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4분의 3 청춘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7

4분의 3 청춘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열린다.

 

끊어지지 않는 고통은

연민을 끊임없이 찾아

감정과 감정의

선과 선의

사이와 사이에

공간을 가르고

점점 점을 찍고

면을 채우고

색을 칠한다.

 

복잡한 선과 선은

내면을 관통하여

지루하게 수식을 만들고

부유하는 날개를 끊고

뚫리는 절벽에는

바람이 날리기도 한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남기기도 하고

하얀 얼굴을 내미는

작은 빛은 굵게, 진하게, 흐리게

드넓은 언덕과 언덕을 만들고

 

흩날리는 먹구름에

선을 깡충 뛰어넘어

하늘의 그려진

가시밭길 뒤늦은 청춘이

아슬아슬 걸린다.

 

낮으로 가는 밤길을 찾아

밤으로 가는 낮 길을 찾아

 

겨울의 문턱이 없는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닫힌다.

 

그렇게 시간의 흔적이

하나하나 새겨지고 있다.

 

2017. 8. 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수사(修辭)[퍼농유]

6. 수사(修辭)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던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언어론적 전회를 일군 천재적 철학자였다. 언어론적 전회란 의식이나 언어 자체의 의미를 묻기보다는 오히려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기능으로 작용하는지를 묻는 언어 게임에 관한 문제이다.

 

 

그럴 때 언어란 사물의 지칭이나 지칭 대상 너머에 있는 실체의 표상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누가 어떻게 사용하고 교환하고 수용하는 수단이며 매개이다. 게임의 도구이다. 흔히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 혹은 화행 이론(話行理論, speech-act theory)이라는 것이다. 우린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언어를 수단으로 행위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철학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의 지성이 걸려 있는 마법에 대항하는 전투이다.

철학에 대한 정의로서 가장 공감하는 말이다. 철학은 미혹된 마법에 대항하고 깨어나도록 만드는 전투이다. 그 수단은 언어다. 그러나 마법에 걸리게 된 것도 언어 때문이 아닐까. 언어가 우리의 세계이고 한계라면 우리는 마법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마법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법에서 깨어난 현실은 무엇일까. 마법에서 깨어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법에서 깨어났다면 어쩌면 다시 마법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삶은 마법적인 환상은 아니지만 환상도 필요로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럴 때 철학이란 더불어 정치란 마법으로서 꿈을 심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을 깨면서 동시에 꿈을 주는 것이다. 꿈을 깨면 현실이지만 꿈을 꾸면 현실이 바뀌기도 한다.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현실은 메마른 사막이 된다. 말이란, 곧 언어란 나의 세계이다. 우리는 말을 나누며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동물이다.

 

 

어떤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옳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한다. 이 말은 형식 논리로 본다면 모순을 담고 있다. 그것이 진리이고 옳은 말이라면 싸가지 없이 들리지 않아야 한다. 옳은 말은 옳게 들려야 한다. 근데 왜 싸가지 없게 들리는 것일까.

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미묘한 어투와 뉘앙스와 타이밍도 문제였겠지만 상대는 누구이며 그 상대에게 어떤 언어와 어떤 방식으로 말할 것이며 상대는 어떻게 수용할까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修辭)에 관한 문제다. 마법에 관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주역 건괘(乾卦)의 구삼(九三)효 「문언전(文言傳)」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덕을 증진하고 업적을 만든다. 진실과 신뢰가 덕을 증진시키는 근원이고 말을 닦아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업적을 만드는 근원이다.(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수사’란 말은 ‘말을 닦아 진정성을 세우는 것’이라고 번역한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수사’란 자신의 진정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과 진정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영향력과 효용적 결과를 만든다.

수사적 기술이란 내면적 진정성을 드러내어 신뢰와 영향력을 형성할 뿐 아니라 효용적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말한다. 남송 시대 주자(朱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비록 진실과 신뢰의 마음이 있다고 해도 말을 닦아 그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정치적인 입지를 가질 수 없다.”(雖有忠信之心, 然非修辭立誠則無以居之.)

진리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진리는 수사를 요구한다. 사회 활동가였던 제이슨 델 간디오(Jason Del Gandio)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책에서 혁명을 꿈꾸고 사회 변혁을 원하는 급진주의자들에게 수사를 공부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수사를 노동으로 규정한다. 물질세계의 변혁을 위해서 노동이 필요하듯이 비물질적인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도 노동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수사란 변혁을 위한 노동이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의 지성이 걸려 있는 마법에 대항하는 전투”이기도 하며 동시에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세상에 마법을 거는 기술적 노동이기도 하다. 마법을 통해 세상은 새롭게 창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인내와 전략이 필요한 섬세한 노동이다. 현실을 고려하고 오랜 시간의 누적적 과정을 거쳐서 젓갈을 곰삭히는 듯한 절제의 노력이 필요한 노동이다. 수사적 노동은 그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듯이, 제이슨 델 간디오는 이렇게 선언한다. “만국의 수사가여, 단결하라!”

 

청춘이 뭐길래 [피켓2030]

이나연(건국대 철학과)

 

편집자님께 청춘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청춘, 청춘이라.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글들은 하나같이 사전에 써져있는 정의를 말하고 가기에 나도 그래보겠다. 청춘의 뜻은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란다. 아, 좋다. 날마다 봄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사로운 노란 빛의 햇살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예쁜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한 꽃들의 인사.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사전적 정의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10대와 20대인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밝고 푸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들이 청춘이라며, 청춘은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먹인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쓰러져도, 다쳐도, 고통스러워도 청춘이니 다시 일어나라고 종용한다. 이제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지겹다. 지겨워서 그냥 귀를 막고 퍼질러 누워있고 싶다. 그런 말을 듣느라고 내 뇌 용량을 쓰느니 시끄러운 락을 들으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드는 게 낫다. 어른들의 착각과 달리 나는 10대 후반과 20대의 나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지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만일 푸른색이 우리 나이 대를 대변한다면 피어나는 새싹과 같아서 푸른 것이 아닌 여기저기 멍이 들어 푸른 것 때문은 아닐까.

 

 

요새는 예전과 달리 초중고라는 정규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이렇게 필수가 되고 나니, 그걸 원치 않는 이들이, 맞지 않는 이들이 이를 거부할 힘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억압적인 학교의 시스템을 인지하는 이들도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받는 차별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주입식 교육에 흥미가 없는 이들도 그것이 무서워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유롭게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공부를 해야 한다. 이처럼 원치 않는 체제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있든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그것도 9년째 말이다. 2015년 자살한 청소년은 모두 708명, 암으로 사망한 경우보다 2.5배 많다고 한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가시밭길을 지나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길만이 옳다고 하며, 그렇기에 싫어도 버텨야 한다며 그곳에 우리를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10대가 발에 피를 흘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해놓으면 쓸 데가 있다는, 꿈을 이루려면 일단 대학은 가야한다는 협박을 들으며 말이다. 그래서 멍 하나가 들었다.

 

 

자, 학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전 이제 수능을 볼 차례이다.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힘든 이곳에서 자살하지 않은 약 60만 명의 10대가 수능을 치른다. 그 60만 명은 시험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결정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시험장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뿔싸,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래도 돈 있는 10대는 사정이 낫다.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재수학원에 들어가면 된다. 돈 없는 10대에게는 선택권도 없다. 재수는 사치다. 나온 점수에 맞춰 그나마 나은 대학 중에 ‘골라’ 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선택은 결코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대학을 가더라도 집안에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한다. 비싼 등록금을 내주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나보다는 집안을 위한 학과와 학교를 택한다. 즉, 그들은 취업이 잘 되는 과 혹은 빨리 졸업해서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전문대를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사장 비위 맞추랴 손님 비위 맞추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말 걸 시간조차 없이 흘러간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에게 맞추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또 아플 수밖에 없다. 갈 곳 없는 원망만이 내 머릿속을 떠돌다가 결국 나에게 도착한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난 거지. 왜 우리 부모님은 돈이 없지. 아니야. 이렇게 대학까지 보내주셨는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참 못났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결국 개인이 자기혐오를 하게끔 만든다. 이때 멍 하나가 더 늘어났다.

 

 

여차저차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약 1000만원에서 3000만원이 넘는 빚을 떠안고 우리는 사회로 나왔다. 그 빚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는데 회사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에 대해 써내라고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까지 뭐했지. 별로 한 게 없다. 아니, 한 것은 많지만 그게 회사가 좋아할 것인지는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지원서 작성을 끝낸다. 지원 동기는 당연히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해서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를 찬양하는 내용을 써야 한다. 다 쓰고 보니 내가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인데도 내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래도 그나마 날 뽑을 것 같은 회사에 일단 지원서를 넣어본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남들만큼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결과는 불합격뿐이다. 있지도 않았던 자존감이 이제는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 친구들이 싫은 소리를 하며 직장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버겁다. 누구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데 배부른 소리하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젠 그런 친구들도 싫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부모님도 싫고 가끔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친척들도 다 싫다. 무엇보다도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싫다. 또 그렇게 멍이 든다.

이게 바로 어른들이 말하는 청춘의 실제 삶이다. 세상에 이리저리 치여 멍으로 얼룩져서 푸른 삶이다. 청춘이 쓰는 글이란 이런 것이다. 더 이상 청춘에게 환상을 갖지 말라. 당신들이 볼 땐, 밟히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이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이렇게 아파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청춘이라고 해서 이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청춘이니 괜찮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 따위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회를 바꾸자고 말하지 못하겠다면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해라. 그럼 반이라도 가니깐.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힘들다고 외치는 청춘들의 목소리를 죽이려 하지 말라. 청춘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청춘이란 단어는 그저 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죽어있는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순치[퍼농유]

5. 순치(馴致)

 

길들임이란 좋은 것이기도 하며 또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나 반면은 있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여우가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사이가 좋아진다는 것이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며 떨어져 지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한다. 날 길들여줘. 날 사랑해줘.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줘. 그것이 편하고 안정된 것이다. 길들임을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순치(馴致)이다. 이 말은 <주역> 곤(坤)괘 초효 「상전」에 나온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니, 음(陰)이 처음 응결한 것이다. 그 도(道)를 따라 점차적으로 이르러서(순치) 단단한 얼음이 된 것이다.”(象曰, 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여기서 순치는 서리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얼음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많은 유학자들은 순치라는 용어를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용해 왔다. 배움이던 사람과의 관계이던 다스림이던 모든 영역은 순치해야만 했다.

송대 성리학자인 정이천은 그래서 “도로써 순치해야지 강압적인 폭력으로 해서는 안 된다.”(蓋以道馴致, 不以暴爲之也.)는 말을 한다. 순치란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움도 사랑도 정치도 강압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를 얻는다. 이 자연의 원리와 순서를 무시하고 고원한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자기기만적 폭력이다.

 

 

그러나 순치의 어원적 의미는 좀 섬뜩하다. 순(馴)이란 길들이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을 길들인다는 의미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는 “말은 먼저 길들인 뒤에 양마(良馬)를 따진다.”(馬先馴而後求良)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달리는 야생마일지라도 좋은 말일 수 없다. 먼저 잘 길들인 뒤에 순치시킨 뒤에 좋은 말이 된다. 양마(良馬)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길들인 뒤에야 양순(良順)하고 선량(善良)한 사람이 된다. 양순하고 선량한 사람은 자연적인 자질과 품성이 아니라 길들여진 뒤에 따질 수 있는 인위적 결과일 뿐이다. 순치되고 길들여질 때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쇠로 만든 우리’(Iron Cages)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관료제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보상과 희망 때문에 고정된 제도 속에 스스로를 속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료제의 문제다. 순치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자본과 국가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순치시키지 않는다. 생리(生理)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는 관료제 사회를 편안하고 안정되게 생각한다. 결국 길들여진 사람들은 스스로 순치되기를 원한다. 날 사랑해줘! 제발!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되게 말들어줘!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연못에 사는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우리에 갇혀 길들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살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우리는 ‘우리’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시대를 마감하는 이때 구태의연한 관료제 우리에서 벗어나야할 때이다. 이제 우리에서 벗어나 야생의 자신을 찾아야 할 터이다. 순치되지 않은 야생마의 근성을 회복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sallymann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원하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되고 싶다. 야생의 근성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우리를 세워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를 길들여줄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우리이기도 하다.

섦 – 유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6

유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가느다란 선위에 걸린

마음을 따라

공간과 공간 사이를 유랑한다.

소금 사막에도 있고

산토리니에도 있고

노르웨이 숲에도 있고

흐릿한 구름사이로

파란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랑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내 사랑도 있었다.

잃어버린 토끼도 있고

잊어버린 강아지도 있고

잊어버린 작은 강아지풀도 있고

잃어버린 청개구리도 있고

언제나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있는 것이 많다.

 

그렇게 보송보송

작은 기억이 조각조각

아슬아슬 걸려 있다.

 

2016. 8.16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털이 보송보송한 벌레가 아니지만 벌레 같은 현상을 보며 어렸을 때 추억이 생각납니다. 자연은 모두 내 것이었고 나의 세상이었습니다. 한때는 그랬습니다. 길을 쉼 없이 갈길 가는 털북숭이 벌레를 들여다보며 깔깔 웃고, 군집을 이룬 까만 개미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들을 보며 즐거워하며 작고 작은이들의 신기한 우주를 만나 행복을 느꼈습니다. 넓은 들판에 파란 하늘, 흐린 하늘, 바람, 나무, 벼, 수많은 풀벌레들,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들, 산토끼, 강아지, 빨간 고추잠자리, 푸릇한 작은 잎들, 밤, 살구, 모과, 감나무가 있는 그 시간의 조각을 추억하면서 내게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많음을 잊고 살고, 추억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살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문득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의 꿈은 더 크고 넓게 자랐습니다. 나의 삶은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만 같은 큰 꿈도 생겼습니다. 그곳에는 산토리니도 있고 그곳에는 노르웨이도 있고 그곳에는 큰 호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공간에 현재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그들을 불러 행복한 조각조각들의 향기를 맡고 보고 만져보고 들어보는 유랑을 떠나봅니다.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최종덕의 책과 리뷰] -16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한국환경보고서 2017 20대 이슈

 

오늘의 서평 책 :  그린 챌린지(한국환경보고서 2017),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이번 서평 책은 <그린챌린지> (녹색사회연구소, 알렙, 2017) 입니다.
글 대신 사진으로 책의 내용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이 환경주제를 잘 읽으려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 눈으로 알아보기 쉽게 책의 목차에 따른 주제 순서대로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그냥 보시기만 해도 좋아요.
 
그래도 한 마디 하려합니다.
이 책은 올해 5월에 나왔습니다. 그 사에에 바뀐 내용들이 있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20개 주제 가운데 8월15일 기준으로  반드시 바꿔야 될 게 바뀌지 않은 것이 있구요,
그리고 바뀌면 안 될 것이 바뀐 것이 있어요
 
설악산케이블카 사업은 작년 2016년 말에  문화재청에 의해 부결된 것인데, 2017년 5월에 보수기관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이 작용했는지, 사업진행을 한다는 행정심판으로 뒤집어 졌습니다. 우리네 심사도 뒤집어졌구요. 기필코 다시 케이블카 사업단절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더 심사가 뒤집어질 일이 있습니다. 바뀌어야 할 사드 배치를 바꿔야 하는데, 굳이 사드배치를 강행한다고 하니 정말 믿을만한 정권이 없네요. 평화환경은 더 멀어지는군요.

추신>
아래 20장의 그림파일은 책을 요약정리한 것인데, 제가 직접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그림파일을 가져다가 돌려 쓸 수 있습니다. 많은 활용 부탁드립니다.
    

미병(未病) [퍼농유]

4. 미병(未病)

 

아는 선배와 함께 식사를 할 때였다. 그는 음식의 영양 성분과 그 음식을 먹었을 때 일어나는 몸의 효과 등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음식을 평가했다.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할지. 놀라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몸이 아프다는 이야기 아닌가. 음식에 관해 많이 안다는 것은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관리해야할 병이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건강을 해쳤을 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한다. 음식을 고르고 영양분을 분석하고 신체의 기능에 대해서 학습한다. 분석하고 학습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맞는 식생활을 실천한다.

선배의 음식공부는 자신의 통증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 행복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왜 따로 공부까지 하겠는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공부를 한다. 머리 아픈 사람들이 약을 구하는 법이다. 병이 없다면 약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서글픈 일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의학에는 미병(未病)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양의학적인 검사로는 몸의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자각증상을 가지고 있는 반 건강상태를 말한다. 특정질환을 진단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강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없는 질병과 건강의 중간상태를 말한다. 완전한 건강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질병 상태도 아닌 제3의 상태이다.

 

Bruce Davidson

 

문제일까?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최상의 의사는 미병 상태를 치료하고, 중간의 의사는 이미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한다.”(上工, 治未病. 中工, 治已病,)는 말이 있다고 한다. 병에 걸리기 전에 먼저 아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 악화되기 전에 치료가 아닌 관리가 중요한 상태이다.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상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병이다. 오직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그래서 병이 될 수 없다. 성인은 병이 없으니 그 병을 병으로 알고 있어서 병이 될 수 없다.”(知不知, 上, 不知知, 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노자에 따르면 미병은 결코 나쁜 상태는 아니다. 병을 모르는 것이 병이지 병을 어떤 자각증상을 통해 알고 있다면 병이 아닐 수 있다. 병은 완치할 수 없다. 병이 악화되기 이전에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것은 치료의 첫단계이다.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행동이 옳고 선하다고 강변하기까지 한다. 고집하고 합리화하면서 자기를 기만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건강에 대한 문제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쩌면 미병의 상태이어야 오히려 더 건강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라는 착각을 끊임없이 생산하기보다는 병에 대한 논쟁과 대화가 필요하다.

건강은 병이 완전히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병이 있지만 그 병을 병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관리할 줄 아는 적절한 능력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짜 환자다. 병을 병으로 인지하지 못한 사회가 병을 깊게 앓는다.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다. 잭 니콜슨의 광기어린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정신 병동이라는 전제적이고 강압적인 시스템 하에서 인간이 추구해야할 가치와 어떻게 하면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개인의 자유를 시스템으로 통제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먼저 사회적 병을 병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빈축[퍼농유]

3. 빈축(嚬蹙)

 

흥분하지 말자, 혐오는 온당하다. 어떤 경우 정당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대학>에는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듯이 한다.”(如惡惡臭, 如好好色)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의 감정을 기만하지 않는 진정성(誠)의 문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비유적으로 하는 말인 듯하지만 결코 비유가 아니다.

누구나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처사에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불공정을 대하는 이 사회적 감정은 공정성을 요구하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정의감이다. 과연 인간만의 독특한 감정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은 당연히 이점을 확인하려고 실험을 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원숭이에게 행한 실험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결론만 말하자. 원숭이는 자신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다른 원숭이의 부당한 대우에는 무관심하다. 인간은 상대를 배려할 줄 안다. 다른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때 내가 불편하더라도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안다. 그러므로 자신만의 불공정만이 아니라 부당하고 불공정한 대우와 처사 자체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인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우리 몸이라는 생물학적 차원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또 결론만 말하자. 혐오는 공정성이라는 도덕과 관련된다. 근본적으로 혐오는 음식 맛이 나쁠 때, 오염된 것을 접했을 때 나오는 거부반응과 관련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맛이 나쁘고 오염된 음식에는 악취가 난다. 악취나 오염된 음식과 관련된 혐오는 동물의 생리 반응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는 오럴(oral, 입)에서부터 모럴(moral, 도덕)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 하나 지적하는 것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얼굴 표정이 미각 혐오에서 일어나는 얼굴 표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안와하근(眼窩下筋)의 반응과 관련된다. 안와하근은 상한 음식을 먹고 나서 윗입술을 들어 올려 코에 주름이 잡히는 표정을 지을 때 사용되는 얼굴 근육이라 한다. 코를 찡그리는 표정이다.

 

Damien hirst

 

흔히 정의를 뜻하는 의(義)를 수오지심(羞惡之心)과 관련해서 말했던 인물은 맹자다. 수오지심이란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제선왕에게 맹자는 제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모든 백성과 함께 그 음악을 즐긴다면, 즉 여민동락(與民同樂)하면 잘 다스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 왕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들으면 골치아파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왕이 음악을 좋아하시나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곤궁에 빠지게 하는가라고 한탄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이맛살을 찌푸린다’고 번역한 말은 ‘축알(蹙頞)’이다. ‘알(頞)’을 흔히 이마로 해석하는데 콧잔등의 뜻이 있다. 맥락적으로 정확히 빈축(嚬蹙)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빈축은 얼굴 정확히는 콧잔등을 찡그린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을 이르는 말이다.

어느 부위를 주로 묘사하는가의 차이가 있지 맹자의 ‘축알’과 빈축과 안와하근을 가지고 설명하는 혐오와 모두 동일한 얼굴 표정임에 틀림없다. 빈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비난이나 미움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부당한 일과 불공정한 처사에 대한 혐오와 관련된다.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혐오다.

맹자가 말하는 빈축의 도덕은 정치적인 부당함에 대한 혐오이며 동시에 악취를 싫어하는 동물의 생리 반응과 관련된다. 빈축은 오럴에서 모럴로 발전된 진화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인간의 독특한 현상이다. 빈축의 혐오는 정당하면서 자연스럽다. 악취는 비단 음식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행위와 마음과 어떤 암시에서조차도 악취는 난다. 악취를 미워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취향은 진화된 결과로서 공정성에 대한 도덕적 근거다. 빈축 사는 일을 혐오하는 일은 그래서 온당하다.

 

그나 저나 이 더운 밤 취두부 한 사발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