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⑪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3(334c~336a) : 정의와 훌륭함()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 폴레마르코스는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주관적 생각 수준에서 규정된 친구와 적 개념을 실제의 친구와 적으로 일정 부분 객관화한 후,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ὴ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검토한다. 이 부분이 이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한다.

 

[334c]

* 소크라테스는 먼저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친구와 적의 개념이 과연 정의 규정에 합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δόξα(doxa)이 갖는 주관적 성격 때문에 실제로는 선량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여’ἁμαρτάνουσιν 선량한 이로 생각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잘못 판단할 경우, 좋은 사람이 적이 되고 나쁜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결국 ‘정의란 못된 사람들을τοὺς πονηροὺς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이고 좋은 사람에게는τοὺς ἀγαθοὺς 해롭게 해주는 것βλάπτειν’δ이 된다는 것이다.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이 여기서는 ‘좋은ἀγαθος 사람’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있다.

 

[334d]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좋은 사람’을 또 ‘정의로운 사람’으로 등치시킨 다음, 그것을 토대로 만약 사람들이 친구와 적을 잘못 판단할 경우, 사람들은 결국 ‘정의로운 사람들을 나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는 자기 당착적인 결론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친구 개념을 ‘실제로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에서 ‘좋은ἀγαθος 사람’으로, ‘좋은 사람’에서 ‘정의로운δικαίος 사람’으로 점차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선량한’으로 번역된 원어 χρηστός(chrēstos)는 앞서(332e) 정의의 쓸모를 다룰 때 ‘소용 있는’의 의미로도 쓰인 말이다. 즉 그 말은 가치와 관련된 말이되 그 자체로 온전히 도덕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영역자(G.M.A. Grube) ‘good’이라고만 옮기지 않고 ‘good and useful’로 옮기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의 표현 바꾸기는 단순히 부연 설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객관성이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선량한 친구’를 도덕적 가치와 객관성이 강화된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꿔 말함으로써 친구 개념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정의와 관련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쓸모’, ‘좋음’, ‘정의로움’이 이미 하나라는 플라톤의 생각이 깔려 있다.

* 이에 따라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와 적 개념과 관련한 자기 생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 제서야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도출한 결론이 잘못된πονηρὸς 주장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해롭게 해주되, 정의로운 사람들에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τοὺς ἀδίκους ἄρα δίκαιον βλάπτειν, τοὺς δικαίους ὠφελεῖν인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는 그것이 한결 나은καλλίων 주장인 것 같다고 답한다. 이로써 친구와 적 개념은 일단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딱히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 결국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자기처럼 이해할 경우 위와 같은 자기 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334e]

* 그런데 사람들 중엔 폴레마르코스처럼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친구와 적을 ‘아주 잘못 판단해온’διημαρτήκασιν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친구들이 못된 자들이니까 해롭게 해주고, 적들은 좋은 자들이니까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롭다는 귀결이 따르게 될 것συμβήσεται’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결국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적으로는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τοὐναντίον로 말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에는 흥미롭게도 ‘아주 잘못 판단해온 사람들’ὅσοι διημαρτήκασιν 굉장히 많다’라는 사실판단이 마치 당연한 사실인 양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διημαρτήκασιν(diēmartēkasin)은 ‘아주 잘못 판단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διαμαρτάνω(diēmartanō)의 현재완료형이다. 원문은 ‘아주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경우’라는 일반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 말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실제 현실에서 정반대가 되었다’는 결론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내용임에도 폴레마르코스조차 전혀 이의를 달고 있지 않다. 아마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썼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아테네 사람들πολλοι이 ‘아주 잘못 판단하여’ 진정 그들의 참된 친구이자 아테네를 위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시대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것도 자칭 정의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귀결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폴레마르코스는 자신과 사람들 모두가 친구와 적을 옳게 규정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을 고치자μεταθώμεθα고 제안한다.

 

[335a]

* 즉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를 ‘선량하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적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하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친구는 ‘좋은 사람’ὁ ἀγαθὸς, 적은 ‘못된 자ὁ πονηρός’라는데도 동의를 표한다. 그리하여 정의는 폴레마르코스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좋은 친구τὸν ὄντα φίλον는 잘 되게 해주되, 실제로 못되고 나쁜κακὸν 적은 해롭도록 해주는 것’으로 수정된다.

*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여전히 앞에서(334d) 친구와 적이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 것이 갖는 의미, 즉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을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객관화하여 정의 관련 논의에 합당한 개념으로 전환시키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서 친구와 적 개념 정도만 수정하려는 폴레마르코스를 향해 정의의 의미규정에 그저 ‘덧붙이는 것’προσθεῖναι 정도를 요구한다κελεύειν고 다소 핀잔 섞인 말을 던진다.

 

[335b]

* 이에 따라 친구와 적의 개념은 ‘실제로 친구인 사람’과 ‘실제로 적인 자’로 수정된다. 물론 수정된 규정 역시 불완전한 정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것으로 논박이 또 한 단계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들 즉, ‘1)친구와 적, 2)이롭게 하는 것(좋게 하는 것), 3)해롭게 하는 것(나쁘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개념들 가운데 두 번째 것은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332b~334b) 검토되었고, 첫 번째 것도 바로 앞에서(3334b~335a)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 번째 것이 남아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정의가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검토를 위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 즉 덕(德 ἀρετή) 개념을 끌어 들인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인간적 훌륭함’(德 ἀρετή)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정의관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도 아직은 그 개념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논의가 앞으로 전기 대화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 결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세 번째 것을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어떤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도 정의로운 사람이 하는 일인가’ἔστιν ἄρα, δικαίου ἀνδρὸς βλάπτειν καὶ ὁντινοῦν ἀνθρώπων;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어도 못된πονηρος 자들과 적들의 경우 해롭게 하는 것βλάπτειν이 마땅하다’고 답한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친구와 적 대신에 말ἵππος’과 개κύων를 끌어들여 말들과 개들이 해를 입으면βλαπτόμενοι 말과 개 각각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가 나빠지는지 좋아지는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로부터 나빠진다χείρους는 대답을 끌어낸다.

 

[335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ν ἀρετὴν과 관련해서 더 나빠지게 된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되묻는 방식으로 ‘정의는 곧 인간적 훌륭함’ἡ δικαιοσύνη 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이라는 그 자신의 핵심 주장을 꺼내든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정의는 원천적으로 그 ‘인간적 훌륭함’으로 누군가의 훌륭함을 해쳐 그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누군가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시가(詩歌)에 밝은 사람이 시가술μουσικῇ로 사람을 비시가적ἄμουσος으로 만드는 것이나, 승마에 능한 사람이 승마술ἱππικῇ로 ‘승마에 서투르게 만드는’ἄφιππος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폴레마르코스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δύνατον 일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35d]

* 차게 하는 것이 열(熱)θερμότης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써 사람들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사람οἱ ἀγαθοὶ은 자신의 훌륭함ἀρετῇ으로 사람들을 나쁘게κακώς 만드는 것은 불가능ἀδύνατο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은 친구이든 다른 누구이든 간에 결코 훌륭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자 즉 부정의한ἄδικος 자의 기능”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335e] 그러므로 누가 ’정의란 각자에게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을 갚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정의로운 사람에 의해 적은 해를 입고 친구들은 이로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σοφὸς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진실을ἀληθῆ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정의가 아님이 우리에겐 명백해졌다.’ οὐδαμοῦ γὰρ δίκαιον οὐδένα ἡμῖν ἐφάνη ὂν βλάπτειν고 선언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συγχωρῶ.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주장을 시모니데스나 비아스Βίας, 피타코스Πιττακὸς라든가 그 밖의 다른 어떤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했다고 하면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그 사람과 싸우겠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도 ‘저로서도 그 싸움에 가담할 준비가 분명히 되어 있다’ἐγὼ γοῦν 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 τῆς μάχης.고 대답한다.

* 비아스(Bias)는 밀레토스 북쪽에 위치한 프리에네(Priēnē)의 정치가이고 피타코스(Pittakos) 또한 레스보스 섬 뮈틸레네(Mytilēnē) 출신의 정치가이다. 이들은 모두 600년 대 활동한 유명한 정치가들로서 이른바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7현인 중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은 그들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뿌리 역할을 한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싸워야 할 대상이 시모니데스가 아니라 ‘시모니데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싸워야 할 대상에서 시모니데스는 제외된 것처럼 말을 한다. 이는 시인의 대부 격인 시모니데스에 대한 예의를 냉소적으로 표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폴레마르코스를 마치 시모니데스인양 대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시모니데스 역시 비판과 극복의 대상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331e에서 시모니데스를 ‘지혜롭고도 신과도 같은 분들’σοφὸς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이라고 비꼬듯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로 시모니데스, 비아스, 피타코스 같은 사람들을 ‘지혜롭고 축복받은 사람들’ τῶν σοφῶν τε καὶ μακαρίων ἀνδρῶν로 묘사하고 있다.

 

[336a]

* 이로써 마침내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 ->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로움을 적에게는 손해를 주는 것’으로 이어져온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철저하게 모두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펴온 사람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맞서 싸울 사람들의 실체가 밝혀진다. 앞서 소개된 시인 ‘시모니데스’는 물론 코린토스 참주 ‘페리안드로스’ Περιάνδρου, 마케도니아왕 ‘페리디카스’ Περδίκκας,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Ξέρξες, 페르시아의 돈을 받고 스파르타를 공격한 테베의 정치가 ‘이스메니아스’σμηνίας 그리고 그 밖의 부자πλουσίου ἀνδρός로서 스스로 굉장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당시 기득권 부유층들이 그들이다.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앞으로 플라톤이 철저히 넘어서야할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가 내건 싸움에 폴레마르코스가 ‘기꺼이 가담하겠다’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고 말하는 부분(335e)도 흥미를 끈다. 사실 폴레마르코스는 대화 과정 내내 난문(aporia)에 빠져 제자리만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응했고 마침내 태도에서 그 정도의 변화에까지 이른 것이다. 최소한 태도에 있어서만은 분명 그는 그의 부친 케팔로스와도 다르고 이후에 등장할 트라쉬마코스와도 다르다.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는 그런 점에서 ‘배움에 대한 선한 의지는 늘 하나같은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 또한 시대의 교사로서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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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대화 부분과 관련해서도 아래와 같이 몇 가지 함께 음미해볼 만한 문제들이 있다.

1)  우선 이 부분의 논증은 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인 ”기술과 ‘훌륭함’ἀρετή과 ‘기능’ἔργον의 관계를 동시에 함께 드러내는 방식으로 장차 그것들이 지식과 더불어 하나일 수 있음을 예고하는 일종의  복선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제1권은 제2권 이후에서 진행될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일종의 군불떼기 즉 예비적 준비 단계의 성격을 갖고 있다. 

2) 소크라테스는 위의 논증에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과 ‘누군가의 훌륭함ἀρετή을 나쁘게 하는 것’κακῶς ποιεῖν’을 같은 차원에서 등치시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만 보면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인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의 의미를 이해하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폴레마르코스가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이를테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가두거나, 금전상 손해들 일종의 ‘외적인 행위’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 훌륭함’은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과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고 있는 ‘외적인 가해 행위’는 동일한 의미의 가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등치시킬 수 있는 같은 차원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훌륭함ἀρετή이므로 훌륭함으로 사람의 훌륭함ἀρετή에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정의는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해를 입히는 것’과 관련하여 두 경우가 갖는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적을 다치게 하고 손해를 보게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적 혼의 상태의 훌륭함까지 다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 시 적장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 적장에게 엄청난 해를 입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적장의 ‘인간적 훌륭함’까지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의는 적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고 말했을 때 손해의 의미는 외적인 행위와 관련한 것이지 당신이 말하는 내면의 덕으로서 ‘인간적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그와 같은 주장에 의해 내 생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3)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완벽하게 부정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이 퇴색되거나 가려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록 논박과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할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매우 특별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훌륭함’이라는 그 자신의 확신을 그런 방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러한 극명한 대비의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한계를 함께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앞서 기술 개념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이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적극적인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일종의 예고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외적 행위 중심의 도덕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적 도덕의식 내지 혼의 상태에 대한 각성이 개시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 아무려나 ‘해를 입히는 것’이 갖는 위와 같은 추론 상의 복합성 때문에 ‘훌륭함’ 관련한 이 부분의 논의를 읽어 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논의를 접한 후 우리 주변에서 해를 입히는 행위지만 정의로운 일로 간주되는 일들, 이를테면 적에 대한 전쟁 행위를 포함해서 범죄에 대한 고소 고발 행위,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법적인 응징과 감금 행위 등과 같은 행위들에 대해서 플라톤은 어떤 식으로 해명을 할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사실 앞서 예를 든 전쟁 행위 같은 경우는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재 자체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특히 당혹감을 안겨 준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일지라도 전쟁에서의 위해 행위 자체가 곧 적군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덕이나 명예까지 손상하는 행위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은 아무리 불가피한 전쟁 상황에서 적군을 대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목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비열한 짓은 삼가야 하며, 아무리 죄를 졌다고 해도 그의 인간됨까지 모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께 일러 준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인 응징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처벌 이전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내면 상태의 훌륭함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교정의식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특수한 대상에 대해 어떤 특수한 이익과 손해를 가져다주는 특정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의 내적인 혼의 상태가 행복한 상태로 보전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이 구현된 훌륭한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미 2500년 전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기저에 만연해있는 마키아벨리즘의 대척점에 굳건하게 서있다.

 

5) 앞으로 점차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인간적 훌륭함’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철학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적 문제 영역에서도 여전히 중차대한 의미를 안겨 주고 있다. 실제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플라톤의 각성이 고대 기독교 윤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는 예수의 가르침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상의 금언 등은 물론 오늘날 사형제 폐지의 정당성과 관련해서도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이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인격과 인권 개념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근원을 근대 자유주의 사상에서 찾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선구적 통찰 역시 ‘훌륭함’ 내지 ‘덕’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에서 충분할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6) 그 밖에 소크라테스와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흥미를 끈다. 케팔로스는 대화를 즐기게 되었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결국 대화를 피해 도망가고 있고,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성실하게 응하다 결국 설득을 받아들여 부정의한 사람들에 대한 싸움에 자신도 가담하겠다고까지 말한다. 이에 비해 앞으로 등장할 트라쉬마코스는 공격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논파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승복하지 않고 냉소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대든다.

 

7) 그리고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사회적 관계를 친구와 적으로만 나누는 입장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당시 전쟁이 거의 일상이었던 배경에서 나온 것이긴 할지라도 보통의 경우에는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부정의는 흑백의 문제일 수 있어도 사적 영역에서 친구와 적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하물며 전쟁상태일지라도 상대국의 무고한 양민들까지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8) ‘정의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폴레마르코스는 ‘적합한 것’의 의미를 시종일관 나를 기준으로 나와 각자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폴레마르코스에게 ‘적합한 것’이란 친소 관계에 따라 자의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대로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해도 제대로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려면 그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내는 앎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은 그러한 앎이 자신의 이익에 역행하는 것임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지혜가 아닌 무지를 거꾸로 앎으로 여기는 자들인 것이다. 결국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시모니데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른 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귀결이다. 폴레마르코스의 무지가 당대 아테네인들의 일상의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그러한 귀결은 당대 아테네인들에 대한 시인들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자체가 이미 아테네를 병들게 하는 악폐임을 함께 보여준다.

 

9) 폴레마르코스가 매달리고 있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거의 상식으로 받들어지던 정의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관은 기본적으로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그 친구와 적이 자신을 기준으로 배타적으로 규정되는 한,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정의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적이 국가끼리의 전쟁 상황에서 마주하는 공적 차원의 적일 경우, 자기의 이익과 보전은 그대로 나라의 이익과 보전으로 이어지겠지만, 당대 아테네에서는 니키아스(이 자는 사유 노예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등 권력가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나라의 이익마저 강자에 의해 법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규정되고 실행되었으며 그 대부분이 실제로는 강자에게 귀속되기 일 수였다.

특히 페리클레스 같은 권력자는 페르샤에 대한 방어를 명분으로 이웃 폴리스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저버리고 부당한 강탈과 착취는 물론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까지 불사하였다. 플라톤이 폴레마르코스와 대화를 마무리하며(336a) 인용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러한 탐욕적 강자들이다. 요컨대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현실에서 본질적으로 공적 영역에서건 사적 영역에서건, 규모가 크건 작건 강자들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정의관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대화를 지켜보던 트라쉬마코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야수처럼 달려들어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소크라테스가 바로 강자들의 그러한 기득권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탈신성화, 탈마법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을 역사를 넘어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가 앞의 글에서 논의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자.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인데,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가 비판하는 교육은 전자의 것이다. 도덕적 영향력의 출발점은 우리의 “굴복(Demütigung)”이고,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이므로, 이를테면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기 비하”이다.(88쪽; 여기서 슈티르너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유희를 엿볼 수 있다.) 더 높은 것은 신성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낯선 힘”에 대한경외심 때문이다.(77) 경외심은 결국 자기비하이므로 나다움이 아니다. 그래서 유일자의 철학은 낯선 힘을 지양하고 나다움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의 철학은 그야말로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 (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철학은 “ ‘에고이스트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자기결정에 의한 ‘나다움’”(172)이다.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나다움을 선어하는 자는 신성모독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과 과소평가는 탈마법화라는 점이다. 나아가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출발점은 저항이다.

 

1. 나다움을 선언하는 자는 신성모독자이다.

 

유일자의 철학이 나다움을 선언하는 것이고 나다움은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기에 그런 사람은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216)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권리에 대한 신성모독(Blasphemie)”을 하는 사람이다.(308) 일반적으로 신성모독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은 슈티르너가 유일자의 태도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Blasphemie단어는 이 책에서 한 번 사용하지만 신성한 것을 파괴하는 태도이다. 이 단어 Blasphemie와 유사한 말은 신성 모독, 신을 모독함(Entweihung –en)인데 이 단어의 사용은 103, 186, 222, 311에서 나온다. 또한 같은 의미인 Entheiligung; entheiligen란 단어는 103-4, 166, 202, 244, 311-2, 343쪽에 언급하는데, 신성 모독은 신성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가장 과격한 것이며, 슈티르너가 거룩한 정신을 비판하기 위하여 정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이성에 대한 반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라는 점과 같은 방식이다. 나를 지배하는 정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자기 정신의 사용을 통한 비판이다.

 

“내가 정신을 유령(Spuk)으로 과소평가하였고 내(Mich) 위에 정신의 지배권을 어떤 망념(Sparren)으로 과소평가 할 때, 그 경우에 정신은 신성을 모독하는(entheiligt) 것으로, 신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정신을 사용한다.”(104)

 

또한 신성모독(Gottes)lästerung과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주의, 그리고 에고이즘을 모독하는(lästernd) 인본주의는 여전히 사랑을 기대한다.” [34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본주의나 공산주의는 에고이즘을 모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자의 철학은 거꾸로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신들린 상태이므로 ‘나쁜 마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독교도에게 가장 나쁘게 보이는 (종교, 도덕상의; 옮긴이) 죄를 범한다. 곧 신성한 마음에 거슬린(wider) 죄와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른다.”(202)

 

2. 신성모독(Entheiligung)은 탈마법화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나 자신의 밖에서 거짓말 하는 운명을 주어야만 한다고 항상 가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나-인간(Ich – Mensch)이기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것을 요구해야만 하도록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다. 피히테의 자아(Ich/ego)조차 나 밖에 있는 그와 같은 본질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자아만이 권리를 갖는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아니라, ‘그 자아’(das Ich)이다.(406)

 

슈티르너는 ‘인간’이라는 것이 “나 밖에 있는” 본질인 피히테의 자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서 마법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법의 영역에서 성경은 마법 수단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376) 나아가 그는 마법의 영역을 ‘실존과 소명’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면서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한다.

 

만약 실존과 소명(Existenz und Beruf) 사이에, 다시 말해 존재하는 나와 존재해야만 하는 나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었다면,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는 끊어졌을 텐데.(410)

 

위 글은 접속법 2식 과거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저 문장의 의미는 실존과 소명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은 ‘존재하는 나’이고 소명은 ‘존재해야만 하는 나’이다. 따라서 소명은 본질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는 실존과 본질의 긴장이 끊어져야만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소명(Beruf)이라는 단어는 계속하여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명은 일종의 본질이며 본질은 ‘개념적 질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개념도 나를 표현하지 않는다.”(412) 유일자라는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이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411) 소명(Beruf)이란 말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세속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생활의 세속적인 일들을 포괄적인 종교적 영향권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재성, 「막스 베버의 경제윤리 연구」, 서울대 대학원, 1983, p.36) 슈티르너는 막스 베버 이전에 자신의 시대를 마법화된 시대로 진단하고 있다. 여전히 종교적인 측면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하여 유령을 푸닥거리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은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의 신화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이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계몽의 변증법, 곧 이성이 진보이면서 야만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제시하였듯이, 이미 그 이전에 슈티르너는 근대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이성이 환상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로지 영혼, 감정, 믿음의 환상(Phantasie)이 종교적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연적 오성(Verstand)”, 인간의 이성(Vernunft) 또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이성조차 환상(Phantasie)과 같은 그러한 공상가(Phantastin)로 존재할 수 있다는 권리를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하는가.(52)

 

슈티르너는 물론 ‘탈마법화’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지향, 곧 소명에서 유일자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탈마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탈마법화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 곧 ‘신성모독’이다. 막스 베버는 “세계의 탈마법화”(Entzauberung der Welt)를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과의 대면적 관계 설정의 완결이 탈주술화, 탈마법화이다. 그는 가톨릭에서 사제는 변체(變體) 기적을 수행하고 천국의 열쇠를 장악하였던 주술사 또는 마술사였기 때문에 세계의 탈마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96, p.91)

또한 “선량한 사람들은, 법이 민중(Volk)의 감정 속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것만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중은 아마도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에 대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신성모독에 적대적일 것이다.”(217) 이 단어의 사용은 188, 202, 267, 347쪽에 나온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모독하다’(entweihen)라는 단어는 103, 186, 222, 311쪽에서 언급하며 ‘욕보이다’(schänden)라는 단어는 186, 244, 336쪽에서 언급한다. 또한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217, 308, 311, 328, 329에 나오며, 특히 217쪽에 나오는 조롱(spott; 64, 217, 267,311),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데, 모두 신성모독을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슈티르너에게 웃음거리나 조롱은 신성모독(Entheiligung)으로 이해된다. ‘덕’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한 그의 경멸을 들어보자.

 

오 라이스(Lais)여, 오 니농(Ninon)이여, 너희는 이처럼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덕을 닦으면서 늙어간 천 명의 처녀들에 반해서 한 사람의 자유로운 그리세트(Grisette)여!(67)

 

“에고이스트는 무리한 요구와 현재의 개념에 반대함으로써, 그는 가장 과격한 것-신성모독(Entheiligung)을 무자비하게 실행한다. 그에게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니까!”(202) 이 말은 견유주의(犬儒主義), 곧 시니시즘(cynicism, Zynismus)을 떠오르게 한다. ‘개와 관련되는’을 뜻하는 kunikos는 넒은 의미에서 어떤 가치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이다. 퀴니코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의 의미-엘렌코스(elenchos)라는 대화법을 통해 당혹스러운 상태, 곧 아포리아(aporia)에 봉착하여 자신의 특정한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를 웃음거리나 조롱으로 바꾸었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철인(412-323 BC) 디오게네스(Diogenes), 그의 실생활 표어는 아스케시스(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는 것), 아나이데이아(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아우타르케이아(스스로 만족하는 것)이고 옷 한 벌,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통 속에 살았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그를 찾아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슈티르너는 국가에 대해 에고이스트가 하는 말 “나로부터 햇빛을 가리지 마라”(Geh’ Mir aus der Sonne)로 표현하면서 한 번 인용한다(257).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가 보여주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곧 신성한 것을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유일자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그가 무자비한 신성모독,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선언, 신성한 것을 욕보이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왜 그토록 신성한 것, 본질, 소명을 경멸하고, 평가절하 하는 것인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3. 탈마법화는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삶의 사명(Lebensberuf), 어떤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삶을 통해 어떤 것을 현실화시켜야만하고 해내야만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은 오로지 수단과 도구이인데, 그 어떤 것은 우리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고, 그 어떤 것에 사람들은 삶을 빚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희생(lebendiges 희생Opfer)을 요구하는 어떤 신을 가지고 있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스러운 행위만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자체는 줄지 않고 남아있고, 정의의 범죄자는 금방 희생에 빠지며, 우리는 “인간의 본질”, “인류의 이념”, ‘인간성’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 ‘가난한 죄인’을 희생으로 학살하고 그 밖에 아직도 우상 혹은 신과 같은 것을 말한다.(361)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삶의 사명은 본질로 이해 할 수 있고, 삶의 사명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있는 희생’을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곧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중들과 개인들(Individuen)을 인류에 헌신 속에서 고생하도록 한다(sich abquälen).(4)

 

우리는 여기서 “(몹시) 괴롭히다, 고통을[고뇌를] 주다;가책받게[번민케] 하다(quälen)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들은 이 곳 말고도 42, 191, 238, 266(새로운 헌법으로 시대에 적합한 개선으로 고생하고), 269(새로운 이상은 새로운 고통을 주고), 324, 325(인류에는 인간의 고역이며), 344, 363, 389쪽에 나온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소명, 본질, 인간, 인류 유령들을 신성모독(Entheiligung, 103,104)이고 과소평가(Herabsetzung,166, 202, 244, 312, 312)하는 것이다. 또한 아픔, 고통(Qual)과 관련하여(43, 92, 164, 238, 324, 397) 논의하면서, 그가 도달한 것은 환영이라는 것, 더 높은 것, 유령이라는 것 때문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걸쳐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der 물질»materiell Gesinnte)은 이상적인 환상(Schemen), 자신의 덧없음(Eitelkeit)에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고, “정신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물질적 향유, 풍족한 생활(Wohlleben)에 모든 것을 희생한다.(64)

 

이렇듯, 슈티르너는 자아의 생성사를 희생(Opfer)으로 보고 있는데, 이 희생을 극복하는 것을 에고이스트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저작 전체는 희생의 극복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의 희생자와 만나지 않고, 어디를 바라볼 수 있었는가?”(66) 그는 비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도대체 누가 “희생하는”(aufopfernd) 것인가?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이다. 만약 연인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과 결핍을 견디고 부모를 떠난다면, 그는 희생하지 않는 것이냐? 혹은 모든 욕망들, 소원들 그리고 고유한 열정의 만족들을 바치는 야심이 있는 사람(Ehr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인색한 사람(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쾌락을 좇는 사람(Vergnügungssüchtige) 등등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열정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희생하는 사람의 어떤 열정은 그들을 지배한다.(81)

 

이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민적 개인의 원형(Urbild)”(DA,63)으로 다루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통하여 사이렌의 소리를 들이며 죽지 않기 위해 자연적 욕구와 본능을 억압하는 희생(Opfer)과 체념(Entsagung)의 자아 형성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그러한 자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다른 한편 슈티르너는 “그런 까닭에 기독교적인 생각을 품은 자들은 억압된 노동자들의 경건성, 그들의 인내와 체념 등등만을 배려할 뿐이다. 억압받는 계급은 그들이 기독교도인 한에 있어서만, 모든 비참함을 참아낼 수 있었다.”(132)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는가? 희생은 많은 곳에서 논하고 있다(82, 83, 85, 104, 109, 135, 165, 196, 198, 211, 238, 243-4, 246-7, 277, 285, 324, 328, 338, 341, 344, 346, 351, 409). 슈티르너는 38쪽에서 민족을 “애국심이 있는 헌신(patriotische Aufopferung)”으로 파악한다. 198쪽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슈티르너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고 있다.

 

새로운 역사는 희생(Aufopferungen)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나의 역사이다. (Der) 인간은 보편(Allgemeine)으로 간주하는 것이다.(197-8)

 

이것은 아도르노가 오디세우스를 개인의 탄생으로 보면서 역사를 자기부정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이해하고, 이것을 향유의 역사로 보고 있다. 향유의 역사는 자기부정을 넘어서고, 희생을 극복한 에고이스트,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슈티르너가 미래를 향유의 역사로 추구하는 반면에, 아도르노도 미래의 역사를 화해(Versöhnung)로 본다.

또한 슈티르너는 체념(Entsagung)을 희생과 함께 논의한다(67, 73, 153, 353). 67쪽에서는 바로 이 “체념의 관례는 너의 갈망의 격정을 냉각시킨다.”고 비판한다. 73쪽에서는 “천상(Himmel)은 체념의 종점이다.”이라고 비판하고 153쪽에서는 “모든 “우월함”을 포기하라고 하는 가장 엄격한 체념론”을 비판하면서 유일자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용으로 자기 향유로 향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신성화(Heiligung) 혹은 정화의 특성(Zug)이 낡은 세계(목욕 재계(齋戒) 등)를 통해 진행되듯이, 그렇게 기독교적 세계를 통해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의 특성이 진행된다.(408)

 

‘체내화’(Verleiblichung)라는 말을 한번 사용하지만, 이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정신분석에서 주체가 대상을 공상적으로 내부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 체내화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기향유를 향하고 있으므로 자기향유는 “자아의 자기실현(Selbstverwertung des Ichs)의 모든 총괄 개념(Inbegriff)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또한 국가에 거스르는 그의 자의식(Selbstgefühls/self-consciousness)의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모든 총괄 개념이 중요하다.”(303)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말을 좀 더 풀어보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에서는 “the ego’s self-realization of value from himself”이라고 번역하였다. 물론 Selbstverwertung 단어가 2번만 사용되었지만,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 자기향유로 나아가는 유일자의 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자기실현의 총괄개념을 살펴 보자. 그는 우리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단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행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verwerten) 안 되고, 나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코 나의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249) “내가 만들어 내는 것, 곧 밀, 아마포 혹은 철과 석탄 등등은 내가 이 땅에서 힘들여 찾아낸 것인데, 그것은 내가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려고 하는 나의 노동이다.”(282) 그러나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자신의 가치를 찾는 길이다. 그렇다, 자신의 가치회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주장한다. “그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verwertet) 않고, 오히려 국가가 그를 가치 있게 만든다.”(281) 또한 “집단 빈곤은 나의 무가치성이고,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는 현상이다.”(282) 그러므로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슈티르너는 소크라테스를 존중하면서 비판하는데,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제시한다.

 

우리들의 소유를 포기하라! 그렇지 않다. 우리들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 시대의 문 위에 저 균형 잡힌 시간이 서 있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Verwerte Dich)!(353)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자각도 중요하다. 다른 측면에서도 자신을 바라보자!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유일자의 철학이 제시하는 전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은 저항하는 일이다.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겪는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의 차원에서 ‘코기도’(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반항은 원초적 자명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책세상, 46쪽)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⑩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전 시간에 이어 계속)

 

[333d]

* 앞서 정의의 쓸모와 관련해서 1)‘항전과 연합전의 경우’(332e) 그리고 2)‘금은을 함께 이용함에 있어 그걸 안전하게 신탁해야 할 경우’(333c)에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하다’는 견해는 아직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소크라테스는 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됐소’εἶεν라고만 답을 한 후, 전쟁이 아닌 평화 시 정의의 쓸모로 화제를 바꿔 그에 대한 반박은 일단 접어두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보관 상태’를 ‘금전의 미사용 상태’ 즉 금전의 쓸모가 정지된 상태로 해석하여, 보관 행위 자체가 이미 정의의 쓸모와는 무관하다는 주장만 펼칠 뿐, 정의의 쓸모로 제시된 ‘안전한 신탁’παρακαταθέσθαι에 대해서는 언급을 유보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직 논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넘어간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다시 꺼내들어 아래와 같이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그러한 경우의 주장마저 논박한다.(333e~334b)

 

[333e]

* 먼저 소크라테스는 권투πυκτικῇ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싸움μάχῃ에 있어서 치는 데 가장 능한δεινότατος 사람은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능하고, 질병의 경우에도 그것을 막는데 능한 의사는 몰래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하다고 말을 한다. 이런 말을 꺼내든 이유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우로 거론했던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를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334a]

* 소크라테스는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훌륭한 수호자’φύλαξ ἀγαθός는 전쟁과 관련한 모든 일에 능하다는 점에서 유능하지만, 적군의 계략과 작전을 ‘몰래 탐지해내는 것’κλέψαι 도 능하다는 점에서 보면 ‘유능한 도둑’φὼρ δεινός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항전이나 연합전 등 전쟁의 경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한 정의로운 사람이 동시에 부정의한 도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은 일면적인 데다 모순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항전과 연합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논박 된다. 그런 연후에 앞에서 유보되었던 금전관계에서 ‘돈의 안전한 신탁’ 차원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즉 돈을 간수φυλάττειν하는데 능한 사람이면 동시에 훔치는 것κλέπτειν도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익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도둑κλέπτης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금전관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 또한 논박된다.

* 여기서 ‘도둑’으로 번역된 두 단어 φὼρ(phōr)와 κλέπτης(kleptēs)는 둘 다 ‘도둑’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자는 항만에서 쓰일 경우 ‘밀수꾼’으로도 쓰이고, 후자는 ‘사기꾼’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군대의 훌륭한 수호자’στρατοπέδου ὁ φύλαξ ἀγαθός라는 표현은 이상국가의 훌륭한 수호자와 당연히 다르다. 이상국가의 수호자에 붙는 훌륭함은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내면적 도덕성과 외적인 통치술 전체에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훌륭함이지만, 이곳에서의 훌륭함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그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군대에서의 군사 기능적인 작전 지휘 운용 능력에 한정하여 빗대어 사용한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냥 ‘군사작전을 잘 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 또한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이다.

 

[334b]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일종의 도둑κλέπτης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호메로스한테서 배운 것 같다’κινδυνεύεις παρ᾽ Ὁμήρου μεμαθηκέναι αὐτό고 말한다. 호메로스도 오뒷세우스의 외조부 아우톨뤼코스Αὐτόλυκος에 대해 호의를 갖고ἀγαπᾷ 있으면서도 그를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있어 모든 사람을 능가한다καίνυμαι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호메로스나 시모니데스 모두 ‘정의는 일종의 도둑질 기술이긴 하나 그것은 친구들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기술’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폴레마르코스 또한 시인들의 선조인 호메로스처럼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별다른 의식 없이 내뱉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우톨뤼코스가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능한 사람임에도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말인 것이다. 이처럼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당대 시인들의 시가가 그렇듯이 서로 반대적으로까지 이해될 정도로 애매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마무리하려고 하자 폴레마르코스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οὐ μὰ τὸν Δί᾽’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자신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난문(難問aporia)에 빠져 ‘저로서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οὐκέτι οἶδα ἔγωγε ὅτι ἔλεγον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어쨌든 정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롭게 해주고 적들에 대해서는 해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애초의 주장으로 속절없이 되돌아가고 만다.

* 이 장면은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말과 사고방식이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대중들 일반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세뇌, 각인되어 있고 얼마나 많은 폐해를 안겨다 주는지를 잘 드러내줌과 동시에 당대 시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첫 부분이 마무리되고, 여전히 무지와 혼돈에 빠져있는 폴레마르코스를 일깨우기 위한 문답법적 대화가 정의의 ‘훌륭함’ἀρετή을 토대로 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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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두 번째 대화 부분(334c~336a)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지금까지 이루어진 문답(331e~334b) 내용을 간략히 평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앞에서 정의의 유능성 내지 쓸모와 관련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모두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된다. 전기 대화편에서 줄곧 수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chos)이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사실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의미 규정(horos)’의 조건은 진리로서의 보편성과 항상성(恒常性)이다. 특정 사례들이나 경우들은 늘 예외적인 사례와 경우들에 직면한다. 정의의 기능, 정의의 쓸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시종일관 특정 사례나 경우를 가지고 정의의 쓸모를 말하지만 정의의 쓸모는 그런 특정한 경우에서의 쓸모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의 쓸모는 어떤 때는 쓸모 있고, 어떤 때는 쓸모없는 그런 종류의 쓸모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경우에서든, 인간의 행위와 마음 상태 그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늘 쓸모가 있는 그런 종류의 쓸모로서 하나같은 항상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요즘 화제가 되는 인문학의 쓸모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요리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요리사가 쓸모가 있을까? 도둑을 잡으려고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경찰관이 쓸모가 있을까? 항해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항해사가 쓸모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우리들은 대부분 폴레마르코스처럼 그 구체적인 경우 경우마다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개별 기술자가 더 쓸모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답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문학의 쓸모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 사람다운 삶의 구현을 추구하는 학문인 한,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기술, 즉 공기가 모든 생명체에 필요하듯, 기술일반에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의 쓸모도 마찬가지이다. 정의의 쓸모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과 관련한 모든 것에 적용되는 모종의 보편적 원리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요리술이건 건축술이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쓸모가 없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요리할 때 요리사가 바른 생각과 의지를 가져야 최선을 다해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여 가장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요리 할 수 있는 것이고, 건축공이나 항해사 또한 바른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최선의 능력을 길러 정성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의나 인문학의 쓸모는 개별 기술들의 구체적 쓸모의 토대가 되는 그 기술들의 근본 기초 즉 그 기술들의 존재근거, 목적과 가치, 내적 구조와 타 기술과의 관계 등과 관련되어 있다.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배후에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이전에, 폴레마르코스처럼 아직 정의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시인들의 말에만 의존하여 구체적인 사례나 속성으로 정의를 말할 경우, 어떤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시종일관 문답법적 논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3) [332c-d]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기술’(technē) 개념 역시 앞서 말한 플라톤적 정의관을 뒷받침해주는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정의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훌륭함’ 내지 ‘탁월함’(aretē)과 더불어 장차 다루게 될 적극적인 정의론을 위한 예고와 준비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다. 미리 간략히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정의가 곧 기술이고 기술이 일종의 문제 해결 방책’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이른바 기술이 단지 과학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에서 정치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인간의 사회적 행위나 활동 영역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기술이 전문적인 지식인 한, 도덕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고 정치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곧 도덕과 정치도 오늘날 과학기술이 그러하듯 객관적 기준과 척도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그 활동의 성공여부에 의해 그 ‘훌륭함’(to agathon)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곧 플라톤에게 도덕과 정치는 오늘날의 용어로 보면 단순한 이론과학이 아니라 기술과학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기술과학적 지식이란 그것의 고유한 객관적 척도와 기준에 맞게 대상에 그 기술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dynamis)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그러한 과학기술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도덕은 지식이다’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도덕과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그에 관한 이해와 지식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해와 지식이 곧 능력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은 줄 아는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말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것을 제대로 알면 반드시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기술개념은 아직 그곳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정의의 척도를 주관적인 인간관계에서 다루려는 폴레마르코스의 잘못된 태도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술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 332e 앞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별 주저 없이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정의라는 기술을 가진 자’가 가장 유능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전쟁πόλεμος이라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중대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게 잘 하는 것이 그냥 전쟁πολεμεῖν(polemein)이 아니라 항전προσπολεμεῖν(prospolemein)과 연합전συμμαχεῖν(symmachein)이라고 언급되고 있음도 주목을 끈다. 물론 prospolemein이라는 말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도 있어 일반적인 전쟁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polemein이라는 말을 쓰고 이곳에서 prospolemein이라는 말을 쓴 것은 비록 폴레마르코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경우라도 침략 전쟁이 아닌 방어 전쟁만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플라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짐작도 해본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에서도 전쟁의 수행은 침략군에 대한 방어전쟁에 한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패권적 제국주의는 그것으로 이미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가장 정의로운 자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도 ‘방어와 보전’φυλάττειν의 의미를 갖는 수호자ὁ φύλαξ(phylax)이다. 연합전의 경우 또한 군대건 사람이건 연합하여 함께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전쟁 역량이고 그 역량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적인 성격으로서 협의의 정의로도 불리는 절제σωφροσύνη(sōphrosynē)란 말도 원래 군사용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연합의 능력이 왜 정의와 관련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테네 전투기술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갑보병기술ὁπλιτικὴ의 경우 서로 협동을 하여 밀집방진(密集方陣)의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 때 각 병사는 개인의 역할도 잘 해야 함과 동시에 전체 전후좌우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긴장을 유지하며 다른 병사들과 보조를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절제의 원래 의미이다. 즉 정의는 나와 공동체가 유기적인 하나임을 알고 나와 공동체의 안녕과 보전을 동시에 구현해내는 앎이자 능력이다.

5) 그런데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에는 내용상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우선 소소하게는 332e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모없다’는 말은 ‘의사가 질병은 물론 건강과 관련해서도πρὸς νόσον καὶ ὑγίειαν 가장 유능한 사람’(332d)이라는 말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의사의 역할은 아프지 않은 사람의 건강도 돌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다루었듯이, 금은의 안전한 신탁과 관리를 위한 금전적 협력관계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더 쓸모가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333c) 또한 비록 개별 사례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재화를 둘러싼 사기, 갈취, 횡령, 도적질 등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금은재화를 가득 쌓아놓은 사람일수록 곁에 정직하고 올바른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금전의 미사용 상태를 금전의 쓸모 자체가 정지된 상태로 보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기술이란 모종의 활동이란 전제하에 재화의 보관 행위를 재화의 미사용 상태, 즉 활동 정지 상태로 보고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보관도 모종의 기술적 활동이고, 특히 재화의 보관 활동은 그 자체로 쓸모가 있다. 금전은 보관 그 상태만으로도 이자 증식을 포함해 여러 가지 고유의 가치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금은의 안전한 보관과 금은과 낫, 방패, 리라의 보관을 함께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금은은 교환가치가 핵심이고 나머지는 사용가치가 핵심이기 때문에 보관가치의 우선성 차원에서 보면 비교상대가 되지 않는다.

7)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재화의 안전한 보유와 보관 이를테면 오늘날 금괴와 외환의 보유는 개인은 물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 중요한 지표이자 쓸모이다. 고대에도 돈의 용도는 물건을 사고파는 화폐로서의 용도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금융업처럼 자금의 보유를 수익의 원천으로 삼는 직업도 존재하였다. 대부업자는 자금을 안전하게 잘 보관해야하고 그것을 위해 협력자가 필요할 때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플라톤도 이점을 알고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 재화의 보관을 재화의 쓸모에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혹시 금은을 쌓아놓고 사는 당대 부유층 기득권자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 때문일까? 노동을 통해 농산물, 생필품 등 일반 상품들을 제작 유통하고 그것들을 사고파는 것으로 벌어들이는 부 이외에 돈만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고리채, 특권과 권력을 통한 부와 재물의 축적, 금은보화의 경쟁적 보유가 가져다주는 특권의 고착화와 그것이 초래한 계층적 괴리와 빈부격차는 고대나 현대나 우리가 해결해야 할 악폐이다.

8) 특히 항전과 연합전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다. 논박의 구성이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허술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논박과정에서 예로 든 권투선수의 공격술과 방어술, 군인의 수호임무와 첩보탐지를 위한 침투임무는 반대되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 행위들 다 각기 권투선수와 군인의 고유의 기능들이고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상충하는 행위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게 권투선수, 군인의 덕이고 모두 훌륭한 권투선수, 훌륭한 군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예로 든, ‘질병을 막는 일과 생기게 하는 일’,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과 훔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기능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위의 경우들과 상통하지만, 위의 경우들과는 달리 그 반대 기능들이 다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고유기능도 아니거니와, 그 기능들은 도덕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전자의 경우와 달리, 그 반대되는 일을 동시에 잘하는 것이 그들 각자의 덕이 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그들 각각 훌륭한 의사, 훌륭한 금전관리자로 불릴 수도 없다. 요컨대 권투선수와 군인의 경우와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경우는 같은 경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군인의 첩보 탐지행위와 금전 관리자의 자금 유용의 같은 경우의 도둑질로 보고 그것을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일종의 도둑이다’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황에 관계없이 훔치는 행위 모두를 부정의한 도둑질로 보는 비약이 숨어 있다. 그것은 ‘군인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살인자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살인자이다’라고 추론하는 전형적인 애매구의 오류(equivocation)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맥락 상 전혀 의미가 다름에도 표현의 동일성을 내세워 원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9) 항전과 금전신탁의 경우와 관련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치밀한 논리를 구사하는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논리적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의아함을 안겨준다. 그래서 혹자는 플라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닌지라 말 그대로 이 부분에서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부분 역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수준에 맞추어 그를 뒤흔들어 혼란에 빠지게 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하게 만들기 위한 소크라테스적 에이로네이아εἰρωνεία(eirōnēia)로 해석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저 유명인들의 말이면 옳다고 믿으면서 논리적 타당성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방편 상 그러한 논변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후의 폴레마르코스의 반응은 그 자체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처구니없게도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갖는 논리적 허술함을 전혀 간취하지 못한 채 그 반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에이로네이아’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자기 생각은 짐짓 숨긴 채 말하는 ‘시치미’(dissimulation)의 뜻을 갖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는데 그 방법을 쓰면서부터, 그 말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게 하여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 소개된 소크라테스의 논변들 또한 시종일관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그의 생각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은 항전과 금전관리와 관련한 논변 또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하는 방식으로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적 논변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저명한 플라톤 연구가 아담(J. Adam)은 ‘이곳의 논변은 타당성이 떨어지고 진지하게 의도된 것도 아니다. 폴레마르코스를 당혹감에 빠트리는 것으로 그 논변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논변은 허술함을 가장한 일종의 시치미이자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모순을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치미를 상대를 속이려는 부정적인 트릭이나 실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검증을 위한 방편적 시험의 일환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치미 논법이 목표로 하는 것은 상대를 모멸하거나 곤경에 빠뜨려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를 자극하고 흔들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한 후, 참된 앎의 세계, 공동탐구(syzētēsis)의 장으로 인도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연구자들의 이러한 호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333e~334a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최소한 논박 자체의 논리적 타당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음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11) 아무려나 ‘에이로네이아’가 소크라테스의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적 논박이 드러내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들어 위의 논변도 타당한 소크라테스적 논박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귀류법적 논박이 갖는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앞서의 논변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크라테스적 논박들이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귀류법적 문답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대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방편상의 명제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 명제들 각각이 내용적으로 참인지 여부는 논박의 타당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반박 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만 하면, 동원된 명제 하나하나의 내용적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으로 상대 주장은 논파된다. 요컨대 논박의 성공여부는 상대 주장과 논박자의 주장에 동원된 명제들 각각의 내용상의 진위 여부에서가 아니라, 그 두 주장을 병립시켜 그 주장들이 서로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양립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의는 일종의 도둑이다’(334a)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전혀 상관이 없고, 그것은 오직 상대 주장과의 연관 속에서 그 주장의 모순을 드러내는 명제로써만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가령 왜곡된 양도논법(dilemma)을 논파하기 위한 반박용 양도논법이 타당성을 갖는 것도, 그 논법의 결론이 상대 논법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가질 때 획득되는 것일 뿐, 반박용 양도논법 자체만 따로 떼어 보면 그것 역시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한 또 다른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이다. 이를테면 누가 아래와 같은 양도논법으로“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슬프다.(결론)”고 주장했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러한 왜곡된 양도 논법을 논파하려면 간과된 선언지(選言枝)를 찾아내 동일한 양도 논법으로 아래와 같이 그와 모순되는 결론을 제시하면 된다.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기쁘다.(결론)” 이 경우 반박용 양도논법 역시 그것만 떼어 보면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이다. 요컨대 폴레마르코스처럼 특수한 사례나 속성에 해당하는 명제들만을 동원하여 정의를 ‘의미규정’할 경우, 정의의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측면만 드러낼 뿐 결코 보편적 정의(定義)에 이를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 과정에서 반드시 예외적이거나 반대적인 경우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년 가을 제55회 정기 학술대회 :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2018년 가을 제55회 정기 학술대회가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회원 및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아 래>

<5회 한중마르크스주의 연구자회의>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 중 철학의 대화, 중국의 사회주의와 현대정치철학의 수용

* 일시 : 2018.10.26 (금) 09:00 개회

* 장소 : 건국대학교 행정관 4층 대회의실

* 주최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건국대 철학과, 남경대 마르크스주의사회이론연구센터

* 후원 : 건국대학교

* 동시통역 제공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⑨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 폴레마르코스가 부친 케팔로스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논의의 국면은 정의의 정의(定義) 문제로 전환된다. 대화의 방식 또한 전기 대화편의 방식 그대로 시종일관 귀류법적 문답의 방식, 즉 상대의 처음 생각이 끝에 가서 정반대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대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 번째 부분(331e-334b)에서는 케팔로스가 제시한 정의에 관한 생각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으로 정립되면서 그 정의관이 안고 있는 한계가 정의의 쓸모 문제를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검토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334c~336a)에서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이 수정된 후, 정의의 ‘훌륭함’을 토대로 하는 즉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권세자들 일반에 편만해 있음이 함께 언급된다.

 

3-1(331e-332b);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31e]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는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 것은 갚는 것’이라는 부친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대의 시인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인다. 시모니데스가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빚진 것)을 갚는 것’τὸ τὰ ὀφειλόμενα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 δίκαιόν ἐστ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앞서 ‘맡은 것’λαβή(331c)이란 말이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이란 말로 바뀌었을 뿐 내용상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한계가 지적된 말이다. 그럼에도 폴레마르코스는 그러한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보기에는 훌륭한 말 같다’δοκεῖ ἔμοιγε καλῶς λέγειν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주장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당대 아테네인들이 그러하듯 시인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맹목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 같은 정도의 사람이 한 말은 믿어야 하며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뭔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폴레마르코스의 태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가 ‘지혜롭고 신과도 같은 분이니까’σοφὸς γὰρ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라고 비꼬듯 말한다. 이처럼 시모니데스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을 힐난하거나 비꼬는 부분은 <프로타고라스>(339a-b)를 비롯해서 대화편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cf. <뤼시스>214b, <카르미데스>162a, <테아이테토스>194c.

*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늘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러니까 폴레마르코스도 당연하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조차 시모니데스의 말이니 안 믿기도 쉽지가 않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시인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거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시모니데스는 6세기 중반에 태어난 고전기 시인들의 대부격인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도 <국가> 606e-607a에서 당대의 그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도 기본적으로 전통을 매우 중시했던 사람이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 선대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들 특히 당대 시인들 대부분이 기득권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시가들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혼란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 자의 방종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고 있음 또한 목도하고 있다.

* 시모니데스(Σιμωνίδῃς 기원전 556?~468?)는 에게 해의 키오스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가 보여주듯 그리스 고전기 시인들의 선구자로 바킬리데스, 핀다로스와 함께 ‘3대 합창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호메로스 시절부터 이미 능력 있는 시인들은 당시 왕이나 참주 또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의 공적을 노래하곤 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전사자의 묘비명,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300인의 스파르타 용사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이스퀼로스를 꺾을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합창대가, 승전가, 찬가. 애가(哀歌) 등 여러 영역에 걸쳐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약간의 단편과 비문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가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다나에의 슬픔을 노래한 <다나에의 비가>는 남아 있는 그의 시편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기원전 476년경에 히에론 1세의 초청으로 시칠리아섬에 가있다가 히에론의 궁정에서 사망하였다.

 

[332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케팔로스의 정의관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했음에도, 폴레마르코스가 다시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여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맡은 것’과 ‘갚을 것’이 같은 것임을 들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재차 환기시킨 후에, 시모니데스의 말을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그 말은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라는 게 ‘그 취지’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황금χρυσίον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라도 친구에게 해가 된다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게 그 취지임이 확인된다. ‘황금이 탐나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라는 주변의 오해도 이겨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로써 ‘정의는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은 폴레마르코스가 이해한 취지에 따라 정의는 ‘친구끼리는 서로에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주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τοῖς φίλοις ὀφείλειν τοὺς φίλους ἀγαθὸν μέν τι δρᾶν, κακὸν δὲ μηδέν이라는 정의관으로 새롭게 확장된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2b]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에 폴레마르코스의 해석이 더해진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검토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상대의 주장이 갖는 일면성 또는 자기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그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친구가 아닌 적χθρός일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한테도 갚을 것(빚진 것)은 단연코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적이 적한테 갚는 것(빚진 것)일 경우 그것은 그에 ‘적합한 것’ 즉 나쁜 어떤 것κακόν τι이라고 답한다.

* 갚을 대상이 적의 경우로 까지 확대되자 폴레마르코스는 ‘갚을 것’(빚진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to opheilomenon)이란 말 대신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to prosēkon)이란 말을 사용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가 사용한 ‘빚진 것’이란 말이 적의 경우에까지 적용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 말 대신 ‘적합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에 적합한’, ‘~에 해당하는’의 뜻을 가진 προσῆκον은 ‘빚진 것’,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말이 갖는 구체성과 당위성이 약화된 다소 애매하고 포괄적인 말이다.(이런 점에서 τὸ προσῆκον은 ‘합당한’으로 옮기기 보다는 ‘적합한’으로 옮기는 것이 더 원의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어떤 기준이나 도리에 맞는’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합당(合當)한’이란 말로 옮기면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하는 το ὀφειλόμενον과 의미상 차이가 잘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폴레마르코스가 ‘빚진 것’이란 말 대신 ‘적합한’이란 말을 쓰자, 바로 시모니데스가 정의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ἠινίξατο 같다고 말한다. ‘적합한’이란 말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의미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τὸ προσῆκον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이라는 정의관은 언뜻 보면 ‘각자에게 고유한οἰκεῖος 몫을 주는 것,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제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적합함’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자연에 따른(kata physin) 본래적 고유함’과 달리 친구와 적이라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을 기준으로 언급된 것이듯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가 표현을 바꾼 것임에도 소크라테스는 마치 시모니데스가 실제로 그렇게 바꾸어 말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고, 질문도 직접 시모니데스에게 던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폴레마르코스가 마치 자신이 시모니데스라도 되는 양 열심히 그를 대변하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모니데스를 포함하여 당대 시인들의 말들이 이현령비현령 아무나 자기 식으로 말을 바꾸어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암시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332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에 우선 그가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라는 그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터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기술’τέχνη개념을 끌어들여 먼저 의술ἰατρικὴ과 요리술μαγειρικὴ이 ‘각기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마땅한 것이자 적합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인지를 묻고, 그런 연후에, 그런 방식에 기초하여 ‘정의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기술>’ἡ τίσιν τί ἀποδιδοῦσα τέχνη δικαιοσύνη인지를 묻는다.

*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시모니데스의 말과 그 말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이 결합되어 구성된 것이라, 시모니데스가 말한 ‘마땅한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표현과 폴레마르코스가 말한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 이란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은 앞서 ‘빚진 것’, ‘갚을 것’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맥락 상 ‘마땅한 것’으로 옮겼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ὀφειλόμενον은 ‘마땅히 해야 하는’의 뜻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332d]

*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의술은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당시 의술적 치료 방법은 기본적으로 복용의 방식이다)로 요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해 주는 기술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ἡ τοῖς φίλοις τε καὶ ἐχθροῖς ὠφελίας τε καὶ βλάβας ἀποδιδοῦσα이라고 답을 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 의해 처음 언급된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이라는 말은 ‘정의란 친구들한테는 잘 되게 해주고 적들한테는 잘못 되게 해주는 것’τὸ τοὺς φίλους ἄρα εὖ ποιεῖν καὶ τοὺς ἐχθροὺς κακῶς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구체화되면서 비로소 검토 대상으로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된 셈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자 방책’으로서 기술τέχνη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논박과정에 단편적이나마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문답법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과는 다소 결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 국면에 가면 이러한 특징은 앞부분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에서의 대화가 전기 대화편과 달리 논박을 넘어 플라톤 자신의 적극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 나중에 점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기술이긴 기술이되,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 특정 시기, 특정대상에게 특수한 무엇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일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건 사물이건 기능이건 간에 모든 대상에게 언제나 가장 고유하고 가장 훌륭한 상태로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능력과 방책으로서의 기술이다. 따라서 정의라는 기술을 정의하면서 어떤 특정인, 특정 대상에 국한된 기술이나 특정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의미 규정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혼의 내적인 상태’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모든 대상, 모든 행위, 모든 기능에 늘 ‘좋음(善, to agathon)’으로 작용하고 무조건적이고도 전일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자, 앎(epistēmē)이고 힘(dynamis)이자, 훌륭한 상태(aretē)’인 것이다.

* 물론 여기서 기술 관련 논의는 아직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플라톤적 기술 개념을 아직 알 리도 없다. 그럼에도 기술 개념은 이미 여기서도, 주관적인 답들만 늘어놓고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논박하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

 

[332e]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기술을 끌어들여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하나의 테제로 정립시킨 후에 드디어 그것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유능성과 쓸모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기술로서 정의의 능력(dynamis)과 기능(ergon)’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먼저 질병과 건강과 관련해서 그리고 바다의 위험과 관련해서, 친구들과 적들한테 잘 되게 해주거나 잘못되게 해줌에 있어 가장 유능한 이가 각기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의사ἰατρὸς 와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가 각기 그러한 사람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행위πρᾶξις와 어떤 일ἔργον과 관련해서 친구들한테는 이롭게 해주되ὠφελεῖν 적들한테는 해롭게 해줌βλάπτειν에 있어 가장 유능할 수 있는지δυνατώτατος’를 묻는다.

*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폴레마르코스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답을 한다. 즉 ‘항전을 할 경우와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ἐν τῷ προσπολεμεῖν καὶ ἐν τῷ συμμαχεῖν,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다고 말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싸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도 자기를 절제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이러한 대답은 비록 특정 사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일단 그가 말한 경우에서의 정의의 쓸모에 대한 내용상의 반박은 잠시 접어두고,(이에 대한 반박은 334c~336a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식으로 정의의 쓸모를 말하면 쓸모를 따지기도 전에 쓸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고 반박한다. 이를테면 의사와 키잡이는 각기 건강한 사람의 경우나 항해하지 않을 경우에는 쓸모가 없듯이,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는ἐν εἰρήνῃ 정의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는 것이다.

*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없겠죠?’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전쟁을 하는 사람들’과 ‘정의로운 사람’이 ‘질병을 앓는 사람’과 ‘의사’의 경우처럼 정의로운 사람들 따로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인 양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어떤 행위’와 ‘무슨 일’과 관련해서 정의의 쓸모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질병이 없는 경우 의사의 쓸모’를 묻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전쟁이 없는 경우 정의의 쓸모’를 묻는 말이다. 플라톤에게는 누구나 다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가 그리는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와 군인, 생산자 모두 다 정의로운 사람이다.

 

[333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평화 시기에 농사γεωργία가 농산물의 취득을 가능하게 해주고 제화술이 신발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과연 용도와 획득χρείαν ἢ κτῆσιν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에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계약과 관련한 일 즉 거래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여기서 계약과 거래를 나타내는 τὰ συμβόλαια와 κοινωνήματα는 모두 협력 상대κοινωνός와 합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력과 협의를 요하는 경우들이다.

 

[333b]

* 폴레마르코스가 정의가 쓸모 있는 경우로서 계약과 거래를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장기와 같은 게임이나 돌을 쌓은 일의 경우를 들어 각기 장기 기사와 건축공이 그 일에 더 유능한지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이 더 유능한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가 각기 기사와 건축공이 더 나은 상대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와 마찬 가지로 장기를 둘 때이건 벽돌을 쌓을 때건 키타라를 연주할 때 건 그 일에 능한 사람들이 쓸모 있는 것이지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로써 정의의 용도와 획득과 관련하여 계약과 거래의 경우에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한계가 드러난다.

 

[333c]

*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금전 관계 즉 뭔가를 공동 구매하는 경우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금전 관련 협력관계가 두 사람이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협력관계πρὸς τὸ χρῆσθαι ἀργυρίῳ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경우는 제외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함께 말을 사거나 팔 경우 정의로운 사람보다 말에 대해 더 잘 아는 전문가가 협력자κοινός로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다시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즉 돈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의 경우를 꺼내든다. 여기서 ‘금은을 함께 이용해야하는 경우’ὅταν δέῃ ἀργυρίῳ ἢ χρυσίῳ κοινῇ χρῆσθαι란 금화 또는 은화로 뭔가를 구매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경우 이를테면 은행업이나 금융업 같은 협력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금전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란 ‘금전이 소용이 되지 않은 그런 때’ὅταν ἄχρηστον에야 정의가 쓸모가 있다χρήσιμος고 말하는 꼴임을 지적한다.

* 말ἵππος은 당시 부유층이나 거래할 수 있는 고가품에 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문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소용없는ἄχρηστον 그런 때에 정의가 소용되는χρηστον가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서 ‘소용없는’의 원어는 ‘소용되는’χρηστον(chreston)’에 부정어 ἄ가 붙은 ἄχρηστον(achreston)이다. ἄχρηστον은 ‘쓰지 않음’(unused)‘과 ’소용없음‘(useless)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쓰지 않을 때에는 쓸모가 있게 되겠군요?’ἡ δικαιοσύνη ἐν ἀχρηστίᾳ χρήσιμος(333d)라고 말할 때는 ἄχρηστον을 또 ‘쓰지 않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가지 다른 뜻을 가진 ἄχρηστον이란 말을 이용한 소크라테스의 말놀이인지 아니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쓰지 않음’은 곧 ‘소용없음’임을 말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나타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어쩌면 돈의 보관과 관리만으로 돈을 버는 당대 신흥 은행업이나 고리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냉소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쓰지 않음’과 ‘쓸모없음’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333d]

* 결국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에 정의가 소용이 있다는 주장은 마치 낫이나 방패, 리라를 보관만 하고 있을 때에나 정의가 소용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정작 쓸 때가 되면 정의가 아니라 포도나무 가꾸는 기술이나 중무장 병기사용술ὁπλιτική, 시가 기법μουσική이 쓸모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결국 이러한 이치로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란 ‘그 각각의 것을 ’쓸 때‘ἐν χρήσε에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가 ’쓰지 않을 때‘ἐν ἀχρηστίᾳ나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그다지 ‘요긴한 것’τι σπουδαῖον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듯 쓸모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그리 내세울만한 정의관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전개된 이상의 문답들은 상대가 특정 사례를 통해 논변을 펼 경우 오히려 그 주장과 모순되는 다른 사례들을 최대한 두루 제시하여 그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gchos)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전개된 논박이 갖는 의미 등 몇 가지 종합적으로 음미할 사항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

“근대 여성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⑨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17.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9강. 근대 여성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강연 : 이현재(서울시립대 교수)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가부장적 가족 질서와 친밀성 영역의 사적 억압을 정치적 해방의 요구로 전환시킨 여성운동의 의미를 현대 한국의 현실에서 재음미 해본다.

 

도대체 어떻게 가부장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존속될 수 있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근대적 이념이 널리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성차별은 (그 형태와 방식만 달라졌을 뿐) 지속되며,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사회구조와 제도, 사고방식 등은 아직까지 건재한 것일까요? 혹시 그 원인이 근대적 “사회 계약” 자체에 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의문을 제시하며 이현재 교수의 강연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토마스 홉스, 존 로크와 같은 계약론자들의 이론에 은폐되어 있는 성적 계약을 폭로하고, 사회 계약의 한계와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한 캐롤 페이트만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왕권신수설과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전통적인 입장과 다르게, 당시 사회 계약론자들은 군주권과 부권보다는 (자유를 중심으로 한) 시민적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여성들의 권리는 누락되거나 배제되었고, 그러한 차별은 자유로운 동의(계약)라는 미명 아래 정당화 되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근대 계약론자들에게조차 여성들의 권리는 침묵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사회 계약의 과정에서 성적인 종속은 은폐된 채 은근슬쩍 넘기게 되고, 그래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성적인 종속을 수용하게 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대적 사회 계약 자체를 부정하고 국가 또는 정부를 뒤집어야 할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다른 점에 주목해 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사회 계약론자들, 예컨대 홉스나 로크의 이론에서 (그 치명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얘기되는 방식 말입니다. 그들의 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이상 여성은 천성적으로, 혹은 본래적으로 예속되거나 노예 상태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그렇게 명령하지도 않았고,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성들 역시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습니다. 다만 사회 계약의 과정에서, 즉 사후적으로 가부장적인 지배에 놓이게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여성들의 예속과 억압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도출됩니다. 이처럼 근대적 사회 계약 이론이 가지는 모순과 갈등의 지점을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현존하는 질서의 자명성을 깨뜨리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존하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것에 대한 저항도 가능할 것일 테지요.

베티 프리단(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4.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下)

“두려움을 떨치고,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변화로 나서자 ”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프로이트와 마거릿 미드를 비판하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교육받은 현대 미국 여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초자아를 만들었다. 바로 여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하고, 여성의 선택과 성장을 방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게 하는 새로운 ‘당위성’의 폭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베티 프리단은 미디어의 영향력을 짚으며, 대부분 남자로 이루어진 여성 잡지 편집자가 행복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선전하고 전파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화 형성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학계의 이론이었다. 프리단은 특히 대학교육의 교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명의 사상가를 겨누어 비판한다. 그 두 사상가는 지크문트 프로이드와 마거릿 미드이다.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과학 교육 민주주의 정신에 의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편견의 이론적 근거를 프로이트주의로 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여성 해방 운동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고, 해방된 여성의 관념에 기여했기에, 여성들은 오래된 굴레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 01. 09 – 1986. 04. 14)도 지적하듯이,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권위를 부여하여 여성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시공간적 한계를 지적하며, 그 이론을 상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여성성의 본질에 남근 선망(penis envy)이라는 이름붙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빈이라는 지역에서 계급적으로는 중상층 여성 환자를 남성의 시선에서 관찰한 산물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실제로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그 시대의 여성을 진단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무비판적으로 프로이트가 설명한 여성성을 마치, 초시공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프로이트가 보편적인 인간성의 특질로 묘사했던 것은 19세기말 어느 유럽 중산층 남자와 여자의 특성”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프로이트 이론의 주요한 전제가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자라난 가정 환경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자기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평생 복종하며 살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유대 집안의 독재적 권위로 집안을 다스린다.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이러한 환경에서 첫 아들 지크문트를 특별히 사랑한다. 프로이트 역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를 질투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부른다. 프로이트 자신이 어머니의 태양이기에, 프로이트의 욕망에 따라 집안은 배치된다. 누이의 피아노 연습 소리가 연구 방해된다고 투덜거린 후, 피아노가 치워지고 음악가의 꿈을 소망한 누이의 기회는 사라진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상황을 여성의 입장으로 보지 않고,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여성의 본성으로 여긴다. 프로이트의 부인인 마르타 역시, 그의 소망대로 사랑스런 어린아이와 같이 자랐고, 그러기에 프로이트가 결혼한다. 그는 배우자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젊고 귀여운 애인, 언제가지나 늙지 않고 한주 정도만 늙은 것 같아야 하며, 모든 신랄함의 흔적을 재빨리 지울 수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결국 프로이트의 이론은 소년의 눈으로 시작되어 결국엔 남자의 눈으로만 설명되는 것이다.

프리단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미국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까닭에 관해,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실상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로이트 심리학은 인간의 이상행동에 대한 분석의 틀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빚어낸 고통에 대한 치유로 제시되고, 문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한 도피 통로이자, 미국의 새로운 종교가 된다. 이에 따라 여성성의 신화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판단이나 대중잡지를 통해 미국 여성의 생활”에 파고든다. 과학적 종교인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론의 근거로 자리 잡고 ‘여성성의 신화’를 공고히 하면서, 여성을 그 스스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는 가부장제에게 보호받아야 할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한다.

프리단은 마거릿 미드 역시 문화 인류학을 프로이트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어 연구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마거릿 미드는 “왜 우리는 기술이 발달했는데도 미국의 여성들은 석기 시대로 후퇴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글을 신문에 실지만, 본인의 저작이 그러한 풍토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미드는 인류학 연구의 성과를 통해 프로이트 이론을 보편인류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일조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기원을 성립시킨다. 생산성의 측면을 남성적인 것, 자궁을 수동적 수용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즉, 미드는 현대의 상태나 과거 상태를 당위적 상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프리단은 미드의 이론을 비판하며, 아기를 갖는 것이 인간성의 성취의 절정이고, 생식이 인간 생활의 중요하고 유일한 것이라면, 왜 자궁 숭배가 없는지 되묻는다.

프로이트의 여성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마거릿 미드의 관점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 50-60년대 미국 여성의 이미지는 한정적인 협소한 틀거리 안에 갇히고 말았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정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말하며 여학생들 에게 천체를 관찰하거나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하라고 격려하는 대신에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교육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다양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맞는다.

 

  • 가정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포로수용소

 

결국 이러한 신화는 미디어가 아름답게 포장하는 안락한 미국 중산층 가정이라는 이상적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프리단은 이 가정을 안락한 포로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가정을 포로 수용소로 설명하는 이유는 실제로 포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과 가정 주부가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단은 “정신 분석자이자 교육심리학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이 1939년 다하우 집단수용소와 부겐발트 집단 수용소에서 죄수로 수감되어 있을 때 했던 연구”를 언급한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자는 수용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에도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포로 수용소는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개성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특성이 없는 존재로만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수용소는 수감자에게 수용소 세계만을 유일한 현실로 만들고 원초적인 육체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도록 한다. 이로 인해, 수감자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잊어버린다. 이 조건은 미국 주부들에게 자아 정체성 상실시키는 조건과 비슷하다.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부들도 새로운 상황에 대항하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수동적인 존재로만 머물면서 주체적 의식을 갖지 않는다. 이는 약한 자아만을 유지한 채 관계성에서 단절된 이기심에 곧장 빠질 뿐 아니라, 적극적인 목적이나 야망, 이익을 잊어버리고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무력하며, 바깥세상을 향한 활동에서 후퇴한다.

또한, 베티 프리단은 50-60년대 아이들의 정서장애가 증가하는 현상과 가정이란 포로수용소에 갇힌 주부들의 상관관계를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어린이 가 여성성의 신화에 의해 무기력해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상호파괴적인 공생으로 나아가고, 이는 다시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 악순환으로 구축된다. 특히 소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소녀들은 학교와 현실에서 치루는 시험을 기피하고, 결혼하면 결국엔 진정한 목적과 만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에 순응하면서 이른 나이에 결혼하도록 선동하는 사회에 따른다. 소녀들은 어린애 수준에 멈춘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어머니에게 자라난 아이 역시 개성을 갖춘 존재로 자라기 보다는 환상 속으로 머물 뿐 아니라, 그 딸 역시 또 다시 최악의 희생자가 된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제시한다. 남들 보기에 번듯하고 부유한 삶을 살며 남편이 대기업의 높은 직위에 있는 가정 주부는 딸을 자신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하게 하고 자기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남편은 바쁘다는 명목하에 사회적 지위와 자신의 직업적 성취에 몰두할 뿐이다. 그럴수록 가정주부는 아이들의 삶에 집착하고, 특히 이 주부에게 딸은 일종의 사물, 즉 또 다른 자아 의탁의 대상에 불과하다.

“가장 나쁜 것은 제가 제 배로 낳은 아이들을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전 아이들을 미워합니다. 아이들에겐 앞으로 자기들의 삶이 있지만, 전 이미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리단은 이렇게 수동적인 의존에 갇힌 주부와 아이들 사이에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이 증가하는 징조를 목격한다. 해결책은 어머니들에게 아이들을 더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과 아이들에게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여성성의 신화의 역설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또 한 여성들이 더 여성적이 되도록 촉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는 아이들과의 관계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더 수동적으로 성장시키는 의존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기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도록 사회는 용인해야 하며, 여성이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오로지 여성성의 신화를 일소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존재이자, 자식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남편이나 아들을 통해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이 필요하다. 이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풍기는 병적 징후로부터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된다.

 

  • 주입된 여성성에서 벗어나, 2세대 페미니즘의 포문을 열다

 

프리단이 『여성성의 신화』에서 전달한 메시지는 여성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66년 폴리 머레이, 케이틀린 클라렌바흐, 도로시 헤너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30명의 여성들이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설립한다. 창립 멤버중 한 명인 프리단은 NOW의 창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창립 선언문은 “모든 여성을 위한 진정한 평등”을 요청하고, “평등하고도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프리단은 미국 최대의 여성운동 단체인 전미여성기구(NOW)를 비롯, 전미낙태권행동리그(NARA), 전미여성정치회의(NWP)의 창립자가 되어, 낙태, 출산 휴가권, 승진과 보수에서의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을 펼친다. 『여성성의 신화』의 저 자에서 더 나아가 페미니즘 운동가로서 베티 프리단은 우뚝 서면서, 직장에서의 성차별 폐지와 임신중단권 운동,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 등을 펼친다.

베티 프리단 덕분에 정치인들이 여성의 불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1963년 여성의 상태를 검토하기 위하여 임명된 위원회는 불평등의 종식을 건의한다. 이에 대한 입법이 뒤따랐으며, 1963년에 디 이퀄 페이 액트 오브 1963(The Equal Pay Act of 1963, 1963년 임금 평등법)은 여성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는다고 명시한다. 프리단의 문제제기는 성평등적 교육 확대와 직장 내 법 ·제도 개선으로까지 이어져 여성의 사회진출을 늘이는 데 이바지한다.

NOW의 전 의장이기도 한 킴 간디는 프리단의 책에 관해, “삶의 실질적인 다른 무언가를 꿈꾸던 여성의 사고를 열어주었으며, 그런 생각들을 비밀스럽게 숨기고 살아온 여성들에게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도 더 나은 삶을 꿈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평가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의 파도의 제일 높은 마루에 있는 나우는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한다. 나우의 활동가인 테리 오닐은 미즈와의 인터뷰에서 “나우는 항상 다양한 중요한 이슈의 현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면서 “페미니즘이 미국의 규범(norm)이 되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우는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헌법에 의해 낙태를 처음 인정했던 1973년 ‘로우 대 웨이드’와 ‘도우 대 볼튼’ 소송 현장뿐만 아니라, 1975년 신용기회균등법, 1978년의 강간피해자보호법과 임신차별금지법 등 중요한 양성평등 헌법수정안(ERA)의 법안 통과의 자리에 함께 한다. 1986년부터는 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운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합하여 매년 3월 미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3월 여성 인권을 위한 행진’을 조직한다.

또한 나우는 1971년엔 성소수자(LGBT) 지원을 공식 발표하며 성소수자 인권 투쟁을 공식 선언한 첫 단체이기도 하다. 나우는 여성운동을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최초로 시도한다. 중앙 조직이 지침을 결정하고 각 지역 지부들이 나우를 지원한다.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전국으로 여성운동이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역의 활동(actions)이 운동(movements)을 만든다”고 설명할 수 있는 이 방식의 성과로, 오늘날 나우는 50개 주 전역에 500개 이상의 지역 및 대학 지부를 두고 있다.

 

  • 여성성의 신화의 성과와 그 이후

 

“역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앨빈 토플러

“이 책은 1963년 현대 여성운동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 회조직을 영구히 바꿔버렸다” -뉴욕 타임즈, 베티 프리단 부고 기사 중-

사회가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들을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만들고 억압하는지 밝혀낸 『여성성의 신화』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픽션 책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여성 운동의 선구자였지만 프리단에게도 일정 한계가 존재한다. 프리단은 『미즈』(MS)를 창립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끄나풀이며 미모를 무기로 여성운동을 독식하는 스타 페미니스트’라 공격할 뿐 아니라,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급진적인 여성 운동가 수잔 브라운 밀러는 그를 ‘가망 없는 부르주아’로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이론과 행동은 가정과 직장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우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적이다. 인종, 성적 지향성, 계급 등의 여성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프리단 자신과 유사한 여성들의 문제에만 착목한다는 점에서 ‘중산층 백인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1981년 저서인 『두 번째 단계』에서 『여성성의 신화』가 가정과 가족에 대해 너무 신랄한 분석을 했다는 비판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우리의 실패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간과에 있다”고 서술하여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의 주장을 뒤집기도 한다. 더 나이가 든 뒤에는 건강과 젊음에 몰두하면서 페미니즘을 등진 채 노인 문제를 다룬 책 『노년의 샘』(1993)을 쓰면서 죽음에 대한 혐오, 젊게 사는 비법을 전파하기도 하면서 논쟁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출간 이후 다양한 논의 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어판 해제를 쓴 여성학연구자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성의 신화』는 지구상 ‘모든’ 여성들이 교육, 법, 고용, 경제적 지위 등 공적 영역에서 평등을 획득하는 ‘그날’까지 유효하다. … 이 시대 여성들의 근본적 고민은 여전히 남성과의 불평등 때문이다. 단지 ‘선택’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운다.”

프리단의 이후 행적과 상관 없이 『여성성의 신화』는 이름 붙일 수 없던 여성들의 문제를 해명하고,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변하지 않는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는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길 위의 우리 철학』 출간 기념 : 알라딘 인문학 스터디 『길 위의 우리 철학』 릴레이 특강

안녕하세요? 한철연 신간 소개와 함께 책 저자들의 직강 강좌가 있어 소개드립니다.

지난 9월 10일 『길 위의 우리 철학』(메멘토)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현대철학분과 구성원들이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 연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서로 모여 머리를 맞대고 써낸 결과물입니다.

최시형부터 안호상까지 근대 지성 13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의 철학과 사상을 조명하고 쉽게 전달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최시형, 방정환, 장일순, 여운형, 한용운, 박은식, 안창호, 신채호, 나철, 박치우, 신남철, 현상윤, 안호상 이상 13인이 우리의 현대사에 남긴 곳곳의 자취를 직접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책 뒷부분에는 이들 인물의 추천 답사코스 지도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것이 곧 우리의 발걸음이 된다는 생각으로 일독 추천합니다.

그리고 아래 알라딘과 도서출판 메멘토 그리고 마포평생학습관(강의장소)에서 주최하는 저자 직강 강좌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래 웹자보를 확인하시고, 맨 아래 빨간 글씨 신청방법에 따라 신청하시면 되겠습니다.

많은 신청 바랍니다~!

※ 신청 방법 :

http://blog.aladin.co.kr/culture/10367309 이 주소로 접속하시어, 알라딘 로그인 하신 후

댓글로 강연과 신청인원, 신청이유를 달아주세요.

 예시) [1강/2명] 저자에 대한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시민의 탄생”(2)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2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 편집주간 드리는 말씀 : 이 후기는 한철연 네트워크 시민대학 2기 프로그램입니다. 처음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아홉 번째 강좌의 후기로 제목을 올렸으나 잘못되어 수정합니다.  시민대학 1기와 2기는 강좌 주제는 같으나 강사 선생님과 강의 내용은 차이가 있음을 알립니다. 2018. 9. 27.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2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17.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1강.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시민의 탄생(2)

 

강연 : 현남숙(한신대 강사)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 국가를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현재 거의 모든 국가의 정치체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형태와는 매우 달랐지만, 이와 같은 정치체제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이 민주주의를 발명한 배경과 그 실행 방식, 사상적 핵심을 살펴보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polis)’라는 아주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 민주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발생했던 곳은 아테네였습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발생한 배경에는 시민계급의 형성이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시민계급은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과정에서 국방력을 위해 결성되었지요. 시민들은 자신과 자신의 도시(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고, 결국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 생겨난 ‘내 도시는 내가 주인’이라는 신념이 민주주의의 배경이 된 것입니다.

 

한편 아테네의 정치적 공간인 아고라(토론장)와 프닉스(민회장)에는 아테네 시민이기만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여러 의제를 가지고 프닉스에 모여, 다 같이 의결했다고 합니다. 아고라는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장으로, 소크라테스가 자기 변론을 했던 공간으로 유명한데요. 아테네 ‘시민’만이 참석할 수 있었던 민회와는 달리, 아고라에는 ‘시민’에서 배제된 여성과 외국인, 노예도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의 민주주의는 무엇을 지향한 것일까요? 현대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 제작, 행위로 분류하여, 그리스 민주주의를 ‘행위’에 해당하는 인간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하는 생존을 위한 활동이고, 제작은 효용성을 위한 활동입니다. 하지만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활동으로서, 서로 다른 인간들이 ‘언어’를 매개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질적 복수성 위에서 공적 행복을 이루는 의미 있는 활동인 것입니다.

 

그리스 민주주의는 현대 정치에서 여전히 중요한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 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토론을 통해 의결에 다다르는 고대 그리스의 심의민주주의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요. 반면에, 다른 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는 계급적 불평등, 권력 관계 등 현실적 실존 조건을 배제한 채 동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모든 시민의 참여’를 표방하였으나, 사실상 성인 남성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치적 영역과 가정영역을 엄밀히 구분하여, 전자의 중요성만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서 그리스 민주주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일반 시민의 지배가 엘리트의 지배보다 낫지 못하다며 그리스 민주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는 고대 그리스의 원형을 참조로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