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철학자의 서재]

『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상운 옮긺, 『데리다를 읽는 시간』, arte, 2018.

 

데리다는 읽히지가 않아서 포기하게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은 강의록으로 데리다의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와 <죽음을 주다>를 강독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겨냥한 쟁점들이 재미있다.

 

예를 들면 데리다에게 하이데거가 독일 민족의 정신이라든가 대학의 정신 같은 것이 있다고 실체적으로 상정한 뒤 그것으로부터 자기주장을 내뱉는다는 이미지(p. 96)로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데리다에게는 그런 실체란 없으며 그것은 항상 ‘이미’ 오염되어 있고 시간에 따라 ‘변형’되며 왜곡되기도 한다. 또 데리다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던 하이데거가 인간/동물/비생물로 세계를 구분하고 인간을 특권화 하는 것이 결국 ‘인간중심주의’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p. 121).

 

데리다는 아도르노의 관점을 끌어들여 하이데거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회귀해야 할 ‘정신’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환상이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아도르노의 눈에 횔덜린은 고향으로의 회귀 불가능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이데거는 한사코 무리하게 고향으로의 회귀 이야기로 만들어 독일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p. 154). 1, 2강은 이런 내용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의 ‘정신’이 모든 것을 통합한다면 데리다에게 그런 것은 환상이며 있는 것은 ‘차이화’이며 ‘차연’이다(p. 167). 데리다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가 확정된 것처럼 보여도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 의미는 미묘한 차이와 비정합성이 생겨나 불안정하게 된다. 이것을 데리다는 ‘차연’이라 부른다(p. 167).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항상 ‘대체보충’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의 감정적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나 예술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그것들이 ‘오리지널’을 대리보충해 주기 때문이다(p. 187).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점을 놓친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기원, 근원, 정신적인 것을 찾는 하이데거가 현재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하이데거를 겨냥해 이렇게 말한다. 홀로코스트를 막으려면 본래의 근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통 기독교적 발상은 ‘철학의 죽음’일 뿐이다(p. 232).

 

3, 4강에서 데리다는 근원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강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 역시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고 본다(p. 322).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가 주체를 압도할 경우 주체가 무력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p. 323). 데리다가 보기에 ‘책임’의 본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결정 근거가 없는 ‘결정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느 쪽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 348). 이 때 어떤 신비,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때, 인간의 이성, 합리성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근대의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데리다가 말하는 것 아니냐고 보고 있다.

 

의미가 계속 변동하고 ‘차이화’ 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확실한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 데리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는 파편화된 것, 균열, 틈, 공백의, 나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거나 ‘신비’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예술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예술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이 잘 안 되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도 같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은 등가교환의 원리를 고안했고 이와 함께 이성적 인간, 계산하는 인간이 생성됐다(p. 449)고 본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서양의 기독교는 이런 대칭성을 중단하고 천상의 이코노미를 명령했는데 그것은 기브 앤 테이크 식의 경제가 아닐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 책임, 무조건적 책임 같은 것일텐데 이것이 데리다의 윤리인 것 같다. 6강까진 이런 논의들이 이어져 있다.

 

마지막 7강은 ‘에크리튀르’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구어가 먼저 있고 나중에 문자가 생겼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기호적으로든 문자적으로든 오염되어 있다. 기호나 문자 체계가 없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지각이 이미 기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p. 488). 유아는 어른들의 말을 제대로 재현할 수 없고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말을 할 수 있게 된다(p. 493). 이러한 과정, 에크리튀르의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파롤이 ‘에크리튀르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p. 512).

 

거칠고 두서없이 리뷰해보았지만 데리다를 읽기 전에 입문서로 읽기 좋은 책이다. 학생도 교양으로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② [2019년 3월 월례회]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②

 

한철연 회원 이상하

출처: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12/80/cover500/k082532437_1.jpg

  • 지난 1부에 이어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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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즈마는 글을 쓰면서 프랑스 현대철학 전공자답게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도 의식하며 글을 쓰고 있다. 대표적으로 들뢰즈의 수목형이 아닌 뿌리-줄기 리좀 모델과는 다른 자신의 데이터베이스 소비 모델에 대해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표층적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표층을 규정하고 있는 심층 즉 커다란 이야기가(거대 담론) 있다. 따라서 근대에서는 그 심층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의 도래에 의해 그 트리형 세계상은 붕괴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어떠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 80년대 일본에서는 그 하나의 후보로 심층이 소멸하고 표층의 기호만이 다양하게 결합해가는 ‘리좀’이라는 모델이 많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포스트모던의 세계는 오히려 데이터베이스 모델(읽어내기 모델)로 파악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 그 알기 쉬운 예가 인터넷이다.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즉 모든 웹페이지를 규정하는 감춰진 커다란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리좀 모델과 같은 표층적 기호의 조합만으로 성립하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에는 한편으로는 부호화된 정보의 집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저의 읽어내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개개의 웹 페이지가 있는 별종의 2층 구조가 있다. 이 2층 구조가 근대의 트리 모델과 크게 다른 것은 거기에서 표층에 나타난 겉모습(각각의 유저가 보는 페이지)을 결정하는 심급이 심층이 아니라 표층에, 즉 감춰진 정보 자체가 아니라 읽어내는 유저 쪽에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표층은 심층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고 그 읽어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러한 모델의 변화는 단순히 사회적으로 인터넷의 출현뿐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자기조직화나 인공생명, 신경망 등 90년대에 널리 주목받은 복잡계통 과학의 발상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 데이터베이스는 유저 측의 읽어내기에 의해 얼마든지 다른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일단 ‘설정’에 손을 대기만 하면 소비자는 거기에서 원작과 다른 2차 창작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상황을 표층으로만 파악하면 오리지널 작품=원작이 무질서하게 시뮬라크르의 바다에 삼켜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우선 데이터베이스=설정이 있고 그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 원작도 가능하고 2차 창작도 가능한 현상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옳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68-71쪽에서 인용.

 

즉 들뢰즈의 리좀 모델은 심층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표층들의 조합으로서 성립하지만,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 모델은 심층은 존재하지만 유저가 표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2차 창작’으로 얼마든지 다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방탄소년단과 그 음악에 대해서 이걸 적용해보자면, 이지영은 들뢰즈의 리좀 개념을 빌려와서 팬덤 아미가 탈중심화해서 방탄과 결합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방탄이라는 중심, 심층, 그리고 빅히트 기획사라는 공식official 설정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국의 팬이 자신의 언어로 방탄의 음악을 번역하고 그 가사로 <뱁새>나 <불타오르네> 같은 노래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 팬이 자신이 원작이며 심층이라고 주장한다면 수많은 다른 아미 팬들이 한국어 원작이 엄연히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온갖 비판과 비추를 받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만약 이런 소동이 크게 난다면 빅 히트 기획사 차원에서 법적 대응을 하고 공식 성명을 낼 것도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심층 자체가 없는 들뢰즈의 리좀이 아니라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 모델이 이 포스트모던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더 적확한 면이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BTS 예술혁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한국에는 ‘부친살해’의 구전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오히려 ‘자식살해’ 즉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비가 아프면 자식이 솥에 들어가서라도 효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끔찍한 설화가 전국 각지에 퍼져있다는 사실이었다. 허나 이 부분에서 이지영은 또 방탄과 아미가 이러한 부친살해,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문화를 파괴하는 한국의 첫 사회 문화적 혁명의 사례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서태지와 신해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90년대 한국에 일본문화가 개방되고 일본 만화와 음악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지금의 30대 이하 세대는 또다시 고개가 갸우뚱 해질 따름이다. 세계 판매 1위를 기록한 대표적인 작품인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어릴 시절에 외계인임에도 자기를 키워준 할아버지 손오반을 죽였고, 자신의 형제이자 뿌리인 사이어인 라데츠가 외계에서 찾아와 지구를 멸망시키자고 하자 반기를 들며 형을 죽인다. 에반게리온은 아버지에게 버려진 주인공 신지가 부당한 아버지의 명령에 저항하고 적응하다가 결국은 부친을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원피스는 만화 내내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해군과 세계정부와 싸우며, 가장 자유로운 해적왕이 되기 위해 자신을 키워준 해군 할아버지마저도 공격하는 루피가 주인공이다. 부친살해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소녀용 취향이라 여겨지는 카드캡터 체리(사쿠라)도 알고 보면 옛날 크로우라는 마법사로가 만든 마법의 카드로 소동이 나고 체리가 크로우 카드를 대체해 새로운 카드의 주인이 되는 이야기다.

구전설화 같은 옛날이야기보다 TV영상 쪽이 훨씬 더 지금 2030 세대에게는 강렬한 이미지로서 기억에 박혀있고, 심지어 본인 같은 30대 세대 이후로는 옛날이야기도 할머니의 구전설화 같은 방식이 아니라 배추도사·무도사 같은 TV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효 사상에 대해 배워왔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에서 방탄소년단이 덜 새롭게 느껴지고 인기가 외국보다 상대적으로 덜한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미 어릴 적 봐온 만화가 더 부친살해적 코드로 가득하다!

 

이지영은 방탄의 노래가사를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들뢰즈의 소수자-생성 또는 소수자-되기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자면 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주로 카프카의 문학을 비평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한다. 허나 미국 시장에 아시아인으로써 ‘뱁새’같은 노래를 부르는 도전자의 입장일 때는 그러한 소수자 생성으로 방탄과 아미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지영 본인이 강연에서 말했듯이 세계 음반 판매량 1위를 달성하고 빌보드차트 1위를 달성한 슈퍼스타가 된 방탄소년단이 계속 그러한 소수자-되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에서 난민이나 퀴어 같이 극도로 소외받고 약한 소수자들이 볼 때는 하나의 기만, 강하게 표현하면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도둑맞은 가난’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일례로 나루토나 원피스 같은 소년만화는 점점 장기연재가 되고 길어질수록 만화 설정상의 구멍이 많아지고 독자들의 감정이입이 힘들어져 판매량도 떨어지는데,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이는 처음의 약하고 보잘 것 없던 주인공이 점점 세계관의 최강자에 가까워져서 ‘노력, 우정, 승리’라는 점프 만화의 주제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큰 연관이 있다. 10년이 넘는 장기방영 끝에 종영한 무한도전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평균이하 남자들이라는 루저의 정서로 시작하고 국민적인 팬덤이 생길만큼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제 누가 봐도 사회의 승자들이고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도 루저 개그 등을 소화하기 버거워했다. 방탄소년단도 월드스타가 되면서 그와 같은 불안과 패배를 노래하는 승자의 딜레마를 겪을 텐데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어설픈 기만술로는 J.비버같은 다른 아이돌처럼 순식간에 대중의 외면을 받지 않을까?

후기를 끝내면서.

 

주유소 -벤야민 일방통행로 중에서 첫 글 주유소 전문.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에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서문에서 대중들이 마치 자신의 구원인 것처럼 자신의 예속을 원하며, 들뢰즈는 이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탄소년단 같은 대중적인 주제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철학을 통해 둘 사이의 접점을 꾀한다는 저자의 시도는 의미 있는 이정표를 남긴다. 강연 중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대학교 강의에서 읽으라고 해도 읽지 않는 니체나 융 같은 고전을 방탄의 뮤비 해석에 필요하니 알아서 찾아 읽고 심지어 팬들끼리 모여서 공부하는 세미나를 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웬만한 학문의 석·박사 전공자보다도 그 분야를 즐기면서 파고든 오덕이 더 깊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전공자와 비전공자 같은 이분법이 점차 해체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앞서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철학이 고루한 형식만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서 주유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사유에 윤활제를 뿌리는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해지는 시대가 아닐까.

아즈마 히로키또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끝내는 마지막 말로 -뛰어난 작품에 대해 하이컬처다 서브컬처다, 성인용이다 어린이용이다, 예술이다 엔터테인먼트다 하는 구별없이 자유롭게 분석하고 자유롭게 비평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기 위해 이 책은 씌어졌다. 이 이후의 전개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다.-로 마무리한다. 이 졸고에서는 줄곧 아즈마의 입장에서 이지영과 들뢰즈를 비판했지만, 이 맥락에서는 들뢰즈도 벤야민도 이지영도 아즈마도 이항대립을 비판하는 같은 입장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과 강연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 보다 좀 세게 비판을 쏟아낸 것 같다. 허나 그만큼 이지영 선생님의 저서와 강연에서 마주한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지속적으로 사유하게 되었고 많은 발상들이 떠오르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보잘 것 없는 역량이지만 이에 감응하여 촉발된 글이라고 봐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와 이지영의 네트워크-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끝.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㉖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대안의 구축을 요구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 그대로를 그 실질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실감나게 되살려 낸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정의가 세 가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 to agathon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 역시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한편 당대의 아테네 현실이 그러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밀론에 입각한 개념적인 차원에서 부정의가 갖는 그 자체로서의 한계에 대한 논리적 논파가 아니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양치기 기술이 엄밀한 의미의 양치기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지혜가 능가 불가능한 엄밀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각 거부되고 논파되었지만, 트라쉬마코스의 혼 속에서 작용하며 끊임없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힘(dynamis, 351e, 358b)들은 결코 그러한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부정의는 엄밀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제멋대로의 이기적 욕망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폐한 현실을 지배한다. 오히려 일상적 부정의의 양태들의 경우 대부분 논리적으로 어설프고 애매하며 얼마간은 합리적이고 얼마간은 불합리한 것들이 그 근간을 이룬다. 현실은 기본적으로 반대적인 것들이 엉켜있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신이 펼친 논증 방식이 갖는 한계를 받아들인다. 제2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와 대화자 모두가 이제 목표로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의 정의만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 차원에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존하며 최대의 작용력을 발휘하는 실질적인 부정의에 대한 혁파이자 그것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의 구축이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 차원에서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하나같이 정의와 정반대의 힘으로 작용하는 그 자체로서의 실질적인 부정의 즉 현실에서의 부정의의 극단치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전면적 혁파를 요구한다. 그 극단적 부정의의 현존이 정의 자체에 의해 그 자체로 부정되는 것이야말로 곧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형상적 기술에다 붙였던(342a. ‘기술 자체’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이 이제 제2권에서는 글라우콘에 의해 현상계의 영역 즉 현실에서 성립 가능한 정의와 부정의의 양 극단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358b.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이 혼 안에 깃들임으로써 그 자체로서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καὶ 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ἐνὸν ἐν τῇ ψυχῇ, 367d.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ὃ αὐτὴ δι᾽ αὑτὴν τὸν ἔχοντα) 이제 플라톤의 기획에 따라 제1권의 엄밀론이 마무리되고 글라우콘을 통해 제2권의 현실론이 개시되면서 부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논파의 장은 물론 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구축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시한 부정의 최대 극단치는 비록 현실의 부정의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극명성을 드러내는 잣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의 실상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는 부정의 찬양론자들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부정의의 경우들보다 어쩌면 겉으로는 정의 찬양론을 표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같이 부정의한 경우들이 더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부정의의 실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문제제기에 이어 현실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사례들을 당대 아테네 현실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펼쳐낸다. 그야말로 두 형제를 통해 현실의 부정의 양상들 모두가, 소크라테스가 물리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자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위한 터파기의 대상들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이 왜 혁명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는 그의 정의론이 엄밀한 규정 차원에서 정의가 갖는 전면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현실 차원에서 이와 같은 부정의가 노정하는 실질적 전면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당대 아테네의 현실상으로서 앞서 분류한 것들 가운데 <C.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에서의 부정의의 실상에 대해서는 앞서 예고한 대로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363c와 364d에서 언급되고 있는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은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교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인물들이다. 무사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제자 또는 동료로, 그의 아들 에우몰포스(Eumolpos)는 엘레우시스 비의(秘儀, τελετή)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의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를 통해 전승된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7세기 이후 점차 다소 이질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이 아테네로 유입되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신앙 양태들이 특히 민간 신앙 영역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기에 이른다.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는 그러한 신비주의 전통의 신앙 양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이 두 종교 전통 모두 올림포스 종교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은 수난과 부활, 이승과 저승,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과 믿음을 신조의 근본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올림포스 종교에서도 디오뉘소스는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면서도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나 마침내 신적 영원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온갖 수난을 이겨낸 상징적인 사람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 영원성이고 이른바 이승과 저승의 분리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에 대한 관념이나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은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쟁을 치루며 영웅적인 삶을 살고 영예로운 기억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일부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소박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 만큼 사후 세계와 혼의 불멸에 대한 소망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육체적 고통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간 트라케 지방 광산노예들의 경우, 디오뉘소스처럼 운명을 잘 감당하여 신적 지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죽은 후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본능수준의 열망을 반영한 지고의 믿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디오뉘소스 신앙은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라우리온 지방에서 은광이 발견된 이후 트라케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디오뉘소스 신앙에 기반한 오르페우스교가 민간 신앙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오르페우스교에서 디오뉘소스는 올림포스 전통에서의 디오뉘소스와 달리 근동의 영향을 받아 자그레우스 영혼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면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수난과 부활의 상징으로서 크게 추앙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뉘소스의 수난과 부활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과 관련하여 혼의 불멸과 정화,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근본 신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의 디오뉘소스 신앙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미 오르페우스부터가 저승에 갔다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 오르페우스교가 전하는 자그레우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뉘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자신과 같은 지배자의 지위를 부여하려 하자 티탄족이 그것을 시기하여 디오뉘소스를 찢어 삼켰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제우스가 티탄족을 번개로 태워 죽였고, 채 삼켜 지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심장으로 디오뉘소스를 다시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때 티탄의 몸이 타버려 남긴 재로부터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인간은 디오뉘소스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신적인 영혼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티탄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육체를 갖게 되면서 끊임없이 육체라는 티탄적 굴레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비밀스런 입교의식을 통해 자기 정화를 수행해야 하며 그 정화가 온전히 완성되어 순전한 혼으로서 별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정화의 정도에 따라 죽은 다음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또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르페우스교는 올림포스 종교의 디오뉘소스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통 올림포스 신앙에는 없었던 영육의 분리와 혼의 불멸,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아테네에 뿌리내리게 한 근본 배경이 되면서 플라톤의 철학은 물론 훗날 신의 아들이 겪는 수난과 부활, 저승에서의 심판과 혼의 불멸과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주요 사상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물론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오르페우스교를 보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계승하고 개혁했다고 평가되는 피타고라스 교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비밀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적인 체험들과 광란적 행위들에 대해 늘 비판적이었던데 반해 오르페우스교의 정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감정적 요소들 대신 이성을 통한 정신의 고양을 정화의 근본 바탕으로 발전시킨 피타고라스 교단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크게 동감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페우스교는 플라톤이 우려한 대로 기원전 5세기말 피폐한 아테네 현실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곳에서(364e-365a) 언급되고 있듯이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입교 의식(비의秘儀, τελετή)을 기복 신앙과 세속적 서원과 면죄의 방편으로 이용함으로써 아테네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엘레우시스 신앙 역시 비록 오르페우스교와 같은 교단의 성격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 데메테르를 모시는 정기적인 제의의 성격을 가지면서 수확과 생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신앙의 근저에는 저승으로 끌려갔음에도 이승과 저승을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 대한 믿음과 하데스로 납치된 이후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 엘레우시스에서 비의를 통해 켈레우스 왕의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데메테르의 비의에 대한 믿음이 근본 신조로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엘레우시스 비의 역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페르세포네적 삶에 대한 소망과 불사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민간 영역에서 제의와 기복신앙의 형태로 아테네에 뿌리내렸지만 오르페우스교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5세기말 아테네의 현실을 피폐화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1-3-2. 젊은이들이 직면하게 될 번민과 갈등[365b-366b]

 

*아데이만토스는 이상과 같이 언급한 후, ‘이 모든 언급을 젊은이들νέων이 듣고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스치고 이것들을 근거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으로 되어 어떻게 살아감으로써 인생을 가장 훌륭하게 완주하게πορεύω 될 것인지를 능히 결론 내릴 수 있는συλλογίσασθαι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아테네 젊은이들 모두 마치 핀다로스가 말한 것처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자문자답 즉 스스로 묻고서 스스로 대답할 법하다는 것이다.

그 자문자답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문 1> ‘높은 성벽τεῖχος으로 오르기 위해 정정당당해야 할까 아니면 부정한σκολιός 속임수ἀπάτη를 써서라도 성벽에 올라 성채 안에서 안전하게 일생을 보낼까?’περιφράξας διαβιῶ[365b]

<자답 1>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의롭지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고역과 손해만 있다고 하지만 현자들이 일러주듯 ‘보이는 것(평판)τὸ δοκεῖν이 진실을 제압하고 행복을 좌우하니 보이는 것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 앞쪽과 외양은 훌륭함의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로 빙 둘러 그려놓되 뒤로는 가장 지혜로운 아르킬로코스의 이악하고 교활한 여우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 [365c]

<자문 2> 어떤 이는 나쁘면서도 언제까지나 남의 눈을 피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말한다.[365c]

<자답 2> 큰일 치고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결사συνωμοσία나 당파ἑταιρεία를 결성할 수도 있다. 설득의 교사에게 대중연설δημηγορική과 법정변론δικανική의 지혜를 배워 말로 설득하거나 폭력βιά을 행사하면 욕심을 부리고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365d]

<자문 3> 어떤 이는 신들의 눈을 피한다거나 신들에게 폭력을 쓴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365d]

<자답 3>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의 눈을 피하는데 마음 쓸 이유가 없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관습들τῶν νόμων 그리고 시인ποιητής들이 일러준 대로 신들은 제물과 서원, 봉납물에 의해 마음이 동하므로 그것들로 신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면 된다. 이들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만 하는데 만약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부정의를 저질러야 하며 그런 짓으로 재물을 얻어 공물로 바쳐야만 한다. 정의로울 경우 신들한테 벌을 받지 않을 뿐이지만, 부정의는 갖가지 이득을 가져다준다. 도가 지나친 짓을 하고ὑπερβαίνοντες 잘못을 저질러도ἁμαρτάνοντες 탄원을 하여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면 된다.[365d-e]

<자문 4> 어떤 이는 이승ἐνθάδε에서 부정의하면 저승Ἅιδης에서 자신 아니면 자손들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366a]

<자답 4> 입교의식과 사면해 주는 신들이 크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강대한 나라들이 주장하는 바이고 신들의 자손인 시인들, 예언자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36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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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문자답은 당대 아테네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이것을 근거로 …결론 내릴 수 있는’은 꿀벌들이 빠른 움직임으로 꽃가루들을 수집하여 꿀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착안한 표현으로서 젊은이들이 갖는 높은 수준의 지적 흡입력과 감수성을 표현한 말이다. ‘결론을 내리다’로 옮긴 συλλογίζομαι는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는 추론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오늘날 삼단논법(syllogism)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 위의 젊은이의 자문자답은 사회진출을 앞둔 당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심적 갈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오늘날 사회진출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일반 젊은이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비록 장래에 관한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은 명문 가문 내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젊은이들로서 당대 일반적인 경향이 그랬고 청년 플라톤도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정계 입문을 앞둔 젊은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다만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그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는 젊은이들은 장차 폴리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게 될 명문가 자제들로서 정계 입문을 목전에 두고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세상 권세와 평판의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상권세와 평판에 대한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유혹을 공생애를 앞두고 예수가 광야에서 맞이하고 있는 시험과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지도자로 세상에 나설 사람이라면 세상 권세와 재물, 평판의 문제는 그 스스로 넘어서야할 가장 큰 시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자답 1>에서 현자들οἱ σοφοί은 4세기말 시인들의 선조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 등을 가리킨다. 365c에 인용된 ‘보이는 것이 진실을 제압하며’ 또한 시모니데스의 말이다.(단편 598 Campbell)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는 음영을 부각시켜 사물을 표현하는 일종의 스케치화로서 이곳에서는 가식과 환영의 의미를 갖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지고 있다.

* <자문 1>에서 성벽으로 옮긴 τεῖχος는 성채의 의미도 갖고 있다. 높은 성벽은 말 그대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의미한다.

* <자답 2>는 당대 젊은이들이 얼마나 소피스트들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마나 연설을 잘 하느냐와 어느 권력가에게 줄을 서느냐는 당대 출세를 꿈꾸는 명문가 청년들의 최우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설득이 안 되면 음해성 소송을 걸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결사와 당파, 대중연설과 법정변론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어 있는 현실은 오늘날의 부정한 정치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자답 3>은 이미 무신론적 사고가 아테네 현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이들에게 신들은 더 이상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관습과 시인들이 지어낸 존재들이다. 그러한 한 종교는 물신주의에 기초한 세속적 서원과 기복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양쪽 다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 한다는 것은 시인과 관습들 모두 내용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 한 통속의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면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 또한 당대 시인과 관습들이 얼마나 현실 부정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자문 4>, <자답 4> 역시 당대 종교가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최고 강대국 사회에서 얼마나 물신주의,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일부 신들이(제우스, 디오뉘소스, 헤카테, 데메테르 등) ‘사면해주는 신들’로 따로 지정되어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사상은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 보다는 이른바 비주류 전통으로서 신비주의 오르페우스교가 아테네에 자리 잡으면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상이다. 예언자들προφῆται에는 국가가 신전사제로 임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민간 일반에서 시인들에 대한 앎을 내세워 예언자로 자처하며 금전과 물품을 대가로 서원을 풀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많은 탁발승들 등 사이비 사제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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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5세기 말 당대 아테네의 사회 현실 곳곳에 편만해있는 정의의 전도 현상과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에 그러한 당대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이 처한 심각성을 총체적으로 다시 종합 정리 평가하고 있다. 당대 현실이 가져다주는 위기 국면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것임에도 아테이만토스가 유독 젊은이들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워 논의를 총론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데는 다분히 플라톤의 의도가 숨어 있다할 것이다. 요컨대 아테네의 정의의 전도현상이 아테네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국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아테네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위기를 의미하고 또 장차 아테네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 또한 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젊은이들은 장차 사회 지도자급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논파하고 규정에서나 실질적 힘에서나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그 무엇보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왜 그들과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보기에, 현실은 소크라테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젊은이들 대부분이 트라쉬마코스 부류가 주장하는 생각들과 처세관에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요구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입장에서는 당대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소크라테스가 답변해야할 안티테제로 있는 그대로 극명하게 제시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로서는 그 무엇보다 그러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의와 정의로운 삶에 대한 참된 앎을 일깨우고 그러한 앎을 평생을 통해 견지해나갈 수 있는 굳건한 방편과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해내는 것이었다.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의 문제제기가 마무리된 후에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론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다름 아닌 수호자 교육 즉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젊은이들을 철학자로 키워내는 교육 프로그램과 그러한 철학자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구축이야말로 플라톤이 종국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정의론의 요체였던 것이다.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① [2019년 3월 월례회]

[2019년 3월 한철연 월례발표 후기]

BTS 예술혁명 강연 후기: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연결 짓기 ①

 

한철연 회원 이상하

 

그림출처:https://image.aladin.co.kr/product/14212/80/cover500/k082532437_1.jpg

방탄소년단에 대한 강연(이지영)을 3월말에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듣는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니 꽤 많은 반응들이 한결같았다. ‘걔들이 그런 책이 나올 정도로 대단해?’ ‘BTS 예술혁명(부제: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이라는 강렬한 제목에 걸맞을 정도로 방탄의 실력과 명성이 대단한가? 그런 철학책은 비틀즈나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레전드에게나 헌사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일 것이다.

저자인 이지영 선생님이 책을 낸 작년 2018년은 이제 막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다는 제목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될 즈음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해외에서 잘나가는 아이돌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작년에 총 음반 판매량 세계 1위를 달성하고 빌보드 1위를 찍은 후 한국에서 지명도가 작년보다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국내에서 인기 체감이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해서는 미진하다. 아마도 한국 예능과 음악프로에 잘 나오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트와이스 같은 경우엔 한국과 일본 방송에서 활동이 활발하기에 세계적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한국에서 존재감은 압도적이듯이 말이다.

물론 단순히 상업적으로 세계 1위라서 찬양한다면 한때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빌보드2위를 찍고 유튜브 조회 1위를 찍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굳이 철학적으로 비평하는 글이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 이지영은 책과 강연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질서 속에서 대다수 국가의 특히 청년들이 무한경쟁 청년실업 소외 등으로 힘겨워하고 있고, 다른 가수와는 달리 방탄소년단이 삶의 시련과 아픔 절망 두려움 등을 진정성 있는 자발성과 개성으로 팬덤인 아미(ARMY)와 ‘탈중심적으로’ 결합해서 음악을 표현하기에 BTS만의 음악적 탁월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허나 이렇게 과연 방탄이 조상 없는 ‘기원’origin, 마치 처음으로 있는 현상이고 완전히 새로운 혁명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혹 팬심 때문에 대중음악의 계보에 대해 망각하신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한국으로만 봐도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울트라맨이야>, 신해철 넥스트의 <아 개한민국>, HOT의 <전사의 후예>·<아이야> 같이, BTS의 <뱁새>처럼 현실비판이 주 요소인, 아이돌과 아티스트의 경계를 해체하는 가수는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의 팬덤이 가수와 결합하여, 종종 가수라는 중심을 벗어나서 사회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봐도 흑인인 마이클 잭슨이 <Black or White>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것, 비틀즈 존 레논의 <Imagine>같이 체제 비판적이고 대안, 희망을 노래한 것은 그들의 팬덤과 떨어뜨려놓고 가수 개개인들의 역량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일까? 심지어 저자도 『BTS 예술혁명』 23쪽에서 비틀즈와 소비에트 연합의 붕괴에 대한 논문을 이미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시대엔 스마트폰과 인터넷 인프라가 없거나 부족했고 지금의 시대엔 전 세계적으로 기술 보급이 되어있다는 것을 결정적 차이점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마치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 이후의 ‘넷페미’ 혹은 ‘영영페미’로 호칭되는 이들이, 자신들에겐 보고 배울 선배도 계보도 없고 자기들이 대한민국의 첫 페미니즘 세대라고,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같은 논쟁적인 페미니즘 책이 나왔듯이 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도 방탄소년단-아미에게도 계보가, 조상이 존재하며 그것은 흔히 덕후라 불리는 오타쿠,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표현을 빌려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아닐까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에반게리온과 원피스-팬덤문화가 없었다면 방탄소년단-아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BTS 예술혁명으로 돌아오면, 저자인 이지영은 방탄의 성공이 어떤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라 방탄의 노래제목처럼 serendipity, 우연히 좋은 쪽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것이라 말한다. 또한 방탄과 팬덤 아미가 성공한 측면은 마케팅이 아니라 현재 세계 전체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 그 억압 아래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단절, 외로움은 어떤 것이고 사람들은 세상을 어떠한 방향으로 바꾸기를 욕망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제기되어야 한다(『BTS 예술혁명』 17쪽)고 주장한다. 방탄의 팬들이 온라인에서 강력하게 연대하여 오프라인 현실 공간에 침투한 결과 영어 위주의 빌보드 차트에 한국어로 1위를 하는 등 기존 위계질서에 균열을 내었으며, 이러한 사회 문화적 변화에서 수목적 위계질서가 아닌 리좀Rizome, 계급이나 높낮이가 없는 뿌리-줄기적 혁명으로서의 정치적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의 16-17년의 촛불혁명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정치변화를 가져왔다면,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초래되고 있는 변화는 전 지구적인 규모의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변혁을 징후적으로 표현한다며 실로 방탄과 아미를 혁명을 초래하는 구원자처럼, 냉정한 비평과는 거리가 먼 기쁨에 찬 어조로 설명한다. 왜 이렇게 철학이나 비평과는 다른 글이 써지게 된 것일까? 단순히 팬심 때문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들뢰즈의 말을 참조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철학책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글쓰기 방식으로 쓰는 것은 머지않아 곧 불가능해질 것이다. “아아, 고풍스런 스타일……” 철학의 새로운 표현수단의 탐구는 니체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연극과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의 혁신과도 제휴하여 속행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지금 즉시 철학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문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철학사는 회화에서 콜라주가 달성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한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서문. 번역은 우노 구노이치의 『들뢰즈, 유동의 철학』에서 인용.

 

이지영은 강연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한마디를 꼽자면 ‘수평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철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논문이 아닌 대중서라는 형식과도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철학을 논문이라는 딱딱하고 엄밀한 글쓰기 형태로만 쓰는 것은 점점 불가능해지기에, 새로운 표현수단으로서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방탄의 팬들도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강연의 내용적으로 봐도 방탄과 아미가 수평적으로, 탈중심적으로 결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탄소년단이 중심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다만 그 가수라는 중심과 팬덤 아미 사이의 관계가 수직적이지 않은, 유동적인 중심이라는 것이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가수와 관객은 더 이상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생비자Prosumer 라는 신조어처럼 관객은 끝없이 가수의 영상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새로운 편집을 하고 새로운 이미지의 네트워크를 생산해내는 소비자이다. 이러한 새로운 영상들의 배치를 이지영은 네트워크-이미지라고 이름 지으며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의 역할이라 할 수 있는 ‘공유 가치’를 제시한다고 말한다. 이전처럼 예술가가 생산한 작품을 수용자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끝없이 가로질러지면서 네트워크와 작품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예술 생산의 형식 속에서 예술가와 수용자가 함께 생산하고 실현해나가는 것이 바로 공유가치이다.(『BTS 예술혁명』 19쪽) 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과연 이것이 방탄과 아미만의 새로운 예술 생산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물음에는 ‘글쎄’ 하며 저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오타쿠 한국말론 오덕, 만화나 게임 등의 서브컬쳐subculture에 대해 탐닉하며 2차 창작과 소비가 일상화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리고 아즈마가 말하는 것처럼 오타쿠는 더 이상 일본만의 특수한 문화가 아니며 단순히 사회의 일부가 향유하는 소수집단만의 문화가 아니라고, 한국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이지영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입덕’ 같은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나 혼자 산다’같은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덕후, 오덕 출연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덕후의 일상을 관찰 하는 게 최고의 시청률을 찍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오덕에겐 왠지 사회부적응자 같은 이미지와 고도소비사회의 문화에 적응한 얼리어답터 같은 양면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씌워져 있으며, 이에 대해 아즈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반 권위적인 분위기가 강한 오타쿠들에게는 오타쿠적인 수법 이외의 것에 대한 불신감이 있으며, 오타쿠 이외의 사람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를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상 학술지로 논단에 나와 태생적으로 서브컬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필자는 이 점에서도 일부로부터 반발을 받아왔다. 즉, 간단하게 말하면 한편에는 애당초 오타쿠 따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오타쿠에 대해서는 특정 집단만이 이야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것이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그 같은 기능부전을 회복하고 오타쿠계 문화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현 문화상황 일반에 대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우리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21쪽에서 인용

 

앨범을 계속 사는 적극적인 트와이스의 팬이나 방탄의 아미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도 오덕에 대한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입덕’ ‘덕통사고’같은 용어를 그들 팬덤에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이어서 강하게 말하면, 방탄소년단과 아미 또한 이 오덕, 오타쿠 서브컬쳐 문화로부터 영향 받은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자면 일본이 선도하고 있는 서브컬쳐 오타쿠, 리오타르가 정의한 근대라는 거대 담론이 몰락한 ‘Postmodern’ 시대에 2차 창작이라는 데이터베이스적 소비를 하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야말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장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문화이다. 한국은 그걸 받아들인 영향으로 작곡가이자 빅히트 대표 방시혁이 방탄소년단을 탄생시켰고 ‘우연히’ 세렌디피티하게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방탄-아미의 탈중심화된 생산으로 대표적으로 거론하는 방탄의 노래 가사를 각국의 팬들이 협업해서 번역하고 유튜브에 자막으로 달아놓는 일은, 서브컬쳐계에선 유튜브가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덕후라면 자연스레’하고 있던 일이였다. 대표적인 작품인 에반게리온과 원피스는 수십개 언어 버전으로 오프닝과 엔딩을 팬들이, 덕후들이 일일이 번역해서 광고도 달지 않은 채 유투브에 올리고,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티비판이나 극장판 애니매이션 영상도 각자가 번역해서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토렌트나 스트리밍 사이트등에 공유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전파했다는 각자의 ‘보람’ 정도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지만 덕후들은 그것을 위해 생계를 이어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들이다. 또한 애니 영상을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거나 오프닝 노래를 자신이 다시 부른 영상은 도무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생산중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정의된 ‘공유가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원피스 덕후야말로 방탄-아미들의 문화적 조상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해석이며 지나치게 앞서간 것 아니냐며 고개를 젓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허나 아즈마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일본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도 피해하기 어려운 정세적인 설명들이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일본 오타쿠들이 미국에 패전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의사 일본’(가상 일본)을 만들어내는 욕망을 표현한다는 부분이다.

 

즉 8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을 ‘오타쿠적인 것’ ‘일본적인 것’이게 하는 특징은 실은 미국에서 수입된 기법을 변형하고 그 결과를 긍정적으로 재수용 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오타쿠적인 일본의 이미지는 이와 같이 2차 대전 후의 미국에 대한 압도적인 열세를 반전시켜 그 열세야말로 우세라고 주장하는 욕망에 뒷받침되어 등장한다. 그것은 분명히 라디오나 자동차, 카메라의 소형화에 대한 열정과 마찬가지로 고도경제성장기의 국가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오쓰카가 주목한 2차 창작의 범람이나 <시끌별 녀석들>(란마와 이누야사의 작가 다카하시 루미코의 데뷔작)의 민속학적 세계 등 오타쿠계 문화의 ‘일본적’인 특징은 근대 이전의 일본에 소박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연속성을 괴멸시킨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주의(소비사회의 논리)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70년대에 코믹 마켓을 패러디 만화로 가득 채웠던 욕망은 에도 시대의 정수라기보다 그 10년 전에 미국에서 팝아트를 낳은 욕망에 가까운 것이며, <시끌별 녀석들>의 작품세계 또한 결코 민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SF와 판타지의 상상력이 굴절된 곳에 일본적인 의장이 스며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오타쿠계 문화의 근저에는 패전으로 인해 ‘좋았던 시절’의 일본이 망한 이후에 미국산 재료로 다시 의사적인 일본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복잡한 욕망이 숨어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모습은 많은 일본인에게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품게 한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34-36쪽에서 인용.

 

이를 읽으면서 평소에 오덕이라는 자의식이 아니더라도 만화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독자라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일본과 한국, 아시아의 제국과 식민지였다는 현실의 역사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흔히들 한국은 일본을 10년 정도 차이로 따라간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같은 격차는 분명히 좁혀져있지만, 그럼에도 만화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관습이나 법 같은 분야까지 일본의 영향은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다. 허나 일본의 패전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식민지 시절은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사회적 금기로, ‘애국’ ‘반일’이라는 코드와 분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남아있다.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아이돌 산업이 일본에서 유래, 더 정확히 말해서 모방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말해버리면 사회적 눈총을 받는 것이다. 마치 90년대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어린 시절 독수리 오형제가 사실은 한국인이 아니며 일본의 ‘과학닌자대 갓차맨’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말하게 되면 주변 친구들이 믿지 않거나 오히려 너 친일파지 라는 식으로 따돌리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른바 K-POP이 국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고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정부에서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이를 일본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행태야말로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패배와 굴종의 역사가 아닌 ‘의사 한국’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한국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욕망의 계보를 제대로 분석함으로써 아즈마가 말하듯 이 사회에 대해 더욱 잘 이해하고 변혁의 ‘뱁새’가 되는 것이 아닐까. 들뢰즈의 말처럼 ‘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1부 끝.

– 2부에서 이어집니다 –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1기 수강 안내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1기 수강 안내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1기 수강 안내를 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 서울자유시민대학의 지원으로 시민강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삶의 고민, 철학으로 풀어보기’란 주제로 1기와 2기 프로그램으로 진행합니다. 이번에는 1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1기 수강 신청을 받습니다.

 

오는 5월 2일부터 7월 11일까지 매주 목요일 7시, 총 10주 동안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에서 1기 강좌를 진행합니다.

 

1진짜 나로 살기 위한 성찰과 소통

강좌기간 : 201952() ~ 711()

일시 : 기간 내 매주 목요일(66일 휴강) 저녁 7~9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오시는 길 : 글 맨 아래 약도참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페이지 참조 : 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637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서교동)

수강대상 : 서울시민이나 우리 삶과 철학에 관심 있는 청년 및 중·장년

수강인원 : 선착순 20

수강료 : 무료

수강신청기간 : 418~ 51일(신청기간 만료 후에도 정원이 차지 않으면 수강신청 가능합니다.)

신청방법 : 이메일신청 kophil@daum.net (반드시 이메일을 이용해 주세요),

신청자의 이름, 생년월일, 성별, 연락처, 이메일을 꼭 적어서 신청해 주세요.

1기 신청기간에 2기 신청은 할 수 없습니다. 2기 신청 기간을 꼭 확인해 주세요.

문의 02-332-4301, kophil@daum.net

 

2기 –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문제들

○ 강좌기간 : 2019년 7월 18일(목) ~ 10월 10일(목)

○ 일시 : 기간 내 매주 목요일(8월 15일, 9월 12일, 10월 3일 휴강) 저녁 7시~9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첨부파일 약도참조)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서교동)

○ 수강대상 : 서울시민이나 우리 삶과 철학에 관심 있는 청년 및 중·장년

○ 수강료 : 무료

○ 수강인원 : 선착순 20명

○ 수강신청기간 : 6월 20일 ~ 7월 17일

 

지금 안내하는 수강생 모집은 1기에 해당되며, 2기는 수강신청일이 되면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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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그램 안내(제1기, 제2기)

 

* 1: 진짜 나로 살기 위한 성찰과 소통 / 강사 : 구태환, 박은미

 

<1주~5주 강사 : 구태환(상지대 교양대학)>

1주 5.2(목) 논어와 성찰(1) : -『논어』를 왜 읽어야 하나? -공자는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고민했나?

2주 5.9(목) 논어와 성찰(2) : -배우는 게 지겹다고? -학(學)

3주 5.16(목) 논어와 성찰(3) :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까? -인(仁)

4주 5.23(목) 논어와 성찰(4) :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예(禮)

5주 5.30(목) 논어와 성찰(5) :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군자(君子)

 

<6주~10주 강사 : 박은미(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6주 6.13(목) 논리와 심리의 사이에서 : 타인을 볼 때는 논리적인 인식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심리적 인식을 하는 문제 상황에 대해 살펴본다.

7주 6.20(목) 논리를 비트는 심리, 심리를 조절하는 논리 :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일관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심리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기제의 문제와 심리기제의 비논리적 작용을 조절할 수 있는 논리의 힘에 대해 강의한다.

8주 6.27(목) 나의 비논리 살펴보기 1 : 갈등과 소통불능은 상대방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기를 바라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소망적 사고 때문이다. 더군다나 타인의 비논리를 보는 힘은 우리에게 갈등을 안겨다준다. 이러한 비대칭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9주 7.04(목) 나의 비논리 살펴보기 2 : 타인의 비논리를 보는 데 열중하기보다 자신의 비논리를 보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하고 자신의 비논리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논리의 힘에 대해 강의한다.

10주 7.11(목) 나를 넘어 타인에게 닿다 : 자기 자신의 비논리를 직면해가다보면 자신의 비논리의 패턴을 만들어내는 심리기제를 만나게 된다. 그 심리기제는 자신만의 소망과 자신만의 상처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자신의 상처 중 자신이 만들어낸 부분이 있음을 인식하고 상처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 2: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문제들 / 강사 : 송종서, 이지영

 

<1주~5주 강사 : 송종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1주 7.18(목) 근대 동아시아의 사상·문화 변동 : 1) 서양 학습의 어려움과 ‘공화제’의 갈증 2) 무너져버린 대한제국의 ‘천하’관 3) 에도 말기 ‘나쁜 이웃’과 메이지유신

2주 7.25(목) 유교 전통과 20세기 동아시아 : 1) 중화민국~신중국의 반(反)유교 운동 2) 홍콩·타이완 신유가의 ‘중국문화선언’ 3) 유교사상과 경제발전의 관계

3주 8.1(목) 유교역할론과 아시아적 가치 : 1) 1980년대 ‘문화열’과 현대신유학 연구 2) 유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3) 리콴유와 김대중의 아시아적 가치 논쟁

4주 8.8(목) 글로벌리즘 VS 팍스 시니카 : 1) ‘중국특색사회주의’에서 ‘중국몽’까지 2) 팍스 시니카: 유교적 평화주의 전략 3) 촛불광장과 ‘공자학원’의 어색한 풍경

5주 8.22(목) ()중화제국 VS 세계 다극화 : 1) 영·미: 브렉시트와 세계 다극화 전략 2) 일본: 반중·대미종속에서 다극화로 3)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인의 의식 4) 혼종(hybrid) 문화전략과 신(新)한류

 

<6~10주 강사 : 이지영(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6주 8.29(목) 17세기 서구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탄생 : – 개인과 자연권으로서의 시민권

7주 9.5(목) 18세기 여성과 시민권 :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8주 9.19(목) 여성주의와 비인간 생명의 권리 : –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9주 9.26(목) 다양성, 숙고와 참여로서의 민주주의 1 : – 아이리스 영

10주 10.10(목) 다양성, 숙고와 참여로서의 민주주의 2 : – 아이리스 영


오시는 길 약도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4월 마당>(2회차) 안내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우리나라 철학 사상계의 어른이신 윤구병 선생님을 모시고 동서양 철학과 사상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사상적 편력과 깊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많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아래 <4월 마당> 일정을 확인해주세요.

 

<4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I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스토아학파 –
* 일시 : 2019년 04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 함께 이야기 나눌 분(가나다순):

  강성훈(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인곤(정암학당 연구원)

  김재홍(정암학당 연구원) 

  류종렬(철학아카데미 교수)

  이규성(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이병창(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아래 – 전체 일정과 주제>

<2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
–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들 –
* 일시 : 2019년 02월 16일(토요일) 오후 2시
*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매 회별로 7-8분을 따로 모십니다)(가나다순)
김인곤, 양호영, 이병창, 이규성, 정준영, 한경자 선생님

<4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I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스토아학파 –
* 일시 : 2019년 04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 함께 이야기 나눌 분: 이규성, 이병창, 류종렬, 김재홍, 김인곤, 강성훈 선생님

<6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인도철학에서 ‘같잖은 생각을 한 사람들’
– <반야심경>, <중론> 등
* 일시 : 2019년 06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
* 일시 : 2019년 0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㉕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4. 논제3: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360e-362c)

 

[360e]

* 글라우콘은 이제 세 번째로, 앞서의 사람들이 왜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고들 말하는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들이 왜 온당한지에 대해 언급한다. 이를 위해 그는 완벽한τέλεον 정상급의ἄκρος 정의로운 사람이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가장 완벽한τελεωτάτη 최상급의ἐσχάτη 부정의한 자가 누리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하여 서로 대비시킨다.

* 우선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자고 제안한 후, 실제로는 부정의하지만 정의롭게 보이는 최상급의 부정의ἐσχάτη ἀδικία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자라는 악명을 얻는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대비시킨다.

 

[361a-c]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

1) 자신의 전문기술에 있어 가능한 기술과 불가능한 기술을 판별할 줄 안다.τά τε ἀδύνατα ἐν τῇ τέχνῃ καὶ τὰ δυνατὰ διαισθάνεται

2) 정상급의 전문기술자의 경우 실수를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듯이ἐὰν ἄρα πῃ σφαλῇ, ἱκανὸς ἐπανορθοῦσθαι 부정의한 자도 부정의한 짓들을 꾀하되 감쪽같이 제대로 해낸다.

3)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르고도 정의롭게 보여δοκεῖν 가장 정의로운 자라는 평판을δόξαν 누린다.

4) 실수를 하여 발각될 경우에도 충분하게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ἱκανῷ ὄντι πρὸς τὸ πείθειν 말을 할 줄 안다.

4) 용기와 완력ἀνδρείαν καὶ ῥώμην, 친구와 재산을 통해διὰ φίλων καὶ οὐσίας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상정한 후에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기δοκεῖν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에게서 정의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것을 벗겨 버려서γυμνωτέος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상정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

1) 실제로 훌륭하고ἀγαθὸν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가장 부정의한 사람이라는 악명κακοδοξία을 얻는다.

2) 이 악명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 ἴτω ἀμετάστατος μέχρι θανάτου 남들에게 평생διὰ βίου 부정의한 자로 보인다.

 

3) 이 악명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인하여 유약해지 않도록 하여 정의와 관련된 시험을 받게 한다.

 

[361d]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들에 대한 대비를 통해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를 판정받게 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두 사람을 판정받도록 함에 있어 어쩌면 그렇게 기운차게 마치 조상(彫像)ἀνδριάς을 닦아내듯 각자를 깨끗이 드러내놓는지ἐκκαθαίρεις 칭찬을 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마침내 어떤 삶이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울 게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이들이 결국 맞이하는 처지를 아래와 같이 결론 삼아 적나라하게 기술한다. 이것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온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361e-361a]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악의 삶

1) 태형을 당하고 사지를 비틀리는 고문과 결박을 당하며,μαστιγώσεται, στρεβλώσεται, δεδήσεται, 두 눈이 불 지짐을 당한다.ἐκκαυθήσεται τὠφθαλμώ,

2) 마침내는 온갖 나쁜 일을 겪은 끝에 책형까지 당한다.ἀνασχινδυλευθήσεται

3) 그제야 정의로운 사람이기 보다는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γνώσεται ὅτι οὐκ εἶναι δίκαιον ἀλλὰ δοκεῖν δεῖ ἐθέλειν.

 

* 이어서 사람들은 부정의한 자야말로 실제(진실)에 집착하며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서 보이기δοκεῖν(평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기εἶναι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은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에서는 정의로운 자 못지않게 자기 확신에 불타있는 자들임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글라우콘은 이들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는 일들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부정의로운 자가 맞이하는 최선의 삶

1) 나라의 통치자가 된다.

2) 자기 자신이 원하는 가문과 혼인을 맺고, 자녀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시킨다.

3) 자기가 원하는 누구와도 교제하고συμβάλλειν 거래κοινωνεῖν를 한다.

4) 거리낌 없이 부정을 저질러 이득을 취하여 모든 면에서 덕을 본다.ὠφελεῖσθαι

5) 공적인 경쟁에서나 사적인 경쟁에서εἰς ἀγῶνας나 모두 상대를 압도하고 능가한다.περιγίγνεσθαι καὶ πλεονεκτεῖν

6) 이에 따라 부유하게 되어 친구들은 잘 되게 해주고, 적들은 해롭게 해준다.

7) 신들에게 제물θυσίας과 봉납물ἀναθήματα을 넉넉하고 호사스럽게 바치고 봉납한다.

8) 신들과, 자신이 돌봐주고 싶은 사람들을 정의로운 사람보다 훨씬 더 잘 돌봐 준다.θεραπεύειν

9) 결국 정의로운 사람보다 부정의한 사람이 ‘더 신의 사랑을 받기’θεοφιλέστερον에 적절한 사람이 된다.

 

  1. 결론 : 신들 쪽에서건 인간들 쪽에서건 정의로운 자들보다 부정의한 자들에게 더 나은 삶τὸν βίον ἄμεινον을 준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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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은 글라우콘의 세 번째 문제 제기에는 우리가 음미해보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통해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후, 소크라테스에게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과연 맞는지 그른지 완벽하게 판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사실 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위와 같은 경향성 자체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는 한, 그것만으로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온당하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여기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그러한 경향성에 대한 부정과 논파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낫다는 것에 대한 완전하고도 압도적인 증명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증명해야만 그야말로 정의가 부정의보다도 낫다는 판정이 바르게κρῖναι ὀρθῶς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이러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엄밀론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논파한 것에 대한 글라우콘 나름의 불만과 그 불만을 토대로 새로 보완 강화된 재반론의 성격을 갖는다.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제1권에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법룰 제정상의 실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기초한 논박에 부딪쳐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토대가 된 엄밀론에 입각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실수를 하지 않는 통치자나 기술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의 통치자와 유리된 추상적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 개념적 존재자에 기대어 다만 트라쉬마코스의 논리적 허점만 파고들어 마침내 논파에 성공한다. 사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정의의 엄밀한 규정과 관한 추상적 논변이 아니라 다만 그 자신이 목도한 현실적 정의관의 엄연한 현존을 드러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전히 자기 방식대로 엄밀론을 토대로 정의의 규정 관련 논의로 논쟁을 이끌어 가고 있고 그에 트라쉬마코스가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철저히 논파를 당하게 된 것이다.

3) 그런데 제1권의 위와 같은 귀결은 앞서도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물론이고 논쟁에서 이긴 소크라테스에게조차도 불만족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을 그들 소피스트들이 자주 사용했던 엘레아적인 이분법적 논리주의를 역이용하여 논쟁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는 논리적으로 논파는 되었을망정 파괴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트라쉬마코스 역시 비록 논쟁은 접었지만 속으로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고수한 채 자신이 펼친 논쟁 과정을 뒤돌아보며 왜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는가 후회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트라쉬마코스가 과연 후회를 했는지 그 후회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트라쉬마코스를 대신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는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잘 들여다보면 최소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논쟁을 되돌아보며 했을 법한 불만 내지 후회의 일단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곳에서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이어가면서도 트라쉬마코스와 달리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기술자 개념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은 앞서의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여지없이 논박 당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트라쉬마코스가 얼떨결에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엄밀론이 지향하는 엄밀성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현실의 통치자가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그 차이가 노정한 논리적 자기모순만을 근거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라우콘이 제1권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대해 불만을 표한 것(358b)도 그러한 논변의 추상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라우콘은 이른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 개념을 더 이상 형식 논리 차원에서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아예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 개념으로 등치시킨다. 소크라테스 역시 비록 논박에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트라쉬마코스의 마음속에 있는 현실의 통치자를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부정한 것에 따른 결과임을 깨닫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글라우콘이나 소크라테스는 모두 이제 형식논리적인 엄밀론적 논의를 반복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다. 그래서 글라우콘은 제2권에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함에 있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각자 완벽한 사람’(360e)의 의미를 제1권에서처럼 전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실수도 저지르되 그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로 바꾸어 제시하고 소크라테스 또한 완전한 기술자에 대한 그러한 글라우콘의 언급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4) 글라우콘과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들은 이제 정의에 관한 논의가 단순히 정의의 추상적 규정 차원의 논리적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 현존하는 실제 정의에 대한 논의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의 통치자와 지배자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기술자는 아니다라는 비판은 논리적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어도 그것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하는 부정의한 현실의 통치자와 기술자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한 통치자와 기술자는 있는 그대로의 엄연한 현실 차원에서 그들이 잘못되었음이 비판되어야 한다. 실수는 기술자를 포함한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소크라테스가 제대로 비판해야할 부정의한 통치자 내지 기술자는 현실적 차원에서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러한 부정의한 통치자이자 기술자이어야 한다. 그런데 실수의 가능성과 기술의 완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통치자와 기술자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그 경우 그것을 즉시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재설정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완벽한 부정의한 자의 의미설정과 관련한 글라우콘의 보완은 보다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이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으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고,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엄밀론에 입각한 비판이 논파에는 효율적인지 몰라도 어떠한 실제적 태도 변화도 담보할 수 없는 공허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5) 게다가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자이건 부정의한 자이건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각자 완벽한 사람으로 상정하고 있다. 제1권에서(350a-c) 소크라테스는 엄밀론에 입각하여 기술을 지식 내지 지혜와 등치시키고 정의로운 자를 지혜 있는 자로, 부정의한 자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지한 자로 규정하여 부정의한 자를 원천적으로 전문 기술자의 분류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여기서 부정의한 자 역시 정의로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완벽한 기술 내지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사실 부정의한 자들 역시 현실적으로 권력과 능력, 나름의 지혜와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단지 논리적 차원에서 결함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그들의 능력이 가지고 있는 기술적 성격을 원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보기에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논법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부정의를 도외시하는 추상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즉 현실에서는 완벽한 정의와 완벽한 부정의라는 기준에 엄밀하게 부합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단지 논리적 부정합성만을 근거로 부정의한 자를 무지한 자로 일괄 추론하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사변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의한 자들 또한 현실적으로 그 결함을 극복해가며 완벽을 도모하는 자들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러한 상태 하에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과연 현실적으로 더 행복한지를 판정하자는 것이다.

6) 요컨대 글라우콘은 제1권에서 엄밀론을 토대로 전개된 정의에 관한 추상적 논의를 거부하고 현실론을 토대로 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이어 받되 정의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보완하는 방식으로 보다 실질적으로 정의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논리적 추상성에만 매달리는 것에 대한 한계는 글라우콘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역시 동감하고 있다. 사실 제1권에서 논쟁의 바탕을 이루는 엄밀론이 종국적으로 판정하는 진리치는 참과 거짓,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배타적 선택지로 주어지지만, 실질적인 현실론에서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는 것,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이 선택지로 포함되면서 그것의 유동성, 변화성, 양태성, 잠재적 지향성도 학문적 판정의 대상으로 함께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글라우콘이 완벽한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 실수의 가능성과 완벽성을 공존시키고 있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이미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이 현실의 정의를 다루는 실질적 정의론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제1권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다른 한 편 전혀 그 바탕을 달리하는 재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재편은 그 자체로 앞으로 전개될 정의론의 토대를 이룰 플라톤 나름의 존재론적 사유의 기본틀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위한 사전 터파기 작업으로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통해 당대 아테네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던 엘레아의 이분법적 존재론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던 현실의 실재성을 복구하여 그것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플라톤 고유의 현실 구제론적 존재론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자연과 우주는 물론 정의와 부정의가 부딪치고 갈등하는 우리의 현실 역시 존재와 무, 정지와 운동이라는 대립적 요소들이 영혼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운동과 변화의 원인으로 함께 공존하고 작용하면서 서로 다양하고도 복잡한 형태로 상호 관계를 맺어가며 모종의 합목적적 질서를 유지 보존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던 것이다.

7) “정상급의 전문 기술자들이 자기의 전문적인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할 줄 알아서 가능한 것들은 하려들되 불가능한 것을 내벼려 둔다.”는 언급도 제1권에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아래와 같은 언급 즉 ‘기술 자체는 더 이상 결함이 없는 어떤 훌륭한 상태’(342a)라는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제1권에서도 살폈듯이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결함이 없다는 언급은 모든 기술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언급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글라우콘의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기술들이란 각기 고유의 전문 영역을 갖는 것이자 그 고유 영역 내에서 완벽한 수준의 기술력(실수를 바로 잡는 기술도 포함)을 갖고 있는 것”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수동 드라이버 기술과 전동 드라이버 기술의 경우, 후자는 전자의 기능적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발전된 기술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기술들은 각기 영역을 달리하는 서로 다른 전문 기술일 따름이며 그에 따라 각각의 완벽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에 따른 전문가도 따로 있는 것이다. 즉 전문가는 인접 기술과 비교하여 자기 기술의 결핍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하면서 그 상관관계 하에서 자기 기술에 최선을 기울이는 기술자인 것이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전문 기술자들은 다른 영역의 기술자들 대해 누가 더 뛰어난 기술자인지 아닌지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와 다른 기술임을 인지하고 구별해가면서 자기 기술 그 자체의 고유한 완벽성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들 모두는 형상계에서나 존재할 법한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들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각기의 영역에서 최선의 전문 기술을 추구하고 구사하는 현실계의 기술자들인 것이다.

8) 가장 완벽한 최상급의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들이 맞이하는 삶에 대한 글라우콘의 극단적 대비는 당시 아테네의 현실이 갖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으로 제시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반복되고 재현되고 있다. 플라톤의 통찰에 대한 감탄에 앞서 비감스러운 절망감과 통탄이 우리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읽어 가다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들 주변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과 사건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이런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당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도 너무도 하나같이 유효하고 심각한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도전에 과연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답을 내놓을 것인가?

9)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 대비는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지만 사실 다른 한편 소크라테스가 지향하는 최선의 상황 즉 최선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와 최악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도 함께 대비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글라우콘이 보기에 정의를 찬양하는 입장에서나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전자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소크라테스에게 도전하는 그의 처지에서 설정자체가 불가능한 대비일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그와 같은 최선의 상황과 그것의 현실적 구현 가능성은 그야말로 그 자신 반드시 증명 내지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도 <국가>의 논의는 글라우콘의 도전에 대한 극복을 넘어서 당대 현실에 대한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1-3. 글라우콘의 견해에 대한 아테이만토스의 보완(362d-367e)

 

[362d]

* 글라우콘이 이상과 같이 말을 마치자 아테이만토스가 나서서 무엇보다도 마땅히 언급되었어야할 게 언급되지 않았다고 자기 이야기도 마저 들어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부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형제가 옆에 있게(돕게) 하라’ ἀδελφὸς ἀνδρὶ παρείη라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의 부탁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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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제1권의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가 활용하던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이용하여 거꾸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을 논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그 소피스트적 흑백논리가 갖는 허망함만큼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 또한 허망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뀐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권에 들어와 글라우콘은 정의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 모순을 드러내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진 소크라테스의 논증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제 현실의 삶의 세계에서 엄연히 현존하는 그대로의 부정의의 실상을 소재로 그것의 실질적인 부당성을 증명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대비 즉 최상급의 정의가 맞이하는 최악의 경우와 최상급의 부정의가 맞이하는 최선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판정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들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삶아 숨쉬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목도할 수 있는 사실 차원의 것들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이러한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도전 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은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극단적인 경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에서 부정의의 부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방편들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만으로 현실에서 존재하는 부정의의 양상 모두가 다 드러나고 또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정의의 양상들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양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의와 부정의의 전도 양상은 글라우콘이 제기한 사례들에서처럼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는 일단 정의론의 문제 영역이 현실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의가 전도된 그 현실의 문제 영역 전체를 다 들여다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면, 글라우콘이 말한 극단적 정의의 전도 양상들만이 아니라 그것 이외의 나머지 양상들도 모두 다루어져야 한다. 이제 아테이만토스의 문제 제기는 현실 곳곳에 현존하는 그러한 나머지 양상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문제제기를 보다 더 완벽하게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채택한 엄밀론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자기모순을 들추어내는데 머무는 것이었다면 제2권에서 새롭게 채택된 현실론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것들 전체에 대한 진단과 극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데이만토스의 보완적 문제제기에는 글라우콘이 제시한 극단적인 경우 보다는 다소 강도가 떨어지지만 아테네의 일상적 현실 영역에서 누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의의 전도 양상 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를테면 일상의 우리의 가정 영역은 물론이고 생활 속 깊이 침투해 있는 종교 생활 영역 그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밀교 영역을 포함해서 일상의 기복주의적이고 물신주의적인 신앙 양태 전역이 아데이만토스의 보완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1-3-1. 정의와 평판(362e-366e)

 

[362e]

* 아데이만토스는 부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글라우콘의 논지를 한결 더 분명하게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쪽 사람들의 생각도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검토 결과 정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조차도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이 밝혀진다면 글라우콘의 논지가 더 강해지고 그에 비례하여 소크라테스의 반론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타 다양한 일상 영역에서도 그러한 정의의 전도 양상이 현존하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의 일상의 현실 영역 전체에 걸쳐 다소 길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아버지 혹은 누군가를 돌보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충고 – 가정 영역

* 이들은 자식과 그들의 돌봄을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충고하며 정의를 찬양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정의 자체 때문이 아니고 정의로 인해 생기는 명성εὐδοκίμησις 때문이다. 글라우콘이 열거한 좋은 삶의 모습들도 모두 정의롭게 보여서 얻은 명성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363a]

 

  1. 전통 종교 생활 영역

* 명성과 평판은 사람들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들로부터도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경건한 자라는 평판과 명성을 얻으면 사람들로부터 명성으로 인해 얻은 좋은 혜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혜택을 신들로부터 받는다.[363a-b]

*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는 신들에게 정의롭게 보여 신들로부터 평판과 명성을 얻을 경우 얼마나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363b-c]

 

  1.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

* 신들로부터 주어지는 혜택들로서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이 들고 있는 것은 앞의 것들보다 더 참신하다. 즉 신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하데스로 인도하여 침상에 기대앉게 하고 머리에 화환을 두르게 한 후 잔치를 베풀고 영원히 술 취한 상태로 지내게 하는데 이런 술 취한 상태를 훌륭함에 대한 가장 좋은 상(賞)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경건한 자들과 신들에 대한 서약에 충실한 자에게는 자손의 자손과 씨족을 뒤에 남게 해준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의 사람들에게는 진창 속에 파묻히게 하고 체로써 물을 떠 나르게 하고 생전에도 나쁜 평판을 갖게 하여 글라우콘이 정의로우면서도 부정의한 자로 평판을 얻은 사람들이 받게 되는 것으로 열거했던 온갖 것들을 받게 된다.[363d-e]

* B에서 나타난 양상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로 대표되는 아테네의 공식적인 종교 담론에 기초한 것들임에 비해 이곳에서의 양상은 이른바 아테네의 비주류 종교 담론 즉 신비주의적이고 밀의적인 오르페우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신앙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들 신비주의 종교 전통은 추후 자세히 다시 다루기로 한다.

 

  1. 사람들과 시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되풀이 하는 말. – 양비론적 사고 영역

*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긴 하나 힘들고 수고롭다. 무절제와 부정의는 달콤하고 얻기 쉽다. 다만 평판과 법에서만 수치스럽다. (요컨대 무절제하고 부정의하지만 법망을 피하고 정의롭다는 평판만 얻으면 아름다운 것과 달콤한 것을 쉽게 얻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다.[364a]

* 대개의 경우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득이 된다. 나쁘지만 부유하고 힘을 가진 자들은 행복하고 예우도 받지만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일지라도 업신여기며 깔본다.[364a-b]

* 신들조차 많은 선량한 사람에게 불운과 불행한 삶을 배정하고 반대되는 사람들엔 그 반대의 운명을 내린다.[364b]

* 여기서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부정의를 찬양하는 것도 아닌 양비론적 태도를 갖는 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양비론의 경우 대체로 부정의를 찬양하는 자들이지만 명분상으로는 정의를 찬양하는 자로 보이고 싶은 자들의 행태에서 나타난다. 기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의 전도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자들에 신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의 종교 생활 자체가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1. 탁발승과 예언자들이 하는 말.[364c-365a] – 기복주의와 물신주의적 신앙 생활 영역

* 부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조상이 저지른 잘못이 있을 경우 제물과 주문 암송 등의 신통력과 연락(宴樂)을 통해 보상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적은 비용으로 주술과 마법으로 신의 도움을 받고 적을 해칠 수 있다.[364c]

* 신들에 관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해준다.[364d]

* 무사이오스와 오르페우스의 책에 제시된 대로 개인들과 나라는 면죄와 정화의식을 치러야 한다.[364e]

* 제물과 즐거운 놀이를 통한 면죄와 정화의식 즉 입교의식은 저승의 나쁜 일들(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365a]

* 탁발승과 예언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공식 종교 생활에 기복신앙과 물신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스며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연락(宴樂)μεθ᾽ ἡδονῶν τε καὶ ἑορτῶν은 의미상 흥과 잔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나타나는 무당굿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2. 논제1 : 정의의 본질과 기원 사회계약설의 관점(358e-359b)

 

*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던지는 세 가지 논변들은 트라쉬마코스의 논변이 그랬듯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자신의 정의론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도전들이자 안티테제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적 문제제기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도 그 도전들의 내용을 잘 살펴보는 것은 플라톤이 직면한 당대의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정의론의 기본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요컨대 글라우콘의 도전은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보다 공고하게 건설하기 위해 플라톤 자신이 주도면밀하게 설계한 터파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58e-359b]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요청에 기꺼이 응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제의 순서에 따라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서 정의란 무엇이고 그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람들은 부정의를 저지르면 좋은 것ἀγαθόν이요 부정의를 당하는 것ἀδικεῖσθαι은 나쁜 것κακόν이지만 부정의를 당할 때의 나쁨이 부정의를 저지를 때의 좋음을 훨씬 압도한다. 그래서 서로 부정의를 저지르기도 하고 부정의를 당하기도 하며 양쪽을 다 맛보고 나면ἀμφοτέρων γεύωνται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선택할 힘이 없는 사람들로서는τοῖς μὴ δυναμένοις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서로 계약을 하는 게συνθέσθαι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 이러한 연유로 사람들은 법률νόμοι을 제정하고 계약συνθήκη을 체결하며 법에 따른 명령을 적법하고 정의롭다νόμιμόν τε καὶ δίκαιον고 말한다. 이것이 정의의 기원이며 본질γένεσίν τε καὶ οὐσίαν δικαιοσύνης이다.

* 정의롭다는 것은 부정을 저지르고 처벌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ἀρίστου 경우와 부정을 당하고도 보복을 할 수 없는 가장 나쁜κακίστου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μεταξὺ οὖσαν이다.

* 이렇게 정의는 양쪽 사이에 있는 것임에도 좋아하는 까닭은 결코 정의가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없어서ὡς ἀρρωστίᾳ 그것을 존중할 뿐이다.

* 그러나 능히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강자 즉 진짜 사내ὡς ἀληθῶς ἄνδρα(이를테면 참주)의 경우는 부정의를 저지르지도 당하지도 않도록 하는 계약 따위는 누구와도 맺지 않는다.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다. 이것이 정의의 본성φύσις δικαιοσύνης이자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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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법률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생각하는 정의와 부정의가 일단 법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에 따르면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법률을 제정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초로서 법률이 제정되기 이전에 모종의 다른 법률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 내지 발생γένεσίς은 말 그대로 자연 상태로 부터의 정의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의의 기원 즉 그러한 정의의 기초가 되는 법률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을 자연 상태로부터의 정의의 기원으로 보고 부정의를 저지르거나 당하는 것의 의미를 단순히 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글라우콘의 도전이 기본적으로 5세기 지식인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플라톤의 정의관이 그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한다면 글라우콘이 말하는 정의의 기원은 플라톤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자리 잡은 신흥 정의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에 대한 아래와 같은 분석도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 글라우콘의 주장은 정의와 법률이 일정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지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정의의 본성을 자연의 본성, 신들의 본성에서 구하고 그것을 관습의 형태로 확립하여 그것을 사회적 삶의 기초로 삼아온 전통적인 입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입장은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전통적 입장과 달리 자연과 관습의 분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글라우콘의 주장은 자연 상태라기보다는 그리스의 역사에서 자연과 관습의 분리가 진행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준다. 글라우콘의 입장을 탄생시키는 배경으로서 글라우콘 스스로가 진단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도 그 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 글라우콘이 언급하고 있는 사회 현실은 부정의를 저질러도 처벌은커녕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가장 강한 자)과 부정의를 당해도 보복은커녕 나쁨만 입는 사람들(가장 약한 자) 그리고 힘에 있어서 그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 중 중간에 속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강자들처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다가 자기들끼리는 서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이기적인 존재인 까닭에 늘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홀로 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제의 형식을 빌어 서로 약속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상호 합의하에 법률과 계약을 제정하여 법이 정한 그 명령을 적법한 것이자 정의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글라우콘이 여기서 말하는 사회 현실 속 사람들이란 계층적으로 아테네 당대의 귀족층과 시민계층 그리고 노예 등 최하계층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정의와 법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글라우콘의 주장은 법률의 강제적 집행과 관리를 주도할 권력기구 내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종종 국가 형성과 관련한 이론들 가운데 사회계약설적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주지하다시피 사회계약설은 기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합목적성과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권리와 의무를 설명해주는 핵심 이론으로서 17세기 근대 국가의 성립과정과 성격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근세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태동되기 2000 여년 전에 이미 사회 중간계층인 시민 계급에 의해 주도된 사회계약이념의 원형적 틀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고도 주목할 만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개인들의 배타적 이기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근세 사회계약론 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홉스(T. Hobbes, 1588~1679)의 사상과도 자주 비교된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자기보존 욕구만 가지고 있어 그 상태를 방치할 경우 마치 원자들이 부딪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계산적 이기심 또한 갖고 있어 그 이성의 규제적 통찰이 그들 모두의 공멸을 피해 사회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즉, 그들은 도덕적 자발성은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계산적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강력하게 통제할 막강한 권력기구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상호 합의 하에 강권국가(Leviathan)를 세워 법률제정 권한 등 강력한 절대 권력을 부여하여 자신들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과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의 방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홉스에게 사회 계약은 자연 상태에서 비슷비슷할 정도의 힘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계약 당사자로 참여하여 합의를 통해 최고 주권자로서 절대군주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그 주권자의 강권통치에 예속됨으로써 서로의 안전과 공존을 보장받는 것이 목표이지만, 글라우콘이 말하는 사회 계약은 앞서 살폈듯이 일단 자연 상태가 아닌 일정한 역사적 현실 상황에서 사회적 강자들과 노예계급을 제외한 보통의 시민들이 그들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위한 법률의 제정과 그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의 수립이 그 목표이다. 다시 말해 최초 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인 바람을 충족시키는 정부의 수립이다.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그것을 태동시킨 정치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른데서 연유한다. 홉스의 강권국가이론은 원래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영국의 절대왕정이 위협을 받게 되자 절대왕정의 정당성을 개인주의 차원에서도 온전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 상태라는 원초적 상황까지 끌어들여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홉스의 이론은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절대왕정주의자들이 보기에 홉스의 사상은 왕권의 절대적 존엄성과 그에 대한 충성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안전보장을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다른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비록 이기적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구가 권력의 합목적성으로 자리 잡긴 했어도 그것이 기존의 절대군주를 통해 담보되는 것은 그 자체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홉스의 사상은 그 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근세 자유주의의 이념이 더 이상 반동에 직면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또한 증대하자 그가 내세운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국가권력의 결합이 자유방임의 한계에 대한 선구적 통찰로 재조명되면서 근세 자유주의 국가 이념의 기본틀을 제공한 위대한 사상가로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참주정, 귀족적, 민주정의 예를 들어가며 결국 참주건 귀족이건 시민이건 법률 제정권을 가진 강자가 진정한 강자이며 정의는 그들의 이익임을 주장하고 있다.(338d-339a) 그런데 글라우콘의 주장에서는 법률의 제정이 참주나 귀족 같은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중간 계층 즉 시민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것은 글라우콘의 정의관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정치적 강자가 이제 더 이상 참주나 귀족이 아니라 민주정체 하에서의 시민임을 말해준다. 물론 귀족 계층도 여전히 사회적 강자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멋대로 법을 제정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시민들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를 막을 정도의 힘 또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약 그들이 이전처럼 법률 제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시민 계급의 법률 제정을 허락하기는커녕 자신들의 힘을 이용하여 언제든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고 그 과정에서 결코 약자들과 상호 협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것은 미친 짓μαίνεσθαι이기 때문이다.(359b) 역사적으로 법률 제정의 결정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는 강제적이고 공적인 집행 기구로서 정부의 통치 권력의 장악을 위한 정치투쟁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민들이 법률 제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적 강자들과의 정치투쟁에서 최소한 시민들이 나름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법률 제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도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사회계약설은 이미 사회적 약자들이 힘을 합해 사회적 강자를 제압하거나 일정부분 타협이 가능해진 상황, 즉 기원전 5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일정한 역사적, 시대적 현실에 조응하는 정의의 기원과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 법률 제정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사회 계약의 합목적성과 관련해서도 글라우콘의 사회계약설은 홉스가 제기하는 사회계약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홉스의 사회계약설에서는 개인의 자기 보전 욕구가 절대 권력에 대한 주권 권력의 위임을 통해 관철되고 있지만 글라우콘이 제시하는 사회계약설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시민 계급이 강자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위해 스스로 주권자로 나서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관철하고 있다. 이미 그곳에는 이전 세기의 참주정은 물론 당대 귀족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한 세기 이전에 성행하던 참주정 치하의 상황을 토대로 강자의 이익으로서 정의를 주장하며 소크라테스를 몰아세우던 트라쉬마코스의 도발은 이제 제2권에서 글라우콘을 통해 현존하는 당대 아테네 현실과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참여의식을 토대로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 도전으로 대체되면서 소크라테스를 보다 강화된 방식으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의 논변은 이기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으로 일관된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테제를 일관되게 유지하되 논거에 있어서는 모두가 목도하고 실감하고 있는 아테네의 역사적 현실을 끌어들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보다 강력하게 이끌어내기 위한 터파기 심화 작업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국가>를 구상함에 있어 자신의 정의론을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고자 하는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이처럼 글라우콘의 정의에 관한 사회계약설적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넘어서야할 정반대의 입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중추적인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거나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시사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은 고대와 현대에 걸쳐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정의의 사회계약설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소수 사회적 강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익을 수호하고자 하는 다수 약자들의 방어 내지 의심 프로그램으로서, 같은 약자이자 배타적인 이기심을 갖고 있는 타인들로부터 스스로의 생존과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실로 민주주주의 본질은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방어적 의심과 투쟁에 기반 해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은 비록 <국가> 전체를 통해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사회계약설적 입장을 탄생시키고 발전시켜온 당대 아테네의 민주정은 물론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앞장 선 소피스트들의 입장은 오늘날 빛나는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의 바탕을 마련해 준 선구적 사상으로서 소중한 철학사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의 주장의 배경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은 주지하다시피 기원전 5세기말에 이르면 법률과 정의가 곧 시민 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방어차원에서 성립되었다는 글라우콘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그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면서 전성기 아테네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근본 동인이 되고 만다.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테네 민주정은 기원전 413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기원전 5세기 중반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역동성을 상실한 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사회경제적 현실 앞에서 공동체의 보존보다는 시민 각자의 자기 도생을 위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관철하는 정치 시스템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른바 사회적 강자로부터 시민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으로 추구되던 입법 정신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민중들이 선동정치가들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정치적 강자로 군림하면서 시민들 서로에 대한 음해와 부의 강탈마저 정당화하고 용인되는 이른바 반공공적 자유방임의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아테네 사회를 뒤덮기에 이른다. 그렇게 보면 글라우콘의 주장에는 이미 역설적으로 당대 아테네 민주정체 하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제기되고 전파된 세계관과 삶의 방식, 즉 자연과 관습의 일치가 아닌 분리를 통해 개인의 이기심을 본성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킨 당대의 피폐된 이기주의와 상대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 이로써 정의와 관련하여 사회계약설적 주장을 추축으로 하는 글라우콘의 첫 번 째 문제제기가 마무리된다. 첫 번째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정치철학적 도전을 담고 있다면 이제 두 번째 문제제기는 인간의 본성론에 기초한 도전의 성격을 갖는다.

 

1-2-3. 논제2: 귀게스의 반지와 인간의 본성 정의는 마지못해 하는 것(359b-360d)

 

[359b]

* 글라우콘은 이제 358c에서 예고한 대로 두 번째 논제 즉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οἱ ἐπιτηδεύοντες 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무능ἀδυναμίᾳ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언급한다. 먼저 글라우콘은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여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성임을 ‘멋대로의 자유’ἐξουσία가 주어진 가상 상황에서의 사고실험과 귀게스(Gyges)의 반지에 관한 전승을 토대로 적극적으로 논변하기에 이른다.

* 글라우콘은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임은 우리가 머릿속으로 아래의 경우를 상정하면’εἰ τοιόνδε ποιήσαιμεν τῇ διανοίᾳ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59c]

* 즉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ἐξουσία를 부여하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모두 탐욕πλεονεξία(pleonexia)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천성ὃ πᾶσα φύσις이 그러함에도 법률이 강제로βίᾳ 천성을 평등을 존중하는 쪽으로ἐπὶ τὴν τοῦ ἴσου τιμήν 유도한다는 것이다.

 

[359d-360a]

*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라우콘은 옛날 뤼디아 사람 귀게스γύγης의 조상에게 τῷ Γύγου τοῦ Λυδοῦ προγόνῳ 생겼다는 어떤 힘에 관한 이야기 이른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내든다.

*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옛날 뤼디아의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는 심한 뇌우와 지진σεισμός이 있은 후 갈라진 땅 틈χάσμα으로 들어갔다가 속이 비고 문이 달린 청동 말ἵππον χαλκοῦν 속에 어떤 송장νεκρόν이 손가락에 금반지χρυσοῦν δακτύλιον를 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빼 가지고 나왔다가 반지의 보석받침σφενδόνη을 자신을 향해 손 안쪽으로 돌릴 경우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ἀδήλῳ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후 목자는 반지를 이용하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에게 접근하여 왕비와 간통하고μοιχεύσαντα 왕비와 함께 왕을 살해ἀποκτεῖναι한 후 왕권을 장악한다.ἀρχὴν κατασχεῖν

* 이곳에서는 ‘귀게스의 조상’이 반지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제10권 612b에서는 그냥 ‘귀게스의 반지’τὸν Γύγου δακτύλιον라고만 언급되고 있어 일부 주석가는 ‘조상’πρόγονος이라는 표현이 잘못 전승된 표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귀게스라는 인물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I권 8-13에 나오는 기원전 7세기 뤼디아 왕 귀게스인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왕의 하인 또는 목자가 나중에 왕이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두 인물이 같은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360b-d]

* 그러한 반지가 두 개가 있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각각에게 끼게 할 경우, 정의에 머물며 남의 것에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ἀδαμάντινος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신 같은 존재ἰσόθεον로 행세할 수 있게 된다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방향ἐπὶ ταὔτ᾽ 즉 부정의 짓을 저지른다.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정의는 좋은 것이 못되는ὡς οὐκ ἀγαθοῦ ἰδίᾳ ὄντος 반면 부정의는 훨씬 이익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는 자발적이 아니라 부득이하게ἀναγκαζόμενος 마지못해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τεκμήριον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ἐξουσία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장 딱하고ἀνοητότατος 어리석은 사람ἀνοητότατος으로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속이며 면전에서 그를 칭찬하는 것은 그들 모두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φόβον때문이다.

* ‘귀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을 경우 남의 것을 손대지 않을 정도로 강철같은 마음을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가정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정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들어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의 주장 자체가 그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른 방편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순수하게 정의로운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 있는 소크라테스의 존재 자체가 그 증거인 것이다.

* 360d에서 ‘부정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면전에서 순수하게 정의로운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면전에서 솔직하게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거나 비난할 경우 어떤 부정의한 일을 당한다는 것인지 금방 이해가 가지 않는다. 면전에서 그의 어리석음을 지적할 경우 자신이 부정의한 자임을 고백하는 형국이 되어 주위 사람들이나 통치자들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정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우에서처럼 모나게 처신할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염려를 나타낸 것일까 아니면 참주정 치하에서 부정의를 독점하는 참주에 의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거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지레 부정의한 자로 백안시되거나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까? 글라우콘의 주장을 자연 상태로 부터의 법과 정의의 기원에 관한 주장으로 해석하고 있는 일부 주석가들은 글라우콘이 법과 정의가 생기기 이전에도 ‘부정의를 당한다’(358e)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말의 의미를 그냥 ‘불이익을 당한다’, ‘해를 입는다’의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 글라우콘은 정의란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들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서로가 약정한 방어적 성격의 것으로서 따라야할 최선의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경우 그것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탐욕적이 된다는 점에서 정의는 다만 약자가 그 자신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정의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면 강자건 약자건 그 누구라도 그것을 자진해서 추구하겠지만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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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우콘이 제기한 두 번째 논변 특히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인간 본성론 내지 도덕 심리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관련 국내 논문들 : 김영균,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기게스의 반지와 두 가지 삶의 방식’ <인문과학논총> 30, 청주대 학술연구소 2005. 임성진, ‘글라우콘의 도전’ <철학사상> 제4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2, 양선숙, ‘만약 당신이 기게스의 반지를 얻게 된다면’, <Knu law review> 제3권,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2012. 이민규, ‘기게스 반지의 선택’, <언론정보학연구> 3권 대구경북언론학회 2001.4)

* 글라우콘이 전하는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형식으로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중대한 물음들을 담고 있다. 물론 내용 자체는 허구라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주장과는 달리 어떤 객관적 증거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일시적이든 아니든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인간 누구도 완전하게 빠져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다. 특히나 글라우콘이나 우리가 서 있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며 배타적인 사회현실에서 타인의 비밀을 타인 몰래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지배 욕구 내지 절대 우위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귀게스의 반지가 상징하는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인간 욕망의 극치를 표현하는 소재로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고 도덕의 근원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가 되어 왔다.(물론 투명인간이란 말은 오늘날 타인의 관심에서 배제되거나 무시당하는 인간의 의미로도 쓰인다). 과연 인간에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주어지고 게다가 그 자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는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오직 하나의 방향 즉 부정의하고도 부도덕한 행위를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만약 그와 달리 누군가 그와 동일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 즉 도덕적 행위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어디에서 구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의 타고난 선의지 내지 선한 본성에서일까 아니면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겪어온 시행착오와 쾌락의 역설과 같은 수많은 인생 경험들 때문에서일까?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수치감 내지 도덕의식은 본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이 또한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정의와 질서가 가져다 준 모종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동서양 철학과 종교의 역사를 통해 고대 성선설과 성악설에서부터 근대의 공리주의, 행동주의, 인본주의 심리학, 사회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수많은 답변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특정 종교나 철학적 신념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누구도 그 어떤 대답이 맞거나 그 대답이 다른 대답을 압도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양태 자체가 인간 본성의 중층성과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러나 어쨌든 크든 작든 일시적이든 아니든 그러한 욕망이 뿌리칠 수 없는 유혹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그것이 빚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적 영역에서건 공적 영역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점에서 실로 글라우콘의 문제 제기는 그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실로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이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향한 유혹은 늘 치명적일 정도로 뿌리가 깊어서 그것을 욕망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현실의 거의 모든 영역이 크게 뒤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를테면 우선 공적인 영역에서 모든 국가가 갖추고 있는 첩보기관은 다른 나라 또는 자국 신민들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비밀스런 탐지와 음모를 권력과 나라의 안전을 보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정당화하고 있고, 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는 기업과 개인 또한 자기들의 부와 권력, 배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타인들에 관한 정보를 그들 모르게 비밀스레 탐지하고 독점하고 활용하려 든다. 고객 서비스를 내세워 이루어지는 기업들의 개인정보의 수집활동이 개인의 취향과 인간관계 등을 포함한 비밀스런 사적 영역에 관한 정보까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도 대규모 포털과 국가기관의 정보망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마치 벤담(J. Bentham)이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나 오웰(G. Orwell)의 빅브라더처럼 거의 실시간으로 우리들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투명인간에 대한 욕망은 이렇듯 공적 영역에서 부와 권력에 대한 다함없는 의지로만 표출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사적 영역에서 만연해 있는 몰래 카메라를 통한 도촬과 도청 행위 등도 자본과 권력에 침식된 개인의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차원에서건 성적 욕구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려는 차원에서건 그 모두 귀게스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일탈 행위 즉 타인에 대한 변태적인 지배 욕구 내지 병적인 인정 욕구의 소산들이다.

* 이런 측면에서도 이곳에서 글라우콘에 의해 제기되는 두 번째 도전은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물론 오늘날 현대인이 직면한 피폐한 삶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앞으로 펼쳐질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그 문제의 심각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아니 그 이상으로 실로 엄청난 의미와 무게를 갖고 우리들 모두에게 소망이자 믿음으로, 빛으로 다가오고 또 반드시 그렇게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글라우콘의 귀게스 반지 이야기를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지진과 뇌우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충격과 상처들이고 땅의 갈라짐은 정신의 분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지하로 들어가는 행위 청동말 속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마치 무의식에 대한 응시를 말하는 것인 양 느껴지고 청동말 속에 반지를 낀 채 누워있는 송장은 우리 안에 잠복하고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자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서 프로이트의 id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송장 역시 똑같은 반지를 끼고 살다가 죽은 권력자의 송장이라는 점에서 꿈을 통해 나타난 무의식 속 귀게스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귀게스가 반지의 능력을 알고 취한 첫 행동이 최고의 금기인 최고 권력자의 여인을 간통하고 그러한 성적 지배를 통해 최고의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것도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를 연상시킨다. 사실 프로이트의 역동적 성격론이 플라톤의 영혼 3분설에서 착안되었다는 것은 관련 연구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석받침을 안쪽으로 돌리면(반지 자체를 손바닥 쪽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반지위에서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보석받침을 자기 쪽으로 돌려 놓는 것을 말할 것이다) 목동의 모습이 다른 목동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웰스(H.G. Wells)의 소설에서 나오는 투명인간이 알몸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다른 설정이지만, 귀게스의 반지를 낀 자가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말 속에서 알몸으로 누워있는 것도 뭔가 그의 욕망이 맞이하는 결말에 대한 플라톤적 시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송장이 사람 크기보다도 크다는 내용도 일정하게는 나름의 고인류학적인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거나 초인적 존재임을 함축하는 것일 수도 있다.

* 글라우콘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에 이어 그가 앞서 밝힌 논제 제기의 기본 순서와 목적에 따라 이제 세 번째로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실로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입론을 위한 아주 깊고도 깊은 터파기 작업이 글라우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를 환대하는 한 가지 방식 [철학자의 서재]

환대에 대하여를 환대하는 한 가지 방식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남수인 옮김)

 

환대에 대하여, 책의 제목부터 문제적이다. 왜냐면. 우리는 사실 누군가를 환대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IMF 이후라고 할까, 신자유주의 이후라고 해야 할까. 무한 경쟁, 성과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후유증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서로에게 잠재적 ‘적’이다. 나는 저 친구보다 우월한 스펙을 쌓아야 하며, 회사에서는 동료보다 높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동료도 난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주노동자도 내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주인이고 그들은 이방인이고 타자일까. 데리다는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질문한다. 어쩌면 태초에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온 우리는 모두가 이 지구의 이방인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방인은 질문하는 자이고 부성(父性) 로고스를 뒤흔드는 자(p. 58)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인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언제나 친구를 기다리고 손님을 기다린다. 휴대폰에 문자나 전화 한통 와 있지 않은 어느 날의 음울함에 대해 생각해보라. 나는 왜 나를 침입할지도 모르는 이방인, 타자 혹은 친구를 기다리는 걸까. 내가 사회적으로 소용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느낌이 들 때 자기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내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나는 주인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에게 문을 여는 순간 나의 ‘주인성’은 침해당한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빗금쳐진 주인,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일까. 데리다는 이를 ‘주인(손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현은 정말 이상한 개념이다(p. 83). 아마 우리가 데리다를 접할 때 느끼는 어려움의 하나일 텐데 데리다는 항상 이런 개념을 우리에게 던진다. 파르마콘도 그 중 하나다. 약이자 독이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 경계에 서있기, 이건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흑백 논리, 이분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여자 아니면 남자 하는 식 말이다. 하지만 지구상에 인간의 성이 n개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지만 이 심각성을 회피하는 것만이 능사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데리다는 항상 이 지점을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 나를 모두 버리고 환대할 것인가, 나를 유지하면서 환대할 것인가, 가 항상 문제다. 무조건적으로 타자를 환대하면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환대인가, 환대가 아닌가.

 

요즘엔 인터넷, 이메일, SNS 등으로 내가 구성되는데 이때 나는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서의 나인가 아니면 외부에, 타자, 이방인에게 내 의도와 무관하게 환대하면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나는 나이면서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는 이런 식으로 나를 침해하고 그 국가 권력과 정치화의 권력은 확장된다(p. 90). 여기에 나의 사적 공간은 보장되는가. 국가 폭력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p. 95).

 

칸트는 우리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는 절대적 명령을 했다. 이렇게 그는 우리의 사적인 권리, 비밀의 권리, 국가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파괴하고 박탈해버린다(p. 97). 칸트는 순수 도덕성의 이름으로 경찰을 아무 곳에나 들여놓았다(p. 98).

 

정의의 환대와 권리의 환대,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아포리아일까. 우리는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할까.

 

환대의 무조건적 법은 추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법이기 위해 법의 조건 안에 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두 체제는 서로를 함유하며 동시에 서로를 배제한다(p. 106). 내가 주인이면서 손님이라는 논리처럼 나는 이 둘 모두를 향해 동시에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나는 교사이지, 교사이자 학생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양창렬 역, 궁리, 2016) 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무지한 스승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관점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무조건적인 환대란 ‘언어를 정지’시키는 것이라 했다(p. 141). 일상어의 정지, 는 새로운 언어를 불러들일지 모른다. 그것은 시적 언어이고, 철학적 언어이고 신조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언어는 기존의 관습적, 일상적 언어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얼핏’이라도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서(상징계) 그러니까 조건적으로, 조건 안에서 끊임없이 ‘무조건적’ 어떤 것을 항상 상상해야 하고 염두에 두고 ‘배려’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입장이 데리다의 입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이방인과 타자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꺼리를 던져 주기 때문에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게일 루빈(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4. <일탈>, 게일 루빈 (下)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S/M 레즈비언 권리 집단 ‘사모아’의 후원 파티, 게일 루빈이 DJ로 참여함)

 

  • 성전쟁

 

1980년대는 미국 여성주의 운동사에 있어서도 게일 루빈의 개인사에 있어서도 여러 모로 시련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백래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 의해 여성과 돌봄에 관한 예산이 전폭적으로 삭감되었으며, 평등권 수정 운동이 실패하고, 낙태권 반대 운동이 확산되어 갔고, 우익 기독교 집단이 반페미니즘, 반동성애를 기치로 삼아,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집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를 더 이상 외칠 수 함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인종적‧계급적‧지리적 차이들이 강조되면서 여성들이 손쉽게 ‘우리’라고 묶일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는 반포르노그래피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운동은 광고와 음반, 영화산업 등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섹슈얼리티와 연결하는 데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점차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전반을 문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래피에서의 S/M 코드의 사용이 가장 문제시되었다. 여성을 속박하고 때리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이미지가 여러 매체들에서 사용되는 데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분노는, 곧 S/M 섹슈얼리티에 대한 전반적인 비난으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WAVPM(Women Against Violence in Pornography and Media, 포르노 및 대중매체의 폭력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은 포르노그래피에 등장하는 상업적 S/M뿐만 아니라 동의에 기반한 S/M이라는 개념까지 부정하며, S/M은 불평등한 권력 관계와 육체적‧정신적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페미니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S/M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한 게일 루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오명이 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게일 루빈은 팻 캘리피아(Pat Califia)와 함께 S/M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권리 집단인 사모아(Samois)를 창립하여 레즈비언의 S/M도 페미니즘적 행위이며, S/M의 참여자들은 사회적 자본을 결여한 여성들로 그들은 놀이를 통해 권력 개념을 탐험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포르노그래피 규제를 둘러싼 페미니스트 사이의 갈등은 1982년 4월 24일 바너드 대학에서 개최된 컨퍼런스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제9차 바너드 컨퍼런스는 ‘성 정치를 향하여’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주최 측은 의도적으로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들이 너무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반포르노 활동가들을 격분하였고, 컨퍼런스 당일에 항의 시위가 벌였다. 바너드 대학 행정실은 컨퍼런스에서 배포될 예정이었던 섹슈얼리티 회의 일지 책자를 몰수하였다. 이 문제의 바너드 컨퍼런스에서 게일 루빈은 「성을 사유하기」를 발표하였다.

 

  • 반복되는 성 공포

 

「성을 사유하기」는 성 공포(sex panic)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 공포는 반복되는 사회적 현상으로, 그것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정부와 경찰은 시민들을 속박할 수 있는 법적‧규제적 무기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반인권적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을 받았을 논쟁적인 법안들이 성 공포의 수사학 앞에서는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되며, 이에 따라 국가의 감시 체계와 경찰 권력은 강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에서의 아동과 청소년의 자위에 대한 공포는 1873년 미연방 반외설법이 통과되도록 만들어 음란하다고 판단되는 그림이나 서적을 제작, 공고, 판매, 소지, 송부, 수입하는 행위 일체를 범죄화하는 데 기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1910년대의 미국에서는 소위 ‘백인 노예’ 공포가 사회를 휩쓸었다. 이 공포에 의해 영국에서는 1885년 형법조항이 개정되고, 미국에서는 모든 주에서 반매춘법이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강력한 즉결 심판이 가능해졌고, 성인 남성들이 합의하에 행한 외설적 행위도 범죄로 간주되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성범죄 및 동성애 공포가 있었고, 이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결합하여 정부기관에 종사하는 동성애자를 소탕과 동성애자에 대한 조직적 사찰이 일어났다.

게일 루빈에 의하면 미국의 1980년대에는 아동-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였다. 동성애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캠페인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힘입어 ‘아동 포르노그래피’ 근절을 위한 법안이 속전속결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아이들을 기소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아동 안전과 복지 증진이라는 명목 하에 금욕이 홍보되었다. 또한 아동-포르노그래피 공포라는 또 다른 형태의 성 공포로 인해 오히려 아이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가 신중하게 검토되지도 못했으며, 아이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알맞은 성적 정보와 서비스가 제공될 기회가 차단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느슨해졌던 성 관련 규제를 원상 복구시키는 계기가 되어 시민의 중요한 성적 자유를 폐기하는 데 일조하였다.

페미니즘 역시 성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는 S/M 이미지를 선동적으로 활용하여, 포르노는 S/M 포르노로 연결되고, S/M 포르노는 결국 강간에 이르고야 만다”는 논리로 성적 규제와 억압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처럼 성 공포는 만연해 있으며, 성 공포에 휩싸여 시민들은 투쟁을 통해 쟁취한 권리들을 자기도 모르게 다시 내주고 만다. 따라서 이제 성에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성을 사유할 때가 왔다고 루빈은 말한다.

 

  • 성에 관한 사유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데올로기

 

성 공포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고정된 이데올로기 역시 성에 대한 사유를 가로막는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거의 의심받지 않으며, 새로운 수사적 표현과 함께 반복해서 출현한다. 문제가 되는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는 성 본질주의이다. 이는 성을 개인의 고유한 특성으로 분류하여 섹슈얼리티에는 역사도 사회적 맥락도 없는 것처럼 사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는 사회적‧제도적‧역사적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구두가 없었던 시대에는 구두에 대한 페티시즘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처럼 기계와 인간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시대에 인간은 기계를 통한 섹슈얼리티를 꿈꾸기도 하듯, 섹슈얼리티는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 본질주의는 섹슈얼리티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여 성에 대한 사유를 어렵게 만든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는 성을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간주하는 성 부정성의 경향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서구 사회는 이 전통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때 출산만을 목적으로 맺는 혼인관계만을 성스럽다고 간주하며, 성해방과 관련된 논의를 차단하고 불경한 것이 된다. 이는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고, 청소년들이 피임법과 성교육에 관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이질적 성에 대해 저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섹슈얼리티 위계

 

「성을 사유하기」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성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섹슈얼리티 위계에 대한 지도를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좋은 성’은 “이성애여야 하고, 결혼 제도 내부에 있어야 하고, 일대일 관계여야 하며, 출산해야 하고, 비상업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세대에 속한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지되 집에서 해야” 하고,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그 어떤 성인 용품, 남녀 역할이 아닌 다른 배역” 등이 결부되어서는 안 된다. ‘나쁜 성’이란 반대로 “동성애, 혼인 관계가 아닌, 문란한, 출산하지 않는, 상업적인 성교”이며, “자위 혹은 난교 파티에서 일어나는, 세대 경계를 넘는, 공공장소, 적어도 덤불숲이나 목욕탕에서 하는 성교”이고, 여기에는 “포르노그래피, 페티시 대상, 성인 용품, 특수한 배역” 등이 결부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 일종의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혼인관계가 아닌 이성애 커플, 문란한 이성애자, 장기간 안정된 레즈비언과 게이 커플 등이 속한다. ‘최악의 성’에는 복장전환자, 트랜스섹슈얼, 페티시스트, 사도마조히스트, 상업적 성, 그리고 세대 간 성애가 속한다. 이처럼 ‘좋은 성’과 ‘나쁜 성’ 사이에는 경계선들이 존재하는데, 경계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섹슈얼리티는 날뛰게 되면서 최악의 성으로까지 치닫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작용한다.

이 성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성에 대한 해방적 사유를 저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민권 차별 경제적‧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들을 성 공포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무기가 된다.

 

  •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페미니즘의 한계와 퀴어 이론의 시작

 

페미니즘은 늘 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왜냐하면 “섹슈얼리티는 젠더들 간의 관계의 접점이며, 여성 억압의 상당 부분이 섹슈얼리티로 인해 발생했고, 그것을 통해 매개되었으며, 그 내부에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의 경향은 성 해방론적인 것과 성 보수주의적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반포르노그래피 담론은 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존의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위계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다만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이성애 지위를 강등시키고, 일대일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상향시켰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페미니즘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계를 드러냈다고 게일 루빈은 평가한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섹슈얼리티 이론에서 페미니즘이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거나, 그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전제에 도전하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젠더 억압에 관한 이론이다. 이러한 사실이 자동으로 페미니즘을 성 억압의 이론이 되게 한다고 추정해버리면, 한편의 젠더와 다른 한편의 성애 욕망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여성 거래」「성을 사유하기」 두 텍스트 간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루빈은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젠더 정체성 형성을 인과적으로 연결시키는 섹스/젠더 체계라는 개념을 구상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는 섹슈얼리티 체계와 젠더 체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젠더 체계를 중심으로 보는 사유이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의 사회적 조직을 온전히 망라할 만한 관점이 없다”고 평가하며, 이후 퀴어 이론의 전개를 암시한다. 마치 맑스주의적 분석으로 젠더의 사회적 구조라는 쟁점을 다룰 수 없듯이 젠더 억압을 중심으로 놓는 페미니즘의 분석으로는 섹슈얼리티 위계까지 포괄하여 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거래」에서 주요하게 사용했던 개념을 「성을 사유하기」에서 철회하는 중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두 텍스트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 거래」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곧 여성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주요 목표 역시 섹슈얼리티의 궁극적인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성 거래」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젠더 정체성의 구속으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성을 사유하기」에서의 섹슈얼리티 해방은 궁극적으로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인해 숨어 다니지 않으며, 상대방을 찾지 못해 오랫동안 외로워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즉 섹슈얼리티 그 자체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게일 루빈의 사유는 섹슈얼리티를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자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으로 상정했던 그 당시 페미니즘의 일방적인 흐름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성 전쟁에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의 성에 대한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여, 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사유를 급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퀴어이론의 출현을 암시하였다. 성 전쟁 이후 등장한 제3물결 페미니즘은 기존의 제2물결 페미니즘의 한계를 넘어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성 해방을 주요한 의제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이때 게일 루빈의 사유는 큰 참조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루빈의 「성을 사유하기」는 페미니즘 운동사의 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철분과의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연재는 여기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