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6)

맹목적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자마자 쇼펜하우어는 이로부터 근본적인 전환을 이룬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세계의 참상을 보여준다. 자연의 맹목적 투쟁은 제쳐두자. 인간 세계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벌이는 투쟁의 세계이며, 타인을 기만하며 동시에 자기를 기만하는 인간 희극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 속으로 개인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끔찍한 세계의 실상 앞에서 전율하면서 이런 세계를 초극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선생의 저서가 최고로 관심을 두는 것도 바로 이런 세계 초극의 길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세계 초극을 해석하는 데서 선생은 두 가지 대립하는 해석을 소개한다. 일반적 해석은 줄리안 영으로 대표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단적으로 구분하며, 현상계는 표상의 세계이며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 인과성이라는 의식의 형식이 지배한다. 예지계는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밝혀지는 세계이며 그 자체가 세계의 진정한 본질이다. 예지계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쇼펜하우어가 찾아가는 세계 초극은 예지계의 본질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의지 부정의 차원이다. 여기서 부정의 대상은 곧 의지 자체이니, 그 결과는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며 이 세계의 참상을 초연하게 정관하는 인식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다만 냉정한 세계 인식일 뿐이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로부터 의지 부정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내감을 통한 본질 인식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인식을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인식은 곧 세계와 나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 즉 우주적 연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통해 맹목적 의지에 이끌려 서로 죽이고 기만하는 나와 세계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런 인식은 내적 자기의식과 구분되는 인식 곧 신비적 인식이며, 부처의 깨달음과 같은 인식이고 시간의 차원인 내감이 아닌 영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7)

그러나 선생은 일반적인 쇼펜하우어의 해석과 구분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 한다. 바로 이런 해석이 쇼펜하우어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하려는 선생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석은 제너웨이가 에트웰의 해석을 발전시킨 것이고 니콜스 역시 동의하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세계’ 초판보다는 재판에 주로 의존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니콜스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초판본(1818년)과 재판본(1859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선 니콜스는 초판본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주목한다.

“의지 자체는 모든 현상 즉 자연 전체의 기체로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친근하게 의지로서 아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지계는 곧 의지 자체 즉 맹목적 의지 자체로 규정된다. 반면 재판본에 이르면 쇼펜하우어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다. 재판본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을 보자.

“의지 자체에 대한 이 인식은 전적으로 충전적이지 않다. 우선 그러한 인식은 표상의 형식에 매여있지 있다. 그것은 지각이거나 관찰이어서 그 자체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어 있다.”

즉 내감을 통한 인식은 비록 표상의 세계에서처럼 공간과 인과율의 형식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이라는 내감의 표상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세계는 아직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어서 근본적으로 주객 분리를 넘어선 물 자체의 세계라 할 수 없다. 이런 내감에 의해 인식되는 세계의 본질은 예지계에 대한 부분적 인식에 지나지 않으며 충전적 인식이 아니다.

니콜스의 구분과 유사하게 제너웨이는 쇼펜하우어의 세계를 세 가지 세계로 구분한다.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에 제너웨이는 ‘현상계에 나타나는 예지계’라는 중간 세계를 개입시킨다. 맹목적 의지의 세계는 예지계의 진정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지계가 현상계 안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인식에 속한다.

“이 관점에서 제너웨이는 영의 견해를 수용해 현상과 물 자체의 이원 구조 대신 다음의 삼중구조를 제안한다. 이 견해는 물 자체에 대한 충전적 인식을 피하는 길이다. 이것은 현상과 예지적 실재의 이분법에 양자로부터 구분되는 제3의 세계를 끼워 넣는 삼분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 제3의 세계는 비예지적이어서 칸트적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비의적이어서 일상 세계와는 다른 것이기에 형이상학적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예지계의 본질은 의지 자체의 단적인 부정, 세계에 대한 정관이 아닐 수 있다. 예지계의 본질은 그 자체가 의지이기는 하지만, 맹목적, 파괴적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힘 즉 생명의 원리이며, 그 자체는 일자[一者]이면서도 수많은 개별적인 힘으로 자기를 발현시키며, 만유[萬有]는 이 일자인 의지로부터 자발적으로 출현하며 서로 평등한 존재일 뿐이며, 개별자 사이의 상호 소통이 일어나는 우주적 연대가 전개된다고 파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지계는 근원적 물질에 작용하여 단계적으로 생명의 진화를 추동하고 무수한 종들로 분화하지만, 그 자체는 무한한 현상계 안에 동일하게 관류하는 일자이다. 내감에서 직접 알려지는 것이 의지의 활동이라면, 이 현상적 직접지는 현상계 전체의 내적 본질로 연장될 수 있다. 나아가서 영원의 관점에서는 만유가 평등한 공감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경험한다.”

이처럼 예지계의 본질이 생명의 원리라면 이 생명의 원리는 곧 새로운 개방적 질서를 낳은 창조적 활동성이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선생의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선생이 왜 2016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지가 이해된다.

선생은 재판에서 이처럼 변화된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단적으로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라고 평가한다. 길지만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이 초월적 경험은 생의 의미의 체현이라는 점에서 물 자체의 현상이 표상의 형식 안에서 직관되는 차원, 즉 위의 도표에서 두 번째 중간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를 해친 것에 대한 죄의식과 도덕적 연민은 물 자체인 의지가 경험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닥없는 심연에서 생기하는 생명원리에 접근하는 노력과 희망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아시아 철학이 예지계가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단서로 자기 수련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찬양한다. 예를 들어 송명이학은 우주의 궁극적 본성이 우리의 심층적 내면으로부터 표면적 감정으로 드러내는 끝을 실미리로 삼아 심층의 본성이 우주의 본질임을 자각한다는 수양론적 심성론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하면서 등장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된 창조적 활동성은 아시아 철학의 영향이며 앞으로 아시아 철학을 통해서 그 잠재적 힘이 더욱 발휘될 것이라고 선생은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9)

쇼펜하우어는 예지계의 본질로 들어가는 길로서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들고 있는데,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길이 맹목적 의지 부정의 길이 아니고 생명원리의 길이라고 본다.

선생은 이런 생명원리에 도달하는 인식의 길을 6장 5절 ‘시간과 영원’에서 더욱 철저하게 분석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이 선생의 저서 가운데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선생은 대열반경의 세계와 더불어 엘리옷의 시를 끌어들인다.

우선, 선생은 쇼펜하우어가 우파니샤드 철학이 심성론에 영향을 받아 인식을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단계는 분별적 의식이다. 그다음은 ‘꿈을 꾸는 잠’이다. 이 꿈꾸는 잠은 “예지계가 [현상계에] 침투하여 지성의 시공간 질서를 넘어서는 영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차원”이다. 이 단계가 부정적 형이상학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다음은 ‘꿈도 없는 무의식’의 차원이다. 이것이 내적 자기의식 곧 현상계 안에서의 예지계를 인식하는 차원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적 자아의 차원이 있다. 이 본질적 자아는 곧 “우주를 영원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깨닫고 있는 진실한 자아의 세계”이다. 선생은 바로 이 네 번째 단계가 세계 초극에서 등장하는 인식이라 보면서, 이 인식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이 네 번째 심층적 차원을 빛의 세계로 묘사한다. 이 세계는 영원성, 쾌활성, 진정한 자아, 고유한 맑음의 세계이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관념을 수용하여, 그것으로 불의 본질적 자아와 정신을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대열반경에 나오는 붓다의 육체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으며 모든 부처와 중생들이 동경하고 깨닫는 영원한 여래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생은 이런 상주 불변의 여래성을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영원의 눈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생은 ‘시간으로부터 영원에 접근하는 길’과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길’을 구분한다. 전자는 붓다의 죽음에 슬퍼하는 대중의 길이다. 이 길은 내감의 형식인 시간의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니 여전히 주객 분열 속에 있다.

반면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을 보는 것이 바로 붓다의 길이니, 여기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불성이 드러나면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느낀다. 모든 인간은 이제 이런 쾌활한 자유를 동경하니, 자신의 불성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에 도달할 수 있다.

이어서 선생은 이 자유에 대한 동경을 엘리옷의 시 ‘4중주’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여기서 엘리옷은 시간을 벗어나야 구속(救贖)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미래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만일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속할 수 없다.”

내감을 통해 인식된 세계는 여전히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이제 이 시간을 벗어나야 비로소 진실된 예지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엘리옷의 시 사중주 가운데 세 번째 연주 살비지즈[salvages]는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영원의 세계를 그린다.

“그 끝이 어디 있는가?

소리 없는 오열에 꽃잎이 지며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가을철 꽃들의 소리 없는 조락에

그 끝이 어디에 있는가?

표류하는 난파물들, 해안에 밀린 백골의 기도, 재난의 예고를 접했을 때의 그 기도할 수 없는 기도에?”

살비지즈는 엘리옷이 어릴 때 살았던 곳, 강과 바다가 만나는 암초 지대이다. 여기서 난파물들이 소용돌이치면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엘리옷에게 기억으로 나아 있다가 마침내 다시 떠올랐다. 선생은 이 이미지가 현상계를 넘어서 예지계로 초월하는 과정을 엘리옷이 그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엘리옷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과거와 미래를 탐색하고

그 차원에 집착한다.

그러나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을 이해하는 것은 성자의 직무다.

아니 직무라기보다

정열과 무아의 자기 방기 속에

일생을 바쳐 죽은 동안에 주고받는 그 무엇이다.”

무시간과 시간의 교차점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이 문은 ‘정열과 무아’를 통해 얻어진다. 엘리옷이 여기서 정열과 무아라고 했던 것이 쇼펜하우어가 예지계의 본질에 들어가는 길을 말하는 것이니, 우주적 연대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10)

필자는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가 위에서 보듯 정관과 도피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 급진성과 창조적 활동성에 관한 탐구에서 나왔다고 평가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생의 철학적 의식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관심과 일치한다. 모더니즘은 일차세계 대전 이후 기존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세계상을 그려내려 했다. 모더니즘은 이런 세계상을 세계에 대한 직접지를 통해 획득하려 하였으며, 이런 인식은 더이상 과학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믿었다. 모더니즘은 이런 직접지는 인간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모더니즘의 기본 관점은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철학적 기투가 과연 성공적인가는 여러 의문을 낳는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런 논의는 선생의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보면서 여기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1편 보러가기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1)

이규성 선생(이후 선생으로 약칭)의 저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쇼펜하우의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이하 ‘의지의 세계’로 축약)은 2016년 9월 발간되었다.

선생은 그동안 서양철학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주로 아시아 철학을 연구했다. 선생은 말년에 서구철학이 중국과 한국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선생은 비록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비주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분명 서양철학의 전통에 선 쇼펜하우어를 다루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책은 너무 방대하고 심지어 서문 자체가 상당한 부피이다. 그 때문인지, 책의 맨 앞에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선생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요약문을 발견했는데, 책의 내용이 정말 잘 요약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요약문을 보면서 선생이 왜 쇼펜하우어를 다루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은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폭력적 만남’으로부터 많은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선생이 아시아 철학을 연구한 것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선생의 여러 저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이번에는 유럽 철학 내부에서 직접 그와 같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연구하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비주류이며, “아시아 철학을 인류의 운명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로 간주한” 서양철학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생은 유럽 철학을 자체 내에서 해체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선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대학 시절부터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선생은 서문 끝에서 대학 시절의 어떤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던 친구의 운명을 보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해야 하겠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부채의식 말고도 다른 이유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2) 혁명적 급진성

필자의 경험으로는 선생은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살아왔다. 물론 비참한 인간 희극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의식은 생생했으나, 선생은 현실적인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자제한 것으로 안다.

‘의지의 세계’가 작성되던 시기는 박근혜 정권이 전횡하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근혜 투쟁을 위해 직접 거리에 나오기도 했으니 그만큼 실천적 투쟁의 절실함을 몸으로 느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 선생은 지식인으로 빨치산이 되어 사망한 박치우의 삶에 대해 필자에게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말을 통해 자신의 내심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선생이 실천적 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일반적으로는 가장 정관적이고 심지어 도피주의라고 비난을 받는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하필이면 이 시기 선생이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로 그 고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필자는 ‘요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이 정립하려는 철학에 대한 전망이다.

“이러한 방향(쇼펜하우어의 철학 방향)에서 전망되는 세계관은 안으로는 무한의 윤리를 본체로 하고 밖으로는 폐쇄적 질서를 개방적 질서로 변형하는 활동성을 갖는다. 이 활동성은 구체적 개인들의 기본적 역량들을 함양하고, 평등한 유대를 확장하는 개방적 노력을 동반한다.”

이런 구절이 지시하는 대상은 쇼펜하우어 철학 자신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이미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철학이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혁명성(또는 그 가능성)을 보면서 오히려 “창조적 활동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급진적 혁명성을 선생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곧 ‘무한의 윤리’이며 ‘개방적 질서’이다. 여기서 ‘무한의 윤리’란 나중에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윤리의 근본이라고 본 두 가지 즉 자발성으로서 자유와 타자(자연과 타인)와의 연대 또는 소통의 세계이다.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는 사회적으로는 개방의 질서(평등한 유대의 세계)를 통해 확립될 것이라 본다.

바로 이런 무한의 윤리, 개방의 질서가 쇼펜하우어의 지향점이기에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로부터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단호한 실천적 투쟁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긴 의지 부정의 길이다. 이것은 죽음의 길이 아니며, 무를 체화한 삶에서 우주와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무대립의 자유의 길이다. 무는 허무를 의욕하는 궁극 목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생성계의 존재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생의 생각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이런 무한의 윤리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즉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혁명의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심지어 쇼펜하우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철학에 내재하는 혁명적 급진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의지 부정과 세계 도피의 한 측면에만 몰입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비판한다. 선생은 쇼펜하우의 철학에서 보이는 이런 혁명적 급진성은 오히려 쇼펜하우어가 숭상한 아시아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시아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하는 그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자신의 책의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책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쇼펜하우어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반면 선생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이니, 그만큼 소통 즉 우주적 연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기 위해 선생은 방대한 연구를 전개한다. 선생의 연구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자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된다. 선생은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생은 두 철학자가 지닌 공통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하고 있다.

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

➁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에 대한 비판

➂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 제기

사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순서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선험적 관념론의 세계(즉 표상의 세계)를 확립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물 자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 물 자체의 세계를 그는 의지의 세계로 규정한다.

선생은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가 지닌 철학적 구도에 따라서 자신의 책을 서술해 나가는데, 1장 서문에 이어서 2장과 3장에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 비판이 논의된다면, 4장과 5장은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현상계)을 확립하고 여기서 현상계를 넘어서 물 자체 즉 예지계로 이행하기 위한 단서가 제시된다. 이 단서는 세계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의 한계 내에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

6장에 이르러 쇼펜하우어의 예지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이 예지계는 내감을 통해 확인한 대로 의지의 세계로 규정되지만, 그 자체가 물 자체의 세계는 아니다. 선생은 이 장에서 의지의 세계를 넘어 물 자체의 세계로 육박해 들어가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논의에 해당하며 그 이후 7-9장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미치는 영향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에 바쳐져 있다.

이 가운데 필자의 관심은 주로 6장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이 6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서 의지의 세계를 논의하는데, 이런 논의에서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4)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 철학, 그것도 ‘순수이성 비판’의 현상론이다. 칸트는 시간, 공간, 인과론이라는 의식의 형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을 구성하면서 현상 세계가 구성된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의식의 형식을 물 자체 적용하게 된다면 즉 이런 의식 형식이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형이상학에 빠진다고 비판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런 선험적 관념론 즉 현상론을 받아들이면서 그 역시 기존의 형이상학은 이런 의식의 형식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은 쇼펜하우어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현상론에 그냥 머물렀다면,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나 흄의 아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세계 배후에 있는 물 자체 세계 곧 예지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예지계를 찾아가는 쇼펜하우어의 길은 선생의 서술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 길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개별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가설 추리적인(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실재의 세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 길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이율 배반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런 딜레마 때문에 물 자체의 세계에 이성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다르게 해석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율 배반 가운데 정립은 오류 추리에 해당하지만, 반정립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반정립은 곧 실재 세계가 무한하며 무규정적이라는 것, 즉 ‘무’라고 상정하는 형이상학이다. 이런 반정립은 비록 방법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길과 동일하므로 기존 형이상학과 마찬가지 오류 추리이고 진정한 세계의 실재 자체, 물 자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반정립은 예지의 세계가 현상계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즉 ‘그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신의 속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 역학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화론과 생리학 등 새로운 과학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과학의 발전은 정립의 길이 아니라 칸트가 반정립이라고 했던 길이 실재의 세계를 더 가깝게 암시한다고 믿었다.

5)

그러나 이런 가설 추리적 방법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실재의 세계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방법은 곧 내감에 의해 접근하는 방법이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길을 ‘성곽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비밀의 통로’라고 말한다. 좀 길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객관적 인식의 길을 통해서는 즉 표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에서는 우리는 결코 표상 즉 현상계를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우리는 한갓 인식하는 주관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에 속하기에 스스로가 물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부터는 침투하여 도달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에 직면해서는 우리는 마치 성곽을 포위하여 밖으로부터 공격하는 병사와 같다. 그들은 성곽을 뚫고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끝없이 그리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른 방식으로 입성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전혀 성곽을 밖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서 내부 배반을 통한 비밀스러운 접선에 의해 단번에 우리를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비밀 지하 터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물 자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의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 온전히 직접적으로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표상 배후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내적 자기의식, 내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필자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성을 지닌 것이다. 이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명증성을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명증적인 사실 즉 나의 본질에서 세계의 본질로 유추해 나간다. 내가 이처럼 의지라고 한다면 내 앞에 있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의지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나의 의지로부터 의지로 이루어진 세계로 도약한다. 쇼펜하우어는 더 나가서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서로 다른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개체적 의지를 넘어선 일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적 의지가 나의 의지로 그리고 사물의 의지로 자기를 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 사물의 의지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의지는 내감의 자기의식을 통해 자각되지만, 사물의 의지는 자각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물은 마치 인간이 자기를 자각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의지는 어떤 속성을 지닌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보자. 내가 나의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확인한 것에 따르면 나의 의지는 맹목적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는 세계적 의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의지 역시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의지로부터 개체적 의지가 출현하지만, 개별적 의지와 세계적 의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동일한 것이 원인과 결과에서 반복하는데, 맹목적 의지가 개별자를 실현하는 방식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맹목적 의지는 개별자를 발현한다.

이런 발현의 관계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와 같이 이데아가 유출되는 것이 될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계로부터 본질을 추론해 들어가는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발현의 관계에서 맹목적 의지는 우연한(자발적) 방식으로 개별자를 발현한다고 본다. 이런 개별자와 의지 사이의 관계는 무라는 심연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며 의지의 발현은 맹목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발견한 맹목적인 일반 의지 개념은 서양 현대 철학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의지는 이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의지’로, 프로이트에 의해 ‘죽음의 충동’으로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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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갈무리, 2022-05-3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한동석(시각예술인)

 

공간이 3차원의 다양체인 것처럼, 『들뢰즈 다양체』는 편지들,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들, 청년기 저작들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껏 발표되지 않았거나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이 텍스트들은 질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의 사이에, 혹은 저변에 자리 잡고는 곧 다른 저작들의 시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좋아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의 막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진동,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며 알게 모르게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메아리와 흡사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던 사이에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꽂이는 조금 더 비좁아져 있었고 들뢰즈에 대한 내 마음은 조금 더 부산해졌다. 새 책의 낯선 느낌이 전해지며 방은 잠시 나와는 무관한 듯 느껴졌고 순간 기존의 물건들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부 편지들」에서는 ‘친구’ 미셸 푸코를 포함한 여러 동료 철학자들, 흠모하는 예술인들, 여러 저작을 통해 협업을 펼쳤던 펠릭스 과타리, 들뢰즈 철학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생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향해 띄운 그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들뢰즈가 평소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기에 발신 메시지로만 남았지만, 문장은 때로는 자잘한 속마음을, 때로는 그지없는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각 인물들과 맺은 관계의 고유성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사뭇 다른 어조에도 철학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무엇보다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힘입어 들뢰즈의 사유가 발전해나가는 내밀한 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새로웠고 들뢰즈의 철학적 고민들이 여타의 저작에서보다 쉽고 간명하게 표현된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가장 호기심을 끄는 편지는 과타리를 향한 것들이었다. 협업이라는 때로 험난할 수도 때로 흥미로울 수도 있을 과정에 대한 일반적이며 막연한 궁금증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뢰즈 혼자만의 저작과 과타리와의 협업이 낳은 저작을 연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물음이, 이들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으로 이끌었다. 먼저 편지에서 드러나는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의 가족주의에 대한, 또 이를 너무나 손쉽게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응시키려는 당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과타리를 ‘야성적 개념의 놀라운 발명가’라고 부르며 ‘무의식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서 과타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기계’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무의식을 죄의식과 더불어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법과도, 위반과도 무관한 것으로서 긍정하는 과타리의 입장을 무의식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고 칭송하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동의와 지지의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과타리와 더불어 분열증적 생산 기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나가고자 한다.

편지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종종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에 더해, 그럼에도 이를 서로에게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은,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구절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결과를, 철학자로서 보다 심대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들뢰즈에게만 귀속시키는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아르노 빌라니와의 편지에서 과타리와의 공저를 들뢰즈만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의 분석에는 독창적일 모든 권리가 있지만, 그 책(『천 개의 고원』)이 본질적으로 나 혼자만의 저작이라 주장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만일 인물이 아닌 모종의 흐름에 의해 책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둘의 협업은 본래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본래의 물결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파장을 형성하는 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녹음에 기초한 또 다른 인터뷰 자료가 2부에 이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들뢰즈는 편지 속에서 종종 여러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업무와 실생활에 쫓겨 저작과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 논문준비생에게 그의 철학을 연구해서 현실적으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당시 프랑스 주류 철학계가 들뢰즈에게 취했을 껄끄러운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은 왠지 모를 공감을 자아냈다. 감성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향하며 전복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철학자가 마주했을 학자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순탄치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험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쉽게 수긍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대한 양의 역작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바라보며 개인의 천재성, 혹은 독특성의 발현과 그에게 사회가 되돌려주는 고난, 이들에 대한 선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을, 혹은 운명적 조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2부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는 들뢰즈의 그림들로 시작된다. 몇몇 그림은 ‘괴물’을 묘사하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있었다. 「1부 편지들」에서 빌라니가 띄운 ‘당신은 괴물인가요?’라는 질문에 들뢰즈는 괴물이란 ‘그 극단적 규정성이 미규정성을 완전하게 존속시키는 그러한 어떤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한 강한 공감과 더불어 무언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느껴지는 현기증을 함께 담아 이 문장에 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기억에 비하면, 괴물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게다가 평범하기까지 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우스꽝스럽게, 또는 그런대로 재밌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4. 평생 친구인 장-피에르 벙베르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들뢰즈의 자화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좋았지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복잡한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친구에게 말을 하라고, 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그는 친구의 목을 매우 솜씨 좋게 어루만져 친구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헌정했던 스승이었으며 훗날 절연했던 페르디낭 알키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알키에의 저작에 대한 들뢰즈의 2편의 리뷰에서 그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키에가 ‘초현실을 피안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낳는 분리의 원리로, 시를 낳는 이행의 원리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비현실에서 현실로 의지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규정했다는 대목은, 들뢰즈가 발전시켜나갔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내재성의 철학의 단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알키에가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는 진리를 넘어서고 진리의 우연적 측면을 파악한다’고 해석한 대목에서, 사유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설적인 어조로써 새롭게 정의했던 들뢰즈의 입장이 마련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들뢰즈가 철학적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여러 입장들을 그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과정은 그의 사상이 갖는 또 다른 저변은 물론, 그가 보였던 창의적 역량도 새롭게 비추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텍스트는 한때 들뢰즈가 출간을 고려했었다는 흄에 대한 강의 자료였다. 비교적 들뢰즈의 활동 초반기, 『차이와 반복』이 출간되기 10년 전 즈음에 이루어졌던 강의이니만큼 그의 사상적 진화의 출발 지점을 헤아려볼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과는 별개로, 더 나아가 저자와도 무관하게, 이 자료는 흄에 대한 강의로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간결한 표현들뿐만 아니라,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역동적인 구도와 명료한 짜임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개괄적인 이해의 계기를 고대해왔던 흄의 철학을 단지 인식론이나 인과론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총체적으로 접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어 기뻤다.

이와 더불어 2부에 수록된 여러 단편 텍스트들도 모두 나름의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음악적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단편은, 음악을 들으며 철학 텍스트를 읽어보는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청각적 환경 속에서 이 단편을 읽어보는 나름의 실험적 상황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소개하며 박자로부터 해방된 시간, 음향 풍경,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음악적 재료에 대해 다룬다. 들뢰즈의 시간, 개체, 물질, 생명에 대한 사유가 음악 속에 녹아든 듯한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3부 청년기 저작들」에서는 스물, 스물 남짓 된 들뢰즈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요 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이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할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청년기 철학자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묘사〉라는 텍스트는 어디에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여 다가가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성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 담론을 동일한 맥락상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타자 철학을 새롭게 바라보며 그 한계를 느껴보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성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묘사가 낯설고 불편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 되기는 있어도 남성 되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는 소수자 되기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입장과 차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다. 언젠가 여러 시간적 양태들이 혼재하는 결정체적 시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이 텍스트와 공명할 또 다른 시공간적인 계기와 더불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독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보다 진보한 독자로서의 역량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을 들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누구도 전면적으로 견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일 이 책을 전기적 자료로 해석할 경우.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그를 다소간 한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 들뢰즈에게 삶의 파고는 철학적 작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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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5월 월례발표회 영상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5월 월례발표회는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념이었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특히 슈티르너 철학의 수용과 관련된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와 김광호 선생님의 열띤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발표자 : 박종성(건국대학교)
토론자 : 김광호(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6월 2일(목)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NoK4CKs7Y1M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4월 월례 발표회 영상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4월 월례발표회는 동학 및 천도교의 사상 그리고 한국현대철학의 서양철학 수용과 관련된 이병태 회원의 발표와 전호근 회원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발표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토론자 : 전호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일    시 : 2022년 4월 29일(금)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k8NW-4fLUIU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3월 월례발표회 영상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 제 :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발표자 : 이찬희[대종교(大倧敎) 시교사(施敎師)]
토론자 : 박병훈(서울대학교)
일 시 : 2022년 3월 24일(목) 오후 5시 – 7시
장 소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Og9lRCP_7c8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의 책과 리뷰]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종전 40주년 연설문에서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가장 포악하고 공포스러운 정치권력자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히틀러의 무소불위 전권은 히틀러 개인의 독재력에 있지만,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가능해졌다.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치에 저항하는 독일인들이 왜 드러나지 않았는지 답답하면서도 궁금했는데,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이라는 한 권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답답함과 궁금함이 풀렸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이후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한 총통으로 스스로 지위를 높였다. 히틀러가 스스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던 권력 즉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혼란정치와 대공황에 이은 파탄경제로 인해 독일 국민대중은 새로운 정치 권력의 탄생을 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히틀러라는 악마를 낳게 했다. 히틀러는 민족공동체, 고용확대, 경기회복이라는 선전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아리아인의 ‘국민동포’라는 민족공동체 부양 구호는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얻게 된다.(18쪽) 이 책에 나온 일반 여성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들이 바라는 건 오직 일과 빵이었어요. 배가 고파서 데모도 했지요. 그러나 그건 히틀러가 총리로 되기 전의 일이지요. 히틀러는 단번에 모든 걸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에게 일자리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국민 대중이 모두 히틀러 지지지가 될 수밖에요.” (책 26쪽)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물질적 부의 혜택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상징인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과 더불어 도로를 가득 채울 자동차 산업 등이 국민기업으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복지정책과 레저산업이 구체화되었다.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은 대중들의 자부심과 히틀러의 인기를 최고로 올렸다. 이렇게 이어진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이런 변화속도를 의도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기획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나치 기획의 성공은 절대 독재이면서도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데서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의 압도적 지지는 실제로는 일종의 마취 현상이었다. 유럽침탈의 장치인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민족공동체의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으로서 나치는 적군과 아군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악의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구원하거나 동조하는 일체의 행위를 악의적 행동으로 규정하여 그런 행동을 증거 조사 없이 기소할 수 있는 특별법, 소위 ‘악의법’을 1934년 통과시켰다.(60쪽) 자국민에 대한 언론 통제를 하면서 라디오 등의 외국방송 청취 일체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가혹할 정도의 처벌을 했다. 히틀러는 청소년에 대한 의식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1936년 540만 명을 넘어선 국가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는 히틀러 독재 권력을 가장 옹호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막상 독일 대중들은 히틀러가 청소년을 “교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32쪽)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38년 나치 지도부는 포그롬Pogrom기획을 앞세워 나치를 반대하는 일체의 저항세력을 공개적으로 처벌하는 대박해를 시작했다. 이로써 국고 파탄을 유대인의 물적 자원으로 메꾸는 전시경제를 치밀하게 시행했다. 나치의 포그롬 대박해는 가시적인 약탈과 폭력을 합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소년을 중심으로 고발과 밀고를 일상화하는 생활습관을 만들어 놓았다.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나치 저항 지하단체들의 활약이 많았는데 왜 독일 내부에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구심의 뿌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폭적인 대중지지의 위력 때문에 저항하는 세력이 은밀한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밀한 저항을 독일 작가 바이젠보른(Günter Weisenborn 1902-1969)은 “조용한 봉기”라고 표현했다. ‘시민의 용기’ Zivilcourage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284쪽)

 

저항의 용기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였다. 암살 기도는 실패했으나 저항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상당한 악의 대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전국적인 무차별 보복을 시작했다. 7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그중에서 200명 넘게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 히틀러의 증오에 찬 폭정은 국민을 완전히 압도했다. 정말 무서웠다.

 

그런 공포사회 속에서도 저항그룹은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처절한 삶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백장미그룹을 포함한 그들의 저항 운동은 전후 오늘날까지 건강한 시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외국으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에밀 아저씨’ 구원 조직은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해 나아갔다. 뮌헨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그의 여동생 조피의 저항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백장미 통신>이라는 삐라 활동을 하던 슈모렉 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나치에 체포, 사형되어 죽음으로 저항의 삶을 마쳤다. 그 외 다양한 계층의 지하집단이 주도한 비밀단체들의 저항 결사 편지와 통신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를 가슴으로 넘기고 있었다.

크라이자우 저항 서클의 지도자였고 그래서 1944년 나치로부터 사형당한 트로트Adam von Trott는 나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2쪽) 이 말은 아픔의 현실을 담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나치 치하의 독일 사회에서 저항세력은 오히려 매국노로 치부되었고 밀고의 대상으로 되었다. 청소년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한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와 전통의 침략전쟁 옹호 그룹이었던 극우세력에서부터 실업과 가난에 빠진 일상인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 나치의 민족공동체라는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항세력은 당연히 매국노와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1945년 히틀러는 죽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 주술의 잔재 효과가 따라서 금방 끝나질 않았다. 이 책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은 나치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종전 그리고 나치 이후 사람들의 관념과 습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치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압축한 글을 하나 인용해보기로 하자.(241-242쪽)

 

1945년부터 1947년 사이에 네 모자는 16제곱 미터에 불과한 좁은 다락방에 살며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릇 하나로 소금에 절인 청어나 감자를 먹고 빨래를 하는 적빈의 생활을 감내했다. 그런 중에 딸 코르넬 리가 통학 도중 전차 운전수가 “아버지는 전사하셨니?”고 묻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코르넬리가 “아닙니다. 히틀러에 반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더러운 배신자의 새끼로구나!” 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댔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유족의 다수는 빈곤에 허덕이면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배신자’로 낙인찍은 세간의 차가운 눈초리에 가위눌렸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끔직했던 과거를 봉인하고 싶었다거나 하는, 유족들이 침묵을 지킨 데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패전 이후 독일 정부는 처음에는 나치 공무원들을 계승한 전후 동/서독 공무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치러진 전국여론조사 결과 나치 시기에 저항단체들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본 응답율이 45%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가 표현했듯이, 독일 패전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독일 국민 다수가 히틀러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63쪽)

 

특히 전범을 처리해야 하는 판검사의 사법계에서 판사의 66%, 검사의 75%가 전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범 처리에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히틀러 선서를 한 독일인이 전시(나치 시기) 중에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 자체가 이적 행위이며 국가반역이라는 나치 잔재 검찰의 법정 옹호들이 횡행했었다. 나치 저항운동을 국가의 반역행위라고 주장한 레머를 재판하는 그 유명한 1951년 레머 재판에서 레머는 오히려 나치 잔재인 검찰들의 지지를 받았다. 재판 방청객이 연일 천 명이 넘을 정도로 관심을 받게 된 레머 재판은 당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확정되는 계기로 바뀌었다. 전후 독일 정부는 나치 친정인 그들 검찰에게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다.(270-3쪽)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일제 잔재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한국 정치와 나아가 최근 무소불위의 한국 검찰 권력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끝낸 패전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을 끝냈지만, 여전히 전쟁 중 휴전 국가이다. 독일은 과거 히틀러 마약의 약해져가는 잔여효과를 처리하면 될 것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지금도 지우지 못한 일제 흔적과 한국전쟁 여파인 색깔 주술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흔적과 주술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검찰 권력과 그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을 깨부수는 오늘의 저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에서 깨닫게 되었다.

<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 영상(《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2회 정기학술대회는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주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장소: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 (온라인 동시진행)
시간: 2022년 6월 11일 (토) 오후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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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박정하 회장(성균관대)
축 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 사회: 이지영(이화여대)
– 발표1 – 김성우(상지대): 코로나 19 팬데믹과 푸코 생명정치의 문제
– 논평1 – 조은평(건국대)
– 발표2 – 김범수(숭실대): 바이러스, 도래한 시대 : 들뢰즈를 중심으로
– 논평2 – 김은주(서울시립대)
– 발표3 – 정유진(서강대): 쏠루세와 코비드 19 – 해러웨이를 중심으로
– 논평3 – 이현재(서울시립대)
– 1부 종합 토론

2부 《이규성 선생님 추모 학술제》 – 사회: 이병창(한철연)
– 발표1 – 이지(이화여대): 중국 현대 ‘신철학’ 재검토 – 이규성의 『중국현대철학사론』 비판적 독해
– 발표2 – 박민철(한철연): 한국현대철학사 방법론의 확장 :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과 그 논쟁들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 청중과 함께하는 좌담회

 

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앞의 글(서평, 1부)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조던이 과학자로서 불굴을 의지를 갖추고 자연 속에 질서를 세워 나갔던 힘의 원천을 묻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여기서 저자의 서술은 비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애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조던에 대한 애가는 갑작스럽게 분노로 전환한다. 이것은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이다.

첫 번째 의심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해 1905년 스탠포드 학장으로 근무할 당시이다. 스탠포드 대학 이사장인 제인 스탠포드가 사망했는데 여러 증거로 볼 때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조던은 학장으로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제인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만다.

최근 이 사건은 다시 조사되었는데 저자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 조던이 제인을 독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의심보다 더 결정적으로 저자의 평가를 전환한 것은 조던이 1920년대 전개했던 우생학 운동이었다.

우생학은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이 1883년 제시했다. 조던은 이런 우생학을 미국으로 전파했으며 1920년대에는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우생학의 온상이 되었다. 조던의 영향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924년 버지니아 수용소나 1928 인종 개선 재단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생학의 결과는 사회 부적응자를 강제로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후일 독일에서는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강제 불임 시술을 통해 유전적 영향을 제거하려 했다.

2)

여기서 강제 불임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간질환자나 정신지체인에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도덕적 타락으로 지목된 창녀, 동성애자 등도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근거가 된 이론이 도덕적 타락이 유전된다는 주장이다.

버지니아 수용소장이었던 프리디 박사는 캐리 벅이란 여성을 조사했다. 그녀는 고아로 자라났으나, 강간당해서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는 애마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프리디 박사는 애마가 캐리의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애마 역시 창녀로 이 수용소에 끌려왔다. 프리디 박사는 캐리가 수용소에서 출산한 아이 비비엔에게서도 정신적 퇴화의 징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 캐리 벅의 예를 도덕적 타락이 3대에 걸쳐 유전한 예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버지니아 수용소에 수용되어 강제 불임 시술의 대상이 되었던 두 여인 애나와 메리를 만난다. 저자는 과연 그들이 그와 같이 처리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를 되묻는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우생학이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저자는 마침내 이 책의 근본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엄격한 절차를 따르는 탁월한 과학자 조던이 이런 우생학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물음이 아니다. 나치즘 역시 우생학에 기초하여 인종 청소를 하였으니, 이런 물음은 곧 나치즘의 원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3)

저자는 조던의 저서를 연구하면서 그 단서를 찾으려 한다. 저자는 마침내 조던을 과학자로 이끌었던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사상에 부딪힌다. 루이 아가시는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표본실 건물 앞에 동상으로 세워놓은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이 나중에 다윈의 영향을 받아 탁월한 과학자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아가시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지배되었다고 본다. 이런 아가시의 사상에 밑바닥에 있는 개념은 자연 속의 신의 계획이라는 개념이다.

저자는 거슬러 올라가서, 조던이 아가시를 자연관찰 캠프에서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때 저자는 아가시의 말을 같은 캠프에 참가했던 시인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시 속에서 발견한다.

스승이 젊은이들에게 말했지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우리는 그분의 법칙에 따라

원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다네

그 무한한 존재, 시작된 적이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그분,

이름 붙일 수 없는 유일자,

우리의 모든 빛의 빛, 그 빛의 근원,

생명의 근원, 그리고 힘의 힘을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자연 속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아가시의 사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론의 태두라고 할 라마르크의 학설과 닮았다. 이 학설은 다윈의 맹목적 진화론과 구별되며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서 이제 진화의 단계는 동시에 탁월함의 단계이며 도덕적 완성의 단계가 된다. 그 단계의 최종 끝에는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의 끝에는 다시 이성적이며 기독교도인 백인종이 있다.

과학이 자연의 종을 연구하는 것은 자연의 종 속에 신이 숨겨놓은 이런 탁월성의 단계, 도덕적 완성의 단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가시는 이렇게 말한다.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4)

저자에 의하면 조던 역시 끝내 아가시의 목적론적 진화론, 즉 자연의 층계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자연의 층계라는 개념은 우생학의 원천이 된다. 그 대문에 조던 역시 우생학 운동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생학은 퇴화라는 개념과 관련된다. 일정한 단계에 이른 생물은 퇴화하여 자신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전시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생학은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퇴화를 막기 위해서는 퇴화가 일어난 종의 번식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인종 청소나 강제 불임 시술의 근거가 된 것이다.

저자는 조던이 스위스의 아오스타라는 공간을 방문한 기록을 발견한다. 아오스타는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을 돌보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장애인이 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어느덧 커다란 도시가 되었다. 조던은 이 아오스타를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저자는 이런 목적론적 진화론에 대립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높이 평가한다. 다윈에서 모든 생물은 각자 적응하고 있는 존재니, 여기서는 어떤 층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생물은 마찬가지로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이런 다윈으로서는 퇴화라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퇴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새로운 적응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물의 다양한 변종이 생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제이니, 이런 변종이 생명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5)

초기에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기도 한 조던이 끝내 다시 아기시의 목적 진화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관해 저자는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 책의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볼 때 저자의 생각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보기에 조던이 은 우생학에 빠져든 것은 자연의 무질서 앞에 조던이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자연이 혼돈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과학이 아무리 이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대지진 앞에서 무너진 조던의 표본실과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혼돈의 세계 속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버지니아 수용소에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한 채 살아남은 애나와 메리의 삶 속에서 발견한다.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그리고 자연에 어떤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을 곧 민들레 법칙이라 한다. 그것이 다윈이 독자에게 그토록 강조했던 것이라고 한다.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이런 법칙은 작가 자신의 삶도 바꾸어 놓았다. 작가는 이제 자신을 떠난 남편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제 직시하며 새로 만난 여성과 삶을 꾸리게 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약간 감상적으로 되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선포한다.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을 해방시키는 것”

6)

마침내 저자는 결단을 내린다. 조던이 어류의 세계에서 세웠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저자는 자기의 일이 조던이 애나와 메리에게 가했던 잔인한 불임시술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자의 결단 속에는 어떤 미묘한 즐거움이 흐른다.

저자는 분지학을 연구하는 캐럴 계숙 윤의 도움으로 물고기라는 존재 즉 어류라는 분류 항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산에 사는 생물을 모두 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또는 공중에 나는 생물을 모두 조류로 분류할 수 없듯이 물에 산다고 해서 모두 어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어류라고 말해지는 폐어, 송어, 멍게, 가자미 등은 동일한 과에 속하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한다는 생각은 관념론 철학의 근본 주장이다. 물고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은 물고기가 마치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제 물고기라는 분류명을 제거해 버린다. 이로써 조던이 목숨을 걸고 확립하려면 물고기의 존재는 사라지게 된다.

7)

글을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나는 다시 회의에 빠진다. 우선 우생학에 대한 문제이다.

민들레 법칙, 아름다운 말이지만 저자가 기대한 만큼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가 그려 놓은 것처럼 자연의 혼돈 앞에 그런 그물망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 아마 그것은 대지진으로 파멸된 조던의 실험실 유리병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저자가 가정했듯이 우생학이 목적론적 진화론의 결과인가? 다윈의 저서 속에 인간이 가축을 개량한 것 역시 진화의 한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다윈의 진화론 자체 내에 이미 그런 우생학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이 아니라, 이런 생물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 속에 끌어들인 것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생물과 동일하다면, 우생학은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생물과 운동 법칙이 다르다는 전제 아래서만 우생학을 비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존재의 탁월성이나 도덕적 완성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인간적 관점을 자연 속에 집어넣는 것이니 비판 받는다. 하지만 자연의 사다리를 자연 자체의 운동 법칙의 차이로 본다면, 이는 자연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가 되지 않을까?

두 번째는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자연은 정말 혼돈에 불과한 것인가? 모든 질서는 인위적인 것인가?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결국 니체의 철학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이란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존 의지는 영웅의 것이고 대부분 사람은 자연의 혼돈 앞에서 오히려 니체가 경멸하는 과학적 삶, 무리 지은 삶을 선택할 것이다.

자연이 혼돈에 불과하다면, 저자가 반대하는 삶이 결론으로 도출되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찾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서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1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어느 물리학 교사의 말이다. 급하게 책을 구해 읽어 보니, 교사의 말이 틀림없다.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철학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번역서 제목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LuLu Miller 저, 정지은 역, 곰 출판, .2021.12)이다. 원본이 2020년 나왔으니, 얼마 전이다. 저서의 원래 이름은 의문문으로 되어 있다.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구체적으로는 20세기 초 미국의 대표적인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다룬다. 단순한 자서전과는 달리 저자가 과학자인 그의 삶에 물음을 던지며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을 읽기 전에 조던을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미국인인 그는 1851년 태어나 1931년 사망했다. 그는 어류를 연구했으며, 그가 발견해 명명한 물고기는 200여 종이 넘는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에 거대한 어류 표본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나면서 이 건물에 이름표를 달아 놓은 유리병에 보관된 표본이 모조리 파괴된다. 물고기와 그 이름표는 서로 흩어져 일대 혼란이 벌어졌을 없게 되었을 때 그는 물고기의 이름표를 물고기의 몸에 바늘로 꿰매 놓는다. 그 후 그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과거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표본실이 건설되었다.

그는 인디아나 대학 학장(1885년)을 거쳐 스탠포드 대학 학장(1891년)을 역임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평화주의자로서 미국의 전쟁 참여를 반대했다. 그는 위대한 미국인의 반열에 들어 심지어 미국에는 그의 이름을 딴 호수와 산도 있다.

그런데 그의 삶에는 의심스러운 구석도 있다. 그는 1906년 스탠포드 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제인 스탠포드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우생학을 미국에 도입하여 그 영향으로 1924년 버지니아 간질환자 정신박약자 수용소가 건설되어 강제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1928년 죽기 직전 그는 미국의 인종 개선 재단의 위원이 되었다. 그의 행동은 사회 부적응자를 청소하려 했던 나치의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그를 새롭게 평가하는 노력이 등장하여 미국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있다. 저자의 이 책은 바로 이런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철학적 전기라고 하겠다.

2)

그의 생애를 간단히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의 삶의 문제가 금방 드러난다.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다. 그가 어떻게 부적응자를 사회에서 제거하기 위한 강제 불임 시술을 합법화하는 잔인한 행동에 빠져들게 된 것일까?

저자는 나중에 가서는 이런 문제를 깨닫게 되지만 처음에 저자가 그의 삶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오히려 다른 문제였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조던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과학자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조던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저자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어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결국, 이 자연 세계 속에 남는 것은 혼돈뿐이다. 이런 혼돈 속에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보다 더 탁월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저자의 아버지에 의하면 “혼돈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배자이며”, 우리는 “한 마리 개미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이런 생각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형이상학자에 대항하면서 니체가 내뱉은 말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혼돈이 지배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엇이겠는가? 니체가 세계의 혼돈 속에서 삶의 허무를 말했듯이 저자의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저자가 어릴 때 부딪혔던 것은 바로 혼돈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비극적인 자기파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냉혹한 세상에서 잠시 ‘웃음의 잔물결’을 던져주는 희극배우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저자가 소녀를 유혹했다고 고소되면서, 남편도 떠나고 저자의 삶은 파괴되고 만다. 저자는 고통 속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과학자 조던의 삶을 연구하게 된다. “아무런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을 그에게서 찾고 싶었다.

3)

저자는 조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소개한다. 조던은 어릴 때 들꽃을 좋아한다. 그는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것들에 마음을 쓰는” 아름다운 아이였다.

노예 폐지론자인 그의 형이 북부 연방군에 참가했다가 발진티푸스로 죽자 그는 내적으로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그는 들꽃을 채집하여 표본을 만들거나 들꽃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 보존하는데 흥미를 느낀다.

그는 1873년 루이 아가시가 페니키스 섬에서 개설한 자연관찰 캠프에 참가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한다. 그는 아가시의 도움을 어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캠프에서 그는 수잔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다윈의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이미 소개한 것처럼 그는 탁월한 학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 따르던 형을 읽었고, 아내 수전도 병으로 일찍 죽었다. 나중에 다시 재혼했지만 아이 바버라도 잃었다. 그런 재앙에도 그는 굽히지 않는다.

저자는 조던이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에 파괴된 물고기 표본실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이런 서술을 통해 과학자로서 조던이 무질서한 자연에 대항하여 질서를 세우기 위해 벌였던 영웅적 노력의 원천을 발견하고자 했다. 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4)

저자가 일단 먼저 가정한 것은 카프카가 말한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란 곧 니체가 말한 생존의 의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는 어쩌면 인간을 계속 나가게 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인 조던에서는 이런 파괴할 수 없는 생존 의지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저자가 조던의 생애에서 발견한 것, 즉 그것을 통해 조던이 자연에 질서를 세우도록 만든 힘은 오히려 두려움이라고 본다.

이 두려움을 저자는 조던이 형의 죽음에서 처음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형을 좋아했다. 그의 형은 노예 해방론자이며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가담했다. 불행하게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다. 어릴 때 그는 형의 죽음에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자연의 혼돈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런 두려움이 질서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이런 두려움이 자연의 파괴적 힘이 분출된 1906년 대지진 앞에서 그가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도록 만든 원천이라는 것이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만이 이 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투쟁할 수 있게 했던 것은 또 하나의 힘은 어떤 기만이었다. 저자는 이 기만을 조던이 남긴 일기 속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기만이라 본다. 이는 근거 없는 어떤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거 없는 기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면서 삶의 투쟁을 계속하게 만드니, 이것은 자기기만이 가진 긍정적 효과라고 한다.

두려움과 질서에 대한 집착, 자기기만이 과학자의 삶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니체가 말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본다면 자연 과학자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의 삶이 여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