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㊵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401b-401e]

* 소크라테스는 시가의 선법과 리듬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 등 모든 기예, 나아가 인체 및 생물들의 본성에서도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ἦθος과 생각διάνοια이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인에 대해 좋은 성격의 상τοῦ ἀγαθοῦ εἰκόνα ἤθους을 시 속에 새겨 넣도록 강요하거나 장인δημιουργός들에 대해 동물들의 상이나 건물 그 밖의 어떤 제작물에도 나쁜 성격τὸ κακόηθες과 무절제ἀκόλαστος, 비굴ἀνελεύθερος, 꼴사나움ἄσχημον을 새겨 넣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ἐπιστατητέον고 그는 말한다.(401b)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수호자들이 나쁨의 모상 속에서ἐν κακίας εἰκόσι 양육될 경우 수호자들의 영혼 안에도 하나의 큰 나쁨κακὸν μέγ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καλός 우아한εὐσχήμων 본성을 추적하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장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αὔρα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아름다운 작품ἔργον으로부터 젊은이들οἱ νέοι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προσβάλῃ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401c)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ὁμοιότης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συμφωνί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401d)

*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서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시가교육μουσικῇ τροφή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것이 젊은이들의 혼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력 때문임을 밝힌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장단ῥυθμὸς과 화음ἁρμονία이 영혼의 내부에εἰςτὸ ἐντὸς τῆς ψυχῆς 가장 잘 스며들고καταδύεται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을 실어 날라φέροντα 영혼을 가장 힘차게ἐρρωμενέστατα 사로잡는ἅπτεται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우아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401d) 그런데 무엇보다도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ὁ ἐκεῖ τραφεὶς은 아름답게 제작되지 못했거나 아름답게 성장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곳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날카롭게 지각할 수 있다ὀξύτατ᾽ αἰσθάνοιτο ὡς ἔδει.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이전’πρὶν λόγον δυνατὸς εἶναι λαβεῖν, 즉 어려서부터 이미 그것을 제대로 비난하고ψέγοι 미워할μισοῖ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칭송하고 즐길 줄ἐπαινοῖ καὶ χαίρων 알며 그것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 훌륭하고 뛰어나게καλός τε κἀγαθός 된다는 것이다.(401e)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양육된 사람인 까닭에 자라면서 그 논거를 접하게 되면ἐλθόντος τοῦ λόγου 그 친근성 덕에δι᾽ οἰκειότητα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γνωρίζων서 제일 반기게ἀσπάζοιτ᾽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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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시가의 선법과 리듬뿐만 아니라 기타 그림과 자수, 건축 등 기타 예술 영역 모두를 가릴 것 없이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닮고 모방해야할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시가의 원칙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 전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 즉 원칙 적용의 확대와 일관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서 플라톤 예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을 간취할 수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품과 생각의 반영으로서 결코 도덕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성품을 만들고 좋은 성품은 좋은 예술을 만들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예술의 좋음과 나쁨이 있다면 예술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술이 반영하거나 담고 있는 성품과 생각의 좋고 나쁨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문제는 곧 도덕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즉 예술은 본질적으로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고 도덕은 심미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품과 생각으로 이끄는 좋은 예술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훌륭한 예술가와 예술 교육은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가 교육의 목표와 과정 일체를 법으로 제정하여 굳건한 제도로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문제를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논리적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주관적 요인이 강한 감각을 통해 생동하는 감성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감각의 영역은 매우 주관적이고 경계가 불분명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성 또한 민감하고 충동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마치 나쁜 풀밭에서 매일 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서 풀을 뜯어 먹으면 결국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는 것처럼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분별도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빠져들게 만들고 특히 감성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혼속에 들어와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답고 우아한 본성이 남긴 자취까지 추적해낼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분별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예술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자못 실감나는 수사적 비유까지 들어가며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그렇게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어야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 살면 그곳에서 산들바람이 건강을 실어 나르듯이, 그들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으로부터 젊은이들의 시각이나 청각에 뭔가가 부딪혀 와서 모든 것에서 젊은이들이 이로움을 얻게 되고 자신들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바로 아름다운 말에 동질감을 느껴 벗으로 삼고 일체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이처럼 플라톤에게 시각과 청각을 기초로 하는 예술과 예술 교육은 그 민감성의 크기만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매우 중차대한 과제로 제시된다. 예술 교육은 눈과 귀를 통한 감성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로는 비록 낮은 단계의 교육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특성 상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와 같은 감성 교육 단계에서의 감수성의 발달은 그 발달의 정도에 비례하여 이후 전개될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 과정에도 매우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오늘날 정서 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평가 못지않게 감성 교육에서 시각과 청각이 갖는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시각과 청각을 신의 선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갖는 교육적 의미 때문이다. 즉 시각은 하늘에 있는 지성을 관찰하여 우리 안에 있는 사유의 회전으로 하여금 그것에 닮게 하는 것이고, 청각은 우리 안에 있는 혼의 회전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연합군으로서 무사 여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티마이오스> 49a-d)

*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러한 시가 교육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도 지금 다루고 있는 음악 교육 분야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이곳의 논의 주제가 시가라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과 관련한 다른 대화편의 내용들과 비교해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와 관련한 내용 모두를 통틀어보아도 여기만큼 큰 비중과 분량을 가지고 음악이 다루어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이 여러 예술 분야 가운데 왜 그토록 유독 음악 분야를 강조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플라톤은 여기서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부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이야말로 그 어떤 다른 예술적 요소들보다 영혼 내부에 가장 잘 스며들고 우아함을 실어 날라 영혼을 가장 힘차게 사로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 예술들 가운데 감성에 작용하는 자극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시가의 원어 mousikē에서 나온 music이 오늘날 음악의 의미로만 쓰여 지고 있는 것도 어쩌면 가사에 비해 음악적 요소가 갖고 있는 감각적 직접성이 그만큼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가에 붙는 장단과 리듬은 단순히 감각상의 자극만이 아니라 시가가 가지고 있는 내용, 즉 그리스인들이라면 가슴에 새겨 두어야 할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자극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다 모종의 직감적 세계관으로 강력하게 아로새겨 넣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음악관에 따르면 좋은 장단과 리듬은 혼에 가장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그 자체로 조화를 구현하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배열되고 설계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는 장단과 리듬이 결합된 음송의 형식을 띠면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채용되고 전승 발전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서는 당대 시문학의 발달에 힘입어 점차 합창 등이 결합된 연극이라는 종합적인 공연 예술로 발전하면서 마치 오늘날의 영화가 대중문화 영역에서 누리는 인기 그 이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시민을 교육하거나 위무하는 최상의 수단으로 더욱 확고하게 인식되면서 급기야 나라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정례 공연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그 시가에 붙는 음악적 요소들은 아테네에서 젊은이들의 영혼에 가장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술인 동시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이끄는 일종의 지배 이념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자 토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그러한 정황 속에서 수많은 연극 공연 및 시가 교육 그리고 그것을 이끄는 시인과 지식인들의 양태는, 그야말로 플라톤이 보기에 당대 아테네 시민과 젊은이들로 하여금 현실의 극복을 위한 올바른 세계관과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함양하기는커녕,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위무라는 미명하에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부추겨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개인주의, 성적 쾌락과 현실 도피를 조장하여 정치 영역에서 선동 정치가 판을 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이런 까닭에 새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어렸을 적부터 그러한 풍토를 정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올바른 시가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입법의 형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제대로 된 시가 교육을 통해서만 올바른 감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나중 이루어질 지성 교육에도 제대로 된 기초를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된 시가 교육 내지 감성 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예술적 감수성이 길러지고 그렇게 형성된 예술적 감수성만이 이성적 능력이 발현되기 이전, 즉 어려서부터 참과 거짓을 직감하여 그것을 제대로 칭송하고 즐기거나 미워할 줄 알게 해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영혼 안에 받아들여 그것들로부터 양육되어 스스로훌륭하고 뛰어나게 해주며, 이후 아름다움의 논거를 접했을 때에도 그 친근성 덕에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서 제일 반기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가를 통한 예술 교육은 감성 교육 차원에서 참과 거짓을 민감하게 직감하는 이른바 가치 감수성, 나아가 정의감 내지 도덕의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다음 단계에서 이루어질 과학교육과 철학 교육의 건강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제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플라톤이 언급하고자 한 시가 교육의 근본 목적이자 그 중요성인 것이다.

* <국가>의 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현실의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한, 여기서 펼쳐지는 그의 예술과 음악에 대한 사유 또한 그가 살던 당대 아테네의 정치적 현실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특히나 시가는 줄곧 이야기해왔듯이 단순히 노래나 시가 아니라 고대 아테네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앞서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뿐만 아니라 당대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은 모두 시가 자체가 아테네 사람들 모두가 숙지해두어야 할 기초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들 모두 시가 교육을 당대 아테네의 가치관을 유포하고 공유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시가를 내용으로 하는 연극과 합창 공연은 아테네에서 시민 교육의 일환으로 나라의 재정적 지원 혹은 부유층의 기부를 토대로 정기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플라톤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수차 언급하였듯이 그와 같은 연극이나 시가의 내용을 짓거나 유포하는 당대 시인들과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행태였다. 플라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위기에 빠진 아테네를 구제하기는커녕 더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으로 철저하게 비판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플라톤이 정의로운 나라를 확립하는 일환으로 젊은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왜 그토록 많은 논의를 할애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왜 그토록 단호하고도 엄격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무려나 플라톤의 예술관은 비록 수호자 교육이라는 특수한 목적 하에 제시된 것이라 할지라도 현대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비추어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일양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 특히 한 개인이 갖는 적합성을 아무리 그 나름의 소질이나 적성과 연관 지운다 해도 평생을 통해 다양한 예술적 경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까지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납득하기가 힘들다. 에를 들어, 오늘날 아무리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관생도일지라도 음악적 감수성은 각기 다를 수 있고 오히려 그와 같은 다양한 경험들이 훗날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과 예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식 자체만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플라톤은 비록 진리 인식과 관련하여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의 심급을 낮게 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예술 자체의 중요성까지 낮게 본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예술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다만 기본적으로 최소한 현대의 자유주의적 예술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예술관이 내세우고 있는 예술과 인격 내지 도덕의 결합 그리고 나아가 정치적 현실과 현실의 결합은 분명 그의 예술관이 갖는 특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을 정치적 현실과 연관시키는 관점 자체를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이 저질렀던 오류, 즉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시켰던 피폐한 경험들을 토대로 무조건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 예술과 정치적 현실의 관계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적 예술관이나 순수 예술지상주의는 비록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현대 예술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자유주의 예술관 역시 현대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하나의 경향일 뿐 새로운 정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고 비판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철학적 균형 감각과 비판 정신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입장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주도하고 있었던 개인주의적 예술관에 대한 플라톤 나름의 비판적 균형 감각의 소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라톤이 주목하고 있는 예술과 도덕, 예술과 정치의 문제는 예술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부동의 주제로 예술사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고 그 때마다 플라톤의 관점은 매우 의미 있는 토론의 토대와 출발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402a-402d]

* 그리고 플라톤은 이것을 마치 글자들γράμμα을 충분히 읽을 줄 알게 될 때까지의 경우에 비유한다. 즉 소수의 요소 문자들τὰ στοιχεῖα이 그것이 결합된 단어들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περιφερόμενα 경우 그것이 작게 쓰이건 크게 쓰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것들 모두를 주목해가면서ἠτιμάζομεν 열심히 식별αἰσθάνεσθαι할 때 충분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402a) 글자들을 알기 전에는 글자들의 모상εἰκών이 물속이나 거울에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므로 글자를 익히는 기술τέχνη과 훈련μελέτη은 글자들의 모상을 익히는 기술이나 훈련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402b) 우리가 수호자로 길러내려는 사람들, 즉 시가에 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절제σωφρ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자유로움ἐλευθεριότης, 고매함μεγαλοπρέπεια의 부류들εἴδη,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ἐναντία 모두가 시가 속 여기저기서 옮겨가며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뭔가 그것들 안에 그것들 자체αὐτὰ와 그것들의 상들εἰκόνας αὐτῶν이 들어가 있음ἐνόντα을 깨닫고αἰσθανώμεθα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것을 믿게 되면서 비로소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 된다는 것이다.(402c)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글과 글자 그리고 글자의 모상의 예를 사람의 혼에도 연결시킨다. 즉 사람의 혼(시가) 속에 훌륭한 성품ἦθος(어떤 글자)이 있고 그것과 합치하고 조화되는 것들이 외모(글자의 모상)에도ἐν τῷ εἴδει 있게 된다면, 그리고 이것들이 같은 원형τύπος(글자 자체)에 관여하고μετέχοντα 있다면 이는 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τῷ δυναμένῳ θεᾶσθαι 가장 아름다움 광경θέαμα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ἐρασμιώτατον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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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이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자를 익히는 과정은 우리가 처음 글을 터득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자를 터득하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게 언급된 이 부분의 내용을 좀 풀어 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선 글들을 반복해 보면서 글이나 단어들이 몇 개의 한정된 요소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그러한 글이나 단어들을 보거나 또 사람들이 그 글들을 어떻게 읽는가를 반복해서 접하면서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를 어렴풋이나마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정을 오랜 시간 반복해서 경험하며 글자를 식별하는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 어떤 글이나 글자가 물속이나 거울에 흐릿하게 또는 굴절되어 나타나더라도 그 요소 글자들의 종류와 음가가 각각 무엇이고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분명하게 식별할 줄 알게 되고 종국에는 그것을 토대로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의 내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에서 글자를 아는 것에 이르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앞에서 예술적 감수성이 훗날 지적 감수성의 토대가 된다는 언급의 연장선상에서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인간의 인식 능력의 발전과 관련한 인지심리학 내지 인식론적 흥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플라톤의 인식론과 관련한 몇 가지 토론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이곳에서 글자를 알게 되는 과정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을 근대 인식론적 용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즉 감각(글자에 대한 최초의 지각)은 모상 수준의 것을 지각하는데 불과하지만 그러한 개별적인 지각 과정에서 현상에 대해 비슷한 지각, 즉 비슷한 감각적 경험이 여러 번 반복해서 생기다 보면 일정한 경험적 관념이 형성되고(글이 요소 문자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단계) 그러한 경험적 관념은 다시 비슷한 현상을 접하면서 주어진 감각 소여(所與)에 더해져 그러한 현상에 대한 보다 더 선명한 경험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어느 정도 식별하고 익히는 단계) 그리고 다시 또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경험적 관념들과 새로운 감각 소여들 간의 상호 작용이 상승 반복하면, 비슷한 관념들은 모종의 동일한 현상으로 추상화되고 마침내 일반적인 경험적 관념들, 즉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개념지가 생겨나게 된다.(요소 문자의 종류와 음가를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하여 반복된 경험과 훈련을 통해 획득한 이러한 개념지를 토대로 비로소 물이나 거울 속 등에 그것들의 상이 보일 경우 그것이 어떤 글자인지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된다.(글자의 종류와 음가를 충분히 식별할 줄 아는 단계)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을 토대로 글을 충분히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인식론에서 경험지의 성립과 관련하여 흄(D. Hume)이 언급한 관념연합의 법칙을 연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추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반복적인 경험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오성 능력에 있다고 가정하면 경험지를 감성과 오성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칸트(I. Kant)를 연상케도 한다. 다만 여기서의 플라톤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글자는 그에 대한 내용적 인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가지의 물자체가 아닌 주관 바깥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실물 글자인데다 비유의 내용 역시 그 실물의 글자를 식별하여 개념지로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은 칸트의 구성설적 개념지와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할 것이다. 플라톤의 앎은 구성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모상에 대한 모사지로 시작하여 점차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여 형상으로서의 완전한 참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있는 직관지이다.

* 그런데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글자와 관련된 존재론적 층위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와 용기, 자유로움 등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개념들의 층위와 상호 맞물려지면서 이곳의 내용이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즉 글자의 비유402a-b)(A)와 이어지는 덕들에 관한 언급(402c)(B)은 각기 글자와 덕들을 깨닫는 과정이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내용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상응 관계가 분명치 않은 까닭에 이 내용을 이데아론과 결부시키는 데 많은 논란과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우선 덕들에 관한 언급(B)에서는 덕의 부류들과 그것들 자체, 그리고 그것들의 상이라는 말도 나오고 이어서(402d) 그에 상응하여 혼 안의 성품들과 외모 그리고 그것들이 관여하는 원형이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존재론적인 층위로 구분해 보면, 다분히 실물과 모상, 그리고 이것들에 관여 내지 분유되어 있는 형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즉 이 부분을 이데아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 비유 부분(A)을 보면 여기(B)에서 언급되고 있는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A와 B 두 부분에서 존재론적 층위에 맞추어 같은 층위에 해당하는 개념들을 대응시켜 보면, 실제 쓰고 읽는 글자는 실물에, 물속이나 거울에 비친 그 실물 글자의 상은 모상에, 그리고 글자(요소 문자) 자체는 형상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A에는 원형 내지 형상을 가리키는 ‘자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형상으로서 글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B에서는 존재론적 층위에 있어 이데아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들이 다소 명시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B부분을 이데아론을 기초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즉 시가와 현실 여기저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거나 경험되는 덕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과 함께 거론된다는 점에서 덕들의 구체적인 양상들, 즉 덕의 모상들이고, 그렇게 반복되는 상들에서 추상된 일반적 덕목들은 개념지로서 덕목들이며, 그것들 자체는 일반적인 덕목들 배후에 있는 본질이자 형상으로서의 덕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이어지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외모와 성품, 그리고 원형과도 큰 어려움 없이 짝처럼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외모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무규정적 성격의 모상이고, 영혼의 성품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모상의 운동성과 원형의 존재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즉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이며, 원형은 그것에 관여되어 있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자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는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명할 때 많이 쓰고 있는 관여metexis라는 말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B부분에서도 ‘덕들 부류’라는 표현에서 ‘부류들’eidē이 가리키는 것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일반적인 ‘개념적 차원에서의 덕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논란이 많다. 왜냐하면 원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들이 들어 있는 것’이 그 ‘부류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갈리기 때문이다.(E. Zeller, 박종현 등은 부류들이 형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예 부류라는 말을 형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그에 이견을 갖는 사람들(J. Adam 등)도 많다. 이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선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제7권에 들어가기 한참 전인 이 부분에서 전후 맥락상 아무 시사도 없이 그 중대한 이데아론을 꺼내놓는다는 것이 뜬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주장은 이곳에서 말하는 ‘글자에 대한 앎과 글자의 상을 알아보는 것’ 그리고 ‘절제 등 그런 부류들에 들어 있는 그것들 자체와 그것들의 상을 깨닫는 것’이 모두 동일한 전문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언급(402b, 402c)과 내용적으로 상호 모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체’라는 말을 이데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그 말은 플라톤 자신 어떤 대상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다름 아닌 그 대상의 상에 대한 반복적인 식별 훈련 내지 경험을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플라톤의 주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란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경험과 수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야말로 순수한 지성적 직관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지성 교육의 전단계로서 감성 교육이 갖는 중요성과 그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는 문맥으로만 이해해야 하며, ‘자체’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에서 모상에 대비되는 실물의 의미 그 이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야 또 B부분의 내용과 A부분의 내용이 플라톤의 의도대로 서로 모순 없이 서로 동일한 내용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 말대로 감각적 지각의 반복적 수련과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 비록 의미상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긴 할지라도, 인간의 인식 과정에서 하물며 플라톤에게서 조차 과연 그것들이 전혀 별개의 단계로 서로 단절되어 있는지는 그들 입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마치 물을 끓이면 어느 순간 액체 상태가 기체로 변하듯이 그 상태 자체는 별개의 것으로 규정될 수는 있지만 그러한 현상이 드러나는 이행과정 자체는 하나의 연속을 이루고 있다.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 역시 어느 순간 전후맥락 없이 별안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선승이 피나게 힘든 고행 끝에 어느 순간 깨달음에 이르듯이 끊임없는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피나는 사유와 성찰 그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획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자의 비유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덕의 식별과 관련한 언급들을 같은 선상에서 풀어서 비교하자면,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 등은 소수의 글자들(알파벳) 같은 부류들이고 시가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그것들의 모상이고 시가는 글(단어 혹은 센텐스)에 해당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글자에 대한 앎은 점차 글로 이루어진 시가를 읽는 능력으로 발전하고, 시가를 읽으면서 내용에서 획득되는 개별 덕들에 대한 앎은 종국적으로 시가가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관에 대한 깨달음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글자의 모상을 익히는 것은 실물 글자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가를 익히는 기초가 되면서 종국적으로 시가의 본질에 대한 앎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부류-자체 그리고 외모-성품-원형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 역시 감성 교육 단계에 이어 앞으로 수행될 과학교육,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철학교육의 단계 및 그것들에 상응하는 교육 대상들을 함축하기 위해 끌어들인 구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앎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도 비슷한 구조를 드러내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된다. 모상을 아는 것이건 원형을 아는 것이건 모두가 동일한 전문 지식과 수련에 속한다는 플라톤의 말은 아마도 참된 지식의 체득과 관련한 이러한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이 부분이 이데아론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에 동의한다.

* 아무려나 모상에 대한 지각과 원형 자체에 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 자신이 그것들을 동일한 전문지식과 기술적 수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론적인 영역에서건 실천적인 영역에서건 그의 철학 내지 철학함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절제, 용기, 자유로움, 고매함의 부류들, 그리고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들 모두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글자를 익힘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작은 것에 있건 큰 것에 있건 무시하지 않고 식별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 전개과정에서 점차 드러나겠지만 그가 설계한 교육의 단계와 그것들이 총체적 통일성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교육의 단계를 감성 교육의 단계, 과학 교육의 단계, 철학 교육의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비록 감성 교육에 대한 과학 교육, 지성 교육의 우위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과학 교육이나 철학 교육 모두 감성 교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식별을 위한 반복적인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οὶ이란 단순히 선천적으로 지성적 소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더해 크건 작건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기술적 수련을 반복하면서 공력을 쌓아가는 사람,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자신의 삶 자체를 최상의 예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402d-403c]

* 이에 글라우콘은 어떤 사람이 영혼에서 어떤 결함이 있다면ἐλλείποι 그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결함이 신체적인 것τι κατὰ τὸ σῶμα이라면 그는 참고서ὑπομείνειεν 기꺼이 반기려 할 것이라고 말한다.(402d) 그러자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글라우콘에게 신체에 결함이 있는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있거나 있었던 것이라고 지레 짚어 말한 후 그의 말에 동감을 표하면서 절제σωφροσύνῃ와 과도한 쾌락ἡδονῇ ὑπερβαλλούσῃ 사이에 공통점κοινωνία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쾌락이 고통λύπη 못지않게 사람을 얼빠지게ἔκφρων 만드는 것인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반문한다.(402e) 이에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쾌락과 그 밖의 덕ἀρετῇ들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오만함ὕβρις과 무절제(방종)ἀκολασία와는 아주 잘 어울리며 성적인 쾌락ἡδονὴν τῆς περὶ τὰ ἀφροδίσια보다 더 크고 짜릿하고ὀξύς 광적μανικός인 쾌락은 따로 없음을 서로 확인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랑ὁ ὀρθὸς ἔρως이란 시가를 알고 절제를 갖춘 사람답게 단정하고κόσμιος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인 한, 올바른 사랑을 그 어떤 광적이거나 무절제 같은 것에다 갖다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403a)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ἐραστής와 소년 애인παιδικὰ이 서로 올바르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결코 그런 쾌락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아래와 같이 입법해야νομοθετέω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소년을 사랑하는 자가 소년 애인을 설득할 때는ἐὰν πείθῃ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χάρις로 사랑하고φιλεῖν 같이 지내며συνεῖναι 어루만져야ἅπτεσθαι 하며 그밖에 다른 일로도 그 이상의 관계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상대와 사귀어야 한다ὁμιλεῖν.(403b) 그리고 이를 어길 경우 시가에 무지하고ἀμουσία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ἀπειροκαλία으로 비난ψόγος을 받게 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관한 논의ὁ περὶ μουσικῆς λόγος가 끝맺어야 할 곳에서 끝맺음을 본 것 같다고 말하고 아마도 ‘시가의 문제’τὰ μουσικὰ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τὰ τοῦ καλοῦ ἐρωτικά로 끝나야만 할 것 같다는 말로 376e부터 시작된 시가 교육에 관한 긴 논의를 모두 마무리 한다.(40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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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영혼 속에 있는 성품과 외모 그리고 원형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원형에 관여하고 있다면 원형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고 시가에 밝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글라우콘은 자기는 신체적 결함이 있더라도 영혼이 온전하면 참고 사랑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외모가 떨어지는 소년과 소년애 관계에 있음을 내비친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을 시가에 밝은 사람이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를 의식해서 지레 변명하듯 나온 고백일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지금 수립되고 있는 나라에서 소년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을 입법해야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 육체적 관계를 당연시 했던 소년애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올바른 소년애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것이며 마치 자식을 대하듯 선의로 사랑하고 같이 지내며 어루만져야 하며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향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구애를 철저히 물리치면서 오직 철학적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실제로 <향연>에서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빌려 지혜를 향한 에로스의 치열한 여정을 아주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205e-212a)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알게 되는 과정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마치 불가의 수도승이 교(敎)와 선(禪)을 아우르며 치열하고도 고뇌에 찬 구도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극적 희열과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듯이 시가의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문제이고 그러한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문제, 즉 철학의 문제는 ‘지혜에 대한 사랑’의 문제인 것이다.

* 한편 사람들은 종종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의미를 이와 같은 소년애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부정하는 태도를 일컫는 것으로 잘못 한정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토닉 러브’는 육체적 관계 자체를 부정하느냐 않느냐에 상관없이 다만 사랑은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지혜에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플라토닉 러브는 앞서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 즉 철학인 것이다. 지혜를 열망하는 에로스는 진정으로 그것을 열망하는 한, 육체적 쾌락조차 절제의 덕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혜를 고양하는 동력의 하나로 승화된다.

* 이로써 제법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전개되었던 시가 교육에 관한 논의가 시가 교육의 목적과 관련한 논의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 되고 이어서 체육 교육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참고> 이 글은 3월 19일 새벽에 처음 올린 글의 일부를 고쳐 3월 19일 밤에 다시 올린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㊴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계속)

 

[397b-398b]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관련하여 우선 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을 기초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으로 구분하여 논의한 후, 이제 그에 이어 그 이야기 방식을 화음(선법)ἁρμονία과 장단(리듬)ῥυθμός을 기초로 논하고자 한다. 그런데 서술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방식을 구성하는 선법과 리듬 또한 변화들이 작고 한 가지로 이루어지는 경우와(397b) 온갖 형태의 변화를 갖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야기 방식은 서술 방식에 의해서도 두 가지로 구분되었지만 선법과 리듬에 의거해서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모든 시인은 앞서 말한 두 유형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 중 전자나 후자 또는 양쪽을 혼합한συγκεραννύντες 어떤 것을 만나게 될 텐데,(397c) 이 나라에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ἐπιεικής ἄκρατος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전자의 방식이지만 아이들과 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들 그리고 대다수 군중ὄχλος들은 반대로 후자나 혼합형이 월등하게 제일 즐거운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397d)그러나 이 나라에는 제화공이든 농부든 전사든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ἕκαστος ἓν πράττει 사람들만 있으므로, 다시 말해 양면적인 사람διπλοῦς ἀνὴρ이나 다방면적인 사람πολλαπλοῦς ἀνὴρ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은 우리의 정체πολιτεί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7e) 그리고 만일 온갖 것이 다 될 수 있고 또 온갖 것을 다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기도 하지만 생기는 것이 합당하지도 않으므로 거룩하고 놀랍고 재미있는 ἱερὸν καὶ θαυμαστὸν καὶ ἡδύν 분이라 추켜세워 준 뒤 다른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한결 딱딱하고αὐστηροτέρός 덜 재미있는ἀηδής 시인과 설화 구술가μυθόλογος가 채용될 것이며(398a) 그들은 우리한테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을 모방해 보여주고 이야기도 군인 교육에 착수했을 때 법제화했던 규범τύπος에 의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서 이야기λόγος 및 설화μῦθος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이제 남은 것은 노래ᾠδή와 선율(서정시가)μέλη의 양식τρόπος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말한다.(39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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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방식(말투)leksis과 서술 방식(이야기의 진행)diēgēsis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야기 방식은 앞서 다루었듯이 어떤 서술방식을 따르는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하고 앞으로 다루어지듯이 어떤 선법과 리듬에 따르는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한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은 가사와 노래로 구성된 시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서술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시가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데 노랫말 즉 시가 가사의 표현 방식으로서 ‘단순 서술방식’과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한 가지만 모방하는 서술방식’과 ‘온갖 것을 모방하는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이전 강해에서 살폈듯 이야기 방식이 서술방식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각기 구분되고 있다. 즉 1)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서술방식 중 최대한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지양하되 모방을 할 경우라도 훌륭한 사람이나 훌륭한 것 한 가지만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2)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단순 서술방식은 지양하고 대부분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을 택하되 그것도 온갖 것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 그리고 이제 서술방식에 기초한 앞선 논의에 이어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이 논의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시가는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가사와 관련된 서술방식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그것에 붙여지는 선법과 리듬에 대한 논의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리듬과 선법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들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이 견지해야 할 기본 원칙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은 온갖 것을 모방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합형의 이야기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politeia에 어울리는 사람은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리지 않고 모방하는 양면적이거나 다방면적인 사람은 발견되지 않고 제화공은 제화공으로, 농부는 농부로, 전사는 전사로 발견될 뿐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나라로 추방되어야 한다. 오히려 한결 딱딱하고 덜 재미있는 설화작가가 우리에게 더 이로움을 주므로 처음에 법제화했던 규범에 의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하면서도 시가 교육을 통해 양성될 수호자가 다스리는 나라 즉 정의로운 나라의 정체가 지향해야 할 기본 원칙의 일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질과 적성에 기초한 한 사람 한 가지 일 즉 일인일기의 전문가주의와 그러한 전문가주의에 기초한 분업주의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 원칙은 아직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2권의 서론적 논의(370b-c)에서도 그랬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다루어질 이상국가의 기본 틀과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국가> 내내 간단없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있어서 이야기 및 설화와 관련된 논의를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 노래와 선율의 방식에 대한 논의를 개시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시가의 노랫말에 관한 논의 즉 이야기 내용과 그것의 서술방식에 기초한 논의이고 지금부터 개시되는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가사에 붙여지는 음악적 요소들과 관련한 논의이다.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1-2-1-2-2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398c-399e]

* 소크라테스는 노래와 선율의 양식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에 관한 논의 또한 앞서 말한 것과 일치를 보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찾아냈다고 말을 한다. 글라우콘은 그 ‘모두’에서 자신은 제외되는 것 같다고 겸손해하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도 능히 말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398c)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바로 뒤에서(398e) 글라우콘이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ός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노래μέλος는 세 가지 즉 노랫말λόγος과 화음(선법)ἁρμονία, 그리고 장단(리듬)ῥυθμός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398d)

* 소크라테스는 우선 노랫말이란 곡이 붙지 않은μὴ ᾀδομένος 말과 다를 것이 없고 화음(선법)과 장단(리듬)은 이 노랫말을 따라야 함을 밝힌 후 바로 글라우콘과 선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398e) 여기서 소개되는 화음의 종류와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혼성 뤼디아 화음μιξολυδιστί ἁρμονία과 고음 뤼디아 화음συντονο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2) 이오니아 화음ἰαστί ἁρμονία과 뤼디아 선법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3) 도리스 선법δωριστὶ ἁρμονία과 프뤼기아 화음φρυγιστί ἁρμονία. 이 중 1)은 비탄조θρηνώδης의 선법으로서 남자는 물론 훌륭해야만 되는δεῖ ἐπιεικεῖς εἶναι 여인들한테도 무용한 화음이고 2)는 유약하고μαλακός 게으름ἀργία과 주연(酒宴)에 맞는συμποτικός 화음으로서 수호자에게 가장 부적절한ἀπρεπέστατον 화음이다. 다만 나머지 3)의 화음만은 훌륭한 사람들의 어조φθόγγος와 억양προσῳδία을 적절하게 모방하게 될 화음으로서 남겨두어야 할 화음으로 제시된다.(399a)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처하는 모습으로 각기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전투 행위나 강제적인 업무βίαιος ἐργασία 등 불가피하게 불운한δυστυχούντων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습과, 그 반대로 운 좋게εὐτυχούντων 평화로운εἰρηνικός 상황에서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행위를 행할 때의 모습으로 나누어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들을 각각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부상이나 죽음 등 역경에 처하더라도ἀποτυχόντος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παρατεταγμένως 참을성 있게καρτερούντως 막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득하며 요구를 할 때에는 신께는 기도εὐχή로써 하되 사람한테는 가르침διδαχή과 충고νουθέτησις로써 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δεομένον 가르치려거나 변화를 설득하려μεταπείθω 하면 조신하게 귀를 기울이는(자신을 숙이는)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 사람, 그래서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πράξαντα κατὰ νοῦν 거만하지 않으며μὴ ὑπερήφαν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금도 있게μέτριος 행동하며 결과τὰ ἀποβαίνοντα에 만족하는ἀγαπῶντα 사람이다.(399b-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노래ᾠδή와 선율μέλος에는 많은 현χορδία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모든 선법을 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ὄργανον도 필요 없고 그에 따라 삼각현τρίγωνος이나 펙티스πηκτίς 등 여러 현과 여러 화음(선법)을 이용하는 모든 악기의 연주자ποιός나 제작자를 양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99d) 특히 현이 가장 많은 아울로스αὐλος가 그렇다. 온갖 화음(선법)παναρμόνια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 자체가 아울로스의 모방물μίμημ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뤼라λύρα와 키타라κιθάρα 그리고 농촌에서 쓰는 쉬링크스(피리)σῦριγξ 정도만 남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마르쉬아스Μαρσύας와 그의 악기보다 아폴론과 그의 악기를 선호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καινός 것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9e)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앞서 372a에서 호사스럽게τρυφάω 산다고 말했던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새 다시 완전히 정화διακαθαίροντες되었다고 말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나머지 것들인 화음에 이어 장단(리듬)ῥυθμός(rythmos)에 관해 논의하자고 말한다. 장단과 박자βάσις(步格,basis) 역시 선법이 그러했듯이 현란하거나 다양해서는 안 되며(400a) 운율πούς(詩脚,pous)과 선율μέλος(melos) 또한 절도 있고κόσμιος 용감한 사람의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라가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리듬에 관해 묻는데 글라우콘은 음정φθόγγος에 네 가지가 있듯 운율에는 3종류가 있지만 어떤 리듬이 어떤 삶을 모방해내는 것인지는 모른다고 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에 관해 다몬Δάμων에게 상의하겠지만 그에게서 들은 몇 가지 장단 즉 어떤 복합장단σύνθετος(복합적인 시각), 에노플리오스ἐνόπλιος(전쟁조), 닥틸로스δάκτυλος(장단단격), 이암보스ἴαμβος(단장격), 트로카이오스(장단격)τροχαῖος(400c) 등을 소개한 후 남겨야 할 박자(basis)와 장단(rythmos)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이 좋은 장단εὔρυθμος을 따르고 또 좋은 장단은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καλός λέξις을 닮은 것이고, 꼴사나움ἀσχημοσύνη은 그 반대의 것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단ῥυθμός과 선법(화음)ἁρμονία이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르는 한 좋은 화음εὐάρμοστος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을 따르고 나쁜 선법은 그 반대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방식은 영혼의 성품ἦθος을 따르고 나머지 것 즉 장단과 선법은 그 이야기 방식을 따른다고 말한다.(400d) 요컨대 좋은 말εὐλογία과 좋은 화음εὐαρμοστία,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 좋은 장단εὐρυθμία은 단순함(좋은 성품, 순진함)εὐηθείᾳ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함이란 어리석음ἄνοια을 좋게 부르느라 우리가 단순함이라고 부르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것을 행하게 되려면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400e) 그리고 장단과 선법 등 음악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회화γραφικὴ나 그와 같은 모든 기예δημιουργία 즉 직조ὑφαντική, 자수ποικιλία, 건축οἰκοδομία을 위시하여 다른 살림살이들의 제작은 물론 우리 몸σῶμα의 본성φύσις과 다른 모든 생물φυτόν들의 본성도 이런 것들 즉 우아함, 좋은 성품과 단순함, 그러한 성품을 갖춘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꼴사나움과 나쁜 장단ἀρρυθμία과 나쁜 화음ἀναρμοστία은 나쁜 말κακολογία과 나쁜 성품κακοηθος의 형제ἀδελφή이고, 그 반대되는 것들은 절제 있고σώφρων 좋은ἀγαθός 성품의 형제이자 모방물μίμημα이라고 말한다.(40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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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논하는 이 부분에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용어가 많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음악과 근현대 음악이 갖는 차이 때문에 그 용어들을 어떻게 오늘날의 음악 용어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고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어들도 차이가 있다. 우리 말 역본들(박종현 역본, 천병의 역본, 학당 초고본)에서도 차이가 있다. 참고로 우리말 역본에서 차이가 나는 주요 역어들을 그리스어 원어와 병기하면 아래와 같다. 강해에서는 편의상 학당 초고본(아직 최종 역어는 아님)을 기준으로 표기했으나 그 역시 아직 최종 역어는 아니다. 약어 : 학초=학당 초고, 박=박종현 역본, 천=천병희 역본. 쪽수 표시는 최초 표기된 곳.

 

ἁρμονία(harmonia) 397b- 선법(박, 천), 화음(학초)

– 학당 초고는 일단 ‘화음’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harmonia는 우리가 흔히 알 듯 고저를 달리하는 둘 이상의 음정들이 동시에 울리는 경우의 화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계 즉 고저를 달리하는 음정들의 일정한 계열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법’이라는 역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ῥυθμός(rythmos) 397b 리듬(박, 천), 장단(학초)

ᾠδή(ōdē) 398c – 노래(박, 천, 학초)

μέλη(melē) 398c – 서정시가(박), 음악(천), 선율(학초),

μέλος(melos) 399e – 노래(박), 멜로디(천), 선율(학초),

βάσις(basis) 399e – 운율(천, 운각(韻脚)400a), 보격(步格)(박, 운율400a), 박자(학초)

πούς(,pous) 400a – 운율(천, basis와 동일하게 번역), 시각(詩脚, 박), 운율(학초),

φθόγγος(phthogos)400a – 소리(학초, 박, 천), 또는 음정(박)

εὔρυθμος(eurythmos) 400d – 좋은 리듬(박, 천), 장단이 맞는 것(학초),

εὐάρμοστος(euharmostos) 400d – 조화로움(박), 좋은 선법(천), 화음이 맞는 것(학초)

 

* 아래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정암학당 해당 부분 역자 김주일 박사가 초고에 붙여 놓은 임시 각주들이다.

1) 399e 마르쉬아스 : 마르쉬아스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의 형상을 한 사튀로스들 중 하나로서, 아울로스 연주를 잘해서 뤼라를 즐겨 연주하는 아폴론 신과 대결을 벌였다는 신화적 존재이다.

2) 399d 아울로스 : 아울로스는 피리의 일종으로 관악기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이 없다. ‘현이 가장 많다’는 것은 여기서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울로스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해 다양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399c-d에 나오는 ‘현이 많다’란 말도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399e basis(박자, 운각) : 그리스 리듬에서 강음은 장음에 주어지고, 하박(basis, thesis) 역시 장음에 주어진다. 따라서 장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시작부분에 강음(ictus)과 하박이 떨어지고, 단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나중에 나오는 장음에 강음과 하박이 떨어진다. 문자에 충실해 보면 basis의 다양함이란 이런 강박의 위치의 다양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기초이론의 이해>를 보면 metre를 박자로 이해한다. 문제는 그리스 시가의 metre가 강약 중심으로 짜인 것이냐의 문제다(역시 같은 책에서 리듬을 장단의 배열로 이해한다). 엮어보면 박자는 기본적으로 첫 박의 장음에 강세가 가는 방식으로 짜인다. 리듬은 장음과 단음의 배열이다. 박자는 배경으로 규칙적으로 깔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리듬은 장단음을 기본 요소로 짜인다. 그런데 그리스 음악은 기본이 시가이기 때문에, 자연적 장단음을 가진 말로 짜인다. 따라서 기본 metre에 따라 박자는 정해져 있고, 리듬도 이것과 기본적으로 겹치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쪼개거나 늘리는 것을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

4) 399e-400a 리듬(박자) : 고대 그리스 음악의 리듬(rhythmos)은 시가의 운율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리듬(rhythmos)은 시가 운율의 장단음 배열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한편 시가 운율의 기본 단위는 장음과 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지는 운각(pous)으로서, 이것들이 모여 운율(metron)이 되며, 시가의 한 행은 한 운율이 된다. 다른 한편 하나의 마디에 들어가는 하나의 운각(운각을 박자와 같은 의미로 볼 때, 서양음악에서는 한 마디에 여러 박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고대그리스 음악에서는 기본적으로 한 박자를 한 마디로 잡는다)을 상박(upbeat)과 하박(downbeat)로 나누고 상박을 ‘arsis’라 부르고 하박을 ‘basis’ 또는 ‘thesis’로 불렀다. 상박은 단음 또는 단음들이고 하박은 장음이다.(Adam은 Westphal을 따라 두 개의 운각과 하나의 강음-ictus-이 하나의 basis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박자(basis)는 원래 하박을 부르는 명칭이고 운각(pous)은 장단음이 결합 된 것으로, 운율의 기본 단위이지만 현재 맥락에서는 리듬과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Ancient Greek Music(M.L.West, 1992), p.129~137 참고. 이런 취지에서 rhythmos, basis, pous를 뉘앙스는 살리고 정확성은 좀 약화하여 장단, 박자, 운율로 하고자 한다. 뉘앙스를 구별한다면 장단의 기본 단위는 운율(pous)이고, 이 운율은 박자(basis)에 의해 이분 되는데, 특히 basis는 강음을 포함하여 장단에 입체감을 주며, 장단은 운율들이 모여 변형을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5) 400a, 화음(선법)을 구성하는 4가지 : 화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음정의 비율(2:1, 3:2, 4:3, 9:8)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dam 주석 참고). 박자를 구성하는 세 가지는 운각(pous)을 이루는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구성되는 방식으로 닥튈로스(장-단-단)나 스폰데이오스(장-장)처럼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2:2가 되는 경우, 이암보스(단-장)나 트로카이오스(장-단)처럼 2:1인 경우, 크레티코스(장-단-장)처럼 3:2인 경우가 있다.

6) ‘그런데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다몬이 어떤 복합장단을 행진에 맞는(에노폴리온) 장단이며 닥튈로스라고, 심지어는 영웅적 장단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들은 것으로 생각하네’oimai de me akēkoenai ou saphōs enoplion te tina onomazontos autouῦ syntheton kai daktylon kai ērōon ge, .. 400b : 이 부분도 구문에 대한 이해에 따라 번역이 갈린다. 우선 남성 4격의 tina에 생략된 명사가 리듬rhythmos이나 아니면 운각metron이냐의 여부에 따라 syntheton의 번역이 갈린다. 일부(Griffith, Leroux, Shorey)는 생략된 명사를 중성임에도 metron으로 보거나 운율pous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 맥락을 시가적이라고 본 듯하다. 그런데 리듬의 문제가 시가와 음악을 구분 짓기 애매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음악의 맥락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듬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그래서 syntheton을 ‘복합장단’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tina를 syntheton에 거는 쪽(Waterfield)과 enoplion에 거는 쪽(Leroux, Sachs) 그리고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tina에 대한 이름으로 나머지 네 개를 보는 쪽(Shorey)이 있다. 또한 enoplion과 syntheton을 어떻게든 묶고, 나머지는 뒤의 분사구문의 목적어로 보는 방식(천, 박)도 있고, 이들을 묶고 tina에 대한 세 이름으로 보는 방식(Adam)도 있다. 문법적으로는 te tina에서 te를 enoplion에 붙는 te로 볼지, 그냥 te, ..kai로 볼지 양쪽으로 갈리는 듯하다. 전자는 어순이 자연스럽고 후자는 뜻에 더 맞아 보인다. 행진풍의 리듬을 복합적이라고 하기에는 복합적이라는 말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합장단은 운율(pous)이 장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영웅적이고 닥튈로스라고 한 것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가 닥튈로스 운각의 6각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닥튈로스나 스폰데이오스가 ‘장-단-단’ 또는 ‘장-장’으로서 두 개의 장음 또는 한 개의 장음과 두 개의 단음으로 구성된다면, 이암보스는 ‘단-장’, 트로카이오스는 ‘장-단’으로 장음 하나와 단음 하나로 구성되며, 앞의 것들이 위아래(arsis-basis)가 균등한데 반해 이것들은 불균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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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추가 설명과 철학적으로 음미해볼 사안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1) 시가에 붙는 화음과 장단(선법과 리듬)에 관한 논의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것들은 앞서 시가 가사(말)의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과 내용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즉 그것들은 장차 용감하고 훌륭한 수호자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적합해야 한다. 우선 시가에서 신들과 영웅들의 훌륭한 말과 행동을 모방하여 절제 있고 절도 있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훌륭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밝아야 하듯이 시가에 붙는 선법과 리듬은 반드시 그러한 시가의 내용 즉 노랫말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시가를 서술함에 우아한 것이건 추한 것이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시인들이나 배우들과 달리 화음과 리듬을 구사하는데도 비탄과 한탄, 술취함과 유약함, 게으름 따위를 부추기는, 그래서 군중들이나 좋아하는 이러저러한 화음을 배제하고 절제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화음을 선호해야 한다. 이를테면 도리스 화음이나 프뤼기아 화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에 따라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에서 악기 또한 여러 현과 넓은 음역을 갖는 악기, 이를테면 아울로스 같은 악기는 제외되어야 하고 뤼라와 키타라 같은 악기 정도만 남겨두어야 한다. 장단과 박자, 운율과 선율 또한 마찬가지이다. 복잡 미묘하고 현란한 장단과 박자는 수호자가 지향할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

2)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음악 교육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고 일양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분야에 상관없이 나름의 일정한 교육 목표와 기준이 요구되어왔고 오늘날 보편화 된 대중문화를 생산 유포하는 방송 및 언론 기관에서조차 일정한 기준 아래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목표와 기준이 가지는 내용의 적합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정당성이다.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 민주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적합성과 관련해서는 일정 부분 귀담아서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합성의 기준을 다수의 결정에서 찾지 않고 소질과 적성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각각의 본성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본성만큼 적합성의 내용 또한 다양하다. 여기서는 나라의 수호자로서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적합한 절도와 절제가 강조되고 있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내용 자체만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경직되고 단순하며 일양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수호자 즉 훌륭한 군인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채택된 것임을 고려하면 나름의 적합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단순하고 일양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교육 대상과 교육 목표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행진곡, 장송곡 등 경우와 상황, 대상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이 따로 있다. 여기서도 그 적합성은 모든 경우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적합성은 수호자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합한 것으로 일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소질과 적성이 다르고 그에 따른 본성과 욕망 또한 다르고 그에 따른 그들의 일과 직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307d에서 보듯이 대다수 군중은 그와 반대되는 유형에 어울리고 오히려 그러한 유형이 그들을 월등하게 즐겁게 해 준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적합성과 관련하여 일관된 원칙이 있다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본성과 욕망에 어울리는 적합성을 찾아 주는 것이다. 그들 각각에 적합한 것이 고유하다면 그들 각각은 일양적이지만 그 각각의 차이만큼 각각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적합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곳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일양성도 다만 늘 냉철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특정의 리듬이 가장 어울리고 그들의 수호자다운 성품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내세우는 특정 성향의 타당성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플라톤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선법과 리듬 등 제반 음악적 요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차이가 다양한 만큼 인간의 인격 내지 성품 형성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리듬과 박자가 그러하듯 일정하고도 객관적인 규칙성과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에서 그러한 음악적 요소들의 내적 연관성은 적합성 차원에서 반드시 분석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런데 위와 같은 음악 관련 논의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음악적 일양성과 경직성이 과연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얼마나 대치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회로 표징되는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룬 음악 분야는 물론이고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과연 인간 욕망의 다양성이 담보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그들 각각의 소질과 적성, 성격과 성향에 상관없이 대체로 돈과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재화 획득 능력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생존 능력과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무한경쟁의 이름으로 그런 능력의 고양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야말로 오히려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일양적이고도 획일화된 기준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대중들의 음악적 관심사만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같이 재물 획득의 효율성을 노리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 다양성은 개인들의 주체적 욕망을 반영하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기획된 구매 욕구의 반영으로서 상품화된 다양성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행과 개성이라는 미명으로 개인들의 소비 욕망을 부추겨 자연적·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고 상품 가치로 획일화된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른 다종다양한 본래의 욕망으로 되돌리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에 찌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과제의 하나라면, 인간의 다양한 자연적 소질과 적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그 위에 세워지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야말로 반(反)민주주의적이라는 오늘날의 비판을 넘어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념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장차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불운한 상황에 처하여 불가피하게 강제적인 일도 해야 하고 평화 시에는 지도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절제 있고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비록 반대적인 상황과 반대적인 일조차도 나라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수호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마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물을 지어내듯 바람직한 하나로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의 반대적인 것들의τῶν ἐναντίων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하나같이 강조되고 있다. 반대적인 것들이 함께 있는 것이 무규정적 현실과 인간 욕망의 근원적 특성이지만 그것들을 영혼이 가지는 지성의 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고 규정하여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수호자이자 철학자들이 할 책무인 것이다.

5) 이에 따라 플라톤은 399b에서 바람직한 어조와 억양, 선법을 모방하여 위와 같은 상반된 상황을 가장 훌륭하게 넘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제법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인간상은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바람직한 수호자 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마치 플라톤 스스로 평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생활 지침을 되새기는 것처럼 비추어지면서 자못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흥미롭게도 동양 유가의 군자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며 요구할 때는 신에게는 기도로 하고 사람에게는 가르침과 충고로 하라’는 말은 ‘하늘을 받들고 타인을 사랑하고(敬天愛人) 천명에 따르고(待天命) 남을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며(推己及人) 말을 삼가되(愼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誠之) 게을리 하지 않는다.(敎不倦)’는 말과 상통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 가르쳐 주거나 변화하도록 설득을 해오면 귀를 기울이라’는 말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올바른 말로 일러 주는 것은 잘 따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法語之言能無從乎改之爲貴)고 말하면서 ‘남이 은근하게 타이르는 말은 기쁘지 아니한가?(巽與之言能無說乎)’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heauton epechonta)인데 사실 그 말을 직역하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신을 숙인다’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공자가 강조하는 겸양(謙讓)의 미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 거만하지 않으며 절제 있고 금도 있게 행동하고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 역시 ‘앎과 행동을 같게 하고(知行合一) 겸손(謙遜)하고 온유후덕(溫柔厚德)하며 스스로를 다스려 예(豫)를 세우고(克己復禮)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천명에 따르면서(盡人事待天命) 수분자족(守分自足)하는’ 동양의 군자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6) 결국 시가에서 음악적 요소 또한 시가를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서 앞서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처럼 그 내용과 방식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리듬과 좋은 선법은 반드시 시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내용 즉 노랫말(시가 가사)에 어울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요즘에는 곡이 작곡된 후 그에 맞추어 가사를 쓰는 일도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에는 작곡은 반드시 노랫말 즉 가사에 맞춰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랫말은 영혼의 성품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이러한 좋은 말씨, 좋은 화음(선법), 좋은 리듬(박자), 좋은 모양(우아함)은 모두 단순함(순진함, 좋은 성격 euētheia)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란 우리가 보통 어리석음anoia을 좋게 부를 때 쓰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가와 관련한 이야기 방식에서 따라야 할 우선순위를 요약하면 선법과 리듬 즉 음악적 요소는 시가의 스토리 즉 말(노랫말)을 따라야 하고 그 말은 영혼의 성품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함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란 성품을 잘 훌륭하게 갖추고 있는 생각(사고)dianoia을 말한다. 즉 단순함은 영혼의 성품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음악은 감각에 작용하는 감성적 요소로서 말이라는 지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그 지적 요소는 다시 영혼의 성품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관계의 최상위에 있는 영혼의 성품이란 그 성품을 보존하는 생각으로서 단순함을 그 내적 본질로 가지고 있다.

7)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단순함εὐηθείᾳ(euētheia)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의 원어 euētheia는 일차적으로 ‘좋은 성격’이나 ‘순진함’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진함은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빈정거리듯 정의를 ‘고상한 순진성’genaian euētheia으로 부를 때(348d)와 같은 의미에서의 순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이의 마음을 일컬을 때의 순진성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도 여기서 그 말을 어리석음anoia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사고로서의 dianoia와 연결 짓고 있고, 주석가인 아담(J. Adam) 역시 그 말의 진정한 어원을 hōs alēthōsῶς(truthfully)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아주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하여 한마디로 명쾌하게 꿰뚫어보는 경우도 경험하고 반대로 아주 간단한 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에 휩쓸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경험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함이란 인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단순함은 사물과 사태의 내적 관계나 실체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분명하고 온전하게 그야말로 명석판명하고 간명하게 드러낼 때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러한 진실을 간취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 고유의 인격적 요소 즉 영혼의 성품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은 이와 같은 순수성이 영혼의 성품이 내적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단순함의 의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 즉 단순함과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다소 개념적으로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의미 즉 ‘장차 수호자들이 될 젊은이들은 반드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성품을 보전하여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한 일들을 진실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핵심적인 내용과 해결 방안을 가장 명료하게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설명하고 있듯이(401e-402a) 이처럼 청소년을 위한 시가 교육의 단계에서 예민하게 진실을 직감하는 젊은이들의 순수성 내지 초보적 단순성은 자라면서 이성적 논거 형성 능력의 민감성으로 발전하고 이후 고도의 철학적 추상 능력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변증법을 통해 진리 자체 즉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8) 그리고 플라톤은 지금까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 즉 말과 그에 수반되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시가 관련 논의 전체를 통해 드러낸 위와 같은 결론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시가 관련 분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림 분야를 비롯한 모든 기예들 즉 직조술, 자수, 건축 등의 예술 영역은 물론 인체 및 생물들의 내적 구조와 본성 등 우아함과 관련한 모든 영역으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시가 관련한 논의를 수행하면서 논의된 문제의식과 일부 도출된 결론들이 앞으로 다루어질 정의로운 국가의 전반적인 문제 영역에서도 통일적이고도 일관되게 적용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 이야기 방식에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지금까지 진행된 시가 교육이 왜 중요하고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끝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392c-d]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λόγος와 관련한 논의 즉 시가의 내용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어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에 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시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ἅ λεκτέον와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지ὡς λεκτέον의 문제가 완전하게 마무리된다는 것이다.(392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고찰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답한 후 그 ‘이야기 진행방식(서술방식)’διήγησις을 단순 서술 방식ἁπλός διήγησις과 모방μίμησις을 통한 서술 방식 또는 그 양쪽 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 방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기 시작한다.(392d)

 

[392e-393c]

* 소크라테스는 단순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꾀하고 있지 않은 방식 즉 시인 자신이 직접 서술하는 방식을 말하며,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이란 시인 자신이 마치 시가의 등장인물이 직접 발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최대한 그를 모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설명해주겠다고 말한 후, 그 두 가지 방식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아가멤논에 대한 크뤼세스Χρύσης의 간청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 각각 인용하여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는 어떤 곳에서는 크뤼세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는 자신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늙은 제관인 크뤼세스로 생각하게끔 최대한 크뤼세스를 모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393d-394b]

*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인이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고 숨기지 않고 호메로스로서만 이야기를 했더라면 모방은 없고 단순한 서술 방식만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후, 그러한 단순한 서술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흥미롭게도 앞서 인용한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모방이 없는 단순 서술 방식으로 형식을 바꿔 길게 들려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발언 사이에 있는 시인의 말(단순 서술 부분)을 제거해버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들만 남겨 놓을 경우 이야기 진행은 앞의 것과 정반대 즉 모방만 있는 서술 방식이 되고 만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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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는 이유는 시가 자체가 설화 내용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전되어오면서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형식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된다. 하나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에 붙는 곡조와 리듬과 관련한 논의이다. 우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중 전자의 것으로서 세부적으로 1)설화를 서술하되 설화에서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설조로 서술하는 방식 즉 ‘단순 서술 방식’과 2) 등장인물이 말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직접 말하듯 서술하는 방식 즉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구분된다.

* 1)의 방식은 쉽게 요즘의 소설이나 연극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간접화법의 방식 즉 내용에서 일반서술이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나 음송인이 단순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고, 2)의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 즉 설화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부분 즉 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인 양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다. 이 가운데 2)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이 마치 해당인물이나 신이 말하듯 음송 서술해야 하므로 최대한 해당인물이나 신 또는 영웅을 잘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1)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에 의한 단순 서술 방식으로 부르고 2)의 방식을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부른다.

* 플라톤의 시인 비판이나 예술 비판을 주제로 <국가>를 고찰할 때 꼭 제기되는 개념이 ‘모방’mimesis개념이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모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들 ‘창조’에 대비되는 의미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의 본질을 창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예술 폄하론자로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방의 의미보다 훨씬 넓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모방에 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개념의 근본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미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에서 창조라는 말의 반대말 즉 어떤 원상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는 것, 복제하는 것, 베끼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표절하는 것을 우선 연상해낸다. 그리고 모방 또한 뭔가에 대한 일종의 묘사이자 표현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을 표현이나 묘사라는 말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나 표현에는 모방적인 묘사나 표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창조적인 묘사나 표현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플라톤의 모방 개념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묘사와 표현의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모방의 일차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원상을 단순히 베끼거나 모사했느냐 아니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창조이건 아니건 그 모두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이자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객관적인 원상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묘사나 표현 또는 그 결과물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동사적 표현이나마 모방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국가> 388b에서도 이미 직접적으로 그 말을 ‘묘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라는 점에서 모방의 결과는 실재성의 심급에 있어 원천적으로 원상에 못 미치는 일정 부분 결핍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성의 한계일 뿐 그 밖에 원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로서 모방 자체가 갖는 가치와 효용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상의 모사인 만큼 실재성에 있어 원상에는 못 미친다는 점만 괄호에 넣고 보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모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하는 대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가와 그 모방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예술은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감각적 묘사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갖는 실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이 갖는 가치나 기능 내지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오해되어선 안 된다.( <국가> 10권에서의 예술과 시인 비판은 여기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실재성의 심급과 관련하여 모방이 갖는 이러한 한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예술의 가치와 기능과 관련하여 예술이 비판 받는다면 그것은 모방 때문이 아니라 그 모방의 대상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모방 수준에 따라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훌륭한 예술도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예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방이 이루어지는 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표 된다. 이를테면 이곳에서처럼 시가의 이야기 영역에서의 모방은 신과 영웅을 대상으로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 내어 서술하는 것(emulation)을 의미하고, 미술과 조각, 음악 등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모양이건 소리이건 원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최대한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사(copy)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수호자 교육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본받고(modelling) 배우는 것(learning)을 뜻하고, 넓게는 기술 영역에서도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선하고 이로운 것을 만들거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전문 기술 또한 모방인 것이다. 요컨대 그 모방의 좋고 나쁨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방 그 자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어떤 수준으로 모방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를테면 신이건 영웅이건 모양이건 소리이건 게다가 기술에서건 교육에서건 원상들의 선성과 아름다움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모상 속에 재현해내느냐에 의해 얼마든지 좋은 모방이 될 수 있고 그만큼 훌륭한 예술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모방의 과정에서 남과 다르게 원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의 탁월성이자 훌륭한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드러난 남다른 차이는 모방자만의 고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누군가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만큼 숨겨진 원상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 영역에서의 창조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이 전적으로 상호 배척되거나 모순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예술이 창조행위를 통해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시대를 불문하고 인류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구현해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적 창조성이란 원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 자신에 의해 작품 속에 구현된 새로운 미적 가치와 의미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 원상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일지라도 그 현실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색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모방 또한 새로운 의미 생산으로서 예술적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적 예술 내지 미학에서 유독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 조화미가 강조되는 까닭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플라톤적 원상의 극대점에 다름 아닌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주적 선성의 본질이 곧 ‘서로 다른 것들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으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우주는 이미 우주 영혼을 통해 그 자체로 시간적 영원성과 공간적 질서와 조화를 확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신적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 모방은 말할 것도 없이 배움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 우주 영혼을 모방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나라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또한 당연히 수호자들이 추구해야할 모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수호자 교육의 궁극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변증법을 통한 형상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또한 본을 보고 우주를 만든 원상으로서 데미우르고스적 사유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 영역에서의 모방과 예술 영역에서의 모방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후자의 모방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기본적으로 감정에 작용하는 것임에 비해, 전자는 감각 너머의 지성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표현되고 이성과 정신에 작용한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상에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여러 영역에 걸쳐 아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부분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방 개념에만 주목한다면 일단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은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모방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가 영역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에서의 모방일 뿐이다. 즉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다름 아닌 시가 영역에서 신과 영웅을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모방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미로 한정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94c-d]

*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그러한 모방만 있는 이야기 진행은 비극의 경우라고 말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아래 3가지로, 즉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διὰ μιμήσεως ὅλη 이루어지는 것, 단순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 양쪽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하고 희극κωμῳδία과 비극τραγῳδία, 디튀람보스διθύραμβος 시가, 서사시ἐπή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다.(394c)

* 그제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이 시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즉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아래의 선택지들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전적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어떤 것을 모방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할 지도 합의해야 한다χρείη 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πλείω ἔτι τούτων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392d)

 

[394e-395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모방에 능한μιμητικός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도 앞서 말한 바에 따르게 되는지를 묻고 ‘동일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모방할 때는 한 가지 것을 모방할 때처럼 훌륭하게 할 수 없다는 것ὅτι πολλὰ ὁ αὐτὸς μιμεῖσθαι εὖ ὥσπερ ἓν οὐ δυνατός을 확인한다. 그런 일을 시도할 경우 많은 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는 격이 되어 결국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394e) 그러므로 희극과 비극을 짓는데 있어 양쪽 모두에 능할 수는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음송인ῥαψῳδός이자 배우ὑποκριτής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고 같은 사람이 희극 배우κωμῳδός이자 비극 배우τραγῳδός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들 모두가 모방물μιμήματ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5a)

 

[395b-396b]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성향은 그런 종류의 것들 보다 한층 더 세분되는σμικρότερα 것이어서 우리의 처음 주장대로 수호자들은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δημιουργία을 포기하고 ‘이 나라의 엄밀한 뜻의 자유의 일꾼들’δημιουργοὺς ἐλευθερίας τῆς πόλεως πάνυ ἀκριβεῖς이어야만 하므로 그것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그 밖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도, 그 어떤 것도 모방해서는 아니 되고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경건하며ὅσιος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과 목소리 또는 사고διάνοια에 있어 습관ἔθος이나 성향φύσις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비굴하거나 창피스런 짓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395c-d) 그러므로 훌륭한 남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못난 일을 하는 여인들은 물론 노예들과 못되고 비겁한 자들, 비속한 말을 해대는 자들, 그 밖에 언행을 통해 자신과 남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5d-396a) 그리고 수호자들이 대장일 등 다른 전문적인 일을 하는 장인들이나 삼단노 전함τριήρης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등에 마음을 쓰거나 모방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말ἵππος과 황소ταῦρος가 우는 소리, 시끄러운 강물ποταμός 소리나 굉음을 내는κτυποῦσαν 바다θάλασσα나 천둥소리 같은 것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미친 짓을 하거나 그것을 닮은 짓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396b)

 

[396c-397b]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이야기 진행(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한 사람ὁ τῷ ὄντι 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 따라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 후 그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즉 절도 있는μέτριος 사람은 시가를 이야기하다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 꿋꿋하고 슬기로운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모방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지만,(396c) 그 사람이 못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열의를 갖고 모방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모방을 창피스러워하고αἰσχυνεῖσθαι 내심으로 경멸할ἀτιμάζων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d) 따라서 조금 전에 호메로스의 시구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야기 방식 즉 단순 서술을 통한 방식과 모방을 통한 방식 모두가 이야기 진행에 관여가 되어 있지만, 결국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방식과 관련해서는 위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모방이 허용되는 한, 시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e)

* 그러나 이와 달리 훌륭하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가 비천할수록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갖 것들, 이를테면 천둥소리나 우박 또는 도르래 따위의 굉음 또는 나팔이나 아울로스 등 악기 소리, 개와 양, 새소리 등 갖가지의 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려든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 방식과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만큼 단순 서술 방식은 조금 뿐이고 대부분이 모방을 통한 방식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을 거론한 배경이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된다.(39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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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서술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방식 중 소크라테스가 지지하고 있는 방법은 단순 서술 방식이고 가장 멀리하는 방식은 모방의 방식 즉 자기가 등장인물인 듯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단순 서술방식으로 몸소 바꾸어 서술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서술방식들을 굳이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단순 서술 방식은 간접화법의 방식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언뜻 우리 생각에는 직접화법이 간접화법보다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실감나게 전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전달 방식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간접화법 즉 단순 서술 방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야기 진행 방식과 관련한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방식 간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들과 희극과 비극, 디튀람보스 시가, 서사시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일단 모방보다는 단순서술 방식에 더 우위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시가는 옛날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직접 목도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를 허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단순 서술 방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그러한 허구 외에 마치 시인 자신이 그 모방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만드는 허구 즉 흉내라는 허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흉내를 내는 대상들이 각기 다른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숫자만큼 허구의 가짓수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 이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단순히 단순서술 방식과 모방의 방식을 구분하고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앞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하자고 말한 것처럼 그 이후 이어지는 논의를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진행 즉 서술 방식간의 비교 우위와 그에 합당한 극형식의 선택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가운데 모방의 방식과 관련하여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이 모방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살폈듯이 시가에서 단순 서술방식은 최소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시인이나 음송인 한 사람의 허구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러 대상들을 다 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한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많은 일을 그렇게 할 수 없다(394e)는 일인일기의 원칙 즉 한 사람이 하나의 전문 기술을 가진다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다 잘 흉내 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흉내를 낼 경우 그러한 모방은 시가를 배우는 어린이들 특히 수호자가 될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모방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일인일기의 원칙에 따라 시가 교육과정에서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흉내 내는 시인들과 음송인 내지 배우들의 행태가 초래하는 해악을 비판하는데 있다. 특히 수호자들은 플라톤의 처음 주장대로 일인일기라는 전문가 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을 포기하고 ‘엄밀한 뜻에서 이 나라의 자유의 일꾼들’이어야만 하므로 시가 교육 단계에서부터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처럼 분별없이 온갖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행위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소리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에게 모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모방은 배움의 중요한 양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다름 아닌 그 모방의 대상과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소리들을 흉내 내거나 묘사해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기술이자 능력으로서 이른바 연극배우의 고유한 기능이다. 단 한 사람의 성격과 역할만을 잘 흉내 내고 모방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태를 마치 그 사람인 양 똑같이 흉내, 즉 연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연극배우가 갖는 고유 기능이다. 그리고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가치가 요구되는 그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연극배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연극배우를 일인일기 내지 전문가 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는 플라톤의 관점은 사실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배우들이 다양한 행위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연기에 불과하다. 악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배우가 악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럼에도 굳이 플라톤이 일인일기 원칙에 입각하여 시인들이나 배우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배경에는 이미 선대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물론 당대에 활동하던 기존 시인들의 행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부정적인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서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396e) 이미 당대의 시가에서는 수호자가 모방을 통해 배울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호메로스 등 선대 시인들은 시가를 지으면서 이미 신과 영웅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며, 당대 시인들 역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시가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연극을 통해 유포 재생산함으로써 어린이들과 대중들을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끌어 아테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 시인들은 물론 음송인들과 배우들 모두 그릇된 시가 내용을 무분별하고 반성 없이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유포함으로써 단순히 시의 창작이나 연기행위를 넘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삶인 양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중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고유 욕망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넘보게 되면서 각기 다양했던 모두의 욕망이 종국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좋고 나쁨에 구애 없이 무분별하게 모방을 일삼는 이러한 시인들과 음송인들, 배우들의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방 양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시가 교육이나 예술 교육 자체가 갖는 중요성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만큼 더욱 철저히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서 지고의 진실로서 신의 선성을 토대로 기존의 시가 교육과정을 철저히 재편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는 그와 같이 새롭게 재편된 시가 교육 과정을 통해 당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오직 신과 영웅들의 선한 모습을 모방하고 배움으로써 훌륭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 시인들과 시가 교육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수행할 수호자들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시가와 시인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인 내지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그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차대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처럼 시가 내지 예술 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의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마무리 한 후에 시가가 갖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매우 상세하게 이어간다. 시가에서 이야기 서술 방식이 갖는 중요성도 크지만 시가가 일종의 노래의 형식을 갖고 음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가 교육에서 음악적 요소가 차지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389b-d]

*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에서 수호신과 영웅들을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으로 용기를 이야기 한 후에 정직ἀλήθεια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거짓말ψεῦδος을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나라의 이익 또는 시민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합당해도,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 누구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389b) 일반 개인ἰδιώτης들이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ἰατρός를 상대로, 신체 단련 수련생이 체육 담당자παιδοτρίβης를 상대로, 선원이 선장κυβερνήτης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389c)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를 붙잡으면 전문가οἳ δημιοεργοὶ이건, 예언자μάντις이건, 의사이건, 목수이건 벌을 줘야 한다. 그들은 마치 배를 전복하듯 나라를 전복하고 파괴할 그러한 관행ἐπιτήδευμα을 들여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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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을 위한 시가 교육 단계에서 거론하는 덕목들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장차 수호자들이 갖추어야할 덕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수호자를 선발하기 이전 단계이므로 최소한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즉 용기와 절제가 먼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이어 절제를 다루기 전에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용기와 절제 외에 정직도 별도의 덕으로 추가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별도의 논의로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그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 아무려나 이 부분은 시작부터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경악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 즉 ‘통치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거짓말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통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도발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통치 권력자와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 내용만 따로 떼어져 20세기 포퍼(K. Popper)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플라톤 정치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핵심 근거로 자주 인용 되어 왔다. 사실 자유주의가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위선, 폭압에 대한 뼈저린 역사적 경험 위에서 소수 정치권력에 대한 다수의 견제와 의심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그러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서, 일단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통치자와 거짓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만 들여다보자면, 플라톤이 제1권 이후 시종일관 내건 주장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도발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다. 플라톤은 줄곧 통치술을 일반적인 전문 기술에 상응하는 것 즉 정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동일한 성격의 앎으로 등치시켜왔는데,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주장 또한 내용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1권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의 관계 즉 전문기술자와 그 기술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그 나라의 통치자들ἄρχων τῆς πόλεως(389b)’이란 말 가운데 ‘통치자들’은 비록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맥락상 제1권에서 언급된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고, ‘그 나라’ 역시 그러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앞으로 제기될 정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통치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기본 설정을 배제하거나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쁘다. 플라톤도 당연히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군인이 적을 속이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다못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제1권에서 언급된 미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을 용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특히나 거짓말의 용인 수준과 관련하여 나랏일과 관련하여 통치자가 행하는 거짓말과 그 밖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의 선한 거짓말을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만큼 통치자의 경우는 거짓말의 해악을 분별해내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잣대가 무엇이고 그 엄격성의 객관적 근거를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 모두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를 내세우듯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최상의 통치 전문가를 그 잣대로 내세운다. 요컨대 통치자의 거짓말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위중하고 중차대한 그 만큼 아무나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통치의 기술과 도덕, 지성의 전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고도의 전문가 즉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거짓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극물의 경우 그것이 위험한 그 만큼 최고의 독약 전문가에 한해 취급이 인가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 기술과 객관적 보편성 내지 정치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나랏일과 관련하여 거짓말이 요구될 경우, 권력의 자의적 독단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검증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야말로 가장 중대한 영역인 만큼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최고의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세 이래 자유주의자들은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전문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플라톤이 가장 정치에 비전문가라고 폄하하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기술 즉 통치술과 일반 전문 기술을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자신의 기본 전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치철학이 그의 지식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인식 능력을 토대로 성립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구현이 철학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담보되고 관철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역사 이래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백안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정치철학을 인치인가 법치인가의 잣대로 양자택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온전한 이해 방식도 아니고 적합한 논의 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말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러서도 하나같이 정치의 지성화를 목표로 삼아 <국가>에서 강조한 인치의 측면에 더해 법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치와 관련해서도 1인의 철학자 대신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 nykterinos syllogos(<법률> 908a, 909a, 968a)라는 다수의 철학자 집단에 최고의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치이건 덕치이건 간에 플라톤 정치 철학적 지향과 목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지성화에 있는 한, 그의 제안들은 정치철학 일반에서는 물론 구조적으로 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찰해보아야 할 철학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부분의 주제는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정직이 왜 중요하고 귀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 일반 개인들이 정직하지 않았을 때 나라가 어떠한 위험에 처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왜 마땅한지를 언급한 연후, 바로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89d]

*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왜 절제σωφροσύνη가 요구되는지 어떤 면에서 대중에게 절제가 가장 중대한지를 묻는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절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은 통치자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ὑπήκοος 그 반면 주색πότος καὶ Ἀφροδίσιος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ἡδονή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ἄρχων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훌륭한καλός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면서 바람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가며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다.

 

[389d-391d]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을 내용적으로 순서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인용 사례의 구체적 내용들과 전거는 텍스트와 주석 참고) 1) 디오메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순종 2) 아킬레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불손 3) 시인(389e) – 통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함νεανίευμα 4) 에우륄로코스((390a-b) – 식욕을 인내καρτερία하지 못함(참지 못함) 5)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 성욕을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ν 참지 못함 6) 오뒷세우스 – 분노를 참지 못함 7)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 재물욕φιλοχρήματος을 참지 못함 8) 아킬레우스(391a-c) – 신에 대한 불손ἀπειθής과 오만ὑπερηφανία 9)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 -무서운 겁탈 10) 기타 신의 아들, 영웅들의 무섭고 불경한δεινὰ καὶ ἀσεβῆ 짓들(39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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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절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들였을까, 그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직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 후 바로 통치자 이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초점은 전후 문맥상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와 일반 개인들 모두에게서 정직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마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처럼 환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통치자와 사인들의 관계에서도 사인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통치자들이 일반 개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 통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 한, 사인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허위 진술, 허위 보고는 생사의 문제를 오가는 질병과 항해, 전쟁 영역에서 죽음과 불행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정직은 통치자와 사인들 간의 참된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수 조건이자 나라와 개인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는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와 사인들의 참된 관계는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지휘관과 병사의 참된 관계가 그래야 하듯이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 대한 사인들의 순종 즉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순종이 사인들의 예속과 희생이라고 오해되어선 안 된다. ‘정직’으로 옮긴 ἀλήθεια(alētheia)는 여기서는 거짓말과 대비하여 그렇게 옮겼지만, 그 말은 ‘정직’(frankness)의 뜻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진리’, ‘진실’, ‘참됨’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조화에 참여하는 여러 구성 요소들이, 마치 도가 도답고 미가 미답고 솔이 솔다워야 도미솔 화음이 이루어지듯, 모두가 다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자기다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순종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통치자를 통해 구현된다는 앎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 그리고 질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근거로서 참된 앎에 통치자 역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이전에 참된 앎과 그것에 따르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정직에 이어 절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정직에 대한 논의는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점은 이곳의 논의와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용기와 절제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정직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을 일삼는 시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별도의 논의, 즉 나라에서 거짓말은 통치자 이외에 허용될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개인으로서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삽입일 수도 있다.

* 아무려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를 지으면서 영웅들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용기에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다시피 이곳에서의 절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행태 위주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절제에 대한 이곳에서의 논의가 앞서 용기의 경우가 그랬듯이 나중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보편적인 규정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논의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앞서 정직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절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성요소 또는 개인의 내적 구성 요소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절제는 강해 초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원래 군사 용어에서 나왔다. 그리스 육군의 기본 전술은 창과 방패를 들고 견고한 대오를 유지하며 전진하는 팔랑크스(phalax) 전법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병사 각자의 개인적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강한 병사가 있더라도 대오를 벗어나 혼자 전진하려 들면 밀집대형은 흐트러져 패배에 직면할 수 있다. 각 병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되 밀집대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병사와의 관계 내지 전체 대오를 늘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체 대오 유지를 위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원칙이자.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합의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즉 통치자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앎과 그것을 구현하는 자발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의(定義) 차원에서 절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의 구현으로서 절제를 ‘질서’κόσμος 인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억제ἐγκράτεια’로 표현(430e)하기도 하고 ‘강한 소리, 약한 소리, 중간 소리의 협화음συμφωνίᾳ, 화성ἁρμονίᾳ’(430e, 432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한 쾌락에 대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개인의 내적 관계에서 관철되어야 할 바람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절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유혹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는 것 즉 지배를 관철시켜 그 유혹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와 관련해서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절제를 언급하면서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κρείττω αὑτοῦ’이라고 말한 후 그것을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서 한결 나은 것τὸ βέλτιον과 한결 못한 것τὸ χεῖρον이 있어서 성향상φύσει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430e-431a). 즉 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건 개인적인 차원에서건 어느 구성요소가 어느 구성요소를 지배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즉 일종의 지배관계에 대한 합의ὁμόνοια’(432a-b)인 것이다. 아무려나 절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대 그리스 사회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오면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전사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일단 여기서 절제에 대한 논의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기존 시가에서 영웅들을 무절제한 사람으로 잘못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실린 영웅들의 무절제한 행태들은 나중에 절제가 무엇인지를 다루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부분의 절제에 대한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추후 다루어질 정의(定義)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다. 우선 이곳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의 무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통치자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행태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은 장차 수호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의 종류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쾌락의 실체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순종과 무절제와 관련된 구체적 행태들을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에 대응시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1) 디오메데스(389e)와 아킬레우스(389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지휘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위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절제가 한결 나은 것에 대한 한결 못한 것들의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불순종과 불손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젊은이들과 수호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무절제 행태들이다. 2) 에우륄로코스((390a-b),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오뒷세우스(390d),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제하기 힘든 인류 공통의 유혹들을 담고 있다. 그 첫째는 생물학적 욕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식욕과 성욕이고 사회적 욕망 차원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노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분노와 재물욕 모두 개인 내면에 자리한 ‘한결 못한 혼에 대한 한결 나은 혼의 지배’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 즉 바람직한 혼의 내적 관계가 전도된 상태에서 나오는 무절제한 행태들이다. 그리고 3) 아킬레우스(391a-c),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d)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불손과 오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다룬 불순종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앞서의 불순종이 사람에 대한 불순종인데 비해 여기서의 불순종은 신에 대한 불손과 오만으로서의 무절제라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이 절제와 직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 또한 절제와 직결 되어 있다. 경건 또한 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이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몇 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 390b에서 ‘자제(自制)’로 옮겨진 ἐγκράτειαν(enkrateia)는 여기서는 절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krateia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외적인 강제와 두려움에 의해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참된 앎에 기대 자발적으로 참는 것으로서 절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2) 391a에서 플라톤은 호메로스에 대한 비난을 일부 유예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기존 신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전적인 부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91c에서 ‘자신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병폐ἐναντίος νόσημα로 재욕에 따른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함ὑπερηφανία이 거론되고 있는데 옹졸함과 거만함이 갖는 상반성이 우리말 역어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옹졸함에 해당하는 원어가 예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재물에 대한 옹졸함은 재물에 대한 예속을 뜻하고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은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방종과 오만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상반성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한결 나은 것의 한결 못한 것에 대한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게 심적 동요상태ταραχή 즉 무절제에 해당한다.

 

[391e]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관련한 사례들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도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도 나을βελτίων 것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이 경건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으며οὔθ᾽ ὅσια ταῦτα οὔτε ἀληθῆ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데 대해 관대συγγνώμη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사악함πονηρία에 대한 무신경εὐχέρεια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이야기들은 말하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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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들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례들은 모두 시가에 실린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기본적으로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시인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들이 그려낸 신과 영웅들의 무절제한 모습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사악함에 대한 무신경을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그런 신화는 짓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려주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들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도 시가 비판과 더불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제의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논의 역시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 또한 함께 갖고 있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4 인간들에 관한 것(386a-391e)

 

[392a]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적 규범을 정하는ὁρίζω 것과 관련하여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 이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한 후, 이제 인간ἄνθρωπος들과 관련한 논의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들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시가를 통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규범을 세울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잘못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토론의 근본 주제 답변을 요구했던 것들이다. 즉 그 내용은 ‘부정의한 자들ἄδικοι은 다수가 행복한εὐδαίμονες 반면 정의로운 사람들δίκαιοι 은 다수가 비참하고ἄθλιοι 또한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들키지 않는 한, 이득이 되나λυσιτελεῖ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ἀγαθόν이되 자신에게는 손해ζημί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합의는 그 때로 미루고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ἅ λεκτέον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이제 논의는 시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이어 시가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ὡς λεκτέον에 대한 문제 즉 이야기 투λέξις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

* <국가>는 크게 서론(제1권), 본론1(제2권-제4권), 본론2(제5권-7권), 본론3(제8권-제9권), 에필로그(제10권) 등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각 권들 간에 내용상의 단절 없이 이어져 있어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제3권 역시 제2권 중간쯤(375a)에서 시작된 이상국가론의 서두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아래는 제4권 끝(445e)까지 이어질 그 이상국가론의 전체 목차이다.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논의는 이제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진입하여 수호자의 교육론 가운데 시가 교육 부분을 다루면서 시인들이 시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 할 내용들로서 신들에 관한 것을 마무리한 후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제2권 375a- 제4권 445e)

<제2권> 후반(375a-383c)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376e-392c)

            1-2-1-1-1 어린이를 위한 설화와 허구(376e-377d)

            1-2-1-1-2 신들에 관한 것(376e-383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83c)

<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1-2-1-1-4 인간에 관한 것(392a-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투와 모방(392e-398b)

            1-2-1-2-1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1-3-2 건국 신화(414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제3권 끝)

<제4권>(419a-445e)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제3권에 이어 계속,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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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386a-b]

*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신들과 어버이γονεύς를 공경하고τιμήσουσιν 서로 우정φιλί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신과 관련하여 어릴 적부터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그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ἀνδρεῖοι이 되려면 그들 자신이 죽음θάνατος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승Ἅιδης의 일들이 실제의 것들이고 또 무서운 것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전투μάχη에서 패배하여 노예δουλεία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은 결코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를 들려주는 사람들을 감독해야ἐπιστατεῖν 하며 그들에게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μὴ λοιδορεῖν 오히려 찬양ἐπαινεῖν 하도록 요구해야 한다δεῖσθαι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진실ἀληθῆ도 아니거니와 장차 전사들로 될 사람들을 위해 유익ὠφέλιμος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386c-387a]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 가운데 위와 같이 저승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시구ἔπος 를 비롯해 그런 유형의 것들은 모두 삭제해야ἐξαλείφω 한다고 말하고 그 구체적 사례들로서 여섯 가지 시구들을 인용하여 열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은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한탄하는 장면은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하데스로 사라지는 모습 등 하나같이 죽음과 하데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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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에 있어 내용적 규범과 관련한 부분은 신과 관련한 부분,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부분, 인간과 관련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곳의 논의가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논의로 시작되는 부분임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논의가 앞에서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불쑥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까지의 논의 방식을 뒤돌아보면 크게 어색할 것도 없다. 앞서 보았듯이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 겉으로는 들려주어선 안 될 것과 들려주어야 할 것을 큰 틀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의 측면을 들여다보면 전자의 형식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고, 다른 한 편 후자의 형식을 통해서는 새로운 대안 내지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것이 신의 선성을 기초로 하는 플라톤의 새로운 신학이자 종교관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신들에 이어 영웅들에 관한 기존의 설화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용기와 절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정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논의 단계가 수호자 선발 이전의 기초 교육 단계라는 점에서 그 덕목들은 아직 지혜와 정의라는 덕목까지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덕목들은 수호자의 선발 이후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이른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어야 할 4가지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바탕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이곳 서두에서 용기는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387d),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388e) 등 구체적인 행위 사례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용기를 다루는 제4권에 가면, 이러한 용기에 대한 구체적 예시들은 좀 더 일반화된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즉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429c-d),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430b)이다.

* 앞서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언급되었듯이, 신들이 선하고 서로 다투지 않는 한, 젊은이들은 그 신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곳 서두에서 젊은이들을 ‘신들과 어버이를 공경하고 서로 우정을 중시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어버이에 대한 공경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동양적인 정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378b) 소크라테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관련 이야기를 비판하면서 설사 아버지가 부정의한 짓을 저질러도 응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제5권에 가서도 수호자들은 자기가 만날 모든 사람을 형제나 누이,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과 딸, 자손 혹은 선대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들에 대한 공경aidos과 돌봄, 어버이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463c-d, 465b). 게다가 <법률>에서는 어버이를 살해하거나 때리는 불경한 자에 대한 처벌은 하데스에서의 처벌보다 결코 부족해서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비록 거류외인이라 할지라도 부모를 때리는 자를 막아설 경우 경연의 특별석에 초대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영구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플라톤 역시 신과 어버이를 섬기고 이웃과 우애롭게 지내는 것을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플라톤의 가르침은 하늘을 섬기고 타인을 사랑하며(敬天愛人)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孝悌)는 동양 유가의 가르침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사실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경험이 생존의 기초이고 농사가 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나이 든 사람을 존경하고 이웃과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냄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에서도 경험과 협업이 승패를 좌우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귀족들에게 명예가 다름 아닌 전쟁 영웅이 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들 또한 훌륭하게 살다 죽은 후 자식들과 형제들이 자신을 잘 기억해주는 것을 명예로 여겼을 것이고 그만큼 그것을 담보해줄 자식들과 형제들의 존재와 그들 간의 결속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말은 플라톤 자신이 저승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호메로스 시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은 다음의 세계 즉 내세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고 다만 죽은 자의 망령이 때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저승은 그 망령들이 머무는 곳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교단을 위시하여 디오뉘시오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비교(秘敎)가 아테네에 유입되면서 점차 아테네인들의 의식 속에 내세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생에서의 행위들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앙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 엘레우시스 비교에서 주장하는 이생의 죄에 대한 정화의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저승을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된다는 플라톤의 말은 이미 아테네에 뿌리내린 그와 같은 당대 내세관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10권에서 죽은 다음 다시 이생으로 돌아온 에르(Er)를 통해 저승에 존재하는 죽은 혼들의 모습과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혼의 불멸은 물론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인과응보가 저승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저승이 무조건 험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심판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는 한, 저승은 그만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용기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저승조차 오히려 찬양의 대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갖는 의미는 ‘죽음과 저승이 실제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수호자라면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정도의 당위적 인내 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다. 오히려 플라톤은 대화편 여러 곳에서 죽음과 저승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죽음이 요구될 경우 기꺼이 다가설 수 있는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올바르게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수행(연습)meletēma하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가장 덜 두려운 것’(67e)이며 그것은 곧 철학자들이 열망하는 것으로서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풀려남과 분리’λύσις καὶ χωρισμὸς ψυχῆς ἀπὸ σώματος(67d)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법률> 제5권에서도 ‘살아 있음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은 혼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고 저승의 일 모두가 나쁘다는 것도 그곳의 신들과 관련된 것이 우리에게 최대로 좋은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727d)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제8권에 가서도 하데스가 오히려 인간 종족에게 가장 좋은 신이라 여기고 존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혼과 몸의 결합이 그것의 분리보다 나은 점이 없기 때문이다(828d).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죽음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41c).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이 자살을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고 비판하지만, 플라톤에게 죽는 연습으로서 철학이 종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의롭게 사는 연습이다. 소크라테스가 <변명>에서 죽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 말의 취지는 저승에서의 삶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승에서 부정의한 심판을 받아 죽은 자들과 서로 겪은 일들을 견주어보고 그가 지혜로운 자였는지 아닌지를 탐문 하려는데 있었다(41b). 흔히 말하듯 well dying은 well being에서 나오는 것이다. 혼과 몸의 분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생에서 정의롭게 살지 않는 한, 죽어서 분리된 혼은 저승에서 결코 정복(淨福)을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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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b-387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에게 위와 같은 구절을 삭제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도록μὴ χαλεπαίνειν 간청할 것이며 그러한 시구들이 시적일수록 그만큼 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로 하여금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인ἐλεύθερος 즉 죽음보다는 노예 신세를 더 두려워할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들과 관련된 모든 무섭고δεινός 두려운φοβερός 이름들, 이를테면 코퀴토스Κωκυτος, 스튁스Στύξ, 지하세계에 사는 자들ἔνεροι, 송장ἀλίβας 등 모든 이들을 몸서리φρίκη치게 하는 것들도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수호자들을 너무 조급하거나θερμότεροι 나약하게μαλακώτεροι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는 반대되는 유형의 것들을τὸν ἐναντίον τύπον 이야기하고 지어야 한다ποιη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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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죽은 호메로스에게 간청한다는 표현은 시적 표현이거나 호메로스를 찬양하는 후예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코퀴토스와 스튁스는 하데스에서 흐르고 있는 강들로 전자는 통곡의 강, 후자는 증오의 강으로 일컫는다.

*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면 신분이 귀족일지라도 모두 적국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노예들 가운데는 지적 수준이 높은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귀족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맡거나 대토지 소유주의 마름 노릇도 하면서 안정된 삶을 누리거나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었다. 또 일부는 이를테면 출판업 즉 원본 파퓌로스를 필사·복제하여 널리 배본하는 일을 맡아 후대에 고대 문헌들이 전승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실은 유명 파퓌로스를 보면 그것을 펴낸 주인의 이름과 내용을 필사한 노예의 이름이 말미에 적혀 있기도 하다. 어떤 노예가 필사했느냐에 따라 사본의 권위와 구매자의 욕구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387d-e]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름난ἐλλόγιμος 인물들의 통곡ὀδυρμός이나 비탄οἶκτος 또한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은 자신의 동료ἑταῖρος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τὸ τεθνάνα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οὐ δεινὸν ἡγήσεται 것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φημί. 그러므로 마치 무서운 일을 동료가 당하기라도 한 듯이 통곡하는 것은 동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훌륭한 삶에 있어πρὸς τὸ εὖ ζῆν 스스로 가장 자족할 수 있는μάλιστα αὐτὸς αὑτῷ αὐτάρκης 사람이어서 누구보다도 타인 의존도가 적고 그에 따라 자식υἱός이나 형제ἀδελφός 또는 재화χρῆμα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들을 빼앗기더라도 가장 덜 두려워ἥκιστα δεινὸν 할 것이고 어떤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가 닥치더라도 덜 통곡하고 가장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견뎌낸다φέρει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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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믿는 한, 동료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하며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폈듯이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좋은 것 즉 혼의 해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의 경우 동료의 죽음을 두고 그가 마치 당한 것으로 여겨 통곡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플라톤은 여기서 훌륭한 사람을 일컬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스승 소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변명>과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의 경우 가장 자족αὐτάρκης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때도 그가 염두에 둔 사람 역시 소크라테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제2권에서의 자족 개념(369b) 즉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사회 분업적인 기능을 다 잘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족이 아니라 여기 표현 그대로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나 힘든 일을 맞이해도 타인에 대한 의타심 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잘 견뎌낼 수 있다φέρειν는 의미의 자족 즉 내적 조건으로서 자립심 내지 의지의 강함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자식과 형제, 그리고 재화는 삶의 외적 조건들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도와줄 자식이나 형제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화의 결핍을 탓한다.

 

[388a-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가에서 이름난ὀνομαστός 남자들의 애가(哀歌)θρῆνος를 가려내어 그것을 여인γυνή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 그것도 진지한σπουδαῖος 여인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남자들 중 모든 못난κακός 자들이 그렇게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ἀποδίδωμι 그것은 옳은ὀρθῶς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수호자로 양육될 사람들이 그와 유사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게δυσχεραίνωσιν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및 다른 시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이 없도록 부탁할δέω 것이라고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여러 군데 인용하여 비판한다. 인용된 사례들 가운데에는 아킬레우스나 프리아모스Πρίαμος 같은 신들의 자손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동료나 자식의 죽음을 두고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가 그의 아들 사르페돈Σαρπηδών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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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가(哀歌)θρῆνος는 말 그대로 망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이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는 이름난 남자들이 노래한 애가가 많이 실려 있는데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굳이 실어야 한다면 진지하지 못한 여인들과 못난 남자들이 노래한 것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플라톤이 기존 시가에 대한 검열과 변조를 용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이미 훌륭한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그것은 있는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 남자들의 애가를 여인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린다는 말에서 혹자는 여인들에 대한 차별을 읽어내기도 한다. 실제로 당대 아테네에서는 비록 귀족일지라도 여성은 시민권을 가질 수가 없었고 반드시 결혼하여 출산과 집안일을 맡아야 하는 기계 정도로만 여겨졌다. 플라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남성으로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민주정의 우상으로 여기는 페리클레스조차 여인들의 덕이란 다만 남자들의 입에 오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여기서 일반 여성들 외에 애가와 무관할 정도의 진지한 여성들의 존재도 함께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수호자의 자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여성 또한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락된 것이 20세기 이후의 일임을 고려하면 기원전 5세기 플라톤의 그와 같은 제안은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조차 자기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슬퍼하는 장면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관을 설명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즉 고대 그리스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가장 위대한 제우스조차 이미 정해진 운명moira을 거스르지 못한다. 가사자들의 죽음은 신들이 최초 자신들의 권한 영역을 분할 할 때 운명의 신 앞에서 맹세한 불가침의 서약 그대로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부여된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 서로에 대한 침범이 불가능adynaton하지는 않지만 침범할 경우 그들은 하나같이 복수nemesis의 신으로부터의 응징nemein을 각오해야만 한다. 요컨대 운명의 신이 정한 최초의 분배 즉 각자의 몫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각자의 운명이자 당위이며 동시에 또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지 않는 각자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388d-e]

* 소크라테스는 들을 가치도 없는ἀνάξιος 이러한 이야기들을 젊은이들이 귀담아 듣는다면σπουδῇ ἀκούοιεν 그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나무라기는커녕 사소한 고난πάθημα에도 전혀 부끄럼도, 참는καρτερός 법도 없이 애가를 부르며 통곡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의 주장ὁ λόγος이 지적해주었듯이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더 나은 다른 주장에 설득되기 전까지는 그 주장에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388e-389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 속에서 신들이나 위인들이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이제 그들이 웃음γέλως에 사로잡히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젊은이들을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φιλόγελως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심한 웃음에 자신을 내맡기게 하여 강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유발시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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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8e에서 언급되고 있는 ‘앞의 주장’은 전후 맥락상 바로 앞에서 거론된 언급이 아니라 387d에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주장 즉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 위와 같이 용기의 구체적 예시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지 않는 것’,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등은 하나같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안정된 혼의 상태를 가리킨다. 웃음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게 웃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수호자는 냉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용기와 관련하여 이곳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설명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일종의 예비적 논의로서 제4권에서 보다 보편적으로 용기를 규정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이다’(제4권 429c-d) 이제 시가 내용 중 용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절제와 관련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또한 나중에 다루어질 절제의 덕에 대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㉟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80d]

*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다. 신은 나쁜 일의 원인일 수 없으며 오직 좋은 것들의 원인이다”라는 사실을 시인들이 시가를 지음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첫 번째 규범이자 법률로서 제시한 후, 두 번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1) 신이 마법사γόης여서 마음먹은 대로 그때그때 다른 형태ἰδέα로 나타날 수 있는φαντάζεσθαι 존재인지 아니면 2) 우리 눈을 속여서 자기에 대해 그런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존재인지 또 아니면 신은 단순하며ἁπλόος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는 일ἐκβαίνειν이 무엇보다도 적은 존재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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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첫 번째 규범에 이어 두 번째 규범이 논의된다. 논의는 여기서부터 제2권 끝(383c)까지 위의 1)(380d-381e)과 2)(381e-382e)의 순서로 다루어진 후 마무리 부분(382e-383c)에서 둘째 규범이 정리된 상태로 제시된다.

 

[380d-381b]

* 1)(380d-381e)은 ‘신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갖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담고 있다. 논변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ὑπ᾽ ἄλλου μεθίστασθαι(380d-381b)와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381b-381e)로 구분해서 진행된다.

* 우선 ‘신은 외부에 의해 변화를 겪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본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ἐκβαίνειν은 자신 혹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이다.(380d)

2) 그런데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것τὰ ἄριστα ἔχοντα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ἀλλοιοῦν 또는 운동κινεῖν을 가장 덜 겪는다. 가장 건강한ὑγιέστατον 몸이 음식이나 힘든 일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가장 강한ἰσχυρότατον 식물들이 태양열이나 바람 등에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이치와 같다.(380e)

3) 혼도 가장 용감하고ἀνδρειοτάτην 가장 분별 있는φρονιμωτάτην 경우, 외부에 의한 영향이나 변화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 집과 옷, 가구 등 잘 만들어진 것들과 좋은 상태에 있는 것들도 시간이나 다른 영향들로 인한 변화ἀλλοιοῦν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a)

4) 이처럼 자연적으로건 또는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또는 이 두 가지에 의해서건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τὸ καλῶς ἔχον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b)

5) 그런데 신과 신에 속하는 것들τὰ τοῦ θεοῦ은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ἄριστα 존재이다.(381b)

6) 그러므로 신은 다른 것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μορφή를 취할 가능성이 가장 적다.(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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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관련한 두 번째 규범을 구성하는 첫째 원리는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외적 요인에 따른 변화와 내적인 요인에 따른 변화로 구분하고, 그 어느 경우이든 왜 신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지를 밝힌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 μεθίστασθαι, ἀλλοιοῦν, μεταβολή 등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상 차이는 별로 없다. 다만 그러한 말 가운데에 ‘운동’의 의미를 갖는κινεῖν(kinein)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어서(380e)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이 불변자인 동시에 부동자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도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표현이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듯이 그리스어 κινεῖν(kinein)은 ‘운동’의 의미와 함께 ‘변화’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실 신은 말도 하고 행동도 하므로(383a) 애당초 부동자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 불변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신이 가지고 있는 형태ἰδέα, μορφή와 언행의 일관성은 물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의 내적 속성의 불변을 뜻한다. 특히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형태와 언행의 일관성은 온갖 모습으로 변덕을 일삼는 전통 신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부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외적인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는 말은, 신이 그 상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신적 상태의 훌륭함과 더불어 능력의 탁월성도 함께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으로 훌륭한 상태가 변화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갖는 나약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건강한 몸과 강한 식물이 그러하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영향 하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내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신적 불변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신이야말로 장자 나라를 통치할 수호자들이 닮아야할 대상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새로운 신관이 정의로운 나라에서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호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시기질투하며 갈라져 싸우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함이 없이 늘 하나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위협하는 어떠한 외부의 영향들로부터도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소크라테스는 신이 갖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몸과 식물 그리고 혼 등 자연적 산물만이 아니라 집과 옷, 가구 등 인공적 산물까지도 함께 끌어들여 ‘자연적으로건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를 가장 적게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이 자연적 본성의 훌륭함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능력 또한 탁월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말 자체가 ‘장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를 우주를 선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내는 신으로 내세워 장인적 기술에 있어 지고지상의 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데미우르고스의 신적 우주 제작 기술의 원리를 나라의 통치자들이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본받아야 할 통치 기술의 근본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신은 통치자들이 닮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381b-381e]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그렇다면 신은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바꾸는가? 바뀐다면 그 변화는 더 낫고βέλτιόν 아름다운κάλλιον 쪽인가 자기보다 더 못하고χεῖρον 추한αἴσχιον 쪽인가?(381b)

2) 신은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분명히 부족함이 없다οὐ ἐνδεᾶ.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나쁜χεῖρον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381c)

3) 신이건 사람이건 자발적으로ἑκών 자신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381c)

4) 그러므로 신이 자신을 바꾸려ἀλλοιοῦν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ἀδύνατον 일이다.(381c)

5) 신들은 각자ἕκαστος 가능한 한 최대한 아름답고 좋은κάλλιστος καὶ ἄριστος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단순하게ἁπλῶς 자신의 모습μορφῇ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381c)

*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ἅπασα ἀνάγκη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말하는 내용, 즉 신들이 온갖 모습을 하고 다닌다거나 신이 변장을 한다ἀλλοιόω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며(381d) 그에 따라 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떤 신들은 별의별 이방인ξένος의 모습을 하고 밤중에 돌아다닌다는 식으로 나쁘게 말해 어린아이들을 겁에 질리게δειλοτέρους 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8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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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변화할 수 없다’는 앞서의 논변에 이어 ‘신은 결코 자신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없다’는 위와 같은 논변에는 시종일관 신이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그 어떤 결여나 부족함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단순하고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근본 전제가 깔려 있다. 자기 변화를 낳는 유일한 동기는 결핍인데 신에게 그러한 결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앞서 살핀 신의 기술적 탁월성ἀρετῆ뿐만이 아니라 신적인 자기 충족성 내지 자기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다. 논의를 마무리하며 신을 표현하는 말 즉 ‘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ἁπλῶς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에서 ‘단순하다’ἁπλόος(haploos)라는 그리스말에는 simple의 의미만이 아니라 타자와 단절된 ‘절대’absolute의 의미는 물론 ‘타자와 어떤 섞임도 없음’not compound, ‘단일함’single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은 신적 불변성과 자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처음부터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이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체적인 존재이다. 신을 표현하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인데 충만함이 여럿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충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분명 여기서 신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위에서 인용한 마무리 부분의 문장 또한 ‘신들 각자’로 시작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일단 플라톤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러 완전한 것들로서 신들 각각의 완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우리는 그 해답의 일단을 앞에서 살핀 신적 능력이 갖는 기술적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의 가장 훌륭한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것을 보전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그것에 대한 능가pleoneksia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는 어떠한 실수도 저지르지 않으며 게다가 그 기술은 오로지 대상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선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기술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에 있어 완전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한 기술들이 여럿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들의 영역에서도 신들은 각기 고유한 역할들이 있고 그 고유한 역할에 있어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며 나아가 그 뛰어난 상태를 늘 하나같이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각기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신 즉 완전하고 결함이 없으면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신 역시 반드시 하나일 이유는 없다 할 것이다.

3) 그런데 그 신들 각자가 완전하면서도 그 자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들이 자체성 내지 자기동일성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곳의 신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의 신들은 모습을 갖고 있고 말과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이데아와 단순 비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이 신화 상의 실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주에서 자체적 존재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뛰어난 존재인 신들을 최소한 그 자체성과 자기동일성의 측면에서 이데아에 견주어 생각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본paradeigma을 보고 우주를 가장 선하게 만든 데미우르고스를 최상의 신으로 그리고 있음은 물론 그가 직접 만든 항성들 즉 영원한 자기 운동자들 역시 모두 신들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플라톤 연구가들은 그 데미우르고스를 그와 같은 우주의 영원한 자기 운동성과 자체성의 근원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선성과 존재성에 기초하여 그를 혹은 그가 바라본 본을 <국가>에서 언급되는 ‘선의 이데아’와 직접 연관 지어 고찰하기도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곳에서의 신들이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신들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를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통치자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원상으로 유추하는 것 역시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라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381e-382e]

* 위와 같이 1) ‘신은 온갖 모습으로 변화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 후 2) 신들은 스스로 바뀌지 않는μὴ μεταβάλλειν 존재이지만 우리에게 자신들이 별의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게끔 우리를 기만하고 홀리는지ἐξαπατῶντες καὶ γοητεύοντες 즉 ’신은 거짓말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381e)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말로나 행동으로λόγῳ ἢ ἔργῳ 우리한테 환영φάντασμα을 내세워 속이는지ψεύδεσθαι를 묻고 그가 그에 대해 모르겠다고 답을 하자 만일에 ‘진짜 거짓’τό ὡς ἀληθῶς ψεῦδος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그 진짜 거짓은 모든 신과 사람이 미워한다고 말하고 그 말의 의미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τῷ κυριωτάτῳ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περὶ τὰ κυριώτατα 자발적으로ἑκὼν 속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거짓을 지니고 있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382a)

* 그래도 아데이만토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아래와 같이 풀어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과 관련해서 혼에서 속는 것ψεύδεσθαί을, 그리고 그렇게 ‘거짓에 빠져 무지한 것’ἐψεῦσθαι καὶ ἀμαθῆ εἶναι을, 그래서 혼에 거짓을 들여와 갖게 된 것을 누구라도 꺼릴 것이고πάντες ἥκιστα ἂν δέξαιντο 그런 경우의ἐν τῷ τοιούτῳ 거짓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다.(382a)

* 그런 연후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을 ‘거짓에 빠진 자의 혼 안에 있는 무지’ἡ ἐν τῇ ψυχῇ ἄγνοια ἡ τοῦ ἐψευσμένου로 칭하고καλοῖτο, 말에서의 거짓τό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과 대비시킨다. 거짓말은 혼이 처한 그런 상태παθήματος의 일종의 모방물μίμημά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εἴδωλον이어서 완전히 순수한 거짓이 못 된다οὐ πάνυ ἄκρατον ψεῦδος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진짜 거짓’은 신들과 인간들 모두의 미움을 산다’고 앞서의 주장을 재차 확인한다.(382b)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진짜 거짓과 거짓말을 위와 같이 대비시킨 후, 화제를 바꾸어 ‘말에서의 거짓’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이 미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 유용할χρήσιμον 때는 언제이며 누구에게 유용한지를 묻는다. 이를테면 적πολέμιος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μανία나 어떤 어리석음ἄνοια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φίλος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παλαιός 일들을 몰라 허구τὸ ψεῦδος를 최대한 진실ἀληθής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μυθολογία 속 거짓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382c)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거짓말이 가져다주는 유익한 경우들을 언급한 후, 도대체 그 중 어느 점에서 거짓이 신에게 유용한지 즉 거짓말을 해서 신에게 유용한 경우가 있는지를 묻는다.(382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신은 옛날에 관해 몰라 시인처럼 허구를 지을 일도, 적을 두려워할 일도, 친근한 이들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빠질 일도 없으므로 ‘신이 누구를 위해 거짓을 말할 일은 전혀 없다’οὐκ ἔστιν οὗ ἕνεκα ἂν θεὸς ψεύδοιτο고 말을 한다. 요컨대 영전인δαιμόνιόν 존재와 신성한θεῖον 존재는 어느 모로 거짓됨이 없다는 것이다.(38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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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에서 ‘가장 주된’의 원어는 ‘힘을 가진, 권위 있는’(having power or authority over)의 뜻을 가진 kyrios의 최상급형인 kyriōtatos를 번역한 말이다. 즉 이 말은 ‘가장 힘이 있고 가장 권위 있는 것 최고의 관심사와 관련해서’의 뜻이다. 다시 말해 이 문맥은 ‘누구든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는 최고 관심사와 관련해서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싫고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런 일에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는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나중에(505d-e) 누구든 ‘좋은 것들’ἀγαθὰ 과 관련해서는 사실 그대로 정말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그와 관련한 억견δόξα은 경멸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에 기초해서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주된 것을 구체적으로 ‘좋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382a에서 말하는 ‘있는 것들’τὰ ὄντα(ta onta)은 역본에 따라 ‘사실들’, ‘사실로 그런 것들’(505d)로 옮겨지기도 한다. 사실 원어 ta onta는 우리가 보통 존재 또는 실재로 옮기는 ’to on’의 복수형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그냥 ‘주어진 현실 내지 현존하는 것들’ 정도를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 실재는 차치하고 일상의 현실사와 관련해서 쉽게 거짓에 빠지거나 속임수를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참주 같은 자들의 경우,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일상의 현실사들 역시 영악하게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러한 현실 정보들을 이용하여 남들을 나쁜 목적으로 속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참주 또한 모종의 지식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참주가 알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일상사와 관련한 현실 정보들일 뿐 결코 실재와 관련한 참된 앎일 수는 없다.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참주를 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 가운데 가장 무지한 자로 부른다. 플라톤에게 ‘무지’amathia, anoia는 일상사 내지 주어진 현실사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능력으로서 혼이 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무지는 혼이 내적으로 불균형 상태ametria에 빠져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228c-d)에서 무지란 혼의 불균형 상태로서 혼의 질병이자 악덕, ‘분별로부터 비켜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국가> 제6권(480d)에서도 사고dianoia는 혼이 균형상태emmetria에 있을 때 각각의 실재의 이데아로 쉽게 인도된다고 말을 한다. 즉 철학자는 현존하는 사실들과 문제 상황들을 균형 잡힌 혼의 총체적인 안목을 통해 그 진실을 포착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참주는 혼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므로 그러한 일상의 사실들과 상황들을 순전히 이기적 관점에서 왜곡하고 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서 결국 부정의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진짜 거짓’to hόs alethōs pseudos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이 허용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그것은 원어에서 참을 나타내는 alethēs란 말과 거짓을 나타내는 pseudos란 말이 형용모순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속는 것’psedesthai(현재 부정사)은 ‘거짓pseudos에 빠지는 것’으로 옮길 수 있고 ’거짓에 빠져‘epseudesthai(완료 부정사)는 ‘속아 넘어가’로 옮길 수도 있다. ‘들여와 갖게 된 것’ἐνταῦθα ἔχειν τε καὶ κεκτῆσθαι을 직역하면 ‘안에 가져서 획득한 것’ 즉 속은 다음 그 속은 상태를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은 제1권(331e-332b) 폴레마르코스와 나눈 대화를 환기시키는 말이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롯한 이후 설화 작가 내지 시인들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광기μανία는 극단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무지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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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에 관한 둘째 규범으로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신은 부족함이 없다’, ‘신은 언제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등에 관한 내용들이 논의된 후 이제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앞에서 ‘신이 변화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것을 내세워 ‘신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똑같은 방식 즉 ‘신은 인간들처럼 거짓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세워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2)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위해 흥미롭게도 ‘진짜 거짓’과 그것의 모방물로서 ‘말에서의 거짓(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런 연후, 신은 진짜 거짓은 물론이려니와 말에서의 거짓도 결코 행하지 않을뿐더러, 흔히들 인간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조차 전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으로 ‘신은 일체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과 말에서의 거짓, 그리고 유익한 거짓말의 의미가 각각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3)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은 ‘혼 안에 있는 무지’, ‘혼의 무지 상태’이다. 혼의 무지 상태는 이미 혼에 거짓이 들어와 거짓에 빠져 있는 자의 상태이다. 그리고 말에서의 거짓 즉 거짓말은 이 혼 안에 있는 무지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온 것이라고 얘기하듯이, 거짓말은 혼에서의 무지가 선행 원인이 되어 그것이 말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이라는 원상의 그림자이자 모방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상인 진짜 거짓의 모방물인 한에서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못 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완전히 순전한 거짓의 모방물인 한, 모방의 정도에 따라 진짜 거짓에 아주 가까운 거짓말에서부터 비교적 그것보다는 좀 떨어진 그것과 덜 비슷한 거짓말 등 여러 종류의 거짓말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도 나왔듯이 자신이 속아서 혼의 무지 상태에 있음에도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마치 진실인 양 떠들어 대는 경우의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듯이 이른바 가짜 뉴스를 진실로 알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이와 순전함의 정도가 다른 거짓말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도 거짓말을 행하는 자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그의 혼 안에 거짓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역시 혼의 무지 상태에서 거짓말을 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들 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실재에 관한 앎이 아니라 일상사 내지 현실 정보들로서 장차 혼의 무지에 의해 왜곡되어 나쁜 목적에 쓰일 재료이자 도구들일 뿐이다. 특히 참주들은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자들 가운데 정보량에 있어서나 그것을 나쁘게 활용함에 있어서나 가장 월등한 자들이고 그만큼 가장 나쁜 자들이다. 그러나 참주는 여전히 그 누구보다도 무지한 자일뿐이다. 왜냐하면 참주는 불균형한 혼을 가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 그러한 현실 정보들의 내적 관계와 본질들 즉 그것들이 삶과 현실에서 어떻게 총체적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진실에 무지할뿐더러, 그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선한 삶을 이루어낼 낼 것인가에 대한 앎 또한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보다 참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진짜 거짓’에 가까운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일부 특수 사안에 속아서 나온 거짓말이지만 참주의 경우는 현실의 모든 사안들과 연관된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이고도 원리적인 앎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에서 나온 모방물로서 거짓말들은 인간들 각자의 가장 주된 부분, 주된 문제 영역에서 결코 유익함을 가져다주지 못함은 물론 참주의 경우가 보여주듯 유익은커녕 인간 삶의 전체 국면에서 전적인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4)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마친 후 거짓말이 때로는 유익한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앞에서 우리가 살핀 내용들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혹자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에 근거하여 어차피 순전하지 않으므로 때로는 유익함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유익한 거짓말은 자기의 이익이 아닌 친구나 대상의 이익을 위한 선한 행위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다가 나중에 철학 통치자들도 행하는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거짓말이다. 만약 유익한 거짓말을 그러한 거짓말의 하나로 포함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히 철학 통치자가 진짜 거짓 즉 혼에서의 무지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혼에서의 무지 상태 즉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 속에는 가장 유익하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덜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도 차이만을 갖는 나쁨이 있을 뿐 어떠한 유익함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처럼 만드는 설화 이야기 속 거짓말들은 나쁨이 아닌 좋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유익한 거짓말은 혼의 무지 상태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국 거짓말은 크게 나누어 혼의 무지상태에서 나온 거짓말과 혼이 속지 않는 상태 즉 앎의 상태에서 나온 거짓말로 나누어지고 앞서 살폈듯이 전자에는 속은 줄도 모르고 진실인 양 떠드는 거짓말과 사실을 알면서 나쁜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이는 거짓말 등이 속해 있을 것이고 후자에는 이른바 유익한 거짓말들이 속해 있다 할 것이다.

5) 그런데 우리가 유념할 점은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 내용의 초점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거짓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짜 거짓에서 나온 거짓말이든 유익한 거짓말이든 그 어떤 경우든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유익한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앞에서의 거짓말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 그 의미의 일관성과 관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러움을 안겨주지만, 전후 문맥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인간과 달리 신들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유익한 거짓말을 할 이유조차 존재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들이 거짓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무결한 선성을 가진 존재임을 더욱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별도의 화제로 삽입된 것이다.

6) 한편 위와 같은 해석과 달리 위의 부분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신이든 사람이든 가장 주된 것 즉 ‘좋은 것’에 관해서는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지 않는다. 2) 좋은 것과 관련한 거짓을 갖고서(속고서) 속은 줄도 모르는 상태가 혼의 무지로서 진짜 거짓이다. 3) 말을 통한 거짓 즉 거짓말은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속이는 것이므로 진짜 거짓에 비해 아주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4) 그러므로 거짓말에는 적에 대해 하는 거짓말, 정상이 아닌 친구에게 하는 거짓말 등의 경우처럼 유익한 거짓말도 있다.

7)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말을 통한 거짓이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거짓말에 존재하는 속성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는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진짜 거짓에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해석은 나중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익한 거짓말이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의 모방물이라면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까지 혼의 무지 상태에서 나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시민을 속이는 참주와 그것에 속은 줄도 모르는 대중을 비교할 때 시민이 혼의 무지의 원상이 되고 참주가 그 모방물이자 영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참주는 자기는 속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을 속이는 자 즉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아닌 반면에 오히려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는 시민이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진짜 거짓은 시민의 상태가 되고 참주는 그 시민을 모방한 자로서 혼에 있어 시민 보다 덜 무지 상태에 빠진 자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은 것과 관련해 가장 무지한 한 자 즉 혼의 무지가 누구보다도 극상의 상태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참주이다. 요컨대 이러한 해석은 참주의 거짓말이 최악의 진짜 거짓말이라는 것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382e-383c]

* 위와 같은 논의가 이루어진 후 소크라테스는 그 논변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둘째 규범δεύτερον τύπον을 제시한다. 즉 ‘신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ἔν τε ἔργῳ καὶ λόγῳ 전적으로 단순하고ἁπλόος 진실ἀληθὲς 하거니와, 스스로 바뀌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도 아니한다’ 신은 인간에게 환영φαντασία이나 말로도 꿈속에서건 생시건 자신을 바꾸거나 남을 속이는 어떤 징조σημεῖον도 보내지 않으며(382e)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결코 우리를 오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383a)

* 그러므로 신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이 규범을 지켜야 하며, 비록 우리가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은 칭송하지만, 만일 이 규범에 어긋난 말을 할 경우에는 칭송하지 않을 것이며οὐκ ἐπαινεσόμεθα(383b) 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해 화를 낼 것이고χαλεπανοῦμεν 그에게 합창 가무단χορός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수호자들οἱ φύλακες을 최대한 신들을 경외하는θεοσεβής 인간이자 거룩한 이들θεῖοι로 키우려면 교사διδάσκαλος들로 하여금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ἐπὶ παιδείᾳ τῶν νέων 이 규범에 어긋난 이야기를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οὐδὲ ἐάσομεν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규범에 전적으로παντάπασιν 찬동하며συγχωρειν 그것 또한 법률νόμος로 삼았으면 한다고 대답한다.(38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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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전통 신화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정기적으로 연극의 형태로 공연되면서 아테네인들의 삶에 대한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극은 일종의 시민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나랏돈은 물론 부유층들의 기부금을 받아 그러한 공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합창가무단도 그러한 지원의 일환으로 공연이 이루어질 때마다 제공되고 있었다.

*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에서 채택될 규범에는 전통적인 신화와 상충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규범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찬송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시가 교육론 내지 종교론은 기본적으로 기존 체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비판적인 분별의 방식으로, 일부는 계승하고 일부는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로써 ‘신은 선하며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변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규범은 시가 교육과 시가 창작을 함에 있어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자 법률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규범들은 앞서 살폈듯이 단순히 시가 교육상의 규범을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세계관 내지 가치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규범들이 담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전통적인 신들과는 차별되는 플라톤 고유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앞에서도 살폈듯이 이곳에서 언급된 신에 대한 새로운 관념들과 장차 본격적으로 언급될 이데아에 대한 관념이 자기 완전성과 자체성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역시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플라톤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크게 요약하자면 그것 역시 플라톤 철학의 연장선 위에서 i) 기원전 7-8세기 형성되고 전승된 신화적 세계관과 ii)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로부터 과학적 사유가 유입된 이래 당대 아테네 사상계에서 형성된 철학적 세계관 즉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 그리고 iii) 피타고라스 이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자리 잡은 영혼불멸 사상 등을 그야말로 총체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통일한 것이다. 이른바 개인의 혼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플라톤 평생의 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이제 제2권은 마무리되고 이어서 시가 교육에 있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들이 다루어지고 그것을 본받아 인간들이 지녀야 할 덕목들이 함께 제시된다.

<국가> 제2권 -끝-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78b-e]

* 소크라테스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저지른 일이 설사 진실일지라도 이 나라에서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아데이만토스도 그런 이야기는 적합하지 않은οὐδὲ ἐπιτήδεια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πολεμοῦσί 서로 음모를 꾸미며 싸움질을 하는ἐπιβουλεύουσι καὶ μάχονται 것으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οὐδὲ γὰρ ἀληθῆ.(378b) 게다가 수호자들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αἴσχιστον 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신들과 영웅ἥρως들이 자기들의 동족과 친근한 이들에게 취한다는 적대행위ἔχθρας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어떤 시민πολίτης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ἀπάχθομαι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짓은 경건한ὅσιον 짓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πείθειν 하려고 한다면 노인γέρων들과 노파γραῦς들이 아이들τὰ παιδία을 상대로 곧바로εὐθὺς 들려주어야 하고(378c) 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들을 위해 시인들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이야기 즉 어떤 시민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짓도록 강제해야 한다ἀναγκασ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지은 온갖 신들의 싸움 이야기들은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게 지어졌건 아니건 간에 이 나라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ὁ νέος은 뭐가 숨은 뜻인지 아닌지 판별κρίνει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δόξα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기δυσέκνιπτάτε καὶ ἀμετάστατα때문이라는 것이다.(378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해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37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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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금지하는 것은 있는 사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 내지 폐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을 감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인데다가 신의 선성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플라톤은 신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물론 일찍이 시민이 같은 시민들을 미워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역사만 보더라도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말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들을 닮은 선조들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지 않고 동족으로서 친근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기존 신화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들 모두가 신들끼리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분열하는 모습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플라톤은 그 자신 평생 동안 몸소 내전을 겪으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특히 기원전 5세기 이래 그리스 사회 전체가 평화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동족상잔과 내전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있어 플라톤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수호자들과 시민들 모두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단합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어려서 부터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것이 갖는 중대성의 크기만큼 어린이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교육과정에서부터 엄격한 규범을 세워 위와 같은 신들과 영웅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원천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신과 관련한 훌륭한 내용들만 듣도록 설계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비판적 사고 내지 그것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자기가 틀렸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교육 대상에게 알려주길 거부하거나 하물며 은폐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판 교육이라면 설사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그것을 감추기 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해야 진정으로 그 뭔가를 온전하게 알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비판적 안목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종종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하기 쉬우므로,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몸에서 면역력을 기르듯이 어떤 것이 나쁜 것들인지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는 플라톤의 생각대로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굳이 미리 배우게 하거나 알려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접하는 시가 작품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시인들을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착종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 이것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미리 끌어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혼의 인식 능력에 기초하므로 제대로 된 앎을 얻기 위해서는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함께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그 신체의 물질성에 의해 원천적으로 혼의 순수성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해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경우 혼의 인식능력이 크게 떨어져 제대로 된 앎을 가질 수 없고 그로 인한 무지가 그에게 나쁜 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지성의 훈련 즉 배움을 통해 이 신체가 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것의 원인은 무지이고 그 무지의 이면에는 물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의 신체가 나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신체가 갖는 물질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막무가내 자기 식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물리적 필연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 인식 능력으로서 혼의 지향성을 흐트러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여 그에게 나쁜 일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쁜 일에 대한 근본책임은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지적 훈련에 게을리 하여 신체의 힘을 통제해 내지 못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즉 혼의 인식 대상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에 따라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간파하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으로 그 잘못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했던 생각을 자신도 미리 다 경험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 사태의 진실을 인지하고 분별해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혼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별의 기준으로서 진실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상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는 순수한 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앎이란 순전히 백지와도 같은 마음 상태에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은 이른바 혼에 의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들어온 감각내용을 토대로 분별되는 것이고 그 분별의 기준 또한 그 후천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험론적 사고는 오늘날 인식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험론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관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지식을 사태와 사물의 진실인 양 강제하는 일종의 나쁜 주입식 교육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태에 대한 진실은 시행착오 내지 실험이라는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에게도 경험은 앎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혼은 그 자신과 닮은 것에 더 잘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들 가운데 혼의 순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험들은 교육의 한 수단으로 적극 권장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나쁜 경험들은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미리 배워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의 순수성을 오염시켜 무지를 초래하고 그로부터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 이러한 한, 분별없이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삶의 현실에는 누구라도 혼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일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그 나쁜 일에 용이하게 대처하거나 이겨내는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앎이기는 하지만, 비록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적을지라도 배움과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아 삶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 누구보다도 넓고 그에 기초하여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지혜 또한 더욱 깊어진다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과학 영역에서건 도덕 영역에서건, 단순한 습득을 위한 교육에서건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에서건, 기본적으로 학습은 혼의 순수성을 통해 함양되고 증진되는 것이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은 뜻’과 관련한 언급은 자칫 신들의 모든 행적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설사 신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나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 즉 숨은 뜻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 교육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가 어린이 교육과정에서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1-1-1 신은 선하다.(378e-380c)

 

[378e-379c]

* 소크라테스가 어린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 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데이만토스는 그게 어떤 것들이며 어떤 설화들μῦθοι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를 묻는다.(378e)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시인들ποιηταὶ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οἰκισταὶ πόλεως임을 환기시킨 후 나라의 수립자들은 시인들이 설화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할 규범τύπος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스스로 설화를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οὐ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θεολογία에 대한 규범들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서사시ἐπη, 서정시μέλη, 비극시τραγῳδία 어떤 시를 짓건 언제나 신을 신인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ἀποδοτέος(379a)즉 “신은 참으로 선하므로”ἀγαθὸς ὅ θεὸς τῷ ὄντι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들은 해롭지 않다. b) 해롭지 않은 것ὃ μὴ βλαβερὸν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c) 나쁜 짓κακὸ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것의 원인κακοῦ αἴτιον일 수 없다.>라는 확답을 얻어내고, 이어서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유익하다.ὠφέλιμον b) 그러면 선한 것은 잘함의 원인αἴτιονα εὐπραγίας이다.>라는 확답 또한 얻어 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τῶν μὲν εὖ ἐχόντων αἴτιον이고 나쁜 것의 원인은 아니다”(379b)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기에 ὁ θεός, ἐπειδὴ ἀγαθός 소수의 것들에 대해서ὀλίγων 원인일 뿐 많은 것에 대해서는 원인이 아니며(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것들τἀγαθὰ이 나쁜 것들 보다 훨씬 더 적기ἐλάττω 때문에) 이에 따라 ‘좋은 것의 원인은 신’으로,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3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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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한 설화가 뭔지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은 시인들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로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설화를 스스로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한다.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테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설화를 짓는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호메로스 등 큰 규모의 설화를 대신할 만한 설화를 새로 짓는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플라톤의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수호자 교육에서 당대 아테네 시가 교육 제도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그 기본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갖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시가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이상국가가 백지 상태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염증상태에 있는 현실의 조건들 위에서 그것을 정화하고 개혁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수립자 즉 철학자란 설화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규범을 세우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논의의 국면 또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음에도 다른 한편 동시에 철학자가 ‘스스로 설화를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οὐ μὴν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곳의 논의 국면과 어울리지 않게 철학자도 시인들처럼 스스로 설화를 지을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깊이 함축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화편들 곳곳에서 기존 신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화적 표현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신화를 짓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말년의 사상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편은 가히 이곳에서 가장 훌륭하게 지은 설화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의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훌륭함과 관련하여 신들이 행한 최선의 행적들 즉 어떻게 신들이 선한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설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나라의 수립자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의 논의가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가 힘을 합쳐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플라톤의 말년의 대화편 <법률>은 그러한 과정을 한층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법률>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다는 전체 구도 하에서 이곳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적인 규범들뿐만 아니라 그 규범들에 걸 맞는 세부적인 법률들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나라의 수립자들이 신과 관련한 이야기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규범 즉 수호자들이 간직해야할 첫째가는 종교적 믿음은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과 관련한 이야기’의 원어가 오늘날 ‘신학’의 의미로 쓰이는 θεολογία(theologia)라는 것을 고려하면 위의 규범은 이른바 플라톤 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이 규범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a)-b)-c)에 이어서 d)-e)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식화한 삼단논법syllogism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위의 추론 과정은 아래와 같이, ‘신은 선하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삼단논법들의 단계를 거쳐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추론해내고 있다.

우선 a)-b)-c)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1> 신은 선하다(대전제)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해롭지 않다(결론). <삼단논법 2>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대전제) 해롭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소전제) 그러므로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3>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신은 선한 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4>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그리고 d)-e)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4> 신은 선한 것이다(대전제) 선한 것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5>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대전제)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6>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대전제)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 위 추론들의 결론 즉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전자 즉 ‘신은 선하다’ἀγαθὸς ὅ θεὸς라는 말은 그 말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ἀγαθὸς(agathos)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morally good의 의미와 함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좋다good’, ‘유익하다’benefit, ‘능력 있다’capable, ‘훌륭하다’admirable 등의 의미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결코 낯선 표현도 틀린 표현도 아니다. 설사 신이 나쁜 일들을 했다하더라도 신은 그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처음 ‘신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데이만토스가 ‘물론이죠!τί μήν;’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앞에서도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듯이, 기존의 신화에 나타난 신들은 나쁜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당대의 신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말에는 새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수호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조, 다시 말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할 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존 신관의 근간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새로운 신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신화 관련 규범으로서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명제들을 플라톤 형이상학의 전모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그의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명제들이 갖는 의미는 가히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플라톤 세계관의 핵심과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길게 논의하기는 우리 강해의 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점만을 음미해보더라도 그 중대성은 지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신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되 그 내용들 모두 신화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화를 통해 플라톤이 드러내고 있는 핵심 요체가 다름 아닌 이곳에서 그가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의 선성”과 그 신을 닮은 “우주의 선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우주론적 설화가 그 자신 평생을 통해 구축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신화가 다름 아니라 <국가>에서 다룬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이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플라톤 철학 연구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와 그가 자신을 닮은 선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바라본 본paradeigm을 <국가> 제6,7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좋음)의 이데아’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그것이 갖는 중대성만큼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작품 안내 참고)

* 플라톤이 기존의 전통적 신화들은 물론 기원전 5세기 수많은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고 새로운 신관까지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해온 신화적 세계관 즉 그리스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강해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크고 방대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이곳 논의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신화를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하여 그리스 종교에서 가히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의 내용들이 인간사와 관련된 시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리스 종교 역시 체계나 강령은 물론 성직자 같은 사람들도 따로 없었고 굳이 있었다면 다만 신전과 공물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과연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그들이 과연 믿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만을 고려하더라도 아테네인들에게 종교는 비록 오늘날의 기성 종교들이 갖는 양태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해 오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종교로서 특성을 갖추었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신화의 내용들은 그들의 역사이자 태초 이래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해 온 자명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래왔듯 모두 거리에서건 집에서건 신들의 탁월성과 불멸성을 칭송하며 신들에게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신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구했고 나라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신들을 끌어들였으며 재판관들 또한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신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시인들은 인생사의 제반 일들을 신화를 끌어들이거나 변용해가면서 시로 노래하였고 예술가들 또한 신들을 모형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아름다움의 근거를 찾아냈다.

* 그렇다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생겨나고 확립된 것일까. 그리스신들 역시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원시시대 이래 그들이 맞이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자연신들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것들은 인간들의 소망과 기원에 반응하는 신인동형설적인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내력과 성격이 구체화 되면서 불멸성과 탁월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가이아와 하데스 등 제우스 이전 신들이 보여주는 다툼과 혼란상은 원시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혼돈의 시대를 투영한 것이고, 제우스의 등장 이후 태양신 제우스를 정점으로 나름의 고유한 역할을 갖고 위계를 형성하고 있는 12신들은 자연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 이후에 생겨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안정감이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이런 경험들이 오랜 기간 반복되고 동시에 집단의 단위가 점차 커지고 사회화되면서 위와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네메시스, 모이라 등 인간의 사회적 삶과 의식을 반영하는 추상적 신들도 생겨나서 도덕과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남하와 정착 과정에서 척박한 환경과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부족의 정치적 결속과 단합을 담보하는 이른바 정신적 토대이자 믿음으로서 그리스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종교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남하 과정에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유입된 이집트 종교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의식과 같은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종교는 근본적으로 씨족이나 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또는 자연적 재앙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집단의 공적 제의를 통해 평화와 승리,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 기본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인들과 개별 가문들의 평화와 안정 역시 그러한 공동체의 평안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태초 이래 신들과 관련한 제의 내지 의식의 형태로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기본적으로 점술과 예언, 신탁이 중심을 이루고 탄원과 기원에서조차 제의와 제물 봉공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원적 배경 하에서 기원전 11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된 아테네인들 역시 매일 신들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였고 정기적으로 큰 규모의 제의와 함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내력이 수많은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시가의 형식으로 기록되면서 차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는 물론 시인들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의 작품까지 그들의 삶과 의식을 지도하고 이끄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아테네에서는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며 학습하는 것이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제도이자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과 관습 및 행위들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면서 사회생활 전반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경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끊임없이 전란에 휩싸이고 게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아테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결속도 서서히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퍼져나가면서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관습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 외국과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거류외인은 물론 외래 사상도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생활종교로서 자리잡아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종교 이외에, 내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디오뉘소스 비의(秘儀) 종교는 그나마 전통적인 종교에서 변용된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이지만, 디오뉘소스 신화의 변용으로서 자그레우스 신화에 뿌리를 둔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 종교 등은 비록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죄에 대한 관념은 물론 대립되는 두 본체 사이의 투쟁으로서 삶의 개념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등 그동안 전통적 아테네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른바 그들의 종교적 신조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에서 발원한 과학과 철학의 흐름이 아테네에 유입된 이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화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크세노파네스Xenophanēs(기원전 570-480)가 일찍이 기존의 신들을 냉소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화에 대한 창조적 변용을 통해 신들을 찬미하던 시인들마저 아테네의 번영과 그 과정에서 급속히 유입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경향을 등에 업고,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찬미보다는 인간사의 고민과 갈등 들을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하물며 신과 영웅들에 대한 냉소와 회의의 눈길도 과감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 신화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신들과 영웅들 간의 싸움이 그려져 있음은 물론 인간사와 관련한 그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아테네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는 더욱 크게 고취되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종교적 제의를 거부하거나 임의로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기원전 5세기 말 시인들의 신들에 대한 변용이 가히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통제는 기이할 정도로 방임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력이 쇠락해졌기도 하였지만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막강한 기득권자로서 오랜 기간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시인들의 지위는 가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은 소피스트들의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발달되면서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멸망을 앞당기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역사를 통해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저자들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창조적 기풍을 세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 플라톤은 이러한 아테네의 종교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오랜 역사 동안 아테네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쳐온 신들에 대한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플라톤은 그 재편을 위해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당대의 종교적 정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전통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아테네에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었고 당대의 정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아테네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히 아테네는 이른바 곪을 대로 곪은 염증상태의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제 플라톤은 그리스의 기존 종교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과정 모두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논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 과정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컨대 플라톤은 <법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제의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다신론적 전통종교를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국가>가 암시하고 있듯이 철학사적 전통에서 확립된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신비종교를 통해 유입된 영혼불멸에 대한 의식을 토대로 인간의 안녕과 행복 국가 사회의 정의와 번영에 대한 기본 관념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379d-380c]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거에 의거하여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들이 생각 없ἀνοήτως이 신을 나쁜 것들의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 잘못임ἁμαρτάνοντος을 분명히 한 후,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가며 하나하나 비판한다.(379d-380a)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사람νέος들이 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 이것들을 신이 한 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설령 그게 신이 한 일ἔργα일지라도 그것을 위한 서술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σχεδὸν ὃν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380a) 즉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δίκαιά τε καὶ ἀγαθὰ을 했으며 그들은 응징을 당함으로써 이롭게 된 것οἱ ὠνίναντο κολαζόμενοι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어떤 시인이 벌δίκη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며ἄθλιοι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 그와 달리 만일 어떤 시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신한테서 은혜를 입은 것’διδόντες δίκην ὠφελοῦντο ὑπὸ τοῦ θεοῦ이라고 말 할 경우에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들의 원인으로 된다는 주장은 모든 방법으로 맞서 분전해야 하며διαμαχετέον 나라가 훌륭하게 다스려지려면 제 나라에서는 ἐν τῇ αὑτοῦ πόλει 나이에 상관없이 운문, 산문 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도 그런 것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380b) 그런 이야기는 경건하지도ὅσιος 유익하지도σύμφορος 않으며 그 자체로도 모순된οὔτε σύμφωνα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 법νόμος에 대해 찬성한다σύμψηφος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이제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들의 원인임μὴ πάντων αἴτιον τὸν θεὸν ἀλλὰ τῶν ἀγαθῶν을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들과 관련한 법률νόμος과 규범τύπος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제시한다.(3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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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뿐만이 아니라 <국가>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신화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그러한 인용이 논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국가>의 논의가 우선 당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시가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그토록 때마다 신화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 강해에서는 앞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물론 앞으로도 신화들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화와 <국가> 논의의 내용적 연관성은 우리말 역본에 실린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앞에서도 신화가 포함하고 있는 ‘숨은 뜻’에 관해 설명한 바가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행한 나쁜 짓들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일단 어린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의 나쁜 행위를 숨기는 것은 사실의 은폐 차원이 아니라 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 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한 뜻을 숨기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숨기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 숨은 뜻을 찾아내서 그 선함을 밝혀야 한다. 그냥 밝히지도 않고 숨은 뜻이 있다고만 말하면 자칫 신들의 나쁜 행위를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논의는 비록 숨은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숨은 뜻과 관련한 논의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신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즉 ‘신들이 선하다는 것’을 찾아내어 실제로는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시인들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함께 밝히고 있는 이야기들만 허용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누군가를 응징했을 경우 그 벌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한 것이 신들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들은 나쁜 일들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경우 경건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들이 주는 벌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마땅히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되 그렇게 처벌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신들의 응징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서든 신들은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률 차원에서건 종교 차원에서건 형벌 내지 징벌과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플라톤에게 벌이란 응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교정(矯正)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벌을 처단과 응징의 성격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가르침의 일환으로 보는 플라톤의 생각에는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벌을 받는 사람에게 벌은 고통스럽고 일단 강제의 형식을 갖고 부여되지만 교육을 통해 그 사람 스스로 벌의 이유가 교정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철학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구성원들이나 상대에게 늘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데이만토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규범을 법no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자기도 그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당위적 규범이 아니라 말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가 제도적 관습으로 채택해야할 최고의 입법 원리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헌법적 규정 내지 헌법 정신임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것을 법률과 규범으로 다시 표현하면서 첫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수호자들이 종교적 신조 차원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둘째 규범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㉝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376c-d]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성향φύσις을 논한 후 이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양육τρέφειν되고 교육παιδεύειν받도록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가 장차 전개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나라에 있어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기는지τίνα τρόπον ἐν πόλει γίγνεται;를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령 다소 길어질μακροτέρα 지라도 이에 대한 고찰σκέψις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후 이 사람들을 논의를 통해 교육시켜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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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수호자의 성향이 거론된 후 이제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논의의 시작을 장식하는 것은 수호자에 대한 교육론이다. 앞으로 수행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본격적인 국가론을 시작하면서 수호자 교육론이 일차적인 과제로 내세워지는 것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어색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국가론을 다룰 때 우선 논의되는 것은 주로 정부와 권력 구조, 법률과 제도 등 국가 시스템에 대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틀에 박힌 물음이지만 아주 오래된 물음 즉 인치(人治)가 먼저인가 법치(法治)가 먼저인가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론의 시작을 수호자 교육론으로 장식하고 있는 플라톤의 입장은 분명 인치가 먼저라는 입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치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정치의 핵심에는 법률과 제도 이전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므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률과 제도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거나 그러한 믿을만한 사람의 주도 하에 만들어지고 운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독재정치의 폐해를 혹독하게 경험한 이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법치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제정된 법률과 제도를 통한 지배만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통치 방식이며 모든 정치 행위 또한 그 법률적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져한다는 생각이 정치적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이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수호자 교육론은 현대인들에게 시작부터 그 의미가 격하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살아간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생각을 단순히 폄하만 할 일도 아니다. 플라톤은 법률과 제도에 따른 지배가 보편화된 오늘날과 달리 사람에 의한 통치가 당연시되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누가 나라를 통치할 것인가의 문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중대하고도 거의 유일한 정치철학적 관심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플라톤 당대에도 법률과 제도가 존재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헌법적 수준의 법률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법률 또한 확고한 구속력을 갖는 오늘날의 실정법과 다른 다소 느슨한 관습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치냐 법치냐를 이분법적으로 극단화해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인치의 시대를 살던 플라톤은 물론이고 법치가 기반을 잡은 오늘날에서조차 모두가 동의하는 사고방식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과 제도를 갖춘 나라라고 할지라도 누가 정치권력을 행사하느냐에 따라 정치 현실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치와 법치는 상호 배척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문제라는 데에는 오늘날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피게 될 플라톤조차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곳에서는 비록 인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당대의 관습법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법률체계를 토대로 법률의 지배 또한 함께 강조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이곳 <국가>의 논의에서는 인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 수호자라는 통치 권력자를 핵심으로 이상 국가론을 펼치고 있지만, <국가> 못지않은 만년의 대작 <법률>을 통해 그는 헌법적 개념을 포함하여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인 입법 과정과 내용을 토대로 인치가 갖는 현실적 한계를 보완함은 물론 법치가 갖는 고유한 중대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전모를 이해하려면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 아니라 <법률>의 논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2) 그러나 일단 이곳 <국가>에서의 논의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서 무엇보다도 나라를 다스리는 수호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수호자의 성향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을 장차 제대로 된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훌륭한 수호자로 길러내는 일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정의로운 국가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론으로 시작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 즉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고찰의 목적은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를 밝혀 정의가 왜 부정의보다 나은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찰의 목적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달라져 오긴 했지만 수호자가 어떻게 길러지고 자라나는가를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가가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정의와 부정의가 나라와 개인에게서 어떤 작용을 하는가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다.

3)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논의가 다소 길어질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가 차지하는 분량을 보면 다소 길다는 표현에서 우리가 느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우선 바로 이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 부분만 보아도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모두를 합해 이곳 376e부터 제3권 412b까지 이어진다. 이 분량은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35쪽에 가까운 것인데 이 분량은 우리가 제1권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핀 분량(스테파누스 쪽수로 48쪽)의 3분의 2에 가까운 분량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수호자의 교육은 수호자를 선발한 후 본격적으로 수호자의 교육이 다루어지기 이전 단계 즉 18세 이전의 아테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일종의 예비 수호자 교육만을 다루고 있다. 이후 제6권과 제7권에 가면 수호자와 통치자를 단계별로 선발한 후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곳의 분량까지 포함하면(502c~541b) 수호자의 교육을 직접적인 주제로 내세워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만 해도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85쪽에 이른다. 이 분량은 <국가> 전체(327a-621d. 스테파누스 쪽수로 약 294쪽) 분량의 거의 30%를 차지한다. 나머지 내용도 거의 다 이러한 수호자 교육이 결과하는 내용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호자의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4) 여기서 양육τρέφειν이란 건강한 신체를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고 교육παιδεύειν은 건강한 혼을 갖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기본적으로 교육은 각자의 혼 안에 있는 힘을, 마치 눈을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과 같이, 실재와 좋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것 즉 혼의 전환περιαγωγῆ을 위한 방책τέχνη이다.(518c)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교육의 목적은 영혼 속에 잠재된 최상의 것들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짐과 습관을 통해 혼 안에 덕을 구현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혼이 근본적으로 자신과 친숙한 것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한, 땅에 심은 식물이 토양과 대기에 의존하여 잘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혼 또한 어떤 것들이 교육의 이름으로 함께 하느냐에 따라 좋음과 아름다움에 더욱 다가가고 그에 동화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425c, 492a)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376e]

*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교육παιδεία은 어떤 것일까, 오랜 세월에 걸쳐 고안된 교육방식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일까’를 물은 후, 현존하는 아테네의 전통적 교육 방식에 준해 몸을 위한 교육으로 체육ἡ ἐπὶ σώμασι γυμναστική을, 혼을 위한 교육ἡ ἐπὶ ψυχῇ μουσική으로 시가μουσική 교육을 제시한 후 이 가운데 시가 교육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시가에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이야기에 사실적인 것τὸ ἀληθές(alēthes)과 허구적인 것ψεῦδος(pseudos)이 있고 어린이παίδιον들 교육은 그 가운데 허구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의아함을 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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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들 즉 시가 교육의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앞에서 언급된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수호자 교육을 아테네의 전통적인 방식에 준해 수행할 것을 표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교육의 대상은 천성과 상관없이 아테네 시민 계급 젊은이들 모두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대 아테네에서는 귀족 여부에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모두 어려서부터 18세에 이르기까지 위에서 언급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마친 후 수호자를 선발할 때에도 천성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오직 교육의 결과에 따른 능력만을 기준으로 선발하고 있다. 현대 비평가들은 종종 플라톤이 태생에 따른 천성의 차이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주의자로 그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공고한 신분사회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가문이나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오직 능력에만 기초하여 교육의 기회는 물론 통치자의 자격까지 부여한 그의 구상이야말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할 그의 진면목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천성적 성향을 더욱 살려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천성적 성향이 다소 모자라도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천성적 성향을 가지고 훌륭하게 교육받은 사람 못지않은 수준으로 길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무리 천성적으로 수호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훌륭한 양육과 교육이 수반되지 않으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 참고로 이곳 제2권과 3권에서는 수호자를 기르기 위한 초기 교육의 일환으로 시가 교육과 체육 그리고 초보적인 수준의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고(18세까지) 18세부터 2,3년 동안은 수호자로서 군사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다 강화된 체육교육이 이루어진다. 이후 20세가 된 수호자들 가운데 통치자가 될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30세까지 어린 시절 받았던 기초 수준의 과학 교육에 이어 체계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과학 교육과 철학 교육을 받으며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35세까지 최고 수준의 철학 교육 즉 변증술 교육을 받는다.(537a-d) 물론 이때에도 시가교육은 지속적으로 부과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명실공한 통치자들로서 15년 동안 도시의 관리와 행정, 군사 관련한 고위 직책을 맡아 나랏일에 봉사하고 50세에 이르면 그러한 모든 일에서 벗어나 철학적 관조에 시간을 보내면서 순번에 따라 철학자왕의 역할을 수행한다.(540a-b) 이때 철학자왕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만 왕으로 봉사한다. 철학자들이 순번대로 왕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넓게 봐서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의 성격을 갖는다고도 하겠다. 이것은 <법률>에 가서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라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체화된다.(<법률> 908a-908a, 672d)

3) 수호자의 교육과 선발에서는 물론 앞으로 펼쳐질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보여주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호자의 교육 방식 좀 더 정확하게는 장차 수호자 선발을 위한 청소년기의 예비 교육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채택하고 있는 교육방식은 일단 현존하는 전통적인 아테네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이상국가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수호자 교육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그가 변혁하려는 아테네의 기존의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고 있는 기본 문제의식은 물론 그 구현 방법론에 있어 그가 가지고 있는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백지상태에서 그가 꿈꾸는 대로 설계하고 건설되는 이상국가가 아니다. 앞서 나라의 기원과 발달에서도 살폈듯이 그의 이상 국가로서 정의로운 국가는 염증 상태에 빠진 나라를 정화하여 세워지는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와 같은 염증 상태의 나라가 쉽게 정화될 수 없다는 것을 당대 아테네는 물론 몇 차례의 쉬라쿠사이에서의 정치실험을 통해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평생을 통해 목도한 아테네 현실은 정화의 구상조차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견고하고 그 역사적 뿌리 또한 너무 깊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정의로운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피폐한 현실을 정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인 동시에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이상국가론을 펼침에 있어 그가 찾아낸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정의로운 수호자를 길러내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바르게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 현실에서 어린이는 물론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쳐왔던 교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제일 유연한 어린 시절부터 18세까지 이루어지는 시가 교육이었다. 특히나 시가 교육은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단순한 예술 교육을 뛰어 넘어 평생을 통해 아테네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아테네 현실 또한 오랜 시간 그와 같은 시가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다. 그런 만큼 플라톤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시가 교육의 개혁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가 내용의 토대를 이루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는 그 자체의 역사적 권위뿐만이 아니라 이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수많은 작품으로 각색되고 변용되어온 만큼 그것을 모두 폐기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그 방대한 분량을 대체할 새로운 시가를 창작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플라톤이 자신의 이상국가론에서 채택한 방법은 기존의 시가 교육 방식에 따르되 신화의 근본 축을 이루어야 할 규범들을 새로 마련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시가 내용에서 잘못된 내용을 철저히 바로 잡아 장차 수호자가 될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기존 설화들을 비판하자 그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이냐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들은 나라의 수립자로서 신화를 지어내는 시인들이 아니라 그 시인들에게 규범τύπος을 제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378e-379a) 그러한 앞뒤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4)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가와 시가 교육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아테네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지배할 정도로 심대한 것인지를 살펴야할 할 때가 되었다. 사실 <국가>를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시가 교육을 어린 시절 어린이의 감수성에 맞추어 부여되는 예술 교육 정도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에서 시가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이나 시문학 정도의 성격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가μουσική(mousikē)는 뜻만으로는 무사(Mousa) 여신 즉 뮤즈 여신들이 관장하는 모든 기예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는 직접적으로 그리스의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신화는 아테네의 조상들의 믿음과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기록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전승되고 오랜 동안 그들의 의식과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 기원전 5세기 시절에 이르러서는 아테네인들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하는 거의 종교적 경전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신화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중요성에 따라 여러 시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각색되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창작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우수한 작품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혹은 축제 때마다 연주와 합창, 춤을 동반한 연극의 형식으로 상연되기도 하였다. 즉 아테네에서 연극은 단순히 오락을 위한 연극 수준을 넘어서서 일종의 시민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가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믿음을 담은 시문학적 담론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은 노래와 춤 모두를 포함한 일종의 종합적인 종교 예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교육은 단순히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음악이나 예술 교육만이 아니라 아테네인으로서 일반교양은 물론 표준적인 가치관, 세계관을 갖추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 굳이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일종의 이념 교육이자 종교 교육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플라톤은 기존 시가 교육이 갖는 토대 위에서 그 장점들을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이 구상하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규범들 특히 신의 선성과 관련한 혁명적인 관념을 내세워 기존 시가의 잘못된 부분을 철저히 부정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 대한 의식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런데 이러한 시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담고 있는 담론의 내용 즉 이야기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에 있어 이야기가 갖는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야기를 사실과 허구로 구분한 후 어린이들의 시가 교육은 허구적인 것을 이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허구’라고 번역한 말의 그리스 원어는 ψεῦδος(pseudos)이다. 그런데 pseudos의 원래 의미는 거짓말,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학적 허구도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우리말 역어로 문학적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말은 매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갖는다. 문학적 허구는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거짓말은 모두에게 일단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소크라테스가 시가 교육에서 pseudos부터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의아해한 것도 아마 pseudos가 갖는 거짓말의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육 특히 어린이 교육에서 거짓말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잘못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pseudos의 원래 뜻인 거짓을 살려 모두 거짓말로 번역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가 최소한 신들과 관련해선 상당 부분 거짓말임을 밝히려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우리는 역본들에서 허구와 거짓말이라는 역어를 함께 접하게 되겠지만 그 두 역어의 그리스어 원어는 모두 pseudos임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6)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체육은 몸을 위한 교육으로, 시가는 혼을 위한 교육으로 구분하지만 나중 체육을 따로 논하면서 체육도 궁극적으로 혼을 위한 교육임을 밝힌다.(410c)

 

[377a-378a]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처음엔 어린이들에게 설화μῦθος를 이야기해준다는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하면서 설화는 대체로 허구이지만 사실적인 것ἀληθῆ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 후 어린이들에게 신체 교육 보다 설화 교육을 먼저 이용하는 이유를 시가 교육을 체육 보다 먼저 착수하는 이유와 등치시킨다. 설화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어리고 연약한νέῳ καὶ ἁπαλῷ 어린이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모든 일의 시작ἀρχὴ παντὸς ἔργου이 중요하다고 말한다.(377a) 그것은 어렸을 때가 가장 유연성이 있고μάλιστα πλάττεται 누군가가 각자에게 새기어 주고 싶은 인상이 제일 잘 받아들여지기ἐνδύεται τύπος ὃν ἄν τις βούληται ἐνσημήνασθαι ἑκάστῳ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지어낸 이야기로μύθους πλασθέντας 닥치는 대로 듣게끔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이 커서 반대되는 생각들을 마음속에 지니게 해서는 안 되며(377b) 그에 따라 설화 작가μυθοποιός들을 감독하여ἐπιστατητέον 그들이 짓는 것이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377c)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모들과 어머니들에게 훌륭한καλὸν 이야기로 아이παῖς들의 혼을 형성해주도록πλάττειν τὰς ψυχὰς 설득하고πείσομεν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많은 것은 버려야만 한다ἐκβλητέον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버려야하는 설화에는 큰 규모와 작은 규모τούς τε μείζους καὶ τοὺς ἐλάττους가 있지만 그 모두 틀τύπος은 같고 같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377d) 그 큰 규모의 설화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및 다른 시인ποιητής들이 구성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허구적인ψεῦδος 설화임을 밝힌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허구적인 설화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탓하는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무엇보다도 제일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서 ‘좋지 못한μὴ καλῶς 거짓말’(377e) 즉 마치 화가γραφεύς가 전혀 닮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과 같은, 신과 영웅들에 관해 나쁘게κακῶς 묘사한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지 못한 거짓말로서 가장 큰 거짓말, 가장 중대한 것들에 대한 거짓말τὸ μέγιστον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γίστων ψεῦδος로서 헤시오도스가 이야기한 우라노스Οὐρανός가 저지른 짓과 크로노스Κρόνος의 행적을 적시한다. (3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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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에게 설화를 이야기할 때 허구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설화에는 사실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른바 옛날이야기나 동화들은 기본적으로 허구pseudos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pseudos에는 훌륭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어리고 연약한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므로 설화 작가들을 감독해야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큰 규모의 설화 가운데에는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좋지 못한 거짓말pseudos 즉 나쁘게kakōs 묘사한 것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언급들을 토대로 pseudos를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다시 분류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 a) 사실과 다른 사실 왜곡으로서 pseudos.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말 뜻 그대로 거짓말. b) 지어낸 것으로서 훌륭한 것 즉 훌륭한 허구로서 pseudos. c) 지어낸 것으로서 나쁜 것 즉 나쁜 허구로서 pseudos.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먼저 유념해야 할 근본 전제가 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훌륭하고 선한ἀγαθὸς 존재이다.(379b) 그러므로 어떤 설화이든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 묘사한 거짓말 즉 위의 구분 상 a)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신화에서도 신들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리고 신들을 좋게 묘사한 것은 위의 기준으로 b)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진실로서 훌륭한 허구 아니면 사실이다. 그리고 그 후 시인들이 지어낸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신을 나쁘게 묘사한 것은 모두 1)에 해당하는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는 a)와 c)의 구분이 따로 없다. 이와 달리 좋게 지어낸 것은 훌륭한 허구 즉 b)에 해당하는 pseudos이다. 요컨대 위의 분류에서 소크라테스의 어법에 따르면 최소한 신과 영웅과 관련해서는 a)의 pseudos와 c)의 pseudos는 모두 우리말 거짓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b)에서처럼 좋게 묘사하면 앞서도 말했듯 훌륭한 것 즉 좋은 pseudos 아니면 사실로 인정된다. pseudos가 어쨌거나 허위의 뜻을 가지고 있는 한, 소크라테스에게는 비록 이곳에서는 신과 관련한 이야기에 국한 되어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설화작가건 시인들이건 정치가이건 간에 좋은 허위, 좋은 거짓말이 허용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는 셈이다. 거짓말의 문제는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하여 나중에 다시 또 다루어질 것이다.

2)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어린이에게 들려 줄 설화 가운데 많은 것을 버려야 하고 또 그러한 것을 지어내는 설화 작가를 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감독의 대상이 어린이를 위한 설화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경우 오늘날에도 감독의 필요성이 요구되듯이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면 기존의 신화나 설화는 물론 새롭게 창작되는 시인들의 작품 모두에 검열의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문학과 예술을 검열하는 다시 말해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앞으로 그 해당 부분에 가서도 각각 살피게 되겠지만 우선 이러한 비판은 앞에서 우리가 살폈듯이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성격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규범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선한 신의 관념 등을 고려하면 그렇게 적확하고 합당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앞서 살핀 대로 아테네에서 시가와 시가 교육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문학 내지 예술 작품의 창작이나 일반적인 예능 교육 차원을 넘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국가 종교 내지 세계관 교육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가와 시가 교육은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함께 공유해야할 진실이자 함께 지켜나가고 유지해야할 일종의 이념이자 세계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가 설계하는 이상 국가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엄중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중대한 문제 영역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플라톤이 시가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불어넣으려는 새로운 신관은 이상 국가의 이념에 준하는 매우 중차대한 교육 목표의 하나임을 고려하면 수호자에 대한 시가 교육에서 신들과 관련하여 거짓말을 가르친다는 것은 쉽게 용인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앞서 살폈듯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오늘날 생각하는 일반적인 교양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국교 교육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오늘날 다종교 국가에서 조차 개신교 교리 교육과정에서 코란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혹은 이슬람 교리 교육과정에서 불교 경전을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그것도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가르치는 경우 아무런 감독 없이 자유로운 학술활동으로 방임하기란 상상조차 힘들다. 플라톤의 시가 교육이 갖고 있는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차대한 신들과 관련한 거짓말을 감독하는 것과 마치 오늘날 일반 시민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제하고 검열하는 것을 등치해서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요컨대 플라톤은 수호자 교육에 있어 아테네의 시가 교육 방식을 받아들이되 내용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만은 아테네 사회에서 경전처럼 받들어지고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그의 이상국가론이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기 위한 이론임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배척하고 진정한 신관 내지 세계관을 심어주려는 그 자신의 철학적 실천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 이 문맥이 담고 있는 합당한 의미라 할 것이다.

3) 박종현 역본에서 ‘허구적인 설화를 구성해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냥 ‘거짓말로 설화를 구성하여’로 변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야 그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뭔가 탓을 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아데이만토스의 태도가 이해된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여기서(377a) ‘좋지 못한 거짓말’은 신화 내용에 대한 가치 평가가 아니라 그냥 ‘사실과 다른 거짓말’을 의미하고 ‘나쁘게 묘사할 경우’ 또한 ‘사실과 다르게 잘못 묘사할 경우’를 의미한다.

 

[378a-b]

* 소크라테스는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설령 그것이 진실ἀληθῆ이라 할지라도 어린 사람νέος에게 그것을 경솔하게 들려줄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것σιγᾶσθαι이 상책이며 불가피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비밀리에 최소한의 소수ἐλάχιστος만이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이 나라에서ἐν τῇ ἡμετέρᾳ πόλει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가 듣고 있는데 누가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ἀδικῶν τὰ ἔσχατα를 저지르는데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해서도 아니 되고 정의롭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아버지를 온갖 방법으로 응징하는데도κολάζων 위대한 신들도 그런 짓을 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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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주장 또한 전체주의 내지 독재시대에 횡행했던 금서 정책 또는 특정 정보에 대한 접근 금지 내지 정보의 독점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물론 극히 소수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 모두에게 그러한 방침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연히 오늘날 확립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지식과 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이 역시 정의로운 국가를 설계하면서 장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과정에서 나라의 중추적 이념이자 가치관의 기초가 되는 신들에 관한 관념을 바로세우기 위한 작업의 일환임을 고려하면, 기존의 잘못된 신화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신은 선한 존재임에도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주 중차대한 거짓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신들과 관련한 특정 사실의 은폐가 아니라 신들에 대한 거짓 정보의 폐기 내지 부정이었던 것이다.

* 그럼에도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침묵이 상책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말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신과 관련하여 여전히 뭔가 진실을 숨기려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 말은 신이 선하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이기 보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어린이 교육의 필요상 감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일종의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달리, 이후 신들의 나쁜 이야기에는 뭔가 다른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을 수 있다는 시사를 내비치고 있음(378d)에 기초하여 이 부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우라노스와 크로노스의 행실은 겉으로 나쁘게 보이지만 뭔가 숨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난 행적은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한지라 침묵하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중에(380a) 소크라테스가 그와 같은 숨은 뜻을 어떻게든 찾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한다. 그러나 신들의 나쁜 행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기존 신화에 실린 신들의 나쁜 행적 모두가 합리화될 수 있는 위험이 있고 그것은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그 자체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이 최대한 기존 신화에서 신들의 선성을 살려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호자 교육과정에서 기존 신화를 비판하고 개혁하여 정의로운 국가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새로운 규범으로 확립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종교 개혁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나중 살피게 되겠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플라톤의 이러한 종교 개혁이 가히 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㉜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서론 강해에서 <국가>의 목차를 언급하며 살폈듯이 우리는 권수를 기준으로 제1권을 <국가>의 서론, 그 이후 제2권부터 9권까지를 본론, 제10권을 에필로그로 나누고, 본론의 첫째 부분을 제2권에서 제4권까지, 둘째 부분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셋째 부분을 제8권에서 제9권까지로 구분하여 <국가>를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권수를 고려하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기준으로 볼 경우, 제1권부터 호사스런 나라에서 수호자가 등장하는 바로 앞 374e까지를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앞서 진행된 서론적 논의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다만 소소하게는 위의 견해와 같되 수호자의 성향까지를 서론적 논의에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강해는 <국가>의 서론적 논의(제1권부터 제2권 357a-374e까지)를 모두 마무리한 셈이다.

* 이에 따라 이제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작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비유를 내세워 논의를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하고 나라의 발전에 따른 계층들의 발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과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정의에 관한 새로운 논의가 그것들의 유기적 연관성을 토대로 전개될 것임을 일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살필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의 첫 부분 또한 그러한 구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나라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나라의 구성 요소로 생산자 계층, 수호자 계층(통치자 계층 포함)을 등장시킨 후 → 수호자의 교육 이념을 통해 그 세 계층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고 → 그 다음 단계로 개인의 영혼 또한 나라의 세 계층에 상응하는 이성, 기개, 욕구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 후 → 그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도 나라의 정의와 동일하게 영혼의 조화를 담보하는 덕으로서 정의를 드러내는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위와 같은 논의 내용들을 강해 서론에서 제시한 목차를 기준으로 좀 더 세부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제2권 375a-제4권 끝)

 

  1. 본론 1,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나라의 기원(357a-374e)
  2.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3.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

{376e-383c(제2권 끝), 제3권 386a -392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3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4권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1.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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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부터 <국가>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한 강해를 이어가자.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2.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374e]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τὸ τῶνφυλάκων ἔργον이 가장 중요하고μέγιστον 그만큼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σχολῆ를 요구하는 한편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τέχνη과 관심ἐπιμελεία을 요하는 것임을 밝힌 후 곧바로 수호자들에 적합한 성향φύσις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한 일에 착수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상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주춤 거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375a-b]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가문 좋은 젊은이의 성향과 지키는 일의 관점에서φυλακὴν 혈통 좋은 강아지σκύλαξ의 성향은 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수호자φύλαξ나 강아지 모두 감각αἴσθησις에 있어서는 예민해야ὀξύν 하고 감지된 것을 추적하는데 날렵해야ἐλαφρός 하며 붙잡고 싸워야 할 때는 힘이 세야만ἰσχυρὸν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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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kyōn라고 해도 상관없음에도 젊은이에 맞추어 새끼 강아지로 표현한 것은 강아지의 원어 skylaks와 수호자의 원어 pylaks의 말미가 같다는 것을 고려한 말놀이일 수도 있다. 개kyōn는 개를 나타내는 명칭 그대로 아테네에서 이른바 퀴니코스kynikos 학파(the cynics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플라톤이 내리고 있는 개의 함축과 견유학파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개의 함축이 거의 상반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흥미를 끈다. 플라톤의 개는 나라를 책임지는 수호자에 비유되고 있지만 견유학파의 개는 오히려 나랏일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375b]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개이든 그 밖의 어떤 동물이든 맹렬하지θυμοειδὴς 못한 것이 어찌 용맹한가ἀνδρεῖος를 반문하고 격정θυμός이야말로 그것이 일게 되었을 때 마음ψυχὴ 이 모든 것에 대해 겁이 없고ἄφοβός 꺾이지 않는다ἀήττητος고 말한다. 즉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성향은 신체적으로는τοῦ σώματος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하는데 날렵하고 힘세어야 하고 심적으로는τῆς ψυχῆς, 격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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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는 동물에 대해 쓰일 때는 맹렬함의 의미를 갖지만 사람에게 쓰일 때는 기본적으로 격정, 분노의 의미를 갖되 생각이 깃든 분노 즉 의분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감정적 격분과는 달리 이지적 측면 즉 자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개의 성격을 갖는다. to thymoeidēs는 이후 플라톤에 의해 개인의 영혼에서 ‘기개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된다.

 

[375c-e]

* 그런데 이러한 성향들은 수호자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대해 거칠어ἄγριος 서로와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διολέσαι 있으므로 친근한 사람에게는 온순해야하고 적들에 대해서만 거칠어야 한다. 다시 말해 수호자는 온순하면서도 대담한 성품 ἅμα πρᾷον καὶ μεγαλόθυμον ἦθος 즉 서로 대립적인ἐναντίος 온유한πρᾶος 성향과 격정적인θυμοειδής 성향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대립적인 성향을 함께 갖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두개의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고 있는 수호자를 찾는 일은 ‘자연에 어긋나는 게 아니’οὐ παρὰ φύσιν라고 말한다.

 

[ 376a-c]

* 그런데 개들의 경우 이러한 대립적인 성향들을 함께 갖추고 있되 친한 사람의 모습과 적의 모습을 식별καταμαθεῖν하여 그 앎과 모름에 의해 친근한 것과 낮선 것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개의 천성의 상태는 영리하고κομψός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배움을 좋아한다φιλομαθὲς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나라의 훌륭하디 훌륭한καλὸς κἀγαθὸς 수호자가 될 사람은 의당 천성으로 지혜를 사랑하며φιλόσοφος 정적이며θυμοειδὴς 날래며 굳세야ταχὺς καὶ ἰσχυρὸς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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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내용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음미할 것이 있다.

 

1)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나라에 대한 논의로 확대된 이후 나라에서 필요한 계층들이 생겨나고 마침내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면서 대문자에 해당하는 정의로운 나라를 살필 준비가 갖추어진다. 장차 드러나겠지만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들은 소문자에 해당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의 세 부분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로운 나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기본적으로 수호자 계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에 수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기층 생산 계층이 지성의 지배로 표징되는 플라톤의 정의로운 국가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처음부터 난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논의를 시작하면서 수호자의 성향부터 꺼내든 것 역시 수호자 계층 또한 분업과 전문화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타고난 적성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자의 성향을 다루는 이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상응하는 개인의 내적 영혼들의 부분이 어떤 것들인지가 거의 명시적이다시피 드러나 있다. 수호자의 성향 자체가 수호자의 내적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수호자의 성향에 관한 서두 부분은 나중에 펼쳐질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 대한 예비적 암시이자 나라의 계층들과 개인의 내적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응하는 것임을 아예 미리부터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실제로 수호자의 성향을 강아지에 빗대어 신체적으로는 감각에 예민하고 추적에 날렵하고 싸울 때 힘이 세야 하고, 심적으로는 맹렬해야(격정적이어야)하며 동시에 아는 사람과 낯선 사람을 식별함에 있어서는 지혜롭고 영리해야 한다는 언급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장차 개인의 내적 영혼들을 나타내는 말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선 ‘격정적’이라는 말 thymoeidēs는 나중 영혼의 ‘격정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thymoeidēs(명사형으로는 thymos)와 표현부터 그대로 일치하고, 식별하고 헤아리는 능력 역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logistikon(명사형 logos)와 내용적으로 일치하며, 감각을 뜻하는 aisthēsis나 신체적 능력을 나타내는 ischus라는 말 역시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을 나타내는 to epithymētikon(명사형 epithymia)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말이다.(440e 참고) 특히나 개의 능력과 관련하여 친한 사람과 적을 구별하는 능력과 연관해 사용하는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os’라는 말과 ‘배움을 좋아하는’philomathes라는 말은 수호자의 성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향을 나타냄과 동시에 개인의 내적 영혼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성적인 부분이 갖는 성격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렇듯 이곳에서의 수호자의 성향은 장차 언급될 영혼 3분설에서 언급되는 영혼의 내적 부분들과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영혼 3분설이 사람 일반에 적용되는 한, 수호자뿐만 아니라 생산자 또한 이성적 부분, 격정적 부분, 욕구적 부분의 영혼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차츰 밝혀지겠지만 그것들 세 부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그들 각각의 전체적인 성향들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갖게 된다. 마치 장기판의 장기 알들은 모두 똑같지만 장기판의 형세는 두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3) 소크라테스는 온순함과 대담함, 온유와 격정이라는 대립적 성향을 함께 갖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훌륭한 수호자란 불가능하다고 운을 뗀 후, 곧바로 개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또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간단히 판정해낸다. 그러나 여기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자문자답을 곱씹어보면 이 부분은 그렇게 간단하게 읽고 넘어갈 곳이 아님을 이내 직감하게 된다. 물론 상식적 수준에서 나라를 지키는 수호자 즉 전사가 하는 일이 아군과 적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정반대의 태도로 임하는 것이 당연한 한, 그 말에 달리 주목할 만한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수호자 가운데 통치자가 선발되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정치 행위임을 고려하면 이 문맥은 한층 중요한 의미로 다가 올 수 있다. 즉 그 말은, 나라에 늘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 모두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인 한, 수호자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 즉 통치의 핵심은 그러한 대립적인 것들 중 하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공존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하나의 옷감으로 만들어 내는 직조술을 정치가의 기술로 언급하고 있는 <정치가>의 내용(281a-283b)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4) 그러나 이 문맥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그 동안 씨름해왔던 존재론적인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의미와 논쟁거리를 안겨준다. 우선 플라톤 이전 시기까지 그리스 지성계를 지배해왔던 엘레아주의적 사고에서 보면 대립자들이 함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하다. 엘레아주의자 말대로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없는 한, 오로지 부동의 일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런 식의 접근은 현실을 공간적 사고에만 가두어 두는 것으로서 시공간 속에서 만상이 엉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엄연한 실재로 우리 앞에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자론자들처럼 운동하는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허공kenos이라는 없는 것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운동을 그저 원자atom들의 물리적 충돌로만 설명하려는 것 또한 혼돈의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구제하는 방안이 될 수 없다. 이에 플라톤은 대립적인 것들이 함께 엉켜 변화무쌍하게 운동을 거듭하는 것이 현실의 진상(眞相)인 한, 그것을 정당화하는 존재론을 제시하고 그 현실의 변화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내야했다. 그것이야말로 존재론적으로 현실을 해명하는 참된 길이며 동시에 모멸의 현실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마땅히 가야할 길이다. 요컨대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존재to on와 생성to aei gignomenon이 있다하더라도 현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로 환원될 수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해체되지도 않는 제3의 것이다. 현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 속에는 이른바 존재적 성격과 생성적 성격이 무한히 관계 맺으며 서로 엉켜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그 현실의 단적인 국면이 드러나는 곳이 곧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어떠한 능동자poioun의 개입이 없는 한 현실은 무규정적apeiron 욕망이 지배하면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개인은 불행의식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 무규정적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불행한 현실은 어떻게든 다양한 욕망이 함께 공존하는 방향, 즉 질서taxis와 조화harmonia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운동하되 지향과 목적telos을 가져야 한다.

5) 그러나 운동은 해체를 의미할 뿐이라는 종래의 사고로는 그러한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운동하되 그 지향의 끝 즉 자기동일성을 동시에 담보해내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부동의 형상을 넘어 그 힘을 생명체의 자기 운동에서 발견한다. 생명체야말로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자기 동일성을 보전하고 그 스스로의 합목적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생명체에게 운동의 정지는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며 해체일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형상의 초월성을 인정하되 자기 운동을 통해 오히려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보전하고 다(多polla)의 영원한 조화와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우주적 선(善agahthon)의 실재 또한 진실로 통찰한 연후, 완벽한 생명체로서 그 우주의 내적 생명력으로서 ‘우주 영혼’을, 현상세계와 인간의 욕망을 우주적 질서로 견인하는 지고의 근거이자 힘으로 천착해낸다. 그리고 플라톤은 다행스럽게도 신들이 현실의 생명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가장 자신의 영혼과 닮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우주 영혼을 본 그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혼돈의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철학자들이다. 그러므로 우주 영혼을 본으로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철학자의 현실 개입이야말로 현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곧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지적 실천이자 최선의 정치이다.

6) 이처럼 플라톤은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성을 넘어 현실을 구제하기를 열망했고 그에 따라 자기동일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존재론을 마침내 우주에 대한 성찰로부터 천착해냈다. 우주는 끝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해체되지 않으며 수많은 대립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질서 속에서 완벽하게 조화시키고 있는 유일한 실재이자 가장 선하고 완벽한 생명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주 영혼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존재론을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영혼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하고 그 영혼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현한 철학자를 통해서 혼돈의 현실이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플라톤이 그야말로 전래의 엘레아적 일자에 버금가는 존재론적 지위를 우주적 생명력의 기초로서 우주 영혼에 부여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영혼은 우주 영혼을 본으로 삼아 물질의 필연성에 끝없이 반역하고 거스르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향해 가장 능동적으로 가장 적확하고도 분명하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모든 부분들과 모든 차이들과 모든 대립자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질서로 용융해내는 지고의 영혼, 즉 우주 영혼의 최상의 모상이었던 것이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 수호자의 성향에 대한 논의에 이어 수호자의 교육론이 스테파누스 쪽수로 거의 35쪽에 이를 정도로(376c-412b) 상당히 길게 펼쳐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의로운 국가를 구축하려는 그의 언급의 대부분이 바로 이러한 수호자 교육론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며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수호자 교육론의 대부분이 시가교육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이 시가 교육에 관한 내용은 매우 중대하고 독립적인 주제를 이루므로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한다.

 

<공지> 정암학당 강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휴강함에 따라 본 웹진 강해는 잠시 쉬었다가 8월 15일 경에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㉛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6. 호사스러운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372e-373d)

 

[373a]

* 이후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를 ‘염증(부어오른) 상태의 나라’φλεγμαίνουσας πόλις로 다시 명명한 후 그 나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에서 염증 상태의 나라로 변하는 원인은 다름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τισιν 건강한 나라에서 주어진 것들과 그곳에서의 생활 방식δίαιτα이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기οὐκ ἐξαρκέσε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사치스런 것들이 추가된다.

*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침상κλίνη과 식탁τράπεζα 및 기타 가구σκευή들, 요리ὄψον와 향유μύρον 및 향료θυμιάματα , 기녀ἑταίρα와 생과자πέμμα, 기타 필수적이 아닌 것들οὐκέτι τἀναγκαῖα 즉 회화ζωγραφία와 자수ποικιλία, 황금χρυσός과 상아ἐλέφαντα 등 그와 같은 유의 온갖 것들.

 

[373b-d]

* 이런 것들이 추가되면서 앞의 나라는 규모ὄγκος와 수πλῆθος에서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되어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하지가 않게οὐκέτι ἱκανή 된다. 그리하여 필요불가결한τοῦ ἀναγκαίου 것을 넘어서는 직능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모든 부류의 사냥꾼θηρευτής과 모방가μιμητής들이 생겨나는데 모방가들 중 일부는 형태와 색채σχήματά τε καὶ χρώματα에 관여하는 사람들(조각가와 미술가)이고 일부는 시가μουσική에 관여하며 이를 돕는 시인ποιητής, 음송인ῥαψῳδός, 배우ὑποκριτής, 합창 가무단원χορευτής, 연출가ἐργόλαβος들이다. 그리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기구σκευή들 즉 여성들의 꾸밈κόσμον과 관련한 다양한 소품(장신구)들παντοδαπῶν을 포함해 더 많은 봉사자(시종)διάκονος들, 이를테면 가복παιδαγωγός(가정교사), 유모τίτθη(건강 관련 시종), 보모τροφός(음식 시중 시종), 시녀κομμώτρια(의복 관련 시종), 이발사κουρεύς, 일반 요리사ὀψοποιός, 고기 요리사μάγειρος(푸주한)가 생겨나고 육류 공급을 위해 앞서 말한 사냥꾼 이외에 양돈가συβώτης 및 온갖 종류의 가축βόσκημα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건강한 나라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살게 되면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어서 의사ἰατρός들이 많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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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사스런 나라가 규모와 수에서 한층 더 커진다고 했을 때 규모와 수가 가리키는 것은 의식주에 있어 필수적인 것 이상의 것들과 그것들을 제공하는 직능의 수는 물론 그런 것들의 확장에 수반하는 인구의 증가까지 포함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규모와 수의 증가는 이미 호사스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가 더 이상 생존 욕구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치스런 욕구에서부터 문화적 욕구에로까지 확대되었음 보여준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맛을 추구하고 고기 요리까지 탐닉하며 자수와 회화는 물론 치장 도구까지 욕구하고 있는 양상은 이미 인간의 욕구가 동물적 욕구를 넘어 사치욕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고 특히 시가μουσική 관련한 욕구의 증대는 이른바 인간의 고유 욕망으로서 문화 예술에 대한 욕망이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모와 유모는 물론 아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의 출현 또한 본능적 돌봄 이상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문명 생활에 대한 욕구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 호사스런 나라에 ‘돼지 치는 사람’συβώτης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 나라에 생존을 위한 식욕 이상의 고급 요리 등 식탐과 미식에 대한 욕망도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사실 기원전 5세기 만해도 아테네 사람들 대부분은 주로 채식을 했고 육식을 즐기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고기 요리는 특수 신분이나 즐겼을 법한 고급 요리로 그려진 것이다. 실제로 아테네에서 소와 양은 기본적으로 식량이나 양모 등을 얻기 위해 사육되었던 까닭에 소고기와 양고기가 일상의 식탁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는 순전히 식용을 위해서 사육된 동물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상류 계층의 고기 수요는 주로 돼지고기였을 것이다. 호사스런 나라에 이르면 사냥술도 이제 더 이상 양이나 가축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기술만이 아니라 식탐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로도 활용된다.

* 미술가와 조각가 그리고 시인들을 모두 모방가μιμητής로 부르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의 예술의 목표가 다름 아닌 자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사실적인 모사와 모방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실주의 회화들조차 단순 모사 즉 복제가 아닌 작자 자신의 정신이 창조적으로 반영된 모종의 개념적 추상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자연에 대한 회화적 모사는 저자의 창조적 관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결핍을 안고 있는 그럴듯한 복제물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고 있다. 플라톤에게 예술가의 모방은 최소한 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진상과 거리가 먼 가상을 추구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오늘날 music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말을 음악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349d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말 자체가 원래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가는 이른바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문학적 시가를 비롯해서 그에 수반하여 이루어지는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예술 분야 전반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에 준하는 이야기이자 노래였던 까닭에 mousikē에 능하다는 것은 예술 능력은 물론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의 교양과 식견을 두루 갖추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mousikē는 ‘학예’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μουσικός(mousikos) 또한 단순히 음악 관련 전문가만이 아니라 예술인과 지식인의 뜻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다.

* 플라톤이 통치자를 언급하며 가장 많이 비유적으로 인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의사이다. 통치자는 나라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신체적 질병이 문제여서 말 그대로 의사가 필요하다.

 

2-7. 전쟁의 기원과 수호자 계층의 발생(373d-374d)

 

[373d]

* 소크라테스는 건강한 나라가 어떻게 호사스런 나라로 변화하는지를 자세하게 이상과 같이 살펴본 후에 이제 이러한 나라에서 왜 전쟁πόλεμος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나라에서는 식량 수요가 크게 늘어나 결국에는 식량을 생산할 영토χώρα가 모자라게 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경우 이러한 땅을 가지는 방법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ἀποτμητέον 할 것이고, 이웃나라 사람들 역시 그들대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τὸν τῶν ἀναγκαίων ὅρον를 벗어나 ’재화(돈)의 끝없는 소유에’ἐπὶ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 ἄπειρον 자신들을 내맡겨 버릴 때는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이다.

 

[373e]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εἰ ἀγαθὸν ἐργάζεται 나쁜κακὸν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 다만 최소한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 만큼은 발견했다고 말하기로 하자고 언급한 후,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라고 단언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틀림없는 말씀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74a]

*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이제 이 나라에는 소규모가 아니고οὔ τι σμικρῷ 나라의 모든 재산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들에τοῖς ἐπιοῦσιν 대항해서 싸울 전체 군대만큼의ὅλῳ στρατοπέδῳ 확대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로써 충분한지 못한지οὐχ ἱκανοί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듯이 ‘한 사람이 여러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ἀδύνατον ἕνα πολλὰς καλῶς ἐργάζεσθαι τέχνας.고 말한 후, 전쟁과 관련한 겨룸ἀγωνία 또한 하나의 전문 기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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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373d-374a)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음미해볼 것이 있다..

1) 호사스런 나라의 규모와 수가 크게 확대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욕구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영토 확장욕과 필수적인 것 이상에 대한 욕구 증대로 인한 재화의 소유욕이다. 물론 텍스트는 목축과 경작을 위한 영토 확장욕은 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재화에 따른 소유욕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욕망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욕망들 모두가 전쟁의 원인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즉 전쟁의 원인은 목축과 경작을 위한 보다 넓은 땅과 호사스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화 즉 땅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이다. 373e에서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그런 것들’이라는 말에서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돈의 소유욕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경우를 소크라테스는 호사스런 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라가 호사스런 단계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욕망이 모두 화폐가치로 환원될 정도로 질적인 차이가 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소비와 사치가 미덕으로 추앙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적성과 소질에 따른 다양한 욕망은커녕 모든 욕망들이 화폐가치로 환원되어 서열화 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다양성은 다만 그러한 서열의 상승을 위한 수단의 다양성에 불과한 것으로 질적으로는 이미 획일화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수호자 계층이 등장하고 종국에는 철인정치가 내세워진 것도 근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탐욕이 초래하는 그러한 파행적 종말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것이다.

2) 박종현 역본은 이 부분을 앞서 인용하였듯이 ‘나라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나쁜 일들이 생기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런 것들이다’ἐξ ὧν μάλιστα ταῖς πόλεσιν καὶ ἰδίᾳ καὶ δημοσίᾳ κακὰ γίγνεται, ὅταν γίγνηται로 옮기고 있다. 이 번역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하는 단서로만 풀이되어 있고 그 나쁜 일들에 전쟁이 포함되는지 여부를 열어 놓고 있다. 이는 아마 ‘그런 것들’이 가리키는 것을 ‘전쟁과 그와 같은 부류의 일들’(war and the like)로 해석하는 일부 주석가(Schneider, Stallbaum)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 연구가들은 위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바로 앞의 문장에 나오는 전쟁의 기원πολέμου γένεσιν과 연결시킨다. 그러한 한, ‘그런 것들’은 영토와 재화에 대한 욕망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 문장을 앞에 나오는 문장과 연결시켜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나라에 있어서 개인적으로나 또는 공적으로나 정작 나쁜 일이 생길 경우에 이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는 단서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들인데 전쟁 또한 그러한 것들로부터 생기는 것일세.’

3)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쟁이 나쁜 결과를τι κακὸν 가져오는지 좋은 결과를ἀγαθὸν 가져오는지는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μηδέν γέ πω λέγωμεν’는 말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언급은 나중에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기대와 달리 <국가>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말의 의미를 그냥 전쟁에서 이기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패하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가 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 증대는 결국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수호자 계층을 비롯해서 철학과 문명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은 나쁘기도 하지만 선을 결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Adam 주석 참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처구니가 없다. 부정의 때문에 철학 통치자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부정의를 좋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4) 필자 생각으로는 그 말은 평생 동안 플라톤 자신이 경험하고 목도한 아테네 전쟁들에 대한 평가, 무엇보다도 페리클레스가 제국주의를 내세운 이후 아테네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들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가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 덕분에 사회 경제적 성장은 물론 문학과 철학 예술 분야에서 다른 폴리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는 같은 민족인 이웃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착취의 기반으로서 이후 스파르타 등 이웃 나라의 반발을 초래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야기되면서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385년 전후 역시 아테네의 번영은커녕 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아테네의 국력이 크게 쇠잔해진 시기였다. 평생 동안 아테네의 이와 같은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플라톤은, 페리클레스와 그 후계자들이 벌인 패권주의적 전쟁이 비록 사회 경제적, 문화적 풍요는 가져다주었기는 하지만 결국은 아테네를 멸망에 이끈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메넥세노스>를 비롯한 여러 대화편에서 틈틈이 페리클레스의 패권주의와 침략 전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아테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켜세울 법한 기원전 5세기 그 영광스러운 시절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된다.

5) 플라톤은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결국은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떼어내려는 전쟁, 즉 침략 전쟁의 배경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흥미롭게도 정작 그 때문에 새롭게 생기는 군대를 침략자가 아니라 반대로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수호자 즉 방어를 위한 군대로 묘사하고 있다. 호사스런 나라가 땅을 떼어내기 위해 벌이는 침략 전쟁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전후 맥락상 어색한 일이다. 왜냐하면 드러난 문맥만 보면 호사스런 나라는 욕구가 증대해도 어떤 영토도 침략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형국으로 읽혀질 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을 플라톤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플라톤의 속내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호사스러운 나라에 이르면 그 증대된 욕구로 말미암아 전쟁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게 불가피하다. 그러나 설사 그럴 지경에 직면했을지라도 플라톤은 어떻게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을 통해 그 욕구를 해결해서는 안 되며, 다만 전쟁을 해야 한다면 이웃 나라가 침략할 경우 방어를 위한 전쟁에 한해 허락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을 편들어 이 문맥에서 그러한 함축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럴 경우 호사스런 나라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침략 전쟁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의 문제가 플라톤에게 남는다. 물론 여기서 그에 관한 플라톤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전후 문맥들을 종합적으로 살펴가며 생각을 기울이면 우리는 플라톤이 호사스런 나라의 등장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전쟁 욕구도 상존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기 보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을 통해 호사스런 나라 사람들의 욕망들과 직능들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그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가 직면하는 문제들이 비록 전쟁 욕구를 촉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는 그들 내부의 욕망들을 규모와 수, 종류와 형태의 측면에서 서로 조율하고 조화시키는 이른바 정치적인 해결 방식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나라에 이어 호사스런 나라를 등장시키고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에 대처하는 군대의 필요까지 끌어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단지 전쟁관련 전문가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관련 전문가도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진 후 나중에 가면 수호를 위한 최고의 직능으로서 정치를 담당할 통치자 계층의 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이들 통치자가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리는 한, 최소한 침략 전쟁은 없으며 전쟁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라를 수호하는 방어 전쟁만 있을 뿐이다.

6) 그리고 욕구의 증대가 초래하는 과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에는 뭔가가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이웃 나라와의 전쟁의 원인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그가 구상한 논의 전체 틀에서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 포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곧바로 이웃 나라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에는 과정상 뭔가 간과되어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가 372e-a에서 보듯이 어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이전에 내부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이 심해지면 이른바 내전도 일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 내부의 갈등이나 내란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 있지 않다. 굳이 그것이 생략된 이유를 찾아본다면 내란이나 내분, 분쟁 등으로 번역되는 stasis라는 말 자체가 이른바 전쟁을 의미하는 polemos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전쟁의 발생 배경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그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나 다툼도 호사스런 나라가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인 한, 호사스런 나라에는 전쟁에 대한 욕구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치에 대한 욕구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국가> 전체를 보면 내분이나 내란의 문제는 플라톤에 의해 현실 국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서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반복해서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은 종종 내부의 분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아테네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전쟁에 대한 욕구에는 그러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군인만이 아니라 통치자에 대한 요구도 포함하고 있다는 추정은 이후의 플라톤의 논의 전개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7) 최초의 나라가 호사스런 나라로 발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앞서도 살폈듯이 이곳 논의 단계의 전체적인 틀에서 보면 최초의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의 성립 단계에 후속해서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의 성립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애초부터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작은 글씨인 개인의 영혼들을 나라라는 큰 글씨를 통해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 영혼의 욕구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나라에서의 생산자 계층에 대한 설명에 이어, 그 상위 부분인 기개적인 부분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나라에서의 수호자 계층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에서 등장하는 수호자 계층에 이어 장차 통치자 계층의 등장과정에 대한 설명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역시 전체적인 논의 구조상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8) 이곳에서(375e) 군대의 등장을 ‘소규모가 아니라 침략자들에 대항해서 싸울 전체군대만큼의 확대’라는 표현 또한 이곳에서 요구되는 직능의 확대가 단지 전쟁 발발에 따른 특정 전쟁 기술들이 일부 추가되는 수준이 아니라 침략자 전체에 대항할 만한 규모 즉 생산자 계층의 규모에 상응할 만한 새로운 계층의 등장임을 보여준다. 즉 호사스런 나라에서 전쟁의 발발을 배경으로 요구되는 전쟁 관련 기술은 생산자 계층에서의 특정 직능과 동급 수준의 직군이 아니다. 생산자 계층에 농부와 제화공, 벽돌공, 무역상 등이 내부 세부 직군으로 소속되어 있듯이 전쟁 관련 기술 또한 이를테면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중무장 보병, 기마병, 해병, 노수 등 전투 형태별 기술은 물론 장비별로도 각기 다른 기술을 가진 세부 기술들이 그 내부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체 군대만큼의 확대’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특정 직능 수준의 군인이나 군대의 확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자와 싸울 전체 기술들과 직군들을 총망라한 모든 군대만큼의 확대 즉 계층 차원에서의 확대임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논의의 전체 틀을 염두에 두고 순서에 따라 생산자 계층에 이어 수호자 계층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9) ‘그들로써 충분하지 못한가요?’라는 글라우콘의 물음은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따로 군대라는 별도의 전문적인 직군이 아니라 일상적 생활인으로서 일반 시민들 모두가 군인으로 나서 싸우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미 앞에서(370c) 한 사람이 여러 가지 기술 분야에 훌륭하게 종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음을 환기시킨다. 사실 이러한 언급은 생산자 계층의 구성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플라톤의 분업과 전문가 주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플라톤 비판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요 근거로 종종 인용된다. 왜냐하면 스파르타야 말로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언급한 대로 직업적인 군인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군인이고 생산 관련 일은 그러한 군인들이 틈날 때에 종사하던 이른바 전사들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분명 그러한 나라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에서 생산자 계층과 군인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고 군인 계층조차 전술과 무기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전문적인 직군들로 구분하고 있다.

 

[374b-c]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전쟁과 관련된 겨룸ἀγωνία 역시 기술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러한 ‘전쟁 관련 기술’πολεμικῆ이 제화 기술 등 일반 기술보다 더 신경을 써야하는κήδεσθαι 일임을 밝힌다. 그리고 최초의 나라에서 여러 전문 기술자들에게 각각이 적성에 따라 한 가지 일을 맡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한가σχολὴ로이 대하고 오직 그 일에만 종사하게 한 것은 각자 자기 일을 적기καῖρος에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기 위한 것임을 재확인 한다. 그런 연후 그는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 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 전쟁 관련 기술 역시 철저하게 분업과 전문가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쟁과 전쟁 무기와 관련한 기술들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즉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방패ἀσπίς 등 전쟁 무기πολεμικῶν ὅπλον나 장비들ὀργάνων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고 해서 그날로 중무장 병기 사용술ὁπλιτικός이나 다른 형태의 전투μάχη에서 유능한 전사ἀγωνιστής가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도구든 그 각각에 대한 지식ἐπιστήμη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충분한 연습을τὴν μελέτην ἱκανὴν 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쓸모χρήσιμος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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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룸(경쟁)의 원어 ἀγωνία(agōnia)는 오늘날 번뇌를 뜻하는 영어 agony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경쟁이 곧 번뇌임은 그제나 오늘날에서나 불변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

* 박종현이 옮긴 ‘제화 기술이 전술보다도 더 신경을 써야만 되는 것인가?’라는 역문에서 ‘전술’이라는 말은 ‘전쟁 관련 기술’이란 말로 고치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고 판단된다. 그 말의 원어 πολεμικῆ(polemikē)는 전쟁 관련 기술 일반을 총칭하는 말로서, 생산자들의 기술이 제화 기술, 농업 기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듯이 polemikē 역시 중장비 병기 사용술, 해전술, 기마술 등 범주 상 하위 기술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관련 기술을 총칭하는 그 말을 생산 기술의 어떤 하나인 제화 기술과 동급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 말 자체로 전쟁 관련 기술이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기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범주 차원에서도 당연히 훨씬 많이 신경을 써야할 계층 차원의 기술임을 의도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이란 역어가 전쟁관련 기술의 하나인 전술(tactic)의 의미로 읽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 말의 원래 뜻과 어울리지 않는다.

* ‘다른 형태의 전투’는 중장비장갑보병 및 기마병 등이 수행하는 육상 전투 형태들 그리고 삼단노선을 이용한 해상전투 형태를 망라해서 표현한 말이다.

* 지식과 연습에 대한 언급은 기술의 탁월성이 선천적인 적성만이 아니라 후천적인 연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기술은 앎이자 지식이되 단순한 앎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실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앎이다.

 

[374d]

* 전쟁을 수행하는 기술은 그에 적성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으며,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쟁에 관한 일이야말로 잘 수행되어야할 가장 중대한πλεῖστος 일인 만큼(374c) 이 나라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곧 수호자φύλαξ들이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의 일들이 나라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μέγιστον 것인 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가 요구되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요한다고 말한다.

 

[374e]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업무에도 그에 걸 맞는 적성이 요구되는 만큼 나라의 수호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고 어떠한 성향들이 적합한지를 가려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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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서 매우 중대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수호자’라는 말이 이곳에서 처음 나온다. 호사스런 나라에서의 욕구의 증대가 전쟁을 촉발하게 되면서 생산자 계층에 이어 마침내 수호자 계층의 등장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이러한 수호자 계층이 수행하는 일ἔργον은 단순히 어떤 특정 기술과 비교될 수 없는 나라의 수호와 관련된 기술 내지 일 전반에 걸쳐 있다. 그러한 한, 수호자의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 만큼 다른 일에 대해 최대한 한가로운 태도와 그 자체로 최대의 기술과 관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 수호자 계층은 나중에 드러나게 되겠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전사들)stratiōtai과 통치자들archontes이 될 사람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 구성을 거론하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통치자 계층은 이 수호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따로 선발된 사람들이고 전사 계층은 그 나머지 사람들이다. 실제로 <국가> 제3권 414b, 제4권 428b에 가면 수호자 계층이 두 부류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 통치자들로 선발된 사람들은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eleis), ‘완전한 수호자들teleoi phlakes’, ‘참된 수호자들alēthino phylakes’로 불리어지고 나머지 사람들 즉 전사들은 ‘보조자들’epikouroi 또는 ‘협력자들’boēthoi로 불린다. 요컨대 정의로운 나라는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 생산자 계층으로 구성되고 이른바 수호자 계층이란 그곳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 이후에는 수호자들의 성향 내지 적성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제2권 처음부터 여기(374e)까지를 <국가>를 구성하는 큰 단락들 가운데 하나로 구획 짓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연구자들은 앞서 생산자 계층의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적성과 성향을 같이 언급했듯이 다음에 이루어지는 수호자들의 성향에 관한 논의까지(376c)를 하나의 큰 단락으로 묶고 이후의 내용부터 수호자의 교육을 다루는 새로운 단락으로 구획 짓기도 한다.

* 우리의 강해는 제2권 강해 서두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자의 구분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실제 학당 강의는 이후의 내용까지 일부 다루었지만 위의 단락 구분을 고려하여 이번 웹진 강해록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