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⑬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전 시간에 이어 계속)

 

[337b]

* 시치미 떼지 말고 대답하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윽박성 요구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요구는 숫자 12에 대해 물으면서 ‘12=6×2, 12=4×3, 12=3×4’라는 정답을 미리 다 알려준 후 답을 할 때 그런 답은 제외하고 답을 하라는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336d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마땅한 것, 유익한 것, 이득이 되는 것, 이로운 것, 이익을 주는 것 등으로 대답하지 말고 분명하게 정확하게 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듯 말한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트라쉬마코스의 요구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열거한 답들은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가 서로 맞는 것으로 동의한 답들인데 그런 답 말고 다른 답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로서는 진실ἀληθής이 아닌 거짓을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흥미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가 묻는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가 요구하는 것이 당사자 소크라테스가 아닌 제3자가 보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일단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대꾸하는 형식을 빌려 최대한 트라쉬마코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의 말이 ‘기가 막힐’ὦ θαυμάσιε 정도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이런 식으로 묻는 사람에겐’τῷ οὕτως πυνθανομένῳ. 이 말은 ‘이런 식으로 미리 프레임을 짜놓고 묻는 사람에겐’의 뜻이다.

* ‘당신이 미리 아니 된다고 한 대답들 중의 어떤 대답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건가요?’. 이 말은 일제 강점기 또는 군사독재시절, 기관에 끌려가 폭력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기관원들이 쓰라는 대로 조서를 쓰고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거나 죽기 까지 한 수많은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337c]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왜 그런 이해하기 힘든 요구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트라쉬마코스 역시 소크라테스가 자기 말을 12에 대한 답의 경우와 똑같은 경우로 보고 있는 것에 의아해한다. 자기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과는 다른 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두 경우가 같건 같지 않건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대답하기를 금하든 말든 자기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을 답으로 말할 것이라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는 그제에서야 소크라테스가 제3자의 입을 빌어 말을 한 것이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의 생각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자기가 금지한 대답 가운데 어떤 것을 답으로 말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윽박을 지른다. 이에 소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되더라도 놀라진 않을 것이오. 자신이 숙고해서 그렇게 생각된다면’οὐκ ἂν θαυμάσαιμι, εἴ μοι σκεψαμένῳ οὕτω δόξειεν 그대로 답을 하겠다고 말한다.

* ‘질문 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면’φαίνεται τῷ ἐρωτηθέντι τοιοῦτον. 이 부분은 ‘그렇게’에 해당하는 τοιοῦτον이 무엇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질문 받은 사람에게 두 경우가 같은 경우로 보인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질문 받은 사람에게 정답으로 보인다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기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τὸ φαινόμενον ἑαυτῷ은 ‘자기에게 정답으로 보인 것’을 뜻한다.

* ‘그렇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오. 자신이 숙고해서 그렇게 생각된다면 말이오.’οὐκ ἂν θαυμάσαιμι, εἴ μοι σκεψαμένῳ οὕτω δόξειεν. 이 말은 ‘내가 잘 살피고 숙고해서 답으로 생각한 것이라면 그것이 당신이 금지한 답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거나 놀라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 트라쉬마코스의 윽박지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대답을 할 것임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어떤 강압과 금지가 있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할 말은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의지가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앞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폭력적 모습에 두려워하며 겁을 내던 모습과 다시 대조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람이 용기를 내는 것은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용기 또한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337d]

* 소크라테스가 어떤 강압적인 금지가 있더라도 진실 아닌 것을 답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결연한 자세를 취하자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대답이 정의에 관해 나온 앞서의 모든πᾶς 대답들과 다른ἑτέραν, 아니 그 보다 더 나은βελτίω τούτων 답을 제시할 경우 어쩌겠냐고 묻는다. 자기가 정의에 대한 답으로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고취되어 빨리 자기가 먼저 대답하고 싶어 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트라쉬마코스는 벌칙을 감수하라고까지 제안한다.

 

[337d]

* 트라쉬마코스가 ‘무슨 벌을 받아 싸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그야 알지 못하는 자τῷ μὴ εἰδότι로서 받아 마땅한 벌τί ὅπερ προσήκει πάσχειν 이외에 무엇이겠소? 그로서는 지자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것이오. 따라서 나는 이 벌을 받아 싸다 τοῦτο ἀξιῶ παθεῖν고 생각하오.’라고 대답한다.

* 여기서 트라쉬마코스는 마치 재판정에서 고소인이 말하듯 말하고 있다. 아테네 재판 절차에 따르면 죄가 확정되면 고소인이 피고소인에게 어떤 벌을 받았으면 좋은지를 물은 후 자기가 생각하는 벌을 제안하고 그것을 재판관들이 판단하여 결정한다. ‘무슨 벌을 받아 싼가?’ τί ἀξιοῖς παθεῖν;라는 물음은 이때 고소인이 법정에서 묻는 일종의 법정 용어이다. 이것은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이미 응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기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하는 자로서’τῷ μὴ εἰδότι ‘받아 마땅한 벌’로서는 ‘지자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것’μαθεῖν παρὰ τοῦ εἰδότος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재판정에서 말하듯 말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의도에 맞추어 벌칙인 양 제안하지만, 실은 벌이 아니라 논쟁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할 바람직한 태도로서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그 벌이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모른 채 ‘가르침을 받는 것’, ‘배우는 것’은 벌이 아니라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고(338b) 있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자마자 ‘정말 재미있는 분이셔’ἡδὺς라고 조롱한다. 자기는 늘 그렇듯 많은 것을 알고 가르치는 선생이고 소크라테스는 늘 그렇듯 배우는 학생처럼 질문만 하는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평소 가르침의 댓가로 돈을 받듯이 소크라테스에게 배우는 벌에 더해 벌금ἀργύριον까지 낼 것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가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의 금전욕만이 아니라 그의 비열함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벌금의 원어 ἀργύριον이 그냥 ‘돈’을 의미하고 소피스트들의 경우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말을 ‘수업료’로 옮기기도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마치 자기가 재판하듯 말하고 있고 그 말 앞에 쓰인 ‘대가를 물린다’ἀποτίνω라는 말 역시 법정 용어임을 고려하면 ‘벌금’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 아무리 벌칙이라 할지라도 트라쉬마코스가 벌금을 제시하고, 게다가 그가 말하는 벌금이 가르침에 대한 대가라는 뜻으로도 들리자, 글라우콘이 참다 못 해 바로 끼어들어 돈 때문이라면 자신들이 갹출할 테니 말이나 계속하라고 다그친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자신들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는 물론 그들 자신에게도 모욕적인 것이다.

 

[337e]

* 트라쉬마코스는 글라우콘의 말에 ‘물론 그러리라 생각하오.πάνυ γε οἶμαι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 선생께서 늘 하시는 식대로 하시게 하자는 거겠죠. 스스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서는 반박하시는 식이죠.’αὐτὸς μὲν μὴ ἀποκρίνηται, ἄλλου δ᾽ ἀποκρινομένου λαμβάνῃ λόγον καὶ ἐλέγχῃ라고 말한다.

* ‘물론 그러하리라 생각하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말은 소크라테스의 지지자들이 소크라테스를 경제적으로 돕는 일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 여기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고서는 반박하는 것’은 사실 소피스트들도 늘 하는 일로서 그들이 가르치는 주된 과목 중 하나인 반론법(logistikē)이기도 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들의 눈에는 소크라테스도 그러한 일을 한다고 보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로 불리어 지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반론법은 어떻게든 논쟁에서 이기기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상대 주장의 꼬투리를 잡는 기술이고,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상대 주장의 한계를 드러내 그로 하여금 앎에 대한 동기를 자극하고 그것을 토대로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도 못하는 사람’τὶς ἀποκρίναιτο μὲν μὴ εἰδὼς μηδὲ φάσκων εἰδέναι일뿐만 아니라 ‘설사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말하지 않도록 금지당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그와 달리 트라쉬마코스에 대해서는 ‘함부로 쉽게 볼 수 없는οὐ φαύλου 사람’, ‘알고 있고 말할 수도 있는’εἰδέναι καὶ ἔχειν εἰπεῖν 사람으로 말을 한다. 이 역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알고 있는 앎은 ‘무지의 지’이지만 소피스트들은 웬만한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과연 무지의 지 이외에 다른 것은 몰랐을까’ 의문을 표시하곤 한다. 소피스트들 역시 그런 의심을 갖고 소크라테스가 알면서도 시치미를 뗀다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앎과 소피스트들이 자랑하는 앎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고민하고 알고자 하는 앎이 우리의 삶은 물론 자연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가 추구하는 철학적인 앎은 소피스트들이나 학원 선생님들 같이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알고 있고 그런 것들에 관해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언제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앎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소크라테스가 고민하는 수준의 철학적 문제들은 쉽사리 ‘안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수가 있다. 이를테면 수 십 년을 참선하며 정진하는 수도승의 경우 정말 진리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확신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안다’고 말하기 힘들고 설사 확신하고 있다고 해도 선뜻 말로 풀어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도승도 자기보다 앎이 적은 사람들을 상대로 뭔가를 가르칠 수도 있고 질문에 대해 답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궁극적인 답에 대해서만은 함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해서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비록 일상적인 생각이 갖는 한계들을 드러내는 방식이긴 했지만 평생 쉬지 않고 ‘무지의 지’를 통해 자기 성찰과 진리 탐구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또 그러한 가르침에 감복하여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비판 정신의 극치로서 그의 ‘무지의 지’ 자체가 갖는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 ‘무지의 지’를 깨닫기까지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을 심오한 앎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수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스승이 평생 걸어갔던 사색의 길을 뒤 쫓아가며 스승이 남긴 앎의 화두를 붙잡고 되물어보고 또 되물어보면서 전기 대화편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 중년이 넘어가며 스승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자기 방식으로 조금씩 깨달아가면서 그 내용들을 스승의 입으로 중후기 대화편들에서 담아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담아낸 내용이 과연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 플라톤의 교설 속에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정신과 숨결이 살아 맥동치고 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판과 부정의 정신을 표상하는 영원한 스승이자 화신으로 살아 숨 쉬게 하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을 자신의 사상 속에서 육화시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지성의 성과로 드러냈던 것이다.

 

[338a]

*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자신은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설령 알고 있다고 생각할 지라도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도대체 누가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한 후에, ‘그러니 차라리 알고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트라쉬마코스 당신이 먼저 대답해서 나를 기쁘게 해주고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라’고 말을 한다.

* 앞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어떻게든 빨리 뽐내듯 자기주장을 펼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점을 노려, 먼저 대답하지 않는다는 그의 타박을 변명과 정중한 요청의 형식으로 받아친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그에 우쭐하여 먼저 주장을 펼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트라쉬마코스 자신 자기당착에 빠졌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다시 열을 올려 소크라테스를 지혜로운 자로 힐난한 후 가르침은 주지 않고 남들에게 배우기만 바라면서 그들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이 말에도 어디까지나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이고 소크라테스는 잔꾀나 부리며 배우는 사람이라는 교만이 녹아있다.

 

[338b]

*소크라테스의 되받음은 상대의 주장을 바로 부정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그것을 발판으로 거꾸로 상대 의도를 무산시키거나 스스로 덫에 걸리게 만든다.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여기서도 소크라테스는 남들한테 배우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폄하를 오히려 자신이 좋아 하는 것이라고 응수한 후 트라쉬마코스가 감사χάρις 표시로 생각하는 돈χρήματα 대신 열렬한 칭찬ἐπαινεῖν을 사례로 주겠다는 형식으로 그의 대답을 이끌어 내고 있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돈이 없다’χρήματα οὐκ ἔχω고 말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가족들의 생계마저 등한시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여러 전승들은 그가 석공이던 부친의 대를 이어 석공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치된 전승은 아니지만 아크로폴리스의 여신상들의 일부는 그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일부 전승은 그가 석공으로 번 돈을 아껴 저축도 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소크라테스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간간히 그를 후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특히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매달려 석공 일을 그만 두지도 않았고 게다가 당대 시인들이나 소피스트들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없는 일이었다. 그를 흠모하여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넓은 땅을 주려던 알키비아데스도, 그에게 노예를 제공하려던 카르미데스도 단번에 거절당하고 만다.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생계는 유지했지만 그 이상의 돈은 결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4-2(338c~339a) :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다.

 

[338c]

*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누가 만약 훌륭한 말을 한다고 판단될 경우ἐάν τίς μοι δοκῇ εὖ λέγειν 열렬하게 칭찬ἐπαινεῖν한다고 하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뇌관에 불이 붙고 곧바로 폭탄이 터지듯 대자고자 정의에 관한 자기 생각의 본심을 토해낸 후, 빨리 칭찬부터 해달라고 소리친다. 이른바 트라쉬마코스 주장의 기본 테제 즉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οὐκ ἄλλο τι ἢ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라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는 부분이 이곳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ίκαιον εἶνα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말을 받아 다시 표현한 말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말과 그 자신이 말한 ‘정의는 강자의 이익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내용상 같은 말이지만 이미 그 말 속에 트라쉬마코스의 강고한 아집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참고로 원문은 ‘강한’을 의미하는κρατύς 의 비교급κρείσσων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은 우리말로 ‘더 강한 자’로 번역함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함’ 자체가 비교 우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 상 큰 차이는 없다고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칭찬하려면 그 말뜻을 알아야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하며 그의 말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ίκαιον εἶναι라는 주장으로 다시 표현한 후 트라쉬마코스에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를 팡크라티온 선수 즉 운동선수의 경우에 빗대 다시 묻는다.

* 소크라테스가 꺼내든 판크라티온 선수 이야기에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주장을 의아해하는 이유와 그가 계속 대화에 나서도록 자극하려는 의도가 함께 들어있다. 우선 그 예 속에는 최소한 정의라고 한다면 강자와 약자 강함과 약함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상식이 환기되어 있고 그럼에도 트라쉬마코스는 그 중 한 쪽만 그것도 강한 쪽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고기는 판크라티온 선수와 같은 특수한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고 일반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속에는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강자의 이득이란 것이 일반 사람과 상관없는 그런 특이한 종류의 이득에 불과하다는 비아냥 혹은 ‘네 말은 강자에게 좋다고 약자에게도 좋다는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야유가 들어있다고 볼 수도 있다.

 

[338d]

*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이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를 향해 자기주장을 최대로 곱새기는κακουργέω 진절머리나는‘βδελυρὸς’ 사람이라고 내뱉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통상 연설가들에게 모욕을 퍼부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Cf. Aristophanes <개구리> 465. κακουργέω라는 동사 역시 수사학이나 변증적 추리에서 악의적인 트릭이나 오류를 사용했을 때 쓰는 말이다. Cf. <고르기아스> 483A. 그가 얼마나 무례하고 안하무인의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 트라쉬마코스는 칭찬 대신 비아냥이 주어지자 발끈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거꾸로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는 강자의 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를 좀더 분명히 말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한다. 이 장면 또한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분명하고 정확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앞서 트라쉬마코스가 대화에 처음 끼어들며 소크라테에게 한 말인데(336c) 여기서는 반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장면은 트라쉬마코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아집을 토해내게 만드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가 원하는 문답법의 장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소크라테스적 논박ἔλεγχος이 시작된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했을 때 ‘더 강한 자’라는 것이 어떠한 이해관계에서 비교 우위를 갖는 ‘더 강한 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들도 흔히 말하듯 일상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서 ‘보다 힘이나 위력이 센 놈이 결국 이익을 차지한다.’라는 생물학적 약육강식의 논리가 표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가 내놓은 대답에는 그러한 이해관계가 개인차원의 것이 아님이 드러나 있다. 즉 트라쉬마코스는 여러 정치체제의 경우를 끌어들여 자신이 말하는 ‘더 강한 자’란 다름 아닌 ‘통치 권력을 가진 자’ἀρχὴ 즉 정치적 지배자임을 밝힌다. 물론 여기서 트라쉬마코스가 밝힌 ‘통치 권력을 가진 자’가 곧 그가 말하려는 ‘더 강한 자’의 유일한 의미인지, 아니면 정의가 강자의 이익임을 설명하기 위한 단적인 경우로서 통치 권력자를 제시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트라쉬마코스에 와서 정의의 문제가 앞서와 다르게 개인적인 삶의 태도나 이해관계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인 문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트라쉬마코스와의 대화 부분에 와서 드디어 정의의 정치적 측면이 처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를 이제 개인의 이해관계나 행위 차원을 넘어서서 폴리스의 현실 정치 영역으로 확대시키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제의 전환과 확대는 제2권에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정의의 문제가 개인에서 나라로 확대되는 것과도 비교된다.

*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처럼 정의 문제가 정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1) 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테제가 핵심 테제로서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2) 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그 주장에 온 힘을 기울여 완벽할 정도로 논파했음에도 왜 그것에 만족스러워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플라톤이 <국가>에서 펼치게 될 논의의 목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 전 시간 언급했듯이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결코 트라쉬마코스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다. 투퀴디데스가 남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몇 장면은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아테네 기득권 세력들 사이에서 얼마나 넓게 펴져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 시간에 그 장면들 몇 가지를 살펴본 후, 제1권의 핵심을 이루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대화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강해를 시작하기로 한다.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

박종성(한철연 회원)

 

  1. 고정관념은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유령이다.

 

우리는 앞서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Entheiligung)과 과소평가(Herabsetzung)는 탈마법화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나의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이 글에서는 고정관념에 대한 슈티르너의 이야기를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아, 자네 머릿속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네(Mensch, es spukt in Deinem Kopfe). 자네는 미쳤네!(Du hast einen Sparren zu viel) 너는 위대한 존재물(Dinge)을 상상한다. 그리고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신들의 모든 세계, 네가 어떤 것에 천직인 정신의 왕국, 너에게 손짓하는 이상(Ideal)을 마음에 그린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종의 고정관념(fixe Idee)을 가지고 있다네!(46)

 

그가 ‘고정관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을 복종시켰던 하나의 관념(Idee)이다.”이고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Tugend)이다.”(46) 나아가 “어떤 생각을 불어넣었던(sich in den Kopf gesetzt) 것”을 고정 관념(fixe Idee)이라고 부르고 있다.(80)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그들의 머릿속에서 유령으로 출몰한다(spukt). 가장 괴롭히는 유령(Spuk)은 인간(der Mensch)이다.”(80) ‘그 인간’이라는 ‘유령’은 고정관념이고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다. 그리고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령을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헤겔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념(Begriffe)은 도처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삶을 규정하고, 지배한다.”(104) “언어 혹은 ‘말’은 우리를 가장 과격하게 전제적으로 다스린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에 반대하여 고정 관념이라는 어떤 완전한 군대를 세우기 때문이다.”(389) 또한 “고정 관념은 ‘근본명제, 원리, 입장’ 등과 같은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낯선(fremd) 입장이 바로 정신, 이념, 생각, 개념, 본질 등의 세계이다.”(67)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개념규정(Begriffssatzungen)에 따라 살아가도록 강제되었다.”(105)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개념규정을 비판하면서, 개념이 ‘유일자’, ‘에고이스트’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소유가 약화되는 곳에서, 그것이 중지하는 곳에서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이 시작되고 어떤 목적은 고정관념이 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66]바로 어떤 목적이 우리가 소유자(Eigentümer)로서 뜻대로 행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유(Eigentum)를 중지하는 그 곳에서 시작한다. 그 경우에 어떤 목적은 하나의 고정된 목적이거나 하나의 고정 관념이 된다.

 

슈티르너가 고정관념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삶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 대부분 신문들의 모든 바보 같은 쓸데없는 말은 도덕, 적법성, 기독교 정신 등등의 고정관념으로부터 고통 받는(leiden) 바보들의 끊임없는 수다가 아닌가?”(47) 슈티르너는 분명히 이러한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끼치는 억압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앞서 슈티르너가 탈신성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라고 주장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현대의 영혼 상태로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방식이다. 곧 우리가 고통받게 만들고(Leiden-machen), 고통스럽게 놓아두고(Leiden-lassen),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들고(Sich-leiden-machen),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Sich-leiden-lassen)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해결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Seelenstnde Psychoanalyse) 슈티르너에게 ‘고정관념’은 고통의 원인이다. “어떤 참된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를 찾으려고 애쓰고 찬양한다.”(397)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지배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정관념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우리가 스스로 고통받게 만든 것이고, 이 고정관념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게 놓아두는 것이며,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하늘을 자신들에게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천국의 입장을 확고하게 그리고 영원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류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칠 줄 모르게 필사적으로 싸웠다.”(67)

 

 

  1. 고정관념에 대해 의심하라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한 고통으로부터 저항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태도는 의심하는 것이다. 곧 고정관념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가 유일자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유일자고 선언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을 자신보다 더 높은 본질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아님’이라고 신성모독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문마다 정치기사로 가득한 것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언젠가 비판의 날카로운 칼을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놓으려 하지 않고, 노복(奴僕)은 노복 근성(Untertanentum)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자유주의자는 ‘인류’ 등등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미친 사람의 그릇된 생각처럼 확고한 그들의 생각들은 단단한 토대에 서 있다, 그리고 저 생각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신성한 것을 공격한다! 그렇다, ‘고정관념’, 그것은 참으로 신성한 것이니까!(47)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의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곧 도시(polis)를 자연적 사실로 보고 도시 안에서의 삶을 정치적 동물로 파악하면서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기존의 공동체의 삶에 대해 의심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에고이스트의 연합’을 구성하길 원한다. 그리하여 연합은 교류, 상호성(Gegenseitigkeit)이고 자유의 확대이며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존의 ‘생각들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의심하면서 살고 있는가? 과연 이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너무나 뻔한 질문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의심하며 살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슈티르너는 고정관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여 그 신성함에 대해 모독을 하길 원했고,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했기에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편협 고루한 종교적 견해를 종교적 입장의 또 다른 측면, 곧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다(eintauschen). 예를 들어 우리는 더 이상 “신은 사랑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거룩한 것이다”라는 술어의 자리에 동일한 의미인 “신성한 것이다”(heilig)라는 말을 대신한다면, 상황은 모든 낡은 것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것에 따라서 사랑은 인간에게 선한 것, 선한 것의 거룩함(Göttlichkeit), 인간에게 명예를 만드는 것, 인간의 참된 인간다움(이것은 “그를 비로소 인간(Menschen)으로 만들고”, 비로소 그의 밖에 어떤 인간을 만든다.)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선한 것은 더 정확하게 다음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비인간적 인간(Unmenschliche)은 애정이 없는 에고이스트이다.”(51)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신은 사랑이다”에서 “사랑은 거룩한(göttlich) 것이다”로, 그리고 다시 “사랑은 신성한(heilig)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인간에게 인간적인 것이다”로 교환된다. 이렇게 되면 슈티르너가 보편적 추상성을 나타내는 ‘인간’과 구분하여 개별성을 강조하고자 사용하는 ‘자아’, ‘유일자’, ‘에고이스트’는 비인간적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맑스와 아도르노에게서도 교환Tausch, 교환가치Tauschwert는 자본주의 사회나 상품의 비밀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열쇠이다. 이것에 반대 측에는 사용가치, ‘즉자적인 사물이 갖는 질’(質), ‘불가공약적인 것’이다.(계몽의 변증법, 32쪽) 이런 맥락에서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도덕적 입장’으로 교환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모든 개별자는 ‘인간’ 혹은 ‘인간다움’으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다움 그 반대 측에 있는 사용가치는 ‘나다움’, ‘비인간적 인간’, ‘에고이스트’로 볼 수 있다. 나다움의 주장은 모든 나다움이 ‘인간다움’이라는 교환가치로 교환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과 교환되는 모든 ‘유일자들’의 비교될 수 없는 질적인 측면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다움’이 ‘인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슈티르너는 ‘나다움’이 ‘인간다움’의 실존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인간다움’이 ‘나다움’을 가능하게 하는가? 헤겔은 후자를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은 좋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데서 비로소 자기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법철학, 153절 보)

또한 위 글에서 논의되는 ‘인간다움’은 계몽과 연관하여 살펴볼 단어이다. 왜냐하면 계몽은 인간다움과 이성성의 원리들을 통해 규정되어 있으며 순수하고 고상하고 인륜적이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가들의 진보 이데올로기에 있어 계몽은 잠재적으로 역사적인 범주, 기획과 목표 개념으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계몽』, 31-32쪽 참조). 계몽이 인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면, 슈티르너는 인간다움을 지양하여 나다움(Eigenheit)을 지향하고 있다.

 

 

  1.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라

 

고정관념은 신성한 것이고 이것을 의심하는 것이 나다움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성한 정신은 절대적 관념으로 변신하고 다시 절대적 관념은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 등등으로 변신한다.

 

가지각색의 변신들(Wandlungen) 가운데 신성한 정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대적 관념’(absolute Idee)이 되었다. ‘절대적 관념’은 다시 다양한 굴절을 통해 서로 나누어져(auseinander) 인류애, 이성적인 것, 시민의 덕(Bürgertugend) 등등의 다른 종류의 관념을 만든다.(104)

 

슈티르너는 절대적 관념이 변신한 것들 가운데 ‘덕’(Tugend)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다움, 여성다움을 자신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다움’으로 인하여 고통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많은 고정관념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 아니라 ‘나다움’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남자다움(Männlichkeit) 혹은 여자다움(Weiblichkeit)과 같은 어떤 나의 특성((Eigenschaft) 고유성(Eigentum))일 뿐이다. 고대인은 사람들이 완전한 의미에서 남자(Mann)라는 그 점에서 이상(das Ideal)을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남자의 덕(Tugend)은 남성적인 힘(virtus)과 훌륭함(arete), 다시 말해 남성다움(Männlichkeit)이다.…여자는 ‘진정한 여성다움’(echten Weiblichkeit)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99)

독일어 Tugend는 virtus(남성적인 힘), vir(인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사물의 고유한 힘을 의미한다. 그런데 “ 인간(Der Mensch)은 단지 어떤 이상이고, 유는 오로지 어떤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Ein Mensch)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Menschen)이란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200) 슈티르너에게 ‘이상’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다. 그런데 “종교는 어떤 이상(Ideal)의 고정(Fixierung), 어떤 절대적인 것의 확정으로 존재한다. 완전성은 ‘최고의 선’이고, 선의 끝(finis bonorum)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이상은 완전한 인간, 참된 인간, 자유로운 인간 등등이다.”(269) 우리는 이미 고정관념이 “어떠한 비난도 허용되지 않는 미덕”(46)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 곧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노력했던 ‘니농’(Ninon)에 대해 언급한다. 먼저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조롱(spott),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두 탈신성화를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잠시 니농 드 랑클로(1616∼1705)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성인데, 직업은 ‘코르티잔(Courtesan, 고급 창부)’으로 알려져 있다. 15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하급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고급 창부의 길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현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이태리어, 스페인어, 수학과 철학 등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유머와 센스를 겸비한데다 우아한 외모도 갖췄다고 한다. 루이14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조언을 들었고, 볼테르도 그의 살롱에 출입하는 단골 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불공평함을 극복하기 위해 남성 우월주의가 만든 모범적 삶과 탕녀의 고정관념을 바꿨다. 슈티르너도 이러한 그의 모습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는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렸다.” 니농 드 랑클로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보다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사랑은 굶주림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화불량으로 죽는 경우는 많다.”(코르티잔, 매혹의 여인들, 수잔 그리핀 지음, 노혜숙 번역/해냄출판사)

 

 

  1. 비아(Nicht-Ich)라는 실체에 비굴하게 굴지 말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의심하라, 그래서 나다움의 가치를 끌어올려라

 

“비아(Nicht-Ich)라는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엄청난 가격을 지니고 있는 한, 나의(Meiner)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을 것이다. 비아는 나에 의해 소비하고 흡수되기에는 여전히 너무 거칠고 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를 완전히 먹어 없애지 않으므로, 기생생물이 신체에서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것(Unbeweglichen)에, 다시 말해 이러한 실체(Substanz) 주변에서 대단히 부지런히 비굴하게 굴뿐이다.”(72)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비아는 신과 같이 파괴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아는 국가, 사회로 볼 수 있다. 슈티르너는 또한 사회를 실체로 간주하는 것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실체(Substanz)를 다치지 않게 해야만 하고 신성하게 유지해야만 한다.”(343) 실체에 대한 잠시 살펴보자. 최초의 존재자를 ‘자기 원인’, 곧 신(theos)이라고 보고,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이므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 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데카르트, Principia Phil, 1, 57)이라는 의미에서 ‘실체’(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재) 존재자’(ens realissimun)라고 불리 운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실체의 개념을 ‘자족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실체라는 것은 마치 기생생물이 바로 그 신체의 체액으로부터 양분을 배양하듯이, 사람들이 그러한 실체에 대해 비굴하게 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비아’는 소비해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비아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체로 보이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신성한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포’되어야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인 것’(Wesentliches) 혹은 ‘실체적인 것’(Substantielles)은 아무것도 변화(Veränderung)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72) 독일어 Wesen은 ‘본질’을 뜻하는 라틴어 essentia가 어원이다. 이 말은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ousia의 번역어인 라틴어 esse에서 유래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1)부수적인 성질의 반대말로 어떤 존재의 항구적인 본성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 점에서 ‘실체’와 가깝다. 나의 것이 비아의 것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국가가 자아(das Ich)로 존재하는 한, 개별적인 자아는 일종의 가난한 악마, 어떤 비-자아(Nicht-Ich)로 남아야만”(280) 한다.

그는 욕망(Begierden)이 ‘고정되어(fix)’서는 안 된다.(67)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나의 소유 스스로가 고착되어 하나의 ‘고정된 이념’ 혹은 하나의 ‘병적 욕망’(Sucht)이 될 수 있기 이전에 그것을”(157) 삼켜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고정관념은 병적 욕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폐욕망(Geldgier)으로부터 화폐욕망의 노예만을 자유롭게 한다.”(374)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해 ‘노예화된 본성의 한탄(Jammer)을 경청’하라고 한다.(68) 화폐욕망은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맑스는 이러한 화폐의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으로 만들어 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독단론자과 비판가를 구분하는데, “비판가는 항상 사상에서 출발하지만, 그러나 그는 원리적인 생각을 사유과정(Denkprozess)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생각을 고정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단론자와는 차이가 있다.”(162)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유일자는 비판가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의심하는 자이다. 나아가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311)은 유일자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함께 쓰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곧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elung) 등도 유일자의 덕목임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래서 그는 “나의 가치, 곧 나다움이라는 가치를”(279) 끌어 올려라! 그런데 “내가 나다움(Eigenheit)을 나에게 마련해 주는 만큼 내가 그만큼만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다.”(184)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자기 해방’(Selbstbefreiung)이기 때문이다.

자기해방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⑫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트라쉬마코스와 대화(336b~354c)

 

* <국가> 제1권이 제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마주해야할 도전들을 담고 있다면 트라쉬마코스가 던지는 문제는 그 도전의 핵심에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하고 있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그의 주장이기 이전에 이미 당대 소피스트들과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널리 팽만해있었던 정의관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타파하려는 근본 표적은 트라쉬마코스가 아니라 소피스트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트라쉬마코스가 등장인물로 설정된 것은 <국가>의 대화상정시기인 기원전 420년 전후해서 그가 아테네에서 활동한 가장 저명한 소피스트들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소피스트들인 것이다. 플라톤이 얼마나 소피스트를 의식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대화편들 중 상당수가 소피스트 혹은 소피스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문제의식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할 과제이자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소피스트들의 사상 전체를 살피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만 소피스트들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므로 여기서는 그 점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 우선 ‘소피스트’라는 명칭은 어떤 동일한 사상을 공통으로 내걸고 나선 어떤 특정 학파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일찍이 아테네에 존재했던 일군의 지식인 계층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 말은 의미상 ‘지혜로운 사람(sophistē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이는 일상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는 일찍이 현인(sophos)이란 말이 있었지만 통상 그 말이 소피스트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아테네에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군 즉, 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소피스트들은 특정 시대, 특정 부류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기존의 지식인 세력이 시인(poiētēs)들이었다면 소피스트들은 신흥 지식인 세력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시기적으로도 기원전 5세기 내내 아테네가 민주정 체제로 거의 굳어지면서 그 시대의 수요에 따라 나타났다가 4세기 말 아테네가 쇠망기에 접어들자 점차 사라져 버린 직업적인 교사들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의 어떤 정황들이 그들에 대한 수요를 불러 일으켰을까? 주지하다시피 아테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중 유일하게 5세기에 접어들면서 한 세기를 지속할 정도로 민주정이 거의 확고할 정도로 자리 잡은 나라였다. 특히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이래 급격하게 진행된 상업화와 국제화는 오랜 동안 농업 중심적인 사회를 지탱해오던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들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그 때까지 귀족 중심으로 그들의 자의에 따라 운영되던 정치체제 또한 민중의 정치 참여 비중이 커짐에 따라 민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요구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민중들 또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데다가 사회경제적으로도 상업화에 따른 개인 간의 이해관계가 전에 없이 다양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개인 간 갈등과 소송도 급격하게 증대되었고 그 만큼 그들에게도 민회에서건 법정에서건 자기 의견을 표출하거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능력이 크게 요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들을 보다 세분화시킴과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적용시키기 위한 다양하고도 새로운 방법과 관점들을 양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곧바로 아테네인들에게 논쟁과 연설 능력이라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시켰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아테네인들의 수요에 부응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아테네의 담론 시장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 물론 논변과 연설 능력의 향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민주정의 발전을 위한 토대이자 인간의 이성 능력의 바람직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아테네의 영화(榮華)를 발판으로 창출된 그러한 수요가 불행하게도 아테네가 곧이어 쇠망기를 맞게 되면서 오히려 아테네의 분열과 멸망을 가속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는 점이다. 아테네가 쇠망기에 들어선 5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테네인들이 추구한 논쟁술의 향상은 공동체의 보전과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논쟁과 설득에 기여하기 보다는 각자도생과 자기의 이익을 실현하는 도구로 활용되었고, 특히 권력이야말로 그러한 이익을 실현하는 최고의 방편임을 알고 있는 엘리트 집단일수록 탁월한 논변과 연설의 기술은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었다. 그야말로 아테네는 소피스트들에게 자신들의 입지와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웬만한 권력가들 집에는 늘 소피스트들로 북적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소피스트들은 증대된 수요에 발맞추어 더욱 정교한 반론술(antilogikē)과 쟁론술(eristikē)을 발전시켜갔고 어떻게든 소송의뢰인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기존의 관습과 규범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과 방법을 찾아내는데 힘을 쏟았다. 소피스트들의 생각과 활동이 개별적이고도 다양한 양태로 수행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상을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통상 그들의 사상적 특징을 ‘인간에 대한 관심’, ‘논리와 언어에 대한 관심’, ‘상대주의적 관점’, ‘퓌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의 분리’ 등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수행한 일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간사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들인데다가, 논쟁이나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상대방의 입장을 상대화하여 깎아 내리고 자신의 입장은 정당화하여 부각시키는 방법과 논리와 관점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날 고액의 변호사일수록 보다 정교하고 교묘한 논리로 자기 소송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법률에 대한 기상천외한 해석을 창출해내는 양태와도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의 상당수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외지인들(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와 트라쉬마코스는 각각 시칠리아와 칼케돈에서 외교 사절로 왔다가 시대 조류를 간파하고 아테네에 눌러 앉은 사람들이고, 프로디코스는 케오스, 힙피아스는 엘리스, 안티폰은 람누스 출신이다)인데다가 모두가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들도 아니었음을 고려하면, 일단 그들로서도 그런 일을 적극적인 생계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그러나 아테네의 급격한 상업화와 제국화가 전체 그리스 사회를 해체하는 근본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플라톤으로서는 그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주도하는 정치 세력은 물론 그것에 영합하여 무책임하게 자기 이익을 좇는 소피스트와 같은 군상들이야말로 반드시 비판 극복되고 타파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활동이 실제로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일이었음에도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지혜와 지식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는데다가, 가르침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 또한 고의건 아니건 간에 당대 기득권 세력들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선동의 기술과 논리로 활용되면서 민중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급기야 아테네의 진정한 친구이자 ‘지혜로운 사람’인 소크라테스를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 여기서도 트라쉬마코스는 정의와 관련하여 그러한 피폐한 기득권 세력을 지지하고 합리화하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앞으로 제기될 트라쉬마코스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현실을 압도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러한 주장이 그 자체로 ‘온 몸과 영혼이 썩고 병들어 있음에도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외치는 어리석은 주장’임을 간파하고 있고 그에 따라 세상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동의할 수도 지지될 수도 없는 무지로 가득한 거짓된 주장임을 역설하고 있다.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그러한 역설(力說)의 서론이자 발판이 된다.

* 아무려나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소피스트를 바라보는 플라톤의 시선은 일부 사안의 경우를 제외하면 아주 확고하고 매서울 정도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피스트하면 ‘궤변가’로 떠올리는 것도 기본적으로 소피스트에 대한 플라톤의 시선이 갖는 영향력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도 분명 소피스트들은 당대 아테네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처럼 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할만한 근거는 분명하고도 설득력 있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소피스트의 사상이라고 모두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상을 시대의 아들로 보고 역사를 ‘자유에의 진보’로 해석하고 있는 헤겔(G. W. F. Hegel)은 그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철학사의 필연적 진보와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적인 사상으로 비판하고, 소피스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준비한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고전 철학자 케퍼드(G. Kerford)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철학사적 운동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면서부터는 소피스트 사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하려는 경향들이 생겨났고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 성과도 크게 진전되었다. 참고로 계기가 된 케퍼드의 저서 <소피스트 운동(The sophistic movement)>(김남두 역, 아카넷)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경향들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는 일단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

 

[336b]

* 드디어 <국가> 1권의 핵심인물의 하나인 트라쉬마코스가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를 지켜보며 수차례 끼어들려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화에 끼어든다. 우리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일정부분 논란의 소지가 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폴레마르코스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크게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목매고 있는 강자들의 입장을 소크라테스가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치 야수처럼,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 찢어 발기라도 하듯이 우리한테 넘벼들더군.’ 여기에서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라고 번역된 συστρέφω(systrephō, twist up, roll up)라는 동사는 사전적으로 ‘야수’(野獸)θηρίον(wolf 336d)에게 쓰일 경우, 야수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려 온 몸을 움 추려 들었다가 확 달려들기 직전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서의 야수는 아마도 늑대일 것이다.(336d 참고)

* ‘찢어발기기라도 하듯’ὡς διαρπασόμενος이란 표현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당대 주류 세력들과 소피스트들 그리고 아테네인들의 광기어린 폭력적 야수성을 묘사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는 ‘무서운 나머지 겁에 질려 있는’δείσαντες διεπτοήθημεν 반면에 트라쉬마코스는 큰 소리를 질러대며φθέγγομαι 저돌적이고도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대하는 트라쉬마코스의 태도는 논쟁에 임하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과격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무서운 나머지 놀라 질겁하며 크게 겁을 더럭 내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모습은 이 짧은 문맥에서 아주 눈에 띨 정도로 반복해서 묘사되고 있다. 어떤 독자들은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들의 폭력적이고도 무례한 모습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대조의 방식을 취했을 것이라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 플라톤이 왜 소크라테스를 의연하게 그려내지 않고 트라쉬마코스 앞에서 ‘무서운 나머지 겁에 질려하고’(336b) ‘들으며 질겁하고 바라보며 겁을 더럭 내고’(336d) 게다가 ‘약간 떨면서’(336e)까지 말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해준다. 사실 어느 누구도 폭력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을 앞둔 순교자는 물론 소크라테스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를 보여줌과 동시에, 질겁하여 겁이 더럭 날 정도로 정말 무섭고 두려운 처지에 있을지라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비록 두렵고 무섭지만 소크라테스는 결코 굴복해서도 포기해서도 안 될 진리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 즉 앎의 문제인 것이다. 아기를 구하려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세상 어머니들 모두는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음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조폭들의 용기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큰 힘에 굴복하는 비굴함의 다른 표현이다. 진정한 용기는 참된 앎이고 그것이 참된 앎인 한 반드시 실천을 수반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도덕은 앎’이다.

 

[336c]

*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아래와 같은 묘사 또한 과격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다. 허튼 소리φλυαρία(336b), 어리석은 짓εὐηθίζομαι(336c), 실없는 주장ὕθλους λέγειν(336d)

* 트라쉬마코스는 소리를 지르며 소크라테스에게 허튼 소리에 매달려 서로 양보하면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런 연후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신다βούλει εἰδέναι면 ‘묻기만 하지도 논박하고서 뽐내려고만 하지도 말고’μὴ μόνον ἐρώτα μηδὲ φιλοτιμοῦ ἐλέγχων 대답 보다 질문이 쉬우니 질문 대신 정의에 대해 답을 하라’고 요구한다. 소피스트들의 논박은 명예욕(φιλοτιμη)때문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 여기서 ‘양보하다’로 옮긴 동사 ὑποκατακλίνομαι(hypokataklynomai)는 ‘양보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트라쉬마코스가 힐난의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말이 갖는 일차적인 의미를 살려 ‘서로에게 굽신거리며’로 옮기는 것이 보다 좋을 듯싶다. 336c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338a에도 ‘양보를 하고서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곳의 원어는 앞의 말과는 다른 ‘받아 들인다’의 의미를 갖는 συγχωρέω(synchōreō) 동사이다.

* ‘대답하는 것보다 질문하는 게 더 쉽다’ὅτι ῥᾷον ἐρωτᾶν ἢ ἀποκρίνεσθαι. 이처럼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은 대답을 잘 하는 사람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저 질문만 하는 학생 수준으로 폄하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처럼 일반적인 학습 수준에서는 선생은 대답을 잘 하는 것이 덕이고 학생은 질문을 잘 하는 것이 덕이다. 그러나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수록 질문은 치열하고 끝이 없으며 질문과 대답 모두 결코 쉽지 않다. 수십년을 홀로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선사들에게 답을 못하고 질문만 한다고 힐난할 수는 없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질문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우선은 자신의 무지를 숨기지 않고 고백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 무지를 벗어나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그러한 열망과 용기에 대한 보답이자 그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다. 철학의 정신은 섣부른 확신과 비약을 거부하고 불확실한 독단과 아집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자 의심이다. 물론 결단해야할 순간마저 끝없이 질문만 던지는 것도 철학의 정신은 아니다. 그 결단의 순간을 알고 미련 없이 결단을 감행하는 것 역시 철학의 정신이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무지의 지’를 설파했지만 그는 죽음을 무릅써야할 순간을 알고 있었고 미련 없이 그 죽음을 받아 들였다.

 

[336d]

* 트라쉬마코스는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마땅한δέον 것, 유익한것, 이득이 되는 것, 이로운 것, 이익을 주는 것 등으로 대답하지 말고 ‘분명하게 정확하게’σαφῶς καὶ ἀκριβῶς 답해 달라고 윽박지르듯 말한다.

* 트라쉬마코스가 나열한 ‘마땅한δέον 것’은 앞서 나온 ‘마땅히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의 다른 표현이고, ‘이득이 되는 것’τὸ λυσιτελοῦν, ‘이로운 것’κερδαλέος, ‘이익을 주는 것’συμφέρον 또한 앞서 나온 ‘유익한ὠφέλιμος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 말은 모두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들이다. 트라쉬마코스가 보기에 소크라테스가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과정에서 정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들은 단계마다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그게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338c) 정의에 대해 대답해달라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도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이라는 말을 써서 답을 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문맥을 잘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가 불분명하고 부정확하다고 불평을 터트리는 까닭은 ‘정의가 이익’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정의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소크라테스 자신 그 이익이 ‘누구의’ 이익인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쉬마코스 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의는 이익이되,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336e]

*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듣고 질겁ἐκπλήσσω하여 겁이 더럭 났다ἐφοβούμην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보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를 보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그 말은 ’사람이 늑대를 보기 전에 늑대가 사람을 먼저 보게 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당시의 미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 말은 아테네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를 늑대 같은 자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 플라톤은 <소피스트>(231a)에서 늑대 이야기를 꺼내어 개와 비교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의 유사성을 거론하고 있다. 늑대와 개는 비슷하지만 늑대는 분별없이 가장 사납기만 한 동물이고 개는 사납지만 길들여져 분별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사람에게 가장 위해를 끼치는 것은 무지한 자인지 여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자들로부터 오기 보다는 언뜻 분별이 어려운 아류들 즉 내 곁에서 비슷한 짓을 하는 자들로부터 온다. 소피스트들은 진짜 무지하고 야만적이지만 겉으로는 철학자인 양 가장하여 대중들 곁에서 그들의 생각을 좀먹고 있다. 마치 거울의 상이 실물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물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이듯이 소피스트는 철학자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자들인 것이다. 참고로 플라톤은 앞으로 우리가 살필 제2권 375c에서 수호자의 자실을 개의 본성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소피스트>. 이창우 역주, 59쪽 참고)

* 소크라테스는 황금을 찾을 때도 서로 양보하지 않고 찾는데 그 보다도 더 귀한 정의를 찾는데 서로 지각없이 양보하며 일을 망치려했겠냐 그리 생각하지 말고 다만 능력δύναμισ 이 미치지 못해 그런 것이니 유능한δεινὸν 당신이 가혹하게 대접하는 것χαλεπαίνεσθαι 보다 동정을 베푸는 것ἐλεεῖσθαι이 더 합당할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황금만을 쫓는 소피스트들의 태도는 진리를 쫓는 철학자들의 열성에 아에 근본적으로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논파한 후 그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 동정어린 눈길을 보낸다.

* ‘유능한’δεινὸν은 ‘능력 있는’ ‘똑똑한’의 의미도 있지만 ‘두려움을 안길 정도로 힘센’의 의미도 있다.

 

[337a]

*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깨달음(무지의 지)에서 출발하는 질문(ἐρωτᾶ)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문답dialogos을 통해 상대의 무지를 짚어내 그 무지를 깨우쳐주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여 논박ἔλεγχος으로 불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만 보면 논박을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무지가 들통 나 부끄럽기도 하고 상대가 답을 빤히 알면서도 시험 삼아 질문하는 것처럼 여겨져 시치미 떼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나 웬만한 것은 다 안다고 교만을 떠는 소피스트들로서는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그저 질문만 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가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그러한 화법을 상투적인εἰωθυῖα 시치미 떼기εἰρωνεία(eirōneia, irony))라고 비난하는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상대로 하여금 앎에 대한 보다 강렬한 열망을 갖게 하고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소크라테스 특유의 토론 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무지의 지(知)’가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계기로 참된 앎을 향한 탐구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 후 역설(逆說)을 함축하는 아이러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εἰρωνεία(eirōneia)를 시치미로 볼 것인가 진리탐구의 한 양태로 볼 것이냐는 문답과정에 참여하는 마음가짐과 목적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에 달려 있다할 것이다. 복종이란 이름을 가지고 명예로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진리에 대한 복종’뿐이다. 철학자는 오직 진리에 복무하고 진리에만 복종할 의무를 갖는다. 에이로네이아로 표상되는 소크라테스의 겸손은 위장된 겸손이 아니라 위와 같은 진리 앞에서의 겸손인 것이다.

*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혹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라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무지의 지를 내세워 상대방의 주장의 허술함을 폭로하는데 힘을 썼을 뿐 자신의 생각은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그 전모를 너무도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스승 소크라테스의 논구를 있는 그대로 되살려 내어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읽어내려 했고 그러한 일을 거듭하면서 차츰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하나 둘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기 대화편에서 중후기 대화편으로 이행되면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조금씩 펼쳐지는 적극적인 주장 내용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드러내려는 플라톤의 치열하고도 열정어린 탐구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것들이 소크라테스의 원래 생각을 담아낸 것인지 아니면 플라톤 자신의 생각에 불과한 것인지는 정확히 분간해낼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플라톤은 이제 더 이상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무지의 지’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고,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려 한다는 점이다. 마침내 플라톤은 서서히 고뇌어린 탐색의 시간을 보낸 후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어서서 시대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의 적극적이고도 새로운 지적 여정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국가> 제1권은 그 자신의 그러한 지적 도전과 이행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전기 대화편의 모든 특징들은 물론, 점차 그곳에서 벗어나는 모습들을 함께 보여주면서, 제2권 이후의 논의가 <고르기아스>, <파이돈>, <에우튀프론>, <프로타고라스>, <향연>, <라케스> 등에서 살피고 모색한 내용들을 종합하고 거기에 새로운 주장을 더해가는 형식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톡,톡,씨네톡]

 

이 글은 2018년 5월 9일 이대 철학과 영화제에서 상영한 <토지와 자유>를 보고, 20분 정도 스페인 혁명의 사상적 의의에 대해 발표하고, ‘예스터데이’ 뒤풀이 자리에서 간략하게 토론한 글을 수정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上)

이규성(한철연 회원,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

 

어느 누구도 하나의 섬은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대지의 한 조각, 이 땅의 한 부분.

어떤 사람의 죽음 이건 나의 생명을 줄이는 것,

나 스스로 인류의 하나이기에.

그러므로 묻지를 말라.

누구를 위해 조종을 울리느냐고.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John Donne의 기도문(For whom the Bell tolls). / 헤밍웨이,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題詞]

 

  1. 파리코뮌과 스페인 혁명전쟁

 

스페인 내전(1936~1939) 기간에 있었던 무정부주의 혁명은 파리코뮌(1871)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민중이 자신의 해방을 쟁취하여 자유와 평등을 실현해본 사건 중의 사건이다. 양자 모두 전쟁과 혁명이 결합되어 있었다. “전쟁은 혁명의 원동력(locomotive)”(마르크스)을 제공해 왔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혁명은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 주둔 군부가 선거에서 이긴 민주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도처에서 학살극을 벌이면서 스페인에 진군하자 이에 민중이 봉기하여 일으킨 혁명전쟁이었다. 혁명전쟁은 인류 사상사에서 <우리는 생각한다>는 집단 지성의 필요성과 의의를 환기시킨다. 그 전쟁을 통해 우리의 양심의 승패가 시험받기 때문이다. 혁명전쟁과 유사한 상황은 민주제가 안착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광주항쟁을 유발한 한국의 군사 쿠데타와 같이 정황이 되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숭상하는 박근혜 정권도 많은 사람의 우려와 같이 촛불시위를 타도하기 위한 은밀한 쿠데타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리코뮌을 보자.

 

파리코뮌은 독일(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독일군에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 파리 시민이 봉건 귀족세력과 지배적 부르주아 계급에 봉기하여 만든 직접민주 공동체이다. 이 체제는 두 달간의 짧은 시기이지만 최초로 주요 생산 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라는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민주주의 혁명파와 기존 지배세력(토지 귀족과 상공업 부르주아) 간의 근 100년간의 피 튀기는 투쟁 이후 제3공화국(1870~1940) 하에서의 1875년 헌법이 제정되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헌정체제로 안착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귀족도 자유주의 흉내를 내야 했음)와 혁명적 민주주의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다. 한국에서는 원래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헌법에 없었으나, 독재를 옹호하는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로 남용되었다.1)  혁명파의 공화주의 정신이 반영된 프랑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철학적으로는 다수성과 통일성 간의 타협을 의미한다. 프랑스 제3공화국 헌정체제에서 다수성이라는 수와 통일적 일자 간의 대결이 의회 내의 논쟁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는 다수성이 초월적 통일성을 민중의 힘 안으로 내재화하여 그 억압성을 제거하는 실천을 통해 민중의 진리로 실현된다는 것이 자각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언급처럼 루소는 원래 지배자의 권리를 의미했던 주권이라는 말을 민중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시켰다. 점차 <다수성>이 정치적 진리로 부상한다. 이 진리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파리코뮌과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에서 섬광처럼 드러났다. 이 빛을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 표현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말은 원래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가 ‘인간’, ‘국가’ 등과 같은 추상적 보편자를 거부하고, ‘특수한 개체들(singularity)’의 사회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었는데,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했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Popup.nhn?movieCode=17874

파리코뮌은 파리시민이 농촌과 괴리된 상태에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연대를 실현했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인민전선가운데 혁명의 최대 세력이었던 자생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도시에서는 산업체의 노동자 경영, 농촌에서는 토지의 공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무정부주의 ‘전국노동연합(CNT)’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 당(POUM)’이 있었는데, 이 조직에 헤밍웨이, 오웰과 같은 문인들, 켄 로치(Ken Loach) 감독 《토지와 자유》에 나오는 데이빗도 가담한다. 그의 여자 친구는 담대한 자발성을 보여줌으로써 무정부주의적 인간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이 가담한 ‘포움’ 조직도 반스탈린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다. 이에 반해 스페인 공산당은 소련의 코민테른 조직의 일부가 되어야 했으며, 외국에서 참여한 ‘국제여단’도 소련의 코민테른 산하의 공산주의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다 한다. 이들은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 토벌 대상으로 규정하게 된다. 러시아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앙 집중적 권력 조직인 당이 국가와 인민을 대표한다는 대표성(representation)을 숭상했다. 무정부주의는 민중의 직접적 참여성과 자발성(spontaneity)을 숭상하기 때문에 이를 용인하지 않는 스탈린주의와 대립했다.

 

파리코뮌을 엥겔스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도 묘사했다. 이는 대다수 인민이 극소수의 지배세력을 억제하고 주권을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도 인민, 시민, 프롤레타리아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의 무정부성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른바 중앙 지도체제를 갖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제기한다. 훗날 레닌주의는 그 인민독재론을 엘리트 당 조직의 영도아래 공산사회로 가는 역사의 객관적인 과도 단계로 설정한다. 레닌주의는 당 조직의 민중 대표성과 초월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민중의 자발적 자각성을 의문시하여 억압하고, 민중과의 변증법적 소통능력을 상실하는 단점을 갖는다. 스페인 내전 기에 무기 원조를 통해 개입한 모스크바 중심의 국제공산주의(코민테른)는 중앙 집중제에 의거한 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와 같은 자생적 급진주의 운동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정책을 썼다. 《토지와 자유》라는 영화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무정부주의 혁명 노선의 관점에서 당시 스탈린주의 조직과의 대립을 그렸다.

 

스탈린 지배하의 코민테른은 1920년에서 1930년대 중국혁명 과정에서도 공산당과 파시스트 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약세의 공산당을 유지하고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정책을 썼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인 진독수(陳獨秀, 1879~1942)가 민주주의를 주장하다가 우경 기회주의로 몰려 축출되어, 지금까지 복권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페인 공산당도 대외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와의 대립을 원치 않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한 우파 정당과의 노골적 대립을 원치 않았다. 사회개혁에서도 코민테른은 급진적 사회화를 반대하고, 부재지주 이외의 토지 몰수와 재분배를 반대했다.

 

스페인 내란기의 혁명 운동에서 좌파 세력의 분열은 혁명 실패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적 저항세력의 민중적 순수성은 그 후 모든 저항자들과 문학 및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민중성을 결여한 니체주의적 탈근대주의 철학은 이러한 지적 원천을 경시함으로써 체제내적 이데올로기로 편입되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개체의 욕망 해방이 연대적 활동성과 분리될 때, 민중적 민주주의는 이기적 합리주의(신고전경제학의 기본 전제)의 세련된 문화적 쾌락주의에 흡수되고 만다는 것이 오늘의 교훈일 것이다. 자유를 향한 욕망의 실현에 충실할 것을 명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 즉 인간현실이라면 바로 이 현실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실재일 수 있다. 수많은 문학 작품이 보여주듯 자유에의 욕망이라는 이 실재성에 충실한 도덕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저항과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도덕이 진정으로 신성한 내적인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이 양심을 부인하도록 하는 모든 체제는 인성 모독이다. 종교가 이러한 인성을 모독한다면, 스페인 혁명기의 가톨릭처럼 총통의 편에서 민중을 살해하는 신성모독의 광기를 행하는 것에 접근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1948년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은 없다. 1972년 제7차 유신헌법으로의 개헌에서부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첨가된다. 이 말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용어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다음은 1987년 대한민국헌법 전문(12월 29일 9차 개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 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스페인 내전과 자유에의 욕망(下)에서 계속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⑪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3(334c~336a) : 정의와 훌륭함()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 폴레마르코스는 아직도 소크라테스의 논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주관적 생각 수준에서 규정된 친구와 적 개념을 실제의 친구와 적으로 일정 부분 객관화한 후,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ὴ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검토한다. 이 부분이 이제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한다.

 

[334c]

* 소크라테스는 먼저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하고 있는 친구와 적의 개념이 과연 정의 규정에 합당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각’δόξα(doxa)이 갖는 주관적 성격 때문에 실제로는 선량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여’ἁμαρτάνουσιν 선량한 이로 생각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잘못 판단할 경우, 좋은 사람이 적이 되고 나쁜 사람들이 친구가 되어 결국 ‘정의란 못된 사람들을τοὺς πονηροὺς 이롭게 하는 것ὠφελεῖν,이고 좋은 사람에게는τοὺς ἀγαθοὺς 해롭게 해주는 것βλάπτειν’δ이 된다는 것이다.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이 여기서는 ‘좋은ἀγαθος 사람’이란 표현으로 바뀌어 있다.

 

[334d]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 ‘좋은 사람’을 또 ‘정의로운 사람’으로 등치시킨 다음, 그것을 토대로 만약 사람들이 친구와 적을 잘못 판단할 경우, 사람들은 결국 ‘정의로운 사람들을 나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정의’라는 자기 당착적인 결론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친구 개념을 ‘실제로 선량한χρηστός 사람’에서 ‘좋은ἀγαθος 사람’으로, ‘좋은 사람’에서 ‘정의로운δικαίος 사람’으로 점차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선량한’으로 번역된 원어 χρηστός(chrēstos)는 앞서(332e) 정의의 쓸모를 다룰 때 ‘소용 있는’의 의미로도 쓰인 말이다. 즉 그 말은 가치와 관련된 말이되 그 자체로 온전히 도덕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영역자(G.M.A. Grube) ‘good’이라고만 옮기지 않고 ‘good and useful’로 옮기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의 표현 바꾸기는 단순히 부연 설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객관성이 점차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선량한 친구’를 도덕적 가치와 객관성이 강화된 ‘정의로운 사람’으로 바꿔 말함으로써 친구 개념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정의와 관련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쓸모’, ‘좋음’, ‘정의로움’이 이미 하나라는 플라톤의 생각이 깔려 있다.

* 이에 따라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와 적 개념과 관련한 자기 생각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그 제서야 확연하게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소크라테스가 도출한 결론이 잘못된πονηρὸς 주장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해롭게 해주되, 정의로운 사람들에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τοὺς ἀδίκους ἄρα δίκαιον βλάπτειν, τοὺς δικαίους ὠφελεῖν인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는 그것이 한결 나은καλλίων 주장인 것 같다고 답한다. 이로써 친구와 적 개념은 일단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딱히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 결국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자기처럼 이해할 경우 위와 같은 자기 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334e]

* 그런데 사람들 중엔 폴레마르코스처럼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친구와 적을 ‘아주 잘못 판단해온’διημαρτήκασιν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친구들이 못된 자들이니까 해롭게 해주고, 적들은 좋은 자들이니까 이롭게 해주는 것이 정의롭다는 귀결이 따르게 될 것συμβήσεται’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결국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적으로는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τοὐναντίον로 말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에는 흥미롭게도 ‘아주 잘못 판단해온 사람들’ὅσοι διημαρτήκασιν 굉장히 많다’라는 사실판단이 마치 당연한 사실인 양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διημαρτήκασιν(diēmartēkasin)은 ‘아주 잘못 판단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διαμαρτάνω(diēmartanō)의 현재완료형이다. 원문은 ‘아주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경우’라는 일반 조건이 아니라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 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다’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 말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실제 현실에서 정반대가 되었다’는 결론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내용임에도 폴레마르코스조차 전혀 이의를 달고 있지 않다. 아마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썼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아테네 사람들πολλοι이 ‘아주 잘못 판단하여’ 진정 그들의 참된 친구이자 아테네를 위해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시대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그것도 자칭 정의의 이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시모니데스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로 귀결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폴레마르코스는 자신과 사람들 모두가 친구와 적을 옳게 규정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을 고치자μεταθώμεθα고 제안한다.

 

[335a]

* 즉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를 ‘선량하다고 생각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선량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적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적용하자고 요구한다. 그리고 친구는 ‘좋은 사람’ὁ ἀγαθὸς, 적은 ‘못된 자ὁ πονηρός’라는데도 동의를 표한다. 그리하여 정의는 폴레마르코스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좋은 친구τὸν ὄντα φίλον는 잘 되게 해주되, 실제로 못되고 나쁜κακὸν 적은 해롭도록 해주는 것’으로 수정된다.

* 그러나 폴레마르코스는 여전히 앞에서(334d) 친구와 적이 각각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대체된 것이 갖는 의미, 즉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을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으로 객관화하여 정의 관련 논의에 합당한 개념으로 전환시키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서 친구와 적 개념 정도만 수정하려는 폴레마르코스를 향해 정의의 의미규정에 그저 ‘덧붙이는 것’προσθεῖναι 정도를 요구한다κελεύειν고 다소 핀잔 섞인 말을 던진다.

 

[335b]

* 이에 따라 친구와 적의 개념은 ‘실제로 친구인 사람’과 ‘실제로 적인 자’로 수정된다. 물론 수정된 규정 역시 불완전한 정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것으로 논박이 또 한 단계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들 즉, ‘1)친구와 적, 2)이롭게 하는 것(좋게 하는 것), 3)해롭게 하는 것(나쁘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개념들 가운데 두 번째 것은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332b~334b) 검토되었고, 첫 번째 것도 바로 앞에서(3334b~335a)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 번째 것이 남아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정의가 ‘누군가를 해롭게 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검토를 위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 즉 덕(德 ἀρετή) 개념을 끌어 들인다.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인간적 훌륭함’(德 ἀρετή)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정의관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의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도 아직은 그 개념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논의가 앞으로 전기 대화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미 결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세 번째 것을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어떤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도 정의로운 사람이 하는 일인가’ἔστιν ἄρα, δικαίου ἀνδρὸς βλάπτειν καὶ ὁντινοῦν ἀνθρώπων;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어도 못된πονηρος 자들과 적들의 경우 해롭게 하는 것βλάπτειν이 마땅하다’고 답한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친구와 적 대신에 말ἵππος’과 개κύων를 끌어들여 말들과 개들이 해를 입으면βλαπτόμενοι 말과 개 각각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가 나빠지는지 좋아지는지를 묻고 폴레마르코스로부터 나빠진다χείρους는 대답을 끌어낸다.

 

[335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사람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인간적 훌륭함’ἀνθρωπείαν ἀρετὴν과 관련해서 더 나빠지게 된다”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되묻는 방식으로 ‘정의는 곧 인간적 훌륭함’ἡ δικαιοσύνη 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이라는 그 자신의 핵심 주장을 꺼내든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정의는 원천적으로 그 ‘인간적 훌륭함’으로 누군가의 훌륭함을 해쳐 그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누군가를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시가(詩歌)에 밝은 사람이 시가술μουσικῇ로 사람을 비시가적ἄμουσος으로 만드는 것이나, 승마에 능한 사람이 승마술ἱππικῇ로 ‘승마에 서투르게 만드는’ἄφιππος 것과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폴레마르코스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δύνατον 일이라고 동의를 표한다.

 

[335d]

* 차게 하는 것이 열(熱)θερμότης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써 사람들을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사람οἱ ἀγαθοὶ은 자신의 훌륭함ἀρετῇ으로 사람들을 나쁘게κακώς 만드는 것은 불가능ἀδύνατο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은 친구이든 다른 누구이든 간에 결코 훌륭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의 기능ἔργον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자 즉 부정의한ἄδικος 자의 기능”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335e] 그러므로 누가 ’정의란 각자에게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을 갚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정의로운 사람에 의해 적은 해를 입고 친구들은 이로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σοφὸς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진실을ἀληθῆ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정의가 아님이 우리에겐 명백해졌다.’ οὐδαμοῦ γὰρ δίκαιον οὐδένα ἡμῖν ἐφάνη ὂν βλάπτειν고 선언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συγχωρῶ.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주장을 시모니데스나 비아스Βίας, 피타코스Πιττακὸς라든가 그 밖의 다른 어떤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했다고 하면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그 사람과 싸우겠노라고 말한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도 ‘저로서도 그 싸움에 가담할 준비가 분명히 되어 있다’ἐγὼ γοῦν 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 τῆς μάχης.고 대답한다.

* 비아스(Bias)는 밀레토스 북쪽에 위치한 프리에네(Priēnē)의 정치가이고 피타코스(Pittakos) 또한 레스보스 섬 뮈틸레네(Mytilēnē) 출신의 정치가이다. 이들은 모두 600년 대 활동한 유명한 정치가들로서 이른바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7현인 중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플라톤은 그들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뿌리 역할을 한 사람들로 비판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싸워야 할 대상이 시모니데스가 아니라 ‘시모니데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싸워야 할 대상에서 시모니데스는 제외된 것처럼 말을 한다. 이는 시인의 대부 격인 시모니데스에 대한 예의를 냉소적으로 표시한 것이리라.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폴레마르코스를 마치 시모니데스인양 대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시모니데스 역시 비판과 극복의 대상임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331e에서 시모니데스를 ‘지혜롭고도 신과도 같은 분들’σοφὸς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이라고 비꼬듯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로 시모니데스, 비아스, 피타코스 같은 사람들을 ‘지혜롭고 축복받은 사람들’ τῶν σοφῶν τε καὶ μακαρίων ἀνδρῶν로 묘사하고 있다.

 

[336a]

* 이로써 마침내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 ->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로움을 적에게는 손해를 주는 것’으로 이어져온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철저하게 모두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펴온 사람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맞서 싸울 사람들의 실체가 밝혀진다. 앞서 소개된 시인 ‘시모니데스’는 물론 코린토스 참주 ‘페리안드로스’ Περιάνδρου, 마케도니아왕 ‘페리디카스’ Περδίκκας,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Ξέρξες, 페르시아의 돈을 받고 스파르타를 공격한 테베의 정치가 ‘이스메니아스’σμηνίας 그리고 그 밖의 부자πλουσίου ἀνδρός로서 스스로 굉장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당시 기득권 부유층들이 그들이다.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앞으로 플라톤이 철저히 넘어서야할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가 내건 싸움에 폴레마르코스가 ‘기꺼이 가담하겠다’ἕτοιμός εἰμι κοινωνεῖν고 말하는 부분(335e)도 흥미를 끈다. 사실 폴레마르코스는 대화 과정 내내 난문(aporia)에 빠져 제자리만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끝까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응했고 마침내 태도에서 그 정도의 변화에까지 이른 것이다. 최소한 태도에 있어서만은 분명 그는 그의 부친 케팔로스와도 다르고 이후에 등장할 트라쉬마코스와도 다르다.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는 그런 점에서 ‘배움에 대한 선한 의지는 늘 하나같은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 또한 시대의 교사로서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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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대화 부분과 관련해서도 아래와 같이 몇 가지 함께 음미해볼 만한 문제들이 있다.

 

1) 소크라테스는 위의 논증에서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βλάπτειν과 ‘누군가의 훌륭함ρετή을 나쁘게 하는 것’κακῶς ποιεῖν’을 같은 차원에서 등치시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표현만 보면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라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인 훌륭함’ἀνθρωπεία ἀρετή의 의미를 이해하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의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폴레마르코스가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이를테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가두거나, 금전상 손해들 일종의 ‘외적인 행위’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적 훌륭함’은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과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고 있는 ‘외적인 가해 행위’는 동일한 의미의 가해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등치시킬 수 있는 같은 차원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훌륭함ἀρετή이므로 훌륭함으로 사람의 훌륭함ἀρετή에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정의는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해를 입히는 것’과 관련하여 두 경우가 갖는 분명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적을 다치게 하고 손해를 보게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적 혼의 상태의 훌륭함까지 다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 시 적장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 적장에게 엄청난 해를 입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적장의 ‘인간적 훌륭함’까지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정의는 적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고 말했을 때 손해의 의미는 외적인 행위와 관련한 것이지 당신이 말하는 내면의 덕으로서 ‘인간적 훌륭함’을 나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그와 같은 주장에 의해 내 생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2) 이런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에 의해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이 완벽하게 부정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이 퇴색되거나 가려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비록 논박과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할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가 정의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매우 특별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훌륭함’이라는 그 자신의 확신을 그런 방식으로 분명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러한 극명한 대비의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적 혼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한계를 함께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앞서 기술 개념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이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적극적인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 질 것이다. 일종의 예고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와서야 비로소 외적 행위 중심의 도덕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적 도덕의식 내지 혼의 상태에 대한 각성이 개시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아무려나 ‘해를 입히는 것’이 갖는 위와 같은 추론 상의 복합성 때문에 ‘훌륭함’ 관련한 이 부분의 논의를 읽어 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논의를 접한 후 우리 주변에서 해를 입히는 행위지만 정의로운 일로 간주되는 일들, 이를테면 적에 대한 전쟁 행위를 포함해서 범죄에 대한 고소 고발 행위,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법적인 응징과 감금 행위 등과 같은 행위들에 대해서 플라톤은 어떤 식으로 해명을 할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 사실 앞서 예를 든 전쟁 행위 같은 경우는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인간의 존재 자체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특히 당혹감을 안겨 준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일지라도 전쟁에서의 위해 행위 자체가 곧 적군이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덕이나 명예까지 손상하는 행위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은 아무리 불가피한 전쟁 상황에서 적군을 대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목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비열한 짓은 삼가야 하며, 아무리 죄를 졌다고 해도 그의 인간됨까지 모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께 일러 준다.

그리고 그것은 법적인 응징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처벌 이전에 그의 인간으로서의 내면 상태의 훌륭함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교정의식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특수한 대상에 대해 어떤 특수한 이익과 손해를 가져다주는 특정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해서 그의 내적인 혼의 상태가 행복한 상태로 보전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이 구현된 훌륭한 상태를 말한다. 플라톤은 이미 2500년 전부터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기저에 만연해있는 마키아벨리즘의 대척점에 굳건하게 서있다.

 

4) 앞으로 점차 자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인간적 훌륭함’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철학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적 문제 영역에서도 여전히 중차대한 의미를 안겨 주고 있다. 실제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플라톤의 각성이 고대 기독교 윤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는 예수의 가르침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상의 금언 등은 물론 오늘날 사형제 폐지의 정당성과 관련해서도 ‘인간적 훌륭함’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이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 인격과 인권 개념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근원을 근대 자유주의 사상에서 찾고 있지만, 그것에 대한 선구적 통찰 역시 ‘훌륭함’ 내지 ‘덕’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에서 충분할 정도로 확인할 수 있다.

 

5) 그 밖에 소크라테스와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흥미를 끈다. 케팔로스는 대화를 즐기게 되었다는 자신의 말과 달리 결국 대화를 피해 도망가고 있고,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성실하게 응하다 결국 설득을 받아들여 부정의한 사람들에 대한 싸움에 자신도 가담하겠다고까지 말한다. 이에 비해 앞으로 등장할 트라쉬마코스는 공격적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가 논파를 당했음에도 끝까지 승복하지 않고 냉소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대든다.

 

6) 그리고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사회적 관계를 친구와 적으로만 나누는 입장도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당시 전쟁이 거의 일상이었던 배경에서 나온 것이긴 할지라도 보통의 경우에는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닌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에서 정의와 부정의는 흑백의 문제일 수 있어도 사적 영역에서 친구와 적은 흑백의 문제는 아니다. 하물며 전쟁상태일지라도 상대국의 무고한 양민들까지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은 결코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7) ‘정의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라는 주장에서 폴레마르코스는 ‘적합한 것’의 의미를 시종일관 나를 기준으로 나와 각자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폴레마르코스에게 ‘적합한 것’이란 친소 관계에 따라 자의적이고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대로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해도 제대로 각각에게 적합한 것을 주려면 그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해내는 앎의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은 그러한 앎이 자신의 이익에 역행하는 것임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지혜가 아닌 무지를 거꾸로 앎으로 여기는 자들인 것이다. 결국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는 ‘각각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시모니데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른 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귀결이다. 폴레마르코스의 무지가 당대 아테네인들의 일상의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그러한 귀결은 당대 아테네인들에 대한 시인들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자체가 이미 아테네를 병들게 하는 악폐임을 함께 보여준다.

 

8) 폴레마르코스가 매달리고 있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거의 상식으로 받들어지던 정의관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관은 기본적으로 친구와 적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그 친구와 적이 자신을 기준으로 배타적으로 규정되는 한,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정의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적이 국가끼리의 전쟁 상황에서 마주하는 공적 차원의 적일 경우, 자기의 이익과 보전은 그대로 나라의 이익과 보전으로 이어지겠지만, 당대 아테네에서는 니키아스(이 자는 사유 노예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등 권력가들이 그랬듯이 이른바 나라의 이익마저 강자에 의해 법의 이름으로 기획되고 규정되고 실행되었으며 그 대부분이 실제로는 강자에게 귀속되기 일 수였다.

특히 페리클레스 같은 권력자는 페르샤에 대한 방어를 명분으로 이웃 폴리스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저버리고 부당한 강탈과 착취는 물론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까지 불사하였다. 플라톤이 폴레마르코스와 대화를 마무리하며(336a) 인용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러한 탐욕적 강자들이다. 요컨대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당대 현실에서 본질적으로 공적 영역에서건 사적 영역에서건, 규모가 크건 작건 강자들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정의관이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대화를 지켜보던 트라쉬마코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야수처럼 달려들어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소크라테스가 바로 강자들의 그러한 기득권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탈신성화, 탈마법화를 통해 희생과 체념을 역사를 넘어서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가 앞의 글에서 논의한 것을 잠시 정리해 보자.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인데,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가 비판하는 교육은 전자의 것이다. 도덕적 영향력의 출발점은 우리의 “굴복(Demütigung)”이고,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이므로, 이를테면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만” 하기 때문에 “자기 비하”이다.(88쪽; 여기서 슈티르너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유희를 엿볼 수 있다.) 더 높은 것은 신성한 것이고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낯선 힘”에 대한경외심 때문이다.(77) 경외심은 결국 자기비하이므로 나다움이 아니다. 그래서 유일자의 철학은 낯선 힘을 지양하고 나다움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다움의 철학은 그야말로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 (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일자의 철학은 “ ‘에고이스트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자기결정에 의한 ‘나다움’”(172)이다.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나다움을 선어하는 자는 신성모독자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성모독자가 수행하는 신성모독과 과소평가는 탈마법화라는 점이다. 나아가 탈마법화는 지금까지의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역사의 문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출발점은 저항이다.

 

1. 나다움을 선언하는 자는 신성모독자이다.

 

유일자의 철학이 나다움을 선언하는 것이고 나다움은 신성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기에 그런 사람은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216)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권리에 대한 신성모독(Blasphemie)”을 하는 사람이다.(308) 일반적으로 신성모독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은 슈티르너가 유일자의 태도를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 Blasphemie단어는 이 책에서 한 번 사용하지만 신성한 것을 파괴하는 태도이다. 이 단어 Blasphemie와 유사한 말은 신성 모독, 신을 모독함(Entweihung –en)인데 이 단어의 사용은 103, 186, 222, 311에서 나온다. 또한 같은 의미인 Entheiligung; entheiligen란 단어는 103-4, 166, 202, 244, 311-2, 343쪽에 언급하는데, 신성 모독은 신성한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가장 과격한 것이며, 슈티르너가 거룩한 정신을 비판하기 위하여 정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이성에 대한 반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이성의 비판이라는 점과 같은 방식이다. 나를 지배하는 정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자기 정신의 사용을 통한 비판이다.

 

“내가 정신을 유령(Spuk)으로 과소평가하였고 내(Mich) 위에 정신의 지배권을 어떤 망념(Sparren)으로 과소평가 할 때, 그 경우에 정신은 신성을 모독하는(entheiligt) 것으로, 신성을 박탈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믿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사용하는 것처럼, 나는 정신을 사용한다.”(104)

 

또한 신성모독(Gottes)lästerung과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주의, 그리고 에고이즘을 모독하는(lästernd) 인본주의는 여전히 사랑을 기대한다.” [347]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본주의나 공산주의는 에고이즘을 모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일자의 철학은 거꾸로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신들린 상태이므로 ‘나쁜 마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어떻게 시작하는가?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독교도에게 가장 나쁘게 보이는 (종교, 도덕상의; 옮긴이) 죄를 범한다. 곧 신성한 마음에 거슬린(wider) 죄와 신성 모독(Lästerung)을 저지른다.”(202)

 

2. 신성모독(Entheiligung)은 탈마법화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나 자신의 밖에서 거짓말 하는 운명을 주어야만 한다고 항상 가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나-인간(Ich – Mensch)이기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것을 요구해야만 하도록 부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다. 피히테의 자아(Ich/ego)조차 나 밖에 있는 그와 같은 본질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이런 자아만이 권리를 갖는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아니라, ‘그 자아’(das Ich)이다.(406)

 

슈티르너는 ‘인간’이라는 것이 “나 밖에 있는” 본질인 피히테의 자아를 의미한다고 이해하면서 마법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법의 영역에서 성경은 마법 수단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성경을 액막이로 사용했던 사람에게 성경은 다만 가치를 가지고, 어떤 마법 수단(Zaubermittels)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376) 나아가 그는 마법의 영역을 ‘실존과 소명’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면서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고자 한다.

 

만약 실존과 소명(Existenz und Beruf) 사이에, 다시 말해 존재하는 나와 존재해야만 하는 나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었다면,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는 끊어졌을 텐데.(410)

 

위 글은 접속법 2식 과거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저 문장의 의미는 실존과 소명 사이에 긴장이 중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의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은 ‘존재하는 나’이고 소명은 ‘존재해야만 하는 나’이다. 따라서 소명은 본질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까 슈티르너는 실존과 본질의 긴장이 끊어져야만 마법의 영역(Zauberkreis)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소명(Beruf)이라는 단어는 계속하여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소명은 일종의 본질이며 본질은 ‘개념적 질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개념도 나를 표현하지 않는다.”(412) 유일자라는 “에고이스트는 자신을 이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411) 소명(Beruf)이란 말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세속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생활의 세속적인 일들을 포괄적인 종교적 영향권 속으로 편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김재성, 「막스 베버의 경제윤리 연구」, 서울대 대학원, 1983, p.36) 슈티르너는 막스 베버 이전에 자신의 시대를 마법화된 시대로 진단하고 있다. 여전히 종교적인 측면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하여 유령을 푸닥거리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은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의 신화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이 아도르노가 계몽을 비판하면서 계몽의 변증법, 곧 이성이 진보이면서 야만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제시하였듯이, 이미 그 이전에 슈티르너는 근대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이성이 환상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로지 영혼, 감정, 믿음의 환상(Phantasie)이 종교적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연적 오성(Verstand)”, 인간의 이성(Vernunft) 또한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이성조차 환상(Phantasie)과 같은 그러한 공상가(Phantastin)로 존재할 수 있다는 권리를 만들었다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하는가.(52)

 

슈티르너는 물론 ‘탈마법화’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질에서 실존으로의 지향, 곧 소명에서 유일자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탈마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탈마법화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 곧 ‘신성모독’이다. 막스 베버는 “세계의 탈마법화”(Entzauberung der Welt)를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신과의 대면적 관계 설정의 완결이 탈주술화, 탈마법화이다. 그는 가톨릭에서 사제는 변체(變體) 기적을 수행하고 천국의 열쇠를 장악하였던 주술사 또는 마술사였기 때문에 세계의 탈마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1996, p.91)

또한 “선량한 사람들은, 법이 민중(Volk)의 감정 속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것만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16)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중은 아마도 신성모독자(Gotteslästerer)에 대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신성모독에 적대적일 것이다.”(217) 이 단어의 사용은 188, 202, 267, 347쪽에 나온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모독하다’(entweihen)라는 단어는 103, 186, 222, 311쪽에서 언급하며 ‘욕보이다’(schänden)라는 단어는 186, 244, 336쪽에서 언급한다. 또한 욕하다, 비방하다(schmähen)와 연관된 단어는 217, 308, 311, 328, 329에 나오며, 특히 217쪽에 나오는 조롱(spott; 64, 217, 267,311), 무례함, 자만이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데, 모두 신성모독을 위한 마음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슈티르너에게 웃음거리나 조롱은 신성모독(Entheiligung)으로 이해된다. ‘덕’이라는 신성한 것에 대한 그의 경멸을 들어보자.

 

오 라이스(Lais)여, 오 니농(Ninon)이여, 너희는 이처럼 창백한 덕(Tugend)을 경멸하기(verschmähen)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덕을 닦으면서 늙어간 천 명의 처녀들에 반해서 한 사람의 자유로운 그리세트(Grisette)여!(67)

 

“에고이스트는 무리한 요구와 현재의 개념에 반대함으로써, 그는 가장 과격한 것-신성모독(Entheiligung)을 무자비하게 실행한다. 그에게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니까!”(202) 이 말은 견유주의(犬儒主義), 곧 시니시즘(cynicism, Zynismus)을 떠오르게 한다. ‘개와 관련되는’을 뜻하는 kunikos는 넒은 의미에서 어떤 가치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의 태도이다. 퀴니코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의 의미-엘렌코스(elenchos)라는 대화법을 통해 당혹스러운 상태, 곧 아포리아(aporia)에 봉착하여 자신의 특정한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를 웃음거리나 조롱으로 바꾸었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의 철인(412-323 BC) 디오게네스(Diogenes), 그의 실생활 표어는 아스케시스(가능한 한 작은 욕망을 가지는 것), 아나이데이아(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것), 아우타르케이아(스스로 만족하는 것)이고 옷 한 벌, 한 개의 지팡이와 자루를 메고 통 속에 살았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그를 찾아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슈티르너는 국가에 대해 에고이스트가 하는 말 “나로부터 햇빛을 가리지 마라”(Geh’ Mir aus der Sonne)로 표현하면서 한 번 인용한다(257).

이렇게 보면 슈티르너가 보여주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곧 신성한 것을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77) 유일자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그가 무자비한 신성모독, 아무것도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선언, 신성한 것을 욕보이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왜 그토록 신성한 것, 본질, 소명을 경멸하고, 평가절하 하는 것인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3. 탈마법화는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어떤 삶의 사명(Lebensberuf), 어떤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고, 그의 삶을 통해 어떤 것을 현실화시켜야만하고 해내야만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은 오로지 수단과 도구이인데, 그 어떤 것은 우리의 삶보다 더 가치가 있고, 그 어떤 것에 사람들은 삶을 빚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희생(lebendiges 희생Opfer)을 요구하는 어떤 신을 가지고 있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스러운 행위만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자체는 줄지 않고 남아있고, 정의의 범죄자는 금방 희생에 빠지며, 우리는 “인간의 본질”, “인류의 이념”, ‘인간성’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 ‘가난한 죄인’을 희생으로 학살하고 그 밖에 아직도 우상 혹은 신과 같은 것을 말한다.(361)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삶의 사명은 본질로 이해 할 수 있고, 삶의 사명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있는 희생’을 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곧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민중들과 개인들(Individuen)을 인류에 헌신 속에서 고생하도록 한다(sich abquälen).(4)

 

우리는 여기서 “(몹시) 괴롭히다, 고통을[고뇌를] 주다;가책받게[번민케] 하다(quälen)라는 단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단어와 관련된 단어들은 이 곳 말고도 42, 191, 238, 266(새로운 헌법으로 시대에 적합한 개선으로 고생하고), 269(새로운 이상은 새로운 고통을 주고), 324, 325(인류에는 인간의 고역이며), 344, 363, 389쪽에 나온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소명, 본질, 인간, 인류 유령들을 신성모독(Entheiligung, 103,104)이고 과소평가(Herabsetzung,166, 202, 244, 312, 312)하는 것이다. 또한 아픔, 고통(Qual)과 관련하여(43, 92, 164, 238, 324, 397) 논의하면서, 그가 도달한 것은 환영이라는 것, 더 높은 것, 유령이라는 것 때문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걸쳐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der 물질»materiell Gesinnte)은 이상적인 환상(Schemen), 자신의 덧없음(Eitelkeit)에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고, “정신적인 것에 마음이 있는 사람”은 물질적 향유, 풍족한 생활(Wohlleben)에 모든 것을 희생한다.(64)

 

이렇듯, 슈티르너는 자아의 생성사를 희생(Opfer)으로 보고 있는데, 이 희생을 극복하는 것을 에고이스트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저작 전체는 희생의 극복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의 희생자와 만나지 않고, 어디를 바라볼 수 있었는가?”(66) 그는 비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도대체 누가 “희생하는”(aufopfernd) 것인가?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의 것(Eins), 곧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지, 하나의 열정 등등에 다른 모든 것을 거는 그런 사람이다. 만약 연인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과 결핍을 견디고 부모를 떠난다면, 그는 희생하지 않는 것이냐? 혹은 모든 욕망들, 소원들 그리고 고유한 열정의 만족들을 바치는 야심이 있는 사람(Ehr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단념하는 인색한 사람(Geizige)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혹은 쾌락을 좇는 사람(Vergnügungssüchtige) 등등은 희생하지 않은 것이냐? 열정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희생하는 사람의 어떤 열정은 그들을 지배한다.(81)

 

이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민적 개인의 원형(Urbild)”(DA,63)으로 다루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통하여 사이렌의 소리를 들이며 죽지 않기 위해 자연적 욕구와 본능을 억압하는 희생(Opfer)과 체념(Entsagung)의 자아 형성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그러한 자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다른 한편 슈티르너는 “그런 까닭에 기독교적인 생각을 품은 자들은 억압된 노동자들의 경건성, 그들의 인내와 체념 등등만을 배려할 뿐이다. 억압받는 계급은 그들이 기독교도인 한에 있어서만, 모든 비참함을 참아낼 수 있었다.”(132)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는가? 희생은 많은 곳에서 논하고 있다(82, 83, 85, 104, 109, 135, 165, 196, 198, 211, 238, 243-4, 246-7, 277, 285, 324, 328, 338, 341, 344, 346, 351, 409). 슈티르너는 38쪽에서 민족을 “애국심이 있는 헌신(patriotische Aufopferung)”으로 파악한다. 198쪽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슈티르너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고 있다.

 

새로운 역사는 희생(Aufopferungen)의 역사 이후에 향유의 역사이고,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나의 역사이다. (Der) 인간은 보편(Allgemeine)으로 간주하는 것이다.(197-8)

 

이것은 아도르노가 오디세우스를 개인의 탄생으로 보면서 역사를 자기부정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새로운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이해하고, 이것을 향유의 역사로 보고 있다. 향유의 역사는 자기부정을 넘어서고, 희생을 극복한 에고이스트, 유일자로 자신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슈티르너가 미래를 향유의 역사로 추구하는 반면에, 아도르노도 미래의 역사를 화해(Versöhnung)로 본다.

또한 슈티르너는 체념(Entsagung)을 희생과 함께 논의한다(67, 73, 153, 353). 67쪽에서는 바로 이 “체념의 관례는 너의 갈망의 격정을 냉각시킨다.”고 비판한다. 73쪽에서는 “천상(Himmel)은 체념의 종점이다.”이라고 비판하고 153쪽에서는 “모든 “우월함”을 포기하라고 하는 가장 엄격한 체념론”을 비판하면서 유일자를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용으로 자기 향유로 향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

 

신성화(Heiligung) 혹은 정화의 특성(Zug)이 낡은 세계(목욕 재계(齋戒) 등)를 통해 진행되듯이, 그렇게 기독교적 세계를 통해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의 특성이 진행된다.(408)

 

‘체내화’(Verleiblichung)라는 말을 한번 사용하지만, 이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정신분석에서 주체가 대상을 공상적으로 내부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 체내화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기향유를 향하고 있으므로 자기향유는 “자아의 자기실현(Selbstverwertung des Ichs)의 모든 총괄 개념(Inbegriff)이 중요하고, 그러므로 또한 국가에 거스르는 그의 자의식(Selbstgefühls/self-consciousness)의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모든 총괄 개념이 중요하다.”(303)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자기실현”이라는 말을 좀 더 풀어보면,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아의 자기(능력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영문에서는 “the ego’s self-realization of value from himself”이라고 번역하였다. 물론 Selbstverwertung 단어가 2번만 사용되었지만, 희생과 체념의 역사를 넘어서 자기향유로 나아가는 유일자의 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자기실현의 총괄개념을 살펴 보자. 그는 우리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단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행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verwerten) 안 되고, 나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결코 나의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249) “내가 만들어 내는 것, 곧 밀, 아마포 혹은 철과 석탄 등등은 내가 이 땅에서 힘들여 찾아낸 것인데, 그것은 내가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려고 하는 나의 노동이다.”(282) 그러나 “노동자는 향유를 위해 노동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척도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을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 ‘노동이 낮게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126) 이런 맥락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자신의 가치를 찾는 길이다. 그렇다, 자신의 가치회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주장한다. “그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지(verwertet) 않고, 오히려 국가가 그를 가치 있게 만든다.”(281) 또한 “집단 빈곤은 나의 무가치성이고,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n) 수 없다는 현상이다.”(282) 그러므로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슈티르너는 소크라테스를 존중하면서 비판하는데, 이번에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제시한다.

 

우리들의 소유를 포기하라! 그렇지 않다. 우리들의 소유를 가치 있게 만들어라!

우리 시대의 문 위에 저 균형 잡힌 시간이 서 있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 너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라(Verwerte Dich)!(353)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자각도 중요하다. 다른 측면에서도 자신을 바라보자!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유일자의 철학이 제시하는 전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은 저항하는 일이다.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겪는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의 차원에서 ‘코기도’(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반항은 원초적 자명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이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책세상, 46쪽)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⑩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전 시간에 이어 계속)

 

[333d]

* 앞서 정의의 쓸모와 관련해서 1)‘항전과 연합전의 경우’(332e) 그리고 2)‘금은을 함께 이용함에 있어 그걸 안전하게 신탁해야 할 경우’(333c)에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하다’는 견해는 아직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소크라테스는 전자의 경우에 대해서는 ‘됐소’εἶεν라고만 답을 한 후, 전쟁이 아닌 평화 시 정의의 쓸모로 화제를 바꿔 그에 대한 반박은 일단 접어두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보관 상태’를 ‘금전의 미사용 상태’ 즉 금전의 쓸모가 정지된 상태로 해석하여, 보관 행위 자체가 이미 정의의 쓸모와는 무관하다는 주장만 펼칠 뿐, 정의의 쓸모로 제시된 ‘안전한 신탁’παρακαταθέσθαι에 대해서는 언급을 유보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직 논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넘어간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다시 꺼내들어 아래와 같이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그러한 경우의 주장마저 논박한다.(333e~334b)

 

[333e]

* 먼저 소크라테스는 권투πυκτικῇ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싸움μάχῃ에 있어서 치는 데 가장 능한δεινότατος 사람은 방어하는 데에 있어서도 가장 능하고, 질병의 경우에도 그것을 막는데 능한 의사는 몰래 병νόσος을 생기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하다고 말을 한다. 이런 말을 꺼내든 이유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우로 거론했던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를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334a]

* 소크라테스는 이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훌륭한 수호자’φύλαξ ἀγαθός는 전쟁과 관련한 모든 일에 능하다는 점에서 유능하지만, 적군의 계략과 작전을 ‘몰래 탐지해내는 것’κλέψαι 도 능하다는 점에서 보면 ‘유능한 도둑’φὼρ δεινός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앞서 항전이나 연합전 등 전쟁의 경우 유능한 사람으로서 폴레마르코스가 언급한 정의로운 사람이 동시에 부정의한 도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은 일면적인 데다 모순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항전과 연합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논박 된다. 그런 연후에 앞에서 유보되었던 금전관계에서 ‘돈의 안전한 신탁’ 차원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논박이 이루어진다. 즉 돈을 간수φυλάττειν하는데 능한 사람이면 동시에 훔치는 것κλέπτειν도 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익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도둑κλέπτης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금전관계에서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 또한 논박된다.

* 여기서 ‘도둑’으로 번역된 두 단어 φὼρ(phōr)와 κλέπτης(kleptēs)는 둘 다 ‘도둑’을 뜻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전자는 항만에서 쓰일 경우 ‘밀수꾼’으로도 쓰이고, 후자는 ‘사기꾼’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군대의 훌륭한 수호자’στρατοπέδου ὁ φύλαξ ἀγαθός라는 표현은 이상국가의 훌륭한 수호자와 당연히 다르다. 이상국가의 수호자에 붙는 훌륭함은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을 행복하게 하는 내면적 도덕성과 외적인 통치술 전체에 탁월한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훌륭함이지만, 이곳에서의 훌륭함은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그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군대에서의 군사 기능적인 작전 지휘 운용 능력에 한정하여 빗대어 사용한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냥 ‘군사작전을 잘 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 또한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이다.

 

[334b]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문답을 마무리하며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일종의 도둑κλέπτης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호메로스한테서 배운 것 같다’κινδυνεύεις παρ᾽ Ὁμήρου μεμαθηκέναι αὐτό고 말한다. 호메로스도 오뒷세우스의 외조부 아우톨뤼코스Αὐτόλυκος에 대해 호의를 갖고ἀγαπᾷ 있으면서도 그를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있어 모든 사람을 능가한다καίνυμαι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호메로스나 시모니데스 모두 ‘정의는 일종의 도둑질 기술이긴 하나 그것은 친구들의 이익과 적들의 손해를 도모하는 기술’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폴레마르코스 또한 시인들의 선조인 호메로스처럼 애매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별다른 의식 없이 내뱉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우톨뤼코스가 도둑질과 거짓 서약에 능한 사람임에도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앞뒤가 맞지 않는 애매한 말인 것이다. 이처럼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당대 시인들의 시가가 그렇듯이 서로 반대적으로까지 이해될 정도로 애매함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호메로스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마무리하려고 하자 폴레마르코스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οὐ μὰ τὸν Δί᾽’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자신 여전히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난문(難問aporia)에 빠져 ‘저로서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οὐκέτι οἶδα ἔγωγε ὅτι ἔλεγον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어쨌든 정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이롭게 해주고 적들에 대해서는 해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애초의 주장으로 속절없이 되돌아가고 만다.

* 이 장면은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들의 말과 사고방식이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대중들 일반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세뇌, 각인되어 있고 얼마나 많은 폐해를 안겨다 주는지를 잘 드러내줌과 동시에 당대 시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 첫 부분이 마무리되고, 여전히 무지와 혼돈에 빠져있는 폴레마르코스를 일깨우기 위한 문답법적 대화가 정의의 ‘훌륭함’ἀρετή을 토대로 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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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두 번째 대화 부분(334c~336a)으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지금까지 이루어진 문답(331e~334b) 내용을 간략히 평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앞에서 정의의 유능성 내지 쓸모와 관련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모두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박된다. 전기 대화편에서 줄곧 수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chos)이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사실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의미 규정(horos)’의 조건은 진리로서의 보편성과 항상성(恒常性)이다. 특정 사례들이나 경우들은 늘 예외적인 사례와 경우들에 직면한다. 정의의 기능, 정의의 쓸모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시종일관 특정 사례나 경우를 가지고 정의의 쓸모를 말하지만 정의의 쓸모는 그런 특정한 경우에서의 쓸모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의 쓸모는 어떤 때는 쓸모 있고, 어떤 때는 쓸모없는 그런 종류의 쓸모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경우에서든, 인간의 행위와 마음 상태 그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늘 쓸모가 있는 그런 종류의 쓸모로서 하나같은 항상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요즘 화제가 되는 인문학의 쓸모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정의의 쓸모와 관련한 이곳에서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요리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요리사가 쓸모가 있을까? 도둑을 잡으려고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경찰관이 쓸모가 있을까? 항해를 할 때 인문학자가 쓸모가 있을까 항해사가 쓸모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인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우리들은 대부분 폴레마르코스처럼 그 구체적인 경우 경우마다 그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개별 기술자가 더 쓸모가 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요구하는 답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문학의 쓸모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 사람다운 삶의 구현을 추구하는 학문인 한,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모든 기술, 즉 공기가 모든 생명체에 필요하듯, 기술일반에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의 쓸모도 마찬가지이다. 정의의 쓸모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과 관련한 모든 것에 적용되는 모종의 보편적 원리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요리술이건 건축술이건 ‘어떤 경우에도 정의가 쓸모가 없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요리할 때 요리사가 바른 생각과 의지를 가져야 최선을 다해 최고의 기술을 습득하여 가장 좋은 재료로 정성을 다해 요리 할 수 있는 것이고, 건축공이나 항해사 또한 바른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최선의 능력을 길러 정성으로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의나 인문학의 쓸모는 개별 기술들의 구체적 쓸모의 토대가 되는 그 기술들의 근본 기초 즉 그 기술들의 존재근거, 목적과 가치, 내적 구조와 타 기술과의 관계 등과 관련되어 있다.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배후에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이전에, 폴레마르코스처럼 아직 정의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시인들의 말에만 의존하여 구체적인 사례나 속성으로 정의를 말할 경우, 어떤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 시종일관 문답법적 논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3) [332c-d]에서 플라톤이 끌어들이고 있는 ‘기술’(technē) 개념 역시 앞서 말한 플라톤적 정의관을 뒷받침해주는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정의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훌륭함’ 내지 ‘탁월함’(aretē)과 더불어 장차 다루게 될 적극적인 정의론을 위한 예고와 준비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다. 미리 간략히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정의가 곧 기술이고 기술이 일종의 문제 해결 방책’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이른바 기술이 단지 과학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에서 정치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인간의 사회적 행위나 활동 영역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기술이 전문적인 지식인 한, 도덕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고 정치도 기술이자 전문 지식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곧 도덕과 정치도 오늘날 과학기술이 그러하듯 객관적 기준과 척도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그 활동의 성공여부에 의해 그 ‘훌륭함’(to agathon)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거나 논증될 수 있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곧 플라톤에게 도덕과 정치는 오늘날의 용어로 보면 단순한 이론과학이 아니라 기술과학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기술과학적 지식이란 그것의 고유한 객관적 척도와 기준에 맞게 대상에 그 기술을 적용할 줄 아는 능력(dynamis)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그러한 과학기술적인 지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플라톤의 ‘도덕은 지식이다’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도덕과 정치의 성공과 실패는 그에 관한 이해와 지식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해와 지식이 곧 능력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은 줄 아는데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말은 그것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것을 제대로 알면 반드시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기술개념은 아직 그곳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정의의 척도를 주관적인 인간관계에서 다루려는 폴레마르코스의 잘못된 태도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술개념을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 332e 앞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유능한 경우는 어떤 경우인지를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별 주저 없이 ‘항전과 연합전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정의라는 기술을 가진 자’가 가장 유능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전쟁πόλεμος이라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중대성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게 잘 하는 것이 그냥 전쟁πολεμεῖν(polemein)이 아니라 항전προσπολεμεῖν(prospolemein)과 연합전συμμαχεῖν(symmachein)이라고 언급되고 있음도 주목을 끈다. 물론 prospolemein이라는 말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도 있어 일반적인 전쟁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polemein이라는 말을 쓰고 이곳에서 prospolemein이라는 말을 쓴 것은 비록 폴레마르코스의 말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경우라도 침략 전쟁이 아닌 방어 전쟁만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플라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짐작도 해본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에서도 전쟁의 수행은 침략군에 대한 방어전쟁에 한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 페리클레스의 패권적 제국주의는 그것으로 이미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가장 정의로운 자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도 ‘방어와 보전’φυλάττειν의 의미를 갖는 수호자ὁ φύλαξ(phylax)이다. 연합전의 경우 또한 군대건 사람이건 연합하여 함께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최고의 전쟁 역량이고 그 역량을 가능케 하는 것이 정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적인 성격으로서 협의의 정의로도 불리는 절제σωφροσύνη(sōphrosynē)란 말도 원래 군사용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연합의 능력이 왜 정의와 관련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테네 전투기술의 핵심을 구성하는 중갑보병기술ὁπλιτικὴ의 경우 서로 협동을 하여 밀집방진(密集方陣)의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이 때 각 병사는 개인의 역할도 잘 해야 함과 동시에 전체 전후좌우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긴장을 유지하며 다른 병사들과 보조를 잘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절제의 원래 의미이다. 즉 정의는 나와 공동체가 유기적인 하나임을 알고 나와 공동체의 안녕과 보전을 동시에 구현해내는 앎이자 능력이다.

5) 그런데 폴레마르코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 과정에는 내용상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우선 소소하게는 332e에서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모없다’는 말은 ‘의사가 질병은 물론 건강과 관련해서도πρὸς νόσον καὶ ὑγίειαν 가장 유능한 사람’(332d)이라는 말과 맞지 않아 보인다. 의사의 역할은 아프지 않은 사람의 건강도 돌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다루었듯이, 금은의 안전한 신탁과 관리를 위한 금전적 협력관계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더 쓸모가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333c) 또한 비록 개별 사례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재화를 둘러싼 사기, 갈취, 횡령, 도적질 등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금은재화를 가득 쌓아놓은 사람일수록 곁에 정직하고 올바른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금전의 미사용 상태를 금전의 쓸모 자체가 정지된 상태로 보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기술이란 모종의 활동이란 전제하에 재화의 보관 행위를 재화의 미사용 상태, 즉 활동 정지 상태로 보고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보관도 모종의 기술적 활동이고, 특히 재화의 보관 활동은 그 자체로 쓸모가 있다. 금전은 보관 그 상태만으로도 이자 증식을 포함해 여러 가지 고유의 가치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금은의 안전한 보관과 금은과 낫, 방패, 리라의 보관을 함께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금은은 교환가치가 핵심이고 나머지는 사용가치가 핵심이기 때문에 보관가치의 우선성 차원에서 보면 비교상대가 되지 않는다.

7)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재화의 안전한 보유와 보관 이를테면 오늘날 금괴와 외환의 보유는 개인은 물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 중요한 지표이자 쓸모이다. 고대에도 돈의 용도는 물건을 사고파는 화폐로서의 용도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금융업처럼 자금의 보유를 수익의 원천으로 삼는 직업도 존재하였다. 대부업자는 자금을 안전하게 잘 보관해야하고 그것을 위해 협력자가 필요할 때 그 만큼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플라톤도 이점을 알고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 재화의 보관을 재화의 쓸모에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혹시 금은을 쌓아놓고 사는 당대 부유층 기득권자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 때문일까? 노동을 통해 농산물, 생필품 등 일반 상품들을 제작 유통하고 그것들을 사고파는 것으로 벌어들이는 부 이외에 돈만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고리채, 특권과 권력을 통한 부와 재물의 축적, 금은보화의 경쟁적 보유가 가져다주는 특권의 고착화와 그것이 초래한 계층적 괴리와 빈부격차는 고대나 현대나 우리가 해결해야 할 악폐이다.

8) 특히 항전과 연합전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많은 논란거리를 안고 있다. 논박의 구성이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허술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가 논박과정에서 예로 든 권투선수의 공격술과 방어술, 군인의 수호임무와 첩보탐지를 위한 침투임무는 반대되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 행위들 다 각기 권투선수와 군인의 고유의 기능들이고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상충하는 행위들도 아니다. 오히려 그 두 가지를 다 잘하는 게 권투선수, 군인의 덕이고 모두 훌륭한 권투선수, 훌륭한 군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예로 든, ‘질병을 막는 일과 생기게 하는 일’,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과 훔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기능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위의 경우들과 상통하지만, 위의 경우들과는 달리 그 반대 기능들이 다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고유기능도 아니거니와, 그 기능들은 도덕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는 전자의 경우와 달리, 그 반대되는 일을 동시에 잘하는 것이 그들 각자의 덕이 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그들 각각 훌륭한 의사, 훌륭한 금전관리자로 불릴 수도 없다. 요컨대 권투선수와 군인의 경우와 의사와 금전 관리자의 경우는 같은 경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군인의 첩보 탐지행위와 금전 관리자의 자금 유용의 같은 경우의 도둑질로 보고 그것을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은 일종의 도둑이다’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황에 관계없이 훔치는 행위 모두를 부정의한 도둑질로 보는 비약이 숨어 있다. 그것은 ‘군인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살인자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살인자이다’라고 추론하는 전형적인 애매구의 오류(equivocation)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맥락 상 전혀 의미가 다름에도 표현의 동일성을 내세워 원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9) 항전과 금전신탁의 경우와 관련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치밀한 논리를 구사하는 소크라테스답지 않게 논리적 타당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의아함을 안겨준다. 그래서 혹자는 플라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아닌지라 말 그대로 이 부분에서는 비록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착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부분 역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수준에 맞추어 그를 뒤흔들어 혼란에 빠지게 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지를 고백하게 만들기 위한 소크라테스적 에이로네이아εἰρωνεία(eirōnēia)로 해석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저 유명인들의 말이면 옳다고 믿으면서 논리적 타당성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한 당대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방편 상 그러한 논변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후의 폴레마르코스의 반응은 그 자체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반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처구니없게도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갖는 논리적 허술함을 전혀 간취하지 못한 채 그 반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에이로네이아’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자기 생각은 짐짓 숨긴 채 말하는 ‘시치미’(dissimulation)의 뜻을 갖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상대의 무지를 드러내는데 그 방법을 쓰면서부터, 그 말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모순에 봉착하게 하여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만드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를 뜻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 소개된 소크라테스의 논변들 또한 시종일관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그의 생각이 갖는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연구자들은 항전과 금전관리와 관련한 논변 또한 폴레마르코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하는 방식으로 폴레마르코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적 논변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저명한 플라톤 연구가 아담(J. Adam)은 ‘이곳의 논변은 타당성이 떨어지고 진지하게 의도된 것도 아니다. 폴레마르코스를 당혹감에 빠트리는 것으로 그 논변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논변은 허술함을 가장한 일종의 시치미이자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모순을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치미를 상대를 속이려는 부정적인 트릭이나 실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검증을 위한 방편적 시험의 일환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치미 논법이 목표로 하는 것은 상대를 모멸하거나 곤경에 빠뜨려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를 자극하고 흔들어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한 후, 참된 앎의 세계, 공동탐구(syzētēsis)의 장으로 인도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연구자들의 이러한 호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333e~334a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최소한 논박 자체의 논리적 타당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음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11) 아무려나 ‘에이로네이아’가 소크라테스의 귀류법(歸謬法, reductio ad absurdum)적 논박이 드러내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들어 위의 논변도 타당한 소크라테스적 논박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귀류법적 논박이 갖는 특징을 이해하는 것은 앞서의 논변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소크라테스적 논박들이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귀류법적 문답 방식은 기본적으로 상대 주장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방편상의 명제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 명제들 각각이 내용적으로 참인지 여부는 논박의 타당성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반박 논법을 통해 상대방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기만 하면, 동원된 명제 하나하나의 내용적 진위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으로 상대 주장은 논파된다. 요컨대 논박의 성공여부는 상대 주장과 논박자의 주장에 동원된 명제들 각각의 내용상의 진위 여부에서가 아니라, 그 두 주장을 병립시켜 그 주장들이 서로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양립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의는 일종의 도둑이다’(334a)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전혀 상관이 없고, 그것은 오직 상대 주장과의 연관 속에서 그 주장의 모순을 드러내는 명제로써만 타당성을 가질 뿐이다. 가령 왜곡된 양도논법(dilemma)을 논파하기 위한 반박용 양도논법이 타당성을 갖는 것도, 그 논법의 결론이 상대 논법의 결론과 모순되는 결론을 가질 때 획득되는 것일 뿐, 반박용 양도논법 자체만 따로 떼어 보면 그것 역시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한 또 다른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이다. 이를테면 누가 아래와 같은 양도논법으로“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안 돼 슬프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슬프다.(결론)”고 주장했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러한 왜곡된 양도 논법을 논파하려면 간과된 선언지(選言枝)를 찾아내 동일한 양도 논법으로 아래와 같이 그와 모순되는 결론을 제시하면 된다. “비가 오면 우산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짚신 장사하는 아들이 장사가 잘 돼 기쁘다.(대전제)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거나 이다.(소전제) 그러므로 언제나 나는 기쁘다.(결론)” 이 경우 반박용 양도논법 역시 그것만 떼어 보면 왜곡된 양도논법인 것이다. 요컨대 폴레마르코스처럼 특수한 사례나 속성에 해당하는 명제들만을 동원하여 정의를 ‘의미규정’할 경우, 정의의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측면만 드러낼 뿐 결코 보편적 정의(定義)에 이를 수 없으며, 소크라테스의 귀류법적 논박 과정에서 반드시 예외적이거나 반대적인 경우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년 가을 제55회 정기 학술대회 :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회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2018년 가을 제55회 정기 학술대회가 아래와 같이 있습니다.

회원 및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아 래>

<5회 한중마르크스주의 연구자회의>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 : 중 철학의 대화, 중국의 사회주의와 현대정치철학의 수용

* 일시 : 2018.10.26 (금) 09:00 개회

* 장소 : 건국대학교 행정관 4층 대회의실

* 주최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건국대 철학과, 남경대 마르크스주의사회이론연구센터

* 후원 : 건국대학교

* 동시통역 제공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⑨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 폴레마르코스와 대화(331e~336a)

 

* 폴레마르코스가 부친 케팔로스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논의의 국면은 정의의 정의(定義) 문제로 전환된다. 대화의 방식 또한 전기 대화편의 방식 그대로 시종일관 귀류법적 문답의 방식, 즉 상대의 처음 생각이 끝에 가서 정반대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대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첫 번째 부분(331e-334b)에서는 케팔로스가 제시한 정의에 관한 생각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으로 정립되면서 그 정의관이 안고 있는 한계가 정의의 쓸모 문제를 중심으로 다각적으로 검토된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334c~336a)에서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친구와 적에 대한 규정이 수정된 후, 정의의 ‘훌륭함’을 토대로 하는 즉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의관이 당대 권세자들 일반에 편만해 있음이 함께 언급된다.

 

3-1(331e-332b);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31e]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는 정직함과 남한테서 받은 것은 갚는 것’이라는 부친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대의 시인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인다. 시모니데스가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빚진 것)을 갚는 것’τὸ τὰ ὀφειλόμενα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 δίκαιόν ἐστ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앞서 ‘맡은 것’λαβή(331c)이란 말이 ‘갚을 것’τὰ ὀφειλόμενα이란 말로 바뀌었을 뿐 내용상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한계가 지적된 말이다. 그럼에도 폴레마르코스는 그러한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자기가 보기에는 훌륭한 말 같다’δοκεῖ ἔμοιγε καλῶς λέγειν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주장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당대 아테네인들이 그러하듯 시인들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맹목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 같은 정도의 사람이 한 말은 믿어야 하며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뭔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폴레마르코스의 태도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가 ‘지혜롭고 신과도 같은 분이니까’σοφὸς γὰρ καὶ θεῖος ἀνήρ라고 비꼬듯 말한다. 이처럼 시모니데스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가 시인들을 힐난하거나 비꼬는 부분은 <프로타고라스>(339a-b)를 비롯해서 대화편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cf. <뤼시스>214b, <카르미데스>162a, <테아이테토스>194c.

*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늘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러니까 폴레마르코스도 당연하듯 그렇게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조차 시모니데스의 말이니 안 믿기도 쉽지가 않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시인들과 시인들의 작품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에서는 호메로스의 작품은 거의 경전(經典)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시모니데스는 6세기 중반에 태어난 고전기 시인들의 대부격인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플라톤도 <국가> 606e-607a에서 당대의 그러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도 기본적으로 전통을 매우 중시했던 사람이어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등 선대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인들 특히 당대 시인들 대부분이 기득권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시가들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혼란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 자의 방종과 이기심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하고 있음 또한 목도하고 있다.

* 시모니데스(Σιμωνίδῃς 기원전 556?~468?)는 에게 해의 키오스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가 보여주듯 그리스 고전기 시인들의 선구자로 바킬리데스, 핀다로스와 함께 ‘3대 합창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호메로스 시절부터 이미 능력 있는 시인들은 당시 왕이나 참주 또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의 공적을 노래하곤 했다. 페르시아 전쟁 때의 전사자의 묘비명, 특히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사한 300인의 스파르타 용사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이스퀼로스를 꺾을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합창대가, 승전가, 찬가. 애가(哀歌) 등 여러 영역에 걸쳐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약간의 단편과 비문 정도만 전해지고 있다. 그는 특히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애가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다나에의 슬픔을 노래한 <다나에의 비가>는 남아 있는 그의 시편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기원전 476년경에 히에론 1세의 초청으로 시칠리아섬에 가있다가 히에론의 궁정에서 사망하였다.

 

[332a]

* 소크라테스는 앞서 케팔로스의 정의관이 갖는 한계를 분명하게 지적했음에도, 폴레마르코스가 다시 시모니데스를 끌어들여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의아해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맡은 것’과 ‘갚을 것’이 같은 것임을 들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을 재차 환기시킨 후에, 시모니데스의 말을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앞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그 말은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은 하지 않음이 마땅하다’라는 게 ‘그 취지’라고 답을 한다. 그리고 황금χρυσίον을 되돌려 주어야 할 때라도 친구에게 해가 된다면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게 그 취지임이 확인된다. ‘황금이 탐나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라는 주변의 오해도 이겨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로써 ‘정의는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은 폴레마르코스가 이해한 취지에 따라 정의는 ‘친구끼리는 서로에게 무언가 좋은 일을 해주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τοῖς φίλοις ὀφείλειν τοὺς φίλους ἀγαθὸν μέν τι δρᾶν, κακὸν δὲ μηδέν이라는 정의관으로 새롭게 확장된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2b]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정의관에 폴레마르코스의 해석이 더해진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검토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상대의 주장이 갖는 일면성 또는 자기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우선 그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친구가 아닌 적χθρός일 경우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적한테도 갚을 것(빚진 것)은 단연코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적이 적한테 갚는 것(빚진 것)일 경우 그것은 그에 ‘적합한 것’ 즉 나쁜 어떤 것κακόν τι이라고 답한다.

* 갚을 대상이 적의 경우로 까지 확대되자 폴레마르코스는 ‘갚을 것’(빚진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to opheilomen)이란 말 대신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to prosēkon)이란 말을 사용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가 사용한 ‘빚진 것’이란 말이 적의 경우에까지 적용되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 말 대신 ‘적합한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에 적합한’, ‘~에 해당하는’의 뜻을 가진 προσῆκον은 ‘빚진 것’,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의미하는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말이 갖는 구체성과 당위성이 약화된 다소 애매하고 포괄적인 말이다.(이런 점에서 τὸ προσῆκον은 ‘합당한’으로 옮기기 보다는 ‘적합한’으로 옮기는 것이 더 원의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어떤 기준이나 도리에 맞는’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합당(合當)한’이란 말로 옮기면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하는 το ὀφειλόμενον과 의미상 차이가 잘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폴레마르코스가 ‘빚진 것’이란 말 대신 ‘적합한’이란 말을 쓰자, 바로 시모니데스가 정의 무엇인지를 말함에 있어 시인처럼 ‘암시적으로 말한 것’ἠινίξατο 같다고 말한다. ‘적합한’이란 말이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의 의미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τὸ προσῆκον ἑκάστῳ ἀποδιδόναι이라는 정의관은 언뜻 보면 ‘각자에게 고유한οἰκεῖος 몫을 주는 것, 각자가 저마다 고유한 제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적합함’이란 플라톤이 말하는 ‘자연에 따른(kata physin) 본래적 고유함’과 달리 친구와 적이라는 말이 이미 그 자신을 기준으로 언급된 것이듯이 주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가 표현을 바꾼 것임에도 소크라테스는 마치 시모니데스가 실제로 그렇게 바꾸어 말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고, 질문도 직접 시모니데스에게 던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폴레마르코스가 마치 자신이 시모니데스라도 되는 양 열심히 그를 대변하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시모니데스를 포함하여 당대 시인들의 말들이 이현령비현령 아무나 자기 식으로 말을 바꾸어 표현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애매모호하고 암시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332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에 우선 그가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라는 그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터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기술’τέχνη개념을 끌어들여 먼저 의술ἰατρικὴ과 요리술μαγειρικὴ이 ‘각기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마땅한 것이자 적합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인지를 묻고, 그런 연후에, 그런 방식에 기초하여 ‘정의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기술>’ἡ τίσιν τί ἀποδιδοῦσα τέχνη δικαιοσύνη인지를 묻는다.

*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시모니데스의 말과 그 말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이 결합되어 구성된 것이라, 시모니데스가 말한 ‘마땅한 것’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이란 표현과 폴레마르코스가 말한 ‘적합한 것’τὸ προσῆκον 이란 표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το ὀφειλόμενον은 앞서 ‘빚진 것’, ‘갚을 것’으로 옮겼지만 여기서는 맥락 상 ‘마땅한 것’으로 옮겼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ὀφειλόμενον은 ‘마땅히 해야 하는’의 뜻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332d]

*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의술은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당시 의술적 치료 방법은 기본적으로 복용의 방식이다)로 요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해 주는 기술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ἡ τοῖς φίλοις τε καὶ ἐχθροῖς ὠφελίας τε καὶ βλάβας ἀποδιδοῦσα이라고 답을 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에 의해 처음 언급된 ‘정의는 각자에게 적합한 것을 갚는 것’이라는 말은 ‘정의란 친구들한테는 잘 되게 해주고 적들한테는 잘못 되게 해주는 것’τὸ τοὺς φίλους ἄρα εὖ ποιεῖν καὶ τοὺς ἐχθροὺς κακῶς δικαιοσύνην으로 구체화되면서 비로소 검토 대상으로서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된 셈이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자 방책’으로서 기술τέχνη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논박과정에 단편적이나마 정의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것은 여기에서의 문답법이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상대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데 그치고 있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문답법과는 다소 결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 국면에 가면 이러한 특징은 앞부분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에서의 대화가 전기 대화편과 달리 논박을 넘어 플라톤 자신의 적극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 나중에 점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기술이긴 기술이되,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 특정 시기, 특정대상에게 특수한 무엇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일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건 사물이건 기능이건 간에 모든 대상에게 언제나 가장 고유하고 가장 훌륭한 상태로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능력과 방책으로서의 기술이다. 따라서 정의라는 기술을 정의하면서 어떤 특정인, 특정 대상에 국한된 기술이나 특정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의미 규정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혼의 내적인 상태’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모든 대상, 모든 행위, 모든 기능에 늘 ‘좋음(善, to agathon)’으로 작용하고 무조건적이고도 전일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자, 앎(epistēmē)이고 힘(dynamis)이자, 훌륭한 상태(aretē)’인 것이다.

* 물론 여기서 기술 관련 논의는 아직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하고 폴레마르코스 또한 플라톤적 기술 개념을 아직 알 리도 없다. 그럼에도 기술 개념은 이미 여기서도, 주관적인 답들만 늘어놓고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주장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논박하기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

 

[332e]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기술을 끌어들여 이른바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을 하나의 테제로 정립시킨 후에 드디어 그것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착수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유능성과 쓸모에 관하여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또한 장차 드러나게 될 ‘기술로서 정의의 능력(dynamis)과 기능(ergon)’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먼저 질병과 건강과 관련해서 그리고 바다의 위험과 관련해서, 친구들과 적들한테 잘 되게 해주거나 잘못되게 해줌에 있어 가장 유능한 이가 각기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의사ἰατρὸς 와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가 각기 그러한 사람이라고 답을 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은 ‘어떤 행위πρᾶξις와 어떤 일ἔργον과 관련해서 친구들한테는 이롭게 해주되ὠφελεῖν 적들한테는 해롭게 해줌βλάπτειν에 있어 가장 유능할 수 있는지δυνατώτατος’를 묻는다.

*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도 폴레마르코스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답을 한다. 즉 ‘항전을 할 경우와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ἐν τῷ προσπολεμεῖν καὶ ἐν τῷ συμμαχεῖν, 정의로운 사람이 가장 유능하다고 말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싸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해서 싸울 경우에도 자기를 절제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힘을 합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의 이러한 대답은 비록 특정 사례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일단 그가 말한 경우에서의 정의의 쓸모에 대한 내용상의 반박은 잠시 접어두고,(이에 대한 반박은 334c~336a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식으로 정의의 쓸모를 말하면 쓸모를 따지기도 전에 쓸모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고 반박한다. 이를테면 의사와 키잡이는 각기 건강한 사람의 경우나 항해하지 않을 경우에는 쓸모가 없듯이,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는ἐν εἰρήνῃ 정의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는 것이다.

* ‘전쟁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없겠죠?’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전쟁을 하는 사람들’과 ‘정의로운 사람’이 ‘질병을 앓는 사람’과 ‘의사’의 경우처럼 정의로운 사람들 따로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인 양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어떤 행위’와 ‘무슨 일’과 관련해서 정의의 쓸모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질병이 없는 경우 의사의 쓸모’를 묻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전쟁이 없는 경우 정의의 쓸모’를 묻는 말이다. 플라톤에게는 누구나 다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그가 그리는 이상 국가에서는 통치자와 군인, 생산자 모두 다 정의로운 사람이다.

 

[333a]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평화 시기에 농사γεωργία가 농산물의 취득을 가능하게 해주고 제화술이 신발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과연 용도와 획득χρείαν ἢ κτῆσιν과 관련하여 어떤 경우에 쓸모χρήσιμος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는 계약과 관련한 일 즉 거래의 경우라고 답을 한다. 여기서 계약과 거래를 나타내는 τὰ συμβόλαια와 κοινωνήματα는 모두 협력 상대κοινωνός와 합심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상호 협력과 협의를 요하는 경우들이다.

 

[333b]

* 폴레마르코스가 정의가 쓸모 있는 경우로서 계약과 거래를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장기와 같은 게임이나 돌을 쌓은 일의 경우를 들어 각기 장기 기사와 건축공이 그 일에 더 유능한지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이 더 유능한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폴레마르코스가 각기 기사와 건축공이 더 나은 상대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와 마찬 가지로 장기를 둘 때이건 벽돌을 쌓을 때건 키타라를 연주할 때 건 그 일에 능한 사람들이 쓸모 있는 것이지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로써 정의의 용도와 획득과 관련하여 계약과 거래의 경우에 정의가 쓸모 있다는 폴레마르코스의 생각은 한계가 드러난다.

 

[333c]

*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금전 관계 즉 뭔가를 공동 구매하는 경우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쓸모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금전 관련 협력관계가 두 사람이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협력관계πρὸς τὸ χρῆσθαι ἀργυρίῳ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경우는 제외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함께 말을 사거나 팔 경우 정의로운 사람보다 말에 대해 더 잘 아는 전문가가 협력자κοινός로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폴레마르코스는 다시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 즉 돈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일의 경우를 꺼내든다. 여기서 ‘금은을 함께 이용해야하는 경우’ὅταν δέῃ ἀργυρίῳ ἢ χρυσίῳ κοινῇ χρῆσθαι란 금화 또는 은화로 뭔가를 구매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그 누군가가 그것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경우 이를테면 은행업이나 금융업 같은 협력관계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금전을 맡기고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란 ‘금전이 소용이 되지 않은 그런 때’ὅταν ἄχρηστον에야 정의가 쓸모가 있다χρήσιμος고 말하는 꼴임을 지적한다.

* 말ἵππος은 당시 부유층이나 거래할 수 있는 고가품에 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문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소용없는ἄχρηστον 그런 때에 정의가 소용되는χρηστον가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서 ‘소용없는’의 원어는 ‘소용되는’χρηστον(chreston)’에 부정어 ἄ가 붙은 ἄχρηστον(achreston)이다. ἄχρηστον은 ‘쓰지 않음’(unused)‘과 ’소용없음‘(useless) 두 가지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쓰지 않을 때에는 쓸모가 있게 되겠군요?’ἡ δικαιοσύνη ἐν ἀχρηστίᾳ χρήσιμος(333d)라고 말할 때는 ἄχρηστον을 또 ‘쓰지 않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두 가지 다른 뜻을 가진 ἄχρηστον이란 말을 이용한 소크라테스의 말놀이인지 아니면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라는 우리말 속담처럼, ‘쓰지 않음’은 곧 ‘소용없음’임을 말하고자 하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나타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또 어쩌면 돈의 보관과 관리만으로 돈을 버는 당대 신흥 은행업이나 고리채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냉소를 담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쓰지 않음’과 ‘쓸모없음’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333d]

* 결국 금은을 함께 이용하는 경우에 정의가 소용이 있다는 주장은 마치 낫이나 방패, 리라를 보관만 하고 있을 때에나 정의가 소용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정작 쓸 때가 되면 정의가 아니라 포도나무 가꾸는 기술이나 중무장 병기사용술ὁπλιτική, 시가 기법μουσική이 쓸모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결국 이러한 이치로 폴레마르코스가 말하는 정의란 ‘그 각각의 것을 ’쓸 때‘ἐν χρήσε에는 ’쓸모가 없다‘ἄχρηστος가 ’쓰지 않을 때‘ἐν ἀχρηστίᾳ나 ’쓸모 있는‘χρήσιμος 그다지 ‘요긴한 것’τι σπουδαῖον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듯 쓸모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시모니데스적 정의관은 그리 내세울만한 정의관이 못 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 정의의 쓸모와 관련하여 전개된 이상의 문답들은 상대가 특정 사례를 통해 논변을 펼 경우 오히려 그 주장과 모순되는 다른 사례들을 최대한 두루 제시하여 그 주장의 한계를 폭로하는 이른바 소크라테스적 논박(elengchos)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전개된 논박이 갖는 의미 등 몇 가지 종합적으로 음미할 사항은 다음 회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