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3회 정기학술대회 영상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세션2 한국근현대사상의 심화와 확장: ‘동학운동’에서 ‘신생철학’까지

세션2
1부 13:00~15:00
◎ 1부 사회: 이병태(경희대)
● 발표 1: 13:00~13:40
– 발표: 김정철(한국국학진흥원) ‘대종교의 역사적 주체에 관한 연구 – 한얼과 아(我) 개념을 중심으로’
– 토론: 박병훈(서울대)
● 발표 2: 13:40~14:20
– 발표: 박영미(한양대) ‘최시형 동학에서 ‘民’ – 깨뜨림 같음 다름의 근대 읽기’
– 토론: 유현상(상지대)
● 발표 3: 14:20~15:00
– 발표: 윤태양(성균관대) ‘근대 전환기 신지식인들의 복고적 탐색의 한 경로에 대한 연구’
– 토론: 김우형(연세대)
2부, 3부(종합토론) 15:15~17:40
◎ 2부 사회: 이병태(동아대)
● 발표 4: 15:15~15:55
– 발표: 송인재(한림대) ‘『사상계』 정치담론의 지형’
– 토론: 진보성(방송대)
● 발표 5: 15:55~16:35
– 발표: 조배준(경희대) ‘윤노빈의 『신생철학』과 한울의 관계론 : 고통으로서의 분단과 행위로서의 삶’
– 토론: 배기호(중원대)
◎ 3부 사회: 이병창(동아대)
● 종합토론: 16:5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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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1부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WQroWb-1eiI

2부, 3부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AupgjEAb0NQ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3회 정기 학술대회 영상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세션1 한국근현대사상의 방법론 탐색: ‘전통’과 ‘근대’ 그리고 서양사상의 주체적 수용

세션 1
1부 13:00~15:00
◎ 1부 사회: 연효숙(연세대)
● 1 발표: 13:00~13:40
– 발표: 김문용(고려대) ‘신채호 상고사학의 사상성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토론: 송호전(한국교원대)
● 2 발표: 13:40~14:20
– 발표: 이종란(조선대) ‘최남선의 근대 지향에 따른 전통사상 재구성의 방법론 고찰’
– 토론: 류시현(광주교육대)
● 3 발표: 14:20~15:00
– 발표: 김제란(고려대) ‘한용운 서양사상 수용 방법론에 대한 재검토’
– 토론: 유흔우(동국대)
2부, 3부(종합토론) 15:15~17:40
◎ 2부 사회: 김재현(경남대)
● 4 발표: 15:15~15:55
– 발표: 김교빈(성균관대) ‘정인보의 감통의 철학과 그 근대적 의미’
– 토론: 한정길(한림대)
● 5 발표: 15:55~16:35
– 발표: 이종철(연세대) ‘류영모의 인간관과 근대의 문제’
– 토론: 전호근(경희대)
◎ 3부 사회: 김재현(경남대)
● 종합토론: 16:5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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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1부 동영상 주소: https://youtu.be/gIZUaXR9Zi8

2부, 3부 동영상 주소: https://youtu.be/ohC67ZHeSFw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12월 3일)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스케치영상 및 개회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가을 제63회 정기 학술대회 개회식(12:50~13:00)
– 개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박정하)
– 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김교빈)

○ 주제: [한국근현대사상의 비판과 재구성]
○ 시간: 2022년 12월 3일(토) 12:30~18:00
○ 장소:
– 세션1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7
– 세션2 성균관대학교 호암관 50308
○ 주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 후원: 한국연구재단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Dt4fMfk444Y

동영상 링크 주소: https://youtu.be/A3IBbQumeT8

아니 에르노와 사건(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아니 에르노와 사건(2)

-두 작품 <단순한 열정>과 <사건>을 통해서

 

4)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가 겪은 사건은 나이가 어린 유부남인 외국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사건이다.

주인공은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서서히 일상의 세계는 의미를 상실하면서 모든 것은 그 남자의 사랑과 연관된다. 남자와 만남이 정해지면, 주인공은 일체를 잊어버리고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 어떤 대화나 표현도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하다. 오직 육체적 관계만이, 남자의 성욕이 살아 있을 때만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욕망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단순한 열정, 39쪽)

그러나 그 순간은 한순간이다. 남자가 떠난 이후 주인공은 남자가 아내나 다른 여자와 만나는 것을 상상하면서 질투에 빠진다. 주인공은 이 질투를 이기기 위해 마치 오연한 듯한 태도를 취해 본다. 또는 거꾸로 남자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혼자서 피렌체로 바캉스를 떠나지만,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만약 그런 경우를[남자가 다른 여자와 차를 타고 가는 경우] 당하더라도 오만하고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똑바로 몸을 펴고 걸었다. …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면서 걸었다.”(단순한 열정, 38쪽)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가 마치 글을 쓰듯이 피렌체에 나의 열정을 새겨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걸을 때나 박물관을 둘러볼 때나 A의 영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단순한 열정, 47쪽)

이미 예고된 헤어짐은 홀연, 아무 이유도 설명됨이 없이 일어난다. 외국인인 그 남자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삶이 마비된다. 주인공은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에 빠진다. 이 상태는 고통과 죽음과도 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겪으면서 두 달이 지나자 작가는 이 사건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원히 이 상태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5)

두 사건은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죽음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 날밤 청소년기부터 간직해 온 내 육체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기잇고 비밀스러운 성기가 달려 잇던 육체를….나는 전시되고 사방으로 벌려진 성기와 바깥으로 열어서 긁어낸 배를 갖고 있었다.”(단순한 열정, 69쪽)

다시 태어난 주인공에게 세상은 “너무나 의미가 많은 존재와 사물이 있는” 세계이며, 그러나 기존의 말로는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순수한 의식이 흥분된 상태에서” 보여지는 세계이다. 작가의 이런 말들은 마치 사르트르가 발견한 즉자의 세계를 암시한다.

작가가 사건을 통해 접한 세계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서 들려오는 신성한 세계이다.

“그리고 합창이 들렸다. Wohin! Wohin! 거대한 지평이 열렸고 ….고통과 영원한 죽음 속에 녹아내렸다.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열정>에서 주인공은 열정이 사라지고 점차 일상의 세계가 돌아온다. 그러나 때때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잠시동안 거대한 고요함이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된다.”

여기서 ‘거대한 고요함’이란 앞에서 사건에 말한 ‘신성한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7)

작가는 두 가지 사건, 임신중절과 단순한 열정을 겪으면서 이 사건이 지닌 끔찍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자신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건의 흔적을 찾아서, 그 사건의 원형을 발견하려 한다.

이런 사건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작가는 세심한 글쓰기 전략을 추구한다. 두 작품은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사건은 일어난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된다. 사건에 관한 인과적 설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사건이 이미 일상의 세계 속에서 그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사건을 입증해줄 자료인 일기나 사진과 같은 일차적 자료에 기초한다. 이런 일차적 자료는 사건의 진행과 더불어 기록된 것이기에 생생하기는 하지만, 주관의 감정적 개입이 심하며, 아직 사건의 본래 의미가 드러나기 전에 작성된 것이기에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작가는 일차적 자료를 따르면서도 일정한 시점 뒤에서 회고적으로 개입하여 재서술한다. 그 시점이란 곧 작가가 자신이 겪은 사건에서 끔찍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글을 써야 하겠다는 강박을 느꼈을 시점이다. 작가는 이런 회고 가운데서 사건과 무관한 사실을 제거하며 냉정하고 순수하게 사건을 드러내려 한다.

그 사건은 일상의 세계에서는 낙태이며 불륜이며 작가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전이며 모험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감정적 판단이 개입하니, 이는 사건의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관점과 감정적 판단을 서술에서 배제하려 하려 한다.

작가는 사건을 그 사건의 원형 그대로 순수하게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원형은 주관적인 작가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피안에 있을 것이니, 작가는 다시 자신이 서술한 글에 주석과 보완을 더한다. 주석과 보완은 때로는 작품 속에 차별적으로 표시되지만 작품의 내용 속에 녹아 들어가서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 결과 때로는 작품의 지문이 어떤 서술시에 서술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작가의 글쓰기는 3차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글쓰기이다. 작가는 이런 글쓰기 방법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거대한 열정 27쪽)

‘있는 그대로’란 곧 사람과 죽음을 초월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그런 진실만이 사건이 지닌 끔찍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이다. 작가는 <사건>의 첫 페이지에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중적인 소원,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아니 에르노와 사건(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아니 에르노와 사건(1)

-두 작품 <단순한 열정>과 <사건>을 통해서

 

1)두 가지 세계

세계를 보는 두 가지 시선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일반적인 시선인데 주어 중심의 세계를 낳는다. 여기서 세계는 모두 어떤 주어가 지시하는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주어는 술어를 통해 다른 사물과 관계하며, 다른 사물로 변화해 나간다.

반면 술어 중심의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이 시선에서는 세계는 술어로 이루어지며 이 술어가 다른 술어와 교차하면서 이런저런 사건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사랑은 죽음과 만나면서 사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생겨난다. 사랑은 질투와 만나면서 질투에 사로잡힌 사랑이 생겨난다.

사랑으로 죽어갔던 베르테르와 사랑으로 죽은 윤심덕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일 뿐이다. 여러 술어가 상호 교차하면서 사건의 네트워크 공간이 이루어진다. 사랑과 환희, 죽음은 서로 교차하면서 사랑의 공간을 이룬다. 사건이 시간적으로 계열화하면서 어떤 대상이 출현한다. 나라는 존재는 일련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지점에 불과하다.

이미 어떤 사건의 공간 속에 있는 나에게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그 사건은 기존의 나에게서 어떤 조짐을 보이다가 마침내 현실화한다. 사건은 더욱 두터워지고 무게를 더하면서 기존의 나를 파괴한다. 나는 갑자기 기존의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존재, 짐승이나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나를 사로잡고 마침내 나를 넘어서면서 나는 새로운 나가 된다. 이걸 사건의 전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

카프카는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변신>이라는 소설로 그려냈다. 이상의 작품 <날개>도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그린 소설로 볼 수 있겠다.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 역시 이런 사건의 전개과정을 주제로 두 편의 소설을 썼다. 하나는 1991년 쓴 소설 <단순한 열정>이며 다른 하나는 1999년 쓴 소설 <사건>이다.

<사건>은 작가가 대학생 시절 1964년 2월 20일에 밤에 부딪혔던 사건을 다룬다. 작가는 1991년 자신이 겪은 단순한 열정을 글로 쓰면서 마지막에 1964년의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한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를 다시 찾아본다. 이 사건은 끊임없이 작가의 마음을 강박하면서 마침내 8년이 지난 다음 <사건>이라는 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작가가 겪은 단순한 열정과, 그 원형으로서 그 사건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둘 다 끔찍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작가는 이를 글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를 신성한 것으로, 자긍심을 주는 것으로 기억한다.

“신성한 무엇처럼 [1964년]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 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내가 공포의 끝에 있었는지, 아름다움의 끝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긍심을 느꼈다. … 혹은 다른 이들은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사건, 75쪽)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단순한 혈정, 59쪽)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단순한 열정, 66쪽)

3)

작품 <사건>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은 작가가 대학생 시절 겪은 임신중절이라는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중절을 불법이었다. 작가는 “알코홀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 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을 피해 임신중절을 결심한다.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임신은 이제 이해할 수 없이 다가온,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 된다. 이 사건은 이제 이름도 없어진다. 주인공은 이 사건을 그저 ‘그것’이라는 말로 부를 뿐이다.

처음에 이 사건은 아직 피할 수도 있을 것으로 나타나지만 점차 그 두터움과 무게를 더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닥쳐온다.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사회로부터 배제되며, 논문 작성이라는 자신의 과제에도 충실할 수 없다. 주인공의 삶은 혼돈에 빠져든다. 주인공은 이 혼돈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알지 못한다.

“시간은 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모든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 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사건, 21쪽)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사건, 27쪽)

“이제 이념의 천국[여대생으로서 삶]에는 다가갈 수 없어 보였고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내 육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사건, 33쪽)

주인공은 불법 시술을 받으며 마침내 자기 뱃속의 생명을 살해하여 변기에 버리는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이 1964년 1월 20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주인공은 죽음과 심판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허벅지 사이에 그것을 꼭 끼고 복도로 걸어나갔다. 나는 짐승이었다.”(사건, 64쪽)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다.”(사건 65쪽) “그 밤은 삶과 죽음의 순수한 경험에서 폭로와 심판의 자리로 바뀌었다.”(사건 66쪽)

작가는 이런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 일체의 인과적 관계를 거부한다. 작품 속에는 인물이나 환경의 구체적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오직 사건이 출현하여 주인공의 마음과 삶을 엄습하는 모습만이 서술되어 있다. 사건은 마치 우주인의 침공처럼 한바탕 전쟁을 일으켰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에 대한 논평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이다.1

 

박종성(건국대, 한철연 회원)

♦ 이 글은 『시대와 철학』 제33권 4호(2022년 겨울호, 12월 31일 발간)에도 기고글로 동시 게재합니다.

 

이 글은 고(故) 김우철 교수의 「『자본』의 변증법적 모순구조」(1993)2에 대한 논평이다. 먼저 김우철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첫째, 『자본』에 적용된 변증법적 방법의 두 가지 문제를 살펴본다. 이 두 가지 문제의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적 모순의 구별, 변증법과 유물론의 관계(‘중층적 모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자본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내적 논리 규명의 이론적 과제는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문제는 모순이라는 주제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긍정적 이해 속에서 그것의 부정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는” 모순의 인식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우철 교수는 둘째, 『자본』의 서술에서 ‘논리적 모순’의 지위를 살펴본다. 맑스가 자본의 일반 정식, 즉 ‘화폐-상품-화폐’(좀 더 분명히 말하면 화폐’일 것이다. – 논평자)를 처음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자본의 모순규정을 주장한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마찬가지로 유통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에서 발생해서는 안 된다.”

 

위 인용문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형식 논리학의 모순은 ‘A는 (A인 동시에) A가 아니다’ 혹은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 위 인용문은 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본의 모순규정은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3으로 위 문장의 논리적 모순은 해소된다.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에 주목해야 한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이지만 화폐-노동력의 교환은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이다. “노동력이 그 자체 상품이 되고 이 특수한 상품의 경우 자신의 교환가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용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힘이라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노동력의 가치 크기는 자신이 사용되는 데서 창조되는 가치 크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화폐-노동력의 교환에서 가치법칙(등가교환)을 따르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인 반면,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은 노동력의 ‘사용가치’, 곧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은 현상적으로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니다.’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A’는 B이고 A”는 B가 아니다.’의 구조이다. 즉 자본의 ‘논리적 모순’은 새로운 탐구로 이행하기 위한 문제 제기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상호제약 관계이다. 그러니까 교환과정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사용가치로 실현될 수 없으며 또 사용가치를 갖지 않고서는 가치로 실현될 수 없다.

노동력의 사용가치(A’)와 가치(A”) 사이에는 상호제약적, 내적 연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변증법적 모순은 형식논리의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A’와 A”의 내적 통일성은 동일성(A)으로 환원될 수 없고 단순히 상호 무관한 것들(A와 B)도 아니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모순을 정식화한다.

 

“공속해야 할 내적 필연성과 상호무관한 자립적 존재는 이미 모순의 기초이다.”

 

그래서 자본의 모순은 궁극적으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상호종속적인 동시에 상호자립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왜 노동의 이중성(사용가치, 가치)은 상품교환 사이에서 모순으로 정립되는 것인가?

김우철 교수는 이러한 점을 살펴보기 위해 셋째, ‘상품의 모순과 그 전개과정’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바로 사용가치와 가치의 모순이다. ‘가치’는 상품을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위선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으로 만든다. 그러나 “가치 대상성에는 한 조각의 자연 소재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생산물의 가치 관계는 노동생산물의 물리적 성질이나 그로부터 생겨나는 물적 관계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서 그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는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상품가치 속에 표현되고 있는가? 구체적 유용 노동은 상이한 형태인 추상적 인간 노동(교환의 기초, 사회관계의 기초)을 매개로 해서만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다.

이제 모순의 실현과 해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용가치로부터 가치가 완전히 자립된 형태인 화폐는 자신의 고유한 기능(가치척도, 유통수단, 지불수단)에서 볼 때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위한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바로 화폐이다. 화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화폐는 그 자신 상품으로서 어느 누구의 사유 재산으로 될 수 있는 외적인 물체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힘이 개인의 사적인 힘으로 된다.”

따라서 자본의 정식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상품-화폐’에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상호공속성은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종속으로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화폐는 “과정 전반을 포괄하는 주체”이자 자기 매개적 주체이며, 자신의 대립물을 자기 바깥에 갖지 않는 ‘절대자’이다. 이제 화폐는 한편으로 살아 있는 노동을 지배하는 가치, 곧 과거 노동이 자본가 속에서 인격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단순한 대상적 노동력, 곧 상품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하여 김우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의를 결론짓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오로지 자본의 통제와 주도 아래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자본의 내재적 생산력처럼 나타난다.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물신주의, 이것이 바로 자본이 이룩한 업적이다.”(209쪽).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노동력 소유자의 주체는 노동력 사용자의 주체인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을 이해하는 열쇠일 것이다. 자본 소유자의 사회적 지배력으로 전도된 노동자들의 사회적 생산력을 다시 전도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박종성 지음

가치가 삶의 목적인 이곳에서

사용가치가 삶의 목적인 그곳으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인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에서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관계의 기초가 되는 곳으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해서만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에서

추상적 인간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아도 구체적 유용 노동이 사회적 성격을 인정받는 곳으로

 

노동력의 가치가 사용가치를 종속하는 곳에서

노동력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서로 함께 하는 곳으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사물들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람들의 눈에

인간들의 관계라는 현실적 형태를 취하는 곳으로

 

판매를 위한 구매가 유통과정인 곳에서

구매를 위한 판매가 유통과정인 곳으로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에서

화폐로서의 화폐가 지배하는 곳으로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곳에서

산 노동이 죽은 노동을 지배하는 곳으로

 

모든 생산자의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자가 지배하는 곳에서

 

그렇지 않은 곳으로,

 

그곳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고(故) 김우철 교수(1960 ~ 2021.12.09)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시대와 철학]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정동훈(성공회대 대학원)

 

올해 하반기에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있다면 아마 ‘책임’이 아닐까 싶다. 이태원에서 발생한 대규모 참사와 함께 수 많은 말과 말 그리고 말들이 이어졌다. 그 중 압권은 ‘책임이 없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수도 한복판에서 수 백명이 넘는 국민들이 죽고 다쳤다. 사건 직후부터 충분히 대비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책임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앙정부도 지방정부도 심지어 집권여당도 ‘책임은 없다’라고 말했다. 대형참사 앞에 무작정 책임이 없다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 온갖 말들을 쏟아낸다.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주최한 행사가 아니니까”, “외국의 문화를 즐기다가 죽은 것인데” 등등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말들로 부자연스러운 무책임을 빚어간다. 그들의 말은 너무 가볍다 아니 저열하다.

이 가벼움은 11월을 맞아 절정에 이른다. 11월 초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다녀온다. 귀국하는 대통령은 마중나온 행안부 장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출근길 문답에서 한 방송사의 기자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과 행동을 했고 그것을 막으려고 설전을 일으킨 한 비서관은 ‘불미스러운 사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임을 했다. 이 모습이 보여주는 의미는 참으로 애석하다. 이태원 참사에 정치적 책임이 있는 장관의 어깨는 감싸주면서 언론통제를 하지 못한 비서관은 사임을 하는 모습은 왕조시대의 모습을 방불케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시작된 지금의 시점까지 이러한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들의 말은 더 저열해지고 있다.

또 한가지 가벼운 말은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 정부와 정치권의 본령이 아니던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지 못한 사건보다 더 정치적이며 정치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중요한 사안이 있을까? 특히 의회는 정쟁을 하는 곳이다. 정쟁을 통해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의회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위의 정당성을 선출이라는 대단히 요란스러운 의식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다. 즉 사건을 정쟁에 이용한다는 말은 정치와 정치인의 존재 목적을 부인하는 것과 진배없다. 집권세력이 그리고 선출직이 스스로의 존재 목적과 의의를 부정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정치의 수준이 얼마나 가벼운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벼움이 비단 그들만의 문제일까? 정치인들이 가볍다고 저열하다고 비난하고 몇 글자 적으면 끝이 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 정치의 수준을 가볍고 무책임하게 만드는 저열한 언어들은 시작은 정치권이지만 결국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재생산 된다. 이 잔혹하고 허접한 언어들은 소위 시사평론가와 정치유튜버라는 사람들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면서 시민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그것이 선거나 여론조사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하향평준화에 기여한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이 글의 주된 소재가 집권세력에게 큰 책임이 있는 사안이라서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제 1야당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 가벼움과 저열함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의 가볍고 저열한 언어가 근본적으로 문제적인 지점은 죽은 사람은 항변할 수 없음에 있다. 항변할 수 존재에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결국 살아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흘러가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면의 한계상 다 담을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서 우리의 수준이 더 가볍고 저열해졌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2년 12월 제3차 정기세미나 영상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2022.1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세 번째 정기 세미나입니다.

(이번 세미나는 사정상 동영상이 아닌, 음성파일로 올립니다.)

이번 세미나는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2016)의 ‘Ⅶ. 아시아 철학과 선험적 구성론’에서 ‘1. 주희朱熹와 쇼펜하우어’의 내용을 중심으로 저자 이규성의 程子와 주희에 대한 연구논문의 일부를 참조하여 정리한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합니다.

다음 세미나는 2023년 2월 16일(목) 16시 잠정 시행 예정으로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선생님의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세한 평론(가제: 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으로 진행합니다.

주    제 : 이규성의 程朱學 이해와 쇼펜하우어의 生철학 (1)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    시 : 2022년 12월 16일(금)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 동영상 출처 : https://youtu.be/mqXvRjLUvrg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손철성 지음,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현남숙(한철연 회원, 성균관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서막을 연 인물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신유물론, 생태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서양철학의 극복되어야 할 유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베이컨의 『신기관』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이것이 시사하듯,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과 그로부터 지배가 가능하다고 보는 관념은, 인류세라 불리는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간중심적이고 무모한 생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이 아닌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의 시간지평에서 보면, 베이컨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의 학문적 공과 중에 ‘과’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편, 베이컨은 당대의 사유관행에 맞서 싸운 우상타파자이자 새로운 학문 방법론의 창안자인 점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손철성(이후 저자)의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관한 대중적 해설서이자 비평서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과 구별되는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의미한다(‘오르가논’이란 ‘도구, 특히 생각의 도구란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논리학 저작 전체에 붙여진 이름이다).

1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을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제시한 인물로 위치 지운다. 그는 베이컨을 근대를 기획한 인물로 명명하면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초입에 도달할 무렵인 16세기에 학문의 대혁신을 이룬 인물로 그려낸다. 대혁신의 요체는 자연을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인식의 방법을 창안하여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의 실제적 내용을 두 각도에서 소개한다. 하나는 지식의 진보를 가로막는 우상타파(종족의 한계, 개인적 편견, 언어의 오염, 기존철학의 방해)에 관한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해석과 지배를 가능케 할 정신의 도구로서의 참된 귀납법에 관한 내용이다. 베이컨은 개별공리로부터 단번에 일반화된 공리로 나아나는 일반적 귀납법과 달리, 경험의 재료를 모아 중간 공리들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개별 사례에 적용해 보면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참된 귀납법을 제시했다.

3장에서 저자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자신과 다른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준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베이컨 자신이 그려낸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소설인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과학기술에 대한 베이컨의 지나친 낙관을 비판하는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칙』이 있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학문의 대혁신으로 만들어갈 과학기술 유토피아에 관한 우화를 제시한다. 한편,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에서 베이컨의 이러한 구상이 갖는 인간에 의한 자연지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처럼,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은 베이컨의 『신기관』에 대한 쉽고도 신뢰할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한다. 뿐더러, 근대 경험주의 계열의 철학자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통로로서의 역할도 한다. 특히, 베이컨의 학문적 공과를 균형 있게 풀어나간 점은 저자가 가진 철학적 내공이자 미덕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베이컨의 프로젝트,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하여 자연의 우위에 두고,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생각은 대체로 비판받고 있다. 근래 팬데믹이나 기후위기에서 보듯, 자연은 인간의 생각만큼 잘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관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생태적 부작용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베이컨이 당대에 새로운 정신의 도구를 제시했듯, 오늘날 철학은 인류세에 요청되는 새로운 지식의 도구나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책무를 갖는다. 길을 잃었을 때 왔던 길을 되짚어가서 새 길을 찾듯, 베이컨의 철학을 성찰적으로 복기해 보아야 한다. 저자가 『베이컨의 신기관 – 근대를 위한 새로운 생각의 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중에, 이러한 점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평자 현남숙: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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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영상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월례발표회·세미나]

11월 월례발표회는 9월부터 시작한 2인 토론자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11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11월 월례발표회

주 제 : “더 좋은 것을 보고 인정하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른다” – 스피노자에게 아크라시아의 문제 –

발표자 : 정선우(연세대학교)

토론자 : 이지영(이화여자대학교), 유민석(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11월 25일 오후 7시 – 9시 방 식 : zoom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RY_S9vM57v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