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의<11분> [철학자의 서재]
이한오(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성공회 신부)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 소설 <11분>(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과 표지 뒷면에 그려있는 매혹적인 그림 때문이었다. 남녀가 성교를 나누는 평균시간을 제목으로 단 것도 도발적이고, 아가씨의 누드도 단순히 에로틱한 것을 넘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했지만,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요인은 소설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었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코엘료는 “옛날 옛적에”와 “창녀”를 대조했는데, “옛날 옛적에”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이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이 명백한 모순을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 발은 동화에 한 발은 나락에 살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자며 그 첫 문장의 모순을 설명한다. 동화와 나락이라! 첫 페이지의 다른 문장도 범상치 않았다.
“모든 창녀가 그렇듯 마리아도 동정녀로 태어났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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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분>(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우리는 성은 넘쳐도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산다. 섹스산업은 밤낮으로 돌아가고 단지 11분의 섹스를 위해 돈을 들여 약까지 먹지만 정작 사랑은 없는 시대다. 거짓과 냉소가 난무하는 관계에 사랑은 없는 법이다. 소설은 브라질 북부의 작은 지방에서 태어난 소녀 마리아의 학창시절과 짧은 직장생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1년 동안의 창녀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실제 인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소설이 끝나는 마리아의 나이는 23살이다. 겨우 스무 두세 살짜리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설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스토리텔링과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마리아의 일기가 두 축을 이룬다. 마리아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의 성장기는 “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니요”라고 말했던 것의 연속이었다. 10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등굣길에 연필을 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다 주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것을 늘 주저했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너무 쉽게 허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입술을 열지 못했고, 사흘이 지난 후 마리아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게 된다. 마리아의 성장기는 늘 이런 식이다.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는-.
소녀 마리아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섹스를 매개로 한 마리아의 성장사를 중심으로 보았다. 소녀 마리아, 여행을 떠나는 마리아, 창녀가 된 마리아,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과정을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한두 가지를 더 발견했다. 그것 역시 그림처럼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에 나오는 다음의 기도문이다.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자주 드리는 기도문의 일부인데, 성모 마리아를 통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융성하던 시대에 지어진 기도이다. 그래서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오니 들어주소서!’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기도해 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래 ‘렛 잇 비'(Let It Be)에 나오는 마리아도 이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이 소설 <11분>에, 그것도 창녀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앞쪽 간지에 들어왔을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움직이고,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던가.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꿈 많고 순수한 브라질 소녀 마리아는 창녀로 둔갑한다.
파울로 코엘료
코엘료는 이런 배치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저 기도문 이외에 소설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세 가지 글과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첫째는 머리말 성격의 글, 둘째는 기원전 3~4세기경 나그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로 시작하여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로 끝나는), 세 번째는 마리아가 나중에 창녀가 되어 지내는 제네바의 지도가 있고, 끝으로 신약성서의 루가복음의 일부도 옮겨놓았다. 이 자료들을 거기 그 자리에 놓았는지 별도의 설명은 없다.
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까지는 예수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죄지은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의 발을 닦아주는 이야기이다. 이 성서 속 이야기를 툭 제시해놓고 이후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풀어 가는데, (성서를 가까이 하며 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 전체가 성서 본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도 이야기이고, 소설도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실(팩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하고자 한다. 그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빚어지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가서 한 번 더 말하기로 하겠다.
나는 춘천에 산다. 내가 만난 춘천 학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울로 가려한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춘천이 너무 답답하고 일자리도 없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브라질 북부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마리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또 마리아에게 이제까지의 남자들은 늘 고통스런 기억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녀는 사랑은 항상 고통만 줄 뿐이라 믿었고 바다를 건너 더 넓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부모님께 집도 사드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 브라질의 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마리아는 여행지에서 스위스인 프로듀서 로제를 만난다. 그가 연예인으로 성공시켜 주겠다는 제안에 마리아는 ‘예스’라고 응답한다. 그녀는 1주일 만에 모든 것을 결정한 뒤 그를 따라 제네바로 떠난다.
돈과 모험을 찾아 나선 여행
꿈에 부풀어 스위스로 도착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1주일에 500달러를 준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값을 제해야 했다. 그녀가 할 일은 삼바댄서였다. 손님과 대화를 하면 안 되고, 사랑에 빠져 일을 그만 두면 해고당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 사랑을 피하는 것은 몰라도, 막상 타의적으로 ‘사랑금지’를 당하고 나니 그녀의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3주 만에 아랍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보기 좋게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서게 될 뻔하다가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고, 그 남자는 사라지고, 다른 일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일생일대 최대의 관문에 서게 된다. 연예인 프로듀서인 줄 알고 만난 아랍인이 호텔로 옮겨 포도주 한잔을 더 하면, 1000프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매춘을 제안 받은 것이다.
1000프랑이면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130만 원 정도 되는, 브라질에서 석 달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그 호텔에서 그 포도주를 마시기로 한다. 막상 몸을 팔고 보니,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닌가? 그녀는 본격적으로 창녀가 되기로 작정하고, 제네바의 텍사스촌 베른가를 찾아간다. 그렇게 마리아는 창녀가 되었고, 직업적 창녀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난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육체’라 불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진 영혼이다. 요 며칠 동안 나는 그 영혼을 아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비판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날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103쪽)
창녀도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이다. 첫째 밤 혹은 둘째 밤의 고비를 넘기면, 그것 역시 고된 일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다른 것과 똑같은 직업이었다. 창녀들도 직업적인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했고, 시간표를 준수했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손님이 너무 많으면 짜증을 부렸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또 “창녀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다.”(110쪽) 나는 작가가 ‘창녀들도’라고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창녀들은’이라는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했다. 그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일기를 붙들고 씨름했다”(111쪽)고 적었는데, 그럼으로써 몸을 파는 창녀가 잃지 않으려는 영혼이 독자의 그것과 다를 수 있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11분을 축으로 돌아가는 세상
작가는 머리말에서 “세상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책도 있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책도 있다”며, 이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코엘료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현실 중에 하나는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함께 제네바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수십 수백 명의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고, 자신을 위해 값비싼 옷을, 그 여자들을 위해서는 더 비싼 옷을 사고,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창녀를 사고, 피부 관리, 몸매관리, 체조, 포르노 등 거대한 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117쪽)
마리아가 제네바에서 만난 남자들은 자신이 세상과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고, 남자들의 외로움을 접하면서 자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섹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콘돔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고, 관계 후 즉시 샤워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깐만요”(128쪽)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나가는 마리아를 어떤 화가가 부른 외마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리아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소리였다.
“당신에게 빛이 있어요.”
“스케치라도 하게 해줘요.”(129쪽)
이 말은 지금까지 자주 듣던 “가슴이 정말 탱탱하군”, “허벅지가 정말 매끈해”, “아파트 한 채를 얻어줄게”하던 그런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모델 일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직업이 창녀인데 그래도 빛이 계속 나는지 따지듯 묻지만, 화가는 중요한 건 창녀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여자와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 화가는 그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겐 빛이 있어요.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것들의 이름으로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가진 의지의 빛이 눈, 그 빛은 당신의 눈을 통해 드러나요”(142쪽)
화가는 그녀를 육체적 미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으로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스에서 필리아로의 상승이랄까. 마리아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시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 남자와 결국 ‘산티아고의 길’을 따라 호수로 흘러드는 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144쪽)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 성인이 걸었던 길로, 지금도 순례의 길로 유명하다. 나는 그들이 첫 만남에서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것이 일종의 회개로 보인다. 성서에서 ‘회개’ 혹은 ‘회심’으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그 뜻은 ‘방향을 돌리다’는 뜻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길의 방향을 타락과 환락의 ’11분’이 지배하는 세상의 베른가로 향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길을 암시하는 성인의 순례길로 그들은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동안, 마리아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첫날 그들이 나눈 대화를 보면 그 길의 의미가 어떤 것일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 그러지 말아요. 난 곧 브라질로 돌아갈 거예요.
– 손님으로 당신을 찾아가겠소.
– 나에겐 굴욕일 거예요.
– 당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찾아가겠소.(149쪽)
물론 섹스에 권태를 느낀 화가가 다시 쾌감을 맛보고 싶은 뜻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기독교(신 구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한다. 회개란 시공간에 묶인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시공간을 창조한 절대자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자, 삶의 실천방식을 자기중심에서 점점 확대하여 이웃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생각을 조용히 따르고자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화가는 마리아에게 간청한 ‘구원’은 마리아를 직업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떤 빛을 가진 인격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날의 마리아의 일기는 자신에게 구원을 간청하는 남자로부터 신의 목소리로 여긴다.
나는 몇 시간 전, 한 카페에 들어갔고,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곳에 던진 것과 같았다. 나는 나에게 다른 종류의 관심을 보여준 첫 번째 사람에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행복한 하루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151쪽)
그들은 이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운명적인 만남에 이른다.
구원의 빛과 영원한 사랑
마리아는 그 화가가 자신이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자긍심과 ‘빛’을 찾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사랑이 체위에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체위의 변화는 춤의 스텝처럼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사랑은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성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은 놀이와 ‘연극’을 통해 그들의 시곗바늘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단순한 만남 이상이라는 것을, 생식기의 ‘포옹’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화가 랄프와의 새로운 만남 와중에도 사디즘에 빠진 영국 신사를 만난다. 가학적인 고통을 주고 받는 그와의 만남도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디즘이 추구하는 고통과 노예적 굴종을 통한 정화 그리고 거기서 오는 성적 쾌감은 또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허무함을 알게 된다.
화가 랄프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과 만난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화적 섹스를 시도하며 새로운 삶의 활기와 의미를 찾아가는데, 결국 그들은 생식기의 ‘포옹’을 통해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영원한 오르가슴을 맛보게 된다. 그녀의 뜨거운 고백은 이러하다.
“나는 그와 합류했다. 그것은 11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337쪽)
루가복음 7장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소설 <11분>에서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옮겨놓은 루가복음의 소제목은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이다. 예수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고 줄여 옮겨보면 이런 이야기이다.
예수가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살던 행실이 나쁜 여자가 그 소식을 듣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랬더니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가 시몬에게 묻기를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하자, 예수는 옳은 생각이라면서, 계속 말하기를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 요약, 공동번역 대본)
예수가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유대사회는 먼지가 많은 땅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발을 씻을 물을 대접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주인이 발을 닦아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인은 물을 내놓지도 않았다. 바리사이인은 스스로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종교적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아마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종교의 본질인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눈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비해 행실이 나쁜 처녀(아마 창녀일 것이다)는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셈이다. 보기에 따라 에로틱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여기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움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그녀에게 선포한다.
“네 죄는 용서받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장 30절)
화가도, 마리아도, 그녀의 배위에 올라와 ’11분’ 남짓 애를 썼던 수많은 남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한마디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1분>은 일종의 종교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보편적인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결국 사랑으로 구원하고, 사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