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1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 글은 Barbara Fultner eds., Jürgen Habermas: Key Concepts, NY: Routledge, 2014라는 책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영미권의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하버마스의 이론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훌륭한 개론서다. 하버마스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서툰 번역으로나마 틈나는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인용된 하버마스 저작의 축약어는 아래와 같다. 꺾쇠 안에 표기된 년도는 영문판 출간 년도다.

 

BFN Between Facts and Norms (1992 [1998])

BNR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2005 [2008])

CE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1976 [1979])

DW The Divided West (2004 [2007])

IO The Inclusion of the Other (1996 [1998])

JA Justification and Appilication [1993]

LC Legitimation Crisis (1973 [1975])

KHI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1971])

MCCA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1983 [1990])

OPC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1998]

PDM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1985 [1990])

PMT Postmetaphysical Thinking (1988 [1992])

PNC The Postnational Constellation (1998 [2001])

STP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 [1989])

TCA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1981 [1984/1987])

TRS Toward a Rational Society [1970]

TJ Truth and Justification(1999 [2003])


 

들어가며

바바라 풀트너(Barbara Fultner)

 

Barbara Fultner, 출처: https://denison.edu/people/barbara-fultner

 

의심할 여지없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전 세계 사회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설립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후계자이자, 비판이론이라고 하면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머마스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탁월한 공적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여러 주요 신문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공개 대화를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자크 데리다에서 미셸 푸코, 리처드 로티 그리고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까지 다양하다. 하버마스는 심오한 체계적 사상가이며 완벽한 통합이론가다. 그의 이론적 개념들은 영미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마르크스의 이론, 유럽대륙철학을 끌어와 합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저작을 읽는 일은 여간한 도전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하버마스는 이 도시의 상공부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 그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 나치의 잔혹행위와 기만행위에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하버마스는 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나치 체제와 공모하거나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했던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그중에서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1950년대 반핵 운동과 1960년대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세대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자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 연구소의 철학 및 사회학 교수로 지명되었다. 1971년에서 1982년까지는 슈타른베르크에 자리한 과학기술세계에서의 삶의 조건에 관한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1994년 은퇴하여 저술에 몰두하면서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의 노스웨스턴 대학, 뉴욕의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과 스토니브룩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초청 강좌를 맡았다.

이 책의 글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광범한 지적 성과에 대한 개념 지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난 40 여 년 간 그는 각 연구 영역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수많은 획기적인 저작들을 내놓았다. 이 책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설정해 주곤 했다. 그의 영향은 비판이론과 사회정치철학에서 가장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기고문들이 보여주듯이, 언어학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으로서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윤리학, 인식론, 심리 철학, 언어철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아마도 하버마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사회, 근대화 및 합리성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이어지던 연구 작업, 즉 도덕이론, 정치 이론 그리고 법 이론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론 진화의 발자취

이 책은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버마스의 지적 발전을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있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저작들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체계성 및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장과 관심사들은 이론의 내적 논리에 따라 진화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른 이론가들의 비판에 답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대화적 사상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저작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1 대부분의 경우 시기 구분은 기본 관점의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하버마스에서 이 네 시기는 기본 관점에서의 변화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초점이나 강조하는 바가 달라짐을 나타낸다. 하버마스 사유의 흐름이 이런 시기 구분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네 시기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라 하겠다.

 

  1. 철학적 인간학: 의식철학과 실증주의 비판(1954~1970)

첫 번째 시기는 박사논문에서 『인식과 비판』까지다. 이 시기의 저작에는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1989])』, 『이론과 실천(1963[1973])』, 『사회과학의 논리(1967[1988])』,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소묘(1971[1983])』가 있다. 이 시기 동안 하버마스는 독일 관념론(칸트, 피히테, 헤겔)과 후설 현상학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해석학과 사적 유물론을 연구하였던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와 인류 역사를 강조하는 사회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식철학을 거부하게 되었다. 18세기 커피 하우스 문화에 대해 세세히 분석하고 있는 『공영역의 구조변동』은 비판이론과 문학 연구에 있어서 표준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영역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당시에 생겨난 특정한 경제적 변화(자본주의, 세계 무역 등)와 긴밀히 묶여 있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공영역의 구조가 역사적 조건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책은 공영역이라는 개념을 하버마스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연구를 미리 예시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문화 상업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후에 등장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를 미리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980년대에 천착하게 될 주체성의 사회적 해명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이때부터 관심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다. 그는 과학에 내재하고 있는 잘못된 객관성 개념을 거부하였다. 과학이 몰역사성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문화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점은 의식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인간은 사회문화적 과정에 의해 매개되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며,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상태에서 진화의 결과물로서의 지식을 얻게 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이 구체적 현실에서 멀어져 버린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와 객관적이고도 편향적이지 않은 과학자로 대체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하버마스적 주체의 인지 능력은 따라서 변치 않는 본성으로서 미리 새겨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학습되어 [본성적 능력으로 보이게끔]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습득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는 기획은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인 칼-오토 아펠에 의해 인식인간학 (Erkenntnisanthropologie)혹은 인간학적 인식론(anthropological epistemology)으로 일컬어졌다.

『인식과 관심』 역시 앞으로 등장할 이론의 토대를 놓은 저작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관심을 인간의 인식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기면서 세 가지 근본적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들을 식별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이다. “기술적 통제를 지향하고, 처신(conduct of life)에 있어서의 상호 이해를 지향하며, 외관상 ‘자연적’ 속박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됨을 지향하는 것”(KHI: 311)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등장한 세 가지 구분들, 즉 이론적, 실천적, 미적 담론과 이에 각각 상응하는 세 가지 타당성 요구, 즉 진리성요구, 규범적 정당성 요구, 진실성 요구의 전조가 되었다. 『인식과 관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언어를 “그것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314)으로 도입함으로써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토대가 될 언어적 전회의 도화선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관심』은 방법론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즉 그것은 하버마스에게 경험적 근거와 근대성에 대한 규범 비판적 분석을 통합한 사회이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에 적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1. 이 시기 구분은 Eduardo Mendieta가 제안한 것을 채택한 것이다.

스무 번째 시간, 손 [시가 필요한 시간]

스무 번째 시간, 손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귀로 읽는 시간’입니다. 위 재생버튼을 누르시면 편하게 ‘시가 필요한 시간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여러분, 요즘 손 잘 씻고 계신가요? 2월말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발발한 이후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그 추세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데요, 한국의 상황은 그나마 안정권에 접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때문에 이번(2020년 초) 겨울에는 독감과 감기 환자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코로나를 예방하려고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모두 착용하고 지내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감기 바이러스가 활발히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손 씻기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습니다.

오늘 왜 갑자기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냐구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을 시가 바로 ‘손’에 관한 시이기 때문이죠. 오늘 제가 가져온 시는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입니다.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죠? 여러분은 평소에 ‘손’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악수하는 이미지나 하이파이브 하는 이미지도 생각이 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와 같은 말도 생각이 납니다.

생각해보면 ‘손’이 의미하는 것이 꽤 많아요. 누군가의 손을 보면 때론 그 사람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죠.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느 정도 손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손톱을 예쁘게 길러서 아주 화려한 네일 아트로 손을 꾸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꾸밈없이 손톱을 바짝 깎는 사람도 있죠. 손만 보아도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간은 비약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손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면, ‘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어쩌면 곧 내가 지켜야 할 ‘나 자신에 대한 예의’와 같은 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손’에 대해서 어떤 예의가 있을까, 우리는 손에게 어떤 예의를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까.. 시인의 시를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손에 대한 예의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번 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

 

♦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네,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 들어보았습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우리의 ‘삶에 대한 충고’와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가 조금 길지만,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로 묶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1) 부모님의 사랑을 늘 기억할 것

2)여유를 가지고 살며 자연을 사랑할 것

3)비굴하지 않은 선한 삶을 살 것

4)때론 나를 위해 고독할 것

 

시인이 가장 첫 번째로 꼽은 손에 대한 예의는 바로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놓치기 쉬운 존재가 우리의 부모님이죠. 여러분은 언제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손을 잡아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서 살다 보면, 전화나 메시지는 자주 할지 몰라도, 부모님을 찾아뵙는 시간을 자주 가지기는 참 쉽지 않은 요즘 젊은이들이죠.

부모님을 찾아뵙는다면 한번 부모님의 손을 꼭 잡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손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도 이만큼 자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손에 대한 예의로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추라는 항목을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근원, 원천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두 번째로 시인은 자연으로 눈을 돌립니다.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위에서 말하는 자연을 어루만지는 손의 행위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요, 바로 ‘여유’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데 하늘을 올려다보고 하늘에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수 있을까요? 여유가 없이 분주하게 살아간다면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도, 봄에 내리쬐는 햇살도, 여름에 길 한편에 자라난 풀잎, 가을에 핀 장미도 그저 스쳐 지나칠 뿐 눈 여겨 볼 수 없을 것이고, 계절의 순간순간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삶이 될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분주한 삶의 한 자락에서 여유를 가지는 마음의 태도를 소유할 것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시인이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이 시를 읽다 보면, 말을 하지 않는 손이 때로는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호의를 얻으려고 손바닥을 비빈 적은 없는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릴 만큼 돈에 현혹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손이 칼을 쥐는 손이 될 수도 있지만, 상처 입은 사람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는 손, 놀란 아이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쓸쓸한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비굴하지 않은 선한 삶을 살기를 충고하고 있죠. 이 시의 표현에서처럼 나를 위한 많은 것들을 쥐고 있더라도 한 손은 비워두고,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아주길 바라봅니다. 그럴 때 우리 손은 어떤 언어보다도 더 마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겠죠. 우리는 우리의 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요?

마지막으로는 ‘때로는 나를 위해 고독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어봅니다. 저는 마지막에 어둠 속에서도 홀로 기도할 것이라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여럿이 나누는 왁자지껄한 대화가 아니라, 나 홀로 절대자인 신과 나누는 고독한 대화죠. 그 시간을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통찰과 반성, 위로의 경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인은 그 시간을 가지기를 충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도 노동의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할 것이라는 시행은, ‘기도’의 시간이 노동자이건 회사원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내가 비록 어둠에 있더라도, 또 손에 박혀있는 굳은살처럼 내 삶이 녹록하지 않더라도, 인생에 어떤 얼룩이나 굳은살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의 문은 늘 열려 있다는 거죠. 누구든 두 손을 모아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 그것이 손에 대한 예의다. 이것을 끝으로 시는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시에서 말하는 손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면, 그건 곧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삶이 되겠죠.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연주곡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가곡 중에 <연(緣)>이라는 제목의 가곡이 있는데요, 그 멜로디를 첼리스트 정우리의 연주로 담은 곡입니다. 오늘 ‘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손으로 연주하는 악기들이 참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첼로의 선율이 주는 묵직한 감동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가져왔습니다. 이 곡 들으시면서, 오늘 시를 통해 들었던 충고들 마음에 잘 담으시고 기억하면서 하루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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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리(첼로) – <연> https://youtu.be/MPqCDvU2g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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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내가 읽는 『자본론』]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얼마 전 아주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형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수년 전이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다. 근황을 묻고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변화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함께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고, 우리 모두 달라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형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의 역경을 한참 설명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더라… 사람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흔한 꼰대식 조언을 무심하게 던졌다. 그 순간 문득 든 엉뚱한(?) 생각,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탐구해도 규명해내지 못했던 (인간에의) 정의를 저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철학을 전공한다고, 내 머릿속엔 나름의 철학적 의문이 샘솟은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얼굴 너머로 더욱 커다래진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도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계기로 시작된 철학적 의문은 이후 수일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여러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던 명쾌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신’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동양철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사조나 ‘실존주의 철학’ 등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듣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내 궁금증을 명쾌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종의 인간적 특성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조의 느낌이 강했으며, ‘실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추상적 특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명료한 존재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래 『자본』1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테두리 밖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의 내용적 얼개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머릿속에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 맞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 궁금증 역시 절대적/고정적 실체를 요구하는 본질주의적 발상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정적 실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방향성만을 시사하고 있었다. ‘유(類)적 존재’ 그리고 ‘노동’이라는 두 키워드는 기존 철학 사조들의 인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관이 질적으로 상이함을 암시했다. 마르크스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로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를 분명히 한 후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인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수동적 존재나 조건적/의존적 존재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넓게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본인이 근 몇 년간 꾸준히 탐닉해온 『자본』의 사상적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類)적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노동’은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반가운 만남 속 우연한 계기로 머릿속에 스며든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문득 찾아온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본인을 휘감아 흔들었다.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경계해가며 해답에 관한 힌트를 찾아 나갔다. 기존의 관심을 계기로 다시 들여다본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그 속에 묘사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경제학, 사회학, 또는 혁명적 정치학으로만 서술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저에 있던 인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철학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는 체계적 논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類)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담은 비교적 직접적인 개념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자 ‘類’는 ‘무리 지음’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어서 그 숨은 의미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이자 헤겔 좌파였던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그가 먼저 사용했던 ‘유(類)적 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유(類)적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은 마르크스 철학이 기존의 절대주의적 관념론의 인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 존재의 실체적 본질을 고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철학들을 비판하는 개념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에서 인간을 ‘종(種)’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을 비판한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학문적 조류는, 인간의 종(種)적 본질을 찾아 모든 개별 인간에게 하향식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적 고전 철학의 흐름이 그릇된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앙상블:ensemble2)’로서 존재함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인간이 그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형태의 어떤 종(種)적 본질만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릴 적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나 별다른 종(種)적 목적성 없이도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던 것은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맥락 위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생물학적 속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 의식적 존재인 셈인데, 이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도 증명된다. 우리 주위의 개인적 인간들이 동물적, 종(種)적 본성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 우리 엄마, 내가 아끼는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종(種)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맥락의 총체로서 오늘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논의를 출발시킨 동네 형과 나 역시도 서로에게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類)적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간은 종(種)적 본성에만 지배받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類)적 성격과 종(種)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식적 사회 활동과 능동적 행위를 실천해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일종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 존재나 도덕 등 조건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으며,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편, 포이어바흐에 의해 유(類)적 존재의 개념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오히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포이어바흐가 설명하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될 뿐, 실천적 주체로서 설명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특히 더욱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種)적 특성을 고정적/실체적인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고, 유(類)적 성격이라는 특질로써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유(類)적 성격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 불변하는 실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 종(種)의 유(類)적 성격에 의거한 사회적 맥락의 총합으로 구성됨을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적인 사회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類)적 존재 개념 속 의미의 맥락이 모호하기 때문에 후대에 숱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고정적 실체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각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에게 유(類)적 성격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인간의 고정적/실체적인 종(種)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했으며, 훗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인은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전반에서 매우 핵심적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의 단초로서 그의 사유 배후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노동’은 마르크스 인간관의 이해를 돕는 두 번째 키워드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속 궁극적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적 행위로서 ‘노동’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버텨내는 노동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할 테다. 앞서 마르크스는 직접적인 신체의 욕구와 본능적 생산 활동에 지배받는 동물과 인간, 또는 동물적 존재와 인간을 명백히 구분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자연 전체의 다양한 사물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동물적 행위와는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 또 인간의 의식과 의지의 형성에 관계한다. 이때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의지적 노동의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유(類)적’ 성격의 행위일 테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만물에 ‘창조적 노동’을 행함으로써 ‘유(類)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확장하여 창조하거나 구체화하는 창의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며 또 이 같은 대상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며 자신의 모습을 직관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노동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특질이라 보았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본디 인간의 ‘유(類)적’ 성격을 실현해내고 확인하는 즐겁고 자발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처음 접하고서 그의 사상 자체가 굉장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의 ‘노동’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 특질로서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 및 강압은 ‘노동 소외’3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외’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질로서의 ‘노동’이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졌음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 행위’는 창조적으로 인간의 유(類)적 본성 혹은 의식적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저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 강압적, 비자발적 과정이 오늘날의 ‘노동’이다. 아끼던 형님을 몇 년 만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 노동의 사회적 압박이 (예를 들면 취업 혹은 취업을 위한 대입 등) 나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직 문제로 수년간 고통 받았다던 형님의 씁쓸한 회상처럼, 우리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의 압박에 시달리며,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이제 어디에서도 ‘인간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서술을 마주하며 느낀 의문스러움은 ‘인간 노동’이 소외되어왔음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겠다.

본래의 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덧붙여보겠다. 앞선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 역시도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인간의 본성이자 유(類)적 특질을 드러내는 ‘노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가치’를 창출해내게 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는 이 ‘가치’(인간 노동)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에서, 줄곧 ‘인간 노동’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애초에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 노동 일반’에 있음을 전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이나 효용가치설의 기본적 구조와는 완전히 상이한 파격적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인간 노동’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착취에 놓이게 되는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 본성으로서의 ‘노동’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두고 ‘노동가치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애(愛)와 휴머니즘적 양상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나 인간 본질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의 초기 저작에서 주로 등장했으며, (위와 같은 경제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 후기로 갈수록 이는 사라지게 된다. 짙은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였던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후기로 발전해가며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나 추상적인 헤겔식 독일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의 변모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앞선 논의의 견해들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類)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류의 본성적 경향성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 격이었던 『독일 이데올로기』4의 면면에서 때때로 드러난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5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전, 후기 저서를 막론하여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활동성 및 실천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밑바탕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인간 노동’에의 논의가 핵심적 토대를 이뤄왔음은 물론이다.

이병창, 『독일 이데올로기』1・2, 먼빛으로, 2019.

이 같은 맥락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존재론적 측면에서만 유(類)적 대상으로 파악했을 뿐, 실천적 행동의 맥락에서 인간을 유(類)적 (감성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유(類)적’ 혹은 ‘감성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포이어바흐는 ‘유(類)적’ 존재 개념을 다수의 개별자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내적인 보편성/통일성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적 총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맥락 속 계급 관계 등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의 흔적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체적, 대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던 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포이어바흐가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계급 구조 형성의 필연성 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이란 ‘유(類)적’ 성격과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대로 고정된 실체로서 형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성격과 실천적 형태의 동적 인간 행위인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명료화한다. 능동성과 창조성을 중요한 본래적 특질로 지닌 인간은, 사회성을 토대로 그 본성을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간관에 흡족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나 관념적 가치(이를테면 ‘자유의지’, ‘실존성’)에 의존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는 결이 다른 이론적 견해를 보였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인간적 관점에서 자신만의 인간관을 정립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는 그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실례를 알고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매우 반가운 만남이었음에도 동네 형님과 나는 무척 많이 달라져 있었고, 이는 우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본질이 실체로서 고정되어있었다면, 형과 나는 예전처럼 본성적으로 통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따라 구성됨을 설명했고 나는 내 생활세계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로서 어떠한 실체도 고정화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동적(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갈망하던 종류의 인간관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사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아마 그러한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 수 있음에 글을 쓰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색은 오늘날에도 어리고 미숙한 예비 철학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확장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공부 중인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생각(인간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가늠할 기회를 얻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유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여기, 내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인간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인간 본성에 대해 추측하는 바가 정확한 사실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며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부의 객체적 존재들을 명확히 인식하겠는가.

비록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이 의문만 연속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논의를 이쯤에서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 나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각자 스스로의 견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까?”


  1.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고전서

  2. 여기서 ‘앙상블:ensemble’은 불어인데, 독일인 마르크스가 흔한 독어 표현 대신 불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마르크스가 ‘하나’로서의 합일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독일(독어)의 신비주의적 흐름의 뉘앙스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 다양성과 개체성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소외’ 혹은 ‘인간 소외’ 현상의 양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2.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3.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4. 유(類)적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노동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물의 지배권, 노동 과정의 통제권, 동료 인간과의 본성적 화합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나아가 유(類)적 인간의 본성 자체도 소외당하고 있는 셈이다.

  4.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다고 한다.

  5. 헤겔 철학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는 달리 절대자 혹은 신을 역사 속에서 발전, 변화하는 주체적 존재로 묘사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58회 정기학술대회(zoom-온라인)

한철연 2020년 봄 학술대회 안내

이번 봄 학술대회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회원분들께 자료집을 메일로 보내드리면서 온라인 참여 방법을 안내 드립니다.

학술대회는 ZOOM에서 진행됩니다.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접속하실 경우에는 별도의 프로그램 설치 없이 아래 ZOOM 계정을 클릭하시면 학술대회에 바로 참여가능 하십니다.

핸드폰으로 접속하실 경우에는, ZOOM 어플리케이션(프로그램)을 미리 설치하신 후에 아래 링크를 누르셔도 되고,

핸드폰에 ZOOM 설치가 안 되어있는 경우에는 아래 링크를 누르면 설치 화면으로 자동으로 넘어가므로,

그때 프로그램을 설치하신 후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화면을 크게 보시기 위해서는 컴퓨터 사용을 권장드립니다.

 

  자료집 다운로드: 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678

 ♦ ZOOM 온라인 학술대회 참여-한철연 계정: https://zoom.us/j/7839705074

각 발표와 논평이 끝난 후 청중 질의시간이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봄 제58회 정기학술대회

♦ 주제: 발터 벤야민, 언어와 혁명
♦ 일시: 2020년 8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 주관 및 주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로그램
<발터 벤야민, 언어와 혁명>

13:50-14:00 ZOOM 등록 및 개회준비
14:00-14:10 한철연 회장 개회사 연효숙(연세대)

주제발표 1
14:10-14:45
20세기 인간학적 유물론의 실천으로서 범속한 계시
-W. 벤야민의 ?초현실주의? 다시 읽기- 발표: 김서라(전남대학교) 사회: 박민철(건국대)
14:45-15:00 논평: 한길석(중부대)
14:55-15:10 청중 질의
15:10-15:20 휴식

주제발표 2
15:20-15:55
벤야민 언어 이론의 발전사
발표: 이병창(동아대학교)
사회: 박민철(건국대)
15:55-16:10 논평: 강동원(고려대학교)
16:10-16:20 청중질의

16:20-16:30 휴식
16:30-17:40 종합토론 사회: 한상원(충북대)
17:40-18:00 연구협력위원장 보고 박지용(경희대)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3-2

 

이상하(한철연 회원)

 조금 가벼운 이야기로 이전의 글을 이어가보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뻔한 말은 이제 현대인들의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데카르트 이래 도구적 합리성, 흔히 말하는 투입-산출이라는 효율성이 인생의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잣대가 된 근대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한국인들은 다들 어떻게든 자신의 기대를 낮추려, 아 어차피 망할거야 안될놈은 안돼 등등의 말로 자기 인생에 실망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생계와 관련되지 않은 스포츠 같은 취미분야에서는 설레발이 아닌 역레발, 즉 자신의 진심과는 반대쪽으로 설레발을 치거나 자기 팀 망하라고 부두술을 거는 행위가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는 중요한 경기 이전에 유행으로, 하나의 문화적 밈으로 퍼지기도 한다. 축구계의 황제인 브라질의 레전드 펠레가 경기 예언만 하면 반대로 실현된다는 펠레의 저주 속설이 퍼지니까, 브라질 국민들은 월드컵 시즌에 제발 펠레가 조용히 입을 다물어주길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고 웹툰같은 대중문화 서브컬쳐의 세계에서도 대부분 캐릭터들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듯,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링크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119874&no=30&week=tue&listSortOrder=ASC&listPage=2

 

 

 그렇지만 도저히 기대를 낮출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으로 온갖 설레발을 다 쳐보고 싶은 포기할 수 없는 소원도 사람마다 분명히 존재한다. 취준생에겐 번듯한 정규직이, 입시생에겐 명문대 합격이 그러하듯, 웹툰 덴마 야엘로드편의 주인공 야엘에겐 최하층 계급 피코인 자신이 이 불평등한 계급 사회를 바꾼다는 소원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힘든 현실의 억압과 차별에 지쳐서 이전 글에 나왔듯이 10대에 벌써 삶 자체를 놓아버리기 직전에 놓인 야엘. 허나 초능력으로 미래를 보고 예언한다는 데바림 종족의 선생님이 자신이 바로 미래에는 영웅의 전당에 올라가 위대한 로드 야엘로 불리게 된다는 예언을 듣게 된다면… 이 소원에 대한 기대는 밑도 끝도 없이 커질 수밖에. 외계인이 나타나서 1년뒤 로또 번호를 알려준다면 그 누구든 어떻게든 1년을 버틸수 있게 되듯이. 2년 뒤면 누구나 전역을 하니까 불공정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군인도 사회로 돌아갈 기대를 품으며 오늘의 모욕을 참아내듯이. 그리고 과거의 역사속에서 맑스를 비롯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현재의 억압과 고통을 영광된 미래에 보상받으리라 기대했듯이, 마치 기독교의 종말론 서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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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미래에 대한 희망찬 예언이, 예정된 자신의 미래가 사실 거짓이었다면?데바림이 미래를 보고 예언할 수 있다는 초능력 자체는 진실이지만 그들이 항상 진실만을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실이라면? 보통 이러면 대부분의 인간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단순히 지금의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을 포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지금까지의 삶과는 아에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우리 역사 속 한국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의 미래에 약속된 승리를 확신하며 투쟁했던 80년대 운동권들이 소련이 무너지는 역사 앞에서 적지 않은 좌파들이 극우파로 전향하지 않았던가. 대중적으로 유명한 김문수나 박형준은 그중 대표적인 인물 한 두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야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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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야엘은 예언된 미래가 거짓이었다는 것에 무너지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예언한 미래가 설사 거짓이라 해도, 그 비전 덕분에 야엘은 차별받고 억압받는 힘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기 때문이다. 공포 마케팅에 전염되어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길이 아니라, 그 사회의 공포에 정면으로 맞서싸우며 그 고통 속에서 현세의 행복을 찾는, 묵묵히 하루하루 땅을 파내는 참으로 종교적인 선지자의 길을 야엘은 택했고 행했다. 벤야민도 바로 이런 삶에 대해서, 맑스가 자본론 책에서 말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더지’라는 혁명가의 모델에 대해 말한 바 있고 중요한 이미지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선 차후 또 천천히 상세하게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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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다쳐서 다리를 못 움직이면 양팔로라도 기어가는 구도자의 길. 어차피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고, 자신에겐 포기할 것이 없으니 더더욱 앞으로 미래로 갈 수밖에 없는 야엘. 이 모든 이야기는 행성 전체에 생방송으로 전달되었고, 피코 계급 전체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야엘 몰래 생방송을 중계했던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로 야엘은 정말로 피코만이 아닌 행성 주민 전체에 큰 울림과 성찰을 주는데 성공했다. 벤야민이면 이런 장면을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기존의 반복되는 과거를 중단시키고 미래의 시간으로 도약하는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흔히 혁명을 전진하는 힘의 대오, 1987년 장준환 감독의 영화처럼 시위나 집회같은 이미지로 많이들 표상하지만, 앞으로만 전진하는 기관차가 혁명인 것이 아니라, 송강호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다소 노골적으로 나온 것처럼 자본주의와 전체주의라는 현재 폭주하는 기관차의 비상 브레이크를 잡아당기는 지금시간이 바로 이 시대의 혁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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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었다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난 사이에 행성 주민들의 꿈과 희망이자 엄청난 스타가 되어버린 야엘. 자신이 했던 말들이 생중계되는 것을 몰랐던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주어진 현재의 고통들을 버텨냈을 뿐이고,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저 스스로 가능한 최선의 행복을 추구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허나 바로 그런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동과 미래를 여는 희미하고 작은 메시아로 통하는 희망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피코 야엘에겐 자신의 길을 먼저 걸었던 역사의 선배 또한 존재했다. 벤야민이라면 이 선배를 바로 앙겔루스 노부스, 역사의 폐허 속에서 끝없이 진보의 폭풍이 불어오는데도 과거의 잔해를 주워담으려는 새로운 천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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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야엘에게 의외의 응원권이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속에서 최하층 계급인 수드라보다 낮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있듯이, 사실은 피코 야엘에게 엄격히 대하던 국회 의장이 바로 피코보다도 키가 작고 낮은 계급 출신이라는 반전이 나온다. 물론 국회의사당이 무너져서 의장이 다리를 다치자 기계몸이 나온 시점에서 이를 벌써 눈치챈 날카로운 독자도 있었을테지만, 나로선 이 복선과 반전에 실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 야엘로드 편부터 사람들이 양영순의 스토리텔링에 깊이 공감하고 훗날 덴경대라 불리게 되는 적극적인 지지 독자층이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야엘의 흔해빠진 영웅적 신화 스토리가 아니라, 이런 세세한 디테일이 양영순의 덴마가 마무리를 망친 괴작이 아닌 다시 또 봐야 하고 한국 웹툰의 역사의 기억안에 남겨둘 만한 근거로 충분치 않은가 나는 감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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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야엘로드의 결말 이후의 50년 뒤를 살짝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 나는 두 가지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50년 뒤의 대화들은 분명 키가 작든 크든 계급이 낮든 높든 평등이 대화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코출신 작은 키의 야엘은 왜 굳이 키를 크게 그렸을까? 50년이나 걸려서 국회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 저 야엘조차도 결국 국회의장이 기계몸을 타고 키를 키웠듯이 상층 출신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처사인 것일까? 정치인이 누구나 국회에서 정장을 입어야 하듯이? 그 유시민조차도 국회 입성한 날에 처음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동료 의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다음날부터 말끔한 정장을 입었듯이 이 또한 양영순의  씁쓸한 현실 풍자인 걸까?

 

 

 

그리고 과연 야엘이 던진 질문인 행복이란 무엇일까? 야엘은 행복이란 마치 자명한 개념인 것처럼 쉽게 말하지만 과연 행복이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말이던가??…  이에 대해서 행복이란 무엇인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만드라고라 편에서 나름의 대답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나름 엘리트인 국회의원 보좌관 야엘이나 만드라고라 마스터인 나오미 수녀처럼 전문가적 지식이나 기술이 없는, 정말 밑바닥 인생도 그러한 어떠한 반전의 계기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제 다음 에피소드인 나이트의 슬럼가 쓰레기 퀑 지로를 보며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야엘처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도망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꾸는, 벤야민이 말하는 혁명적인 지금시간을 과거로부터 불러올 수 있을 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

 

 

계속…

열아홉 번째 시간 – 다시, 사랑 [시가 필요한 시간]

열아홉 번째 시간 – 다시, 사랑

 

마리횬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이번 주에도 ‘귀로 읽는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위 파일을 누르시면 편하게 ‘시가 필요한 시간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오늘은 “다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코너를 시작하고 두 번째 시간이었나요? ‘사랑’이라는 주제로 김인육 시인의 시 <사랑의 물리학>을 들려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수학과 과학에 존재하는 법칙이 있죠. 질량의 크기는 무게를 말하고, 부피는 물체의 가로 세로 높이를 곱한 크기를 가리킵니다. 보통 무게가 무거우면 그 물체의 크기도 더 크기 마련이죠. 무게를 재는 추를 생각해보면, 5g짜리 추와 50g짜리 추가 있다면 50g짜리 추가 훨씬 그 부피가 크지 않겠어요? 그것이 자연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법칙이라면, 김인육 시인은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내 놓으며 우리의 생각을 뒤엎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 시간을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 

오늘 “다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른 한 편의 사랑 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지난 번 <사랑의 물리학>과 함께 읽어도 좋을 시로 한 번 골라 봤는데요, 장석남 시인의 <배를 매며>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장석남 시인은 1965년 인천에서 출생했고,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한 시인입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면서 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시죠. <배를 매며>라는 제목만 들어서는 사실 사랑에 대한 시라는 감이 잘 안 올 수도 있겠는데요, 시를 한 번 듣고 더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 <배를 매며> 입니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이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모든 사랑에 대한 시 –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랑

이 시에서 시인은 배가 정착하는 것과 사랑이 다가오는 것을 함께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를 들으면서 여러분들 머리 속에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어떤 존재가 있을 거 같아요.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첫사랑’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사실 ‘첫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랑이 다, 사실은 다 예고 없이 시작됩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이 시는 예고 없이 찾아오고 예고 없이 시작되는 모든 사랑에 대한 시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밧줄이 ‘등 뒤로’ 날아 온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언제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거죠.

이 시에 ‘호젓한 부둣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호젓하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호젓하다’ 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무서우리만치 고요한’이라는 의미와 함께, ‘매우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롭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홀가분하다’는 느낌은 언제 가지게 될까요? 예를 들면.. 오래 준비했던 시험을 마침내 다 끝냈을 때 라던지, 한바탕 청소를 다 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럴 때에 “와 진짜 홀가분하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훌훌 털어버렸을 때의 기분과 상황일 때 쓰죠.

그렇다면 말 그대로 그냥 ‘홀가분’만해야 하는데, 이 ‘호젓하다’라는 말에는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롭다’”라고 그 뒤에 ‘외로움’의 느낌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홀가분한 건 홀가분한 거고, 쓸쓸하고 외로운 건 쓸쓸하고 외로운 건데, 홀가분해서 쓸쓸하고 외롭다는 건… 생각해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는 느낌도 들죠. 왜 시인은 사랑에 대한 비유로 ‘부둣가’라는 배경을 잡으면서 ‘외로운 부둣가’라던지, ‘조용한 부둣가’가 아니라, ‘호젓한 부둣가’라고 썼을까요? 한 번 생각을 해 보죠.

혼자가 되면, 사실 이것 저것 생각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 굉장히 편하고 홀가분한데, 막상 또 곁에 아무도 없으면 뭔가 마음 한 켠이 쓸쓸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 감정을 딱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바로 ‘홀가분하여 쓸쓸하고 외로운’이라는 뜻의 ‘호젓하다’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호젓한 부둣가’라는 표현은, 사랑에 대해서,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해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혹시… 지금 굉장히 호젓해지셨나요? J  

 

문득 들어온 배, 문득 던져진 밧줄

이 시가 사랑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래서 공감 가는 표현들이 많은 거 같아요. 어느 날 밧줄이 던져지고, 배가 들어오고 하는 사랑이 시작되는 경험을 하긴 했는데… 우리는 알고 있죠. 그것이 그저 아름답게 끝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사랑이라는 게 어느 날 불쑥 찾아온다는 것도 공감이 되고, 다 공감이 되는 표현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그렇게 왔다가 또 떠나 간단 말이죠. (그럴 거면 들어오지를 말던지,..) 그런데 한편으로 배의 입장에서는 ‘아니 그러면 밧줄을 매지를 말던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쪽 입장에서는 “아니, 그러길래 누가 들어 오래?” 라고 또 말할 수도 있을까요? 다가온 배가 잘못인 건가, 아니면 던져진 밧줄을 맨 내가 잘못인 건가… 그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따가운 공방전이 되겠죠.

 그런데 사실 이 시를 잘 읽어보면, 들어오는 ‘배’도, 그리고 그 배를 매는 ‘나’도, 어느 쪽에도 책임이 없음을 알 수 있어요. 이 시를 잘 보면 밧줄이 ‘던져진다’라고 되어 있지, 밧줄을 던진 존재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죠. 배에 손이 달린 것도 아니니까 배는 밧줄을 직접 던질 수가 없고,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던진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에 대한 아주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나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해 보자면, 바야흐로 제가 러시아에 유학을 갔을 때였습니다. 도착한지 몇 일 안 되어서 학교 행사에 유학생 신분으로 초대가 되었어요. 그 행사 중간에 유학생 학생회에서 러시아 소설 작품 중 한 장면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는 순서가 있었고, 한 한국인 남학생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잘 부르더라구요. 굉장히 인상적으로 무대를 봤고, 한 눈에 반해버렸죠. 그게 어떻게 보면 이 시에서 말하는 ‘밧줄’이지 않았을까요? 그 사람도 일부러 나에게 던진 것이 아니고, 나도 억지로 잡아 끈 것도 아니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갑작스럽게 던져진 밧줄이었던 셈이죠.

그날 이후 알고 보니 같은 기숙사 건물에 사는 남학생이어서 서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아주 천천히 조용히 배가 들어 온 셈이고, 그 사이에 저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던져진 밧줄을 매었던 것이고, 그 친구라는 배가 내 호젓한 부둣가로 천천히 와서 머물렀던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요?

몇 개월 후에 그 친구가 곧 한국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찾아왔고, 용기를 내서 저의 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좋아한다고. 그런데 그 친구도 저를 좋아하지만 친구로만 좋아한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 이후로 그 친구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계속 친구로 잘 지냈지만, 저는 한 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살짝 숨기고 친구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좋아했던 마음이 점점 작아지더라구요. 밧줄이 어느 새 풀려서 배가 떠난 셈이죠.

 

떠나간 사랑도 아름답다

아까도 우리가 잠깐 얘기했지만,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뭐하냐,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떠나가지 않냐”라고, 그리고 “그렇게 떠나 갈 거였으면 들어오지를 말았어야 되는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이것도 정말 사랑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와 함께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져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이것은 배가 떠나간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 같더라구요. 배가 떠나가고 그 자리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아, 배만 머물렀던 게 아니구나, 그 사람이 머물렀던 장소, 그 사람이 있었던 시간, 그 때의 구름의 모양, 빛의 빛깔 그런 것들이 다 머물렀던 거구나” 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시인은, 그것을 알게 되는 것 역시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죠.

 밧줄을 매고, 배를 붙잡아 매고, 그 배를 내 부둣가에 머물게 두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떠나 가야지만(떠났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거죠.

아…. 다시 호젓해지네요..

 

모든 사랑에 대한 시 – 다시, 사랑

예전에 제가 들었던 어느 강의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많은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영화, 노래가사에 왜 성공한 사랑 이야기는 별로 없고, 이별 이야기나 실패한 사랑 이야기, 애틋하게 이어질 듯 말 듯 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렇게 많은 걸까?” 라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을 한 문장으로 말씀하셨는데요, “성공한 사랑은 아기를 낳고, 실패한 사랑은 이야기를 낳는다”였습니다. 아기를 뜻하는 프랑스어(Enfant)는 다르게 풀이하면 ‘말 없음(En-fant)’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데요, “성공한 사랑에는 아기가 생기지만, 실패한 사랑에게는 아기(말 없음)를 대신해 무수한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 듯하죠?

비록 사랑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대신 그 사랑으로 아름다운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긴다면, 그것 역시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이 시를 읽으면서 “성공한 사랑이든, 혹 실패한 사랑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석남 시인도 시를 통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여러분들도 이 시를 읽으면서 여러분 만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장석남 시인의 시 <배를 매며>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곽진언의 <고스란히>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노래에는 내가 놓아버린 적이 없는데 어느새 끈이 풀려 멀어져 버린 사랑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문득 찾아왔다가 스르륵 떠나버리는 사랑의 이야기가 가사에 잘 드러나면서 이 시와 참 많이 연결이 되더라구요. 호젓한 부둣가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곽진언  – <고스란히> https://youtu.be/2c181Ra66as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신입회원 모집을 위한 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신입회원 모집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1개 이상의 세미나에 참여하실 경우 회원 가입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여러 개의 세미나에 중복 참여하셔도 됩니다.
•8월 둘째 주 부터 세미나가 시작됩니다.
•참여를 희망하시는 분은 이메일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참여 신청시 성함, 이메일, 연락처, 희망 세미나 주제를 알려주세요.)
•강의 일정 및 장소는 8월 첫째 주 공지할 예정입니다.
•참여 신청 및 문의 : kb-940@daum.net(교육부장 김종곤)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읽는 『자본론』]

기본소득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노동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거나, 사냥을 나가거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 매일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이전의 노동 형태와 현재의 임금 노동에 차이가 있다면,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전의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이 내 것이었고 임금 노동에서는 내가 만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다. 우리는 일정 기간 동안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우리의 신체를 판다. 회사든 공장이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안에 머문다. 우리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뿐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자를 ‘자유로운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중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노동자의 선택이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것이고, 기저에서는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free of) 것이다.

많은 맥락에서 우리는 전자의 자유에 초점 맞추기를 좋아한다. 노동자 자신도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고, 자본가도 노동자가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많은 채용공고들 중 어느 곳에 지원할지 선택할 수 있다. 서점에서 알바할지 식당에서 서빙을 할지 고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해서 하는 일이니까 노동자가 착취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고등학생 동창 중 최저시급이 7,530원이었을 때, 시급 5,500원을 주는 편의점에서 일한 친구가 있다. 시급은 적지만 위치로나 근무 시간으로나 그 친구한테는 그나마 최적의 알바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최저시급 이하로 임금을 주는 곳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것은 친구니까, 이는 착취라고 할 수 없을까? 아니다. 명백한 착취다. 친구더러 ‘네가 선택했으니까 너는 착취당하는 게 아니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있다. 마찬가지로 편의점 알바를 했을 때다. 졸업한 고등학교 근처의 편의점에서 약 2주간 일한 적이 있다. 나는 계산대 지키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들어오면 선반에 진열하고 창고에 정리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다리를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해서 1시간만 일해도 체력이 바닥났다. 4시간 동안 천천히 하면 됐을 것을, 내 속도에 따라 빨리 끝날 수 있는 일이라 늘 2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집에 갔다. 두 시간이면 당시 시급으로는 약 15,000원이다. 하지만 2시간 일해서 15,000원 받고,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님께 그만둬야겠다고 말씀드리니,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게 한 시간 만큼의 임금은 제하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고등학생 때 받은 나름의 노동교육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찾아가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부당하다고. 나를 교육하느라 다른 알바생을 남긴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나는 분명 노동을 했으니 내가 노동한 만큼의 임금은 주시는 게 맞다고. 어림없었다. 퇴짜를 맞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할까 고려했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나에게 없었다. 5만 원을 떼였다. 약 8시간 동안의 노동이 공중분해 된 것이었다. 내가 작은 빵집의 사장이었다면 8시간 동안 빵을 만들면 그 빵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이 이야기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명제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권리라고. 노동력밖에 가지지 못한 노동자는 결국에는 어떤 걸 선택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free of) 노동자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노동의 노예로 전락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나를 위한 노동’으로 보았다. 노동의 과정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긴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의 직접적인 생존과 나의 잠재력 실현의 수단이다. 그래서 노동이란 내가 필요하면 하는 것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길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시간을 조절할 권리도 나에게 있어야 한다. 현대의 임금 노동에서 후자의, 나를 위한 노동의 요소들은 전부 제거되고 전자의, 온전히 타인만을 위한 노동만 남아버렸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퇴근해서야 조금의 자유의지를 되찾는다.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는 이러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퇴근 후의 시간뿐이 아니라 노동의 과정 자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국회의원과 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의 구호는 사실 틀렸다. 우리는 아무 일자리나 양적으로 늘어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노동을 원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너무나도 자주 무시당한다.

인간다운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요새 떠오르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직은 개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 최근에 정부에서 실행한 재난지원금 정책이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를 조금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재난지원금을 통해서 우리는 만약에 기본소득이 있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처음 기본소득에 관심을 두게 된 건 2016년이었다. 내가 새내기가 된 해이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이 개최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봉사단에 지원해서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스텝이 되었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발표자와 청중이 몰려왔는데 스텝의 특권은 강의실들을 기웃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에 애써 귀 기울여 보니,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썩 괜찮게 느껴졌었다.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토지가 인류의 공동재산이라는데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이끌었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농부가 황무지를 개간해 쓸 만한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 땅을 해당 농부의 소유로 볼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땅의 개간자가 토지의 소유자가 되는데, 이때, 페인은 그 소유자가 땅의 진짜 주인인 공동체에 빚을 지는 것이라고 봤다.1 토지뿐만 아니라 대기와 데이터, 기술과 같은 유무형의 다른 재원들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우리가 진정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강렬히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맞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사실 공동의 것인데 왜 누구는 그걸 가지고 부를 축적하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지? 우리의 노동은 왜 고통스러워야 하지?’ 그 이후부터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게 되어 기회가 날 때마다 조금씩 공부를 했다. ‘기본소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유토피아적 세계. 하지만 알고 보니 기본소득은 또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다.

출처: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홈페이지 https://basicincomekorea.org/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에서 내가 쫓아다니던 한 미남이 있는데, 브라질에서 온 길고 검은 곱슬머리의 ‘마르코’였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즐겨보던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서 이집트 파라오 군대를 이끌던 내 이상형과 똑 닮았었다.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한테 어렵게 말을 걸어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집에 가서 그의 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자기 소개란에 ‘나는 자유주의자입니다’라고 적혀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마르코가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기본소득은 좌파에 의한, 그리고 좌파를 위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기본소득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나중이 돼서야 알았다.

물론 진보와 보수에서 기본소득에 찬성하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보수는 기본소득 발상이 출발했던 ‘권리’의 개념보다는 ‘효용’에 더 집중한다. 생산력은 점점 증가하는데, 소비 주체는 줄어들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순환의 위기에 대한 대안쯤으로 보는 것이다. 또는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대신 복지의 축소를 주장하면서 시장 이윤의 재분배에 개입하지 않는 작은 정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진보 측에서는 기본소득이 우리를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신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평등, 그리고 인간다운 삶 등이 진보 스타일 기본소득의 목적이다.

그러나 양측의 찬성 견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양측의 반대도 드셀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복지병을 걱정하거나 기본소득이 게으름을 유발하고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없앨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 안에서는 논쟁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데, 진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를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부의 분배’라는 사회적 당위를 실현하는 방법이 기본소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부의 분배가 부자들에게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국가에서 주는 소득의 수혜자가 되면 국가의 주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통제를 받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는데, 이 주장은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오히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열린다는 반론에 부딪힌다. 맑시즘(Marxism)으로 넘어가면, 그 안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이 갈린다.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주장한 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이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견도 있고,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자본주의는 존속되며, 생산수단이 노동자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주체성을 잃고 오히려 사회에 빌붙어 기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으로 인해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만약에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을까? 혹은 취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엄두도 못 내기에 다음 생으로 미뤄두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취업 걱정으로 의미 없는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이 뛰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시민정치에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밥을 차려줄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아무리 달콤한 상상일지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양 입장을 전부 고려하면, 기본소득 시나리오의 결말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살아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자기가 좋아했던 소파 의자 위에 앉아 턱을 괴며 조만간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기본소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골똘히 고민할 것이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위하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2012년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를 이끌어냈던 다니엘 헤니는 기본소득이 결코 답은 아니라고 한다. 대신 기본소득은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나와 공동체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노동과 삶에 관한 질문이다. 나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불평등을 한 번에 해결할 답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대신,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되고, 이 질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답이라는 것에 점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새내기 때 자원 활동했던 기본소득 네트워크 포럼의 관중 중에 일본에서 온 사회학 교수와 그 제자도 있었다. 순진했던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제자가 웃어 보이면서 ‘그것은 누구나의 꿈이지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진하게 남는다.


<참고문헌>

다니엘 헤니・필립 코브체 저, 원성철 역,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 오롯, 2016.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천관율, 「진짜 뉴딜은 기본소득이다」,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1. 이상원, 「기본소득 안에 담긴 ‘돈벌이’에 대한 철학」, 『시사IN』 제669호, 2020년 7월 14일, 20~24쪽.

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시가 필요한 시간]

열여덟 번째 시간, 버팀목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7월이 시작되고도 벌써 보름이 흘렀네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학교들이 전면 온라인수업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진통을 겪은 지도 벌써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종강을 하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죠?

2020년의 절반을 보낸 나에게 중간 성적표를 매겨본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남은 절반을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가요? 저는 2주에 한 번씩 좋은 시를 소개하는 이 “시가 필요한 시간”을 더 열심히 꾸며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운동도 할 거구요, 주변 사람들도 좀 더 살뜰히 챙기는 하반기를 보내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오늘 들려 드릴 시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입니다. ‘버팀목’이라고 하면, 혼자 뻗어 자라나기에는 좀 얇은 가지들을 지탱해주려고 옆에 꽂아두는 나무 막대기를 말하죠? 방울토마토나 고추 같은 식물을 키울 때 옆에 세우고 식물이 기대어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버팀목입니다. 이 시는 시 텍스트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워낙 선명해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시죠.

 

 

 

버팀목에 대하여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 귀로 읽는 시간

복효근 시인의 시 ‘버팀목에 대하여’ 들어보았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드는 시죠? 저도 읽으면서 약간 울컥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이것이 다 나 혼자의 힘으로 된 거 같아 보일 때가 있죠. 특히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거나,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면서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뭔가 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이 시의 첫 시작에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나옵니다. 험한 바람에 쓰러져 있는 다 자라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으면서, 옆에 각목을 하나 세워서 기댈 수 있도록 버팀목을 세워주죠.

쓰러졌던 나무는 버팀목인 각목에 기대어 다시 살아갑니다. 잔뿌리를 하나씩 내리고 곧 다시 싹도 틔우게 될 거예요. 하지만 각목은, 그 역시도 한 때는 살아있는 나무였겠지만, 이제는 깎이고 다듬어져서 더 이상 생명력이 없는 ‘죽은 나무 가지(조각)’에 불과하죠. 죽은 나무인 버팀목은 자신의 어깨를 산 나무에게 내어주면서 나무가 잘 자라도록 옆에서 자기 역할을 다 합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살아있는 나무가 싹을 키우고 잔뿌리를 내리며 자랄수록, 각목은 점점 햇빛과 비바람에 마모되고…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삭아 없어지게 됩니다. 버팀목이 삭아 없어질 만큼의 세월이라면, 과거 태풍에 쓰러졌던 나무도 그만큼 성장해 있겠죠.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잘 자란 나무는 이제 어떤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어엿한 거목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가 더 이상 쓰러지지 않는 이유가 그 자체의 건장함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해진 나무가 스스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나무를 버티게 해 주는 ‘사라진 버팀목’이 있다는 것이죠. 그 대목에서 이제 시인은 나무에서 ‘나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내가 바로 쓰러졌던 나무인 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버팀목이 되어준 누군가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허위허위’라는 말은 순 우리말로,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먼저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는 모양’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손을 휘저을 때 “훠이 훠이”하는 의성어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힘에 겨워 힘들어하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어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가지의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죠? 이 두 가지의 뜻은 시 안에서 절묘하게 만나게 됩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허공에 손을 이리저리 내두르는데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내가 혼자 힘겹게 걸어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라는 뜻이 될 수 있죠. 시인은 아무도 곁에 없는 것 같고, 내가 혼자 힘겨워하는 것 같지만, 아버지와 이웃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응원이 나의 버팀목으로 서 있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이웃들이 태풍에 쓰러졌던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듯이,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지금 싹 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라고 시가 끝나고 있는데요, 이 시를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지금의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버팀목과 같은 가족, 친구, 이웃들의 격려와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내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지금 태풍 같은 어떤 어려움에 넘어져 계신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허위허위 저어봐도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외로움에 있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고, 여러분을 든든히 지켜 줄 버팀목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을 꼭 붙들고 다시 일어설 힘을 내시라는 메시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버팀목을 힘입어 든든한 나무로 자라셨다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댈 어깨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시면 어떨까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만든 ‘나무’라는 곡을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악동뮤지션의 찬혁군이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던 경험을 가지고 작사 작곡 한 노래로 알려져 있죠.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그가 떠난 자리는 나무랄 것 없이 텅 비어 있었다”라고 끝나는데요, 이 <버팀목에 대하여> 라는 시에서의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여전히 내 곁에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라는 시 구절과 뭔가 연결되는 것 같고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아서 골라 보았습니다. 마침 또 제목이 ‘나무’라구요.

오늘 하루도 힘 내시고, 이 시와 노래 한 편이 여러분에게 버팀목이 되길 바라며,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양희은, 악동뮤지션 – 나무 https://youtu.be/GLQTRlYyPco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신간 안내] 『의학의 철학』(최종덕 지음, 씨아이알, 2020년 7월 8일 발간)

『생물철학』(2014)과 『비판적 생명철학』(2016)에 이어 이번에 ‘의학’을 주제로 최종덕 회원의 신간이 출간되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만남’을 중심으로 오랜시간 연구에 매진한 저자는 한철연에서 마르크스와 자연학, 진화 생물학과 페미니즘, 환경철학 등 근본적이면서 시의성 있는 다양한 논의 주제로 세미나와 집담회를 진행해왔습니다. 『의학의 철학』은 진화와 노화, 그리고 면역이라는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자 철학적인 실존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시의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삶에 깊숙히 침투한 전염성 질병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할지에 큰 도움이 될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일독을 권하며 많은 회원들과 관심있는 분들의 서평과 견해를 기다립니다. 아래 출판사의 소개글을 전합니다.

 


 

의학의 철학

질병의 과학과 인문학

 

책소개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다

“이 책은 의철학 분야에 환영받을 만한 또 다른 성과일 뿐만이 아니라 의철학 분야를 유의미한 방식으로 진전시킨 책이며, 이런 점을 잘 알리려고 한 것이 내 추천 서문의 뜻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이 의철학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구하는 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 미국 베일러 대학 의철학 교수 제임스 마컴 추천 서문 중에서

의철학은 철학사에 갇혀 있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인문의학과 의료인문학의 방향과 지향을 안내하는 나침판이다. 인문의학이 의학자만의 감성적 소유도 아니지만 인문학자만의 지성적 소유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의철학도 철학자만의 특별한 사유구조의 소산물이 아니며 의학자만의 고유한 사명의식도 아니다. 질병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갈등, 병원과 정책에 대한 사회적 갈등, 과학과 임상에 대한 지식론적 갈등, 문화와 인류에 대한 역사적 갈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런 갈등을 풀고 싶어 하는 문제의식을 갖는 모든 사람이 의철학의 주체이다.
의학의 철학은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고통과 질병의 존재가 가능함을 알게 해준다. 어떤 유형의 고통은 과학의 대상보다는 실존의 문제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 의학의 철학은 고통에 직면한 환자 개인마다의 실존과 규격화된 임상의 현실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성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눈을 키워준다.

 

출판사 서평

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집중하지만, 거꾸로 철학은 문제를 일으키는 데 주목한다. 문제를 일으킨다는 말은 원래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인데, 가짜 문제를 골라내고 진짜 문제를 찾아 질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의학의 철학』에서 말하는 질문 역시 정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문제를 심어주는 데 있으며, 문제와 문제 아닌 것을 스스로 식별하도록 하여 거짓 문제를 해소하는 데 있다.
의학의 철학은 의학적 이론을 투영하는 렌즈이며, 의학적 세계를 비춰보는 유리창이며 의학적 인간학을 반성하는 거울이다.
의학은 질병 인식의 최종 목적지를 분명하게 향하고 있지만, 의학의 철학은 목적지를 향하는 수많은 길이 그려진 지도를 제공할 뿐이다.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 쉽게 알지는 못해도 막혔던 길, 낭떠러지 길, 함정의 길을 가지 않도록 안내하는 것이 철학의 지도이다. 질병의 지식보다는 우선 질병을 이해하는 지도가 우선이다.
냉철한 과학과 성찰적 철학을 궁금해 하는 독자라면 의철학의 배를 타고 이 책의 지도를 따라 항해하면 진짜 건강한 거주민의 땅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진화, 노화, 면역을 통해 몸이라는 자연을 인식하려는 저자의 열망이 듬뿍 담긴 이 책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우리 몸들을 위한 귀중한 방향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 강신익 교수 추천서문 중에서

 

출처 : http://circom.tizi1011.gethompy.com/board.php?board=tnshopmain&command=shop&view=2_view_body&no=690&corner=&sort=gs_ord&indexorder= 도서출판 씨아이알

 

 

목차


지은이: 최종덕

물리학과 수학 그리고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주제로 독일 기센(Giessen)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상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화생물학과 의학의 철학 공부에 집중해왔다. 현재는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의 저서로 학술원 과학도서 우수상을 받은 『생물철학』(2014), 세종도서상을 받은 『비판적 생명철학』(2016) 그리고 『승려와 원숭이』(심재관 공저, 2016), 『뇌복제와 인공지능 시대』(최순덕 공역, 2020) 등이 있다. 이전 저서를 포함하여 저자의 모든 공부경력은 저자의 개인 홈페이지 <철학의 눈> http://eyeofphilosophy.net이나 새로 구축 중인 http://philonatu.com에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