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⑦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8. 종로 일대 탐방

 

제7강.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강연 : 윤태양(건국대 연구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동학혁명의 현장을 직접 탐방함으로써 책 속에 갇힌 역사를 몸소 경험해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에는 곳곳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종로 일대를 윤태양 교수의 이야기와 함께 ‘서울 속의 동학혁명’을 테마로 걷는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귀금속 종합매장으로 변모하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이었던 단성사 자리에 그보다 더 예전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하였지요. 단성사 터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고문을 받았던 좌포도청(左捕盜廳)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을 잡으려고 만든 좌포도청이 조선 후기에 주로 타 당파의 정적을 제거하고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등 사회·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인물을 취조하거나 형을 집행하던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종로3가 9번 출구 벽면에 새겨진 처형되기 직전 최시형의 모습을 보니, 민중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고,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했던 그의 정신이 느껴졌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운현궁입니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이 장소가 동학혁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는데요.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흥선대원군과 대화를 나눈 곳이 바로 운현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봉준이 운현궁에 문객으로 3년 정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하여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종 부부와 민비 척족세력의 부정부패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동시에 민비 척족 세력은 임오군란의 군인들과 동학혁명의 농민들이 모두 분노했던 대상이었습니다. 서울의 유명 유적지가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과 관련 있었다는 점이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운현궁 바로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수운회관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인 천도교 중앙대교당(1921년 건립), 그리고 세계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함께 있습니다.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어린이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이 곳에 거점을 두고 독립운동과 어린이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참, 소파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라고 하는 군요. 어린이를 존중할 대상, 인격으로 보는 평등 의식의 바탕에 바로 동학의 근본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인사동을 거쳐 들른 곳은 태화빌딩입니다. 이 빌딩 앞에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 적힌 커다란 기념비와 동판으로 제작된 독립선언문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유혈사태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따로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경찰에 자진 투항한 장소가 지금의 태화빌딩이 있는 자리에 있던 고급 음식점 태화관이었다고 합니다.

종각역 앞 전봉준 동상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동상이 세워진 바로 그 자리가 전봉준이 처형당한 전옥서 터입니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전옥서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촛불혁명의 시대를 맞아, 전봉준과 동학혁명 세력이 추구했던 저항정신을 기리고자 2018년 4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정부의 부정부패와 가진 자들의 횡포에 저항한 농민군들, 식민지배 시기에 민족해방을 꿈꾸고,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어린이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했던 천도교 지식인들, 마지막으로 2016년 겨울, 전봉준의 저항 정신과 공명하는 촛불혁명까지, 오늘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동학이 그저 어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저항운동으로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⑥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329a~329d) : 케팔로스의 대답 노년의 즐거움은 노령이 아닌 생활방식에서 온다.

[329a]-[329d]

* 케팔로스는 대부분의 경우 노인들은 자신이 불행한 탓을 노령γῆρας으로 돌리고 한탄을 하지만, 자신의 경우 노년은 소포클레스의 노년이 보여주듯 갖가지 욕망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εἰρήνη καὶ ἐλευθερία를 누리는 시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진짜 탓이 아닌 것을 탓하고 있다는 것이다.

[329a]

* ‘성적인 쾌락과 관련해서 그리고 술잔치나 경축 행사 또는 이런 등속에 속하는 다른 여러 것과 관련해서’. 여기서 언급된 ‘경축행사’εὐωχία는 ‘마음껏 먹고 노는 잔치’를 뜻한다. [329b]까지 묘사되고 있는 왕년에 대한 회고와 자랑, 성적 쾌락, 음주가무 등 왕성하게 먹고 놀던 시절에 대한 향수, 분노와 회한, 나이타령 등 고대 아테네 노인들의 모습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노인들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

* 여기서 말하는 속담παροιμία은 ‘동갑내기가 동갑내기를 즐겁게 해 준다’ἥλιξ ἥλικα τέρπει는 속담으로서 <파이드로스> 240c, <니코마코스 윤리학> 1161b34에도 나온다. <뤼시스> 214a, <프로타고라스> 337d, <향연> 195b에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 말이 나온다.

* 이처럼 ‘끼리끼리 지내거나 노는 것’은 친한 사람들끼리 속내를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소통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가로 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끼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고 그래서 서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다가 가 상대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삶의 진실은 일상의 안일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결국은 우리 모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임을 일러 준다. 플라톤은 삶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한, 그런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앎을 이끄는 지성이야말로 일상의 타성을 거부하고 인생에 대한 참된 앎과 실천을 견인하는 힘이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토대인 것이다. ‘앎이 곧 도덕이자 행복’이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에게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 앎은 앎이 아니다.

 

[329b]

* 케팔로스는 노령이 불행κακός의 ‘진짜 탓’τὸ αἴτιον αἰτιᾶσθαι이 아님을 자신의 경우를 근거로 주장하고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 예시로 시인 소포클레스의 경우를 끌어들인다.

* 소포클레스(Σοφοκλες 기원전 496년~406)는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 -406)와 함께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 북서쪽 콜로노스(Kolonos)에서 무기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청년시절 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축하하는 무대의 선창자로 뽑혀 배우로도 유명했고 기원전 468년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에서 스승인 아이스퀼로스를 제치고 우승한 뒤 아테네 최고의 비극작가로서 18번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다. 평생 동안 그는 <안티고네>, <오이뒤푸스 왕>을 비롯해 130편에 이르는 비극을 썼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비극에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비극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종족(genos)보다 가족(oikos)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특별하게도 그는 기원전 441년에 장군(strategos)으로 선출되어 페리클레스와 함께 사모스 전쟁에 출정하기도 했고 기원전 443년에는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관리하는 재무관(hellēnotamias)으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명망을 누렸다. 그리고 기원전 413년 시켈리 원정이 실패한 후 아테네의 위기관리를 위해 꾸려진 특별자문위원회에서 위원직(probouloi)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84세였음을 고려하면 그는 평생 동안 아테네 정치 문화계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귀족과 인민 모두에게서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소포클레스가 무기제조업자에 종사하는 귀족 가문의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망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케팔로스에게 소포클레스가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 아테네인들에게 시가와 시인들의 말은 전통적으로 가장 믿을 만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아테네인들은 지식인이건 일반인이건 누구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려면 거의 습관적으로 시가와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래서 노령과 관련해서 케팔로스 역시 그 자신 가장 선망했을 법한 소포클레스를 인용하고 있고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소크라테스와 논쟁하면서 시인 시모니데스를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주요 사상 담론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도 문학자 또는 극작가들이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아무려나 시인들과 소피스트들이 주름잡고 있는 당대의 그러한 지적 풍토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극복해야할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점은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할 때 좀 더 다루기로 한다.

 

[329c]

* 케팔로스는 온갖 불행의 탓을 노령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자신의 사례와 소포클레스의 사례를 기초로 반박한다. 불행은 노령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가 말하는 ‘성적 쾌락이라는 광포한 주인ἄγριον δεσπότην으로부터의 해방’은 몸이 늙어 성기능의 저하되어 ‘욕망이 뻗침을 그치고 수그러듦에 따라’ἐπειδὰν αἱ ἐπιθυμίαι παύσωνται κατατείνουσαι καὶ χαλάσωσιν 주어진 수동적인 자유와 평화이다. 그러니까 소포클레스의 해방 또한 기본적으로는 노령이 가져다 준 것이다. 케팔로스는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노인들을 비난하고 소포클레스를 치켜세우지만, 소포클레스의 평화 역시 노령 때문임을 고려하면 일단 노령 자체가 불행의 원인이 되거나 평화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게 정말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일세. 흡사 광포한 어떤 주인한테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거든’ἁσμενέστατα μέντοι αὐτὸ ἀπέφυγον, ὥσπερ λυττῶντά τινα καὶ ἄγριον δεσπότην ἀποδράς. 현대 생리학에 의하면 특히 남성의 경우, 노인이 되어도 성적 욕망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성적 기능만 저하될 뿐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의 성기능 저하는 해방의 기쁨 보다는 대부분 열패감, 무력감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심리는 고대 그리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노인의 비극은 그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젊다고 여기는 데 있다. 그렇게 본다면 노령이 자연스럽게 욕망을 줄어들게 한다는 식의 소포클레스의 말은 노령의 즐거움을 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한 것이라 해도 최소한 속마음 그대로를 말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정말로 그가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면 그는 존재하는 육체적 욕망을 어떠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이겨냈기 때문일 것이다.

* 케팔로스도 소포클레스의 그 말이 실은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 케팔로스 말대로 불행과 관련해서건 평화와 관련해서건 노령이 진짜 탓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자유와 평화를 가능케 하는 진짜 원인으로 그런 수동적 해방이 아닌 다른 것을 제시한다.

 

[329d]

*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도, 그리고 친척들과 연관된 일들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 탓이 있을 뿐이니’ καὶ τούτων πέρι καὶ τῶν γε πρὸς τοὺς οἰκείους μία τις αἰτία ἐστίν. 여기서 ‘이런 것들’은 노령이 가져다 준 성적 쾌락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소포클레스의 경우와 온갖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일반 사람들의 경우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친척들과 연관된 일들’이란 329a에서 언급된 노인들의 신세한탄과 불평들, 노인이 된 자신을 업신여기는 친척들의 태도를 말한다. 요컨대 불행이건 평화이건 그 어느 것이건 사람들은 모두 그 원인을 나이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케팔로스는 이제 불행이건 자유와 평화건 각자의 생활 방식τρόπος을 유일한 원인μία τις αἰτία으로 제시한다. 노령기에 맞이하는 불행은 나이 탓이 아니라 그 자신 가지고 있는 생활방식의 탓이라는 것이다. 노령일지라도 절도와 만족κόσμιος καὶ εὔκολος이라는 훌륭한 생활방식을 갖추고 있으면 지쳐도 적당히 지칠 정도로 견뎌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런 사람에게는 노령도 젊음도 다 견디기 힘들다’εἰ δὲ μή, καὶ γῆρας καὶ νεότης χαλεπὴ τῷ τοιούτῳ συμβαίνει는 것이다.

* 케팔로스가 말한 생활방식의 원어 τρόπος는 사람에게 쓰일 경우 삶의 방식(a way of life, habit), 습관 혹은 성격(character, temper)을 뜻하고 그 내용으로서 ‘절도와 만족’은 각각 아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절도 κόσμιος : 방정함, 몸가짐이 바름, 앞뒤 분간이 있음, 만족 εὔκολος 쉽게 만족함, 평온함, 유유자적함, 선선함. 요컨대 이 문맥에서 τρόπος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또는 성격’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 이러한 케팔로스의 생각은 사태의 진짜 원인을 단순히 노령이라는 외적인 요소에서 찾지 않고 노령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삶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말하듯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사태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노령도 마음먹기에 따라 견디기 힘든 불행의 원인일 수도 있고 소포클레스처럼 평화의 원인일 수도 있으며, 젊음 또한 절도와 자족의 태도를 갖추고 있으면 행복의 원인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노인이건 젊은이건 육체적 욕망과 그것을 좇지 못하는 현실과의 간극을 이겨내지 못해 방종과 문란함에 빠져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물론 마음먹기가 모든 영역에서 다 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먹기는 기본적으로 나의 주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사태와 관련해서는 마음먹기가 통하지 않는다. 물론 사태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그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달리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태 자체의 진행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마음먹어도 배고픔이 계속 되는 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달리 마음먹기에 따라 사태 자체의 객관적 진행을 바꾸어 놓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종종 이러한 경우에서마저도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내하면서 오히려 마음먹기를 통해 수동적으로 상황에 적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은 편해질 수 있어도 변화와 개선을 가로 막는 장애물로 작용하여 오히려 현존하는 모순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거나 악용될 수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것은 바람직한 변화를 가로막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될 수도 있다.

* 케팔로스가 자유와 평화의 진짜 원인으로 절도와 만족이라는 생활방식을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찬사를 보낸다. 사실 케팔로스의 그러한 태도는 사태의 진실을 파악함에 있어 단순히 구상적인 사례들의 제시에 의지하지 않고, ‘나’라는 주관을 중심에 두고 생활방식이라는 개념적 사고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 주관과 자의식, 추상적 사고에 눈을 뜨기 시작한 당대의 시대정신에도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그러한 태도가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오랜 전쟁으로 공동체가 처한 위기 상황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주제가 나라와 개인의 정의라는 정치·사회적 문제의식과 유리된 채, 단순히 자신의 사적인 안녕과 행복을 위한 방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은 케팔로스 부류가 말하는 안녕과 행복 또한 덕의 수행을 통해 체득된 내적 영혼의 조화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실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내보이고 싶어 하는 일종의 격조 있는 삶을 위한 나름의 자기 규율적 생활습관 정도로 그리고 있다.

* 상당수의 학자들 특히 영국 출신 학자들은 그들의 전통 자체가 경험적 지혜를 중시해서인지 이곳에 나타난 케팔로스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갖춘 사람으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를테면 네틀쉽(R. L. Nettleship)은 그를 한 세대의 경험 많은 선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철학은 이 경험을 비판의 대상이 아닌 학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만약 케팔로스를 문답 대상으로 삼았다면 옳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키케로의 말까지 그는 인용한다. 하물며 그를 572e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주의 욕망과도 같은 거칠고 잔인한 주인’을 스스로 제거한 사람으로까지 칭찬한다. 그리고 그의 종교적 신념도 통속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소박하고 순수한 신념으로 평가하고 있다.

* 그러나 텍스트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너무도 명백하게 케팔로스를 학습의 대상이 아닌 문답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젊잖게 생활방식을 강조하는 케팔로스에게 무안할 정도로 시종일관 그의 재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꼬치꼬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케팔로스와의 대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가 케팔로스 개인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그가 대표하는 당대 기득권층, 특히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태도와 사고방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이 왜 케팔로스를 <국가> 도입부의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게 했는지, 왜 그가 장차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통로 또한 그것에 있을 것이다.

 

2-3(329e~330c):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이 과연 생활 방식인가 아니면 재산인가?

 

[329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속내를 살피기 위해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어 내는 것’ἡγεῖσθαί σε ῥᾳδίως τὸ γῆρας이 과연 생활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이 믿고 있듯이 실제로는 육체적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을 정도의 위안거리를 가능케 하는 재산 때문인지를 충동질하듯 다그쳐 묻는다. 여기서 ‘충동질하다’ἐκίνουν . κινεῖν라는 말은 ‘움직이다’라는 의미 외에 ‘휘 젓는다’, ‘재촉하다’라는 뜻으로 문답과정에서 대답을 촉구하고 자극시키기 위해 자주 쓰이는 말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 대해 학습의 자세가 아니라 의심을 갖고 뭔가를 따지는 문답의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뤼시스> 223 A, 크세노폰의 <회고> IV 2. 2. 아리스토파네스 <구름> 745 참고.

* 여기서 ‘위안거리’παραμυθία란 말은 정신적, 물질적 위무 방안까지를 포함하여 당면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재산이 이러한 위안거리를 보다 쉽게 얻는 데 분명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크게 다를 게 없다.

* ‘하기야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다.καὶ λέγουσι μέν τι, οὐ μέντοι γε ὅσον οἴονται’.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당돌하다고 느껴졌을 법도 한데 점잖게 그리고 유연하게 질문에 답을 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케팔로스가 경직되고 고집스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단 겉으로는 나름 노련함과 내공을 갖춘 경륜 있는 노인임을 보여준다.

 

[330a]

* 케팔로스는 세리포스인과 테미스토클레스 일화를 인용하여 일반인들의 생각에 반론을 제시한다. 세리포스는 에게해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다. 이 일화와 관련해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Histories apodexis)> 8권 125장 참고

* 일화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리포스 사람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고명함이 테미스토클레스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나라 때문이라고 헐뜯는다, 이에 대해 테미스토클레스는 내가 세리포스인이어도 고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세리포스인 네가 아테네인이어도 고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대응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대답에는 아테네와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의 우월함과 세리포스와 세리포스인에 대한 폄하가 깔려있다. 이 일화를 케팔로스의 의도에 맞추어 생활방식과 재산과 관련시켜 풀어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아무리 테미스토클레스 내가 훌륭한 생활방식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가난한 세리포스에서 태어났다면 고명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네같이 저급한 생활방식을 가진 세리포스사람은 아무리 부자나라 아테네에서 태어난다할지라도 결코 고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이 말을 재산과 노령을 견디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한다. 즉,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면 노령을 견디기 힘들고, 그 자신 훌륭하지 못하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노령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처럼 케팔로스는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으로 재산과 훌륭한 생활방식을 함께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그의 생각에 대한 일반인들의 비판을 피해간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이 말은 생활방식 이외에 재산을 추가 병치시킴으로써 앞서 노령을 수월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생활방식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중에 그 생활방식 역시 기본적으로 재산에 크게 의존해 있음이 드러난다.

* ‘훌륭한 사람’ὁ ἐπιεικὴς이란 말의 원어 ἐπιεικής는 기본적으로 ‘적합한’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처럼 사람을 가리켜 쓸 때에는 ‘능력 있는’, ‘친절하고 선한’, ‘합리적이고 공정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부유하다 할지라도 쉬 자족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οὔθ᾽ ὁ μὴ ἐπιεικὴς πλουτήσας εὔκολός ποτ᾽ ἂν ἑαυτῷ γένοιτο라는 케팔로스의 말은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어떤 경우에도 쉬 자족을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만 말하면 이 점은 플라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케팔로스가 인용하고 있는 세리포스인 일화는 훌륭한 데모스토클레스도 가난한 세리포스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리되지 못했을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가난하면서도 훌륭함을 유지하고 노령도 잘 견뎌내는 사람, 즉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 동양식의 청빈한 선비상은 마치 불가능한 경우인 듯 아예 경우의 수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삶을 이해하지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험도 경험 나름이다. 선대로부터 부를 이어받은 케팔로스 같은 부류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또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면전에 두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악의적이 아닐 수 없다. 듣는 소크라테스야 물론 의연했겠지만 이 모습을 그리고 있는 플라톤으로서는 모욕이 앞섰을 것이다. 만약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자기 말대로 실제 ‘절도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면, 최소한 ‘소크라테스 선생님 같은 경우는 아주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 정도는 케팔로스의 입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330b]

*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도발적 질문에 대해 자신이 왜 생활방식을 중시하는 지를 예시를 동원하여 나름 균형을 갖추고 논리적으로 해명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소크라테스도 그의 생활방식과 관련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질문을 이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내 보이지 않고 곧바로 재산가τις χρηματιστὴς 케팔로스의 재산 상속οὐσίαν κέκτημαι παραλαβὼν과 형성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말하는 생활방식이 실제로는 재산에서 나온 것임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생활방식이 아닌 재산과 관련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추가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앞 질문에 이어 계속되는 도전적 질문에 당황할 만도 한데 케팔로스는 여전히 점잖음을 유지하며 그 질문에 선선히 응한다.

 

[330c]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도전은 계속된다. 이후의 소크라테스의 언급 또한 케팔로스를 칭찬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케팔로스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아이러니이다. 우선 케팔로스가 재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칭찬은 기실 케팔로스가 가진 재산이 기본적으로 상속재산임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재산을 스스로 취득한 자들이 갖는 재산욕에 대한 서술 역시 케팔로스가 재산을 상속한 자이긴 하나 그것을 토대로 제 손으로 당대 최고의 갑부의 자리에 오른 사람인만큼, 케팔로스 또한 재산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케팔로스는 이러한 의도를 모른 채 소크라테스의 말을 칭찬으로 여기고 그의 말에 진실된ἀληθῆ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 이곳에는 ‘스스로 재물을 취득하지 않은 이들’οἳ μὴ αὐτοὶ κτήσωνται과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οἱ δὲ κτησάμενοι, ‘재물을 모은 사람들’οἱ χρηματισάμενοι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곱절이나 재물에 애착을 갖고 있다’διπλῇ ἀσπάζονται αὐτά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재물을 모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마치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 대해서 그리고 아버지들이 자식들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듯이 그런 식으로 재물에 대해 ‘자신들의 작품처럼 열성을 보이는’σπουδάζουσιν ὡς ἔργον데다가 또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그러하듯이 재물의 효용성κατὰ τὴν χρείαν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식으로 몸소 ‘재물을 모은 사람들’은 사귀기조차 힘든 사람들χαλεποὶ καὶ συγγενέσθαι이고 부(富)τὸν πλοῦτον이 외에 ‘아무것도 좋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οὐδὲν ἐθέλοντες ἐπαινεῖν고 힐난한다.

* ‘곱절이나 재물에 애착을 갖고 있다’에서 ‘곱절’에 해당하는 말 διπλῇ를 ‘이중의 이유 때문에’(a double reason)로 번역하는 사람(P. Shorey)도 있다. 일반인들처럼 재물의 효용성에서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재물을 그 자체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곱절’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 여기서 ‘재물을 모은 사람들’은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이되, 재물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재물을 마치 자기 자식인양 그 자체로 애착을 갖는 어느 정도 재물을 모든 재산가를 의미할 것이다. 단순히 취득 방법에서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로만 제한하면 ‘땀 흘려 자기 손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 모두가 ‘사귀기 힘들고 그저 부만 칭송하는 부정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되고, 오히려 ‘제 힘으로 재물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재산에 애착을 갖고 있지 않은 나름 긍정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땀 흘려 제 손으로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하여 마치 시인이나 아버지가 제 작품이나 자식들을 본능적으로 애착을 갖듯 재물 그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나오는 세 부류들 모두를 ‘제 손으로 취득했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큰돈을 소유하고 있는 부류들’ 즉 재산가들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은 재산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일 것이다.

* ‘돈을 버는 사람들’οἱ χρηματισάμενοι에 쓰인 동사 χρηματίζω가 ‘돈을 모으다’라는 의미 외에 ‘금전 관련일로 협상하다’, ‘사업을 벌이다’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아마 당대 상업이나 무역업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 부유층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케팔로스도 비록 상속 재산에 힘입었기는 하지만 자식에게 상속 재산 못지않을 부를 물려 줄 정도로 상공업을 통해 제 손으로 부를 일군 신흥 부유층이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부유층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플라톤의 비판은 케팔로스 개인 보다는 아테네의 급격한 사회변화를 가져다 준 상업주의 풍조와 그에 기대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할 것이다.

* 플라톤이 재산가가 재물에 대해 갖는 애착을 시인과 부모가 각기 자신의 시와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과 동렬에 놓은 것도 매우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용도보다는 본능적이다시피 그 자체에 집착하는 행태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혹시 재산가의 금전만능주의, 부모들의 생물학적 가족이기주의, 당대 시인들의 독선적 아집을 동급의 부정적 집착으로 바라본 플라톤의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 노령이건 젊음이건 수월하게 견디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생활방식이라는 케팔로스의 주장은 문답을 통해 ‘아무리 생활방식이 훌륭하더라도 재산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다’는 것으로 바뀐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경륜을 갖춘 노인답게 나름 유연하고도 균형 있게 답을 했다고 여기지만 노령과 젊음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원인에 재산을 추가시킴으로써 생활방식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말하는 생활방식도 실질적으로는 재산에 기초한 것임을 의심하고 또 재산에 초점을 맞추어 또 추가적인 질문을 던진다.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 –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⑥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27.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6강.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 –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

 

강연 : 구태환(상지대 초빙교수)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백성은 어떻게 자립적 시민으로서의 자기 요구를 정치화하였는지 살펴본다.

 

조선 말기는 신분제적 봉건 질서의 부조리와 모순이 극심하고, 외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백성들(민중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득세와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인한 터무니없이 과중한 세금 탈취를 당하였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등의 외세가 조선의 이권(利權)과 지배권을 노리며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등장한 것입니다. 특히 동학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동학사상은 시대적 문제에 대한 민중의 대응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당시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다시 개벽(開闢)’을 외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귀하고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확립하였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적 이념은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불교나 도교 또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새로운 세상, 즉 다시 개벽을 위한 새로운 도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수행과 수양 끝에 얻어낸 도가 바로 ‘시천주’입니다. ‘시천주’는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심’을 뜻합니다. 한울님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氣) 가운데 가장 지극한 기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한 한울님은 우리 모두가 모시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신분, 빈부,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모두 동등하게 귀한 존재입니다. 각종 차별과 폭력은 시천주를 깨닫지 못한 채 저지르는 악행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여성, 어린이, 노인, 빈민, 천민 등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 한울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동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평등의식과 존중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동학사상에 따르면, 모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해야 하며, 나아가 우주 만물이 곧 시천주라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만민평등, 나아가 만물평등 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동학사상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여 있던 당시 현실에서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간절한 열망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던 지배층의 안일한 태도와 다르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면서도 그것이 혹시나 외세 침략에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동학혁명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핑계로 쓰였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둘리네 동네의 어느 골목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날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쌍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니 이곳이 바로 둘리네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니고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이기도 했다. 사실 쌍문동은 지나가기만 했지 돌아다녀 본 것은 처음이다. 둘리를 보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지역을 알릴만한 소재의 빈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감정도 생긴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쌍문역에서 8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고 희동이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찾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골목 어귀에 고만고만한 규모의 분식집들이 여러 개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에는 학교 근처에도 문구점이나 분식집이 그저 한두 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골목 맨 윗자리에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가 다 몰려 있었다. 정의여중고 입구 교차로에서 정의여중고 방향의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이니 함석헌(1901~1989)의 생가 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니 그의 삶의 흔적은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 지역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다만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 자리나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옛 오산학교 자리나 나중에 확인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거처는 지금 ‘함석헌 기념관’으로 변경해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함석헌은 용산 원효로의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지금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은 차남 함우용 내외의 집이었다. 도봉구는 이곳을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6.25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효로 작은 집이 욕심 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함석헌을 보여준다면, 서울의 변두리 끝자락 쌍문동의 집은 강단철학에서 외면받아 온 한국 철학의 변방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다소 지나친 생각일까?

 

(사진 1. 함석헌 기념관 )

 

우선 들어간 곳은 맨 아래 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 ‘씨ㅇ·ㄹ 갤러리’였다. 전시 내용은 ‘붓글씨로 만나는 함석헌’ 전이었다. 함석헌이 남긴 글의 내용을 여러 사람이 붓글씨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워낙 많은 글과 시를 남겨 그의 글귀나 시를 소재로 서예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전에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씨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기획의 함석헌 관련 전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는 무료 대관도 해준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정식 방문을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위로 향하는 내부 계단이 있었으나 굳이 바깥으로 나가 정문 출입구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기념관 안내판이 있었고 2층 현관 옆에는 함석헌의 묘비가 있었다.

 

(사진2 – 함석헌 묘비, 함석헌 기념관)

 

원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묘비는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안내하고 있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맞은 편 벽에 제일 먼저 연보가 펼쳐져 있다.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실이었을 공간에 육필원고와 함석헌이 발행한 ‘씨의 소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 안 쪽 방은 영상전시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함석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영상 자료를 계속 상영하고 있다. 함석헌이 사용한 방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 그는 스스로 한국교회의 이단자임을 자처하였지만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인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사상가였다. 그의 소박한 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성경이었다.

 

(사진 3 – 함석헌 서재의 성경책, 함석헌 기념관 )

 

저항과 사상혁명의 길

함석헌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은 일반인들에게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으로 더 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이 고향의 참사를 들었더라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한반도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고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함석헌에게 반공세력에 대한 정탐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한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른 후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1947년 3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한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건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함석헌에게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그의 삶 전체는 독재와 타락한 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함석헌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였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1963년 독일에 들러 안병무를 만나고 난 후 귀국한 함석헌은 본격적으로 5ㆍ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한다.

1970년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박정희정권만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에 빠진 지식인들과 언론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오랜 동안 노자와 장자에 대한공개 강좌를 열기도 했고, 1973년부터는 여기에 더해 퀘이커리즘과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 활동에 함썼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그 전부터 호의를 갖고 지켜 본 퀘이커교도가 된다. 하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 전부터였다. 그가 퀘이커 교도가 된 계기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고립되었던 자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퀘이커리즘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함석헌의 주요 활동은 반유신 활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에는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협의화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과 더불어 박정희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른바 ‘3ㆍ1 구국선언’ 등에 참여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은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5공화국에서도 이어진다. 비록 전두환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와 같은 비판적 잡지와 언론이 폐간되기도 했으나 강연 등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그의 활동이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의 정신은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태도에도 항거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도 절대화하는 순간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삶은 끊임없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상대적 시간에 머물면서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은 ‘뜻’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생의 역동성을 유지할 수 없다. 진리를 향해가는 박진성이 결여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과거의 자아가 마치 본래적 자기라는 것을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면서 참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항거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인격이므로 무엇을 다 한대도 인격의 자주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격의 자주성은 자연의 경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경로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씨앗이 썩어 새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자신을 덮고 있는 흙과 돌에 항거하고, 병아리는 자신의 둘러싼 껍질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진 4 –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은 「씨ㅇ·ㄹ혁명의 꿈」(1980)에서 자신의 철학을 ‘씨ㅇ·ㄹ철학’으로 소개했다. 씨ㅇ·ㄹ이라는 말은 알맹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이나 본질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유신시대에로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비판의 칼날은 유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이전에 발생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4·19실패의 원인에 대해 학생이 시작했지만 민중의 혁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실패는 결국 민중의 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 즉 사람이란, 함석헌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나 군인이나 다 맨 사람 위에 덧 입혀진 옷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 아닌 학생, 군인, 정치인 등등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입은 정체성으로 만나면 제도에 그 자리에 붙게 된다고도 한다. 함석헌은 특권 없는 제도는 없으며, 혁명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인이 일으킨 혁명, 학생이 일으키는 혁명은 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맨 사람이 아닌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은 순전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제도화된 입장에 따른 이해관계는 행동을 강제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비단 외적인 강제에 의한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제 역시 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률에 의해 타인의 강제에 따른 노예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나 입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주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함석헌이 그래서 참다운 혁명은 사상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 사상 혁명의 내용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함석헌의 실천은 씨의 소리발간으로 구체화 된다. 씨의 소리발간은 독재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정치적 저항이자 언론운동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독재에 대한 투쟁이었고 민중의 사상 혁명을 이끌기 위한 선동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삶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대 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變)도 화(化)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리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자(變字)밑에 있는 ‘文’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더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의 한편인 ‘인’은 사람이라는 인(人)자인데. 이쪽의 ‘匕’는 인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실상 함석헌이 말하는 변화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은 씨의 스스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에 있다고 본 함석헌의 사유는 다분히 노장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노장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가 사상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인위적인 삶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노장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함석헌의 사상이 씨에로 귀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석헌은 도덕경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강조하는 데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통치자란 씨들이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통치자라고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씨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함’의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자연이고 함석헌에게 자연은 필연이었다. 따라서 민중들인 씨들에 위한 일대 변화 역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자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自)가 스스로의 까닭(由)인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상 혁명이란 스스로(自)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씨ㅇ·ㄹ이 스스로 함에 의해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씨은 생명의 자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라 함은 생명의 원동력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발성은 외부의 강제를 배척하는 원리이다. 오랫동안 백성, 신민, 국민 등으로 불린 민(民)은 자발성의 주체가 아닌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면 씨은 제도와 문명에 귀속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의 주체를 은유하는 것이다.


(사진 5-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이 주장하는 저항의 또 다른 의미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투쟁이다. 그는 인격이란 자유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에는 한이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선악의 문제가 도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함석헌에게 그것은 보통의 윤리의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선악이요 존재의 선악이다. 함석헌은 선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보고, 악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항의 철학」 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엇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엇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걸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의 자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방해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유는 우리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만한 중요한 인문적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유 안에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사진 6 – 비폭력저항주의자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4.19 묘역에서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민자치공간으로 꾸며진 곳을 빼고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역에 들러 보았다. 문득 함석헌의 묘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함석헌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기념관이 된 곳 인근에 자리한 4.19묘역이 더 적절했을 성 싶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서훈 취소가 되어 마땅한 인사들의 무덤도 즐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은 과연 그런 자들과 머물기를 바랬을까?

평일이고 비가 조금씩 와서 그런지 참배객 등의 방문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나마 몇몇 사람들은 그 옷차림새로 보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보였다. 4.19 기념탑에서 개인적인 간단한 참배를 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4.19 당시의 각종 자료와 화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초등학생들의 시위참가를 기록한 사진이다. 함석헌은 4.19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맨 사람의 혁명이 아니었고 학생의 옷을 입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사진을 보면 함석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말이야 초등학생들이지 그들이 무슨 학생의 옷을 입었으며 왜 맨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4.19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함석헌의 지적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7 – 4.19에 참가한 초등학생의 시위, 4.19기념관)

 

 

기고자: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에이드리언 리치(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2.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下)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미국 산타 크루즈(Santa Cruz) 길가에 그려져 있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상화)

 

  • 니카라과 혁명과 흑인 페미니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이후 1980년대 내내 언론·종교·대중문화·정치 등의 영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반발하는 백래시(backlash)에 시달렸고 낙태를 둘러싼 이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냉전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국제적인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 여성들과 남미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또한 위태로워졌다. 특히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은 혁명을 통해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남미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하였던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를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니카라과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서 니카라과 여성들은 무장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독재정권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반혁명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으나 80년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이슈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셋째, 미국의 페미니즘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고, 무엇보다도 제2물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던 흑인여성들이 흑인운동 내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주변화되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에게 젠더와 인종 문제는 중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흑인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 속에서 1984년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Notes toward a Politics of Location)」가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리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여성들)

 

  • 타자와 몸의 위치성

미국이 니카라과 내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지 “여성으로서 나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오히려 리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주의에 동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 위에 그려진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자신에게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니카라과 내전과 그 내전이 일으키는 비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타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때의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치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으며, 위치의 역사에는 타자들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즉 여성으로서 나는 단지 정부를 비난하거나, 혹은 “여성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3번 말한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민족적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국민국가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데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어떻게 또한 여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만들었고 또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역사의 한 장소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흑인 미국 시민들의 글에서, 그들의 행동, 연설, 설교들에서 내가 그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는 한 위치의 지점인 나의 백인성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의 쿠바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부터 누가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시각 및 생각의 방식을 형성했던 하나의 위치,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위치로서 북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가난한 나라이자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 4년을 바친 사회인 니카라과를 여행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언덕 아래에서 나는 등 뒤로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무게, 미국의 군사력, 미국의 엄청난 화폐 전횡, 미국의 매스미디어 등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내가 반체제 인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권력의 부츠를 한껏 치켜올린 미국인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도 위에서 내 몸이 놓인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몸 자체에 대한 질문, 즉 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몸은 어디에 있으며, 내 몸은 무엇으로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이하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몸에는 변형되고 변색되고 손상되고 손실된 부분,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몸의 피부색, 임신의 흔적 여부, 중산층으로 치과의 진료를 받은 치아의 흔적들은 내 몸이 특정한 역사의 지형을 지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백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혼합되어 있는 흔적들이 몸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몸을 통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단지 성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관계 안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위치의 정치. 나의 몸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 몸이 하나의 정체성 그 이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세계로 옮겨질 때, 나는 여자로 간주되고 여자로 취급받지만, 또한 백인으로 간주되고 백인으로 취급받는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한 명의 흑인 아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지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백인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에 의해 신비화되었을지라도.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흑인여성들)

 

  •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이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들의 공통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고양된 의식과 함께 해방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히려 미국의 페미니즘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하는 경향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경험을 삭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몸에서, 지도 위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지탱해온 ‘우리’,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임을 확인한다. 오히려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 또한 특정한 위치 속에서는 억압 기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즘 위기의 시기 속에서 새로이 발견한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에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는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주디스 버틀러, 찬드라 모한티,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사상 속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언어와 고민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리’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통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념과 희망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의 상실을 “계속 나아가기 위한 투쟁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향한 투쟁”의 토대로 만들고자 하였다. 페미니즘이 단일한 ‘우리’의 정체성으로 확립될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

 

  • 두 편에 걸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 어떠셨나요?
  • 다음으로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연재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⑤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플라톤 대화편의 고전 그리스어 텍스트의 모태는 19세기 초 독일의 고전문헌학자 베커(I. Bekker)가 유럽의 유수 도서관들을 찾아가며 그곳에 산재해있었던 수많은 중세 양피지 사본들(vellum codex)을 비교 교열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여러 해에 걸쳐 펴낸 이른바 베커판 교정본(校訂本)(1816-1823)이다. 이 후 여러 종류의 추가적인 교정본들이 후속해서 나왔는데 그 가운데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표준적인 텍스트로 채택되고 있는 교정본이 19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펴낸 <플라톤 전집>(Platonis Opera) 이른바 버넷(J. Burnet)판 교정본이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지 101년 후인 지난 2003년에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새로운 옥스퍼드대학 판 교정본(S. R. Slings 편찬)이 출간되었다. 이 새 교정본을 보면 <국가>의 고전 그리스어 텍스트 역시 여러 곳이 수정되어 있다. 그런데 수정한 내용들이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라 내용상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기초 원전 텍스트가 달라진 터라, 1997년 버넷판을 텍스트로 삼아 <국가> 우리말 원전 역본을 펴낸 박종현 선생도 이러한 수정 부분들을 꼼꼼하게 반영하여 2003년에 <국가> 개정증보판을 새로 펴냈다. <국가> 박종현 역본의 본문 내용 중 *표 표시를 한 부분들이 새로 수정된 부분인데, 책 말미를 보면 달라진 부분들에 대한 고전어 텍스트 상의 근거가 부록으로 함께 실려 있다.

* 폴레마르크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불러 세워 체류를 권하는 부분[327c]에도 그러한 수정 내용이 들어 있다. 1997년판 박종현 역본에는 “그렇다면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 있지 않겠소?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보내 주어야만 되게끔 설득할 수 있을 때의 경우가 말이오.”로 번역되어 있지만, 2005년 개정판 역본에는 “그러면 아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보내 주어야만 되게끔 우리가 설득하게 될 경우가 남아 있지 않소?”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버넷판 텍스트에서 두 단어로 분리되어 실려 있는 ἓν λείπεται(한 가지가 남아 있지 않겠소?)라는 구절이 새 텍스트에서는 ‘하나’의 뜻을 가진 ἓν을 후속 동사에 붙여 그냥 ελλείπεται(남아 있지 않겠소?) 한 단어로 수정된 데에 따른 것이다. 내용 상 ‘한 가지’라는 뜻이 없어진 것이다. 사실 고전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부분을 ἓν λείπεται로 볼 것이냐 ελλείπεται로 볼 것이냐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 새 교정본에서는 ελλείπεται쪽을 택한 것이다. 이렇듯 고전학자들은 텍스트 상의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가면서 과연 어떤 것이 플라톤 당대의 텍스트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두고 지금도 씨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정 부분은 내용적으로도 왜 그런 수정이 이루어졌는지 눈여겨 볼만한 사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후 내용을 보면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불러 세워 대짜고자 ‘우리가 몇 명인지 아시냐? 우리 보다 더 강하시면 청을 물리치고 시내로 가시고 아니면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식으로 요청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득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리 무턱대고 강권하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득이 통하겠느냐’는 식으로 다시 반문하고 글라우콘이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장면은 플라톤이 앞으로 전개될 트라쉬마코스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여겨지는 장면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선 다음,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예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펴다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밀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지지만 속으로는 끝까지 설득되지 않은 채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이 장면에서도 폴레마르코스는 마치 트라쉬마코스처럼 처음부터 막무가내 힘으로 길을 막고 서서 자기 요구를 내세우고 있고 소크라테스는 설득의 방법도 있다고 반문하지만 그는 아예 설득할 받아들일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꾸한다. 이럴 경우 과연 소크라테스로서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설득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냥 강압에 밀려 폴레마르코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곳의 경우처럼 함께 구경을 하자는 수준의 강권이야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겠지만, 트라쉬마코스의 요구처럼 정의와 행복의 관계를 묻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서는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결코 굴복을 거부하고 마땅히 그에 맞서 싸우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설득을 접고 제2권부터 그의 입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대안적 주장을 제시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논파되었음에도 속으로는 여전히 근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통해 ‘아집이란 비록 논파는 될 지라도 결코 파괴되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란,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세워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 주장의 정당성을 사회적 변화의 동력으로 관철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국가> 제1권에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제2권 이하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함의이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의 강권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설득 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설득 한 가지만 남아 있다면 그게 실패할 경우 강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고하는 복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면 더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해당 부분 텍스트의 수정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합당한 수정이 아닐 수 없다.

* 그래서 아테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강권하는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는지 바로 대화에 끼어들어 다른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체류를 권한다. 아테이만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새로운καινόν 것이라고 관심을 보이자 폴레마르코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그의 말을 거들고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에게 머물기를 권한다. 폴레마르코스도 최소한 소크라테스가 젊은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서둘러 돌아가려한 것으로 보아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제안대로 축제 현장이 아니라 그 전에 일단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1. 케팔로스와 대화(328b~331d)

 

2-1(328c-328e): 소크라테스 케팔로스를 만나 노년의 즐거움을 묻다.

 

[328c]

*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일행의 수를 내세워서까지 가는 길을 막아선 이유가 단지 마상 횃불경주와 철야제 구경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사실 폴레마르코스의 제안에 따라 집으로 오게 되었지만 전후 상황을 보면 케팔로스가 아들 폴레마르코스를 시켜 구경 안내를 핑계로 소크라테스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케팔로스 이외에 여러 사람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사실 당시 아테네의 유명 정치가나 부유층의 집은 소피스트들을 비롯해서 당대 많은 유력 인사들이 드나들거나 머무는 일종의 고급 사교 무대였다. 페리클레스의 집에 수많은 소피스트들이 아예 식객으로 늘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캐팔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나 친척처럼 자주 찾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다른 소피스트나 유력인사들이 그러하듯 소크라테스도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케팔로스는 당대 아테네 여러 유력인사들은 자기 집에 자주 드나드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만은 그리하지 않아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기다렸다는 듯 반기면서 ‘실은 자주 찾아와야만 한다.’χρῆν μέντοι.(328c), ‘이제 더 자주 당신이 이리로 와야 한다.’νῦν δέ σε χρὴ πυκνότερον δεῦρο ἰέναι.(328d)는 말로 반복해서 강권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모습도 그러한 서운함 때문일 것이다.

* ‘내가 오랜만에 그 분을 뵌 탓이기도 하지.’διὰ χρόνου γὰρ καὶ ἑωράκη αὐτόν. 케팔로스가 아주 늙어보였다는 앞의 말과 더불어 이 말은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가 서로 상당 기간 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소피스트들이나 유명 인사들처럼 케팔로스 같은 유력 인사들 집에 드나들기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케팔로스 역시 자기가 기력이 있으면 소크라테스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지난날 그 긴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를 제 발로 찾아간 적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케팔로스는 거류외인으로 아테네로 건너와서 부를 쌓고 여유자적하고 품위 있는 삶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소크라테스에게 과시하려고 폴레마르코스를 시켜 그를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러한 케팔로스의 모습을 통해 크게는 상업주의, 부와 가난의 문제를 포함해서 당대 신흥 기득권 부유층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된 케팔로스를 시대착오를 무릅쓰고 하나의 대표적 인물로 대화편에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 시인과 소피스트, 장군 등 수많은 사람들 이외에 거류외인이자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물은 케팔로스가 유일하다.

* 이런 측면에서 보면 케팔로스의 등장은 <국가> 전체의 구상 하에서 주도면밀하게 도입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실제로 <국가> 제1권은 당대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의 등장과 그의 훈계조의 과시로부터 시작하여, 폴레마르코스의 입을 통해 아테네의 주류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들의 주장으로 이어진 후, 트라쉬마코스의 거친 입을 통해 또 다른 당대 신흥 지식인 세력으로 크게 부상한 소피스트의 도발적인 도전을 그려냄으로써 그 극치에 이른다. 이처럼 대화의 목적과 동기는 물론 등장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플라톤의 아주 섬세하고도 주도면밀한 문학적 철학적 플롯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은 <국가>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가 된다. 정의의 문제를 둘러싼 당대의 도전과 도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의식과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계속 강조하게 될 것이다.

* ‘머리에 제관을 쓰신 채ἐστεφανωμένος…. 뜰에서 막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네’τεθυκὼς γὰρ ἐτύγχανεν ἐν τῇ αὐλῇ. 여기서 제물을 바친 대상은 제우스임이 분명하다. 아테네인들은 집 뜰(ἑρκος)에 제단을 만들어 제우스를 가정을 지키는 신으로도 섬겼다. Ζεὺς ἑρκεῖος는 이 경우에 붙여진 제우스의 이름이다. 이처럼 집에서 제단을 꾸미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삶의 일부였고 그 대부분은 오늘날도 그러하듯이 개인과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전란의 혼란기에 일반 대중이라면 몰라도 아테네 사회 지도층인 케팔로스가 제사를 드리면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저 재산에 기대어 자신의 안녕과 사후 구원에 관심을 쏟는 모습에 비판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호메로스 시가와 시인들에 매달려 있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된다.

 

[328δ]

* ‘적어도 내 경우에는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어짐에 따라 그 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한다.’ὡς εὖ ἴσθι ὅτι ἔμοιγε ὅσον αἱ ἄλλαι αἱ κατὰ τὸ σῶμα ἡδοναὶ ἀπομαραίνονται, τοσοῦτον αὔξονται αἱ περὶ τοὺς λόγους ἐπιθυμίαι τε καὶ ἡδοναί. 케팔로스의 이 말은 정신적 즐거움이 육체적 즐거움에 반비례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 즐거움에 부차적인 것임을 은연 중 내포하고 있다.

* ‘잘 아셔야하오’εὖ ἴσθι, 젊은이들과 ‘어울리시오’σύνισθι, 자주 ‘찾아주시오’φοίτα 이곳 케팔로스의 말에는 명령형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어 긍정 명령형의 용례가 모두 강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케팔로스의 말에는 전체적으로 연장자임을 내세워 소크라테스를 내려다보며 훈계조로 강권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 여기서 ‘다른’ἄλλαι이라는 표현은 노인이 되어도 시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도 있음을 시사한다. 하긴 늙어서도 맛있는 것을 찾거나 다른 위안거리에 집착하는 일은 시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 표현은 그냥 이러 저러한 육체적 즐거움들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직접적인 ‘다른’의 의미로 썼다면 여기서 ‘시들어가는 즐거움’이란, 전후 문맥상 성적 쾌락일 것이다.

* 아테네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출산을 위한 방편으로 부모와 친척들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성적 쾌락을 위해 외도를 일삼거나 연애 대상으로 따로 정부를 두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귀족이라면 적어도 2-3명의 정부는 있어야한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해진다. 부부간에 성적인 교감과 정신적 유대의 일치와 상승을 꿈꾼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회적 관습상 부부간의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공존은 구조적으로 이미 기대할 여지가 없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 부부간의 일편단심과 사랑은 말 그대로 신화적 로망에 불과하다. 요컨대 여성은 장차 가사와 출산, 육아를 위한 일종의 도구이자 재산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수호자들 간의 처자공유는 기본적으로 가족이기주의, 귀족 내 자기 혈족주의가 빚어내는 반공동체적 경향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을 주목적으로 한 당대의 기계적인 결혼관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능력에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은 것은 당대의 의식 수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기는 하나 인격체로서 여성의 성적 자의식과 자기정체성에 관해서는 여전히 시대적 무지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328e]

* 소크라테스도 노인과 대화하는 걸 기뻐한다고 말한 후 케팔로스의 삶의 여정에 관해 물으면서 특히 ‘노년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 어려운 고비인지 의견을 구한다.

*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어짐에 따라 그 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증대된다는 케팔로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도 ‘실은 저로서도 많이 연로하신 분들과 대화하게 되는 걸 기뻐합니다.’χαίρω γε διαλεγόμενοςτοῖς σφόδρα πρεσβύταις.라고 호응한다. 앞에서 케팔로스가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고 말했을 때 대화의 원어는 logos이고 케팔로스의 말을 받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화의 원어는 dialogos이다. 물론 dialogos에는 일반적인 대화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logos라고 표현한 것을 염두에 두고 아마 중의적으로 이 표현을 썼을 것이다. 케팔로스가 원하는 것은 담소이지만 소크라테스가 바라는 건 문답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기나긴 인생경험을 통해 생각이 굳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노인들의 생각은 경륜의 측면과 함께 아집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 ’들어서 알아야한다‘에 쓰인 πυνθάνομαι는 ‘듣거나 물어서 아는 것(to learn by hearsay or by inquiry)’을 의미한다. 케팔로스는 앞서 소크라테스에게 훈계조로 강권하다시피 말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노년의 삶에 대해 배우되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묻고 따지는 방식도 병행해서 배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 ‘노년의 문턱’’ἐπὶ γήραος οὐδῷ이라는 말은 <일리아스> 22권 60, 24권 487에서 처음 나타나는 어귀로 부양자가 없이는 따로 살아가기 힘든 단계의 노년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은 출생의 문턱을 넘어 이생을 살다가 노년의 문턱을 넘어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로 여겨진다. 케팔로스는 아테네 몇 안 되는 부유층으로 집도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노년의 문턱을 넘어 장남인 케팔로스의 부양을 받으면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어르신께서 어떻게 알려 주실 것인지’ἢ πῶς σὺ αὐτὸ ἐξαγγέλλεις. 여기서 쓰이고 있는 ἐξαγγέλλεις는 무대 뒤에서 연극의 진행 상황을 말로 알려주는 ‘전달자’를 뜻하는 연극용어 ἐξάγγελος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노령의 의미를 알려주는 전달자 역할을 부탁하고 있다.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 노동과 노동자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⑤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2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5강.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 노동과 노동자

 

강연 : 박종성(건국대 초빙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우리의 삶에 있어서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끝없는 굴레일까요?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한 주체적 행위일까요? 박종성 교수의 이번 강의를 들으며 역사적으로 노동과 노동자가 어떻게 정의되고, 가치 평가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특히 맑스(Karl Marx, 1818~1883)의 사상을 바탕으로 ‘노동자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에 노동은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얻게 된 징벌로 적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육체적 활동인 노동은 노예계급의 것이라며 저급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동은 철학적 맥락에서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노동은 신의 명령으로서 그 의미가 변화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유재산 개념의 등장으로, 모든 권리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그 가치가 격상됩니다.

 

그 이후 등장한 칼 맑스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인데요,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실존조건으로 봅니다. 즉 노동은 인간의 존재에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한 노동과 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착취와 소외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활동은 노동자의 노동력,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쳐 ‘생산수단’이라고 부릅니다. 이를테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은 노동대상이며,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한 기계 등은 노동수단입니다. 이 생산수단과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을 가릅니다. 말하자면,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자본가이고, 생산수단 없이 자신의 노동력만을 가진 자가 노동자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기본 세포는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력 역시 상품으로 봅니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할 때 이중적 자유가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이 이유로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노동자의 착취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자본의 가치증식입니다. 다시 말해 1만큼의 자본을 가지고 1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이를 가능케 하려면 제 값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노동력을 구매하면 됩니다. 더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지요.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 임금이 부당해도 자본가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원리와 노동자의 이중적 자유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는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계약 관계라 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이기에,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자본가의 적대자로 생각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게으름’을 나쁜 덕목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노동자 자신의 욕망을 왜곡하고 자본에 복무하도록 만듭니다.

 

물론 맑스는 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계급을 없애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혁명이 단번에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착취구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혁명의 낙관도 기대할 수 없는 우리는, 노동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강의를 맡은 박종성 교수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먹고는 살되, 내가 신나는[나에게 재미와 의미가 있는] 일을 하며 살자”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④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서론에 이어 본문 강해는 앞에서 밝힌 강해취지에 따라 텍스트를 처음부터 빠짐없이 천천히 읽어가며 주요 부분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정암학당 현장 강의에서는 텍스트의 일정 단락을 청중들과 함께 읽고 난 다음, 강사가 다시 읽어가며 설명을 하지만, 이곳 강의록에는 본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텍스트 해당 부분 독서를 병행하며 본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1 ]

 

<세부 목차 >

 

  1.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 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1. 케팔로스와 대화 : 노년의 즐거움과 재산(328b~331d)

2-1(328b-328c) : 소크라테스, 케팔로스를 만나 노년의 즐거움을 묻는다.

2-2(329a~329d) : 케팔로스의 대답 – 노년의 즐거움은 노령이 아닌 생활방식에서 온다.

2-3(329e~330c) :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이 과연 생활 방식인가 재산인가?

2-4(330d~331d) : 노령의 즐거움과 재산의 관계를 논하다 정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다.

 

  1. 폴레마르코스의 정의(331d~336a)

3-1(331d-332b) : 폴레마르코스,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즉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334c~336a) : 기능과 훌륭함(덕)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1. 트라쉬마코스의 정의(336b~354c)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

4-2(338c~339a) :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다.

4-3(339b~340b)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이 잠깐 끼어든다.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4-5(341a~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4-7(344d~345e) : 소크라테스의 절망과 분노

4-8(345e~346e) :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4-10(348a~349a) :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 정의와 부정의는 각각 덕과 악덕.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

4-11(349b~350c) :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4-12(350d~352c) :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본문 강해>

 

  1.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327a]

*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어제 나눈 대화를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는 그가 글라우콘과 함께 아테네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처음 열리는 트라케인들이 주최하는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축원과 구경을 마친 후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 ‘어저께 나는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네.’κατέβην χθὲς εἰς Πειραιᾶ μετὰ Γλαύκωνος <국가>의 그리스어 텍스트는 ‘내려갔네.’κατέβην라는 동사로 시작한다. 이 첫말이 갖는 함축을 제7권 서두의 동굴의 비유에서 지혜로운 자가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당연히 동굴의 비유 부분에서도 그 동사가 나온다.(516e) 대화편의 구조를 크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주장들을 논박하거나 깨닫게 하여 지혜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어제’χθὲς 거의 밤이 샐 정도로 오랫동안 토론을 했음이 분명함에도 그에 이어 오늘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도 이처럼 ‘어제’ 대화에 이어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티마이오스>에서 ‘어제’(17a)했다고 요약 인용되고 있는 이야기가 <국가> 4권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티마이오스>의 대화 설정 시기가 <국가>에서 이루어진 대화 다음날이고 그에 따라 <국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이 <티마이오스>의 등장인물들 즉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실제로 5세기 플라톤 주석가로 유명한 프로클로스는 이를 근거로 <국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를 3부작으로 쓰여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된 내용은 <국가> 전체 내용도 아니고 4권의 내용도 일부만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에서 그 내용이 어제 이야기한 내용에서 빠진 것 없이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19a~b).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국가>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에서 일부 요약에 불과한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플라톤의 핵심 정치사상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중요한 내용을 그 날 하루만 표명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 두 대화편의 대화 설정시기가 연속적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 페이라이에우스Πειραιεύς는 아테네 도심으로부터 8㎞ 떨어진 아테네 외항이다. 페이라이에우스는 페리클레스의 제국화 정책 이후, 국제적인 교역이 급증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아테네와 외부지역을 연결하는 핵심 항구이었을 뿐만 아니라 에게 해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로서도 중심적인 기능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싸고 스파르타와의 전쟁 기운이 커지자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7년 막강한 스파르타의 육군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네를 방어하고 아테네 도심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도심 성곽과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성(μακρὰ τείχη)을 구축한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아티카를 침공하면 지역 농민들을 소개(疏開)시켜 장성으로 피신케 한 후 스파르타 군이 복귀하면 해군을 동원하여 스파르타 해안 마을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앞서 살폈듯이 좁은 장성 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 거주함에 따라 기원전 429년에는 참혹한 역병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그 여신께 축원도 드릴 겸’προσευξόμενός τε τῇ θεῷ이라는 말에서 표명되고 있는 여신신은 354a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축제가 벤디스 축제(Bendideia)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벤디스(Bendis) 여신임이 분명해 보인다. 벤디스 여신은 아테네의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에 해당하는 트라케 지방의 여신으로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각 나라마다 숭배하는 주신이 있었고 주신들 이외에도 또 각 도시와 지방, 마을 마다 자신들을 가장 잘 돌봐줄 것으로 여겨지는 각기 다른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리스 전역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을 비롯해 지역별, 개인별로 공물을 바치고 안녕을 기원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신전들과 제단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기적으로 제의와 축제가 열리곤 하였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종교 생활 즉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은 오랜 동안 전통적인 규범이자 관습으로서 그들의 일상적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신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호메로스 시가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전과 다름없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제의와 축제는 물론 공적 기부금까지 동원하여 수시로 펼쳐지는 시가를 주제로 한 합창극·연극 공연은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는 일종의 교양교육이자 세계관 내지 가치관 교육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의 시가와 시인 비판은 단순한 예술 비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세계관·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인 것이다. 수호자 교육에서 시가 교육이 생각 외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제는 수호자 교육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살필 것이다.

* 소크라테스도 위와 같은 아테네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에 따라 제의에 참석하여 신들에게 기원을 드리고προσεύχομαι 있다. 이곳에 나오는 ‘본바닥 사람들(ἐπιχώριοι)의 행렬’은 아마도 트라케 사람들의 벤디스 축제를 동반 축하하기 위해 본토 주민들이 펼친 아르테미스 여신 경배 행렬일 것이다. 이미 국제화된 아테네에서 본토 주민과 거류외인이 큰 거리감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 ‘트라케인들’οἱ Θρᾷκες 이들은 본토 주민들과는 구별되는 거류외인들((metoikoi 혹은 synoikoi)로서 대부분 아테네의 상업 장려 정책에 의해 페이라이에우스에 정착한 트라케 출신 즉 발칸반도 동북부에서 내려온 상인들 또는 라우레이온 은광 채굴을 위해 초청된 광산 기술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유입이 늘어남에 따라 아테네는 그들의 관습과 제례도 허락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페이라이에우스에 트라케인들의 여신인 벤디스 신전도 세워졌고 축제도 개최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 관련 비각문에 대한 연구 가운데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벤디스 축제가 아티카에서 열린 시기는 기원전 42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앞서 살핀 대화편 상정 시기를 최대 429년까지 높여 잡을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Christopher Planeaux, ‘The Date of Bendis Entry into Attica’, The Classical Journal 96.2, December, 2000. pp165-195)

*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주민들은 자유민(eleutheros)과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자유민은 다시 시민(politēs, 참정권을 가진 완전 시민으로서 성인 남성들과 불완전 시민으로서 그들의 가족)과 비시민(거류외인+ 그의 가족, 시민과 비시민의 자식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처럼 시민은 곧 자유민이지만 자유민이 곧 시민은 아니다. 그리고 비자유민에는 농노(농업노예)와 가사노예(가정교사, 보모 등)가 있었다. 이러한 계급분화는 그리스의 모든 국가가 정복국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25년 경 아테네의 인구는 시민은 29,000명 그들의 가족은 87,000명 거류외인은 7,000명 그들의 가족은 1,4000명, 농노와 노예는 81,000명, 총 218,000명 정도였다. 완전한 시민권은 곧 참정권(koinōnein archēs)을 의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민주정은 주민 14%에 해당하는 성인 남성 이른바 완전 시민들만의 민주정이었다.

* 아테네에 타 지역 그리스인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초 클레이스테네스가 자신의 정치적 배후세력으로서 민중의 수를 늘이려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테네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기원전 48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테네에 거주하는 타 지역 그리스인 출신이 시민이 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비교적 국제적인 도시였던 코린토스 정도를 제외하면 나라마다 외국인도 별로 없었고 스파르타는 아예 정책적으로 외국인을 추방 또는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만은 해를 거듭할수록 외국인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이후부터 이른바 metoikos 즉 거류외인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여지면서 법적인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어떤 이는 metoikos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 된 것은 427년 초연된 아이스퀼로스의 연극<페르시아인(Persai)>이었다고도 주장한다. (James Watson. “The Origin of Metic Status at Athens”. The Cambridge Classical Journal 56, 2010. p. 265) 이후 거류외인은 시민권은 취득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유인으로서 영주권과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각종 종교행사와 제례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참정권을 제외한 기타 공공사업에 권리와 부담을 함께 가졌으며 때로는 군역을 지기도 하였고 일부 부유층은 자비무장인(hopla parechomenoi)이 되어 전투에 나서기도 하였다. 다만 그들은 시민이 아니어서 법정에 설 때에는 한 시민을 보호자(prostates)로 내세워야 했다. 그리고 세금의 경우, 이들은 식솔의 수에 따라 소정의 인두세(metoikion)를 내야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상업 진흥정책에 따라 다른 세금에서는 면제되어(ateleia) 점차 이들의 지위는 향상되었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63쪽 참고) 이후 이들의 상당수가 부를 축적하여 아테네 부유층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에게도 공공기부금 헌납(leitourgia: 비극·희극의 상연에 불가결한 합창대 운용비용, 함선의 장비 및 시설 등 공공사업비를 위한 기부제도)이 요구되었고 부정기적으로 과세된 특별재산세(eisphora)의 납부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4세기에 들어서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 시민들 가운데 중추적인 계층은 조상 대대로 이어 받은 토지 소유자로서 2, 3명의 노예를 두고 농업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중소 자영농들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농업이야말로 자유인에 어울리는 직업으로 여겨졌으며 상공업은 시민이 아닌 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르러 상업이 발달하고 이오니아 등 외지에서 올리브 수요가 급증하자 토지는 식량생산 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용 올리브 재배지로 크게 바뀌어 무역업은 물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도자기 산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른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경제는 식량생산과 물물교환 중심의 전통적인 경제 틀에서 벗어나 교환가치 중심의 화폐경제, 상업경제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의 변화는 농업경제 중심의 전통적인 시민적 삶의 방식을 해체하는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업주의적 재편은 특히 페리클레스 등장 이래 아테네가 제국화되면서 전통 그리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혼란과 내분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당대 주변 국가들 특히 아테네와 패권경쟁을 하던 스파르타인들에게는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 이외의 상업주의적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 이후 동맹국으로부터의 조공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장기적인 경제입국을 위한 비축과 투자 개념은 희박했고 대부분의 경비가 파르테논 등 대규모 신전 건축을 포함하여 시민들의 정치 참여 및 배심원 수당으로 지출되었다. 예산개념도 따로 없었고 실제로 근대국가가 재정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몇몇 분야( 예컨대 공교육, 공공수송 등 사회간접자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군비를 비롯한 나라에 필요한 경비 또한 기본적으로 동맹국의 조공과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의 공물 그리고 부유층의 공공기부제(leitourgia)에 크게 의지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시민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되었으며 직접세는 필요할 경우 민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상시적인 세입의 주요항목은 무역업의 증대로 생긴 관세 수입정도였다. 아테네는 최소한 재정운용에 한해서는 오늘날의 최소국가와 소비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페리클레스 사후 실권을 잡은 클레온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어 동맹국의 조공 요구도 크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시민의 정치 수당도 인상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이기는 하지만 데미스토클레스가 라우레이온 은광이 발견되자 그곳에서 생긴 막대한 부를 시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페르시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삼단노선 건조에 투자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시민 모두가 국가 연금자이다시피한 이러한 포퓰리즘적 경향과 원시적인 재정정책, 행정의 비전문주의는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전성기 동안에는 민주정하 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지만, 시라쿠사 원정 실패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참담한 패배를 지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각자도생을 위한 민중들의 이기심과 선동정치, 부자 갈취, 무고와 소송 등 사회적 병폐의 원인이 되면서 공동체의 분열과 몰락을 재촉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123-130쪽 참고) 이러한 점에서 <국가>가 이 혼란기를 배경으로 아테네의 상업주의를 대표하는 세력이자 오랜 전쟁기간 동안 무기 판매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케팔로스와의 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국가>의 집필 또한 이후 아테네가 더욱 쇠락하여 거의 재기 난망의 상태로 접어들던 기원전 375년 전후에 이루어졌다.

 

[327b]

* 소크라테스는 시내로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폴레마르코스의 시동παῖς을 통해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기서 시내τὸ ἄστυ는 폴리스 ‘아테네’의 중심을 이루는 아테네 성곽 내 도심 지역을 말한다.

* ‘시동이 내 뒤에 와서 옷을 붙잡고서’καί μου ὄπισθεν ὁ παῖς λαβόμενος τοῦ ἱματίου.

말을 걸기 전 옷을 붙잡는 장면은 <국가> 제5권 서두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나온다.(449b)

 

[327c]

* 폴레마르코스는 아테이만토스, 니케라토스 그 밖에 몇 명과 함께 소크라테스에게 다가와 시내로 가지 말고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니케라토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니키아스의 아들(Νικήρατος ὁ Νικίου)이다. 니키아스(기원전 약 470-413)는 422년 클레온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어 스파르타와 일시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으나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 원정 중 포로로 잡혀 처형된다. 그의 아들 니케라토스는 함께 있는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404년 30인 과두정권에 의해 처형된다. 기원전 406년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장군으로 참전했다가 시신 수습 문제로 문책을 당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처형된다.

* 이 사람을 ‘이겨내시거나(더 힘이 세거나)’의 원어(κρείττους)는 나중에 트라쉬마코스가 ‘강자’를 표현할 때도 나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힘에 의한 물리적 윽박지름은 이어서 언급되는 소크라테스의 설득(πείθειν)의 방법과 대비된다. 그리 심각한 대화 국면은 아니긴 하지만 폴레마르코스에게 설득의 방법은 아예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지도 않다. 이런 식의 농담조 윽박지름은 <필레보스> 16a, <파이드로스> 236c에도 나온다.

*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실 수가 있을까요?’ἦ καὶ δύναισθ᾽ ἄν πεῖσαι μὴ ἀκούοντας;라는 폴레마르코스의 반문에 글라우콘이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οὐδαμῶς라고 답하는 부분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복선처럼 느껴진다. 잠시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만나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종국에 이르러 트라쉬마코스가 이미 처음부터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런 사람을 설득하기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바른 대응은 이제 설득이 아니라 그와 같은 주장을 완전하게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대안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 아무려나 이러한 윽박지름식 강권은 소크라테스에게 익숙하지도 받아들여지기도 힘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곁에 있던 아데이만토스는 이 상황의 어색함을 금세 알아차리고 다른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체류를 청한다.

 

[328α]

* 아테이만토스는 밤에 횃불 경기도 있고 철야제παννυχίς도 열리니 그것도 구경하고 젊은이들과 대화도 나눌 겸 재차 머물기를 청한다. 횃불 경주 λαμπὰς : λαμπὰς는 횃불 경기의 공식이름이기는 하지만 λαμπὰς는 뒤에 나오는 λαμπάδια와 마찬가지로 그냥 ‘횃불’을 뜻한다.

* 트라케 지방은 광산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으로 광산노예들이 많았다.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또한 트라케 광산에 묶여 지낸 광산 노예들의 삶에서 착상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몸과 영혼의 이원론, 영혼불멸설 또한 고대 아티카에서는 그리 발달하지 않은 사고인데 광산 동굴노예의 참혹한 삶이 영혼만이라도 자유롭고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과 욕구의 일환으로 생겨나 점차 아티카에도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트라케지방에서 디오뉘소스 신앙이 발달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에서 열린 횃불 경기도 그들이 광산 동굴에서 늘 함께 했던 횃불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산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마상 횃불 경기에 의아해하며 관심을 보인다.

* 이 후 전개된 대화의 분량으로 시간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철야제 구경은 밤샘토론으로 대치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말잔치(συμποσίον)가 축제 구경보다 좋은 잔치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서도 소크라테스는 지금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소크라테스의 열정과 체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28b]

* 아테이만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보이자 폴레마르코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그의 말을 거들고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에게 머물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뤼시아스, 에우튀데모스, 트라쉬마코스, 카르만티데스, 클레이토폰이 이미 와 있었고 뜰에서 제물을 바치고 앉아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 뤼시아스 Λυσίας (약459-약378)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이다. 기원전 404년 형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민주파의 편을 들어 30인 과두정에 맞서다 형은 재산을 몰수당한 후 처형되고 그 자신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로써 유복했던 케팔로스 가문은 몰락한다. 무기 제조 판매업을 통해 치부한 신흥 상공인 계급이자 거류외인이었던 케팔로스 집안으로서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과두정 세력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뤼시아스는 기원전 403년 민주파에 의해 30인 과두정권이 무너지자 아테네로 돌아와 유명한 법정 연설문 작성자로 명성을 얻었고 민주파를 적극 지지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이 민주파에 의해 희생된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가 기원전 375년 경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사태를 목도한 후임을 고려하면 <국가>에서 플라톤이 이미 몰락한 케팔로스 가문을 어떤 시각에서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추정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 나오는 에우튀데모스Εὐθύδημος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로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 나오는 키오스 출신 에우튀데모스와 동명이인으로서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 카르만티데스 Χαρμαντίδης는 훗날 유명한 연설가 이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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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에는 다소 방해가 되겠으나 텍스트 내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주요 개념의 원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 앞으로 본 강해에서는 중간 중간 고전 그리스어 원문을 병기할 예정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어 원전 텍스트 대부분이 실려 있는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 저자별 목록에서 ‘Plato’을 찾아서 을 클릭한 후, 플라톤의 <국가> 텍스트(Republic, Greek)와 해당 페이지 및 섹션(327a, 338c 등으로 표기)을 찾아가면 버넷(J. Burnet)판 그리스어 원문과 쇼리(P. Shorey)의 영어 번역, 아담(J. Adam)의 주석 등을 참고할 수 있다. 특히 실린 고전 그리스어 원문의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자세한 단어별 사전(Liddell & Scott’s Greek-English Lexicon)풀이가 나와 있어, 최소한 고전 그리스어 알파벳 정도만 익힌 분들도 쉽게 해당 개념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Perseus Digital Library, Perseus Collection, Greek and Roman Materials

http://www.perseus.tufts.edu/hopper/collection?collection=Perseus:collection:Greco-Roman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④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13.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4강.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

 

강연 : 이지영(이화여대 강사)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프랑스 혁명기에 평민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프랑스 대혁명은 과연 성공한 혁명일까? 그 성공과 실패 여부는 과연 누구를 기준으로 평가된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우리는 어떤 변화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오늘의 강의는 이런 물음들로 시작되었습니다. 강의를 맡은 이지영 교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유, 혁명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성공한 혁명이라 할 수 있는지를 말이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민중이 사회 전면에 등장해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 자신의 요구나 이익이 거의 반영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독특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들에 의해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민중 혁명’이기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 혁명’ 혹은 ‘시민 혁명’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쩌면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중들이 피 흘려 싸웠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민중은 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없었을까요? 왜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질서로 이행하는 것에 그쳤을까요? 그 까닭은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 그 자체에 내재적으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요? 혁명을 일으켰던 ‘제3신분’의 이질성과 다양성에서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삼부회의 한 축을 차치하던 ‘제3신분’은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지부터 법률가, 하급 관료, 장인(직공), 노동자, 농민 및 농노, 빈민 등을 포괄했던 광범위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봉건적 질서와 신분제를 타파하겠다는 목표만 동일할 뿐, 서로의 욕구나 목적이 완전히 상이했던 것입니다.

결국 혁명의 과정과 그 귀결에서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지들이 그토록 원했던 소유권(사유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이 절대적 가치와 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게 됩니다. 소유권 혹은 재산권으로서 자유는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확립되었고, 그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목적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지 혁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혁명을 통해 ‘무엇을 바꾸는가’, ‘누가 바꾸는가’가 결정적인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혁명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으로 인해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물어야 하고, 그것이 정말로 좋은 변화인지, 즉 개선된 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2016년 겨울부터 그 다음 해까지 지속된 이른바 촛불 시민 ‘혁명’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1.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上)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1970년 5월 1일 뉴욕에서 열린 ‘제2차 여성연합대회(Second Congress to Unite Women)’에는 전에 없던 긴장이 감돌았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스무 명의 여성들이 행사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훼방을 놓았다. 이 여성들은 주류 페미니즘 운동이 레즈비언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큰소리로 항의하였다. 티셔츠에 적힌 “연보라색 골칫거리”라는 글귀는 미국에서 제2물결 여성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던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이 레즈비언 운동을 비난하며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이름붙인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베티 프리단과 그녀가 회장으로 있던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는 여성의 평등권을 보장받기 위한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을 국회에 통과시키기 위한 운동이 가장 주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전국여성단체의 운동을 주도하던 회원들 중 일부는 레즈비언들이 젠더 이슈보다는 섹슈얼리티를 의제로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여성운동이 확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류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가운데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lity and Lesbian Existence)‘이 1980년 <기호들(Signs)>지에 발표되었다. 이 글은 발표와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성애를 여성 억압의 주요 원천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주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항의하는 여성들

 

여성 억압의 원천으로서 강제적 이성애

에이드리언 리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내재적인 욕망을 자연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거나 의문시하지 않은 데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고 억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인생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리치가 보기에는 이성애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이며,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남성적 권력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어하면서 유지된다. 캐틀린 고프(Kathleen Gough)를 인용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고, 강제적으로 섹슈얼리티를 남성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여성들의 생산력을 제어하기 위해 여성들의 노동을 명령하고 착취하는 것, 여성들의 아이들을 통제하고, 그녀들에게서 아이들을 빼앗는 것, 여성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고, 여성들의 운동을 막는 것, 여성을 남성들 사이의 거래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 여성들의 창조성을 속박하고, 사회의 지식과 문화적 성과의 거대한 영역에 여성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억압의 형태는 단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평등과 재산 소유의 문제로만은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해방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지 남성과 동등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성애라는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에 있어 ‘대부분의 여성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자이다’라는 가정은 이론적으로 정치적인 장애물이다. 이러한 가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레즈비언 존재가 역사에서 누락되어 왔으며 질병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며, 레즈비언을 고유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예외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며, 만약 당신이 자유롭고 ‘선천적인’ 이성애자로 생각한다면 여성에게 이성애란 ‘선호’가 아닐 수 있고, 오히려 강제적으로 부여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선동되고 유지되어온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하나의 제도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적 시스템 또는 인종주의라는 계층 질서가 육체적 폭력과 허위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힘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성애가 여성의 ‘선호’나 ‘선택’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이성애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페미니스트에게는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생각, 새로운 길로의 탐험, 거대한 침묵으로부터의 균열, 인간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같은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레즈비언 존재(lesbian existence),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num)

강제적 이성애라는 제도 내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존재가 비가시화되고 삭제된다. 이런 가운데에서 레즈비언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리치는 레즈비언주의(lesbianism)이라는 용어보다는 “레즈비언 존재”“레즈비언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레즈비언 존재라는 말을 통해 리치는 레즈비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과 더불어 레즈비언 존재의 의미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말을 통해 단지 여성이 다른 여성에서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뿐만 아니라 한 여성의 인생이나 역사 속에서 여성들과 동일시해왔던 경험까지로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이처럼 확장된 의미에서 레즈비언 연속체는 여성들이 우애와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적인 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는 비가시화되고 삭제되고는 하는 레즈비언 연속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레즈비언 연속체의 발견을 통해 여성들은 여성들을 서로서로 북돋아줄 힘을 발견하고 해방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여성들이 레즈비언 연속체로 존재할 가능성-여자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에서부터, 엄마가 된 여성이 어렸을 적 엄마의 모유 냄새를 회상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에 이르기까지,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한 클로이와 올리비아의 관계처럼 함께 실험실을 공유하는 두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성들이 90세에 죽어가는 여성을 쓰다듬어주고 어루만져주는 것에 이르기까지-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레즈비언과 동일시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레즈비언 연속체의 안과 밖을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연결하기

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글을 썼던 동기에 대해서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했듯 주류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오히려 자신들이 일궈나가는 정치적 목표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으며,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주류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남성들이 일궈낸 제도 속으로 편입해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불만으로 여겨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이었다. 이 갈등 속에서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었던 리치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하여 페미니스트들도 포괄할 수 있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며, 가부장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의 공통적 목표로 설정하였다.

물론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도였다. 레즈비언의 의미를 여성과 여성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 형성, 그리고 심지어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키는 바람에 레즈비언의 고유한 정치적 의미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공통의 젠더 이슈로 연결시키면서 남성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맹 또한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글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공적인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임금차별하는 것 외에도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는 것을 통해 기능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언제나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언제나 사랑해 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통해 새로운 사랑, 대안적 사랑의 가능성을 여는 것 또한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수록된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 모음집 <피, 빵, 시(Blood, Bread, and Poetry)>

 

에이드리언 리치의 페미니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이 발표되던 1980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만 51세였고, 세 아이의 엄마였으며, 동시에 레즈비언이었다. 1950년대까지 최상위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자 유명한 여성 시인으로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아내와 엄마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시달렸었다. 그러던 중 1966년에 리치의 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리치는 반전운동, 시민권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면서 리치는 자신의 고립감과 우울감의 원인을 가부장제와 연결시켜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남편을 떠났다. 이후 자메이카 출신의 소설가인 미쉘 클리프(Michelle Cliff)와 레즈비언 연인관계를 지속하였다.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가정이라는 삶 속에 갇혀 있던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는 에세이는 그녀의 삶의 전환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우리에게 여전히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이 가부장제로 인해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으며, 이 숨겨진 사랑의 발견이 우리에게 더 많은 만남과 창조성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