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필 감독을 기억에 새기며 [유철의 유럽방랑기] -4

이번 유철의 유럽방랑기는 특별히 필자의 삶에, 또 많은 이들의 삶에 인연과 시선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글을 싣습니다. 인연이 있던 많은 분들이야 당연히 고인을 추모하겠지만, 일면식 없는 이들도  세상의 한 구석을 가까이서 함께 기록으로 남겨왔던 고인과 고인의 작업들을 조금이나마 다시 되새기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서요. 너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그 시절, 나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싸움-에바다(박종필, 1999)’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에바다 문제, 특히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을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 그것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영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꾼 건 그 영화제의 입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만들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됐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투정이란 것을 나도, 그 투정을 듣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 내가 영상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 박종필 감독, 종필이 형이 있다. 그가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내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2000년 어느 날 신촌에서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연대 앞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삼겹살 집이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나누는 그런 곳. 삼겹살이라 하더라도 불판에 얹으면 금새 녹아 없어지는 1인분 2000원짜리 삼겹살이니, 이게 정말 삼겹살인지 의심스러운 그런 삼겹살이 나오는 허름한 곳이었다. 
한 대학생 누나가 내게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사람이 오니 꼭 나오라 연락에 나는 야자를 제끼고, 독서실 자리에 불을 켜 놓고서는 형 누나들과 할 소주한잔 기대하며 신촌으로 향했다. 
그들과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본 그 영화, ‘끝없는 싸움-에바다’를 만든 그 사람이라고. 그도 내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한다.

“어, 네가 그 고등학생이구나! 반갑다!”

그는 내게 고등학생 한 명이 대학교 동아리실에 무작정 찾아와 그들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동안 무척 궁금 했었다고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라던 그. 그러나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다루는 법, 촬영, 편집할 때 주의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의미하고 그리고 중요한지를 늘어 놓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꼭 같이 작업하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제스쳐, 그의 말투, 그의 젓가락질, 소주 마시는 모습,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당시 그가 건낸 그의 명함을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내게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영상작업을 통해 생긴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만난 종필이 형. 그는 바쁜 일이 생기거나, 촬영이 겹치거나 하면 가끔 내게 카메라를 맡기곤 했다. 그는 내게 촬영 부탁을 하면서, 그날 필요한 그림들과 내용들을 설명하다가는 결국 항상 마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봐. 못 쓰면 다시 촬영하면 되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에바다 농아원의 문이 열리던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에바다 농아원 사태는 점차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에바다 정상화를 자축하는 잔칫날.

“야, 너 유철이 아니니? 너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지내?”

반가운 형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했던 나. 학생회를 한다는 핑계로, 나의 게으름으로 야학에 발걸음이 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상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영상작업의 첫 대상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에서, 그 에바다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와의 만남, 그러나 예전 나의 꿈에서 많이 멀어진 나. 그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불편한 것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서운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형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당시 영상을 안한다는 그런 서운함일 듯 싶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이제 영상은 그만 둔 거니?”

최소한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질문. 베시시 웃으며 “네”라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왜’를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으며 웃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난다.

굳이 형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형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쉬이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모처에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술자리, 형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영상을 그만하기로 한거였지?”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머뭇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형, 저는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 비참하고 또 억울한데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너무 잔인해요. 평생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입학 후부터는 카메라를 결코 들지 않았다. 물론 몇 번 시도하기도 했으나, 열정과 분노만이 가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그리고 그 현장에서 같이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외치는 구호와 분노를 기록해야 하는 작업.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들과 부둥켜 안거나 혹은 같이 울기보다는,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 작업. 내게 그런 작업들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그 수 많은 사건들에 벽을 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말도 안되는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서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유철아,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네가 해야할 역할과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너는 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해야만 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변명과 변명 속 어딘가에 묻어 있는 서운함, 아마 형은 그 서운함을 알아 차린 듯 싶었다. 내가 영상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을 형은 이미 알아 차렸던 것 같다. 그때 그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같잖게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지난해, 초여름. 정말 오랜만에 양재동에서 형과 만났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형과의 술자리에 나는 추억 팔이 삼매경에 빠졌다. 신촌에서 불판에 얹으면 녹아 없어지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그리고 질겨서 결국 씹다가는 결국 그냥 이를 삼켜야 했던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빡빡머리 고등학생 앉혀놓고 소주 따라주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 추억팔이. 형은 내게 그 때 나와 함께 촬영 다니던 여학생하고는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냐며 뜬금포를 날렸다. 이에 나는 질세라 거 형의 연애사로 응수하며 ‘우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고, 노들이야기를 하고.. 
함께 술자리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만 한참을 형과 소주를 기울였다. 둘의 혀가 조금씩 꼬여가던 찰나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

당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 안됐던 터라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형과 함께 탄 택시. 형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유철아, 건강해야 해. 유학생활 힘들겠지만 건강관리 잘하고, 들어오면 또 한잔 하자.”

그렇게 나는 다음에, 진짜 다음에 꼭 한 잔 할 것을 약속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소주 한 잔 더 하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놀려주었을 텐데.. 건강 꼭 챙기시라 이야기 했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 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이렇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는 길 조차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후회마저 허망하다.

종필이 형, 이제 정말 형을 볼 수 없는 거야? 전 형이 언젠간 꼭 같이 작업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가긴 어딜가요.. 아직도 저는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힘드네요. 특히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아직도 형에게 투정만 늘어 놓네요. 아직도 형 앞에선 제가 철부지 고등학생인 것 같아요. 그냥 지금 형이 그리운건 어쩔도리가 없네요. 보고싶어요.. 형.. 그저 형이 가는 길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괴롭네요.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냥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 날 양재동에서 형에게 한 말, 다시 하고 싶었어요. 내가 꿈을 키워가던 시절, 당신은 내게 영웅이었고, 지금도 형을 보면 설렌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건 정말 형이라고 말이에요. 결국 전하지 못한 이말 이렇게나마 남겨요. 그곳에서 라도 이 글 읽어주세요.

이제 정말 형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아니, 보낸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그냥 가슴에 묻는 것이겠죠. 호식이 형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아마 가슴에 묻은 형들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으로 계실 것이고,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의 원동력이 될거에요. 

형, 종필이 형! 조심히 가요. 먼 훗날 꼭 저승에서 약속한 소주 한 잔 기울여요. 그 때까지 건강히 계셔요..!

 

사진출처 : 4. 16 연대 페이스북 타임라인


현재 유튜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영화 다시 돌아보기가 진행 중이니 꼭 보시는 것도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김세리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

 

평생 어린이를 마음에 품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살았던 그. 33세 짧은 삶을 마감하는 방정환 선생의 유언이다. 생의 끝자락에서도 그의 생각은 오직 어린이에 대한 염려와 걱정뿐. 과연 그에게 어린이는 어떤 의미인가.

 

조선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린 사람들은 어른의 예속물 또는 부속물 정도로 간주되어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인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별되고 무시당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물론 어린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며 불평등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하나의 존재로 이끌어내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몸소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1899~1931) 선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개념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은 1920년대 방정환에 의해서였으며, 그 이전에는 ‘소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이 근대성을 갖기 시작한 것을 1914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청춘』 창간호에 ‘어린이의 꿈’을 게재하는 것에 기원을 두나 용어가 근대적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이다.

 

 

 

 

 

 

 

 

 

[방정환 사진 – 출처:네이버백과]
[색동회 회원 (앞줄 왼쪽부터) 조재호 고한승 방정환 진장섭,
(뒷줄 왼쪽부터) 정순철 정병기 윤극영 손진태 – 출처:한국잡지백년2]

 

방정환을 떠올리면 다양한 수식어가 함께 따라간다.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선구자, 아동교육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소년운동가, 언론·출판인, 천도교 청년운동가, 동화 구연가, 민족운동가 등 그가 살았던 짧은 인생속에서 어떻게 그 수많은 일들을 해내었는지 참으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들은 결국 ‘어린이’를 위한 운동으로 귀결된다. 독립운동가인 그는 나라운명이 미래어른인 어린이에 의해 좌우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도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당장의 현상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눈으로 어린이를 대할 것을 강설하였다. 그리고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를 대함에 상당히 주체적인 인격으로 분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의 천도교적 정신이 투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방정환 동상 – 출처:네이버]

 

[소파 방정환 망우산 연보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소년회의 중심일원이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이 시절부터 천도교의 소년입지회 등의 활동을 통해서 천도교 사상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대 교주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교리, 2대 교주 최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3대 교주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사상 등으로 이어지는 천도교의 만민평등사상, 인간존중 사상은 방정환의 사회문화운동, 어린이 운동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린이를 하나의 존중의 대상, 인격으로 보고자 하는 바탕에는 그들이 차별에서 벗어난 존재론적 동등성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파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끝없는 사랑과 존중 이면에는 동학의 정신과 나라의 살리고자 하는 구국정신이 동시에 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선생의 정신적 배경은 잊혀지고, 그저 어린이의 아버지로만 불리고 있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소파 방정환의 동상을 남산에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기던 날(1987년), 윤석중 선생 – 출처:네이버]

 

 

‘어린이날의 노래’의 시를 지은 윤석중 선생이 회고하는 방정환을 대표하는 두가지는 말은, “정성스러워라”와 “나를 버리라”였다고 한다. 이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한울님의 한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천도교의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의 이기심을 버려 비움의 나를 만드는 것이고, 세상을 정성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은 비워진 나를 그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통해서 그러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기적인 것들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 어린이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그러할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배우는 새로운 어린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성장할 것임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방정환. 그는 짧았던 인생 내내 어린이를 위해 살았다. 소외되었던 어린이의 존엄과 격(格)을 찾아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어린이를 통해 건설적인 국가 미래를 꿈꾸고자 하였다.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그는 1931년 7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투병하게 되고 33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다. 타계 직전까지 어린이를 위한 동화 집필과 구연에 몰두하였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뒷날에 큰 물결, 대파(大波)가 되어 출렁일 터이니
오래오래 살아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그럴 리가?[퍼농유]

2. 그럴 리가?

단적으로 말해보자. 나는 대통령이 될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왜들 그러시는가? 있다.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럴 리가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죽일 리가 있을까 없을까? 또 왜들 그러시는가? 당연히 있다.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먼저 밝히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문장은 비문이 아니다.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란 말이다. 모두 그럴 리가 있냐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말들은 모두 한글의 문법구조에 타당하다. 여기서 그럴 리라는 말은 분명 리(理)라는 전통적 철학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고 확신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의 언어적 토대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해 보자. 지금 앉아 있는 그 건물이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외적인 충격을 전혀 가하지 않았는데도 무너질 리가 있을까, 없을까? 없을까?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 건물 안에 앉아있는 것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보자면 건물이 외적 충격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천만년 후에는 무너질 리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은가? 천만년 후에 외적 충격이 없이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붕괴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천만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인연과 세력, 즉 가깝거나 혹은 먼 원인과 조건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배열되고 누적되고 형성되어 다른 질적 상태로 전환되는 순간을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하여 그럴 리라는 잠재성의 세력이 현실에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거대한 물결이 둑의 틈새를 견디다가 어느 순간 툭 터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럴 리는 틈새로부터 나온다. 그럴 리가 어떤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터진다. 왕필의 문인인 동진(東晉) 시대 한강백(韓康伯)은 <주역>에 나온 기(幾)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幾)란 균열이다. 틈새이며 기미이며 낌새이며 기회이며 위기이기도 하다.

틈새란 무에서 유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이 틈새의 때는 이치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이다.(幾者, 去無入有, 理而無形)

결국, 이런 일상적 용법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럴 ‘리’라고 했을 때의 리(理)는 객관적 사물의 원리로서 이치나 외부적으로 강제되는 도덕적 당위로서 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감추어진 잠재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세력의 조건들과 접촉하고 충돌하여 어떤 현실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이 숨겨져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현실에 어떤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예측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거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다. 언어가 우리의 세계관을 규정한다면 그럴 리라는 말은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에서 악당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흉계를 꾸미기 전에 “시간의 자궁 속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잉태한 것은 달이 차면 나오게 마련이거든.”이라고 말했을 때, 정확히 잉태한 것은 바로 그럴 리를 말한다. 이 그럴 리가 시간의 자궁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현실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럴 리가 있는 균열과 틈새와 낌새를 느꼈다면 어서 조심스럽게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시간의 자궁 속에서 어떤 사건이 잉태될지 모르므로.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최종덕의 책과 리뷰] -15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

 

오늘의 서평 책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 문학의 아토포스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기 전

 

저 머나먼 은하의 한 별에서 외계인을 만났는데,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발화행위로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질까? 공존 아니면 경쟁의 관계가 형성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이 (i)가장 자연스럽고 (ii)가장 그럴듯하며 (iii)공존과 경쟁 범주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는 뜻에서 가장 효율적이다.

 

거주자와 외부인이 공존한다고 가정해보자. 공존의 경우도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다. (i)두 존재가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어서 상대방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ii)서로 힘의 차이가 너무 커 아예 싸움이 되지 않고 힘센 자가 약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경우이다. 첫째 경우는 원래 싸움에 관심이 없다면 그 생명종은 이미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어떤 존재이든지 현재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모종의 노력이 있어 왔고, 모종의 노력은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과 같은 후손을 복제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존의 첫째 경우는 논리적으로만 가능하고 자연적이지 않다면 실제로 실재할 수 없다. 공존의 둘째 경우는 현실적이며 증거도 충분하다. 영장류 연구자 드발의 관찰보고에 따르면 히말라야 원숭이는 엄격한 서열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새끼는 우두머리에게 감히 엉길 수 있다. 힘의 차이가 뚜렷한 일 년 미만의 어린 새끼에게만 관용을 베푼다. 다 자라난 새끼가 엉기는 것을 대장이 용서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침팬지는 4살까지 봐주고, 인간은 더 오래간다.(드발 2014, 244)

 

1949년 중국은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  정책을 표방하면서 소수민족을 흡수한다. 중국정부가 인정한 55개 소수민족은 인구구성 비율로 약 8.5%이지만(2010년) 전인대 대표자 비율로는 14%나 된다.(제11기 전인대 2,987명 중) 중국은 힘에서 격차가 큰 소수민족과는 공존하지만 티벳이나 최근의 위구르처럼 중앙세력에 도전하는 소수민족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폭력으로 강제 공존정책을 시행한다. 할 만한 상대와만 공존하고 소통한다는 뜻이다.(진은영, 10장)

 

두 존재유형이 경쟁하는 경우는 거주자가 외부인을 쫒아 내거나 지배하는 경우 혹은 침입자로서 외부인이 거주자를 몰아내고 지배하는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 이 경우라도 상황을 이해하는 주변조건이 있다. 외부인이 거주자보다 힘이 월등하게 크더라도 새로운 거주 환경에 익숙하지 못하면 외부인은 적응에 실패할 것이다. 혹은 거꾸로 외부인에게만 맞는 면역 조건을 새로운 거주지에 심어 놓으면 기존 거주자가 소멸하는 경우도 있다. 책 『총.균.쇠』에서 1532년 스페인 피사로의 인구 168명이 1,000만 명 인구의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유럽엔 있었고 아메리카 땅에는 없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였다.

 

관점을 외계가 아닌 지구로 돌려 외계인과 지구인이 조우하던 기분 그대로 4만 년 전을 보자. 우리 조상과 가장 가까웠던 근연종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와 유럽 땅에서 4만 년 전 쯤에(여러 가설 중 가장 강력한 이론) 처음으로 조우했다. 당시는 빙하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에 살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언스보다 키도 크고 뇌의 크기도 더 컸다. 외부인이었던 사피언스는 살아남고 추위에 이미 적응했던 기존 거주자인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 멸종 이유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i)그들 사이에서 공존과 경쟁이 같이 있었고, (ii)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사피언스 모두 석기 시대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혁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벽화를 그렸고, 백조의 뼈에 구멍을 낸 피리를 불었다.(미슨, 15장)

 

그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하자. 네안데르탈인과 다르게 호모사피언스는 ‘먹는 입’보다 ‘말하는 입’(진은영, 302)이 더 발달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멸절되었다는 해석이 다수 있다. 우리는 먹어야 살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도 그랬다. 그러나 먹는 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오로지 경쟁만이 있고 공존은 불가능하다. 공존은 먹고사는 조건이 평등해지거나 아니면 아예 차이가 크다는 것을 내가 인식해야 하고 또한 상대방도 알아차려야 한다. 나도 알고 상대도 아는 그런 것은 언어행위로 가능하며 언어행위는 ‘말하는 입’을 필요로 한다. 상호인식이 공존가능성의 원형이다. 공존은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진은영도 먹는 입이 아니라 말하는 입이 소통의 조건이라고 했다.(진은영, 10장)

 

고대인도 동굴벽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조상은 그들의 사냥감과 사냥방식을 그림으로 그려 후손에게 남기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있다. 그들이 우리이다. 그들은 공간적 소통보다 시간적 소통이 더 필요했다. 3만 년에서 1만 년 전 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에는 들소, 사슴, 멧돼지, 염소가 그려져 있다. 그런 동물들은 그들의 입을 채워 줄 객체이다. 그런데 먹는 입의 주체 즉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라스코 벽화 700점 중에서 아래 벽화에만 유일하게 먹는 입의 주체로 사람이 등장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서 만 년 전 즈음에는 동물 외에도 사람의 모습이 다른 동굴에서 벽화로 등장한다.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은 벽에 손을 찍는 음화(스텐실) 방식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이미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으로 바뀌는 조상의 소통노력을 엿볼 수 있다.

                                                        (라스코, 1만8천 년 전 추정)                                           (라스코, 2만7천 년 전 추정)

 

먹는 입은 들소를 기억하기 위한 정보로서 들소를 그렸다. 말하는 입은 들소에 의미를 입혀서 상징적인 들소를 그렸다. 대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종교적 의미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문화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 행위는 예술의 시작이었다. 3만 년 전 조상은 사냥법의 개선을 위해 들소의 움직임과 계절에 따른 무리 이동 등을 세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 관찰결과를 ‘기록’하는 벽화를 남겼다. 들소를 관찰한 정보를 보존하는 것이 벽화를 그리는 목적이다. 동굴의 어둠 끝 차가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동굴 속 가족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돌가루를 미리 물에 개놓아야 하고 동물기름을 모아 횃불을 밝혀야 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하다. 차가운 돌 표면에 그림을 그리면서 벽은 따듯해지고 가족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벽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구체적 정치행위였다. 정치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행위였다. 벽화는 사냥감을 기록하는 매체이며 동시에 서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의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정공유의 고대인의 행위는  곧 예술의 원형이며 예술의 시작이었다. 문학, 그림, 음악처럼 모든 예술은 현실의 삶을 투사하는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긴 설명을 했다. 나는 이를 예술의 아토포스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이런 행위가 정치의 원형이라고 서평자는 이해했다.

 

2. 더 비기닝: 정치가 생기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소빙하기가 끝나가면서 추위가 좀 풀렸고, 우리 조상들은 동굴에서 대지로, 숲에서 들로 서서히 나왔다. 들밀(밀)과 피(벼)의 알곡을 남겼다가 그 다음 해 땅에 뿌려 더 많은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기술혁명이었다. 마침내 위험하고 불안정한 수렵행위보다는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씨족 구성원들이 이리저리 이동하지 않고 가족이 한 곳에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씨족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대략 8천 년 전 일이다. 이후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고 더 큰 부족이 형성되면서 부족 집단 간 갈등이 생겨났다. 사람들 간에 배반과 협동으로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권력과 정치는 동의어가 되었다. 벽화를 그리던 3만 년 전 조상들의 감정공유의 정치 대신 권력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문자가 만들어졌고, 문자 기록은 정치인들의 비밀스런 권력이 되었다. 소수의 권력집단 외에 허락 없이 기록을 소유한 자는 즉시 처벌되었고, 들소가 가는 길, 산속의 호수, 사막 건너 오아시스, 검은 숲속의 통로를 그린 지도나 이야기는 신비화되었다. 뭇사람들이 넘볼 수 없도록 한 기록의 비전은 권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그 사이 철학과 과학이 등장했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에 이어지면서 신화는 이성으로 변신하고 교회의 도그마로 위장했다. 이성은 보편적 사유에서 시작되었고, 소 열 마리와 염소 스무 마리를 가진 부족이 10+20=30 이라는 보편적 수학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편적 생각, 그 자체도 여전히 비밀스런 기록으로 여겨졌다.

 

화산의 마그마와 지진은 지구가 분노한 것으로, 일식과 월식으로 드러난 해와 달의 운행, 인간에 대한 보복으로 생긴 홍수와 가뭄 등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권력자에 대한 충성심은 권력자에 의해 시로 쓰여 졌고 그림으로 그려졌다. 시와 그림은 이제 들소와 주변의 사람들, 강의 흐름과 강에 비춰진 달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치적 행위를 벗어나서 시와 그림 스스로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예술에 주체를 빼앗겼다. 나로부터 주체를 빼앗아간 예술은 저 혼자 감정을 향유하고 저 혼자 호흡한다. 창window조차 없어서 저 혼자만의 모나드를 자위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은 이런 예술을 자율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 예술은 세상을 기록하지 않으며 빼앗아간 주체 자체를 현현할 뿐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그런 현현성은 권력의 수단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자율성의 의미를 이렇게 보면 자율성의 예술과 참여성의 예술은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배중율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진은영은 자율성을 폭넓게 조율한다.

 

3. 감성적 자율성

 

진은영은 예술의 자율성을 독특하게 설명한다. “예술적 자율성이란 정치와 무관한 영역에서 예술이 제 스스로의 살림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포착하여 기계적 인과법칙 속에서 실현된 일들에 또 다른 원인을 부과하는 것이다. 예술은 기계적 인과사태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한다”(진은영 261)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했다. 꼬이고 꼬이는 사태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지만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자율성인지, 아니면 진짜 자율성이란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 못했었다. 하지만 그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진은영은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호젓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지성의 배치를 위반하는 흐름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진은영 262) 이 책의 1장에서 말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랑시에르와 진은영이 262쪽에서 말한 자율성이란 ‘자율성 2.0’ 버전으로 참여성과 결합한 자율성, 이분법에서 탈피한 자율성을 말한다. 진은영이 강조하고 중시한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의 의미를 그의 책에서 따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성적 자율성이란 (i) 현실에서 분리된 언어의 자기목적주의autotelism의 신성화를 거부하며, (ii) 예술의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거부하고, (iii) 황금새장을 탈출하여 세상을 다시 구성하는 특이성을 추구하며(감성적 자율성의 특징), (iv) 감각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이지만 (v)그렇다고 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현실정치 참여에 제한될 필요가 없으며, (vi) 그런 활동의 내적 동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감성분배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진은영은 확실히 말한다.

 

진은영은 문학이 삶과 결합된 정치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문제된 사태에 대해 명확한 내러티브나 선명한 메시지의 직접적 표현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30-35)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은 자칫 선전구호로 되거나 관습적 규칙에 헌신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의 의도적 윤리화를 비판한 글을 진은영의 책에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이나 정치의 활동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윤리는 체류의 행위이며, 이미 가정된 관습적 규칙에 복종하고 안주하는 행동원리이다.(진은영 101)

 

진은영은 한국에서 문학의 정치적 논쟁점을 아주 쉽게 정리해 주었다. 하나는 참여의 문학이며 다른 하나는 자율의 문학이라고 했다. 참여성은 “정치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을 강조하여 민족. 민중 문학적 이슈들을 특정한 스타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율성은 “시인과 시민의 입장을 구분해서 시민으로서 정치적 자유공간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시인으로서는 비정치적이고 자율적 형식실험에 몰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진은영 267)

 

4. 랑시에르의 감성적 자율성은 폐쇄적 자율성과 다르다

 

자율성의 태도는 “자율적인 그날이 오기까지” 한번 기다려 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유토피아의 허구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상실한 것을 오지 않을 미래에 찾아가라는 주문과 같다. 신과 내세의 유토피아도 그렇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에 대한 환상은 권력자들이 뿌린 마약에 취한 집단적 병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정치적 색깔론과 경제적 낙수효과에 기인한다. 이 두 가지 마약의 중독성이 우리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밝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좀 힘들어도 참고 열심히 일해보자“의 허구는 유토피아 사유구조의 허구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70년대 평화시장 봉재 노동자들은 절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권력자들이 시민을 부려먹기 위한 도구적 언어일 뿐이었다. 정권과 삼성과 같은 재벌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춤췄던 봉재공장 사장님들은 그런 말을 열심히 외쳐댔다. 그러나 밝은 미래가 정말, 다시 한번 정말 온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재벌과 독재 권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밝은 진짜 미래가 오지 않도록 악랄한 조치를 해놓았다. 그러한 불행한 역사의 현장이 지금 작동되고 있다. 정권이 조금이나마 바뀌었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 사회에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하니 영세업이 망한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대놓고 한다. 핵발전을 중지하다고 하니 지역경제 때문에 핵발전 중지를 반대한다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드러난다. 역사적 적폐청산을 대놓고 거부하는 과거의 권력집단들이 갖은 변명과 저지를 시도하고 있다.

 

유토피아 조작자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권력집단의 조작은 대중에게 유토피아의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중독성 믿음을 갖게 한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전지전능하여 모든 지식을 갖고 있지만, 신을 믿는 대중은 지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되고 오로지 믿음만을 갖도록 강요될 뿐이라는 논리와 같다. 권력자는 그들만의 기록을 갖지만, 대중에게는 기록 대신 믿음의 환상만을 제공한다. 랑시에르도 감정의 분할, 감각의 분배를 믿음에만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있다. 누구 좋으라는 믿음인가? 이렇게 유토피아는 종교와 만나 사람들의 감각을 더 마비시켜 놓았다. 감각의 분배는 너의 감각, 나의 감각을 먼저 유연하게 연습해 놔야 한다. 현실에 순응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감각의 마비와 경화를 가져온다. 그래서 진은영은 이 시대 너머 미래를 준비하는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권유한다. 진은영의 책, 결론에서 말한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나는 이렇게 감각의 유연성 연습을 한다는 순간으로 이해했다. 진은영이 더 이야기해 줄 것이다.

 

5. 감각분배의 정치

 

세상과의 구체적인 접촉이었던 주술과 샤머니즘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추상화되었고, 추상적 신의 존재가 구체적 현실을 지배했다. 나는 신석기 시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은영의 말대로 부족의 공동체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조에zoe에서 비오스bios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상적 관념론과 종교적 도그마가 결합하면서 비오스는 오히려 그들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래서 겉은 비오스이지만 내용으로는 조에로 퇴락했다. 그것이 오늘의 정치이다. 그런 정치를 진은영은 ‘치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들만의 경영’their own managenment라고 하고 싶다. 치안과 그들만의 경영 상태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주체들 사이의 사적 이해와 편견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조에가 아닌 비오스 영역에서만 소통이 가능하다고 진은영은 말한다.(275) ‘먹는 입’의 조에는 생명이 시작하던 10억 년 전의 원핵세포에서나 다세포생명을 거쳐 척추동물로 넘어서 늑대와 국화를 거쳐 오늘의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조에의 작동은 초시간적이다. ‘먹는 입’에서 ‘말하는 입’이 추가되면서 우리는 역사의 변화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비오스로 향한 혁명이다. 이런 지평선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라고 진은영은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275) 물론 진은영은 이런 정치적 비오스가 경제적 조에로, 권력독점의 조에로, 사적이익의 조에로 위장되고 포장되는 현실의 아픔을 지적했다. 그래서 진은영은 치안의 정치에서 벗어나 감각분배의 정치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진은영의 감각분배의 정치는 마치 와이파이나 블루투스와 같은 무선통신과 비슷해 보인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혹은 위성통신은 정보를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문학도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감각을 무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재권력이나 경찰치안은 사람을 잡아두거나 말로 위협하거나 더 먼 땅으로 못 가게 경계를 긋는다. 그러나 문학은 그런 경계를 해체하고 넘어선다. 그래서 권력집단도 예술을 무서워했다. 감각은 감정의 열기emotion’s fever를 지닌다. 권력집단 특히 독재권력은 감각온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 예술은 감정의 열기까지 무선통신으로 전달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이 깔리지 않은 곳이 있듯이, 수많은 다른 언어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문자의 예술이나 그렇지 음악이나 미술은 그런 한계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서평자는 인류학자 회벨E. A. Hoebel이 동 그린랜드Eastern Greenland 에스키모 부족에서 1908년 채집하고 기록한 노래를 인용하려 한다. 한 부족에서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몸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그들의 싸움을 대신한다. 그 부족에서는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갈등관계를 노래로 처리한다고 한다. 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남자 B가 그의 부인을 학대하고 나중에는 그 부인을 버렸다. 다른 남자 A가 그 나이 든 여인을 데리고 와서 다시 결혼하여 사랑의 마음으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남자 B는 시기심에 남자 A에게 그 여자를 다시 내놓으라고 싸움을 걸었다. 노래로 말이다. 부족장이나 그들의 법률에 갈등해소 혹은 치안을 맡기지 않고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하여 스스로 해결하는 감각분배의 사례인 것 같아서 그 노래 가사를 재인용해 보았다.

6. 진은영의 소통의 시학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소개하면서 랑시에르를 넘어서 있다. 진은영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소통의 인문학에서 “정치적 주체화”를 강조하면서 책을 마무리하였다. 소통의 인문학을 잘 건축하기 위해 “소통의 과학”과 “소통의 시학”을 구분하는 진은영의 방식을 따른다면(진은영 298)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 차원에서 책을 썼지만, 나는 <소통의 과학> 차원에서 서평을 썼다.

 

진은영은 소통의 시학에서 “철학자의 아름다운 거짓말”을 말하면서 거짓말의 현실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진은영 297) 나는 이런 그의 말을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야만 멀리 그리고 오래 감각을 분배할 수 있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맞는지 모르겠다. 신비화를 경계하고, 이상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는 사회과학적 지식의 의미를 갖는 “소통의 과학”에서 더 나아가 진은영은 “미래의 불가능성이 가능한 존재로 변모하는 순간”을 그려내고, “불가능한 동일시를 통한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소통의 시학”에 시선을 뿌리고 있다.

 

이 서평의 제목을 나는 “정치에서 시가 태어나는 순간들 : 예술은 정치적이다”라고 했다. 이는 진은영의 “정치적 주체화”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노룩패스, 레밍, 갑질, 밥하는 동네아줌마, 각목과 추행의 언어가 횡행하는 사회, 소통단절 권력이 여전한 사회에서 우리는 정치적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느꼈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감각을 무시하는 감각독재, 소통을 두려워하는 공감부재의 권력과 그 적폐를 i) 강하게 저항하고 ii) 냉정하게 청산해야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온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서평을 위한 참고문헌>

 

진은영 2012, 『훔쳐가는 노래』, 창비

진은영 2009,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웅진주니어

드발  2014. 『착한 인류』, 오준호 옮김, 미지북스

S. 미슨  200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김명주 옮김, 뿌리와 이파리 외

최종덕  2016, 『비판적 생명철학』, 당대

방심[퍼농유]

우쑵니다.
너무도 오랫만이라 쑥스러움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낯섭니다. 죄송합니다. 먹고 사느냐 나름 힘겹게 생활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방학이라 이렇게 한숨돌리며 세월에 지치고 더위에 지친 몸 건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예능프로그램처럼 시즌 투가 되어버렸습니다.

요즘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대학 모 전공 모 교수가 우리말로 철학하기라는 걸 시도한 적이 있었죠. 송구스럽지만 웃었습니다. 의도는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실 내용을 들여다보니, 국어순화운동 차원이더군요. 이화여자대학을 배꽃계집애큰배움터 정도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순수 우리말로 철학하자는 것이었죠. 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은 순수한 한글을 고집하면서 철학한다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내용의 차원을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했습죠.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과 그 말들의 맥락과 그 말들의 효과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기능하는지를 분석해하지 않을까요. 그 사유의 이면에 깔린 구조와 양태를 언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같은 것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단지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일상언어의 메타적 분석하고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그가 사용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에 희랍어를 분석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던가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대부분은 한자문화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송명 성리학과 선진 철학이 그러합니다. 일본 학자들이 서양학문을 수용하면서 많은 번역어 조어를 만들어내었고 또 그것을 우리가 상당부분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도 기본적으로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이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는가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의미 맥락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전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어원적 차원에서 분명한 족보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하나마 관심과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건승하시길…..

1. 방심(放心)

모든 방치된 것은 썩는다. 어쩌면 이 명제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만큼이나 예외가 없다. 방치에는 무관심과 무책임이 묻어있다. 화초에 물과 공기가 부족하면 썩게 되듯이 어떤 것이든 관심과 책임이 부족할 때 썩는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과 책임과 인정이 철수되었을 때 남는 것은 무기력하게 메마른 황무지일 뿐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메말라 강퍅하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다시 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흔히들 근본적 욕망을 식색(食色)과 관련된 생리적 욕구라고 본다. 대표적으로 매슬로(maslow)는 인간의 욕구에 위계가 있다고 하여 욕구 피라미드를 가정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로부터 시작하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의 욕구, 마지만 자아 실현의 욕구로 구분했다.
장대익의 <울트라소셜>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이런 욕구의 위계는 뒤집어져야만 한다. 논리는 이렇다. 어린 아기에게 이런 욕구의 위계를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린 아이에게는 먼저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당연하다. 먹을 것이 필요하고 따뜻한 품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은 음식, 집, 물 등이 아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대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어린 아이는 이것을 직접 욕망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이런 대상을 가져다줄 ‘사람’이다. 사회적 연결망이 없으면 아기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기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미숙아로 태어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약함과 취약함과 미숙함이 최초로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럴 때 가장 근본적 욕망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라 사회적 욕구이다. 이는 진화가 만든 결과이다. 사회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보다 상위에 있는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사회적 방식으로 충족시켜 주기 위한 근본적 욕구”이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사회적 자산, 즉 부모, 친지, 친구, 동료 등과의 관계를 통해 획득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는 뒤집어져야 한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인(仁)은 사람의 본래 마음이고, 의(義)는 본래 마음을 실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방치하고 찾을 줄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방치하고서도 찾을 줄을 알지 못한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치된 마음(放心)을 찾는 것일 뿐이다.”(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不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인의(仁義)란 사회적 욕구이다. 방심은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린 상태이다. 부주의하고 조심성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방치된 사회적 마음이다. 적당한 물과 공기로 길러지지 못해 썩어가는 사회적 욕구이기도 하다. 본심의 상실이기도 하다. 맹자에게서 방심은 정확히 본심에 주의하지 못한 부주의이고 본심을 상실하여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사회적 욕구를 방치한 채로 살아간다면 맹자에 의하면 그것만큼 애처로운 일은 없다. 이 애처로움을 깨우치는 것이 학문의 요체이다. 학문이란 구방심(求放心)이다. 도망간 닭과 개를 찾는 것과 같이 방심(放心)을 구하는 일이다. 방심이란 잃어버린 마음이고 방치된 마음이다. 학문은 단지 이 사회적 욕구인 인의(仁義)의 마음이 방치된 채로 썩지 않지 않게 하는 일이다.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얀-사우데크(Jan-Saudek)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최종덕의 책과 리뷰] -14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국민을 협박하는 삼성의 정치자본

 

오늘의 서평 책 :  이종보, 삼성독재, 빨간소금, 2017.

 

 

 

독재정권과의 동맹이 삼성재벌의 핵심이라는 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혹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나 대충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오늘날까지 존속한 이유는 재벌기업이 국가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강력한 기대감에 의해 지지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기대감이 지난 정권의 역사를 통해서 기만적으로 조작되고 가공된 허상이었음을 어느 책 한 권을 읽고 깨닫게 되었다. 그 책은 최근에 나온 <삼성독재>(이종보 씀, 빨간소금출판사, 2017)라는 책이다

 

이 책 초반부에서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도 그러했지만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절대적 비호 아래 성장한 삼성의 매판자본 형성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다.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삼성의 자본독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물자 배분과정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상거래에서 삼성은 특혜를 받아왔다는 과거사를 주목해야 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부터 박근혜 빙의정권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탈법, 세습, 불법, 유착, 매판, 독점, 축재, 착취의 범례라 할만한 일들을 수행해 왔다. 요약해서 말하면 부정축재와 매판자본 그리고 독점자본이 삼성의 키워드라는 것을 이 책은 선명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1939년 2백만 평의 땅장사를 시작으로 한 지난 80여 년을 거치면서 일상화된 삼성의 자본권력이 우리의 마음까지를 빼앗아 갔는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자신도 혹시 삼성바이러스에 면역되었는지를 반성하게 한다. 저자 이종보는 말한다. “우리는 삼성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삼성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표현하는 위대한 신이 되었다”.(9쪽) 이러한 삼성의 막강한 지배력이 산업기술과 통상 기반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일상성의 문화와 지식을 포함한 정치 영역까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이런 삼성의 속살을 “정치적 자본가”로 표현하고 있다.(20쪽) 한국에서 피어오른 “정치적 자본가”로서 삼성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i) 가족지배 ii) 개발독재 iii) 문어발식 종합상사 iv) 정경유착이다.

 

이 책은 삼성의 이런 모습들 가운데 정경유착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한다. 그 역사는 땅장사를 시작하던 삼성 상회(1938년)의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땅장사는 땅을 구입할 큰 돈을 필요로 한다. 이병철은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으로 2백만 평의 대지주가 된다. 삼성의 출발부터가 매판자본의 시작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와 미국의 상속자인 이승만의 강건한 방호벽에 힘입어 삼성의 세력은 전국화 되었다.

삼성상회 – 사진출처 : Wikimedia Commons

 

이승만의 권유로 삼성물산공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서울로 진출한 삼성은 일제 적산과 미국의 원조물자를 기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쌓게 되었다. 설탕과 밀가루 그리고 모직 사업으로 50-60년대 이미 한국의 자본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이르기까지 한일은행, 조흥은행, 상업은행을 인수하면서 삼성과 정치권력이 한 몸통이 된 경과를  이 책은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1959년 이승만 자유당 내각 명단을 이병철이 작성하여 당시 이승만 다음의 정치권력 2인자였던 이기붕에게 전달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다.

 

419 혁명과 함께 이승만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삼성이 살아남게된 경위를 이 책은 소상히 기술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삼성은 무한한 것인가. 정말 삼성은 위대한 신이었나 보다. 419 혁명은 정치혁명일 뿐 사회경제혁명이 아니기 때문에 삼성은 죽을 수 없다는 기묘한 논리를 삼성은 조작해 내었다. 곧 이어 이뤄진 삼성과 박정희 정권과의 동맹은 한국 근대인의 흉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63년 박정희는 재벌 폭리의 상당 금액인 50억 원을 상납 받았다고 이 책은 폭로한다. 그 금액은 당시 정부 예산의 1/15 수준이었다고 하니 오늘의 가치로 따진다면 27조원에 해당한다. 박정희가 갈취하고 또한 재벌이 알아서 기면서 상납한 바로 그 돈이 오늘의 박근혜-최순실 농단의 지하수장고였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니 더더욱 몸서리가 처진다.

 

1966년 삼성과 박정희가 공모했던 대규모 밀수사건은 정말 대단한 국가회롱의 사태였다. 그러나 박정희와 삼성의 결탁권력은 이런 사실까지도 잠잠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한국에서는 삼성보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경주 최 부자가 설립한 대구대학을 삼성이 인수하고, 삼성은 이를 박정희에게 헌납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박근혜의 이름으로 존속하는 영남대학교가 그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어마어마한 사태들이 한 두 건이 아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역사의 심판을 받고 죽었지만, 삼성은 역시 불사의 존재였다. 삼성과 전두환과의 밀월은 더 가관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산업경제 전반에서부터 국방산업에까지 미쳤던 그들의 정경유착은 방송매체와 스포츠산업을 포함한 문화산업 전반에 뻗쳤다. 그런 문화 공략전술이 오늘의 정유라를 낳은 것이다. 군부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에도 삼성은 건재했다. 오히려 삼성의 권력은 ‘글로벌’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되고, 과거처럼 독재정권의 눈치조차도 볼 필요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독주가 정착되었다. 이건희의 개인 우상화는 극에 달했는데, 이 책은 그런 우상화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부분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책으로 읽기에는 재미났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사진 출처 : vimeo.com

 

문민정부에서 삼성은 과거 독재정권과 다르게 오히려 정부와 정치를 하대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삼성의 이건희는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노골적인 무시 발언을 한다.(120쪽) 노무현 정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삼성은 악독한 정권에는 아부전략으로, 상대적으로 민주지향의 정권에는 무시전략을 이중적으로 적용하는 야비한 전술을 이어갔다. 이런 전략이 바로 삼성 전략기획의 기초인 것 같다.

 

이제 이병철과 이건희는 가고, 이재용이 대를 잇고자 기를 쓰고 있다. 3대를 이어 권력을 계승하려는 삼성을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계승한 북한 독재권력과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딱 맞다. 삼성 이름만 들어도 숭상하는 유행이 여전하다. 삼성이 개인 기업인데 자식들이 대를 이어 승계하는 게 뭔 대수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삼성은 개인 소유 기업이 아니라 주식회사이며, 개인 투자도 아니고 국민세금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탈취한 돈으로 꾸려간 기업이다. 상속이 법적으로 가능한 개인재산 부문조차도 상속세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계열사 모두를 지배하려는 소유구조를 통해 불법을 일상화하고 있다. 노조를 허용하고 있지 않으니 공공성이란 아예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밀수에 친일, 탈세와 횡령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경제가 국민경제를 살린다는 환상에 빠져 삼성파티를 대신 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의 승계시도는 아버지의 승계조건을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통해서 계열사를 피라미드 안으로 가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재용의 승계를 위한 기초작업은 이미 1996년 그 유명한 삼성애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에서 시작했다. 20년에 걸친 승계작업은 전적으로 정권의 인정없인 불가능했다. 책에 나온 이야기를 써본다면,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2015년 합병으로 이재용은 8,549억 원의 이득을 보았지만, 국민연금공단은 1,388억 원을 손해봤다. 그 사라진 돈은 모조리 국민의 세금이다. 이런 방식의 소유구조 조작과 횡포는 삼성에서 누워 죽먹듯 해왔던 일들이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사진출처 : vimeo.com

 

다시 말하지만 삼성은 적은 지분으로도 계열사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소유구조를 항상 유지해 왔다. 삼성은 비서실, 구조조정본부에서 전략기획실과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바꿔가면서 계열사 전체의 소유구조를 관장하는 비서조직을 존속시켜 왔다. 최순실 농단 이후 최근 해체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소유구조의 일방적 결정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정권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했다. 결국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역사적 배경에는 삼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이재용의 후계 승계를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이재용은 문화재단 후원 298억 원을 내놓았다. 결국 박근혜는 탄핵으로 끝났지만, 삼성의 내재적 자본독재는 여전하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삼성은 ‘성장논리’와 ‘글로벌경영’, ‘국가경쟁력’과 ‘창조적 파괴’ 등, 교묘한 혼란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본독재를 영위하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묘한 언어포장을 벗겨보면 삼성의 속내는 불법과 유착으로 형성한 매판자본을 통하여 부정축재를 누적시켜 자본독점을 안착시켜가는 행위를 숨기는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냉정하게 삼성을 알아야 한다. 삼성 경제가 국가 경제가 아니라, 국민 경제가 삼성 경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정말 대단한 역사였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둥, 삼성이 있어서 한국경제가 커졌다는 등의 억지는 부정비리의 당사자들과 매판의 역사적 관련자들 그리고 독재권력의 주관자 집단이 노리는 기본전술이다. 한국 경제성장의 대단한 역사는 한국인이 만든 것이지 삼성과 박정희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성과 박정희 관련자들은 한국이라는 유무형의 몸체 가운데 있는 흉부를 그들 마음대로 도려낸 살점을 가지고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대한민국 흉부를 도려낸 후의 서민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삼성브랜드의 마취제를 사용했지만 그나마도 마취약이 풀리는 곧 다가올 시간에 그 고통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온 몸에 퍼질 것이다. 삼성이 저지른 위해요소들을 거꾸로 해결해 갈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실질적인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맞이할 수 있다.

 

이 책 <삼성독재>의 저자 이종보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첫째 재벌이 투자를 기피하는 이유는 정부를 길들이려는 의도에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권유착 목적이 아닌 순수 재투자가 되도록 하는 기업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재벌기업은 항상 ‘성장논리’와 ‘국가경쟁력’이라는 구호를 도용하여 국민을 협박하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그런 협박에 밀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투명한 기준을 제시하면 된다. 셋째 이 책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서술했듯이 정치와 재벌의 유착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강하게 맺어져 있다. 거꾸로 말해서 재벌개혁은 정치개혁 없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정치개혁을 통해 관습적 정경유착의 끈을 끊을 때 비로소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한국경제의 환상을 깨야 한다. 삼성이 세계 1위의 기업이라고 자축하는 것은 삼성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삼성이 커지면서 빈부격차는 더 커졌고, 사회적 우울증은 급증했고, 국부 반출은 더 많아졌고, 소기업은 더 망가졌으며, 노사관계는 더 나빠졌고, 청년실업은 더 늘어가기만 했다. 그런 직접적 인과관계는 아직 명료하지 않지만, 그 상관관계는 분명하다.

 

부자가 권력을 잡으면 서민들도 부자가 흘린 국물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수효과때문에 우리 국민은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놓았고 삼성과 같은 재벌들에게 제공한 막대한 불법적 혜택에 대해 눈감고 있었다. 이제 낙수효과의 허상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실감나게 느꼈다. 어려운 전문용어나 에둘러 돌려치는 말도 쓰지 않은 책이라서 술술 읽히면서도 진짜 공감을 주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 이번 여름에 읽은 이 책은 무더위를 식히지는 못할지언정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몰입을 시켜준 좋은 책이었다. 강추!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이병태

 

‘대학로’는 정확하게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글쓴이에겐 이래 저래 인연이 많은 곳이다. 장장 두 세기(世紀)에 걸쳐 인근의 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원천징수가 이뤄지는 첫 직장도 같은 동네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닌 곳임을 기려 ‘대학로’란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강변하고 싶지만, 탄핵 당한 대통령은 자신을 희생하여 기면(嗜眠)에 빠진 우리의 역사 의식을 일깨운 큰 스승이라 지껄이는 것만큼이나 공분(公憤)을 살 일이니 자제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동네에는 여러 대학들이 몰려 있고 문화·예술 관련 기관이나 공연장도 많아 대학생들이나 청년층 유동인구가 압도적이다. 그러니 ‘대학로’는 꽤 어울리는 명칭이다. 하지만 ‘대학로’의 ‘대학’은 그 뿌리를 더듬을 때 사실 ‘경성제국대’다. 1960년대 지역명이 결정될 무렵엔 이 지역에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학교의 이미지가 ‘대학로’란 명칭에 가장 강하게 녹아 있긴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터와 건물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고스란히 경성제국대학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민족 지사들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단번에 좌절시키면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이렇듯 일개 지명 속에서도 여전히 유령처럼 떠돈다.

(사진 1: 경성제국대학의 모습. 본관 등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도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한국지성사의 지평에서 되돌아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유구한 지적 전통을 삽시간에 뒤흔들어 무너뜨린 까닭이다. 제국 권력의 공식적인 학문·교육 기관이 탄생하면서 한국지성사는 그 정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던 지적 전통은 순식간에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것으로 위축되었으며, 일본을 경유한 서구발(-發)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식민화의 쐐기랄 수 있는 이 사건에는 피한방울 튀지 않았지만, 참혹하기가 포연 자욱한 전장 못지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인재들은 이제 경전을 덮고 사각모를 쓰기 위해 앞 다퉈 제국의 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그곳에는 이들을 자기부정으로 이끌 기만의 논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새롭고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과학·기술·이론들 이면에는 ‘굴욕’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거나 억압과 굴종의 심화를 ‘진보’와 ‘계몽’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숙명이라 강변하는 목소리가 항상 함께 했다. 더욱이 제국이 저작(咀嚼)하여 다시 내뱉은 설익은 서구의 이론들을, 녹녹찮은 지적 전통 위에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좇던 인재들이 속속 받아 삼키고 있었다.

탕건 자국이 문신처럼 남아있을 정도로 한학을 깊이 공부한 학생들이 많아 당시 한문 교수였던 다카다 신지(高田眞治)의 실수를 바로잡아준 일화나, 또 다른 한문 교수 다다 세이지(多田正知)가 성균관 후신인 경학원의 대제학 정봉시(鄭鳳時)에게 몰래 과외를 받다 정봉시의 친척이었던 학생에게 들켰던 일 등은 제국대학 설립 이전 조선의 지적 전통이 그 공과를 차치하고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당시 경성제대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1/3~1/2 정도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이론에 젖어들면서도 제국의 논리에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학문권력의 중심지에 몰려든 이들이 대체로 영달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적 지성사에서 현실의 질곡에 맞서도록 이끌 단초를 애타게 찾았으며 이는 당연히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겠지만 일정 정도는 옛 지적 전통의 잔향(殘響)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이였다. 그의 삶 전체에서 특별히 전통적인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고 여길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의 조선인 동학(同學)들 일부에게 공통적이었던 시대적 정향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외려 더 뚜렷했다. 그가 가장 집요하게 매달린 학문적 주제는 ‘역사’였고, 그의 주저 역시 ‘『역사철학』’임은 우연한 사실이 아닌 셈이다. 그는 현실의 억압을 딛고서는 인류의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했던 것이다.

(사진 2 : 동아일보 1939년 1월 1일자 ‘新建(신건)할 朝鮮文學(조선문학)의 性格(성격)’이란 기사에 실린 신남철의 사진)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그와 같은 신남철의 시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서구 사조였다. 당시 그가 받아들여 체화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모국 또는 대국들이 정식화한 역사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하는 실천적 노선과 다르다는 점에서 ‘수정주의적’이라거나 ‘자유주의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곤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교조적 이론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보다 현실을 고려한 창조적 수용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같은 변용은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고뇌의 무게나 상상력의 깊이 없이 불가능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이 무기를 평생 갈고 닦았던 것인데, 그에게 처음 이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는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또는 미야케 로쿠지죠, 三宅鹿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남철은 반(反)‘제국’적 사유의 토대를 ‘제국’ 대학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야케는 1928년 4월 18일부터 1934년까지 법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를 담당했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수업을 통해 주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신남철은 물론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해방정국의 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그의 수업을 들었으며,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 인 이재유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 당시 이재유가 탈옥했을 때 미야케는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발각되어 급기야 이 일로 파면된다. 미야케의 진심,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모든 이들의 열정은 차치하고,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제국을 향한 이론적 무기가 ‘제국’의 대학을 통해 전달되는 이 ‘어긋남’이 신남철은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진 3 :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이재유 탈옥 및 은닉 사건 기사에 실린 미야케의 사진)

 

신남철은 우리에게 주로 ‘철학’의 권역에 속하는 이로 기억된다. 팔이 안으로 굽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철학’과 졸업생인 까닭에 이 특출한 지식인을 ‘철학사’ 또는 ‘철학’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기란 철학도로서 일단은 마뜩잖다. 하지만 신남철을 철학의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일이 개운치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대단히 ‘문학’적인 인물이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신남철의 글은 현재 『역사철학』(김재현 해제, 2010)과 『신남철 문장선집』 I, II(정종현 엮음, 2013)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역사철학』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남철 문장선집』’은 한 지식인의 글모음집 치고는 제목이 좀 어색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지식인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의 글을 모아 놓고 ‘문장선집’이라 했으니 말이다.

엮은이의 말로는 『역사철학』의 경우 해제도 그렇고 완성도가 높은 판본이 김재현에 의해 이미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모든 글을 수록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집’이라 하기는 어려우니 『신남철 선집』 정도면 무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장선집’이라 이름 한 까닭을 엮은이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신남철은 철학, 역사, 문학의 인문학과 마르크시즘을 위시한 당대의 사회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지식을 형성하고 실천하고자 한 종합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종합적인 인문지식과 실천을 추구했던 동아시아의 지식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의 제목을 ‘문장’ 선집이라 명명했다.”

신남철은 우리 역사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상술했듯이 일정하게 옛 지적 전통의 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의분에 찬 역사 인식과 실천 외에,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전공의 벽에 갇혀 있지도 않았거니와 그러기에는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호기심 또한 깊고 또 폭넓었던 까닭이다. 개인적 성향과 지성사적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는 창조적인 상상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거침없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삶 속에 삽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기질은 그를 북으로 이끌었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급진의 붉은 빛이 선명했음에도 그의 사유와 삶은 구와 신, 남과 북, 식민지와 제국, 이론과 실천, 정통과 이단, 타협과 저항 사이에 가로 놓여 동요했고, 이 떨림은 다시 ‘전공’과 ‘강단’의 병속에 갇힌 이 시대의 학문과 지성에게 출구를 가리키는 애절한 손가락임에 틀림없다.

(사진 4 : 경성제국대학 예과학생들이 발행한 문학잡지 『文友』 5호. 신남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출처 : 아단문고 웹사이트)

 

 

블로그분과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섦 – 빈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4

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썩어가는 흰 눈에 바람에 가려진 나무의 흔들림이 있다

산은 말하고 말은 말이 없고 마른 하늘은 새벽별 그리워

밤이 그리워 가슴에 빛이 나고  세상은 온통 까만 닭이 짖는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빗속에 눈이 내린다

 

2017. 7.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