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음과 나쁨[철학을다시 쓴다]-1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번 주부터는 1부와 2부를 순차적으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 좋음과 나쁨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
“이게 라틴어죠. 무슨 말입니까? 혹시라도 배운 분?”
“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예, 무슨 뜻이죠?”
“생이 먼저고, 철학은 나중이다.”
“그렇죠! 우선 살고 볼 일이고 철학을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일동 웃음.)
뭘 해야 살지, 우리 한번 골 싸매고 덤벼봅시다. 저도 혼자는 못 사니까 살려고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혼자 잘 살 수 없는 세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벌이나 개미처럼 여럿이 힘을 합해야 제 앞가림도 할 수 있게 태어난 생명체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 이것을 뭐라고 부르죠?”
“사회요. 그렇죠. 사회! 더 흔한 말로 시골 노인들은 ‘세상’이라 그러죠. 조금 교육받은 분들, 초등학교 문턱이라도 가본 사람은 사회라고 그러고, 그것도 안 배운 분들은 다 세상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우선 살고 보아야 하는데 제대로 살 수 있으려면,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팔뚝에다가 문신 새겨서 ‘착하게 살자’고 결심해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요즘에는 또 ‘바르게 살자’는 말도 나옵디다. 우리가 매사에 참되고 정직해라 이런 얘기를 듣게 되는데 참되고 정직해서 뭐해요? 여러분들 안데르센의읽으셨죠? 그 동화에서 임금이 옷을 벗고 나다니는데, ‘정말 옷 멋있습니다.’ 하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살아남으려고 하는 거죠. 임금한테 잘못 보이면 당장 가는 목숨이니까,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은 거짓이 발붙이기 힘든 세상,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그래도 살 수 있는 세상,에 나오는 국민들처럼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권력자에게 옷이 멋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이겠죠. 실천하고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또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여쭈어 보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건강, 생명 등에 부합하면 쾌로 느껴지고 그것이 좋은 것인 거 같고요. 죽음, 질병 등에 부합하면 불쾌이고 자기 생명이 단축되는 거니까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결론적으로 나쁨이 되는…….”
“좋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편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대화에 참여한 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의사 선생님이 한 대답과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그 옆에 계시는 남자 분, 어떤 때 우리는 좋다고 하고, 어떤 때 우리는 나쁘다고 그러죠?”
“내 마음에 들면 좋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쁘고…….”
“그렇죠? 주관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벙거지 쓰신 분, 어떤 때 좋다 그러고 어떤 때 나쁘다고 합니까? 본인의 개인감정을 객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솔직하게 느끼는 것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아, 인간이 왜 이렇게 퇴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머리가 나빠지는 게 무슨 법칙인 거 같아. 우리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적어도 그렇게 대답은 안 합니다. 제가 연모하는 연상의 여인이 있습니다. 저보다 9살밖에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십대 중반이신데 그 풍천 아주머니한테 제가 묻습니다. “아짐, 어떤 때 우린 좋다 그러고 어떤 때 우린 나쁘다고 그래요?” 하면 그 풍천 아주머니는 저한테 “철학 교수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몰라? 에이,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고, 없을 것이 있고 있을 것이 없으면 나쁜 것이제.” 하고 딱 부러지게 대답합니다. 이 말 맞아요? 이제 구체적으로 질병을 예로 들었으니까 이야기할게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질병은 있을 거예요 없을 거예요?”
“없을 거요.”
“‘없을 것’이죠? 있으면 나쁜 것이죠? 그죠? 지금 제가 배가 고픈데 그릇에 밥이 하나도 없다, 텅 비어 있다 그럴 때는 어때요? 나쁘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런 거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 평등, 평화, 우애, 관용,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할 것입니까 없어야 할 것입니까?”
“있어야 해요.”
“그렇죠? 이런 것들이 고루 있어야 좋은 세상이죠? 그 다음에 억압, 착취, 전쟁, 이기심, 탐욕,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야 할 것이요.”
“없어야 할 것이죠? 있으면 나쁜 세상이죠. 우리가 좋은 세상을 앞당기려면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고 그래야겠죠? 여기에서 말의 생김새를 눈여겨봅시다. 우리 민족은 대단히 예민한 민족이고 철학하는 데 선천적으로 좋은 머리를 타고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좋은 머리로 이야기를 잘 하는데 갑자기 쉬운 질문을 하면 얼어붙어가지고 온갖 어려운 낱말 다 꾸며내서 대답을 어렵게 합니다. 자기 확신도 없으면서.(일동 웃음.)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 → 좋다.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다 → 나쁘다.
동의하십니까?”
“예.”
“여러분들 전부 나중에 속았다고 투덜대지 마세요. 이 강의 내용은 전부 여러분들의 동의를 얻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다’는 좋다는 말이고, ‘있을 것이 없거나 없을 것이 있다’는 ‘나쁘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말에서 딱 한마디가 달라지니까 좋고 나쁜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을.”
“‘는’에서 ‘을’로 바뀌었다. 그러면 ‘을’은 뭡니까?”
“당위.”
“왜 당위가 미래의 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독일어로는 졸렌(sollen) 이라고 그러죠. 왜 이 ‘당위’가, ‘해야 할 일’이 미래시제로 표현이 될까요? 과거시제나 현재시제로 표현이 되지 않고 왜 미래시제로 표현이 되겠습니까?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우리는 왜 미래를 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왈가왈부해야 하죠?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과거는 이미 없는 거고 미래는 아직 없는 건데.”
“곧 올 거니까.”
“올지 안 올지 어떻게 알아요?”(일동 웃음.)
“현재가 나빠서…….”
“나쁘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질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고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해선 안 되고. ‘당위가 미래시제로 표현되는 까닭을 200자 원고지로 100매로 써내시오.’ 이러면 이 수강 신청한 분들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냥 농담입니다.”(일동 웃음.)
앙리 베르그송/ 출처: www.artnstudy.com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번역이 돼 있고요. 거기에서 나온 말을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우리의 기억(기억, 몽상, 회상, 추억 다 연결이 되는 말이죠.)과 그리고 응집, 삶의 에너지가 응집되는 문제,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 상상, 추억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공간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응집되어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모든 과거가 하나로, 현재로 모여 미래로 집중되는가를 검토합니다. 들뢰즈가 예를 들면서 한 말 가운데서 이런 게 있습니다.
원뿔을 거꾸로 세워놓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면 한 면은 확산이 되면 어디에서는 몽상이 펼쳐지고 어디에서는 추억, 어디에서는 기억, 이렇게 전개되는 단면들이 주루룩 나오는데, 현실에서 부딪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렇게, 저렇게 펼쳐졌던 그 모든 역사성들이 모두 어떻게 하나로 응집이 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간단히 여러분 사고 시험을 또 한 번 하겠습니다. 원뿔이 땅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원뿔을 횡단면으로 나란히 자른다고 칩시다.
“수학 선생님! 이 도형은 눈에 익으시죠? 이 도형의 단면을 가로로 잘랐을 때 위쪽과 아래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횡단면을 잘랐으니까 연속된 걸 잘랐는데 아래쪽과 위쪽이 크기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그러면 아래와 위가 같은 것들이 연속이 되면 주욱 자라서 원기둥이 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이게 원뿔이잖아요.”
“미분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말고요, ‘미분’, ‘적분’ 하지 말고요. 다 얼버무리는 소리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맞는데요. 거의 없어지는…….”
“차이가 없으면 원기둥이 될 것이오. 차이가 있으면 계단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우둘투둘 할 것 아닙니까? 아래 것이 크고 위에 것이 작으면 우둘투둘 계단식이 될 거 아닙니까? 무한을 둘러싸고 토막 내서 답을 찾자는 게 미분/ 적분이잖아요. 무한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면, 무한이 뭐예요? 셀 수 없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헤아릴 수 없는 게 무한이죠. 누가 니 속셈이 뭐냐, 하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머리 굴려가지고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도 무한의 한 속성입니다. 규정할 수 없는 것, ‘무규정성’ 이것도 ‘무한’이라고 하니까요. 한정지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수학 선생님, 아까 이야기했던 것 빼놓고, 무한에는 수학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무한 어떤 무한이 있습니까?”
“수렴, 발산.”
“수렴이란 말도 사실은 이상한 말이기는 합니다. 발산도 수렴도 다 우스운 말인데, 어쨌든 내적 무한, 수렴을 내적인 무한이라고 그러고, 발산을 외적인 무한이라고 그러죠. 그렇죠? 이것을 베르그송은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공간 축에 놓지 않고 시간 축으로 봅니다. 베르그송에 의지해서 들뢰즈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온갖 개념들을 그럴싸하게 쫘악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형을 놓고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같은 문제를 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단면을 자르게 될 때 그것이 같다고 하면 원기둥이 될 것이고 다르다고 하면 울퉁불퉁한 계단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단면으로 자른 원뿔의 윗면하고 아랫면은 어떻다고 해야 돼요?”
“미세하게 다르다.”
“다르다고 하면 미세하게 다르거나 정밀하게 다르거나 다 계단이 되어버린다니까.”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지 바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그렇다면 뭐 이지도 않고 아니지도 않고, 이것을 한 단계 더 추상하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그랬죠?”
귤은 사과와 다르다. 왜? 귤은 사과가 아니니까. 왜? 귤에 있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없고 귤에 없는 어떤 것이 사과에는 있으니까. 그렇게 전부 ‘있다/ 없다’로 수렴이 되죠. 그래서 말하자면 원뿔을 단면으로 잘라놨을 때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원은, 동그라미는 크기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은 크기로 볼 때 아래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는 것이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실제로 그렇게 아니라고만 볼 수 없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무규정성이라고 그랬죠. 이렇게 말해도 틀리고 저렇게 말해도 틀린다,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용수, 나가르주나의. ‘아닐 비’(非)자를 무한히 읊조리는 그런 이상한 이론이 나타납니다.
‘뭘 할까’ 하는 데서 우리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지점. 그게 실제로 우리의 존재 조건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똑같은 거리에 건초더미 두 개가 있고 반대쪽에 굶주린 당나귀가 있다고 칩시다. 건초더미가 색깔도 같고 모양도 같고 다 똑같은데, 이 당나귀가 어떤 것을 고를 것이냐……. 이것은 유명한 딜레마 문제 중 하나인데, 안 좋은 결말이 있습니다. 끝이 안 좋은 이야기. ‘굶어죽었다.’(일동 웃음.) 뭘 골라야 할지 몰라서 눈만 굴리다가 죽었다.”
“설마요.”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고르죠.”
“그렇지!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렇죠? 머리 굴리지 않고 저지르고 본다.”
도시 사람들은 서로 늘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이 비슷해지죠. 그리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떼거리를 짓죠. 생각이 다르면 실제로 같은 형제라도 천리만리 거리가 느껴지고 등을 돌리면 딱 돌아보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면 이 사람 어떤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촌사람들은 뭐가 닮는지 아세요? 손이 닮습니다. 시골에서는 거짓말 안 통하거든요. 24시간 늘 한마을에서 같이 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달라져버리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같아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어때요? 말로 살죠. 이런 문제를 내는 부류의 인간들이 전부 말로 먹고 사는 인간들이에요. 손은 무언가 하는 연장이죠. 손은 도구죠.
“제가 하고 있는 게 뭡니까? 놀리는 거죠? 손을 놀리는 거죠? 손발을 놀린다. 손, 발을 열심히 놀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부지런히 일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천적인 삶에서는 일과 놀이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는 어떻게 해요?”
“굴려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상한 사이비 교주라든지 조직운동가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도시에서 우글우글 많이 생겨납니다. 왜 그러냐면 도시라는 삶의 공간 자체가 사람으로만 이루어졌고, 사람끼리 모이면 머리 굴려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설득당하고 그러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니까.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머리 굴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먹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그러는데 주먹이 더 반사적이고 더 파괴적이어서 폭력을 쓰는데, 그 형태는 뭐죠? 칼을 든다, 총을 든다……. 우리가 나중에 무엇을 하려면 맨몸으로만 하기 힘드니까 연장을 써서 하게 되죠. 그런데 연장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는 연장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장은 칼이고 총이고 대포고 원자탄이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 연장으로 빨리 효율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낫이나 호미나 괭이 같은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대장간에 가서 같은 ‘연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을 벼리더라도 농사꾼이 대장간에서 찾는 거하고 장군이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을 지닌 통치자가 대장간을 찾는 거 하고는 다릅니다. 실제로 그리스 사회에서 대장간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합니다. 대장간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건 무엇이냐면, 전쟁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역사 시대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이렇게 나누는 것은 사실 사람과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의 발달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기의 역사입니다. 무기 재료로 역사 시대를 가르는 겁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나는데, 그 양식이 나타나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과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이루는 저마다 다른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