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안내] 한철연 회원 출연 강의 시청 안내 [근현대 한국의 풍경 – 한국의 생명사상을 찾아서]

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에서 진행하는
지역인문학센터 온라인 강의 [근현대 한국의 풍경 – 한국의 생명사상을 찾아서]에
한철연 회원(이종철, 조배준, 최종덕) 선생님들이 출연하여 강의를 진행합니다.

한국현대철학의 중요한 인물 유영모, 함석헌, 장일순에 대해 알기 쉽고 친절한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제에 관심있는 회원 및 여러분들께 한번 시청하시길 권합니다.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강의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cmks.yonsei.ac.kr/system/xbd/board.php?bo_table=onlinelecture&sca=3

 

경로는 아래 캡쳐화면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시대와 인간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시대와 인간상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상도 바뀌게 마련인가 보다. 자주 정치인이 그런 인간상의 변화를 암시하는데, 미국에서 클린턴과 트럼프, 한국에서 문재인과 윤석렬을 비교해 보면 그런 변화가 느껴진다.

클린턴과 트럼프, 문재인과 윤석렬, 이렇게 대조해 놓고 보면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정책적 차이만은 아니고 그런 차이는 심지어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더 뚜렷한 것은 인간상의 차이다. 인간상으로 볼 때 클린턴과 문재인이 닮았고 트럼프나 윤석렬도 서로 닮았다.

클린턴과 문재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트럼프나 윤석렬과 같은 사람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클린턴 다음에 트럼프가 나오고 문재인 다음에 윤석렬이 나온 것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참에 시대와 인간상의 상관성을 한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헤겔이 시대와 정신의 상관 관계를 파헤쳐 ‘정신현상학’이라는 불멸의 저서를 남겼으니, 나도 좀 흉내를 내 보아야 하겠다 싶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60년대 이전에는 내가 체험한 시대가 아니므로 생략하고, 내가 함께 살아온 60년대 이후만 보자.

2)

한때 히피족이 세상을 지배했다. 히피족은 세상에 초연하면서 낭만적 몽상에 젖어 살았다. 고독과 자유를 즐겼으며, 명상을 즐겼다. 히피족이 음악과 섹스 그리고 대마초에 빠진 것은 세상을 초탈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히피족이 출현한 이유로 그 시대 배경이 자주 논의된다. 50년대 말까지 서구 사회는 전후 복구를 거쳐 복지 국가를 이루었으나 그 대가는 거대한 관료 체제였다. 이런 관료 체제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자라난 세대가 히피 세대이니 이들이 세상을 초탈하려 했던 것도 이해된다. 권력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으니 이를 벗어나려면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60년대 서구에서 히피족이 지배할 무렵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아래 있었다. 이들의 권력은 노골적이었다. 유신 체제, 중앙정보부, 물고문, 최루탄 등. 온갖 폭력적 수단이 사용되었다.

이런 시대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이 저항을 위해 존재했고 효율적인 저항이 필요했다. 목적을 정하고 수단을 선택했으며 가장 합리적인 수단을 위해 과학이 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운동도 삶도 과학으로, 술도 연애도 과학으로! 이 시대는 낭만적이라는 것처럼 경멸적 단어는 없었다. 대신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등장했다. 이런 유형을 흔히 운동권이라 부른다.

3)

90년대 후반,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소위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이 시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유화가 발전했다.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 시대가 열렸다. 금융 자본이 등장했고 컴퓨터와 온라인이 새로운 생존 무기가 되었다. 자유로운 섹스, 불금의 광란이 벌어졌고 자동차와 영화와 바캉스가 맥주 거품과 함께 넘쳐흘렀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세계 여행을 떠났다.

이런 시대 장발을 한 히피족이나 운동화를 신은 운동권은 촌스럽게 보였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인간 유형은 흔히 ‘여피족’으로 규정된다. 어떤 학자(대비드 부륵스)는 이런 여피족을 ‘보보스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 여피족을 어떻게 규정할까? 여피족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드라마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우 배용준이다. 그는 내게는 단정한 차림에 안경을 쓴 곱상한 얼굴로 기억된다. 사회보다는 개인을,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행복을, 거대한 것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세련된 기호를 갖고 있다(커피와 음악 와인 등). 그는 타인에 대해 특히 여성에 대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그는 새로운 첨단 기술을 장식물처럼 온몸에 걸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적이거나 금욕적이거나 탈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영악하기 짝이 없다. 그는 주가를 꿰고 있으며 부동산 시세에 환하다. 무엇을 팔면 돈이 되고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는지 잘 안다. 그가 늘 끼고 다니는 책은 경영학의 책이며 그가 통독하는 책은 심리학의 책이다. 그는 한마디로 이익에 침을 흘리는 스마트한 인간이다.

그런 여피족이 신자유주의 시대 30여 년을 군림해왔다. 이런 인물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풍미한 전문 기술 노동자, 대표적으로 은행인, 증권맨이 여기에 속한다. 정치적으로 이런 여피족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미국에서는 클린턴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아마 문재인일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정책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인물 유형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무현은 아무래도 운동권에 가까운 인물이다. 반면 문재인은 운동권보다는 차라리  여피족에 가까운 스마트한 정치인이다. 문재인의 별명이 곧 신사 아닌가? 이재명 하면 여피족에 더 가까워진다.

4)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금 비틀거린다.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그 대표적인 증상일 것이다. 금융 위기 이후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미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대 미국에서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우선 생김새조차 여피족과는 거리가 멀다. 거의 돼먹지 못하게 생겼다. 언어와 행동거지도 난폭하기 짝이 없으니, 거의 조폭 수준이다. 생각과 사고도 너무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며 적은 삼킬 듯이 증오하고 자기편은 무엇이라도 좋다. 어쩌면 여피족을 반전 선택하면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인물을 억지로 좋게 보자면 의리의 사나이 돌쇠형이 아닐까? 아니, 단순 무식하고 저돌적인 저팔계 유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장점이 있다. 사소한 것은 제치고 크게 문제를 파악하고 집요하면서도 대담하게 이를 해결해 나간다.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또 상당한 친화력이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주는 비상하다.

이런 인물이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 시대처럼 사랑 받는 때는 없었지 않을까? 결국, 트럼프는 클린턴의 후광 아래 있던 힐러리를 제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왜 이런 인물이 이 시대 사랑받는 것일까?

시대의 증상이 아닐까? 이 시대에 다들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 무너지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 복원되기도 하니, 새로운 시대가 오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갈피를 알 수 없다. 니체가 줄을 타는 곡예사를 보면서 앞으로 가도 위험하고 뒤로 가도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어도 위험하다 했는데 꼭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시대, 불안한 혼돈의 시대, 사람들은 트럼프와 같은 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닐까?

5)

최근 대선에서 윤석렬이 이겼다. 윤석렬의 언행을 보면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거칠고 난폭하기에 늘 구설에 시달라자만 재수 9년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듯 두둑하기 짝이 없는 배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을 물고 늘어지고(조국 사태에서 처럼) 같은 편을 챙기는 것은 트럼프와 상당히 닮았다.  적어도 우파 통합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친화력을 말해준다. 정책적으로도 핵심 문제를 잡아내는 능력도 엿보인다. 트럼프가 클린턴의 반전 선택이듯 윤석렬은 문재인의 반전 선택이다.

초짜 정치인이 거대 야당을 접수한 데 이 기질이 작용했다. 사람들이 소확행을 주장하는 이재명보다 재수 9년의 윤석렬을 선택한 것도 이 인간상 외에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시대가 거대한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전환기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힘에 의존해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윤석렬의 인간적 결함을 지적한다고 그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결함을 가진 인간이기에 오히려 선택 받았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신냉전시대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전환기를 이해해야 한다.

 

이방원의 권력과 문재인의 권력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이방원의 권력과 문재인의 권력

 

이종철(연세대)

 

매주 주말마다 하는 KBS의 역사 드라마 <이방원>이 점입가경,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단한 권력의지를 가진 태조의 5남 이방원이 드디어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을 살해하고 궁궐의 권력을 일시에 장악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다. 방원은 확실히 권력 게임에서 절묘한 타이밍을 잘 읽고 순발력 있게 움직이는 인물이다. 과거 포은 정몽주 선생이 고려에 대한 절개를 강조하면서 이성계의 혁명을 반대하자 방원은 거침없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다. 마찬가지로 방원은 조선을 설계하고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앞세우면서 신료들의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한 삼봉 정도전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탄 사이에 그를 살해했다. 권력 게임에서 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이어서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을 살해하고, 이복동생의 매제도 죽인다. 권력 앞에서는 피를 나눈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라는 것이 그의 냉정한 판단이다. 태조 이성계는 그가 이처럼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일찍이 파악했지만 차마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없어 미적거리다가 그 자식에 의해 완전 무장 해제를 당하고 권력을 상실한 자의 온갖 수모도 겪고 있다. 그것이 부모의 업보라는 데에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 깔려 있다.

 

방원이 궁중 권력을 장악했지만 바로 용상에 오를 수는 없다. 이른바 권력의 정당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해서 둘째 형 방과를 임시 세자로 세워 아버지 태조와 자신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해 놓고 태조의 합법적인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둘째에게 자신이 당한 모욕을 씻어 달라고 하자 둘째 방과가 그에 따라 움직이려 하고, 셋째와 넷째는 저들 나름대로 방원을 죽이고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의를 시작한다. 드라마 <이방원>은 이번 주 딱 여기까지만 방영되었다. 잘 알다시피 이방원은 제2차 왕자의 난도 진압을 하면서 왕의 자리에 오르고,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함흥으로 돌아가 칩거를 한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방원은 누구보다 왕의 권력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력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정적을 살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정치의 도덕성 운운한다면 그를 잘못 보아도 한 참 잘못 보는 것이다. 그는 “군주는 인자함을 보여줄 것인가, 잔인함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마키아벨리즘의 화신답게 왕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제도와 경쟁자들을 일거에 제거해버린다. 여기에는 쿠데타 공신들과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헌신적으로 돕고 희생을 했던 처가의 장인 민제와 처남들(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척의 영향력을 차단하겠다는 것이 명분이다. 이쯤 되면 과연 방원은 인간의 탈을 쓴 야차나 다름없지 않냐, 이런 자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겠냐라고 그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왕의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태종 방원은 신료 중심에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6조 직계제(왕이 6조에게 명령하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각종 제도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개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조선왕조의 틀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런 맥락에서 태종 방원은 초지일관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에 방해가 되는 제도나 인물을 제거하고 그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 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화신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어떻게 보면 태종 이후 세종대에 이르러 조선이 안정기에 이르고 거의 모든 면에서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 것은 태종이 이렇게 밑거름을 깔아주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의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사적인 도덕의 차원과 동일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왕의 권력이 인자함을 표방하는 순간 백성의 삶이 피폐해질 가능성이 크다. 왕의 권력이 비록 잔인하다 해도 그 권력의 중심에 백성을 세우고 있다면 그런 권력은 얼마든지 정당성을 띨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방원의 권력 문제를 21세기 한국의 전임 대통령 노무현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퇴임하게 될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와 대비시켜보자. 오랫동안 인권 변호사로 활약을 했던 노무현에게 권력은 억압적인 폭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임 기간 중 이런 권력을 해체해서 분권화하고 분리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는 절대 권력이라 할 대통령의 권력을 총리와 나누려 했고, 서울 중심을 해체해서 지방 분권화를 시도했고, 실제로 세종시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가 반대가 심해서 그친 경험도 있었다. 그에게 권력은 늘 억압적이어서 민주주의에 반대가 되고 그 권력이 집중될 경우 언제든 독재와 파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부정적(negative)인 의미만 가졌다. 그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상당한 수준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대의 현실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판단하듯 권력이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만 가지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포스트 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적절히 지적했듯, 권력에는 이런 부정적인(negative) 의미 외에도 생산적이고 긍정적인(positive) 측면도 있다는 것을 노무현은 몰랐다. 이런 긍정적 권력을 통해 권력이 생산하고 실현할 수 있는 가치는 수도 없이 많다. 한편으로 그런 권력은 이데올로기적인 억압 기구를 해체할 수 있고, 재벌 중심의 경제체계도 흔들어 놓을 수 있고, 오늘날 문제가 되는 법조 권력에 균열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보여준 모습은 바로 그런 생산적 권력을 통해 각종 제도적 개혁과 외척이나 공신 세력의 저항을 물리침으로써 세종이 안정적 기반 위에서 국가를 경영할 수 있게끔 해준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권력을 희화화하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한 것은 노무현의 단견이라 할 수 있다. 결국에 그는 희대의 사기꾼과 같은 이명박에게 양탄자를 깔아준 셈이 되고 말았으니까 완벽하게 실패한 대통령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이 심어 놓은 가치와 철학이 촛불 혁명의 거름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가치와 철학이 실현되는 데는 너무 많은 우회와 희생이 따른 점도 외면할 수가 없다.

 

 

이른바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의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는 밥상을 차려 주고 수저까지 쥐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아울러 잘못 판단해서 그 권력을 상대에게 넘겨주는 우를 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조국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고 하지만 사실 윤석열을 검찰총장의 자리에 앉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는 이런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윤석열이란 인물이 과연 시대적 화두인 검찰 개혁에 적절한 인물인지에 대해 결정적으로 오판을 한 셈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인사 검증 시스템을 제대로만 돌려 보았어도 어떻게 윤석열이란 인물을 고속 승진을 시켜 검찰총장이란 막강한 자리에 앉힐 수 있었을까, 그리고 조국 사태가 빚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이 의도했던 검찰 개혁에 얼마나 방해가 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윤석열 체제가 순탄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했는가 등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문재인의 정치적 판단력과 권력 행사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윤석열이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성장할 때마다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 주기까지 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윤석열이나 이번에 종로구 보궐선거로 당선된 전 감사원장 최재형이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정치적 후원자인 셈이다. 문재인은 전임 대통령 그 누구보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총선에서 무려 180석 이상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행사할 줄 모르고 좌고우면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 개혁을 거의 시도도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죽음으로써 보여준 현실도 이해하지 못한 채 양손에 쥔 권력을 어벙하게 들고만 있다가 당하고 만 것이다. 그가 이런 정치적 오류를 범한 데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정치적 판단력의 부재와 더불어 권력을 도덕과 분리하지 못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사적 인식의 한계가 크게 작용한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통령의 권력과 사적인 문재인의 권력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순돌이에 불과했다. 오래전 서양의 마키아벨리가 말해주었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조선의 태종이 보여주었던 왕의 권력 속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권력은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자가 비유했듯 칼과 같아서 강도가 들고 있으면 흉기로 변하지만, 주부가 요리할 때 사용하는 칼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칼이라도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그리고 누가 그것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모습을 달리하면서 결과도 다르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권력을 쥐려고 하는 자는 권력이 갖는 이처럼 다의적이고 다면적인 모습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권력의 이런 속성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동물적인 권력욕만 가지고서 권력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오랜 역사가 보여주고 있듯, 그런 권력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고통에 시달린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정권교체론’에 대해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4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른바 ‘정권교체론’에 대해

 

이종철(연세대)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변화 요구는 유별나다. 일본은 수십 년 된 자민당이 아무리 문제가 많어도 당명을 바꾸지 않는데 한국은 선거철만 되면 수시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당명도 너무 자주 바꿔서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한 그 정체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미국이나 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의 정당사를 보아도 거의 변화가 없는데 왜 한국은 이렇게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당명을 바꾸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을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한국인들의 정서 불안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인들의 다이나믹한 정치의식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 모두가 함께 작용해서 그런 것인지 당췌 알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바꾸기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진실일 듯 싶다.

오래전 대통령 선거에서 로고 송으로 당시 유행하던 가수의 노래가 사용된 적이 있다. 그 당시도 정치 변혁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그런지 이 로고 송이 선거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이정현의 “바꿔”라는 노래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가고만 있어

어느 누굴 믿어 어찌 믿어 더는 못 믿어

누가 누굴 욕하는 거야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속에 속물들이야.

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사랑도 다 바꿔

바꿔 바꿔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 라는 가사는 가수 이정현의 호소력 있는 고음과 함께 그해 선거판의 변화 욕구를 여지없이 채워주었다. 한 마디로 대중가요가 정치판의 욕구를 아싸리하게 풀어준 셈이다.

주역의 계사전에도 이런 변화에 대한 기술이 있다. 우리는 흔히 ‘궁즉통’이란 말을 사용하는데, 계사전에 표현된 정확한 내용은 이렇다. ”궁즉변이고, 변즉구이고, 구즉통이다.“ 다시 말해 어려움에 처하면 변화와 개혁을 시도하고,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만사가 형통해진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궁즉통이 아니라 중간 과정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개혁을 할 때 비로소 궁즉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대선판에서 가장 큰 화두는 ‘정권교체론’이다. 야당은 이 ‘정권교체론’을 전면에 내세워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격이나 자질이 크게 미달한 윤석열을 밀고 있다. 앞서 몇 차례의 글에서 지적했듯, 그들은 윤석열이 대통령 깜이 안 되는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심으로 보수 야권과 중간 지대의 회색 집단까지 대거 끌어들이는 전략을 펴고 있다. 윤석열은 과거 조국 사태에서 보여주었듯 거의 편집증 환자처럼 일단 공격 목표가 세워지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돌격하는 멧돼지 스타일이다. 윤석열의 이러한 스타일이야말로 절치부심 정권교체를 바라는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욕구를 풀어줄 수 있는 화신이나 다름없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대선가도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권교체론’이 가장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 부터 말하면 나는 이런 요구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탐욕을 위장한 허구적 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검찰 개혁을 무산시키려는 수많은 집단적 반발에서 보았듯, 개혁의 화살이 자신들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개혁이 아니라 그저 이 정권을 뒤집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저 구실 좋은 ‘정권 교체론’으로 위장한 것이다. 이런 ‘정권 교체론’은 전략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해서 대선 정국에서 정치 지형을 야권의 의도대로 짜는데 유리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론’은 앞에서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 부동산 정책 실패, 최저 임금제의 실패, 방역 대책 실패 등 한 마디로 총체적 실패, 부패와 무능 등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현 정권을 바꿔야지만 살 수 있다고 공갈도 치고 협박도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중간 지대에서 눈치만 열심히 보던 지식인 집단들도 대거 보수 우파로 이동해서 정권을 바꿔야지만 현재의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지경이 되었을까? 한 마디로 보수 기득권의 ‘정권 교체론’의 선전 선동 효과는 어느 정도 약발이 미친 셈이다. 그토록 절대 단일화는 없다고 여러 차례 맹세하다시피 한 안철수가 막판 시간에 쫓겨 윤석열의 팔을 들어주면서 한 소리도 정권교체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공갈을 쳤겠는가?

하지만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더라도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정권 교체론’은 허구적인 기만에 불과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바꾸자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왜 바꾸는가에 관해서도 근거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최저 임금을 빠르게 올려서 자영업자들을 힘들게 했다, 부동산이 가파르게 올라서 청년 세대와 집 없는 서민들의 희망을 꺽었다, 실패한 방역 대책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생존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다. 남북 관계는 도로 옛날이고, 한미 관계도 예전같지 않다 등등이다. 하지만 그 내력을 상식적으로 따져만 보아도 지나치게 현상을 과장하고 호도한 측면이 많다. 많은 이들이 급격한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가장 큰 정책적 실패라고 지적하지만, 이 문제는 부동산을 투기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민 대다수의 욕망과 관련이 깊어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대 욕망이 급격하게 늘어나면 정책적으로 잡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런 현상은 주식 판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해서 꼭대기를 찍지 않는 한 결코 막을 수가 없는 일이다. 결국 이런 투기판에서 희생 당하는 자들은 안타깝게도 뒤늦게 뛰어든 초짜들만 당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투기판을 막기 위해 각종 부동산 정책을 썼지만 한 번 달구어진 투기 수요를 바로 차단하기는 어렵다. 이런 정책들의 효과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지만 나타나는데, 금년 들어 꺽인 부동산 가격 조정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자체를 부동산 정책의 실패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장을 거시적으로 보지 못하는 피상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동산 문제는 인구 절벽 현상을 고려해야 하고, 각종 세제 및 제도개혁 문제와 국토균형발전 문제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풀어야 할 과제이다. 덧붙여서 하나 더 지적을 한다면 왜 노무현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에서 보듯, 진보 정권에서 더 부동산 투기 심리가 발흥하는가를 풀어줄 필요는 있겠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막무가내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음모가 더 크다고 하겠다.

방역 대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대 코로나 방역 대책은 OECD 내의 그 어떤 국가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진 편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 분석을 하면 잘 드러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만한 면은 이른바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영미권과 유럽권이 초토화되면서 그들의 의료제도와 국민들의 방역 의식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과거 이런 질병 문제는 의료 서비스 제도의 수준이 떨어지고 국민들의 예방 의식도 낮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런 일반적 상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세계 최선진국이라 할 미국과 유럽의 각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을 거치면서 수십만의 인명을 상실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천문학적 비용을 댓가로 지불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치면 이것은 완전한 패배에서 기사회생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도 그 여파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은 그런 상황과 비교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사망자 숫자나 확진자 숫자가 절대적으로 작다. 이런 점은 전 세계 언론이 인정을 해서 오죽하면 K-컨텐츠와 빗대서 K-방역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어졌을까? 그런데 이런 차이를 외면하면서 국내의 보수 언론들은 국민들을 바보 취급하듯 허구헌 날 방역 실패 타령만 하고 있다. 언론은 무엇보다 팩트에 기초한 공정한 비판을 사명으로 삼아야 할텐데,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만 일삼으니 그런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다. 물론 방역과 관련해 문 정부가 무조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계 의 벼량 끝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살폈는지, 왜 그들만 코로나 방역의 짐을 일방적으로 지게 되었는지의 문제를 생각하면 정책 판단의 미스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방역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 산과 들 그리고 해변과 같은 지역에서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 점과 확진자 숫자 위주의 기계적 판단으로 인해 질적인 정성 판단을 하지 못해 좀 더 세심하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인류가 처음 경험해 보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 그것 자체를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 빚어진 최악의 상황과 비견될 수 있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비판의 과녁을 벗어나도 한 참 벗어난 것이다. 이제라도 중요한 것은 코로나를 거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의 영업 수준을 회복시켜주고 제도적으로 보상해주는 대책에 있다.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개선이 없다면 문 정권을 향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적 문제들 역시 야당이 주장하듯 아전인수격으로 ‘정권 교체론’을 내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른 문제들도 오십보 백보다. 오히려 문정권은 경제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고 할만큼 선방했다. 일본의 반도체 공격에 대해 적극 방어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공급망 채널이 무너지고 한국의 반도체 부품 산업을 키운 것이 그렇다. 또한 견고한 수출 드라이브를 배경으로 한국의 수출 규모는 코로나 이전을 넘어서 가장 큰 무역 흑자를 냈다. 이런 현상은 OECD 내의 어떤 국가들보다 앞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정권 교체론’이라는 것은 그저 바꾸기 위한 막무가내식 요구일 뿐 전혀 합리성이나 대안이 없는 정치적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보수 야권은 명박-근혜 10년을 거치면서 4대강 사업의 삽질로 국토를 뒤집고 사대 강을 오염 천지로 만들어 놓았고, 피로 이룩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렸고, 최순실 비선과 같은 실정으로 인해 마침내 추운 겨울날 국민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라고 분노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던 세력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석고대죄를 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과오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세력들이 어느 날 갑자기 어벙이 강화 도령 같은 윤 석열을 앞세워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국민을 호도하는 행위다. 그것은 기득권 세력의 탐욕과 무능을 감추는 정치적 선전 선동이고 비열한 술책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저간의 한국 정치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반성을 했다고 한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요구되는 것은 5년마다 단임제 대통령 선거 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비용,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선거제도, 기득권의 세습을 가능케 하는 각종 제도들, 군부 통치가 끝나자 마자 법을 앞세워 여전히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법조 세력들 등을 둘러싼 낡은 법적, 정치적 제도들, 낡은 교육과 사회 시스템들을 뜯어고치는 일이다. 사실 이런 문제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의 화두이자, 미래를 향한 대한민국호의 순항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런 ‘정치 개혁’, ‘사회 시스템 개혁’을 외면하고 그저 선동과 선전에 불과한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정치 현실을 바꾸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개혁의 초점도 없고, 대안도 없고, 목표도 없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윤 석열을 앞세웠겠는가? 자신들의 공허한 막가파식 ‘정권 교체론’을 선무당처럼 떠들기에 윤 석열 만큼 적합한 인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큰 과제는 산적한 ‘정치 개혁’과 ‘사회 시스템개혁’을 통해 미래의 혁신적 대한민국호를 만드는 일이다. 이제 더는 과거처럼 정확한 목표도 없고, 그것을 이끌어갈 역량도 갖추지 못한 체 달톰한 말로 국민의 귀를 속이는 정권 교체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선거 구호에 불과한 것인지를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개혁’을 어떤 세력이 맡고, 어떤 지도자가 가장 어울리는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기로점에 서 있는 대한민국호를 구하는 일이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25)

안철수+윤석열의 1+1이 왜 마이너스…믿었던 국민들 분노폭발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5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안철수+윤석열의 1+1이 왜 마이너스…믿었던 국민들 분노폭발

 

이종철(연세대)

 

•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내 표 돌리도’라고 분노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야합이 벌어졌다고 비난

• 정치적 야합 행위는 우리가 처음 제기한 원 + 원이 빚을 수 있는 최악의 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편의점이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다 보면 특판 상품이라고 해서 원 플러스 원 상품이 있다. 기왕의 상품을 하나 사면 하나 더 끼워 주는 것이다. 물건 한 개 값으로 2개를 구할 수 있으니까 소비자의 기쁨이 배가 되고, 판매자 입장에서도 재고를 빨리 소진할 수 있으니까 좋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 플러스 원 제도는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런 형태의 프로모션 제도는 마케팅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원 플러스 원이 똑같이 그런 형태로 나타나는가? 가령 1+1은 얼마일까라고 묻는다면 어린 애들도 금방 2라고 답을 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럴까? 1+1은 2라는 산술적 결과만 존재할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방울 2개를 합치면 몇 개가 될까? 이 경우는 당연히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1=2라는 산술적 결과가 옳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면에서 1+1은 2도 아니고 1도 아닌 경우가 있다. 앞서 든 원 플러스 원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산술적 결론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 이런 결과를 볼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이런 대표적인 경우는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나타날 수 있는 효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다. 인간은 상형문자인 인(人)에서 보듯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기도 하고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타자의 인정이 중요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인간을 만난다. 가장 먼저 부모를 만나고, 그다음에는 형제자매를 만나고, 좀 더 크면 동네 친구들을 만나고, 그러다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입학하면 그곳에서도 친구들을 만난다. 한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이처럼 매 순간 매 단계마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놀이하고 학습하고 함께 일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장에서 누구를 만나는가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나는 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만나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있던 길도 막혀 버린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면 그 길로 인해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리면서 그 이후의 효과나 가능성은 처음 생각하기 힘든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1+1은 결코 산술적 의미에서 2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가늠하기 힘든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생각을 정치판에 끌어들이면 어떨까? 대선을 며칠 앞둔 요즘 끊임없이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들 앞에서 완주를 하겠다고 하늘 같이 맹세를 했다가도 판세의 유불리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전망에 따라 하루아침에 식언하고 안면을 바꾸고 단일화를 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그들 말마따나 단일화가 1+1=1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축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화를 통해 훨씬 큰 시너지 효과를 낳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시너지 효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1+1=0 혹은 마이너스 게임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의도는 늘 결과와 불일치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에 이루어진 안철수와 윤석열 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단일화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도 밥도 안돼서 서로를 죽이는 게임이 될 것인가?

출처  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42

나는 안철수와 윤석열 간의 단일화를 보면서 그들의 인간적 결정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얼마나 정권교체에 대한 욕구가 강했으면 그간 자신들이 해왔던 수많은 말들을 식언하고, 국민들에게 했던 수많은 약속들을 하루아침에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칠 수 있었겠는가? 정치인들에게 국민에 대한 약속은 절대 깨서는 안 될 금과옥조나 다름없다. 신뢰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그는 정치인으로서 더는 성장할 수 없다. 오래전 피타고라스가 이야기했듯, 정치인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집단인데 그런 신뢰를 내팽개친 상태에서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윤석열은 말할 것도 없고 안철수는 정치인으로 도저히 하기 힘든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철수답다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의 그런 행동을 통해 그의 본질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끊임없이 초딩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초딩 만큼이나 자기 행동에 대해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책임은 자유로운 성인만이 질 수 있는 것인데 초딩이 무슨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니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단일화를 선언한 것이 아닐까? 요즘 영악한 초딩들은 범법 행위를 하고서도 촉법소년을 핑게로 빠져 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안철수 역시 그런 영악한 초딩처럼 행동하려고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길래 성인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식언을 하고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그를 믿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해외 동포들의 신뢰를 나몰라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이런 초딩 정치인이 윤석열과 같은 모지리 정치인과 단일화를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가 더 궁금해지는 데 있다. 추측컨대 아마도 여기서는 변증법적 종합이 일어나기 보다는 기계적 결합이 일어나지 않을까? ‘모자른 초딩’ 혹은 ‘초딩스런 모지리’. 그리하여 따로따로 움직일 때보다 서로 합칠 때 마이너스 효과를 빚어서 서로의 표를 깍아 먹는 것이 아닐까?

당장 그들의 전격적인 단일화를 보고서 그들을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내 표 돌리도’라고 분노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야합이 벌어졌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것은 원칙도 없고, 명분도 없고, 마침내 실리도 잃어버리는 그런 단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 야합 행위는 우리가 처음 제기한 원 + 원이 빚을 수 있는 최악의 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모자른 초딩 혹은 초딩스런 모지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합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헛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애들아!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242)

 

필자의 다른 글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이병창(한철연 회원)

 

지극히 혼탁한 세상이다. 서로 진흙 속에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코로나로 답답한데, 세상은 더욱 우울하다. 이럴 때는 차가운 물 한잔, 신선한 바람 한 줄기 기다려진다.

자다가 새벽에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문득 떠오른다. 성함은 생각나지 않고 별명만 생각난다. 황금박쥐 선생님이다. 그 시절 황금박쥐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모습이 황금 박쥐의 모습과 닮았다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한문 선생님이셨는데(당시에는 한문이 정규 수업 과목이었다) 한문을 무조건 외우라면서 외우지 못하면 주어 팼다. 깡 마른 선생님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한 반 오십 명 되는 학생을 모조리 주어 팼다.

그 덕분에 지금도 한문을 싫어하여 내가 남들보다 한문 실력이 떨어진 이유가 됐다. 그래도 약간 한문을 아는 것은 선생님의 덕분이니, 주어 패는 교육도 완전히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두 개의 한문 시가 지금 기억난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굴원의 ‘어부사’다. 전자는 한문으로 읽어도 리듬이 좋아서 지금도 기억한다. 후자는 그 가운데 특히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라는 구절이 입에 맴돈다.

굴원이 이 시를 지은 다음 자살했다고 들었는데,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황금 박쥐 선생님은 어린 우리에게 이 시를 가르쳐 주면서 무척이나 비감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은 박정희가 3선에 나서면서 독재를 강화하고 국민교육 헌장을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늘 세상이 혼탁할 때는 이 시가 기억나는데, 나는 지금도 그 뜻을 모르겠다. 사람이 현실에 따라서 능소능대하라는 뜻 같은데 굴원이 이 시를 쓰고 왜 자살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어부와 다른 굴원의 삶은 시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 지언정”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굴원은 산다는 것은 현실을 따라 능소능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굴원은 지식인으로서 세상 사람의 삶을 끝내 거부한 것이었을까? 일반적 해석은 이런 지식인으로서의 결기가 이 시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차라리 일신이라도 일으켜 비수를 들고 적의 팔이라도 찔러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시를 써놓고 그저 자살한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굴원은 능소능대의 삶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상에 대한 갈망은 그에게 하나의 병이 아니었을까? 이상에 대한 집착이란 허망한 병이지만 이상의 병을 앓으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모순과 더불어 살아가는 거’다. 굴원은 그렇게 버티다가 그 병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마침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굴원의 어부처럼 삶이란 현실에 따라 능소능대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몸은 늘 이를 따르지 못한다. 물러날 때 앞으로 나서고 겸손해야 할 때 자만에 빠진다. 기회를 놓치고서 기뻐하고 이상을 말로 떠들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그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 고통이야 여기서 회상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렇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이상이란 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비수를 들어 적을 찌르지도 못하고, 굴원처럼 자살을 하지도 못한다.

이상의 병을 벗어나는 다른 길은 없을까? 황금 박쥐 선생님과 같은 삶도 있지 않을까? 황금 박쥐 선생님은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우리 가운데 누군가 이 시의 뜻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않을까? 그런 조그마한 희망이 그가 우리를 그토록 주어 패면서 이 시를 가르쳤던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나로서는 황금 박쥐 선생님처럼 나를 기억할 제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에는 어떤 메시아적 기대감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을 구할 진인이 어디서 나올 것 같다. 혼탁한 세상이면 더욱 그런 진인이 그리워진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연세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보다 보니 약소 국가의 비애와 그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나에게도 아프게 느껴진다. 나라가 적의 군화 발에 밟히는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었다. 그들이 사방에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죽자 사자 나라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겪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일게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경험을 겪었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 치하로 들어가는 치욕도 경험했다. 나라를 잃고서 우리 선조들은 만주 벌판을 떠돌며 풍찬노숙하면서 배를 곯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유태인 다음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많이 겪은 민족이다. 과거 약소국가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스탈리 체제 시절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무려 2만 5천명이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국가를 지킬 힘이 없다 보니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동족 간에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민족이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 당시 막 일기 시작한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이념 전쟁의 대리를 비극적인 한민족이 떠맡게 된 것이 아닌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 타율적 강제에 의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는 결코 떠벌이 입이 아니라 강한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세계 최빈 국가의 상태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유신 독재의 쓰라린 경험도 겪었지만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데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다. 이런 뜨거운 애국심은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도 똑같았다. 드디어 한국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선망하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고래 등쌀에 시달리는 새우가 아니라 모든 국가가 선망하는 돌고래와 같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본다면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그저 말하기 좋은 수식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통과한 한국인이라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국가의 에너지는 단순히 경제 발전으로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른바 ‘한류’ 붐에 따른 K-컨텐츠는 노래와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을 타고서 전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 일본이 서구에 소개되면서 일으켰던 붐을 능가하는 것이다. BTS는 전 세계의 아미들이 신화처럼 떠받들고 있고, ‘설국 열차’나 ‘기생충’, 그리고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한국 영화들은 이제 서구인들의 안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넷플리스 같은 문화 플랫폼은 한국의 드라마들이 맘껏 놀 수 있는 앞마당을 만들어준 격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드라마들은 만들어지자마자 수십억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뒤흔들면서 세계 1위 권을 너무나 쉽게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은 과거 아시아인들이 영국의 비틀즈를 따라 부르면서 서구적 감성에 공감하던 것처럼, 반대로 서구인들이 모방하면서 감성적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면 그 여파가 지레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운 거대한 대한민국호의 지도자로 국정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강화 도령 같은 어벙이를 세울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의 피와 땀이 요구되지만 그것을 덜어 먹는 데는 단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수령에 빠진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자국의 유명 정치인들까지 일본이 2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통탄을 하고 있고, 한국은 이제 점점 더 ‘넘사벽’이 되어 가고 있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무엇보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은 일본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만 집착하고 미래를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이끌지 못한 잘못이 크다. 한국도 잘못하면 이런 일본식 모델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크다. 일본 못지않게 급격하게 고령화되어 가서 인구 구성에서 생물학적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경제의 규모에 따른 저성장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미국과 패권주의를 다투는 거대한 중국과 언제든 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극우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 여전히 남북 간에는 냉전 상태의 긴장이 높아서 평화를 이야기하기가 요원한 상태이다. 때문에 한국은 잠시도 한 눈을 팔거나 정체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1963년 영화 <강화도령>(감독 신상옥)의 한 장면ㅣ출처: NAVER 영화 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19690&imageNid=1850137#tab

한국이 반도체나 몇몇 분야의 산업에서 선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수출에 전력 투구룰 하고는 있지만 지금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 패권주의가 심하고 국가 간의 경쟁도 심하다. 4차 산업 혁명에 들어선 현재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 유전 공학과 사물 인터넷과 같이 산업의 다양한 부문에서의 국가 간 경쟁은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정책을 잘못 판단한다면 언제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때문에 21세기의 한국은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과거로 후퇴할 것인가의 기로 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 뽑는 것은 그저 하기 좋은 정치인 한 명을 내세우는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경험이나 식견이 없고,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인 검찰 조직에서만 성장한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호를 이끌겠다고 나설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언감생심인데, 윤석열은 ‘조국사태’와 같은 기형적인 사건에서 등장한 인기 스타일 뿐 전혀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막가파식 ‘정권 교체’를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이런 극우 보수 세력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보듯 대한민국을 다시금 과거의 망령에 가두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명박-근혜 10년 동안 피로 세운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세력이고, 여전히 대한민국에게서 부패 공화국의 오명을 떼지 못하게 만든 세력이다. 미국의 성조기를 자신들의 분신으로 내세우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감이나 주인 의식이 하나도 없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과 그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윤석열이 어떻게 대통령이 돼서 약진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겠는가? 그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이 나라를 다시 과거로 추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할 것인가? 지금은 기득권자들의 탐욕으로 치장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낡은 수구 정치의 제도나 법들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정치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만일 대한민국호가 향후 몇 년 동안 이런 낡은 시스템들을 개혁할 수 있다면 한국은 한 시대 안에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개혁적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만든 나라인데 어떻게 모지리 강화 도령 같은 인물에게 덥석 맡길 수 있겠는가?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139)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1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연세대)

 

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 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장 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욕구의 덕이 절제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얼마든지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의지만이 선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연민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이런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0325336114/in/photostream/

추운 겨울날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행태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분노하면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고,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한나라 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명만 바꿔서 활개를 치고, 게다가 특수부 검사 출신이 어느 날 갑자기 편집증 환자 같은 수사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돼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이 과거 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당의 실책과 같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나라를 덜어 먹을 만큼 부패한 정권도 아닌데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최저 임금을 가파르게 상승시키다 보니 자영업자들에게 부담을 준 측면이 있고, 부동산이 급등함에 따라 적지 않은 국민의 원성을 산 부분이 있지만 그것 자체는 정책적인 실수일 뿐 커다란 실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윤 석열처럼 화끈하게 행동하지는 못해도 늘 노심초사 국민을 생각하면서 정치를 한 노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한 윤 석열이 대선 가도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대열에는 단순히 태극기 부대나 보수적인 노인네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존 정부와 정치에 참여했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대학의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력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꼴 보수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진영 논리에 나포된 경우가 있고, 자신들의 욕망을 진영 논리와 일체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몽골의 초원에서 경험한 것이다. 어린아이 한 두 명이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양들의 정신이 아이의 정신에 의해 나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나치를 지지하던 수 많은 동조자들은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정신적으로 나포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트럼프 체제하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영혼이 없는 대중’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영 논리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켜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수적 욕망의 대리인이나 대변자를 윤석열과 국민의 힘에서 찾고 있는데, 이처럼 정치가 원시적 욕망에 기대는 순간 부패하고 타락한 예는 역사적으로 많다. 한국의 보수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 -내 가족, 내 아파트, 내 진영 등-을 지키려는 원시적 욕구를 우선시 하는 데서 더 정체성을 찾기가 쉽다. 보수의 정치 평론가 조 갑제가 올바로 이야기했듯, 한국의 보수는 ‘가진 게 돈 뿐’이란 말이 보수의 탐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욕구가 한국 경제의 성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정반대다. 이런 원시적 욕망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하는 국민의 힘 당과 정치 초년병인 윤 석열을 앞세우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양쪽 진영을 오락가락하는 이른바 회색 집단의 경우가 있다. 이들이 과거 일말의 양심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는 지는 몰라도 지금 이들은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명분하에 탐욕적인 보수의 뒷전으로 숨고 있다. 지식인 집단과 같은 하이 클래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도 윤 석열이 세계 10권 안에 든 대한민국 호를 이끌기에는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윤 석열의 지지 대열에 서는 것은 양심을 지키기에는 그들의 도덕적 의지가 미약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독일의 지성인 집단이 보여준 행태가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히틀러 체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인식했지만 그것을 비판하기에는 자신들이 입게 될 불이익에 대한 정서적 두려움과 이성적 고려를 더 중시하는 세력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알량한 양심을 지키기에 필요한 전사들의 용기가 너무나 부족한 세력이다. 이런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막무가내 정권 교체의 명분을 내세워서 자신들이 보기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윤 석열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 석열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동조는 기득권 세력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히틀러 체제하에서 보여주었던 지식인 집단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처: Daum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3869#photoId=972168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덕목을 외면하는 자가 대한민국의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083)

 

필자의 다른 글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나인당케의 단상들]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한상원(한철연 회원, 충북대)

 

그림 칼 슈미트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

Carl Schmitt / 출처: 위키피디아

 

1.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칼 슈미트가 <대지의 노모스>에서 기술한 ‘정당한 적(justus hostis)’과 ‘전쟁 길들이기(Hegung des Kriegs)’라는 개념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슈미트의 주장은 이렇다. 국제질서는 도덕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세력은 상대를 부당한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따라서 적에 대한 잔혹한 응징을 정당화한다. 오히려 교전 당사자를 ‘정당한 적’으로 규정하는 관점만이 전쟁의 극단적 폭력성을 억제하면서 ‘전쟁 길들이기’를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그러하다. ‘깡패국가(rogue states)’를 응징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중동을 군사적으로 침공하고 폭격했던 미국과 나토, 그리고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는 돈바스 지역의 ‘자치공화국’들을 승인하며 해당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러시아의 푸틴 모두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로, 상대방을 부당한 침략자이자 범죄자로 규정하면서 각자의 군사적 팽창을 정당화한다. 만약 바이든과 푸틴이,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질서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진) ‘정당한 적’으로 규정한다면, 지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충돌의 위험이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정당한 적’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국내정치에 대입해봐도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자신을 ‘촛불 혁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 이후 실행되어야 할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자신들은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는 정의의 심판자이며, 반대편은 심판되어야 할 불의한 적폐 세력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은 정부와 여당으로 하여금 모든 권력을 잡고도 자신을 영원히 정의의 심판자 역할로 이미지화하면서, 자기 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의들, 예컨대 권력형 성범죄, 입시비리 등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반성적인 태도로 일관하도록 만들었다. ‘정의로운’ 세력이 실은 ‘불공정’을 자행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에 직면한 것이다. 이제 이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과반수가 ‘정권교체’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하고 있고, 상대진영 대권주자는 이제 똑같은 적폐청산 프레임을 이용해(‘민주당 적폐 청산’) 자신의 권력획득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폐로 규정하면서 정작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과 관련된 핵심적인 쟁점들을 흐리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치를 도덕으로 환원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심판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될 때 벌어지는 해프닝에 가깝다.

 

3.

이러한 논의구도를 조금 더 확장했을 때,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혁명적 폭력’들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공포통치나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사건들은 혁명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자신들의 정적을 ‘인민의 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벌어졌다. 여기서도 정치는 도덕화되며 ‘정의’의 이름으로 적을 ‘심판’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정당한 적’이라는 관념이 결여된 채 벌어지는 ‘숙청’의 잔혹함은 정치의 도덕화가 실은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들’)을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상통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렌트는 ‘고통’과 ‘연민’이 정치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정치가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응징으로 변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폭력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대가 ‘비인간적 범죄자’라는 도덕적 분노는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어째서 정치적 갈등이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사실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슈미트의 ‘정당한 적’이야말로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융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실제로 무페가 ‘적대(antagonism)’를 비폭력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경합(agonism)’으로 승화시켜 자유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참조했던 것은 슈미트였다.

 

4.

그러나 이처럼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슈미트의 주장은 문제가 없는 걸까? 과연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첫째로, 민주주의 정치는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과연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정의에 대한 헌신’이나 ‘타자에 대한 연대감’과 같은 도덕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주체화 과정을 단순히 ‘전능한 주권자와의 직접적 동일시’로 이해하고 이를 만장일치적인 박수갈채 행위 속에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물론 도덕의 요소가 결합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호명되는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같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권국가들 사이의 국제법 질서를 하나의 헤게모니적 체제로 이해할 때, 그러한 헤게모니 질서는 특정한 규범적 가치에 대한 신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마가 로마의 패권을 유지했던 것은 단지 로마가 전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시민권’과 ‘로마법’이 가진 가치에 대한 믿음이 종속민들로 하여금 로마의 동맹세력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국제관계에서도 일정한 도덕적 요소를 갖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수행하는 물질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국제인권규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정도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1919년의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로 생긴 국제연맹, 그리고 2차 대전 후 만들어진 국제연합을 비난하면서, 그 토대가 되는 세계시민주의를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국제연합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슈미트라면 따라서 유엔 결의를 통해 공표된 세계인권선언을 정치의 도덕화이자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중립화로, 곧 정치의 탈정치화로 비난할 것이다. 또 인권선언이 가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인해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갈등이 전개될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공적으로 선언된 이념이 갖는 ‘정치적’ 실재성에 관해서 슈미트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이러한 인권선언이 수많은 배제된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를 지배에 대한 ‘대항정치’의 관점에서 사유하지 않는 슈미트에게서 그러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제기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아렌트가 말한 ‘사회적인 것’)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필히 정치와 도덕이 맺는 환원적이지 않고 몹시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

결론적으로, ‘정당한 적’과 ‘전쟁 길들이기’라는 슈미트의 통찰은 우리에게 ‘정치의 도덕화가 낳는 폭력’에 대한 유용한 깨달음을 주지만, 이를 통해 정치와 도덕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은 슈미트의 관점은 온전히 수용될 수 없다. 정치는 (심지어 슈미트가 말하는 ‘적/동지’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도) 일정한 ‘가치지향’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연세대)

 

  •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오래전 유행하던 노래가 하나 있다. 가수 태진아가 간드러지게 몸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일국의 지도자를 어중이 떠중이가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그만한 역량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덕을 쌓고서도 대권을 앞에 두고서 좌절한 정치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일은 훨씬 그렇다. 그런데 그런 노력 없이, 그리고 역량에 대한 검증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력한 야당의 대선 후보로 등장을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것도 행정이나 정치에 문외한으로 일방통행을 일삼는 특수부 검사에서 평생 경력을 쌓은 사람이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대권 후보로 등장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일까? 조선 시대도 아닌데, 어리벙벙한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임금이라고 앉혀 놓을 수 있을까? 정치가 코메디인가, 가수왕을 선발하는 것인가? 대통령 자리는 경험을 쌓고 역량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쌓은 역량을 최고로 발휘해서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하는 최고 지도자의 자리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국정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철학자 왕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일국의 지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무수한 훈련을 거친 다음, 최종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Dialectic)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경험과 학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자는 누구보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처자 공유제’까지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너무나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져서 플라톤 자신도 후기에는 포기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제왕학을 필수적으로 학습하고 엄격한 수련을 거치는 것은 왕의 비중과 역할이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데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경우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만한 경험을 쌓고 그만한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이러한 일반적 기준에 미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첫째 앞서도 지적했듯, 그는 정치나 행정과는 전혀 무관한 특수부 검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런 경력으로 인해 고속 승진을 해왔으며, 마침내 조국 일가를 도륙하는 고도의 편파적 수사로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스타가 되는 경우는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없지는 않아도 힘든 경우다. 게다가 검사는 대화 상대가 있는 변호사나 사건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판사와도 다르게 자신들이 세운 수사 기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법정에서 변호사와 공방을 벌인다할지라도 그들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법정이 아니라 수사 현장과 그 과정에서 일 뿐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국정을 처리한다면 과거 유신 독재나 군사 독재와 비슷한 검찰 독재가 가능할 때와 비슷해질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에 대해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검찰 공화국’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한낱 우려일지 몰라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은 재앙으로 판명될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인 인기에 편승해서 정치인 행세하는 것이나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인물에 환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퓰리즘의 형태나 다름없다.

둘째, 윤석열에 대한 이런 우려는 실제로 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더욱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있다. 여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윤석열의 캠프 안에서도 이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라는 충고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타인의 충고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좁은 식견이나 시야에 대해 별로 반성하지 않는 소아병 환자일 가능성도 높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가 있을 경우 기꺼이 고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처럼 독선과 아집에 빠진 자가 최고 권력자로 독주한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이미 그는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를 할 때 거의 편집병 환자처럼 이 잡듯 수사를 단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사를 보고 ‘도륙’이라는 표현까지 쓴 것은 검찰 수사가 한 가정을 파탄낼만큼 편파적이고 참혹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아, 저런 식의 수사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움과 공감 때문에 서초동 검찰 청사 앞에 몰려와 ‘조국수호’를 외친 것이다. 왜 이런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가? 이것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륜의 파괴이고 심각한 정의의 손상인 것이다. 이것을 정당한 수사권 행사 운운하는 작자들은 지옥의 사자나 다름없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요구하는 지도자는 외골수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면서 대화와 설득을 시도하고 타협을 하고자 하는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나 얼마 전 물러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셋째, 정치 지도자로서 윤석열의 경험이나 경륜, 그리고 자질이 부족한 현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 관계의 위험에 대해 일반인 정도의 상식도 없이 ‘선제 타격’을 말했다. 그는 과거 한국 정치의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음 정권하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정치 보복’을 시사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민주적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대중 앞에서 카메라를 받고서 수 분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함으로써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다양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을 부정하는 투의 말을 하면서 외면하기도 했고, 실제로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조차 의심될 만큼 무지를 거침없이 드러냈고, 이를 안하무인 격으로 오만하게 치부하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도대체 이처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일시적인 인기 하나로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21세기에 가능할 법한가? 이것은 여와 야를 떠나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한낱 우려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대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분노했던 심정을 벌써 다 잊었는가?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두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841&fbclid=IwAR1VQ9170rHHuz5yyex_vBhuOgPk6g2UgxGaaG2XadjeMNi1NPCNIQhvAo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