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요즈음은 월드컵 시즌이다.?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경기다.?지난 두 달 동안 짓눌렀던 세월호의 슬픔도 이 열광을 감출 수는 없다.?사람이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월드컵의 열기가 전 세계를 덮고 있고,?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다.?특정 사건을 가지고 이념이나 인종,?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열광하는 경우는 드물다.?올림픽 경기를 제외한다면,?단일 구기 종목으로 전 세계의 국가가 고루 예선과 본선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축구가 유일하다.?야구는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그리고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지구를 대표하는 종목은 아니다.?배구나 하키,?골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광을 할까??축구에는 인종적?·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까??공을 차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도 격구(擊毬)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멕시코의 마야 인들도 공을 가지고 노는 오랜 경기 전통이 있다.?이런 전통은 다른 많은 민족이나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공을 발을 가지고 노는 이런 행동의 어떤 면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충실한가??축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직 발로만 하는 운동이다.?골을 막는 골키퍼만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공이 장외로 나가 경기장 안으로 공을 집어넣을 때만 예외적으로 손의 사용이 허락된다.?경기장에서 손을 사용하면 바로 프리킥 벌칙을 받고,?패널티 애리어 안에서 골 키퍼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이라는 최고의 벌칙을 받는다.?혹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발과 머리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이런 본능적 행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인류가 직립 원인으로 서면서 비로소 손이 해방된다.?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된 사건은 문명사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일 수도 있다.?이 손은 나무의 과일을 따고,?도구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직접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상을 조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회 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또 손은 손가락을 활용하여 셈을 세는 데도 사용된다.?하나 둘로 시작하는 셈은 추상 활동의 시작이다.?이 셈으로부터 숫자의 발견이 이루어진다.?숫자는 자연 대상을 단순하게 계산하는 추상 도구이다.?이 수자로부터 수들의 관계와 비율이 발견되고,?이를 통해 음들의 관계,?물리적 사건들의 관계,?천체의 운동의 법칙 등이 숫자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도구를 제작하고 추상 활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출발은 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축구에서는 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규칙이다.?오직 발과 머리만을 사용하고,?그 발의 재간과 헤딩 기술만을 이용해서 공을 골대로 집어넣는 것이다.?이 발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가장 원초적인 대지를 딛고서 이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수단이다.?때문에 발은 이런 원초적인 본능과 에너지에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축구가 동서고금의 인종과 문화,?노소와 경제적 빈부 차와 상관없이 고루 환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원시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야구의 경우 홈런을 치면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누상을 한 바퀴 돈 홈런 타자는 다른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는 세리모니를 한다.?그 장면은 상당히 절제된 문화 의식과 같다.?하지만 축구에서 골을 넣는 순간 그 선수의 포효를 보라.그는 막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몸동작이 복합된 세리모니를 하면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축구의 경우 이런 괴성과 몸동작이 심한 편이다.그것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수 만 명의 사라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보라.?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아니 그 이상이다.?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피를 흘리는 대결을 보면서 환호했다.?어떤 경우는 사자와 같은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열광하고,?네로 황제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모습에 광분하기도 했다.?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결투 장면의 피를 보면서 야수적 본능을 대리 충족한다.?아마도 현대의 축구경기는 그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대리 경험할 수 있는 데 가장 가깝지 않을까??그런데 이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발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사회학적으로는 이런 에너지나 정념의 발산 장치를?‘안전도관’이라고 말한다.?이런 도관은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도관의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이런 안전도관으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활용했다.?니체는?『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를 본적으로 두 가지 판이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이 작품은 니체가?28살에 써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동시에 문헌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명한 미학자 빈켈만은 그리스 정신을?‘아름다움의 정신’으로 간주한다.?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수적 황금 비례에 기초한 통일성과 단순성의 미이다.?그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는 이 아름답고 밝은?“아폴론적 정신”으로 대변된다.?그런데 니체는 빈켈만의 이런 일반화된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그리스 사회는 밝은“아폴론적 정신”뿐만 아니라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도 있다는 것이다.?빈켈만이 밝은 아름다움의 정신을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보았다면,?니체는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주로 비극의 축제에서 확인한다.?비극은 그리스 사회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최전성기에 유행한 드라마이다.?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비극 공연에 열광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고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도 한다.?이런 비극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이어진다.?니체에 따르면 밝은?“아폴론적 정신”은“개체화의 원리”이고,?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은?“전체와 집단의 원리”이다.?전자는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 구현되고,?후자는 비극이 공연되는 집단 축제(디오니소스 축제/중세의 카니발)에서 드러난다.?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나 혹은 대규모 집단 응원 행위도 이런 축제와 연관이 깊다.?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세 가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한다.?즉 인간과 자연의 벽,?개체와 공동체의 벽,?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인간을 자연(무기물)으로 되돌리고,?개체를 공동체와 연결하고,?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의 발산과 집단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월드컵 축구를 현대판 디오니소스적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서?‘대~한민국,?따단 따 딴단’을 외칠 때 보여주었던 집단 에너지의 일체감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나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를 능가할 정도이다.?이런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은 신화의 세계와 연결될 터인데,?그 당시 동아시아의 오랜 전쟁의 신?‘치우 황제’가 마스코트로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으로 보거나 축구를 몸만으로 하는 경기라고 단순화하기에는 힘들다.?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발과 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머리와는 상관이 없는 몸의 운동으로 보인다.?하지만 개인들의 기량을 쌓는 과정에서 발재간과 헤딩 기술은 몸에 기억된다.?몸은 의식이나 정신활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 역시 두뇌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몸이 두뇌의 활동이고,?두뇌는 몸을 기억한다.?뇌의 발달은 다른 육체기관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손이 기억을 하고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를 요하기 때문에 전문 피아니스트라도 연주가 쉽지가 않다.?그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만,?그렇다고 악보 전체가 그대로 머릿속에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설령 암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지휘자의 손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건반을 터치하는 것은 암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터치는 기억하는 뇌의 독립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기억하며,?정교한 손동작이 이루어지는 만큼 뇌의 발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기억은 손과 뇌,?그리고 환경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합작품인 것이다.?이런 사정은 축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재간과 헤딩 기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축구 선수는 오랜 반복 훈련에 따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몸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본능적 활동과 에너지의 발산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축구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과정은 두뇌 플레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토탈 사커를 지향하는 현대 축구에서는 고정된 포지션 속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 상황에 따른 임기웅변의 역할이 필요한 복잡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축구는 심판의 엄격한 규칙과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기이다.?전술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인지과정만이 아니고,?규칙을 내면화하고 적응하고,?더 나아가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정이다.?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고도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상업화된 프로 축구에서는 선수들은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 출신의 다른 선수들과 소통하는 어려움도 필수적으로 겪게 된다.?이런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몸으로 익힌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때문에 이런 경험을 거친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 후 해설 경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맡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능이 일반인들을 상회한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이렇게 본다면 축구가 단순히 발재간과 헤딩기술을 활용한 원시적 운동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오늘 날 현대 축구는 다른 어떤 경기들보다 대표적으로 상업화된 경기이다.?선수들의 몸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고,?축구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웬만큼 재정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스타 선수의 몸값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수익을 넘어설 정도이다.?지역 간 격차도 심해 리그별 수준 차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세계축구협회(FIFA)가 유엔 못지않게 권력기관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FIFA의 수장은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은 올림픽 유치 못지않게 국가 간에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렇게 보면 축구는 가장 자본의 영향을 받는 현대적인 운동 산업의 하나라 할 ??? 있다.?동시에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기초한 경기,?몸과 뇌 그리고 상황이 집적된 고도의 기억 메카니즘에 기초해 있고,?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그렇다면 축구는 원시와 현대,?본능과 이성,?몸과 정신,?자기와 타자,?선수와 관중 등이 종합적으로 집적된 경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가장 상업화되고 현대화된 경기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가장 원시적 본능과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일상의 스캐쥴을 무시하고,?축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이 축구의 승패에 실의와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가 7살에 병이 들었다. 내 우로 언니가 둘 있었는데, 큰 언니가 먼저 병이 들었다. 울 언니는 얼굴에 병 표가 마이 나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병 표가 얼굴에는 안 나고 다리에 나더라. 그것도 무릎 우로 나서 치마로 감추모 안 보였다. 큰 딸도 한스러운데 셋째 딸까지 그 험한 병에 걸리고 보이 울 아부지 엄마 맘이 어땠겠노. 내가 펄쩍거리고 뛰다가 행여라도 다리에 난 병 표가 들킬까봐 울 엄마는 나보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7살에 병이 들어도 나는 내가 병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환자 취급 안 했거든. 어린 기 병 걸린 게 맘이 아파서 내말은 무슨 말이든지 전부 다 들어줬다. 국민학교도 갔다. 집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를 가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라. 나도 모리게 자꾸 손이 치마로 가서 잡고 있었제. 펄쩍 거리고 뛰다가 다리 병표가 들킬까 무서버서 체육시간이 되모 자꾸 뒤로 가는 기라.

하루는 공부 마치고 집에 갈라고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라. 가니까 손을 펴 봐라, 손을 뒤집어 봐라 하데. 요리조리 보다가 고마 치마를 걷어 보라는 기라. 나는 안 걷을라꼬 자꾸 움찔움찔 했다. 그래도 어짜겄노 그마 다리 병표를 봤는 기라. 담임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일부터 집에 있어라.” 하고 나가더라. 응, 그 말은 인자 학교 오지 말라는 기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 말하니까 울 엄마도 집에 있으라카더라. 그 길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뭐라고? 원망스럽지 않냐고? 모리겄다.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선생님이 오지 말라니까 가모 안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그래도 그때는 울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괜찮았다. 학교는 우리 아버지가 우기서 보내줬다. 엄마는 문맹이다. 내 우에 작은 언니는 나하고 큰 언니 때문에 참 마이 힘들었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모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랬다.

대성당 앞 벚나무

대성당 앞 벚나무

집에만 있으께 참 심심하더라. 학교를 안 갈 때는 몰랐는데 다니다 안 다니니까, 아이고 그 참 심심하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집에 있다가 길에 아(이)들이 안 보이모 산으로 놀러갔다가 바닷가로 내리왔다가 그리 하다가 또 아(이)들이 학교서 올 때쯤 되모 집에 콕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어린 맘에 산으로 바닷가로 쏘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일라고 애 마이 썼다.

큰 언니는 얼굴에 볼긋볼긋하게 나더라. 얼굴에 그리 나께 할 수 없이 학교도 못 가제. 집에 있으께 병이 나도 자연히 밥을 해 묵게 되는 기라. 작은 언니는 학교 가고 나는 어리고, 또 내 밑에 남동생은 마이 어린 기라. 아부지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했다. 그라니까 큰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해 줬제. 병들어도 언니가 집에 있으께 부모님도 그리 부지런히 날뛰었고, 우리 식구는 밥 안 굶고 쌀밥도 묵고 했다.

하루는 언니가 물양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아이가. 근데 우물가에 있던 여자들이 언니를 보고 소리 지르고 물을 끼얹고 난리를 피웠는 기라. 와 그랬겠노. 물 못 떠가게 그라제. 병 걸리 갖고 물뜨러 오께나 저거한테 병 옮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제. 여자들이 떼거지로 달리 들어서 언니를 이리저리 흔들고 옹기를 집어 던지고 물을 바가지 채로 갖다 붓고 물담아 이고 다니는 옹기를 발로 차고…… 휴우 휴이….

물에 흠뻑 빠져갖고 혼이 나가서 들어왔는데, 그날로 언니가 병이 났다 아이가.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하는 기라. 여자 셋만 있으모 그마 혼이 나가는 기라. 그마 셋이 지나만 가도 그래. 그라이 집에만 있는데 울 부모 맘이 어땠겠노. 어데 가서 따지지도 몬하고 누구한테도 말 몬했다. 그날 들일 갔다가 들어오셔서는 언니 그 꼴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더라.

나는 나이가 없어서 그때는 그 심정을 몰랐제. 한참 살고보이 인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병은 옮는 기 아이다. 우리 식구 여섯 중에 큰언니하고 나만 걸린 거 보모 모리나. 걸릴라 쿠모 다 안 걸맀겄나. 내 밑에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마이 적었다. 엄마는 일 나가서 안 들어오고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다. 달래도 안 되고 배가 고프니까 자꾸 칭얼거리기도 하고……

암죽을 먹이야 하는데 나도 얼라 아이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생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어서 먹이기도 하고, 내가 씹은 쌀을 밥그릇에 담아 겨우겨우 불을 때서 끓여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어리지만 생쌀을 그대로 주모 안 되겄고 굶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했는데, 그래도 내 맘 한 구석에 겁이 나서 엄마가 들어 오모 그 말을 못 했다. 말할 용기가 없는 기라. 혹시라도 어린 남동생이 병에 걸리모 어짜노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 동생은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산다. 이기 옮는 병이모 우리 남동생은 걸리도 내가 쌀을 씹어 먹인 만큼 병이 걸리야 하는 거 아이가. 큰언니? 그때는 우물가에서 그 일을 당한 후로 병이 점점 들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기라. 아가 울어도, 그거를 암죽을 끓이가 먹이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될 정도로 그리 병이 깊어가더라고. 내 맘에 쌀을 씹어 먹이모 그기 암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방지축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날 새모 산에 간다. 산에 가모 봄이면 진달래가 온 천지다. 그거 뜯어서 입에 넣어 보모 싸~ 한 기 맛이 있었다. 맨날천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다니다가 배고프모 집에 와서 밥 한숟가락 묵고, 동생 울모 업어주고 그랬다.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학교 안 가는 게 그리 서럽지도 않더라. 심심한 거 하고 친구들 옆에 가기 힘든 것만 빼모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자꾸 문제가 생기는 기라. 우물가에서 그라고 온 뒤로 대문 밖을 안 나가는데 얼굴에 나는 기 더 표가 나. 점점 마이 나고, 나는 얼굴에는 안 나는데 왜 그리 얼굴에 나는지. 병 표도 마이 나고 정신도 나가고, 동네 사람들 눈에 우리 언니는 같은 동네에 있으모 안 되는 사람인기라. 저거 때문에 언니가 정신이 그리 됐는데……

내 눈에도 언니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더라.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고 벌벌 떨고, 그라모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덩달아 겁이 나고 그랬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을 기라. 지옥이 따로 있겄나, 그기 지옥이지. 하기사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걸 나는 몰랐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린 척 하다가 점점 수군거리고, 언니를 소록도로 보내라는 기라. 우리 부모님은 애써 못들은 척 해도 마이 힘들었제. 가까이 지내서 걱정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자 아(이)들을 그마 보내야 안 되겄나?”하고, 집에 오는 것도 좀 뜸해지는 것 같더라. 그때는 순경이 병자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라다가 인자는 순경이 우리 집으로 온다. 뭐하러 오겄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문디 있다고 신고하니까 순경이 나오지. 빨리 잡아서 보내라고 신고하는 거지. 아버지 엄마는 들일하다가도 멀리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보이모 어떤 때는 소리치고 어떤 때는 쫓아온다. 그라모 나하고 큰언니는 뒷산으로 내빼는 기라. 그냥, 그냥 산으로 들어간다. 언니하고 쪼그리고 있다가 해지모 집으로 들어가제.

하루는 집에 있는데 순경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리 오는 기라.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 없다. 왜 이라노?”하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버티고 서서 큰 소리를 지르는 기라. 응, 우리보고 빨리 달아나라는 뜻이지. 언니하고 나는 뒷문으로 돌아서 또 산으로 간다. 가다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퍽 고꾸라지고 있는 기라. 순경이 집안으로 들어 올라고 아버지를 사정없이 밀친 기라.

성심원 산책로

성심원 산책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 나고 그런 것 보다 큰언니하고 나는 겁에 질려서 계속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정신이 나간 언니 손을 꼭 잡고 안 잡힐라고 정신없이 뛴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어데 나무 밑에 덤불 밑에 쪼그리고 그리 있다가 어두워지모 엉금엉금 내려 왔다. 해가 있으모 못 내리오제. 동네사람들이 우리 보모 그냥 안 두지. 어짜든지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 버리야 저거가 병 안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안 가고 우리 집 마당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응? 아이다. 다른 집에도 병자가 있었다. 그때 그리 흔한 병도 아이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다 소록도로 가든가 집을 떠나든가 했제. 우리는 아버지가 어짜든지 멀리 안 보내고 옆에 가까이 두고 병을 낫게 할라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큰언니하고 나를 어데 보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버틴 거지. 그라고 우리 집이 그래도 좀 먹고 살았거든. 그라니까 아주 함부로 하지는 못했제. 그래도 결국은 떠나왔제.

고향? 생각 마이 나제. 어릴 때 떠나와도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난다. 봄이 되모 도다리 쑥국이 일품이다. 니가 어째 도다리 미역국을 아노? 니도 거제도라고? 거제도 어데고? 고향 사람 만났네. 맞다. 도다리 넣은 쑥국하고 미역국은 지금도 생각난다. 희한하게 쑥하고 도다리가 어울린다. 된장 약하게 풀어 넣고 캐온 쑥하고 싱싱한 도다리가 있는 국은 봄이 되모 생각난다. 미역국도 도다리 넣고 끓이면 국물이 진하고 참 시원타.

하이고, 너거 할머니도 숭어 간 맛을 알았네. 숭어 간, 그거 안 묵어 본 사람은 모린다. 나도 어릴 때 숭어 어장이 옆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숭어 간을 한번 훔쳐 묵어 봤는데, 맛있는 기라. 몇 번 훔쳐 묵었지. 하하 흠, 참 맛이 있다. 숭어 한 마리에 간은 한 개제. 꼭 밤톨 맨치 생긴 게 싱싱한 숭어 간은 탱탱하다. 소금에 콕 찍어 묵으모 쫄깃한 기 참 맛이 있다. 보통 탁주하고 같이 묵는데, 술도 사람에 따라 발효하는 기 다른 기라.

누룩도 보통 요새 파는 누룩이 아이다. 그 누룩이 곡식 아이가. 물에 불리서 만들어 윗목에 두모 한 3일 뒤에는 발효하는 기라. 어데, 3일 후에 발효되는 기 정상이다. 더 오래 두모 술맛도 없고 술 색깔도 안 좋다. 그런데 더 빨리 발효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 갖고 술을 담가도 담가는 사람에 따라 술이 잘 익기도 하고 잘 안 익기도 한다. 술이 사람에 따라 다리게 발효되는 기지. 말하자모 술이 사람 가리는 기라.

칼치 회 묵어 봤나? 그거는 안 묵어 봤고나. 칼치는 바다에서 올라 오모 바로 죽는다. 칼치 잡는 배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금방 잡아갖고 금방 들어 오모 묵어도 괜찮다. 칼치는 반짝반짝한다. 맞다, 그렇제. 칼치는 비늘을 벗기야 된다. 칼치 비늘은 호박잎으로 마무리 하모 된다. 호박잎으로 몇 번 쓱 문지르모 된다. 뼈채 썰어서 된장에 함께 묵으모 그 맛이 기차다. 고소하고 참 맛있다. 에이, 고등어 회는 비리다. 비리서 별로라.

내 노래 한 번 해볼까?. “서러운 내 인생 흐르고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이 내 몸이 서럽고 서러워 한 세상 살아도 서러운 세상”. 나는 노래하는 기 좋다. 가수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옛날에는 한 번 부르모 한 번에 몇 곡씩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모 서러움도 잊어뿌고 눈물도 안 나고 괜찮다.

니는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여게 뭐할라꼬 오노? 니가 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기 걱정이다. 저게 박카스 있다. 박카스 묵어라. 저게 마이 안 있나. 한 개만 묵지 말고 마이 가져가라. 고마 한 박스 가져가라. 목마르고 할 때 묵으모 좋다. 또 갖다 준다.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서 차 가면서 묵어라. 뭐 할라고 또 온다고, 안 와도 된다. 니가 너무 힘들다 아이가. 내 걱정 하지 마라.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 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나태영(한철연 회원)

 

 

김갑수와 최장집

이명박 정권 초기에 전국 수만 명 대학교수가 시국선언을 했다.이명박 정권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했다.?바로 이 순간 이명박 도우미가 나타났다.?최장집이 나타났다.?최장집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선거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히틀러도 선거로 총통 자리에 올랐다.?최장집이 헛소리해도 최장집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만큼 최장집 인맥과 학맥이 두텁다.?손호철,?정청래,?박상훈이 최장집 폐인이다.?김갑수 혼자서?<오마이뉴스>에서 최장집을 비판했다.

 

근대사를 통해 현대를 읽다.

김갑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인정한다.?다만 백범 김구 선생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한다.?한독당 김구가 한민당 이승만 생각을 받아들인 사실을 비판한다.?김구 선생이 친일파 청산을 먼저 하고 국가 건설했어야 했는데 국가 건설을 먼저 하고 친일파 청산하자는 이승만 꼬임에 넘어간 사실을 비판한다.?결국 이승만 의도대로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되었다.?김구 한독당은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다.?김구 선생도 암살당하는 비운을 당했다.?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는 김갑수는 함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는 것을 반대했다.?김갑수 말대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과거 역사를 오늘 우리 문제를 푸는데 사용할 줄 아는 김갑수 안목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김갑수는 통합보다는 한 세력이 강해지면 다른 세력이 강한 세력으로 빨려 들어오는 게 낫다고 말한다.?한독당 김구 선생 실패를 보고서 품은 생각이다.?나는 속 마음으로 김갑수 의견에 반대했다.?나는 진보당과 노동당이 합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까닭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두 당이 똑같은 당이라는 것이다.?괜히 쪼개져서 보통 사람들이 볼 때 진보는 세력이 작으면서도 왜 쪼개지냐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조금 다르더라도 합쳐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그래서 진보정당 지지율을 높여야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보다는 김갑수 생각이 더 옳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민주노동당(진보당)과 진보신당(노동당)이 쪼개질 때 앙금이 크다.?북조선 관련 사건이 터질 때 입장 차이가 생긴다.?특히 북조선 핵 문제가 생기면 입장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래도 노동당은 정의당 보다는 낫다.?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국정원을 비판하고 진보당 편을 들어줬다.?다행이다.?어쨌든 두 당이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비판적 지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두 진보정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책 경쟁을 하면 좋겠다.?너무 급하게 통합을 밀어붙이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8·15?직후 김준연은 한민당 간부가 되어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그는 한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우리가 익히 알듯이 한민당은 친일지주와 친일 부역배들이 주축이 된 사이비 야당이었다.

같은 한민당 내에 장덕수라는 경쟁자가 있었다.?물론 장덕수는 화려한(?)?친일경력의 소유자였다.?하지만 장덕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로서 세속적인 실력 면에서 김준연보다 우월했다.?장덕수는 한민당의 요직인 정치부장과 외교부장을 겸직했다.?동시에 장덕수는 김구와 황해도 동향으로서 김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한민당과 한독당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내부의 정적 장덕수도 제거하고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임정 주도의 한독당까지 와해시킨다면?’?김준연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만났다.?얼마 후 장덕수는 혜화동 자택에 카빈을 들고 찾아온 경찰에게 피살되었다.?김구가 미군정 재판정에 나가 미군 장교에게 모욕적인 심문을 받은 것은 장덕수 암살 배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이어 미군정 재판부는 한독당의 핵심인물인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등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것은 한독당의 와해와 김구의 죽음,?그리고 친일청산 실패로 귀결되었다.?결국 단정수립에 반대하던 통일세력,?요즘으로 말하면?‘종북세력’인 한독당과 지도자 김구를 거세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이지만 그 앞잡이에 야당을 자임하던 김준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준연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김준연과 닮았는가.?최고학부,?독일유학,?운동권 장식 이력,?제1야당 출신,?반공단정세력,?미군정·독재정권을 배후로 하여 경쟁자와?‘종북정당’을 파괴한 이가 누구인가??공히 김준연 그리고 유시민이 아니었던가?’‘우리는?1950년대 진보당 파괴와 조봉암 법살의 역사를 알고 있다.?이것은 조봉암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서상일계의 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서상일(1887~1962)은 언제나 조봉암에게 날카로운 경쟁의식을 느꼈고‘진보?1인자’를 향한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보성전문 출신인 그는 사사건건 조봉암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권 장악을 위한 서상일계의 쿠데타가 벌어진 것은?1956년 대선 이후였다.?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민주당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수권정당으로 도약하자 미국과 이승만 집단은 진보당을 적출하려 들었다.?서상일은 여기에 앞잡이로 나섰다.?그는“조봉암의 주장은 너무 강하다(북에 가깝다)”고 하면서 진보의 혁신과 대중화를 표방, ‘혁신대동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상일과 그 추종자들은 내부 쿠데타에 실패하자,?곧’민주혁신당’?창당에 나선다.?그러나 민주혁신당은 조봉암이 지향했던?’피해대중의 구제‘에는 관심이 없었다.?아무튼 민주혁신당의 창당은 조봉암 등의 진보세력을 고립시켰고 진보정당의 명맥을 끊어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봉암은 체포되었다.?서상일과?‘혁신’?세력들은?‘진보당 사건’?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서,?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에게 교묘하게 불리한 증언만을 내놓는다.?즉?“진보당은 좌경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주혁신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진보당에 비해선 우경화한 정당이다” “그들이 평화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농민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 내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래의 일이므로 나는 모르겠다”등이었다.

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김갑수, <주권방송>?페이스북 단상, 2013년?10월?16일)

김갑수는?『전쟁과 운명』?이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라는 거울에 오늘 우리를 비춘다.?누가 진국인지 도대체 누가 껍데기인지 보여준다.?진국은 통합진보당이다.?껍데기는 민주당이다.?정의당이다.?새누리당은 껍데기 메카이다.?껍데기 생산공장이다.?아니다.?작것이다.?철학자 윤구병이 말했다.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진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껍데기는 더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껍데기이다.?저들은 국정원이 만든 놀이터에서 열심히 논다.?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논다.?국정원은 평범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평범한 사람을 억지로 감옥에 가두었다.?국정원이 저지른 나쁜 짓이 이 땅 현대사를 도배질한다.?국정원이 조작해서 만든?‘짜깁기 녹취록’은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다.?그런데도 그?‘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많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진보언론이다.?그런 진보언론에서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터무니없는 연속 인터뷰 기사를?1면에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손호철은 스스로를 진보교수라고 말한다.최소한 손호철은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책도 여러 권 쓴 사람이다.?그런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했을 것이다.?자주 자기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그런 손호철이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한다.?착잡한 상황이다.?배움이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한다.?통합진보당은 김구 한독당처럼 죽지 않는다.조봉암 진보당처럼 죽지 않는다.

1970년대, 1980년대 이 땅에서 행해졌던 일이 이미 일제 강점기 때 행해졌다.?박정희는 친일파이다.?이런 박정희를 존경하는50대 이상 분들이 너무도 많다.?그 분들께 이 책?『전쟁과 운명』과?『중경의 편지』,?『압록강을 넘어서』를 선물하고 싶다.

 

이재유 선생 한 번 찾아 뵙고 싶다.

그 당시에 이런 멋진 분이 계셨다니 기쁘다.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의 생존권과 독립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는 부분과?’그는 조직원들을 지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투쟁 방식을 실천했다.’는 부분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통합진보당과 노동당 사람들이 이 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전쟁과 운명』을 읽고 외친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친일파는 살아있다』!
남한과 북조선은 단군 자손 국가이다!
발해와 신라가 싸운 전철을 밟지 말라!
주한미군 물러가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영혼의 돌봄 :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영혼의 돌봄: 플라톤의 [파이돈]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1

조은평(건국대 강사)

 

 

 

  1.  상처받은 슬픈 영혼의 자화상

 

-이번 시리즈 강의의 목적은 고전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

-?그렇다면 고전이란??누군가 고전이란 이런 거라고 말하더군요.?모두가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뜻밖에 별로 많이 읽지 않는 책(장식용),?또는 친구가‘요즘 무슨 책 읽어?’라고 물어올 때?[논어]를?‘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듯이?‘다시 읽는다’고 말하는 책.(당연히 읽어야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게 고전이기에 처음 읽는다고 말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가지는 않을까 하는 데서 기인하는 방어기제)

-?그럼 오늘 함께 검토해 볼,?플라톤의?[파이돈]을 읽어보신 분?

-?또한 이번 시리즈 강의의 큰 주제가?‘나이듦의 철학’인데요.?뭐 어떤 의도로 기획된 것일까요?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사실 이중적이죠.?한편으로 세상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잘 알게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는 반면에,?살면서 경험하고 판단한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 탄탄해지면서 도리어 그런 관점에 매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죠.

-?그럼에도 여러분들은 나름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때론 충격을 받으면서 나름의 질문들을 던지게 되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고민하게 되는 삶의 문제들과 질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신가요?

-?과연 바쁘게 주어진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살아온 인생의 중년.?중년의 우리들을 뒤흔드는 삶의 충격들을 무엇일까요??또 그런 충격들 앞에서 어떤 고민과 질문들을 갖게 되나요?

-?누군가 말하더군요.?갑자기 내 삶이 하찮게 느껴지고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먼저 성공한 모습을 절실히 직면하게 될 때라고요.

-?이런 순간,?우리는 한없이 비참해 지면서,?이렇게 비참함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더 한심하게 여기게 되죠.?정말 친했던 친구가,?선배가 후배가 먼저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실 축하하고 칭찬해 주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그야말로 쪼잔한 마음을 갖게 되는 우리의 슬픈 영혼의 자화상.

-?대체 이런 영혼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아니 이런 영혼의 상처는 왜 생기는 걸까요??아니 대체 영혼이란 뭘까요??그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개념은 아닐까요?

-?지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도?‘영혼’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할까요??더구나 오늘 강의의 주제인?‘영혼의 돌봄’이라는 논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바로 여러분들과 우리들의 이 슬픈 영혼의 자화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이를 위해 플라톤이?[파이돈]에서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논의를 함께 검토해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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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혼 불멸’과?‘영혼의 돌봄’

 

1)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단상들

– ‘악법도 법이다!’라고 인정하며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과연?

– NO!?소크라테스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그저?‘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태연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과 철학에 대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2)?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

-?소크라테스에게?‘좋은 삶’= ‘지혜를 추구하는 삶’

-?아울러 지혜란?‘상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앎.

-?그리고?‘상기’가 가능하다면 영혼은 이미 이전에 존재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불사한다.?더구나 삶을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본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더 좋은 곳을 가는 반면에,?영혼을 잘 돌보지 못한 사람들은 하데스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이처럼?‘영혼의 불멸,?불사’를 논증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일단 분명한 것은?‘영혼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것은 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되는 일’이라는 점을 역설하기 위해서.

-?바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의연하게 전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플라톤의?[파이돈]!

3)?플라톤의?[파이돈]

:?소크라테스가 그의 벗들과 나눈 마지막 철학적 대화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대화편.?플라톤은?‘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선택함으로써,?소크라테스가 행한 것들과 이야기한 것들에 특별한 중요성과 무게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대화편의 중심 주제는 영혼의 불멸.?하지만 영혼 불멸을 증명하는 것이[파이돈]을 저술한 플라톤의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다른 데 있었다.?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그리고 이것은 오직 철학함을 통해서,?즉 영혼을 육체적인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시키고,?순수한 지적 파악의 대상들을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추구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플라톤은 이 메시지를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하고 있지 않다.?그것은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화 행위들을 통해 구체화된다.?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정확한 사태의 진실을 알기 위해 토론에 몰두하는 모습은 플라톤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상,?바로 그것이었다.?플라톤,?전헌상 올김, [파이돈],?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이제이북스, 2013. 9-10쪽.?작품해설 참조.

(참조.?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보통 저술 시기에 따라 전기,?중기,?후기 대화편으로 구분. [파이돈]은 중기에 속하는 작품. [메논], [향연], [파이드로스], [국가]가 중기 작품들.?대략?[메논] -> [파이돈] -> [국가]?순서로 저술된 것으로 추정.)

 

-?영혼에 대한?[파이돈]의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

1)?영혼과 몸의 확고한 이분법

:?인식론적 측면에서,?영혼과 몸의 이분법은 오로기 순수한 이성 작용에 의해서만 진리가 포착될 수 있으며,?몸에 속한 감각기관들을 통한 모든 인식은 기만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이데아론)

:?또한 종교적인 측면에서,?이 이분법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욕망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정화될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금욕주의적 특성)

2)?다른 대화편들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관점,?육체적 욕망에 대한 비판과 거부,?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영혼의 정화라는 테마,?상기와 연결된 윤회 사상,?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죽은 자의 심판과 그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 (이런 특징들은 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

 

– [파이돈]의 대략적인 내용

<도입부(57a-61c)>

– [파이돈]편 제목이 파이돈인 이유??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주는 전달자가 파이돈.?일종의 액자구조.?파이돈의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 왜 곧바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

-?사형 집행이 늦어진 이유는 테세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 섬으로 떠난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도시를 정결히 해야 한다는 법 때문.?드디어 델로스로 떠났던 배가 귀환한다는 소식을 듣고,?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이 임박했음을 알게 된 제자들과 친구들이 평소보다 일찍 감옥에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주게 된다.

<철학자와 죽음(61c-69e)>

-?본격적인 철학적 토론의 시작?:?제자들과 친구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두고 한 없이 침울한데,?정작 소크라테스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심지어?“분별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나를 따라오라”(61c)고 누군가에게 전해달라는 농담까지.

DSC09172-1-?제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태도가 의아해서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철학자는 죽은 사람을 따르려 할 거라고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거지요?”

-?이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면 임박한 죽음에 대해 노여워하지 않고 태연히 그것을 맞이할 것이라고 주장.

-?심지어?‘진정한 철학자들은 전 생애를 통해 죽음을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일까??우선 그는?‘죽음이란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논의를 진행.?몸과 그에 결부된 감각지각을 통해서는 참된 존재들에 대한 앎이 획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오로지 참된 앎은 오직 순수한 사고와 추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그런데 순수한 사고와 추론은 오직 영혼이 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따라서 만일 죽음이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을 의미한다면,?참된 존재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결국 죽음의 상태를 추구하고 열망하는 셈이다.(‘동굴의 비유’?참조)

-?그렇다면 평생 이러한 상태를 염원하던 사람이 막상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즉 죽음을 앞두고 노여워한다는 것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다.

<영혼 불멸에 대해 옹호하는 논증들(69e-107b)>

-?이처럼?‘철학자는 죽음을 태연히 맞이할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사실상?‘영혼이 죽은 다음에도,?즉 몸과 분리된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제자들은 과연 영혼 불멸이라는 전제가 참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기에 해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결국 이후부터 소크라테스는 영혼 불멸에 대한 일련의 증명들을 선보이고,?다시 제기되는 제자들에 반론에 또 다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논의가 이어진다. ( 1)?순환 논증?/ 2)?상기 논증?/ 3)?유사성 논증, 4)?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 5)?심미아스에 대한 답변?/ 6)?마지막 논증?)

-?이런 여러 논증 중에서 세 가지만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순환 논증(삶과 죽음의 순환)

-?소크라테스의 첫 논변은 변화에 관한 일반 법칙을 근거로 삼는다.?어떤 사물?x가?F라는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면,?그리고?F에 반대되는 속성?-F가 존재한다면, F를 가지게 됨이라는 변화는?-F로부터의 변화이다.?말하자면?‘모든 만물은 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는 점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잠을 자는 것’과?‘깨어있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속성이다.?그러나?‘잠을 자는 것’은?‘깨어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깨어있는 것’?또한‘잠을 자는 것’에서 생겨난다.?이와 마찬가지로?‘강하게 됨’은?‘약한 것으로부터 강하게 되는 것’이고, ‘나빠짐’은?‘좋은 것으로부터 나쁘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원칙을?‘죽음과 삶’에도 똑같이 적용한다.?죽음은 삶의 반대이다.?어떤 것이 살게 되는 것은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살게 되는 것이고,?역으로 죽게 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죽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양”눰袖막??균형 있게 일어나야만 한다.?즉?F로부터?-F로의 변화는 반드시?-F로부터?F로의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 반대항 중 한 쪽의 성질을 지니게 되고,?더 이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이 앞서 제시된?‘반대항으로부터의 변화’라는 원칙과 결합하면,?죽은 자들이 산 자들로부터 생겨나는 것 못지않게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그런데 산 자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몸과 결합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야 한다.

2)?상기 논증(상기설을 통해 태어나기 이전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을 논증)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은 결국 상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상기(anamnesis)란?:?어떤?a라는 사람이?X를 통해?Y를 기억해 내는 것!

-?예를 들어,?누군가(a)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이나 사진(X)을 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Y)을 기억해 내는 것 같은 방식이 상기라는 것.?기본적인 논증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a는?Y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알고 있어야 한다.

2. a는?X를 감각지각을 통해 인지할 뿐만 아니라?Y를 떠올려야 한다.

3. X와?Y는?(유사하지만)?서로 다른 지식의 대상이어야 한다.

4. a가?Y와 유사한?X에 의해서?Y를 상기했다면, a는?X가?Y에 유사성에 있어서 뭔가 부족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5.?우리는?‘같은 것들’(X)로부터?‘같음 자체(Y)’에 대한 지식을 떠올린다.

– 5와 같은 기억도 역시 상기.

-?따라서 감각지각을 통해?‘같은 것들’로부터?‘같음 자체’를 떠올리고,?또 이 둘이 유사성에서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감각지각을 갖게 되기 이전에,?다시 말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같은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같은 자체’에 대한 앎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혼이 가지고 있어야하면,?이는 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해야 함을 함축한다.

(?참조)?예를 들어?[메논]편에서 노예소년에게 삼각형에 대해 상기시키는 논의.

삼각형 모양의 그림,?현실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은 없지만 유사한 삼각형의 모양을 통해?‘완벽한 삼각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노예소년도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런 완벽한?‘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알 수 있다. )

3)?유사성 논증

-?이제 상기 논증에서 밝혀지는 것은 결국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한다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죽고 난 다음에도 그것이 계속 존재하고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반론 제기. ‘몸으로부터 빠져나온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 제기.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

-?우선 존재하는 것들을?‘가시적인 종류’와?‘비가시적인 종류’로 구분하고,그 각각이 가지는 특징들을 열거한다. ‘가시적인 것’들은 결합적이고 결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반면, ‘비가시적인 것들’은 비결합적이고 항상 동일한 상태를 유지한다. (예를 들어?:?같은 것들/같은 자체,?아름다운 것들/아름다움 자체,?사랑하는 것들/사랑 자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렇다면 몸과 영혼은 각각 둘 중 어떤 종류의 것들과 유사한지를 묻는다.당연히 몸은 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고,?영혼은 비가시적인 것들과 유사하다는 동의를 얻어낸다.?이로부터,?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몸은 쉽게 해체되기 마련이지만,?비결합적인 성질을 지니는 영혼은 해체되지 않고 늘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따라서 우리는 죽은 뒤에 우리의 영혼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 버리지나 않을까하고 어린아이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논증에 뒤이어?“철학함이 영혼을 돌보는 최선의 길”이라는 관점이 생동감 넘치는 비유를 통해 제시.

 

<신화?(107c-115a)>

-?영혼 불멸에 관한 논변이 종료된 이후,?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사후에 겪게 되는 일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115a-118a)>

-?소크라테스가 의연하게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

 

 

3. ‘영혼의 돌봄’은 어떻게 가능할까??또 어떤 식으로 실천해야 할까?

 

-?결국 플라톤의?[파이돈]이 전하는 메시지는?‘영혼의 돌봄’

-?아울러 이는?‘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를 추구하기 위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을 늘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하지만 아마 영혼의 불멸과 정화되지 못한 영혼의 심판이라는 테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낯선 신화에 불과할 것.

-?그럼에도?‘영혼의 돌봄’이라는 테마는?‘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왜냐하면 영혼이 정말 존재하고 불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여전히 고민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영혼을 돌보면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또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1)?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도록 항상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사회?

-?사회가 아무리 각박하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더라도?‘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개인들의 사회?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잘 알고 있듯이,?때때로 내 영혼을 팔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드라마?[빅맨]?속의 이야기?:?주인공 김지혁?VS?강동석?/?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강동석의 부하직원!?그렇다면 이에 비해 주인공 김지혁이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었던 비법은??타고난 천성??시장 사람들에게 받은 돌봄의 관계,?그 관계가 만들어준 인성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영혼의 돌봄’이라는 과제는 어쩌면 우리 모두 늘 추구하고 싶은 삶의 목표일지도 모르지만,?사회적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 어쩔 수 없이 내 영혼을 그 무언가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그렇다면 더 중요한 과제는?

2) ‘영혼의 돌봄’을 방해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실천?

– [피로사회](한병철)의 테마를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성과사회),?무엇이든 할 수 있다!?또 그래야만 나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사회적인 강요 속에서 자기 자신도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

-?또한?‘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들의 어리숙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

-?플라톤은 당시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철인정치’를 내세운다.?당연히 오늘날 보기에 귀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는 이런 플라톤의 논의에서?‘민주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이끌어 낸다.?그것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유형에 대한 비판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언급한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중에서)

“민주주의라는 상징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로운 힘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에 집중된다.?그런 유형의 핵심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말해 이기주의,?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31쪽)

-?바디우에 따르면,?민주주의적 주체는 젊은 시절에는?‘구속받지 말로 즐겨라’는 식으로?“자유로워지기를 상상하는 헤픈 탐욕”을 누리다가 늙어서는“예산을 따지고 안전을 추구하는 구두쇠”로 변모한다.(34쪽)?따라서 현재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안전만을 추구하는 주체를 양산한다면,?이런 식의 순환의 질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다.?따라서 지금처럼 상징화된?“‘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모든 권위를 중지시키면서 플라톤의 비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연습을 하고난 뒤에야 우리는 결국 그 단어를 본래 의미대로 복원할 수 있다.?민주주의란 인민들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 실존이다.?민주주의란 국가를 고사시키는 열린 과정,?인민에 내재적인 정치이다.”(41쪽)

-?아울러 플라톤의?[국가]편의 일부를 현대판으로 각색해서 이렇게 번역한다.

조은평 도봉 그림1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이런 정치적 현실에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영혼의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될 것.

-?이는?‘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즉?‘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그저 혼자 고민하며 시지프스처럼 외롭게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과?‘아름다운 삶’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길을 모색할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4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4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pservisi.net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6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

김성우(ⓔ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 글은 <프레시안>과 공동게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신이 존재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무신론을 택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시나리오)이나 규범이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실존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본질)를 써 가는 작가가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선포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정치적인 전체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진정한 스탈린주의 정치가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한 정화(숙청)와 집행(학살)을 수행한다. 그의 마음은 그 일을 하면서도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는 단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도착증 환자의 태도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462도착증의 대표적인 유형은 가학증인 사디즘과 피학증인 마조히즘이다. 도착증의 전형적인 태도는 자신을 ‘큰 타자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큰 타자는 주체에게 그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에게는 ‘국민의 뜻’, 기업가에게는 ‘소비자의 욕구’, 일신교도들에게는 ‘신의 뜻’,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의 사명’, 관료에게는 ‘조직의 명령’ 등이 그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대표적 사례인 사디스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도착증에 전형적인 부인(disavowal)에 해당한다.

지젝은 이러한 도착증의 범주를 가지고 정치적 전체주의는 물론 테러리즘에 빠져든 종교적 근본주의까지 해명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정적을 살해하거나 표적물을 죽일 때도 역시 ‘알라신의 뜻’에 호소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이완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특히 5월 29일에 기고한 제3차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다 ‘상천(上天, 유교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썼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매국도, 제국주의적 침략도 정당화하는 마법 지팡이이다.

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발언도 이러한 도착증적인 증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온누리 교회 강연록(국무총리실 제공)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종교적 근본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논리적인 합선(short-circuit)이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제멋대로 합선시켜 구사하는 것이다. 광신주의적 살인마는 표적물이 된 사람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신의 분노로 포장한다. 그는 교묘히 세속적인 협박 편지가 주는 공포와 최후의 심판 때 신의 분노를 마주할 때 일어나는 두려움을 섞는다. 문창극 후보자의 논리에도 이러한 합선이 존재한다. 학술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의 민족사와 신성한 섭리를 뒤섞어 민족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식민 지배, 더 나아가 분단과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단 한마디로 풀어낸다. 이런 사건 모두 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합선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광주 기독교연합회(NCC·CBS·YMCA·YWCA)는 “문 후보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비성경적이고 반신학적인 인사“라고 규정한다.

물론 또 다른 기독교 인사들은 문 후보자의 논리를 두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종윤 원로목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의 길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의 교회에서 강연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전광훈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4백년 애굽종살이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도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로 해석되는 것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긍정적 내지 부정적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며 “세상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에서 교회 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관점에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자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대로 기독교 신앙적 관점과 세상적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의 구분도 중요하다. 문 후보자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목사들의 해석은 세상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관점과 심지어 유대교적인 관점까지도 뒤섞어버린다. 이는 테러와 침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및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BBC 방송에 따르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처럼 “나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라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이들의 정신세계에서는 라캉의 말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테러, 학살, 침략을 이렇게 신의 계시, 신이 주신 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이슬람적인 관점이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인가? 가해(加害)를 신의 명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나와 같은 비신학자가 보아도 당연히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역사적 비극)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사와 유대교의 민족사를 마구 뒤섞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어디에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가이사(로마의 황제인 케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일본에게 주신 신의 뜻인 것인가? 이러한 해석이 앞선 말한 도착증 환자의 논리적 합선에 해당한다. 가해를 신의 뜻으로 본다면 이는 사디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하고 피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마조히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 문 후보자는 애국적인 투사인 안중근도 아닌, 김구도 아닌 매국노의 대표자인 윤치호의 글을 인용한 것인가? 더군다나 비판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감적인 자세로 인용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 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이완용ⓒWikimedia Commons

이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데 선교사가 와서 변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자기 폄하와 서구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 폄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며 유럽의 식민 사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폄하와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국노의 기본 논리이다. 그래서 친일은 필연적으로 친서구로, 종국적으로는 친미로 귀결된다.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친일과 친미적 사관이 기독교적인 사관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예수는 친(親)로마적인 매국노인가? 아니면 반(反)로마적인 민족 투사인가? 아니면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종교적 구원자인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세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기독교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도착증 환자라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선택할 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에 있다. 지젝에 의하면 부정(Verneinung)은 무의식의 저항이다.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정, 즉 억압(Verdr?gung), 부인(Verleugnung) 그리고 거부(Verwerfung)가 있다. 이러한 부정의 세 가지 심리 메커니즘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이라는 진단 범주들에 상응한다. 신경증적인 부정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전자를 빌린 후에 다시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세 가지 형태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난 결코 네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이런 발언이 전형적인 억압적인 부정이다. 또한 물신주의적인(도착증적인) 부인은 다음과 같다. “난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너에게 돌려주었잖아.” 마지막으로 정신병적인 거부(Verwerfung, foreclosure)의 사례는 상징 질서인 큰 타자를 배제하고 있어서 비(非)논리적으로 발언한다. “어쨌든 그것은 구멍이 있었어.”

이와 유사하게 문 후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변화를 살펴보자. 채널A 방송에 따르면 처음에 문창극 후보자는 출근길에 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반문했다. 청문회 준비단과 회의를 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연이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청문회 준비단은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문 후보자도 퇴근길에서 “(강력 대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문 후보자의 해석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두둔했다. “어쨌든 그것은 성경적이었어.” 이러한 태도는 처음에 인용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식이다.

부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이 혹시라도 도착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심지어 정신병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조은평(건국대)

 

 

3. ‘소비의 사회’와 현대인 :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소비사회’라는 규정에 대해>

– 소비사회의 문제는 오늘날 여러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회학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라고 보고 있다.

조은평 표4

– 일단 ‘소비사회’라는 규정은 ‘상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것을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 하지만 단순히 대량생산에 기초해서 대량소비가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소비개념과는 다른 소비개념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사물)의 소비란 ‘사용가치’의 소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는 어떤 행위이다. 그는 사물을 기호로 파악하고, 사회를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면서 소비 행위를 특정한 상품(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닌 차이에 대한 욕구로 규정한다.(‘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

<소비사회가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

1) 상품미의 무한 추구.
–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미’다. 상품은 이런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2) 개인의 욕망구조도 변화.
–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일과 생산 -> 놀이와 소비)
–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에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논리도 차이의 논리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 ‘소비사회’라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

1)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구멍이 뻥 뚫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얼이 빠져 버린 미국인들에게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냈던 첫 메시지. ->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to go back shopping!”
(cf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정부 관련 기사 “정부, 세월호 참사후 처음 ‘소비 둔화’ 우려 진단, 파이낸셜뉴스, 2014. 5. 6 / 현오석 부총리, “세월호 참사 후 서비스업 다소 부정적영향”, 아시아경제, 2014. 5. 6)

2) 아이 여성(child-women)의 출현 : 아동기에 대한 상업화!
–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놓은 구두나 핸드백을 신어보거나 걸쳐보면서 보내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더구나 당시 그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좀 더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당시 그 소녀의 나이가 10살!
– 더구나 한 영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10세 소녀들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화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또한 그 소녀들 중 26퍼센트는 ‘자신들이 별로 날씬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몸무게 때문에 고민’. 말하자면 점차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날씬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잡지 속에 인쇄된 우상(아이돌)들의 그 불가능한 이미지’와 비교한다.

3)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해지는 쇼핑과 쇼핑몰 문화?
– 어린 시절부터 갖고 노는 쇼핑카트!(뽀로로 쇼핑카트)

4)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전략.
– 백화점과 쇼핑몰 건물에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진열된 곳에 공통적으로 없는 그 무엇은 뭘까?
– 광고처럼 모든 쇼핑몰의 공간(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포함해서)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된 공간. 그처럼 마케팅 원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 들어선 소비자는 당연히 포획당할 수밖에 없다. (참조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부작 중 2부 ‘소비는 감정이다’)

조은평 사진2-1

 

4. ‘소비 사회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까?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의 약국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왜 탈출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자유로운 약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듯.

1) 우선 ‘왜 탈출해야 할까?’
– 사실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사회처럼 결국에서는 구매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는 ‘소비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지탱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해야 한다.
– 또한 ‘소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는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공동체) 좀 더 다른 형태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사회라는 동굴, 쇼핑몰이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 그냥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 과연 가능할까?
: 합리적 소비자로 생활하기?
: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저항해보기. 불매 운동(예. 광고 불매 운동, 녹색 소비자 연대 등등)
: 소비 하지 않기? 아마도 가장 두려운 현상일 것!! 예)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말!
자본 – 상품 – (불려진) 자본( M-C-M’ / C-W-C’)
– 말하자면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순환 운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아마도 대부분 회의적일 것.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길 듯.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사회’를 유지하고 만들어 낸 ‘자본의 흐름’을 변혁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점.
–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일단 ‘탈출을 가능하게 해줄 지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계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그대로 따라 쫓아가야만 생존할 수도 있고, 어쩌다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500만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59:56! EBS 다큐프라임)
–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그저 잘못된 현실 인식이나 단순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이라는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처럼 말이다.
– 오히려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티벳 승려들이 기도할 때 기구를 돌리는 것처럼,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고 확고히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스템이나 위계질서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또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소비 시스템(소비사회의 전략)을 따라 소비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소비사회’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다시 이런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들을 형성하려는(수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사진1>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사진 2>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사진3>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 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 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최종덕(한철연 회원)

단 하루, 어제 신문에 오른 사회면 뉴스만 대충 집어보련다

문창극 총독 지명자는 대학원 다니고 박사학위 다 할만 했으니까 한 거라고

송광용 신임 비서관은 논문 표절 아니라구 허구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손석희 아나운서를 빨갱이라고 하니

이 세상 빨갱이 천지가 되었고

전광훈 목사는 서울시민들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우질 않나,

하기야 그 목사만 그런 게 아니니까

박상은 국회의원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개그까지 하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언론은 모두 입을 다물라“고 대국민 협박을 하고

박유하라는 교수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한 책을 냈다니,

교수들은 신림동 좌판 나물 파는 우리 할머니에게 머리 조아리라

끔찍한 일베의 살인인증사진과 더불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직원들의 댓글달기를 몰랐다는 판결이 났다고 하는데,

글쎄 누가 믿을까

거짓말들,

어제 하루치 신문에만 뜬 거라고.

하루하루가 이런 뉴스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으니,

온갖 거짓이 횡행하더라.

기만이 땅에 가득차고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니

신도 혼미해졌는지 교회까지 자기 속임수에서 허우적거리는거군.

기만은 자기 이익만을 크게 하려니,

부끄럼 한 점 없다고 당당한 위선의 몸짓까지 흉내낸다

기만을 성공시키려니

첫째가 뭇 사람들이 내 속임수를 눈치 챌 수 없도록 속임수를 세게 가는 거야

둘째는 네가 혹시 내 속임수를 의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 속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잔머리도 늘어나는 거지.

기만꾼들은 남들이 내 기만에 마음을 놓고 속아 주도록 주도면밀함까지 있다구.

거기다 대통령이 받쳐준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에 허세 또한 당당해져

그보다 기만에 더 능한 자들이 여기저기,

자기 자신도 자기가 하는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기만들이 많거늘,

그런 기만을 자기기만이라 하더라.

남들에 마법을 피우기 전에 나 자신에게 기만의 주술을 거는 거야.

그리고 나서야 남을 더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이지.

기만자는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거야.

신문에서 날마다 보듯이 말이지.

인간중독이 아니라 자기중독이라서, 그건 약도 없어.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일단 왕권력을 바꾸고 봐야겠지.

거짓을 탐지하고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사기꾼들이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이 기꺼이 속아주면 기만자들은 놀랄 속도로 자기증식하니깐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믿음은 지식권력의 수단일 뿐임을 아는 거지.

교회나 절에 나가는 신도는 믿음은 강한데, 그런 믿음도 권력지식의 노예니깐

자기기만 병증이 샤머니즘이나 주술의 향을 타고 이 땅을 질식키려는데,

원래가 교회권력이나 독재정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양상인거지

다행히 우리 몸속에는 기만을 알아채는 생리적 능력이 있으니 그런 능력을 잘 발휘해야겠지

발휘하면 뭐하나, 눈 부릅뜨고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신문 좀 편하게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