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7

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9987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시작된 유가족 단식 농성이 벌써 21일을 넘겼다. 평소 단식을 하지 않던 사람이 이 더운 날에 거리에서 이 정도로 단식을 한다면 생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벌써 몸 상태가 현저하게 나빠져 외부 접촉을 막고 있다고 한다. 유가족들의 이런 상태를 걱정한 시민들이 현재 광화문에서 연좌 농성에 진입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정권은 무엇이 두려워서 특별법 제정을 막고 있는 것이고, 도대체 무능한 야권은 무엇이 힘들어서 계속 머뭇거리고만 있는 것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으로 저 바다에 수장시킨 것도 원통한데, 그 부모들까지 나서 이렇게 배를 곯아 가며 청원해야 하는가? 특별법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아닌가? 우리 국민은 그 당시 대통령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참으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 흘린 눈물이라고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있고서 벌써 100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을 뿐, 원통한 부모들만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루 하루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국민들은 언제까지 대통령의 무능한 판단과 느려 터진 결정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들은 참으로 유가족들이 거리에 쓰러져 다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미 죽은 아이들의 혼이 구천에 떠돌면서 원통해하는 데도 당신들은 그런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특별법은 특정 정당이나 정권의 정략적 산물이 될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현 정권 만의 잘못도 아니다. 물론 사고 책임의 직접적 당사자들과 책임 범위 안에 있는 관료들의 문제는 중차대하다. 하지만 관피아와 해피아 같은 문제들은 지난 수 십 년 간 한국사회가 앞만 보며 달려 오면서 누적된 문제들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은 현 정권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풀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이다. 성역없는 수사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현정권의 책임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대한민국,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을 올곳이 세우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이렇게 역사적 과제로 생각한다면 도대체 당신들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정권은 유한하지만 우리 민족과 후손이 살아갈 대한민국은 영원하다. 그런 국가를 바로 세우는 문제에서 왜 당신들은 정권의 안위만 생각하고, 정략적으로만 문제를 보는가?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에 정권에 기초한 권력의 무상함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은 그런 권력의 무상함을 또 다시 경험하고 싶은가, 그리하여 세월호 문제를 정략적 미봉책으로 해결하려다가 자자손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고 싶은가? 당신들은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

 

사진-민중의 소리

사진-민중의 소리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백일이 훨씬 지났고, 그 부모들의 단식도 21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한 치의 걸음도 내딛고 있지 못하다. 대통령은 이렇게 조사가 늦어지고 대책 수립이 지연되다보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럴수록 부모들의 원한의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의 골도 메우기 힘들 정도로 깊어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를 미룰수록 항간에 떠도는 세월호 관련 의혹들은 더욱 비등할 것이고, 그 모든 화살은 정치권과 청와대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여파는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들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우리 사회의 발목을 더욱 더 과거에 묶어두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책임은 정부의 수반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무능한 판단에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른단 말인가?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대일 관계에서 과거사 청산을 따지고, 대북관계에서 진정성과 신뢰를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불행한 문제들이 청산이 안 되고, 서로 간에 신뢰가 부재하다면 결코 미래의 발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대통령이 왜 세월호 참사를 가볍게 생각하는가? 왜 그것을 조삼모사 식의 정략적 판단으로 호도하려고 하는가? 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의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했던 이야기를 뒤집어 버리려고 하는가? 세월호 참사로 야기된 문제들을 조사하고 최소한 미래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정도의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은 한 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대통령은 참으로 모른단 말인가? 혹여 대통령은 지난 보궐선거의 압승 결과를 믿고 이제는 세월호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안이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대통령이 선거결과를 그렇게 이용하려 한다면 이제 국민들은 무능한 야당에 대한 불신을 넘어 정치권 전반을 불신하는 엄청난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벌써부터 보상금을 가지고 유가족들을 회유하고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의 목숨값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 하겠는가?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부모들의 비통한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원한의 감정만 심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정치가 아니겠는가? 아, 어떻게 이다지도 어리석은 정치인들을 우리 손으로 뽑았단 말인가? 정녕 대통령은 정치 전체가 불신되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이 막심해지는 시대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는 분명히 적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권력들 앞에서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그들을 더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과 대립하는 국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헌신짝 취급하는 국가, 국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국가, 국민의 원한 감정만 자극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과연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국가가 언제까지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봄날에 화창하게 핀 꽃같은 아들과 딸들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지 몇 시간이나 되었는가? 그런 그들이 배에 갇혀 구조의 손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상태로 서서히 저 차가운 바다로 수장된 모습을 지켜본 부모들의 비통한 심정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히고,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컴컴한 바닷 속에서 시신이라도 거두어주기를 바라는 영혼들이 있는데, 그런 부모들이 무얼 그렇게 심한 걸 원한다고 하는가? 시체장사를 한다고, 자식팔아 영화를 누리려 한다고, 심지어 유가족 충이라는 막말까지 들어가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인가? 그들은 단지 정확한 진상규명이고, 그것을 위해 성역없는 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수사권을 가지고 수사를 하더라도 음해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그 결과를 가지고 법원의 공정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런 판단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무수한 장애들이 또 다시 앞을 가로 막을 터인데, 그런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 유가족들의 가슴은 한 없이 타들어갈 터인데, 어찌 국민의 녹을 받고 있는 국회와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은 첫 단추를 꿰는 일에서부터 이토록 유가족의 애를 태우는가?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들의 어린 자식들이 구조의 손길도 받지 못하고 서서히 수장되어갈 때, 다들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던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 때 누가 좌우를 따졌고, 여야를 따졌고, 진보와 보수를 따졌는가? 그 수장되어가던 순간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구조의 손길을 펼치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골든 타임을 놓친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자책하고 분노를 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여했고, 얼마나 많은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국민 경제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는가? 그런데 다시 우리는 그 시간을 놓쳐 국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미래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대통령이여. 당신들은 또 다시 그런 골든 타임을 놓치고,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 국민은 더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 한 번 호소한다. 세월호 특별법을 정략적으로 바라보지 마라. 역사의 눈을 의식하면서 조건없이 신속하게 처리하라. 그래서 더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라. 더는 국론을 분열시키지 마라. 더는 국민들이 이 고통 속에서 한 없이 좌절하지 않게 하라.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간절히 부탁한다. 부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고통을 생각하라. 부디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합칠 것을 생각하라.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라. 부디 역사의 눈을 생각하라. 정권은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구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3.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별로 다르지 않다. 모든 종교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모든 예술은 이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식을 미학화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는 철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철학은 종교나 예술과 다르게 합리적 언어로 서술하고 논증하려 할 뿐이다. 고대 문헌들 가운데 이 죽음과 관련해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플라톤의 『파이돈』이라는 작품이다. 초기 플라톤의 작품은 대부분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다.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한다는 죄로 고발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으로 가다가 제사장 에우튀프론을 만난다.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고소하러 가는 그와 경건과 불경의 문제를 토론한 작품이 『에우튀프론』이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배심원인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변명』이다. 빌어도 시원찮을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당신들의 영혼을 살피라고 충고한다. 괘씸죄까지 더해져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힌다. 당시 감옥의 소크라테스는 바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는다. 외국으로 나간 아테네의 배가 들어올 때까지 사형선고를 유예 받는다. 이때 돈 많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감옥에서 탈출시켜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다. 여기서 잘못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 『크리톤』이다. 그런데 사형을 받기 바로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파이돈이 스승을 설득하러 들어갔다가 나눈 대화가 ‘죽음’에 관한 유명한 작품인 『파이돈』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인간의 영혼이 무엇이고, 이 영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자못 날카로운 논증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 이유가 아니라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몇 가지를 적어보자.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영혼과 육체는 본래 다른 존재이다.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보는 이원론의 시작이다.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단일하고 죽지 않는 것이다. 복합물이 아니기 때문에 나누어지지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육체는 그 정반대이다. 육체는 물질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생멸을 반복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등장하는 ‘에르(Er)의 신화’를 보면 영혼은 본래 이데아의 세계에 거주한다. 이 영혼이 이승으로 넘어오면서 망각(레테Lethe))의 강물을 마시면서 이데아의 세계의 기억을 상실하고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플라톤을 거부하는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그를 패러디해서 정 반대로 표현한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라고”.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은 빠삐용처럼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 때 도와주는 것이 철학이다. 때문에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다. 육체가 죽을 때 비로소 영혼은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얼마나 기독교적인가? 이 철학의 수업을 받은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를 그리스에 전파하는데 어울린다고 본다. 아우구스투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따라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의 두 세계로 나누는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정립한다. 기독교의 몸을 빌린 플라톤의 철학이 중세 천년을 지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감옥으로부터 탈출시키려고 온 파이돈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자신이 감옥을 나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결연히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한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이고,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영원한 자유의 시작이다.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있을까? 이처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탈옥을 시킨단 말인가? 몽매한 제자들은 그저 이 뛰어난 스승의 말에 설득당하고 감복할 뿐이다. 하지만 치밀하고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놓치지 말 일이다. “나도 그 세계를 직접 가본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이네, 그래서 꼭 내 말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네…이렇게 믿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라 하겠으나, 그 모험은 아름다운 것일세”(플라톤, 『파이돈』) 그렇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직접 경험한 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신화를 전달한 것이고, 다만 그 신화가 그럴 듯해서 그것이 옳다고 확신한 것이며, 이러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 신화와 설화, 종교와 이성의 논증 등은 다만 이러한 완벽한 무지에 기초해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경험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죽음뿐이겠는가? 영혼은 어떻고, 세계의 유무한성은 또 어떤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고 하는 신의 존재는 또 어떤가?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을 둘러싸고 무수한 논쟁을 벌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논쟁은 사상누각에 불가할 뿐이다. 근대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데카르트 조차 이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사유하는 자아(코기토)를 새로운 세계의 원리로 정립했지만, 여전히 이 자아를 보증서줄 절대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신은 개념상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의 ‘합리적 심리학’에서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비판은 그런 논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밝힌다. 관념 속의 백 탈러(당시 독일 화폐)와 실제 내 호주머니 속의 백 탈러는 다르다. 관념 속의 신은 현실 속의 신이 아니라고. 존재는 신이라는 완전성의 개념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고.

 

이런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의 약점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학이 발달하고 실증주의적 세계관이 비등할 때, 형이상학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근대 경험론의 유명한 회의주의자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관련된 모든 책들은 백해무익하므로 불쏘시개로나 쓰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먼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자처한 20세기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명제만이 있다. 하나는 의미 있는(meaningful)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없는(meaningless) 명제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명제인가?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명제와 참과 거짓이 확실한 논리적인 명제가 그렇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는 명제가 전자에 해당되고, “3*5=12”라는 명제는 후자에 해당된다. 전자는 참인 명제이고, 후자는 거짓 명제이다. 이와 다르게 경험적으로 검증도 안 되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가치와 관련된 도덕 명제나 검증이 불가능한 영혼의 불사나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와 신학적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들은 그저 ‘개소리’나 다름없이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들은 이런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을 가지고 철학의 오랜 아포리아들을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이제 종언을 고해야 하는가? 철학은 그들의 도발적인 주장 이래로 더 이상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과학이 발달하면 영혼에 관한 오랜 갈증이 해소되고, 신에 관한 물음을 더는 하지 않는가? 이런 말만 덧붙이겠다. 비엔나 서클의 수장인 모리츠 슐릭은 강의를 하다가 학생의 권총을 맞아 죽고, 그 서클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개를 오래 키워 본 경험으로는 개소리에도 미세한 변별이 있고, 그 차이에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4.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고 기다리겠노라.” 월명은 죽은 누이와 극락세계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착한 누이가 선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극락왕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자신도 선한 삶을 살고자 도를 닦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죽음은 그냥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후의 세계에서의 보상과 징벌의 문제는 이승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곧 삶의 문제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이는 받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받는다는 사실의 문제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이 불공평하고 부 정의한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갈 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것은 사실 명제인가? 그것은 소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착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상을 받고, 나쁘게 사는 사람이 과연 벌을 받고 있는가?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세상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 과연 그런가고. 오히려 이기적이고 사람들을 이용하려 들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그러지 않는가? 착한 사람들은 그저 멍청하게 당하기만 하고 어렵게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현실 속에서 착하게 살라고?

 

『사기열전』을 쓴 중국의 유명한 사마천은 그 책을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충절의 정치인이다. 그들은 주나라의 무왕이 통치하는 곳에서 나는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은 굶어 죽었다. 양심과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하게도 굶어 죽은 것뿐이다. 반면 유명한 악인 도척은 온갖 악행을 일삼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까지 한다. 그는 사람의 생간을 매일같이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악인이면 공자까지 그를 교화하러 들어갔다가 손을 내두르고 물러날 정도이다. 『장자』의 잡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론 사실은 아니고, 다만 유가를 패러디하기 위해 노장(老莊) 쪽에서 만든 이야기이리라. 사마천은 선인과 악인을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 가고 묻는다. 만일 도가 있다면 당연히 선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더 빈발하지 않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진 사마천의 내력이 있다. 그는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남자로선 치명적인 거세의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다른 대신들처럼 비겁하게 이릉의 등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진실과 소신을 지킨 것이고, 그 대가는 너무도 비참했다. 그런 참담을 견디지 못해 자살까지 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그 억울함을 누대에 남은 명저 『사기』를 쓰는 일로 대신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이 『사기열전』을 시작하면서 던진 물음은 너무나 절실한 윤리적 물음이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과연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것은 당위이고 요청이다. 적어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오래 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숱한 종교와 철학이 등장한다. 불교는 인과응보를 이야기한다. 선인선과고 악인악과라는 것이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고 한다. 금생의 복이 없다면, 그것은 전생에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내생의 복은 금생의 선업을 쌓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이 인과응보론이 교조화되면 현실 합리화의 논리로 변질될 수도 있다. 다 과거의 인연이고 업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여자로 태어난 것,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가난한 것 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극락과 연옥, 천국과 지옥은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도록 유도한다. 선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후 세계의 심판을 이용한 징벌과 보상이다. 하지만 사후 세계나 심판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한 타율적 강제이다. 이런 공포와 강제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행위란 단지 연민과 동정심으로 행하는 행동인가? 이런 감정을 갖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루소나 흄과 같은 근대의 많은 계몽 사상가들은 이런 동정심을 통해 가난한 자와 병약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공리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그것이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말한다. 행위의 동기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만 있으면 도덕적이며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돼지의 쾌락’이라 비난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는 사회 정책적 차원에서 사회를 개량하고 개선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칸트는 이런 접근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짐승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길이다. 개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한 소를 도덕적이라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동물들의 행위를 도덕적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은 인간에게 고유한 행위가 아닐까? 인간의 행위 중에서 동물의 행위와 비슷한 행위를 제한다면 도덕적 행위가 남지 않을까? 무엇이 동물의 행위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위인가? 애완동물을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물도 감정이 있다. 어떤 때는 인간보다 더 정서적으로 반응을 잘 한다. 이런 감정은 항상 그 감정을 유발한 원인이 있다. 기쁘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화가 나게 하는 것, 사랑하게 하는 것 등 모두가 어떤 원인이 있어 그것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고, 그 각각에 대응하는 감정이 나타난다. 이런 감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에 갇혀 있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때문’(because of)의 산물이라고 하자. 인간은 항상 ~ 때문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가지며, 동물도 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칸트는 숭고한 도덕을 이런 동물적 감정에 정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비루하고 비천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유로운 존재의 자유로운 행위에 기초해 있다. 타율적 강제나 외부의 공포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노예의 도덕일 뿐이다. 나중에 니체는 원한(르쌍티망) 감정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행위를 ‘노예의 도덕’으로 보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고귀한 도덕을 ‘주인의 도덕’으로 본다. 그리스의 자유인들에게는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안에 목적을 갖는 행위가 정치적 실천(Praxis)이다. 정치는 자유인들만의 활동이다. 반면 타자를 위해 봉사하고 행위의 목적을 타자에게 두는 것은 비천한 여성이나 노예가 담당하는 노동(Arbeit)이다. 이점에서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의 덕목이다. 자유인의 도덕적 행위는 외부의 원인에 종속되거나 타율적 강제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 안에 행위의 동기를 가지는 행위이다. 편의상 이런 행위를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행위라고 하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손해가 남에도 불구하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착한 마음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 그것만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을 넘던 사마리아 장사꾼은 강도의 피해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을 만난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무섭고 떨리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갖는 두려움과 떨림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자 감정이다. 당연히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합리적(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산속에서 이런 피해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똑 같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강도는 주변에서 똑같이 노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반응이나 이성적인 계산은 똑 같이 이유(~ 때문에)를 들어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사마리아 인의 착한 마음(선의지)은 이런 이유를 넘어선다. 그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강도를 당할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부상당한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덕의 뿌리는 감성이나 이성이 아닌, 전사들의 용기와 같은 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인간은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용감한 인간이다. 그렇다. 도덕이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칸트, 『윤리형이상학기초』) 그것은 감정도 아니고 결과에 대한 고려나 계산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의 착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의지는 의무감이다. 의무란 무엇인가?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며, 도덕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마땅히 법칙에 따르는 행위, ‘마땅히 ~해야 한다’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 명령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타율적 명령이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 스스로 부여한 규범이자 명령, 곧 자기 입법이고 자율(autonorm)이다. 때문에 이런 도덕법칙을 따를 때 그는 비로소 자유롭다. 자유로운 인격의 왕국에 거주하는 인간이 따르는 보편적 도덕 법칙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주관적) 준칙(maxim)이 너의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너의 인격에 있어서나 어떤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격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취급하고, 단지 수단으로서 만은 결코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 하라.”(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런 칸트의 생각이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하다 보면 늘 손해를 볼 뿐이고, 결국 선인보다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칸트는 결과의 유 불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므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우리가 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땅히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동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의지의 선택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무수히 많은 이유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또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이루어지는 힘든 인간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힘든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무리치는 예수처럼, 오직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왕궁의 호사로운 삶을 박차고 나간 석가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 공자처럼 사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도덕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는 인간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가 아니다. 인간은 소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을 어떻게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겠는가?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우리는 이런 인간들의 ‘목적의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이런 인간들 속에 감추어진 신성(神聖)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당신이 이미 부처라고,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가? 그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어떠한가? 그 세계에서 목적으로 대접받는가, 혹은 수단과 소모품으로 취급되는가?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하는 절대 부정이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과 단절되는 두려움이다. 이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다른 어떤 문제도 가볍다. 부귀와 권력도 이 앞에서는 한 없이 무력해진다. 성서의 온갖 이야기, 팔만 사천의 법문조차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낱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인간 문명이 쌓아 올린 온갖 지식과 기술, 그리고 과학조차 이 절대 부정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생각의 극단으로 끌고 간다. 죽음은 삶의 무게조차 사소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 서면 우리는 삶을 더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과연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생각한 죽음에 대한 단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읽어보자. 어떻게 다가오는가?

 

生死路隱 죽고 사는 길이

예 이샤매 저히고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가나다 말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니르고 가나닛고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라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닙다이 이리저리 떨어질 잎처럼

한 가재 나고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논 곧 모다온뎌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아아! 극락에서 만날 나는

道 닷가 기드리고다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끝>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기획하며

 

 

4기 연구협력위원회 학술 1부에서 연락드립니다. 금번 2014년 2학기부터 월례발표회를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운영해 보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월례발표회는 전문적인 논문 발표 형식을 취해 왔는데요, 그 덕분에 오랜 기간 동안 한철연 회원 간의 깊이 있는 학술 교류를 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철연이 여타 전공 학회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서 새로운 월례발표회 형식을 고려해 보면 어떨까 하는데 고민이 모아졌습니다. 한철연은 단일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인 여느 학회와 다르게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모임이다 보니, 전문적인 논문 발표 형식을 갖는 기존 월례발표회가 회원들 간의 학술 교류를 활발하게 하기에 제한이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번 2학기에는 독서토론 모임의 형식을 취하는 월례발표회를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방식은 추후에 진행하면서 더 고민해 봐야겠지만 우선은 하나의 책을 정하고, 그에 대한 발제자를 정해서 독서 토론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모임의 이름은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로 정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 주신 연구위 부장님들께 감사드립니다.

<8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 조은평(건국대 외래교수)
철학자의 서재 :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일 시 : 2014년 8월 20일(수) 오후 3시 ~ 5시 30분
장 소 :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무지한스승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지음, 궁리 펴냄)

[프레시안]에 게재되었던 발표자의 서평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5218

8월 이후 일정
* 9월 19일(금) 김우철 선생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10월 24일(금) 진은영 선생님, 8월 진은영 신간 『문학의 아토포스』
*11월 21일(금) 강경표 선생님,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
*12월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2학기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시작 시간은 저녁 7시 30분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yhseo2001@hanmail.net

학술 1부 드림

 

놀이의 해방적 본질: 나는 왜 밤새 놀아도 또 놀고 싶은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4

놀이의 해방적 본질:?나는 왜 밤새 놀아도 또 놀고 싶은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4

 

강경표(중앙대)

 

1.?피로사회?-?우리에겐 박카스뿐인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낸다.?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밥을 먹고,소파에 눕는다.?마누라 눈치가 없을라치면 발도 안닦는다.?리모컨을 찾아 뉴스를 틀고 뒹굴뒹굴하다 잠이 들 때도 많다.?총각 때는 술자리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드물다.?아니 사실 두렵다.?속된 말로,?체력이 달린다.

“철학은 사소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대학 첫 강의 때 들었다.?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학생들에게 되풀이하고 있다.?과연 그럴까??반문해 본다.?미안하다!?학생들에게 거짓말을 했다.?철학은 사소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할 수는 있다.?그러나 시작뿐이다.?사유의 치열함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그 순간부터 철학자의 치밀한 사유를 따라가는 과정이 나도 버겁다.?그래서일까? “피곤하다”는 말을 할 때가 많다.?특히 마누라한테.

값이 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무실을 방문할 때 피로회복제를 사가는 경우가 많다.?그 피로회복제에는?“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의 피로를 알고 있다”는 묵시론이 깔려 있다.?무엇 때문에 당신이 피곤한지는 모른다.?중요한 것은 구체적 사실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한병철은『피로사회』에서 그것을?“성과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상 속에서 살고 있기”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괜찮아~?잘 될거야~”라는 노랫말처럼?‘긍정성의 과잉’?이 강요되고 강도 높은 자기 관리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사노라면,?만성적으로 피곤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가 인간의 본질이라 믿으며 살아간다.?게으름에는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고,?성실함은 당연시 한다.?당신의 성실함에 박카스를 권한다.?당신의 성실함에 보내는 작은 찬사다.?그러나 디오니소스(Dionysos)1)는 도취와 광기,?그리고 술이다.?회식 자리가 광란으로 치닫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금(불타는 금요일)’이 필요한 이유다.?밤새 놀아도 더 놀고 싶다.?놀이(play)가 인간만의 본질이기 때문일까??아니다!?놀이가 삶에서 철저하게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5-1-1

 

2.?놀이를 잊은,?그래서 동물만도 못한 삶

시간을 돌려보자.?당신이 성실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재미가 있어서 성실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바로 어린시절-노는게 생활이었던 때였다.?노동과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놀이가 곧 노동이고 놀다보니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다음날도,?그 다음날도 놀면 됐다.?그것으로 족했다.?사실 당신은 놀이(play)로부터 성실함을 배우고 끈기도 길렀다.?그러나 이젠 어른이다.?놀면 안 된다.?놀면 백수고,?낙오자,?루저일 뿐이다.?간혹 놀기만 해도 되는 사람이 있긴 하다.?돈이 많은 경우에는 놀아도 된다.?그러니 대부분의 어른들은 놀 수가 없다.

놀이를 인간만의 본질로 규정한 사람들도 있다.?바로 호모루덴스(Homo Ludens)다.?그러나 우리 주변에 호모루덴스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사실 놀이가 인간만의 본질이라는 것도 틀린 것이다.?동물도 놀기 때문이다.?동물의 놀이와 인간의 놀이가 차이가 있다면,?동물은 커서도 잘 놀지만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인간이 놀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로 한정된다. 그마저도 어른보다 더 바쁜 요즘 아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노는 것을 잊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다.?놀이를 망각하라!?당신이 꿈꿔야 하는 것은 집,?자동차,?재테크뿐이다.?길어진 수명에 대비해야 하며,?노동하는 육체를 위해 건강을 챙겨야 한다.?당신이 정규직이라면 정년을 향해 달리면 되고,?비정규직이라면 정년을 찾아 달려가면 된다.?그렇게?65세까지는 놀지 말고 살아야 한다.?그러나 이런 삶의 지속은,?놀아야 할 때 놀이를 망각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당혹스러운 문제로 다가온다.?당신은 아이처럼 노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아이와 놀아줄 수 없다.?나이가 들어 노동시장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꾸면 어떨까??놀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우리도 노는 법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최소한 노동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3.?노동?Vs?노동

고전에서 노동과 관련한 글귀를 찾아보자.?일반적으로 노동은 기피의 대상이지만 기원전?7세기 헤시오도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은 일벌이 모은 꿀을 먹기만 하며 그 수고를 착취하는 꼬리 뭉툭한 게으른 수벌과 기질이 같다.?이런 사람은 신도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적당한 순서에 따라 받아들여 제철에 나는 곡식으로 곳간을 가득 채워야 한다.?사람은 노동을 통해 번식하고 부유해진다.?신들이 보기에도 일하는 사람이 더욱 사랑스럽다.?노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지만,?노동하지 않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다.?일하는 사람은 부를 차지해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헤시오도스『노동과 나날』中-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만약 내가 철학하는(philosophieren)?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내가 생각해도 우습다.?전문적으로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그런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다른 질문을 해보자.?구걸은 노동일까??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그러나 조지 오웰은 생각이 달랐다.

거지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하지만 대체 노동이 뭘까??인부는 곡괭이를 휘두르며 일한다.?거지는 화창한 날씨에나,?궂은 날씨에나,?하지정맥이 툭툭 불거져 나와도,?만성 기관지염에 시달려도 문밖에서 일한다.?구걸도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이다.?물론 무익하기는 하지만 그럴싸한 노동 중에도 무익한 활동은 많다.?……?현실적으로 보면 거지는 수중에 들어오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여느 사업가와 다르지 않다.?거지는 대부분의 현대인에 못지않게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단지 부자가 될 수 없는 노동을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다.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中-

철학하는 것도 노동이다.?누군가는?‘잡다한 생각을 하는 것이 무슨 일인가 놀이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사실 철학자들이 치밀하게 생각을 탐구하는 것은 꽤나 머리 아픈 일이면서도 부자가 될 수 없는 노동 중 하나일 뿐이다.

 

4.?놀면서 일할 수 있는 회사 그러나 사실은 놀이 착취

놀면서 일하는 회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의 회사들이 있다.?미국의 구글이 그렇고,?한국에도 제니퍼소프트가 그렇다.?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회사를 부러워한다.?최소한 노동시간만이라도?35시간으로 줄어든다면,?야근만 없다면,?주말 근무만 없다면,?우리는 더 놀 수 있지 않을까?

부러움을 뒤로 하고,?잠시 고민을 해보자.?대량생산체제에서 우리는 항상 노동 착취를 당해왔다.?지금은 금융자본과 함께 신용을 착취당하고 있다. 당신은 신용을 담보로 학자금 융자를 받았고,?전세자금 융자를 받았다.?그리고 당신은 그 신용을 지키기 위해 다시 당신의 노동을 팔고 있다.?놀면서 일하는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구글과 같은 회사는 새로운 착취의 유형을 보여줄 뿐이다.?놀면서 일한다는 회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다.

칸트는?“놀이가 상상력의 바탕”이라고 말한바 있다.?놀이는 상상력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당신에게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원하기에 놀이(play)를 권할 뿐이다.?지금은 구글과 같은 회사가 적기 때문에 놀면서 일하는 것이 부러워 보일 수 있다.?놀이와 일을 병행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꿈의 직장이라고 불릴 수 있다.?그러나 많은 회사가 구글과 같은 형태가 된다면 놀이 착취도 본격화될 것이다.

 

5.?놀이의 해방적 본질 그리고?『에코토피아 뉴스』

놀이란 무엇인가??놀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존재하고 놀이를 정의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놀이를 연구하고 정의한다고 해서 놀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놀이는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다.또한 감정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우리가 놀이를 통해 얻는 것은 즐거움이며,?때로는 그 즐거움에서 해방감을 느낀다.?나는 놀이의 본질은 놀이의 무목적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놀이에는 목적이 없다.?단지 즐거우면 된다.목적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논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놀이는 촘촘하게 짜인 이성의 그물을 벗어나게 해준다.?그 그물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도 반짝하고 빛나는 게 아닐까?

문제는 놀이를 우리의 삶으로 어떻게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가에 있다.?우리가 놀이를 삶에 두는 방식은 취미생활이다.?이런 방식의 놀이가?‘불금’을 즐기는 것보다 좀 더 건전해 보일 수는 있다.?그러나 이것도 결국 노동을 위한 활력을 재생산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나도 이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일과 놀이와 삶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살 수 있을까??희망을 품으면서도 아직은 절망적이다.『에코토피아 뉴스』의 글귀로 이 감정을 대신한다.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당신은 우리와 함께일 수 없습니다.?당신은 전적으로 과거의 불행한 시대에 속하므로 우리의 행복조차 당신을 지치게 만들 겁니다.?다시 돌아가세요.”

-윌리엄 모리스『에코토피아 뉴스』中-

 

-주석-

1) ?디오니소스를 로마 신화에서는 바카스라고 한다.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풍경3학교에서는 오지 말라고 해도 그래도 실실 가니까 또 별 말이 없어. 그래서 좀 더 다녔다. 응, 오다가다 가다말다 했제. 큰 언니는 얼굴에 표가 자꾸 나. 나는 7살에 병이 들었다카는데 내가 스스로 안 거는 아매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뭐 병이 들었다 해도 그기 무슨 병인지 얼매나 심각한 건지는 몰랐제. 바닷가에 있는 바위는 넓고 크다 아이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큰 바위에 어짜다 닿으모 그 부위가 빨갛게 불키는 기라.

그리 긁었던 기억은 없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하모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밤에 그 왜 큰 가마솥 안 있나? 그 솥 밑에 붙어 있는 검정을 긁어 와서 잘 때 되모 불킨 데에 솔솔 흩어서 뿌려주더라. 그라모 다음 날 아침에 보모 그 불킨 기 흔적도 없어. 그래도 바위에 닿으모 또 불키고, 검정은 그때뿐이고…. 그래도 그기 유일한 약이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소록도 가기 전까지 약을 묵거나 바른 기억은 없어.

시간이 가니까 불키는 것 말고도 인자 무릎 우로 종기가 한두 개 나는 기라. 그래도 안 보이니까 그런 건지 그럭저럭 슬슬 다니고 때로는 친구들하고 놀기도 했다. 아매도 국민학교 4학년 때였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바위를 펄쩍 거리며 옮겨 다니며 노는데 그만 바람에 치마가 훌렁하고 날리는 기라. 친구들이 그만 봤다. 다리에 소소하게 빨갛게 불키 있는 거를. 치마를 얼른 덮었는데 친구들이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대.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역시 담임이 나오라쿠는 기라. 친구들이 담임에게 말했지, 뭐. 담임이 치마를 걷어보더마 인자 진짜 학교 오지 마라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집에 왔지 뭐, 어짜겄노. 오지 말라는데, 안 가야지. 또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서 산에서 놀다가 해가 지모 내려오고 그랬다. 뭐 먹었냐고? 산에 가모 묵을 거 천지다. 다래가 꼭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보이는데, 그런 기 여기저기 많았다. 밥만 없지 묵을 거는 많아서 언니하고 나는 산에서 있는 게 편했다.

그런데 인자는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 산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자꾸 눈치가 보이더라. 사람들이 자꾸 소록도에 가라고 하는 기라. 우리 아버지 엄마도 어쩔 도리가 없어.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 면사무소에서도 오고 지서에서도 오고 마을 사람들은 내내 ‘왜 안 보내노? 언제 보낼 끼고?’ 하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를 자꾸 뭐라카고 한께 우리 부모님도 버틸 재간이 없었어. 언니하고 나 안 보내고 데리고 있을라고 얼매나 애를 썼다고. 그래도 더는 못 버텨. 성한 둘째 언니하고 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남동생들을 생각하모 안 보낼 수도 없는 기라.

내가 12살 때, 1952년도에 소록도로 갔다. 동생들이 있으니까 아버지 엄마는 못 오고 나하고 언니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 부모님은 좀 있다가 우리 보러 왔제. 언니라 해도 정신이 그러니 내가 언니 손을 꼭 잡는 기 아이고 우리 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견내량 다리를 건너 버스 타고 가다가 들키모 아무 데나 차 세우고 내리라 하고 그라모 내리고, 그래서 언니하고 손잡고 걷다가 차가 오면 손들어서 타고, 또 쫓겨 내리서 걸었다. 묻고 물어서 처마 밑에 자고 해서 이틀 만에 소록도에 닿았다. 여관에 갔는데 나가라 해서 길에서 잤다.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깝고, 게가 그렇더라.

내가 갔을 때에는 소록도에 마을이 7개 있더라. 어데, 소록도는 구역을 나누어서 병 상태에 따라서 다리게 살게 해. 병 상태가 양호한 한센인은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야 해. 나는 나이가 어리도 병상태가 양호하다고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라 하데. 가서 물도 떠 주고 밥도 멕여 주고 잔심부름도 하는데, 제일 못할 기 대소변 수발드는 기라.

그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이었거든. 우리 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일은 안 했제. 나는 병표가 마이 안 나고 그리 안 깊어서 굳이 소록도로 안 가도 되는데 우리 언니 혼자 못 보내니까 같이 간 거거든. 우리 부모님이 큰 딸이 걱정돼서 막내딸을 딸리 보내면서 맘이 어땠을꼬. 동네 사람들도 언니보고 난리지 나보고는 그리 안 했어.

밤새 요강에 오줌을 싸고 그래. 그라모 나는 아침에 일찍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그 요강을 비워야 돼. 그래도 다행인 게 똥은 딴 데 쌌어. 똥은 거름이 되거든. 오줌도 따로 모았어. 아무 데나 버리모 안 되고 그 모아 놓는 데에 갖다 버리야 하거든. 밤새 요강이 가득 차니까 어두컴컴한 새벽에도 일어나야 해. 빨리 안 가모 욕도 하고 난리가 나. 내가 빨리 요강을 비워야 또 싸지. 모아 놓는 데는 사람들이 있는 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게까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가모 오줌이 막 내손으로 손목으로 타고 흘러내리.

손이랑 손목에 오줌이 마를 날이 없더라. 그때 겨우 12살인데…. 겨울이 너무 힘들었어. 날은 춥지. 요강은 무겁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두 손으로 받치 들고 저 멀리까지 가모 팔이랑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아무리 살살 걸어도 오줌은 출렁거리고 흘러 내리. 아무리 빨리 걷고 빨리 움직이도 거리가 멀고 하니까 요강을 비우고 가모 욕이 들려. 내가 안 가모 오줌을 못 싸니까 오줌이 누고 싶은 사람은 참으면서 욕이 나오는 기지. 하하하. 욕 듣는 기 싫어서 빈 요강을 들고 종종거리기도 하고 뛰기도 했어.

한겨울에는 손목이랑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것 같애. 그라고 요강을 씻는 것도 내가 했거든. 그때 따신 물이 있나. 그냥 찬물에 씻는데 너무 춥고 손이 시린께 오줌 냄새도 안 나. 누가 나를 씻기 주는 것도 아이고, 맨날 손이랑 손목이 틀어서 보기 숭했어. 겨울에는 튼 데가 터지서 피도 나고 가렵기도 하고 그렇는 기라. 그게 오줌이 흘러 내리모 따갑고 씨리고, 그라다가 딱지가 앉고, 어짜다 딱지가 떨어지모 또 피도 나고 그랬어.

더러버도 어짤 기야. 안 하모 안 되는데. 소록도에 간 이상 나가지도 못해. 온통 바다인데 어데로 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인자 그때 마음은 기억이 잘 안 나. 그냥 마음이 아파. 12살짜리 계집애가 오줌 가득 든 요강을 들고 찬바람 속을 발발 떨고 가던 기억만 또렷하고 자꾸 떠올라. 그래도 그기 있던 사람들이 나 어리다고 마이 예삐해 주고 잘 해줬다. 오줌을 참고 있으모 성을 내도 평소에는 참 따뜻하게 대해줬어.

어데로 가나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은 있어. 그런 사람들 성질낸 거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하나 잘못하나 성질 내는데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없는 기라. 그 사람 천성이라. 그런 사람은 잘해 주도 툴툴 못해 주모 성을 뭐같이 낸다. 그런 사람의 성질에 내가 움직이 봤자 나만 손해라.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넘겨야 해.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기 어딨노.

풍경2내가 살던 부락에서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환자들이 스스로 밥을 못하니까 단체로 밥을 해서 줬거든. 나도 식당에서 밥 먹었제.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어. 날짜도 안 잊혀져. 4월 27일 주일이었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가서 나물을 뜯어 오라 카더라. 요강 비우는 것보다는 나물 뜯는 일이 안 좋나.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가서 나물을 뜯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놀래서 허겁지겁 갔는데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좀 늦었어. 마이 안 늦고 쪼금 늦었어.

그래도 규칙을 어긴 게 돼서 감독관한테 불리 가서 종아리를 맞았어. 근데 좀 세게 때려졌는가봐. 그만 뼈가 부러졌던가봐. 종아리도 좀 터지고. 자꾸 덧나. 진물도 나고 안 낫는 기야. 그래도 오줌 요강은 들고 다녔제. 워낙 중환자도 많고 나는 부모도 없이 정신없는 언니하고만 있응께 자꾸 일을 해야제. 아팠지. 얼매나 아팠다고. 그게는 사지 있는 사람은 아프다고 봐 주는 것 없어.

날이 지나가니까 온몸이 불덩어리라. 열이 너무 심해서 어떤 날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그랬어. 보다 안 되니까 다리를 끊자 하대. 치료법이 뭐가 제대로 없었어. 살면 사는 기고 못 살고 죽으모 죽는 운명이지. 의대가 있는 데에 병원이 있었어. 아이라, 지금 겉은 의대가 아니고 진짜 의사는 몇 안 되고 거기서 흰 가운 입고 의사 도와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데를 의대라고 불렀어. 해부도 하고 그랬제.

수술실 천장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어. 둥글고 큰 거울인데 수술대 위에 누워서 보면 내 얼굴까지 다 보여. 수건으로 얼굴도 안 덮어줬어. 전신마취가 어데 있노. 그냥 허리 아래만 마취해. 수술하면서 저거끼리 웃는 소리, 말하는 소리 다 들어. 그라고 기계 덜그덕 거리고 다리 자르는 소리도 들리고 보였어. 봤지. 거울로 보다가 기절해버렸지, 뭐.

눈 뜨니까 당가에 거꾸로 매달아 놨어. 오른 쪽 다리가 없대. 링겔도 없고 눈 뜨고 물이라도 넘기모 사는 기고 안 그라모 죽는 기라. 나중에 이야기 들은께 몇 시간 동안 눈도 안 뜨고 못 깨어났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부실로 옮길라고 했는데, 우리 언니가 가슴이 따뜻하다고, 아직 안 죽었다고 내 가슴 위에 엎드려서 안 비켰어. 사람들이 나를 못 옮겨가게 내 위에 팍 엎어져서 “우리 동생 안 죽었다.”고 울고불고 했던 모양이야. 울 언니가 날 살린 셈이지.

열이 너무 마이 나고 오랫동안 열에 시달리고 나니까 얼굴 살이 축 늘어지대. 그냥 살이 축 늘어지고, 지금 나 봐라. 얼굴이 이리 축 처져서 바위 얼굴 같다 아이가. 웃기는 와 웃노? 내가 예삐다고? 니 거짓말도 잘 한다. 눈도 깜짝 안하고 입도 안 삐뚤어지고 그리 거짓말을 하나? 허허허 우리 아버지가 나 다리 잘리고 난 뒤에 와서 내 얼굴 보더니 “얼굴이 큰 바우 얼굴 같다.” 이라대. 그래가 내가 보니까 진짜 그렇더라. 그 전에는 좀 예뻤겠제?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모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돌아 오더라.

며칠 누워 있었던 것 같애. 열도 내리고 몸을 좀 움직일만 하자 또 요강 비우러 다녔지. 옳은 치료도 없고 누가 있어서 나를 돌봐 주겄노. 우리 언니야 내 옆에 껌딱지 마냥 붙어 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이라. 목발이 어데 있노? 나무 작대기 하나 주워서 그거 짚고 절뚝거리고 다녔지 뭐. 맞을 때 양쪽 종아리를 맞았거든. 응? 점심시간에 늦었으니까 맞았지. 그게는 규칙이 하도 엄해서 딱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해.

왼쪽 다리도 마이 아팠어. 그래도 그 다리로 안 움직이모 어떻게 해? 누가 밥 먹여주나? 작대기 짚고 오줌이 흐르는 요강 들고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절뚝거리고 다니다 보니 그마 왼쪽 다리도 탈이 났어. 너무 아프고 또 열이 나. 봄에 오른쪽 다리 자르고 난 후로 여름 내내 떨리기도 하고 열도 나고 춥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슬펐냐고? 잘 모리겄다.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해 가을에 왼쪽 다리도 마저 잘랐다. 방법이 없었다니까. 요새하고 달랐어. 그라고 그게는 소록도다. 소록도가 어떤 데인지 알기나 하나? 지금 소록도는 그때 소록도가 아이다. 지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모 우리 인생 아무도 모린다. 나도 가끔씩은 꿈이던가 생시던가 싶기도 하다. 어찌 다녔냐고? 처음에는 엉덩이로 밀고 다니다가 좀 있으니까 나무다리를 해 주더라. 응, 그때도 의족이 있었다.

지금 의족하고는 마이 달라도 걸어 다닐 수는 있었다. 나무로 동구랗게 홈을 파서 그게다 다리를 넣고 끈으로 묶어 다녔다. 처음에는 무겁고 불편해도 그게 아니모 못 걷는다 아이가. 그라께 열심히 연습했다. 나무다리로 다니면서 심부름도 하고 요강도 비우고 우리 언니도 돌봐주고 그리 했다. 나 때린 사람도 미안타 하더라. 그리 될 줄 몰랐다고, 일부러 그리 한 거는 아이라고 하더라. 그라모 됐지. 일부러 그라는 사람이 어데 있노.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됐다. 으응, 원망 안한다.

갑자기 사진은 무신 사진이고? 에이, 안된다. 니 얼굴 베린다. 커다란 내 얼굴이 니 옆에 있으모 니 얼굴 베리서 안 된다. 너무 붙이지 마라. 얼굴을 저리 좀 옆으로 해봐라. 니 얼굴이 고운데 나 때문에 베리모 어짤라고 자꾸 옆에 붙어쌌노. 사진? 올리도 된다. 누가 나를 알겄노? 어데다 사진을 낸다꼬? 내 이야기하고 같이 올린다고? 그리해라. 괜찮다. 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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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금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문제는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험공부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낮게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도 철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하고 싶은 생각 방향이나 행동 방향은 늘 자신에게 편한 방식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은 그 행동에 맞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그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좋은 시험성적을 원하면 ‘시험공부’라는 원인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다.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가 이렇게 머리 쓰면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편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놓고는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런 것을 두고 철학에서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라고 한다.

소망적 사고란 생각을 하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유 없이 자신의 소망에 따라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방식은 대체로 소망적 사고인데, 철학은 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망적 사고를 해도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망적 사고를 하면 일단 마음은 편해지지만 이후에 지속적으로 불편이 야기되고 합리적인 해결이 안 되어 문제가 더 장기화되기 때문에 소망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소망적 사고는 결국은 나를 더 힘든 길로 몰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출처: http://skyfm.tistory.com)

(출처: http://skyfm.tistory.com)

어느 날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이 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 어딘가에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소망적 사고이다. 오히려 로또가 되는 것은 번개 맞는 확률보다 낮고,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생각패턴과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 혹은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소망적 사고의 문제를 타인과 갈등을 겪을 때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갈등상황에서 우리는 ‘그 사람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그는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데, 결과는 나의 행동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의 행동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고, 그는 나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맞게 내 행동을 바꿀 의사가 없다. 거꾸로 내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상대방이 야속할 뿐이다.

우리는 내 행동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에 들어해달라고 요구하면 화를 내게 된다. “도대체 너는 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그리도 안 해주느냐?” 하면서 원망을 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굉장히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그 사람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행동하는 대로 상대방이 받아들여주길 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중논리이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논리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논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이중논리를 구사한다고 한다.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줄 의사가 없다.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이중논리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논리를 마음 편하게 구사하면서 상대방은 마땅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바꾸어야 하고 또 마땅히 내가 하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과 상대방의 마음, 상대방의 행동과 나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내 행동에 맞추거나 내 행동을 상대방의 마음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편이 쉬운가?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뿐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이지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다.

바랄 수 없는 것과 바랄 수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려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해오던 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결과,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기 쉬운 행동을 해놓고서는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비합리적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지해온 습관대로 행동하면 그동안 겪어왔던 결과만 다시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나의 행동패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해야 유효한 고민, 필요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면, 바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없는 바람을 가지는 것을 그만 중단하게 된다.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랄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바람의 정도가 약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에 여러분의 6살짜리 조카가 “저는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싶은데, 화장실은 정말 정말 가기 싫어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화장실에 가야 또 다음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위와 장을 비우게 될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여러분은 그런 허황된 소망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논리적 불가능성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쓸모없는 바람에 덜 휘돌리게 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이 왜 바랄 수 없는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나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느 설문조사에서 남자들은 세련되면서도 검소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세련되려다보면 소비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검소하기는 어렵다. 남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이 좋아서 저렴한 비용에 세련되게 하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세련되려면 옷이며 액세서리 구두 등을 다양하게 착용해보고 감각을 키워야 하는데 검소하게 한다고 해도 얼마나 검소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여자가 성격이 안 좋다면? 결국 남자들은 그 세련되고 검소한 사람이 성격도 좋고 외모도 좋고 데이트비용도 내며 애교까지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여자들이 책임감 있고 소신 있으며 나에게만 다정다감하고 그러면서도 근육질에 키까지 큰 남자친구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임감 있고 소신이 있으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설사 자신의 여자 친구라 할지라도 그 원칙을 어길 경우 비판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여자친구에게만 다정다감하겠는가? 여자친구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은 다른 여자에게도 다정다감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다정다감함의 특성을 한 명에게만 발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발휘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만족할까? 내가 원하는 특성을 가진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을 원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을 수 있도록 생각을 조절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은 효과적으로 잘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 바라봤자 되지도 않는 일을 바라느라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하는 우매함은 이제 그만 날려 버려야 한다.

헤겔미학: 예술을 알지니 예술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 같으냐?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5

헤겔미학:?예술을 알지니 예술이 너희를 자유케 할 것 같으냐? <도봉도서관 나이듦의 철학> 5

이관형(한국예술종합학교)

 

 

근대(modern)?혹은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비판은 사상의 영역에서는 주로 동일성을 향한다.?이때 집중포화를 받은 것은 헤겔이다.?이 강의는“1)동일성이 무엇이며 동일성이 왜 문제가 되는가? 2)동일성에 기초한 철학이라고 비판 받는 헤겔의 예술관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이를 살펴봄으로써 철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개념적 파악이 아니라 미감을 통해)?동일성이 과연 극복 가능한지를,?숨이 막히도록 촘촘히 짜인 근대적 삶의 굴레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는지를?(답을 내린다기 보다는 오히려)?되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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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헤겔 미학은 그의 철학체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그런데 그의 철학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그의 체계를 흔히?‘동일성’의 체계라고 한다.?그러므로?‘동일성’이 무슨 말인지라도 알아봄으로써 그의 체계에 대한 이해를 갈음하고자 한다.?지나치게 피상적·도식적인 이야기가 되겠으나 체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헤겔미학은?‘앙금없는 찐빵’, ‘소없는 만두’일 것이다.1)

1)?파르메니데스의 동일성 논리?-?존재의 옹호와?(개념을 통한)?존재 분할의 반대

-존재의 희미한 빛:?존재의 원초성을 옹호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존재의 찬란한 빛:?존재의 종국적 완성인 동일성,?평등성,?충만성의 옹호

“존재는 쪼갤 수 없다.?왜냐하면 모든 것이 같기 때문이다.?그리고 존재의 응집을 막을 수 있도록 여기 또는 저기에 보다 강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또 덜 강한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오히려 존재자에 의해 충만되어 있다.”

-“그것들(인간의 잘못된 견해들)에 따라 두 형식들을 명명한다.?이것들 중에 하나는 있으면 안 되는데 이 점에서 그것들은 오류에 빠지고 있다.?그리하여 그것들은 형태를 대립시키고 특징들을 서로서로 분리시킨다.”(파르메니데스 단편)

2)?플라톤의 동일성 논리?-?파르메니데스적 존재의 이데올로기화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이후 자연철학의 전개-생성(헤라클레이토스),?양(피타고라스),?질(엠페도클레스),?원자들의 양적 결합(데모크리토스)-를 통해 그리고 마침내 아낙사고라스에 의한 존재의 운동에 대한 분리적 파악(운동주체nous와 운동내용)에 이르러 이러한 분리된 자연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원초성)는 이데아가 된다.?즉 진,?선,?미 자체라는 이데아로 규정된다.?현실은 이데아의 모사이기 때문에 진선미의 원형과 같기도 하고(同)?다르기도(異)?하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이데아와 같은 측면은 긍정·강화하고 다른 측면은 부정·억제하여 원형인 이데아로 부단히 다가갈 수 있다.?이 변증법적 운동을 이끄는 힘은 이데아가 지닌 에로스적 견인력이다.?에로스의 운동과정은 감성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감성을 넘어서는 데에 있다.?이러한 운동이 일어나는 곳은 사회(polis)이며 사회는 통치자,?군인,?생산계급이 피라미드 구조로 조직된 노동 분업의 체제이다.?이에 대해 하이데거는?“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열림을 시작한 존재가 플라톤에 의해 망각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한다.

3)헤겔의 동일성 논리?-?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

독일관념론(Der deutsche Idealismus)은 이상주의로도 옮기지만 이데아주의로도 옮길 수 있다.?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의 역사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이 생각난다.?헤겔은 훨씬 풍부하고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체계를 완성시켰지만 그 골격은 플라톤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DSC09008-1헤겔의 논리학의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와 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질은 엠페도클레스의 질개념을,?무한성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개념을,?대자존재(F?rsichsein)는 아낙사고라스의 주관성개념을,?양은 피타고라스의 수와 데모크리토스의 양적 원자론을 다루고 있다?···여기까지가 존재론이다.?본질과 현상,?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카테고리는 플라톤의 철학을 서술한다.?이에 이르러 존재는 본질과 가상 사이의 반사관계로 발전한다.?이데아의 세계는 본질적 세계이며 현상의 세계는 이데아를 반사 또는 반성할 뿐이다.?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이념(Idee)의 차원으로 고양된다.?헤겔은 이념이 생명,?인식(진과 선),?절대이념으로 나누어 전개한다고 본다. ···?생명의 이념은?···?인식의 이념으로 이행에 그 의미가 있다. ···?절대이념은 진과 선의 통일이며 생명은 절대이념에 이르기 위한 단계와?···?절대이념의 운동을 위한 장···이다.?헤겔의 절대이념은 주관성인 의지(선)와 객관성인 대상(진)?사이가 막힘없이 소통되는?···체계인 것이다.”2)

 

2.헤겔 미학의 특징3)

헤겔의 철학체계를 크게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예술을 다루는 곳은 정신철학의 맨 뒷부분 절대정신에서이다.?즉 자연과 정신의 발전도정을 거치는 이념의 자기전개가 가장 최고점에 이르러서다.?플라톤 식으로라면 진선미의 이데아에 도달하는 것이다.?예술은 종교,?철학과 더불어 절대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1)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Scheinen)이다.

헤겔의 철학은 자유의 이념의 전개과정에 대한 서술이다.?그러므로 예술,종교,?철학은 자유의 이념이 실현되는 지점이다.?그렇지만 이 삼자 간에도 위계는 있다.?삼자 각각에 해당하는 정신능력은 직관,?표상,?사유이다.?예술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지며 감각과 대상에 여전히 의존적이다.?그러므로 삼자 중 가장 하위의 것이다.?표상은 직관보다 우월한 것이지만 직관의 내면화일 뿐이다.?표상은 감각적·대상적 직관을 내면으로 옮겨 놓은 것일 뿐 표상의 내용에는 여전히 감각적인 상이 자리한다.?종교는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에 대한 표상을 믿는 데서 성립한다.?그러므로 아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철학은 사유를 통해 절대자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철학에 이르러서야 신은 그것이 외적인 것(직관)이든 내적인 것(표상)이든 어떠한 감각성·대상성에 의존하지 않고 정신의 순수하고 내면적인 활동(사유)을 통해 파악된다.

2)미학은 예술철학이다.?즉 예술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헤겔은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위를 주장한다.?예술은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라는 점이며 정신적인 것이 자연 산물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미가 자연미보다?한층?고차적이라는 점만은 이미 주장할 수 있다.?왜냐하면 예술미는?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또 거듭 태어난?미이며,?정신과 그 산물들은 그만큼 더 자연과 그 현상들보다 고차적이며,?또 그만큼 더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실로?형식적으로?보면,?인간 머리를 스치는 어떠한 저급한 착상이라도 그 어떤 자연 산물보다?우월하다.”4)

3)내용미학이다.?이념의 내용이 감각적 소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예술이다.?그러므로 예술이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예술미)의 이념은 다른 말로 이념의 감각적 상,?즉 이상(das Ideal)이다.?각 시대별로 나타난 예술미의 이념,?즉 이상에 대한 개념적 파악이 미학 혹은 예술철학이다.

예술의 형식은 그 내용(즉 이념)에 따라 각 시대적으로 상이하게 규정된다.다른 한편 예술은 이념의 감각화이므로 감각화하는 질료(소재)의 차이에 따라서 각각의 장르를 형성한다.

4)예술형식론과 장르론

상징적 예술형식-이상의 추구,?정신이 자연에 못 미침.

고전적 예술형식-이상의 성취,?정신과 자연의 조화.

낭만적 예술형식-이상의 초월,?정신의 자유는 자연의 제한을 초월함.

①상징적 예술형식

예술형식의 역사는 상징,?고전,?낭만의 삼 단계로 발전해왔다.?상징적 예술형식의 시대는 이상을?‘추구’한다.?신적인 것(절대자)은 아직 분명하게 규정되지 못한다.?이념은 개별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신적인 것의?“구상화에 대한 한갓된 찾아 헤맴”?내지?“그것을 이루려는 분투와 애씀”만이 있을 뿐이다.?절대자는 개별성의 구체적인 형태 대신에,?정신의 제대로 된 표현이 될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자연대상으로 치환될 수 있을 뿐이다.?상장이란 본질적으로 이러한 부정합성을 통해 특징지어진다.?상징을 통해 표현된 것은 낯선 것,?이질적인 것에 머문다.?따라서 이 단계에서 지배적인 미적 범주는 미가 아니라 숭고이다.?왜냐하면 신적인 것을 질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무능력은 양적인 극단으로,?즉 과도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상징적 예술형식의 전형적인 장르는 건축이다.?즉 상징적 예술은 신들을 위한 장소만을 제공할 뿐,?그 신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하지 못한다.

②고전적 예술형식

상징적 예술형식은 내용에 적합한 형상화를 이룰 수 없는 무능력의 산물이다.?이에 반해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이런 무능력은 극복된다.?아름다운 것 혹은 미적 이상은 비로소?‘성취’된다.?표현되어야 할 대상과 표현된 것이 완전하게 일치함으로써 고전적 예술형식은 미의 이상 내지 예술의 이상의 진정한 실현을 이룩한다.?따라서 이 단계는 예술의 정점,?미의 정점이다.?형태는 더 이상 낯선 것,?이질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기화된다.?절대자는 더 이상 생소한 자연적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 신체의 형태를 통해 개별성으로 표현된다.?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신들을‘절반의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신들을 신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따라서 가능한 최고의,?이념의 감각각 현현이며,?그러한 한에서 예술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종교를 위한 어떤 부가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종교이다.?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의식에 가장 잘 부합하는 예술 장르는 조각이다.?조각에서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이제 신적인 것은 건축에서와는 달리 그것이 거처하는 공간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그리스 신상들 속에서 자신을 위한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다.

③낭만적 예술형식

정신의 발전은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성취한 미와 예술의 조화와 완성을 넘어서?‘초월’한다.?즉 낭만적 예술형식에서 예술은 완성이 아니라 해체된다.외견상 이러한 해체는 이미 상징적 예술형식에서 볼 수 있었던 내용과 형식의 대립 및 차이로 되돌아 가는 것이DSC09009-1다.?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부조화는 예술 이전 단계로의 퇴행이 아니라 예술 일반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 내지 넘어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상징적 예술형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념과 형상의 불일치와 분리,?부조화가 일어나지만 양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상징에서는 이념의 결핍이 형상화의 결함을 수반하는 데 비하여 낭만적인 것에서 이념은 정신과 심정으로서 그 스스로 안에서 완성된 것으로 나타나야 하며 이와 같은 더 고차적인 완성에기반하여 이념은 자기의 진정한 실재성과 현상을 오로지 자기 자신 속에서 찾고 또 완성시킬 수 있음으로써 외적인 것과의 통일에서 벗어난다.?장르적으로 낭만적 예술형식은 삼차원적 자연성의 최초의 지양인 회화로 시작하여 시간성 안에서의 순수 내면의 울림인 음들의 질서인 음악을 거쳐,?정신적인 것을 말을 통하여 표상하게 하는 시문학(poesie)에 이르러 종국에는 해체되기에 이른다.

 

3.예술의 종언?

미의 추구인 예술은 이미 고전적 예술형식의 단계로서 종언을 고한다.?그렇다면 숭고로서의 예술은 어떻게 되는가??숭고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절대자 역시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술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그렇지만 절대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예술은 사라지지도 사라질 수도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우리는 더 이상 예술작품을 신적으로 경배하지는 않는다.?여전히 고대희랍의 신상들을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마리아가 아무리 존귀하고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하더라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다.?이제 우리는 그러한 예술작품 앞에 더 이상 무릎을 꿇지 않는다.”(헤겔)

“예술은 절대이념의 영역,?즉 자유의 영역이다.?그러나 그 자유는 철학적 사유의 그것에 필적할 수는 없다.”

 

1) ?동일성에 대한 논의는?“이준모,『밀알의 노동과 공진화의 교육』,?한국신학연구소(1994)”에 의한다.

2) ?이준모, 33쪽

3) ?권대중,?헤겔의 미학, (안에)?미학대계 제1권,?서울대출판부.?주로 이 글을 요약함.

4) ?Hegel,?『Vorlesungen ?ber die ?sthetik?Ⅰ』, in Werke in zwanzig B?nden 13, S.14,?이창환 역(미출간)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도봉도서관 인문독서아카데미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덕 윤리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와중에서도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됩니다. 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이나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 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세월호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됨, 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나 애국심 논란도 이러한 미덕과 악덕의 범주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덕과 미덕의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 이제이북스, 2006)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 <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 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 ‘좋은 삶’이 주제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 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 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자의 실천적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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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2007)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 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 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 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 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 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을 겨냥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 이론이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각 사람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 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 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즉,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는 데에 강제적인 규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 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 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 ‘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 동물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 <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 그리고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고려하면 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 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 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인 <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哲人王)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다시 말해서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 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politeia)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 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 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 ‘완전하게’(성숙하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 “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경험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므로,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덕목입니다. 성숙한 어른은 경험 많은 의사처럼 최고의 규범이나 이론을 곧바로 현재 상태에 적용하지 않고,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여기에 알맞게 규범을 적용합니다. 레시피대로가 아니라 손맛으로 요리하는 숙련된 요리사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행동 방식을 억제하고 중용(中庸)의 태도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과함이나 부족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mesotes)’입니다. 이 가운데를 수학적인 도식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평균값이 아닙니다. 중용은 그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은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함(미덕)입니다. 초보자와 달리 원숙한 지혜로운 어른이야말로 원칙과 상황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냅니다. 이는 새로운 이상에 사로잡혀 조급한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미숙한 청년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중용이 타락하면 이 말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노회한 정치가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신하는 영리한 기회주의자, 그리고 나서지 않고 엎드려 복종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처신을 치장하는 데 쓰일 뿐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 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 지성적인 관조(명상)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 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 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 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에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 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 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양육을 받고, 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강조하는 유교도 같은 문제점을 앉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사진1>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재작년 겨울이었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학교 본관건물 뒷마당을 걷고 있었다. 눈이 내려 교정 전체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본관 뒷마당 한쪽 구석에는 히틀러 파시즘에 맞서 저항하다 죽음에 이른 훔볼트 대학교 학생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이날 비석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높여 있었다. 새하얀 눈에 덮인 비석과 꽃다발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잔하게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색색의 꽃송이들은 지금도 누군가 희생된 자들, 쓰러져간 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꿋꿋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 그리고 분단과 냉전이라는 독일 현대사의 흔적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려는 독일인들의 노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벽에서는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벽화를, 거리에서는 조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의 흔적들을 보존하려는 베를린의 노력은 이 도시가 현재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새로운 현대예술의 메카이자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Ged?chtniskirche)는 이 도시를 새로 찾은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될까?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사진2>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거대한 교회와 호화로운 궁전이 주요 관광지로 손꼽히는 여느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베를린의 전통적인 관광지인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895년 완성된 이곳은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그의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교회다.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소연방들로 분열되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봉건적인 잔재 속에서 낙후된 상태를 타파하고 급속한 근대화와 공업화를 이룩하여 유럽 최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이러한 독일 통일과 그 이후 독일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113m의 높이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큰 교회당을 가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 독일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 교회는 2차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배당과 잘려나간 첨탑의 꼭대기는 급격한 근대화 이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나아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향해 치달아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폐허와 분단이라는 처참한 상태로 전락해버린 현대 독일의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를 반영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 트라우마를 가리기 위함이었는지, 전쟁 이후 서베를린 당국은 도시 전체의 재건에 맞추어 교회 역시 재건축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베를린 시민들은 2차 대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교회를 훼손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시당국의 재건축 계획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폐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 교회로 관리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이, 그리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과거를, 그리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비

<사진 3> 홀로코스트 기념비

시내 중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이 건축물 바로 옆에는 지난 2005년 세워진, “살해된 유럽의 유태인들을 위한 기념비”, 일명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축구장 두 개 크기인 13,100 m² 면적의 부지 위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크기로 죽은 자의 관을 형상화한 모양의 조각들이 세워져 있고 관광객들은 각 조각상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이 지어질 때 ‘과연 시내 한 복판에, 그것도 그렇게 넓은 땅 위에 꼭 유태인 기념비를 지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시내 중심이자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연방의회 건물 바로 인근에, 그것도 드넓은 부지 위에 조성된 이 기념비들은 독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여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노이에 바헤

<사진 4> 노이에 바헤

이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서울의 종로처럼) 베를린에서 가장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훔볼트 대학교, 국립 오페라 극장, 베를린 돔과 같은 주요 역사적인 건물들이 몰려 있다. 그런데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이러한 역사적 유적들 한 가운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조각상이 건물 안쪽에 전시되어 있다. 보통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반전 예술가인 케테 콜비츠(K?the Kollwitz)가 조각한, 쓰러진 병사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놓여 있다. 일체의 조명이 없는 커다란 건물 내부에는 어둠이 깔려 있고 오로지 입구와 천장의 틈새를 뚫고 온 햇빛만이 이 피에타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남긴 콜비츠는 그 자신이 당시 열여덟이던 둘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였으며, 이 피에타상은 따라서 콜비츠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한 호소력과 무게감은 이러한 그녀 자신의 슬픔과 상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쾰른의 콜비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녀가 만든 반전 판화에는 “전쟁은 결코 다시는!(Nie wieder Krieg!)”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 스스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 전쟁의 폭력과 광기를 비판하고 반전을 호소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그 호소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발사한, 시신의 뼈까지 태워버리는 악마의 무기 백린탄을 실은 미사일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우크라이나 반군이 군항기로 오인해 저격한 민간 비행기에 탄 2백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 순간에도 케테 콜비츠가 조각한 피에타 상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사진 5>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6백만 명의 유태인과 소수자들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라는 참담한 비극이 탄생한 곳은 베를린 남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 반제(Wannsee) 인근의 별장이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친위대(SS)의 제국보안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나치 당, 친위대, 경찰의 고위 간부들을 이곳으로 소환한다.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논의하는, 이른바 “반제 회의(Wannsee Konferenz)”의 시작이었다. 이 별장은 지금은 유태인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치의 거물급 고위직 간부들이 아우슈비츠, 다카우 등 죽음의 수용소에서 행해진 가스실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최종해결책”이 논의된 곳이라서 그런지,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음산하고 오싹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내부에서는 나치 시기 선전부 장관 괴벨스(Goebbels) 등에 의해 이뤄진 유태인 혐오 연설을 소개한 당시의 신문 기사,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현황 등이 전시되어 있고 관람 코스의 맨 끝에는 이곳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결정한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최고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를 비롯한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선조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 글과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반제 회의에서 회의록을 작성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점령지역 유태인들뿐 아니라 동맹국, 중립국, 적국 등지의 유태인을 모두 합쳐 총 1천 1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전쟁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전범재판을 받지만, 회의록 작성자이자 유태인 수송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도주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다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는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고, 전체주의적 지배란 이처럼 무반성적이고 모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익명의 지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우리가 익명의 지배라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강요하는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관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한 사회의 노력은 끔찍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반제 저택의 유태인 기념관에서 본,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가 진술한 내용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학교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나치 범죄자로 배울 때 친구들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을 기억하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는, 그러나 자신은 나치 정권을 수립하고 유태인 대학살에 기여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으며, 독일이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행한 잘못들이 낱낱이 알려져야 하고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할 것이라 말한다. 과연 한국에서 친일파 조상을 두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아 지금도 기득권 지배세력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사진 6>

이 사진은 내가 사는 동네의 이웃집 대문 앞에서 찍은 것이다. 독일의 가정집이나 공공건물 앞에서는 이러한 작은 장식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건물에 살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사진에 나온 집의 경우엔 1891년생인 아르투어 단넨바움이 1920년생인 딸 일제, 1925년생인 게르다와 함께 살다가 셋 모두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독일의 자세는 오늘날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이를 군국주의적 헌법 재해석과 재무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일본의 아베 정권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국무총리 후보가 되고,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한 극우 성향의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옹호한 사람이 교육부 장관 후보가 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사회 전체의 노력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쟁점이 된다. 지나간 일 무엇 하나도 이 땅에서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현재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망각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맞서 ‘잊혀져선 안 될 것 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러나 역사를 망각하는 한, 비극적인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위해 싸우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벤저스》, 《저스티스 리그》, 《왓치맨》과 《불안한 현대 사회》: 현대의 불안, 약자의 연대? <벙커1> 1

《어벤저스》,?《저스티스 리그》,?《왓치맨》과?《불안한 현대 사회》:?현대의 불안,?약자의 연대??<벙커1> 1

유현상(숭실대 강사)

 

 

 

 

1. B급 문화로서의 슈퍼 히어로 영화

-?코믹스 혹은 만화는 판타지나?SF?장르와 더불어 전형적인?B급 문화에 속하는 영역

어벤져스-?한동안?B급 문화는 일부 매니아들의 문화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대중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고 있음

– B급 문화의 부각은 대중들의 눈높이를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

-?아이들이나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들이 즐기기 위한 판타지로도 적절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B급 문화의 복합적 요소 구비

– B급 문화의 한 장르로서 슈퍼 히어로 영화들은 대체로 선악의 구도가 단순

-?슈퍼 히어로들은 그들의 초능력과는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무능력하기까지 함

-?아동기적 상상은 한편 인간의 근원적 불안 의식을 원형적으로 보여 줌

-?슈퍼 히어로에 대한 상상은 불안 의식의 원형

-?슈퍼 히어로의 이중고는 현대인들이 처한 이중고와 다르지 않음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부터 야기되는 내부의 적과 그들이 물리쳐야 할 거대 악(惡)

-?그들의 연대(solidarity)는 거대 악을 넘어서는 악,?혹은 거대 악들의 연합에 상응하는 전술

-?그들의 연대가 전략이 아니고 전술인 이유는 일시적인 연대이기 때문

-?슈퍼 히어로들의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연대에 맞지 않음

-?이타적이고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할약을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일상적 삶은 외면

-?슈퍼 히어로들의 고립된 일상은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연상하게 함

 

?2.?초능력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슈퍼 히어로의 등장에 대한 근원적 관심은 최초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대응할 수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의 한 형태

-?자연 현상에 대한 신화적 설명과 유사성을 갖춤

-?플라톤의?『국가』에 등장하는 전설?‘기게스의 반지’와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인?‘도깨비 감투’?이야기는 일종의 초능력을 얻게 되는 인간이 슈퍼 히어로가 아닌 인간의 욕망을 지적하는 내용

–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을 상징

-?초능력은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

-?초능력은 슈퍼 히어로들의 능력이자 슈퍼 악당들의 능력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거대 악,?즉 슈퍼 악당의 존재에 의해 설득력을 갖춤

-?인간의 무력과 한계 상황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은 맞서야 할 대상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인지하게 함

-?슈퍼 히어로에 대한 요청은 상상 속에서 바로 그러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판타지

-?슈퍼맨의 경우 자연마저도 변화시켜 인간을 구원

 

3.?슈퍼 히어로,?하지만 소외된 약자

-?슈퍼 히어로라는 존재는 거대 악이 사라지는 순간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

-?슈퍼 히어로들을 끝까지 응원하는 것은 아이들과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여성

-?대개의 영화에서 슈퍼 히어로의 진정한 적은 정치권력

-?근원적으로 영화 속 슈퍼 히어로들 역시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않음

-?현대의 소외된 현실은 모든 이들의 삶에서 근원적인 문제

-?슈퍼 히어로들에게 초능력은 동경의 대상이자 소외의 원인

-?소외는 환대받거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

-?역할의 상실,?존재감의 무시,?성과에 대한 불인정 등등은 모두 그 구체적인 형태

-?인간의 수단화를 보여 주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소외 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독일 철학자 칼 마르크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인간을 오직 목적으로만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라는 언명을 함

-?칸트의 언명은 직접적으로 소외를 경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도구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선구적으로 주장

-?슈퍼 히어로들은 현대인들이 처한 불안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줌

-?슈퍼 히어로들의 소외는 그들이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4. 현대 사회의 상황

-?캐나다의 철학자이자?『불안한 현대 사회(2001)』(The Ethics of Authenticity, 2000)의 저자인 찰스 테일러는 현대의 상황에 대해?‘불안’이라는 말로 함축

-?테일러는 불안의 원인으로?‘개인주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상실’?등을 제시

-?현대가 안고 있는 불안의 원인들은 인정을 방해하고 소외를 초래

-?인정의 문제는 근대 철학 이후에 등장한 중요한 주제 중 하나

-?타자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나와 대등한 존재이상이어야 한다.?따라서 인정의 문제가 개개인의 생존과 구체적으로 결부된 역사적 조건은 근대 이후

 

5. 인정의 정치

-?테일러는?[자아의 원천들]에서 근대적 자아의 정체성이 지니는 특징적인 구성요소를 타인들의 복지를 고려하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모든 사람이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근대적 자아,?혹은 근대 이후 인류가 지니게 된 이러한 생각들은 개인주의적인 배경과 더불어 인정의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배경

-?자본주의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고 시장의 지배가 강화될수록 인정의 문제는 더욱 절실한 문제

-?현대 사회가 다문화하고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 접근을 요청

-?테일러는 인정(recognition)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으로 보았다.

-?인정은 관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개인들 간의 문제이며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다.

-?인정의 문제에 대해서 테일러가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인정이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테일러는 인정의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현대에서의 정체성의 문제는 진정성의 개념과 더불어 고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체성이 인정의 문제와 연관되는 이유는 마땅한 인정에의 결여가 정체성의 왜곡에서 비롯되기 때문

-?정체성 왜곡의 형태는 인정에의 요구를 주장하는 다양한 현대 정치의 진영에서 제시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가부장제 문화가 여성의 정체성을 왜곡하고,?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하는 그룹에서는 백인 우월주의가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강요

-?정체성의 왜곡이 마땅한 인정의 결여를 초래

-?테일러는 마땅한 인정과 정체성의 요구는?‘평등한 품위의 정치’와?‘차이의 정치’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이해

-?평등한 품위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에 대해 비차별의 원리를 위배한다고 비판하며,?차이의 정치는 평등한 품위의 정치가 사람들을 참되지 않은 동질성의 틀로 밀어 넣어 정체성을 부정

-?평등한 품위의 정치를 보여주는 절차적인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목적과 소수의 집단적인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 테일러의 생각

-?다민족 사회에서 상이한 문화에 대해서 테일러는 상이한 문화들을 살려 두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가치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

-?승인의 방식이나 태도가 결코 시혜적이거나 평등한 존경의 관점은 배척

-?테일러는 다른 문화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마땅한 인정을 위해서는 지평 융해의 접근을 역설

-?다른 문화에 대한 섣부른 존경이나 호의적인 태도 역시 오만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한 태도는 또한 이미 그러한 호의적인 평가를 할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이러한 입장에서의 평가는 다분히 균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테일러는 가다머의 지평 융해의 방법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테일러의 표현대로?‘세계적인 차원과 뒤섞인 각각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문화에 대해서 좀더 개방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착수해야만 할 것이다.

-?테일러는 헤르더의 말을 빌어 다양한 문화는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위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동의

-?테일러가 말하는?‘인정의 정치’는 크게 다양한 개인의 정체성과 인정에 관한 문제와 다양한 문화의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개인의 경우에 정체성과 인정의 문제가 자기 표현을 바탕으로 한 대화적인 진정성이 핵심이라면,?문화의 경우에는 지평 융해를 통한 비교문화 연구가 핵심

 

6.슈퍼 히어로의 연대와 약자들의 연대

-?모든 형태의 연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연대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

희망 버스-?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 연대는 단순한 일차적 연대

-?현대 사회에서는 연대의 주체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의식이 모두 차이를 보일 수 있다.?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인 관계의 양상도 빠르게 변화한다.?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연대의 현실적 요청은 더욱 증가

-?슈퍼 히어로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현실의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테일러는 진정한 연대는 자발성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파악

-자발성을 보장하기 위한 기초는 개인들이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함

-개인적인 자기실현만을 도모하려는 삶의 태도에서는 진정성이 출현할 수 없고 진정성이 없는 개인은 자기 결정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함

-연대는 물질적 삶의 조건 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의 획득을 필요로 하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취할 수 있는 인정 투쟁의 효과적인 전략

-연대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동일한 정치적인 삶의 이슈에 대해서 공동의 행동을 결의하는 것이다.?여기서의 결의는 각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약속하는 정치적 판단의 공표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연대성은 삶의 고통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하여 객관적 해결책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 ‘연대감’에 대한 인식은,?다양하게 규범화된 역할들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관련되는 방식을 넘어서 우리는 다양한 측면을 지녔지만 함께 결합되고 근본적으로 평등한 인간 존재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이다.?약자의 권력에 합법성을 부여하고,?뒤바뀜과 위반의 순간에 돌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근원적 공동체이다.”(찰스 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