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 9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오늘 아침에 집으로 선거공보 책자가 배달되어 왔다. 보고 싶지도 않아 버릴까 하다가 갑자기 젊은 사람들도 나처럼 이런 책자를 휙 버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일부러 봉투를 잘 뜯어보았다. 그것도 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도달했으니, 이참에 “2017년 대통령 선거공보 선거책자에 관한 서평을 쓰기로 했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보고 선거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말하면서 실망 섞인 비난을 쉽게 내던지곤 한다. 그런 비난은 기득권의 오만이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기성세대는 자신의 기득권을 젊은 세대와 나눠가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문제가 풀릴 리 없고, 세대 간 대립과 갈등만 커져갈 것이 뻔하다. 동물의 왕국에서 본 원숭이에 관한 다큐 하나를 소개한다. 원숭이 수컷 우두머리의 독재 권력이 강한 집단일수록 암컷과 어린 새끼는 집단에서 공동으로 획득한 먹이감을 포기하곤 한다. 다큐 제작자에게는 마치 먹이에 대한 무관심으로 보였을 정도다. 수컷 대장이 먹이를 강하게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개체가 먹이를 먹으려고 시도하다가 대장에게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힘없는 새끼들은 먹이를 포기한다. 포식 욕구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힘센 수컷들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무관심해진 것이다. 먹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같다. 욕망마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의 정치적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의 겉모습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말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를 원한다면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탓하기 전에 기성세대가 독점하는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간단한 이 사실을 숨기고 젊은 세대의 무관심만을 탓한다면 여전히 세대 간 갈등은 풀리지 않는다. 반복된 이념공세나 추상적인 구호정치를 내던지고 기성세대의 허세와 자기기만을 과감하게 버릴 수만 있다면 젊은 세대의 무관심은 자동적으로 관심으로 바뀐다. 불행하게도 기성세대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나올지 나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기성세대이기 때문이다. 현 기성세대에 닥칠 냉정한 인구학적 팩트로 미루어 기성세대는 그들만의 권력을 놓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는 젊은이가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가 되면 자동적으로 기초욕망을 채웠으나, 앞으로는 스스로 강한 관심과 표현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청년의 불리함만 늘어나게 된다. 지금도 알바하느라 바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는 슬픈 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는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강하게 욕구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이번 투표에 젊은 세대가 참여하는 세속적 의미가 생긴다.

 

 

아픈 이야기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지벼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오늘 다음 날 있을 출판사 총판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와 출시될 도서들을 정리하느라  저녁 식사도 거르고 10시 30분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못 먹고 온 나에게 신랑은 안쓰러운지 옷도 갈아 입지 않은 내게 빨리 소파에 앉으라며 테이블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몇 번을 데웠는지 모른다는 따근한 두부찌개. 나랑 같이 먹으려고 신랑은 김치볶음밥으로 우선 먹었다고…

신랑의 전매특허 두부찌개는 늘 맛있다. 오늘은 더 맛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 맛있다. 목마름이 밀려와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오기 전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맥주도 사서 미리 냉장고에  뒀노라고.
이렇게 말하면 신랑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자로 오해받을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내 남자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사들인 텔레비전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101분 기록으로 이야기를 다시 꺼내 영상으로 보여준다. 신랑과 나는 세월호  이야기에 대해  “이제 좀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남의 고통은 어찌 그리 쉽게 잊자고들 하는지 되려 묻고 싶다. “교통사고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 내리면 쉬운 표현이라 그리 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개탄스럽다. 나와 신랑 사이에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약속한 부분도 있고… 나이도 이제 마흔 중반에 생각도 많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는 아동 전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에 가족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우리가 연결하면 연결 안 되는 고리가 있던가?
그렇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세월호를 탔다가 엄마, 아빠, 형 모두 잃은 요셉이는 나의 먼 친척이었다.
내가 평소 친척으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주에 친인척들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모임을 취소했고, 그 안타까운 사연을 뉴스로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변 왈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세상에!
우리 다 같은 국민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목소리 좀 냈다고…
그런 관계들이 있어서 내가 그러는 것이라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사건보다 더 아픈 또 하나의 사건이다.
‘세월호’에 직접 탑승했거나 탑승한 가족이 있어야만,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다만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이 지금은 미련으로 남았을 그 꿈 많은 아이들을… 우리는 그 찬란한 미래를 무참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고였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변명만이 소란하다. 비겁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맛있게 먹던 밥을 짧게 마무리한다. 맥주를 벌컥벌컥! 목이 메어와 숨쉬기가 곤란하다. 목 아픔을 참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 줄기가 참아지질 않는다. 그 부모들의 속은 어찌할꼬. 그 영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미처 공개하지 못했던 어느 부분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었잖아”, “아~ 이러다가 혹시 죽는 거 아니겠죠?”,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 남겨야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커튼이 이 만큼 들렸다는 건 그만큼 기울었단 말이겠죠.”, “물이 들어와요.”, “아~~~ 안돼!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은데 이 영상 어른들이 볼 거라 욕은 못하겠고… 아… 나는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을까 봐 걱정돼요.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 영상 속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했던 말들은 그리 되어 버렸다.

핸드폰 영상으로 담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록했을 우리 아이들의 희망을…
우리는 끊어 버렸다.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실 신호도 끊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패닉 상태였다’라고 말하며 살고자 허둥지둥 세월호 밖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고, 비겁했다.
또 그들을 구한 해경들은 선장인지, 선원인지 몰랐다고 했다.

선장답지 못했고, 선원답지 못했고, 해경답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했고, 인간답지 못했다.

상황실은 각각 보고만 잘 하고 있으라고…
해경들은 그 모습들을 보고도 퇴선 명령은 없다.
관저에서는 ‘세월호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진으로 찍어 빨리 보고 하라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민간 민박 선원들이 보다 못해 뛰어들자 해경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1분 1초를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어느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급한데…
상황실 보고하는 목소리는 여유가 있고 웃음도 있고…
참으로 비통하다.

아이들은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도  다른 객실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부모님께 보내는 메시지에는 곧 구하러 온다고 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킨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내리지 않고 그저 선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반복 방송을 하고 있다.  스피커에서 되풀이 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보통 다른 날이었더라면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을 법 한데… 이 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생각해서 아마 그들 전부가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선내 방송의 지시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그대로 따른게 아닐까 싶다.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스스로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못 입은 친구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정들을 서로 다독인다.

그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웃음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아마 그리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혹자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런다’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것이다.
내 자식을 그렇게 수장시킨 부모들도 그리 말할까? 철이 없다고?
그 부모들을 대신해서 마구마구 싸워주고 싶다.

길게 끌어 봐야 국민들 세금만 더 늘어난다고 말하는 그들은 끝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이 책!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순간순간 고민이다.
내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인성이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꼭!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주문이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을 도왔던 민간 잠수부와 민간 선박 선원들에게 이제 봄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맞는 봄이 새롭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p.s  서로 나누고, 도우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시평)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더 맑스]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김종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경. 박근혜의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어 내려가는 판결문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법률용어와 법률적 논리로 인해 결론을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그러나’가 반복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라는 간결한 문장이 읽혀지는 그 순간에야, 박수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을 통해 기쁨의 순간을 나눴다.

 

그랬다. 기뻤다. 스스로에게, 또 추운 겨울날 광장을 함께 메웠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이 날 만큼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지인들과 함께 축배를 드는 것이 투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복기되는 내용이 있었다. 판결문을 들으면서 의아했고, 실망했고, 가슴 아팠고, 화났던 내용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재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첫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위법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고 둘째, 박근혜의 대응이 성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더라도 ‘성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법리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탄핵을 물을 수 있는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을 포함해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게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가 세월호 참사 당시 발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누구도 대통령이 재난상황 발생 시 현장으로 달려가 장비를 착용하고 직접 구조 활동을 하는 직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따져 묻는 내용 역시 ‘왜 당신은 바로 팽목항으로 달려가 해경과 잠수부를 비롯한 인력들과 함께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냐?’가 아니다. 우리가 묻는 것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권한자로서 국가 재난상황 발생 시 구난과 구조를 위해 국가의 재원이 원활하게 동원될 수 있도록 지휘감독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의무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판결 전문(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우리 헌법 제10조와 판례(헌재 2008. 12. 26. 2008헌마419등 참조)가 확인하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를 다했는지 안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에 따라 실제로 이정미 재판관은 “피청구인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합니다.”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 행적을 따라가면서 검토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성실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뭐라도’ 했는지를 묻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판결문 낭독에는 이러한 검토 내용은 없었다. 전문의 < 피청구인의 대응> 부분을 보더라도 대통령 측 주장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거하고 있을 뿐 그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조차 수행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전문에는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된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50분 경 국가안보실은 “구조가 순조롭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방송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떠한 지휘감독을 했는지를 이들의 주장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논리가 실종되어 있다.

 

재판관 김이수와 이진성의 보충의견(소수의견)을 보면 세월호 관련 내용이 파면사유에서 누락된 것이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다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었던 종합결론과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를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하고 급박한 위험이 가해지거나 가해질 가능성이 있는 국가 위기 상황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보면서 그와 동시에 “피청구인은 상황을 신속히 인식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를 보호할 구체적인 작위의무를 부담하게” 됨을 인정하고 있다. 즉, 헌법 제66조 제2항 및 제3항, 제69조(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 헌법 제34조 제6항(국가의 재해 예방과 국민보호), 국가공무원법 제56조(모든 공무원은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판단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들(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은 박근혜 측의 주장에 대해 “위기상황의 인식”, “피청구인의 대처”로 항목을 나누어 살피고 있다. 간략하게 핵심 판단 내용만 전하자면 당일 박근혜가 집무실에 출근하였으면 오전에 이미 상황을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오보 때문에 대응이 늦었다는 박근혜 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일 박근혜의 지시라 해봤자 원론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지시 내용은 사실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백한 성실의무 위반이자 작위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들 보충의견은 ①(전제)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위반=탄핵사유 → ②(사실관계)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성실/작위 의무 위반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①, ②에 따라 탄핵사유로서의 부합성에 대한 판단, 즉 최종 결론은 ③‘탄핵사유가 된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결론은 너무나도 엉뚱하게도 “이 사유만으로는 파면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사진공동취재단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5672)

 

 

도대체 이러한 판결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종합판결도 보충의견도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는 파면 사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논리 없음과 모순을 감행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날 박근혜의 탄핵사유 중 가장 핵심이 ‘기업의 자율성 침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에 대한 사안은 파면사유에 해당할 만큼 (판결문에서 반복하고 있는) “중대한” 사안이 아닌 반면 기업의 자율성 침해는 파면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이라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용어를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고 말했던 판결문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보다 기업의 돈벌이가 더 ‘중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1990년 헌법재판소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원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판결문이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중대한’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부정하였던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정치’였다는 것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대통령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국가를 요구하였지만 판결문은 그것이 한낱 분노에 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책임을 묻기 위한 ‘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안정적인 시장경제질서의 회복이 너희가 아우성치는 생명보다 더 중대하다고 보면서 이제 그만 광장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우리의 시간을 광장의 촛불이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려놓고 있다. 대통령의 자리에 박근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들여놓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한 말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적합해 보인다. “헌법은 변혁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한에서 헌법으로 기능하는 것이고, 국민의 열망을 배제하고 기성질서를 고착화하는 한에서는 치안법이다.(자크 랑시에르 지음/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51쪽 이하.) 판결문은 헌법을 치안법으로 대체하고 있다.

 

 

광장을 통해 나온 변혁의 열망이 ‘판결문의 정치’ 속에서 용해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세월호 참사 관련 내용을 판결문 전면에 배치한 의도가 ‘대통령 파면’이라는 고기를 던져주면 시민들은 자신들의 논리 없음과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뻐하면서 그 고기를 즐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재판관 안창호는 보충의견에서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구절을 다시 판결문에 돌리고 싶다. 판결문은 이 구절에 따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 판결문에 불복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불복’이 보수단체가 말하듯 박근혜의 탄핵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 불복은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그 무엇보다 중대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분노도 열정도 없이(sine ira et studio)’ 살아가라는 판결문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또 죽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만드는 세상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던져놓게 되기 때문이다. 1072일 만에 물위로 인양된 세월호와 마주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판결문의 정치’에 맞서 국가폭력과 자본, 제왕적인 권력정치에 맞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세월호의 정치’를 맞세우고 싶다. 그러한 정치가 승리가 하였을 때에만 오로지 축배를 들고 싶다.

 

 

 

오늘부터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더 맑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맑스분과블로그진을 시작합니다.
블로그진의 타이틀은 ‘더 맑스’ 인데요. 영어 정관사(The) 의미를 살려 잊혀진 듯한 그 맑스를 되살릴 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More) 오늘의 현실에서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습니다.
더 맑스 블로그진은 한철연 맑스분과원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릴텐데요. 일종의 two track으로 운영됩니다.
우선, 분과원들의 ‘시평’ 이 올라가고, 또 지금 분과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공산당선언 번역’과 관련된 짚어볼 이야기, 후일담 등도 올릴 예정입니다.

 

e-시철 독자 여러분, The 맑스, More 맑스!  앞으로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크로아티아 여행기 [유철의 유럽방랑기] -1

앞으로 영국에서 유학 중인 이유철씨가 유럽에서의 여행과 유학생활에 관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을 올릴 예정입니다. 웹진 게재에 흔쾌히 허락해 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은 앞으로 유럽 곳곳의 사진과 더불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활력있게 펼쳐지는 지면을 마주하실 있을 겁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이스트라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풀라Pula는 그동안 내가 거쳐 온 ‘마을’에 비하면 ‘도시’에 가깝다. 엄청난 크기 아우구스투스 성전과 풀라 아레나는 과거 찬란했던 풀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 풀라 아레나 넘어 보이는 수 많은 크레인들과 현대식 항구는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군데 군데 위치한 클럽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보다 그 동안 지나쳐 온 조용한 테라스를 가진 카페를 그립게 만든다. 거짓말 아님…ㅎ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그렇게 지나쳐 온 ‘마을’들을 그리워 하며 걷는데, 저 멀리 교회 앞 작은 광장에서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꽤나 덥지만, 아이들은 열심히다.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만있기 어렵다. 나는 말도 없이 자연스레(?) 아이들 공간에 침범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웬 낯선 동양인의 공을 뺏기 위해 하나 둘씩 좇아 온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몇 분이나 뛰었을라나? 땀이 비오듯 하고,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날씨가 25도나 되지만 자외선 알러지가 있는 나는 옷을 벗지 못한다. 지쳐 길바닥에 누워버린 나를 보고 아이들이 웃는다.

“아저씨 저기 그늘에 누우세요”

꽤 유창한 영어로 내게 말하는 이 꼬마는 시몬이다. 2달 여전에 수도 자그레브에서 이사 온 시몬은 이 동네 똘똘이로 통한다.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한다. 주변 친구들이 쉬지 않고 자랑한다.

“어, 아저씨도 영어하네? 있잖아요, 시몬은 우리 학교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구요, 그리고, 그리고.. 뭐였더라? 맞아, 수학도 엄청 잘해요!”

여기에서 가장 덩치가 큰 마테오는 마치 자기 일인양 자랑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내게 말했다. 쑥스러운 듯 구석에 한 여학생이 크로아티아어로 시몬에게 말한다. 그러자 시몬은

“아, 이 친구는 사라인데요, 영어를 잘 못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는지 묻는거에요.”

그러자 마테오는 사라에게 다시 크로아티아어로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곧장 도망친다. 얼굴이 빨개진 사라는 곧장 마테오를 쏘아보더니 그를 뒤쫓는다. 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자 여기에서 가장 키가 작은 디노는 내게

“그게 아니구요, 사라가 요즘 사랑에 빠졌는데요, 방금 마테오가 자신의 이름이 사라가 좋아하는 남자애 이름이랑 같다고 이야기 한 거에요”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상기된 얼굴의 사라를 바라봤다. 그냥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마테오도 사라를 좋아하는 듯 보였다. 새하얀 피부에 아드리아 해처럼 맑고 파란 눈을 가진 사라는 전형적인 크로아티아 여인이다. 그녀는 운동을 좋아하는 듯 보였고, 잠시 같이 뛰어 보니 실제 웬만한 남학생들보다 축구를 잘하는 듯 했다. 그런 사라는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사람친구를 가장한 모두가 흠모하는 인기녀인 듯 했다.

마테오와 사라를 보고 있노라면 어렸을 적 생각이 난다. 무척이나 부끄럼 많았던 나, 내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같은 아파트에 살았었다. 나는 7층, 그녀는 11층이었다. 그녀와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거나,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탈 때면 어찌나 떨리던지.. 숨을 못 쉴지경이었다. 그렇게 몰래 몰래 그녀를 흠모하던 중 내 마음을 전한건 내가 아닌 제 3자였다. 그녀도 나도 방문 학습지을 했었는데,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걸 알아차린 방문교사는 오작교가 되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을 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 입이 귀에 걸린 나를 보고선 방문학습지 선생님이 어찌나 웃던지. 그 때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 마음이 내가 사라와 마테오를 바라보며 드는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냥 마냥 이쁘기만 하다. 그리고 덩치만 큰 마테오가 아주 소심하게, 그리고 수줍게 사라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설렌다.

“근데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관광객이에요? 아시아인인데 영어를 어떻게 해요?”

그녀는 엘리다. 그녀는 키가 작고, 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지닌 아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아시아인과 대화하는게 처음이라고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관광객 상대로 장사하지 않는 이상 그들 인생에 대화해본 아시아인은 내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박사 공부를 하는 학생이고 영국에 있다고 하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리고는 뒤에 있던 마르코를 불렀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뭐라 이야기 하더니 갑작스레 내 앞에서 시퍼렇게 멍든 무릎과 넘어져 생긴 상처로 보이는 발뒷굼치를 내게 보였다.

“아저씨, 얘 농구하다 다쳤어요. 괜찮아 보여요?”

아마도 이친구들에게 영어 닥터가 의사로 이해 되었나 보다. 내가 다시 설명하자, 이제는 내가 정치인 지망생이 되어 있는 듯 싶었다. 아니라고 설명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았다. 내 영어실력이 문제일까? 여튼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들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뭐 하고 싶어? 꿈이 뭐니?”

아이들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저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싶어요. 그리고 영국도 가보고 싶어요! 영국에서 공부해 보고 싶어요”
“저는.. 슈케르 같은 축구선수가 될거에요! 돈도 많이 벌고,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부모님이랑 넓은 집에서 살고싶어요!”
“저는 학교 선생님이요! 우리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저는.. 배를 탈거에요! 바다가 좋아요.”
“저는 아저씨처럼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탐험가가 될거에요. 영국 가보고 싶어요! 영국은 어때요? 좋아요?”
“마르코, 아저씨는 그냥 여행객이야. 탐험가가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여행은 탐험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 탐험가는 북극같은 곳을 가는 거란 말이야.”
“그런가? 하여튼 나는 탐험가 할래!”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티격태격하며 떠듬떠듬한 영어로 내게 말한다. 그들의 꿈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의사가 되고 싶은 시몬은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게 싫고 게다가 아픈 동생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한다. 의사가 되면 동생도 고치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의사가 되고싶다고 했다. 작은키 다부진 체격의 엘리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 그저 넓은 집에서 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집안이 그다지 화목하지 않은 디노는 학교 선생님이 부모님 같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선생님이 되어 자신같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싶다고 했고, 아버지가 어부인 마르코는 아버지랑 배타러 나가는 게 좋다고 한다. 덩치가 산만한 마테오는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해외에는 어떻게 사는지, 뭐가 있는지가 궁금해서 탐험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각자의 사연, 각자의 꿈. 하나같이 그들은 하고 싶은게 많다. 조금만 더 물어보면, 또 다른 미래, 자신의 꿈을 그린다. 하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고, 세상이 궁금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내게 묻는다.

“한국은 어디에 있어요?” “중국하고 달라요?” “한국은 영어 써요? 아니면 중국말?” “영국은 좋아요? 옥스포드 가보셨어요?”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그것을 상상하면 마냥 즐겁고, 장미빛인 이 꼬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 없이 때묻은 나를 발견한다. 하고 싶은 것 보다 할 수 있는 것, 되고 싶은 것 보다 될 수 있는 것, 나의 미래와 꿈을 상상하면 눈 앞이 캄캄해 질 수밖에 없는 현실. 그들의 행복한 미소와 상상이 나에겐 그리 많지 않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크로아티아에 오기 전, 나는 슬로베니아 서부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여행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 대학생 한 명을 만났다. 언론을 전공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이자, 휴학생인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그만두기 작정하고 그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긴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지방대를 다니는 자신에게 부모님이 바라는 그리고 부모님이 걸어온 그 ‘평범’한 길은 사실 어렵다며, 그리고 자신은 요리가 너무 좋지만 인정받기 어려울 것 이라며, 그래서 이를 잊고 그렇게 ‘평범’하게 살 방도를 찾기 위해 두 달간의 여행을 떠나 왔다고 했다.

그와 같은 도미토리에서 묵게된 나는 율리안 알프스에서 셀수 없이 많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단어들을 주고 받았지만, 그는 내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조언하지 못했다. 어쩌면 정해진 삶을 수용하느냐 마느냐만 남았다는 것을 둘 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선 땅에서의 삶은 만족하는 삶이라기 보다 생존해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밤새 마신 술과 오랜 여독에 실신한 듯 잠들어 있는 그에게 편지 한 통 남기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의 전부 였다.

‘…. 00군, 아직 젊어요. 하고 싶은 것 한 번 해봐요. 응원 할게요. 좋은 여행되길…..’

새빨간 거짓말. 물론 응원한다. 그리고 그가 하고싶은 것을 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이 될지 나도, 그도 알고 있다. 게다가 하고 싶은게 뭔지도 모르는 내가,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것 하라는 조언이 가당키나 한가? 오히려 그건 아마도 내게 하는 말일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도통 책이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글쓰기를 할 때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그건 아마도 물리적인 문제만은 아닐터, 최근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면역성 질환들을 경험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제 원형탈모까지 생겼으니.. 이제 내게서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다시 내게 묻는다.

‘유철아, 공부하는게 즐겁니? 왜 공부를 그토록 하려고 하니?’

나이라는 것은 내게 이런 질문을 묻게할 만큼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내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헛된 나이가 되지 않을까? 이 여행에서 찾고 싶은 것, 내가 욕망하는 것을 찾아야지.

우물쭈물 하던 사라가 내게 말한다.
“저는 운동하는게 좋아요. 남들 보다 잘 하는게 많지 않은데 운동은 남들 보다 잘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뛸 때 가장 행복해요.”

사라가 대답하자, 마테오가 옆에서 외친다.
“마테오랑 결혼할거 아니야?”

그렇게 마테오는 다시 또 이곳 광장을 한 바퀴 돌고, 사라는 놀리는 것이 마냥 싫지 않은 듯 천천히 그를 쫓는다. 그리고 다시 각자 내 옆에 앉는다. 그들이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시간 나는 그들과의 기억이 행복하다. 그리고 짧지만 잊혀질 것 같지도 않다. 나를 뒤돌아 보게 한 그들의 꿈들과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 소리는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섦 – 가보는 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9

가보는 것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기를 바라지만

보석처럼 빛나기도 전에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런대로 흔들리지 않고 싶지만

기울어가는 해처럼 기울어지지만

바스락거리는 해를 잡아보고도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상념을 붙잡고 싶지만

그렇게 살아지지만

다시 본래의 세계로 물들어가지만

시작의 습관을 붙잡고 싶지만

잠을 청하는 마을의 언덕위에 부는 바람을 잡아보고 싶지만

가을 빛 고스란히 어깨위에 웃음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그림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로 보내지만

경험하지 못한 공간으로 인도하지만

끝까지 쌓아 가보는 것이다.

 

2017. 4. 13.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나, 다니엘 블레이크 [평이의 궁시렁]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사진출처 : http://creativeyoo.tistory.com/72

 

갑작스런 심장질환 때문에 40년 경력의 목수는 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그 훌륭한 복지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늘 그렇듯 그 훌륭한 복지시스템은 관료주의 행정 절차에 따라 언제나 규정과 원칙을 지키며 사람들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질병수당 신청에서 탈락된 다니엘 블레이크.

자신의 심장질환을 국가에 증명해야 생존을 유지할 수 있고, 당장의 먹거리와 생존을 위해 구직수당이라도 신청해야 하는 상황. 연필 세대인 우리 목수는 인터넷과 자동응답전화가 너무 낯설다.

이에 비해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 평범하고 정직한 40년 경력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정작 현대의 복지 시스템에는 적응할 수가 없다.

 

나, 평이도 이 주인공처럼 많이 늙어 인터넷과 자동응답전화에 적응 못하는 세대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아니 요즘의 나의 상황과 맞물려 너무나 공감이 간다.

가방끈만 길어 강단에선 자신이 교수라도 되는 듯이 살아가지만 정작 파리 목숨에 불과한 보따리장수인 시간강사.

너무 쪽팔린 상황이라 대놓고 얘기도 못하게 짤린 나의 지금 상황은 다니엘 블레이크의 영화 속 상황과 오버랩 된다. 성적입력 기간이 하루 늦었다고 아무런 소명 기회조차도 받지 못한 채 1년 동안 모교에서 강사 위촉을 받을 수 없는 상황. 말이 좋아 제재이지 이건 그냥 해고나 마찬가지다.

사진 출처 : 모 대학에 서 2016년부터 새로 변경된 규정 중에서 캡쳐

교수와 전임강사들은 나름 봉사점수 감점 등으로 실직의 위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제재를 가하면서, 정작 시간강사는 1년 동안의 강사 위촉 금지라는 어마무시한 규정을 참 손쉽게도 시행하는 대학. 난 이런 대학에서 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면서 그리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쳐왔던 것일까?

정말 바보가 따로 없다. 아마 오늘날 전태일이 만들었던 ‘바보회’를 제일 먼저 조직해야 하는 직종이 있다면, 시간강사가 1순위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바보 시간강사, 평이.  이게 바로 나의 현 상황이란 걸 뼈져리게 느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내게 싸워야 한다는 걸 일깨워 준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얼핏 소심해 보이지만 실상 매우 담대하게 일자리 지원센터 벽에다 낙서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입장을 알리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 시대의 영웅이란 아마 블레이크 같은 우리 소심한 인간들의 외침 속에서 출현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고민이다. 이미 정신승리법을 터득한 듯이 1년이라는 안식년(?)에 감사하며 견디고 있지만, 맘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도 아직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썩은 뿌리 자르기]

아래 글은 회원이 자발적으로 투고한 글입니다.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되며, 글의 주장은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

:김형모가 쓴 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나태영

소득대체율 학살의 한국현대사
소득대체율이란 국민연금 가입자가 40년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을 경우 나중에 자신이 벌던 월급의 몇 프로를 매달 연금으로 받는 것을 이른다. 쉽게 말해서 내가 40년간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서 매달 수입에 맞게 정해진 국민연금 보험료를 4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100만원을 받는다. 2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50만원을 받는다.

1977년 노태우 정부 때 소득대체율은 70프로였다. 첫 번째 학살은 김대중 정부 때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 행해졌다. 나라 전체 재산이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 때이니 이해가 된다. 소득대체율이 60%로 떨어졌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여야는 60%였던 소득대체율을 2008년 50%로 10% 낮추고, 2009년부터 2028년까지 20년 동안은 매년 0.5%씩 낮춰 40%로 하기로 법을 고쳤다. 국민연금 지급 개시연령도 원래 60세였지만 2013년부터 5년 단위로 1세씩 올려 2033년에는 65세가 된다.

국민연금 대상자는 호구?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정승?
2017년 현재 국민연금 보험금 지급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다. 2014년 국회에서 새누리당 인간들이 억지로 막아서 그리되었다.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이래저래 국가로부터 버림받는데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등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국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2013년 기준 … 48만 명의 공무원 등 특수직연금 수령자가 받는 연금액은 총 15조원이고, 나머지 750만 명(일부 중복수령 포함)이 넘는 국민연금 및 기초연금 수령자가 받은 연금액은 17조 1천억원이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58쪽)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대체로 길게 일한다. 월급도 조금씩 더 늘어난다. 2017년 현재 젊은 층에서 교직원, 공무원, 직업군인이 되려고 안달하는 까닭중 가장 큰 까닭은 수명은 90대 전후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기타 직업으로는 45세 이후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한 직장에서 또는 한 업종에서 저들보다 더 짧게 일한다. 매달 버는 돈은 대략 45세 이후부터 팍 줄어든다. 반대로 들어갈 돈은 더 늘어난다. 나는 우리 나이로 올해 쉰 넷이다. 딸 쌍둥이가 지금 고3이다. 나는 재작년 연봉 약 1천 5백 만원, 작년 연봉 약 2천 만원, 올해는 운 좋게 1월부터 3월까지 한 달에 250 만원 정도 벌었다. 한울님! 고맙습니다.

우리 형은 91년부터 어린이(초등)학교 선생님 일을 했다. 두 딸 중 큰 딸은 올해 졸업했다. 둘 대학 등록금은 무이자 대출로 월 80만원씩 갚기로 했단다. 무이자 대출이라 나는 많이 부러웠다. 2년전에 형한테 들었다. 매달 연금보험료 본인부담 50만원, 국가부담 50만원해서 100만원 낸단다. 1년에 미래를 위해서 1천 2백 만원 낸단다. 내 입이 벌어졌다.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우리집 서울시 토지 사용료 매달 25만원, 이자로 나가는 돈이 매달 50만원인데!

또한 변변한 직장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나 지역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다 본인이 부담해야한다. 내 경우도 연금 보험료 낸 기간중 약 90프로 기간동안 다 내 부담이었다.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반발이 컸다. 보기를 들자면 돈 많은 직장의료보험 노동조합이었다. ‘의보통합반대 100만인 국민서명운동’과 총파업 투쟁을 했다. 김대중 정부는 뚝심 있게 국민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결국 국민건강보험 재분배기능을 높이고 효율성과 보장성을 키우는 효과를 거뒀다. 박수!

천덕꾸러기 국민연금과 특수직연금을 통합하여 ‘국민연금 하나로’ 이뤄내자! 아베도 했는데 어찌 우리가 못해내겠는가. 다수가 이 땅 중산층인 특수직연금 대상자들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래도 이뤄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자!

국민연금에 살아 숨 쉬는 소득재분배의 마술!
A값은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을 뜻한다. 2015년 3월부터 적용되는 A값은 198만 1천 975원이다. B값은 가입 기간 중 당사자의 생애평균소득을 뜻한다.

‘홍길동의 가입 기간 평균 소득이 300만원이고, 연금을 받기 시작 시작할 때 가입자평균소득(A값)이 200만원이며, 소득대체율이 40%라 한다면’(『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28쪽)

300만원의 40%인 120만원과 200만원의 40%인 8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 된다. 이를 2로 나눈 결과인 100만원이 300만원인 평균소득자 홍길동의 연금 수령액이다. B값이 100만원인 사람의 경우 위 공식대로 계산하면 연금액이 60만원이 된다. 결국 실제 소득대체율은 40%가 아니라 60%프로가 된다.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인 A값이 198만 1천 975원 이하인 사람은 그만큼 덜 내고도 더 많이 가져가게 된다. 이는 낸 만큼 받아가는 사보험 연금과 다른 국민연금의 강점이다.

“단순히 내 월급에서 떼어간 만큼만 나중에 연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가입한 모든 이들’의 평균소득(일명 ‘A값’)이, 나 자신의 국민연금 지급액에 50%나 영향력을 미친다. 즉 ‘모두 함께’라는 공동운명체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세대내 연대’와 노동에 종사하는 세대가 노인층인 세대를 부양하는 ‘세대간 연대’도 포함한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62쪽)

따라서 서민일수록 길게 조금씩이라도 끈질기게 국민연금 가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서민들은 피하고 강남 아줌마들은 임의가입을 통해 국민연금 재테크를 한다. 저들은 국민연금이 사보험 연금보다 수익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예민한 촉수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사보험연금에서는 물가인상이 반영되지 않는다. 보험금이 30만원이면 10년 뒤나 30년 뒤나 숫자 그대로 30만원 받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물가인상이 반영되어 지금 30만원 받는 경우 10년 뒤에는 40만원이나 45만원 받아서 지금 돈 가치 30만원이 평생 보장 된다.

김형모는 주장한다. 국민연금 강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라고!

첫째, ‘A을 높인다.

둘째, 가입기간을 늘린다.

셋째, 소득대체율을 인상한다.

 

튼튼 국민연금을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국민연금 금고에서 나가는 돈보다 많으면 ‘튼튼 국민연금’이 가능하다. 독일 벤츠 회사 자동차 조립 공정의 로봇화 즉 자동화율이 97%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러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자리 늘리는 길은 무엇일까? 하루 노동시간을 우선 7시간으로 줄이고 50년 뒤에는 6시간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윤구병 선생이 사장으로 일하는 보리출판사는 50년 앞서서 하루 노동 시간을 6시간으로 한다. 월급은 똑같이 하고서 말이다. 하루 노동시간 7시간 제도를 우선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제1 하청 정규직 노동자에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월급은 지금 월급의 95프로로 줄일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40세부터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대신에 이들의 정년을 67세로 늘려줄 필요가 있다. 가늘고 길게 전략이다.

내가 사는 ‘성미산마을’에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이 있다. 망원시장 ‘부산어묵’ 사장님과 가족과 직원은 하루 14시간 일한다. 보통 자영업자 하루 노동 시간이 10 – 14시간이다. 이분들에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은 무릉도원 이야기이다. 이분들이 하루 노동 시간을 20프로 줄이면 한 달에 40만원, 40프로 줄이면 80만원을 국가가 지불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이 뜻있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고졸자 4년후 임금과 대졸자 첫 임금 차이가 95대 100이 된다면 대학 진학률이 더 낮아져 사교육 비용이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이 땅 월급쟁이들의 지갑이 두둑해질 것이다.
위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면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더 늘어날 것이다. 튼튼 국민연금이 이루어질 것이다.

참조>

국민복지연금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국민의 노령⦁폐질 또는 사망 등에 대하여 연금급여를 실시함으로서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실록 국민의 연금』 4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