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아내가 이케아에서 6단 철제 서랍을 주문했다. 이케아가 약속한 3만 8천원의 가성비를 즐기려면 3시간 이상 손수 조립하는 수고를 바쳐야 한다. 처음에 아내는 나보고 조립을 해달라고 했다. 이럴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얼빠진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바보를 앞에 둔 아내는 혼자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현실 인식 능력이 탁월하다.

서랍장이 완성되자 아내는 탄성을 지르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기쁨에 들 떠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무심코 서랍을 열다가 대참사를 저지르고 말았다. 견고하게 서 있던 서랍장이 산산이 무너진 것(실제로는 부품 몇 개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아내는 서랍장이 민감한 아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예전에 볼보는 차 예닐곱대를 쌓아놓는 광고로 견고함을 강조했는데, 이 스웨덴 출신 서랍장은 어찌된 일인지 ‘아기 돼지 삼형제’의 첫째 돼지 집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가 단단한 모든 것을 연약한 액체로 전화시켜버리는 ‘액체근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 6단 서랍장은 액체근대의 산물임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도 액체임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임’이 되어 사뭇 의기양양해진 요즘이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줄 것을 애원하는 ‘전임’ 아닌 ‘전임’이다. 10년 안에 정년 자리를 꿰차지 못하면 나가야 하고, 정년이 되려면 다시 시험 절차를 거쳐 ‘신입’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비정년 트랙 교육중점전임교원’이라고 한다.

 

<1984>의 신어(newspeak)같은 이 용어의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2년 동안 의료보험과 사학연금(국민연금같은 것) 그리고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해당되지 않으므로 실업수당과 산업재해 수당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승진과 그에 따른 임금 상승에 대한 규정은 ‘정년 트랙 전임’과별도다. 하지만 근무 내용은 동일하다. 주당 12시간 강의, 매년 1~2편의 논문 실적, 교내 행정 업무를 위한 보직 봉사 등은 정년과 비정년의 구분이 없다. 전임이지만 교수회의에 참여하여 학교 행정에 대해 논할 수 없고 교수협의회의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 연구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무기계약이 아니므로 고용 내용상으로는 전임으로 분류할 수 없는데 서류상으로는 전임의 명칭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전임 비율을 높이라는 교육부 행정 지침을 준수하고자 이런 꼼수를 쓰는 듯 하다.

 

비정년전임이 되면 다음달 수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 언제나 이곳저곳의 평가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2년 뒤 계약 연장을 염두에 둬야 하므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을 거절하기는 웬만한 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를테면 교수와 학생이 동아리를 지어서 정기적으로 만나 무슨 활동을 같이하고 무언가를 지도하게 하는 사업이랄지, 교수학습커뮤니티 참가, 연탄 나르기 봉사, 교재 집필, 고등학생 대상 특별 강연 준비, 교양 도서 소개 집필, 거의 매주 열리는 회의 참여, 회식 등등 연구와 강의 이외의 잡다한 업무가 한아름이다. 이런 업무는 대부분 에이스나 코어 사업(나는 일 년이 넘도록 이 사업이 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수행을 위해 나랏돈을 지원받으면서 하는 건데, 비정년 전임 같은 파리 목숨은 사업에 참여하면 받게 되어 있는 소액의 수당마저도 받지 못하고 무급 봉사를 감내하는 신세에 몰리기도 한다.

 

이렇게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내면 어느새 학기말이 되어 강의평가서가 날아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평가서를 열어보면 인문교양 강의자들은 영락없이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온통 실용주의와 효율성에 사로잡힌 대학 사회에서 고색창연한 인문교양을 강의하고도 평점 90 이상의 강의 평가를 바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교수들은 강의 평가 평점 90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강의 이외의 시간을 학생 면담으로 보내고 학생들의 온갖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용을 쓴다. 고객 만족 점수에 목숨 거는 서비스직 사원의 비애는 강단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비정년전임의 사정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란다. 마가렛 대처 체제가 지구를 휩쓸게 된 이후, 정년 교수직은 드물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후보가 정년 자리 하나를 두고 150~200명의 후보가 경쟁한다. 철학이나 인문학 분야에서는 정년 자리 하나를 위해 300~400명이 경쟁한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참혹한 경쟁률을 뚫고 정년이든 비정년이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차적으로 임용은 대학 입학 성적에서 결정된다. 입학 당시 대학의 순위가 1차적 요인이다. 두 번째 요인은 역시 유학, 그 중에서도 미국 유학 출신자인가 여부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영어권 유학 출신자들은 SCI급 논문 실적을 쌓는 데에도 유리하지만 영어 강의 능력면에서도 이득을 본다.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핸디캡을 메꾸기 위해 국내 등재지 논문 실적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한 해에 서너 편씩 논문을 남발해 500%, 1000%의 실적을 올리지만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개인적 노력이외에 힘을 쓸 사람들을 널리 알거나 지원한 대학에 대한 폭 넓은 정보 취합 능력과 임기응변력 등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한 마디로 운수소관이다. 그렇게 얻은 자리도 대략 열에 일고 여덟은 일 이년 뒤의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이케아 서랍장만큼이나 부실한 자리다.

 

그런데 이 부실한 자리도 얻지 못한 채 근근히 연명하고 뛰어난 연구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인문학 연구자의 대부분은 이런 알량한 교수 자리도 얻지 못하는 유랑지식인 신세로 생을 마친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10여년의 대학원 수련 기간을 거쳐 학위를 받는다. 졸업 후 운이 좋으면 시간당 5~6만원정도의 강의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시간 당으로 받는 액수로는 고액이지만 강의 시수가 일주일에 고작 5~10시간 이하여서 정상적 생활을 유지할 수준은 되지 않는다. 월 2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올리면 ‘재벌’에 속한다. 이마저도 방학에는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의 시간강사들은 방학 중에 이렇다할 수입이 없으므로 1년 52주의 시간 중 30주만 연명 가능한 상태이다. 나머지 기간은 동면에 들 수밖에 없는 기이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생활도 1년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강사 계약은 최장 1년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난방비를 이기지 못하고 겨울 방학 중에 태국 등지를 떠도는 이들도 있다. 해외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면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처음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는 1998년 구제금융기였다. 그때 나의 스승께서는 추어탕을 사주시면서 반가움 반 안쓰러움 반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20년 후 이 표정을 후배에게 물려 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적폐청산의 목소리가 높다. 2017년을 전후하면서 끈질기게 광화문 앞을 점거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 덕에 그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1998년의 적폐를 깔고 앉은 채 돌아가고 있다. 기술관료들이 지배하는, 자유 없는 신자유주의사회에서는 적폐청산의 구호로는 어림없다. 액체근대적 비정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당사자들이 바로 적폐청산을 외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대통령이 인천공항에 가서 정규직 전환 문제에 대해 한 마디했다. 비정규직자들의 무기계약직화를 둘러싼 노동자 간 갈등을 두고 노조가 지혜롭게 문제를 풀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적 사안은 모든지 민영화해 버리는 것을 시대의 규범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정치 세력의 수장답다.

글 : 행길이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1880년 겨울 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고 세 살부터 청주에서 자란 신채호는 어린 시절부터 그 지역의 전통적 지식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랐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엄격한 유학적 기풍을 고스란히 지닌 가문 분위기도 여기에 한몫했다. 조정에서 정3품 벼슬까지 지낸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한학으로 학문의 맛을 본 신채호는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짓고 열네 살 즈음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공부에 제법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이웃마을의 문중 어른들에게 한학을 더 배우기도하고 신기선과 같은 이름 난 관료형 학자에게 수학하기도 한 신채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교한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신채호의 이른바 학창시절은 한 지역의 인재가 출세가도로 가는 엘리트 코스에 다름 아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의 애국지사로 유명한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山東)의 삼재(三才)라 불렸다고 하니 얼마나 주위의 큰 기대와 성원을 받았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단재 신채호 생가지 풍경,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출처 : 필자

 

그러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으로 청주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모여 살았기에 산동대가(山東大家)라 불리는 신 씨 집성촌 사람이었던 신채호는 서울에 올라가서 가문의 영광과 보장된 자기 성공의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계기는 오히려 제도권 전통 교육의 최고 산실이었던 성균관에 입교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성균관에 들어간 신채호는 후일 자신의 전기 『단재전』을 짓는 변영만, 조소앙 등 신학문과 새로운 사조에 열중했던 학우들과 어울리면서 의병활동 지도자로 이름 높았던 이남규, 김연성, 애국계몽사상가 유인식 등에게 배운다.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외세가 침탈하는 현실을 자각하면서 역사를 보는 눈이 뜨였다. 우승열패의 신화로 점철 되던 구한말 대한제국 처지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은 구습·적폐를 버리고 신사조를 바라던 지식인층의 입장으로 일면 이해할 수 있다. 개화자강론에 관심을 보였고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던 신채호는 성균관에서 외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서대문에 있던 독립관을 찾았다고 한다. 가장 급진적 자유·민권운동이었던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어 잠시 투옥되기도 한다. 이 때가 성균관에 갓 입학한 1898년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이 경험은 신채호에게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시 청주에 학당을 설립하여 신규식, 신백우 등과 애국계몽·신교육 운동을 벌이기도 한 신채호는 1905년 26세의 나이로 성균관 박사에 임명된다. 이 당시 박사라는 직함은 지금의 교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음날 이를 사직한다. 신채호는 전통적 학자의 전형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미 동아시아 내에서 배신당한 뒤였고 다이내믹하면서 잔인하게 전개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성균관 박사자리에 앉아있기에는 눈에 보이는 망국의 현실이 가시덤불과 같았을 것이다. 그 시절 그가 투신한 것은 기존 유학자의 길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여 시대정신의 정화를 구현하는 길이었다. 신채호가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최신 정보와 다양한 국내외 사조에 접근할 수 있는 언론인을 직업으로 택한 신채호는 1905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초빙된다. 1904년 청주에 산동학당을 만들어 활동하던 중 며느리를 보기 위해 청주를 찾은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다. 신채호는 자기 연고지에서 소박하나마 뜻을 펼치려 했지만,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신채호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다시 그를 서울로 불렀다. 지금도 종각 지하철역 5번 출구에는 『황성신문』 옛터 표지석이 서 있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1905년은 사람들이 ‘을씨[사]년스럽다’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침통하고 침울한 때였다. 한 국가 공동체가 당한 치욕의 시간을 민중은 그렇게 불러 기억했고 신채호는 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사 옛터,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33 (종각역 5번 출구 앞)> 출처 : 독립기념관

 

신채호의 『황성신문』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고발한 것을 빌미로 『황성신문』이 발행정지 당하자 신채호는 1906년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시기 최대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를 맡아 다시 언론활동을 시작한다. 1907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논설을 기고한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뒤편, 목은영당 옆이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자리다. 이 시기 언론인으로서 신채호의 의기(義氣) 넘치는 논설은 절정을 이룬다.

 

당시 신채호의 사상전개의 중심은 민족 개념에 대한 확립에 있었다. 1908년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명명한다. 일찍이 우리에게 동포, 종족이란 개념은 있었지만,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없었다. 민족은 근대적 개념이다. 신채호는 망국 앞의 나라가 위기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대의 대상인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화주의를 벗어나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역사를 관조하는 것은 현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또한 이것은 세계질서가 된 사회진화론의 극복이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사대주의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 상고사에 대해 주체적으로 재해석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1910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신채호가 상고사에 몰두한 이유이다. 낭가(郎家)사상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정신에 대한 고유성의 확보 시도였고, 이와 연계하여 1908~1909년 사이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최영 등 우리 역사의 상무적 영웅들을 소설을 통해 현실로 소환한 것은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강력한 힘을 민족의식으로서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에서 “이십세기 신동국의 영웅”을 두고 ‘국민적 영웅’이라는 뜻으로 설명하였고, 사회 전반의 각각 영역에서 활약하는 다수의 소영웅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그 영웅들은 “이십세기 신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국민국가 출현의 바람과 세상을 이끄는 주체로서 신국민은 초기 신채호 사상에서 민족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문사 창간 사옥 터 표지석,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5 (목은영당 옆)> 출처 : 독립기념관

 

그런데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가 제국주의라 규정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이것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이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기독말살론』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보통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실천에 옮기려 한 시기는 1921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 논설의 시기를 보면 이러한 사조를 처음 접한 것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1910년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중국 신문 『진보(震報)』에서 “일본에 오직 고토쿠 슈스이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1929년 재판정에서 진술할 때도 고토쿠 슈스이의 저서를 읽은 후부터 무정부주의(아나키즘)로 기울기 시작하였다고 발언한 적이 있으니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는 최초 영향이 고토쿠 슈스이로부터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본을 강도로 규정한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길의 정점에서 제국주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야수의 유린’이기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 스스로 생의 본능에 의거하여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행동’으로 폭력혁명과 무력투쟁에 매진해야함을 지지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는 이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신채호의 서울살이는 1910년 중국 청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어졌는데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던 1907~1909년 사이 ‘민족’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이지만, 경술국치 이후 신채호가 중국으로 망명한 1910년부터 현저히 감소한다. 국민국가 실현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사라진 희망은 그의 자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삼청동 신채호 옛집 터,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2-1번지> 출처 : 네이버 지도

 

신채호가 서울에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집터는 지금의 삼청터널 가는 길 끝자락 삼청동 2-1번지에 있다. 변영만은 『단재전』 첫머리에서 이 집을 방문한 광경을 적고 있다. 신채호가 아내의 모유가 부족하자 독수리표 연유를 사다 주었는데 아내 풍양조씨가 아들 관일(貫日)에게 잘못 먹여 체한 병이 났다. 이것 때문에 화가 난 신채호는 집 앞 개울에서 연유통을 모두 도끼로 찍어버려 삼청동 개울물이 모두 우윳빛으로 변한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변영만이 다시 방문했는데 그의 아들 관일이 사망한 뒤였다. 이에 신채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관일이 마침내 백홍(白虹)이 되었어.” ‘흰 무지개가 해를 뚫고 지났다’는 이 말은 자식 잃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 앞으로 나타날 비상한 사건의 복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9년 이 일을 빌미로 조강지처와 이혼한 신채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떠난다. 떠나기 전 삼청동 집을 팔기 위해 집문서를 넘겨야 하는데 이마저 분실하여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에 집문서를 분실 광고를 낸다. 신채호 서울살이의 마지막은 이렇게 안타깝게 끝나는데, 알고 보면 이는 대한제국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많은 인사들의 운명 역시 그러했겠지만 신채호의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도 삼청동 신채호의 옛 집터는 휑한 시멘트 공터로 남아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 신채호가 올린 광고> 출처 : 연합뉴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1. 총을 들어야 했던 철학자의 운명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임화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의 한 구절이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상황에서 그는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인 남로당 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전사한 동지들의 서늘한 이름을 불러 본다. 다음 해에 비극적으로 마감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임화도 예감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전 이후 숙청되는 박헌영과 남로당계의 몰락은 마치 예정된 일처럼 진행되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의 박치우(왼쪽), 행적을 알 수 없는 그의 부인과 함께(오른쪽)>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4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이 말이 조선인 ‘서양철학 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박치우(朴致祐, 1909~1949)의 마지막 행적이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잔존하는 오늘날의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의 ‘혁명렬사릉’에도 그의 묘비는 없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동학이자, 일제의 ‘교육칙어’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태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朴鍾鴻, 1903~1976)과 달리 그는 남과 북 모두에서 오랜 동안 잊혀졌다. 다만 월북하기 직전에 출간한 유일한 저서 『사상과 현실』만이 박치우가 분투한 실천적 사유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진 와중에 그는 일제말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발표한 글과 해방 직후에 발표한 원고를 급히 모았다.

 

<『사상과 현실』 초판(백양당 1946년 11월 20일 간행) 및 재간행본들>

 

1930년대 중반 한 때 언론지면에서 고상한 인문평론가로 활동하던 이 젊은 철학자는 이제 해방공간에서 ‘좌익 언론’ <현대일보>의 발행인 겸 주필이자 남로당의 핵심적인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남쪽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가혹한 탄압과 우익단체의 무분별한 테러가 자행되던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그는 북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기 이전 평양에서 김일성과 진행한 일곱 번의 비밀회동에 네 차례 배석한 박치우였지만, 다시 어떤 모습으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8.15’와 함께 그어진 ‘38선’은 1년 사이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경계이자 생사를 오가는 전선(戰線)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2. 해방공간 민주주의 담론의 현재성

 

한국전쟁 중 김책시(金策市)로 이름이 바뀐 함경북도의 항구 도시 성진(城津)에서 목사 박창영(朴昌英)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고 스무 살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던 박치우. 이후 몸담고 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자진 폐교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거치고, 일제 말기 중국에서 5년간 망명 생활 후에 돌아 온 고국에서도 그가 ‘말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간지 <현대일보>는 “자유조선의 소리, 세계민주주의의 전령, 새 나라 건설의 전령”을 천명하며 창간되었는데, 일요일에도 발행할 만큼 당시 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좌익 활동 탄압 및 민생정책의 무능, 그리고 우익의 파시즘적 행태를 가감 없이 비판했던 이 신문은 6개월도 가지 못해 강제폐간 당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다른 여러 민주주의‘들’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남북에 각각 정부가 세워지고 미국과 소련에서 이식된 분단국가주의적 민주제가 시작된 이후, 이 땅에서 도달 가능한 ‘인민의 자기 통치’로서 민주주의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유예되었기 때문이다.

 

박치우는 해방공간의 민주주의 논쟁에 참여하면서 박헌영이 ‘8월 테제’에서 현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적 달성을 우선 지지했다. 그런데 그가 궁극적으로 해방 조국의 새로운 민주주의로 품고 있던 이상은 자유민주주의가 주장하는 형식적·사적소유중심적 시민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인민민주주의였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근로인민’이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다가가는 것이 ‘인주주의(人主主義)’의 토대가 되는 민주주의로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낳은 근대 시민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새로운 한반도는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실현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주는 민주국가였다.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 사회주의’ 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단지 구호로만 표방했던 인민민주주의의 독재적이고 독단적인 제도화가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의 말을 사회주의적 이상의 원형 속에서 다시 보자.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주의와 주장에 철저하려면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주저앉지 말고 다수자인 근로인의 현실적인 일대일의 요구를 강력히 보증할 수 있는 근로 인민 민주주의에까지 자신을 진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되고야 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예측 내지 각오할 줄 모르는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벌써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金)’주주의나 ‘물(物)’주주의 혹은 ‘지(地)’주주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중)

 

박치우는 일제말기부터 새로운 독립 조국의 미래상을 고민하던 실천적 ‘지식인’이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라도 굴려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가’였다. 그는 해방 조국이 무엇보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원했고, 그 길을 넓혀가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넓게 ‘연대’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는 파시즘이다’를 목놓아 외치고 싶어도 반대로 말하고 써야했던, 고통스러운 식민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자, 언제든 얼굴을 바꿔 도래할 수 있는 파시즘의 망령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역사가 강요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굴복 요구에 맞서, 그는 총을 드는 것으로 응전했고 철학자로서 ‘당파성’을 당당히 옹호했다. 당시 그가 고민했던 문제들, 즉 반민족세력에 대한 처벌, 통일국가의 형성,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점진적 혁신과 사회적 연대, 시민사회의 모순과 이율배반의 극복, 변증법적 현실 인식의 정치적·실천적 가능성 등은 사실 당시 기준에서만 유효한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천으로서의 이론이자 이론으로서의 실천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박치우는 단지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숨어서 읽던 사상가로만 추억될 수 없다. 1945년의 고민, 즉 진정한 독립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냉전의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 체제로서 유지되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민주주의 같은 주제는 그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박치우가 남긴 짧은 글 속에서 그는 언제든 살아 돌아와 묻는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마땅히 무엇이어야만 될 것인가.”

 

언젠가 박치우가 분단국가의 남쪽에 머물 수 있었다면, 이후 한국의 철학계와 한국의 진보 정치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 적이 있다. 지배 체제가 부여하는 권위와 권력을 비웃으며 시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비합리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꼬장꼬장한 서양철학 1세대 선배들의 모습.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현대 철학’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후대에 전해지면 좋겠다는, 오래된 기대가 내게도 있기 때문일 게다.

 

3.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의 역사적 고통과 철학함의 과제

 

박치우가 월북한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처음엔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인쇄물을 공급하는 해주인쇄소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이후부터는 월북한 남로당 잔존 세력을 교육하여 유격대로 양성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리의 탄광촌에 마련된 그곳은 당원들을 재규합하고 사상을 벼리고 무장투쟁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박치우는 사상과 역사 교육을 전담하는 정치부원장으로서 2년여 간 이곳을 관리했다.

 

하지만 자신과 월북한 좌익이 곧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일 것을 그는 직감했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에도 수세에 몰린 남로당 세력은 1949년 9월 총봉기를 통해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입산한 세력과 더불어 그들은 이미 6월부터 400여 명이 오대산 지구로 투입되었다. 분단국가 내부 권력 투쟁의 희생양들은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만 독재적 지배체제의 구축이 가능함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얼마 남지 않은 1949년 가을, 박치우와 그의 동지들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우리가 아는 분단의 역사는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의 실상을 기록하지도, 고통을 기억하지도,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했다.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빨치산> (출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태백산 지구로 투입된 박치우의 1군단은 군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와해되고, 잔류병들은 제3군단 김달삼(金達三) 부대와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박치우는 태백산 인근에서 주검도 없이 산화했다. 제주 ‘4.3’을 주도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지명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공식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죽은 어느 빨치산 대장의 ‘잘린 모가지’는 왜 중요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무고를 증명하고 부락민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의 마음이 읽힌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고, 서로를 절멸시키려고 했던 상처는 두터운 피딱지가 되어 말라버렸다.

 

1928년 이른 봄, 경성역에 내린 축구를 좋아하던 스무 살의 수재 박치우는 가히 짐작이나 했을까. 사상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여 역사의 운명 같은 것을 감내해야 한다고. 기실 philosophy라는 서양의 학문전통을 최초로 수학했던 이들은 ‘실천으로서의 철학함’이라는 문제의식을 기저에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철학적 실천 방향에 따라 1세대의 삶과 후대의 영향은 크게 달라졌다. 그들의 시대와 정치공동체가 요구했던 민족사적 과제는 결국 독립 이후 특정한 이념을 지향하는 국가의 건설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단국가는 냉전시대를 거쳐 오며 공생적 적대관계, 적대적 유사체제를 구축해야 했고 그들의 운명은 결국 당대 지배 권력의 필요와 요구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박치우는 경성제대 졸업논문에서 연구한 신칸트주의 철학자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나 지도교수 미야모토 와키치(宮本和吉)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더 오래도록 살아남아 현재진행형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1936년 ‘아카데미즘’ 중심의 철학을 벗어나며, 그는 과거에 철학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과제라고 썼다. 박치우의 그 생각은 살아있는 ‘우리철학’을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이정표로 남아 있다. 바로 시대의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스스로,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해 나가라는 메시지이다. 아니, 사실 그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함의 본령이었다.

 

기고자: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한반도의 역사와 시대정신에서 발현된 문제의식을 통해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그 동안 게으르게 지내서 반성하며 살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건국대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공립도서관에서 다양한 주제의 인문학과 통일학을 강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B급 철학』, 『통일인문학』, 『통일담론의 지성사』 등이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7. 착실(着實)

착실(着實)

 

좋은 아이디어가 항상 성공할까? 선한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을까? 고귀한 이상이 언제나 실현되었을까? 꼭 그렇지 않다. 현실이 그렇다. 현실은 복잡하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라는 개념이 있다. 착한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을 말한다. 현대는 기술이 발전한 것 같지만 세계에는 아직도 기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넘친다. 주로 NGO의 활동과 연계되어 빈곤과 가난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플레이펌프라는 것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회전놀이기구를 신나게 타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 회전력을 이용해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후진국들을 위한 자선 사업의 일종이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다. 원인은? 여성들이 사용하기 힘들고 아이들은 회전놀이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속도감을 느낄 수도 없어서 탈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누가 재미도 없는 뺑뺑이를 하루 종일 돌리겠는가? 가장 실패한 적정 기술의 하나로 평가된다. 현지 사정에 전혀 무지했던 것이다. 착한 기술일지라도 먼저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착한 소비라는 개념도 있다. 탐스 슈즈(TOMS Shoes)라는 회사가 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기부한다는 모토로 후진국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소비를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비판을 받았다. 현지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하나를 기부한다는 자선 행위가 현지에서 생산된 제품들의 선호도를 떨어뜨려 지역 경제에 타격을 준다.

가난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 사람들이 도덕적 자선 행위를 하고 있다는 착각만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착한 소비를 함으로써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도덕적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있다. 물론 탐스 슈즈 창립자는 후진국 국가들에 신발 공장을 세워 현지인을 고용하여 이런 비판을 해결하려 했다.

윌리엄 맥어스킬의 냉정한 이타주의라는 책이 있다. 자선 행위에 효율성을 강조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이기도 하다. 이 말은 자선, 선의 등의 도덕적 행위에 효율이라는 경제적 관념이 결합된 듯하다. 마치 경제적 도덕주의처럼 들리기 때문에 어색하게 들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덕을 행한다는 착각이 아니라 도덕에서도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착실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약간 우둔하게 성실하다는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원래적 의미 맥락은 다르다. 착실(着實)이란 실제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달라붙는다는 말이다. 실제와 현실에 부합한다는 말이다. 우둔하게 성실하기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주희는 이렇게 말한다.

앎은 고명함을 귀하게 여기고, 실천은 착실함을 귀하게 여긴다. 앎이 고명하다면 반드시 착실하게 해 나가야 한다.(知識貴乎高明, 踐履貴乎着實. 知既高明, 須放低着實做去.)

 

혁명가였던 체 계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혁명가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혁명은 리얼리스트일 때만이 실현할 수 있다. 리얼리스트는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리얼리스트일 때만 불가능한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착실한 사람이 고명한 이상을 꿈꿀 때 혁명은 가능하다. 고명한 이상만 품고 착실하지 못한 사람은 세상 탓만 할 뿐이다.

 

 

 

섦 – 더(the)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3

더ㅡthe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더 하고 싶고

더 있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를 한정하지 않는 세계는

더하고 더해도 끝이 없다.

더 할수록 너무 어렵고

더 하고 싶을수록 더 하지 못한 것은

무한정적으로 한정된다.

더하는 사랑과 사람과의 관계는

더 울수록 더 덥고 더 어려운 일이다.

 

무한정 세계에 살아가고

한정된 세계에 머무르며

갈피를 못 잡고

타협하지 못하는 사랑은

외부은하에 피어나

더 할 수 없이 빛으로 흩어져

안드로메다를 찾는 계절을 맞이한다.

거울 속의 거울의 나는

무한히 가슴에 담긴 별을

더하고 나누고 빼는 것처럼

더와 계속과 덜 사이에 차이를 찾아

은하수 숲으로 하루를 위하여 건너간다.

 

2017. 12. 13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노라면 동분서주도 모자라 남분북주를 해야할 판이다. 고교시절 방영된 국경일 기념 드라마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 당시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의 필통 데코레이션을 담당한 인물이었지만 3.1운동과 님의 침묵에 관한 잔상 이외에 그에 관한 지식은 전무했기 그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불충분하다. 어떤 운명인지 충청도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강원도와 인연을 맺은 뒤 우연한 기회에 인제의 만해마을과 백담사를 찾아 오래전 추억을 떠올렸다. 만해마을 전시실에서 한용운이 한 세기 전에 지금 내가 보는 음빙실문집을 보았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총으로 주권자를 학살하고 권좌를 누리고 지금도 호위호식하는 사람의 흔적만 백담사에 남아있었음은 충격이었다. 이미 8년 전 일이고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

 

만해 대신 정치적 도피를 한 독재자를 기념하는 백담사

 

홍성에서 나고 자라 강원도 산사에서 출가했으며 배움을 찾아 러시아로 길을 떠났고 불교 인사로서 남도의 여러 사찰을 돌며 강연하고 조선의 독립적 종단 건설을 위해 승려들을 설득했으며 경성에서는 신문 잡지를 내며 본인의 목소리를 내고 생을 마쳤다. 한용운은 이렇듯 여러 지역에 족적을 남겼으니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한 두군 데 공간만 찾는 것으론 역부족이다. 5개 지자체가 손을 잡고 대학의 만해연구소가 협조하여 선양사업의 의지를 보인 것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없지 않다. 게다가 불교 개혁을 주장하고 불교 대전을 펴내서 불교 이론을 심화하고, 조선 독립의 서로 억압의 역사에 저항하는 족적을 남기고 만년에는 시와 소설로 문학인으로서의 면모(본인은 문학으로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지만)도 남겼기에 한용운의 내면을 전면적으로 파악하려면 길고도 어려운 여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동북아시아를 주유하며 몸소 겪은 일들은 공간적으로도 활동 영역으로도 다채로운 그의 역정을 열정적인 독립운동가로 그리며 영웅적 행적이라고 기리고만 끝낼 수 없게 만든다. 승려가 된 후 그는 세계를 관심대상으로 품었고 세계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그의 길은 고단한 투쟁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첫 출타부터 고난을 겪었다. 출가 초기 중국에서 들어온 영환지략, 해국도지, 음빙실문집을 읽고 세계를 경험하리라는 꿈을 품은 한용운은 가정을 버리고 출가했듯 일본에서 떠나 조선을 거쳐 러시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를 거쳐 미주까지 가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으나 그 계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좌절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현지 조선인이 그를 일진회로 오인해서 죽이려고 했다. 일단 풀려난 뒤에도 다시 조선인에게 봉변을 당하던 도중 현지 경찰에 발견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생을 마칠 뻔한 경험에 한용운은 세계일주의 결심을 접게 된다. 국권이 위태롭던 시기 그의 길에서 위협을 준 이들은 역사의 현실이 만들어낸 동포의 배타심과 경계심이었다.

 

얼어붙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바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배운 경력이 있지만 불교 종단을 총독부가 통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시기 그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총독부 권력을 이용해서 종단 내 본인의 권력을 굳히려던 친일 승려였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식민지 권력이 준 주지라는 자리에 취한 승려들의 비협조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용운도 당시 종단의 유력인사도 은둔의 수도승이 아니었지만 세간에 대한 처신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는 식민지 권력이었다.

식민지 권력에 맞서는 일에서도 그가 겪은 것은 결코 동지적 단결만이 아니었다. 임제종 운동이 끝난 후 고국의 현실을 알리려 만주에 갔지만 그곳에서 블라티보스토크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정탐으로 오인한 그곳 조선인이 한용운을 총으로 쏘았던 것이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 학생이 총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이 훗날 조선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이를 오인사살할 뻔한 일화다. 한용운은 이 일화를 「죽다살아난 이야기」로 남기기도 했다. 훗날 독립에 뜻을 같이 한 이들과의 불화, 불일치도 한용운의 역정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벗이었고 3.1독립선언을 주도한 최린과 여러 인사들이 훗날 변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서정주의 입으로 전해진 한용운에 대한 현상윤의 첫인상은 “껌정 두루마기에 껌정 고무신에 얼굴은 가무잡잡 불그레하고 키는 나지막한 청년”이었고 현상윤은 그를 “꼭 무슨 첩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한용운은 “처음 우리 판에 와서부터 어떻게나 열심히 한몫 끼워 달라고 조르던”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독립선언도 ‘우리 판’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한용운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불교에서도 권력과 멀었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던 비주류였다. 신간회가 출범한 후에도 한용운을 찾아온 기자가 한용운의 입장을 민족주의에 끼워맞추려고 취재하려다 크게 혼쭐이 나서 돌아간 일화도 전해진다. 독립을 당연시 하는 후세의 시각에서는 당시의 민족운동을 단순하게 보기 십상이지만 상황이 빚어낸 오해든, 생각의 변화든, 퇴행적 네트워크 문화의 발로에서든 한용운은 갖가지 불화를 겪었다. 이러한 불화에 그는 “훼예를 무시하는 호담이 있어야 만인의 이상을 초월하는 쾌사를 창조할 수 있다.”(「훼예毁譽」)라며 결연히 응답했다.

 

심우장에 설치된 한용운의 동상

 

심우장에 동상으로 남아있는 한용운의 인상은 매우 고단해보인다. 2017년에는 심우장에서 그를 기리는 뮤지컬도 상연되었고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기념물이다. 이렇듯 그에 대한 기억은 지속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의 삶은 고달팠고 병을 얻어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민적을 거부해서 인권 없이 살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출가 이후 불교개혁을 위해 조선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일 못지 않게 그가 겪은 ‘조선인’들과의 불화도 그를 힘들게 한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친딸에 의해 정치가로 회고되고 불교에 투신한 것이 정치활동에 대한 갈망이라고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시대를 불철저하게 인식하거나 지배권력과 타협하며 그와는 다른 ‘정치’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그의 삶을 더욱 핍진하게 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스스로도 고단했다고 회고하는 삶의 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는 그 흔적을 그의 열정적인 활동의 자산으로 남은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이 유명세를 탄 것은 3.1 독립선언 이후 투옥된 후 발표한 「조선독립의 서」이지만 그 생각의 연원은 불교사상이었다. 그는 고려대장경의 문구를 발췌해서 『불교대전』을 편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정의로운 차원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편찬 의도를 밝혔다. 그는 불경을 통해 현실의 사악함을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불교의 교지(敎旨)는 평등”이고 불교의 사업은 “박애(博愛)요, 호제(互濟)”였기 때문이다. 또한 선(善)은 “죽어 지내는 소극성이 아니라 우자가 되고 승자가 되어 뭇 사람들을 보호하고 만물을 애육하는 자가 되는 것”이요 “대등하고 평등한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여 사랍답게 사는 일”이다. 악은 “열자와 패자가 되어 남들에게 동정받는 자가 되고 사물에게 부림을 받는 자가 되는 것”, “차등과 불평등을 자초하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억압과 차등의 제국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일천하게 만해의 삶을 엿보는 동안 종교를 혁명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삼자던, 장타이옌, 동시에 지식인과 수많은 불화를 겪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루쉰, 그리고 루쉰이 그려낸 끝없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 나그네가 떠올랐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는 만해가 기념사업도 하고 공연도 열리며 기려지지만 권력의 자장 안에서 위선적 정치인, 나약하고 허위적인 지식인, 기레기, 그들의 네트워크가 공고한 오늘의 현실에서 만해가 살아있다면 비난받지 않고 불화를 겪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한용운

 

 

기고자: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교수)

중국현대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실험과 시련, 행운을 불균등하게 겪으면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

1945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일제치하에서는 그토록 어려웠던 ‘민립대학’의 설립이, 광복과 함께 속속 진행되기 시작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도 1946년 9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대총장 현상윤(玄相允, 1893~1950?)은 1946년 2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대학 승격과 함께 총장이 되었다. 지금 고려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대학원 건물 앞 두 동상 중 서양식 옷차림에 동그란 안경을 낀 인물이 바로 그이다.

 

 

현상윤은 고려대학교 대학원의 첫 박사이자, 국내 1호 박사이기도 하다. 1953년 3월 25일, 고려대학교는 그의 저서 『조선유학사』로 그에게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 전할 수는 없었다. 1950년 7월,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2.

현상윤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던 중인 1948년부터 한국 사상사를 직접 강의했다. 이 강의는 훗날 『조선유학사』로 우선 발전·정리되었다. 『조선유학사』는 1948년 11월 25일 완성, 12월 5일 민중서관에서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의 전통사상에 대해 근대적 체제를 갖추어 쓴 첫 사상사 저술로 평가된다. (그는 이어 『조선사상사』를 탈고했지만, 출판사에 넘긴 원고가 난리통에 유실되는 바람에 일부만이 전해질 뿐이다.)

 

 

『조선유학사』는 이 땅에 유학이 처음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신라와 고려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척사위정파와 그 이후까지를 다루고 있는 통사적 사상사 저술이다. 현상윤은 우리나라의 오랜 유학적 전통에 있어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을 으뜸으로 여겼다. <서문>에서 그는 ‘상고와 중고 시대 신교와 불교에 비해 유교는 이지적이고 귀족적인 성격 탓에 다수의 이해를 받지 못했고, 그러므로 조선 유학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유학만이 탐구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그 까닭을 댔다. ‘중국에 비교해도 뛰어났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수준’과 ‘일본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까닭 중 하나였다.

 

 

사실 조선 유학사에 대한 근대적 탐구는 그 전에도 있었다. 아마도 그 최초의 것은 일제의 관학자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의 식민사관에 기초한 「이조유학사에 있어서 주리파와 주기파의 발달」(1929)일 것이다. 141면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에서 그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주리파와 주기파로 분류하고 이들의 계통이 조선정치계의 붕당을 형성했으며, 이들 붕당 간의 당쟁이 조선사회를 지배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선민족이 고착적이고 창의적이지 않으며 낙천적이고 문약하고 형식주의적이며 당파적이라고 폄훼했다. 그의 폄훼는 조선총독부의 입맛에 맞춘 편협한 것일 뿐 아니라 조선사상의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민족적 특성을 부정적으로 도출하는 근거없는 논리적 비약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다카하시 도루는 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 『조선유교연원』(1917)을 쓴 장지연(張志淵, 1864~1921)과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양자의 논쟁은 1915년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를 통해 수차례 진행되었는데, 요점은 조선 성리학자들에 대한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에 대한 장지연의 대응이었다 할 수 있다.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은 경전연구와 수양에 치중한 조선 성리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을 잊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지연은 그러한 것은 단지 일부 ‘썩은 학자들(腐儒)’의 문제였다고 대응했지만, 다카하시 도루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다.

 

분명 다카하시 도루의 비판 중 일부는 납득할 만한 것이 있으며, 또한 당쟁 등의 문제는 당시 민족학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명백히 식민사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그러한 학문적·정치적 사례로부터 민족성으로 일반화시키고이를 통해 조선의 사상과 민족을 폄훼한 저의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4.

현상윤은 1913년 보성학교를 졸업 후 1914년(22세)부터 1918년(26세)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급사회학과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21년, 29세의 나이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송진우, 최린, 최남선, 김승훈, 이승훈 등과 함께 3.1 운동을 주도했고,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에게 저 일본 유학기간은 최신의 학문을 배우고 익혔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다카하시 도루의 관점 자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전적인 비판의식을, 그는 가지지 못했는지 모른다.

 

 

조선 유학에 대한 현상윤은 관점은 일견 다카하시 도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조선 유학의 죄(罪)로 ‘모화사상(慕華思想)’, ‘당쟁(黨爭)’, ‘가족주의의 폐해’, ‘계급사상’, ‘문약(文弱)’, ‘산업능력의 저하’, ‘상명주의(尙名主義)’, ‘복고사상’ 등을 지적했다. 모화사상이나 당쟁, 문약 등은 모두 다카하시 도루가 조선 유학의 문제로 지적한 것들이다. 나아가 조선 유학의 영향으로 한국 민족의 사상과 민족적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조선유학사』는 다카하시 도루와 같은 식민사관에 머물러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조선 유학에 공(功) 역시 있으며, 그것은 ‘군자학(君子學)의 면려(勉勵)’, ‘인륜도덕의 숭상’, ‘청렴절의의 존중’ 등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유학에 대한 당시의 비판적 지적들을 거론하면서 그와 함께 조선 유학의 긍정적 이면을 조명한 것이다.

 

5.

현상윤이 흔들어 놓은 조선 유학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관점은, 이후 한국 유학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짐에 따라 이제 더 이상 주류 해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현상윤이 제시한 조선 유학의 공은 전부 인정하고, 그가 언급한 과 역시 유학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했던 이상은(李相殷, 1905~1976)의 「한국에 있어서의 유교의 공죄론」은 현상윤에 이은 가장 가까운 되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유학에 대한 연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 대한 근래의 연구를 분석하는 것은 과거 자체에 대한 연구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이 특히 바로 ‘우리의 철학’에 대한 것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현상윤은 우리 철학을 돌아보는 것의 중요성을 일치감치 깨닫고 있었다. 우리의 철학은 곧 우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찬양도 근거없는 비판도 우리는 부수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정신, 우리 철학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길 위에서.

 

 

기고자: 윤태양(건국대학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건국대학교에서 순자로 석, 박사를 마쳤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지역시민에게 퍼뜨리는 것과 권리중심사회에 걸맞는 도덕철학의 규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긴급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장소변경 안내

[긴급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장소변경 안내

 

회원 여러분과 웹진 (e) 시대와 철학 독자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전호근입니다.

 

긴급사항을 전합니다.

오는 11월 25일 열릴 학술대회는 본래 한철연과 한국여성철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유로 한철연 단독 개최로 변경되었고 장소도 이화여대에서 한철연 연구실로 바뀌었습니다. 부득이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된 사유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주 학술대회 발표자 중 한 사람을 지목해 발표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항의 메일 7통이 접수되었습니다. 이어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한국여성철학회에도 15통의 항의 메일이 접수되었고, 교육부와 이대 쪽에도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당시 그저 한 차례 해프닝으로 마무될 줄 알았으나 이후 한국여성철학회 쪽에서 지난 11월 21일 최종적으로 회원들과 충분히 논의할 시간을 얻기 위해 학술대회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철연에 통보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한철연 연구협력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의견을 나눈 결과 한철연 단독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연구위는 이 사태를 학문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일 뿐 아니라, 동료 연구자이자 한철연 회원 중 한 사람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부당하게 침묵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중심에 놓고 대응해 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갑작스런 장소변경에 대해 사과드리며, 이번 53회 정기학술대회의 변경내용을 재차 긴급히 안내드립니다.

 

주제 – 여성과 철학 : 철학의 타자는 말할 수 있는가?

 

▶ 일시 – 2017년 11월 25일(토) 12:30 ~ 18:00

 

▶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실(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302호)

              – 세부장소는 아래 안내 참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세부 순서

순서 시간 발표 비고
12:30~13:00 등록
제1부

 

13:00

~

16:40

13:00~13:10 개회사 및 인사말

: 전호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경희대)

1부 사회

(윤은주, 숭실대)

13:10~13:40

 

13:40~14:00

발표1.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차이와 일치-버틀러와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이지영, 이화여대)

토론: 조주영 (서울시립대)

14:00~14:30

 

14:30~14:50

발표2. 말을 넘는 몸의 고백 –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 읽기 (조현준, 경희대)

토론: 조선정 (서울대)

14:50~15:00 쉬는 시간
15:00~15:30

 

15:30~15:50

발표3. 장치로서 젠더와 방법으로서의 퀴어링 –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모색 (김은주, 동덕여대)

토론: 이현재 (서울시립대)

15:50~16:20

 

16:20~16:40

발표4.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는가? – 레이 랭턴의 침묵 논증 비판 (유민석, 서울시립대)

토론: 이선형 (서울대)

16:40~16:50 쉬는 시간
제2부

 

16:50

~

18:30

16:50~17:40 자유토론 사회

(박민미, 동국대)

17:40~18:30 정기총회 및 소송학술상 시상식

: 전호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경희대)

18:30 이후 만찬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섦 – 내가 되는 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42

내가 되는 것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내가 어떤 것을 바라보느냐

지금의 내가 되고

미래의 내가 된다.

지금의 자신에 관하여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어떤 이유로 세상의 풍경에 머물지 않고

그 어떤 핑계로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어떤 변명으로 스스로의 삶을 타협하지 않고

내가 세상의 풍경이 되는 한 그루의 나무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의 나는 아마도 곧 내일의 내가 될 것이니까.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가 되는 그 곳이니까.

 

2017. 11.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삶에 정형화하는 것은 타인의 정형화에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할 때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나는 그 정형화 된 삶 속에 끌려 갈 수밖에 없을 때를 만나기도 하니까요. 내 삶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그 삶속에 들어가 보는 것에서 그의 세상을 만나 새로운 세계의 틀을 만듭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고 싶지 않을 일을 해야 할 때, 정형화가 되어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무감으로 붓질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 정형화를 감내합니다. 삶은 모순의 연속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모순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으로 생각을 들어가 봅니다. 삶의 불안정한 충돌 속에서 삶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그 내면에 있을 뿐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곧 내가 향하는 곳이고 내가 바라보는 곳입니다. 나의 지금은 아마도 곧 내일의 내가 될 것입니다. 그저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