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연세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보다 보니 약소 국가의 비애와 그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나에게도 아프게 느껴진다. 나라가 적의 군화 발에 밟히는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었다. 그들이 사방에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죽자 사자 나라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겪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일게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경험을 겪었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 치하로 들어가는 치욕도 경험했다. 나라를 잃고서 우리 선조들은 만주 벌판을 떠돌며 풍찬노숙하면서 배를 곯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유태인 다음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많이 겪은 민족이다. 과거 약소국가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스탈리 체제 시절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무려 2만 5천명이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국가를 지킬 힘이 없다 보니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동족 간에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민족이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 당시 막 일기 시작한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이념 전쟁의 대리를 비극적인 한민족이 떠맡게 된 것이 아닌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 타율적 강제에 의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는 결코 떠벌이 입이 아니라 강한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세계 최빈 국가의 상태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유신 독재의 쓰라린 경험도 겪었지만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데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다. 이런 뜨거운 애국심은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도 똑같았다. 드디어 한국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선망하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고래 등쌀에 시달리는 새우가 아니라 모든 국가가 선망하는 돌고래와 같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본다면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그저 말하기 좋은 수식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통과한 한국인이라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국가의 에너지는 단순히 경제 발전으로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른바 ‘한류’ 붐에 따른 K-컨텐츠는 노래와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을 타고서 전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 일본이 서구에 소개되면서 일으켰던 붐을 능가하는 것이다. BTS는 전 세계의 아미들이 신화처럼 떠받들고 있고, ‘설국 열차’나 ‘기생충’, 그리고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한국 영화들은 이제 서구인들의 안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넷플리스 같은 문화 플랫폼은 한국의 드라마들이 맘껏 놀 수 있는 앞마당을 만들어준 격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드라마들은 만들어지자마자 수십억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뒤흔들면서 세계 1위 권을 너무나 쉽게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은 과거 아시아인들이 영국의 비틀즈를 따라 부르면서 서구적 감성에 공감하던 것처럼, 반대로 서구인들이 모방하면서 감성적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면 그 여파가 지레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운 거대한 대한민국호의 지도자로 국정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강화 도령 같은 어벙이를 세울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의 피와 땀이 요구되지만 그것을 덜어 먹는 데는 단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수령에 빠진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자국의 유명 정치인들까지 일본이 2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통탄을 하고 있고, 한국은 이제 점점 더 ‘넘사벽’이 되어 가고 있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무엇보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은 일본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만 집착하고 미래를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이끌지 못한 잘못이 크다. 한국도 잘못하면 이런 일본식 모델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크다. 일본 못지않게 급격하게 고령화되어 가서 인구 구성에서 생물학적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경제의 규모에 따른 저성장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미국과 패권주의를 다투는 거대한 중국과 언제든 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극우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 여전히 남북 간에는 냉전 상태의 긴장이 높아서 평화를 이야기하기가 요원한 상태이다. 때문에 한국은 잠시도 한 눈을 팔거나 정체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1963년 영화 <강화도령>(감독 신상옥)의 한 장면ㅣ출처: NAVER 영화 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aver?code=19690&imageNid=1850137#tab

한국이 반도체나 몇몇 분야의 산업에서 선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수출에 전력 투구룰 하고는 있지만 지금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 패권주의가 심하고 국가 간의 경쟁도 심하다. 4차 산업 혁명에 들어선 현재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 유전 공학과 사물 인터넷과 같이 산업의 다양한 부문에서의 국가 간 경쟁은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정책을 잘못 판단한다면 언제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때문에 21세기의 한국은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과거로 후퇴할 것인가의 기로 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 뽑는 것은 그저 하기 좋은 정치인 한 명을 내세우는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경험이나 식견이 없고,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인 검찰 조직에서만 성장한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호를 이끌겠다고 나설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언감생심인데, 윤석열은 ‘조국사태’와 같은 기형적인 사건에서 등장한 인기 스타일 뿐 전혀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막가파식 ‘정권 교체’를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이런 극우 보수 세력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보듯 대한민국을 다시금 과거의 망령에 가두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명박-근혜 10년 동안 피로 세운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세력이고, 여전히 대한민국에게서 부패 공화국의 오명을 떼지 못하게 만든 세력이다. 미국의 성조기를 자신들의 분신으로 내세우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감이나 주인 의식이 하나도 없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과 그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윤석열이 어떻게 대통령이 돼서 약진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겠는가? 그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이 나라를 다시 과거로 추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할 것인가? 지금은 기득권자들의 탐욕으로 치장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낡은 수구 정치의 제도나 법들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정치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만일 대한민국호가 향후 몇 년 동안 이런 낡은 시스템들을 개혁할 수 있다면 한국은 한 시대 안에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개혁적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만든 나라인데 어떻게 모지리 강화 도령 같은 인물에게 덥석 맡길 수 있겠는가?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139)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1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의 부재’이다.

 

이종철(연세대)

 

미국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학살자인 아이히만의 법정을 참관하고 내놓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이 유태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렌트 입장에서는 도대체 나치 전범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들이기에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궁금했다. 아렌트는 이 법정을 참관하기 위해 한 학기 강의를 반납하기까지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나서 내놓은 진단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과 같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이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좋은 아저씨 같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대단히 가정적이고, 딸아이들 한 테는 좋은 아빠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여기서 아렌트가 내놓은 진단이 저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하다 보니 저런 범죄에 휩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부재가 저런 엄청난 범죄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전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렌트는 여기서 제대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반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다 보니 저런 행동을 했다고 덧붙인다. 아렌트가 여기서 도출한 ‘악의 평범성’은 나치의 행태에 대한 거의 고전적인 해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민한 학생이 보기에 나치에 부역한 그녀의 스승 하이데거가 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나라 독일, 유럽에서도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했던 독일의 국민이 과연 아무런 생각 없이, 비판적이거나 반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아서 나치에 열광하고, 유태인 학살과 같은 인종 청소에 동조를 했단 말인가?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진단이 틀렸다고 본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행동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을 할 때도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생각과 이성적 사고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하는 종적인 차이(종차)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이 생각이 없이 행동했다는 말은 그 말의 의미를 백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적확한 진단이 아니다. 인간은 생각이 없이 행동하다가 범죄를 저지르고 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에 휩쓸리고 도덕적인 판단과 행동을 이끌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오래 전 플라톤이 이야기했듯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이나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사(military man) 들의 용기의 원천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이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능적인 감성과 욕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장 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사들의 용기와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길래 플라톤은 이성의 덕이 지혜이고, 욕구의 덕이 절제라고 한 반면 의지의 덕은 전사들에게 요구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도덕적 행동을 의지에서 찾는 플라톤의 전통은 근대의 도덕 철학을 종합하고자 한 칸트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칸트는 “이 세계 안에서, 아니 그 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인들이 덕(virtue)이라고 간주했던 우수한 두뇌, 강인한 체력, 뛰어난 판단력 같은 것들도 그 밑에 선 의지가 깔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가장 큰 악덕이 될 수 있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얼마든지 가장 나쁜 악인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의지만이 선한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런데 이런 선 의지는 저절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신음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자. 산길을 갈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산짐승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다. 그런데 밤중에 산길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대부분은 머리끝이 솟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자기도 똑같이 저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설 것이다. 이 경우 감성적 판단은 끊임없이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성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라고 자위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덕적인 양심이 있는 사람은 두렵기도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을 내가 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연민이 앞서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덕적 행동은 이런 감정적 두려움과 이성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부상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도덕이란 이처럼 전사들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듯, 감정과 이성을 넘어서 마땅히 선의지(양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적 욕망을 나치가 대변하고 있고, 그들이 반대할경우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나치에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역 행위를 하는 데 있다. 그것은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와 합리적인 이유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pspd1994/30325336114/in/photostream/

추운 겨울날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행태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분노하면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고,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한나라 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당명만 바꿔서 활개를 치고, 게다가 특수부 검사 출신이 어느 날 갑자기 편집증 환자 같은 수사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돼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이 과거 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당의 실책과 같은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나라를 덜어 먹을 만큼 부패한 정권도 아닌데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문재인 정부가 최저 임금을 가파르게 상승시키다 보니 자영업자들에게 부담을 준 측면이 있고, 부동산이 급등함에 따라 적지 않은 국민의 원성을 산 부분이 있지만 그것 자체는 정책적인 실수일 뿐 커다란 실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윤 석열처럼 화끈하게 행동하지는 못해도 늘 노심초사 국민을 생각하면서 정치를 한 노고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한 윤 석열이 대선 가도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대열에는 단순히 태극기 부대나 보수적인 노인네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존 정부와 정치에 참여했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대학의 지식인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이런 행동에 대해 아렌트처럼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단순화시킨다면 본질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세력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꼴 보수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진영 논리에 나포된 경우가 있고, 자신들의 욕망을 진영 논리와 일체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몽골의 초원에서 경험한 것이다. 어린아이 한 두 명이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양들의 정신이 아이의 정신에 의해 나포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나치를 지지하던 수 많은 동조자들은 이런 식으로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정신적으로 나포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트럼프 체제하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영혼이 없는 대중’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진영 논리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켜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보수적 욕망의 대리인이나 대변자를 윤석열과 국민의 힘에서 찾고 있는데, 이처럼 정치가 원시적 욕망에 기대는 순간 부패하고 타락한 예는 역사적으로 많다. 한국의 보수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존중하고 고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것 -내 가족, 내 아파트, 내 진영 등-을 지키려는 원시적 욕구를 우선시 하는 데서 더 정체성을 찾기가 쉽다. 보수의 정치 평론가 조 갑제가 올바로 이야기했듯, 한국의 보수는 ‘가진 게 돈 뿐’이란 말이 보수의 탐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이런 욕구가 한국 경제의 성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정반대다. 이런 원시적 욕망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들을 대변하는 국민의 힘 당과 정치 초년병인 윤 석열을 앞세우려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상황에 따라 양쪽 진영을 오락가락하는 이른바 회색 집단의 경우가 있다. 이들이 과거 일말의 양심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는 지는 몰라도 지금 이들은 기득권을 위협한다는 명분하에 탐욕적인 보수의 뒷전으로 숨고 있다. 지식인 집단과 같은 하이 클래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도 윤 석열이 세계 10권 안에 든 대한민국 호를 이끌기에는 자질이나 자격 면에서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윤 석열의 지지 대열에 서는 것은 양심을 지키기에는 그들의 도덕적 의지가 미약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 가장 지적으로 우수한 독일의 지성인 집단이 보여준 행태가 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히틀러 체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인식했지만 그것을 비판하기에는 자신들이 입게 될 불이익에 대한 정서적 두려움과 이성적 고려를 더 중시하는 세력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알량한 양심을 지키기에 필요한 전사들의 용기가 너무나 부족한 세력이다. 이런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막무가내 정권 교체의 명분을 내세워서 자신들이 보기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윤 석열을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 석열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동조는 기득권 세력이 보일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히틀러 체제하에서 보여주었던 지식인 집단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처: Daum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3869#photoId=972168

아렌트가 말한 것과 다르게 ‘생각 없는 행동’이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부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훨씬 더 이기적이고 교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선과 악을 결단하는 삶의 매 순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려는 선의지와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전사의 용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의지와 전사의 용기야말로 플라톤과 칸트가 강조해 마지않았던 도덕의 본질이고 도덕적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덕목을 외면하는 자가 대한민국의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083)

 

필자의 다른 글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나인당케의 단상들]

‘정당한 적(justus hostis)’ 개념: 슈미트의 위대한 통찰과 나의 반론

 

한상원(한철연 회원, 충북대)

 

그림 칼 슈미트의 저서 <대지의 노모스(Der Nomos der Erde)>

Carl Schmitt / 출처: 위키피디아

 

1.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칼 슈미트가 <대지의 노모스>에서 기술한 ‘정당한 적(justus hostis)’과 ‘전쟁 길들이기(Hegung des Kriegs)’라는 개념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슈미트의 주장은 이렇다. 국제질서는 도덕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하는 세력은 상대를 부당한 적으로 간주하게 되고 따라서 적에 대한 잔혹한 응징을 정당화한다. 오히려 교전 당사자를 ‘정당한 적’으로 규정하는 관점만이 전쟁의 극단적 폭력성을 억제하면서 ‘전쟁 길들이기’를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실제로 그러하다. ‘깡패국가(rogue states)’를 응징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명분으로 중동을 군사적으로 침공하고 폭격했던 미국과 나토, 그리고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있는 돈바스 지역의 ‘자치공화국’들을 승인하며 해당 지역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겠다는 러시아의 푸틴 모두 자신들을 정의의 수호자로, 상대방을 부당한 침략자이자 범죄자로 규정하면서 각자의 군사적 팽창을 정당화한다. 만약 바이든과 푸틴이, 서방과 러시아가 서로를 악마화하지 않고 (각자가 추구하는 질서에 대한 상이한 개념을 가진) ‘정당한 적’으로 규정한다면, 지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충돌의 위험이 줄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2.

‘정당한 적’이라는 개념은 이처럼 정치의 도덕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국내정치에 대입해봐도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 촛불시위 이후 등장한 민주당 정권은 자신을 ‘촛불 혁명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혁명 이후 실행되어야 할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자신들은 불의한 세력을 응징하는 정의의 심판자이며, 반대편은 심판되어야 할 불의한 적폐 세력이다.

그런데 이 패러다임은 정부와 여당으로 하여금 모든 권력을 잡고도 자신을 영원히 정의의 심판자 역할로 이미지화하면서, 자기 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의들, 예컨대 권력형 성범죄, 입시비리 등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반성적인 태도로 일관하도록 만들었다. ‘정의로운’ 세력이 실은 ‘불공정’을 자행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에 직면한 것이다. 이제 이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과반수가 ‘정권교체’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답하고 있고, 상대진영 대권주자는 이제 똑같은 적폐청산 프레임을 이용해(‘민주당 적폐 청산’) 자신의 권력획득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폐로 규정하면서 정작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과 관련된 핵심적인 쟁점들을 흐리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치를 도덕으로 환원해서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심판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될 때 벌어지는 해프닝에 가깝다.

 

3.

이러한 논의구도를 조금 더 확장했을 때, 역사적으로 벌어진 수많은 ‘혁명적 폭력’들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공포통치나 모스크바 재판과 같은 사건들은 혁명 이후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자신들의 정적을 ‘인민의 적’으로 악마화함으로써 벌어졌다. 여기서도 정치는 도덕화되며 ‘정의’의 이름으로 적을 ‘심판’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정당한 적’이라는 관념이 결여된 채 벌어지는 ‘숙청’의 잔혹함은 정치의 도덕화가 실은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들’)을 동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그리고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러나 상통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렌트는 ‘고통’과 ‘연민’이 정치의 주제가 되었을 때 정치가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응징으로 변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폭력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상대가 ‘비인간적 범죄자’라는 도덕적 분노는 ‘인류의 적’으로 규정된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어째서 정치적 갈등이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사실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슈미트의 ‘정당한 적’이야말로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융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실제로 무페가 ‘적대(antagonism)’를 비폭력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경합(agonism)’으로 승화시켜 자유민주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참조했던 것은 슈미트였다.

 

4.

그러나 이처럼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슈미트의 주장은 문제가 없는 걸까? 과연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첫째로, 민주주의 정치는 원자화된 개인이 집단적으로 벌어지는 정치적 행위의 장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회의 주권자로 거듭나는 주체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과연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 ‘정의에 대한 헌신’이나 ‘타자에 대한 연대감’과 같은 도덕적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한 주체화 과정을 단순히 ‘전능한 주권자와의 직접적 동일시’로 이해하고 이를 만장일치적인 박수갈채 행위 속에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슈미트의 관점에서는 물론 도덕의 요소가 결합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호명되는가라는 관점에서는 ‘어떻게 ‘올바른’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같은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주권국가들 사이의 국제법 질서를 하나의 헤게모니적 체제로 이해할 때, 그러한 헤게모니 질서는 특정한 규범적 가치에 대한 신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로마가 로마의 패권을 유지했던 것은 단지 로마가 전쟁을 잘 수행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시민권’과 ‘로마법’이 가진 가치에 대한 믿음이 종속민들로 하여금 로마의 동맹세력이 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국제관계에서도 일정한 도덕적 요소를 갖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수행하는 물질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국제인권규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정도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1919년의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로 생긴 국제연맹, 그리고 2차 대전 후 만들어진 국제연합을 비난하면서, 그 토대가 되는 세계시민주의를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난한다. 이러한 비난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국제연합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슈미트라면 따라서 유엔 결의를 통해 공표된 세계인권선언을 정치의 도덕화이자 ‘인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중립화로, 곧 정치의 탈정치화로 비난할 것이다. 또 인권선언이 가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인해 ‘인권’을 둘러싼 새로운 갈등이 전개될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공적으로 선언된 이념이 갖는 ‘정치적’ 실재성에 관해서 슈미트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이러한 인권선언이 수많은 배제된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를 지배에 대한 ‘대항정치’의 관점에서 사유하지 않는 슈미트에게서 그러한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제기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를 사회적 지배(아렌트가 말한 ‘사회적인 것’)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주권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정치는 그러한 연합이 실행되기 위한 ‘주체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필히 정치와 도덕이 맺는 환원적이지 않고 몹시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

결론적으로, ‘정당한 적’과 ‘전쟁 길들이기’라는 슈미트의 통찰은 우리에게 ‘정치의 도덕화가 낳는 폭력’에 대한 유용한 깨달음을 주지만, 이를 통해 정치와 도덕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믿은 슈미트의 관점은 온전히 수용될 수 없다. 정치는 (심지어 슈미트가 말하는 ‘적/동지’의 구분이라는 의미에서도) 일정한 ‘가치지향’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이종철(연세대)

 

  •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오래전 유행하던 노래가 하나 있다. 가수 태진아가 간드러지게 몸을 흔들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아픔도

두 사람이 만드는 걸

 

어느 세월에 너와 내가 만나

점 하나를 찍을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이 맞고, 기쁨과 슬픈 히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갈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들 간의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는가? 일국의 지도자를 어중이 떠중이가 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도자가 되려면 그만한 역량과 노력이 있어야 하고, 국민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그런 덕을 쌓고서도 대권을 앞에 두고서 좌절한 정치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일은 훨씬 그렇다. 그런데 그런 노력 없이, 그리고 역량에 대한 검증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유력한 야당의 대선 후보로 등장을 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것도 행정이나 정치에 문외한으로 일방통행을 일삼는 특수부 검사에서 평생 경력을 쌓은 사람이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대권 후보로 등장하는 현실이 과연 정상일까? 조선 시대도 아닌데, 어리벙벙한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임금이라고 앉혀 놓을 수 있을까? 정치가 코메디인가, 가수왕을 선발하는 것인가? 대통령 자리는 경험을 쌓고 역량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지금까지 쌓은 역량을 최고로 발휘해서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하는 최고 지도자의 자리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능력과 역량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국정은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철학자 왕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일국의 지도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무수한 훈련을 거친 다음, 최종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변증법(Dialectic)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만큼 이론과 실천에 대한 경험과 학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도자는 누구보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처자 공유제’까지 주장을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도 너무나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져서 플라톤 자신도 후기에는 포기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제왕학을 필수적으로 학습하고 엄격한 수련을 거치는 것은 왕의 비중과 역할이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데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경우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만한 경험을 쌓고 그만한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이러한 일반적 기준에 미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첫째 앞서도 지적했듯, 그는 정치나 행정과는 전혀 무관한 특수부 검사에서 경력을 쌓았고, 그런 경력으로 인해 고속 승진을 해왔으며, 마침내 조국 일가를 도륙하는 고도의 편파적 수사로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스타가 되는 경우는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정치에서는 없지는 않아도 힘든 경우다. 게다가 검사는 대화 상대가 있는 변호사나 사건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판사와도 다르게 자신들이 세운 수사 기획에 따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이다. 물론 그들이 법정에서 변호사와 공방을 벌인다할지라도 그들이 유명세를 타는 것은 법정이 아니라 수사 현장과 그 과정에서 일 뿐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국정을 처리한다면 과거 유신 독재나 군사 독재와 비슷한 검찰 독재가 가능할 때와 비슷해질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에 대해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검찰 공화국’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한낱 우려일지 몰라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것은 재앙으로 판명될 것이다. 때문에 일시적인 인기에 편승해서 정치인 행세하는 것이나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인물에 환호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퓰리즘의 형태나 다름없다.

둘째, 윤석열에 대한 이런 우려는 실제로 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보여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더욱 설득력 있게 드러나고 있다. 여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드는 동작을 반복하는 행위는 차라리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윤석열의 캠프 안에서도 이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바꾸라는 충고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타인의 충고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좁은 식견이나 시야에 대해 별로 반성하지 않는 소아병 환자일 가능성도 높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문제가 있을 경우 기꺼이 고치려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처럼 독선과 아집에 빠진 자가 최고 권력자로 독주한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이미 그는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를 할 때 거의 편집병 환자처럼 이 잡듯 수사를 단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사를 보고 ‘도륙’이라는 표현까지 쓴 것은 검찰 수사가 한 가정을 파탄낼만큼 편파적이고 참혹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아, 저런 식의 수사가 나에게도 닥칠 수 있겠구나”라는 두려움과 공감 때문에 서초동 검찰 청사 앞에 몰려와 ‘조국수호’를 외친 것이다. 왜 이런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가? 이것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인륜의 파괴이고 심각한 정의의 손상인 것이다. 이것을 정당한 수사권 행사 운운하는 작자들은 지옥의 사자나 다름없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요구하는 지도자는 외골수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과 소통하면서 대화와 설득을 시도하고 타협을 하고자 하는 건전한 이성의 소유자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나 얼마 전 물러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셋째, 정치 지도자로서 윤석열의 경험이나 경륜, 그리고 자질이 부족한 현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 관계의 위험에 대해 일반인 정도의 상식도 없이 ‘선제 타격’을 말했다. 그는 과거 한국 정치의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다음 정권하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식으로 ‘정치 보복’을 시사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민주적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대중 앞에서 카메라를 받고서 수 분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함으로써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기도 했다. 그는 이해관계가 다양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을 부정하는 투의 말을 하면서 외면하기도 했고, 실제로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조차 의심될 만큼 무지를 거침없이 드러냈고, 이를 안하무인 격으로 오만하게 치부하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도대체 이처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일시적인 인기 하나로 대통령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21세기에 가능할 법한가? 이것은 여와 야를 떠나서 세계 10대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한낱 우려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대재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전의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분노했던 심정을 벌써 다 잊었는가?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두 번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종철 철학박사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841&fbclid=IwAR1VQ9170rHHuz5yyex_vBhuOgPk6g2UgxGaaG2XadjeMNi1NPCNIQhvAoQ)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2월 20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를 허락한 필자와 <내외 신문> 측에 감사드립니다.

 

여우가 무서워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다

 

이종철(연세대)

 

이번 대선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탄핵하기 위해 추운 겨울 날 촛불을 들고 나섰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다시 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드라이브가 아주 강력하기 때문이다. 아직 5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정으로 퇴진한 정부를 다시 지지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퇴진한 당이 그 사이 분골쇄신했다는 이야기도 없이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요상한 수수께끼라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아마도 이렇게 된 데는 강력한 기대를 걸었던 문 정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국민의 기대에 미흡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문 정권이 크게 실정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정권 교체를 강하게 원한다는 데는 아마 다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중 하나는 조국 사태 거치면서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안하무인격 내로남불에 대한 실망과 함께 그 *이 그 * 아닌가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조국 사태가 키운 불씨지만, 헤성처럼 등장한 윤 석열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고, 정권 교체라는 것도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조국의 처가 자식을 위해 동양대 문서를 위조한 사실 관계는 이미 그로 인해 대법원 판결을 받아 4년 징역형을 받았으니까 그것 자체를 변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수사 당시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한 것 까지는 인정해준다 해도. 별건 수사로 저인망 훑듯 표적 수사한 결과는 너무나 초라한 것이다. 대학의 입시 당국도 별로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표창장 하나로 기소를 한 것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이런 식의 수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이는 법을 앞세운 횡포나 다름없다. 요리를 하라고 칼을 쥐어 주었더니 뒷골목의 강도로 돌변한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고 한다면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처 김건희나 의료보험료를 부정 수급하고 통장 잔고를 위조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인 장모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내로 남불이 따로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원칙은 근대 법치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하지만 법은 추상적인 원리와 원칙만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법 자체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법을 다루는 수사기관들이나 법원은 다른 누구들보다 공정성을 위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형평의 저울을 사법부의 상징으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조국 일가를 도륙할 때의 검찰의 태도는 과잉을 넘어서 위법적 수준까지 넘나든 정도이다. 그래 놓고도 법을 앞세우니 국민들이 법에 대해, 그리고 사법 기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는 것이다. 내로 남불이 따로 없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으로 법이 운용된다면 누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국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대표적인 공정성 파괴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 책임을 조국 전 장관에게만 미룬 것은 이른바 기득권 보수 신문들이 씌워 놓은 프레임일 뿐이다. 현명한 국민은 반드시 이런 진실을 올바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윤 석열 자신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듯 자신을 키운 것은 조국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검찰에서 수사 검사로 명망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영향권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조국 사건을 진행하면서 전국적 인물로 등장했고, 이제는 한 나라의 대권을 다투는 유력한 야당의 대표가 되었다. 이쯤 되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정도를 넘어서 일약 스타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 신문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약삭빠르게 그를 대권 후보로 치켜 세웠고, 문 정권의 미지근한 태도에 실망한 국민들은 그를 난세를 구할 수 영웅으로 떠 받들기 시작했다. 이런 열풍이 마침내 “차기 대통령은 윤석열이다”는 신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윤석열이 그만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를 한 커풀만 벗겨 보아도 이런 신화가 허구적이고 기만적임을 알 수 있다.

앞서도 지적했듯, 검찰 수사를 지휘한 윤석열의 태도는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대표적인 형태이다. 그는 검찰을 바로 세워 달라는 문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린 채 엉뚱하게 조국 수사의 파문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물량과 인적 자원을 투입했다. 만일 이런 식으로 개별 수사를 진행한다면 검찰청이 백 개가 되어도 범죄 수사를 제대로 단행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수사 기관은 한정된 자원과 인력을 합당한 사건의 성격에 맞추어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치를 할 것 인지를 고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사태처럼 무대포식의 수사는 공정성의 위배이자 판단력의 부족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개입된 수상한 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실하고 편벽된 통치를 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가 불행하게 마감한 박근혜 정부 이상으로 파행을 거듭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대체로 이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유형이 있다. 경험이 작은 우물안 개구리일 수록 그저 자기가 믿는 세상이 세상 자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검찰의 특수부에서 활동해온 윤석열의 좁은 시야가 그렇다. 게다가 그의 행동은 오래전 TV 드라마에서도 보여졌던 우직한 돌쇠 이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일단 결정하면 ‘앞으로 돌격!’하는 돌쇠의 우직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공정성을 크게 위반한 수사를 단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런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앞날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윤석열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도 위험한 발언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대표적으로 그가 말한 ‘선제 타격’은 한반도의 특수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을 감안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게다가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한다면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는 위험한 인물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는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기로점에 서 있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과거에 발목 잡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 지금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냐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과거 승승장구하던 대한민국 경제가 IMF를 당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앞으로 20년은 더 걸려야 IMF 체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새로 정부를 맡은 김대중은 대한민국을 이런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했을 뿐더러 미래 성장과 통일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덕분에 한국은 몇 년 지나지 않아 IMF 체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한국 경제도 새로운 도약 단계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독 후 독일이 유럽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메르켈이라는 걸출한 여성 지도자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혁명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점에 대해 충분히 실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수행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에 대해 실망을 했다고 해서 과거의 실정에 대한 반성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인으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이 없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은 그저 하기 좋은 표현이 아니다.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686&fbclid=IwAR0nnJ7mLI2WoRKUU73RjH8uMAwyZgVWUBEBdcYh8n_iBZUaekmtGqhhwNA)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2)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앞의 글에서 ‘차이나 붐’ 1부를 소개했다. 1부의 내용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다. 두 가지가 핵심인데, 하나는 사회주의 시대 축적된 자본과 노동력이 있어서 개혁 개방 이후 남미 식의 파국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혁 개방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단계 개혁 개방 정책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마디로 박정희식 수출 정책이 중국에 이식되었다고 한다. 저임금, 저가 농산물, 저금리 정책 대출, 고환율 정책 등이 그 핵심이다.

저자 흥호펑은 이 책의 2부에서는 중국 자본주의와 미국(여기에 유럽도 포함된다)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 즉 세계 체제의 문제에 집중한다. 월러스타인은 70년대 서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 공존 관계를 세계 체제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도 그와 같은 세계 체제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중국과 미국의 세계 체제에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는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의 금융 자본이 결합한 체제이다. 중국은 미국에 못지않게 서구나 한국 일본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 그리고 남미, 중동과도 관계 한다.  저자는 중,미 관계를 핵심에 놓고 나머지 세계는 이 관계를 둘러싸고 있다고 본다. 서구(독일 등)와 아시아 국가는 중국과 경쟁하거나 중국에 부품을 제공하는 제조업 국가이며 남미의 경우 주로 원료를 공급 기지가 된다.

2)

저자는 5장에서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제조업 국가에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전환의 한쪽 축은 중국의 저가 수출이다. 중국의 저가 수출로 미국 제조업이 붕괴했다. 다른 쪽 축은 달러 기축 통화 체제이다. 미국은 그 덕분으로 금융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70년대 말 달러를 저 평가하여 제조업을 보호하려 했으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주저앉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저가 수출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은 쌍둥이 적자 즉 막대한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 빠지게 되었다. 이 재정 적자는 제조업 붕괴하면서 세수가 부족하게 되고, 거꾸로 실업자가 증대하면서 사회 보장 비용이 증가한 데 원인이 있다.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어떻게 파국에 처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 미스테리는 중국의 미국 국채 투자에 있다고 한다. 중국은 고 환율 정책으로 저 평가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하면서 막대한 수출 이윤을 얻었는데 중국은 미국 국채에 투자하면서 획득한 달러를 미국으로 돌려주었다.

중국의 수출 이윤의 미 국채 투자는 여러 가지 효과를 낳았다. 우선 미국은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국채를 통해 ➀ 정부 지출을 유지했다. 또한, 국채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은행은 저금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은 ➁ 국민에게 신용 대출을 강화하면서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둔 과잉 소비 체제를 이루게 된다.

국채 투자로 달러가 환수 되면서 미국은 달러가 고 평가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날 인플레이션은 ➂ 싼값으로 수입되는 소비 상품으로 막을 수 있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저자 자신의 견해라기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으로 보인다. 이런 일반화된 주장은 80년대 이후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은행 대출은 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금융 자본과 미국 고급 기술 노동자 사이의 유착 관계의 원인이 된다. 미 국민 특히 고급 기술 노동자는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은행 대출을 통해 부채 파티를 즐겼으니 그 결과가 곧 2000년대 초반 전개된 부동산 투기였다. 이런 틀로부터 신자유주의 시대를 주도한 민주당 클린턴 체제가 충분히 설명된다.

3)

경제학에서 일반화된 주장은 주로 신자유주의 체제 가운데 미국 측에 대한 분석에 한정되었다면 저자 흥호펑의 설명은 이 체제의 상대편인 중국 측에 집중된다. 중국 측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으니 저자의 설명은 이런 관점에서 굉장한 도움이 된다.

이제 중국 측으로 가 보자. 저자의 물음은 여기에 있다. 즉 중국은 미 국채 투자를 왜 지속하는가? 국채 투자는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조공에 불과한데도 중국이 이를 지속하는가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그 하나는 수출로 벌어 들인 달러를 미 국채에 투자함으로써 ➀ 위안화 가격 상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안화 상승은 저가 수출 전략을 파탄시키는 것이다. 인위적인 위안화 저 평가 방식(페그제)은 미국의 압력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달러를 미국으로 되돌려주는 미 국채 투자 정책을 수용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채 투자로 미국은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출과 신용 대출을 지속하면서 ➁ 중국의 수출품에 대한 수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런 중국의 미 국채 투자를 통해 중국의 수출 기업과 미국의 금융 자본은 공생할 수 있었고 이런 공생 관계가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적 세계 체제가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는 이런 저가 수출 체제가 중국 내부에서 어떤 문제점을 불러 일으키는가를 설명한다. 이런 문제점은 2부 4장과 6장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저자는 그 문제점을 여러 통계 자료를 통해 논증하려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논증을 빼고 간단하게 그 결과만 들어보기로 하자. 박정희 식 수출 체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저자에 의하면 저가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은 두 가지 한계에 부딪힌다.

첫째는 저 임금, 저 농산물 가격, 고 환율 등으로 국내 소비 감소로 내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힌다. 한편으로 기업의 채산성 악화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지출로 재정이 고갈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상황은 악화하는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보장 정책이 대폭 후퇴한다. 그 결과 20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대규모 노동자 저항이 일어났다.

둘째는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수출은 구미의 점차 수요 부족(예를 들어 2008년, 2013년 미국과 유럽 경제 위기에서처럼)과 신흥 개발 국가 사이의 경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위기 시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 투자로 위기에 처한 부실 기업을 지원했으나 덕분에 기업은 저가 수출로 이윤을 낳지 못하니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80년대 노동자의 저항과 90년대 IMF위기에 처한 우리로서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악화된 노동자 상황, 부실한 기업이라는 이중 위기가 낳는 증상이 부동산 투자이다.

저평가된 위안화로 중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니 이 때문에 부동산 투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다. 은행은 부실에 시달리는 기업보다 부동산에 투자된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지만, 점차 악화하는 노동자 상황은 대출을 갚을 수 없으니 부동산 투기는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초 현실적으로 사치스러운 지방 정부 건물, 중복되는 지하철 노선, 불필요한 공항, 수요가 없는 고급 아파트, 쓸모없는 건축물이나 시설 등, 유령 도시나 유령 쇼핑몰 등을 들고 있는데, 저자는 이 현상 자체가 중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서문에서 잠시 언급했던 헝다 사태는 단순한 부실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저가 수출에 한계에 부딪히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이다.

4)

중국은 저가 수출 정책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었다. 우선 199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가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에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게 바로 2003년 후진타오 정부이다.

후진타오는 내륙 개발과 농산물 수매가 인상, 새로운 노동 계약법을 실시하여 국내 불평등을 축소하고 국내 수요를 증가시켜 내부 성장을 확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이런 정책은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로 중국의 수출이 축소되자, 황급히 중단되고 말았다.

2012년 새로 등장한 시진평 정부는 후진타오의 정책을 계승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개혁 정책의 효과에 대해 회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자의 결론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이런 회의적인 관점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중국의 공산당 내부의 민주주의 과정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서방 언론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시진평의 독재 체제가 강화된다고 하지만 실제 이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의 결과인 노동자 상황 악화와 부실 기업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노력의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주요섭(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아마도 ‘사물들의 우주’ 이전에는 ‘인간들의 우주’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이전에도 ‘사물들의 우주’는 엄존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변’된다. 다시,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역시 사실은 사물들의 우주였을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문득 ‘인간이라는 사물’을 출현시켰고, 인간들의 우주라는 착시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물도 다른 사물들이 그렇듯이 문득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 샤비로의 사고실험, 혹은 철학적 SF는 결이 조금 다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의 허무주의적 편향에 대응해 ‘또 다른’ 사변적 실재론을 탐색한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짧지 않지만, 결론은 명쾌하다. 그 이름은 ‘사변적 미학’이다(279).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비-상관적으로’ 실재하되, 그것은 단지 무정(無情)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유정(有情)한, 마음이 있는 사물들의 그물망이다.

 

감응하는 우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1982년, 장일순과 김지하를 비롯한 원주캠프는 ‘생명의 세계관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제안하는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인간 중심 세상에서 생명 중심 세상으로의 대전환과 생명운동으로의 사회운동의 대전환을 선언한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이제 세계는 ‘생명들의 세계’다. 이를테면, ‘생명들의 우주’다. 물론 이때 생명이란 인간이나 고양이와 같은 유기체만이 아니다. 풀 한 포기와 돌멩이도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나에게 ‘사물들의 우주’라는 책은 무엇보다 ‘감응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의 ‘내적 경험’이라는 표현에서 감이 왔고, 범심론(pan-psychism)에 대한 긴 소개에서 나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감응(感應)은 흔히 정동(情動)으로 옮겨지는 affec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 ‘기(氣)의 감응’, 혹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의 그 감응이다. 또한 19세기 말 동학에서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과의 감응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는 생명세계의 소통형식으로서의 감응이기도 하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감응하는 사물의 사밀성, 즉 ‘사물의 숨겨진 내면적 삶’(77)을 강조한다. 사물들은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은 서로 교감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넷플릭스 영화 ‘문어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어이야기의 화자는 “문어와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감응의 아름다움이다. 감응은 인간과 문어와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어를 둘러싼 바닷속 생태계가 곧 또 하나의 감응하는 우주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도 ‘너’도 ‘그’도 감응함으로써 살아있다. 햇볕과 바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이전에 햇볕을 쬐고 공기를 마시는 덕분에 살아있다. 감응은 비-의식적이다. 여성들의 월경이 그렇듯이 달을 의식하지 않아도 신체는 달과 감응한다. “달에 대한 나의 파악은 표상이 아니라 원격접촉이다”(216). 서로의 내적 삶을 몰라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경험에 접근할 수 없다. ‘나’도 ‘나’를 알 수 없다. 인식 이전에, 신체와 신체 사이 신체와 사물들 사이에서 비-의식적인 감응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원리상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178) 저자가 화이트헤드를 빌려 말하고 있듯이,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150).

 

범심론: 사물에도 내적 경험이 있다

 

그렇다.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란, 다시 말하면 ‘감응하는’ 사물들의 우주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과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경험적이다(155). 키워드는 ‘경험’이다. 감응하는 사물을 샤비로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하는 사물인 셈이다. 저자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해 단언한다. 프로토타입은 ‘경험’이다. “모든 존재는 내재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한다. 존재는 곧 경험이다.”(150)

그러나 이때 경험은 물질적이다. 에너지적이다. 저자는 스트로슨(2006)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물리적 소재는 그게 어떠한 형태라도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현상을-포함하는-경험이다.”(189) (그런데, 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도 자신의 주저 『인간현상』에서 사물의 내부를 이야기한다. “사물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범심론으로 이어진다. 샤비르에게 범심론은 “현상적인 경험을 실체화하거나 근절시키지 않고 그 자명함을 존중하는 데에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다.”(189. 강조는 저자.) 범신론(Pan-psychism)의 ‘범’(Pan)이란 접두사가 그렇듯이 사밀성과 관계성을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사물에 적용하는 것이다.

생명의 감각으로도,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도 범심론은 자연스럽다. 생명사상을 정초한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핵심적 특징을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과 함께) 영성이라고 꼭 집어 말한다. 이때 영성은 인지적 마음, 감성적 마음과 구별되는 생명의 보편적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이다. 이때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이다(화이트헤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아우르는 ‘감응하는 마음’이다.

2012년 어느 강연에서 시인 김지하가 생태학과 녹색당의 한계를 언급한 바 있다. 요점은 생태학과 녹색당에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 관찰만 있을 뿐 존재의 내적 경험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의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존재가 외면과 내면을, 일인칭 경험과 관찰가능한 삼인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193)고 말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생태와 녹색의 사유는 오늘날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여지듯이, 내적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외적 관찰의 결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기후위기 대응의 한계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전환의 시대, 범심론적 사변은 역설적으로 대전환의 키워드가 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샤비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두 개의 탈출구 중에서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가차 없는’ 객체적 실재론이 아닌, 사물들의 가치경험을 통해 존재의 평등성이 인정되는 범심론적 실재론을 제안한다.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카나리아, 미생물, 원자 등의 사태와 같은 지평 위에 인간의식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인류는 명실상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직면해있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SF영화들은 포스트 휴먼와 트랜스 휴먼의 세계, 혹은 ‘인간-외계인들의 우주’를 도래할 현재로 보여준다.

최근 나의 키워드는 파국과 태동이다. 오늘날 팬데믹-기후위기의 경험에서 볼 때, 파국적 이행(Catastrophic transition)은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세계들이 태동하고 있다는 기대 혹은 예감이다. 그리고 그 태동을 촉진하는 것을 정동적 서사들이다. 새로운 세계관 설정이다. 나에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도 또 하나의 서사 혹은 세계관이다. 그 스스로도 그의 사변이 과학소설에 가깝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변’은 파국적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들을 태동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을까?

사변적 실재론은 언어적 전회를 경과한 사유이다. 구성주의를 통해 인식론적 장애물을 넘었기에 존재론적 백가쟁명을 가능하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존재론적 사변들과 사고실험들과 환상적 이야기들이 제출될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사변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실재론이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격발시킬 수 있을까? 토끼와 호랑이와 인간과 천지만물이 함께 춤추는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현실은 훨씬 치열하고 절박하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은 매우 실존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심론적 실재론이 생물 종들의 속절없는 소멸을 완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불평등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인간사회 내부의 소멸과 격리와 파괴를 전환시킬 수 있을까? 사물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실재론적 사상기획의 사회적 효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판의 한국사회, 사상기획들의 존재 여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물들의우주〉-보도자료 ‘클릭’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중국을 보는 하나의 창 – 『차이나 붐』 서평 (1)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요즈음은 좀 뜸해졌는데, 작년 년 말에 언론은 중국 부동산 기업 헝다의 파산 위기를 연속해 보도했고 세계의 이목이 일시에 헝다 사태로 집중했다. 일개 기업의 부채 규모가 자그마치 약 3000억 달러라니, 놀랄 만하다. 이 정도는 중국 총 경제 규모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어디 이게 헝다에만 한정된 일일까?

2012년 경인가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도시마다 엄청난 규모로 아파트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 많은 아파트 대부분이 비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속으로 의아했지만, 중국은 큰 나라니 무한 세계 앞에서 유한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 무력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헝다 사태를 보니 중국 역시 무한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헝다 사태를 계기로 중국 사회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찾았다. 이때 우연히 눈에 뜨인 책이 ‘차이나 붐’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 훙호펑의 2015년 저서이다. 부제 ‘왜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구입해 읽었다.

훙호펑은 1980-90년대 후기 식민 시대의 홍콩에서 성장했으며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친중국적이었으나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비판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그는 그 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며, 현재는 존스 홉킨스 대학 사회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지금까지 두 가지 연구 프로젝트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하나는 중국의 정치적 근대성의 기원과 특수성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산물로 ‘중국 특색의 저항’(2011) 책을 저술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경제 부흥의 기원과 핵심 동학을 규명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이 책이다.

2)

이 책은 서문과 결론에서 보듯이 두 가지 논제에 도전한다. 하나는 등소평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오직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결과이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에 반대하며 사회주의적 유산이 중국 자본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식으로 몰락하지 않은 주요 지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에 반해서 저자는 중국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편입되어서 상호 의존적으로 되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중국과 미국에 상호 이익을 줌으로써 세계 경제를 지탱하고 있으니, 그는 미국의 몰락은 중국의 몰락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전체적 관점은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라는 개념으로 보인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세계 체제 속에 공생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저자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보는 관점도 그와 유사하다.

3)

이 책 전체는 1부와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주로 중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부에서 그는 명, 청 시대 이미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음에도 자본주의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탐구하고, 이어서 사회주의 시대 자본의 축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서술한다. 이 부분은 역사적 서술로 흥미롭기는 하지만 당장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사회주의 시대 이루어진 경제적 유산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성공시켰다는 그의 주장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유산으로 축적된 자본[국유 기업과 시설]과 우수하고 훈련된 노동력 그리고 자율적 정부를 들고 있다. 이런 유산 때문에 중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

1부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그는 이런 중국의 개혁 개방을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의 입장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1978년부터 1989년까지다. 이 시기에 중국은 일부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주로 지방에 있었던 기존의 사회주의적 국유 기업(또는 집체 기업)이 자본주의적 기업으로 전환하면서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시작했다.

사회주의 시대 농촌에 저장되어 있었던 과잉 인구가 노동자로 제공되었으며, 인플레이션 아래서 기업은 시장 가격과 국정 가격이라는 ‘쌍궤제’를 통해 국정 가격으로 물자를 공급 받아 시장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이윤을 축적했다.

사회주의 시대 노동자를 보호해 왔던 사회 보장 제도가 이 시기 폐지되면서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료와 기업의 유착 관계가 발전하면서 부패가 증가했다.

저자는 이 때문에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천안문 사태의 두 축이었던 학생과 노동자가 분열했다 한다. 학생은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관료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노동자는 정부의 저임금 정책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 정책을 회복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양자의 분열 때문에 천안문 사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5)

저자는 1992년 등소평의 남순 이후 2003년 장택민이 물러나기까지가 개혁 개방의 두 번째 단계라 한다. 오늘날 중국의 사회 경제를 지배하는 기본 틀이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때 중국은 미국 금융회사의 조언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➀ 국유 기업을 개혁하여 수출 기업화 했으며 ➁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사영 기업이 출현했다. ➂ 호구제를 폐지하여 싼값으로 무제한 노동자를 공급했으며 복지 체계를 완전히 해체했다. ➃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저가 농산물 정책을 실행했다. ➄ 국유 은행의 저금리 대출,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값싼 상품을 해외에 수출했다. ➅ 정치적으로 대학 졸업자, 기업가를 당으로 흡수했으며, 수출 기업이 존재하는 연안 지역 출신이 당을 지배했다.

이상의 정책을 본다면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한국의 군부 독재 시대 수출 산업화 정책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주로 차관의 형태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으나 중국의 경우 외국 자본의 직접 투자에 의존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중국은 이상과 같은 개혁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로 편입했다. 중국은 해외 금융 자본과 국내 과소 소비[저임금, 값싼 농산물]에 기초하여 저가 상품을 생산하여 미국과 서구로 수출했으며 여기서 쌓인 막대한 수출 이윤을 다시 미국의 국채에 투자했다. 미국은 부채에 기반을 두고 낮은 인플레이션과 저금리를 통하여 과잉 소비 체제를 형성했으며, 그 결과가 미국 부동산 투자였다. 부채를 통해 형성된 미국 금융 자본은 다시 중국의 수출 기업에 투자되어 미국 금융 자본에 높은 이윤을 주었다.

6) 여기까지가 1부의 주요 내용이다. 지금까지 서술된 주요 내용은 개혁 개방 정책이 전개된 역사적 과정이다. 이에 대해 필자로서는 충실하게 소개할 뿐 옳고 그름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헝다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의 주요 기업이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부채에 기반한 성장이란 신흥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부족한 자본을 마련하는 길은 곧 부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채는 성장을 통해 갚아나가야 한다. 남미의 경우는 외자 도입을 통해 개발 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부채 위기로 파산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저자는 이 문제를 2부에서 다루고 있다. 2부의 주요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의 책과 리뷰]

독후감 : 2022 대선에 끼어든 생체 부적

– 트리버스(Robert Trivers),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다시 읽고 –

 

최종덕(한철연 회원, 독립학자)

 

  1. 자기기만의 습성을 가진 사람들

습관적 기만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전형은 자신의 거짓말 행위의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습관적 기만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기억을 짜맞추어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성곽에 갇힌 좁은 세상의 경험을 확대하여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게 된다. 자신이 하는 일상의 기만행위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이 기만적이라고 확정 판단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책 232쪽)

광신도적 주술사나 그런 주술에 점입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 광신도 모두 예외 없이 자기기만 증상의 사례들이다. 자기기만 증상자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에 수치심을 갖지 않고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특히 사회적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기만 증상을 같이 갖고 있을 때 기만의 사회적 악폐는 더 심각해진다. 이런 경우를 권력형 자기기만 현상이라고 부른다.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도그마를 생산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그마를 강력하게 강요하며 그런 도그마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도그마 권력을 위배하는 사람들 모두를 악마화시킨다. 예를 들어 현재(2022년 2월) 대선후보로 나선 권력형 자기기만 증상자는 현 정권에 대한 적폐 수사를 한다거나 검찰청 앞에 모인 국민을 사법처리하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을 들 수 있다. 즉 자기기만 증상자는 자신의 거짓 합리화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을 미리 위협하고 강한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책 117쪽)

 

  1.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

자기기만의 병증은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전개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불안정한 내부 심리상태를 우주적 특권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말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책 461쪽) 박근혜씨의 ‘우주 기운 운명론’이 그러했고, 윤석열씨의 ‘왕(王)자 그리고 이마 흰털 생체 부적’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주술성 자기기만 심리상태의 특징은 자기소집단의 서열을 공고히 하며 자기를 정점으로 따르는 소집단 구성원에게는 특별하고 예외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권력집단 기만성이 외부로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함몰한다는 것을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책 463쪽)

트리버스의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자신의 기만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상대의 기만을 알아채는 심리적 형질도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나아가 권력형 기만자의 자기기만 혹은 타자 기만행위에 대하여 기꺼이 속을(기만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의 또 다른 심리적 형질이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1. 보통 사람들, 도덕성과 경쟁심의 이중트랙을 볼 수 있는 눈

권력형 기만증상자의 기만행위를 기꺼이 수용하는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트리버스는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우리 인간 자신의 또 다른 이면이다. 권력 기만자의 증상이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면서 우리들조차 자기기만의 플라시보 효과를 탐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전염된 우리 보통 사람들을 비난만 해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은 진화의 호모 사피언스이다.

대한민국 현실 선거 정치와 연관하여 말해 보자. 대선에 나선 민주당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석열 후보는 기만행위가 많아서 민주당이 결국 선거에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들었다. 그런 말은 호모사피언스의 진화생물학적 현실을 모르는 오판으로 끝날 수 있다. 권력형 기만집단도 언제든지 승리할 수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만집단의 행위와 그 여파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기만이라는 플라시보 효과에 기꺼이 그리고 능동적으로 동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놓치거나 무시하면 아무리 진심어린 이재명 백 명을 가져와도 선거에 이길 수 없다. 도덕과 진리로 볼 때 상대방보다 낫다고 해서 선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인성은 두 개의 형질 궤도 위에서 나타난다. 하나의 궤도는 남들과 함께 하는 도덕심이며, 다른 하나는 남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경쟁심이라는 궤도이다. 두 개의 궤도로(이중 트랙) 진화된 양면성의 호모 사피언스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냉정한 인식 위에서 만든 응급형 선거정책을 생산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올 것이 분명하다.

 

  1.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를 다룬 이 책,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해 온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허풍과 기만의 심리를 노출하면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되는 심리 상태, 우월감에 도취되어 공동체 분열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상태, 권력형 기만증상을 이용하여 확대생산하는 주변정치인들의 동조 양상, 습성대로 행동한 후 반성없이 얼버무리는 기만행위, 너무 잦은 미성숙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인지부조화의 상태를 자주 보아온 우리들, 이 책에서 서술된 수많은 사례들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우리 독자는 씁쓸하다.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4) – 날뛰는 여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인 작품이다. 이야기, 논문, 콩트 등이 결합한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 문학의 이념인 보편 문학의 개념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아마도 책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방랑자들’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아누쉬카이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그녀가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케르베로스의 개(즉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가 지키는 입구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아누쉬카의 아들은 유전적 질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은 아누쉬카와 그의 남편이 체르노바에서 방사선을 쏘였기 때문에 얻은 질병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남편을 돌본다.

그녀의 남편은 감옥에 갔다 온 모양이다. 아들 병의 원인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던 모양이다. 그 뒤 남편 역시 침대에 누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단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밤에는 “형태를 읽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이런 밤에 아누쉬카는 꿈을 꾼다. “목을 자른다든지,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핏물에 담근다든지…”하는 꿈이다. 아누쉬카에게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아들이나 남편, 사회에 있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 단편 전체에 절망적인 분위기로 깔려있다. 작가는 오직 아누쉬카의 내면에만 주목한다.

2)

아누쉬카는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자기의 아들과 손자를 돌본다. 아누쉬카는 그 하루에 약국에 들르거나 음식물을 사거나 하는데, 그날 그녀가 어기지 않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껏 우는 일이다.

그녀는 대개 대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운다. 그녀는 꼭 아버지같이 인자한 모습을 지닌 성상 앞에서 운다. 그녀가 울기 위해서는 주변이 고즈넉해야 하지만 성상의 눈이 그녀를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날도 휴가를 얻어 평소 가던 대성당에 갔지만, 그날따라 관광객이 많아서 아누쉬카는 울음을 터뜨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누쉬카는 도시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이번에는 성상의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에 도대체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누쉬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상을 올려보던 아누쉬카는 성상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성상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히면서 그녀의 먼 곳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마치 뭔가를 체험한 듯했고, 무언가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충격이었지만 어두운 절망적 느낌이 아니었다. 이 느낌을 작가는 “몸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어떤 맑은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서술한다. 아누쉬카에게 어떤 근본적 전회가 일어난 것이다.

끝내 울음을 울지 못한 아누쉬카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집 앞에 도착했지만 돌연 멈추어 선다. 다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그녀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돌아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녀는 울음을 울지 못한 상태에 시달리며 마침내 현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하철의 지하 세계에 산다. 매일 이런저런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면서 끝없이 움직인다. 아누쉬카는 노숙자, 아니 방랑자가 된 것이다.

3)

물에 빠진 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로 악을 쓰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닐까? 성상의 얼굴이 아누쉬카에게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성철 스님이 10년 면벽 수도 끝에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투성이의 세계였다고 한다. 아누시카 역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기에, 그것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아누쉬카가 지하철 노숙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그녀는 덕지덕지 옷을 껴입고 있다. 머리는 수건과 모자로 둘러싸고 지하철역 앞에서 8자를 맴돌면서 입으로는 욕을 쏟아낸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아누쉬카는 날뛰는 여인에게 다가가 밤이면 함께 머무른다.

그리고 어느 날(몇 달이 지났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에 청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는 말을 몰고 온 처녀도 있다.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아누쉬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들이 그의 아들 피에티아[‘피에타’와 같은 말로 보인다)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녀의 안에서 피에티아가 부풀어 오르고 점점 자라났다. 아마 다시 그를 출산해야 할 것 같았다. … 피에티아가 어느 틈에 그녀의 폐에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솟았다. 흐니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누쉬카가 지켜보던 중, 무리 속의 한 처녀가 말이 도망치려 하자, 채찍으로 등을 내리친다. 그것을 보고 아누쉬카와 날뛰는 여인이 달려간다. 그리고 짓눌린 목구멍을 짜내어 소리친다. “(말을) 내버려 두라고!!”

이것은 니체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토리노 시장에서 채찍을 얻어맞는 나귀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는 정신적 어둠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청년들과 싸움을 벌인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갔으나 곧 방면된 아누쉬카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어지는 단편에서 날뛰는 여인이 무슨 욕을 했는지가 나온다. 날뛰는 여인의 말이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은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세상의 지배자와 싸우는 힘은 움직임에 있다. 작가가 소설 방랑자에서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 아누쉬카가 집과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 지하의 세계로 간 이유가 설명된다. 밤의 세계, 지옥의 지배자, 케르베로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누쉬카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울음의 터뜨리는 것 사이의 연관이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마침내 때가 다가온 것인가? 때 즉 카이로스 말이다.

올가 토르카추크의 신비한 철학이 시종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아뉘시카는 울음을 터뜨릴 때를 얻었지만 나는 철학의 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