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한겨레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조현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리듬 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음악에 관한 책일 것이라 생각해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은 분들이 계셨다면, 그런 걱정은 떨쳐 버려도 될 듯하다.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일상에 관한 책이며, 이론적 동기보다는 실천적인 관심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과 비판을 계승하고 보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책이며, 이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쓰인 책이다.

르페브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을 (…) 정초”(한국어판 55쪽)하려는 그의 원대한 꿈은 미완의 기획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이 책 곳곳에서 사회를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과 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각과 틀을 특징짓는 키워드가 바로 ‘리듬’이다.

 

리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분석

그럼 르페브르는 왜 리듬에 주목하는 것일까? 먼저, 리듬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 곧 “거대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된 프로세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극장”(202쪽)이기 때문에 르페브르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 부과되는 야간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 리듬을 깨뜨림으로써 일의 능률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리듬 분석은 일상생활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비판 작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또한 르페브르는 리듬 개념을 통해 불변하는 정적 존재가 가변적인 동적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존재론적 발상을 혁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56쪽 참조). “세계 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83쪽)으며, 결국 “느리거나 빠르고 매우 다양한 리듬들만이 있을 뿐”(앞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심장박동을 포함하는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인간이 먼저 있고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르페브르가 리듬 개념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각각의 리듬을 분리함으로써 무엇이 ‘자연’에서 왔고, 무엇이 후천적인 것, 관례적인 것,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86쪽)하고, 이를 통해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착각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천적이고 관례적인 리듬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리듬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르페브르에게 리듬은 일상생활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을 보완하고, 존재에 대한 관점을 혁신시키며,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분석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의 모순

르페브르는 거시적인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되는 절차간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이라는 개념 쌍을 도입한다. 순환적인 반복이란 “우주적·세계적·자연적인 것에서 오”(64쪽)는 것으로 “낮, 밤, 계절, 바다의 파도와 조수, 달 모양의 변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위와 같은 쪽). 반면, 선형적인 반복은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위와 같은 곳)으로 “주어진 틀에 따라 행위와 동작이 단조롭게 반복”(위와 같은 곳)되는 것을 말한다. 시계의 반복적인 똑딱거림이라는 선형적 반복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자연적 반복을 측정가능하게 할 때처럼, 양자는 때로는 통일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간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이 철저히 노동시간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형적인 반복과 순환적인 반복은 갈등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게 된다. 관행으로 굳어진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근무 형태의 반복은 삶의 자연적 리듬을 깨뜨리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은 이처럼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의 리듬의 족쇄를 풀고, 우리의 삶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우선성과 고통을 통한 리듬의 지각의 필요성

이렇게 볼 때,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리듬들과 사회적이고 선형적인 리듬들의 형태들을 분류하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리듬 분석>은 미완의 저작이기에 이런 작업의 단초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웅장한 기획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제이기에, 르페브르의 기획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주제와 함께 르페브르 철학의 실천적 의의를 논하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까 한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 자신을 이루는 리듬들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210쪽)고 주장한다. 이는 리듬 분석이 제 3자에 대한 관조나 관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임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 분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간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고통을 체험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고통이 리듬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인식 근거라면, 리듬은 고통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근거다.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깨져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리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균형이 깨지는 것을 지각하기 전이나 후 모두,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듬 분석>에서 고통의 문제는 두 가지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먼저 신체의 리듬들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균형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삶의 지상명령으로 설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개인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이런 개인적 차원의 신체 리듬들 간의 균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의 구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사회윤리적인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르페브르의 주장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손상이나 파괴를 가져오는 고통이나 죽음은 악이며,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

<리듬 분석>의 서론에서 르페브르가 공언하긴 했지만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은 실천적 방안 역시도 이런 스피노자적인 맥락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리듬 분석의 실천적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데, 예술적 리듬을 통한 카타르시스(192쪽)와 조화리듬성의 회복(196쪽)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리듬 분석의 실천적 효과가 좀 더 가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리듬들 간의 균형을 위한 개인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이 해명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페브르의 사유는 스피노자의 발상과 합류한다.

물론,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는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한 자연적이고 거시적인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미시적이고 인위적인 리듬의 반복에 기인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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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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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그런데 그리스적 사고가 완전한 독립에 이르렀음을 선언해야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토론술(Dialektik)의 시기로 불리어지는 철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들은 모두 하나의 지속적인 발전과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학의 시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과 함께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화의 시대와 결별하였다. 그리스인들 모두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만큼 일반적 추리력도 발전하여 그로부터 윤리학과 토론술도 나타났다. 철학의 가능성은 이렇듯 자연학에서 그 발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민족의 경우 그들의 종교에 이미 일정한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마침내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와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들의 우주창조설화를 깨고 사물의 근원(archai)에로 육박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탈레스(기원전 640-550년)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물질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그 중앙에 대지가 구(球)로서 떠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여겼고, 별들이 대지 위의 천정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안에 있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밀레토스 학파에 이어서 이 영역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현저히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곧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저작은 고대에서조차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편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실로 여러 가지 해석과 생각들을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기 위해 영원한 새로움의 상징으로서 한 순간의 휴식조차 없는 불을 필요로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유동과 영원한 개조의 한 가운데 있으며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 귀결 안에서 그는 주기적인 반복의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영겁의 불을 상정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들 중에는 그가 최초로 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에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호메로스와 그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와 철학자가 폴리스에 대해 행한 것으로서는 가장 최초의 격렬한 이반을 발견한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크고 넓어 개개의 폴리스 차원의 문제들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벌써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제논 등 엘레아학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이오니아학파에 대립한다. 그들은 범신론의 길을 걸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민족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를 그 순수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탐구와 다함없는 정진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그 자신의 필요로부터 학설로 발전하였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충분한 부 또는 간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시대에도 이미 철학자들 서로에 대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3-445)

 

그런데 어느 물질적인 원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다(多)의 통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같이, 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간에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체계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된 창조물이었다. 신관에 의한 강제나 유인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자연학적 발견이나 예측은 본질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지식은 종교적 의식이나 신화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학설에서 보이는 증오(neikos)와 사랑(philia)과 같은 추상적 힘은 여전히 신화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물론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peri physe?s)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가 식민지로서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지기 마련인 데다가 본토의 다른 땅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모든 종교적 편견으로부터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민간 종교에의 예속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은 운동의 원인을 그 원소와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그 ‘정신(nous)’을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을 지라도 세계에 질서와 운동을 부여하는 원리로 삼을 정도로 위대한 혁신을 이룩했다. 최대한 기존의 아무런 전제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ros)의 개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이 그 다양한 추측을 행하는 데에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서서히 진화해온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07?)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학파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세 명의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에 의한 지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는 주체도 객체도 끊임없이 흐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를 어떠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파멸 시키려할 경우, 통상 신에 대한 불경을 빌미로 삼곤 했는데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 제기한 소송은 그러한 중상들의 첫 번째 사례이다. 그가 호메로스의 신화를 도덕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우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양을 한 개의 돌 또는 뜨거운 금속 덩어리로, 달을 일종의 지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 ; 헬레스폰토스 동쪽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자신의 책을 통해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고(기원전 411년) 그가 쓴 책들 모두가 그의 집과 뤼케이온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회수되어 몽땅 불태워졌다. 디아고라스(Diagoras) 역시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의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더 심한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망을 친 그의 목에 1달란톤의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언젠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라고 말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도 결국 도망을 가서 생명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신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희극에서는 제멋대로 다루어도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철학에서만은 유독 보수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432년에 디오페이테스(Diopeithes)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자연현상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모두를 고소해야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래, 자연에 대한 학적 탐구는 아테네에서 비밀리에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는 더 이상 철학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크세노파네스는 다신교적인, 또 의인적인 민간 종교에 대항하여 그 특유의 새로운 신의 개념인 하나이자 전체(hen kai pan)를 다음과 같은 말로 변호하고 있다. “사자로 하여금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면, 신들도 사자를 닮은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민간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건을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하여 인생의 목표를 공포나 미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euthymia, euest?)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를 시조로 하는 원자론 학파는 회의론자들과 에피쿠로스가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가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묘사하고 있듯이 그러한 움직임을 비웃는 일이 아테네에 만연해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고자(sykophantes)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전란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 소송을 당한다 해도 예전만큼 그렇게 무서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가능한 한 회피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들의 세계 지배는 부정한다는 교묘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 철학은 민간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나가면서(대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다고 무신론은 아닌 일신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순환의 끝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종교가 될 운명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향한 공격,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적 생존과 교양의 위대한 전제를 향한 공격은 전통적 신들을 향한 공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적대 행위는 벌써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보다 큰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엄격한 신앙심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윤리학은 종교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고, 게다가 종래의 신화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지하세계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도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처럼 시인들의 경시대회에서 추방당하고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또 신화를 거의 범신론적 개념상의 이름들로 극복하려한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공격하는 엘레게이아(Elegeia)와 이암보스(Iambos)율(풍자에 적합한 운율)의 시를 써서 신들에 관한 그들의 언급을 비난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행한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소크라테스가 조각을 단념한 것처럼 그 자신 비극 문학을 단념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색하는 사람들의 신화와의 결별은 이미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리학과 토론술 또한 순전히 철학을 통해서 자연학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현상으로서 소피스트 철학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 철학은 사회 현상으로서 나중에 고찰하게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와 지식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소피스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기로 한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들로서는 아주 만만한 경쟁 상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말만 들으면 소피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도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져온 선입견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소피스트들은 모두 외지로부터 아테네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레온티노이, 힙피아스(Hippias)는 앨리스, 프로디코스(Prodikos)는 케오스 출신이다.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 축제가 있을 때면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존경도 크게 받아 고액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이 돈까지 받았는데도 대중들이 그들에게 갈채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만으로도 수긍이 갈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말 도움이 되는 처방전이라면 공짜로 그것을 받는 것보다 사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을 더 좋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라든지 투퀴디데스(Thukydides)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들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로부터 생긴 필연적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된 것이 단지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견해와 약정에 의해서(doks? kai nom?)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모든 일에는 찬반양론(duo logous)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또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단순한 회의론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부정론을 내세워 아테네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갖 이상한 행위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들을 그토록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유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정한 방식을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연설기술(Redekunst)은 모든 인식이 주관적이라고 하는 학설과 일체의 것이 설득력에 달렸다는 학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고취되고 크게 육성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인식은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 전반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엘레아학파로부터 차용해온 허위 추론방법을 그들의 토론술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정신적인 체력훈련(Gymnastik)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의 교육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사람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요구에는 부응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들은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중들은 그들에 대해 대단한 사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힙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석조 인장 등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온갖 종류의 치장물을 몸에 붙이고 나타나 스스로 일종의 백과사전적 만능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많은 실제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서적 또한 얼마 되지 않는 지적 풍토에서 대단한 지식욕에 불타고 있었던 시대적 요구에 영합했던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굳이 만일을 빌어 이야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이룬 것 같은 효과를 그 시대에 미쳤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idea tou kosmou)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문법에도 정통해 있었다. 힙피아스는 기억술과 관련한 학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논의영역에는 역사와 고고학, 폴리스의 종류에 대한 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의 예비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정치학, 식민지학, 법률학, 가정 및 국가 행정에 관한 이론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das proballete)고 말한 고르기아스의 그 유명한 재촉이 논리학상의 조작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친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 말은 소피스트들의 지식이 그 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함으로써 그리스 사회에서 하나의 은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3. 연설기술 -다음에 계속)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보고듣고생각하기]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나태영(한철연 회원)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은 그 놈이 그 놈이다. 박정희는 18년간 독재로 이 나라를 숨 쉬고 살기 힘든 나라로 만들었다.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부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했는데 명이 참 길다. 1980년 12월 31일자로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종필이 1963년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박근혜 아버지인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를 1979년 10월 26일 총살시킨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자신이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고 이는 유신독재의 몰락을 불렀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몰락이 박근혜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지 주목된다.’(문경환 글, 128쪽)

‘국정원’ 세 글자는 ‘피눈물’ 세 글자와 동의어이다. 국정원 때문에 피눈물 흘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저는 공소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검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양능력 없는 엄마를 둔 조카를 돌보는 일조차 국가정보를 빼내기 위한 내란음모의 증거라며 억지로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자신들의 대선부정을 덮기 위해 조작해낸 이번 사건에는 상식도 기본도 없이 광기만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이아빠가 갇혀 있는 하루하루가 억울하고 일분일초가 아깝습니다. 아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이 아빠를 보는 것도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

“도대체 이런 슬프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생긴 걸까요.” 믿었던 30년 지기 친구가 국정원에서 돈을 받고 자기 양심을 판 것을 알았을 때도 분노보다는 처절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먼저 가졌던 제 남편입니다.’(임이화 글, 7쪽)

국정원이 엄한 사람 간첩 만들어 죽였다. 엄한 사람 국가보안법이란 죄로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갇힐 인간은 다름 아닌 국정원장 남재준이다.

 

김갑수 외 공저,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도서출판615, 2013.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조직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간첩사건’으로 발표한 이 사건으로 ‘수괴’로 지목된 권재혁은 이듬해인 1969년 사형됐고, 이강복은 암으로 옥중사망, 이형락은 만기출소 후 자살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진실화해위)는’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사건’과 함께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을 ‘간첩사건’으로 발표했지만, 별도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권재혁 등 13명을 연행해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를 통해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권재혁 등 13명을 1968년 7월 30일 경부터 강제 연행해 3일에서 53일간 불법 구금하고,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앙정보부가 지인들 간의 친목모임을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명칭과 강령을 가진 반국가단체로 확대 과장해 조작한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검사작성 피의자 신문조서나 자술서 등은 임의성이 의심이 있는 억압적인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어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 내지 내란예비음모 등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도 없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조치’를 취할 것과 재심을 권고했다.’(통일뉴스, 박현범, 2009.10.13.)

21세기에도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자 여러분은 <구속노동자후원회>라는 단체 누리집 들어가 보기 바란다.

 

고등학교 교육만 제대로 받아도 국정원이 저지른 잘못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하고서도, 박사학위까지 따고서도, 언론사 기자 일 여러 해 하고서도, 언론사 이끌면서도 국정원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 정의당 국회의원들, 손호철, 이대근, 오연호, 심상정, 진중권, 주대환 등등이 그들이다.

국정원이 프락치를 시켜서 진보당 모임 현장을 녹음했다. 녹음 내용을 조작하고, 짜깁기해서 녹취록을 퍼뜨렸다. 한국일보가 ‘짜깁기 녹취록’을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정원이 평소에 왜곡, 조작하는 데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국정원이 퍼뜨린 ‘짜깁기 녹취록’을 먼저 의심해야 했다. 먼저 1차 녹음 파일을 정확히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했다. 왜곡 없이 글로 옮겨진 내용을 바탕삼아 국정원이든, 진보당이든, 이석기를 비판해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국정원이 퍼뜨린 ‘짜깁기 녹취록’을 바탕삼아 이석기와 진보당을 비난했다. 이 땅에서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진보적이고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현상에 압도되어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매카시즘의 노예들과 별 차이가 없다.’(김대규 글, 뒤표지)

 

손호철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 녹취록 등은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와 상관없이 테러계획 등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손호철한테 말한다. 테러계획은 없었다. 정확히 파악하고 글을 써라.

‘문제는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이 국가보안법의 존재 등으로 인해 종북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민주당의 묻지마식 반MB야권연대와 비례대표제가 더해져 이들의 정체성에 대한 엄밀한 대중의 검증이 없이 문제의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한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 종북주의자들이 떳떳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도록 만들어서 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사시켜야 한다. 또 민주당도 낡은 묻지마식 야권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2013-09-15[손호철의 정치시평]이석기를 넘어서)

진보당 국회의원들 괜찮은 사람들이다. 국정원에 놀아난 민주당, 정의당 국회의원들이 문제 많은 인물들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합쳐야 한다. 민정당으로 합쳐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되면 진보당 사람들이 더 힘을 얻는다. 진보당 사람들 죽지 않는다.

‘정의당 그리고 노동당으로 이름이 바뀐 진보신당 등 주사파에 비판적인 진보세력들은 진보의 존망이 걸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의 올바른 선택이다.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는 신랄하게 비판하되 그것이 ‘종북매카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올바른 진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대중의 몫이다.’(2013-09-15[손호철의 정치시평]이석기를 넘어서)

정의당은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을 옹호하는 국민참여당 계열이 함께한 정당이다. 손호철한테 부탁한다. 정의당한테 바라지 말라. 상처 입는다. 노동당(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게 ‘종북’이란 주홍글씨 새긴 것 사과하라. 한나라당이 ‘친북’이란 두 글자 쓸 때 당신들은 ‘종북’이란 두 글자 썼다. 손호철 같은 진보지식인 척 하는 지식기술자들이 정신 차려야 이 땅 진보정당이 산다.

손호철처럼 진보당을 비난하는 사람들한테 손석춘이 한 말을 알려준다.

“언론이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와 비슷한 사건으로 대서특필해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방법만 보더라도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 얼마든지 단순 비교가 가능하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선거라며 이승만까지 덧붙여 몰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여론몰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비례대표 순위는 어떻게 결정하고 또 했는가. 더러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통합진보당과 경선 규칙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과연 그러한가. 좋다. 두 당은 통합진보당과 달리 당 지도부가 당 안팎의 인사들로 임명한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 심사위에서 결정한 순위대로 모든 게 이뤄졌을까?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영향력으로 순위가 조정된 사람은 없는가? 바로 그렇기에 조중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의 죽음을 들먹이는 사람들과 이 책이 서 있는 자리는 확연히 다르다. 진보정치 세력이 직면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또한 수구-보수세력과 민주세력은 달라야 한다.”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21, 22쪽)

새누리당, 민주당 인간들아! 제발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당신들 당내 비례대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뽑지 말고 진보당처럼 투표로 뽑아라. 진보당보다 더 멋지게 비례대표 뽑아라. 그런 다음에 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뽑는 길 비난하라.

 

‘이석기 사태’가 아니라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태안 기름유출사건’이 아니라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건’이 맞다. 많은 언론들이 ‘태안 기름유출사건’이라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도 이 표현을 쓴다. 옳지 않다. 태안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삼성은 대통령 보다 힘이 세다. 삼성이 힘 있는 사람들한테 떡값을 돌렸다. 삼성이 언론사에 많은 광고를 준다. 언론사는 삼성한테서 광고 받지 못하면 밥벌이가 힘들어진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그래도 진보언론이라면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건’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

똑같이 ‘이석기 사태’라는 표현을 쓰면 문제 일으킨 국정원은 빠진다. 죄 지은 것 없는 이석기만 고생한다. 이석기가 문제 일으켰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 조중동, 종편, 지상파 방송한테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은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란 표현을 써 주기 바란다. 진정 당신들이 진보언론이라면 그리해주기 바란다.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없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고 누구든지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없애야 한다고 뜻을 모읍니다.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해도 없애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갖습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편안하게 살자, 서로 우애하면서 살자, 전쟁은 안 돼, 이런 빛 좋은 말로 때우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실천과 연관 지어서 이건 없는데 우리가 빚어내야겠어, 길러내야겠어, 만들자고 뜻을 모으고 힘을 길러내는 데에는 창조적 지성의 결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건설은 우리가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머리를 쓰는 일도 필요하지만 건설은 손과 발, 몸을 놀려서 합니다.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야 건설 사업에 동원이 되죠.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죠?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십여 년 이상을 마오가 생존해 있었고, ‘사인방’이 전면에 나섰을 때는 세계가 온통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를 읽고 다니듯이 그 당시에는 마오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혁명지도자였습니다. 그 후로 사인방이 몰락하고, 급속도로 경제력이 떨어지게 되고, 세계열강의 대열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또 문화혁명 기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비판의식과 창조의식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치르게 된 대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등소평 체제가 등장해서 급속도로 시장경제 쪽으로 경제정책을 바꿔 오늘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1966년 천안문 성루에서 신문을 읽는 마오쩌둥 – 출처: http://blog.hani.co.kr/blog_lib/contents_view.html?BLOG_ID=spider&log_no=26193

중국에서 부정부패는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하면 나라가 거덜 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괴물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까닭은 문화혁명 시절에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중국 공산당의 중간 간부가 되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희망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화혁명 때,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지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제로 끌려가서 농촌에서 몇 년, 공장에서 몇 년씩 몸으로 때운 신체적 기억이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모두 공산당 당원들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가 널리 확산되지 않고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체제가 꾸려진 것입니다. 몸으로 겪고 때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로 믿을 게 못 됩니다.

체제와 상황이 사람을 규정하는 힘이 너무 커서, 책상머리에서는 혁명가이기도하고, 영웅이기도 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상황이나 체제의 압력에 짓눌리게 될 때 어떻게 망가지고 변하게 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나 토론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생산관계가 건강하게 바뀜에 따라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증가한 생산력은 무한히 다양화되고, 무한히 커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쪼는 질서’(pecking order)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페킹 오더(peking order)’는 먹이를 적게 주면 제일 힘 센 닭이 다른 닭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 쪼아서 쫒아버리고 혼자만 먹이를 독차지해서 마음껏 먹다가 배가 차면 물러나고, 그 다음 힘이 센 놈이 쪼고, 배가 차고, 물러나고, 힘없는 놈은 나중에 비리비리 말라 죽는 힘센 놈 중심의 위계질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쪼는 질서’라고 합니다. 마르크스 레닌은 생산관계가 건강해져서 생산력이 무한히 발전하게 되면 쪼는 질서가 없어지고, 자연히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신화는 믿지 않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벌써 200년 전부터 그리고 덩달아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온 세상이 도시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우선 지구라는 생태 환경 자체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길들여져 있는 도시인들이 물질 에너지를 펑펑 써서, 과거 삶의 자산, 미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생명 자산까지 짧은 시간에 전부 탕진해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물려줄 것이라곤 전쟁과 굶주림과 증오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 생명자원이나, 물질자원이나 모두 한정되어 있는데, 이걸 펑펑 써버리면서 온 인류가 모두 무한히 증가하는 생산력에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생명에너지, 생체 에너지를 써서 사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의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어 이제 물질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질 에너지는 확산에너지로, 폭발시켜서 얻는 에너지인데, 이 폭발 과정에서 80%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그 낭비된 에너지는 모두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오염시키는 산업쓰레기로 바뀝니다.

생체에너지는 응집에너지입니다. 여러분들 ‘확산’(divergent)과 ‘응집’(convergent)이란 말 알고 있죠? 응집 에너지가 사용되는 데는 낭비요소가 최소화되고, 산업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순조롭게 순환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는데, 현대 도시사회는 응집 에너지, 곧 생체에너지만 써서는 살길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생체에너지가 응집되어 있는 정상 상태의 유기물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만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됩니다. 그런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도시내부에는 없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철학자의 서재]

파울로 코엘료의<11분> [철학자의 서재]

 

이한오(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성공회 신부)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 소설 <11분>(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과 표지 뒷면에 그려있는 매혹적인 그림 때문이었다. 남녀가 성교를 나누는 평균시간을 제목으로 단 것도 도발적이고, 아가씨의 누드도 단순히 에로틱한 것을 넘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했지만,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요인은 소설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었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코엘료는 “옛날 옛적에”와 “창녀”를 대조했는데, “옛날 옛적에”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이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이 명백한 모순을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 발은 동화에 한 발은 나락에 살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자며 그 첫 문장의 모순을 설명한다. 동화와 나락이라! 첫 페이지의 다른 문장도 범상치 않았다.

“모든 창녀가 그렇듯 마리아도 동정녀로 태어났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 <11분>(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우리는 성은 넘쳐도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산다. 섹스산업은 밤낮으로 돌아가고 단지 11분의 섹스를 위해 돈을 들여 약까지 먹지만 정작 사랑은 없는 시대다. 거짓과 냉소가 난무하는 관계에 사랑은 없는 법이다. 소설은 브라질 북부의 작은 지방에서 태어난 소녀 마리아의 학창시절과 짧은 직장생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1년 동안의 창녀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실제 인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소설이 끝나는 마리아의 나이는 23살이다. 겨우 스무 두세 살짜리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설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스토리텔링과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마리아의 일기가 두 축을 이룬다. 마리아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의 성장기는 “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니요”라고 말했던 것의 연속이었다. 10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등굣길에 연필을 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다 주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것을 늘 주저했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너무 쉽게 허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입술을 열지 못했고, 사흘이 지난 후 마리아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게 된다. 마리아의 성장기는 늘 이런 식이다.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는-.

 

소녀 마리아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섹스를 매개로 한 마리아의 성장사를 중심으로 보았다. 소녀 마리아, 여행을 떠나는 마리아, 창녀가 된 마리아,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과정을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한두 가지를 더 발견했다. 그것 역시 그림처럼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에 나오는 다음의 기도문이다.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자주 드리는 기도문의 일부인데, 성모 마리아를 통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융성하던 시대에 지어진 기도이다. 그래서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오니 들어주소서!’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기도해 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래 ‘렛 잇 비'(Let It Be)에 나오는 마리아도 이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이 소설 <11분>에, 그것도 창녀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앞쪽 간지에 들어왔을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움직이고,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던가.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꿈 많고 순수한 브라질 소녀 마리아는 창녀로 둔갑한다.

 

파울로 코엘료

코엘료는 이런 배치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저 기도문 이외에 소설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세 가지 글과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첫째는 머리말 성격의 글, 둘째는 기원전 3~4세기경 나그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로 시작하여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로 끝나는), 세 번째는 마리아가 나중에 창녀가 되어 지내는 제네바의 지도가 있고, 끝으로 신약성서의 루가복음의 일부도 옮겨놓았다. 이 자료들을 거기 그 자리에 놓았는지 별도의 설명은 없다.

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까지는 예수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죄지은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의 발을 닦아주는 이야기이다. 이 성서 속 이야기를 툭 제시해놓고 이후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풀어 가는데, (성서를 가까이 하며 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 전체가 성서 본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도 이야기이고, 소설도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실(팩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하고자 한다. 그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빚어지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가서 한 번 더 말하기로 하겠다.

나는 춘천에 산다. 내가 만난 춘천 학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울로 가려한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춘천이 너무 답답하고 일자리도 없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브라질 북부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마리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또 마리아에게 이제까지의 남자들은 늘 고통스런 기억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녀는 사랑은 항상 고통만 줄 뿐이라 믿었고 바다를 건너 더 넓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부모님께 집도 사드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 브라질의 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마리아는 여행지에서 스위스인 프로듀서 로제를 만난다. 그가 연예인으로 성공시켜 주겠다는 제안에 마리아는 ‘예스’라고 응답한다. 그녀는 1주일 만에 모든 것을 결정한 뒤 그를 따라 제네바로 떠난다.

 

돈과 모험을 찾아 나선 여행

꿈에 부풀어 스위스로 도착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1주일에 500달러를 준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값을 제해야 했다. 그녀가 할 일은 삼바댄서였다. 손님과 대화를 하면 안 되고, 사랑에 빠져 일을 그만 두면 해고당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 사랑을 피하는 것은 몰라도, 막상 타의적으로 ‘사랑금지’를 당하고 나니 그녀의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3주 만에 아랍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보기 좋게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서게 될 뻔하다가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고, 그 남자는 사라지고, 다른 일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일생일대 최대의 관문에 서게 된다. 연예인 프로듀서인 줄 알고 만난 아랍인이 호텔로 옮겨 포도주 한잔을 더 하면, 1000프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매춘을 제안 받은 것이다.

1000프랑이면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130만 원 정도 되는, 브라질에서 석 달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그 호텔에서 그 포도주를 마시기로 한다. 막상 몸을 팔고 보니,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닌가? 그녀는 본격적으로 창녀가 되기로 작정하고, 제네바의 텍사스촌 베른가를 찾아간다. 그렇게 마리아는 창녀가 되었고, 직업적 창녀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난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육체’라 불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진 영혼이다. 요 며칠 동안 나는 그 영혼을 아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비판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날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103쪽)

창녀도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이다. 첫째 밤 혹은 둘째 밤의 고비를 넘기면, 그것 역시 고된 일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다른 것과 똑같은 직업이었다. 창녀들도 직업적인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했고, 시간표를 준수했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손님이 너무 많으면 짜증을 부렸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또 “창녀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다.”(110쪽) 나는 작가가 ‘창녀들도’라고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창녀들은’이라는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했다. 그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일기를 붙들고 씨름했다”(111쪽)고 적었는데, 그럼으로써 몸을 파는 창녀가 잃지 않으려는 영혼이 독자의 그것과 다를 수 있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11분을 축으로 돌아가는 세상

작가는 머리말에서 “세상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책도 있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책도 있다”며, 이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코엘료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현실 중에 하나는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함께 제네바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수십 수백 명의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고, 자신을 위해 값비싼 옷을, 그 여자들을 위해서는 더 비싼 옷을 사고,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창녀를 사고, 피부 관리, 몸매관리, 체조, 포르노 등 거대한 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117쪽)

마리아가 제네바에서 만난 남자들은 자신이 세상과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고, 남자들의 외로움을 접하면서 자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섹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콘돔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고, 관계 후 즉시 샤워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깐만요”(128쪽)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나가는 마리아를 어떤 화가가 부른 외마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리아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소리였다.
“당신에게 빛이 있어요.”

“스케치라도 하게 해줘요.”(129쪽)

이 말은 지금까지 자주 듣던 “가슴이 정말 탱탱하군”, “허벅지가 정말 매끈해”, “아파트 한 채를 얻어줄게”하던 그런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모델 일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직업이 창녀인데 그래도 빛이 계속 나는지 따지듯 묻지만, 화가는 중요한 건 창녀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여자와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 화가는 그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겐 빛이 있어요.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것들의 이름으로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가진 의지의 빛이 눈, 그 빛은 당신의 눈을 통해 드러나요”(142쪽)

화가는 그녀를 육체적 미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으로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스에서 필리아로의 상승이랄까. 마리아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시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 남자와 결국 ‘산티아고의 길’을 따라 호수로 흘러드는 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144쪽)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 성인이 걸었던 길로, 지금도 순례의 길로 유명하다. 나는 그들이 첫 만남에서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것이 일종의 회개로 보인다. 성서에서 ‘회개’ 혹은 ‘회심’으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그 뜻은 ‘방향을 돌리다’는 뜻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길의 방향을 타락과 환락의 ’11분’이 지배하는 세상의 베른가로 향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길을 암시하는 성인의 순례길로 그들은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동안, 마리아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첫날 그들이 나눈 대화를 보면 그 길의 의미가 어떤 것일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 그러지 말아요. 난 곧 브라질로 돌아갈 거예요.
– 손님으로 당신을 찾아가겠소.
– 나에겐 굴욕일 거예요.
– 당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찾아가겠소.(149쪽)

물론 섹스에 권태를 느낀 화가가 다시 쾌감을 맛보고 싶은 뜻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기독교(신 구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한다. 회개란 시공간에 묶인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시공간을 창조한 절대자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자, 삶의 실천방식을 자기중심에서 점점 확대하여 이웃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생각을 조용히 따르고자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화가는 마리아에게 간청한 ‘구원’은 마리아를 직업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떤 빛을 가진 인격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날의 마리아의 일기는 자신에게 구원을 간청하는 남자로부터 신의 목소리로 여긴다.

나는 몇 시간 전, 한 카페에 들어갔고,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곳에 던진 것과 같았다. 나는 나에게 다른 종류의 관심을 보여준 첫 번째 사람에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행복한 하루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151쪽)

그들은 이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운명적인 만남에 이른다.

 

구원의 빛과 영원한 사랑

마리아는 그 화가가 자신이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자긍심과 ‘빛’을 찾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사랑이 체위에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체위의 변화는 춤의 스텝처럼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사랑은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성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은 놀이와 ‘연극’을 통해 그들의 시곗바늘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단순한 만남 이상이라는 것을, 생식기의 ‘포옹’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화가 랄프와의 새로운 만남 와중에도 사디즘에 빠진 영국 신사를 만난다. 가학적인 고통을 주고 받는 그와의 만남도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디즘이 추구하는 고통과 노예적 굴종을 통한 정화 그리고 거기서 오는 성적 쾌감은 또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허무함을 알게 된다.

화가 랄프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과 만난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화적 섹스를 시도하며 새로운 삶의 활기와 의미를 찾아가는데, 결국 그들은 생식기의 ‘포옹’을 통해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영원한 오르가슴을 맛보게 된다. 그녀의 뜨거운 고백은 이러하다.

“나는 그와 합류했다. 그것은 11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337쪽)

 

루가복음 7장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소설 <11분>에서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옮겨놓은 루가복음의 소제목은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이다. 예수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고 줄여 옮겨보면 이런 이야기이다.

예수가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살던 행실이 나쁜 여자가 그 소식을 듣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랬더니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가 시몬에게 묻기를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하자, 예수는 옳은 생각이라면서, 계속 말하기를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 요약, 공동번역 대본)

예수가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유대사회는 먼지가 많은 땅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발을 씻을 물을 대접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주인이 발을 닦아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인은 물을 내놓지도 않았다. 바리사이인은 스스로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종교적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아마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종교의 본질인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눈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비해 행실이 나쁜 처녀(아마 창녀일 것이다)는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셈이다. 보기에 따라 에로틱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여기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움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그녀에게 선포한다.

“네 죄는 용서받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장 30절)

화가도, 마리아도, 그녀의 배위에 올라와 ’11분’ 남짓 애를 썼던 수많은 남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한마디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1분>은 일종의 종교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보편적인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결국 사랑으로 구원하고, 사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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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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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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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 이런 사회의 변화 때문에 정말 잘 사는 삶의 의미를 잊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던 원형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위세에 눌려 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은 어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현대라는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경오염, 문명오염, 정치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오염이 이미 퍼져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쓸려간 땅에도 그 다음 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죽어 가는 삶에 풀먹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고”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그러면서도 더불어 “함께 하는” 자연(自然)을 생각하고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삶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염된 틀에 너무 쉽게 면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억지로” 그리고 “남에 기대는” 그리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거나, 산업문명을 거부하여 원시생태로 돌아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작은 희망이고 구체적인 실현가능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억지로” 그리고 “남이 시키고 남에 기대는” 모순된 삶의 벽을 하나 하나씩 깨트리고, 그래서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같이 걷고 함께 마련하며 어울어 숨을 쉬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의 공간은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고 하는 문화공간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의 흐름대로 저절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삶, 그리고 우리의 자연과 함께 또한 남과 함께 두고두고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의 지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적게 쓰면 된다. 그리고 둘째로 이왕 썼으면 그 쓴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한 개인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공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접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을 말하기 전에?자연을 죽어 있는 물질로만 보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하나로서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모여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철학의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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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소외와 소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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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의 양상은 조심해서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서나 길거리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뉴스 감으로 되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인의 개성을 찾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매체에서 말하는 개성은 편협한 개인주의와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의 농락에 빠진 개성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이제 자기만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공격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가 지니는 관계의 끈을 모조리 끊어 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끈이 없어진 나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볼 때 쓰레기를 대충 버리고 마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자아상실 혹은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의 성곽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투영하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그물망이란 상업주의나 개인주의의 맹목적인 희생물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양식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 http://laborhealth.or.kr/28730

물론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서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합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적인 나를 찾기 위하여 먼저 할 일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도 포함합니다. 시간적으로 먼 남을 같이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환경을 생각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역사적 타인은 나의 자손과 지구 저편 사람들의 자손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멀리 있는 남까지도 생각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나도 비로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대를 보통 정보사회라고 말합니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과학의 산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교통과 통신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습니.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불필요한 소비만을 낳게 하는 거대한 상업주의를 거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만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세계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보통 신화적 자연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우리의 자연을 전부 그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형성되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팽배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오만함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자연을 갖고 자연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근대과학을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주의 전략에 빠져 이기적 개인주의를 마치 개성의 표현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주체성인 양,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의 흔적이 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정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위기와 더불어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해 가고 있다는 징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현재의 환경위기를 대처하는 일은 사실 눈감고 아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인간의 소외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성을 팽개치고 관계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끈을 쓸데없이 꼬거나 끊어버리고, 개인들의 경쟁과 탐욕으로 모인 어설픈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럴 뿐인데 뭘 야단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합니다.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인 것입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의식 오염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어떻게 헤쳐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 개량주의도 그 해결의 작은 방도일 수 있지만 환경위기가 인간위기의 한 단편임을 깨닫기에는 모자랍니다. 결국 궁극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문제, 사회민주화의 문제, 경제 정의의 문제 등을 올바르게 보고 그에 따른 실천의 생활관습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소비의 문제를 따져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왜 소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소비는 문제일 수도 없고 문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소비는 더 나은 문화적 창조를 위한 것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이러한 연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철학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산림을 무차별하게 깎아 먹는 골프장과 한강변이나 신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 축사오염, 염색공장의 폐기물, 과대포장, 일회용품 사용을 반대하는 실천적 운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시설물이나 제품이 나와야 하는 모순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성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소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피적 현상에 얽매어 있다면 결국 개발 최상주의라는 환상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를 다시 청소년 문화로 돌려봅시다. 소위 신세대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이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마취제 기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과소비 행태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소비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소비성향의 사회적 풍조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소비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고정된 정관사가 아니고 우리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부정관사의 모습입니다.?

소비 문제와 관련하여 에너지 생산과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존자원 에너지를 계속 늘려가자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존자원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 늘려 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구호를 계속 외치는 일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에너지 생산의 한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욕구이며 둘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된 에너지이며 셋째는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물질의 오염과 의식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의식의 오염은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낳게 되며 다시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대하여 오로지 앞의 둘째 문제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안전하다느니 발전소 건립의 충분한 경제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만을 하는 개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셋째 문제가 중요합니다. 순전하게 경제적 이유만을 따진다해도, 핵발전에서 생기는 저준위,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의 처리비용을 계산한다면 핵발전의 경제적 타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미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핵발전 시설계획을 전면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핵발전소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기 때문에 구조물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한 후에 아파트처럼 재건축할 수도 없고 폐기해야 하는데, 이 때 건축 폐자재인 콘크리트 조각 하나하나 모두가 영구히 보존해야할 방사능 누출오염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핵폐기물 처리에 드는 경제적 비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제적 이유를 떠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립으로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초과된 소비이며, 그 소비를 향유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회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파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의 오염은 핵 쓰레기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갖고 또 얼마나 많은 ‘문명의 잔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개발주의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지금 같은 소비형태와 문화양상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이어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의 근본 원인은 위기를 낳은 사회적 요인에 대하여 근원적인 치료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단순이론으로만 풀려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난국을 푸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경제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제단위인 주체인 소비자의 맹목적인 소비 행태들을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소비의 맹목성을 부채질한 기업의 소비 유도논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의식오염을 정화하기 전에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정착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이해 없이 개인의 환경구호만을 강조하면 지하철과 공원과 길거리는 깨끗해질지라도 기업의 일회용 포장지와 화학적 제품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도쿄의 길거리는 정말로 깨끗하지만 1인당 일회용품 사용량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쓰레기 분류가 잘 되기는 하지만 사회의식이 결여됐다면, 지금의 검측기로 측정이 어려운 다이옥신은 소각로 굴뚝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며, 원자력 에너지가 청정에너지라는 정부의 홍보가 승리하여 여기저기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님비현상을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라고 계속 몰아붙이면서 행정편의주의로 가거나 기업가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폐기물 이동금지협약은 유명무실해져서 국가간 기술이전과 경제원조라는 명목 아래 힘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우선한 특정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이동이 더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시장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FTA 체제 국제경제의 흐름은 시장경제기준을 몇몇 힘 있는 선진국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논리와 전체논리 사이의 괴리는 경쟁과 이기주의, 약육강식과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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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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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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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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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나. 피타고라스와 영혼불멸 신앙

보다 엄밀함을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자 그에 대적하는 신화의 필사적인 저항이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몸부림이 가장 집약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인물이 바로 저 위대한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미 윤회전생을 통해 아에탈리다스, 에우포르보스, 헤르모티모스, 퓌로스 등 네 사람의 삶을 살았고, 서로 다른 지역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건 역사적 인물로서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70년경 사모스에서 태어난 것이 분명하고 성년이 된 후 기원전 530년경 이탈리아의 크로톤(Kroton)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가르침을 펴다가 혁명이 일어나 그의 신도들이 처절하게 추방되기 3년 전인 기원전 497년에 사망했다. 그가 이집트를 다녀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믿을 만한 사실이다. 제26왕조 치하였던 당시 이집트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나우크라티스(Naukratis)가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왕래정도가 아니라 가장 진정한 이집트인, 즉 신관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들과 교유하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헤로도토스(II, 81)도 전하고 있듯이 이른바 오르페우스(Orpheus)교와 박코스(Bakchos)교의 신도들이란 사실 이집트인들과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럴 정도로 피타고라스적 본질과 이집트적 본질은 아주 닮아 있었고 오르페우스교의 행사와 피타고라스학파의 행사 또한 서로 혼동될 만큼 비슷했다. 한편, 피타고라스가 바빌론에 갔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인도와는 어떤 식으로건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영혼 윤회설(metempsychos)에는 오히려 이집트적인 것보다는 인도적인 색채가 보다 강하게 배어있다.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

그런데 피타고라스가 그리스인에게 전해준 것으로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영혼 윤회설 내부의 금욕사상과 결합된 그의 새로운 종교와 윤리학이다. 그는 철학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종교 개혁가였고 생존의 고뇌가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던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이 지상에서의 삶이란 전생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속죄의 과정으로서 감내해야 할?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속죄 상태가 끝난 후에는, 테오그니스(Theognis)가 생각하듯 침묵의 돌이 되어 무덤 가운데에 눕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화의 순서를 밟은 다음, 내세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 윤회전생(輪回轉生)한다고 생각했다. 신비로 가득 찬 의식을 통해 정화되고 전 생애에 걸쳐 신성한 의식을 추호의 소홀함이 없이 수행해낸 경건한 사람만이 종국에 가서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러한 희망을 기치로 내세워 그 교단을 이끌어 간 것이다. 그 역시 오르페우스 교도와 마찬가지로 육체는 영혼의 묘지 혹은 감옥이며 고귀한 영혼은 천상 세계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피타고라스가, 영혼이 여러 육체를 거치는 지상에서의 편력을 모두 끝낸 후에는 그 보답으로서 지상적 존재를 마감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가르쳤거나, 마지막으로 그 영혼은 신격의 하나로 영입되었을 것(어쨌든 이것은 플라톤의 희망이었고, 앞서 엠페도클레스도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이라고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영혼불멸과 일치하는 것은 후자 쪽의 생각이지만, 영혼이 “벌로서” 육체에 갇혀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영혼이 보다 크고 잦은 비참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신이 영혼을 구제해 줄 때까지 육체 안에서 잘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타고라스학파가 교인들에게 자살을 금하고 “노령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엄하게 가르쳤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 과거가 어떻게 비쳐졌는지 또 그 경우 어떠한 것이 친근성을 가지고 그에게 전생과 관련한 신호를 보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생에서 4번이나 생존했다고 하는 그의 기억에 관한 전승들은 하나같이 동물들 안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사실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오래 동안 다우니아의 숫곰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와 친근했던 한필의 황소는 아주 나이가 많아질 때까지 타렌툼의 어느 신전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영혼 윤회설을 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오르페우스 교도로부터 배웠는지 아니면 반대로 오르페우스 교도 쪽이 피타고라스로부터 그 교설을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마 영혼 윤회의 사상은 어디에선가 도래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딱히 이 사상을 거부하려는 사람도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불사의 신앙이 새롭게 요구되거나 그곳에로의 비약이 필요할 경우, 그리스인은 즉시 피타고라스를 상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중에서 피타고라스학파와 별도로, 영혼이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 등으로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것을 그야말로 영혼이 받는 벌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친 사람은 아그리겐툼(시칠리아)의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기원전 444년경)였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다. “나는 이미 소녀였으며 또 소년이었고, 새끼양이며 새이었고 바다 속 물고기였다.”

수학의 나라. 특히 기하학의 나라인 이집트로부터 피타고라스는 가장 중요한 이득으로서 수학적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학문의 과학적 일면은 여기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수학과 음악 연구의 발단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 연구가 후에 피타고라스 철학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수학적, 음악적인 우주의 구성에 도달 할 수 있었으며 또 오르페우스교의 교설과 달리 기괴한 신학에 미혹되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E. Rohde) 물론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수의 이론이 매우 광범위한 문제영역을 가지고 있고 그 이론들 중 얼마만큼이 피타고라스와 연관되어 있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도 증언하고 있듯이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들보다 이전 시대에 이미 피타고라스가 수학을 자기 학설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아주 의도적으로 수의 영역에 다양한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에게 수라는 것은 여러 가지 힘의 비유이며, 수의 비례나 비율 또한 여러가지 사상의 비유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도 그는 1과 다, 짝수와 홀수, 신성한 수 10과의 관계 속에서 신성한 4개의 수(1+2+3+4=10) 등과 같은 것들에 각각 사상을 결부시켜 청강자들을 갑자기 숭고함에로(ins Erhabene) 끌어 들였을 것이다. 또 이 학설에는 도덕적인 면과 함께 미학적인 면도 있었다. 즉 원은 가장 아름다운 평면이며, 구는 가장 아름다운 물체라는 설명함으로써 대지에 구의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대지가 타원형 또는 원반으로 여기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리는 여러 가지 수 또는 그 역이라고도 설명함으로써 이미 수를 음악의 기초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물질적 원소들을 특정의 기하학적 도형들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윤리적, 지적, 물질적 세계를 이와 같이 수의 형태로 설명하는 것은 당대의 모든 그리스적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경향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기하학과 산술은 이후 그리스의 모든 지식을 해명하는 손잡이(labai)가 되었다.

라파엘의부분화 – 음악이론을 기술하는 피타고라스

하지만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이 세계 전체를 학문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기초에 불과했다. 다름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학설에서 처음으로 지구가 우주 체계의 중심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 준 획기적인 주장이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대지성(對地星, Gegenerde, 태양계 행성을 열 개로 하기 위해 지구의 뒤에 있다고 상정한 행성)이라든지 중심불(천체가 그 둘레를 수학적 법칙에 따라 회전하는 우주의 중심)이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긴 해도 그들은 결국 지구가 그 중심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피타고라스 학설에 돌려야 할 영예가 또 있다. 그들은 처음으로 심리학적 구분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영혼을 인지력, 정열, 이성의 세 가지로 나누어 이 중 인지력과 정열은 동물도 가지고 있지만 이성은 인간만이 소유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이 학설이 단순한 철학이었다면 여성은 거론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피타고라스학파의 활동에 관한 전승에서 우리는 여러 명의 여성 피타고라스 교도들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아내 테아노(Theano)와 그의 딸 다모(Damo) 등 일단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의 학문적 문제에 활발한 관심과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려나 양성의 평등을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최초로 확립해 낸 것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윤회의 학설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여성을 남성과 더불어 영혼 윤회과정에서 태어나는 동격의 사람으로 여겼고 윤회에 의해 태어날 다음 세대 사람들의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인품은 신화적 전승 통해서 추측하건대 매우 엄숙하고 아폴론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훌륭한 용모에 흰 의복을 걸치고 그는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언행에서는 온화하고 친근한 정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지만 이내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의 마을 전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가르침은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그의 학생들은 처음 5년간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마 일종의 예비 과정의 경우 수준 높은 제자들이 그를 대신하여 가르쳤던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무슨 일이든 “스승께서 그렇게 말씀하였다“는 말로 언표된 이상 그 이상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의 형태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교설을 전할 때마다 ”내가 호흡하고 있는 공기에 맹세코, 내가 마시는 물에 맹세코, 내가 말하는 일에 논박을 더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신도들에게 침묵과 명상과 내면의 집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뛰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의 학설은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 비의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고 영혼의 윤회와 피타고라스적인 윤리는 공공연하게 가르쳐지고 있었다. 물론 일부 과학적 지식들은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피타고라스가 그러한 지식들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식들을 신중하게 극히 서서히 전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학설이 와전되거나 왜곡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학파는 매우 독특하게도 가르침을 전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징적이거나 장중한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학설을 주창하면서 신들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종교가 그를 만족시킨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종교로는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들 또한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에서 그려지듯 여러 가지 불성실한 상태로부터 결코 벗어나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에게 남아 있던 것은 혐오라고 하는 항의 밖에 없었다. 그는 지하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로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이름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신들을 얼마나 깊이 숭배하고 공경했음은 신께 바치는 기도에 대한 그의 훌륭한 태도만 보더라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선물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는 선물의 선택을 철저히 신들에게 맡겼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영혼 윤회설 때문에 크로톤과 메타폰티온(Metapontion)에서 종래의 장중하고 화려한 사망자 숭배나 이것과 결부된 대량의 무속 및 유령 관련 미신들과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고도의 정화적인 기능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리스 본토의 상당수의 제사들보다 훨씬 은밀한 성격의 제사방식을 가져와 그것을 수행했다. 영혼 윤회설은 이미 복잡한 학설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비의적 제사방식까지 함께 들여온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윤회설과 결합된 새롭고도 고상한 윤리가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일 것이다. 이 교설은 옛 부터 육식을 피하고 채식주의를 받들어 왔는데 그렇게 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전에 인간이었던 영혼이 동물의 모습으로 동물의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듯 기원전 4세기의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절제와 관련한 수많은 규범들과 관습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준수여부가 사후에 더 좋은 것을 요구할 권리까지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별한 의복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수행한 금욕은 오르페우스 교도의 그것보다 훨씬 밝고, 투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패한 양심을 용서받기 위한 금욕이 아니고, 청정한 사람들이 청정한 삶 그대로를 유지하기 위한 금욕이었던 것이다. 그 유일한 목적은 단지 한층 더 고상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적 생활의 진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은 성실하게 지키되 서약은 가능한 한 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거짓 서약이 창궐했던 당시로서는 이것은 실로 이채롭다할만한 특색이다.

라파엘로,

피타고라스가 지방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면 그가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도시에서는 부와 사치가 지나쳐 이른바 명문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군대, 경기와 관련한 일 즉 넓은 의미에서 승부를 위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피타고라스는 그들이 추구하는 승부욕과 명예욕은 결국 그들 자신을 예속 상태에 빠트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부와 승부를 쫓는 삶을 경멸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이 비범한 스승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소유물을 하나로 모아 숭고하고도 엄숙한, 종교적 기운으로 가득 찬 공동체를 꾸려 재산을 공유하며 생활하였다. 한편 그는 정치적 개혁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피타고라스 사후 아주 후대의 세속적 피타고라스 교도들이 행한 실제적인 정치적 활동 때문에 생긴 견해일 뿐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아니다. 또 다른 피타고라스 교도들은 오르페우스 교도들과 손을 잡아 고행을 앞세운 미신적인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가장 믿을 만한 증인으로서 플라톤은 최소한 실천철학과 관련해서는 피타고라스를 사생활 영역에서 독특한 형태의 종교 의식을 창시한 사람 정도로 말하고 있을 뿐, 솔론과 카론다스와 같은 정치가 내지 입법가들과는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대체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극히 중요한 몇 개의 사안과 관련하여 다른 그리스인들과는 애초부터 다른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매우 독특하게도 스승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치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리스인들의 삶은 모두 이 폴리스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사모스로부터 와서 이 폴리스의 이러한 정치적 제도와 행태를 접하고는 줄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크로톤에서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의 말년의 짧은 전성기 이후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 그의 신봉자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혹한 박해를 받아 급기야 그들 대부분이 추방을 당하거나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 사정 또한 아마도 수학과 관련한 그의 방정하고도 엄격한 태도와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피타고라스학파가 고대 그리스에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과학적이기도 한 가장 초기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단체였다는 사실은 이 학파가 누려야할 영원한 명예일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친밀하게 서로 결속된 하나의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오니아학파나 엘레아학파와 다르다. 실제로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우정과 연대감으로 서로를 헌신적으로 도왔고 학파에 속한 사람들이 사망했을 경우 그 사람이 개인적인 안면이 있건 없건 장지가 멀건 가깝건 간에 상관없이 문상을 가 장례를 도왔다고도 전해진다. 이 학파의 영향이 스승이 사망한 이후 2세기 이상 유지되었다는 점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가 이러한 영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다음에 계속 )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만추(晩秋)

브레히트는 묻는다. 신화로 가득 찬 ‘아름답고 견고한 저 테베의 상들은 누가 지었는가?’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테베의 왕들이 지었겠지.’

어르신을 따라서 한적한 시골에서 며칠을 보냈다. 새벽달에게 농담하다(고 쓰고는 애인 생겨 달라고 떼쓰다고 읽는다). 아침 물안개를 즐기고 알을 품는 논병아리를 구경하며 보냈다. 한적한 곳에서는 노래도 불렀다. 고추잠자리 가성이 안 올라가서 며칠 연습했다.

매 끼니를 얼마나 잘 먹었는지, 죄책감까지 들 정도였다. 죄책감의 근거는 만나로 연명하던 광야인 즉 누가 한 수저 더 먹으면 다른 사람은 굶는 떠돌이 히브리인들의 삶에서 그들 지도자들의 ‘먹기를 탐하는 자, 목에 칼을 댈지라’는 경고이다. 어르신의 냉엄한 눈초리인즉 호된 꾸지람을 듣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귀신들이 도망갔다-상처들이 치유되는 깊은 시간이었다.

그 지방의 명찰을 구경 갔다. 절은 새로 개축했다. 숙련공들의 솜씨가 잘 드러나는, 목재들의 이음은 틈새 하나 없었고 3포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20년 전 절 짓는 비용은 평당 천만 원이었다. 단청 공사를 하고 있었다. 단청공들은 작업 조건에 따라서 때로는 누워서, 때로는 앉거나 서서 작업하고 있었다. 20년 전 단청 공사 가격은 300만원이었다. 지금의 비용은 추정도 못하겠다.

절 뒤켠에 단아한 황토방이 있었다. 만추의 주변 경관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누구라도 그 곳에서 머물러 살고 싶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스님은 이것을 ‘내가’지었다고 했다. 공장에서 목재를 깎아다가 현장에서 짜 맞춤하는 공법이라면 평당 약 3백만 원, 목수와 인부들이 직접 작업한다면 건축 비용을 추정할 수 없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

 

자본주의의 꽃을 금욕의 상징인 절에서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부처님께 절 공양하는 것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소원이라는 것을 들었다. 새로 지어도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니는 전통 건축양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테베의 성을 지은 것은 왕들이 아니듯이, 절을 공양하는 것은 헌금한 사람이나 스님들이 아니다. 오막살이를 보면 그 속에 사는 가난한 가족들을 생각하듯이, 신축 절을 보면 온 몸이 아픈채 노동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목수들과 퇴역쟁이들을 생각한다.

스님과 차 마시는 자리에 동석할 수 없었다. 돈 냄새가 진동해서라면 내가 너무 애큐트(acqute)한가? 주지스님은 야생의 버려진 사슴을 주워다 기른다 했다. 사람 손을 타고 큰 사슴은 사람들을 잘 따랐다. 나는 또다시 스님의 자기 신비화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야생 사슴이 길거리에 내버려져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 자신이 추측의 단초를 주었다. 근처 사슴 농장에서 이 아이(사슴) 시집보내, 새끼 한 배를 내었다고 했다.

오래 전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염소가 새끼를 낳고 죽었다. 어린 것들을 가족들이 우유 먹여 키웠다. 얘들이 사람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배고프면 마루앞에 와서 매애-하고 울었다. 귀엽다며 욕심 많은 사람이 한 마리를 가져갔다. 다른 한 마리는 성장하자, 집 어딘가에 묶어놓았다. 사람이 다가가면 개가 주인에게 애교 부리듯이 커다란 뿔을 조심스럽게 들이밀거나, 두 발로 서서 펄쩍펄쩍 뛰었다.

‘일부작 일부식(一不作 一不食)’을 실천하는 스님이 계셨다. 그가 정치력이 넓어져, ‘절(국립공원) 입장료 받지 말자‘는 운동을 했다. ’중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일해서 먹고 살라‘고 일갈했다. 이 운동 발전하면 절에서 헌금 받지 말자라는 주장으로 번질지도 모를 참이다. 그는 종단에서 쫓겨났다. 그 후 진보파 스님이 종권을 잡자 승첩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몇 십 억 헌금 뒤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본다. 누구는 극락 가기 위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을 자기 도구로 삼는다. 이는 기독교,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건축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 노동자의 자기방어 기제들-원인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누군가는 내가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으로, 돈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소히 돈 들어갈 데가 많다. 서사 작업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하고 술도 마시려면 돈 들어간다. 남는 돈은 친구 발전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띄엄 뛰엄 일해도 워낙 사람이 없다보니 용역회사에만 가면 일감이 있었다. 윤 씨, J를 포함해 여럿이서 기존 현장에서 바라시 작업을 했다. 공정표에 바라시는 콘크리트 타설 후 15일 지난 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 현장은 어제 콘 타설했다. 조심스럽게 해체작업 한다 해도 양생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콘크리트는 잘 굳지 않을 것이다.

바라시는 우선 갓다(카터, 쇠로 된 절단기)를 이용해 형틀 짜면서 여기 저기 묶은 반생이를 끊는다. 이 작업은 쉽지 않다. 큰 갓다로 하면 무거워 팔이 아프다. 작은 갓다로 하면 힘이 들어 팔이 아프다. 끊고 또 끊어내다 보면 다 끊겠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해 나갔다. 그 다음인 즉 하리(보)의 형틀과 상판(슬래브)을 이어주기 위한 목재를 털어낸다. 하리 패널들을 연결해 주는 핀을 제거한다. 만약 핀을 재거한 다음 헌치를 털면 갑자기 폼들이 밑으로 쏟아지게 된다. 작업 순서를 뒤바꾸면 위험하다. 삿보도(지주 동바리)들을 가로 세로로 이어주는 후리도메 철봉들을 제가한다. 동바리는 정확히 15일 후에나 제거하게 된다.

하리통 바라시 작업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재를 정리하는 동안, 김 팔뚝이(나의 팔뚝 두 배를 가졌기 때문에 김 씨에게 붙여진 별명)와 손을 맞춰 벽체 해체 작업을 했다. 그는 젊고 공손했으며 바라시 전문으로, 유능하기 짝이 없어, 저녁에는 애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선 벽체의 다대(거푸집을 똑바로 세우기 위한 철봉)를 제거한다. 한 사람은 철봉을 잡고, 다른 사람은 철봉을 고정시킨 반생이나 후크, 즉 철봉을 폼에 고정시킨 재료를 제거한다. 다대(세로)철봉을 폼에서 분리시켜 정리한 다음, 같은 방식으로 요꼬(가로) 철봉을 제거한다. 벽체 폼 핀을 제거한 후, 한 사람은 폼을 잡아주고 다른 사람은 빠루(바라시 대)로 단단하게 벽체에 붙은 폼을 떼어내 정리한다.
해체란 것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재료들을 내리는 것이라서 중력은 가중된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작업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하다 다치는 사람은 무능하다. 두 달 전 공정 때, 언어장애인 Y가 다쳤다. 무식하나 힘 좋고 시키는 대로 막일하는 그를 사장(오야지)으로 호칭했다. Y가 오른 손 엄지손가락 큰 뼈 금이 가고 작은 뼈 골절 후 몇 개월이 지났다. 그의 엄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산재를 청하기 위해 관리자들에게 서류에 사인을 부탁했다. Y에게 돌아온 대답은 ‘반장 해임’이었다. 산재 난 현장은 보험료가 올라가고 하청에서 불이익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 덕분에 유리한 것은, 즉 산업자원부뿐이다.

화병이 났다. 노동하면서 일 때문이 아니라 공손하지 못하거나 교양 없는 사람들의 말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원색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각양의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레미콘 공장 신축 현장이다. 평택항에서 일했던 팀이 옮겨왔다. 팀장이 작업을 지시하며 나와 J를 향해 말했다. “이씨, 타이 빼먹지 말고 다 꽂아. 저번 (평택항) 옹벽 핀 네 개 안 꼽았어.” 내가 물었다. “옹벽 터졌나요?” 터지지는 않았단다.

J가 나에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핀 잘 꽂으라 했죠?”

순간, 처녀들이 시집가기 위해 안방 가는 그날까지 ‘승질’ 더럽다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상대 남자에 대한 불만에도 주둥이 꾹 다물고 있듯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아, 씨발 너도 함께 핀 꼽았잖아” 하고 내 쏘고 말았다.

사정은 이렇다. 나와 J가 작업한 구간을 바라시하던 정씨가 폼과 폼을 연결하는 핀이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바대(폼 외부를 가로, 세로로 연결시키는 철봉)가 핀 빠진 곳에 붙어있어서 콘크리트가 터지지는 않았다. 출 퇴근길은 지루하다. 정씨는 심심파적으로, 재미있게, 핀 빠트린 노동자들을 조롱했다. “개쌔끼들이 손이 얼었나봐”, 이런 식으루다가.

J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나를 방패막이로 쓴 것은 천하고 비겁하다. 노동자들이 자기방어기제를 쓰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이다. 팀에서 찍히면 일하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팀을 떠나, 다시 외톨이로 이 현장 저 현장 떠돌아 일을 다니기로 했다. 야비한 인간들과 어울려봐야 득이 될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

3.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 한도

평택 항 작업 현장 앞 도로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입 곡물을 운반하는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현장은 수입 곡물 터미널 신축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 건물이 무었을 하든 관심 없다. 일해서 품값을 받아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기 공장에서 일해도 되는가? 원자력 발전소 신축 일 해도 되는가? 지엠오 곡물 수입 건축물을 지어도 되는가?

무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인가? 박그녀는 외국에 있었으므로 진보당 해산 청구 국무회의에 전자 싸인을 했으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인가? 내가 원자력을 짓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들이 시켜서 일했을 뿐이지, 원자력 주변에 많이 태어나는 지진아들에 대한 책임이나, 반감기 수억 년의 방사능 폐허에 대한 무한 책임져야 하는 후손에 대한 책임은 없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한도에 대해서 물을라 치면 노동자의 가치라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노동하는 나는 단순히 생산력의 도구인가, 아니면 나는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존재로서 노동하는가의 여부이다. 전자라면 자본에 착취당해도 싸다. 후자라면 범죄와도 같은 노동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오신 손님이 앞에서의 여행에 함께 했다. 그는 국내에서 회자되는 지엠오 식품이니, 광우병 쇠고기니 하는 논의들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일상 그것들을 아무 문제없이 먹기 때문이다.

지엠오 식품이나 쇠고기가 미국과 한국의 잣대가 다르다는 설명을 하기란 요령부득이었다. 미국에서는 지엠오 식품이 없다. 이것을 허가 안하기 때문이다. 유독 국내에만 건너오는 것이 지엠오 농산물이다. 쇠고기 역시 미국에서 유통되는 것은 월령이 낮다. 송아지가 성우가 되면 바로 시장으로 간다. 우리 식탁에는 월령에 상관 없는 고기가 올라온다. 그러나 자국 시장에는 송아지에서 갓 성우가 된 고기를 유통시킨다 . 그러니 그 나라 사람들은 동양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엠오 농산물은 광우병과 같이 위험하거나 더 위험성이 크다. 자신들을 ‘자연의’라고 칭하는 사람들인 즉, 야마기시 학원의 영향을 받아 인체에 자연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어떤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엠오 농산물은 우선 인체의 약한 부분인 관절, 물렁뼈를 친다. 2년간 지엠오 밀을 먹인 쥐에게서 종양이 솟아났다(한겨레 21). 종래의 실험용 쥐 검사는 6개월이었다. 그렇다면, 지엠오 곡물을 먹고 큰 축산물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지엠오 농산물로 만든 식용유, 밀가루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은?

미국 손님은 미국이 사람과 동물에게 그토록 해로운 물건을 다른 나라에 파는 부정의한 나라가 아니라고 믿는 듯 했다. 그러니 지엠오 논쟁이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은, 보수주의자 손님이 미국 공무원의 자국 이익을 위한 행위, 도덕적 불감증 문제였다. 미국의 어느 판사는 한 미간 쇠소기 비밀협상이 끝난 새벽에 일어나 스위스 은행에 동결되어있던 이명박 회사 자금 해제 서류에 싸인을 했다(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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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데모크라시-국민의 독재

미국 손님으로부터 자신이 가꾸는 정원 손질에 대해 들었다. 정원에 여러 가지 나무들을 심었다. 그 곳에서 풀이 자라면 야단난다. 이웃에서 곧바로 신고가 들어간다. 그러면 벌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보름에 한 번 꼴로 풀을 베어주거나 잔디밭의 잡초를 제거해야 한단다.(황금광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부정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민주주의란 부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국민의 독재란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지,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란다. 수많은 이민족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민주 독재가 더욱 철저하단다.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이란 꿈도 못 꾼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일을 지시하는 사람들의 강제가 휠씬 많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요, 명령은 관리자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딱 잘라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라는 이분법이 작용한다.

곡물하치장 공사이후 유치원 신축 공사장을 갔다. 직영 목수 8명이 있었고, H인력에서 가끔 보는 이들 3명과 함께 갔다. 오야지가 일하는 우리들 주변에 지켜 서서 사사건건 일을 지시했다. 수시로 일의 방식을 바꿔 지시하기도 했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J도 함께 갔다.

누군가가가 말했다.

“저 오야지와 함께 일하기는 힘들겠어.”

압권은 함께 일하러 간 X노인의 궁시렁이었다. 오야지가 안 듣는 곳에만 가면 노인이 한 마디씩 했다.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네가 해라 이자식아.” “너는 기본이 틀려먹었다 이자식아. 아침 밥도 안 멕이고 (쉴)참에 라면 주는걸 보고 알겠다.” “가만 있으면 알아서 할 터인데 아주 나쁜 놈이구먼.” “이제 퇴근한다 이눔아, 나는 너와 일 안할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노인이 말했다.

“못주머니 차고 함께 일하는 오야지하곤 일 할 만 하지만, 못주머니 안 차고 지시만 하는 사람과는 일하기 힘들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품값도 더 쳐준다. 목수 힘든 거 알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X노인이 사회성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오야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X노인의 생각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반영되어있다. 오야지는 자기는 일 시키는 사람, 정신노동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수 편에서는 노동 자체가 무의식적이 아니라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작업한다.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불필요하다.

기왕에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에 완공된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4개 는 아직 가동을 못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부품 비리와도 관계있는 모양이다. 원자력 안전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노컷 뉴스). ‘발전소를 당장 세울 만큼의 문제될 부분은 없다…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수조사결과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들었다’고 했다. 누구인지 정확치 않으나, 어느 인터뷰이는 비리 품목의 부품들은 ‘외국에서도 사용한다‘고 말하더란다.

통속적 인간인 나는 스즈키 인트루더를 탔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돈을 만지자 맨 처음 이것을 샀다. 국산 오토바이의 성능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지축을 울리는 그 소리와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인 같은 모습에 반해서 샀다. 우연히 오토바이에서 국산 600CC용 부품을 발견했다. 정품이 아닌 비품을 사용한 오토바이는 생명의 문제와 연관 있다. 크게 손해 보고 원 주인에게 되팔았다. 개인 생명 달린 오토바이와 원자력사고를 비교할 수 있으랴만, 내 경험에서 할 수 있는 유비는 이것 뿐이다.

부정으로 검사를 통과한 원자력 부품에 대해 ‘별 문제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윤리불감증 정도를 넘어서 범죄가 확실한,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기무사)의 선거 개입까지도 무조건 편드는 사람들이 이정권의 수혜자나 언제든지 신분 상승 기회가 있다고 믿는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랬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메말라 빠진 한 마디밖에 할 수 없다. 방송과 언론이 국민 의식을 장악하고 오랜 반공 교육을 통해 주입받은 것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무엇인가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 투쟁의 시기가 지났다면 다시 올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일 게다.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 드린다…….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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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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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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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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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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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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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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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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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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