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철폐 동아시아 연대를 만들어갑시다” –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인터뷰 [나인당케의 단상들]

“차별철폐 동아시아 연대를 만들어갑시다”

–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인터뷰

 

(정리: 한상원/ 통역: 최성문)

 

량영성 씨는 198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에 정착하였으며, 그의 가족은 이후 3대째 일본에서 살고 있다. 량영성 씨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에 다녔다. 조선학교는 재일교포 중, 국적을 ‘조선’으로 표기한 조선인들의 자치학교로, 아직도 일본에서는 다른 외국인학교와 달리 정식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 내 극우단체 재특회(在特会)의 조선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극심해지고 그에 대항하는 카운터스 운동이 등장하던 2013년, 그는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를 세워 40여 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캠퍼스 내 헤이트워치 감시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현재 히토쓰바시 대학(一橋大学) 언어사회연구 박사과정생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그의 책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가 번역되어 있다. 필자는 도쿄도 후추(府中)역 인근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통역에는 요코하마 국립대학 사회학 박사과정생 최성문 선생이 수고해주었다. 그중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여 옮긴다.

 

–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과 반인종주의 운동을 소개해주십시오. 한국에서도 혐오발언 문제가 심각하고 이를 규제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진행 중인데,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안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제 생각에 2016년에 제정된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은 문제가 많은 법입니다. 한국이 참고한다면 미국이나 유럽의 50년 전에 기본적으로 차별을 정의한 이념법, 금지법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선진국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국가인데, 미국, 유럽 등 다른 선진국가들에서는 네이션의 중요한 요소로서 인권의 진보적 가치를 두지요. 프랑스는 군주를 처벌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일본이라면 혁명이나 민주화 운동이 한 번도 사회를 바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종주의와 관련해서도 근본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인종주의정보센터(ARIC) 대표, 재일조선인 3세 량영성(梁英聖)씨 출처: 필자

 

헤이트 스피치가 이렇게까지 창궐하는데 일본 정부가 어떠한 대처도 하고 있지 않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예컨대 프랑스는 루이 국왕을 죽이고 인권을 천명하는 공화주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했고, 노예해방 내전을 벌였고, 공민권운동도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이런 국가들에서는 ‘역시 차별은 안 된다’는 규범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규범이 일본에는 없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그 이후의 독재정권 타도하는 투쟁 등을 거치면서, 이것이 내셔널리즘, 네이션이라는 한계는 있으나, 인권 개념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본은 현재 전후 처음으로 재특회 등등 풀뿌리 극우 운동 등이 형성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독일의 경우, 국가가 나치즘을 부정하기 때문에 네오나치 운동은 반국가적인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일본은 천황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전쟁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있습니다. 반(反)차별 정책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면서 조선인들의 국적도 박탈했습니다. 사실 이런 나라에서는 극우운동이 성립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보신 것처럼 국가가 이미 차별을 하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년간 극우가 발흥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이 일본의 2016 헤이트 스피치법을 참고로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악법입니다. 한국이 참고하려면 차라리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는 ‘원칙적 측면’으로 기본적 차별금지법을 가능한 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념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긴급적 측면’인데요. 당면한 차별을 멈추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한국 상황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동아시아가 처한 수준에서 EU가 제정한 것과 같은 차별금지법을 한국, 대만 등이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중장기적으로 그렇게 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 상당히 문제가 많지만, 어쨌건 재특회를 규제하려는 법인데…

규제하려는 법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재특회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도, 사쿠라이 마코토(재특회 전 회장)가 일본제일당 만들어서 선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재특회는 일본에서 평판이 나빠져서 옛날보다 인기가 없습니다. 옛 중심인물들이 재특회를 버리고 선거 활동을 통해서 차별적인 활동을 하는데, 그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재특회에 대해서도, 일본제일당에 대해서 모두 방치하고 있습니다.

 

 

– 실질적으로는 규제하지 않는다, 그럼 일본 정부가 이걸 도입한 이유는 ‘보여주기식’인 건가요?

재일조선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는 특히 2009년부터 2011년 사이가 절정이었습니다. 교토의 조선고교 습격 사건, 필리핀인들의 자녀인 당시 14세 소녀 노리코 강제소환 촉구 시위 등 ‘습격형’ 헤이트 스피치가 심각해졌지만, 매스컴은 이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2016년에 해당 법안이 만들어진 것은 직접적으로는 2013년 2월 처음으로 <아사히신문>이 ‘헤이트 스피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재특회 데모를 비판한 데서 기인합니다. 이것이 2013∼2014년 사이 급속도로 문제시되어 2014년 즈음부터 야당이 인종차별금지법을 만들려 했습니다. 2015년 법안이 제출됐고, 결과적으론 아베 정권이 제정한 셈이죠. 그러나 실은 헤이트 스피치가 2013년부터 큰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최대 이유는 카운터(대항) 운동의 존재였습니다.

량영성씨의 저서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2018) 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16626/10/cover500/8990062861_1.jpg

 

종래 일본의 반차별운동은 기본적으로 자이니치 또는 피차별인종이나 소수자 당사자들이 그들의 조직이나 개인 차원에서 차별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타입이었는데요. 사회운동은 그러한 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즉 올드타입 운동은 ‘피해자를 케어’하는 운동이었으나 반면 카운터 운동은 ‘가해자를 억압하여 차별을 그만두게 한다’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피해자가 (신분상 불이익 등으로)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가해’ 자체가 범죄이자 악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카운터 운동의 대대적인 성장이 <아사히신문>에 의해 보도가 되면서 2013년에 ‘사회악’으로서의 차별이 최초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카운터 운동이 먼저 있고 나서, 그것을 보도하는 매스컴이 나오고, 그것이 또 사회문제화되어 겨우 야당이 법안제정에 나선 것입니다.

아베 정부는 야당에게 헤게모니를 주지 않으려 하면서도, 이 법안의 내용을 가능한 무력화하기 위해 2016년 법안을 제한된 범위 내에서 통과시킵니다. 차별받는 피해자의 범위를 ‘본국 외 출신자’로만 한정을 두어, 오키나와 출신자를 배제하는 효과를 냅니다. 또 구체적인 처벌 조항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가 의지가 없다는 것이죠. 차별이 발생해도 그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일본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어낸 것은 한계는 있지만 분명 운동의 성과이기는 합니다. 카운터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은 특히 도쿄나 관동지역의 경우에는 축구와 록 음악 등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안티파(Antifa)’ 문화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미국이나 독일의 안티파는 되지 못한 것이죠. 독일은 실제로 네오나치 집회를 저지하는 행동이 가능합니다. 반면 일본은 실질적인 극우 집회 저지는 불가능합니다. 사람 수가 적고 그런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운터 운동을 ‘카운터’ 운동 이상으로 하는 것, 즉 카운터 운동을 발전시키는 한편 운동을 래디컬화하는 제3의 사회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 한국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시기 일베 등 극우 사이트의 혐오 표현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이를 규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표현의 자유’ 규제 논쟁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혐오 표현 규제에 반대하는 주디스 버틀러와 규제에 찬성하는 제레미 월드론의 저서가 나란히 번역되면서 논쟁이 촉발되기도 했지요. 반차별 운동에 참여하시는 선생께서는 이러한 논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나라의 역사나 사회에 따라서 차별금지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차별금지법 제정이 2006년으로 늦어진 이유는 이미 형법상 민중선동죄가 있었고, 역사교육을 통해 충분한 시민교육을 하고 있었으며, 국가에 의한 진상규명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반인종주의 법안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가해자 나치 전범 처벌과 같은 개별 이슈들에 대해서는 투쟁이 존재했고 승리해왔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는 1964년의 공민권이 포괄적 차별금지를 규정합니다. 인종, 성, 연령, 장애 등이 포함되고, 흥미로운 것은 예비역을 차별금지 범주에 넣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의 베트남전 반대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죠. 그 이후 블랙팬서당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벌어지면서,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사고가 사회운동 쪽에도 널리 퍼지게 됩니다.

결국 (역사부정이나 혐오 표현을 처벌하는 독일식 모델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식 모델 중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이러한 논쟁 중에, 어느 쪽이 좋은가를 추상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출처: https://image.aladin.co.kr/product/8833/79/cover500/8997779664_2.jpg

 

버틀러의 책 『혐오 발언』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버틀러를 좋아하는 분들이 실천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연구자들은 버틀러가 헤이트 스피치 규제를 거부한다고 생각하지만, 잘 읽어보면 버틀러는 ‘국가가 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대학이 하는 스피치 규제는 찬성’합니다. 버틀러는 Gesetz[법률]를 통한 규제는 반대하지만, Recht[법/권리]를 대학, 기업, 지역사회에서 수행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듯 근대사회의 물상화는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사적 노동으로부터 사회 총노동을 성립시켜야 하는 모순이 노동생산물을 상품으로 물상화 시키므로, 인간도 부르주아/공민으로 분열시킵니다. 따라서 ‘시장의 인격’, ‘부르주아’로서의 권리에 대해 대항하면서, 국가 구성원의 공적인 인권 주체(공민)에도 반대하는 의미에서 시민권(Citizenship) 개념이 필요합니다. 일본, 한국에는 이 개념이 부재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상품 계약 주체도 아니고, 원자화된 물상화의 인격화로 승인된 국가의 구성원도 아닌, 공동체적 시민성의 자발적 연대, 결합, 투쟁 속에 형성되는 시민성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혐오 발언을 규제한다면, 어떤 차원으로부터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차원에서의 규제인지, 국가적 강제의 차원인지도 구분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자율적 규제, 즉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며, 운동 속에 반차별 규범을 국가가 시행하도록 만들고, 사회가 국가를 흡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아까도 설명했듯이, 일본형 반차별 운동의 특징은 피해당사자의 입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행동이 차별로 됨은 피해자가 그것을 차별이라고 발언해야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는 차별의 진의를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고립감, 두려움 등으로 피해자가 ‘그것은 차별이다’라고 공개 발언하지 못하면, 제3자는 나서지 말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했습니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이 아닌지에 대한 ‘진리’가 피해자의 ‘고백’에만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민권(citizenship)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해자조차 ‘자신의 손실을 항의하는 시장의 부르주아적 주체’로 규정하는 부르주아적 인권(시장에서 물상화된 인격) 개념일 뿐입니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기업사회의 비밀입니다.

반면 시민권(citizenship)에 근거하여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가해자의 책임을 지게 하며, 가해자가 가진 자연권[표현의 자유]을 억제한다는 것, 그것이 포인트입니다. 기존의 일본형 반차별운동은 피해자의 입을 통한 발설로 차별을 규정하기 때문에 가해자의 자연권 억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피해자가 얼마나 요구하든지 간에, 가해자의 자발적 반성을 요구하는 것뿐, 그가 ‘차별할 자유’를 빼앗는다는 논리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푸코가 말한 (자유주의적 통치성 속에서) ‘인권의 공리주의’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인권 개념을 공리주의적인 도구로 쓰는 발상, 다시 말해 정의를 오직 ‘개임의 룰’로만 이해하는 인권 개념 말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시장에서의 공정경쟁 외에 어떤 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평등’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범이 없습니다. 노동에서의 차별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죠. 이것도 일본형 기업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 한국의 진보진영조차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로서 한국의 시민사회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까?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나 재일조선인 인권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아시아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U와 비교했을 때 아시아에는 지역 차원에서 전쟁이나 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국제관계가 없습니다. 현재의 국가 간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일본의 위안부 부정이라던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 등이 국제적인 영토문제와 결부되어 지역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차별금지정책은 전후 세계에서는 반파시즘과 차별금지를 보장하여 국제평화 유지에 기여할 것입니다. EU의 기반에 있는 것은 ‘반차별=반파시즘’이라는 규범을 통한 평화 유지입니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도 일본 정부가 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차라리 아시아 수준에서 차별금지를 국제적인 룰로 만들면 어떨까 싶습니다. 각각의 나라에서 시민권의 원칙을 성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예컨대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 부정은 ‘차별금지’로써 억제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부정 그 자체가 역사부정일 뿐만 아니라, 성차별을 선동하고 있으며 나아가 계급차별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삼층집을 짓는다면 먼저 토대가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역사갈등 문제를 직접 푸는 건 토대 없이 삼층집을 세우는 것과 같아요. 좀 먼 길이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차별금지정책을 시행하고, 시민권의 원리를 각국에서 제정해서 아시아 각국의 공통언어로 ‘차별반대’를 제정하지 않으면 역사 문제를 말할 공통언어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혐오는 국내 소수자의 문제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한국 여성차별(미소지니) 살인의 억제 등 긴급한 과제이기에 그것을 위해 혐오 표현의 규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아가 이를 국제적인 파시즘 억제 전략으로 확대하여 차별금지법을 먼저 한국, 대만에 만들어놓는 것도 중요합니다.

역사부정이나 파시즘화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의 관계를 사유하는데, 역사를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측면이 아니라 차별금지라는 시민권의 관점에서 출발해야 다른 길이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의 전략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공통언어로서 ‘시민권(citizenship)’과 ‘반차별’이 필요합니다. 반파시즘 위안부 문제 등에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 등 영토문제에도 민족주의 논리로만 반대하게 된다면 극우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극우에 반대하는 데 있어서 ‘인권’은 소소해 보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권(citizenship)으로써 차별반대 논리, 이것을 지침으로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다가오는 올림픽에서 욱일기 응원을 허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어떻게 반대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로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서경덕 교수의 방식, 즉 역사 언어로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틀리지는 않지만, 약점을 말한다면 역사적으로 엄밀히 따질 때 지금의 히노마루(일본 국기)도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저는 욱일기가 문제 되는 것도 차별금지 문제라고 봅니다. 실제로 10년 전부터 가두 연설방식의 헤이트 스피치에서 욱일기가 문제시되고 있는데, 역사적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더라도 이 10년간에 걸친 ‘차별=욱일기’라는 연관 증거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차별’의 상징으로 하켄크로이츠가 있는 것처럼 욱일기도 차별의 상징으로 규정할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역사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차별의 상징으로 욱일기를 금지하자고 주장하면 됩니다.

이처럼 역사 문제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의 논리로 풀어서 얘기합시다. 그게 아마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또 한국 내 극우 반대 논리로도 써먹을 수 있습니다. 이영훈의 책 『반일종족주의』를 보면 한국 뉴라이트 특징은 민족주의 비판에 있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오히려 좌파에 의해 점령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극우는 아마도 시장원리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 성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식민지 시기를 정당화하는 것도 경제, 독재정치 정당화도 경제입니다. 따라서 한국 뉴라이트를 비판할 때도 역사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완전히 극우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뉴라이트가 ‘자본주의’ 경제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근거한 뉴라이트를 논박하려면 역시 시장을 넘어서는 논리, 시민권이라는 논거가 중요할 듯싶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㊴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계속)

 

[397b-398b]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관련하여 우선 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을 기초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으로 구분하여 논의한 후, 이제 그에 이어 그 이야기 방식을 화음(선법)ἁρμονία과 장단(리듬)ῥυθμός을 기초로 논하고자 한다. 그런데 서술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방식을 구성하는 선법과 리듬 또한 변화들이 작고 한 가지로 이루어지는 경우와(397b) 온갖 형태의 변화를 갖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야기 방식은 서술 방식에 의해서도 두 가지로 구분되었지만 선법과 리듬에 의거해서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모든 시인은 앞서 말한 두 유형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 중 전자나 후자 또는 양쪽을 혼합한συγκεραννύντες 어떤 것을 만나게 될 텐데,(397c) 이 나라에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ἐπιεικής ἄκρατος들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전자의 방식이지만 아이들과 이들의 교육을 돌보는 가복들 그리고 대다수 군중ὄχλος들은 반대로 후자나 혼합형이 월등하게 제일 즐거운 것이어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397d)그러나 이 나라에는 제화공이든 농부든 전사든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ἕκαστος ἓν πράττει 사람들만 있으므로, 다시 말해 양면적인 사람διπλοῦς ἀνὴρ이나 다방면적인 사람πολλαπλοῦς ἀνὴρ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은 우리의 정체πολιτεί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7e) 그리고 만일 온갖 것이 다 될 수 있고 또 온갖 것을 다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기도 하지만 생기는 것이 합당하지도 않으므로 거룩하고 놀랍고 재미있는 ἱερὸν καὶ θαυμαστὸν καὶ ἡδύν 분이라 추켜세워 준 뒤 다른 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이로움을 위해 한결 딱딱하고αὐστηροτέρός 덜 재미있는ἀηδής 시인과 설화 구술가μυθόλογος가 채용될 것이며(398a) 그들은 우리한테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을 모방해 보여주고 이야기도 군인 교육에 착수했을 때 법제화했던 규범τύπος에 의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서 이야기λόγος 및 설화μῦθος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이제 남은 것은 노래ᾠδή와 선율(서정시가)μέλη의 양식τρόπος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말한다.(39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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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방식(말투)leksis과 서술 방식(이야기의 진행)diēgēsis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야기 방식은 앞서 다루었듯이 어떤 서술방식을 따르는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하고 앞으로 다루어지듯이 어떤 선법과 리듬에 따르는지에 따라 규정되기도 한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은 가사와 노래로 구성된 시가를 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서술방식은 앞서 말한 대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시가를 구성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데 노랫말 즉 시가 가사의 표현 방식으로서 ‘단순 서술방식’과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다시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한 가지만 모방하는 서술방식’과 ‘온갖 것을 모방하는 서술방식’으로 구분된다. 이에 따라 이전 강해에서 살폈듯 이야기 방식이 서술방식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각기 구분되고 있다. 즉 1)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서술방식 중 최대한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은 지양하되 모방을 할 경우라도 훌륭한 사람이나 훌륭한 것 한 가지만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2)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 : 단순 서술방식은 지양하고 대부분 모방을 통한 서술방식을 택하되 그것도 온갖 것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

* 그리고 이제 서술방식에 기초한 앞선 논의에 이어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이 논의된다. 앞서도 말했듯이 시가는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가사와 관련된 서술방식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그것에 붙여지는 선법과 리듬에 대한 논의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리듬과 선법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들을 모방하는 이야기 방식이 견지해야 할 기본 원칙을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다시 한번 재확인하고 있다. 즉 순수하게 훌륭한 사람은 온갖 것을 모방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합형의 이야기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politeia에 어울리는 사람은 각자가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는 이러저러한 일을 가리지 않고 모방하는 양면적이거나 다방면적인 사람은 발견되지 않고 제화공은 제화공으로, 농부는 농부로, 전사는 전사로 발견될 뿐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른 나라로 추방되어야 한다. 오히려 한결 딱딱하고 덜 재미있는 설화작가가 우리에게 더 이로움을 주므로 처음에 법제화했던 규범에 의거 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를 하면서도 시가 교육을 통해 양성될 수호자가 다스리는 나라 즉 정의로운 나라의 정체가 지향해야 할 기본 원칙의 일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질과 적성에 기초한 한 사람 한 가지 일 즉 일인일기의 전문가주의와 그러한 전문가주의에 기초한 분업주의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 원칙은 아직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제2권의 서론적 논의(370b-c)에서도 그랬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방식으로 앞으로 다루어질 이상국가의 기본 틀과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국가> 내내 간단없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시가에 있어서 이야기 및 설화와 관련된 논의를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 노래와 선율의 방식에 대한 논의를 개시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시가의 노랫말에 관한 논의 즉 이야기 내용과 그것의 서술방식에 기초한 논의이고 지금부터 개시되는 논의는 이야기 방식에 관한 논의이되, 가사에 붙여지는 음악적 요소들과 관련한 논의이다.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1-2-1-2-2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398c-399e]

* 소크라테스는 노래와 선율의 양식과 관련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에 관한 논의 또한 앞서 말한 것과 일치를 보려고 하는 한, 우리가 해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찾아냈다고 말을 한다. 글라우콘은 그 ‘모두’에서 자신은 제외되는 것 같다고 겸손해하자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도 능히 말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398c)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바로 뒤에서(398e) 글라우콘이 ‘시가에 밝은 사람’μουσικός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노래μέλος는 세 가지 즉 노랫말λόγος과 화음(선법)ἁρμονία, 그리고 장단(리듬)ῥυθμός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398d)

* 소크라테스는 우선 노랫말이란 곡이 붙지 않은μὴ ᾀδομένος 말과 다를 것이 없고 화음(선법)과 장단(리듬)은 이 노랫말을 따라야 함을 밝힌 후 바로 글라우콘과 선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398e) 여기서 소개되는 화음의 종류와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혼성 뤼디아 화음μιξολυδιστί ἁρμονία과 고음 뤼디아 화음συντονο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2) 이오니아 화음ἰαστί ἁρμονία과 뤼디아 선법λυδιστὶ ἁρμονία, 3) 도리스 선법δωριστὶ ἁρμονία과 프뤼기아 화음φρυγιστί ἁρμονία. 이 중 1)은 비탄조θρηνώδης의 선법으로서 남자는 물론 훌륭해야만 되는δεῖ ἐπιεικεῖς εἶναι 여인들한테도 무용한 화음이고 2)는 유약하고μαλακός 게으름ἀργία과 주연(酒宴)에 맞는συμποτικός 화음으로서 수호자에게 가장 부적절한ἀπρεπέστατον 화음이다. 다만 나머지 3)의 화음만은 훌륭한 사람들의 어조φθόγγος와 억양προσῳδία을 적절하게 모방하게 될 화음으로서 남겨두어야 할 화음으로 제시된다.(399a)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두 가지 상반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대처하는 모습으로 각기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전투 행위나 강제적인 업무βίαιος ἐργασία 등 불가피하게 불운한δυστυχούντων 상황에 처했을 때의 모습과, 그 반대로 운 좋게εὐτυχούντων 평화로운εἰρηνικός 상황에서 자발적인ἑκούσιος 행위를 행할 때의 모습으로 나누어 훌륭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습들을 각각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부상이나 죽음 등 역경에 처하더라도ἀποτυχόντος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παρατεταγμένως 참을성 있게καρτερούντως 막아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후자의 상황에서 훌륭한 사람이란 누군가에게 뭔가를 설득하며 요구를 할 때에는 신께는 기도εὐχή로써 하되 사람한테는 가르침διδαχή과 충고νουθέτησις로써 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δεομένον 가르치려거나 변화를 설득하려μεταπείθω 하면 조신하게 귀를 기울이는(자신을 숙이는)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 사람, 그래서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πράξαντα κατὰ νοῦν 거만하지 않으며μὴ ὑπερήφαν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금도 있게μέτριος 행동하며 결과τὰ ἀποβαίνοντα에 만족하는ἀγαπῶντα 사람이다.(399b-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노래ᾠδή와 선율μέλος에는 많은 현χορδία을 사용할 필요도 없고 모든 선법을 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ὄργανον도 필요 없고 그에 따라 삼각현τρίγωνος이나 펙티스πηκτίς 등 여러 현과 여러 화음(선법)을 이용하는 모든 악기의 연주자ποιός나 제작자를 양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99d) 특히 현이 가장 많은 아울로스αὐλος가 그렇다. 온갖 화음(선법)παναρμόνια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들 자체가 아울로스의 모방물μίμημ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뤼라λύρα와 키타라κιθάρα 그리고 농촌에서 쓰는 쉬링크스(피리)σῦριγξ 정도만 남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마르쉬아스Μαρσύας와 그의 악기보다 아폴론과 그의 악기를 선호하는 것이 전혀 새로운καινός 것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9e)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앞서 372a에서 호사스럽게τρυφάω 산다고 말했던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새 다시 완전히 정화διακαθαίροντες되었다고 말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나머지 것들인 화음에 이어 장단(리듬)ῥυθμός(rythmos)에 관해 논의하자고 말한다. 장단과 박자βάσις(步格,basis) 역시 선법이 그러했듯이 현란하거나 다양해서는 안 되며(400a) 운율πούς(詩脚,pous)과 선율μέλος(melos) 또한 절도 있고κόσμιος 용감한 사람의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라가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리듬에 관해 묻는데 글라우콘은 음정φθόγγος에 네 가지가 있듯 운율에는 3종류가 있지만 어떤 리듬이 어떤 삶을 모방해내는 것인지는 모른다고 답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에 관해 다몬Δάμων에게 상의하겠지만 그에게서 들은 몇 가지 장단 즉 어떤 복합장단σύνθετος(복합적인 시각), 에노플리오스ἐνόπλιος(전쟁조), 닥틸로스δάκτυλος(장단단격), 이암보스ἴαμβος(단장격), 트로카이오스(장단격)τροχαῖος(400c) 등을 소개한 후 남겨야 할 박자(basis)와 장단(rythmos)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이 좋은 장단εὔρυθμος을 따르고 또 좋은 장단은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καλός λέξις을 닮은 것이고, 꼴사나움ἀσχημοσύνη은 그 반대의 것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단ῥυθμός과 선법(화음)ἁρμονία이 말(노래 말)λόγος을 따르는 한 좋은 화음εὐάρμοστος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 방식을 따르고 나쁜 선법은 그 반대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방식은 영혼의 성품ἦθος을 따르고 나머지 것 즉 장단과 선법은 그 이야기 방식을 따른다고 말한다.(400d) 요컨대 좋은 말εὐλογία과 좋은 화음εὐαρμοστία, 우아함εὐσχημοσύνη, 좋은 장단εὐρυθμία은 단순함(좋은 성품, 순진함)εὐηθείᾳ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함이란 어리석음ἄνοια을 좋게 부르느라 우리가 단순함이라고 부르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것을 행하게 되려면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400e) 그리고 장단과 선법 등 음악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회화γραφικὴ나 그와 같은 모든 기예δημιουργία 즉 직조ὑφαντική, 자수ποικιλία, 건축οἰκοδομία을 위시하여 다른 살림살이들의 제작은 물론 우리 몸σῶμα의 본성φύσις과 다른 모든 생물φυτόν들의 본성도 이런 것들 즉 우아함, 좋은 성품과 단순함, 그러한 성품을 갖춘 생각들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꼴사나움과 나쁜 장단ἀρρυθμία과 나쁜 화음ἀναρμοστία은 나쁜 말κακολογία과 나쁜 성품κακοηθος의 형제ἀδελφή이고, 그 반대되는 것들은 절제 있고σώφρων 좋은ἀγαθός 성품의 형제이자 모방물μίμημα이라고 말한다.(40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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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법과 리듬에 기초한 이야기 방식을 논하는 이 부분에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 용어가 많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 음악과 근현대 음악이 갖는 차이 때문에 그 용어들을 어떻게 오늘날의 음악 용어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고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어들도 차이가 있다. 우리 말 역본들(박종현 역본, 천병의 역본, 학당 초고본)에서도 차이가 있다. 참고로 우리말 역본에서 차이가 나는 주요 역어들을 그리스어 원어와 병기하면 아래와 같다. 강해에서는 편의상 학당 초고본(아직 최종 역어는 아님)을 기준으로 표기했으나 그 역시 아직 최종 역어는 아니다. 약어 : 학초=학당 초고, 박=박종현 역본, 천=천병희 역본. 쪽수 표시는 최초 표기된 곳.

 

ἁρμονία(harmonia) 397b- 선법(박, 천), 화음(학초)

– 학당 초고는 일단 ‘화음’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harmonia는 우리가 흔히 알 듯 고저를 달리하는 둘 이상의 음정들이 동시에 울리는 경우의 화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계 즉 고저를 달리하는 음정들의 일정한 계열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선법’이라는 역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ῥυθμός(rythmos) 397b 리듬(박, 천), 장단(학초)

ᾠδή(ōdē) 398c – 노래(박, 천, 학초)

μέλη(melē) 398c – 서정시가(박), 음악(천), 선율(학초),

μέλος(melos) 399e – 노래(박), 멜로디(천), 선율(학초),

βάσις(basis) 399e – 운율(천, 운각(韻脚)400a), 보격(步格)(박, 운율400a), 박자(학초)

πούς(,pous) 400a – 운율(천, basis와 동일하게 번역), 시각(詩脚, 박), 운율(학초),

φθόγγος(phthogos)400a – 소리(학초, 박, 천), 또는 음정(박)

εὔρυθμος(eurythmos) 400d – 좋은 리듬(박, 천), 장단이 맞는 것(학초),

εὐάρμοστος(euharmostos) 400d – 조화로움(박), 좋은 선법(천), 화음이 맞는 것(학초)

 

* 아래는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정암학당 해당 부분 역자 김주일 박사가 초고에 붙여 놓은 임시 각주들이다.

1) 399e 마르쉬아스 : 마르쉬아스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의 형상을 한 사튀로스들 중 하나로서, 아울로스 연주를 잘해서 뤼라를 즐겨 연주하는 아폴론 신과 대결을 벌였다는 신화적 존재이다.

2) 399d 아울로스 : 아울로스는 피리의 일종으로 관악기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이 없다. ‘현이 가장 많다’는 것은 여기서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울로스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해 다양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399c-d에 나오는 ‘현이 많다’란 말도 ‘다양한 화음을 연주할 수 있다’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399e basis(박자, 운각) : 그리스 리듬에서 강음은 장음에 주어지고, 하박(basis, thesis) 역시 장음에 주어진다. 따라서 장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시작부분에 강음(ictus)과 하박이 떨어지고, 단음으로 시작하는 운각에서는 나중에 나오는 장음에 강음과 하박이 떨어진다. 문자에 충실해 보면 basis의 다양함이란 이런 강박의 위치의 다양성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음악기초이론의 이해>를 보면 metre를 박자로 이해한다. 문제는 그리스 시가의 metre가 강약 중심으로 짜인 것이냐의 문제다(역시 같은 책에서 리듬을 장단의 배열로 이해한다). 엮어보면 박자는 기본적으로 첫 박의 장음에 강세가 가는 방식으로 짜인다. 리듬은 장음과 단음의 배열이다. 박자는 배경으로 규칙적으로 깔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리듬은 장단음을 기본 요소로 짜인다. 그런데 그리스 음악은 기본이 시가이기 때문에, 자연적 장단음을 가진 말로 짜인다. 따라서 기본 metre에 따라 박자는 정해져 있고, 리듬도 이것과 기본적으로 겹치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쪼개거나 늘리는 것을 플라톤이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

4) 399e-400a 리듬(박자) : 고대 그리스 음악의 리듬(rhythmos)은 시가의 운율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리듬(rhythmos)은 시가 운율의 장단음 배열을 기본적으로 따른다. 한편 시가 운율의 기본 단위는 장음과 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지는 운각(pous)으로서, 이것들이 모여 운율(metron)이 되며, 시가의 한 행은 한 운율이 된다. 다른 한편 하나의 마디에 들어가는 하나의 운각(운각을 박자와 같은 의미로 볼 때, 서양음악에서는 한 마디에 여러 박자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지만, 고대그리스 음악에서는 기본적으로 한 박자를 한 마디로 잡는다)을 상박(upbeat)과 하박(downbeat)로 나누고 상박을 ‘arsis’라 부르고 하박을 ‘basis’ 또는 ‘thesis’로 불렀다. 상박은 단음 또는 단음들이고 하박은 장음이다.(Adam은 Westphal을 따라 두 개의 운각과 하나의 강음-ictus-이 하나의 basis를 이룬다고 보았다.) 따라서 박자(basis)는 원래 하박을 부르는 명칭이고 운각(pous)은 장단음이 결합 된 것으로, 운율의 기본 단위이지만 현재 맥락에서는 리듬과 큰 의미 차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Ancient Greek Music(M.L.West, 1992), p.129~137 참고. 이런 취지에서 rhythmos, basis, pous를 뉘앙스는 살리고 정확성은 좀 약화하여 장단, 박자, 운율로 하고자 한다. 뉘앙스를 구별한다면 장단의 기본 단위는 운율(pous)이고, 이 운율은 박자(basis)에 의해 이분 되는데, 특히 basis는 강음을 포함하여 장단에 입체감을 주며, 장단은 운율들이 모여 변형을 이루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5) 400a, 화음(선법)을 구성하는 4가지 : 화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본적인 음정의 비율(2:1, 3:2, 4:3, 9:8)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Adam 주석 참고). 박자를 구성하는 세 가지는 운각(pous)을 이루는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구성되는 방식으로 닥튈로스(장-단-단)나 스폰데이오스(장-장)처럼 장음과 단음의 비율이 2:2가 되는 경우, 이암보스(단-장)나 트로카이오스(장-단)처럼 2:1인 경우, 크레티코스(장-단-장)처럼 3:2인 경우가 있다.

6) ‘그런데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다몬이 어떤 복합장단을 행진에 맞는(에노폴리온) 장단이며 닥튈로스라고, 심지어는 영웅적 장단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들은 것으로 생각하네’oimai de me akēkoenai ou saphōs enoplion te tina onomazontos autouῦ syntheton kai daktylon kai ērōon ge, .. 400b : 이 부분도 구문에 대한 이해에 따라 번역이 갈린다. 우선 남성 4격의 tina에 생략된 명사가 리듬rhythmos이나 아니면 운각metron이냐의 여부에 따라 syntheton의 번역이 갈린다. 일부(Griffith, Leroux, Shorey)는 생략된 명사를 중성임에도 metron으로 보거나 운율pous로 보고 있다. 아마도 이 맥락을 시가적이라고 본 듯하다. 그런데 리듬의 문제가 시가와 음악을 구분 짓기 애매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음악의 맥락에 더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듬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그래서 syntheton을 ‘복합장단’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tina를 syntheton에 거는 쪽(Waterfield)과 enoplion에 거는 쪽(Leroux, Sachs) 그리고 어느 쪽에도 걸지 않고, tina에 대한 이름으로 나머지 네 개를 보는 쪽(Shorey)이 있다. 또한 enoplion과 syntheton을 어떻게든 묶고, 나머지는 뒤의 분사구문의 목적어로 보는 방식(천, 박)도 있고, 이들을 묶고 tina에 대한 세 이름으로 보는 방식(Adam)도 있다. 문법적으로는 te tina에서 te를 enoplion에 붙는 te로 볼지, 그냥 te, ..kai로 볼지 양쪽으로 갈리는 듯하다. 전자는 어순이 자연스럽고 후자는 뜻에 더 맞아 보인다. 행진풍의 리듬을 복합적이라고 하기에는 복합적이라는 말이 더 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합장단은 운율(pous)이 장단음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영웅적이고 닥튈로스라고 한 것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가 닥튈로스 운각의 6각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닥튈로스나 스폰데이오스가 ‘장-단-단’ 또는 ‘장-장’으로서 두 개의 장음 또는 한 개의 장음과 두 개의 단음으로 구성된다면, 이암보스는 ‘단-장’, 트로카이오스는 ‘장-단’으로 장음 하나와 단음 하나로 구성되며, 앞의 것들이 위아래(arsis-basis)가 균등한데 반해 이것들은 불균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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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같은 내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추가 설명과 철학적으로 음미해볼 사안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1) 시가에 붙는 화음과 장단(선법과 리듬)에 관한 논의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것들은 앞서 시가 가사(말)의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과 내용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즉 그것들은 장차 용감하고 훌륭한 수호자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에게 적합해야 한다. 우선 시가에서 신들과 영웅들의 훌륭한 말과 행동을 모방하여 절제 있고 절도 있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훌륭한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밝아야 하듯이 시가에 붙는 선법과 리듬은 반드시 그러한 시가의 내용 즉 노랫말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시가를 서술함에 우아한 것이건 추한 것이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서술하는 시인들이나 배우들과 달리 화음과 리듬을 구사하는데도 비탄과 한탄, 술취함과 유약함, 게으름 따위를 부추기는, 그래서 군중들이나 좋아하는 이러저러한 화음을 배제하고 절제 있고 절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화음을 선호해야 한다. 이를테면 도리스 화음이나 프뤼기아 화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에 따라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에서 악기 또한 여러 현과 넓은 음역을 갖는 악기, 이를테면 아울로스 같은 악기는 제외되어야 하고 뤼라와 키타라 같은 악기 정도만 남겨두어야 한다. 장단과 박자, 운율과 선율 또한 마찬가지이다. 복잡 미묘하고 현란한 장단과 박자는 수호자가 지향할 우아함과 거리가 멀다.

2)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같은 음악 교육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야말로 터무니가 없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고 일양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과정에서는 분야에 상관없이 나름의 일정한 교육 목표와 기준이 요구되어왔고 오늘날 보편화 된 대중문화를 생산 유포하는 방송 및 언론 기관에서조차 일정한 기준 아래 심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목표와 기준이 가지는 내용의 적합성과 그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정당성이다. 플라톤의 주장은 오늘날 민주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적합성과 관련해서는 일정 부분 귀담아서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합성의 기준을 다수의 결정에서 찾지 않고 소질과 적성이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각각의 본성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본성만큼 적합성의 내용 또한 다양하다. 여기서는 나라의 수호자로서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적합한 절도와 절제가 강조되고 있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 교육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내용 자체만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경직되고 단순하며 일양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수호자 즉 훌륭한 군인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채택된 것임을 고려하면 나름의 적합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단순하고 일양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교육 대상과 교육 목표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행진곡, 장송곡 등 경우와 상황, 대상에 따라 어울리는 음악이 따로 있다. 여기서도 그 적합성은 모든 경우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적합성은 수호자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수호자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적합한 것으로 일양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 소질과 적성이 다르고 그에 따른 본성과 욕망 또한 다르고 그에 따른 그들의 일과 직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307d에서 보듯이 대다수 군중은 그와 반대되는 유형에 어울리고 오히려 그러한 유형이 그들을 월등하게 즐겁게 해 준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적합성과 관련하여 일관된 원칙이 있다면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본성과 욕망에 어울리는 적합성을 찾아 주는 것이다. 그들 각각에 적합한 것이 고유하다면 그들 각각은 일양적이지만 그 각각의 차이만큼 각각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적합성의 종류는 다양하다. 이곳에서의 음악적 리듬의 일양성도 다만 늘 냉철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수호자를 위한 음악 교육과정에서는 그와 같은 특정의 리듬이 가장 어울리고 그들의 수호자다운 성품의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내세우는 특정 성향의 타당성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플라톤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선법과 리듬 등 제반 음악적 요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차이가 다양한 만큼 인간의 인격 내지 성품 형성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다양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리듬과 박자가 그러하듯 일정하고도 객관적인 규칙성과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과정에서 그러한 음악적 요소들의 내적 연관성은 적합성 차원에서 반드시 분석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런데 위와 같은 음악 관련 논의에서 플라톤이 제시한 음악적 일양성과 경직성이 과연 현대사회의 다양성과 얼마나 대치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자유주의 사회로 표징되는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다룬 음악 분야는 물론이고 그 밖의 모든 분야에서 과연 인간 욕망의 다양성이 담보되고 있는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현대인들은 그들 각각의 소질과 적성, 성격과 성향에 상관없이 대체로 돈과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획일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재화 획득 능력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생존 능력과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무한경쟁의 이름으로 그런 능력의 고양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야말로 오히려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적합성과는 무관하게 일양적이고도 획일화된 기준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대중들의 음악적 관심사만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같이 재물 획득의 효율성을 노리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그 다양성은 개인들의 주체적 욕망을 반영하기보다는 자본에 의해 기획된 구매 욕구의 반영으로서 상품화된 다양성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의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 유행과 개성이라는 미명으로 개인들의 소비 욕망을 부추겨 자연적·사회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다. 자본에 의해 수단화되고 상품 가치로 획일화된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따른 다종다양한 본래의 욕망으로 되돌리는 것이 자본주의 문명에 찌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중대하고도 심각한 과제의 하나라면, 인간의 다양한 자연적 소질과 적성을 기본 전제로 깔고 그 위에 세워지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야말로 반(反)민주주의적이라는 오늘날의 비판을 넘어서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이념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장차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불운한 상황에 처하여 불가피하게 강제적인 일도 해야 하고 평화 시에는 지도자다운 품성을 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절제 있고 예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비록 반대적인 상황과 반대적인 일조차도 나라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수호자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 속에서 마치 씨줄과 날줄을 엮어 직물을 지어내듯 바람직한 하나로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의 반대적인 것들의τῶν ἐναντίων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하나같이 강조되고 있다. 반대적인 것들이 함께 있는 것이 무규정적 현실과 인간 욕망의 근원적 특성이지만 그것들을 영혼이 가지는 지성의 힘으로 헤아리고 분별하고 규정하여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수호자이자 철학자들이 할 책무인 것이다.

5) 이에 따라 플라톤은 399b에서 바람직한 어조와 억양, 선법을 모방하여 위와 같은 상반된 상황을 가장 훌륭하게 넘어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제법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인간상은 당연히 정의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바람직한 수호자 상이기는 하지만 내용 면에서 마치 플라톤 스스로 평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생활 지침을 되새기는 것처럼 비추어지면서 자못 우리에게 감동과 교훈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것은 흥미롭게도 동양 유가의 군자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며 요구할 때는 신에게는 기도로 하고 사람에게는 가르침과 충고로 하라’는 말은 ‘하늘을 받들고 타인을 사랑하고(敬天愛人) 천명에 따르고(待天命) 남을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며(推己及人) 말을 삼가되(愼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誠之) 게을리 하지 않는다.(敎不倦)’는 말과 상통하고 반대로 ‘남이 자신에게 요구를 해오며 가르쳐 주거나 변화하도록 설득을 해오면 귀를 기울이라’는 말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올바른 말로 일러 주는 것은 잘 따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法語之言能無從乎改之爲貴)고 말하면서 ‘남이 은근하게 타이르는 말은 기쁘지 아니한가?(巽與之言能無說乎)’라고 반문하고 있다. 여기서 ‘귀를 기울인다’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ἑαυτὸν ἐπέχοντα(heauton epechonta)인데 사실 그 말을 직역하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신을 숙인다’라는 뜻으로 그야말로 공자가 강조하는 겸양(謙讓)의 미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지성에 따라 행동하고 거만하지 않으며 절제 있고 금도 있게 행동하고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 역시 ‘앎과 행동을 같게 하고(知行合一) 겸손(謙遜)하고 온유후덕(溫柔厚德)하며 스스로를 다스려 예(豫)를 세우고(克己復禮)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천명에 따르면서(盡人事待天命) 수분자족(守分自足)하는’ 동양의 군자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6) 결국 시가에서 음악적 요소 또한 시가를 이야기 하는 방식으로서 앞서 서술방식과 관련한 논의에서처럼 그 내용과 방식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리듬과 좋은 선법은 반드시 시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내용 즉 노랫말(시가 가사)에 어울려야 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요즘에는 곡이 작곡된 후 그에 맞추어 가사를 쓰는 일도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에는 작곡은 반드시 노랫말 즉 가사에 맞춰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랫말은 영혼의 성품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이러한 좋은 말씨, 좋은 화음(선법), 좋은 리듬(박자), 좋은 모양(우아함)은 모두 단순함(순진함, 좋은 성격 euētheia)을 따르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란 우리가 보통 어리석음anoia을 좋게 부를 때 쓰는 그런 단순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고 아름다운 성품을 갖춘 생각διάνοια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어디서나 이것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가와 관련한 이야기 방식에서 따라야 할 우선순위를 요약하면 선법과 리듬 즉 음악적 요소는 시가의 스토리 즉 말(노랫말)을 따라야 하고 그 말은 영혼의 성품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단순함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란 성품을 잘 훌륭하게 갖추고 있는 생각(사고)dianoia을 말한다. 즉 단순함은 영혼의 성품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음악은 감각에 작용하는 감성적 요소로서 말이라는 지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고 그 지적 요소는 다시 영혼의 성품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배관계의 최상위에 있는 영혼의 성품이란 그 성품을 보존하는 생각으로서 단순함을 그 내적 본질로 가지고 있다.

7)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단순함εὐηθείᾳ(euētheia)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의 원어 euētheia는 일차적으로 ‘좋은 성격’이나 ‘순진함’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순진함은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가 빈정거리듯 정의를 ‘고상한 순진성’genaian euētheia으로 부를 때(348d)와 같은 의미에서의 순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어린이의 마음을 일컬을 때의 순진성에 더 가깝다. 소크라테스도 여기서 그 말을 어리석음anoia이 아니라 오히려 지적 사고로서의 dianoia와 연결 짓고 있고, 주석가인 아담(J. Adam) 역시 그 말의 진정한 어원을 hōs alēthōsῶς(truthfully)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아주 복잡한 것을 아주 단순화하여 한마디로 명쾌하게 꿰뚫어보는 경우도 경험하고 반대로 아주 간단한 것도 선입견이나 편견에 휩쓸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경험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함이란 인식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단순함은 사물과 사태의 내적 관계나 실체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분명하고 온전하게 그야말로 명석판명하고 간명하게 드러낼 때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러한 진실을 간취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 고유의 인격적 요소 즉 영혼의 성품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은 이와 같은 순수성이 영혼의 성품이 내적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단순함의 의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이곳에서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 즉 단순함과 생각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다소 개념적으로 풀이해서 말하면 이런 의미 즉 ‘장차 수호자들이 될 젊은이들은 반드시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성품을 보전하여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한 일들을 진실의 관점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의 핵심적인 내용과 해결 방안을 가장 명료하게 찾아내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설명하고 있듯이(401e-402a) 이처럼 청소년을 위한 시가 교육의 단계에서 예민하게 진실을 직감하는 젊은이들의 순수성 내지 초보적 단순성은 자라면서 이성적 논거 형성 능력의 민감성으로 발전하고 이후 고도의 철학적 추상 능력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변증법을 통해 진리 자체 즉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8) 그리고 플라톤은 지금까지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논의 즉 말과 그에 수반되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시가 관련 논의 전체를 통해 드러낸 위와 같은 결론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시가 관련 분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림 분야를 비롯한 모든 기예들 즉 직조술, 자수, 건축 등의 예술 영역은 물론 인체 및 생물들의 내적 구조와 본성 등 우아함과 관련한 모든 영역으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시가 관련한 논의를 수행하면서 논의된 문제의식과 일부 도출된 결론들이 앞으로 다루어질 정의로운 국가의 전반적인 문제 영역에서도 통일적이고도 일관되게 적용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써 이야기 방식에서 음악적 요소와 관련한 논의가 마무리되고 지금까지 진행된 시가 교육이 왜 중요하고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끝으로 이어진다.

아홉 번째 시간, 친구 [시가 필요한 시간]

아홉 번째 시간, 친구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2020년도 어느덧 1월이 지나고, 2월의 마지막 주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굉장히 오랜만에 여러분을 만나는 기분이 드네요. 잘 지내셨어요?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와 세계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요, 이럴 때 일수록 몸과 마음 잘 챙기시고,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친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예전에는 친구하면 주로 학교 친구, 동네 친구, 동아리 친구를 떠올리기 쉬웠는데, 요즘은 SNS를 많이 하다 보니 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도 친구처럼 소통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또 원데이 클래스’ 같은 다양한 모임들이 주변에 많이 생기다 보니, 그곳에서 알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는 경우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 과거에 비해 친구라는 개념이나 경계가 확실히 넓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이의 개념도 과거보다는 덜 중요시되는 것 같고,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친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 한 편을 준비해 보았어요.

첫 번째로 여러분께 들려드릴 시는,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이라는 제목의 시예요. ‘우화라는 말은 인격화한 동물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자와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라는 뜻의 우화(寓話, 이솝우화)도 있지만, 짝 우(偶)에 말 화(話)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함이라는 뜻 우화(偶話)도 있더라구요. 마종기 시인의 시 제목은 이 두 번째 우화에서 왔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겠죠. 

시인은 이 시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강과 강물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여러 번 읽을수록 정말 와 닿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 앞에 넓은 강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들어보시죠. 

 

偶話(우화)의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네,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 들어보았습니다. 이 시를 들으면서 넓은 강을 한번 떠올려보자고 했는데요, 그 전에 먼저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모래밭 어딘가를 상상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그 부분에 흙이 조금씩 파이면서 작은 물길이 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 곳으로 물이 계속 흐르다 보면 점점 굵고 깊은 물길이 터지게 되죠.

 

이 시의 첫 시작이 그러한 비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평평했던 땅에 물길이 생기는 것 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을 함께 연결 지어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쪽과 저쪽 사이에 처음 물길이 생겼을 때, 그 사이로 자주 물을 보내야 그 자리가 조금씩 깊게 파이면서 물길이 유지될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얕기만 한 물길은 깊게 파이기 전에 금방 사라지고 말 겁니다.

 

물길이 오가야 그 물길이 점점 깊어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도 서로 친해지려면 자주 만나고 이야기가 자주 오가야만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할거예요. 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기 마련이죠.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매우 친한 친구가 있는데,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서로 존댓말도 썼고, 겉으로 내색은 안 하더라도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상황도 있었죠. 내 개인적인 얘기를 어디까지 꺼내야 될지도 잘 모르고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서로 말도 편하게 하고, 척 하면 착 알아듣고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고민거리도 서로 얘기하고 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있죠. 여러분도 아마 그런 친구 한 명씩은 있을 겁니다. 

시인은 처음 물길이 생기고, 물이 자주 오가고 서로 섞여야 하는 수고를 거친 후에는 넘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는 강물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로 전혀 모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만나서 서로 친해지기까지는 쉽다손 치더라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내면적 고민까지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사이까지 된다는 것은 진짜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진실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시인은 이야기 합니다.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 있겠는가. 수려한 강물이 된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하고 말이죠.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만큼의 물길이 오간 세월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곁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나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긴 세월과 많은 노력을 통해 이제 큰 강이 되었다면, 물을 계속 보내거나 굳이 수고스럽게 섞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계속 큰 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큰 강은 얕은 물길처럼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시를 거듭 읽을 수록, 강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정말 친한 친구와는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마치 며칠 전에 보고 다시 만나는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가 않잖아요? 정말 친한 친구라면,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사이일 것이고, 긴 말을 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친구의 한숨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그런 사이일 겁니다. 마종기 시인의 말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두 사람의 사이에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 만남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나게 될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인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어요.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시인은 그 시작과 끝은 모를지라도,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이미 시작된 인연과 만남이라면 그 만남이 맑고 투명하기를, 시원하고 곱게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맑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힘들 때 곁에서 든든히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또 누군가가 나를 생각 할 때 마냥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만나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시원한 강가에 나가면 가슴이 탁 트이듯이,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해봅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샘킴이 부른 <Your Song>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샘킴과 K-Pop Star 방송동기이자 같은 회사 소속가수인 권진아 양을 위해 만든 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권진아 양이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샘킴이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하는데요, 가사가 참 위로가 되는 노래입니다.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샘킴 – Your Song https://youtu.be/pMT0hihnb4E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여덟 번째 시간, 가족 [시가 필요한 시간]

 여덟 번째 시간, 가족

 

 마리횬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은 가족을 주제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평소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나요? 얼마 전에 설 연휴도 있어서, 아마 오랜만에 친척들과 부모님들을 뵙고 온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평소에는 학업에, 직장에 바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지만, 명절이나 연휴만큼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저는 2016년에 친척을 방문하러 호주에 갔다가, 약 2년간 호주 브리즈번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느낀 것 가운데 한 가지는, 호주 사람들은 참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호주에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퇴근시간 이후에 추가로 야근을 하면 추가수당을 받아요.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휴일이나 주말에 근무하면 기존에 받던 시급이나 주급의 몇 배를 추가로 받는 것이 법으로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 볼 때, “기존 시급의 몇 배를 더 준다고 하면, 서로 휴일에 근무하려고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울 텐데요,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은 돈을 좀 덜 벌더라도 그 일할 시간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추가 근무 대신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선택하더라구요. 호주 사람들에게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부분이 정말 크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복지의 조건과 상황이 다르겠지만, 호주 사람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때론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사실은 결국 가족들을 위해서 야근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일 텐데, 그 희생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그 희생이 가족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각각 한  골라보았습니다. 이 시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싶어요.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 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배꼽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와 어머니의 자궁을 연결시켜주는 탯줄이 있던 흔적을 의미합니다. 

 

그 탯줄을 통해서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나죠. ‘배꼽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분이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후로 자라나면서 또한 평소에 살면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체부위이기도 합니다. 

유안진 시인의 <배꼽에 손이 갈 때>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기왕이면 배꼽 위에 손을 얹으시고 이 시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배꼽에 손이 갈 때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들어보았습니다. 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시를 읽고 나니 이 시가 어머니에 관한 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시의 첫 부분에, 생각할 게 있으면 누군가는 가슴에 손을 얹기도 하고, 뒷머리를 긁는 사람도 있는데, 난 배꼽에 손이 간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뭔가 생각할게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시의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뭘까요?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낯선 이들과 가족 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말,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산다는 그 말을 한 번 생각해볼까요? 이 시의 화자는 어쩌면 지금 참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외국에 나가서 가족들과 떨어져있었던 경험이 있다 보니까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어요. 물론 외국에서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외롭지 않게 가족같이 잘 지냈지만, 정말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는 진짜 가족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겠죠. 

회사나 학교에서도 거의 친언니나 친동생과 같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터놓고 지내는 좋은 동료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더라도 실제 친언니와 친동생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진짜 가족보다는 그래도 뭔가 조심스럽고 약간의 거리는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이 시의 화자도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지금 한국의 20-30대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주변에도 취업 때문에 혹은 고시나 진로 때문에 부모님 집을 떠나 홀로 서울이나 지방에 나와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처음에는 독립했다는 설렘이 앞서지만 점점 혼자 지내는 게 쉽지 않고 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현실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지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는 거겠죠. 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데가 없다면,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어느 날 밤, 가만히 배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한 거죠.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말들, 이만하면 배부르다이만하면 따뜻하다너무 생각 말거라’ 라는 말은 아마도 어머니의 말투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 번쯤은 이런 기억이 다 있으실 겁니다. 어렸을 적에 배가 아프면 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꼽 주변을 쓰다듬어 주고, 배를 만져주던 기억. 한 번쯤은 있으실 텐데, 사실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자체는 아무 치료제도 아니고 그냥 일 뿐이죠. 하지만 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말하니까, 신기하게 무슨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아팠던 배가 싹 나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무슨 힘이 있던 것일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말에 어떤 힘이 있던 것일까요?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손과 말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배부르단다그만하면 따뜻하단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괜찮다라고, 너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단다라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 와서, 배를 쓰다듬고 있는 손이 내 손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이 된다는 이 표현에서, 시의 화자는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현재의 힘듦과 외로움을 견뎌낼 만한 위로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누구의 말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 때, 어머니라는 존재, 나를 향한 그 어머니의 위로의 말이야말로 정말 진심 어린 격려와 충고가 되겠죠. 

 

어머니의 말이 때로는 잔소리로 들릴 때도 있죠. 사실은 그 모든 말들이 다 나를 위한 말일 텐데, 자녀들은 그걸 쉽게 놓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시를 통해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와 함께 소개해드릴 곡은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곡입니다. 예전에 TV방송에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부르면서 유명해졌던 곡인데요, 오늘은 그 곡의 원곡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몰랐던 엄마의 속마음과 딸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 양희은- 엄마가 딸에게 https://youtu.be/8rWuQI9ljsY

 

 

 

늘 가족을 주제로 소개해 드릴 두 번째 시는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골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시는 유난히 슬픈 내용의 시가 많이 있더라구요. 어머니에 관한 시도 물론 슬픈 시가 있었지만 그래도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았는데, 아버지에 관한 시들은 유독 슬픈 내용들이어서 소개할지 말지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 한 편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서 가져왔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시는 이상국 시인의 <혜화역 4번 출구>라는 제목의 시 입니다. 제목만 들어서는 아버지가 연상되지 않는 것 같죠. 저도 처음에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아버지에 대한 시라고는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뭔가 가슴 한 켠에 묵직한 감동이 있었던 시 입니다. 여러분께도 그 감동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 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 준다 아빠 잘 가

 

네,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들어보았습니다. 시의 한 줄 한 줄에서 아버지의 무뚝뚝함이랄까? 그 무뚝뚝함 속에 담긴 진심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첫 번째로 읽었던 시가 자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시였다면, 이 이상국 시인의 시는 아버지 입장에서 자녀를 향하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 속의 아버지도 그렇고, 우리 아버지들은 왜인지 모르지만 다 큰 자녀들에게는 사랑표현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한 방송에서 개그맨 이경규씨와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경규씨의 딸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빠와 딸 모두 대화도 별로 없고 감정표현에 서로 서툰 서먹서먹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자료화면으로 두 부녀의 옛날 모습이 함께 나왔는데, 이경규씨가 3-4살 된 딸을 너무 잘 안아주고, 계속 딸아이와 이야기도 하고 너무 잘 놀아주고, 뽀뽀도 해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지금의 대면 대면한 부녀 사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친밀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가정이 다 똑같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위 방송에서처럼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현재는 자녀와 부모님 사이가 다소 서먹한 가정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우리의 아버지들도 예전에는 우리들에게 감정표현을 잘 하셨을 텐데, 왜 지금은 그렇게 못하실까요?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께 애교도 부리고 모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했던 때가 있었을 텐데, 언제부터 다소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을까요? 아마도 자녀들이 크면서 사춘기도 오고, 또 각자 자기만의 활동영역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자녀 사이가 멀어졌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시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오죠. 세 번째 연에서,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하는 대목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딸을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마음으로는 옛날처럼 딸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겠죠.

 

또한 서울에 눈이 온다고 보낸 딸의 메시지에 그거 다 아빠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아라라고 답장을 보낸다는 그 대목 역시도,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표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이 시를 읽으면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 속의 진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득 저희 아버지가 생각이 났어요. 저희 아버지도 전화하면 늘 하시는 얘기가 있어요. “뭐하고 있었어? 밥은 먹었고? 피곤하지 않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밤에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등등, 안부를 묻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면 항상, 잠깐만 있어 봐, 엄마 바꿔줄게 하고 그것으로 아버지와는 통화가 끝납니다. 어머니하고는 기본 30분은 넘게 통화하는데, 아버지와는 늘 약 3분 정도 통화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 더 길어지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잠깐만 기다려봐, 엄마 바꿔줄게로 통화가 끝이 나죠. 어렸을 때는, 하실 말씀도 없으신데 왜 전화 하시는 건가 싶기도 했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조금 크고 나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별 말씀도 안 하시고, 통화하는 시간도 짧음에도 이렇게 전화를 하시는 것 역시 다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던 것이죠. 이제는 그걸 다 알고, 제가 먼저 아버지께 전화 드리기도 하고, 아빠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어느 인터넷 페이지에서 읽었던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어요. 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릴게요. 

한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질문1]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여자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에 심한 흉터가 생기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세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요,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을 골랐을까요? 이 [질문1]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은, A 10%, B 10%, 그리고 C 80%였습니다. 압도적으로 C가 많았죠.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질문2]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남자는 사업에 크게 성공한 백만장자였다. 그런데 그의 회사가 파산해 남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여자는 그 남자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결과는, A 30%, B 30% 그리고 C 40%였습니다. 아까 첫 번째 질문보다는 예전처럼 사랑하겠다는 비율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대답과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답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친 교수가 말했습니다. “모두 이 두 남녀를 ‘연인관계’라 생각했나?” 학생들은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남녀라고 해서 연인관계로만 생각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학생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질문의 남녀가 ‘부녀관계’이고두 번째 질문의 남녀가 ‘모자관계’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지고 학생들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교수는 앞선 두 질문을 다시 한 번 되물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학생들 전원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답변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떤 흉터를 갖게 되든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고, 자식이 어떤 실패를 겪더라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죠. 

 

어느 인간관계가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관계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고, 쉽게 잴 수 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랑이 부모님에게 넘치게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유난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네요. 오늘 가족을 주제로 함께 했는데요,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출구>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홍재목의 당신이 그대가입니다. 이 노래는 사실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인데요,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게 되는 추억들, 그 아쉬움과 그리움을 노래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곁에 계실 것만 같지만, 사실 인간의 삶과 시간, 기억은 유한합니다. 언젠가는 이별하게 될 테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고 있는 이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죠. 이 노래 들으시면서 더 늦기 전에 우리 부모님과의 추억들을 되새겨보고, 다시 한 번 그 사랑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시구요,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올게요. 

 홍재목 – 당신이 그대가 : https://youtu.be/HcjgsIkXcl0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2020 경자년 한철연의 새로운 출발(신년회 사진)

안녕하세요? 웹진 편집주간입니다.

2020년이 밝은지도 벌써 두 달째가 됩니다. 한철연은 2020년에 지난 6기 연구협력위원회가 2년간의 일을 마감하고 7기 연구협력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지난 1월 15일 한철연 신년회는 한철연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면서 2년간 수고할 회장님과 연구협력위원들이 새롭게 포부를 다지는 자리였습니다.

앞으로 한철연의 새로운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라며 웹진도 새로운 동력을 얻어 좀 더 분발하겠습니다.

7기 한철연 회장 연효숙 선생님과 연구협력위원장 박지용 선생님을 위시하여 모든 연구협력위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일곱 번째 시간, 안녕(이별과 만남) [시가 필요한 시간]

일곱 번째 시간, 안녕(이별과 만남)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 일곱 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요, 여러분은 ‘안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안녕’이 떠오르시나요? 우리는 친한 누군가와 만났을 때 ‘안녕’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친한 누군가와 헤어질 때도 역시 ‘안녕’이라고 말합니다. ‘안녕’이라는 이 친근한 말 속에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제일 먼저 어떤 안녕이 떠오르셨을까요?

제가 알고 있는 몇 개 나라의 언어만 살펴보아도, 만날 때의 인사와 헤어질 때의 인사가 같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영어는 ‘헬로(Hello)’와 ‘굿바이(Good bye)’로 서로 다르죠. 중국어로도 니하오(你好)와 짜이찌엔(再见)이 다르고, 일본어도 만났을 때 ‘사요나라(さようなら)’하면서 만나지는 않습니다.

러시아어로도 친구끼리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고 인사하는 말은 ‘쁘리벳(Привет)’이구요, 헤어질 때는 ‘빠까(Пока)’라고 인사합니다. 완전히 다르죠. 이렇게 몇 가지 예시만 찾아 봤는데도, 신기하게 우리나라만 ‘안녕’이라는 하나의 말로 다른 뉘앙스를 나타내며 사용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편안할 안(安)에 편안할 녕(寧)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는 이 ‘안녕’이라는 말 속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났을 때 ‘그 동안 편안했는가!’라고 안부를 확인하는 반가운 마음, 그리고 서로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날 때까지 편안하고 편안하길 바란다!’는 다음 번 만남에 대한 소망까지 함축된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얼핏 헤어질 때에 말하는 인사로서만 생각했었는데,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깃들어 있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오늘 ‘안녕’이라는 주제로 이별에 대한 시를 두 편 준비 했는데요, 오늘 준비한 시 모두 완전한 이별을 노래한 시라기 보다, 방금 이야기했던 ‘안녕’이라는 두 가지 의미의 말처럼, 이별하지만 여전히 곁에 머무는 마음, 곧 다시 만나리라는 소망을 담아 이별을 노래하는 시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 노래>입니다. 시를 들어보시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는 시적 화자의 애잔한 마음이 잘 느껴지실 겁니다.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이별 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노래’ 들어보았습니다. 시 속의 화자는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어요. 상대방이 곧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떠날 사람에게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조금만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가 떠난 후에 그대를 사랑하겠다… 음… 이 시는 무슨 의미일까요? 누군가가 ‘떠난 후’에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사랑일까요? 시인은 그 사랑의 방식을 ‘노을이 되는 것’ 그리고 ‘별이 되는 것’으로 비유 합니다.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사람에게 조금만 늦게 떠나주기를 바라면서, 그 사이에 내가 먼저 그 곳에 가서 그대 뒷모습에 배경이 되는 노을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옷깃을 여밀 만큼 추운 날, 주위가 어둡고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때에도 그대를 위해서 노래하는 밤하늘의 별이 되리라고 고백하고 있죠.

노을과 별은 모두 내가 인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 시간에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들이죠. 노을과 별처럼 그렇게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늘 그 자리에서 그대를 사랑하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별 노래’를 들은 사람은, 아마도 노을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밤에 별을 보더라도 그냥 별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던 그 사람이 왠지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 시는 처음에 시작했던 연이 마지막에 한번 더 반복되면서 끝나고 있습니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어떤 이유에서 맞이하게 된 이별인지 시에 드러나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는 이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아마 마음으로는 늘 함께이지 않을까요? 주황빛의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노을이 되겠다고 고백했던, 그리고 별이 되어 노래하리라고 고백했던 그 상대방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이 시야말로 헤어졌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는 그런 ‘안녕’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번에 이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가 있습니다. 가야금 연주자인 정민아가 작사작곡하고 직접 부른 <무엇이 되어>라는 곡인데요, 실제로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가사도 독특해서 여러 번 듣게 되었던 곡이에요. 이 노래의 가사에는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 가까이 있는 무엇이 되고 싶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이 되었어도 난 그대와 나 사이 이별 안에 있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역설적이면서도 반복되는 이 가사가 비록 헤어지지만 늘 함께 있겠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함께 들어보시죠.

 

♫ 정민아_무엇이 되어: https://youtu.be/eA2WhHHdDg0

 

네, ‘안녕’을 주제로 시가 필요한 시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녕’을 주제로, 이별과 만남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었던 두 번째 시는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입니다.

‘바람의 말’.. 뭔가 바람이 전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시를 먼저 듣고 이야기 더 나누겠습니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 시는 마종기 시인에게도 의미가 있는 시라고 합니다. 마종기 시인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시인인데요, 어느 날 병원에서 예순 살 정도 되신 분이 자신의 사연을 적어 마종기 시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는데 바로 이 <바람의 말>과 관련이 있는 사연이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1년전 사랑하는 남편을 폐암으로 떠나 보냈던 보호자였다고 해요. 긴 투병 기간 중 점점 쇠약해지던 남편이 어느 날 종이 한 장을 내밀면서, 아내에게 시간 날 때 읽어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 때는 정신도 없고 피곤해서 ‘그러겠다’고 하고 잊고 지냈었는데, 얼마 후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른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남편이 죽기 전에 전해주었던 그 종이가 나온 겁니다. 그 종이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는데, 그 시가 바로 이 마종기 시인의 시 <바람의 말> 이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듣고 다시 시를 보면, 이 시가 실제로 떠나는(혹은 이미 떠난) 누군가의 메시지로 들리기도 합니다.

바람은 나뭇가지도 흔들고, 꽃나무의 꽃잎도 날아가게 하는데, 시적 화자는 그게 그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너의 곁에 머물고자 하는 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라고 있죠. 두 번째 연에는 이러한 시 구절이 나옵니다.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그대를 알았던 자리에 꽃나무를 심고, 그 꽃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이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내가 심었던 꽃나무가 꽃을 피울 때쯤엔, 우리가 서로 안다는 이유로 생겼던 괴로움들이 사라질 거라는 말인데…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좋지만… 이제 막 꽃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언제 자라서 언제 꽃을 피우겠어요? 그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게 될 때까지의 그 오랜 시간은 계속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라는 말일까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세 번째 연에서 나옵니다. 시인은 마치 그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하죠.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이제 막 심은 나무에서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 꽃을 피울 날이 과연 언제 도래할 것인가.. 그게 참 아득한 일인 것 같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일은 우리의 생각으로 다 알 수가 없다고…

어렸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 내게 성숙의 시기가 찾아봤을 때, 즉 어떤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이해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죠.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 등, 현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가 되면, 이 시의 표현대로 나무에 꽃이 필 때가 되면, 그 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라고 위로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는 고통도 따르겠죠. 그럴 때, 시인은 귀 기울여 바람의 말을 들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착한 당신’, 너무나 착하기 때문에 홀로 남아 이별을 괴로워하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늘 곁에 있을 테니 힘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는 이 시를 읽고 또 듣는 동안에,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하고 그 팽목항에 매여있던 노란 리본이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바람에 꽃잎이 날린다는 시 구절과, 바람에 날리고 있는 노란 리본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는 것 같았고, 시를 여러 번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세월호 아이들과 유가족들이 많이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언제쯤 꽃잎이 되어 이 괴로움이 다 날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 있는 ‘안녕’이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두 편의 시 만나 봤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가 노을과 별로 함께 머물겠다는 고백이었다면, 마종기 시인의 시는 이별하지만 여전히 ‘바람’으로 곁에 머물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시였습니다.

오늘 마무리하면서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과 함께 들으면 좋은 곡 소개해드릴게요. 김효근이 작곡하고 뮤지컬배우 양준모가 부른 <내 영혼 바람 되어>라는 곡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구전되던 작자미상의 시 ‘A Thousand Winds’라는 시를 김효근씨가 직접 번역하고 곡을 붙인 노래라고 해요.

저는 사실 이 노래를 2006-2007년쯤에 알게 되었는데, 양준모씨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이 곡이 지금은 세월호 추모곡이 되어 있네요. 그 이유와는 상관 없이, 가사의 내용과 멜로디가 마종기 시인의 시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정호승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추운 날씨 탓에 움츠러들기 쉬운데요, 따뜻한 시와 좋은 노래와 함께 포근한 하루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올게요.

 

♫ 양준모_내 영혼 바람 되어: https://youtu.be/Oa0cpu5N5a0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376e-392c)

          1-2-1-2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방식과 모방(392c-398b)

 

[392c-d]

* 소크라테스는 이야기λόγος와 관련한 논의 즉 시가의 내용에 대한 고찰을 마치고 이어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에 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 시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ἅ λεκτέον와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지ὡς λεκτέον의 문제가 완전하게 마무리된다는 것이다.(392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 방식에 대한 고찰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가에 대한 고찰이라고 답한 후 그 ‘이야기 진행방식(서술방식)’διήγησις을 단순 서술 방식ἁπλός διήγησις과 모방μίμησις을 통한 서술 방식 또는 그 양쪽 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술 방식으로 나누어 고찰하기 시작한다.(392d)

 

[392e-393c]

* 소크라테스는 단순 서술 방식이란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꾀하고 있지 않은 방식 즉 시인 자신이 직접 서술하는 방식을 말하며,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이란 시인 자신이 마치 시가의 등장인물이 직접 발언하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최대한 그를 모방하여 서술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데이만토스가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마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설명해주겠다고 말한 후, 그 두 가지 방식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아가멤논에 대한 크뤼세스Χρύσης의 간청을 다루고 있는 <일리아스>의 첫 부분에서 각각 인용하여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호메로스는 어떤 곳에서는 크뤼세스에 대해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는 자신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늙은 제관인 크뤼세스로 생각하게끔 최대한 크뤼세스를 모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393d-394b]

*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인이 자기 자신을 어디에서고 숨기지 않고 호메로스로서만 이야기를 했더라면 모방은 없고 단순한 서술 방식만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후, 그러한 단순한 서술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보다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흥미롭게도 앞서 인용한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모방이 없는 단순 서술 방식으로 형식을 바꿔 길게 들려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발언과 발언 사이에 있는 시인의 말(단순 서술 부분)을 제거해버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들만 남겨 놓을 경우 이야기 진행은 앞의 것과 정반대 즉 모방만 있는 서술 방식이 되고 만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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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구분되어 다루어지는 이유는 시가 자체가 설화 내용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구전되어오면서 노래 내지 음송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형식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된다. 하나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관련한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야기에 붙는 곡조와 리듬과 관련한 논의이다. 우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는 이중 전자의 것으로서 세부적으로 1)설화를 서술하되 설화에서 설명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을 해설조로 서술하는 방식 즉 ‘단순 서술 방식’과 2) 등장인물이 말하는 부분을 마치 그가 직접 말하듯 서술하는 방식 즉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구분된다.

* 1)의 방식은 쉽게 요즘의 소설이나 연극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간접화법의 방식 즉 내용에서 일반서술이나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나 음송인이 단순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고, 2)의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 즉 설화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부분 즉 대사에 해당하는 내용을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인 양 서술하거나 음송하는 방식이다. 이 가운데 2)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이 마치 해당인물이나 신이 말하듯 음송 서술해야 하므로 최대한 해당인물이나 신 또는 영웅을 잘 흉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1)의 방식은 시인이나 음송인에 의한 단순 서술 방식으로 부르고 2)의 방식을 모방을 통한 서술 방식으로 부른다.

* 플라톤의 시인 비판이나 예술 비판을 주제로 <국가>를 고찰할 때 꼭 제기되는 개념이 ‘모방’mimesis개념이다. 오늘날 예술과 관련하여 ‘모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흔히들 ‘창조’에 대비되는 의미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오늘날 예술의 본질을 창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종종 플라톤이 예술을 모방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예술 폄하론자로 몰아세우곤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에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방의 의미보다 훨씬 넓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모방에 관한 논의가 처음 나타나는 이곳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개념의 근본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미리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앞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에서 창조라는 말의 반대말 즉 어떤 원상을 외형적으로 흉내 내는 것, 복제하는 것, 베끼는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을 표절하는 것을 우선 연상해낸다. 그리고 모방 또한 뭔가에 대한 일종의 묘사이자 표현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모방이라는 말을 표현이나 묘사라는 말과 결코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묘사나 표현에는 모방적인 묘사나 표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창조적인 묘사나 표현까지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플라톤의 모방 개념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묘사와 표현의 뜻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모방의 일차적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원상을 단순히 베끼거나 모사했느냐 아니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창조이건 아니건 그 모두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이자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객관적인 원상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묘사나 표현 또는 그 결과물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동사적 표현이나마 모방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국가> 388b에서도 이미 직접적으로 그 말을 ‘묘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근본적으로 객관적 원상에 대한 주관의 묘사라는 점에서 모방의 결과는 실재성의 심급에 있어 원천적으로 원상에 못 미치는 일정 부분 결핍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성의 한계일 뿐 그 밖에 원상에 대한 표현과 묘사로서 모방 자체가 갖는 가치와 효용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본질적으로 원상의 모사인 만큼 실재성에 있어 원상에는 못 미친다는 점만 괄호에 넣고 보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모방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방하는 대상이 좋은 것인가 나쁜가와 그 모방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예술은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감각적 묘사의 산물로서 예술 작품이 갖는 실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어도 예술이 갖는 가치나 기능 내지 효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오해되어선 안 된다.( <국가> 10권에서의 예술과 시인 비판은 여기에서와 달리 기본적으로 실재성의 심급과 관련하여 모방이 갖는 이러한 한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요컨대 예술의 가치와 기능과 관련하여 예술이 비판 받는다면 그것은 모방 때문이 아니라 그 모방의 대상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방의 대상과 모방 수준에 따라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훌륭한 예술도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예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를 토대로 모방이 이루어지는 각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표 된다. 이를테면 이곳에서처럼 시가의 이야기 영역에서의 모방은 신과 영웅을 대상으로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 내어 서술하는 것(emulation)을 의미하고, 미술과 조각, 음악 등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모양이건 소리이건 원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최대한 똑같이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사(copy)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수호자 교육의 영역에서의 모방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좋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본받고(modelling) 배우는 것(learning)을 뜻하고, 넓게는 기술 영역에서도 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의 기술을 본받아 사람들에게 선하고 이로운 것을 만들거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전문 기술 또한 모방인 것이다. 요컨대 그 모방의 좋고 나쁨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모방 그 자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어떤 수준으로 모방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이를테면 신이건 영웅이건 모양이건 소리이건 게다가 기술에서건 교육에서건 원상들의 선성과 아름다움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모상 속에 재현해내느냐에 의해 얼마든지 좋은 모방이 될 수 있고 그만큼 훌륭한 예술가들의 존재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모방의 과정에서 남과 다르게 원상의 아름다움을 보다 잘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는 사람의 탁월성이자 훌륭한 능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드러난 남다른 차이는 모방자만의 고유 능력에 의해 새롭게 산출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성격 또한 갖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누군가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만큼 숨겨진 원상 본래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재현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예술 영역에서의 창조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이 전적으로 상호 배척되거나 모순되는 것만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예술이 창조행위를 통해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시대를 불문하고 인류 모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지고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구현해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적 창조성이란 원상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예술가 자신에 의해 작품 속에 구현된 새로운 미적 가치와 의미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 원상을 전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일지라도 그 현실적인 과정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는 탐구와 모색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이를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모방 또한 새로운 의미 생산으로서 예술적 창조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플라톤적 예술 내지 미학에서 유독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 조화미가 강조되는 까닭은 모방의 대상으로서 플라톤적 원상의 극대점에 다름 아닌 영원히 선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주적 선성의 본질이 곧 ‘서로 다른 것들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으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우주는 이미 우주 영혼을 통해 그 자체로 시간적 영원성과 공간적 질서와 조화를 확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신적 실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영역에서 모방은 말할 것도 없이 배움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그 우주 영혼을 모방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나라에서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 또한 당연히 수호자들이 추구해야할 모방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수호자 교육의 궁극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변증법을 통한 형상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 또한 본을 보고 우주를 만든 원상으로서 데미우르고스적 사유에 대한 모방인 것이다. 다만 그러한 철학 영역에서의 모방과 예술 영역에서의 모방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후자의 모방이 시각과 청각 등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기본적으로 감정에 작용하는 것임에 비해, 전자는 감각 너머의 지성적 사유와 관조를 통해 표현되고 이성과 정신에 작용한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상에서 플라톤의 모방 개념을 여러 영역에 걸쳐 아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지금 읽은 이 부분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방 개념에만 주목한다면 일단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은 다만 위에서 말한 여러 모방 개념들 가운데 하나인 시가 영역에서 사용되는 좁은 의미에서의 모방일 뿐이다. 즉 그것은 앞서도 인용했듯이 다름 아닌 시가 영역에서 신과 영웅을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직접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읽을 때 모방 개념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의미로 한정해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394c-d]

*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그러한 모방만 있는 이야기 진행은 비극의 경우라고 말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아래 3가지로, 즉 전적으로 모방에 의해διὰ μιμήσεως ὅλη 이루어지는 것, 단순 서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 양쪽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구분하고 희극κωμῳδία과 비극τραγῳδία, 디튀람보스διθύραμβος 시가, 서사시ἐπή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다.(394c)

* 그제야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이 시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즉 이야기 방식과 관련한 아래의 선택지들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고찰하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즉 전적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전혀 모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도록 할 것인지를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어떤 것을 모방의 방식으로,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할 지도 합의해야 한다χρείη 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πλείω ἔτι τούτων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392d)

 

[394e-395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들이 모방에 능한μιμητικός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도 앞서 말한 바에 따르게 되는지를 묻고 ‘동일한 사람이 여러 가지 것을 모방할 때는 한 가지 것을 모방할 때처럼 훌륭하게 할 수 없다는 것ὅτι πολλὰ ὁ αὐτὸς μιμεῖσθαι εὖ ὥσπερ ἓν οὐ δυνατός을 확인한다. 그런 일을 시도할 경우 많은 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놓치는 격이 되어 결국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이다.(394e) 그러므로 희극과 비극을 짓는데 있어 양쪽 모두에 능할 수는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음송인ῥαψῳδός이자 배우ὑποκριτής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고 같은 사람이 희극 배우κωμῳδός이자 비극 배우τραγῳδός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들 모두가 모방물μιμήματ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95a)

 

[395b-396b]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성향은 그런 종류의 것들 보다 한층 더 세분되는σμικρότερα 것이어서 우리의 처음 주장대로 수호자들은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δημιουργία을 포기하고 ‘이 나라의 엄밀한 뜻의 자유의 일꾼들’δημιουργοὺς ἐλευθερίας τῆς πόλεως πάνυ ἀκριβεῖς이어야만 하므로 그것에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그 밖에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도, 그 어떤 것도 모방해서는 아니 되고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ἀνδρεῖος 절제 있고σώφρων 경건하며ὅσιος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방이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계속되면 몸가짐과 목소리 또는 사고διάνοια에 있어 습관ἔθος이나 성향φύσις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비굴하거나 창피스런 짓을 모방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395c-d) 그러므로 훌륭한 남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들이 이러 저러한 못난 일을 하는 여인들은 물론 노예들과 못되고 비겁한 자들, 비속한 말을 해대는 자들, 그 밖에 언행을 통해 자신과 남들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5d-396a) 그리고 수호자들이 대장일 등 다른 전문적인 일을 하는 장인들이나 삼단노 전함τριήρης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 등에 마음을 쓰거나 모방을 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말ἵππος과 황소ταῦρος가 우는 소리, 시끄러운 강물ποταμός 소리나 굉음을 내는κτυποῦσαν 바다θάλασσα나 천둥소리 같은 것을 모방해서도 안 되고 미친 짓을 하거나 그것을 닮은 짓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396b)

 

[396c-397b]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시가의 이야기 방식λέξις과 이야기 진행(서술 방식)διήγησις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한 사람ὁ τῷ ὄντι καλὸς κἀγαθός이 따라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고 언급한 후 그 각각의 경우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즉 절도 있는μέτριος 사람은 시가를 이야기하다가 훌륭한 사람의 말투나 행동에서 꿋꿋하고 슬기로운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면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이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하며 모방하고 싶어 할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지만,(396c) 그 사람이 못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열의를 갖고 모방하려들지 않을 것이고 그런 모방을 창피스러워하고αἰσχυνεῖσθαι 내심으로 경멸할ἀτιμάζων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d) 따라서 조금 전에 호메로스의 시구와 관련해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이야기 방식 즉 단순 서술을 통한 방식과 모방을 통한 방식 모두가 이야기 진행에 관여가 되어 있지만, 결국 그 가운데 모방을 통한 방식과 관련해서는 위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만 모방이 허용되는 한, 시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396e)

* 그러나 이와 달리 훌륭하지 않은 자들의 경우는 그가 비천할수록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온갖 것들, 이를테면 천둥소리나 우박 또는 도르래 따위의 굉음 또는 나팔이나 아울로스 등 악기 소리, 개와 양, 새소리 등 갖가지의 소리와 몸짓을 모방하려든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야기 방식과 서술 방식에 있어서는 그 만큼 단순 서술 방식은 조금 뿐이고 대부분이 모방을 통한 방식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 방식을 거론한 배경이 다름 아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비로소 확인된다.(39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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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시나 설화 이야기에서 서술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방식 중 소크라테스가 지지하고 있는 방법은 단순 서술 방식이고 가장 멀리하는 방식은 모방의 방식 즉 자기가 등장인물인 듯 흉내 내어 서술하는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리아스> 첫 부분의 내용을 단순 서술방식으로 몸소 바꾸어 서술하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러한 서술방식들을 굳이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단순 서술 방식은 간접화법의 방식으로, 모방을 통한 방식은 직접화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언뜻 우리 생각에는 직접화법이 간접화법보다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이고 실감나게 전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전달 방식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간접화법 즉 단순 서술 방식이 더 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야기 진행 방식과 관련한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방식 간의 우열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방식들과 희극과 비극, 디튀람보스 시가, 서사시를 순서대로 그것들 각각에 귀속시킨 후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 나라에서 비극과 희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은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라 언급한 후 다만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으므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을 진행해가자고 말한다.

*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일단 모방보다는 단순서술 방식에 더 우위를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시가는 옛날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직접 목도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판단되는 이야기를 허구의 형식을 빌려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단순 서술 방식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그러한 허구 외에 마치 시인 자신이 그 모방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만드는 허구 즉 흉내라는 허구를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흉내를 내는 대상들이 각기 다른 여럿이라는 점에서 그 대상의 숫자만큼 허구의 가짓수 또한 늘어나는 것이다.

*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 이제 이야기 방식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단순히 단순서술 방식과 모방의 방식을 구분하고 비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님이 서서히 드러난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앞서 마치 바람이 그러듯 논의가 이끄는 대로 고찰하자고 말한 것처럼 그 이후 이어지는 논의를 들여다보면 앞서 말한 이야기의 진행 즉 서술 방식간의 비교 우위와 그에 합당한 극형식의 선택이 논의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가운데 모방의 방식과 관련하여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이 모방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다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앞서 살폈듯이 시가에서 단순 서술방식은 최소한 이야기 서술에 있어 시인이나 음송인 한 사람의 허구를 담고 있지만 모방의 방식은 등장하는 각기 다른 여러 대상들을 다 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들의 온갖 종류의 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이 저마다 한 가지 일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지 많은 일을 그렇게 할 수 없다(394e)는 일인일기의 원칙 즉 한 사람이 하나의 전문 기술을 가진다는 원칙에 비추어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플라톤은 이곳에서도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을 다 똑같은 수준으로 다 잘 흉내 낼 수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좋은 것 나쁜 것 가리지 않고 흉내를 낼 경우 그러한 모방은 시가를 배우는 어린이들 특히 수호자가 될 사람들에게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요컨대 이 부분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모방 자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일인일기의 원칙에 따라 시가 교육과정에서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은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흉내 내는 시인들과 음송인 내지 배우들의 행태가 초래하는 해악을 비판하는데 있다. 특히 수호자들은 플라톤의 처음 주장대로 일인일기라는 전문가 주의 원칙에 따라 다른 일체의 전문 기술을 포기하고 ‘엄밀한 뜻에서 이 나라의 자유의 일꾼들’이어야만 하므로 시가 교육 단계에서부터 시인들이나 음송인들, 배우들처럼 분별없이 온갖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행위들과 온갖 종류의 나쁜 소리들을 모방하게 해서는 안 되며 다만 모방을 할 경우 용감하고 절제 있고 경건하며 자유로운 사람들과 같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바로 어릴 때부터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에게 모방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모방은 배움의 중요한 양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모방의 좋고 나쁨은 다름 아닌 그 모방의 대상과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행위나 소리들을 흉내 내거나 묘사해내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문 기술이자 능력으로서 이른바 연극배우의 고유한 기능이다. 단 한 사람의 성격과 역할만을 잘 흉내 내고 모방할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배우가 아니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태를 마치 그 사람인 양 똑같이 흉내, 즉 연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연극배우가 갖는 고유 기능이다. 그리고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 가치가 요구되는 그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연극배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나 연극배우를 일인일기 내지 전문가 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는 플라톤의 관점은 사실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게다가 연극배우들이 다양한 행위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연기에 불과하다. 악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연극배우가 악한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 그럼에도 굳이 플라톤이 일인일기 원칙에 입각하여 시인들이나 배우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배경에는 이미 선대의 시인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은 물론 당대에 활동하던 기존 시인들의 행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부정적인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서 수호자들이 모방하는 부분은 긴 이야기 가운데 작은 부분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396e) 이미 당대의 시가에서는 수호자가 모방을 통해 배울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호메로스 등 선대 시인들은 시가를 지으면서 이미 신과 영웅들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며, 당대 시인들 역시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시가 교육 과정에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규모의 연극을 통해 유포 재생산함으로써 어린이들과 대중들을 그릇된 가치관으로 이끌어 아테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당대 시인들은 물론 음송인들과 배우들 모두 그릇된 시가 내용을 무분별하고 반성 없이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유포함으로써 단순히 시의 창작이나 연기행위를 넘어 그것을 그들 자신의 삶인 양 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대중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분별력을 잃고 자신의 고유 욕망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넘보게 되면서 각기 다양했던 모두의 욕망이 종국에는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좋고 나쁨에 구애 없이 무분별하게 모방을 일삼는 이러한 시인들과 음송인들, 배우들의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모방 양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시가 교육이나 예술 교육 자체가 갖는 중요성까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중요한 만큼 더욱 철저히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서 지고의 진실로서 신의 선성을 토대로 기존의 시가 교육과정을 철저히 재편하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는 그와 같이 새롭게 재편된 시가 교육 과정을 통해 당대의 시인들과 다르게 오직 신과 영웅들의 선한 모습을 모방하고 배움으로써 훌륭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대 시인들과 시가 교육과정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수행할 수호자들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고 엄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 시가와 시인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예술인 내지 대중문화의 생산자들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그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자유주의적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차대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처럼 시가 내지 예술 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심대하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의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마무리 한 후에 시가가 갖는 음악적 요소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매우 상세하게 이어간다. 시가에서 이야기 서술 방식이 갖는 중요성도 크지만 시가가 일종의 노래의 형식을 갖고 음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가 교육에서 음악적 요소가 차지하는 영향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시간, 기다림 [시가 필요한 시간]

여섯 번째 시간, 기다림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보신 적 있으세요?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설렘으로 느끼겠지만, 짜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제가 한 번은 친구랑 대학로에 가기로 하고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길을 몰라서 그 친구와 꼭 같이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친구가 10분 후면 도착한다고 해서 카페에 있는 푹신한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를 기다렸죠.

 

그런데, 자꾸만 문을 보게 되는 거예요. 문이 열릴 때 ‘그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고, 또 누가 들어오길래 ‘내 친구인가?’ 하고 보면 아니더라구요.

막상 문이 열리면 다른 사람들만 들어오고, 그럴 때마다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 ‘아 왜 안 나오지’하고 ‘빨리 왔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시죠? 가만히 있어도 어련히 알아서 도착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문으로 눈이 가던 경험. 내가 쳐다 본다고 상대방이 더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얼마쯤 지났을까, 진짜로 그 친구 얼굴이 딱 들어오는데, 세상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문득 어떤 시 한 편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시가 바로 오늘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인데요, 직접 누군가를 기다려 보니까, 이 시만큼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마음,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의 심경 고백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시인데요,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이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들어 보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이 대목이 참 공감이 됩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문 쪽으로 눈이 갔던 그 경험과 참 비슷하죠.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 부분도 참 멋진 표현이에요. 이 시 속의 ‘나’는 사실 계속 한 자리에 앉아서 상대방을 기다리는 중이지, 실제로 일어나서 움직이는 건 아니에요. 직접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향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어요. ‘기다리다 지쳐서 차라리 내가 간다’ 그런 말이 아니라, 몸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내 마음은 이미 오고 있는 너에게 가있다는 거죠. 그만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말하면서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서 너에게로 ‘가고’ 있고, ‘가슴에 쿵쿵거림’을 따라 너에게로 ‘가고 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시인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 역시,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을 다 해서 와야지만 서로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나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 지인들을 생각해 봐도, 그들과 ‘지금’ ‘이 시점’에 ‘이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확률이죠.

제가 한국에서 알게 된 스웨덴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사실 50대 아주머니셔서 우리 문화에서 친구라고 하기는 조금 멋쩍지만,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스웨덴에 있었어요. 아주 먼 데서 왔죠. 그리고 이 친구에게는 50년이 넘는 세월이, 저에게는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인 2019년이 되어서야, 우리가 한국에서 서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거니까,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우리가 만난 것이겠죠.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웃에서 알고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해 봐도, 한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 시 구절이 잘 말해주듯 얼마나 어렵고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다릴 때, 그 사람과의 인연을 이렇게 생각을 해 본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리더라도 결코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시간일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만남과 기다림이 결코 다른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만남이 있으려면 오랜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린 만큼 그 만남이 값질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러블리벗이라는 프로젝트팀이 작사 작곡하고, 홍재목이 부른 ‘그늘 같은 늘 같은’이라는 곡입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따뜻한 곳만 찾게 되지만, 여름 한 낮은 그늘이 정말 필요한 시간이죠. 여름에 햇빛이 뜨거울 때는 짧은 그늘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 곡에서는 한 겨울에 여름이 되길 기다리면서, 여름이 되면 다시 그늘을 찾듯이 나를 잊지 말고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리노라고 노래하는 곡입니다. 오늘 읽은 기다림의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홍재목의 <그늘 같은 늘 같은> 듣고 오겠습니다.

 

홍재목 – 그늘 같은 늘 같은: https://youtu.be/TvuEKuMx6sM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은 기다림을 주제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문병란 시인의 ‘호수’라는 시입니다. 사실 저는 이 시의 텍스트를 먼저 읽고 난 후에 제목이 ‘호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제목이 왜 호수일까 좀 생각을 하게 되는 시 였습니다. 시가 길지 않은데, 여러분도 시를 들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그럼, 시 먼저 듣고 오겠습니다.

 

호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무수한 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 버린 다음

비로소 만나야 할 사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 시인의 ‘호수’ 들어보았습니다. 이미 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난 후, 집에 돌아온 밤.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이 때는 아마도 혼자 있을 때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을 다 만나고 난 후,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런 고백은 흔하지 않죠.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그런 사람을 지금 오래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라고 표현하고 있죠. 이것은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사랑하고 싶다고 하는 이 고백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 여러 거쳐가는 사랑 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어떤 시행착오 없이, 가장 마지막으로 만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들으면 ‘끝사랑’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요. 첫사랑은 여러 명 일 수 있는데, 끝사랑은 딱 한 사람뿐이잖아요.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그런 지나가는 사랑이 아니라, 진짜 마지막 사랑이라는 건, 그 사람을 평생 사랑하고 살겠다는 이야기겠죠.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수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으로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 속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정말 긴 기다림이기에, 시인은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나에게는 너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런 의미로 읽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나의 모든 사랑의 마지막이 너다. 내가 하루 종일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나의 고독의 시간에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존재는 너다. 와, 이런 고백은 참 멋지죠.

 

그런데 왜 제목이 ‘호수’일까요? ‘바다’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저도 나름 열심히 고민해보고 유추해낸 결과가 있긴 한데, 제가 미리 말씀은 안 드리고, 처음으로 “애독자 퀴즈”를 내볼까 합니다.

​이 문병란 시인의 시 ‘호수’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고, 왜 제목이 ‘호수’일까에 대한 나름의 생각들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돼요.

시와 문학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본인의 감상, 느낌 생각들을 짧게라도 적어주세요. 적어주신 분들에 한해서 소정의 상품을 드리겠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분들의 댓글을 기다리는 2주가 되겠네요. ^_^

 

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외로움’이다, 혹은 ‘그리움’이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문병란 시인은 사랑을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긴 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깨달음은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어깨와 무수한 눈길을 다 지나고 시간의 변두리로 물러나 혼자 있게 되었을 때,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서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죠. 기다림과 고독이 만나는 순간이네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독의 시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같은 그 외로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됩니다.

 

오늘 끝 곡으로는 심규선 작사 작곡의 심규선이 부른 ‘강’이라는 곡 들려드릴게요. 이 노래는 심규선씨가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그 감정을 담아 쓴 곡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요,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만큼 긴 기다림이 있을까, 그것만큼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병란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많이 생각났던 곡이었는데, 여러분께도 나눌게요.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돌아올게요.

 

심규선 – 강https://youtu.be/mDSO6bfk2x8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톡,톡,씨네톡]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을 잘 몰랐던 20대 청춘이 영화로 전태일을 만나고 돌아본 지금 우리 삶에 대한 단상 – 편집자 주

 

!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도시인

 

아직 11월 말인데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가와 카페를 채우고 방금 커피 주문을 받던 점원은 루돌프 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데이였는데… 올해 할로윈의 주인공은 조커와 할리퀸이다. 영화의 힘일까? 귀신을 기리지 않고 캐릭터 인기투표의 장이 돼가고 있다.

마침 라떼가 나왔으니, 한잔 들이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때는 세계가 해리포터에 빠졌었다. 모두 마법사 망토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라고 외치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처럼 활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할로윈 데이 때는 다들 해리가 돼 이마 한편에 번갯불을 이고 다녔었다. 그런데 할로윈 데이에 볼드모트 분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름조차 부르면 안 되는 사람 분장을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일까?

하지만 이건 내 라떼의 이야기고 요즘 이야기를 하자. 이제 한국은 제법 문화적으로 풍부해진 것 같다. 할리우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도 수출하고 있다. 가장 잘나가는 것 중 하나가 방탄소년단일 것이다. 여기 카페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캐릭터가 새겨진 굿즈를 팔고 있다.

사실 난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한 장면이 있다. 음악프로에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한 멤버가 말했다. “응! 어서 와~ 방탄은 처음이지?” 남자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인 표현으로 속삭인다. 그 어떤 자기소개보다 짜릿했다.

 

전태일, 너는 나에게 부담감을 줬어.

 

최근에 본 영화 중 나에게 방탄소년단의 부담스럽고 낯부끄러운 인사와 같은 짜릿함을 준 게 뭘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나에게는 옛사람인 전태일(1948.8.26~1970.11.13)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인상을 주고 떠나간 사람이지만, 정규 역사 수업에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어르신들 얘기를 엿듣거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가끔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클릭해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옛날에 뭘 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이러던 내가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 ‘세상과 대척점에 서서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희생한 인물’ 물론, 한 인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위험한 일반화지만 이 글은 전태일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전태일이란 이름을 들으면 볼드모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뭔가 큰일을 했지만,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까 굳이 그 이름을 꺼내면 안 되는 사람 정도? 이른바 금기어에 갇혔다고나 할까.

어른들이 공통으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정치·종교·집안 문제는 말하는 게 아니여~’인데, 전태일은 이 중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이 세 주제는 개인의 바뀔 수 없는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걸까? 반면에 신변잡기 같은 ‘small talk’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재미있으면서 이렇든 저렇든 누구에게나 큰 상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나누면서 공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모 아니면 도, 아니 마이너스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야 하는 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PC)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현대에는 약간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 문제의 뿌리는 언어적 제국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함은 옳지만,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금기되어 있다. 강자가 강해진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식어버린 체다치즈 감자튀김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끈끈하게 굳혀졌다.

굳혀진 끈끈함 중 하나는 쉬이 공감 받고 싶은 열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 쉽게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대화들은 늘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와 이병헌을 필두로 <미스터 션샤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소재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아주 멋들어지게 드라마는 그려냈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커지고 있는 반일본 정서의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에 매료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일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발효된, 묵은 옛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다시 새길만 하다. 시대가 지날수록 정치·사회·문화 모두가 변해가므로 그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교두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에 <미스터 션샤인>은 매혹적인 교두보였다. 세대 차이가 나는 현대와 과거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를 잊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한다. 조선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적응의 대가를 너무나도 아프게 치러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지 않고 지금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고 대화의 구심점이 되는 주제가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게 과연 우리 자신에게 좋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금기어라고 느낄 수 있는 토론 논제가 어쩌면 우리 생활에서 서로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깊숙이 박힌 악순환의 고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고 말하는 피드백을 동반한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이해심과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금기어는 누군가에겐 상처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만심만으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너무나도 많다. 비싼 점심 메뉴, 비싼 커피값, 의미 없는 학교 수업, 실업 문제 등 과연 지금 우리의 생생한 삶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다. 코를 뚫은 남자, 무릎 꿇고 구걸하는 걸인,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보라. 생각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문제만 골라보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자. 내 의견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책도 읽어보자. 겹겹이 자료를 쌓고 준비가 끝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악(樂)인열전]⑤

연말 특집 – 한국 인디씬을 위하여

 

이 현 (건국대학교 철학과)

 

항상 외국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공부하면서, 한국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그런데 뭐랄까. 나에게 있어서 한국 인디씬은 참 아픈 손가락이다. 실망과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라고 해야하나. 개인적으로 2000년대부터 다시 한국 인디씬이 대중들에게 주목 받고 장기하, 십센치, 혁오 등이 대중음악에 안착한 것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진성 덕후들은 난색을 보이겠지만, 이러한 성공 사례는 대중음악 전반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중요한 요소이고 이러한 성공은 인디씬 활성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사례가 한편으로는 인디씬의 개성을 사라지게 만들고 흔히 ‘돈이 되는 인디’가 생겨나면서, 예전에 비하면 인디의 중요한 핵심인 ‘다양성’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나의 기대가 지나치게 큰 걸까? 물론 어느 시대에나 주류 흐름이라는 것이 있고, 인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흐름 속에서도 자기의 색을 찾고 차별화를 줄 수 있는 음악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아쉬울 뿐이다.

 

좋은 인디 음악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좋은 인디음악이란 무엇일까? 완벽한 사운드 메이킹? 멋있는 가사 스토리텔링? 이러한 기술적인 부분들은 메이저 음악을 이길 수도 없으며, 이길 필요도 없다.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음악’의 조류 속에서 한낫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수는 적지만 그 파도 속에서 힘차게 자기의 길을 해엄치는 ‘대어’들이 있고, 우리는 그 대어를 낚을 때 월척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현재 인디씬에 머물러 있는 아티스트들을 응원하고 있다. 인디씬의 침체는 아티스트들의 역량들을 떠나서 환경적으로 너무나 열악하고, 음원 수익의 불공정한 구조가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솔직히 한국에 인디씬의 활성화를 떠나서,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 인디씬에서 꾸준히 자신들의 색을 찾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분명히 있다. 연말도 됐으니, 이런 반골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음악 덕후로서 앞으로 주목할 만한 한국 아티스트들 소개하고자한다.

 

O.O.O(오오오)

이미지 출처, O.O.O 공식 페이스북

 

2018년 11월에 첫 정규앨범을 낸 4인조 밴드이다. 이들의 음악세계는 한 외로운 개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의 전 미니앨범들인 [HOME] [CLOSET], [GARDEN]은 한 개인의 우울한 내면에 집중했다. 그들의 섬세하고 몽환적인 사운드는 갇혀있는 한 개인의 감정의 미묘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앨범 제목들은 ‘집’, ‘정원’과 같이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내면적인 공간이며, 떠나고 싶은 곳이었던 HOME에서부터 떠나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 CLOSET. 그리고 집 밖으로 나왔으나 완전한 밖은 아닌, 안이라고도 밖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 그 경계에 있는 GARDEN에 나왔고, 정규앨범 [PLAYGROUND]에 이르면서, 외부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외로운 ‘나’와 ‘타인’ 사이에 있는 ‘우리’라는 흐름을 타고 나아가고 있다.

 

O.O.O – [PLAYGROUND]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kye2HmUFurYW0LSa0KYu0rFKDqPZGP7tl

 

O.O.O – [GARDE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lNjNRswUtyxAX7ImrpC61Z3SEfshxrUD4

 

O.O.O – 푸른달

https://youtu.be/b7fkx4VZuXg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이미지출처, 한국대중음악상

 

2018년부터 개최된 <서울블루스페스티벌>을 기점으로 재야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참여하며 한국 블루스의 기준을 바꿔가고 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뮤지션이 ‘최항석과 부기몬스터’이다. 2019년 ‘난 뚱뚱해’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부분’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블루스 부활의 신호탄을 날렸다. 그가 만들어가고 있는 블루스는 기존 미국정서에 벗어나 예스러운 한국 정서의 블루스이다. 유머와 위트 대신 해학과 풍자를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흔히 ‘아재감성’이 물씬 풍긴다. 블루스의 핵심적인 정서라면 특유의 끈적함인데, 그것의 근원은 멜랑꼴리한 감정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멜랑꼴리는 한국인들이 느끼기 힘든 정서이고 결국 블루스는 미국에서만 먹히는 음악인가 싶었다. 그러나 최항석은 멜랑꼴리 대신 ‘한’으로 끈적임을 만들어 벌렸다. 블루스하고 어울리는 것은 진한 커피였지만, 최항석에게 어울리는 것은 뜨끈한 국밥이다. 한국 블루스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난 뚱뚱해>

https://youtu.be/QblUiRdp3Ek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 [Good man but Blues man]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ZnZnYMM0GS7XqM2Vbm3soRTp49dFKZq_

 

최항석과 부기몬스터 x 엄인호 – <푸들푸들 블루스>

https://youtu.be/VBKjQAz1kwc

 

 

보수동쿨러

이미지 출처, 포크라노스

 

이 밴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자, 극찬이 전혀 아깝지 않은 밴드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인디 밴드로서 그들은 쟁글 팝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고적이면서 세련된 사운드는 익숙하면서 새롭다. 기존 독법에 새로운 해석은 그들의 음악관을 잘 보여준다. 몽환적이면서 동시에 명료한 문제작 <3080>의 가사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실험은 경계를 부풀리는 새로움”을 전해줄 것이다. 이 가사말은 그들의 음악을 대변하고 있다. 익숙함에 멀어지고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독법 속에서 그 익숙함을 벗어나고자 한다. 일상은 늘 반복되지만 영원하지 않는 것처럼, 익숙함은 영원할거 같지만 영원하지 않다. 그들의 음악은 익숙한 장르 안에서 이질적인 부분은 계속 끄집어낸다. 그렇기에 그들의 음악은 익숙하면서 이질적인 모순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규정되지 않는, 구분하지 않는 끝없는 감정의 재생산”이다.

 

보수동쿨러 – <3080>

https://youtu.be/WHhbac6PVqs

 

보수동쿨러 – <목화>

https://youtu.be/wyJcV_V82Bw

 

보수동쿨러 – <죽여줘>

https://youtu.be/FwjWwRCA860

 

인디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실 함부로 독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정의함 그 자체가 인디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음악덕후로서 인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상 속에서 나에게 새로움을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신선한 충격.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에게 너무나도 잘 맞는 음악. 나에게 너무나도 와 닿는 음악. 그것이 인디의 매력이 아닐까.

연말을 기념할 당신만의 음악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지만 좋은 노래를 찾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들을 수 있는 노래는 많지만 나에게 다가오고 와 닿는 노래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