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푸코에 이어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였다. 푸코는 실천적 관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실제 나중에 정치권에서 친노파를 만들어내는 데 일부분 기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인데, 실천 쪽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문학 비평 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데리다의 사상 중에 흥미를 끌었던 개념은 무슨 ‘중심주의’이다. 그의 사상으로부터 ‘이성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 개념이 나왔다. 그의 철학은 ‘중심’ 중심주의였다. 이런 개념은 기존의 보수적 지배 사상의 비판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주로 운동권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해독되었다. 운동권 사상 역시 보수적 사상에 못지않게 이런 각종 중심주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에서 방법론적 핵심 개념은 ‘차연’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차이와 지연이라는 두 의미를 지닌 합성어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후기구조주의라는 방법론에서 필연적으로 이끌려 나오는 개념이었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모든 구조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다. 그 때문에 어떤 것은 하나의 구조로 파악되는 동시 다른 구조로도 파악된다. 순수한 객관적 대상이 없으니, 두 구조는 하나의 지점에서 중첩될 뿐이며, 바로 이렇게 두 구조가 중첩되는 지점을 지칭하는 개념이 곧 차연이었다.

데리다는 머지않아 이런 차연 개념을 포기하고 레비나스 등과 같이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현상학적 본질직관 개념으로 돌아가는데, 데리다의 후기 사상은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운동권이 자기를 반성하는데 방법론적인 관점을 주었다. 데리다의 주장은 당시까지도 남아서 투쟁했던 운동권의 진영 안에 수류탄을 깐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진리이고 가치 있다고 믿지 않고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욕망일 뿐이니, 세상은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전투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투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2)

그 외에도 나는 알튀쎄와 같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책을 읽었다. 그의 중층적 결정론이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은 명확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느껴졌다. 당시 한국에는 윤소영 교수와 같은 알튀쎄 주의자가 있었고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나로서는 알튀쎄의 철학이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인 보드리야르의 책을 읽기도 했다. 그의 소비사회라는 개념이나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으나, 그는 사회학자에 가깝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으나, 깊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내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이렇게 나는 한 십 년 동안을 당시 유행을 좇아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다행히 학교에서 교과목 개편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대로 나의 강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권리를 얻었기에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교과목으로 설정해서, 내가 공부하면서 동시에 강의하기도 했으니, 나의 실험적 강의를 참고 들어준 학생들에게 지금 미안하기도 하며 동시에 고맙게도 생각한다.

97년 나는 지쳤다. 마침 학교에서 안식년을 받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무슨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유럽에서 나는 97년 겨울 한국이 IMF에 빠지게 되었고 그해 년 말 선거에서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3)

IMF로 망하는 것은 어차피 예견되었던 사실이니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곧 김대중 선생의 당선을 알았을 때, 나는 최초로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대중 선생이 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시절, 노동운동을 배신했을 때도,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는 운동권과 그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경제적 개혁을 달성하리라 믿었다.

이 노선은 박현채 선생이 기초를 잡고 김대중 선생이 널리 알린 대중경제 노선이었다. 그것은 산업의 재편성을 통해 민족경제로 나가는 노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김대중 선생에 기대했다. 이제 정권을 잡았으니 그는 자신의 대중경제 노선을 실천하리라. 희망이 솟았다.

멀리 독일에서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나가면서 나는 이참에 어설픈 현실참여를 끝내고 학자로서의 나의 길을 다잡아 가리라고 생각했다. 독일 튀빙엔은 참 작은 대학 도시였다. 만물은 고요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월의 들판이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가 덮어주던 포프린 이불보에 수 놓인 꽃잎들처럼 들판에는 이름 모를 야생 꽃들이 피었다.

나는 튀빙엔 유학생들과 자주 함께 산책하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나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아서 하는 것은 철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철학도 자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며, 나의 철학적 자의식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자면 철학은 시대의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 실천적 철학이어야 했다.

나는 산책하면서, 내가 10년간 허겁지겁 따라갔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들을 생각해 보았다. 십 년간 그들의 철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으나 손에 잡히는 것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고, 어떤 진리도 가치도 없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과거 운동권은 이제 소확행이라는 개념에 빠져들었다.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이었다. 소확행이란 곧 와인과 여행, 그리고 약간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소확행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중산층적인 물질적 자원이 필요했다. 대학교수로서 나도 이런 소확행의 분위기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나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허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푸코나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조주의라는 무기였다. 이 구조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칸트에 이르고, 언어학이라는 확실한 토대를 갖추고 구조주의 외에도 과학철학(예를 들어 토마스 쿤) 등에서 지지와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알튀쎄를 통해 구조주의로 전향했다.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에서 보듯이 불가피하게 상대주의와 소확행이라는 삶으로 빠지게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던 튀빙엔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던 헤겔 논리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나는 독일어도 잘 모르면서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는 마침 헤겔 논리학 3권 개념론 부분을 읽어나갔다. 독일 교수와 대학원생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헤겔에 관해서라면 그가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헤겔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 도대체 헤겔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헤겔 철학이 어쩌면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이었다.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것을 구조적 좌표 위에 점 찍는 것은 가능했지만 구조가 변동하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변화는 우연일 뿐이었다.

그런데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은 하나의 인식 구조에서 다른 인식 구조로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이행 구조를 밝히게 된다면, 구조가 필연적으로 변동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릎을 쳤다. 이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80년대 헤겔 연구에 이어서 10년 만에 다시 헤겔연구로 돌아서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박사 논문을 통해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을 밝혀 보고자 했다. 나는 튀빙엔 대학교 도서관에서 다시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며 그 가운데 모순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에는 항상 모순이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딜레마로, 어떤 경우에는 자가당착으로 어떤 경우에는 전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정신의 이행은 모순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감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으로 나중에 귀국한 지 2년 뒤 2000년 겨울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목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였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㊹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023년 3월 19일 정암학당 강의록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1)

 

*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제부터 <국가>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 정의로운 국가와 관련한 논의는 일단 주제 구분으로만 보면 3권 말미 412b에서부터 4권 434c까지만 다루어질 정도로 분량이 생각보다 짧다.(<국가> 전체 분량의 15분의 1정도) 내용도 우선 이상 국가의 기본 구조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계층들의 분화 및 그에 따라 등장하는 통치자들의 자격과 생활방식, 근본 임무 등이 언급된 후,(412b-427c) 그런 나라에 어떤 덕들이 깃들어 있기에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가 되는지가(427c-434c) 매우 압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짧기는 하지만 “분업적 공동체로서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세 계층들이 자신의 고유한 직분을 온전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덕목을 갖춘 정의로운 나라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된다.”는 플라톤 이상 국가의 기본 요체를 담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이상국가론으로 알고 있는 독자들로선 학자들이 분류한 소주제별 목차 구성에 있어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를 주제로 내세운 부분이 여기 이 정도 분량으로만 설정되어 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해를 위해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전체 구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국가>는 먼저 제1권에서 부정의한 자가 행복하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논리적 부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적극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살피려면 소문자보다 대문자가 더 잘 보이듯이 개인이 아닌 국가로 확대하여 살피는 것이 한결 쉽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살핀 다음 그것을 통해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또 부정의한 국가를 통해 부정의한 개인을 살핀 후 그 양자를 서로 비교하려 한다. 이에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부터 우선 수립한다.(427c까지) 그리고 그 나라에 깃든 덕목들을 살펴 그 나라가 왜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인지를 언급한다.(434c까지) 여기가 현재 우리 논의가 서 있는 지점이다. 이렇듯 주제 구분상 정의로운 국가의 수립과 특징들을 담고 있는 이 부분은 비록 정의로운 국가의 요체를 담은 것일지라도 소크라테스가 애초에 설정한 전체 논의 구도와 순서에 따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내용이 짧은 것이다.

* 이참에 <국가> 전체의 논의 구도의 이해를 위해 이후의 논의 구도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의 구도상 다음 단계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대문자로서 정의로운 나라를 토대로 소문자로서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나라와 마찬가지로 개인 역시 영혼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고 그곳에도 네 가지 덕목들이 깃들어 있음을 확인한다.(434d-445e) 그리고 논의 계획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비교 대상인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을 다루려 한다. 그러나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은 논의 진행을 저지하고 소크라테스가 앞서(423e-424a) 제시한 이상국가론에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남녀평등, 처자공유 등을 비롯한 몇 가지 난제들을 끌고 들어와 대답을 요구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이른바 세 가지 파도들(449a-474c)이다. 그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애초의 논의 계획을 바꾸어 그들의 문제제기에 답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국가> 5권에서 7권까지의 내용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형식상으로만 보면 일종의 애초 논의 구도에서 일탈된 논의 영역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그 문제점들에 대한 극복의 기초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 거론되고 그것을 논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왕의 위상과 역할,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철학의 교과 및 변증술, 좋음의 이데아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논의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앞서 짧게 기술된 이상 국가 관련 주제들과 내용들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연후 8-9권에 가서 계획된 논의 순서로 돌아가 부정의한 국가와 개인이 살펴지고 그후 비교를 통해 논의 목적대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증명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제4권에서 비록 짧은 분량으로 간단하게 제시되었지만 이후 부분에서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추가적인 논의들을 통해 그 내용들이 더욱 풍성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또한 플라톤 자신이 <국가>를 통해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보다 더 잘 드러내려고 했던 본래의 기획이자 드라마틱한 플롯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이제부터 우리는 다룰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에 관한 논의는 내용적으로 통치자들의 선발 자격과 조건들 그리고 나라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세 계층들에 깃든 덕목들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특징과 규범적 원칙들이 논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통상 우리가 국가론 내지 정치체제론 하면 떠올리는 주제들 즉 정부의 형태, 입법 및 사법과 관련한 조직과 제도, 법률의 체계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은 여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의 덕목과 규범 즉 사람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섣부르다. 앞서도 살폈고 이곳에서도 그렇듯이(417b) <국가> 중간 중간 주요 단계마다 언급 내용들에 대한 법제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데다 특히 말기의 대작 <법률>에 가면 시종일관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누차 강조하였듯이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가> 등 여타의 대화편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물론 무엇보다도 <국가>와 <법률>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 이에 따라 이곳에서 우리들의 논의는 이곳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 및 특징 그리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이 지녀야 할 덕과 규범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되, 필요에 따라 <법률>에 관한 논의를 보충적으로 포함하게 될 것이다. <국가>와 <법률>의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권력과 철학의 결합, 이상국가의 실현가능성을 논하는 5권(471c-474c)에 가서 독립적인 주제로 심도 있게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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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b-c>

*정의로운 국가 수립을 위한 수호자 교육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수호자들 중 ‘누가 다스리고 누가 다스림을 받는지’οἵτινες ἄρξουσί τε καὶ ἄρξονται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바로 통치자들οἱ ἄρχοντες의 선발과 자격이 논의된다. 우선 통치자들은 연장자πρέσβυς이자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 즉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 즉 나라 수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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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자들’의 원어 οἱ ἄρχοντες는 ‘통치자’ 또는 공식 지위로서 ‘집정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ἄρχων(archōn)의 복수형이다. 그런데 이 말은 389a, c에도 나오긴 하지만 이른바 수호자들과 차별하여 이상 국가의 한 계층으로 따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드디어 통치자들, 수호자들, 생산자들로 구분되는 플라톤 정치체제의 기본 구조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철인왕정’이라 부르고 그 철학자 왕이 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종일관 ‘통치자들’로 표현하고 있듯이 <국가>에서는 통치 행위나 통치 역할의 주체를 표현할 경우, 군왕(473c, 543a 등)으로 부르든 철학자로 부르든,  기본적으로 복수 즉 집단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통치자들 가운데 특출한  한 사람이 생길 경우도 상정하고 있다.(445d) 그러나 지위명이나 일반명사 용례(491a, 591a 등)를 포함하여 ‘최선자들의 나라’에 상응하는 개인으로서 ‘왕도 정체적 인간’을 가리키거나 그와 참주의 차이를 비교할 때(580c, 587b 등)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통치자는 복수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흔히들 오로지 1인 군주정 또는 1인 독재정의 국가로만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통치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집단으로서 복수의 통치자들, 군왕들, 철학자들이다.

*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1인 군주정 내지 전제정으로 여기게 된 데는 순전히 텍스트로만 보면 제7권에 나오는 몇 가지 문구들에 대한 표피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통치자들이 ‘서로들 각기 번갈아가며 나라에서 함께 고생한다. συμπονεῖν ἐν τῇ πόλει ἕκαστοι ἐν μέρει’(520d)는 말이 나오고 또 비슷한 내용으로 ‘차례가 오면 서로들 각기 나랏일로 고생하면서 나라를 위한 통치를 한다.πρὸς πολιτικοῖς ἐπιταλαιπωροῦντας καὶ ἄρχοντας ἑκάστους τῆς πόλεως ἕνεκα’(540b)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each other’를 뜻하는 ἕκαστοι(hekastoi)나 ἑκάστους(hekastous)라는 말을 각기 한 사람의 군왕이나 통치자로만 해석하여 최고 통치자의 자리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맡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들 모두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사람만이 아니라 각각의 여러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즉 그 말은 통치와 관련한 복수의 역할들을 복수의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각기 돌아가며 맡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같은 부분(520d)에서 ‘함께 고생한다.’συμπονεῖ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수의 역자들(P. Shorey, G. Grube, C. Reeve)도 모두 그 부분을 ‘각기 돌아가며 나랏일들을 나눠 맡는다.’(to share in the labors of state, each in turn)로 번역하고 있고,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로 알려진 아담(J. Adam) 역시 그 복수형의 의미를 ‘때때로 고생을 서로 덜어주고 있는 (복수의) 통치자들의 (복수의) 교대들(relays of governors relieving one another from time to time)’로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돌아가며 늘 혼자가 다 떠맡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를 돌아가며 혼자가 다 떠맡는다면 임기를 1년씩만 잡아도 50세부터 길게 잡아 70세까지 20년 동안 전체 통치자의 숫자는 20명 정도면 되고 2년씩 잡으면 10명, 4년씩 잡으면 고작 다섯 명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플라톤은 통치자들을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을 각 집단ἔθνος(ethnos)으로 표현하고 있는데(420b) 통상 부족이나 종족 수준의 규모를 나타내는 그 말을 5명에서 20명 정도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이러한 논거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들 1인의 철학자왕정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는 않다. 참고로 그 논거들은 대략 이러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상과 허상이 모든 게 동일하지만 동시에 반대이듯이,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는 허상인 1인 참주정의 정반대 실상으로서 완벽한 철학자 1의 통치체제로 설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치자들을 집단으로 둔 것 역시 철학자가 철학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통치를 수고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분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여럿을 두었을 뿐이다. 일종의 고통 분담 차원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위계나 능력 차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고 완벽한 수준이므로 임기에 구애 없이 누가 돌아가며 통치업무를 맡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통치와 관련하여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도 1인 통치자의 완벽한 능력으로 적합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처리할 수 있다. 등 등

* 그러나 <국가>에는 이 문제를 불식시킬 정도로 결정적인 플라톤의 언급이 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 ‘왕도정체’βασιλεία(basileia)를 ‘특출한 한 사람이 통치하는 체제’로, ‘최선자들의 정체’ἀριστοκρατίᾳ(aristokratia)를 ‘특출한 여럿이 통치하는 체제’로 직접 규정한 후에(445d) 이후의 언급에서 정의로운 국가, 최상위 정치체제는 일관되게 ‘최선자들의 정체’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544e,545c,547c) 물론 왕도정체와 최선자 정체를 구분 짓지 않는 언급들도 나온다.(576e, 580b) 그러나 그 경우는 통치자들 수(數)의 관점이 아니라 두 정체의 통치자들 모두 공히 철학자라는 관점에서 언급될 때이다. 그리고 <국가>의 이상 국가를 본으로 삼아 현실화한 실물로서의 현실 국가를 다루는 <법률>을 보면 그곳의 통치자들 역시 복수의 통치자들이고 역할도 각기 나뉘어져 그들 모두가 통치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의 군왕들이나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역할로서 법수호자를 비롯해 사정관, 교육감독관 등이 나오고 야간위원회라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수 또한 법수호자는 37명이고 사정관들은 최초 12명에서 시작해 매년 3명씩 추가되며(946c) 최고 의사 결정 협의체인 ‘야간위원회’도 법수호자 10명과 수십 명의 사정관들로 구성되어 있다.(<법률> 752e-753a, 946c, 961a) 그리고 이곳에서 플라톤은 설사 최고 통치자를 1인으로 두는 왕도정체라 해도 반드시 입법자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법률> 710d) 도리아 3국 중 스파르타만이 멸망하지 않은 까닭 역시 스파르타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복수의 왕들이 통치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법률> 691d-e) 이렇게 보면 <국가>의 철인왕정이라는 군주정이 <법률>에 가서 완화되어 최고 권력이 한 사람에 치우치지 않고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최고 권력자를 복수로 하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견해 또한 텍스트상으로 맞는 말이 아니다. <국가>도 <법률>도 다 최고 권력자들이 복수이고 그들이 받는 교육 내용 또한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최소한 권력 구조상 ‘철학자 집단의 통치체제’라는 기본 원칙에는 플라톤 중기나 말기나 변화가 없다. 이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을 1인의 철인왕정체로 단정하고 내용적으로 그것을 반민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1인 군주정과 독재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 나치스가 등장하면서 당시 권력가 게오르그(S. Georg) 주변의 명망 있는 독일 철학자들이 이른바 게오르그 학파를 결성하여 나치즘과 히틀러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플라톤의 철인왕정을 적극 내세웠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앞서 살핀 7권 문구들에 대한 그릇된 해석도 기본적으로 그들로부터 시작되고 강화된 것이다. 이들이 펴낸 관련 책들은 지금 이름조차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파시즘은 물론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의 등장과도 맞물려 당대 급진 우파는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플라톤의 정치 철학은 20세기 서구 지성인들에게 독재정과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각인되었고 특히 종전 후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 등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된 이래 가히 전체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철학으로 고착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이에 대한 반론도 고전학자들은 물론 현대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전개되면서 최근에는 플라톤 정치철학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 정치이론을 극복하는 기초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졸고 “플라톤과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정암학당 지음, 동녘, 2017 참고)

* 통치자들이 연장자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나이가 많아야 한다가 아니라 통치자가 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오랜 기간 그 교육과 훈련을 훌륭하게 마친 그 만큼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장자라고 하면 많은 경험들에 기초한 연륜의 깊이를 먼저 떠올리는데 앞서도 살폈듯이 연장자의 훌륭함은 경험의 많고 적음 보다는 그 경험의 종류 즉 경험들이 영혼에 어떤 영향들 주는가에 달려 있다. <법률>에서도 이 원칙은 이어져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법수호자들과 사정관들 모두 연장자들이어야 한다. 특히 그들 중 법수호자들의 경우에는 나랏일과 관련한 최고의 권력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참석할 때 각자 본성과 양육에 있어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30세 이상의 젊은이들을 반드시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961d-e) 이른바 최고의 지성도 가장 뛰어난 감각과 섞여 하나가 될 때 가장 안전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이상적 최선의 본으로서의 <국가>와 차선의 실물로서의 <법률>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원칙과 현실, 철학과 권력, 인치와 법치 등 삶과 현실의 주요한 갈등 국면에서 균형과 조화는 그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담보하는 요체이다.

 

[412d]

* 또 통치자들은 나라 수호에 슬기롭고φρόνιμος 유능해야δυνατός 하며 나라에 마음을 쓰는κηδόμενος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φίλος 것에 제일 마음을 쓰는 법이고 그것은 유익함συμφέρον 또는 잘되고εὖ πράττειν 잘못됨에 있어 자기와 같이 하는 경우의 것이므로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그처럼 나라에 유익한 것이면 누구보다도 열의προθυμία를 다해 온 생애를 통해 그것을 행하려는 사람을 통치자로 선발해야만 한다.(4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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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는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국가를 성립시키는 사람들은 어떤 계층에 속하건 어떤 직능을 갖고 있건 모두가 훌륭한 사람들인 것이다.

* 통치자들의 기본 자격으로서 ‘슬기로움’과 ‘유능함’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씀’은 나중에 언급될 영혼의 이성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예비적으로 풀어서 쓴 말들이다.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나라에 대한 헌신을 말하는 것으로 영혼의 기개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포함하는 말이다.

* 그런데 나라와 통치자들 내지 수호자들의 이해가 동일하다는 생각은 그것만으로는 개인이나 국가들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이기적인 통치자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과 동일하다는 명분하에 국가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격에서 나라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앞서 슬기(지혜)와 유능함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움은 장차 이성 부분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통치에 있어 대상의 이익 즉 시민과 나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앎의 덕목이고 유능함은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힘으로서 실천의 덕목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앎은 이미 실천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슬기가 유능함에 앞서 먼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을 전제로 한 후에 그것에 희생과 헌신 열의가 더해졌을 때 진정한 이상국가의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의 슬기와 유능함은 플라톤의 정체가 철학자들의 정체가 되느냐 피폐한 1인 참주정이 되느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금의 정치현실도 그렇듯이 어리석고 무도한 정치 지도자가 자기 나름으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확신 아래 열의를 갖고 정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열의를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는 파국으로 몰린다. 성서의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수많은 사랑의 권고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평생을 그리하겠노라 마음 새기는 잘 알려진 성구이다. 그러나 덕목들 가운데 ‘의를 위하여 기뻐하며’라는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구에 감동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처신이 얼마나 그 말에 모순되는지는 모른 채 거리낌 없이 공정과 의리도 함께 외쳐댄다. 우리들의 무지는 자신들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눈물이 될 수 있다.

* 이곳에는 통치자들을 누가 어떻게 선발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본과 원칙으로서 말로 세우는 이상국가인 만큼 통치자들의 자격 이외에 제도로 규정되는 구체적인 선발 절차까지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통치 권력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국가>의 원칙을 현실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법률>을 보면 <국가>의 통치자들에 버금가는 법수호자들의 선발 절차가 언급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빌어 “기병이나 보병에 복무하는 사람들, 그리고 감당할 힘이 있는 나이에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관리들의 선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법률> 752e-754a) 관리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국가>에서 통치자로 번역되는 ἄρχων(archōn)으로 당연히 법수호자도 포함한다. 또 그들의 임기 역시 70세로 제한이 있어 법수호자들은 순차로 교체된다. 물론 이 선발 절차가 <국가>의 통치자 선발과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록 통치자 집단의 피선거권은 ‘최선자들’이란 제한 조건이 붙어 있지만 플라톤 스스로 통치자들을 선발하는 사람들로서 장교는 물론 일반 병사 등 시민 계급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이 된 촛불 집회에서 가장 많이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도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최고 통치자들로서 법수호자들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 정체처럼 시민들의 추천과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권력이 위임된 복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바람직한 정치체제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도 추후 별도의 독립적인 주제로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1) 끝. 다음 회에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2), 건국신화 계속)

[신간안내]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 박종성 번역, 부북스, 2023년 2월 28일) [한철연 소식]

『유일자와 그의 소유』(막스 슈티르너 지음 · 박종성 번역, 부북스, 2023년 2월 28일)

 

막스 슈티르너의 명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슈티르너 철학 전공자인 한철연 박종성 회원이 번역하여 최근 출간하었습니다. 슈티르너 저서가 국내에 변역된 것은 처음입니다. 본 웹진의 블로그진에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코너를 연재하고 있는 박종성 회원은 박사학위 취득 이후 슈티르너의 철학을 규명하겠다는 일념 아래 오랜시간 동안 번역 작업에 몰두하였고 그 결실이 번역서 출간으로 맺어졌습니다. 슈티르너에 대한 국내 학계의 수요와 연구가 거의 전무한 현실에서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 사상 연구자 및 독일 철학 전공자들은 한번 관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겨봐야할 것 같습니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모든 종교, 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그의 글은 자신을 많은 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기존의 모든 종교, 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정중하게 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의 모든 현존하는 동시대의 종교, 철학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뻔뻔스럽고 통렬하게 도전했다. 놀랍지 않게, 이 일은 자신들의 위대한 이념들과 이론들을 완성하거나 실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모든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이데올로기 연구자들이 슈티르너를 기피인물로 만들었다. 박종성의 번역이 그 기피인물과 마주할 기회를 주었다. -김성민(건국대 철학과 교수)

혁명이 아닌 반란을 꿈꾼 슈티르너가 세상에 내놓은 마치 침묵과도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항변서. 그에게 ‘나’란, 대의나 이념에 종속된 자가 아닐뿐더러 인간이라는 일반성에 매몰될 수 없는 존재이며 심지어 언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창조적 존재이다. 자신을 지우라고 요구하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읽어야 할 책. -전호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현실적 대안을 고민했던 마르크스에게 몽상을 늘어놓는 급진주의자들이란 지극히 위험한 존재였다. 꿈이란 나아갈 길을 잊도록 할 만큼 너무도 매혹적이기에. 마르크스가 보기에 슈티르너의 꿈은 특히 위험했다. 일체의 속박도, 굴종도, 타협도 없는 ‘나’의 완전한 해방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티르너의 꿈은 특정한 통치체계의 구축이나 삶의 안정 따위로 ‘나’의 해방이 결코 완결될 수 없음을, 오히려 항상 되풀이하고 되돌아 봐야 할 꿈임을 웅변한다. 이는 안존과 타성이 유일한 삶의 양식인 우리에게 ‘나’를 일깨우는 각별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박종성은 십수 년의 노력으로 슈티르너의 목소리,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고스란히 우리말로 옮겨주었다. 자, 이제 슈티르너의 일갈에 귀 기울여 속박을 안식으로 여기는 초라한 ‘나’를 돌아보자.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철학자의 서재』1, 2(공저), 『B급 철학』(공저), 『코뮨의 미래』(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현재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화 ‘타르’ – 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영화 ‘타르’-음악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1) 타르의 몰락

영화 ‘타르’는 레즈비언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수석 지휘자인 타르의 몰락을 그리는 영화다. 그녀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 선 여성이다. 그녀는 줄리아드 교수이며, 자서전 ‘타르가 타르에 대해’를 출판했고, 아코디언이라는 여성 음악가를 육성하는 시민 단체를 맡고 있다.

그런 그녀를 몰락시킨, 그것도 한순간에 몰락시킨 것은 그녀의 성적 충동이다. 그녀는 이미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리니스트인 여성과 함께 살고 있다. 그 외에도 그녀는 비서인 프란체스카나, 아코디언 소속 학생인 크리스타와도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 그녀에게 러시아에서 건너온, 아직 소녀 티를 벗어나지 않은, 발랄하고 육감적인 느낌을 주는 첼리스트 올가는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필하모니의 부지휘자의 자리를 기대했던 프란체스카는 그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자 크리스타와 타르의 관계를 폭로한다. 크리스타의 부모가 그녀를 언론에 고발하자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게다가 타르가 프란체스카를 대신하여 비서로 삼아 데리고 뉴욕에 출장 간 올가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그녀는 갑작스럽게 추락하고 만다.

성적 충동으로 한 인간이 몰락한다는 스토리만 놓고 본다면, 굳이 이 영화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2시간 40분에 걸친 영화가 시종일관 관객이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몰락하는 타르 내면의 균열이다.

흥미로운 것은 타르 내면의 균열과 더불어 음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음악의 탄생은 타르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처음 음악은 마치 딩동 하는 알림 소리처럼 마음에 떠오른다. 조금 지나면 음악은 어디선가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처럼 울린다. 그녀는 메트로놈 소리를 듣고 한밤중에 깨어나며, 살펴보니 메트로놈이 벽장에 감추어져 있다.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무언가 위기를 알리는 듯한데, 타르는 급히 오선지를 펼쳐 이를 음악으로 작곡해 나간다.

내면의 소리에서 음악이 탄생하는 모습은 키에슬로프의 영화 ‘세 가지 색깔-블루’에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주인공 쥴리는 내면에서 점차 확대되며 들려오는 소리를 악곡으로 작곡해 나간다. 다만 ‘블루’에서는 죽음과 같은 절망에 빠진 쥴리의 내면에 조금씩 생명의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음악은 부풀어 오르는 생명감과 비례한다. 반면 영화 ‘타르’에서는 오히려 음악의 출현은 주인공의 몰락과 교차하고 있다.

2) 음악의 원천

음악과 몰락이 서로 교차하는 긴장의 정점에서 타르는 올가를 따라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내려간다. 마치 환상의 세계 속에 들어선 듯 지하실은 황폐하고 올가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타르가 지하실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섰을 때, 거기엔 희미하게 호랑이 같은 물체가 으르렁거린다. 타르는 두려움에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쓰러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크게 다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르는 자신이 작곡하던 음악을 완성하게 된다.

영화 블루에서와 달리 생의 희망이 아니라 죽음에의 몰락이 오히려 음악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쇼펜하우어, 그리고 그의 제자인 니체는 음악의 근원을 디오니소스적인 몰락에의 의지에서 찾았으니까 말이다.

과연 음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 ‘블루’에서처럼 생에의 희망이 음악의 원천인가 아니면, 영화 ‘타르’에서처럼 몰락에의 의지가 음악의 근원인가?

영화 ‘타르’에서 감독은 영화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떻게 보면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이 보이는 타르와의 대담을 보여준다. 여기서 타르는 다음 번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은 이 작품(특히 4장)은 죽음을 그린 것으로 보지만, 그녀는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말러가 그녀의 연인인 알마에게 헌정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는가? 영화 ‘타르’에서도 타르는 자신이 몰락을 경험하면서 작곡한 곡을 자신의 딸에게 헌정한다. 그 딸은(아마도 함께 살던 바이올리니스트의 딸인 듯한데) 타르가 유일하게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보살피는 딸이다. 여기서도 몰락에서 나온 음악이 생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죽음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동시에 사랑, 또는 생에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쩌면 죽음에 의지가 곧 생에의 의지, 사랑에의 의지인 것이 아닐까?

3) 음악의 자율성

이 영화에서 음악에 대한 물음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첫 번째 대담 장면에 이어서 다음 장면에서 타르는 줄리아드 대학교에서 지휘법을 강의한다. 여기서 타르는 음대 학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타르가 바흐를 언급하자, 학생은 바흐는 반여성적이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음악이 음악가의 개인적 삶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음악은 고유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인지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타르는 음악은 자율적인 것이며 음악과 개인적인 삶은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논쟁 중에 타르는 자신은 레즈비언이지만 자신은 음악 속에서 항상 신을 느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이 타르의 음악이 그 자신의 몰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면, 음악이 자율적이라는 그녀 자신의 주장과 충돌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스토리 전개 대부분은 주로 클래식 음악에 기초한다. 영화 ‘타르’에서 흥미로운 것은 처음과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대조되는 음악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처음 인트로 장면에서 오랫동안 어두운 화면을 보여주면서, 배경에 음악을 들려주는데, 아마도 아랍 쪽의 음악인 듯이 보인다. 음악은 비애적이지만 단조로운 여인의 한탄처럼 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부근에 나오는 음악은 타악기 위주의 사이키델릭한 전자 음악이다. 감독이 인트로와 마지막에 이런 음악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이런 음악을 통해 음악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우리의 물음은 이렇게 종합될 수 있다. 음악은 자율적인가 아니면 삶을 배경으로 하는 것인가? 음악은 삶 가운데 몰락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생에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가?

음악이 지닌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헤겔의 음악론은 이런 이중성을 설명하는 데 하나의 디딤돌을 제시할 지도 모른다. 헤겔은 음악은 삶에서 나온 자연적 소리를 테마로 삼아 고유한 음악적 방법으로 이를 전개한다고 본다. 이는 마치 베토벤의 교양곡 9번에서 문들 두들기는 소리가 음악적으로 전개된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음악이 근대의 파토스적 인간을 표현한다고 본다. 이런 파토스적 인간이란 즉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오델로나 맥베스와 같은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파토스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보듯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지만, 헤겔은 이런 파괴는 오히려 개인이 실체적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해방의 길이라 한다. 몰락이 곧 해방이라는 헤겔의 주장은 곧 음악의 이중성을 설명할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㊸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3)

[410a-412b]

* 그리고 정의로운 나라의 젊은이들은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는다고 우리가 말한 저 단순한ἁπλός 시가μουσικῇ를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재판술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410a) 그리고 시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같은 발자취를 좇아가며 체육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고 이 체조와 운동γυμνάσιον καὶ πόνος을 열심히 하려는 이유 또한 다른 선수들이 그저 힘ἰσχύς만을 키우기 위해 운동과 식생활을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천성 중 기개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10b)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을 제도화한 목적이 체육은 몸을 돌보기 위해서, 시가는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둘 다 영혼을 위하는데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렇다고 시가 교육이 영혼에 관여한다 해서 체육보다 시가 교육에 더 치중해서도 안 된다.(410c) 왜냐하면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영혼 또한 가장 온전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체육만 평생 어울려 지내고 시가는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필요τὸ δέον 이상으로 ‘사납고ἀγριότητός 완고한σκληρότητος 상태의 마음’διάνοια을 갖게 되고 그 반대로 시가에 치우치고 체육은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부드럽고μαλακίας 온순한ἥμερος 상태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410d) 사나움ἀγριότητός은 천성φύσις 중 기개적인 부분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ἀνδρεία가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장되면 딱딱해지고 고약해지기χαλεπὸν 십상이라는 것이다.(410d) 그리고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κόσμιον 될 것이라고 말한다.(410e) 그래서 수호자들은 성향상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 양쪽 측면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조화를 이루어ἁρμόζειν 절제τὸ σῶφρον와 용기를 갖추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비겁하고ἀνάρμοστος 사납게 된다는 것이다.(410e)

*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위와 같은 부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누군가가 시가에 자신을 맡겨 아울로스 연주에 심취하여 달콤하고 유약하며 구슬픈 화음ἁρμονία의 음악들을 마치 깔때기처럼 귀를 통해서 영혼에 쏟아붓는 경우, 처음에는 쇠를 무르게 하듯 기개의 경직된 상태를 무르게 하여(411a) 조금은 쓸모 있는 상태로 만들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시가를 들이부으며 시가에 홀려있기만 한다면, 결국 그는 기개를 완전히 녹여버리고, 힘줄을 끊어내듯 그것을 영혼에서 끊어내어 ‘유약한 창병(槍兵)αἰχμητής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애초에 타고나기를 기개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고 반대로 기개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개를 허약해지게 해서 성마르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 벌컥 성을 냈다가도 금세 사그라지게 만든다고 말한다.(411b) 그와 달리 체육에만 매달리고 시가와 철학은 손대지 않는 사람은 처음에는 몸을 잘 유지하고 기개로 가득 차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Μοῦσα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경우에는(411c) 비록 그의 영혼에 배움μάθημα을 사랑하는 면모가 좀 있다 할지라도, 배움과 탐구ζήτημα도 전혀 맛보지 못하고 논변λόγος이나 나머지 다른 시가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마침내는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귀먹고 눈멀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논변을 혐오하는μισόλογος 자가 되고 시가에 무지한 사람이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Πειθώ하는 법이 없고,(411d) 아무 일에나 짐승처럼 야만스러운 폭력을 사용하며, 장단에 맞지 않고 천박하게 무지함ἀμαθίᾳ과 서투름σκαιότης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προσήκοντος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ἐπιτεινομένω καὶ ἀνιεμένω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가와 체육을 가장 아름답게 섞어서κεραννύντα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하는 사람, 이 사람을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아가 그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나라에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어떤 감독자ἐπιστάτης가 늘 필요하다고 말한다.(41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춤이나 사냥, 짐승몰이, 그리고 체육경기, 말들로 하는 경합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의 규범τύπος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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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질병과 건강 모두 철저히 자기 관리에 달렸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관리의 궁극 목표가 영혼을 보살피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체육 교육의 목표 또한 영혼의 돌봄에 있다는 생각은 당대의 체육 교육관과 차별하여 플라톤이 처음 제시한 것이다. 몸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더라도 그에게서 정신의 건강은 몸의 건강을 담보한다.

* 여기서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나움ἀγριότης과 거칠음σκληρότης, 부드러움μαλακία과 온순함ἡμερότης, 단정함κόσμιον 등이 나온다. 우선 사나움과 거칢은 기개 부분의 양육 상태에 따라 용감함에 대비해서 나타나는 마음 상태들이다.(410d), 그리고 부드러움은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상태이고(410d) 온순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이고 단정함은 그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때 드러나는 마음 상태이다.(410e) 그러니까 사나움과 거칠음은 기개 부분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고 부드러움과 온순함, 단정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다.

* 그런데 부드러움μαλακία은 여기서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soft, mild, gentle의 뜻 외에 부정적인 의미로 morally weak, lacking in self-control의 뜻도 있고 실제로 <국가> 556c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부드러움을 기개부분이 약해지면 드러나는 마음 상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도 기개 부분이 노래에 매료되는 정도에 따라 부드럽게 되거나 지나칠 경우 아예 녹아 버리는 마음 상태로 언급되기도 한다.(411b). 단정함κόσμιον 또한 여기서는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되었을 때의 상태로 언급되고 있지만(410e) 질서, 절도well-ordered의 뜻은 물론(329d) 얌전함과 조신함of a patient, quiet, modest의 뜻도 있어 오히려 기개 부분이 지닌 용기에 대비되는 마음 상태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J. Adam의 해당 부분 Note 참고)

* 그래서일까,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 될 것”(410e)이란 문장에서 ‘이것’αὐτοῦ이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란이 있다. 여기서 우선 네 가지 특성 즉 사나움과 거칢, 부드러움과 온순함이 구별된다. 이 중 사나움은 기개 부분에 유래하는 것으로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가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거칠게 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의문도 생긴다. 앞의 문장(410e)을 언뜻 보면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J. Stallbaum 등) 그렇지만 이것은 문법적으로 ‘온순함’을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εἴη의 주어로 새로 끼워 놓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경우 또 ‘온순하고 단정하게’라는 말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온순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J. Adam의 해당 Note 참고) 물론 이 경우 내용상 ‘온순함이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는 역어 상 동어반복으로 보여 다소 어색하지만, 이 말은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제대로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란 의미를 내포한다.

* 이어서 체육에만 매달려 시가와 철학을 게을리했을 경우 초래되는 여러 양태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 제기된 언급들이다. 내용적으로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으로서 배움과 탐구 및 논변과 설득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그 반대의 경우로서 논변 혐오와 폭력, 무지함과 서투름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411e)의 표현은 영혼이 음악적 이미지를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영혼은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이라는 두 가지 현χορδή들의 풀고 당김을 통해 조화롭고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는 일종의 음악이고 그런 점에서 그와 같은 조화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은 실제 현악기의 현을 조율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시가적인 사람이다.(412a) (<라케스> 188d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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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도 언급했듯이 시가교육이나 체육교육 모두 영혼의 상태가 핵심적인 관심사항이다. 사실 나중(439d)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영혼 3분설이란 이름으로 익히 많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성 부분τὸ λογιστικὸν과 기개 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과 욕구 부분 ἐπιθυμητικόν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은 내용상 이성 부분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들 간의 조화가 이루어지 않았을 경우 나타나게 되는 영혼의 상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가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내용들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플라톤의 영혼론(434c-441c)의 예비적인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영혼에 미치는 대조적인 영향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 영향에 따라 영혼의 기개부분과 이성부분이 드러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양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기개부분에 시가 교육이 지나치면 기개를 허약하게 하여 유약한 창병으로 만들고 반대로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짐승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다. 즉 영혼의 기개부분의 온전한 상태인 용감한 상태를 중심으로 교육 정도에 따라 유약함과 야만스러움, 이른바 비겁과 만용의 상태가 초래되는 것이다.(411e-a)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 즉 이성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아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논변을 혐오하는 자가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하지 않고 짐승처럼 야만스런 폭력을 사용하며, 천박하게 무지함과 서투름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411d-e)

* 이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도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지혜를 가운데 두고 영악함과 아둔함 양쪽으로, 기개 부분도 용기를 가운데 두고 비겁과 만용 양쪽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기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욕구 부분 역시 절제를 가운데 두고 인색과 사치 양쪽으로 각각 다양한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 모두 교육 여하에 따라 각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한 사람의 전체적인 영혼의 상태는 그러한 각 부분의 각기 다른 양태들 간의 다양한 관계로 나타나며, 또 그에 따라 각 사람들의 소질 또한 그것들의 다양한 상호 조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여기듯 ‘영혼의 이성부분, 기개부분, 욕구 부분 각각이 가장 완전한 상태들을 이룬 상태에서 그것들 간에 성립되는 조화’만이 조화의 유일한 상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화 상태는 통치자가 가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영혼의 조화 상태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조화로운 인간 영혼의 상태’가 갖는 다양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를테면 이상적인 군인이나 이상적인 생산자는 조화의 양상은 다르지만, 이상적인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고유한 소질을 구현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이곳의 논의는 논의의 기본 취지대로 시가 및 체육교육의 조화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부차적으로는 그러한 시가 및 체육 교육이 결과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 또한, 비록 크게는 각자의 천성에 따라 세 가지 양태로 구분되어 나타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같은 계층의 개인들끼리도 다양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함께 일깨워 준다. 통치자 계층이나 군인 계층이나 생산자 계층이나 어느 계층에 속하는 그 누구든 조화로운 영혼의 양태가 로봇이 아닌 한, 계층별로 어찌 천편일률적이겠는가.

*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영혼 각 부분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 간의 조화이지 논의 전개상 아직은 영혼들 각 부분의 조화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들 각 부분 간의 균형과 조화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관장하고 그 이성적인 부분의 상태는 앞서 살폈듯이 교육 여하에 따라 사람마다 다양하다. 이를테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지혜를 가장 잘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그 지혜와 조화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 최상의 조화도 구현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는 영혼의 기개부분과 욕구부분은 이성 부분의 발달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은 욕구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스스로 생산 능력을 가장 발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절제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의 조화에도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고 있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과 기개적인 부분은 욕구 부분의 발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수호자 계층에 속하면서 통치자를 보조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이상국가 내의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상태를 갖고 있으면서 모두 다 자기의 천성과 소질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최상의 내적 조화를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만 영혼들 간의 최상의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다른 계층은 그 보다 떨어지는 이른바 영혼의 부조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만 천성에 맞춰 그들이 구현하는 조화의 양상만 다를 뿐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 내 사람들 모두는 영혼의 각 부분의 다양한 상태들이 각 부분 간의 무수한 상호 조합 방식의 차이에 따라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영혼의 양태를 갖고 있고 각기 고유한 특성에 따라 분업적 사회공동체의 다양한 직능들을 나눠 맞는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비록 사회적 계층들과 구성원 간의 조화를 관장하는 통치자의 역할이 가장 중시되고는 있지만 단지 통치자의 역할만으로 성립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상 국가는 분업적인 사회공동체 내에서 각기 다른 본성과 그에 따른 역할을 가진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 각각이 스스로 최선의 내적인 영혼의 조화를 보전하면서 사회적인 자기 직분을 다 했을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기다운 삶을 누리는 공동체가 이상국가론의 목표인 것이다. 개인의 행복감 또한 양상은 각기 달라도 각자 영혼의 조화 상태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상국가의 구성원들은 계층과 직능에 상관없이 모두 행복하다.

*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드러내는 위와 같은 모습들은 비록 영혼의 조화 양상 측면에서만 살펴본 단편적인 내용들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그 구상만으로도 이미 환상이라 할 정도로 현금의 우리들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면 현대 금융 자본주의는 확신에 차 있듯 인간의 본성을 오로지 물질적 욕망으로 환원하여 획일화해버렸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대부분 나라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날이 갈수록 더 벗어나기 힘든 고통과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상태를 절망적인 눈으로 지켜볼 수만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그 극복을 향한 몸부림의 하나로 철학적인 숙고도 끊임없이 감행해야 한다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비록 고대 저작의 한계에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발상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각기 다른 소질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모색의 고전적이고 반성적인 지표로서 매우 의미 있는 논점과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플라톤 역시 이러한 논의들을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꿈꾸듯 써내려 간 것이 아니라 병들대로 병들어 있는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헤쳐 가며 체득한 고뇌어린 성찰을 토대로 토로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그의 영혼론과 정의로운 정치체제론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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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 역시 체조와 운동, 식생활의 관리 등의 방식으로 힘을 키우고 건강한 신체를 보전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이 체육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며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체육 교육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체육 교육의 목표와 시가 교육의 목표는 종국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체육은 몸을 돌보고 시가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그 둘 다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위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대전체와 원칙 아래에서 체조와 운동 식생활 관리 등의 체육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라는 근본 원칙 위에서 체육 교육과 시가 교육은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논의의 마지막 부분은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부조화를 이루었을 경우 어떠한 심각한 지경에 이르는지를 아주 상세하고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수호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면과 기개적인 면을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서로 당기고 풀어 가며 양 측면의 조화를 이루어 종국적으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으로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러한 체제를 나라에서 보존할 수 있는 어떤 감독자가 늘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이것들이야말로 교육과 양육의 규범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시가 및 체육 교육과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마침내 이상국가론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 체제의 보전을 위한 감독자로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통치자에 대한 논의로 대화를 이끈다.

<체육 교육 끝. 다음 주제 :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신화(412b-415d)>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

1)

부산에 정착해서 모처럼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여유를 이용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었으므로, 사전을 찾아가며 까다로운 원전을 그것도 관계대명사로 이어진 마르크스의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자본론 읽기를 가로막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방대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교수를 혹사했다. 나는 거의 매 학기 18시간 어떤 때는 24시간까지 강의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일상적인 업무, 학생들과의 만남, 교수로서의 학내 투쟁과 대외 투쟁이 나의 초조한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나는 마르크스 자본론 3권을 쌓아 놓고, 매일 남은 페이지가 얼마인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최초의 계획은 자본론을 다 읽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헤겔 논리학의 진행 방식을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론을 거의 다 읽기까지, 도무지 헤겔의 논리학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으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었다.

거기에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로 구 운동권은 독선적이고, 영웅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이라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런 비판의 최종 점정{點睛]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였다. 그 시가 내용만 본다면, 꼭 당시 운동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필요는 없었으나 누구나 그의 시를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그런 비판 앞에 운동권은 고개를 숙였으며, 부끄러움 때문에 병이 들었다.

구 운동권은 길을 잃었다. 대부분, 현실 정치권으로 흡수되었으며, 일부는 명상운동으로 나갔다. 이 시기 ‘방하[放下: 내려놓다]’라는 참선이 유행했다. 나는 과거 누구보다도 급진적이었으나 그 후 방하 운동에 참여했던 어느 교수로부터 술 자리에서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몰랐으나, 잘못했다는 죄책감만은 누구나 지나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슬픔은 느끼지만, 무엇이 슬픈지는 모르는 상태와 같았다.

2)

이 시기, 구 운동권 문화를 대체하려는 듯이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으니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발전시킨 문화가 곧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80년대 들어 유행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었고 신자유주의로 변화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서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수입된 것이다. 당혹했지만, 먼저 문화가 수입되고 나중에 사회가 변화한다는 한국문화의 일반적 발전 법칙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삽시간에 세상을 점령했다. 우리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하는 데 현실의 변화보다, 오히려 90년대 초 부딪힌 구 운동권의 좌절감과 자기비판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운동권의 거대 담론을 부정하지는 못했으나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 구원을 느꼈으며 구 운동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끌려갔다.

어떻든, 포스트모더니즘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보다는 유희적이고 장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욕적이고 엘리트적이었던 모더니즘 문화에 대립하면서 쾌락을 허용하고, 대중성과 상업성을 받아들이자 했다.

민족과 민중을 말하는 것은 마치 철 지난 옷을 다시 꺼내 입는 것과 같았다. 그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일상적 투쟁이 독자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여성 운동, 지역 운동, 문화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등. 이와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단체가 세워졌다. 과거에 모든 단체 이름 앞에는 ‘민중’이나 ‘민족’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름 앞에 ‘시민’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며, 아예 ‘경실연’이라든가 ‘참여연대’라든가 하는 독특한 이름이 등장했다.

새로운 운동 단체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자 했으며 세상은 합의를 통해 결정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길거리에서 시위는 진정되고 법과 언론을 이용한 투쟁 방식이 등장했다. 이제 앞에 고발장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걸어가는 단체 대표의 모습이 언론을 장식했다.

2)

이러한 새로운 시민운동,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소위 자유주의 철학이었다. 갑자기 푸코와 데리다,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밀어닥쳤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밀어닥칠 때는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 역시 여기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자본론을 거의 다 읽은 단계에서 원래의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새롭게 소개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의 책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다. 나는 불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아직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영어번역본을 구해 읽었다.

일단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구조주의는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놓았는데,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와 주체 속에서 모든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으나 구조주의는 이런 역사의 개념이나 주체의 개념을 비웃었다. 한순간 내가 딛고 있는 받침대가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구조주의는 구조의 변화만을 말했지, 이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역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역사의 변화를 믿는 편이었는데, 그렇다면 구조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일단 구조 개념의 철학적 토대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구조주의에 매료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를 더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3)

처음 손에 잡았던 철학자는 푸코였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동의할 만했다. 그는 생체 권력이나, 판옵티콘의 자아 감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니,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이런 권력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매료되었던 개념은 푸코의 권력 개념보다 담론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담론을 형성하는 담론의 구조를 제시하면서 이런 담론의 구조가 권력의 지배 아래 형성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진리의 기준이나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이런 권력의 지배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 하면서, 소위 ‘지식-권력 복합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푸코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억압적 거대 권력 개념과 이데올로기 개념과 대조되면서 나에게는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푸코의 주장은 당시 확산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 독자적 운동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 운동은 각 분야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을 제거하려는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푸코의 사상은 프랑스와 같이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노골적인 폭력 장치를 통해 강제적인 억압이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푸코의 투쟁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 처음 등장한 다양한 시민운동은 90년대 초중반에만 해도 아직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시민 운동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되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철학일지(5)[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5)

1)

앞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관련되어 두 가지 이채로운 일 중 한 가지를 소개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제 또 하나의 이채로운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나는 많은 인문학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질 때, 철학연구자들보다 앞서서 이들 연구자들도 이미 자기의 분야에서 연구회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 거의 학문의 분과마다 하나의 학회나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학문이 아카데미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현실에 복무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진 조금 뒤 다양한 연구회 사이에 통합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합동 단체를 만드는 데 모두들 진심이었다. 합동 단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학술단체협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요즈음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단체였다. 학문간, 학제간 통합된 연구자 단체는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입한 연구단체의 전체 나, 정확한 결성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

학단협이 만들어질 때 준비 모임에 후배들의 위임을 받아 내가 참석했던 것 같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산업사회연구회의 조희연 선생이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급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려 했던 것 같은데 농업 문제 연구자인 이우재 선생이 제동을 걸면서 상당히 대중적이고 온건한 단체가 되었다. 나는 이우재 선생의 편에 들었기 때문에 조희연 선생과 여러 번 부딪혔지만, 그런 충돌이 학술단체 협의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적 공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나중에 이 단체 출신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진출하면서 민교협이나 교수노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어떻든 이 단체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학문 전선에서도 하나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시의 영향을 받아 진지전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는데, 마침내 다른 모든 투쟁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의 진지가 꾸려졌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창립총회는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열렸다. 내 기억으로는 통신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아마 강당의 규모가 500석정도 되었는데 그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철학 전공자만이 아니라 비철학 연구자나 일반 대중도 이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주제도 기존의 철학계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주제였다. 우리는 당시 연구자들의 많은 존경을 받던 언론인 이영희 선생이나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 영문학자 백낙청 선생 등의 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마 어마어마한 규모의 참석자가 창립총회에 모여들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역시 백낙청 선생의 사상을 연구해서 발표했는데, 그 본문 역시 어딘가 있을 텐데, 굳이 찾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기존의 철학계를 비판하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나는 누구도 하지 않던 연구를 했다. 철학계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을 호기심이나 개인적 선호에 따라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개인적인 선호로 본다면 단연 실존철학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철학에서도 올바름이라는 것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올바름 자체가 사실 철학적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때는 올바름이란 영원한 잣대가 있고 철학도 그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엇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삶과 철학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올바른 철학은 올바른 삶으로 나타날 것이고, 거꾸로 올바르지 못한 철학자의 삶은 원래 그의 철학 자체 내에 그런 올바르지 못한 삶이 잉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올바른 철학의 흔적을 계승하고 싶었다. 나는 몇몇 철학적으로 올바른 흔적도 발견했다.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이름이 이때 기억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올바르지 못한 철학은 비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순한 구도였다. 현실에 기여, 삶과 철학을 곧바로 이어버린 이런 구도는 지금 보면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때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에서 했던 또 하나의 작업은 북한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철학 연구도 우리 민족의 철학 연구이니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북쪽의 철학이 운동권을 통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너무 단편적이었다.

북쪽의 철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런 철학이 전개된 과정이 이해되어야 했다. 단순히 그쪽 사회의 역사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철학이 나오기까지 많은 철학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었으리라. 그런 철학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해되어야만 북쪽의 철학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의 철학자가 누구인지,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침, 송상용 교수님이 안기부와 협조하고 일본의 조선대학과 연결하여 북쪽의 철학자가 발표한 논문집을 복사하여 들여왔다.

대부분의 복사는 북쪽의 학계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연구잡지였다.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잡지 전체를 복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70년대 말 이후 철학 잡지는 단절되었고 80년대 후에 다시 복간된 철학잡지는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잡지를 철학의 분야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기부의 도움으로 잡지를 복사해 왔으니 우리의 연구발표도 안기부에서 허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북쪽 철학에 관련된 심포지움을 열고자 했을 때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안기부에서 허용할 수 없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의 연구는 시대와 철학에 발표하기로 하고 심포지움 개최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심포지움에서 북쪽의 사회철학적 연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발견한 잡지의 대부분의 연구는 북쪽이 아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에 머무를 때 나온 것이어서 소련이나 기타 사회주의 진영에서 연구된 내용과 크게 다른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성과는 쌓여갔으나, 현실의 운동은 점차 좌절감에 사로잡혀갔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부 시절 3당 합당이 일어나자, 사회의 민주화는 다시 한 번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산화를 신문지상에서 보면서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속이 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감을 내적으로 느꼈으나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 80년대 말 고르바죠프의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생계와 관련하여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는 활로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교내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사회철학이나 근대사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새롭게 개설하였다. 마침 철학과에서 사회철학 담당교수를 뽑으려 했는데, 이때 동아대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내려오기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요청대로 동아대학교에 지원했다. 교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민주적 총장이 선출된 상황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다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말하자면 학생들이 뽑은 교수가 되었다. 68혁명 시대 파리 벵센느 실험대학에서 학생이 교수를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그런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그때는 있었다.

5)

나는 부산에 내려가면서 이제부터는 학자가 되기로 했다. 한편으로 학생을 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연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헤겔 철학이었다.

내가 다시 헤겔철학을 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 때문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는데 자본론 앞 상품 화폐 장 속에 마르크스의 설명에 너무 매혹되었다. 그 설명은 내가 헤겔 논리학을 읽다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변증법의 논리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헤겔의 변증법에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어 헤겔의 논리학을 자본론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철학 일지(4)[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4)

1)

역사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85년 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 때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가만히 시골에서 무위 도식할 수는 없었다.

85년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회철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철학도들이 모여 작은 연구실을 마련했다. 처음엔 신림동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곧 봉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처음 했던 사업이 사전을 번역하던 것 같은데,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이 열린 것인지, 연구실을 열어놓으니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아마 후자였으리라. 그렇다면 왜 처음에 연구실을 내려 했던 것일까? 모여서 공부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때 다른 학문 영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연구자들이 모인 연구실이 세워졌으므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당시 운영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의 이런저런 앞에서 말했던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 있을 텐데 그걸 열 수 없으니,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하자.

대체 무엇을 연구했을까?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역사나 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그때는 학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남은 노트들은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관해,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노트들이다. 그런 것들은 철학 밖의 글이니 여기서 소개할 것은 못 된다. 철학적으로는 여전히 철학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이런저런 장소에서 철학 논쟁에 관해 설명했다.

이 시기에 거꾸로 나는 철학을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없었다. 방금 말했던 다양한 사회 역사 공부와 철학 소모임 활동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생계를 위해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건성으로 했을 뿐이다. 나는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는 밤에 늦게 들어갔다. 어쩌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곧 전환점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있었고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다시 확신시켜주는 여러 사건을 만났다.

뭐가 할까, 순진한 시절이었다. 사회 역사적 현실을 알기만 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열정이 지배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 시절만큼 철학자가 높이 대우받았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정말 자부심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 철학을 통달했다고 믿었고 남들 앞에서 자랑했으니 어리석은 치기가 지배했다. 곧 그런 치기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

2)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한 달이 다가왔다. 87년 6월이었다. 매일 거리로 쏟아져 나갔고 우리 대학원생도 석 박사 과정 가릴 것 없이, 사회철학을 하든 아니든 함께 모여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도 행복했고 거리에서 만난 누구도 모두 친구였다. 길거리에서 흩어졌던 철학과 대학원 선후배를 만나면 그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해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시청 앞 광장에 10만 군중이 모였을 때, 나는 역사의 대낮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은 역사의 신과 내가 직접 만난 순간이었다. 자유와 행복감이 물 밀려오듯 나를 덮었으니, 나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 6월 항쟁은 노태우의 항복으로 끝났으나 곧이어 7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학습했던 노선 소위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좌절의 시기가 다가왔다. 믿었던 김대중 선생이 노동자 대투쟁의 정점에 재를 끼얹었다. 그는 노동자에게 자제하라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냈다. 나아가서 그는 정부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탄압을 허용하였다. 배반이라고 느껴졌다.

8월 말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 대투쟁이 한순간 꺾이고 곧바로 선거전으로 흘러갔으므로 배반이라는 느낌을 곰 씹어 볼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김대중 선생을 믿었고 나 역시 그의 배반은 선거투쟁을 위한 일시적 양보 정도로만 믿었다.

그해 정확히 언젠가는 모르겠다. 10만 명이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들으러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6월 항쟁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이후 다시 한번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같이 행진했던 후배가 말했다. 만일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면, 내 말을 따르겠노라고. 그러면서 그가 당선될지를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목청껏 김대중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 후배는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겨울, 역사는 독재자의 승리로 끝났다. 80년 봄의 패배와 좌절의 지긋지긋한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3)

80년 봄처럼 나는 다시 철학을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어떤 까닭이었는지 소위 신 마르크스주의자의 철학 특히 알뛰쎄와 그람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올랐다. 그것은 87년의 거대한 역사적 실험은 그동안 갈고 닦았던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로서는 알뛰쎄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더 마음에 다가왔다. 지배 계급에 대한 문화적 투쟁이 없이, 기습적인 공격이나 정치적 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의 내 마음에 설득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뛰쎄 파와 논쟁을 위해서도, 그의 주장 역시 학습해야 했다.

선거전에서 패배 이후 이런저런 학습과 활동으로 바빴지만, 내 마음에서 이미 열기는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았고 마치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갔다.

이즈음 사회철학 연구실은 사전 번역을 마치고 사전을 출판했다. 사전을 번역하는 데 박정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철학연구실 후배들이 무척이나 고생했다. 그들의 노고와 개인적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 대표자로서 박정호 선생의 이름을 밝힌다.

사회철학연구실은 거기서 얻은 돈으로 좀더 넓은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사이 다른 대학에서도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여러 집단, 그룹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회철학 연구실은 헤겔 학회 성원과 만나, 통합을 준비했다. 두 집단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 한국철학사상 연구회라는 단체였다.

이 연구단체는 창립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철학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외국의 철학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현실에 맞는 철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배님들 역시 철학이 시대에 기여하고, 우리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는 철학계 선배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학계에서는 새로 출발하려는 단체에 대해 마땅찮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시기는 조금 늦어졌지만, 성대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 연구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곧 철학사상 연구회에 합류하면서 철학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지방에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도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그들 역시 차례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가담해주었다.

이런 움직임 가운데 이채로운 게 있다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이규성 선생을 비롯하여 내가 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가담했다. 이 잡지 역시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와 같은 의식과 목적을 가졌지만, 다만 여기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 연구자는 아니었다. 고대철학, 동양철학, 분석철학 등 다양한 연구자가 사회에 관한 관심과 우리의 철학이라는 지향점에 대해 동의했다.

그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수가 되어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단체를 이루어 함께 연구하기보다는 글을 써서 잡지를 만들어 새로운 철학을 직접 제시해 보자는 생각에서 잡지(부정기 무크지를 표방했다)를 만들었다. 제목은 ‘시대와 철학’이며, 출판은 윤구병 선생이 주선하여 종로서적에서 맡아주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이 집단 역시 연구회에 가담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헤겔은 거기서 그의 시대는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는 여명의 시대라 했는데, 그 때문에 ‘사회와 철학’이라고 할 것이 ‘시대와 철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이 잡지가 철학논문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사르트르가 현대지에 발표했던 철학에세이를 좋아했다. 나는 새로 만드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이런 철학에세이로 채워지기를 기대했다. 시대와 철학은 나중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이름이 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1호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수 동호인 그룹이 만들었던 시대와 철학은 1호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시대와 철학을 인수했을 때도 나는 이 잡지가 철학 에세이집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후배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오히려 철학 논문집으로 만들어 기존 학계의 논문집과 대결하자는 입장이었다. 나는 상당히 강하게 나의 생각을 내밀었으나 후배들은 나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시대와 철학은 철학 논문집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데에는 아마도 철학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은 이때부터 시작된 거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2월 제4차 정기세미나 영상 “童心說 그리고 市隱의 주체자 이규성의 현대철학 추측” 2023.0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번 세미나 발표는 과학철학 전공자의 시각에서 이규성의 철학을 신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 물리와 생물, 언어와 반언어, 이기주의와 숭고감, 그리고 색채론 논쟁에서 보았듯이 입자와 파동을 하나로 담아낼 수 있는 혼융의 철학으로 이해하며, ‘배타적인 것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혼융의 철학’이라고 규정합니다. 또 이러한 평가의 근거를 제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    제: 童心說 그리고 市隱의 주체자 이규성의 현대철학 추측
발표자 :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일    시 : 2023년 2월 16일(목)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o78fkufv7eg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㊷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2)

[408c-409d]

* 그런데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는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아스클레피오스가 아폴론의 자식이면서도 황금에 넘어가 이미 다 죽은 부유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그 때문에 벼락에 맞았다고 말한다면서 소크라테스는 만약 그가 신의 자식이라면 추하게 이익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고, 추하게 이익을 밝혔다면 신의 자식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408c) 이에 글라우콘은 우리나라에 훌륭한ἀγαθός 의사ἰατρός와 훌륭한 재판관δικαστής이 필요하다면서 훌륭한 의사란 건강한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보고 병든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본 사람이고 훌륭한 재판관 또한 온갖 성향의 사람들을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라는 한 가지 말에 서로 다른 문제, 즉 몸σῶμα에 관한 문제와 영혼ψυχῇ에 관한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질문한다고 지적한 후(408d) 온갖 것에 대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관련하여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재판관이 갖는 차이에 대해 언급한다. 즉 의사는 몸을 몸으로써 치료하지 않고 영혼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설사 자기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도 아니고 또 온갖 병에 걸려 보았다 해도 그러한 경험들이 오히려 의사를 능숙하게 만들지만(408e), 재판관은 영혼으로 영혼을 다스리기 때문에 그가 젊어서부터 형편 없는πονηρός 영혼들 사이에서 자라고 어울리며 온갖 부정의를 저질렀을 경우 이미 영혼이 잘못된 상태가 되어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부정의를 날카롭게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영혼이 훌륭하고 뛰어난 상태에서 정의로운 것들을 건강하게 판정하게 되려면 젊었을 때 나쁜 성품ἦθος들을 경험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들과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409a)

* 바로 그렇기에 뛰어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εῖς은 젊어서는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잘 속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훌륭한 재판관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늦게 배운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훌륭한 재판관은 남의 영혼에 있는 남의 부정의를 지각해 내는 것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하여 부정의가 본래 어떤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경험ἐμπειρίᾳ이 아니라 앎ἐπιστήμῃ을 이용하여 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409b) 그리고 약삭빠르고 의심이 많으면서 갖은 부정의를 저지르며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들과 교류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본에 주목하여 철저히 경계하여 수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훌륭하고 나이 든 사람들과 접하면 그런 훌륭한 성품의 본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409c) 분별없이 의심하고 무엇이 건강한 성품ἦθος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ἀβέλτερος 자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지혜로운σοφός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못된πονηρός 사람들하고만 더 자주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요컨대 악함πονηρία은 덕ἀρετὴ도 자신도 결코 알지 못하지만, 덕은 천성에 교육이 더해져 시간이 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악함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도 파악하게 되므로(409d) 이런 덕을 갖춘 사람은 지혜로워질 수 있지만 못된 자는 지혜로워질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재판술δικαστικῆ과 의술ἰατρική도 이런 것에 기초하여 법으로 제정νουθέτησις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러한 기술들이 몸과 영혼에 있어 ‘성향이 알맞은’εὐφυής 사람들은 돌봐주고(409e) 그렇지 못하거나 치유 불가능한 사람들은 스스로 죽게끔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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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수련을 마친 일종의 소수 전문직이라는 점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추첨으로 돌아가며 재판을 맡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재판관들과 다르다. 아테네 민주정에서 재판관의 수는 적게는 201명에서 1001명(가부 동수를 막기 위해 홀수로 정한다)에 이르고 그들은 재판 참여 수당도 받았다. 소크라테스도 501인의 재판관들의 투표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탄식하듯 소송과 고발이 남발하던 당대 아테네에서 시민재판관들은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판 진행을 일일이 다 따라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405c에서 언급되고 있는 ‘졸고 있는 재판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변명> 31a에는 이처럼 졸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가 각각 덩치가 큰 말과 등에로 비유되고 있다.

*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재판절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당대 아테네의 재판은 오늘날도 그렇듯이 사회적 범죄를 다루는 재판과 개인 소송을 다루는 재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만 재판 절차는 재판관이 아니라 추첨으로 선임된 관리가 맡았고 그 해당 관리는 현행범이나 피고의 자백들을 통하여 범죄가 명백한 경우, 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법에 따라 바로 판정(anakrisis)하여 처벌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판단이 요구되는 경우 관리는 재판소로 판정(ephesis)을 넘겼고 그곳에서 미리 추첨으로 선임된 시민재판관들이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듣고 일차로 유무죄를 판결하고 이차로 원고와 피고가 제시하는 형량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최종 판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재판관은 오늘날과 달리 1인 내지 부심 포함 3인이 아니라 마치 오늘날 배심원들처럼 수백 명 이상의 많은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개인 소송 역시 이와 비슷한 절차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재판에 넘기기 전에 중재자들에 의한 중재가 강조되고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409b)은 <테아이테토스> 176e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비참한ἔσχατος 본’을 연상시킨다. 이때 본의 의미는 경험한 사례라기보다는 전거 내지 기준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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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기존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와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의 시가 교육의 토대가 되었던 기존 작품들의 내용을 일정 부분 비판하고 차별화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담겨있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흥미롭게도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한다. 글라우콘은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간에 다양한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각 훌륭한 의사이고 훌륭한 재판관이라고 말한다. 의사가 마주하는 질병과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하여금 더욱 질병을 훌륭하게 치료하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재판관이 마주하는 사람들의 성향들에 대한 경험들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주는 재판관으로 하여금 훌륭하게 재판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은 기술일반과 경험과의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기술자이건 그와 관련한 경험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리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기술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그와 비례해서 더욱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선 플라톤은 글라우콘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은 경우에 따라 의사와 재판관의 훌륭함을 구성하는데 정반대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분을 무시하고 모든 경험을 하나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의 기초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몸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설혹 자신의 몸과 관련한 경험이 나쁠지라도,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의사에게는 훌륭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지만, 영혼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따라 훌륭함과 관련하여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재판관에게 영혼에 나쁜 경험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재판관을 훌륭하게 만들기는커녕 반대로 재판을 그르치고 왜곡하게 만든다.

* 의술도 몸이 아닌 영혼이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의 경우 설사 자신의 몸과 관련한 나쁜 경험들조차 자신의 훌륭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물론 장시간의 수술이 필요한 현대 의술의 경우 의사의 체력은 의술의 훌륭함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의술이란 기본적으로 약물치료술이라 몸이 약해도 충분히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요컨대 의술이건 재판술이건 훌륭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영혼의 상태이다.

* 경험과 기술에 관한 글라우콘 또는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과 플라톤의 관점이 차이가 나는 것은 원천적으로 플라톤 사상이 갖는 아래와 같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이다. 그리고 기술 또한 앎인 한, 도덕과 분리될 수 없다. 즉 기술은 지식이자 도덕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러한 앎과 기술의 도덕성의 기초에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기술의 훌륭함을 평가할 때나 그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평가할 때 그 경험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가 매우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러한 고려 없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그저 단순하게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을 거론하고 있는 글라우콘을 비판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는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기술자라면 모두 자신의 고유 기술에 대한 탁월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보전을 위한 도덕의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 위의 논의는 형식적으로는 크게 체육과 몸과의 연관 하에서 몸과 관련한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 즉 영혼의 훌륭한 상태가 주안점을 이루면서 경험의 위상 또한 영혼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구분되어 논의되고 있다. 몸과 관련한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의술의 훌륭함에 기여하는 좋은 경험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험도 영혼과 관련하여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은 그 어떤 기술이건 그 훌륭함에 방해가 되는 무조건 나쁜 경험들이다. 특히 영혼의 훌륭함이 훈련을 통해 채 확보되지 않은 젊은 시절 형편없는 영혼들과 어울려 영혼에 나쁜 영향을 받게 되면 그러한 경험들은 더욱 위험하다. 그것은 영혼의 훌륭함을 훼손하여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경우 나쁜 경험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훗날 재판관이 되었을 때 그것의 나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플라톤에게 영혼은 참된 앎을 인식하는 능력이고 나쁨은 그 앎의 결핍 상태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훈련을 통해 영혼이 훌륭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경우 참된 앎과 지혜, 훌륭함의 본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은 그 결핍을 알아보고 그것의 나쁨을 쉽게 판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하고도 투명한 단계의 영혼의 훌륭함을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게 체득한 사람들은 비록 남들의 경험 속에 있는 나쁨이지만 오히려 더욱 명민해진 앎을 통해 그 나쁨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두 빛 새싹이 좋은 양육 환경에서 온전하게 잘 자라날수록 나중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병충해도 민감하게 대응하여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함을 보전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이수한 후의 연령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의 의미는 단순히 연령대가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영혼의 훌륭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겪는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삶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극복하여 더욱 훌륭함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앎과 기술의 영역에는 플라톤 당대의 시대적 혼란상을 감안하더라도 도덕의식이 결벽이라 할 정도로 지나치게 민감하고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날에서조차 우리 삶에 주어지는 나쁜 경험들을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사서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아직 심성이 여리고 순수한 어린이를 위한 정책 수립과정에는 어린이에게 나쁜 경험을 줄 수 있는 환경은 하나같이 배제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경험들의 위협과 폐해는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이런 점에서도 나쁜 경험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 영혼의 건강하고 훌륭한 상태,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교육 과정과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 경험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은 본성론상 단순히 후천적인 환경결정론도 아니고 선천적인 본성에 의해 좌우되는 소박하고 유치한 본성결정론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본성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영혼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다. 일단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우주적 선을 배우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의 본성론에는 흔히들 말하듯 성선설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그것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끊임없는 배움과 수련을 통한 후천적 노력에 달려 있다. 앞서도 살폈듯이 영혼은 인식과 행동을 이끄는 능력이지만 끊임없이 외적 경험에 영향을 받으며 그 영향의 크기에 의해 그릇된 인식과 행동으로 이끌리고 그것이 반복 강화되면서 인식과 행동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성향을 오히려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본성론상 또 후천적인 환경결정론의 측면도 일부 갖고 있다. 인간은 일정 부분 선천적으로 영혼의 순수성을 갖고 태어난 이후 후천적인 환경 속에서 일정한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순수성이 더욱 깊고 단단하게 성장 발전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순수성이 훼손되어 무지와 어리석음에 휘말릴 수도 있는 가능적 존재인 것이다. 영혼은 비록 선천적으로 선한 가능성으로 주어졌지만,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목적이나 운명은 없다. 운명론이나 목적론적 결정론이 들어갈 자리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입장은 전통적인 그리스의 운명론과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플라톤 철학은 영혼의 자율성과 내적 가능성을 토대로 문제 해결 능력dynamis의 확보를 위한 분투와 극복의 철학이다. 이상국가론의 출발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등 교육론에서 출발하는 것도 그만큼 능력의 함양이 이상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능력의 극대치로서 ‘철학자 왕’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살피겠지만 철학자 왕의 능력 또한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다만 철학자 왕은 그 우주적 시민적 선을 향한 분투와 노력에 있어 추락의 가능성에 맞서 늘 지적 긴장과 반성력을 잃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수한 영혼을 보전하면서 최선의 상태를 구현해 내는 능력의 표상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 담긴 이상국가론은 법치(法治)가 아니라 수호자 내지 통치자들에 의한 인치(人治)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은 앞서 능력과 관련한 논의만 보더라도 아주 엇나간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다룬 시가 교육론에서도 그랬듯이(383c) 체육교육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몸과 관련한 의술은 물론 재판술 관련해서도 법의 제정을 통한 제도화가 언급되고 있다. 물론 그곳에는 <법률>만큼 세세한 법률 규정들로 채워져 있지는 않고 소크라테스 또한 이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는 한 지나치게 소소한 것까지 입법할 필요는 없다고 언급하기도 한다.(425d) 그러나 그것은 이상국가의 큰 틀을 내용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 상 특징 때문이지 잘 들여다보면 이상국가와 관련한 큰 주제가 마무리될 때마다 그것의 입법화가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다.(425a-427b, 456b, 462a, 463d, 484d, 497c-d, 502b-c 등 참고) 플라톤의 법률론과 관련하여 종종 간과하기 쉽고 실제로 간과되고 있는 <국가>에서의 이러한 내용들은 <국가> 또한 기본적으로 법치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인치 일변도라는 주장은 맞는 말이 아니다. 많이 알려지기로는, 플라톤의 후기작품 <법률>이 대변하듯 플라톤은 말년에 가서 정치적 현실의 한계를 인지하게 되면서 <국가>에서 주장한 인치를 접고 법치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국가>와 <법률> 모두 근본 주제 상의 차이 즉 <국가>는 본(本)과 원칙을 다루고 <법률>은 실물과 적용을 다루는 차이가 있을 뿐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치와 법치의 균형과 조화’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 아무려나 인치가 앞서느냐 법치가 앞서느냐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별 의미는 없다. 아무리 법이 훌륭해도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현실로 드러날 수도 있고 아무리 통치자가 훌륭해도 법적 절차에 따른 견제와 비판이 담보되지 않으면 이른바 법적 안정성은 물론 권력의 타성과 자의적 행사에 따른 독재정의 폐해와 그 권력에 빌붙어 형성된 기득권의 특권적 횡포를 막기가 어렵다. 일례로 근대 절대왕정의 출현과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은 인치의 야만적 피폐함과 폭압성을 뼈저리게 경험케 하였고 그에 따라 오늘날에 와서는 절대 권력에 대한 허망한 기대를 원천적으로 포기하고 일반의지에 기초한 입법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해내는 법치의 전략을 최선의 정치적 대안으로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제로 확립된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히 의심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러나 여전히 현실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까닭에 비록 시민들의 투표로 권력이 위임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고착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토대로 선출된 권력의 지위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소수 기득권화된 그들에 의해 여론 형성과 그에 따른 입법과 사법 행위가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법치를 토대로 한 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시민의 각성 등 사람의 문제 내지 인치가 갖는 중대성을 새롭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당대의 아테네 민주정과 그것이 빚어낸 참주정의 피폐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는 물론 <법률>의 논의를 단순히 인치냐 법치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그의 의도를 시작부터 일단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인치와 법치의 조화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우리가 고민하고 있다면 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고 원칙적인 정치철학적 답변이 <국가>와 <법률>에서 의미 있고도 균형 있게 구해질 수 있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서서히 밝혀지겠지만 플라톤 철학의 중심에는 늘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그것들의 공존이 대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의술과 재판술을 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그 법률 규정의 실질적 내용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이 갖는 문제점과 논쟁점은 따로 반복해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언급들은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가교육 및 체육교육과 관련한 결론적 내용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영혼론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그곳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체육교육3 다음 강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