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내가 읽는 『자본론』]

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나는 지금, 집 근처 24시 카페에 앉아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커피를 타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홀을 치우는 저 알바생분은 아마 새벽 파트타임 알바인지 매일 밤 내게 커피를 건넨다. 너무도 분주한 그가 안쓰러워질 때쯤 문득 이 곳에 일하는 알바생들은 과연 근로의 대가로 얼마를 지급받는지 알고 싶어졌다. 곧장 ‘알바천◯’에 접속해 확인한 결과, 이 곳에서 근무하는 알바생들이 1시간에 받는 급여는 놀랍게도 법정 최저시급인 8,590원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필자도 알바를 꾸준히 해왔다. 학교 앞 고깃집, 오목교역 앞 디저트 카페,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 근무했었던 경희대 정문의 어느 회덮밥 집까지,., 알바 근무가 얼마나 고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알바생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나 열정적으로 걸레질을 하는 데도 최저시급을 받는다니,,, 그렇다면 저 열정적인 노동의 대가를 과연 얼마로 책정해야 합리적이고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 있을까? 시급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커피 한 잔에도 정성을 쏟는 저 알바생분의 노력과 열의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정당한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취급 받는다. 뭐 이 지점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값어치이다. 21세기 현재, 세계 주요 국가들은 고용주가 노동력을 구매할 때 노동자에게 지불해야할 시급의 최저 기준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며, 이후의 가격 책정 및 가격의 변동과 흥정은 자본주의 하의 여타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즉 주류경제학의 기본적 메커니즘으로서 ‘효용가치설’을 기반으로, 수요-공급의 원리에 충실한 법칙성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면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하고, 반대로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줄어들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승한다. 현실 속 노동력의 값어치 책정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법칙도, 가치 척도도 없으며,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화폐화 된 노동력의 값어치가 변화할 뿐이다. 내가 노동하는 강도와 양, 방식과 메커니즘은 그대로인데, 저 알바생분이 제공하는 커피의 질도, 양도, 맛도 그대로인데, 외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시급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가 판매하고, 또 직접 행함으로써 판매가 완료되는 우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가, 별개의 외부상황에 의해 그 가격과 가치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미심쩍은 현실에, 나는 적지 않은 의문을 품는다. 우리가 알바 근무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해결해야할 몇 가지 핵심적인 의문이 있음은 명백하다. 나아가 오늘의 논의를 빌어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 같은 알바생들이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첫째로, 경제적인 ‘가치’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어서 ‘가격’과 ‘가치’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급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다뤄져야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늘 그래왔듯,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을 꺼내어 이 의문들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본다면, 놀랍게도 늘 그랬듯 힌트가 될 만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저서 『자본』Ⅰ-상 제1편 제1장에서 우리의 의문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제1편 제1장 ‘상품’에서 가치의 형성과정과 상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또 제2장 ‘교환과정’과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에서는 앞선 논의에서 형성된 가치가 화폐형태로 거래되는 과정과 상품의 교환과정 및 화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다룬다. 먼저 제1장에서 그들이 심도 있게 고찰하는 가치 및 화폐 형성의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우리의 첫 번째 의문 속 ‘경제적 가치’의 형성과정에 대해 자세히 탐구해보고자 한다. 사실 그들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기에는 문체가 너무나도 난해하고 그 내용 역시 현학적이기에, 필자가 읽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표현 방식 속의 근본 원리와 핵심적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읽고 이해함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가치’의 형성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고찰하려면, 우리는 응당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 가 봐야한다. 물물 교환이 성행하던 원시 사회에서 상품이나 시장, 가치와 같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람들은 우연적 만남을 통해 물물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건의 교환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는 우연의 형태로 단순한 개별적 형태이며, ‘경제적 가치’의 [제1형태]라로 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교환하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물건에 의해 표현되고, 이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거래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교환을 이어갔기에 물건의 정확한 가치를 책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서로 간의 교환을 승인 할 때의 척도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인데, 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에 들인 노력과 정성을 어림잡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에 비교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가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물물교환 할 때도, 내가 공을 많이 들인 소중한 물건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저주운 물건과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상식이다.

거래가 조금 더 활발해지면 앞선 단계를 넘어선 두 번째 가치형태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제1형태]에서는 상대방의 물건으로만 내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수동적인 과정이 반복 되어 특정한 이들이 특정한 물건을 지속적으로 교환과정에 내놓는다면, 물물교환 장에 나온 모든 이들은 그 특정한 물건을 통해 자신들의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게 된다. 이를테면 매번 손수 만든 아메리카노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 이가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과 교환 될 수 있는 아메리카노 커피의 양을 고려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특정한 물건은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이 상황을 [제2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물물교환 단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교환의 장이 형성되고, 교환과정과 가치의 형태가 조금 더 발달하면, 앞선 등가물이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게 된다. 즉, 앞서 우연적이며 상이한 개별적 교환 사건들의 종합으로, 사람들이 물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던 등가물이 그 기능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산과정 전반에서부터 비단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물건을 생산하며, 비단의 양으로 자기 물건의 가치를 예측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불어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물건을 비단과의 교환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상황이 비단(일반적 예시) 생산의 활성화와 맞물려 시간적, 공간적으로 크게 증대된다면 비단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등가물로 기능을 하게 된다. 비단이 노력/정성의 양, 그리고 ‘가치’를 어림잡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제작한 이후 비단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비단을 얻는 상황을 먼저 고려하며 자신의 물건을 만들게 된다. 가치의 이러한 형태가 [제3형태]이고, 비단이 금과 같은 본격적인 화폐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부터 [제4형태] : ‘화폐 형태’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치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이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상품’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상품’의 개념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비단(일반적 예시)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만들어 이를 실제로 비단(혹은 화폐)과 교환하는 상황은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거래 과정을 통해 이를 실제로 교환하게 되면, 그 물건은 비로소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상품은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유용성이 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필자의 위 서술은 한 가지 비밀을 더 암시하고 있다. 바로 상품에 내재된 가치가 두 종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카페 의자가 매우 불편하다고 느끼던 찰나이기에, 이 의자를 예시로 삼아 보겠다.—  의자도 분명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도 질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가치를 내포한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사용가치’다. 이는 의자의 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앞서 말한 상품의 사회적 유용성에 기인한 ‘쓸모’이며, 각 물건에 따라 기능적 특수성을 띤다. 의자는 사람이 앉아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드러낸다. 두 번째로, 의자는 ‘가치일반’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혹은 ‘가치일반’이란 의자의 교환(거래)이 가능케 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비록 조금 불편하지만, 이 의자 역시도 분명히 상품으로서 거래와 교환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척도로?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준으로 이 의자는 교환될 수 있었을까?

‘경제적 가치’의 형성 과정은 바로 그 척도로서의 ‘가치일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과정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 물물교환 시절부터 화폐형태의 등장까지, 교환의 장에 나온 이들이 항상 고려했던 것은 물건 제작에 투여한 노력과 정성이었다. 즉 의자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척도이자 기준으로서의 ‘가치일반’은 노력과 정성, 다시 말해 의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인 것이다. 이 의자를 판매한 이가 의자를 만드는데 투여한 노력에 걸맞은 가치를 돌려받기 희망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상식이고 자명한 것이다. 요컨대, 상품 속에는 두 가지 형태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교환과 거래를 가능케 하는 ‘가치일반’은 상품에 투여된 노력,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겠다. 사실 이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핵심적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자본』은 가치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책을 펼쳐들며 ‘노동일반이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 위에 약간의 첨언을 얹어보자면, 상품에 이질적인 두 개의 가치가 내재되어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동 역시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가지게 된다. 의자만의 특수한 기능, 즉 사용가치(유용성)를 만드는 특수한 실제적 노동과, 교환의 척도가 되는 가치일반을 창조하는 노동일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노동 역시 두 측면으로 분화되며, 노동일반과 그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일반은 추상적 / 관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반면 앞서 말했듯, 특수한 실제 노동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용가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또 실질적인 유용성의 형태를 띠게 되는 셈이다.

‘경제적 가치’란 노동에서 나온다는 역사적 고찰과 함께 첫 번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렇다면 화폐의 양으로서의 가격과 가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곤 한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 맞을까? ‘이디◯ 커피’의 아메리카노가 지닌 가치는 3,200원의 가격으로 온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까? 앞서 언급한 [제3형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물 자체가 ‘일반적 등가물’로 변하며 모든 상품들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즉 앞선 예시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또는 비단)는 일반적 등가물이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직접적·사회적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노 커피(일반적 등가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이 이와 같은 성격을 얻지 못하기에 이뤄진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에서만 형성 가능하다.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의 이 아메리카노 커피의 역할은 모든 상품들이 차지할 수 있다.

사회적 타당성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일반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역사적으로는 ‘금’이 차지해왔다. 나아가 ‘금’처럼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독점적인 등가형태가 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화폐 상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금이 화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금은 자신에게 체현된 노동일반의 양을 척도 삼아 다른 모든 상품들을 견줄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역할을 도맡아 왔다. 위의 언급에서 가치의 [제4형태]는 바로 ‘화폐형태’였다. 이는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는 구체적 상품으로 정해졌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일반적 등가형태가 최종적으로 상품으로서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를 통해 화폐형태로 전환된 것이 [제4형태]이다. 화폐의 기능을 하는 금에 의해 표현되는 단순한 형태가 바로 ‘가격형태’이며, 길고 긴 역사적 과정 속에, 드디어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가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메리카노 커피에 붙은 3,200원이라는 가격표를 이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금이 아니며, 금과는 질적으로 매우 상이해졌다. ‘금’은 화폐로 기능을 시작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투여된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통해 가치의 척도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은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대변하지 않으며, 노동일반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가치(사회적 노동일반)를 직접 담아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화폐는 자신이 직접 가치(투여된 노동일반의 양)를 지님으로써 가치의 척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가치를 대변할 뿐이며, 가치의 관념적 도량형의 역할만을 도맡게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천 속에 사람들은 화폐(혹은 금)가 본래 어떤 가치(가치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는 신비한 성질)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분명한건 오늘 내가 건넨 3,200원과 3,200이라는 수적 표현은 실제로 어떤 실질적 가치일반(노동일반)의 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관념화된 척도로서 ‘3,200원’이라는 가치의 관념적 양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의 대가로 지불한 3,200원은 실제 ‘경제적 가치(=노동일반의 응고량)’의 양이 아니라 관념적 ‘가격 형태’이며, 가치와 가격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가격 형태’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가치일반의 양과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음에 기인했지만, 이제 우리는 화폐와 그 가격형태를 그저 관념적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즉 가격이 상품에 투여된 가치(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대변해준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 속 상품의 가격 형태는 수요 공급의 주류경제학 논리에 따라 수시로 변모한다. 똑같은 가치를 담은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일 새벽에는 갑자기 달라진 ‘가격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의문, 즉 ‘경제적 가치’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은 ‘노동일반’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했고, 나아가 이는 ‘가치’와 ‘가격 형태’의 근본적인 의미 차이와 맥락의 구분을 암시한다. 우리가 두 번째로 묻고자 했던 ‘가치’와 ‘가격’의 관계 역시도 어느 정도 해명이 된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의 시급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우리의 시급은 어떻게 판단해야할까? 논의의 서두에서 얘기했듯,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여타의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용한다. 알바 시급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명료히 하려면 시급의 대가로 우리가 사장님들에게 판매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더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면, 앞서 말했듯, 다른 상품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속에 내재된 가치를 평가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상품의 경제적 가치를 무엇으로 해명했는가? 바로 ‘인간노동일반’이다. 즉 아메리카노 커피에 투여된 인간의 추상적 노동일반의 양이 그 가치를 표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가치를 측정해야한다. 다소 난해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의 논리와 그 정합성에 의거했을 때. 상품 ‘노동력’의 가치는 그 생산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필자도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낯설고 해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해보자. 오목교역 24시 이디◯ 커피의 알바생분이 사장님에게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는 알바생이 상품 ‘노동력’을 위해 준비한 모든 노동 및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알바생은 오늘의 근로를 위해 잠을 잤을 것이고, 기본적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노동을 이어왔을 것이다. 밥이나 배달음식을 먹고, 샤워를 하거나, 보다 말끔한 모습을 위해 이발도 하며 머리 손질에 공을 들였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시간이 이디◯ 커피 사장님이 구매한 알바생의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알바생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를 위해 그 생산과정에서 준비한 모든 노동과 그 시간만큼의 노력의 합은 그의 상품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유 방식이지만, 눈을 감고 조금만 고민해보면, 우리의 마지막 의문을 명쾌히 해결해줄뿐더러, 노동력과 시급의 관계 전반에 대한 탁월한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그 해답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이 지닌 특수한 성질에 대한 인지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인간의 본성적, 본질적 행위일뿐더러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 과정에서 더욱 특별한 성질을 드러낸다. 이디◯ 커피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한 상품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급여로 지급받고, 실제로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력’의 판매를 이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거래가 되는 한편, 구매자의 상품 사용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게 된다.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고,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의 (구매자를 위한) 실제 노동 이행을 통해서 상품 교환의 거래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이디◯ 커피 새벽 알바생분(‘노동력’의 판매자)은 걸레로 테이블을 닦는 등 노동을 이행함으로써 시급의 대가를 지불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사장님에게 만들어 제공하는 셈이다. 시급의 양은 알바생분이 판매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와 같은 크기, 같은 양일 것이다. 하지만 저 분(알바생)은 자신이 지불받은 시급, 즉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 =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준비한 알바생분의 노동시간 = 시급이 제공해야하는 가치의 양]인 상황에서,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의 대가로 돌려받은 가치의 양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봐도, 우리가 알바를 할 때, 그 날 알바 근무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생산)한 시간만큼만 당일 근로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일함으로써 그 판매를 완료하기 위해 우리가 전날 종일 준비했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구매자의 사용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논의이나 간단히 말하면, 커피숍의 알바생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위해 이전에 투여한 노동시간보다 단 1시간이라도 더 많은 양의 노동을 근로 과정에서 행하는 순간 잉여가치의 형성과 이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점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먼저, 화폐 형태(가격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알바 시급이 수십만 알바생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 상황 속에서는 어떠한 알바생도, 아니 어떠한 노동자도, 사장님에게 제공하기 위해 준비한 상품 ‘노동력’ 속에 녹아있는 (준비과정/생산과정 속)노동시간 만큼만 근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일하기 위해 준비한 시간보다 더 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가치’가 ‘노동일반’에서 창조되는 한, 자본주의적 분업-생산체계는 알바생들과 노동자들이 만드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착취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기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개의 아메리카노 커피를 탄생시킨 저 장인은, 만약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시급을 돌려받았다고 해도, 그 가치의 배에 달하는 양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출처 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86348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어렵고 난해했던 논의와 우리의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복잡한 고찰을 이쯤에서 줄이고, 다시 새벽녘의 이디◯ 커피에 앉아보자. 사실 어느 가게든 요즘의 알바 시급은 최저시급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초반에 알아본 것처럼 저 알바생분들 역시 2020년 기준 법정 최저시급은 8,590원선에서 자신의 1시간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을 것이다. 근 몇 년간 법정 최저시급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전 논의에 따르면, 이는 정말 납득이 어려운 상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우선 몇 년째 꾸준히 이 카페를 방문하는 입장에서, 작년 말에도 저 알바생분은 근무를 했고, 오늘 밤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내게 제공했으며, 지금 현재도 예년과 비슷한 양의 노동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알바생분은 2019년에는 8,35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했고, 올해 들어 지금은 8,59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최저시급이 오름과 동시에 저분이 ‘노동력’ 판매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을 쏟아 붓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면 모든 노동자들은 최저 시급의 인상과 동시에 ‘노동력’ 생산에 더 많은 노동을 투여하는가? 둘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 분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가치를 지닌 ‘노동력’을 생산함에도, 이 대가로 시급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권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 의사결정이며, 실제로 ‘가치’가 거래되는 양상과는 무관하다. 대체 어떤 가격표가 알바생들의 ‘노동력’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인가? 8,350원? 8,590원? 아니면 9,000원? 알바생분의 1시간 ‘노동력’ 가치의 ‘가격 형태’는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책정되는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권리로,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노동력’의 값어치와 그 기준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의문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 알바생들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그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더불어 ‘가치’의 거래 현장과는 무관한 상품 ‘노동력’의 법적 ‘가격 형태’ 책정에 대해 정치권으로부터 어떠한 해명도 듣지 못했다. 설령 시급의 ‘가격 형태’가 알바생 및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지닌 가치와 정확히 동일한 값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추가로 생산하게 되는 잉여의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자본의 착취 역시 필연적인 수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가치’의 정확한 표현 방법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지도 못했고, 정치권과 제도권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들을 조정할 권한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대학생 신분인 알바생들이 이토록 커다란 ‘가치’의 문제와 ‘착취’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알바생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착취는 왜 발생하는지, 또 우리의 시급은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진지한 문제인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의 알바생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화폐와 가치에 관한 사회적 환상에 휩쓸리지 않고, 8,590원 속에 숨어있는 착취의 알고리즘을 포착해야한다. 어떠한 구체적 방식으로 ‘가치’의 참된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지 줄기차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우린 이미 ‘경제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고, 우리 내의 시급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호도되는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해내야할 과제들 역시도 분명해졌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이 지니는 구조적 착취의 모순을 이해하고 분노해야할 것이다. 그 모든 저항과 문제제기의 시발점은 파란 모자의 이디◯ 커피 알바생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시급 8,590원에 있다. 당신의 시급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시급은 안녕한가?

열여섯 번째 시간, 경지 [시가 필요한 시간]

열여섯 번째 시간, 경지

 

마리횬

 

최근에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되는데요, 여름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더위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부쩍 나무 그늘이 많아진 것을 혹시 보셨나요? 자주 산책하는 공원을 거닐 때 3-4월, 아니 5월까지만 해도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걸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에 가보니 그 사이에 나무가 무성해져서, 어느 새 산책로에 나무그늘이 만들어졌더라구요. 푸르러진 나무들이 서로 맞닿아서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을 보면서, 새삼 ‘아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어쩜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 서서 무수한 겨울과 여름을 보내며 소리도 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내는지. 그 나무들을 보면서 떠오른 시가 있어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입니다.

 

 

나무의 경지

                                         정병근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 들어 봤습니다. ‘경지’라는 말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단어인데요, 사실 ‘경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어요. 똑같은 한자[境地]를 쓰면서도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첫 번째로는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경계’가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경지’가 되는 거죠. 두 번째로는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과 체계를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완전 다른 뜻인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 뜻에서 의미가 이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특성과 체계가 있는 독자적인 경계(범주)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세 번째 뜻은 뭘까요? 세 번째 뜻은 아마도 여러분이 이 단어를 듣고 가장 많이 생각하셨을 법한 뜻으로, ‘몸이나 마음, 기술 따위가 어떤 단계에 도달해 있는 상태’ 라는 뜻입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할 때의 그 ‘경지’죠.

 

출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c343e140fd0d4d089f309c6455e159ec 네이버사전

 

그런데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가 흘러가는 흐름과 이 ‘경지’라는 말의 세 가지 뜻이 신기하게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과 방금 설명 드린 ‘경지’의 세 가지 뜻을 잘 기억해두시면서 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이 시가 이렇게 시작하죠.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라고요. 이 첫 부분이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경지’의 첫 번째 뜻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어서,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일정 경계 안의 땅’에만 머물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죠.

두 번째 연에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라고 이어지는데요, 그런데 그 콤플렉스가 그저 콤플렉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어서 시인은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콤플렉스가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자, 독자적인 그만의 영역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경지’의 두 번째 뜻,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을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과 이어지죠.

일정 경계 안에 스스로를 세워 놓고 있는 나무를 ‘한계’와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이기적인’ 존재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범주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무가 또 다른 경지에 이르면서 시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정 경계 안에 있었던 나무의 경지, 그리고 특정한 독자적인 범주를 만든 나무의 경지, 그리고 이제는 다가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나무의 경지. 이렇게 세 가지의 나무의 경지를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는 형식적으로도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요, 어쩌면 시인이 시의 제목을 ‘나무의 경지’라고 하면서 이 세 가지 뜻의 경지를 모두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된 시는 마지막에 두 줄로 이렇게 끝납니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혼자만의 삶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보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삶을 산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매력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아름다움이 된다니… 이 시가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고, 가령, 춥다고 따뜻한 곳으로 가거나 덥다고 시원한 곳으로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서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이 시의 표현처럼 어쩌면 “까마득한 세월”이 걸릴 수도 있겠죠. 잠시 마음먹기는 쉬워도, 사실 그 마음가짐을 계속 고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욕심,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나를 PR해야지만 살아남을 것처럼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잊힐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에게 먼저 다가가고, 다른 누군가의 취향에 맞추려고 나 자신을 바꿀 때도 있지 않은가요? 여론이 기우는 쪽으로 내 생각을 바꿔버리기도 참 쉽죠. 대세에 따르는 게 정답인 양,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한 심리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이, 어쩌면 요즘 같은 시대에 뒤쳐지고 잊혀지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지만, 내 자리를 올바르게 지키고, 그 자리에서 내 생각(가치관)을 가지고 뿌리 내리고 이파리를 키워 놓는다면, 마침내 많은 지친 생명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르는 것이 진짜 ‘경지’이겠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내 생각도 없이, 그저 유행만 좇다가 올라간 자리는 결코 ‘경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거품’일겁니다. 쉬우면 너도나도 다 경지에 오르겠죠.

여러분 각자가 겪어내고 공부하고 있는 자신만의 분야가 있을 테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뜻으로의 ‘경지’가 각자 하나씩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곡으로, 클래식 연주곡을 가져왔습니다. 영화 OST인데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삶과 말년을 다룬 영화 <The Last Station(2009)>에 삽입된 같은 제목의 연주곡입니다. 톨스토이야 말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비판 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귀족으로 태어났음에도 농민의 계몽과 교육을 주장했고, 농민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귀족들의 부의 축적을 비판하는 문학활동을 하는 등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톨스토이 자체도 그리고 그의 작품들도 모두 이 시에서 말하는 경지에 이른 것들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지금도 다시 찾고 있고, 그것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받는 거겠죠. 이 영화의 ost도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곡인데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도 시원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Sergey Evtushenko – The Last Stationhttps://youtu.be/scUVwhUvyJw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자본론 에세이3, 「2장: 교환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임금격차는 왜 존재할까? 나는 고등학생 때 이것이 늘 궁금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대기업 회장이 동네 미용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언제나 CEO, 의사 또는 교수가 미용사보다 많았다. 하지만 대기업 회장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하기에 우리 동네 미용사 언니보다 몇백억 배의 연봉을 받고 대학교수는 왜 비정규직 강사보다 아홉 배가량 더 많은 돈을 버는 걸까?

나는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 1년에 두 번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펴줘야 하는데,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는 것은, 비가 올 때 「해리 포터」 속 ‘해그리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빗기지도 않고, 제멋대로 엉켜서 머리카락이 자주 빠지기도 한다. 머리를 펴는 비용은 미용실에 따라 제각각이다. 머리 길이에 따라 10만 원 안팎이다. 반곱슬이 아닌 사람들은 이 가격을 두고 겨우 미용실 가는데 10만 원이나 쓰냐며 깜짝 놀란다. 그러면 나는 새로 한 머리 때문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죄인이 된 것처럼 조금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지난달 다시 한번 미용실을 찾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미용실이 나의 사치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들으면 ‘겨우’ 미용실에 큰돈을 썼다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1. 해그리드. 출처: https://thewiki.kr/w/%EB%A3%A8%EB%B9%84%EC%9A%B0%EC%8A%A4%20%ED%95%B4%EA%B 7%B8%EB%A6%AC%EB%93%9C

 

먼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머리를 펴는 작업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작업인지, 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2) 약품을 발라 모발을 연화(軟化)하는 작업을 한다.

3) 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4) 매직기로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씩 붙잡고 쫙 펴준다.

(이 단계가 제일 오래 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단계이다. 머리카락이나 두피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곱슬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펴줘야 하기 때문이다.)

5) 머리가 펴진 상태가 고정될 수 있도록 과산화수소수를 머리에 발라 중화한다.

6) 또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인터넷에서는 15단계로 설명하고 있지만1, 여기서는 분량상 생략한다. 총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과정이다. 세 시간 동안 미용사가 내 머리를 펴는 손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바로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용사의 손이 가위질, 빗질, 다림질에 분주하게 움직였고 내 머리카락은 그런 미용사의 손안에서 계속 변화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모든 곳에서 타인의 노동을 경험하고 또 직접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생한 노동으로 와닿은 것은 어쩐 일에서인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간단발인 나는 7만 9천 원을 지불했다.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 가치만큼의 살아있는 노동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삼아 타인에게 판매함으로써 먹고살게 되었다. 이렇게 노동자는 상품소유자가 되고, 고용주는 노동의 구매자가 되었다.

문제는 이거다: 어떤 인간의 노동이 다른 인간의 노동보다 몇억 배의 가치를 가지는 게 합리적일까? 같은 종류의 노동이면 이를 판단하는 게 조금은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곰돌이 눈에 단추를 끼우는 일에서 하루에 100개의 단추를 끼운 사람이 70개만 끼운 사람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철도 노동자의 임금과 대기업 회장의 임금 격차는 합리적인가?

자본론 제2장의 핵심은 화폐(어떤 상품의 가격)가 두 상품 사이를 이어줄 뿐, 상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폐는 두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 복잡한 관계 도식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노동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의 노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판매되어 화폐가 수중에 들어와야 비로소 우리의 노동은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컨대 누군가가 신발공장에서 노동한다면, 그것은 신발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신발을 만들어 번 돈으로 쌀을 사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목적은 노동의 산물인 신발을 다른 상품인 쌀과 교환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쌀을 파는 사람에게는 신발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화폐가 등장하게 되었다. 화폐는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를 통일된 단위로 치환시킨다. 쌀을 파는 사람이 내가 만든 신발을 원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에게 내 신발을 판 화폐로 쌀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화폐는 우리의 생활을 아주 편리하게 해준 셈인데, 애초에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가 단순화되면서 그 사이에는 물신이 끼어들 자리도 생겨버렸다.

그림 2. 1923년, 지폐에 풀을 발라 벽지로 이용하는 남성. 출처: http://historicphotographs.blogspot.com/2013/04/using-banknotes-as-wallpaper-during.html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감자 하나의 가격은 500억 마르크, 빵은 한 조각에 800억 마르크였다고 한다. 당시 벽지 가격도 너무 올라서 사람들이 벽지 대신 지폐를 벽에 발라야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가격이다. 이전에는 감자 하나에 1마르크(현재 약 0.5유로에 해당하는 가격)도 안 했을 텐데 무려 500억 마르크라니.

이렇게 특정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이 놓인 경제 관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화폐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화폐 형태로 임금을 받는 살아있는 노동도 그래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과평가되는 일이 발생한다. 임금에는 살아있는 노동의 가치만이 아닌 각종 사회적 믿음과 제도들에 대한 환상들도 은근슬쩍 개입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그리고 이들 임금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노동의 차이는 아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가치가 낮은 노동을 하거나, 더 빈약한 비중의 살아있는 노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면서 비정규직 안에 포함된 노동이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체 가능성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은 더 낮은 가치의 노동으로 취급되어 임금을 최소한으로 받는 것이 정당화된다. 사회에서 사람들 간 경쟁을 존속시키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같은 종류의 노동을 하는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임금 격차가 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샤넬 가방이 홍대 수제 가방 장인이 만든 가방과 다른 점은 브랜드의 여부뿐이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 이미 우리는 그러한 명품이 환상임을 다뤘다. 사회가 특정 개인에게 주는 타이틀,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치 엄청난 가치가 그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과 같은 느낌도 역시 모두 환상이다.

갑질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최근에 있었던 경비원 폭행 사건이나 조금 더 오래된 ‘땅콩회항’ 사건을 통해, 사회가 붙여준 타이틀(지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착각을 심어주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갑과 을은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과 을은 지위와 임금의 차이로 결정된다. 왕권 시대에 왕들은 신의 은총을 받아 고귀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박박 우길 수라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갑’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들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은총도 받지 않았고 마법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갑에게 있는 거라곤 ‘갑’이라는 이름뿐이다. 앞서 자주 이야기했듯, 다양한 직업으로 나타나는 갑이라는 타이틀은 살아있는 노동 위에 씌워진 거품일 뿐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줄일 수 있겠다. ‘갑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갑의 노동이 아닌 사회시스템이다.’

백번 양보해서 갑이 을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갑이 을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근거나, 몇억 배나 더 되는 임금을 받을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갑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고, 을을 부리길 좋아한다.

나는 모든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노동이 우리 삶의 큰 부분이며 우리가 타인의 노동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임금노동이 공동체를 개개인으로 쪼개놓고 경쟁하도록 부추기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붙들어주는 것이 나와 타인의 노동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노동이 다른 이의 노동보다 훨씬 더 특별하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갑과 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 역시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도리어 생존을 위협하는 사회상에 비통해했기에, 마르크스는 물신의 허울을 걷어내어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노동이 진정 보답받기를 꿈꿨을 것이다.

자본론을 읽고 화폐가 주는 가치가 환상임을 깨달아도 우리는 수많은 ‘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도 신은 우상의 숭배를 끊임없이 경고하고 백성에게 고난을 주어야만 했다) 임금 격차가 노동의 가치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임금 격차는 항상 있을 것이고 갑의 횡포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지(知)와 행(行)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지난여름 독일에 사는 친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기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언니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독일에서 변호사 플랫폼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의 양도 엄청나게 많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50%가 다 세금으로 나간다는 얘기도 함께 알려줬다. 처음에 눈이 동그래져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빠와 나의 표정이 ‘50% 세금 대목’에서 조금 김이 새는 것처럼 보였는지, 친구는 세금으로 절반이 빠져나가도 열심히 일한 만큼의 돈은 남아서 괜찮다고, 우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살아있는 노동’이란 단어를 이 글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노동이 본질로서 임금에 반영되고 나머지 물신은 벗겨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답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난 5월에는 또 다른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는 우리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어 감옥에 수감 되었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가능했던 이유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얽힐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박근혜를 대신할 보수는 많다) 사회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촛불혁명이란 단어가 왠지 늘 불편했지만,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던 탓에 친구의 말을 듣고 속이 시원했다. 그렇다. 진정한 혁명이란 반드시 본질에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법이다. 수개월 동안 많은 시민이 광화문 거리로 나온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주거의 불평등, 갑질 등 수많은 사회문제는 결국 다 임금 격차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임금 격차가 완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촛불혁명이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1. https://kjsi0203.wordpress.com/2008/07/24/%EB%B3%BC%EB%A5%A8%EB%A7%A4%EC%A7%81-%EC%9D%B4%EB%A1%A0/

한철연 2020년 5월 월례발표회 “슈티르너의 역사철학 – 인간의 삶과 인류 역사의 미래”(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5월 월례발표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이번 2020년 5월 발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응으로 온라인 녹화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새롭게 시도되는 방식의 첫 번째 월례발표회는 건국대의 박종성 선생님과 경희대의 이병태 선생님께서 맡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제목: 슈티르너의 역사철학 – 인간의 삶과 인류 역사의 미래

발표자 : 박종성(건국대 상허교양대학)

논평자 :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일시: 2020년 5월 30일(토) 오후 4시 – 6시

장소 : 건국대학교

방식 : 비공개 방식(오프라인 촬영 및 영상 업로드)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자우림 샤이닝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2 feat.

자우림 샤이닝

 

이상하(한철연 회원)

 

5.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자우림의 노래 샤이닝 중에서.

 

출처 여행중에 직접 찍은 제주도 협재 해변의 사진

 

 

 이번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나오미수녀와 벤야민에 대해 쓰면서 난 자우림의 명곡 샤이닝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도망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이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과 예기치 못한 고난과 고통이 산재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허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선 도무지 이 반복되는 지겨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니체도 지긋지긋하다고 강조한 중력의 정령을.

 그래서 현대인들의 유토피아는 항상 외국, 여행 속에만 존재한다. 이 유토피아, 낙원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만… 진정한 자기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망이 여행에는 잠재되어 있다. 타인이 자기를 알아볼 일이 없는,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의 자기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었고, 나치의 유럽을 피해서 미국으로 가려던 벤야민도, 수녀원을 떠나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었던 덴마의 나오미 수녀에게도 분명히 그런 욕망이 있었으리라. 그래서 수녀는 이렇게 주문했다. 어디로든 여기서 가장 먼 곳으로.

 그렇지만 그 여기서 먼 공간 조차도 돈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안에서만 정해진다. 분명 그러한 속세의 논리가 싫어서 봉사하는 삶을 위해 수녀원으로 들어갔을 나오미 수녀지만, 토지 소유권 문제로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고 거길 나와서도 이 돈의 한계에 갖히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나 푸코 같은 사람이 말했다는 ‘자본주의의, 세계의 외부란 없다’라는 끔찍한 말이 떠오른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사실은 벗어날 이 내부의 ‘바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건 아닐까.

 게다가 이 에벤에셀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미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남은 짐 또는 재산인 가방을 타지에 도착하자마자 부랑자에게 도둑질당한다. 그리하여 돈이 없기에 식사를 하고서 식당주인의 허락을 받아 설거지 노동으로 보상하려는데 그마저도 기차역에서부터 온갖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며 스트레스를 준다… 시선이란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헤겔 시절부터 말해온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관심 타인의 시선을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이 있지만, 그 때문에 또한 인정투쟁에 시달리게 되고 고통을 받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래서 앞에서 말했듯 그런 시선이 없는 타지로의 여행을 이상화하지만, 나오미 수녀는 분명 멀리 타지로 왔음에도 오히려 수녀원보다 더욱 타인의 시선에 시달린다. 그리고 왠 낯선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는데…

 이는 놀랍게도 에벤에셀 도시의 시장이 직접 나오미 수녀를 알아보고 찾아와서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노인이 절반 이상인 실버타운 에벤에셀의 시장은 당연히 건강에 큰 관심이 있었고, 나오미 수녀가 그동안 만들어온 약효가 있는 만드라고라에 나오미 수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에 시장을 비롯해서 모든 시민이 나오미 수녀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비서가 그녀에게 살짝 나오미가 계속 이 도시에 살며 만드라고라를 만들기를 원한다고 전해준다. 조용히 살던 수녀원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야반도주한 나오미 수녀의 입장에서 정말 만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진작 그 끝도 없는 보상없는 노동이 반복되는 수녀원에서 도망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더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20세기 세계대전중 나치의 독일에 살던 유대인 벤야민도 이런 희망을 기대하며 모스크바로 떠나고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크리스마스날 상가를 헤매고 파리의 아케이드를 산책하던 벤야민처럼, 듬직한 경호원이 항상 대동해주고 그보다도 더 듬직한 시장의 신용카드를 받고서 에벤에셀의 거리를 산책하는 나오미수녀.그녀는 돈이 필요없는 수녀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겨우 며칠만에 잊어버릴 만큼 이 풍족한 소비생활에 익숙해진다. 이는 참으로 무섭고도 매혹적인 돈의 마력이자 자본주의의 매력이 아닐까.

 돈이 없을땐 누구나 돈과 자본주의에 악담과 저주를 퍼붓지만 돈이 많을땐 이 자본주의만큼 나에게 쉽게 만족과 행복을 제공해 주는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름신이라던가 sibal 비용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가며 나의 행복을 위해 소비를 저지른다.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을 때 자본주의와 관련해 그런 일화가 있었다. 아일랜드였나 어떤 유럽의 소국에선 전통 음악 등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해서 전혀 미국의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티비가 아일랜드에 들어오고 엠티비같은 방송이 시작되자 겨우 몇년만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할리우드와 미국 팝송에 열광했다는 것이다. 이 나오미 수녀도 그와 비슷한 씁쓸하고도 달콤한 자본의 매혹과 참맛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자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벤야민도 아마 그러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겨우 며칠만에 완벽하게 바뀌는 사람은 없고 나오미 수녀님도 그러하다. 5일전에 수도원을 철거하겠다는 용역 깡패의 말을 나오미수녀는 기억해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자신을 찾아온 택배원 덴마를 따라 다시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허나 그곳에서 이전에 자신이 구하고 간호했던 거지들이 수도원 철거를 막는 광경을 보고… 나오미는 이전에 수녀원장님이 자신에게 남긴 말을 떠올린다…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4&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양손에 시장의 카드로 사거나 선물받은 물건을 잔뜩 쥐고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지 부랑자의 무리를 만난 나오미 수녀.

벤야민은 이 나오미 수녀처럼 도시의 빈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부모손을 잡고 상점가를 가다가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을 만났었고… 파리같은 대도시의 거대한 아케이드를 산책하다가 화려한 상품들에 대비되는 실업자 거지 매춘업자 노숙자 심지어 온몸을 광고판으로 채운 샌드위치맨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 가진 것 없는 약한 자들 사이를 산책하면서 벤야민은 희망을 수집하고 새로운 서사를 구성해낸다. 어쩌면 나오미 수녀도 벤야민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사회에서 아무 몫도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몫을 찾아주기… ?

 

 

6.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더 늦게 전에

어서 도망치렴.

안밖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오미수녀에게 원장수녀님은 병환으로 아픈 와중에도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이제 왜 그녀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다시금 알아볼, 벤야민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를 회억, 회상하고 기억해볼 시간이다.

수녀원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나오미 수녀. 하지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의외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원했던 곳이, 자기가 즐거운 곳이 아니었으니까. 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오미는 만드라고라를 재배하는 농부일 때나 병자를 간호하는 간호사일 때나 신의 종으로 하루종일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수녀일 때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고 즐거웠다는 것을, 그 장소를 떠나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 다뤘던 철학자 하이데거도 딱 이런 상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무언가가 부재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깨닫는다고. 물론 꼭 철학자의 이런 언어가 아니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으로도 왜 나오미 수녀가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는지, 수녀원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저렇게 양손에 잔뜩 쥔 무거운 상품들을 내려놓고 예수나 부처를 떠올리게 할만한 미소를 짓게 되는지 알게 되는 이유로 충분하리라.

출처-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5&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이제 수녀원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이전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후배를 만나고 원장수녀님이 말한 말씀을 계속 전해준다. 어서 도망치라고. 자신은 이미 잘 다녀왔다고. 심지어 이 후배의 이름은 마리아, 덴마의 세계에 기독교는 없고 그와 닮은 종교들만 있지만 예수를 낳았다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자의적 해석이지만, 나오미라는 이름 자체도

나오(더라도) 바깥으로

미(me)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라고 양영순이 의도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마리아는 서양에 한국의 영희만큼이나 흔해빠진 이름이고 이 모든 게 나의 시쳇말로 뇌피셜 무리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런 게 바로 그저 재밌었다고 한번 휙 보고 넘길 수도 있는 만화 한 편에 대해서, 산책하고 수집하는 리뷰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재구성하는 길은 아닐까. 벤야민이 모스크바 일기를 재구성했듯이.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나오미를 그렇게까지 움직이게 한 힘의 원천이란 결국 뭐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이리라. 생명이라는 건 천주님이 이 우주 곳곳에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한 가장 즐거운 에너지 흐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마치 스피노자가 기쁨의 정서에 대해 말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흔히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함께 서양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 철학을 개시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이나 명예욕같은 구체적인 인간의 정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룬 섬세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벤야민도 이런 스피노자나 니체의 철학을 분명히 읽었고 영향받은 기록들이 그의 저서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 그래서 벤야민은 20세기 나치의 파시즘이 휘몰아치는 유럽의 거리에서 빈민과 창부와 산책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대해 살펴보고 수집하며 자신의 역사철학을 다듬어나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도 바로 그런 수집가이자 산책가로서 벤야민의 문장과 마음을 훔치고 흉내내고 싶어서 이 연재글을 시작한게 아닐까.

이제 나오미수녀는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 떠나보고 나서야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공간, 즐거운 삶이 있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벤야민도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다가, 자신의 연인인 아샤를 보기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가 돌아오고 모스크바의 일기를 남긴 것도 바로 이런 나오미의 마음과 닮아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이런 정서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글을 마무리하면 나름 감동적이고 훈훈한 흔한 결말이리라. 하지만 나는 또 마음 한켠에서 삐딱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고 입을 삐쭉 내민다.사실 나오미 수녀도 이전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능력있으면서도 운까지 좋은 일부 사례에 불과한건 아니냐고. 만드라고라 마스터로 이미 하나의 엘리트 전문가였고, 여행객이 타지에서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면 보통 패닉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기 마련인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도시의 시장이 그녀를 구해주러 오는건 지나치게 그녀에게 편리하고 양 작가의 작위적인 전개가 아니냐고. 좀 더 무리수를 던져본다면 어쩌면 베를린의 부잣집 엘리트로 자라난 벤야민이 잠시 모스크바로 외도를 떠난 것도 단지 그런 ‘일탈이자 행운으로 가득찬 여행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라고.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6&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또한 이 에피소드의 스토리 전체가 그 각자 다양하고 수많은 일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칫 개인적으로 버티고 즐기면 된다고 정당화하는건 아니냐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을 법하다. 천년도 더 전에 로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시절부터 기독교의 이런 서사는 매우 고전적인 레파토리 아니었는가.

 현재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미래에 더 큰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서사. 이는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저 구원은 미래에, 심지어 죽음 뒤에만 존재하니 현실에서 무슨 고통을 받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종말론, 메시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 21세기에 오히려 종교는 더더욱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중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모두 살고 있다…

 

 

7.

 개신교니 신천지니 하는 특정 종교나 특정 교파의 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다들 영원한 경제성장을 비롯한 유사 종교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편에 이어 이번 글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또한 고통받으면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기독교스러운 서사는 여전히 우리 세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면 이런 만드라고라 마스터이자 수녀였던 나오미 수녀나 벤야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감각해야 할까. 이에 대해 나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서론을 끝내는 이 말로서 내 표현을 대신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모든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고서… 비판, 비평이란 당연히 그러해야 하니까. 다음 글에선 이런 기독교와 수도원의 구원서사가 아닌, 맑스의 투쟁과 해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필자는 이러한 논의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역사철학을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서구 역사철학 역시 이러한 관심, 즉 고통과 불의를 신의 관점 속에서 설명하려는 이유에서 ‘역사의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맑스와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옹호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맑스의 이중성 역시 논증할 것이며, 아울러 벤야민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메시아에 대한 관점을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역사적 유물론을 일관된 방식으로 억압받는 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역사철학으로 재설정하기 위한 방향 전환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진보’라는 명분으로 과거를 망각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결국 역사철학의 세속화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당화하고 망각하려는 시도들과 정반대로, 망각에 저항하고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로 ‘도약’하려는 모든 형태의 ‘몫 없는 자들’의 서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예비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철학에 대한 시론임과 동시에 정치철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이 실은 모든 역사철학에 공통된 것이며,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39-40p)

계속…

이유도 없는 외로움 사랑했다는 괴로움

내게도 날개가 있어 날아갈 수 있을까.

이 가슴 속의 폭풍은 언제 멎으 려나

바람부는 세상에 나 홀로 서 있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 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내가 읽는 『자본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혹자는 말한다.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성공할 수 없다고. 나는 스스로 꽤 좌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비판에, 냉소에, 조소에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마르크시즘에 미래가 있을까? 분명 현실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가 21세기에, 그것도 한국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지하게 그를 ‘패션좌파’1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한다. 68혁명이 남긴 신좌파적 상상력은 더 이상 강력하지도, 도발적이지도,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색(사회주의)과 녹색(생태), 보색(여성), 무지개(퀴어) 등2의 성장과 강화는 서로의 조화(연대)에서 가능하지만 지금 연대의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좌파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精緻)한 설계도를 제시하지 못한다. 일단 기존 사회를 해체하는 게 곧바로 새로운 질서의 정립으로 이어지지 못함을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전(全)지구적 폭격은 우리의 삶 속에서 대안사상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황폐화시켰다.

 

노동은 계속해서 액화(液化)되어간다. 플랫폼 노동자, 초단기계약직, 프리랜서들은 노동하지만 온전한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고, 그렇게 노동계급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계급투쟁’은커녕, 노동계급의 단결, 아니 노동계급의 형성도 어려운 세상이다.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해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된다.3 공동체 밖에서 인간들은 자유롭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는 자본에 착취당할 자유이다. 다시 말해 이 자유는 하루 12시간, 주 6일, 정해진 작업장 없이 일할 것을 강제하는 계약서에 ‘자발적으로’ 서명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공상에 젖은 좌파들’은 아직도 대공장시대에나, 혹은 전후(戰後) 호황경제 때나 가능했을법한 대안들을 내놓는다. 그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도 하지 않는다. 2020년 현재 정치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비교하여 어떠한 우위도 점하고 있지 못하다. 변화한 시대에 발맞추지 못한 소위 구좌파들은 시쳇말로 ‘빻았고’4, 정체성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신좌파들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토대를 볼 줄 모른다. 정말 이 시대의 좌파적 대안은 지금의 주류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좌파들이 무력해지고, 공상적이라고 비판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정확한 분석의 부재와 참신한 상상력의 실종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분석과 상상력의 부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가치를 해석하는 방법을 지금의 지배적 사상에 빼앗긴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자유는 원래 좌파의 것이 아니었고, 평등한 세상이 자유로울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자유는 인간들의 평등한 상호관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 자유가 ‘인간 존재의 자유’라면 말이다.

 

자본주의가 뿌리박은 자유주의는 신체에서 뻗어 나온 소유권이라는 사고에 천착하여 재산의 축적과 사용이 자유로운 사회가 진정 자유롭다고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은 결국 돈 많은 사람이 돈 쓸 자유에서 시작해 자본이 무한정 자가 증식할 수 있는 자유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당노동행위를 강제하는 계약서에 서명할 자유만 가지게 된다. 이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다. 그저 자본의 자유이다. 그리고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를 착취하여 성장하는 자본의 자유는 불평등을 낳는다. 또한 불평등 없이는 자본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기에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이상의 불평등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용인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그 옛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얼핏 언급하고 넘어간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association of free individuals)’부터 시작하자! 낡은 유물을 다시 꺼낸다고 여기지 말아 달라. 지금의 문제제기는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좌파의 기본정신에서 어긋나, ‘자유와 평등’을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으로 해석하는 통념5을 깨기 위한 것이니 말이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먹고사는 걱정을 떨쳐버려야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당연하게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먹을 몫을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 여기서의 소유는 자신이 소비할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즉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당장 내가 먹을 만치 밥을 할 수 있는 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소비재의 소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내가 갓 지은 밥을 남이 먹으면 나는 당연히 배가 차지 않는다. 내가 소비할 것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유는 어떠한가? 앞문단의 논리대로라면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 즉 자본의 자유 역시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단지 자신이 소비할 것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의 구성원이 임노동자와 소상공인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 임노동자들과 소상공인들의 소유는 자본의 부스러기로 구성된다. 생산수단에서 생겨난 가치가 일부 임노동자들에게 돌아가고, 그 가치가 다시 소상공인들에게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사용가치의 이전이 일어난다. 그 사용가치를 일부 소유하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소유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생산수단에 노동을 투하하여 나오는 가치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가져간다. 그리고 그 가치는 다시 자본에 축적되어 규모가 커진다. 가치가 나오는 구멍을 쥔 게 자본가들이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영위할 사용가치들은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본의 사적 소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다른 사용가치의 소유나 가치의 부스러기의 소유가 종속된다.

 

앞에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다. 그 목구멍으로 넘길 밥을 만들거나 혹은 교환해올 사용가치, 또는 가치가 자본에 종속된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본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이라는 언명에서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이어야 한다. 생산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할 때 우리가 소비할 사용가치도, 교환의 척도로 이용할 가치도 평등하게 나눠지고, 그래야 인간이 자유로워진다.

 

생산수단을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지 의문일 수 있다. 생산수단을 전부 쪼개어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산업의 집적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생산력, 효율성의 향상이 불가능할뿐더러, 큰 산업을 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로 가능해진다.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공동의 생산수단을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활용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개인적 노동이 아닌 사회적 노동으로 의식하며 사용하는 사회구성체이다. 여기서 구성원들이 생산한 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사회적 노동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회구성체의 총생산물 일부는 다시 공동의 생산수단을 보충하는 데에 쓰이고, 나머지는 사적으로 분배된다. 이 분배의 기준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얼마나 노동하였는지’로 결정된다. 이 사회구성체에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억압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모두의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걱정은 줄어든다. 자신이 일한 만큼 가지기 때문에, 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자신이 소비할 사용가치를 얻을 수 있다.6

 

위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자유와 평등’을 ‘인간의 자유와 소유의 평등’으로 해석할 때 가능하다. ‘자본의 자유와 소유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사이의 평등’에서는 불가능하다. 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유와 평등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사용가치의 소유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의 기반에서는 주류적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좌파, 또는 대안사상은 자신들이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받게 된 배경을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주류가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거꾸로 주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좌파와 대안사상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보다 세련되고 과학적이기에 지금 주류의 시선이 주류가 되었고, 좌파가 세상을 보는 눈은 주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주류의 논리적 기반에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기에 사태의 근원을 발본색원할 수 없게 한다. 새로운 기반을 다져야 한다. 아무리 마르크스가 철학이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고 했을지라도, 그 말의 전제에는 ‘과학적이고 엄밀한 분석’이 있다. 대안사상만의 과학적인 기반이 필요하다. 그것이 ‘좌파는 공상적’이라는 냉소를 떨쳐버릴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앞 문단이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좌파의 논리적 기반과 세계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기존의 것이 모두 쓸모없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위에서만이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개를 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해서는 공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안은 체제 밖에서 체제를 조망하고, 체제 안에서 체제를 타격할 때 실현된다. 토대의 변화에 상부구조의 변화가 연동된다고 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허위의식을 벗어던질 때 토대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가 평등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피하여 평등에서 자유가 비롯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론』은 나에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하나의 무기를 제공했다. 인간의 자유는 소유의 평등에서부터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서두에 서술한 냉소에 맞설 정확한 분석과 참신한 상상력의 부활을 위해, 지금까지 자본의 자유에 억압당한 인간 존재를 위해, 아래와 같이 외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위해. 인간에게 자유를, 자본에게 억압을.

 


  1. 명확한 계급적 의식과 실천 없이 좌파적 생활양식 및 정치적 지향을 단지 유행하는 패션을 따르듯 멋으로만 소비하는 사람들을 에둘러 비꼬는 말이다.

  2. 당연히 이 정체성들과 가치의 연대에는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정체성들과 가치(장애, 인종, 평화 등)가 포함된다.

  3. 혹은 인간이 파편화, 개인화, 원자화되는 사회에서 계급의식의 자각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4. 예의 없거나 낡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un-PC한, un-Political Correctness) 사람들을 형용하는 속어이다.

  5. 심지어 ‘좌파’들조차도 이러한 해석을 벗어나지 못한다.

  6. 다만 일할 수 없는 구성원들에게의 분배 방식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열다섯 번째 시간, 스포츠 [시가 필요한 시간]

열다섯 번째 시간, 스포츠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 열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러분을 찾아뵙니다. 오늘은 “이것도 과연 시가 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법 한 주제를 골라보았는데요, 바로 ‘스포츠’입니다.

 

 

스포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스포츠뉴스 시작 할 때 나오는 “딴딴딴! 뚜구뚜구…”하는 로고송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고, 또 땀 흘리는 축구선수들, 질주하는 마라토너들 등의 이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스포츠가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을 때도 분명 있어요. 9회말 2아웃의 상황에서 역전하는 야구 경기나, 42.195km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를 보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긴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 스포츠를 가지고도 시를 쓴다는 것은 왠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 않나요? 고독하게 앉아서 사유하고 감상하는 ‘시’하고 스포츠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죠?

하지만 오늘 제가 준비한 시를 들어보시고 “와,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 느낄 수 있길 바라봅니다. 오늘 들려드릴 시는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입니다.

낙법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요,

 

출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147429f33e64345894d32c6e4bf5f76 네이버사전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 굳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낙법이 뭔지는 잘 아실 겁니다. 벌써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죠. 그런데 이 ‘낙법’도 시가 될 수 있을까?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시죠.

 

 

낙법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 할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며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았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낙법을 시로 만나니 마치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낙법’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요,

 

“메치기의 연습에 들어갈 때는 먼저 낙법연습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다. 낙법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는 그 자체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 따라서 낙법의 연습은 메치기 기술의 기본이 될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몸놀림에 익숙해지므로 유도기술 훈련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될 수 있다.”

 

다른 어떤 기술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넘어지는’ ‘기술이라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죠? 그리고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어야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낙법으로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더라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누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메치기 당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는 내 공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저 넘어지는 것에 다름없어 보였던 낙법이 유도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고, 뿐만 아니라 모든 공격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짜릿한 부분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갈 때, 이 시의 표현처럼 때로는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꼿꼿하게 굽히지 않고 곧게 고집하는 것이 때로는 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죠.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지만 넘어지더라도 몸이 상하지 않는 유도의 낙법기술처럼, 때로는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목에 붙인 힘을 빼고 둥글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안전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에서 그저 넘어지고 쓰러진 채로 끝이 아니라,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솟아나는 사람, 굳건하게 무릎을 세우는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비록 넘어졌더라도, 그렇게 넘어진 채로 계속 드러누워 버린다면 그 채로 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넘어졌던 자세에서 다시금 굳게 무릎을 세운다면 이제는 다시 Get ready, 공격 시작인 것이죠. 넘어지는 것이 패배하는 것만 같고 힘없는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내 쪽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공격의 기술’이라는 것. 이 ‘낙법’이라는 시를 통해 배워 봅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로 영화 ost 를 가져 왔습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남아공 럭비팀의 실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인빅터스(Invictus)’의 ost 중 한 곡 ‘colorblind’입니다. 난 끝날 때까지 일어날 거야. 난 다시 하늘을 볼 거야. 난 쓰러져도 기도할거야. 난 바닥에 있지 않을 거야.” 라는 가사는 권순진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가사죠.

이 영화는 스포츠영화로 분류가 되는데요, 영화 장면 중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자신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한 편의 ‘시’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어떤 시인지 영화 속에서 찾아보세요!). 그 시는 럭비팀 주장을 비롯해 패배감에 젖어있던 많은 팀원들에게 용기를 주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시와 스포츠가 만나는 순간이죠^^

어제 하루, 혹시 머리를 낮추고 몸에 힘을 푼 채로 그만 넘어져 버렸다면, 이제 여러분의 두툼한 엉덩살로 버티고 무릎을 세울 차례입니다. 넘어질 때 안전하게 넘어져야 다음 공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인생의 낙법을 통해 Get Ready하시는 오늘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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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ctus ost – Colorblind  https://youtu.be/MQODgf0Pg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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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내가 읽는 『자본론』]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2016년 여름, 대한민국 교육부의 어느 정책기획관은 교육부 직원들,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가 했던 발언은 아직도 유행어처럼 우리 주위에서 종종 회자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 그의 발언에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원로 언론인 이강희의 명대사였다. 극 중 이강희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부 관료 입에서 실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현실에 많은 대중들은 자신이 개돼지 가축임을 비꼬듯 자처하며 해당 정책기획관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법과 제도를 손봐야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세간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저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새삼스레 말 한마디에 화가 난 것일까? 국민과 민중들이 개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슷한 맥락의 위 두 대사는 아마 대한민국 민중의 우매함을 비아냥대는 권력의 ‘근거 있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기득권은 물질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서와 사고를 지배하고 그 표출 양상을 예상하여 통제 정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근거’가 충만한 자신감이라 칭할만하다. 이들의 발언에 담긴 의미와 맥락은 분명하다. 그들이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며, 대다수의 국민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언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거짓된, 혹은 잘못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그래서 잘못된 팩트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게끔 하는 사회 구조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가축 취급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 뿐이며 이강희와 교육부기획관의 자신감이 전제한 지배 구조가 실재함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대중들을 한낱 가축으로 전락 시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중들이 정말 가축이라도 된 것 마냥, 자신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회에 순응하고 살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nistry_of_Education(South_Korea).jpg

 

나는 이 의문을 해소해줄 첫 실마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묻고 싶다. 혹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교실에만 있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단어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사상이나 이념의 일반적인 의미와 등치시켜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용례에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사회적 모순의 발달에 따라 실재를 ‘전도’시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위한 관념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허위의식’ 정도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를 기저에 두는 까닭은, ‘이데올로기’가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모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창출을 돕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랑스의 유물론자들 및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에 영향을 받아, 헤겔의 전도된 국가 개념과 종교에 관한 개념을 비판하는 데에서 그 본격적인 시발점을 구축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적 개념으로 부상했으며,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윤리적 측면 등 다양한 외연을 띠며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이 그들 자신을 향한 ‘개돼지 대우’의 토양으로서 근본적 사회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도구로써 손색이 없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근현대적 시점에서는 궁극적(본질적) 실재의 현상 형태인 자본주의적 사회가 바로 이데올로기 형성의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이데올로기’를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전도’ 작용을 매개하게 된다. 이 세상의 실재와 그 본질적 관계들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생산의 영역이다. 허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인 관계들을 은폐하고 현상 형태일 뿐인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 체계를 형성, 설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의식 또한 전도시키게 된다. 후기 자본주의 속 강대국이자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난 나. 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우리가 개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안개처럼 가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이다.

한편 바로 그 생산의 영역으로서 경제적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존재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사회의 99%를 개돼지로 만드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직결되기에 그렇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적 생산성을 향한 집착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 원리이자, ‘개돼지’계급과 이들을 착취하는 계급이 계속적으로 ‘갈등-공존’하게하는 기본적인 알고리즘임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즉 이 사회의 근본적 계급 구조와 이를 망각하게 하는 ‘생산성’에 관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이 가축 취급을 받는 이유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본질적 구조와 계급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며,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미화하고 은폐하고자 한다.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자본의 증식 욕구는 많은 척도들을 경제적 척도로 일원화 시켰고, 경제적/물질적 성공에 대한 열망은 곧 ‘생산성’과 ‘효율’에 대한 집착과 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한한 욕구의 생성과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나도 노력하면 대중들을 들쥐 취급할 수 있는 달콤한 자리에 오르는 희망이 샘솟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의 문제 따위는 고이 접어 장롱에 넣어 두게 되었을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집약되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정치적(권력적) 욕구의 성취와 경제적 성공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기득권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다음 세대로부터 ‘어찌 하면 더욱 큰 생산성을 이끌어 낼까’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 ‘경쟁’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한정된 가치를 가지려면 싸우고 갈등하여 승리하고 쟁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착수한 이들은 사실 자신들 모두가 나눠가지고도 남을만한 양의 재화와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전쟁에 뛰어들었다. 더욱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같은 ‘참전’을 성실한 삶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전시 상황에서 그 누가 ‘개돼지적’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하랴. ‘이데올로기’라는 안개는 본질을 가리는 데에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경쟁’은 실재의 전도와 관념의 전도를 매개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일 뿐이다.

권력과 기득권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의문을 통제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득권의 이 모든 관념적 유인책에 현혹되어 자신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관념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과 속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자본주의 경쟁 사회 속의 부속품이 된 개별 인간들뿐이었다. 가축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적 삶은, 일반 대중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득권에 서기 위한 경쟁은 민중들 내에서 갈등을 야기하며, 일종의 시합의 장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 속에서 주인과 가축으로 나뉘는 사회구조의 본질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방해하고 은폐한다. ‘잉여가치 착취’의 구조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한 대중의 지각을 막는 것이다. 대중들의 관념을 전도시키는 셈이다. 민중들은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민중계급/노동계급 내부에서의 갈등과 경쟁 및 혐오와 차별을 이어간다. 기득권과 자본가들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영원히 가축일 수밖에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들 내부에 끊임없이 갈등과 혐오와 경쟁을 유발시킨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젠더갈등, 소수자혐오 등도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모두는 연대해야하며, 개나 돼지가 아님을 다 함께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시대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눈이 멀어 지속적으로 기득권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확산시키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개념을 등장시키며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물신성’이 그것이다. 『자본』의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 ‘물신성’ 개념을 언급한다.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물신숭배’는 영어로는 fetishism으로 풀이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물건의 내재된 속성인 것처럼 은폐하여, 물건에 소유자의 인격을 투영하거나 물건 그 자체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물신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물건의 내재된(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 힘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적 영역에 집중적으로 적용되는 커다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특성을 설명한 프랑스의 드브로스의 저작은 데이비드 흄의 영향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물신숭배(fetishism)의 직접적 어원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사용한 ‘페티쉬’라는 개념인데, 그 의미 또한 같은 맥락 위에서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감정과 관계한다.

『자본』을 통해 제시되는 두 가지 물신성은 ‘상품 물신성’과 ‘화폐 물신성’이다. 상품 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띨 때 발생한다. 이는 상품 형태가 사회적 생산관계를 은폐하여 사람이 아닌 물건들이 관계를 맺는 상황처럼 보이게 만든다. 상품생산자는 생산관계의 물화(물질화, 물건화)를 마치 어떤 한 상품이 생산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른 대상물과 교환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능력은 마치 물리적 속성처럼 상품이 본래 가지는 성질처럼 느껴진다. 즉 ‘상품 물신성’은 상품에 인격을 투영해 사람이 상품 대하기를 실제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폐 물신성은 금이 화폐로 변한 역사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화폐(금) 자체에 가치가 내재된 것으로 오해할 때 발생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일반적 등가물 상품이 화폐(금)가 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의 발달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꾸로 모든 상품이 금으로 교환될 수 있게 하는 금의 화폐적 속성이 금의 본성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믿는 오해가 화폐 물신성을 야기한다. 화폐 물신성도 마찬가지로, 화폐 자체에 인격과 능력이 부여되어 화폐 그 자체가 인격화, 목적화되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물신성의 두 양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크게 낯선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 특히 ‘물신성’은 계급적 구조가 현대인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현실을 가장 여실히 증명하는 동시에, 대중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대중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실재의 생산관계와 사회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같은 온갖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내 글을 읽고, ‘그래서 이 글은 민중이 개돼지가 맞다’는 걸 말하려 쓴 것 아니냐는 언짢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이 이 모든 구조에서 벗어날 능력을 잠재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완전히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민중이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돼지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엮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통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정밀하게 작용하는 지를”, “왜 우리가 개돼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또한 이 글을 읽음으로서 단 한 사람의 대중이라도, 우리가 언제든 레밍이 될 수 있는 이 모든 사회적 구조를 자각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가축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난 멸시받고 괄시받는 99%의 세계인이 언젠가는 이 모든 구조적 불의를 알아채고 함께 그것에 대항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레밍도, 개도, 돼지도 아닌 존엄하고 가능성 넘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열네 번째 시간, 어머니 [시가 필요한 시간]

열네 번째 시간, 어머니

 

마리횬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 주 미루다 보니 조금 늦어버렸네요. 더 늦기 전에 소개해드릴 시가 있어 가져왔습니다.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입니다.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이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요즘 웬만한 물건들은 가까운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온라인 쇼핑몰도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전자기기, 식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주문당일이나 다음날 새벽에 샛별처럼 빠르게 로켓과도 같은 속도로 받을 수가 있죠.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여기, 늦게 온 소포 하나가 있습니다. 남해에 사시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소포입니다. 행여 어디 부딪혀서 생채기라도 날까, 유자 아홉 개를 싸고 또 싸고 무명실로 겹겹이 감아 조심조심 포장해서 보낸 소포를 봅니다.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시 제목에서 분명 “늦게 온” 소포라고 시작했지만, 다름아닌 어머니가 보낸 것임을 아는 순간, 밤 늦게 받은 소포는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을 만큼 재빨리 날아 온 소포가 됩니다.

시의 화자는 겹겹으로 동여맨 매듭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마디를 읽어내고, 속에 것보다도 더 무겁게 포장된 마분지에서 겹겹이 쌓인 두터운 어머니의 마음을 보아냅니다. 포장된 종이를 한 장 한 장 벗겨낼 때마다 나의 낯선 서울 살이, 분주한 생활의 겉꺼풀도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느끼죠. 그리고 마치 그런 자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어머니의 쪽지가 눈앞에 툭 떨어집니다.

마치 실제 어머니의 쪽지를 마주하는 듯, 시의 원문에는 어머니의 말투로 된 시행이 고스란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서툴고 맞춤법도 안 맞는 촌스러운 편지, 투박하게 싸맨 유자, 빠르고 편리한 흐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늦게 온 소포…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더 큰 위로를 주는 듯 합니다.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어머니가 한지더미로 꽁꽁 싸서 보낸 것은 사실 유자가 아니라, 혹시 내 아들 딸이 바빠서 챙겨먹지 못할 까봐, 그저 몸에 좋은 거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었겠죠. 유자를 포장했던 종이들을 버리려고 접었다가, 어머니 생각에 다시 펼쳤다가… 접었다 펼쳤다 하는 그 손길에서 어머니를 향한 말 못할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새벽에 내려 녹고 있는 눈을 핑계 삼는 시인의 눈물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이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눈물은 슬픔, 쓸쓸함, 외로움의 눈물이 아니라,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아 흘리는 눈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지 않을까요?

이 시를 읽으며 함께 생각난 시 가운데 이대흠 시인이 쓴 <어머니라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가만히 살펴보면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한국어의 비음에 해당하는 자음 ㅇ,ㅁ,ㄴ이 들어있습니다. 비음은 공기가 코로 나가서 코를 울려서 내는 소리를 뜻하는데, 이 세 가지 비음이 모두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어머니’인 것이죠. 어쩌면 그래서 “엄마”라고 입으로 부르기만 해도 우리의 콧등이 시큰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한 그리움이자 영원한 울림의 이름, ‘엄마’, ‘어머니’…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설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몇 년 전 “K-pop Star”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작곡으로 소개가 되었던 짧은 노래인데요, 가사가 참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린 <늦게 온 소포>와도 잘 어울리고, 어버이날을 지내면서 많이 생각난 노래이기도 합니다. 5월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부모님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꼭 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이설아 – 엄마로 산다는 것은, https://youtu.be/8EHdwo2ux6U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자본론 에세이2 – 1장: 상품) [내가 읽는 『자본론』]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내가 즐겨 입던 바지가 있다. 신축성이 아주 뛰어나고 춥지 않을 만큼 두꺼우며 덥지 않을 만큼 얇아서 4계절 내내 입을 수 있었던 바지였다. 바지의 큰 주머니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어서 동전이나 열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편리했다. 그 바지에 유일한 단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 바지가 아주 잘 찢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지가 찢어지면, 같은 가게에 가 같은 바지를 샀다. 비싼 가격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바지는 3개월 정도 입고 다니면 어김없이 같은 부위가 찢어졌다. 사이즈가 나한테 작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같은 바지를 새로 사고 버리기를 4번쯤 반복한 뒤, 나는 다시는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내 애정과 신뢰에 매번 실망만 안겨주는 바지에 이제는 질려버린 것이다.

나는 그 바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바지는 대체 왜 이렇게 잘 찢어지는 걸까? 이 바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대체 어떤 기업이 이렇게 잘 찢어지는 바지를 만들고 싶어 할까? 어렸을 때 엄마는 종종 직접 내가 입을 바지를 만들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늘 가장 질긴 천을 사서 절대 찢어질 일이 없도록 박음질을 촘촘하게 했다. 하지만 이 바지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에 관해 알게 되었다. 패스트 패션이란,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와 바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최신유행의 의류를 세계적인 수준에서 짧은 주기로 만들어내고 저가로 대량생산·판매하는 상표와 업종을 말한다. 주로 젊은 층이 소비하는 H&M, ZARA, GAP 그라고 Benetton과 같은 기업들이다. 이들은 빨리 입고 버릴 수 있도록 낮은 질과 가격의 옷을 생산해낸다. 그래야 사람들이 옷을 빨리 버리고 곧 또 새 옷을 산다. 그게 이들 산업이 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패스트 패션 산업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환경에 미치는 예부터 몇 가지 들어보자. 말하자면 사실 끝도 없다. 패스트 패션 산업에서 하나의 면(綿)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3,000ℓ의 물이 필요하고, 레이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간 865억 그루의 나무가 희생된다. 버려진 면이 환경에서 분해되기 시작하기까지는 80년이, 폴리에스터는 수백 년이 걸린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를 5번 내외로 입고, 35일 이내에 버린다.1 북미에서만 1년에 120억 톤의 의류 폐기물이 발생한다고 한다.2

이제 노동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세계적으로 6명의 노동자 중 1명이 의류산업에서 일한다. 그중 80%가 여성이고, 이들 중 2%만이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패스트 패션 산업은 개발도상국의 가장 값싼 노동만을 사용한다. 개중에 아동노동도 포함된다. 노동자 대부분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실제 사례로는 2013년 4월에 발생한 방글라데시의 의류공장 붕괴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Dakha)의 의류공장이었던 ‘Rana Plaza’가 붕괴되어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 1,100여 명이 사망하고 2,500명가량이 부상을 당한 참사였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어린 여성이었다. 방글라데시는 봉제 의류산업의 신흥 강국으로, 높아진 중국의 인건비를 대체할 인력시장을 찾던 서구 의류업체들의 진출지였다. 방글라데시의 시간당 임금은 24센트로 중국의 1달러 26센트3 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2013년의 사고가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첫 사고는 아니었다.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230여 개의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꼭 건물 붕괴의 위험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은 의류를 제조할 때 들어가는 각종 화학물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느끼며 노동해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은 피부질병, 호흡곤란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데4,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던 당시의 노동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옷을 사러 매장 안으로 들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바지 앞에 섰을 때, 지금 내가 알아차린 것과 다르게 패스트 패션에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또 그때는 앞으로 내가 자본론 에세이를 쓰면서 패스트 패션 산업에 대해 이토록 긴 설명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나의 이런 경험은 바로 마르크스가 1장에서 이야기하는 ‘물신’ 개념과 직접 관계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 걸쳐 여러 상이한 생산물이 어떻게 화폐라는 공통된 옷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들이 놓인 사회적 관계가 표백되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그렇게 표백된 생산물들은 마치 복잡한 연애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오직 나만을 위해 나타난 왕자. 우리는 이 왕자가 우릴 비참한 현실로부터 구원해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환상을 깨고 왕자의 연애사를 낱낱이 밝혀냈다. 알고 보니, 왕자는 성에서 바로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 여러 장소와 여러 사람을 거쳐 많은 짓(?)을 저지른 후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왕자의 종착지는 내가 아니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우린 감쪽같이 속았다. 왕자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왕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품이고 왕자의 ‘복잡한 연애사’는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 그리고 모든 생산과정을 일컫는다. 왕자에게 아직 남은 ‘가야 할 길’은 상품이 내 손을 거쳐 간 후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상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물신)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여러 사회적 관계가 얽혀있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는 물신을 환상, 또는 허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물건의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그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세컨핸드(중고) 옷을 꽤 즐겨 입는 편이다. 1년에 몇 번 동묘나 광장시장, 명동의 중고 옷가게들을 돌면서 내가 좋아하는 밝고 강렬한 색감과 독특한 무늬를 가진 옷들을 건진다. 대개 거기서 판매되는 옷들은 거의 누가 입은 게 티가 나지 않는 중고 옷들이지만, 그중 몇은 헤진 데가 있거나, 희미한 얼룩이 져 있거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그게 세컨핸드 나름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는다. 내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헝가리의 경우, 중고의류산업이 꽤 크다. 중고의류를 전문으로 다루는 ‘Humana’, ‘Creme’과 같은 체인들이 부다페스트 도심에만 수십 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세일하는 날이면 매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사람 중 중고 옷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갔던 것이라 찝찝하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람들은 깔끔한 새 옷을 사는 걸 선호한다. 물론, ‘손을 거쳐 갔다’는 것이 중고 옷과 새 옷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새 옷도 누군가의 손을 전혀 거쳐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옷을 비롯한 모든 ‘새’ 상품은 상품사슬(Commodity Chain)을 거친다. 세계화 시대에서 그 사슬의 길이는 어마어마하다. 청바지 브랜드 ‘Calvin Klein’은 “나와 캘빈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요(Know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5라고 광고하지만, ‘나와 캘빈 사이’에는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디자인된 데님은 베냉에서 자란 목화로 만들어져 독일에서 만든 염료를 사용해 이탈리아에서 직조되고 염색된다. 이 데님은 청바지로 가공되기 위해 바다 건너 튀니지에 보내지고 나중에 프랑스 소재 일본 기업에서 만든 지퍼를 달게 된다. 청바지의 주머니 안감으로 사용된 면은 파키스탄에서 재배된 목화가 사용되었고, 버튼은 독일에서 만든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을 위한 구리는 나미비아에서, 아연은 호주에서 왔다. 청바지를 만드는 실은 영국, 터키, 헝가리에서 만들어졌고, 스페인에서 염색되었으며, 이 실을 위한 폴리에스테르 섬유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청바지는 영국 리버풀의 한 의류 매장에 입고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된다.6 이 어마어마한 상품사슬은 인간사슬이기도 하다. 청바지의 모든 생산과정에는 노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청바지 생산에 기여한다. 우리 중 누구는 세컨핸드 의류가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쳤다는 이유로 찝찝해하지만, 이처럼 새 옷도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에게 안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찝찝하지 않지만, 그래서 또 우리는 어떤 상품이 생산되기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2만 원 내고 청바지를 사서 3개월 입고 버리면 끝이다. 더 이상 내가 지고 있는 빚은 없다.

물신을 인스타그램으로 이해하면 쉽다. 상품의 가격은 핸드폰의 좁은 화면을 통해 인스타그램이 선별하여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미지에 불과하다. 화려한 이미지 뒤에,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이나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가려져 있다. 다음 이미지들은 한때 온라인에서 화재가 되었던 이미지들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wrenkitchens.com/blog/kitchen-lived-perception-vs-reality/

인스타그램 속에서 보여 지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풍자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아주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과 상황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우리가 사진을 올릴 때는 그러한 것들을 곧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의 가장 좋은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내보이고 싶어 한다. 내가 팔로우 하고,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대신 삶의 파편으로서의 이미지들만 올리고 또 보면서 우리 모두의 삶은 퍽 괜찮은 삶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불평한다.

자본론을 읽으면, 마르크스가 특정 현상의 역사성을 살피는 걸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착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화폐가 생겨나기도 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착취가 발생하게 된 긴 역사든, 청바지가 나에게로 오기까지의 짧은 역사든 그 과정을 무시할 때 물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착취를 눈감아주며 개인을 단절시켜 서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느끼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백마 탄 왕자는 연애사가 복잡하다. 이상한 놈한테 당하지 않으려면 캐물어야 하듯이 우리는 반짝이는 것 뒤의 일그러진 것, 인스타그램 사진 너머의 현실, 상품 이면의 노동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허핑턴 포스트, 「The Problem With fast Fashion」, https://www.huffpost.com/entry/problem-fast-fashion_n_57ebfeafe4b0c2407cdb22c0

  2. https://www.bwss.org/fastfashion/

  3. 배윤정,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례로 알아본 기업의 사회적 책임」, CGS Report, 2013-11

  4. Shwowp, 「The Dark Side of the Fast Fashion Industry」, http://www.shwowp.com/the-dark-side-of-the-fast-fashion-industry/

  5. 광고의 맥락상 의역하면 섹슈얼한 의미다.

  6. 조철기, 「일곱 가지 상품으로 읽는 종횡무진 세계지리」, 서해문집, 2017-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