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㊽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3 수호자들의 임무 3(423d- 427c)
[423d-427c]
* 소크라테스는 앞서 말한 임무들이 쉽고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의 크고 충분한ἱκανόν 하나가 있다고 말한 후 그것이 다름 아니라 교육παιδεία과 양육τροφή임을 밝힌다. 만약 수호자들이 교육과 양육을 잘 받아 균형 잡힌μέτριος 사람들이 되면 앞서 말한 정도의 임무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미뤄두고 있는 문제 즉 부인을 취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는 문제들까지도 쉽게 간파할διόψονται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423d-e)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최대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ά τά φίλων’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도 이에 동의를 표한다. 게다가 그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일단 잘 출발하면 발전적인 순환κύκλος을 이룬다고 말한다. 즉, 유용한χρηστός 양육과 교육이 보존되면σῳζομένη 그것이 좋은 본성φύσις을 만들어 내고 자손의 출산과 관련해서도 한층 더 낫게 된다는 것이다. (424a)
* 요컨대 나라를 돌보는 자ἐπιμελητής들은 교육과 양육을 고수하여ἀνθεκτέον 어떤 경우에도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ή과 시가μουσική에 급진적인 변화νεωτερίζειν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424b) 노래ᾆσμα가 아니라 노래 방식τρόπος만 새로 고쳤다고 칭송해서도 안 된다. 시가의 형식εἶδος이나 방식τρόπος의 변화는 가장 중대한 나라의 법νόμος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불법이 쉽게 끼어들지 않도록 시가에 수호자들의 초소φυλακτήριον를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424c) 그것은 조금씩 성품ἦθος과 행실ἐπιτήδευμα에서 계약συμβόλαιον으로, 법률과 정치 체제로 이행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기τελευτῶσα 때문이다.(424d)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들이 준법적인ἔννομος 놀이를 잘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시가를 통해 훌륭한 법질서εὐνομία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그들 자신의 성장은 물론 나라에서 잘못된 것도 바로잡고 이전 사람들이 망쳐놓았던 사소해 보이는 일상 예법들도 모두 찾아낸다는 것이다.(424e-425a)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것들을 법제화νομοθετεῖν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받아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잡게 되면 닮은 것τό ὅμοιον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어 좋은 것이 됐든 그 반대되는 것이 됐든 하나의 전적이고도τέλειος 강력한νεανικός 어떤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425c) 시장과 관련한 세칙들 이를테면 계약 폭언과 폭행과 서면고소αἰκία, 재판관들의 임명과 관련한 일들, 세금의 징수나 납부 등 시장이나 도시를 감독하거나 항구세와 관련된 일들도 굳이 법제화 할 필요가 없다.(425d) 아데이만토스가 말한 대로 아름답고 뛰어난 사람들은 법제화해야 하는 것들 대부분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25e) 이에 소크라테스도 아데이만토스에게 신이 앞에서 이야기했던 법을 보전σωτηρία해 주는 경우 그렇다고 말해준다.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가 그렇지 못한 경우 그들은 마치 최선의 것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평생 이런 유의 많은 법규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고쳐가며 산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받아 그런 사람들은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ἀκολασία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δίαιτα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 거라고 말한다.(426a)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병을 더 키우면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치료약φάρμακον을 조언해 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그것으로 건강해지리라는 기대를 지니는 멋진χαρίεις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래와 같은 진실 즉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기 전에는 그 어떤 처방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오히려 누구보다도 싫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6b)
*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성을 내는 것은 멋진 게 아니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런 아데이만토스의 생각을 받아 주면서도 짓궂게도 한술 더 떠서 그런 일을 저지르는 나라와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과연 그들이 앞의 사람들과 같은지 그리고 과연 그들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묻는다.(426b) 즉, 소크라테스는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터이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이 있다면 그 나라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인지를 물은 후에, 그렇게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도 시민들이 즐거워하도록 보살피고θεραπεύῃ, 아첨하며 환심을 사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의향을 미리 알아 만족시키는 데 능란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고 힐난한다.(426c)
* 이에 대해서도 아데이만토스는 정색을 하고 그런 사람들 모두 앞서 말한 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자들로 어떤 식으로도 칭송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다시 힐난하는 말투로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 의향과 열의를 지닌πρόθυμος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이 가상하다고 말하고 측정할 줄μετρεῖν 모르는 자가 마찬가지로 측정할 줄 모르는 자에게 키를 알려주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426d) 이에 아데이만토스가 또다시 반대를 표명하자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사람들χαριέστατοι이라고 다시 비아냥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휘드라의 목을 자르고 있는 꼴인지 모른 채 계약상의 사기κακούργημα 등 이러저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매번 뭔가 끝πέρας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여기고 세세한 것까지 모두 법으로 제정하고 또 고친다는 것이다.(426e)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입법가는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할πραγματεύεσθαι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이 무용지물ἀνωφελής이며 아무것도 이루는 게 없고πλέον οὐδέν,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그것 중 일부는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이전의 관행ἐπιτήδευμα들에서 저절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427a)
* 이후 소크라테스는 다만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법령νομοθέτημα들 중에서도 가장 중대하고도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으뜸가는 법령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θυσία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δαίμων들과 영웅ἥρως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에 관한 해석은 전적으로 대지의 중심에 있는 배꼽ὀμφαλός에 앉아 이런 것들에 대해 해석해 주는 조상 전래의 해석자ἐξηγητής에게 맡긴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이 일단 마무리 된다. (42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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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a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koina ta philōn은 그리스의 속담으로 <국가>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소유와 결혼 그리고 자식들 문제까지 이 말을 적용해서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도 그 말에 찬성을 표한다. 그렇다고 아데이만토스가 여기서부터 벌써 처자 공유를 동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아데이만토스는 차마 그것까지 공유한다는 말씀일까 긴가민가하면서 단지 그 속담에만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449c에 가서야 아데이만토스는 이 말이 처자와 자식까지 공유하는 것임을 알고 이의를 제기한다. 이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자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까지 표현하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이다.
* 425b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예법들’은 구체적으로 연장자 앞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적절하게 말을 삼가는 것, 자리를 양보하는 것과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부모를 모시는 것θεραπεία, 머리와 옷과 신발을 단정히 하는 것을 비롯한 전체적인 몸가짐과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것들 등이다. 흥미롭게도 이것들 모두는 동양의 전통 예법들과도 별 차이가 없다.
* 425d ‘법제화할 것이 없다.’ : 여기 나오는 사안들 대부분은 플라톤의 <법률>에서 다시 언급된다. 계약에 대한 것은 913a 이하와 920d 이하, 폭언에 대한 것은 934e 이하, 폭행에 대한 것은 879b 이하, 서면 고소에 대한 것은 949c 이하, 재판관의 선임에 대한 것은 767a 이하와 956b 이하, 도시감독관과 시장감독관에 대한 것은 763c 이하 참고. 한편 항구세와 관련해서는 <법률>에서 수출품이나 수입품에는 세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다.(847b) <국가>에서는 이러한 세칙은 법제화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법률>에 가서 법제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법률>의 국가가 <국가>의 국가와 비교하여 실천적 현실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나라의 본을 다루고 <법률>이 나라의 실물을 다루는 한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 426c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를 흔들면κινεῖν 사형에 처해질 테니ἀποθανουμένους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시민들에게πολίταις 공표하는 나라들’ : ‘흔들면’으로 옮긴 κινεῖν은 의미 상 비판을 물론 체제를 변동하려는 시도까지 포함한다. 이 나라들은 426b에서 비유한 대로 시민들의 근본적인 개혁 요구와 비판을 거부하고 오히려 과도한 탄압을 일삼는 정치체제들을 가리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목도했던 당대 아테네 민주정과 30인 과두정 그리고 시칠리아의 참주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정체들 모두 반대파는 물론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아테네 민주정은 실정에 대한 개혁 없이 반대파에 과도하게 예민하여 소크라테스마저 반체제로 몰아 사형에 처했고 30인 과두정도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사람들조차 사형에 처했다. 제1권에 등장하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30인 참주들에 의해 처형 되었다.
* 426d ‘그런 나라들을 보살필θεραπεύειν 의향과 열의를 지닌 자들의 용기와 너그러움εὐχέρεια’ : 이 말은 잘못된 나라에서 어리석은 정치가들이 갖는 만용에 가까운 권력욕과 그들의 섣부르고 무모한 태도를 의미한다. ‘너그러움’의 원어 εὐχέρεια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좋은 의미로는 대범함의 의미도 가지지만 여기에서는 경계해야 할 일임에도 제 욕심에 못 이겨 섣불리 나서는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무모함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엄격해야 함에도 무작정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자들이다.
*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아데이만토스와 주거니 받거니 그야말로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치자와 대중들의 잘못된 양태에 관해 물을 때마다 아데이만토스가 시종일관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마치 못 믿겠다는 듯이 힐난조로 계속 되물어 본다. 이것은 아데이만토스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몰아 놓은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분노를 아데이만토스를 상대로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드러내 보이려는 플라톤 나름의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를 제자나 동료가 아니라 당대 아테네 지식인이자 시민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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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호자들의 임무로서 나라의 규모와 영토 관련 업무는 물론, 적성과 소질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임무 또한 절대 쉽지 않은 임무들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 임무 모두를 쉬운 임무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임무보다도 교육과 양육 관련 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음이 여기서 밝혀진다.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큰 것 하나 정도가 아니라 충분한 것 하나로 표현할 정도이다.
*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375a-434c)을 크게 나누면 (I) 그 나라의 중추로서 수호자와 통치자들이 어떤 성향으로(375a-376c) 어떻게 교육되고(376c-412b) 임명되며(412b-415d) 어떤 생활방식(415d-421c)과 임무(421c-427c)가 부여되는지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 등에 관한 주제가 먼저 다루어지고(375a-427c) (II) 그 후 그러한 기본 틀과 직무를 갖춘 나라가 어떻게 정의로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 그 나라의 내적 특성과 덕목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다.(427d-434c) 이 가운데 이 나라의 기본 틀과 직무를 다루는 부분(I)이 스테파누스 쪽 수 분량으로 총 42쪽 분량인데 흥미롭게도 이 가운데 교육이 차지하는 부분이 36쪽에 이른다. 게다가 <국가>의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6권과 7권에서도 변증술 등 보다 진전된 수준의 교육 과정이 근 40쪽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교육의 문제를 얼마나 중대한 과제로 여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플라톤 주석가들이 <국가>를 주제 구분상 정치론이라기보다는 교육론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 플라톤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이데아론을 떠올릴 것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최상의 위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이 기본적으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데아는 존재론의 위계상 최상의 가치이자 목표일 수는 있어도 정작 플라톤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그러한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인간 능력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플라톤 철학의 주제가 내용상 영혼론이자 교육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인간적 삶의 본질인 양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근원적 비참성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우주적 본성에 의지하여 반드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우주적 본성은 교육을 통해 고양된 영혼으로 각성되면서 비로소 삶의 근원적 비참성을 극복하는 적극적 능력으로 현전한다. 사회 또한 고양된 영혼의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를 통해 해체의 위기에서 벗어나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로 진보한다.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정치 체제가 일단 출발을 잘 하게 되면 교육과 양육이 보존되고 그것이 보존되면 좋은 본성을 낳고 그것은 또 자손의 출산도 낫게 만들어 선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의로운 나라의 전망과 관련하여 플라톤 자신 나름의 확신과 낙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확신과 낙관 역시 교육과 양육이 견고하게 잘 자리 잡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만큼 교육과 양육의 제도적 정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교육과 양육의 방책을 온전하게 수립하고 잘 보전하는 것은 수호자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수호자들은 그 보전의 과정에서 교육과 양육을 그르치는 것이 있다면 마치 돌다리도 두드려가듯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일상에서 시민들이 부르는 노래 방식의 변화마저 결코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단초가 되어 노래도 바뀌고 그에 따라 시가에도 변화가 생기면 시가 교육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실 노래 방식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는 생각 정도는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노래의 변화가 시가 교육의 변화는 물론 결국에 가면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를 감시하는 초소를 세우겠다는 언급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행된 문화 검열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과장과 기우의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증적 반응으로까지 비추어진다. 요즘 시절로 보자면 어떤 인기 가수가 아리랑 정도의 국민가요를 나름 편곡해서 다르게 부르는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꼴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음악 또는 대중문화의 변화 및 발전에 대한 플라톤의 신경증적 거부 의식 등 문화 전반에 대한 그 자신의 수구적 경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비난한다.
* 그러나 시가 교육을 다룬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의 정의로운 나라에서 시가가 차지하는 위상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시가 교육을 다루면서(376e-403c) 시가 즉 mousikē가 단순히 음악이나 특정 문화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뮤즈(mousa) 여신이 관장하는 제반 지적, 예술적 행위 및 성과 일반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리스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신화적 세계관 그리고 생활 방식을 반영하는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문맥에 따라 mousikē를 학예(學藝)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시가 교육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와 공동체가 추구해온 가치관과 세계관은 물론 일상의 생활 방식의 요체들을 전수하고 준법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일종의 시민 교육이자 종교 교육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시가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시민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부여되며 이후에도 연극과 예술 공연을 비롯한 정례적인 행사들을 통해 늘 마음에 되새기고 학습해야 할 이른바 평생 교육의 과제로 주어진다. 사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노래는 시가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노래 방식은 또 노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그 노래 방식의 변화에조차 민감함은 시가 자체가 갖는 중요성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노래는 아테네 시민들의 일상 영역인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감각에 직접적이고도 빈번하게 작용하는 것인 만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여파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노래가 가져다주는 이러한 여파에 대한 우려는 <법률> 700c-701d에서도 구체적으로 다시 피력된다. 노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개인의 성품과 행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법률과 정치 체제까지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 아무려나 시가에 대해 플라톤이 왜 그토록 예민하게 여기는지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 체제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의 면모로 비추어진다. 물론 보수주의 자체가 비난거리는 아니다. 플라톤 생각대로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굳이 바꿀 필요도 없고 굳이 새로운 것을 찾을 이유도 없다. 그것이 그 자체로 늘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아무리 걱정하고 주의를 기울여도 변화는 작건 크건 늘 일어나고 변화의 욕구가 크게 쌓이면 어떤 경우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격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런 만큼 반대로 우리는 플라톤에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만약 플라톤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정의로운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하거나 또 그래서 결국 부정의한 정치 체제로 바뀌었을 경우 플라톤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도 있다. 이곳에서(426c) 소크라테스는 만약 시민들이 잘못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의 질서와 체제를 바꾸려 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고 포고하는 나라들을 단호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플라톤 역시 최소한,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는 경우 시민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필연지사이자 마땅한 일이며 권력자들은 그것을 폭압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 <편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황이 나온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온의 친척들에게 잘못된 권력자들에 대해 용기 있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스승 소크라테스마저 죽음에 몰아넣은 자들의 폭력성과 어리석음이 떠올랐을까? 다만 그랬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거나 아예 공염불일 게 분명하다면 조언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편지> 330d-331d 참고) 사실 <국가>는 이런 나라들에 대해 철저히 절망한 나머지 그러한 나라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구상 하에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은 백지상태에서 이상적이기 만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타락해버린 돼지들의 나라를 정화하는 변혁의 차원에서 나라를 세우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의 임무에 관한 언급을 마무리하면서 수호자들이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까지 법제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세세한 관습까지 법제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425b)이다. 왜냐하면, 닮은 것은 언제나 닮은 것을 불러내므로 굳이 그에 따른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자면, 뛰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경우 법제화 이전에 잘못될 만한 일을 쉽게 간파하여 미연에 방지할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반대로 어리석은 자가 나라를 잘못 다스릴 경우에는 아무리 법제화를 해 봐야 자신은 물론 누구도 온갖 법 기술을 동원하여 탈법을 도모할 것이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것이다. 전자는 그야말로 입법의 궁극 목적은 법이 필요 없게 하는 것이라는 금언에 일치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후자는 아무리 법률이 세분되어도 입법자가 무도한 자인 한 또 다른 법 제정과 법 기술만 양산할 뿐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라 할 것이다. 이른바 전자의 나라는 그야말로 치자의 뛰어난 능력에 기초한 이상적인 덕치의 나라이고, 후자의 나라는 참주와 같은 치자의 폭압적 강제력에 기초한 극단적인 법치의 나라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427a) 진정한 입법가는 어떤 것을 법제화하고 어떤 것은 관행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지 잘 분별해낼 수 있으므로 세세한 규범이나 규칙 등에 골몰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치자들은 마치 온갖 것을 법으로 다 다스릴 수 있다고 믿고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법으로 제정하고 또 수정하는 것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
* 이곳에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는 어리석은 나라의 여러 사례는 제8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타락한 민주정과 참주정의 나라의 양태들과도 일치된다는 점에서 이곳 또한 그에 대한 예비적 서론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법 제정의 원칙으로서 나라의 최대선과 최대악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462a)이 없이 무작정 법률에만 의지하는 어리석은 치자들의 행태들에 대한 플라톤의 힐난은 그야말로 적나라하고 단호하다. 병이 들었으면서도 무절제한 탓에 몹쓸 생활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성적 쾌락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아예 근본을 치유할 능력(덕과 원칙에 기초한 통치 능력)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아 마치 휘드라의 목을 자르듯이 그저 끝없이 그때그때 즉물적인 대증치료를 반복하면서(법률 제정과 수정의 악순환) 자신의 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여기서 반체제 인사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을 하면서도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 데 능란하고 그런 역할에 열의를 가진 정치가들과 그런 자들을 뛰어난 사람이자 큰일에 지혜로운 사람으로 여기는 대중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무도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 그리고 그에 환호하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플라톤에게 참주와 선동정치가들은 진실과 자신을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자들이어서 대중들의 갈채에 눈이 멀어 마치 자기들 생각과 의견이 옳은 양 맹목적인 확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홀려 갈채를 보내는 대중들 또한 진실과 자신을 측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이들의 양태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반정부 민주화 세력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Sports, Screen, Sex 정책 : 프로 스포츠의 출범, 컬러 티브이의 확대. 통금해제, 심야 주점과 성매매, 성인 영화와 황색 잡지의 보급, 올림픽의 유치 등)을 수립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최대한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유도하였고 하물며 국민 위무책이라는 명분으로 5·18 광주 학살 희생자 1주기 즈음해 연예인을 총동원하여 국풍 81이라는 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감하게도 어처구니없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술에 취하고 배를 잔뜩 채우며 아무 통치 능력도 없는 자가 기득권자들의 부추김에 눈이 돌아 권력을 잡은 후 강자들과 기득권자들에게는 한없이 아첨하면서 반대파들과 약자들에 대해서는 갖은 공권력과 법적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는 작태를 우리는 지난 1년 내내 목도하고 있다.
* 그런데 이곳 정의로운 나라의 법제화 수준은 위의 대비 차원에서 언급한 극단적인 두 나라 중 순수할 정도의 덕치의 나라와 비교하여 일정 부분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이곳 수호자들은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때마다 법제화를 시도하고 있는 데다(380c, 383c, 403b, 409e, 410a, 417b) 나중에 가서도(484b-c) 법률 및 관행들의 수호를 아예 수호자들의 임명 조건으로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가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실물을 염두에 두고 본(本)으로서 그려진 최선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법이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상 국가는 올바른 정치에 의해 정의로운 삶이 담보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인치와 법치가 균형을 이루되 가능한 한, 법제화를 최소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고, 반대로 참주들과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다스려지는 참주정이나 민주정의 국가는 권력가들이나 시민이나 가릴 것 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다툼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나날이 법적 강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법률도 더욱 세분화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다른 정체의 나라 간 차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근대 이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들을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수차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정치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 본성이나 욕망구조의 근원적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모든 정치적 구상마다 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구조가 태생적으로 각기 다르고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개인도 혼자 자족(autokratia)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근본 전제로 두고 출발한다. 그러므로 자족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서로 자기가 잘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아 서로 분업적으로 협동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의 기원이며 이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며 자족할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다. 즉 정치가의 기본 역할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협동적 공동체를 수호하고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회적 역할이 특별하거나 다른 것에 우월하지 않다. 그 역할들 모두 고유한 적성과 소질에 따라 정해지고 그에 따라 추구하고 좋아하는 가치들 또한 고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자에 대한 질투나 경쟁 없이 자기 소질에 따라 분업적인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으며, 나라의 관리 역할을 맡는 통치자 또한 본성상 물욕이 없는데다 제도적으로도 사적 소유가 아예 금지되어 있어 그들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 또한 자연스럽다. 요컨대 나라 구성원들은 서로 욕망구조가 이질적이고 다양함에 따라 상호 의존적 협동적 사회관계를 통해 자족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역할은 시민들 각자 자신의 다양한 소질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잘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보살핌(epimeleia)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는 위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뿐만이 아니라 부정의한 현실 국가들까지 모두 살피고 들여다본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정의로운 국가가 타락할 경우 어떠한 과정을 밟는지 치밀하게 분석한다. 이상 국가는 교육과 양육이 잘못되는 경우 통치자들의 욕망구조가 변질되고 권력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정치를 불신하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욕망구조가 물질적 욕망으로 획일화된다. 각자도생과 배타적 의심과 경쟁이 마치 자연의 본성에서 기원한 것인 양 당연한 일상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치 체제의 변동과 관련한 이러한 플라톤의 분석은 역사적 현실, 특히 근대 이후 사회적 현실을 설명하는데도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마침내 신자유주의의 지배로 전일화된 현대 사회는 무한 경쟁 속에서 국가 간 계층 간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 수준으로 심화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 가난과 불평등, 부당한 차별을 불가피한 사회적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는 강자대로 약자는 약자대로 무한결핍에 시달리면서 정치의 목적으로서 자족적 삶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자기만족이나 종교적 믿음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정치·사회적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미 나라는 수없이 많은 나라와 개인들로 분열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내적 영혼까지 분열된 것이다.
* 사실 플라톤도 비록 이상 국가를 가장 이상적 정체로 내세우기는 했으나 욕망이 이기적으로 획일화된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다수결이 최선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상태에서는 민주정이 최선의 정치적 선택임을 인정하고 있다. 당대 아테네 민주정을 붕괴시키고 그 대신 급진적 과두정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려던 30인 참주들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민주정이 황금처럼 보였다고 플라톤이 말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구성원들의 욕망구조가 우주적 자연의 본성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바뀌기 전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제도적 변혁도 성공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는 길은 어디에서 주어질까? 단순히 이상 국가만을 들여다보면 그 길은 하염없이 멀고 방책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국가> 8권에서 탁월하게 진단하고 성찰한 이상 국가의 타락 과정과 <법률>의 방책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그 회복의 단서가 발견될 수 있다. 앞으로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겠지만 플라톤은 정치 권력의 부패와 그로 인한 빈부의 양극화의 근원을 시종일관 교육의 부재에 따른 욕망구조의 왜곡, 즉 본성의 물질적 획일화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출발 또한 근본적으로 획일화된 욕망구조를 바꾸는 데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또한 그러한 변혁을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플라톤이 변혁의 주체로 내세운 철학자 왕은 정치철학적으로 다만 권력과 지성의 결합에 기초한 정치의 지성화의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기획을 우리의 변혁 열망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정치가와 시민들의 지적 각성에 기초한 교육체제의 개혁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과제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욕망구조와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향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중간 목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자신들 고유의 욕망을 구현하면서 행복하게 공존하는 하나의 나라가 최종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 모두 각성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조직적인 저항 그리고 진지하고도 뜨거운 연대가 없으면 어떠한 진전도 담보할 수 없다.
*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틀을 만드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나머지 입법사항으로서 신전 건립과 제의를 비롯한 신들과 신령들, 영웅들 및 저승에 있는 이들 관련한 법령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 또한 적성과 소질에 따른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이고 수호자들이 적극적으로 챙겨야 할 고유 업무는 아니다. 이로써 말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일단 마무리되고 어떻게 그런 나라가 왜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인지 그 나라가 포함하고 있는 덕목들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에 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들.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