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6월 마당(3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6월 마당(3회차)

2월에 시작한 철학 마당이 이제 3회째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윤구병 선생님의 사상적 편력과 깊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6월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6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인도철학에서 ‘같잖은 생각을 한 사람들’
  – <반야심경>, <중론> 등
* 일시 : 2019년 06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 공동좌담자(가나다순) :

①김제란(동국대학교 동국역경원)

②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③이병창(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④이현구(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초빙교수)

⑤최유진(경남대학교 교수, 불교철학)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 이후 일정 ***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
* 일시 : 2019년 0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㉙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 나라의 기원: 자족하지 못함, 서로의 필요에서 생긴다(369a-369c)

 

* 문자의 비유는 이미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란 다만 이기적 개인들의 집합체일 뿐이며 개인이 사회에 빚진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국가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처럼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화된 전체로서 각 부분은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보전의 기초로서 생명의 유지를 위한 내적인 통일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즉 사회는 단순히 분리되어 고립된 단위들로 간주되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 사회는 부분들의 속성들의 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이익의 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이익 즉 공동체 자체의 이익을 갖는다. 이것이 곧 독립적인 개인들의 이익의 단순한 통합과는 구별되는 사회적 이익 내지 공공의 이익이다. 그러나 이 공공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공공의 이익 또한 개인들의 이익이되 개인 모두가 공유하는 이익이다. 유기체의 경우 기관들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고 몸 전체의 건강이 담보되어야 각 기능의 온전성도 담보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각 개인 또는 계층들이 서로의 유기적 의존성을 토대로 본성에 따라 자기들 고유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국가 공동체의 행복이 구현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담보되어야 각 개인들과 계층 또한 자신들의 본성에 맞는 욕망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 이처럼 플라톤은 논의 방법론과 관련한 논의에서부터 이미 단순한 논의 방법론을 넘어 그가 펼칠 정의로운 국가의 기본 성격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다. 곧 이어 펼쳐지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주장 역시 이러한 국가의 유기체적 성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369b]

* 소크라테스는 먼저 나라를 수립시키는 기원ἀρχὴ부터 언급한다. 즉 나라의 기원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ἐπειδὴ τυγχάνει ἡμῶν ἕκαστος οὐκ αὐτάρκης, ἀλλὰ πολλῶν ὢν ἐνδεής이라고 말한다.

 

[369c]

* 이런 경위를 통해 각자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되어 동반자κοινωνός 및 협력자βοηθός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공동생활체συνοικίᾳ에다 ‘나라’πόλις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이론상으로 수립되는 나라는 필요χρείᾳ로부터 그 수립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369d]

*그에 따라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πρώτη γε καὶ μεγίστη으로 생존을 위한 음식물τροφή, 둘째는 주거οἴκησις, 셋째는 의복ἐσθής 및 그와 같은 유의 것들이 필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부ὁ γεωργός, 집짓는 사람ὁ οἰκοδόμος, 직물을 짜는 사람ὁ ὑφάντης 그밖에 제화공ὁ σκυτότομος이나 신체와 관련되는 것을 보살피는 사람ἤ τιν᾽ τῶν περὶ τὸ σῶμα θεραπευτήν 즉 최소 다섯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최소한도의 나라, 최소 필요국ἥ ἀναγκαιοτάτη πόλις은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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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나라체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법률> 3권 서두부분(676a~)의 내용과도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이야기가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서술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어왔다. 우선 역사적 서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 최소한도 국가에서 호사스런 나라로의 변화가 규모의 증대에 기초하고 있고 규모의 증대는 인구의 증가 등 시간적 흐름과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게다가 나라가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큰 문자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의 나라의 변화는 소문자인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최초의 국가와 그 이후의 국가의 변화는 생존만 충족되면 더 이상을 바라지 않는 어린 아이의 욕망 단계를 넘어 점차 욕구가 확대되고 사치심이 생겨나면서 그에 따라 타자의 욕망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성인들의 욕망 단계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곳 이야기는 겉으로는 역사적 서술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차 논하게 될 현실의 국가가 어떤 배경에서 정의와 더불어 부정의가 함께 생겨나는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논리적 설명에 강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생명체에서 질병의 이유를 밝히려면 질병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기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장차 현실의 나라에서 부정의가 생기는 이유를 밝히려면 부정의가 생기기 이전의 최소한도의 국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이 생기는 것은 성장 때문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사실 때문이므로 이곳 이야기는 나라와 개인들의 기원이나 성장 과정에 대한 역사적 진술이 아니라 개인과 나라의 요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소한도의 나라가 최초의 나라라면 이 나라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된다는 서술 자체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최초에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한 가족을 나라로 보기도 힘들거니와 가족의 구성원에는 일을 하지 못하는 유아도 있었을 것이고 게다가 나라가 최소한 한 가족 이상으로 구성되는 한, 다섯 사람은 넘었을 것이다. 설사 일하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었다 해도 가족 단위에서 서로 다른 일을 전문으로 했다고 보기도 힘들거니와 무엇보다도 농사라는 일 자체가 원시시대 수렵채취 시기 이후에 나타난 것임을 고려하면 이미 이곳 이야기는 나라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 기술과 거리가 멀다. 그렇게 본다면 이것은 실제 나라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다섯이란 숫자 또한 최초의 나라를 구성하는 최소한도의 사회적 기능들의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주장 가운데 어떤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단적으로 가려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인과적 설명에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일반적 설명도 있지만 시간적 선후를 갖는 특수한 사실에 대한 인과적 설명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국가>에서 역사적 변화 과정을 그린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이곳 이외에 또 있다.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하여 참주정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제8-9권의 내용이 그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토인비(A. Toynbee)는 이 내용을 기초로 플라톤의 역사관을 쇠퇴사관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의 쇠락을 개인 영혼의 타락과 병행해서 설명된 것에서도 시사되듯이 그것은 정치체제의 변화와 개인의 욕망 간의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역동적인 체제 변동론 내지 도덕 심리학으로서 무엇보다도 그 변화의 방향이 쇠퇴와 진보 내지 회복 양쪽 방향에 다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부정의와 불행의 근본 원인과 양상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고찰이라 할 것이다.

* 그런데 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나라의 기원이 개인들 각자가 자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근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상호 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삶의 보전을 위해 상호 협동적이며 의존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나라 또한 그에 따라 본질적으로 그러한 개인들의 본성에 기초하여 상호 호혜적인 협동체 즉 공동체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장차 플라톤의 국가 구성 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구성한다. 즉 플라톤은 앞서 글라우콘이 나라의 기원으로서 주장한 사회계약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글라우콘은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에서 지배 능력이 없는 다수의 약자들이 소수의 강자들로부터 최소한의 안전과 공존을 담보하기 위해 서로 약정을 맺은 데서 나라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나라는 본성적으로 상호 협동적인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스스로의 삶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배타적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그것을 관철할 힘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자기 보전을 위해 상호 약정을 맺어 성립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들 모두 만약 자기에게 힘이 생기면 언제라도 이러한 약정을 몰래 어기거나 뒤집으려 한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글라우콘의 이러한 견해는 자연 상태로부터의 최초 국가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참주를 비롯해 사회적 강자의 전횡을 막아내고 어느 정도 대중의 연대가 가능하게 된 기원전 4세기 당대 아테네의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민주정이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소피스트들이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배경으로 득세했음을 고려하면 나라의 기원에 대한 이곳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러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이기적 욕구와 맞물려 등장한 포퓰리즘적 민주정과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 <법률> (676a~680e)에서도 플라톤은 나라 체제의 기원을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프로타고라스> 322b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나라의 기원을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모여 살게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야생의 사나운 동물들을 폭력적인 사회적인 강자로서 참주에 비교한다면 나라의 기원에 관한 프로타고라스의 견해와 이곳에서 글라우콘이 대변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 등 소피스트들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플라톤이 그리는 최초의 국가는 마치 질병이 없는 건강한 몸과 같다. 소크라테스가 후에(372e) 이 나라를 ‘건강한ὑγιής 나라’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평생 동안 몸에 질병이 전무할 리 없다. 질병이 없는 몸은 현실의 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국가는 현실에서 상존하는 국가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러한 국가가 우리가 추구할 이상국가도 아니다, 질병이 없는 상태로 상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국가는 질병이 있되 그것을 잘 억제하고 대응하여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는 나라이다. 다만 질병을 달고 사는 현실의 몸을 설명하려면 건강한 몸에서 어떻게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듯이, 장차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고 있는 현실국가를 논의하려면 나라에서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시원적 배경과 원인을 살펴야 하므로 사회적 갈등 이전 상태의 나라 즉 최소한도의 국가, 최초의 국가가 제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흔히들 우리가 말하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최초의 국가도 아니고 아예 실현 자체가 불가능한 상상의 나라는 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현실의 조건 위에서 최선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최선의 나라를 의미한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은 나오지 않으며 다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라는 표현만 나온다.

 

2-3. 최소한도의 나라와 분업의 발생(369e-371a)

 

[369e-370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나라에서 분업이 생기는 배경을 설명한다. 즉 나라에서 한 사람은 자신의 일ἔργον을 모두를 위한 공동의 것으로 제공해야한다ἕνα ἕκαστον τούτων δεῖ τὸ αὑτοῦ ἔργον ἅπασι κοινὸν κατατιθέναι는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는 나머지 네 사람의 식량을 함께 생산하여 그것을 그들과 나누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그런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70b-c]

*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πρῶτον , 사람은 각자 성향에 있어서 다르게 태어나서ἡμῶν φύεται ἕκαστος οὐ πάνυ ὅμοιος ἑκάστῳ, ἀλλὰ διαφέρων τὴν φύσιν 일 또한 저 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둘째πότερον, 각각의 것이 더 많이πλείω, 더 훌륭하게κάλλιον, 그리고 더 쉽게ῥᾷον 이루어지는 것은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성향에 따라κατὰ φύσιν 적기에ἐν καιρῷ 하되, 다른 일에 대해서는 한가로이 대할 때이기 때문이다σχολὴν τῶν ἄλλων ἄγων, πράττ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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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수행하는 일들의 기능적 고유성과 전문성, 분업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 부분은 나라의 기원을 개인의 비자족성, 상호 호혜적 의존의 필요성에서 구하는 앞서의 주장과 더불어 장차 제시될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그러한 주장의 필연성은 이미 플라톤이 큰 글씨 작은 글씨 비유에서 나라를 유기체인 개인의 확대로 보고 있는 것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유기체로서 개인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모두 하나 같이 서로 태생적으로 다르고 각기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최선으로서 자신의 건강한 보전을 위해 유기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적기(適期)καῖρος(kairos)와 한가함에 대한 설명 또한 분업의 효율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테면 농부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잘 수행한다는 것은 파종과 양육과 추수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적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언제든 그 적기에 임할 수 있도록 그것을 방해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한다. 즉 적기를 놓치게 하는 일로부터 손을 뗄 수 있는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농부의 일은 자연의 순환에 바탕하고 매년 반복되는 일이므로 어느 정도 적기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의사와 같이 병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적기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적기를 예측하기 힘든 일일수록 적기를 놓치지 않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환자가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넋 놓고 다른 일에 부름을 당하거나 그곳에 매달린다면 제대로 질병을 치료할 수 없고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의사는 치료를 위한 것 이외의 어떤 일로 부터도 한가로움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농부나 의사 모두 한가로운 사람은 아니다. 농부는 농한기를 맞이하더라도 지난 농사일을 뒤돌아보면서 시행착오와 경험을 정리 기록하는 등 내년 농사를 준비해야 하고 의사 역시 환자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에는 보다 효율적인 치료술 연마에 힘써야 한다. 다만 이곳에서 말하는 한가로움σχολή(scholē)은 ‘그것을 저해하는 일로부터 손을 뗀다’, ‘그곳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한가로움이다. 이른바 지식인이 한가로움의 뜻을 가진 scholar로 불리게 된 연유도 이것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원래 지식인 계급은 왕이나 사제, 귀족 등 권력자가 나랏일이나 자신의 일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 일부 지능이 높은 사람을 불러들여 다른 일에 시간을 쓰지 말고 머리로 자신을 돕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식인은 머리 쓰는 일 이외에는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일단은 고역스런 육체적 노동에서 벗어나 한가함을 누린다는 점에서 scholar로 불리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원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지식인 계급이 본질적으로 권력자들의 참모 역할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무려나 지식인은 공동체적 삶의 보전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만을 고하는 참된 심부름꾼이자 정직한 충신일 수도 있지만 언제라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빌붙어 권력의 아류이자 부역자로 전락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는 분업은 이른바 마르크스(K. Marx)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과 다르다. 우선, 플라톤의 분업은 본성에 따른 것으로서 자기 삶과 공동체의 적극적 보전의 방책이다. 즉 분업의 효율성은 자기와 공동체의 이익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분업은 생산의 효율을 통한 자본의 확대 즉 자본가의 이익 창출을 위해 자본가가 계획한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의 욕망에 거슬러 불가피한 임노동 조건에 따라 강제된 단순 반복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효율성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온전하게 노동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즉 분업은 자본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착취의 방책이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분업은 단순히 분업이 지향하는 경제적 효율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본성에 따른 욕망을 구현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기와 공동체의 건강한 보전에 기여 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원리 이전에 도덕의 원리이자 건강한 사회관계의 원리이다. 아무려나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에 종사 한다’는 원칙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장차 정의로운 국가의 핵심 원리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정치라는 중대사에 따로 전문성을 두지 않고 시민이라면 아무나 간여할 수 있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비전문성과 반공공성을 공격하는 기본 근거가 된다. 이 원칙은 <법률> 846d-847b에서도 재차 강조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역시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플라톤의 비판에 열려 있다. 플라톤에게는 정치의 민주화 이전에 정치의 질적 토대로서 정치의 지성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정치의 지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주정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민주정 역시 당시 아테네 현실이 보여주듯이 포퓰리즘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향φύσις(physis)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 인간 영혼의 본성을 의미하며 제2권에서 제4권까지 핵심용어를 구성한다. 이것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되고 고유한 개인성이다. 물론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전제이지만 최소한 플라톤에게는 그것은 피폐한 현실을 넘어서는 근본 바탕이자 힘이며 앞으로 건설할 정의로운 국가의 기초로 선언되고 유포되어 소피스트적 담론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구이자 사람이라면 마땅히 받아 들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370d-e]

* 그런데 농부는 쟁기나 괭이 그 밖에 농사와 관련되는 다른 도구ὄργανον들이 필요한데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에 더 많은 시민이 필요하다. 나머지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따라 목공τέκτων, 대장장이χαλκεύς, 목동βουκόλος과 목부νομεύς 등 이런 부류의 많은 장인들δημιουργοί이 작은 나라πολίχνιον의 동반자들이 되어 나라는 커진다. 게다가 쟁기질을 위한 소βοῦς, 제화공을 위한 가죽δέρμα과 양모ἔριον 그리고 건축 재료 등의 이용과 운반을 위한 짐승ὑποζύγιον들도 필요하다. 나아가 나라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나라로부터 조달 받고 그런 것을 조달해주는κομιοῦσιν 사람도 필요하다. 이른바 유통을 담당하는 무역상ἔμπορος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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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법률>이 세우려는 바람직한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에 수출할 정도의 잉여를 생산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고 최대한 자급자족을 강조한다. 그곳에 세워지는 나라는 가까이에 이웃 나라가 없다.(<법률> 704a-705b)

*‘상대방 나라에 빈손으로 가면 빈손으로 온다’는 말 또한 상호 호혜적 의존성을 내포하는 본성의 연장선상에서 언급된 말이다. 이 말에는 외국과의 모든 거래는 물물 거래이고 외환 거래는 없으며 화폐는 국내에서만 유통되었다는 당대 역사적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 이제 최초국가에서의 필요가 제조업을 넘어서 상업 및 유통 등을 비롯한 서비스업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런 요구는 바로 이어 화폐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 2019년 봄 제56회 정기 학술대회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창립 30년 기념, 2019년 봄 제56회 정기 학술대회를 아래와 같이 안내합니다.

회원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참석 부탁드립니다.

—————-<아 래>——————

○ 주제 : 분단 극복의 시대 남·북 철학 학술교류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주최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일시: 2019년 06월 08일 토요일 13시~18시
○ 장소: 숭실대학교 한경직기념관 – 숭덕 김덕윤예배실

○ 학술대회 프로그램 안내

○ 한경직기념과 김덕윤예배실 찾아오는 길

○ 뒤풀이 장소: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 2번 출구 뒤쪽 ‘미주알고주알’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62길 29, 전화 : 02-817-8892)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피켓2030]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영주

 

.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첫 수업시간에 스무 살이라는 시를 교수님이 칠판에 적으셨다.

너무 행복해서 길에 있는 돌멩이에다가도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는 스무 살, 나의 스무 살은 어땠던가. 나는 그때쯤 정말 많은 책을 찾아 읽었었다. 스무 살,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다고 알게 해준 시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던 그저 평범한 ‘옆집 착한 딸’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항상 또래집단에서 ‘우월한’ 쪽에 속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히 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의사가 되길 원하셨고, 나도 나쁠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의사가 될 줄 알았다. 고등학교, 처음으로 조금 더 큰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갔고, 나는 그곳에서 정말 많은 다양한 출신지의 친구들을 만났다. 나와는 다르게 뚜렷한 목표가 있던 친구들도 많았고, 돈과 시간, 어느 쪽이고 열심히 서포트 해주시는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매일이 경쟁이라던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와 필기 하나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버팀목은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과 정말 사소한 오해와 시간이 쌓여 멀어지고 나서, 세상의 전부와 같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 안의 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공부보다는 내일의, 아니 오늘의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던 열아홉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스무 살, 성인이 되어있었다.

내가 책을, 그중에서도 자기 계발 서에 집중해서 읽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이렇게 스무 살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어떤 것을 시작하기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어떠한 자격증도 없었고, 하고 싶었던 것,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나보다 더 오랜 삶을 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의 저자 중 하나쯤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그 책을 통해서 인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책으로의 도피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채 3개월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 서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한 것일까?

 

.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누가 만들까? – 우리 사회는 왜 아플까

짧은 인생동안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던 것이 수능이었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 역시 수능과 관련해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고3이었을 때, 수시 원서를 넣으면서 친구들과 만약 원하는 대학에 붙지 못하고 하향해서 대학을 가야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재수는 없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어떤 친구는 1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혹은 학교를 다녀보고 다시 공부할지 생각해본다는 친구도 있었던 것처럼 각자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해 각자의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행복과 불행에 대해 갖는 나의 의문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2)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꼭 불행일까?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문제가 있는 삶일까?

첫 번째, 즉 행복과 불행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만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에서 말하는 우리 사회가 왜 헬조선인지 규정하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모든 감정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왜 모두 헬조선이라는 말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인적 자원을 통한 성장을 이룬 나라이다. 나라의 교육 역시 성적의 서열화, 즉 줄 세우기를 통해 평가하고,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대기업이나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이 원할만한 남들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 자신을 마케팅 해야 한다. 끊임없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에 의해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친구, 아빠의 직장동료들의 자식들과 비교당하고, 그 아이들은 커서 사회에서 비교를 당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비교를 반복할 것이다. 사회의 큰 변화가 있어서 이러한 사회구조가 변화하기 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타인의 행복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 어떤 삶을 살더라도 만족하기 쉽지 않고, 헬조선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각자의 행복의 기준이 다르고, 각 나라별로 사회구조와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의 기준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동적이지 않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잠깐 동안 내가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수생도 아닐 때 주변에서는 나를 걱정한다고 하고 부모님께, 그리고 나에게 ‘뭐 해먹고 살래’와 같은 걱정과 같은 부담을 주곤 했다. 부모님은 그 시기동안 정말 하고 싶은 것 –공부가 아니어도 좋으니-를 찾으라고 했었지만, 사실 정말 오랜 시간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잊고 살았더니 어떤 것을 내가 앞으로 배우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커져갔다. 결국 다시 공부를 택해서 이렇게 대학생이 되긴 하였지만, 앞으로 남은 생이 이렇게 긴데 그 짧은 시간동안 고민해서 어떤 일을 배웠다고 내가 그 일을 평생 즐겁게 하면서 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자신하지 못한다. 공부는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로 작용되긴 하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는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장기적인 나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결정하고 결과를 얻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두 번째, 행복하지 않다고 그것이 꼭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행복과 불행, 이러한 감정이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 느끼는 이 불행이라는 감정을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잔병을 앓으면서 병원에 자주 가고, 이를 통해서 큰 병을 예방하기도 하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불행은 때로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었던 에세이 중에서 인상 깊었던 ‘스물아홉 생일, 일 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아마리는 스물아홉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불우한 처지, 오랜 시간 사귄 남자친구와의 결혼이 불확실해 지고, 파견직 직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여자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해 정확히 일 년 뒤, 서른 살의 자신의 생일이 오면 죽기로 결심했던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 자신의 개인적인 다짐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생을 건 한판- 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면서 점차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마침내 게임에서 이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엔딩을 보면서, 그녀에게 있어서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러한 이유들이 나에게는 빈약하다고 느끼는, 개인의 기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과, 끝을 정해두고 나서 다시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열심히 살 것이라는 원동력을 부여받는 것을 통해, 가장 불행했던 순간에서 그동안의 자신을 뒤돌아보고, 재정비함으로써 결국 앞으로의 행복한 삶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진, 개개인이 불행함을 느끼는 아픈 사회임은 맞다. 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진정한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사회도 변화하고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 그래서 나는 충분히 잘 삽니다

세 번째 단락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광고의 카피문구에서 따왔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현재의 나의 위치가 아쉽다고, 너는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지금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은 관심이 있다고, 나는 지금 어쩌면 지쳐서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내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부분까지도 고려해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바쁘게 과제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위해 하루하루 지내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하다. 남들이 봤을 때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앞으로 힘들 일이 많을 수도 있고, 고민도 생기겠지만, 그 상황 역시 나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들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와 평범한 남자의 사랑을 정신과 의사인 여자주인공은 그들의 사랑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는 왜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했을까? 비록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분명 중간중간 두 사람에게 쉽지 않은 시간들이 지나가겠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지금의 관계에서 행복감을 느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현재 그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그들이 어떻게 해쳐나갈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미리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불안함만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니 정말 나를, 누군가를 위한다면 걱정과 불안보다는 믿어주고 응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과 안녕하기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매트릭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를 배신한 사이퍼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진실을 알고 선구자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나의 평온함과 행복을 깨고 불안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딛는 것이 과연 쉬운 선택일까? 진실을 알고서도 덮고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현실은, 물론 부정할 수 없고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실을 향해 다 같이 나아갈 것이다. 삶에 있어서 큰 변화이기도 하고, 우리가 선택하고 마주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당장 그 현실과 같은 불안을 안고 매일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나를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현실적인 말,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여전히 불행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그들과 작별하려고 한다. 이 ‘안녕’은 그들과의 헤어짐과 동시에 나 스스로의 평온함, ‘안녕’을 추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길게 행복과 불행,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지금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불안과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거리두기 -작별하기- 를 선택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이 선택에 대해 미래에 후회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 필요한 사람은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미리 불안에 떨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행복의 기준이다.

나는 단지 지금의 나에게 충실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을 뿐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고 호혜주의이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힘의 증가이다.

 

우리는 앞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에서 나 자신의 유용을 위해서만 합의에 동의한다.”(351)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 사용하므로 ‘서로에게’ 자기향유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의무는 결국 나에 대한 나의 의무이고 이것이 에고이스트의 사랑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고 상호적 자기 향유라고 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리고 내가 같은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나는 개인이 실현할 수 있었던 권능보다, 합의를 통해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내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하여, 의심할 바 없이 그와 의사소통을 한다. 이러한 유대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유대가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유대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유대는 어떤 –연합(Verein)이다.” 349

 

이렇듯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신의 힘의 증가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증가라는 조건에서만 유대를 유지하므로, 이러한 조건에 어긋나면 에고이스트는 유대, 혹은 연합을 중지할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에고이스트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 사라지거나 폐지되는 관계를 지양한다. 유대, 연합의 관계 맺기는 힘의 증가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힘의 증가는 왜 일어나는가?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기분 좋음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324) ‘공감’하는 존재이기에 힘의 증가도 가능하다. 공동의 권능을 통하여 나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이 유대이자, 연합이다. 연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에고이스트 사랑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앞서 에고이스트 사랑은 ‘서로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 사랑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낭만적 사랑과 에고이스트의 사랑을 구별해야 한다.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이미 그 내용을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낭만적 사랑은 무엇인가? 낭만적 사랑은 위선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우리 시대에 ‘위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 곧 ‘자기기만’, 대상을 위한 대상의 사랑을 위하여 맹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 7월,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의 제정ㆍ공포에 따라 행정자치부에서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여 새로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규정하였고,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초기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이고 1974년 이후 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맹세는 지난 1972년 당시 문교부에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해 왔다. 그런데 국가가 개인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전근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35년 만에 시대흐름을 반영한 내용을 담게 됐다고 한다. 과연 시대의 흐름을 반영했을까? 이 맹세는 충성의 맹세를 일방적으로 ‘고취시키는 교육’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교육을 신성한 것을 만들어 내는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지난번에 썼던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을 상기해 보자. 이러한 교육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 곧 나다움이 아니라, 신성한 것에 굴복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훈육되는 것이고 신성한 것, 곧 “조국과 민족”이든 “정의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인데, 이는 ‘자기 굴복’, ‘자기비하’이다. 이러한 신성화에 대해 슈티르너는 신성한 대상에 대한 ‘신성모독’, ‘탈신성화’,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선포를 통해 ‘나다움’을 찾고자 하였다.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대상의 사랑, 조국애이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다. 슈티르너는 그러한 고정된 자아로 자신을 이해하지 말고 ‘창조적 무’라는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슈티르너의 주장으로 이 맹세문을 나를 위한 맹세문으로 변주하면 어떨까?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내 유일성 앞에 자기결정과 자기의지의 자율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하는 나에 대한 관심보다 나를 위한 나의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에고이스트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기 힘을 증가시키는 관계 맺기가 에고이스트 사랑이니까. 보다 정확히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호혜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이 점에 관해 조금 더 주목해 보자.

 

  1. 사랑은 호혜주의이다.

우선 슈티르너가 ‘호혜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해 보자.

 

교류는 호혜주의(Gegenseitigkeit)이고, 개별자의 행위이며, 개별자의 콤메르키움(commercium)이다. (239)

 

강당처럼, 그렇게 교도소는 틀림없이 일종의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지만(예를 들어, 노동 공동체), [241]결코 어떤 교류도, 어떤 호혜주의도, 어떤 연합(Verein)도 만들지 못한다.

 

정리하면,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commercium)은 하나의 묶음이다. 콤메르키움은 상업, 교류를 뜻한다. 이렇듯 호혜주의는 교류, 연합의 원리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류, 호혜주의, 연합, 콤메르키움을 같은 범주로 분류하고 사회, 협동조합, 공동체를 다른 범주로 구분한다. 전자는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면서 ‘호혜주의’를 요구한다. 그럼 후자의 범주는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친절’(Liebesdienste), 자비, 연민 등등”이다.

 

차라리 나는 그들의 ‘친절’, 자비, 연민 등등에 의존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자기 유용성에 의지하고자 한다. 인간의 자기 유용은 호혜주의를 요구하고(당신이 나에게 하듯, 그렇게 나도 너에게), 아무것도 ‘헛되이’ 행동하지 않고, 노력하여 획득하고 –보상을 치르고 얻을 것이다.(347)

 

또한 에고이스트 사랑은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은 확실히 도로 돌려줄 수 있지만, 상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Gegenliebe)에 의해서만 지불될 수 있다(“가는 호의가 있으면 오는 호의가 있다”;속담).348

 

  1. 에고이스트 사랑은 취득자의 사랑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말하는 사랑은 ‘주는 사람, 선물을 주는 사람, 애정이 깊은 사람’(Liebevollen)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얻는 사람’(Nehmenden), 혹은 무엇을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 곧 ‘취득자’(Aneignenden)(346)의 사랑이다. 슈티르너는 ‘Nehmenden’와 ‘Aneignenden’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곧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학위를 취득하다.”는 것은 학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독일어 ‘Aneignenden’에 주목해 보자. 이 단어의 동사 ‘aneignen’는 ‘무엇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영어 본에서 ‘appropriator’로 옮겼다.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에 원인을 두고 있는 그런 사랑이다. 이 단어는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이 노동자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고 노동의 결과물을 자본의 소유로 이전하는 모습을 말할 때 주로 섰다.”([생각하는 마르크스], 백승욱, 북콤마, 97쪽)

다르게 생각해 보자. ‘Aneignenden’을 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취득자’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자기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는 그런 사람이다. 더 이상 주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취득자의 사랑이다. ‘취득자’는 ‘소유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취득자는 자기 유용성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와 그 능력의 결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형식적으로 주어진 법률적 주어짐,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슈티르너는 주장하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 맺기는 자기 유용성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무엇이 모두의 소유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다시 말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사회적 소유는 쓸모없다. 사회적 소유는 개인의 소유로 전용되어야 쓸모 있다.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드는 것이 보다 근원적이지 않을까?

유일자를 설명하거나 의미하는 많은 말들 중에 유일자는 취득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일자는 취득자이고 소유자이다. 어떤 능력의 소유자는 자신의 창조자이다. 이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취득자인가?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인가? “너는 너의 창조물(Geschöpf)로 존재”하는가?(39) 나는 나를 창조하는 창조자이자 내가 창조한 창조물인가?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 [철학자의 서재]

책 읽어주는 시간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긺,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arte, 2017.

1957년 스푸트니크가 지구 밖으로 쏘아올려졌다. 이제 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지금이야 별일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p. 18)이나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로서 한나 아렌트에게 이 문제는 어쩌면 ‘인간의 조건’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 작업, 활동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해 세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미래에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하지 않거나 변경될 것이다. 일단 아렌트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그 성격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아렌트에게 ‘노동은 생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고 ‘작업’은 인간이 공작물을 만들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삶은 끝나도 이 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행위로 보았다. 그리고 ‘활동이란 이 공작물을 이용하면서 ‘정치체’를 만들어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체’ 안에 사람들이 존재했던 증거가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p. 43).

 

여기서 ‘활동’은 하나의 목적을 갖지 않는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목적 지향성을 비판한다. 목적은 그 목적을 향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렌트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항상 자유를 향한 ‘활동’을 중시(p. 59)한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맺는 ‘활동’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없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노동, 작업, 활동 중 타자의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은 ‘활동’ 뿐이다(p. 82). 아렌트는 이 복수성을 균질화하면 대중사회가 되고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다고 본다(p. 99). 아렌트에 의하면 대중사회의 대중은 똑같이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아 그저 떠내려가는 것일 뿐, 자발적으로 ‘활동’하려고 하지 않는다(p. 132). 근대는 공적 영역의 ‘활동’이 의미를 잃고 모든 인간 행위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p. 182).

 

노동만을 중시하게 된, 근대인이 지향하는 ‘부’는 자기를 재생산하려는 생명을 중시하는 것일 뿐 시민에게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서사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세계’를 짓밟고 부서뜨린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다(p. 204). 근대인은 ‘사적’인 일에 집중하면서 ‘공통세계’로부터 소외되었다(p. 209).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 본질이라 했지만 아렌트는 노동을 통한 생명의 무한 증식과, 부는 인간을 공통세계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p. 218). 기술이 진보하고 노동이 기계화되는 시대에는 더욱 인간이 자발성을 발휘할 여지는 줄어든다(p. 219).

 

기계에 의해 노력할 여지가 없어지면 이제 인간은 그저 생명과정으로 회귀해갈 것이며 소비 욕구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소비의 가속화에 의해 진행되는 상품사회에서 사물은 내구성을 잃게 되고 점점 공통세계는 해체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요 논지이다(p. 229).

 

상품 사회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p. 297).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지배적이라고 비판했던 마르크스에 대해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공적 영역’을 거부한 것은 아니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p. 307). 아렌트는 노동보다 ‘언론’과 ‘활동’을 인간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p. 333).

 

언론과 활동은 사회를 전제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정치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활동과 언론의 의미를 공동체 안에서 전승해 가는 역할을 맡는 것은 예술작품이다(p. 368). 아렌트는 노동은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인간은 세계에서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고독한 대중이 될 뿐이다. 이것을 아렌트는 ‘세계 소외’라 부른다(p. 442). 뿐만 아니라 기계화, 자동화는 세계의 해체를 촉진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의 세계는 개개의 가설이나 명제가 어디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고 체계와의 정합성이 있냐, 만이 중요할 뿐이다(p. 459). 수학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공통세계’가 나올 리가 없다(p. 465). 근대의 합리성, 즉 과학과 수학의 세계는 세계와의 접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 안에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만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로 축소되었다(p. 485). 이런 존재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공리주의에서 ‘행복’이라 말하는 것은 각 개체의 생명이 촉진되고 인간의 생명력이 촉진되고 번식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함을 뜻한다. 활동이나 작업 등 인간의 고유의 능력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p. 497). 근대는 이렇게 생명과 노동을 중시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능력은 쇠퇴해 예술가에게만 한정되어 있다(p. 502).

 

한나 아렌트의 근대성 비판은 지금 보아도 유의미한 것 같다. <인간의 조건>을 실제로 읽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이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늘날의 대중 사회를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㉘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 나라의 기원과 발달(368a-374d)

 

[368a]

*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반론과 요구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을 ‘그 어르신의 자제들’이라 부르며 그들의 자질φύσις을 칭송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이 메가라 전투에서 그들이 세운 수훈을 칭송하며 지었다는 시의 첫 구절도 인용한다. 그처럼 훌륭하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낫다ἄμεινον는 것에 설복당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실로 아주 비범한θεῖος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다름 아닌 그들의 생활방식τρόπος 때문임도 함께 밝힌다.

 

[368b-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과연 정의를 제대로 구조βοηθεῖν해낼 것인지 당혹스럽고 또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자신은 트라쉬마코스를 상대로 말로써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아직 숨을 쉬고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자로서ἔτι ἐμπνέοντα καὶ δυνάμενον φθέγγεσθαι 그것을 포기하고ἀπαγορεύειν 정의를 구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ὅσιον이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τὸ δεδιός을 안겨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 상책κράτιστον 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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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가리켜 ‘그 어르신의 자제들’ὦ παῖδες ἐκείνου τοῦ ἀνδρός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어르신’을 트라쉬마코스로 보는 주장도 있다.(J. Adam 각주 참고) <필레보스> 36b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필레보스로부터 논의의 권한 일체를 이어받은 프로타르코스를 두고 그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논의를 이어받듯 아데이만토스 형제 역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마치 자식처럼 이어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논의를 이어받은 것과 폴레마르코스나 프로타르코스가 논의를 이어 받은 것은 동기와 사정이 전혀 다르고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칭찬 또한 짓궂은 말투가 아니라 진지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그 표현은 바로 뒤에 나오는 ‘아리스톤의 아들’παῖδες Ἀρίστωνος에 대응되는 것으로 그 어르신 또한 그들의 부친 아리스톤Ἀρίστον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 플라톤의 어머니 페리크티오네Periktionē는 솔론의 가계를 잇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고 아버지 아리스톤은 자진해서 목숨을 바쳐, 헤라클레스 형제들의 아테네 침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 전설의 인물이자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코드로스(Kodros, 기원전 1089 ~ 기원전 1068년)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인용한 시를 지었다는 이른바 ‘글라우콘을 사랑하는 사람’ἐραστής이 글라우콘의 외삼촌인 크리티아스Kritias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동성애 관계에서 성인 남성을 가리키는 말 erastēs를 옮긴 것이다. 그의 상대인 소년 애인은 paidika라 불린다. 글라우콘도 관습대로 소년시절 소년 애인 역할을 한 것이다.

*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는 기원전424년과 기원전 409년에 일어난 전투가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그 가운데 어느 시기의 전투인지는 불확실하다. 서두 강해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의 대화상정시기를 기원전 410년경으로 추정한 초기 연구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기원전 420년 전후, 또는 멀게는 기원전 430년 이전까지도 상정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언급된 메가라 전투가 최소한 기원전 409년에 벌어진 전투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고 기원전 424년 전투로 보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만약 <국가>의 대화상정시기가 기원전 430년 이전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시대착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생 글라우콘이 기원전 424년 전투에 참여했다면 최소한 18살이 넘어 탄생연도가 기원전 442년 이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상정할 경우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동생 플라톤과 형들의 나이가 최소한 15살 이상 크게 벌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의 언급은 시기와 상관없으며 다만 플라톤이 형들을 <국가>에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미화의 일환으로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일부 연구자들은 아테네와 메가라 사이에는 위의 두 전투뿐만이 아니라 간단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전투를 굳이 위 두 시기의 전쟁 가운데 하나로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이곳의 메가라 전투 시기는 케팔로스와 프로타고라스, 프로디코스의 생존, 다몬, 소크라테스의 추정 연령대, 트라쉬마코스의 전성기,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의 투리오이 이주와 귀환 시기 등과 더불어 대화상정시기를 추정하는 주요 요소들이기는 하나 이들 요소들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까닭에 대화 상정시기를 추정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비범한(신적인)θεῖος 사람들로 평가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앞서 366c에서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두 부류 즉 ‘하늘이 내린 성품θεῖος φύσις’을 가진 자와 ‘지혜를 얻은 자’ 가운데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방식τρόπος은 이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을 뒷받침 해준다. 절도 있고 훌륭한 생활방식의 중요성은 앞서 케팔로스도 주장하고 있다.(329d)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생활방식은 하늘이 내린 성품에 기반한 것인데 비해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생활방식은 부(富)에 기반을 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자신이 행할 일을 ‘정의를 구조βοηθεῖν하는 일’로 표현하고 있다. 구조의 원어 boēthein은 구조(rescue)라는 뜻과 도움(help)의 뜻을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구조의 의미가 더 적절할 것이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물론 아데이만토스 형제가 실감나게 전해주는 당대 아테네의 부정의한 현실은 그야말로 정의가 나락에 빠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우위에 대한 제1권에서의 자신의 논증이 아데이만토스 형제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는(358b)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제1권에서의 논의가 갖는 불완전성과 한계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은 일시 그를 당혹하게ἀπορῶ 만들었지만 그러한 당혹감은 오히려 정의의 구조를 향한 새로운 다짐과 불퇴전의 각오로 이끄는 발판이자 도화선이 된다. ‘아직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결코 정의를 구조하는 일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를 구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두려운 일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선언은 부정의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는 삶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변명하는 우리들의 비겁한 마음에 준엄한 칼날을 겨눈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숨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정의를 구원하라. 정의에 눈을 감고 안주하는 것이 상책(가장 강력한 방책)κράτιστον이 아니라 비난받고 있는κακηγορουμένῃ 정의를 구원ἐπικουρεῖν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삶과 행복을 위한 가장 막강한 방책이다.’

 

 

2-1. 나라와 개인의 유비(368c-369a)

 

[368c]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에 앞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요구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여 제시한다.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논의를 포기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무엇이며τί ἐστιν ἑκάτερον 이들 둘의 이득ὠφελία과 관련된 진실τἀληθὲς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줄 것’

 

[368d]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탐구 과제를 보다 잘 탐구ζήτησις하기 위한 방법을 먼저 제안한다. 왜냐하면 착수하려는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자가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τὸ ζήτημα οὐ φαῦλον ἀλλ᾽ ὀξὺ βλέποντος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능하지도 않고οὐ δεινοί, 그다지 시력도 좋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같은 글자일 경우 큰 글씨를 먼저 보고 난 다음에 작은 글씨를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듯이 먼저 큰 글씨부터 보자고 제안한다. 즉 누군가가 그다지 시력이 나쁜 μὴ πάνυ ὀξὺ βλέπουσιν 사람들더러 먼 거리에서 작은 글씨γράμματα σμικρὰ로 적혀있는 것을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 그것과 똑같은 글씨들τὰ αὐτὰ γράμματα이 어딘가 ‘큰 곳에 더 큰 글씨로’μείζω τε καὶ ἐν μείζονι 적혀있다면 먼저 그 큰 글씨를 읽고 난 후 그것들이 작은 글씨와 같은지 아닌지를 살피게 된다면 아주 천행ἕρμαιον이라는 것이다.

 

[368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에 관한 탐구에서 그런 유사점τί τοιοῦτον이 있는 그 큰 곳을 발견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 큰 곳이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임을 밝힌다. 즉 정의에는 ‘개인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ἀνδρὸς ἑνός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정의’δικαιοσύνη ὅλης πόλεως도 있다는 것이다.

 

[369a] 그러므로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그런 다음 작은 것과 큰 것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 을 검토하면서 개인의 정의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무런 이의도 달지 않고 훌륭한 말씀καλῶς λέγειν인 것 같다고 동의를 표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나라를 ‘이론상으로 수립되고 있는 한 나라’ γιγνομένην πόλιν λόγῳ라고 부르고 그 나라를 관찰하게 되면θεασαίμεθα 그 나라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어떻게 생겨나는지γιγνομένην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36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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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수행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요구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해결해야할 과제들임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간명하게 정리한 내용은 그 자체로 그들 요구의 핵심은 물론 장차 <국가>가 다룰 기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내용적으로 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1) 모든 방법을 다해 정의를 구조할 것 2) 논의를 포기하지 말 것. 3)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가 무엇인지 밝힐 것 4)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과제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수행에 임하는 태도와 수행해야할 과제의 내용이다. 아무리 태도가 훌륭해도 내용이 부적절하면 무의미하고, 아무리 내용이 적절해도 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부실을 면치 못할 것이다. 1)과 2)는 과제 수행에 임하는 태도로서 적극적인 의미에서건 반성적인 의미에서건 소크라테스에 의해 여러 차례 표명된 바가 있다.(348a-b, 352d, 354b, 368b-c 등) 앞에서 ‘숨을 쉬고 말을 할 수 있는 한, 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다짐은 과제 수행자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의 극한치를 보여준다. 그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 특히 3)과 4)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수행해야할 핵심 과제로서 그 표현부터 매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의 대상에 부정의를 포함시키고 있다. 전기 대화편 이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사태를 우연적인 속성의 차원이 아니라 본질 그 자체의 측면에서 엄밀하게 규정해줄 것을 요구하거나 물을 때 쓰는 표현이다. 글라우콘 역시 자기가 말하는 것은 정의의 본질적 규정이 아니라 정의가 갖는 여러 우연적 속성들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정의의 ‘어떤 것’hoion einai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358c) 그 대신 ‘그것이 무엇인지’ti esti라는 표현은 소크라테스에게 엄밀한 의미의 규정 내지 본질을 물을 때 쓰고 있다.(358b) 소크라테스도 제1권을 마무리하며 그간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논의를 이끌어 왔다고 후회하면서(354c) 그 말을 정의에만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요컨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은 엄밀한 의미 규정을 자체로 내포하는 실재적 대상에 대해 그것의 정의 내지 규정을 물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정의를 비판할 때마다 부정의가 엄밀성을 결여하고 있는 무규정적 비실재임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아예 ti esti의 물음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았고 하물며 그러한 결함 하나에 기초하여 부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를 부정하곤 했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제 제2권에 들어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논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직격탄을 날린 후에(358b)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의 규정차원에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나 쓰던 ti esti를 놀랍게도 부정의에 대해서 물을 때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358b) 그리고 이런 연후 아데이만토스도 그에 이어 소크라테스에게 정의가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물을 때마다 매번(366e, 367b, 367e, 368c)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부정의도 정의와 마찬가지로 실체적인 힘을 갖고 현존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앞선 강해에서도 수차례 강조했듯이, 부정의가 근본적으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질 수 없는 비존재라는 것에 기초하여 논리적 규정차원에서 그 결핍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방식만으로는 결코 현존하는 부정의의 힘을 제거하거나 혁파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 형제들 모두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제 정의의 결핍으로서 부정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서, 부정의가 현실에서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영향력의 실체적 현존을 인정한 연후에 그것도 함께 규명되고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글라우콘의 요구를 받는 형식으로 직접 부정의에 대해서도 ti esti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ti esti는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정의(定義) 차원의 물음을 넘어 비록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나 현실에서 엄연히 실재하는 힘으로 현존하는 한, 그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구별과 구분, 이해를 확보하고 그 성격을 최대한 실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물음으로 확대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 정의와 부정의의 이익과 관련한 진실이 무엇인지 자세히 검토할 것이라는 요구 또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다. 정의가 어떤 좋은 것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글라우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도 좋은 것이지만 결과로도 좋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정의가 그 결과 때문에 값어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 때문에 좋은 것인지에 방점을 두고 대답해주기를 요구한다.(367c) 그러나 여전히 정의가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임이 밝혀져야 한다. 즉 정의는 현실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 점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사이다. 4)의 요구는 제1권 마지막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이익과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가 갖는 우위를 이제 본격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다루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정의론은 이른바 오늘날 윤리학적 기준에 따른 동기주의 내지 법칙주의 또는 결과주의 그 둘의 성격을 모두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을 함께 통일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그 구분 어디에도 선택적으로 귀속될 수는 없다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구를 간명하게 정리한 후에 그들의 요구대로 정의와 부정의가 각각 무엇이고 어떤 힘을 갖는 것인지를 보다 잘 탐구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탐구 과제가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잘 검토할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그 정도의 유능함을 갖추지 못한 터라 우리 수준에서 해당 과제를 잘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이때 제시되는 것이 잘 알려진 소문자·대문자 비유이다. 즉, 시력이 나쁜 사람이 어딘가 같은 글씨로 큰 글씨가 있을 경우 그것을 본 다음에 나중에 작은 글씨를 보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듯이 큰 글씨에 해당하는 것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 여기서 ‘탐구 과제가 눈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예리하게 보는 사람의 것’이라는 역문은 원어 paulon(쉬운, 사소한, 낮은 수준의)을 ‘예리한’oksy에 대비시켜 옮긴 것이지만 그와 달리 ‘일거리’τὸ ζήτημα를 수식하는 말로 해석하면 ‘쉬운 과제가 아니라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거리’로 옮길 수도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작은 글씨 즉 ‘개인’ἑνός에 대응되는 큰 글씨가 다름 아닌 ‘나라’πόλις라고 말하고 그 둘의 유사성을 검토해보면서 애초의 과제인 ‘개인의 정의’를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1) 개인은 개체인데 반해 나라는 집합체이다. 2) 개인은 유기체인데 반해 나라는 비유기체이다. 3) 개인과 나라는 오늘날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그렇듯이 서로 대립적이다. 요컨대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단순하게 대응 확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아데이만토스 형제는 위와 같은 그의 제안에 이의는 고사하고 훌륭한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어쨌거나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의아하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제안과 아데이만토스의 호응 모두가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그곳에 숨겨진 플라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일단 최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방식으로 간단히 음미해보기로 하자

* 소크라테스의 제안은 일단 겉으로는 개인과 나라는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성격의 것으로서 1대1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담고 것으로 들린다. 도대체 개인은 개체이고 나라는 집합체인데 어떻게 1대1로 대응한다는 것일까? 1대1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대응된다면 개인이 모인 그 개인들의 집단과 나라가 대응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유념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개인과 나라의 유사성은 모든 면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탐구하려는 과제는 우리가 앞서 살폈듯이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의 혼속에서 어떤 힘을 갖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에서 서로 비교해가며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각각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관련한 유사성이다. 이미 제1권에서도 비록 단편적이나마 개인과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정의와 부정의가 작용하는 방식이란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개인은 물론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이건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으면 우애와 협동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며 부정의가 깃들어 있으면 대립과 불화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351e-352a). 그런데 우애와 협동, 대립과 불화는 복수의 것 즉 여럿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개인에게서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지 제1권에서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서 우리는 제2권 이후에 펼쳐질 개인 영혼의 3분설이 그곳에 전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그렇다. 플라톤은 앞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개인은 3가지 서로 다른 영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모종의 집합체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 또한 서로 다른 계층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는 집합체인 것이다. 결국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개인과 나라가 서로 크기만 다를 뿐 1대1로 대응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의와 부정의가 혼들의 집합체로서 개인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과 계층들의 집합체로서 나라 내부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유사성인 것이다. 요컨대 개인은 생명체로서는 개체이지만 혼의 구성에 있어서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집합체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 내부에서의 관계방식과 나라 내부에서의 관계 방식 사이의 대응은 이미 본 강해 서두부분에서도 살폈듯이 politeia라는 말 자체가 개인이 자신의 혼들을 다스리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자 동시에 나라가 나라의 계층들을 다스리는 나라의 정치 운영 방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그 주장은 일단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모종의 같은 집합체라고 하더라도 생명체로서 개인들의 혼이 갖는 집합적 성격과 비생명체로서 나라의 계층들이 갖는 집합적 성격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그 자체로 생명의 보전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협동하는 그야말로 생명체이지만 후자의 경우 생물학적 생명체가 아니므로 서로 다른 계층들이 그 자체로 협동적이고 의존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배타적이고 대립적이다. 그래서 일부 메타윤리학자들은 이것은 사상가 개인의 소망과 당위를 사실과 자연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판이 갖는 타당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이곳에서도 글라우콘은 정의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사회계약설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358e-359b) 글라우콘에 따르면 개인들은 개인 내부의 영혼들이 그러하듯 서로 의존적이고 협동적이지 않다. 그들이 모여 약정을 맺고 법률을 만드는 이유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다. 개인들은 모여 살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약정을 맺고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에는 당대 아테네 현실은 물론 당대 주류 지식인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의 국가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왜 유기체인 개인과 나라를 내적 관계 맺음의 방식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이곳은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정의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제안에는 단순히 탐구 방식의 효율성 차원의 내용만 담겨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탐구방식을 위한 제언 자체에서부터 이미 글라우콘의 생각을 뿌리 채 부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읽어가면서 플라톤의 제안이 갖는 문제점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에 앞서 도대체 플라톤은 왜 당대의 주류 지식인들의 생각에 거슬러서까지 유기체인 개인과 비유기체인 나라를 1대1로 대응시켰는가를 들여다보았는지에 대해 우선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탐구 방식과 관련한 제안에는 글라우콘이 대변하는 소피스트 부류의 사회계약설적 국가관과는 정반대의 국가관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플라톤은 나라 또한 생명체인 개인과 동일하게 당연히 유기체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될 중차대한 진실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즉 나라와 법률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개인들이 관습과 타성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약정을 맺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협동적 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자연적 본성에 입각하여 그러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 그러한 국가의 기능을 유기적으로 극대화할 수 있는 내적인 협동심과 우애 또한 갖추고 있다. 그러한 한, 각자의 행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계층 구성 내지 공동체의 성립은 그 자체로 본성에 일치하는 자연적 욕구의 발현이다.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이 그의 사상 자체가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비난을 한다.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에서는 개인 보다 나라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든 개인의 행복 또한 나라의 보전과 안녕에 의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어떤 경우에서건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것은 개인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 플라톤이 말하는 나라와 개인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에만 기초하더라도 플라톤의 생각은 위와 같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와 거리가 멀다. 우선 나라와 국가가 유기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둘의 의존성은 선후상하가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리고 그 유기적인 성격을 개인과 나라로 분리하여 생각하더라도 그들 간의 예속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라가 행복하려면 각 계층들이 계층 스스로의 욕망에 부응하여 자신들의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방식으로 그들 서로 완벽한 협동과 조화를 이루어 내야 한다. 즉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각 계층들의 욕망 구현과 그것을 통한 행복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층들의 욕망 구현은 그 계층을 구성한 개인들의 욕망 구현 즉 각 개인의 내면에서 영혼들 간의 조화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의 내적 영혼의 조화는 그 자체로 이미 그 개인의 평화와 행복이다. 결국 나라가 행복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자 전제는 결국 개인이 구현하는 개인들 각자의 내적 평화와 행복이다. 이들이 불행하면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개인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고 계층의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나라의 행복은 담보될 수 없다. 물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이 희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생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그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며 그 어떤 강제도 주어져서는 안 된다. 나라의 통치자들 또한 스스로의 본성과 기능에 역행하여 자기만의 권력과 부를 누리면 이미 그 개인 자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없으며 그 자체로 그 자신은 물론 다른 계층들과 개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계층들은 상처나 위협에 대한 자기 방어 능력 내지 복원력이 그렇듯이 그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자구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가 건강할수록 그러한 부정의한 권력을 축출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그 만큼 빨라진다.

* 물론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고 현실에서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는커녕 그 반대의 경우가 다반사이다. 플라톤 역시 그러한 정의로운 개인과 나라를 구축해내는 것이 당대 아테네 현실 자체가 보여주듯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고 설사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에게 본성으로 구유되어 있더라도 그것의 발현이 필연적으로 담보되는 것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바로 이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한 나라를 관찰하게 된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물론 부정의 역시 생겨나게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즉 그는 지금부터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탐구하되 그저 이상적인 관점에서 낭만적으로 선언하듯 정의를 논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시시때때로 언급하고 있듯이 이제 정의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의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장애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부정의도 함께 살펴야 한다. 그래야만 당대 소피스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들이 얼마나 단견에 불과한 것이며 종래는 개인과 나라 모두를 불행과 파국에 빠트리는 것인지가 실질적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려면 부정의와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가 앞으로 펼칠 국가론은 말 그대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의 이상적인 ‘정의론’인 동시에 현실에서 늘 정의를 위협하고 강력한 힘으로 그 쇠락과 변질의 힘으로 작용하는 가장 피폐한 ‘부정의론’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과 나라가 유기체라는 진실은 본질적으로 이미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의 본성적이고도 자발적인 협동성을 전제하므로 그 자체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을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실천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전제하더라도 유기체는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수 있는 것 또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그 질병의 실체와 극복 방안 또한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건강을 보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부정의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 언급은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축이 이루어진 후에 제8권에서 제9권에 걸쳐 정의로운 나라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들과 타락의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분석한다.

* 혹자는 이 부분에서 장차 수립될 정의로운 나라에서 어떻게 부정의가 생겨나는 것일까? 부정의가 생겨나는 나라라면 그것은 이미 그것으로 그 나라가 아직 정의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지금부터 거론 되는 정의는 형상으로서 정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가장 형상에 가까운 상태로 구현된 정의이므로 그것은 다른 한편 늘 부정의로 변할 가능성에 열려 있다.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으로는 무규정적인(apeiron) 것이되 그 무규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자기 동일적인 것(tauthon) 즉 형상 쪽과 닮은(homoion) 상태가 이른바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하나로 정의이고, 그 무규정 상태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타자적인 것(heteron), 즉 형상 쪽과 가장 닮지 않은(anhomoion) 상태가 역시 앞으로 각각 논의될 대상 가운데 다른 하나인 부정의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도 언제든 부정의로 변질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고 부정의 또한 언제든지 정의로 회복되고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8권에 실린 나라의 쇠락과정을 플라톤의 쇠퇴사관으로 해석하는 토인비(A. Toynbee)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의 정의론은 결코 필연을 담보하는 낭만적 이상론이나 결정론의 체계가 아니며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언제든 쇠락할 수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가능성의 체계인 것이다. 다만 완전하게 열린 비결정론과 차이가 있다면 플라톤은 그 열린 가능성에서 우리가 지향하고 다가 가야할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홍규 선생이 플라톤의 이론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목적론과 구분하여 ‘동적인 목적론’으로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일 것이다.(박홍규 <희랍철학논고> 121쪽 참고) 인간은 동적 목적론에 기초하는 한, 끊임없이 결핍에서 충만으로 곧 선을 지향하고 그곳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과 행동이 없거나 참된 지식 대신 무지가 행위를 인도할 경우 인간은 결코 목적으로서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행동력과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철학은 해체와 무질서, 부정의에 저항하는 끊임없는 지적 노력과 교육, 실천적 연마가 수반되지 않으면 다다르기 힘든 긴장의 체계, 치열한 지적 긴장의 체계, 끊임없는 분투의 체계이다. 플라톤에게 운명론은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이다.(이정호, ‘박홍규의 존재론적 사유에 담긴 플라톤의 정치철학’, <박홍규의 형이상학> pp.137-142 참고)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㉗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E. 아데이만토스의 결론[366b-367a]

 

[366b]

* 아데이만토스는 보완을 마무리하며 더 이상 무슨 근거로 최대의 부정의보다 정의를 선택할 것인지 반문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최정상의 사람ἄκρων들이 말하듯 부정의를 기품으로 기만해가면서 최대의 부정의를 저지를 수만 있다면 그는 생시에도 죽어서도 신들 앞에서든 인간들 앞에서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πράξομεν κατὰ νοῦν이라고 말한 후 이 모든 언급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366c-367a]

1) 영혼ψυχῆ이나 육체σῶμα 또는 금전χρῆμα이나 가문γένος에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정의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2) 설사 우리가 말한 것들이 거짓이고 정의가 가장 좋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부정의한 자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συγγνώμη을 가질 것이며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다οὐκ ὀργίζεται.[366c]

3) 신과도 같은 본성을 타고나거나θείᾳ φύσει 또는 부정의가 뭔지 알게 되어서ἐπιστήμην λαβὼν 부정의를 멀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도 자발적으로ἑκών 정의롭게 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366d]

4) 다만 용기부족ἀνανδρία, 노령γῆρας, 무력함ἀσθένεια 때문에 부정의를 저지를 수 없는 사람만이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가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그가 가장 먼저, 가능한 한 가장 최대한으로 부정의를 저지른다.[366d]

5) 우리의 이 모든 언급의 원인은 정의의 칭송자들ὅσοι ἐπαινέται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평판δόξα이나 명예 τιμή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δωρεά과 무관하게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366e]

6)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신들도 인간들도 주목하지 않았다.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혼이 부정의하면 나쁜 것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인 반면 정의는 가장 좋은 것임을 논변으로τῷ λόγῳ 충분하게 피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6e]

7) 여러분들이 이 점을 주장하고 젊은이νέος들을 젊은 시절부터 설득해왔다면ἐπείθετε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φυλάσσω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수호자)φύλαξ가 되었을 것이다.[3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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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생에서 죄를 지으면 죽은 다음일지라도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관념은 역설적으로 선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악이 응징되지도 않는 이승에서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이리라. 법칙주의적 도덕론을 대표하는 칸트(I. Kant) 조차 선과 행복의 일치 즉 최고선의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해 혼의 불멸과 신적 자유를 요청(Postulat)하고 있다. 아무리 선의지가 보상과 무관한 정언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선과 행복의 일치는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진실로서 함께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이승이건 저승이건 인과응보의 가능성 그 자체가 부정되고 있을 정도로 정의나 정의로운 신이 자리할 곳이 없다. 부정의한 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제 뜻대로 산다. 신은 다만 시인들이 일러주듯 오히려 사람들 특히 강자들의 서원과 공물에 지배되는 인위적 관습의 산물일 뿐이다.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언급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구원과 의지의 마지막 보루인 종교의 영역마저 얼마나 심각하게 물신주의에 젖어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1)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강자 4)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은 약자이다. 그런데 아테이만토스는 의아스럽게도 설령 어떤 이가 앞서의 언급들이 모두 거짓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고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에 대해 상당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고 분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의가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 라면 오히려 그는 부정의한 사람을 꾸짖고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이유가 3)에서 해명된다. 그 어떤 이는 정의가 최선임을 알고 있고 증명도 할 수 있지만 이미 그는 당대의 현실에서 강자가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는 경우는 기대하기 힘들 만큼 거의 희박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천성적으로 신과도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정의가 최선임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이란 극히 소수이며 그 자체로 극히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통의 일상에서 그저 시류에 따라 기득권적 관성에 따라 별 반성 없이 부정의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강자들에게 예외적인 경우를 들어 그들의 부정의를 탓한들 그들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이해할 리도 없다. 물론 약자들은 강자들과 달리 정의를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하는 것도 정의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 부정의를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도 힘을 갖게 되면 누구보다도 맨 먼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의를 저지른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의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강자이건 약자이건 간에 정의가 최선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미 아테네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명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힘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데이만토스는 이렇게 된 현실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들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최선이며 부정의가 최악임을 일깨워주지 못한 정의의 칭송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즉 정의의 칭송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부정의를 비난하거나 정의를 칭송함에 있어 평판이나 명예 또는 그로부터 주어지는 혜택과 무관하게 정의를 칭송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정의 부정의 각각이 그것을 지닌 자의 영혼에서 그 자체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토대로 정의와 부정의를 찬양하거나 비난해야 마땅함에도 인간은 물론 신들조차 시를 통해서든 사사로운 이야기를 통해서든 누구도 그 점을 논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의 칭송자들이 정의가 최선임을 젊은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논변으로 충분하게 피력하고 설득해왔다면 젊은이들이 부정의를 행하지 않을까 서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부정의를 저질러 가장 나쁜 것과 동거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각자가 스스로 각자의 가장 훌륭한 감시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아데이만토스의 언급은 장차 펼쳐질 바람직한 정의론의 구축이 타인들의 부정의에 대한 배타적 의심과 배제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내면에서 정의 자체가 드러내는 힘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토대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감시자가 되어 부정의를 늘 스스로 경계하면서 그 정의의 온전한 힘을 길러내고 함양하는데 있음을 미리 보여준다. 즉 정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배타적 공존이 아니라 사회협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 각자의 내적 반성을 토대로 타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선의를 구현하는 공동체적 공존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를 경계한다’, ‘자신에 대한 감시자’라는 표현에서 ‘경계한다’φυλάσσω와 ‘감시자’φύλαξ라는 표현은 나중 수호자를 나타내는 말 φύλαξ(pylax)와 뿌리가 같거나 같은 말이다. 정의는 타자를 배타적으로 경계하고 타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진정으로 이기는 자만이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진정한 수호자이자 자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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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마침내 소크라테스에게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아데이만토스의 요구는 곧 이어 살펴보겠지만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문제제기가 종국적으로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정의론을 펼침에 있어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야할 핵심 과제,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제시하려는 정의론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1-3-2. 아데이만토스의 요구(367a-e)

 

*아테이만토스가 끝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 사항은 아래와 같다.

  1. a)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 밝힐 것이 아니라 이들 각각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당사자에게 그 자체로αὐτὴ δι᾽ αὑτὴν 무슨 작용ποιοῦσα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줄 것.[367b]
  2. b)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은 배제해 줄 것. 정의와 부정의 양쪽 각각에서 진짜 평판τὰς ἀληθεῖς δόξας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τὰς ψευδεῖς δόξας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고, 부정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것이라고 그대로 들키지 않고 부정의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 [367b]
  3. c) 동시에 그것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 (자기가 저지르는) 부정의는 자신의 이익, (강자가 행하는) 부정의는 는 약자의 불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과 같이 하는 것이라 단언하겠다.[367c]
  4. d) 그러니 정의가 가장 좋은 것, 즉 결과 때문에도 가치가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 평판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으로 인해 좋은 것이라는 점을 찬양해 줄 것.[367d]
  5. e) 정의는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닌 자를 이롭게 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라.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어떤 내용의 평판이건 하지 말 것. 소크라테스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이다.[367d]
  6. f)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낫다는 주장만 밝히지 말고 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말건 간에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 쪽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나쁜 것인지도 밝혀 줄 것.[36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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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아할 것들이 있다.

1) 우선 위에서 a)는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사람의 혼 안에서 그 자체로 무슨 작용을 하기에 한쪽은 나쁜 것이지만 다른 한 쪽은 좋은 것인지를 밝혀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정의와 부정의가 혼 안에서 그 자체로 갖는 힘이 무엇인지’가 그의 요구의 핵심 키워드이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의 이러한 요구는 이미 이전의 언급에서도 틈틈이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플라톤이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요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중차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특히 ‘그 자체’αὐτὴ란 말은 간단없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다.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그 자체 때문δι᾽ αὑτ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란 답을 끌어낸 후 곧바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혼 안에서 어떤 힘을 갖는지(358b)를 듣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한 단락 지나가서도 다시 같은 표현을 써서 정의가 ‘그 자체로’αὐτὸ καθ᾽ αὑτὸ 찬양받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358d) 그리고 아데이만토스 역시 정의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글라우콘이 위에서 한 말과 똑같이 ‘그 각각이 그걸 지니고 있는 자와 혼 안에서 있으면서 그 자체의 힘으로τῇ αὑτοῦ δυνάμει 무엇을 하는지’ 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366e) 마침내 문제제기를 마무리하는 이곳 마지막 부분에서도 단적이고도 결론적인 요구로서 테제의 형식(위 요약문 a)으로 앞서 말한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367b) 그것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부연설명이 주어진 후(367 c~d) 언급 끝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그 테제가 똑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위 요약문 f). 367e) 이처럼 이례적일 정도로 동일 내용을 수차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펼칠 정의론의 방향과 요체는 물론 <국가>의 논의 계획과 관련한 플라톤 자신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이곳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만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혼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보여 달라고 마치 자신의 의견인 언급하고 있지만(367b) 사실 뒤돌아보면 소크라테스 자신 이미 제1권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그 스스로 ‘정의와 부정의 각각이 개인 안에서 뿐만 아니라 나라이건 씨족이건 군대건 간에 그 집단 안에 깃들어 있을 경우 어떤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미 묻고 있다.(351a~352a) 물론 그곳에서는 ‘혼 안에서’라는 말 대신 ‘개인 안에서’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전후 문맥상 그러한 힘과 기능이 혼의 기능임이 충분히 암시되고 있고(352d) 마무리 즈음에 가면 마침내 그것이 혼의 덕ἀρετή ψυχῆς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353e)

2) 이전 강해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대해 계속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사실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의 기술 즉 형상적인 것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있을 뿐(342a) 아데이만토스의 요구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맥에서는(351e~352a)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그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 자체’라는 말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이 사용한 말이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문제제기가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을 드러내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 포석이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제2권에 와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냥 흘려보내기 힘든 모종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게다가 잠시 후(368c) 소크라테스 또한 비록 그들의 요구를 받아 다시 정리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규정 차원의 것을 언급할 때 쓰던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정의는 물론 부정의에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분명 이곳에서 언급되는 정의와 부정의는 개인과 나라에 깃들어 있는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로서 이미 형상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부정의는 정의의 결핍으로서 원천적으로 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둘에 ‘그 자체’라는 말은 사용한 것은 부정의에 대한 제1권에서의 엄밀론적 비판이 단지 논파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데 따른 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정의에 대한 혁파와 정의의 수립 내지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진실은 단순히 부정의가 엄밀한 지혜도 덕도 아니라는 비판만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정의와 부정의가 개인과 나라 안에서 실제 어떤 힘을 갖느냐를 실질적으로 비교해서 그것을 토대로 정의의 우위성을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지 부정의를 정의의 결핍이라는 소극적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작용력을 갖는 적극적인 현실태이자 모종의 실체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주의 통치가 참된 기술도 아니고 참된 앎도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허위이자 비존재라고 해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는 막강하고도 주도면밀할 정도의 힘과 기술력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앞으로 펼쳐질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에 새롭게 부응하기 위해 그 둘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사용하여 실체적 현존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에서의 실질적 비교우위를 논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물론 이것이 정의의 형상성과 실체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견지하고 있었던 기존 입장의 후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정의는 원천적으로 정의의 결핍이며 억견의 소산이며 그런 의미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도 앎도 아니며 어떤 이유에서든 존재론적으로 실재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부정의가 그처럼 원천적으로 억견이자 허위일 수밖에 없는 가장 치명적인 근거는 단지 그것이 형상적 일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기보다는 그것이 실재성의 조건으로서 가장 일차적인 선(좋은 것 to agathon)을 결핍하고 있다는데서 주어진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진리성과 존재성 여부를 가르는 지고의 기준은 선성의 존재 여부이다. 선성을 제외한 채 엘레아적인 일자성만을 기준으로 현실의 부정의를 들여다 볼 경우 부정의는 그저 무규정적인 비존재일 뿐 그것이 갖고 있는 현실적 작용력의 현존성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이제 그것이 갖는 힘의 현존성을 분간해내야 하고 그 무규정적인 힘들의 분간을 위한 존재론적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와 참주를 사물과 거울에 비친 상으로 비유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이 사물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 상을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 상은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보통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실제 사물이 아니라는 근거를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러나 그 상이 실재성을 결여한 것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로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거울상이 허상이기 이전에 이미 철저하게 사물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이다. 즉 그 거울상은 사물의 모습과 일대일 대응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방향이 정반대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비유를 드는 이유는 앞에서 거울상이 허상이기도 하지만 역상이기도 하듯이 이른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를 무지이자 결핍이라는 이유로 칼같이 부정하기 보다는 일단 사물의 모습을 일대일로 하나하나 대응하는 형식으로 전부 가지고 있되 방향만 정반대인 것 즉 참주 역시 철학자의 지혜에 대응되는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되 다만 그 지혜의 방향이 정반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주의 지혜와 철학자의 지혜는 모든 면에서 서로 동일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방향만은 정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굳이 비유에 기초해서 말하자면 이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 곧 선성(to agathon)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참주의 지혜가 참된 기술이 아니고 참된 앎과 힘이 아닌 근거는 그것이 실재성을 결여한 허상과도 같은 것이기 이전에 실재와 정반대의 역상이라는 점 즉 원천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선성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가 정의의 결핍으로서 허위라는 것도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실재성의 결핍에서 구해지기 이전에 결정적으로는 선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포착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의는 내지 이른바 참주의 지혜는 선을 결핍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실재성을 갖는 것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힘과 작용력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로 서로 대응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도 참주는 철학자 왕과 마찬가지로 모두 통치에 있어 막강한 기술과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참주는 선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와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구별되고 그 기술과 힘 또한 정반대의 목적을 지향한다. 플라톤에게 그 만큼 선성은 실재성을 가르는 중차대한 지고의 기준이다. 이런 점에서도 선성은 이미 형상 일반의 실재성의 기초로서 엘레아적 일자성을 넘어서 있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선(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고차적이며 그 이데아들의 내적 통일성의 근거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 이데아 세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모사물로서 우주 역시 이미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선성이 곧 존재성의 최고 가치이자 그의 철학의 대전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전히 참된 앎이 곧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 덕이며 덕이 곧 앎이다.(353e) 다만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이러한 배경과 구도 위에서 현실의 정의와 부정의 그것들 각각에 그 자체라는 말을 붙여 그것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실체적 힘들의 현존을 인정한 것이고 나아가 철학자와 참주가 각기 가지고 있는 힘을 실질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부정의에도 모종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 토대가 마련되어야만 실질적인 작용력에 기초한 정의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5)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요구에는 또 하나 의미 있게 주목해야할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그들이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면서 정의의 문제를 개인의 내면 차원 즉 혼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제1권에서도 암시되었듯이(351e) 바로 이어서 문자의 비유를 통해 나라와 집단의 정의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그것들의 유기성이 주도면밀하게 고찰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출발은 개인의 정의이고 나라의 정의는 개인의 정의를 보다 잘 살피기 위한 방편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정의론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은 행복과 관련하여 정의로운 개인이 갖는 부정의한 개인에 대한 우위성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오늘날 일단의 정치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의 정의론을 개인이 무화된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접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 위 b)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린다. 해석이 갈리는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진짜 평판과 가짜 평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둘러싼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진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올바른 평판 즉 진실한 의미의 평판’으로, 거짓된 평판을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평판’으로 해석하는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 경우 ‘진짜 평판을 제거하는 것’이 나쁘지 ‘진짜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한다면, 전체 문장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나쁜 태도를 가리키는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 뒤의 귀결절과 내용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바로 앞에 나온 글라우콘의 요청 내용을 360e~361d에서 행해진 요청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곳에서 글라우콘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제대로 대비시켜 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하다는 평판을 받고, 부정의한 사람은 완벽하게 부정의해서 정의롭다는 평판을 받는 경우를 상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곳에서의 요청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부정의 각각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그것들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 상태 즉 전도된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361c) 그것을 논파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원문에서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덧불인다’προσθ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에서도 천병희 역본이 그러하다. 즉 천병희 역본은 박종현 역본과 다르게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을 제거하고 가짜 평판을 덧붙이지 않는 한,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로 옮기고 있다. 요컨대 가짜 평판이 덧붙여진 정반대의 현실 상황을 상정한 상태에서 그 가짜 평판을 논파를 해야 제대로 정의를 찬양하는 논증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입장과 달리 진자 평판과 가짜 평판의 의미를 반대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진짜 평판이란 ‘현실 세계에서 현존하는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실제 평판’을 가리키며 가짜 평판은 그러한 현실에서 실재하는 평판과 거리가 먼 ‘소크라테스가 내세우는 평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평판(doxa)이란 이미 그 자체로 진실과 거리가 있는 것이므로 진짜 평판의 의미를 진정한 평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앞의 글라우콘의 요청도 358에서 제기되고 있는 글라우콘의 요청 즉 보수나 평판 차원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의 측면에서 정의의 우위성을 논증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들은 μὴ(mē)라는 부정어가 수식하는 말을 앞의 입장과 달리 제거하다ἀφαιρήσεις에 걸어 번역하고 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박종현 역본은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종현 역문을 원문과 비교해가며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들 양쪽 각각(정의와 부정의)에서 진짜 평판은 제거하지 않고, 그 각각에 거짓된 평판을 덧붙인다면,εἰ γὰρ μὴ ἀφαιρήσεις ἑκατέρωθεν τὰς ἀληθεῖς, τὰς δὲ ψευδεῖς προσθήσεις’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이 보이는 것τὸ δοκεῖν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 위의 두 가지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해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입장이 이어지는 문맥과 보다 더 자연스럽게 상통하고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무리가 적다고 판단된다.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앞서 요약문 d), e), f)에 담긴 내용 또한 이제 더 이상 평판 따위를 거론하면서 정의의 우위를 논하지 말고 정의와 부정의 그 자체가 갖는 현실에서의 작용력을 가지고 논해달라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b)의 내용을 이후의 내용과 연관시켜 풀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글라우콘이 요청했듯이 평판 따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배제하십시오. 만약 선생님께서 이들 양쪽에서 현존하는 평판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선생님이 생각하는 현실과 거리가 먼 평판만 그 각각에다 덧붙이신다면 그것은 평판을 평판으로 맞대응하는 잘못된 대응으로 그 또한 실재 정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이 아니라 그저 그런 듯이 보이는 정의의 평판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평판만 가지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입장과 다를 게 없습니다. 보상이나 평판 따위에 대해 칭찬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플라톤 자신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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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강화하여 그를 대신하여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이 수행한 소크라테스 주장에 대한 반론과 요구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이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본격적인 정의론이 시작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Egoist) 사랑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에고이스트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고 자기 유용성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잠시 간디의 일화를 얘기하면 좋을 것 같다. 간디 생애 말년에 어떤 서양기자가 간디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평생 남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적인 생애를 살아왔느냐”라고. 이 질문에 간디는 뭐라고 했을까? 간디는 자기희생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간디는 자기가 남들을 위해서 살았다고 보는 것은 전혀 오해인데, 그 이유는 남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내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살고, 내 조국이 독립해야만 자기 자신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간디는 에고이스트이다. 현상적으로는 타인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에고이스트이다.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에고이즘인데, 에고이즘(egoism)을 흔히 이기주의로 번역하기 때문에 에고이즘이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자아(ego)는 ‘자기 존중 혹은 자기 중요성’(self-esteem or self-importance)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고 에고이스트는 자아주의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기존의 에고이스트라는 말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에고이스트를 ‘유일자’라고 말했다. 곧 유일자는 자아주의자이다. 그럼 자아주의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명히 인간이 “이타적”행위를 할 때조차, 개인의 모든 행위의 근본 원인은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아주의자의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나에게 모든 것이고 나를 위하여(Meinethalben) 모든 것을 한다.(179)

 

예를 들어 가족 사랑이 보통 ‘효성’(Pietät)으로 이해되었듯이, 가족사랑은 어떤 종교적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조국에 대한 사랑(Vaterlandsliebe)을 ‘애국심’이라고 설교했다. 우리의 모든 낭만적 사랑은 같은 양식으로 움직인다. 말하자면 언제나 위선(die Heuchelei) 혹은 오히려 어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uneigennützigen Liebe)이라는 자기기만(Selbsttäuschung/self-deception),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은 나를 위한 것-정확히 말해서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um Meinetwillen)-이 아니라 대상을 위한 것이다. 327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애인과의 사랑은 어떨까? “그러나 내가 애인의 이마 위의 슬픈 주름살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그래서 나를 위하여, 나는 애인의 이마에 입 맞추어 통증을 제거한다.”(325) 이렇듯 심지어 사랑도 자기 유용성이다. 다시 말해 에고이스트간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다. 또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랑’은 ‘자기기만’이다. ‘애국심’은 자기기만이고 대상을 위한 대상의 관심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다. 흔히들 ‘Eigennutz’(selfishness)를 이기주의로 번역하는데,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에고이스트가 무엇에 합의하는 이유는 자기 유용성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을 위해서만, 곧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합의에 동의했다. 351

 

이제 ‘Eigennutz’(selfishness)는 ‘내 자신의 이익’(meines eigenen Nutzen)이고 영어로 my own benefit을 의미한다. 또한 Eigennutz단어에 해당하는 영어는 selfishness인데 이는 self(자기) + ish(적인) +ness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단어를 ‘자기 유용성’으로 번역하였다. 자기 유용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슈티르너의 글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단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에고이즘의 의식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사랑이 나에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랑이 나를 즐겁게 하기에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어떤 ‘사랑의 계율’도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감정이 있는 존재와 공감(Mitgefühl(fellow-feeling))한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Qual)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quält), 그들의 기분 좋음(Erquickung)이 또한 나를 기분 좋게 한다(erquickt).(324)

 

자기 유용성의 이해관계, 관심은 세계를 자기 소유로 하는 것이다. “세계가 –내 소유로 되도록, 내 자기 유용성(Eigennutz)은 세계를 자유롭게 하는 것에 관심(Interesse)이 있다.”(342) 이러한 자기 유용성은 성인에 이른 ‘자기중심적 관심’(egoistisches Interesse)에서 가능하다.(14) 또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 유용성에 따른 사랑은 상호간의 관계이다. 존재와의 공감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자기 유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기 유용성은 다른 존재와의 공감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기 유용성은 언제나 상호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조금 더 확인해보자.

 

2.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지만 서로 서로사용하므로 서로에게자기향유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이 자기 유용성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곧 자기 유용성은 에고이스트 서로에게 해당한다는 것이다. 자기 유용성이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에고이스트의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용성, 이용이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에고이스트 상호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zueinander) 어떤 관계만을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사용할 수 있음,(Brauchbarkeit/usableness) 쓸모가 있음(Nutzbarkeit/utility), 유용(Nutzens/use)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einander) 아무런 의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331)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자기 유용성(Eigennutz/selfishness)에서 솟아나고, 자기 유용성의 침대로 몰려들어 다시 자기 유용성에 이른다.(328)

 

나는 세계와 인간을 이용한다네 (benutze(utilize))!(330)

나는 내 열정의 자양분을 위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애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애인은 항상 다시 내 열정의 자양분으로 원기가 난다. 애인에 대한 모든 내 염려는 내 사랑의 대상에만 해당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만 해당되며, ‘열렬하게 사랑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330)

 

이렇듯 슈티르너는 사람의 관계를 ‘서로 서로’ 유용성으로 보고 있다. ‘서로 서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유용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유일자의 의미가 확장된다. 유일자는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서로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자에게 “교류(Verkehr)는 세계향유(Weltgenuss )이고 내 -자기향유(Selbstgenuss)의 일부를 이룬다.”(358) 서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자기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다. 에고이스트간의 관계는 서로에게 자기향유를 위한 수단이다. 슈티르너에게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에게 이용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향유하는 것이다. “내 사랑의 대상을 향유한다(geniesse)”(330)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을 이용하는 것은 향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말하자면 ‘서로 서로’(zueinander) 이용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자기향유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용’은 향유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자기향유가 사람의 관계이므로 사랑도 서로의 자기향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슈티르너가 강조하듯이 ‘서로에게’ 의무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의무가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나에게 의무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 사랑의 의무 또한 대상을 위한 의무가 아니라 나의 의무이다.

 

3. 사랑은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란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다.

 

사람의 관계를 상호간의 유용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를 ‘따로 또 같이’라는 관계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에고이스트의 사랑은 ‘따로따로’ 자기 유용성이면서 동시에 ‘함께’ 자기향유이어야 한다. 함께하는 자기향유는 에고이스트 간의 동등한 자율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함께하는 자기향유가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사랑의 관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해할 수 있다. 잠시 사람 관계를 서로간의 사용으로 이해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려보자.

칸트가 <윤리 형이상학 기초 놓기>(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n: Digitale Bibliothek Band 2: Philosophie, 75면)에서 실천적 정언명령의 정식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Person)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간성(Menschheit)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brauchest)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강조는 옮긴이]

 

이 글에서 옮긴이가 강조한 부분에 주목해 보자. 곧 ‘…만’, ‘항상 동시에’ ‘사용하다’라는 중요한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문구는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칸트가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은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칸트는 사람 관계에서 상호 수단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서 사용하지말”라는 말은 “인간성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상호 수단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단적인’ 이란 말은 ‘나의 욕구와 행복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이란 의미이다. 슈티르너의 사랑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가 오로지 상호 수단적으로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슈티르너의 사랑에 대한 논의로 가져와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랑은 자기 유용성이라는 수단이고 동시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자기향유라는 목적은 자아 외부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자아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칸트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모두의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라는 말이라면, 슈티르너는 각자의 자아 안에 자기향유라는 목적이 동등하게 존재하고 이것을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내 것이 되는 것”(117), 자아의 상호 존중, 그것이 에고이스트 사랑일 것이다. 또한 이것이 자유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자기결정에 의한 자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172)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의 사랑은 자유로운가? 다시 말해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이었는가? 나는 그대에게, 그대는 나에게 따로 또 같이 자기 유용성이었고 자기향유이었는가?

『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철학자의 서재]

『데리다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을 리뷰하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상운 옮긺, 『데리다를 읽는 시간』, arte, 2018.

 

데리다는 읽히지가 않아서 포기하게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은 강의록으로 데리다의 생각을 알기 쉽게 풀어 놓았다. 데리다의 <정신에 대해서>와 <죽음을 주다>를 강독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겨냥한 쟁점들이 재미있다.

 

예를 들면 데리다에게 하이데거가 독일 민족의 정신이라든가 대학의 정신 같은 것이 있다고 실체적으로 상정한 뒤 그것으로부터 자기주장을 내뱉는다는 이미지(p. 96)로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데리다에게는 그런 실체란 없으며 그것은 항상 ‘이미’ 오염되어 있고 시간에 따라 ‘변형’되며 왜곡되기도 한다. 또 데리다는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던 하이데거가 인간/동물/비생물로 세계를 구분하고 인간을 특권화 하는 것이 결국 ‘인간중심주의’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다(p. 121).

 

데리다는 아도르노의 관점을 끌어들여 하이데거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회귀해야 할 ‘정신’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환상이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아도르노의 눈에 횔덜린은 고향으로의 회귀 불가능성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이데거는 한사코 무리하게 고향으로의 회귀 이야기로 만들어 독일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다(p. 154). 1, 2강은 이런 내용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의 ‘정신’이 모든 것을 통합한다면 데리다에게 그런 것은 환상이며 있는 것은 ‘차이화’이며 ‘차연’이다(p. 167). 데리다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가 확정된 것처럼 보여도 시간의 경과 속에서 그 의미는 미묘한 차이와 비정합성이 생겨나 불안정하게 된다. 이것을 데리다는 ‘차연’이라 부른다(p. 167).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항상 ‘대체보충’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의 감정적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나 예술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그것들이 ‘오리지널’을 대리보충해 주기 때문이다(p. 187).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점을 놓친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기원, 근원, 정신적인 것을 찾는 하이데거가 현재 상황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하이데거를 겨냥해 이렇게 말한다. 홀로코스트를 막으려면 본래의 근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통 기독교적 발상은 ‘철학의 죽음’일 뿐이다(p. 232).

 

3, 4강에서 데리다는 근원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강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 역시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면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고 본다(p. 322).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가 주체를 압도할 경우 주체가 무력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p. 323). 데리다가 보기에 ‘책임’의 본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결정 근거가 없는 ‘결정불가능’한 상황에서 어느 쪽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 348). 이 때 어떤 신비, 비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책임져야 할 때, 인간의 이성, 합리성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근대의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데리다가 말하는 것 아니냐고 보고 있다.

 

의미가 계속 변동하고 ‘차이화’ 하고 있기 때문에 고정된 확실한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 데리다의 입장에서는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는 파편화된 것, 균열, 틈, 공백의, 나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언어로 완전히 포획되지 않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거나 ‘신비’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예술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예술을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이 잘 안 되는 지점이 있지 않은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도 같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근대의 합리적 이성은 등가교환의 원리를 고안했고 이와 함께 이성적 인간, 계산하는 인간이 생성됐다(p. 449)고 본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서양의 기독교는 이런 대칭성을 중단하고 천상의 이코노미를 명령했는데 그것은 기브 앤 테이크 식의 경제가 아닐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무한 책임, 무조건적 책임 같은 것일텐데 이것이 데리다의 윤리인 것 같다. 6강까진 이런 논의들이 이어져 있다.

 

마지막 7강은 ‘에크리튀르’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구어가 먼저 있고 나중에 문자가 생겼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기호적으로든 문자적으로든 오염되어 있다. 기호나 문자 체계가 없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지각이 이미 기호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p. 488). 유아는 어른들의 말을 제대로 재현할 수 없고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말을 할 수 있게 된다(p. 493). 이러한 과정, 에크리튀르의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지각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파롤이 ‘에크리튀르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p. 512).

 

거칠고 두서없이 리뷰해보았지만 데리다를 읽기 전에 입문서로 읽기 좋은 책이다. 학생도 교양으로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