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7. 3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2강.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강연 : 배기호(충북대 강사)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춘추전국시대에 제안된 민본주의적 통치 원칙의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동양에 민주적 전통은 있는가? ‘민주(民主)’와 ‘민본(民本)’은 어떻게 다른가? 민본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치와 이념일 수 있는가?”

 

오늘 강의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배기호 교수는 순자(荀子, BC 298~BC 238) 철학을 중심으로 고대 유학 전통에서 민본 사상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여 설명했습니다. 성악설에만 가려져 있던 순자 철학에서 ‘위’와 ‘아래’의 문제를 깊게 파고듦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참여’라는 메시지로 고대 유학 사상을 재구성한 것이지요.

 

오늘날 정치적 주체가 된 ‘아래’는 ‘위’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며, 정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권리와 더불어 의무를 자각해야 하고, 공동체의 일원이자 주인으로서 의식 수준을 고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자 철학을 비롯한 고대 유학을 현대적으로 재-음미해본다면, 더 이상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아래’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라는 순자의 말은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심지어 고대 유학에서조차 백성들이 단지 통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근본이 됨을 밝히는 말이 됩니다.

 

순자 철학을 중심으로 민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현실과 연결 지으면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가 논의 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순자의 말을 통해, ‘시민(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활동, 즉 참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누구에게나 해당하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요컨대, 고대 유학이 표방하는 바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적용한다면, 시민의 정치 참여를 북돋우고 올바른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2018. 7. 23.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1강.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강연 : 김성우(상지대 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와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우리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과연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일까요? 과거 세계 대전과 대량학살을 일삼았던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현재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내세우면서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 모두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얻어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은 커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작년 전국을 뒤흔든 국정농단 사건, 최근 연이은 정치인들의 성폭력 문제들, 그리고 제주도를 통해 입국하려는 난민들을 둘러싼 문제들은 민주주의의 결함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라고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민주주의의 결함이 그 자체 본질적인 문제이므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채택해야할까요? 아니면 그 결함이 민주주의 자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 발생한 수정 가능한 외적인 문제로 반성과 변혁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 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첫 번째 시간, 김성우 교수는 민주주의의 결함에 대한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7~BC 347)과 현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에서 찾아봐야한다고 얘기합니다. 민주주의가 발생한 고대 그리스 사회로 돌아가 이 문제를 고민해보고, 이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아렌트의 새로운 이해를 엿보았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플라톤은 독재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예속과 같은 결함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렌트는 “이소노미아(isonomia)”, 즉 평등한 자유로부터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아렌트가 주목한 이소노미아는 장자의 ‘무치(無治)’와도 관련 있습니다. 이소노미아의 주 특징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없다는 것, 인간의 평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무치주의는 비록 이소노미아와 다르게 ‘인위’보다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소노미아와 비슷합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시민대학에 참여해주신 수강생들의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 즉 “민주주의체제에서 발견된 결함은 본질적인 것인지, 수정 가능한 외적인 것인지”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이소노미아와 무치주의로 극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철학자와 그가 제시한 철학의 에토스와 파토스를 시대적 한계와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해야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연 이소노미아는 멀리 있는 것일까요?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①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1

<아래>

  1. 개강일 : 2018년 8월 1일(수요일)부터 매주 수요일 상설 강좌로 진행
  2. 장 소 : 사단법인 정암학당 서울연구실(서초구 방배동 795-25)
  3.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4.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5.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6. 방 식 :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며 90분 강의한 후 질의응답시간을 갖는다. 정치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강의하되 회원들의 관심사에 맞추어 진행한다.

 

[서 론]

  • 강좌의 취지

철학사를 통해 플라톤 철학만큼 많이 다루어진 철학도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에 대한 크고 작은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와 관련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주어지는 경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플라톤에 관한 철학사나 해설서 등에 의존해 있고, 직접 플라톤이 쓴 작품 자체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플라톤을 만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사실 플라톤의 작품들이 워낙이 방대하고 형식과 내용 또한 체계적이지도 평이하지도 않은데다가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 자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중역본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 강의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철학 작품이자 문학 작품이기도 한 그의 텍스트를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그 드라마틱한 역동성을 직접 체험해가면서 그의 생각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보고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사실 플라톤 철학 전문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텍스트를 학술적인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주 임무로 삼고 있지만, 어떤 동기에서건 플라톤 철학을 알고 싶어서 여기 이 자리에 오신 일반 독자 분들로서는 플라톤의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보다는 플라톤 텍스트를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직접 읽어가면서 플라톤과 주체적으로 만나보고 그것이 나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음미해보는 것이 보다 큰 관심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쩌면 독자 분들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플라톤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 우리와 같은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 연구자들이 힘들여 번역한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을 펼 때마다 “아! 플라톤이 한국말을 배워 나의 상황과 여건과 요구에 맞추어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들려주려 내 곁에 와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의 음성, 생각, 고민, 표정을 읽어내고 그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삶과 철학을 근본에서 다시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를 위해 텍스트를 함께 읽어가면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찾아가되 동시에 그것을 최대한 자기 생각과 연관 지어 음미해보는 시도도 병행했으면 좋겠다. 본 강사부터도 그런 태도로 텍스트를 읽어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청자들은 강의를 들으며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플라톤의 생각, 본 강사의 생각을 자유롭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고민해가면서,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의 깊이와 의미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형성해 나갔으면 한다. 물론 강좌에 참여하는 분들의 그러한 노력과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에는 강사의 역량이 크게 부족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처음 설정한 강의의 기본적인 취지를 변함없이 잘 견지해가며 강의를 진행하려 한다. 그리고 방침상 최대한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논의는 줄이고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가며 세세히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은 하겠지만, 군데군데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될 경우에는 적절히 그와 관련한 설명과 토론도 병행할 것이다. 다만 제목을 비롯하여 집필시기, 대화상정 시기 그리고 그 시기들의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나름의 관점에서 먼저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앞으로 텍스트를 매우 천천히 자세하게 읽어가기 때문에 전체를 빨리 독파하고픈 청자들에게는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을 다 읽어내는 데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청자들과 강사 모두 플라톤의 <국가>를 이러한 공개강좌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려는 시도가 아마도 처음이기도 한 만큼,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최대한 즐겁게 함께 읽어 나가기로 하자.

 

  1. 제목 소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통상 우리가 <국가>로 옮기고 있는 책의 그리스어 원제목은 폴리테이아(politeia, πολιτει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시민적 삶’(civic life), ‘시민의 조건과 권리, 시민권’(the condition and rights of citizen, citizenship)이라는 뜻이다. 또 그 말의 동사적 어원인 politeuō라는 말을 함께 찾아보면 ‘시민으로 살다’(to live as a citizen), ‘나랏일에 참여하다’(to take part in the government)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가 기본적으로 ‘시민생활과 정치생활을 하나로 여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임을 잘 보여준다. 물론 ‘폴리테이아’라는 말에는 우리말 제목과 역어가 보여주듯이 제도로서의 ‘국가의 정치체제(the constitution of a state), 정부 형태(a form of government), 정치 조직(civic polity)’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라는 책의 제목을 소개하면서 ‘삶의 방식’으로서 그 말의 일차적 의미부터 꺼내 드는 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의미를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히 ‘정치체제’라는 뜻으로만, 특히 오늘날 법률적·제도적 의미에서의 정치체제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중층적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아예 ‘폴리테이아’라는 표현 자체를 ‘시민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방식’과 ‘시민으로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함께 사용하여, 그것들이 결코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적인 ‘시민의 생활방식’임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시민적 삶의 방식’이란 폴리스의 안전과 가치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임과 동시에,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보전하기 위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였던 것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본적으로 시민생활이 곧 정치생활이었다는 점에서 폴리테이가가 갖는 복합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삶의 방식의 두 가지 측면이 갖는 유기적 통일성을 영혼론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토대로 더욱 부각시켜, 그의 정치사상의 요체로서는 물론 <국가>의 논의 전체를 풀어나가는 기본 토대이자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앞으로 책을 읽어가며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자 기반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국가>의 원제목으로서 ‘폴리테이아’는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을 가장 바람직하고 훌륭한 상태로 조직해내는 원리 내지 활동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림 일반이라는 확장된 의미에서 ‘정치체제’라는 말로 바꿔 말하자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일적 운용원리이자 방식으로서 법률적·제도적 정치체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욕망들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고 운용하는 이른바 영혼 내부의 심리적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개별 폴리테이아를 지시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과두정적인 사람ho oligarchikos, 민주정적인 사람ho dēmokatikos, 참주정적인 사람ho tyrannikos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말로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폴리테이아는 개인의 내적 생활방식 즉 개인들 각각의 내적 영혼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원리 내지 방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른바 통치 또는 다스림(archein)이란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기 다른 계층 내지 기능들의 ‘최선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활동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내적·외적 정치체제는 앞으로 상호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특색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겠지만, 미리 언급하자면 우리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영혼의 정치철학’으로 부르고, 또 ‘정치철학이자 도덕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복합성 내지 중층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②’에서 계속…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철학자의 서재]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읽는 스피노자부터 칸트까지,

스포일러 없는 서평 추구

 

 

 

스펙이나 쌓는 저렴한 삶은 살지 않겠다 해놓고 보니, 취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철학 관련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비전공자들은 그래서 철학 서적들을 읽을 땐 2차 문헌이라고 하는 안내서나 입문서들을 통해 읽거나 할 수 밖에는 다른 묘수가 없다. 스피노자니 칸트니 헤겔이니, 다 그렇다. 말하자면 내 방에 과외 선생님이 필요한 건데 이 책은 내게 그 역할을 해주었다.

 

스피노자의 <에타카>는 읽다가 읽다가 버티고 버티다가 그냥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스피노자에 대해 쉽고도 재밌게, 가령 스피노자가 어떻게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쉽다’거나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거미에겐 쉬운 거미집 짓는 일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것이며 인간에게 쉬운 일을 거미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산수를 못하는 거미에게 무능력하다고 하겠지만 그건 인간중심적 사유방식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사실 거미와 인간에게는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자신의 편리대로 사물을, 대상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신까지도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스피노자하면 ‘신 즉 자연’이라는 말부터 떠오르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스피노자의 ‘신의 자연화’는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거나 자연이 오묘한 설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해체하기 위한 말이었다(p. 103).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특별히 도움을 주기 위해 인간 신체의 기관들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자연은 따라서 신의 설계가 아니라 다만 기계적 기술의 결과라는 말이 된다. 오늘날 읽어도 이런 스피노자의 생각들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칸트나 헤겔은 또 어떤가. 물론 그 전에 홉스, 로크, 흄, 루소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한을 국가나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기본적 생각이다. 여기서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바가 곧 군주가 원하는 바’라는 점에서 개인과 군주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건 끝나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 너(지배자)와 내가 하나인 상태, 균열이나 분열 없이 그런 상태가 가능한가. 아주 작은 집단조차 뜻이 안 맞아 분열하고 갈라서는 데 말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폴리스(시민들이 의논하면서 공동으로 실천하던)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과 행복이라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p. 172). 홉스의 사회이론은 이런 시대에 탄생했다. 홉스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했다. 그게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홉스는 왜 자연상태를 상호부조의 상태가 아니라 전쟁상태라고 단정 지은 걸까. 홉스의 자연상태는 하나의 가상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인간에게 자연권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힘을 말한다(p. 174). 따라서 이런 상태의 인간들이 ‘국가’가 없다면 전쟁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이기적이만한 걸까. 최근에는 이기적 성향이 인간 유전자 속에 자연적으로 입력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자연적 증거로 제시되지만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는 자명하지 않다(p. 181). 아마 홉스는 근대의 시작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나면서부터 무한한 이기적 권력욕을 지닌다는 ‘생리학적 본성론’을 가정했을 것이다(같은 곳).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이제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전쟁을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 홉스에게 이성이 이기적이면서 사적인 반면, 로크에게 이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상호 존중하는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p. 206). 둘 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근대 부르주아 정치 이념이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홉스에게 시민사회의 목적이 죽음을 피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로크에게 그것은 ‘재산의 보존’이었다(p. 209). 로크에게 시민은 자유로운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로크는 스스로 공적 이성을 중시했지만 그 이성은 ‘재산을 가진 시민의 이성’이었던 것이다.

 

루소는 로크의 주장과 달리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또 루소는 홉스식으로 자연상태를 전쟁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독립적 존재들의 세계로 묘사한다(p. 276). 이런식으로 루소와 로크, 홉스의 정치, 사회이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건너 뛸 뻔 했다. 루소로 가기 전에 흄이 있었다.

 

흄, 하면 인과론을 비판했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인과론을 왜 비판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이걸 문제 삼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흄에 따르면 그건 우리의 반복적 경험에 따른 믿음이지, 직접 지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p. 251). 막말로 내일 태양이 안 뜰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이런 습관적 인식을 흄은 비판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한 나라고 가정된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나, 함빡 웃고 있는 나, 설레는 나, 떨리는 나, 화난 나, 이런식으로 존재할 뿐 ‘불변하는 나’라는 ‘실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대번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라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대답은 각자 마련해 보시길. 너무 많은 걸 스포일러 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칸트까지만 간략 소개할까 싶다. 헤겔은 소중하니까 남겨두는 걸로. 흄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흄을 넘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철학자 아닌가. 기존에는 객관 대상에 의거하여 주관이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칸트는 주관에 의해서 객관이 성립된다는 인식 방법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p. 308).

 

칸트는 인간의 인식, 주관, 내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면서 여기에서 인간의 해방, 즉 ‘자유’를 발견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경향성을 지닌 인간 존재는 결정론적 인과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경향성, 인간의 자연성을 넘어서 도덕법칙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때 자신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 수 있다.

 

칸트에게는 자연보다 ‘자유’가 우위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저 두 세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칸트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칸트가 거기서 찾아낸 것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의 영역 사이에 중간항(p. 319)으로, 이 판단력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판단력의 영역, 즉 ‘미적 체험’에서 인간은 저 두 세계(자연과 자유)를 통일할 수 있으며 이때 인간은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감(p. 323)이라는 게 있어서 충분히 그런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정리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한번 근대철학사를 훑어보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큰 산의 형태를 한 번 보고 나무를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랄까. 물론 중요한 일은 직접 스피노자를 읽고, 칸트를 헤겔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무턱대고 칸트를 펼쳐들었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 이게 우리가 칸트 입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꼭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전처럼 공부하다가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학 정석이 집합 부분만 새카만 것처럼 모든 책의 서문만 까맣게 된 책들이 많은 건 나 뿐일까. 그래서 요샌 아예 중간이나 뒤에서부터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책은 궁금해서 앞을 볼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니던가. 잘 정리된 서양근대철학사 한권쯤은 읽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안내] 영화 <길> 공동체 상영 9월30일 토 3시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 입니다. 

9월에 한철연 공동체 영화 상영을 안내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 적폐 중 하나가 사학 재단의 각종 비민주적 행태, 비리 문제입니다. 

우리 한철연 공동체 회원 다수가 대학 교육에 몸담고 있는 만큼 사학 재단 문제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슈라 할 것입니다. 

이에 사학 민주화 투쟁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길>>을 상영하고자 합니다.

<<길>>은 오랜 세월 사학 재단의 횡포로 몸살을 알아온 상지대 40년 사학 민주화 투쟁사를 다룬 다큐입니다. 

한국 사학 재단이 안고 있는 각종 문제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7월 지병으로 별세하신 故박종필 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든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의 자리가 이어집니다. 

회원 여러분과 가족, 친구를 초대합니다. 

 

– 한국 철학 사상 연구회 2017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30일(토), 오후 3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내용: <<상지대 사학 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 – 길>> 상영 및 관람 후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

비용: 회원, 비회원 모두 3000원

(잘 아시다시피 한철연은 순수 학술 단체로 재정상 문제로 전액을 후원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아래 언론 보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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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

비대위-`다큐인’ 제작 나서 
내달 서울 이대역서 시사회

【원주】원주 상지대 사학분쟁 민주화 운동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다.

상지대비상대책위원회는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다큐인’과 상지대 사학분쟁과 관련한 다큐 영화 `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을 제작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다큐 영화 길은 40년간 상지대 사학분쟁에 대한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상지대 구성원들의 인터뷰와 재연, 기록영상 등으로 그린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를 연출했던 박종필씨가 프로듀서로 참가했고 뉴스타파 시사다큐멘터리 `목격자들’을 연출한 남태제씨가 연출을 맡았다.

텀블벅(Tumblbug) 인터넷 소셜 펀딩업체에서 3,000만원 후원을 목표로 한 달 동안 후원자를 모집했으며 지난 14일 최종 마감 결과 104% 초과 달성해 337명이 총 3,144만7,900원을 후원했다. 

영화는 내부시사를 통해 다음 달 12일 서울 이화여대역 앞 필름포럼 1관, 15일 오후 7시30분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모두극장에서 각각 시사회를 할 예정이다.

강원 일보- 김설영기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안내]한철연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B급 철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수다”

–  [B급 철학](알렙)의 필자들과 함께하는 난상 시국토론

 

 

1. 일시 및 장소 : 2017년 3월 25일(토) 오후2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2. 토론 주제 : 2017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논하다. 광장의 ‘정치’가 단순히 ‘통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촛불혁명(?)은 과연 진정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3. 진행방식 안내

– 처음 시도하는 편안한 파티 다과식 난상토론 : 생맥주 1잔, 간단한 안주와 다과.

– 단순한 책소개가 아니라, 책에서 논의된 주제들과 연관된 질문을 미리 선별해서 필자들과 공유 토론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

– 사회 및 진행 : 조은평(웹진 편집주간) / 이지영(학술1부장)

– 토론자 : [B급철학]의 필자 3인

  : 유현상(숭실대 강사), 한길석(가톨릭대강의교수), 박종성(호원대 강사)

 

– ※ 추신 : 토론회를 마치고 참여한 외부 회원분들 중 5명을 선정해서 [B급철학](알렙)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 본 토론회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와 웹진 (e)시대와 철학의 공동기획으로 진행합니다. 앞으로도 1년에 2회 정도 월례발표회 대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획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한철연 회원님과 독자님들 및 철학에 관심을 가지 모든 분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조광제의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 

 

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울 시민청 강좌]-2

강의 2 :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강지은 (건국대 강사)

소비없는 세상은 상상불가능하다. 소비를 주도하는 유행의 본질에 대한 분석과 쇼핑을 통해 얻는 자유와 구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본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편지13>, <편지16>, <편지17>, 참조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신용카드로 얻은 자유
<편지16> 유행에 관하여
<편지17> 쇼핑하라!

<차례>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입을 옷이 없습니다. 진짜 옷이 옷장이나 서랍에 없는 게 아닌데 입을 옷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건 뭔가요.
아마도 그 이유는 유행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딱히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저런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나 혼자 나팔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아마 그 날 하루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지점이 정확하게 같지는 않습니다. 살짝 변형이 되어 돌아오죠. 예전에 유행했던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한다고 예전 바지를 꺼내 입고는 못돌아다닙니다. 색상이든 바지폭이든 무언가 변형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죠.
저는 진짜 유행이란 걸 쫒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철마다 돈써야죠, 신경써야죠. 가뜩이나 팍팍한 삶에 유행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를 괴롭게 할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게도 물리학에서 꿈꾸어왔지만 포기했던 기계장치인 ‘페르페투움 모빌레 Perpetuum mobile’를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페르페투움 모빌레란 스스로 유지되서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장치인데요. 물리법칙에서는 불가능한 기계장치죠. 기계장치란 저항을 만나면 추가적으로 외부에서 동력을 제공해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계장치의 원리가 사회학으로 넘어오면 실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영역이 바로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유행은 영원할 것이라는 거죠.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게오르그 짐멜은 인간의 너무도 강력한 인간의 두 가지 욕구나 열망들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처럼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인간의 욕구나 열망들이란 바로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안전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그 맞잡은 손을 다시 놓아 버리려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짐멜이 말한 대로 “유행이란 사회적인 평준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개인적인 톡특성을 추구하는 경향 사이에서 타협을 보장하는 독특한 삶의 형태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타협은 ‘안정된 상태’일 수 없다. …….그 타협은 절대 그대로 가만히 유지될 수 없기에 반드시 영구히 재협상되어야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짐멜이 말하고자 하는 유행의 본질은 어찌보면 모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핵심을 짚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입든 절대 남들보다 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늘 염색을 하지만 튀는 색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화점에서 예쁜옷을 골라서 사입었지만 그 옷을 나만 샀을리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하철을 탔을 때 건너편에 앉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나를 발견하면 굉장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개성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유행이란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더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도 바로 “항상 새롭고 가장 최근에 인기를 끄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율만큼이나 반드시 꼼꼼하게 살피고 열심히 지켜야만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바로 이것입니다. 작년에 사입은 옷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새로 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본 멘트이시지요?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주로 TV홈쇼핑에서 쇼호스트들이 하는 방송멘트인데 아주 높은 톤으로 외쳐댑니다. 화면의 방송마감 시계는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카드를 꺼내서 결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제가 햄릿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삶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때로는 몇 분 남았는데 완판! 글자가 화면 가득 뜹니다. 아차,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쇼호스트들은 시청자들에게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음을 섭섭해하며 다음 상품 방송으로 몇 분 일찍 넘깁니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TV홈쇼퍼들은 중독구매 혹은 강박구매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TV홈쇼핑 같은 경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건을 구경하고 감정이입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시청자로 하여금 굉장한 만족감을 줍니다. 사실 직접 물건을 만질 수도 없고 고를 수도 없는데 그보다 더한 선택의 기회를 받은 듯한 착각을 하게 되죠. 쇼핑의 만족감은 어디까지일까요. 결재를 하는 순간 끝입니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홈쇼핑을 시청하고 계속 결재를 해야 하는 중독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백화점의 명품 쇼핑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선망인 명품가방의 만족감은 얼마나갈까요. 구경하고 고르고 결재하고 집에 들고 가서 한 일주일 정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상품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쇼핑을 하는 상품들이 과연 치약이나 비누 쌀처럼 사용가치가 있는 것들 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명품가방, 예쁜 그릇처럼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기호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소비지상주의사회입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부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낸 첫 메시지는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였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요청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면

쇼핑이 모든 고통이나 불행을 치유하고 그 어떤 위협도 물리치고 밀쳐내며, 그 모든 기능 불량 상태도 수리하는 방법, 곧 아마도 유일무이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분명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도 쇼핑몰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근심거리들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7> 150쪽.

현대인에게 쇼핑몰이든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쇼핑하러 돌아다니는 일은 일상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TV나 스마트폰이 우리의 쇼핑을 도와줍니다. 게다가 요즘은 쇼핑할 때 내가 돈을 쓴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세상이 왔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땐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단말기에 카드를 긁는 모습이나마 보기라도 하지요. 스마트폰 결제시스템은 그저 등록해놓은 카드의 비밀번호만 누르면 일사천리로 결제가 이루어집니다. 복잡하게 일일이 카드 고유 넘버나 카드 뒷면의 세 자리 숫자 따위를 누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카드 결제를 마치는 순간 쌓여있던 근심걱정도 눈 녹듯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따라올 또다른 스트레스는 애써 외면합니다. 모두 무엇인지 아시죠? 바로 카드 결제일입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예전에 신용카드가 우리의 지갑을 채우기 이전을 기억하시지요? 물건을 구입하려면 현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돈쓰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도 있었지요. 월급을 봉투에 받던 시절을 지낸 분도 있으실겁 니다. 두툼한 월급봉투의 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 그 땐 무엇을 구입하든 쉽게 턱턱 구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갑을 열어서 현금을 꺼내야했기 때문이었죠. 또 지갑에 현금이 없으면 무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등장한 이후 소비의 패턴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고 당장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빚지고 사는 세상이 된 것이죠. 카드광고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광고멘트가 바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였습니다. 기억나시죠? 카드 광고들을 보면 사람들이 스포츠와 레저를 즐기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유있는 시간도 보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깜짝 파티도 해주더군요. 그것이 모두 카드 덕분이라네요. 그렇다면 카드로 미리 선결제하고 나중에 지불했을 텐데요. 만약에 통장에 잔고가 없다면 다른 카드에서 돈을 빌려 갚는 돌려막기라도 해야 합니다.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한 지출을 한 모양입니다. 이번 달은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결제하지 못한 부분을 메꿔야하겠네요. 돌려막기할 카드가 없는 사람은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갑엔 보통 서너 장 이상의 카드가 꽂혀 있지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카드로 즐긴 당신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패턴이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비슷한 전처를 밟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결코 자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는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모두가 빚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시기에 단지 ‘살기 위해 대출 받는 사람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시기, 다시 말해 유년기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야말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이다. …… 바로 이러한 시기야말로 대출회사가 이들의 약한 정곡을 노려 공략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이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던 이 세상의 지도에서 부모들이 차지하던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업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부모 자리를 대신해서 슬며시 그 젊은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
게다가 이런 젊은이들이 대출회사의 공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도 한 몫을 한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대출회사가 각 나라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학생들이 그 어떤 학과나 학부를 선택하든지 간에 모든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에서 ‘신용거래와 관련된 생활기술’을 이론과정 뿐 아니라 실습과정으로도 배울 수 있게끔 필수 교과과정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학자금 대출은 받기 쉽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분명 잘못될 여지가 많으며 더구나 되갚기 쉬운 듯이 매력적으로 유혹하지만 결국에는 기만적인 속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보통 평균적인 학생이라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간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학업을 끝마치게 되며, 조만간 그 누구라도 다른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빚이 쌓여 도저히 되갚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깨닫게 될 거시이다. 더구나 떠안게 된 그 빚이란 것도 실상 대출 받은 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빚을 져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114~116쪽.

현대사회는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죽하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Not Buy Day’운동을 외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비하지 않고 살기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농사도 짓고 벌도 키우는 실험도 하더군요. 세상은 소비의 천국,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맞지만 내손에 쥔 돈이 없을 때 이곳은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빈 지갑 때문에 힘겹습니다. 이제 다른 시스템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서울 시민청 강좌] -1

필자의 허락을 얻어 [서울시 시민청]에서 올 여름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을 총 5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흔쾌히 원고를 넘겨주신 필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의 1 :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강지은(건국대 강사)

우리는 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에 대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분석을 시도한다. 더불어 스마트폰을 통해 매일 접하는 SNS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관한 반성도 함께 모색해 본다.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차례>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이 된 지 얼마쯤 되었을까요.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스마트폰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제 기억엔 5년 남짓 된 듯 싶습니다. 제가 스마트폰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말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아이와 기억나는 큰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처음 사준 스마트폰이 2011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소설을 15권이나 엄마 몰래 읽은 것이었어요. 이미 또래들에게 인소(인터넷소설) 읽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건데 저는 몰랐던 거죠. 지금 중년 분들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틴로맨스라는 얇은 로맨스소설이 인소의 원조쯤 되겠죠. 예전에 저희들은 고교생 때나 되어 읽던 걸 저희 딸은 스마트폰 덕분에 초등학교 때 접한 거죠. 처음엔 아이가 당장 타락이나 한 것 마냥 속상하고 그랬는데, 세상이 그러니 차라리 저도 한 번 인소를 읽어 보자 싶더군요. 그리고는 아이와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가 상상하는 타락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스마트폰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화를 거듭한 듯 보입니다. 당시에는 없던 소셜네트워크가 전 세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가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희 아이는 그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물건인데 손에서 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에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소가 유행하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소소한 게임들이 유행했었던 듯합니다. 당시엔 조잡했던 게임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바일 게임 시장이 pc게임 시장과 맞먹을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하겠죠.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게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연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임은 ‘포켓몬고’겠죠. 포켓몬고는 새로운 증강현실(AR)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입니다. 저는 해본적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가봅니다.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출시도 되지 않았는데 속초에서 어찌 어찌 된다고 하니 유저들이 몰려가는 대소동까지 있었다죠. 아무튼 스마트폰의 진화는 무한대인 듯합니다. 아무튼 당시 인소의 유행이 지난 후엔 카카오톡이 주도하는 SNS가 아이들을 사로잡더군요. 이제 아이의 스마트폰은 단톡방의 알림이 울리고 아이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답을 달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아이들에게 기쁨도 주었지만 상처도 주었습니다. 카카오톡의 상태메시지는 은근히 타인을 욕하거나 따돌리는 메시지창이 되기도 하고, 오프라인의 왕따는 온라인에서도 역시 왕따가 되어 단톡방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재미와 연대 두 가지를 제공하는 신기한 상자임에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풍속도가 이러하다면 어른들의 스마트폰 풍속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물론 아직 2G폰을 가지고 계신 어르신도 계시긴 합니다. 저희 친정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십니다. 폴더폰 기억나시지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 계신데 저희어머니 말고 많은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자식과 카카오톡으로 사진도 주고받고 친구분들과 소통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의 역사는 스마트폰의 변천사보다 조금더 앞섭니다. 언제부터 휴대폰이 소위 공짜폰으로 전면 보급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97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인데 남편만 휴대폰을 한 대 장만했습니다. 당시 만해도 남편만 장만하면 됐지 뭐 저까지 덩달아 사겠다고 나서기가 좀 거시기 한 그런 때였습니다. 아직 대학원생이라 금전적 여유도 없었구요. 처음 우리집에 온 남편의 휴대폰은 크기는 손 크기 만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창도 작은 그런 폰이었죠. 그러던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창의 크기가 커지다가 컬러가 등장하고 창을 손가락으로 터치할 수 있는 터치폰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버튼이 아니라 화면을 터치해서 조작을 하는 기술은 스마트폰의 기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터치폰의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곧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고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처음엔 도대체 애플리케이션, 앱이 뭐야? 핸드폰을 쓰면서 왜 요금말고 또 돈을 결재해? 궁금한 것도 많았죠.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세계는 스마트폰 천국이 되었습니다.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익숙해진 스마트폰 안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의 SNS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한번 함께 보면서 노철학자가 어느 부분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에 놀라고 걱정을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질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소녀는 이제 다른 친구들이 없을 때, 과연 사람들이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혼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지 거의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는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워볼 만한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셈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24~25쪽.

어떠십니까? 누가 생각나십니까? 물론 자녀분들이 많이 생각나시지요? 본인 스스로가 생각나시기도 하구요. 저는 식당갔을 때 보았던 남의 집 유아들이 더 생각납니다.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영상이 뽀로로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큰 해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영상이 아니라 손에 쥔 것 자체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죠.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면 잠시도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도 심심한 것을 못참는 현대인은 수시로 SNS에 접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올린 포스팅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확인하러, 좋아요가 몇 회나 올라갔나 확인하러, 또 그냥 다른 포스팅 둘러보러 등등의 이유로 들락날락 거리는 시간이 생각해보면 하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꼭 페이스북, 트위터에만 접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날씨가 도대체 왜 이렇게 덥지? 궁금하면 그것도 무엇이 해결해주나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에 접속하면 네이버에 날씨가 나옵니다. 메인화면엔 그날그날의 탑뉴스들이 뜨죠. 내가 원하는 연예기사나 다이어트, 음식 뉴스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들을 읽느라 시간이 흘러갑니다. 스마트폰은 누군가와 접속하게도 해주지만 그저 온라인과 내가 접속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오늘 서울 시민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SNS를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SNS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빠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트위터의 앰블램은 참새같은 새모양이지요? 시도 때도 없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처럼 아무 때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포스팅을 하는 곳이 트위터입니다. 남이 댓글을 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하지만 SNS의 속성상 댓글 없는 포스팅은 공허합니다. 내가 포스팅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재빠르게 댓글을 달아주고 리트윗을 해주면 그야말로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올린 포스팅은 순식간에 전 세계(친구가 전세계에 퍼져있다면) 혹은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지요. 페이스북도 속성은 비슷합니다. 트위터는 짧은 글을 간단하게 포스팅한다면 페이스북은 사진과 함께 좀 더 긴 글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르죠. 페이스북에선 좋아요가 몇이나 올라가는지가 관심사인 것 같아요. 페이스북 개인페이지 말고 회사나 상업성을 띤 페이지들은 그 페이지들의 좋아요나 공유만을 관리해주는 업체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그야말로 ‘인정’이라는 내면적 속성의 숫자화 또는 외면화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정이 숫자로 표시되는 장소가 바로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인정받기 위해서는 칭찬받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엔 착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습니다. 문제는 나만 빼고 그런 것 같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럼 뭘 포스팅해야 할까요? 도대체 나를 스스로 생각해보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는 일도 변변히 잘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영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닙니다. 아…….인정은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가진 최고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식당도 제일 비싼 곳에 갈 때만 사진을 찍어 포스팅을 합니다. 변변치 않은 식당에 가면 사진찍기는 없습니다. 셀카도 오늘 화장발이 잘 받은 날만 찍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상 받아온 날은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는 날입니다. 나는 최고의 것을 포스팅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나의 일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하겠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남들이 최고의 모습을 포스팅 한 곳에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실 남들에 비하면 내 모습은 참 별볼일 없으니까요.
다시 좀더 인정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대체로 많이 받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유명인 또는 연예인들이겠죠.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된 사람들이니까요. 나와 그들이 친구는 아니지만 언젠가 유명인들의 SNS에 들어가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많은 좋아요와 댓글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SNS 포스팅을 하면서 그런 연예인들과 같은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것이죠. 지그문트 바우만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인간 존재증명이 이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에 밀려 쫒겨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51쪽)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SNS를 자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많이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유명인들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가 될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철학자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소셜네트워크 활동인 셈이지요.
그러나 SNS가 진짜 자신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대시켜줄까요? 철학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명인의 흉내내기에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장해보면 사회의 영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결국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류 즉 보여지는 부류(유명인, 연예인)와 권력이 없는 부류 즉 보는 부류(일반인, 소외계층)의 삶은 어디에서도 뒤바뀌지 않는다는 진리 말입니다. 거기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페이스북의 친구 1000명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따지고 든다면 또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같은 너” 바로 페이스북 등의 SNS 친구이지요.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어쨌거나 SNS 이전과 이후는 고독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SNS 이후에 연락 않던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이죠. 한 번 연락하고나니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또 많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조금 친한 친구들도 있고요. 한동안 동창들끼리 네이버 밴드 많이들 하셨죠. 카카오톡 단체톡도 하시고요. 이런 온라인 모임들이나 개인적인 접속들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근황을 알 수도 있고 대화도 할 수 있고 내가 귀찮으면 접속을 중단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참 편리하고 깔끔한 만남입니다. 그러다보니 또 내 손안의 핸드폰이 채팅창의 알림을 울려주면 안들어가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인간관계가 풍부해졌다고 느끼거나 나의 정신세계가 확장되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공허감을 느낄 때가 훨씬 많지 않으십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이 걱정하는 내용을 함께 들어볼까요.

당신은 즐겁게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면서 당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아주 가까운 주변에 있는 진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멀리 있는 친구들이 접속하려고 버튼을 클릭해올 때, 과연 누가 정작 가족과 이야기하기를 원하겠는가?……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31쪽.

오늘부터 시간을 정해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코너를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흔쾌히 출판책의 원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저자 조광제 선생님과 ‘생각정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조광제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철연 회원 필자분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코너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한 개념어에 대한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회원분들의 추가글 또는 논쟁, 토론을 함께 담아내는 나름 리좀 같은 개념어 코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아래는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의 서문에 해당하는 조광제 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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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안내서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을 앞세운 질문 형식들이 정착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한의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그러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평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부터 그러한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해서 그러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왜 그러한 평가를 하게 되었을까? 특히 한반도 분단 상태를 견디고 있는 당사자인 우리 남한 주민들로서는 향후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날 일들에 대해 첨예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건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미칠,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의 변화에 대해 과연 우리가 주도적인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건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데 과연 ‘현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피력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이라는 말조차 엄격하게 파고들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사건의 향방에 대해 한반도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체적’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에 관해 정확하고 면밀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 혹은 ‘대상’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인데도, 이 사건이 미치는 국제적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할 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국제적인 파장은 다시 한반도를 향해 영향을 미친다. 사건을 둘러싸고서 확산과 수렴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면서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사건의 진원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 그 구조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국제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수렴’은 무엇이며, ‘확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관련 사건들에 의거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에 의거해서’라는 말은 ‘……을 지평으로 해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다른 관련 사건들을 지평으로 해서 의미를 갖는다.”라는 바꿀 수 있다. 이때 ‘지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피력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지평’(예컨대 한반도에서 동북아, 동북아에서 세계 전체)은 항상 그 속에서 문제가 되면서 의미를 갖는 ‘주제화된 대상’(예컨대 김정일의 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주제화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됨’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말을 제대로 피력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피력하고 이해한다 할지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다들 피상적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 제대로 소통을 이루었다고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설명과 이해가 혼돈된 상태에서 제대로 질서를 갖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되는 기초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혼돈은 ‘카오스’이고, 질서를 갖춘 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과연 ‘카오스’는 무엇이며,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이를 근본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을 하고 그 말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된 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말이 제대로 기능하고 정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이해하는 당사자들이 거기에서 활용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고, 올바른 소통을 통해서 바람직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설명’이 무엇인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효과’가 무엇인지, 또 ‘행동’이 무엇인지 등을 근본에서부터 알고자 한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의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비단 대대적인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사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굳이 나비 효과와 같은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대적인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본적인 법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은 결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으면서 계속 새롭게 다변화해 나가는 사회역사적인 전체의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영위된다. 나와 나 아닌 것들 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곧 삶의 역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즉 ‘자아’는 무엇이며, 나 아닌 것 즉 ‘타자’ 무엇이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어쩌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확대시킬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자기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이고자 할 때, 항상 자기가 아닌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기임을 전문적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자기가 아닌 것들을 ‘타자’(他者)라 하고,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對他的)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對他性)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작동하는 주요 개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나름의 존재, 즉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대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할 때, 다른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을 설명해 주는 개념들(설명항) 역시 다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략 설명했지만,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알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태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이고, 특히 그 인간들의 말을 통해서다.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으면 인류가 형성 ‧ 축적해 온 온갖 예술 문화적인 보고(寶庫)들을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러 장르의 문헌들에서 예사로 쓰이는 것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닌가. 그 문헌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살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은 인간 사유의 기초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사유를 하건 더욱 논리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힌다는 것은 모든 사유를 위한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두뇌 체조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혀 나의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을, 나아가 전 인류적인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나의 삶이 없고, 나의 삶이 없이는 공동체의 삶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략한 이 책은 저자가 일해 온 <철학아카데미>의 2011년 봄 학기에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책의 문장들 중 실제 강의 상황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더라도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를 알고서 책으로 출판하고자 제안을 하고, 또 솔선수범해서 애써 멋진 책을 만들어 준 출판사 <생각정원>의 대표 박재호 선생께 마찬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12월 21일, 녹번동에서
저자 조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