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문성원의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철학자의 서재]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보 씨 또 다시 등장하다

구보 씨라는 이름이 다시 서점에 등장했다. 그런데 제목이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이다. 박태원의 구보 씨, 최인훈의 구보 씨에 이어 이번에는 소설가가 아닌 철학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전에 알던 구보 씨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냥 직업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도 중년에 접어든 모습이다.고리타분한 얘기인가 했더니, 이번에는 소설이 아님에도 소설만큼이나 꽤 잘 읽힌다. 물론 구보 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면 가끔 말이 늘어져 졸음이 오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때마다 Y라는 여성이 어김없이 나타나 구보 씨에게 독자의 생각을 속 시원히 전달해주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철학자 구보 씨는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이야기만 길게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Y의 돌직구가 날아오기 때문에, 구보 씨는 다른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다가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소심한 구석이 있는 평범한 중년 남성이다. 아마 독자들은 두 사람이 대화 중에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구보 씨와 Y, 구보 씨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소통, 뱀파이어, 크기, 사회, 철학 등 그가 일상에서 책이나 영화, 뉴스 등을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당연하다. 일상은 주제 따위는 상관없이 마구 포착되고 또 버려지기도 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책을 통해 구보 씨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을 엿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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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를 바라보는 시선- Y의 돌직구

(문성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세상과 소통하려는 어떤 철학자의 곁에 Y 같은 인물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데다,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Y가 정확히 구보 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격 없이 친한 사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이라는 행위는 항상 어떠한 반론을 전제로 진행된다. 반론은 학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반론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가끔은 Y의 참견을 반기기도 하고, Y가 없는 곳에서도 Y가 반론하는 환청을 듣는 철학자 구보 씨는 그야말로 천상 철학자다.

사실 철학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들에게 남다른 취급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구보 씨의 강의를 들은 익명의 강의 평가만 들여다봐도 철학자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 알 수 있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247쪽)

전공자가 듣기에도 정곡을 찔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구보 씨가 전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때문에 철학은 원래 골치 아픈 거라는 생각이다. 고민은 곧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이 없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구보 씨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Y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251쪽)

한편으로는 정말로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얘기가 길어지고 졸리는 것이다. 하지만 구보 씨는 꿋꿋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개념을 통한 사유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민을 반영한다. 게다가 철학자들은 무조건 텍스트에 갇혀서 헤매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노력이 드러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보통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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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소통을 말하다

‘소통’은 그동안 정치권과 언론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모자람이 없다. 그만큼 현실의 영역에서 소통이라는 것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구보 씨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 사이의 소통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구보 씨는 자꾸 소통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우리가 양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고, 내가 아닌 것 역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내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양분법적 사고를 선호하는 이유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설명해보려 하지만 잘 안 되는 구보 씨에게, Y는 이렇게 일갈한다.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마르크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기를 듣다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좇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좇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87쪽)

소통이니 어쩌니 말하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해관계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지식인 나부랭이’라는 말에 욱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던 구보 씨는 이래서 소통이 될 수 없다며 다시 푸념하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나 방법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춰지고 달리 쓸 곳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과 방법의 쓸모는 결국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Y의 날선 일갈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해관계에 따른 행위만 있고,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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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통과 가짜 소통

 

철학자 구보 씨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일단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듣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이야기가 성립한다. 구보 씨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Y나 친구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격 없이 상대를 비판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설득하며 알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의미의 소통이 아닐까?

유학의 고전인 <중용>은 배움의 과정에 대해 “견문을 넓히고(博學), 의심이 없도록 자세히 묻고 따지며(審問), 신중히 생각하고(?思), 확실하게 판단해서(明辯), 독실하게 실천하라(篤行)”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 유학이 다양한 경험과 자세한 질문을 시작 지점으로 삼고 적극 권장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경험은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해 줄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은 그 다음의 일이다. 넓게 보면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인 실천 지침인 셈이다. 견문을 넓히는 일의 기본은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의심되는 부분을 자세히 묻는 일은 곧 오늘날 말하는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편을 가르고 독실하게 실천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악성 댓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댓글의 주인공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다. 당연히 말을 건넬 필요도 없다. 단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모두 적으로 규정해버리고는 분노를 표출하고 우월감을 느낀다. 그래서 정이천은 앞에서 말한 <중용>의 5가지 덕목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이제는 더 나아가 명백하게 드러난 과거의 사실을 묻고 따지기만 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 시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아무래도 확실히 판단과 독실한 실천만 할 줄 아는 듯하다. 단순한 만큼 실천하기도 쉽지만, 그건 일방통행일 뿐이다. 일방통행만 있으면 길은 결국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소통(疏通)이란 바로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터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제하면서 흐르는 시간은 과연 누구의 편이 될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소통을 말한다. 말뿐인 소통은 아무 의미 없는 가짜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Y의 돌직구를 감상해보자.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에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88쪽)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⑨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박민미(동국대 강사)

 

품위 있는 사회를!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주장했다. 품위 있는 사회는 제도를 통해 그 권한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갈릿은 ‘이등 시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특권화된 시민과 그에 비해 차별 받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서구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여전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령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맥락이다. 만일 한 사회의 시민 부류에서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를 제도적이건 문화적이건 차별적으로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들을 문화적 차원에일지언정 특정인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함으로써, 주류적인 시민이 일등 시민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현상마저도 특권화라고 비판하는 정교한 자의식이다.

그런데 단 한 명의 특권화된 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시민을 이등 시민으로 전락시킨 사태가 2012년, 버젓이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전체 시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철저하게 모욕당했다.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으로서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경향신문, 2013년 8월 25일 오피니언)고 말한 손호철(서강대 교수·정치학)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품위’라는 말이 수사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념’의 어휘라는 것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

선거에서 피선거권자가 누린 특권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순간, 이 땅에 사는 모든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11조 1항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헌법 제7조 1항의 규정대로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라는 의무를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누린 특권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해 ‘이제는’ 늦었지만, ‘답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특권을 위해 전체 국민을 이등 시민으로 강등시킨 이 모욕에 값하는 길일 것이다.

헌법과 현실의 괴리, 이제 이등 시민들은 이 모욕을 갚을 것이다. 중단 없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 출범-파주이야기[지미갤러리]

 

 

글/사진?: 윤지미(한철연 회원)

2014년, 제 4기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가 새롭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2월 8일, 부서별 업무 현황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기획하기 위해 모인 첫 회동.

4기의 꿈은 무엇일까? 3기와 연속성을 띠면서도 4기만이 해낼 수 있는 혁신이 궁금하다.

그러나 먼저, 어려운 일 새롭게 맡은 모든 임원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공동체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17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공동체 형성 과정

 

공동체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할 때 큰 틀의 공동체를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농경사회, 유목사회, 도시사회. 여기서 도시사회도 특성에 따라 두 가지로 갈라질 수 있죠. 서구 마르크시스트들이 따로 구별하는 ‘아시아적인 전제’가 이루어지는 도시사회와 지중해 연안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해안도시 사회. 성격이 다르죠. 농경사회와 유목사회는 어디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저번 시간에 제가 최초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나요? 충분히 설명을 안 했나요?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듣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근거도 없고 누가 책으로 쓴 바도 없는, 저의 상상과 몽상, 때로는 망상까지 곁들여진 이야기라고 여기고, 열심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기 바랍니다. 어쩌다가 머릿속에 남는 것이 있으면 담아두셔도 되고요.

저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한데, (제 아들에 따르면 저는 사람보다 오랑우탄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 저희 집안사정과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의 기후변화는 단속적으로 혹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최근의 빙하기가 지나고 나서 간빙기에 해당합니다. 몇만 년 전에 천천히 날씨가 풀리기 시작해서 간빙기가 시작했다고 그랬나요? 고생물학자나 지질학자 같은 사람들 증언을 들으셨을 텐데, 저나 여러분들이나 숫자에 약하기는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한 이만 년 전 정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으니 꼭 믿지는 마십시오. 독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죠. 정밀과학, 엄밀 과학 바탕 위에서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론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간빙기가 시작된 게 이만 년 전 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긴 세월 동안에 빙하기와 간빙기가 지구를 번갈아가면서 덮쳤는데, 빙하기가 오게 되면 인류들은 어디에 주로 모여 살았을까요?”

“동굴 속.”

“동굴 속? 뭐, 그렇죠. 그런데 적도 부근에 살았겠죠? 다른 데는 북극에서부터 지금의 한대지방, 온대지방까지 전부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고 오직 적도부근만 말하자면 따뜻한 곳이었을 테니까.”

빙하기 때의 적도 부근을 상상 속에 그려 봅시다. 빙하기 때 적도 부근은 어떤 기온상태고, 어떤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을까요? 지금은 적도가 열대우림지역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상당히 거북한 곳이고, 지나치게 많은 비와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이고 있지요? 간빙기가 오면서 점점 날씨가 풀림에 따라서 적도 지역에서 생활 조건이 악화되면서 식물들 가운데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도 점점 온대 지방으로 퍼져 가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풀들도 온대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적도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옮아 살게 되었겠죠? 실제로 빙하기에는 적도 지방에 과일나무도 많이 있었고, 짐승들이 풀 뜯어먹고 살기 좋은 초원 상태고 넝쿨식물이 우거지지 않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봅니다. 게다가 적도 지역은 어떻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나누어지나요? 아니죠? 정말 철없는 곳이었겠죠. 그래서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철없이 살 수 있었고, 철없이 살 수 있는 곳이 낙원이죠. 낙원에서는 먹이를 얻으려고 머리를 쓸 필요가 없죠. 손만 뻗으면 먹을 것이 있고,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없으니까 따로 입고 벗고 할 필요도 없고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에덴동산은 아마 빙하기 때의 적도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에덴동산에다가 지혜의 열매가 달린 생명의 나무를 하나 두고 그 생명수 아래서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가 살도록 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도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수에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생명수라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생명수이죠. 그런데 그 생명수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제로 그 생명수는 언젠가 죽고 그 열매가 간직하고 있는 씨앗이 떨어져서 재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하나님의 처지에서 살피면 엄청나게 큰 재난이죠.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수를 보고 날마다 그 그늘에서 절하고 영생을 누리라고 했는데 갑자기 열매가 맺히니까 (제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겁니다, 소설을 쓰는 건데…….), 아무튼 열매가 달리니까 하나님이 깜짝 놀라서 절대로 그 열매에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어디선가 뱀이 나타나서 저 열매를 먹는 게 좋다고 이브를 꼬시죠. 실제로는 하나님도 너희 목숨 영원토록 보장 못하니까 저 열매 먹어라, 이런 식으로 꼬였겠죠. 결국 그 꼬임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는 지혜의 열매를 나누어 먹습니다. 하나님이 이 꼴을 보고 노여워해서 니네들은 이제 이 에덴에선 살 수가 없다 하여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죠.

그런데 이 시점이 간빙기하고 겹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간빙기와 겹쳐서 실제로 기온이 높아지니까 그 동안 그렇게 살기 좋았던 적도 부분이 열대우림지역으로 바뀌면서 초원에서 넝쿨이 우거진 밀림지대가 되고 바닷물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전에는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에 가면 늘 조개를 주워 마음껏 배불리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개펄이 죄다 물속에 잠겨 버리고 점점 살기 어려워집니다. 갖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던 나무들도 남과 북으로 흩어져서,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무도 그렇고, 낟알이 달린 풀도 그렇고 거기에 따라서 짐승들도 전부 먹이를 찾아서 남과 북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도 그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칩시다. 온대 지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철 있는 곳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철 한철이 들고 나는 곳, 그래서 온대지방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한 철 한 철 나면서 철이 나고 한 철 한 철 접어들면서 철이 들어야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보장해줘서 영원히 살 수 있었으니까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고 살아도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몸에 옷을 걸칠 필요도 없었겠죠. 그럴 필요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생명의 동산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났으니까 우리가 때맞추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를 맞춰서 배꼽 달린 아이들인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고 그러죠.

카인과 아벨/ 출처: www.allaboutthebible.net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죠. 유목사회와 농경사회가 여기에서 갈라지는 계기가 되죠. 그렇죠? 말하자면 카인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내서 씨 뿌리고 짐승 길들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사는데, 아벨은 짐승들을 데리고 초원을 찾아서 멀리멀리 떠나는 운명에 놓인 것이죠. 그런데 성서를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농경 공동체가 유목 공동체보다도 더 지배적인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어요. 원시 공동체는 아프리카에서부터 소단위로 이루어진, 농경 공동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포유류 가운데 제법 기특한 게 인간 수컷입니다. 왜 그러냐면 유인원까지 포함해서 포유류 가운데서 암컷에게 씨만 뿌려놓고 달아나지 않는 수컷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수컷은 암컷이 둘러놓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람 암컷들이 얼마나 영악하냐 하면 수컷들을 가두어 놓고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녔어요. 여자는 온전한데 남자들은 그에 못 미쳐서 바보라는 뜻으로 ‘반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 반편이냐고요? 생물학적으로도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려면 언어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사람 수컷의 두뇌는 말을 주고받을 때 왼쪽 뇌만 작용을 합니다. 그쪽에만 불이 들어와요. 암컷은 왼 뇌 오른 뇌 두 쪽 다에 언어중추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자가 온전한 인간이라 하면 남자는 반편이라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반편인 남자를 길들이기가 참 쉽기는 쉬웠겠어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그 동안에는 수컷이 게을러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적도 부근에서만 살았다면 손만 뻗으면 늘 먹을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으니까 일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얼음이 풀리면서 적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 온대 지방으로 옮겨 살면서 널리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곳, 지금 아프리카 나이로비 국립공원같이 온갖 야생동물들이 뛰어다니는 그런 비슷한 곳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수컷들은 사냥하러 간다 하고 떼 지어서 몰려나갑니다. 요즘 아주 정밀한 조준 망원경이 있는 사냥총 가지고도 짐승사냥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꼬챙이 하나 들고 거기에다가 돌멩이 둘둘 감아가지고 무슨 사냥이 되었겠습니까? 그냥 가사노동에서부터 벗어나는 구실로 우르르 떼 지어서 다니는데, 그러다보니 쫄쫄 굶고, 가을이나 겨울이 오면 먹고 살길이 어디 있어요? 동굴에 불 피워 놓고 덜덜덜 떨다가 굶어죽기 직전에 나와서 옛날에 씨만 뿌리고 달아난 암컷들에게 간단 말이죠. 짐승이나 사람이나 애를 배고 갓난애가 생기면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좁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가까이 있는 풀이나 낟알 같은 것들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서 먹을 만하다 싶으면 캐다가 주변에 심고, 씨 뿌리고 해서 농작물들을 기르기 시작하고 짐승 새끼가 우연히 발견되면 주워다가 우리 속에 가둬서 기르기 시작하죠. 수컷들이 돌아와 보니까 그동안 다 굶어 죽었을 줄 알았던 암컷들이 살아남았고, 곡식도 저장해 놓고 짐승도 길들이고 해서 겨울날 채비를 다해 놓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같이 살자고 궁둥이를 슬그머니 들이민 거죠. 그래서 모계사회가 시작된 거죠. 주권의 출처는 경제권에 있는데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활동을 해서 생산을 하고 재생산을 하는 기초를 닦아놓은 게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에 빌붙어 산 거죠. 여자공동체에. 남자들은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 모계 사회가 수십만 년 지속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⑧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개인이나 사회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가 있다. 이러한 목표나 가치를 개인은 좌우명이라 하고, 학교는 교훈이라 하고, 회사는 사훈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명문화하거나 구호화하여 붙여두기도 한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내 꿈은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목표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이 나아가고자 하고, 대한민국에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무엇일까?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목표나 가치는 당연히 [헌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 존재인가? 대통령은 취임 당시에 자신의 목표를 선언문 형식으로 낭독하게 되어 있는데, 이 역시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헌법] 69조) 즉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는, 즉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할 존재다. 행정부 수장의 목표가 그러하다면, 대통령 소속이면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국가정보원법] 제2조) 국정원의 목표 역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뒤흔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분명히’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일 것이며, 따라서 대통령은 마땅히 그 수장과 담당자를 질책해야 한다. 대통령 자신의 임무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전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현 정권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정원의 만행은 대통령 개인의 목표나 가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목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리고 전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의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라는 격앙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대통령이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으로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는 사실 아닐까. 그러한 선거 부정은 자신의 목표인 민주주의 수호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적절한 말이나 대응이 없다. 이것은 임무 방기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야 할 대통령이 그러한 가치와 목표를 짓밟은 행동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의 수수방관은 국정원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서 대통령이 방조하지는 않았나 의심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행정부의 수장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자기 직속 기관이 될 조직의 불법행위를 방조했다? 그리고 당선 후에도 그러한 불법행위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의 목표인 ‘민주주의’의 수호와 달성을 위해 노력하리라고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심화된다면 대다수의 대한민국 구성원은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이상을 스스로 수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구호를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타도! 박근혜 정권!’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4기 연구협력위원회 첫 회의를 잘 마쳤습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사진 : 윤지미(한철연 회원)

정리 : 강지은(편집주간)

 

한철연 제4기 연구협력위원회가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한철연을 기대합니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철학자의 서재3>출간 안내[ⓔ시대와철학 알림]

신간소개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부제 <철학자의 서재 3: 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책 천국>

 

 

 

우리 시대의 명저, 숨어 있는 책, 저주받은 걸작들을 통해 쏟아내는
철학자들의 쓴 소리 / 흰소리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이 출간되었다. 5년 동안의 연재, 206명의 필자, 217편에 달하는 서평들이 세 권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세상의 붕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3권에서 철학자들은 현실과 일상, 정치와 경제, 안과 밖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기와 책읽기와 사유하기에 관한 통합적 안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63편의 “철학자들의 쓴 소리/흰소리”가 담겨 있다. 모두 책을 소개하는 글들이다. 실용적 독자들로서는 이 책만 대충 읽어도 63권의 책을 읽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이른바 “읽은 척 매뉴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기로는 최적이다. 또, 철학자들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알 수 있는, “훔쳐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책의 운명이 ‘실용적 차원’에 머물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저자들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의 현재적 삶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운명에 대한 상상을 해보라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인 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명저나, 숨어 있는 책,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 동서양 고전들을 선정하여 서평을 쓴 것을 모은 책으로, 지난 5년간(2008년 9월~2014년 현재)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던 칼럼들이다. 서평이기도 하며, 철학 칼럼이기도 하며, 에세이이기도 한 이 코너는, “서평 문화의 장”의 한 획을 그었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오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는 서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일상의 삶에서도 찾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들이다. 이론과 활자들의 말잔치가 아니라, 책읽기, 글쓰기, 철학적 사유에 관한 통합적인 안내서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서재> 시리즈는 방대한 양의 서평 모음집에 그치지 않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철학자의 서재>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맹의 사상 등에서 시작하여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2500년 지성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무려 200여 권에 달하는 책들 중에 우리 시대 지성들이 읽어야 할 교양이 망라돼 있는 것이다.

또, <철학자의 서재>는 책의 선정과 집필을 최소 한 달 이전에 시작하기 때문에, 사유하고 글을 쓰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분량이 주어진다. 그럼으로써, 글의 완성도와 주제의 선명성이 높게 나타난다.

<철학자의 서재>는 대안적 상상력, 내일을 지시하려는 몸짓과 울림을 강조한다. 학문은 현실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서적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문화/예술/대중문화 등 거의 전 분야를 다룬다. 철학적 사고는 대안적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깊어진다는 점이다. 철학 본연의 텍스트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텍스트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출판사 보도자료 중 일부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시대와철학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프레시안 시민강좌
?<큰 것을 생각하라 2014>
세속의 철학자, 경제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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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디자인하기 위한 공존의 경제를 찾아서-
?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시련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하는 것은, 새로운 유토피어니즘을 기획하는 것이다.
미국식 금융 자본의 붕괴 이후,
그리고 9·11 이후 체제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방향을
이제 우리 주변으로 돌려, 공동체의 나아갈 비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상과 주거에서, 마을과 공동체에서,
지역 사회와 도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의 의미를 재구성해보자.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디자인해 보기 위해
우리 시대의 가치, 자본, 노동의 의미를 다시 세워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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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커리큘럼

2월 13일 1강 : 세계경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성찰하기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2월 20일 2강 : 노동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 박영균(건국대 HK교수)
2월 27일 3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1 – 한길석(한신대 외래교수)
3월?? 6일 4강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2 – 박민미(대진대 외래교수)
3월 13일 5강 :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이순웅(숭실대 외래교수)
3월 20일 6강 :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재구성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3월 27일 7강 :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 도시를 생각한다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4월?? 3일 8강 : homo cooperatus 협동성 경제의 실현 – 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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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14년 2월 13일~4월 3일(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총 8강)

● 장?????? 소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신청문의 : 02) 332-4301 /?kophil@daum.net?(주로 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 수?강?료 :

① 전 강좌 15만원
② 각 강좌당 2만원
③ 한철연 회원(정회원, 준회원, 후원 회원 등) 무료
마감 인원 : 35명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