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15-피디아스와 라오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5- 피디아스와 라오쿤

 

1)

헤겔은 미학강의 2권에서 그리스 조각을 설명하면서, 느닷없이 영국의 외교관 엘진 경을 거론한다. 그는 1789년에서 1803년 사이에 터키 제국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으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헤겔은 언급하기에 사람들(특히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그렇다)은 그를 약탈자라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가만 두었으면 이슬람 지배 아래 파괴되었을 예술품을 구출하였다고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엘진 경의 약탈물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그의 약탈 때문에 파산했으니[1] 신으로부터 충분히 처벌받았다고도 하겠으나, 엘진 경의 콜렉션은 헤겔이 고전적 예술형식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은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이 시대 작품들에서 이구동성으로 평가되는 것은 형식과 자세의 매력과 고상함이 아니며 피디아스 이후의 시대에서처럼 이미 외부를 향하는, 그리고 감상자의 측면의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 우아함이 아니며, 제작의 섬세함과 대담함 또한 아니며 오히려 일반의 찬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형상들이 갖는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이다. 그리고 특히 자연적 질료적인 것을 완전히 꿰뚫고 지배하는 자유로운 생동성을 통해 경탄은 정점으로 치달았다.”[2]

 

결론적으로 말해 엘진 경의 약탈물이 들어오면서 그리스 예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이전 그리스 예술은 매력과 고상함, 우아함 등 때문에 만족을 주었으나, 이제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 자유로운 생명성 때문에 경탄을 주고 있다고 한다.

 

2)

여기서 엘진 경의 약탈물이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의 유래를 이해해야 한다. 엘진 경의약탈물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 부착된 조각품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가 그리스 동맹을 이끌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BC 5 세기경 건축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 신전 건축을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그리스 조형 예술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 피디아스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엘진 경의 약탈물은 그리스 조형 예술의 최고작품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을 대변했던 작품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의 대표작은 빙켈만에 의해 평가되어 신고전주의 시기 모범이 되었던 작품인 Apollo BelvedereLaocoön 군상,  Belvedere Torso, Antonous Mondragone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BC 3세기 그리스 몰락기에서부터 AD 2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며 지금 대부분을 교황청이 소유하고 있다.

 

두 시대의 작품을 비교해 보기만 하면 헤겔이 왜 미학강의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엘진 경의 약탈물 중의 하나를 보자. 이것은 파르테논 신전 페디먼트에 부착된 것으로 엘진이 가지고 와서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하는 조각상 중의 하나다.

 

이것과 비교하여 전성기가 지난 BC 4세기 작품을 보자. 이것은 그 시대 크니도스에서 만들어진 이후 AD 1세기 로마 시대 복사한 것으로 교황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크니도스의 비너스 상이다.

전성기 작품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자립성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몰락기 작품은 헤겔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며 특히 약동적이다. 물론 전성기 작품 속에서도 몰락기 요소를 찾을 수 있으며, 몰락기 작품 속에서도 전성기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배적인 것은 전 후 시대 서로 다른 것이었다.

 

3)

고전주의 작품은 처음에는 주로 16세기 들어와 로마에서 발굴된 것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아테네는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발굴된 것은 앞에서 말한 로마 교황청 소장품과 같은 것인데, 르네상스 이래 사람들은 그런 작품의 주로 표면적인 모습에 주목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절 고전 예술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순간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포착된 리얼한 것이었으며, 보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고 해방하는 힘을 지녔다. 헤겔의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 보티첼로의 비너스 상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고전 예에 대한 이런 이해에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 빙켈만이다. 빙켈만은 18세기 초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청이 소장하고 있는 발굴품을 직접 보면서 그 핵심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는데, 그로부터 그리스 예술을 파악하는 고전주의적인 관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뛰어난 미술 작품들이 자세와 표현에서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이고 현저한 특징은 결국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아무리 바다의 표면에 거친 풍랑이 인다 해도 깊은 심연 속은 언제나 고요를 지킴과 같이, 그리스 조각상들은 격정의 한가운데 있다 해도 위대하고 초연함을 지키는 영혼을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평가했을 때 토대가 되었던 작품은 교황청 소장 라오쿤 군상이었다. 그는 이 라오쿤 군상[3]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영혼은 라오콘 군상, 특히 라오콘의 얼굴에서 격렬한 고통에 맞서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의 육체의 모든 근육에서 고통이 드러난다. 굳이 얼굴과 다른 신체 부위를 보지 않고 고통으로 수축된 그의 복부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고통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얼굴 표정이나 다른 몸짓이 격렬하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라오콘 상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라오콘처럼 끔찍한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라오쿤 군상의 표면적 모습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표현한다. 그 표면적 모습만 보면 이 군상은 오히려 그리스 예술의 후기 즉 몰락기에 나타나는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도 빙켈만은 이런 모습 속에서 고통에 맞서 자기를 유지하는 고귀함과 고요함을 보니, 빙켈만은 표면적 모습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적 모습을 간취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위대하고 고귀한 영혼은 조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발견된다. 라오콘 상이 고통만을 묘사한다면 그것은 파렌티르소스일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는 영혼의 독특함과 고귀함의 성질을 통일하기 위해서 라오콘을 극한 고통 가운데 두면서도 고요한 상태와 맞닿아 있는 동작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혼의 평정은 유일하고 독특한 성격에 의해 나타나야 하고 형태에 고요와 움직임을 동시에 부여해야 한다. 그것은 지루하거나 둔감하지 않은 고요함이다.”

 

빙켈만은 고전 예술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작품 가운데 보티첼리보다는 오히려 라파엘로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시스티나의 마돈나 상과 같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고귀함과 고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래 시스티나 마돈나 상 가운데 마돈나의 얼굴 모습을 보라.

 

4)

헤겔이 빙켈만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가는 그가 고전 예술을 평가하면서 제시하는 개념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고전 예술의 대표적 특징으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요함과 자립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런 개념은 빙켈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헤겔은 고전 예술이 단순히 고요함과 자립성만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한다. 고전적 예술은 또 하나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본다. 즉 생동성이다. 어느 시대에도 두 요소가 다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자립성은 전성기 시대 지배적이었고 생동성은 오히려 몰락기에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이행기를 거친 이후 고전 예술의 발전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터키 외교관 시절 엘진은 사비를 들여 그리스 미술품을 발굴했고 특히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조각품을 떼어냈다. 엘진의 약탈물은 1803년 영국으로 보내졌으나 수송 도중 배가 침몰하여 이를 인양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 그는 프랑스를 거쳐 귀국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전쟁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에 탄원한 끝에 석방되어 1806년 귀국했다. 귀국해서 그는 자신의 부인이 자기의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것을 알고 이혼 소송을 하느라 많은 돈이 들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 사설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들여왔던 조각품을 영국 정부에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들인 전체 비용의 반 값으로 판매했으니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는 나폴레옹에 탄원하는 중 그가 했던 발언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상원의원과 귀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그를 추궁하는 빚쟁이를 피해 1820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1840년 파리에서 죽었으니, 약탈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고 하겠다.

[2] 미학강의 2권, 409쪽

[3] 라오쿤 군상은 트로이의 신관 라오쿤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바다 뱀에 물려 죽는 모습을 조각했다. 이 작품은 로도스 섬 출신 세 명의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알려지며, BC 2세기 경 제작된 원본을 로마 황제 시대 복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논평> – 고(故)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에 관해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 논평

–고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에 관해서

 

이 글은 2024년 1월 11일 한철연 신년회에서 진행한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故 남기호 회원 저) 북콘서트에서 논평한 내용입니다. 헤겔과 야코비를 중심으로 전개한 남기호 교수의 학술 작업에 대한 평가를 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기호 교수를 잘 알지 못하지만, 가끔 학회나 논문을 통해 엿보게 되는 치열하게 철학을 연구하는 모습, 그것도 현실의 삶과는 무관한 것과 같은 형이상학을 그리고 이 시대는 거의 죽은 개로 버려진 헤겔 철학을 연구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쌓아 올릴 나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남기호 선생을 생각하면 마음 속에서 철학의 순교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남기호 선생의 철학적 고투를 가슴에 새기고 그가 노력하여 얻은 성과를 정리하여 그 위에서 우리의 갈 길을 열어나가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가 아닌가 해서 비록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기 그의 철학적 성과를 정리하여 놓고자 한다.

 

1)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

필자가 알기로 남기호 교수는 그 동안 두 권의 연구서를 냈다. <헤겔과 그의 적들(도서출판 길, 2019)>과 <독일 고전 철학의 자연법>(도서 출판 길, 2020)이다. 위의 두 연구서는 법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남교수는 그 동안 여러 논문을 작성했고 그 중 헤겔 관련 논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논문이 야코비와 관련된 논문이다. 아마 야코비 관련 논문들이 이번 유고집으로 발간된 책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으로 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발간된 두 권의 책에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헤겔 당시 독일에서 전개된 계몽주의의 자연법 사상과 낭만주의의 역사법 사상 사이의 논쟁이며, 이번 책에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낭만주의자인 야코비가 전개한 독일 고전철학자(레싱,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등)에 대한 비판이니 남교수의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는 낭만주의와 합리주의 사이의 대결이 가로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논의 가운데 남교수의 입장은 대체로 헤겔의 자연법과 이성적 인식을 옹호하는 입장이지만, 남교수는 헤겔을 단순히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계승자로 보지 않고, 야코비를 비롯한 낭만주의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합리주의를 발전시키려 했다고 파악한다.

독일 낭만주의는 적어도 1807년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 이전에는 프랑스적 민주제를 옹호하며 독일 봉건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나폴레옹 해방 전쟁을 거쳐가면서 점차 보수화된다. 중세를 낭만화하며,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거로 전락하고 만다.

헤겔은 1802년까지만 해도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1803년 이후 비판적으로 전환하며 그런 비판은 1807년 발간된 <정신현상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가 낭만주의가 보수화되는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헤겔의 비판이 어떤 맥락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헤겔과 낭만주의의 대결은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 있을 때 더욱 치열하게 되니 그 한 가운데 잔트 사건이 있다. 그 사건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1821년 <법철학>에서 잘 드러난다.

 

2)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은 지금까지 주로 셸링 철학과의 관계에서 논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남교수의 연구 덕분에 셸링 이상으로 야코비가 문제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같다. 이 점이 헤겔 연구에서 남교수의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 속에서 신을 추방하는 근대 자연과학과 계몽주의의 흐름에 대립하면서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를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 가운데 출현했다. 독일에서는 괴테의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시작된 낭만주의는 그 후 크게 보아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셸링이며 다른 하나는 야코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이다.

셸링은 스피노자적 자연 개념을 끌어들여 실체적 통일을 자연의 무한한 생산력을 통해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야코비는 심지어 셸링적 자연 개념조차 초월적 인격 신을 이성으로 끌어내린다고 비판하며 신은 오직 신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에 반해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지적 직관과 이성의 역할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즉 지적 직관을 통해서만 이성의 활동을 신의 인식으로 인도될 수 있으며 이성의 비판 없이는 지적 지관은 망상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을 고려할 때, 남교수가 헤겔을 파악하는 데서 하필이면 야코비에 대해 특별하게 주목했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1]

 

필자는 야코비를 직접 연구한 적은 없으나 남교수의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야코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이해에 의거해 볼 때 야코비의 근본 입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신은 초월적 인격적 존재이며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하는 자이니, 신에 대한 합리적 개념을 통한 어떤 인식도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코비는 인간이 신에 대한 접근은 인간적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귀속하는 이성 즉 오직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남교수에 따르면 야코비는 칸트나 헤겔보다는 오히려 셸링에 대해 더 비판적이며, 양자 사이의 대결은 특히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교수는 셸링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살아 있는 신의 현존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이 신은 그 근거로 의식될 만한 어떤 것으로부터 연역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신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진화하듯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신의 근거로 간주된 그 어떤 것이 신보다 먼저 그 위에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불합리하다. 만약 신의 현존 증명이 살아 있는 신의 이념만을 연역하는 것이라면 이는 또한 살아 있는 현실적 신 자체의 증명일 수 없음을 물론이고 기껏해야 자신의 인식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인간 정신의 주관적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2]

 

이상은 야코비가 신이 자신의 근거로부터 자신을 전개한다는 셸링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이번 발간된 책에서 남교수는 이 책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헤겔과 야코비 사이의 대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자의 대결에서 다루어진 논점은 주로 헤겔의 저서 <믿음과 앎>(1802년)이라는 글에서 나온다. 이 글을 셸링이 헤겔과 함께 발간한 <철학 비판 저널>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 헤겔은 야코비적 이성(즉 계시)이 신성의 사원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악마에게 예배당을 지어준다고 비판했다. 즉 계시로 얻어지는 지식이 진리인지 허위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야코비는 이런 비판에 대해 거꾸로 이성을 통해서는 신에 도달할 수 없다면서, 헤겔을 이솝의 소처럼 커지려고 배를 부풀리다 터져 버린 개구리의 우화에 빗댄다. 

야코비는 여기서 형용사적 이성과 명사적 이성을 구분한다. 형용사적 이성은 인간에 속하는 이성이며, 명사적 이성은 인간이 그에 속하는 이성이다. 전자의 이성은 “자연 사물을 제약되고 매개된 필연적 사슬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기에 초자연적 무제약자는 이러한 이성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오성적 이성을 지닌 인간은 동시에 피조물로서 이러한 신적인 이성에 속하고 있기에 매개들의 무한한 사슬을 넘어 단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현존의 근원을 예감할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에게도 자유가 가능한 것이다.“[3]

 

야코비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적인 이성에 인간이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니, 인간의 자유는 곧 신적 이성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본다.

 

남교수에 따르면 헤겔은 그 후 야코비와 삶에서나 철학에서 야코비와 화해를 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헤겔은 1807년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의 중재를 거쳐 야코비와 개인적으로 화해한다. 이런 화해는 남교수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에게 주어졌던 정치적 개혁 과제의 공감과 야코비의 감화력 있는 인격 때문이었다고 한다[4]. 그 결과 1812년 야코비가 죽자 헤겔은 그의 학문적 기여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헤겔은 평생에 걸쳐 철학적으로는 야코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남교수에 의하자면, 야코비의 비판을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려 시도했다. 남교수는 이런 전환을 통해 헤겔은 ‘매개적 직접성의 철학’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는 매개되어 있으면서도 그 매개 자체가 지양되어 있다는 것이다.

 

“매개 없는 직접지도 거짓이지만 매개 속에서 이 매개 자체를 지양하지 않는 절대자의 사유도 거짓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헤겔은 후에 자신의 철학백과요강 앞부분에서 야코비의 철학을 이전 형이상학과 근대 경험론 및 칸트의 비판철학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른바 직접성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5]

 

직접성 즉 계시는 야코비에게서는 순수한 예감, 또는 동경의 형태로 출현한다. 그렇다면 이런 직접성은 헤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출현할까? 그의 저서 <야코비..>에서 이 부분의 서술은 아주 간략하게만 다루어졌다.

 

4)

남교수가 헤겔 철학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매개된 직접성의 철학은 아마도 남교수가 쓴 논문 <매개된 직접서의 변증법>(시대와 철학 27-3, 2016)에서 좀더 상세한 설명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남교수는 헤겔이 <철학백과요강>에서 전개한 객관적 사유의 발전을 다루었다. 간단하게 이 논문에서 남교수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객관적 사유의 첫 번째 형태는 몰의식적 직접성의 사유이다. 그것은 직접적 접촉에 따른 사유이거나 자명한 자기 연관 속에 일어나는 사유이다. 전자는 경험적 사유를 지칭하며 후자는 아마 형식 논리학적 사유를 말할 것이다. 종전의 형이상학은 형식 논리학적으로 파악된 속성을 절대자의 술어로 파악하면서 절대자를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형이상학은 절대자는 모든 술어를 넘어선 존재라는 점을 간과한다.

 

두 번째 객관적 사유의 단계는 매개적 사유이다. 직접적인 존재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는 주장인데 대상은 사유의 범주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는 이런 범주 자체를 이미 직접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범주 자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범주가 구성하는 것은 경험인데 이 경험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주어지지만 칸트는 이 경험을 넘어선 그 대상은 인식할 수 없는 물 자체이다. 결국 두 번째 매개의 단계는 무지에서 무지 사이에 걸쳐져 있는 인식에 불과하다.

헤겔은 객관적 사유의 세 번째 단계를 설정한다. 이것이 바로 야코비의 직접지이다. 즉 무한자에 대한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계시적 인식이다. 헤겔은 직접지를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우선 이런 직접지는 경험적 내용을 형이상학화한 결과물일 수 있다. 즉 인간적 인식이지, 신의 계시라고 확립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직접지는 매개적 앎과 대립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독단이 되고 있다.

 

헤겔은 한편으로 야코비를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야코비의 개념을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면서 자기의 철학으로 나가는 데, 논점은 감각적 경험과 지적 직관 사이의 관계에 있다.

야코비에게서 감각적 경험과 지적 직관은 직결되어 있다. 즉 감각적 경험이 곧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지적 직관이 된다. 야코비는 이 관계를 매개로 파악하지 않고, “매개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비약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은 야코비의 이런 주장은 오히려 직접지가 매개된 지식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즉 지적 직관이 경험을 매개하여 출현한다는 것이다.  

 

“무한자에 관한 이 객관적 사고는 개별적 유한자와 분리되는 비약이 아니라 이 유한자를 전제하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고양함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신에 관한 직접지는 유한자[감각적 경험]와의 매개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6]

 

남교수에 따르면 야코비가 매개의 지점을 간과한 것은 야코비가 매개가 지양되어 직접성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학문적 매개에서 직접성이 지양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직접성을 지양하는 이 매개 자체가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다.”[7]

 

5)

그렇다면 헤겔에게서 매개 자체가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남교수에 따르면 바로 그것이 곧 헤겔에게서 가상의 역할이라 한다.

 

“세계 내 유한한 존재들은 단지 가상일 뿐이요 이 현상적 유한자들의 “매개 속에서 매개 자체를 지양하는 것”이 바로 “본질적 사유의 참다운 본성”이다.”[8]

 

헤겔에 따르면 참다운 이성은 매개 자체가 지양된다는 것을 통해 직접지에 이르는 것이다.

 

“객관적 사유는 그 유한성을 넘어 어떤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매개된” 직접성으로서 무한자까지도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9]

 

이상에서 남교수의 평생에 걸친 철학적 고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 핵심 개념은 매개된 직접성의 개념에 있다. 하지만 매개된 직접성이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이 사실은 매개된 것이라는 말일까? 예를 들어 오늘날 경험이라는 것은 이미 일정한 개념틀을 전제로 하는데, 그 개념틀은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아니면 매개가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지양되고 다시 직접적 계시가 요구된다는 말일까? 매개가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매개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에 그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매개가 본질적인 것을 향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이미 일정한 방향성이 내적인 직관을 통해 주어져야 한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을 전개하기보다는 남교수의 철학적 입장이 야코비를 통해 헤겔의 매개된 직접성의 개념에 이르는 길이었다는 사실만을 밝히고 끝내기로 하자.


 

[1] 물론 남교수의 스승인 발터 예슈케 교수의 영향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발터 예슈케 교수는 헤겔의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야코비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2] 남기호, 207쪽

[3] 남기호, 302쪽 참고

[4] 남기호, 311쪽 서술을 참고로 하라.

[5] 남기호, 309쪽

[6]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3쪽

[7]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4쪽

[8]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4쪽

[9]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5쪽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

 

1) 고전 시대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의 표현 기호이다. 이 정신은 마침내 절대 정신으로 발전하는데, 그 토대는 바로 국가이다. 이 국가는 사회적 상호 관계 위에서 출현한 사회 정의나 공동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개별적 의지의 통일체이니,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즉 일반의지이다.

상징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었던 동방 국가(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의 국가)나 고전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는 고전 시대 국가(앞으로 고전 국가로 통칭하기로 하자)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헤겔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 차이를 설정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동방 국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전 국가에서는 자유가 존재했다는 데 있다. 즉 고전 국가에서는 평민의 자유가 보존되었고 이주민에게 일정한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도시 국가와 도시 국가 사이에서도 상대적 평등이 인정되었다. 물론 이런 자유나 평등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를 말하며, 그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이 존속했으나, 동방 국가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자유나 평등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평가되는 역사적 근거는 고전 시대에서 적어도 그 전성기에서는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의 투쟁을 통해 민주제와 공화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1]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이처럼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시대가 민주제와 공화제로 나갈 수 있었던 역사적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니 생략하기로 하자.

헤겔은 고전 시대에 찬탄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대체로 두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우선 고전 시대에서 개인의 자유가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전 시대에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의지인 국가에 복종했지만 그것은 근대에서와 같이 자각적으로 복종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관습적으로 형성된 민족 의식[2] 또는 위대한 영웅에 대한 감정적 신뢰를 통해서 복종했다는 것이다.[3]

또 하나 헤겔이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고전 시대[여기서는 로마 공화정까지만 다루어진다]의 도시 국가 사이에는 협력과 대립의 관계가 무상하게 변천했는데 그런 가운데 한번도 동방의 국가가 도달했던 것과 같은 통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도시 국가는 그리스에서처럼 공동의 동맹을 만들어내거나 로마 공화정에서처럼 자율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동맹 도시보다는 발전된 형태 즉 동맹 도시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 관계조차 후일 로마 제국이나 그 이전 동방 국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통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4]

 

2) 신들의 전쟁

고전 시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런 한계 때문에 헤겔은 고전 시대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개별성이 출현했으나 그 개별성은 일반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매개가 결여된 ‘직접적 결합’이라는 원리가 고전 시대 시대 정신을 규정하니 우리는 이런 특징을 예술적 표현에서 찾기 전에 먼저 종교적 표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그 점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정신적인 것을 내실로 삼고 자연적인 것은 단순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 그리스 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리스 신은 아직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기독교 신]은 아니며 인간적 한계를 지닌 특수한 신이고,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특정 개성을 지닌 정신이라고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 그리스 신이다. 신의 정신이 아직 여기서는 스스로의 정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곳에 놓여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표현을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5]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징 시대처럼 동물 신의 모습이나 아니면 이슬람의 카바(흑색 돌)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신 개념에 대한 헤겔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신의 본질이 바로 인간 공동체의 의지 즉 일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에서 신이 본성은 이성적으로 자각된 것은 아니고, 감각적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자각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는 우연하다. 이런 우연성은 상징주의 시대 자연 신의 모습에서 빌어오든가 아니면 지역적으로 전래하는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하지만 그 우연성만 본다면, 전래의 상징적 신이 수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미 구 시대 신의 형태는 새로운 신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구 시대 신은 더 이상 자연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제 정신적 힘을 의미하게 된다.

구 시대 신은 자연적인 것이며 불명료하고 우연적인 것이며 환상적인 것이지만 새로운 신은 정신적인 것이며 명료한 것, 필연적인 것이고 실체적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구 시대 신과 새로운 신 사이의 투쟁[6] 또는 신의 변용[7]을 그려내고 있다.

신의 이런 차이에 관해서 헤겔은 예를 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거론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구 시대 자연신인 티탄 족의 신인데도 인간을 위해 불과 기술을 가져다 준다. 헤겔은 이 사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지만, 이런 신화에서 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이때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설명을 소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에피메테우스가 모든 생물에게 살아가기 위한 고유한 기술을 나누어주었는데 프로메테우스가 나중이 보니 인간에게 줄 기술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파이토스와 아테네로부터 불의 기술과 직조의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 사이에 끝없는 분쟁이 벌어지니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헤르메스를 통해 정의를 선사했다고 설명한다.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런 설명을 통해 볼 때 불과 직조의 기술은 아직 실체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단순한 생존의 기술, 자연의 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록 프로메테우스가 욕구의 만족을 위한 기술을 주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구 시대 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8]

헤겔은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통해 구 시대 신인 프로메타우스와 새로운 신인 제우스, 헤르메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부각한다.

 

3)신과 인간

더구나 신이 지닌 우연적인 모습은 이제 정신적 힘의 표현이 되므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신은 개인적 의지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곧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라고 말한다.

신이 자기를 이런 아름다운 개체의 형상으로 드러낼 때 헤겔은 이를 “그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을 마치 상징주의 시대에 자연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자연이라는 기호를 상징적으로 즉 마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 시대 신상이 신이 현존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헤겔은 이를 어디까지나 신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이란 곧 이 시대 예술을 의미하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드러내는 예술적 기호라는 의미이다. 달리 고전 시대 신상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고전 주의 시대 신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작품으로 간주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현존으로 간주되니, 양자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서사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중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 인간적 사건이 신의 행위로 설명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의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반영한다.

헤겔은 예를 들어 호머 일리아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거론한다. 아킬레스의 친구 파틀로클로스와 트로이의 헥토르가 싸울 때, “어슴푸레한 어둠에 몸을 감춘 신(아폴로)가 혼전을 틈타 그에게 다가와 등과 어깨를 내리치며 투구를 벗겨 내고” “그의 손아귀에 있는 청동창 역시 부러뜨리며 그의 어깨에서 방패를 끌어내리고 갑옷을 벗긴다.” 이어서 호머는 비로서 에우포르보스가 창으로 파트로클로스의 뒤에서 어깨 사이를 찌를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헥토르가 신속히 다가와 창으로 복부의 약한 부분을 깊숙이 찌른다. 이런 서술을 보면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로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사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서로 중첩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은 호머의 이런 서술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특수한 사건들을 그러한 신의 등장을 통해 설명하는 모든 경우에, 신들은 인간 내면 자체에 내재하는 것 즉 그의 고유한 열정과 고찰의 힘이거나 그가 처한 상황의 일반적 힘들 즉 인간에게 닥치는 것과 이 상황의 귀결로 그에게 발생하는 것의 힘이자 근거이기 때문이다.”[9]


 

[1]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 대해 각기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들이 왕에 복종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에 바탕한 상하 관계에 의한 것도 … 아니고, 가부장제 지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명문화된 법적 지배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 살아 가려면 …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왕은 … 개인적 위엄이 있었다.”(역사철학강의, 227쪽)

“로마에 이르러 겨우 자유라는 일반원리 또는 추상적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추상적인 국가와 정치와 권력을 구체적 개인 위에 두고, 개인에게 철저한 종속을 강요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권력에 대립하는 인격을 창출한다. 인격이야 말로 법의 근본적 기초이기 때문이다.”(역사철학강의, 275-276쪽)

[2] 이 민족의식은 씨족이나 부족을 통해 형성되는 혈연적 일체감과는 구분된다. 도시국가에서 다양한 씨족, 부족은 해체되며, 그 사이에 다양한 혼인이 교차되면서 역사상 민족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아테네 민족이라든가 로마 민족 등이다.

[3]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의 다음 글을 참조로 하라.

“국민은 전쟁터에서 왕의 용병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예속미으로서 마음에도 없이 싸우는 것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존경하는 주군을 따르는 자로서, 주군의 전공과 명예의 증인으로서 또 필요하다면 주군의 호위로서 싸운다.”(역사철학강의, 228쪽)

또는 미학강의에 나오는 다음 글도 참조하라.

‟그리스 인륜적 삶에서 개인은 독자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웠으되, 현실의 국가에서 현전하는 일반적 관심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륜의 일반성과 내적, 외적으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는 그리스적 삶의 원칙에 적합하게 평온한 조화를 이루었으니” (미학강의 2, 27쪽)

[4] 헤겔은 그리스 사회에 대해 로마 사회가 가지는 차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로마 사회는 후일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운 인격이 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 로마법의 지배가 출현한다. 동시에 이 시대 기독교가 출현하는데, 헤겔은 그 핵심 원리를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관계에서 찾는다. 헤겔은 이런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로마가 출현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헤겔은 그 역사적 원인을 로마가 주변의 민족국가로부터 추방된 자 또는 도덕들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적 원인이야 어떻든 헤겔은 로마의 정신을 그리스 정신과 구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정신은 기쁨과 명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형태를 취해 추상적 세계에 틀어박히는 일이 없다. …그 때문에 개인의 덕도 공동체 정신이 넘치는 예술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 인격과 같은 것이 거기에는 아직 없었다.”(역사철학강의, 275쪽)

그리스 시대 개인은 관습적으로 길러지는 덕성[arete]을 통해 공동체적 의지로 통합되었으나, 로마 시대 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니 이런 욕망을 공동체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법의 원리가 출현한다. 이 법은 강제적 힘에 의해 강요되니, 이게 바로 로마 시민의 덕성(즉 virtue)이다.

“주관의 내면성이라는 원리는 우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내용을 밖에서부터 지배자 내지 통치자의 특수한 의사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역사철학강의, 277쪽)

그러나 헤겔은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 사이의 차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공화정으로 나가는 시기 그리스 사회나 로마 사회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가 제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시대 역사의 종합적 결과이지, 본래 내재하는 속성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떻든 고전적 예술 형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로마의 예술은 후기 즉 그리스적 전성기의 해체기에 주로 다루어진다.

[5] 헤겔, 역사철학강의, 240쪽

[6] “반면 티탄들은 추방당하여 지하에 거주해야 하며 혹은 오케아노스가 그렇듯 밝고 명랑한 세계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머물거나 기타 다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2권, 67쪽

[7]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이제 단순한 자연욕구와 그 만족에 제한되는 인간의 행동이 뒷전에 밀려감을 발견한다. 자의식적 정신에서 발원하는 법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 옛 정의는 즉 테미스와 디케 등은 무제한적 타당성을 상실하며,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니 단순한 지역성은 비록 그것이 여전한 역할을 하지만 보편적 신의 모습으로 변신하니, 그들에게서 지역성이 그저 흔적으로 잔존할 뿐이다.”헤겔, 미학강의 2권, 69쪽

신들의 변용에 관한 구체적 예를 들자면, 포세이돈은 오케아노스와 같이 바다의 신이지만, 그에게는 트로이의 건설자이고 아테네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특성이 부여된다. 아마도 해양 무역을 보호하는 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서 헬리오스의 자취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또한 질서의 신이 된다. 에베소의 여신 디아나는 자연의 생산적 힘을 상징하는 옛 신이지만 원래 달의 신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는 이제 동물을 사냥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대지의 여신이었지만 그리스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변모한다.

[8] 헤겔, 미학강의 2권, 61쪽 서술을 참조하라.

[9] 헤겔, 미학강의 2권, 111쪽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

 

1)

헤겔은 상징적 예술형식을 다루면서 마지막 3절에서 비유법을 다룬다. 1절과 2절에서 다룬 상징, 숭고의 개념은 이념이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시대에서 출현한 예술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3절에서 다루는 비유법은 상징적 예술형식이 해체되어서 다른 시대의 예술형식에서 종속적인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다룬다.  

상징이나 숭고의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이념, 절대정신이었다. 여기서 기호 즉 작품과 그 의미 즉 이념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작가는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니, 마치 기호와 의미 사이에는 신비한 연관이 있어 작품은 마치 직접적으로 그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연관은 대체로 수수께끼적인 특성을 지닌다. 본격적 상징에 이르러 양자 사이에 매개가 유사성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 그 매개를 작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비유법에서 이제 이념 즉 절대정신이 아니라 작가가 표현하려는 개인적인 의미일 뿐이다.  그 의미는 작품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하며 그 연관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 파악에 의존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체계화를 좋아하는 헤겔은 이런 비유법조차 체계화한다. 그는 먼저 비유만 제시되고 그 의미는 간접적인 추론에 의존하게 만드는 형태로서 우화, 비유담, 교훈담, 속담, 변신담을 거론하며 이어서 비유와 더불어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형태로서, 은유와 이미지(풍유) 그리고 직유를 구분한다. 전자나 후자는 비유와 그 의미 사이에 유사성과 같은 합리적 연관이 매개가 된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작가가 억지로 또는 자의적으로 양자는 연관시키는 형태로서 교훈시나 서술시(전원시)에서와 같은 비유법을 들고 있다. 이 마지막 형태에서 처음 상징에서 감추어져 있던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무차별성이 마침내 폭로되면서 상징적 예술형식은 해체되고 만다.

비유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목적이라면 헤겔이 제시하는 비유법 설명을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헤겔은 친절하게도 풍부한 예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비유법을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설명은 좀 개념적이지만, 그 내용은 요즈음 문학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말해 두자.

 

2)

비유법의 종류를 구분하는 자체는 철학적으로는 별로 흥미롭지 못하지만, 비유법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즉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관한 논쟁이다. 논쟁의 출발은 괴테였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괴테 이전에 상징은 헤겔에서 보듯이 기호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징은 의미를 지시하지만 그 지시 연관이 무매개적이어서 신비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반면 괴테는 초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이탈리아 여행 이후 1800년 전후로 고전주의로 전향하면서[1], 상징이라는 개념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즉 상징은 그 의미인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형상을 말한다. 상징은 이념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념과 구체적 형상은 진정한 통일을 이룬다. 괴테를 이를 “감각적 현상과 초감각적 의미의 합일”[2]로 표현했다. 또는 “인간 정신이 가장 내밀하게 자연과 결합되어 온전한 형상으로 창조한 대상”이라고 말한다.[3]

괴테는 상징을 고전적 예술의 대표적인 도구로 파악하면서, 그의 이전 바로크 시대 예술의 도구인 알레고리[4]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괴테는 알레고리를 개념에 대해 외면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상징이 이념의 무한한 풍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는 개념의 외면적인 한 측면만 파악하는 단편적인 것에 그친다. 그러므로 괴테는 진정한 예술에 이르는 길은 알레고리가 아닌 상징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가 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에서 알레고리가 생겨나는데,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을 예시하는 사례나 표본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본래 시문학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시문학은 그 본성상 보편적인 것을 염두에 두거나 가리키지 않은 채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5]

 

3) 벤야민과 알레고리

괴테는 알레고리와 상징, 바로크 예술과 고전주의를 예술적 가치의 측면에서 비교했다. 그에 반해서 벤야민은 예술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알레고리의 개념을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파악한다.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은 그의 실패한 교수자격취득 논문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 설명된다.

벤야민의 이런 시도는 각 시대 예술의 형식을 기호의 형태를 통해 파악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닮았다. 그런데 헤겔은 알레고리를 한 시대의 특별한 예술 형식으로 말한 적이 없고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 형식은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발견하므로, 벤야민의 시도는 특별한 흥미를 끈다.

  우선 벤야민은 알레고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알레고리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사회적 관습이나 자의적 연관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고 보면서 거기에 고유한 객관적인 토대가 있다고 본다. 즉 알레고리는 서로 분열된 두 개의 개념 체계 즉 구조가 중첩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구조 속의 어떤 요소가 다른 구조 속에서 등장하여 다른 구조로부터 의미를 얻게 되면 알레고리가 된다.

벤야민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예술의 특징이 바로 이런 알레고리의 사용에 있다고 한다. 그는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예술로서 비애극-그는 이를 고대 비극과 구분하여 비애극이라 하는데-을 거론하면서 고대 비극과 구분되는 근대 비애극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이런 알레고리의 형식을 발견하려 한다.

이 비애극[6]의 표면적 구조는-상세한 것은 나중에 고대 비극을 논할 때, 소개할 예정인데- 일종의 궁중암투이다. 여기서 서로 투쟁하는 두 세력 예를 들과 왕과 신하가 서로 야심을 부리는 가운데 몰락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런 구조의 배후에는 죽음과 부활 또는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적 구조가 매개되어 있다. 즉 왕과 신하의 상호 몰락은 곧 신이 세상을 구원하는 섭리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애극은 멜랑콜리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런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며 구원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애극의 기본 구조는 세속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의 이원적인 중첩이며 그 때문에 벤야민은 세속적인 사건 각각은 신적인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고 본다.

 

4) 멜랑콜리의 정신

이런 이원적 구조의 중첩은 비단 바로크 시대 비애극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7]. 바로크 시대는 역사적으로는 절대주의 시대이며 근대 자본주의가 출현할 무렵이다. 이 시대 예술 대표적인 예술은 회화와 건축에서도 발견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를 보자.

 

과학이 발전하고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세속적 행복이 증가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멜랑콜리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의 분열이었다. 현실 세계는 배후의 어떤 세계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간은 그 힘을 알지 못하고 다가오는 몰락의 운명 앞에 두려워한다.

이렇게 분열된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역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분열되어 있다. 전자는 표면적인 경쟁의 질서이다. 여기는 개인의 자의가 지배한다. 후자는 시장 및 가치법칙의 질서이다. 이것은 심층적이면서 표면의 질서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 벤야민은 바로크 시대 예술을 지배하는 알레고리의 형식은 곧바로 자본주의 시대 즉 소외된 시대예술의 일반 형식으로 간주한다.  

벤야민은 이런 알레고리 형식과 멜랑콜리의 정신을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절정기에 등장한 보드레르의 도시 산책에서도 발견하며, 나아가서 20세기 등장한 대중 예술인 영화 예술 속에서도 발견한다. 벤야민의 이런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제로부터 너무 벗어나니 생략하기로 하자.

 

5) 알레고리와 가상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자본주의 시대 예술 형식으로 보았는데, 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필자가 보기에 벤야민이 알레고리의 형식을 자본주의 시대와 연관시킨 점은 문제가 있다.

알레고리가 두 개의 세계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접속하는 시기나 장소에는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표면과 배후가 중첩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가 사용될 수 있기는 하지만, 알레고리는 그 외의 다른 시기나 지역에서도 충분히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질적 문화가 충돌하는 헬레니즘 시대에 다양한 곳에서 이런 알레고리적 형식이 출현했다.

자본주의적 알레고리는 멜링콜리의 감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 알레고리는 그런 감각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는 자본주의 시대 일반적 예술 형식으로 규정하려면, 멜랑콜리적 알레고리로 제한해야 한다.

헤겔은 중세 이후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낭만주의 시대라 이름 붙였는데 이 시대 고유한 예술형식으로서 가상이라는 형식을 제시한다. 헤겔이 말한 가상이라는 형식과 벤야민이 말한 알레고리의 형식은 구분된다.

헤겔의 경우 가상은 단순히 중첩되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념적인 것을 지시하는 기호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상호 작용의 관계에서 개별자는 몰락하며 그런 몰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 가치 법칙의 지배를 입증하니, 헤겔이 말한 대로 가상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이 시대 절대정신 즉 이념을 적절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1] 임홍배에 따르면 괴테의 상징 개념은 1797년 8월 16일 <쉴러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1797년 쓴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잘 보여준다고 한다. 임홍배,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 개념에 대하여>, 비교문화 45집, 2008. 6 참고.

[2] 가다머, 진리와 방법, 튀빙엔, 1990,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3]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4] 우선 알레고리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알레고리란 그리스어로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말이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때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비유법이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므로 알레고리이지만 보통은 좁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알레고리란 관습적인 차원에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지시할 때 성립하는데,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는 유사성에 기초한 은유{도상}나 인접성에 기초한 환유(지표)와 구분된다. 유사성이든 인접성이든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알레고리와 그 의미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간접적인 관련만 존재한다.

[5]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2쪽에서 재인용

[6] 당시 비애극의 대표적인 예로서 안드레아스 그뤼피우스의 『레오 아르메니우스』를 보라. 드라마는 성탄절 하루 전 정오에 시작하며 작품 소재는 비잔틴의 최고 군사령관 미하엘 발부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황제 레오(AD 813-820 까지 통치)의 살해이다. 또한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 극작가 라신느의 희곡 『파에드라』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7]

이름 없는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무명인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이 글은 한글본 [유일자와 그의 소유]( 슈티르너 지음, 박종성 옮김, 부북스, 2023. 2쇄[학술원 우수 학술도서])를 읽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짧은 영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울피 란트스트라이허(Wolfi Landstreicher)의 글 [이름 없는 /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 무명인](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이 글에서 인용하는 슈티르너의 글은 독일어 원본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슈티르너가 쓴 [슈티르너 비평가들]이란 글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비판의 반비판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옮긴이 해제”와 “옮긴이 말”을 참조하길 바랍니다. 아울러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이란 용어에 대한 설명도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옮긴이 해제”를 참조길 바랍니다.

 

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이름 없는
자기중심적 사람의 정체성 비판
무명인

 

울피 란트스트라이허 지음 박종성 옮김

2017

 

그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nichts) 때에만 그리고 그대의 이름만 언급될 때에만, 그대는 그대로서 인정된다(wirst anerkannt). 그대에 대해 무엇인가를(etwas) 말하자마다, 그대는 그러한 어떤 것(인간, 정신, 기독교도 등등)으로서만 인정된다.

– 막스 슈티르너 『슈티르너 비평가들』(Rezensenten Stirners, 1845)

 

사람들이 정체성(identity)과 개성(individuality)을 얼마나 자주 혼동하는지가 재미있습니다정체성은 동일성”(sameness)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일성은 나와 동일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개인들을 서로 충돌하는 동일한 원자(identical atoms)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합니다(마르크스주의자는 이것이 개인주의자가 말하는 것이라고 가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원자조차도 당신이나 내가 그들을 원자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할 때만 동일해집니다원자화는 나의 유일한(unique) 개성을 부정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는 과정이며이 과정에서 동일시(identification)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슈티르너는 당신과 나즉 지금 이 순간 육체가 있는 모든 개인을 유일자”(der Einzige)이라고 불렀습니다『슈티르너 비평가들』에서 그는 유일자 그저 이름일 뿐이며그 이상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말하고 쓰려면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유일자는 … 전혀 개념의(옮긴이내용이 없다유일자는 불확정성 그 자체(Bestimmungslosigkeit selber)이다 … 내가 내 세상에서 살기 전에네가 네 세상에서 살기 전에유일자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정체성과 동일성을 부여하고 유일한unique 것으로서의 유일자를 파괴하는 것입니다유일자)에 개념적 내용(conceptual content)을 부여하는 것은 유일자를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유일자이면서도 정체성과 다투어야 합니다예를 들어 선술집에 들어갈 때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때경찰들이 제지할 때신원을 밝혀야 하는(identify myself) 진부한 일이 있습니다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누군가는내가 그러한 경우들의 규칙들에서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해 특정 법적 권한(authority)을 위임 받았습니다나도 술 마실 나이가 된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나는 수표를 현금화할 권한이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나는 미납 증서가 없는(no outstanding warrants)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이러한 각각의 정체성들은 내가 따라 생활해야 할 개념들입니다그리고 그렇게 생활하지 않으면그 자기 생활의 결과를 감수하게 됩니다그러나 사실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과 동일하지 않습니다비록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러한 각각의 과제들(어느 정도의 음주어느 정도의 현금 필요경찰들과 어느 정도 멀리하기)을 충족할 수 있다고 해도나는 어떤 그러한 대의들도 아닙니다그리고 나에게 이러한 기준을 부과하는 사람들은 나의 유일한 나(unique self)에 추상 개념들을 강요하고그들의 규칙들과 자신만의 일관성에 대해 사회적 요구 사항을 따르도록 강요한다는 점에서 나의 적들입니다그들은 나의 자기소유성(ownness)과 더불어 나의 유일성(uniqueness)을 훼손하려고 합니다.

게다가모든 지배적 사회 질서는 개인들을 인종성별국적성적 취향 등의 범주적 정체성(categorical identity)에 따라(in terms of) 처리하도록 설정되어 있을 뿐입니다이것들은 모두 허구이지만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이러한 범주들은 개인을 노예화하고개인을 배제하고개인을 제한하고(placing restrictions on), 개인을 구타하고 살해하는 등의 구역질날 정도(ad nauseum)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그러한 범주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학대를 경험한 이들이 이 학대와 가해자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연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습니다(makes sense).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연합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단결이 학대를 뿌리 뽑으려는 공유된 욕구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이 학대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 범주적 정체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들은 그들이 파괴하려는 질서의 적들이 아니라인정과 정의를 원하는 질서의 희생자들로서 단결하기로 선택합니다사회 질서는 유일한 개인(unique individuals)이 아닌 범주들만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정의는 측정하고 무게를 달 수 있는 것즉 비교하고 동일시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습니다정체성동일성집단에 속함은 사회적 인정과 정의에 대한 요구 사항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입니다나의 유일성을 알고 있는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으로서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범주적 정체성과 그걸로 즉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적으로서 다르게 반응합니다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한다면그들은 내 자신의 목표와 힘을 향상시키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아니라내 자신과 내 연합을 위해 정체성과 정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하지만 나는 도덕주의자는 아닙니다나는 정체성이 항상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의 용도를 잘 찾을 수 있습니다사실나는 내가 라고 말할 때마다정체성을 사용합니다. 이 말에서 나는 여기에서 지금의 내 자신곧 나의 직접적이고 구체적 나를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시합니다유일하기 때문에(내가 구체적으로 여기에서 지금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하지 않지만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동일시하는 정도까지 나 자신을 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과 결합하기로 선택합니다왜냐하면 내가 만난 타인의 과거 모습들과 타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타인의 힘을 향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과거 내 자신의 나 개념은 나의 세계와 관련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는 데서 나에게 중요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여기서정체성은 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여기서도나는 범주적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개인적 정체성즉 내가 사용하기 위한나의 자기 향유(self-enjoyment)을 향상시키기 위한 개념적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서나 자신을 위해 만든 등식(equation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약 내가 개념적 도구들을 나 자신이라고 여긴다면나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최근에나는 자신을 개인주의허무주의자자기중심적허무주의자(egoist-nihilists)라고 묘사하면서 지배 질서에 대한 다양한 공격을 주장하는 개인들(분명히 소그룹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의 성명서(communiqués)을 접했습니다스스로 통치자의 질서에 반역하고 공격하는 자는 틀림없이 나의 동지입니다나는 개인의 행동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그의 모든 결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개인과 친밀감을 느낍니다그런데 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단체 이름을 사용하여 단체 정체성(group identity)을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어쨌든 개인의 행동에 대해 주장할 필요성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내가 지배 질서를 공격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선택한다면이 선택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삶의 직접성에서 비롯되며나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그뿐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다른 행동에서 영감을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 자신의 삶이고 내 자신의 기회입니다반항적 행동이 반항적 마음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분노와 기쁨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기 위해 글을 쓸 수도 있지만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큰 지혜입니다그러나 여기서 내가 가장 의문시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행위를 주장하는 개인이 정체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이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하는 이유입니다(이 이름들 중 일부는 아름답고 시적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나타내는 호칭(labels)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명된 성명서(signed communiqué)는 그 행동을 수행한 유일한 개인들에 대한 행동의 즉각적이고 순간적 의미를 청중에게 그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영구적 의미로 대체합니다영구적 의미와 함께 영구적 정체성이 생기고 유일한 개인들은 이러한 결정된 형태 속으로 사라집니다스스로 행동하는 유일한 개인은 이름이 없습니다(nameless)유일한 개인 이름이 없습니다왜냐하면 유일한 개인이라는 존재는 의미가 완전히 비어 있지 않거나 그를 표현한다고 생각되는 이름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고 덧없기 때문입니다그가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면정체성 없이 익명으로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만약 유일한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선택하거나그것을 대화나 토론의 문제로 만들기로 결정하거나자신들이 반항하는 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선택한다면유일한 개인이 이 일을 익명으로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자신의 유일성으로 행동하는 개인은 자신의 행동과 동일시할 필요가 없으며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완전히 그 행동에 빠져 있었습니다어쨌든자신의 행위를 주장하는 것의 완전한 의미들은 자신의 반란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과 느끼는 연대감과 친밀감(solidarity and kinship)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지속적 논쟁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정체성은 당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 규정하는 것입니다내가 말했듯이그러한 규정을 가지고 노는 것이 타당할 수 있는(또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순간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규정들이러한 정체성들은 결코 내가 될 수 없습니다그러나 그것들은 나를 하나의 역할이나 일련의 역할이라는 감방에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내가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이 역할을 거부해야 합니다내 이익에 도움이 될 때 가끔 쓰는 가면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물론내가 그 역할에 맞지 않으면나는 예측불허가 되고나는 덧없어지고나는 제도와 제도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슈티르너는 『슈티르너 비평가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슈티르너는 유일자라고 이름을 붙이고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름은 유일자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Stirner nennt den Einzigen und sagt zugleich: Namen nennen dich nicht) 정확하게 유일한 개인으로서 나는 이름이 없습니다정확히 그와 같은 나는 정체성이 없습니다나는 그야말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입니다(I am simply myself here and now).

 

Wolfi Landstreicher
Nameless
An Egoist Critique of Identity
Unknown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②

 

문성원(한철연 회원, 부산대 철학과)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앞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1. 많은 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청년 시절 제게 헤겔은 무엇보다 ‘자유’의 철학자였습니다.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지요. 진보의 순서를 문명권에 따라 공간적으로 배치한 것이나 물질적·경제적 동인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 따위는 맑스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극복되는 시대적 한계로 여겨졌죠. 이런 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자기의식의 원리에서 출발한 자유는 산업화로서의 외화와 그것의 자주적 전유를 그 전개 형태로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자유는 산업화와 자주를 아우르는 근본 틀로 취급될 여지를 갖겠지요.

2. 그런데 이 ‘자유’는 최근에 우리가 여러 번 목도했다시피 내용 없는 공허한 울림으로 되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자유가 운위되는 양태는 매우 자의적어서, 실제로는 자신의 좁게 겨냥된 과녁만을 노릴 뿐, 주변의 중요한 문제들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는 무책임하며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자유롭죠. 흔히 말하는 대로 아집과 무지와 무능의 소치라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데에는 애당초 자유 개념과 결부되어 있는 자기 중심성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알다시피 이때의 보편은 실상 시대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한정된 ‘보편’이죠. 게다가 우리가 익히 보다시피 그런 특정한 잣대마저도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덕택에 지금 우리는 권리와 법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전횡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3. 이런 모습이 자유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부정적 면모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구태일 겁니다. 이념의 외화와 자기복귀라는 틀이 한 때 호소력이 있었던 건 그것이 자기 확인과 자기 확장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열망에 부응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아직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고픈 집단이 있겠으나(아마 북한―적어도 현재의 주도적 지배층―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드러난 숱한 문제들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체는 단일하지 않을뿐더러 궁극적으로 단일해질 수도 없다는 것, 각각의 주체는 재현의 실패를 지시하며1 그런 실패가 계속되는 한에서 요구된다는 것, 또 주체의 자유란 이 같은 실패가 일회적이지 않게 하는 선택의 기제이고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집단적 자유의지(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포함해서―의 실체라는 것, 등등이 그간의 사태에 대한 반성을 통해 도출된 일반적 결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렇다고 자유의 여지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활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확실성을 보장받으려는 과도한 목적론적 구도를 포기하고 자기중심적 외화가 초래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들을 충분히 경계한 채로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목표에 얽매인 상태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자유’가 주도적 모토로 내세워질 수 있는지, 오히려 퇴행적 발상에 이용당할 소지가 많지 않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이죠. 더러 얘기되듯 누구의 자유인가, 어떤 자유인가를 구체적으로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유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자유 개념의 특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겁니다.2

5. 외화로서의 산업화와 자기복귀로서의 자주를 주된 계기로 삼아 지나간 일들을 꿰어보려 했다고 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틀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오히려 그동안 불거진 예기치 못했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일이 긴요할 겁니다.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틀의 수립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테지요.

 

 

1. 여러 문제 가운데 제가 특히 흥미롭다고 여기는 우리 현실의 사안으로는 무엇보다 세대 문제를 들고 싶군요. 그중에서도 근래에 두드러진 세대 간의 불평등 논란이 관심을 끕니다. 세대의 문제는 시간적 추이와 관련된 문제고 그런 점에서 변화, 발전의 문제이기도 할 테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에서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일반적인 형태로 논의될 따름이었겠죠. 혁명적 격변의 시기에도 체험의 단절적 변화가 세대의 구분에 새겨지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을 한 탓에 세대 간의 특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2. 이제 산업화 이전 세대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하겠고, 70년대까지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확연히 노년층에 접어든 산업화 세대와 87년을 전후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 할 이른바 386(이 이름이 등장했던 1990년대초 당시에 386이었지 현재는 586을 거쳐 686에까지 이른) 세대, 그리고 민주화 이후 성장기를 보낸 X, Y, Z의 알파벳 세대 등 갈수록 구분도 촘촘해지는 세대들이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죠. 여기서 특히 세기의 전환기를 어려서 겪은 이들, 대체로 1980년대 중반쯤에 태어난 Y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M(밀레니엄) 세대라고 하고, 이들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태어난 Z세대를 묶어서 MZ 세대라 부르는 것 같군요. 그런데 불평등과 관련한 논란의 초점은 현재 사회의 중심 세력이라 할 386세대와 2,30대 청년층을 이루는 MZ세대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

3.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 이철승 교수는 한국의 세대를 ‘자원 동원 네트워크’라고 이해합니다.3 단순히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이상이라는 거죠. 특히 그는 386세대가 성공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국사회의 주도층이 되었으며, 그 다음 세대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철승 교수가 드는 386세대의 성공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어요. 첫째, 베이비 붐 세대라서 수가 많다는 점, 둘째, 민주화 운동에 힘입어 균질성과 응집력을 획득했으며 학생-시민-노동조직의 연계를 이루어 내었다는 점, 셋째 이른바 세계화에 편승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점.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세대는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바람에 휘말리고 만 탓에―IMF 외환위기가 그 단적인 징표겠죠― 시장이 야기하는 불평등한 ‘신분의 위계화’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권력의 과두제화와 독점’에 안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청년 세대가 불만을 가지고 반발하는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테죠.4

4. 이철승 교수는 386세대와 다른 세대의 소득격차가 커져가고 있고, 세대간 정치권력의 분포 비율 면에서도 이 세대 이후 젊은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여러 통계 도표를 통해 제시합니다.5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요. 그 주된 논거는 세대간 불평등에 비해 모든 세대 내의 계급간·계층간 불평등이 더 심하며,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및 갈등의 주요 원인은 세대 격차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세대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것이지요.6 저는 이 논란에서 어떤 편을 들 만큼 우리 사회의 실증적 사실에 밝지 못합니다. 양측이 내놓는 통계들은 나름으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요. 다만, 세대내의 불평등 역시 크다고 하더라도 386이라는 1960년대 출생 세대의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다른 세대가 같은 연배일 때에 비해 다소 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결의 사태에 주목해 보고 싶군요.

5. 저출산의 문제야말로 심각한 세대의 문제이고 또 세대간의 문제가 아닐까요? 노령층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부담이 늘어난다든가 한국 사회의 소멸이 우려될 지경이라든가 하는 얘기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예상되는 결과 이전에 자식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게 만든 부모 세대의 책임을 먼저 문제 삼아야겠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 세대가 처한 상황의 엄중함에 주목해야 할 줄 압니다. 저는 이것이 앞서 말한 공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산업화가 낳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증상이 저출산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의 부재가 사회 발전 방향과 비전의 공백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윤석렬 정권의 탄생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6. 저는 몇 해 전에 저출산이 ‘생물학적 파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7 작년에는 영국의 BBC가 ‘한국은 출산 파업 중’이라는 표현으로 우리의 저출산 사태를 보도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8 사전의 협의도 주도하는 조직도 없는,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집단적인 저항인 셈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청년 세대를 낳은, 그리고 현 상황을 만든 세대를 향한 (아마 오늘의 발표자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항의겠지요.

7. 산업화한 국가들 대부분이 저출산 현상을 보인다는 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급속한 인구 증가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인구수가 주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지 모르죠. 하지만 인류세의 위기를 개체수 조절로 극복하는 선구적 모습을 보인다고 자위하기에는 출산을 포기하게 되는 이유들이 너무 팍팍하고 출산율의 저하가 너무 가파릅니다.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차고 넘칠 만큼 많은 논의가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급속한 압축 성장의 대가라는 점이죠. 극심한 경쟁과 수도권 중심의 과밀집 등이 저출산의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 그 결과지요. 여기에 덧붙여 저는 축약된 과정 탓에 욕망에 대한 반성과 조절의 기회가 없었거나 부족했다는 것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의 68혁명에 해당하는 계기가 생략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이런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늘어난 소득에도 불구하고 더욱 돈에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이 집약되는 오늘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386세대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거예요. 비록 압축적 과정 때문에 오히려 지연된 민주화라는 과제에 치여 스스로는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8.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이 ‘어떻게’는 오늘 우리의 주제인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헤겔이라면 혹 압축적 산업화에 대립하는 계기로 탈성장을 내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탈성장 담론이 자리잡을 여지는 얼마나 될까요? 그것은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으로 여전히 고초를 겪고 있는 한반도 주민의 일부가 그 반대의 극을 추구하기 위해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는 일9보다는 더 현실적인 시도일까요?

9.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에는 두 개의 원작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1983)가 직접적 원작이지만, 무라카미의 그 단편이 제목에서부터 윌리엄 포크너의 “Barn Burning”(1939)을 염두에 둔 것인 데다가, 이창동 감독 자신도 포크너의 그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영화 한 장면에 그 소설이 실린 포크너의 책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인 종수(유아인 분)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 말을 들은 벤(스티브 연 분)이 그 책을 구해 카페에서 읽고 있는 것으로 나오죠. 그거야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다 같이 헛간(<버닝>의 경우 비닐하우스)을 태우는 걸 모티브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세 작품의 배경이 다르듯, 태운다는 행위의 의미도 조금씩 다릅니다.

10. 포크너의 헛간 불태우기는 소작농의 저항을 표현하죠. 지주에게 헛간은 대단한 재산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것도 아닙니다. 몰래 불 지르고 적당한 손해를 입히기에 적합한 장소지요. 그래서 그 일은 추적당하고 재판받는 자못 심각한 사태에 이르기도 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의 경우에는 헛간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되죠.10 적어도 그것을 태우는 소설 속의 부유한 젊은이에게는 말입니다. 그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헛간, 그러니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은 아니지만 사라져도 별 지장이 없는 헛간을 골라두곤 마음 내킬 때 몰래 태웁니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얘길 하죠. 소설에서 이 헛간은 그가 별 부담 없이 사귀는 젊은 여자와, 그러니까 있어도 없어도 좋을 그런 여자와 암시적으로 겹칩니다. 이창동의 영화 <버닝>에서도 비슷해요.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 벤(스티브 연 분)이 주기적으로 태운다는 비닐하우스와 그의 일시적 애인인 해미(전종서 분)가 겹치죠. 그런데 큰 차이는 <버닝>에서는 태우는 행위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11.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무라카미 소설의 화자(話者)와 마찬가지로 소설가(정확히는 소설가 지망생)이기는 하지만, 쿨한 분위기의 전자와 달리 농촌 출신의 투박함을 잃지 않은 청년이지요. 그래서 그는 태워짐에 분노하며 결국 태우는 자를 태웁니다. 쓸모없음을 처리하는 자를 처리하죠. 물론 영화 마지막의 이런 장면들은 종수가 쓰는 소설 속의 사태라고, 그러니까 종수의 희망이 영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든 <버닝>은 이렇게 저항을 재도입하죠. 포크너가 묘사한 소작농의 저항은 이제, 사회가 꼭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적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놓인 청년 세대의 저항이 됩니다. 이 저항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아직 그렇죠. 출산율 저하는 어쩌면 소극적 저항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의 미래를 태우는 극단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 “보통 사람도 자동차나 PC 같은 개인 소유 기계는 통제할 수 있겠지만, 대형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쥐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진보된 기술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해 더 강화된 통제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불필요해진 탓에 대중은 불필요한 존재, 즉 체제에 떠넘겨진 쓸모없는 짐더미가 되어 버린다.”11 이것은 ‘유나바머’ 테어도르 카진스키의 선언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십수년간이나 미국 몬태나주 숲 속에 숨어 지내며 기술문명을 중단시키려는 목적으로 십여차례에 걸쳐 폭탄 테러를 저지르다 1996년 체포되었던 인물이죠(무기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금년 6월 숨을 거뒀지요). 카진스키에 견해에, 특히 그의 반기술주의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그의 문제의식에는 동조할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싶어요.

2. 사실, 청년 세대의 집단적 불안감에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이전과는, 그러니까 소외되고 착취를 당하더라도 스스로의 활동에 분명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점이 아닌가 해요. 코인에 대한 열풍도 외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도 이처럼 가치의 기준이 불확실해진 데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헤겔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해 제가 자신 있게 답을 내놓을 처지는 아닌 것 같군요.12 저로서는 이렇게 어설프고 산만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그치고 다른 분들의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할 듯합니다.

3. 끝으로 덧붙이자면, 저의 이 부족한 발표에 ‘헤겔 바깥의 헤겔’이라는 제목을 붙여본 데에는 오늘의 상황이 헤겔 철학의 태생적 배경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헤겔을 넘어선 헤겔”13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데, 아마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특징의 발전과 연속성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죠. 저는 오늘날의 철학은 외부에, 바깥의 변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설명과 의미 부여의 틀을 짜나가야겠죠. 그것이 제가 주제넘게 떠올려 보는 오늘의 헤겔 모습입니다.

– 끝 –


♦ 이전 글


  1. 『헤겔 레스토랑』, 앞의 책, 469쪽 참조.

  2. 외람되지만 저는 오래 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졸저 『배제의 배제와 환대』, 동녘, 2000 참조.

  3.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3쪽 이하 참조.

  4. 이 책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더라면(출간일은 2019년 8월 9일인데요), 조국 사태를 이 불만 표출의 대표적 사례로 연결시켰을 법합니다.

  5.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125쪽 이하, 또 70쪽 이하 참조.

  6. 대표적으로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2022 참조.

  7.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67쪽.

  8. 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8262158001#c2b

  9. 「한반도 영세 중립화 선언」 참조.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Tw8byRcRmOEwZHZeg2TBgsPN7LBrsOaupmykENb-cgnZ74Q/viewform

  10.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 권남희 옮김, 문학동네, 2014, 68쪽.

  11. 테어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조병준 옮김, 박영률출판사, 2006, 111쪽.

  12. ‘만듦의 문명’에 대비되는 ‘즐김의 문명’에 대한 전망과 기대는 제가 단편적으로나마 곳곳에서 계속 피력해 온 것이지만, 이 자리에서 거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13. “Hegel beyond Hegel” ― 이것은 그의 책 『분명 여기에 뼈가 있다』(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원서는 Absolute Recoil, Verso, 2014)의 3부 제목입니다.

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12-언어의 회복

 

1)

호퍼는 40년대 들어 마침내 실재계의 세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 바탕에는 뒤늦게 그에게 다가온 원초적 장면의 체험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실재로부터 단절하고 상징의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이 상징의 세계에서 맨 처음 그가 만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세계이다.

 

호퍼의 욕망 구조에서 새로운 전환의 시기였던 1940년 그는 아래와 같은 그림 <밤의 사무실>을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사무실에서 밤 늦게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남자이며 사무용 책상에 서류에 몰두하고 있다. 호퍼는 그를 상당히 위에서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그의 오른 편에는 창문이 열려 있지만,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바람은 불지 않는다.

 

그림의 외편에는 여성이 있다. 그림 왼 편 아래쪽에 타이프라이터가 있는 걸로 보아, 비서로 보인다. 그녀는 온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엷은 푸른 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서류함을 뒤지는 중 갑자기 남자를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호퍼는 그녀를 거의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어서, 타이라이터 책상과 남자의 테이블, 그리고 남자와 시각적으로 어긋나고 있다.

 

실내는 실내 전등과 책상 위의 등의 빛이 교차하면서 상당히 밝고 전체적으로 밤의 아늑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바닥의 녹색과 책상의 짙은 고동색이 그런 분위기에 어울린다. 언뜻 상당히 섹슈얼할 수도 있는 분위기인데, 더구나 여성의 몸의 윤곽이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차가운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남자는 서류에 몰두하여 그런 분위기에 전혀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순간, 여자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 그저 딱딱한 사무적인 이야기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의 시선을 끌어내기 위한 도발적 언어일까?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에게 터뜨리는 파일까?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이 던져 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말이 없고 창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자기의 내면에 잠겨 있다. 이 그림의 남자는 그런 연속 선상의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여성은 아니다. 여성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말을 건네고 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이렇게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2)

이어지는 그림은 호퍼가 1947년 그린 <여름 저녁>이라는 그림이다. 얼핏 보면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집은 무슨 무대의 세트처럼 보인다. 이 집의 테라스에 두 남녀가 걸쳐 앉아 있는 측면이 너무 옆으로 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법은 호퍼의 그림에서 자주 나온다. 그 결과 정면과 측면이 마치 몽타쥬된 듯하며, 집의 분위기보다는 연극 세트처럼 보이게 만든다.

 

두 남녀의 등 뒤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짙은 여름 밤이다. 풀들이 무성하고 하늘은 검푸르며, 숲은 좀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그 으스스함은 두 남녀를 덮칠 것도 같은데, 마치 벽에 붙여 놓은 그림처럼 보이면서 두 남녀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테라스에는 밝은 등이 켜있고 그 아래서 두 남녀가 있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어린 듯 보인다. 여자는 브래지어와 짧은 치마만 입었지만 더구나 색깔이 붉은 색이지만,  섹슈얼한 모습은 아니다. 아마 호퍼가 긴장된 다리의 근육을 가감 없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손을 써 가면서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경우 대개 남자는 앞으로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내면서 여자를 설득한다. 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여자의 인상이 심각한 듯 하니 남자는 아마 상당히 진지한 약속을 던지는 모양이다.

 

그 내용은 독자가 짐작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호퍼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서류 속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이 그림에서 남자의 말에 여자는 귀 기울이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곧 대화가 오갈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3)

이 그림은 1949년 그려진 <밤의 회의>라는 그림이다. 우리가 미국 호퍼의 시대 살지 않은 한 이 그림은 배경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세 사람이 회의를 하는 방의 천정에 시멘트 대들보가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기둥이 보이는데 그 옆에 창문이 달린 문이 보인다. 이 문이 마치 허공에 세워진 듯하다. 방의 좌우에는 나무로 된 긴 탁자(또는 군 내부반 침상)가 놓여 있으며, 세 사람은 그 사이에 있다. 과연 이런 공간이 실제할 수 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운데, 그 가운데 서 있는 세 사람은 매우 실제적인 모습이다.

 

두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다. 앉아 있는 나이든 사람이 책임자로 보인다. 서 있는 여성은 나이든 여성인데, 아마 비서로 보이고,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책임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는 아마 그 말을 실행할 직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는데, 분위기상 업무와 연관된 일에 관해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하는 장면 오른쪽에서 아주 밝은 환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낮이라면 햇빛이겠지만, 제목에서 밤이라고 밝혀 놓았으니 햇빛은 아닐 것이다. 가로등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환한 빛이다. 아마 작가인 호퍼가 임의로 집어넣은 빛일 것이다.

 

호퍼는 왜 아마도 업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대화를 하는 그들을 이렇게 강한 빛으로 비추어 주었을까? 일상적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호퍼가 어둠과 침묵으로 표현되는 실재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호퍼로서는 일상적 대화가 오히려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자연 순환, 그 회귀 [천 하룻밤 이야기]

자연 순환, 그 회귀:

관습 또는 습관을 넘어설 것인가?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중.

— 2023 12 22, 동지(冬至).

 

누구에게나 삶이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단지 속는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자기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경향과 관습을 이어가면서, 임의적으로 여러 갈래 길에서 하나로 밖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냉정하다. 이것을 따뜻하게 느끼는 것이 착각이다. 이런 착각과 달리 착오는 비교에서 온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는데, 또는 제 눈에 들보를 못 보면서 남의 눈에 티끌을 따져든다고 한다. 신체를 가진 삶은 상식[sens commun,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다섯 감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영향을 받는다. 그다음으로 생각하는 의식이 있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좀 더 깊이 사유한다는 편들은 원래 영혼의 사유하는 양식(bon sens)과 신체의 느끼는 감각작용이 다른 길도 있다고 한다. 어째거나 이 둘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 있고, 서로가 다르게 작동하는데 어느 쪽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다르다고도 한다.

그런데 상식의 사유도 양식의 사유도 인간의 이기심 앞에서 무력하다고 한다. 그 이기심이 삶과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권력, 권세, 권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결정은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의사결정의 기제(메카니즘)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결정권을 가진 어떤 능력을 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의 활동에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보면, 그 의지라는 것도 오래 익숙해진 습관과 같은 관례적 또는 본능적 결정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떤 본능이 상식과 양식과 다른 인식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무상보시나 희생 등의 예를 들면서 인간이 행동 결정에서 의지가 본능을 넘어선다고들 한다. 의지라는 것을 설정하면서 상식과 양식과 다른 길이, 즉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 능력으로서 있다고들 한다. 다른 한편 그 의지가 협박과 고문 등에 의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과오 또는 오류 정도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강압적이 아닌 유혹과 회유에도 다른 길을 선택하기 할 때,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이 지성이 계산하여 선택한 것으로,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의지를 잘만 사용한다면 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의지를 다른 어떤 능력과 달리 상위에 두고자 한다. 그 의지의 결단이 지성의 계산 없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이들은 의지도 최종결단에서는 자기 지식으로서 상식과 양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단이 맹목적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관습적으로 만들어진 자기신념이든 종교 신앙이든 지성의 영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사건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사건의 영향 아래 더 깊은 본능에 충실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본능이 자기보존에 맹목적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서, 지성과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능을 동물적 또는 아메바적이라고 비하해버리면, 간단히 지성이 우위이고, 지성의 계산하는 판단과 달리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판단에는 의지가 작동한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신체의 감성, 의식의 지성, 그리고 삶의 판단의 의지가 따로라고들 한다. 이런 논의들도 인간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사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살아간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문제는 인간이 생명체로서 자연의 흐름과 절단 그리고 자연의 순환과 재생산에 익숙했던 시절을 지나,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있다는 것이다. 우선 토지와 더불어 자연생산을 위주로 하는 삶에서는 자연 순환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인간이 먹을 것을 저장하고 집을 짓고 옷을 입는다고 해도, 자연 속에서 자연생산은 자기 회귀의 길을 간다. 곡식이든 집이든 세월의 흐름에서 변질하고 소멸한다. 그 변질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명 있는 존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싸고 자고 일어나고 하는 흐름의 과정에서 생물체들이 자기 방식대로 순환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관습대로 다양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인류가 도구를 발달시키면서 점점 더 흐름의 절단을 잘하게 되고, 또 그 절단을 고정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안정되게 한다고 믿고 산다. 자연에서 고착적이고 고정적인 면들을 만들면서, 자연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을 도구로 또는 대상으로 삼고, 그 자연의 자기순환과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철학사의 시작을 두고 자연의 이법(理法)에 대한 관심이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전환했다고들 한다. 그 이법을 아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법을 신화와 더불어 참주의 법치와 대립으로서만 생각했으나, 참주의 법률에 익숙해진 관습에 젖으면서, 이법을 따르는 것이 법률을 따르는 것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법을 대상에 대한 자연법이라고 여기고, 이것을 본능의 삶이라 여기면서, 법률의 영속성을 위해 지성의 체계와 원리들을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률 그 위에 신법을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이런 신법을 무한 소급하여, 자연법 이전에 신법이 있었다고 추론하는 사고가 등장하면서, 자연은 법치의 하부, 게다가 신법의 하부 중의 하부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자연을 떠나서 사회 또는 체제 속에서 권력이 우세하고, 다른 한편 법률의 권력을 넘어서 원리의 권위가 우선하다고 여기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런 전도된 방식은 이상하게도 철학사에서 기원전 300년 경에 논리학과 기하학의 체계가 성립하는 시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삼단논법의 증거하는 방식과 기하학원론의 증명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방식이다. 증거와 증명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논리학의 증거와 기하학의 증명이 언어와 도형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의 대상은 그래도 사물이며, 도형의 대상은 추상된 점과 선이다. 이 둘의 정합적 체계가 하나의 방향으로 여기는 것이 양식에 가깝다면, 이 두 방향이 다르지만, 평행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초기에 더는 묻지 않고서 상식에 근거하여 유비적으로 타당성만을 근거로 삼는다. 이런 상식과 양식이 사유체계의 우위를 차지하면서, 철학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삶 또는 실재성과 멀어진 것이리라. 어쩌면 철학적 사유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또는 암묵적으로, 인간이 자연보다 상위 또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자연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탐욕과 오만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자들이 이것을 내면적으로 아는 자들을, 사용가치가 없다는 명목으로, 열등하게 취급하였고, 다루는 자의 방식에 따라오지 않은 자들을, 자기들과 비교해 도착자들로 규정하였다.

대상을 다루는 자는 공감하며 상부상조하는 자들이 자기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법리로 배척하고 제외하려 하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먼저 억압하고 또는 공포를 심으며 협박하였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우월성에 대한 다른 대처 방식으로 정복과 식민지 노예로 삼는 폭력이 있었다. 이 정복은 상대 토지에서 삶을 몰살시키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렸다고 했던가. 지배자는 더 이상 그 토지에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자연은 사용자의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자연은 복원하고 그 토지에는 추어들과 기억을 지니고 지금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사고 체계가 있기 전에도 인간은 도시를 건설하던 시기로서 기원전 7천 년 전부터 수많은 전쟁과 소멸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있었지만, 소멸이 있었을까? 아니면 전쟁의 과정에서 절단을 피해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그보다 자연재해도 소멸의 한몫을 했을 것인데 흐름은 돌아서 돌아서 회귀의 과정을 걷고, 새로운 토지 위에 삶을 영위해 나간다. 긴 세월의 이야기 즉 신화와 설화로 남았다.

그런데 인종들 간에 전쟁에서 노예로 삼는다는 조건 이전에, 노예로 살기보다 죽음을, 이라고 말하며 저항했던 시대가 있었을까? 아무래도 노예보다 자유라는 용어를 역사상으로 떠올리는 것은 종족의 집단이 관습과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 가능할 때라고 본다면, 전설 따라 이야기에서 기록상 이집트 왕조 시작의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3천200여 년 경으로 어림잡을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바빌론 3천여 년경, 중국의 3천여 년경, 인더스 문명도 마찬가지로 잡는데, 이 시대들이 정복과 투쟁의 시대였을까? 문명의 건설에서 상부상조 노력의 시대였을까?

물론 삶에 이익과 편리를 추구한다는 점을 기본으로 하면, 사냥에서 전쟁의 방식이 인종들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문자 이전의 설화는 전쟁의 설화라는 점이다. 그 흐름의 절단면은 전쟁이 전부였을까? 들뢰즈는 흐름은 단절의 장애를 우회하기도 하고 밑으로 흐르기도 하고 산과 벽을 넘기도 한다고 했다. 왜 이른 리좀의 흐름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절단의 단면으로 문명의 지배로 역사가 쓰였을까? 지금도 자본제국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음에서, 값싼 노동력의 인민들은 세계를 흐르고 있다. 자본이 흐르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 그것은 전쟁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면서 어느 사회집단이 부를 획득하고 지배권을 누릴 방편으로 용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세기 전 1차 대전에서 유럽 국가 간의 부의 경쟁에서 식민지 쟁탈전이었다고들 한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다시 한번 교회와 왕권들이 자기들의 기반을 다지려는 방편이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1차 대전에서도 교회가 전쟁을 막기보다 부추겼다고 한다. 이런 근거로서 중국에게 전쟁을 걸게 하는 것은, 선교사의 박해를 핑계로 교회 권세의 확장에 국가권력을 끌어들인 것이라고들 한다.

‘어떻게 종교가 인민이 죽어 나가는데, 권력들의 전쟁에 동의하면서까지 교권의 권세를 누리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가’에 대한 대답으로, – 그 이야기를 하는 자는 크리스트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는 방편으로 전쟁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엄창난 부를 누리고 있으며, 그때에도 이름하여 ‘성전(聖殿)이라는 교회’의 부를 지키자는 암묵적 동의 아래 전쟁을 수행하였고, 교회의 재산은 인민에게 나누고 전쟁을 반대하자는 반대파를 제거할 때는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반(反)애국으로 몰았고, 종교 자체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박해하였다는 것이다. 이 혼란한 세상을 조장하면서 이합집산으로 교회 전체의 총괄하는 부를 늘여갔다는 것이다.

13세기에 프란체스코파들이 말하듯이, 교회가 가난한 자의 천국을 말로 하기보다 교회 재산을 인민에게 환원하면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말로만 가난을 구제하고 전쟁 없는 평화를 이야기 해봤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4세기에 파리의 프란체스코파 학자들이 도미니크파 학자들에 대해 비판하다가 당했지만, 18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이 말했고, 20세기 초에 프랑스 공산당이 독일과 전쟁을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것이다. 파괴는 다음 건설에서 어느 한쪽으로 부 또는 자본을 몰아주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런 방식이 산업화 이래로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어 2세기 전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이보다 21세기 차이를 엄청나다고 한다. 지금의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과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에서, 어디에서 누가 재화의 집중화와 자본의 재영토화를 실행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제국으로서 미국이 몰락하는 중이고, 다극화의 세계를 여는 중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을 부추겼던 종교와 국가는 주구로서 하수인을 키워왔고 또한 보수화라는 이름으로 존속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권세와 권력은 여전히 탐만치에 빠져있다. 어쩌면 탐만치를 벗어나기 위해 주구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저항과 항거가 공염불이 될지도 모른다. 주구가 아니라 근원을 폭파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근원 폭파의 노력은 있어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학파, 프란체스코학승들,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이어지면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토마다 다 같은 것이 아니고, 살아온 관습과 습관은 전혀 달리 살아가는 방식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당연을 넘어서는 것은 인식의 차이라기보다 교육이다. 교육 자연은 자기 방식으로 흐른다는 알게 하는 것이다. 윤구병 말대로 어린 시절에는 토지 위에서의 교육이 필요하다. 윤구병의 “특별기고(2017)”는 참조할 수 있다.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흐르면서 줄기를 창발하는 것이다. 탈주로를 찾고 있다. 역사 속에서 이 많은 글과 이론들을 전개해 왔음에도, 이제도 그 글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고 있다는 한계에서 흐름은 개념도 관념도 아니라 이미지이다. 이미지를 만드는 중이다.

다른 한편 아직도 천문학과 물리학이 생물학과 심리학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이 있다. 물리학처럼 중심은 하나라고 쳐봐도 1초에 퍼져나간 구(공)위에 무수히 많은 점은 다양하다. 다양한 점들만큼이나 생명체들이 있다. 각 생명은 자연 자체의 여러 방향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 중에서 다른 하나에 쿼크니, 끈이니 초끈이니 하는 이야기를 붙인다. 그 끈이든 초끈이든 1초 만에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구상의 생명체에 관하여 말하자면 흐름의 과정이 삶인데, 그만큼 많은 시간을 흘러가야 현 생명체의 삶이다. 그 흐름이 언제 시작했으며 언제쯤 끝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미 혁명을 포기한 자이다. 들뢰즈는 혁명이 이미지라 한다. 마치 한 사람의 삶이 마감할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있듯이, 혁명은 다른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한 시대를 마감할 때 이미지가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즉 창발하는 자는 완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형성은 자연의 과정일지 아무도 모르지만, 흐름의 한 줄기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레닌을 이름으로 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마오쩌뚱의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의 패배가 낳은 호치민의 이름으로 베트남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미지 만드는 과정과 작동은 혁명이며, 들뢰즈에게서는 철학이다.

(3:28, 56WMA) (4:29, 56WM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미학산책12-숭고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2-숭고에 관해

 

1) 상징에서 숭고로

헤겔은 상징적 예술 형식을 다루면서 1절에서 그 핵심적 개념인 상징의 개념을 다루지만 이어 2절에서는 숭고 개념을 다룬다. 3절은 비유론 일반을 전개한다.

 

헤겔의 미학강의에서 어느 장이든 항상 1절은 개념을 다루고 2절이 본론에 해당하며 3절은 그 영향을 다루니, 헤겔이 숭고 개념을 상징적 예술 형식 2절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숭고가 상징적 예술 형식에 핵심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상징 개념은 필연적으로 숭고의 개념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 점을 다루기 전에 숭고 개념에 관한 논의의 차원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것은 헤겔의 숭고 개념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으로 보인다. 

 

2) 칸트에서 숭고의 감정

미학에서 숭고의 개념은 칸트에 의해 종합된 이후 쉴러로 전개되었으나 그 후 논의에서 사라졌다.그 후 20세기 들어 모더니즘 예술이 등장하면서 숭고 개념이 다시금 관심의 대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료타르는 아방가르드 예술에 나타나는 숭고미에 기초하여 포스트모던 시대의 숭고 개념을 전개하였다.

 

숭고 개념에 관한 논의의 차원은 주로 숭고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 숭고의 감정은 고통과 쾌감이 혼합된 감정으로 간주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감정을 공포와 연민의 혼합으로 규정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숭고의 미학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비극의 미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선 버크는 근대에 들어와 숭고 개념을 탐구한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는 숭고를 감정의 차원에서 다루면서 칸트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어떤 위험에 처해 고통을 겪다가 그것을 벗어나게 되면 쾌감을 느끼면서 숭고의 감정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숭고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룬 철학자는 칸트이다. 그는 심미적 감정과 숭고의 감정을 구분했는데 양자는 모두 미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에게서 미적 판단은 이중적인 판단이다. 미적 판단은 한편으로 구성적 판단과 대립하는 반성적 판단이라는 인식적 과정을 전제하며 그 위에서 어떤 감정이 출현하는 감정적 판단을 내린다. .

 

심미적 감정의 경우 미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반성판단은 대상에 대한 상상력의 작용(즉 수동적, 재생적 상상력)을 통해 주어진 대상이 오성의 개념 속에 귀속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상력의 작용이 자유로울수록 이로부터 욕망의 쾌감과 구분되는 순수한 쾌감이 출현한다. 이 쾌감이 곧 심미적 감정이다.

 

그에 반해서 숭고 감정의 경우, 그 전제가 되는 반성적 판단 자체가 이중적이다. 먼저 대상에 대해 상상력이 작용하더라도, 적절한 개념을 찾을 수 없다. 대체로 양적 크기가 무한하거나(수학적 무한) 질적인 규정이 무규정적인 경우(역학적 무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상상력이 거듭 발동하더라도 상상력이 개념을 찾는 데 실패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감정은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에 그칠 것이다[1].

 

칸트는 상상력이 주어진 대상에서 신과 같은 이성적 이념을 발견하는 순간이 여기서 출현한다고 한다. 즉 어떤 것이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어떤 것이 규정되지 않는 것을 지시한다는 생각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2] 이 점을 칸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구상력[종합적 상상력]에 대하여 초월적인 것은(직관의 포섭에서 구상력은 이 초월적인 것에까지 추진된다) 말하자면 구상력이 그 속에 빠져버릴까 두려워하는 심연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이성의 이념에 대해서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합법칙적이요, 구상력의 그러한 노력을 일으키는 것이다.”[3]

 

이 순간 판단하는 주관은 쾌감을 느끼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고통과 새로운 쾌감이 뒤섞인 숭고라는 감정이 출현한다.

 

칸트의 숭고 개념은 쉴러에게 전달된다. 쉴러는 숭고의 개념을 칸트와 마찬가지로 설정하는데 다만 마지막에서 칸트가 이념이라고 한 것을 도덕법칙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쉴러에서 숭고의 감정은 도덕법칙이 주어진 대상에서 실현되는 도덕적 감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쉴러는 이를 격정적 숭고라 규정하면서 이를 그리스 비극와 현대 비극을 포괄하는 비극론의 토대로 삼았다.

 

3) 료타르에서 숭고

숭고의 개념이 미학에서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료타르에 와서이다 그는 칸트의 숭고 개념에 기초해서 20세기 중반 아방가르드 예술을 해석했다. 그가 그 대표적 작품으로 들고 있는 것이 바넷 뉴먼의 작품들이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리얼리즘적인 예술이 지닌 재현의 체계를 해체했다고 한다. 리얼리즘은 재현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재현은 이미 어떤 사유의 구조를 전제로 하여 나오므로,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여줄 수 없다. 재현은 구조적 제약 때문에 그 구조 밖의 대상을 시야에서 배제하며 진리를 왜곡한다.

 

재현의 근저에 놓인 사유 구조는 은폐되어 있으므로, 재현이 마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자아낸다. 아방가르드 예술은 대상의 재현 속에서 대상을 재현하는 과정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 재현의 한계를 폭로하고 재현 자체를 해체했다.

 

아방가르드는 재현을 해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아방가르드는 재현의 체계 속에서 억압되고 드러나지 않았던 순수한 대상 즉 사건이 재현을 해체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 순수한 대상은 칸트의 물 자체처럼 다만 있을 뿐이며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이지만 동시에 진리를 암시하는 빛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은 해체의 고통과 동시에 진리가 암시되는 쾌감을 혼합하는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료타르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발전 선상에서 등장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배태되는 것으로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와 마찬가지로 재현의 체계를 해체하는 데 다만 아방가르드가 그 해체를 통해 진리를 암시하는 빛을 발견하려 했던 것과 달리 재현의 체계를 해체하는 것 자체로 머무른다.

 

료타르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드르처럼 진리의 빛을 찾아 현시할 수 없는 것을 현시하려는 엘리트적인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재현을 해체하면서 그 너머 무엇을 현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예술을 다만 해체에 머무르게 하려는 것, 그런 고통을 즐겨 인수하려는 삶을 료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숭고라고 명명한다.

 

4) 헤겔에서 숭고의 개념

칸트에서 료타르에 이르기까지 숭고의 개념은 감정의 차원에서 규정되었다. 숭고는 두 가지 감정 즉 불쾌와 쾌감의 혼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쾌의 감정은 대상의 무한성, 해체를 전제로 하며 쾌는 이념과 초월적 진리에서 나온다.

 

헤겔의 경우 숭고의 개념은 감정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는 숭고를 기호로서 예술작품이 그 의미에 해당하는 이념과의 상징적 관계에서 찾는다. 이런 상징적 관계는 본질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으며, 이런 단절은 수수께끼적인 힘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이런 단절을 넘어서려는 가운데 유사성을 통한 매개를 찾아 본래적 상징이 출현하지만, 본래적 상징을 통해서도 의미와 상징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상징이 표현하려는 의미는 추상적이며 무규정적인 이념인 한에서, 상징을 통해서 그 이념에 도달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예술이 발전하면서 의식적으로 양자를 일치시키려는 필사적인 시도가 등장하게 되니, 이것을 헤겔은 곧 숭고라 한다.

 

칸트나 료타르처럼 숭고를 감정의 차원에서 찾는다면, 숭고의 예술은 어느 시대나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현대의 비극도, 18세기 낭만주의나 20세기 모더니즘도 숭고의 감정이라는 차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숭고를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 의미가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이념인 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하므로,  헤겔은 숭고의 예술을 역사적으로 상징주의 시대로 한정한다. 물론 고전주의 시대나 낭만주의 시대에도 감정적으로는 쾌와 불쾌가 뒤섞인 감정이 있지만 이런 예술형식에서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관계(현상이나 가상으로서 예술)는 상징주의 시대(상징적 예술)와 다르므로, 이런 예술은 숭고의 예술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에서 고대 비극이나 근대 비극은 비록 감정적으로는 숭고감을 주지만 이런 예술이 숭고의 예술은 아니다.

 

칸트의 숭고 개념과 헤겔의 숭고 개념이 이처럼 구별되지만, 칸트에서 숭고감의 전제가 되는 반성판단은 헤겔에서처럼 기호적 관계로 재해석할 수 있다. 즉 어떤 무규정적인 것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신)를 지시하는 것으로 된다면, 여기서 무규정적 대상과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 기호의 관계가 된다. 그렇게 본다면, 헤겔의 숭고 개념이 나오니, 칸트와 헤겔의 차이가 멀지는 않다고 하겠다. 헤겔은 감정적 차원을 부차적으로 보는 반면, 칸트는 감정적 차원을 본질적으로 본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5) 숭고의 두 가지 방식

칸트나 료타르에서 숭고의 감정이 출현하는 대상은 무규정성을 지니거나 해체적인 것에 한정된다. 그러나 헤겔은 기호와 이념 사이의 관계 속에서 숭고의 개념을 찾으려는 가운데, 숭고의 개념을 이원화한다.

 

헤겔은 숭고의 예술을 긍정적 숭고와 부정적 숭고로 이원화한다. 전자는 곧 범신론적 상징인데, 여기서 신은 자연의 감각적 형상을 통해 표현되지만, 이 형상이 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유사한 감각적 형상을 반복하거나 감각적 형상을 과장한다. 헤겔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나는 흐르는 물속의 맛이며, 태양과 달 속의 광채이며, 성전 속의 신비로운 낱말이며, 남성 속의 남성성이며, 대지 속의 순수향이며, 불꽃 속의 광채이며, 모든 존재 속의 생병이며, 고행자 안의 고행이며, 생명체 안의 생명력이며, 현자 안의 지혜이며, 광명체 안의 광채이니라.”[4]

 

헤겔은 이런 숭고한 상징의 정점에서 유대교와 마호메트교의 종교적 문학예술이 출현한다고 본다. 유대교와 마호메트교는 신은 초월적이며, 추상적 무규정적이므로 구체적 형상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도 지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마호메트교는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은 상징적으로 표현될 수 있으니, 그것은 언어적 표상을 통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유대교나 마호메트 교에서 신은 구체적 형상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나이다.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베인 바가 되어 시들고 마나이다. 우리가 그처럼 빨리 소멸되니 주께서 노하시어 우리가 그처럼 갑자기 사라지니 주께서 근심하나이다.”[5]

 

헤겔의 긍정적, 범신론적 숭고와 부정적 초월적 숭고는 칸트가 구분했던 두 가지 숭고 즉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와 비교될 수 있다. 긍정적 숭고는 감각적 형상을 무한히 반복하는데,수적 무한성 역시 동일한 크기의 반복이니, 같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칸트의 역학적 숭고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신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도달하려는 헤겔의 부정적 숭고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1] 버크는 실재하는 위협에서 고통을 느낀다고 했지만 칸트는 이런 위협은 어디까지나 상상력의 발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위협으로 생각했다. 

[2] 전자는 상상력의 포섭[apprehension]의 운동이며 후자는 상상력의 총괄[comprehension]의 운동이며 달리 말하자면 전자는 전진의 운동이라면 후자는 역진의 운동이다.

[3] 칸트, 판단력 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1974, 125쪽

[4] Krischna, Bhagawadgita56, Lect. VII, Sl. 4 ff. 헤겔 미학강의 1, 496쪽 재인용

[5] 시편, 104편, 5-7절. 헤겔 미학 강의1, 508-509쪽

 

“볼 수 없는 것(l’invisible)”, 시간과 공간 [천 하룻밤 이야기]

“볼 수 없는 것(l’invisible)”, 시간과 공간

2023 12 07 대설(大雪) {젊가13010형이상23시공}

 

교육의 문제는 인류사에서 난제일 것이다. 교육의 필연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르네상스 이래로 교육이란 일반인을 포함하는 교육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교육이 1882년에 요즘 말하는 평등, 무상, 세속(무종교) 교육이라는 법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모든 어린이에게 어떻게 학년 구분의 교육방식과 교육의 내용을 설정할 것인지를 고민하여, 요즘의 각 학년의 구분을 검사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어느 지식을 갖추면 몇 학년 등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70년대에는 초등 3학년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했는데, 요즘은 초등 2학년 때 한다고 한다. 전에는 중등 1학년 때 인수분해를 배웠는데, 초등 6학년이 되면 이미 인수분해를 알아채고 다룬다고 한다. 수학 만이 아니라, 물리학, 그리고 생물학, 건강을 위해 인간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은 학년에 따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세계가 교육 방식에서 거의 공통의 진행방식을 따라간다. 유전자(DNA)에 연관과 미토콘드리아 역할은 고등교육에서 다룬다. 그런 교육의 배치와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종합과정으로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한다. 프랑스만이 철학을 대학입학 자격시험으로 네 시간에 걸쳐서 논술을 보고, 그리고 개인 능력의 실험으로 구두로 문답시험도 본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한자를 익히기 위해 ‘천자문’이란 단어의 기초를 배운다고 하지만, 어린이용으로는 “격몽요결”이 있었고, 사회의 생활을 위한 “명심보감”이 있었다. 그리고 제도 속에서 행정과 실무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사서삼경”을 통과해야 했다고 하는데, 중앙에서 관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사대부들이 사서삼경과 이에 걸맞은 다른 문헌들도 탐구했다. 학문의 방법과 사회제도의 연관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 사서삼경이 중심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서양은 일곱(7) 예비학문이 있다. 문법, 수사학, 변증학의 삼학(trivium)과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의 사과(quadrivium)이다. 숫자로는 동서양이 모두 7학문이 기초이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임무를 맡기 위해서, 그들은 이런 기초보다 더 많은 공부를, 동양은 예기 춘추 등을 포함하는 10경을 읽어야 한다고 하듯이, 서양에서는 7학문을 넘어서 자연철학과 도덕론, 그리고 신학을 포함하였다. 이런 단계적 방식의 교육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고대와 중세의 상식에 준하는 지식의 이해는 초등학교에서, 근대에서 개별학문의 등장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학문을 다루는 과정은 중등과정에서, 19세기의 다양한 학문이 생성되고 분류되는 시기를 다루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할 것인데, 그 고등학교에 마지막 학년에서는 현대에서 여러 갈래로 벌어지고 있는 학문들에 대해 맛보기 정도를 한다. 대학에 가서 학문의 가지 중 하나를 잡고서 공부하라고들 한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분류들의 가지를 따라가기에 앞서, 인류가 이 지점까지 오게 된 과정의 종합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 종합이 철학인데, 그 철학을 다루지 않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교육의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시행할 배치와 배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깊이 또는 여러 방식으로 철학을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 고중세나 서양 고중세에 종교의 힘이 강했다. 한쪽은 불교가 다른 쪽은 크리스트교가, 그리고 서양이 르네상스를 겪듯이 우리에게 신유학이 있었다. 등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길을 걸었던 것은 인류의 지식과 인식이 한계에서 오는 것이리라. 고중세에서 아무리 하늘과 우주가 무한하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상식(5관)을 통한 지식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인류가 망원경이 발명하면서 눈으로 보는 세계 이상의 우주를 설정하고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했고, 그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 변화에 맞는 도덕론과 과학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여러 학문들이 생겨남에도 기본적으로 자연(la nature)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 서양철학사를 읽으면, 근대에 와서 신의 ‘자연(les natures)’, 인간의 ‘자연’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자연을 본성이라 번역했지만, 그 자연이 학문과 삶의 토대인 것은 분명하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부류들과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지식으로 삼는 부류들은 다르다. 자연을 공존이라 하는 공산주의자와 자연을 소유로 하려는 자본주의의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자연은 상부상조와 사적 소유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두 부류가 있는 것은 현실 세상이다. 사람들은 세계관이 다르다고들 한다. 그 세계관이라는 관망(vision, 통찰)에 대한 견해들이 왜 다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다루는 방식을 나로서는 형이상학이라 부른다. 이런 문제 제기에는 탐만치가 들어있다고 본다. 형이상학은 탐만치를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나온 학문이리라. 탐만치의 이면에 들어있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서양철학사에서 여러 난제(수학, 언어, 운동부정)가 있었고, 그 난제들을 해결했다고 하면, 더 깊이 또는 더 멀리 난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에서 수학적으로 1을 깊이 들어가는 경우와 무한을 더 멀리(?) 나가는 경우는 일상인에게는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 1보다 깊이 있는 문제를 잘 보아야 탐만치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런 문제 같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문제로서 제기되었던 것이 1(단위) 보다, 공간과 시간이었고,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논의되는 문제이다.

문제 같지 않은 문제라, ‘우선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터전이 공간이잖아, 그리고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시간이잖아’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왜 이오니아의 질료에 이어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의 한 축인 퀴니코스-스토아로 이어지는 현자들이 ‘볼 수 없는 것’(l’invisible)을 사유의 문제로 다루었을까? 그 스토아 현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말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거의 네 가지로 나열할 수 있었으리라. 공간, 시간, 원자(아톰), 영혼(퓌쉬케)이다. 유물론이니 실재론이니, 이미지니 하는 문제는 이 네 가지의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견해에서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볼 수 없는 것’임을 통상적으로 인정하지만, 공간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사유한 현자들에 대해서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현자들의 말하는 공간은 물건과 물건 ‘사이’가 공간도 아니고, 그리고 물건이 자리를 차지하는 ‘위치’도 공간이 아니며, 이 공간이 어떻게 있는지를 모르면서, 물건이 있고 사람이 있으니까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의 부분을 설명하는 방식이지, 공간이라는 전체 또는 현존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공간을 불가분성과 측정 불가능성은 아무래도 현자들의 말놀이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이 현자들은, 이데아들이나 논리의 항들이 말놀이라 여기고, 공간의 실재성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말놀이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이다.

우선 시간을 보자, 시간이란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인정하기는 쉽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하늘의 수를 땅으로 환원하려는 플라톤의 시간처럼, 시간의 지나감을 설명하는 것이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지나간 흔적으로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보면 그가 살아온 과정(흐름) 전체가 시간인데, 이 흐름 전체를 대상화하여 시간이라 부른다고 하는 것은 흐름을 사물처럼 대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벩송(Bergson)은 흐름을 대상화하지 않고서 ‘이미지’라고 스토아학자들처럼 말했다. 그 흐름은 어제라는 과거의 과정, 이제라는 현재, 그리고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아제가 있다. 시간은 어제, 이제, 아제의 세 단위를 잘라서 구별할 수 있다면 삼차원이다. 흐름에서 삼차원 이상을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제-이제-아제를 하나로 이미지로 생각하는 것과 차원 셋으로 잘라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이 세 과정을 하나 보아, 생(Vie)이라고들 하는데, 현자들이 말하듯이 어제-이제-아제를 이런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간은 시간과 달리 위치 또는 사이(간격)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그 너비 또는 부피 또는 무한으로부터 생각하는 것도 공간이 아니라고 한다. ‘볼 수 없는 것’으로서 공간(허무, 빈 것)이 논리적으로 점, 선, 면, 체적, 우주 등으로 차원을 달리하면서 위치와 크기의 관점에서 공간을 설명하기 위한 항목들을 설정할 수 있다. 문제는 단위 설정이다. 점으로부터 설명할 때, 점이 위치와 크기가 없는 차원인 0차원이고, 선이 1차원이라 한다. 이 0차원에서 점이 공간을 설명하는 항목 또는 대상이 아닐 것 같다. 다른 한편 수학에서 지수의 도입으로 x의 3승이 체적이면, x의 4승은 무엇이며, x의 5승은 무엇일까? 수학자들은 5승 이상을 다루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차원이 사유에서 있을 수 있듯이 공간은 볼 수 없고 나아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무한이 수의 나열에서 무한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면, 공간은 시간과 달리 ‘볼 수 없는 것’이 다른 차원일 것 같다. 왜 원자론자들이 원자와 ‘빈 것’이라 했는지, 그 빈 것이 볼 수 없는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원자가 볼 수 없는 것으로 삼았던 현자들의 사유가 형이상학의 사유일 것이다.

앙리 벩송(Henri-Louis Bergson, 1859~1941)

 

시간을 볼 수 없지만, 삶의 과정과 천체의 운동으로 보아도 ‘흐른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없고, 그럼에도 생명체인 한에서 흐름이 실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제-이제-아제의 삼차원으로 설명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이와 유비적으로 추리하여 공간을 삼차원에 한정시키는 것은, 흐름으로서라기보다 부피[너비]를 지닌 생명체인 한에서 신체가 공간 속에 어떤 자리 또는 위치를 차지하는 체적이라는 점이다. 시간과 달리 공간 속에 체적으로서 물체 또는 신체는 3차 이상의 차원을 현실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유에서 실험적으로 3차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지만, 생명체를 다루는 한에서 3차원의 방식과 시간의 3차원을 겹쳐서 우화적 이야기가 난무한 것이 세상사일 것이다.

주역에서 8괘를 넘어서 4차원을 사유하지 않고, 삼차원을 두 겹으로 겹쳐서 64괘를 설정한 것은, 내가 보기에 나와 타인과의 관계 설정과 유비적으로 두 3항을 겹쳐서 삶의 양상들을 64가지로 나눈 것이며, 이는 요즘 MBTI의 8괘의 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말하자면 MBTI는 상식적 차원에서 인간의 자연들(본성)을 구별했다면, 복잡한 국가 또는 사회 체제에서 다양한 자연들(양상들)을 64가지로 분류하면서. 각 괘가 한 인간의 전형 또는 한 사건의 전형을 넘어서서 해석하는 틀로 보았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설명을 이런 이분법적 나눔으로 해석하는 것이 3차원 이상을 다룰 수 없다 또는 다루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공간을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여 MBTI로 다루거나 좀 더 깊이 있게 64괘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생명체의 삶의 과정은 이런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판단하려고 할 때 어떤 단면을, 의식상에서 추억, 또는 현재의 찰나를 기준으로 그 인간에 대해 해석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인간은 흐르는 과정이며 변화와 운동 중에 있다. 그런 운동과 변화 중을 공간상에서 정지된 측면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과정이고 흐름이기에 공간이라는 위치 설정도 궤적도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해석이 편리하다는 것도 사람들은 안다. 현자의 ‘볼 수 없는’ 공간은 어쩌면 원자보다 영혼과 맞물려 있을 것 같다. 그 영혼은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점, 선, 면, 체적 속에 속하지 않지만, 그래도 해석과 설명을 위해 삼차원(신체)으로 환원해야 편리하다는 정도일 것이다. 공간 속에서 점이 움직인다고 여긴 쪽이 원자론자라면, 공간 속에서 영혼이 움직인다고 하면 스토아 현자들일 것이다. 이 두 계열로서 퀴레네학파와 퀴니코스학파는 공간 설정이 학문의 기초라고 보았거나, 공간 설정이 안 되지만 공간과 같은 설정이 필요하니까 영혼을 삼차원의 방식에 유비적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벩송은 공간이든 시간이든 이미지 덩어리가 활동 중이며, 스토아의 체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로 설정했던 이유가 있다. 그 운동 중이란 우주도 이미지이고, 운동 가운데에서 운동하고 있는 개체도 이미지이며 운동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 우주라는 운동 중인 이미지가 자연이라고 하면, 이오니아학파의 자연 즉 휠레로 거슬러 올라가고, 휠레 속에 연속적이 운동하는 개체의 이미지는 언젠가는 우주의 이미지로 되돌아간다고 하게 되면 자연회귀이고 그 자연의 운동 중이라는 의미에서 자연의 자기 활동성 또는 자발성이 형이상학의 기초가 된다. 이것을 스토아학파를 본떠서 벩송의 형이상학을 설명하면, 자연론, 휠레론, 유물론이며, 공간과 시간은 운동중인 이미지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벩송은 플로티노스를 통해서 스토아로, 퀴니코스로, 소크라테스로, 이오니아로 심층에서 연속하는 흐름을 철학으로 보았다. 철학은 운동하며 역동적이다. 이런 사유는 부동의 신을 사고하는 소르본 대학의 신학적 관점에 빠진 관념론들과 다르다.

운동하는, 흐르는, 덩어리가 이미지이며, 코스모스의 이미지이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의 코스모스에서 로마철학으로 넘어가면서 유니버스로 향하였다. 그 유니버스에서 사적 소유를 과거-현재-미래의 차원에서 유지하는 신학이 바울 이후 323년 삼위 격의 성립이다. 그 삼위 격이 상호부조 공동체를 버리고, 부동의 신의 자연에 사적 소유을 안겼다. 서양철학사 2천 년에서 공동체와 사적 소유의 논쟁이 형이상학의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종교가 사적소유를 인정하면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잘 안다. 그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만들고 크리스토스라고 부르면서,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주장하는 이들을 즐겨 마남(魔男)사냥을 했다. 벩송이 보는 철학사적 관점이다. (4:08, 56WKG)

(4:31, 56WKGG)

 

♦ 참조:

성격학(caractérolog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41.(P.304)

성격들의 연구.

이 용어는 분트(Wilhelm Wundt 1832-1920)에 의해 창안되었다. 성격학은 성격의 분류와 그 형성에 관해 연구한다. 분류는 시험(tests, épreuves)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유명한 것은 로르샤흐(Hermann Rorschach 1884-1922)의 시험인데, 그 시험은 두 장의 종이 사이에 잉크 점을 으깨어서, 이 흔적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불러일으키는 생각을 물어보는 것이다. 비에르스마(Wierzma, 홀란드)와 헤이만스(Corneille Heymans 1892-1968 벨기에)가 행한 매우 복잡한 “격자칸”(les grilles)의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을 이용하여 매우 유명한 분류법을 확립하였다. 그 분류는 1. 정서(l’émotivité), 2. 활동(l’activité), 3. [반향으로서] 주도적 또는 부차적(la primarité ou la secondarité)으로 한다. 여기서 선도자(le primaire)이란 현실적 운동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고, 조연자(le secondaire)는 자기 안에 경험들이 흔적으로 또는 깊은 반향(retentissement)으로 남아있어서, 이런 사실 때문에 과거 경험에 의해 여전히 제재를 받는 자이다.

단순히 사람들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내성적(introverti) 성격과 외향적(extraverti)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자시 자신으로 향하는 성격이고 후자는 수다를 떨고 세상에 개방적이며, 내재성에 관계하지 않고 한계까지 가보는 성격이다. 예를 들어, 내성적인 성격은 그림을 감상하거나 세계의 광경을 보는 경우 특히 “움직임”(le mouvement)에 민감하며, 분열상(schizoïde)의 경향을 띤다. 그 예로 반고호(Van Gogh 1853-1890)의 『측백나무(les Cypres)』는 특히 이런 해석에 알맞다. 외향적 성격은 특히 “색깔”(la couleur)에 민감하다. 그리고 사물들의 “형태”(forme)에 주목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학식 있는 지성의 전형이며, 우울(mélancolie)하다 [형상주의는 철학적으로 좋게는 금욕주의, 이상에 대한 실망에 따른 허무주의에 가깝다]. 이 움직임, 색깔, 형태의 세 가지 모두에 균형적인 전형이 있는데, 이 대표자로서는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로 소개된다. 내성적 성격과 외향적 성격 사이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문학과 과학 사이에 나타나는 대립이다. (아래 도표 참조)

(43TKC)

 

성격학caractérologie 표

(이 도표는 8괘의 전형과 닮았다) (43TKC)

이런 상식으로, 물체가 정지 또는 운동을 그 자체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을 넘어가는 것이 갈릴레이와 뉴턴이다. 물체는 움직이고 있고, 게다라 나아가 진동하고 있다는 것은 열역학 다음으로 전자기학의 설명에서 등장한다. 물체는 움직이는 중이라는 것은 1930년대 불확정성의 원리 이후에 우주는 움직이는 중이 된다. 고대 이오니아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후 퀴니코스-스토아 계열에서 정리하기를 “볼수 없는 것”으로 공간과 시간, 원자와 영혼이라고 할때도 움직이며 변화하지만, 대상들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문제 제기 한 것이다. 마치, 거짓말쟁이 파라독사든지, 원이 직선으로 환원되는지에 대한 문제 등도 마찬가지로 풀 수 없는 난제였는데, 이런 난제에 거리를 두고서 출반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56WKJ)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