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에 관해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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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에 관해서

서평 -거대한 반격(파올로 제르바우도 저, 남상백 역, 다른 백년, 2022)

1)

필자는 어느 교수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반격’인데, 무엇을 반격하는지 부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부제는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부정하고 등장한 것이 포퓰리즘이다. 저자는 코로나 위기 이후 포퓰리즘이 무너지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반격이 시작하고 있다고 보며, 이런 반격에 ‘거대한’ 반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영국의 문화 이론가이며, 킹스 칼리지 문화연구소 소장이고, 디지털 문화에 대한 분석과 강의를 해왔다. 저자는 트위터, 소셜 등에 기초한 정치 운동이나 정당 등에 대하여 저서를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포퓰리즘에 깊은 관심을 둔다.

저자는 반격에 중점을 두었지만 필자로서는 반격보다는 오히려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에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트럼프 현상에서 잘 보듯이 오늘날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상당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면서 우파든, 좌파든 포퓰리즘이 압도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파 포퓰리즘 현상으로 미국의 트럼프,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이태리 북부동맹 지도자였다), 항가리의 빅토 오르반, 영국의 브렉시트파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공통으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이 이주 노동자나 소수 집단에 대해 아주 강한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혐오감의 표출을 통해 몰락하는 하층 제조업 노동자로부터 심정적 지지를 끌어낸다.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몰락한 전통 제조업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중상주의적 보호 정책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이들은 구 자본가 계층의 지지를 받아, 구 자본가 계층과 하층 노동자의 정치적 블록을 형성한다.

저자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미국의 샌더스와 민주사회주의자, 영국의 코빈, 차베스와 같은 21세기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 피케티 등 기본 소득론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이들에게 공통된 정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으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대체로 ‘소득 보전’ 정책이 곧 좌파 포퓰리즘의 핵심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유주의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대처, 레이건 정책에서 보듯 작은 정부, 노동 유연화인데 한마디로 저임금화 정책이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블레어 등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세계화, 금융 자본화다.

두 가지 가운데 좌파 포퓰리즘이 주로 반대하는 것은 저임금 정책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전하자, ‘월가를 점령하자’는 선동적인 주장을 내세웠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고 실상 신자유주의의 해체로 나가지는 않는다. 좌파 포퓰리즘은 다만 현상을 유지하면서 저임금 정책을 소득 보전 정책을 통해 보완하려 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소득 보전 정책은 프레카리아(precariat)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다고 한다. 프레카리아는 불안정(precarious)와 프로레타리아의 합성어로,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확산한 불안정 취업자를 말한다. 비정규직, 실업자, 신분 저하된 대졸 취업자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의 또 하나 측면 즉 세계화에는 긍정적이다. 세계화를 주로 값싼 생필품 수입 체제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화로 무너지는 국내의 제조업을 대신하기 위해 이들은 소위 그린-뉴딜 정책을 내세운다. 즉 그린-뉴딜 정책을 통해 몰락한 제조업을 기후 위기나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산업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런 정책은 신중산층(전문기술 노동자 층)의 지지를 받으며, 좌파 포퓰리즘은 신중산층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탈취하여 프레카리아와 전문기술 노동자의 블록을 조직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소득 보전 정책을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이런 정책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소득 보전 정책은 케인즈 이론에 기초한 합리적 정책으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복지국가 시대에 이런 정책은 경제적 선순환을 일으키는 정부의 주요 정책이었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이 비현실적이고 따라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 판단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필자가 나름대로 추론하자면, 소득 보전 정책이 감정적인 정책인 이유는 이 정책은 통화와 재정을 국가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민족국가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3)

대체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이런 정치적 세력을 저자는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이론적 문제로 대두된다. 무엇을 포퓰리즘이라 하는가?

저자는 여기서 구조주의 정치학자 에르네스트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을 먼저 자신의 개념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제시한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London, 2015)’라는 책에서 포퓰리즘을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을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접합시키는 담론 동학”으로 규정하면서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이질적 요소를 결합하는 계기는 라캉적인 개념인 소위 ‘텅 빈 기표’인데, 이것은 상징적 구조가 몰락하는 구멍을 의미한다. 이런 텅 빈 기표를 채우기 위해 여러 환상이 중첩되니, 이런 텅 빈 기표는 정치적 영역에서 이데올로기가 접합되는 기표가 된다.

저자는 이런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분석을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 분석에 의존한다. 저자는 여기서 대니 로드릭의 포퓰리즘 분석(‘포퓰리즘과 지구화 경제’,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policy1, 1-2, 2018)을 참조로 하는데, 대니 로드릭은 포퓰리즘의 경제적 토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로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제조업이 무너지면서(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금융 중심국의 처지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성장하는 금융 자본가와 몰락하는 제조업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기술 노동자 계층과 삶이 불안정해진 노동자 계급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하는 데 기초한다.

이런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결과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새로운 인민 블록이 형성된다. 하나는 몰락하는 중소기업 자본가 계층과 몰락한 제조업 노동자(블루 칼러)의 블록이다. 이것이 우파의 포퓰리즘 블록을 이룬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 블록의 중심은 신자유주의 시대 등장한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프레카리아와 신자유주의의 저임금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진 노동자 계층이다.

이런 경제적 기초 때문에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4)

라클라우의 주장은 텅 빈 기표나 환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포퓰리즘의 심정에 호소하는 이유는 밝혔다. 라클라우는 이런 텅 빈 기표가 사회의 상징적 구조에 구멍이 생김으로써 발생한다고 보지만 그런 구멍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분석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토대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포퓰리즘 이론은 포퓰리즘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즉 그런 포퓰리즘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왜 주로 퇴행적이거나 공상적 정책을 통해 심정에 호소하는 것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포퓰리즘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하면서 포퓰리즘이 발생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과 그것이 환상에 기초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였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포퓰리즘 설명은 종합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포퓰리즘이 전체적으로 설명되는 것일까? 저자의 설명은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설명으로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저자의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모호하다.

5)

거대한 반격의 저자는 좌우파 포퓰리즘은 모두 심정에 기초한 포퓰리즘이라 분석하면서 그런 포퓰리즘은 2019년 이후 코비드 위기 이후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트럼프의 반응에서 보듯이 코비드 위기에 대해 음모론적으로 접근하면서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한때 재난 지원금이라는 형태로 자기를 실현하는 듯했으나 그것이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주택 가격상승)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는 그것을 신국가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이 용어는 마치 나치즘을 상시시키는 용어라 필자는 이를 피하려 한다. 저자의 주장을 오히려 잘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는 자주 국가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이런 자주 국가의 이념을 민족 국가의 귀환, 국가 소유와 공공경제의 확산, 평등한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자리에서 그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필자는 저자의 포퓰리즘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6)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일정한 경제적 조건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한다. 이런 판단은 그 정책이 환상적(퇴행적이거나 공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환상적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판단은 과학성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래 과학성을 객관적으로 판정할 기준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환상적이라는 판단은 이미 비판하는 자신의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포퓰리즘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포퓰리즘이 등장했다. 나치가 등장할 시기가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 시대였으며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역시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치 시대였다.

물론 간접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 자체가 물질적 토대인 사회 경제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본다면 역시 민주주의가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이런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개념적으로는 숙고를 통한 합의에 기초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민주주의는 숙고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 이유는 상업적 언론의 영향일 수도 있으며, 정치 지도자나 정당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의회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중산층이 지배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민주주의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여 왔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포퓰리즘이 등장했다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 시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 원인은 무엇일까? 중상층의 붕괴, 불평등의 심화를 일차적으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의 지나친 상업화와 더불어 SNS의 발달로 생겨난 정치 팬덤 현상,  정당보다는 개인적 지도자에 의존하는 경향 등을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의문만 제기한 채로 이 글은 마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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