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통의 제거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필연적인 육체적 육망들은 충족시키는 반면, 해로운 욕망들은 완강히 거부할 때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이다. 이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얻으면 만족하고 고통을 혐오한다. 이는 이성과는 무관하게 본성에 이끌려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쾌락주의의 공통적 전제에서 도출되는 입장이다. 고대의 쾌락주의에는 에피쿠로스 학파말고도 아리스티포스의 퀴레네 학파도 있었다. 퀴레네 학파가 육체적 쾌락의 무한한 증진을 추구한 것과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육체적 쾌락 뿐만 아니라 정신적 쾌락도 추구하였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고통이 결핍에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쾌락은 고통의 제거에서 비롯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즉 고통을 제거한 이후에는 더 큰 쾌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 쾌락을 무한히 증가시키기를 원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다. 에피쿠로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적 쾌락이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육체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육체가 유한한데 쾌락이 무한할 리는 없다.”

허기라는 고통이 소박한 식사를 통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줄기차게 추구한다. 형태를 달리한 즐거움이 증가된 쾌락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기의 맛’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우 우리는 성인병이라는 고통을 겪게 된다. 쾌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추구하게 되면 “쾌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위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위가 무한한 용량을 가진다’라는 잘못된 의견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잘 새겨야 하겠다.

 

소박한 쾌락주의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만족스러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고통이 사라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제거 그것이 곧 쾌락이다. 시시해보이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소박한 사실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은 새로운 형태의 쾌락이 우리를 만족시킨다 해도, 그것을 위해 감수한 노력과 애타는 시간 등을 감안해 우리가 얻은 즐거움의 양을 계산해 본다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노동의 성과를 착취해 얻은 기쁨이라 해도, 그가 품고 있는 불만은 공동체적 삶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에피쿠로스적 관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양이란 우리가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에 국한된다. 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 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 그럴 경우에만 진정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선택과 기피의 이유를 스스로 발견하고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 깊게 판단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 에피쿠로스의 제자 메트로도로스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은다.” 되도록 많은 재산을 모음으로써 우리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해도 우리가 육체를 지닌 인간인 이상 우리는 갈증, 허기,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신 육체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존재적 지위를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원한다. 하지만 일단 우리에게 신과 같은 풍요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욕구는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tyche)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켰을 때 얻는 쾌락에 만족하는 삶이 익숙해지면 사치스러운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그러한 행운을 과감히 무시하더라도 번민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 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고전문헌학자 앙드레 보나르는 한 고인의 말을 인용하며 에피쿠로스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 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 어둠이 닿기 전에 [유운의 전개도 접기]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이유운

 

 

글자의 단위로 해체된 영원의 풍경 앞에

우리가 있다

 

이 사이에서 서로의 배역을 침범할 수 있다

우리는 깨진 단어들을 주워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지

 

나는 너를 위해 이교도의 신에게 고해하는 자

미움을 가지고 네게 도박을 하고 있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나누어 잡고 팝콘 통에서 가끔 손등을 부딪히고 비슷한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가능했다

 

영화가 끝나면 사이도 배역도 없어지겠지

 

차가운 물에 뺨을 댄 채로

이방인을 예감했다

 

새로 켜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뺨은 결말도 모르고 훌쩍 자랐지

 

헐어 쓰고 버린 마음처럼 매끄럽게

 

너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새로운 슬픔이나 기쁨, 사랑이나 전쟁을 마음에 더 이상 들이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약한 것을

 

우리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 대신

서로의 뺨을 만지며 유일이라고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사랑을 너무나 잘 해낼 수도 있었다

 

저기 봐,

우리가 포개진 장면이 나온다

 

애써 익힌 사랑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니

 

내가 배운 건 영화를 위해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너는 입맞춤을 받기 위해 새롭게 만든 이마를 내게 보여준다

검정색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걷어올리고

 

너는 사라진 것들을 많이 닮았어

너는 대답 대신 웃고 있지

 

희미한 빛 속에서 네 모양을 본다

 

왜 사랑의 장면은 이토록 희고 푸르러야 하는 걸까

 

 

어둠이 닿기 전에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종이접기를 하면 손톱으로 꼭꼭 모서리를 눌러 접어도 뒤집으면 언제나 하얗게 벌어진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뒤집으면 그런 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기적인 마음, 사랑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마음, 겁이 많아 이기심과 욕심을 사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음, 그 거짓말이 남긴 흰 자국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누군갈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은 항상 뒤엉키고 함께 자란다.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 나를 들여다 보는 마음에서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는 건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을 때마다 여러 자국이 생기고 나는 조금씩 비참하고 구겨질 뿐 조금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이 남은 종이들은 점차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뺨에 닿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나는 종이로 태어나 광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멋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나의 선생님께 자주 편지로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오래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8년 11월 15일 오전 2시 49분] 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은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장래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진부한 것이고 형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기존의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히거나 알지 않으면 그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언어를 배우다가 부모에 항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연구를 끝까지 해야 한다. 단절은 연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진부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창조적 실천도 할 수 없다. 너는 늙은 세대가 아니니 너그러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삼류 정객들의 시대, 덜 떨어진 학자들의 시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움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심각하니 그냥 웃어 넘겨도 된다. 지나치게 신경 쓰면 건강에 해로우니 항상 명랑하여라.

 

항상 명랑하여라. 이 어려운 말을 위해 마음을 털어내고 키운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제8회 소송학술상]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

안녕하세요, 웹진 〈(e)시대와 철학〉편집주간입니다.

 

지난 2021년 12월 4일 낮에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 학술대회가 줌(zoom) 온라인으로 열렸습니다.

이날 발표와 논평 이후 제8회 소송학술상 시상이 있었습니다.

소송학술상은 소송 송상용 선생님(한림대 명예교수)의 뜻을 이어 한철연 소장 학자들의 학술을 평가하고 고양하기 위해 한철연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시대와 철학』에 최근 2년 동안 수록된 논문 중 우수 논문 한 편을 선정하여 한철연 회원에게 2년에 한 번 수여하는 학술상입니다.

제8회 소송학술상은 박종성 회원이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논문은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입니다.

 

시상은 한철연 김교빈 이사장이 했고, 연효숙 회장이 축사를 전했습니다.

 

박종성 회원 소감

“예 반갑습니다. 일단 너무 감사하구요(웃음),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논문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참고로 상패와 함께 박종성 회원에게 전달한 꽃다발은 연효숙 회장이 발품을 팔아서 직접 구한, 오래오래 잘 시들지 않는 꽃이라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한국에서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 연구를 개척하는 선생님의 행보에 회원 모두 관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립니다~

 

 

 


슈티르너 연구자인 박종성은 “슈티르너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금은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 번역에 힘쓰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 주제: 《입장들: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
– 일시: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오후 1시
– 장소: 온라인(Zoom)방식으로 진행

《입장들 :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라는 흥미로운 주제 아래 3인의 발표와 3인의 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제8회 소송학술상 시상식과 총회가 이어집니다.

—————————————————————-
–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연효숙 회장(연세대)
개회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 사회: 서영화(서울대)
– 발표1 – 김광호(서울시립대): 루소의 정체경제론
– 논평1 – 조은평(상지대)
– 발표2 – 이관형(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노동 없는 노동자의 사회
– 논평2 – 조배준(건국대)
– 발표3 – 한길석(중부대): 아렌트의 사유와 도덕
– 논평3 – 남기호(연세대)

2부 종합토론 – 사회: 강지은(서울시립대)

3부 소송학술상 시상식 및 총회 – 사회: 박지용 연구협력위원장(경희대)
– 수상작: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
「Stirner’s The Meaning of Criticism of “Metamorphose”」 – Park Jongsung
– 시상식 및 총회
– 폐회사: 연효숙 회장

 

• 자료집 다운로드 : http://www.hanphil.or.kr/board04/view.asp?key=8

•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yD34zqrykkI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톡,톡,씨네톡]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김다혜(상지대학교 재학)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관심, 고립, 분리, 거리를 둠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영화 <디태치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밀려드는 문제들 속에 고립된 그들은 각자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 중이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왜 서로 돕지 않는 걸까?

 

영화는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의 20대는 딱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눈앞에 세상이 있는데도, 내가 섞여들지 못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출처 https://sprdthemssg.wordpress.com/2018/07/13/%EB%B6%84%EB%A6%AC/

나는 차가움이 싫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움은 항상 내 마음에 시리도록 큰 상처를 남겼다.

김경미 시인이 쓴 <다정이 나를>이라는 시가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시다. 누군가의 냉소가 나를 휩쓸고 간 후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시처럼 마냥 서러웠다.

어른의 차가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그 날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빠가 큰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시내의 삼촌 댁에 맡겨졌다. 당시엔 소위 말하는 ‘놀토’가 없었던지라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 오전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삼촌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서 혼자 숨죽여 울곤 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엄마와 두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삼촌 차를 타는 대신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는 숙모와 함께하기로 했던 날이다. 숙모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혼날까 봐 무서워 버스를 기다리며 숙모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게 해서 집에 가면 저를 혼내실 거냐고. 버스 정류장에서 숙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날 향해 온갖 삿대질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붓는데, 그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삼촌은 숙모 옆에 서서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의 그 얼굴들, 눈빛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뜨거운 분노, 그 차가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어렸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린 외로운 아이를 가만히 안아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차가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화가 났다.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불행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정함이 결핍된 무심한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디태치먼트>는 20대의 내 시선으로 본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주인공인 헨리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이다. 그는 겉보기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스위치가 눌리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통에 잠겨 절규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한다. 거리에서 매춘생활을 하며 사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보살펴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거리 생활을 하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던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왜 이래요.”라고 말한다.

철조망에 매달려 온몸으로 고독함과 고통스러움에 매일 몸부림치는 같은 학교의 동료 선생에게 주인공 헨리가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단지 이 장면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어려운 영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묻는다. “내가 보여요?”라고. 헨리가 다시 “네, 보여요.”라 답하자 선생은 “세상에 드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 인사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하는 순간.

출처 https://wpalss.tistory.com/765

20대의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고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내 인간관계는 모두 ‘나-그것’이었다.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많은 실수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며 살았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 지나가면 이 고통이 끝날 줄로만 알고. 그러나 20년이 흘렀어도 선명한 그 날의 기억처럼 어떤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실수를 가만히 감싸준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박했던 건지, 세상이 나에게 박했던 건지 그 순서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제법 성장했다. 적어도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화를 내는 대신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통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최근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비슷한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 중에서는 더운 날 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쉴 곳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 모른다.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큰 사람은 아니다. 나 한 사람은 너무 작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해주시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어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점심때라 식사는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먹었다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덕분에 아파트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며 마지막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만큼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일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마땅히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그게 순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나를 돕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삶의 대부분을 죽도록 일하다가 끝마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이 필요하지.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소설가 김영하는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내면을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지키는 데 책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있을 때 책 속 문장들은 한결같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라는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네 안에 있는 한 줄의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언젠가는 꼭 누구에게나 읽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지는 거 아니겠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은 그러한데 형편없는 사람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전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삶에서 고통을 뺄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적어도 서로 괴롭히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더해주지는 말자. 타인의 실수를 그냥 덮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 되자.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앞으로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툴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도와주고, 또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너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사회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82239

가장 보편적인 시 / 〈작가 노트〉 [유운의 전개도 접기]

가장 보편적인 시

 

이유운

 

아무것도 모독하지 않고 문장을 끝내는 법

짐승이 되어가는 사랑을 견디는 법

 

수많은 개론서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나빠지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성실하게

 

이마에 붉게 찍힌 낙인을 문지르며

나의 마음을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가르치기 어려웠다

 

    이것은 시입니다. 저것은 예술이고요, 이 방 안에서 당신은 여자라고 규정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보세요. 걸음걸이마다 이름을 붙여봅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실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존재보다는 기분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자, 다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이것은 시, 저것은 예술, 당신은 여자.

 

잘 포장된 나

 

미래파적, 언어의 무용, 무해한 표현들, 상처받은 어린 화자, 탈피하고자 하는, 흰 공간……

대체로 시시했고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까 진짜 웃기지 않니? 시라는 건

아무렇게나 말하고 이렇

행갈이만 하면 문학

지 않니

아주 문학 같다

퍽 예술 같기도 하지

 

뭉뚱그려 보편적인 시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다닌다

 

 

작가 노트

 

어떤 행위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부여된다. 도덕성을 보유한 자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퍽 다르며 둘 다 이런 시대에는 비겁한 자가 된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자 보다 비겁하고 저열한 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세상이므로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시보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쉽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인 시와 보편적인 학습. 그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 무해하고 하얗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이런 말들도 행갈이를 하면 시 같을 것이다 보편적이므로.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백과전서파의 사랑 /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운의 전개도 접기]

백과전서파의 사랑

 

이유운

 

나는 사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창틀에 정의들을 끼우고 학습하기에

적절한 탄생이다

 

많은 것을 외우며 자랐지

 

죽은 비둘기의 표정, 싸구려 조명,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무릎의 튼살, 양철통으로 만든 마음, 꿈의 안팎에서 소진되어 돌아온 패잔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외울 정의가 없었으므로

그 또한 적절한 단락이었다

 

너는 자주,

날씨의 정의 아래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

부르면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그건 너무 순진한 모양이어서

나는 네 살갗을 짚으려고 손을 만들었다

 

내 손금에 박힌 절반의 문장을 보여줄게

이것이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무도 외우지 않은 말이다

 

사물들이 점친 내 운명의 점괘다

 

요약하자면

 

돌이킬 수 없고 자주 갈라진다는 것이고

밝은 밤에 죽을 거라는 결말이다

 

결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지칭대명사처럼 기능할 것이고

대부분 너를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펼 지도 모르겠다

이 점괘가 입술의 단위로 부서질 만큼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를 부르면

너는 너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

 

아쉽지 않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언젠가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니까

 

네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며 집을 돌아다닌다

네가 지나치는 곳마다 정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고

 

비참하게 쌓인 종이들이 오래들 자고 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춤을 추면 어떨 것 같아?

 

나 아주 슬플 것 같아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게 많은 풍광을 보여준다. 그는 내가 살지 않은 모든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공릉과 헷갈리는 정릉, 서울의 골목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걸음들, 학교, 순간들, 사람들, 얼굴들, 사랑들, 시간들, 미움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그 풍광들을, 순간들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그게 나로부터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내 마음과 시간과 우리에게 무언가 자국을 남기고 내려갔으면 해서. 그 자국이 쌓여서 스키드 마크를 남겼으면 해서. 그 마크를 손으로 짚으면 맥박이 느껴졌으면 해서.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맥박. 고동. 규칙적인 심장의 소리. 우리 이 도시에 잔뜩 스키드 마크를 남기자. 모든 자국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사랑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가 내린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주제 :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발표자 : 남기호(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석배(세종대학교)

일시 : 2021년 11월 5일(금) 오후 3시~5시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교동 태복빌딩 302호)

 

후기: 정선우 (한철연 회원)

 

 

헤겔의 칸트 비판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또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여러 방면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과 유사하게, 헤겔은 끊임없이 칸트를 염두에 둔 채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는 듯하다. 특히 칸트적 도덕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비록 명시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과 실천 불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채 행해진다. 바로 이 점이 한철연 11월 월례회에서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남기호 선생님(이하 발표자)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발표자가 누차 강조하듯이 헤겔의 이러한 비판이 직접적으로 칸트의 이론에 대한 반박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적 도덕이 세계에 전면화되고 일반화됐을 때의 모순적인 지점들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의 성격보다는 일종의 세계관으로서의 칸트적 도덕이 그러한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행위자들에게 어떤 모순과 난점을 일으키는지를 문제 삼는 성격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텍스트에 입각해 헤겔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시도는 칸트주의자 입장에서 정당하고 타당할 수 있지만, 헤겔의 논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묻고 따져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헤겔은 칸트적 도덕이 세계관으로 정립된다면 그 세계관이 행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여겼는가?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상세한 설명 가운데, 나는 자유와 자연의 조화, 또는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조화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 자기의식의 주관적 목적(곧 의무로서의 도덕성)과 세계의 객관적 목적(곧 결과로서의 행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헤겔이 문제 삼는 칸트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러한 조화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피안에서만 실현되고 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조화는 무한히 지연되기 때문에 어떠한 현실성도 획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조화로 귀결될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발표자가 Verstellung의 역어로 선택한) ‘시치미떼기’가 등장한다.

먼저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요청된 조화가 도덕적 행위 안에서 언제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시치미 뗀다. 나아가 요청된 조화를 도덕적 행위를 통해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 행위 자체가 지양돼야 한다는 점을 시치미 뗀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헤겔 특유의 재치 있는 설명이 빛을 발한다.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이 조화를 이루려면, 도덕법칙이 그 자체로 자연법칙이 돼야 한다. 즉 자연이 늘 도덕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이로써 도덕적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상황에 이른다. 도덕성에 반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 도덕적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연필연성에 따른 모든 행위가 전적으로 도덕적 행위와 일치하는데, 도덕성의 추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이처럼 도덕은 도덕의 폐지를 궁극 목적 내지 최고선으로 삼는 바, 칸트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모순을 함축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이 궁극의 목적, 내지 최고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위치한 것이므로 행위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은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결국 칸트적 세계관에 입각해 살아가는 행위자들은 도덕적 행위를 위해 행복을 결코 고려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서의 행복의 조화를 영원히 추구해야만 하는 처지, 곧 상반된 요구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이른다. 따라서 발표자는 강조한다: “도덕과 자연, 이성과 감성 등은 ‘지금 여기의 이’ 현실 속에서 통일적으로 사유되지 못한다. 이 의식[칸트적 세계관을 지닌 의식 – 작성자 추가]은 그저 아득한 피안의 통일을 표상하며 정작 자신의 현실 속에서는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뿐이다.”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박종성(한철연 회원)

 

아직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글본이 나오는 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슈티르너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der Mensch’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속에서 저 단어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슈티르너는 ‘der Mensch’를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대립의 지점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대립을 역전시키고 있다. 전형적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중요하다. 그가 청년을 비유로 들어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글을 보자.

 

순수한 생각을 밝히는 것, 혹은 순수한 생각을 신봉하는 것, 그것은 청년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진리, 자유, 인류, 인간(der Mensch)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모든 빛나는 자태는 청년의 영혼을 계몽하고 열광케 한다. (12쪽)

 

먼저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저 구절에서 ‘der Mensch’는 어떤 뜻일까? 함께 쓰인 단어들을 보자. 그것은 ‘진리, 자유, 인류,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 ‘순수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der Mensch’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고,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고,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며,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슈티르너가 원문에서 사용하는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가 ‘der Mensch’의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쓸 때, 그때 인간은 추상적, 이상적 인간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der Mensch’는 정신, 이상, 인간 일반, ‘인간이란 본질’, 인간의 본질, 유령 같은 나, 참된 인간, 더 높은 본질, 유령, 허깨비, 신성한 것, 고정관념, 유적 존재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대립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재밌게도 같은 단어이다.

 

-자유롭게 된 것은 저마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오로지 저마다 다른 인간은 인간(der Mensch)이다.(121쪽)

 

위 문장에서는 같은 단어 ‘der Mensch’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인간’(Der Mensch)을 추상적 인간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그때 ‘인간’이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쓴 ‘ 인간’(Der Mensch)은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der Mensch’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이라는 것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사람이 ‘der Mensch’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der Mensch’는 앞서 인용했던 추상적 인간과는 대립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der Mensch’라는 말은 거꾸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고, 보편이 아니라 개별이며, 본질이 아니라 존재이다. 원문에서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개인, 개별, 어떤 인간, 나, 사람, 인간들 등으로 쓰고 있다.

위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정리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다.

 

위와 같은 내용, 곧 모순, 대립의 지점을 아래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der Mensch)이 인간들(die Menschen)에 맞서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Unmenschen)에 맞선다.(152쪽)

 

지금까지 ‘der Mensch’를 대체로 인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추상적 인간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der Mensch’가 인간과 대립되고 모순되는 내용을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슈티르너는 이 지점을 인간에 대립하는 명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번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슈티르너는 단수와 복수의 대조를 통해 추상적 인간과 구체적 인간을 대립시키고 있으므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옮기는 것이 더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 인간’은 ‘ 인간들’과 대립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고 ‘ 인간들’은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들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조금 더 ‘테제’와 ‘안티테제’의 내용을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이제 ‘진테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 이제, 그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인간을(den Menschen) 기독교 역사와 인류의 종교적 혹은 이상적 노력이 마침내 발견했던 성과로 생각하도록 하자. 자, 인간은 누구인가? 이노라! 인간은 기독교의 결말이자 결과이다. 나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하는 재료이고, 자기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이며,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역사이다.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다운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테제와 안티테제를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다.=인간은 나이다.=인간은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나는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는 보편이다.

진테제: 인간은 나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이다.

 

슈티르너는 진테제의 근거를 ‘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서 그럴까? ‘나로서의 인간’은 자기다운 사람(Egoist)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개인이고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으로 해소된다. 이상으로서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슈티르너가 ‘der Mensch’라는 단어를 통해 모순, 대립을 설정하고 다시 그 대립으로부터 종합하는 사유방식을 통해 기존에 지배적이던 사유 틀을 깨부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대립은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나로서의 인간이다. 전자를 강조하면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개별, 구체, 존재, 차이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der Mensch’라는 말을 통해,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말장난을 통해, ‘der Mensch’로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익살, 조롱, 비웃음은 권위주의와 대항하는 힘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책 전체에 퍼져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권위주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비웃음, 조롱, 익살로 저항한다.

 

내가 나의 참된 행복(Heil)을 어떤 것, -곧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38쪽)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무엇이 어이가 없는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가? 다른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는가? 행복(Heil)을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게 만들기 위하여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지배적 담론을 유사한 단어를 통해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 돋보이고 있다. ‘신성한 것’은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 민족, 국가이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타인의 삶>이 떠오른다. 국가, 민족을 위해 살아온 그가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점원이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 ‘비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K-철학’은 가능한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월례발표는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김시천 선생님이 『東洋哲學』 제55집(2021. 7.)에 게재한 논문 「’K-철학’은 가능한가?」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주제 : ‘K-철학’은 가능한가?
발표 :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20일(수) 오후 4시 ~ 6시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 발표 논문 다운로드 : 2021.10.20 김시천[동양철학]_제55집_2021_K-철학은가능한가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znByiBE7O8k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