 보편타당성을 따르는 자율적 의무의 입각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비판과 구축의 작업으로 접근한다. 그의 입장은 도덕을 비판하는 니체를 계승하고, 존재의 역량(puissance)으로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재단된 삶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생성해내는 행동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 서영화

ⓒ 서영화

문제 설정부터 많은 설명을 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표에서는 니체의 선악비판보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특히 신체의 역량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서 행동학의 의미를 접근했다. 발표 후 토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체의 의미부터 보충설명하고 싶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신체, 동물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신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제자인 일본 철학자 우노 구니이치는 corps(신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쓰는 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근대에서는 신체에 대해서 심과 신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피노자나 니체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나 심층적 의식의 지위를 신체 개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신체는 변이의 힘을 갖고 있는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발표자의 경우에는 이를 신체의 역량을 변용과 변용능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정의하면서 역량 강화의 윤리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생성하는 되기의 개념을 힘들(초기 존재론에서는 강도로 설명한다)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고 설명되는 지평으로 나아간다.

발표자는 이런 정리를 한다. “신체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경도는 신체들 간의 관계를 제시하며 신체들의 결합과 합성을 의미하는 변용(affection)이다. 위도는 한 신체에 있어서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강도적인 변화 상태와 그 정도를 보여주는 정동(affect)이다.” 그리고 이 정동은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개체성, 즉 이것임(hecc?it?)으로 나타난다. 이것임은 원래 둔스 스코투스 학파가 존재들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haecceitas에서 유래한다. 들뢰즈의 경우 이 개념을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하는데, 사건은 인칭적인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개체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임은 정동을 통해서 신체를 조성하는 생산하는 되기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발표자는 되기(devenir)의 의미에서 신체 결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즉 되기의 블록(bloc de devenir)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성으로 발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체화가 가능한 심층적인 접힘과 펼쳐짐을 해석할 수 있다. 발표자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할 수 있는 이중 포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되기 개념이 실재의 변화 ‘과정’이며 ‘상호 변용’의 결합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 안에는 신체의 역량 강화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여기서 비롯되는 의지적 주체의 도덕을 비판하는 함의가 깔려 있었다.

이 설명 안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되기가 마치 상대주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는 비판의 날이 설 수 있다. 특히 되기가 어떤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들뢰즈의 되기가 막연하게 신체적 역량 강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적 역량 강화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서 발표자는 되기의 구체적 실천의미를 정리했다. 되기는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벗어나서 그 구분의 경계를 횡단하고, 다수의 권력 지점이라는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적인 것의 되기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 방식에서는 자아 중심적 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고 도처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익명적 ‘아무개’로서 윤리 정치적 존재론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정치존재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합의체(합의라는 신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주어진 수동적인 역량, 혹은 이미 주어진 절대적 권력 앞에서 복종 대신에 도주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여성되기에 해당한다.

도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대체 나만 왜 이런 거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①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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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대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다. – 에픽테토스

 

Epictetus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도대체가 “내 인생은 살만해요.”, “내 인생은 유쾌상쾌통쾌해요.”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매일 나만 이 모양인 것 같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 남들은 다들 어려움도 없을 것 같고 인생이 나처럼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며 살지만 나의 부러움을 받는 그 사람은 또 자기 속을 몰라서 그런다고, 자신의 인생을 소설로 쓰면 10권도 넘을 것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았던 그 사람도 세세한 사정을 들어보면 사연이 만만치 않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상대방의 하소연을 들을 새도 없을 만큼 바쁘게 살면서 나만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기구절창하다. 차마 그런 사연들을 일일이 얘기하기 싫고 꺼내 보이기 싫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알면 “그런 사정이 있었어?” 할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살면 살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이 “날자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구절을 읽으며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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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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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려운 삶을 살아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 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경우도 많다.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매학기 평균 150명의 학생의 인생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학생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자신의 인생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학생은 150여 명 중에 한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의 성격상 어떤 편향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문제가 없는 유쾌상쾌통쾌한 삶이라고 하는 사람은 2%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10여년 동안 2천여 명의 이 시대 대학생들의 삶을 만난 나의 결론이다.

우리 모두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각자의 사연은 모두 소설로 10권이 넘는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으로는 별 일 아닌데도 본인이 너무 꼬아 생각해서 어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겪어낼 수 있었을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문제가 전혀 없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자랑하는 연예인들도 생각 외로 어려운 일을 겪어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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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유쾌상쾌통쾌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은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차라리 그런 사람을 보아야 기운이라도 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배가 아플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저 인간은 뭐가 잘나서 저런 거야?’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때로는 “당신도 그래요?”라고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당신도 당신의 삶이 힘드세요?” 혹은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들 살아내고 계세요?”라고 소리 질러 물어보고 싶은 심정,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 쯤은 겪어본 그런 심정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억울하다. 이랬으면 좋겠는데 저렇고, 저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학점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 어느 정도는 되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항상 그에 못 미친다. 그 ‘어느 정도’가 사실 그렇게 욕심 부리는 수준도 아닌 것 같은데 내 인생은 그 정도도 되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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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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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했는데도 원하는 게 얻어지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얻어낼 만큼 노력하지 않고서도 결과는 좋기를 바라는 것인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한다. 이 말이 그렇게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 말이 ‘거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심지 않았다는 것’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지금의 결과가 다소 억울하더라도 혹시 네가 충분히 원인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살펴보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생이 풀려가지 않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가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계속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내가 오늘 겪게 되는 일 중 내가 원하는 것은 첫 번째 일의 경우에는 5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두 번째 일의 경우에는 2가지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이고, 세 번째 일의 경우에는 3가지 가능한 결과 중의 하나이고, 네 번째 일의 경우에는 4가지 중의 하나라고 하자. 그러면 연이어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1/5X1/2X1/3X1/4’, 즉 1/120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내가 원하는 일들로만 나의 하루가 채워지는 것은 상당히 낮은 확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굵고 짧게 살아.”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굵고 길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굵고 길게 살고 싶지만,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굵으려면 짧을 수밖에 없고 길려면 가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던 것이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은 확률상 너무 낮은 일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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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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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방송이나 일기예보 방송을 하는 리포터들은 끝인사로 “좋은 일만 가득한 하루 되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라는 사태기술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확률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의 조건 상 ‘좋은 일만 가득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이라는 규정이 자꾸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4천만 원의 연봉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3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고 5천만 원을 받던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다. 그러니까 항상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일어난 일보다 좋아야 우리는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좋은 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스파게티를 먹어도 처음에는 7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맛있게 느끼지만 7천 원짜리 스파게티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맛이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면서 1만3천 원 정도 하는 스파게티여야 맛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비싼 스파게티를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수입이 수십억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비싼 외제 자동차도 몇 대씩 가지고 있고 집도 몇 채이고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요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입에 맞는 식사를 할 수 없고 마음에 맞는 상품을 구매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차는 이 측면은 마음에 드는데 저 측면은 마음에 안 들고, 이 집도 이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제발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 그 사람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그 사람에게 완벽한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쾌락의 역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화이다. 쾌락의 역설이란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오히려 불만족이 커진다.’는 역설을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데 결과는 불만족이기 때문에 역설이라 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현실에서 쾌락을 얻어내는 속도보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설이 생길 수밖에 없다. 37평 아파트를 얻기 위해 돈을 버는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42평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속도는 아주 빠른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이 차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으니 쾌락의 역설이 일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바다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메우려 들면 메울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기 때문에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 없음을 충격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대학생들이 핸드폰을 자주 바꾸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한 번 물은 적이 있다. “핸드폰을 바꾸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가요?” 나는 그래도 “한 달”이라는 답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어떤 학생이 대답했다. “사흘이요!” 세상에나! 겨우 사흘을 만족시키자고 그 돈을 들인단 말인가!

그래서 쾌락의 역설에 주목한 철학자들은 불만족을 줄이려면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속도보다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욕망이 늘어나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쾌락주의인데 실제의 내용상으로는 금욕주의에 해당하는 그러한 쾌락주의가 있는 것이다.

여하간 이 일화를 듣고 더 좋은 물건을 가지고 싶으면 ‘그래, 돈 열심히 벌어 저거 사자!’ 할 수 있는 서민이 더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 말한 사람처럼 더 이상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것보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은 그냥 일어나는데 인간의 인식 구조로는 그 일이 반드시 그 이전에 일어난 일보다는 좋아야 ‘좋다’고 규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낄 때 ‘좋다’고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이 순차적으로 이전보다 좋은 일로만 연결되는 것이 확률상 아주 낮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일/나쁜 일’의 규정은 너무나 주관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은 나쁜 일이 있어야 좋은 일을 ‘좋은 일’로 인식할 수 있다. 병에 걸려야 건강이 좋은 일인지 알게 된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건강은 기본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졸중에 걸리기 전에는 스스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뇌졸중에 걸리고 나면 자기 발로 화장실에 가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좋은 일이다.

우리 아이에게 일어난 일도 이러한 문제를 잘 드러내준다. 처음에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을 때 아이는 비록 그것이 이미 18만 킬로미터를 뛴 중고차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아빠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면 “우와! 차 타고 간다.” 하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제는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않는 것을 불행해했다. 자동차로 편히 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동차로 갈 수 없는 것을 불편해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은 그렇게도 적응이 빠르다. 좋은 것에 적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나쁜 것엔 노력해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사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빠가 시간이 될 때는 데려다주고 시간이 되지 않을 때는 데려다주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데려다주는 경우에 행복을 느끼더니 얼마되지 않아 데려다주지 않는 것에 불행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인식 조건에서는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는 무척 공허한 말인 것이다. 아무리 행복한 일들이 쌓여도 인간은 거기서 더 행복한 일과 덜 행복한 일을 나누고는 덜 행복한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그래서 조상님네들이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지도 모르겠다. 아래를 보고 살라는 속담은 ‘덜 행복한 일’을 곧 ‘불행한 일’로 등치시켜버리는 인간의 인식의 편향성을 교정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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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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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인간은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은 일만 많은 것 같은데도 그 중에 덜 좋은 일을 두고 불평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우매한 짓을 하지 않으려면 늘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인간이 고도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강아지는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그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불행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문제가 없이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 중 가장 덜 좋은 일을 불행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불행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는 신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문제에 시달리든 주관적으로 문제를 만들어내서 문제에 시달리든 여하간 문제에 시달린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으니 말이다.

재벌은 재벌대로, 유명인은 유명인대로, 인기 있는 연예인은 연예인대로 그 나름의 어려움을 겪어내며 살아내고 있다. 누구나 ‘누가 내 속을 알까?’ 하면서 한숨 쉬며 살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재벌은 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민하는 돈의 단위가 다를 뿐이지 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수준에서 고민을 한다면 재벌은 몇 천억 원대로 고민을 할 뿐이다.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해주고 친절해도 자기에게 친절한 건지 자기 돈에게 친절한 건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자주 보듯이 형제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앞에서 엄청난 불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관계가 주는 만족감을 통해서인데 돈 때문에 관계로 인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상당한 불행이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큰 문제없는 평범한 인생도 있다. 이들 중에는 불행의 능력을 상당히 줄인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대체로는 인생에서 각자가 겪어내는 고통의 수위는 그렇게 차이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또 자신이 인생이 너무 밋밋하다고 힘들어한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을 살펴보면 인생 자체는 그리 굴곡지지 않았어도 본인의 마음이 볶아쳐서 그런 굴곡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생이 정말 굴곡져서 누가 봐도 입벌어지게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는 잘 견뎌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주관적으로 각자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수위는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인생이 힘겹다는 것, 그 점만큼은 정말이지 공평한 것 같다. 남의 인생, 모른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벼울 것이라고 함부로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남의 인생이 부럽다면 질문해보자. ‘그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인생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 다만 잘 겪어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힘들게 겪어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몰라서 그렇지, 너만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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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에릭 슐로서의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철학자의 서재]

선우현 (청주교육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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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가격에 양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세상, 정녕 좋아진 걸까?

예전만 해도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선, 명절이나 잔칫날에나 겨우 맛볼 수 있었던 ‘귀한’ 먹거리가 바로 ‘고기(육류)’였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한우 정도면 모를까 수입산을 포함하면,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온 가족이 양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소고기 등심구이다. 돼지갈비와 삼겹살도 직장 회식이나 친구들 간의 모임에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흔한 먹거리가 된지 오래다. 치킨 또한 전화 한 통이면 콜라와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대표적 야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오늘의 풍요로운 현실에 대해, 그 옛날 보릿고개를 겪으며 배고픔의 설움을 경험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거참, 세상 좋아졌다!”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 즉 신자유주의로 새로이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가?

햄버거무서운이야기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에릭 슐로서?찰스 윌슨 지음, 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 ⓒ모멘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넘쳐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증적 현상’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핵심적인 내용을 온전히 전달하면서도 쉽고 재미있게 서술된 에릭 슐로서(Eric Schlosser)의 귀중한 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던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Chew on this)>(노순옥 옮김, 모멘토 펴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슐로서는,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이는 표면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참깨가 박힌 빵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9쪽)고 역설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널리스트가 아닌 예리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철학자로서의 슐로서를 엿보게 된다. 왜? ‘철학(함)’이란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현상 배후에 있는 ‘실체적 본질’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고기며 햄버거며 풍족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행복한’ 세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슐로서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푸른 초원 대신 ‘똥 무더기’ 위에서 사육되는 가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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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먹거리 가운데 하나는 단연 햄버거다. 물론 어른들이 먹기에도 꽤나 맛있다. 게다가 언제든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싼 가격에 간편하게 한 끼를, 그것도 맛있게 때울 수 있는 편리성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잠시 입을 호사하도록 해주는 햄버거 속에 들어 있는 고기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상태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 이 패티 뿐 아니라 주변에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고기들은 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식탁에 오른 걸까?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기를 제공해 주는 가축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가축하면 우리는 흔히 ‘푸른 초원에서 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장’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적어도 미국과 같이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난다. 실제로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은, 오직 더 많은 고기 생산을 위해 운동을 제한당한 채 특수 사료를 먹여 단기간에 살이 찌도록 의도된, 목장이 아닌 엄청난 규모의 ‘비육장(肥育場)’에서 판매용 고기 상품으로 제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들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며 신선한 풀을 뜯는 게 아니다. 도살되기 전 3개월 동안 소들은 (…) 특수곡물을 먹는다. 피부 아래 미리 이식한 성장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소를 빠르게 살찌우도록 설계된 곡물이다.”(151~152쪽). 온갖 오물과 배설물, 죽은 소들의 사체까지 있는 비육장에서 소들은 오직 먹기만 한다. 운동은 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똥 무더기 속에서”(177쪽).

?치킨용 닭들의 삶 역시 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좁은 공간에 엄청난 수의 닭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먼지와 깃털, 병균으로 득실대는 환경 속에서, 오직 식용으로 적합한 크기로 살찌우게끔 먹고 또 먹는 삶이 지속될 뿐이다. 그것도 “첫날과 마지막 날을 빼고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160쪽) 못하는 겨우 40일 동안의 삶이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생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직 살찌우기 위해 먹는 삶으로 인해 “다리는 체중 때문에 구부러지고 체액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기”(161쪽) 때문이다.

그러나 가축들의 고통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사육장이나 비육장을 떠나 도축되는 과정에서도 그것은 계속된다. 가령 닭들을 도살 처리하는 도계장(屠鷄場) 내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닭들은 거대한 도계장에서 도살되는데, 빠르게 움직이며 수천마리의 닭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체인에 다리가 묶여 거꾸로 매달린다. 부품을 끼워 맞추는 자동차 공장의 조립라인과 달리 현대식 도축장의 생산라인은 해체라인이다. 죽이고 재빨리 분해한다.”(162쪽)

하지만 이처럼 무시무시한 도계 시설에서 도살되는 것은 그나마 고통이 덜한 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잔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슐로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닭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일꾼들이 닭의 다리를 일일이 잡을 시간이 없다. 그러면 머리 위 체인에 매다는 대신 일꾼들은 남은 닭을 벽에다 집어던진다. (…) 여전히 꽥꽥대며 퍼덕이는 것도 있다. (…) 짜증 난 일꾼이 닭 위에서 뛰며 짓밟거나 잡아서 벽에 다시 던진다.”(164쪽)

ⓒ 오마이뉴스, 최병렬

ⓒ 오마이뉴스, 최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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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적 살처분’이란 미명하에 자행되는 ‘가축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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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사람들에게 싸고 영양가 높은 맛난 고기를 제공하는, 고마운 존재인 사육 동물들이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공포, 괴로움은 제대로 포착되기가 어려웠다.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사육장이나 도축장의 실태는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는, 가축들이 겪는 야만적인 학대의 실상을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세히 목격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구제역이나 조류 독감으로 인해 수백만 마리의 돼지와 소, 닭과 오리가 살아 있는 상태로 생매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소위 ‘살처분’을 들 수 있다. 가축 학살 동영상을 통해 드러난, 구덩이 속에 내던져져 울부짖는 채 생매장 당하는 돼지들의 참상은 그야말로 가축 판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한데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조류독감으로 인해 전국에서 닭과 오리가 또 다시 살처분 당하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비(非)생명윤리적인’ 만행이 재현되고 있다. 그 수가 무려 380여 만 마리! 정녕 이래도 되는 걸까? 그것들은 엄연히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닌가? 과연 그러한 가축들을 한갓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먹거리 상품’으로 간주하여, 경제적 손실을 줄인다는 이유로 그처럼 임의로 살처분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나 한 걸까? 설령 도축이나 살처분을 당하는 경우에도, 동물의 입장을 고려해 고통과 두려움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들은,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고 사용하다 쓸모없거나 경제적 손실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전자제품처럼, 대규모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생산되어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동물들이 지닌 생명이나 그것들이 느낄 공포나 두려움, 아픔이나 고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도 그것들과 똑같이 느끼고 의식하는 ‘동물’인데도 말이다.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도축장 내 노동자 세상

도축장은 사육 동물들에게도 무섭고 고통스럽지만, 작업하는 인간들에게도 끔직하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정글’처럼 야만적인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판치는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은 이미 100여 년 전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업튼 싱클레어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다. 그 일부에는 “일꾼 하나가 사고로 큰 통에 빠져 라드, 즉 돼지기름이 되어버린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얘기도 있다.”(166쪽)

?문제는 지금도 도축장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에서 비롯된 비윤리적인 정글의 세계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정육회사들이 패스트푸드 업계의 필요에 맞추느라 대형화하면서 임금을 깎기 시작했다. (…) 그리고 생산라인의 속도를 올렸다.”(168쪽) 소를 해체해 진공 포장육으로 만드는 생산 라인의 속도는 도축장을 두려움과 공포, 고통의 소굴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럼 왜 라인은 그처럼 빠르게 움직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속도가 빠를수록 회사의 수익은 커진다.”(171쪽) 분당 7마리 정도의 큰 소가 생산라인으로 보내지면 일꾼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을 자르고 저며 낸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생명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의 ‘직업안전위생관리국’이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고기 가는 기계에 팔이 끼여 죽고, 컨베이어에 머리가 부서져 죽기도 한다. 암모니아 유출로 한 명이 죽고 여덟 명이 다치기도 했으며, 가축을 기절시키는 스턴총에 죽은 사람도 있다.”(169쪽)

하지만 노동자들은 부상이나 죽을 수 있는 위험 사태에 대해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다. 정육회사들은 그들을 “경고 없이 아무 때든, 무슨 이유로든 해고할 수 있다.”(172쪽) 멕시코 등에서 갓 이민 온 ‘불법 체류자’가 작업장 인부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부양할 가족이 있는 그들의 처지에서 불평이란 곧 “모든 것을 잃을”(172쪽)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알겠는가? 우리가 식탁에서 맛나게 먹는 고기는, 도축 작업장 내 인부들의 목숨 혹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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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광우병과 ‘O-157: H7’ 대장균: 가축의 역습 혹은 복수?

이제껏 아무 생각 없이 맛나게 먹었던 고기가, 가축들뿐 아니라 사육하고 도축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의 대가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과 희생은, 고기를 먹는 우리들에게 또 다시 전이된다. 이름 하여 ‘사육 동물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맛난 고기로 인해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는 대표적인 예로는 ‘인간 광우병’을 들 수 있다. “값이 싸게 치이는 단백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소’, 즉 “도축장에서 나온 부스러기 쇠고기와 피를 소에게 먹였던”(218쪽) 탓에 새로이 등장한 치명적인 불치의 병인 인간 광우병은, 한 순간의 고기 맛을 보기 위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해야 하는 극도의 위험성과 두려움을 우리 인간들에게 고스란히 안겨 주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넣은 광우병보다 ‘현실적으로’ 한층 더 위험한 것은 치명적인 ‘장출혈’을 일으키는 새로운 대장균 “E. 콜리 O-157: H7″(174쪽)이다. 실제로 이 병원균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 수만 해도 인간 광우병의 그것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에 의하면, 해마다 자국 내에서 대장균 O-157: H7에 감염되는 사람은 대략 7만 3000여 명이며 그 중 61명이 사망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경우, 적지 않은 수가 제대로 익히지 않은 햄버거 속 고기 패티에 들어 있던 대장균으로 인해,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며 내장 기관에 수많은 구멍이 뚫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음에 이르렀다. 로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로렌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병원에 입원해 엄청난 고통과 세 번의 심장발작을 겪은 후 1992년 12월 28일 엄마의 품에서 죽었다. 겨우 6살이었다.”(174쪽)

그런데 이처럼 그 정체를 파악키 어려운 치명적인 병원균의 출현과 확산이 이루어지게 된 근본 원인은, 대규모 축사와 거대 도축시설을 갖춘 기업화된 ‘공장식 축육(畜肉) 생산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장균 O-157: H7만 해도 그 병원균의 서식지는 ‘소의 위장’임이 밝혀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축의 대량 사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소는 반추동물로서 위가 4개이며 ‘풀’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초식 동물이다. 방목하는 소들은 기계적인 되새김질과 위 속 세균의 작용으로 풀의 섬유소를 완전 소화하여 흡수한다. 그러나 대규모로 생산된 ‘옥수수’의 80% 이상을 가축 사료용으로 전용하고 있는, 기업화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방식은, 소들이 수천 년 동안 먹어 본적이 없던 새로운 사료, 즉 ‘죽은 소’ 사체의 육골분을 섞어 단백질을 보충한 옥수수 사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인간 광우병의 출현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소장에 남아 있던 옥수수가 발효하여 장내 미생물을 ‘악산성의 걸쭉한 액체’로 변질시켜 대장균 O-157: H7이 증식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그 결과 도축된 고기나 배설물 등을 통해 해마다 미국 내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그 중 수십 명을 사망케 하는 무시무시한 사태를?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방질 많은 맛있는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즐기기 위해, 우리 인간은 풀과 건초로 사육해야 할 초식동물인 소에게 비육을 위해 과도한 옥수수 곡물을 제공하고, 초식동물에 맞지 않는 동물성 사료를 공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른 대가로, 미쳐 날뛰는 ‘식우종(食牛種)’을 출현시켜 생태계 질서의 붕괴를 자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광우병’의 등장과 가공할 대장균의 출현 및 무차별적 확산에 따라 인간 종(種) 자체의 보존이 위협을 받게 되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 사회’의 등장을 우리 인류는 현재 맞이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말이나 휴일이면 동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아빠 엄마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 세트를 맛나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이 미소 짓는 모습에 다시 또 행복해 하는 부모들의 모습! 참으로 보기 좋고 흐뭇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닌가? 단 돈 몇 천원에 맛난 한 끼 혹은 간식으로 그처럼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여기까지다. 그처럼 웃음꽃 가득한 정경의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사육 동물들과 사람들의 희생과 아픔, 고통과 좌절 그리고 너무나 슬픈 ‘이별’이 자리하고 있다. 고통 없이 사육되고 도축될 최소한의 ‘동물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는 야만적인 거대한 공장식 육류 생산 시스템, 생명체가 아닌 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한갓 ‘상품’으로 취급되는 사육 동물들의 비애, 철저히 ‘돈의 논리’에 의거해 멀쩡히 살아 있는 가축들이 수백만 마리씩 생매장 당하는 반(反)생명윤리적인 비극적 참상, 살처분 작업에 참여한 관련 공무원들이 겪는 끔직한 정신적 트라우마와 후유증,?소수 대기업이 독점한 기업형 고기 생산 방식으로 인한 수많은 축산농가의 몰락과 좌절, 도축장 내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횡포와 수탈 그리고 희생, “노조를 모르는”(84쪽) 햄버거 매장에서 거의 착취 수준으로 부림을 당하는 10대 청소년 종업원들의 환멸과 좌절, 끝으로 순간의 맛과 미소, 행복 뒤에 닥칠지 모를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 그리고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

이러한 실체적 진실에 접하여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슐로서에 의하면, 정부나 의회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와 그들의 공급업자들이 지닌 정치적 힘은 의회가 할 일에 대한 논의를 대부분 무의미하게 만들기”(229쪽)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요구를 지닌 더욱 막강한 집단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 “소비자들이다.”(229쪽)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극복 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 일차적 실천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며 그 주도권 역시 ‘궁극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이 점을 슐로서는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진정한 변화를 향한 첫 걸음은 아주 쉽게 내디딜 수 있다. 사 먹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푸드 회사들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으면 된다. 음식 값으로 쓰는 한 푼 한 푼은 투표할 때의 한 표와 같다. 어떤 회사의 제품을 사는 것은 그 회사의 정책과 행동에 지지표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229쪽)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구보 씨라는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그런데 제목이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이다. 박태원의 구보 씨, 최인훈의 구보 씨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알던 구보 씨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냥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도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다.고리타분한 얘기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만큼이나 꽤 잘 읽힌다. 물론 구보 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가끔 말이 늘어져 졸음이 오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Y라는 여성이 어김없이 나타나 구보 씨에게 독자의 생각을 속 시원히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철학자 구보 씨는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만 길게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Y의 돌직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구보 씨는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아마 독자들은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구보 씨와 Y, 구보 씨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소통, 뱀파이어, 크기, 사회, 철학 등 그가 일상에서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당연하다. 일상은 주제 따위는 상관없이 마구 포착되고 또 버려지기도 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통해 구보 씨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엿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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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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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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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철학자의 서재]

 

박정하 (성균관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데카르트, 그는 누구인가?

데카르트는 17세기 초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 혹은 ‘근대성의 아버지’라 불린다. 데카르트가 산 시대는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 시대는 중세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근대라는 새 시대가 탄생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던 격변기요 과도기였다. 사회적으로는 종교 개혁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종교 세력이 복잡한 갈등 속에서 30년 전쟁(1618~48)을 치렀고, 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태에서 고통 받던 시대였다. 사회가 불안했기 때문에 신비주의와 미신이 널리 퍼져 정신적으로도 혼미한 상태였다.

르네 데카르트(Rene-Descartes, 1596~1650)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 전쟁터에 뛰어들기도 했고 세상을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방랑 생활도 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세상 온갖 일의 허무함, 무의미함을 느끼고, 혼자 숨어살면서 오직 진리 탐구를 위해 일생을 바치려고 노력했다. 그런 진지한 삶의 역정을 겪은 끝에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떠올라, 길 잃은 나그네처럼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세의 낡은 사고방식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주체의 확립’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근대성의 기초를 닦고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였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 사상의 주제들을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어서 그의 사상 전체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방법서설>의 제4부에서만 간략히 다룬 철학의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이고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는 책은 1640년에 나온 <성찰>이다. <성찰>에 대해서는 당시 중세 철학을 고수하던 철학자는 물론이고 중세 철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철학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가세하여 열띤 찬반 논의를 펼쳤다. 이론적인 반박만이 아니라 무신론과 신성 모독죄로 공공연히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겪으면서 데카르트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2.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

 

▲<방법서설>(르네 데카르트 지음, 최명관 옮김, 서광사 펴냄). ⓒ서광사

 

이 책들에서 데카르트는 근대성(modernity)의 아버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이다. 흔히 중세의 신(神)중심주의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로 넘어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때 ‘인간’은 개인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서양 고대도, 특히 그리스의 사상도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인간은 사회에서 독립된. 사회 이전에 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는 공동체적 인간이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안에서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충족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폴리스에서는 좋은 인간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흔히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는 정확한 의미를 따지자면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은 이러한 공동체적 인간, 즉 공동체 속에서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받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으로서의 원자적인 인간이 먼저 있고, 사회는 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 사회가 개인에 의해 의미 부여되는 것이다. ‘사회 계약론’이라 부르는 근대의 주류 사회철학 이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평가받는 칸트는 근대 주체의 모습을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계몽이란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의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신체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 등으로 인하여] 이성의 결핍 자체에 있을 경우에는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의 표어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즉 ‘과감하고 지혜롭고자 하라!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어떤 다른 권위나 힘의 강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율적인 근대 주체의 모습이다. 결국 주체를 주체이게끔 만드는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이성인 셈이다.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주체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은 각 개인이 바로 이렇게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립했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렇게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스스로 사용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바로 데카르트는 근대성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초판본(1637) ⓒgreenbee.co.kr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양식(良識, good sense)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으로 양식을 가지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 바로 양식 혹은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나면서부터 평등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확립을 선언하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가지고 이에 기반해서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이 사실은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시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상식이란 개념은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이야 너무 일상화되었지만 근대 전체를 떠받드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사실 중세까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세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토대 중에 하나가 인간은 날 때부터 능력을 다르게 타고나기 때문에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봉건 귀족 계급은 이성을 갖추고 양식을 타고난 계급이기에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노 계급은 이성을 갖추지 못한, 따라서 양식을 갖추지 못한 계급이기에 배워도 소용없고, 봉건 귀족의 지도와 지배를 받아야 하는 계급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양식 여부에 따라서 신분을 나누던 시대의 끝자락에서 데카르트는 혁명적 선언을 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양식을 갖추고 있다”라고. 이는 중세 신분제에 대한 마지막 진혼곡을 울리는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선언 이후 근대 사회는 이른바 상식에 근거한 민주주의를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사실 근대 초까지도 많은 정치철학자는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이른바 ‘중우(衆愚) 정치’를 초래한다는 이유였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데 그러면 어리석은 대중이 머릿수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다 이성을 갖추고 이를 스스로 사용하는 자율적인 주체라는 데카르트식 생각이 확보되면서, 그렇다면 다수가 찬성하는 쪽이 올바른 판단에 가까울 것이라는 결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저 선언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 방법적 회의

이러한 데카르트 사상의 핵심이 잘 응축되어 있는 책이 바로 <방법서설>이다. <방법서설>은 아주 짧은 책이다. 정식 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모든 학문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이다. 6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언뜻 엉성하고 치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상 전체를 쉽고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는 책이다. 또한 이 책은 데카르트가 과학과 철학의 전문가들보다는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쉽게 쓴 책이다. 당시에 학자들은 책을 쓸 때 어려운 라틴어로 썼는데 그는 이 책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썼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학자들이 한문으로 책을 쓰던 조선 중기쯤에 한글로 쓴 격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데카르트 자신의 말에 따르면 학문을 잘 모르는 부인네들조차 무언가 깨달을 수 있도록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데카르트가 이 책을 통해서 제시하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정말 대담하고 야심만만하게 철학의 기초를 새롭게 놓으려 했다. 그는 중세와 근세의 건널목에서 길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하고 있는 철학에서 새로운 방법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방법의 철학자”라고 자주 부른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규칙을 4가지로 압축하여 제시한다.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

둘째는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 간에도 순서가 있는 듯이 단정하고 나아갈 것.

그리고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枚擧)와 전체에 걸친 통관(通觀)을 어디서나 행할 것.” (<방법서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진리 탐구를 위한 방법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진리인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 것. 속단과 편견을 피할 것.
둘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쪼개서 탐구할 것. (분석의 규칙)
셋째, 가장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것에 다가갈 것. (종합의 규칙)
넷째, 문제의 요소들을 다 열거하고 그 중 단 하나라도 빠뜨리지 말 것.

그리고 유명한 이 4가지 규칙 외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으로 신중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 규칙들을 보면서 실망 반, 비웃음 반으로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무슨 엄청나고 대단한 규칙인 줄 알았더니 그게 뭐냐면서 속았다고 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규칙들은 오늘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상식적인 것이니까 이 규칙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당연히 알고 있었고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독단적이고 공허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지배하여 실제로 이 규칙들이 무시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규칙들을 철학 연구에도 적용하여 철학을 새롭게 세우려 했다. 이때 그가 제시한 규칙 가운데 특히 첫째 규칙이 잘 통용되고 있는 전형이 수학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수학의 정확한 방법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을 중세의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암흑에서 끌어내고 철학을 수학, 특히 기하학과 같이 확실하고 명증하고 투명한 학문으로 확립하려 했다.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明證性)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참된 용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학이 기계적 기술에만 응용되고 있음을 생각하고서 그 기초가 아주 확고하고 견실한 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위에다가 더 높은 건물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도덕을 다룬 고대 이교도들의 저술은 화려하고 웅장하나 모래와 진흙탕 위에 세운 궁전과 같다고 본다. 그들은 여러 가지 덕을 대단히 찬양하고,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도 더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가르쳐주지는 못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그토록 훌륭한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이 가끔 냉혹이나, 교만이나, 절망이나, 친족 살해에 지나지 않는다.” (<방법서설>)

그렇다면 수학을 모델로 해서 얻은 새로운 방법으로 철학의 물음들을 다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데카르트도 신의 존재라든가 인간 정신의 본질과 같은 중세 철학이 제기한 물음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진정 학문으로 다루려면 신비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확실한 토대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이 엄밀한 학문일 수 있는 이유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다” 또는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날 수 없다”와 같은 명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 공리들이다. 수학은 이러한 공리들에서 출발하여 구성된 체계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수학 시간에 도형의 어떤 성질을 나타내는 ‘정리’가 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증명을 해야 한다고 배운다. 바로 이 증명에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공리’다. 그러나 ‘공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리는 스스로 명백히 참인 것이고 따라서 최초의 출발점, 제1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철학도 확실한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수학의 공리와 같이 직접으로 확실하고 명백해서 철학의 전체 구조를 떠받쳐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한 점을 발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절대 확실한 시작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진리라고 여겨 온 것들을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대담하게도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버리고 첫 번째 기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철저한 의심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데카르트의 이런 작업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근세 철학의 결정적인 일대 변혁을 이룩한 과정이었다.

4. 제1원리를 찾아서

데카르트가 활동했던 시기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회의주의의 시대였다. 당시는 아직도 과학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믿을 만한 방법이 없던 시대였으며, 그런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던 시대였다. 이렇게 회의주의가 팽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종교였다. 단 하나의 종교적 진리만을 인정하던 중세의 권위에 도전하여 다양한 문제제기가 등장함으로써 종교적 진리가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에 대해 백가쟁명식 논쟁이 벌어졌다.

데카르트도 바로 이런 회의주의라는 시대의 분위기 중심에 있었음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알 수 있다.

“철학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겠다. 즉 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우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논쟁의 여지가 없는, 따라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직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해 나아가리라는 자부심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에 관하여는 참된 의견이 하나 이상 있을 수 없을 터인데 실제로는 갖가지 많은 의견이 있으며, 또한 그것들이 학식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참인 듯 보이는 모든 것을 거짓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 (<방법서설>)

이런 회의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를 확고한 기초 위에 놓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지식을 획득하고 축적할 방법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을 확립하려는 관심이 17, 18세기 철학의 주된 관심으로 부각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바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이 문제를 해결하여 보편학(mathesis universalis)을 확립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인물이다.

방법적 회의는 바로 이런 보편학을 확립할 수 있는 토대를 찾는 작업이다. 어떤 회의주의보다도 저 지독한 회의를 통해 어떤 회의주의도 승복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토대를 확보하자는 전략인 것이다. 적의 무기로 적을 무찌르는 역설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문제마다 의심스럽고 잘못하기 쉬운 점들을 특히 반성하면서, 전부터 내 정신 속에 스며들어 있던 오류를 모두 차츰 뿌리 뽑았다. 그렇다고 내가 의심하기 위해 의심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회의론자를 흉내 낸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내 모든 계획은 내 스스로 확신하고, 무른 흙이나 모래를 젖혀 두고 바위나 찰흙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방법서설>)

그런 확실한 토대를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제1원리’라고 부른다. 바로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한 실험적인 작업이 방법적 회의인 것이다. 보편학의 토대가 될 제1원리는 어떤 회의주의도 무너뜨리기 힘들 정도로 ‘확실(certain)’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심정으로 이 확실함을 굉장히 강하게 규정한다. 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데카르트에 따르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서설>)

현재 의심하지 않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이다”라는 주장은 확실한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대체로 이런 주장을 참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도 데카르트에 따르면 확실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한테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어떤 이유 때문에 수도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그동안 우리가 참된 지식으로 믿고 있던 것들의 확실성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어떤 사람이 사과를 한 바구니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몇 개가 썩어 버려서 나머지 성한 사과도 썩게 될지 모른다고 하자. 그래서 썩은 사과들을 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우선 모든 사과를 바구니에서 꺼내 놓고 나서 하나씩 자세히 검사하여 썩지 않은 것만 골라 다시 바구니에 담은 다음 나머지는 버리지 않겠는가?” (<성찰>)

데카르트는 지금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여겨온 것의 토대를 의심해 보자마자 모든 것이 흔들거리기 시작함을 느꼈다.

▲ <방법서설/성찰/철학의 원리/정념론>(데카르트 지음, 소두영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우선 감각적인 지식부터 의심해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많은 사물이 정말 내가 보는 대로 내 밖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눈은 우리를 속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물속의 막대기가 휘어져 보이는 빛의 굴절 현상이나 똑같은 색이 바탕색에 따라 밝기가 달라 보이는 착시 현상 등에서 종종 경험하듯이 감각은 우리를 자주 속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의심 속에서도 최소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만 주의해 보면 그 확실함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꿈을 꾸면서 내 몸이 벼랑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땀을 흘리기도 하고 물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여 두려워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 몸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이 절대로 꿈일 리 없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흔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예컨대 “2+3=5″라는 수학의 진리나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는 과학의 진리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모든 인식의 기초가 되는 이런 진리마저도 데카르트가 근원적으로 철저히 회의하자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는 2+3=5가 아닌데 만일 신이 인간을 2+3=5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면, 즉 신이 인간을 근본적인 기만과 본질적인 왜곡과 비진리 속에서 살도록 창조해놓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이 과학과 철학이 끊임없이 주장해 온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기만하는 신’ 또는 더 나아가 ‘악의에 가득 찬 악마’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수학의 원리까지도 의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추론하면서 까지도 오류를 범하였으며, 지금은 오류라고 밝혀진 것을 이전에는 확실하고 자명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창조한 신은 모든 것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물에 대해서까지 도 우리가 항상 속임을 당하도록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의 원리>)

이런 얘기는 억지 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데카르트도 신성모독의 위험 때문에 주춤거린다. 그러나 중세 전체를 통해 절대시된 신에 대해 감히 가설로라도 대담하게 의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근대로 한 발짝 더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최고의 권위인 신조차도 비판적 이성의 회의 대상으로 놓고자 하는 진정한 근대적 자율적 주체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나는 진리의 원천으로서 최고선인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악령이 존재하며, 그 악령이 나를 속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가정해보겠다. 또한 나는 하늘, 대기, 달, 색채, 외형, 소리 그리고 모든 외계의 대상들이 단지 허황된 꿈에 불과하며 악령이 나의 고지식함을 이용해서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또 나 자신은 손도 귀도 살이나 피, 감각 기관도 없는데 단지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다. 나는 이런 생각을 굳게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에 따를 참이다. 즉 이제껏 내가 생각해 온 것처럼 어떤 진리를 알아낼 힘이 내게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잘못된 것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 나를 속이는 자가 아무리 전지전능하다 할지라도 그가 나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성찰>)

 

5. 주체의 확립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앎의 모든 확실성이 무너져 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확실성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전부 의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가 의심하는 한 의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의심하는 나에 대한 확실성은 신이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신이 나를 속일지라도 속는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기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된다.

“내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야말로 반드시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진리,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견고하고 확실하여 아무리 과장이 심한 회의론자라도 이 진리를 뒤집어엎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내가 찾아 헤매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이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방법서설>)

“나, 바로 내 자신은 어떤 것도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미 내가 감각과 육체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였다. 이제 나는 이로부터 또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는지 주저하고 있다. 나는 육체와 감각들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가? 또한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즉 하늘도 대지도 인간의 정신과 육체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거꾸로 만일 내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전지전능한 기만자가 있어서 항상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가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한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나를 속여보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속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심사숙고해 본 후에 나는 결국 ‘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말하건 아니면 마음속에 품건 간에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성찰>)

데카르트가 철학의 기초로 세운 이 명제에 대해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말할 사람도 있음직하다. 그러나 이 명제는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 명제는 근원적인 확실성을 신에게서 찾은 중세 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의 사유, 인간의 자의식에서 철학의 토대가 되는 확실성을 찾음으로써 서양 사상의 새 장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명제가 갖는 사유하는 주체가 갖는 확실성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 되고 참된 사고 밑에 놓여야 할 기초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 안에 사고하기 위해서 나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참이라고 보증된 어떤 사실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우리가 매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참이라는 점을 일반적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성찰>)

이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신이 아닌 인간이 진정한 주체로서 모든 확실성의 근원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바로 ‘내’가 출발점이고 기초임을 보여 주었고, “사고하는 나”를 제1원리로 하여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이 형이상학은 자연학, 기술학, 의학, 도덕학 등 실천학을 근거 짓는 기초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로써 인간이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오직 자신으로부터만 솟아나는 확실성에 따라 진정한 주체가 되는 근대성의 특징을 데카르트는 최초로 정초하게 된다. 모든 것은 바로 또한 자연도 이제 중세 세계관에서처럼 신성한 피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며 토대인 인간이 적극으로 파악하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된다. 결국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신 중심의 중세 세계관에 치명타를 먹이면서 근대의 인간에 대한 ‘주체성의 철학’이 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해서 근대 주체는 지금까지 발전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 자세한 내막을 여기서 다 추적하기는 힘들겠지만, 중요한 발전 단계들을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데카르트가 최초로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지만 너무 개인 개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다보니 ‘나’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고 유아론(唯我論)적 성격에 빠져 버렸음은 잘 알려진 문제이다.

이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인간 이성의 활동인 수학과 과학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하여 인간 이성이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여 주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구조를 밝혀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의 주체는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니 탈역사적이고 탈시간적인 성격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헤겔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주체에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여,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는지를 해명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 주체의 사회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노동하는 주체, 계급으로서의 주체 개념을 확보하였다. 하버마스는 다시금 한 차원 더 넓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는 관계가 중요한 측면임을 해명하면서 의사소통적 주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근대 주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발전되어 가는 첫걸음을 데카르트가 내디디고 있고, 그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 [철학자의 서재]

타이-마르크 르탄의 <알몸으로 학교 간 날>?[철학자의 서재]

 

신우현 (상지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알몸으로 학교가기

<알몸으로 학교 간 날>(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이라는 그림책을 소개하려한다. 주인공인 피에르는 어느 날 알몸으로 학교에 간다. 책가방은 챙겼지만 아이가 알몸인 것은 눈치 채지 못한 아빠 덕분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너무 심각하게 따지지는 말자. ‘아무리 이야기의 배경이 정신없는 아침이더라도 아이가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라든지 ‘도대체 엄마는 어디로 갔기에 아빠가 아이를 챙겨서 저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들었지?’라든가 하는 질문은 잠시 멈추기로 하자. 어쨌든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갔다. 아이가 알몸으로 학교에 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저자의 말을 잠자코 들어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빠는 신발을 잊진 않았다. 빨간 장화다. 신발은 신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덕분에 알몸인 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운동장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인사했어요. “피에르, 안녕” “피에르, 별일 없지?” “피에르,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 “어, 그런데 피에르, 너 장화 예쁘다.” “아, 그래, 장화 아주 멋있네!” “예쁜 빨간색이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장화 속이 조금 갑갑했어요.(6쪽)

 

▲(타이-마르크 르탄 지음, 벵자맹 쇼 그림, 이주희 옮김, 아름다운사람들 펴냄). 출처: book.daum.net

 

알몸으로 등교한 피에르에 대한 친구들의 반응이다. 어느 누구도 알몸인 피에르에 대해 손가락질하거나 조롱하거나 질책하지 않는다. 다만, 단짝 친구만이 에둘러 배려하지 않고 “안 추워?”라고 질문한다. 그런데도 피에르는 아무 말 없이 갑갑함을 느낀다. 선생님 역시 빙그레 웃으며 맞이해주셔도 ‘나무 의자가 너무 딱딱했지만 몸을 비틀지는 않았어요.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라며 위축된 마음을 드러낸다.

선생님 역시 선생님은 피에르를 배려한답시고 가리개로 몸을 덮어주거나 없는 듯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몸 상태 그대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피에르에게 발표를 많이 시킨다. 비록, “피에르, 피리새에 대해 아주 잘 설명했다. 꼭 이 교실 안에 피리새가 있는 것 같아” “피에르, 아주 잘 대답했다. 꼭 이 교실 안에 작은 수도꼭지가 있는 것 같구나”라는 칭찬을 덧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체육시간에 두발을 모으고 뛸 때가 가장 좋아요. 그렇게 뛰다 보면 걱정을 잊을 수 있거든요. 오늘도 옷차림 때문에 걱정이 있으니까 열심히 뛰기로 했어요. 나는 깡충깡충 뛰었어요. 있는 힘껏 뛰었어요. 그리고 웃었어요. 마음껏 웃었어요.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랐어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곧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만히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종이 울렸어요. 이제 점심시간이에요. (17~18 쪽)

사실 피에르가 체육시간에 열심히 뛰어오른 것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로 크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을 잊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면서 웃고, 웃을수록 더 높이 뛰어올라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자 곧 멈추고 만다. 결국 이어지는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모두 왁자지껄 웃는 상황에서도 조금밖에 웃지 못한다.

더욱이 방학 때 가장 즐거웠던 일을 그리는 미술시간에 아이들은 모두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특이한 바닷가를 그린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마음 불편해한다. 쉬는 시간이 오자 친구들이 또 빨간 장화이야기를 할까봐 큰 덤불 뒤에 숨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던 피에르는 나뭇잎과 줄기로 몸을 가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알몸인 채로 초록 장화만을 신고 있던 옆 반 여자아이를 만난다.

그 애 이름은 마리였어요. 나는 마리에게 내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마리도 나에게 제 나뭇잎을 보여주었어요. 우리는 깔깔 웃었어요. 우리는 함께 풀줄기를 찾았어요. 그러고는 각자 나뭇잎을 붙였어요. “고마워” 마리가 나에게 말했어요. “고마워” 나도 마리에게 말했어요. 우리는 또 웃었지만 아까처럼 실컷 웃지는 못했어요. 종이 울렸거든요. 쉬는 시간이 끝났어요. (27쪽)

마리와의 만남으로 이제 피에르는 자신감을 찾는다. 선생님이 천사에 관한 노래를 시키자 자신 있게 손을 들고 교단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감탄한 얼굴로 피에르를 보고 있었고, 손뼉 치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피에르는 그 자리에서서 멋진 빨간 장화를 신고 작은 나뭇잎을 붙이고 아주 자랑스럽게 인사를 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갔어요. 어찌된 일인지 길거리에서 가볍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어요. 체육시간처럼 말이에요. 나는 날듯이 달려갔어요. 지나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활짝 웃었어요. 알몸이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31쪽)

 

남과는 다른 피에르가 자유로워지기까지

‘알몸’은 이 세상의 수많은 ‘차이’이다. 그림책의 저자인 타이 마르크 르탄은 대부분의 사람과 다른 ‘차이’를 지닌 사람이 자유로워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림책은 피에르의 감정을 덤덤한 듯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벵자맹 쇼의 재치 있고 상큼한 그림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 알몸으로 학교에 가게 되었을 때 피에르는 망설이듯 몸을 숨기고 운동장을 들여다본다. 쑥스러웠지만 피에르는 친구들 앞에 선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는 친구들을 만났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갑갑해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수업시간에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지도 못한다.

웃음으로 맞아주신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에르에게 발표를 시키지만, 피에르와 선생님은 당황함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체육시간에 피에르가 걱정을 잊기 위해 깡충깡충 뛰고 순간이나마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던 것은 다름 아닌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러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카트린느 선생님이 피에르에게 여벌의 옷을 입혀주거나 다른 아이들처럼 옷을 입혀주었어야 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실 상황에서 옷을 벗고 있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동학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다. 상징이고 은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아이에게 옷을 주는 것은 다른 아이와 억지로 같아지라고 하는 것일 수 있다. 옷을 입지 않은 등교한 것도 선택일 수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피에르의 선택을 존중해준 것이다. 그런 선택을 왜 했느냐며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피에르를 받아들여준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의 갈등 상황은 선생님과 친구들의 배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체육시간에 피에르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이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을 피에르가 의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술시간에 피에르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의 그림에 벌거벗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는 것을 보고 피에르는 더욱 불편해진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피에르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은 자신과 같은 ‘차이’를 지닌 옆 반 아이를 만나고 나서다. 피에르는 마리와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만 다르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을 소외감과 불안함이 같은 처지의 마리와 만나고 해소되었을 테니 말이다. 마리를 만난 후 피에르는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 로 인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고, 그 ‘차이’를 내가 지니고 있어서 좋다고 진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피에르는 ‘차이’로 인한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이다.

피에르가 ‘차이’를 긍정하고 세상과 화해하여 자유로워지게 된 데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와 같은 처지인 마리와의 소통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를 받아들이는 태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자, 상당수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여서 “변태!!!”라고 외쳤다. 재치 있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교묘하게 가린 그림에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아이들보다는 “말도 안 돼. 선생님한테는 혼나고 아이들한테는 놀림 받을 텐데, 다른 애들은 왜 아무 말도 안하지?”라며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어린이들이 더 많았다. 자기라면, 절대로 알몸으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란다.

우리 사회는 ‘차이’에 너그럽지 않다. 나와 다른 점은 이상한 것으로 치부된다. 심한 경우에는 적으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차이’를 핑계로 진행된다. 사회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므로 옆의 친구나 동료의 ‘차이’는 약점이 되고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피에르의 친구들과 선생님의 배려는 다소 생경한 것이 된다.

‘동일성’만을 강조하면서 ‘차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폭력이다. 대체로 ‘동일성’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다수이고 기득권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차이’는 ‘차별’이 되기 쉽다. 우리 사회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거나 많다는 이유로, 키가 작거나 못생겼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력이 짧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차이’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배려를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배려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과 상상력,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공격하려는 충동을 절제하려는 이성으로부터 온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힘들다. 여기서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불편과 고통을 내 것으로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생각해볼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은 불편함과 고통을 최소화하는 환경이 아이를 기르는데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불편한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고, 고통스러움을 경험해보지 않으면서 자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다른 사람의 불편함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계속 훈련될 필요가 있다.

용산 참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중은 얼마나 싸늘했는가. 대다수 사람들의 경제적 이익 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소수의 인권 요구는 냉정하게 묵살되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불에 타죽어도, 얼어 죽어도 무관심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배려는 찾아볼 수 없고, 우리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고 민주적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이 어떤 보호를 받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그저 우아한 지식인이나 교양인의 제스처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다.

생각하는 게 달라도, 뚱뚱해도, 장애인이어도, 돈이 없어도, 외국인 노동자여도, 여자여도, 가방끈이 짧아도 주변의 배려로 자신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생활하며 결국 나에게 있는 ‘차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가 유토피아다. 피에르처럼 알몸이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외칠 수 있는 사회가 어서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