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 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a-371e)

 

* 앞서 문자의 비유가 보여주듯 최초의 나라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기 성향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게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일을 한다’(370b)는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것은 적성에 따른 분업을 정당화하는 중대한 전제로서 장차 정의로운 나라의 속성을 규정하는 핵심 토대가 된다. 플라톤에게 인간은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달리 결코 이기심을 본성으로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혼자서는 살 수 없고 그에 따라 서로 필요에 따라 의존하고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될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성 또한 서로 다르게 가지고 태어나 기꺼이 서로의 필요에 부응하는 자질 또한 갖추고 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생각은 단지 당대 아테네가 패권주의를 지향한 이래 상업화되고 개인주의화되면서 마치 이기심이 자연적 본성인 양 왜곡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의로운 국가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협동적 존재로서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새롭게 다시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371a-b]

* 상대국과의 거래 즉 수입εἰσάγειν 및 수출ἐξάγειν이 요구되는 한, 나라는 상대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종류의 것들도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 한다. 이에 따라 더 많은 농부들과 장인들이 필요하다. 게다가 각 종류의 물건들의 수입과 수출을 도와 줄 심부름꾼διάκονος 즉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τῶν ἐπιστημόνων τῆς περὶ τὴν θάλατταν도 필요하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 때문에 협력 관계κοινωνία를 맺고 나라를 수립했으므로 나라 안에서도 물건들을 서로 팔고 사는 일이 필요하여 시장과 교환을 위한 표σύμβολον로서 화폐νόμισμα가 생겨난다.

 

[371c-e]

* 그리하여 시장ἀγορά에서 생산물의 유통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생산물을 교환해줄 심부름꾼으로서 소매상πρᾶσιν διακονοῦντας이 나타나고 짐 운반 등 체력의 사용을 파는 사람들οἳ δὴ πωλοῦντες τὴν τῆς ἰσχύος χρείαν 즉 체력 사용의 대가로서 임금μισθός을 받는 임금노동자(고용인)μισθωτοί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는 소매상을 ‘제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들의 경우 대개 신체적으로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에는 무용한 사람들’πόλεσι σχεδόν τι οἱ ἀσθενέστατοι τὰ σώματα καὶ ἀχρεῖοί τι ἄλλο ἔργον πράττειν로 묘사하고 있고(371c) 임금노동자는 ‘지적인 일에서 동반자 관계에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τὰ μὲν τῆς διανοίας μὴ πάνυ ἀξιοκοινώνητοι ὦσιν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371e)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농부와 건축공, 직물공, 제화공, 목부 그리고 무역상과 소매상, 임금노동자를 최초 국가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 즉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른 국가로 언급하고 그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하는 만큼 ‘완전 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ἡ πόλις, ὥστ᾽ εἶναι τελέα라고 말한다.(37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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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무역상ἔμπορος은 수출입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이고, ‘해상 운송에 정통한 사람’은 선박으로 사람과 화물을 운반하는 해운업자ναύκληρος이다.

* 보통 화폐νόμισμα가 가지고 있는 기능으로 가치의 교환,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 기능을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화폐가 처음에 교환을 위한 물표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이후 화폐는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언제라도 필요한 물건과 바꿀 수 있는 가격 즉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되었고 시장에서도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점과 상인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화폐는 거래 물건들의 경제적 가치를 표시하는 척도가 되었다. 특히 화폐가 가치의 저장 기능을 갖게 된 이후 화폐는 교환 수단을 넘어서 장차 높은 가격으로 되팔기 위한 매점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화폐 자체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 되면서 화폐의 소유욕의 증대에 비례하여 차입의 욕구 또한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돈으로 돈을 버는 직종 즉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유통과 판매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화폐의 발생을 통해 사용가치를 갖는 구체적 물건들이 화폐로 추상화되고 가격으로 일원화되면서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우위가 초래된 것이다. 게다가 금융의 발달에 따른 사용가치에 대한 교환가치의 절대적 우위는 생산자 계층에 대한 관리 계층의 우위는 물론 인간의 욕망을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일원화함으로써 금전만능주의를 탄생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대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수단에 거꾸로 종속되는 이른바 소외(Entfremdung)가 발생한 것이다.

* 아테네 당대에만 해도 이미 은행이 존재했고 개인들 간의 금용 거래는 물론 고리채 또한 성행했다. 플라톤은 이미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화폐의 기능을 교환 기능으로 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단지 일반론 차원에서 최초국가 단계에서의 화폐의 기원을 언급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화폐의 사적 소유욕의 증대와 고리채 등 금융을 통한 부의 축적이 일상화된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서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배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아테네 당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게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재물의 사적 소유가 금지되고 있다. 재물의 소유와 축적은 오직 생산자계층에게만 허용되고 있고 통치자 계층에게는 최소 필수품 이외의 어떠한 소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권력과 부를 함께 갖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권력은 순수하게 시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자신의 덕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자의 몫이다.

* 플라톤이 소매상을 ‘가장 허약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데 무용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플라톤이 소매상이나 허약한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는 최초국가에서 소매상도 나라 안에서 서로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고 그 또한 그 일을 맡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면 그 일은 태생적으로건 후천적으로건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맞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무용하기로 말하면 철학자들 역시 농사나 소매상 등 생산이나 유통 관련 일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소매상을 ‘그 일을 눈여겨보고 스스로 떠맡는 사람εἰσὶν οἳ τοῦτο ὁρῶντες ἑαυτοὺς ἐπὶ τὴν διακονίαν τάττουσιν ταύτην(371c)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소매상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일이 아니라 필요와 적성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뒷받침해준다. 체력의 사용을 파고 사는 사람들 즉 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묘사 또한 소매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성과 소질에 따라 그 일을 스스로 떠맡는 사람들이며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최소한도의 필요에 따라 최초의 나라의 정원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그들에 대한 폄하를 포함하고 있다기보다는 신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차이가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그러한 사정이나 여건이 달리 변화할 가능성이 거의 힘들다면, 그들의 사정과 적성에 따라 그들에게도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역할이 주어질 수 있고 주어져야 함을 언급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임금 노동자들이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전혀 받지 못한 채 예속되어 강제로 노동하는 노예와 달리 최소한 이들은 그 일을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그 일에 대한 대가도 받고 있다. 실제로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이곳 최초의 국가의 정원에는 노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에 근거해서 플라톤이 그리는 정의로운 국가에 아예 노예 자체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비록 노예가 맡은 일의 대부분이 체력을 쓰는 일이지만 시민 가운데에도 체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임금 노동자가 바로 그 시민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사람이 아닌 마소로 여겼고 플라톤 역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노예의 존재는 이미 정의로운 국가에서도 당연한 존재로 전제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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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최초 나라의 정원(구성원)πλήρωμα πόλεώς을 보면 결국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나라는 농부, 직물공, 건축공, 목부 외에 무역상과 해운업자 그리고 소매상과 임금 노동자로 구성된 나라이다. 이들 모두는 직접 생산과 유통을 도와주는 이른바 물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심부름꾼들로서 장차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생산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아직 정치가나 지식인, 철학자가 없는 이와 같은 최초 국가를 ‘완전하리 만치 성장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이쯤에서 우리는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 요구에 대한 답변을 시작하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시키고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는 한 마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과 나라 안에서 어떤 힘(dynamis)으로 작용하기에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고 낫다는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하는 어떤 힘이란 개인의 경우 영혼들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미 언급된 바 있다.(358b) 사실 그것은 장차 개인의 정의를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영혼 3분설에 따른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 기개적인 부분, 욕구적인 부분임을 예고하는 것이자 소크라테스가 답변을 시작하면서 다룰 대상이 다름 아닌 개인의 영혼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개인을 살피되 그것을 보다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같은 성격을 갖는 나라를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 다시 개인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은 장차 개인과 나라를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살피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쨌거나 일단 이 제안이 개인의 영혼들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한 방편으로 끌어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나라에 대한 고찰이 내용적으로 개인의 영혼들에 대응해서 제시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개인 영혼의 세 부분은 나중에 드러나듯이 나라의 세 계층 즉 통치자 계층,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과 그대로 대응된다. 이와 같은 논의 구도상의 전후 맥락을 염두에 두고 최초국가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살필 경우, 결국 소크라테스가 그 최초의 국가를 생산자들로 구성된 나라로 구성하고 그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이 최초의 나라가 결국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최초 국가에 이어 사치스런 나라가 소개되고 그 사치스런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나오고 장차 그곳에서 다시 통치자 계층이 등장하게 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최초의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나라의 기원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정의로운 나라의 세 계층이라는 전체 구도를 염두에 두고 그 가운데 우선 생산자 계층의 성립과정부터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기획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가 장차 사치스런 나라로 계속 변화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이 최초의 나라를 ‘완전하리만치 성장한 나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생산자 계층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최초국가에 대한 기술을 통해 부정의가 생기기 직전 단계까지 즉 필요에 있어서 최소한도의 수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차 드러날 정의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3계층 가운데 물적 기반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우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371e]

* 이러한 나라를 수립한 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이 나라 안 어디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으며,ποῦ οὖν ἄν ποτε ἐν αὐτῇ εἴη ἥ τε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ἡ ἀδικία; 그 각각은 우리가 이제껏 검토해온 것들(주민들 또는 기능들)중 어느 것과 더불어 생겨났을까”καὶ τίνι ἅμα ἐγγενομένη ὧν ἐσκέμμεθα;를 묻는다.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사람들 상호간의 어떤 필요” χρείᾳ τινὶ τῇ πρὸς ἀλλήλους에 의해서 그 각각이 생겼다고 답을 한다. 즉 위의 나라는 사람들 상호간의 필수적인 필요χρείᾳ에 입각하여 수립된 나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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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최초의 나라는 앞서 우리가 살핀 전체 논의 구도상 첫 단계의 완결일 뿐 종결은 아니다. 실제로 최초의 나라는 그 상태 그대로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변화를 맞이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경우, 순진무구하게 생존의 욕구만 충족되면 불만이나 고민도 없는 어린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고 점차 신체적으로 성장하고 욕구 또한 다양화되고 증대되면서 어른으로 자라나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도 같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소크라테스가 완전하리만큼 성장한 최초의 나라를 언급한 후에 느닷없이 글라우콘에게 이 나라 안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에 있고 무엇 때문에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지를 묻고 그 원인이 ‘필요’chreia임을 재차 확인하고 있는 장면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최초의 나라는 완결되었지만 최초의 나라를 성립시켰던 필요는 완결을 넘어 계속 나라의 변화를 낳는 근본 원인임이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대화는 최초의 나라는 일단 마무리되었지만 그 다음의 단계 즉 정의와 함께 부정의가 발생하는 단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며 그 원인은 하나같이 ‘필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5. 건강한 나라, 참된 나라 그리고 돼지들의 나라(372a-372d)

 

[372a]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나라가 완전하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필요의 확대에 따라 등장하게 될 나라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도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성립한 최초 나라의 모습 즉 서로에게 필요를 제공할 준비가 된 최초의 나라의 사람들οἱ οὕτω παρεσκευασμένοι이 어떤 방식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찰한다.πρῶτον οὖν σκεψώμεθα τίνα τρόπον διαιτήσονται.

 

[372b-c]

*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를 요약하면 이와 같다. “그들 모두 좋은 자리에 누워 충분하게 먹고 마시면서 신들을 찬송하며ὑμνοῦντες τοὺς θεούς 서로들 즐겁게 교제하고ἡδέως συνόντες ἀλλήλοις, 가난이나 전쟁πενίαν ἢ πόλεμον을 ‘유념하여’εὐλαβούμενοι. 재력 이상으로ὑπὲρ τὴν οὐσίαν 자식을 낳지도 않으면서 건강과 함께 평화로움 속에서ἐν εἰρήνῃ μετὰ ὑγιείας 일생을 보내다가 아마도 늙은이로서 고령에 죽으면서 그와 같은 또 다른 인생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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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먹거리들 즉 주식인 보리 가루ἄλφιτον와 밀가루ἄλευρον[372b] 그리고 부식(요리ὄψον)으로서 소금ἅλας과 올리브ἐλαία, 치즈τυρός, 삶은 구근βολβός과 채소λάχανον 요리, 그리고 후식τράγημα으로서 무화과σῦκον와 콩류ἐρέβινθος(완두콩) καὶ κύαμος(콩), 포도주οἶνος, 도금양μύρτη(방향성의 상록 관목, 아프로디테의 신목)의 열매μύρτον나 도토리φηγός 등(372c)은 당시 그리스의 일반 가정의 식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주목할 점은 그리스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고 그에 따라 실제로 그리스인들 모두 반도에 정착한 이래 문어와 조개류 등 많은 어류들을 섭취했음에도. 플라톤이 서술하고 있는 식품에는 육류는 물론 어떠한 어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제1권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338c 강해 참고) 그리스인들은 육류는 즐겨 먹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스런 나라에서는 육류의 수요가 생겨난다.(373c 참고)

* ‘요리’의 원어 ὄψον(opson)은 기본적으로 익힌 주식에 곁들여 먹는 부식을 뜻하지만 익힌 음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어떤 사람은 이것을 좁은 의미에서 육류와 어류 음식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글라우콘이 앞에서 ‘요리도 없이 잔칫상을 받게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은 플라톤이 언급한 음식들에서 육류나 어류 등 고급 먹거리가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을 듣고 이어지는 설명이 그에 대한 보완 설명이라고 본다면 글라우콘이 빠졌다고 지적한 것은 그 내용으로 보아 육류나 어류가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부식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세부 묘사들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최소한 의식주에 있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만족스러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비록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정의의 원초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들이 유일하게 조심하는εὐλαβούμενοι 것은 가난이나 전쟁이지만 그것조차 말 그대로 ‘조심’ 또는 ‘유념’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타락이전의 삶 즉 에덴동산의 삶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 요체는 건강과 평화이다. 건강은 말 그대로 신체적인 강건함이요 평화는 나라 사이에서건 개인 사이에서건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서건 갈등과 분열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실 최초 국가의 사람들처럼 최소한도의 필요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의 경우, 인생을 살아가며 목표하는 것으로서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 이런 나라를 일컬어 ‘건강한 나라’라고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유기체로서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신체적 건강 때문일 것이고 나아가 ‘참된 나라’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 또한 이 나라가 보전하고 있는 자연적 정의 즉 분열과 갈등이 없는 평화의 상태 때문일 지도 모른다.

 

[372d]

* 그러나 글라우콘은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에 대해 그렇게 수립된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ὑῶν πόλις”라고 폄하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 나라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먹고 사는 일인데 그것은 돼지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으며 소크라테스가 그런 식으로 돼지의 나라를 수립하려했다면 과연 그런 것들만으로 돼지들을 살찌울 수 있겠느냐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반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를 되묻고 글라우콘은 ‘흔히 하는 대로ἅπερ νομίζεται 그들이 불편을 감수할 사람들τοὺς μέλλοντας μὴ ταλαιπωρεῖσθαι이 아닌 한, 그들은 땅바닥 돗자리 위가 아닌 침상에 누워 식탁에 차려진 식사도 하고 요즘 사람들이 먹는 요리와 후식 즉 좀 더 고급스런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반문을 호사스런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는가 하는 것도 고찰해보자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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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글라우콘에게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원인을 묻고 그 답이 ‘필요’chreia라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372a)과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가 세우려는 나라가 돼지들의 나라인 한, 그가 말한 것들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논의 구도상 최초의 나라에서 호사스런 나라로 이행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최초의 나라는 돼지들의 나라와 진배없으며 그에 따라 마치 돼지가 일정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필요를 추가해서 더 안락한 삶을 욕구하듯이 최초의 나라는 결코 그것으로 완결되지 않고 욕구가 증대하여 종국에는 사치스런 욕구까지 발생하여 결국 다른 나라로 불가불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유기체의 성장이 필연이듯 사람의 욕구는 결코 일정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늘 필요를 생산하며 그에 따라 욕구 또한 필연적으로 확대된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최소한 인간의 욕구는 어떻든 간에 일단 다양한 형태로 확대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아가 만약 그 증대된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서로의 갈등은 물론 전쟁까지 초래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즉 최초의 나라가 사치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갈등과 다툼이 생겨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 여기서 인간의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는 것이 필연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인간은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주장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욕망의 증대가 제한된 가치 총량을 넘어설 때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념이 결코 일원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 가치의 총량이란 말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정신적 가치 내지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욕망은 따로 총량이 없다. 일부 물질적 가치 영역에서 갈등과 다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나 행태를 뒷받침하는 일반적 근거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인간 욕구의 증대에 따른 나라 내지 사회 계층의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고 있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나라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호사스런 나라로 변모하고 호사스런 나라는 호사를 추구하는 시민들의 욕구 증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모순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최고 단계인 자기 정화가 가능한 이상 국가의 등장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 결국 글라우콘의 냉소적 태도는 이러한 나라는 자신들이 듣고자 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되는 현실의 나라도 아니고 부정의를 정화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나라도 아님을 내비친 것이다. 사실 최초의 나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비록 건강과 평화 상태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나라나 개인이 질병과 분열을 적극적으로 이겨내고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의식주 등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한 채 살아가는 돼지 같은 삶이 가져다주는 건강과 평화이다. 그에 따라 이 나라에는 타자에 대한 긴장도 고민도 문제도 없으며 그런 까닭에 아직 정부도 정치도 철학도 없다. 물론 최초의 나라에는 비록 각자가 서로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수행하는 상태 즉 자연적인 정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지속해서 증대하고 그에 따라 나라가 규모나 수에서 확대 되고 필요가 충족되지 않음에 따라 필연적으로 다툼과 갈등이 생기고 그로부터 부정의가 발생하며 그에 따라 그에 대한 대책 또한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다시 말해 부정의를 다스리고 정의를 보전하기 위한 장치가 새롭게 요구되면서 그 일을 맡을 심부름꾼으로서 수호자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과 정치·문명은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위와 같은 현실 국가에서 요구되는 불가피한 필요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

* 앞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통치자 계층, 수호자(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면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의 형성 단계상 초기 단계의 국가 즉 생산자 계층으로만 구성되는 국가이다. 나라를 구성하면서 이처럼 생산자 계층의 나라를 최초의 나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국가 수립에 있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할 요소가 다름 아닌 의식주라는 물적 기반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또한 유기체인 한,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그 다음 정치도 철학도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적 토대라는 하부구조 없이 정신과 문화 등 상부구조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토대와 상부구조가 모두 성립한 이후에 어느 것이 구조 전체를 지배하고 구조의 보전과 지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의 문제는 별개의 논점을 구성하는 것이라 해도, 플라톤 역시 물적 조건 내지 생산자 계층의 역할이 나라 자체의 성립을 위한 일차적이고도 필수적인 기반인 것만은 결코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리고 이 나라는 비록 생물학적 자기 보전 자체에 만족하는 이른바 돼지들의 나라이긴 할지라도 이 나라를 구성하는 생산자 계층들 사이에는 협동적 삶이 유지되고 있고 그에 따라 고민과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단 플라톤은 부정의의 원인을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특성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국가>에서 정의를 다루면서 왜 수호자 계층만을 주로 다루고 생산자 계층은 크게 다루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플라톤은 부정의를 바로 잡는 주체에서 생산자 계층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했던 민주정의 중심 세력으로서 민중이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은 여전히 생산자 계층을 불신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중에 대한 불신은 생산자 계층의 고유한 역할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그 고유 영역을 넘어서 정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데서 온 것이다. 플라톤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성하는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 계층의 역할과 협동적 삶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뢰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층이 자기 고유 역할을 넘어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원인을 생산자 계층에서 찾지 않고 그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게 만든 지배 계층의 탐욕적 욕망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8권 정치체제의 타락과정을 설명하면서 민주정 치하에서 기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인 대중이 드러낸 욕망의 왜곡이 생산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 계층의 그릇된 욕망과 잘못된 정치행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부정의의 근원은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발생하는 모든 해악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생산자 계층이 아닌 지배 계층의 탐욕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통치가 소수의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까닭에 소수 권력 계층의 지성화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열망하게 되었고 그 방책을 구축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오히려 권력의 지성화가 소수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 시민의 지성화, 다중 집단의 지성화를 통해 달성되어야 하고 달성될 수 있으며 달성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플라톤 정치 철학의 핵심이 양적 차원에서 소수 권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지성에 의한 권력의 지배 즉 권력의 지성화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민중의 지성화를 위한 철학적 원리로도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생산자들로 구성된 최초 나라를 건강과 평화가 담보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생산자 계층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생산자 계층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전체 논의 구도를 염두에 두고 정의와 부정의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려는 차원에서 부정의가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 논의 구도 하에서 최초의 나라를 넘어서, 즉 물적 토대로서 생산자들로 구성되는 단계를 넘어서 문명과 문화적 욕구의 단계에 들어와야, 비로소 정의와 부정의가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기 위한 포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젤러(E. Zeller)는 ‘돼지의 나라’라는 글라우콘의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견유학파의 시조로 평가되고 있는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 445?-365?)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안티스테네스는 플라톤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실천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강건한 정신과 몸으로 소박한 삶에 자족하는 삶을 이상으로 여긴 사람이다. 즉 글라우콘의 냉소는 그와 같은 잘못된 이상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최초 나라의 모습은 안티스테네스가 꿈꾸는 그러한 삶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담과 헨켈(Stud zur Gesch, Lehre vom Staat, 8 f.)등은 이러한 젤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최초의 국가는 다만 이상 국가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그려진 것으로서 일부 아이러니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곳에서 언급된 필요와 분업, 협동의 원리는 이후에도 수정되고 대체되면서 논의 기본 바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아직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산자 계층의 삶에 대한 불쾌함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최초 나라의 편안한 삶(εὐχερὴς βίος Pol. 266 C)을 돼지의 삶에 비교한 것은 나름 적절하다. 다만 소크라테스와 달리 글라우콘이 냉소를 표하고 있는 것은 그 최초의 나라가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답변을 통해 기대하고 있었던 현실 국가와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개θυμοειδής를 크게 중시하는 글라우콘으로서는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물질적 욕구ἐπθυμμα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는 나라의 삶을 경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아담 주석 참고)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2e]

* 이처럼 글라우콘의 냉소를 접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구가 그러한 나라만이 아니라 호사스런 나라도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고찰해보자는 요구로 받아들인다.[372e] 즉 글라우콘이 원하는 나라는 그러한 현실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나라가 아니라, 늘 정의와 부정의가 문제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요구나 관심사도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나라 즉 ‘호사스런 나라’τρυφῶσας πόλις인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보기에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는 앞서 서술한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인 것 같지만 글라우콘이 정 그러한 나라를 살피기를 원한다면 ‘호사스런 나라’를 살피는 것도 그리 나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해서 나라들에 있어서 생겨나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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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앞서도 간단히 살폈듯이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필요에 입각한 나라를 먼저 말한 것은 장차 부정의가 문제되면서 수호자 계층이 요구되는 현실 국가를 끌어들이기 이전에 그 첫 단계로서 생산자 계층의 성립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최초국가와 호사스런 나라의 모습을 보다 대조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밑 작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른바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를 먼저 두고 그 다음에 호사스런 나라를 살펴야 정의와 부정의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깨끗한 흰 백지 위에 뭔가를 그려 넣어야 더 분명하게 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최초의 나라를 ‘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어떤 이는 이곳 최초의 나라가 자연적 적성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일을 맡아 수행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자연적 본성에 따라 각자 자기가 할 일을 잘 수행해내는 것이 플라톤의 정의인데 이 나라는 이미 그러한 정의가 자연적으로 구현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건강한 나라’라는 표현은 몰라도 ‘참된 나라’라는 표현은 일종의 아이러니로 해석한다. 참된 나라는 종국적으로 철학을 통해 부정의가 극복되고 정의가 구현되는 나라를 말하는데 이 최초의 나라는 철학적 사유는커녕 그저 먹고 사는 것에 만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인 인간들로만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앞서 소개하였듯이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필수적인 욕구에 만족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를 ‘참된 나라’ἀληθινὴ πόλις, ‘건강한 나라’ὑγιής πόλις라고 부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러한 나라야말로 실제로 그가 꿈꾸었던 이상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안티스테네스와 달리, 그저 생산자 계층만이 존재하는, 실제 현실과 거리가 먼 그런 나라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욕구가 이글거리고 서로 부딪치는 현실 그 조건 위에서 그것들 모두가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꿈꾸고 있다.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은 사실 공허한 일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현실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본(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 있는 현실의 조건 위에 선 이상국가인 것이다. 오히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강한 나라, 돼지들의 나라는 어쩌면 루소(J. Rousseau)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을 때 그가 염두에 둔 최초 자연 상태의 인간 사회,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또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이상적인 과소(寡少)국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㉙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 문자의 비유는 이미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란 다만 이기적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개인이 사회에 빚진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국가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처럼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화된 전체로서 각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보전의 기초로서 생명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통일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사회는 단순히 분리되어 고립된 단위들로 간주되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사회는 부분들의 속성들의 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이익의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익 즉 공동체 자체의 이익을 갖는다. 이것이 곧 독립적인 개인들의 이익의 단순한 통합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이익 내지 공공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공공의 이익 또한 개인들의 이익이되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이익이다. 유기체의 경우 기관들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고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어야 각 기능의 온전성도 담보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각 개인 또는 계층들이 서로의 유기적 의존성을 토대로 본성에 따라 자기들 고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구현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담보되어야 각 개인들과 계층 또한 자신들의 본성에 맞는 욕망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논의 방법론과 관련한 논의에서부터 이미 단순한 논의 방법론을 넘어 그가 펼칠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 성격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곧 이어 펼쳐지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주장 역시 이러한 국가의 유기체적 성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369b]

*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ἀρχὴ부터 언급한다. 즉 나라의 기원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ἐπειδὴ τυγχάνει ἡμῶν ἕκαστος οὐκ αὐτάρκης, ἀλλὰ πολλῶν ὢν ἐνδεής이라고 말한다.

 

[369c]

* 이런 경위를 통해 각자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어 동반자κοινωνός 및 협력자βοηθός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생활체συνοικίᾳ에다 ‘나라’πόλις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론상으로 수립되는 나라는 필요χρείᾳ로부터 그 수립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369d]

*그에 따라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πρώτη γε καὶ μεγίστη으로 생존을 위한 음식물τροφή, 둘째는 주거οἴκησις, 셋째는 의복ἐσθής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부ὁ γεωργός, 집짓는 사람ὁ οἰκοδόμος, 직물을 짜는 사람ὁ ὑφάντης 그밖에 제화공ὁ σκυτότομος이나 신체와 관련되는 것을 보살피는 사람ἤ τιν᾽ τῶν περὶ τὸ σῶμα θεραπευτήν 즉 최소 다섯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최소한도의 나라, 최소 필요국ἥ ἀναγκαιοτάτη πόλις은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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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나라체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률> 3권 서두부분(676a~)의 내용과도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이야기가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서술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어왔다. 우선 역사적 서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최소한도 국가에서 호사스런 나라로의 변화가 규모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고 규모의 증대는 인구의 증가 등 시간적 흐름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다가 나라가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큰 문자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나라의 변화는 소문자인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최초의 국가와 그 이후의 국가의 변화는 생존만 충족되면 더 이상을 바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욕망 단계를 넘어 점차 욕구가 확대되고 사치심이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타자의 욕망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성인들의 욕망 단계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곳 이야기는 겉으로는 역사적 서술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차 논하게 될 현실의 국가가 어떤 배경에서 정의와 더불어 부정의가 함께 생겨나는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 설명에 강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생명체에서 질병의 이유를 밝히려면 질병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기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장차 현실의 나라에서 부정의가 생기는 이유를 밝히려면 부정의가 생기기 이전의 최소한도의 국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이 생기는 것은 성장 때문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사실 때문이므로 이곳 이야기는 나라와 개인들의 기원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술이 아니라 개인과 나라의 요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한도의 나라가 최초의 나라라면 이 나라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서술 자체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최초에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한 가족을 나라로 보기도 힘들거니와 가족의 구성원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유아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나라가 최소한 한 가족 이상으로 구성되는 한, 다섯 사람은 넘었을 것이다. 설사 일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해도 가족 단위에서 서로 다른 일을 전문으로 했다고 보기도 힘들거니와 무엇보다도 농사라는 일 자체가 원시시대 수렵채취 시기 이후에 나타난 것임을 고려하면 이미 이곳 이야기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기술과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실제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다섯이란 숫자 또한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최소한도의 사회적 기능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단적으로 가려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인과적 설명에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있지만 시간적 선후를 갖는 특수한 사실에 대한 인과적 설명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에서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린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이곳 이외에 또 있다.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하여 참주정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제8-9권의 내용이 그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토인비(A. Toynbee)는 이 내용을 기초로 플라톤의 역사관을 쇠퇴사관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을 개인 영혼의 타락과 병행해서 설명된 것에서도 시사되듯이 그것은 정치체제의 변화와 개인의 욕망 간의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역동적인 체제 변동론 내지 도덕 심리학으로서 무엇보다도 그 변화의 방향이 쇠퇴와 진보 내지 회복 양쪽 방향에 다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부정의와 불행의 근본 원인과 양상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고찰이라 할 것이다.

* 그런데 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나라의 기원이 개인들 각자가 자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삶의 보전을 위해 상호 협동적이며 의존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나라 또한 그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러한 개인들의 본성에 기초하여 상호 호혜적인 협동체 즉 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장차 플라톤의 국가 구성 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구성한다. 즉 플라톤은 앞서 글라우콘이 나라의 기원으로서 주장한 사회계약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지배 능력이 없는 다수의 약자들이 소수의 강자들로부터 최소한의 안전과 공존을 담보하기 위해 서로 약정을 맺은 데서 나라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는 본성적으로 상호 협동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배타적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자기 보전을 위해 상호 약정을 맺어 성립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 모두 만약 자기에게 힘이 생기면 언제라도 이러한 약정을 몰래 어기거나 뒤집으려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글라우콘의 이러한 견해는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초 국가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참주를 비롯해 사회적 강자의 전횡을 막아내고 어느 정도 대중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 기원전 4세기 당대 아테네의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민주정이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배경으로 득세했음을 고려하면 나라의 기원에 대한 이곳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러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이기적 욕구와 맞물려 등장한 포퓰리즘적 민주정과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 <법률> (676a~680e)에서도 플라톤은 나라 체제의 기원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프로타고라스> 322b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나라의 기원을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모여 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을 폭력적인 사회적인 강자로서 참주에 비교한다면 나라의 기원에 관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대변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 등 소피스트들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플라톤이 그리는 최초의 국가는 마치 질병이 없는 건강한 몸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후에(372e) 이 나라를 ‘건강한ὑγιής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몸에 질병이 전무할 리 없다. 질병이 없는 몸은 현실의 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현실에서 상존하는 국가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러한 국가가 우리가 추구할 이상국가도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로 상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국가는 질병이 있되 그것을 잘 억제하고 대응하여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다만 질병을 달고 사는 현실의 몸을 설명하려면 건강한 몸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듯이, 장차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고 있는 현실국가를 논의하려면 나라에서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시원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야 하므로 사회적 갈등 이전 상태의 나라 즉 최소한도의 국가, 최초의 국가가 제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최초의 국가도 아니고 아예 실현 자체가 불가능한 상상의 나라는 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조건 위에서 최선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최선의 나라를 의미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라는 표현만 나온다.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369e-371a)

 

[369e-370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나라에서 분업이 생기는 배경을 설명한다. 즉 나라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일ἔργον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해야한다ἕνα ἕκαστον τούτων δεῖ τὸ αὑτοῦ ἔργον ἅπασι κοινὸν κατατιθέναι는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는 나머지 네 사람의 식량을 함께 생산하여 그것을 그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70b-c]

*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πρῶτον , 사람은 각자 성향에 있어서 다르게 태어나서ἡμῶν φύεται ἕκαστος οὐ πάνυ ὅμοιος ἑκάστῳ, ἀλλὰ διαφέρων τὴν φύσιν 일 또한 저 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둘째πότερον, 각각의 것이 더 많이πλείω, 더 훌륭하게κάλλιον, 그리고 더 쉽게ῥᾷον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κατὰ φύσιν 적기에ἐν καιρῷ 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σχολὴν τῶν ἄλλων ἄγων, πράττ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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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수행하는 일들의 기능적 고유성과 전문성,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 부분은 나라의 기원을 개인의 비자족성, 상호 호혜적 의존의 필요성에서 구하는 앞서의 주장과 더불어 장차 제시될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그러한 주장의 필연성은 이미 플라톤이 큰 글씨 작은 글씨 비유에서 나라를 유기체인 개인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유기체로서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모두 하나 같이 서로 태생적으로 다르고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최선으로서 자신의 건강한 보전을 위해 유기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적기(適期)καῖρος(kairos)와 한가함에 대한 설명 또한 분업의 효율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파종과 양육과 추수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그 적기에 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방해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적기를 놓치게 하는 일로부터 손을 뗄 수 있는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부의 일은 자연의 순환에 바탕하고 매년 반복되는 일이므로 어느 정도 적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의사와 같이 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적기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적기를 예측하기 힘든 일일수록 적기를 놓치지 않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환자가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넋 놓고 다른 일에 부름을 당하거나 그곳에 매달린다면 제대로 질병을 치료할 수 없고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치료를 위한 것 이외의 어떤 일로 부터도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농부나 의사 모두 한가로운 사람은 아니다. 농부는 농한기를 맞이하더라도 지난 농사일을 뒤돌아보면서 시행착오와 경험을 정리 기록하는 등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하고 의사 역시 환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보다 효율적인 치료술 연마에 힘써야 한다. 다만 이곳에서 말하는 한가로움σχολή(scholē)은 ‘그것을 저해하는 일로부터 손을 뗀다’, ‘그곳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가로움이다. 이른바 지식인이 한가로움의 뜻을 가진 scholar로 불리게 된 연유도 이것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지식인 계급은 왕이나 사제, 귀족 등 권력자가 나랏일이나 자신의 일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 일부 지능이 높은 사람을 불러들여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말고 머리로 자신을 돕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식인은 머리 쓰는 일 이외에는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일단은 고역스런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scholar로 불리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원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식인 계급이 본질적으로 권력자들의 참모 역할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무려나 지식인은 공동체적 삶의 보전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만을 고하는 참된 심부름꾼이자 정직한 충신일 수도 있지만 언제라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빌붙어 권력의 아류이자 부역자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는 분업은 이른바 마르크스(K. Marx)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과 다르다. 우선, 플라톤의 분업은 본성에 따른 것으로서 자기 삶과 공동체의 적극적 보전의 방책이다. 즉 분업의 효율성은 자기와 공동체의 이익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은 생산의 효율을 통한 자본의 확대 즉 자본가의 이익 창출을 위해 자본가가 계획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의 욕망에 거슬러 불가피한 임노동 조건에 따라 강제된 단순 반복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효율성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온전하게 노동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즉 분업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착취의 방책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분업은 단순히 분업이 지향하는 경제적 효율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욕망을 구현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와 공동체의 건강한 보전에 기여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원리 이전에 도덕의 원리이자 건강한 사회관계의 원리이다. 아무려나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 한다’는 원칙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장차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정치라는 중대사에 따로 전문성을 두지 않고 시민이라면 아무나 간여할 수 있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비전문성과 반공공성을 공격하는 기본 근거가 된다. 이 원칙은 <법률> 846d-847b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역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플라톤의 비판에 열려 있다. 플라톤에게는 정치의 민주화 이전에 정치의 질적 토대로서 정치의 지성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의 지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주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민주정 역시 당시 아테네 현실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향φύσις(physis)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 인간 영혼의 본성을 의미하며 제2권에서 제4권까지 핵심용어를 구성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되고 고유한 개인성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이지만 최소한 플라톤에게는 그것은 피폐한 현실을 넘어서는 근본 바탕이자 힘이며 앞으로 건설할 정의로운 국가의 기초로 선언되고 유포되어 소피스트적 담론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구이자 사람이라면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370d-e]

* 그런데 농부는 쟁기나 괭이 그 밖에 농사와 관련되는 다른 도구ὄργανον들이 필요한데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에 더 많은 시민이 필요하다. 나머지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따라 목공τέκτων, 대장장이χαλκεύς, 목동βουκόλος과 목부νομεύς 등 이런 부류의 많은 장인들δημιουργοί이 작은 나라πολίχνιον의 동반자들이 되어 나라는 커진다. 게다가 쟁기질을 위한 소βοῦς, 제화공을 위한 가죽δέρμα과 양모ἔριον 그리고 건축 재료 등의 이용과 운반을 위한 짐승ὑποζύγιον들도 필요하다. 나아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조달 받고 그런 것을 조달해주는κομιοῦσιν 사람도 필요하다. 이른바 유통을 담당하는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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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법률>이 세우려는 바람직한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의 잉여를 생산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고 최대한 자급자족을 강조한다. 그곳에 세워지는 나라는 가까이에 이웃 나라가 없다.(<법률> 704a-705b)

*‘상대방 나라에 빈손으로 가면 빈손으로 온다’는 말 또한 상호 호혜적 의존성을 내포하는 본성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된 말이다. 이 말에는 외국과의 모든 거래는 물물 거래이고 외환 거래는 없으며 화폐는 국내에서만 유통되었다는 당대 역사적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 이제 최초국가에서의 필요가 제조업을 넘어서 상업 및 유통 등을 비롯한 서비스업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바로 이어 화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㉘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a-374d)

 

[368a]

*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반론과 요구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을 ‘그 어르신의 자제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자질φύσις을 칭송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이 메가라 전투에서 그들이 세운 수훈을 칭송하며 지었다는 시의 첫 구절도 인용한다. 그처럼 훌륭하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ἄμεινον는 것에 설복당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아주 비범한θεῖος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다름 아닌 그들의 생활방식τρόπος 때문임도 함께 밝힌다.

 

[368b-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과연 정의를 제대로 구조βοηθεῖν해낼 것인지 당혹스럽고 또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자신은 트라쉬마코스를 상대로 말로써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자로서ἔτι ἐμπνέοντα καὶ δυνάμενον φθέγγεσθαι 그것을 포기하고ἀπαγορεύειν 정의를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ὅσιον이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τὸ δεδιός을 안겨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 상책κράτιστον 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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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가리켜 ‘그 어르신의 자제들’ὦ παῖδες ἐκείνου τοῦ ἀνδρός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어르신’을 트라쉬마코스로 보는 주장도 있다.(J. Adam 각주 참고) <필레보스> 36b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필레보스로부터 논의의 권한 일체를 이어받은 프로타르코스를 두고 그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논의를 이어받듯 아데이만토스 형제 역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마치 자식처럼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논의를 이어받은 것과 폴레마르코스나 프로타르코스가 논의를 이어 받은 것은 동기와 사정이 전혀 다르고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칭찬 또한 짓궂은 말투가 아니라 진지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 표현은 바로 뒤에 나오는 ‘아리스톤의 아들’παῖδες Ἀρίστωνος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 어르신 또한 그들의 부친 아리스톤Ἀρίστον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 플라톤의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ktionē는 솔론의 가계를 잇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고 아버지 아리스톤은 자진해서 목숨을 바쳐, 헤라클레스 형제들의 아테네 침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자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코드로스(Kodros, 기원전 1089 ~ 기원전 1068년)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시를 지었다는 이른바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ἐραστής이 글라우콘의 외삼촌인 크리티아스Kritias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동성애 관계에서 성인 남성을 가리키는 말 erastēs를 옮긴 것이다. 그의 상대인 소년 애인은 paidika라 불린다. 글라우콘도 관습대로 소년시절 소년 애인 역할을 한 것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는 기원전424년과 기원전 409년에 일어난 전투가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그 가운데 어느 시기의 전투인지는 불확실하다. 서두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의 대화상정시기를 기원전 410년경으로 추정한 초기 연구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기원전 420년 전후, 또는 멀게는 기원전 430년 이전까지도 상정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최소한 기원전 409년에 벌어진 전투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원전 424년 전투로 보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 <국가>의 대화상정시기가 기원전 430년 이전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시대착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생 글라우콘이 기원전 424년 전투에 참여했다면 최소한 18살이 넘어 탄생연도가 기원전 442년 이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상정할 경우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동생 플라톤과 형들의 나이가 최소한 15살 이상 크게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의 언급은 시기와 상관없으며 다만 플라톤이 형들을 <국가>에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미화의 일환으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일부 연구자들은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는 위의 두 전투뿐만이 아니라 간단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전투를 굳이 위 두 시기의 전쟁 가운데 하나로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이곳의 메가라 전투 시기는 케팔로스와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코스의 생존, 다몬, 소크라테스의 추정 연령대, 트라쉬마코스의 전성기,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의 투리오이 이주와 귀환 시기 등과 더불어 대화상정시기를 추정하는 주요 요소들이기는 하나 이들 요소들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까닭에 대화 상정시기를 추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비범한(신적인)θεῖος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앞서 366c에서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두 부류 즉 ‘하늘이 내린 성품θεῖος φύσις’을 가진 자와 ‘지혜를 얻은 자’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방식τρόπος은 이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뒷받침 해준다. 절도 있고 훌륭한 생활방식의 중요성은 앞서 케팔로스도 주장하고 있다.(329d)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생활방식은 하늘이 내린 성품에 기반한 것인데 비해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생활방식은 부(富)에 기반을 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자신이 행할 일을 ‘정의를 구조βοηθεῖν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다. 구조의 원어 boēthein은 구조(rescue)라는 뜻과 도움(help)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구조의 의미가 더 적절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실감나게 전해주는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그야말로 정의가 나락에 빠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우위에 대한 제1권에서의 자신의 논증이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는(358b)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제1권에서의 논의가 갖는 불완전성과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일시 그를 당혹하게ἀπορῶ 만들었지만 그러한 당혹감은 오히려 정의의 구조를 향한 새로운 다짐과 불퇴전의 각오로 이끄는 발판이자 도화선이 된다. ‘아직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결코 정의를 구조하는 일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를 구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두려운 일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부정의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삶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변명하는 우리들의 비겁한 마음에 준엄한 칼날을 겨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숨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정의를 구원하라. 정의에 눈을 감고 안주하는 것이 상책(가장 강력한 방책)κράτιστον이 아니라 비난받고 있는κακηγορουμένῃ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과 행복을 위한 가장 막강한 방책이다.’

 

 

2-1. 나라와 개인의 유비(368c-369a)

 

[368c]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에 앞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한다.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논의를 포기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무엇이며τί ἐστιν ἑκάτερον 이들 둘의 이득ὠφελία과 관련된 진실τἀληθὲς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줄 것’

 

[368d]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탐구 과제를 보다 잘 탐구ζήτησις하기 위한 방법을 먼저 제안한다. 왜냐하면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자가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τὸ ζήτημα οὐ φαῦλον ἀλλ᾽ ὀξὺ βλέποντος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고οὐ δεινοί, 그다지 시력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같은 글자일 경우 큰 글씨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작은 글씨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먼저 큰 글씨부터 보자고 제안한다. 즉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나쁜 μὴ πάνυ ὀξὺ βλέπουσιν 사람들더러 먼 거리에서 작은 글씨γράμματα σμικρὰ로 적혀있는 것을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 그것과 똑같은 글씨들τὰ αὐτὰ γράμματα이 어딘가 ‘큰 곳에 더 큰 글씨로’μείζω τε καὶ ἐν μείζονι 적혀있다면 먼저 그 큰 글씨를 읽고 난 후 그것들이 작은 글씨와 같은지 아닌지를 살피게 된다면 아주 천행ἕρμαιον이라는 것이다.

 

[368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에 관한 탐구에서 그런 유사점τί τοιοῦτον이 있는 그 큰 곳을 발견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 큰 곳이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임을 밝힌다. 즉 정의에는 ‘개인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ἀνδρὸς ἑνός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ὅλης πόλεως도 있다는 것이다.

 

[369a] 그러므로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그런 다음 작은 것과 큰 것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 을 검토하면서 개인의 정의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훌륭한 말씀καλῶς λέγειν인 것 같다고 동의를 표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나라를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 γιγνομένην πόλιν λόγῳ라고 부르고 그 나라를 관찰하게 되면θεασαίμεθα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γιγνομένην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36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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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수행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요구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간명하게 정리한 내용은 그 자체로 그들 요구의 핵심은 물론 장차 <국가>가 다룰 기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1)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2) 논의를 포기하지 말 것. 3)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밝힐 것 4)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과제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행에 임하는 태도와 수행해야할 과제의 내용이다. 아무리 태도가 훌륭해도 내용이 부적절하면 무의미하고, 아무리 내용이 적절해도 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부실을 면치 못할 것이다. 1)과 2)는 과제 수행에 임하는 태도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건 반성적인 의미에서건 소크라테스에 의해 여러 차례 표명된 바가 있다.(348a-b, 352d, 354b, 368b-c 등) 앞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다짐은 과제 수행자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의 극한치를 보여준다. 그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 특히 3)과 4)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수행해야할 핵심 과제로서 그 표현부터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의 대상에 부정의를 포함시키고 있다. 전기 대화편 이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사태를 우연적인 속성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측면에서 엄밀하게 규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물을 때 쓰는 표현이다. 글라우콘 역시 자기가 말하는 것은 정의의 본질적 규정이 아니라 정의가 갖는 여러 우연적 속성들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정의의 ‘어떤 것’hoion einai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358c) 그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ti esti라는 표현은 소크라테스에게 엄밀한 의미의 규정 내지 본질을 물을 때 쓰고 있다.(358b) 소크라테스도 제1권을 마무리하며 그간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논의를 이끌어 왔다고 후회하면서(354c) 그 말을 정의에만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엄밀한 의미 규정을 자체로 내포하는 실재적 대상에 대해 그것의 정의 내지 규정을 물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정의를 비판할 때마다 부정의가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는 무규정적 비실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아예 ti esti의 물음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하물며 그러한 결함 하나에 기초하여 부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를 부정하곤 했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제 제2권에 들어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직격탄을 날린 후에(358b)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의 규정차원에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나 쓰던 ti esti를 놀랍게도 부정의에 대해서 물을 때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358b) 그리고 이런 연후 아데이만토스도 그에 이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물을 때마다 매번(366e, 367b, 367e, 368c)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부정의도 정의와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힘을 갖고 현존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앞선 강해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듯이, 부정의가 근본적으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질 수 없는 비존재라는 것에 기초하여 논리적 규정차원에서 그 결핍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방식만으로는 결코 현존하는 부정의의 힘을 제거하거나 혁파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 형제들 모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제 정의의 결핍으로서 부정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정의가 현실에서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의 실체적 현존을 인정한 연후에 그것도 함께 규명되고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는 형식으로 직접 부정의에 대해서도 ti esti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ti esti는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정의(定義) 차원의 물음을 넘어 비록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현실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힘으로 현존하는 한, 그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구별과 구분, 이해를 확보하고 그 성격을 최대한 실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물음으로 확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이라는 요구 또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정의가 어떤 좋은 것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글라우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도 좋은 것이지만 결과로도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정의가 그 결과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인지에 방점을 두고 대답해주기를 요구한다.(367c) 그러나 여전히 정의가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임이 밝혀져야 한다. 즉 정의는 현실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사이다. 4)의 요구는 제1권 마지막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이익과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가 갖는 우위를 이제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론은 이른바 오늘날 윤리학적 기준에 따른 동기주의 내지 법칙주의 또는 결과주의 그 둘의 성격을 모두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을 함께 통일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그 구분 어디에도 선택적으로 귀속될 수는 없다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간명하게 정리한 후에 그들의 요구대로 정의와 부정의가 각각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갖는 것인지를 보다 잘 탐구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탐구 과제가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검토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 정도의 유능함을 갖추지 못한 터라 우리 수준에서 해당 과제를 잘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이때 제시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자·대문자 비유이다. 즉, 시력이 나쁜 사람이 어딘가 같은 글씨로 큰 글씨가 있을 경우 그것을 본 다음에 나중에 작은 글씨를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큰 글씨에 해당하는 것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 여기서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이라는 역문은 원어 paulon(쉬운, 사소한, 낮은 수준의)을 ‘예리한’oksy에 대비시켜 옮긴 것이지만 그와 달리 ‘일거리’τὸ ζήτημα를 수식하는 말로 해석하면 ‘쉬운 과제가 아니라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거리’로 옮길 수도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작은 글씨 즉 ‘개인’ἑνός에 대응되는 큰 글씨가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라고 말하고 그 둘의 유사성을 검토해보면서 애초의 과제인 ‘개인의 정의’를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1) 개인은 개체인데 반해 나라는 집합체이다. 2) 개인은 유기체인데 반해 나라는 비유기체이다. 3) 개인과 나라는 오늘날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그렇듯이 서로 대립적이다. 요컨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단순하게 대응 확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아데이만토스 형제는 위와 같은 그의 제안에 이의는 고사하고 훌륭한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의아하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안과 아데이만토스의 호응 모두가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그곳에 숨겨진 플라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최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방식으로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일단 겉으로는 개인과 나라는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1대1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담고 것으로 들린다. 도대체 개인은 개체이고 나라는 집합체인데 어떻게 1대1로 대응한다는 것일까? 1대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대응된다면 개인이 모인 그 개인들의 집단과 나라가 대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개인과 나라의 유사성은 모든 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탐구하려는 과제는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의 혼속에서 어떤 힘을 갖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에서 서로 비교해가며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각각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관련한 유사성이다. 이미 제1권에서도 비록 단편적이나마 개인과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작용하는 방식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개인은 물론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이건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으면 우애와 협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며 부정의가 깃들어 있으면 대립과 불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351e-352a). 그런데 우애와 협동, 대립과 불화는 복수의 것 즉 여럿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개인에게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지 제1권에서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서 우리는 제2권 이후에 펼쳐질 개인 영혼의 3분설이 그곳에 전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 플라톤은 앞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개인은 3가지 서로 다른 영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모종의 집합체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 또한 서로 다른 계층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집합체인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가 서로 크기만 다를 뿐 1대1로 대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혼들의 집합체로서 개인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계층들의 집합체로서 나라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유사성인 것이다. 요컨대 개인은 생명체로서는 개체이지만 혼의 구성에 있어서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집합체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 내부에서의 관계방식과 나라 내부에서의 관계 방식 사이의 대응은 이미 본 강해 서두부분에서도 살폈듯이 politeia라는 말 자체가 개인이 자신의 혼들을 다스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자 동시에 나라가 나라의 계층들을 다스리는 나라의 정치 운영 방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그 주장은 일단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모종의 같은 집합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체로서 개인들의 혼이 갖는 집합적 성격과 비생명체로서 나라의 계층들이 갖는 집합적 성격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그 자체로 생명의 보전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협동하는 그야말로 생명체이지만 후자의 경우 생물학적 생명체가 아니므로 서로 다른 계층들이 그 자체로 협동적이고 의존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배타적이고 대립적이다. 그래서 일부 메타윤리학자들은 이것은 사상가 개인의 소망과 당위를 사실과 자연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이 갖는 타당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이곳에서도 글라우콘은 정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사회계약설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358e-359b) 글라우콘에 따르면 개인들은 개인 내부의 영혼들이 그러하듯 서로 의존적이고 협동적이지 않다. 그들이 모여 약정을 맺고 법률을 만드는 이유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개인들은 모여 살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약정을 맺고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에는 당대 아테네 현실은 물론 당대 주류 지식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국가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왜 유기체인 개인과 나라를 내적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이곳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제안에는 단순히 탐구 방식의 효율성 차원의 내용만 담겨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탐구방식을 위한 제언 자체에서부터 이미 글라우콘의 생각을 뿌리 채 부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플라톤의 제안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에 앞서 도대체 플라톤은 왜 당대의 주류 지식인들의 생각에 거슬러서까지 유기체인 개인과 비유기체인 나라를 1대1로 대응시켰는가를 들여다보았는지에 대해 우선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에는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소피스트 부류의 사회계약설적 국가관과는 정반대의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은 나라 또한 생명체인 개인과 동일하게 당연히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중차대한 진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즉 나라와 법률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개인들이 관습과 타성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약정을 맺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협동적 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자연적 본성에 입각하여 그러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 그러한 국가의 기능을 유기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내적인 협동심과 우애 또한 갖추고 있다. 그러한 한, 각자의 행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계층 구성 내지 공동체의 성립은 그 자체로 본성에 일치하는 자연적 욕구의 발현이다.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이 그의 사상 자체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난을 한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서는 개인 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개인의 행복 또한 나라의 보전과 안녕에 의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어떤 경우에서건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개인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만 기초하더라도 플라톤의 생각은 위와 같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우선 나라와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둘의 의존성은 선후상하가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성격을 개인과 나라로 분리하여 생각하더라도 그들 간의 예속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라가 행복하려면 각 계층들이 계층 스스로의 욕망에 부응하여 자신들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방식으로 그들 서로 완벽한 협동과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즉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각 계층들의 욕망 구현과 그것을 통한 행복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층들의 욕망 구현은 그 계층을 구성한 개인들의 욕망 구현 즉 각 개인의 내면에서 영혼들 간의 조화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내적 영혼의 조화는 그 자체로 이미 그 개인의 평화와 행복이다. 결국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자 전제는 결국 개인이 구현하는 개인들 각자의 내적 평화와 행복이다. 이들이 불행하면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의 행복은 담보될 수 없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강제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나라의 통치자들 또한 스스로의 본성과 기능에 역행하여 자기만의 권력과 부를 누리면 이미 그 개인 자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계층들과 개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계층들은 상처나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능력 내지 복원력이 그렇듯이 그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자구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가 건강할수록 그러한 부정의한 권력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그 만큼 빨라진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고 현실에서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그 반대의 경우가 다반사이다. 플라톤 역시 그러한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구축해내는 것이 당대 아테네 현실 자체가 보여주듯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고 설사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에게 본성으로 구유되어 있더라도 그것의 발현이 필연적으로 담보되는 것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물론 부정의 역시 생겨나게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지금부터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탐구하되 그저 이상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으로 선언하듯 정의를 논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시시때때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제 정의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의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장애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정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당대 소피스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들이 얼마나 단견에 불과한 것이며 종래는 개인과 나라 모두를 불행과 파국에 빠트리는 것인지가 실질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부정의와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펼칠 국가론은 말 그대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의 이상적인 ‘정의론’인 동시에 현실에서 늘 정의를 위협하고 강력한 힘으로 그 쇠락과 변질의 힘으로 작용하는 가장 피폐한 ‘부정의론’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과 나라가 유기체라는 진실은 본질적으로 이미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의 본성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동성을 전제하므로 그 자체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실천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전제하더라도 유기체는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수 있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그 질병의 실체와 극복 방안 또한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건강을 보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부정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 언급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이 이루어진 후에 제8권에서 제9권에 걸쳐 정의로운 나라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들과 타락의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분석한다.

* 혹자는 이 부분에서 장차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부정의가 생겨나는 것일까? 부정의가 생겨나는 나라라면 그것은 이미 그것으로 그 나라가 아직 정의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부터 거론 되는 정의는 형상으로서 정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형상에 가까운 상태로 구현된 정의이므로 그것은 다른 한편 늘 부정의로 변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으로는 무규정적인(apeiron) 것이되 그 무규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자기 동일적인 것(tauthon) 즉 형상 쪽과 닮은(homoion) 상태가 이른바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하나로 정의이고, 그 무규정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타자적인 것(heteron), 즉 형상 쪽과 가장 닮지 않은(anhomoion) 상태가 역시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다른 하나인 부정의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도 언제든 부정의로 변질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고 부정의 또한 언제든지 정의로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8권에 실린 나라의 쇠락과정을 플라톤의 쇠퇴사관으로 해석하는 토인비(A. Toynbee)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결코 필연을 담보하는 낭만적 이상론이나 결정론의 체계가 아니며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언제든 쇠락할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체계인 것이다. 다만 완전하게 열린 비결정론과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그 열린 가능성에서 우리가 지향하고 다가 가야할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이론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목적론과 구분하여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일 것이다.(박홍규 <희랍철학논고> 121쪽 참고) 인간은 동적 목적론에 기초하는 한, 끊임없이 결핍에서 충만으로 곧 선을 지향하고 그곳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과 행동이 없거나 참된 지식 대신 무지가 행위를 인도할 경우 인간은 결코 목적으로서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동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철학은 해체와 무질서, 부정의에 저항하는 끊임없는 지적 노력과 교육, 실천적 연마가 수반되지 않으면 다다르기 힘든 긴장의 체계, 치열한 지적 긴장의 체계, 끊임없는 분투의 체계이다. 플라톤에게 운명론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이정호, ‘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의 형이상학> pp.137-142 참고)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㉗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E. 아데이만토스의 결론[366b-367a]

 

[366b]

* 아데이만토스는 보완을 마무리하며 더 이상 무슨 근거로 최대의 부정의보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지 반문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최정상의 사람ἄκρων들이 말하듯 부정의를 기품으로 기만해가면서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를 수만 있다면 그는 생시에도 죽어서도 신들 앞에서든 인간들 앞에서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πράξομεν κατὰ νοῦν이라고 말한 후 이 모든 언급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366c-367a]

1) 영혼ψυχῆ이나 육체σῶμα 또는 금전χρῆμα이나 가문γένος에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2) 설사 우리가 말한 것들이 거짓이고 정의가 가장 좋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부정의한 자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συγγνώμη을 가질 것이며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οὐκ ὀργίζεται.[366c]

3) 신과도 같은 본성을 타고나거나θείᾳ φύσει 또는 부정의가 뭔지 알게 되어서ἐπιστήμην λαβὼν 부정의를 멀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자발적으로ἑκών 정의롭게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366d]

4) 다만 용기부족ἀνανδρία, 노령γῆρας, 무력함ἀσθένεια 때문에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만이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가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그가 가장 먼저, 가능한 한 가장 최대한으로 부정의를 저지른다.[366d]

5) 우리의 이 모든 언급의 원인은 정의의 칭송자들ὅσοι ἐπαινέται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평판δόξα이나 명예 τιμή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δωρεά과 무관하게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366e]

6)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신들도 인간들도 주목하지 않았다.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혼이 부정의하면 나쁜 것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인 반면 정의는 가장 좋은 것임을 논변으로τῷ λόγῳ 충분하게 피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6e]

7) 여러분들이 이 점을 주장하고 젊은이νέος들을 젊은 시절부터 설득해왔다면ἐπείθετε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φυλάσσω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수호자)φύλαξ가 되었을 것이다.[3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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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에서 죄를 지으면 죽은 다음일지라도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관념은 역설적으로 선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악이 응징되지도 않는 이승에서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리라. 법칙주의적 도덕론을 대표하는 칸트(I. Kant) 조차 선과 행복의 일치 즉 최고선의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혼의 불멸과 신적 자유를 요청(Postulat)하고 있다. 아무리 선의지가 보상과 무관한 정언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선과 행복의 일치는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진실로서 함께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승이건 저승이건 인과응보의 가능성 그 자체가 부정되고 있을 정도로 정의나 정의로운 신이 자리할 곳이 없다. 부정의한 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제 뜻대로 산다. 신은 다만 시인들이 일러주듯 오히려 사람들 특히 강자들의 서원과 공물에 지배되는 인위적 관습의 산물일 뿐이다.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언급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구원과 의지의 마지막 보루인 종교의 영역마저 얼마나 심각하게 물신주의에 젖어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1)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강자 4)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약자이다. 그런데 아테이만토스는 의아스럽게도 설령 어떤 이가 앞서의 언급들이 모두 거짓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고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고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라면 오히려 그는 부정의한 사람을 꾸짖고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이유가 3)에서 해명된다. 그 어떤 이는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고 증명도 할 수 있지만 이미 그는 당대의 현실에서 강자가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는 경우는 기대하기 힘들 만큼 거의 희박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천성적으로 신과도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정의가 최선임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이란 극히 소수이며 그 자체로 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일상에서 그저 시류에 따라 기득권적 관성에 따라 별 반성 없이 부정의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강자들에게 예외적인 경우를 들어 그들의 부정의를 탓한들 그들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이해할 리도 없다. 물론 약자들은 강자들과 달리 정의를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정의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도 힘을 갖게 되면 누구보다도 맨 먼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의를 저지른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의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강자이건 약자이건 간에 정의가 최선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아테네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명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데이만토스는 이렇게 된 현실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들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최선이며 부정의가 최악임을 일깨워주지 못한 정의의 칭송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즉 정의의 칭송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함에 있어 평판이나 명예 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과 무관하게 정의를 칭송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토대로 정의와 부정의를 찬양하거나 비난해야 마땅함에도 인간은 물론 신들조차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누구도 그 점을 논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의 칭송자들이 정의가 최선임을 젊은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논변으로 충분하게 피력하고 설득해왔다면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장차 펼쳐질 바람직한 정의론의 구축이 타인들의 부정의에 대한 배타적 의심과 배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에서 정의 자체가 드러내는 힘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토대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 부정의를 늘 스스로 경계하면서 그 정의의 온전한 힘을 길러내고 함양하는데 있음을 미리 보여준다. 즉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배타적 공존이 아니라 사회협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 각자의 내적 반성을 토대로 타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선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적 공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경계한다’, ‘자신에 대한 감시자’라는 표현에서 ‘경계한다’φυλάσσω와 ‘감시자’φύλαξ라는 표현은 나중 수호자를 나타내는 말 φύλαξ(pylax)와 뿌리가 같거나 같은 말이다. 정의는 타자를 배타적으로 경계하고 타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으로 이기는 자만이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진정한 수호자이자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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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마침내 소크라테스에게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아데이만토스의 요구는 곧 이어 살펴보겠지만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종국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정의론을 펼침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야할 핵심 과제,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제시하려는 정의론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1-3-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아테이만토스가 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a)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 밝힐 것이 아니라 이들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αὐτὴ δι᾽ αὑτὴν 무슨 작용ποιοῦσα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줄 것.[367b]
  2. b)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은 배제해 줄 것. 정의와 부정의 양쪽 각각에서 진짜 평판τὰς ἀληθεῖς δόξας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τὰς ψευδεῖς δόξας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것이라고 그대로 들키지 않고 부정의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367b]
  3. c) 동시에 그것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 (자기가 저지르는) 부정의는 자신의 이익, (강자가 행하는) 부정의는 는 약자의 불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과 같이 하는 것이라 단언하겠다.[367c]
  4. d) 그러니 정의가 가장 좋은 것, 즉 결과 때문에도 가치가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 평판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으로 인해 좋은 것이라는 점을 찬양해 줄 것.[367d]
  5. e) 정의는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닌 자를 이롭게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어떤 내용의 평판이건 하지 말 것. 소크라테스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이다.[367d]
  6. f)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지 말고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말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줄 것.[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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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아할 것들이 있다.

1) 우선 위에서 a)는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사람의 혼 안에서 그 자체로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가 혼 안에서 그 자체로 갖는 힘이 무엇인지’가 그의 요구의 핵심 키워드이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요구는 이미 이전의 언급에서도 틈틈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플라톤이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중차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ὴ란 말은 간단없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그 자체 때문δι᾽ αὑτ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란 답을 끌어낸 후 곧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혼 안에서 어떤 힘을 갖는지(358b)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한 단락 지나가서도 다시 같은 표현을 써서 정의가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찬양받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358d) 그리고 아데이만토스 역시 정의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글라우콘이 위에서 한 말과 똑같이 ‘그 각각이 그걸 지니고 있는 자와 혼 안에서 있으면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366e) 마침내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는 이곳 마지막 부분에서도 단적이고도 결론적인 요구로서 테제의 형식(위 요약문 a)으로 앞서 말한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367b)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부연설명이 주어진 후(367 c~d) 언급 끝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그 테제가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위 요약문 f). 367e) 이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동일 내용을 수차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방향과 요체는 물론 <국가>의 논의 계획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이곳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보여 달라고 마치 자신의 의견인 언급하고 있지만(367b) 사실 뒤돌아보면 소크라테스 자신 이미 제1권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그 스스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건 간에 그 집단 안에 깃들어 있을 경우 어떤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미 묻고 있다.(351a~352a) 물론 그곳에서는 ‘혼 안에서’라는 말 대신 ‘개인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 그러한 힘과 기능이 혼의 기능임이 충분히 암시되고 있고(352d) 마무리 즈음에 가면 마침내 그것이 혼의 덕ἀρετή ψυχῆς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353e)

2)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대해 계속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의 기술 즉 형상적인 것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을 뿐(342a) 아데이만토스의 요구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맥에서는(351e~352a)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그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 자체’라는 말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사용한 말이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드러내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 포석이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제2권에 와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냥 흘려보내기 힘든 모종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잠시 후(368c) 소크라테스 또한 비록 그들의 요구를 받아 다시 정리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규정 차원의 것을 언급할 때 쓰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정의는 물론 부정의에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분명 이곳에서 언급되는 정의와 부정의는 개인과 나라에 깃들어 있는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로서 이미 형상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부정의는 정의의 결핍으로서 원천적으로 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둘에 ‘그 자체’라는 말은 사용한 것은 부정의에 대한 제1권에서의 엄밀론적 비판이 단지 논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데 따른 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정의에 대한 혁파와 정의의 수립 내지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진실은 단순히 부정의가 엄밀한 지혜도 덕도 아니라는 비판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안에서 실제 어떤 힘을 갖느냐를 실질적으로 비교해서 그것을 토대로 정의의 우위성을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부정의를 정의의 결핍이라는 소극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작용력을 갖는 적극적인 현실태이자 모종의 실체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주의 통치가 참된 기술도 아니고 참된 앎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위이자 비존재라고 해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막강하고도 주도면밀할 정도의 힘과 기술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앞으로 펼쳐질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새롭게 부응하기 위해 그 둘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실체적 현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에서의 실질적 비교우위를 논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물론 이것이 정의의 형상성과 실체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견지하고 있었던 기존 입장의 후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정의는 원천적으로 정의의 결핍이며 억견의 소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도 앎도 아니며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부정의가 그처럼 원천적으로 억견이자 허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치명적인 근거는 단지 그것이 형상적 일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기보다는 그것이 실재성의 조건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선(좋은 것 to agathon)을 결핍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진리성과 존재성 여부를 가르는 지고의 기준은 선성의 존재 여부이다. 선성을 제외한 채 엘레아적인 일자성만을 기준으로 현실의 부정의를 들여다 볼 경우 부정의는 그저 무규정적인 비존재일 뿐 그것이 갖고 있는 현실적 작용력의 현존성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이제 그것이 갖는 힘의 현존성을 분간해내야 하고 그 무규정적인 힘들의 분간을 위한 존재론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와 참주를 사물과 거울에 비친 상으로 비유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이 사물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 상을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 상은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보통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실제 사물이 아니라는 근거를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그 상이 실재성을 결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로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거울상이 허상이기 이전에 이미 철저하게 사물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이다. 즉 그 거울상은 사물의 모습과 일대일 대응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방향이 정반대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비유를 드는 이유는 앞에서 거울상이 허상이기도 하지만 역상이기도 하듯이 이른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를 무지이자 결핍이라는 이유로 칼같이 부정하기 보다는 일단 사물의 모습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대응하는 형식으로 전부 가지고 있되 방향만 정반대인 것 즉 참주 역시 철학자의 지혜에 대응되는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되 다만 그 지혜의 방향이 정반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와 철학자의 지혜는 모든 면에서 서로 동일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방향만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굳이 비유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이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 곧 선성(to agathon)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참주의 지혜가 참된 기술이 아니고 참된 앎과 힘이 아닌 근거는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이기 이전에 실재와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 즉 원천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선성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가 정의의 결핍으로서 허위라는 것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실재성의 결핍에서 구해지기 이전에 결정적으로는 선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의는 내지 이른바 참주의 지혜는 선을 결핍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실재성을 갖는 것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작용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로 서로 대응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도 참주는 철학자 왕과 마찬가지로 모두 통치에 있어 막강한 기술과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참주는 선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와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그 기술과 힘 또한 정반대의 목적을 지향한다. 플라톤에게 그 만큼 선성은 실재성을 가르는 중차대한 지고의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도 선성은 이미 형상 일반의 실재성의 기초로서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서 있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선(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고차적이며 그 이데아들의 내적 통일성의 근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 세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모사물로서 우주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성이 곧 존재성의 최고 가치이자 그의 철학의 대전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참된 앎이 곧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 덕이며 덕이 곧 앎이다.(353e) 다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이러한 배경과 구도 위에서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 그것들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그것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실체적 힘들의 현존을 인정한 것이고 나아가 철학자와 참주가 각기 가지고 있는 힘을 실질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부정의에도 모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실질적인 작용력에 기초한 정의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5)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요구에는 또 하나 의미 있게 주목해야할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 차원 즉 혼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도 암시되었듯이(351e) 바로 이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나라와 집단의 정의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그것들의 유기성이 주도면밀하게 고찰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출발은 개인의 정의이고 나라의 정의는 개인의 정의를 보다 잘 살피기 위한 방편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정의론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로운 개인이 갖는 부정의한 개인에 대한 우위성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오늘날 일단의 정치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의 정의론을 개인이 무화된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접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 위 b)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린다. 해석이 갈리는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진짜 평판과 가짜 평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둘러싼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진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올바른 평판 즉 진실한 의미의 평판’으로, 거짓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평판’으로 해석하는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 경우 ‘진짜 평판을 제거하는 것’이 나쁘지 ‘진짜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한다면, 전체 문장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나쁜 태도를 가리키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 뒤의 귀결절과 내용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로 앞에 나온 글라우콘의 요청 내용을 360e~361d에서 행해진 요청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곳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제대로 대비시켜 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하다는 평판을 받고, 부정의한 사람은 완벽하게 부정의해서 정의롭다는 평판을 받는 경우를 상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요청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그것들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 상태 즉 전도된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361c) 그것을 논파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원문에서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덧불인다’προσθ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도 천병희 역본이 그러하다. 즉 천병희 역본은 박종현 역본과 다르게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가짜 평판을 덧붙이지 않는 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로 옮기고 있다. 요컨대 가짜 평판이 덧붙여진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 그 가짜 평판을 논파를 해야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논증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 달리 진자 평판과 가짜 평판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진짜 평판이란 ‘현실 세계에서 현존하는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실제 평판’을 가리키며 가짜 평판은 그러한 현실에서 실재하는 평판과 거리가 먼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평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평판(doxa)이란 이미 그 자체로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므로 진짜 평판의 의미를 진정한 평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앞의 글라우콘의 요청도 358에서 제기되고 있는 글라우콘의 요청 즉 보수나 평판 차원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의 우위성을 논증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은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앞의 입장과 달리 제거하다ἀφαιρ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박종현 역본은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종현 역문을 원문과 비교해가며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들 양쪽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위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해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입장이 이어지는 문맥과 보다 더 자연스럽게 상통하고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무리가 적다고 판단된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앞서 요약문 d), e), f)에 담긴 내용 또한 이제 더 이상 평판 따위를 거론하면서 정의의 우위를 논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그 자체가 갖는 현실에서의 작용력을 가지고 논해달라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b)의 내용을 이후의 내용과 연관시켜 풀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 따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하십시오. 만약 선생님께서 이들 양쪽에서 현존하는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거리가 먼 평판만 그 각각에다 덧붙이신다면 그것은 평판을 평판으로 맞대응하는 잘못된 대응으로 그 또한 실재 정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이 아니라 그저 그런 듯이 보이는 정의의 평판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평판만 가지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과 다를 게 없습니다.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플라톤 자신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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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강화하여 그를 대신하여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수행한 소크라테스 주장에 대한 반론과 요구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이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정의론이 시작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㉖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대안의 구축을 요구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 그대로를 그 실질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실감나게 되살려 낸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정의가 세 가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 to agathon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 역시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한편 당대의 아테네 현실이 그러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밀론에 입각한 개념적인 차원에서 부정의가 갖는 그 자체로서의 한계에 대한 논리적 논파가 아니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양치기 기술이 엄밀한 의미의 양치기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지혜가 능가 불가능한 엄밀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각 거부되고 논파되었지만, 트라쉬마코스의 혼 속에서 작용하며 끊임없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힘(dynamis, 351e, 358b)들은 결코 그러한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부정의는 엄밀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제멋대로의 이기적 욕망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폐한 현실을 지배한다. 오히려 일상적 부정의의 양태들의 경우 대부분 논리적으로 어설프고 애매하며 얼마간은 합리적이고 얼마간은 불합리한 것들이 그 근간을 이룬다. 현실은 기본적으로 반대적인 것들이 엉켜있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신이 펼친 논증 방식이 갖는 한계를 받아들인다. 제2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와 대화자 모두가 이제 목표로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의 정의만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 차원에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존하며 최대의 작용력을 발휘하는 실질적인 부정의에 대한 혁파이자 그것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의 구축이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 차원에서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하나같이 정의와 정반대의 힘으로 작용하는 그 자체로서의 실질적인 부정의 즉 현실에서의 부정의의 극단치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전면적 혁파를 요구한다. 그 극단적 부정의의 현존이 정의 자체에 의해 그 자체로 부정되는 것이야말로 곧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형상적 기술에다 붙였던(342a. ‘기술 자체’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이 이제 제2권에서는 글라우콘에 의해 현상계의 영역 즉 현실에서 성립 가능한 정의와 부정의의 양 극단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358b.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이 혼 안에 깃들임으로써 그 자체로서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καὶ 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ἐνὸν ἐν τῇ ψυχῇ, 367d.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ὃ αὐτὴ δι᾽ αὑτὴν τὸν ἔχοντα) 이제 플라톤의 기획에 따라 제1권의 엄밀론이 마무리되고 글라우콘을 통해 제2권의 현실론이 개시되면서 부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논파의 장은 물론 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구축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시한 부정의 최대 극단치는 비록 현실의 부정의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극명성을 드러내는 잣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의 실상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는 부정의 찬양론자들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부정의의 경우들보다 어쩌면 겉으로는 정의 찬양론을 표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같이 부정의한 경우들이 더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부정의의 실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문제제기에 이어 현실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사례들을 당대 아테네 현실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펼쳐낸다. 그야말로 두 형제를 통해 현실의 부정의 양상들 모두가, 소크라테스가 물리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자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위한 터파기의 대상들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이 왜 혁명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는 그의 정의론이 엄밀한 규정 차원에서 정의가 갖는 전면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현실 차원에서 이와 같은 부정의가 노정하는 실질적 전면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당대 아테네의 현실상으로서 앞서 분류한 것들 가운데 <C.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에서의 부정의의 실상에 대해서는 앞서 예고한 대로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363c와 364d에서 언급되고 있는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은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교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인물들이다. 무사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제자 또는 동료로, 그의 아들 에우몰포스(Eumolpos)는 엘레우시스 비의(秘儀, τελετή)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의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를 통해 전승된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7세기 이후 점차 다소 이질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이 아테네로 유입되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신앙 양태들이 특히 민간 신앙 영역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기에 이른다.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는 그러한 신비주의 전통의 신앙 양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이 두 종교 전통 모두 올림포스 종교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은 수난과 부활, 이승과 저승,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과 믿음을 신조의 근본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올림포스 종교에서도 디오뉘소스는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면서도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나 마침내 신적 영원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온갖 수난을 이겨낸 상징적인 사람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 영원성이고 이른바 이승과 저승의 분리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에 대한 관념이나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은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쟁을 치루며 영웅적인 삶을 살고 영예로운 기억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일부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소박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 만큼 사후 세계와 혼의 불멸에 대한 소망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육체적 고통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간 트라케 지방 광산노예들의 경우, 디오뉘소스처럼 운명을 잘 감당하여 신적 지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죽은 후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본능수준의 열망을 반영한 지고의 믿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디오뉘소스 신앙은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라우리온 지방에서 은광이 발견된 이후 트라케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디오뉘소스 신앙에 기반한 오르페우스교가 민간 신앙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오르페우스교에서 디오뉘소스는 올림포스 전통에서의 디오뉘소스와 달리 근동의 영향을 받아 자그레우스 영혼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면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수난과 부활의 상징으로서 크게 추앙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뉘소스의 수난과 부활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과 관련하여 혼의 불멸과 정화,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근본 신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의 디오뉘소스 신앙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미 오르페우스부터가 저승에 갔다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 오르페우스교가 전하는 자그레우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뉘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자신과 같은 지배자의 지위를 부여하려 하자 티탄족이 그것을 시기하여 디오뉘소스를 찢어 삼켰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제우스가 티탄족을 번개로 태워 죽였고, 채 삼켜 지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심장으로 디오뉘소스를 다시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때 티탄의 몸이 타버려 남긴 재로부터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인간은 디오뉘소스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신적인 영혼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티탄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육체를 갖게 되면서 끊임없이 육체라는 티탄적 굴레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비밀스런 입교의식을 통해 자기 정화를 수행해야 하며 그 정화가 온전히 완성되어 순전한 혼으로서 별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정화의 정도에 따라 죽은 다음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또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르페우스교는 올림포스 종교의 디오뉘소스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통 올림포스 신앙에는 없었던 영육의 분리와 혼의 불멸,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아테네에 뿌리내리게 한 근본 배경이 되면서 플라톤의 철학은 물론 훗날 신의 아들이 겪는 수난과 부활, 저승에서의 심판과 혼의 불멸과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주요 사상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물론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오르페우스교를 보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계승하고 개혁했다고 평가되는 피타고라스 교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비밀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적인 체험들과 광란적 행위들에 대해 늘 비판적이었던데 반해 오르페우스교의 정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감정적 요소들 대신 이성을 통한 정신의 고양을 정화의 근본 바탕으로 발전시킨 피타고라스 교단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크게 동감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페우스교는 플라톤이 우려한 대로 기원전 5세기말 피폐한 아테네 현실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곳에서(364e-365a) 언급되고 있듯이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입교 의식(비의秘儀, τελετή)을 기복 신앙과 세속적 서원과 면죄의 방편으로 이용함으로써 아테네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엘레우시스 신앙 역시 비록 오르페우스교와 같은 교단의 성격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 데메테르를 모시는 정기적인 제의의 성격을 가지면서 수확과 생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신앙의 근저에는 저승으로 끌려갔음에도 이승과 저승을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 대한 믿음과 하데스로 납치된 이후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 엘레우시스에서 비의를 통해 켈레우스 왕의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데메테르의 비의에 대한 믿음이 근본 신조로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엘레우시스 비의 역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페르세포네적 삶에 대한 소망과 불사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민간 영역에서 제의와 기복신앙의 형태로 아테네에 뿌리내렸지만 오르페우스교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5세기말 아테네의 현실을 피폐화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1-3-2. 젊은이들이 직면하게 될 번민과 갈등[365b-366b]

 

*아데이만토스는 이상과 같이 언급한 후, ‘이 모든 언급을 젊은이들νέων이 듣고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스치고 이것들을 근거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으로 되어 어떻게 살아감으로써 인생을 가장 훌륭하게 완주하게πορεύω 될 것인지를 능히 결론 내릴 수 있는συλλογίσασθαι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아테네 젊은이들 모두 마치 핀다로스가 말한 것처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자문자답 즉 스스로 묻고서 스스로 대답할 법하다는 것이다.

그 자문자답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문 1> ‘높은 성벽τεῖχος으로 오르기 위해 정정당당해야 할까 아니면 부정한σκολιός 속임수ἀπάτη를 써서라도 성벽에 올라 성채 안에서 안전하게 일생을 보낼까?’περιφράξας διαβιῶ[365b]

<자답 1>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의롭지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고역과 손해만 있다고 하지만 현자들이 일러주듯 ‘보이는 것(평판)τὸ δοκεῖν이 진실을 제압하고 행복을 좌우하니 보이는 것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 앞쪽과 외양은 훌륭함의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로 빙 둘러 그려놓되 뒤로는 가장 지혜로운 아르킬로코스의 이악하고 교활한 여우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 [365c]

<자문 2> 어떤 이는 나쁘면서도 언제까지나 남의 눈을 피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말한다.[365c]

<자답 2> 큰일 치고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결사συνωμοσία나 당파ἑταιρεία를 결성할 수도 있다. 설득의 교사에게 대중연설δημηγορική과 법정변론δικανική의 지혜를 배워 말로 설득하거나 폭력βιά을 행사하면 욕심을 부리고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365d]

<자문 3> 어떤 이는 신들의 눈을 피한다거나 신들에게 폭력을 쓴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365d]

<자답 3>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의 눈을 피하는데 마음 쓸 이유가 없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관습들τῶν νόμων 그리고 시인ποιητής들이 일러준 대로 신들은 제물과 서원, 봉납물에 의해 마음이 동하므로 그것들로 신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면 된다. 이들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만 하는데 만약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부정의를 저질러야 하며 그런 짓으로 재물을 얻어 공물로 바쳐야만 한다. 정의로울 경우 신들한테 벌을 받지 않을 뿐이지만, 부정의는 갖가지 이득을 가져다준다. 도가 지나친 짓을 하고ὑπερβαίνοντες 잘못을 저질러도ἁμαρτάνοντες 탄원을 하여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면 된다.[365d-e]

<자문 4> 어떤 이는 이승ἐνθάδε에서 부정의하면 저승Ἅιδης에서 자신 아니면 자손들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366a]

<자답 4> 입교의식과 사면해 주는 신들이 크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강대한 나라들이 주장하는 바이고 신들의 자손인 시인들, 예언자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36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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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문자답은 당대 아테네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이것을 근거로 …결론 내릴 수 있는’은 꿀벌들이 빠른 움직임으로 꽃가루들을 수집하여 꿀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착안한 표현으로서 젊은이들이 갖는 높은 수준의 지적 흡입력과 감수성을 표현한 말이다. ‘결론을 내리다’로 옮긴 συλλογίζομαι는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는 추론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오늘날 삼단논법(syllogism)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 위의 젊은이의 자문자답은 사회진출을 앞둔 당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심적 갈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오늘날 사회진출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일반 젊은이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비록 장래에 관한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은 명문 가문 내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젊은이들로서 당대 일반적인 경향이 그랬고 청년 플라톤도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정계 입문을 앞둔 젊은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다만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그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는 젊은이들은 장차 폴리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게 될 명문가 자제들로서 정계 입문을 목전에 두고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세상 권세와 평판의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상권세와 평판에 대한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유혹을 공생애를 앞두고 예수가 광야에서 맞이하고 있는 시험과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지도자로 세상에 나설 사람이라면 세상 권세와 재물, 평판의 문제는 그 스스로 넘어서야할 가장 큰 시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자답 1>에서 현자들οἱ σοφοί은 4세기말 시인들의 선조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 등을 가리킨다. 365c에 인용된 ‘보이는 것이 진실을 제압하며’ 또한 시모니데스의 말이다.(단편 598 Campbell)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는 음영을 부각시켜 사물을 표현하는 일종의 스케치화로서 이곳에서는 가식과 환영의 의미를 갖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지고 있다.

* <자문 1>에서 성벽으로 옮긴 τεῖχος는 성채의 의미도 갖고 있다. 높은 성벽은 말 그대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의미한다.

* <자답 2>는 당대 젊은이들이 얼마나 소피스트들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마나 연설을 잘 하느냐와 어느 권력가에게 줄을 서느냐는 당대 출세를 꿈꾸는 명문가 청년들의 최우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설득이 안 되면 음해성 소송을 걸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결사와 당파, 대중연설과 법정변론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어 있는 현실은 오늘날의 부정한 정치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자답 3>은 이미 무신론적 사고가 아테네 현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이들에게 신들은 더 이상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관습과 시인들이 지어낸 존재들이다. 그러한 한 종교는 물신주의에 기초한 세속적 서원과 기복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양쪽 다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 한다는 것은 시인과 관습들 모두 내용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 한 통속의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면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 또한 당대 시인과 관습들이 얼마나 현실 부정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자문 4>, <자답 4> 역시 당대 종교가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최고 강대국 사회에서 얼마나 물신주의,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일부 신들이(제우스, 디오뉘소스, 헤카테, 데메테르 등) ‘사면해주는 신들’로 따로 지정되어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사상은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 보다는 이른바 비주류 전통으로서 신비주의 오르페우스교가 아테네에 자리 잡으면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상이다. 예언자들προφῆται에는 국가가 신전사제로 임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민간 일반에서 시인들에 대한 앎을 내세워 예언자로 자처하며 금전과 물품을 대가로 서원을 풀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많은 탁발승들 등 사이비 사제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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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5세기 말 당대 아테네의 사회 현실 곳곳에 편만해있는 정의의 전도 현상과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에 그러한 당대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이 처한 심각성을 총체적으로 다시 종합 정리 평가하고 있다. 당대 현실이 가져다주는 위기 국면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것임에도 아테이만토스가 유독 젊은이들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워 논의를 총론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데는 다분히 플라톤의 의도가 숨어 있다할 것이다. 요컨대 아테네의 정의의 전도현상이 아테네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국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아테네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위기를 의미하고 또 장차 아테네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 또한 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젊은이들은 장차 사회 지도자급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논파하고 규정에서나 실질적 힘에서나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그 무엇보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왜 그들과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보기에, 현실은 소크라테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젊은이들 대부분이 트라쉬마코스 부류가 주장하는 생각들과 처세관에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요구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입장에서는 당대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소크라테스가 답변해야할 안티테제로 있는 그대로 극명하게 제시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로서는 그 무엇보다 그러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의와 정의로운 삶에 대한 참된 앎을 일깨우고 그러한 앎을 평생을 통해 견지해나갈 수 있는 굳건한 방편과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해내는 것이었다.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의 문제제기가 마무리된 후에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론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다름 아닌 수호자 교육 즉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젊은이들을 철학자로 키워내는 교육 프로그램과 그러한 철학자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구축이야말로 플라톤이 종국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정의론의 요체였던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㉕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4. 논제3: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360e-362c)

 

[360e]

* 글라우콘은 이제 세 번째로, 앞서의 사람들이 왜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고들 말하는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들이 왜 온당한지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 위해 그는 완벽한τέλεον 정상급의ἄκρος 정의로운 사람이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가장 완벽한τελεωτάτη 최상급의ἐσχάτη 부정의한 자가 누리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하여 서로 대비시킨다.

* 우선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자고 제안한 후, 실제로는 부정의하지만 정의롭게 보이는 최상급의 부정의ἐσχάτη ἀδικία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자라는 악명을 얻는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대비시킨다.

 

[361a-c]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

1) 자신의 전문기술에 있어 가능한 기술과 불가능한 기술을 판별할 줄 안다.τά τε ἀδύνατα ἐν τῇ τέχνῃ καὶ τὰ δυνατὰ διαισθάνεται

2) 정상급의 전문기술자의 경우 실수를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듯이ἐὰν ἄρα πῃ σφαλῇ, ἱκανὸς ἐπανορθοῦσθαι 부정의한 자도 부정의한 짓들을 꾀하되 감쪽같이 제대로 해낸다.

3)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르고도 정의롭게 보여δοκεῖν 가장 정의로운 자라는 평판을δόξαν 누린다.

4) 실수를 하여 발각될 경우에도 충분하게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ἱκανῷ ὄντι πρὸς τὸ πείθειν 말을 할 줄 안다.

4) 용기와 완력ἀνδρείαν καὶ ῥώμην, 친구와 재산을 통해διὰ φίλων καὶ οὐσίας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한 후에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기δοκεῖν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에게서 정의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것을 벗겨 버려서γυμνωτέος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상정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

1) 실제로 훌륭하고ἀγαθὸν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사람이라는 악명κακοδοξία을 얻는다.

2) 이 악명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 ἴτω ἀμετάστατ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남들에게 평생διὰ βίου 부정의한 자로 보인다.

 

3) 이 악명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인하여 유약해지 않도록 하여 정의와 관련된 시험을 받게 한다.

 

[361d]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들에 대한 대비를 통해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판정받게 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두 사람을 판정받도록 함에 있어 어쩌면 그렇게 기운차게 마치 조상(彫像)ἀνδριάς을 닦아내듯 각자를 깨끗이 드러내놓는지ἐκκαθαίρεις 칭찬을 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마침내 어떤 삶이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울 게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이들이 결국 맞이하는 처지를 아래와 같이 결론 삼아 적나라하게 기술한다. 이것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온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361e-361a]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삶

1) 태형을 당하고 사지를 비틀리는 고문과 결박을 당하며,μαστιγώσεται, στρεβλώσεται, δεδήσεται, 두 눈이 불 지짐을 당한다.ἐκκαυθήσεται τὠφθαλμώ,

2) 마침내는 온갖 나쁜 일을 겪은 끝에 책형까지 당한다.ἀνασχινδυλευθήσεται

3) 그제야 정의로운 사람이기 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γνώσεται ὅτι οὐκ εἶναι δίκαιον ἀλλὰ δοκεῖν δεῖ ἐθέλειν.

 

* 이어서 사람들은 부정의한 자야말로 실제(진실)에 집착하며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보이기δοκεῖν(평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은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자 못지않게 자기 확신에 불타있는 자들임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글라우콘은 이들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는 일들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삶

1) 나라의 통치자가 된다.

2) 자기 자신이 원하는 가문과 혼인을 맺고, 자녀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시킨다.

3) 자기가 원하는 누구와도 교제하고συμβάλλειν 거래κοινωνεῖν를 한다.

4)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러 이득을 취하여 모든 면에서 덕을 본다.ὠφελεῖσθαι

5) 공적인 경쟁에서나 사적인 경쟁에서εἰς ἀγῶνας나 모두 상대를 압도하고 능가한다.περιγίγνεσθαι καὶ πλεονεκτεῖν

6) 이에 따라 부유하게 되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해준다.

7) 신들에게 제물θυσίας과 봉납물ἀναθήματα을 넉넉하고 호사스럽게 바치고 봉납한다.

8) 신들과, 자신이 돌봐주고 싶은 사람들을 정의로운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돌봐 준다.θεραπεύειν

9) 결국 정의로운 사람보다 부정의한 사람이 ‘더 신의 사랑을 받기’θεοφιλέστερον에 적절한 사람이 된다.

 

  1. 결론 : 신들 쪽에서건 인간들 쪽에서건 정의로운 자들보다 부정의한 자들에게 더 나은 삶τὸν βίον ἄμεινον을 준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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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은 글라우콘의 세 번째 문제 제기에는 우리가 음미해보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후, 소크라테스에게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과연 맞는지 그른지 완벽하게 판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위와 같은 경향성 자체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는 한, 그것만으로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온당하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여기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경향성에 대한 부정과 논파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낫다는 것에 대한 완전하고도 압도적인 증명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증명해야만 그야말로 정의가 부정의보다도 낫다는 판정이 바르게κρῖναι ὀρθῶς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이러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엄밀론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논파한 것에 대한 글라우콘 나름의 불만과 그 불만을 토대로 새로 보완 강화된 재반론의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제1권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법룰 제정상의 실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기초한 논박에 부딪쳐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토대가 된 엄밀론에 입각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실수를 하지 않는 통치자나 기술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통치자와 유리된 추상적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개념적 존재자에 기대어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논리적 허점만 파고들어 마침내 논파에 성공한다. 사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정의의 엄밀한 규정과 관한 추상적 논변이 아니라 다만 그 자신이 목도한 현실적 정의관의 엄연한 현존을 드러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 방식대로 엄밀론을 토대로 정의의 규정 관련 논의로 논쟁을 이끌어 가고 있고 그에 트라쉬마코스가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히 논파를 당하게 된 것이다.

3) 그런데 제1권의 위와 같은 귀결은 앞서도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물론이고 논쟁에서 이긴 소크라테스에게조차도 불만족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그들 소피스트들이 자주 사용했던 엘레아적인 이분법적 논리주의를 역이용하여 논쟁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는 논리적으로 논파는 되었을망정 파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트라쉬마코스 역시 비록 논쟁은 접었지만 속으로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고수한 채 자신이 펼친 논쟁 과정을 뒤돌아보며 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는가 후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트라쉬마코스가 과연 후회를 했는지 그 후회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트라쉬마코스를 대신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는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잘 들여다보면 최소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을 되돌아보며 했을 법한 불만 내지 후회의 일단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서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이어가면서도 트라쉬마코스와 달리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기술자 개념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은 앞서의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여지없이 논박 당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얼떨결에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밀론이 지향하는 엄밀성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현실의 통치자가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그 차이가 노정한 논리적 자기모순만을 근거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이 제1권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대해 불만을 표한 것(358b)도 그러한 논변의 추상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라우콘은 이른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개념을 더 이상 형식 논리 차원에서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아예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 개념으로 등치시킨다. 소크라테스 역시 비록 논박에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트라쉬마코스의 마음속에 있는 현실의 통치자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부정한 것에 따른 결과임을 깨닫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글라우콘이나 소크라테스는 모두 이제 형식논리적인 엄밀론적 논의를 반복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은 제2권에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함에 있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각자 완벽한 사람’(360e)의 의미를 제1권에서처럼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실수도 저지르되 그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로 바꾸어 제시하고 소크라테스 또한 완전한 기술자에 대한 그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4) 글라우콘과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이제 정의에 관한 논의가 단순히 정의의 추상적 규정 차원의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 현존하는 실제 정의에 대한 논의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의 통치자와 지배자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아니다라는 비판은 논리적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어도 그것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하는 부정의한 현실의 통치자와 기술자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한 통치자와 기술자는 있는 그대로의 엄연한 현실 차원에서 그들이 잘못되었음이 비판되어야 한다. 실수는 기술자를 포함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소크라테스가 제대로 비판해야할 부정의한 통치자 내지 기술자는 현실적 차원에서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러한 부정의한 통치자이자 기술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수의 가능성과 기술의 완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와 기술자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 경우 그것을 즉시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완벽한 부정의한 자의 의미설정과 관련한 글라우콘의 보완은 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이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으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고,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엄밀론에 입각한 비판이 논파에는 효율적인지 몰라도 어떠한 실제적 태도 변화도 담보할 수 없는 공허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5) 게다가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자이건 부정의한 자이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각자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고 있다. 제1권에서(350a-c) 소크라테스는 엄밀론에 입각하여 기술을 지식 내지 지혜와 등치시키고 정의로운 자를 지혜 있는 자로, 부정의한 자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지한 자로 규정하여 부정의한 자를 원천적으로 전문 기술자의 분류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여기서 부정의한 자 역시 정의로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완벽한 기술 내지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사실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적으로 권력과 능력, 나름의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결함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의 능력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성격을 원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보기에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논법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부정의를 도외시하는 추상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완벽한 정의와 완벽한 부정의라는 기준에 엄밀하게 부합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단지 논리적 부정합성만을 근거로 부정의한 자를 무지한 자로 일괄 추론하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사변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의한 자들 또한 현실적으로 그 결함을 극복해가며 완벽을 도모하는 자들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러한 상태 하에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과연 현실적으로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자는 것이다.

6) 요컨대 글라우콘은 제1권에서 엄밀론을 토대로 전개된 정의에 관한 추상적 논의를 거부하고 현실론을 토대로 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이어 받되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보다 실질적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논리적 추상성에만 매달리는 것에 대한 한계는 글라우콘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역시 동감하고 있다. 사실 제1권에서 논쟁의 바탕을 이루는 엄밀론이 종국적으로 판정하는 진리치는 참과 거짓,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배타적 선택지로 주어지지만, 실질적인 현실론에서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 선택지로 포함되면서 그것의 유동성, 변화성, 양태성, 잠재적 지향성도 학문적 판정의 대상으로 함께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이 완벽한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 실수의 가능성과 완벽성을 공존시키고 있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이 현실의 정의를 다루는 실질적 정의론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제1권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한 편 전혀 그 바탕을 달리하는 재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재편은 그 자체로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의 토대를 이룰 플라톤 나름의 존재론적 사유의 기본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위한 사전 터파기 작업으로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통해 당대 아테네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던 엘레아의 이분법적 존재론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던 현실의 실재성을 복구하여 그것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플라톤 고유의 현실 구제론적 존재론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자연과 우주는 물론 정의와 부정의가 부딪치고 갈등하는 우리의 현실 역시 존재와 무, 정지와 운동이라는 대립적 요소들이 영혼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인으로 함께 공존하고 작용하면서 서로 다양하고도 복잡한 형태로 상호 관계를 맺어가며 모종의 합목적적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던 것이다.

7) “정상급의 전문 기술자들이 자기의 전문적인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할 줄 알아서 가능한 것들은 하려들되 불가능한 것을 내벼려 둔다.”는 언급도 제1권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아래와 같은 언급 즉 ‘기술 자체는 더 이상 결함이 없는 어떤 훌륭한 상태’(342a)라는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제1권에서도 살폈듯이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결함이 없다는 언급은 모든 기술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언급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글라우콘의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기술들이란 각기 고유의 전문 영역을 갖는 것이자 그 고유 영역 내에서 완벽한 수준의 기술력(실수를 바로 잡는 기술도 포함)을 갖고 있는 것”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수동 드라이버 기술과 전동 드라이버 기술의 경우, 후자는 전자의 기능적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발전된 기술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기술들은 각기 영역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전문 기술일 따름이며 그에 따라 각각의 완벽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에 따른 전문가도 따로 있는 것이다. 즉 전문가는 인접 기술과 비교하여 자기 기술의 결핍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하면서 그 상관관계 하에서 자기 기술에 최선을 기울이는 기술자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 기술자들은 다른 영역의 기술자들 대해 누가 더 뛰어난 기술자인지 아닌지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와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해가면서 자기 기술 그 자체의 고유한 완벽성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들 모두는 형상계에서나 존재할 법한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들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각기의 영역에서 최선의 전문 기술을 추구하고 구사하는 현실계의 기술자들인 것이다.

8)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들이 맞이하는 삶에 대한 글라우콘의 극단적 대비는 당시 아테네의 현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으로 제시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고 재현되고 있다. 플라톤의 통찰에 대한 감탄에 앞서 비감스러운 절망감과 통탄이 우리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읽어 가다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들 주변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과 사건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당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도 너무도 하나같이 유효하고 심각한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도전에 과연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답을 내놓을 것인가?

9)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 대비는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지만 사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가 지향하는 최선의 상황 즉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도 함께 대비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글라우콘이 보기에 정의를 찬양하는 입장에서나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전자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하는 그의 처지에서 설정자체가 불가능한 대비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그와 같은 최선의 상황과 그것의 현실적 구현 가능성은 그야말로 그 자신 반드시 증명 내지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국가>의 논의는 글라우콘의 도전에 대한 극복을 넘어서 당대 현실에 대한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1-3. 글라우콘의 견해에 대한 아테이만토스의 보완(362d-367e)

 

[362d]

* 글라우콘이 이상과 같이 말을 마치자 아테이만토스가 나서서 무엇보다도 마땅히 언급되었어야할 게 언급되지 않았다고 자기 이야기도 마저 들어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형제가 옆에 있게(돕게) 하라’ ἀδελφὸς ἀνδρὶ παρείη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의 부탁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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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제1권의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가 활용하던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이용하여 거꾸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그 소피스트적 흑백논리가 갖는 허망함만큼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또한 허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권에 들어와 글라우콘은 정의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 모순을 드러내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소크라테스의 논증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제 현실의 삶의 세계에서 엄연히 현존하는 그대로의 부정의의 실상을 소재로 그것의 실질적인 부당성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대비 즉 최상급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상급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판정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삶아 숨쉬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목도할 수 있는 사실 차원의 것들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도전 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은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극단적인 경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부정의의 부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방편들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만으로 현실에서 존재하는 부정의의 양상 모두가 다 드러나고 또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정의의 양상들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양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의와 부정의의 전도 양상은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에서처럼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일단 정의론의 문제 영역이 현실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의가 전도된 그 현실의 문제 영역 전체를 다 들여다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극단적 정의의 전도 양상들만이 아니라 그것 이외의 나머지 양상들도 모두 다루어져야 한다. 이제 아테이만토스의 문제 제기는 현실 곳곳에 현존하는 그러한 나머지 양상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보다 더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채택한 엄밀론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자기모순을 들추어내는데 머무는 것이었다면 제2권에서 새롭게 채택된 현실론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것들 전체에 대한 진단과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데이만토스의 보완적 문제제기에는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인 경우 보다는 다소 강도가 떨어지지만 아테네의 일상적 현실 영역에서 누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의의 전도 양상 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를테면 일상의 우리의 가정 영역은 물론이고 생활 속 깊이 침투해 있는 종교 생활 영역 그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밀교 영역을 포함해서 일상의 기복주의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신앙 양태 전역이 아데이만토스의 보완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1-3-1. 정의와 평판(362e-366e)

 

[362e]

* 아데이만토스는 부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글라우콘의 논지를 한결 더 분명하게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의 생각도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검토 결과 정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조차도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이 밝혀진다면 글라우콘의 논지가 더 강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소크라테스의 반론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타 다양한 일상 영역에서도 그러한 정의의 전도 양상이 현존하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의 일상의 현실 영역 전체에 걸쳐 다소 길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 혹은 누군가를 돌보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충고 – 가정 영역

* 이들은 자식과 그들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충고하며 정의를 찬양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 인해 생기는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이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좋은 삶의 모습들도 모두 정의롭게 보여서 얻은 명성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363a]

 

  1. 전통 종교 생활 영역

* 명성과 평판은 사람들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들로부터도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경건한 자라는 평판과 명성을 얻으면 사람들로부터 명성으로 인해 얻은 좋은 혜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혜택을 신들로부터 받는다.[363a-b]

*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는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평판과 명성을 얻을 경우 얼마나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363b-c]

 

  1.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

* 신들로부터 주어지는 혜택들로서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이 들고 있는 것은 앞의 것들보다 더 참신하다. 즉 신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하데스로 인도하여 침상에 기대앉게 하고 머리에 화환을 두르게 한 후 잔치를 베풀고 영원히 술 취한 상태로 지내게 하는데 이런 술 취한 상태를 훌륭함에 대한 가장 좋은 상(賞)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경건한 자들과 신들에 대한 서약에 충실한 자에게는 자손의 자손과 씨족을 뒤에 남게 해준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진창 속에 파묻히게 하고 체로써 물을 떠 나르게 하고 생전에도 나쁜 평판을 갖게 하여 글라우콘이 정의로우면서도 부정의한 자로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으로 열거했던 온갖 것들을 받게 된다.[363d-e]

* B에서 나타난 양상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공식적인 종교 담론에 기초한 것들임에 비해 이곳에서의 양상은 이른바 아테네의 비주류 종교 담론 즉 신비주의적이고 밀의적인 오르페우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신앙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들 신비주의 종교 전통은 추후 자세히 다시 다루기로 한다.

 

  1. 사람들과 시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되풀이 하는 말. – 양비론적 사고 영역

*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긴 하나 힘들고 수고롭다. 무절제와 부정의는 달콤하고 얻기 쉽다. 다만 평판과 법에서만 수치스럽다. (요컨대 무절제하고 부정의하지만 법망을 피하고 정의롭다는 평판만 얻으면 아름다운 것과 달콤한 것을 쉽게 얻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364a]

* 대개의 경우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득이 된다. 나쁘지만 부유하고 힘을 가진 자들은 행복하고 예우도 받지만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업신여기며 깔본다.[364a-b]

* 신들조차 많은 선량한 사람에게 불운과 불행한 삶을 배정하고 반대되는 사람들엔 그 반대의 운명을 내린다.[364b]

* 여기서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부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닌 양비론적 태도를 갖는 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양비론의 경우 대체로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지만 명분상으로는 정의를 찬양하는 자로 보이고 싶은 자들의 행태에서 나타난다. 기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의 전도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 신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종교 생활 자체가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1. 탁발승과 예언자들이 하는 말.[364c-365a] – 기복주의와 물신주의적 신앙 생활 영역

* 부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조상이 저지른 잘못이 있을 경우 제물과 주문 암송 등의 신통력과 연락(宴樂)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주술과 마법으로 신의 도움을 받고 적을 해칠 수 있다.[364c]

* 신들에 관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해준다.[364d]

* 무사이오스와 오르페우스의 책에 제시된 대로 개인들과 나라는 면죄와 정화의식을 치러야 한다.[364e]

* 제물과 즐거운 놀이를 통한 면죄와 정화의식 즉 입교의식은 저승의 나쁜 일들(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365a]

* 탁발승과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공식 종교 생활에 기복신앙과 물신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스며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연락(宴樂)μεθ᾽ ἡδονῶν τε καὶ ἑορτῶν은 의미상 흥과 잔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나타나는 무당굿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2. 논제1 : 정의의 본질과 기원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는 세 가지 논변들은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이 그랬듯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자신의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도전들이자 안티테제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적 문제제기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그 도전들의 내용을 잘 살펴보는 것은 플라톤이 직면한 당대의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정의론의 기본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의 도전은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보다 공고하게 건설하기 위해 플라톤 자신이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터파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58e-359b]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제의 순서에 따라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정의란 무엇이고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면 좋은 것ἀγαθόν이요 부정의를 당하는 것ἀδικεῖσθαι은 나쁜 것κακόν이지만 부정의를 당할 때의 나쁨이 부정의를 저지를 때의 좋음을 훨씬 압도한다. 그래서 서로 부정의를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의를 당하기도 하며 양쪽을 다 맛보고 나면ἀμφοτέρων γεύωνται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선택할 힘이 없는 사람들로서는τοῖς μὴ δυναμένοις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서로 계약을 하는 게συνθέσθαι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법률νόμοι을 제정하고 계약συνθήκη을 체결하며 법에 따른 명령을 적법하고 정의롭다νόμιμόν τε καὶ δίκαιον고 말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며 본질γένεσίν τε καὶ οὐσίαν δικαιοσύνης이다.

* 정의롭다는 것은 부정을 저지르고 처벌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ἀρίστου 경우와 부정을 당하고도 보복을 할 수 없는 가장 나쁜κακίστου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μεταξὺ οὖσαν이다.

* 이렇게 정의는 양쪽 사이에 있는 것임에도 좋아하는 까닭은 결코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없어서ὡς ἀρρωστίᾳ 그것을 존중할 뿐이다.

* 그러나 능히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강자 즉 진짜 사내ὡς ἀληθῶς ἄνδρα(이를테면 참주)의 경우는 부정의를 저지르지도 당하지도 않도록 하는 계약 따위는 누구와도 맺지 않는다.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다. 이것이 정의의 본성φύσις δικαιοσύνης이자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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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법률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생각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일단 법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에 따르면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법률을 제정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로서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모종의 다른 법률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 내지 발생γένεσίς은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부터의 정의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의 기원 즉 그러한 정의의 기초가 되는 법률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을 자연 상태로부터의 정의의 기원으로 보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것의 의미를 단순히 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이 기본적으로 5세기 지식인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관이 그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플라톤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자리 잡은 신흥 정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에 대한 아래와 같은 분석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 글라우콘의 주장은 정의와 법률이 일정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정의의 본성을 자연의 본성, 신들의 본성에서 구하고 그것을 관습의 형태로 확립하여 그것을 사회적 삶의 기초로 삼아온 전통적인 입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입장은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전통적 입장과 달리 자연과 관습의 분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자연 상태라기보다는 그리스의 역사에서 자연과 관습의 분리가 진행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준다. 글라우콘의 입장을 탄생시키는 배경으로서 글라우콘 스스로가 진단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도 그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 글라우콘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 현실은 부정의를 저질러도 처벌은커녕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가장 강한 자)과 부정의를 당해도 보복은커녕 나쁨만 입는 사람들(가장 약한 자) 그리고 힘에 있어서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 중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강자들처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자기들끼리는 서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기적인 존재인 까닭에 늘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제의 형식을 빌어 서로 약속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상호 합의하에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여 법이 정한 그 명령을 적법한 것이자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이 여기서 말하는 사회 현실 속 사람들이란 계층적으로 아테네 당대의 귀족층과 시민계층 그리고 노예 등 최하계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정의와 법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글라우콘의 주장은 법률의 강제적 집행과 관리를 주도할 권력기구 내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종종 국가 형성과 관련한 이론들 가운데 사회계약설적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지하다시피 사회계약설은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합목적성과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해주는 핵심 이론으로서 17세기 근대 국가의 성립과정과 성격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근세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태동되기 2000 여년 전에 이미 사회 중간계층인 시민 계급에 의해 주도된 사회계약이념의 원형적 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고도 주목할 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세 사회계약론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홉스(T. Hobbes, 1588~1679)의 사상과도 자주 비교된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자기보존 욕구만 가지고 있어 그 상태를 방치할 경우 마치 원자들이 부딪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계산적 이기심 또한 갖고 있어 그 이성의 규제적 통찰이 그들 모두의 공멸을 피해 사회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즉, 그들은 도덕적 자발성은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강력하게 통제할 막강한 권력기구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호 합의 하에 강권국가(Leviathan)를 세워 법률제정 권한 등 강력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여 자신들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과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의 방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홉스에게 사회 계약은 자연 상태에서 비슷비슷할 정도의 힘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계약 당사자로 참여하여 합의를 통해 최고 주권자로서 절대군주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그 주권자의 강권통치에 예속됨으로써 서로의 안전과 공존을 보장받는 것이 목표이지만, 글라우콘이 말하는 사회 계약은 앞서 살폈듯이 일단 자연 상태가 아닌 일정한 역사적 현실 상황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노예계급을 제외한 보통의 시민들이 그들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률의 제정과 그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수립이 그 목표이다. 다시 말해 최초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인 바람을 충족시키는 정부의 수립이다.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것을 태동시킨 정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른데서 연유한다. 홉스의 강권국가이론은 원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영국의 절대왕정이 위협을 받게 되자 절대왕정의 정당성을 개인주의 차원에서도 온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 상태라는 원초적 상황까지 끌어들여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은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절대왕정주의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사상은 왕권의 절대적 존엄성과 그에 대한 충성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안전보장을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비록 이기적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구가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자리 잡긴 했어도 그것이 기존의 절대군주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그 자체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홉스의 사상은 그 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근세 자유주의의 이념이 더 이상 반동에 직면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또한 증대하자 그가 내세운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국가권력의 결합이 자유방임의 한계에 대한 선구적 통찰로 재조명되면서 근세 자유주의 국가 이념의 기본틀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참주정, 귀족적, 민주정의 예를 들어가며 결국 참주건 귀족이건 시민이건 법률 제정권을 가진 강자가 진정한 강자이며 정의는 그들의 이익임을 주장하고 있다.(338d-339a) 그런데 글라우콘의 주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이 참주나 귀족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중간 계층 즉 시민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의 정의관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정치적 강자가 이제 더 이상 참주나 귀족이 아니라 민주정체 하에서의 시민임을 말해준다. 물론 귀족 계층도 여전히 사회적 강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멋대로 법을 제정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시민들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막을 정도의 힘 또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 그들이 이전처럼 법률 제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시민 계급의 법률 제정을 허락하기는커녕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언제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고 그 과정에서 결코 약자들과 상호 협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기 때문이다.(359b) 역사적으로 법률 제정의 결정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는 강제적이고 공적인 집행 기구로서 정부의 통치 권력의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민들이 법률 제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적 강자들과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 시민들이 나름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법률 제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사회계약설은 이미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합해 사회적 강자를 제압하거나 일정부분 타협이 가능해진 상황, 즉 기원전 5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정한 역사적, 시대적 현실에 조응하는 정의의 기원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 법률 제정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사회 계약의 합목적성과 관련해서도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은 홉스가 제기하는 사회계약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는 개인의 자기 보전 욕구가 절대 권력에 대한 주권 권력의 위임을 통해 관철되고 있지만 글라우콘이 제시하는 사회계약설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시민 계급이 강자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해 스스로 주권자로 나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는 이전 세기의 참주정은 물론 당대 귀족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 세기 이전에 성행하던 참주정 치하의 상황을 토대로 강자의 이익으로서 정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를 몰아세우던 트라쉬마코스의 도발은 이제 제2권에서 글라우콘을 통해 현존하는 당대 아테네 현실과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참여의식을 토대로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도전으로 대체되면서 소크라테스를 보다 강화된 방식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의 논변은 이기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일관된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테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되 논거에 있어서는 모두가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는 아테네의 역사적 현실을 끌어들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터파기 심화 작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국가>를 구상함에 있어 자신의 정의론을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처럼 글라우콘의 정의에 관한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넘어서야할 정반대의 입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중추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거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은 고대와 현대에 걸쳐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정의의 사회계약설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소수 사회적 강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다수 약자들의 방어 내지 의심 프로그램으로서, 같은 약자이자 배타적인 이기심을 갖고 있는 타인들로부터 스스로의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실로 민주주주의 본질은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방어적 의심과 투쟁에 기반 해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비록 <국가> 전체를 통해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사회계약설적 입장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켜온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물론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앞장 선 소피스트들의 입장은 오늘날 빛나는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바탕을 마련해 준 선구적 사상으로서 소중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의 주장의 배경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은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5세기말에 이르면 법률과 정의가 곧 시민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방어차원에서 성립되었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그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면서 전성기 아테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근본 동인이 되고 만다.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테네 민주정은 기원전 41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역동성을 상실한 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사회경제적 현실 앞에서 공동체의 보존보다는 시민 각자의 자기 도생을 위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정치 시스템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른바 사회적 강자로부터 시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으로 추구되던 입법 정신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들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정치적 강자로 군림하면서 시민들 서로에 대한 음해와 부의 강탈마저 정당화하고 용인되는 이른바 반공공적 자유방임의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아테네 사회를 뒤덮기에 이른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에는 이미 역설적으로 당대 아테네 민주정체 하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제기되고 전파된 세계관과 삶의 방식, 즉 자연과 관습의 일치가 아닌 분리를 통해 개인의 이기심을 본성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킨 당대의 피폐된 이기주의와 상대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 이로써 정의와 관련하여 사회계약설적 주장을 추축으로 하는 글라우콘의 첫 번 째 문제제기가 마무리된다. 첫 번째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치철학적 도전을 담고 있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제기는 인간의 본성론에 기초한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1-2-3.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359b]

* 글라우콘은 이제 358c에서 예고한 대로 두 번째 논제 즉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οἱ ἐπιτηδεύοντες 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무능ἀδυναμίᾳ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먼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임을 ‘멋대로의 자유’ἐξουσία가 주어진 가상 상황에서의 사고실험과 귀게스(Gyges)의 반지에 관한 전승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논변하기에 이른다.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임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아래의 경우를 상정하면’εἰ τοιόνδε ποιήσαιμεν τῇ διανοίᾳ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59c]

* 즉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를 부여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모두 탐욕πλεονεξία(pleonexia)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천성ὃ πᾶσα φύσις이 그러함에도 법률이 강제로βίᾳ 천성을 평등을 존중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ἴσου τιμήν 유도한다는 것이다.

 

[359d-360a]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우콘은 옛날 뤼디아 사람 귀게스γύγης의 조상에게 τῷ Γύγου τοῦ Λυδοῦ προγόνῳ 생겼다는 어떤 힘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든다.

*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옛날 뤼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는 심한 뇌우와 지진σεισμός이 있은 후 갈라진 땅 틈χάσμα으로 들어갔다가 속이 비고 문이 달린 청동 말ἵππον χαλκοῦν 속에 어떤 송장νεκρόν이 손가락에 금반지χρυσοῦν δακτύλιον를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 가지고 나왔다가 반지의 보석받침σφενδόνη을 자신을 향해 손 안쪽으로 돌릴 경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ἀδήλῳ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목자는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에게 접근하여 왕비와 간통하고μοιχεύσαντα 왕비와 함께 왕을 살해ἀποκτεῖναι한 후 왕권을 장악한다.ἀρχὴν κατασχεῖν

* 이곳에서는 ‘귀게스의 조상’이 반지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제10권 612b에서는 그냥 ‘귀게스의 반지’τὸν Γύγου δακτύλιον라고만 언급되고 있어 일부 주석가는 ‘조상’πρόγονος이라는 표현이 잘못 전승된 표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귀게스라는 인물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I권 8-13에 나오는 기원전 7세기 뤼디아 왕 귀게스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왕의 하인 또는 목자가 나중에 왕이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360b-d]

* 그러한 반지가 두 개가 있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각각에게 끼게 할 경우, 정의에 머물며 남의 것에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ἀδαμάντινος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신 같은 존재ἰσόθεον로 행세할 수 있게 된다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방향ἐπὶ ταὔτ᾽ 즉 부정의 짓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정의는 좋은 것이 못되는ὡς οὐκ ἀγαθοῦ ἰδίᾳ ὄντος 반면 부정의는 훨씬 이익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는 자발적이 아니라 부득이하게ἀναγκαζόμενος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τεκμήριον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ἐξουσία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장 딱하고ἀνοητότατος 어리석은 사람ἀνοητότατος으로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속이며 면전에서 그를 칭찬하는 것은 그들 모두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φόβον때문이다.

* ‘귀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을 경우 남의 것을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들어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의 주장 자체가 그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른 방편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인 것이다.

* 360d에서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면전에서 순수하게 정의로운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면전에서 솔직하게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거나 비난할 경우 어떤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는 것인지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면전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경우 자신이 부정의한 자임을 고백하는 형국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나 통치자들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우에서처럼 모나게 처신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염려를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참주정 치하에서 부정의를 독점하는 참주에 의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거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지레 부정의한 자로 백안시되거나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까? 글라우콘의 주장을 자연 상태로 부터의 법과 정의의 기원에 관한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일부 주석가들은 글라우콘이 법과 정의가 생기기 이전에도 ‘부정의를 당한다’(358e)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말의 의미를 그냥 ‘불이익을 당한다’, ‘해를 입는다’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 글라우콘은 정의란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서로가 약정한 방어적 성격의 것으로서 따라야할 최선의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경우 그것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탐욕적이 된다는 점에서 정의는 다만 약자가 그 자신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면 강자건 약자건 그 누구라도 그것을 자진해서 추구하겠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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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콘이 제기한 두 번째 논변 특히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인간 본성론 내지 도덕 심리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관련 국내 논문들 : 김영균,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기게스의 반지와 두 가지 삶의 방식’ <인문과학논총> 30, 청주대 학술연구소 2005. 임성진, ‘글라우콘의 도전’ <철학사상> 제4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 양선숙, ‘만약 당신이 기게스의 반지를 얻게 된다면’, <Knu law review> 제3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2012. 이민규, ‘기게스 반지의 선택’, <언론정보학연구> 3권 대구경북언론학회 2001.4)

* 글라우콘이 전하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형식으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중대한 물음들을 담고 있다. 물론 내용 자체는 허구라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주장과는 달리 어떤 객관적 증거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일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인간 누구도 완전하게 빠져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다. 특히나 글라우콘이나 우리가 서 있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사회현실에서 타인의 비밀을 타인 몰래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지배 욕구 내지 절대 우위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귀게스의 반지가 상징하는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인간 욕망의 극치를 표현하는 소재로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고 도덕의 근원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가 되어 왔다.(물론 투명인간이란 말은 오늘날 타인의 관심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당하는 인간의 의미로도 쓰인다). 과연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주어지고 게다가 그 자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는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오직 하나의 방향 즉 부정의하고도 부도덕한 행위를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만약 그와 달리 누군가 그와 동일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 즉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의 타고난 선의지 내지 선한 본성에서일까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겪어온 시행착오와 쾌락의 역설과 같은 수많은 인생 경험들 때문에서일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수치감 내지 도덕의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정의와 질서가 가져다 준 모종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역사를 통해 고대 성선설과 성악설에서부터 근대의 공리주의, 행동주의, 인본주의 심리학,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수많은 답변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나 철학적 신념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누구도 그 어떤 대답이 맞거나 그 대답이 다른 대답을 압도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양태 자체가 인간 본성의 중층성과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쨌든 크든 작든 일시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욕망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그것이 빚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적 영역에서건 공적 영역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로 글라우콘의 문제 제기는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실로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이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향한 유혹은 늘 치명적일 정도로 뿌리가 깊어서 그것을 욕망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현실의 거의 모든 영역이 크게 뒤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선 공적인 영역에서 모든 국가가 갖추고 있는 첩보기관은 다른 나라 또는 자국 신민들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비밀스런 탐지와 음모를 권력과 나라의 안전을 보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정당화하고 있고, 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기업과 개인 또한 자기들의 부와 권력, 배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타인들에 관한 정보를 그들 모르게 비밀스레 탐지하고 독점하고 활용하려 든다. 고객 서비스를 내세워 이루어지는 기업들의 개인정보의 수집활동이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을 포함한 비밀스런 사적 영역에 관한 정보까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대규모 포털과 국가기관의 정보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치 벤담(J.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나 오웰(G. Orwell)의 빅브라더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들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공적 영역에서 부와 권력에 대한 다함없는 의지로만 표출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적 영역에서 만연해 있는 몰래 카메라를 통한 도촬과 도청 행위 등도 자본과 권력에 침식된 개인의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차원에서건 성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차원에서건 그 모두 귀게스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일탈 행위 즉 타인에 대한 변태적인 지배 욕구 내지 병적인 인정 욕구의 소산들이다.

* 이런 측면에서도 이곳에서 글라우콘에 의해 제기되는 두 번째 도전은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물론 오늘날 현대인이 직면한 피폐한 삶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앞으로 펼쳐질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그 문제의 심각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아니 그 이상으로 실로 엄청난 의미와 무게를 갖고 우리들 모두에게 소망이자 믿음으로, 빛으로 다가오고 또 반드시 그렇게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글라우콘의 귀게스 반지 이야기를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지진과 뇌우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충격과 상처들이고 땅의 갈라짐은 정신의 분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행위 청동말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치 무의식에 대한 응시를 말하는 것인 양 느껴지고 청동말 속에 반지를 낀 채 누워있는 송장은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자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서 프로이트의 id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송장 역시 똑같은 반지를 끼고 살다가 죽은 권력자의 송장이라는 점에서 꿈을 통해 나타난 무의식 속 귀게스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귀게스가 반지의 능력을 알고 취한 첫 행동이 최고의 금기인 최고 권력자의 여인을 간통하고 그러한 성적 지배를 통해 최고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것도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를 연상시킨다. 사실 프로이트의 역동적 성격론이 플라톤의 영혼 3분설에서 착안되었다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석받침을 안쪽으로 돌리면(반지 자체를 손바닥 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반지위에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보석받침을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것을 말할 것이다) 목동의 모습이 다른 목동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웰스(H.G. Wells)의 소설에서 나오는 투명인간이 알몸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다른 설정이지만, 귀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말 속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도 뭔가 그의 욕망이 맞이하는 결말에 대한 플라톤적 시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송장이 사람 크기보다도 크다는 내용도 일정하게는 나름의 고인류학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거나 초인적 존재임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에 이어 그가 앞서 밝힌 논제 제기의 기본 순서와 목적에 따라 이제 세 번째로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실로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위한 아주 깊고도 깊은 터파기 작업이 글라우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㉓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

 

플라톤은 제1권에서 <국가>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다루고 해결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인지를 그 동안 전기 대화편을 통해 특징적으로 구사했던 논박술과 아이러니의 방법을 총 동원하여 아주 드라마틱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플라톤은 제1권에 등장하는 인물들 각자의 생각과 성격은 물론 그 생각에 수반되는 심리적 정황까지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논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문학적 효과까지 더해주고 있다. 게다가 제1권 끝부분에서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즉 트라쉬마코스를 성공적으로 논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은 미완결 상태로 끝난다는 점에서는 전기 대화편과 비슷하지만 이미 제1권 자체가 대화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대화를 위한 마중물임을 고려하면 이미 그 자체로 전기대화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무지의 지를 넘어서 아포리아에 답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제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선택한 논의 방식은 더 이상 상대 주장에 대한 논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 넘어 플라톤의 새로운 목표는 이제 왜곡된 현실 경험을 토대로 무장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견고한 반도덕주의자들의 입장을 완전히 무력화할 정도의 압도적인 대안 즉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사람, 정의롭고 동시에 행복한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구축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나라를 적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도록 제1권과 다른 논의 방식을 선택한다. 실제로 제2권 이후의 대화는 문답의 방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상대 주장을 철저히 검증하고 논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펼 수 있도록 대화상대가 곁에서 도와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새로운 대화상대로서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적극 지지해줄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곧 플라톤의 친형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다. 이 두 인물은 실제 소크라테스에게 아주 우호적이었으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두 형들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플라톤은 <국가>를 구상하면서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펼치든 자기 생각을 가장 잘 지지해주고 이해해줄 인물로서 처음부터 그의 친형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 형제는 플라톤의 의도대로 <국가> 마지막 까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하는 판소리꾼 곁에 기꺼이 북장단을 쳐주는 고수(鼓手)처럼, 소크라테스의 성실한 대화 파트너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국가>의 논의 방식은 비록 대화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문답법적 대화(dialogia) 방식이라기보다는 소피스트들이 즐겨 쓰던 장광설(makrologia)에 가깝다는 점에서 우리를 다소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주장이 논리적이고도 객관적 검증과 거리가 먼 수사술적 과장 내지 풍자가 동원된 일방적 연설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것이라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비록 일방적인 논변이긴 하지만 형식과 내용에서 하나하나 대화 상대의 동의를 받아가면서 최대한 내적 정합성과 체계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아무려나 <국가>의 논의 방식이 갖는 장광설적 면모는 무엇보다도 논의의 초점이 논파나 검증보다는 적극적인 대안 수립에 맞추어진 데 따른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실재와 겉모습은 같지만 모든 것이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상(像)이듯이 소피스트 같은 부류들의 장광설적 주장이 갖는 전적인 허구성을 – 그럼에도 현실에서 실제인 양 비쳐지는 그 심각성을 – 빈 구석 하나 없이 전적으로 철저하게 제압해내기 위한 방책으로 제시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거짓에 대한 전적인 전복으로서 어떤 의미에서는 혁명의 방책인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대안의 수립을 위한 플라톤의 일차 과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터파기 작업이다. 위로 건물을 높이 올리기 전에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완벽하게 더욱 아래 쪽 방향으로 최대한 더 깊이 파들어 가야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도리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더욱 체계화하고 논지도 더욱 보완하고 강화하여, 장차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정의로운 나라, 정의로운 사람이 그 도전을 이겨내고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바로설 수 있도록, 마치 트라쉬마코스가 냉철한 모습으로 거듭나 다시 대들기라고 하듯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단호하게 두드려 대기 시작한다. 제2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려나 제2권 이후 새롭게 채택된 논의 방식은 위와 같은 플라톤 나름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대부분 논변 위주로 전개되고 있어, 제1권이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적 묘사를 포함한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크게 반감되어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강해형식 또한 앞에서와 같이 최대한 스테파누스 쪽수 행수를 따라가며 분석하는 방식을 취하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여러 쪽수, 행수에 걸쳐 제시된 논변을 묶어서 정리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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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 서두에서 소개하였듯이 제2권은 <국가> 전체를 이루는 다섯 꼭지 중 두 번째 꼭지 즉 정의로운 국가와 개인을 다루는 제2권부터 제4권까지의 내용의 첫 부분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과 제3권의 끝은 내용상 단절 없이 그 다음 권으로 이어지고 제4권 끝에 가서야 내용상 단절이 나타나면서 <국가> 세 번째 꼭지(제5권에서 제7권)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제2권에서 제3권, 제3권에서 제4권의 구분은 내용상의 구분이라기 보다는 순전히 파피루스의 길이에 따른 편집상의 한계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그래서 제2권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에 이어 본격적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다루기 위한 서론적 논의와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다가 내용상 단절 없이 같은 주제로 제3권으로 이어진다. 그 흐름의 세부 내용을 개관하면 아래와 같다.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1-1. 글라우콘의 재반론(357a-362c)

1-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357a-358a)

1-1-2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1-1-2-1. 논제1: 정의의 기원과 본질 –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1-1-2-2.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1-1-2-3. 논제3: 부정의한 자가 정의로운 사람보다 행복하다(360e-362c)

1-2. 아데이만토스의 보완과 요구(362d-367e)

1-2-1. 정의와 평판(362e-366e)

1-2-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1.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c-374d)

2-1. 정의를 잘 찾기 위한 방편 : 소문자와 대문자 비유(368c-369a)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 인구의 증가(369e-371a)

2-4. 무역상, 소매상, 임금노동자 등 서비스업과 화폐의 발생(371b-371e)

2-5. 돼지들의 나라(372a-372d)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1.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 (376d- 제3권 412b)

3-1. 수호자의 성향(374e-376c)

3-2. 시가교육(376d-

3-2-1. 시가 교육의 목표(376d-380c)

3-2-2. 허용되지 않는 시가의 내용(380d-383c 제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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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문제제기(357a-367e)

 

[357a]

* 소크라테스는 말을 마친 후 논의λόγος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하나 이내 이제까지의 논의는 서곡προοίμιον에 불과한 것임을 직감한다.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포기ἀπόρρησις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모든 면에서 좋다는 점을 ὅτι παντὶ τρόπῳ ἄμεινόν ἐστιν δίκαιον εἶναι ἢ ἄδικον; 그저 설득한 것처럼 ‘보이기’δοκεῖν를 원하는지 아니면 제대로 ‘진정으로 설득해주기’를ἀληθῶς πεῖσαι 원하는지를 묻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게 자기에게 달린 문제라면εἰ ἐπ᾽ ἐμοὶ εἴη 자기는 진짜 설득하는 쪽을 택할 것ὡς ἀληθῶς ἔγωγ᾽ ἂν ἑλοίμην이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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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풀려났다고 생각하는ἀπηλλάχθαι ‘논의’는 정의에 관한 논의 자체라기보다는 앞서 진행된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을 가리킨다.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풀려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 새로운 논의의 서곡을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 다시 문제제기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그의 포기 선언(승복이 아니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제대로 설득해줄 것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가 그에 부응하는 제2권의 첫 장면은 제1권 논의의 계승과 평가 그리고 제2권 이후의 새로운 논의 전개를 동시에 함축하는 일종의 훌륭한 문학적 전환 장치이다. 플라톤이 글라우콘으로 하여금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설득이 실상은 실패로 끝났음을 공유하게 하고 나아가 소크라테스에게 제대로 된 설득을 요구하도록 그리고 있는 것 자체는 이미 제2권 이후의 <국가>의 전개가 아포리아를 노정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안 제시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요구에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역시 이제 더 이상 아포리아 수준에서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한 정의관을 스스로 구축해내는 수준의 소크라테스로 탈바꿈시키려는 플라톤 자신의 결연한 의지와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글라우콘의 요구에 대해 ‘그것이 내게 달린 문제라면 진짜 제대로 설득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무지의 지를 고백하며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하기를 저어하는 전기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논의를 완결짓기 보다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만들어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무지의 지를 고백하게 하거나 논의 자체를 아포리아 상태로 두고 끝을 맺고 있다. 이를테면 제1권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에우튀프론>이나 <뤼시스>에서는 논의 상대가 가버리는 것으로 논의가 끝나고 <라케스>에서는 자신도 난관에 빠졌으니 훌륭한 선생을 구해야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나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대화자들 모두 모든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중기 대화편 <메논>에 와서는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소크라테스 자신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논의가 미해결 상태로 끝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다르다.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는 이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차 있다.

* 플라톤은 자신의 형 글라우콘을 ‘만사에 대해 언제나 제일 담대한 사람’ὁ γὰρ Γλαύκων ἀεί τε δὴ ἀνδρειότατος ὢν τυγχάνει πρὸς ἅπαντα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글라우콘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두 친형들을 메가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용기 있는 사람이자 철학적 자질도 뛰어난 비범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367e-368a) 플라톤의 의도를 고려하면 제2권 이후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상대로 적합한 인물상은 소크라테스에게 우호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비판할 수도 있는 용기와 명민함을 함께 갖춘 사람이어야 했을 것이다. 아마도 플라톤은 당대의 역사적 인물로서 자신의 친형들만큼 그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의 하나인 <국가>에 자기 친형들을 등장시켜 사람들 기억에 남게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플라톤도 자기 속내를 털어 놓기에 가장 만만한 사람으로 가족을 먼저 떠올렸던 것일까? 메가라 전투가 플라톤의 나이 3살 때인 기원전 424년에 일어났고 그곳에 친형들이 참전했다면 최소한 형들과 플라톤의 나이 차이는 적어도 15-2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윈 플라톤으로서는 친형들을 아버지처럼 의지하였을 것이고 친형들 또한 플라톤을 자식처럼 보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대화 설정 연대를 410년경 전후로 잡고 있는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의 친형들이 참전했던 메가라 전투를 409년에 벌어졌던 두 번째 메가라 전투로 상정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플라톤과 친형들과의 나이 차이는 훨씬 줄어든다. 그러나 대화설정 연대를 410년 전후로 잡을 경우 소크라테스도 거의 노년의 문턱에 이른 나이(59세)가 된다는 점에서 그 자신 노년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328e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화 설정 연대와 관련한 논의를 참고)

 

1-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와 정의의 푯대(357b-358a)

 

[357b-d]

*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글라우콘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을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 후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어느 것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먼저 글라우콘이 분류한 그 세 가지는 아래와 같다,

 

1) 결과로 생기는 것을 갈망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때문에αὐτὸ αὑτοῦ ἕνεκα 반기며 우리가 갖고자 하는 그런 것, 예를 들어 기쁨τὸ χαίρειν 또는 해롭지 않은ἀβλαβής 즐거움들αἱ ἡδοναὶ, 즉 나중에 그 때문에 가져서 기쁜 것 말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생기지 않는 것μηδὲν γίγνεται ἄλλο ἢ χαίρειν ἔχοντα;.

2) 우리가 그 자체 때문에도 좋아하고 거기서 생기는 것들τῶν ἀπ᾽ αὐτοῦ γιγνομένων 때문에도 좋아하는 것들. 예를 들어 현명함τὸ φρονεῖν이나 봄τὸ ὁρᾶν 또는 건강함τὸ ὑγιαίνειν.

3) 그것들 자체 때문이 아니라 보수μισθός라든가 그것들로부터 생기는 다른 것들 때문에 갖고자 선택할 만한 것. 고생스럽기는 하지만ἐπίπονος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 ἡμᾶς. 예를 들어 신체단련τὸ γυμνάζεσθαι, 아파서 치료 받는 것τὸ κάμνοντα ἰατρεύεσθαι, 치료 행위나 기타 돈벌이ἰάτρευσίς τε καὶ ὁ ἄλλος χρηματισμός.

요컨대 글라우콘은 좋은 것을 1)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 2) 그 자체 때문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 3)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정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에 포함되는지를 묻는다.

 

[358a]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행복하게 될 사람이라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도 그로부터 생겨나는 것들 때문에도 좋아해야할ἀγαπητέον 부류 즉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한다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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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것에 대한 글라우콘의 분류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은지를 제대로 설득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제시된 것인데 좋은 것들의 분류와 글라우콘의 요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다소 뜬금없이 보인다. 그러나 글라우콘의 분류 중 소크라테스가 선택하는 ‘좋은 것’은 장차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정의의 특성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 역시 정의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 드러내 놓고 시작할 수 있도록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를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형색임이 역력하다. 그만큼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좋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통상 우리는 이 부분에서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제시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의 분류를 접하는 순간, 그 세 가지 좋은 것들을 우리가 행해야할 도덕적 행위 기준에 관한 것들로 이해하곤 한다. 실제로 해당 부분에 관한 연구자들의 논의들 가운데 상당부분이 그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많은 논란거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좋은 것’,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칸트(I. Kant)의 동기주의 내지 의무론(deontology)적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정직함’ 등의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은 결과주의 내지 공리주의(utilitarianism) 윤리학이 주장하고 있듯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위 덕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이해 방식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문제에 부딪친다. 우선 여기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란 의무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도덕적 행위로서 좋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글라우콘이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예시한 것들 즉 ‘기쁨’ 내지 ‘쾌락’은 다만 내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 ‘거짓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의 도덕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위나 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시된 기쁨이나 즐거움이 보여주듯 그 자체로 갖기를 바라고 반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칸트적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그 자체로 선한 어떤 ‘행위‘도 아니고, 자신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무조건 의무로 부과되는 정언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 자체 때문에 우리가 반기고 갖고 싶어 하는 좋은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된 좋은 것 역시 행위라기보다는 슬기로운 능력, 볼 수 있는 능력, 건강을 보전하는 능력인 동시에 그러한 능력이 구현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세 번 째 좋은 것은 예시한 것들 모두가 보여주듯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행위들 또한 도덕적 행위로 분류되기는 힘든 것들이다.

*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좋은 것 즉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으로서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에 기쁨이나 쾌락이 예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의가 곧 행복이라고 추론하고 그러한 플라톤의 주장을 공리주의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정의가 이미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행위 결과로서의 행복 여부에만 주목하는 공리주의 입장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 기쁨이나 즐거움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정의가 곧 기쁨이나 즐거움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들의 예시로서 모종의 상태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 자체 때문에도 좋은 것이자 동시에 그것에서 생기는 것들 때문에 좋은 것으로서의 플라톤의 정의는 단순히 좋은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함이나 현명함들이 보여주듯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면서 그로부터 또 다른 좋은 것을 생기게 하거나 구현하는 능력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체 때문에 좋지만 기쁜 것 말고 전혀 어떤 것도 생기지 않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좋은 것이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을 포함하고 있고 결과 때문에 좋은 것들로서 보수나 평판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서 보수나 평판이 곧바로 두 번째 좋은 것이 될 수도 없다. 두 번째 좋은 것이 첫 번째 좋은 것의 속성과 세 번째 좋은 것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번째 것이 그 둘의 단순 조합일수는 없는 것이다. 글라우콘이 분류한 세 가지 좋은 것들은 각각 고유한 속성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것들로서 서로 섞여질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첫 번째 것은 좋은 상태에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고 세 번째 것은 결과만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두 번째와 같은 것일 수 없다.

* 첫 번째 좋은 것이 갖고 있는 좋은 상태 그것만으로는 정의의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상태이자 그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보전하며 구현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의는 단순히 그 자체로 좋은 상태만이 아니라 늘 그 상태로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적 실행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시종일관 하나같이 좋은 상태로 있는 것이어서 그것의 담지자에게 결과로서 좋은 것까지 안겨주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좋은 것이다. 정의는 첫 번 째와 세 번째 조건들의 단순 조합으로서 좋은 것이 아니라 상태와 능력과 결과들이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결합된 그것 자체로 하나의 좋은 것, 그야말로 통째로 좋은 것이다. 정의와 같은 부류의 좋은 것으로서 플라톤이 예시한 것들, 이를테면 건강함이 그 자체로 몸의 좋은 상태인 동시에 유기체로서 병적 요소를 물리쳐가며 몸의 좋음을 통일적으로 보존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듯이 정의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정의는 시종일관 그 자체로 완벽한 상태이자 제1권에서 수차 언급하고 있듯 탁월한 실행력으로서 덕이자 훌륭함(ἀρετή)이어서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그것을 가진 나라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굳이 보상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정의는 그 자체 때문에 행복하다는 점에서 이미 그것으로 내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고 동시에 정의는 결과 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외적인 사회적 보상도 함께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플라톤이 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푯대이다. 나라와 개인들에게 좋은 것들로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의의 구체적 내용들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정의에 관한 철학적 입장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속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정의관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톤은 이제 이러한 이상적 푯대를 세워 더 하늘을 찌를 정도의 낙관적 기세를 가지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수립과 구축에 나선다. 플라톤이 내세우는 정의는 정의의 푯대로서 가히 신적인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답변을 내놓고자 하는 제2권의 첫 장면에서 정의가 어떤 부류의 좋은 것인지에 대한 글라우콘의 물음과 그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앞으로 ‘정의가 부정의보다 좋다’ 결론을 향해 소크라테스가 펼칠 주장에 대한 검증의 근본 지표가 된다. 플라톤은 <국가>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그와 같은 정의의 근본 특성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두 번째 좋은 것에 속하는 예로서 현명함과 봄을 들고 있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인간의 능력으로서 인지기능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그가 예시한 건강함은 정의를 나타내는 가장 적확한 비유개념으로서 곳곳에서 인용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인지 기능 중 유독 ‘봄’τὸ ὁρᾶν을 예시한 것은 일상적인 봄과 더불어 철학적 관조(idein)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 첫 번째 좋은 것의 예로서 ‘해롭지 않은 즐거움’αἱ ἡδοναὶ ὅσαι ἀβλαβεῖς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예로 아래와 같이 음악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음악이 노래를 동반하든 아무런 장식이 없든 간에 가장 즐거운 것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적어도 무사이오스는 노래하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기쁨을 주는 그 힘 때문에 그것을 친교적 회합과 여가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바로 이점에서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음악 속에서 교육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가 없는 즐거움은 그 궁극목적에도 어울릴 뿐만 아니라 휴식과도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정치학> 8권 1339b 20-27, 김재홍 역)

* 좋은 것과 관련하여 비슷한 분류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키티온의 제논(Zenon)의 언급에서도 발견된다. ‘좋은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고telikos 어떤 것들은 매개가 되고poiētikos 어떤 것들은 최종적인 것이 되면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친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이로움은 수단이 되는 좋은 것들이다. 반면에 용감함tharsos, 자부심phronēma, 자유, 희열terpsis, 유쾌, 안락alypia과 덕에 따른 모든 행위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제7권 96.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김주일 외 역주, 근간)

 

1-2. 글라우콘의 이의 제기(358a-362c)

 

[358a]

* 글라우콘의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두 번째 좋은 것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답을 하자 글라우콘은 먼저 다중들ὅι πολλοῖ의 견해를 소개하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다중들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달리 정의는 고생스런 부류에 속하는 것τοῦ ἐπιπόνου εἴδους이며 다만 보수μισθός와 평판δόξα을 통한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에 수행해야한다고 여길 뿐 그 자체 때문이라면 까다로운 것으로서 피해야 하는 부류의 것φευκτέον ὡς ὂν χαλεπόν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다중들의 견해와 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비난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배우는 데 굼뜬 사람τις δυσμαθής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을 모른 채 허황된 이상만을 논하는 사람이 아니다. 철학자는 다중들의 생각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배우는 데 굼뜨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무게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철학은 지성에 대한 예민함이며 그 예민함은 거꾸로 거짓과 불의로부터 전해지는 유혹에 둔감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불의에 약삭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지성적인 것이자 반철학적인 것이다.

 

1-2-1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되살려 논제를 제시하다(358b-358d)

 

[358b]

* 그러자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가 물러선 것은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 소크라테스에게 너무 일찌감치 홀린 결과로 밖에 생각이 안 되고, 그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각각에 대한 논증ἡ ἀπόδειξις περὶ ἑκατέρου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가 그들의 주장이나 다중(多衆)ὃῖ πολλοῖ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그 각각이 과연 무엇인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그리고 그 각각이 영혼 안에ἐν τῇ ψυχῇ 있을 때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어떤 힘을 갖는지’를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듣고 싶을 뿐이라고 토로한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되살려서ἐπανανεώσομαι 그 요체를 아래 세 가지 논점으로 나누어 주장할 터이니 소크라테스에게 그에 대한 답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 ‘뱀 다루는 사람에게 뱀이 홀리듯ὥσπερ ὄφις κηληθῆναι’을 박종현 역본은 ‘뱀한테 올리듯’으로 잘못 옮기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뱀에 비유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원문에는 뱀이 홀림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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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그 각각이 무엇인지’,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라는 글라우콘의 말에서 각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 그것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각각이 가리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글라우콘의 말은 자칫 정의와 부정의 각각을 실체인 양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ὸ καθ᾽ αὑτὸ라는 표현은 형상을 나타날 때 쓰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가 일컫고 있는 각각 즉 정의와 부정의는 모두 현실의 영역 속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일종의 무규정적 정도(degree)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독자적인 실체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제1권에서도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언급한 바가 있다.(352c) 아무튼 글라우콘의 말이 어떻든 플라톤에게 부정의는 분명 정의의 결핍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그 자체’라는 말에 큰 무게를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그 자체’라는 표현을 부정의와 관련시켜 이해한다면 뒤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정의를 가장 최대로 결핍한 상태 즉 최대의 부정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글라우콘의 요청은 이제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재현하여 따지는 방식으로 새로운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한 터파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에게 대놓고 그가 행한 각각의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글라우콘의 태도가 자못 공세적이다. 무엇보다 글라우콘의 요구에는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간명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하게 함축되어 있다. 우선 제1권 말미에서 소크라테스가 후회하고 있듯이 무엇보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답변이 제시되어야한다. 더 이상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定義)가 주어진다고 해서 목표가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말을 통한 정의 즉 내용 규정 차원을 넘어서서 정의가 실제로 영혼 안에 있을 때 그 자체로 과연 어떤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의 이 두 번째 요구는 제1권 말미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불만이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불만 즉 단지 규정 차원의 미흡함에 대한 불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실제로 정의가 갖는 구체적 힘에 대한 논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대한 불만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컨대 플라톤이 글라우콘의 요구를 통해 제시하는 <국가>의 핵심 목표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적극적인 구축이자 건설인 것이다.

* 그런데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갖는 힘을 말해줄 것을 요청할 때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 경우를 ‘그 각각이 영혼 안에 있을 때’로 특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다루어지는 정의와 부정의가 기본적으로 나라와 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 각각이 ‘개인의 영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 있을 때 어떤 힘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달라고 해야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정의가 궁극적으로는 나라와 개인 두 영역에서 유기적이고도 통일적으로 관철되어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것들을 서로 구분해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일단 <국가>에서 정의를 논하는 기본 출발점에는 개인의 영혼 즉 개인의 정의로운 영혼에 대한 관심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그러나 그것이 플라톤의 개인에 대한 관심의 우위성이라고까지 너무 과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앞 제1권에서도 부정의가 한 사람 안에서 생기게 될 경우 갖게 되는 힘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깃드는 곳으로서 나라와 씨족, 군대 등 집단들도 같은 경우로서 함께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351e-352a) 아무려나 개인과 나라 어디에 방점을 두든 글라우콘의 요구에 담겨 있는 내용만 보더라도 일단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관심사가 개인과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나라와 집단과 연관해서만 집중되어 있다는 세간의 이해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58c]

* 그리하여 글라우콘은 새로운 차원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위한 터파기 작업의 일환으로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을 되살려ἐπανανεώσομαι τὸν Θρασυμάχου λόγον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논변으로 제시하겠다고 말한다.

1)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의 본질과 기원δικαιοσύνην οἷον εἶναί φασιν καὶ ὅθεν γεγονέναι, 2) 정의는 그것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할 수 없이 하는 것’ἐπιτηδεύουσιν ὡς ἀναγκαῖον ἀλλ᾽ οὐχ ὡς ἀγαθόν이다. 3) ‘부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 낫다’ἀμείνων ἄρα ὁ τοῦ ἀδίκου ἢ ὁ τοῦ δικαίου βίος.

 

[358d]

* 글라우콘의 제시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한 터파기라는 점은 논의 제시에 앞서 그가 피력하고 있는 심정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즉, 자신은 위와 같은 논변들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를 비롯해 무수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귀가 닳도록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διατεθρυλημένος τὰ ὦτα ἀκούων 자신도 혼란스러워졌고ἀπορῶ 게다가 누구로부터도 자기가 바라는 만큼 ὡς βούλομαι 만족스럽게 정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들은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정의가 그 자체로서 찬양받는ἐγκωμιαζόμενον 것을 듣고 싶고, 그것을 위해 자기는 반대로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μάλιστα 부정의한 삶을 칭찬ἐπαινῶν 하겠다는 것이다.

*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는 심정적으로는 정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다가 그에 대해 특별히 대응할 능력도 없어 당혹스러워하는 당시의 양심적인 지식인들 내지 젊은이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오늘날에도 더 심화되었으면 심화되었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58e]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의도와 요구를 들은 후 지각νόος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주제를 말하거나 들을 때보다 더 자주 기뻐할 것은 없다고 크게 환영의 뜻을 표한다. 이제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차원의 대화가 시작될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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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정암학당에서 열리는 <국가> 강해가 제2권부터는 강사 사정상 격주로 진행되므로 이곳 웹진 강의록도 강해가 이루어진 다음 주 수요일 경에 게재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㉒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352d]

* 이제 검토하기로 했던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훌륭하게 살고 행복한가?ἄμεινον ζῶσιν οἱ δίκαιοι τῶν ἀδίκων καὶ εὐδαιμονέστεροί εἰσιν;’ 이 논의는 예사로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οὐ γὰρ περὶ τοῦ ἐπιτυχόντος ὁ λόγος, ἀλλὰ περὶ τοῦ ὅντινα τρόπον χρὴ ζῆν.

*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문제이오만 이제 이를 검토 해보야만 되겠소.’ὅπερ τὸ ὕστερον προυθέμεθα σκέψασθαι, σκεπτέον. 역문에서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부분이 앞에서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혹시 347e에서 언급된 ‘나중에 다시 또 검토하기로 했던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가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내용 상 맞지를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급에 바로 이어서 제기된 문제 즉 그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문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나은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검토해야할 문제가 곧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원문 ὕστερον을 ‘나중’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 다음에 이어서’의 뜻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쟁 ‘다음으로 그것에 이어서 우리가 검토하기로 제기했었던’ 문제 즉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를 이제 검토보아야 되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는 344e에서도 논의의 핵심과제로서 강조되었고 347e에서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과제로 거론되었고 또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앞에서 덕과 지혜 차원에서 힘과 능력 차원에서 검토된 바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껏 우리가 말한 것을 근거로’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다’φαίνονται μὲν οὖν καὶ νῦν, ὥς γέ μοι δοκεῖ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논의는 앞에서도 수차 강조되었듯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므로’ ‘한층 더 잘 검토해 보아야할’ἔτι βέλτιον σκεπτέον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정의가 덕과 지혜 그리고 힘에 있어서 낫다는 것을 토대로 ‘왜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훌륭하고 이득이 되며 행복한가’를 두 번째 논쟁의 세 번째 논제이자 마무리 논제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위해 우선 소크라테스는 말(馬)ἵππος의 기능을 예로 들어 기능ἔργον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352e]

*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능이란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ὃ ἂν ἢ μόνῳ ἐκείνῳ ποιῇ τις ἢ ἄριστα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 귀의 기능은 듣는 것이다.

 

[353a]

* 단검이나 칼 등 베는 여러 가지로도 물론 포도나무 가지를 자를 수 있지만 전정용 낫δρέπανον 만큼 훌륭하게 자르지 못하는 한, 전정용 낫의 기능이 곧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는 것이다. 이렇듯 ‘그것만이 뭔가를 해낼 수 있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각각의 기능이다.’τοῦτο ἑκάστου εἴη ἔργον ὃ ἂν ἢ μόνον τι ἢ κάλλιστα τῶν ἄλλων ἀπεργάζηται

 

[353b]

*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각각의 것에는 훌륭함(덕)ἀρετὴ도 있다. 눈, 귀 등 각각이 다 제 고유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를 가지고 있다.

 

[353c]

* 각각은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οἰκεία ἀρετή)에 의해 그 기능을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지만, 나쁜 상태(나쁨κακία)에 의해서는 그 기능을 나쁘게κακῶς. 수행한다.

* 요컨대 어떤 것의 기능ἔργον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고 훌륭함(덕)ἀρετὴ은 그 기능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훌륭함(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스스로 탁월하게 구현할 줄 알고’ 그래서 ‘그 특유의 탁월한 상태τῇ οἰκείᾳ ἀρετῇ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는 그 기능의 대상에 대해 탁월하게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덕’은 언제나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스스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자 그에 따라 대상을 가장 탁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악덕 (나쁨κακία)은 그와 같은 덕을 앗기거나στερόμενα 결여하고 있는 나쁜 상태이자 기능의 저하에 따라 나쁜 작용을 하여 대상과 관련하여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악덕’은 시력을 결여한 상태로서 나쁜 시력 때문에 대상을 잘못 보거나 틀리게 보는 것 즉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의 결핍 내재 부재를 말한다. 참주는 덕을 가장 결핍한 가장 나쁜(악덕을 가진) 자로 그에 따른 부작용 즉 부정의를 최대로 야기하는 자이다.

[353d]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면 영혼ἢ ψυχῇ에도 기능이 있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이 혼의 특유한 기능이다.

 

[353e]

* 그렇다면 위와 마찬가지로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잘 해내게’εὖ πράττειν 될 게 필연적이다.

* ‘그런데 앞서 정의는 혼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훌륭함, 덕)이지만 부정의는 나쁜 상태(나쁨, 악덕κακία)라는 점이 동의되었다.

* 그렇다면 결국 정의는 혼의 기능을 훌륭한 상태가 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겠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잘못κακῶς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이 복 받고 행복하며μακάριός τε καὶ εὐδαίμων’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이다.

 

[354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하고 부정의한 자는 불행하다ὁ μὲν δίκαιος ἄρα εὐδαίμων, ὁ δ᾽ ἄδικος ἄθλιος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한다.

* 결국 이 모든 논의를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이 이득이고 불행ἄθλιόν은 이득λυσιτελής이 아니므로 결국 ‘부정의는 정의보다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 이로써 검토와 논박이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말한 대로 검토과정에 순순히 수긍하고 결국 자기주장의 반대로 귀결되자 ‘벤디스 여신 축제일Βενδίδεια을 당신의 축하 잔치로εἱστιάσθω 삼으라’고 비아냥대며 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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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검토 부분에서도 의미 있게 음미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353e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고 부정의는 혼의 악덕’임이 앞에서 동의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앞 어디에도 그런 부분은 없다. 다만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이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점은 마지못해서 이기는 하지만 서로 동의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정의는 덕이다’라는 말과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에서 동의된 결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도 당연히 동의된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능가 관련 검토에서 ‘정의가 덕이다’라는 결론은 아래의 의미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정의는 능가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훌륭한 상태, 적도의 상태인 동시에 그것을 관철시키는 기능이다. ii)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정의로운 사람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태와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구현하게 만든다. iii)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 내부의 혼의 상태와 기능도 당연히 최상의 훌륭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의 결과로 주어진 결론으로서 그 검토 과정 그 자체가 모종의 한도와 경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논증 자체가 완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2) * 설사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합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앞에서 각 기능들은 눈과 귀, 포도나무 전정용 낫이 그렇듯이 그것들의 훌륭한 상태로서 덕을 가지고 있다. 즉 기능과 덕은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되었듯이 혼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는 그러한 혼들 가운데 어떤 기능에 대응하는 것인가? 덕이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라면 정의가 혼의 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정의만이 유일하게 여러 가지 덕을 갖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거나 지금까지의 논변만으로는 일단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급 상의 내적 불일치 내지 논거의 부족함이 가져다주는 의문은 이곳에서 명시적으로 해명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정의는 혼의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이곳에서 불쑥 내던져진 말일까? 우리는 이와 관련한 의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비록 명시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잘 헤아려 보면 ‘정의가 혼의 덕이다’라는 말이 어떤 맥락과 근거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힘을 거론하면서 그 힘을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힘으로 언급하고 있고 흥미롭게도 개인도 그 여럿으로 구성된 집단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고 있다.(351e-352a) 이것은 앞서도 설명하였듯이 소크라테스 자신 개인의 영혼 자체가 여럿으로 구성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앞으로 영혼 3분설의 형태로 제시된다. 즉 혼은 개인에게 하나의 혼이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하부의 혼들이 또 있는 것이고 정의는 그 여러 가지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어 그것의 총화로서 개인의 혼이 일을 잘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덕인 것이다. 즉 정의는 덕이자 지혜이면서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여럿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는 능력으로서 개인 내부의 여러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이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상태 즉 혼의 덕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덕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는 개인의 여러 혼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조화를 이루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으로 하여금 온전한 덕을 가지게 하는 덕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정의는 나라나 집단 차원에서는 구성인 또는 계층들의 기능과 덕을, 그리고 개인차원에서는 개인 내부의 혼의 기능과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한 나라, 한 마음으로ὁμονοοῦντα αὐτὸν ἑαυτῷ(352a) 조화 통합시키는 덕인 것이다. 굳이 영혼 3분설을 내세우지 않고 두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앞부분 검토 내용만 가지고도 위와 같은 내용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그곳에서 혼이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결코 비약이라거나 아무런 근거 없이 내던져진 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위의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소크라테스가 혼의 특유한 기능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353d)과 관련해서도 의미 있게 음미해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부분 역시 영혼의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언급된 혼의 기능들 또한 앞으로 <국가> 전체를 통해 거론될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혼들의 역할 내지 기능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자 나아가 그것들과 일정부분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ἄρχειν은 군사적으로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것command, 행정적인 관리govern의 뜻도 있다)은 철학자 왕을 보조하고 시민들을 보살피는 수호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고, ‘심사숙고’βουλεύεσθαι는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선발된 철학자왕의 역할을 함축하며, ‘사는 것’τὸ ζῆν(to zēn)의 연관 동사 ζάω(zaō)가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 및 생활을 유지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개인 영혼에서 이성과 기개와 욕구의 기능과도 일정 부분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혼ψυχῇ은 이미 호메로스 시절 이래 ‘목숨’의 뜻도 가지고 있다.

4) *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두 번째 논쟁의 마지막 논제 즉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다. i) 혼에는 여러 기능들이 있다’(353d) ii) 혼의 덕은 그 기능을 잘 해낼 게εὖ πράττειν 필연적이다(353e) iii) 그러므로 혼의 덕은 앞서 언급한 모든 일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 사는 것들 그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다.(353e) iv)앞서(353b) ‘정의는 혼의 덕’(350d)임이 동의되었다.(353e) v) 그러므로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며 그처럼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은 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354a) vi)그리고 부정의한 사람은 위와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통해 불행하다는 것이 밝혀진다.(354a)

* 우선 이 논증은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은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추론 상의 어색함이나 비약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내용적으로도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며 잘 심사숙고하고 잘 사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훌륭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v)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훌륭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복 받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 말만 떼어서 보면 ‘훌륭하게 잘 사는 것’이 곧 ‘복 받고 행복한 삶’이라 것에 크게 어색함은 없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앞에서 ‘사는 것’τὸ ζῆν이 혼의 기능들 전체가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그것의 의미가 일종의 ‘생명 활동이자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 기능을 ‘훌륭하게 잘 한다’는 것에서 ‘복되고 행복한 삶’이 곧바로 추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사람의 ‘복되고 행복한 삶’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사는 것’이 혼의 기능의 전체가 아니라 하나라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갖는 애매함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v)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이 잘 산다’는 말의 의미는 내용적으로 혼의 기능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는 것’만을 ‘잘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냄으로써 심신 모두에 걸쳐 ‘훌륭한 삶, 훌륭한 생애를 보낸다’εὖ βιώσετα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어 원문 상으로도 앞서 ‘사는 것τὸ ζῆν’(353d)이 다소 넓은 의미에서의 ‘산다’live를 나타내는 ζάω(zaō, live, be alive) 동사 연관어로 쓰인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생애를 보내다’pass one’s life의 의미가 좀 더 두드러지는 βιόω(bioō)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곧 이어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ho eu zōn)을 나타낼 때는 ζάω(zaō) 동사 연관어를 다시 쓰고 있어 일관성은 결여하고 있지만 ζάω(zaō) 동사의 의미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미 ‘잘 사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내는 것이라는 것이 iii)과 iv)에서 충분히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잘 사는 것’의 의미를 혼의 기능의 하나인 ‘사는 것’을 잘 하는 것만으로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아무려나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덕ἀρετή과 기능ἔργον에 기초한 논증방식들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증들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논증들을 통해 정의는 나라건 개인이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다양한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조직해내는 합목적인 조직 원리이자 힘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354b]

* 이상으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은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모두 논파된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러한 문답의 귀결을 벤디스 여신의 축제일에 선생을 위한 축하 잔치로 삼으라고 마지막까지 빈정거린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자기에게 상냥하게πρᾶος 대해 준데다 사납게 대하길 그만둔 덕분이라고 점잖게 응수한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제까지의 대화가 실은 흡족하지 못했고οὐ μέντοι καλῶς 그 탓이 자기에게 있다δι᾽ ἐμαυτὸν고 말한다. 마치 식탐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음식을 적절히 즐기기도 전에, 뒤에 나오는 음식을 낚아채듯 받아먹었다고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것이 나쁨(악덕κακ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인가 아니면 지혜σοφία이며 훌륭함(덕ἀρετή)인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또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참지 못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검토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354c]

*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꼴이 되었다’ὥστε μοι νυνὶ γέγονεν ἐκ τοῦ διαλόγου μηδὲν εἰδέναι고 탄식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이 일종의 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지닌 이가 불행한지 아니면 행복한지’ὁ ἔχων αὐτὸ οὐκ εὐδαίμων ἐστὶν ἢ εὐδαίμων도 알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국가> 1권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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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제1권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부분에도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사가 포함되어 있다.

1)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전기 대화편 대부분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를 문제 삼으면서도 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그것의 일부 속성이나 사례들로 답하고 있는 것들이 갖는 한계 내지 그것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를테면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얻을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기를 간청하는 소크라테스를 뿌리치고 에우튀프론이 급히 갈 데가 있다고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그냥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고 있고, <라케스>도 용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답을 간청하지만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으니 최고로 훌륭한 선생을 만나 답을 구해야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도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모두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으며, <뤼시스> 역시 아동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와의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거기에서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끌어들여 문답을 이어가려 하나 아동의 보호자와 형제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바람에 아포리아 상태에서 문답이 마무리되고 있다. 게다가 중기 대화편으로 알려진 <메논>에서는 문답이 아포리아 상태에 있음에도 <에우튀프론>과 달리 아예 소크라테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논의가 끝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 또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논의로 옮겨간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을 탓하는 형식으로 논의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학자들은 <국가> 제1권을 아예 전기 대화편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라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어떤 학자들은 전기에 저술된 대화편이되 다만 플라톤이 <국가>를 구상하면서 내용 구성의 필요에 따라 그 내용을 약간 고쳐 <국가>의 서론으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은 전기 대화편들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내놓지 않은 채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국가> 전체적인 계획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해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국가> 제1권은 전기에 저술된 독립된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구상 아래 <국가>의 서론으로서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2) 그러면 <국가> 제1권이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전체 내용 또는 플라톤의 <국가> 전체 구상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기 대화편들은 대부분의 경우, 문답이 난관에 봉착한 이후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갖는 의미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는 의미 있게 부각되는 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자신이 적극적으로 답을 내놓을 태세는 내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건 내버려 둔 채로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것에 불만족을 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불만족을 표명하는 것 자체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불만족을 표명하되 그 앎을 위한 검토를 내버려 둔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라케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다고 자기를 탓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자신 또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이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문답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렇게 된 탓을 자신에게 돌리며 후회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보다는 오히려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곳에는 답을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것에 대한 검토로 휩쓸려 들어간 소크라테스 자신의 뼈아픈 자책과 후회 나아가 탄식이 담겨 있다. 정의에 대한 앎이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주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곳에서의 그의 탄식은 문답을 통해 그 자신 정의를 드러내거나 납득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음식을 즐기는 순서에 비유하여 다루어야할 문제를 내버려둔 채 자제를 못하고οὐκ ἀπεσχόμην 부차적인 문제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후회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트라쉬마코스의 공격적이고도 파괴적인 주장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그 대안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플라톤 자신의 근심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이제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나 무지의 지의 고백이 능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적극적인 정의에 대한 앎의 생산 내지 구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것이 되었소”(354b)라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은 제1권의 논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행해왔던 전기 대화편의 논의 방식 전체에 대한 통렬하고도 전면적인 자기비판과 더불어 이제 부정의에 대한 논파를 넘어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제1권 곳곳에 드러나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만이 목적이었다면 문답은 첫 번째 논쟁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박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정의와 이익과 관련한 권력지상주의의 입장은 물론 부정의 찬양론 일반에 대한 반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득과 행복을 논제로 두 번째 문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논쟁의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트라쉬마코스의 고분고분한 모습은 이제 문답의 목적이 논파가 아닌 다른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두 번째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논파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대안으로 내놓을 정의론의 핵심 키워드를 짧게나마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2권 이후의 논의를 예고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 전환은 첫 번째 논쟁과정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적나라한 속내를 확인한 이후부터(347e) 감지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논파되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트라쉬마코스를 보며 이제 더 이상 그와 정의에 관해 논파를 목적으로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통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배제한 채 글라우콘과 그러한 부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을 상의한 후 그 방침에 따라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이 내건 논제를 화두로 문답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논제 또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반박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덕과 지혜, 정의의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혼의 덕에 대한 주장 등을 적극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의에 관해 앞으로 자기가 내세울 내용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단계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 그러한 구도에 맞추어 두 번째 논쟁에 들어와서 부터는 트라쉬마코스를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대해 적극적인 반박하거나 대응하는 문답의 상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벌이는 판에서 단순히 수긍과 부정만을 표명하는 소극적인 참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검토 방식을 다시 논의하고 앞으로 함께 논의의 판관이자 변론인들이 되자고 언급할 때부터(348b) 이미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앎의 구축이 선언되고 있으며 두 번째 논쟁은 그것을 위한 준비와 포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국가> 제1권을 통해 플라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제1권이 이름 그대로 제1권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제1권은 모든 전기 대화편들처럼 난관에 직면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전기 대화편들 모두는 그냥 그것으로 종결되고 마는데 반해, <국가> 제1권은 이미 제1권이라는 이름 그것으로 종결이 아닌 그것의 극복과 적극적인 정의를 건설하기 위한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제1권은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을 통해 ti esti(What is it?)라는 탐문방식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충분하게 보여주면서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물음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구축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중기 대화편 이후 플라톤은 ti esti라는 탐문방식을 상대방의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하는 방편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하물며 정의와 행복의 문제는 그 자신 평생의 철학의 과제로 매달려 왔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행복의 문제라는 필생의 과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상대방 주장의 한계만을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가>를 설계하고 집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제1권 마지막 말대로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람이 과연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알 도리도 없고 그에 따라 그것을 구현할 가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앎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그의 계획과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플라톤은 제1권을 통해 앞으로 맞닥트리게 될 심각한 현실 국면 즉 그가 대적하려는 부정의한 세력들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뿌리 깊은 현실적 완고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제1권 내내 보여주고 있는 부정의하고도 탐욕적인 입장은 논파는 차치하고 웬만한 대안으로는 결코 파괴되거니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직면하고 있는 중차대한 심각성은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뿌리 깊은 탐욕은 비록 논파는 될지언정 결코 파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사학자인 트라쉬마코스와 당대 기득권자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를 소환하여 그들의 탐욕과 무지를 차분하고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국가> 제1권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함축이 아닐 수 없다.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의 배경에는 그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탐문은 단순히 논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불의한 기득권 세력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변혁해내는 힘이자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쇠망기에 접어든 아테네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국가>를 구상하고 써내려간 플라톤의 기본 의도이자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1권은 그러한 전체적인 구도 아래에서 왜 그것이 기본목적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넘어서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토대이자 서론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제1권 마지막에서 다시 환기되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혼의 구축’이야 말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루어서도 안 되는 절대 절명의 과제임을 알리는 플라톤 자신의 선언이자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2권 이하에 대해 제1권이 갖는 함의이다. 이렇게 제2권 이하를 기약하며 제1권은 여기서 끝난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 강해 끝 –


* 2018년 8월 1일부터 2019년 1월 23일까지 총22회에 걸쳐 정암학당에서 진행된 <국가> 제1권 강해가 마무리됨에 따라 잠시 방학을 한 후, 2019년 3월 6일부터 제2권 강해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곳 웹진 강의론 역시 2019년 3월 중순부터 다시 재개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㉑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2(350d~352c):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350d]

* 소크라테스의 논박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문답의 귀결에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장면은 앞에서도 수차례 나오지만 이곳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질질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그것도 엄청나게 땀까지 뻘뻘 흘리다가ἑλκόμενος καὶ μόγις, μετὰ ἱδρῶτος θαυμαστοῦ ὅσου’ 동의하고 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ἐρυθριῶντα 모습은 소크라테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모멸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고 뻔뻔한 자일수록 그가 느끼는 수치의 강도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봐 줄 기세 없이 트라쉬마코스를 몰아세운다. 그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해결 본 것으로 치고οὕτω κείσθω 곧바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가 더 강하다ἰσχυρὸν εἶναι τὴν ἀδικίαν’라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350e]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기세는 꺾여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말을 하려 하면 어차피 ‘대중 연설’δημηγορεῖν을 할 거라고 여길 터이니 내가 내 식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당신 좋을 대로 질문이나 하라‘고 말한다.

* 앞서 살폈듯이 검토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연설에 의한 방식은 아예 배제된 데다가 그 논의에 개입조차 못할 정도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박에 크게 위축되어 있다. 여기서도 입으로는 자신도 할 말이 있고 또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는 하고 있지만 이미 트라쉬마코스는 주눅이 든 상태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이자 연설가임을 자부하는 그가 그것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런데 반박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상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아냥거리는 일이다.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는 노파γραῦς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좋다εἶεν거나 아니라고만 대답하겠노라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에 빌붙어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지식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늘어놓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를 그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래도 대답만은 솔직히 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번째 논제 역시 자신의 검토 방식에 따라 논의를 이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문답에 주도권을 잃은 트라쉬마코스는 그저 소크라테스 마음에 드는 말이나 해주겠다고 다시 빈정거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두 번째 논박을 시작한다.

 

[351a]

* 소크라테스는 먼저 ‘부정의가 보다 강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는 것은 부정의와 비교하여 정의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ὁποῖόν τι τυγχάνει ὂν 충분하게 논의해 보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정의가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이라면 지혜와 덕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351b]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최선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즉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과연 강한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정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부정의한 나라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나라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부정의를 갖추고 있어 그런 것임을 재차 주장한다.

* 여기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가장 부정의한 나라 즉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를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해서 갖고 있는 나라’πόλιν ἄδικο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ας πόλεις ἐπιχειρεῖν δουλοῦσθαι ἀδίκως καὶ καταδεδουλῶσθαι, πολλὰς δὲ καὶ ὑφ᾽ ἑαυτῇ ἔχειν δουλωσαμένην는 분명 페리클레스 이후 부당하게 다른 폴리스들을 예속화하고 스스로를 제국화한 아테네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국가>를 집필하던 기원전 375년경은 물론 <국가>의 대화시기로 상정되고 있는 기원전 410년 전후는 아테네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가 결코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없고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같은 민족 형제 나라들을 부당하게 침탈하고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아테네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351c]

* 소크라테스는 앞서 그가 당부한(350e) 대로 트라쉬마코스가 속내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한 후, 흥미롭게도 나라와 군대στρατόπεδον는 물론 하물며 강도단λῃστὰς이나 도둑κλέπτας의 무리까지 예로 들어, 어떤 집단이 ‘부정의하게 공동으로κοινῇ 뭔가를 도모할 경우에 만약 그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εἰ ἀδικοῖεν ἀλλήλους 과연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πρᾶξαι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수행해낼 수 없을 거라 대답한다.

 

[351d]

*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들끼리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동의를 얻는다.

* 이로써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면서 서로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경우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다툼’ ἢ στρατόπεδον ἢ λῃστὰς ἢ κλέπτας을 초래하여 결국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며, 반대로 합심과 우애를ὁμόνοιαν καὶ φιλίαν 다하면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 서로에게서 확인된다. 이로써 351a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으로서 정의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란 ‘합심과 우애’를 담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정의로운 사람은 합심과 우애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그 단체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증오와 불화만 일으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가 추구하는 일을 그르쳐 그 단체나 개인을 약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정의의 기능ἔργον이 그런 것이라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노예들 사이에서건ἐν ἐλευθέροις τε καὶ δούλοις 서로를 증오하고 대립하게 만들고μισεῖν καὶ στασιάζειν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언급 또한 5세기말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아테네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을 두고 부정의가 마치 고유한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유한 기능은 덕을 갖고 있지만 부정의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부정의가 일으키는 어떤 나쁜 작용을 말한다.

 

[351e]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생겨 그들끼리는 물론 정의로운 사람과도 적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런 여러 사람들의 경우 말고 개인 한 사람 안에서 부정의가 생길 경우ἑνὶ ἐγγένηται ἀδικία에도 부정의가 조금도 힘δύναμι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를 표한다.

 

[35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앞의 논의를 토대로 집단ἔθνος과 개인εἷς의 경우로 나누어, 부정의가 그곳 각각에 깃들 경우 어떤 힘을 갖는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우선 나라, 씨족, 군대 같은 단체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δύναμις이란 1) 대립과 불화τὸ στασιάζειν καὶ διαφέρεσθαι를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각기 스스로에 대해서,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ἑαυτῷ τε καὶ τῷ ἐναντίῳ παντὶ καὶ τῷ δικαίῳ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적ἐχθρὸν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이란 본성상 1) 자기 자신에 갈등과 불화στασιάζοντα καὶ οὐχ ὁμονοοῦντα를 일으켜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갖는 힘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이 집단의 내부와 개인의 내면을 각각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시키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글 말미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352b]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편 후 ‘한데 보시오. 신들θεόι도 어쨌든 정의롭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정의로운 자는 신들에 대해 친구φίλος가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정의롭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몰라도 정의를 합심과 우애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 직후에 언급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은 결코 합심과 우애의 신들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소크라테스 나름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신들 모두는 <티마이오스>에서 강조하고 있듯 우주와 인간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 수호자들에 대한 시가 교육을 통해 신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런 점에서도 짧은 언급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펼쳐질 주장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 트라쉬마코스는 논의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자 아예 자기는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논의를 마음대로 즐기라’εὐωχοῦ τοῦ λόγου θαρρῶν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금처럼 남은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대답하여 ‘이 향응을 흡족하게’τῆς ἑστιάσεως ἀποπλήρωσον 해달라고 말한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352b-c)

1)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서σοφώτεροι καὶ ἀμείνους더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 πράττειν이다.

2) 부정의한 사람들이란 서로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들οὐδὲ πράττειν μετ᾽ ἀλλήλων οἷοί 이다.

3) 이들이 부정의한 사람들인 채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효과적으로, 열심을 다해ἐρρωμένως, ῥώννυμι의 분사형) 해내는 것으로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진실ἀληθὲ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전적으로 부정의한 자들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삼가는ἀπέχω 일도 없었을 것인즉 이들 사이에는 그마나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52c]

* 그런데 위 3)의 언급과 그 이후 이어지는 소크라테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의 내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부정의한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이어지는 후반부 언급에서는 뭔가 서로 삼가기도 하고 그나마 어떤 형태의 정의도 깃들어 있어 뭔가를 해내기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와 문장전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전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οὐ παντάπασιν ἀληθὲς λέγομεν라는 역문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문의 경우 παντάπασιν(altogether, wholly)을 ‘전혀’로 옮겨 앞의 내용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내용상 ‘전면적으로’ 옮겨 앞의 내용을 부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판단된다. 상당수의 영역본(G.M.A. Grube, P. Shorey)도 그 부분을 부분 부정으로 번역하고 있다.(what we say(our statement) is not altogether true) 여기서 말한 부정의한 자들의 경우 철두철미하게 부정의한 자들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한 자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그 부분을 다시 풀어서 옮겨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부정의한 사람들도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전면적으로 부정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에게 삼가기는커녕 공격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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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의 두 번째 논제 즉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보다 강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보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태도에 관해서이다.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한 논쟁에서는 물론, ‘부정의는 정의보다 낫다’와 관련한 두 번째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 당한다. 그것도 문답 하나하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논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논박이다. 보통의 경우 논쟁의 귀결이 이 정도라면 한 쪽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부정의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지혜와 덕은 물론 힘까지 갖춘 것임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논파를 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그와 문답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와 관련한 첫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태도를 바꾸는 등 태도를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결국 논리에서 밀리자 목욕탕에서 물을 붓듯 자기 속내를 쏟아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가 문답의 방식으로 논파는 되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첫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트라쉬마코스가 쏟아낸 마지막 항변을 분수령으로 문답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확인한 후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강력하게 반박한 후,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아예 그를 제쳐두고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훨씬 중요하다 생각하는 논제를 자신의 주도하에 두 번째 논쟁의 화두로 내세운 후,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끌어들여 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논쟁 역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두 번째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는 형식적으로 문답에 참여할 뿐 이미 문답을 나눌 의지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들여 문답을 이어가게 하고 있을까? 혹시 플라톤이 의도하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 국면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논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논박의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그들을 원천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앞으로 플라톤이 내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속성을 일부나마 미리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두 번째 논쟁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덕과 지혜, 합심과 우애의 힘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는 것 즉 행복은 앞으로 <국가> 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펼치게 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덕목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 역시 <국가> 본론에 대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부여한 제1권이 갖는 함축이라 판단된다.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함축과 관련해서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모든 논쟁이 마무리된 후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의 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것이다.

2) *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정의가 갖는 힘을 논하면서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앞으로 <국가> 본론에서 펼칠 플라톤의 계획의 일단을 미리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름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덕과 지혜로서 정의가 갖는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며 집단은 물론 개인의 경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합심과 우애를 이야기하면서 집단의 경우를 예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단체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합심과 우애가 중요하게 문제되는 영역으로 개인의 내적 영역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주장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그러한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심적 갈등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소박한 수준에서 이를테면 하얀 마음, 검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는 등 서로 다른 욕망의 요소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기독교 역시 우리 안에 신의 형상(Imago Dei)은 물론 영성 상실에 따른 원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적인 것들로서 우리 안에서 서로 합심과 우애를 나눌 대상들은 아니다. 이에 비해 플라톤이 말하는,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나라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계층과 욕망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있어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개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런 전제도 없이 개인 내면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의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 2권 이후에 펼쳐질 영혼 3분설의 내용을 미리 선취하여 예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라 또는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럿들이 서로 적대적인 것인지 그래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 혹은 변모되어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어서 그대로의 모습을 갖는 것이되 다만 관계를 잘 맺어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지의 문제는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대립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타도하거나 심판해야할 죄악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의이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는 관계맺음의 원리와 목표는 다르지만 그것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실재하는 현실 조건들이다. 부정의와 정신의 분열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 서로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무지와 일탈의 소산들이다.

3) * 이곳의 논의 내용에서 의미 있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소크라테스가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부정의하지만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상태’ 즉 ‘어중간한 상태의 못된 자들’τὰ ἄδικα 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352c) 사실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첫 번째 논쟁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할 때도, 그리고 또 두 번째 논쟁의 첫 번째 논제에서 지혜와 무지를 구분할 때도 각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그 결핍태로서의 부정의, 결코 능가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혜 자체와 그 결핍태로서의 무지를 2분법의 잣대로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해왔다. 이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 지혜σοφία와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덕ἀρετῆ과 악덕κακί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두 번째 논쟁, 두 번째 논제에 들어오면서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들도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면 그 일을 조금도 수행해내지 못하지만,(351c)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다’(351d)고 말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 전체는 비록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해도 집단 구성원들끼리는 정의로운 일을 한결 더 잘 해내는 상태’ 즉 한 집단에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다시 말해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정의한 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은 마치 의도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논제를 제시한 처음 의도대로 힘에 있어 정의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의로운 집단과 부정의한 집단,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만 비교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강도나 도둑 같은 집단까지 끌어들여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혹시 이것마저도 앞서와 같이 앞으로 <국가>에서 다룰 논의를 위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제1권에 부여한 예고이자 함축이 아닐까? 사실 앞서 1)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거침없고 무분별할 정도의 탐욕적 속내를 확인한 이후,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통해 그의 반론 의지를 잠재운 데에다,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 관심사와 관련한 두 번째 논제를 꺼내들어 자신의 주도하에 논쟁을 이끌고 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미 논박과 논파의 단계를 넘어 그들을 압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의 차원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정의와 일의 수행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 사실 우리들은 보통 현실 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말할 때 특정 사람과 그룹을 칼같이 나누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언제나 정의롭다거나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의와 부정의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현실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와 어중간한 부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완전한 정의와 그 반대로서의 완벽한 수준의 철저한 부정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정의와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는 분명 존재하되 플라톤은 이제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듯이(351b-d)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일을 공동으로 도모하지만 구성원들끼리는 합심과 우애가 있어 한결 더 일을 잘 해내는 경우도 그러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극단적으로 참주가 자신은 철저히 부정의하지만 시민들을 완전히 속여 시민들 모두 참주를 정의로운 자로 착각한 채 서로 합심과 우애를 다해 참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우도 그러한 다양한 현실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 압도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들이다. 플라톤 철학을 현실 구제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행된 완전한 정의와 그 결핍태를 나누는 이분법은 여전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현실일수록 부정의를 정의로부터 분리하고 구분하기 위한 확고한 정의의 기준과 푯대는 언제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라와 개인 차원에서 완벽한 정의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축해내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의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각 인간에게서 어떻게 현상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중간한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과 이해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에 대한 언급은 실로 소크라테스의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현실 인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것 역시 예비적인 수준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그것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서 살피게 되겠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존재(to on)와 무(無)(mē on) 그 중간에 있는 무규정적 존재(apeiron)에 대한 플라톤의 숙고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무규정적인 존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동의 일자(一者, hen)를 주장하는 자들과 존재자 일체를 무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생성(gignōmenon)으로 환원하려는 자들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그러한 비판은 곧 무규정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현실 인식을 사변에 예속시키는 것으로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되 현실의 무규정성이 허무주의로 방치되지 않고 역동적인 선과 아름다움(agathos kai kallos)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자 그곳에로의 부단한 운동력으로서 우주 영혼과 인간 영혼의 내적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을 구명하여 현실의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일을 그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과제 내지 관심사는 형상(Idea)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규정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에 있다할 것이다. 즉 철학의 관제는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으면서 어떠한 단절도 받아들이지 않는 연속과 관계맺음 그 자체로서 무규정자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 존재자들이 형상적 존재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인식해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규정자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자 그 인식이 곧 실천을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한, 그것으로 진리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는 불굴의 정신이자 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 아무려나 두 번째 논쟁에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다는 주장은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진다는 것에 기초하여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우들을 보면 오히려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그에 따라 부정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역사에서도 부정의한 군주나 독재자가 엄혹한 군기를 내세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사들을 향해 패배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워 정의로운 군대를 무찌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트라쉬마코스도 이곳에서 가장 부정의한 자 즉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는 그가 참주인 한, 시민을 통제하고 예속화시키는 힘과 권력이 있어 법률도 자기 이익에 맞추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시민적 의무 차원의 정의감 때문이건 법률 위반이 가져다주는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건 법률을 준수한다. 즉 그들로서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참주들의 억압에 의해 대립과 갈등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때로는 참주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나라가 목표로 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개인들 역시 스스로를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부하며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일상의 착하고 선량하며 나라의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거리낌 없이 하물며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독재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행태를 목도하고 있다.

* 이 밖에도 부정의한 나라나 개인이 정의로운 나라나 개인을 압도하고 지배한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고도 남는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서조차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덕과 지혜와 상관없이 합심과 우애를 ‘집단을 강하게 만드는 조직 원리’로 생각하는 깡패집단의 논리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근대정치 사상사에서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양 국가 및 권력을 정당화하는 당연하고도 적극적 근거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즘은 시민의 동의나 도덕과 상관없이 전제 군주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통치 권력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주장하고 있고, 또 홉스주의 또한 개인들은 모두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보전욕구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안전한 삶의 보전을 위해 강력한 통제 권력을 자발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은 상호 계약의 형식으로 강권 국가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정의는 그러한 폭력성과 비참성을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책이라는 소극적 원리로 여겨져 ‘정의는 곧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 내지 부정의에 대한 응징’이라는 근대 이후의 정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현대의 권력가들은 고대의 참주 못지않게 부역 지식인들의 주도면밀하고도 충성스런 지원을 받아가며 보다 강력한 통제와 착취 기술은 물론 정의의 평판까지 얻게 해주는 고차원의 기술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더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축해가고 있다.

* 정의만이 합심과 우애를 발생시키고 일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나라와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말과 명분에서만 우위를 점할 뿐 순진한 사람들의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를 덕과 지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심과 우애의 근원이자 공동체와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뱉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해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 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패배주의적 냉소와 그럴듯한 담론들 모두는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 판매상들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겁한 자기변명이자 거짓 구호일 뿐이다. 현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치의 상대성과 중립을 미명으로 현실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호도하는 작태를 거듭하며 안존을 도모해왔으나 장구한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권력과 영화, 부와 명예, 거짓과 위선이야말로 한 순간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자 그 자신은 물론 그들의 자손들 모두에게 영원한 수치이자 멍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2400여 년 전 이미 그러한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지성으로 고양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합심과 우애어린 협동과 나눔이 경쟁과 대립, 증오와 차별보다 강함을 역설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순진한 사람들의 희망과 당위가 어때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고상한 순진성γενναία εὐήθεια이면 어때서!’, ‘그래서 그게 혼이 아닌 몸의 손해이고 죽음이라면 어때서!’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 이미 오래 전 그렇게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건넨 독배를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를 결코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 그것의 구현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우주적 존재이다.

* 선과 정의, 진실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철학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전파하고 그것의 구현을 향한 힘과 희망을 키워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적 실천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절망과 패배의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힘이자 그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빛에 대한 열망이자 사랑이다. 그 열망과 사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들을 불의에 대적하는 전장에로 다가서게 한다. 입장의 상대화는 다만 그런 입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힘으로 아니 강고한 힘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철학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유효할 따름이다. 요컨대 철학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두 입장이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그 싸움에 의해 인간의 삶과 행복이 보전되느냐 유린되느냐가 걸려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하는 영원한 토대이자 보루이다. 우리가 진정 철학을 하는 한, 철학은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분연히 일어서게 한다. 억압과 거짓과 독단에 순응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가짜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영원히 서 있어야할 지고의 당파성이자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당파성이다. 우리의 공부와 사색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우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텍스트 내용에 대한 이론적 사색에 머물러 플라톤 사상의 우열여부만을 논하지 말고 그것의 실천적 전략도 함께 모색하고 정치투쟁도 감행해가면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역사와 현실에서 그 우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믿음에 기초한 열망과 당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친분과 혈연 등 사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입장의 같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요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플라톤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지적인 긴장과 분투의 철학이다. 플라톤의 열망 이상의 정열이 우리 안에서 불같이 끝까지 타오를 수 있도록 플라톤을 읽는 우리 또한 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국가> 강해는 학술임과 동시에 격정을 동반하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철학은 무지와 탐욕에 휘둘려 가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염없이 시대착오적이고 불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