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유리의 성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2

유리의 성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깨어질 듯, 깨어지는 틈새로

작은 꽃이 스스럼없이 피어난다.

한 때는 흙이었고

한 때는 바람이었고

한 때는 길이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유리는

타인의 길에 의지할 때 깨어진다.

스스로 자라는 길에는

작은 씨앗이 보송보송 피어나고

옹기종기 모인 자갈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는다.

나는 곧 타인의 끝에 서있다.

나는 다시 타인의 시작에 서있다.

 

2017. 6.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균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하면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유리처럼 단단했던 그 벽이 투명해집니다. 우주를 이해하면서 작은 꽃이 피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시원함도 느낄 수 있는 자갈도 만납니다. 작은 씨앗들이 모이고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은 변화의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두꺼웠던 벽은 흐려지고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는 유리의 성을 깨고 우주를 항해합니다.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이지

 

1.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을 선고하였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부여된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고 헌정질서를 유린하였기 때문이다. 선고를 하였던 재판관이 모두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는 헌법에 있고, 그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은 바로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파행적인 정치체제와 국정운영이 낳은 폐단을 버텨내는 것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고단한 일상에 함몰되지 않았다. 자기 삶에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의식은 시민의 촛불이 되어 광장을 조용히 밝혔고 강하게 연대하였다. 이를 두고 촛불혁명이라고도 하고 시민혁명이라고도 하며 민주주의의 승리를 감격해한다. 충분히 감격할 일이다. 그러나 혁명은 무혈이건 유혈이건 파괴를 본질로 한다. 이제 무너뜨린 그 자리에 건설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감격에 취해있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너무 많다.

 

탄핵심판선고 / 광화문촛불
(사진출처: 연합뉴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의 탄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탄핵된 대통령은 또 있었다. 바로 이.승.만. 우리는 대부분 그를 ‘초대대통령’으로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60년 4월까지 3대에 걸쳐 연임한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그 때 이승만은 탄핵된 것이 아니라 하야(下野) 형식을 취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으로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이가 3명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손병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이와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이 기획되었다(<조선독립신문>제2호, 1919년 3월 3일자 보도). 그리고 국내외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그 가운데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정부가 가장 먼저 임시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1919. 3. 21). 이 곳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 외에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던 임시정부가 3곳이 더 있다. (당시 여러 임시정부 중 한성정부(1919. 4. 23)에서는 대통령격인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후 국내외에 다수로 분열되어 있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하나의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게 된다(1919. 9. 6). 통합되기 전 다수의 임정 가운데 한 곳이었던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에 수립하면서(4월 13일 언론에 공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처음에는 내각책임제였는데, 이후 통합하면서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전문을 포함한 8장 57개조의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었다(1919. 9. 6).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는데, 이 헌법이 보장하는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손병희 다음에 대통령으로 불린 두 번째 인물이라면, 세 번째가 박은식이다. 1920년경 박은식은 독립운동가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임정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를 두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박은식을 차기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임시대통령 불신임안’, ‘임시대통령 유고안’, ‘임시대통령 탄핵안’ 등이 걸려 있던 이승만 문제를 일단락지은 후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된다(1925. 3). 그러나 박은식은 곧바로 개헌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신설해 내각책임제로 바꾼 후 5개월간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우리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불린 인물은 없었다.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셈이다. 통합임시정부 초대대통령과 대한민국정부 초대대통령.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초대대통령으로서는 탄핵당했고, 대한민국초대대통령으로서는 하야 후 망명하였다.

 

손병희 / 이승만 / 박은식
(사진출처: 네이버)

 

3.

20세기 우리의 독립운동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하나는 외세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자주독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정치사회체제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왕조체제와 신분질서체계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물론 군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모든 백성들이 이른바 시민의식을 고취할 만한 확장된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데에 요구되는 이념과 체제는 밖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주어졌다. 백성들은 여전히 신분제의 굴레 속에서 타고난 신분적 제약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통치체제에는 군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민주의 개념과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정부형태의 수장도 왕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계몽과 교육운동에 헌신했었던 사람들이 많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역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학교 설립과 교사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일제의 침략위협이 강하게 압박해올수록 그는 개혁론을 주창했었다. 제도와 형식의 개혁 이전에 국민 개개인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사회에서 책임 있게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하는, 일종의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군주제 몰락 이후 민주공화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였기에, 국민 개개인의 의식의 개화가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감당할 수 있는 의식이 자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교육은 수단으로서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배계층이 전유하다시피 하였던 교육의 대상을 확대하고 어려운 한문이 아닌 국문을 사용하여 속도감 있는 교육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통적 유가지식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촉구한다. 본래 유학의 정신은 군권을 존중[尊君權]하는 데에 있지 않고 백성을 중요시하는[民爲重]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전통성리학자들이 갖는 제왕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 “공자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이 학문의 공덕을 발휘하여 백성에게 행복을 주고자 한다면, 이것을 개량해 맹자의 학문을 넓혀서 인민사회에 널리 미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전통적 사고방식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민주공화적 의식으로의 개혁을 도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고의 바탕에는 양명학이 있다. 그의 개혁론은 양지가 주체가 되는 실천적 변혁이다. 더불어 그는 의식의 개혁과 성장이 선행되지 않은 채 제도와 형식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새로운 제도와 형식은 구체제 의존적인 의식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것임을 예상하고 그 위험을 경계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한 후에 박은식은 역사서 집필에 주력하며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를 적극 후원하였다. 그가 저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는 1864년부터 1911년까지 한국의 애통한 역사, 그러니까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는 최근의 우리 역사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읽고 제대로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 책은 국내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고 일제는 이에 당황하여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하게 된다. 1920년에 저술한 『독립운동지혈사(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전투까지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을 ‘우리나라 평민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의병을 자세히 다루면서 민중의 역할과 민권의 중요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이처럼 혁명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3.1운동의 의미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단의 기관지를 맡았고,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있는 상해거류민단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는 통합된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민주와 공화의 정신을 민중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체제를 고민하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박은식이 작성하고 한국 민족대표 26인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서.  
(출처. 네이버)

 

4.

탄핵된 대통령들은 대통령을 왕의 다른 이름쯤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의 이름으로 군림하던 군주를 끌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패한 독재자를 처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주공화의 정신을 실현하는 일이다. 본래적으로 평등한 이들이 자유롭게 연대하여 본래의 평등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것이다.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군주가 통치하는 왕조체제는 이미 종식되었다. 그러나 체제는 변하였어도 의식이 여전하다면 유사왕조체제가 운영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은 끈질기게 고민하였다. 독립이후 건설해야 하는 민주공화적인 대한민국을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변형된 유사왕조체제가 거듭되었다. 또한 역시 자주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끈질기게 분투해왔다. 그리고 지금 오랜 왕조의 종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민주와 공화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기고자: 이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화여대)

왕양명 철학과 최한기 철학을 연구하여 석박사를 받았다. 철학은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철학 연구도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 다음에는 “최시형과 장일순”(구태환) 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 박영미

 

스트롱맨의 허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 11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스트롱맨의 허구

 

책 『파퓰리즘』에 대한 서평 : Cas Mudde and C.R. Kaltwasser, Populism, Oxford, 2017

 

1. 파퓰리즘이라는 책

 

최근 들어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도 가끔 들려온다. 요즘 그런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대체로 자기와 다른 입장의 정치인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파퓰리즘의 말이 그만큼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다음의 세속적 어투에 연관되어 있다. 먼저 첫째 대중에 영합한다는 어투를 상징한다. 둘째 대중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정치가의 권력을 은유한다. 셋째 파퓰리즘은 대중에 따라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 반대로 대중과는 격이 다른 정치엘리트만의 권력양상임을 은근히 함의한다. 이런 나의 직관적 이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요사이 출간된 책 한권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파퓰리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그래서 그 책을 소개할 겸 이렇게 리뷰를 하게 되었다. 그 책 이름은 이 쪽 분야를 오랜 동안 연구해온 조지아대학교 머디 교수가 펴낸 『파퓰리즘』이다.

 

파퓰리즘의 정치인이라면 대뜸 유럽의 우파 지도자나 남미의 죄파 출신 대통령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 정치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만큼 파퓰리즘이라는 용어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의미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오히려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언어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파퓰리즘의 고유한 의미는 없다는 사회과학적 입장도 강한데, 어쨌든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서 파퓰리즘의 정치 양상을 일반적 정치 특징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어서 파퓰리즘을 단박에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의도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해소의 실마리를 찾았다.

 

2. 해방적 파뮬리즘

 

파퓰리즘은 인민the people과 엘리트the elite 계층을 구분하는데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파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좁은 의미로 정의할 때 파퓰리즘이란 부패한 기존의 엘리트 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대중의 일반의지가 자생적으로 집결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p.6) 인간과 사회의 특성에 대한 규범화된 신념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면 파퓰리즘도 충분히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갖을 수 있다. 파퓰리즘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간주했지만, 파시즘이나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같은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수준에 있다. 저자의 구분을 서평자 마음대로 다시 번역해 본다면, 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고체성 이데올로기thick-centered ideology라고 붙일 수 있고, 파퓰리즘의 이데올로기는 액체성 이데올로기thin-centered ideology로 비유될 수 있다(p.6).

 

파퓰리즘의 원형은 봉건제 왕권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하고자 했던 i) 해방전선이었으며 독재로부터 대중의 인권을 보호하려했던 ii) 투쟁기반 역할을 했었다. 독재저항에 나섰던 아르헨티나 정치이론가 라클라우(Ernesto Laclau)도 말하기를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파퓰리즘을 이 책의 용어와 무관하게 해방적 파퓰리즘이라고 부르려 한다.

 

우리에게 해방적 파퓰리즘은 조선말 농민혁명으로 시작한 동학과 조선후기 양명학과 대종교 등 일제 강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형이었다.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재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은 대부분 해방적 파퓰리즘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제주의가 무너지는 19세기 말과 민주주의가 들어서는 20세기 초를 연결하는 데 있어 파퓰리즘의 역할은 큰 의미를 지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파퓰리즘과 민주주의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19세기 말부터 확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p.40) 불행히도 20세기 중후반 소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이 휘날리면서 파퓰리즘은 다른 색깔로 드러나게 되었다.

 

3. 폐쇄적 파퓰리즘nationalist populism

 

파퓰리즘의 시작은 억압된 피플(백성, 국민, 민중, 인민, 대중)을 해방시킨다는 아젠다에서 출발한다. 반면 요즘 거론되는 파퓰리즘은 정치시스템의 한 양상으로 간주되곤 한다. 파퓰리즘이 이미 현대 미디어와 정치에 제한된 규범적 용어라는 입장을 이 책은 제시한다(p.6)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상황에 더 잘 사용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은(4쪽)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유민주주의 범주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적-정치적 양상이라고 보아도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왕권형 권위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오히려 사회적 민주주의보다 퇴보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나도 동의한다. 저자가 말하는 파퓰리즘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현존하는 파퓰리즘은 외국인 혐오증과 반이민 정책과 연관된 유럽의 파퓰리즘과 파벌주의와 경제적 파국에 연관된 남미의 파퓰리즘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트들이 민중을 위험하고 부정직하며 상스럽다고 믿으며, 동시에 엘리트는 도덕적으로 민중들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성에서도 우월하다고 믿는다.(p.7) 따라서 엘리트 정치가는 대중을 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엘리트 정치가들이 나서서 대중을 조정하는 정치는 대부분 독재정치로 이어진다. 엘리트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방적 독재 정치양식을 변명하기 위하여 파퓰리즘을 선전도구로 악용한다. 엘리트 정치인 혹은 정치집단이 대중 일반을 잘 살게 해줄 수 있다고 호도한다. 자본의 권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엘리트 정치집단과 엘리트 경제집단이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상호 결탁된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와 권력의 잔여물을 대중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환상의 기대치를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한다. 엘리트 정치와 낙수효과가 서로 상생하여 오도된 파퓰리즘이 형성된다.

 

이러한 엘리트중심 파퓰리즘은 해방적 파퓰리즘이기보다는 정반대의 폐쇄적 파퓰리즘에 가깝다. 이 책도 그런 폐쇄적 파퓰리즘을 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파퓰리즘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에 있다. 첫째 1970년대 한국의 군사혁명, 태국의 친위혁명, 남아메리카의 해방혁명 등으로 새로 형성된 신생 독립국가와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파퓰리즘이다. 둘째 최근 전세계적 빅이슈가 되고 있는 IS 테러와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오는 무슬림 난민에 대응하는 정치적 양식으로서 파퓰리즘이다. 둘째 파퓰리즘은 최근의 난민증가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그 단초는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독일 통일이 된 1989년 이후 유럽국가의 변화에 있다. 이 책은 2017년 초 출간되었지만, 초고는 트럼프 대통령 이전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트럼프 정권의 파퓰리즘에 대해서 다룬 것은 별로 없다. 지난 2012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후보였던 사라 페일린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조금 언급했을 뿐이니, 이 책의 시의성은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폐쇄된 파퓰리즘은 내가 붙인 이름이고, 학술적으로는 주로 민족주의 파퓰리즘natioalist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혹은 국가주의 파퓰리즘으로 번역해야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유럽국가나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다중민족으로 형성된 미국에서는 민족주의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국가주의로 변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America First” 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트럼프는 극단의 국가 이기주의를 채택했다. 결국 그가 대중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트럼프는 충분히 파퓰리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트럼프의 파퓰리즘은 전형적인 폐쇄적 파퓰리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4. 파퓰리즘 정치가의 세 가지 형태

 

파퓰리즘의 정치가(파퓰리스트)는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소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외부 파퓰리스트, 내부 파퓰리스트 그리고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의 세 형태를 말한다. 이들의 차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범례를 통해 그 차이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1 외부 파퓰리스트 : 외부 파퓰리스트는 주류 혹은 엘리트 정치그룹과 연관성이 전혀 없었던 정치 신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치 비주류였지만 기존 정치세력에 신물이 나거나 폐해를 입었던 대중들에게 큰 호감도를 갖고 인기를 얻으면서 주도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경우이다. 전반적으로 드문 현상이기는 하지만, 차베스나 후지모리가 그 사례였다. 칠레의 후지모리 대통령(1990-2000)은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학총장 출신이었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1998-2012)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다. 진정한 외부 파퓰리스트는 정당정치와 제도정치로 안착된 서구유럽에서는 드물고 라틴아메리카처럼 개인적이고 유동적인 정치시스템에서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독재자로 낙인찍혀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p.74)

 

4.2 내부-외부 파퓰리스트 : 이들과 다르게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는 정치적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강한 연관성을 가졌던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외부 파퓰리스트보다 정치적 성공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전후 최장기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70-1983)의 정치적 제자인 하이더 카린티아 주지사(Jorg Haider, 1999-2008)는 국민들의 강력한 인기를 받아 스스로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수상이 되고자 했다.(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으면서 수상이 되지 못했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당시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맥케인John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추천되어 인기 급부상한 사라 페일린과 당시 이탈리아 수상과의 친분관계로 나중에 이탈리아 수상까지 한 미디어 제왕 베르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2008-2011)이 전형적인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들이다.(p.75)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3 내부 파퓰리스트 : 원래부터 정치적 엘리트 핵심이었던 파퓰리스트도 있다. 저자는 이들은 내부 파퓰리스트라고 표현했다. 내부 파퓰리스트는 원래 정당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인연이 없었다가 개인적 등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외부 혹은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와 다르게 내부 파퓰리스트는 대중정당을 만든 후에 포퓰리스트로 전환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부수상 출신 탁신은 자신의 대중정당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상까지 했다. 스위스 보수당 SVP 출신으로서 반이민정책과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대중영합의 인기를 통해 극우대중정당을 만들어 스위스 연방위원장이 되었던 블로커(Christoph Blocher, 2004-2007), 그리고 보수당에서 우파 대중정당을 창설하여 헝가리의 민족주의 파퓰리즘을 내세운 헝가리의 오르반(Victor Orbán) 수상(2010-현재)이 전형적인 내부 파퓰리스트의 사례이다.(p.76)

 

5. 파퓰리즘과 민주주의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이라는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말은 파퓰리즘의 이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파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 절차와 이상을 무너트리는 것이다”라고 프랑스 주지주의 사회과학자 로잔발롱(Pierre Rosanvallon)은 말한다.(p.79) 앞서 많은 사례에서 보여주었듯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의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많다. 민주주의와 파퓰리즘을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견해와 민주주의를 보완한다는 견해는 그 어느 것도 틀리거나 맞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파퓰리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파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하지만 부정적 영향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p.84) 그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의 내용을 저자는 표로 만들었는데, 저자가 만든 표를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파퓰리즘의 부정적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민주주의의 존속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파퓰리즘은 난민과 무슬림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합법화하고 있다. 최근 한국 정치파동에서 속살을 드러낸 폐쇄적 파퓰리즘은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처럼 동원된 파퓰리즘이라는 최악의 병증을 드러냈다. 역사에서 드러났듯 세기말 동학운동과 같은 해방적 파퓰리즘에서부터 <촛불>이라는 자생적 파퓰리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내부에서부터 대중적 공감성이 되살아나 폐쇄적 파퓰리즘의 병증을 겨우 치료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항상 불완전하며, 언제든지 개선될 수 있지만 거꾸로 쇠퇴될 수도 있다. 폐쇄적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덮으면 미래는 암울할 것이며 해방적 파퓰리즘이 건재하면 민주주의는 더 건강해 질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통치 그 자체만이 아니라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도 강조한다.(p.86)

 

6. 스페인, 프랑코 스트롱맨 정권과 그를 수용한 철학자 가세트의 이중성

 

6.1 박정희, 전두환과 맞먹는 프랑코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독일 나치의 도움을 받아 공화파 전선을 물리치고 자신의 승리로 가져가면서 정권을 장악한 1939년부터 그가 죽을 때(1975)까지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사라진 전제주의 왕까지 겸비한 총통의 자리를 차지한 전형적인 독재자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극적인 부역으로 파퓰리즘 형태의 압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코가  30만에 가까운 유아납치, 언론장악, 정적 제거를 하면서도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대중을 강제로 동원하여 자기지지를 하도록 유도해 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대중 지지를 이끌어 낸 결정적인 배후세력은 카톨릭 교회였다. 불행하게도 점에서 프랑코 정권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스페인 근대사를 몇몇 문장으로 아래처럼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 1920년대 카톨릭 교회가 전국토의 93%를 소유했을 정도로 빈부차가 극심했다.
  • 왕정과 기득권 부패에서 해방하려는 시도가 제2 공화정을 탄생시켰지만 곧 무너졌다.
  • 그 결과가 당시 식민지반란군을 제압했던 떠오르는 별 프랑코(당시 대령)군부와 프랑코 군부를 신의 계시인 십자군이라고 치켜세운 카톨릭 교회 및 극우반공산당파가 한 축의 세력이며, 반대 축으로 공화파-좌파-국민세력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 1939년 프랑코 정권은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확장했다. 여전히 파퓰리즘의 이름을 도용했다.
  • 블랙리스트의 한국 문화계처럼 영화, 예술, 등의 문화정책에서 강력한 문맹정책을 시행했다. 상당 부분 프랑코 입장에서 성공적이었다고 그들은 자평했다.(각주1)
  • 프랑코 독재일당은 나중에(1949년) 당명을 민족해방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시효라고 본다.
  •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비로소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각주2)

각주1) 대표적인 사례가 No-Do(영화 시작 전에 정권홍보상영) 강제시행 등.

각주2)  1975년 이후 스페인 민주화 이행과정이 평화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많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적폐 청산과정과 사회적 부작용을 거쳤다. 1975년부터 80년 사이 민주화운동으로 63명의 거리 시위자가 사망하였고, 약 400명이 내부 테러로 희생되었다.(Paloma Aguilar Fernández, “Justice, Politics, and Memory in the Spanish Transition”, in The Politics of Memory, p. 97.)

 

6.2 이를 바라본 철학자 가세트 :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 스페인 ‘생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각주3) 가세트는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이라는 책에서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물론 가세트는 대중을 말하면서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의 부류로 규정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잠재적인 인간의 존재성으로 말했다. 즉 대중은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이 아닌 일종의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대중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세트가 대중을 복종의 당사자며 엘리트를 지배의 주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입장과 견해가 없는 자는 입장과 견해가 분명한 집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 대중철학의 핵심이다. 가세트가 말한 대중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대중은 1) 자신의 의견과 입장이 없으며 2) 권력에 대체로 추종하며 3) 사회문제에 참여하지 않으며 4) 자신의 사람에 치명적인 위해가 느껴지지 않는 한 지배체제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가세트는 말한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가세트가 말하는 대중은 전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세트의 대중은 평균화된 존재(평균대중)들이다 그래서 대중 개인의 의견과 주장은 대중 안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대중은 원래 비속하고 나태하여 이성적인 문제해결에 약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을 잘 이용하는 집단이 바로 엘리트의 폐쇄된 파퓰리즘이다. 대중은 본래의 지배적 권위의 소유자인 엘리트(選良)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대중 스스로 엘리트의 지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의 기괴한 대중론이다. 이러 생각은 프랑코 정권의 무자비한 통치에 대중이 숨죽여만 생존했던 당대의 기억에서 나온 관념적 소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각주3)  오르테가가 <생의 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물리학의 실재(reality)가 아니며, 수학에서 의미하는 실재도 아니며, 플라톤 실재론 철학의 실재도 아니고, 관념론 철학의 관념생성의 실재인 자아(ego)도 아니다. 그의 생의 실재는 인간의 사람 자체이다.

 

7. 스트롱맨의 등장 : 파퓰리즘의 콘트롤센터

 

중남미 정치권에서 보듯 대중과 직접 연계하면서 권력을 집중하는 소위 강한 카리스마 이미지의 정치가들의 출현을 파퓰리즘이라고 한다. 파퓰리즘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수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카리스마 지도자로부터 파퓰리즘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p.97) 이들은 대중과의 연결을 중시하지만 반대자들을 단절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파퓰리스트는 일부 자연사한 사람들 말고 대부분 끝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p.4)

 

스트롱맨의 사례로서 칠레 피노체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칠레의 폭정 피노체트(Augusto Pinochat) 대통령(직위,1973-1990)은 민주화운동 인사 3,000명 이상을 납치 살해했던 박정희이나 전두환과 맞먹는 독재자였다. 피노체트는 1970년 민주의 봄이 피던 당시의 칠레에서 3만여 명 이상의 민주인사들을 살해하면서 정권을 탈취했다. ‘산티아고’의 봄은 정말 짧았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이라는 민중가요로 잘 알려진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íctor Lidio Jara Martínez, 1932-1973)의 기타치는 손목을 잘라버린 피노체트의 악명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악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위선이 끼어있었다. 미국정권이 피노체트를 오랜 동안 지원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는 점이다. 피노체트 역시 스트롱맨의 철권정치를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군중을 동원하여 자기 지지를 표방하도록 하는 폐쇄적 파퓰리즘을 간판으로 세웠다. 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1956-1970), 리비아의 Muammar al-Gaddafi(1969-2011), 이스라엘의 장기집권자 Benjamin Netanyahu, 헌법까지 마음대로 바꾸면서 장기독재를 기획한 터키의 현재 대통령 Tayyip Erdogan을 들 수 있다(p.39).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빠지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흔적이 강한 경우 그 친족인 박근혜 같은 사람도 ‘그냥’ 정치를 향유하게 되는 우스운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의 트럼프나 그를 흉내내는 홍준표의 스트롱맨 양태는 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거짓말을 동원해야 한다. 그 거짓말의 양상은 독재권력기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롱맨 초기에 기만적이었다가 스트롱맨 후기에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전환된다. 자기기만의 스트롱맨 권력기에는 대체로 대중들의 삶의 고통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

 

스트롱맨의 파퓰리즘은 아래의 현상을 드러낸다.

 

  • 조작된 군중동원을 항상 기획하며, 실제로 군중집단유도에 강하다.
  •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확보에 주력한다. 사전 이미지 확보가 안 되었거나 새로운 권력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 이런 미디어 장악이 안 되는 경우 미디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 기존 정치 이데올로기나 경제구조와 이론을 무시하고 그만의 이기주의 기반 정책을 기획한다.
  • 강한 카리스마를 내세워 독단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려 한다. 그들의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우러난 존경심으로서 권위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한 i) 공포심 조장에 기반한 권위이거나 혹은 ii) 대자본에 의한 낙수효과로서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동원된 형태의 권위는 독재권력으로 귀착될 뿐이다. (커크 호킨스)
  • 개인성향을 정치권력에 그대로 반영한다.(personalization; p.77) 권력의 개인적 특성이 현대정치의 일반적 경향이지만 스트롱맨의 개인 특성은 개인의 우상화로 연결될 우려가 높다.
  • 필리핀 두테르테나 미국 트럼프처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기초헌법을 무시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들처럼 파퓰리즘이 권력화되면서 사법권을 무시한 조폭형 정치가 일상화된다.(p.38)
  • 스트롱맨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서열과 계층구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스트롱맨 정권은 원천적으로 평등정책을 거부한다.(각주4)
  • 스트롱맨의 정치는 최후에 원칙이 없어지고 인물만 남는다.
  • 스트롱맨의 정치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엘리트는 항상 적대적 관계를 욕망하고 적 진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스트롱맨의 특징은 어떤 형식의 이기주의 집단과 결합한다.

각주4)  폐쇄적 파퓰리즘은 보수주의 정치양태의 하나로 드러난다. 폐쇄적 파퓰리즘은 말이 파퓰리즘이지 대중 혹은 서민이나 민중의 입장이 아닌 정치엘리트와 경제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행태를 보인다.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과 권력 중심으로 개편되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개악시키거나 단절하고자 한다. 건강보험이나 실업수당 혹은 경제 소외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줄이거나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주의들의 파퓰리즘을 말한다.

 

파퓰리즘을 해방적 파퓰리즘과 폐쇄적 파퓰리즘의 두 양상이 있다고 앞서 말했다. 해방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주체성 혹은 선천적 양심성을 근간으로 한다. 반면 폐쇄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예속성을 파고들면서 대중 혹은 집단화된 개인의 이기주의에 근간을 둔다. 파퓰리즘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중의 개념도 단박에 정의되기 어렵다. 굳이 말한다면 해방적 파퓰리즘의 주체는 피플(인민)이며, 폐쇄적 파퓰리즘의 대상은 대중mass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의미는 주로 종속적이거나 예속적이든지 아니면 집단 내 개인의 정체성도 없고 개인이 모인 집단의 정체성도 없는 경우, 그런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 대중은 무질서를 지향한다는 것이 서구일반의 설명이다. 반면에 피플은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집단의 목적지향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집단을 피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트롱맨은 대중을 통제하는 데 주로 문맹정책 등의 문화적 조정구조를 사용하며, 피플을 통제하기 위하여 무력이나 공포정치를 이용한다.

 

엘리트정치의 부작용인 스트롱맨 출현은 대중의 부정적 의미 즉 예속적이고 무질서 지향의 집단을 통제하며 훈육하고 종속시킬 수 있다는 권력의 형성을 의미한다. 스트롱맨의 특징은 그들의 이기주의에 대중의 욕망을 조정하는 데 있다. 스트롱맨 일반이 보여주는 마조키즘이나 훈육주의는 한 사회의 퇴행성으로 가는 잣대가 된다.

 

피플people과 대중mass의 문제점을 상쇄하고 조절하며 전통 스피노자 철학에서 도입한 개념인 다중multitude 개념은 해방적 피플과 예속적 대중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많이 회자된다. 이탈라이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가 창의한 다중 개념이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성 집합성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나왔지만, 과연 파퓰리즘의 피플을 대체할 수 있는 지는 독자가 평가해야 할 듯하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유철의 유럽방랑기] -3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슬로베니아 남서쪽 끝자락 크로아티아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작디 작은 마을, 피란Piran. 수도 루블라냐에서 5시간,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에서 버스 외에는 변변한 교통수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특히 피란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근처 도시인 코페르Koper에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벅차 오르듯 넓디 넓고, 새파란 바다가 보고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베니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피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피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탈리아 두이노, 미라마레,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이졸라의 아름다운 경관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를 그저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나를 위로해 본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피란으로 들어가는 길, 산비탈을 굽이굽이 넘어 내려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배의 선수처럼 뾰족하게 톡 튀어 나와 있는 마을, 피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유난히 맑은 하늘,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는 마치 아드리아 해가 하늘로 쏟구쳐 나를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노부부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다를바 없다. 들썩이는 할아버지의 궁둥이나, 목을 내뺀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살짝 몸을 비틀어 드리자, 할아버지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들어 상체를 쑤욱 내밀며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지잉…’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쯤 어딘가의 카메라가 정겹다. 그러나 장담 컨데 그 사진엔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반사광에 바깥 풍경은 그저 하얗게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 척!’ 하며 웃으신다.
어린 시절, 아직 남은 필름이 들어있는 사진기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가 이것 저것 찍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저 그 안에 있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24방, 36방을 빨리 채워버려야만 했다. 지금같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현상하거나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생각날 때 클릭해서 보는 그런 시절과 다르다. 무엇이 찍혔을지, 혹은 어떤 필름이 들어 있는지 하는 기대가 있었고, 그 필름이 현상되어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노부부의 카메라를 보니 문뜩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이 싹튼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에 그 수평선 마저 모호한 그 곳에 내가 마치 던져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방파제 끝에 서로 마주한 초록과 빨강색 등대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이 이 방파제에 기대어 저 두 등대를 배경삼아 둘이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 문뜩 떠오른다. 그러니 여기에 로멘틱함도 더해진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데서 셀카를 찍는 건 촌스러운거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그곳을 지나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호수 같이 잔잔하고 깨질듯 맑은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그러자 눈 앞엔 타르티니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 한 가운데에는 피란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비루투오소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타르티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사실 둘러보면 이 곳 마을은 타르티니 일색이다. 광장 입구에는 타르티니 호텔이 있으며, 동상 맞은 편 건물에는 타르티니의 생가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의 동상 뒷 편 언덕 중턱의 성 프란시스 성당에도 마찬가지다. 성당에는 찬송가가 아니라 타르티니가 작곡한 소나타가 하루 종일 흘러 나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타르티니 광장도 마찬가지다. 타르티니 광장 한 가운데서 어린 꼬마의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두고선 타르티니의 명곡, ‘악마의 트릴’을 연주한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하나 둘씩 던져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휘저으며 연주에 집중하는 꼬마 모습이 당돌해 보인다.

 

 

사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르티니의 친구였던 프랑스 천문학자 요셉 랑드의 일기에는 그 이야기가 적혀있다.
음악에 심취한 타르티니는 좋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밤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성직자가 되길 바랬던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그리고 다시 그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그에게 남은 건 음악, 바이올린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티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둠 가득한 곳에서 나타난 붉은 모습의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영혼을 내놓아라. 네가 영혼을 내놓는다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제안을 마르티니가 받은 것이었다. 악마의 제안에 타르티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건내며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 바이올린으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가장 황홀한 연주를 내게 들려 주시오.“

그러자 악마는 그와의 약속에 따라 타르티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악마가 들려준 트릴은 타르티니가 지금까지 평생에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꿈 속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오선지에 옮겼는데,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한다.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한 악마의 트릴, 만약 악마가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장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앙상의 문제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 남북통일? 그 순간 이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이도 많지 않을 터, 그럼 박근혜의 종신형? 영생이나 막대한 금은보화? 그것도 아니면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생환?…

문뜩 동네에서 만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오른다. 아직 볕이 귀했던 영국의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을 만끽 하고픈 마음에 잽싸게 밖을 나섰다. 지금 해가 떠도 5분 뒤 비가 올 수 있는 것이 영국 겨울 날씨다. 시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온다.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과 함께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 한 귀퉁이.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백발의 아시아계 노인이 있었다.
낡디 낡은 테일드 코트에 잘 다려진 흰색와이셔츠, 검정색 등산복 바지에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를 신은 백발 노인. 군데 군데 하얗게 빛 바랜 바이올린은 그 기능이나 할까 싶지만, 그 노인의 활 놀림에 응답하며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노라 외친다. 인상을 쓰다가 살짝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짓는 애잔한 그의 표정은 그 울림에 깊이를 더 하는 듯 하다.
초라하지만 나름 갖춘 그의 복장과 그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객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파란 하늘을 향해 키스를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한다.

“이번 곡은 제 아내를 위한 곡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녀를 대신해 여러분들께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노부부는 다시금 손을 꼬옥 부여잡았고, 맞은편 어린 아이는 그녀의 부모를 꼬옥 끼어 안는다. 아직 찬 공기에 나는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비벼본다.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과 마찰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건 건반악기가 주는 그런 직관적인 감동과는 다르다. 여러 개의 모노코드를 박자에 따라 혹은 화음 만들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찰현악기가 내는 소리는 이보다 훨씬 감성적이다. 그 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눈물이 흐르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의 연주에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악마가 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타나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한다면, 분명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내에게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게 해다오’ 하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애절했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꼬마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뒤로 하고 광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좀 전에 버스에서 마주한 노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손맛이 그리웠던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두 분을 찍어드릴까요? 두 분 같이 서 보셔요!”

할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잡아 끈다.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그녀는 마지 못해 그의 옷자락을 놓는다. 아마도 낯선 동양청년에게 ‘귀중품’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내 핸드폰을 놓았다. 그러자 비로소 되찾은 그녀의 미소.

“할머니! 할아버지랑 더 가까이 붙으셔요. 좀 더! 굿!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저매니~”

‘찰칵, 지잉..’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독일인 노부부, 할머니는 언제나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지는 시기인 봄, 그리고 절정인 여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에 덧붙이며 말한다.

“그래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미리 예약해.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순 없지. 이번 여름에는 두브로브니크!”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한다.
“그래요. 두브로브니크, 갑시다. 그러려면 당신도 계속 운동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들며 여전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노부부에게는 다음 여행, 그리고 그 다음 여행, 또 그 다음 여행이 악마와의 거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는 악마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지금 내가 내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박사학위 정도라 답하지 않을까? 박사논문 서론에 내 연구의 의의랍시고 쓴 거창한 포부는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바이올린 연주나, 늙은 노부부의 다음 여행과 같이 그 다지 로맨틱하지도, 그렇다고 작지만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절실하거나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저 시작했기에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 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갈구하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영원히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 거래에서 이를 요구한다면 그건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부부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바람이 가치 있는 건 그들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 했는가? 내가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 1

 

박영미

 

1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중에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분노를 외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들의 분노와 희망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여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의 촛불 속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기억했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릴 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광장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

 

(국민일보)

 

2

광화문 광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다. 하나는 이순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 나는 촛불 광장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오늘의 박근혜와 어제의 박정희가 오버랩 된다. 광장의 동상이 오늘의 박근혜가 곧 어제의 박정희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에 6미터가 넘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다.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박정희에게는 뛰어난 무장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에 힘쓰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에 폐지될 때까지 누구나 반드시 읽고 외어야 하는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이 주문을 공포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고 통제한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는 이미 계획된 ‘10월 유신’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내용을 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바로 이 시기 <국민교육헌장>의 초안을 기초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5년간 수행하면서 10월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박종홍(1903~1976)이었다.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했던 서양철학 1세대로, 서양철학 1세대 중에서 드물게 전통철학의 현대적 계승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며, 서양철학과 전통철학이 결합된 ‘우리철학’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또한 경성제대부터 서울대학교까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 강단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박종홍이 학문 생애 전체를 통해 노력한 ‘우리철학’의 모색은 의도의 선의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국가권력과 결탁되며 일그러졌다.

 

그가 주장한 ‘부정성-주체의 자각-창조’의 논리는 전통철학과 결합하여 ‘천명-주체의 자각-참여’로 해석되었고, 다시 <국민교육현장>에서 ‘역사적 사명-민족적 자각-민족중흥’으로 구체화되었다. 더 나아가 천명과 역사적 사명은 ‘국가’로, 주체와 민족적 자각은 ‘국민정신’으로, 참여와 민족중흥은 ‘근대화’로 바꿔도 무방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정성’은 역사적 사명이 된 절대적인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주체의 자각’은 교육과 지도로 내면화된 국민의 정신으로 전락하였으며, ‘창조’는 개발 반공 민주 애국 애족을 내용으로 하는 편협한 근대화로 축소되었다.(『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300쪽)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보여줬던 국가의 모습은 이렇게 박정희가 꿈꾸고 계획했던 국가의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 부녀의 불온한 꿈을 저지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 다시 박근혜가 선택(?)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성급한 희망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 개인의 권력욕과 이를 도운 철학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절대 국가가 아닌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갖춘 국가, 복종하는 국민이 아닌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 국가의 강요된 목표가 아닌 개인들의 바람과 꿈을 사회의 목표로 만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열려진 길 위에서 시선을 미래보다는 과거에 두고자 한다. 우리철학, 한국근현대철학은 역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때로는 열려 있지 않은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철학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고 이제는 이에 대한 정리와 성찰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잘못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없다면 철학에서의 ‘종언’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은 한국근현대철학을 소개한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동녘, 2015)의 출간이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고은의 「길」 중에서)

 

기고자: 박영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양대) 

중국 청대 대진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7세기이후 동아시아 철학의 변화와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현대철학과 중국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 다음에는 “박은식”(이지)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0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이번에는 절판된 책 한 권을 소개 합니다)

자평(자기 책 서평) : 최종덕 지음,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03

 

이번 서평은 오래 된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정말 겸연쩍습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인데, 15년 전에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라진 책입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과감히 자뻑 수준의 자평을 올려 봅니다. 책의 마지막 10장 부분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장 제목은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입니다. 과학과 철학, 동양학과 서양학, 고전과 현대를 방황하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헤아려주세요

 

1. 그때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뾰족이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협궤를 과감히 벗어나서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통합과학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2. 연속성을 찾아서

 어릴 적에 멋모르고 천주교 성당을 나가게 되었다. 사춘기의 고민을 풀 수 있는 빛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었다. 선과 악의 경직된 기준을 심사하는 일보다 사랑과 용서를 교회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기독교의 구원이었다.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아주 분명했다. 복잡한 교리 밑바닥에서 공통된 구원의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울 이후 ‘양심’이라는 보조준거가 나왔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준은 깨질 수 없는 성곽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과 지금도 문명과 단절된 아마존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란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의 무차별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 구원은 2000년 전의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이룬 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라는 물음보다는 “당신은 최초를 인정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최초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이라도 철학적 반성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나의 존재를 묻다보면 어느새 최초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듯이 시간적 최초성은 아주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으며, 이제 대학선생이 되어 철학 강의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한 답 같지 않은 적당한 답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있다. 그 뒤에 와서야 최초는 최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내가 하도록 해 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인도철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천주교 수사이셨던 할아버지이다. 교수님에게서는 시간적 최초만 따지지 말고 공간적 최초와 함께 보아야 하며, 인식의 최초가 존재의 최초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직 수사님에게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면서 최초는 최후의 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학문으로 접했던 고전물리학과 분석철학은 나에게 이 세계를 모두 산수算數와 조립의 대상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럽철학을 접하면서 내가 공부한 산수와 조립방식은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 공부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얽매어진 실재 세계의 가능성들을 나의 가슴 안에 담아 주었다. 이 때부터 나의 철학적 화두는 연속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철학 공부의 대상은 인간이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자연의 근원은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 생물학적 자연과 초미시의 물리적 자연의 모습은 적어도 연속성 자체였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자연과학적 대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의 운동과 현상이 바로 연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연속성의 모습을 인간의 한계인 인식의 차원에서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문은 사이언스이어야 한다. 사이언스 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비연속적이거나, 혹은 대상이 비록 연속적이더라도 그 연속성이 비연속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연속적이 아니면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칸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칸트는 그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와 달리 연속성의 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연속성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적 담론으로 다루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오성의 성곽 안으로 비연속성의 세계만 편입시키고 연속성의 세계는 제외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서구 근대철학의 중요한 지위를 얻으면서, 서구에서 비약적인 학문발전이 있게 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구분은 먼저 인식의 오차를 현저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상의 과학과 마음의 형이상학 양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는 비연속성과 연속성의 대비와 유사하다. 흐르는 강물을 떠서 정확한 양을 누구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잔을 이용하여 한잔, 두 잔 또는 세 잔을 떠서 전달한다. 강물이 잔물로 바뀌면서 아날로그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 전달은 반드시 계량 가능한 단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단위화 되지 않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은 오차와 노이즈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다. 반면에 디지털의 정보 전달은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대상을 단위화 하고 나누어 셀 수 있어서 그 전달 효과가 매우 크다. 우선 단위와 단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은 이쪽 혹은 저쪽의 한 단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놓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보 단위의 구분이 확실해지므로 노이즈 발생율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디지털 전환은 자연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의 많은 것을 디지털 단위로 이전하고 변환하거나 혹은 왜곡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무엇인가 있으며,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식의 난제를 자연과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연속성의 화두란 이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바꾸어 자연의 원래 모습으로 이전되고 변환되거나 혹은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노이즈가 가득 찬 아날로그라면 굳이 다시 아날로그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철학적 화두란 노이즈가 없는(상대적으로 적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고, 인문학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동양의 지리부도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인 운동과 현상이 전통 물리학적인 인과율의 범주와 차이나는 것을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서로 만나야만 해결되는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대상계를 관찰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고대 자연철학의 진화론적 사유와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인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과 역사주의 철학의 조류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성의 철학이 아니고 시간이 유입되어 역사화된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든 관심의 테두리를 나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존재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나는 동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식의 유형은 존재의 양상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존재의 양상을 지배하는 존재의 원초성은 모든 존재에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초월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존재 혹은 진화존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싶다. 동양적 의미의 존재는 서양적 의미의 실체론적 존재와 달리 시간을 머금은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역사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나는 역사 존재 자체의 자화상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양론이다. 물론 두 가지 방식도 자연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 한번 핀 꽃은 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을 인간 행태의 도리에 비유하여 말할 때 그 논거는 전적으로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운동의 동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동양학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결국 동양의 자연주의는 역사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행태의 방식이 서로 연속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대학원 시절 주렴계나 장횡거를 배우면서 대단한 우주 해석이 그들의 주제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장횡거에게서 개별자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것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개별자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한 라이프니츠의 시각으로 볼 때 장횡거는 하나의 정서적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순서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장자를 만나고 보니 참으로 주렴계 이상의 대우주가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란은 주자학을 풍월하면서 다시 차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학 풍의 논의가 광대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우주의 책을 쓰고 있어서 무척 난해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한 학문의 칼을 들이대면서 조금씩 정리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벌써 학문과 수양의 이중적 갈등이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실상 동양철학을 수양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학문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풀어줄 만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은 수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과학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절실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수양을 빙자하여 학문의 엄밀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동양학의 문외한이자 초보자의 의심어린 어설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공손룡을 만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나왔다. 오래 전 논리철학에 심취해 있던 중에 동양에서 서양의 논리와 비슷한 장르를 찾다가 문자적 차원의 유사성에 끌려 명가名家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가를 비판한 장자처럼 혜시 역시 논리학이 아니라 광대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 유가나 도가, 또는 불가의 이야기 안에는 연속성의 주제가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는 말은 대학원 시절에 공부의 주제를 잡게 해준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과연 최초를 인정해야 만 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최초와 최후를 상정한 서양과학의 선형적 사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역사적 상황의식은 분명한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당시는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고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 같았다. 서민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물론 그러한 노력은 관리 주도로 이루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의 개념은 현직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민가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학자인 잠재적 관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민의 생활태도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도리와 임금과 서민간의 관계까지 다루면서, 삶에 녹아드는 실질적인 지표를 의도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지표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 유럽사회라면 다른 상황을 낳았을 것으로 본다. 유럽이라면 이러한 혼란상황에 직면해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종교적 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사람의 덕목을 제시하는 사회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았으며, 내세를 따지는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에 보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상반시켜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말했다. 그러나 유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조차도 이를 구하듯 실용적 적극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였다. 물론 도가는 그것조차도 부정하였다.

 

이렇게 제자백가 시대의 관심에 대하여 아마도 어떤 이는 사회 구원에 앞서 개인 해방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사회구성체 조직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도가든지 유가든지 그것이 사회철학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호감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도전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불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척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교가 신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학적 상상을 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생겼다. 동양철학이 개인의 수양론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본체론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철학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수신제가를 한 뒤에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권력 유지의 차원에서 보는 수직적 해석이 아니라, 수신제가를 하면서 동시에 치국평천하도 할 수 있다는 수평적 입장을 취한다면 위의 논의 구조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아리 고개나 계룡산 계곡에 있는 많은 점집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역을 내세우며 장사를 하는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주역은 인간의 대소사를 점치는 책이 아니라 원래 하늘의 운행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의 기저에는 하늘의 운행방식과 인간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하늘의 운행방식을 그린 주역을 가지고 그 운행방식을 따르는 인간의 대소사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점치는 집에서의 주역의 구실을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이 본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하늘은 땅을 낳고 법칙을 생산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하늘은 땅으로부터 귀납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의 하늘은 땅의 모든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의 하늘은 2500년 전부터 인위성이 가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하늘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하늘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늘이 내 몸 안에 들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를 통해서 맹자 이후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맹자와 불교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양명학의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늘이 내 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땅의 숨겨진 유전자를 갖고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장자가 말한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땅인지를 모르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부부의 잠자리를 하면서 어느덧 하늘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용의 지적처럼 그러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동양철학계의 큰 스승, 배종호 선생님이 미국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였다. 그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배종호 선생님께 이상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다. 우리의 풍수지리 해석이 그랜드케년 지역에도 들어맞는지를 여쭈었다. 선생님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지리적인 풍토의 차이가 고유의 사상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땅이 하늘의 생산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동양철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뿐이다.

 

4. 서양이 이름붙인 동양

이후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동양철학을 잊고 지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는 힘든 유학생활을 달래기 위하여 틈틈이 붓글씨를 쓰곤 하였다. 재활 포장용 종이에 ‘인(仁)’자를 수백 번이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뜻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동양철학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의 현실은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수양론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제일 먼저는 동양인 우리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느꼈고, 역설적이지만 많은 동양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표제어는 서양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동양학에 대한 열기가 크게 일어났지만 그 열기의 실상은 비동양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왜곡된 동양학 연구태도라고 본다. 둘째 서구문화가 여과 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을 든다. 셋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두려워하는 잘못된 관행을 든다. 넷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둘째 문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이를 무턱대고 이성과 반이성으로 대치시켰던 과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이분법적 태도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연구 자세와 우리를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준다면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소한 논문을 쓰려면 남이 해놓은 소주제 전개와 주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남이 해놓은 연구결과를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혹은 기존의 연구결과에 일목연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최근의 학계풍토로 보아서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글들이 우리 자신이 쓴 글보다 동양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안내구실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 구석 한편에는 아직도 ‘서양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라는 조소 어린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접하다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풍선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이 비전문가나 일반인 혹은 동양학 입문자에게 과연 한국의 기존 동양학 연구자는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서양의 동양학자의 강점이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는 대신에 멀리서 숲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래 전에 동양철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청된 독일 한국학자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연구발표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한국어 구사를 했기 때문에 나의 필요성은 별로 없게 되었다. 어쨌든 그의 남명 관련 연구논문은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의 남명 관련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학자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리고 논문의 전개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느꼈다.

 

5. 동서고금의 시선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요즘(15년 전)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학문 외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 중에서 다섯 번째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서양철학 그것도 과학철학하는 사람이 왜 갑자기 한의학이나 동양철학을 건드리고 있냐는 비난 어린 질문들이다. 한문이나 제대로 하느냐하는 보이지 않는 비난일 것이다. 약간은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한문을 읽는 수준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양철학 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주 전공은 자연철학이고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문제를 건드릴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비난은 동양과 서양을 획일적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본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반드시 만나야만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반드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의 부각에만 그치면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 아류에 머물고 만다. 차이의 정립은 종합을 위한 과정적 단계일 뿐이다. 과정을 거처 우리는 방법론과 문제의식까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철학과 동양의 자연철학을 종합하는 듯이 보이는 작업은 거창한 학제간 연구이기보다는 한 논문의 작은 구성요소로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은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도 동양철학을 다른 전공으로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상학 수업을 수강한 후에 하버마스 수업을 수강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1998년쯤인가 동서양 철학하는 소장학자들이 모여서 더불어 공부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를 이현구, 김교빈, 박석준 선생님 등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동식물의 생태학적 자연학을 담아 낸 책인데, 동양철학의 시선을 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독서모임이었다. 동양에도 서양이, 서양에도 동양이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요즘(1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뽀족히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이름을 과감히 벗어나서 대화의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아가 서양철학자들도 동양학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위비교가 아닌 동양의 철학적 소재나 방법론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 그 개인에게만 부과될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풀이를 찾기보다는 학자군의 만남, 학문간의 협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묶이지 않으며,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그런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03년 나온 책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섦 – 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꽃이 아니라서 꽃이라 부를 수 있고

 

알 수 없는 향기라서 머무를 수 있고

 

그 안의 기억이라서 푸르게 자랄 수 있고

 

물음의 저편에 별 하나의 꿈이 있어서

 

아름다울 수 있다.

 

2017. 5.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