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이상하(한철연 회원)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이전의 글을 이어가보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뻔한 말은 이제 현대인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래 도구적 합리성, 흔히 말하는 투입-산출이라는 효율성이 인생의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잣대가 된 근대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한국인들은 다들 어떻게든 자신의 기대를 낮추려, 아 어차피 망할거야 안될놈은 안돼 등등의 말로 자기 인생에 실망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생계와 관련되지 않은 스포츠 같은 취미분야에서는 설레발이 아닌 역레발, 즉 자신의 진심과는 반대쪽으로 설레발을 치거나 자기 팀 망하라고 부두술을 거는 행위가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중요한 경기 이전에 유행으로, 하나의 문화적 밈으로 퍼지기도 한다. 축구계의 황제인 브라질의 레전드 펠레가 경기 예언만 하면 반대로 실현된다는 펠레의 저주 속설이 퍼지니까, 브라질 국민들은 월드컵 시즌에 제발 펠레가 조용히 입을 다물어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웹툰같은 대중문화 서브컬쳐의 세계에서도 대부분 캐릭터들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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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도저히 기대를 낮출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으로 온갖 설레발을 다 쳐보고 싶은 포기할 수 없는 소원도 사람마다 분명히 존재한다. 취준생에겐 번듯한 정규직이, 입시생에겐 명문대 합격이 그러하듯, 웹툰 덴마 야엘로드편의 주인공 야엘에겐 최하층 계급 피코인 자신이 이 불평등한 계급 사회를 바꾼다는 소원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힘든 현실의 억압과 차별에 지쳐서 이전 글에 나왔듯이 10대에 벌써 삶 자체를 놓아버리기 직전에 놓인 야엘. 허나 초능력으로 미래를 보고 예언한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자신이 바로 미래에는 영웅의 전당에 올라가 위대한 로드 야엘로 불리게 된다는 예언을 듣게 된다면… 이 소원에 대한 기대는 밑도 끝도 없이 커질 수밖에. 외계인이 나타나서 1년뒤 로또 번호를 알려준다면 그 누구든 어떻게든 1년을 버틸수 있게 되듯이. 2년 뒤면 누구나 전역을 하니까 불공정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군인도 사회로 돌아갈 기대를 품으며 오늘의 모욕을 참아내듯이. 그리고 과거의 역사속에서 맑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현재의 억압과 고통을 영광된 미래에 보상받으리라 기대했듯이, 마치 기독교의 종말론 서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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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미래에 대한 희망찬 예언이, 예정된 자신의 미래가 사실 거짓이었다면?데바림이 미래를 보고 예언할 수 있다는 초능력 자체는 진실이지만 그들이 항상 진실만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실이라면? 보통 이러면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금의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을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지금까지의 삶과는 아에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우리 역사 속 한국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의 미래에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며 투쟁했던 80년대 운동권들이 소련이 무너지는 역사 앞에서 적지 않은 좌파들이 극우파로 전향하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유명한 김문수나 박형준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 한 두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야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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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야엘은 예언된 미래가 거짓이었다는 것에 무너지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예언한 미래가 설사 거짓이라 해도, 그 비전 덕분에 야엘은 차별받고 억압받는 힘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이다. 공포 마케팅에 전염되어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길이 아니라, 그 사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싸우며 그 고통 속에서 현세의 행복을 찾는, 묵묵히 하루하루 땅을 파내는 참으로 종교적인 선지자의 길을 야엘은 택했고 행했다. 벤야민도 바로 이런 삶에 대해서, 맑스가 자본론 책에서 말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더지’라는 혁명가의 모델에 대해 말한 바 있고 중요한 이미지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선 차후 또 천천히 상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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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다쳐서 다리를 못 움직이면 양팔로라도 기어가는 구도자의 길. 어차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고, 자신에겐 포기할 것이 없으니 더더욱 앞으로 미래로 갈 수밖에 없는 야엘. 이 모든 이야기는 행성 전체에 생방송으로 전달되었고, 피코 계급 전체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야엘 몰래 생방송을 중계했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로 야엘은 정말로 피코만이 아닌 행성 주민 전체에 큰 울림과 성찰을 주는데 성공했다. 벤야민이면 이런 장면을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기존의 반복되는 과거를 중단시키고 미래의 시간으로 도약하는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흔히 혁명을 전진하는 힘의 대오, 1987년 장준환 감독의 영화처럼 시위나 집회같은 이미지로 많이들 표상하지만, 앞으로만 전진하는 기관차가 혁명인 것이 아니라, 송강호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다소 노골적으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와 전체주의라는 현재 폭주하는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지금시간이 바로 이 시대의 혁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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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었다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난 사이에 행성 주민들의 꿈과 희망이자 엄청난 스타가 되어버린 야엘. 자신이 했던 말들이 생중계되는 것을 몰랐던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현재의 고통들을 버텨냈을 뿐이고,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스스로 가능한 최선의 행복을 추구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허나 바로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미래를 여는 희미하고 작은 메시아로 통하는 희망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피코 야엘에겐 자신의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선배 또한 존재했다. 벤야민이라면 이 선배를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 역사의 폐허 속에서 끝없이 진보의 폭풍이 불어오는데도 과거의 잔해를 주워담으려는 새로운 천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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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야엘에게 의외의 응원권이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속에서 최하층 계급인 수드라보다 낮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있듯이, 사실은 피코 야엘에게 엄격히 대하던 국회 의장이 바로 피코보다도 키가 작고 낮은 계급 출신이라는 반전이 나온다. 물론 국회의사당이 무너져서 의장이 다리를 다치자 기계몸이 나온 시점에서 이를 벌써 눈치챈 날카로운 독자도 있었을테지만, 나로선 이 복선과 반전에 실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 야엘로드 편부터 사람들이 양영순의 스토리텔링에 깊이 공감하고 훗날 덴경대라 불리게 되는 적극적인 지지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야엘의 흔해빠진 영웅적 신화 스토리가 아니라,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양영순의 덴마가 마무리를 망친 괴작이 아닌 다시 또 봐야 하고 한국 웹툰의 역사의 기억안에 남겨둘 만한 근거로 충분치 않은가 나는 감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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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야엘로드의 결말 이후의 50년 뒤를 살짝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 나는 두 가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50년 뒤의 대화들은 분명 키가 작든 크든 계급이 낮든 높든 평등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코출신 작은 키의 야엘은 왜 굳이 키를 크게 그렸을까? 50년이나 걸려서 국회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저 야엘조차도 결국 국회의장이 기계몸을 타고 키를 키웠듯이 상층 출신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사인 것일까? 정치인이 누구나 국회에서 정장을 입어야 하듯이? 그 유시민조차도 국회 입성한 날에 처음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동료 의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다음날부터 말끔한 정장을 입었듯이 이 또한 양영순의  씁쓸한 현실 풍자인 걸까?

 

 

 

그리고 과연 야엘이 던진 질문인 행복이란 무엇일까? 야엘은 행복이란 마치 자명한 개념인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과연 행복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말이던가??…  이에 대해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만드라고라 편에서 나름의 대답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나름 엘리트인 국회의원 보좌관 야엘이나 만드라고라 마스터인 나오미 수녀처럼 전문가적 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정말 밑바닥 인생도 그러한 어떠한 반전의 계기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제 다음 에피소드인 나이트의 슬럼가 쓰레기 퀑 지로를 보며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야엘처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벤야민이 말하는 혁명적인 지금시간을 과거로부터 불러올 수 있을 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

 

 

계속…

열아홉 번째 시간 – 다시, 사랑 [시가 필요한 시간]

열아홉 번째 시간 – 다시, 사랑

 

마리횬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이번 주에도 ‘귀로 읽는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위 파일을 누르시면 편하게 ‘시가 필요한 시간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오늘은 “다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코너를 시작하고 두 번째 시간이었나요? ‘사랑’이라는 주제로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을 들려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수학과 과학에 존재하는 법칙이 있죠. 질량의 크기는 무게를 말하고, 부피는 물체의 가로 세로 높이를 곱한 크기를 가리킵니다. 보통 무게가 무거우면 그 물체의 크기도 더 크기 마련이죠. 무게를 재는 추를 생각해보면, 5g짜리 추와 50g짜리 추가 있다면 50g짜리 추가 훨씬 그 부피가 크지 않겠어요? 그것이 자연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법칙이라면, 김인육 시인은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내 놓으며 우리의 생각을 뒤엎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 시간을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 

오늘 “다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한 편의 사랑 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 <사랑의 물리학>과 함께 읽어도 좋을 시로 한 번 골라 봤는데요, 장석남 시인의 <배를 매며>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장석남 시인은 1965년 인천에서 출생했고,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한 시인입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면서 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시죠. <배를 매며>라는 제목만 들어서는 사실 사랑에 대한 시라는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겠는데요, 시를 한 번 듣고 더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 <배를 매며> 입니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이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모든 사랑에 대한 시 –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랑

이 시에서 시인은 배가 정착하는 것과 사랑이 다가오는 것을 함께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를 들으면서 여러분들 머리 속에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어떤 존재가 있을 거 같아요.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사실 ‘첫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랑이 다, 사실은 다 예고 없이 시작됩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이 시는 예고 없이 찾아오고 예고 없이 시작되는 모든 사랑에 대한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밧줄이 ‘등 뒤로’ 날아 온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거죠.

이 시에 ‘호젓한 부둣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호젓하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호젓하다’ 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무서우리만치 고요한’이라는 의미와 함께, ‘매우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롭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홀가분하다’는 느낌은 언제 가지게 될까요? 예를 들면.. 오래 준비했던 시험을 마침내 다 끝냈을 때 라던지, 한바탕 청소를 다 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럴 때에 “와 진짜 홀가분하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훌훌 털어버렸을 때의 기분과 상황일 때 쓰죠.

그렇다면 말 그대로 그냥 ‘홀가분’만해야 하는데, 이 ‘호젓하다’라는 말에는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롭다’”라고 그 뒤에 ‘외로움’의 느낌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홀가분한 건 홀가분한 거고, 쓸쓸하고 외로운 건 쓸쓸하고 외로운 건데, 홀가분해서 쓸쓸하고 외롭다는 건… 생각해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느낌도 들죠. 왜 시인은 사랑에 대한 비유로 ‘부둣가’라는 배경을 잡으면서 ‘외로운 부둣가’라던지, ‘조용한 부둣가’가 아니라, ‘호젓한 부둣가’라고 썼을까요? 한 번 생각을 해 보죠.

혼자가 되면, 사실 이것 저것 생각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굉장히 편하고 홀가분한데, 막상 또 곁에 아무도 없으면 뭔가 마음 한 켠이 쓸쓸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 감정을 딱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바로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로운’이라는 뜻의 ‘호젓하다’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호젓한 부둣가’라는 표현은, 사랑에 대해서,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해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지금 굉장히 호젓해지셨나요? J  

 

문득 들어온 배, 문득 던져진 밧줄

이 시가 사랑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서 공감 가는 표현들이 많은 거 같아요. 어느 날 밧줄이 던져지고, 배가 들어오고 하는 사랑이 시작되는 경험을 하긴 했는데… 우리는 알고 있죠. 그것이 그저 아름답게 끝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사랑이라는 게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는 것도 공감이 되고, 다 공감이 되는 표현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렇게 왔다가 또 떠나 간단 말이죠. (그럴 거면 들어오지를 말던지,..) 그런데 한편으로 배의 입장에서는 ‘아니 그러면 밧줄을 매지를 말던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쪽 입장에서는 “아니, 그러길래 누가 들어 오래?” 라고 또 말할 수도 있을까요? 다가온 배가 잘못인 건가, 아니면 던져진 밧줄을 맨 내가 잘못인 건가… 그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따가운 공방전이 되겠죠.

 그런데 사실 이 시를 잘 읽어보면, 들어오는 ‘배’도, 그리고 그 배를 매는 ‘나’도, 어느 쪽에도 책임이 없음을 알 수 있어요. 이 시를 잘 보면 밧줄이 ‘던져진다’라고 되어 있지, 밧줄을 던진 존재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죠. 배에 손이 달린 것도 아니니까 배는 밧줄을 직접 던질 수가 없고,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던진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에 대한 아주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나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해 보자면, 바야흐로 제가 러시아에 유학을 갔을 때였습니다. 도착한지 몇 일 안 되어서 학교 행사에 유학생 신분으로 초대가 되었어요. 그 행사 중간에 유학생 학생회에서 러시아 소설 작품 중 한 장면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는 순서가 있었고, 한 한국인 남학생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잘 부르더라구요. 굉장히 인상적으로 무대를 봤고, 한 눈에 반해버렸죠. 그게 어떻게 보면 이 시에서 말하는 ‘밧줄’이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도 일부러 나에게 던진 것이 아니고, 나도 억지로 잡아 끈 것도 아니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갑작스럽게 던져진 밧줄이었던 셈이죠.

그날 이후 알고 보니 같은 기숙사 건물에 사는 남학생이어서 서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아주 천천히 조용히 배가 들어 온 셈이고, 그 사이에 저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던져진 밧줄을 매었던 것이고, 그 친구라는 배가 내 호젓한 부둣가로 천천히 와서 머물렀던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몇 개월 후에 그 친구가 곧 한국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찾아왔고, 용기를 내서 저의 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좋아한다고. 그런데 그 친구도 저를 좋아하지만 친구로만 좋아한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 이후로 그 친구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친구로 잘 지냈지만, 저는 한 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살짝 숨기고 친구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좋아했던 마음이 점점 작아지더라구요. 밧줄이 어느 새 풀려서 배가 떠난 셈이죠.

 

떠나간 사랑도 아름답다

아까도 우리가 잠깐 얘기했지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뭐하냐,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떠나가지 않냐”라고, 그리고 “그렇게 떠나 갈 거였으면 들어오지를 말았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이것도 정말 사랑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와 함께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져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은 배가 떠나간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 같더라구요. 배가 떠나가고 그 자리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아, 배만 머물렀던 게 아니구나,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장소, 그 사람이 있었던 시간, 그 때의 구름의 모양, 빛의 빛깔 그런 것들이 다 머물렀던 거구나” 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시인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것 역시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죠.

 밧줄을 매고, 배를 붙잡아 매고, 그 배를 내 부둣가에 머물게 두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떠나 가야지만(떠났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거죠.

아…. 다시 호젓해지네요..

 

모든 사랑에 대한 시 – 다시, 사랑

예전에 제가 들었던 어느 강의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많은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영화, 노래가사에 왜 성공한 사랑 이야기는 별로 없고, 이별 이야기나 실패한 사랑 이야기, 애틋하게 이어질 듯 말 듯 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렇게 많은 걸까?” 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을 한 문장으로 말씀하셨는데요, “성공한 사랑은 아기를 낳고, 실패한 사랑은 이야기를 낳는다”였습니다. 아기를 뜻하는 프랑스어(Enfant)는 다르게 풀이하면 ‘말 없음(En-fant)’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데요, “성공한 사랑에는 아기가 생기지만, 실패한 사랑에게는 아기(말 없음)를 대신해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 듯하죠?

비록 사랑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대신 그 사랑으로 아름다운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긴다면, 그것 역시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이 시를 읽으면서 “성공한 사랑이든, 혹 실패한 사랑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석남 시인도 시를 통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여러분들도 이 시를 읽으면서 여러분 만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장석남 시인의 시 <배를 매며>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곽진언의 <고스란히>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에는 내가 놓아버린 적이 없는데 어느새 끈이 풀려 멀어져 버린 사랑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문득 찾아왔다가 스르륵 떠나버리는 사랑의 이야기가 가사에 잘 드러나면서 이 시와 참 많이 연결이 되더라구요. 호젓한 부둣가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곽진언  – <고스란히> https://youtu.be/2c181Ra66as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신입회원 모집을 위한 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신입회원 모집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1개 이상의 세미나에 참여하실 경우 회원 가입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여러 개의 세미나에 중복 참여하셔도 됩니다.
•8월 둘째 주 부터 세미나가 시작됩니다.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은 이메일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참여 신청시 성함, 이메일, 연락처, 희망 세미나 주제를 알려주세요.)
•강의 일정 및 장소는 8월 첫째 주 공지할 예정입니다.
•참여 신청 및 문의 : kb-940@daum.net(교육부장 김종곤)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읽는 『자본론』]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이전의 노동 형태와 현재의 임금 노동에 차이가 있다면,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전의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이 내 것이었고 임금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우리의 신체를 판다. 회사든 공장이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안에 머문다. 우리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자를 ‘자유로운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노동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것이고, 기저에서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of) 것이다.

많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자의 자유에 초점 맞추기를 좋아한다. 노동자 자신도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고, 자본가도 노동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채용공고들 중 어느 곳에 지원할지 선택할 수 있다. 서점에서 알바할지 식당에서 서빙을 할지 고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까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고등학생 동창 중 최저시급이 7,530원이었을 때, 시급 5,50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일한 친구가 있다. 시급은 적지만 위치로나 근무 시간으로나 그 친구한테는 그나마 최적의 알바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저시급 이하로 임금을 주는 곳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친구니까,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없을까? 아니다. 명백한 착취다. 친구더러 ‘네가 선택했으니까 너는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다.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약 2주간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계산대 지키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들어오면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정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1시간만 일해도 체력이 바닥났다. 4시간 동안 천천히 하면 됐을 것을, 내 속도에 따라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이라 늘 2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갔다. 두 시간이면 당시 시급으로는 약 15,000원이다. 하지만 2시간 일해서 15,000원 받고,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게 한 시간 만큼의 임금은 제하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나름의 노동교육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찾아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부당하다고.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긴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나는 분명 노동을 했으니 내가 노동한 만큼의 임금은 주시는 게 맞다고. 어림없었다. 퇴짜를 맞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할까 고려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5만 원을 떼였다. 약 8시간 동안의 노동이 공중분해 된 것이었다. 내가 작은 빵집의 사장이었다면 8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 그 빵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라고. 노동력밖에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결국에는 어떤 걸 선택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free of) 노동자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노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으로 보았다. 노동의 과정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의 직접적인 생존과 나의 잠재력 실현의 수단이다. 그래서 노동이란 내가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길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조절할 권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임금 노동에서 후자의, 나를 위한 노동의 요소들은 전부 제거되고 전자의,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노동만 남아버렸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야 조금의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는 이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퇴근 후의 시간뿐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국회의원과 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의 구호는 사실 틀렸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나 양적으로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노동을 원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너무나도 자주 무시당한다.

인간다운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새 떠오르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개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최근에 정부에서 실행한 재난지원금 정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조금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에 기본소득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본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이었다. 내가 새내기가 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봉사단에 지원해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스텝이 되었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발표자와 청중이 몰려왔는데 스텝의 특권은 강의실들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에 애써 귀 기울여 보니,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썩 괜찮게 느껴졌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토지가 인류의 공동재산이라는데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땅의 개간자가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데, 이때, 페인은 그 소유자가 땅의 진짜 주인인 공동체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1 토지뿐만 아니라 대기와 데이터, 기술과 같은 유무형의 다른 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우리가 진정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맞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공동의 것인데 왜 누구는 그걸 가지고 부를 축적하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지? 우리의 노동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지?’ 그 이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회가 날 때마다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본소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토피아적 세계. 하지만 알고 보니 기본소득은 또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s://basicincomekorea.org/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에서 내가 쫓아다니던 한 미남이 있는데, 브라질에서 온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마르코’였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즐겨보던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서 이집트 파라오 군대를 이끌던 내 이상형과 똑 닮았었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한테 어렵게 말을 걸어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집에 가서 그의 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소개란에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르코가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좌파에 의한, 그리고 좌파를 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본소득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물론 진보와 보수에서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보수는 기본소득 발상이 출발했던 ‘권리’의 개념보다는 ‘효용’에 더 집중한다. 생산력은 점점 증가하는데, 소비 주체는 줄어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의 위기에 대한 대안쯤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대신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면서 시장 이윤의 재분배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진보 측에서는 기본소득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평등, 그리고 인간다운 삶 등이 진보 스타일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그러나 양측의 찬성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의 반대도 드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복지병을 걱정하거나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유발하고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안에서는 논쟁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데, 진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를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하는 방법이 기본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부의 분배가 부자들에게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서 주는 소득의 수혜자가 되면 국가의 주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는데,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오히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열린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맑시즘(Marxism)으로 넘어가면, 그 안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갈린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이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있고,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자본주의는 존속되며, 생산수단이 노동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주체성을 잃고 오히려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해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에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을까? 혹은 취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에 다음 생으로 미뤄두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으로 의미 없는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뛰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시민정치에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밥을 차려줄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아무리 달콤한 상상일지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양 입장을 전부 고려하면, 기본소득 시나리오의 결말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살아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했던 소파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며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골똘히 고민할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2012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던 다니엘 헤니는 기본소득이 결코 답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기본소득은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나와 공동체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삶에 관한 질문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한 번에 해결할 답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되고, 이 질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답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새내기 때 자원 활동했던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관중 중에 일본에서 온 사회학 교수와 그 제자도 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제자가 웃어 보이면서 ‘그것은 누구나의 꿈이지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참고문헌>

다니엘 헤니・필립 코브체 저, 원성철 역,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 오롯, 2016.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천관율, 「진짜 뉴딜은 기본소득이다」,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1.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20~24쪽.

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시가 필요한 시간]

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7월이 시작되고도 벌써 보름이 흘렀네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학교들이 전면 온라인수업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진통을 겪은 지도 벌써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종강을 하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죠?

2020년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 중간 성적표를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은 절반을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는 2주에 한 번씩 좋은 시를 소개하는 이 “시가 필요한 시간”을 더 열심히 꾸며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운동도 할 거구요, 주변 사람들도 좀 더 살뜰히 챙기는 하반기를 보내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오늘 들려 드릴 시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입니다. ‘버팀목’이라고 하면, 혼자 뻗어 자라나기에는 좀 얇은 가지들을 지탱해주려고 옆에 꽂아두는 나무 막대기를 말하죠? 방울토마토나 고추 같은 식물을 키울 때 옆에 세우고 식물이 기대어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버팀목입니다. 이 시는 시 텍스트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워낙 선명해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시죠.

 

 

 

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 귀로 읽는 시간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드는 시죠? 저도 읽으면서 약간 울컥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이것이 다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거 같아 보일 때가 있죠. 특히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거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면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뭔가 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이 시의 첫 시작에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나옵니다. 험한 바람에 쓰러져 있는 다 자라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으면서, 옆에 각목을 하나 세워서 기댈 수 있도록 버팀목을 세워주죠.

쓰러졌던 나무는 버팀목인 각목에 기대어 다시 살아갑니다. 잔뿌리를 하나씩 내리고 곧 다시 싹도 틔우게 될 거예요. 하지만 각목은, 그 역시도 한 때는 살아있는 나무였겠지만, 이제는 깎이고 다듬어져서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죽은 나무 가지(조각)’에 불과하죠. 죽은 나무인 버팀목은 자신의 어깨를 산 나무에게 내어주면서 나무가 잘 자라도록 옆에서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살아있는 나무가 싹을 키우고 잔뿌리를 내리며 자랄수록, 각목은 점점 햇빛과 비바람에 마모되고…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삭아 없어지게 됩니다. 버팀목이 삭아 없어질 만큼의 세월이라면, 과거 태풍에 쓰러졌던 나무도 그만큼 성장해 있겠죠.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잘 자란 나무는 이제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어엿한 거목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가 더 이상 쓰러지지 않는 이유가 그 자체의 건장함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해진 나무가 스스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나무를 버티게 해 주는 ‘사라진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죠. 그 대목에서 이제 시인은 나무에서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내가 바로 쓰러졌던 나무인 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버팀목이 되어준 누군가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허위허위’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먼저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손을 휘저을 때 “훠이 훠이”하는 의성어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어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죠? 이 두 가지의 뜻은 시 안에서 절묘하게 만나게 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내두르는데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내가 혼자 힘겹게 걸어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라는 뜻이 될 수 있죠. 시인은 아무도 곁에 없는 것 같고, 내가 혼자 힘겨워하는 것 같지만, 아버지와 이웃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응원이 나의 버팀목으로 서 있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이웃들이 태풍에 쓰러졌던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듯이,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지금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라고 시가 끝나고 있는데요, 이 시를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버팀목과 같은 가족, 친구, 이웃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지금 태풍 같은 어떤 어려움에 넘어져 계신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허위허위 저어봐도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에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고, 여러분을 든든히 지켜 줄 버팀목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꼭 붙들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시라는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버팀목을 힘입어 든든한 나무로 자라셨다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댈 어깨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면 어떨까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만든 ‘나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악동뮤지션의 찬혁군이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던 경험을 가지고 작사 작곡 한 노래로 알려져 있죠.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그가 떠난 자리는 나무랄 것 없이 텅 비어 있었다”라고 끝나는데요, 이 <버팀목에 대하여> 라는 시에서의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내 곁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라는 시 구절과 뭔가 연결되는 것 같고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골라 보았습니다. 마침 또 제목이 ‘나무’라구요.

오늘 하루도 힘 내시고, 이 시와 노래 한 편이 여러분에게 버팀목이 되길 바라며,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양희은, 악동뮤지션 – 나무 https://youtu.be/GLQTRlYyPco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신간 안내] 『의학의 철학』(최종덕 지음, 씨아이알, 2020년 7월 8일 발간)

『생물철학』(2014)과 『비판적 생명철학』(2016)에 이어 이번에 ‘의학’을 주제로 최종덕 회원의 신간이 출간되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만남’을 중심으로 오랜시간 연구에 매진한 저자는 한철연에서 마르크스와 자연학, 진화 생물학과 페미니즘, 환경철학 등 근본적이면서 시의성 있는 다양한 논의 주제로 세미나와 집담회를 진행해왔습니다. 『의학의 철학』은 진화와 노화, 그리고 면역이라는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자 철학적인 실존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시의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삶에 깊숙히 침투한 전염성 질병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할지에 큰 도움이 될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하며 많은 회원들과 관심있는 분들의 서평과 견해를 기다립니다. 아래 출판사의 소개글을 전합니다.

 


 

의학의 철학

질병의 과학과 인문학

 

책소개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다

“이 책은 의철학 분야에 환영받을 만한 또 다른 성과일 뿐만이 아니라 의철학 분야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진전시킨 책이며, 이런 점을 잘 알리려고 한 것이 내 추천 서문의 뜻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이 의철학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는 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미국 베일러 대학 의철학 교수 제임스 마컴 추천 서문 중에서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인문의학이 의학자만의 감성적 소유도 아니지만 인문학자만의 지성적 소유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철학도 철학자만의 특별한 사유구조의 소산물이 아니며 의학자만의 고유한 사명의식도 아니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갈등, 병원과 정책에 대한 사회적 갈등, 과학과 임상에 대한 지식론적 갈등, 문화와 인류에 대한 역사적 갈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런 갈등을 풀고 싶어 하는 문제의식을 갖는 모든 사람이 의철학의 주체이다.
의학의 철학은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고통과 질병의 존재가 가능함을 알게 해준다. 어떤 유형의 고통은 과학의 대상보다는 실존의 문제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의학의 철학은 고통에 직면한 환자 개인마다의 실존과 규격화된 임상의 현실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성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눈을 키워준다.

 

출판사 서평

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집중하지만, 거꾸로 철학은 문제를 일으키는 데 주목한다.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은 원래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인데, 가짜 문제를 골라내고 진짜 문제를 찾아 질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의학의 철학』에서 말하는 질문 역시 정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문제를 심어주는 데 있으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하여 거짓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
의학의 철학은 의학적 이론을 투영하는 렌즈이며, 의학적 세계를 비춰보는 유리창이며 의학적 인간학을 반성하는 거울이다.
의학은 질병 인식의 최종 목적지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의학의 철학은 목적지를 향하는 수많은 길이 그려진 지도를 제공할 뿐이다.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 쉽게 알지는 못해도 막혔던 길, 낭떠러지 길, 함정의 길을 가지 않도록 안내하는 것이 철학의 지도이다. 질병의 지식보다는 우선 질병을 이해하는 지도가 우선이다.
냉철한 과학과 성찰적 철학을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의철학의 배를 타고 이 책의 지도를 따라 항해하면 진짜 건강한 거주민의 땅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려는 저자의 열망이 듬뿍 담긴 이 책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우리 몸들을 위한 귀중한 방향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 강신익 교수 추천서문 중에서

 

출처 : http://circom.tizi1011.gethompy.com/board.php?board=tnshopmain&command=shop&view=2_view_body&no=690&corner=&sort=gs_ord&indexorder= 도서출판 씨아이알

 

 

목차


지은이: 최종덕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독일 기센(Giessen)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상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화생물학과 의학의 철학 공부에 집중해왔다. 현재는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의 저서로 학술원 과학도서 우수상을 받은 『생물철학』(2014),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2016) 그리고 『승려와 원숭이』(심재관 공저, 2016), 『뇌복제와 인공지능 시대』(최순덕 공역, 2020) 등이 있다. 이전 저서를 포함하여 저자의 모든 공부경력은 저자의 개인 홈페이지 <철학의 눈> http://eyeofphilosophy.net이나 새로 구축 중인 http://philonatu.com에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다.

 

[신간 안내] 『중국현대철학사론』(이규성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년 6월 30일 발간)

『한국현대철학사론』(2012)과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에 이어 중국현대철학의 흐름과 역사를 획득과 상실이란 주제로 짚어본 이규성 회원의 역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2017년 9월부터 한철연에서 2년 넘게 세미나를 열어, 일정 부분 집필한 원고를 가지고 동료 후배들과 토론을 하며 책을 써나갔습니다. ‘이 책은 결국 모두가 함께 쓴 것’이라는 저자의 겸사는 이 책이 폭 넓은 이해를 담고, 자기 안의 깊은 고민에서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방대한 분량(1,136쪽)이지만, 곧 한철연 회원 및 관심있는 분들의 서평과 견해가 나오길 바라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중국현대철학사론<이화학술총서>

획득과 상실의 역사

 

출처: http://www.ewhapress.com/ewhapress/164/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9vayUyRmV3aGFwcmVzcyUyRjY5MDYlMkZ2aWV3LmRvJTNG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책 소 개

20세기 중국 주요 사상가들의 세계상을 통해
중국현대철학의 획득과 상실, 그 역동의 역사를 짚어보다

 

이 책은 20세기 근 100년에 걸친 중국현대철학의 흐름을 짚어보는 철학서이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신민주주의 혁명인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인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자본주의 세계화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서구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적 지형의 변화와 더불어 전통철학과 변별되는 개념인 신철학(新哲學)이 동서를 막론하고 등장했다. 대대적인 동서문화의 충돌과 융회로 현대철학의 주제는 더욱 다양해졌고, 이질적 문화에 뿌리를 둔 상호적이고 혼종적인 개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20세기의 역사적 상황이 주는 과제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수용한 중국철학은 외세의 위협과 함께 들어온 이질적인 사고방식들을 만나 비로소 자신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되었고, 문제의식을 담아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서 학문적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중국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큰 철학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정치·사회 철학’을 주장한 진독수(陳獨秀)와 모택동(毛澤東) 등은 반봉건·반식민을 위시하며 기존의 사회 위계를 극복한 새로운 민주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문화주의적 형이상학’을 내세운 종백화(宗白華), 양수명(梁漱溟), 웅십력(熊十力), 풍우란(馮友蘭) 등은 회고적 입장에서 중국문화의 보편적 의의를 강조하며 전통문화의 재해석을 통해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논리적 이성주의 철학’을 주장한 풍우란(馮友蘭)과 김악림(金岳霖) 등은 이성주의 입장에서 동서 형이상학을 융회하는 것과 더불어 전통철학이 결여한 지식론과 형식논리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개별자와 타자성의 철학’은 장세영(張世英)이 표방한 사조로, 중국철학의 새로운 흐름들이 실증철학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며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내적 자유의 요구에도 응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사상적 중첩성을 띠고 발전해온 중국현대철학을,
대표적인 여덟 명의 주요 사상가와 그들의 세계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장과 2장에서는 정치·사회 철학을 주장한 진독수와 모택동의 사상을 살펴본다. 1장에서는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진독수(陳獨秀, 1879~1942)를 다룬다. 그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고 보고 스탈린 체제를 비판했으며, 후기에는 ‘대중민주주의’와 ‘민주공화주의’를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행적을 애국계몽 후 신학문 학습까지의 시기, 북경대학 인문대학장 취임 후 5·4운동 발생까지의 시기, 공산당 초대 서기장 취임 후 퇴출까지의 시기, 좌익 반대파가 되어 민주공화주의자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2장에서는 중국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구축한 모택동(澤東, 1893~1976)을 다룬다. 그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표방하다가 인민공화국헌법 반포 후 사회주의 개조정책을 선포하며 혁명을 급진 좌경화했으며,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을 긍정하고 그에 대한 모순의 발견과 실천론을 강조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생애를 학습과 사상의 편력 시기, 중국혁명을 촉발한 중국적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사상 형성 시기, 문화대혁명을 촉발한 좌경 급진혁명론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3, 4, 5장에서는 문화주의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종백화, 양수명, 웅십력의 사상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중국현대미학의 형성자 종백화(宗白華, 1897~1986)를 다룬다. 그는 유럽 낭만주의 흐름을 접하고 그것에서 예술적·종교적 철학과 비교미학을 수용한 후 동서융회의 철학과 공령·충실의 미학을 강조했으며, 중국적 생명주의 미학을 발전시켰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생애를 사상적 맹아기이자 모색기인 전기와, 예술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예술을 통해 사회를 변화·구제하고자 한 시기인 후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4장에서는 신유가학자이자 문화결정론자였던 양수명(梁漱溟, 1893~1988)을 다룬다. 그는 자기에 대한 반성적 이해를 표방하는 ‘자기학’을 생활문화로 삼으며, 이 자기학으로서의 동서 범심주의적 생명철학 및 동서비교적 문화관을 형성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전변을 사공학적 실용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기, 형이상학에 기반을 두고 염세적·출세간적 사상으로 나아간 시기, 향촌자치운동을 벌이며 송명이학적 사고와 지행합일론을 따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5장에서는 역시 신유가학자였던 웅십력(熊十力, 1885~1968)을 다룬다. 그는 유식학을 재해석해 유·불·도를 종합·절충하는 체용불이의 세계상을 세웠으며, 송명이학을 재해석해 수렴·발산하는 힘 간 대립·통일의 법칙인 흡벽론을 수립해 서양의 문화적 힘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 장에서는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치적 학술통제에 불만을 품고 공산사회적 이상을 지지하며 민주주의적 해방을 염원했던 웅십력의 5·4혁명 전후 성숙한 체용합일적 체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6장과 7장에서는 논리적 이성주의 철학을 주장한 풍우란과 김악림의 사상을 살펴본다. 6장에서는 동서융회의 관점과 형식주의 신이학을 표방한 풍우란(馮友蘭, 1895~1990)을 다룬다. 특히 그의 사상적 발전 과정을, 철학을 선의 추구로 정의한 인생철학 시기, 플라톤주의적 관점을 반영해 『중국철학사』를 집필한 시기, 송대이학에 대한 형식논리적 논의를 통해 인격 이상의 철학을 주장한 신이학적 체계 시기,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중국철학사』를 수정한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7장에서는 논리학과 지식론을 통해 철학의 보편성을 정립함으로써 중국철학의 현대화에 기여한 김악림(金岳霖, 1895~1984)을 다룬다. 그는 ‘중국에서 발견한 철학’과 ‘중국에서의 철학’을 구분하고 논리적 형식에 따라 체계적으로 구성된 윤리적 형이상학과, 이성적 개념 및 감각적 경험을 함께 중시하는 절충적 지식론을 주장했다. 이 장에서는 그의 초기 정치사상과 더불어 주요 철학사상인 윤리적 형이상학 및 지식론을 살펴본다.

8장에서는 개별자와 타자성의 철학을 주장한 장세영의 사상을 살펴본다. 이 네 번째 유형의 철학에서 장세영(張世英, 1921~현재)은, 앞서의 세 유형의 철학이 개인성과 타자성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철학이 소홀히 해온 개념들, 즉 무근거성, 우연성, 타자성, 자유 등을 송명이학적 만유상통의 원리와 연결함으로써 개별자의 독특성과 타자성의 문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장에서는 장세영 사상의 핵심인, 유심론적 ‘합리적 내핵’의 원리와, 변증법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서 비롯해 우주와 인생에 대한 윤리-심미적 통찰을 담아낸 ‘신철학’에 대해 알아본다.

이 책에서는 이들 사상가의 철학적 세계상을 이들의 주요 문제의식과 해결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가운데 각각의 특징과 시대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논한다. 이제 인류는 과거와 달리 문화 상호성과 지구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중국철학 역시 세계와의 연관성 안에서 자신의 장단점을 반성적으로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철학은 평안한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는 전통적인 함영(涵泳)의 철학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부조리와 사회적 선악의 갈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 역시 융회적 특징을 띠고 발전해온 중국현대철학사의 큰 맥을 짚어봄으로써 중국철학이 사회주의 정치철학과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타자성의 철학 간 결합을 통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를 전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http://www.ewhapress.com/ewhapress/164/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9vayUyRmV3aGFwcmVzcyUyRjY5MDYlMkZ2aWV3LmRvJTNG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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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1. 구국과 ‘주권재민’(1897~1919)

2. 공자 비판과 대아적 덕성주의

3. 근대과학과 ‘에너지의 명령’

4. 생명감정과 현실 참여

5. 동류의식과 사회주의

6. 연대적 윤리와 역사관

7. 중국대혁명과 전략

8. 취소주의와 후기 민주주의론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1. 사상의 전변과 ‘체용’의 윤리

2. 파울젠과 우주적 대아론

3. 양창제와 발현의 철학

4. 마음의 힘과 민중

5. 생성과 ‘중첩적’ 모순

6. ‘실사구시’와 실천적 인식론

7. ‘민중연합’과 ‘사회혁명’

8. ‘일조진리’와 문화대혁명의 코뮌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1. 문제의식과 사상적 구도

2. 공령과 충실의 미학

3. 분투와 융회

4. 생명과 ‘거리 두기’

5. ‘율력의 철학’과 ‘상’과 ‘수’

6. 동양예술의 공간성과 ‘평면화’ 및 ‘추’의 방법

7. 철학과 음악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1. ‘생명’과 생활문화로서의 ‘자기학’

2. 사회주의와 향촌자치론

3. 오이켄의 ‘정신생활’과 양수명의 ‘직각적 이성’

4. ‘문화방향론’과 유식학의 ‘감각론’

5. 현대과학과 철학의 변화 및 생철학

6. ‘자각적 능동성’과 ‘자동성’

7. 동서학술의 분화와 ‘회통’

8. 러셀의 권고와 ‘중국의 길’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1. 신해혁명과 ‘혁심’의 형이상학

2. 절충적 ‘회통’과 ‘무’의 효용성

3. 『신유식론』의 ‘흡벽론’과 신인성론

4. 생성론의 두 가지 의미

5. ‘경학’의 근본정신과 정치·역사관

6. 철학과 과학의 ‘상관’

7. 비판과 의의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1. 사상의 확대와 구조

2. 동서비교와 ‘인생철학’

3. ‘새로운 언어분석’

4. 신이학과 논리적 형식주의

5. 이기론과 ‘유형론’

6. 예술과 경계론

7. 역사관과 신이학에 대한 비판들

8. 철학사와 형이상학적 보수주의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1. 철학의 조건과 ‘자기인식’

2. 정치사상과 ‘자아실현’의 형이상학

3. 중국철학의 ‘대전변’과 실천적 회통성

4. ‘능’과 ‘식’의 형이상학

5. 목적론적 과정으로서의 ‘도’

6. ‘이사겸중’의 지식론

7. 경험적 소여와 개념적 ‘도안’

8. 『러셀철학』과 사건론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1. 자유의 길과 ‘귀향의 길’

2. 헤겔철학의 ‘합리적 핵심’과 유물변증법

3. ‘자유의 주체성’과 ‘소통성’

4. ‘무근거성’과 ‘경계론’

5. 심미적 ‘신철학’과 자유의 미학

6. 희망과 무한

결론. 상실과 전망

참고문헌

찾아보기


지은이 : 이규성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9년부터 2017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 『최시형의 철학: 표현과 개벽』(2011), 『생성의 철학: 왕선산』(2002), 『내재의 철학: 황종희』(1994)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세계의 탈환과 자유의 길」(2017), 「康有爲의 세계의식과 이상사회」(2013), 「무한모순의 변증법과 생성의 세계」(2010), 「한국현대철학에서의 두 가지 변증법과 사상의 혁명」(2009), 「경험과 생철학의 가능성」(2009), 「朱熹와 李延平: 사유의 전환과 구조」(2008), 「한국근대 생철학의 조류와 구조」(2008), 「심정과 자유의 철학: 함석헌」(2006) 외 다수가 있다.

 

 

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내가 읽는 『자본론』]

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사회 대부분의 거래에 돈을 사용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이 많으면 좋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돈벌이를 스스로 못하는 사람이 다 큰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이유도 이런 돈의 중요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돈 버는 일이 즐거운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양해야 할 사람의 안녕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지 돈 버는 일 자체가 즐겁지는 않다. 당장 내 주위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도 가족 부양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말씀하시지 그 자체가 즐겁다는 이야기는 안 하신다. 엄청 중요한 돈인데, 왜 막상 그 중요한 돈을 버는 과정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일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돈 버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돈 버는 사람 중 절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거나 소상공인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자신의 노동력과 돈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과 돈의 교환은 다른 교환과는 좀 다르다. 즐겁게 돈을 벌 수 없는 이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과정을 살펴보자.

 

교환은 왜 발생할까? 교환은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나에게는 필요하지만 남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기 위해 발생한다. 마르크스는 이걸 좀 어려운 말로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용가치다.”1라고 표현했다. 쌀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남아있는 쌀이 필요가 없지만 닭이 필요하고, 닭을 기르는 옆집 사람은 닭고기가 질려서 쌀이 필요하다면, 나와 옆집 사람은 자연스럽게 쌀과 닭을 교환할 것이다.

 

이런 교환이 누적되다 보면 사람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쌀을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보니, 쌀을 원하는 옆집 사람이 아니면 바로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나는 옷이 필요한데 만약 옷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쌀이 아니라 생선을 원하면 나는 옷을 구하기 위해 쌀이 필요한 어부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겪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환에 사용하는 상품들 전부의 가치 측정수단으로서 화폐(돈)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화폐가 등장하고, 교환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화폐가 집적되어 자본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번다.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상품은 원소유자에게는 쓸모가 없기에 교환과정에 들어가 상품이 되어 돈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서 남에게는 쓸모 있는 그런 상품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많이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게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고, 소상공인이 된다. 문제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노동력은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죽은 사람은 일을 할 수 없다. 노동력은 인간의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실상 자신에게 매우 필요한 생명력을 파는 일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상관없이 당장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당장 나와 내가 부양하는 사람들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팔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들과는 다르게 원소유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돈을 버는 걸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뇌와 근육을 원하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고 본인의 바람과 관계없는 곳에 써야 하는 현실이 우리가 오늘도 아침부터 출근이 싫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그 사이의 간극에서 당장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이 소유한 공장, 상점, 사무실에서 소모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지루해지는데,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기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까?

 

물론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부터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수렵채집을 해야 했다. 또 인간은 자신이 살 집도 지어야 했고 자신이 입을 옷도 만들어야 했다. 아마 모든 노동을 로봇이 수행하고 그 과실을 온전히 인간이 향유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행해야 하는 노동은 너무하지 않은가? 자급자족 사회,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교환만이 존재했던 사회는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노동이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않느냐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2 내가 일을 해서 만들어낸 물건으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게 나에게 만족을 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필요한지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살아가는 지금 사회에서 내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곧 자본이 그 노동을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노동이 자본에게 유용해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대가로 임금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보다 자본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우리 주변만 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직장 일정에 자신의 하루 계획부터 연간 계획까지 맞춰야 하는 직장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 미래 노동력을 더 잘 팔기 위해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다.

 

자본은 사회 전체의 공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자본은 인간 개인이나 사회보다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 가치 증식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불리는데 필요한 인간 노동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투기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다 사회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공공부문 노동자나 기간산업 종사자보다 더 보상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자본 증식에 대한 기여도가 그러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땀 흘리는 일상의 노동은 그 보상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하는 ‘가변자본’에 불과하다. 땀, 심지어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이런 노동에 대해 기적과 같은 대가는 없다. 그나마 그런 노동의 기회조차 부여잡기 힘든 시대. 여기에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래 우리 인간이 교환을 시작한 이유는 사실 우리 인간에게 그 교환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통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역으로 인간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교환과정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주식시장의 흐름에 따라 사회 전체가 출렁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이런 현실이 과연 긍정적인 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의 현실은 꾀 안 부리는 사람들이 힘들여 일해서 생산하는 재화와 가치들을 자본의 하수인들이 복잡하고 어려우며 자신의 손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금융상품을 통해 갈취하는 지옥도이다. 그래서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이다.

 

착취론 같은 거창하게 들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우리 주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열심히 팔아 모은 돈을 어디다 쓰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 사회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라고 표현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죄다 집세 내느라 부동산 투기자본한테 피땀 흘려 번 돈을 뜯기고, 어쩌다 돈 좀 모아 주식 몇 주 사면 투기세력의 시장 널뛰기로 혼란한 시장 틈바구니에서 투자금을 투기세력들한테 다 뜯기는 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현실이다.

 

그럼 거꾸로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돈벌이가 즐거울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공공복리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투기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보람차게 돈벌이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간극을 줄이고, 그 간극을 교란하는 불로소득을 최소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그 중요한 돈을 즐겁게 벌 수 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을 읽고 쓰는 글이지만 『자본론』에 구체적이고 세세한 답이 있진 않다. 이 연재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본론』이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자본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사회였던 때에 나온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금의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하다고 규정짓는 건 과도한 처사이다. 오히려 『자본론』의 서술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욱 놀랍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을 기초부터 지탱해온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명력과 노동력을 온전히 자신과 우리 모두의 공영을 위해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새로이 도래할 일하는 자들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1.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2.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열일곱 번째 시간, 비 [시가 필요한 시간]

열일곱 번째 시간, 비

 

마리횬

 

6월도 다 지나가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입니다. 갑작스런 무더위가 계속되는 동안 햇빛은 뜨겁고, 마스크는 마스크대로 한층 더 답답하게 후끈거리는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었는데요, 드디어 며칠간 반가운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가을이라도 된 것처럼 한낮에도 살짝 서늘하기까지 하더라구요. ‘아 여름이 이대로만 시원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비’를 이야기하는 시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비 좋아하세요?

 

 

저는 비를 좋아해요. 빗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이 더 알맞을 것 같네요. 특히 비가 내려서 도로가 비에 젖었을 때, 그 위로 자동차가 달리면서 내는 “촤악~” 소리가 참 좋습니다. 밤에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거 아세요?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해변가에 나와있는 것 같고 괜시리 기분도 좋아진답니다!

왠지 모르게 비 오는 날에는 조금 차분해지기도 하고, 비 오는 날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시가 바로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는 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입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비가 ‘가는’ 소리라니 약간은 생소하죠.

‘비 가는 소리’라면 비가 점차 그치기 시작할 때의 빗소리를 말하는 것일 텐데요, 내리는 비가 그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시를 통해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는 소리

                          유안진

 

가는 소리에 깼다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낮에 비가 내렸다면 당연히 빗소리가 들릴 것이고, 창 밖 풍경으로 빗줄기가 보일 테니 비가 오는 줄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비가 오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야 ‘아, 비가 왔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은 ‘밤비’뿐이겠지요. 이 시는 비가 그치고 있는 어느 날 밤, 화자가 잠을 깨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잠든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렸고, 이제는 서서히 그치고 있는 밤비를 보면서 시인은 문득, 온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새 가버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겨우 알아차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벌써 6월이 다 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듯, 이미 지나가버린 뒤에야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들이 있죠. 우리의 젊음이 그렇습니다. ‘내가 10년만, 아니 5년만 더 젊었다면’하는 생각, 다들 한 번씩은 해 보셨겠죠? 이제 막 젊음을 누리는 10대나 20대초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던 시간의 빠름을 그 때가 지나간 후에 점점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또 누군가가 떠난 이후, 그 존재의 무게와 깊이가 얼마나 컸었는지 뒤늦게야 와 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고, 가족,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없는 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것을 보니 그가 내 곁에 가까이 머물렀었구나’, ‘그의 존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게 틀림 없구나…’라고 누군가가 떠난 흔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가 있죠. 역시 한창 어리기만 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 일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눈 앞에 왔을 때 두 손으로 꼭 잡았어야 했던 것인데, 당시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지나쳐 버린 후에야 ‘그 때 시도해 볼 걸’, ‘….걸, …걸..’하며 후회하죠. 왜 진작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이렇게 깨닫게 되는지..

이처럼 밤비가 지나가버린 뒤에야 비가 왔었다는 것을 깨닫는 새벽녘의 선잠처럼, 뒤늦은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들이 우리 삶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쉬움과 애잔함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이 시에서의 ‘불협화의 음정’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를 때 듣게 되는 ‘화음’이 있죠. 음정이 딱 맞아 떨어지는 화음(협화음)은 듣기에도 안정적이고,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서로 어긋나고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의 음정은 불안하고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한편으론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시인은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그러한 아련하고 슬픈 느낌을 ‘가고 있는’ 빗소리를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이죠.

 

어느새 가는 소리가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소리 보다, 왔다가 떠나가는 빗소리가 더 들린다면, 어쩌면 이제 조금 더 성숙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것은 “왔다가 가고야” 마는 것인데, 그것을 전혀 모른 채 아쉬움 없이 떠나 보냈던 수많은 날들, 젊음, 사랑, 기회들을 이제는 돌이켜보게 되었다는 것이니까요.

분명 비 가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감수성이며 성찰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에만 너무 지나치게 붙들려 있어서도 안될 겁니다. 오히려 이 시의 화자처럼,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라고 그것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에서 어김없이 또 다시 비가 내릴 테니까요.

황동규 시인은 “즐거운 편지”라는 시에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치겠지만, 눈이 그치면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가 또 눈이 퍼부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지금 눈이 그치고 마치 내 사랑도 끝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세월 지나 다시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처럼, 내 사랑 역시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기다림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닐까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새 비가 그치고 떠나가고 있나요? 그 ‘비 가는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신 후에, 다시 훌훌 털고 다음 번에 내릴 비를 기다려 보면 어떨까요? 내일이 될 지, 다음 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반드시 다시 비가 내릴 겁니다. 그 때는 ‘비 오는 소리’도 반갑게 들을 수 있게 말이죠.

 

오늘 이 시와 어울릴만한 노래로 한영애 씨의 <바람>을 골라 보았습니다. 내리는 줄 몰랐다가 그쳐버린 비처럼, 곁에 있는 줄 몰랐다가 떠난 뒤에야 알아차리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 했었는데요, 우리 주위의 바람, 구름, 비가 되어 그대의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한영애씨의 목소리를 만나 한층 더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이번 주에는 비 소식을 기다려보면 어떨까요. 저는 2주 후에 또 좋은 시를 가지고 찾아올게요.

한영애 – 바람  https://youtu.be/ljb6_c2TIfA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3-1.

이상하(한철연 회원)

 

 지난 글에서 다룬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독교의 해방서사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전형이었습니다.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을 거듭한 주인공이 도피와 고난과 시련끝에 현재를 극복하고 삶의 행복과 영광을 얻는 이야기였죠. 그렇다면 오늘 다루는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주인공 야엘은 어떨까요. 이전의 주인공 나오미수녀는 사회나 국가와는 별개로 그저 자기 삶의 의미란 행복이란 대체 무엇인지 찾아 헤매는 수녀 한 명이었습니다. 반면에 행성 네게브의 최하층 천민 피코로 자라난 야엘은 어린 초등학생 시절에 남들보다 키가 작고 다리가 짧기에 밥부터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고 이에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무척이나 사적이면서도 너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라온, 헤겔의 말을 빌려보면 한 세계사적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야엘에 대해 말하기 전에 조금 서글픈 진실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부하고 뻔하고 슬픈 말이지만, 억압과 차별이 없는 시대는 인류의 역사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마다 날 때부터 능력과 신분과 계급이 다른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초에 가문에 유전자에 타고난 게 사람마다 다른 법인데 대우를 다르게 받는 게 뭐가 문제고 대체 뭐가 차별이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스스로가 행하는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와 집단을 만들고, 심지어 제도권 내에 극우 정당을 만들고 떵떵거리며 차별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정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이 국가,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이라고. 괜히 선동과 말장난으로 세상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좀 받아들이라고.

 

 허나 이런 불행한 역사의 진실에 대응하는 힘도 역사상 존재해왔죠. 과연 너희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건 언제 어디에 존재하냐고, 만약 있더라도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눈으로 그걸 어떻게 알고 느낄 것이냐고. 시대가 변해도 살아남는 진정한 문학과 예술은 항상 그러한 현실에 맞서서 상상력의 힘으로 날아오르며 니체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대지의 중력에 맞서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양영순의 웹툰 덴마-야엘로드 편도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히 흔한 전형의 스토리텔링은 아니고 약간 비틀린.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29&weekday=tue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테러로 국회가 무너진 상황에서, 택배를 전하러 온 주인공 덴마와 함께 야엘은 목숨을 건 탈출 중에 자신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합니다. 작중에서 행성 네게브의 가장 가난하고 몸도 작은 최하층 계급 피코로 태어난 주인공 야엘은 다리도 짧아서 느리기에 어릴 때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중의 기본인 밥 문제부터 선착순이라는 능력주의의 가면을 쓴 차별을 겪습니다. 심지어 이를 도와주고 해결해줘야 마땅한 보육시설의 선생도 넌 최하층 계급이니까 불평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며 누가 봐도 부당하게 야엘을 윽박지릅니다. 이러면 당연히 사람으로써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야엘은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자신을 더 짜내고 더 힘내서 뛰어봅니다. 이는 이전 나오미수녀의 기독교적 믿음과 비슷하면서도, 마치 볼테르 이후 헤겔 맑스를 비롯한 근대 계몽주의의 후손들이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렇기에 우리가 더 열 배 천 배 힘내야 한다는, 그러면 역사의 법칙은 미래엔 반드시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선형적 진보사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에 대해선 우리가 계속 덴마와 함께 읽어온 한상원을 말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맑스는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물론자였다. 그리고 맑스 자신과 그의 사상 역시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맑스의 역사철학적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지적 풍토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갔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맑스의 계몽주의, 독일 고전철학 상이의 연관성 속에는 19세기까지 서구의 모든 역사적 사유를 사실상 지배해 왔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기독교 종말론적 역사관의 흔적들이 공명하고 있다. 물구나무 선 사변적 세계를 뒤집어 인간의 두 발이 땅을 향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철저한 유물론자 맑스의 역사적 사유에 기독교 종말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맑스 자신이 언급한 적이 있듯이,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 언급은 맑스뿐 아니라 볼테르 이후 역사의 진보와 이성의 최종적 승리를 주장했던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01-102쪽 인용.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현재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행성 네게브의 계급차별에 대해 항의하고 더 힘내서 분투하려는 야엘은 마치 근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에 대한 억압을 잘 이겨내며 씩씩하고 당찬 야엘조차도 버티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억압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도 있고 괜찮지만 나의 거울이나 다름없는 내 친구나 가족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모욕보다 더 참기가 어렵지요. 심지어 연주자라는 꿈에 대한 좌절에 겹쳐,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친구에 대한 이중적 차별을 그냥 듣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친구의 쇼크사를 모욕했기에 자신이 정신놓고 떄린 인간이 재단 이사장 아들인지 아닌지는 적어도 야엘에겐 전혀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도 아닌데 타인의 고통에 관심가지는 사람들을 관심종자니 정치병이니 심지어 위선자니 몰아세우고 적극적으로 조롱하지만, 어쩌면 야엘의 경우처럼 우리는 타자의 고통과 부당함에 민감할때만 진정으로 차별적 구조를 깨뜨리는, 현재의 반복을 중단시키는 강력한 저항과 혁명의 원동력이 생겨나는 걸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차별에는 적당히 참고 넘어가던 야엘이 자신이 잠시나마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듯이, 그리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 어쩌면 벤야민이라면 이런 순간을 ‘지금시간’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불러와서 그 힘으로 지옥같은 현재의 동일한 반복을 깨뜨리는 ‘지금시간’ 이에 대해선 천천히 더 깊숙히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힘을 동원한 저항의 순간은 당연히 기존 체제의 강력한 억압에 부딪칩니다. 체포되어 소년원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는 중 참고 참다가 참다못한 야엘이 죽은 소녀와 같은 방식으로 자살을 결심하려 하는 차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미래를 본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남겨준 과거 예언의 기록을 꺼내보게 됩니다.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day=tue

 너무나 많은 정서들을 함축하는 피코 야엘의 저 웃음과 울음.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건축물을 패러디한 행성 네게브 영웅의 전당. 만화 나루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나온 적이 있죠. 당연히 원 모티브는 미국의 러쉬모어 산에 있는 4인의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과거의 역사에 이 위대한 전당에는 피코가 아닌 상류 계급 출신만이 조각되었지만, 데바림 선생님은 이 전당의 가장 높은 곳에 바로 최하층 계급 피코인 야엘이 올라갈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자살 직전까지 갔던 야엘은 이 예언을 통해 더더욱 놀라운, 혼신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게 되어 국회 보좌관까지 올라갑니다. 마치 한국에서 가난한 비수도권의 흙수저 출신이 사법고시를 통과한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거기서도 상위 계급 출신들의 온갖 차별과 억압을 받지만, 예언을 통해 미래에 대해 확신이 생긴 야엘에겐 이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야엘이라는 개인의 갈등과 투쟁이 행성 전체를 의외의 결과로 이끌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계사적 개인에 대해선 또 한상원과 헤겔을 참조해보며 숙고해볼만 만합니다.

 

 헤겔에게서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는 자유를 향해 진보한다. 역사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 고통은 이러한 자유를 시련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 세계사의 전체 과정은 이 충동을 의식적으로 도달하도록 하려는 노동이다. 이를 위해 역사에는 갈등과 적대가 불가피하다. 세계사는 대립이 표출되는 전장과도 같다.

 

 적대와 갈등, 폭력이 자유를 향한 진보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다시금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섭리의 신비를 보여준다. 헤겔은 세계사를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세계사적 개인에 관해 언급한다. 세계사적 개인 혹은 영웅의 창조적 행위는 새로운 사태와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역사를 추동한다. 그런데 이때 영웅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실은 정신 자신의 본질에 의해 작동하는 현실이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의 충동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추동하는 개인적은 특수한 욕망과 열정, 의지를 통해 세계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성은 교활한 책략을 통해, 행위하는 개인의 의식이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끌고 나간다. 이성이 지닌 간지는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섭리의 구체적 형태다.

 

“열정의 특수 이익은 보편자의 실행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편자는 특수한 것, 한정된 것, 그리고 그 부정으로부터 보편자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투쟁하며 그중 한쪽이 몰락하는 것은 특수한 것이다. 보편적 이념은 대립과 투쟁 속으로, 위험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것은 공격과 손실로부터 물러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 이성의 간지라 부를 수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한상원 저), 114-115쪽 인용.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day=tue

정해진 미래가 있으니까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기니 어떠한 어려움도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야엘은 이런 말을 하는 것에서는 단순히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준의 신앙이 느껴집니다. 그 누가 현재의 나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나에게 고통을 주든 나는 반드시 내 구원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서사. 이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인 기독교적인 구원의 서사이자 계몽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야엘로드는 분명히 계급 갈등과 경제적 차별이라는 흔한 진보주의 또는 유물론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적인 지점과 결합합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바로 이렇게 이질적인,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시켜서 나치가 득세한 2차대전중의 독일인으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역사철학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인, 신학적인 자세로 과연 괜찮은 걸까요? 혹시 작중의 야엘처럼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게 되면 기존의 신학은 오히려 없으니만 못한 거짓된, 허무한 낙관주의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이 또한 헤겔이 말한대로 적대와 투쟁을 통한 이성의 간지일까요?

계속…

출처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1&weekday=t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