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풀어주시오(1)-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를 풀어 주시오(1)-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를 읽고

1)

정보라의 작품은 우화나 설화, 동화, SF 형식을 취하고 있고 작품 곳곳에는 유쾌한 역설이 나 환상이 등장하므로 언뜻 가벼운 작품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들어있어 깊고 진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후기에 말한 대로 그의 작품 곳곳에는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한 마디는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 말은 ‘덫’이라는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나를 풀어 주시오”라는 말에서 나오는 ‘하오 체’는 지금은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과거에는 예컨대 장성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하는 말투였다. 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때 사용할 수도 있겠다. 이런 말투는 상대방을 높이며 동시에 상대방에게 부탁하면서도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말투라고 분석할 수 있다.

요즈음 ‘주십시오’와 같은 ‘합시오 체’가 많이 사용되는데, ‘하오 체’는 이런 ‘합시오 체’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다. ‘제안 사항 없음 자신이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부탁할 경우 사용한다. 반면 ‘하오 체’는 상대방이 자신과 매우 친밀한 존재라는 점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말투라 하겠다. 친밀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가 바로 ‘하오 체’이다.

이런 ‘하오 체’ 말투는 이 단편집에 실린 ‘머리’와 같은 작품에 나오는 말투와는 반대다. 머리는 변기 구멍에서 나와서 주인공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머리 사이의 대화는 마치 사극에 왕과 대비 사이의 말처럼 들린다. 서로 존중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은 쉽게 반감으로 바뀌니 주인공과 머리의 대화는 곧 반말체로 바뀐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옷을 달라 하여 옷을 주지 않았느냐? 달라는 대로 다 주었으면 감지덕지하고 얼른 나갈 일이지 나더러 변기 속으로 들어 가라니 무슨 미친 소리냐?”

그러자 머리는 이렇게 답한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고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반면 “풀어주시오”라는 하오체는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오히려 서로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주목적으로 보인다.

2)

‘나를 플어주시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이제 덫이라는 작품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남자가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덫에 걸린 여우를 보고 여우를 죽여 털가죽을 얻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덫에 걸린 여우가 처음으로 이 말을 말한다.

여우가 사용하는 하오체에서 여우는 하나의 당당한 인격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구나 여우는 다가오는 남자를 존중하면서도 친밀한 존재로 보고 있다. 여우가 자신을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이야기가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 즉 전설이나 민담에 속하니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다가오는 남자는 여우에게 낯선 남자인데, 여우는 무슨 이유로 그를 턱없이 믿고 있는 걸까? 여우는 남자가 양식 있는 인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우의 발목 상처에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보고, 여우를 자신의 헛간에 가두어 놓는다. 이 단편 속에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부탁은 여러 번 변주되어 등장한다. 한번은 여우가 죽자 그 대신으로 갇혔다고 짐작할 수도 있는 딸의 입에서도 나온다.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딸이 하는 말로서는 좀 서늘하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믿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불러 딸의 임신한 배를 가르려 했다. 이 말은 재산과 사람을 모두 잃고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마도 산 채로 죽어 있는 남자의 입에서도 나온다. 남자는 그를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약간 사무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이니 이렇게 ‘하오체’를 사용할 수 있겠다.

딸과 쌍둥이인 아들의 입에서도 나온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의 피를 빨아먹고, 남자는 그 아들의 상처를 쑤셔 황금을 얻었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을 사랑해 임신시켰고 의사가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려 했을 때 뛰어들어서 아이를 구해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산속에서 죽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아들의 배를 갈라 금빛으로 빛나는 내장을 파먹으며 살아간다. 동네 사람들이 다가가자 죽은 듯했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풀어주시오” 마지막 이 말에는 주어가 없다. 그 때문에 말 자체에 진지함이 사라졌다. 이미 상대를 믿지 않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해진다.

이 말은 마지막으로 한번 반복되는 데, 이번에는 하오체가 사라진다. “플어….” 이젠 말을 하다 아예 멈추어 버린다. 더는 부탁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덫’이라는 단편에 반복되는 이 말은 점차 친밀함을 상실하고 의심이 강화된다.

3)

풀어달라는 말은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대개 어딘가 갇혀 있거나 매여 있다. 단편 ‘흉터’에서 소년은 동굴에 갇혀서 한 달에 한 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것’으로부터 등골을 빨아 먹힌다. 소년은 자신이 왜 이 동굴에 던져졌는지, 자신의 등골을 파먹는 그것이 도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잔인한 고통 속에서 이 고통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갇혀 있다는 주제는 마지막 작품 ‘재회’에서도 변주된다. 주인공이 광장에서 만난 폴란드 남자는 아마도 마조히스트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묶어주고 그것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묶어 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그렇게 묶어주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에 주인공은 기꺼이 그를 돕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지만 남자는 자신의 손을 묶어 놓고 목을 매고 죽었다. 주인공은 환영으로 그를 다시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풀어 줄까?” 목을 매고 죽은 남자는 말을 할 수 없고 다만 눈만 깜박거리면 응답한다. 풀어 달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이 남자를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삶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여러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폴란드의 어느 도시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주인공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할아버지를 본다. 남자는 매번 광장을 가로질러 같은 길을 반복한다. 환영이다. 나중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만 죽고 만 사람이다. 이 할아버지는 전쟁의 현장에 갇혀 있다.

이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할아버지 역시 갇혀 있다. 남자의 할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준비한다. 배낭을 싸 두고 통조림을 쌓아 둔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다. 그것은 남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풀어주었던 남자는 환영을 볼 수 있다. 남자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 환영을 따라서 떠나갈 것을 두려워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묶어 두고 아들이 환영을 보고 말할 때는 매를 들어 때린다. 남자의 어머니 역시 갇혀 있다.

4)

작가는 이 작품 ‘재회’에서 무엇이 사람을 가두어 두는지를 말해 준다. 길지만 정보라의 삶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니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생존본능이라는 것에 갇혀 있다. 사람들의 삶은 이 생존본능이 가장 격렬하게 발휘되었던 순간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사실은 과거의 유령일 뿐이다.

작가에게서 생존 본능이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황금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앞에서 든 단편 덫에서 주인공 남자는 황금에 사로잡혀 있다. 황금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모래와 바람의 지배자’라는 단편에서도 등장한다. 사막의 나라 왕은 황금의 배를 타고 사막을 오가는 주술사와 전쟁을 벌인다. 왕은 승리하지만, 마술사의 저주에 걸린다. 그 때문에 그의 아들인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눈이 멀었다.

초원에서 온 공주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자가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주술사를 찾아간다. 공주는 주술사의 해법을 따라 왕자의 눈을 뜨게 했으나 사막의 나라에 모든 사람이 걸려 있는 황금 물신주의 저주는 풀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 뜨게 할 방법은 없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또 다른 변주를 낳는다. ‘흉터’에서 ‘그것’이라는 변주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은 처음에 ‘그것’의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점차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은 거대한 부리를 가지고 있고 잿빛 날개와 파란 눈을 가진 존재였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오랜 궁리 끝에 동굴과 괴물을 탈출했으나, 그가 만난 것은 어쩌면 더 원초적인 동굴이다. 그는 돈벌이에 눈이 먼 대머리 남자에 끌려 다니면서 격투를 벌인다. 그는 이 새로운 동굴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가 더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버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본능과 황금 물신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삶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더는 황금을 생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할 때 버려지면서 비로소 해방되는 것일까?

5)

“풀어주시오”라는 작가의 말투에서 짐작하듯이 사람을 가두고 있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이며 가장 존중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생존본능 자체, 황금에 대한 매혹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질상 황금에 대해 매혹을 느낀다.

황금의 매혹은 작품 덫에서 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들은 딸의 피를 먹을 때만 상처에서 황금을 흘린다. 남자는 딸을 여우처럼 가두어 둔다. 그런 딸은 투명하고 창백한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무감각하고 서늘한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또는 그 아름다움은 “달빛 아래 검은 숲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매력을 발산했다.

딸의 모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황금빛 자체에 관한 서술로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황금빛이 가진 매혹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금빛 안개는 서늘하고 창백했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가까이 가고 싶어 졌고 가까이 가면 손을 담그고 싶어 졌다.”

이런 금빛 안개에 다가간 사람은 누구나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가두고 있는 동굴은 바로 그 자신의 본성, 생존본능과 황금에 대한 매혹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두고 있는 한 이 동굴을 벗어날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등골을 빨아먹는 ‘그것’의 모습이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의 본성인 그것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이 아닐까?

혹시 어둠 속에 쇠사슬을 바위에 부딪혀 내는 순간적인 빛이 하나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아마 예술과 같은 것이 작가가 말하는 그런 순간적인 빛에 해당할지 모른다. 예술은 삶을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동굴을 나와 밤하늘에 별빛을 보면서 동굴에서 보았던 빛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 별빛은 “누군가 자신처럼 동굴 안에 갇힌 사람이 쇠사슬을 거대한 돌벽에 부딪치며 저 수많은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말하듯이 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별빛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인들 누가 들어주겠는가? 그게 공허와 어둠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놀이라면, 그처럼 허망한 놀이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소년은 밤하늘의 별빛조차 무심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작가의 절망감이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고 하겠다. 살아서 탈출할 길은 없다는 절망감이 정보라 작가의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8월 월례발표회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하반기(8-11월) 월례발표회는 발표를 신청한 회원들의 발표로 이어집니다.
이번 8월 발표는 2022년 상반기 월례발표회 대주제였던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과 연결되는 주제입니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김시천 회원의 발표로 2022년 하반기 발표를 시작합니다.

주    제: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발표자: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자: 유현상(숭실대학교)
일   시 : 2022년 9월 2일(금)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0zZH2hnIMzQ

달콤한 것들에 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달콤한 것들에 대해

언제부터 인가 교외에 빵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시내 임대료가 비싸서 그런가 했다. 곧 알았지만 그게 카페의 일종이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빵을 함께 먹었다.

속으로 웃었다. 외국 사전에 가든의 의미로 고기집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빵집의 의미로 카페가 등록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날 아이가 식사 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내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빵이지? 아이의 말이 보통 빵집에서 파는 빵이 식사 빵이라 한다. 카페에서 파는 빵은 식사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카페에서 파는 빵은 카페 빵인가?

나도 카페 빵을 한번 먹어 보았다. 카페에 진열된 빵은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대개 아주 달콤한 빵이었다. 생각해보니 쓴 커피를 먹으면서 달콤한 빵을 곁들이는 것은 환상적인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스타벅스 이후 커피가 더욱 쓰게 되더니 급기야 이런 빵집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차가운 얼음에 뜨거운 팥을 얹어 먹는 팥빙수만큼이나 환상적이다.

처음에 한두 개 생기던 카페 빵집이 이제 어디서나 흔하게 등장한다. 이젠 시내에도 카페 빵집이 흔하다. 사람들이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철학 본능이랄까? 내게 의문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걸까?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것의 형태도 달라졌다. 우리 어릴 때는 단연 사탕이 인기였다. 요즈음 사람은 그 달콤함을 카페 빵에서 찾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에 사람들이 특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달콤함은 문화의 다양한 형태에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배용준이 한류를 대표하는 인기 품목이었다. 배용준은 그 미소 속에 달콤함을 달고 다닌다.

방탄 소년단에 대해 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노래가 버터에서 보듯이 달콤하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겐 고통도 슬픔도 저항도 없다. 

게다가 막걸리는 왜 또 그렇게 달콤해졌는지? 

그 뿐만 아니다. 정치의 세계는 원래 건달들의 세계였다. 옛날에는 우락부락한 파이터 아니면 건들거리는 한량, 조삼모사식 달변의 인물이 정치를 지배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인의 모습도 바뀌었다.

마치 연예인처럼 생긴 정치인이 등장하더니,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도 소확행이라고 한다. 작지만 확실히 행복하다는 것은 달콤함의 정의가 아닌가?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달콤함의 이면은 우울함이 아닐까? 우울할수록 더욱 달콤한 것이 그리워진다. 우울할 때는 쓴 술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이런 우울함은 환상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그게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이미지 문화이다. 술과 달콤함, 영화, 이 세 가지는 내가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울함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우울함이란 상징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징조이다. 상징계가 무너지면 처음엔 달콤한 환상이 등장해 이를 메꾼다. 하지만 머지않아, 달콤한 환상은 무서운 박해자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게 편집증이다.

이 시대 달콤함이란 편집증의 시대를 예고하는 전조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람들은 무서운 박해자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포퓰리즘에 관해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포퓰리즘에 관해서

서평 -거대한 반격(파올로 제르바우도 저, 남상백 역, 다른 백년, 2022)

1)

필자는 어느 교수님의 소개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반격’인데, 무엇을 반격하는지 부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부제는 ‘포퓰리즘과 팬데믹 이후의 정치’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부정하고 등장한 것이 포퓰리즘이다. 저자는 코로나 위기 이후 포퓰리즘이 무너지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반격이 시작하고 있다고 보며, 이런 반격에 ‘거대한’ 반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는 영국의 문화 이론가이며, 킹스 칼리지 문화연구소 소장이고, 디지털 문화에 대한 분석과 강의를 해왔다. 저자는 트위터, 소셜 등에 기초한 정치 운동이나 정당 등에 대하여 저서를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포퓰리즘에 깊은 관심을 둔다.

저자는 반격에 중점을 두었지만 필자로서는 반격보다는 오히려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에 흥미를 느꼈다. 왜냐하면, 트럼프 현상에서 잘 보듯이 오늘날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상당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저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면서 우파든, 좌파든 포퓰리즘이 압도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파 포퓰리즘 현상으로 미국의 트럼프,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이태리 북부동맹 지도자였다), 항가리의 빅토 오르반, 영국의 브렉시트파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은 공통으로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이들이 이주 노동자나 소수 집단에 대해 아주 강한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혐오감의 표출을 통해 몰락하는 하층 제조업 노동자로부터 심정적 지지를 끌어낸다.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대 몰락한 전통 제조업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중상주의적 보호 정책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이들은 구 자본가 계층의 지지를 받아, 구 자본가 계층과 하층 노동자의 정치적 블록을 형성한다.

저자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미국의 샌더스와 민주사회주의자, 영국의 코빈, 차베스와 같은 21세기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 피케티 등 기본 소득론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이들에게 공통된 정책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으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대체로 ‘소득 보전’ 정책이 곧 좌파 포퓰리즘의 핵심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신유주의에는 두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대처, 레이건 정책에서 보듯 작은 정부, 노동 유연화인데 한마디로 저임금화 정책이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블레어 등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세계화, 금융 자본화다.

두 가지 가운데 좌파 포퓰리즘이 주로 반대하는 것은 저임금 정책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전하자, ‘월가를 점령하자’는 선동적인 주장을 내세웠으나, 일시적인 것에 그쳤고 실상 신자유주의의 해체로 나가지는 않는다. 좌파 포퓰리즘은 다만 현상을 유지하면서 저임금 정책을 소득 보전 정책을 통해 보완하려 한다.

좌파 포퓰리즘의 소득 보전 정책은 프레카리아(precariat)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다고 한다. 프레카리아는 불안정(precarious)와 프로레타리아의 합성어로,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확산한 불안정 취업자를 말한다. 비정규직, 실업자, 신분 저하된 대졸 취업자 등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의 또 하나 측면 즉 세계화에는 긍정적이다. 세계화를 주로 값싼 생필품 수입 체제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화로 무너지는 국내의 제조업을 대신하기 위해 이들은 소위 그린-뉴딜 정책을 내세운다. 즉 그린-뉴딜 정책을 통해 몰락한 제조업을 기후 위기나 환경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산업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런 정책은 신중산층(전문기술 노동자 층)의 지지를 받으며, 좌파 포퓰리즘은 신중산층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부터 탈취하여 프레카리아와 전문기술 노동자의 블록을 조직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자는 앞에서 보았듯이 소득 보전 정책을 좌파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이런 정책이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소득 보전 정책은 케인즈 이론에 기초한 합리적 정책으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복지국가 시대에 이런 정책은 경제적 선순환을 일으키는 정부의 주요 정책이었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소득 보전 정책이 비현실적이고 따라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이라 판단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필자가 나름대로 추론하자면, 소득 보전 정책이 감정적인 정책인 이유는 이 정책은 통화와 재정을 국가가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민족국가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3)

대체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등장한 이런 정치적 세력을 저자는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이론적 문제로 대두된다. 무엇을 포퓰리즘이라 하는가?

저자는 여기서 구조주의 정치학자 에르네스트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을 먼저 자신의 개념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제시한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London, 2015)’라는 책에서 포퓰리즘을 구조주의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을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접합시키는 담론 동학”으로 규정하면서 이질적 요소들이 결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이질적 요소를 결합하는 계기는 라캉적인 개념인 소위 ‘텅 빈 기표’인데, 이것은 상징적 구조가 몰락하는 구멍을 의미한다. 이런 텅 빈 기표를 채우기 위해 여러 환상이 중첩되니, 이런 텅 빈 기표는 정치적 영역에서 이데올로기가 접합되는 기표가 된다.

저자는 이런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분석을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 분석에 의존한다. 저자는 여기서 대니 로드릭의 포퓰리즘 분석(‘포퓰리즘과 지구화 경제’,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policy1, 1-2, 2018)을 참조로 하는데, 대니 로드릭은 포퓰리즘의 경제적 토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로 금융자본이 지배하고 제조업이 무너지면서(이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금융 중심국의 처지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성장하는 금융 자본가와 몰락하는 제조업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기술 노동자 계층과 삶이 불안정해진 노동자 계급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하는 데 기초한다.

이런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결과적으로 이에 저항하는 새로운 인민 블록이 형성된다. 하나는 몰락하는 중소기업 자본가 계층과 몰락한 제조업 노동자(블루 칼러)의 블록이다. 이것이 우파의 포퓰리즘 블록을 이룬다. 반면 좌파 포퓰리즘 블록의 중심은 신자유주의 시대 등장한 불안정한 노동에 종사하는 프레카리아와 신자유주의의 저임금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진 노동자 계층이다.

이런 경제적 기초 때문에 좌파 포퓰리즘과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4)

라클라우의 주장은 텅 빈 기표나 환상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포퓰리즘의 심정에 호소하는 이유는 밝혔다. 라클라우는 이런 텅 빈 기표가 사회의 상징적 구조에 구멍이 생김으로써 발생한다고 보지만 그런 구멍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분석하지는 않았다.

경제적 토대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포퓰리즘 이론은 포퓰리즘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즉 그런 포퓰리즘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을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왜 주로 퇴행적이거나 공상적 정책을 통해 심정에 호소하는 것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포퓰리즘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하면서 포퓰리즘이 발생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과 그것이 환상에 기초하는 이유를 설명하려 하였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포퓰리즘 설명은 종합적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포퓰리즘이 전체적으로 설명되는 것일까? 저자의 설명은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설명으로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저자의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모호하다.

5)

거대한 반격의 저자는 좌우파 포퓰리즘은 모두 심정에 기초한 포퓰리즘이라 분석하면서 그런 포퓰리즘은 2019년 이후 코비드 위기 이후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트럼프의 반응에서 보듯이 코비드 위기에 대해 음모론적으로 접근하면서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한때 재난 지원금이라는 형태로 자기를 실현하는 듯했으나 그것이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주택 가격상승)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라 한다.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다. 저자는 그것을 신국가주의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이 용어는 마치 나치즘을 상시시키는 용어라 필자는 이를 피하려 한다. 저자의 주장을 오히려 잘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는 자주 국가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이런 자주 국가의 이념을 민족 국가의 귀환, 국가 소유와 공공경제의 확산, 평등한 세계화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자리에서 그런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필자는 저자의 포퓰리즘에 대한 언급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다.

6)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저자는 일정한 경제적 조건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책을 포퓰리즘이라 한다. 이런 판단은 그 정책이 환상적(퇴행적이거나 공상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환상적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판단은 과학성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래 과학성을 객관적으로 판정할 기준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환상적이라는 판단은 이미 비판하는 자신의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포퓰리즘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과거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포퓰리즘이 등장했다. 나치가 등장할 시기가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 시대였으며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역시 당시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치 시대였다.

물론 간접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는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 현상 자체가 물질적 토대인 사회 경제적 조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본다면 역시 민주주의가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이런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개념적으로는 숙고를 통한 합의에 기초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민주주의는 숙고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 이유는 상업적 언론의 영향일 수도 있으며, 정치 지도자나 정당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본다면 의회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중산층이 지배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민주주의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여 왔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 포퓰리즘이 등장했다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 시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린 원인은 무엇일까? 중상층의 붕괴, 불평등의 심화를 일차적으로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의 지나친 상업화와 더불어 SNS의 발달로 생겨난 정치 팬덤 현상,  정당보다는 개인적 지도자에 의존하는 경향 등을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의문만 제기한 채로 이 글은 마치도록 하자.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6)

맹목적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자마자 쇼펜하우어는 이로부터 근본적인 전환을 이룬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세계의 참상을 보여준다. 자연의 맹목적 투쟁은 제쳐두자. 인간 세계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투쟁의 세계이며, 타인을 기만하며 동시에 자기를 기만하는 인간 희극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 속으로 개인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끔찍한 세계의 실상 앞에서 전율하면서 이런 세계를 초극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선생의 저서가 최고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런 세계 초극의 길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세계 초극을 해석하는 데서 선생은 두 가지 대립하는 해석을 소개한다. 일반적 해석은 줄리안 영으로 대표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단적으로 구분하며, 현상계는 표상의 세계이며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라는 의식의 형식이 지배한다. 예지계는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밝혀지는 세계이며 그 자체가 세계의 진정한 본질이다. 예지계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쇼펜하우어가 찾아가는 세계 초극은 예지계의 본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의지 부정의 차원이다. 여기서 부정의 대상은 곧 의지 자체이니, 그 결과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며 이 세계의 참상을 초연하게 정관하는 인식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다만 냉정한 세계 인식일 뿐이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로부터 의지 부정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내감을 통한 본질 인식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인식을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인식은 곧 세계와 나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 즉 우주적 연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통해 맹목적 의지에 이끌려 서로 죽이고 기만하는 나와 세계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인식은 내적 자기의식과 구분되는 인식 곧 신비적 인식이며, 부처의 깨달음과 같은 인식이고 시간의 차원인 내감이 아닌 영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7)

그러나 선생은 일반적인 쇼펜하우어의 해석과 구분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 한다. 바로 이런 해석이 쇼펜하우어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하려는 선생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은 제너웨이가 에트웰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고 니콜스 역시 동의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 초판보다는 재판에 주로 의존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니콜스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초판본(1818년)과 재판본(1859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선 니콜스는 초판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주목한다.

“의지 자체는 모든 현상 즉 자연 전체의 기체로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친근하게 의지로서 아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지계는 곧 의지 자체 즉 맹목적 의지 자체로 규정된다. 반면 재판본에 이르면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다. 재판본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을 보자.

“의지 자체에 대한 이 인식은 전적으로 충전적이지 않다. 우선 그러한 인식은 표상의 형식에 매여있지 있다. 그것은 지각이거나 관찰이어서 그 자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어 있다.”

즉 내감을 통한 인식은 비록 표상의 세계에서처럼 공간과 인과율의 형식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이라는 내감의 표상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세계는 아직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어서 근본적으로 주객 분리를 넘어선 물 자체의 세계라 할 수 없다. 이런 내감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의 본질은 예지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에 지나지 않으며 충전적 인식이 아니다.

니콜스의 구분과 유사하게 제너웨이는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세 가지 세계로 구분한다.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에 제너웨이는 ‘현상계에 나타나는 예지계’라는 중간 세계를 개입시킨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예지계의 진정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지계가 현상계 안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인식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제너웨이는 영의 견해를 수용해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 구조 대신 다음의 삼중구조를 제안한다. 이 견해는 물 자체에 대한 충전적 인식을 피하는 길이다. 이것은 현상과 예지적 실재의 이분법에 양자로부터 구분되는 제3의 세계를 끼워 넣는 삼분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 제3의 세계는 비예지적이어서 칸트적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비의적이어서 일상 세계와는 다른 것이기에 형이상학적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예지계의 본질은 의지 자체의 단적인 부정, 세계에 대한 정관이 아닐 수 있다. 예지계의 본질은 그 자체가 의지이기는 하지만, 맹목적, 파괴적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힘 즉 생명의 원리이며, 그 자체는 일자[一者]이면서도 수많은 개별적인 힘으로 자기를 발현시키며, 만유[萬有]는 이 일자인 의지로부터 자발적으로 출현하며 서로 평등한 존재일 뿐이며, 개별자 사이의 상호 소통이 일어나는 우주적 연대가 전개된다고 파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지계는 근원적 물질에 작용하여 단계적으로 생명의 진화를 추동하고 무수한 종들로 분화하지만, 그 자체는 무한한 현상계 안에 동일하게 관류하는 일자이다. 내감에서 직접 알려지는 것이 의지의 활동이라면, 이 현상적 직접지는 현상계 전체의 내적 본질로 연장될 수 있다. 나아가서 영원의 관점에서는 만유가 평등한 공감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처럼 예지계의 본질이 생명의 원리라면 이 생명의 원리는 곧 새로운 개방적 질서를 낳은 창조적 활동성이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선생이 왜 2016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지가 이해된다.

선생은 재판에서 이처럼 변화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단적으로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라고 평가한다. 길지만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이 초월적 경험은 생의 의미의 체현이라는 점에서 물 자체의 현상이 표상의 형식 안에서 직관되는 차원, 즉 위의 도표에서 두 번째 중간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를 해친 것에 대한 죄의식과 도덕적 연민은 물 자체인 의지가 경험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닥없는 심연에서 생기하는 생명원리에 접근하는 노력과 희망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아시아 철학이 예지계가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단서로 자기 수련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찬양한다. 예를 들어 송명이학은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 우리의 심층적 내면으로부터 표면적 감정으로 드러내는 끝을 실미리로 삼아 심층의 본성이 우주의 본질임을 자각한다는 수양론적 심성론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된 창조적 활동성은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며 앞으로 아시아 철학을 통해서 그 잠재적 힘이 더욱 발휘될 것이라고 선생은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9)

쇼펜하우어는 예지계의 본질로 들어가는 길로서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들고 있는데,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길이 맹목적 의지 부정의 길이 아니고 생명원리의 길이라고 본다.

선생은 이런 생명원리에 도달하는 인식의 길을 6장 5절 ‘시간과 영원’에서 더욱 철저하게 분석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이 선생의 저서 가운데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선생은 대열반경의 세계와 더불어 엘리옷의 시를 끌어들인다.

우선, 선생은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 철학이 심성론에 영향을 받아 인식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분별적 의식이다. 그다음은 ‘꿈을 꾸는 잠’이다. 이 꿈꾸는 잠은 “예지계가 [현상계에] 침투하여 지성의 시공간 질서를 넘어서는 영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차원”이다. 이 단계가 부정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꿈도 없는 무의식’의 차원이다. 이것이 내적 자기의식 곧 현상계 안에서의 예지계를 인식하는 차원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적 자아의 차원이 있다. 이 본질적 자아는 곧 “우주를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깨닫고 있는 진실한 자아의 세계”이다. 선생은 바로 이 네 번째 단계가 세계 초극에서 등장하는 인식이라 보면서, 이 인식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이 네 번째 심층적 차원을 빛의 세계로 묘사한다. 이 세계는 영원성, 쾌활성, 진정한 자아, 고유한 맑음의 세계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관념을 수용하여, 그것으로 불의 본질적 자아와 정신을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대열반경에 나오는 붓다의 육체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으며 모든 부처와 중생들이 동경하고 깨닫는 영원한 여래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생은 이런 상주 불변의 여래성을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영원의 눈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시간으로부터 영원에 접근하는 길’과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길’을 구분한다. 전자는 붓다의 죽음에 슬퍼하는 대중의 길이다. 이 길은 내감의 형식인 시간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니 여전히 주객 분열 속에 있다.

반면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 바로 붓다의 길이니, 여기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불성이 드러나면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제 이런 쾌활한 자유를 동경하니, 자신의 불성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에 도달할 수 있다.

이어서 선생은 이 자유에 대한 동경을 엘리옷의 시 ‘4중주’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여기서 엘리옷은 시간을 벗어나야 구속(救贖)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미래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속할 수 없다.”

내감을 통해 인식된 세계는 여전히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이제 이 시간을 벗어나야 비로소 진실된 예지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엘리옷의 시 사중주 가운데 세 번째 연주 살비지즈[salvages]는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영원의 세계를 그린다.

“그 끝이 어디 있는가?

소리 없는 오열에 꽃잎이 지며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가을철 꽃들의 소리 없는 조락에

그 끝이 어디에 있는가?

표류하는 난파물들, 해안에 밀린 백골의 기도, 재난의 예고를 접했을 때의 그 기도할 수 없는 기도에?”

살비지즈는 엘리옷이 어릴 때 살았던 곳, 강과 바다가 만나는 암초 지대이다. 여기서 난파물들이 소용돌이치면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엘리옷에게 기억으로 나아 있다가 마침내 다시 떠올랐다. 선생은 이 이미지가 현상계를 넘어서 예지계로 초월하는 과정을 엘리옷이 그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옷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과거와 미래를 탐색하고

그 차원에 집착한다.

그러나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을 이해하는 것은 성자의 직무다.

아니 직무라기보다

정열과 무아의 자기 방기 속에

일생을 바쳐 죽은 동안에 주고받는 그 무엇이다.”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이 문은 ‘정열과 무아’를 통해 얻어진다. 엘리옷이 여기서 정열과 무아라고 했던 것이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에 들어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니,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10)

필자는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가 위에서 보듯 정관과 도피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급진성과 창조적 활동성에 관한 탐구에서 나왔다고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의 철학적 의식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관심과 일치한다. 모더니즘은 일차세계 대전 이후 기존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세계상을 그려내려 했다. 모더니즘은 이런 세계상을 세계에 대한 직접지를 통해 획득하려 하였으며, 이런 인식은 더이상 과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모더니즘은 이런 직접지는 인간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모더니즘의 기본 관점은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철학적 기투가 과연 성공적인가는 여러 의문을 낳는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런 논의는 선생의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보면서 여기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1편 보러가기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1)

이규성 선생(이후 선생으로 약칭)의 저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쇼펜하우의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이하 ‘의지의 세계’로 축약)은 2016년 9월 발간되었다.

선생은 그동안 서양철학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주로 아시아 철학을 연구했다. 선생은 말년에 서구철학이 중국과 한국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선생은 비록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비주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분명 서양철학의 전통에 선 쇼펜하우어를 다루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책은 너무 방대하고 심지어 서문 자체가 상당한 부피이다. 그 때문인지, 책의 맨 앞에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선생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요약문을 발견했는데, 책의 내용이 정말 잘 요약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요약문을 보면서 선생이 왜 쇼펜하우어를 다루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은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폭력적 만남’으로부터 많은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선생이 아시아 철학을 연구한 것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선생의 여러 저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이번에는 유럽 철학 내부에서 직접 그와 같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연구하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비주류이며, “아시아 철학을 인류의 운명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로 간주한” 서양철학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생은 유럽 철학을 자체 내에서 해체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선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대학 시절부터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선생은 서문 끝에서 대학 시절의 어떤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던 친구의 운명을 보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해야 하겠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부채의식 말고도 다른 이유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2) 혁명적 급진성

필자의 경험으로는 선생은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살아왔다. 물론 비참한 인간 희극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의식은 생생했으나, 선생은 현실적인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자제한 것으로 안다.

‘의지의 세계’가 작성되던 시기는 박근혜 정권이 전횡하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근혜 투쟁을 위해 직접 거리에 나오기도 했으니 그만큼 실천적 투쟁의 절실함을 몸으로 느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 선생은 지식인으로 빨치산이 되어 사망한 박치우의 삶에 대해 필자에게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말을 통해 자신의 내심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선생이 실천적 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일반적으로는 가장 정관적이고 심지어 도피주의라고 비난을 받는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하필이면 이 시기 선생이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로 그 고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필자는 ‘요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이 정립하려는 철학에 대한 전망이다.

“이러한 방향(쇼펜하우어의 철학 방향)에서 전망되는 세계관은 안으로는 무한의 윤리를 본체로 하고 밖으로는 폐쇄적 질서를 개방적 질서로 변형하는 활동성을 갖는다. 이 활동성은 구체적 개인들의 기본적 역량들을 함양하고, 평등한 유대를 확장하는 개방적 노력을 동반한다.”

이런 구절이 지시하는 대상은 쇼펜하우어 철학 자신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이미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철학이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혁명성(또는 그 가능성)을 보면서 오히려 “창조적 활동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급진적 혁명성을 선생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곧 ‘무한의 윤리’이며 ‘개방적 질서’이다. 여기서 ‘무한의 윤리’란 나중에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윤리의 근본이라고 본 두 가지 즉 자발성으로서 자유와 타자(자연과 타인)와의 연대 또는 소통의 세계이다.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는 사회적으로는 개방의 질서(평등한 유대의 세계)를 통해 확립될 것이라 본다.

바로 이런 무한의 윤리, 개방의 질서가 쇼펜하우어의 지향점이기에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로부터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단호한 실천적 투쟁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긴 의지 부정의 길이다. 이것은 죽음의 길이 아니며, 무를 체화한 삶에서 우주와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무대립의 자유의 길이다. 무는 허무를 의욕하는 궁극 목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생성계의 존재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생의 생각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이런 무한의 윤리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즉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혁명의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심지어 쇼펜하우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철학에 내재하는 혁명적 급진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의지 부정과 세계 도피의 한 측면에만 몰입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비판한다. 선생은 쇼펜하우의 철학에서 보이는 이런 혁명적 급진성은 오히려 쇼펜하우어가 숭상한 아시아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시아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하는 그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자신의 책의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책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쇼펜하우어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반면 선생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이니, 그만큼 소통 즉 우주적 연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기 위해 선생은 방대한 연구를 전개한다. 선생의 연구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자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된다. 선생은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생은 두 철학자가 지닌 공통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하고 있다.

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

➁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에 대한 비판

➂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 제기

사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순서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선험적 관념론의 세계(즉 표상의 세계)를 확립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물 자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 물 자체의 세계를 그는 의지의 세계로 규정한다.

선생은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가 지닌 철학적 구도에 따라서 자신의 책을 서술해 나가는데, 1장 서문에 이어서 2장과 3장에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 비판이 논의된다면, 4장과 5장은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현상계)을 확립하고 여기서 현상계를 넘어서 물 자체 즉 예지계로 이행하기 위한 단서가 제시된다. 이 단서는 세계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의 한계 내에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

6장에 이르러 쇼펜하우어의 예지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이 예지계는 내감을 통해 확인한 대로 의지의 세계로 규정되지만, 그 자체가 물 자체의 세계는 아니다. 선생은 이 장에서 의지의 세계를 넘어 물 자체의 세계로 육박해 들어가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논의에 해당하며 그 이후 7-9장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미치는 영향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에 바쳐져 있다.

이 가운데 필자의 관심은 주로 6장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이 6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서 의지의 세계를 논의하는데, 이런 논의에서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4)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 철학, 그것도 ‘순수이성 비판’의 현상론이다. 칸트는 시간, 공간, 인과론이라는 의식의 형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을 구성하면서 현상 세계가 구성된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의식의 형식을 물 자체 적용하게 된다면 즉 이런 의식 형식이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형이상학에 빠진다고 비판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런 선험적 관념론 즉 현상론을 받아들이면서 그 역시 기존의 형이상학은 이런 의식의 형식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은 쇼펜하우어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현상론에 그냥 머물렀다면,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나 흄의 아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세계 배후에 있는 물 자체 세계 곧 예지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예지계를 찾아가는 쇼펜하우어의 길은 선생의 서술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 길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개별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가설 추리적인(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실재의 세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 길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이율 배반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런 딜레마 때문에 물 자체의 세계에 이성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다르게 해석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율 배반 가운데 정립은 오류 추리에 해당하지만, 반정립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반정립은 곧 실재 세계가 무한하며 무규정적이라는 것, 즉 ‘무’라고 상정하는 형이상학이다. 이런 반정립은 비록 방법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길과 동일하므로 기존 형이상학과 마찬가지 오류 추리이고 진정한 세계의 실재 자체, 물 자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반정립은 예지의 세계가 현상계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즉 ‘그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신의 속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 역학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화론과 생리학 등 새로운 과학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과학의 발전은 정립의 길이 아니라 칸트가 반정립이라고 했던 길이 실재의 세계를 더 가깝게 암시한다고 믿었다.

5)

그러나 이런 가설 추리적 방법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실재의 세계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방법은 곧 내감에 의해 접근하는 방법이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길을 ‘성곽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비밀의 통로’라고 말한다. 좀 길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객관적 인식의 길을 통해서는 즉 표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에서는 우리는 결코 표상 즉 현상계를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우리는 한갓 인식하는 주관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에 속하기에 스스로가 물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부터는 침투하여 도달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에 직면해서는 우리는 마치 성곽을 포위하여 밖으로부터 공격하는 병사와 같다. 그들은 성곽을 뚫고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끝없이 그리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른 방식으로 입성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전혀 성곽을 밖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서 내부 배반을 통한 비밀스러운 접선에 의해 단번에 우리를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비밀 지하 터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물 자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의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 온전히 직접적으로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표상 배후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내적 자기의식, 내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필자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성을 지닌 것이다. 이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명증성을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명증적인 사실 즉 나의 본질에서 세계의 본질로 유추해 나간다. 내가 이처럼 의지라고 한다면 내 앞에 있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의지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나의 의지로부터 의지로 이루어진 세계로 도약한다. 쇼펜하우어는 더 나가서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서로 다른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개체적 의지를 넘어선 일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적 의지가 나의 의지로 그리고 사물의 의지로 자기를 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 사물의 의지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의지는 내감의 자기의식을 통해 자각되지만, 사물의 의지는 자각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물은 마치 인간이 자기를 자각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의지는 어떤 속성을 지닌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보자. 내가 나의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확인한 것에 따르면 나의 의지는 맹목적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는 세계적 의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의지 역시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의지로부터 개체적 의지가 출현하지만, 개별적 의지와 세계적 의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동일한 것이 원인과 결과에서 반복하는데, 맹목적 의지가 개별자를 실현하는 방식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맹목적 의지는 개별자를 발현한다.

이런 발현의 관계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와 같이 이데아가 유출되는 것이 될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계로부터 본질을 추론해 들어가는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발현의 관계에서 맹목적 의지는 우연한(자발적) 방식으로 개별자를 발현한다고 본다. 이런 개별자와 의지 사이의 관계는 무라는 심연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며 의지의 발현은 맹목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발견한 맹목적인 일반 의지 개념은 서양 현대 철학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의지는 이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의지’로, 프로이트에 의해 ‘죽음의 충동’으로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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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갈무리, 2022-05-3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한동석(시각예술인)

 

공간이 3차원의 다양체인 것처럼, 『들뢰즈 다양체』는 편지들,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들, 청년기 저작들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껏 발표되지 않았거나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이 텍스트들은 질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의 사이에, 혹은 저변에 자리 잡고는 곧 다른 저작들의 시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좋아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의 막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진동,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며 알게 모르게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메아리와 흡사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던 사이에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꽂이는 조금 더 비좁아져 있었고 들뢰즈에 대한 내 마음은 조금 더 부산해졌다. 새 책의 낯선 느낌이 전해지며 방은 잠시 나와는 무관한 듯 느껴졌고 순간 기존의 물건들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부 편지들」에서는 ‘친구’ 미셸 푸코를 포함한 여러 동료 철학자들, 흠모하는 예술인들, 여러 저작을 통해 협업을 펼쳤던 펠릭스 과타리, 들뢰즈 철학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생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향해 띄운 그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들뢰즈가 평소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기에 발신 메시지로만 남았지만, 문장은 때로는 자잘한 속마음을, 때로는 그지없는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각 인물들과 맺은 관계의 고유성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사뭇 다른 어조에도 철학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무엇보다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힘입어 들뢰즈의 사유가 발전해나가는 내밀한 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새로웠고 들뢰즈의 철학적 고민들이 여타의 저작에서보다 쉽고 간명하게 표현된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가장 호기심을 끄는 편지는 과타리를 향한 것들이었다. 협업이라는 때로 험난할 수도 때로 흥미로울 수도 있을 과정에 대한 일반적이며 막연한 궁금증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뢰즈 혼자만의 저작과 과타리와의 협업이 낳은 저작을 연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물음이, 이들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으로 이끌었다. 먼저 편지에서 드러나는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의 가족주의에 대한, 또 이를 너무나 손쉽게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응시키려는 당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과타리를 ‘야성적 개념의 놀라운 발명가’라고 부르며 ‘무의식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서 과타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기계’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무의식을 죄의식과 더불어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법과도, 위반과도 무관한 것으로서 긍정하는 과타리의 입장을 무의식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고 칭송하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동의와 지지의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과타리와 더불어 분열증적 생산 기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나가고자 한다.

편지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종종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에 더해, 그럼에도 이를 서로에게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은,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구절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결과를, 철학자로서 보다 심대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들뢰즈에게만 귀속시키는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아르노 빌라니와의 편지에서 과타리와의 공저를 들뢰즈만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의 분석에는 독창적일 모든 권리가 있지만, 그 책(『천 개의 고원』)이 본질적으로 나 혼자만의 저작이라 주장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만일 인물이 아닌 모종의 흐름에 의해 책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둘의 협업은 본래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본래의 물결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파장을 형성하는 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녹음에 기초한 또 다른 인터뷰 자료가 2부에 이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들뢰즈는 편지 속에서 종종 여러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업무와 실생활에 쫓겨 저작과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 논문준비생에게 그의 철학을 연구해서 현실적으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당시 프랑스 주류 철학계가 들뢰즈에게 취했을 껄끄러운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은 왠지 모를 공감을 자아냈다. 감성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향하며 전복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철학자가 마주했을 학자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순탄치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험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쉽게 수긍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대한 양의 역작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바라보며 개인의 천재성, 혹은 독특성의 발현과 그에게 사회가 되돌려주는 고난, 이들에 대한 선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을, 혹은 운명적 조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2부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는 들뢰즈의 그림들로 시작된다. 몇몇 그림은 ‘괴물’을 묘사하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있었다. 「1부 편지들」에서 빌라니가 띄운 ‘당신은 괴물인가요?’라는 질문에 들뢰즈는 괴물이란 ‘그 극단적 규정성이 미규정성을 완전하게 존속시키는 그러한 어떤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한 강한 공감과 더불어 무언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느껴지는 현기증을 함께 담아 이 문장에 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기억에 비하면, 괴물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게다가 평범하기까지 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우스꽝스럽게, 또는 그런대로 재밌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4. 평생 친구인 장-피에르 벙베르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들뢰즈의 자화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좋았지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복잡한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친구에게 말을 하라고, 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그는 친구의 목을 매우 솜씨 좋게 어루만져 친구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헌정했던 스승이었으며 훗날 절연했던 페르디낭 알키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알키에의 저작에 대한 들뢰즈의 2편의 리뷰에서 그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키에가 ‘초현실을 피안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낳는 분리의 원리로, 시를 낳는 이행의 원리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비현실에서 현실로 의지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규정했다는 대목은, 들뢰즈가 발전시켜나갔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내재성의 철학의 단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알키에가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는 진리를 넘어서고 진리의 우연적 측면을 파악한다’고 해석한 대목에서, 사유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설적인 어조로써 새롭게 정의했던 들뢰즈의 입장이 마련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들뢰즈가 철학적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여러 입장들을 그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과정은 그의 사상이 갖는 또 다른 저변은 물론, 그가 보였던 창의적 역량도 새롭게 비추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텍스트는 한때 들뢰즈가 출간을 고려했었다는 흄에 대한 강의 자료였다. 비교적 들뢰즈의 활동 초반기, 『차이와 반복』이 출간되기 10년 전 즈음에 이루어졌던 강의이니만큼 그의 사상적 진화의 출발 지점을 헤아려볼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과는 별개로, 더 나아가 저자와도 무관하게, 이 자료는 흄에 대한 강의로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간결한 표현들뿐만 아니라,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역동적인 구도와 명료한 짜임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개괄적인 이해의 계기를 고대해왔던 흄의 철학을 단지 인식론이나 인과론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총체적으로 접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어 기뻤다.

이와 더불어 2부에 수록된 여러 단편 텍스트들도 모두 나름의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음악적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단편은, 음악을 들으며 철학 텍스트를 읽어보는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청각적 환경 속에서 이 단편을 읽어보는 나름의 실험적 상황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소개하며 박자로부터 해방된 시간, 음향 풍경,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음악적 재료에 대해 다룬다. 들뢰즈의 시간, 개체, 물질, 생명에 대한 사유가 음악 속에 녹아든 듯한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3부 청년기 저작들」에서는 스물, 스물 남짓 된 들뢰즈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요 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이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할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청년기 철학자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묘사〉라는 텍스트는 어디에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여 다가가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성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 담론을 동일한 맥락상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타자 철학을 새롭게 바라보며 그 한계를 느껴보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성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묘사가 낯설고 불편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 되기는 있어도 남성 되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는 소수자 되기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입장과 차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다. 언젠가 여러 시간적 양태들이 혼재하는 결정체적 시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이 텍스트와 공명할 또 다른 시공간적인 계기와 더불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독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보다 진보한 독자로서의 역량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을 들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누구도 전면적으로 견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일 이 책을 전기적 자료로 해석할 경우.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그를 다소간 한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 들뢰즈에게 삶의 파고는 철학적 작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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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5월 월례발표회 영상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5월 월례발표회는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념이었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특히 슈티르너 철학의 수용과 관련된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와 김광호 선생님의 열띤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발표자 : 박종성(건국대학교)
토론자 : 김광호(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6월 2일(목)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NoK4CKs7Y1M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4월 월례 발표회 영상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4월 월례발표회는 동학 및 천도교의 사상 그리고 한국현대철학의 서양철학 수용과 관련된 이병태 회원의 발표와 전호근 회원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발표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토론자 : 전호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일    시 : 2022년 4월 29일(금)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k8NW-4fLUIU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3월 월례발표회 영상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 제 :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발표자 : 이찬희[대종교(大倧敎) 시교사(施敎師)]
토론자 : 박병훈(서울대학교)
일 시 : 2022년 3월 24일(목) 오후 5시 – 7시
장 소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Og9lRCP_7c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