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0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이번에는 절판된 책 한 권을 소개 합니다)

자평(자기 책 서평) : 최종덕 지음,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03

 

이번 서평은 오래 된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정말 겸연쩍습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인데, 15년 전에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라진 책입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과감히 자뻑 수준의 자평을 올려 봅니다. 책의 마지막 10장 부분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장 제목은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입니다. 과학과 철학, 동양학과 서양학, 고전과 현대를 방황하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헤아려주세요

 

1. 그때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뾰족이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협궤를 과감히 벗어나서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통합과학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2. 연속성을 찾아서

 어릴 적에 멋모르고 천주교 성당을 나가게 되었다. 사춘기의 고민을 풀 수 있는 빛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었다. 선과 악의 경직된 기준을 심사하는 일보다 사랑과 용서를 교회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기독교의 구원이었다.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아주 분명했다. 복잡한 교리 밑바닥에서 공통된 구원의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울 이후 ‘양심’이라는 보조준거가 나왔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준은 깨질 수 없는 성곽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과 지금도 문명과 단절된 아마존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란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의 무차별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 구원은 2000년 전의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이룬 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라는 물음보다는 “당신은 최초를 인정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최초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이라도 철학적 반성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나의 존재를 묻다보면 어느새 최초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듯이 시간적 최초성은 아주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으며, 이제 대학선생이 되어 철학 강의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한 답 같지 않은 적당한 답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있다. 그 뒤에 와서야 최초는 최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내가 하도록 해 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인도철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천주교 수사이셨던 할아버지이다. 교수님에게서는 시간적 최초만 따지지 말고 공간적 최초와 함께 보아야 하며, 인식의 최초가 존재의 최초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직 수사님에게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면서 최초는 최후의 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학문으로 접했던 고전물리학과 분석철학은 나에게 이 세계를 모두 산수算數와 조립의 대상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럽철학을 접하면서 내가 공부한 산수와 조립방식은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 공부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얽매어진 실재 세계의 가능성들을 나의 가슴 안에 담아 주었다. 이 때부터 나의 철학적 화두는 연속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철학 공부의 대상은 인간이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자연의 근원은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 생물학적 자연과 초미시의 물리적 자연의 모습은 적어도 연속성 자체였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자연과학적 대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의 운동과 현상이 바로 연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연속성의 모습을 인간의 한계인 인식의 차원에서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문은 사이언스이어야 한다. 사이언스 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비연속적이거나, 혹은 대상이 비록 연속적이더라도 그 연속성이 비연속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연속적이 아니면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칸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칸트는 그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와 달리 연속성의 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연속성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적 담론으로 다루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오성의 성곽 안으로 비연속성의 세계만 편입시키고 연속성의 세계는 제외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서구 근대철학의 중요한 지위를 얻으면서, 서구에서 비약적인 학문발전이 있게 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구분은 먼저 인식의 오차를 현저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상의 과학과 마음의 형이상학 양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는 비연속성과 연속성의 대비와 유사하다. 흐르는 강물을 떠서 정확한 양을 누구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잔을 이용하여 한잔, 두 잔 또는 세 잔을 떠서 전달한다. 강물이 잔물로 바뀌면서 아날로그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 전달은 반드시 계량 가능한 단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단위화 되지 않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은 오차와 노이즈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다. 반면에 디지털의 정보 전달은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대상을 단위화 하고 나누어 셀 수 있어서 그 전달 효과가 매우 크다. 우선 단위와 단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은 이쪽 혹은 저쪽의 한 단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놓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보 단위의 구분이 확실해지므로 노이즈 발생율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디지털 전환은 자연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의 많은 것을 디지털 단위로 이전하고 변환하거나 혹은 왜곡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무엇인가 있으며,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식의 난제를 자연과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연속성의 화두란 이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바꾸어 자연의 원래 모습으로 이전되고 변환되거나 혹은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노이즈가 가득 찬 아날로그라면 굳이 다시 아날로그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철학적 화두란 노이즈가 없는(상대적으로 적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고, 인문학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동양의 지리부도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인 운동과 현상이 전통 물리학적인 인과율의 범주와 차이나는 것을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서로 만나야만 해결되는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대상계를 관찰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고대 자연철학의 진화론적 사유와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인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과 역사주의 철학의 조류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성의 철학이 아니고 시간이 유입되어 역사화된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든 관심의 테두리를 나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존재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나는 동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식의 유형은 존재의 양상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존재의 양상을 지배하는 존재의 원초성은 모든 존재에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초월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존재 혹은 진화존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싶다. 동양적 의미의 존재는 서양적 의미의 실체론적 존재와 달리 시간을 머금은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역사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나는 역사 존재 자체의 자화상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양론이다. 물론 두 가지 방식도 자연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 한번 핀 꽃은 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을 인간 행태의 도리에 비유하여 말할 때 그 논거는 전적으로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운동의 동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동양학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결국 동양의 자연주의는 역사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행태의 방식이 서로 연속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대학원 시절 주렴계나 장횡거를 배우면서 대단한 우주 해석이 그들의 주제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장횡거에게서 개별자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것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개별자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한 라이프니츠의 시각으로 볼 때 장횡거는 하나의 정서적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순서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장자를 만나고 보니 참으로 주렴계 이상의 대우주가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란은 주자학을 풍월하면서 다시 차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학 풍의 논의가 광대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우주의 책을 쓰고 있어서 무척 난해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한 학문의 칼을 들이대면서 조금씩 정리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벌써 학문과 수양의 이중적 갈등이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실상 동양철학을 수양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학문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풀어줄 만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은 수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과학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절실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수양을 빙자하여 학문의 엄밀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동양학의 문외한이자 초보자의 의심어린 어설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공손룡을 만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나왔다. 오래 전 논리철학에 심취해 있던 중에 동양에서 서양의 논리와 비슷한 장르를 찾다가 문자적 차원의 유사성에 끌려 명가名家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가를 비판한 장자처럼 혜시 역시 논리학이 아니라 광대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 유가나 도가, 또는 불가의 이야기 안에는 연속성의 주제가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는 말은 대학원 시절에 공부의 주제를 잡게 해준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과연 최초를 인정해야 만 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최초와 최후를 상정한 서양과학의 선형적 사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역사적 상황의식은 분명한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당시는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고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 같았다. 서민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물론 그러한 노력은 관리 주도로 이루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의 개념은 현직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민가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학자인 잠재적 관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민의 생활태도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도리와 임금과 서민간의 관계까지 다루면서, 삶에 녹아드는 실질적인 지표를 의도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지표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 유럽사회라면 다른 상황을 낳았을 것으로 본다. 유럽이라면 이러한 혼란상황에 직면해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종교적 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사람의 덕목을 제시하는 사회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았으며, 내세를 따지는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에 보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상반시켜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말했다. 그러나 유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조차도 이를 구하듯 실용적 적극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였다. 물론 도가는 그것조차도 부정하였다.

 

이렇게 제자백가 시대의 관심에 대하여 아마도 어떤 이는 사회 구원에 앞서 개인 해방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사회구성체 조직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도가든지 유가든지 그것이 사회철학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호감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도전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불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척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교가 신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학적 상상을 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생겼다. 동양철학이 개인의 수양론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본체론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철학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수신제가를 한 뒤에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권력 유지의 차원에서 보는 수직적 해석이 아니라, 수신제가를 하면서 동시에 치국평천하도 할 수 있다는 수평적 입장을 취한다면 위의 논의 구조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아리 고개나 계룡산 계곡에 있는 많은 점집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역을 내세우며 장사를 하는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주역은 인간의 대소사를 점치는 책이 아니라 원래 하늘의 운행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의 기저에는 하늘의 운행방식과 인간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하늘의 운행방식을 그린 주역을 가지고 그 운행방식을 따르는 인간의 대소사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점치는 집에서의 주역의 구실을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이 본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하늘은 땅을 낳고 법칙을 생산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하늘은 땅으로부터 귀납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의 하늘은 땅의 모든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의 하늘은 2500년 전부터 인위성이 가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하늘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하늘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늘이 내 몸 안에 들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를 통해서 맹자 이후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맹자와 불교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양명학의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늘이 내 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땅의 숨겨진 유전자를 갖고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장자가 말한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땅인지를 모르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부부의 잠자리를 하면서 어느덧 하늘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용의 지적처럼 그러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동양철학계의 큰 스승, 배종호 선생님이 미국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였다. 그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배종호 선생님께 이상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다. 우리의 풍수지리 해석이 그랜드케년 지역에도 들어맞는지를 여쭈었다. 선생님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지리적인 풍토의 차이가 고유의 사상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땅이 하늘의 생산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동양철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뿐이다.

 

4. 서양이 이름붙인 동양

이후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동양철학을 잊고 지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는 힘든 유학생활을 달래기 위하여 틈틈이 붓글씨를 쓰곤 하였다. 재활 포장용 종이에 ‘인(仁)’자를 수백 번이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뜻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동양철학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의 현실은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수양론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제일 먼저는 동양인 우리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느꼈고, 역설적이지만 많은 동양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표제어는 서양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동양학에 대한 열기가 크게 일어났지만 그 열기의 실상은 비동양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왜곡된 동양학 연구태도라고 본다. 둘째 서구문화가 여과 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을 든다. 셋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두려워하는 잘못된 관행을 든다. 넷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둘째 문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이를 무턱대고 이성과 반이성으로 대치시켰던 과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이분법적 태도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연구 자세와 우리를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준다면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소한 논문을 쓰려면 남이 해놓은 소주제 전개와 주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남이 해놓은 연구결과를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혹은 기존의 연구결과에 일목연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최근의 학계풍토로 보아서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글들이 우리 자신이 쓴 글보다 동양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안내구실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 구석 한편에는 아직도 ‘서양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라는 조소 어린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접하다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풍선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이 비전문가나 일반인 혹은 동양학 입문자에게 과연 한국의 기존 동양학 연구자는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서양의 동양학자의 강점이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는 대신에 멀리서 숲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래 전에 동양철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청된 독일 한국학자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연구발표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한국어 구사를 했기 때문에 나의 필요성은 별로 없게 되었다. 어쨌든 그의 남명 관련 연구논문은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의 남명 관련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학자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리고 논문의 전개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느꼈다.

 

5. 동서고금의 시선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요즘(15년 전)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학문 외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 중에서 다섯 번째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서양철학 그것도 과학철학하는 사람이 왜 갑자기 한의학이나 동양철학을 건드리고 있냐는 비난 어린 질문들이다. 한문이나 제대로 하느냐하는 보이지 않는 비난일 것이다. 약간은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한문을 읽는 수준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양철학 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주 전공은 자연철학이고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문제를 건드릴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비난은 동양과 서양을 획일적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본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반드시 만나야만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반드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의 부각에만 그치면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 아류에 머물고 만다. 차이의 정립은 종합을 위한 과정적 단계일 뿐이다. 과정을 거처 우리는 방법론과 문제의식까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철학과 동양의 자연철학을 종합하는 듯이 보이는 작업은 거창한 학제간 연구이기보다는 한 논문의 작은 구성요소로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은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도 동양철학을 다른 전공으로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상학 수업을 수강한 후에 하버마스 수업을 수강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1998년쯤인가 동서양 철학하는 소장학자들이 모여서 더불어 공부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를 이현구, 김교빈, 박석준 선생님 등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동식물의 생태학적 자연학을 담아 낸 책인데, 동양철학의 시선을 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독서모임이었다. 동양에도 서양이, 서양에도 동양이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요즘(1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뽀족히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이름을 과감히 벗어나서 대화의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아가 서양철학자들도 동양학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위비교가 아닌 동양의 철학적 소재나 방법론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 그 개인에게만 부과될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풀이를 찾기보다는 학자군의 만남, 학문간의 협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묶이지 않으며,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그런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03년 나온 책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섦 – 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꽃이 아니라서 꽃이라 부를 수 있고

 

알 수 없는 향기라서 머무를 수 있고

 

그 안의 기억이라서 푸르게 자랄 수 있고

 

물음의 저편에 별 하나의 꿈이 있어서

 

아름다울 수 있다.

 

2017. 5.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안내]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를 공지합니다.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가 5월 26일(금) 오후 6시 30분에 열립니다.

 

이번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에는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이 찾아옵니다.

진행은 김은주 선생님이 맡아 진행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주제는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 고의적 어리석음으로 사유와 삶의 일치를 원하다”입니다.

사유와 삶의 일치는 그 누구보다도 사유를 업으로 삼은 지식인의 희망사항일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적 어리석음을 통해  가능하다니,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것입니다.

국내 학계에선 아직 낯설다 할 수 있는 시몬느 베이유라는 철학자에 대해 조금이나마

접근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듯 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대합니다.

 

–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일시 : 2017년 5월 26일(금). 오후 6시 30분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주제: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 고의적 어리석음으로 사유와 삶의 일치를 원하다”

담당: 김은주 선생님(동덕 여대)

 

——————-이하 인터넷 서점 알라딘 책 소개.————————————–

 

특정 종교인으로서 신앙심을 고백한 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근본적 삶의 조건에 대한 탐구와 그 극복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기록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였으며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은총이란 지성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게 해 주는 초자연의 빛이다.

지은이 시몬 베유는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신비주의자이다. 고등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정의로운 평화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총을 들었고, 노동자의 삶을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논하기를 거부하여 공장노동자와 농장노동자가 되어 생활하였다.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유철의 유럽방랑기] -2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피란은 ‘아드리아 해의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중세시대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강한 영향을 받은 피란은 슬로베니아어 외에 이탈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베네치아풍의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게다가 피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조지 교회 옆 종탑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 별칭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피란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건물도 그런 베네치아풍의 건물이었다. 마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붉은빛 외관의 베네치안 하우스가 그렇다. 타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이 3층짜리 베네치안 하우스의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건물장식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특히, 일반적으로 정면에만 테라스가 있는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이 건물의 테라스는 달리 정면에서 왼쪽면까지 이어져 있어 독특하기도 하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독특한 외관을 지닌 이 건물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피란이 베네치아 공국에 지배 받던 시절, 한 베네치아 상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상인은 나이 어린 피란 여인에게 반하고 말았는데, 그는 그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피란에 들를 때마다 그 여인에게 선물을 한 가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남성들의 과시욕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런 둘을 보며 피란 사람들은 무척이나 수근거렸다고 한다. 나이 많은 식민지배국의 남성이 피식민국의 어린 여성을 쫓아 다녔으니, 게다가 그녀의 선물을 매번 한가득 가져다 주니 이 좁은 동네에서 이만한 가십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 여인을 두고 매국노라 하는 이들부터 어린 여자가 돈만 밝힌다고 비난하는 이들, 곧 그 상인이 여자를 버릴 것이라며 떠드는 이들, 반대로 그런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에게는 파렴치한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을 터. 둘을 바라보는 피란 주민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감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변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그녀에게 집 한 채를 지어 선물한다. 그리고 창문과 창문 사이 사자상을 설치, 그 아래 휘장에 라틴어로 이렇게 새긴다.

‘Lass a Pur Dir’

영어로는 ‘Let them talk’, 한국말로 해석하자면, ‘지꺼리게 놔둬’, ‘말하게 둬’ 혹은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다. 그건 자신들을 두고 수근거리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에도 비난의 대상은 여성에게만 향했을 것, 게다가 상인은 무역을 위해 주기적으로 떠나야 하니, 그녀 곁에 항상 있을 수 없을테고 말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오롯이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하는 말,

‘내사랑, 신경쓰지마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은 비난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

‘떠들 테면 떠드시오! 하지만 사랑하는 내 여자를 괴롭히지 마시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말란 말이오!!’

각자의 사랑이 왜곡되는 상황, 그리고 이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그 상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없을 때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집을 지어주는 것 밖에 없었지 않을까? 그런 그의 마음은 주변 건물보다 유난히 많은 창문, 큰 창문들, 그리고 두 면으로 이어진 큰 테라스, 굳이 밖을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바다와 주변이 훤히 내다 보이는 건물 위치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이 로맨틱한 건물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실 이런 사랑 이야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 건물에 방문하는 이유는 건물 1층에 위치한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앞다투어 공수해 간다는 피란의 소금 가게, 피란스케 솔리네Piranske Soline가 있기 때문이다.
금처럼 귀하다는 피란의 소금, 그건 피란주민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였다. 소금은 피란에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으나, 이 때문에 주변국들로 부터의 침략과 핍박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소금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들의 침략 역사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 비잔티움 제국, 신성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함부르크 제국에 이르기까지 한다. 피란을 감싸고 있는 모르곤 언덕의 몇 미터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성벽이 그 역사를 대변한다.

모르곤 언덕을 오른다. 이스트라 반도의 마을들이 그러하듯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사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골목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내가 양손을 뻗으면 마주한 건물벽이 닿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은 정겹다. 집 창문에 고개를 내밀어 앞집과 대화하는 할머니, 그 앞집과 연결된 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람 사는 냄새 풀풀 나는 골목이다.
그 사람냄새 나는 좁은 길을 굽이굽이 오르며, 사람 사는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모르곤 언덕 위에 있다. 언덕 아래 펼쳐지는 피란. 내 시선과 수평선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나는 마치 선수처럼 뾰족한 피란 반도라는 커다란 배 위에서 아드리아 해를 항해하는 듯 하다. 성 조지 성당 앞의 한 연주가의 아코디언 소리는 배의 항해를 알리는 기적 소리 같다. 연신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 눈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진 찍길 포기하고는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깜뻑이며 풍경을 머리 속에 담아 보려 애쓴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거기 한 번 서 봐요.”

한 동양인이 내게 말을 건다. 굴러가는 R발음이 이건 여지 없이 북미권 발음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 허름한 옷차림에 목에 건 손바닥 만한 초록색 손가방, 하지만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썬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나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건냈다. 셀카든 아님 찍히는 것이든 그리 능숙한 내가 아니다. 어색하게 팔을 허리춤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기를 반복한다. 그러자 R발음 굴러가던 그녀가 익숙한 언어로 내게 묻는다.

“한국사람이죠? 맞아, 한국사람이야. 반가워요, 저는 카탈리나라고 해요.”

한국말을 하는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국계 미국 이민자였다. 그녀는 지난 1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오랜만에 자신의 한국 고향을 방문했지만, 너무나도 변해 버린 모습에 실망을 하고 제 2의 고향을 찾아 떠나 여행 중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소 젖 짜고, 피사리 하고, 새참 먹고 했던 그런 곳에 논밭은 어디로 갔는지 아파트가 들어차고, 카페들이 생기고 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낯설더라구요. 그건 제 고향이 아니었어요. 실망한 마음을 안고 바로 그 길로 한국을 떠났어요. 다른 곳에서 그 고향 냄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에요.”

지금은 자신의 새로운 고향을 찾았다고 한다. 우연히 여행중 만난 친구를 따라 찾아 가게 된 우크라이나의 리비우Liviv가 그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주변을 여행하고 있다는 그녀. 낯선 곳에서 고향같은 익숙함이라니, 그건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정든 고향을 상상하며 방문한 그 고향이 내 고향 같지 않다는 느낌.. 사실 나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부모님도 서울에서 자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명절이든 뭐든 서울 밖을 나선적이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 내가 자란 그 동네 아파트는 여전히 거기 있고, 그 앞에 있던 버거킹과 맥도날드도 그 위치에 있다. 변한 것이라고는 맥도날드 뒤편에 스타벅스가 생겼다는 것 정도? 서울은 변해 봤자 서울이다. 그 자리 그 건물에 간판들만 바뀌는 그런 곳.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건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당선될 것 같아서 였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인 그 나라에서 살 용기가 더 이상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미국땅을 밟지 않을 거에요. 요새 영국은 어때요?”

나의 30대를 보내고 있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반이민 분위기를 대표하는 영국, 브렉시트 가결 이후에는 그러한 인종차별적 반이민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브렉시트 가결 전후로 해서 인종차별적 범죄가 5배나 늘었다고 하니, 실제 체감하는 건 그 이상이다.
나도 종종 인종차별을 겪는다. 인종차별을 당할 때의 그 모욕감은 사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자괴감을 들게 만든다. 처음 이를 경험 했을 때는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둔해 졌는지, 아니면 서구사회에서 ‘자발’적 ‘쭈구리’로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수 많은 간접적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고, 인지한다 하더라도 ‘잘’ 참는다. 그래도 모욕적인 처사에는 가능한 한 영국 ‘젠틀맨 엔드 레이디스’에게 배운 ‘인다이렉트’한 표현과 함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폴라이트’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긁는다.

“매우 유감이군요.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당신들이 늘 말하듯 자랑스러운 영국인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겠어요? Be British!”

그러나 매번 이렇게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 어두운 밤 길을 걷고 있는데, 트럭에 탄 영국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곤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다시 정중히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이, 아시아인들은 아기를 어떻게 갖아? 너희들 성기가 고만한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기나 해? 하하하하”

모욕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차에 탄 그들을 쫓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며 ‘X먹어라!’하고 외칠 용기도 없었다. 그건 회피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안의 쭈구리를 확인한다.
그렇기에 카탈리나의 용기가 부럽다. 비록 그것이 회피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벗어나 그곳에 있음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와 나는 우연히 또 다시 유럽에서 마주치면 그 때는 소주 한 잔 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물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제 2의 고향 리비우에 방문하라며 친히 주소를 이메일 주소와 함께 내게 건내 주었다. 내 언젠가는 가리라 다짐해 본다.

쪽지와 함께 모르곤 언덕을 내려 오는 길, 어린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간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보아하니 분명 하교길이다. 금발의 여학생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치며 들릴 듯 말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칭크스Chinks~”

내 옆을 지나치자 마자 깔깔대며 웃는다.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용기내어 보기로 한다. 그냥 지나치면 그들이 평생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모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 내어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헤이, 레이디스, 너희들 그럼 못 써! 그건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는 표현이야. 앞으로는 그런 표현 쓰면 안돼. 절대로!”

검지 손가락을 상하좌우로 흔들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나의 정색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잠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깔깔대며 나를 앞서 간다. 그녀들이 사는 온 천지가 백인이니, 나같은 노랭이를 보면 신기하기도, 놀리고 싶기도 하겠다. 나도 그들을 양놈이라, 그리고 코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단지 훗날 그녀들이 시골 골목길에서 만난 그 검은 머리 노랭이 청년의 설교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민박집 관리인인 마르코가 추천해준 펍, Café Neptun으로 향한다. 기분 전환엔 맥주가 최고다. 아직 비수기인 탓에 가게마다 손님들은 거의 없지만 가게들마다 때마침 열린 슬로베니아의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시청하고 있는게 보인다. 사람들은 TV를 바라보며, 소리지르기 바쁘다. 어디나 축구열기는 똑 같다. 바텐더로 보이는 여인이 내게 묻는다.

“뭐 마시겠어요?”
“로컬 맥주 하나 주세요.”
“그럼 이게 최고에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며 잔과 함께 내게 건낸다. 그 병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Out of China’
내가 맥주를 한참 쳐다보고 있자, 슬로베니아가 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계속 성질만 내던 옆 자리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나는 애써 웃으며 바텐더에게 말한다.

“음.. 이 맥주 정말 맛있네요. IPA죠? 근데, 미안하지만 저는 중국인이 아녜요.”
내 얘기를 들은 바텐더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이 맥주는 이 근처 지역 맥주인데, 그 지역 이름이 아이도브슈치나Ajdovščina에요. 발음이 비슷하지 않아요?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말장난을 무척 좋아해요. 하하하 정말 오해 말아요!”

그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그들이 모두 양놈이고, 코쟁이들이 듯 말이다. 그래 나는 지금 한국 밖에 있다. 무척이나 낯선 곳. 나와 생김새도 문화도 사고도 다른 이들과 내가 자란 곳에서 비행기로 11시간 거리에 있다. 낯익은 거라곤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낯설다.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도 없고, 논도 없고, 동네 바둑이도 없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쌓아 올린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파트 촌. 내가 즐겨 찾던 비디오 대여점도 학교 과제물을 팔던 문방구도, 동네 슈퍼마켓도 사라져 버린 그곳. 이제는 낯익은 간판들마저 사라지고 낯선 외래어 간판들로 대체된 그곳. 공터들은 사라지고, 커다란 백화점과 주상복합 건물들로 가득 차 버린 그곳. 그런데 왜일까? 종종 겪는 차별은 더욱 그곳을 그립게 한다. 내게 이곳과 다를 바 없이 낯선 곳이 되어 버렸으며,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또다른 배제가 존재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립다.
그건 장소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닐까? 비록 풍경이 변해도 낯선이들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낯익은 사람이 낯설게 변했다 하더라도 혹은 그 시절 그 기억이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 그 기억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낯선 땅, 이역만리에서 잠시나마 터전을 잡아 살기로 했으나, 여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없다. 아니, 쓸 생각을 안했다는 것이 맞다. 그저 이곳에 온 목적이 우선되었지 결코 내 이야기를 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이들의 삶에 맞추어 그들과 이질적이지 않게 살았기에 그 동안의 이야기는 ‘그들 이야기 속 나’가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카탈리나가 그러했듯이 고향은 이질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의외의 곳에도 있을 수 있다. 이제야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의 마음으로 버텼던 지난 날이 헛되다. 이제 나도 이곳 낯선 땅에서 내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그들 속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속 그들을 써 내려가 봐야겠다. 그렇다면 그들의 차별은 내 이야기가 되고, 그렇기에 그 차별에 더 용기 있게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리라 다짐해 본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섦 – 노래 위에 상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0

노래 위에 상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퍼석퍼석 모래 위로 나는 새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 위에 핀 꽃을 노래하는 슬픔의 변명이 놀라워

그들은 꽃을 멀리하였다.

기억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붉은 입술로 노래를 하고

익지 않은 푸른 사과는 아쉬워 바람에 춤을 춘다.

 

아직 낯선 사과에 겨울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은 너무 낯설고 익지 않아 항상 거칠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나비의 향기가 그립고

아직 익지 않은 밤, 푸르게 익어가는

한 여름 밤의 녹색 바람이 그립다.

부슬부슬 알 수 없는 비를 그리며

갓 구은 듯 한 초승달 한 마리가 반짝반짝

창밖으로 떨어지는 밤을 그리워한다.

그는 수많은 밤을 모아 곧 시장을 열 것이다.

그 추억의 밤을 누군가는 곧 사서 모을 것이다.

 

201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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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딱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덜 익고 푸릇한 사과처럼 모든 것이 그 크기만큼 낯설고 그 크기만큼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푸른 사과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는 것은 수많은 밤을 그 안에 담기 때문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많은 밤을 담을 것입니다. 푸르른 여름밤 풀냄새가 하늘에 가득하고 달빛에 반짝이는 빵 냄새가 나는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과 뜨겁고 시원한 여름밤과 꽃이 피는 봄밤도 같이 담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낯익은 가을밤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던져 준 하얀 겨울밤을 차곡차곡 쌓은 사과의 낯설었던 밤은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 됩니다. 상인은 수많은 밤을 팝니다. 작은 샘에 동그랗게 뜬 달을 떠서 누군가의 마음에 담는 것처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밤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는 삶을 때로는 갈망하며 삶은 항상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늘 꽉 찬 듯 부족한 것이 그리움입니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9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오늘 아침에 집으로 선거공보 책자가 배달되어 왔다. 보고 싶지도 않아 버릴까 하다가 갑자기 젊은 사람들도 나처럼 이런 책자를 휙 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일부러 봉투를 잘 뜯어보았다. 그것도 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도달했으니, 이참에 “2017년 대통령 선거공보 선거책자에 관한 서평을 쓰기로 했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보고 선거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말하면서 실망 섞인 비난을 쉽게 내던지곤 한다. 그런 비난은 기득권의 오만이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기성세대는 자신의 기득권을 젊은 세대와 나눠가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문제가 풀릴 리 없고, 세대 간 대립과 갈등만 커져갈 것이 뻔하다. 동물의 왕국에서 본 원숭이에 관한 다큐 하나를 소개한다. 원숭이 수컷 우두머리의 독재 권력이 강한 집단일수록 암컷과 어린 새끼는 집단에서 공동으로 획득한 먹이감을 포기하곤 한다. 다큐 제작자에게는 마치 먹이에 대한 무관심으로 보였을 정도다. 수컷 대장이 먹이를 강하게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개체가 먹이를 먹으려고 시도하다가 대장에게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힘없는 새끼들은 먹이를 포기한다. 포식 욕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힘센 수컷들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무관심해진 것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같다. 욕망마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의 정치적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의 겉모습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말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를 원한다면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탓하기 전에 기성세대가 독점하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간단한 이 사실을 숨기고 젊은 세대의 무관심만을 탓한다면 여전히 세대 간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반복된 이념공세나 추상적인 구호정치를 내던지고 기성세대의 허세와 자기기만을 과감하게 버릴 수만 있다면 젊은 세대의 무관심은 자동적으로 관심으로 바뀐다. 불행하게도 기성세대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기성세대이기 때문이다. 현 기성세대에 닥칠 냉정한 인구학적 팩트로 미루어 기성세대는 그들만의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젊은이가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가 되면 자동적으로 기초욕망을 채웠으나, 앞으로는 스스로 강한 관심과 표현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청년의 불리함만 늘어나게 된다. 지금도 알바하느라 바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슬픈 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강하게 욕구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이번 투표에 젊은 세대가 참여하는 세속적 의미가 생긴다.

 

 

아픈 이야기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지벼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오늘 다음 날 있을 출판사 총판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와 출시될 도서들을 정리하느라  저녁 식사도 거르고 10시 30분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못 먹고 온 나에게 신랑은 안쓰러운지 옷도 갈아 입지 않은 내게 빨리 소파에 앉으라며 테이블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몇 번을 데웠는지 모른다는 따근한 두부찌개. 나랑 같이 먹으려고 신랑은 김치볶음밥으로 우선 먹었다고…

신랑의 전매특허 두부찌개는 늘 맛있다. 오늘은 더 맛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 맛있다. 목마름이 밀려와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오기 전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맥주도 사서 미리 냉장고에  뒀노라고.
이렇게 말하면 신랑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자로 오해받을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내 남자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사들인 텔레비전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101분 기록으로 이야기를 다시 꺼내 영상으로 보여준다. 신랑과 나는 세월호  이야기에 대해  “이제 좀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남의 고통은 어찌 그리 쉽게 잊자고들 하는지 되려 묻고 싶다. “교통사고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 내리면 쉬운 표현이라 그리 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개탄스럽다. 나와 신랑 사이에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약속한 부분도 있고… 나이도 이제 마흔 중반에 생각도 많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는 아동 전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에 가족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우리가 연결하면 연결 안 되는 고리가 있던가?
그렇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세월호를 탔다가 엄마, 아빠, 형 모두 잃은 요셉이는 나의 먼 친척이었다.
내가 평소 친척으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주에 친인척들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모임을 취소했고, 그 안타까운 사연을 뉴스로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변 왈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세상에!
우리 다 같은 국민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목소리 좀 냈다고…
그런 관계들이 있어서 내가 그러는 것이라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사건보다 더 아픈 또 하나의 사건이다.
‘세월호’에 직접 탑승했거나 탑승한 가족이 있어야만,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다만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이 지금은 미련으로 남았을 그 꿈 많은 아이들을… 우리는 그 찬란한 미래를 무참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고였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변명만이 소란하다. 비겁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맛있게 먹던 밥을 짧게 마무리한다. 맥주를 벌컥벌컥! 목이 메어와 숨쉬기가 곤란하다. 목 아픔을 참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 줄기가 참아지질 않는다. 그 부모들의 속은 어찌할꼬. 그 영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미처 공개하지 못했던 어느 부분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었잖아”, “아~ 이러다가 혹시 죽는 거 아니겠죠?”,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 남겨야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커튼이 이 만큼 들렸다는 건 그만큼 기울었단 말이겠죠.”, “물이 들어와요.”, “아~~~ 안돼!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은데 이 영상 어른들이 볼 거라 욕은 못하겠고… 아… 나는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을까 봐 걱정돼요.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 영상 속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했던 말들은 그리 되어 버렸다.

핸드폰 영상으로 담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록했을 우리 아이들의 희망을…
우리는 끊어 버렸다.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실 신호도 끊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패닉 상태였다’라고 말하며 살고자 허둥지둥 세월호 밖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고, 비겁했다.
또 그들을 구한 해경들은 선장인지, 선원인지 몰랐다고 했다.

선장답지 못했고, 선원답지 못했고, 해경답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했고, 인간답지 못했다.

상황실은 각각 보고만 잘 하고 있으라고…
해경들은 그 모습들을 보고도 퇴선 명령은 없다.
관저에서는 ‘세월호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진으로 찍어 빨리 보고 하라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민간 민박 선원들이 보다 못해 뛰어들자 해경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1분 1초를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어느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급한데…
상황실 보고하는 목소리는 여유가 있고 웃음도 있고…
참으로 비통하다.

아이들은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도  다른 객실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부모님께 보내는 메시지에는 곧 구하러 온다고 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킨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내리지 않고 그저 선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반복 방송을 하고 있다.  스피커에서 되풀이 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보통 다른 날이었더라면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을 법 한데… 이 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생각해서 아마 그들 전부가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선내 방송의 지시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그대로 따른게 아닐까 싶다.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스스로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못 입은 친구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정들을 서로 다독인다.

그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웃음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아마 그리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혹자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런다’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것이다.
내 자식을 그렇게 수장시킨 부모들도 그리 말할까? 철이 없다고?
그 부모들을 대신해서 마구마구 싸워주고 싶다.

길게 끌어 봐야 국민들 세금만 더 늘어난다고 말하는 그들은 끝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이 책!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순간순간 고민이다.
내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인성이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꼭!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주문이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을 도왔던 민간 잠수부와 민간 선박 선원들에게 이제 봄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맞는 봄이 새롭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p.s  서로 나누고, 도우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