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시간, 고독 [시가 필요한 시간]

다섯 번째 시간, 고독

 

마리횬

 

오늘도 역시나 시 읽기 참 좋은 고독한 밤입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고독’인데요, 외로울 고(孤)에 홀로 독(獨), 이 두 한자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중국어로는 구두(GuDu)라고 발음하고, 일본어로는 고도끄(こどく) 라고 한다고 하네요. 같은 한자를 써서 발음도 비슷한가 봅니다. 러시아어로는 아진노체스트보(Одиночество)라고 하는데, 아진(один)이란 숫자 하나(1)를 뜻하고, 뒤에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추상명사형 어미 체스트보(чество)라는 어미가 붙어서 ‘혼자 있는 상태’라는 뜻이 되죠. 어느 나라에서든 고독이란 외로이 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고독이란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고독이 필요하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온다고 하죠?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나만의 모습이 있기 마련이죠. 사람들 만나서 얘기 듣는 걸 좋아하고, 왁자지껄 사람들이랑 모여서 놀면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혼자 방에 돌아와서 조용히 생각도 정리하고 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틈에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거나, 하루를 곱씹어보거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죠.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도 사실은 앞으로의 계획이나 자기 개발적인 생각들을 하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고독하지 않고서는 시를 쓰기도 어려울 거에요.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도 고독해 보지 않고는 절대 쓸 수 없는 시입니다. 오늘 먼저 만나 볼 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라는 시입니다. 혹시…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가 생각나시나요? 하하.

이 시를 읽으면, 홀로 있는 것의 힘이랄까, 고독한 사람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시는 조금 길지만 천천히 한 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연필로 쓰기

                                정진규

한 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고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 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시인의 시 ‘연필로 쓰기’ 들어 보았습니다. 연필로 쓰기와 우리 인생을 대비시켜서 표현을 하고 있죠. ‘연필로 글씨를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우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겁니다.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로, 연필로 시를 쓰다가 시어 하나를 잘못 쓰거나 하면, 지우고 다른 단어로 고쳐 쓸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삶은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지워내고 다시 그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연필로 쓴 시를 고쳐 쓰다가 ‘내 삶도 이러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시 한 편 쓰는 것도 정말 쉬운 게 아니죠. 물론 시인마다 좀 다르겠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거의 해산의 고통이랑 맞먹는, 그런 엄청난 노력으로 시 한 편이 쓰여진다고 하던데, 그렇게 어렵게 쓰여지는 시도, 쓰다가 틀리면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조차도 안되니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지워버릴 수 없는 생애를 차곡차곡 살아내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연필처럼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생애를 꿈꿉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간 길을 지울 수 있다는 얘기는, “떳떳했던 나의 길, 내가 살아온 진실의 길” 마저도 지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어요. 삶이 연필로 쓰는 것과 같다면, 잘못만 지우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도 같이 지워질 수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떨 것 같으세요? 잘못은 지워지면 좋겠지만, 내가 이뤄낸 성과와 명성들까지 같이 지워진다면..?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지우고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럴지라도 괜찮다고 고백합니다. 잘못간 서로의 길을 고쳐서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살아왔던 길이 지워져도 좋다’ 라고 고백하고 있죠.

불가능한 것이지만 어쩌면 그 불가능함 때문에 계속해서 시를 써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은 다시 쓸 수 없기에, 이제라도 연필로 시를 쓰겠다, 시를 쓰듯 내 삶을 살겠다, 시가 곧 내 삶이다. 이러한 고백으로도 들립니다.

오늘, 고독에 관한 시 첫 번째 시로, 정진규 시인의 ‘연필로 쓰기’ 만나 봤는데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임재범의 <비상>이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지금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 고독을 원동력 삼아 이제 날개를 펴고 비상하리라 하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고독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 그 시간을 에너지로 삼아서 힘내시라는 의미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임재범 비상 _ https://youtu.be/5LxGzSFnucE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고독’을 주제로 함께 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여러분은 혼자 바닷가에 나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들과 다 같이 함께 바닷가에서 한 시간 노는 것과, 홀로 조용히 한 시간 바닷가를 거니는 것에는, 똑같이 한 시간을 머무는 것이지만 아마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시는 홀로 바닷가에 나갔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영 시인의 ‘바닷가에서’ 듣고 오겠습니다.

 

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시인의 시 ‘바닷가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홀로 나간 바닷가라고 해서 뭔가 굉장히 쓸쓸한 분위기일 것 같았는데요, 막상 시를 읽어보니 시 구절 하나 하나가 다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파도, 수평선, 일몰,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섬. 이 모든 것들은 바닷가에 가면 흔히 마주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스스로 낮추는 자의 평안’, ‘스스로 포기하는 자의 충족’, 그리고 ‘스스로 감내하는 자의 의지’를 읽어냅니다.

 

오늘 주제가 고독인 만큼, 이 시는 고독의 힘을 잘 얘기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지 않은 사람은 없거든요.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한 번씩은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할 때가 있고,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로울 때가 분명 있는 법이죠.

외로움이 아예 없을 순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그냥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흘려 보낼 게 아니라, 자신에게 좀 더 몰입하는 시간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더 발견하는 시간으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혼자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지 않으면, 아무 성찰 없이 하루를 살게 될 겁니다.

그런 고독의 시간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곽재구 시인이 쓴 여행 에세이 중에,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골목골목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충분히 견뎌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아파하고 방황한다. 이 점이 사랑이 찾아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사실은 그 순간이 인생에 있어 사랑이 찾아올 때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쓴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의 깊이, 삶의 우아한 형상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즘 쌀쌀한 날씨 탓에 고독에 찬 밤을 보내고 계신 분들! 내 인생에 귀한 시간이 찾아왔다 생각하시고, 견뎌 내면서 힘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들려드릴 노래로 박효신의 ‘숨’을 가져왔어요. 가사와 멜로디가 참 위로가 되는 곡입니다.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힘 없이 멈춰있던 세상에 비가 내리고, 다시 자라난 오늘, 그 하루를 살아.”

 

여러분! 외롭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다 멈춰버린 것만 같은, 겨울 같은 때가 있죠. 하지만 그 시간들이 찾아왔을 때, 오늘 하루 쉴 숨이 있다는 것, 오늘 하루 쉴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곁에 언제나 나를 변함없이 지켜주고 응원해주는 바다 같은 존재, 봄비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눈 고독의 힘! 꼭 기억하시면서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길 바랄게요.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박효신 숨https://youtu.be/oBKpJiVEcnU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악(樂)인열전]④

간지나는 사춘기 찌질이들의 탄생/소외된 사춘기적 주체 – 더 스미스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출처 : The Smiths, back in the glory days (Picture: Stills Press Agency/REX/Shutterstock) Read more: https://metro.co.uk/2017/09/21/the-smiths-30-years-since-the-split-and-still-the-best-british-band-ever-6904839/?ito=cbshare Twitter: https://twitter.com/MetroUK | Facebook: https://www.facebook.com/MetroUK/

 

비틀즈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 밴드는 더 스미스(The Smiths)이다. 스미스는 오늘날 브릿팝(BritPop)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장르의 아버지격이 되는 밴드이다. 오늘날 ‘락’을 논하면서 ‘브릿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키델릭과 함께 브릿팝은 좋든 싫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즘 인디씬의 주류는 브릿팝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음악적 스타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브릿팝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 감성이 (어쩌면 음악적 스타일보다) 후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줬다.

더 스미스는 비록 활동기간 동안 영국 이외에 지역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블러나 오아시스로 대표되는 브릿팝 열풍 속에서, 모두들 자신들이 제 2의 스미스라고 자처했으며, ‘스미스’라는 망령은 다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있는 인디 밴드들인 ‘잔나비’나 ‘새소년’ 역시 브릿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브릿팝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브릿팝은 오늘날까 힘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브릿팝’스러움은 ‘스미스’스러움의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브릿팝의 힘은 ‘스미스’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albumism

1984년 그들의 데뷔앨범 [The Smiths]가 발표될 때만 해도 스미스가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미스의 최고의 앨범을 한 장의 앨범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3집 음반 [The Queen Is Dead](1986)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밴드 스미스의 힘’은 오히려 [The Smiths]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 때문도, 사춘기 정서로 가득한 때문도 아니다. [The Smiths]의 힘은 당시 주류 팝으로부터 소외 되어왔던 ‘침묵한 다수’가 수면 위로 등장한 첫 시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복고적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데뷔한 80년대는 락의 인기가 예전만큼 좋지 못했고, 신디의 발전으로 기타를 베이스로 한 전통적인 락 사운드가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니 마(Johnny Marr)의 징글쟁글(jingle-jangle)1) 주법은 기타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스미스의 노래들은 대체로 보컬이 아닌 기타를 통해 곡의 맬로디를 만들어간다. 그들의 작곡 방식은 먼저 기타로 주선율을 잡고 그 위에 보컬을 입히는 방식이다. 결국 노래이기 이전에 연주곡으로 완성된 이들의 곡에서 모리세이의 보컬은 상당히 제한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보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낸다. 보컬의 테크닉을 심하게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모리세이의 보컬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덕분에 그의 혀짧은 발음과 중성적인 목소리 톤은 성숙하지 않은 유아적인 웅얼거림으로 표출된다. 찰랑거리고 밝은 기타 톤과, 아이의 투정 같은 음색, 그리고 문학적이고 자기비하적인 가사는 모리세이를 ‘사춘기적 주체’로 재탄생한다.

모리세이의 ‘사춘기적 주체’는 나 자신 안에 있는 ‘소외된 자아’를 전면으로 세운다. [The Smiths]의 화자는 성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남자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Reel Around the Fountain”, “Pretty Girls Make Graves”)으로 대변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이는 80년대 영국의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영국은 한 순간에 추락하게 되고,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게 된 영국의 두려움이 이 곡에서 반영된다. 이는 자신의 자책감으로 드러낸다(“You’ve Got Everything Now”, “Still Ill”). 그리고 이 자책감은 완성되지 못한 나 자신(성인)에 대한 자책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혼자 살기 힘든 이 더러운 세상에 대한 비난과 조소(“You’ve Got Everything Now”, “This Charming Man”),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대한 불만(“What Difference Does It Make?”, “I Don’t Owe You Anything”),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비하(“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를 통해 자신의 소외감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러한 더러운 세상을 한편으로 긍정하며, 누군가 자신을 이해하고 함께 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Hands in Glove”). 이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동일시’에 이른다(“Suffer Little Children”). 사춘기적 주체는 이 ‘동일시’에서 등장한다. 물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유아성’에 대한 동일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UNCUT

 

라캉이 말했듯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자아는 주체로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계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을 ‘언어’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적 측면에서) 언어 뒤에 숨는다. (아마 라캉이라면,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유아적 상태를 주체에 자리에 놓는다. 성인도 아니고 유아도 아닌 상태, 사춘기적 주체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존재를 복원하는 또다른 매듭으로서 기능한다. 사춘기적 주체는 원초적 자아의 주체화이며, 나의 원초적인 모습, 남들이 보기에 찌질한 모습, 숨기고 싶은 모습을 오히려 드러낸다. 가식을 던져버리는 행위, 자기비하를 당당하게 드러내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냄은 ‘비하로서 긍정함’이다. 이러한 ‘비관적 긍정’은 스미스 이후 블러, 오아시스로 이어진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성인적 숨김을 버리고 무분별한 사춘기적 드러냄은 브릿팝의 당당함의 시원이 된다.

스미스의 앨범은 ‘숨어있던 어른이 영혼’들을 위한 앨범이다. ‘어른’들은 스미스(와 모리시에의 가사)를 철부지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미성숙’의 의미밖에 지니지 않았던, ‘사춘기’라는 시기를 그자체로 삶의 한 형태임을, 그리고 그 시기의 예민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함을 당당히 선언한다. 사춘기의 변덕스러움은 성인이 되면서 자제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변덕스러운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즐겁다고 우울해지는 감정은 우리와 늘 함께한다. 삶에 대한 긍정과 비관이라는 이중성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춘기이다. 그럼으로써 스미스의 음악은 ‘누구나 겪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시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한 사춘기를 살고 있을지도.

 

The Smiths – The Smiths, 1984,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kZf-GN9RcAFVQFkPaWn9At

 

The Smiths – The Queen Is Dead, 1986, Full Album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dlKjfbzZGdnN_prwsxZUf745SVUz88MX


1)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서 징글쟁글이라고 부른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마지막(12월) 마당(6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해야할 시기에 왔습니다.

지난 2019년 2월부터 격월로 진행한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이 마지막 회를 남겨두었습니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마지막(12월) 마당(6회차)을 안내합니다.

이번에는 지난 회차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또 송년회 겸 뒤풀이 자리도 마련할 예정입니다.

이번 마당에서 윤구병 선생님의 철학과 지난 활동들을 정리해보고 2019년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윤구병 철학 마당 여섯 번째 마지막 마당 안내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부터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지난 2월 윤구병 철학 마당 첫째 모임을 연 이래 이제 여섯 번째 마지막 마당을 엽니다. 이번 철학 마당은 그간의 모임을 마무리하는 자리인 만큼 아래와 같은 순서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제1부> 윤구병 선생님에게 후학들이 묻다. (오후 2시 – 3시 20분)

* 발제 : 이병창

* 제목 : 윤구병 선생님의 존재론적 실천적 철학 – 윤구병, <철학 다시 쓰다>를 읽고(30분)

* 개요 : 윤구병 선생님은 평생을 치열하게 실천적인 삶을 살아오시면서 세계의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존재론적 사유에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로서는 아마도 플라톤, 베르그송, 그리고 박홍규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은 자신의 그러한 철학적 삶을 ‘함과 됨’이라는 두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실천 철학적 개념이 존재론적 개념과 어떤 연관을 가졌는지, 또 이런 개념이 선생님의 실천적 삶을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 질문 및 보완 1 : 류종열 – 베르그송과 윤구병(10분)

* 질문 및 보완 2 : 이정호 – 플라톤, 박홍규 그리고 윤구병(10분)

 

* 윤구병 선생님의 답변 (30분)

 

* 휴식 시간(10분)

 

<제2부> 대담 : 윤구병 선생님의 실천적 삶과 의미에 관해 (오후 3시 30분 – 5시)

* 대담 및 사회 : 김재현, 이병창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평생을 바쳐 오신 윤구병 선생님의 실천적 삶과 그 역정에 관해 선생님과 대담을 나누면서 그 의미를 함께 되짚어 본다. (뿌리 깊은 나무, 김지하와의 관계, 전교조 창립, 변산 공동체, 보리 출판사, 민족의학, 중립화 통일론 등)

 

* 휴식 및 함께 뒤풀이 준비

 

<뒤풀이-저녁식사 및 술자리> : 오후 5시 30분부터

* 철학 마당을 마무리하고 망년의 모임도 겸해 한철연 강의실에서 뒤풀이 모임을 열고자 합니다. 주관과 후원을 맡은 측에서 음식과 술을 풍성하게(?) 준비한다고 합니다. 철학 마당에 오신 분들은 물론 한철연 회원 동지들도 많이 오시어 윤구병 선생님의 건강도 기원하고 망년의 회포도 함께 나누셨으면 합니다.

 

* 주최 : 윤구병 철학마당 준비 위원회(이규성,이병창,김교빈,류종열,최종덕,서유석,이정호)

*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출간 안내(예발트 일리옌코프 지음, 우기동·이병수 옮김, 책갈피, 2019년 11월 27일 발간)

1990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이란 제목으로 번역(우기동 옮김) 출간되었던 예발트 일리옌코프의 책이 2019년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약 3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독자들이 찾는다는 사실은 이 책이 가진 무게와 가치를 말해줍니다. 한철연에서 오랜시간 함께 연구활동을 했던 우기동, 이병수 선생님 두 분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1990년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한번 번역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정제된 서평으로 웹진에서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아래 출판사에서 보내준 공식 보도자료로 소개를 대신합니다.


신간 보도자료 20191127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예발트 일리옌코프 지음 | 우기동·이병수 옮김 | 책갈피 | 신국판(152*225) | 332쪽

2019년 11월 27일 발행 | 17,000원 | ISBN 978-89-7966-168-2 93170

책갈피 | 서울 성동구 무학봉15길 12, 2층 | 전화 (02) 2265-6354 | 팩스 (02) 2265-6395

이메일 bookmarx@naver.com | 홈페이지 http://chaekgalpi.com

 페이스북 http://facebook.com/chaekgalpi |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chaekgalpi_books

 

♦ 간략한 책 소개

 

서양 근대 철학사의 절정,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탄생을 다룬 고전

 

이 책은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이 어떻게 발전했고, 어떻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절정에 이르렀는지 추적한다.

1부 “변증법의 역사”는 데카르트의 합리론부터 헤겔의 변증법에 이르는 철학사를 다루며, 관념론적 전통의 핵심과 그 한계를 지적한다(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도 덧붙인다). 2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변증법에 유물론을 결합시킨 논리학을 다루며,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적·방법적 공헌을 되새긴다.

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인간의 사고, 즉 존재와 사고의 관계 문제는 마르크스 이전에는 형이상학적∙선험적 논리학의 문제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접근해, 논리학이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하는지에 관한 문제이고, 나아가 자연과 사회 역사의 변화 과정에 대한 체계임을 논증한다. 즉, 유물론과 결합된 변증법적 논리학은 과학적 인식과 실천적 활동의 방법인 것이다.

이런 철학에 깊이 파고들어서 마르크스와 레닌처럼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활용하려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유용할 것이다.

 

♦ 책 소개

 

서양 근대 철학사의 절정,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탄생을 다룬 고전

 

이 책은 서양 근대 철학사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이 어떻게 발전했고, 어떻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절정에 이르렀는지 추적한다. 또, 프랑스와 독일의 고전 철학자들이 논한 존재론적·인식론적 쟁점을 상세히 설명하며, 논리학의 본질적 윤곽을 밝히 드러낸다. 1부 “변증법의 역사”는 서양 근대 철학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2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철학과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적·방법적 공헌을 되새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일리옌코프는 1924년 스몰렌스크에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직후 세상에 나와, 스탈린과 흐루쇼프 정권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대에 비극적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는 한평생 변증법·유물론·인식론 등을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였다. 대표작으로는 이 책 외에도 《마르크스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Dialectics of the Abstract & the Concrete in Marx’s Capital, 1960), 《레닌주의 변증법과 실증주의의 형이상학》(Leninist Dialectics and the Metaphysics of Positivism, 1979) 등이 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계간지 《히스토리컬 머티리얼리즘》에 따르면, 그의 자살은 당시 러시아 학계가 그를 점점 고립시키고 배척한 것과 직접적 연관이 있었다. 일종의 “마녀사냥”이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철학자 일리옌코프의 모든 경력은 소련 관료 집단의 손에 훼손됐다. 당시 관료들은 조금이라도 창조적인 지적 활동이라면 모조리 단속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부활이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그것이 유물론인 이유는 물질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물질이 정신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물질적 생활 조건이 인간의 사고를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간의 역사가 예정된 결과를 향해 자동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취급하는 기계적 유물론이나 숙명론적 결정론이 결코 아니다.

변증법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철학 용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화, 즉 상반된 주장의 충돌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을 변증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헤겔은 더 발전된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해 인간 의식·사상의 역사 전체가 내적 모순을 통해 발전했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여전히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고 변모시켜 그것에 유물론적 기초를 놨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든 자연의 역사든 역사의 원동력은 상반된 사상이나 개념의 충돌이 아니라, 상반된 물질적·사회적 세력의 충돌이라고 생각했다. 레닌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충실히 이해하고, 그것을 제국주의 분석 등에 적용하며 더욱 발전시켰다.

이런 철학에 깊이 파고들어서 마르크스와 레닌처럼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활용하려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유용할 것이다.

 

♦ 본문에서

 

  • 변증법적 논리학의 중요성

‘논리학’(Logic; 첫 글자를 대문자로)으로 이해됨과 동시에 현대 유물론의 인식론으로 이해되는 변증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제는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레닌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삶과 과학적 지식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뚜렷한 변증법적 특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이 과학적 인식과 실천적 활동의 방법일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탐구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실험 결과와 사실 자료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 논리학의 역사를 고찰해야 하는 이유

어떤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그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런 역사적인 접근방법이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오늘날 소위 논리학이라는 학문 내에는 논리학의 영역을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는 이론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론들은 저마다 논리적 사고의 발전과정에서 유일한 현대적 단계라고 주장하고, 단순히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학의 역사를 고찰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의 유산

사유를 속성으로 정의함으로써 스피노자는 기계적 유물론의 대표자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적어도 200년을 앞서갔다. … 스피노자의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물론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사고하는 생물체라면 모두 돌이나 그 밖의 ‘사고하지 않는 물체’의 형태로 연장돼 있으면서도 사고한다는 점이다. … 헤르더, 괴테, 라메트리,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등 모든 위대한 스피노자주의자들은 물론 초기 셸링조차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이해했다. …

이것은 나중에 레닌이 수용했던 일반적인 방법론적 입장이다. 레닌은 감각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성질, 즉 반영의 성질을 바로 물질의 토대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봤다. 레닌에 따르면, 사고는 물질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보편적 성질 혹은 속성이 최고로 발전된 형태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물질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스피노자의 표현처럼 물질 자체를 ‘불완전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엥겔스나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물질을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 헤겔을 넘어선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어떤 철학체계든 그것의 약점이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약점이나 결함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관련해서 이 점을 분명히 이해했고, 그럼으로써 헤겔은 물론 그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 유물론자 포이어바흐보다도 논리학의 문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헤겔의 역사적 공헌은 물론 역사적으로 제약된 그의 학문적 발전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 줬다. 다시 말해 헤겔의 변증법이 건널 수 없는 분명한 경계와 변증법의 창조자가 아무리 애써도 극복할 수 없는 환상의 힘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 헤겔은 매우 정직하고 일관된 관념론자였으며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그 밖의 모든 관념론의 비밀을 폭로했던 인물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헤겔은 존재, 즉 사고 외부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자연과 역사의 세계가 논리학을 증명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봤으며, 나아가서 존재가 논리학의 동일한 도식이나 범주를 되풀이해서 확증하는 ‘사례들’의 고갈되지 않는 저장소라고 봤던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표현했듯이, ‘논리의 사상事象’은 헤겔이 들어가지 못하게 ‘사상의 논리’에 울타리를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 유물론 대 관념론, 기계적 유물론 대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사에서 관념적인 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이라고 하는 양극으로 귀착된다.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은 관념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과 대립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유심론적 입장이나 이원론적 입장을 정당하게 거부했으나, 관념적인 것을 한 물체가 다른 물체 속에 반영된 상, 즉 유기적으로 조직된 물질의 속성 내지 기능으로 이해했다. 관념적인 것의 본성에 관한 이런 유물론의 보편적 견해는 데모크리토스-스피노자-디드로-포이어바흐로 이어지는 일련의 유물론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구체화됐으나 유물론 사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이루게 된다.

마르크스 이전 유물론의 취약점은 프랑스 유물론자들(특히 카바니와 라메트리) 사이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그 뒤에 포이어바흐와 19세기 중엽의 소위 속류유물론(뷔히너·포크트·몰레스홋 등)에서 독자적 형태로 발전했다. 그 취약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비역사적이고 인간학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입장에 묶여 있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관념적인 것을 두뇌의 물질적·신경생리학적 구조 및 그 기능과 동일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낡은 유물론은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유물론을 역사에까지 적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온갖 특성이 외적 세계와 함께 자기자신을 변형시키는 인간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 철학은 세계관의 “살아 있는 영혼”이다

과학 전체가 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과제를 홀로 떠맡고 있는 세계관인 체하는 ‘순수’철학과 꼭 마찬가지로, 철학∙논리학∙인식론을 포괄하지 않는 과학적 세계관이란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은 세계관의 발전에 관한 논리학, 또는 레닌의 표현처럼 세계관의 ‘살아 있는 영혼’인 것이다.

 

♦ 지은이 소개

 

예발트 일리옌코프 Evald Ilyenkov

(1924~1979)

 

한평생 변증법·유물론·인식론 등을 연구한 소련의 저명한 철학자. 소련에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부활을 꿈꾸다 마녀사냥에 시달린, 철저한 비주류이자 이단아였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 일시적 유화 국면이 펼쳐지자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했다”는 오명을 쓰고 강단에서 쫓겨났다. 당시 소련 관료들은 조금이라도 창조적인 지적 활동이라면 모조리 단속하려 들었고, 스탈린주의 정설에 어긋나는 일리옌코프의 저작을 특히 눈엣가시로 여겼다. 갈수록 심해지는 학계의 배척 속에서 1979년 자살로 생을 마쳤다.

대표작 《마르크스 자본론에서 추상과 구체의 변증법》(Dialectics of the Abstract & the Concrete in Marx’s Capital, 1960)은 매우 독창적인 《자본론》 연구서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레닌주의 변증법과 실증주의의 형이상학》(Leninist Dialectics and the Metaphysics of Positivism, 1979)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 옮긴이 소개

 

 우기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헤겔의 주객 동일성 고찰”(1985)로 석사 학위를, “유물변증법적 자연관”(1994)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미래문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대학 강단을 벗어나 노숙인, 재소자, 지역 주민 등 소외 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고, 2013년부터는 서울시민대학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를 기획했다. 최근에는 기후 위기, 인공지능AI 등 지구적 어젠다나 이슈를 통해 ‘세계시민 의식’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소외 계층과 호흡하는 인문학”(2007), “마을과 시민”(2014) 등이 있고, 저서로는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공저, 돌베개, 1991), 《행복한 인문학》(공저, 이매진, 2008), 《인문학 박물관에서》(공저, 인물과사상사, 2010)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철학연습》(미래사, 1986)이 있다.

 

이병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헤겔의 진리 개념에 대한 고찰”(1987)로 석사 학위를, “열암 박종홍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연구”(2004)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20세기에 전개된 이 땅의 사상과 철학에 관심을 두고 지성사 연구를 계속해 왔다. 2009년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에 들어와 통일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를 10년째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 근현대 철학 사상의 사상사적 이해”(2013), “북한 철학의 패러다임 변화와 사상적 특징”(2014), “한반도 통일과 인권의 층위”(2018) 등이 있고, 저서로는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공저, 돌베개, 1991), 《통일담론의 지성사》(공저, 패러다임북, 2015), 《통일의 기본가치와 인문적 비전》(공저, 선인, 2015)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맑스·엥겔스 용어사전》(논장, 1989)이 있다.

 

♦ 차례

 

책을 펴내며

옮긴이 머리말

1990년판 옮긴이 머리말

 

서론

 

1부 변증법의 역사

1장 논리학의 주제와 근원: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2장 실체의 속성으로서의 사고: 스피노자

3장 논리학과 변증법: 칸트

4-1장 논리학의 구조적 원리(이원론 혹은 일원론): 피히테

4-2장 논리학의 구조적 원리(이원론 혹은 일원론): 셸링

5장 논리학으로서의 변증법: 헤겔

6장 논리학의 구성원리 재론 — 관념론인가 유물론인가?: 포이어바흐

 

2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

7장 객관적 관념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8장 논리학의 주제로서의 사고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

9장 논리학이 변증법 및 유물론적 인식론과 일치함에 관해

10장 변증법적 논리학의 범주로 본 모순

11장 변증법에서 보편의 문제

 

결론

 

후주

네 번째 시간, 인내 [시가 필요한 시간]

네 번째 시간, 인내

 

마리횬

 

지난 시간에 달에 대한 시와 별에 대한 시를 읽었었는데, 지난 한 주 동안 얼만큼 밤하늘의 별과 달을 챙겨 보셨나요? 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아마 읽을수록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읽는 건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몇 줄 정도의 시인데, 그 시 한편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할 때가 있죠. 저도 그걸 가끔 느끼곤 해요.

 저는 ‘얼마나 유명한 시인이 쓴 시인가’ 하는 것보다는, 저 스스로 먼저 공감이 되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런 시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죠. 누군가에게 소개하기 이전에 제가 먼저 ‘아 좋다’라고 느껴야, 그것에 관해서 글을 쓸 때 저도 더 감정을 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텐데,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사소한 일상들을 바탕으로 쓴 시를 선호하는 편인 것 같아요. 일상 속에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떤 작은 것들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얼마나 값진 것으로 변화 되는지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늘 ‘인내’라는 주제로 소개해 드릴 시 역시, 어떤 작고 소소한 것에 대한 시인데요, ‘담쟁이’에 관한 시 두 편을 가져 왔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시죠? 벽을 타고 오르고 벽면을 다 덮으면서 피는 담쟁이.

그 담쟁이와 인내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시죠?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라는 시입니다. 눈 앞에 담쟁이 넝쿨로 가득한 푸른 벽이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시를 들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담쟁이 덩굴의 독법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 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 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졸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 시인의 시 ‘담쟁이 덩굴의 독법’ 들어 보았는데요, 담쟁이가 피어 오르는 것을, 담쟁이가 벽 구석 구석 한 땀 한 땀 읽어가는 것처럼 표현을 했죠. 미세하게 한 잎 한 잎 벽을 타고 자라나는 담쟁이 덩굴의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마치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담쟁이를 보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를 듣고 나니까 그렇게 노력하며 자라나는 담장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냥 ‘읽는다’라고 하지 않고, ‘지문이 닳도록’ 읽는다고 하고, 또 ‘아픈 독법으로’, ‘기어 오른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뭔가 애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담쟁이의 모습을 읽어내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습니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든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초록색 잎에 가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붉은 단풍이 드는걸 묘사하고 있는 건데, 그걸 ‘피멍이 든다’고 표현을 했어요. 벽을 오르기 위해서 인내하며 노력하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푸른 손 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서 책을 덮어야겠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모습, 이번에 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인내하고 참아내는 그런 모습이 보이죠. 다음해 새 봄이 오면 또 다시 맨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 테고, 어쩌면 또다시 다 읽어내지 못한 채로 시들 테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올라가는 담쟁이의 모습. 그 모습에서 인내가 느껴지시나요?

어떻게 보면, 인간은 담쟁이보다 더 많은걸 가지고서도 조금만 힘들면 쉽게 포기해버리는데.. 이 시를 통해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담쟁이가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 상황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 있다면, 이 시 들으시고 조금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 봄’이 올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I Won’t Give Up>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너무 유명한 곡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백의 가사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의 ‘인생’을 놓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린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나혜경 시인의 시 속의 다짐과도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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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로 준비한 담쟁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시인데요,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서 학교에서 해직된 후 무직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시기,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에 쓰여진 시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에 도종환 시인은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여러 선생님들과 모여서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때에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창 밖의 옆 건물 벽에 담쟁이 잎이 가득 붙어 있는 게 보인 것이죠. 그 벽을 보면서, ‘저 벽에는 물 한 방울 마실 곳도 없고, 뿌리를 내릴 흙도 없는데, 처음부터 저런 담벼락에서 살도록 던져진 담쟁이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인도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담쟁이는 애초부터 그런 척박한 환경에 살도록 던져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담쟁이가 더 불쌍하다고도 볼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시인은 불쌍한 눈으로 담쟁이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과 숲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들에 비하면, 담쟁이는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처한 환경도 훨씬 더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 인내하며 여럿이 함께 힘을 내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시인의 눈은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런 담쟁이를 보면서, ‘와.. 저런 상황에서도 담쟁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담쟁이 잎들과 손 잡고 함께 벽을 기어올라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시인은, 가지고 있던 회의 서류 뒷면에 자신의 생각을 시로 써 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가 바로 이 ‘담쟁이’입니다. 그럼, 한번 시를 읽어 볼까요?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이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함께 손잡고 올라간다.

푸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아까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시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담쟁이를 보고, 같은 인내와 끈기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인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동이 또 다르죠. 앞서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 어떤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말해주고 있었다면, 두 번째로 읽은 도종환 시인의 시는 ‘함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것을 ‘벽’이라고, ‘절망의 벽’이라고 말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르잖아요? 때로는 여러 말보다도 함께 손 잡아주고, 말없이 이끌어줄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더 위로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 힘든 시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뭔가 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 계시다면, 이 시와 함께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 한 방울 없고 뿌리 내릴 흙도 전혀 없는 벽에서도 담쟁이는 푸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힘 내세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93 Million miles>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들아 살면서 어두워 보일 때가 있을 테지만, 빛이 없는 것도 때론 필요한 법이란다. 단지 이것만 기억하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넌 언제든지 집에 돌아올 수 있단다. 모든 길이 위험한 비탈이어도 거기엔 언제나 네가 의지할 손이 있단다. 이것만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길이 가파르게만 보이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의지할 손이 있다는 말,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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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오늘날 무엇을 뜻하는가? [나인당케의 단상들]

♦ 아래 글은 『똑똑똑 녹유』 제14호(2019. 12)와 <ⓔ 시대와 철학>에 중복 게재됨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나인당케의 단상들]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똑똑똑 녹유』 편집팀에 감사드립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오늘날 무엇을 뜻하는가?

 

한상원(한철연 회원)

 

[이 글은 녹색당 유럽당원모임에서 발간하는 매거진 <똑똑똑 녹유>에 기고된 글이며, 허락을 통해 중복게재합니다.]

 

 

들어가며: 독일 통일과 정치적 주체화 과정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그리고 이듬해 동독과 서독은 역사적인 통일에 합의한다. 올해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의 역사적인 장소인 브란덴부르크에서는 대규모 축제가 열렸다. 거대한 지구본과 레이저 쇼로 장식되고 인기 가수들의 노래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채워진 이 호화로운 축제는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과정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전시하고 싶은 독일 주류 사회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것은 행사 마지막에 펼쳐진 거대한 불꽃놀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림1 2019년 11월 9일 장벽붕괴 30주년 기념행사. 사진출처: dpa/Annette Ried, www.rbb24.de

그러나 독일 통일 과정은 단지 두 분단국가의 재결합과 하나의 국가형성이라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분석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동독의 권위주의 정권의 퇴진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이 드러내는 또 다른 측면이다. 즉 그것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지만 정작 인민의 목소리를 묵살해온 정치체제에 대한 인민 자신의 저항 과정이자 정치적 주체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독일 통일은 (최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흔히 언급되는 바와 같이 단순하게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독 인민의 자주적인 결정과 정치적 행동에 의해 이뤄진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이 사건은 ‘국가의 결합’ 이전에, 억압적 정치체제의 종식을 가져온 ‘아래로부터의’ 주체화 과정의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복잡한 사태에 직면한다. 오늘날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는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한 장벽의 붕괴, 즉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호는 난민과 이민자의 유입에 반대하면서 국경통제를 요구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통일 이후 독일도 피해가지 못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오늘날 ‘인민(Volk, people)’의 범주는 상실되었거나, 기껏해야 이러한 ‘포퓰리즘’이라는 이름의 기형적 정치운동에 동원되며 보수적 민족주의와 타자 혐오에 젖어 있는 수동적인 군중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끌었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의 현주소를 추적해보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진단하고 성찰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니콜라이 교회에서 본홀머 슈트라쎄로: 1989년 가을의 인민

 

동독 주민들의 자유화 시위는 80년대 후반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9월 4일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이른바 월요시위(Montagsdemonstrationen)가 매 주 열리게 된다.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를 중심으로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는 언론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 그리고 자유선거를 요구했다. 이 시위의 정점은 10월 초, 독일민주공화국(DDR) 건국 40주년 기념일을 전후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에서 드러나게 된다. 10월 4일 드레스덴(Dresden) 중앙역에 5천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건국일인 10월 7일에는 플라우센(Plausen)에서 1만 명이 참여하는 더 큰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 곤봉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다음날인 8일에는 다시 드레스덴에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정권에 항의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베를린을 방문 중인 가운데, 이처럼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식은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 속에 치러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명예가 짓밟혔다고 생각한 당국과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은 그해 여름 중국 베이징을 핏빛으로 물들인 천안문 항쟁 방식의 진압을 검토하였고, 군부의 투입과 진압작전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음을 은밀히 암시하면서 시위대가 겁에 질리기를 유도했다. 즉 시위대와 당국 양측 모두 이 사태가 중국의 천안문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위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따라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았다. 10월 9일, 다시 월요일이 돌아왔다. 이날의 월요시위에는 무려 7만 명이 라이프치히 시내에 운집했다. 만약 경찰의 발포나 군부대의 투입이 일어났다면 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유혈사태로 이어졌을 것이다. 당국은 결국 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시위대는 자신감에 가득찼고, 자신들의 승리를 장담했다. 주민들의 자신감이 상승하자 시위의 규모는 더 커졌고 그 다음주 월요일인 16일에는 12만 명, 그 다음주인 25일에는 무려 32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림2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를 외치는 동독 시위대. 사진출처: https://www.maz-online.de

이러한 시위의 결과 호네커는 사임한다. 동독 당국은 더 이상 시위대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여행 자유 조치를 취함으로써 여론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정부는 11월 9일 전국에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조치를 발표한다. 애초에 익일(10일)부터 적용될 예정이었던 이 조치는 정부 대변인으로 기자회견장에 나온 귄터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의 역사적 실수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는 기자들에게 이 조치가 “즉시(sofort), 지체 없이(unverzüglich)” 시행될 것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이 기자회견을 본 동베를린의 주민들은 본홀머 슈트라쎄(Bornholmer Straße)의 검문소로 달려간다.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에 검문소는 통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동베를린 시민들은 1961년 장벽 건설 이래 처음으로 서베를린으로 자유로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장벽이 붕괴한 것이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영토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 장벽은 그 기능을 상실했고, 이듬해까지 대부분의 장벽이 철거되기에 이른다.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월요시위부터 본홀머 슈트라쎄에서의 장벽 통과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 과정에서 등장한 상징적인 구호가 바로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이다. 이 구호는 1835년 발표된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üchner)의 희곡 『당통의 죽음(Dantons Tod)』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뷔히너는 이 구호를 통해 인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법률은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호소한 바 있다.

이 구호를 통해 동독의 시위대는 ‘인민 공화국’의 정치인들이 언제나 입에 올리는 ‘인민’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당국의 정치가들에게 ‘인민’이라는 기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동원해야 할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대는 ‘바로 우리가’ 인민이라는 사실을 외침으로써, 이 ‘텅 빈 기표’에 실질적인 내용과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랑시에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치안(Polizei)’의 논리로 동원된 ‘인민’이라는 기표가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바로 그 인민들, 즉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 스스로를 ‘인민’, 곧 공화국을 이루는 보편적 주체로 선언함으로써 이 치안의 논리에 저항하는 ‘정치(Politik)’의 논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따라서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이며, 이러한 주체화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자들을 발화하는 자들로 만듦으로써 기존의 사회적 공간에서 전개되던 감각적인 관계를 전복, 새로운 감각의 공동체를 출현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외무부장관 사이의 협정을 통해 체결된 독일의 통일은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동독 주민들의 거대한 정치적 주체화의 경험이었다. 국가 간의 협정도,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도 아닌, 동독 주민들의 급진적 정치화 과정이 바로 30년 전 1989년 가을 일어난 장벽 붕괴를 이끌어낸 것이다.

 

 

인민과 새로운 포퓰리즘: 오늘날의 쟁점

 

1989년 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동독 주민들은 새로 탄생한 통일된 독일 연방공화국에서 자신들이 정당한 주체로 대우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엇나갔다. 통일 이래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커져만 갔고, 동독 지역의 소외와 낙후성은 개선되지 않았다. 통일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경제적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동독 주민들의 임금과 생활수준은 여전히 서독 주민들의 70~80% 가량으로 조사되고 있다. 여전히 동독 지역 주민들의 57%가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는 보고도 있다. 그 사이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배제와 박탈의 감정은 커져만 갔다. 그들은 서독에 주요 기반을 두고 있는 독일의 두 거대 정당들 – 기민연(CDU)과 사민당(SPD) – 이 자신을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누가 이들을 대변할 것인가?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현재,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차별의 감정은 쉽사리 외국인 배제와 독일 민족주의의 강화를 촉구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치의 성장을 낳았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우리가 인민이다’를 자신들의 선거구호로 채택했다. 이미 연방의회 제3당을 차지한 AfD는 올해 9월 구동독 지역인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10월에는 튀링엔 주 지방선거에서 제2정당으로 부상했다.

AfD의 선거광고. 사진출처: https://www.demokratiegeschichten.de/wir-sind-das-volk/

이 구호가 우익 포퓰리즘 운동의 전유물이 된 것은 이미 2014년, 라이프치히 시위 25주년을 맞아 드레스덴에서 다시금 ‘월요시위’를 시작한 페기다(PEGIDA)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AfD의 부상, 그리고 2018년 (과거 칼 맑스 시(Karl-Marx-Stadt)라 불리던) 켐니츠에서의 대규모 우익 시위대에서 이 구호는 그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수의 ‘진보적’ 혹은 ‘좌파적’ 비판가들이 AfD나 페기다 시위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이들이 ‘네오 나치’ 혹은 ‘파시즘’, ‘극우 인종주의’ 세력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해악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주로 의회주의에 기반을 둔 자유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체제로 정의하며, 이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포퓰리즘적 목소리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는 태도와 결부돼 있다. 만약 그러한 가치판단이 사실이라면 독일 사회, 나아가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국 내에 존재하는 이들 ‘극우 파시즘’ 세력을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마치 독일 형법 130조가 – 표현의 자유 논란에도 불구하고 – 나치 찬양이나 인종혐오 등의 선동(Volksverhetzung)을 금지하고 있듯이 말이다.

AfD와 페기다를 ‘악’으로 묘사하는 이러한 총체적 가치판단이 놓치고 있는 물음은, 어째서 현재의 동독 주민들에게 이들이 강한 호소력을 갖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서독인들은 이들이 동독에 사느라 ‘민주주의의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쉽게 답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1989년 자유화를 요구하면서, 천안문 방식의 폭력적 진압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민이다!’ 구호를 외치고 권위주의적인 호네커 정부를 끌어내린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페기다 시위 참여자의 40%가 과거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들을 손쉽게 민주주의의 ‘적’인 ‘네오 나치’, ‘파시스트’ 세력으로 단정짓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2018년 출간된 샹탈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는 우익 포퓰리즘에 대한 이러한 일면적 가치평가를 비판한다. 먼저 무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인해 자본, 특히 금융자본의 경제적 권력이 국제적인 규모로 급속도로 확산되는 가운데 국민국가의 실질적 효력이 축소되면서, 주권의 담지자로 규정되었던 ‘인민’이라는 범주가 사실상 퇴조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포스트 민주주의’ 내지 ‘포스트(탈) 정치’의 상황은 다시금 ‘잃어버린 (인민)주권’에 대한 갈망을 낳았다. 반면 19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만 속에 유럽 전역에서 집권할 수 있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 담론과 타협, 우경화하면서 토니 블레어 식의 ‘제3의 길’을 선언하였다. 독일에서도 1998년 집권한 슈뢰더 사민당 정부는 하르츠IV 등 기존 사회국가의 복지정책을 대폭 축소하고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을 도입해 거대한 반발을 낳았다.

즉 좌우를 막론하고 기존 의회정치세력은 ‘신자유주의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대중적 분노와 박탈감을 야기했다. 오늘날 우익 포퓰리즘 확산은 바로 좌우를 막론하고 신자유주의 의제들을 수용한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 분노를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페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들을 통해 제기되는 대중의 요구들이 상당부분 ‘민주적인’ 요구들이라고 도발적으로 지적한다. 즉 그것은 권력에 대한 ‘인민’의 통제, 곧 ‘인민주권’에 대한 요구인 것이며, 따라서 여기에 대해 ‘정치적’ 답변이 제시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익 포퓰리즘 세력이 내놓는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적 답변이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좌파는 이들을 대신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담론을 제기해야 한다. 무페는 이를 통해 건설되어야 할 운동이 정치적 주체로서 ‘인민’을 호명하며, 그러한 인민의 잃어버린 주권에 대한 요구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인민주의)적’ 요소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무페의 주장은 포퓰리즘이라는 기표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기존의 담론들과 단절하면서, 오히려 좌파 정치세력들이 ‘포퓰리즘’ 운동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즉 ‘기득권’에 대항하는 ‘인민’이라는 전선을 폐기할 것이 아니라, 이 전선을 좌파적으로 재전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골칫거리로 여기는 전반적인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필자는 그녀의 주장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아쉽게도 그녀에 대한 반론을 이 자리에서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1989년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치며 호네커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 구동독 지역의 ‘인민’이 어째서 30년이 지난 오늘날 동일한 바로 그 구호를 통해 AfD와 같은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 대한 지지를 표출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페가 제시하는 현실 분석과 전망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 10월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초대로 독일을 방문한 무페는 좌파당 당수 카티야 키핑(Katja Kipping)과 바로 이 점에서 논쟁을 벌였다. 무페는 ‘어째서 노동계급이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는가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우익 포퓰리즘 정당을 ‘극우 파시즘’으로 규정하면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과 선을 긋게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좌파는 이들 대중에게 계속 대화를 걸면서, 그들의 ‘포퓰리즘적’ 요구, 즉 ‘인민적’ 요구에 공감하는 가운데 이를 좌파적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 중 16%가 코빈에게 투표했는데, 이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따라서 브렉시트에 찬성한 사람들을 모두 ‘파시스트’로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조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무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오늘날 필요한 것은 우익 포퓰리즘 세력의 구호로 전락해버린 ‘우리가 인민이다!’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이 구호를 새로이 재전유하는 일일 것이다. 과연 ‘우리’란 누구인가? 즉 누가 오늘날 ‘인민’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이 물음에서 우익 포퓰리즘은 마이너스(-)의 정치를 선보인다. 그들은 이민자와 난민, 무슬림, 유태인, 그리고 모든 외국인은 ‘인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플러스(+)의 정치를 제시해야 한다.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 즉 노동자와 외국인, 난민, 성소수자와 여성 등이 서로의 요구들을 기표연쇄를 통해 헤게모니적으로 구성하며 함께 투쟁할 때 현재의 억압과 소외, 차별과 불평등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 40여 년간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해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파국으로 드러난 현재의 상황에서, 정치적 전선은 ‘신자유주의 이후’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그것은 오늘날 CDU와 SPD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브렉시트와 제레미 코빈(영국) 사이에서, 트럼프와 샌더스(미국) 사이에서, AfD와 디 링케 혹은 녹색당(독일) 사이에서, 마리엔 르펜과 멜랑숑(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선이다. 과연 신자유주의 이후 정치질서의 원천은 새로운 형태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적 국가주권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적이고 수평적인 인민주권이 될 것인가? 이 전선에서 ‘주권자 인민’은 우익 포퓰리즘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상으로 호명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장벽 붕괴 30주년인 오늘날의 정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라고 믿는다.

 

 

보론: 천안문, 라이프치히 그리고 홍콩. 어떤 30년 전이 반복될 것인가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은 동시에 천안문 항쟁 30주년을 뜻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호네커 정부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 열린 월요시위를 천안문 방식으로 진압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30주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인민이다!’ 구호를 계승하고 있는 것은 홍콩의 시민들이다. 30년 전 천안문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라이프치히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인민 공화국’이 끝없이 인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배제하고 있는 ‘인민’이 바로 자신임을 제시하면서 치안의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를 드러내고 있다. 홍콩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고, 중문대와 이공대에서의 잔인한 진압작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현재, 중국 정부와 인민군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이 이뤄질 것이라는 우려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홍콩은 과연 30전 년의 천안문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라이프치히 시위와 장벽 붕괴를 반복할 것인가. 거대한 폭력 앞에 선 홍콩의 민주화 시위대는 벤야민이 말한 ‘과거의 현재화(Aktualisierung)’를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잊혀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순간마다 역사의 한복판에 벌거벗은 채로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 ‘인민’의 전통을 현재적인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림4 사진출처: Hong Kong Free Press (www.hongkongfp.com)

최근 한국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이 대학가의 홍콩 지지 대자보를 찢고 지지 학생들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그들이 정치적 반대자를 비난하기 위해 여성과 위안부에 대한 모욕적 발언을 사용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럼에도 어쩌면 그들은 예전에 아편전쟁을 일으킨 전범 제국주의 국가들의 내정간섭으로부터 사회주의 중국의 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일 수도 있다.

나는 ‘사회주의’ 중국을 수호해야 한다고 믿는 그들에게 맑스의 문장들을 되돌려주고 싶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쓴 청년 맑스는 ‘국가’를 숭배하기 이전에 그 국가가 과연 ‘인민’의 의지에 의해 구성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은 국가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주체화된 국가로 만든다. 민주주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국가를 객체화된 인간으로 만든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국가는 […] 인민의 특수한 내용이자 특수한 현존의 형식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에는 이런 문장도 등장한다. “한 마디로 코뮨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현존하는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문장은 많은 면에서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닮았다. 억압받는 자의 저항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오의 그 정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회주의의 대의를 옹호하는 중국인이라면, 이 순간 홍콩인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진압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1949년 권력을 장악한 그들의 선조를 이어받은 것은 인민에게 탱크를 보내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1989년 천안문과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이었으며, 오늘날에는 홍콩인들이 그러한 ‘인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악(樂)인열전]③

 

“음악은 침묵의 잔을 채우는 와인이다.”

– 소리의 가능 조건으로서 침묵, 로버트 프립에 대한 단상

 

이 현(건국대학교 철학과)

 

“고요함은 소리의 부재다. 침묵은 침묵의 존재다.”

–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

 

1951년 현대 음악의 선구자인 존 케이지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간 적이 있었다. 그는 무향실을 다녀오고, 이렇게 썼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공학자한테 이 이야기를 하자 그는 나에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이고, 낮은 것은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했다.”

 

존 케이지는 완전한 무음 상태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무음’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였다. 들뢰즈가 “회화가 얼굴의 탈영토화이듯 음악은 목소리의 탈영토화”라고 말했듯이, 음악은 언어(라는 문법적 규칙)를 벗어난 음-기계들 생산의 과정이고, 음의 배치이다. 완전한 무음은 없다. 그때 존 케이지는 이렇게 선언한다. “음악의 종말은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존재의 원초적인 소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정한 반복을 유지하고 심장 박동수는 최초의 리듬이다. 그 소리의 근원은 지상의 원소들의 소리이며, 리비도의 ‘울음소리’는 일체 세계의 울림이다. 그리고 이 울림은 존재 그 자체이다. 존 케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도 소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 있을 것이다. 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절대적인 무음은 없다는 발견이 존 케이지로 하여금 〈4분 33초〉를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완전한 무음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처럼,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는 순간, 그때 우리는 침묵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침묵의 순간에도 미묘한 잔음들은 청각기관을 자극하고 있다. 소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필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침묵이라고 말하는가? 우리에게 침묵이란 없다. 단지 우리는 ‘침묵을 듣는 것’이다. 침묵도 하나의 소리인데, 비-소리로서의 소리이고, 우리로 하여금 소리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소리이다. 침묵이 없다면 음악도 없다. 와인을 담아 둘 와인잔이 필요하듯, 침묵은 소리를 받아주는 그릇이고, 음악을 가능케 해주는 또 다른 소리이다.

갑자기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존 케이지의 일화는 침묵 역시 음악의 영역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침묵은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에 해당한다. 클래식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기침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일 것이며, 이 모든 행동들은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소리들은 연주자가 제어할 수 없는 우연적인 것들이다.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주자는 연주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심호흡을 하며, 소리를 만들고 있다. 연주자가 내고 있는 이 소리들은 연주자의 소리이지만 제어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침묵의 순간은 소리의 필연성과 우연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고, 아이러니하게 침묵은 ‘소리의 존재’를 보여준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King Crimson

이러한 소리의 우연성의 발견은 현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 세례를 받은 인물 중에 하나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이다. 로버트 프립은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기타 연주자로 잘 알려졌다. 킹 크림슨은 69년에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희대의 명반과 함께 등장했으며, 70년대 락의 황금기를 풍미했다. 70년대는 락의 테크닉이 최고 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이고, 대부분의 락의 형식이 이 시기에 정리되었다. 20세기 초 미술의 모든 실험적 방법이 아방가르드 시기에 구축되었다면, 80년대 락의 모든 실험적 방법은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에 의해 완성된다. 킹 크림슨을 빼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킹 크림슨은 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로버트 프립이 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King_Crimson_members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을 제외한 멤버 교체만 20명이 넘는다. 프립의 극단적 진보성향은 그의 인간관계에서도 보인다. 그는 새로운 멤버들과 새로운 음악에 도전했고, 그것을 극한까지 몰아세웠다. 그 고행을 견뎌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변화를 추구했던 그는 매번 기상천외한 음악적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은 마니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밴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처럼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프립과 다른 멤버들이 늘 대립했고,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이 불협화음은 그들의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늘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그의 밴드 역시 늘 우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졌다.

 

그의 진가는 킹 크림슨에 한정되지 않는다. 킹 크림슨 얘기만 해도 많지만, 이번에는 로버트 프립에 집중하기로 하자. 프립은 킹 크림슨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 중 73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명반 [No Pussyfooting]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FRIPP & ENO [No Pussyfooting]

https://youtu.be/ZwHH7XECJLg

앨범 아트 역시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거울 방 안에 있는 거울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거울인데, 그 거울 역시 반대편 거울을 재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상상해보자. 우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볼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반대편 거울이고, 반대편의 거울이 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거울이다. 거울 속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후관계는 없고 계속 반복되는 자기복제, 모방의 모방들 밖에 없다. 끝없이 펼쳐지는 거울 방은 마치 소리의 파장과 같다. 무한히 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퍼져나가는 음파처럼, 거울 속 이미지들은 계속 자신을 재현하면서 확장한다. 거울을 이용한 이 앨범 아트는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음들이 계속 중첩되면서 무한히 반복되는데,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우연적 음들의 배합과 자기복제. 그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메이킹을 거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브라이언 이노로부터 프립은 많은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연주 기법을 발명한다. 초기의 형태는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Revox A77)를 이용하여 한번 연주된 소리를 녹음과 재생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일종의 딜레이 효과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70년대 말부터 “Frippertronics”라는 명칭을 얻는다.

https://youtu.be/4Xjtm-RZaek – Montreal, North American tour in 1979

프립퍼트로니스(Frippertronics)와 로버트 프립(Robert Fripp)

프립퍼트로니스의 원리

 

Frippertronics는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더욱 성능이 향상되었다. 2대의 아날로그 녹음기는 디지털 장비로 대체되고 각종 이펙터가 추가됐다. 이 시기부터 프립의 기법은 “Soundscape”라는 명칭을 얻었다. Soundscape 역시 Frippertronics과 마찬가지로 사운드에 반복, 연장 효과를 준다. 이 효과는 마치 넓게 퍼진 풍경(Scape)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프립은 Soundscape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Soundscape에 의한 나의 연주는 음의 지연(delay), 반복(repetition), 우연적인 효과(hazard)를 기본으로 한다. 주로 즉흥연주(Improvisation)이기 때문에 때와 장소, 청중들과 청중들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 Soundscape은 기타 한 개로 수많은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가진 내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https://youtu.be/lr8SR_bzayk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 Bringing Down the Light

사운드스케이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이다. 92년 발표된 데이빗 실비안(David Sylvian)과 함께 발표한 이 곡은 완전히 사운드스케이프만으로 이루어졌다. 몽환적인 사운드가 일품이다.

 

프립을 소개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의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는 저작권에 대단히 민감한데, 그래서인지 음원사이트를 통해서 그의 음악을 다운로드할 수가 없다. 그의 음악을 듣고 싶으면 수고스럽게 시디를 직접 사서 들어야 한다. 21세기에 너무나도 불편하지만 그의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을 어찌 말리겠는가. 혹시라도 프립에 관심이 생겨서 시디를 직접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에 앨범은 꼭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King Crimson>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킹 크림슨의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21st Century Schizoid Man을 시작으로 Epitaph까지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를 권장한다. 킹 크림슨 1기를 대표하는 앨범

[Islands], 1969

킹 크림슨 2기에 해당하는 앨범이다.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 시작하면서, 좀 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시기. 킹 크림슨 앨범들 중에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던 시기이다.

[Larks’ Tongues In Aspic], 1973

3기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다. 재즈, 클래식, 헤비메탈 등등 한 앨범이 아니라 한 곡에 다 섞여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스의 드러머였던 빌 브루포드가 참여했다. 굉음과 침묵이 서로 핑퐁하듯이 왔다갔다 하는데, 킹 크림슨이 음악적 실험을 가장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시기이다.

[Red]

3기의 마지막 앨범. 여러 멤버들이 탈퇴하고 3인 체제로 낸 앨범이다. 보통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 <Starless>에서의 프립의 독주는 정말 환상적이다.

 

<프로젝트>

FRIPP & ENO [No Pussyfooting], 1973

명 프로듀서 브라이언 이노와의 합작, 프립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사실상 프립의 진가는 여기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David Sylvian & Robert Fripp [The First Day], 1992

제펜의 데이비드 실비앙과의 합작, 사운드스케이브가 가장 잘 드러나는 앨범

David Bowie [Heroes], 1977

동명의 타이틀곡에 프립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솔로>

[The Last of the Great New York Heart Throbs], 1978

 

[Exposure], 1979

프립의 음악세계가 나를 매혹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프립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리’에 대한 철학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소리는 왜 소음이 아니라 음악이 되는 것인가. 음악의 핵심은 반복과 변화이다. 리듬은 반복이지만, 동시의 변화이다. 우리가 반복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잠깐의 텀이 필요하다. 반복이라는 의미 안에는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다. 소리 다음에 침묵. 그리고 침묵 이후에 등장하는 소리로의 변화. 이 모순적인 요소들의 순환이 바로 음악이다.

비단 음악뿐이겠는가. 삶 역시 반복과 변화의 나열 아니겠는가. 늘 일상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가 삶을 작은 예술로 만들어주기에, 조금이라도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 케이지와 로버트 프립. 우리는 침묵 역시 듣고 있다. 소리는 침묵 덕분에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침묵은 음악의 이정표 역할이 되어준다.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와인잔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이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잠깐 찾아오는 침묵의 소리를 찾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자기에서 자기와 다른 자기에로 ‘변화'(transformation)가 아닐까.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389b-d]

*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에서 수호신과 영웅들을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으로 용기를 이야기 한 후에 정직ἀλήθεια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거짓말ψεῦδος을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나라의 이익 또는 시민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합당해도,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 누구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389b) 일반 개인ἰδιώτης들이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ἰατρός를 상대로, 신체 단련 수련생이 체육 담당자παιδοτρίβης를 상대로, 선원이 선장κυβερνήτης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389c)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를 붙잡으면 전문가οἳ δημιοεργοὶ이건, 예언자μάντις이건, 의사이건, 목수이건 벌을 줘야 한다. 그들은 마치 배를 전복하듯 나라를 전복하고 파괴할 그러한 관행ἐπιτήδευμα을 들여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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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을 위한 시가 교육 단계에서 거론하는 덕목들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장차 수호자들이 갖추어야할 덕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수호자를 선발하기 이전 단계이므로 최소한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즉 용기와 절제가 먼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이어 절제를 다루기 전에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용기와 절제 외에 정직도 별도의 덕으로 추가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별도의 논의로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그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 아무려나 이 부분은 시작부터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경악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 즉 ‘통치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거짓말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통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도발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통치 권력자와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 내용만 따로 떼어져 20세기 포퍼(K. Popper)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플라톤 정치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핵심 근거로 자주 인용 되어 왔다. 사실 자유주의가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위선, 폭압에 대한 뼈저린 역사적 경험 위에서 소수 정치권력에 대한 다수의 견제와 의심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그러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서, 일단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통치자와 거짓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만 들여다보자면, 플라톤이 제1권 이후 시종일관 내건 주장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도발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다. 플라톤은 줄곧 통치술을 일반적인 전문 기술에 상응하는 것 즉 정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동일한 성격의 앎으로 등치시켜왔는데,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주장 또한 내용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1권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의 관계 즉 전문기술자와 그 기술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그 나라의 통치자들ἄρχων τῆς πόλεως(389b)’이란 말 가운데 ‘통치자들’은 비록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맥락상 제1권에서 언급된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고, ‘그 나라’ 역시 그러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앞으로 제기될 정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통치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기본 설정을 배제하거나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쁘다. 플라톤도 당연히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군인이 적을 속이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다못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제1권에서 언급된 미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을 용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특히나 거짓말의 용인 수준과 관련하여 나랏일과 관련하여 통치자가 행하는 거짓말과 그 밖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의 선한 거짓말을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만큼 통치자의 경우는 거짓말의 해악을 분별해내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잣대가 무엇이고 그 엄격성의 객관적 근거를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 모두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를 내세우듯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최상의 통치 전문가를 그 잣대로 내세운다. 요컨대 통치자의 거짓말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위중하고 중차대한 그 만큼 아무나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통치의 기술과 도덕, 지성의 전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고도의 전문가 즉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거짓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극물의 경우 그것이 위험한 그 만큼 최고의 독약 전문가에 한해 취급이 인가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 기술과 객관적 보편성 내지 정치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나랏일과 관련하여 거짓말이 요구될 경우, 권력의 자의적 독단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검증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야말로 가장 중대한 영역인 만큼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최고의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세 이래 자유주의자들은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전문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플라톤이 가장 정치에 비전문가라고 폄하하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기술 즉 통치술과 일반 전문 기술을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자신의 기본 전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치철학이 그의 지식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인식 능력을 토대로 성립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구현이 철학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담보되고 관철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역사 이래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백안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정치철학을 인치인가 법치인가의 잣대로 양자택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온전한 이해 방식도 아니고 적합한 논의 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말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러서도 하나같이 정치의 지성화를 목표로 삼아 <국가>에서 강조한 인치의 측면에 더해 법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치와 관련해서도 1인의 철학자 대신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 nykterinos syllogos(<법률> 908a, 909a, 968a)라는 다수의 철학자 집단에 최고의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치이건 덕치이건 간에 플라톤 정치 철학적 지향과 목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지성화에 있는 한, 그의 제안들은 정치철학 일반에서는 물론 구조적으로 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찰해보아야 할 철학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부분의 주제는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정직이 왜 중요하고 귀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 일반 개인들이 정직하지 않았을 때 나라가 어떠한 위험에 처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왜 마땅한지를 언급한 연후, 바로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89d]

*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왜 절제σωφροσύνη가 요구되는지 어떤 면에서 대중에게 절제가 가장 중대한지를 묻는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절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은 통치자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ὑπήκοος 그 반면 주색πότος καὶ Ἀφροδίσιος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ἡδονή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ἄρχων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훌륭한καλός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면서 바람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가며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다.

 

[389d-391d]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을 내용적으로 순서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인용 사례의 구체적 내용들과 전거는 텍스트와 주석 참고) 1) 디오메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순종 2) 아킬레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불손 3) 시인(389e) – 통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함νεανίευμα 4) 에우륄로코스((390a-b) – 식욕을 인내καρτερία하지 못함(참지 못함) 5)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 성욕을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ν 참지 못함 6) 오뒷세우스 – 분노를 참지 못함 7)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 재물욕φιλοχρήματος을 참지 못함 8) 아킬레우스(391a-c) – 신에 대한 불손ἀπειθής과 오만ὑπερηφανία 9)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 -무서운 겁탈 10) 기타 신의 아들, 영웅들의 무섭고 불경한δεινὰ καὶ ἀσεβῆ 짓들(39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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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절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들였을까, 그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직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 후 바로 통치자 이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초점은 전후 문맥상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와 일반 개인들 모두에게서 정직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마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처럼 환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통치자와 사인들의 관계에서도 사인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통치자들이 일반 개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 통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 한, 사인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허위 진술, 허위 보고는 생사의 문제를 오가는 질병과 항해, 전쟁 영역에서 죽음과 불행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정직은 통치자와 사인들 간의 참된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수 조건이자 나라와 개인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는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와 사인들의 참된 관계는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지휘관과 병사의 참된 관계가 그래야 하듯이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 대한 사인들의 순종 즉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순종이 사인들의 예속과 희생이라고 오해되어선 안 된다. ‘정직’으로 옮긴 ἀλήθεια(alētheia)는 여기서는 거짓말과 대비하여 그렇게 옮겼지만, 그 말은 ‘정직’(frankness)의 뜻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진리’, ‘진실’, ‘참됨’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조화에 참여하는 여러 구성 요소들이, 마치 도가 도답고 미가 미답고 솔이 솔다워야 도미솔 화음이 이루어지듯, 모두가 다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자기다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순종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통치자를 통해 구현된다는 앎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 그리고 질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근거로서 참된 앎에 통치자 역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이전에 참된 앎과 그것에 따르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정직에 이어 절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정직에 대한 논의는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점은 이곳의 논의와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용기와 절제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정직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을 일삼는 시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별도의 논의, 즉 나라에서 거짓말은 통치자 이외에 허용될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개인으로서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삽입일 수도 있다.

* 아무려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를 지으면서 영웅들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용기에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다시피 이곳에서의 절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행태 위주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절제에 대한 이곳에서의 논의가 앞서 용기의 경우가 그랬듯이 나중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보편적인 규정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논의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앞서 정직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절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성요소 또는 개인의 내적 구성 요소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절제는 강해 초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원래 군사 용어에서 나왔다. 그리스 육군의 기본 전술은 창과 방패를 들고 견고한 대오를 유지하며 전진하는 팔랑크스(phalax) 전법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병사 각자의 개인적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강한 병사가 있더라도 대오를 벗어나 혼자 전진하려 들면 밀집대형은 흐트러져 패배에 직면할 수 있다. 각 병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되 밀집대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병사와의 관계 내지 전체 대오를 늘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체 대오 유지를 위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원칙이자.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합의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즉 통치자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앎과 그것을 구현하는 자발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의(定義) 차원에서 절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의 구현으로서 절제를 ‘질서’κόσμος 인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억제ἐγκράτεια’로 표현(430e)하기도 하고 ‘강한 소리, 약한 소리, 중간 소리의 협화음συμφωνίᾳ, 화성ἁρμονίᾳ’(430e, 432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한 쾌락에 대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개인의 내적 관계에서 관철되어야 할 바람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절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유혹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는 것 즉 지배를 관철시켜 그 유혹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와 관련해서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절제를 언급하면서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κρείττω αὑτοῦ’이라고 말한 후 그것을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서 한결 나은 것τὸ βέλτιον과 한결 못한 것τὸ χεῖρον이 있어서 성향상φύσει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430e-431a). 즉 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건 개인적인 차원에서건 어느 구성요소가 어느 구성요소를 지배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즉 일종의 지배관계에 대한 합의ὁμόνοια’(432a-b)인 것이다. 아무려나 절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대 그리스 사회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오면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전사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일단 여기서 절제에 대한 논의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기존 시가에서 영웅들을 무절제한 사람으로 잘못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실린 영웅들의 무절제한 행태들은 나중에 절제가 무엇인지를 다루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부분의 절제에 대한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추후 다루어질 정의(定義)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다. 우선 이곳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의 무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통치자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행태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은 장차 수호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의 종류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쾌락의 실체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순종과 무절제와 관련된 구체적 행태들을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에 대응시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1) 디오메데스(389e)와 아킬레우스(389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지휘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위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절제가 한결 나은 것에 대한 한결 못한 것들의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불순종과 불손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젊은이들과 수호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무절제 행태들이다. 2) 에우륄로코스((390a-b),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오뒷세우스(390d),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제하기 힘든 인류 공통의 유혹들을 담고 있다. 그 첫째는 생물학적 욕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식욕과 성욕이고 사회적 욕망 차원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노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분노와 재물욕 모두 개인 내면에 자리한 ‘한결 못한 혼에 대한 한결 나은 혼의 지배’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 즉 바람직한 혼의 내적 관계가 전도된 상태에서 나오는 무절제한 행태들이다. 그리고 3) 아킬레우스(391a-c),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d)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불손과 오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다룬 불순종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앞서의 불순종이 사람에 대한 불순종인데 비해 여기서의 불순종은 신에 대한 불손과 오만으로서의 무절제라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이 절제와 직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 또한 절제와 직결 되어 있다. 경건 또한 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이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몇 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 390b에서 ‘자제(自制)’로 옮겨진 ἐγκράτειαν(enkrateia)는 여기서는 절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krateia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외적인 강제와 두려움에 의해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참된 앎에 기대 자발적으로 참는 것으로서 절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2) 391a에서 플라톤은 호메로스에 대한 비난을 일부 유예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기존 신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전적인 부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91c에서 ‘자신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병폐ἐναντίος νόσημα로 재욕에 따른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함ὑπερηφανία이 거론되고 있는데 옹졸함과 거만함이 갖는 상반성이 우리말 역어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옹졸함에 해당하는 원어가 예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재물에 대한 옹졸함은 재물에 대한 예속을 뜻하고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은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방종과 오만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상반성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한결 나은 것의 한결 못한 것에 대한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게 심적 동요상태ταραχή 즉 무절제에 해당한다.

 

[391e]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관련한 사례들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도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도 나을βελτίων 것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이 경건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으며οὔθ᾽ ὅσια ταῦτα οὔτε ἀληθῆ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데 대해 관대συγγνώμη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사악함πονηρία에 대한 무신경εὐχέρεια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이야기들은 말하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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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들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례들은 모두 시가에 실린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기본적으로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시인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들이 그려낸 신과 영웅들의 무절제한 모습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사악함에 대한 무신경을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그런 신화는 짓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려주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들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도 시가 비판과 더불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제의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논의 역시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 또한 함께 갖고 있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4 인간들에 관한 것(386a-391e)

 

[392a]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적 규범을 정하는ὁρίζω 것과 관련하여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 이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한 후, 이제 인간ἄνθρωπος들과 관련한 논의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들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시가를 통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규범을 세울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잘못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토론의 근본 주제 답변을 요구했던 것들이다. 즉 그 내용은 ‘부정의한 자들ἄδικοι은 다수가 행복한εὐδαίμονες 반면 정의로운 사람들δίκαιοι 은 다수가 비참하고ἄθλιοι 또한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들키지 않는 한, 이득이 되나λυσιτελεῖ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ἀγαθόν이되 자신에게는 손해ζημί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합의는 그 때로 미루고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ἅ λεκτέον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이제 논의는 시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이어 시가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ὡς λεκτέον에 대한 문제 즉 이야기 투λέξις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세 번째 시간, 밤하늘 [시가 필요한 시간]

세 번째 시간, 밤하늘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시 읽기 참 좋은 밤이네요. 최근에 저녁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죠. 이제 곧 겨울인가 싶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2년 정도 있었는데, 호주에 살 때는 밤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보는 그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날씨가 쌀쌀해질수록 별이 많아졌던 기억이 나는데요, 한국에서는 밤에 하늘을 보고 별을 찾아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의 주제는 ‘밤하늘’인데요, ‘밤’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뭔가 어둡고 고독..하다고 할까? 흡사 어떤 ‘암흑기’와 같은 이미지가 먼저 다가올 수도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나름의 낭만과 매력이 있는 시간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나 싶어요.

오늘 주제가 밤하늘이다 보니까 문득 생각이 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예전에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한 7시 반쯤 되었던 것 같아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봤는데, 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사이에 엄청 큰 달이 떠 있더라구요.

그 달빛에 비춰진 구름과 밤하늘이 너무 환상적이고 예뻤어요. 그래서 그 때 제가 속해있는 그룹 채팅방에다가 달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하늘의 달을 보라고 연락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혹시 있나요?

꼭 달이 아니더라도, 어느 맛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군가가 생각나고 ‘아, 그 사람이 여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던 경험, 분명 한번쯤은 있으시죠? 그렇게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꽤나 좋아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서 나를 마음속에 떠올려준다면? 누군가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연락을 준다면! 아마도 꽤 감동을 받겠죠. 뭔가 그 사람에게 내가 특별한 대상이 된듯한 느낌이 들 테니까요. 무엇이든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누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잘 전달이 된다면 꽤 근사한 감동이 있을 겁니다.

그런 서로의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있어서 오늘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바로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인데요, 시 먼저 읽고 이야기 나누도록 할게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문득 한가지 궁금한 게 생기죠. 과연.. 진짜로 달이 예쁘게 떴기 ‘때문에’ 전화를 한 걸까? 어쩌면 그냥 달은 핑계고, 그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달을 보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는 건, 이미 그 사람 마음 속에 상대방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는 거 아닐까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화해서 ‘달이 너무 예쁘게 떴으니까 한번 봐봐’라고 툭 던지지만, 그 말 속에는 그만큼의 애정이 분명히 담겨 있겠죠. 그리고 이 시 속에서 그 전화를 받은 사람도, 달 얘기를 툭 꺼내는 말 속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딱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달이 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른다… 무슨 뜻일까요? 평소 늘 보던 달빛이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밝고 환한 달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수화기 너머로 상대방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감정,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고마움, 감동, 그리움, 그런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그 순간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화로 밖에는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마음을 ‘달빛에 실어 보내’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이겠죠. 멀리 떨어져 있기에 더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하늘에 뜬 환한 달을 보고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고, 그 전화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도 또 하나의 달이 떠오른다는 이 시적 표현은, 물리적으로는 먼 거리에 있지만, 마음만으로는 서로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 느껴지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 멋지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홍이삭의 ‘산 넘어 그대는’이라는 곡 소개 해드릴게요. 이 곡은 ‘차곡차곡’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가수 홍이삭과 더블베이스 연주자 송인섭이 작곡하고, 일반 구독자들이 직접 댓글로 작사에 참여해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해요. 지금 곁에 함께 있지 않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홍이삭 특유의 밝은 멜로디를 만나 아름답게 표현된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를 들으시면서 누구를 마음 속에 떠올리실지 궁금하네요.

QR코드를 스캔하면 음악재생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밤하늘이라는 주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칼럼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다른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라는 글이었는데요, 요즘 시를 읽으면서 점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법을 좀 더 배워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가 필요한 시간’이죠!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호주에 가서 가장 놀랐던 게, 밤하늘에 별이 정말 많이 보이는 거였어요. 한국에서는 사실 다른 별은 잘 안보이고, 눈에 띄게 밝은 별이 딱 하나 있어서 ‘저게 북극성이다!’라고 바로 알 수 있죠. 그런데 호주는 별이 전부 다 밝으니까 뭐 하나를 딱 찾아낼 필요가 없더라구요. 낮에는 구름이 너무 예쁘고 또 밤에는 별이 너무 예뻤던 호주의 하늘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도종환이라는 시인이 쓴 시 중에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 마을에 별들이 많이 뜬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시가 있는데, 호주가 딱 그런 곳인 것 같아요. 도종환 시인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제 발 밑만 쳐다보며 사는 동안, 그리하여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을 잊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별들도 알았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별들도 도시의 하늘을 떠나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이 밝을수록 별이 도시의 하늘을 떠나간다. 시적인 표현이죠. 낮이고 밤이고 바쁘게 치이는 도시의 삶, 밤에도 불을 밝힐 수 밖에 없으니 밤 하늘에는 당연히 별이 보이지 않겠죠. 시인은 그런 삶을 가리켜 ‘별들도 떠나버리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 역시, 그만큼 모두 자기 사는 일에 급급해서 남을 돌아다 볼 여유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을 겁니다. 처음 언급했던,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도 다시 돌아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만나 볼 시는 바로 별에 대한 시입니다. 이성선 시인의 시 ‘사랑하는 별 하나’ 함께 만나 보시죠.

 

사랑하는 별 하나

                                이성선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도 꽃이 될 수 있을까.

세상 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가슴에 화안히 안기어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이 될 수 있을까.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얗고 노란 별이 있다면, 이 땅에도 하얗고 노란 별들이 있습니다. 바로 들판에 핀 들꽃들이지요. 밤에 보는 별들과 낮에 마주하는 들꽃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누군가를 바라봐주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일 겁니다.

사람은 서로 오해도 하고 또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곁에 있을 때도 있고, 곁을 떠날 때도 있죠. 하지만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런 자연을 보고 시인은 참 많은 위로를 받은 것 같습니다. 외로운 밤에 고개를 들면, 별이 그 자리에서 눈을 마주쳐주고, 세상일이 괴로워 고개를 푹 숙일 때, 그 자리에서 들꽃이 미소를 지어주며 위안을 주고 있음을 느껴냅니다. 그 흔한 별과 들꽃을 보고 위로를 받고,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시를 쓸 수 있는 이 시인의 눈이 참 부럽습니다.

이런 별과 들꽃처럼 위로와 위안이 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죠.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의 ‘나도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라는 구절은, 마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들리면서, 어떤 다짐으로도 다가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이런 위안의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스탠딩 에그의 <Starry Night>이라는 곡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곡은 스탠딩 에그가 호주를 여행하던 중에, 울룰루(Uluru)에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쓴 곡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어요. 이 노래 들으시면서 밤하늘의 별도 감상하시고, 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하루를 마무리 하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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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 을이라는 호칭은 민주적인가. [철학자의 서재]

을의 민주주의? 을이라는 호칭은 민주적인가.

 

진태원, 『을의 민주주의 – 새로운 혁명을 위하여』, 그린비, 2017.

 

이 책은 민주주의에 대해, 포퓰리즘에 대해, 인권과 다중, 시민성, 정치적 주체, 몫 없는 이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라클라우와 랑시에르, 아렌트, 발리바르, 네그리, 푸코 등의 철학자들이 호출된다. 하지만 어려워 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들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대중의 개입이라는 소란’을 겪게 되는데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를 불완전’(p. 76)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부정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만일 억압되고 배제된 자들,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체제일 수 있다면 ‘아래로부터의 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p. 93) 오늘날, 저자는 포퓰리즘(인민주의)의 내부(p. 93)에서 다시 새롭게 정치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는지 자문하고 있다.

 

이것은 대중들의 역량(p. 125)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대중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인가. 촛불집회 시민들의 역량은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물가는 계속 오르고 서민들은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언론이나 TV를 보면 지금 바깥세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안정적인 것만 같다. 과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차적 목표였다면 이제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시대다. 청년 세대들은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헬조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의 신조어도 낡아 가는 지금 청년들에게 남은 건 남혐, 여혐(한남, 김치녀 등)인 듯도 하다. 청년 실업의 문제는 왜 어느 순간 젠더의 문제로 전이된 것일까. 강남역 살인 사건 등의 몇몇 사건들을 통해 촉발된 것도 있지만 그 저변에 다른 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문제(실업, 취업난 등)는 왜 어느 순간 다른 문제로(젠더 등) 비약하거나 변이하는 것일까. 여러 사회의 모순(중요모순 부차모순 할거 없이)들이 잠복해 있다가 동시다발적으로 (미세한 시차를 두고)분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혁명은 가능할까.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다움일까. 다중일까. 정치적 주체일까.

 

시민다움은 발리바르의 개념이다. 발리바르에게 시민다움의 정치는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에 맞서 공동체를 탈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p. 156). 이런 공동체에서 시민들은 자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여기서는 ‘미완의 시민권’(같은 곳)만이 부여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과 인민people을 구별하는데 인민이 획일적인 동일성을 지닌 집단(p. 236)이라면 다중은 어떠한 배제나 우열도 전제하지 않은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개념이다(같은 곳). 이들은 주권에 대한 다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이야기하며 다중이 정치적 주체라고 말한다(p. 239). 그들에게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가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 있는 육체다(p. 241).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적 주체로 또는 정치적 탈주체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고(370), 랑시에르는 푸코를 비판하면서, 푸코의 주체가 윤리적 주체의 성격을 띄며 정치성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285).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치안을 규정하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다(288). 

 

어쩌면 정치성을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우리 ‘을’들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것인가. 우린 어떤 주체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되지 말아야 할까. 나는 정말 ‘을’인가. 아니면 ‘을’이 아닌가. 경제적 신체적으로 갑에게 종속되어 있거나 상황이 열악하다고 해서 나를 ‘을’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미완의 인간’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한국남자(한남)라고 상대를 규정해 놓고 접근하면 그는 한남이 ‘된다’ 그게 아니라 다른 가능성, 다르게 관계하고 대화할 수 있는 방향을 만드는 것, 관계의 정치를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그래야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들(을이라 하든 88만원 세대라 하든)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by 엄진희(시인, 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