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철학의 역사에서 ‘뭣’을 다루는 방식들.
— 2024 08 22 처서(處暑): 더위가 물러나려나.
류종렬(한철연 회원)
서양철학사는 인간의 지식 또는 인식의 발달사일까? 어쩌면 서양의 학문은 늦게서야 철이 들어 인간이 자연 속에서 무엇이며, 어떤 지위를 갖는지를, 자연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는(speculation)것이 아닐까? 이제 신의 이야기는 허구(우화) 또는 수많은 파라독사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고.
서양 사상사에서 인간이 자기의식 또는 자의식을 갖는 시기를 르네상스 이후 데카르트에 와서야 신학에서 벗어나 두 가지 실체를 주장하면서, 또는 주체과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기에 나왔다고 한다. 그 자의식에서 문장과 판단에서 주어 문제이기도 하고, 두 실체에서 사유의 실체만큼이나 너비의 실체도 그와 상응한다고 하는 점에서, 주어 또는 주체가 주도권을 지니는 관념적 성격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류라는 종이 자연에 대해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이 주체로서 지위를 갖는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 발달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서 생각하는 경향 위에서 주인의 역할로서 주체이다. 르네상스가 중세 종교의 시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인간은 종교적으로 신의 부속물 또는 대리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대리자가 신과 연관에서 벗어나, 종교에서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이법(la raison)을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두 실체론(이원론)에 들어있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발생의 능동적 능력도 있음을 보았고, 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의 주체인 사유와 마찬가지도 객체인 물체의 운동에도 능동적 성격(신체의 감정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 속에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l’illusion)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의 자기 풀림 또는 전개(발전)이 인간에 의한 것도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연의 풀림과 같은 방향(봉상스)로 나가는 인간의 풀림이 상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는데, 이를 평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자연의 생성과 전개, 인간의 파악과 추리, 이 둘은 평행도 대칭도 아니며 각각이 다른 계열이다. 이를 당시의 수학적 방식으로 설명을 뿐이다. 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철학자들은 인간이 독자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증거하려고 했기에 수학적 방식들을 동원하였다. 그 수학들은 증빙자료를 제시하기보다, 자료들을 체계화하고 정합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그 질서가 있음을 아는 인간이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들이 인간의 개별성이라든지, 인간 의식의 시간–지속성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시대와 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이 동일한 역할, 즉 개인의 동일 정체성이 시대를 거쳐서도 동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 시대의 한계로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고대에도 있었다. 그리스에서 가이아–우라노스(하늘) 시대, 크로노스(땅) 시대, 제우스 시대 등으로 변전의 과정이 있었다. 이 우화적 이야기를 고대 시대의 변화들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하더라도, 인간 사유의 변화와 연관을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몇몇 역사가들이 시대의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들을 서술하는 연대기나 사건들의 기록들이 역사적 과정과 변화에 관한 규칙 또는 법칙을 찾기보다 사실의 기록으로 후대의 참고로 삼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의 감(鑑)과 서양의 사변(spéculation, 비춰봄)이 등장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다양한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한 평면위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비추어보는 것이지만, 사유의 차이를 대조(le contraste)하는 것이다. 대조는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경우(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적절한 처방 또는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그래도 13세기는 대조의 시대라 한다).
이런 사유가 르네상스 이후에, 우선은 두 가지 방식, 사유와 운동, 또는 영혼과 신체 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식적으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대비로서, 종교적으로 정신과 물질로서 생각하는 경향을 또는 양식(bon sens)을 갖는다. 시대가 달라도 삶의 터전이 달라도 이런 이분법적 구분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지도성(조작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항대립에서 자의식이라는 자아가 나오는 것인가? 인식과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는다. 삶의 터전에서 대조란 소수의 관계와 다수의 연관들이 도덕적, 정치적 문제거리로 남아있다는 것을 18세기(빛들의 세기, 계몽기, 칸트 표현으로 청년기)에 와서야 인간들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는 역사의 시대구분에서 신들의 시대, 영웅들의 시대, 인간들의 시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첫째의 경우에, 종교의 강제적 힘 이외 다른 강제적 힘은 없었다고 한다. 둘째에서는 평민은 법률 밖에 있는 시대라고 하고, 근대에서 자연권의 관계들이 인간들 사이에 일반화된다고 한다. 이를 체제와 연관하여, 신정체, 귀족정체, 인간적 정부(가끔은 군주정체이다)라는 구별을 하였다. 이런 시대적 과정에 대한 통찰이 다음 시대의 철학자들에게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철학 강의에서, 인간은 이법(이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인간의 자유가 점점 확대된다고 보았다. 고대에는 황제 또는 참주의 1인의 자유의 시대였다면, 봉건 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민을 사회적 부속물로 그리고 농노를 고대 이래로 경제적 도구 정도로 여겼다. 그도 놀랐던 프랑스 대혁명 이래로 시민들이 자기의 의사를 표출하고 협의하며, 법제적인 노력을 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에게까지 자유가 확대되어 점점 자유가 인간에게 보편적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혁명이 질서를 혼란시키고 무정부 상태를 만든다는 이유 때문에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며, 사회에는 어떠한 큰 덩어리의 체제가 있고 그 내부에서 맞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 제도들의 성립의 과정이 실증철학의 성립인데, 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방향을 간다고 보았다. 그는 학문들이 성립과 그 발전 과정들을 보면서, 즉 수학들이 대수학과 미적분학들로 확장되고, 천문학이 점성술을 넘어서 정확성을, 그리고 물리학이 체계와 법칙들을 세우고, 화학이 연금술을 넘어서는 분자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생물학에서 개체의 생명의 고유성이 전개되고 또한 변형이론이 나옴으로서 개인(개체)의 단위가 성립하게 되고, 사회 또는 국가의 체제 속에서 배제 되었던 평민의 역할이 확장되면서, 어쩌면 자의식의 발흥으로, 언론, 집회, 결사(협회, 정치조직)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보았다. 이 여섯째 등장하는 사회는 꽁트는 우선 사회 덩어리가 먼저 있다는 점에서 정태적으로 보았지만, 각 학문 발달의 과정만큼이 제도에서도 새로운 제도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 자연권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앞 시대에 인간은 이기심을 토대로 체제가 성립한데 비해, 사회는 상부상조와 여러 조직체들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지배의 이기심(l’égoïsme)과 달리 사람들 사이에 이타심(l’altruisme 꽁트가 창안한 용어이다)이 있다고 하여, 다음 세상은 협업과 협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꽁트는 삶의 터전에서 실증성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고대의 시대에 실증성이 결핍된 시대이라 젖혀두고, 그리고 3단계로서 신학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실증의 시대라 한다. 실증시대의 학문은 사회학이 주축이라는 것이다.
맑스(Marx, 1818-1883)는 정치경제학을 창안하였다. 사회 제도와 그 체제 자체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 원시공산사회, 고대 노예 경제시대, 중세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이 사회의 자기모순에 의해 공산주의사회가 도래한다고 하였다. 그는 꽁트의 사회조직화와 체제에 대한 논의와 달리, 사회와 국가의 부의 축적과 재생산이란 측면, 노동, 상품, 화폐, 자본의 개념들을 정립하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과정에서 잉여와 착취를 찾아냈다. 이런 착취의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가치 생산의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강조하며, 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였다. 그 자본주의 사회는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구를 무기로 삼고, 전쟁의 무기를 확장하여 대중과 인민을 겁주고 달래며, 잉여와 이자를 통한 착취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전쟁 국가의 무너짐이 아니라 카르텔을 공고히 하는 데는 로마카톨릭의 교회조직론과 앵글로색슨의 분석논리철학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벩송(Bergson, 1859-1941)은 역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정태적으로 “우주론”으로 다루어서 안 되고, 통태적으로 “우주발생론(cosmogonie)”으로 다루어야 하다고 보았다. 꽁트 설명이 이래로 선전제의 요청에 의해 세워진 제반 학문이 무너졌고, 나머지 남은 학문이 영혼(심리)학 인데, 이것을 기억이론으로 새롭게 정립하였다. 이로서 자아의 지속성을 말하게 된다. 과정과 강도를 높이는 노력에 의해 자아의 정립은 지속하고 있는 중이며, 아직 완성이니 완전이니 절대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 시대에서는 자연의 지배를 이해한데 비해, 벩송은 자연의 자기생성과 자발성을, 즉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를 강조하였다. 그는 실증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사실들과 상태들에 대한 자료들은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면 문제는 해소된다고 보았다. 완전자, 보편자, 절대자라는 용어들은 선전제 미해결의 용어들로서, 이런 용어를 앞세워서 학문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착각에 빠진 것이며, 도덕과 종교의 제도를 세우는 것은 정태적 관계만을 서술하는 우화적이 된다고 보고, 끊임없이 노력과 강도를 높이는 개인의 영혼(프쉬케, 심리)의 함양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 라이프니츠 이래로 개체의 자유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벩송은 서양 학문의 발달사를 상층의 이데아와 에이도스 시대에서, 갈릴레이의 빗금을 따라 내려와 표면에서 재현과 재생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이루며, 이러한 표면을 성립하게 하는 것은 사물들 안에서 생성하고 생장하는 힘(충력, 엘랑)이 있다고 하면서, 생명은 내재성의 발현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표면의 일반화(개념자업)와 이에 걸 맞는 추상화로서 상징과 기호를 다룬다고 하였다.
벩송의 꼴레쥬드 프랑스 강의들을 수강했던 에밀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는 이법과 신앙의 대립에서 근대성의 발달로 실증성이 첨가되어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립된다고 보았다. 순수 논리와 같은 학문, 개별적 학문들, 그리고 인간관계 사실들과 사건들에 관한 학문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학문의 분화와 개열들에서 자유의 방향들을 제시하려 하였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벩송의 상층 표면 심층이라는 학문과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설명을, 벩송의 물질과 기억의 회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그리고 플라톤의 영원과 시간을 퀴니코스–스토아의 영원과 시간으로 바꾸어 보았다. 들뢰즈는 우주 발생론적 과정을 기억의 발현으로 보아, 심층의 생성에서 표면의 이중성 그리고 이중성의 두 방식이 하나의 가지만을 강조하는 봉상스(좋은 감관)의 길이 있다. 그 길이 상층의 스콜라주의, 이데올로기, 속 좁은 이성의 현상학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의 가지는 무엇인가? 심층의 덩어리의 생성 방식은 추리의 일반화에 의한 표면의 현상(재현, 시뮬라크르)와 달리 자기 발생과 자기 개체성(특이성)을 생성하고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생성의 현상도 시뮬라크르인데, 원본에 따른 현상의 시뮬라크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로 봉상스의 기준에서 두 시뮬라크르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의 유비 또는 알레고리로 설명하는데 비해, 들뢰즈는 두 시뮬라크르가 기원과 원인이 다르다고 보았다(벩송의 두 원천처럼). 이로서 들뢰즈는 벩송의 삼단계의 지식의 전개과정과 달리 발생의 도식을 만들며 달리 말한다. 스토아학파와도 달리 리좀(Rhizome)이란 개념을 창안하면서, 리좀들의 움직임과 엮음에서 나오는 배치에 따른 새로운 지도그리기(cartographie)를 제안한다(데카르트 식의 좌표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리좀은 나무처럼 고정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또 생장하면서도 흐른다. 그 흐름이 이익을 따라 흐르는 것 같지만, 자연의 자기 생성과 자기 만들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흐름이 인민의 의식이며, 이와 더불어 인민으로서 자아의 주체성은 생성 중이라는 의미가 된다.
들뢰즈가 디지털 시대, 즉 규소의 시대는 속도와 강도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맥루한의 이론, 즉 빛이 이미지들(기호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빛 자체가 의미 전달체이며 생성의 흐름 덩어리라는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다양한 빛의 정거장의 한 항(terme)이 플랫폼(정거장)이라 한다. 물론 다른 항들의 플렛폼도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적인 정거장은 수렴과 발산의 점이라기보다 떠도는 리좀과 같지 않을까? 플랫폼이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현재로서 알 수 없지만, 빛의 흐름과 에너지가 우선은 선을 따라 다녔다. 이제는 선 없이 전 지구를 모으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면서, 발산과 수렴이 앞의 순간(l’instant)과 다른 순간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21세기 초반에 인민들의 손안에 든 누리소통(SNS) 도구가, 어느덧 제국의 도구/무기 체계를 넘어서 무기가 되어 가고 있다. 누리소통이 인민들 사이의 자유 또는 소통을 통한 협의와 상부상조가 아니라, 자본의 세 가지 세력들(국가, 교회, 구성 학문)의 패거리에게 인민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무기가 되어 가는 듯하다. 윤석열 정권은 미 제국의 이런 힘을 믿고 있다. 일본의 부역자, 밀정 노릇을 해도 누리소통을 지배하면 대중과 인민을 개돼지 취급하면서 노리개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런 시대에 20퍼센트 정도의 지지를 받고도 미국의 지시를 받은 일본, 그 일본의 사주를 받는 밀정과 매국노가 누리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게 실현이 될까? 이광수와 부역파들이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했듯이, 부일자들과 밀정들이 또 한번 이런 말을 한다면, 한번은 비극, 한번은 희극이 아니라, 역사의 발전에서 3패거리들의 박멸과 소멸을 하지 않는 한, 상식의 믿음을 확장한 양식의 외연확장은 소수의 이기심(탐만치)으로 전승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당연하다. 혁명은 이기심이 악라는 것을 증거할 것이며, 이기심이 자연을 피폐하게 하고 인간도 피폐하게 하여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장면이 될 것이다.
세 패거리의 인식론이 탐만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게 욕망이라 부르자 말라 그것은 탐욕이며, 그들에게 보편이라 부르지 말라 인민은 보편을 추구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는데 그 보편이 맞다고 오만하게 떠든다. 부를 누리면서, 공공적 이익을 사적으로 횡령하는 이들에게 무슨 보편이 있는가? 부일자 숭일자, 모미자(숭미자)들의 치졸함은 그들은 그들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자주와 자치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미국의 말을 듣고 일본에게서 가져오면 된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부일자 또는 밀정들이 되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446년 훈민정음 이래로 자의식 발동이 이었지만 느리게 진행되어, 심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한자 문화 속에서 표면으로 올라올 수 없었다. 한글로 입말을 쓴지 79년인데 이 속도와 강도는 이전 600년의 속도보다 빠르고 강도가 높다. 누리소통이 79년의 흐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의 발산과 수렴이 있다. 이 효과가 “뭣”인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강도와 속도만큼이나 인민의 노력에는 내공이 쌓이고 있다.
심층의 발산 곧 자유의 분출은, 마치 혁명처럼, 간헐적이고 폭발적이다. 누리소통 시대에 균열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시대의 균열로 흐름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발성으로 솟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4:18, 57SMA) (4:41, 57SMB) (5:09, 57SMBB) (5:11, 57S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플라톤과 베르그송)』(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