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한철연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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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 – 故 이현구 선생을 기리며

 

전호근(한철연 회원, 경희대)

 

이 글은 2025년 7월 21일 <경인일보> [전호근 칼럼]에 실린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다’를 필자의 동의를 거쳐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원글 출처: https://www.kyeongin.com/article/1746816

 

지난 7월 14일, 동양철학 연구자 이현구 선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저명한 학자는 아니었다 하겠으나 동양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선생의 책을 읽지 않은 이가 드물 것이다. 선생이 30여 년 전에 펴낸 ‘동양철학 에세이(김교빈·이현구 공저, 동녘)’는 그야말로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였고 지금까지 명저로 손꼽히는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동양철학에 입문한 이가 심심치 않게 있는 걸 보면 선생이 학계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다 하겠다.

선생은 기철학 연구에 평생 매진한 탁월한 연구자였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에 관한 연구는 선생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만하다. 일찍이 최한기의 기학을 두고 “동과 서를 융합하고,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놓은 인류사의 관점에서 보편학을 추구한 학문”이라 규정한 것이라든지, “인간학과 자연학을 포괄하는 종합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연학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마련한 데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 대목은 지금 보아도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선생과 함께 명말청초의 학자 방이지의 ‘약지포장’과 ‘물리소지’를 읽었다. 당시 선생의 학문적 열정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치열한 것이어서 아무리 난해한 대목이 나와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동학과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선생은 형형한 눈빛과 느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지도하곤 했는데 논리가 정확하고 전고에 틀림이 없었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아도 선생의 열정에 감화되어 공부에 더욱 매진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남은 인생에 선생과 함께 공부할 때만큼의 학문적 열정이 다시 찾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생은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넥타이까지 갖춘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학생들과 만났다. 한번은 내가 넥타이까지 매는 건 좀 번거롭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선생이 말하길, 언젠가 넥타이를 매지 않고 편한 차림으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 꿈에 맹자가 나타나 무례하다는 꾸지람을 들었노라고 답했다. 내가 선생의 빈소를 찾기 앞서 평소 매지 않던 넥타이를 꺼낸 까닭은 그런 선생의 범절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형식은 다소 달랐지만 전통 학자의 풍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선생은 세상에 나가 이익을 구하는 일이 없었고, 남들과 경쟁하지도 않고 가만히 알아주는 이를 기다릴 뿐이었다. 선생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의 학문적 재능과 통찰의 깊이를 높이 평가했지만 세상은 선생의 인품과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끝내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선생의 성품은 소탈하기 그지없어 요즘 세상의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시공간 감각도 남달라 미처 국경일인 줄 모르고 평소처럼 강의하러 나섰다가 뒤늦게 깨닫고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든지 남의 강의실에 잘못 들어가서 강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선생은 어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을 무덤덤하게 들려주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았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던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생전 선생은 ‘맹자’에 나오는 좌이대단(坐以待旦·앉아서 아침을 기다림)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이 말은 주나라의 주공이 왕도를 생각하느라 밤새며 고심하다가, 가만히 앉아서 아침을 기다린다는 희망을 담은 글귀이다. 역사 속의 주공은 기다리던 아침을 맞이했지만 선생의 아침은 끝내 오지 않았던 것 같다.

싹을 틔우고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뜻을 지니고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뜻은 내가 지니는 것이지만 쓰이고 쓰이지 않고는 세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점이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하는 까닭이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철학분과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절의 故 이현구 선생(가운데)|ⓒ 전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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