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7. 3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2강.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강연 : 배기호(충북대 강사)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춘추전국시대에 제안된 민본주의적 통치 원칙의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동양에 민주적 전통은 있는가? ‘민주(民主)’와 ‘민본(民本)’은 어떻게 다른가? 민본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치와 이념일 수 있는가?”

 

오늘 강의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배기호 교수는 순자(荀子, BC 298~BC 238) 철학을 중심으로 고대 유학 전통에서 민본 사상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여 설명했습니다. 성악설에만 가려져 있던 순자 철학에서 ‘위’와 ‘아래’의 문제를 깊게 파고듦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참여’라는 메시지로 고대 유학 사상을 재구성한 것이지요.

 

오늘날 정치적 주체가 된 ‘아래’는 ‘위’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며, 정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권리와 더불어 의무를 자각해야 하고, 공동체의 일원이자 주인으로서 의식 수준을 고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자 철학을 비롯한 고대 유학을 현대적으로 재-음미해본다면, 더 이상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아래’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라는 순자의 말은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심지어 고대 유학에서조차 백성들이 단지 통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근본이 됨을 밝히는 말이 됩니다.

 

순자 철학을 중심으로 민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현실과 연결 지으면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가 논의 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순자의 말을 통해, ‘시민(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활동, 즉 참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누구에게나 해당하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요컨대, 고대 유학이 표방하는 바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적용한다면, 시민의 정치 참여를 북돋우고 올바른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2018. 7. 23.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1강.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강연 : 김성우(상지대 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와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우리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과연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일까요? 과거 세계 대전과 대량학살을 일삼았던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현재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내세우면서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 모두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얻어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은 커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작년 전국을 뒤흔든 국정농단 사건, 최근 연이은 정치인들의 성폭력 문제들, 그리고 제주도를 통해 입국하려는 난민들을 둘러싼 문제들은 민주주의의 결함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라고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민주주의의 결함이 그 자체 본질적인 문제이므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채택해야할까요? 아니면 그 결함이 민주주의 자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 발생한 수정 가능한 외적인 문제로 반성과 변혁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 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첫 번째 시간, 김성우 교수는 민주주의의 결함에 대한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7~BC 347)과 현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에서 찾아봐야한다고 얘기합니다. 민주주의가 발생한 고대 그리스 사회로 돌아가 이 문제를 고민해보고, 이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아렌트의 새로운 이해를 엿보았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플라톤은 독재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예속과 같은 결함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렌트는 “이소노미아(isonomia)”, 즉 평등한 자유로부터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아렌트가 주목한 이소노미아는 장자의 ‘무치(無治)’와도 관련 있습니다. 이소노미아의 주 특징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없다는 것, 인간의 평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무치주의는 비록 이소노미아와 다르게 ‘인위’보다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소노미아와 비슷합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시민대학에 참여해주신 수강생들의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 즉 “민주주의체제에서 발견된 결함은 본질적인 것인지, 수정 가능한 외적인 것인지”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이소노미아와 무치주의로 극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철학자와 그가 제시한 철학의 에토스와 파토스를 시대적 한계와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해야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연 이소노미아는 멀리 있는 것일까요?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①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1

<아래>

  1. 개강일 : 2018년 8월 1일(수요일)부터 매주 수요일 상설 강좌로 진행
  2. 장 소 : 사단법인 정암학당 서울연구실(서초구 방배동 795-25)
  3.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4.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5.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6. 방 식 :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며 90분 강의한 후 질의응답시간을 갖는다. 정치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강의하되 회원들의 관심사에 맞추어 진행한다.

 

[서 론]

  • 강좌의 취지

철학사를 통해 플라톤 철학만큼 많이 다루어진 철학도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에 대한 크고 작은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와 관련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주어지는 경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플라톤에 관한 철학사나 해설서 등에 의존해 있고, 직접 플라톤이 쓴 작품 자체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플라톤을 만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사실 플라톤의 작품들이 워낙이 방대하고 형식과 내용 또한 체계적이지도 평이하지도 않은데다가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 자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중역본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 강의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철학 작품이자 문학 작품이기도 한 그의 텍스트를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그 드라마틱한 역동성을 직접 체험해가면서 그의 생각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보고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사실 플라톤 철학 전문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텍스트를 학술적인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주 임무로 삼고 있지만, 어떤 동기에서건 플라톤 철학을 알고 싶어서 여기 이 자리에 오신 일반 독자 분들로서는 플라톤의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보다는 플라톤 텍스트를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직접 읽어가면서 플라톤과 주체적으로 만나보고 그것이 나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음미해보는 것이 보다 큰 관심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쩌면 독자 분들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플라톤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 우리와 같은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 연구자들이 힘들여 번역한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을 펼 때마다 “아! 플라톤이 한국말을 배워 나의 상황과 여건과 요구에 맞추어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들려주려 내 곁에 와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의 음성, 생각, 고민, 표정을 읽어내고 그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삶과 철학을 근본에서 다시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를 위해 텍스트를 함께 읽어가면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찾아가되 동시에 그것을 최대한 자기 생각과 연관 지어 음미해보는 시도도 병행했으면 좋겠다. 본 강사부터도 그런 태도로 텍스트를 읽어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청자들은 강의를 들으며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플라톤의 생각, 본 강사의 생각을 자유롭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고민해가면서,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의 깊이와 의미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형성해 나갔으면 한다. 물론 강좌에 참여하는 분들의 그러한 노력과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에는 강사의 역량이 크게 부족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처음 설정한 강의의 기본적인 취지를 변함없이 잘 견지해가며 강의를 진행하려 한다. 그리고 방침상 최대한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논의는 줄이고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가며 세세히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은 하겠지만, 군데군데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될 경우에는 적절히 그와 관련한 설명과 토론도 병행할 것이다. 다만 제목을 비롯하여 집필시기, 대화상정 시기 그리고 그 시기들의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나름의 관점에서 먼저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앞으로 텍스트를 매우 천천히 자세하게 읽어가기 때문에 전체를 빨리 독파하고픈 청자들에게는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을 다 읽어내는 데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청자들과 강사 모두 플라톤의 <국가>를 이러한 공개강좌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려는 시도가 아마도 처음이기도 한 만큼,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최대한 즐겁게 함께 읽어 나가기로 하자.

 

  1. 제목 소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통상 우리가 <국가>로 옮기고 있는 책의 그리스어 원제목은 폴리테이아(politeia, πολιτει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시민적 삶’(civic life), ‘시민의 조건과 권리, 시민권’(the condition and rights of citizen, citizenship)이라는 뜻이다. 또 그 말의 동사적 어원인 politeuō라는 말을 함께 찾아보면 ‘시민으로 살다’(to live as a citizen), ‘나랏일에 참여하다’(to take part in the government)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가 기본적으로 ‘시민생활과 정치생활을 하나로 여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임을 잘 보여준다. 물론 ‘폴리테이아’라는 말에는 우리말 제목과 역어가 보여주듯이 제도로서의 ‘국가의 정치체제(the constitution of a state), 정부 형태(a form of government), 정치 조직(civic polity)’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라는 책의 제목을 소개하면서 ‘삶의 방식’으로서 그 말의 일차적 의미부터 꺼내 드는 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의미를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히 ‘정치체제’라는 뜻으로만, 특히 오늘날 법률적·제도적 의미에서의 정치체제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중층적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아예 ‘폴리테이아’라는 표현 자체를 ‘시민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방식’과 ‘시민으로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함께 사용하여, 그것들이 결코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적인 ‘시민의 생활방식’임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시민적 삶의 방식’이란 폴리스의 안전과 가치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임과 동시에,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보전하기 위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였던 것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본적으로 시민생활이 곧 정치생활이었다는 점에서 폴리테이가가 갖는 복합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삶의 방식의 두 가지 측면이 갖는 유기적 통일성을 영혼론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토대로 더욱 부각시켜, 그의 정치사상의 요체로서는 물론 <국가>의 논의 전체를 풀어나가는 기본 토대이자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앞으로 책을 읽어가며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자 기반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국가>의 원제목으로서 ‘폴리테이아’는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을 가장 바람직하고 훌륭한 상태로 조직해내는 원리 내지 활동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림 일반이라는 확장된 의미에서 ‘정치체제’라는 말로 바꿔 말하자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일적 운용원리이자 방식으로서 법률적·제도적 정치체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욕망들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고 운용하는 이른바 영혼 내부의 심리적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개별 폴리테이아를 지시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과두정적인 사람ho oligarchikos, 민주정적인 사람ho dēmokatikos, 참주정적인 사람ho tyrannikos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말로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폴리테이아는 개인의 내적 생활방식 즉 개인들 각각의 내적 영혼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원리 내지 방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른바 통치 또는 다스림(archein)이란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기 다른 계층 내지 기능들의 ‘최선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활동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내적·외적 정치체제는 앞으로 상호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특색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겠지만, 미리 언급하자면 우리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영혼의 정치철학’으로 부르고, 또 ‘정치철학이자 도덕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복합성 내지 중층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②’에서 계속…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9.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上)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60년대에 시작된 소위 ‘여성주의 제2 물결’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1945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유대인 부모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몬태나주 캔자스시티에서 자라났다. 격동의 60년대에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한 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ArtInstitute of Chicago)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다. 1960년대는 한국 전쟁 후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던 동서 냉전이 다시 격렬해져 당시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이 핵전쟁 불사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하던 시기였다. 특히 미국이 주도했던 베트남 전쟁은 6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냉전의 위협과 길고긴 전쟁에 회의감을 느낀 청년세대는 기성 세대의 권위주의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새로운 청년 문화를 형성했다. 68운동, 프라하의 봄, 반전 운동, 인권 운동, 흑인 해방 운동, 학생 운동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대표되는 히피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20대를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보내며 학생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경험은 파이어스톤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 문제 중에서 ‘페미니즘의 문제를 여성들의 최우선적 과제로 볼 뿐 아니라 더 큰 혁명적 분석에 있어서도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으로 이끌었다.

이 시대 서구의 젊은 여성들은 여타 사회 운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모든 사회 운동에서 여성 문제는 주변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더 나쁘게는 “여성”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외면당했던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억압을 중심으로 하는 풀뿌리 운동 조직, 피 흘리는 대중에 기반할 필요성, 지도력과 권력 놀음의 종식”을 내세웠던 흑인 운동조차도 이 중요 원칙을 여성들에겐 적용하지 않았다. 흑인 운동에서 흑인 여성은 단지 보조자였고, 발언권이 적거나 없었으며, 흑인 남성들은 흑인 여성 위에 군림하고 명령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받는 이들의 처지에 누구보다도 크게 공감하고 이들의 해방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으나 그 운동들은 정작 여성 자신의 해방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파이어스톤의 기념비적 저작 『성의 변증법』에 잘 녹아있으며 이 책의 근본 정신의 토대를 형성했다.

 

  • 페미니즘 제 1물결,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넘어 여성 억압의 본질적 구조로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성적 계급(class)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그것은 약간의 개혁이나 여성의 노동 세력으로의 완전한 통합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피상적 불평등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파이어스톤은 여성을 하나의 계급이라고 선언한다. 여성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약간의 개혁 즉 파이어스톤 당대까지 지속되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는 “남성과 동등한 법적 대우를, 여성에게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을!”이라는 슬로건의 실현으로 쟁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대표적 실천 운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법적 권리, 교육의 기회 등이 주어져야 하며 이에 따른 결과로 남성과 동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의 문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서구에서 시작된 이들의 희생적 실천 운동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이들은 남성을 인간의 이상적 기준으로 생각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정권 등이 실현되자 여성 운동은 1960년대가 오기까지 오랜 침묵의 시간을 맞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정치 운동의 부수적 역할을 맡아 남성 기득권 강화에 기여하거나, 여성의 직업으로 특화된 남성 보조적인 하위 직업에 종사하며 착취당하거나, 가정에서 어머니 모성의 가치 있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하면서 갈팡질팡했다. 앞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예를 들어 살펴보았듯 여성이 참정권 등을 얻고 고등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여성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법적 지위의 문제와 무관하게 일상의 모든 곳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는 여성 억압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방위적 분야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파이어스톤은 이와 같은 사정이 이전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 억압의 문제에 피상적으로 접근한 까닭이라고 파악한다. 여성 억압은 단지 이상적 지향점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맑스-엥겔스가 그러했듯 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적 분석 방식을 통해 억압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파이어스톤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 억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불충분한 시도였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생산 양식과 교환 양식의 변화, 사회의 계급 분화와 계급간의 투쟁’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여성의 억압에는 이런 경제적 여과기라는 틀에 걸맞는 방식을 통해서만 접근했던 것이다. 지배 계급과 노동 계급, 이들 두 계급의 투쟁사라는 역사 분석은 불충분하다. 이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남성 계급과 여성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와 착취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억압의 역사다. 따라서 다만 여성이 노동의 전면에 나서고 온갖 법적 권리를 얻는다고 해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 생물학적 조건, 생식능력과 육아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보다 오래되고 고질적인 것은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다. 이것은 남성 계급과 여성 계급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생물학적 차이, 아이를 임신하기 위한 기관 발달이 무력을 약화시키고 임신과 육아의 긴 시간 더욱 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 자연적 사실이 인간 최초의 불평등 구조의 핵심이다. 이러한 기능의 차이는 여성의 생식 능력을 숭배하는 드믄 곳에서조차 남성의 여성 착취와 지배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 생물학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한 가족에는 이처럼 자연 본질적 불평등한 힘의 분배가 내재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자연적 생식 차이는 모든 계급 제도의 전형이자 최초의 노동 분업의 형태이다. 또 맑스-엥겔스가 파악한 인간의 역사로서의 노동 계급과 지배 계급의 투쟁의 역사, 그 악의 근원인 사유 재산 제도의 자연적 근거이자 권력욕의 근원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에서의 해방 없이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 해방은 불가능한 꿈인 것이다.

생물학적 힘의 불균형이 여성의 필연적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힘의 지배를 그대로 수용하는 동물이 아니란 점에서 지당한 것이다. 인간은 정의(justice), 도덕 관념과 자연 과학의 발전을 통해 동물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걸어왔다. 만일 물리적 힘의 지배라는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옳음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곧 정의였다면 인간은 여전히 노예제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자연의 잔혹한 질서의 인간적 개편에 자연 과학의 발전이 엄청난 기여를 해왔다는 것은 맑스-엥겔스의 유물 사관의 하부-상부 구조의 변화 분석 또한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맑스-엥겔스가 그들의 불충분한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통해 인간의 해방을 위해 생산 수단의 노동 계급의 점유를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생식 수단을 여성이 완전히 점유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소유자(Eigner)와 ‘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은 초-자아(das Über-Ich)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소유자(Eigner)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은 초자아(das Über-Ich)이다.

 

1) 신성한 것(Heiligen)경외심(Ehrfurcht)이고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이다.

 

우리는 이미 책의 제목인 ‘유일자’(Einzigen)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저작의 다른 곳에서 그는 개별자(Einzelnen), 자기 소유자(Eigenen, self-owned,106, 254)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결론적으로 이 말들은 모두 소유자(Eigner) 내지 에고이스트(Egoisten)란 말과 연관되어 있다. 그럼, 다시 유일자를 ‘소유자’의 모습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당신이 어떤 존경 혹은 경외(공경하면서 두려워함Ehrfurcht)를 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Heiligen)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당신 자신조차, 당신은 그것을 살짝 건드리며 “신성한 두려움”(heilige Scheu)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신성하지 못한 것에게조차 이러한 색체를 갖게 한다(교수대, 범죄 등등.). 당신은 바로 신성한 것의 접촉이 무섭다. 그 점에 있어서 신성한 것은 두렵고 낯선(Unheimlich) 어떤 것, 다시 말해 친숙하지 못한 것(Unheimisches)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Uneigen) 어떤 것이 있다.(78)

 

여기서 먼저 알 수 있듯이 신성한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물(Ding)도 스스로 신성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에 의해, 나의 선언, 나의 판단, 나의 무릎 굽히기에 의해,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양심에 의해 신성한 것이다.”(77) “그것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간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 낯선 힘(Macht eines Fremden)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인정하는데, [78]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어, 항복하고, 자신을 속박하도록 한다(헌신, 겸손(Demut), 굴종, 공순 등등)는 것이다.”

이렇듯 신성한 것은 자신의 신성의 선포에 의해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내가 낯선 힘으로 시인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신성한 것은 두렵고 낯선 것이고 친숙하지 못한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니다.

 

 

2) 신성한 것은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친숙하지않음’(Un-heimlichkeit)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신성한 것의 특징을 낯섦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자신의(eigen) , 곧 소유자의 모습과 대립시켜 논의하고 있다.

 

낯섦(Fremdheit)은 ‘신성한 것들’의 특징이다. 모든 신성한 것에는 어떤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es), 다시 말해 낯선 것(Fremdes)이 놓여있다. 우리는 그 낯선 것 안에서 전혀 친숙하지(heimisch) 않고 익숙하지(zu Hause) 않다. 나에게 신성한 것은 나에게 자신의(eigen) 것이 아니다.(40)

 

unheimlich는 원래 뜻은 “섬뜩한”, “으스스한”이다. 데리다는 프로이트 이래 현대 이론가들은 이 단어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본다. 이 단어가 “Heim”, 곧 “집”, “고향”, “조국” 등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 안에 이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친숙한 것, 국민적인 것(heimlich)에 가장 낯선 것, 위협적인 것이 있다. 프로이트는 Unheimlichkeit을 “두려운 낯선 것”으로 파악한다. 이 단어를 그대로 분철하면 Un-heimlichkeit은 “친숙하지-않음”, 또는 “낯선 친숙함”이다. 데리다는 『에코그라피』 226쪽 이하에서 프로이트를 설명하면서 “두려운 낯선 것”은 언제나 이미 존재해 왔기에 친숙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unheimlich와 heimlich의 대립을 해체한다. 이렇듯 이 단어에 내재한 의미는 역설적이다. 곧 두려운 낯선 것은 친숙하지 않음, “낯선 친숙함”이다. 그런데 위 단락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슈티르너가 사용하는 이 단어도 프로이트의 사용법을 함축하고 있다. “두려운 낯선 것”은 “낯섦(Fremdheit)이고 “낯선 친숙함”이다. 슈티르너는 여러 곳에서 ‘유령’, ‘인간’을 두렵고 낯선 것으로 이해한다.(37쪽, 44쪽, 78쪽 참조)

또한 unheimlich와 heimlich의 대립의 해체는 이미 위의 인용문(78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의 문장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친숙하게(heimisch) 느꼈고 더 이상 두렵고 낯선 것(Unheimlichen), 다시 말해 신성한 것과 신성한 전율(Schauer)을 느끼지 않았다는 거만한 망상이 생길 것이다.(311쪽)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두렵고 낯선 것은 무엇일까? 국민적인 것(heimlich)은 아닐까? 그것은 가장 낯선 것, 그래서 위협적인 것일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가족, 애인, 고향, 국가, 사회, 도덕, 인간, 학교, 교육 등등 이라면, 그것들은 또한 우리에게 가장 낯선 것이고, 두렵고 낯선 것은 아닐까?

 

3) 신성한 것(Heiligen)은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자아(das Über-Ich)이다.

 

그는 ‘자연스러운 두려움(Furcht)’과 “신성한 두려움” 곧 경외심(Ehrfurcht)을 구별한다. 요컨대 두려움은 해방의 여지가 있지만 경외심은 자아를 지배하는 내적인 힘이다.

 

두려움에는 간지(奸智:List), 기만(Betrug), 책략(Pfiffe) 등을 통해 두려웠던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와 반대로 경외(공경하면서 두려워함Ehrfurcht)는 완전히 다르다. 경외에는 두려워 할뿐만 아니라 존경하는(geehrt) 것이다. 이를테면 두려웠던 것은 내가 더 이상 빼앗을 수 없는 내적인 힘(Macht)으로 되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그 권력의 지배권 안에 존재하고….. 나와 두려웠던 것은 같은 것(eins)이다.(78)

 

신성한 것은 에고이스트가 접근할 수 없어야만 하는 모든 것이고, 에고이스트의 (Gewalt) 밖에 있어서, 다시 말해 에고이스트보다 위에 있어서 건드릴 수 없는 모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성하다는 것은 모든 양심의 문제(Gewissenssache)이다.(77)

 

‘신성한 것’은 프로이트(Das Ich und das Es, 1923; 슈티르너의 저작은 1844년에 출판되었다)이래로 간단명료한, 더 현대적인, 익히 알고 있는 표현인 초-자아(das Über-Ich)이다(Bernd A. Laska, Der “Eigner” bei Max Stirner, 46). 따라서 슈티르너의 의미에서 신성한 것은 아이에게 그때그때의 (우연적인)사회의 최초에 낯선, 투사된, 내면화된, 규범적 구조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성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교육의 본질적 결과물이다.(Bernd A. Laska)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우리들은 소유자인가? 아래의 글을 음미해 보자.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는(알고 있는, 연구하는 등등) 것인데, 다시 말해 어떤 고정된 대상에 전념하고, 그것에 침잠(沈潛)하여, [79]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과의 관계는 폐지의 관계(Auflösens)(제거의 관계 등등)가 아니라, 앎의 관계, 근본을 캐는 관계이고 토대를 굳히는 관계 등등이다.

 

우리는 기존의 교육에 대해 어떤 관계를 취하고 있었고 있었어야만 했는가? 고정된 대상에 대한 침잠의 관계인가? 아니면 고정된 대상과의 폐지인가?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인가? 아니면 탈신성화인가?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소유자’의 모습은 또한 ‘자율성’(Autonomie)과 관련된다.(‘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을 뜻하는 autonomos을 어원으로 한다. 이 말은 ‘그 자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auto’와 ‘법칙’을 뜻하는 nomos의 합성어이다.) 물론 이 단어는 233쪽에서 한번 언급되지만, 이 단어는 자유재량(Willkür)과 자기결정(Selbstbestimmung)과 관련되는 것이며 유일자의 모습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후에는 다시 자율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독립문, 자주독립의 열망

독립문역사거리, 사통팔달의 분주한 길 남쪽에 멀찌감치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북쪽에는 북한산이 양쪽으로 안산과 인왕산이 들어온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바로 앞에 고가도로에 가려 한 눈에는 볼 수 없는 독립문이 있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본다. 독립문 뒤로 서재필 동상, 독립관, 3.1운동 기념탑, 그리고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세의 침탈에 저항한 우리 역사의 흔적과 기억이 모두 모여 있다. 그곳은 중국 사신을 맞이한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며 자주독립 열망했던 근대의 꿈이,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라는 식민지의 좌절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과거의 독립문, 현재의 독립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곧바로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을 계획했다. 독립관은 모화관慕華館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독립문은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세운다는 것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과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갑오개혁이후 사용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고, 영은문은 바로 모화관 앞에 있던 것으로 1895년 철거되어 돌기둥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설계해서 1897년 11월 준공되었고, 197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은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제안했지만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안팎으로 거세게 흔들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붙잡고 싶었던 조선인들의 의지와 열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사설)

 

 

서재필과 <독립신문>, 계몽의 꿈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건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립신문>이 있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맞서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서재필이 주도하여 탄생시킨 근대적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7세 무렵 양자로 입적된 뒤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외숙인 판서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교류하였고, 1880년 무렵 13촌 아저씨뻘인 서광범을 통해 김옥균을 소개받았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국내에서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거나 참형되었고, 아들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죽게 된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귀국을 요청받아 돌아 와 개화파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창간을 계획하고 당시 내무대신인 유길준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국고에서 5,000원을 지출하겠다는 승인서를 받았다. 이것을 토대 삼아 우선 인쇄기를 일본 오사카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장소는 정동 미국 공사관 뒤 정부 소유의 빈집을 사용하기로 했다.”(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독립신문 창간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 3면과 영문판 1면 총 4면, 주 3회 발행, 한글전용 띄어쓰기 언문일치를 실행한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창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 불편부당하고, 2 양반 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이 없이 전 국민을 평등하게 다하며, 3 전국 인민을 공평하게 대변하고, 4 정부정사를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실상을 정부에 알리어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을 시키며, 5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일반국민이 모두 신문을 읽도록 하고, 6 신문가를 저렴하게 하여 일반국민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하며, 7 부정부패와 모든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8 영문판을 발행하여 한국의 사정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며, 9 국민에게 나라 안 사정을 알게 하고, 10 국민에게 외국 사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국민의 계몽을 목표로 한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처음 300부에서 곧 500부, 1898년 초에는 1500부, 그해 말에는 3000부로 급증했다. 당시의 구독방식은 지금과는 달리 신문 한 부를 여러 사람이 돌려 읽고 사랑이나 시장에서 낭독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을 것으로 추측하면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1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개화’, 2 자주독립과 국가이익의 수호, 3 국민의 민권 신장과 수호, 4 한글 발전에 공헌, 5 부정부패 고발, 6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 7 세계와 한국의 연결과 한국인 시야의 세계적 확대 등에 기여 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독립신문>의 한글전용 채택이다. 계몽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 동일하게 국민 계몽의 목표를 설정하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신청년新靑年>이 가장 주력했던 것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이러한 취지의 <독립신문> 국문판을 창간부터 책임진 사람은 주시경이었다.

 

독립신문사터(배재학당 근처 표지석과 신아빌딩)

 

독립문을 둘러본 뒤 길 독립신문사의 흔적을 보고 싶다면 마을버스 종로05를 타보자. 독립문 건너편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인왕산 둘레 한양성곽까지 올라간 뒤 내려오며 사직공원 뒤편의 단군성전을 지난다. 그렇게 고불고불 작은 길과 큰 길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 하차해 길을 건너면 정동길이 시작된다. 정동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신아빌딩이 보이면 배재학당 방면으로 걸어 올라가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옆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독립신문사터’라고 쓰인 표식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실제 독립신문사 자리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걸어 왔던 길 초입에 있는 신아빌딩 근방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다른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근대 시민의 길

<독립신문>의 발행 이후 독립문 등의 건립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면, 독립협회의 창립과 만민공동회의 개최는 <독립신문>의 취지에 부합하는 근대적이며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서재필의 제안하고 여러 개화파 지식인집단이 참여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한다. 독립협회가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추진하던 초기에는 관료들이 주도를 했지만 1897년 8월 29일 첫 토론회를 시작으로 점차 시민들이 표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국민 계몽에 관한 주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지원하던 정부도 입장을 바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시도하였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 3시 독립관에서 개최하고, 논쟁적 주제를 선정해서 찬성과 반대 연사 각 2명이 발표를 하며, 회원들은 토론자로 참가하고 회원이외의 방청인도 참관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분야의 문제를 주제로 모두 34회 개최되었으며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씩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독립신문>의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는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거치면서 근대 시민의 탄생과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1898년 2월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운동을 계몽운동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전환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 황제에게 강국들이 나라를 넘보고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국민과 함께 단결하여 밖으로는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고 안으로는 과검하게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리고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한다. 최초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의 약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이 민중대회에서 미전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연사들의 연설을 들은 민중들은 박수로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12일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지 않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동일 장소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수는 더 많아져 수만 명의 민중들이 운집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을 추진한다. 근대적 정치제도의 건설에 대한 논의와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10월 28~29일 관민공동회를 거쳐 의회설립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의회가 설립되기 하루 전날인 11월 4일 황제에 의해 개혁정부의 해산,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들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면서 의회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은 지금의 광화문과 종각역 사이 종로구 서린동이다. 만민공동회가 열리면 종로의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참여했으며, 밥장사는 장국밥을 술장사는 술을 가져왔고, 부자와 거지 가리지 않고 기부금을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은 역사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만민공동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898년 12월 1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당시 보름 넘게 철야투쟁을 하던 민중들을 “만민들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무한 고생한다”고 묘사했다. 그해 겨울 우리도 120여 년 전 민중들의 열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길 위에 그렇게 서있었다.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으로 지나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의 한 구절이다. 19세기 한국의 사상지형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말이다. 19세기 사상의 하나는 동학으로부터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민중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 개화사상으로부터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에 이르는 계몽적 개화의 흐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앞의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전통적 위정척사의 흐름이다. 이들을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은 1850~6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의 각각의 사상 안에서도 변화가 매우 컸으며, 단일한 하나의 사상으로 규정하거나 체계화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첫 번째이고 가장 주목받지 못한 것은 두 번째이다. 앞선 시대와의 사상적 연관을 찾기 어렵다, 새로운 철학적 내용이 없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로 실제 많은 친일인사를 배출했다는 감정적 배제 등이 그 이유였다. 필자가 개화사상에 가졌던 오랜 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19세기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과 방법으로 지나온 흔적이며 역사일 것이다. 오랜 편견을 버리고 갖게 된 생각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길을 읽고, 정리하고 그런 후에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다. 내가 찾고 있는 우리의 근대와 현대는 그렇게 지나온 시간과 길들에 의해 촘촘히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고자: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7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의 근대에 대한 모색과 사상적 연관을 연구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8. <여성들과 공동체의 전복>,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주부들을 계급에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계급투쟁은 매순간 모든 지점에서 지연당하고 좌절당하며, 또한 자신들의 행동의 완전한 범위를 찾아낼 수도 없다. …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의 은폐된 형태임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은 여성 투쟁의 목표와 형식 모두에 관한 일련의 문제를 제기한다.”

 

  • 핵가족과 그것의 정치경제학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부불노동으로 처리되는 것은 어떻게 형성되고 정당화되게 된 것일까?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조차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늘 가사노동이 당연한 것으로 떠넘겨지는 것일까? 달라 코스타는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적 가족’에서 찾는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은 주로 농업생산 및 수공업생산에 공동으로 참여했던 데 반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변화된 생산양식은 이전의 봉건제적 가족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붕괴시키면서 현재와 같은 핵가족 형태를 고착시켰다. 생산의 장소를 농촌의 가족공동체에서 도시의 공장 및 사무실로 이전시키는 사회의 공간적 재배치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은 이전까지는 필수적으로 생각되었던 그들 노동의 지분과 그러한 노동참여에 따른 상대적인 권력을 상실했다. 자본은 도시로 떠밀려온(물론 그들은 기존의 가부장제로부터, 농노나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기쁨에 찬 해방을 맞이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에서 선별한 인간인 남성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내 공장과 사무실의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나머지 가족 전체의 생계의 짐을 지웠다. 이렇게 농노제에서 자유로운 노동력으로의 이행은 우선 남성 프롤레타리아트를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와 공간적·기능적·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시켰고, 곧이어 학교제도를 통해 그들로부터 그들의 아이를 분리시켰다. 농촌공동체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가부장 남성이 자유로운 임금 소득자로, 그 다음 그들의 자녀들이 예비노동자이자 학생으로 변형되는 동안, 갈기갈기 찢어진 가족 내에는 성별 및 세대간 분리에 따른 뿌리깊은 소외가 자라난다.

이처럼 자본은 가족구조를 재편함으로써 남성 및 아이들을 여성들과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남성과 아이들을 위한 뒷바라지, 즉 무상의 재생산노동인 가사노동의 과업을 할당했다. 이제 가정에서의 모든 일은 여성의 책임이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순환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은 반드시 가정에 남아야만 한다. 자본은 이러한 가족형태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이윤생산에 성공하고, 또 계급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사서비스를 받아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충분한 식사를 하고 나타난 공장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많은 생산능력을 발휘해 줄 것이며, 그들이 일하면서 얻은 육체적 피로감과 상실감을 사랑으로 채워줄 사람이 가정에 늘 있을 것이며(단 자본의 관점에서는 이 사랑조차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을 가능케 할 삽입섹스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들이 은퇴하면 잘 훈련된(이른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이 나타나 공장과 사무실의 빈자리를 메워줄 것이며, 또 그들이 일하다 다치고 불능상태에 처했을 때면 가정과 여성이 떠맡아줄 것이며, 그래도 일손이 부족할 때라면 집안에 유폐되어 ‘무능력’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해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참한 착취상황에 대한 불만을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극적으로 전환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아내가 불행한 것은 남편이 쥐꼬리만큼만 돈을 벌어와서이다.’ ‘남편과 아이가 불행한 것은 집안일을 소홀히 한 아내와 엄마 때문이다.’, ‘부모가 불행한 것은 그들 가족 전체를 계급이동 시켜줘야 할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툭하면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등등. 즉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집안과 가족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들이 무상의 노동을 해야만 자본은 자신의 정상적인 생산순환 및 이윤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의 ‘자본주의적 가족 비판’은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진출이나 그에 따라 직장 내 유리천장을 없애는 것이 여성투쟁의 과제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여성투쟁을 계급투쟁의 종속변수로 보는 ‘사회주의적’ 관점이 은폐시킨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그 근본에서부터 비판할 논거를 제공해준다.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이 그녀가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있다는 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문제의 일부를 보지만 해결하지는 않는다. [공장의] 일관 작업대로의 예속이 부엌 싱크대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또한 일관 작업대의 예속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모른다면 남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를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 가족이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의 바로 그 기둥임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족을 단지 상부구조로 간주하고, 변화를 위해서 오로지 공장들에서의 투쟁 단계들에만 의존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우리는 계급투쟁에서의 기본적인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능하는 모순을 항상 영구화하고 악화시킬 절름발이 혁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 여성들의 힘과 대안적 정체성

 

이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글을 쓸 1970년대 당시의 운동의 한 형태였으며 현재에도 하나의 구호로 사용되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투쟁을 지지 및 옹호하는 한편 그것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 했다.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토대이자, 여자가 당하는 억압·종속·고립을 그것들의 물질적 기초인 여자가 당하는 착취로 곧장 연결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매력이 있는 하나의 관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투쟁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에 평화롭게 있으면서도 국가가 지급할 임금을 순진하게 손놓고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또한 이 투쟁이 여성운동의 다른 형태들과 결합되지 않은 채 제기되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가족 제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한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노예적 삶을 더욱 공고히 할 위험, 즉 여성의 역할을 가사노동에 고정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임금 투쟁의 목표는 단지 이런 노동을 덜, 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동을 부여받은 여성의 주부화를 박살내는 쪽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투쟁의 출발점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투쟁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위치를 어떻게 찾느냐에 즉 가사노동의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투쟁에서의 더 높은 전복성”에 두어져야 한다.

달라 코스타는, 맑스가 그러했듯, 이러한 여성들의 전복적 투쟁이 가능한 근거를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노동의 형태와 성격 속에서 찾고자 했다. 즉 여성들이 벌이는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은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이 지닌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대안적인 정체성”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대안적인 정체성’,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와 가족체계는 여성을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1) 마녀-되기와 악녀-되기. 여성 주부들은 집안의 벽 안에 구금되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성성’을 재차 강제당하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노동조직화의 전체 구조를 보게 만든다. 즉 자본과 남성 노동자들이 공장 내에서의 적대를 중단하고 동맹관계를 회복하는 곳인 가정에서 여성들은 늘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어!’, ‘몸가짐을 똑바로 해’, ‘집안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와 같은 명령을 듣곤 하는데, 이것은 구금된 여성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본과 남성노동자의 은밀한 연합이 자신의 신체를 겨냥해서 이뤄지고 있음을 파악하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아내, 영웅적 어머니, 조신한 딸로 그녀들에게 부과되는 이미지는 여성투쟁이 집중되고 또 그녀들이 위반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2) 가족관계 바깥의 자율적 개인. “여성들은 아내나 어머니로서만 자신들의 남편과 아이를 만나기를, 즉 그들이 바깥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갖는 식사시간에만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모든 영역이 여성의 가정주부화를 전제하는 그만큼, 가정 바깥의 모든 장소들은 여성들에 의한 투쟁의 기회를 제공한다. 즉 공장 회합에서, 반상회에서, 학생총회에서, 심지어 취미모임들에서 여성들이 남성을 어머니 대 아버지나, 아들 대 딸이 아니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만나고 대면하면서 공통 관심사를 다룰 때, 그들은 가정 내에서의 종속된 권력관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3) 질 오르가즘의 신화를 파괴하는 사랑의 기계. 여성들이 회사나 공장에서, 노동자총회에서 단지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밤에는 잠자는 것 외에 사랑을 하고 싶기에 야근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할 때, 그것은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맞서 여성으로서 그녀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사랑을 계급의 이해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개인들의 낭만적 영역으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남성들이 아니라 왜 여성들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계급의 전체 역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계기를 준다. 따라서 이때의 사랑은 출산과 육아를 벗어난 사랑, 따라서 삽입성교에 구속되지 않는, 강제된 이성애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4) 생산에서 배제된 자들의 연합. 자본주의적 가족체계 내에서 남성들과 청소년들이 가족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들이 근대적 훈육기관들에서 자본의 명령에 익숙해지는 동안, 여성들, 노인들, 장애인들과 같은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신들의 연합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린아이들, 노인, 아픈 사람 등과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시간을 갖기를 요구하는 것’, 이것은 단지 자본의 판매시장 확대를 의미하는 가사노동의 자동화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회로에서 배제되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생산회로를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이 투쟁의 주도권을 쥐고 자본과 국가를 향해 다른 모든 배제된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 부를 재전유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들과 분리된 노동자 남성 및 학생으로서의 청소년들과의 재통합을 추진하는 시초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 노동거부와 공동체의 전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와 가족구조는 여성의 사회적 투쟁의 잠재력을 극도로 팽창시킨다. 자본주의는 부불노동으로서의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존해 자신의 거대한 이윤생산체계를 지탱하고,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여성운동의 투쟁방향과 목표를 좀더 혁명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이 거대한 생산회로의 중심부에 있는 가사노동과 바로 그 경계선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하고자 했다. 여성들은 가정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항상 일하며, 바로 이렇게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바로 그 노동의 성격, 그 노동의 수행과정이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끊임없이 팽창시키는 것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한 덩어리로 생산했던 가족적 생산체계를 해체하고 그들 중 일부를 공장과 학교체계로 분리시켜 표면적인 착취관계를 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모든 생산의 밑바닥에 여성의 부불노동이 뒷받침되게끔 하는 착취와 이윤의 안정된 판을 형성했다. 바로 이 숨겨진 노동, 그림자 노동이 없다면, 자본은 이윤은커녕 현재와 같은 사회형태로의 도약조차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달라 코스타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의 비밀은 바로 이 근본적 밑바탕, 가사노동이면서 재생산노동인 이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인 여성 자신의 노동에서 찾아져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 이 노동은 이제 숨겨진 노동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생산관계 전체의 전면으로 부상되었다. 노동의 여성화, 노동의 정동화, 노동의 가사노동화, 그리고 인간 자체, 주체성 그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의 삶정치화는 이제 산업자본을 넘어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 내에서, 임금관계 안팎 모두에서 가장 핵심적인 생산능력이 되었다. 자본은 과거에는 부불노동의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만 요구했던 것을 이제 남녀 모두에게 예외없이, 심지어 자본 자신의 운동에게조차 명령한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라! 너 자신이자 타인인 저 특이한 인격체이자 감성적이고 정동적인 존재를. 모든 이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어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타자에게 사랑받으며,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라고. 이 점에서 바로 우리의 시대, 인지자본의 시대에서, 달라 코스타의 혁명적 페미니즘은 다른 어떤 혁명이론도 능가할 가장 근본적이고 해방적인 선언이 된다. (끝)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편이 연재됩니다.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년 네트워크 시민대학 1기 수강 안내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년 네트워크 시민대학 1기 수강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 자유시민대학의 지원을 받아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란 주제의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오는 7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1기) 매주 월요일 7시, 총 10주 동안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에서 진행합니다.

강좌는 1기(7월 23일~10월 1일)와 2기(9월 17일~11월 26일)로 나누어 진행합니다.

지금 안내하는 수강생 모집은 1기에 해당되며, 2기는 추후 다시 공지할 예정입니다. 참고로 1기와 2기의 강좌 프로그램은 동일합니다.

 

상세내용

교육 기간 : 2018년 7월 23일(월) ~ 10월 1일(월) 저녁 19:00~21:00

교육 장소 : 서교동 소재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전화 : 02-332-4301

♦ 한철연 오시는 자세한 길 안내는 한철연 홈페이지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162 공지 글의 첨부파일 지도를 확인하시면 좋습니다.

수강 대상 : 서울 시민

수강 인원 : 선착순 20명

신청 방법 : 한철연 공식메일 kophil@daum.net으로 이름, 생년월일, 성별, 휴대폰 번호, 이메일을 꼭 적어서 신청해 주세요.

 

서울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1기 프로그램 강의별 내용

1주 07.23(월) :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와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2주 07.30(월) :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

(춘추전국시대에 제안된 민본주의적 통치 원칙의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3주 08.06(월) : 근대 부르주아는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 도시공간의 출현, 커피하우스, 살롱

(근대에 커피하우스와 살롱의 공간에서 재건된 부르주아적 시민과 고대적 시민이 어떻게 다른지 고찰해 본다.)

4주 08.13(월) :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

(프랑스 혁명기에 평민들은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5주 08.20(월) :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19세기 이후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보편적인 정치적 요구로 전환시켰는지 고찰해 본다.)

6주 08.27(월) :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백성은 어떻게 자립적 시민으로서의 자기 요구를 정치화하였는지 살펴본다.)

7주 09.03(월) :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동학혁명의 현장을 직접 탐방함으로써 책 속에 갇힌 역사를 몸의 경험으로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다.)

8주 09.10(월) : 중국에서 시민 되기의 행로

(이천년에 걸친 동아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적 형태의 공화국 역사를 시작한 신해혁명의 의미를 현재적 관점에서 전망해 본다.)

9주 09.17(월) : 근대 여성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가부장적 가족 질서와 친밀성 영역의 사적 억압을 정치적 해방의 요구로 전환시킨 여성 운동의 의미를 현대 한국의 현실에서 재음미해 본다.)

10주 10.01(월) : 광화문 광장의 함성, 시민들의 목소리

종합 토론(촛불정치의 현장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던 혁명 정치의 파편을 제도정치 비판의 관점에서 토론해 본다.)

 

아래 웹자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7. <여성들과 공동체의 전복>,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가정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여성들과 단결하기를 원하며, 여성들이 집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모든 상황들에 맞서 싸우기를 원하며, 간호실, 학교, 병원, 요양원, 또는 정신병원이든 어디든 게토들에 있는 모든 이들의 투쟁들에 우리 자신을 연결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투쟁 형태이다.”

 

1943년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 트레비조에서 태어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는 유럽이 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이탈리아의 ‘포떼레 오뻬라이오’[노동자의 힘]에서 활동하며 노동자, 학생, 여성들이 연합한 전투적 투쟁에 참여했다.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이 전통적으로 크게 갈등하지 않았던 이탈리아에서 페미니즘 이론은 맑스의 자본 비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당시에 전개되던 여성들의 사회적 투쟁을 강화시키는 배경으로 삼았는데,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의 글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전복」이 그런 흐름에서 가장 선도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이 글은 처음에는 ‘빠도바 여성 투쟁 운동’이라는 서명으로 1971년 6월 팸플릿의 형태로 작성되어 여성 운동가들 사이에서 회람되는 방식으로 이탈리아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후 1972년 3월 이탈리아의 마르실리오 출판사에서 정식 출판물로 출간되었고, 그해 10월 영국 폴링 월 출판사에서 셀마 제임스의 글 「여성의 자리」(1953년에 최초 발표)가 함께 수록된 영어판으로 번역․발간된 이후 지금의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재생산과 여성의 지위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당시의 국제 학계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한편, 지금은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계열의 여러 출판물들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으로 수용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여성학의 여러 교과과정에서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채택되고 있다.

 

 

  • 가사노동, 즉 부불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

 

고전적 맑스주의의 전통에서 여성들의 가사노동은 공공의 생산노동인 임금노동과 구별되는 사적인 영역의 재생산 노동으로 범주화된다. 그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에 의해 착취되는 무산자 계급, 즉 임금노동 계급만이 혁명의 주축이며, 그 밖의 생산자들은 혁명의 보조자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혁명의 적으로 기능한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가 도전한 것은 바로 이러한 노동계급의 분할, 즉 생산노동(주로 남성들이 담당하는 공장과 직정에서의 산업생산노동)과 재생산노동(임금노동에 고용된 이들을 포함한 여성 대부분에게 떠넘겨지는 출산․육아를 포함하는 가정에서의 가사노동), 공적 노동과 사적 노동으로 분할된 규정이었으며, 나아가 그러한 범주적 구별에 적용되는 노동의 성격적 분할, 즉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규정이었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개념적으로 분할하는데, 고전적 맑스주의는 이것에 근거해 가사노동을 ‘생산적이지 않은 노동’, 따라서 자본축적에 동원되지 않는 노동으로 규정하며, 그 결과 여성의 노동은 자본 바깥에 있는 것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달라 코스타는 가정주부가 가정에서 생산하는 것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바로 그 ‘노동력’ 상품이라고 말한다. 가정주부의 노동을 통해 남편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을 자유 임금노동자로 판매할 수 있게 되며 자본은 그 노동을 통해 자신의 착취적 생산형태를 유지한다. 즉 가정주부의 생산성이 남성 임금노동자 생산성의 전제조건이며, 나아가 미래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가정주부의 출산과 육아가 일정량의 노동력을 충원하는 노동시장의 전제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보호되는 가족은 ‘노동력’ 상품이 생산되는 사회적 공장이다. 따라서 가정주부와 가정주부의 노동은 잉여가치 생산과정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시작되는 기초를 이룬다. 다시 말해, 가정주부의 노동은 자본축적 과정의 원천이자 심장이다.

국가와 법적․제도적․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협력하는 가운데, 여성은 고립된 가족 안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수행되는 노동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노동은 강제되고 착취되는 노동이 아니라, 사랑, 돌봄, 감성, 모성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화된 노동, 인간의 본능적 활동으로 치부되었다. 정통 좌파들이 놓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달라 코스타는 자본과 국가가 여성의 무상가사노동과 남성의 임금노동을 연계하는 전략적 관계를 창출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자본은 ‘생계 책임자’인 남편이라는 인물 뒤로 숨을 수 있다. 여성은 ‘가정주부’로 남편을 직접 다루면서,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편을 위해 일하리라 여겨진다.

“자본이 남성을 충원하고 그를 임노동자로 전환시키는 한, 자본은 남성과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들 간의 분열을 만들어냈다. 즉 임금을 받지 않는 이들은 사회적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기에, 사회적 반란의 주체들이 될 수 없다고 간주된다. … 노동계급운동 조직들이 분명하게 밝히지도 않았고, 또한 가정하지도 않은 것은 바로 임금을 통해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자들의 착취가 조직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착취는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임금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착취[당한다는 사실]를 숨기기 때문이다. 임금은 공장의 단체협상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지배했다. 여성들이 관련되어 있는 노동은 자본 바깥에서 하는 개인적 서비스처럼 보인다.”

이런 분석에 기초해서, 달라 코스타는 많은 좌파 남녀들이 갖고 있는 통념, 즉 여성은 억압받는 이들일 뿐이며, 여성 억압의 문제는 ‘남성들의 맹목적인 성차별주의’에 있다는 식의 생각도 비판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유상노동뿐 아니라, 가정주부의 무상노동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가내노예화는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노동력’ 착취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 무상노동이 지닌 착취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임금노동에 대한 착취구조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부불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과 여성들의 투쟁

 

달라 코스타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그래서 부불노동으로 만드는 과정이 정치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생산하며, 또한 그에 따른 당시에도 있었던 여러 형태의 운동 양식들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첫째, 여성 무능력의 신화의 확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도래와 함께, 여성들은 고립되고 가정이라는 감방에 갇혀서 모든 측면에서 남성 임금에 의존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여성들에게 가사노동이 전가됨으로 인해, 설혹 직장 여성의 경우일지라도, 업무의 연속성이 가정에서의 일들을 통해 깨지는 경험을 매순간 겪어야 하며, 그것이 직장에서의 업무 배제의 이유나 여성의 취업이 힘든 이유로 기능한다. 가사노동의 시간이 가족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관리에 있는 만큼, 여성들은 휴일이나 휴가에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정에서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할수록 더 무능력해지는 효과를 낳는다. 나아가 주부의 경우, 이웃 이외의 사회생활의 모든 가능성들이 차단되는 만큼 여성들은 사회적 지식 및 사회적 교육의 기회 역시 박탈당하게 되며, 협력과 연대의 경험 역시 차단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공장과 직장 바깥에서의 비공식적인 생활 공동체로의 참여의 기회를 확산시킨다. 임차료 파업, 인플레이션에 반대하는 투쟁들, 생필품 가격 인상에 대한 항의, 건강 및 의료분야에서의 과실로 비롯되는 항의 등의 기반에는 항상 여성들의 비공식적인 조직이 있었다.

둘째, 자본과 국가에 의한 여성의 자궁 관리. 자본주의는 가족을 핵가족으로서 정립했고, 사회적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노동시장에서 독자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서 여성을 핵가족 안에서 남성에게 종속시켰다. 핵가족은 여성노동 활동의 발전 및 창조의 모든 가능성들을 없애 버리듯이, 여성의 성적, 심리적, 정서적 자율성의 표현을 없애 버린다. 여성은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것도 자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나눠주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여성의 성생활을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기능으로 축소시킨다. 여성들은 자녀를 갖도록 강요받았고 그녀가 자율적으로 실행할 출산 통제의 가장 원시적인 기술조차 금지당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의 낙태법 반대 운동을 촉발시켰다.

셋째, 노동분업의 동성애. 자본 권력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 남성들과 여성들 간의 성적 애정 및 친밀감을 명령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성애 운동은 그런 명령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동성애는 자본주의 사회 자체의 틀에 뿌리박고 있다. 서로가 하루 종일 분리된 채 가정에 있는 여성들과 공장과 회사에 붙들려 있는 남성들. 이것은 이미 자본이 노동하는 이들에게 부과하는 동성애적인 삶의 틀이다. 자본은 한편으로는 이성애를 종교로 끌어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들과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서로 접촉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노동력 재생산에 유용한 한에서만 이성애를 허용할 뿐 나머지 시간에서는 이성애를 파괴하고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달라 코스타는 바로 이러한 자본의 작용이 역설적으로 동성애적 경향들을 촉발 및 폭발시킨다고 보았는데, 동성애 운동은 그런 점에서 자본에 의해 조성된 사랑의 관계를 자본으로부터 명령에 맞서는 방식으로 전환시킨 사례인 것이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