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톡,톡,씨네톡]

영화 <디태치먼트>와 우리 사회의 무심함에 대해

 

김다혜(상지대학교 재학)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무관심, 고립, 분리, 거리를 둠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영화 <디태치먼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밀려드는 문제들 속에 고립된 그들은 각자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 중이다. 모두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은 왜 서로 돕지 않는 걸까?

 

영화는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내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라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속 한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등장하는 이 문장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나의 20대는 딱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고립되어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눈앞에 세상이 있는데도, 내가 섞여들지 못하는 이 세상이 나에게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출처 https://sprdthemssg.wordpress.com/2018/07/13/%EB%B6%84%EB%A6%AC/

나는 차가움이 싫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이 차갑지는 않았지만, 차가움은 항상 내 마음에 시리도록 큰 상처를 남겼다.

김경미 시인이 쓴 <다정이 나를>이라는 시가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시다. 누군가의 냉소가 나를 휩쓸고 간 후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시처럼 마냥 서러웠다.

어른의 차가움을 가장 크게 느꼈던 그 날은,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내 나이 열 살 때, 아빠가 큰 빚을 지고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외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시내의 삼촌 댁에 맡겨졌다. 당시엔 소위 말하는 ‘놀토’가 없었던지라 내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 오전 몇 시간이 고작이었다. 삼촌 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서 혼자 숨죽여 울곤 했었다. 사건이 있던 날은 엄마와 두 시간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삼촌 차를 타는 대신 몇 시간 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신다는 숙모와 함께하기로 했던 날이다. 숙모는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나는 혼날까 봐 무서워 버스를 기다리며 숙모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게 해서 집에 가면 저를 혼내실 거냐고. 버스 정류장에서 숙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내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날 향해 온갖 삿대질과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붓는데, 그 자리에서 나를 도와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삼촌은 숙모 옆에 서서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때의 그 얼굴들, 눈빛들,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뜨거운 분노, 그 차가움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어렸다.

왜 그랬을까? 좀 더 따뜻하게 대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린 외로운 아이를 가만히 안아줄 수는 없었던 걸까.

 

차가운 사람들을 보면 나는 화가 났다.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왜 서로에게 좀 더 다정할 수는 없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남의 불행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들 모두가 불행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정함이 결핍된 무심한 사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디태치먼트>는 20대의 내 시선으로 본 세상과 많이 닮아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듯 주인공인 헨리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진 미성숙한 인물이다. 그는 겉보기에 감정을 잘 다스리는 성숙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스위치가 눌리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력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통에 잠겨 절규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는 노력한다. 거리에서 매춘생활을 하며 사는 여자아이를 데려와 보살펴주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모두가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거리 생활을 하던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던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 “왜 이래요.”라고 말한다.

철조망에 매달려 온몸으로 고독함과 고통스러움에 매일 몸부림치는 같은 학교의 동료 선생에게 주인공 헨리가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이다. 단지 이 장면 하나 때문에 굳이 이 어려운 영화를 인용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선생은 의아한 듯 되묻는다. “내가 보여요?”라고. 헨리가 다시 “네, 보여요.”라 답하자 선생은 “세상에 드디어…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신 고맙다 인사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관심으로 변하는 순간.

출처 https://wpalss.tistory.com/765

20대의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고 잔뜩 날을 세운 채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내 인간관계는 모두 ‘나-그것’이었다. 그때 만난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그것’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 많은 실수를 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 만을 바라며 살았다. 지나가라, 얼른 지나가. 지나가면 이 고통이 끝날 줄로만 알고. 그러나 20년이 흘렀어도 선명한 그 날의 기억처럼 어떤 상처는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의 실수를 가만히 감싸준 어른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가 나에게 박했던 건지, 세상이 나에게 박했던 건지 그 순서조차 이제는 모르겠다. 단지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만은 정확히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 시간을 지나온 지금의 나는 제법 성장했다. 적어도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지금은 화를 내는 대신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해 오히려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낀다. 고통 속에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아서.

최근에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 비슷한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법정 스님이 생전 남기신 글 중에서는 더운 날 나무의 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쉴 곳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람의 그늘은 덕인데, 눈앞의 사소한 이해타산에 걸려 덕의 그늘을 펼칠 줄 모른다. 나무의 그늘에 견줄 때 우리들 사람의 그늘은 얼마나 엷고 빈약한가.”라는 내용을 담은 글이 있다.

나는 아직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큰 사람은 아니다. 나 한 사람은 너무 작다. 그러나 적어도 내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려는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해주시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어 인사를 나눈 후, 마침 점심때라 식사는 하셨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먹었다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봐 줘서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몇 번이나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덕분에 아파트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며 마지막으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게 참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몫만큼 감당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립된 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상대방이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또 별거 아닌 일에 크게 감동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오늘을 버틸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고립되지 않도록 돕는 것도 마땅히 우리 사람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무조건 타인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돕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만 한다. 그게 순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나를 돕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주인공 헨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삶의 대부분을 죽도록 일하다가 끝마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거야.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식과 신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이 필요하지. 우리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소설가 김영하는 독서를 왜 하느냐는 물음에 ‘내면을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지키는 데 책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따위의 고민에 빠져있을 때 책 속 문장들은 한결같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책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은호야.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 난 믿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난 은호 너에게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 말을 남기고 싶구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겠니. 네가 힘들 때 책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었듯이, 내가 은호 너라는 책을 만나 생의 막바지에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듯이. 그러니 은호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한 권의 책이 되는 인생을 살아라. 네 안에 있는 한 줄의 진심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언젠가는 꼭 누구에게나 읽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따뜻해지는 거 아니겠니.”

 

나 역시 누군가에게 다정한 자국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람은 그러한데 형편없는 사람이라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고통의 종류와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전부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아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허지웅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삶에서 고통을 뺄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이다. 적어도 서로 괴롭히지는 말자.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할지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더해주지는 말자. 타인의 실수를 그냥 덮어줄 줄도 아는 인간이 되자. 누구나 실수하고 산다.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앞으로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툴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할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 없이 타인을 도와주고, 또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와 너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 사회가 서로 돕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82239

가장 보편적인 시 / 〈작가 노트〉 [유운의 전개도 접기]

가장 보편적인 시

 

이유운

 

아무것도 모독하지 않고 문장을 끝내는 법

짐승이 되어가는 사랑을 견디는 법

 

수많은 개론서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나빠지기 위해

학교에 다녔다

성실하게

 

이마에 붉게 찍힌 낙인을 문지르며

나의 마음을 읽고 쓰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들은 가르치기 어려웠다

 

    이것은 시입니다. 저것은 예술이고요, 이 방 안에서 당신은 여자라고 규정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보세요. 걸음걸이마다 이름을 붙여봅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실재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누가 그런 걸 궁금해하겠습니까? 존재보다는 기분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자, 다같이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이것은 시, 저것은 예술, 당신은 여자.

 

잘 포장된 나

 

미래파적, 언어의 무용, 무해한 표현들, 상처받은 어린 화자, 탈피하고자 하는, 흰 공간……

대체로 시시했고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니까 진짜 웃기지 않니? 시라는 건

아무렇게나 말하고 이렇

행갈이만 하면 문학

지 않니

아주 문학 같다

퍽 예술 같기도 하지

 

뭉뚱그려 보편적인 시라고 거들먹거리며 걸어다닌다

 

 

작가 노트

 

어떤 행위에는 모종의 도덕성이 부여된다. 도덕성을 보유한 자와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자는 퍽 다르며 둘 다 이런 시대에는 비겁한 자가 된다. 성실하고 도덕적인 자 보다 비겁하고 저열한 자가 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세상이므로 파편적이고 주변적인 시보다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쉽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보편적인 시와 보편적인 학습. 그것들은 대체로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다. 무해하고 하얗고 깨끗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이런 말들도 행갈이를 하면 시 같을 것이다 보편적이므로.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백과전서파의 사랑 /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유운의 전개도 접기]

백과전서파의 사랑

 

이유운

 

나는 사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창틀에 정의들을 끼우고 학습하기에

적절한 탄생이다

 

많은 것을 외우며 자랐지

 

죽은 비둘기의 표정, 싸구려 조명,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 무릎의 튼살, 양철통으로 만든 마음, 꿈의 안팎에서 소진되어 돌아온 패잔병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더 이상 외울 정의가 없었으므로

그 또한 적절한 단락이었다

 

너는 자주,

날씨의 정의 아래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얼굴

부르면 돌아보는 이름을 가진

 

그건 너무 순진한 모양이어서

나는 네 살갗을 짚으려고 손을 만들었다

 

내 손금에 박힌 절반의 문장을 보여줄게

이것이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남은, 아무도 외우지 않은 말이다

 

사물들이 점친 내 운명의 점괘다

 

요약하자면

 

돌이킬 수 없고 자주 갈라진다는 것이고

밝은 밤에 죽을 거라는 결말이다

 

결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주로 지칭대명사처럼 기능할 것이고

대부분 너를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펼 지도 모르겠다

이 점괘가 입술의 단위로 부서질 만큼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너를 부르면

너는 너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지

 

아쉽지 않다

 

주인이 된다는 건

언젠가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니까

 

네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며 집을 돌아다닌다

네가 지나치는 곳마다 정의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고

 

비참하게 쌓인 종이들이 오래들 자고 있다

 

우리가 그 위에서 춤을 추면 어떨 것 같아?

 

나 아주 슬플 것 같아

 

 

 

유일한 자에게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종교적 습관이자 문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내게 많은 풍광을 보여준다. 그는 내가 살지 않은 모든 곳으로 나를 데려갈 수 있다. 내가 아직도 공릉과 헷갈리는 정릉, 서울의 골목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걸음들, 학교, 순간들, 사람들, 얼굴들, 사랑들, 시간들, 미움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지 못했을 것들. 그 풍광들을, 순간들을 자꾸 글로 쓰게 된다. 그게 나로부터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해서. 내 마음과 시간과 우리에게 무언가 자국을 남기고 내려갔으면 해서. 그 자국이 쌓여서 스키드 마크를 남겼으면 해서. 그 마크를 손으로 짚으면 맥박이 느껴졌으면 해서. 내 손바닥을 간질이는 맥박. 고동. 규칙적인 심장의 소리. 우리 이 도시에 잔뜩 스키드 마크를 남기자. 모든 자국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 사이로 미끄러져 가는 사랑을 지켜보고 서 있다. 비가 내린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1월 월례발표회 후기

 

주제 :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

발표자 : 남기호(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석배(세종대학교)

일시 : 2021년 11월 5일(금) 오후 3시~5시

장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교동 태복빌딩 302호)

 

후기: 정선우 (한철연 회원)

 

 

헤겔의 칸트 비판은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철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또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여러 방면에서 집요하게 비판하는 것과 유사하게, 헤겔은 끊임없이 칸트를 염두에 둔 채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는 듯하다. 특히 칸트적 도덕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비록 명시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현 불가능성과 실천 불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채 행해진다. 바로 이 점이 한철연 11월 월례회에서 “『정신현상학』의 도덕적 세계관”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남기호 선생님(이하 발표자)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발표자가 누차 강조하듯이 헤겔의 이러한 비판이 직접적으로 칸트의 이론에 대한 반박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적 도덕이 세계에 전면화되고 일반화됐을 때의 모순적인 지점들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칸트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의 성격보다는 일종의 세계관으로서의 칸트적 도덕이 그러한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행위자들에게 어떤 모순과 난점을 일으키는지를 문제 삼는 성격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의 텍스트에 입각해 헤겔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시도는 칸트주의자 입장에서 정당하고 타당할 수 있지만, 헤겔의 논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묻고 따져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헤겔은 칸트적 도덕이 세계관으로 정립된다면 그 세계관이 행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여겼는가? 이에 대한 발표자의 상세한 설명 가운데, 나는 자유와 자연의 조화, 또는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조화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 자기의식의 주관적 목적(곧 의무로서의 도덕성)과 세계의 객관적 목적(곧 결과로서의 행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헤겔이 문제 삼는 칸트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러한 조화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피안에서만 실현되고 달성될 수 있다. 이러한 조화는 무한히 지연되기 때문에 어떠한 현실성도 획득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역설적으로 부조화로 귀결될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모순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한 (발표자가 Verstellung의 역어로 선택한) ‘시치미떼기’가 등장한다.

먼저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의 요청된 조화가 도덕적 행위 안에서 언제나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시치미 뗀다. 나아가 요청된 조화를 도덕적 행위를 통해 달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 행위 자체가 지양돼야 한다는 점을 시치미 뗀다. 어째서일까? 여기서 헤겔 특유의 재치 있는 설명이 빛을 발한다. 도덕법칙과 자연법칙이 조화를 이루려면, 도덕법칙이 그 자체로 자연법칙이 돼야 한다. 즉 자연이 늘 도덕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이로써 도덕적 행위 자체가 불필요한 상황에 이른다. 도덕성에 반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데, 도덕적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연필연성에 따른 모든 행위가 전적으로 도덕적 행위와 일치하는데, 도덕성의 추구가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이처럼 도덕은 도덕의 폐지를 궁극 목적 내지 최고선으로 삼는 바, 칸트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 모순을 함축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이 궁극의 목적, 내지 최고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위치한 것이므로 행위자들의 현실적인 행복은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결국 칸트적 세계관에 입각해 살아가는 행위자들은 도덕적 행위를 위해 행복을 결코 고려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서의 행복의 조화를 영원히 추구해야만 하는 처지, 곧 상반된 요구들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이른다. 따라서 발표자는 강조한다: “도덕과 자연, 이성과 감성 등은 ‘지금 여기의 이’ 현실 속에서 통일적으로 사유되지 못한다. 이 의식[칸트적 세계관을 지닌 의식 – 작성자 추가]은 그저 아득한 피안의 통일을 표상하며 정작 자신의 현실 속에서는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뿐이다.”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슈티르너의 유일한 사람과 그의 소유를 읽기 전에

 

박종성(한철연 회원)

 

아직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글본이 나오는 날을 기대하며 이 글을 쓴다. 슈티르너의 글을 읽을 때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der Mensch’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글 속에서 저 단어는 고정된 하나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슈티르너는 ‘der Mensch’를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고 이러한 이중적 의미에서 대립의 지점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자기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그 대립을 역전시키고 있다. 전형적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중요하다. 그가 청년을 비유로 들어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글을 보자.

 

순수한 생각을 밝히는 것, 혹은 순수한 생각을 신봉하는 것, 그것은 청년의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진리, 자유, 인류, 인간(der Mensch)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모든 빛나는 자태는 청년의 영혼을 계몽하고 열광케 한다. (12쪽)

 

먼저 관념론의 시기를 다루는 저 구절에서 ‘der Mensch’는 어떤 뜻일까? 함께 쓰인 단어들을 보자. 그것은 ‘진리, 자유, 인류, 등과 같은 생각의 세계’, ‘순수한 생각’이다. 그러니까 ‘der Mensch’는 현실이 아니라 이상이고,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고, 개별이 아니라 보편이며, 존재가 아니라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슈티르너가 원문에서 사용하는 단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가 ‘der Mensch’의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쓸 때, 그때 인간은 추상적, 이상적 인간을 의미한다. 원문에서 ‘der Mensch’는 정신, 이상, 인간 일반, ‘인간이란 본질’, 인간의 본질, 유령 같은 나, 참된 인간, 더 높은 본질, 유령, 허깨비, 신성한 것, 고정관념, 유적 존재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대립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재밌게도 같은 단어이다.

 

-자유롭게 된 것은 저마다 다른 인간이 아니라,(오로지 저마다 다른 인간은 인간(der Mensch)이다.(121쪽)

 

위 문장에서는 같은 단어 ‘der Mensch’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슈티르너는 대체로 ‘인간’(Der Mensch)을 추상적 인간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그때 ‘인간’이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관사를 강조하면서 쓴 ‘ 인간’(Der Mensch)은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der Mensch’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개인이라는 것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사람이 ‘der Mensch’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der Mensch’는 앞서 인용했던 추상적 인간과는 대립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der Mensch’라는 말은 거꾸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고, 보편이 아니라 개별이며, 본질이 아니라 존재이다. 원문에서 구체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개인, 개별, 어떤 인간, 나, 사람, 인간들 등으로 쓰고 있다.

위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정리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다.

 

위와 같은 내용, 곧 모순, 대립의 지점을 아래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der Mensch)이 인간들(die Menschen)에 맞서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Unmenschen)에 맞선다.(152쪽)

 

지금까지 ‘der Mensch’를 대체로 인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의미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추상적 인간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der Mensch’가 인간과 대립되고 모순되는 내용을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슈티르너는 이 지점을 인간에 대립하는 명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번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슈티르너는 단수와 복수의 대조를 통해 추상적 인간과 구체적 인간을 대립시키고 있으므로 정관사를 그대로 두고 옮기는 것이 더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 인간’은 ‘ 인간들’과 대립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 인간’은 추상적 인간이고 ‘ 인간들’은 구체적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들이 아니고,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조금 더 ‘테제’와 ‘안티테제’의 내용을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이제 ‘진테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 이제, 그러한 발견의 결과로 얻은 이익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인간을(den Menschen) 기독교 역사와 인류의 종교적 혹은 이상적 노력이 마침내 발견했던 성과로 생각하도록 하자. 자, 인간은 누구인가? 이노라! 인간은 기독교의 결말이자 결과이다. 나로서의 인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자 이용하는 재료이고, 자기희생의 역사 이후의 향유의 역사이며, [198]인간의 역사 혹은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역사이다. 인간이 보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와 자기다운 사람이 정말로 보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테제와 안티테제를 추가해 보자.

 

테제: 인간은 인간이다.=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다.=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다.=인간은 나이다.=인간은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다.

안티테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나이다.=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나는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는 보편이다.

진테제: 인간은 나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인간은 나로서의 인간이다.=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이다.=나는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이다.

 

슈티르너는 진테제의 근거를 ‘나로서의 인간이 보편’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최고로 중요한 자기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서 그럴까? ‘나로서의 인간’은 자기다운 사람(Egoist)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개인이고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면서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오로지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인간”으로 해소된다. 이상으로서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 저마다 다른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슈티르너가 ‘der Mensch’라는 단어를 통해 모순, 대립을 설정하고 다시 그 대립으로부터 종합하는 사유방식을 통해 기존에 지배적이던 사유 틀을 깨부수려는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대립은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나로서의 인간이다. 전자를 강조하면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개별, 구체, 존재, 차이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der Mensch’라는 말을 통해,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말장난을 통해, ‘der Mensch’로 익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익살, 조롱, 비웃음은 권위주의와 대항하는 힘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책 전체에 퍼져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는 권위주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 비웃음, 조롱, 익살로 저항한다.

 

내가 나의 참된 행복(Heil)을 어떤 것, -곧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38쪽)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다. 무엇이 어이가 없는가? 유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가? 다른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는가? 행복(Heil)을 ‘신성한 것’(Heiliges)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게 만들기 위하여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지배적 담론을 유사한 단어를 통해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 돋보이고 있다. ‘신성한 것’은 보편, 추상, 본질,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범주를 대표하는 것이 민족, 국가이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타인의 삶>이 떠오른다. 국가, 민족을 위해 살아온 그가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점원이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 ‘비즐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K-철학’은 가능한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이번 월례발표는 상지대학교 교양대학 김시천 선생님이 『東洋哲學』 제55집(2021. 7.)에 게재한 논문 「’K-철학’은 가능한가?」의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10월 월례발표회

주제 : ‘K-철학’은 가능한가?
발표 :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20일(수) 오후 4시 ~ 6시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 발표 논문 다운로드 : 2021.10.20 김시천[동양철학]_제55집_2021_K-철학은가능한가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znByiBE7O8k

한국

 

여름성경캠프 /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여름성경캠프

 

이유운

 

어느 날 해가 거꾸로 솟았다 어젯밤 우리 중 누군가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깍지를 끼고 마주 잡은 손 위로

불투명한 천을 덮었다

 

천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어둠을 먹고

 

소원의 주동자를 색출할 때

한 명이 나서는 대신 모두가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용서한다는 일의 기괴함

 

사이좋게 멸망하길 바라는 마음이 왜 상냥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걸까

 

거짓말을 한 죄로 성역에서 분리된 우리는 서양호랑가시나무를 주워다 오두막을 짓고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곳으로 추방당해 오는 자 모두 구원받으리”

 

쉽게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방법

이런 편리한 구원을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를 용서하는 신은 없어도 좋았겠다고 속삭였다

 

어둠을 잘라 만든 미사보

그 아래에 무릎을 대고 앉은 나와 너

 

고해하는 목소리 고백하는 얼굴

지옥을 가르치는 말투 사랑을 배우는 표정

 

유난히 날카롭게 발음되는 보호와 구원이라는 단어

 

너는 일어선다

그리고 난파된 유람선을 보듯 나의 무릎을 보고

 

『돌아가자』

 

너는 왜 그런 말을 선언처럼 하는지

너와 나를 우리라고 말하는 걸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도망가자』

 

너를 흉내내 고백하는 나

나는 너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는다

 

우리의 캠프는 익사하기 좋은 숲에서 끝난다

 

캠프가 매해 여름마다 열리는 건, 우리가 만든 성역의 오두막은 오트밀을 먹으러 오라는 종소리와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지

 

네 귓바퀴 모양을 닮은 조개를 줍고

살갗같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다 아마포처럼 두르고

 

오두막 바깥으로 너의 녹색 트렁크가 멀어져 가는 걸 본다

 

영원한 아침이 오고

천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의 투명한 자매님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

― 베드로의 첫째 서간, 4장 8절.

 

사랑에 있어서, 나는 그간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떤 사랑이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것도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했기 때문에, 아주 흐릿한 사랑의 징후들도 사랑이라고 잡아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름성경캠프.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첫사랑의 자국을 떠올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동그랗게 모여 앉아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거나 ‘38색 크레파스’가 적힌 종이 쪽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기억 사이에서 사랑의 징후를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구가 작았고 혼자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는 좀, 음침한 어린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언니들은 스스럼없이 다가오곤 했다. 성당에서는 미사보를 쓰고 있어 옆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이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묶고 드러낸 건강한 빛깔의 귓바퀴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나에게 운동화의 벨크로를 단단하게 누르며 낮은 나무를 오르거나 풀을 뜯어다 반지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봉숭아 물을 들이는 법, 그리고 첫눈이 올 때까지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마법 같은 이야기들도.

― 첫사랑이 이루어지는 거야.

― 그게 뭔데?

―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하는 거.

그러면 나는 이걸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는 내 손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는 언니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니들을 좋아하고 언니들은 나를 귀여워했으므로. 지금 이미 이뤄진 일을 위해서 첫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 이상하게 들렸다. 그해 겨울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 내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사건의 진실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일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캠프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둘러앉은 둥근 얼굴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너무나도 위대한 일이라서 고작 봉숭아물이 사라지지 않는 걸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종교는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집 한 켠에는 언제나 마리아 상과 ‘가정을 위한 기도’ 팻말이 놓여 있었고, 일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미사를 갔고 나이에 맞추어 여러 가지 세례를 받았다. 나는 매주 신에게 고해할 나의 죄악을 마련해갔다. 나의 양육자는 내가 잘 되기를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나는 그 기도가 내가 받은 사랑 중에 가장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잘 치르기를. 수능을 잘 보기를. 내가 대학을 잘 가기를. 내 석사논문이 무사히 통과하기를. 지금은 그가 나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정상적으로 사랑하기를’?

이 에세이를 발표한다는 건 사실 아주 모험적인 일이다. 이 에세이를 쓰고 삼켜두고 일기장으로 복사 붙여넣기를 한 다음 다시 이 페이지를 비우고, 텅 빈 화면을 바라보고, 다른 글을 쓰다가 그걸 다시 지우고, 제목을 바꿔보고, 다른 시를 뒤적여봤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꼭 ‘나’가 앞으로 나올 필요는 없다. 이것은 비겁한 방법이 아니며 누군가를 설득하려고 할 때 당사자성은 필수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분과 태도가 아주 달라진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은 남성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로 말을 한다. 대부분 내가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주 멋지고 유연한 사람들이었지만 철학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한다.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삶을 존중받아야 한다. 누구라도 타인의 삶을 규정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위대하고(Love wins!) 물론 사랑이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누구의 젠더라도 존중해야 한다그리고 나는 이 말에 찬성한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일은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이상하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어떤 말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선을 밟고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작년과 올해, 정말로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도, 친한 사람들도,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SNS에 쓴 글들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슬픔이 가시면 화가 났다. 치사하기 그지 없다. 선은 처음에 누가 그었나? 우리 모두 분필을 쥐고 원하는 선을 그어보는 경험이 있었나? 없었다. 선을 긋는 분필이 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니까 그런 선이 있었다. 그 선에 운동화 앞코로 모래를 뿌리고 뛰어놀다 보니 좀 흐릿해졌다. 네 앞에 선이 있는데, 넘어가도 돼? 누군가 묻는다. 나는 그 선을 그린 적도 없고, 나에게 의미도 없는 선이니까 괜찮다고 말한다. 함께 놀 때는 공간이 넓은 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나를 죄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괴이하고 비논리적인 일이다. 이걸 누가 그었는데요? 아무도 모른다. 모르면서 우선 잘못이라고 한다. 우리는 걸을 수 있으니까 걸었고 뛰고 싶어서 뛰었을 뿐인데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잘못이 되었다.

나는 나를 부정하거나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에게 ‘나는 이해하고 존중해’ 라는 말도 할 필요조차 없다. 당신이 뭔데 나를 이해하지? 나는 타인이 내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지? 길을 잘 가다가, 당신을 지나치는 고양이나 노신사를 갑자기 붙들고 ‘나는 네 존재를 이해한다’ 라고 말해보는 걸 상상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다. 그걸 왜 ‘특별하고 편견에 맞서는 분들’ 에게는 하지 못하는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와 거리를 두고, 내가 그런 사람인 것을 지나치면 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 수는 없니?”라는 괴상한 말이다. 평범이라는 게 뭔지부터 말해봐야겠다. 소위 말하는 ‘정상’? 그럼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한 번도 평범한 적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언제나 특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힘껏 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백 번 나은 말 같긴 한데, 그래도 즐거운 말은 아니다.

이 괴이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그리고 때마침 운좋게 나는 시인이다. 할 수 있는 건 계속해서 말하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이라는 건 이런 말을 하기에 퍽 편리한 도구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발표하기로 했다. 별 얘기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땅따먹기를 하고 있을 것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새로운 평범을 위하여 선이 없는 세상으로 갈 것이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낙오자가 되는 건 아무래도 멋진 일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 영원한 벗,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용감했던 HY를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대의 양극화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7년~261년까지 아테네는 46년 간 전쟁과 폭동으로 점철되었다. 아테네는 알렉산더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폴리스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민주적 연대의 정신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 살육과 방화, 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아테네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 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 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 알렉산더의 원정에서의 승리는 노예를 대량으로 공급해주었다. 기득권층은 늘어난 노예를 가지고 거대농장을 운영했으며 경쟁력을 잃은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몰락을 거듭했다. 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시민이 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계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 한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 아테네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

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전쟁과 폭력, 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양극화 시대의 미몽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 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 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이라는 구조적 접근으로는 좀처럼 만족되기 어려운 급박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힘써 호응해줄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고, 제도적 투쟁을 전개하게끔 자극하는 공동체적 가치도 소멸한 지 오래였다. 사회적 변동의 압력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고, 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너 죽고 나 살자’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농담의 세계 / 곪아버린 것들의 신 [유운의 전개도 접기]

농담의 세계1

 

이유운

 

포자의 상태로 나누는 입맞춤

언니는 전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연인 앞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상상된 타자이거나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언니는 턱을 괸 채로 나의 망가진 걸음걸이를 본다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 뿐

 

우리가 똑같이 없어진 세계에서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이 장면이 원망인지 희망인지 알지 못했다

 

미지근한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

언니와 나 사이의 시차를 본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가 되겠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되거나

 

내가 닮은 건 언니의 뒷모습

나는 꿈에서 거슬러 받은 나를 추슬러서 돌아온다

 

이토록 지겨운 세계에서

이제 나는, 꿈을 꾼 나날들을 가늠하지 않고……

 

 

곪아버린 것들의 신2

 

련도, 난연[爛然] 곪아버린 것들의 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종종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감각이 든다. 가위를 눌리면 손가락을 뒤로 꺾어보면 된다고 한다. 꿈 속에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세계가 온통 바뀌어 있다면, 그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까? 꿈이 선명하게 기억날수록 이런 의심은 강해진다.

    꿈 속에서 주로 나는 신과 대면하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일 때도 있고,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신일 때도 있다. 주로 그 신들은 화가 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만들어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낸다.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신들의 얼굴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종종,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고 또 실제에는 없는 실재의 인물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림에서 내가 상상으로 얽어낸 얼굴들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종교와 신을 만들어낸 멋진 종족이다. 나는 그 종족의 일원으로써 이 멋진 발명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는 신화와 종교가 좋다.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엄청난 자세가 좋다. 취향에 따라 종교와 신을 선택하는 일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지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질투하는 신들이다. 그런 신들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경배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신과 악마가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신을 믿으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 넣어 전쟁을 하게 만드는 신, 메뚜기와 전갈을 보내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게 하는 신, 인간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신.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믿음은 어딘가 서슬이 퍼렇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련도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새롭고도 아주 멋진 새로운 신화에 매혹되었다. 영원의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원불변의 곧은 신은 언제나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손은 언제나 신성한 손으로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련도 작가의 신화에서 새로이 태어난 신들은 그간 신의 것이 아니었던 특성들을 전유한다. 곪거나 썩은 것들. 무한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순간의 신들. 이 신들은 슬프거나 질투하거나 무서워 보이지 않다. 그는 내 꿈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왜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이 썩어 있으니 그것을 만지면 저항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신화와 꿈 사이의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들은 가끔 나에게 그런 살갗과 얼굴을 보여준다. 정말로 연약하고 매혹적인 신들이다.

    그 중에서도 《곪아버린 것들의 신》을 봤을 때, 그가 그려낸 신의 팔과 얼굴에 돋은 이끼와 버섯을 보며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과 신을 쉽게 등치시킨다. 그 둘은 모두 완전무결하고 성스럽고 깨끗하며 그 흔적들은 여기저기 낭자하지만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신과 사랑을 모욕하는 건 비슷하게 힘이 들고 또, 꼭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강희’는 “레즈비언 윤강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버섯 윤강희가 되겠다” 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긴다. 그런 그가 마지막 편지에 연인에게 건강하길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같다.

    강희가 버섯이 된 방 안에서, ‘언니는 여전히 잘 있다’ 라고 말을 시작하는 ‘수민’처럼, 나도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신화 없는 전쟁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약한 신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얀 연인이 있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런 삶에서는 나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걷는 시간을 소망한다. 아마도 그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푹신푹신한 땅이 없어서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자주 넘어져서 무릎과 발뒤꿈치가 죄다 까져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쿠션을 걸어 무릎의 연골과 근육이 퇴화되는 것보다는 자주 다치고 구르며 아주 멀리서 태어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슬픈 이야기와 연약한 신을 태어나게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포자처럼 달라붙어서, 나는 딱딱한 길 저 멀리까지 가고 싶다.

 

 

 

이유리 소설가는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빨간 열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onyuthegreatestcat@gmail.com

련도 작가는 신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다. ryundoyoon@gmail.com

 

 

  •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동 시대 작가들과 동료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치고 2주 후에 유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본 시는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유리, 「버섯의 나라에서」, 『레인보우 다이빙』, 아미가 출판사, 2020.

  2. 련도 작가의 동일 제목의 작품에서 따왔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발표회 영상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9월 월례 발표회

최근 출간(2021년 3월 5일)된 서영화 선생님의 번역서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를 중심으로 서영화 선생님의 발표를 진행하고 박지용 선생님의 토론이 이어집니다.

주제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발표자 : 서영화(『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의 번역자, 서울대학교)
토론자 : 박지용(경희대학교)
일시 : 2021년 10월 1일(금) 오후 4시~6시(2시간 25분 분량)
장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xYtx7qN_R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