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있음과 없음의 구분[철학을다시 쓴다]-2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 몇 가지로 정리를 해봅시다. ‘있다/?없다가 가장 위에서 모든 것을 가려주는 근거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방금 드렸죠??철학은?‘원인학’(aitiology)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그러니까 왜,?왜,?왜를 끝까지 묻고,그 원인을 밝혀서 맨 위에 있는 놈이 뭐냐,?최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같고 다르고,?이고 아닌 것을 뒤에서 끈으로 허수아비처럼 놀리는 두 놈이 있다,?그 두 놈은?‘있음’과?‘없음’이다 하는 것까지는 밝혀냈습니다.?그러면 있다/?없다라는 게 도대체 어떤 괴물이길래 이렇게 삼라만상을 다 뒤에서 조종하고 있느냐,?이걸 한번 살펴보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혹시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있음과 없음’이라는 제 존재론 강의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이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까닭은 여러분들이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해 보죠.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있는 것은 있다’?하고?‘없는 것은 없다’?하는 것을 참이라 그랬죠. 2번도 아까 말씀드렸습니다.?참말입니까,?거짓말입니까?”

“거짓이요.”

“3번도 이렇게 되면 거짓말이라 그랬죠.?제가 앞에 적은 글 가운데?1과?4번은 참, 2와?3은 거짓의 근거가 된다고 말씀드렸죠.?그런데 정말 그런지 봅시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여러분들 잘 이해하실 수 있죠??그냥 머리에 딱 들어옵니다.?그렇죠??있는 것이 있지.?그다음에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했는데,?이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 뜻도 없습니까??이렇게 있다/?없다로 끝나는 말을 논리학에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임자말과 풀이말이 이다/?아니다로 연결되는 말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진술’이고, ‘판단’이고, ‘명제’라고 합니다.존재의 영역에 있는 말들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가 없고 다만 뜻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면 됩니다.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이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

“지금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알아듣겠죠??그렇습니다.?이 말에는 분명히 뜻이 있습니다.?무슨 뜻을 가졌을까요? ‘있는 것이 없다’라는 말에는?‘하나도 없다’는 뜻이 담겨 있지요??분명히 대답하십시오.?그 다음에?‘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에도 뜻이 담겨 있지요?무슨 말입니까??혹시 이 말이?‘빠진 것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인지 보십시오.?맞습니까?”

“네.”

“그다음에?‘없는 것이 없다’는 말에는 뜻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어요. ‘다 있다.’”

“그렇죠!?똑똑한 학생들이네. ‘다 있다’라는 뜻이죠.

자,?그러면 이제 여러분,?수수께끼입니다.?분명히 이유가 있을 텐데?‘있는 것이 없다’라고 해버리면 부정이 되는데,?왜 느닷없이?‘하나’가 튀어 나오지요??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유구조가,?우리 생각이 어떻게 움직여 가길래?‘있는 것이 없다’가 느닷없이?‘하나도 없다’는 말로 바뀔 수 있느냐??그리고?‘없는 것이 있다’고 할 때,?실제로는 이 말도?‘거짓’의 울타리 속에 있는데 왜?‘없는 것’이 갑자기?‘빠진 것’이 돼 버리느냐.?우리 머리가 어떻게 움직이기에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고 이런 의미를 가진 낱말들이 갑자기 도깨비처럼 튀어나오는지,?그리고‘없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왜 이것이 여럿을,?모두를 가리키는?‘다 있다’는 말로 바뀌게 되느냐,?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없죠?”

“전체를 머릿속에 두고서 없는 것이 있다라고 하고 그 전체성에 없는 것들이 꽉 찬 상태로 있다 생각하면 그 중 빠진 게 있다,?있는 것이 없다,?원래 다 있어야 되는데 그 있는 게 없으니까 하나도 없는 거죠.”

“제가 저 야바위 놀음을 하려고 그랬는데 대신해 주네요.(일동 웃음.)

그런데?‘전체’라고 하려면 최소한의?‘단위’가 있어야 합니다.?여럿의 최소 단위가 있어야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려 전체라고 합니다.?하나 가지고 전체라고는 안 하죠.?그러면 전체라고 할 때 전체를 이루는 최소단위는 몇이어야 합니까??적어도?‘둘’이어야 하지요??여기서 여럿의 최소단위인 둘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합니다.?둘 이상이 있어야 좌우간 다(多)라는 말을 쓸 수 있고,전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그 둘이 무엇입니까?(대답 없음.)

지금까지 이야기한 가운데 밝혀진 것은?‘있는 것’과?‘없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이?‘있는 것’과?‘없는 것’이?‘전체’를 구성한다고 봐야죠.?그러면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까,?없어야 합니까?”

“있어야 해요.”

“있어야죠.?지금 우리는 당장 속절없는 거짓말의 수렁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그랬죠.?그렇죠??그러니까 우주의 구조,?그것을 반영하는 우리 사유의 구조.?이게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없는 것’을 실체화해서 있다고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혹은 그런 것을 실제로?‘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그렇죠.?이제 여러분들 반은 제 거짓말에 넘어갔습니다.?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꼭 필요하다,?없는 것이 있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는데,?그 말을 여러분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시간이 저로서는 괜찮습니다.?왜냐 하면 제가 한 스무 해 전에 풀어먹었던 것을 그냥 되풀이하면서 그냥 적당히 강의시간 때울 수 있으니까,?저로서는 이런 강의가 괜찮은데…….?아마 바쁘신 여러분들한테는 시간낭비가 될 겁니다.?이런?‘거짓말’이 바닥에 깔린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안 바쁜데…….”

“하하하,?안 바쁩니까??그러면 이제 한 단계 더 진전시켜서 봅시다.?있는 것이 하나로 있다고 칩시다.?있는 것이 없다고 했을 때?‘하나도 없다’가 된다고 했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된 거죠.?여러분 가운데?‘선생님 무슨 그런 헛소리하세요??이게 어디 하나로 있습니까??둘로 있죠.?귤과 무화과 둘로 있는데 하나로 있다니요?멍청한 소리 그만하세요.?우리가 하나로 있으면 입이나 벙긋할 수 있고 이것저것 가려나 볼 수 있겠어요??똥,?오줌도 못 가리지.?그러니까 이제 그런 헛소리하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그런데 여럿의 최소단위는 뭐라고 그랬죠??둘!?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입니다.?그러면 이제 여기 있는 것을 둘로 나눠 보자,?하나는 있는 것 기역(ㄱ)이고,?하나는 있는 것 니은(ㄴ)이다,?그러면 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래야 나눠지지 않겠습니까?그런데 이 둘을 나누는 선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는 거요.”

“예??있으면 하나로 합쳐져 버리죠.?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인데 뭣 때문에 둘로 있습니까??또 다른 대안은 이 경계선이?‘없는 것’이어야 하겠죠??그런데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습니다.?그러니까 또 하나가 되는 거죠.있는 것은 하나로 있죠.”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다시.?만일에 여럿의 최소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쳐 보자,그러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그러려면 나누어 주는 경계선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을 나누어 주는 것이 있어야 그걸 둘이라 그러지,?달라붙어 있어서 하나로 있다,?그러면 둘이라고 안 하지 않느냐,?그러면 이 나누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다.”

“그렇게 있다고 가정을 한다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이 되어서 달라붙어 버린다.?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고 가정을 해버리면 경계선이 없는 것이 돼죠??또 달라붙죠??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하나도 없다’라는 말과 같아져서?‘있는 것’이 통째로 부정이 돼 버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있는 것은 하나로 있기 때문이요.”

우리 나라 사람들 굉장히 머리 좋죠.?그걸 압니다.?우리는 옛날부터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그래서 있는 것이 부정이 되면 통째로 부정되어서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된다.?그 다음에 없는 것이 있다 할 때 이건 빠진 것이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실제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서양의 존재론 역사를 이끌어오면서 말썽에 말썽을 거듭해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이것은 서양 사람들의 사유 구조에서는 실제로 논리적인 사고에서나 초월적인 사유에서나 똑같이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데,?기독교에서는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이 사람들은?creatio ex nihilo (무로부터의 창조),?무에서 창조하는 것.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창조를 믿습니다.?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난다는 가정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열역학 제일의 법칙이 다 무너져 버리죠.?그렇지 않습니까??무에서 유가 나온다,?그러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무너져 버립니다.?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말을 히브리 사람들은 하거든요.?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다,?하나님이 주물럭주물럭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nihil)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그래서 유일신(有―神)이다,?하나로 있다,?그러니까?‘있는 것’은?‘하나’고 그래서?‘하나’님인데,하나님만 있고 나머지는 전부 헛되고 헛된 것이다,?없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 거니까 헛되다고 하는 건데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서 보면,?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입니다.?없는 건 없다,?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그러니까 없는 것이 있다고 하지 말고 다른 말로 바꿔 보자,?이렇게 해서 계속 맴도는 쳇바퀴를 만들어 낸 게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서 현대 실증과학에까지 내려옵니다.

자,?그러면 이제?‘없는 것이 있다’,?거짓의 근거가 되는 말이라고 했지만?‘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사고가 요청하는 거니까 없는 것을 있다고 놓고 한번 가 보도록 하죠.

그러면 우선 여럿(多)은 확보되죠??없는 것도 있고,?있는 것도 있다고 하면 둘이 확보되지 않습니까??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구제받을 길이 열리는 겁니다. ‘같고’, ‘다르고’, ‘이고’, ‘아니고’,?하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겁니다.?없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없는 것을 빼놓고는?‘아니다’라는 부정사 쓸 수 없죠??그리고 다르다는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고 보면 여기서도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그렇죠??그러면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습니까,?없습니까?”

“있습니다.”

“경계선이 있으면 있는 것,?있는 것,?있는 것,?해 가지고 없는 것이 차츰차츰 줄어들어서 다 없어져 버려요.?그럼 거꾸로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치면 없는 것,?없는 것,?없는 것,?해서 있는 것이 다 없어져 버려요.?그렇죠??이 경계선이 누구 편을 드느냐에 따라서 없는 것이 온통 다 삼라만상을 지배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온통 다 이 세상을 지배하기도 하고,?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이게 뭐죠??이 경계선은 어떻게 봐야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죠.?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는 것과도 구별되고 없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것하고도 구별되면서 경계선 노릇을 하는 거죠.?그렇죠?”

어떤 것이 끝나는 지점,?이를테면 선분(line)의 두 끝을 그리스 사람들은‘페라스’(peras)라고 합니다.?우리말로 바꾸면?‘끝’입니다.?끝,?갓,?겉,?다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주는 경계 지점에 있는 것을 우리는?‘겉’이라 하고?‘갓’이라 하고?‘끝’이라 하기도 합니다.?그러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은 뭐냐고 하느냐?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합니다.?이것은 끝이 아닌 것,?끝이 없는 것,?경계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라틴어로는?‘인피니스’(intfinis),?영어로는?‘인피니트’(infinite)입니다.?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하나는 무한한 것,?무한히 연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그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이것이 그리스어?‘apeiron’이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그러면 이제 세 가지가 나왔죠??없는 것 하나,?있는 것 하나,?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세 가지가 나왔죠??여러분,어떤 원시인들 가운데 수를 셀 때?‘하나’, ‘둘’, ‘많다’?그렇게 표현하는 부족들이 있다고 하죠??그게 아주 정확한 겁니다.?하나,?둘,?그 다음에?‘많다’입니다.?그 이유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마는 아마 여기서 밤새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그랬죠??그런데 없는 것은 하나로 있겠습니까,?여럿으로 있겠습니까??하나로 있습니까?”

“아니요,?여럿으로.”

“이유는?”

“아까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다 있다’고 그랬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빠진 것’이 있다는 말도 된다고 그랬고.”

“그 빠진?‘디펙트’(defect)가 꼭 하나일 이유는 없어요.”

“그렇죠.?빠진 것이 꼭 요렇게 빠져야 하고 이만큼 빠지게 할 필요는 없다,빠진 것에는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없는 것은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없는 것은 많다,?있는 것은 하나이지만 없는 것은 무한이 많다,?이래 없고,?저래 없고 없는 사람 죽을 맛이지만 어쨌든 없는 것은 엄청 많다.”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한철연 맑스분과 MT-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맑스분과가 4월 11일부터 1박 2일 동안 MT를 다녀왔다.

한철연에서는 각 분과의 엠티비를 1년에 두 번에 한하여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단 참여인원이 7인 이상일 경우이다.

공식적인 엠티 기간은 11일부터 1박 2일이었지만 10일 밤 9시 30분, 선발대가 충남 서산의 삼길포항으로 출발했다.

낚시터의 좋은 자리를 일찍부터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금요일인 11일 오후 1시 MT 참여를 밝힌 맑스분과원과 그 가족들이 모두 합류하여,

충남 서산 삼길포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근처 왜목마을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직도 이원혁 분과원이 끓여준 도다리 매운탕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도다리를 낚아 올린 이는 조배준 분과원이었고,

그 도다리를 요리하기 좋게 손질한 사람은 김종곤 분과원이었다.

박영균 분과원은 작은 물고기에 속한다며 놓아주자고 낮은 소리로 거듭 외쳤지만, 그의 호소는 우리의 귓전에서 사라졌다.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벌벌 떨며 겨우 잡은 고기였기 때문이다.

7개의 낚싯대로 잡은 수확량은 작은 도다리 세 마리.

낚시터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수온이 낮아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낚싯대를 걸쳐만 놓은 채, 바닷가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술잔만을 비웠다.

 

▲삼길포항

▲삼길포항

▲왜목마을 바닷가

▲왜목마을 바닷가

▲맑스분과 MT

▲맑스분과 MT

▲분과장과 분과원들

▲분과장과 분과원들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2)[대안도덕교과서]-3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5. 정의

현실사회에서 우리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 평등하지 못한 상황, 거짓이 판을 치는 상황 등에 대하여 부당하다는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자주 접합니다. 같은 학급 안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편애하는 선생님, 몰래 커닝하는 친구들, 왕따당하고 집단폭행당하는 친구를 뻔히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나 자신, 등등 부당하다고 느끼는 상황을 극복하고 개선해야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런 마음 상태를 우리는 정의로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이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거짓된 상황을 고쳐보려는 감정 상태입니다. 물론 정의로운 마음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는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의 현실이 많기 때문에 개인이 혼자서 그런 불공정과 불평등 및 거짓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사회, 즉 가족, 학교, 지역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세계 속에서 내가 불공정과 불평등 그리고 거짓됨의 많은 상황에 대하여 나는 그냥 눈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그런 사회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관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구석진 곳에서 내가 아는 학우가 폭력으로 돈을 빼앗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칩시다. 나는 그런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습닏. 일제고사 기간에 남들이 몰래 부정행위를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 하는 것이 별 문제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의로운 마음을 누구나 다 갖고 있으면서도 부정의한 사태를 고치려는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사람들 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부정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불의를 고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면 그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지지만, 그런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눈감고 있는 사람이 많으면 결국 그 사회는 병들고 불행해질 뿐더러 나 개인의 삶도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길거리 보행자 보도에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담배꽁초가 이미 열대여섯 개 정도 버려져 있었다고 칩시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가 꽁초를 버리려고 쓰레기를 찾던 중인데 마땅한 쓰레기통을 찾지 못하다가 그 길거리 화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 화분이 쓰레기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만, 이미 그 화분은 남들이 버린 꽁초가 쌓였으므로 나도 하나 더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담배꽁초 하나 더 보탠다고 큰 일이 날 것도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나도 불의와 부정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소위 ‘무임승차’라고 부릅니다. 무임승차는 정의로움을 파괴하는 사회적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임승차를 자주 반복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의 행동이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화분이 깨끗한 상태였다면 나도 담배공초를 거기에 버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나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임승차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기하급수적으로 더 부정의한 사회가 됩니다. 반면 이를 고치려는 사람이 한둘 모이면 이 사회는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의로움의 마음은 다른 겸양이나 긍지의 마음과 달리 사회적인 윤리감정에 해당합니다.
 

 

6. 관심

청소년 시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듯이,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리고 설계한 대로 ‘자아’라는 미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인생의 재료를 많이 확보하는 시기입니다. 청소년기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저것 눈에 뜨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연예인 스타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사회탐구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서 방학 내내 부모님 몰래 사회과학 책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인터넷 게임에 확 빠져서 공부고 뭐고 오로지 게임 캐릭터만 머릿속에 꽉 차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정열이 있다는 것은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게임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중독증을 좀 더 포괄적인 정열로 바꿀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것이 바로 청소년의 특징입니다. 게임을 하고 싶은 정열이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정열에 불이 붙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의 마음은 무엇을 행동하고 실현하느냐 하는 대상에 무관합니다. 정열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샘을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 샘물을 파기 위하여 어디에 물기가 스며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달리 말해서 정열을 키우려면 우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이 요청됩니다.

관심은 일종의 호기심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즉 관심이 있어야만 사물이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부터 정열이 생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생활의 논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나의 진정한 친구로 삼고 싶다면,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옷색깔까지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이 자동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그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도 나를 따라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친이 됩니다. 친구들끼리 몰려다니기는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 친구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인터넷 게임조차도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관심이라는 마음의 힘은 인터넷 게임이나 아이돌 연예인에 대한 열광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청년 벤처기업을 용기있게 기획하는 관심, 사회복지 분야로 미래의 꿈을 두는 관심, 영어공부도 할 겸 당장 미드에 빠져보는 관심, 이 모두 세상을 창조하는 마음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내 마음 속에 잘 키우는 일이 소중합니다. 특히 청소년은 무엇에든지 관심을 둘 수 있는 잠재적 창조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관심이 이것저것에 너무 많아서, 집중이 안 되고 산만해진다고 불평을 호소합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이 일도 해보다가 아니면 저 일도 해보면서,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자기 자신을 질책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산만함조차도 아무 것도 안 하는 무관심보다 좋은 것이니 자신을 질책할 필요 없습니다. 청소년기의 중요한 발달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방황이라는 사실이다. 방황은 관심이 너무 많아서 그 어느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장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나의 방황은 성장기 뇌가 안정화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 방황은 진정한 관심을 찾아가는 삶의 시도입니다. 관심은 방황을 거쳐야만 비로소 ‘집중함’으로 정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긴 인생에서 따져볼 경우 방황이 없는 정착은 자칫 인생의 오류를 낳을 수 있습니다. 원래 영어표현으로서 시행착오Trial and Error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시도를 했기 때문에 실수가 생긴 것이고, 그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시도로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도하고 실수하지만 또 다시 시도하는 용기를 일으키는 방아쇠는 바로 청소년기의 관심입니다. 방황은 일시적으로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청소년기에 그런 방황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성장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어른에게 있어서 방황은 인생의 실패일 수 있으나, 청소년에게 있어서 방황은 성공하는 인생의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철학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년은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통일된 존재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인간본성의 모습을 어른과 청소년이 함께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청소년 윤리 교과서는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참말과 거짓말[철학을다시 쓴다]-2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짝짝짝짝.)

“안녕하세요.?앉아서 해도 상관없겠습니까?”

“네.”

“제가 여기 계시는 선완규 선생님하고,?또 다른 한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학문은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한다.?그리고 특히,?제가 하는 거짓말은 멀쩡한 거짓말이어서 윤구병과 함께 하는?‘거짓말 잔치’?이렇게 강좌 제목을 붙였으면 참 좋겠다.’?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거짓말이 된다는 각오 없이는 입도 벙긋 할 수 없는,?그런 지점이 있거든요,?그래서 선불교에서 스님들이?‘입만 벙긋하면 틀린다’는 말을 합니다. ‘개구즉착’(開口卽錯),?입만 벌리면 거짓말한다는 뜻이죠.

제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왜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죠.

우리가 무엇이 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이냐 라고 물어볼 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가 있죠.?여기서 가장 총명해 보이는 분에게 여쭤 볼까요??여기 어머니,?학구열이 대단하신 거 같은데 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그러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거짓말이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은 참말이라고…….”

“저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거짓말하는 건데요.(일동 웃음.?하하하하.)?제가 워낙 여자를 좋아하니까 이번에는 저쪽에 있는 여자 분에게 여쭤 보겠습니다.?우리는 거짓말을 허위라고 하기도 하고 오류라고 하기도 하고 착오라고 하기도 하고,?참말은 진리라고 하기도 하고 진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는데,?우리는 어떤 때 참말을 한다고 하고 어떤 때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까?”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떨 땐 거짓이 되고 어떤 땐 참이 되고…….”

“지금 철학 선생 앞에 두고 철학하실래요?”(일동 웃음.)

여러분들이 죄다 우리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을 어렵게 어렵게 하는 연구만 하고 그런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쉽게 대답할 줄 모릅니다.

내가 우리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여쭤 보면 바로 튀어 나오거든요.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게 참말이고 없는 걸 있다 하거나 있는 걸 없다 하면 거짓말이지.?안 그려?”?이렇게 대답하십니다.?여러분들 그 말 틀렸습니까??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 하면,?그건 거짓말이죠.?참말은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하는 게 참말이고.?인 걸 아니라 하고 아닌 걸 이라 하는 게 거짓말 아닙니까,?그렇죠?

실제로 참과 거짓의 구별이 왜 이렇게 중요한지 말하자면,?어차피 사람도 생명체니까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데 사람 가운데 혼자서 자기 앞가림하는 사람은 드물죠.?지금 끼고 계시는 안경,?곱게 매만지는 생머리,?두텁게 껴입은 양복,?이거 다 스스로 만드신 거 아니죠??이렇게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더불어 살 길을 찾아야 살 수 있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저는 사실은 제가 맹수였으면 더 좋겠습니다.?그러나 제가 사람 탈을 썼으니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끼치고 이렇게 삽니다.?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서로 말을 주고받아서?‘나 지금 뭐 없는데 너 지금 가진 거 있냐?’?라든지 서로 이렇게 의사소통을 해서 남거나 모자라는 것을 주고받고 나누면서 살 길을 찾지 않습니까??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게 죄다 거짓말이다.?그렇게 되면 의사소통할 길이 차단돼 버려요.?그러면 혼자 살기 싫어도 혼자 웅크리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말을 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거짓말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분 손들어 보세요.?그런 뻔뻔한 분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습니다.예,?없을 겁니다.?누구나 경우에 따라 거짓말은 할 수밖에 없고 어쨌든 거짓말은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러셀을 비롯해서 널리 실증주의자들에게 난제로 알려졌던 것들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어떤 크레타 사람이 아테네에 와서 이야기하기를?‘크레타 사람은 죄다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대요.?그 사람 말이 참말이겠어요,?거짓말이겠어요??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해답을 알고 계신 분 한번 이야기를 해 주시죠.?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참말이요.”

“참말입니까??그 사람은 크레타 사람이니까 거짓말쟁이입니다.?그런데 거짓말쟁이가 참말을 해요?”

그 형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 제가 그 크레타 사람이라고 여기십시오.

제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 거짓말인데 넘어가지 마세요.?거짓말에도 계보가 있고,?전제하는 근거가 있습니다.?거짓말의 계보를 여러분들에게 잠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한번 써 봅시다.(칠판에 적음.)

 

참말?: 1.?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2.?인 것을 이라고 하고,?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

3.?같은 것을 같다고 하고,?다른 것을 다르다고 하는 것

 

거짓말은 여러분들이 거꾸로 대입해 보면 되겠죠.?따로 쓰지 않겠습니다.

귤과 무화과는 다르죠.?그럼 한번 적어 보죠.(칠판에 적음.)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일상 언어의 차원(보통 말)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요즘 철학자들은 이런 천한 말을 안 쓰고,?차별성과 동일성,?이런 말을 써서 그런데,?실제로?‘같다/?다르다’라는 말이거든요. ‘귤과 무화과는 다르다’?우리가 왜?‘같다/?다르다’라는 말을 많이 쓰냐면,?같은 것끼리 모아서 일반화하고 추상화해야 말에 효율성이 생기고,?의사소통을 빨리 할 수 있거든요.?그러려고 어떤 때는 추상화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체화하기도 하는데 만일에?‘같다/다르다’라는 말로 이 귤과 무화과를 구별하지 못하고 이 매직펜과 마이크를 구별하지 못하면 참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들겠죠.?이 세상은?‘여럿’과?‘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익숙할지 모르겠습니다.?보통 말(일상 언어)에서?‘귤은 무화과와 다르다’고 하는데 이 말을 참과 거짓이 갈라서는 논리 언어로는 어떻게 나타냅니까?

귤과 무화과는 왜 다르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학생들이 대답이 없자)?꿀들 안 잡수셨죠?(일동 웃음.)

간단합니다.?굉장히 쉽게 생각하십시오.?제 강의는 제가 알고 있는 낱말이 몇 개 안 되기 때문에 복잡하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다. (논리 언어)

 

우리가?‘이다/?아니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임자말과 풀이말을?‘이다’와?‘아니다’로 연결시키게 되면 거기서 참과 거짓이 쉽게 드러납니다.?그래서 이것을 논리적인?‘진술’이라 부르기도 하고?‘판단’이라 하기도 하고?‘명제’라 유식하게 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혹시 대학 다닐 때 논리학 강의를 들어 보신 분 있습니까??우리는 논리학시간에?‘프로포지션’(proposition)이라는 끔찍한 낱말,?괴물 같은 낱말을 배웁니다.?그것을 또 괴물 같은 한자로?‘명제(命題)’라고 번역하는데,?이 낱말을 그냥?‘논리 언어’라고 부릅시다.?여러분들이 조금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요.?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라고 그러죠?”

“귤은 귤이고 무화과는 무화과니까.”

“어휴.(일동 웃음.)?이거 보세요.?제가 질문을 다시 하고 여러 사람의 답변을 충분히 들어보고 싶습니다마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중에 토의 시간 때 자세히 이야기합시다.”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다.’(존재언어)가 정답입니다.?왜 귤과 무화과는 다르냐고 했을 때에,?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가 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고,?그럼 왜 귤은 무화과가 아니고 무화과는 귤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귤에 있는 어떤 것,?그것이 형태가 됐든 맛이 됐든 색소가 됐든 무엇이든지 귤에 있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없고,?귤에 없는 어떤 것이 무화과에는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귤은 무화과와 다르다 하고 귤은 무화과가 아니라고 합니다.?여러분들이 여기에 동의 안 하면 저는 더 이상 강의를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죠??바로 여기까지!

‘있다’, ‘없다’는 말이 끼어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존재 언어’라고 합니다.

‘있음’과?‘없음’을 나타내는 말을?‘존재 언어’라고 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죠?그런데 여러분들 지난 한 주일 동안?‘존재’나?‘무’(無)같은 말을 한 번이라도 입에 올린 분이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없을 겁니다.?그러면 여러분 중에 단 오 분이라도?‘있다/?없다’, ‘이다/?아니다’라는 낱말을 쓰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있습니까??없죠.?우리가 다(多)와 운동 속에 있는 서로 다른 삼라만상을 가려보는데?‘있다/?없다’, ‘이다/?아니다’, ‘같다/?다르다’라는 말이 아주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쓰지 않고는 우리의 생각을 펼쳐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이 모두 다 참말인가요?”

“네.”

“여러분 같은 분들만 있으면 제가 농사 안 짓습니다.?힘들여서 농사지을 까닭이 없어요.?속여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땀 흘리며 힘들여서 농사짓습니까??제가 한 말을 참말이라고 보시다니 참 딱합니다.(일동 웃음.)

말하자면 여기까지 제가 지꺼린 말 재주도?‘기술’입니다. ‘설득술.’?제 말을 듣고 내적인 확신이 여러분에게 생겼습니까??아직 아닙니다.?다 동의를 했지만(처음부터 끝까지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시킨 말이 없지요.)?왜 동의를 했지요??그럴듯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설득술’인데 제가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이야기해 갑니다.?곧 파탄이 나게 되고요.”(일동 웃음.)

 

네그리의 제국강의[한철연 세미나-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세미나-네그리의 제국

 

지금의 세계는 통제 네트워크,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소통방식, 초국적 기업들과 비물질노동의 등장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전세계적 질서를 규정한다. 자본주의가 한창이던 시기의 제국주의(Imperial)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계나 한계가 없는 보편적 정치 질서를 가진 지금 세계화된 지구적 정치질서를 ?네그리는 제국(Empire)이라 한다. 변화한 세계만큼 기존의 사회철학의 모든 개념은 제국(Empire)의 세계에서 모두 해체되고 다시 재정립되어야 한다. 네그리의 이론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형들은 근대 정치철학의 기본 개념들인 주권, 국민, 인민과 같은 개념들의 새로운 反변증법적 접근을 보여준다.

또한 경제체계와 정치, 노동의 변화로 더 이상 제국(Empire) 내에서 혁명의 주체는 더 이상 정형화된 노동자일 수 없다. 네그리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보여주는 제국의 착취와 통제 체제들을 넘어서 새로운 저항 주체인 다중(Multitude)을 들어, 다중의 힘으로 민주적인 세계화된 공동체를 지향한다.

네그리가 정치적 망명의 시기가 끝나고 전 세계를 다니며 다중들과 함께 당면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강연 모음집인, <네그리의 제국강의>를 통하여 제국, 평화, 전쟁, 다중, 유토피아, 예술, 유럽 통일, 포스트사회주의 전략, 자유와 해방, 삶-권력과 삶-정치 등의 핵심 개념과 네그리의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가 확신하는 가능성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한다.

 

교 재 : Antonio Negri, Empire and Beyond (Polity, 2008)

안또니오 네그리, <네그리의 제국 강의>,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0.

시 간 : 격주 월요일 오후 8시 약 2시간 진행

장 소 : 兀人고전학당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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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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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

 

이 글은 3월18일 7시에 열린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첫 강연 원고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 2. 22 ~ 1860. 9. 21

 

염세주의 철학의 의미

 

B.?러셀은?<서양 철학사>에서 쇼펜하우어를?“특이한 사람”으로 보고,?그 이유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찾는다.?쇼펜하우어에서처럼 지독한 염세주의는 철학의 역사에서 어떤 유별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철학자는 대체로 삶의 의미를 낙관하는 근거를 설명하고자 한다.?무엇을 낙관하고 또 그 낙관의 기초가 무엇인가는 각기 다를지언정 삶과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보통 철학자들의 생각이라면,?삶이 철저하게 의미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는 것이다.

삶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의미 있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한 시간들이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반복한다면 낙관도 비관도 아닌 중간적인 것일 수 있다.?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삶을 전체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다.?비관적인 삶의 태도는 삶과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고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므로 이 세 가지 각기 다른 삶의 태도들은 긍정,?부정,?그 중간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좀 더 옹호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삶을 의미있게 보려는 낙관적인 노력이 일종의 철학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바는 삶은 원래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리라는 것이다.?비참한 삶을 직시하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철학이라는 말이다.?삶의 비참함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의미있는 것인냥 호도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철학이게 된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의 태도는 비참하지 않은 삶을 비참하게 생각하는 삐딱한 태도가 아니라,?오히려 두려움 없이 삶의 허무를 인정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용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해 갖게 되는 거짓 희망,?삶이 전체로서 의미있다는 태도에 맞서 그 무의미성을 부르짖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할 수 있다.?동시에 우리가 갖는 낙관이 과도한 것이 아닌지,?혹은 삶의 무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우리는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된다.?무엇하러 우리는 아등바등 애쓰며 살았는가 생각하게 되며 삶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한 바로 그 지점에 접근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일관념론의 철학과 예리한 대립각을 세웠다.?쇼펜하우어는 대표적으로 헤겔의 철학이 대중을 기만하는 철학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보았다.?그럼에도 현실에 있어서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쇼펜하우어는 대중들이 자신의 철학의 의미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 소망을 대중들이 저버린 것이다.?당대의 학계와 청중들은 쇼펜하우어보다는 헤겔의 철학에 더 많은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진실한 삶의 실체를 가리고 기만하는 거짓된 희망일지언정 삶을 낙관함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애쓴 대중들은 그러한 낙관을 보여준 헤겔에 열광했다.?마치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거짓 성공 신화를 자아내는 헐리웃 영화에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그러니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것이야.?허무한 삶을 허무하다고 말하면 삶이 더 허무해지지 않겠어?”?이러한 대중들의 반응은 낙관이 정점에 이를 때,?다시 허무를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을 갖게 되고,?허무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지나친 낙관이 일종의 중간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요약하자면 삶의 대한 허무주의,?염세주의는 건강한 삶을 유지시키는 한 방식이지만,?낙관적인 태도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시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염세주의 철학의 근본토대들.?낙관주의에 입각한 환상 파괴

 

03-18@19-27-36-516-2영원한 진리가 어쩌면 찰나적인 인간의 삶에 의미의 빛을 선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욕망이며,?이 점에서 철학의 목표점은 종교와 같은 것이다.?이러한 진리와 진리를 향한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서 삶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낙관적이다.?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인다.?가령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철학(고대회의주의자,?흄,?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진리에 대한 회의는 진리에 대한 가상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므로 삶을 위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일종의 삶에 대한 낙관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고통을 유발시키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고통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말한다.?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세계는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단순한 답변으로 삶이 원래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답을 생각해보자.?그 답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어떤 관점이기도 하다.?세상은 고통이다.?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되는 철학적인 근본전제들과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삶을 접근한다.?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세계와는 다르며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와 유사하다.?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반대:?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그저 기독교적인 세계관일 따름이다.?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다면,?그것은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밖에는 없다.

의지란 무엇인가??쇼펜하우어 철학의 특이성은 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표상보다는 의지 개념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더 독창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쇼펜하우어는 현상과 물자체라는 칸트의 구분을 따름으로써 칸트 철학의 충실한 후계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인식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진 칸트의 물자체는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는 의지 개념으로 변형된다.?세계는 한측면 현상으로서,?또다른 한측면 의지로서 이분화된다.?그러나 이분화된 두 세계의 경계,?마야의 장막으로 경계지워진 두 세계의 구분을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해를 통해서 이해하고 또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방식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신체적 존재로서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내적으로는 자기자신 자체는 곧 의지라는 점을 단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즉 의지는 물자체이다.?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통해 의지는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된다.?인간,?생명체,?무기적 자연에 이르기까지 전체 존재는 맹목적인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이러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연결망을 존재계 전체의 지속적인 상승화 충동을 낳고 목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이며,?그것이 세계자체의 의지인 것이다.?그러나 그 끝은 개별적인 존재에게는 존재의 소멸,?죽음밖에는 없다.?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폭력이며,각 개별 존재에게 애쓰기의 최종적인 종결을 선언한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를 통해서 개인은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해방은 적극적인 의지의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3.?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많은 단상들은 쇼펜하우어의?〈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1851)에서 주요한 주제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이 저작은 그의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와 비교하자면,?비체계적인 단편들의 묶음이라는 특징을 갖는다.?일종의 에세이적 저작인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우리는 때로는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실 때 우리는 신체적인 만족감을 느낀다.?그러나 개체의 의지는 어떻게 해도 충족될 수 없어서 끝이 없다.?그저 하루하루를 생존할 뿐 인생은 참다운 행복에 한발짝씩 다가가지 못한다.?왜 그런 것인가??삶은 그저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도데체 존재하지 않는다.?이루지 못한 욕구는 고통을 주고,?욕구의 성취는 싫증을 낳을 따름이다.?본능은 인간을 생식에로 몰아 세운다”삶에의 의지의 가장 완전한 현상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다.?삶은 허망한 것이다.?결국은 죽음을 향한 과정으로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인생을 환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지상의 시간은 모든 행복과 삶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을 때 고통이 생긴다.?인식의 정도에 따라 고통이 커진다.?세상에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없는 반면,매우 슬퍼해야 할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세상을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그러한 고통이 산재해 있음을 느낀다.

삶은 마치 힘든 과제를 떠맡는 것과 같아서?“나는 인생을 견뎌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삶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합리적인 사고를 할 경우,?아이를 낳아 고통을 되물림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설득하고 그러한 종교적인 교리를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이다.

기독교 신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모든 것이 매우 보기 좋다”고 자화자찬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교의 중에 가장 열등한 것이다.?인간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죄 많은 것,?불합리한 것,?원죄로 이해된 것,그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다.?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맹목적인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라고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의지 자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허뿐이다.

악몽과 같은 삶에서 깨우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자살은 다른 사람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비하면,?특별히 도덕적인 오류가 없다.?그러나 세계의 고통이 증대되므로 그리 옳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생명을 소멸시킨다고 해서 의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자살은 살려는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버리는 것이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오히려 가능한 하나의 해결 방식으로서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이념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도덕의 형이상학적 이념보다는 미학적 이념이 마야의 베일 너머 세계의 실재를 인지하게 한다는 것이다.?고통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은 예술가적인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현상을 벗어난 나를 현상을 넘어선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구원.?현상적 삶으로부터 구원이다.?기독교적 정신은 금욕적인 정신이다.?금욕적 정신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것이다.?의지의 부정이야 말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신약의 성경 정신의 핵심은 바로 의지의 부정 금욕적 삶의 이상을 주장하고 있다.?의지의 긍정은 자의식을 자신의 개체에 한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우연에 의한 행운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결국 타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의 방법이다.?자기 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이겨내려는 강박증이다.

칸트에서 의지란,?인간의 실천이성과 신이 조화된 세계,?목적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근대 서구전통에서 최초의 반기독교적인 철학의 원류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의지라는 점에서 여전히 관념론적이다.?비합리주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 관념론이다.?세계는 실재로 의지인 것이다.?서로 살려고 하는 아전투구의 현장이 바로 세계의 실재인 것이다.?허무한 세계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지적인 통찰과 용기를 갖는 것,?무의미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는 것이 낮은 시선으로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적인 삶의 의미인 것이다.?즉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낙관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철학적인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구원은 없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예술은 사물의 현상적인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존재 자체의 본성(이념)을 드러냄으로써 현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위안이다.?고통을 제거하는 윤리적인 대안으로써 고통에 대한 감수성,?연민과 동정을 들 수 있다.?금욕적 삶의 태도 또한 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4월 22일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론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소장) 입니다. ?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행복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인터넷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한 욕심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거든요. 게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놀고 몸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과 욕망을 누그러지게 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게임을 무작정 못하게 막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게임 아이템을 많이 잃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면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으니, 항상 화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 마음이 편해지지만 집에 들어와 부모로부터 간섭과 핀잔을 받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행복해지지만,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고통에 버금갑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통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어른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해서 어떤 감정이 행복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그 감정을 걸러내고 아우르고 다스려서 표현하는 방법 안에 행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복의 실체를 직접 찾으려는 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 것입니다.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 껍질을 잘 까서 먹습니다.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껍질을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 껍질을 깠더니 그 속에 다시 껍질이 있어서 껍질을 또 벗깁니다. 그 안에 껍질을 계속 벗기면서 결국은 나무 것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침팬지의 영리함은 바나나에 통했지만 양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행복도 양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양파의 행복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벗겨내어야만 그 안에 진짜 행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행복이란 감정 저 깊이 숨겨진 부동의 실체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난 감정을 풀어가는 표현과 방법 그 자체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생각이 고정된 어른보다 약간의 착오는 있을지언정 생각이 유연한 청소년에서 더 많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을 과감하게 멈추고 혼자 힘으로 몇 달 동안 방치되었던 내 책상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책상 정리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대견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이 바로 행복의 시작점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도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다시 게을러지거나 인터넷게임으로 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기로 하죠.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되더라도 잠시라도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서 이외의 상황에서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 작년 겨울에 입었다가 보관해 둔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나왔을 때, 어제 밤 당일치기로 찍어서 공부한 문제들이 오늘 시험문제에 그대로 나왔을 때, 나는 매우 기쁨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행동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결국 게을러지고 순간 감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어른들보다 자기 충동에 빠지게 될 우려가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은 가족, 교사, 또래 등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현상은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충동이라기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더 크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자기충동이 더 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장점은 행복으로 가는 행동을 연습할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지 더 말해 봅시다.
 

 

2. 책임과 자유

나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복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행복은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행복의 상태가 계속 죽 이어져서 욕망의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 내가 바로 행복한 나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감정은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욕망의 감정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본능을 넘어서는 윤리감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들이 대학교 윤리학 교재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아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윤리학으로서 서구에서는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편 윤리의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쫒으면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기존 윤리학의 공통점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의 자유의지에 다라서 행동을 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갓난아기 내 동생이 밥그릇을 엎어도 혼나지 않는데, 나는 밥알을 조금 흘려도 아빠에게 혼줄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갓난아기 내 동생보다 책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갓난아기 동생보다 자유의지를 담은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윤리학은 책임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갓난아기 내 동생은 나만큼 책임질 일이 없지만 한편 내 동생은 나보다 자유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가 아끼는 잠바를 물어뜯어서 나는 속상합니다. 나는 화난 김에 강아지 콧등을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지만 손해배상하라고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집 강아지는 그만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서, 사육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냉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법정에 세워야겠지만, 호랑이에게는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호랑이는 자유가 없으며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원합니까 아니면 철망에 갇힌 노예나 동물원의 노리개가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강아지도 목줄을 메어서 줄을 억지로 끌면 깨갱거리면서 싫어합니다. 그런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면 좋아라하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큰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책임의 얽힘이 바로 윤리학의 기본틀입니다. 윤리학의 고전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윤리이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칸트의 윤리학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만, 바로 그 칸트가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동기부여라는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했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나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학교 선배의 강압에 의해서 내가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도 않고 별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때 그 나의 행동은 즐겁고 효과도 크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년이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이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청소년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교육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고 즐겁고 큰 효과가 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안에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할 수 있어야만 바로 앞서 말한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갖게 되며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쯤이야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구태의연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아 필자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해 봅시다. “타인의 압박과 관습 그리고 명령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런 용기를 항상 연습하는 모습이 바로 청소년의 본능입니다.
 

 

3. 긍지와 인정욕구

용기의 감정은 청소년의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어른들은 직장, 동창, 혈연 등 사회적 관계들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청소년은 아직 사회적 연관관계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와 가능성에서 무한합니다. 친구들이나 대중매체의 아이돌 스타로부터 어떤 때는 문학소설이나 영화로부터 간혹 짜릿한 감성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성메시지는 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와 닿는 동기부여가 생기면 우리들은 어서 빨리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은 신중함이 필요하고 신중하지 않으며 행동의 용기가 자칫 무모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꾸 머뭇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무모함도 문제가 생깁니다. 머뭇거리는 주저함과 일시적인 자극에 의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실은 그런 갈등의 현실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없는 그런 인간상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려는 마음의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중용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용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뜻은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과정을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런 나의 반성을 거쳐서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마음이 커가는 징표입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갖는 생각을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절대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도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취보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동기부여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이 남과의 관계망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양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제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독선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반성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자기도취에 빠진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은 실효성도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결국 반성이 없는 믿음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남의 믿음과 충돌되는지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반성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한 생각이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통해서 이룬 행동은 그만큼 실효성도 높고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결국 더 높고 뜻있는은 자부심을 더 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높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을 우리는 긍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상의 연습은 자아를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듯이, 긍지가 너무 지나치게 넘치면 오만이 됩니다. 한편 자부심이 없으면 자기불신이 되듯이,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함이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굴함을 느낄 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비굴함을 갖게 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즉 자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느낄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청소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교성적 등과 같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적인 기준 때문에 생긴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기성세대 혹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말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떨어지지만 만화를 잘 그리는 자부심이 나만의 긍지입니다. 키는 작지만 나의 다부진 성격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을 남들보다 더 키울 수 있는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룹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게임프로그램 제작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믿음의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긍지가 넘쳐서 오만해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함도 비굴함도 갖지 않고 적절한 자부심인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은 그런 감정의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긍지를 찾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의 시소를 타면서 나는 긍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청소년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나면서 긍지를 갖는 사람, 타고나면서 오만하거나 비굴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긍지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연관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바로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철학에서는 인정요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속보이고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잘 낫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지나친 태도를 간혹 우리는 접합니다. 그런 지나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려 합니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상대방의 인정요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요구는 오만하거나 비굴한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인정욕구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남들은 나를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긍지와 용기, 믿음과 인정, 이 모두 통일된 인격체로 향한 도덕감정의 기초입니다.
 

 

4. 겸양

청소년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수줍음이란 원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양식에서 나왔습니다. 청소년의 수줍음은 어른으로 되는 아주 중요한 감정단계입니다. 부모 밑에서만 자라다가 사회로 나가면서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려는 정신적 면역제인 것입니다. 수줍음이란 일종의 사회화 과정입니다.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의 단계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감정의 성장입니다. ‘만약 내가 이러 저러하게 행동을 할 경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우려심이 지속되는 감정형태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수줍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수줍음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는 마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나쁘게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줍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서 남에게 양보하며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키우는 겸양의 시작입니다. 2,500년전 고대중국의 철학자 맹자의 사단설을 들어 보셨나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마음을 4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 가지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줍음이란 결국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다 합친 마음의 씨앗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줍어하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수줍음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파렴치하다고 부릅니다. 염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파렴치하거나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물론 수줍음의 감정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 행동도 못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나의 생각을 내 안에만 가두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이 세상에 표현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런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칫 나 자신을 스스로 자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서 벗어나 나의 수줍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습관을 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스스로 만들면 우리 모두 수줍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자동적으로(선천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줍음과 파렴치의 양단에서 겸양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장점입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자본론강독]-13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정리 : 김성심

 

 

4장에서는 단순상품유통(C-M-C)이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M-C-M)으로 전환한 모습을 살핌으로서 자본의 일반 공식을 이끌어냈다.

 

제 5 장 자본의 일반 공식의 모순

 

자본으로서의 화폐유통이 단순상품유통과 구별되는 점은 판매와 구매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화폐로 상품을 구매해 다시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얻은 자본가는 상품을 A에게서 구매하고 다음에 그것을 B에게 판매하지만, 단순한 상품소유자라면 상품을 B에게 판매하고 다른 상품을 A로부터 구매한다. 따라서 두 경우의 A와 B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A. 단순상품유통이 가치의 증식을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순서를 거꾸로 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단순상품유통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순상품유통이 [거기에 들어가는] 가치의 증식[따라서 잉여가치의 형성]을 그 성질상 허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203쪽)

우선 단순상품유통을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거래다”라고 말할 수 있다.(204쪽) 양쪽은 모두 그들 자신에게 사용가치로서는 쓸모없는 상품을 양도하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얻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환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건 아니다. 교환 이전에 이미 상품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교환을 통해서 증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상품교환은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등가물끼리의 교환이고, 따라서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될 수 없다.”(206쪽)는 것을 알게 된다.

B. 등가로 교환되지 않는 경우는 어떠한가?

 

예를 들어 판매자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특권에 의해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예컨대 100의 가치가 있는 것을 110으로 즉 그 가격을 ‘명목상’ 10% 높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판매자는 10의 잉여가치의 형성을 가져왔는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그 판매가가 다시 구매자로 되어 110에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형성, 따라서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판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한다는 것으로써도 또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구매한다는 것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다.”(209쪽)

“그러므로 잉여가치가 명목상의 가격인상으로부터 생긴다든가 [상품을 가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판매자의 특권에서 발생한다고 하는 환상을 철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판매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따라서 생산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계급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급의 존재는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 즉 단순상품유통의 입장에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다.”(210쪽~211쪽)

“그러므로 우리는 판매자는 동시에 구매자이며, 구매자는 동시에 판매자라는 상품교환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자.”(211쪽)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왜 우리가 자본의 기본형태[즉 근대사회의 경제조직을 규정하는 자본형태]를 분석하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옛날로부터의 자본형태인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3권 제4편 참조?”(214쪽)

“지금까지 밝힌 대로 잉여가치는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형성되려면 유통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유통의 배후에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215쪽)

C. 자본 일반 공식의 모순은 무엇인가?

 

“자본은 유통(의 내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216쪽)

“화폐의 자본으로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해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216쪽~217쪽)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에크리[한철연 세미나-라캉분과]

 

김우철(라캉분과 통신원)

 

1. 분과원: 이병창, 연효숙, 김상현, 신현주, 김형석, 김우철

2. 세미나 진행: 매주 월요일 3시 30분, 2시간 가량 (분과 결성한 지 2~3년 가량 되었음)

3. 세미나 내용: 라캉 텍스트 강독 (<세미나 11권>과 <리비돌로지>를 거쳐 현재 <에크리> 강독 중)

4. <에크리> : 라캉이 쓴 논문들 모음집으로서 라캉 이론의 핵심이 담겨 있는 저작.

라캉분과는 이 저작에서 “거울단계(The Mirror Stage as Formative of the I Function)”, “무의식에서 문자의 심급(The Instance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을 거쳐 지금은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On a Question Prior to Any Possible Treatment of Psychosis)”를 영어본으로 읽고 있는 중이다.

“모든 정신병 치료에 선행하는 한 가지 문제”는 라캉이 1955~6년에 진행한 세미나 3권(<정신병(The Psychoses)>)의 핵심 내용을 포함하는 중요한 논문으로서, L 도식과 R 도식에 의한 주체의 설명, 은유의 일반 공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 이름(부성적 은유)의 기능, 정신증과 아버지 이름의 폐제(foreclosure)에 대한 설명, 그리고 자신의 망상증 경험을 출간한 정신병 환자 슈레버 판사의 자서전을 임상분석의 사례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