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침몰하는 대학]

고려대 민동 강사법관련 구조조정 저지 대자보

※ 위 링크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 지난 11월 28일 발표한 대자보 PDF 파일입니다. 메인 이미지 대자보 사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저작자와 성명단체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저작자와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감사드립니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사업1부장)

 

하나, 대학 내 시간 강사와 강사법

2018년 11월 28일, 7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다시 법사위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8일, 29일 거의 실시간으로 김영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진통 끝에 2019년 8월 1일부로 강사법이 시행되게 되었다. 강사법 시행과 관련하여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영곤, 김동애 두 부부 선생님이시다. 전국강사노조는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앞 텐트 농성으로 강사법 시행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충분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다가 2009년 대학 측의 해고통보로 강사직을 잃고 복직 투쟁을 하셨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박사 학위가 없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를 네 학기로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려 했고, 이 결정에 따라 88명의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넘게 계약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적인 취지와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 상황을 더 열악하게 만들게 되었다. 김영곤 선생님의 복직 투쟁은 결과적으로 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사립대학이 공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려대학은 복직 소송에 패소한 김영곤 선생님께 천만 원의 법률비용을 청구했다. 일 년 동안 학교가 지급한 강사료가 천만 원도 안 된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이 잘 알고 있다. 통상 기업들이 강고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써먹는 수법을 일개 대학 강사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학교 당국의 법률비용 청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종결되기는 했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해왔지만, 학교의 압력으로 그 텐트는 교양관 앞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의하러 교양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항상 그 텐트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몇 해 전 첫눈이 왔던 추운 어느 날, 텐트 앞에서 김영곤 선생님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당시 나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복직 판결을 받았고,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강사법 투쟁 또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사법은 국회와 정치인들이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가치에 따라서 시혜적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권익을 위한 투쟁은 항상 약자들 스스로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강사법 시행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향한 단결 투쟁이 제도 변화를 낳은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둘, 사학 자본의 민낯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 이윤을 낳는다. 대기업이 쌓아둔 영업이익이나 사립대학이 쌓아둔 재단적립금의 실체적인 원천은 같다. 노동자들의 착취가 대학과 대기업이 쌓은 이익의 원천이다. 이제 강사법은 방학 중 임금 지급과 4대 보험 지급의 의무를 고용기관인 대학에 부과한다. 그런데 대학 측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법으로 강제하다니!’라는 억울함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대학은 돈이 없다고,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강사들을 협박한다. 이런 사립대학의 뻔한 대응을 예견한 사람들은 법 시행 주체인 사립대학이 각종 대응책을 미리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는 다시금 강사법 시행의 부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은 예상한 그대로,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대학 졸업 학점을 대폭 낮추고 강좌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 전략회의를 했고 또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립 유치원장이 정부지원금으로 명품가방을 샀다는 기사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사립대학들은 재단적립금을 부당하게 주식투자로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치권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립 유치원보다 국공립 유치원이 더 신뢰도가 높고 안전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차적인 공공성 확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실현과 관련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도 분명하다. 교육의 사회적인 공공성에도 불구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데에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립 교육기관 대 교육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에 대한 예산은 현재 강사 수준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니 국립대학 교수들과 총장들은 사립대학이 구조조정 없이 시행하라고 편하게 말한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정부지원금이 없으면 추가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한 예로 11월 14일 고려대학교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교무회의 비공개 문서가 언론에 드러났다. 곧바로 강사법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 방문을 단행했다. 나는 내가 가입해 있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라도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민주동우회는 모교의 부당한 결정에 반대하여 공동대책위원회와 연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12월 3일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잠정적인 승리일 뿐 정작 강사법 시행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어떤 입장 변화가 있을지 주시해야 한다.

김동애 선생님은 한 회의에서 강사법 투쟁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서정민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니 더욱 강사법으로 인해 다시 극단의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셋, 사립대학은 강사법 시행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벌써 몇 주 전부터 2019년 1학기 강의 시간 배정과 관련해서 선배, 후배,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A 대학에서는 4대 보험을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강사들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B 대학에서는 한 강좌만 하던 강사들은 정리했다고 한다. C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한다. 이 모두 정리해고 되는 경우들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감정의 변화들을 감내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화가 나도 받아들여야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지만 장기화된 해고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하면 어떤 불행한 사태들이 나타날지 모두 알고 있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더 심각한 상황을 낳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불안한 징후는 벌써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학문 후속세대들의 위기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세심한 대책이 더욱 필요하다.

강사법 시행을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립대와 사립대에 불균형적으로 배정되어 사립대의 대량 해고를 막아낼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강사노조 단체들은 다시금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시간강사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19년 8월 1일부로 시행되는 강사법에서 시간강사들의 전체 규모가 현저히 낮아지지 않도록 교육부에 사립대학 지원과 관련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해야 한다. 가령 교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구조조정의 실행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교육부는 눈앞의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을 실행한 학교들을 전수조사하고 철회를 분명히 강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2018년 12월 14일.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을 담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직후 그것의 의미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를 내세울 때만 해도 그의 주장은 자기 이익의 극대적 실현을 위한 권력지상주의로 비쳐졌고 그 단적인 경우가 참주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참주정 찬양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앞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라쉬마코스는 오히려 일상의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 즉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다만 그것의 우위를 판정해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로서 가장 부정의한 권력인 참주와 참주정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권력지상주의와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 모두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그런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또한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표방하는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이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동시에 양립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총동원하여 시민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시민들이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고 부정의를 일삼도록 결코 내버려 둘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강자의 정의와 시민의 부정의는 둘 다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는 이기심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배타적인 데다가 특히 강자에게는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이 이미 현실적으로는 기회주의 이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 모두가 철저히 이기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 참주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참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철저히 참주 편에 서서 시민을 착취하는데 앞장 설 것이고, 참주정이 쇠할 때는 참주 몰래 부정의를 저지르는데 몰두하다가 또 시민들이 득세하면 시민들 편에 서서 부정의를 선동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주의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하건 앞서 우리가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 모두를 함께 내걸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일관된 소신으로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어떻게든 남을 누르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의 찬양론 위에 서 있되, 기회가 되면 권력에 빌붙어 약자들의 부정의 찬양론도 탄압하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지상주의를 함께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그의 주장 자체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반도덕주의적 입장이자 그야말로 공동체 파괴주의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앞서 그가 쏟아낸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이기주의는 국가 차원과 개인 차원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가 철저히 모든 국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물과 허상이 모든 면에서 서로 대응되면서 모든 내용에서 정반대인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철저히 대립해 있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의 논의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안티테제로서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서술 계획 아래 제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인간 삶의 이익과 행복의 문제는 그만큼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것이고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투쟁 또한 그만큼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것이다.

4-7(344d~ 345e): 소크라테스의 분노와 재반론

 

[344d]

* 트라쉬마코스는 그의 속내를 마치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βαλανεύς들이 물을 쏟아 붇듯 우리의 귀에다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서는καταντλήσας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동석한 사람들은 그러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그것이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우리 스스로 알게 되기도 전에’πρὶν 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εἴτε οὕτως εἴτε ἄλλως 떠날 생각이냐고 묻고 간청하다시피 말을 한다.πάνυ ἐδεόμην τε καὶ εἶπον

* 트라쉬마코스는 대화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면서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스스로 알게 해주는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사람’이다.

 

[344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묻는다. ‘혹시 선생은 우리가 사소한 것을 결정하려 꾀하고 있지 각자가 어떻게 삶으로써 가장 유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지 그 삶의 방식을 결정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오?’ἢ σμικρὸν οἴει ἐπιχειρεῖν πρᾶγμα διορίζεσθαι 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ν, ᾗ ἂν διαγόμενος ἕκαστος ἡμῶν λυσιτελεστάτην ζωὴν ζῴη;

*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정의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논하고 싶어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정의에 관한 문제는 곧 우리를 가장 유익한 삶,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 일체’(the whole way of life)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 이것은 곧 <국가>의 테마이다.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전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οὐδὲν κήδεσθαι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모름으로써ἀγνοοῦντες 더 나쁘게χεῖρον 살게 되든 또는 더 훌륭하게βέλτιον 살게 되는 전혀 개의치 않는οὐδέ τι φροντίζειν 것 같다고 질타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당황한 듯 짧게 반문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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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앞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를 정치체제와 정치적 강자와 관련하여 거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삶의 방식’은 언뜻 개인적 차원의 삶의 방식으로 느껴져 다소 의아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말 대신 ‘가장 유익을 가져다주는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를 언급했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된 ‘삶의 방식’을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로만 제한하여 이해할 경우 오히려 플라톤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 사실 <국가>에서 정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본 흐름을 보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가?’ 즉 개인 차원의 정의와 행복 문제로 시작했다가 소문자보다 대문자로 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나라에서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확대된 후, 논의의 말미에 다시 개인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것은 정의로운 삶의 문제를 탐문함에 있어 플라톤이 얼마나 개인의 행복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여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결코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국가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의론이 반대로 개인주의적 정의론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부제에 들어 있는 ‘폴리테이아’politeia와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라는 말이 갖는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함의를 살펴본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은 <국가> 전체를 통해 정치적 삶과 개인적 삶 가운데 어느 것을 우위에 두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것들 각각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적으로 밀접하고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현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은 여전히 전체주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이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소외를 속수무책 방관하고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명을 황폐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플라톤적인 정치철학이 갖는 내적 가능성과 의미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정의와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으로 거론된 ‘삶의 방식’은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어느 것이 가장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함축함과 동시에 ‘삶의 방식들 일체’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미 개인들의 정치적 삶의 방식 즉 정의로운 정치체제의 문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45a]

*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말한다. 그리고 하물며 부정의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μὴ διακωλύῃ 멋대로 저지르게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득κερδαλεώτερον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사 부정의를 남 몰래하든 싸움을 벌이든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으며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닐 것οὐ μόνος이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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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결연한 거부가 담겨있는 이 부분은 그가 혐오하는 소피스트의 웅변조의 연설같은 느낌마저 든다. 344d에서 시작해서 345b 중간까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분명 무지의 지와 겸손을 앞세우며 늘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그 말 속에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녹아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 예시하고 있는 참주조차 대놓고 부정의를 저지르지는 못한다. 법을 내세우는 기만의 방법으로 몰래 자신의 이익을 취할 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참주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의 가장 유리한 조건 즉,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부정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결코 그는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ἄδικος μέ γε οὐ πείθει ὡς ἔστι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κερδαλεώτερον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와 반대의 정도가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트라쉬마코스를 질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보면 여러 곳에서(345e) ‘성의를 보이시오’προθυμοῦ, 345b, ‘납득시켜 주시오’πεῖσον, ‘345b 견지하시오’ἔμμενε, ‘속이지 마시오’μὴ ἐξαπάτα) 등 명령어가 사용되고 있고, ‘전혀’, ‘아무런’ 등 완전부정을 뜻하는 οὐδείς라는 표현도 여러 번(344e, 345a) 등장할 정도로 말투 또한 결연하고 단호하다. 다그침에 가까운 질문과 명령어만이 아니라 말의 길이도 이제까지 그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길다. 아마도 <변명>정도라면 모를까 어떤 대화편에서도 이 부분만큼 소크라테스의 결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거의 없을 듯싶다. 공관복음서에서 장사치들로 들끓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된다면 과언일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그의 비장한 결의가 엿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에는 어떤 극단적인 부정의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은 용기로써 늘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또한 담겨 있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재생산을 위해서이다. 하물며 부정의한 자들은 열매가 보장되지 않는 일은 도모할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 하지 않는다. 싸워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싸운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해도 끝없이 재생산되는 신비 아닌 신비, 결코 마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부정의한 자들이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는 이유이자 증거이다.

 

[345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에 이제까지 자기가 한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억지로 머리(영혼)속에 집어넣어 드릴까요?εἰς τὴν ψυχὴν φέρων라고 대든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데만 능할 뿐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나아가 그 말을 논리적으로 검토하거나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을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그의 태도에는 말투와 달리 다소 겁을 먹고 움츠려든 느낌이 든다.

*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것은 대화와 설득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에게는 가장 혐오스런 말이자 모욕적인 말이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파렴치하다. ‘결코 그러지 마시오.’μὰ Δί᾽ μὴ σύ γε라는 말에는 트라쉬마코스를 압도하고 남을 정도의 단호함이 배어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본래 그가 해오던 대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검토하여 논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 논박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호하다. 통상적으로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적 검토에 앞서 상대방의 동의를 먼저 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동의는 고사하고 논박에 앞서 트라쉬마코스에게 먼저 말 바꾸는 태도부터 고치라고 야단치듯 다그친다. ‘말한 것은 견지하라ἔμμενε. 혹시, 견해를 바꿀 시에는 그걸 명백히 바꾸되 우리를 속이지 말라ἡμᾶς μὴ ἐξαπάτα.’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칼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고르기아스> 499b~c cf. 334e, 340b~c

 

[34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바로 앞에서 한 말 가운데에서도 말을 바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처음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의 행태에 입각해서 정의를 이야기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였다고 말을 바꾸고 또 그것이 비판에 직면하자 양치기의 예를 내세워 다시 현실적 의미에서의 통치자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양치기 기술과 관련한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한다.

* 우선 트라쉬마코스가 예로 든 양치기ποιμήν는 서로가 동의한 엄밀론에 입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치기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트라쉬마코스가 양을 살찌우는 것πιαίνειν은 양들의 최선의 상태τὸ τῶν προβάτων βέλτιστον를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마치 자기가 접대 받을 손님인 양 성찬εὐωχία으로 올라올 양고기를 염두에 두고 양을 치고 있거나 아니면 마치 자기가 돈벌이꾼χρηματιστής인 양 나중에 돈을 벌기 위해 팔 것을 염두에 두고 양을 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345d]

* 그러나 앞서 기술에 관한 논의에서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듯이(342b~c) 양치기 기술이 적어도 양치기 기술인 한, 그 기술이 양들의 보살핌에 있어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미흡함이 없는 완벽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한, 양치기 기술의 관심사는 스스로의 이익 아니라 그 기술의 대상ἐκεῖνος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

* 기술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342a~b의 논의를 통해 플라톤에 의해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전쟁술과 수렵술의 예를 들어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을 반드시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전쟁술은 전쟁의 대상인 적군을 해치는 것이고 수렵술 또한 수렵의 대상인 동물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단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대상’에 해당하는 원어 ἐκεῖνος(이 말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내 바깥 쪽 저것’that person or thing there을 뜻한다.)의 의미를 단순히 외부의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즉 ‘기술이 마주하는 과제로서 저것’ 즉 기술이 관여하는 일차적인 과제 내지 목적obj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대상을 실체적 대상으로만 한정할 경우 이를테면 의술이나 제약술의 대상은 다 ‘병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기술임에도 대상간의 고유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술의 고유성에 맞추어 대상의 고유성도 살린다면 이를테면 통치술의 경우, 통치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수렵술의 경우도, 수렵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동물의 포획’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동물의 포획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러한 기술 모두 일단 외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고 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기술은 기술 대상의 이익에 관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기술론은 통치술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유비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고 위와 같은 해석 또한 최대한 플라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기술 관련 언급 자체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345e]

* 소크라테스는 모든 다스림ἀρχή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ἀρχομένῳ τε καὶ θεραπευομένῳ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는 것τὸ βέλτιστον σκοπεῖσθαι이라고 서로 동의했음을 트라쉬마코스에게 환기시킨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럼에도 나라들에 있어서 통치자들이 즉,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μὰ Δί᾽ οὔκ 그 점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동의를 표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통치자들’은 트라쉬마코스가 343c에서 말한 현실에서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한 적이 있는(341b)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이다. 그리고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앞에서 그가 설명한 대로 ‘통치술이 통치술인 한, 통치자의 이익과는 무관하므로 강제라면 몰라도(347c) 그런 자리를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트라쉬마코스 역시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 통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은 잘 알고 있다’라고 답을 한다. 트라쉬마코스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 대상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술은 맡아봐야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는데 왜 자진해서 맡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나 트라쉬마코스 모두 일단 참된 통치자건 아니건 누구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기피한다는 것을 공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점차 밝혀지겠지만 통치의 대가로 주어지는 권력과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에게 수치스러운ὄνειδος 것으로서 그들 자신에게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통치를 기피한다는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말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란 게 그저 시민의 이익만 도모하고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는 누구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생각은 현실에서의 통치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의 통치와 달리 자기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위와 정반대로 자격이 되건 안 되건 누구라도 자진해서 그 일을 맡으려 한다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통치술 자체와 자기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잘못된 생각을 깨기 위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예시한 다스림과는 다른 다스림(관직)들τὰς ἄλλας ἀρχὰς의 경우를 들어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한 것이고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임을 재차 밝힌다. 즉 일반 다스림의 경우 하나같이 ‘자진해서 다스림을 맡지 않고 보수를 요구 한다μισθὸν αἰτοῦσιν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통치술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와 돌봄을 받는 쪽의 이익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은 별도의 보수를 따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과 보수를 얻는 기술이 별개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로 붙여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혹자는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더라도 통치술 자체가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훌륭한 사람들은 무상으로라도 통치를 맡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통치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통치술 자체가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이익을 위한 참된 통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들이 맡아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강제ἀνάγκη와 벌ζημία이라는 방식으로 통치가 맡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와 벌을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통치를 맡지 않을 경우, 자기보다 못난πονηροτέρου 사람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αἶσχος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강제는 적극적인 보상μισθός은 아니지만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도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강제로서 벌과 보상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훌륭한 사람역시 사람인 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꺼려하므로, 최소한 다른 훌륭한 사람이 통치를 맡아 수치심의 면제가 담보되는 한, 자신은 최대한 통치를 맡기를 기피하려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강제된다면 그 역시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 일을 맡아 시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 획득술의 문제를 다루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346a]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앞서와 같은 논박을 토대로, 다스림이 위와 같듯이 다른 기술들도 각각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을 가지고 각기 자기 기술의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임을 밝힌다. 의술ἰατρικὴ 은 건강ὑγίεια을 제공하고 조타술κυβερνητικὴ은 항해할 때 안전σωτηρία을 제공하듯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듯 통치술과 보수를 획득하는 기술 즉 보수 획득술은 각기 다른 것을 제공하는 다른 기술이라는 것이다.

 

 

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 아래 글은 [건대신문]에 12월 4일자로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시대와 철학>에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건대신문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 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⑰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문답을 통해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는 기술 일반의 특성에 기초해 볼 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행하는 자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렇게 문답의 귀결이 트라쉬마코스가 처음에 제기한 주장과 정반대의 것으로 뒤바뀌자 트라쉬마코스는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자신이 처음에 동의한 엄밀론을 스스로 저버리고 태도를 바꾸어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343c]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것το δικαίον과 정의δικαιοσύνη, 부정의한 것το ἀδικαίον과 부정의ἀδικία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 ‘실제로 정의란 남에게 좋은 것’τὸ δίκαιον 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 τῷ ὄντι 즉, 2)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3) 복종하고 섬기는 자에게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4)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조종(지배)하고ἄρχει 5) 피지배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6)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εὐδαίμονα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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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흥미롭게도 앞서와 달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 대신에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타자의 이익)ἀλλότριον ἀγαθὸν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분명 앞에서 그가 한 말들과 다른 방식의 표현이어서 순간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그가 서있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좋은 것’이란 ‘피지배자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바로 이어서 그 ‘남’이 가리키는 대상이 ‘강자’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런데 트라쉬마코스는 다른 방식으로 연이어 또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트라쉬마코스는 별다른 전제도 없이 태연스럽게 앞에서 말한 정의와 ‘반대적인 것으로서 부정의’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에서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는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언급했다가 4), 5), 6)에서는 ‘부정의가 정의를 조종하고 강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부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고 상호 모순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라쉬마코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자인 까닭에 그가 말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떤 경우의 정의와 부정의인지가 종종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부분 즉 ‘반면에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이어서ἡ δὲ ἀδικία τοὐναντίον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지배)하고 그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저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한다’라는 말을 분석하여 어디서 어떤 내용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그 내용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지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 부분을 ‘반대의 것’이 가리키는 경우의 수에 따라 분석한 표가 이 글 말미에 첨부된 <별첨 자료>이다.

* 이 <별첨 자료>에 의하면 결국 트라쉬마코스는 1), 2), 3)에서 정의를 언급할 때는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강자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기준으로 정의를 진술하다가 4), 5), 6)에서 부정의를 언급할 때는 별안간 기준을 바꾸어 이른바 공평과 정의가 제대로 확립된 실제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진술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이곳에서도 정의와 부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들을 아무런 사전 전제 없이 편리한 대로 뒤 바꾸어 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 1), 2), 3)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다시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이 될 것이다. “정의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공평과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말들은 하지만 현실의 정의를 기준으로 약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의는 실제로 남인 강자와 통치자의 이익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을 섬기는 약자인 자기한테는 손해이다.” 그리고 또 그와 달리 관점을 바꾸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 부정의를 언급한 4) 5) 6)에서의 진술도 그의 본래 취지에 따라 풀어 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 반면에 진짜 정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와 정반대로 부정의야말로 참으로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조종하고 약자들은 강자의 이익을 행하여 강자를 섬기며 행복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의 주장이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고 그의 속마음이 흔들리거나 일관성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논리적 일관성은 없을지언정 어떤 경우이든 강자의 이익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는 초지일관하다. 그 강자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앞에서 정의를 말할 때 적용한 기준과 뒤바꾼 것이고, 덧붙여 앞에서 말한 남과 자기가 가리키는 대상 또한 뒤바꿔 놓은 것이다.

* 아무려나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정의에 대한 정의(定義)라기 보다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결과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드러내는 진술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그가 언급한 1)‘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란 말은 그 스스로 확인해주고 있듯이 ‘강자’임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결국 2), 3)은 그것에 근거하여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트라쉬마코스가 바라 본 현실에서의 정의의 실상이다. 그리고 별표에서 드러나듯이 4)에서 말하는 부정의는 앞에서 말했듯이 정의로운 나라를 기준으로(별표 기준 B) 정의와 부정의를 언급할 때의 부정의이다. 다만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부정의는 현실에서 정의로 위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껍데기 정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름만 정의이지 실제로는 부정의이다’라고 말할 때 그런 정의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4)를 풀어 읽으면 ‘현실에서의 껍데기 정의, 실제로는 진짜 부정의는 참으로 순진하고 진짜 정의로운 사람을 지배하고’가 된다. 5)는 4)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고 6)은 5)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343c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 무엇이냐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서 주목을 끌어왔다. 특히 니콜슨(Nicholson. P. P, ‘Unravelling Thrasymachus Arguments in the Republic’, Phronesis 19, 1974)이 그 주장을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의 일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주목한 이래 그것을 둘러싼 논쟁도 이어졌다.(Keferd. G. B. ‘The Doctrine of Thrasymachus in Plato’s Republic’ in Sophistik in Wege der Forschung clxxx vii , Darmstadt, 1976) 이 주장의 요체는 즉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정의는 타자의 이익’ 즉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의 규정을 일관성있게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통치자들이 그러한 정의의 규정에 따라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므로 강자와 약자들 모두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강자나 약자 구분 없이 모두 실제로는 자기 이익 즉 부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트라쉬마코스도 ‘정의는 타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 위에 서 있되 다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은 그 정의가 결과한 현실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의는 남에게 이익이자 자기에게 손해, 부정의는 자기에게 이익 남에게는 손해’라는 윤리학적 의미에서의 부정의 찬양론인 동시에 약자들이 갖고 있는 정의에 대한 이중성과 정의의 현실상에 대한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트라쉬마코스의 말에서 자기와 남을 권력의 우열관계로 특정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여기서 남과 자기를 분명하게 강자와 약자로 특정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권력관계에서 강자의 부정의와 약자의 부정의를 동시에 찬양하는 이론은 그 자체로 자기 모순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한 규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최소한 정의의 기준을 정함에 있어 전혀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예 원래부터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정의의 규정 또는 정의(定義)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토대가 되는 권력관계를 괄호에 넣고 순전히 본성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의 주장 역시 철저히 인간의 이기심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넘어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뿐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최대로 구현하는 권력지상주의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강자 자신은 아무리 부정의를 찬양하고 지지해도 약자들에게까지 부정의를 용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의 강자 즉 통치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부정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이른바 불법이 판치는 무정부상태를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통치자가 아니다. 가장 부정의한 강자는 법적 정의를 내세워 통치 대상을 기만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약자를 착취하고 자신은 재산뿐만이 아니라 평판과 명예까지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력을 가진 통치자인 것이다.

* 결국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은 그 자신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표이기도 하지만 그 비일관성이 누가 보더라도 쉽게 눈에 띨 정도로 노골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원천적으로 막무가내 강자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정의를 정확하게 규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능멸하기 위한 도발일 수도 있다. 어쩌면 플라톤은 이 부분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말과 논리로 정의를 규정하고 부정의를 논박하는 일 자체는 트라쉬마코스 같이 정의의 정의(定義)와는 무관하게 강자의 이익만을 어떻게든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소용도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 대한 논의의 관심사는 장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정의관의 논리적 일관성 여부 보다는 정의의 정의(定義) 자체를 무시하고 능멸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모아져야 한다. 그의 주장의 비논리성도 그런 차원에서 비판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트라쉬마코스는 논리와 무관하게 정의이건 부정의이건 그 어떤 이름을 가지든지 기본적으로 오직 강자의 이익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굳이 그의 일관성을 찾는다면 ‘강자의 이익’을 향한 이기적 탐욕과 권력 의지의 일관성이다. 그에게 정의의 정의(定義)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정의가 법으로 표현되는 한, 트라쉬마코스의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법을 만들어 언제라도 법적 정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기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지속적인 이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통치 권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평판에 대한 욕망까지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정의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에 있는가에 있지 않고 다만 제멋대로 법의 형식을 빌어 어떤 것도 정의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권력뿐인 것이다. 어떤 현실이 펼쳐지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트라쉬마코스는 비록 그렇게 강자의 이익을 주장하더라도 그 자신이 최고의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 평생을 늘 강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누리는 최대의 이익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물론 이곳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앞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폭로되고 비판된다. 당대 젊은이들을 소피스트들에게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주장이 갖는 비논리성은 더욱 철저하게 폭로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궁극적으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주장의 외적인 논리적 비일관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그의 생각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논리적 내적 아집과 권력지상주의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떻게 깨부수고 제압하느냐에 있다. 트라쉬마코스가 내세우는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논파를 해도 그것만으로 결코 파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것에 필적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힘을 갖는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고 그 정의로운 나라를 지탱할 철학과 그에 합당한 권력자를 키워 부정의한 권력자와 그 세력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국가> 전체를 구상하고 설계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부여한 <국가> 제1권의 의미 또한 그러한 난관들에 대한 치열한 자기인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에 있을 것이다.

 

[343d-e]

* 이어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자보다 아래와 같이 ‘어떤 경우에나 덜 갖는다.’πανταχοῦ ἔλαττον ἔχει고 말한다. 1) 상호간의 계약 관계에서ἐν τοῖς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υμβολαίοις, 계약을 해지할 때ἐν τῇ διαλύσει τῆς κοινωνίας 2) 나라와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ἐν τοῖς πρὸς τὴν πόλιν 세금εἰσφορά을 낼 때 3) 나라에서 받을 것이 있을 때 ὅταν τε λήψεις 4) 저 마다 어떤 관직을 맡고 있을 때ὅταν ἀρχήν τινα ἄρχῃ ἑκάτερος 위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운 자는 결코 이익을 보지 못하고 손해 보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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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고대 아테네에서 계약과 세금 부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계약συμβόλαιον 형태와 방식들은 놀랄 정도로 오늘날과 거의 똑같다. 토지와 건물의 매매ōnē 계약, 신전의 건축과 도로 및 가옥의 건설 및 보수를 위한 건축계약, 건물과 토지의 임대차 계약, 근로 계약, 은행을 통한 금전 위탁parakatabēkē 및 대출 계약은 물론 개인 간 채무 계약도 오늘날과 똑같이 계약문서syngraphē로 행해지고 그와 관련한 세부 조건들도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매매 계약에 노예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계약 관계에서 계약을 해지할 때 정의로운 자가 ‘덜 갖는’ἔλαττον ἔχει 경우가 생기고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 때 그가 말하는 계약 해지의 경우는 정상적인 계약만료에 따른 해지가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중도 계약해지 즉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 역어의 원어인 διαλύω는 계약을 깬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계약을 일방적으로 깰 경우 정의로운 자가 손해를 입는 경우는 고대라고 해서 오늘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매매 계약의 경우에 매매가의 100분의 1을 공지세로 내야 했는데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정의한 사람일수록 매매가를 낮춰 잡았을 것이고 토지 건물의 임대차 계약의 경우에도 시가의 12% 정도를 연세로 내게 되어 있지만 부정의한 자일수록 연체를 미루거나 떼먹고 도주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아테네가 상업화되고 국제화된 이후 아테네에는 이방인xenoi과 거류외인metoikoi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들은 부동산을 소유할 수가 없었으므로 건물 임대차 계약은 계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 만큼 부정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채무 계약은 이자율이 평균 연12% 정도에서부터 높게는 20-30%에 이르는 고리채도 많았다고 하니 순진하고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덜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8% 정도의 이자율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푼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대 이자 수익에 대한 욕망이 낳은 폐해가 어느 정도였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건의 교환 수단에 불과한 화폐로 돈을 버는 것 자체를 부정하여 이자 수수 행위를 반대하고 있다.(플라톤 <법률> 742c,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8, 2-8)

* 한편 세금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나라가 시민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 주는 것이 오래된 원칙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적용되는 직접세 즉 재산세eisphora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전쟁 시기나 비상시에 한 해 민회의 승인을 받은 연후에야 그것도 최상류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과되었다. 이것은 아테네의 재정이 기본적으로 신전 공물과 부유층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5,6세기 이전의 아테네는 귀족들의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에 의한 나라였고 그 때문에 마치 가장이 식솔을 돌보듯 전쟁 장비를 비롯해 참전에 이르기까지 귀족들이 경비를 대는 일은 당연시 되었고 그 만큼 권력도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재정을 부유층들이 책임지는 이러한 전통은 5세기 들어와서도 이어져 아테네가 전성기를 이루는 5세기 중반까지는 부자들(거류외인들 가운데 부를 이룬 사람들 포함)의 공적 기부제leitougia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재산세 납부가 요구될 때에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테네에 민주정이 급진화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까지 발발함에 따라 재정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자 속국들에 대한 조공 요구는 물론 부유층에 대한 기부 압박 또한 증가 되었고 그에 따라 점차 기부 회피와 조세 저항의 경향 또한 늘어나 시칠리아 원정 패배 이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급기야 재산세 부과 대상도 시민 대다수에게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언급한 세금은 이러한 정황에 따라 시민 대다수에게 부과된 재산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대 재산세는 재산액에 비례하여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정직한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테네가 제국의 위세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속국들의 조공은 물론 급격한 교역량의 증가에 따른 관세와 시장세(telē) 등 간접세의 수입으로 재정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4세기에 들어오면 속국들의 조공도 끊어지고 관세 수입도 줄어든 데에다가 부유층마저 무고자들의 협박에 시달려 기부는 물론 조세마저 노골적으로 기피하게 되자 아테네는 각자도생을 위한 혼란과 분열을 겪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위의 4가지 경우는 기원전 5세기말에서 4세기에 걸쳐 고대 아테네에서 일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놀랄 정도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일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순서 그대로 오늘날에도 1) 갑을 간에 불공정 계약과 허위계약이 판을 치고 있고 2) 세금 또한 소시민, 월급쟁이들은 꼬박꼬박 정직하게 납세하지만 부유층, 권력층은 법망을 피해 탈세하기 일쑤이며. 3) 납품단가조작, 입찰담합, 대형국책사업 부정수주 등 소시민은 엄두도 못 낼 일들을 부유층, 권력층은 시도 때도 없이 저질러가며 나랏돈을 축내기 일쑤이고 4) 하위직 공무원은 박봉에도 묵묵히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지만 고위직은 뇌물수수, 측근비리, 낙하산 채용, 정경유착에다 퇴직 후 전관예우, 고액 연금까지 온갖 특권과 혜택을 누리기 일쑤이다.

* 계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pactum은 평화를 의미하는 pax에 어원을 두고 있다. 즉, 특정 사안과 관련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상호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행위이되 계약 당사자 서로가 강제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이고도 흔쾌한 만족과 기대감을 동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는 근대 국가의 기초로서 홉스(T. Hobbes)적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노동의 상품화와 유연화에 기초한 임노동계약, 하청계약 등 일상에서의 사회적인 계약 전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불공정 계약이 고착화되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히려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력적일 정도로 호소력을 갖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오늘날 그것이 위력적인 호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라쉬마코스의 언급에도 나타나있듯이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 또한 그와 같이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배우고 철학을 공부하고 권하는 이유 또한 트라쉬마코스 부류들이 저지르는 악덕과 그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담론들을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담론을 생산하고 나누고 공유하고 연대하여 그 부정의한 세력들과 맞서 싸워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고고하게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344a]

* 트라쉬마코스는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정의한 자야 말로 남들을 ‘크게 능가할 수 있는 사람’ τὸν μεγάλα δυνάμενον πλεονεκτεῖν.이라고 주장한다. 사적인 관계에서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것을 판정해내려면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미 충분하지만 제일 쉽게 판정하는 길은 ‘가장 완벽한 상태의 부정의’ 즉 공적 차원에서 참주들이 행하는 참주정τυραννίς의 경우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정의의 실상을 가장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고ῥᾷστα μαθήσῃ 부정의한 자를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ν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정의로운 자를 가장 비참한ἀθλιωτάτος 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참주정은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λάθρᾳ καὶ βίᾳ 빼앗기를 조금 씩 조금 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συλλήβδην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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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다’는 의미로 사용한 πλεονεκτεῖν는 아무튼 비교 대상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제약 없이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 말을 콕 집어 그의 주장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근거로 삼는다. 즉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의한 자나 하는 일이지, 정의로운 자가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어떤 행위나 기능에는 그 자체로 이미 능가할 수 없는 최상의 한도peras, 객관적 척도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그것을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적도(適度), 몫, 분수를 지킴, 자기 직분의 충실함을 함축하면서 그의 정의관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무도함과 부정의는 그러한 정해진 한도를 ‘능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해내는 것’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악의 극치로서 참주정의 피폐함과 죄악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344b]

*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단번에 몰래 깡그리 해내지 못할 때 이를 테면 신전 절도범 ἱερόσυλοι, 납치범ἀνδραποδισταὶ, 가택침입강도τοιχωρύχοι, 사기꾼ἀποστερηταὶ, 도둑κλέπται 같은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지만, 그러나 부정의한 자들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자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은 부끄러운αἰσχρός 호칭대신에 행복한εὐδαίμων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μακάριος 사람이라 불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제나라 시민들한테서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τὴν ὅλην ἀδικίαν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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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실감나는 묘사는 그가 시켈리아에 가서 디오뉘시오스 1세를 보고 경험한 것에 기초한 것이리라. 실제로 플라톤이 그린 참주의 모델이 바로 디오뉘시오스 1세라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 당대의 실상은 오늘날의 정황에서도 결코 낯설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단돈 몇 푼을 훔쳤다고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재판정에 서는 모습과 수천억을 횡령한 자들이 낯 두껍게도 번질거리는 얼굴을 곧추 세우고 뻔뻔하게 죄가 없다고 으스대며 재판정에 들어서는 모습을 우리들은 오늘날에도 일상의 다반사로 접하고 있다. 그리고 좀도둑은 온갖 손가락질을 해가며 비난하지만 정치 권력자나 재벌 오너가 온갖 추행과 횡령을 저질러도 비난은커녕 선망의 눈으로 동정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강대국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횡포를 저질러도 마치 정의를 구현한 것인 양 떠벌이고 또 그들의 속국을 자처하는 자들은 그들의 짓거리에 환호를 보내는 반면, 그들의 억압에 저항하다 앙갚음을 받거나 그들끼리의 다툼 때문에 희생된 나라들과 사람들이 그들의 폭력 앞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거나 파리 목숨 취급을 받고 있어도 눈길 하나 보내지 않는다.

*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롭다는 판정 결과는 사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앞에서 예시한 정도의 ‘남을 능가하는 자’만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공적인 권력 관계에서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참주정 치하의 참주의 경우이다. 참주야말로 정의라는 미명하에 가장 부정의한 일을 마음대로 저질러 최대의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결코 지속적인 이득을 담보할 수 없다. 참주가 가장 이익을 많이 취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이기심을 최대로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부정의 찬양론을 넘어 권력 지상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자들의 영광스런 순간과 파멸의 순간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플라톤이 그리고 있듯이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거리에서 바늘 앞에 놓인 풍선과도 같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다. 고대 로마의 폭군들과 20세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 스탈린은 물론 우리나라 현대사의 일그러진 권력자들의 등장과 몰락 또한 그 단면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어떤 사람이 시민들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때’라는 말은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했을 경우 재산의 압류는 물론 신분까지 박탈되어 노예가 되는 경우를 나타낸 것이다. 훨씬 이전인 솔론의 시대에는 채무 때문에 인신을 구속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말기는 이전 시대보다 더 각박하고 비열해진 것이다.

 

[344c]

* 부정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자기가 부정의한 짓을 행하는 것τὸ ποιεῖν τὰ ἄδικα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τὸ πάσχειν 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정의 한 짓이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은 정의보다 더 강하고ἰσχυρότερον 자유로우며ἐλευθεριώτερον 전횡적인δεσποτικώτερον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말한 대로ὅπερ ἐξ ἀρχῆς ἔλεγον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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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약자들의 경우 ‘법률을 위반해서 얻는 이익보다 법률을 위반해서 당하는 손해가 더 크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 한다’는 그 자신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이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장차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을 대하는 약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플라톤은 그의 말을 통해 부정의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예고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과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사람들이 부정의를 비난하는 이유를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고 있다. 사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들키면 처벌의 위험이 있어 두렵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 선택하기에 달렸다. 이에 반해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없으면 꼼짝없이 ‘당하는 불행’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을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와 정반대의 입장이다.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부정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더 나쁜 일이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삼가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은 영혼에 손상을 가하고 그것을 부패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물론 피해를 입는 것이지만 내가 잘못하여 내 영혼이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건강함’을 중시하는 사람은 ‘부정의를 저질러’ 영혼을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부정의에 당하는 것’이 덜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갖는 윤리학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쟁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도 트라쉬마코스의 입을 통해 그 대결이 예고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눈에 트라쉬마코스는 영혼이 썩어 문드러져 온갖 악취를 뿜어대며 스스로가 다 파괴되었음에도 ‘부정의를 당하지 않는’ 강자라는 사실에 도취되어 마치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희희낙락거리는 참으로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일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누가 인생의 승자인지 실로 명약관화한 것이다.

* 그가 결론적으로 재확인하고 있는 ‘처음 말한 대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만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ἑαυτῷ 이득이다’라는 말에서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득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343c에서 말한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 표현한 같은 의미의 말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가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약자의 부정의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만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강자와 약자 모두의 부정의를 촉구하는 입장 정도라면 강자의 이익만을 독점적으로 주장하는 자신의 권력지상주의적 입장과 부딪친다. 그러므로 일단 트라쉬마코스가 이곳에서 말하는 ‘자신’은 앞에서 ‘남’이 ‘강자’에 한정된 것처럼 ‘강자’에 한정하여 사용된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고 다른 한편 (강자의 실제 행태나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정의는 (강자) 자신을 위한 이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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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자료>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 즉 정의로운 자를 조정하고 강자를 이롭게 함의미 분석

 

기준 A : 현실 정의, 현실 부정의=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현실의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기준 B : 진짜 정의, 진짜 부정의=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정의와 부정의

구분

기준 A I II 후속 내용

0

343c 원안

정 의

남(강자)

이익

부정의는 그 반대의 것으로서

강자를 이롭게 함

자기(약자)

손해

 

  1.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일관성 있게 이해할 경우(기준 A를 유지)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A I II 후속내용과 일치 여부
1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2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3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일치하나 원안과 모순
자기(강자)

이익

* 1,2 경우 내용 상 동일

* 3의 경우, 취지는 일치하나 정의도 부정의도 다 강자의 이익이자 약자의 손해가 되어 자기모순, 자가당착에 빠짐.

 

  1. 텍스트를 트라쉬마코스의 취지에 맞추어 읽을 경우(기준 B로 전환)

구분

‘반대의 것’ 내용 기준 B I II 후속 내용과 일치여부
4 원안 II의 반대 부정의 남(강자) 손해 불일치
자기(약자) 이익
5 원안 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이익 불일치
자기(강자) 손해
6 원안 I,II의 반대 부정의 남(약자) 손해 원안과 일치
자기(강자)

이익

* 4,5 경우 내용 상 동일

* 6을 원안 0과 비교하면 기준을 임의로 바꾸고 I, II를 바꾼 것, 그런데 I, II를 바꾼 것은 내용상으로는 후속 내용과 일치하므로 결국 부정의의 기준만을 임의로 바꾼 것.

<결론> 부정의의 기준을 임의로 A에서 B로 바꾼 것 – 진짜 부정의한 통치 권력에 대한 찬양

2019년 상반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입회원 교육 프로그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교육부에서 알립니다.

한철연 교육부에서는 <2019년 상반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입회원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아래의 프로그램 진행 방식과 대상자 안내문을 확인하시고,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1. 일시 : 2019년 1월 12일 ~ 2월 16일 매주 토요일 오후 3:00~5:00

회차

일시 담당 주제
1

1월 12일

한철연 연구협력위

랑시에르와 평등의 정치

2

1월 19일

헤겔분과

헤겔과 낭만주의

3

1월 26일

한국현대철학분과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의 우리 철학

4

2월 09일

정치철학분과

스피노자와 정치

5 2월 16일 여성과철학분과

철학과 여성주의철학의 과제들

  1. 방식

– 한철연 연구협력위 기획 강좌 + 4개 분과 주제별 세미나 (부분 수강 불가)

–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자는 한철연 정회원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함.

– 내부 사정에 따라 일정과 주제에는 변동이 있을 수 있음.

 

  1. 대상 : 학부 3~4학년 및 대학원생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1. 장소 :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태복빌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1. 수강료 : 무료

 

  1. 신청 및 문의 : kb-940@hanmail.net(교육부장 김종곤) / 02-332-4301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⑯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전 시간 342a-b의 내용은 341d에서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이익이 있나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엄밀론에 입각하여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기술 자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 자체’를 나타내는 아래와 같은 표현들 즉 ‘그 자체’αὐτὴ, ‘온전한ὅλος 것’. “틀림없는 것ὀρθὴ οὖσα, ‘아무런 훼손도 없는 것’ἀβλαβὴς, ‘순수한 것’ἀκέραιός이란 말들은 완전자로서의 형상eidos 개념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부분을 곧바로 형상에 대한 언급으로 연결시키기에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각에서 이 부분을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1권이 단순히 전기 대화편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격적으로 형상론이 제기되는 중기 대화편의 성격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언급된 기술 자체를 형상론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한 번 음미해보기로 하자.

우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의술 그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현실의 기술이 아니고 오히려 현실의 기술들이 기술로서 규정되는 근거이자 본질 즉 자기 동일자로서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함poneria이나 과오hamartia가 없는, 탁월성aretē이 이미 구현되어 있는 완전자이며 그에 따라 어떤 것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자체적이고도kata auto 순수하며akeraios 자족적인autarkēs 존재이다. 이에 반해 다만 그것을 분유(分有)metechein하고 있는 현실의 개별 기술들은 그 분유에 근거하여 비록 그 기술로는 불리어지지만 결함을 안고 있어 늘 다른 기술에 상호 의존하면서 끝없이aperaton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원천적으로 자체 존재로서의 규정성peras을 획득하지 못한 채 가변적 계기들 내지 측면들만 가진 무규정자apeiron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기술임’과 ‘기술 아님’ 즉 반대적인 것tounantion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 쪽 극단치인 동일성tauton에서부터 무(無) 쪽 극단치인 타자성heteron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ananchē 속에 던져져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러한 기술들 내부에 존재 쪽 운동성과 무(無) 쪽 운동성이 생성과 소멸, 형성과 해체를 두고 무한 투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완전자로서 기술 자체는 이미 본질로서 기술 대상의 이익을 미리 살피고skepsomenes 제공하여ekporiusēs 최대한 완벽하게 해주는 성질 내지 탁월성ἀρετῆ을 구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은 개별 기술들 내부에도 분유되어 있다. 이것은 개별 기술들 각각 내부에 자신의 탁월성을 향해 다가 갈 수 있는 능력dynamis이 가능성으로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개별 기술들이 그러한 내적 가능성을 어떻게 자각하고 있느냐이다. 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철학은 존재 쪽 운동성으로서 영혼psychē의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이자 앎이다. 요컨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앎의 능력이자 견인력으로서 참된 영혼이 자리함을 깨닫고 자체존재로서의 형상eidos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을 변증술dialektikē을 통해 획득하여 개인의 정의로서 그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내고 동시에 나라의 정의로서 타자의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과 나라 모두 행복eudaimonia해지는 것이다. 철학자왕은 다만 그 철학의 공부와 정치적 실천의 극단에 서 있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자 지표인 것이다.

 

[342c]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언급을 토대로 의술이나 마술(馬術)ἱππικὴ 등 그 어떤 기술도 기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ἐκείνῳ οὗ τέχνη ἐστίν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는 그 말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여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고 말하자 마뜩치는 않지만 마지못해 동의한다.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의 이익을 미리 생각하고 제공한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기술이 병을 고치는 의술 또는 안전한 항해를 담보하는 키잡이 기술이라는 점에서 일단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을 관리하고’ἄρχουσί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고 말하자 그제에서야 소크라테스의 기술에 대한 예시들이 통치술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가 자신의 동의를 토대로 진행되어 온 이상 그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42d]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언급 없이 기술이라는 말 대신에 전문지식ἐπιστήμη(epistēmē)이란 말을 꺼내들어 ‘그 어떤 전문지식도 더 강한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하는 자의 이익을 생각하며σκοπεῖ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고 말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이 결국 통치술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항을 시도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에서(341c) ‘엄밀한 의미의 의사나 키잡이를 이야기하면서 기술의 대상을 ’관리한다‘, ’통솔한다‘라는 말을 이미 사용했고 그 말에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음을 환기시킨다.

 

[342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키잡이와 통솔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아니라 선원이자 통솔을 받는 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지시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또 할 수 없이 동의하고 만다. 결국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통치술임이 드러난 이후에 전개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막판 줄다리기도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마무리된다.

*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의를 토대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놓는다. 즉 ‘통치를 맡은 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 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치를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τὸ τῷ ἀρχομένῳ καὶ ᾧ ἂν αὐτὸς δημιουργῇ,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쐐기라도 박듯이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라는 말로 이 부분에 대한 논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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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한 의미의 기술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문답에 대해 몇 가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통치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이라는 말(342e)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나타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cf. 341a) 이 말은 현실 통치자가 따라야 할 규범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직분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통치자가 통치자인 한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직분, 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수행할 수도 그리해서도 안 되며 만약 그 본분에서 벗어날 경우 그는 이미 통치자도 전문가도 지식인도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적 직분들 혹은 개인의 영혼 내부에 있는 기능들 또한 자기의 고유한 직분과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직분상의 고유성이 무너지면 그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결코 온전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은 통치자를 비롯한 전문가의 직능상의 고유성을 규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직분 내지 직능들의 적도(適度to metrion)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2) * 소크라테스는 기술이 하는 일들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만 해도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342a-b, 342c, 342e)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341d-e, 342a) ‘관리한다’ἄρχουσί(342c-d),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 (342c),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342d-e) 등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들은 사실 일반 기술 관련한 일에 대한 표현으로는 다소 어색한 말들이다. ‘관리한다’, ‘지배한다’, ‘지시한다’라는 말이 대상에 대한 기술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특히 ‘지배한다’와 ‘지시한다’의 원어 κρατέω와 ἐπιτάττω가 강제와 명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이 말들은 플라톤에게서 기술과 대상 간의 권력관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자아낸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종의 섬기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궁금증은 일반 기술에 대한 예시를 발판으로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밝혀지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표현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통치술과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그와 같은 강제와 우위를 함축하는 말들과는 꽤나 다른 그 반대를 함축하는 말들 즉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관심과 사려를 다해 살핀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 ‘그 쪽을 염두에 둔다’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말들은 통치술이 대상인 시민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위계상 우위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고 섬기는 기술임을 새삼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궁금증을 자아낸다. 뭔가 앞서 사용한 표현들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염두에 둔다’βλέπω는 표현은 타자에 대한 진지하고도 다함이 없는 관심과 걱정을 담은 시선(視線)으로서 하이데거(M. Heidegger)의 ‘돌봄과 염려’(Sorge) 개념까지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통치술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이중성 내지 상충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들을 서로 상충되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과 관련한 관리와 지배, 지시라는 말들을 시민에 대한 섬김과 봉사,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정치적 집행 차원의 말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 말들을 기술의 대상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한 통치자의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여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의 성격은 실제로 그처럼 반대적인 요소를 엮는 방식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통치술은 그저 대상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다. 플라톤에게 있어 통치술은 수차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듯이 적극적인 관리와 지배의 기술인 동시에 대상에게 이익을 온전하게 제공하는 실행 능력이자 앎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선성(善性)τὸ ἀγαθὸν과 이타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 기술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과연 현실에서 부분적이나마 그러한 능력에 준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부모의 행동 양태를 들여다보면 분명 그러한 능력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을 가진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돌보며 밤낮으로 늘 자식을 염두에 두고 있고, 자식의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살피고 생각하며 자식을 위해 늘 퍼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부모는 이이들을 또 단속도 하고 지시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서 통치자와 시민의 관계는 일상에서 부모와 지식간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모는 그러한 일들을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식들에게 행하지만 플라톤의 통치자는 그것을 철저히 이성에 따라 타자들 즉 시민들 모두에게 행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사적인 가정(家政)’은 본능에 기반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공적인 국정(國政)’은 기술 즉 전문지식과 선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유와 실천의 힘을 생물학적 본능 수준의 힘조차 능가하는 힘으로 고양코자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발상은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가히 이성과 도덕의 화신으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이런 점에서도 많은 비평가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을 그 자체로 실현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평가하고 그의 관념성을 비판한다. 특히나 앞서와 같은 플라톤 통치술의 특성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이 동양의 봉건적 정치철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폄하되는 주된 이유이다. 실제로 그의 통치술은 군왕과 백성의 관계를 부모 자식 사이로 여기는 동양의 성왕론 내지 왕도정치론과도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한마디로 부성주의(paternalism)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팔로우어로 설정하고 있고 정치이념에 있어 전체주의는 물론 철저히 전문가 주의, 소수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현대 민주주의는 선한 정치에 대한 믿음 보다는 악한 통치에 대한 우려와 의심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에 따라 비록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는 해당 전문가의 역할이 존중될 지라도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이 정치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나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소수 엘리트 집단들의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20세기의 비극적 정치 현실의 주범이자 근본 원인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비판이 내포하는 플라톤 정치이론에 대한 혐오와 폄하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통치자가 갖는 철두철미할 정도의 반성적 지성과 선의에 입각한 고도의 이타성과,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롯한 20세기 독재자들의 무반성적 독단과 정치적 야욕을, 전체주의와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라는 잣대로 단순 등치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순수하게 텍스트에 기초해서 바라보면 그의 통치술은 시민들 각자의 고유한 본성과 그에 수반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현실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것들의 조화와 그것을 통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현대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유포한 인간 본성의 획일성 즉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이기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들의 배타적 갈등을 다수의 견해를 기준으로 조정하고 타협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욕망이 화폐로 환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획일적이며 물신주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플라톤이 다원주의적이고 화폐라는 물신이 최고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유주의가 오히려 전체주의적이다. 하기는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 본성 자체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면서, 그 획일적인 이기적 본성의 효율적인 구현을 위한 수단적 욕망의 다양성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외눈박이처럼 그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도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가 그 욕망을 증폭시키는 기재로 고착된 이래 패배주의적이고 무반성적인 현실 안주의 정치철학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플라톤의 통치기술에 대한 사유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또 다른 측면 즉 자연법의 이념과 현대 민주주의가 과제로 삼고 있는 정치적 주체들의 지성화와 정치권력의 도덕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의 개별적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마무리하며 언급한 말 즉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καὶ 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 καὶ τὸ ἐκείνῳ συμφέρον καὶ πρέπον, καὶ λέγει ἃ λέγει καὶ ποιεῖ ἃ ποιεῖ ἅπαντα.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는 물론 오늘날의 마키아벨리스트들의 주장까지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통치 모럴의 표상이자,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가슴에 안고 있어야 할, 통치자의 도덕성과 언행일치를 담은 신성한 강령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정치이론의 핵심이 다름 아닌 정치권력의 지성화에 있고 현대 민주주의 또한 그것을 핵심과제로 안고 있는 한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을 반성의 시금석으로 새롭게 뒤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4) 342d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항을 시도하는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앞서 엄밀한 뜻의 의사는 ‘몸을 관리하는 자’σωμάτων ἄρχων임을 합의했다고 말을 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는데 앞서 합의한 부분(341c)과 비교해보면 합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앞에서 합의한 내용은 엄밀한 뜻의 의사는 ‘환자들을 돌보는 자’ἢ τῶν καμνόντων θεραπευτής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말 역어로만 보면 두 말의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돌보는 자’θεραπευτής가 그리스어 원래 의미로는 지배자나 관리자와 관계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을 섬기는 사람’, ‘궁정 신하’, ‘시중꾼’의 의미를 갖는 말로서 위계 상 앞의 말과 반대의 성격을 갖는 말임을 고려하면, 일단 합의 내용의 불일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플라톤이 그 말을 별다른 언급 없이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내용상 다른 의미를 갖는 그 말을 위계에 민감한 트라쉬마코스가 왜 같은 말로 받아들였는지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칠 수도 있는 이러한 소소한 표현들과 텍스트의 맥락들 모두 우리가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 자신 이미 시민에 대한 통치와 지배, 헌신과 섬김을 하나의 통일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5)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설명 없이 기술을 전문지식이라는 말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기술이라는 실천적 활동이 기본적으로 앎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왜 이 국면에서 굳이 기술 대신 그 말을 꺼내든 것인지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전문 지식의 원어 ἐπιστήμη(epistēmē)가 ‘실재에 대한 앎’, ‘참된 앎’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폈듯이 그의 엄밀론이 형상론의 함축도 갖고 있음을 전제하면 아마도 그것은 장차 다루게 될 ‘실재에 관한 것’을 여기에서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343a]

* 결국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가 동의한 엄밀론에 따라 논의를 진행한 결과 ‘정의에 대한 정의가 정반대로 바뀌었음’ὅτι ὁ τοῦ δικαίου λόγος εἰς τοὐναντίον περιειστήκει이 모두에게 명백하게καταφανὲς 드러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크게 당황해하며 답변 대신 소크라테스를 마치 코를 흘리면서도 보모τίτθη의 돌봄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그 때문에 돌보는 목동ποιμήν과 돌봄을 받는 양πρόβατον의 관계조차 모르는 사람이라 힐난한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보살핌과 피보살핌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 해도 보모나 목자 같은 보살피는 자들이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살핀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목동과 양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다 쏟아 붓는 기세로 아주 길게 자기 생각을 토해 낸다. 트라쉬마코스는 애초 현실론에 입각하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엄밀론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다가 그것이 또 비판에 부딪치자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또한 임기응변적으로 바뀌는 그의 태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이 부분(343b~344c)은 트라쉬마코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국가> 전체의 논의를 통해 넘어서야할 높고 거대한 악의 봉우리가 된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목동들이 양이나 소를 보살피는 목적이 주인이나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게다가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이 목자가 양을 대할 때와는 뭔가 다르게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밤낮으로διὰ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생각한다고 믿고 있다고 비난한다.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실제로는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οἳ ὡς ἀληθῶς ἄρχουσιν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다른 ‘있는 그대로의 현실 통치자들(real rulers)’을 말한다. 그는 자신도 동의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스스로 저버리게 되자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말하는 ‘참’τἀληθῆ의 기준은 그 자신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소크라테스와 정반대이다. 그가 이어서 펼치는 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피기로 한다.

 

* 참고로 342a-b 부분에 대한 박종현 역본은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워 쉽게 읽히지가 않는데다가 일부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학당 초고를 토대로 필자가 다시 고쳐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342a> “그럼 이건 어떤가요?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결함이 있는가ἐστιν πονηρά,요? 아니면 다른 어떤 기술이건 어떤 훌륭함ἀρετῆ을 추가로 필요로 하는 것ὅτι προσδεῖταί τινος ἀρετῆς인가요? 이를테면 눈은 시력을 필요로 하고 귀는 청력을 필요로 하며, 그런 까닭에διὰ ταῦτα 그것들에게는 그것들의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을 살펴주고 제공해줄σκεψομένης τε καὶ ἐκποριούσης 어떤 기술이 필요하듯이, 기술 자체에도 어떤 결함이 내재해있어서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ἔνι τις πονηρία 각각의 기술에는 그것에 이익이 되는 것을 살펴줄 다른ἄλλης 기술이 필요한 것이며, 살펴주는 그 기술에는 다시 그런 종류의 다른 기술이 필요해서 이런 사태가 끝이 없게ἀπέραντον 되는 것인가요? <b>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이익을 살피나요?ἢ αὐτὴ αὑτῇ τὸ συμφέρον σκέψεται; 그도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신의 결함을 보충하고ἐπὶ τὴν αὑτῆς πονηρίαν 자신의 이익을 살펴줄 어떤 기술을 더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가요?οὔτε προσδεῖται; 그 기술이 자기 자신이든 다른 기술이든οὔτε αὑτῆς οὔτε ἄλλης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유가 기술은 어떤 것이든 결함도 없고 잘못도 없기 때문이고οὔτε γὰρ πονηρία οὔτε ἁμαρτία 또 어떤 기술도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이 되는 걸 찾는 게ζητεῖν 적합하지 않기 때문οὔτε γὰρ προσήκει인가요? 그런가 하면 각각의 기술은, 그것이 엄밀하고 완전하게 그것 그대로의 것인 한에서ἕωσπερ ἂν ᾖ ἑκάστη ἀκριβὴς ὅλη ἥπερ ἐστίν, 제대로 된 것ἐστιν ὀρθὴ οὖσα,으로서 훼손이나 섞임이 없기ἀβλαβὴς καὶ ἀκέραιός 때문인가요? 엄밀한 뜻으로τῷ ἀκριβεῖ λόγῳ 그것을 살펴 보세요.σκόπει. 사태가 이런가요 안 그런가요?οὕτως ἢ ἄλλως ἔχει;”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다시 자기의지와 나다움으로 위계질서에 맞서라

 

우리는 앞서 유일자라는 존재론을 통해서, 하이데거에 앞서 유일자가 ‘염려’하는 것은 ‘고유한 자아’이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그런데 고유한 자아는 피히테가 말하는 ‘절대적 자아’가 아니다. 그리고 고유한 자아를 염려하는 것은 내가 ‘나다움’을 나에게 마련해주는 것이며, 이는 해방과 구별되는 근원적인 자유인 자기해방이며, 곧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전권을 주는 것이라는 전권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라고 하였다.(39) 자기 자신을 염려하는 않는 자는 자기폐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가?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나에게[Mir] 불쾌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나이가 들고 나에게 욕지기가 나서, 나는 나에게 어떤 공포이며, 혹은 나는 나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고 결코 나에게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자기폐지(Selbstauflösung) 혹은 자기비판이 일어난다.(201)

 

자기폐지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는 노예근성, 헌신(Dienst),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182)인데, 이러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에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자기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 또한 나다움이고 자유이며, 자기해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자기폐지, 자기부정과 대립하여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를 주장한다. 그에게 자기부정의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의 지배이다. 사유(Denken)보다 의지(Will)를 중시하는 관념론 정신의 활동적 측면에 대한 강조는 “나는 의지(의욕)한다. 고로 존재한다”(Ich wille, also bin Ich)라고 말한 셸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노예 신분의 멍에, 통치권의 구속, 귀족들(Aristokratie)과 군주들의 속박, 욕망(Begierden)과 열정(Leidenschaften)의 지배.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Willens),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 더구나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을 요구한다.(172)

 

이렇게 볼 때, 자기의지는 자기결정이며 이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자기부정은 자신의 사용이 아님(Uneigennützigkeit)과 같은 의미이다(228) 이렇게 보면 자기인정은 자신의 사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용은 자기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티르너가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 이후에 니체 또한 인간을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의 총체”로 이해하고 이러한 “총체적 존재(Die Gesamtheit)에 대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Das Selbst) 혹은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런 존재를 니체는 ‘신체’라고 부른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4) 다시 슈티르너로 돌아와 보면, 그는 이러한 자기의지의 자유가 나다움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다움은 자기가 무엇을 할 자격, 권리, 전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 곧 ‘자기 전권위임’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verleug) 사람만이,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만이”(220) “참, 인류 등등과 같은, 모든 더 높은 본질은 우리보다 상위에(über) 있는 어떤 본질(Wesen)”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40). 슈티르너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일자의 염려를 상기하도록 한다. “네가 매 순간에 존재하듯이, 그렇게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고, 그리고 바로 이러한 “창조물”에서 너는 너 자신을, 곧 창조자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40) 슈티르너의 이러한 주장 이후에 니체(1844-1900)는 위버멘쉬(Übermensch)를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über-sich-hinaus-gehen, sich-ü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결코 고정될 수 없는 존재이며,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으로서의 변화를 경험하는 존재이다.”(백승영, 『철학, 죽음을 말하다』, 165)

그런데 니체와 유사하게 슈티르너는 사람들이 참된 것을 신성한 것,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된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über sie geht’s nicht hinaus)”(38)고 말한다.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유일자는 신성한 것, 곧 참된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적 자유주의’에 대해 “자유주의의 원리, 곧 인간을 넘어서지 않는(über das Prinzip des Liberalismus, den Menschen, nicht hinausgeht)”다고 비판한다(136). 그리고 그는 유일자를 표현하고 있는 “자기실현은 코뮨과 공산주의 범위를 넘어선다(hinausgreifen)”(303)고 주장한다. 자기실현은 유일자의 모습인데, 곧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그는 민중이 ‘민중의 존엄을 능가하는(über seine Majestät hinausragen) 사람들을 억압한다(237)고 비판하는데, 여기서 존엄을 능가하는 사람은 에고이스트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사회를 넘어서고 극복해야(über sie hinausgehen und sich erheben)”한다고 주장하고 있다(343). 또한 그는 에고이스트의 역사를 말하는데, “남아 있는 세계사에서 자신의 소유(Eigentum)를 소유한다는 것,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넘어서는(geht übers Christliche hinaus) 것이다”(411). 말하자면 에고이스트, 곧 유일자,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모든 추상적인 것, 자신 위에 있는 것으로 오인하는 것들을 넘어서고 능가하는 사람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글의 첫 머리에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는데, 그곳에서 ‘생존투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주인과 노예, 곧 승자는 주인이고 패자는 노예라고 하면서 “몽둥이가 사람을 이기거나(überwindet) 사람이 몽둥이를 제압하는가이다”(9)라고 비유적으로 말한다. 결국 그는 유일자를 통해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노예의 삶, 곧 몽둥이가 사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의 삶, 곧 우리가 몽둥이를 극복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채찍의 권력(Macht)’에 대해 ‘우리들의 –반항(Trotz), 반항적인 용기(trotziger Mut)’를 “우리들의 부동심(不動心)(Ataraxie), 다시 말해 의연함, 대담성, 우리들의 거스르는 힘(Gegengewalt), 우세(Übermacht), 정복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면, 곧 “우리가 스스로 느껴서 깨닫는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unüberwindlich)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10) 또한 슈티르너는 ‘어떤 병적 욕망, 어떤 열정 등등으로 타락한 누군가’에 대해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하길 원하고 있다(374). 나아가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은 니체의 창조적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의 힘(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창조적인 아무것도 아님(Nichts)에서 다시 태어난다.”(412) 니체의 위버멘쉬와 너무도 닮아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니체의 위버멘쉬는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너무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슈티르너의 유일자의 모습과 니체의 위버멘쉬는 너무나 닮아 있다. 아무튼 이렇듯 슈티르너는 ‘나다움’의 추구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존재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태도 중에 ‘겸손’을 통해 위계질서에 맞서고 궁극적으로 위계질서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하여 겸손을 버리는 것이다.

 

  1.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

 

그의 ‘자아’에 대한 추적은 계속하여 ‘나다움’과 연결되어 사유된다. 그는 사회에 의해 나의 나다움(Eigenheit)을 제한하게 되는 경우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은 내가 동경하고, 숭배하고, 숭상하고, 존중하기 때문이고,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없음(Mutlosigkeit)”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주장한다(344). 단순히 단념, 자기부정, 용기없음이 아니라 모든 ‘나의’ 단념, ‘나의’ 자기부정, ‘나의’ 용기없음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강조는 필자). 이렇게 볼 때, 자기부정을 벗어나는 길은 자아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러한 ‘나다움’의 제한에는 겸손(Demut)이 존재하는 것이다. Demut는 독일어로 ‘국가, 피상적인 것’을 숭배하다(dienen)는 뜻이다.<Heinz Messinger und Der Langenscheidt-Redaktion, Langenscheidts Grosswörterbuch, Langenscheidts KG, Berlin und Mnchen, 1989, S.269, S.276.> 또한, 이 단어는 영어본에서는 humility이다. ‘humility’는 라틴어 ‘겸손’(humilitas)에서 유래한다. 이 명사는 형용사 평편한(humilis)과 관련된다. 이 단어는 겸손한, 낮은(humble)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humus로 이끌어낸 것인데, humus는 대지(earth), 땅(ground)이라는 뜻이다.< Dictionary.com Unabridged (v 1.1). Random House, Inc. 23 Sep 2008. Dictionary.com 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humus.> 또한 라틴어 homo에서 비롯된 영어가 human이고 humble(겸손한, 천박한, 낮추다)도 같은 어원을 지고 있으므로 인간이 ‘대지에 머리를 숙여’ 인간의 ‘겸손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슈티르너는 겸손이 오히려 나다움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또 다른 정신에 대한 복종, 위계질서(Hierarchi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에게 겸손(humilitas)은 추상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칭한다. 인간(homo)는 국가, 종교, 신과 비교하여 대지(humus)이므로 천한 것, 낮은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는 마치 신을 숭배하듯이 추상적인 것을 숭배한다. 나아가 자기부정은 체념과 갈망의 냉각으로 이어진다.

 

이제 체념(Entsagung)의 습관은 너의 갈망(Verlangen)의 격정을 냉각시키고, 너의 청춘의 장밋빛은 -더없는 행복의 빈혈증 가운데서 퇴색되어간다.(67)

 

또한 그는 생각의 지배를 ‘무자비한 위계질서’(Hierarchie)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위계질서에 대한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원래 Hierarchy는 그리스어인 hierarkhia는 ‘성자의 지배’를 의미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조직 원칙을 이루었다.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순위를 나누고, 또한 성직자는 교황을 최상위로 하여 주교, 사제, 부제의 단계가 정해져 있다. 또 세속의 국가도 중세에는 교회의 인가 아래에서만 그 통치권을 얻어, 제왕도 교황 아래의 한 단계에 속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엄중한 상하의 단계적 조직을 하이어라키라고 한다.(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그것은 얼핏 보면 생각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생각에 지배는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기 때문에, 그 때 나는 생각들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굴복의 이유는 자아의 굴복이기에 굴복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생각하지 않음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에 굴복하기 때문에, 생각들이 자유롭다면, 그렇다면 나는 생각들의 노예이고, 나는 생각들에 대한 어떤 강제력도 갖지 못하며 생각들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가지려고 하고, 생각들로 꽉 차 있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생각 없이 존재하려 하고, 생각의 자유 대신에 생각하지 않음으로 나를 지킨다.(388)

 

위 글을 다시 보면 생각들에 지배되는 상황, 곧 생각들의 노예인 경우는 내가 생각들에 대한 ‘강제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맑스가 노동의 소외, 강제노동을 비판한 것 또한 노동에 대한 통제가 노동자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슈티르너는 그 비판의 길이 사유에 대한 것이므로 비판의 ‘결’ 또한 다른 것이다. 맑스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지양을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하여 극복하려고 하였다면, 슈티르너는 생각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고, 생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생각하지 않음은 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신성모독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생각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의 지배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고 경멸하고 조롱하여 그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다시 아래의 글을 통해 위계질서의 의미를 이해해 보자.

 

그러나 생각과 이념의 힘,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 요컨대 위계질서는 성직자들로서, 다시 말해 신학자, 철학자, 정치인, 속물, 자유주의자, 교사, 고용인, 부모, 아이, 부부, 프루동, 조르주 상드(George Sand), 블룬칠리(Bluntschli) 등등으로 있는 동안 지속된다 등등.(392-393)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위계질서는 “생각과 이념의 힘(Macht), 이론과 원리(Theorien und Prinzipien)의 지배(Herrschaft), 정신의 위엄(Oberherrlichkeit)”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 이념의 ‘’, 이론과 원리의 ‘지배’, 정신의 ‘위엄’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 지배, 위엄으로 등장할 때가 문제인 것이다(강조는 필자). 곧 “위계질서는 생각의 지배(Gedankenherrschaft), 정신의 지배다! ”(79) 슈티르너와 동시대를 살면서 가혹하게 비판했던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판이란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체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을 통해 전복되어야 하며,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휘어잡을 때만 물질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385) 이러한 주장은 물질적 힘(Gewalt)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면서, 이론이 대중과 결합되면 물질적 힘이 된다는 측면에서 슈티르너의 주장과 반쯤 공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맑스는 전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결국, 슈티르너가 하고자 하는 주장을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라’라고 요약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겸손은 유일자인 나를 낮추고 추상적인 것들을 나보다 높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나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결여로 자유, 자기해방, 자기 전권위임이라는 나다움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든다.

 

  1. 위계질서에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슈티르너는 위계질서와 관련하여 어린이를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삶에 필요한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저 정신들에 대해 무관심(gleichgültig)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약하기 때문에, 정신들의 권력에 굴복”한다(79). 우리는 이 글에서 위계질서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 무관심이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로 위계질서에 저항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의 공격에 무관심하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하여 자신들을 쇠약하게 만들지 않게 하도록 만들어서, 그 일을 무관심(Apathie)하게 성취하였다. 호라티우스는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nil-admirari)는 유명한 말을 하고,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하여 다른 것들에 대한,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한다.(101)

 

닐 아드미라리(nil-admirari)는 호라티우스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며 <서간집>에 남긴 말이다. 무관심(Apathie:어원은 그리스어 páthos이다)은 모든 정념(情念)에서 해방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스토아 학파는 정념에 방해받지 않는 태연자약한 심경, 격정 등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마음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였다. 슈티르너는 스토아 철학을 소환시킨다. 마치 데리다가 도래할 유령으로 맑스를 소환하듯이 말이다.

 

누구나 대상들(Objekten)과 어떤 관계를 맺는데,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그 대상들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성경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에게 성경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 같은 사람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고, 그에게 성경은 단지 어떤 장난감 등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376)

 

아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대상들에 대한 태도에서 무관심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경으로 놀이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성경은 마법 수단도 아니고, 성경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대해 슈티르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대상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sich gar nichts aus ihr macht) 사람”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다. 니체는 위버멘쉬에 이르는 정신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낙타에서 사자를 거쳐 어린아이에 이르는 과정으로 비유된다. 낙타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에 복종하고 외경하는 정신의 상태이므로 부정할 힘의 부재이고,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자명성을 부정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을 획득한 상태이며, 어린아이의 정신은 창조력을 갖춘 정신, 곧 새로운 자명성을 창출할 가능성의 획득을 의미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다. 곧 이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곧 나다움을 추구하며 살기위해서는 자기부정에서 자기인정으로 삶의 태도를 전환시키고, 위계질서에 겸손하지 말아야 하며, 위계질서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것에 대한 헛됨을 부여하여 신성한 것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고 자기의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 “자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81)

슈티르너의 말대로 ‘아이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에게 신성한 대상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이 같은 사람이여! ‘너의 청춘의 장밋빛’을 위해 자기를 인정하고, 위계질서에 대해 겸손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고 무관심을 선언하라!

 

오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왔다.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노랫말이 떠오른다.

 

“어느 것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Nothing really matters to me)

 

다시 슈티르너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

모든 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⑮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340c]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의 설전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을 클레이토폰처럼 이해하건 그냥 원래대로 이해하건,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οὐδέν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 그런 연 후 트라쉬마코스에게도 ‘강자의 이익’이란 말이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된 것’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οκοῦν εἶναι τῷ κρείττονι을 뜻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 아마도 트라쉬마코스는 클레이토폰의 제안을 듣고 속으로 “실수로 법을 잘못 제정했을 경우 법을 다시 고치면 되는데 웬 호들갑인가. 결국 다 강자의 이익이기는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임이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361a-b) 게다가 클레이토폰의 제안은 자기주장과 달리 ‘통치자에게 이익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지 꼭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먼저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내를 들켜버린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이제 그러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클레이토폰의 말처럼 ‘이익으로 생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펄쩍 뛰며 ‘천만에요ἥκιστά, 실수를 저지른 사람을 제가 더 강한 자로 부를 것으로 생각하시나요?’라고 반문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어떤 점에서는 실수도 저지른다고 동의했을 때(339c) 그런 뜻으로 말한 걸로 생각했다”고 트라쉬마코스의 달라진 태도를 지적한다. 이 말 또한 트라쉬마코스의 심기를 건드린다.

 

[340d]

* 트라쉬마코스는 이 말에 더욱 자존심이 상해 소크라테스를 곡해자(궤변가)συκοφάντης라고 힐난하고, 이제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자신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확신이라도 심어주려는 듯이 길게 펼쳐 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를 자신이 원하는 논박의 장으로 더욱 한 발짝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자기가 생각한 친구와 진짜 친구를 구별하지 않은 채 느슨하게 친구를 정의했다가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았다. 그랬던 터라 트라쉬마코스는 이제 폴레마르코스와 비슷한 처지에 몰리자, 금방 태도를 바꾸어 자기가 먼저 자신이 말한 통치자를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서도 잘못된 정의관을 제대로 검토하려면 엄밀함이 수반되는 기술의 측면에서 논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들고 나온 트라쉬마코스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플라톤의 창작물임을 고려하면 논박의 국면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긴장감 있고도 주도면밀하게 이끌어가는 플라톤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 여기서 곡해자의 원어는 συκοφάντης(sykophantēs)이다. sykophantēs는 원래 소송 관련 용어로서 상대방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 소송을 거는 무고자(誣告者)를 나타내는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무화과 열매(sykon)를 보이게 하는(phainō)자’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나뭇잎이 커서 흔들릴 때나 열매가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말은 부유층을 비롯한 소송 상대자를 협박하여 숨긴 재산을 뜯어내려는 무고자의 뜻도 갖게 되었다. 트라쉬마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이 무고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무고행위를 돕거나 앞장섰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이 늘 일상으로 무고를 일삼다가 정작 수세에 몰리다보니 소크라테스의 정당한 지적도 무고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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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와 그것이 미친 아테네 말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chische Kuturgeschichte, Darmstadt 1956) Vol. 1, s.225-233 참고. <e시대와 철학>, [시철북&아카데미], ‘그리스 문화 대탐험’ 제14강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서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중후반 아테네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과 분열에 처하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지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무고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나라 또한 그들을 구제하기 힘들고 민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하층민들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 아테네에는 아예 무고를 전문적으로 일삼는 직업도 생겨났고 반대로 돈 받고 무고를 막아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런 다툼과 소송이 많아질수록 소피스트들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소피스트들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정치가들 또한 민회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수수방관하거나 거꾸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벌금을 물게 했지만 그 정도의 배심원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설사 벌금을 물게 되었을 경우에도 그대로 버티기 일 수였다. 뤼시아스의 시대에 연체된 미납액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노예를 1000명이나 갖고 있었던 니키아스도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고자에 시달리던 크리톤도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힘센 무뢰한을 고용하여 무고를 면했다고 한다.(<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들을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무고자들은 민주정이 회복된 후에 다시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이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선동정치가들과 무고자들간의 거래와 타협 같은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상당수의 양식 있는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임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무화과(sykon)는 무고자(sykophantēs)의 어원이 된 말로서 여기서는 무고자들을 비유한 말이다) (부르크하르트 <그리스 문화사> 1권 p.225-233. e시대와 철학,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참고)

*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거나 제국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여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일단은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기 일 수였다. 그에 따라 군사독재 시절 우리나라의 경우 혹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때처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인들에게 제국은 거의 종교로까지 받들어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국사범이라는 이유로 집행되는 일도 생겨났다. 게다가 소송 과정에서 피고발인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 35) 이러한 고문행위는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가 견지하고 있었던 패권주의 이념과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민중들 그리고 민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선동적 정치가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즉 투퀴디데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아테네는 대외적으로는 명실공한 폭압적 참주의 나라였고 대내적으로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눈이 먼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을 지지한 민중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테네 민회는 일단 자국의 국가주의적 이익과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연법적 이념과 상관없이 그 어떤 것이든 어떤 수단이든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 결국 아테네는 전성기 시절에는 속국들의 공물로 특권을 누리는 제국이었고, 기원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무고자들이 횡행하고 권력자들과 민중들 모두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동안 혼란과 내분으로 점철된 이른바 자유방임의 나라였다. 이런 이유로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의 비판 이래 중우(衆愚) 정치로 폄하되기도 했고, 아테네 민중 역시 피착취 기층 민중이 아닌, 속국들의 민중들에 대한 착취자이자 자국의 노예들에 기생한 소수의 완전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사이비 민주정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은 고대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동안 아테네의 중심적인 정치체제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오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은 물론 개인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고 각성케 하여, 전성기 아테네의 문화적 성취와 역동성의 기반이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아테네 민중들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피착취 민중이자 국제주의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노예들과 거류외인들을 포함하는 아테네인들 대다수도 아니었지만(이것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 모두에 해당된다),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민중이 그것도 거의 1세기에 걸쳐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해온 경우는 아테네 민주정이 유일무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 또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그 자체로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의 고전적 전거이자 반성적 지표로서 여전히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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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곡해자라고 힐난한 후,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가 왜 실수하지 않는 통치자인지 설명하기 위해 의사ἰατρός. 계산 전문가λογιστής, 문법가γραμματιστής 등의 예를 끌어들인다.

 

[340e]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전문가도 엄밀한 뜻에 따라κατὰ τὸν ἀκριβῆ λόγον 말한다면 그가 전문가인 한에서는 결코 실수ἁμαρτία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모자라 실수를 하는 것이므로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이처럼 그 어떤 통치자도 그가 통치자인 때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앞서 통치자가 실수를 한다고 대답했던 것은 사람들이 보통 그런 말을 하는 그런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양해도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341a]

*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통치자는 가장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결코 실수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정하고 피지배자는 법 준수 의무에 따라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강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강자의 이익을 이행하는 것’δίκαιο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ποιεῖν συμφέρον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는 그 자신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나오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가 내몰려 답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논박이 낳은 하나의 성과로서 내용적으로도 엄밀한 통치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에 대해 따로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곡해자(무고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만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고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혐오하는 소피스트들이나 일삼는 일인데 그 짓을 자신이 했다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두고 둘 사이에서 짧지만 날선 공방이 오간다. 두 사람이 구사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대화가 단순히 말의 곡해 차원의 것이 아니라 무고 행위라는 소송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계획적으로ἐξ ἐπιβουλῆς 곱새기기 위해서 질문한 것으로 생각하시오.’라는 말은 무고자들이 무고할 때 철저히 사전 계획을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빤히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라든지 ‘논의에 의해서 꺾을 수도 없다οὔτε βιάσασθαι τῷ λόγῳ δύναιο’는 말 또한 소송 관련 말투로서 무고가 트라쉬마코스 자신에게 얼마나 익숙한 일인지를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을 꺾을 수 없다(승소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341b]

*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은 곡해 따위는 하지 않으며 트라쉬마코스 당신이나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자의 의미를 확정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곱새겨보려면 곱새겨보라는 듯 자신 있는 말투로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 역시 ‘가장 엄밀한 뜻으로 통치자τὸν τῷ ἀκριβεστάτῳ λόγῳ ἄρχοντα ὄντα.’인 자라고 답을 확언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신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했던 폴레마르코스의 전철은 결코 밟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341c]

* 이러한 확언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 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또한 트라시마코스를 사자에 비유해 그의 자신감을 부추겨 새로운 논박의 장을 펼쳐 그의 주장을 제대로 검토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깔린 말이리라.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라는 말은 무모한 행동을 일컫는 그리스의 속담이다.

* 그리하여 이제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에 대한 엄밀론에 입각한 새로운 검토가 시작된다.

검토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첫 질문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전문가로서 예를 든 의사를 소재로 삼아 의사가 돈별이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인지를 묻고 이어서 키잡이(선장κυβερνήτης)가 선원들의 통솔자인지 선원인지를 묻는다.

* 단도직입적으로 둘 사이의 주제인 통치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의사나 키잡이 등 구체적인 관련 사례를 먼저 예시하는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검토 방식에서 자주 눈에 띄는 방식이다. 특히 의술과 키잡이 기술은 통치 기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기술이다.

[341d]

* 트라쉬마코스가 각각에 대한 환자를 돌보는 사람, 선원들의 통솔자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불리는 까닭이 다름 아니라 의사와 선장 각각의 기술τέχνη에 있음을 밝히고 그 기술이란 의술의 경우 환자에게, 키잡이 기술의 경우 선원에게 ‘각각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ἐπὶ τῷ τὸ συμφέρον ἑκάστῳ ζητεῖν τε καὶ ἐκπορίζειν;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 ἔστιν τι συμφέρον ἄλλο ἢ ὅτι μάλιστα τελέαν εἶναι;

 

[341e]

* 여기서 ‘기술이란 기술의 대상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 아니겠소?’라는 첫 번 째 물음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두 번 째 물음은 무엇을 묻는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 트라쉬마코스도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를 못하여 ‘무슨 뜻으로 그걸 물으시죠?’πῶς τοῦτο ἐρωτᾷς;라고 되묻는다. 그러면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란 무슨 말일까? 일단 이 말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기술의 대상인지 기술인지 헷갈릴 수 있지만 원문은 그것이 기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그 말은 ‘각각의 기술에’ ‘도’까지 붙어 ‘각각의 기술에도’καὶ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술의 대상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대상의 이익이듯이 각각의 기술도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술의 대상이 갖는 이익의 경우를 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몸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몸의 존속을 위해 그 부족을 채우는 것이 이익이고 기술은 그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몸은 기술 즉 의술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기술 즉 의술은 무엇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어 그 기술의 이익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뜻밖의 말을 마주한다.

 

[342a]

* 소크라테스의 말은 모두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을 그의 의도에 따라 긍정문으로 풀어 설명해보자. 우선 소크라테스는 의술(기술)은 몸과 달리 그 의술 자체로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결함πονηρά이 없으며 그래서 어떤 기술이건 훌륭한 상태ἀρετῆ를 결핍하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한다. 우선 이 말부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모든 기술에는 부족한 점이 있고 그에 따라 그 기술 스스로의 결핍을 보완하여 기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 기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은 트라쉬마코스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만을 가지고 논의하기로 한 그 연장선상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술 그 자체’로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다.

342b에서도 기술을 엄밀한 뜻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고 342c에서는 이에 따라 ‘의술 그 자체’를 그냥 ‘의술’로 표현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 즉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자기 기능에 결핍이 없으므로 결핍을 미리 생각할σκεψομένης 필요도 없고 제공해 줄ἐκποριούσης 도움도 없다. 만약 현실의 기술처럼 결핍이 있다면 그러한 기술은 그 기술의 이익을 살펴 줄 다른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면서 그런 사태가 끝없이ἀπέραντος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기술들은 그 자체 뭔가로 한정될 수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스스로 미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 아무런 결함πονηρία도 과오ἁμαρτία도 없고 온전하고ὅλος 틀림없고ὀρθός 훼손도 없고ἀβλαβὴς 순수한ἀκέραιός 것이기 때문이다.

 

[342b]

*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말은 앞서(341d) 그 자신이 한 말 즉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라는 말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기술은 결함이 없는 것 즉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따로 살피고 제공할 이익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것일까? 이 의문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해소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에도 결함이나 과오란 전혀 없어서 기술로서는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이 되는 것을 찾는 것ζητεῖν은 합당치προσήκει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술 그 자신은 이미 완벽하므로 자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을 찾아 그 대상에게 제공하는 것이야 말로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42c]

*그러므로 의술의 경우 엄밀한 의미의 의술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술(馬術) 또한 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완벽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계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ἄρχουσί καὶ κρατοῦσιν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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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기술에 관한 주장에서 그가 말하는 기술의 완벽성은 그 기술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인 한에 있어서 다시 말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한에서 갖는 그 기술의 완벽성이다. 즉 완벽성이 그 기술이 그 기술로 불리어지는 조건인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기술이란 말 대신 기술자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분야 기술자를 불렀는데 그가 만약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당신 기술자 맞아?’라고 비난하곤 한다. 그 기술에 무능함 내지 결함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미 기술자가 아닌 것이다.

* 그런데 기술의 완벽성을 위와 같은 기술의 조건과 정의 차원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엄밀한 의미로 기술을 정의한다 해도 그 기술 자체는 보다 발전된 다른 형태의 기술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멍을 뚫는 기술에서 나무를 뚫는 것보다는 쇠를 뚫는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고 계산 기술에서도 주판 기술보다는 전자계산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같은 기술이 아니라 이미 다른 기술이다. 왜냐하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기능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술 내부의 속성이 아니라 기술 외부에서 그 기술에 대한 기술 사용자의 관심과 평가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자계산기가 주판보다 계산이 빨라도 그것은 이미 다른 기술이고, 설사 같은 기술이라 해도 전기가 없는 곳에서는 주판에 뒤지는 것이고 또 아무리 전동 드라이버 기술이 좋더라도 수동 드라이버를 쓰는 것이 보다 섬세한 작업을 위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플라톤이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의 완벽성은 기술의 조건이나 정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갖고 있는 고유 기능과 관련한 자체 기능상의 완벽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무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쇠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모두 각기 그 용도에 딱 맞는 일이 있고 그런 일에 있어서는 그 각각의 기술은 그 자체로 타 기술과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는 최선을 제공하는 기술(기술자)인 것이다. 즉 모든 기술은 서로 다르고 기술의 우열이 있다면 같은 기술 내에서 이루어질 뿐, 다른 기술과의 관계에서 비교 우위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술은 각각 다른 기술과 구별되는 고유의 탁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 사용자는 기술 각각의 고유성이 갖는 경계 내지 ‘한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전문가는 자기 기술 수준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어 가능한 것들만 붙들고 불가능한 것은 내버려 두는 식으로 기술의 완벽성을 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360e-361a) 요컨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이 갖는 고유성 내지 내적 규정성(한계peras)을 아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도 기술은 지식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기술 관련 논의는 곧바로 기술과 전문 지식 또는 기술자와 지식인의 가장 바람직한 쓰임새 내지 행위 기준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 행위와 기능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적합성의 의미를 갖는 적도(適度to metrion) 개념과도 연계되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정의론과 관련하여 고유한 직분, 몫과도 연계되면서 소크라테스 사상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 그런데 왜 플라톤은 기술을 논의함에 있어 현실의 기술이 아닌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상의 논의만 보더라도 플라톤이 정의의 문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외도 없이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려고 하는지가 실감나게 전해진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그는 엄격주의와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당대의 혼란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동떨어진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엄밀론의 배경에는 당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을 넘어서는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치열하고도 냉철한 비판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오히려 플라톤이 살던 당대의 시대 상황이 그것도 일부 시기가 아니라 거의 그의 전 생애동안 그야말로 극도의 혼란기였다는 사실은 그가 왜 이토록 엄격하게 흔들리지 않는 도덕과 정의의 기준을 세우려 했는지를 충분하게 웅변해 준다. 물론 격동기라고 해서 다 플라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그 혼란을 극복하려하기보다는 그 혼란을 시대의 자연스런 변화 또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그것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례이고 또 어떤 사악한 일부의 사람들은 그 혼란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결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도 타협할 수도 없었다. 어떤 부조리 어떤 혼란 어떤 독단도 나라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것인 한, 모두 이성의 빛 아래 낱낱이 폭로되어야 하고 최소한 정의와 이성이 우주와 자연, 나라와 개인의 본성을 관통하는 지고의 원리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혹한 현실과 현존하는 시대의 모순과 무지에 맞서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의에 대한 사색과 논증은 정의를 처절하게 갈망하는 자에게 그 갈망하는 만큼 더욱 치열하고 엄격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정의에 관한 논증을 검토함에 있어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편에 서서 생각해야 하는지는 그가 내세우는 철학 정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할 것이다. 설사 우리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입장의 강건함과 실천력을 보전하기 위한 대안 구축의 동기이자 발판으로서만 유효할 뿐이다. 입장의 순수함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 이와 같은 기술 자체의 고유성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둘러싼 논란과도 연관이 있다.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기술은 그야말로 기술이 가지고 있는 기능 차원에서 그 기술의 가치를 이야기해야지 그 이외의 가치판단을 개입시켜 그 기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입장은 이곳에서 기술의 이익이란 기술 자신이 아닌 대상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술은 고대의 기술과 달리 기술개발에 엄청난 자본이 투여되므로 기술자체는 비록 자본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그 기술의 쓰임새, 목적은 기술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본 투자자의 이익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기술의 고유성과 가치는 자본 투자자들에 의해 창출되고 그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기술의 완벽성이 평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주장하는 사람의 동기에 관계 없이 자본 투자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 또한 플라톤의 기술에 관한 입장은 기술과 욕망에 관한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술은 그 기술의 대상이 갖는 결핍 혹은 문제를 해결하여 최선의 상태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결핍과 문제가 기술의 기원이다. 그러나 결핍과 문제는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의 관계 하에서 주어진다. 오늘날 수많은 결핍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는 그것은 인간에게 결핍이거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욕망이 숙명을 넘어서는 순간 결핍이 생겨나고 기술이 발생한다. 이 말은 기술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그만큼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증대하며 그만큼 수많은 결핍이 생산되고 증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결핍과 문제의 해소가 행복이고 결핍과 문제의 발생이 기술의 기원인 한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다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숙명 안에 가두어지지 않고 늘 그것을 넘어서려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기술 경쟁을 통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그 속도와 깊이, 크기와 종류에 비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욕망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게다가 그 기술력을 자본이 뒷받침하는 한, 기술력의 배분 또한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공정하게 되고 양극화된다. 한도와 척도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이러한 무한 욕망, 무한 기술 경쟁의 시대인 현대사회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이고 낭만적이기 그지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 주도하는 기술관은 이미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철학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무한 탐욕이 그 크기와 깊이를 더해갈수록 그것의 크기와 깊이 이상으로 그 모순을 혁파해내기 위한 비판을 끊임없이 수행해왔고 가히 시대착오로 불릴 만큼의 치열한 철학적 상상력과 도전 정신을 통해 그 극복의 근본 방향을 제시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만큼 과학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측면에서도 기술이 지향해야할 이익에 대한 성찰 즉 앎이자 도덕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통찰은 오히려 과학 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과학 기술을 추동하는 욕망 이상으로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숙명이 아닌 비판과 지적 도전의 과제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철학적 욕망이 있는 한, 인류에게는 늘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 모순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펼치는 엄밀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 부분 플라톤의 형상론적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기술을 전문적 지식ἐπιστήμη과 등치시키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심증에 더욱 다가가게 만든다. 이 ἐπιστήμη(epistēmē)라는 말은 참된 실재로서 이데아에 대한 앎을 나타낼 때도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낸시 초도로우(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7.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上)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부모parents’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성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남성 부모parent를, 어머니는 여성 부모par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잉태와 출산의 과정 이후에도 다르게 지속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는 단지 부모의 성별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정한 역할까지 규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어머니이다 라고 말할 때는 누군가가 아버지이다 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어떤 의미가 덧붙여진다.” 낸시 초도로우(1944. 1. 20 – )<모성의 재생산>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왜 어머니는 여성인가?, 부모노릇의 모든 활동들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왜 남성이 아닌가?”

낸시 초도로우 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성의 ‘돌봄’을 페미니즘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돌봄의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할당되며, 돌봄은 여성화된 활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러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은 자기 입법적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도덕 주체를 가정하는 비관계적인 도덕 모델을 비판하고, ‘여성적’ 활동으로 간주되어 가치절하된 돌봄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도덕적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돌봄을 포함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과 연결지어 분석하고자 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도 적지 않다. 초도로우는 이들과는 다르게, 어쩌면 조금 도전적인 관점으로 돌봄, 특히 어머니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행하는 돌봄에 접근한다. ”어머니 노릇”이 젠더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돌봄에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임금을 지급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여성-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한 불평등한 젠더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 ‘어머니’와 ‘어머니노릇’


어머니mother라는 단어는 어머니라 불리는 사람의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구성, 가족 내 역할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머니라면, 대개 이성애자 여성이고, 아이가 있을 것이며, 아이에게 어머니로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질문하는 이론이라면, 이 문제의식에 어머니가 빠질 수 없다.

초도로우는 젠더재생산의 핵심이 ‘어머니’라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어머니노릇’이라고 보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들며, 여자아이를 잠재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어머니노릇’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재생산>의 원제인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mothering’이 바로 이 ‘어머니노릇’이다. 초도로우가 문제삼는 ‘어머니노릇’은 특히 어린 아이가 자신이 독립된 인간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일 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돌봄이다. 어머니노릇의 구체적인 활동은 아이와 접촉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아이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초도로우는 이러한 어머니노릇으로 인해 여성의 삶,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남성성, 젠더 불평등,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노동 권력들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 이론적 배경 –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


초도로우는 “어린 아이가 생의 초기에 경험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다.

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5. 6 – 1939. 9. 23)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전적으로 의식적이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의 정신적 삶은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정신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목적과 동기를 의식적으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의식적 사고를 ‘말하기’ 그리고, 무의식적 정신을 ‘꿈’과 연결짓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안에서 의식은 사회적 활동으로, 무의식은 의식화, 언어화할 수 없는 개인적 정서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에 다름 아닌 상태, 즉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가 되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의 억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모라는 대상에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때 사회화/의식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결과는 젠더화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 사회화 과정을 거친 아이는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남성적 남아가 되거나 여성적 여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발달은 유아의 타고난 성기적 본능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인간의 정신발달이 가족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 공헌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생애 초기에 조직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초도로우는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이 자연적으로 행동과 발달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은 오히려 관계를 획득하고 보유하는 과정에서 조작되고 변형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을 따른다.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초기 어린 아이의 관계적 경험이 심리적 성장과 성격 형성에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물론 프로이트 또한 정신적 삶의 모든 요소는 관계적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가 본능이라 가정하는 것도 양식화되고 구성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초도로우는 “부모노릇을 통해 전달된 사회구조, 특히 젠더구조가 어린 아이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서 승인되고 변형되며, 아이의 정서적 삶을 발달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간 대상관계이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젠더에 따른 대상관계적 경험들의 차이와 이로 인한 심리발달의 차이에 주목한다.

 

  •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을 다시 쓰다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은 사실상 아들과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 비극의 남성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어린 아이였던 남자아이가 사회적 주체로서 남자어른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아이가 극복하고 버려야할 ‘의존성’으로 간주된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젠더화된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자신과 같은 젠더인 부모와 동일시하고, 젠더가 반대인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 확장된 이성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 진입하기 이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체성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모두 어머니와 애착을 형성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만,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페니스는 매우 중요한 매개물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형성하고 있는 애착관계에 아버지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개입한다. 아버지의 등장으로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페니스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점차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이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에 여자 아이는 자신이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낳아준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여자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핵가족 모델에서 아버지는 가정 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어머니는 가정 내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이트가 저술하던 당대에는 이같은 젠더분업이 더 뚜렷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째서 대체로 가정 외부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페니스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남자아이의 심리발달모델을 여자아이에게 대칭적으로 적용하려는 무리한 시도로, 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젠더정체성 발달을 비약적이고 단순하게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비판과 더불어 초도로우는 어린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다시 쓰면서, 정신분석학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오이디푸스기 이전 과정, 즉 전오이디푸스기를 재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下)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