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시간, 사랑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 시간, 사랑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으로 함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사랑’입니다. 음, ‘사랑’하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어떤 사랑이 떠오르시나요?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텐데, 오늘 이야기 할 사랑은 어떤 수평적이고 균형 잡힌 대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한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 남녀 간의 짝사랑과 같이 말이죠.

‘짝사랑’… 짝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뭔가 어릴 때의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네요. 가장 처음으로 하는 첫사랑은 아마도 짝사랑일 테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좋아하다가 어느 새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그런 ‘짝사랑’이나 ‘첫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녀간의 짝사랑도 짝사랑이지만, 부모님들의 자식사랑도 짝사랑과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만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존재는 없는데,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때로는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는 게 또 자녀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간의 짝사랑의 시로도 읽히고 또 부모님의 자식을 향한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는 시가 있어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바로 김인육(1963~)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인데요, 2016년 7월에 <시가 필요한 시간> 방송에서 소개해드린 후에 드라마 <도깨비(2017)>에도 삽입이 되면서 유명해진 시이기도 합니다. 시의 내용을 들어보시면 왜 제목이 ‘사랑의 물리학’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럼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 듣고 오겠습니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 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네,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 듣고 왔습니다. 왜 제목이 사랑의 물리학인지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과학책에서 봤을 법한 ‘질량’이라던지, ‘부피’, ‘비례’ 같은 전혀 시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시어가 나오니까,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런 조금은 딱딱하지만 나름 익숙한 용어들을 가지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묘사를 하고 있어서 뭔가 더 잘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비꽃 같이 작은 크기더라도, 꽃잎같이 가벼운 것이더라도 사랑이라는 대상 앞에서는 그것의 흡입력이 지구보다도 더 크다는 이 새로운 법칙. 물리학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법칙이죠. 그래서 그냥 물리학이 아니라 ‘사랑의’ 물리학이라고 제목을 붙였나 봅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이 시와 함께 어떤 사진 한 장을 같이 본 적이 있어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어쩌면 이 시가 단순히 남녀의 첫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걸 느낀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제 막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이불을 덮고 있는 사진이었는데요, 아빠의 큰 손이 살포시 아기를 감싸고 있던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 밑에 이 김인육 시인의 시가 적혀있었는데요, 이 시에서 말하는 제비꽃 같이 조그마하지만 지구보다 더 큰 힘으로 나를 끌어당긴다는 이 존재는, 어쩌면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감정일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라는 작은 존재는 부모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그런 특별한 사랑의 대상일 테니까요. 김인육 시인의 시를 이렇게 읽으니까 또 다른 감동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강허달림이라는 가수가 직접 작사작곡하고 부른 <사랑이란>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인 가수인데요, 이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사랑이란, 다 주고도 남을 사람, 사랑이란, 다시 살아야 할 이유”…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을 사랑, 내가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랑이라는 노랫말이 김인육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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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랑’이라는 주제로 들려드릴 두 번째 시는 한용운(1879~1944) 시인의 시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까닭…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보통 ‘이상형’이라고 해서,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해놓는 어떤 조건들이 있죠. 가령, 키는 어떻고, 스타일은 어떻고, 성격은 어떻고 등등. 그런 의미에서는 누굴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편으로는 누군가가 정말 좋으면, 그 사람 자체 말고 어떤 또 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요즘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빠르고 쉽게 변해버리는 세대에서는 누구를 사랑할 때, ‘내가 저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왜 사랑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아요.

한용운의 시를 들어보면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이유,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이유. 이 시는 부모님께 읽어드려도 정말 좋고, 아내나 남편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가 고백하기에도 너무나 좋은 시입니다. 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 듣고 오겠습니다.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들어보았습니다. 너무 멋진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홍안(紅顔)이란, ‘붉은 얼굴’ 즉 ‘젊고, 잘생기고 늠름한 모습’을 말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의 홍안만을 사랑한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나의 잘 갖춰진 멋진 모습만을 사랑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시에서의 ‘당신’은 ‘나’의 젊고 늠름한 모습뿐만 아니라 늙고 초라한 백발까지도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곧 나의 밝은 모습만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나’의 눈물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당신’의 사랑이 이 시의 화자인 ‘나’에게 얼마나 크고 깊은 사랑으로 다가왔을지, 이 시의 어조를 통해서 느낄 수 있죠.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 속에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역시 가족, 부모님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사랑일겁니다. 나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의 ‘죽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이 시의 마지막의 구절은, 어떤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까지 보여주는데요, 이 정도로 깊이 나를 사랑해 줄 존재.. 여러분 마음 속에는 누가 떠올랐을지 궁금해지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양희은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계절이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내 마음도 바뀔까 두렵’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그대’가 있어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 속에서의 ‘그대’는 한용운의 시의 ‘당신’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말, ‘그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그대들, 부모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랑을 담아 들려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마음 속에 떠오른 그 누군가에게 이 시와 노래를 나눠보시면 어떨까요? 그럼, 저는 2주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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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악(樂)인열전]①

[악(樂)인열전]

연재를 시작함에 앞서
처음, 이 연재 의뢰가 들어온 지는 꽤 오래됐다. 작년 초겨울인 거로 난 기억한다.
계속하여 미루다가 드디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그동안 나의 게으름도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추어인 내가 음악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말 할 수 있는 ‘음악’이란 무엇인가? 내 역량 안에서 음악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한 음악’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체험’이다.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음악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를 바꿀 힘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매번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지만 <예스>와 함께한 아침은 웅장했다. 그리고 점심시간마다 <리암 갤러거>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잡생각을 실내화 마냥 던져버렸고,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친 마음을 <빌 에반스>가 대신 울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걷는 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나에게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해준 동행자들이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그 동행자들을 손쉽게 고를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나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을 나의 세계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이어폰을 꽂고 있을 때만큼은 나와 동행자 단 둘뿐이며, 어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유일한 순간이며,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다.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여행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나만 느꼈던 그것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마다 후기를 적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본 연재에서 나의 경험들을 전달하고 싶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동행자들, 그중에서 처음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새로운 친구 한 명 소개받는 느낌으로 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성性스러운 성가聖歌 제프 버클리

이 현(건국대 철학과)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1966.11.17~1997. 5. 29)

처음 소개할 동행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제프 버클리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다. 나에게는 정말 음악을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특히 제프 버클리를 좋아했다. 항상 버스 뒷 구석에 그 친구랑 나란히 앉자 한쪽씩 이어폰을 끼면서 같이 이 노래를 들었었다.
“들으면 행복하면서 너무 슬퍼”
그 친구의 평이 너무 인상 깊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제프가 나의 곁에 있게 된 것이

Jeff Buckley – Hallelujah
https://youtu.be/y8AWFf7EAc4

<가사>
Well I’ve heard there was a secret chord
That David played and it pleased the Lord
But you don’t really care for music, do you?
Well it goes like this:
The fourth, the fifth, the minor fall and the major lift
The baffled king composing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your faith was strong but you needed proof
You saw her bathing on the roof
Her beauty and the moonlight overthrew ya
She tied you to her kitchen chair
And she broke your throne and she cut your hair
And from your lips she drew the Hallelujah
Hallelujah(X 4)
But baby I’ve been here before
I’ve seen this room and I’ve walked this floor
You know, I used to live alone before I knew ya
And I’ve seen your flag on the marble arch
And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X 4)
Well there was a time when you let me know
What’s really going on below
But now you never show that to me do ya
But remember when I moved in you
And the holy dove was moving too
And every breath we drew was Hallelujah
Hallelujah(X 4)
Maybe there’s a God above
But all I’ve ever learned from love
Was how to shoot somebody who outdrew ya
And it’s not a cry that you hear at night
It’s not somebody who’s seen the light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Hallelujah (X 12)

노래 자체는 매우 단조롭다. 기타와 보컬 단 두 가지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조에 감미롭고 절제된 기타선율과 제프의 담백하고 절절한 보이스는 곡 전체를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고, 그 모습은 마치 성령의 빛으로 가득한 성당 내부와 같다. 성당 안쪽은 텅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비친 빛들 덕분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당은 밝지 않으면서 어둡지 않다. 비어있으면서 가득 찬 공간. 성(聖)적 공간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다.
원래 이 노래는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1984년에 발매한 그의 앨범 Various Positions의 B면 1번 수록곡이었다.

Leonard Cohen – Hallelujah
https://youtu.be/ttEMYvpoR-k

이 곡을 낸 이후 존 케일(John Cale),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밥 딜런, 본 조비 등등 다양한 커버들이 나왔다.

John Cale – Hallelujah
https://youtu.be/-gi3J8nPKPE

Rufus Wainwright – Hallelujah
https://youtu.be/PBo-n_17XU0

Bob Dylan – Hallelujah
https://youtu.be/u7JrHD6YAto

Bon Jovi – Hallelujah
https://youtu.be/RSJbYWPEaxw

레너드 코헨은 이 곡을 작사하기 위해서 수년간 고민을 했다고 한다. 가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구절만 80개의 초고를 썼으며, 성(聖)적이고 성(性)적인 가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얼핏 보면 성(聖)스러움과 성(性)적인 것은 정 반대에 있어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신성은 금기의 매혹적 양상”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반대에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cstasy of St. Teresa, Bernini. 1598-1680>

많은 커버 중에 가장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커버는 제프의 커버이다. 코헨으로부터 ‘원곡보다 뛰어난 리메이크’라며 찬사받은 바 있다. 1997년 발매된 Grace의 6번 트랙인, 이 커버는 사실상 곡의 주인이 레너드가 아니라 제프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테크닉의 훌륭해서? 아니면 그의 타고난 목소리 때문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곡에 대한 해석이다. 제프는 이 곡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제프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할렐루야는 숭배하는 사람, 우상, 신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가 아니에요.” “하지만 오르가슴의 할렐루야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성가(聖, 性-歌)는 관능적인, 환희의 노래이다. 정말로 우연하지만, 이 둘이 한국어 발음에서 같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Halleluja”는 무엇을 위한 송가인가? 제프가 연주한 ‘비밀스러운 코드’(secret chord)는 ‘사랑’을 위한 소리이다. 성(聖, 性)인 사랑은 모두 자신을 뛰어넘어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얻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어쩌면 완전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늘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노래에 대해서, “당신은 노래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할렐루야의 가사는 곡 씹으면 씹을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 노래는 (제프의 말했던 것처럼) 사랑, 오르가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엌 의자에 묶어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서에서 머리카락은 영광을 상징하고 그런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몰락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몰락임과 동시에 상승하는 순간. 엑스터시의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은 바로 이 순간 아닐까? 당신을 추구하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나를 버리는 순간이며, 행복하면서 동시에 슬픈 것이 아닐까?

“love is not a victory march, It’s a cold and it’s a broken Hallelujah”
사랑은 승리의 행진은 아니에요. 그것은 차가운데다 부셔져 있지요. 할렐루야

제프 버클리는 1966년 1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팀 버클리와 메리 귀베르사이에서 태어났다. 팀 버클리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메리 귀베르와 이혼했고, 메리는 이후 재혼하여 제프는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제프는 양아버지의 성을 따라 스코티 무어헤드(Scotty Moorhead)로 개명하기도 했었다. 팀 버클리와는 8살 때인 1975년에 다시 만났는데, 이것이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만나고 얼마 뒤 팀 버클리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제프는 버클리라는 성을 되찾았다.

Halleluja가 수록된 <Grace>는 1994년에 발매된 그의 첫 정규앨범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요절했다. 1997년 5월 29일 친구와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부르며 울프 강을 걷다가 갑자기 옷을 다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친구가 한눈판 사이 제프는 사라졌었고, 이후 수색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6월 4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Grace>는 얼터너티브 포크 록의 정수로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 ‘팀 버클리’도 엄청난 천재였지만 그는 그를 한 편으로는 뛰어넘었다. 제프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정규 데뷔 이전까지 시네(Sin-é)를 비롯한 뉴욕의 클럽들을 돌며 레드 제플린, 밥 딜런, 누스랏 파테 알리 칸, 레너드 코헨 등의 커버 곡들을 연주하면서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러면서 다른 아티스트의 곡을 자신의 색채로 버무리는 연습을 꾸준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제프의 커버는 원곡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습 과정을 거쳐 첫 자신의 소리를 담은 것이 였다. 1994년 첫 데뷔 당시 그는 롤링 스톤 매거진에서 “어떤 곡을 가져다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이제 그 수업은 끝났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의 매력은 독특한 감수성이다. 묘한 슬픔과 거침이 함께 공존한다. 그의 째지한 리듬감 덕분에 슬프지만 절대 처지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 울림은 거기에 깊이감과 우아함을 입혔다.
첫 번째 트랙 [Mojo Pin]이 그의 보컬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다. 속삭인 듯하면서 절규하는 그이 보컬은 앨범의 시작부터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타이틀 곡인 [Grace]는 다이나믹한 전개와 게리 루카스(Gary Lucas)의 기타가 일품이다. 서로 다른 기타 2대를 다른 리프로 구성했는데, 그 위에 버클리의 보컬 기교가 극한까지 이르렀다. [Lover, You Should`ve Come Over]는 그의 자작곡으로서 도입부의 오르간 소리가 인상적이다. 포크의 감성을 제프만의 감성으로 잘 표현했다. 의 곡의 구성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은지 알 수 있다. [Last goodbye]와 [So Real]은 전형적인 포크 록의 형태를 띠고 있고, [Corpus Christi Carol]은 중세 교회 성가를 편곡해서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가 하면, [Eternal Life]과같이 헤비메탈 스타일의 곡도 있다.

Mojo Pin
https://youtu.be/Svo7LZbnUVw

Grace
https://youtu.be/A3adFWKE9JE

Lover, You Should`ve Come Over
https://youtu.be/HxfE6PJmGS8

Last goodbye 

https://youtu.be/3MMXjunSx80

So Real
https://youtu.be/EcaxrqhUJ4c

Corpus Christi Carol
https://youtu.be/pRyHLrsqO0c

Eternal Life
https://youtu.be/7eiqlE98bPI
(앨범 자체가 명반이기에 전곡을 한번씩 다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의 노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늘 사랑이었다. 가사 전체가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유행처럼 퍼진 염세주의를 거부했다. 그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마냥 행복하고 밝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이별을 포함한 사랑”이었고, “얻을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은 마냥 행복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마냥 행복하지 않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버티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늘 양가적이다. 그렇기에 제프의 사랑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태도는 기쁨도 아니고 체념도 아니다. 사랑의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임에 가깝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면서 너무 슬픈 것처럼 말이다.

다음에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라캉의 사랑’의 쓴 장 알루슈는 그의 책에서 ‘사랑하기 혹은 사랑받기의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스스로를 축축하지만 불타오름 없이 연소되는 장작으로 만드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

* <국가>는 크게 서론(제1권), 본론1(제2권-제4권), 본론2(제5권-7권), 본론3(제8권-제9권), 에필로그(제10권) 등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각 권들 간에 내용상의 단절 없이 이어져 있어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제3권 역시 제2권 중간쯤(375a)에서 시작된 이상국가론의 서두 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아래는 제4권 끝(445e)까지 이어질 그 이상국가론의 전체 목차이다.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논의는 이제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에 진입하여 수호자의 교육론 가운데 시가 교육 부분을 다루면서 시인들이 시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 할 내용들로서 신들에 관한 것을 마무리한 후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을 다루기 시작한다.

 

  1. 본론 1, B.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제2권 375a- 제4권 445e)

<제2권> 후반(375a-383c)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376e-392c)

            1-2-1-1-1 어린이를 위한 설화와 허구(376e-377d)

            1-2-1-1-2 신들에 관한 것(376e-383c)

                    * 신은 선하다(376e-380c)

                    * 신은 단순하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380d-383c)

<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1-2-1-1-4 인간에 관한 것(392a-392c)

         1-2-1-2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392c-398b)

            1-2-1-2-1 이야기 투와 모방(392e-398b)

            1-2-1-2-1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1-2-1-3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1-3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412b-427c)

       1-3-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1-3-2 건국 신화(414b-415d)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17b 제3권 끝)

<제4권>(419a-445e)

       1-3-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제3권에 이어 계속, 419a-421c)

       1-3-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1-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2-1 혼의 세 부분(434c-441c)

    2-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제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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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386a-417b)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386a-b]

*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신들과 어버이γονεύς를 공경하고τιμήσουσιν 서로 우정φιλία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신과 관련하여 어릴 적부터 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그들이 용기 있는 사람들ἀνδρεῖοι이 되려면 그들 자신이 죽음θάνατος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승Ἅιδης의 일들이 실제의 것들이고 또 무서운 것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전투μάχη에서 패배하여 노예δουλεία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은 결코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를 들려주는 사람들을 감독해야ἐπιστατεῖν 하며 그들에게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μὴ λοιδορεῖν 오히려 찬양ἐπαινεῖν 하도록 요구해야 한다δεῖσθαι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진실ἀληθῆ도 아니거니와 장차 전사들로 될 사람들을 위해 유익ὠφέλιμος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386c-387a]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설화 가운데 위와 같이 저승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시구ἔπος 를 비롯해 그런 유형의 것들은 모두 삭제해야ἐξαλείφω 한다고 말하고 그 구체적 사례들로서 여섯 가지 시구들을 인용하여 열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은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한탄하는 장면은 물론 파트로클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하데스로 사라지는 모습 등 하나같이 죽음과 하데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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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에 있어 내용적 규범과 관련한 부분은 신과 관련한 부분,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부분, 인간과 관련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곳의 논의가 수호자 및 영웅과 관련한 논의로 시작되는 부분임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논의가 앞에서 마무리되었다고 말한 후 불쑥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까지의 논의 방식을 뒤돌아보면 크게 어색할 것도 없다. 앞서 보았듯이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 겉으로는 들려주어선 안 될 것과 들려주어야 할 것을 큰 틀로 삼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의 측면을 들여다보면 전자의 형식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고, 다른 한 편 후자의 형식을 통해서는 새로운 대안 내지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것이 신의 선성을 기초로 하는 플라톤의 새로운 신학이자 종교관이다. 플라톤은 이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신들에 이어 영웅들에 관한 기존의 설화들을 비판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용기와 절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방식으로 정차 수호자가 될 젊은이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논의 단계가 수호자 선발 이전의 기초 교육 단계라는 점에서 그 덕목들은 아직 지혜와 정의라는 덕목까지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덕목들은 수호자의 선발 이후 자세하게 논의하게 될, 이른바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어야 할 4가지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바탕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이곳 서두에서 용기는 일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387d),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388e) 등 구체적인 행위 사례들로 표현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용기를 다루는 제4권에 가면, 이러한 용기에 대한 구체적 예시들은 좀 더 일반화된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즉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429c-d),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430b)이다.

* 앞서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언급되었듯이, 신들이 선하고 서로 다투지 않는 한, 젊은이들은 그 신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곳 서두에서 젊은이들을 ‘신들과 어버이를 공경하고 서로 우정을 중시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특히 어버이에 대한 공경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동양적인 정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378b) 소크라테스는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관련 이야기를 비판하면서 설사 아버지가 부정의한 짓을 저질러도 응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제5권에 가서도 수호자들은 자기가 만날 모든 사람을 형제나 누이,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과 딸, 자손 혹은 선대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아버지들에 대한 공경aidos과 돌봄, 어버이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463c-d, 465b). 게다가 <법률>에서는 어버이를 살해하거나 때리는 불경한 자에 대한 처벌은 하데스에서의 처벌보다 결코 부족해서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비록 거류외인이라 할지라도 부모를 때리는 자를 막아설 경우 경연의 특별석에 초대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영구히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플라톤 역시 신과 어버이를 섬기고 이웃과 우애롭게 지내는 것을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플라톤의 가르침은 하늘을 섬기고 타인을 사랑하며(敬天愛人)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孝悌)는 동양 유가의 가르침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사실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 같은 농경사회에서는 경험이 생존의 기초이고 농사가 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나이 든 사람을 존경하고 이웃과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냄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에서도 경험과 협업이 승패를 좌우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귀족들에게 명예가 다름 아닌 전쟁 영웅이 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들 또한 훌륭하게 살다 죽은 후 자식들과 형제들이 자신을 잘 기억해주는 것을 명예로 여겼을 것이고 그만큼 그것을 담보해줄 자식들과 형제들의 존재와 그들 간의 결속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 ‘저승의 일들을 무조건 험하게 말하지 말고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말은 플라톤 자신이 저승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호메로스 시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죽은 다음의 세계 즉 내세에 대한 인식은 희박했고 다만 죽은 자의 망령이 때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저승은 그 망령들이 머무는 곳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교단을 위시하여 디오뉘시오스 신앙과 엘레우시스 비교(秘敎)가 아테네에 유입되면서 점차 아테네인들의 의식 속에 내세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생에서의 행위들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앙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면 엘레우시스 비교에서 주장하는 이생의 죄에 대한 정화의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저승을 오히려 찬양하도록 요구해야 된다는 플라톤의 말은 이미 아테네에 뿌리내린 그와 같은 당대 내세관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제10권에서 죽은 다음 다시 이생으로 돌아온 에르(Er)를 통해 저승에 존재하는 죽은 혼들의 모습과 그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혼의 불멸은 물론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인과응보가 저승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저승이 무조건 험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심판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는 한, 저승은 그만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용기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저승조차 오히려 찬양의 대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이 갖는 의미는 ‘죽음과 저승이 실제 두렵고 혐오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수호자라면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정도의 당위적 인내 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다. 오히려 플라톤은 대화편 여러 곳에서 죽음과 저승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죽음이 요구될 경우 기꺼이 다가설 수 있는 적극적인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올바르게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수행(연습)meletēma하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가장 덜 두려운 것’(67e)이며 그것은 곧 철학자들이 열망하는 것으로서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풀려남과 분리’λύσις καὶ χωρισμὸς ψυχῆς ἀπὸ σώματος(67d)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법률> 제5권에서도 ‘살아 있음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은 혼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고 저승의 일 모두가 나쁘다는 것도 그곳의 신들과 관련된 것이 우리에게 최대로 좋은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727d)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제8권에 가서도 하데스가 오히려 인간 종족에게 가장 좋은 신이라 여기고 존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혼과 몸의 결합이 그것의 분리보다 나은 점이 없기 때문이다(828d). 이런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변명>에서 죽음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41c). 혹자는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이 자살을 부추기는 것일 수 있다고 비판하지만, 플라톤에게 죽는 연습으로서 철학이 종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정의롭게 사는 연습이다. 소크라테스가 <변명>에서 죽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을 때도 그 말의 취지는 저승에서의 삶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승에서 부정의한 심판을 받아 죽은 자들과 서로 겪은 일들을 견주어보고 그가 지혜로운 자였는지 아닌지를 탐문 하려는데 있었다(41b). 흔히 말하듯 well dying은 well being에서 나오는 것이다. 혼과 몸의 분리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생에서 정의롭게 살지 않는 한, 죽어서 분리된 혼은 저승에서 결코 정복(淨福)을 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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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b-387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에게 위와 같은 구절을 삭제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도록μὴ χαλεπαίνειν 간청할 것이며 그러한 시구들이 시적일수록 그만큼 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로 하여금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인ἐλεύθερος 즉 죽음보다는 노예 신세를 더 두려워할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들과 관련된 모든 무섭고δεινός 두려운φοβερός 이름들, 이를테면 코퀴토스Κωκυτος, 스튁스Στύξ, 지하세계에 사는 자들ἔνεροι, 송장ἀλίβας 등 모든 이들을 몸서리φρίκη치게 하는 것들도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수호자들을 너무 조급하거나θερμότεροι 나약하게μαλακώτεροι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와는 반대되는 유형의 것들을τὸν ἐναντίον τύπον 이야기하고 지어야 한다ποιη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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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죽은 호메로스에게 간청한다는 표현은 시적 표현이거나 호메로스를 찬양하는 후예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코퀴토스와 스튁스는 하데스에서 흐르고 있는 강들로 전자는 통곡의 강, 후자는 증오의 강으로 일컫는다.

* 고대 그리스에서도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면 신분이 귀족일지라도 모두 적국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노예들 가운데는 지적 수준이 높은 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귀족 집안에서 가정교사를 맡거나 대토지 소유주의 마름 노릇도 하면서 안정된 삶을 누리거나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었다. 또 일부는 이를테면 출판업 즉 원본 파퓌로스를 필사·복제하여 널리 배본하는 일을 맡아 후대에 고대 문헌들이 전승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실은 유명 파퓌로스를 보면 그것을 펴낸 주인의 이름과 내용을 필사한 노예의 이름이 말미에 적혀 있기도 하다. 어떤 노예가 필사했느냐에 따라 사본의 권위와 구매자의 욕구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387d-e]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름난ἐλλόγιμος 인물들의 통곡ὀδυρμός이나 비탄οἶκτος 또한 삭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훌륭한ἐπιεικής 사람은 자신의 동료ἑταῖρος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τὸ τεθνάνα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οὐ δεινὸν ἡγήσεται 것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φημί. 그러므로 마치 무서운 일을 동료가 당하기라도 한 듯이 통곡하는 것은 동료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훌륭한 삶에 있어πρὸς τὸ εὖ ζῆν 스스로 가장 자족할 수 있는μάλιστα αὐτὸς αὑτῷ αὐτάρκης 사람이어서 누구보다도 타인 의존도가 적고 그에 따라 자식υἱός이나 형제ἀδελφός 또는 재화χρῆμα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들을 빼앗기더라도 가장 덜 두려워ἥκιστα δεινὸν 할 것이고 어떤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가 닥치더라도 덜 통곡하고 가장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견뎌낸다φέρει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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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믿는 한, 동료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하며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 살폈듯이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좋은 것 즉 혼의 해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의 경우 동료의 죽음을 두고 그가 마치 당한 것으로 여겨 통곡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플라톤은 여기서 훌륭한 사람을 일컬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스승 소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실제로 <변명>과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훌륭한 사람의 경우 가장 자족αὐτάρκης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때도 그가 염두에 둔 사람 역시 소크라테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제2권에서의 자족 개념(369b) 즉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사회 분업적인 기능을 다 잘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족이 아니라 여기 표현 그대로 불행한 사태συμφορά나 힘든 일을 맞이해도 타인에 대한 의타심 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온유하게πρᾳότατα 잘 견뎌낼 수 있다φέρειν는 의미의 자족 즉 내적 조건으로서 자립심 내지 의지의 강함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자식과 형제, 그리고 재화는 삶의 외적 조건들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기보다는 자기를 도와줄 자식이나 형제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화의 결핍을 탓한다.

 

[388a-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가에서 이름난ὀνομαστός 남자들의 애가(哀歌)θρῆνος를 가려내어 그것을 여인γυνή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 그것도 진지한σπουδαῖος 여인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남자들 중 모든 못난κακός 자들이 그렇게 노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면ἀποδίδωμι 그것은 옳은ὀρθῶς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수호자로 양육될 사람들이 그와 유사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게δυσχεραίνωσιν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및 다른 시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이 없도록 부탁할δέω 것이라고 말하고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여러 군데 인용하여 비판한다. 인용된 사례들 가운데에는 아킬레우스나 프리아모스Πρίαμος 같은 신들의 자손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동료나 자식의 죽음을 두고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가 그의 아들 사르페돈Σαρπηδών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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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가(哀歌)θρῆνος는 말 그대로 망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이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는 이름난 남자들이 노래한 애가가 많이 실려 있는데 정의로운 나라에서의 시가 교육 과정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굳이 실어야 한다면 진지하지 못한 여인들과 못난 남자들이 노래한 것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플라톤이 기존 시가에 대한 검열과 변조를 용인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이미 훌륭한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그것은 있는 사실을 고의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 남자들의 애가를 여인들이 노래한 것으로 돌린다는 말에서 혹자는 여인들에 대한 차별을 읽어내기도 한다. 실제로 당대 아테네에서는 비록 귀족일지라도 여성은 시민권을 가질 수가 없었고 반드시 결혼하여 출산과 집안일을 맡아야 하는 기계 정도로만 여겨졌다. 플라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남성으로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민주정의 우상으로 여기는 페리클레스조차 여인들의 덕이란 다만 남자들의 입에 오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여기서 일반 여성들 외에 애가와 무관할 정도의 진지한 여성들의 존재도 함께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수호자의 자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여성 또한 수호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이 허락된 것이 20세기 이후의 일임을 고려하면 기원전 5세기 플라톤의 그와 같은 제안은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 신들 중 가장 위대한 신 제우스조차 자기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슬퍼하는 장면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관을 설명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즉 고대 그리스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가장 위대한 제우스조차 이미 정해진 운명moira을 거스르지 못한다. 가사자들의 죽음은 신들이 최초 자신들의 권한 영역을 분할 할 때 운명의 신 앞에서 맹세한 불가침의 서약 그대로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부여된 고유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게 서로에 대한 침범이 불가능adynaton하지는 않지만 침범할 경우 그들은 하나같이 복수nemesis의 신으로부터의 응징nemein을 각오해야만 한다. 요컨대 운명의 신이 정한 최초의 분배 즉 각자의 몫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각자의 운명이자 당위이며 동시에 또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지 않는 각자의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388d-e]

* 소크라테스는 들을 가치도 없는ἀνάξιος 이러한 이야기들을 젊은이들이 귀담아 듣는다면σπουδῇ ἀκούοιεν 그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나무라기는커녕 사소한 고난πάθημα에도 전혀 부끄럼도, 참는καρτερός 법도 없이 애가를 부르며 통곡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의 주장ὁ λόγος이 지적해주었듯이 결코 그래서는 안 되며 더 나은 다른 주장에 설득되기 전까지는 그 주장에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388e-389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시가 속에서 신들이나 위인들이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는 모습은 물론 이제 그들이 웃음γέλως에 사로잡히는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젊은이들을 ‘웃음을 좋아하는 사람’φιλόγελως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심한 웃음에 자신을 내맡기게 하여 강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유발시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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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8e에서 언급되고 있는 ‘앞의 주장’은 전후 맥락상 바로 앞에서 거론된 언급이 아니라 387d에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주장 즉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동료이기도 한 훌륭한 사람 역시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 위와 같이 용기의 구체적 예시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죽음이나 불행을 비탄하지 않는 것’, ‘웃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등은 하나같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안정된 혼의 상태를 가리킨다. 웃음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게 웃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수호자는 냉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용기와 관련하여 이곳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설명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일종의 예비적 논의로서 제4권에서 보다 보편적으로 용기를 규정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용기란 일종의 보전 즉 고통과 즐거움, 욕망과 공포에 처해서도 끝끝내 소신을 보전하여 지니는 것이다’(제4권 429c-d) 이제 시가 내용 중 용기와 관련한 이야기는 절제와 관련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 또한 나중에 다루어질 절제의 덕에 대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첫 번째 시간, 청춘 [시가 필요한 시간]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문화&세상보기 [시가 필요한 시간] 입니다. 이 연재는 저자 마리횬이 선정한 시 두 편과, 함께 들으면 좋을 두 곡의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특히 호주 한인방송에 출연했던 마리횬이 직접 낭송한 시를 들어보면 시의 의미와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 마리횬이 안내하는 시의 오솔길을 따라 사색하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시간, 청춘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시 좋아하세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쁘고 정신 없는 하루를 살고 있죠. 좀처럼 ‘나’를 위해서 쉬어줄 수 있는 시간을 찾기가 힘든 요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페이지를 읽는 시간만큼이라도 시 한편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차분히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의미로 시와 노래가 함께 하는 ‘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코너를 기획해 보았는데, 어떠신가요?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시죠?

     시가 필요한 시간. 오늘 처음 시간인데요, 여러분께 들려드릴 주제는 ‘청춘’입니다.

     청춘(靑春)!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제목의 책도 생각나고, 요즘 같은 때에는 왠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말인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도전정신’이랄까? 뭐든지 시작해도 될 것만 같은 그러한 느낌이 불끈 솟아오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 중 누군가는 지금이 자신의 청춘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또 어떤 분들은 ‘아, 나의 청춘의 때는 이미 지나갔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모든 분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의 시가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 울먼(Samuel Ulman, 1840-1924)의 ‘청춘’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맥아더 장군 덕분입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서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으로 근무했던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집무실에 이 시를 걸어 놓으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송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 이 시를 오늘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는데요, 맥아더 장군도 좋아했었고 또 김대중 대통령도 좋아했던 시, ‘청춘’. 한 번 들어 볼까요?

 

청춘

                                       사무엘 울먼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장미 빛 뺨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에 달려있다.

 

청춘,

그것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샘솟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다.

 

청춘은 스무 살의 청년에게도 예순 넘은 노인에게도 있는 것.

그 누구도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理想)을 잃어버릴 때에 비로소 늙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단지 우리의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고뇌, 공포, 자기불신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티끌로 만들어 버린다.

 

예순 살이든 열여섯 살이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경이에 대한 이끌림, 어린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동경,

삶에 대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대와 나의 가슴 한 가운데에 어떤 안테나가 있어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기쁨, 용기,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그대는 영원히 젊으리라.

 

영감이 끊어지고 그대의 영혼이

냉소의 눈에 덮여 비관의 얼음에 갇힐 때

그대는 비록 스무 살이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그대는 여든 살이어도 영원한 청춘이다.

 

네, 사무엘 울먼의 시 ‘청춘’ 읽어보았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라는 시의 첫 시작부터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지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에 비로소 늙는다는 말, 그렇기 때문에 예순 살의 노인이라고 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무 살의 청년일지라도 열정과 이상이 없다면 그는 청춘이 아니라는 이 시인의 말은 큰 울림을 줍니다. 여러분에게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마음 속에 불타는 열정이 있습니까? 유약해지려는 마음을 굳게 다잡을 수 있는 용기, 안일해지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모험심이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을 붙잡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청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시는 사무엘 울먼이 젊었을 때, 문자 그대로 ‘청춘’일 때 쓴 시가 아니에요. 이 시는 그가 80세가 다 되었을 노년에, 정확히는 78세의 나이에 쓴 시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시에서 말한 ‘80세의 노인이어도 청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시인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춘의 힘과 열망을 계속 붙들지 않으면 아무리 스무 살이어도 늙은이와 다름이 없다는 시 구절은, 20-30대에게도 도전이 되지만, 혹 중년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 메시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젊은 시인이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라, 78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말년에 정의 내리고 있는 ‘청춘’이기에 그 또한 의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이 시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곡은, 윤종신 작사 작곡의 김도향이 부른 <시간>이라는 곡이에요. <시간>은 2005년도에 발매된 곡인데,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에서 박재정군이 리메이크 해서 부르면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곡입니다. 이 노래에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지만, 지나온 매 순간이 그러했듯 지금이 나의 최고의 시간이기에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리라’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김도향씨가 이 노래를 예순 살의 나이에 불렀는데, 연륜이 담긴 그의 목소리로 이 노랫말을 들으니, 묘하게 사무엘 울먼과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꼭 한 번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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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청춘’이라는 주제로 함께하고 계신데요, 두 번째로 나눌 시는 유안진 시인(1941~)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입니다. 앞서 사무엘 울먼의 시는 ‘우리 모두가 바로 청춘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었는데, 이번 시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이 시는 뭔가 힘든 시기를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시인이 건네주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안진 시인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듣고 오겠습니다.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유안진

 

고목(古木)도 젊어지는

오뉴월 초록 세상에는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신록을 따라 녹음을 따라

푸를 대로 푸르러 푸른 숨결 차 올라서

뜨겁게 달궈지고 거칠 대로 거칠어져서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는

무더위와 폭풍과 장대비의

그 열정 그 광기 그 고통이 휘몰아쳐 줘서

젊음이란다.

 

꿈과 이상으로 밀고 가는 힘과 용기란다

지혜의 태반이란다

감당 못할 시련이란 없는 법이란다.

 

유안진 시인의 시 ‘청춘 아닌 그 누가 있을 수 있는가’ 듣고 왔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만 같아 보이던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봄이면 꽃이 피고, 다 늙어버린 고목(古木)도 5월이나 6월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초록 잎으로 푸르러지죠. 매년 때가 되면 가지마다 나뭇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어 오르는 것을 보는데, 참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나무는 어떻게 그렇게 매년 다시 푸르게 피어날 수 있을까요? 시인은 나무가 그냥 푸르러지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무더위를 늘 견뎌내기 때문에, 그리고 폭풍과 장대비를 늘 오롯이 맞아내기 때문에 다시 푸르러질 수 있는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뜨겁게 달궈지고 거칠 대로 거칠어져서

도무지 겁나는 것이 없는

무더위와 폭풍과 장대비의

그 열정 그 광기 그 고통이 휘몰아쳐 줘서

젊음이란다

 

나무와 들풀이 태양의 뜨거움과 장대비를 맞아야만 다시 푸르러 지듯이, 곧 ‘청춘’이 되듯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떤 고통과 인내와 훈련들이 있다면 그것은 청춘이기에 혹은 청춘이 되기 위해서라면 겪어야 하는 과정이며, 그런 것들을 ‘견뎌 내는 것’이 바로 ‘젊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비록 나이가 들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버텨내고 인내한다면, 다시 말해 ‘꿈과 이상으로 밀고 가는 힘과 용기’가 당신에게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청춘일 겁니다.

오늘 첫 시간으로 함께 해 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힘이 될 것 같은 노래, 이승렬의 <날아>라는 곡 준비했습니다. 드라마 <미생>의 주제곡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노래 들으시면서 또 하루의 ‘청춘’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청춘을 응원하며 오늘 첫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2주 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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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㉟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80d]

*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다. 신은 나쁜 일의 원인일 수 없으며 오직 좋은 것들의 원인이다”라는 사실을 시인들이 시가를 지음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첫 번째 규범이자 법률로서 제시한 후, 두 번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1) 신이 마법사γόης여서 마음먹은 대로 그때그때 다른 형태ἰδέα로 나타날 수 있는φαντάζεσθαι 존재인지 아니면 2) 우리 눈을 속여서 자기에 대해 그런 것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존재인지 또 아니면 신은 단순하며ἁπλόος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는 일ἐκβαίνειν이 무엇보다도 적은 존재인지를 묻는다.

 

———–

 

* 이제 첫 번째 규범에 이어 두 번째 규범이 논의된다. 논의는 여기서부터 제2권 끝(383c)까지 위의 1)(380d-381e)과 2)(381e-382e)의 순서로 다루어진 후 마무리 부분(382e-383c)에서 둘째 규범이 정리된 상태로 제시된다.

 

[380d-381b]

* 1)(380d-381e)은 ‘신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갖지도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담고 있다. 논변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ὑπ᾽ ἄλλου μεθίστασθαι(380d-381b)와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381b-381e)로 구분해서 진행된다.

* 우선 ‘신은 외부에 의해 변화를 겪는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본모습에서 벗어난다는 것ἐκβαίνειν은 자신 혹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한다는 것이다.(380d)

2) 그런데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것τὰ ἄριστα ἔχοντα은 다른 것에 의해 변화ἀλλοιοῦν 또는 운동κινεῖν을 가장 덜 겪는다. 가장 건강한ὑγιέστατον 몸이 음식이나 힘든 일에 영향을 가장 덜 받고 가장 강한ἰσχυρότατον 식물들이 태양열이나 바람 등에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이치와 같다.(380e)

3) 혼도 가장 용감하고ἀνδρειοτάτην 가장 분별 있는φρονιμωτάτην 경우, 외부에 의한 영향이나 변화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 집과 옷, 가구 등 잘 만들어진 것들과 좋은 상태에 있는 것들도 시간이나 다른 영향들로 인한 변화ἀλλοιοῦν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a)

4) 이처럼 자연적으로건 또는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또는 이 두 가지에 의해서건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τὸ καλῶς ἔχον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μεταβολή를 가장 적게 받는다.(381b)

5) 그런데 신과 신에 속하는 것들τὰ τοῦ θεοῦ은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ἄριστα 존재이다.(381b)

6) 그러므로 신은 다른 것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μορφή를 취할 가능성이 가장 적다.(38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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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관련한 두 번째 규범을 구성하는 첫째 원리는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외적 요인에 따른 변화와 내적인 요인에 따른 변화로 구분하고, 그 어느 경우이든 왜 신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지를 밝힌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변화를 의미하는 말로 μεθίστασθαι, ἀλλοιοῦν, μεταβολή 등 여러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의 의미상 차이는 별로 없다. 다만 그러한 말 가운데에 ‘운동’의 의미를 갖는κινεῖν(kinein)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어서(380e) 혹자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이 불변자인 동시에 부동자인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도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표현이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듯이 그리스어 κινεῖν(kinein)은 ‘운동’의 의미와 함께 ‘변화’의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실 신은 말도 하고 행동도 하므로(383a) 애당초 부동자일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 불변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신이 가지고 있는 형태ἰδέα, μορφή와 언행의 일관성은 물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로서의 내적 속성의 불변을 뜻한다. 특히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 형태와 언행의 일관성은 온갖 모습으로 변덕을 일삼는 전통 신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부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외적인 영향을 가장 덜 받는다는 말은, 신이 그 상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서 신적 상태의 훌륭함과 더불어 능력의 탁월성도 함께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으로 훌륭한 상태가 변화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갖는 나약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건강한 몸과 강한 식물이 그러하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영향 하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내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신적 불변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신이야말로 장자 나라를 통치할 수호자들이 닮아야할 대상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새로운 신관이 정의로운 나라에서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수호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 시기질투하며 갈라져 싸우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변덕을 부리거나 함이 없이 늘 하나같은 모습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을 위협하는 어떠한 외부의 영향들로부터도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소크라테스는 신이 갖는 가장 훌륭한 상태가 변화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몸과 식물 그리고 혼 등 자연적 산물만이 아니라 집과 옷, 가구 등 인공적 산물까지도 함께 끌어들여 ‘자연적으로건 기술에 의해서건’ἢ φύσει ἢ τέχνῃ ‘가장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은 다른 것에 의한 변화를 가장 적게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이 자연적 본성의 훌륭함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능력 또한 탁월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말 자체가 ‘장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를 우주를 선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내는 신으로 내세워 장인적 기술에 있어 지고지상의 본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데미우르고스의 신적 우주 제작 기술의 원리를 나라의 통치자들이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본받아야 할 통치 기술의 근본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신은 통치자들이 닮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381b-381e]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의한 변화ὑφ᾽ ἑαυτοῦ μεθίστασθαι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은 논변을 제시한다.

1) 그렇다면 신은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바꾸는가? 바뀐다면 그 변화는 더 낫고βέλτιόν 아름다운κάλλιον 쪽인가 자기보다 더 못하고χεῖρον 추한αἴσχιον 쪽인가?(381b)

2) 신은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분명히 부족함이 없다οὐ ἐνδεᾶ.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나쁜χεῖρον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381c)

3) 신이건 사람이건 자발적으로ἑκών 자신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다.(381c)

4) 그러므로 신이 자신을 바꾸려ἀλλοιοῦν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ἀδύνατον 일이다.(381c)

5) 신들은 각자ἕκαστος 가능한 한 최대한 아름답고 좋은κάλλιστος καὶ ἄριστος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단순하게ἁπλῶς 자신의 모습μορφῇ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381c)

*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ἅπασα ἀνάγκη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말하는 내용, 즉 신들이 온갖 모습을 하고 다닌다거나 신이 변장을 한다ἀλλοιόω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거짓말이며(381d) 그에 따라 시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것을 들은 어머니들이 어떤 신들은 별의별 이방인ξένος의 모습을 하고 밤중에 돌아다닌다는 식으로 나쁘게 말해 어린아이들을 겁에 질리게δειλοτέρους 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8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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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다른 것들에 의해서 변화할 수 없다’는 앞서의 논변에 이어 ‘신은 결코 자신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없다’는 위와 같은 논변에는 시종일관 신이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있어κάλλους ἢ ἀρετῆς 그 어떤 결여나 부족함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단순하고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근본 전제가 깔려 있다. 자기 변화를 낳는 유일한 동기는 결핍인데 신에게 그러한 결핍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앞서 살핀 신의 기술적 탁월성ἀρετῆ뿐만이 아니라 신적인 자기 충족성 내지 자기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다. 논의를 마무리하며 신을 표현하는 말 즉 ‘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ἁπλῶς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에서 ‘단순하다’ἁπλόος(haploos)라는 그리스말에는 simple의 의미만이 아니라 타자와 단절된 ‘절대’absolute의 의미는 물론 ‘타자와 어떤 섞임도 없음’not compound, ‘단일함’single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늘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μένει ἀεὶ ἐν τῇ αὑτοῦ μορφῇ는 말은 신적 불변성과 자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에게 신은 처음부터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이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체적인 존재이다. 신을 표현하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부족함이 없는 충만함인데 충만함이 여럿 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충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분명 여기서 신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위에서 인용한 마무리 부분의 문장 또한 ‘신들 각자’로 시작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일단 플라톤의 신관이 유일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러 완전한 것들로서 신들 각각의 완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우리는 그 해답의 일단을 앞에서 살핀 신적 능력이 갖는 기술적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신의 가장 훌륭한 상태, 결함이 없는 상태 그리고 그것을 보전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그것에 대한 능가pleoneksia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며 어떠한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자는 어떠한 실수도 저지르지 않으며 게다가 그 기술은 오로지 대상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선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기술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 기능에 있어 완전하고 결함이 없다. 그러니까 완전한 기술들이 여럿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들의 영역에서도 신들은 각기 고유한 역할들이 있고 그 고유한 역할에 있어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며 나아가 그 뛰어난 상태를 늘 하나같이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각기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신 즉 완전하고 결함이 없으면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신 역시 반드시 하나일 이유는 없다 할 것이다.

3) 그런데 그 신들 각자가 완전하면서도 그 자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들이 자체성 내지 자기동일성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곳의 신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의 신들은 모습을 갖고 있고 말과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이데아와 단순 비교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이 신화 상의 실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주에서 자체적 존재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뛰어난 존재인 신들을 최소한 그 자체성과 자기동일성의 측면에서 이데아에 견주어 생각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본paradeigma을 보고 우주를 가장 선하게 만든 데미우르고스를 최상의 신으로 그리고 있음은 물론 그가 직접 만든 항성들 즉 영원한 자기 운동자들 역시 모두 신들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많은 플라톤 연구가들은 그 데미우르고스를 그와 같은 우주의 영원한 자기 운동성과 자체성의 근원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갖는 선성과 존재성에 기초하여 그를 혹은 그가 바라본 본을 <국가>에서 언급되는 ‘선의 이데아’와 직접 연관 지어 고찰하기도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곳에서의 신들이 통치자들이 본받아야 할 신들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를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통치자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원상으로 유추하는 것 역시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라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381e-382e]

* 위와 같이 1) ‘신은 온갖 모습으로 변화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된 후 2) 신들은 스스로 바뀌지 않는μὴ μεταβάλλειν 존재이지만 우리에게 자신들이 별의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게끔 우리를 기만하고 홀리는지ἐξαπατῶντες καὶ γοητεύοντες 즉 ’신은 거짓말을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381e)

*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말로나 행동으로λόγῳ ἢ ἔργῳ 우리한테 환영φάντασμα을 내세워 속이는지ψεύδεσθαι를 묻고 그가 그에 대해 모르겠다고 답을 하자 만일에 ‘진짜 거짓’τό ὡς ἀληθῶς ψεῦδος이란 말이 허용된다면 그 진짜 거짓은 모든 신과 사람이 미워한다고 말하고 그 말의 의미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에게 ‘그 누구도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τῷ κυριωτάτῳ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περὶ τὰ κυριώτατα 자발적으로ἑκὼν 속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거짓을 지니고 있는 걸 제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382a)

* 그래도 아데이만토스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아래와 같이 풀어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과 관련해서 혼에서 속는 것ψεύδεσθαί을, 그리고 그렇게 ‘거짓에 빠져 무지한 것’ἐψεῦσθαι καὶ ἀμαθῆ εἶναι을, 그래서 혼에 거짓을 들여와 갖게 된 것을 누구라도 꺼릴 것이고πάντες ἥκιστα ἂν δέξαιντο 그런 경우의ἐν τῷ τοιούτῳ 거짓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이다.(382a)

* 그런 연후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을 ‘거짓에 빠진 자의 혼 안에 있는 무지’ἡ ἐν τῇ ψυχῇ ἄγνοια ἡ τοῦ ἐψευσμένου로 칭하고καλοῖτο, 말에서의 거짓τό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과 대비시킨다. 거짓말은 혼이 처한 그런 상태παθήματος의 일종의 모방물μίμημά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εἴδωλον이어서 완전히 순수한 거짓이 못 된다οὐ πάνυ ἄκρατον ψεῦδος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진짜 거짓’은 신들과 인간들 모두의 미움을 산다’고 앞서의 주장을 재차 확인한다.(382b)

*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진짜 거짓과 거짓말을 위와 같이 대비시킨 후, 화제를 바꾸어 ‘말에서의 거짓’ἐν τοῖς λόγοις ψεῦδος 즉 거짓말이 미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 유용할χρήσιμον 때는 언제이며 누구에게 유용한지를 묻는다. 이를테면 적πολέμιος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μανία나 어떤 어리석음ἄνοια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φίλος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παλαιός 일들을 몰라 허구τὸ ψεῦδος를 최대한 진실ἀληθής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μυθολογία 속 거짓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382c)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거짓말이 가져다주는 유익한 경우들을 언급한 후, 도대체 그 중 어느 점에서 거짓이 신에게 유용한지 즉 거짓말을 해서 신에게 유용한 경우가 있는지를 묻는다.(382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신은 옛날에 관해 몰라 시인처럼 허구를 지을 일도, 적을 두려워할 일도, 친근한 이들의 어리석음과 광기에 빠질 일도 없으므로 ‘신이 누구를 위해 거짓을 말할 일은 전혀 없다’οὐκ ἔστιν οὗ ἕνεκα ἂν θεὸς ψεύδοιτο고 말을 한다. 요컨대 영전인δαιμόνιόν 존재와 신성한θεῖον 존재는 어느 모로 거짓됨이 없다는 것이다.(38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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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가장 주된 부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문제들과 관련해서’라는 표현에서 ‘가장 주된’의 원어는 ‘힘을 가진, 권위 있는’(having power or authority over)의 뜻을 가진 kyrios의 최상급형인 kyriōtatos를 번역한 말이다. 즉 이 말은 ‘가장 힘이 있고 가장 권위 있는 것 최고의 관심사와 관련해서’의 뜻이다. 다시 말해 이 문맥은 ‘누구든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는 최고 관심사와 관련해서 속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싫고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런 일에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는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나중에(505d-e) 누구든 ‘좋은 것들’ἀγαθὰ 과 관련해서는 사실 그대로 정말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그와 관련한 억견δόξα은 경멸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에 기초해서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주된 것을 구체적으로 ‘좋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382a에서 말하는 ‘있는 것들’τὰ ὄντα(ta onta)은 역본에 따라 ‘사실들’, ‘사실로 그런 것들’(505d)로 옮겨지기도 한다. 사실 원어 ta onta는 우리가 보통 존재 또는 실재로 옮기는 ’to on’의 복수형이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들로 생각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그냥 ‘주어진 현실 내지 현존하는 것들’ 정도를 나타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 실재는 차치하고 일상의 현실사와 관련해서 쉽게 거짓에 빠지거나 속임수를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참주 같은 자들의 경우,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고 일상의 현실사들 역시 영악하게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러한 현실 정보들을 이용하여 남들을 나쁜 목적으로 속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참주 또한 모종의 지식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참주가 알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일상사와 관련한 현실 정보들일 뿐 결코 실재와 관련한 참된 앎일 수는 없다.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참주를 지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 가운데 가장 무지한 자로 부른다. 플라톤에게 ‘무지’amathia, anoia는 일상사 내지 주어진 현실사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능력으로서 혼이 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무지는 혼이 내적으로 불균형 상태ametria에 빠져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228c-d)에서 무지란 혼의 불균형 상태로서 혼의 질병이자 악덕, ‘분별로부터 비켜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국가> 제6권(480d)에서도 사고dianoia는 혼이 균형상태emmetria에 있을 때 각각의 실재의 이데아로 쉽게 인도된다고 말을 한다. 즉 철학자는 현존하는 사실들과 문제 상황들을 균형 잡힌 혼의 총체적인 안목을 통해 그 진실을 포착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지만, 참주는 혼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므로 그러한 일상의 사실들과 상황들을 순전히 이기적 관점에서 왜곡하고 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서 결국 부정의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진짜 거짓’to hόs alethōs pseudos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이 허용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그것은 원어에서 참을 나타내는 alethēs란 말과 거짓을 나타내는 pseudos란 말이 형용모순처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속는 것’psedesthai(현재 부정사)은 ‘거짓pseudos에 빠지는 것’으로 옮길 수 있고 ’거짓에 빠져‘epseudesthai(완료 부정사)는 ‘속아 넘어가’로 옮길 수도 있다. ‘들여와 갖게 된 것’ἐνταῦθα ἔχειν τε καὶ κεκτῆσθαι을 직역하면 ‘안에 가져서 획득한 것’ 즉 속은 다음 그 속은 상태를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은 제1권(331e-332b) 폴레마르코스와 나눈 대화를 환기시키는 말이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 같도록 만드는 설화 이야기‘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비롯한 이후 설화 작가 내지 시인들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광기μανία는 극단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무지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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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에 관한 둘째 규범으로서 ‘신은 변화하지 않는다’, ‘신은 부족함이 없다’, ‘신은 언제나 단순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등에 관한 내용들이 논의된 후 이제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앞에서 ‘신이 변화해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것을 내세워 ‘신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똑같은 방식 즉 ‘신은 인간들처럼 거짓말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세워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2)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위해 흥미롭게도 ‘진짜 거짓’과 그것의 모방물로서 ‘말에서의 거짓(거짓말)’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런 연후, 신은 진짜 거짓은 물론이려니와 말에서의 거짓도 결코 행하지 않을뿐더러, 흔히들 인간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조차 전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으로 ‘신은 일체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과 말에서의 거짓, 그리고 유익한 거짓말의 의미가 각각 무엇인지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3)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짜 거짓’은 ‘혼 안에 있는 무지’, ‘혼의 무지 상태’이다. 혼의 무지 상태는 이미 혼에 거짓이 들어와 거짓에 빠져 있는 자의 상태이다. 그리고 말에서의 거짓 즉 거짓말은 이 혼 안에 있는 무지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자 나중에 생긴 영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온 것이라고 얘기하듯이, 거짓말은 혼에서의 무지가 선행 원인이 되어 그것이 말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이라는 원상의 그림자이자 모방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상인 진짜 거짓의 모방물인 한에서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못 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완전히 순전한 거짓의 모방물인 한, 모방의 정도에 따라 진짜 거짓에 아주 가까운 거짓말에서부터 비교적 그것보다는 좀 떨어진 그것과 덜 비슷한 거짓말 등 여러 종류의 거짓말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앞에서도 나왔듯이 자신이 속아서 혼의 무지 상태에 있음에도 자신이 속은 줄도 모르고 마치 진실인 양 떠들어 대는 경우의 거짓말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사회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듯이 이른바 가짜 뉴스를 진실로 알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이와 순전함의 정도가 다른 거짓말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은 사실들을 알고 있으면서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남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도 거짓말을 행하는 자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그의 혼 안에 거짓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역시 혼의 무지 상태에서 거짓말을 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들 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실재에 관한 앎이 아니라 일상사 내지 현실 정보들로서 장차 혼의 무지에 의해 왜곡되어 나쁜 목적에 쓰일 재료이자 도구들일 뿐이다. 특히 참주들은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자들 가운데 정보량에 있어서나 그것을 나쁘게 활용함에 있어서나 가장 월등한 자들이고 그만큼 가장 나쁜 자들이다. 그러나 참주는 여전히 그 누구보다도 무지한 자일뿐이다. 왜냐하면 참주는 불균형한 혼을 가져 분별에서 벗어나 있어 그러한 현실 정보들의 내적 관계와 본질들 즉 그것들이 삶과 현실에서 어떻게 총체적으로 서로 관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진실에 무지할뿐더러, 그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선한 삶을 이루어낼 낼 것인가에 대한 앎 또한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보다 참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진짜 거짓’에 가까운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일부 특수 사안에 속아서 나온 거짓말이지만 참주의 경우는 현실의 모든 사안들과 연관된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이고도 원리적인 앎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에서 나온 모방물로서 거짓말들은 인간들 각자의 가장 주된 부분, 주된 문제 영역에서 결코 유익함을 가져다주지 못함은 물론 참주의 경우가 보여주듯 유익은커녕 인간 삶의 전체 국면에서 전적인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4)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를 마친 후 거짓말이 때로는 유익한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앞에서 우리가 살핀 내용들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혹자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완전히 순전한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에 근거하여 어차피 순전하지 않으므로 때로는 유익함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유익한 거짓말은 자기의 이익이 아닌 친구나 대상의 이익을 위한 선한 행위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다가 나중에 철학 통치자들도 행하는 거짓말이라는 점에서, 앞에서 말한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거짓말이다. 만약 유익한 거짓말을 그러한 거짓말의 하나로 포함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 특히 철학 통치자가 진짜 거짓 즉 혼에서의 무지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혼에서의 무지 상태 즉 진짜 거짓의 모방물로서 거짓말 속에는 가장 유익하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덜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도 차이만을 갖는 나쁨이 있을 뿐 어떠한 유익함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적들에 대한 거짓말, 광기나 어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친구들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옛날 일들을 몰라 허구를 최대한 진실처럼 만드는 설화 이야기 속 거짓말들은 나쁨이 아닌 좋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유익한 거짓말은 혼의 무지 상태로서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결국 거짓말은 크게 나누어 혼의 무지상태에서 나온 거짓말과 혼이 속지 않는 상태 즉 앎의 상태에서 나온 거짓말로 나누어지고 앞서 살폈듯이 전자에는 속은 줄도 모르고 진실인 양 떠드는 거짓말과 사실을 알면서 나쁜 목적을 위해 남을 속이는 거짓말 등이 속해 있을 것이고 후자에는 이른바 유익한 거짓말들이 속해 있다 할 것이다.

5) 그런데 우리가 유념할 점은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 내용의 초점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는 거짓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진짜 거짓에서 나온 거짓말이든 유익한 거짓말이든 그 어떤 경우든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유익한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앞에서의 거짓말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 그 의미의 일관성과 관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러움을 안겨주지만, 전후 문맥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인간과 달리 신들의 경우에는 애초부터 유익한 거짓말을 할 이유조차 존재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신들이 거짓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무결한 선성을 가진 존재임을 더욱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별도의 화제로 삽입된 것이다.

6) 한편 위와 같은 해석과 달리 위의 부분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신이든 사람이든 가장 주된 것 즉 ‘좋은 것’에 관해서는 자발적으로 속으려 하지 않는다. 2) 좋은 것과 관련한 거짓을 갖고서(속고서) 속은 줄도 모르는 상태가 혼의 무지로서 진짜 거짓이다. 3) 말을 통한 거짓 즉 거짓말은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속이는 것이므로 진짜 거짓에 비해 아주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4) 그러므로 거짓말에는 적에 대해 하는 거짓말, 정상이 아닌 친구에게 하는 거짓말 등의 경우처럼 유익한 거짓말도 있다.

7)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말을 통한 거짓이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거짓말에 존재하는 속성 ‘자신은 속지 않은 상태’는 그것이 모방하고 있는 진짜 거짓에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진짜 거짓의 모방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해석은 나중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익한 거짓말이 진짜 거짓인 혼의 무지의 모방물이라면 철학 통치자들이 행하는 유익한 거짓말의 경우까지 혼의 무지 상태에서 나온 것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시민을 속이는 참주와 그것에 속은 줄도 모르는 대중을 비교할 때 시민이 혼의 무지의 원상이 되고 참주가 그 모방물이자 영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참주는 자기는 속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을 속이는 자 즉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아닌 반면에 오히려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는 시민이 진짜 거짓에 빠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진짜 거짓은 시민의 상태가 되고 참주는 그 시민을 모방한 자로서 혼에 있어 시민 보다 덜 무지 상태에 빠진 자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은 것과 관련해 가장 무지한 한 자 즉 혼의 무지가 누구보다도 극상의 상태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참주이다. 요컨대 이러한 해석은 참주의 거짓말이 최악의 진짜 거짓말이라는 것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382e-383c]

* 위와 같은 논의가 이루어진 후 소크라테스는 그 논변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둘째 규범δεύτερον τύπον을 제시한다. 즉 ‘신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ἔν τε ἔργῳ καὶ λόγῳ 전적으로 단순하고ἁπλόος 진실ἀληθὲς 하거니와, 스스로 바뀌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도 아니한다’ 신은 인간에게 환영φαντασία이나 말로도 꿈속에서건 생시건 자신을 바꾸거나 남을 속이는 어떤 징조σημεῖον도 보내지 않으며(382e) 말에서든 행동에서든 결코 우리를 오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383a)

* 그러므로 신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거나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이 규범을 지켜야 하며, 비록 우리가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은 칭송하지만, 만일 이 규범에 어긋난 말을 할 경우에는 칭송하지 않을 것이며οὐκ ἐπαινεσόμεθα(383b) 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 대해 화를 낼 것이고χαλεπανοῦμεν 그에게 합창 가무단χορός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수호자들οἱ φύλακες을 최대한 신들을 경외하는θεοσεβής 인간이자 거룩한 이들θεῖοι로 키우려면 교사διδάσκαλος들로 하여금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ἐπὶ παιδείᾳ τῶν νέων 이 규범에 어긋난 이야기를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οὐδὲ ἐάσομεν고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규범에 전적으로παντάπασιν 찬동하며συγχωρειν 그것 또한 법률νόμος로 삼았으면 한다고 대답한다.(38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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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전통 신화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정기적으로 연극의 형태로 공연되면서 아테네인들의 삶에 대한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연극은 일종의 시민 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나랏돈은 물론 부유층들의 기부금을 받아 그러한 공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합창가무단도 그러한 지원의 일환으로 공연이 이루어질 때마다 제공되고 있었다.

* 정의로운 나라의 시가 교육에서 채택될 규범에는 전통적인 신화와 상충하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신과 관련한 규범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호메로스의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찬송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시가 교육론 내지 종교론은 기본적으로 기존 체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비판적인 분별의 방식으로, 일부는 계승하고 일부는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로써 ‘신은 선하며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 ‘신은 변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규범은 시가 교육과 시가 창작을 함에 있어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자 법률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한 규범들은 앞서 살폈듯이 단순히 시가 교육상의 규범을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세계관 내지 가치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규범들이 담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들은 전통적인 신들과는 차별되는 플라톤 고유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앞에서도 살폈듯이 이곳에서 언급된 신에 대한 새로운 관념들과 장차 본격적으로 언급될 이데아에 대한 관념이 자기 완전성과 자체성의 측면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역시 플라톤의 신학과 철학의 내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플라톤의 신관 내지 종교관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크게 요약하자면 그것 역시 플라톤 철학의 연장선 위에서 i) 기원전 7-8세기 형성되고 전승된 신화적 세계관과 ii)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로부터 과학적 사유가 유입된 이래 당대 아테네 사상계에서 형성된 철학적 세계관 즉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 그리고 iii) 피타고라스 이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자리 잡은 영혼불멸 사상 등을 그야말로 총체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통일한 것이다. 이른바 개인의 혼 안에서 그리고 사회적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 했던 플라톤 평생의 꿈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 이것으로 이제 제2권은 마무리되고 이어서 시가 교육에 있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들이 다루어지고 그것을 본받아 인간들이 지녀야 할 덕목들이 함께 제시된다.

<국가> 제2권 -끝-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10월 마당(5회차) 안내

안녕하세요? 한철연 총무부입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기에 다들 평안하신지요.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 10월 마당(5회차)를 안내합니다.

지난 8월에 이어 철학 마당 5회를 맞았습니다.

이번에는 원효, 화담과 경허 등 한국철학사에서 불교와 기철학의 인물들을 다룹니다.

관심 있는 회원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등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 공동좌담자(가나다순) :

①구태환(상지대학교 초빙교수)

②김제란(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③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④이병창(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⑤최유진(경남대학교 교수,불교철학)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 이후 일정 ***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도시와 제국의 싸움 [나인당케의 단상들]

 

 

도시와 제국의 싸움

한상원(한철연 회원)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도시와 국가가 같은 개념이었다. 그리스어로는 polis, 라틴어로는 civitas는 모두 도시와 국가를 뜻했다. 이는 ‘도시국가’별로 정치단위를 가졌던 고대적 언어관습이다(아마 이와는 상관 없겠지만, 독일어에서도 도시Stadt와 국가Staat는 모음 길이만 다른 거의 유사한 발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란 자율성을 가진 정치적 자치공동체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을의 확장인) 도시가 이루는 자율적, 독립적 공동체로서 폴리스를 예찬한다. 그러나 고대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케도니아와 로마라는 대제국의 출현으로 붕괴되었다. 도시는 제국으로 흡수된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중세의 한복판에 재등장한다. 북부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일부 지역에서 시민들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사고 공동방위를 통해 자치도시(코뮌) 공화국을 수립한다. 마키아벨리가 활동한 피렌체는 대표적인 자치도시 공화국이었다. 맑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당시의 도시공화국(생캉탱)의 자유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그에 맞서 코뮌의 시민들이 어떻게 상호방위를 실행했는지 엥겔스에게 쓰고 있다. 훗날 벤야민은 이 편지를 인용하며 이렇게 적는다. “최초의 코뮌: 도시.”

최근 중국 대륙에 대항하는 홍콩 시민의 저항을 보면, 마케도니아와 로마와 같은 대제국에 흡수되는 것에 저항하는 도시국가(폴리스), 또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중세 자치도시(코뮌)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히나 홍콩인들이 최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도시의 자치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앙집권적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이 21세기 도시공동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도시는 제국으로부터 살아남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까. 오늘날 홍콩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시대와 철학]

국민과 국회의원을 생각한다. – “좌좀들 150만명”발언 즈음하여

 

이영훈(한철연 회원)

 

얼마 전, 국내 제1야당 소속의 민모 국회의원이 개인 SNS에 올린 글이 뉴스가 된 적이 있다. 기자의 사견 등을 제외하고 사실만 나열하면 뉴스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모 의원이 북한 열병식 사진, 교황 방한 사진, 나치당 뉘른베르크 당 대회 사진과 더불어, 이번 검찰개혁 시위 사진들을 함께 올리고 “좌좀들 150만 명”이라 지칭했다.’

이전에도 국회의원들의 과한 언사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야 이 친구야, 쟤들은 원래 그렇잖아, 대한민국 국민답게 행동하라고’라는 식으로 넘어갈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민 의원의 이 발언에서 그저 쉽게 넘기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내가 알기에 국회의원은, 시험 봐서 입성하는 입법부나 사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한 행사를 대행하라고 국민이 뽑은 ‘선출직’이다. ‘국민을 대행’하는 ‘선출직’이라는 점은 국회의원이 관료조직과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부분이 왜 포인트인지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 의원의 득표율을 보자. 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확인해보니 민 의원은 해당 지역구 투표인 119,224명 중 32,963명이 투표하여 당선됐다. 참고로 2등은 여당 소속이며 27,540표로 낙선했다. 바꿔 말하면, 참여하지 않은 인원을 차치하고서라도, 민 의원 지역구 주민 중 2등을 뽑은 약 27,540명 중의 적어도 일부는 민 의원과 반대되는 정치적 성향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들 중 또 몇몇은 이번 검찰개혁 시위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시위는 안 나갔어도 이 시위를 지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민 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구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전 국민의 뜻을 대행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민 의원 지역구의 예에서 보았듯이 상식적으로 그와 생각이 다를 가능성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민 의원은 이번 시위에 나선 국민을 “좌좀들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뭐 국회의원이니까, 이 정도 언사는 넘어가도 된다고 보는지? 혹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상적인 것이니까, 그도 사람이니까 내지는 정치인이니까… 이런 발언도 내뱉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발언에 대해 전혀 불편해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국민이 뽑았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국민을 ‘사고능력은 전혀 없는 채 식욕에 따라 인육을 탐해 움직이는 죽어 썩어버린 상상의 시체 덩어리’인 좀비에 빗대어 “좌익 좀비 150만 명”으로 규정했다. 이 국회의원은 많은 국민들이 그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더럽다, 더러워’라며 혐오의 발언을 또 다시 내뱉었다. 이 국회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들의 동조 혹은 묵인 덕분에 민 의원과 그의 소속 당은 물론 당신들과 정치사상이 다른 국회의원까지 똑같이 국민을 무시할 수 있는 실질적 근거를 하나 더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생각해 봤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묻는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을 거리낌 없이 모욕하는 민 의원의 발언에 관대한 당신과 그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가 달라졌을 때도 저들이 과연 당신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일 것 같은가? 아니면 그저 자신들을 대표하는 자들일 것 같은가.

아마 어떤 사람들은 당신들과 그 정당이 영원히 뜻을 같이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그런 정치인에 대한 순진하기까지 한 ‘믿음’이 깨지는 실례는 특정 당적과 상관없이 지난 우리 현대사에서 수도 없이 봐 왔다.

 

자신과 같은 국민인 검찰청 앞의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죽은 고깃덩어리 살육귀로 규정하는 자와 그런 인물이 소속된 정당이 과연 민의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가? 과연 누가 저들에게 묵인과 동의로서 자신만을 대변할 면허를 주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청와대 대변인이었고 KBS 9시 뉴스 앵커 출신인 민 의원이 단지 세속적이고 친숙한 언사를 구사해보고자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언어를 뜻도 잘 모른 채 사용하는 ‘실책’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사람인지라 잠시 과한 언사를 했다고 얼른 태세를 바꾸어 사과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결과는 모두가 감당할 뿐이지만 국민의 입장, 또 시민의 입장에서는 ‘국민을 대행하는 자’가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떻게 발언해야하는지 깨닫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은 어떤 직책인가’라는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㉞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 시인들이 지켜야할 규범(계속)

 

[378b-e]

* 소크라테스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저지른 일이 설사 진실일지라도 이 나라에서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자 아데이만토스도 그런 이야기는 적합하지 않은οὐδὲ ἐπιτήδεια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신들끼리 전쟁을 일으키고πολεμοῦσί 서로 음모를 꾸미며 싸움질을 하는ἐπιβουλεύουσι καὶ μάχονται 것으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οὐδὲ γὰρ ἀληθῆ.(378b) 게다가 수호자들이 서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αἴσχιστον 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신들과 영웅ἥρως들이 자기들의 동족과 친근한 이들에게 취한다는 적대행위ἔχθρας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어떤 시민πολίτης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ἀπάχθομαι 일도 없거니와 오히려 이런 짓은 경건한ὅσιον 짓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πείθειν 하려고 한다면 노인γέρων들과 노파γραῦς들이 아이들τὰ παιδία을 상대로 곧바로εὐθὺς 들려주어야 하고(378c) 이들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들을 위해 시인들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이야기 즉 어떤 시민도 같은 시민을 미워한 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짓도록 강제해야 한다ἀναγκαστέον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지은 온갖 신들의 싸움 이야기들은 숨은 뜻ὑπόνοια이 있게 지어졌건 아니건 간에 이 나라에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린 사람ὁ νέος은 뭐가 숨은 뜻인지 아닌지 판별κρίνει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δόξα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기δυσέκνιπτάτε καὶ ἀμετάστατα때문이라는 것이다.(378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해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37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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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금지하는 것은 있는 사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 자체를 부정 내지 폐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들을 감독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신을 나쁘게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짓말인데다가 신의 선성이라는 이 나라 최고의 규범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최고의 규범적 가치로 확립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플라톤은 신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물론 일찍이 시민이 같은 시민들을 미워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조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 역사만 보더라도 사실과 다르다. 다만 이 말은 신의 자손으로서 신들을 닮은 선조들이 본래부터 서로 싸우지 않고 동족으로서 친근하게 지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기존 신화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들 모두가 신들끼리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분열하는 모습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실 플라톤은 그 자신 평생 동안 몸소 내전을 겪으며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특히 기원전 5세기 이래 그리스 사회 전체가 평화의 시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동족상잔과 내전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왔음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지금 염증 상태의 나라를 정화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있어 플라톤이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수호자들과 시민들 모두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긍지를 갖고 서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단합하는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어려서 부터 한 나라의 시민이자 동족으로서 서로에 대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 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그것이 갖는 중대성의 크기만큼 어린이에게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교육과정에서부터 엄격한 규범을 세워 위와 같은 신들과 영웅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들을 원천적으로 배격하고 오직 신과 관련한 훌륭한 내용들만 듣도록 설계하였던 것이다.

* 그런데 비판적 사고 내지 그것의 함양을 위한 교육의 화신이라고 부를만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자기가 틀렸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교육 대상에게 알려주길 거부하거나 하물며 은폐라도 하려는 듯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수가 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판 교육이라면 설사 잘못된 생각일지라도 그것을 감추기 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해야 진정으로 그 뭔가를 온전하게 알고 나아가 그와 관련한 비판적 안목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종종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나쁜 일을 당하기 쉬우므로, 그런 나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치 몸에서 면역력을 기르듯이 어떤 것이 나쁜 것들인지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감수성이 강한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는 플라톤의 생각대로 나쁜 것들이 무엇인지 굳이 미리 배우게 하거나 알려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접하는 시가 작품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시인들을 강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언급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착종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 이것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나쁜 것의 원인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미리 끌어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지성은 혼의 인식 능력에 기초하므로 제대로 된 앎을 얻기 위해서는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일이 힘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함께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그 신체의 물질성에 의해 원천적으로 혼의 순수성이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방해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경우 혼의 인식능력이 크게 떨어져 제대로 된 앎을 가질 수 없고 그로 인한 무지가 그에게 나쁜 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지성의 훈련 즉 배움을 통해 이 신체가 혼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나쁜 것의 원인은 무지이고 그 무지의 이면에는 물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의 신체가 나쁜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신체가 갖는 물질성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막무가내 자기 식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물리적 필연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 인식 능력으로서 혼의 지향성을 흐트러트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사태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갖게 하여 그에게 나쁜 일을 안겨다 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쁜 일에 대한 근본책임은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지적 훈련에 게을리 하여 신체의 힘을 통제해 내지 못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혼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훈련 즉 혼의 인식 대상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에 따라 어떠한 거짓말이나 허위도 간파하여 제대로 사태를 파악하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으로 그 잘못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도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했던 생각을 자신도 미리 다 경험해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자신 사태의 진실을 인지하고 분별해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혼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별의 기준으로서 진실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물론 플라톤의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상은 물론 그것을 인지하는 순수한 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앎이란 순전히 백지와도 같은 마음 상태에 후천적 경험을 통해서 주어지는 감각자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참과 거짓은 이른바 혼에 의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들어온 감각내용을 토대로 분별되는 것이고 그 분별의 기준 또한 그 후천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험론적 사고는 오늘날 인식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험론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플라톤의 관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불분명한 지식을 사태와 사물의 진실인 양 강제하는 일종의 나쁜 주입식 교육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태에 대한 진실은 시행착오 내지 실험이라는 경험의 과정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에게도 경험은 앎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혼은 그 자신과 닮은 것에 더 잘 반응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들 가운데 혼의 순수성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경험들은 교육의 한 수단으로 적극 권장된다. 그렇지만 이른바 나쁜 경험들은 특히 어린이들의 경우 미리 배워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혼의 순수성을 오염시켜 무지를 초래하고 그로부터 나쁜 일들이 야기된다. 이러한 한, 분별없이 시행착오를 감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삶의 현실에는 누구라도 혼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나쁜 일들에 직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혼의 순수성을 잘 보전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그 나쁜 일에 용이하게 대처하거나 이겨내는 능력을 훨씬 더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앎이기는 하지만, 비록 인간사에 대한 경험이 적을지라도 배움과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닦아 삶의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 누구보다도 넓고 그에 기초하여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분별하고 대처하는 지혜 또한 더욱 깊어진다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과학 영역에서건 도덕 영역에서건, 단순한 습득을 위한 교육에서건 비판적 사고를 위한 교육에서건, 기본적으로 학습은 혼의 순수성을 통해 함양되고 증진되는 것이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숨은 뜻’과 관련한 언급은 자칫 신들의 모든 행적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노정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설사 신들의 행위 가운데에는 겉으로는 나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 즉 숨은 뜻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 교육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어린 나이일 적에 갖게 되는 생각들은 좀처럼 씻어 내거나 바꾸기가 어렵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가 어린이 교육과정에서 환경적 요소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2-1-1-1 신은 선하다.(378e-380c)

 

[378e-379c]

* 소크라테스가 어린이들에게 훌륭함ἀρετή과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하게 지은 것들 κάλλιστα μεμυθολογημένα을 듣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아데이만토스는 그게 어떤 것들이며 어떤 설화들μῦθοι인지를 누가 묻는다면 뭐라 답할 것인지를 묻는다.(378e)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시인들ποιηταὶ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οἰκισταὶ πόλεως임을 환기시킨 후 나라의 수립자들은 시인들이 설화를 지음에 있어 지켜야할 규범τύπος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스스로 설화를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οὐ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 말한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면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θεολογία에 대한 규범들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소크라테스는 서사시ἐπη, 서정시μέλη, 비극시τραγῳδία 어떤 시를 짓건 언제나 신을 신인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ἀποδοτέος(379a)즉 “신은 참으로 선하므로”ἀγαθὸς ὅ θεὸς τῷ ὄντι 그렇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먼저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들은 해롭지 않다. b) 해롭지 않은 것ὃ μὴ βλαβερὸν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c) 나쁜 짓κακὸ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쁜 것의 원인κακοῦ αἴτιον일 수 없다.>라는 확답을 얻어내고, 이어서 <a) 선한 것τὸ ἀγαθόν은 유익하다.ὠφέλιμον b) 그러면 선한 것은 잘함의 원인αἴτιονα εὐπραγίας이다.>라는 확답 또한 얻어 낸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선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τῶν μὲν εὖ ἐχόντων αἴτιον이고 나쁜 것의 원인은 아니다”(379b)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기에 ὁ θεός, ἐπειδὴ ἀγαθός 소수의 것들에 대해서ὀλίγων 원인일 뿐 많은 것에 대해서는 원인이 아니며(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것들τἀγαθὰ이 나쁜 것들 보다 훨씬 더 적기ἐλάττω 때문에) 이에 따라 ‘좋은 것의 원인은 신’으로, ‘나쁜 것들의 원인은 신 아닌 다른 것’으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한다.(37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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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한 설화가 뭔지를 묻자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은 시인들이 아닌 나라의 수립자들로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사람들이지 설화를 스스로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답을 한다. 대안이 되는 설화가 무엇인지를 묻는 아테이만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설화를 짓는 원칙과 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호메로스 등 큰 규모의 설화를 대신할 만한 설화를 새로 짓는다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플라톤의 현실 인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앞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수호자 교육에서 당대 아테네 시가 교육 제도를 전면 부인하기보다는 그 기본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갖는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꾀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시가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이상국가가 백지 상태에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염증상태에 있는 현실의 조건들 위에서 그것을 정화하고 개혁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수립자 즉 철학자란 설화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규범을 세우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논의의 국면 또한 그 차이를 드러내는데 있음에도 다른 한편 동시에 철학자가 ‘스스로 설화를 꼭 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οὐ μὴν αὐτοῖς γε ποιητέον μύθους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이곳의 논의 국면과 어울리지 않게 철학자도 시인들처럼 스스로 설화를 지을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깊이 함축적으로 전하기 위해 대화편들 곳곳에서 기존 신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화적 표현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신화를 짓고 있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의 말년의 사상을 가장 깊게 담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편은 가히 이곳에서 가장 훌륭하게 지은 설화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데이만토스의 궁금증에 부응이라도 하듯 훌륭함과 관련하여 신들이 행한 최선의 행적들 즉 어떻게 신들이 선한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그 자신의 설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나라의 수립자들이라는 표현은 이곳의 논의가 소크라테스와 아데이만토스가 힘을 합쳐 말로써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플라톤의 말년의 대화편 <법률>은 그러한 과정을 한층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법률>에서는 새로운 나라를 수립한다는 전체 구도 하에서 이곳 <국가>가 제시하고 있는 원칙적인 규범들뿐만 아니라 그 규범들에 걸 맞는 세부적인 법률들이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 나라의 수립자들이 신과 관련한 이야기로서 가장 먼저 제시하고 있는 규범 즉 수호자들이 간직해야할 첫째가는 종교적 믿음은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과 관련한 이야기’의 원어가 오늘날 ‘신학’의 의미로 쓰이는 θεολογία(theologia)라는 것을 고려하면 위의 규범은 이른바 플라톤 신학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이다. 여기서 이 규범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a)-b)-c)에 이어서 d)-e)를 거쳐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식화한 삼단논법syllogism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위의 추론 과정은 아래와 같이, ‘신은 선하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형태의 삼단논법들의 단계를 거쳐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들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결론을 추론해내고 있다.

우선 a)-b)-c)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1> 신은 선하다(대전제)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해롭지 않다(결론). <삼단논법 2> 선한 것은 해롭지 않다(대전제) 해롭지 않은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소전제) 그러므로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3> 선한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신은 선한 것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결론). <삼단논법 4> 신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대전제)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그리고 d)-e)로 이어지는 추론을 삼단논법들로 분해하면 다음과 같다. <삼단논법 4> 신은 선한 것이다(대전제) 선한 것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5> 신은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이다(대전제) 유익하고 잘함의 원인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결론). <삼단 논법 6> 신은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이다(대전제) 훌륭한 상태에 있는 것들의 원인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소전제) 그러므로 신은 나쁜 것들의 원인이 아니다(결론)

* 위 추론들의 결론 즉 ‘신은 선하다’,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전자 즉 ‘신은 선하다’ἀγαθὸς ὅ θεὸς라는 말은 그 말 하나만 따로 떼어서 보면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ἀγαθὸς(agathos)라는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도덕적 선morally good의 의미와 함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좋다good’, ‘유익하다’benefit, ‘능력 있다’capable, ‘훌륭하다’admirable 등의 의미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선하다’라는 말은 결코 낯선 표현도 틀린 표현도 아니다. 설사 신이 나쁜 일들을 했다하더라도 신은 그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과 관련한 규범으로서 처음 ‘신은 선하다’라고 말했을 때 아데이만토스가 ‘물론이죠!τί μήν;’라고 답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 즉 ‘신은 좋은 것의 원인이고 결코 나쁜 것의 원인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앞에서도 지적되었고 이후에도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듯이, 기존의 신화에 나타난 신들은 나쁜 일들을 수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당대의 신관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이 말에는 새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나라에서 수호자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가장 중요한 신조, 다시 말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할 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종교적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이곳에서 기존 신관의 근간을 부정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새로운 신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신화 관련 규범으로서 추가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 명제들을 플라톤 형이상학의 전모를 가장 깊이 있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그의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내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그 명제들이 갖는 의미는 가히 이곳 <국가>의 논의뿐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플라톤 세계관의 핵심과 바로 직결되어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곳에서 자세히 길게 논의하기는 우리 강해의 논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점만을 음미해보더라도 그 중대성은 지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선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기본적으로 신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되 그 내용들 모두 신화의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신화를 통해 플라톤이 드러내고 있는 핵심 요체가 다름 아닌 이곳에서 그가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의 선성”과 그 신을 닮은 “우주의 선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우주론적 설화가 그 자신 평생을 통해 구축하고자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신화가 다름 아니라 <국가>에서 다룬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것임이 <티마이오스> 서두에서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플라톤 철학 연구가들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와 그가 자신을 닮은 선한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바라본 본paradeigm을 <국가> 제6,7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선(좋음)의 이데아’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플라톤 철학에서 그것이 갖는 중대성만큼 그것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티마이오스>, 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 작품 안내 참고)

* 플라톤이 기존의 전통적 신화들은 물론 기원전 5세기 수많은 시인들이 지은 이야기들을 왜 그토록 비판하고 새로운 신관까지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그리스인들 특히 아테네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해온 신화적 세계관 즉 그리스 종교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기원전 5세기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강해수준에서 그것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크고 방대한 주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이곳 논의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는 신화를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하여 그리스 종교에서 가히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신화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아마도 신화의 내용들이 인간사와 관련된 시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리스 종교 역시 체계나 강령은 물론 성직자 같은 사람들도 따로 없었고 굳이 있었다면 다만 신전과 공물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에게 과연 종교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화에 나타난 신들을 그들이 과연 믿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과 관련한 것이었다는 점만을 고려하더라도 아테네인들에게 종교는 비록 오늘날의 기성 종교들이 갖는 양태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해 오면서 그들의 삶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신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종교로서 특성을 갖추었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신화의 내용들은 그들의 역사이자 태초 이래 그리스인이자 아테네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해 온 자명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래왔듯 모두 거리에서건 집에서건 신들의 탁월성과 불멸성을 칭송하며 신들에게 안녕과 행복을 빌었고,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신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해결책을 구했고 나라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신들을 끌어들였으며 재판관들 또한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신들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시인들은 인생사의 제반 일들을 신화를 끌어들이거나 변용해가면서 시로 노래하였고 예술가들 또한 신들을 모형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아름다움의 근거를 찾아냈다.

* 그렇다면 신화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생겨나고 확립된 것일까. 그리스신들 역시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원시시대 이래 그들이 맞이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 자연신들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것들은 인간들의 소망과 기원에 반응하는 신인동형설적인 존재로 점차 인식되었을 것이고 그것들에 이름이 붙여지고 내력과 성격이 구체화 되면서 불멸성과 탁월성을 가진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가이아와 하데스 등 제우스 이전 신들이 보여주는 다툼과 혼란상은 원시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혼돈의 시대를 투영한 것이고, 제우스의 등장 이후 태양신 제우스를 정점으로 나름의 고유한 역할을 갖고 위계를 형성하고 있는 12신들은 자연들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진 시대 이후에 생겨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해와 안정감이 투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이후 이런 경험들이 오랜 기간 반복되고 동시에 집단의 단위가 점차 커지고 사회화되면서 위와 같은 자연신들 이외에 네메시스, 모이라 등 인간의 사회적 삶과 의식을 반영하는 추상적 신들도 생겨나서 도덕과 규범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남하와 정착 과정에서 척박한 환경과 오랜 기간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부족의 정치적 결속과 단합을 담보하는 이른바 정신적 토대이자 믿음으로서 그리스 종교가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 종교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신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남하 과정에서는 물론 그 과정에서 유입된 이집트 종교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내면적 구원 의식과 같은 요소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 종교는 근본적으로 씨족이나 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 또는 자연적 재앙이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고통으로부터 집단의 공적 제의를 통해 평화와 승리,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 기본틀로 자리 잡고 있었고, 개인들과 개별 가문들의 평화와 안정 역시 그러한 공동체의 평안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태초 이래 신들과 관련한 제의 내지 의식의 형태로 발달해왔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종교가 기본적으로 점술과 예언, 신탁이 중심을 이루고 탄원과 기원에서조차 제의와 제물 봉공이 주축을 이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원적 배경 하에서 기원전 11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 정착하게 된 아테네인들 역시 매일 신들에게 제의를 행하면서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일로 받아들였고 정기적으로 큰 규모의 제의와 함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와 같은 내력이 수많은 설화로 구전되어 오다가 기원전 8세기 문자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시가의 형식으로 기록되면서 차츰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는 물론 시인들의 선조 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와 핀다로스의 작품까지 그들의 삶과 의식을 지도하고 이끄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져 아테네에서는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그것들을 의무적으로 암송하며 학습하는 것이 교육과 관련한 중요한 제도이자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 이처럼 신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종교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삶과 관습 및 행위들에 대한 규범으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면서 사회생활 전반은 물론 개인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아테네의 경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끊임없이 전란에 휩싸이고 게다가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아테네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결속도 서서히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크게 퍼져나가면서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관습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 들어와 외국과의 잦은 왕래가 이루어지고 거류외인은 물론 외래 사상도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아테네에서 생활종교로서 자리잡아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종교 이외에, 내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비주의 전통의 종교들도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른바 디오뉘소스 비의(秘儀) 종교는 그나마 전통적인 종교에서 변용된 신비주의 전통에 속하는 종교이지만, 디오뉘소스 신화의 변용으로서 자그레우스 신화에 뿌리를 둔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 종교 등은 비록 유치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원죄에 대한 관념은 물론 대립되는 두 본체 사이의 투쟁으로서 삶의 개념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구원의 약속 등 그동안 전통적 아테네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이 이른바 그들의 종교적 신조로 내세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에서 발원한 과학과 철학의 흐름이 아테네에 유입된 이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이 제기되면서 기존의 신화에 대한 회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크세노파네스Xenophanēs(기원전 570-480)가 일찍이 기존의 신들을 냉소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신화에 대한 창조적 변용을 통해 신들을 찬미하던 시인들마저 아테네의 번영과 그 과정에서 급속히 유입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경향을 등에 업고, 신들과 영웅들에 대한 찬미보다는 인간사의 고민과 갈등 들을 작품의 주제로 내세우기 시작하였고, 하물며 신과 영웅들에 대한 냉소와 회의의 눈길도 과감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작품 속에는 전통 신화보다도 더 심각한 수준으로 신들과 영웅들 간의 싸움이 그려져 있음은 물론 인간사와 관련한 그들 사이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도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아테네 사회에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는 더욱 크게 고취되었다. 당대 아테네에서는 종교적 제의를 거부하거나 임의로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금지되었지만, 기원전 5세기 말 시인들의 신들에 대한 변용이 가히 신성모독에 가까울 정도로 변질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통제는 기이할 정도로 방임되고 있었다. 정치적 통제력이 쇠락해졌기도 하였지만 아테네 지성을 대표하는 막강한 기득권자로서 오랜 기간 공고해질 대로 공고해진 시인들의 지위는 가히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권은 소피스트들의 입장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고 발달되면서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멸망을 앞당기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역사를 통해 수준 높은 문학작품의 저자들이자 자유로운 표현의 자유와 창조적 기풍을 세운 선구자로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 플라톤은 이러한 아테네의 종교적 상황을 목도하면서 오랜 역사 동안 아테네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쳐온 신들에 대한 의식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플라톤은 그 재편을 위해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당대의 종교적 정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전통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아테네에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이 유입되어 있었고 당대의 정황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그림자가 아테네에 너무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히 아테네는 이른바 곪을 대로 곪은 염증상태의 나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이제 플라톤은 그리스의 기존 종교를 한편으로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이 과정 모두를 살피는 것은 우리의 논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것이지만 그 과정을 아주 거칠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요컨대 플라톤은 <법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제의의 형식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다신론적 전통종교를 계승하면서도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국가>가 암시하고 있듯이 철학사적 전통에서 확립된 엘레아적 일원론과 다원론적 세계관과의 조화를 도모하면서 동시에 신비종교를 통해 유입된 영혼불멸에 대한 의식을 토대로 인간의 안녕과 행복 국가 사회의 정의와 번영에 대한 기본 관념을 혁신적으로 바꾸려고 하였던 것이다.

 

 

[379d-380c]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거에 의거하여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들이 생각 없ἀνοήτως이 신을 나쁜 것들의 원인들로 언급한 것들이 잘못임ἁμαρτάνοντος을 분명히 한 후, 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해가며 하나하나 비판한다.(379d-380a)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들은 어린 사람νέος들이 듣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이 이것들을 신이 한 일로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고 설령 그게 신이 한 일ἔργα일지라도 그것을 위한 서술로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 σχεδὸν ὃν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380a) 즉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δίκαιά τε καὶ ἀγαθὰ을 했으며 그들은 응징을 당함으로써 이롭게 된 것οἱ ὠνίναντο κολαζόμενοι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어떤 시인이 벌δίκη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며ἄθλιοι 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되고 그와 달리 만일 어떤 시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고 그 때문에 비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처벌을 받음으로써 신한테서 은혜를 입은 것’διδόντες δίκην ὠφελοῦντο ὑπὸ τοῦ θεοῦ이라고 말 할 경우에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신은 선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쁜 일들의 원인으로 된다는 주장은 모든 방법으로 맞서 분전해야 하며διαμαχετέον 나라가 훌륭하게 다스려지려면 제 나라에서는 ἐν τῇ αὑτοῦ πόλει 나이에 상관없이 운문, 산문 여부에 상관없이 아무도 그런 것을 말하거나 듣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380b) 그런 이야기는 경건하지도ὅσιος 유익하지도σύμφορος 않으며 그 자체로도 모순된οὔτε σύμφωνα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 법νόμος에 대해 찬성한다σύμψηφος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이제 ‘신이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니라 선한 것들의 원인임μὴ πάντων αἴτιον τὸν θεὸν ἀλλὰ τῶν ἀγαθῶν을 시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신들과 관련한 법률νόμος과 규범τύπος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제시한다.(3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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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뿐만이 아니라 <국가>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신화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있다.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그러한 인용이 논의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국가>의 논의가 우선 당대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고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시가가 그들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지배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플라톤이 그토록 때마다 신화를 인용하면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우리 강해에서는 앞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는 물론 앞으로도 신화들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신화와 <국가> 논의의 내용적 연관성은 우리말 역본에 실린 주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앞에서도 신화가 포함하고 있는 ‘숨은 뜻’에 관해 설명한 바가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행한 나쁜 짓들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해도 일단 어린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신들의 나쁜 행위를 숨기는 것은 사실의 은폐 차원이 아니라 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말 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선한 뜻을 숨기고 있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숨기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은 그 숨은 뜻을 찾아내서 그 선함을 밝혀야 한다. 그냥 밝히지도 않고 숨은 뜻이 있다고만 말하면 자칫 신들의 나쁜 행위를 모두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논의는 비록 숨은 뜻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용적으로는 숨은 뜻과 관련한 논의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시인들이 신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고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경우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즉 ‘신들이 선하다는 것’을 찾아내어 실제로는 신이 올바르고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하며, 시인들의 이야기들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함께 밝히고 있는 이야기들만 허용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이를테면 신들이 누군가를 응징했을 경우 그 벌을 받은 자들이 비참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한 것이 신들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들은 나쁜 일들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경우 경건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도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들이 주는 벌은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마땅히 응징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벌을 받은 것이되 그렇게 처벌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이다.

* 사람에 대한 신들의 응징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플라톤의 언급은 어떤 경우에서든 신들은 선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률 차원에서건 종교 차원에서건 형벌 내지 징벌과 관련한 플라톤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즉 플라톤에게 벌이란 응징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는 자를 이롭게 하는 것 즉 교정(矯正)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벌을 처단과 응징의 성격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가르침의 일환으로 보는 플라톤의 생각에는 사람들의 내적 변화에 대한 플라톤의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벌을 받는 사람에게 벌은 고통스럽고 일단 강제의 형식을 갖고 부여되지만 교육을 통해 그 사람 스스로 벌의 이유가 교정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스스로 잘못을 교정할 수 있으므로 나라의 지도자나 철학자는 잘못을 저지르는 구성원들이나 상대에게 늘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아데이만토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규범을 법nomos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자기도 그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은 선하다’라는 말이 단순히 당위적 규범이 아니라 말로 세우는 정의로운 나라가 제도적 관습으로 채택해야할 최고의 입법 원리 즉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헌법적 규정 내지 헌법 정신임을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그것을 법률과 규범으로 다시 표현하면서 첫째 규범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제 수호자들이 종교적 신조 차원에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둘째 규범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