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이종철 선생님의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를 읽고서
연효숙(한철연 회원)
철학자는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불편한 글쓰기의 효과는 어디까지 미칠까? 고통, 폭력과 죽음에 직면하여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종철 선생님(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의 신간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는 460여 쪽의 분량으로 제법 두툼한 책이다. 사실 『철학과 비판』이라는 큰 제목은 철학 전공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어서,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런데 부제가 흥미롭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 여러 철학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저자가 염두에 둔 철학자들은 몽테뉴, 파스칼, 마르크스, 벤야민, 니체 그리고 아도르노 등이다. 이들의 글쓰기는 저자 말대로, 논문 형식을 빌지 않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삶과 현실에 대해 정신적 통찰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들이 이 책에도 구현되고 있는가?
책 전체를 넘기다 보니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점이 있다. 거의 주석과 참고문헌이 없다. 일단 어떤 전문적인 철학 연구서나 논문들 묶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말랑말랑한 신변잡기? 일기와도 같은 글쓰기? 이런 의문을 갖고 책을 읽어 나갔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대중서처럼 보이지만 전문적인 식견의 수준을 지닌 책이었다. 대중서와 전문 연구서의 모호한 갈림길에 있는,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이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 현실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철학이 대중에게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동떨어져 알 듯 모를 듯 현학적인 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을 떠나 전제와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연구 공간의 섬에 고매한 척 홀로 떠있는 고독한 철학자가 아니라,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현실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이다. 현실을 떠난 사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간섭받고 자신의 고민과 민낯을 삭제하여 동, 서양 텍스트 수입 오퍼상으로 전락한 철학 전공자들에게 퍼붓는 저자의 목소리, 귀 기울이고도 남는다. 다만 철학 전공자들이 몸담은 또 다른 진공 같은 현실에 이 목소리는 잘 스며들지 않는다.
저자는 글을 쉽게 쓴다. 술술 잘 읽힌다.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글이 쉬우면서도 깊이와 창의성이 있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꿈꾸는 이 책은 대중들의 눈높이에는 약간 높을 수 있으나 문턱은 높지 않다. 전문가들은 왜 이렇게 글을 쉽게 쓰지 못했을까? 그렇다고 철학의 특정 분야에 한정된 몇몇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암호 같은 글들을 써 왔던 철학 전공자들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 종종 논문 심사를 위해 철학 전공자들의 논문들을 읽을 때, 나도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비전공자들은 읽기조차 어려운 암호 같은 글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기성 학계가 요구하는 수준과 관행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에세이 철학 글쓰기를 하면 거의 탈락일 것이다. 저자처럼 에세이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어떠한 연구비 지원도 받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 우리를 옥죄는 또 하나의 현실이자 딜레마이다.
이종철 지음,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 도서출판 수류화개, 2021년 6월 1일 발간.
또 하나 인상 깊은 ‘글의 효과’ 중, 글의 최대 효과는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정말 공감이 간다.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감을 주는 글은 처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지만, 다시 곱씹어 생각하면 나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글쓰기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인심을 잃어서까지 공격적으로 글을 썼다가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 전공인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동아시아, 동양 철학, 한국, 중국, 일본 등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충 얼개를 다 알고 있는데, 동아시아,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서양 철학의 텍스트를 열심히 연구해 왔던 나 자신의 공허한 모습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서양 철학의 공부가 다 헛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 연구에서 ‘나의 고민과 문제’와 ‘우리의 현실’을 절실하게 적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동아시아, 한국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나의 고민과 문제가 현실에 저절로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외면해 온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계기는 충분히 될 것이다. 저자의 생각도 이런 맥락과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 ‘동아시아 사상’의 대목이 훨씬 더 잘 읽힌다. 물론 서양 철학을 거의 평생 연구해 온 저자에게 동양 철학의 고매한 수준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왜 서양 철학 연구자인 저자가 『논어』, 『주역』, 『장자』와 같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졌는지, 저자에게 불교는 또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 하나 울림을 주는 대목은 ‘고통, 폭력과 죽음’에 대해 쓴 대목이다. 이제까지 철학은 이성과 진리, 논리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감성, 죽음, 고통,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철학이 이런 문제들을 외면해 왔지만, 저자는 고통, 참사, 폭력 등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는 밥벌이의 고단함도 같이 묻어 나온다. 저자가 철학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생활의 기반을 지원해 주는 확실한 철밥통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에서 빚어지는 저자의 고단한 노동, 생활고 등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을’들의 노동이 다 고단하듯이, 비정규직 철학 연구자들에게 밥벌이를 위한 노동은 정말 지겨우나 필수적인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향한 저자의 도전과 모험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저자는 철학 하는 집단, 전문가 철학 전공 연구자들의 관행을 얼마나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탐구에서, 특히 ‘한국학자들의 이중성’, ‘일본철학사전’ 등의 논평에서 그 논조의 강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논평에 대해 기성 학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전처럼 그저 침묵과 무시, 무관심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책은 일단 작지만, 반향이 있어 보인다. 독자들의 반응인지, 철학 전공자들의 반응인지는 아직까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이 반향이 불씨가 되어 더 멀리 퍼져 나가 들불처럼 번질 것인지, 불씨가 파삭 사그라들지는 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주석 없는 철학적 글쓰기는 가능한가? 이렇게 글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글쓰기는 대중적인 글과 전문적인 글쓰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말하는 것인가? 업계와 비업계 사이의 경계인의 위치에서 쓰는 글쓰기를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무모한 시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글쓰기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인가?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기는 힘들다. 자신의 문제로 철학 하고자 했던, 철학의 출발점에서 가졌던 나의 문제의식이, 철학 전문 전공자로 키워지면서 희미한 기억처럼 빛바래졌고, 현실은 또 냉혹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에세이 철학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우리의 철학의 현실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은 분명하다. 그 파문이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칠지, 거대한 파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에세이 철학을 향한 글쓰기는 불안, 두려움, 고통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철학이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대중들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감정, 고독, 불안, 두려움 등에 대해 공감과 위안을 원한다. 물론 다른 인문사회 과학에서도 이런 문제들에 많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어떤가? 여전히 철학 전공자들은 자신만의 높은 울타리 속에서 타인의 고통, 약자, 소외된 자, 이민자, 국외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소리 없는 아우성들을 듣지 않으려는 기성 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세이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에게 되묻는다.
에세이 철학은 시대의 목격자, 고발자, 기록인의 역할을 담지(擔持)할 수 있을까? 철학 연구자들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1980년대에 탄생한 여러 철학회의 탄생 비화를 적은 기록은 그 시대 철학을 하던 청년들의 고민을 생생하게 담아서 진한 울림을 준다. 내가 속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 비화에 대한 기록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9년 ‘사회철학연구실’과 ‘한국헤겔학회’가 만나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하고, 다른 여러 학회로 이합집산 되었던 기록을 저자가 전하고 있다. 나도 이 과정에 잠깐 참여한 기억이 있다. 벌써 30년도 넘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우리 젊은 시절, 그 시대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남는 문제와 물음은 제자리이다. 철학은 무엇이고 철학자는 누구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예전에 어떤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가 퍼뜩 떠오른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주석 없이는 한 줄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즉 권위 있는 철학자들의 책을 인용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와 주장을 쓸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철학함”은 “나의 철학함”인가? 그래서 많은 동·서양 문헌들을 소개하고 진열하여 지식을 파는 오퍼상이 되기를 멈추고 “진짜 철학자 되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에세이 철학의 목표일까? 저자의 바람대로 ‘에세이 철학’이 부활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응원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의 비판적 기능, 더 신랄하고 적나라한 고발 등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논쟁의 불씨가 훨훨 타오르기를 희망해 본다.
▼ 위의 글에 대해 『철학과 비판』의 저자 이종철 박사가 쓴 답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