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시간, 스포츠 [시가 필요한 시간]

열다섯 번째 시간, 스포츠

 

마리횬

 

시가 필요한 시간, 열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러분을 찾아뵙니다. 오늘은 “이것도 과연 시가 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법 한 주제를 골라보았는데요, 바로 ‘스포츠’입니다.

 

 

스포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스포츠뉴스 시작 할 때 나오는 “딴딴딴! 뚜구뚜구…”하는 로고송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고, 또 땀 흘리는 축구선수들, 질주하는 마라토너들 등의 이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스포츠가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을 때도 분명 있어요. 9회말 2아웃의 상황에서 역전하는 야구 경기나, 42.195km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를 보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긴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 스포츠를 가지고도 시를 쓴다는 것은 왠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 않나요? 고독하게 앉아서 사유하고 감상하는 ‘시’하고 스포츠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죠?

하지만 오늘 제가 준비한 시를 들어보시고 “와,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 느낄 수 있길 바라봅니다. 오늘 들려드릴 시는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입니다.

낙법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요,

 

출처 https://ko.dict.naver.com/#/entry/koko/0147429f33e64345894d32c6e4bf5f76 네이버사전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 굳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낙법이 뭔지는 잘 아실 겁니다. 벌써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죠. 그런데 이 ‘낙법’도 시가 될 수 있을까?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시죠.

 

 

낙법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 할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며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았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낙법을 시로 만나니 마치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낙법’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요,

 

“메치기의 연습에 들어갈 때는 먼저 낙법연습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다. 낙법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는 그 자체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 따라서 낙법의 연습은 메치기 기술의 기본이 될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몸놀림에 익숙해지므로 유도기술 훈련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될 수 있다.”

 

다른 어떤 기술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넘어지는’ ‘기술이라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죠? 그리고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어야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낙법으로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더라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누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메치기 당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는 내 공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저 넘어지는 것에 다름없어 보였던 낙법이 유도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고, 뿐만 아니라 모든 공격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짜릿한 부분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갈 때, 이 시의 표현처럼 때로는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꼿꼿하게 굽히지 않고 곧게 고집하는 것이 때로는 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죠.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지만 넘어지더라도 몸이 상하지 않는 유도의 낙법기술처럼, 때로는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목에 붙인 힘을 빼고 둥글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안전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에서 그저 넘어지고 쓰러진 채로 끝이 아니라,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솟아나는 사람, 굳건하게 무릎을 세우는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비록 넘어졌더라도, 그렇게 넘어진 채로 계속 드러누워 버린다면 그 채로 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넘어졌던 자세에서 다시금 굳게 무릎을 세운다면 이제는 다시 Get ready, 공격 시작인 것이죠. 넘어지는 것이 패배하는 것만 같고 힘없는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내 쪽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공격의 기술’이라는 것. 이 ‘낙법’이라는 시를 통해 배워 봅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로 영화 ost 를 가져 왔습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남아공 럭비팀의 실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인빅터스(Invictus)’의 ost 중 한 곡 ‘colorblind’입니다. 난 끝날 때까지 일어날 거야. 난 다시 하늘을 볼 거야. 난 쓰러져도 기도할거야. 난 바닥에 있지 않을 거야.” 라는 가사는 권순진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가사죠.

이 영화는 스포츠영화로 분류가 되는데요, 영화 장면 중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자신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한 편의 ‘시’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어떤 시인지 영화 속에서 찾아보세요!). 그 시는 럭비팀 주장을 비롯해 패배감에 젖어있던 많은 팀원들에게 용기를 주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시와 스포츠가 만나는 순간이죠^^

어제 하루, 혹시 머리를 낮추고 몸에 힘을 푼 채로 그만 넘어져 버렸다면, 이제 여러분의 두툼한 엉덩살로 버티고 무릎을 세울 차례입니다. 넘어질 때 안전하게 넘어져야 다음 공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인생의 낙법을 통해 Get Ready하시는 오늘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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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ictus ost – Colorblind  https://youtu.be/MQODgf0Pg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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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내가 읽는 『자본론』]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2016년 여름, 대한민국 교육부의 어느 정책기획관은 교육부 직원들,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가 했던 발언은 아직도 유행어처럼 우리 주위에서 종종 회자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 그의 발언에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원로 언론인 이강희의 명대사였다. 극 중 이강희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부 관료 입에서 실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현실에 많은 대중들은 자신이 개돼지 가축임을 비꼬듯 자처하며 해당 정책기획관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법과 제도를 손봐야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세간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저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새삼스레 말 한마디에 화가 난 것일까? 국민과 민중들이 개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슷한 맥락의 위 두 대사는 아마 대한민국 민중의 우매함을 비아냥대는 권력의 ‘근거 있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기득권은 물질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서와 사고를 지배하고 그 표출 양상을 예상하여 통제 정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근거’가 충만한 자신감이라 칭할만하다. 이들의 발언에 담긴 의미와 맥락은 분명하다. 그들이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며, 대다수의 국민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언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거짓된, 혹은 잘못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그래서 잘못된 팩트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게끔 하는 사회 구조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가축 취급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 뿐이며 이강희와 교육부기획관의 자신감이 전제한 지배 구조가 실재함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대중들을 한낱 가축으로 전락 시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중들이 정말 가축이라도 된 것 마냥, 자신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회에 순응하고 살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nistry_of_Education(South_Korea).jpg

 

나는 이 의문을 해소해줄 첫 실마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묻고 싶다. 혹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교실에만 있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단어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사상이나 이념의 일반적인 의미와 등치시켜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용례에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사회적 모순의 발달에 따라 실재를 ‘전도’시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위한 관념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허위의식’ 정도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를 기저에 두는 까닭은, ‘이데올로기’가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모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창출을 돕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랑스의 유물론자들 및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에 영향을 받아, 헤겔의 전도된 국가 개념과 종교에 관한 개념을 비판하는 데에서 그 본격적인 시발점을 구축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적 개념으로 부상했으며,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윤리적 측면 등 다양한 외연을 띠며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이 그들 자신을 향한 ‘개돼지 대우’의 토양으로서 근본적 사회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도구로써 손색이 없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근현대적 시점에서는 궁극적(본질적) 실재의 현상 형태인 자본주의적 사회가 바로 이데올로기 형성의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이데올로기’를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전도’ 작용을 매개하게 된다. 이 세상의 실재와 그 본질적 관계들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생산의 영역이다. 허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인 관계들을 은폐하고 현상 형태일 뿐인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 체계를 형성, 설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의식 또한 전도시키게 된다. 후기 자본주의 속 강대국이자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난 나. 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우리가 개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안개처럼 가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이다.

한편 바로 그 생산의 영역으로서 경제적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존재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사회의 99%를 개돼지로 만드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직결되기에 그렇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적 생산성을 향한 집착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 원리이자, ‘개돼지’계급과 이들을 착취하는 계급이 계속적으로 ‘갈등-공존’하게하는 기본적인 알고리즘임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즉 이 사회의 근본적 계급 구조와 이를 망각하게 하는 ‘생산성’에 관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이 가축 취급을 받는 이유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본질적 구조와 계급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며,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미화하고 은폐하고자 한다.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자본의 증식 욕구는 많은 척도들을 경제적 척도로 일원화 시켰고, 경제적/물질적 성공에 대한 열망은 곧 ‘생산성’과 ‘효율’에 대한 집착과 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한한 욕구의 생성과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나도 노력하면 대중들을 들쥐 취급할 수 있는 달콤한 자리에 오르는 희망이 샘솟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의 문제 따위는 고이 접어 장롱에 넣어 두게 되었을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집약되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정치적(권력적) 욕구의 성취와 경제적 성공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기득권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다음 세대로부터 ‘어찌 하면 더욱 큰 생산성을 이끌어 낼까’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 ‘경쟁’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한정된 가치를 가지려면 싸우고 갈등하여 승리하고 쟁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착수한 이들은 사실 자신들 모두가 나눠가지고도 남을만한 양의 재화와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전쟁에 뛰어들었다. 더욱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같은 ‘참전’을 성실한 삶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전시 상황에서 그 누가 ‘개돼지적’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하랴. ‘이데올로기’라는 안개는 본질을 가리는 데에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경쟁’은 실재의 전도와 관념의 전도를 매개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일 뿐이다.

권력과 기득권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의문을 통제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득권의 이 모든 관념적 유인책에 현혹되어 자신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관념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과 속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자본주의 경쟁 사회 속의 부속품이 된 개별 인간들뿐이었다. 가축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적 삶은, 일반 대중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득권에 서기 위한 경쟁은 민중들 내에서 갈등을 야기하며, 일종의 시합의 장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 속에서 주인과 가축으로 나뉘는 사회구조의 본질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방해하고 은폐한다. ‘잉여가치 착취’의 구조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한 대중의 지각을 막는 것이다. 대중들의 관념을 전도시키는 셈이다. 민중들은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민중계급/노동계급 내부에서의 갈등과 경쟁 및 혐오와 차별을 이어간다. 기득권과 자본가들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영원히 가축일 수밖에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들 내부에 끊임없이 갈등과 혐오와 경쟁을 유발시킨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젠더갈등, 소수자혐오 등도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모두는 연대해야하며, 개나 돼지가 아님을 다 함께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시대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눈이 멀어 지속적으로 기득권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확산시키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개념을 등장시키며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물신성’이 그것이다. 『자본』의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 ‘물신성’ 개념을 언급한다.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물신숭배’는 영어로는 fetishism으로 풀이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물건의 내재된 속성인 것처럼 은폐하여, 물건에 소유자의 인격을 투영하거나 물건 그 자체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물신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물건의 내재된(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 힘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적 영역에 집중적으로 적용되는 커다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특성을 설명한 프랑스의 드브로스의 저작은 데이비드 흄의 영향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물신숭배(fetishism)의 직접적 어원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사용한 ‘페티쉬’라는 개념인데, 그 의미 또한 같은 맥락 위에서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감정과 관계한다.

『자본』을 통해 제시되는 두 가지 물신성은 ‘상품 물신성’과 ‘화폐 물신성’이다. 상품 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띨 때 발생한다. 이는 상품 형태가 사회적 생산관계를 은폐하여 사람이 아닌 물건들이 관계를 맺는 상황처럼 보이게 만든다. 상품생산자는 생산관계의 물화(물질화, 물건화)를 마치 어떤 한 상품이 생산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른 대상물과 교환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능력은 마치 물리적 속성처럼 상품이 본래 가지는 성질처럼 느껴진다. 즉 ‘상품 물신성’은 상품에 인격을 투영해 사람이 상품 대하기를 실제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폐 물신성은 금이 화폐로 변한 역사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화폐(금) 자체에 가치가 내재된 것으로 오해할 때 발생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일반적 등가물 상품이 화폐(금)가 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의 발달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꾸로 모든 상품이 금으로 교환될 수 있게 하는 금의 화폐적 속성이 금의 본성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믿는 오해가 화폐 물신성을 야기한다. 화폐 물신성도 마찬가지로, 화폐 자체에 인격과 능력이 부여되어 화폐 그 자체가 인격화, 목적화되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물신성의 두 양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크게 낯선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 특히 ‘물신성’은 계급적 구조가 현대인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현실을 가장 여실히 증명하는 동시에, 대중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대중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실재의 생산관계와 사회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같은 온갖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내 글을 읽고, ‘그래서 이 글은 민중이 개돼지가 맞다’는 걸 말하려 쓴 것 아니냐는 언짢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이 이 모든 구조에서 벗어날 능력을 잠재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완전히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민중이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돼지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엮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통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정밀하게 작용하는 지를”, “왜 우리가 개돼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또한 이 글을 읽음으로서 단 한 사람의 대중이라도, 우리가 언제든 레밍이 될 수 있는 이 모든 사회적 구조를 자각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가축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난 멸시받고 괄시받는 99%의 세계인이 언젠가는 이 모든 구조적 불의를 알아채고 함께 그것에 대항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레밍도, 개도, 돼지도 아닌 존엄하고 가능성 넘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열네 번째 시간, 어머니 [시가 필요한 시간]

열네 번째 시간, 어머니

 

마리횬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 주 미루다 보니 조금 늦어버렸네요. 더 늦기 전에 소개해드릴 시가 있어 가져왔습니다.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입니다.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이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요즘 웬만한 물건들은 가까운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온라인 쇼핑몰도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전자기기, 식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주문당일이나 다음날 새벽에 샛별처럼 빠르게 로켓과도 같은 속도로 받을 수가 있죠.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여기, 늦게 온 소포 하나가 있습니다. 남해에 사시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소포입니다. 행여 어디 부딪혀서 생채기라도 날까, 유자 아홉 개를 싸고 또 싸고 무명실로 겹겹이 감아 조심조심 포장해서 보낸 소포를 봅니다.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시 제목에서 분명 “늦게 온” 소포라고 시작했지만, 다름아닌 어머니가 보낸 것임을 아는 순간, 밤 늦게 받은 소포는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을 만큼 재빨리 날아 온 소포가 됩니다.

시의 화자는 겹겹으로 동여맨 매듭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마디를 읽어내고, 속에 것보다도 더 무겁게 포장된 마분지에서 겹겹이 쌓인 두터운 어머니의 마음을 보아냅니다. 포장된 종이를 한 장 한 장 벗겨낼 때마다 나의 낯선 서울 살이, 분주한 생활의 겉꺼풀도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느끼죠. 그리고 마치 그런 자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어머니의 쪽지가 눈앞에 툭 떨어집니다.

마치 실제 어머니의 쪽지를 마주하는 듯, 시의 원문에는 어머니의 말투로 된 시행이 고스란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서툴고 맞춤법도 안 맞는 촌스러운 편지, 투박하게 싸맨 유자, 빠르고 편리한 흐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늦게 온 소포…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더 큰 위로를 주는 듯 합니다.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어머니가 한지더미로 꽁꽁 싸서 보낸 것은 사실 유자가 아니라, 혹시 내 아들 딸이 바빠서 챙겨먹지 못할 까봐, 그저 몸에 좋은 거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었겠죠. 유자를 포장했던 종이들을 버리려고 접었다가, 어머니 생각에 다시 펼쳤다가… 접었다 펼쳤다 하는 그 손길에서 어머니를 향한 말 못할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새벽에 내려 녹고 있는 눈을 핑계 삼는 시인의 눈물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이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눈물은 슬픔, 쓸쓸함, 외로움의 눈물이 아니라,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아 흘리는 눈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지 않을까요?

이 시를 읽으며 함께 생각난 시 가운데 이대흠 시인이 쓴 <어머니라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가만히 살펴보면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한국어의 비음에 해당하는 자음 ㅇ,ㅁ,ㄴ이 들어있습니다. 비음은 공기가 코로 나가서 코를 울려서 내는 소리를 뜻하는데, 이 세 가지 비음이 모두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어머니’인 것이죠. 어쩌면 그래서 “엄마”라고 입으로 부르기만 해도 우리의 콧등이 시큰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한 그리움이자 영원한 울림의 이름, ‘엄마’, ‘어머니’…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설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몇 년 전 “K-pop Star”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작곡으로 소개가 되었던 짧은 노래인데요, 가사가 참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린 <늦게 온 소포>와도 잘 어울리고, 어버이날을 지내면서 많이 생각난 노래이기도 합니다. 5월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부모님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꼭 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이설아 – 엄마로 산다는 것은, https://youtu.be/8EHdwo2ux6U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자본론 에세이2 – 1장: 상품) [내가 읽는 『자본론』]

 

반짝이는 것 이면의 일그러진 것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내가 즐겨 입던 바지가 있다. 신축성이 아주 뛰어나고 춥지 않을 만큼 두꺼우며 덥지 않을 만큼 얇아서 4계절 내내 입을 수 있었던 바지였다. 바지의 큰 주머니 안에는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있어서 동전이나 열쇠 같은 것을 보관하기에 편리했다. 그 바지에 유일한 단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 바지가 아주 잘 찢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지가 찢어지면, 같은 가게에 가 같은 바지를 샀다. 비싼 가격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바지는 3개월 정도 입고 다니면 어김없이 같은 부위가 찢어졌다. 사이즈가 나한테 작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같은 바지를 새로 사고 버리기를 4번쯤 반복한 뒤, 나는 다시는 그 바지를 사지 않았다. 내 애정과 신뢰에 매번 실망만 안겨주는 바지에 이제는 질려버린 것이다.

나는 그 바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바지는 대체 왜 이렇게 잘 찢어지는 걸까? 이 바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대체 어떤 기업이 이렇게 잘 찢어지는 바지를 만들고 싶어 할까? 어렸을 때 엄마는 종종 직접 내가 입을 바지를 만들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늘 가장 질긴 천을 사서 절대 찢어질 일이 없도록 박음질을 촘촘하게 했다. 하지만 이 바지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에 관해 알게 되었다. 패스트 패션이란,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나와 바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최신유행의 의류를 세계적인 수준에서 짧은 주기로 만들어내고 저가로 대량생산·판매하는 상표와 업종을 말한다. 주로 젊은 층이 소비하는 H&M, ZARA, GAP 그라고 Benetton과 같은 기업들이다. 이들은 빨리 입고 버릴 수 있도록 낮은 질과 가격의 옷을 생산해낸다. 그래야 사람들이 옷을 빨리 버리고 곧 또 새 옷을 산다. 그게 이들 산업이 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이러한 패스트 패션 산업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환경에 미치는 예부터 몇 가지 들어보자. 말하자면 사실 끝도 없다. 패스트 패션 산업에서 하나의 면(綿)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3,000ℓ의 물이 필요하고, 레이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간 865억 그루의 나무가 희생된다. 버려진 면이 환경에서 분해되기 시작하기까지는 80년이, 폴리에스터는 수백 년이 걸린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를 5번 내외로 입고, 35일 이내에 버린다.1 북미에서만 1년에 120억 톤의 의류 폐기물이 발생한다고 한다.2

이제 노동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세계적으로 6명의 노동자 중 1명이 의류산업에서 일한다. 그중 80%가 여성이고, 이들 중 2%만이 생계를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패스트 패션 산업은 개발도상국의 가장 값싼 노동만을 사용한다. 개중에 아동노동도 포함된다. 노동자 대부분은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실제 사례로는 2013년 4월에 발생한 방글라데시의 의류공장 붕괴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Dakha)의 의류공장이었던 ‘Rana Plaza’가 붕괴되어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 1,100여 명이 사망하고 2,500명가량이 부상을 당한 참사였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어린 여성이었다. 방글라데시는 봉제 의류산업의 신흥 강국으로, 높아진 중국의 인건비를 대체할 인력시장을 찾던 서구 의류업체들의 진출지였다. 방글라데시의 시간당 임금은 24센트로 중국의 1달러 26센트3 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2013년의 사고가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첫 사고는 아니었다.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230여 개의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5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꼭 건물 붕괴의 위험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은 의류를 제조할 때 들어가는 각종 화학물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느끼며 노동해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은 피부질병, 호흡곤란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데4,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던 당시의 노동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옷을 사러 매장 안으로 들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바지 앞에 섰을 때, 지금 내가 알아차린 것과 다르게 패스트 패션에 관련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또 그때는 앞으로 내가 자본론 에세이를 쓰면서 패스트 패션 산업에 대해 이토록 긴 설명을 늘어놓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나의 이런 경험은 바로 마르크스가 1장에서 이야기하는 ‘물신’ 개념과 직접 관계한다.

마르크스는 1장에 걸쳐 여러 상이한 생산물이 어떻게 화폐라는 공통된 옷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자기들이 놓인 사회적 관계가 표백되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그렇게 표백된 생산물들은 마치 복잡한 연애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오직 나만을 위해 나타난 왕자. 우리는 이 왕자가 우릴 비참한 현실로부터 구원해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마르크스는 우리의 환상을 깨고 왕자의 연애사를 낱낱이 밝혀냈다. 알고 보니, 왕자는 성에서 바로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 아니라 여러 장소와 여러 사람을 거쳐 많은 짓(?)을 저지른 후 나에게로 왔다. 그리고 왕자의 종착지는 내가 아니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우린 감쪽같이 속았다. 왕자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왕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품이고 왕자의 ‘복잡한 연애사’는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 그리고 모든 생산과정을 일컫는다. 왕자에게 아직 남은 ‘가야 할 길’은 상품이 내 손을 거쳐 간 후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상품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물신)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여러 사회적 관계가 얽혀있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는 물신을 환상, 또는 허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물건의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그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세컨핸드(중고) 옷을 꽤 즐겨 입는 편이다. 1년에 몇 번 동묘나 광장시장, 명동의 중고 옷가게들을 돌면서 내가 좋아하는 밝고 강렬한 색감과 독특한 무늬를 가진 옷들을 건진다. 대개 거기서 판매되는 옷들은 거의 누가 입은 게 티가 나지 않는 중고 옷들이지만, 그중 몇은 헤진 데가 있거나, 희미한 얼룩이 져 있거나, 작은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그게 세컨핸드 나름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는다. 내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헝가리의 경우, 중고의류산업이 꽤 크다. 중고의류를 전문으로 다루는 ‘Humana’, ‘Creme’과 같은 체인들이 부다페스트 도심에만 수십 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세일하는 날이면 매장은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사람 중 중고 옷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갔던 것이라 찝찝하다는 이유에서다. 그 사람들은 깔끔한 새 옷을 사는 걸 선호한다. 물론, ‘손을 거쳐 갔다’는 것이 중고 옷과 새 옷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새 옷도 누군가의 손을 전혀 거쳐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옷을 비롯한 모든 ‘새’ 상품은 상품사슬(Commodity Chain)을 거친다. 세계화 시대에서 그 사슬의 길이는 어마어마하다. 청바지 브랜드 ‘Calvin Klein’은 “나와 캘빈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요(Know 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5라고 광고하지만, ‘나와 캘빈 사이’에는 사실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예컨대, 미국에서 디자인된 데님은 베냉에서 자란 목화로 만들어져 독일에서 만든 염료를 사용해 이탈리아에서 직조되고 염색된다. 이 데님은 청바지로 가공되기 위해 바다 건너 튀니지에 보내지고 나중에 프랑스 소재 일본 기업에서 만든 지퍼를 달게 된다. 청바지의 주머니 안감으로 사용된 면은 파키스탄에서 재배된 목화가 사용되었고, 버튼은 독일에서 만든 황동으로 만들어졌다. 황동을 위한 구리는 나미비아에서, 아연은 호주에서 왔다. 청바지를 만드는 실은 영국, 터키, 헝가리에서 만들어졌고, 스페인에서 염색되었으며, 이 실을 위한 폴리에스테르 섬유는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청바지는 영국 리버풀의 한 의류 매장에 입고되어 소비자에게 판매된다.6 이 어마어마한 상품사슬은 인간사슬이기도 하다. 청바지의 모든 생산과정에는 노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청바지 생산에 기여한다. 우리 중 누구는 세컨핸드 의류가 누군가의 손을 한 번 거쳤다는 이유로 찝찝해하지만, 이처럼 새 옷도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건 아니다. 우리에게 안 보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찝찝하지 않지만, 그래서 또 우리는 어떤 상품이 생산되기 전과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2만 원 내고 청바지를 사서 3개월 입고 버리면 끝이다. 더 이상 내가 지고 있는 빚은 없다.

물신을 인스타그램으로 이해하면 쉽다. 상품의 가격은 핸드폰의 좁은 화면을 통해 인스타그램이 선별하여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미지에 불과하다. 화려한 이미지 뒤에,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과정이나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가려져 있다. 다음 이미지들은 한때 온라인에서 화재가 되었던 이미지들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wrenkitchens.com/blog/kitchen-lived-perception-vs-reality/

인스타그램 속에서 보여 지는 것과 현실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풍자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아주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과 상황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우리가 사진을 올릴 때는 그러한 것들을 곧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우리의 가장 좋은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내보이고 싶어 한다. 내가 팔로우 하고,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들과 대면하는 대신 삶의 파편으로서의 이미지들만 올리고 또 보면서 우리 모두의 삶은 퍽 괜찮은 삶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현실이 시궁창’이라고 불평한다.

자본론을 읽으면, 마르크스가 특정 현상의 역사성을 살피는 걸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착취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화폐가 생겨나기도 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착취가 발생하게 된 긴 역사든, 청바지가 나에게로 오기까지의 짧은 역사든 그 과정을 무시할 때 물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착취를 눈감아주며 개인을 단절시켜 서로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느끼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백마 탄 왕자는 연애사가 복잡하다. 이상한 놈한테 당하지 않으려면 캐물어야 하듯이 우리는 반짝이는 것 뒤의 일그러진 것, 인스타그램 사진 너머의 현실, 상품 이면의 노동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 허핑턴 포스트, 「The Problem With fast Fashion」, https://www.huffpost.com/entry/problem-fast-fashion_n_57ebfeafe4b0c2407cdb22c0

  2. https://www.bwss.org/fastfashion/

  3. 배윤정,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례로 알아본 기업의 사회적 책임」, CGS Report, 2013-11

  4. Shwowp, 「The Dark Side of the Fast Fashion Industry」, http://www.shwowp.com/the-dark-side-of-the-fast-fashion-industry/

  5. 광고의 맥락상 의역하면 섹슈얼한 의미다.

  6. 조철기, 「일곱 가지 상품으로 읽는 종횡무진 세계지리」, 서해문집, 2017-06-21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2020.04.05.

 

이상하(한철연 회원)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궁핍에서 태어난 산물로
고찰할 줄 아는 자만이,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중에서 발췌)

 

 

1.

지난 시간에 두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 폐허 속에서 점화된 불꽃, 낙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낙원,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어느 시대에나 형태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또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나를 가져봐! 나를 즐겨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자진해서 사람 피부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가 자주 농담처럼 말하듯 이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란 결국 모두에게 ‘즐겨라’ 라는 지상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즐기거나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영주에게 저항하며 도망친 농노들이 만들어낸 중세 코뮨 도시나,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평의회라든지 로버트 오언의 공동농장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 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다가 검거된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종교인들의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현대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화폐,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약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종로의 조계사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현실 권력에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한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약효를 입증한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다가 도피하고 방황하던 청춘, 웹툰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도피와 삶의 행복의 사유-이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볼 수 있으리라.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2.

나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른다.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공동체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19세기의 마지막에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시대에 종교가 무슨 큰 현실적인 영향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오래된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신흥 유사종교,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내가 사는 서울 홍대동의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가정통신문처럼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이런 계절의 순환과는 달리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주가는 다 회복하고 경제는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고난 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계의 달력과 시계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로 시간을 세고 있으며 21세기 근대화된 국가 중에 사실상 예외는 없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언젠가는 오를 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대다수의 삶과 구조적으로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내 세대가 직접 겪어본 것만 하더라도 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 2008년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공황,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까지. 영원한 경제성장이란 없으며 10년 정도 주기로 세계적인 불황,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경제성장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뿐 끝없이 현재 세계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를 대다수 개인들, 이른바 개미들이 스스로 국난을 극복하자며 동학 농민 운동을 패러디하여 ‘동학 개미 운동’을 펼치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연극을 펼치는 중이다. 지금의 천도교인 동학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바로잡자며 백년 전에 펼친 그 운동을 이제 주식시장에서 다시 반복해보자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불황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불멸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보며 겨우 재작년에 겪은 전국민의 휩쓸린 비트코인 폭등과 폭락 대란이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겨볼 즈음이 아닐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거없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서 ‘청춘 예찬’이라는 글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아니 외우는 병든 실험용 쥐 같았던 수험생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판매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고서 한번 더 힘을 내봤지만, 당연히 그 책을 읽는 95퍼센트 이상은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김난도 그의 행적과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리얼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과 도피는 그야말로 이런 우리 세대의 청춘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또한 그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의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칸트의 명언을 패러디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히 재구성해보라, 너 자신만의 감각을 표현할 용기를 가져라!

 

1927년 1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여기 베를린에 와서 비로소 분명해진 모스크바에 대한 몇가지를 더 적는다. (1월 29일부터의 일기는 2월 5일 베를린에서 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베를린은 하나의 죽은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고 한 명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떨어진 채 큰 거리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동물원 역에서 그루네발트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나야 했던 거리들은 마치 닦고 문질러 씻은 듯 지나치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도시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적 사태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시각은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 체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비록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의식하면서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유럽인이 러시아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 체류는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정밀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된다. 평균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적인 사람,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체제에 덜 적합한 사람일수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손쉽게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유럽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다가서는 추상적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 모스크바는 다른 대도시에서 저항하기 힘든 멜랑콜리를 퍼뜨리곤 하는 교회 종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이것 또한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고 그리워지는 것 중 하나다. (257-258)​

 

 

4.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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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를 따라가보자. 덴마의 주 무대인 드넓은 제8우주의 행성 중 하나인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막내로 보이는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군대의 이등병처럼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아픈 청춘이다. 혼자서 수십명의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수십명분의 가사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이 와중에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 약자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기존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주 액션 활극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극, 블랙코미디인 덴마에서 이런 수도원이 나오는 걸까. 이 가난한 수녀들의 수도원에 대해서 우리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에서 한상원의 언급을 한번 살펴보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 전통은 이렇듯 공통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공동 분배 역시 공동선의 원리로서 강조해왔다.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자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85p)

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전체를 지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으로도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과 직면한다. … (86p)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바티칸이 상실해버린 사도 바울의 공동선 이념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작점은 성직자들이 청렴한 삶을 살고, 수도원 내에서 자율적, 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따. 수도원 운동의 교회 개혁 중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교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당시 성직자들 중에는 교회법을 어기고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어디까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하는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면서 이러한 논쟁은 다소 정치적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87p)

현실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덴마의 우주에서는 태모신교라는 종교가 굉장히 큰 세력을 쥐고서 실버퀵이라는 자체 회사를 통해 우주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다. 물류, 유통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마존이 지금 미국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쿠팡이 당일배송으로 한국인의 편리함을 장악하고 있듯이 경제의 대단히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태모신교에 비교해 마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에 나오는 고엘 종교회와 나오미수녀의 선행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렇게 헌신하면서 당연히 기존 지역사회의 헌금이나 십일조도 줄었으리라.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병환으로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에게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한다… 깡패가 얼릉 이 수도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에 붙여놓은 빨간색 재산 철거통지서를 만지면서.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8&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수천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 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나치가 득세하는 지금의 유럽을 피하기 위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출처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4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에벤에셀에 대한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한 독자의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떠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의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를 인도한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전에 나오미 수녀가 키워냈던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기 이전엔 농부로서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엄청난 고통과 억압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 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

 

계속…


 

열세 번째 시간, 향기 [시가 필요한 시간]

열세 번째 시간, 향기

 

마리횬

 

요즘 부쩍 거리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붙잡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꽃의 향기가 참 좋죠. 향수를 뿌려야만 향기를 가질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꽃은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인간이 뿌린 향수는 아무리 짙은 향수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향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꽃은 피어 있는 동안 심지어는 말라서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고 사니까,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셈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향기. 이 향기가 꽃에게는 있는 이유가 뭘까? 오늘 소개해 드리는 시를 읽으며 한 번 생각 해 보시죠.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고운 자리에

꽃처럼 순하고 어여쁜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꽃 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꿀벌과 나비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좋아 밤낮으로

꽃을 만지는 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시인은 시인이자 수녀님이시죠.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시에서는 ‘꽃마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시인이 우리에게 가지길 원하는 이 ‘꽃마음’이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은 꽃에게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한 태도를 엿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화려한 꽃이라도, 또 어느 담벼락의 볼품없는 꽃이라 하더라도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법이 없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겸손하게 자라나고, 그리고 때가 되면 활짝 피어 납니다.

 

꽃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활짝 핀 꽃 속에는 하늘과 태양, 비와 바람의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뜨거운 태양빛도 받아야 하고, 거센 빗줄기도 속절없이 맞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더위와 추위, 외로움, 또 바람 불 때의 아픔.. 꽃이 피어 나려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하죠.

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손길도 있습니다. 농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꽃을 기르고 키우며 정성을 다 했던 사람들의 어루만짐의 시간들도 한 송이의 꽃 속에 들어 있겠죠.

그 긴 시간들을 감내했기 때문에 지금의 꽃이 있는 것일 텐데, 활짝 핀 꽃송이만 봐서는 그런 모든 시간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가 꽃 속에 감춰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결코 쉽게 피는 꽃은 없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기다림의 꽃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의 꽃마음을 우리에게도 가지고 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쉬운 인생이란 없잖아요. 꽃이 그러했듯 우리도 향기로운 삶으로 피어나려면, 견뎌내야 할 것들을 견디고, 겪어야 할 연단을 겪으며, 피어날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실, 열매가 열리려면 먼저 꽃이 져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잘 아는 상식이죠. 시인은 그 부분까지도 고찰해냅니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이 보아낸 또 하나의 꽃마음은 열매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곱게 빛나는 꽃의 마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겸손과 만족의 꽃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겠죠.

이 시에서 말하는 꽃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자 매 순간 노력한다면 그러한 삶이 정말 향기 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는 이문세의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라는 곡입니다. 마이너 코드와 메이저 코드가 번갈아 진행되는 것이, 마치 평탄치만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마치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나고야 마는 아름다운 꽃처럼, 굴곡진 우리의 인생 속에도 분명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봄날에 참 어울리는 곡입니다. 시와 노래와 함께 오늘도 향기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문세 –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

               주소https://youtu.be/VumtfvtThtc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의 무기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나의 무기 『자본론』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독어판 서문에서 순진한 독일 독자들에게 일갈하는 대목이다. 『자본론』이 나온 지 벌써 150여 년이 지났지만, 또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은 『자본론』의 배경인 유럽이 아니라 대한민국 땅이지만, 이 일갈은 2020년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물론 전 세계 사람들 모두에게도 ̄ 유효한 언명이다. 『자본론』의 문제의식은 아직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각자가 살아가는 조건이 다른 만큼, 『자본론』도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나의 조건에서, 202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자본론』을 읽고, 그에 관한 글을 쓸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러기에 앞서, 나와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과 『자본론』에 관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현재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반대한다. 또한 『자본론』이 가진 문제의식의 근원인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모순은 지금까지 결코 해소된 적 없으며, 앞으로도 자본주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히 『자본론』을 읽어서 이런 ‘빨갱이’가 된 건 아니다. 『자본론』은 나의 그러한 사상적 입장을 날카롭게 벼릴 수 있게 해주는 숫돌이지, 결코 경전이 아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기에 굳이 그 두껍고 문체도 건조한 『자본론』을 꾸역꾸역 읽은 것일 게다.

그럼에도 『자본론』은 내 인생의 책 중 한 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내가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가졌던 여러 문제의식에 공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책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사회에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 처음에는 그냥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철이 들어가면서 ‘그냥 그런가봐’ 하면서 복권당첨을 꿈꾸며 자기 앞에 닥친 일에만 신경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덜 철이 들었나보다. 부러움과 동정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세상에 대한 분노는 인생에 대한 의문으로, 인생에 대한 의문은 체제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내 주변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내 주위에는 항상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회는 항상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도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런 사회의 선전이 곧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명문대 출신들에게 고액과외를 받을 때 그들은 동네 허름한 보습학원을 전전했고, 다른 친구들이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다닐 동안 동네PC방에서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나름 여유로운 형편의 친구들은 집에서 용돈도 받으면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할 때,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제대로 된 자기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그들은 대학은 꿈도 못 꾸었으며, 중·고등학교도 어영부영 다니고 바로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이 정말 싫다.

대학에 와서 더 적나라하게 느꼈다. 지갑이 두꺼운 사람과 지갑이 얇은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르다. 요즘 시대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들 한다. 그런데 진짜 밥을 굶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다. 단 몇 천원이 아쉬워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비싼 서울 방값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서 고시원을 전전하고 친구 하숙집에 몰래 얹혀살다시피 하는 대학생이 2020년 대한민국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에게 미래는 밝은 꿈이 아니라 어두운 현실이다. 20대의 꿈도 지갑이 두꺼워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그러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노력만으로 이러한 삶을 벗어나려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해야 한다. 학교 수업 외 모든 시간 노동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공부도 해야 한다. 점점 가진 자에 대한 부러움은 시기로 변했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망적인 고민으로 변해갔다.

더 가진 자에 대한 시기와 덜 가진 자에 대한 동정은 돈 못 별면 사람대접 못 받는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그랬다. ‘내 고민의 근원에는 자본주의가 있구나.’ 그렇게 살아왔다. 어쩌다 『자본론』을 읽게 되었다. 그냥 열심히 읽었다. 무언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읽었다. 1권을 다 읽었다. 별 답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다. 일상의 당연했던 문법들이 낯설어졌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설명할 하나의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200년 전 태어난 털북숭이 독일인 아저씨에 공명하는 순간, 그 순간 나는 『자본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본론』을 철 지난 헛소리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보았다. 여전히 일만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어디선가는 4차산업혁명을 대비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달은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세상이 어찌되든 간에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와 같은 대학생들 역시 정교하게 따져본 적도 없고 투철한 계급의식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미래에 임노동자가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기업체가 요구하는 ‘스펙’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른 빈부격차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해소될 여지도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 『자본론』은 현재 그리고 어느 정도의 미래까지 우리가 처했고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는 동의하는 사람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들을 앞에 두었을 때의 나의 심정을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문구가 대변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자본론』을 펼쳐들고 읽으라 강제하고 싶었다. 당신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게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당신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필요한지 알고 있냐고, 왜 남들 살라는 데로 살아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처음의 분노처럼 계속해서 감정이 끓어 넘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론』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은 책도 아니고, 진리가 담긴 경전은 더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고민하기보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는 기회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치열하고 엄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배우면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바람이 크다.

맨손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순 없다. 나 혼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도 없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끊임없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도구가, 무기가 필요하다. 나는 『자본론』이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자본론』은 무려 시대의 삶을 바꾸었다. 그런 책은 드물다.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계속되는 한, 『자본론』은 그 대안을 모색하는 길잡이로서 가장 유의미한 논의로 남을 것이다. 지난 150년간 그래왔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본론』이 제기한 문제의식의 원인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수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세계가 지속되는 한 『자본론』의 생명력은 결코 다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경우가 아닌 우리 삶의 작은 조각에서도 『자본론』은 우리의 무기가 되어준다. 대학 못 가면 인간 대접 못 받는 사회가 절망적이라면, 그래서 꾸역꾸역 대학 갔더니 졸업하고 취직도 안 되는 현실이 지긋지긋하다면, 인간을 돈으로만 보는 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면, 겨우겨우 취직하니 일만 하다 죽을 것 같다면, 이 이상한 삶을 끝장낼 무기로 『자본론』을 사용해보자. 답을 얻지는 못해도 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은 나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자, 내 친구들을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나는 집도 없이 한 끼 한 끼 겨우겨우 먹고 살아가는 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자본론』을 나의 무기로 삼아 나아가겠다. 언젠가 세상은 나아지겠지만, 또 나아져야만하겠지만, 그 과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갈려나가는 순간의 연속일 터이다. 그 희생과 헌신에 나의 보잘것없는 노력도 함께할 것을 다짐해본다.

열두 번째 시간, 기도 [시가 필요한 시간]

열두 번째 시간, 기도

 

마리횬

 

 

 

‘무언가를 빌다’라는 뜻의 한자어, 빌 기(祈)에 빌 도(禱)로 이루어진 말, ‘기도’입니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 어쩌면 자칫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단어일 텐데요, 그런데 이문재 시인의 시 <오래된 기도>에서는 조금 다른 ‘기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것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게 기도가 될 수 있지?” 라고 반문이 드는 것들이 있죠. “음식을 오래 씹는 게 기도하는 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행동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다름아닌 ‘잠시 멈춤의 상태’, 곧 일상의 빠른 흐름에서 순간의 시간, 일부의 시간을 떼어내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노을이 지는 때라면 곧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로 오늘을 보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춰 노을을 한 번 바라본다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잠시 하루를 돌아 볼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음식을 오래 씹는 것 역시, 별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한 번쯤 천천히 음식을 오래 씹는다면, 아무래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어떤 ‘멈춤의 상태’, 마구 흘러가 버리는 시간에 잠시 ‘매듭’을 지어보는 것. 시인은 그러한 시간이나 순간들을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또한 관심 없이 지나가버릴 수 있는 사소한 존재, 생명, 주변의 자연에 한 번 더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 역시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버스에서 혹은 길에서, 아이들에게 눈 마주쳐 준 적 있으신가요? 피어있는 꽃을 잠시 바라보셨나요? 그럼 여러분도 기도를 하신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기도라는 것이 과연 어떤 거창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며,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숨쉬고 있었던 기도의 순간들. 그래서 시인은 이 기도를 ‘오래된 기도’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이 오래된 기도를 해오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 2013)>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요,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신의 곁으로 데려간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사색적 헌신’은 이문재 시인의 시 속에 담긴 여러 모양의 ‘오래된 기도’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것 곁에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에 잠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행복이며, 우리들에게 필요한 오래된 기도인 것이죠.

어떻게 한 주가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주말을 맞이하고, 어느새 4월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 모든 것이 점점 가속도가 붙은 듯 흘러가버리는 이유.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면, 흘러가는 시간을 묶어주는 ‘사색적 헌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 삶에 기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출도 자제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죠. 한 편으로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 곧 친구와 만나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나, 반가운 얼굴들과의 악수, 계절마다 걸었던 벚꽃길 등..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일상들이 이제 와 보니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바쁜 하루, 분별없이 흘려 보내는 오늘을 살고 계신가요?

내일은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보시고, 또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도 불러보고, 노을이 질 때 잠시 걸음을 멈춰 보고, 갓난아기와 눈도 맞춰보고, 차를 타지 않고 한 번 걸어도 보고,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 보는… ‘오래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와 함께 들어볼 노래 소개해드릴게요.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ost 중 <나의 피아노> 라는 곡, 이병우 기타리스트의 연주로 들으면서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적 헌신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이병우 – 나의 피아노 https://youtu.be/559T9wiwwCE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내가 읽는 『자본론』]

2000년생 김필진이 읽는 『자본론』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마르크스의 『자본』, 이른바 『자본론』이라 불리는 책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당신의 머릿속을 불현 듯 스치는 불온서적이 있다면 유추하는 그것이 맞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얼핏 들어본 거 같은데… 마르크스 어쩌고 하는 고전책 아냐?” 정도의 배경 지식이 담긴 답변도 거의 듣기 힘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올해로 만 20세가 되는 대한민국의 2000년생 남자다. 물론 제목의 ‘김필진’도 동일 인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내 나이 또래의 대한민국 사람에게 2020년 1월 현시점에서 『자본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면 더욱 저조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래도 개중에는 소싯적 신문의 정치면 사설 좀 읽어왔다며 그 불온서적에 대해 아는 체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한마디 해주고 싶다. “나 요즘에 바로 그 『자본론』 읽어요.” 그들의 대답은 비교적 비슷할 것이고 예측 가능하다. 빨갱이냐고 묻거나 아직도 그걸 읽는 사람이 있냐고 답할 것이 확실하다. 21세기 현재, 스스로 좌파임을 자부하는 이들에게까지도 외면 받는 책이 바로 『자본론』이다. 그걸 읽고 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대학생이 말이다. 왜? 나는 왜 『자본론』을 읽고 공부하는 것일까?

‘금기’ 나는 금기라는 벽과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에 싸움쟁이였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공을 찼고, 학급 내 주먹질 다툼은 월례행사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 주차된 차의 백미러를 깨먹는 일 정도는 큰 사건도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적이고 올바른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왔고, 꽤나 반항적인 편이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모습에 속을 태우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나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학생으로서의 쇄신을 위해, 목동 7학군으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나는 강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내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을 살던 곳을 떠나 첫 교복을 입게 된 동네는 내가 살아왔던 곳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목동의 치열한 학구열은 나의 평범한 하루하루들을 옥죄어왔다. 버티기 버거웠다. 학교를 안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신경성 복통에 하루를 멀다하고 입원했음은 물론이요, 우울증에 불안-강박증, 심리 상담까지, 몸도 마음도 상했고 그야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 시기도 있었다. 내 학창시절은 산산조각이 났고, 중학교 시절에 사귄 친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많이 다퉜다. 아버지의 이사 결정이 내 삶 자체를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커가며,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사회적 괴물이 아버지의 그러한 판단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생김과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놈의 존재를 피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본론』은 이 무렵에 내가 접한 여러 종류의 불온서적 중 하나였다.

『자본론』과 나의 첫 만남은 내가 살아온 맥락 위에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이 당시에는 『자본론』을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공부하지는 못하였으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 선생님께서 지으신 『자본론 공부』 등의 가벼운 책들로 흥미를 키워갔다. 결정적으로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술, 이를 테면 『공산당 선언』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경제학-철학 수고』의 요약문 등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의 고통과 불만, 피해의식을 보듬어 내 잘못이 아님을 다독여준 것은 다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털보 할아버지와 ‘소외론’이었다. 나는 그들의 휴머니즘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의 눈에 그러한 책들은 그야말로 파격이었고, 내 안에 꿈틀대던 금기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켜주었다. 금기의 벽은 사회에 대한 나의 반항심만으로는 꿈적도 않더니, 내 손에 낫과 망치가 쥐어진 순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내 『자본론』이 내 머리 속에 들어오자, 금기의 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공차는 것을 좋아하던 반항아는 수많은 고통의 시간들 끝에 결국 벽을 넘어서고야 만 것이다.

누구보다 시끄러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느 새 나는 대학생, 새내기의 문턱에 있었다. 그렇게 앙망했던 경희대학교에 입학해 보니, ‘이까짓 대학이 뭐라고 나는 그렇게 망가졌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학교를 쉬거나 그만두기도 했고 가족들과 갈등을 겪기도, 사랑하는 것들을 잃기도 했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던 이유는 결국 대학 입시에서 시작되었었기에 더욱 허망했다. 그토록 강요받던 ‘인서울 4년제’, ‘국내 TOP10 대학’은 그 무엇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허망함으로 방황하던 첫 학기, 나는 교양 수업으로 수강하게 된 ‘고전 읽기 : 『자본』’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내 몸과 마음에는 완전히 아물지 못한 상흔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내가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또 공부하고 싶은 것들, 내가 나아가야할 길, 그리고 내가 싸워내야 할 것들이 보다 명료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계속 나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했다. 그간 꾸준히 놓지 않았던 『자본론』 등 여러 불온서적을 또 다시 꺼내든 나는, 우울한 이 세상의 무자비함에 당하고만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신입 생활은 『자본』과 함께하게 되었다.

『자본론』은 개인적인 내 정서의 흐름과 밀접히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생, 성인, 사회인으로서 내가 만난 세상은 내 경험과는 무관하게 『자본론』의 필요성을 꾸준히 증명해주었다. 알바생으로서, 대학생으로서, 국민으로서, 철학전공자로서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자본론』으로 명쾌히 답변이 가능한 미스터리들이 많았다.

우선 대한민국의 20대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알바와 같은 실제적 임노동 상황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19년 한 해 동안 꾸준히 알바를 해왔다. 2020년에도 알바를 계획 중인데, 최저시급이 오른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다. 2020년의 최저시급 인상은 진작부터 결정되어 있었을 터인데, 나는 2019년 한해 8,350원의 최저 시급에 내 노동력을 판매했다. 그렇다면 내 노동력과 교환되어야할 값어치만큼의 최저임금이 8,590원으로 사전에 판단/책정되었던 것은 2019년이나 혹은 그 이전일 것이고, 이를 토대로 2020년의 최저임금인상을 예정해둔 2019년 당시에도 나는 (그 보다 적은 값인)8,350원에 내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차익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내 노동력의 값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을 텐데 왜 엉뚱한 이들이 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내 노동력의 값어치는 8,350원이 맞는가? 8,590원이라고 단언할 수는 있는가? 나는 매달 매해 항상 똑같이 노동력을 생산해 판매하는데, 해가 바뀐다고 그 교환의 등가 값어치가 바뀌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수많은 궁금증과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메웠다. 알바 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명쾌히 답을 주지 못했다. 내 질문으로 인해 비슷한 의문을 함께 품게 된 친구도 있었다. 『자본론』은 이에 대해 간단하고도 무서운 대답을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었다. “가격은 가치와 다른 것이고, 내 노동력의 가치는 불변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가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자본론』은 설명하고 있었다.

출처: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2873529925

 

이 같은 『자본론』의 예리한 통찰은 나아가 대학생으로서 김필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김필진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우선 『자본론』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서 마르크스는 ‘물신숭배’에 대한 언급을 제법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물신숭배’란 단적으로는 사회적 관계가 투영되어 있는 물건에 인격을 부여해, 물건이나 상품 그 자체를 숭배하거나 인격화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니며 그 대상이 상품(물건)에서 일종의 상품인 ‘화폐’로 바뀐 ‘화폐 물신성’ 또한 함께 설명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어렵고 와 닿지 않는 용어들을 사용하면 그 참된 의미와 현실성을 체감하기 힘들다. 다만 위의 서술처럼 간단하게나마 그 핵심 의미를 인지하고 우리 주위의 현실 세상을 둘러본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자본론』 속의 ‘물신성’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극도로 고도화 되어가는 이 시점에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더욱 더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결국엔 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돈이 최고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XX브랜드의 상품은 정말 우아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YY 회사의 제품은 그 스스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우수하다.” 등등. 사실 이러한 문제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위와 같은 주위의 사례들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다. 돈과 상품이 그 자체로 처음부터 어떤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믿으며, 돈과 상품의 신비성을, 그것들을 인격화하여 숭배함으로서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돈과 상품이 불러오는 이로움을 돈과 상품 자체에 내재된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성’의 환상은 일반 대중들의 무의식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면화 되어왔다. 특히 돈과 상품에 예민한 20대 대학생들을 둘러보면 그 양상을 더욱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본론』은 우리가 무의식에 내포하고 있던 그릇된 환상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저술과 자본주의적 ‘물신성’에 대한 고찰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로 자본주의적 모순의 맥을 꿰뚫고 있다.

그렇지만 『자본론』의 내용이 이러한 일반론적 원리와 세계를 구성하는 포괄적 메커니즘에만 포커스를 두는 것은 아니다. 『자본론』의 여러 파트에서는 당대 유럽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간단히 말해서) 영국 북부의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하기 위해, 아일랜드나 영국의 각종 농업지의 갈 곳 없는 이들과 농민들을 마음대로 잡아다 날라서 노동력의 공급을 증폭시켰다는 내용이다. 사안의 비인간성과 잔혹함뿐만 아니라 내가 해당 내용을 인상 깊게 여기는 까닭은 그 현재성에 있다.

얼마 전 선배를 통해 알게 된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자본」에 등장하는 위의 영국의 사례와 닮아있다. 2020년 현재 고용노동부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제도인 ‘고용허가제’는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일을 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장주나 사업주들이 고용노동부에 노동력 공급을 요청하면 고용노동부에서 지원 받은 이주노동자들을 선별해 뽑은 뒤 양측을 연결해 사업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해외에서 한국까지 날아온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게 될 곳이 어떠한 곳인지, 어떤 사람이 자기의 고용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근로하게 되며, 자신이 일할 직장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또 이직은 3번으로 제한되며, 이를 어길 시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된다.

한마디로 강제노동에 가까운 이러한 제도는, 스스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 아직도 『자본론』에 등장할법한 말도 안 되는 노동법이 살아 있음에 매우 분개한다.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위와 같은 제도를 떠받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계속해서 『자본론』을 읽고 ‘고용허가제’와 같은 비인간적 착취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가야할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은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재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앞서 제시한 ‘최저시급’과 ‘고용허가제’의 두 가지 사례는 그 현재성의 단편적이고 구체적인 양태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사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의미에서 내가 『자본론』을 계속 공부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현실적 동기도 존재하는데, 내가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철학을 전공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 서적인 『자본론』에서 철학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본론』의 전체를 관통하는 ‘노동가치설’은 논의의 시작부터 ‘가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적 사유를 동반한다. 물론 ‘노동가치설’이 철학적 이론이거나,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이 되어야만 학설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실제적인 ‘가치’의 형성과정이 그 근본 맥락의 시발이다. 다만 경제학의 주류가 ‘효용가치설’이고 ‘가치’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보편적 관념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가치’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노동가치설’에 다가가기 위한 첫 단추로서 필요할 것이다. 그냥 아무 일이나 한다고 해서 전부 다 가치를 만드는 노동인 것은 아니며, 가격이 높고 수요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 상품의 ‘가치’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깊은 사색과 고찰 속에서만 일반적인 경제상식의 문을 깨부수고 나올 것이다.

철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에 의해서 형성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식의 인간애의 사유는 충분히 공부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 시절 한창 교복 입던 때의 나를 따뜻하게 달랬던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은 『자본론』의 커다란 맥락과 흐름에도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자본론』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다.

지금까지 『자본론』에 관한 이야기는 내 개인의 삶과 그 외부에 실재하는 자본주의 세계 간의 관계망에서 서술을 해봤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일들을 구체적 사례로 삼아,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를 설명하고자 노력했고, 또 같은 맥락에서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내가 『자본론』을 계속해서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왔던 삶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필연성의 이유와, 현실적/현재적 유효성의 이유,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20대로서 내가 살아왔던 삶은 마르크스주의 인식에서 사회의 불의와 맞닿아있었으며, 『자본론』은 그러한 문제의 본질과 그 현실적 해결법의 실마리를 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리고 현재성이 충분한 책이었다. 그것이 내가 계속 『자본론』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하는 동기이기도 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주목하는 영향력 있는 큰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가치설은 전 세계의 경제학도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이제는 커다란 계급적 혁명도 일어나지 않으며, 화폐물신화는 이미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읽는다. 뉴스와 신문, 정치인과 이웃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주입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가장 최선의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정녕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시스템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착취와 억압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 걸까? 다양한 관점을 견지해보고, 열정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져본다면, 이 세상은 다르게 보일지 모른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인간의 살아 숨 쉬는 가능성을 정치와 철학 속에서 찾고 싶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자본론』을 권할 것이다.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난 뒤에야 맛볼 수 있는 떨림,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뜨거운 열정과 버무려진 그 떨림에, 2000년생 김필진은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열한 번째 시간, 봄 [시가 필요한 시간]

열한 번째 시간, 봄

 

마리횬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연기되고 멈춰 있지만, 가까이에 다가오는 봄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이 올라왔고, 햇빛 비치는 곳에 서 있으면 따스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봄’이 성큼 눈앞에 와 있네요. 아직 바람은 조금 차갑긴 하지만 말입니다.

 

봄을 기대하면서, 오늘 함께 읽을 시는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쳐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인생을 이야기 하거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비유적으로 이야기 할 때,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인생을 항해로 표현했죠.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도 생각이 납니다. 또 어떤 중요한 결단을 내린 후에 “우리 이제 한 배를 탄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비유가 이 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생은 항해다’라는 표현을 하진 않지만,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두 번이랴”라고 하는 표현에서 그 비유가 드러나고 있죠.

우리가 살아가는 일속에는 기쁜 일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죠. 생각해보면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파도에 흔들리면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나를 놓아버리지 말 것을 시인은 당부합니다. 오히려 그런 날은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닻을 내린다는 건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요, 성난 파도가 일고 바람이 마구 부는 상황에서 배를 그냥 놔둔 채로 계속 항해를 한다면, 아무리 큰 배라고 하더라도 여기저기로 휩쓸려 버릴 것이고,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다 떠밀린 후에 그제서야 다시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을 찾으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리저리 흔들릴 것만 같은 그런 날에는 조용히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닻’의 의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배를 고정시켜주는 닻을 살펴보면 무게는 상당하지만 크기가 꽤 작습니다. 배보다 큰 닻 본 적 있으세요? 평소에는 배에 싣고 다녀야 하니까 배의 몸체보다는 훨씬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몇 십 배의 큰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닻이죠. ‘배’가 ‘나 자신’을 의미한다면, ‘닻’은 ‘작지만 나를 지탱해줄 힘이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배마다 닻이 하나씩 있듯이,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이 ‘닻’과 같은 작지만 큰 무언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은 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닻’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친구와의 전화 한 통, 부모님의 격려의 말 한마디,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시 한 편, 맛있는 커피 한 잔 등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이 ‘닻’이 되는지 한 번 생각 해보세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뜻하지 않게 만나는 파도와 같은 일들, 바람과 같은 일들이 없을 수는 없겠죠. 그럴 때 그 파도와 바람에 흔들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닻을 내리시고 그 일들을 잠시 묻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고 바람이 멎었을 때, 그때 다시 내 방향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분노가 치미는 일이나,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괜히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그 화를 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본의 아니게 괜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그 순간 잠시 한 숨 쉬어 가면서 내 마음 속에 닻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만 바보같이 참으라는 얘기냐!”라고 말이죠. 똑같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줄 텐데, 나만 닻을 내리고 참으라는 거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럴 때 시인은 마지막 연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 줄 수 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오게 되어있는데, 춥다고 아무리 불평해봤자 그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아요. 더 춥게 느껴질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겨울’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시인은 우리의 삶에 있을 그 아픔과 상처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파도에 휩쓸려 더 긴 시간을 돌아 올 것인가, 닻을 내리고 내 방향을 지키며 그 시간을 버틸 것인가. 선택해야 하겠죠.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 배의 닻을 내리고 그 시간들을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곧 봄의 시간이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겁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로, 홍이삭의 ‘봄아’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홍이삭이 제 24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던 곡인데요, 따뜻한 목소리와 가사가 봄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곡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과 잘 어울리는 것 같죠? 여러분, 조금만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꽃 필 차례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습니다.

 

홍이삭 <봄아>https://youtu.be/_v7AKeXZqrc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