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49-작가와 독자의 공동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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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49-작가와 독자의 공동체

 

1) 절대정신

지금까지 서술의 필요성 때문에 예술의 목적과 관련된 작가 독자 관계에 대한 서술은 생략하였다. 하지만 예술 장르에 대한 대체적인 소개가 끝난 이즈음에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시문학에서 작가 독자 관계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독특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의는 거슬러 올라가 예술의 목적에서부터 시작하자.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 또는 이념의 표현이다. 이때 정신이란 한 역사적 사회를 형성하는 공동의 목적과 공동의 의지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절대정신이라 한다. 이 절대정신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종교와 예술, 철학이다. 종교적으로는 신으로 환상적 방식으로 출현하며, 철학적으로는 사유의 체계를 통해 전개된다. 예술적으로 정신 감각적 기호를 통해 표현된다.

그렇다면 절대정신 즉 정신을 표현하려는 활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시대의 정신은 이미 내적으로 출현하고 있으나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상태이다. 절대정신은 그 시대 정신을 자각하고 이를 표현하며 이를 통해 대중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이다. 절대정신은 대중의 주관적 내면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을 지니며, 이를 통해 집단의 공동 의지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정신에 적합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를 지닌다.

절대정신이 실천적 힘이며, 또한 실천적 목표를 갖는 것이기에 절대정신은 불가피하게 그 시대 사회정치적 투쟁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절대정신 자체가 직접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직접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투쟁이다. 절대정신은 다만 주관적 내면을 변화시키며,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 형성에 기여하려 한다.

 

2) 예술의 목적

종교나 예술, 철학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 특히 예술은 감각적 직관의 방식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니, 다른 절대정신에 비추어 장단점을 지닌다.

종교는 환상 속에서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런 능력을 지닌 자는 극히 소수이며 대중은 이 소수의 외적 환상에 수동적으로 종속한다. 철학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전개하니 대중이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유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예술은 시대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감각적 직관의 방식을 통해 자각하니, 시대정신을 철학보다 명확하게 자각한다는 데 예술가의 탁월성이 놓여 있다. 또한 예술은 감각적 직관을 사용하기에 대중적 영향력에서 종교적 수동성과 철학적 자발성의 중간에 머무른다.

헤겔에서 예술의 목적은 오락이나 장식이나 유희가 아니며 학문처럼 인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관계된 정신을 표현하여 주관적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미학은 20세기 초 중반에 등장한 아방가르드 미학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20세기 초 중반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들은 미래의 새로운 사회의 이념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예술에 맡겨진 과제라 보았다. 이들은 합리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직관적으로 그 이념에 도달하려 하였다. 이들 아방가르드들은 나아가서 예술은 주관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힘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고 보면서 예술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예술적 기법을 실험하였다.

 

3) 예술가의 천재성

시대정신과 예술가 사이의 관계에서 예술가의 천재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헤겔은 예술가의 재능과 천재성을 구분한다. 전자는 예술의 질료를 다루는 솜씨를 말한다. 이런 솜씨는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된다.

반면 후자는 감각적인 방식으로 시대의 일반적 정신에 도달하는 능력과 관련된다. 예술가는 여기서 시대의 정신을 먼저 파악한 다음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수단 자체를 통해 시대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이니, 정신의 인식과 감각적 표현은 서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감각적 방식으로 정신을 인식하는 능력에서 예술가는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며 이런 탁월성은 단순히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 이상이니, 이 능력은 상당한 정도 자연적으로 타고난다고 하겠다. 그 때문에 헤겔은 이런 예술가의 능력을 천재성이라고 하였다.

헤겔에서 예술적 천재는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존재는 아니다. 헤겔에서 예술가의 탁월성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예민하게 파악하는 데 있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내적으로 성숙되지 않는 한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자기 시대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 정신을 깨달을 수 없으니, 예술적 천재성 역시 시대 정신의 역사적 발전에 제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재의 영감은 재능에 속하는 감각의 훈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인식에 속하는 생산 의도를 통해 환기되는 것도 아니다. 천재의 영감은 오직 정신적 내용에서 출현한다. 그러므로 영감은 외적인 동기(주문 등)에 의해서도 개인적인 감동을 통해서도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소재 자체 속으로 침잠해야 한다.

 

“참된 영감은 판타지가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붙들고 있는 어떤 특정한 내용에서 점화된다” [1]

“그는 역으로 자신의 주관적 특수성과 그 우연적 특칭성을 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자기의 편에서 소재 속으로 침잠해야만 한다.”[2]

 

이처럼 천재의 영감이 시대 정신 자체 속에 성숙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시대정신이 오히려 진정한 주관이고 내용이며, 천재는 시대정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나 형식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주관으로서 그는 말하자면 그를 사로잡은 내용의 구성을 위한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3]

 

4) 독자와의 관계

예술이 시대정신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오직 작가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 작품이 제작되는 경우는 없다. 예술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정치적 선동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데 예술은 자주 이런 목적성을 기피한다.

자주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순수한 고독 속에서 오직 미적인 창조의 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저주받은 작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흔히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헤겔의 관점에서 예술은 절대정신의 표현인 만큼, 예술은 항상 그것이 전달되는 대상(사용자, 관람자, 청중, 독자, 관객 등)을 향하여 작품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예술은 다른 사회관계와 구별되는 독특한 작가-독자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작가-독자 관계는 예술 장르마다 독특하다. 헤겔은 각 장르를 설명할 때마다 부분씩 이 관계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것을 이제 종합해서 설명하여 보자.

헤겔은 조각과 건축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건축의 경우 자신의 목적을 외부에 지닌다고 한다. 즉 건축적으로 구축되는 공간은 삶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전이며 왕궁이며 주택이다. 여기서 사용자는 건축 자체에 대해 외면적이다.

반면 조각은 정신의 현상적 형태이니, 그것은 “그 스스로 존재한다[ihrer selber wegen da][4].” 조각 작품은 작가의 주관성 넘어 있는 것이며, 조각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주관성과도 무관한 것이다. 작품 자체에 어떤 주관성도 배제되어 있다. 그것은 정신의 현존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숭배의 대상이다.

낭만적 예술에 이르면 작가와 독자는 특수한 주관성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낭만적 예술 자체가 주관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품 속에 주관성이 새겨져 있다.

 

“조각상은 대개 그 자체로 독자적이어서 감상자가 어디에 서고자 하는가를 걱정하지 않는다. … 감상자는 작품에 대해 무차별적이다. …그 내용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자신에게서 기인하고 완결되었으며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회화의 이미 내용을 이루는 것은 주관성 그것도 동시에 내적으로 특칭화된 내면성이다…. 까닭인즉 회화는 주관적인 것을 묘사하는 작품으로서 이제 본질적으로 오로지 주관을 위해 감상자를 위해 현존할 뿐, 그 자체로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그 전체 표현방식에서도 역시 보여주기 때문이다.”[5]

 

물론 여기서 표현되는 주관성은 자립적인 주관성이 아니며, 자기 내로 복귀하는[in sich zuruekehren] 따라서 내밀한[innig] 주관성이다. 작가도 작품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독자 역시 작품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니, 이런 내면의 실천적 변화가 작품을 통해 매개된다.

 

5)

회화에서 시작된 작가와 독자의 관계 즉 한편으로 특수한 주관성의 만남이며 다른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서로 자기를 지양하는 관계는 음악이나 시문학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회화의 경우 색채의 마법을 통해 작가의 주관적 감정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정신적 내용에 관한 한 작가의 주관성은 대상에 대한 주관의 위치, 시점에 제한된다. 또한 공간적 평면에 현존하는 작가로부터 분리되어 공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작가로서는 알지 못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작품은 특정한 장소에 걸리게 되면서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외적 환경에 의존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6].

반면 음악의 경우 소리는 작가와 독자의 시간적 주관성과 심정의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음악은 간접적으로는 정신적 내용이 표현되지만 그것은 모호할 뿐이며, 직접적으로는 작가의 감정이 표현될 뿐이다. 여기서 작가와 청중의 관계는 긴밀하다. 음은 “감각적 현존재를 가지지만” “직접적 순간적으로 소멸한다”[7]. 즉 작가(또는 연주자)가 연주하는 가운데서 존재하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동일한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는 의미는 연주하는 순간에 다르게 출현한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부유할 뿐이다.

같은 낭만주의 장르더라도 시문학의 경우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매우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회화나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주관성은 관점이나 감정에 제한되니 매우 제한적일 뿐이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작품의 모든 내용에 작가의 주관성이 낙인 찍혀 있으며 그 내용은 감정에서 사유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 과거에서 미래에 걸친 다양성을 담고 있다.

 

“언어는 의식의 높은 곳, 깊은 곳을 두루 섭렴하여 내면에 현재하는 일체의 것을 포착하고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지성적 정신적 전달수단이기 때문이다.”[8]

 

그런 가운데 작가와 독자가 만나게 되므로, 독자는 작가의 주관성에 아주 긴밀하게 그리고 매우 포괄적으로 동화된다. 회화의 외적 관계, 음악의 일시적 관계를 넘어선 장기적이고도 두터운 관계가 여기서 형성된다. 그 때문에 회화나 음악에서 애호가는 있어도 공동체는 없지만 문학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일정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음악이나 회화의 경우 작가는 일방적으로 전달하며 독자는 다만 그것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만 관계하게 된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작가의 작품에 대해 독자는 동일한 언어를 통해 반응(비평이나 감상 등)할 수 있으니, 작가 역시 거꾸로 독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상호적 관계가 수립된다. 여기서 독특한 상호작용적인 문학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다.

물론 문학적 공동체의 한계도 있다. 회화와 음악은 단순한 직관적 능력만 있으면 그 속에 표현된 정신이 전달될 수 있다. 이런 직관 능력은 민족의 차이에 대해 상당히 독립적인 인간의 일반적 특성이다. 회화나 음악은 범인류적, 세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시문학의 경우 언어는 고유한 민족성을 지니게 된다. 타민족의 경우 언어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장애를 지니게 되고 번역이 가능하기는 하더라도 일정한 한계를 지니므로 시문학의 독자는 민족적으로 제한된다.

 

6)

헤겔이 밝힌 것처럼, 시문학에서 작가와 독자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시문학에서는 자주 작가와 독자의 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사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와 독자의 공동체일 것이다.

카페가 아닌 곳에 있는 사르트르를 생각할 수 있을까? 1966년 모습

사르트르에 따르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을 대상화한 것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작품과 그 대상[주제, 내용]의 관계는 지향성의 관계에 있다. 즉 작품의 대상은 지향작용에 내재하면서도 초월하는 의미[sense: 의의]이며, 작품은 지향작용 내에서 의미를 지향하는 단편[signification: 의미]이다. 작가는 언제나 의미의 단편에 머무르며, 끝내 초월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며 작품 속에서 이 의미는 침묵, 말하지 못한 것으로 남는다.

이 의미가 마침내 실제하는 것으로 출현하는 것은 독자의 참여를 통해서이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단편을 징검다리 삼아 좇아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작가가 상정한 의미에 도달한다. 이 과정은 현상학에서 의미를 인식하는 변용[variation]의 작업에 속할 것이다.

독자가 발견한 의미는 정말로 작가가 작품 속에 추구했던 의미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한 의미가 될 것이니,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은 단순한 수동적인 인식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제시한 징검다리를 독자 자신이 해석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이다. 독자는 작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작품을 존재하게 하니, 작품을 최종적으로 창조하는 이는 다름 아닌 독자이다.

사르트르는 이 관계가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독자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적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창조는 어디까지나 작가가 제시한 징검다리를 따라 수동적으로 건너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동시에 수동적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과정을 마치 ‘자유로운 꿈’ 또는 “결연히 수동적 입장에 서려는 자유”라고 말한다.

 

“읽기란 자유로운 꿈이다. 나는 어느 때나 꿈에서 깨어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읽기란 자유로운 꿈이기 때문이다.”[9]

 

독자는 이렇게 자신이 창조한 의미를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독자는 이런 의미를 작가가 이미 숨겨놓은 의미라고 믿는다. 독자에게 작가는 신 자체이며,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이런 상정에 따라서 거꾸로 작가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우리들 독자는 우리의 자유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타인인 작가의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우리에게 요구하면 할수록 우리도 더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10]

 

독자는 작가가 진정한 의미를 숨겨놓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더 이상의 많은 요구를 하지만, 독자의 이런 요구는 바로 작가가 작품 속에서 징검다리를 놓아줌으로써 독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독자는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명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가 그런 것을 과제로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전적으로 자유롭게 작가의 자유를 인정하고 작가를 숨겨놓은 의미의 진정한 창조자로서 인정한다.

바로 이 관계가 사르트르가 말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이며, 이 관계를 통해 작가도 자유로운 존재에 이르고 독자 역시 자유로운 존재에 이르는 관계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유를 고매하게 증여하며, 독자는 작가에게 마찬가지로 고매하게 주체가 되게 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관계를 곧 ‘고매성의 협약’이라 이름 붙인다.

작품에 숨겨놓은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작가나 독자가 주어진 세계를 넘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이데거 식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존재자를 넘어 존재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작업이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통해 이런 존재 전체를 다시 인간에게 귀속시키니, 바로 이것이 작품의 진정한 목적이다. 작품은 자유의 세계를 만인에게 호소한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통해 만인이 존재자의 세계를 넘어가기를 호소한다.

 

“작가가 남들의 자유에 호소하기를 선택한 것은 양자 간의 요구의 연계를 통해서 그들이 존재의 전체를 인간에게 다시 귀속시키고 인간의 수중에 세계를 사로잡기 이해서이다.”[11]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작용적 관계에 주목했는데 사르트르는 현상학적인 의미론을 통해서 이 관계를 작가와 독자가 구축하는 자유의 공동체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 미학강의 1권, 389쪽

[2] 미학강의 1권, 390쪽

[3] 미학강의 1권, 390쪽

[4] 미학가의 2권, 380쪽

[5] 미학강의 3권, 32쪽

[6]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원래 계획된 성당에서 시청으로 이전되면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을 생각해 보라. 즉 작품은 작가에 의해 부여된 의미 이상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7] 미학강의 3권, 160쪽

[8] 미학강의 3권, 276쪽 그러므로 헤겔은 시문학은 노년의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다. 말년의 괴테가 대표적이다.

[9]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민음사, 1998, 73쪽

[10]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75쪽

[11]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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