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월례발표회]
우리에게 ‘철학함’이란 무엇인가?
후기: 박영균 (건국대 HK 연구교수)
윤구병 선생의 <철학을 다시 쓴다> 강연을 들은 후 …
2013년 3월 8일 오후 5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에서는 <철학을 다시 쓴다>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열렸다. 이번 강연회는 윤구병 선생이 지난 2월 12일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라는 책에 담긴 그의 사유를 함께 나누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그의 책, <철학을 다시 쓴다>는 <시대와 철학>에 연재되었던 “있음과 없음에 관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 <있음과 없음>이라는 책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윤구병 선생은 한철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7년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고자 했던 젊은 소장 철학자들이 모여 보수철학계에 반기를 들고 한철연의 창립을 모색하던 시절, 그 주춧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 한철연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그 후로 장시간 단독대표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당시, 청춘의 열정 속에서 반역의 철학을 꿈꾸었던 선배들도 이제는 머리 희끗한 장년이 되었으며 한철연의 회원들도 ‘출애굽세대들’로 채워졌다. 그것이 역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당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40-50여 명의 청중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는 보리출판사 관계자들과 선생을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강연탁자 위엔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윤구병 선생은 탁자 한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칠판 위에 ‘時空間 四次元 連續體의 存在論的 根據’라고 썼다. 순간적으로 ‘뭐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어 선생은 이렇게 써야 사람들은 유식한 철학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수입된 언어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지웠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
우리말로 하는 철학, 그것은 윤구병 선생이 평소에 추구해왔던 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고대의 존재론’에 대한 탐색을 우리말 속에서의 사유하는 존재론으로 바꾸어놓았다. 존재와 무 대신에 ‘있음’과 ‘없음’의 철학을 사유하는 것도 모두다 이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으로부터 운동과 생성, 그리고 ‘함’과 ‘됨’의 사유를 이끌어낸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참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할 때, 그것은 거짓이다.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좋은 것이며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을 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민지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로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을 가려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바른 생각을 일깨울 수 있고, 거짓에 맞서 좋은 앞날을 가꿀 올곧은 뜻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한철연의 정신 또한 이로부터 출발했었다. <시대와 철학> 두 번째 창간호에서 한철연은 “현실로부터 출발하되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 초월적인 선천적인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독백이나 철학자들끼리의 속삭임, … 외국에서 차용”하기만 하는 반시대적이고 현학적인 철학들을 비판하면서 “주체적 철학”의 길을 주창했다. ‘주체적 철학’은 근원적 실천이자 생산자적 철학이며 비판적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보적 핵심을 포착해 내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에 되돌려줌”의 철학이다.
그 선언이 있은 이후, 벌써 2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 동안 우리는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경험했으며 위로부터 진행된 수동혁명으로서 ‘포스트 87년 체제’와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민주주의’, ‘포스트 맑스주의’, ‘포스트 구조주의’를 거쳐 다시 2013년 현재 1972년 ‘유신’의 퍼스트레이디가 또 다시 대통령이 된 2013년 오늘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동안 한철연은 무엇을 했는가? 돌이켜 보면 한철연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신에 한철연은, 그 운동을 가능케 했던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으로 철학함의 의미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윤구병 선생의 이번 강연과 2월에 있었던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 강연은 바로 이런 ‘한국에서의 철학함’의 의미를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살리는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처음 낙성대역에 있었던 한철연의 문을 두드렸을 때, 비좁고 초라해보였던 한철연은 철학적 사유함을 추동하는 열정과 낭만, 분노와 깨워있음이 있었다. 그 때 우린 분노의 술잔과 탄식의 넋두리 없이 철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시대모순에 저항하는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이라는 모토와 함께 ‘한국에서의 철학함’이라는 ‘주체적 철학함’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철연에서 ‘시대의 혼으로서 철학’도, ‘한국에서의 철학함’도 한철연의 기조가 되지는 못했다. 철학을 다시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없어야 할 것들이 있음’에 대한 분노와 ‘있어야 할 것들이 없음’에 대한 탄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밀려들어오는 서양철학과 옥죄여오는 현실 속에서 ‘있음’을 사유하고 ‘없음’의 부정적 몸짓이 가지고 있는 ‘일깨움’의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그 속에서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들, 그리고 ‘함’과 ‘됨’을 사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다시 부여잡아야 할 화두는 ‘한국에서의 철학함’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던 많은 진보학계들이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한철연보다 먼저 ‘비상’했으며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한철연은 가장 늦게 날개를 폈으나 아직도 그 날개짓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을 지나 어두운 ‘밤’을, 그것도 동 트기 직전에 가장 어두운 칠흑의 밤을 잠 못 든 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방황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국에서 철학함’을 보았다. 한철연의 20년 역사만큼이나 긴 시간이 흘러 이번에 우리는 다시 이규성 선생을 통해서 ‘시대모순’과 싸워야 했던 ‘한국현대철학의 사상사적 고뇌’를, 그리고 윤구병 선생을 통해서 서구의 존재론이 한국적 사유의 독특함과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주체적 철학함’의 열정과 길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1980년대 중반 한철연이 시작했을 때와는 다른 시작이며 다르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그 다른 시작을 알리는 것은 ‘한국에서 철학함’이라는 화두를 부여잡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린 그들이 아니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나 그들과 다른 철학과 경험 속에서 살아왔던 한철연의 ‘동학들’이다. 거기에는 ‘하나(있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없음’에 빠져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디우가 말했듯이 ‘철학’은 항상 소피스트나 라캉과 같은 ‘반철학’과 함께 해야 한다. 왜냐 하면 다수만이 생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에 대해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단지 선언할 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 ‘선언’과 함께 이 새로운 시작을 사유해야 한다.
사진: 박영미 학술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