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저 너머에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Mulder, Where are you?” (멀더, 어디에요?)

“Scully, The Truth is Out There.” (스컬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30대 이상은 위 대사를 모를 리 없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The X-Files>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우리나라에서는 KBS가 수입하여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안방에 날라다 주었다. <The X-Files>는 FBI 수사관인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스컬리(질리언 앤더슨)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해결 사건 등을 추적하는 X-File이라는 부서에서 겪는 일을 줄거리로 하는 TV 시리즈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매회 오프닝에 스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문구이자, 남자 주인공 멀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마다 되뇐 말이 바로 ‘The Truth is Out There(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다.

2016년 8월 26일, 검찰 출두를 앞둔 롯데 그룹 부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수사 기관과 이를 감추고 싶은 또는 감추어야만 하는 자 간의 대결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모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했던가. 그의 죽음으로 진실도 함께 묻혔다. 언론에서는 스스로 몸을 던진 망인을 두고 ‘충신(忠臣)이다. 의리 있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 하나만큼은 정말 깍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행동을 미덕 또는 충성으로 여기는 사회, 또 그런 사람에게 뒤늦게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사회, 이것이 그 옛날 우리가 배운 동방예의지국의 실체인가 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 위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지켜져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질 수는 있는 것일까. 또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등등. 위와 같은 언론의 태도로 보아 부회장이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해서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말 못하는 기계처럼 양심선언이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실제 사례가 있으니 굳이 위 사건을 가지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5년 노회찬 의원이 들추어낸 이른바 ‘삼성 X파일’과 2007년 김용철 변호사(당시 삼성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 녹취록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죄로 기소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빵집(뚜레쥬르)을 운영하기도 했다.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했으며 이들의 비위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예의 없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여정이다. 과연 어떤 진실이기에 그들은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래서 필사적으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면 그런 진실 위에 쌓아온 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 온 ‘진실’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지금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런 모순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는 이유도 동방예의지국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누설하려는 자들이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현상은 세월호 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어도 참는 게 미덕이고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예의다. 덕성도 예의도 없으니 ‘진실한’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만약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론에서는 유족들을 유공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일제히 찬사를 보낼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롯데 사태에서 보았듯이 진실을 저 너머에 고이 묻어준 대가로, 통 큰 결단으로 사회를 살렸다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의 진실도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2013년 1월에 제기된 18대 대선 부정 개표 소송을 떠안은 대법원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2014년 소위 ‘성완종 리스트’ 의혹도 흐지부지되어 몸통들은 처벌받지 않고 덮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도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1948년으로 정하겠다는 건 무엇을 위함일까. 또 누구를 위함일까.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뿌려졌기에 이를 모조리 거둬들이려는 것일까. 1948년을 나라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진실을 수거하려는 자들은 일각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친일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조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단하려 한다. 1948년 이전 이 땅에 자신과 조상들의 행적에 관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 팔 걷어붙이고 막으려는 것이다. 롯데와 삼성이 보여주듯,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보듯. 여기에 딴죽을 걸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매를 맞고, 진실을 수호한 자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서 진실이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이 사실은 늑대였다는 점이다. 가해자이면서 가증스럽게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란 그런 것. 전 국민이 알면 경천동지할, 그래서 지우고 싶은 이 ‘진실’ 위에 시멘트 반죽을 붓고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진실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모습은 저 멀리 재벌권력이나 정치권력에서 보듯 대규모의 조직적 차원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장삼이사인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다를 바 없다. 대학 강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면 학교 측은 물론이요 동료·선후배 강사들까지 손가락질하며 그를 내친다. 내부 문제를 밖에 알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분란을 일으킨 죄로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한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동료 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성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데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를 욕하고 발로 차는 모습이. 그러면서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 같다. 쥐가 고양이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러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진실을 폭로하는 쥐는 가혹한 뒤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노회찬 의원이나 김용철 변호사, 세월호 유족처럼. 혹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을 지켰다는 공로로 자자손손 명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다. 롯데그룹 부회장처럼. 이도 저도 싫다면 살아 있는 머리에 진실을 가둔 채 입 다물고 사회가 강요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진실’로 무장한 길을 걷다보면 우연히 ‘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진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리 곳곳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어느 날 백화점이 붕괴되고 한강다리가 끊기기도 한다. 자신을 녹색으로 드러낸 4대강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모두 스스로 민낯을 드러내며 대국민 사기극임을 커밍아웃한다. 다른 쪽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솔한 현실에 기초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남의 10억 원짜리 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10원짜리 집은 무엇이 다른가. 그 집이 10억이라는 건 진실인가.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꼴을 봐야 그제야 깨닫는다. 10억짜리 집이나 10원짜리 집이나 다 같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먹고 자고 싸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다 같은 집이라는 사실을. 경매에서 1억 2천만 원에 낙찰된 900g의 송로버섯은 정말 1억 2천만 원인가. 전쟁이 발발해 먹을 게 귀해지면 땅콩 한 알도 1억 2천만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실이란 고작 이와 같은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모래성처럼 점점 약해진다. 이런 걸 지키겠다고 이 난리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사회,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요, 진실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진실을 수호해보지만 종국엔 무너지면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조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오류로 가득한 볼품없는 그 민낯 말이다. 이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 하다. 진실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국의 한 고속도로가 차량 정체로 꽉 막힌 적이 있었다. 교통경찰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맨 앞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시범 운행 중인 무인차가 한 대 있었으니… 범인은 무인차였다. 무인차가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킨 탓에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 그렇다면 그동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태 사람차가 속도를 위반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무인차가 ‘저 너머에 있던 진실’을 고속도로로 끌고 와 스스로 예의 없는 공익제보자가 된 것. 인정에 손발이 묶인 사람이 못 하는 양심선언을 인공지능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렇듯 뭔가 일이 터져야 그간 꾹꾹 눌려왔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애써도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던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진실’을 들춰내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 세상의 토대가 되어 온 온갖 추한 ‘진실’을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양심선언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양심선언은 추한 진실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인 나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규정 속도를 위반한 운전자 각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너머로 진실을 던져보지만 동시에 내 안에 동일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젠장,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필자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적 가게에서 쥐포, 껌, 사탕 등을 훔친 적이 있다. 몇 번 있다. 당시엔 CCTV가 없던 시절이라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당시에 누가 이를 알고 가게 주인에게 이른다고 했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물어뜯어서라도. 마치 롯데처럼, 삼성처럼, 정부처럼, 학교의 비정규직 강사들처럼, 황우석 박사처럼.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지는 나의 모습과 대면해야 하니까. 나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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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가즘(robogasm) [퍼농유]

우쑵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미래학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오래된 미래를 예기하며 확신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죠. 현실을 살기에도 버거……. 넵, 미래학이란 게 가진 자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좀더 매끈하고 편리하고 단순하게 만들려는 테크노로지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의 로봇학자가 가까운 미래에 사람이 ‘섹스봇(sexbot·성관계용 로봇)’과의 성관계에 중독되어 인간 사이의 성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경고했더군요. 혹은 2050년이 되면 인간의 성관계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50년이면 제가 거의 90이 되는지라 별 상관이 없는 세상이지만 서글퍼지더군요. 성관계가 사라지다니. 섹스봇은 사람마다 다른 신체 조건과 취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맞춤형으로 개발한다면 진짜 인간의 성능(?)을 능가하여 로봇과의 성관계에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죠.
상상이 가더군요. 언제든지 원하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없이 맺을 수 있는 편리함. 아, 그 모텔 문 앞까지 가는 과정에 필요한 감정 다툼과 뻐꾸기(?)와 인내력과 이해력과 동정과 동의와 돈과 시간과 등등 헤아리기 어려운 자원과 능력과 성능이 필요하죠. 그에 비하면 섹스봇은 그냥 오케이. 인간이 피곤할 뿐이죠.
의무적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서 해방된 섹스 그 자체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가능한 현대 사회라지만 뭔가 연애 편지가 이메일도 대체되고 캘리그라피가 만년필을 대체하는 뭐 그런 어떤 앙꼬빠진 찐빵과 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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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어린이도 성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기겁을 했었죠. 어린아이가 느끼는 성적 쾌감이라니. 엄마의 젖을 빨며 성적 쾌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프로이트의 주장은 상식처럼 되어 버렸더군요. 그렇다면 섹스봇이 곧 출시될 미래 시대에 이런 상상은 어떨까요.
아내 혹은 남편(결혼 제도가 남아 있을려나?)이 현관문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남편 혹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나 스포츠 센터에 가서 섹스 한 게임 뛰고 올께.” 아내 혹은 남편은 무관심한 듯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합니다. “그래, 이번에는 꼭 멀티 오르가즘에 도달해야 해. 위생과 안전은 반드시 지키고.”
불가능할까요? 단연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섹스가 스포츠가 되는 날, 섹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 육체적 노동의 피로감 때문에 섹스의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한 오판일까요? 섹스의 쾌락은 체력적 노동이 아니라 환상과 도덕의 금지로 이루어진 어떤 아트적(? art, techne?)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과도하고 도덕적 금지가 엄격할 때, 쾌락은 강렬하다, 더군요. 쿨럭.
남자는 포르노를 좋아하고 여자는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남자도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물론 여자도 포르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음, 저 남자는 확신합니다. 남녀의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는 것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맨스건 포르노건 모두 환상을 기반으로 합니다. 네,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성적인 충동을 종족번식으로 설명합니다. 진화심리학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적 충동은 단지 생물학적인 본능만은 아닐 겁니다. 생물학적 본능의 결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적 충동은 동물적인 충동으로서 생물학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적 판타지가 유발시킨 정신분석학적 욕망의 결과입니다.
성적 충동은 어떤 학습된 환상에 의해서 유발되는 것이지, 성적 충동에 의해서 환상이 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성적 충동은 환상의 결과이지 환상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죠. 환상에 의해서 성적 충동이 구성되고 결과되는 것이지 생물학적 본능이 일어나서 환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죠.(뭐라는 거니?)

Slavoj Žižek

지젝은 이 점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광고로 예를 듭니다. 유명한 동화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 한 소녀가 개울가를 걷다가 개구리를 한 마리 발견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키스를 하자 못생긴 개구리는 멋진 젊은 남자로 변합니다. 그 상대 젊은 남자는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그 소녀를 탐욕스럽게 키스합니다. 소녀는 한 병의 맥주로 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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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해한 바는 이렇습니다. 소녀는 개구리같은 남자에 대해 젊은 남자의 환상을 갖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욕망의 대상인 맥주병이라는 환상을 갖습니다. 두 남녀의 주체는 서로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서로 각각의 주관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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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녀에게서 일어나는 성행위의 구조는 살과 피를 지닌 상대와의 실제 행위가 아니라, 환상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환상적(phantasmic)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타자의 육체는 환상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일 뿐이라는 것입죠. 지젝이 표현이 참 그러합니다. 남녀의 육체가 환상을 투사하기 위한 스크린이라뇨! 하, 그럼 영화관에서 서로 섹스하는 …. 아니 영화관에 홀로 앉아 마스터베이션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육체적인 섹스 행위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각자 환상에 빠져서 각자 마스터베이션의 쾌락에 빠지는 것이 현실적인 섹스의 모습이라는 것입죠. 단순하게 말하자면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말은 성관계를 하는 두 사람은 사실 각자의 판타지에 빠져 각자 따로 서로의 환상 속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섹스봇과 함께 느끼는 로보가즘(robogasm)의 정체는 바로 이 마스터베이션의 극대화가 아닐까요? 환상의 극대화, 성능(?)의 극대화, 오롯이 혼자만이 느끼는 멀티오르가즘의 사유화. 그렇다면 자위 행위가 좋지 않은 이유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혼자만의 환상에 사로 잡혀 살아 있는 생명인 타인으로부터 오는 살 떨리는 감각과 교감하기를 차단하고 포기하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증가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쾌락의 독점과 사유화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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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부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아, 이 첫경험의 설렘만큼이나 수줍은 것은 ….. 네, 죄송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씁드리자면, 섹스는 살맛이다, 뭐 그런 것입니다. 살과 살이 접촉해야 살맛(?)을 느낀다. 살맛을 느끼는 섹스는 살아나갈 수 있는 살맛을 준다. 섹스는 환상을 매개로 하는 쾌락이지만 그 쾌락의 실제적 내용은 살맛이다. 사는 맛이며 살의 맛이다. 살이라는 피부가 접촉할 때 세포들이 미세하게 느끼는 맛이며 동시에 살아있다는 떨림을 주는 맛이다. 뭐 이런 논리입쬬.
섹스봇과 함께 하는 로보가즘은 바로 이러한 모텔 앞까지 가야 하는 희노애락의 과정과 상호간의 살맛을 제거해버린 쾌락의 극대화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다시 반복하지만 섹스는 환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상을 필요로 합니다. 살이란 육체는 생물학적 살덩어리이지만 동시에 존재론적인 살덩어리입니다. 존재론적 살덩어리는 생물학적 살덩어리 위에 덕지덕지 쌓여진 삶의 주름들과 같습니다. 존재론적인 살덩어리는 생물학적인 몸이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삶의 총체적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기억이 저장된 주름진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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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섹스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왜 일까요? 존재론적 살덩어리인 자신의 삶을 이해해달라는 요청 때문은 아닐까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 나야. 그다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해줘. 물론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상호 이해 속에서 존재론적 살덩어리들은 서로에 대한 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각자만의 환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환상은 상호 교환되고 공유된 환상이기에 서로의 공감 속에서 작동합니다. 존재론적 살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환상의 윤리성이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가 아닐까요. 자기만의 환상에 취한 자기도취적 폭력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유된 환상입니다. 주름진 존재론적 몸을 나누는 섹스는 혼자만의 환상에 빠져 자위행위적인 로보가즘은 아닐 것입니다. 성능(?)은 물론 보장 못합니다. 함정이죠. 그러나 남녀 공히 모두 포르노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합니다.
존재론적 살이 느끼는 것은 그래서 로보가즘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적인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전적으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수줍음도 없는 헌신과 요구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신뢰는 주름진 존재론적 살덩어리를 느끼는 살맛을 통해 형성됩니다.
섹스가 도덕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호 이해와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환상에 근거한 섹스는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차이가 뭐냐구요. 아, 급 피곤함을 느껴서 …. 쿨럭. 나이듦이 서글퍼지는지는 계절입니다. 살맛이 없습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9

자유의 갈망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소리없이 떨어지는 나태는 속박에 이른다.
저 문틈 사이로 들리는 갈망하는 자유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은 것에 대한 열망은
한 낮에 흐드러져 반짝이는 섬광같다.
점점점 떠오르는 흰 점과 가는 선들은
회오리를 일으켜 빛으로 퍼져 나간다.
그 곳에는 반쯤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마침표가 서성인다.
숨을 거두기 위한 추적은 계속된다.
빛으로 일어나라. 소년이여!
열망 가운데 갈망하는 자유의 날개가 있다.

2016-8-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8-30 자유의 갈망 copy


작업노트

어떤 생은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실타래처럼 엉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저항하지 않고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않고 살았던  긴 시간이 흘러

정신과 육체는 반복되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잠수함에 갇힌 육체가 정신을 붙잡아 가둡니다.

어떤 한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몸의 현상은 정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몸은

정신을 구속합니다.

창문을 열고 나가면 눈앞에는 반짝이는 섬광이 아른거리고

전선처럼 정신은 엉켜있어 세계는 어지럽습니다.

반쯤 가려진 시야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삶의 한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불안합니다.

한 생의 삶이 자유의 날개를 달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합니다. 

[한철연] 2016년 9월 월례발표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세상을 삶아 먹을 듯했던 여름의 기세가 하루 아침에 꺾이고 거짓말처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학술 활동에 탄력 붙으시길 바랍니다.

9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9월에는 남기호 선생님께서 헤겔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한철연에서 헤겔과 함께 즐겨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회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도 기대하실만 자리일 것입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23일(금), 오후 6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발표자 및 논문 제목: 남기호 선생님(제주대)

: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 헤겔의 『철학백과요강』(1827) 예비개념을 중심으로>

*논평자: 이정은 선생님 (연세대)

 

<논문 개요>

본 발표는 『철학백과요강』 재판 예비개념 부분에서 전개된 헤겔의 변증법을 객관적 사유의 구조로서 분석한다.

헤겔에게 논리적인 것이란 존재와 직접적으로 매개된 객관적 사유규정들이다.

먼저 칸트 이전의 순진한 형이상학에서 객관적 사유규정은 대립 의식 없이 직접적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유규정은 유한한 것으로서 다른 객관적 사유규정과 대립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 다음으로 순진한 경험론과 비판 철학은 객관적 사유규정들을 자신들의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매개된 것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타자와 대립된 매개는 제약된 유한성을 의미한다.

끝으로 형이상학화하는 경험론 내지 직접지의 철학은 이러한 매개 자체에 대립하는 무한한 직접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유한자와 분리된 공허한 비약으로 귀착한다.

이에 반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해 설정되는 직접성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객관적 사고의 세 발전 입장들은 각각 논리적인 것의 추상적 오성적 측면, 변증법적 부정적-이성적 측면, 사변적 긍정적-이성적 측면에 해당한다.

본 발표는 이렇게 칸트 이전 볼프 형이상학, 칸트의 비판철학 그리고 야코비의 직접지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헤겔 변증법의 기본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직접적 규정의 매개와 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한 직접성의 무한한 긍정적 규정 가능성의 관점에서

헤겔의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은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예고

일시 : 10월 21일 (금) 오후 6시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유민석 선생님은 버틀러의 <혐오 발언>의 역자이십니다.

근래 대한민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 각종 혐오 발언과 페미니즘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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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교육용’ 전기 요금이었구나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와, 요즘 진짜 공부 많이 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 사드(THAAD)에 전기 누진제까지.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맞다. 2005년엔 황우석 박사 덕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더니 2008년엔 MB(이명박) 덕분에 광우병 지식인으로 거듭나고… 다시 공부 시즌이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 정부가 우리에게 또 다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누진제 얘기를 해보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더위가 이어지면서 학교에서도 전기 요금 폭탄을 우려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매우 의아했다. 학교에 공급되는 전기 요금 체계엔 또 무슨 꼼수가 숨어 있기에 저런 뉴스가 나오는 걸까. 요즘, 주택용/산업용 전기는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어 자주 접하던 차에 교육용 전기는 또 뭔가 싶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주택용, 산업용, 일반용(상가), 기타로 구분하여 요금을 부과하는데 교육용/농업용/가로등이 기타 항목에 포함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엔 누진제가 적용되진 않지만 교육용 전기의 독특한 요금 구조 탓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폭염에 괴로워해도 학교 재정이 어려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를 그냥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이래서 교육용이구나”. 학교에 공급하는 전기를 ‘교육용’이란 딱지를 붙여 별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고비용의 요금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참는 게 미덕’임을 가르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육용 전기 요금을 고비용으로 설계한 이유였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는 <참는 게 미덕이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강연자가 “성희롱을 당하면 78.4%가 참고 넘어간다. 이게 미덕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학부형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 교사도 참는 게 미덕이다. 교수가 되고 싶은 대학원생은 지도 교수의 성희롱은 물론 논문 가로채기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서열에 따라 순번대로 임신을 해야 한다. 신입 간호사는 임신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 한편 일터에서의 노동자 역시 회사 측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검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상사로부터 폭언·폭력에 시달려도 참는 게 미덕이다. OECD 최하위권의 노조 조직률 12.3%(2015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고 퇴직금마저 떼여도 참는 게 미덕이다. 팥빙수 장사가 잘 되어 상가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인 자영업자는 억울해도 참고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게 다 미덕이다.

 

사드가 들어와도, 핵발전소가 세워져도 참는 게 미덕이다. 허술한 공권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징징대면 안 된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자식을 잃어도 정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고 울음을 그치는 게 미덕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악악’대며 시위를 하면 안 된다. 정부에서 1인당 5,000만 원씩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 챙기고 입 다무는 게 미덕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제동을 걸어 청년의 삶까지 직권 취소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노인들 역시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뙤약볕 아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1만 원이라도 건지는 게 미덕이다. 혹여 기업이 만든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하여 폐 손상으로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간다 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덕이 여기서 멈출 순 없다.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금연을 요청했다가 뺨을 맞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참고 마시는 게 미덕이며, 아랫집 혹은 윗집으로부터 담배 연기가 스며들어도 참고 사는 게 미덕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겨울 내내 난방비가 한 푼도 나오지 않도록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내가 부당하게 요금 폭탄을 뒤집어쓰더라도, 이를 발설하지 않고 참는 게 미덕이다. 교육부 공직자로부터 공개적으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왈왈” 또는 “꿀꿀”대며 짖는 것도 잠시일 뿐 너무 더워서 짖을 힘도 없다. 더워도, 배고파도, 몸이 아파도, 모욕을 당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이제 똥·오줌도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참, 이미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이 화장실도 제 때 못 간다고 하니 지금 현실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가르침을 교과서를 벗어나 현장 위주의 실습 교육으로 제공해주시니 우리나라가 교육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국가 차원에서 이런 식의 대국민 교육을 조직적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필자는 이른바 ‘민중 개·돼지’ 발언의 주인공인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가 그 정점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감히 누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겠다는 금기어를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국정원도 못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못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컨트롤타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교육부임이 틀림없다. 국정원 위에 교육부 있다. 이런 교육부에게 아직 교육 컨텐츠가 남아 있을까. 물론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해줄 내용은 ‘민영화(民營化)’가 아닐까 싶다. 전기·가스·수도·철도와 같은 공공부문의 사영화(私營化) 또는 영리화(營利化) 말이다. 그렇다면 대장정의 교육이 막을 내린 후엔 무엇이 이어질까. 정책기획관 출신 나향욱씨는 어디서 또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민영화 교육을 마지막으로 교육 강국으로서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축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난 7월 8일 이후 우리는 개·돼지로 살고 있다는 점을 벌써 잊었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편할까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최종회, 세종과 독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의 최후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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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리스(sexless) [퍼농유]

우쑵니다.

 

더위 먹은 김에 공자 빼갈 먹는 소리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일할 의욕을 잃고서 몽롱한 정신에 인터넷을 들락거리다가 어떤 기사를 보고 불현 듯 일어난 생각입니다. 잠못 이루는 열대야가 만들어낸 난삽한 생각들입니다.

 

섹스리스(sexless)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성인 부부 35.1%는 한 달에 1번 이하의 관계를 맺는 섹스리스 부부라고 합니다. 상당히 높죠. 세계 평균 20%, 미국 평균 6%에 비한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일본은 44%. 1등입니다. 우리나라는 2등.

어쩌면 이런 통계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설문지 답변을 솔직하게 쓸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화적 차이도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점은 부부 사이에 섹스리스가 상당히 높은 수치를 차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더불어 현대는 리스(Lease)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정수기 리스, 자동차 리스부터 사무실과 집까지 리스해서 쓰는 일은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입니다. 유용하면서도 깔끔하죠. 귀찮은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섹스리스 시대에 ‘섹스 리스(Sex Lease)’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 중년들의 진정한 사랑은 불륜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실용적 사랑은 불륜이 아니라 리스가 대세를 이룰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은 섹스리스의 원인이었습니다. 주요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이더군요. 첫째 피로감.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와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것입죠. 만성피로로 찌들게 만드는 피로 사회는 인간 행복의 본능까지도 저하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목할 만한 원인은 두 번째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더군요. “가족까리는 키스하는 거 아니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가족이라는 친밀감이 깊어지면 성적인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감이란 친하고 가깝게 지내서 서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친밀감과 성적인 매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부부는 의리로 삽니다.

일반적인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생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더군요. 인터넷에서 본 기사입니다. 이스라엘 헤르츨리야의 복합 센터의 심리학 교수 구리트 번바움은 친밀함이 깊으면 성적인 욕구가 더 강할 수 있다고 오히려 반대로 주장하더군요. 실험을 통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친밀함이 커져도 성적 욕구는 솟아나며, 규정하기 힘든 묘한 감각인 성적 욕구를 장기간에 걸쳐 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응성을 높이는 것이다.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이 번바움의 결론에 따른다면 섹스 리스의 원인은 부부관계의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거꾸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밀함이 깊어져서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적인 욕구가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섹스리스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죠.

왜 더 깊이 친밀해지려고 애쓰는 노력이 떨어질까? 문제는 그것입니다. 아 물론 다른 사회 정치적 분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친밀함의 깊이와 섹스는 반비례한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죠.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결혼한 뒤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아내는 이제 더 깊이 알아야할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상이다. 알 필요가 없다. 왜? 모두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친밀성은 깊어지지 않는다. 친밀성이 깊어지지 않으니 섹스는 불가능하다. 이런 논리가 아닐까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과 무시가 친밀성이 깊어지지 못하게 가로막고 그것 때문에 섹스에 대한 흥미는 감소한다. 결국 더 친밀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섹스는 불가능하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섹스리스를 ‘섹스 리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요. 남편 혹은 아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을 먼저 버릴 것. 남편 혹은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과 아집을 내려놓고 남편 혹은 아내 그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겸허히 경청할 것. 경청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설렌다면 “그 어떤 화려한 섹스보다도 낫다.” 물론 함정은 있습니다. 실행하기 힘든 일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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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논리는 비난 섹스리스의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트 때문입죠.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이라는 감정들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름답지만 비루하며, 기이하지만 적나라하죠.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합니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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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합니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합니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집니다.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WRITER PHILOSOPHER LEAVING POLICE STATION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습니다.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이 됩니다.

섹스리스를 사랑과 관련시킬 때 드는 의문이란 이런 겁니다. 타자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증가할까? 아니면 감소할까? 바르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멋진 생각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투명함이 명백함으로 전환되는 이 역설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함이 명백함이 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논리는 역으로 타자에 대한 명백한 앎은 사랑을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거나 친밀한 사람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착각입죠. 이러한 착각과 오만에 근거하여 나는 너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너의 이런 속성 때문에 놀라우며, 너의 의도가 이런 것이기에 화가 나고, 너의 생각이 이렇기에 짜증이 난다고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과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판단과 앎에 근거하여 상대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마치 어떤 작품을 읽고서 이 작품의 쓴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적 태도는 온당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잘 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를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입니다. 그래서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된”다고 하는 말은 고정된 이미지로서의 외관을 통해서 실체를 규정하려는 주체의 오만한 노력들이 파기될 때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주체의 자기도취가 이르는 결말은 타자에 대한 지배 아니면 싫증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숙한 사랑의 지혜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그대로’라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랑하는 상대는 이제 주이상스(jouissance)의 텍스트가 됩니다. 바르트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향유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타자는 어떤 저자의 하나의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 무한히 음미되어야할 텍스트인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의미가 정의되어 고정되어야할 명증함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경청하며 음미되어야할 모호함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설렘의 흥분을 가지고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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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사랑의 역설에는 놓쳐버린 역설이 또 있지 않을까요. 독자의 탄생을 위해서 저자를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이상스를 위해 주체는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소유의 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타자를 소유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타자를 소유하려는 의지를 포기하려는 것입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려는 순간 저자와 사랑의 주체는 죽은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메마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의 환상, 그 상상계가 메마르게 되기 때문에 주체는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계의 체계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

 

무기력하고 메마른 사랑이란 또 다른 사랑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타자에 대한 불투명한 앎이 오히려 사랑의 명백함이 된다는 긍정적 역설을 말했지만, 또 동시에 타자의 불투명함을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창조할 수 있는 저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역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를 강화시켰다면 바르트는 주체를 무화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주체의 능력이 강화될 때 사랑은 투쟁이 되고 밀당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체의 능력이 무화될 때 사랑은 식은 재가 되고 관조가 됩니다.

바르트는 도가(道家)적 사유와 근접해 있습니다. 바르트는 분명 노자(老子)의 논리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주희(朱熹)는 노불(老佛)에 대해서 비판적이죠. 죽은 재와 마른 나무와 같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항시 권모술수적인 측면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죠.

바르트도 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이 ‘그대로’ 혹은 ‘비소유의 의지’라는 사랑의 방식이 빠질 수 있는 사기술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전략적으로 주체를 무화시킨다면? 그것은 사기술이죠.

아랑드롱

아! 죄송합니다. 더운데 피곤하게 해드렸군요. 쿨럭~

세줄 요약은 이렇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잘 안다고 오만 떨지 말 것.

상대를 그 자체 그대로 경청할 것.

그러나 사기 치지는 말 것.

이상입니다.

 

 

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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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도덕적 해이 vs. 도둑적 해이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맴맴맴매~엠~

매미들이 목청이 터져라 울어댄다.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 눈을 떠도 울고 있다. 매미들은 잠도 안자나. 어제 울던 그 놈들이 아직도 울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내가 알게 뭐냐, 지들도 사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데. 하긴 그럴 만도 하다. 7년을 땅 속에서 보내고 올라온 매미에게 지상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2주. 그들에겐 오직 짝짓기만 있을 뿐. 사람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그렇지.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매미까지 종일 울어대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뭐 어쩌겠는가. 자연이 언제 사람 사정 봐가면서 돌아가더냐. 화산 폭발도 지진 발생도 제멋대로 예측불허다. 쓰나미도 사람 봐가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다 쓸어버린다. 고3 수험생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매미가 조용조용 눈치 보며 울지 않는 것처럼. 자연은 이렇게 무심하다.

그런데 우리 곁에 자연 말고도 무심한 자들이 또 있다. 우리에게 유심(有心)하겠노라 약속한 자들, 즉 공직자들이 그들이다. 공직자들이 우리에게 무심한 것도 그냥 넘겨야 할까. 지들끼리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마치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며 짝을 구하는 과정과 같다고 치부하며 관심을 꺼도 될까. 하루에 38분 꼴로 한 명씩 자살을 하든 말든, 175만 명의 노인들이 뙤약볕 아래서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워 연명하든 말든, 배가 뒤집혀서 학생들이 죽든 말든, 중동에서 이상한 바이러스가 국내로 들어와서 곳곳을 들쑤시든 말든, 산업 현장에서 연간 2,000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든 말든, 검사/간호사가 일터에서 폭언·폭력에 시달리든 말든, 그로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자살을 하든 말든, 밤낮을 가리지 않는 빚 독촉으로 사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든 말든… 공공을 돌보는 일을 업으로 삼는 공직자들은 마치 자신이 자연인 양 무심하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엔 이처럼 무심한 정부가 청년들의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하는 서울시의 정책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최근(2016년 8월) 서울시가 청년수당을 지급하자 기다렸다는 듯 보건복지부가 시정 명령에 이어 직권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인데, ‘식물’ 정부가 명민한 촉으로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며 우리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직권 취소란, 쉽게 말해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 사업은 무효이고 이미 지급한 수당은 다시 환수하라는 의미다. 정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사업을 두고 ‘무분별한 현금 살포다’, ‘지급받은 돈으로 술을 마시는 등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 ‘국민이 낸 세금이 허투루 쓰일 수 있다’,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아 애초부터 수긍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서울시가 돈 있다고 함부로 할 문제는 아니다’ 등의 이유를 들며 악착같이 달라붙어 흠집을 내고 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아차!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청년들을 포함한 온 국민의 삶에 무심한 정부’,라는 그간 나의 생각은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임을 깨달았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깊은 우려를 해온 정부를 자의적으로 매도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한 지적을 하는 유심(有心)한 정부를 무심하다고만 간주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나도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정부를 향한 유심한 마음을 담아 진지한 관심과 애정을 표하고자 한다. 나의 자의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정부 그대들이 제시한 논리에만 입각하여.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청년들이 지급받은 수당을 술 마시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데,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대들이 속한 집단의 ‘도덕적 해이’, 아니 ‘도둑적 해이’를 걱정한다. 아무렴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씩 받는 사람이 낭비하는 세금 액수가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너희 도둑놈들이 헤쳐 먹는 세금과 비교가 될까.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청년수당 90억 원 전액이 음주에 쓰인다 해도 자원외교 비리 22조 원을 비롯한 수십조 원에 이르는 고관대작들의 그간 도둑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구직 청년이 6개월간 받는 수당으로 혹시 술을 마시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평생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타가는 부장 판사가 술을 처마시고 명백한 불법 행위인 성매매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묻고 싶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니 한번 물어보자, 개**놈아. 지방정부가 청년들에게 현금을 살포한다 한들 중앙정부가 구제금융이란 명목으로 부실 은행과 기업에 꽂아주는 수십조 원의 대규모 현금 살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법인에게 주면 현금 지원, 사람에게 주면 현금 살포인가. 나아가 현금 살포는 안 되고 현물 살포는 허용되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우리가 낸 세금에서 나온 물대포 살포로 납세자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건 권장할 일이고, 청년들에게 지하철을 타거나 도시락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라며 현금을 살포하는 건 함부로 해선 안 될 짓으로서 지양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하시니 나도 한 마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그대들에게 월급이 지급되는데, 그 월급의 사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들은 납세자에게 사용처를 제시하고 월급을 받아가고 있는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설마 술을 마신다거나 성매매를 할 목적으로 강남의 오피스텔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대들의 말마따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니 앞으론 현직 판사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은 매월 예상 음주와 성매매 횟수를 포함하여 자신이 받아가는 월급의 사용처를 납세자에게 제출해 주길 바란다.

그대들의 말이 다 맞다. ‘무분별한 현금 살포로 인한 도덕적 해이’,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 전적으로 공감하고 수긍한다. 담뱃세를 올린 첫 해인 작년(2015년)에 2014년 대비 3.6조 원이 추가로 걷혔다고 한다. 올해엔 2014년 대비 6조 원이 국고로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한단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갖다 바치는데 어찌하여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빚만 늘어갈까. 도대체 우리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이길래.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정부의 입장 표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부를 향해 무분별한 현금 살포를 한 탓에 이를 집행하거나 국가 행정을 돌보는 공직자들의 ‘도둑적 해이’가 심화한 것이라는 자성 아닌 자성이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것. 그대들이 내세운 논리가 맞는다면 조세 행정 역시 거둬들인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그대들의 주장처럼 돈 있다고 함부로 세금을 납부할 일이 아니다. 세금을 거둬 수중에 돈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 돈을 어디에 쓸 줄 알고 우리가 감히 세금을 낼 수 있겠나. 그대들이 징수한 세금의 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니 우린 이제 납세의 의무로부터 자유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그대들이 카메라 앞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다. 공무원인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방송을 비롯한 각종 언론을 통해 세금 납부, 즉 그대들을 향한 우리들의 현금 살포 행위에 사실상 정당성이 없다는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며 커밍아웃을 해주셨다. 때마침 사법부에 몸담고 계신 판사께서도 온몸으로 나서 행정부의 발표와 보조를 맞춰 주시니 한층 호소력이 있었다. 무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남몰래 뒤에서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다니.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그대들을 보니 7년간 어두운 땅 속에 있다가 한여름에 양지로 올라와 잠시 머물다 가는 매미가 생각난다. 맴맴맴매~엠~.

사진출처 : www.flickr.com 참여연대.

사진출처 : www.flickr.com – 참여연대

2016. 08. 08. [나인당케의 단상들]

단상1

우리 시대는 ‘신념에 가득 찬 투사’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아닐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투사는 결국은 자신의 신념의 노예가 되어 아주 쉽게 근본주의자가 되곤 한다. 다른 한 편, 우리 시대에 ‘투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도처에서 우리는 여전히 투사들을 보고 있다. 오늘날 투사가 없다는 식의 푸념은 현실을 보지 않는 자세이거나,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면 투사가 아니야’라는 식의 자기위안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이해하는 것이다.

단상 2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밤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은 수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태도인지 모른다. 이것은 상대주의의 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과 확신은 상대주의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진리는 열려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오히려 진리에 대한 열정을 요구한다.

단상 3

오늘은 제2롯데월드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드높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본은 우뚝 솟은 거대한 남근의 형상을 하고 낮은 곳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라고 요구한다. (벤야민의 말투를 한 번 따라해보자면: 하늘을 향해 지어진 성경 속의 바벨탑이 무너진 뒤,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상실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분열되었다. 서울의 바벨탑은 그 자체로 현대인들의 소통불가능성을 알레고리적으로 체현한다.) 나는 그 모습에 분노스러웠지만, 5층의 전망 좋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는 길에는 잠실대로 인근에 아무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경찰과 구청의 행정처리에 감격하며 또 분노했다. 저 거대하게 솟은 남근과 자본의 지배 앞에서 나는 고작 담배 한 개피를 어디서 피워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사회는 이렇게 개인을 통제하는가. 그물처럼 조직화된 ‘관리되는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단상 4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밤에 제 시간에 잠이 든 적이 없다. 늘 피곤하면서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 깊어서야 잠이 드는데, 타지에서도, 고향에서도 언제나 아늑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삶이 우습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100년 전에 기가 막힌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대인들은 선험적 고향상실을 경험한다는 것. 즉 고향상실은 경험에 앞서서, 구체적 경험을 근거짓는다는 것.

단상 5

다시, 오늘날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진리란 허공 어디엔가가 아니라 이러한 일그러진 삶의 미시적 형태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지 말고 이해하라. 그래야 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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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퍼농유]

우쑵니다.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이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드릴 소식이라도 전해드려야 하건만 지난번에 이어 다시 홍보질입니다. 넵넵 ~~~ 더워 죽겠는데 더욱 짜증나게 하시겠지만 이 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방구석 컴퓨터 앞에서 이러고 있는 저는 오죽 갑갑하겠습니까. 정말 울고 싶어지는 한 여름 밤입니다. 막걸리라도 한통 마시고 ……. 쿨럭. 혜량하여 주십시요.

 

 

왜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을까? – 맹호연(孟浩然) 춘효(春曉)

 

1

봄잠에 새벽이 온 걸 깨닫지 못하니(春眠不覺曉)

곳곳에 새 우는 소리다(處處聞啼鳥)

밤에 온 비바람 소리에(夜來風雨聲)

꽃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花落知多少)

 

맹호연(孟浩然)의 ‘춘효(春曉)’다. ‘봄날 새벽’은 기이하다. 늦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봄날 새벽의 청신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늦잠에서 깨어 듣는 요란한 새 소리 때문에 봄날 새벽의 서글픔이 더욱 깊다. 어쩌라, 서글퍼한다고 비바람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새벽이 온지 왜 몰랐을까? 어쩌면 새벽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잠결에 비바람 소리는 또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그 모진 비바람에 꽃이 지고 있다. 전원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일까? 천만에 이것은 전원시가 아니다.

물론 맹호연은 전원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묘사하는 전원은 한적하거나 밝지 못하다. 오히려 세상을 한탄하거나 울적하여 분위기가 밝지 않다. 그래서 청신한 새벽에 느끼는 울적함은 애처로움의 미학이다.

육유(陸游)라는 시인은 촉(蜀) 땅으로 들어가던 중 스스로 자문하였다.

 

이 몸은 시인이나 되라는 걸까?(此身合是詩人未?)

가랑비 속 나귀 타고 검문을 지났으니(細雨騎驢過劍門)

 

육유의 이 표현은 자신이 일개 시인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목해야할 것은 ‘나귀를 탄다’는 표현이다. 나귀를 타는 것이 왜 시인을 상징하게 되었을까? 맹호연 때문이다.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는 것을. 눈썹은 찌푸리고 어깨는 불쑥 솟은 산 같은 모습을.”(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 소동파가 맹호연을 묘사한 이 말 때문에 눈 속에서 나귀를 탄 시인의 이미지는 고착되었다.

기려도김명국

당연히 그림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맹호연의 초상은 아니, 시인의 초상은 나귀를 타고 눈 속을 걷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귀를 타는 모습을 그린 기려도(騎驢圖)는 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조선조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기려도와 함덕윤 기려도가 인상적이다.

기려도함윤덕

눈을 밟고 매화를 찾는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나 파교에서 매화를 찾는다는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이미지도 모두 맹호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답설심매’와 ‘파교심매’도 마찬가지로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가 유명하다.

파교심매심사정

맹호연의 ‘춘효’와 관련하여 내가 주목하는 그림이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그림이다. 1915년에 백악과 경복궁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전해진다. 여름과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인데 제목이 왜 봄날 새벽을 뜻하는 ‘백악춘효’일까?

백악춘효

심전은 ‘백악춘효’에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915년 당시 경복궁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경복궁은 일제의 탄압 아래 파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되는 경복궁 모습은 몰락하는 조선 왕조의 모습과도 같았다.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보며 심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심전 안중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이왕직의 요청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백악춘효’를 완성한다. 조선왕조의 봄날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렸던 것은 아닐까? 심전은 분명 맹호연의 이 시를 의식했을 것이다. 어젯밤 모진 비바람에 또 얼마나 많은 꽃들이 떨어졌을까? 봄날 새벽은 언제 오려나.

 

2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근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의 ‘낙화’이다. 맹호연의 ‘춘효’를 읽을 때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시다. 맹호연은 모진 비바람에 지고만 꽃잎을 근심하지만, 조지훈은 꽃이 졌다고 해서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한다. 꽃은 질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지게 마련이다. 어쩌란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일한 가신이었던 박지원은 2003년 교도소 가는 길에서 시를 읊었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 나는 의아해했다. 아니, 정치인이 교도소에 가면서 이런 시 구절을 읊다니. 낭만적이라서 놀랐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내뱉은 시 구절에는 묘한 상징적 대비가 있었다.

박지원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비바람은 누구겠는가? 박해하는 사람들이다. 꽃은 누군가? 박해를 받는 자신이 아닐까? 자신은 부당한 비바람에 의해서 비록 박해를 받지만 아름다운 꽃이기에 탓하지는 않겠다는 대범한 자신의 마음을 이 시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호연의 시를 봄날 한가함과 청신함을 노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을 읽어낸다. 탐미적이면서 허무한 서글픔이 배어 있는 달관적인 태도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꽃과 바람을 생각한다면 맹호연의 시는 그렇게 한가하지만은 않다. 바람은 부당한 소인배들의 세력이 벌이는 횡포이고 꽃은 그 횡포에 억울하게 당한 군자들이 아닌가? 맹호연은 꽃이 또 얼마나 떨어졌을까라고 근심하고 있다. 정의는 또 얼마나 부당한 세력들에게 박해를 받았던가.

<주역>에는 바로 소인들의 세력이 군자를 박해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괘가 있다. 스물세 번째 괘인 박(剝䷖)괘이다. 산지박(山地剝)으로 읽는다. 괘의 모습이 산을 상징하는 간(艮☶)괘가 위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괘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음(陰⚋)효와 하나의 양(陽⚊)효로 이루어졌다. 음이 아래에서부터 생겨나서 점차로 자라 극성한 형세로 발전하여 하나의 양을 몰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소멸이며 박멸이다. 빼앗긴다는 뜻이 있다. 모진 비바람에 꽃잎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하나만이 남아 있다.

이 마지막을 상징하는 효가 박괘의 가장 위에 있는 양효이다. 이 마지막 여섯 번째 효의 말은 이렇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그의 집을 없앤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여기에 유명한 말이 나온다. 큰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인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석과불식’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했다. 신영복은 석과(碩果)를 씨과실로 푼다. 그는 ‘석과불식’을 “씨과실을 먹지 않는다”고 풀면서 희망을 읽었다.

석과불식1

옛날 사람들은 과일을 딸 때 모두 다 따지 않았다. 몇 알은 반드시 남겨 새들의 먹이가 되게 했다. 까치밥이라 한다. 씨과실은 상징적으로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초겨울의 감나무를 상상하면 좋다.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 있는 빨간 감 한 개가 ‘희망’을 상징한다.

씨과실은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씨를 남긴다. 가장 크고 탐스런 씨과실은 단 하나 남았더라도 희망이다. 씨는 이듬해 봄에 새싹을 피우기 때문이다. 스물세 번째 박괘 다음 괘는 무슨 괘일까? 스물네 번째 괘는 복(復䷗)괘이다. 지뢰복(地雷復)이라고 읽는다.

땅을 상징하는 곤(坤☷)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괘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땅 아래에서 우레와 같은 양(陽)의 기운이 올라온다. 복괘를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에서 양(陽)효 하나가 여러 음(陰)들의 세력을 뚫고 올라오고 있다. 생명의 소생을 상징하는 괘다. 박괘를 이어 복괘로 이어지는 과정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는다. 반드시 씨를 남기고 소생한다. 다시 빛이 솟아오르는 광복(光復)이다.

심전 안중식이 1915년 ‘백악춘효’를 그렸을 때 조선의 광복을 희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봄날의 새벽 광복은 1945년에 왔다. 하지만 물어야 할 것은 단지 희망만이 아니다. 희망을 꿈꾼다고 해서 반드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희망의 근거다. 희망은 단지 환상적인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괘의 ‘석과불식’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먹히지 않았을까?

 

3

맹호연은 지고만 꽃잎을 서글퍼했지만 조지훈은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고 했다. 탓할 수 없다고 해서 체념하고 포기해야한다는 말일까? 박괘에 달린 괘의 말은 이렇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것은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하늘의 운행이기 때문이다.(順而止之, 觀象也. 君子尙消息盈虛. 天行也.)

 

불의한 세력의 비바람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 고난의 시대에 그 비바람을 탓할 순 없다는 것은 자포자기적 체념은 아니다. 힘겨워하고 두려워하면서 혼자 괴로워하는 일도 아니다. 분노하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일도 아니다. 무모하게 저항하는 일도 아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자조하는 것도 아니다. 냉정을 되찾는 일이다.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멈추”는 일이다.

“소멸되어 빼앗기는 모습을 관찰했다.”는 말은 그래서 비바람의 박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자라나고 줄어들고 가득차고 텅 비는 과정”을 파악하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세의 부득이함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이렇게 냉정하게 현실을 이해하면서 희망을 품는 씨과실은 어떤 비바람이 올지라도 먹히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고 했다. 비바람에 꽃이 졌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로만 서있는 겨울날 나무들의 신세를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다 이 가혹한 겨울이 왔던 것일까? 어쩌다 단 하나의 감만이 남아 비바람을 견디고 있을까?

Spinoza

이렇게 되어버린 시세와 형세의 원인을 이해하는 일이다. 꽃잎이 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요, 비바람을 탓할 필요도 없다. 자초한 일이라고 자학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때가 되면 꽃은 지게 마련이지만 꽃이 질 수밖에 없는 형세의 원인을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먼저 이해하라.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언더스탠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해야 한다. 사람들의 언더는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에 선다면 서글퍼하기를 멈추고 냉정하게 이해해야한다. 언더에 스탠드하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언더에 스탠드할 일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한다. 하지만 먼저 사람들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무의식 아래에 깔려있는 편견과 오만과 증오 등의 썩어빠진 엘리트 근성들을 먼저 이해해야하리라. 그것을 먼저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호연에게는 봄을 시샘하는 비바람과 함께 덧없이 지고 만 꽃의 허무함을 담담히 바라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인생을 달관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달관한다고 해서 봄은 오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이 모진 겨울을 넘기면 다시 봄이 오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도 봄은 오지 않는다.

희망은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넋 놓고 기다리는 무기력이 아니다. 희망은 냉정한 자기 이해와 현실 인식에서 솟아오르는 부득이함이다. 이 부득이함은 어찌할 수 없기에 할 수밖에 없는 힘과 의지로 충만하다. 이 힘과 의지 때문에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림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씨앗을 땅에 일구는 일이다. 씨앗을 땅에 심기 위해서는 더렵혀진 땅을 새롭게 일구는 작업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꽃이 졌다고 해서 서글퍼하는 일도 사치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