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1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이 글은 Barbara Fultner eds., Jürgen Habermas: Key Concepts, NY: Routledge, 2014라는 책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영미권의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하버마스의 이론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훌륭한 개론서다. 하버마스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서툰 번역으로나마 틈나는 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에 인용된 하버마스 저작의 축약어는 아래와 같다. 꺾쇠 안에 표기된 년도는 영문판 출간 년도다.
BFN Between Facts and Norms (1992 [1998])
BNR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2005 [2008])
CE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1976 [1979])
DW The Divided West (2004 [2007])
IO The Inclusion of the Other (1996 [1998])
JA Justification and Appilication [1993]
LC Legitimation Crisis (1973 [1975])
KHI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68 [1971])
MCCA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1983 [1990])
OPC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1998]
PDM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1985 [1990])
PMT Postmetaphysical Thinking (1988 [1992])
PNC The Postnational Constellation (1998 [2001])
STP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1962 [1989])
TCA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1981 [1984/1987])
TRS Toward a Rational Society [1970]
TJ Truth and Justification(1999 [2003])
들어가며
바바라 풀트너(Barbara Fultner)
의심할 여지없이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전 세계 사회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설립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후계자이자, 비판이론이라고 하면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머마스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탁월한 공적 지식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여러 주요 신문에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면서 수많은 유명인들과 공개 대화를 전개하였다. 거기에는 자크 데리다에서 미셸 푸코, 리처드 로티 그리고 베네딕트 14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까지 다양하다. 하버마스는 심오한 체계적 사상가이며 완벽한 통합이론가다. 그의 이론적 개념들은 영미 분석철학뿐만 아니라 사회학, 마르크스의 이론, 유럽대륙철학을 끌어와 합친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저작을 읽는 일은 여간한 도전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에른스트 하버마스는 이 도시의 상공부 책임자였다. 2차 대전 후 그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 나치의 잔혹행위와 기만행위에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던 하버마스는 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나치 체제와 공모하거나 소극적으로나마 지지했던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그중에서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1950년대 반핵 운동과 1960년대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세대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한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자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학 사회 연구소의 철학 및 사회학 교수로 지명되었다. 1971년에서 1982년까지는 슈타른베르크에 자리한 과학기술세계에서의 삶의 조건에 관한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그는 1994년 은퇴하여 저술에 몰두하면서 일리노이주 에반스턴의 노스웨스턴 대학, 뉴욕의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과 스토니브룩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초청 강좌를 맡았다.
이 책의 글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하버마스의 광범한 지적 성과에 대한 개념 지도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난 40 여 년 간 그는 각 연구 영역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수많은 획기적인 저작들을 내놓았다. 이 책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설정해 주곤 했다. 그의 영향은 비판이론과 사회정치철학에서 가장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의 기고문들이 보여주듯이, 언어학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으로서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윤리학, 인식론, 심리 철학, 언어철학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아마도 하버마스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사회, 근대화 및 합리성에 관한 포괄적 이론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에 이어지던 연구 작업, 즉 도덕이론, 정치 이론 그리고 법 이론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론 진화의 발자취
이 책은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버마스의 지적 발전을 역사적 관점에서 추적하고 있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저작들에서 눈에 띄는 사실은 체계성 및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장과 관심사들은 이론의 내적 논리에 따라 진화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른 이론가들의 비판에 답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변증법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대화적 사상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저작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1 대부분의 경우 시기 구분은 기본 관점의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하버마스에서 이 네 시기는 기본 관점에서의 변화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초점이나 강조하는 바가 달라짐을 나타낸다. 하버마스 사유의 흐름이 이런 시기 구분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네 시기 구분은 다소 임의적이라 하겠다.
- 철학적 인간학: 의식철학과 실증주의 비판(1954~1970)
첫 번째 시기는 박사논문에서 『인식과 비판』까지다. 이 시기의 저작에는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1989])』, 『이론과 실천(1963[1973])』, 『사회과학의 논리(1967[1988])』, 『철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소묘(1971[1983])』가 있다. 이 시기 동안 하버마스는 독일 관념론(칸트, 피히테, 헤겔)과 후설 현상학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다. 해석학과 사적 유물론을 연구하였던 하버마스는 사회진화와 인류 역사를 강조하는 사회이론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식철학을 거부하게 되었다. 18세기 커피 하우스 문화에 대해 세세히 분석하고 있는 『공영역의 구조변동』은 비판이론과 문학 연구에 있어서 표준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영역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물질적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당시에 생겨난 특정한 경제적 변화(자본주의, 세계 무역 등)와 긴밀히 묶여 있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바로 공영역의 구조가 역사적 조건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책은 공영역이라는 개념을 하버마스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로 만듦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연구를 미리 예시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문화 상업화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후에 등장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를 미리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980년대에 천착하게 될 주체성의 사회적 해명이라는 주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이때부터 관심의 싹이 트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하버마스는 실증주의 과학에 대한 비판을 고조시켰다. 그는 과학에 내재하고 있는 잘못된 객관성 개념을 거부하였다. 과학이 몰역사성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문화가 우리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점은 의식철학도 공유하고 있다. [하버마스에게] 인간은 사회문화적 과정에 의해 매개되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형성되며,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상태에서 진화의 결과물로서의 지식을 얻게 되는 주체다. 이런 인간이 구체적 현실에서 멀어져 버린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와 객관적이고도 편향적이지 않은 과학자로 대체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하버마스적 주체의 인지 능력은 따라서 변치 않는 본성으로서 미리 새겨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학습되어 [본성적 능력으로 보이게끔]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습득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는 기획은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인 칼-오토 아펠에 의해 인식인간학 (Erkenntnisanthropologie)혹은 인간학적 인식론(anthropological epistemology)으로 일컬어졌다.
『인식과 관심』 역시 앞으로 등장할 이론의 토대를 놓은 저작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관심을 인간의 인식 영역을 구성하는 요소로 여기면서 세 가지 근본적 인식을 구성하는 관심들을 식별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적, 실천적, 해방적 관심이다. “기술적 통제를 지향하고, 처신(conduct of life)에 있어서의 상호 이해를 지향하며, 외관상 ‘자연적’ 속박으로 보이는 것으로부터 해방됨을 지향하는 것”(KHI: 311)은, 정확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등장한 세 가지 구분들, 즉 이론적, 실천적, 미적 담론과 이에 각각 상응하는 세 가지 타당성 요구, 즉 진리성요구, 규범적 정당성 요구, 진실성 요구의 전조가 되었다. 『인식과 관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언어를 “그것의 본성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314)으로 도입함으로써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토대가 될 언어적 전회의 도화선을 놓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관심』은 방법론적 쟁점을 제기하였다. 즉 그것은 하버마스에게 경험적 근거와 근대성에 대한 규범 비판적 분석을 통합한 사회이론을 형성하려는 목적에 적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이 시기 구분은 Eduardo Mendieta가 제안한 것을 채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