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마음속 깊이 진실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행동하는 데 반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만심이라는 위안을 필요로 한다. – 롤로 메이

?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모두 전화를 해대며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루 회사를 가지 않으면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없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면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 학교를 안 갔을 때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회사에 결근했을 때 업무내용 확인차 전화 한 번 오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멀쩡히 어떻게 어떻게 처리했노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나여야 한다.’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어.’의 태도이다.

나는 세상의 일부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인 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는 나의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세상이 나의 생각의 폭 안에 들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서 만들어내는 곳이기에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합의는 어렵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옳고 그름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면서 그 방법론과 관련해서 너무 자기 방식을 고집하려다 보면 세상을 나의 폭에서 제한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많고 많은 변인들이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에 내 눈에 옳은 것이 진짜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내 눈에 옳지 않은 것이 진짜 그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 수준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높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현실의 복잡한 변인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즉 나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의 좁은 생각의 폭 안에 세상이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나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는 억압되는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가지게 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이 전제로부터 놓여 나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빨리 졸업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다.

생각해보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러한 모습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 조물주는 이 피조물들의 자유를 지나치다싶게 인정해주는 조물주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인정해주니 말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의 자유의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로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도록,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지 않도록 구조화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나는 세상의 일부고 세상과 나를 비교해볼 때 극히 미미한 변인일 뿐인 나의 마음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스스로에게 되뇌자. ‘세상은 나보다 큰데 어떻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어?’

?

‘100% 사고’에 빠지지 말자

?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누구나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이를 ‘100% 사고’라고 부른다.

우리는 100%를 바란다. 한 명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얼마나 괴로워지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심리학에서 비합리적 전제라고 정리해놓은 것 중에 특히 중요한 것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2.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취적이어야 한다.

3. 어떤 사람은 악하고 나쁘며 야비하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비난과 저주와준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4.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끔찍스러운 파멸이다.

?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이런 내용을 강의하러 다니는 나 자신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좋은 강의평가에 한두 명이 약간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마음 생김새가 그러한 모양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러한 100% 사고에 잘 시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 사고에 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이 100% 사고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이 100% 사고만 하지 않아도 많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내지 못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낸다. 그런데 그 나의 비판력으로 타인을 보면 타인에게서는 약점을 엄청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자칫하면 우리는 80점인 사람을 -20점으로 대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주목하다보면 나의 장점은 모두 잊고 마치 내가 단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80%에 만족하자는 생각은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라는 것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할 수 있었다. 팔자(八字)라는 것은 나의 생년월일시에 오행, 즉 화수목금토의 다섯 종류의 글자가 모두 8개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월일시 4가지의 갑자에 해당하는 오행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팔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오행의 다섯 글자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칸이 8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8개의 글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다섯 글자를 골고루 2개씩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팔자를 산출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에게는 아쉬운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자 산출 방식을 보며 ‘인간에게는 100%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학문상의 객관적인 근거는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타인에게는 100%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서는 약점을 보지 못하기 쉬운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식의 편향성에 따라 자신은 100%가 아니면서도 타인에게 100%를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만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단점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야스퍼스(Jaspers)의 말대로 타인이 신이나 성자 같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요구는 모든 관계를 방해한다.

?

우리를 괴롭히는 완벽에의 허상

?

완벽에의 허상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스스로에게 어떠한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혹시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잘못된 전제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언젠가 집근처 골목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틀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틀리는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더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몇 개의 음만 빼고는 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드디어 전혀 음이 틀리지 않는 연주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완벽한 연주를 듣지 못했다. 하도 연습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같이 연습하는 심정이 되었고 완벽하게 연주되는 것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연주하는 사람이 꼭 한두 음에서 틀리곤 했다. 한 두 음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데 틀리고 말 때에는 듣는 내가 다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했다.

ⓒhttp://anngabriel.egloos.com/

ⓒhttp://anngabriel.egloos.com/

그 엄청난 연습량을 목격하며 도대체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동안 완벽한 연주를 얼마나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습할 때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틀리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틀릴 때마다 틀린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연주 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습과정에서 수많이 틀려봐야 연주회에서 틀리지 않고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일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도 연주한 당사자는 음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연주기법 상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또 괴로워하겠지만 말이다. 삶이 이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의 확률게임은 0.0001 vs 99.9999의 게임인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수도 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가 원하던 것과 조금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쉬워하고…. 완벽한 연주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수없이 틀린 연주를 하며 그 틀린 음들을 견뎌야 한다. 틀린다는 사실 자체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완전히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전에는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연주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

?

?

?

?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

?

?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가네코 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짧은 삶과 옥중수고의 목적

 

무엇이_나를_이렇게_만들었는가_표지

▲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이학사

이 책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정애영 옮김, 이학사 펴냄)는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쓴 글이다. 그러니까 옥중수고인 셈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이들이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동지이자 부인이었다고 한다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박열의 부인이자 동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공감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세상을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옥중수기를 쓴 목적이기도 하다. 그녀는 23살이라는 짧은 생을 감옥에서 마감하였다.
?
잠시 그녀의 연보를 보면, 그녀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불행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녀는 1903년 1월 25일에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03년생이나 실제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가 6살 무렵 아버지와 이모가 정을 통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버지가 끝내 이모와 집을 나가자 어머니는 대장장이와 동거를 하였고, 대장장이와 헤어지고 난 뒤엔 항구의 노역꾼과 동거를 한다. 다음해 노역꾼인 고바야시의 고향으로 이주하여 고바야시의 형수의 친정집 오두막에 살기 시작하였고 그 다음 해인 1911년 고바야시와 헤어지고 외갓집으로 이사한다. 어머니는 후미코를 친정에 두고 잡화점을 하는 후루야 쇼헤이와 결혼한다. 그녀는 그때까지 무적자였다.
?
1912년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여 친할머니가 사는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의 고모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1915~1917년 부강공립심상소학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감동하였고 7년에 걸친 식모살이를 벗어나 야마나시의 외갓집으로 돌아온다. 그 다음해에 도쿄에 사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집으로 옮겼고, 신문 보급소에서 생활하며 신문을 팔면서 영어 학교와 겐슈학관에 다녔다. 또 그해 연말까지는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를 팔았고 사탕가게 주인집에서 식모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
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일본 군경이 조선인을 해치고 있다.

1921년 사회주의자 호리 기요토시의 집에서 일하며 기숙하였으나 호리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꼈고, 결국 작은 외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사회주의자들을 알게 되고 사상을 접한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선인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돈 것을 계기로 조선인이 6000~8000명이 학살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학살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불령선인의 비밀 결사 사건’을 발표한다. 이 대중 조직에 박열과 후미코가 있었다.

1925년 후미코는 예심판사가 요구한 전향을 거부한다. 대심원으로 넘어가면 사형을 선고받는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26년 후미코는 박열과 결혼신고서를 구청에 제출하고 그 해 7월 23일, 그녀의 나이 23세에 형무소에서 목매달아 죽는다.?

다른 옥중수고와는 달리 이 저작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삶을 모두 지워버리고자 쓴 것이다. 후미코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 생활의 폭로이며 말살입니다. 저주받은 나 자신의 생활의 마지막 기록이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유품입니다. 아무 재산도 없는 나의 유일한 선물로 이를 택하(宅下, 수형자자 소지품이나 영치물 등을 친족에게 인도하는 것)합니다.” (7쪽)?

 

또한 그녀는 이 옥중수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부모들이 이것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사회를 좋게 하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읽어주면 좋겠다.” (18쪽)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읽기를 그녀는 바랐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부모이거나 사회를 좋게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기 바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수기를 읽으면서 그녀가 자주 간절히 목 놓아 외치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그 이후에 사회주의 사상가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더 자유에 대한 갈증이 확장되고 깊어짐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 삶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희망했는지, 처참한 삶은 그녀로 하여금 어떤 이념을 자극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녀의 글 속에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의 삶 전체를 음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노예의 삶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후미코

??

그의 옥중수기는 참으로 슬펐다. 이런 사건도 있었다. 후미코는 친할머니 집에 살면서 식모로 일을 했다. 나물을 삶다가 솥을 깨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할머니는 그 솥 값 1엔 20전을 내라고 하였다. 할머니 집에 와서 식모로 일하면서 딱 한 번 10전을 받은 적 밖에 없던 후미코는 그 돈을 낼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 솥 값은 일본을 떠나올 때 전별금으로 받은 12,3엔의 돈에서 변상하였다. 할머니 젓가락이 부러진 날은 “정초부터 웬일이냐. 후미, 넌 내가 죽어버리기를 비는 모양이구나. 좋아 단단히 기억하고 있으마.”(101쪽)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
이러한 일들이 생기면 후미코는 늘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겨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을 받았다. 그 상황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겨울 아침의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 추위와 피곤으로 얼굴은 나무판처럼 딱딱해지고, 다리는 막대기같이 굳어지고 저렸다. 꼬집어도 감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배는 고파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103쪽) 그는 이러한 벌을 받은 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이라도 사죄를 해야 했고, 할머니와 고모의 위엄을 위해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이러한 경험은 끝이 없었다. 그의 나이 12살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체험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하라. 자기 행동을 남에게 맹세케 하지 말라. 그것은 아이로 하여금 책임감을 빼앗은 일이다. 비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에도 행동에도 겉과 속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에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를 감시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자신의 행위의 주체는 완전히 자기 자신이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누구도 속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하고?자율적인 책임감?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104쪽)

 

그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율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징벌을 두려워하게 되면서 접시 하나를 깨도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자율적 인간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언제나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늘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고 차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녀는 이 수기를 부모들이 읽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 위의 후미코의 말은 부모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아이를 자율적인 주체로 성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간이 아닌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책임지는 그러한 인간,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인간, 그리하여 어떤 이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진실로 떳떳한 자율적인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
꾸미기_유럽2013.01 396그녀의 또 다른 경험도 소개해 볼 필요가 있다. 외할머니와 고모의 집에서 식모로 착취당하며 모든 아이들이 하는 생활을 금지당한 후미코는 어른이 되어 길가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거기서 아이들의 엄마가 달려와 기모노가 더러워지니 놀이를 하지 말하고 야단치는 장면을 본다. 아이는 놀이에 빠져 그만두려 하지 않으려 했고, 엄마는 울부짖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끌고 갔다. 그것을 보고 후미코는 마음 속으로 외친다.

 

“왜 그렇게 무리는 하는 거죠? 당신은 대체 아이가 귀한가요, 기모노가 귀한가요? 아이는 기모노를 위해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이를 위해 기모노가 있는 거죠. 그렇게 때 타는 게 무서우면 좋지 않은 허름한 기모노를 입혀놓으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안락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고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자유(강조는 필자)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빼앗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두세요. 자유의 천지에서 뛰어노는 건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입니다. 그래야만 아이는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128쪽)

 

그가 바라는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였다. 그리고 자유는 아이들의 유일한 특권인 것이다. 아이들은 자유를 먹고 자라나는 존재다. 따라서 그녀에게 자유의 억압은 가장 큰 죄악이었다. 이것은 아나키즘의 핵심적 주장과 같다. 물론 아나키즘이 자유방임을 허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자유, 그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인간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자유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이러한 자유와는 구분하여 그의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는 스스로의 비참한 삶을 통하여 인간이 착취 받고 이웃이 고통 받는 것을 슬퍼하였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녀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얼마나 아이들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는지 다시금 반성해야 한다. 후미코는 할머니와 고모에 의한 고통과 위엄에 질식당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절절히 자유를 외치고 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고자 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 말이다. 이러한 그의 말은 우리에게 공명한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보편성에 억압된 자아가 아니라 개별적인 자아에의 희구, 자율적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삶의 반성과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옥중수고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또 다른 것은 그의 문체다. 그는 화려하거나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옮긴이가 인용한 쓰루미 슌스케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수기는 번역서에 떼어낸 추상어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15년의 전쟁을 겪고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오늘의 일본 지식인들의 허를 찌른다.”(365쪽) 이 구절 또한 우리들에게 반성의 계기를 만든다. 우리는 추상적인 말을 통해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비단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사태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은 중요한 글쓰기의 자세일 것이다.

 

이제 최초의 질문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수기를 마치며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단지 나의 반생의 역사를 여기에 펼쳐놓았으니 다행인 것이다. 마음 있는 독자는 이 기록으로 충분히 알아주리라. 나는 그것을 믿는다.”(353쪽)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몫은 우리에게 남는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무엇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시대였으며, 그녀의 삶을 둘러싼 가족이었고 교사였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였다. 즉 그녀의 삶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만든 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제국주의로 전화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다이쇼데모크라시로 명명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3.1운동에 감동한 그녀는 삶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그녀의 처절하고 짧은 인생, 불꽃처럼 살다간 삶, 지지리 운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 안고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슬픈 옥중수기의 저류에 흐르는 그의 희망이고 행복한 인간의 지향점이다. 그것은 자율적인 인간을 꿈꾼, 가족에 버림받고 가족에 착취당하며 놓고 싶지 않던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자 온전히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던 23년의 짧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이다. 그녀는 예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며 수기를 마친다.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는 현상으로는 죽었지만 사상의 기억, 삶의 치열함과 그녀의 삶 자체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녀의 옥중수기를 읽으며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그 고단하고 치열한 삶, 그것은 우리가 그녀의 삶 속에서 보다 따듯한 가슴으로 받아 안아야 할 영원의 실재가 아닌가!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유’다. 어린 시절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녀는 ‘내 안에 살아 있는 생명’, ‘생명의 의욕(意慾)’을 느끼고(150쪽), 이후에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목적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일이었다고 서술한다.(221쪽)

그녀는 자신이 동정의 마음을 갖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돈 있는 사람에게 혹사당하고, 가혹한 대우를 받고, 괴롭힘에 짓눌리며,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지배받아왔다.”(304) 인간에 대한 공감을 자신의 비참한 삶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삶을 공감한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 타자를 보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타자에 대한 공감은 다시 또 다른 이들의 삶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베르그송과 헤겔을 알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자신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슈티르너, 알티바세프, 니체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제로 그즈음 나는 그것(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장난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334-335쪽)

 

그녀는 삶의 목적이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며 타인의 노예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사회주의 사상가, 혹은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어린 시절부터 희망하고자 했던 자유의 추구를 더욱 확고하게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들은 아이들을 부모의 욕망을 관철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고민과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는 있는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찾고 희망하고 실천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을 그녀는 추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삶의 추구는 타자에 의한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살면서 마치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듯이 간주하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타인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자문한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녀는 이 물음에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혹은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물음의 중요성은 나의 행동 당신들의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삶은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상호영향을 강하게 미치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가슴 깊게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며 살아갔던 후미코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야 한다. 정말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

??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오스트리아 의사 및 정신분석학자로 개인 심리학을 세웠다.

지금 발현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능력과 특성에 대한 잠재력을 마음껏 펼침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열등감을 우리의 창조성을 깨우는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고 더 괜찮은 나로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할 것이다. – 아들러?

?현대인들은 남들과 다르기를 욕망하면서도 남들에게 뒤떨어질까봐 불안해한다. 광고는 “나는 달라요.” 하면서 남들과 달라보일 수 있는 물건을 구매하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물건을 같이 구매해서 남들과 같아진다.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남들과 같은 물건을 가지려 하면서도 남들과는 달리 돋보이고 싶어 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Lef?vr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라는 책에서 ‘일상성’이란 현대인들이 지겨워하면서도 놓치면 불안해하고 전전긍긍해하는 이상한 것이라고 했다. 일상성으로 인한 극도의 권태와 피로 속에서도 일상성에서 벗어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일상성은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벗어날까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남들과 똑같이 도매금으로 취급되는 것도 싫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를 르페브르는 잘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르페브르는 일상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는 덧없음을 사랑하고 탐욕적이며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라고 진단한다. 유행과 같은 덧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해 늘 탐욕적이고, 이렇게 새로운 것을 갈구하니 역동적으로 생산해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현실에서는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을 갈구하게 된다. 핸드폰이 새로 나올 때마다 바꾸고 싶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에게 진력낼까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구매하는 것

?

현대인들의 소비 패턴을 보면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 사는 것만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을 가는 경우가 많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패턴을 두고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현대인들은 기호가치를 얻기 위해 소비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얻게 되는 어떤 상징성 때문에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꾸미기_2007_1~3저렴한 큐빅을 구매하지 않고 비싼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데에는 기호가치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에는 ‘쉽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큐빅과 다이아몬드를 한 눈에 구분해내지 못하고 “그거 큐빅이야, 다이아몬드야?”라고 물으면서도 몇 백 배의 돈을 지불하고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는 데에는 상징성이 개입된다. 이는 짝퉁과 명품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화점에 가지고 가서 진품인지 짝퉁인지를 가려야 할 정도로 맨 눈으로는 진품과 짝퉁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굳이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입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명품에는 ‘아무나 들 수 없음’, ‘함부로 살 수 없음’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가격 차이를 감수하고서도 (그리고 명품과 짝퉁의 차이를 스스로 판별하지 못하면서도) 아주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명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명품 마케팅의 비법은 가격을 올리는 것이라고도 한다. 가격을 올려야 더 잘 팔린다는 것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구매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구매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명품의 상징성이다. 보드리야르가 현대인들은 상품의 구입과 사용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위세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명품구매는 이러한 소비 특성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이다. 만약에 모두가 명품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어제까지 그렇게도 명품을 원하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명품에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명품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명품을 사는 행위에서 ‘남들이 사고 싶어하지만 함부로 살 수 없음의 상징성을 구매하는 것이고 결국은 ‘남들과의 차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이는 부도 회사의 상품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제까지 비싼 가격에 팔렸던 제품이 부도난 오늘 갑자기 덤핑 처리된다. 어제의 그 물건과 오늘의 그 물건이 다르지 않지만 품질도 변하지 않았고 기능도 디자인도 변하지 않았지만 어제의 가격과 오늘의 가격은 다르다. 이제 그 물건이 싸게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옛날과 같은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물론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격 차이가 AS를 받을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가격은 물건의 고유한 가치에 의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상황에 의해 매겨지는 것이다.

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값을 싸게 책정하도록 하고 비싸게 팔릴 것이라는 예측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게 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자들은 상품의 상대적인 사회적 위세 및 가치를 결정하는 의미작용의 질서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았다. 부도 회사의 제품은 품질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 가치결정의 의미작용의 질서에서 평가절하되는 제품이기에 선택될 가능성이 낮고 선택될 가능성이 낮기에 가격을 싸게 책정하는 것이다. 이 의미작용의 질서에서는 ‘쉽게 살 수 없음’, ‘남들이 부러워함’ 등의 요인이 높은 층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

자존감에 손상을 입은 현대인

?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품을 한 번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고 그 물건이 소비되어야 시장체계가 역동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구매해야 시장이 성장하고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에 1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의 생산력을 확보하고도 5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부터 팔기 시작하는 식의 기업의 행태가 일반화된다. 제품의 회전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내력은 그만큼 떨어져간다. 불편함을 참으면서까지 기존의 제품을 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기능이 있는 훨씬 더 편리한 제품이 늘 우리의 구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 그래서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없어진 시대에 나도 누군가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렵고 나의 옆 사람도 나를 인간으로 존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물이 주는 불편이 빨리 제거해버려야 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주는 불편을 견디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옆 사람이 나를 불편해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사물과의 관계든, 사람과의 관계든 모든 관계가 인스턴트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자꾸만 불안해진다.

인생 전체를 실업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채워야 하는 현대인들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찾지 못한 채 방황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인생의 가장 기초적인 물음조차 사치로 여기며 취업에 필요한 지식으로만 자신을 채워야 하는 상황이니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어떤 물건을 사고 싶은가는 알지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해 느끼게 되는 막막한 공허감과 고독감을 이기려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물건을 산다. 공허감과 고독감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찾고 소비를 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음을 각자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 저 밑바닥에서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 채울 수 없는 공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꾸미기_성연현대인들은 공허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감각하고 느낌이 없는 상태에 처하기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감각하거나 느낌이 없는 상태는 마음속에 있는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상태이다. 불안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불안을 느끼는 센서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외된 채 살면서도 소외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고독하고 공허하기는 한데 어떻게 하면 그 불안과 고독과 공허를 극복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허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제3자가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기가 홀로 있지 않다는 위안이라도 얻고자 한다. 인간이 공허하고 불안해지면 혼자 있기가 두려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다른 사람이나 물건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현대인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자존감과 힐링이 주요 화두가 되는 것같다. 서점에 가보면 대중서의 대부분은 자존감이나 힐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현대인들이 그만큼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힐링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경쟁’이라는, 듣기만 해도 숨차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이니 그 무한경쟁에서 1등을 할 수 없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자존감에 손상을 입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사회에서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일자리가 모자라지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 시대에 나에게 “너 아니면 안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우리는 너무도 그립다.

그런데 텅빈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또 다른 공허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기대거나 친밀감을 느끼려 해도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공허한 각자 각자는 자신의 텅빈 내면 때문에 타인의 텅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면에 공허를 안고 있는 사람은 사랑으로 그 공허를 채우고 싶어 한다. 그렇게 자신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공허를 채우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랑받으려만 하지 사랑하려 노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랑에 실패한다. 서로가 사랑을 달라고만 하지 사랑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받지 못한다는 쓰라린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친구가 되지 않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

?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철학자의 서재]

박지용(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예수님, 석가님, 공자님, 그리고 소크라테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단연 1순위 후보에 오를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생존 당시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의 저작에서 주요 논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연역 삼단논법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면 철학자를 연상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대변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프리드리히 로렌츠 지음, 박철규 옮김, 도원미디어 펴냄). ⓒ도원미디어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그 이름에 걸맞게 그토록 빛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테면 플라톤 하면 이데아, 헤겔 하면 변증법, 마르크스 하면 역사유물론, 칸트 하면 비판철학, 대강 이런 굵직굵직한 주제어들이 철학자들의 이름과 결부되어 왜 그 철학자가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빛나는 이름과 함께 알려진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과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 정도다. 이 두 가지 명언도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다. 우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남겨진 낙서(?)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 바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니 그리 큰 반론의 여지는 없다. 설령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했다 치더라도 그 말의 유래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것이다.

 

또 혹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의혹의 대강은 이렇다. 시민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을 강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데올로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명성을 빌려 시민들의 비판정신과 저항적 실천을 약화시키고 독재자의 논리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그 말을 날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한 구실로 삼은 모종의 정치세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명성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다고 알려진 명제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허구에 기초한 것이 되어버린다. 쉽게 말하자면, ‘어?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 안 했대?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거지?’라는 황당한 상황으로 귀결된다.
?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예수와 석가는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으셨고, 공자도 유교라는 유사종교의 신격화된 숭배 대상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소크라테스가 성인의 반열에 속하기에는 뭔가 임팩트가 떨어져 보인다. 인류 전체를 통틀어 네 명의 성인을 선발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소크라테스에 대한 평가는 과장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다. 예수의 위대함을 부정할 경우에는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겠지만, 소크라테스를 4대 성인의 반열에서 격하시키자는 목소리는 그리 충격적인 문제제기는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시선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소크라테스를 조망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그 기록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법적인 판결을 통해 사형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각각 그 기록을 남겼고 이 기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인물로 승화되게 된다. 이 재판과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이후 역사적인 사건으로 비화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다. 즉 무지한 대중이 죄 없는 뛰어난 현자 소크라테스를 죽게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사건을 기화로 민주주의의 적대자가 되고 이상국가론, 철인정치를 펼치게 된다.

또 하나의 관점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법적 심판을 플라톤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시 역사적인 배경, 정황, 사건들을 통해서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며, 소크라테스가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의 정치적인 역관계 속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망하는 것이므로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충분한 혐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판결에 있어서도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 후자의 관점들은 주로 현대에 들어서 제기된 것이다.
?
이 둘 중 어느 관점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양자택일적으로 대립된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주정치의 오류가 지적되고, 또 후자의 관점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사형을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잘못이 지적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대립적 관점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한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문제시될 수 있는 철학적인 현실비판의 의미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법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Socrates-1-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생각해보기만 해도, 그 자체로는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는 현실적인 논리들이 있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람들은 그 현실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분단 이후 반공 집회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야만성을 당연한 현실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또 철학과 철학자로 하여금 하나의 당파를 강요하는 논리는 언제나 현실 논리에 기초해서 작용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철학의 보편성은 민주정치냐 과두정치냐의 양자택일적 상황 자체를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현실 자체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법정은 철학적인 사유의 합법적인 권리 주장의 법정으로 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에 칸트는 ‘이성의 법정’에서 인간의 이성은 여러 현실적인 사안들을 검토하여 현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칠 수 있고, 그러한 권리는 당연히 현실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칸트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종교적인 주제마저도 철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이성의 공적 사용 권리를 과감하게 주장하였지만, 너그러운 계몽군주마저도 그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금지시켰다. 철학은 권력의 검열 앞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철학적인 사유에서는 금기와 경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철학이 짊어진 사회적인 역할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하고 공개적으로 간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자신을 일컬어 쇠파리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무뎌진 의식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잘못된 대립구도에서 강요된 선택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그 대립구도 자체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잘못된 사회에서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지적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철학은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는 삶을 조장하는 사회를 비판해야 한다. 민주냐 독재냐의 양자택일적 상황이 갖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삶의 방식은 철학적인 물음을 끝없이 던지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가 좀 더 여유로운 상황이었더라면 소크라테스를 애써 법정에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를 희생시켜 아테네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비판의식이 마비된 극단화된 사회에서 철학적인 물음 제기는 위험한 행위로 오인될 수 있다는 내적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생각함에 있어서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의 잘못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음흉한 의도를 경계해야 함과 동시에,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철학적인 문제로 다룰 경우에는, 그러한 잘못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서 여전히 잔존해 있다는 현실 비판이 결부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생활 속으로, 악처 크산티페

 

대학 시절 나는 학과에서 새로운 소크라테스 해석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고하신 권창은 교수의 강의였다. 그분은 소크라테스의 논쟁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민주주의적 가치에 주목하셨고, 소크라테스-플라톤 연계로 이어지는 보편실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피력하셨다. 당대의 정치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민주정치와 철학의 현실적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은 내 생각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못했다.
?

그의 죽음은 그의 철학적인 기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소크라테스의 기행은 그 개인의 기행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유한 것이고 본래적인 기행이었다. 그가 보인 기이한 행동의 목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시시콜콜 참견을 하고, 대화 상대자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홀로 생각할 때는 너무 골똘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것으로 알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데몬이라는 분열된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그런 행동 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기 내면에서 명령하는 데몬이 법정에서 단호히 나서라고 말했다고 변론인들에게 전한다.
?
재판 전날 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법정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데몬)은 소크라테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상황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할 수 있으면, 잔을 물러달라’고 호소했다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적인 짐을 진 예수의 고뇌와도 비견된다. 이 비교 자체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인간 소크라테스를 성자 예수와 동급에서 비교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유다와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아니토스와 민주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 행위이다. 그것도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음 일반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죽음, 죽은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경지는 그야말로 철학적이다. 그 철학적인 깊이는 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자기사유의 정점이 아니겠는가. 사유는 일종의 자기분열 행위이며, 이 분열은 때에 따라서 다중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은 분열증이라는 직업병을 겪지 않는데, 대화하는 의식이 집에서 나갔다가 항상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영혼인 데몬과의 대화에서 죽은 소크라테스에서 삶을 얻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이끄는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이제 그 삶을 버리고 영혼 속에서 안주하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삶이자 철학적인 죽음의 아이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철학적인 자기 구제인 것이다.

socrates지금까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명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 크산티페가 아닐까 한다. 철학자는 저작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대 철학자들도 저작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구전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낮 시간 아고라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들로 전승된다. 하루 종일 철학 토론을 한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 철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면 그의 아내 크산티페도 소크라테스 철학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모두가 떠나 캄캄해진 아고라의 밤,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대화 상대자 크산티페가 있는 집으로 가야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산티페가 묘사된 유일한 곳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날을 서술한 <파이돈>이다. 독배를 마셔야 할 시간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와 소크라테스의 어린 아들을 집으로 먼저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따름이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라는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철학자와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었을까?

법정에서도 밝혀졌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 토론 수업은 전체 무료강좌였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누렸을 유명세를 생각한다면 요즘 대치동 스타강사 정도는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는 무료강좌 원칙을 정했다. 다른 소피스트들은 소규모 사설학당을 차려 많은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라는 저작에서는 재산가 크리티아스가 자기 자식들을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프로타고라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경제적인 위기 상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돈벌이를 하지 않아 크산티페가 겪었을 생활고는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남루한 옷을 입고 심지어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일생 연봉 무일푼인 그가 그래도 70세까지도 짱짱한 건강을 유지했다는 건 철학적인 사유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의 주된 사유 대상은 절제, 용기와 같은 도덕적인 덕목들이었다.

고대 아테네라고 해서 가정생활을 꾸리는 재테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크세노폰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록 <경영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이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최선의 재산축적 방법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안 살림에는 나 몰라라 했으니 크산티페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니 크산티페를 대놓고 악처라고 폄하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인 것이다.

소설 <소크라테스와 악처 크산티페>는 역사적인 배경 묘사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빈약한 감이 들게 하지만 아내 크산티페의 관점에서 비친 소크라테스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보인다. 소설이므로 저자는 상당 부분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묘사하고 있음에도, 현실감 있는 언어로 소크라테스의 부부관계를 잘 전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크산티페의 최초의 구타를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덕목으로 이겨냈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능력과 활동을 희생한 대가로 소크라테스는 상습적인 구타를 얻게 되어 고통을 즐기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크산티페는 평생을 불평하고 소크라테스를 개조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의 철학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하게 된다. 철학의 지속을 위해서는 아내의 용서를 구해야 하고 때때로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손석춘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철학자의 서재]

박민철(동남보건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에게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고 3에 진입한 1997년 봄쯤이었다.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아주 잠깐 꾼 적이 있었다. 입시 관련 책보다는 다른 책을 보고자 동네 구립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그때, 손에 잡아든 책이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보잘것없던 내 서재에서 가장 중앙에 꽂아둔 책이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 내 삶의 전환기를 함께 했던 그 책은 수백 권의 전공 책과 원서에 밀려 책장 맨 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 옛날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주었던 저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손석춘 지음, 철수와영희 펴냄). ⓒ철수와영희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뭐라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던 마음 속 불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기뻤다. 제목만 보고 이 책이 나의 사소한 고민을 덜어주길 바랐다. 솔직하게 말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석용산 지음, 고려원 펴냄)식의 통속적인 수양서 내지 에세이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사회로의 적응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나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신문 읽기의 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가 신문 논설문과 칼럼으로 잔뼈가 굵은, 한국 언론 운동을 이끌어 온 ‘손석춘’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제안을 담고 있는 냉철한 논설문이다. 짧은 책이지만 여기에 담긴 질문의 무게감은 꽤나 묵직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 그리고 이를 이끌고 있는 진보 세력에 대해 ‘돌직구’를 던진다.

‘국격’이 높아지고 ‘세계 7대강국’에 진입했다는 찬가가 울려 퍼지던 2012년 6월 어느 날, 달동네 월셋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 수당으로 살아왔던 노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다. 노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는 참으로 어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삶을 부정하는 후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만큼 힘이 크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후회들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특히 ‘진보’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꾸던 진보들은 일상 속에 매몰되어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저자는 현실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는 진보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 지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16쪽)

 

진보를 후회와 패배감으로 옭아매는 몇 가지 프레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스펙트럼을 규정하는 저자의 시선이다. 저자가 규정한 진보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4월 혁명, 5월 항쟁,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8월 연세대항쟁에 몸으로 참여했거나 마음으로 지지한 모든 사람’을 진보라 정의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진보’다. 저자의 폭넓은 규정 덕분에, 실천력이 부족했다는 과거 선배들의 비판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저자가 진보를 생각보다 광범위한 범주로 규정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대동단결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진보의 ‘가치’를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보는,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분단체제에 고통 받는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유·평등·자주·평화·복지·생태·인권·소수자 권리 등 다양한 진보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거나 이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만큼 진보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사회는 드물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진보 운동이 활발하던 그때는 ‘별이 빛나는 시대’였다. 루카치의 저 유명한 문장,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처럼, 별이 빛나는 시대는 암울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시대는 이미 과거완료형이다. 구체적인 증거는 진보가 집권할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저자가 지적하듯 진보 세력의 집권에 필요한 1200만 표라는 기준은 비정규직 850만 명과 농민 300만 명, 청년실업자 100만 명, 정규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2000만 명의 유권자로 이미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

 

이렇듯 폭넓은 진보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없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내놓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권력의 프레임은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비틀어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이 대다수의 민중과 결합하지 못하게 만들었음이 첫 번째 이유이다. 현실 권력에 대한 아집 때문에 2010년 ‘진보 대통합’이 분열로 나아갔으며, 결과적으로 진보 세력의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이 무산된 것이 두 번째이다. 2000년 이후 우리 민중의 삶은 더욱 고달프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첫 번째 이유는 언론 권력의 작동과 연관되며, 두 번째 이유는 정치 권력, 세 번째 이유는 경제 권력의 교묘한 술책과 연관된다. 이른바, ‘철의 3각 동맹’인 정치 권력·경제 권력·언론 권력이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각종 권력 프레임이 진보의 후퇴를, 진보의 멀어짐을, 진보의 패배감을 불러왔다.

일상에 매몰된 진보들에 묻는 또 다른 질문, ‘그 깨끗한 꿈, 무덤까지 가져갈 셈인가?’

 

별이 저물어버린 시대는 별이 빛나는 시대를 살았던 진보 세력 자신들에게 삶에 대한 후회를 가져온다. 저자의 진단처럼 진보의 위기를 지나 진보에 대한 조롱어린 사망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진보 세력은 깊은 패배감에서 벗어나올 줄 모른다. 별을 잃어버린 그들은 어떠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억척스러운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4월을, 5월을, 6월을, 7~8월을, 8월을 감동과 보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더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며 자신의 경제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는 대안이 없다며 정치 현실 또는 정치 생활에서 눈 돌리고 경제생활에만 억척스럽게 매몰되어도 좋은가.”(103쪽)

 

이는 젊은 날의 깨끗한 꿈에 대한 자조적인 자포자기이거나, 몰감성적인 외면이다. 저자는 진보의 패배감이 커질수록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진보의 꿈이 포기되는 순간, 나를 포함한 민중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진보는 마침내 막다른 길에 내몰린 노동자, 농민, 빈민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 된다.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가 자신의 꿈을 무덤까지 가져갈 듯이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민중과의 소통에 실패했고 더 원천적으로는 자신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맞아 죽거나 분신자살한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민을 떠올리면, 오늘 진보정치 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도덕적 나태를 넘어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다. 그런데 과연 ‘나태한 공범’이라는 비판의 과녁은 진보정치 세력만일까? 혹시 모든 진보가 성찰해야 마땅한 자기 가슴의 ‘화살’이 아닐까.” (30~31쪽)

 

그렇다. 저자의 인식은 옳다. 자기 가슴으로 날아온 화살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아프다. 분명 나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타살의 공범이라는 ‘사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1970년의 ‘전태일’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980년대의 진보를 살아있게 만들었다면, 2000년대의 진보는 ‘전태일’에 무감각하다. 저자가 가슴 시리게 기억하는 고(故) 허세욱·박영재 동지는 2000년대의 ‘전태일’이다. 이렇듯 진보의 무력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적 감수성을 잃게 만들었다. 여전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고통을 증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진보는 별을 찾는 마음으로 이 둘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보이는 진보에 대한 애정은 분명하다. 그러한 애정에 나는 감사한다. 저자는 젊은 날의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무덤까지 가져가지 않으려면 개인적 무력감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시작은 객관적인 현실 파악과 그에 기반을 둔 냉철한 자기반성이다. 그러한 자기반성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진보 세력이 잊고 있었던 문제, 다름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따른 ‘대중적인 소통’이다. 그렇다고 소통을 수구-기득권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이 쓰는 그것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들의 소통은 그네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무엇보다 진보가 할 일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97쪽)

 

우리는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 이것은 저자의 두 가지 질문에 호응하는 우리 자신들의 자문(自問)이다. 우리는 무덤에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젊은 날의 그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패배감과 우울감을 가져갈 것인가?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신문 읽기의 혁명>(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더러는 세월의 이끼 탓에 정의롭고 깨끗했던 꿈에 곰팡이가 피거나 아예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에 잠기거나 우울할 일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정의롭고 깨끗한 꿈을 잊었기에 우울했던 나날에서 벗어나 체념의 곰팡이를 툴툴 털어내고 일상의 정치경제생활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옳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138쪽)

그렇다. 우리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보의 만장(輓章)이 한국사회 전반에 나부낀다고 해도 우리는 그 상여행렬을 조용히 따라갈 수만은 없다. 나, 나의 어머니, 내 아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 체제가 우리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꿈을 꾸지 않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소박한 꿈을 꾸어본다. 내 아들이 사는 세상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좀 더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세상이 되기를. 이제 귓가에 울리는 듯한 저자의 마지막 외침을 딱딱한 글로 전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학습하라, 대안사회를 토론하라, 국민과 소통하라.” 이 땅의 모든 진보들에게 전한다.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을.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진보 위기론에 대한 저자의 논리적 응답과 진보의 내적 성찰을 위한 냉철한 제안을 의도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지표에 근거한 구체적인 분석 및 정책들을 제외했다. 그것이 정의로운 꿈을 꾸었던 모든 사람들과 가슴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는 저자의 저술 의도에 보다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와 더불어 한편에 밀어놨던 <신문 읽기의 혁명>을 책장 가운데로 가져왔다. 다시금 꿈을 꿀 때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

?

인간은 1분에 100단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데 생각은 400단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외에 300단어에 해당하는 만큼 생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300단어에는 자칫하면 거짓말이 섞여 들어간다. ‘세상은 너를 원하지 않아,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너무 못나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아, 너의 실체를 알면 너를 조롱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식의 거짓말이 너무나 많이 섞여 들어간다.

꾸미기_ST830089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만의 소설을 ‘망집’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인생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식의 허상을 덧씌워서 보기 때문에 망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식의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자꾸 살피게 되면 인식의 편향성을 느끼게 된다. 아니 자신의 인식의 편향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이 어떤 허상을 덧씌우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의식 때문에 이러저러한 허상을 덧씌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자신의 소망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서 객관을 객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편파적으로 인식하면서 허상을 덧씌우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러저러한 소망으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식이 대박이 나기를 바라다 못해 대박이 날 것이라고 믿는다. 객관적으로는 깡통계좌를 차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도 자신만은 그 대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 근거 없이 믿고 만다. 이러한 인식의 편파성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적용된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편향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고양적 편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자기고양적 편향이 너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너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

우리는 자주 ‘딱 나일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곤 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 하는 생각이 괴로움을 일으킨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성향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있다. 그 성향이 그 사람을 특징짓는다. 그런데 사실 성향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성향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은 성향일 뿐이다. 다만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되기도 하고, 나쁘게 발휘되기도 할 뿐이다. 무슨 소리냐고?

생각해보자.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신중하다’와 ‘우유부단하다’는 모두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정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않고 결정을 하면 ‘신중하다’고 하고, 결정해야 할 시점을 넘어서까지 생각하면 ‘우유부단하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좋게 발휘되면 ‘신중하다’고 평가받는 것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나쁜 성향이란 없다. 성향 자체는 어떠한 경향성일 뿐이기 때문에 ‘나쁘다, 좋다’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나쁜 특성을 없애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특성 자체가 나의 존재에 속해 있는 것이라서 그 특성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완전히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 γν?θι σεαυτ?ν 그노티 세아우톤)

너 자신을 알라(그리스어:γν?θι σεαυτ?ν그노티 세아우톤)

그러니까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안다는 것은 그 성향이 좋게 발휘될 때뿐만 아니라 나쁘게 발휘될 때도 파악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것을 흔히 ‘성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확히는 ‘성향을 바꾼다’가 아니라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것을 조절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향 자체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나다’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나의 성향은 나의 존재방식과 연관되는데 갑자기 그 성향만 딱 빼서 버린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너의 지방만을 빼서 버려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요구이다. 지방이 나의 몸 전반에 걸쳐 있는데 그 부분만을 분리해서 버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내 몸에서 지방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지방이 잘 분해되는 음식을 먹고 지방 음식의 섭취를 줄이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방이 과다하게 되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는 경우 지방만을 빼지는 못하기 때문에 근육이나 칼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부분까지 같이 빠져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아무리 특별한 다이어트 방법이라 해도 지방만 추출해서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하나의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고, 성향 자체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좋게 발휘될 때와 나쁘게 발휘될 때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나 자체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나의 성향을 적절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 성향이 어떨 때 좋게 발휘되고 어떨 때 나쁘게 발휘되는지를 잘 파악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것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나쁘다고 규정해버리면 자신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 버려서 자기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나에게 실망하게 되면 그 성향을 조절하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성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 그 성향이 발휘되는 방식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라

?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 발현을 통제하려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나는 잘난 인간이어야 하는데’와 같은 전제에 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이 말을 들으며 ‘그래, 나는 이런 전제에 매여 있는 것 같아.’ 하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대하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기분 나빴던 적이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는가?

어떤 사람은 자주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만만해보이나?’ 하는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만해 보이나?’ 하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만만해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고 있는 것들을 잘 검토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철학적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 ‘우리 각자가 원하는 바’이다. ‘내가 잘난 인간이어야 한다’는 인간이면 누구나 매이게 되는 전제이다. 그래서 이 전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제에 고착되어 있는 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고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에 더 생각이 매이게 된다. 그러면 객관적 인식과는 멀어진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가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꾸미기_회전_사진 152인식을 객관적으로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에 매이지 않으면서 인식의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자신의 마음의 결을 느끼게 된다. 내가 나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내가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고 저럴 때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 사람인지를 알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인식의 편향성의 특징을 느껴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자신의 경향성을 알고 조절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성격이 팔자”라고까지 하겠는가. 역술에서는 ‘팔자(八字)’로 사람의 경향성을 말하고, 인도에서는 ‘구나(guna, 공덕 또는 덕)’라는 말로 사람의 경향성을 지칭한다. 인도에서는 바로 이 ‘구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결국은 구나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소리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야 자신의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을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향성을 나쁘다고 규정하지 말고 경향성이 나쁘게 발현되는 것을 막자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자. 자신의 경향성을 알아야 자신을 가누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좋다. 나의 성향은 문제가 아니다. 나의 성향은 장점으로도 발휘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발휘될 수도 있다. 성향 자체를 문제시하지 말고 성향이 발현되는 방식을 조절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

?

?

?

?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철학자의 서재]

오지석 (루터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곳”?!

 

1983년 한 가수가 부른 건전가요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을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 있고 계층 이동이 열려있다는 사회라고 선언한다. 흡사 미국을 향해 이민 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아메리카 드림’을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노래는 1970년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에 이어 제5공화국 시절 우리들을 집단 최면으로 이끌었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아네트 라루 지음, 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그렇다보니 아네트 라루가 <불평등한 어린 시절>(박상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회 계층이라는 요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서 “어떤 개인이건 열심히 일하고 충분히 노력한다면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차이는 개인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노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을 ‘스펙 쌓기’,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귀족 인맥 쌓기’에 내모는 것이 우리 시대의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삶의 경험과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부와 지위의 불평등이 사회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이유, 다음 세대에게 갖고 있는 것을 물려주는 것이지!

 

인터넷 검색 엔진에 ‘세습’ 또는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한국 사회가 북쪽 권력의 3대 세습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회 속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세습 또는 대물림에 대해서는 일부러 눈을 감거나 관대하다. 심지어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하는 일은 ‘핏줄’을 통한 전수라고 온갖 매스미디어를 통해 주장하며, 자식의 경쟁자들에게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대물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각기 다른 말로 표현한다. 전통 사회에서 세습이라는 말 자체는, ‘왕권 세습’에서 보듯이 정치적, 법률적 용어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재산 세습은 특별히 ‘상속’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학문이나 기예의 세습은 ‘사사’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세습은 혈연, 지연, 학연 각각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같은 방식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것은 역시 핏줄에 의한 세습, 대물림이다. 우리말에서 ‘대물림’, ‘세습’, ‘상속’, ‘전수’, ‘사사’, ‘물려주다’의 용례를 살펴보다보면 ‘~을 에게’, 혹은 ‘~에(에게) ~을’이라고 나온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것이 삶의 목적 또는 삶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548px-Frederik_de_Grote_en_Wilhelmine

아네트 라루는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특히 교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회적 계층 및 불평등의 대물림 문제를 들여다본다.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를 이끄는 지배 및 불평등의 패턴에 주목한다. 또한 개인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 위치를 유지 혹은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러한 특권의 세습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나 특권은 자신의 지능이나 재능 또는 노력 같은 역량을 통해 자신 스스로 획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여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과연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자신의 노력이나 재능의 결과물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아네트 라루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다.
??

라루는 이 책에서 교육을 ‘집중 양육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라는 방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활동, 언어 사용, 가정생활과 공공기관이라는 분류에 따라 아홉 사례를 소개한다. 각각 등장하는 사례를 읽다보면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책은 학교 또는 교육기관의 정보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중산층과 그렇지 못한 노동자 및 빈곤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자녀의 스케줄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출 수 있는 중산층 부모들, 이와 반대로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자녀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게 익숙한 노동자·빈곤층 부모들을 마주하다보면 유럽과 같은 자녀 양육 수당이라든지 무상교육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하면 조선시대부터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탄압하거나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 쉽게 사용했던 패턴을 통해 ‘자기검열’ 하게 하는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직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세습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생활에 필요를 요구하고 공급받기도 한다. 아네트 라루는 자녀들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사회생활을 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에 주목한다. 자녀와의 언어생활을 보면 계층별로 차이가 나는 것을 기술하고 있는데, 가령 중산층은 자녀들에게 다양한 언어적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정에서 제공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맺어나갈 준비를 갖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내는 도구로 사용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거나 협상하는 법을 숙지해나간다.

 

이에 비해 노동자 및 빈곤층의 언어생활은 짧은 문장과 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 제한적이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의견을 타협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 가족의 삶에서 언어란 논리적 대화 기술이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학습 수단이 아니라 실용적인 의사 전달 수단의 역할만 하고 있다. 중산층의 언어생활과 노동자 및 빈곤 계층의 언어생활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간극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계층, 계급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국 사회는 상생, 공존이라는 단어보다는 ‘경쟁’이라는 말이 익숙하고 그것이 현실을 지배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회 계층 사이의 이동이 상당히 얼어붙은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앞 세대(70세 이상)가 아직도 믿고 있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단지 드문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사회는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그 실력은 어떻게 배양되는가? 이런 물음에 한국 사회는 ‘교육’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오늘도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앞에 그리고 학원 앞에 차량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
다른 나라보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몰입한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자신의 수입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 붓는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녀가 ‘사회적 이동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경제력을 집중한다. 하지만 이것도 부모 자신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노동자, 빈곤층일 경우 누구라도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겪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대물림의 현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누군가에게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는’ 사회를 지양하고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을까? 이런 물음을 남기고 아네트 라루의 말로 글을 맺고자 한다.

?

“한 개인의 출신 가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위치는 그 개인이 인생에서 겪게 될 일이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은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회 계층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에 득이 되는 방향인지도 모른다.”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나도 나를 배우고 알아야 한다[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②-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세네카

?

?열등감이 있거나 잘나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여를 보고 내심 좋아한다. ‘그래, 저 사람은 저런 결여가 있어. 나보다 못하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서 타인의 단점과 결여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도 유능해진다. 그래서 또 남들과의 관계가 엉켜버리지만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의 결여 한 가지를 보고서는 안심을 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났다는 증명을 만나면(즉 어느 한 부분에서 자기보다 성취를 이룰 때) 굉장히 당혹해한다. ‘저 사람에게 저런 면이 있었는데 내가 몰랐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앞서가는구나.’ 하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여하간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십중팔구는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그 사람으로서는 결정적인) 실패를 맛본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릴 때 신동 소리 좀 들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대학은 서울대쯤은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서울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든가 하는 사람들말이다. ?’나는 ΟΟ한 면은 좀 잘 하는 편이고, ΔΔ한 면은 좀 못하는 편이야. 그렇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 받을만해’라는 확신이 없으면 참 인생이 괴로워진다. 타인의 시선에 그렇게 좌우되려니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질 것인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게 사는지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게 피곤하다는 걸 알아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를 감지하지 못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도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아무래도 정신분석을 좀 받아봐야 할까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정신분석은 무슨 개뿔, 그건 밥 먹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복에 겨워서 하는 짓이지.” 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사실은 정신적 문제가 심각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 정신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문제가 많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들이 옆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내놓고는 자신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병원까지 찾게 만든 원인임을 전혀 모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들은 정말 치료 받아야 할 사람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옆 사람이 환자로 온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문제를 자각하고, ‘나는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

?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알기 어렵다. 인간은 거울이라는 매개가 있어야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매일 남을 쳐다보고 ‘저 인간은 이래서 문제이네 저래서 문제이네.’ 말하면서도 자신의 문제를 보지는 못한다. 그 눈으로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기 자신을 성찰해내고 반성해내기 바쁜 사람은 타인에 대해 말할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 하느라고 바빠서 남들이 무슨 잘못을 하는지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의 잘못이 눈에 잘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내가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그리도 나는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고 싶어하는가?’를 말이다. 내가 A보다 못났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없는 사람은 A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그리 골몰하지 않는다. A의 잘못을 누가 말해도 그리 관심두지 않는다. A에 대한 험담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 나는 A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워요.”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면 볼수록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지게 된다. ‘나도 그런 잘못을 하는데 뭐’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 마음 놓고 욕한다.

사실 이렇게 욕하게 되는 데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심리가 관련되어 있다. 그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타인의 잘못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는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남들이 열띠게 험담을 해도 그 험담의 대열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남의 잘못을 말하게 되는 것은 ‘잘못을 하는 그 사람’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확인에의 욕구가 없는 사람은 타인의 잘못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의 잘못을 말하고 생각해봐야 나에게 남는 것이 없으므로 그 ‘남의 잘못’에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 ‘남의 잘못’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만 배워내자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는 사람일수록 ‘나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남의 잘못을 말하면서 쾌감을 얻는 데 집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쪽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얼마나 예리한 비판력으로 남의 잘못을 들추어냈는지, 그 때 자신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게 된다.

꾸미기_유럽2013.01 478당신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가? 자신의 잘못을 보는 데에 지나치게 유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더 유능하다. 인간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남에게는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도 자신에게는 아주 뭉툭한 칼날만 들이대거나 아예 칼날을 들이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을 옆에 두고 싶은가? 우리 모두는 나의 단점은 덮어주고 나의 장점을 칭찬해주는 사람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도 나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 유능한 사람은 자꾸만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고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알아주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게 된다. 그 예리한 비판력으로 자신의 잘못을 본다면 인간관계가 좋아질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

누구나 얼마쯤은 부당하고 얼마쯤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부당함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부당함은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측면을 돌아볼 줄 아는 반성능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 부당한 측면을 보고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대체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폭탄은 타인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은 아주 잘 찾아내고 혐오하면서도, 자신의 비합리적인 측면이나 부당한 측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철학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객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식의 자연적인 경향성은 자신이 잘한 일과 타인이 못한 일을 보는 데 유능한데, 철학에서는 자신이 잘한 일과 못한 일, 타인이 잘한 일과 못한 일을 균형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니 철학적 성찰을 하려면 머리가 아파진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로 논리적으로 따지다보면 인간 인식의 자연적 경향성, 즉 심리가 더 잘 드러난다.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부당한 측면, 이상한 측면이 없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이상한 측면이 있고 그 사람에게도 이상한 측면이 있을 뿐인데, 왜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그리도 골몰하는가? 물론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이 나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상한 측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이상한 측면이 나에게 어떤 불편을 끼치는지를 아는가? 대부분 모른다. 그러니까 계속 그 행동 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바꿔서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특별한 싸이코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자기 반성력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면서도 그 행동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얼마나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합리적인 사람인가? “나만큼만 합리적이라고 해!”, “그래도 나는 합리적인 편이기야 하지.” 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이라고 느끼는 나 자신 역시 어떤 이상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나의 그 이상한 측면이 옆 사람을 나도 모르게 힘들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분한 자기 반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 모두는 얼마쯤 이상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이상한 부분이, 그에게는 나의 이상한 부분이 문제될 뿐이다. 나에게 그의 이상한 부분만 보이고 나의 이상한 부분이 파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만 이상한 부분이 있고 나에게는 이상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싸이코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싸이코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싸이코라고 몰아붙이는 인식의 편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생각해보자. 그 사람이 실제로 이상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이상한 측면에 대해 쑥덕거리면 그 사람이 그 이상한 측면을 고치는가? 나와 동료의 쑥덕거림은 그 사람으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를 잘 따져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이상한 측면을 조절해내기도 바쁜데, 뭣하러 굳이 남의 부당한 측면에 그렇게도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에 골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은 부당해.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야!’라고 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역으로 내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열등하다는 것이 확인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크기변환_꾸미기_DSCN0697“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가장 잘 모를 수 있다. (당신이 불편해하는 그 사람도 대체로 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나’이지만 나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대상화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거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남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남의 문제를 찾아내는 데 너무나 유능하지만,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특성 그대로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보아내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 인식을?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 훈수 두는 사람이?3배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객관적 인식에 비해 1/3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 누군가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인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에 끄달려가면서 마음에 따라 반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

?

?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2월 월례발표회]

?[2014년 2월 월례발표회]

 

들뢰즈의 행동학(?thologie)과 되기(devenir) 개념의 실천적 의미

 

발표: 김은주(동덕여대)
후기: 김범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4년 2월 26일. 한철연에서는 <들뢰즈의 행동학과 되기 개념의 실천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김은주 선생의 논문 발표회가 진행되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도 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 주제는 지금 시대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매우 훌륭하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은 약자를 보듬고 배려하는 상징처럼 간주된다. 이 코스프레와 함께 코드화된 폭력만 잘 활용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물론 취임 1년 후에도 안정적인 지지율 50%도 가능하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 참으로 여성-되기 코스프레는 위대하다. 또한 이런 사건도 기억해 볼 수 있다. 어떤 여성은 어머니의 심정(엄마 코스프레?)으로 회사의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시대에 여성되기는 오히려 구조적 파시즘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코스프레가, 이런 어머니가 여성-되기일까? 여성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여성-되기라는 개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들뢰즈의 행동학, 특히 되기의 문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라는 양가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가짐과 문제의식으로 들뢰즈의 행동학을 해석하면서 여성되기의 가능성을 연구한 성과를 정리하는 김은주 선생님의 2월 발표는 무척이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배치부터 심상치 않았다. 2시간을 훌쩍 넘는 발표와 토론이었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지지와 비판이라는 이중주가 넘실거릴 수 있는 배치였다. 프랑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성적 태도로 철학을 접근하는 사람들과 늘 대립각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늘 한편에서 조용하게 혼잣말을 한다. ‘문제제기부터 잘못됐어!’ 발표자인 김은주 선생님(이하 발표자로 명한다.) 오른쪽에는 가따리 전공자가, 반대편 왼쪽에는 여성철학이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공부한 분이 앉았다. 이런 배치는 오묘한 이중주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임과 동시에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긴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표자는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 설정부터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윤리적 작업은 규범을 따르는 의무의 논리에서 벗어나, 힘을 실행하고 존재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는 윤리적 논의를 ‘~해야만 하는 바’라는 형식적 보편타당성을 따르는 자율적 의무의 입각점에서가 아니라 존재 방식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가치의 문제를 새롭게 발견하는 비판과 구축의 작업으로 접근한다. 그의 입장은 도덕을 비판하는 니체를 계승하고, 존재의 역량(puissance)으로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재단된 삶에 저항하며 새로운 존재론적 조건을 생성해내는 행동학의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 서영화

ⓒ 서영화

문제 설정부터 많은 설명을 요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발표에서는 니체의 선악비판보다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특히 신체의 역량에 관한 문제에 집중해서 행동학의 의미를 접근했다. 발표 후 토론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신체의 의미부터 보충설명하고 싶다. 신체란 구체적으로 인간의 신체, 동물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모두 신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제자인 일본 철학자 우노 구니이치는 corps(신체)라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쓰는 體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근대에서는 신체에 대해서 심과 신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스피노자나 니체의 경우에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무의식이나 심층적 의식의 지위를 신체 개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나아가 신체는 변이의 힘을 갖고 있는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발표자의 경우에는 이를 신체의 역량을 변용과 변용능력이라는 두 축에 따라 정의하면서 역량 강화의 윤리적 측면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생성하는 되기의 개념을 힘들(초기 존재론에서는 강도로 설명한다)의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고 설명되는 지평으로 나아간다.

발표자는 이런 정리를 한다. “신체를 규정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경도는 신체들 간의 관계를 제시하며 신체들의 결합과 합성을 의미하는 변용(affection)이다. 위도는 한 신체에 있어서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강도적인 변화 상태와 그 정도를 보여주는 정동(affect)이다.” 그리고 이 정동은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는 개체성, 즉 이것임(hecc?it?)으로 나타난다. 이것임은 원래 둔스 스코투스 학파가 존재들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한 haecceitas에서 유래한다. 들뢰즈의 경우 이 개념을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하는데, 사건은 인칭적인 자아를 구성하지 않는 개체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임은 정동을 통해서 신체를 조성하는 생산하는 되기 개념과 만나게 된다.

발표자는 되기(devenir)의 의미에서 신체 결합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즉 되기의 블록(bloc de devenir)으로서 둘 사이의 관계성으로 발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는 개체화가 가능한 심층적인 접힘과 펼쳐짐을 해석할 수 있다. 발표자는 공진화(co-evolution)를 설명할 수 있는 이중 포획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되기 개념이 실재의 변화 ‘과정’이며 ‘상호 변용’의 결합으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 안에는 신체의 역량 강화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함께, 여기서 비롯되는 의지적 주체의 도덕을 비판하는 함의가 깔려 있었다.

이 설명 안에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되기가 마치 상대주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색채로 가득하다는 비판의 날이 설 수 있다. 특히 되기가 어떤 당파성을 견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 들뢰즈의 되기가 막연하게 신체적 역량 강화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파시즘적 역량 강화의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던질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서 발표자는 되기의 구체적 실천의미를 정리했다. 되기는 인간 중심주의에 의해 벗어나서 그 구분의 경계를 횡단하고, 다수의 권력 지점이라는 중심으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적인 것의 되기는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 방식에서는 자아 중심적 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해체하고 도처에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익명적 ‘아무개’로서 윤리 정치적 존재론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정치존재론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합의체(합의라는 신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조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주어진 수동적인 역량, 혹은 이미 주어진 절대적 권력 앞에서 복종 대신에 도주와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되기의 과정이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여성되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