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 아래 글은 2022년 3월 3일 <내외 신문>(http://www.naewaynews.com/) [이종철 칼럼]에 게재된 원본 기사에 일부 사진을 첨부하여 <ⓔ 시대와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코너에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종철(연세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보다 보니 약소 국가의 비애와 그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나에게도 아프게 느껴진다. 나라가 적의 군화 발에 밟히는 슬픔은 겪어보지 않은 국민들은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었다. 그들이 사방에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죽자 사자 나라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겪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 일게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인들에게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경험을 겪었고, 마침내 일제의 식민지 치하로 들어가는 치욕도 경험했다. 나라를 잃고서 우리 선조들은 만주 벌판을 떠돌며 풍찬노숙하면서 배를 곯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유태인 다음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많이 겪은 민족이다. 과거 약소국가에서 탈출한 한국인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스탈리 체제 시절 20만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곳곳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무려 2만 5천명이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국가를 지킬 힘이 없다 보니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동족 간에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민족이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그 당시 막 일기 시작한 냉전의 최전선에 서서 이념 전쟁의 대리를 비극적인 한민족이 떠맡게 된 것이 아닌가? 힘이 없으면 언제든 타율적 강제에 의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는 결코 떠벌이 입이 아니라 강한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세계 최빈 국가의 상태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비록 유신 독재의 쓰라린 경험도 겪었지만 국력을 강하게 하자는 데는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했다. 이런 뜨거운 애국심은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도 똑같았다. 드디어 한국은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선망하는,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한 국가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고래 등쌀에 시달리는 새우가 아니라 모든 국가가 선망하는 돌고래와 같은 위치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본다면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그저 말하기 좋은 수식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통과한 한국인이라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국가의 에너지는 단순히 경제 발전으로만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른바 ‘한류’ 붐에 따른 K-컨텐츠는 노래와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들을 타고서 전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 일본이 서구에 소개되면서 일으켰던 붐을 능가하는 것이다. BTS는 전 세계의 아미들이 신화처럼 떠받들고 있고, ‘설국 열차’나 ‘기생충’, 그리고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한국 영화들은 이제 서구인들의 안방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새롭게 만들어진 넷플리스 같은 문화 플랫폼은 한국의 드라마들이 맘껏 놀 수 있는 앞마당을 만들어준 격이 되었다. ‘오징어 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드라마들은 만들어지자마자 수십억 전 세계인들의 감성을 뒤흔들면서 세계 1위 권을 너무나 쉽게 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은 과거 아시아인들이 영국의 비틀즈를 따라 부르면서 서구적 감성에 공감하던 것처럼, 반대로 서구인들이 모방하면서 감성적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면 그 여파가 지레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운 거대한 대한민국호의 지도자로 국정에 대한 아무런 경험이 없는 강화 도령 같은 어벙이를 세울 수 있는가? 나라를 세우는 데는 수십 년의 피와 땀이 요구되지만 그것을 덜어 먹는 데는 단 몇 년이 걸리지 않는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수령에 빠진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자국의 유명 정치인들까지 일본이 2류 국가로 전락했다고 통탄을 하고 있고, 한국은 이제 점점 더 ‘넘사벽’이 되어 가고 있다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무엇보다 아베와 같은 극우 보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이들은 일본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의 영광만 집착하고 미래를 개방적이고 진취적으로 이끌지 못한 잘못이 크다. 한국도 잘못하면 이런 일본식 모델에 발목 잡힐 가능성이 크다. 일본 못지않게 급격하게 고령화되어 가서 인구 구성에서 생물학적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고, 경제의 규모에 따른 저성장은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한국은 미국과 패권주의를 다투는 거대한 중국과 언제든 대륙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극우 일본에 둘러싸여 있다. 여전히 남북 간에는 냉전 상태의 긴장이 높아서 평화를 이야기하기가 요원한 상태이다. 때문에 한국은 잠시도 한 눈을 팔거나 정체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이 반도체나 몇몇 분야의 산업에서 선도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수출에 전력 투구룰 하고는 있지만 지금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기술 패권주의가 심하고 국가 간의 경쟁도 심하다. 4차 산업 혁명에 들어선 현재 인공지능과 로봇 산업, 유전 공학과 사물 인터넷과 같이 산업의 다양한 부문에서의 국가 간 경쟁은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정책을 잘못 판단한다면 언제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은 하루아침이다. 때문에 21세기의 한국은 나라의 운명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과거로 후퇴할 것인가의 기로 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을 한 사람 뽑는 것은 그저 하기 좋은 정치인 한 명을 내세우는 것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적 경험이나 식견이 없고,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인 검찰 조직에서만 성장한 인물이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호를 이끌겠다고 나설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언감생심인데, 윤석열은 ‘조국사태’와 같은 기형적인 사건에서 등장한 인기 스타일 뿐 전혀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막가파식 ‘정권 교체’를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이런 극우 보수 세력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보듯 대한민국을 다시금 과거의 망령에 가두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명박-근혜 10년 동안 피로 세운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세력이고, 여전히 대한민국에게서 부패 공화국의 오명을 떼지 못하게 만든 세력이다. 미국의 성조기를 자신들의 분신으로 내세우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국가를 이끌어갈 자신감이나 주인 의식이 하나도 없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과 그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윤석열이 어떻게 대통령이 돼서 약진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 수 있겠는가? 그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묻는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운 나라인가? 이 나라를 다시 과거로 추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미래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나라의 초석을 다지게 할 것인가? 지금은 기득권자들의 탐욕으로 치장된 ‘정권 교체’가 아니라 낡은 수구 정치의 제도나 법들을 뜯어고칠 수 있는 ‘정치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만일 대한민국호가 향후 몇 년 동안 이런 낡은 시스템들을 개혁할 수 있다면 한국은 한 시대 안에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개혁적 지도자가 등장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런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렇게 만든 나라인데 어떻게 모지리 강화 도령 같은 인물에게 덥석 맡길 수 있겠는가?
출처 : 내외신문(http://www.naewa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