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㊸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3)

[410a-412b]

* 그리고 정의로운 나라의 젊은이들은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는다고 우리가 말한 저 단순한ἁπλός 시가μουσικῇ를 즐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재판술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410a) 그리고 시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같은 발자취를 좇아가며 체육 교육을 받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고 이 체조와 운동γυμνάσιον καὶ πόνος을 열심히 하려는 이유 또한 다른 선수들이 그저 힘ἰσχύς만을 키우기 위해 운동과 식생활을 관리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천성 중 기개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10b)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을 제도화한 목적이 체육은 몸을 돌보기 위해서, 시가는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둘 다 영혼을 위하는데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렇다고 시가 교육이 영혼에 관여한다 해서 체육보다 시가 교육에 더 치중해서도 안 된다.(410c) 왜냐하면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영혼 또한 가장 온전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체육만 평생 어울려 지내고 시가는 소홀히 하는 사람은 필요τὸ δέον 이상으로 ‘사납고ἀγριότητός 완고한σκληρότητος 상태의 마음’διάνοια을 갖게 되고 그 반대로 시가에 치우치고 체육은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부드럽고μαλακίας 온순한ἥμερος 상태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410d) 사나움ἀγριότητός은 천성φύσις 중 기개적인 부분에서 나오는데 그것이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ἀνδρεία가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조장되면 딱딱해지고 고약해지기χαλεπὸν 십상이라는 것이다.(410d) 그리고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κόσμιον 될 것이라고 말한다.(410e) 그래서 수호자들은 성향상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 양쪽 측면을 다 가지고 있으므로 조화를 이루어ἁρμόζειν 절제τὸ σῶφρον와 용기를 갖추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비겁하고ἀνάρμοστος 사납게 된다는 것이다.(410e)

*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위와 같은 부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누군가가 시가에 자신을 맡겨 아울로스 연주에 심취하여 달콤하고 유약하며 구슬픈 화음ἁρμονία의 음악들을 마치 깔때기처럼 귀를 통해서 영혼에 쏟아붓는 경우, 처음에는 쇠를 무르게 하듯 기개의 경직된 상태를 무르게 하여(411a) 조금은 쓸모 있는 상태로 만들겠지만, 그가 계속해서 시가를 들이부으며 시가에 홀려있기만 한다면, 결국 그는 기개를 완전히 녹여버리고, 힘줄을 끊어내듯 그것을 영혼에서 끊어내어 ‘유약한 창병(槍兵)αἰχμητής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애초에 타고나기를 기개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고 반대로 기개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개를 허약해지게 해서 성마르게 만들어 사소한 일에 벌컥 성을 냈다가도 금세 사그라지게 만든다고 말한다.(411b) 그와 달리 체육에만 매달리고 시가와 철학은 손대지 않는 사람은 처음에는 몸을 잘 유지하고 기개로 가득 차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Μοῦσα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경우에는(411c) 비록 그의 영혼에 배움μάθημα을 사랑하는 면모가 좀 있다 할지라도, 배움과 탐구ζήτημα도 전혀 맛보지 못하고 논변λόγος이나 나머지 다른 시가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마침내는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귀먹고 눈멀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논변을 혐오하는μισόλογος 자가 되고 시가에 무지한 사람이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Πειθώ하는 법이 없고,(411d) 아무 일에나 짐승처럼 야만스러운 폭력을 사용하며, 장단에 맞지 않고 천박하게 무지함ἀμαθίᾳ과 서투름σκαιότης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προσήκοντος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ἐπιτεινομένω καὶ ἀνιεμένω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가와 체육을 가장 아름답게 섞어서κεραννύντα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영혼에 적용하는 사람, 이 사람을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아가 그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가 나라에서 보존되기 위해서는 어떤 감독자ἐπιστάτης가 늘 필요하다고 말한다.(412a)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춤이나 사냥, 짐승몰이, 그리고 체육경기, 말들로 하는 경합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의 규범τύπος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

*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술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질병과 건강 모두 철저히 자기 관리에 달렸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관리의 궁극 목표가 영혼을 보살피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체육 교육의 목표 또한 영혼의 돌봄에 있다는 생각은 당대의 체육 교육관과 차별하여 플라톤이 처음 제시한 것이다. 몸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을 담보하지는 않더라도 그에게서 정신의 건강은 몸의 건강을 담보한다.

* 여기서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나움ἀγριότης과 거칠음σκληρότης, 부드러움μαλακία과 온순함ἡμερότης, 단정함κόσμιον 등이 나온다. 우선 사나움과 거칢은 기개 부분의 양육 상태에 따라 용감함에 대비해서 나타나는 마음 상태들이다.(410d), 그리고 부드러움은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영혼의 상태이고(410d) 온순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이 지닌 것이고 단정함은 그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때 드러나는 마음 상태이다.(410e) 그러니까 사나움과 거칠음은 기개 부분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고 부드러움과 온순함, 단정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서 유래하는 마음 상태이다.

* 그런데 부드러움μαλακία은 여기서 시가 교육이 가져다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soft, mild, gentle의 뜻 외에 부정적인 의미로 morally weak, lacking in self-control의 뜻도 있고 실제로 <국가> 556c에서는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부드러움을 기개부분이 약해지면 드러나는 마음 상태로 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도 기개 부분이 노래에 매료되는 정도에 따라 부드럽게 되거나 지나칠 경우 아예 녹아 버리는 마음 상태로 언급되기도 한다.(411b). 단정함κόσμιον 또한 여기서는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되었을 때의 상태로 언급되고 있지만(410e) 질서, 절도well-ordered의 뜻은 물론(329d) 얌전함과 조신함of a patient, quiet, modest의 뜻도 있어 오히려 기개 부분이 지닌 용기에 대비되는 마음 상태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J. Adam의 해당 부분 Note 참고)

* 그래서일까, “온순함τὸ ἥμερο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이 지닌 것으로 이것 또한 너무 느슨해지면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온순하고 단정하게 될 것”(410e)이란 문장에서 ‘이것’αὐτοῦ이 가리키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란이 있다. 여기서 우선 네 가지 특성 즉 사나움과 거칢, 부드러움과 온순함이 구별된다. 이 중 사나움은 기개 부분에 유래하는 것으로 제대로 양육되면 용기가 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거칠게 된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러나 의문도 생긴다. 앞의 문장(410e)을 언뜻 보면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J. Stallbaum 등) 그렇지만 이것은 문법적으로 ‘온순함’을 ‘필요 이상으로 부드러워지지만’μαλακώτερον εἴη의 주어로 새로 끼워 놓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경우 또 ‘온순하고 단정하게’라는 말도 설명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온순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J. Adam의 해당 Note 참고) 물론 이 경우 내용상 ‘온순함이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는 역어 상 동어반복으로 보여 다소 어색하지만, 이 말은 온순함이 훌륭하게 양육될 경우 ‘제대로 온순하고 단정하게 된다’란 의미를 내포한다.

* 이어서 체육에만 매달려 시가와 철학을 게을리했을 경우 초래되는 여러 양태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를 강조하기 위해 제기된 언급들이다. 내용적으로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으로서 배움과 탐구 및 논변과 설득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그 반대의 경우로서 논변 혐오와 폭력, 무지함과 서투름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 ‘신이 인간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을 위해서 두 가지 기술을 부여하여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당기고 풀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411e)의 표현은 영혼이 음악적 이미지를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영혼은 기개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이라는 두 가지 현χορδή들의 풀고 당김을 통해 조화롭고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하는 일종의 음악이고 그런 점에서 그와 같은 조화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은 실제 현악기의 현을 조율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시가적인 사람이다.(412a) (<라케스> 188d 참고)

——————————

* 앞서도 언급했듯이 시가교육이나 체육교육 모두 영혼의 상태가 핵심적인 관심사항이다. 사실 나중(439d)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영혼 3분설이란 이름으로 익히 많이 들어 알고 있듯이 이성 부분τὸ λογιστικὸν과 기개 부분τὸ θυμοειδὲς과 욕구 부분 ἐπιθυμητικόν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τὸ φιλόσοφον은 내용상 이성 부분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들 간의 조화가 이루어지 않았을 경우 나타나게 되는 영혼의 상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시가교육과 체육 교육의 조화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내용들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플라톤의 영혼론(434c-441c)의 예비적인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영혼에 미치는 대조적인 영향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 영향에 따라 영혼의 기개부분과 이성부분이 드러낼 수 있는 아주 다양한 양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기개부분에 시가 교육이 지나치면 기개를 허약하게 하여 유약한 창병으로 만들고 반대로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짐승처럼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만든다. 즉 영혼의 기개부분의 온전한 상태인 용감한 상태를 중심으로 교육 정도에 따라 유약함과 야만스러움, 이른바 비겁과 만용의 상태가 초래되는 것이다.(411e-a) 이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 즉 이성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에 체육 교육이 지나치면 이전의 자신보다 더 용감해지겠지만 무사 여신과도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아 배움을 사랑하는 면모가 허약해지고 논변을 혐오하는 자가 되어 무슨 일에든 논변을 통해 설득하지 않고 짐승처럼 야만스런 폭력을 사용하며, 천박하게 무지함과 서투름 속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411d-e)

* 이것은 영혼의 이성 부분도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지혜를 가운데 두고 영악함과 아둔함 양쪽으로, 기개 부분도 용기를 가운데 두고 비겁과 만용 양쪽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기서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욕구 부분 역시 절제를 가운데 두고 인색과 사치 양쪽으로 각각 다양한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성 부분과 기개 부분, 욕구 부분 모두 교육 여하에 따라 각기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한 사람의 전체적인 영혼의 상태는 그러한 각 부분의 각기 다른 양태들 간의 다양한 관계로 나타나며, 또 그에 따라 각 사람들의 소질 또한 그것들의 다양한 상호 조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여기듯 ‘영혼의 이성부분, 기개부분, 욕구 부분 각각이 가장 완전한 상태들을 이룬 상태에서 그것들 간에 성립되는 조화’만이 조화의 유일한 상태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화 상태는 통치자가 가져야 할 가장 이상적인 영혼의 조화 상태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조화로운 인간 영혼의 상태’가 갖는 다양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를테면 이상적인 군인이나 이상적인 생산자는 조화의 양상은 다르지만, 이상적인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고유한 소질을 구현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처럼 이곳의 논의는 논의의 기본 취지대로 시가 및 체육교육의 조화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부차적으로는 그러한 시가 및 체육 교육이 결과하는 조화로운 영혼의 상태 또한, 비록 크게는 각자의 천성에 따라 세 가지 양태로 구분되어 나타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같은 계층의 개인들끼리도 다양한 양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함께 일깨워 준다. 통치자 계층이나 군인 계층이나 생산자 계층이나 어느 계층에 속하는 그 누구든 조화로운 영혼의 양태가 로봇이 아닌 한, 계층별로 어찌 천편일률적이겠는가.

* 그런데 플라톤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영혼 각 부분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 간의 조화이지 논의 전개상 아직은 영혼들 각 부분의 조화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살피게 되겠지만 영혼들 각 부분 간의 균형과 조화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관장하고 그 이성적인 부분의 상태는 앞서 살폈듯이 교육 여하에 따라 사람마다 다양하다. 이를테면 통치자 계층은 이성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지혜를 가장 잘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그 지혜와 조화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 최상의 조화도 구현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는 영혼의 기개부분과 욕구부분은 이성 부분의 발달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생산자 계층은 욕구적인 부분이 가장 발달하여 스스로 생산 능력을 가장 발 발휘하기 위한 영혼의 상태를 보전하면서 절제의 능력으로 사회적 계층들 간의 조화에도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그가 함께 가지고 있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과 기개적인 부분은 욕구 부분의 발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수호자 계층에 속하면서 통치자를 보조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이상국가 내의 각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영혼의 상태를 갖고 있으면서 모두 다 자기의 천성과 소질이 최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최상의 내적 조화를 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치자만 영혼들 간의 최상의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다른 계층은 그 보다 떨어지는 이른바 영혼의 부조화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만 천성에 맞춰 그들이 구현하는 조화의 양상만 다를 뿐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 내 사람들 모두는 영혼의 각 부분의 다양한 상태들이 각 부분 간의 무수한 상호 조합 방식의 차이에 따라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영혼의 양태를 갖고 있고 각기 고유한 특성에 따라 분업적 사회공동체의 다양한 직능들을 나눠 맞는다. 장차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비록 사회적 계층들과 구성원 간의 조화를 관장하는 통치자의 역할이 가장 중시되고는 있지만 단지 통치자의 역할만으로 성립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상 국가는 분업적인 사회공동체 내에서 각기 다른 본성과 그에 따른 역할을 가진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 각각이 스스로 최선의 내적인 영혼의 조화를 보전하면서 사회적인 자기 직분을 다 했을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자기다운 삶을 누리는 공동체가 이상국가론의 목표인 것이다. 개인의 행복감 또한 양상은 각기 달라도 각자 영혼의 조화 상태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상국가의 구성원들은 계층과 직능에 상관없이 모두 행복하다.

*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드러내는 위와 같은 모습들은 비록 영혼의 조화 양상 측면에서만 살펴본 단편적인 내용들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그 구상만으로도 이미 환상이라 할 정도로 현금의 우리들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면 현대 금융 자본주의는 확신에 차 있듯 인간의 본성을 오로지 물질적 욕망으로 환원하여 획일화해버렸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대부분 나라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날이 갈수록 더 벗어나기 힘든 고통과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상태를 절망적인 눈으로 지켜볼 수만도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고 그 극복을 향한 몸부림의 하나로 철학적인 숙고도 끊임없이 감행해야 한다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은, 비록 고대 저작의 한계에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발상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각기 다른 소질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철학적 모색의 고전적이고 반성적인 지표로서 매우 의미 있는 논점과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플라톤 역시 이러한 논의들을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꿈꾸듯 써내려 간 것이 아니라 병들대로 병들어 있는 당대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헤쳐 가며 체득한 고뇌어린 성찰을 토대로 토로한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그의 영혼론과 정의로운 정치체제론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

* 플라톤 역시 체조와 운동, 식생활의 관리 등의 방식으로 힘을 키우고 건강한 신체를 보전하는 것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이 체육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며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체육 교육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체육 교육의 목표와 시가 교육의 목표는 종국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체육은 몸을 돌보고 시가는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그 둘 다 영혼의 훌륭한 상태를 위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대전체와 원칙 아래에서 체조와 운동 식생활 관리 등의 체육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라는 근본 원칙 위에서 체육 교육과 시가 교육은 어느 곳에도 치우침이 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논의의 마지막 부분은 앞서 살폈듯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이 부조화를 이루었을 경우 어떠한 심각한 지경에 이르는지를 아주 상세하고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수호자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면과 기개적인 면을 적합한 정도에 이를 때까지 서로 당기고 풀어 가며 양 측면의 조화를 이루어 종국적으로 가장 시가에 능하고 가장 조화로운 사람으로 길러져야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들을 담보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러한 체제를 나라에서 보존할 수 있는 어떤 감독자가 늘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이것들이야말로 교육과 양육의 규범 즉 정신적인 교육과 신체적인 교육의 기본 틀이라고 언급한다.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시가 및 체육 교육과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마침내 이상국가론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정치체제와 그 체제의 보전을 위한 감독자로서 수호자 중의 수호자 즉 통치자에 대한 논의로 대화를 이끈다.

<체육 교육 끝. 다음 주제 :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신화(412b-415d)>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

1)

부산에 정착해서 모처럼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여유를 이용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었으므로, 사전을 찾아가며 까다로운 원전을 그것도 관계대명사로 이어진 마르크스의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자본론 읽기를 가로막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방대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교수를 혹사했다. 나는 거의 매 학기 18시간 어떤 때는 24시간까지 강의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일상적인 업무, 학생들과의 만남, 교수로서의 학내 투쟁과 대외 투쟁이 나의 초조한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나는 마르크스 자본론 3권을 쌓아 놓고, 매일 남은 페이지가 얼마인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최초의 계획은 자본론을 다 읽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헤겔 논리학의 진행 방식을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론을 거의 다 읽기까지, 도무지 헤겔의 논리학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으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었다.

거기에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로 구 운동권은 독선적이고, 영웅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이라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런 비판의 최종 점정{點睛]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였다. 그 시가 내용만 본다면, 꼭 당시 운동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필요는 없었으나 누구나 그의 시를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그런 비판 앞에 운동권은 고개를 숙였으며, 부끄러움 때문에 병이 들었다.

구 운동권은 길을 잃었다. 대부분, 현실 정치권으로 흡수되었으며, 일부는 명상운동으로 나갔다. 이 시기 ‘방하[放下: 내려놓다]’라는 참선이 유행했다. 나는 과거 누구보다도 급진적이었으나 그 후 방하 운동에 참여했던 어느 교수로부터 술 자리에서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몰랐으나, 잘못했다는 죄책감만은 누구나 지나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슬픔은 느끼지만, 무엇이 슬픈지는 모르는 상태와 같았다.

2)

이 시기, 구 운동권 문화를 대체하려는 듯이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으니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발전시킨 문화가 곧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80년대 들어 유행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었고 신자유주의로 변화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서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수입된 것이다. 당혹했지만, 먼저 문화가 수입되고 나중에 사회가 변화한다는 한국문화의 일반적 발전 법칙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삽시간에 세상을 점령했다. 우리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하는 데 현실의 변화보다, 오히려 90년대 초 부딪힌 구 운동권의 좌절감과 자기비판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운동권의 거대 담론을 부정하지는 못했으나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 구원을 느꼈으며 구 운동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끌려갔다.

어떻든, 포스트모더니즘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보다는 유희적이고 장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욕적이고 엘리트적이었던 모더니즘 문화에 대립하면서 쾌락을 허용하고, 대중성과 상업성을 받아들이자 했다.

민족과 민중을 말하는 것은 마치 철 지난 옷을 다시 꺼내 입는 것과 같았다. 그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일상적 투쟁이 독자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여성 운동, 지역 운동, 문화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등. 이와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단체가 세워졌다. 과거에 모든 단체 이름 앞에는 ‘민중’이나 ‘민족’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름 앞에 ‘시민’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며, 아예 ‘경실연’이라든가 ‘참여연대’라든가 하는 독특한 이름이 등장했다.

새로운 운동 단체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자 했으며 세상은 합의를 통해 결정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길거리에서 시위는 진정되고 법과 언론을 이용한 투쟁 방식이 등장했다. 이제 앞에 고발장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걸어가는 단체 대표의 모습이 언론을 장식했다.

2)

이러한 새로운 시민운동,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소위 자유주의 철학이었다. 갑자기 푸코와 데리다,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밀어닥쳤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밀어닥칠 때는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 역시 여기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자본론을 거의 다 읽은 단계에서 원래의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새롭게 소개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의 책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다. 나는 불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아직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영어번역본을 구해 읽었다.

일단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구조주의는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놓았는데,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와 주체 속에서 모든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으나 구조주의는 이런 역사의 개념이나 주체의 개념을 비웃었다. 한순간 내가 딛고 있는 받침대가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구조주의는 구조의 변화만을 말했지, 이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역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역사의 변화를 믿는 편이었는데, 그렇다면 구조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일단 구조 개념의 철학적 토대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구조주의에 매료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를 더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3)

처음 손에 잡았던 철학자는 푸코였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동의할 만했다. 그는 생체 권력이나, 판옵티콘의 자아 감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니,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이런 권력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매료되었던 개념은 푸코의 권력 개념보다 담론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담론을 형성하는 담론의 구조를 제시하면서 이런 담론의 구조가 권력의 지배 아래 형성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진리의 기준이나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이런 권력의 지배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 하면서, 소위 ‘지식-권력 복합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푸코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억압적 거대 권력 개념과 이데올로기 개념과 대조되면서 나에게는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푸코의 주장은 당시 확산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 독자적 운동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 운동은 각 분야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을 제거하려는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푸코의 사상은 프랑스와 같이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노골적인 폭력 장치를 통해 강제적인 억압이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푸코의 투쟁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 처음 등장한 다양한 시민운동은 90년대 초중반에만 해도 아직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시민 운동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되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철학일지(5)[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5)

1)

앞에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관련되어 두 가지 이채로운 일 중 한 가지를 소개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제 또 하나의 이채로운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나는 많은 인문학 연구자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질 때, 철학연구자들보다 앞서서 이들 연구자들도 이미 자기의 분야에서 연구회를 만들었다. 내 기억으로 거의 학문의 분과마다 하나의 학회나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학문이 아카데미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현실에 복무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세워진 조금 뒤 다양한 연구회 사이에 통합된 단체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합동 단체를 만드는 데 모두들 진심이었다. 합동 단체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학술단체협희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요즈음은 거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으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단체였다. 학문간, 학제간 통합된 연구자 단체는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다. 가입한 연구단체의 전체 나, 정확한 결성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2)

학단협이 만들어질 때 준비 모임에 후배들의 위임을 받아 내가 참석했던 것 같다. 모임을 주도한 것은 산업사회연구회의 조희연 선생이었다. 당시 그는 상당히 급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를 만들려 했던 것 같은데 농업 문제 연구자인 이우재 선생이 제동을 걸면서 상당히 대중적이고 온건한 단체가 되었다. 나는 이우재 선생의 편에 들었기 때문에 조희연 선생과 여러 번 부딪혔지만, 그런 충돌이 학술단체 협의의 필요성에 대한 시대적 공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단체는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었고 나중에 이 단체 출신 연구자들이 대학교수로 진출하면서 민교협이나 교수노조를 형성하는 데 핵심이 되었다. 어떻든 이 단체가 세워지면서 이른바 학문 전선에서도 하나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시의 영향을 받아 진지전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는데, 마침내 다른 모든 투쟁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의 진지가 꾸려졌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창립총회는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로 열렸다. 내 기억으로는 통신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아마 강당의 규모가 500석정도 되었는데 그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철학 전공자만이 아니라 비철학 연구자나 일반 대중도 이때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주제도 기존의 철학계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주제였다. 우리는 당시 연구자들의 많은 존경을 받던 언론인 이영희 선생이나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 영문학자 백낙청 선생 등의 사상을 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마 어마어마한 규모의 참석자가 창립총회에 모여들었던 이유는 이런 주제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역시 백낙청 선생의 사상을 연구해서 발표했는데, 그 본문 역시 어딘가 있을 텐데, 굳이 찾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기존의 철학계를 비판하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나는 누구도 하지 않던 연구를 했다. 철학계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 우리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철학을 했는지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철학을 호기심이나 개인적 선호에 따라서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개인적인 선호로 본다면 단연 실존철학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철학에서도 올바름이라는 것이 적용된다고 보았다. 올바름 자체가 사실 철학적으로 형성된 개념이지만, 그때는 올바름이란 영원한 잣대가 있고 철학도 그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엇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삶과 철학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올바른 철학은 올바른 삶으로 나타날 것이고, 거꾸로 올바르지 못한 철학자의 삶은 원래 그의 철학 자체 내에 그런 올바르지 못한 삶이 잉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올바른 철학의 흔적을 계승하고 싶었다. 나는 몇몇 철학적으로 올바른 흔적도 발견했다. 신남철, 박치우 등의 이름이 이때 기억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올바르지 못한 철학은 비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단순한 구도였다. 현실에 기여, 삶과 철학을 곧바로 이어버린 이런 구도는 지금 보면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때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였다.

3)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에서 했던 또 하나의 작업은 북한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우리는 북한에서 일어나는 철학 연구도 우리 민족의 철학 연구이니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북쪽의 철학이 운동권을 통해 소개되기는 했지만, 너무 단편적이었다.

북쪽의 철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런 철학이 전개된 과정이 이해되어야 했다. 단순히 그쪽 사회의 역사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철학이 나오기까지 많은 철학 연구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었으리라. 그런 철학 연구자들의 연구가 이해되어야만 북쪽의 철학이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쪽의 철학자가 누구인지, 어떤 연구를 해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침, 송상용 교수님이 안기부와 협조하고 일본의 조선대학과 연결하여 북쪽의 철학자가 발표한 논문집을 복사하여 들여왔다.

대부분의 복사는 북쪽의 학계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연구잡지였다.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잡지 전체를 복사했는데 유감스럽게도 70년대 말 이후 철학 잡지는 단절되었고 80년대 후에 다시 복간된 철학잡지는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연구잡지를 철학의 분야별로 나누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기부의 도움으로 잡지를 복사해 왔으니 우리의 연구발표도 안기부에서 허용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북쪽 철학에 관련된 심포지움을 열고자 했을 때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안기부에서 허용할 수 없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우리의 연구는 시대와 철학에 발표하기로 하고 심포지움 개최는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심포지움에서 북쪽의 사회철학적 연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발견한 잡지의 대부분의 연구는 북쪽이 아직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에 머무를 때 나온 것이어서 소련이나 기타 사회주의 진영에서 연구된 내용과 크게 다른 내용은 발견할 수 없었다.

4)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성과는 쌓여갔으나, 현실의 운동은 점차 좌절감에 사로잡혀갔다. 80년대 말 노태우 정부 시절 3당 합당이 일어나자, 사회의 민주화는 다시 한 번 불가능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산화를 신문지상에서 보면서 나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속이 빈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과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허감을 내적으로 느꼈으나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찾지 못했다. 80년대 말 고르바죠프의 사회주의 개혁운동이 전개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생계와 관련하여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나는 활로를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교내 민주화가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사회철학이나 근대사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새롭게 개설하였다. 마침 철학과에서 사회철학 담당교수를 뽑으려 했는데, 이때 동아대 학생들이 나를 찾아와 내려오기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요청대로 동아대학교에 지원했다. 교내 민주화 운동이 전개된 민주적 총장이 선출된 상황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다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말하자면 학생들이 뽑은 교수가 되었다. 68혁명 시대 파리 벵센느 실험대학에서 학생이 교수를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가 그런 교수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그때는 있었다.

5)

나는 부산에 내려가면서 이제부터는 학자가 되기로 했다. 한편으로 학생을 기르면서 다른 한편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연구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헤겔 철학이었다.

내가 다시 헤겔철학을 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 때문이었다. 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는데 자본론 앞 상품 화폐 장 속에 마르크스의 설명에 너무 매혹되었다. 그 설명은 내가 헤겔 논리학을 읽다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변증법의 논리를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헤겔의 변증법에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어 헤겔의 논리학을 자본론과 함께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철학 일지(4)[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4)

1)

역사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85년 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역사의 때가 오고 있다는 직감이었다. 가만히 시골에서 무위 도식할 수는 없었다.

85년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회철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철학도들이 모여 작은 연구실을 마련했다. 처음엔 신림동 어디에 있었던 것 같은데 곧 봉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처음 했던 사업이 사전을 번역하던 것 같은데, 사전을 만들기 위해 연구실이 열린 것인지, 연구실을 열어놓으니 사전이 만들어졌는지, 기억이 불분명하다. 아마 후자였으리라. 그렇다면 왜 처음에 연구실을 내려 했던 것일까? 모여서 공부할 장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때 다른 학문 영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연구자들이 모인 연구실이 세워졌으므로, 거기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당시 운영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의 이런저런 앞에서 말했던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 있을 텐데 그걸 열 수 없으니,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하자.

대체 무엇을 연구했을까? 모두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 나는 역사나 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했는데, 그때는 학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때 그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남은 노트들은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 관해,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노트들이다. 그런 것들은 철학 밖의 글이니 여기서 소개할 것은 못 된다. 철학적으로는 여전히 철학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나는 이런저런 장소에서 철학 논쟁에 관해 설명했다.

이 시기에 거꾸로 나는 철학을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없었다. 방금 말했던 다양한 사회 역사 공부와 철학 소모임 활동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생계를 위해 몇몇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건성으로 했을 뿐이다. 나는 밖으로만 돌았고 집에는 밤에 늦게 들어갔다. 어쩌면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곧 전환점이 다가온다는 확신이 있었고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다시 확신시켜주는 여러 사건을 만났다.

뭐가 할까, 순진한 시절이었다. 사회 역사적 현실을 알기만 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열정이 지배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그 시절만큼 철학자가 높이 대우받았던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정말 자부심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 철학을 통달했다고 믿었고 남들 앞에서 자랑했으니 어리석은 치기가 지배했다. 곧 그런 치기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

2)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한 달이 다가왔다. 87년 6월이었다. 매일 거리로 쏟아져 나갔고 우리 대학원생도 석 박사 과정 가릴 것 없이, 사회철학을 하든 아니든 함께 모여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도 행복했고 거리에서 만난 누구도 모두 친구였다. 길거리에서 흩어졌던 철학과 대학원 선후배를 만나면 그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해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시청 앞 광장에 10만 군중이 모였을 때, 나는 역사의 대낮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은 역사의 신과 내가 직접 만난 순간이었다. 자유와 행복감이 물 밀려오듯 나를 덮었으니, 나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마침내 6월 항쟁은 노태우의 항복으로 끝났으나 곧이어 7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우리가 같이 학습했던 노선 소위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좌절의 시기가 다가왔다. 믿었던 김대중 선생이 노동자 대투쟁의 정점에 재를 끼얹었다. 그는 노동자에게 자제하라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냈다. 나아가서 그는 정부의 노동자 대투쟁에 대한 탄압을 허용하였다. 배반이라고 느껴졌다.

8월 말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 대투쟁이 한순간 꺾이고 곧바로 선거전으로 흘러갔으므로 배반이라는 느낌을 곰 씹어 볼 겨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김대중 선생을 믿었고 나 역시 그의 배반은 선거투쟁을 위한 일시적 양보 정도로만 믿었다.

그해 정확히 언젠가는 모르겠다. 10만 명이 김대중 선생의 연설을 들으러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6월 항쟁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이후 다시 한번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같이 행진했던 후배가 말했다. 만일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면, 내 말을 따르겠노라고. 그러면서 그가 당선될지를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목청껏 김대중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배에게 어떤 말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그 후배는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결국, 그해 12월 겨울, 역사는 독재자의 승리로 끝났다. 80년 봄의 패배와 좌절의 지긋지긋한 감각이 다시 되살아났다.

3)

80년 봄처럼 나는 다시 철학을 시작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어떤 까닭이었는지 소위 신 마르크스주의자의 철학 특히 알뛰쎄와 그람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올랐다. 그것은 87년의 거대한 역사적 실험은 그동안 갈고 닦았던 민중민주주의라는 노선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로서는 알뛰쎄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더 마음에 다가왔다. 지배 계급에 대한 문화적 투쟁이 없이, 기습적인 공격이나 정치적 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그의 주장이 당시의 내 마음에 설득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뛰쎄 파와 논쟁을 위해서도, 그의 주장 역시 학습해야 했다.

선거전에서 패배 이후 이런저런 학습과 활동으로 바빴지만, 내 마음에서 이미 열기는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치지 않았고 마치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갔다.

이즈음 사회철학 연구실은 사전 번역을 마치고 사전을 출판했다. 사전을 번역하는 데 박정호 선생을 비롯한 사회철학연구실 후배들이 무척이나 고생했다. 그들의 노고와 개인적인 희생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 대표자로서 박정호 선생의 이름을 밝힌다.

사회철학연구실은 거기서 얻은 돈으로 좀더 넓은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사이 다른 대학에서도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연구자들이 많이 출현했다. 여러 집단, 그룹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회철학 연구실은 헤겔 학회 성원과 만나, 통합을 준비했다. 두 집단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 한국철학사상 연구회라는 단체였다.

이 연구단체는 창립하면서 두 가지를 강조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는 철학이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히 외국의 철학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현실에 맞는 철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배님들 역시 철학이 시대에 기여하고, 우리 철학이 세워져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는 철학계 선배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학계에서는 새로 출발하려는 단체에 대해 마땅찮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는데,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시기는 조금 늦어졌지만, 성대를 중심으로 한 동양철학 연구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고 곧 철학사상 연구회에 합류하면서 철학계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지방에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도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그들 역시 차례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가담해주었다.

이런 움직임 가운데 이채로운 게 있다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이규성 선생을 비롯하여 내가 대학 시절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가담했다. 이 잡지 역시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와 같은 의식과 목적을 가졌지만, 다만 여기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회철학이나 헤겔 철학 연구자는 아니었다. 고대철학, 동양철학, 분석철학 등 다양한 연구자가 사회에 관한 관심과 우리의 철학이라는 지향점에 대해 동의했다.

그들은 대개 일찍부터 교수가 되어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단체를 이루어 함께 연구하기보다는 글을 써서 잡지를 만들어 새로운 철학을 직접 제시해 보자는 생각에서 잡지(부정기 무크지를 표방했다)를 만들었다. 제목은 ‘시대와 철학’이며, 출판은 윤구병 선생이 주선하여 종로서적에서 맡아주었다.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이 집단 역시 연구회에 가담했다.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의 이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 헤겔은 거기서 그의 시대는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는 여명의 시대라 했는데, 그 때문에 ‘사회와 철학’이라고 할 것이 ‘시대와 철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나는 이 잡지가 철학논문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사르트르가 현대지에 발표했던 철학에세이를 좋아했다. 나는 새로 만드는 시대와 철학이라는 잡지가 이런 철학에세이로 채워지기를 기대했다. 시대와 철학은 나중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잡지의 이름이 되면서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1호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소수 동호인 그룹이 만들었던 시대와 철학은 1호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시대와 철학을 인수했을 때도 나는 이 잡지가 철학 에세이집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후배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오히려 철학 논문집으로 만들어 기존 학계의 논문집과 대결하자는 입장이었다. 나는 상당히 강하게 나의 생각을 내밀었으나 후배들은 나의 생각에 관심이 없었고 결국 시대와 철학은 철학 논문집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결정된 데에는 아마도 철학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은 이때부터 시작된 거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2월 제4차 정기세미나 영상 “童心說 그리고 市隱의 주체자 이규성의 현대철학 추측” 2023.02.16. [월례발표회·세미나]

이번 세미나 발표는 과학철학 전공자의 시각에서 이규성의 철학을 신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 물리와 생물, 언어와 반언어, 이기주의와 숭고감, 그리고 색채론 논쟁에서 보았듯이 입자와 파동을 하나로 담아낼 수 있는 혼융의 철학으로 이해하며, ‘배타적인 것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혼융의 철학’이라고 규정합니다. 또 이러한 평가의 근거를 제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    제: 童心說 그리고 市隱의 주체자 이규성의 현대철학 추측
발표자 :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일    시 : 2023년 2월 16일(목) 오후 4시~6시
장    소 : 서소문로 45 소재, 이병창 교수 ‘정치학교’ 연구강의실
방    식 : 대면+비대면 zoom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o78fkufv7eg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㊷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1.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 (2)

[408c-409d]

* 그런데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는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아스클레피오스가 아폴론의 자식이면서도 황금에 넘어가 이미 다 죽은 부유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그 때문에 벼락에 맞았다고 말한다면서 소크라테스는 만약 그가 신의 자식이라면 추하게 이익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고, 추하게 이익을 밝혔다면 신의 자식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408c) 이에 글라우콘은 우리나라에 훌륭한ἀγαθός 의사ἰατρός와 훌륭한 재판관δικαστής이 필요하다면서 훌륭한 의사란 건강한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보고 병든 사람들도 아주 많이 다루어본 사람이고 훌륭한 재판관 또한 온갖 성향의 사람들을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라는 한 가지 말에 서로 다른 문제, 즉 몸σῶμα에 관한 문제와 영혼ψυχῇ에 관한 문제를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질문한다고 지적한 후(408d) 온갖 것에 대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관련하여 훌륭한 의사와 훌륭한 재판관이 갖는 차이에 대해 언급한다. 즉 의사는 몸을 몸으로써 치료하지 않고 영혼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설사 자기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도 아니고 또 온갖 병에 걸려 보았다 해도 그러한 경험들이 오히려 의사를 능숙하게 만들지만(408e), 재판관은 영혼으로 영혼을 다스리기 때문에 그가 젊어서부터 형편 없는πονηρός 영혼들 사이에서 자라고 어울리며 온갖 부정의를 저질렀을 경우 이미 영혼이 잘못된 상태가 되어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부정의를 날카롭게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영혼이 훌륭하고 뛰어난 상태에서 정의로운 것들을 건강하게 판정하게 되려면 젊었을 때 나쁜 성품ἦθος들을 경험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들과 섞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409a)

* 바로 그렇기에 뛰어난 사람들οἱ ἐπιεικεῖς은 젊어서는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에 부정의한 사람들에게 잘 속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훌륭한 재판관은 젊은 사람이 아니라 부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늦게 배운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훌륭한 재판관은 남의 영혼에 있는 남의 부정의를 지각해 내는 것을 오랜 시간을 들여 연마하여 부정의가 본래 어떤 나쁜 것인지를 자신의 경험ἐμπειρίᾳ이 아니라 앎ἐπιστήμῃ을 이용하여 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409b) 그리고 약삭빠르고 의심이 많으면서 갖은 부정의를 저지르며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들과 교류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본에 주목하여 철저히 경계하여 수완 좋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훌륭하고 나이 든 사람들과 접하면 그런 훌륭한 성품의 본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에(409c) 분별없이 의심하고 무엇이 건강한 성품ἦθος인지를 모르는 어리석은ἀβέλτερος 자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지혜로운σοφός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못된πονηρός 사람들하고만 더 자주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요컨대 악함πονηρία은 덕ἀρετὴ도 자신도 결코 알지 못하지만, 덕은 천성에 교육이 더해져 시간이 가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악함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도 파악하게 되므로(409d) 이런 덕을 갖춘 사람은 지혜로워질 수 있지만 못된 자는 지혜로워질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리고 재판술δικαστικῆ과 의술ἰατρική도 이런 것에 기초하여 법으로 제정νουθέτησις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러한 기술들이 몸과 영혼에 있어 ‘성향이 알맞은’εὐφυής 사람들은 돌봐주고(409e) 그렇지 못하거나 치유 불가능한 사람들은 스스로 죽게끔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

*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수련을 마친 일종의 소수 전문직이라는 점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추첨으로 돌아가며 재판을 맡는 당대 아테네 민주정의 재판관들과 다르다. 아테네 민주정에서 재판관의 수는 적게는 201명에서 1001명(가부 동수를 막기 위해 홀수로 정한다)에 이르고 그들은 재판 참여 수당도 받았다. 소크라테스도 501인의 재판관들의 투표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탄식하듯 소송과 고발이 남발하던 당대 아테네에서 시민재판관들은 종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재판 진행을 일일이 다 따라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405c에서 언급되고 있는 ‘졸고 있는 재판관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변명> 31a에는 이처럼 졸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가 각각 덩치가 큰 말과 등에로 비유되고 있다.

* 참고로 당대 아테네의 재판절차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당대 아테네의 재판은 오늘날도 그렇듯이 사회적 범죄를 다루는 재판과 개인 소송을 다루는 재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다만 재판 절차는 재판관이 아니라 추첨으로 선임된 관리가 맡았고 그 해당 관리는 현행범이나 피고의 자백들을 통하여 범죄가 명백한 경우, 재판소에 넘기지 않고 법에 따라 바로 판정(anakrisis)하여 처벌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판단이 요구되는 경우 관리는 재판소로 판정(ephesis)을 넘겼고 그곳에서 미리 추첨으로 선임된 시민재판관들이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듣고 일차로 유무죄를 판결하고 이차로 원고와 피고가 제시하는 형량 중 하나를 택하는 방식으로 최종 판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재판관은 오늘날과 달리 1인 내지 부심 포함 3인이 아니라 마치 오늘날 배심원들처럼 수백 명 이상의 많은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개인 소송 역시 이와 비슷한 절차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재판에 넘기기 전에 중재자들에 의한 중재가 강조되고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 ‘형편없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본παράδειγμα들’(409b)은 <테아이테토스> 176e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비참한ἔσχατος 본’을 연상시킨다. 이때 본의 의미는 경험한 사례라기보다는 전거 내지 기준을 뜻한다.

———————————————————————————

*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기존 비극작가들과 핀다로스와 견해를 달리한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의 시가 교육의 토대가 되었던 기존 작품들의 내용을 일정 부분 비판하고 차별화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담겨있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흥미롭게도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한다. 글라우콘은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간에 다양한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각 훌륭한 의사이고 훌륭한 재판관이라고 말한다. 의사가 마주하는 질병과 건강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하여금 더욱 질병을 훌륭하게 치료하게 만들고, 마찬가지로 재판관이 마주하는 사람들의 성향들에 대한 경험들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옳고 그름을 판가름해주는 재판관으로 하여금 훌륭하게 재판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라우콘의 생각은 기술일반과 경험과의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기술자이건 그와 관련한 경험을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그리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기술의 숙련도가 높아지고 그와 비례해서 더욱 훌륭한 기술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은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선 플라톤은 글라우콘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은 경우에 따라 의사와 재판관의 훌륭함을 구성하는데 정반대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분을 무시하고 모든 경험을 하나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의 기초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몸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설혹 자신의 몸과 관련한 경험이 나쁠지라도,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의사에게는 훌륭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지만, 영혼과 관련한 경험의 경우, 경험의 좋고 나쁨에 따라 훌륭함과 관련하여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재판관에게 영혼에 나쁜 경험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재판관을 훌륭하게 만들기는커녕 반대로 재판을 그르치고 왜곡하게 만든다.

* 의술도 몸이 아닌 영혼이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의 경우 설사 자신의 몸과 관련한 나쁜 경험들조차 자신의 훌륭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물론 장시간의 수술이 필요한 현대 의술의 경우 의사의 체력은 의술의 훌륭함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시 의술이란 기본적으로 약물치료술이라 몸이 약해도 충분히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요컨대 의술이건 재판술이건 훌륭함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영혼의 상태이다.

* 경험과 기술에 관한 글라우콘 또는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과 플라톤의 관점이 차이가 나는 것은 원천적으로 플라톤 사상이 갖는 아래와 같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플라톤에게 앎은 도덕이다. 그리고 기술 또한 앎인 한, 도덕과 분리될 수 없다. 즉 기술은 지식이자 도덕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러한 앎과 기술의 도덕성의 기초에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는 기술의 훌륭함을 평가할 때나 그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평가할 때 그 경험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가 매우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러한 고려 없이, 몸과 관련한 경험과 영혼과 관련한 경험을 그저 단순하게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 그것의 풍부함만으로 훌륭함을 거론하고 있는 글라우콘을 비판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는 의사이건 재판관이건 기술자라면 모두 자신의 고유 기술에 대한 탁월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 공동체의 조화와 보전을 위한 도덕의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 위의 논의는 형식적으로는 크게 체육과 몸과의 연관 하에서 몸과 관련한 경험과 기술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몸에 대한 영혼의 우위 즉 영혼의 훌륭한 상태가 주안점을 이루면서 경험의 위상 또한 영혼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구분되어 논의되고 있다. 몸과 관련한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의술의 훌륭함에 기여하는 좋은 경험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험도 영혼과 관련하여 나쁜 영향을 주는 것들은 그 어떤 기술이건 그 훌륭함에 방해가 되는 무조건 나쁜 경험들이다. 특히 영혼의 훌륭함이 훈련을 통해 채 확보되지 않은 젊은 시절 형편없는 영혼들과 어울려 영혼에 나쁜 영향을 받게 되면 그러한 경험들은 더욱 위험하다. 그것은 영혼의 훌륭함을 훼손하여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경우 나쁜 경험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훗날 재판관이 되었을 때 그것의 나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플라톤에게 영혼은 참된 앎을 인식하는 능력이고 나쁨은 그 앎의 결핍 상태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훈련을 통해 영혼이 훌륭한 상태에 이른 사람들의 경우 참된 앎과 지혜, 훌륭함의 본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람은 그 결핍을 알아보고 그것의 나쁨을 쉽게 판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순수하고도 투명한 단계의 영혼의 훌륭함을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해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게 체득한 사람들은 비록 남들의 경험 속에 있는 나쁨이지만 오히려 더욱 명민해진 앎을 통해 그 나쁨을 더욱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두 빛 새싹이 좋은 양육 환경에서 온전하게 잘 자라날수록 나중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병충해도 민감하게 대응하여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함을 보전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재판관은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이수한 후의 연령대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이든 사람’πρέσβυς의 의미는 단순히 연령대가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영혼의 훌륭한 상태에 이를 정도로 오랜 기간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과정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겪는 경험들은 비록 나쁜 경험일지라도 반드시 우리의 삶을 나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극복하여 더욱 훌륭함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앎과 기술의 영역에는 플라톤 당대의 시대적 혼란상을 감안하더라도 도덕의식이 결벽이라 할 정도로 지나치게 민감하고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오늘날에서조차 우리 삶에 주어지는 나쁜 경험들을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기꺼이 사서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날 아직 심성이 여리고 순수한 어린이를 위한 정책 수립과정에는 어린이에게 나쁜 경험을 줄 수 있는 환경은 하나같이 배제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경험들의 위협과 폐해는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이런 점에서도 나쁜 경험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 영혼의 건강하고 훌륭한 상태,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교육 과정과 훈련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 경험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은 본성론상 단순히 후천적인 환경결정론도 아니고 선천적인 본성에 의해 좌우되는 소박하고 유치한 본성결정론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본성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영혼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다. 일단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우주적 선을 배우고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플라톤의 본성론에는 흔히들 말하듯 성선설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천적인 인식능력이자 행동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그것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끊임없는 배움과 수련을 통한 후천적 노력에 달려 있다. 앞서도 살폈듯이 영혼은 인식과 행동을 이끄는 능력이지만 끊임없이 외적 경험에 영향을 받으며 그 영향의 크기에 의해 그릇된 인식과 행동으로 이끌리고 그것이 반복 강화되면서 인식과 행동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성향을 오히려 강화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본성론상 또 후천적인 환경결정론의 측면도 일부 갖고 있다. 인간은 일정 부분 선천적으로 영혼의 순수성을 갖고 태어난 이후 후천적인 환경 속에서 일정한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순수성이 더욱 깊고 단단하게 성장 발전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순수성이 훼손되어 무지와 어리석음에 휘말릴 수도 있는 가능적 존재인 것이다. 영혼은 비록 선천적으로 선한 가능성으로 주어졌지만,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목적이나 운명은 없다. 운명론이나 목적론적 결정론이 들어갈 자리는 플라톤 철학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입장은 전통적인 그리스의 운명론과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플라톤 철학은 영혼의 자율성과 내적 가능성을 토대로 문제 해결 능력dynamis의 확보를 위한 분투와 극복의 철학이다. 이상국가론의 출발이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등 교육론에서 출발하는 것도 그만큼 능력의 함양이 이상국가의 성패를 가르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 능력의 극대치로서 ‘철학자 왕’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살피겠지만 철학자 왕의 능력 또한 가능성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 다만 철학자 왕은 그 우주적 시민적 선을 향한 분투와 노력에 있어 추락의 가능성에 맞서 늘 지적 긴장과 반성력을 잃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수한 영혼을 보전하면서 최선의 상태를 구현해 내는 능력의 표상이다.

* 플라톤의 <국가>에 담긴 이상국가론은 법치(法治)가 아니라 수호자 내지 통치자들에 의한 인치(人治)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은 앞서 능력과 관련한 논의만 보더라도 아주 엇나간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다룬 시가 교육론에서도 그랬듯이(383c) 체육교육을 다루는 이곳에서도 몸과 관련한 의술은 물론 재판술 관련해서도 법의 제정을 통한 제도화가 언급되고 있다. 물론 그곳에는 <법률>만큼 세세한 법률 규정들로 채워져 있지는 않고 소크라테스 또한 이곳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는 한 지나치게 소소한 것까지 입법할 필요는 없다고 언급하기도 한다.(425d) 그러나 그것은 이상국가의 큰 틀을 내용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 상 특징 때문이지 잘 들여다보면 이상국가와 관련한 큰 주제가 마무리될 때마다 그것의 입법화가 지속적이고도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다.(425a-427b, 456b, 462a, 463d, 484d, 497c-d, 502b-c 등 참고) 플라톤의 법률론과 관련하여 종종 간과하기 쉽고 실제로 간과되고 있는 <국가>에서의 이러한 내용들은 <국가> 또한 기본적으로 법치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인치 일변도라는 주장은 맞는 말이 아니다. 많이 알려지기로는, 플라톤의 후기작품 <법률>이 대변하듯 플라톤은 말년에 가서 정치적 현실의 한계를 인지하게 되면서 <국가>에서 주장한 인치를 접고 법치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국가>와 <법률> 모두 근본 주제 상의 차이 즉 <국가>는 본(本)과 원칙을 다루고 <법률>은 실물과 적용을 다루는 차이가 있을 뿐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치와 법치의 균형과 조화’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 아무려나 인치가 앞서느냐 법치가 앞서느냐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플라톤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별 의미는 없다. 아무리 법이 훌륭해도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현실로 드러날 수도 있고 아무리 통치자가 훌륭해도 법적 절차에 따른 견제와 비판이 담보되지 않으면 이른바 법적 안정성은 물론 권력의 타성과 자의적 행사에 따른 독재정의 폐해와 그 권력에 빌붙어 형성된 기득권의 특권적 횡포를 막기가 어렵다. 일례로 근대 절대왕정의 출현과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은 인치의 야만적 피폐함과 폭압성을 뼈저리게 경험케 하였고 그에 따라 오늘날에 와서는 절대 권력에 대한 허망한 기대를 원천적으로 포기하고 일반의지에 기초한 입법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해내는 법치의 전략을 최선의 정치적 대안으로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체제로 확립된 것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히 의심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러나 여전히 현실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던 까닭에 비록 시민들의 투표로 권력이 위임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고착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토대로 선출된 권력의 지위를 거의 독점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소수 기득권화된 그들에 의해 여론 형성과 그에 따른 입법과 사법 행위가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법치를 토대로 한 현대 민주주의 역사는 역설적으로 시민의 각성 등 사람의 문제 내지 인치가 갖는 중대성을 새롭게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사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당대의 아테네 민주정과 그것이 빚어낸 참주정의 피폐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는 물론 <법률>의 논의를 단순히 인치냐 법치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그의 의도를 시작부터 일단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 인치와 법치의 조화가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우리가 고민하고 있다면 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이고 원칙적인 정치철학적 답변이 <국가>와 <법률>에서 의미 있고도 균형 있게 구해질 수 있다. 논의를 진행하면서 서서히 밝혀지겠지만 플라톤 철학의 중심에는 늘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그것들의 공존이 대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의술과 재판술을 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그 법률 규정의 실질적 내용들은 이미 앞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설명과 그것이 갖는 문제점과 논쟁점은 따로 반복해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언급들은 세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시가교육 및 체육교육과 관련한 결론적 내용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플라톤 영혼론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그곳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체육교육3 다음 강에서 계속)


 

나의 철학 일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3)

1)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내가 어떤 논문을 쓴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엮어 나가려 했지만, 그 당시 도대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는 돌덩어리를 그냥 삼키듯이 쓴 것 같다. 부끄러워서인지 그 후 다시 석사 논문을 뒤져 본 적이 없다.

나는 1년 석사를 마치고 결혼도 하고, 다행히 경남대에 자리를 얻어갔다. 그 뒤 2년 반 동안 경남대 있었으나, 박사 과정 수업 때문에 마산에서 서울까지 매번 고속버스를 타고 오르내렸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일단 접어두고 그에 앞서 헤겔의 논리 자체를 이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강의와 박사 과정 수업 사이 혼자서, 조금씩 공부해 나갔으나, 이건 정신현상학보다 더 어려워 별 진척은 없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읽다가, 헤겔이 미적분학에 관해서 논한 부분을 발견했다. 약 100페이지에 걸친 상당히 긴 부분인데, 펠릭스 마이어 출판사사에서 헤겔 전집을 새로 발간하면서 이 부분은 제거해 버렸다. 다만 논리학 뒷부분에 일종의 이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어 놓았으니, 펠릭스 마이너 사에서는 이 부분의 진위를 약간 의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당시 라슨 판 논리학을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부분이 본문 다음의 추가[Zusatz] 부분에 실려 있어, 일단 이 부분이 헤겔의 논리학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당시에는 펠릭스 마이어 판본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부분이 헤겔의 말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이 부분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나는 이때 헤겔의 미적분학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나로서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아마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헤겔은 미적분을 다루면서 하나의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미적분 계산이 엄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계산 자체는 엄밀하지 않는데도 미적분학이 자연을 해석하면서 얻어낸 결과는 성공적인데, 헤겔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려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미적분학을 이해해야 했고, 나아가서 헤겔의 수 개념 자체를 이해해야 했다. 헤겔의 수 개념을 이해하자니, 러셀의 수 개념이 생각났고 헤겔의 수 개념과 러셀의 수 개념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혀야 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을 통해서 어떻게 미적분학이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헤겔의 제기했던 물음 대로, 왜 미적분학의 계산이 엄밀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자연 해석에 무리가 없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로서는 굉장히 힘들게 공부하고, 굉장히 장황한 논문을 작성했다. 아마 지금 이런 논문을 썼다면 어디에도 실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아직도 헤겔의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시 읽지 못했다. 다만 헤겔의 사유에서 미적분학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만 어렴풋하게 느낀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셸링을 통해 헤겔로 전해지면서 미적분학은 헤겔 논리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논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은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2)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내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처음 나온 삼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문서를 작성했다. 나중에 이 문서들은 따로 보관했던 것 같다. 아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다. 지금도 데이터베이스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띄울 수는 없다. 그때 사용했던 프로그램이 폭스프로라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6 시대 프로그램이니 혹시 구하더라도 현재 컴퓨터에 구동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방안이 나서기까지는 당분간 기억에 의존해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박사 과정 수업을 들으러 마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 사이 대학원에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다. 이 세대는 이미 학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상당히 학습하고 올라온 세대였다.

당시 차인석 교수님이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을 소개했다. 주로 하버마스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시고 대학원에서도 하버마스의 책 인식과 관심 등을 제자들과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 세대는 차인석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삼아 사회철학을 주로 연구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찾으려 하기보다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찾아내려 했다. 나는 이들과 약간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스에게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반면 이 후배 세대들에게 마르크스의 철학 즉 유물론이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 또한 시대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철학적으로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후배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마르크스의 철학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자는 선동이 등장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누구도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원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차인석 교수님의 댁에 그 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때부터 차인석 교수님이 대학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강독하도록 만들려는 유혹이 시작되었다. 어느 해 연말인지 새해 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의 댁을 방문해서 자리를 펼쳤다. 우리는 교수님에게 올해는 이 책을 강독하시는 게 좋지 않겠냐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강박 아닌 압박을 가했으니, 교수님이 알고 넘어 가주신 것인지, 아니면 교수님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해 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기로 했다. 덕분에 그해 봄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이 가진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을 복사본으로 한 권씩 얻게 되었다. 교수님은 이 복사본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 복사본에 번호를 매겨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받은 복사본은 4번이고, 현재도 그 4번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했을 때 대본으로 삼았던 책이 바로 이 4번 복사본이다.

이제 대학원에서 우리의 관심은 더 풍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철학,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 등이 풍성하게 논의되었다. 지금도 이 후배들 모습이 선하다. 그들은 헤겔은 지독하게도 싫어했으나, 선배로서 나에게는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헤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3)

수업을 들으러 서울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교의 게시판과 벽 등 곳곳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 대자보를 읽는 것은 시대적 현실을 아는 통로였다. 좀더 관심을 가지면 소위 문건이라는 것을 구해 볼 수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문건이 있었고 이런 문건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토론과 더불어 새로운 운동 단체가 출현했으니, 이런 토론과 단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보았고 거기에 희망을 보았다. 그때 출현한 문건이나 대자본 내용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굳이 불필요하리라.

84년도 말경으로 기억한다. 특이한 문건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게 바로 품성 또는 심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품성, 심성이라는 개념은 유물론적인 연원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잇는 개념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실존철학의 세대였고 이 시대 철학이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인간을 심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심정을,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심정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나는 대학 시절 빠져들었던 심정의 철학과 새로이 등장하는 심성, 품성의 철학이 친연성을 지닌 개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심성과 품성 개념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개념은 우선 그 유래가 낭만주의적 철학에서 있는 것 같았으며 더욱이 심성과 품성은 매우 영웅주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유물론적으로 당파성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현실주의적 측면과 충돌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이 개념이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자신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있는 만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간 혁명의 개념은 당파성 개념과 달리 계급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심정적 실천적 의지의 측면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개념은 결코 영웅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개념이 등장하면서 대학과 지식인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앞에서 83-4년도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더불어 철학 논쟁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런 철학적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 커다란 역사적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질 때 날게 되니, 올빼미가 날았다면, 이미 황혼 즉 여명이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 연효숙 편 [나와 한철연] ①

이 코너는 2023년 1월 12일(목) 서교동 소재 한철연 강의실에서 거행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2부 행사에서 ‘나의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이란 주제로 진행한 발표회를 계기로 구성되었다. 이 코너에 게재되는 글들은 ‘내’가 처음 한철연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활동을 돌아보면서 한 개인이 철학 전공자로서 거친 여정뿐만 아니라 한철연이라는 철학 학회의 지난 활동을 되살피는 내용이 될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철학함이 무엇이었는지 그 역사의 일부에 자리했던 옛 한철연과 지금의 한철연, 그리고 앞으로 한철연을 생각하며 지금 철학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연효숙(연세대)

 

나는 2023년 1월 12일(목)에 열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의 신년회 때 세대별 4인 주자들(70년대 세대, 80년대 세대, 90년대 세대, 2000년 이후 세대)의 릴레이 간담회 기획(각 사람이 10분씩 발표)을 현남숙 연구협력위원장으로부터 부탁받았다. 처음에는 이 신년회 간담회 4인 기획이 노년 세대(60세 이상) 회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줄 알고 좀 주춤거렸다가, 세대별 기획이라는 말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흥미로운 기획이라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하였다. 주제는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 이 주제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세대별로 한다는 것이 새로운 시도였고, 또 간담회 형식이니 자유롭게 생각나는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한철연 신년회 간담회는 4인의 발표로 끝이 났다. 이어서 송상용 선생님, 김교빈 선생님의 추억담도 있었고 회식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말한 ‘한철연의 나, 나의 한철연’ 내용은 제대로 기억된 것이었을까? 부분부분 끊기는 희미한 그 시절의 기억을 가다듬다 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4인 릴레이 간담회를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한번 남겨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진보성 웹진 편집주간이 4인 간담회를 정리하고 있는데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내 계획, 즉 직접 내가 이 기억의 내용을 쓰는 것은 어떨까? 또 이 기획을 4인 기획으로 이어서 쓰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쓰면 어떨까? 이렇게 제안했다. 논문 형식의 딱딱한 기록이 아닌, 우리들 각각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에세이 형식, 르포 형식으로 가볍지만 진솔하게 써 내려 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단 기억’의 형식으로 한철연 34년의 역사(1989년부터 2023년까지)를 각각의 기억의 편린 속에서 끄집어내어 콜라주 형식으로 갖다 붙인다면, 그렇게 찢어 붙인 조각 조각들이 우리 시대 한철연의 다면적인 기억이자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나는 신년회 때 했던 이야기들, 기억들에 덧붙여서 1세대 한철연 회원으로서 추억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이 기억은 온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며, 그에 대한 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그 기억에 대한 사실(팩트)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료적 기억만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이러한 릴레이 기록이 후일에 또 다른 한철연의 기록들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한철연 탄생의 추억

나는 78학번으로 70년대 학번 후반 주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 정권의 유신 말기로, 캠퍼스에는 알 수 없는 억압과 침묵의 공기가 무겁게 맴돌았다. 1979년 10월 29일 가을에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믿을 수 없는 속보는 빨리 퍼져 나갔다. 80년 서울의 봄, 광주 항쟁 등 그때 대학생들은 누구나가 다 반정부 데모에 동참했고, 매캐한 최루 가스의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와 해체, 그리고 진보 진영의 암흑 시절에 나는 당시 한국헤겔학회의 일원이었다. 1988년 가을쯤 광화문에서 헤겔학회 소장파들(유헌식, 이종철, 나)과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연구실(사철연)의 소장파들(이상훈, 서도식 등)이 양쪽에 다 참여했던 우기동, 양운덕의 매개로 광화문 계단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마르크스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고, 칸트, 헤겔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두 단체 회동 시 장소였던 계단의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세한 논의 내용은 기억에 없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계단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얘기했던 그 기억은 나만의 기억일까. 암튼 그 후 두 단체의 통합을 위한 모임은 몇 차례 더 있었다. 그 시절에 대해서는 이병창, 우기동, 이종철, 김교빈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통해 어렴풋이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두 단체 회원들이 마석이었던가 어딘가 교외로 나가 통합에 관한 논의를 더 했었는데, 그중 단체의 작명에 관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이병창은 ‘사상’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고(이병창, 나의 기억 동일), 이종철은 ‘실천’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우기동 기억).

그렇게 1988년은 흘러가고, 1989년 3월 25일 두 단체는 통합하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나도 이 창립총회의 기억은 분명히 있다. 이때 이정호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짐작되며,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확인도 했다. 그리고 창립총회의 사진을 이정호 선생님이 가지고 있으며 내게 보내 준다고 했다. 이렇게 창립총회가 있기까지 두 단체의 통합 과정에 대한 나의 한철연 가장 초기의 장면과 기억이 이제는 아련하고 어렴풋한 ‘한철연의 추억’으로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다. 아마 내가 더 나이가 든다면 이 장면들은 더욱더 빛바랜 사진인냥 재생도 복원도 어려운 채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1988년경 광화문 일대(민방위 훈련 중) / 사진출처: 영화 <칠수와 만수>(1988)

 

  1. 학회지의 추억

2023년 올해 따져 보니 내가 한철연과 함께한 세월은 34년째이다. 한철연이 1989년에 공식 출범했는데, 양 단체가 완전히 한철연 속으로 해체되어 융합되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한국헤겔학회는 이미 임석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몇몇 노장파 회원들(이을호, 이병창, 설헌영 등)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회철학연구실은 주로 서울대 철학과 72학번(이규성, 이훈, 이영철, 이정호, 이병창, 김수중 등)이 먼저 활동했다(고 들었다). 통합 이후 사회철학연구실은 한철연에 흡수 통합되었고, 한국헤겔학회는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학회지의 경우, 한국헤겔학회는 1984년에 『헤겔연구』제1호가 나왔으며, 사회철학연구실의 학회지에 대한 사정은 내가 잘 모르겠다. 한철연을 중심으로 하자면, 『시대와 철학』이 무크지 형식으로 1988년, 1989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나왔고, 이 책 두권은 아마 서교동 태복빌딩에 보관되어 있겠지만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한철연의 공식 학회지 『시대와 철학』 제1호는 1990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발간되었고, 이 책은 나도 갖고 있다. 한철연 20여 년간의 『시대와 철학』 그리고 회원들의 학술활동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2009년 한철연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시대와 철학』제20권 3호에 실린 박영균의 「철학 없는 시대 또는 시대 없는 철학」의 논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한철연 회원들의 20년간의 주요 학술활동 성과에 대해서는 이철승의 「‘임중(任重)’의 시대정신 발현과 ‘도원(道遠)’의 ‘우리철학’ 정립 문제」와 이정은의 「사회 변혁을 위한 철학적 논의들」의 논문들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시대와 철학』 제1호 1990.6.30. 발행 / 사진출처: 연효숙 회원

 

  1. 연구실의 추억

한철연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추억은 연구실에 대한 기억이다. 다른 무수한 학회들과 달리 한철연은 고유의 연구 공간인 연구실이 있었다. 이 연구실에서 분과별로 세미나하고, 기조부(이병수, 박영균, 송석현 활동)의 초청으로 외부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나는 1989년 당시 과천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 한철연의 연구실인 낙성대 연구실까지는 남태령 고개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한층 더 친근감이 갔다. 그러다가 1994년에 ‘논리교육연구실’이 발족되고, 이때부터 신촌, 홍대 연구실 시절이 열리게 되었다. 한철연이 ‘논술 사업’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엄청난 논쟁이 있었을 당시 나는 무슨 사정 때문이었는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6년 학위를 마친 후에 나는 홍대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있었던 ‘논리연구실’에 조광제, 우기동, 홍건영 선생님과 함께 상근하게 되었다. 학위를 마친 후 딱히 장래가 보장되는 자리가 내게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한동안 한철연 회원들은 논술 첨삭 노동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자의반 타의반 발휘했다. 이때가 아마도 한철연 역사상,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여유 있는, 그러나 연구 역량이 거의 발휘되지 못한 시절이 아닌가 기억된다. 그러다가 한샘의 재정난으로 1999년 한철연의 논술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제2의 낙성대 연구실로 이사 가면서, 다시 연구실 분위기는 차분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윤구병 선생님의 제안으로 현재 서교동의 태복빌딩 3층으로 이사 왔고, 이순웅 당시 연구협력위원장의 열성적 제안으로 한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깔끔하게 환골탈태해진 현재의 연구실이 탄생하게 되었다.

 

  1. 분과활동의 추억

한철연과 내가 함께한 세월은 다른 초창기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34년이다. 늘 한철연에 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철연은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있었다. 나는 한철연에 들락날락하며 밀착했다가 거리를 두었다가 하곤 했었다. 한철연에서 내가 소속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활동은 역시 분과 활동이었다. 창립 초기에 내가 기억하고 참여했던 분과는 대표적으로 ‘변증법 분과’였다. 어느 여름에는 명지산으로 분과 엠티를 당일치기로 갔다 왔던 기억도 있다. 이 분과 소속으로 현재까지 한철연에 열심히 나오는 회원은 이병창 선생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나는 문화변증법 분과에도 소속이 되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분과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내가 한철연에서 동지들과 함께 만들고 가장 애썼던 분과는 ‘여성과철학 분과’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6년에 만들어졌다. 김세서리아, 이정은 등과 의기투합해서 여성과철학 분과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여성과철학 분과는 한철연을 27년 이상 굳건히 지킨 분과라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분과에 한 번도 결석 없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고, ‘여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어떤 직감 때문에 좀 멀리한 시절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여성과철학 분과를 멀리하면 나에게는 특이한 금단 현상이 나타나 얼마간 휴식 후에 다시 복귀하고는 했다. 한철연이 친정집이라면, 여성과철학 분과는 친정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이후 많은 후배들이 여성과철학 분과에 나처럼 들락날락하며 꽤 적지 않은 성과를 내었다. 지금 나는 여성과철학 분과를 지키는 창립 멤버이자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흐뭇한 기분이다. 최근에는 3-4년 전에 만들어진 ‘근현대 삶 사회 분과’(이른바 복덕방 분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교빈 분과장님과 더불어 한철연 초창기 멤버들의 집합소가 됐지만, 이후 20년은 더 가자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가는 분과가 되길 희망한다.

2017년 11월 25일(토)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가을 제53회 정기학술대회 광경 / 사진출처: 전호근 회원 facebook계정

 

  1. 한철연 속 나의 궤적

나는 한철연의 창립 멤버이자, 은퇴하지 않는 회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은퇴하지 않을 결심’을 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퇴물처럼 보여도 굳건히 지키는 어느 사찰의 은행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철연에서 쓴 감투는 여성과철학 분과의 첫 번째 분과장이다. 이 감투는 꽤 오래갔고 장기집권을 했다. 그러다가 분과장을 김세서리아에게 물려 주고 나는 평회원으로 자유롭게 세미나에 참여했다. 한편 논리교육연구실에 발탁되어 상근연구원(유급)으로 2년여를 지냈고, 그 후 서교동 연구실 시절로 이사 한 후에는 한철연에 잘 나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순웅 위원장의 전화가 나를 깨웠다. 걱정 반 불안 반 마음으로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실수한 것?’이라고 자기 검열하면서 이순웅 위원장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나는 차기 연구협력위원장 자리를 덜컥 제안받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에 나는 당황했고, 망설임과 거절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순웅 위원장이 두 번째 왔을 때 나는 삼고초려는 아니지만 결국 그 자리를 수락하고 말았다. 나는 연구협력위원회의 부장 감투도 한 번 쓰지 않고 낙하산 위원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옳은 결정인가? 하는 많은 망설임도 있었지만, 이 2년 동안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한철연과 맺은 두 번째 소중한 인연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후 편집위원장 그리고 회장까지 나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흥겨운 마음으로 그 직책들을 수행하였다. 어찌 보면 나는 한철연의 고위직 감투에서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닌 셈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함의가 있음은 다들 잘 아실 것 같다.

한철연은 늙어가고 있다. 후배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학문 후속 세대 문제는 큰 짐으로 남아 있다. 또 한철연의 끝나지 않은 정체성 논의는 한철연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위안 삼아 본다. 21세기 인문학 위기 속에서 한철연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추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이정호, 김교빈, 이병창, 서유석, 이종철, 우기동, 문성원, 김세서리아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 등 큰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나의 철학 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2)

1)

80년 봄은 논쟁으로 무르익었다. 복학생 그룹과 재학생 그룹의 논쟁, 이는 정치적으로는 즉각적인 정치 투쟁이냐, 대중적인 학내 민주화냐 하는 논쟁이었고, 철학적으로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었다.

나는 현실주의자의 비판을 내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옳았지만 낭만주의자로서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선물로 준 석사 졸업 논문을 읽었다. 그 논문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헤겔 정신현상학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설명한 것이었다.

석사 논문이니 아주 간략한 것이지만, 나는 이 논문의 내용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헤겔은 이 주노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노예가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리고 노예가 어떻게 해방되는가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려냈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주인은 자유를 얻었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노예는 자유를 잃었다. 향락에 빠진 주인은 거꾸로 노예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고, 거꾸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를 전복시키는 계급투쟁은 알다시피 물질적인 차원에서 힘의 관계이었다. 그런 힘의 관계에서 무언가 결여된 듯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어졌다. 헤겔에서 주노 관계의 전복은 정신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런 정신적 투쟁이 마르크스의 물질적 계급투쟁보다 나에게는 더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독일어 원본인 훗셀의 ‘선험적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내가 헤겔에 전념하게 된 데에는 그해 광주 이후의 정신적 공황 상태가 있어야 했다.

2)

80년 봄은 짧게 끝났다. 5.17 광주에서 자행된 군부의 폭력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로 아무도 다시는 웃음을 웃을 수 없었다. 젊음의 찬란함은 사라졌고 정신적 공황이 지배했다.

학교가 문을 닫은 여름 내내 나는 패배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다시 술에 빠져들었다. 8월이 지나면서 어느날 아침 술에 깨서 나는 더는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때 나는 다시 선배의 논문에서 읽었던 헤겔의 주노 관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거기서 정신적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나도 헤겔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이 되면서 개학을 하게 되고 다시 대학원 연구실에 선후배들이 되돌아왔다. 당시 학교까지 집이 너무 멀었다. 무려 3시간이 걸렸으니, 나는 어느 선배와 대학원 연구실에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급기야 곤로와 담뇨를 가져왔고, 심지어 굴비 한 두름도 창문에 걸어 놓았다. 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에서만 학교를 나섰다.

이때 어떤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제안했다. 그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했던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 후배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레닌이 말했는데, 헤겔의 변증법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헤겔의 논리학 책을 읽자고 했다.

그는 학부에서는 하이데거 역사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광주 이후 헤겔로 전향했다. 나와 철학적 이력이 비슷하였기에 우리는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내에서 헤겔을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직접 연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이고 그 고유한 철학은 헤겔의 철학이니, 철학도는 마땅히 헤겔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모임이 유지된 논리였다.

헤겔을 읽는 모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마침 어느 교수님이 해외 안식년을 떠난 후라, 교수님의 방이 비었다. 헤겔 논리학을 읽자는 후배는 그 교수님이 매우 아끼는 제자였다. 귀국한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실이 담배꽁초와 술 냄새로 뒤범벅된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후배를 자신의 마음에서 추방하여 버렸다.

헤겔을 공부하면서 지도교수도 바뀌게 되었다. 다행히 역사철학을 하시던 이상철 교수님이 우리를 맡아 주셨다. 지금도 간염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이상철 교수님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난다. 교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그 후 우리가 겪었던 많은 혼란을 그래도 덜 겪지 않았을까?

3)

9월 찬바람이 들면서 우리는 더욱 진지해졌다. 오직 헤겔만 안다면 역사를 들어 올릴 지렛대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아적인 신념으로 우리는 헤겔을 읽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겔을 전공하신 교수님도 없었다. 이상철 교수님도 역사철학을 전공하실 뿐, 헤겔을 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턱대고 우리끼리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하루 내내 헤겔을 붙잡고 있었지만, 하루에 한 페이지도 못다 읽을 때가 많았다. 조금만 읽으면 졸려서 책상에 엎드려 잤고, 깨어나서는 우리의 부족한 머리 때문에 역사가 지체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나 어디서 헤겔을 이해하는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헤겔 원전을 읽다가 도저히 안 되니, 헤겔의 해설서를 찾았다. 당시 많은 학생이 아마도 우리와 유사한 이유에서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니 이런저런 헤겔 해설서가 영인되어 판매되었다. 헤겔의 해설서는 주로 서독에서 연구한 업적이었으며, 헤겔의 원전만큼이나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헤겔을 이해하는 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해설서는 헤겔을 관념론자로서 해석하려는 딜타이, 가다머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발견하려는 우리의 의도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런 점에서 서독에서 흘러나온 헤겔의 해설서를 불신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이해가 되든 안 되는 헤겔의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 씩 읽어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이때 도움을 주신 분이 임석진 교수님이었다. 임석진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번역한 후배가 매개되어, 임석진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유학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교수님은 마침 자신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을 번역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가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여러 번 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헤겔이 책을 놓고 함께 세미나를 하거나 한 적은 없다. 누구는 이런 모임을 일컬어 일차 헤겔 학회라 하면서 나중에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헤겔 연구자들이 조직한 헤겔 학회와 구분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학회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으며, 그저 교수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하면서 헤겔연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나 충고와 격려를 들었을 뿐이다.

4)

헤겔을 연구하는 것은 내적인 어려움만은 아니었다. 외적인 어려움도 있었는데, 우리의 약간 비밀스러운(사실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으나,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모이거나 공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헤겔 공부는 곧 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교수님들이 무척이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헤겔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운동권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밀히 학습하곤 했으니, 그런 모임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학내에서 갑작스럽게 긴장된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헤겔을 연구한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다. 이런 긴장된 시선에서부터 학내에서 여러 불편한 관계가 출현했으나, 그런 것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철학적으로 더 문제는 당시 철학계를 지배한 아카데미즘이었다. 한국 철학계에서 아카데미즘은 60년대 후반 귀국한 철학 교수, 주로 당시 유럽에 번성하던 언어철학을 공부한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국내에서는 국내 박사 학위 과정이 제도화하면서, 아카데미즘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 대학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소위 졸정제 때문) 많은 학자가 등장한 것도 이런 아카데미즘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아카데미즘이 강조했던 것은 철학적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었고, 철학적 연구를 논쟁의 방식을 통해 전개해야 한다는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을 연구하던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반발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에서 역사와 삶을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발견하려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는 오히려 시적인 무게를 지닌 것이어야 했으며, 철학적 연구는 역사를 들어 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시간이나 논문 발표 시간에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던 철학 교수님들과 우리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는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철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들은 선배 세대들이 전개했던 소박한 철학 인생관에 가까운 철학에 반발감을 느껴 철학을 이런 소박함에서 구원해 철저한 학문으로서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에 경도한 철학교수는 그들의 선배들이 지녔던 인생관적 철학의 소박함을 다시 부활하려는 듯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