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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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쑵니다.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기분은 무엇일까요? 뭔지 모를 허기로 꾸역꾸역 양푼에 담긴 비빔밥을 먹으면서 이 허기는 단지 육체적 허기만은 아닐 줄도 모른다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이 허기에 관한 소설이 있습니다. 굶주림에 대한 소설입니다. 카프카의 단식광대라는 소설입죠. 주인공은 스스로 굶주림을 선택하는 단식을 대단한 재주인양 전시하는 광대에 대한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단식을 예술에 대한 상징으로 독해하더군요. 뭐 나쁜 해석은 아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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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갇힌 광대가 왜 스스로 음식을 거부할까에 주목한다면 좀 다른 느낌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 갇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에 갇힌 광대는 동물원의 직원들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지는 음식. 기존의 동물원이 만들어주는 음식입니다. 인스턴트 음식입죠. 때문에 광대가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입니다. 경탄할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하죠.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핵심 같더군요. 부득이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죽습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입니다. 자신의 입맛이라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에 사는 다른 동물들은 동물원이 제공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데 왜 이 광대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맹자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굶주린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달게 먹고, 목마른 사람은 무엇을 마셔도 달게 먹는다. 그러나 이것은 음식의 진미를 맛보는 것이 아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미각의 본성을 해쳤기 때문이다. 어찌 입과 배에만 굶주림과 목마름의 해침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침이 있다.”(飢者甘食, 渴者甘飮. 是未得飮食之正也. 飢渴, 害之也. 豈惟口腹有飢渴之害? 人心, 亦皆有害.)

전 맹자의 말에서 음식의 진미라고 번역한 말에 주목합니다. 음식에도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지 않을까요? 음식 자체에 진짜 맛과 가짜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에게는 진짜 미각(味覺)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맹자는 굶주림에 처한 인간이 동물원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아무거나 먹을 때 진짜 미각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진짜 미각을 상실했다면 단식광대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전 맹자가 사람의 마음을 말하면서 이 미각의 문제로 비유했다는 것이 단지 상징으로 읽혀지지는 않더군요. 맹자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인간의 본심과 미각의 문제를 음식으로 비유하면서 설명합니다. 중국인들이 팔진미(八珍味)로 손꼽는 것 가운데 곰 발바닥 요리가 있습니다. 일명 웅장(熊掌)입니다. 물론 먹어본 적은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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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곰발바닥 요리를 빗대어 맹자가 말하는 본심인 의로움[義]을 설명합니다. 물고기 요리도 맛있고 곰 발바닥 요리도 맛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모두 가지지 못할 때 어떻게 할까요? 당연합니다. 더 맛있는 곰 발바닥 요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죠. 맛있는데. 이런 음식의 비유와 함께 논의되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주목할 만합니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할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사는 것보다 더욱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사는 것을 구차스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죽는 것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는 것보다 더욱더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죽음의 환난을 구차스럽게 피하지 않을 것이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

이것은 단지 상징적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맹자에게서 의로움은 인간에게 하기 싫은 것을 강제적으로 강요하는 당위적 의무가 아닙니다. 물고기보다 더 맛있는 곰발바닥 요리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생물학적 미각의 선택이듯이, 구차스럽게 사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의로움을 선택하는 것 또한 생물학적 취향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맹자에게서 사단(四端)이라는 도덕적 본성은 맛 가운데 맛, 쾌락 가운데 쾌락인 생물학적 미각입니다. 입, 귀, 눈과 같은 감각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취향이 있습니다. 마음에도 동일한 취향이 있다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죠. 공통적인 취향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가진 공통적인 취향은 맛있는 고기 요리가 입맛을 기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은 주로 미학과 관련해서 논의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은 ‘게슈막’(Geschmack)입니다. 흔히 취향이나 취미로 번역되더군요. 그러나 이 ‘게슈막’이라는 독일어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영어 ‘테이스트’(taste)도 취향이지만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바로 맛과 미각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칸트는 이 개인의 주관적 취향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취향은 주관적인 경험적 사실이지만,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취미판단은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입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공통감은 곧 ‘상식’(common sense)이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상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상식은 사적 감각과 구별되는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공통감이다. 이 공통감은 판단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호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가능하게 되는 호소 때문에 판단은 특별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

아렌트가 해석한 공통감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미학적 감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입니다. 공통감에 기초한 판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고, 호소력을 넘어 동감과 지지를 얻을 때는 특별한 타당성을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집니다.

맹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사단도 단지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능력이 아닙니다. 도덕적 능력을 과시하는 일도 아닙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줄도 모릅니다. 맹자에게서 인(仁)과 의(義)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맛보아 감동할 수 있는 공동체 감각으로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아, 논의가 이상한 곳으로 흘렀군요. 다시 카프카의 단식광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입에 맞는 음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단식했던 것입니다. 그 능력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던 것이 아니었죠. 굶주림을 견뎠던 것입니다. 아니 굶주림을 선택했던 것이고 동물원에서 주는 음식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취한 것입니다. 그런 것이죠. 맹자에 따른다면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의로움을 취한”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미각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니체의 입맛이 까다롭더군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매사에 맛있어 하는, 그런 만족. 이것이 최선의 취향은 아니다! 나는 ‘나’, ‘그렇다’ 그리고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반항적이며 까다로운 혀와 위장을 높이 평가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씹어 소화하는 것은 돼지나 하는 일이다!”

동물원에서 던져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먹성과 비위가 좋은 동물들은 어쩌면 역겨운 음식들까지도 맛있다는 듯이 먹어대는 돼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럴진대 나는 나라 하고, 그렇다와 아니다를 말할 줄 아는 까다로운 혀와 위장이 가진 미각을 회복할 때, 그 미각(味覺)은 공동체 감각으로서 미각(美覺)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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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 듯 소개팅 나가 우아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에 칼질 잘하고 집에 들어와서 고추장에 열무김치 넣어 비벼 먹어야 해소되는 그 허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허기가 아니라 뭔가 인간적인 허기가 아닐까요.

단식광대는 인간적인 미각을 잃었고 입맛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은 것이죠. 죽을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어쩔 수 없던 일이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살맛을 잃었는데요. 슬픈 일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 슬프다기보다는 인간은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슬픕니다.

아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굶주림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굶주림 없이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굶주림을 통해서 동물원이 주는 음식들을 거부하고 동물원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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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는 이쁜 여자와 느끼한 스파게티를 먹고 돌아와 집에서 혼자 양푼에 고추장과 열무김치를 넣어 밥을 비벼먹는 구차스런 외로움과 비겁을 행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해방이라니. 굶주림과 해방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살맛나지 않는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기란 그렇게도 힘든 일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먹방의 시대이니깐요. 그러나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없건만, 능히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라는 <중용>에 나온 말은 단지 수사적인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 허리우스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을 위하여! [평이의 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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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이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었네.

왜 나는 나이고 너가 아닌 거지? 왜 나는 여기에 있고 거기에는 없는 거지?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공간의 끝은 어디에 있는 거지?

태양 아래서의 삶이란 단순한 꿈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은 것은 단지 이 세계에 앞서 존재하는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환영에 불과한 건 아닐까?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그리고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내가 생기기 전에는 나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지?

또 어떻게 나라고 하는 사람이 그 언젠가는 더 이상 그러한 나일 수 없다는 게 있을 수 있지?

– 빔 벤더스의 영화, <욕망의 날개Wings of Desire(1987)>, 한국 개봉이름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베를린합성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였을 때, 다들 철학자였다. 온통 새롭고 낯선 주변의 세계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물음을 쏟아내던 그 시절을 회상해 낼 수 있다면, 아마도 한번쯤은 저런 질문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모국어라는 그 어렵고 낯선 장애물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비로소 깨치게 된 언어의 힘으로 우리는 모두 세상에 대해 질문하던 철학자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철학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어렵고 낯선 단어들, 추상적이고 일상의 삶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그 수많은 언어의 유희들. 나와는 그저 상관없는 전문 철학자들의 말잔치. 물론 때론 그들의 말잔치가 가끔은 흥미를 끈다. 철학교수들이 쉽게 풀어내는 인문학 강좌 열풍에 이끌려 열심히 그들의 말씀(?)에도 귀 기울여 본다. 그럼에도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더구나 내 삶의 문제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사실 인문학, 특히 철학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강의와 말씀에만 기대려 할 때, 역설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살면서 이 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품게 된 수많은 질문들, 또 그 질문들을 던졌던 자신의 지적인 능력 자체를 망각한다면, 철학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전문가에 기대어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해법만을 기대하는 무기력하고 자신의 지적 능력을 무시하는 그런 대중으로 전락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가 지적으로 평등하며 다만 그 동등한 지적 능력을 어떻게 발현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당연히 머릿속에 반론이 떠오를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지적으로 평등하냐고. 사람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특성과 능력을 부여받기에 똑똑한 사람도 있고 멍청한 사람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기에 좀 더 똑똑한 지식인들이 멍청한 대중들을 계몽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말 우리는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으로 구별되어 태어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똑똑한 사람들이 우리 같은 다소 멍청한 대중들을 이끌고 지배하면 되는 게 아닐까? 똑똑한 전문 정치인이 우리의 삶과 정치를 좌우하고, 똑똑한 전문가들이 이 사회를 잘 꾸려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바로 이런 생각이 모든 위계의 원천이다.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전문 정치인과 대중, 전문 철학자와 대중으로 끊임없이 사회적인 위계를 생산하고, 그런 위계에 따라 사회적 삶과 정치가 좌우되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잘 안다. 우리 스스로 지적인 능력을 발현하며 모국어를 터득했고, 또 그런 자신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배워왔다는 사실을. 단지 치열한 생존의 무게에 갇혀 다른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을 뿐,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우리가 발현시킨 그 능력들을 좀 더 넓은 영역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도 말이다.

정치가 그들만의 일이 아니듯, 철학도 일부 전문가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물론 철학자로서, 연구자로서 평생을 바치는 소수는 늘 필요하고 소중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세상을 계몽하는 선구자일 수는 없다. 이제는 누군가의 계몽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해방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철학 역시도 이제는 단순히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우리 대중 모두가 스스로 철학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들만의 철학이 아닌 우리 모두의 철학이.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5

우주선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아무 의미없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가 있고
의미있는 것이 의미 없을 때가 있고
비어 있는 것을 채워야 할 때가 있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할 때가 있고
알고 있어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보여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가 있고
믿고 싶은대로 볼 때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가 있고
보고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볼 때가 있다.
열려 있으면서 닫혀 있기도 하고
닫혀 있으면서 열리기도 하는
무한대로 영원할 것처럼 영원하지 않다.

2016-4-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4-25 우주선 copy

 

작가 노트

눈은 어쩌면 오감 중에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일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현상에 대해 문을 금방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합니다.
우리의 눈은 낯설음에 대해 이해의 속도가 더뎌질 때 조금 더 빠르게 정보를 인식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체계를 어떤 틀에 끼워 맞춰 그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을 볼 때
자동기술법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기록하듯이 무의식적 지각을 통해 감각을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시각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느끼는 감각은 수많은 사건과 경험의 반복적인 습관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는 속도와 양적 수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림을 말로 설명하는 것, 사진을 글로 표현하는 것, 시를 말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 입니다.
시각화한 사물을 읽는다는 것은 낯설고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시각적으로 익숙한 것은
낯설음에서 익숙함의 반복된 학습의 과정을 통해 정보 인식의 확장이 가능해져 곧 익숙함에 이른 것이라고 봅니다.

관객은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단편들과 때로는 익숙한 단편들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며
타인의 낯선 세계의 정보를 받아들임으로써 관객은 자신의 우주안에 정보의 회로를 새롭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쳐
창의적인 상상력과 다양한 세계로 확장하는 힘을 만들어 곧 낯선 경험을 익숙함의 과정으로 만들 것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작업은 때로는 낯설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에서 순간적인 찰나와 영속적인 부분의 차이이며
사람이 감지하는 모든 사물의 시간의 순간성과 영속성에 대한 시간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지나가던 곳이거나 관심있게 보아야 보이는 것들, 자세히 관찰해야 보이는 것들,
그러한 공간, 물질, 현상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는 차근차근 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것이 무엇일까? 도대체 모르겠는데? 하는 생각과 같이 시각적인 작업에 대해
관객은 그 자체를 모호한 상태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눈에 읽히는대로 읽을 수도 있고
다양한 다른 현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그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해석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시대와 철학] – 다시 초심으로!!

2010년 6월 10일 웹진 창간 발기인 선언문(다시 꺼내보며 초심으로)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2010년 6월 10일)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의 지배적 권세와의 관계방식을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고전적으로 조용한 사유의 정원을 소요하거나 현대적으로 각종 하청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의 여유를 시대의 문제를 비켜가는 피신처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 생존의 절박함에 추동되어 외래사조의 청부업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자기상실과 세계상실의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극복 의지가 없는 곳에 철학의 위기가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유입과 군부독재의 등장에 저항한 광주항쟁은 진정한 자유와 연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증명하였다. 고통이 피워낸 이 문제의식은 수많은 청년들을 도래하는 해방에 자신과 인류의 삶의 의미를 걸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계의 일부 소장학자들은 철학을 ‘시대의 진정한 혼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한국철학사상연구회」(1989)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 전후의 우리의 스승들이 지난한 위기에 선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생의 열정과 사색을 80년대의 정치 경제적 현실의 문맥에서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의 교사들은 3.1운동의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성한 가치의 조명 아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이 추상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실천적 지성을 철학의 포부이자 양심으로 간주했다.

서양학술의 유입에 따라 자연사에 대한 우주적 이해와 현대 엄밀 과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생이 겪는 억압적 고통의 해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이 참여적 지성의 전통은 현실의 주요문제를 간과하는 지성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자존심과 자기의식을 저버린 비루한 정신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왔다.

유성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난 이래, 머뭇거리던 생명체가 최초의 결단으로 눈을 뜬 이후, 인류 혁명사는 자유의 사상만이 인간을 세계와 화해하게 하는 것임을 감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자유야말로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총괄적 변화를 위해 전진하는 고단한 시간의 삶을 기쁨으로 인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날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서 만인의 자유를 위해 민중 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소수자들의 정치 경제적 과두제를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문민정권 이후의 신자유주의 공세, 의회 민주제의 형식적 정상화 및 정보 문화산업의 일상화, 생존 경쟁 이데올로기의 선전 등은 민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독재를 공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과학적 유물론 철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성격이 자본주의의 통속적 유물론과 친화성이 있으며, 기계적 경직성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반성은 기존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전체성의 원리가 개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원리라는 통념을 보급시키고, 무명의 평등한 개체들이 주권자라는 관념을 확산시켰다. 영상과 정보 상품의 폭발적 소비 흐름을 타고 개체들의 권력은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광고판이나 말끔해진 공중 화장실에서도 떠다닐 수 있었다.

전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반한 주체성도 죽었다는 표어로 유행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문화생활 양식으로 실증되는 것 같았다. 소외된 소수자를 포함한 개체들의 권리는 유연하게 된 사법부의 법제화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장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상품 정보화 조류와 명운을 함께했다. 이처럼 개체들의 권력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갔다’. 그리고 그동안 무엇이 왔는가?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그래서 닳아빠진 자유 민주적 유물론이 ‘왔다’. 세계는 물건들과 그 관계들의 총체이다. 사회적 개체들은 그것에 의존해서만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상인가? 그것은 초월적 종교와 예술과 진보주의도 그 앞에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매혹되는 미끈한 속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나는 가상세계가 덤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이것에 홀린 세계상을 세속적 유물론이라고 판단한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총체적 물질화와 정신의 전면적 자기소외는 현상적 실재가 가상이라는 고전적 관념을 가상도 실재라고 뒤집는 데에서 경쾌하게 완성된다.

그동안의 한국사회가 누린 민주적 세계상은 정보 상품의 홍수와 개체의 권리, 금융 증권의 생활화와 사적 공간의 법제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권력에 매료되고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반(反)주체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은 변증법의 전체성의 원리와 주체성을 두려워하여, 자유 민주적 과두제가 갖는 전체성의 원리와 폭력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포기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기존의 자유 민주적 사고가 전체적 일원성과 개체적 다원성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 전통철학이 논변의 편리를 위해 동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범주에 갇혀 버리기로 작정해온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고는 변증법적인 전체성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현실에서 작동하는 독재적 전체성에 대한 탐구까지도 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찾은 개체성의 권위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성에 기대어 회복하고자 함으로써 급진적 주체성을 기각했다.

개체성과 전체성은 사이좋게 공존한다. 지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전체성의 위력 하에 개체가 보호받고 배려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는 사회공학자들이 되어 버린 정객들과 기업가들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는 이 시대의 여러 군주들이 의회 민주제에 의해 등장하고 그것 위에 군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적 유물론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학문 영역은 신자유주의적 정치화와 이데올로기화라는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대한 메뚜기 떼가 전진하는 원리가 서로 지체하면 뒤에 오는 자에 의해 먹이가 되는 위험성에 따른 흥분이라면, 우리의 이성은 분명 곤충의 변태적 욕망을 동력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의 잡지 『ⓔ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시대는 밖으로는 정치·경제·과학·문화의 영역이 제기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와 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세상의 바닥과 구석에서 권력이 가한 모든 참사가 전해주는 말없는 자유의 충동을 삶의 진실로 수용할 때, 물질과 생명이 갈등하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세계의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더욱 우리 내면의 양심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에의 즐거운 몰입 대신 세계에 대한 탐구와 사색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영혼 대신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생성시키는 주체성을 찾는 데에서 사유는 그 깊이와 폭을 갖게 될 것이다. 시대와 사유가 넘어지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는 바로 이 깊이와 폭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일동

강지은 곽노완 구태환 권정임 김광호 김교빈 김문용 김세서리아 김성민 김성우

김수중 김시천 김우철 김원열 김인곤 김재현 김종곤 김호경 김홍경 문성원 박강수

박기순 박민미 박영균 박영미 박영욱 박은미 박정하 박종성 백충용 서도식 서영화

서유석 송석현 송종서 신우현 심의용 심혜련 연효숙 우기동 유현상 이관형 이규성

이병수 이병창 이병태 이상훈 이성백 이순웅 이재원 이정은 이정호 이지영 이철승

이현구 임재진 전호근 정준영 조광제 조민환 조은평 최유진 최종덕 최한빈 한길석

현남숙 홍영두 홍원식 황성혜

(이상 가나다 순 6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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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기억하며[4.16]

4.16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너와 내가 타지 않은 세월호에

가슴이 타지 않은 세월호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강을 건너

그래서 회피하고 싶은 공간을 어지럽히고

무차별하게 밟히고 또 밟혀서

잊혀진 꽃이 된 내 안의 붉은 꽃은

너와 내가 탄 세월호에

가슴이 타는 세월호에

고통으로 짓이겨 세월의 꽃을 밟는다.

모두가 타는 가슴으로 피어나는 세월은

우주 끝을 돌아 돌아 다시오는 세월

 

세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줘

깜깜한 어둠이 차오르는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을 간절히 찾아 헤매던 그 손길

이미 흐려지고 잊혀지고 지워져 가는 꽃들

 

붉은 꽃들, 날개를 피어 우주의 한 줄기 빛으로 피어나줘

 

 

 


세월호를 기억하며 2016-3-28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이지영(학술1부 부장)

 

다시 4월이 왔다. 4월은 얼었던 황무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잔인한 달이라고 영국의 한 시인은 노래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찬란한 일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에게 4월은 힘들게 움튼 생명이 만개하기도 전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잔인한 달이 되어버렸다. 생명의 존귀함에 경중이 있겠느냐마는 300여 명의 세월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세월호를 타고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고등학교 2학년 어린 학생들이었기에 그 아픔은 더욱 배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2주기를 앞둔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3시, 영화 “나쁜 나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체 상영 및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을 위해 회원들 및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연구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이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의 대정부 진상 규명 요구의 진행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보다 좋은 질의 영상을 함께 보기 위해 공동체 상영을 기획한 이들은 1시부터 한철연 사무실에 나와 영사기를 설치하고 영상과 음질을 체크하는 등 공을 들였다.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상영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고 이후 50일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의 눈은 팽목항, 진도 체육관, 광화문 광장, 국회 등에서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다만 내 아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따라간다. 뭐든 해줄 것 같았던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축소하려하고,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는 대통령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아픈 몸짓과 절규가 차가운 청와대의 거대한 침묵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숙했던 관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청와대 진입을 막는 이들을 향해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마지막에 엄마를 불렀을 것이라고, 내가 바로 엄마라고’라고 외치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김진열 감독과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긴 시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밀착 동행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진열 감독에게 참석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 유족들이 국가에 바라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영화가 sns 인터넷 뉴스 보도 등과 달리 극적인 면이 떨어지는데 의도가 있었는가, 인문학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으로 이어졌다. 김진열 감독은 차분하게 질문 하나 하나에 응했다. 유가족을 만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겠다, 타인들의 시선에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유가족들은 다만 진실을 원한다, 정부가 진상 규명을 회피한다는 정황을 만들기 때문에 의혹도 깊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동의 아래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자극적인 사고 사진이나 증언들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감안하여 자극적인 면은 피하고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자취를 쫒았다. 인문학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와서 시민 학교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유가족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자대로 자신들이 할 역할을 찾아서 해주면 좋겠다 등의 답변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침울해진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시간 반에 걸친 대담이 끝나고 김진열 감독이 참석한 뒷풀이가 이어졌다. 오히려 대화는 참석자들 대다수가 참여한 뒷풀이 장에서 활봘하게 오갔다. 김진열 감독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이야기도 오갔다. 밤이 술과 함께 깊어질수록, 세월호 참화에 대한 울분과 분노 반성의 말들이 격렬하게 오갔다. 단원고 학생만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참사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인문학자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젊은 학도로서 우리는 어우러져 함께 생각을 나누고 아직은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침묵하는 정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요구하는 민중의 열망을 이긴 적이 없다. 시간과 함께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숨기고 싶어하는 이가 있는 진실을 밝히는 힘은 오래 지속되는 기억과 정의의 요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상영2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4

눈 내리는 마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상상의 동물을 만나는 그 곳에는
불꽃놀이 환영이 일어나고
벼슬이 있는 발이 큰 닭은 분주하게 흔들흔들  기뻐하고 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강아지는 훨훨 날고 있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고양이는 파릇파릇 걷고 있고
상상의 콧 노래를 부르는 멋진 코끼리는 날개짓을 하고 있고
신나게 물 뿌리는 망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뽀득뽀드득하게 앉아
구두에 반짝반짝 유리알 빛을 내고 있다.

푸른 빛이 있는 나무가지 사이로
복슬복슬 흰 눈이 내리고 있는 마을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열띤 침묵의 춤을 춘다.

2016-3-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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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세미나안내]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정규세미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정규 세미나 안내

들뢰즈, 어떻게 읽을 것인가

참석자 : 김성우 박사, 서영화 박사, 김남연, 강다연, 성현아

주교재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마누엘 데란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

Peter Hallward, Out of This World : Deleuze and the Philosophy of Creation.

일시 : 2016년 상반기 매주 금요일 2~4시30분

장소 : 올인고전학당 세미나실

참가 문의전화 02-565-9688

 

크기변환_포맷변환_들뢰즈 포스터_수정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3

바람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지속적이지도 않고

영속적이지도 않은

잠깐의 시간을

영원하듯 바라보는 곳에

빛나는 겨울의 끝에

서있는 바람은

하얀 눈꽃에 꽃씨를 실어

하얗게 몽글몽글 터트린다.

그 시간에 잠깐을 붙잡거나

또는 긴 시간에 오래를 붙들거나

영원한 것은 없다.

있다가 오고 없다가 오는

잠깐의 바람은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하얗게 피어 검게 그을려가는

하얀 목련에

바람 주머니를 넣어

영원한 사랑을

크게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2016-2-2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2-25 바람

 

[공지]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안내(2016년 3월 26일 토, 오후3시, 3월 월례발표회 대신 진행합니다)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안내(3월 월례발표회 대신 진행합니다)

일시 : 2016년 3월 26일(토), 오후 3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실(2호선 합정역 2번 출구에서 10분, 자세한 약도는 아래 참조)

내용: 영화 <나쁜 나라> 공동체 상연 후 김진열 감독과 토론

관람료: 회원 1인 5천원 / 가족 및 친구 등 동반시 비회원 4천원

관람문의 : (02) 332-4301, 총무간사 010-8612-2174(강경표) 010-2555-7918(배기호)     

 

(한철연은 순수학술단체로 재정상의 문제 때문에 관람료 전액을 후원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다만 비회원의 경우에는 1인 1천원을 지원하여 4천원에 관람 가능합니다.)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학술1부 부장 이지영입니다. 그동안 한철연 학술1부는 월례 발표회 형식과 내용의 다양성을 꾀함으로써 회원 여러분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영화 상연을 연 1,2회 기획하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3월 월례발표회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나쁜 나라> 상영과 더불어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의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가족, 친구를 초대합니다.

 

 

 

 

 

영화 <나쁜나라>

2015년 12월 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김진열 감독이 연출했다.

2014년 4월, 진도 앞바다에서 생중계된 세월호 침몰사건은 304명의 희생자가 속해 있는 가족들에게 평생 지고 가야 할 상처를 안겨줬다. 그 중에서도 단원고 학생들의 유가족들은 자식 잃은 슬픔을 가눌 틈도 없이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 앞에서 노숙 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질문은 단 하나,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 하지만 그 진실은 1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평생 ‘유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마주친 국가의 민낯, 그리고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그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투쟁 1년의 기록.

크기변환_나쁜나라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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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 철학 사상 연구회 월례회 예정>

 

* 4월 22일(금) 오후 6시, 한철연 사무실

조영준 선생님, “블로흐의 유토피아론에 대한 자연철학적 고찰: 생태학적으로 정향된 실천적 자연철학의 정립을 위하여”

* 5월 한철연 정기 학술 발표회로 대체

 

*** 발표를 희망하시는 선생님, 회원 중 신규 학위자 논문 발표 추천,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에서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학술 1부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적극적 참여 부탁드립니다.

regainer@naver.com(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크기변환_한철연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