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계속 누드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는 검소한 편이다. 눈에 띄는 사치(奢侈)라고 할 만한 건 평생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형편도 못 되지만, 그럴 마음이 생겼던 때도 거의 없지 싶다. 그거야 철학자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더구나 구보씨처럼 근검절약이 강조되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치란 일종의 염치없음을 범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염치없음. 레비나스 식으로 말한다면 뻔뻔한 찬탈(簒奪)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근래에는 구보씨에게 자그만 사치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 호텔 목욕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금이야 만원이 채 안 되고 그것도 이러저런 할인을 받으면 5000원 남짓이니까 별 것 아니지만, 어떻든 시설이나 분위기로 보면 일반 목욕탕과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고 돔 형식의 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적다. 채광이 자연스레 잘 되고 목욕탕 안에 김이 서리지 않는다. 더구나 노천탕도 있어 그렇게 춥지 않은 날이면 발가벗고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구보씨는 발가벗고 활보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한동안 이곳에 자주 들락거렸다. 무언가를 걸치는 게 아니라 벗어던지고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최고의 사치란 이렇게 발가벗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물과 공기와 햇볕 아래 자유로운 몸과 감각. 구보씨는 긴 의자에 발가벗은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온 몸의 피부가 한 장의 눈꺼풀 같다.

이것이 사치인 이유는, 이러한 누림에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많건 적건 간에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이 같은 발가벗음은 가짜일 수 있다. 목욕탕 안에서의 발가벗음은 진정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욕탕이라는 시설과 장소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 안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 당당할 수 있다. 이때의 발가벗음은 벗겨냄이 아니라 덧붙임이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은 때를 벗겨내지만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박탈의 느낌을 수반하는 벌거벗음이 있다. 옷 입은 자들 앞에서, 옷 입은 자들의 장소와 그들의 시선 앞에서 벗고 있을 때가 그렇다. ‘벌거벗은 생명’. 근자에 유행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가 여기에 적절하다. 이런 벌거벗음은 갖추어야 할 것이 박탈되었음을 보여주는 부(負)의 표시다. 한 사회의 규칙, 제도, 권리 따위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지시하는 게 이런 벌거벗음이다. 옷 입은 자들은 이렇게 벌거벗은 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상성(正常性)을 확보해낸다.

이때의 벌거벗음은 무방비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털을 깎고 이빨을 뽑아버린 짐승의 모습과도 같다. 그 벌거벗음은 위험에 대해 직접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털 없는 피부 말고는 외부의 시선과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벌거벗은 자는 움츠리고 두려워하며,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벌거벗음과 수치심 사이에는 벌거벗음을 감싸는 관념들의 피륙이 있다. 이 관념들은 맨 몸뚱이의 취약함을 감추고 가리는 장치들과 관계하여 짜인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우리의 취약함을 헤집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수치를 모르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지경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자다. 도덕이란 우리의 취약함을 보완하여 덮는 속옷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이 찢기거나 헤졌을 때 우리가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는 눈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심을 통해 취약함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돌아본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수치란 아마도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옷 입은 이들은 벌거벗은 자들을 놓고 그들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벌거벗겨 놓은 경우라 해도 말이다. 그들은 옷을 입고 싶어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수치심을 없애고자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옷 입은 자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문을 할 때 대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벌거벗기기인 것은, 고문을 당하는 이가 스스로 무력하며 박탈당했음을 절감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사실상 노예의 처지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저항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는 자들이 나타나면 옷 입은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옷이 그저 짜인 피륙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벗겨질 수 있는 것임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옷을 벗어던지며 벌이는 시위가 때로 위력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실제로 박탈당하고 있고 실제로 벌거벗기고 있는 자들이 겉치레에 불과한 옷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사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 걸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라고 해요.”

“파르헤지아라면 진실한 말하기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알다시피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지요. 나는 그걸 ‘노출’과 관련해서 쓰고 있어요.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건, 단순히 취약함에 노정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감벤처럼 벌거벗음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건 옳지 않아요.”

사진: Dina Al-Kassim

“그런데 디나, 당신이 예로 든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나체 시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 아닌가요? 잠시 동안만 불도저가 집을 허물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결국 그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고 새로 지어준 집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그건 당신 말대로 일종의 스캔들이었을 뿐 아닌가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비록 당장의 저항은 잦아들었지만, 그 스캔들의 의미는 계속 남거든요. 그들은 대중 앞에서 수치를 범한 셈이고, 그건 그들과 그들의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요. 그 여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들을 겪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사회의 통념화한 이야기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성해 나갈 바탕이 될 수 있어요. 적어도 그녀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했잖아요. 그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거예요.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 말이지요.”

“그런 얘긴 얼핏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노예가 그 위협 앞에 전율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뚜렷이 의식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노출과 수치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대상화와 거리두기를 통한 자기의식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건데, 그렇다고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수치의 경험이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그렇담, 당신이 말하는 노출에 의미부여를 하는 데 큰 제한이 있을 법해요. 헤겔의 경우 노예에서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계기는 노동이잖아요. 그런 거에 해당하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가 말하는 노출의 특성은 적극성에 있어요. 헤겔에서의 위협처럼 그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도 이런 말하기의 주체적인 면을 놓치고 있다는 거구요. 버틀러는 이 노출을 응답이나 책임과 관련지어요.”

“버틀러라면, 주디스 버틀러 말이죠?”

“예, 주디스는 제 선생님이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응답이나 책임이라면 레비나스 용언데…하긴 버틀러는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 같은 말도 차용해서 씁디다만…”

“네. 노출은 상처입기 쉬움을 무릅쓰는 행위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상처입기 쉬움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죠.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말예요. 그건 단지 일시적으로나 미봉적으로 우리의 피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고, 그래도 상처입기 쉬움은 항존하죠. 그러니까 옷은 우리의 피부를 가리면서 우리가 상처입기 쉽다는 사태를 가리고 있는 거구요. 레비나스라면 ‘노출’이 이러한 사태를 깨우쳐주고 거기에 응답하게 한다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래요. 저도 레비나스가 노출과 벌거벗음에 대해서 많이 논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언제 그런 얘길 좀 나누죠.”

“예. 근데, 이번엔 부산에 어떤 일로 오셨나요? 지난번에 다녀가신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는데…”

“아, 이번엔 부산국제영화제 구경 왔어요. 캘리포니아 대학의 학생들 몇 명 하구 같이요. 저랑 공부하는 한국학생들도 좀 있거든요. 영화제 오시면 혹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군요. 전 부산에 살면서도 가기가 쉽지 않던데… 역시 제3세계 영화를 주로 보시겠죠? 그런데, 참, 이 목욕탕엔…?”

“네, 여기가 좋다는 얘기 듣고 잠시 쉬러 왔어요.”

“어, 그런데, 여긴 남탕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어라, 그러고 보니 다 벗고 계시네. 음마, 나두…어, 저기 Y도 있네. 그럼, 여기가 여탕이야?”

구보씨는 흠찟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목욕탕 의자에 누운 채 잠시 졸았나 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십여 분 잔 듯했다. 에이, 그런 꿈은 조금 더 꾸어도 괜찮은데… 구보씨는 못내 아쉬워하며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구보씨,다시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구보씨가 벗는 걸 좋아하긴 해도 아무 때나 벗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옷에 크게 신경을 쓰지도 못하는데, 그건 구보씨가 구(舊)세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구보씨가 자랄 때만 해도 단정함 이상으로 옷차림에 관심을 갖는 건 그리 칭찬 받을 일이 못 되었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다닌다는 말은 겉치레를 앞세운다는 뜻, 내면이 실(實)하지 못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 못살던 때의 얘기다, 라고 하면 분명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다. 근검절약의 강조야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항상 있기 마련인 도덕의 기본메뉴다. 내면의 가치 운운하는 것은 그 이면(裏面)의 보완물 격이다. 그런 가치가 실제로 있느냐 하는 건 천당이 실제로 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겉으로 차려 입지 못하는 형편이라면 내면의 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겠는가.

구보씨가 옷차림에 짐짓 무관심한 것에는 그런 ‘문명’의 세례 탓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옷차림 때문에 그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일종의 현혹(眩惑)일 뿐이다. 우리는 겉모습에 놀아나서는 안 되고, 화려한 치장 밑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구보씨가 자꾸 누드를 내세우는 데에는 이런 구시대의 교육이, 다시 말해 산업화 이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한 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

겉은 가짜고 속이 진짜다, 라는 건 본질주의의 구태(舊態)다, 라고 해도 거기엔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겉과 속을 나누고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생각하는 데에는 사태를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일 때의 얘기다. 그 본질이라는 게 실재(實在)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익(便益)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본질이라고 내세운 것에 이미 이해관계가 묻어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삶의 의미, 역사의 의미, 의미의 의미 따위가 바로 그런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당신네 철학자들이 제시해 줘야 하는 게 그런 삶의 의미 같은 것 아냐?”

학교의 구내식당에서 만난 한 선생님이 반쯤은 힐난이 섞인 듯, 또 반쯤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들어 머리가 부쩍 더 세버린 그 선생님은 이제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잘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떠올리는 숟가락에도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양파 껍질 같은 거지.”

구보씨는 요령 있게 발을 빼고 싶었다. 사람들은 과연 삶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거나 좌절하는가. 그렇기보다는, 일상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애꿎게 그 탓을 ‘삶의 의미’에 돌리는 것이 아닌가. 마음먹은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든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따위가 대부분 실제 원인이지 않은가.

구보씨는 짐 자무쉬의 최근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 영화에선 거의 말이 없는 한 흑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킬러다. 그 남자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에 여러 경로를 거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며 트럭도 탄다. 그런데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작은 트럭의 뒷면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LA VIDA NO VALE NADA”(인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

“그 영화 첫머리엔 랭보의 시구가 나와요. ?취한 배?의 앞부분. ‘유유한 강들로 접어들자 이젠 선원들 없이도 될 것 같았어…’ 암튼 재미있어요.”

“구보 선생이 추천하는 영화는 대개 졸리더라구. 이 영화도 그렇겠지?”

“뭐, 보기에 따라선… 어떻든 영화니까요.”

“야한 장면도 있어?”

“누드 씬이 있긴 한데, 야하진 않아요.”

“그래?”

“요새야 누드라는 게 별 거 없잖아요. 그래선지 이 영화에선 투명한 비닐 옷만 걸친 여자가 나와요. 그 여자가 다 벗기도 하죠. 그게 그거니까…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지도 몰라요.”

“일종의 허무야?”

“글쎄요, 허무도 여러 종류니까요. 게다가 순수한 허무란 건 없잖아요. 이 영화에서도 킬러가 결국 목표를 달성하거든요. 좀 황당한 방식으로긴 하지만…”

“황당한 방식?”

“예. 상식적인 인과성을 뛰어넘어서요. 무장한 부하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건물 안의 보스를 죽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킬러가 그냥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 왔냐고 물으니까, ‘상상력’을 통해서라고 대답하죠. 뭐, 어차피 영화니까요. 어떤 걸 바라느냐는 게, 그 바라는 걸 표현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영환 허무주의적인 건 아니에요. 오히려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걸 강력하게 보여 주죠.”

“그럼 말이야, 구보 선생. 원하는 게 이뤄질 수 없는 경우는 어떤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면 말이지. 그건 허무 아니야?”

“영화에서 말예요?”

“아니,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글쎄요, 바라는 데 이뤄질 수 없는 건 허무라기보다 슬픔이겠죠.”

“슬픔? 슬픔이라…”

그 선생님은 좀 어두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꼭 슬픔으로 귀착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분노하고 미워하기도 하니까. 그런 게 힘에 부치고 아무 소용없다고 여겨질 때 찾아오는 게 슬픔일 거다. 장애를 물리치려는 반응의 표출이 분노라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에 부딪혀 나타나는 위축의 느낌이 슬픔인 셈이다. 물론 순수한 슬픔은 찾기 어렵다. 많은 경우 슬픔은 분노와 섞여 저주나 원망 따위를 낳는다.

슬픔이 진해지고 무거워지면 이루고자 했던 목표마저 삼켜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자칫, 있지도 않은 허무와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치명적인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대부분의 병이 상한 몸의 회복을 위해 휴식과 안정을 강요하는 것이듯이, 과도하지 않은 대부분의 슬픔도 장애와 손실에서 물러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반면에 허무주의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다. 허무주의는 파괴적 공격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데 있다. 허무주의는 세상에 만연한 가식(假飾)과 위장(僞裝)을 들춰내지만, 수명이 다한 가치와 의미들뿐 아니라 때로 이제 막 자라나는 싹마저 짓밟는다. 허무주의자는 황량한 폐허가 이루어낸 평등의 지평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 세상이 허무(虛無)하다면 더 이상 억울해 할 필요도, 더 이상 구차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 우리 구보 선생은 어떤가. 요즘 즐겁게 잘 지내지?”

마주 앉은 선생님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 주위를 닦으며 묻는다. 어느새 이 양반도 이제 예순이 가까운 나이다.

“웬걸요. 저야 늘 슬프죠.”

구보씨는 멋쩍게 웃는다.

“그게 뭔 말이야? 요새 뭐하고 사는데?”

“그냥 책이나 읽고 있죠. 가끔 누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허허, 웬 누드? 누드라는 게 별 거 없다면서…”

“그러게 말예요. 혹시 그래도 아직 별 거 있는 누드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기, ?누드모델?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벌써 한 20년쯤 전 영환데, 그거 4시간짜리 DVD를 다시 봤어요. 늙수그레한 화가가 젊은 여자 모델을 벗겨놓고 계속 그리죠.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그리고, 그러다 포기하고, 또 다시 그리고… 그런 과정이 4시간 동안 이어져요.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진 않아요.”

“그래서 그림은 완성하고?”

“그렇죠. 영화에선 완성하는 것으로 나와요. 물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진 않죠. 화가는 그 그림을 벽 속에 넣고 발라버려요. 그리고 새로 그림을 그려 그걸 공개하죠. 진짜 그림은 영원히 숨겨진다는 얘긴데, 이런 아이디어는 사실 낡은 거죠. 발자크의 단편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그게 다야?”

“그러니까요. 그게 다란 생각을 안 하게 하는 게 문제인 거죠. 겉치레를 다 벗겨내고 벌거벗은 몸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거예요. 영화하고 별개로 말이죠.”

“허허… 그래서 구보 선생은 뭘 좀 찾아냈어?”

“아직요. 찾아내면 말씀 드릴게요.”

“구보 선생도 진짜는 벽 속에 숨겨놓고 가짜만 말해 주려고?”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숨길 게 없으면서 숨기는 척 하는 것은 사기겠지만, 이미 숨겨진 것을 끝없이 찾아다녀야 하는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사기일까. 구보씨는 그 선생님과 헤어져 혼자 걸으면서 생각했다. Y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녀도 생각이 바뀔 날이 있을 거야.

실재(實在)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과 어쩔 수 없는 어긋남이 있지만 그걸 향한 추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반복되는 진부함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어? 문명의 확장 사이클이 요즘처럼 문제를 키워갈 때 내파(內破)의 싹이 눈에 띄게 자라지 못했다면, 반성의 수단으로 들이댈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사고방식들일 거야. 그게 비루하게 현실을 쫓는 구차함이나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허무함보다는 낫지 않겠어?

벌거벗은 몸은 이런 모색의 메타포, 적어도 그 일부일 거야. 그렇더라도 오늘날의 누드에는 어떤 슬픔이 깔려 있어. 상업성에 물든 누드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일종의 비타협적인 슬픔 같은 것, 그게 누드의 정체처럼 여겨지는 거야. 그건 왜일까. 구보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벌거벗은 하얀 몸뚱이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구보씨, 축구를 보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지.”

십여 년 전에 구보씨가 들었던 말이다.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자주 떠오른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동의를 구하듯 구보씨를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 역시 잊히지 않는다. 구보씨가 취직 때문에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였다. 한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쓰기로 거의 결정이 되었다가, 무슨 사정 때문인지 취소가 되고 다시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가 났다. 사라졌던 기회가 다시 나타났으니 반길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가.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가. 구보씨는 석연찮은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그 말을 되짚어 보았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살아가면서 이 말을 떠올릴 만한 상황을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월드컵 축구 탓에 그런 경험을 했다. 우리 팀이 16강에 올라가기 전, 조별 리그를 치를 때였다. 그리스에 2-0으로 이긴 기쁨도 잠시, 아르헨티나에 참패를 당하고 난 직후였다. 우리와 마지막 경기를 벌일 나이지리아가 그리스에 2:1로 졌다. 구보씨도 그 경기를 보았는데, 나이지리아는 먼저 골을 넣어놓고도 쓸데없는 반칙을 해서 한 명이 퇴장당하는 바람에 경기를 망쳤다. 케이타라는 그 선수는 다음 경기에, 그러니까 우리 팀과의 경기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선수들도 두 명이나 부상을 당하여 교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당장, 이런 사태가 우리 팀에 호재라는 얘기가 나왔다. TV에서도, 인터넷에서도 그랬다. 나이지리아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이번 대회에 운이 없었다. 아르헨티나와 벌인 첫 경기에서는 오심 때문에 억울한 패배를 당했다. 심판이 아르헨티나 공격수의 반칙을 보지 못하고 골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우리와 벌인 경기에서도 거의 점수와 다름없는 결정적인 골 찬스를 몇 번이나 놓쳤다. 사실, 내용 면에서 보면 한국 팀이 힘겨웠던 경기였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나이지리아 감독이 한 말이 여러 면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번 월드컵 자체가 나이지리아에는 어려운 대회였다. 한국에 축하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마지막 순간 득점 기회가 많았는데 살리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해줬는데 운이 안 따랐다. 우리에게 운이 따랐다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축구가 이번 대회에서 약세인데 나이지리아에 온 지 4~5개월 밖에 안됐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다. 요보가 부상을 당해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16강 탈락은 선수를 선발하고,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시킨 내 책임이다.”

대회를 불과 4~5개월 남겨두고 감독을 교체해서 준비에 허점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나이지리아의 불찰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이지리아는 승리하지 못했고, 그 덕택에 우리는 16강에 진출했다. 누가 보더라도 실력으로 압도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이지리아의 불운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구보씨는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 주저앉은 나이지리아 선수들의 망연한 표정과 운동장으로 자랑스럽게 걸어 나오는 허정무 감독의 대비되는 모습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었다. 정녕 그런가. 저들의 불행은 우리의 행복인 것인가.

“구보야, 이건 그냥 축구 경기야.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기라구. 누군가는 지고 떨어져야 하는 거잖아.”

맞다. 이건 축구 경기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에겐 축구가 삶이고 일이다. 우리도 이렇게 밤잠을 설치고 지켜보지 않는가.

“나도 우리가 16강전에 나가게 되어서 기뻐. 무엇보다 박주영의 멋진 골이 마음에 들고 말이야. 우리 선수들이 잘 했다구. 다만, 나이지리아도 실력 있고 열심히 했는데 안됐다는 거지. 게다가 Y야, 내가 찜찜한 건 상대방 팀의 안 좋은 상황을 반기고 기꺼워하는 태도야. 어떤 께름칙함도 없이 말이지. 그건 사실 페어플레이 정신에도 어긋나는 거잖아.”

페어플레이라… 구보씨는 막상 이런 말을 하면서도 뒷골이 땅기는 것을 느낀다. 페어플레이란 스포츠가 스포츠일 때, 그러니까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할 때나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날처럼 각광받는 스포츠는 모두 돈과 결부되어 있는 판국에, 그런 말이 과연 힘이 있을까.

월드컵의 경우, 개최국이 거두는 경제효과가 순익만 10억 달러 이상이며, 후원사인 현대와 기아가 거둘 광고효과가 10조원이 넘고, SBS가 사들인 한국 독점중계권료가 1억 4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어떤 나라가 16강에 진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돈이 왔다 갔다 한다. 당장 각국 선수단에 지급되는 배당금만 해도 16강 진출 시 900만 달러, 8강 진출 시에는 1800만 달러에 이른다. 사정이 이럴진대, 승부보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는 말이 먹힐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구보씨는 못내 안타깝다. 축구는 전세계가 즐기는 스포츠라고 하지 않는가. 구보씨도 어릴 적 비좁은 골목에서나마 온종일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고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누구나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운동 경기가 축구다. 그런 축구가 승부와 돈의 무게에 짓눌려 일종의 전쟁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상대편과 함께 즐기는 놀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전과(戰果)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터가, 내 편과 네 편의 희비가 확실하게 갈리는 승부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허정무 감독이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를 앞두고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전쟁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 이렇듯 결사항전을 외치는 마당에, 상대방의 불운한 처지를 반기는 태도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느니 어쩌느니 하고 구보씨처럼 떠들다간, 곧바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라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잠깐, 구보야. 축구 얘기를 하다가 웬 고사성어냐. 너 같이 그런 꼴을 보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는 거야. 쉽게 말하면 될 걸 괜히 문자나 쓰고 싶어 하고… 어쨌든 말을 했으니 무슨 뜻인지는 설명을 해 줘야잖아.”

“하, 미안. 그런데 이런 건 요즘 인터넷 찾아보면 금방 나와.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구. 파부침주는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의 싸움을 앞두고 자기 군사들에게 밥 짓는 솥을 깨뜨리고(破釜) 타고온 배를 물에 가라앉히게(沈舟) 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해서 크게 이겼다는 거지. 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그보다 앞선 전국(戰國) 시대 얘긴데,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 이웃 초나라와 싸울 때 괜히 실속 없이 인(仁)을 내세우다 망하고 만 일을 두고 생겨난 말이야. 적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자는 말을 듣고도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북을 울리지 않는 법이라는 둥 폼 잡고 머뭇대다가 결국 싸움에 지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는 거지.”

“아, 그 얘긴 나도 들은 적이 있어. 하긴, 구보 너 같이 철학합네 하는 치들은 그 양공이라는 작자랑 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호호… 현실감 없이 구는 게 꼭 닮았잖아.”

“어라, 그렇담, Y 너도 축구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거냐? 타인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어야 하고?”

“얘 좀 봐. 그렇게 갖다 붙일 일은 아니야. 내가 언제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그랬니? 축구는 전쟁은 아니지만 어차피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게임이잖아. 지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목표인 거고. 지는 사람 처지가 안쓰러우면 아예 그런 게임을 하질 말아야지.”

“Y야, 내 말은 승부에 집착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게임 외적인 원인이 있다는 거고. 게임이라면 서로 이겼다 졌다 해야 재미가 있고, 또 그래야 서로 기술이나 재주도 향상되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월드컵 축구는 진짜 국가 대항 싸움처럼 되어 버렸어. 그러다 보니 막상 게임의 재미보다는 승부가 우선이 됐다는 거야. 네 말대로 이게 그냥 축구 경기에 그치질 않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니까. 프랑스 같은 경우를 좀 봐. 축구 지고 그 후유증이 사회 갈등으로까지 번진다잖아.”

“그건 거꾸로 보면 축구 같은 스포츠가 사회 통합의 역할을 한다는 뜻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Y야, 너도 알다시피 그런 통합은 미봉적이고 조작적인 게 되기 쉽다구. 축구가 대한민국을 하나 되게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묻어버리기도 하잖아. 이명박이나 정몽준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다시 4강까지 올라가서 지난 지방 선거의 패배 같은 걸 덮어버리길 원할 거야. 광고나 이벤트로 한 몫 챙기는 작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전을 응원하는 서울의 인파)

“구보야, 그렇게 말하면서 넌 왜 축구중계는 꼬박꼬박 챙겨 보냐? 너 같이 생각할라치면 우리 팀이 일치감치 탈락하길 바라야 맞는 거 아냐?”

“글쎄 말이야. 사실, 나도 우리가 계속 이겼으면 좋겠어. 비록 실력으론 어렵겠지만, 운이라도 따라 주면 좋겠어. 왜냐구? 그거야 나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서 그렇겠지. 스포츠라는 게 공동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특히 축구는 말이야. 축구공과 공동체, 이 둘 사이엔 어떤 연관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공동체라는 게 같은 방향에서 공을 쫓는 어떤 경계의 내부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 그 경계 안에서는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사태를 벗어나게 되는 그런 내부 말이지. 축구 경기에서 이기면 다들 기뻐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그 경계에는 언제나 밖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 밖과의 관계에서는 타인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라는 대립쌍이 여전히 작동한다는 거지.”

“얘, 옛말에 걱정이 반찬이면 상발이 무너진다고 했어. 구보야, 지금 네가 꼭 그 꼴 같애. 축구라는 게 이기면 좋고, 지면 그만이고, 뭐 그런 것 아니니.”

Y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건 어려운 일 같았다. 구보씨는 아쉽지만 그만 입을 닫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겐 경쟁과 승부는 숙명과 같은 것인가. 이 세상에서 경계 없는 송무백열(松茂柏悅)*의 꿈을 꾼다는 건 정녕 부질없는 짓인가.

*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측백나무가 기뻐한다는 뜻.

문성원(부산대, 철학) /

구보씨, 장미 향기를 맡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구보씨는 오월의 태양 아래 막 피어난 붉은 장미 몇 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건 구보씨가 본 적도 없는 오래 전의 연극 제목이었는데, 웬일인지 버릇처럼 입에 붙어 예기치 않은 순간에 튀어나오곤 했다.

장미의 향은 강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코를 흠흠 거려야 간신히 약한 자극이 올 정도다. 요즘 꽃들은 냄새가 이전만 못하다. 보기 위한 꽃들로 개량한 탓일 거다. 그래도 이렇게 울타리에 심어진 꽃들은 나은 편이다. 대개는 아예 향이 없다시피 하다.

어떻든 장미가 피었다. 바야흐로 장미가 피는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장미를 큰 마당에 가득 심어놓은 곳을 일부러 찾아갔다. 구보씨가 사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런 공원이 있어서다.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을 쉬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와 공원은 한참 북적였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상,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화창한 오월의 한때를 즐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호외가 날라들었다. 거기에는 굵고 큰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다. 이제 다시 핀 장미를 보면서 구보씨는 그 때 일을 떠올린다.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장미와 노무현 사이에 특별한 연관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노란 장미라면 몰라도 붉은 장미라니… 하지만 구보씨에게 노무현과 함께 연상되는 장미는 붉은 색이다. 붉은 장미, 햇살을 받아 더 붉은, 동백꽃처럼 붉은 빛의 장미…
영화 ‘시’의 한 장면
이건 어쩌면 이미지의 간섭 현상일지도 모른다. 동백은 꽃 밑동까지 송이채 떨어진다. 미련을 남기지 않고 지는 꽃이 동백이다. 마치 목이 꺾이고 잘린 듯 툭툭 땅에 떨어진다.

우연일까. 이창동 감독의 최근 영화 ‘시’에도 장미가 나오고 동백이 나온다. 영화에서 윤정희가 분(扮)한 양미자는 장미의 꽃말이 고통이라고 말한다. 구보씨가 알기론 장미에 그런 꽃말은 없지만, 그래도 양미자의 말을 믿고 싶다.

영화 ‘시’에 나오는 동백은 목이 꺾이듯 떨어지지 않는다. 그 동백은 조화(造花)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동백꽃을 화면에 담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감독은 동백꽃을 등장시키고 양미자가 그 꽃을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게 한다.

영화에서 동백 대신 꺾여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강물에 떨어져 죽은 여중생 희진이가 한 떨기 동백인 셈이다. 그 동백을 품고 강물은 흐른다. 영화는 꺾인 꽃망울에 무심한 세상을, 악할 것조차 없이 제 살기에 바쁜 뻔뻔한 사람들의 모습을 함께 비추고 다시 강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죽은 희진이를 위해 미자가 쓴 시가 흐른다. ‘아네스의 노래’다. 미자는 뒤늦게 왜 시를 쓰고 싶어 했을까.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 꽃을 좋아할 뿐 세상살이에는 서툴고 말투마저 어색한 미자가, 삶의 아름다움으로 끝내 붙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미자의 노래,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의 노래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구보씨 시(詩)를 생각하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꽃을 한 동안 들여다보던 구보씨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럼, 물론이지.” Y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는 이유는 말이야, 스스로도 변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애써 부정하고 싶어서라구. 자신의 말을 반사물로 삼아서 그런 바람을 증폭시켜 보는 거지. 뭐, 나쁠 건 없어. 때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구보씨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을 때, Y는 이렇게 이죽거리듯 참견을 했다.

하긴 사람이 안 변할 수는 없지,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날씨에 민감한 건 나쁜 게 아니야. 다만, 뭐가 어떻게 변하느냐는 거지. 그런데 시를 쓴다는 건 아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변하는 날씨와 변하는 세월을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심정 한 자리, 그런 게 있어야 시구(詩句)가 맺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또 기다림과 희망이 되는 걸 거야. 과거와 미래가 지금 이 순간에 한 몸이 되는 어떤 절절함 같은 것으로 말이지. 시(詩)라… 그래, 이 부박(浮薄)한 현실 속에서도 시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는가. 그건 지금 이 시절에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어쩌면 해마다 피어나는 이 꽃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작 시를 쓰고 읽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 이창동의 영화 ‘시’도 외국 영화제의 힘을 입어 간신히 관객 동원을 하고 있는 꼴이잖아. 구보씨는 하루에 단 한 번뿐이었던 그 영화의 상영 시간을 떠올렸다. 개봉 후 며칠 안 돼 영화관을 찾았는데도 그랬다. 이제 시는 꽃 자체가 아니라 점점 옅어져 가는 꽃향기와 같은 것일지도 몰라. 가까이 가서 맡으려고 애를 써야 간신히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것 말이야…

누가 그랬었지? 현대의 대표적인 시는 광고 카피라고… 한편으론 그게 맞는 말이겠지. 압축적이고 세련된 표현으로 범람하는 언어가 바로 광고 카피일 테니까 말이야. 또, 그걸 만들어내려고 쥐어짜는 노력의 양과 강도를 생각해 봐. 카피스트의 고생은 아마 시인들 못지않을 거야. 그렇더라도 그게 시야? 디자인된 언어, 향기 없이 흩날리는 꽃잎들처럼 사방에서 현란하게 명멸(明滅)하며 흩어지는 어구들…

시란 모름지기 살아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살아 있다는 게 뭘까. 죽음에 바치는 헌사(獻辭)에서도 살아 숨 쉬는 것,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움직이면서도 죽음 너머의 한 지점을 끝까지 겨누는 것, 그래서 죽음의 세력들과 죽음의 상인들이 몰고 오는 온갖 유혹과 치장을 이겨내는 것, 삶을 죽음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조차 삶을 찾아내고 움켜잡는 것, 그리하여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꿈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기꺼이 매혹되는 것…

“구보야, 넌 너무 유약해. 사내애가 허구한 날 꽃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지. 그렇다고 꽃을 가꾸기라도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잖아. 그저 남이 가꾼 꽃에 코나 들이대고 있으면 거기서 철학이 나오니?”

Y의 질책이다. 그녀는 어디 있다가 또 이렇게 바람처럼 나타난 걸까.

“Y야, 나는 지금 꽃만 보고 있는 게 아니고, 꽃 너머를 보고 있는 거야. 향기만 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향기 너머를 더듬고 있는 거고… 말하자면, 장미가 품고 있는 시(詩)에 귀 기울이고 있는 중이라구.”

“얼씨구. 참 시시한 소리 하고 있다. 지금이 그럴 때냐?”

“왜, 무슨 일이 있어?”

“무슨 일? 너 참 속 편하다. 다들 신경 곤두서 있는 판에. 자칫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잖아. 막상 어렵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중국 관계 꿍꿍이만 정리되면 혹 모르는 일이라는 얘기도 있어. 그게 아니더라도, 전교조 교사들 130여명을 교과부가 해임하겠다고 결정하고 나선 건 알지? 오늘은 천안함 발표를 못 믿겠다고 한 김용옥씨를 우익단체들이 국보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는 뉴스가 떴어. 김용옥은 니들과 같은 철학자 아니니?”

“허, 그런 일이…. 정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모양이네. 하지만, Y야,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우린 박정희 시절도, 전두환 시절도 견디고 헤쳐 왔잖아. 때로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잠시거든.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시심(詩心)을 잃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시심? 그렇게 장미나 들여다보면서 말이지? 네가 해직 통보를 받는 심정을 알기나 해?”

“아, 미안해, Y야. 그렇게 화내지 마. 나도 답답하다구. 어떻게 안 그렇겠어? 실은 나도 장미를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던 중이었어. 그러다 보니까 며칠 전에 본 영화 ‘시’가 떠오르고, 그래서 해 본 소리야. 꽃이나 시 같은 게 유약한 것 같지만,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을 받쳐 주는 건 의외로 그런 것 아닐까. 변하는 세태에도 믿고 기다리고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를테면 싸움터의 병사들이 품 안에 접어 간직하는 어머니의 편지 같은 것 말이지. 날씨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굳게 잡아주는 어떤 닻줄 같은 것… 잠깐, Y야, 그렇게 가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봐.”

그러나 Y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구보씨는 멀어져가는 Y의 뒷모습를 향해 그녀에게 막 들려주려던 시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밤, 우리가 칼날을 피해갈 수 없었던 그 밤,
그리고 그 날, 그 황혼녘, 두드려 맞은 누군가의 심장이
죽음을 준비하던 그 부서진 골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파블로 네루다, ?로르카를 위한 송가? 중에서)

문성원(부산대학교, 철학) /

구보씨,구보씨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요즘은 날씨가 참 궂다. 그래도 꽃은 핀다. 구보씨가 사는 곳은 한반도 남쪽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벌써 진달래도 피고 목련도 피었다. 아직 가지뿐인 나무들 틈새에서 갓 피어난 진달래는 속도위반이라도 한 처자처럼 약간 수줍어 보인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여기 감상이 없을 수 없다. 상투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람도 꽃처럼 가고 또 새로 오지만, 꽃 피고 지듯 매년 계절마다 그런 것이 아니라서 아쉬움이 더하다. 작년에도 많은 사람이 떠났다. 그렇게 간 사람들은 이제 우리 곁에 오지 못한다.

하긴 꽃이 다시 피듯이 한번 간 사람이 또 오는 경우도 있다. 구보씨가 그렇다. 이 봄에 다시 등장한 구보씨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30년대다.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한 것이 1934년이니까 벌써 76년이 지났다. 그렇게 보면 구보씨의 나이가 이제 희수(喜壽)에 이른 셈이다. 하지만, 구보씨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새로 등장했으므로, 또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므로, 나이를 따지는 건 별반 의미가 없다.

최인훈이 60년대 말부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연작을 발표하여 구보씨를 다시 불러냈다. 그 구보씨는 박태원의 구보씨와 좀 다르다. 먼저 한자 표기에서 차이가 난다. 박태원의 구보는 ‘仇甫’였는데, 최인훈의 구보는 ‘丘甫’다. 시대배경이나 무대도 다르다. 하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의 조선 땅 경성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 땅 서울이다.

90년대에 등장한 구보도 있다. 주인석이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라는 부제로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소설 연작집을 냈는데, 여기 주인공인 구보에게는 한자 표기가 없다. 그는 80년대 격동의 상처와 90년대의 침울한 분위기 가운데서 번민한다. 무대는 전(前)근대와 포스트-모던이 공존하는 서울이다.

세 번의 구보는 다 구보이지만 다 다른 구보다. 마치 봄마다 피는 진달래가 다 진달래이지만 다 다른 진달래이듯이.

그런데 하필이면 이제 왜 다시 구본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간의 구보가 지녔던 사색적인 소시민성 때문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최인훈의 구보가 보여준 인상이 강렬했다. 최인훈의 구보 이후로는 어떤 구보든 시대를 걱정하는 반성적인 지식인상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매번 다르지만 그래도 반복의 느낌을 주는 일종의 변주(變奏)처럼, 구보라는 이름은 나름의 울림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도 네가 구보라는 건 좀 뜬금없어.”

드디어 참지 못하고 Y가 끼어든다. 그녀의 약간 치켜 뜬 눈매는 어딘지 쨍하는 목소리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넌 소설가도 아니고, 또 그닥 젊은 축도 아니잖아.”

그거야 아무려면 어떤가. 구보가 꼭 소설가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소설가와 철학자 사이에 넘지 못할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소설가 가운데 최인훈의 구보씨 정도로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던 사람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젊지 않다는 건, 글쎄, 그건 좀 아픈 얘기다.

“Y야,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젊은 친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 더구나 철학자라면 말이야, 그래도 불혹(不惑)은 넘겨야 하지 않겠어?”

구보씨도 이런 게 좀 억지라는 건 안다. 젊은 철학자가 노숙한 철학자에 비해 못하라는 법은 없다. 왕필(王弼)이나 니체가 젊은 나이에도 훌륭한 업적을 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쓴 것은 서른이 채 안 되어서였으며,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것도 30대 때였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구보씨는 다 젊었다.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쓴 것은 20대였을 때고, 최인훈의 경우도 30대 초반, 주인석도 30을 갓 넘었을 무렵 구보를 그려냈다. 그래서 구보씨는 비판적이고 삐딱했을지언정 풋풋함과 패기를 잃지는 않았다. 철학자 구보씨는 그럴 자신이 있는 걸까?

사실, 그건 잘 모르겠다. 깨놓고 말하면, 철학자 구보가 이렇게 구보씨가 된 건 다분히 우연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이 웹진을 관장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요청한 것은 일종의 ‘철학강좌’였다. 시장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요청문을 보았을 때, 아이쿠, 싶었다. 자신이 없었다. 또 억지로 거기에 맞춰 쓴다 해도 그렇게 목적의식이 견고(!)한 형태로야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서 궁리 끝에 다시 끄집어 올리게 된 것이 구보씨 이야기다.

박태원 시절부터 구보씨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솔직했던 편이다. 소설 속의 인물로 나오는 까닭에 자전적(自傳的)인 이야기를 각색하여 표현하기가 쉬웠다. 그 과정에서 실제와 허구가 버무려지지만, 그건 나름의 실재(實在;reality)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소설이라는 형식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 구보씨가 소설을 쓰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필요한 만큼만 그 같은 형식을 차용하겠다는 얘기다.

“풋, 구보야, 그건 비겁한 거야. 철학자면 철학적 내용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됐지, 왜 남의 틀이랑 이름을 빌리니? 또 그렇게 문학적 형식을 쓸 거면, 거기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거잖아. 말하자면, 문학적 가치도 있고 재미도 있어야 하는 거거든. 근데 넌 누가 그런 점에 대해서 불평을 하면 이건 사실 문학적인 게 아니고 철학적인 글이라고 발뺌할 거잖아. 그럼 그건 이중적으로 비겁한 거라구.”

또 Y다. 허 참… 그래, 너 잘났다.

네 눈엔 낫살이나 먹구 이런 글 쓰고 있는 내가 뭐 그렇게 속 편해 보이냐? 그렇게 요리조리 피할 길을 생각했다면 구태여 이런 걸 왜 쓰겠어? 그냥 못하겠다고 그러지.

그리고 네가 말한 그런 생각은 따분한 형식주의고 치사한 보수주의의 발상이야. 문학의 형식이 따로 있고 철학의 형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 내가 굳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같은 걸 다시 거론해야 되겠니?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실제와 꼭 같지 않지만, 실제보다 더 유의미하고 더 생명력이 있잖아. 물론 구보씨를 내세워 철학을 논의하는 게 그런 대작들에 비할 만한 결과를 낳을 거라고 말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저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걸 얘기하는 거야. 괜히 고유한 형식이 어쩌구 하면서 엄격한 척하는 치들은 대개 자기 밥그릇에 대해 위엄을 부리는 거라구.

가만, Y에게 이렇게 성질낼 일이 아니다,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뭐, 사실, 일리가 있는 말이지 않은가. 여기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가령, 오늘날에는 실제와 허구의 혼재(混在)가 바로 실재(實在)의 모습이 되었다는 식의 얘기는 어떤가. 이제 ‘가상현실’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이 되었다. 게임이나 훈련용 시뮬레이션 따위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상업 광고를 보라. 광고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품 간의 관계는 실제인가, 허구인가? 예컨대, 김연아가 광고하는 냉장고를 김연아가 정말 사용하고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광고 효과는 실제적이며, 그래서 그 광고는 현실의 일부가 된다.

구보씨와 구보씨가 늘어놓는 철학 이야기 사이의 관계도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실제와 허구의 섞임이 만연한 시대에는 구보씨 같은 인물이 등장해서 철학을 들먹이는 건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원래 박태원의 구보에서부터 구보는 이렇게 영역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의식(意識)의 세계와 실제 세계의 삼투(?透).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이미 모더니스트였다. 하지만 그 삼투가 한 방향만의 것, 의식의 무력한 작위(作爲)만일 수 없었다는 것은 박태원의 이후 행적이 보여준다. 그는 좌익 문학 진영에 가담했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으며, 그 후로는 역사소설을 주로 발표했다. 대표작 [갑오농민전쟁]은 실명(失明)과 전신불수의 병중에서 구술(口述)을 하여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86년에 78세로 사망했다.

최인훈이 분단과 냉전의 시기인 60년대 말에 구보를 다시 불러낸 것은 아마 이런 이중의 삼투를 염두에 두어서였을 것이다. 최인훈의 구보는 소시민의 일상을 살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는 그의 일상에 간단(間斷)없이 침투한다. 중국의 유엔가입이나 월남전, 군사훈련반대 데모 따위가 구보의 생각을 멈추게 하거나 끌고 간다. 그는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난세’(亂世)를 사는 지식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조차 박정희의 유신독재 이후로는 사라져 버렸다.

최인훈은 근 20년에 걸친 침묵 끝에 1994년 소설 [화두]를 내놓았다. 철학자 구보씨는 당시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최인훈이 한 TV 인터뷰에서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 책([화두])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자못 자랑스레 말하던 장면, 이문열이 [화두]에 대해 ‘지성의 장엄한 황혼’을 보는 것 같다고 한 말을 크게 부각시킨 그 책의 신문 광고. 두 가지 다 씁쓰레한 웃음을 짓게 했던 기억이다.

“어, 그건 또 왜?”

이번에는 Y의 참견이 반갑다. 사실 그녀는 여러 모로 기특하고 사랑스런 존재다. Y가 없는 세상, 그건 생각하기 싫다. 지루한 평화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므로.

“이문열이 한 그 말의 초점은 ‘황혼’에 있었거든.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그게 칭찬이라기보다는 이제 수명이 다했다는 걸 강조하는 뜻으로 읽혔다는 거지. 꽤 긴 그 소설의 마지막이 소련이 무너진 러시아를 배경으로 끝나는 것도 시사적이고 말이야. 그리고 [화두]는 나름대로 진지한 자전적 작품이지만, 뭐, 20년 동안 그걸 준비하고 있었다고 자랑스러워 할 만한 건 아니다 싶어. 그러니까 이문열의 말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건 아닌 셈이지.”

무엇에나 수명이 있기 마련이다. 박태원의 구보에도, 최인훈의 구보에도. 그러나 구보의 수명이 다한 것은 아니다. 구보는 여럿이며 또 이어질 수 있으니까. 모름지기 개체를 절대화해서 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보는 건 역사의 무대에 개인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사고방식일 따름이다. 생각하고 느끼는 거야 언제나 개체지만, 그 생각이나 느낌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전파되지 않는가. 구보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을 수 있고, 이 시대에도 저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이 자리에서 구보가 꼭 해야 할 어떤 역할이 있을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웹진에 소설가 아닌 철학자 구보가 등장해야 할 어떤 까닭이 있는 걸까?

글쎄, 자꾸 그렇게 물어볼 일은 아니다. 꼭 필요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 말대로 이명박과 강호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사태를 따지는 건 우스꽝스럽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 아닌 세상에서는, 아니 그런 세상이기에, 구보씨에게도 뭔가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하긴, 삼성의 이건희가 회장님으로 복귀하는 판국인데, 구보라는 작자가 뭐로 되돌아오든 그게 뭔 대수겠어? 아무튼 난 이건희 때문에 누가 복귀한다고 그러면 짜증부터 나는 거야. 마치 거기가 정당한 제 자리였다는 듯이 구는 게 역겹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까, 구보야, 너도 괜한 설레발치지 말고 하려거든 ‘정직’하게 잘 해 보라구. 오늘이야 대충 이렇게 끝낸다고 해도 당장 다음부터는 뭔가 내용 있는 얘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

문성원(부산대) / admin@admin.com

베르히만의『침묵』[철학적 인간극장]

1

베르히만의 영화 침묵은 그의 ‘실내악적 영화’의 간결성이 형식적으로 처음 완성된 영화라고 평가된다. 이 영화에서 소년 요한과 그의 어머니 안나 그리고 이모 에스더는 함께 외국 여행에서 고향 스웨덴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새벽에 기차 안에서 기침 발작을 일으킨 에스더 때문에 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의 어느 낯선 도시 티모카의 한 호텔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영화는 기차 안에 발작이 일어나는 새벽에서부터 그 다음날 오후 2시 다시 기차를 타고 떠나기까지 극히 제한된 시간을 다룬다.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우선 호텔에 들어가 요한과 안나가 간단히 낮잠을 자는 사이, 에스더는 외로움 때문에 술을 먹고 마스터베이션을 한 후 잠이 든다. 곧 이어 낮잠에서 깬 소년은 미로 같은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호텔 관리인인 노인과 다섯 난쟁이들을 만난다. 그 사이 안나가 깨어나 욕망의 불을 켜고 도시 여행을 떠난다. 안나는 레스토랑에 들러 웨이터를 만나고, 이어 극장에서 난쟁이 극단의 공연과 객석에서 일어나는 남녀의 실제 정사를 엿본다.

그 사이 소년은 돌아와 어머니가 없자 에스더와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안나가 돌아온다. 안나의 더렵혀진 옷을 보고 에스더가 안나를 경멸하자, 안나는 도발적으로 다시 방을 나가, 약속한 웨이터와 함께 호텔의 이웃 객실에 들어간다. 그때 안나와 에스더의 싸움 때문에 방 밖으로 쫓겨나 있던 요한은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객실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 충격에 빠진 요한은 에스더에게 이를 말하고, 에스더는 안나가 정사를 벌리는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둘 사이의 감추어왔던 대립이 마침내 폭발한다.

안나가 다시 한 번 더욱 동물적으로 웨이터와 섹스하는 사이 방 밖에서 이 소리를 지켜 듣고 있던 에스더는 마침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아침에 안나는 웨이터를 남겨두고 빠져나오면서 문밖에 쓰러진 에스더를 발견한다. 안나는 결국 병든 에스더를 호텔 방에 내버려 두고, 요한과 기차를 타고 다시 떠난다.

이 영화는 플롯의 많은 부분을 생략했다. 요한의 아버지는 대화중에 간단히 그 생존만 언급될 뿐 함께 사는 지 아니면 따로 사는 지 명백하지 않다. 에스더는 결혼했는지, 자매의 죽은 아버지는 언제 죽었는지,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어디로 왜 여행 갔는지, 에스더의 병이 어떤 것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안나와 에스더 사이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극단적인 갈등을 보이는지, 그저 모든 것이 모호할 뿐이다. 이 영화는 마치 스케치로 대강 윤곽만 그려진 풍경처럼 보인다.

2

들뢰즈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유에 이르려고 했다. 그가 주목했던 영화들은 현대 영화 곧 60년대 뉴웨이브 영화이다. 그는 그런 영화들의 특징은 주인공들이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고, 다만 응시할 뿐이라는 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가공할 만한 현실에 직면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런 곤경 앞에서 외면적으로 얼어붙은 주인공들은 내면에 있어서 생성의 길에 들어선다. 그들은 습관적 기억이 지배하는 현재라는 시간 평면을 떠나, 무의식적 기억이 잠재된 과거의 시간 평면 속으로 들어간다.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은 이제 쌍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이다. 여기서 양자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가상(잠재성)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크리스털 이미지라 명명했다. 그는 이 크리스탈 이미지가 곧 직접적인 시간(곧 생성)의 이미지라 한다.

베르히만의 영화 ?침묵? 역시 들뢰즈의 이런 시간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선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들이 머물던 도시 티모카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만, 이 도시의 삶의 환경은 주인공들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런 위협은 이제 막 의식을 갖고 세상으로 들어가려는 소년에게 더욱 강한 힘으로 다가온다.

첫 장면에서 기차 안에서 새벽에 깨어난 소년은 창문 밖으로 모든 것을 검게 불태우듯이 떠오르는 흰 태양을 본다. 우연히 엿본 이웃 객실에 승무원의 얼굴을 경악에 의해 짓이겨져 있다. 소년이 창문 밖을 보자 열차에 실려 포신을 세운 탱크들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줄지어서 실려 간다.

 

이런 위협적인 환경 속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들의 행동은 허공에 걸려 있다. 그것은 마치 에스더가 병에 걸려 호텔 방에 머무르게 된 것과 유사하다. 안나는 이런 환경 속으로 뛰어들어 보지만, 도시의 혼잡 속에서 무관심하면서도 적대적인 사람들에 부딪힐 뿐이다.

그것은 바로 들뢰즈의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다. 여기서 영화 제목 ‘침묵’이 암시하듯이 이 영화에서 대화는 극히 억제되어 있고,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채우는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도 극히 암시적으로만 말해질 뿐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이 출현한다.

베르히만은 이 영화에서 풍부한 시각적 이미지들은 말할 것도 없이 다양한 감각들을 실험한다. 영화에서의 침묵은 다양한 사운드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 기차 안에서의 장면 내내 마치 열차의 쇠바퀴가 철로에 스치면서 내는 마찰음 소리가 이어진다. 처음 호텔 안에서 요한이 창밖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도시의 무관심을 강조하듯 신문팔이의 외침이 강조된다.*** 영화는 안나가 호텔방에서 웨이터와 더불어 정사하기 직전 요한이 밖에 엿듣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팔에 찬 팔찌들의 찰랑거리는 소리를 클로즈업한다. 또한 이튿날 에스더는 안나와 요한이 점심 먹으로 나간 사이 마치 죽음이 다가오듯이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이 영화에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바로 촉각적이거나 후각적 이미지들이다. 낮잠을 자기 전 목욕한 이후 안나는 요한의 몸에 스킨을 발라주는데, 요한이 그 냄새를 맡는 동작을 통해 후각적 이미지가 강조된다. 이어서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호텔 객실 안으로 들어가고 에스더는 잠들어 있을 때, 요한은 발바닥으로 방바닥이 떠는소리를 감지한다. 이어서 물 컵들이 선반에서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요한이 창밖으로 다가가 보자, 탱크들이 다가온다. 이런 이미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에스더를 버려두고 기차를 타자, 비가 온다. 이때 안나는 창문을 열어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는다.

이런 풍요한 시각적, 청각적, 촉각 후각적 이미지들 외에도 침묵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우선 들뢰즈가 말하는 불연속적인 파편화된 이미지가 이 영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런 이미지의 파편성은 요한이 어머니의 발을 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요한이 호텔 방안의 바닥에 앉아 방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어머니의 발을 응시하고 있자, 어머니가 ‘왜’라고 묻는다. 그러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발이 엄마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하고 있어요.”

요한은 사물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사물의 세부를 지각하면서 각각의 지각은 파편화되어 독자적으로 살아있다. 요한의 이런 지각적 특징은 푸르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제시했던 지각적 특징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애인인 알베르틴이 친구들과 함께 걸어오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파편화된 지각들의 몽타주를 드러내 보인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 가운데 압권은 바로 가상과 현실의 착종이라고 하겠다. 안나가 레스토랑을 나가서 극장으로 갔을 때 무대 위에는 난쟁이 극단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객석의 뒷자리에서 남녀가 실제 정사를 벌린다. 두 가지 이미지들은 내용적으로 서로 연관된다. 난쟁이들이 벌리는 이미지는 마치 지네와 같은 모습으로, 실제 일어나는 남녀 간의 정사의 모습과 닮았다. 베르히만은 두 장면을 시각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무대 공연은 실제 정사에 대한 논평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객관적인 느낌이 든다. 거꾸로 실제 정사는 마치 포르노 영화를 찍듯이 찍혀져 있어서 연극성이 강조된다. 이런 이미지들 속에서 실제와 환상, 현실과 무대가 서로 교차되는 듯이 보인다.

 

 

영화 침묵에 나오는 가상과 실제의 착종은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크리스털 이미지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들뢰즈의 크리스털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안나와 에스더를 통해서 드러난다. 안나와 에스더는 서로 대립하지만, 구분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그것은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 장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이 영화에서 호텔에 머무르던 소년의 어머니 안나와 이모 에스더의 내면적 갈등이 폭발한다. 마치 전쟁 중인 듯 거리 한 가운데로 탱크가 굴러 오기도 하는 위협적인 현실, 결과적으로 호텔 방안에 갇혀서 벗어날 수 없는 중압감, 더구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에스더의 고통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둘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욕망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나와 에스더의 욕망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호텔에 들어서 목욕 장면에서 드러난다. 안나가 옷을 벗고 탕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베르히만은 침대에 누워있는 에스더의 시선에서 포착한다. 그것은 에스더가 안나를 엿보고 있는 관음증의 장면이다. 거꾸로 이 장면은 안나가 에스더의 시선에 자신의 벌거벗은 육체를 일부로 노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안나의 욕망 역시 에스더에게로 향해 있다.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욕망은 동성애적인 욕망구조와 유사하다.

 

두 사람은 이런 감추어진 욕망을 지니면서도 서로 대립한다. 이런 대립은 이 욕망이 금지된 것이고 그래서 자기의 상대방에 대한 금지된 욕망은 감추려 하는 데서 발생한다. 무의식적 욕망은 자연히 누설되므로, 이를 감추려는 억압은 강화된다.

각자는 타인을 오해한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에 대한 근원적 욕망은 각자로부터 그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채 몸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런데 각자는 이렇게 타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증상을 자기 자신의 욕망 구조에 의해 즉 자신의 의식을 통해 재해석한다. 그 결과 서로는 서로를 오해한다.

먼저 에스더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금기를 받아들인다. 에스더의 욕망은 신경증적인 증상을 통해 발산된다. 그 점은 에스더의 성적 욕망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정액 냄새가 역겹습니다…..배란하게 되면 생선 썩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죠.”

이런 에스더는 안나의 욕망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망의 표현임을 알지 못한다. 에스더는 안나에게도 자신과 같은 도덕적 금기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안나는 이런 금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에스더는 안나가 도덕적 금기를 지킬 정신적 능력이 없는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해석한다. 에스더는 안나를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다.

더구나 에스더는 자신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욕망이 안나에 대한 근원적 욕망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욕망을 안나에게 도덕적 금기 부과함으로써 충족하려 한다. 그런데 에스더는 자기의 욕망이 안나에게는 육체적 욕망으로 이해된다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안나로부터 굴욕감을 느낀다. 에스더는 자신은 도덕적 금기를 부과하려는데 안나는 그것을 육체적 욕망으로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이 차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에스더의 오인은 마찬가지로 안나에게도 일어난다. 안나는 자신의 근원적 욕망을 육체적 욕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어떤 정신적 관계도 배제한다. 안나의 욕망은 도착적인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웨이터와 성관계를 맺으면서 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다행이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참 다행이야”

안나는 에스더에게서 흘러나오는 욕망이 사실은 자기를 향한 근원적 욕망임을 알지 못한다. 안나는 에스더의 욕망을 정신적 우월감 또는 지배욕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안나가 물질-정신이라는 개념들로 에스더를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나는 자기의 욕망이 사실은 에스더에 대한 비밀스러운 욕망의 표현임을 모른다. 안나는 자신의 욕망을 에스더에게 감추기 위해 그것이 (모르는 남자에 대한) 육체적인 욕망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한다. 그러면서 안나는 이런 육체적 욕망을 에스더가 단순한 동물적 욕망으로만 해석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결과 에스더의 도덕적 금기를 부과하는 태도에 부딪히면서 반발감을 느낀다. 안나는 자신의 위장을 에스더가 간파해 주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서로 간의 근원적 욕망과 동시에 서로 간의 오인으로부터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갈등은 더욱 더 악화된다. 베르히만이 그려낸 안나와 에스더의 대결은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지옥’의 모습이다. 이제 영화장면을 통해서 에스더가 느끼는 굴욕감과 안나가 느끼는 증오감을 확인해 보자.

4

두 사람의 대립은 안나가 낮잠을 잔 이후 나가려고 할 때부터 발생한다. 에스더가 기다리라고 하자, 안나는 이에 대해 ‘왜’라고 묻는데, 이 ‘왜’라는 반문이 에스더의 감추어진 비밀한 욕망을 안나가 알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에스더는 곧 이어 자기 말을 취소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감추려 하지만 안나는 그냥 나가버린다. 이때 에스더는 자기의 욕망이 안나에게 육체적 욕망으로 오인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굴욕감을 느낀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결은 안나가 극장에서 돌아왔을 때 더욱 심화된다. 에스더는 안나의 방으로 안나를 따라와서 안나가 벗어놓은 원피스를 주워 보면서 엉덩이 부분이 더럽혀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경멸조의 미소를 짓고는 돌아가서 자기 방에서 무심한 듯 타자를 친다. 에스더는 안나의 욕망을 오인하고 단순히 육체적 욕망으로만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에스더의 이런 태도를 자신에 대한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에스더의 정신적 우월감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자, 안나는 에스더의 등 뒤로 다가와서 앞으로 자기를 ‘감시’하지 말라고 한다. 이런 ‘감시’라는 표현 속에 에스더가 부과하려는 도덕적 금기에 대한 증오감이 들어 있다. 안나는 앞으로 더욱 더 도발적으로 육체적 욕망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저녁시간에 잠시 바흐의 음악을 통해 두 사람 사이에 친근감이 되살아나지만, 안나가 웨이터를 만나기 위해 떠나려 하자, 둘 사이의 대립은 더욱 악화된다. 두 사람은 요한을 잠시 밖으로 내쫒고 다툰다.

에스더는 안나에 대해 캐묻고 싶은 욕망을 감출 수 없다. 그 욕망은 안나의 육체적 욕망을 확인하고 그것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근원적 욕망을 채우려는 태도이다. 안나는 자신이 에스더가 세운 도덕적 금기를 깨뜨린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에스더의 지배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래서 자신이 극장에서 본 남녀 정사의 모습을 전해주고, 이어서 바의 웨이터와 정사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안나는 웨이터와 호텔 객실에서 정사를 나누면서도 계속 에스더를 의식하고 있다. 성관계 중 안나는 독백을 통해 에스더가 자기를 지배해 왔음을 비난한다. 이런 둘 사이에 결정적인 대립은 요한이 알려준 대로 안나가 웨이터와 함께 정사를 나누는 방으로 에스더가 찾아갔을 때 벌어진다.

“언니는 항상 자신의 원칙만 내세우며 살아 왔잖아.”

“언니에게 주요한 것은 자존심이야. 언니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지.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살잖아.”

“언니는 항상 자신을 증오하듯이 나를 미워했던 거야”

원칙, 우월감, 증오 이것은 안나가 이해하는 에스더의 모습이다. 안나는 이런 에스더를 무너뜨리려 한다. 반면 에스더는 안나를 동물적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이런 안나를 구원하려 한다. ‘사랑’이란 그런 우월감의 표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런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의 내면적 갈등은 폭발한다. 이 영화에서 ‘침묵’은 바로 안나와 에스더 사이의 소통불능을 말한다. 이런 소통불능은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시각으로 상대방을 오인함으로써 일어난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근원적 욕망의 관계에서 서로의 위치는 다르다(안나는 나르시시즘적인 욕망구조를, 에스더는 신경증적인 욕망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타인을 자신과 상상적으로 동일시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타인을 해석하면서 이런 오인이 일어난다. 이런 오인이 거꾸로 서로의 적대감을 키우게 한다.

5

두 사람은 갇혀 있다. 그것이 베르히만이 이 영화 침묵에서 보여주는 침묵의 세계이다. 그러나 베르히만은 이런 ‘지상에서의 지옥’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행동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대립을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에스더는 안나가 웨이터와 정사를 벌리는 호텔 문 앞에 있다가 끝내 그 앞에서 쓰러진다. 그것은 에스더의 간절한 욕망을 암시한다. 그것은 안나도 마찬가지이다. 안나는 웨이터와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성관계를 갖는 안나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안나와 에스더의 이런 행동들은 그들의 해방을 암시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안나와 에스더의 욕망 구조가 고정되어 있어서 두 사람은 어떤 벗어날 수 없는 감옥 속에 영원히 갇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베르히만은 지옥을 벗어날 가능성을 오히려 소년 요한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의 경우 그의 욕망 구조는 영화 속에서 어떤 전환을 겪게 된다. 이 전환이 곧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생성과 연관된다.

낮잠 자기 전 목욕 장면에서 요한이 어머니 안나의 등을 밀다가, 어머니 등에 얼굴을 갖다 대는 장면은 요한이 아직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년 요한은 낮잠을 잔 후 장난감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호텔의 내부로 모험을 떠난다. 소년의 모험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세 가지이다. 이 모두는 소년의 성적 욕망과 관련되면서, 소년이 외디푸스적 국면을 지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소년은 복도에 붙어 있는 그림에 부딪힌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지나가면서 이 그림을 본다. 이 그림의 내용은 판 신이 요정을 붙잡는 것이다. 벌거벗은 요정의 모습은 요한에게 어머니를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어서 소년은 난쟁이들이 머무르는 객실로 들어간다. 이 난쟁이들은 안나가 들렀던 극장에서 공연하던 그 난쟁이들이다. 이들은 소년에게 여자 옷을 입히는데, 이는 동성애를 암시한다. 이 동성애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근친상간적 욕망의 합리화의 한 형태이다. 소년은 난쟁이들과 함께 놀다가 밖으로 나와서 호텔 복도에 오줌을 누는데, 그것은 성적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년은 호텔관리인을 만난다. 호텔관리인은 소년에게 자기 부모의 죽은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는 양상추에 싼 소시지를 베어 먹는 시늉을 낸다. 이것은 명백히 거세 위협을 암시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결국 호텔 안에서 소년의 모험은 외디푸스적 국면을 거쳐 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런 외디푸스적 국면이 지나간 다음 소년은 에스더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된다. 이 언어는 소년에게는 상상계를 벗어나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소년은 상징계로 들어오면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처음 기차 안에서 요한이 어머니 바로 옆에 앉았지만 떠나는 기차 안에서 소년은 어머니를 마주 대해 앉아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6

이 영화는 두 가지 내러티브로 직조된다. 그 하나는 안나와 에스더의 동성애적인 갈등이며, 베르히만은 이것을 닫힌 세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 세계가 침묵의 세계 곧 증오감과 굴욕감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지옥’의 풍경이다

또 하나는 소통이 가능한 세계이다. 이 영화에서 소통은 소년 요한의 외디푸스적 성장을 통해 제시된다. 베르히만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요한이 상상계(나르시시즘)에서 상징계(신경증)로 진입했다는 것이 아니다. 주요한 것은 욕망의 구조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외디푸스적 성장은 이런 전환의 한 가지 방식만을 보여줄 뿐이다. 외디푸스적 전환이 존재한다면, 거꾸로 신경증에서 나르시시즘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욕망의 구조적 전환이 가능하다면, 이런 전환을 통해 인간들 사이의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상에서의 지옥’이 서로 다른 욕망 구조를 지닌 사람들 사이의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욕망구조의 전환을 통해 타인을 이해할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이해가 가능하다면 이제 지상에서 더 이상 지배와 증오와 같은 현상들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세계는 단순히 상징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언어는 곧 번역을 의미한다. 하나의 언어구조에서 다른 언어구조로의 번역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곧 서로 닫힌 언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아닐까?

닫힌 세계에서 안나와 에스더는 서로 마주보면서도 동일한 거울영상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크리스털 이미지에 속한다. 열린 세계에서 요한은 욕망의 구조적인 전환에 직면한다. 이런 구조적 전환이 바로 들뢰즈가 말한 시간의 생성이다. 요한은 시간 이미지이다. 그런데 크리스털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는 서로의 이면이다. 안나와 에스더의 갈등은 요한의 생성을 축성한다. 이 영화에서 에스더가 끌어 모은 번역이 요한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이런 시간이 지옥의 풍경에서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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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본에는 신문팔이의 외침에 대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 소리들은 억압적인 침묵을 깨트리는 유일한 소리이었다.”

이병창(동아대, 철학) /

영화 『스파이더』와 편집증[철학적 인간극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스파이더(2002)』는 편집증 환자를 다루는 영화이다. 필자는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면서 라캉의 실재계 개념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없어서 막막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많은 도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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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스파이더로 불린다. 그에게 전형적으로 편집증의 증세가 나타난다. 그는 행동이 지독히 느리고, 자폐적으로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는 자기만이 아는 글자로 노트를 빽빽하게 채운다. 크로넨버그는 주인공의 심적 상태를 벽돌로 창문을 막아놓은 건물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신의 침묵[철학적 인간극장]

잉그마르 베리히만의 영화 [겨울 빛 ]

이 영화는 빛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성찬식 의례를 보여준다. 시간은 정오이다. 밖에는 이미 눈이 내렸고 앞으로 또 눈이 내릴 듯이 캄캄하다. 북유럽의 겨울 빛은 차갑고 약하다. 겨울 빛은 마치 불투명한 잿빛 유리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렴풋하게만 드러난다. 그 겨울 빛 아래 박수근의 그림에서 나오는 듯한 나목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

성당 안은 어두컴컴하다. 감독은 영화의 사운드를 아예 죽여 놓아, 성당 안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성찬식에 모인 신도들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정적 속에서 성당(루터파 교회)의 목사인 토마스가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는 내적으로 고독하다. 불확실한 현실의 온갖 짐들과 불행으로부터 그를 감싸 안아 왔던 아내가 죽은 이후, 그 충격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신앙심조차 유지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그는 내적으로 신앙을 되찾으려는 필사적 고투를 펼치고 있다. 그는 성찬식을 힘겹게, 의무를 위한 의무로서 수행하고 있다. 그의 필사적 고투를 바로 겨울 빛 그리고 또한 그 아래 앙상한 나목이 상징한다.

영화 [겨울 빛]은 베르히만 감독이 모색해 왔던 미니말리즘(minimalism)의 영화 또는 ‘실내악적(chamber) 영화’가 완성된 첫 번째 작품으로 말해진다. [겨울 빛]은 정오에서 시작하여 오후 3시에 끝난다. 장소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정오 미사와 오후 미사가 이루어지는 두개의 교회에 한정되어 있다. 사건은 교회의 한 신도의 자살과 목사와 그의 애인 사이의 만남에 한정된다. 그러나 미니말리즘 회화가 그렇듯이 평범한 사건 뒤에 은폐된 채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핏빛 사건이 전개된다. 베르히만은 여기서 죽음의 절망에 처했던 목사의 구원과 신앙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신의 부재와 인간의 자유

영화에서 첫 장면에 이어서 목사 토마스의 절망을 더욱 철저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사건은 교회의 몇 안 되는 신도 중의 하나인 어부 페르손의 자살이다. 성찬식이 끝난 뒤 페르손 부부가 목사를 찾아온다. 침묵하는 페르손을 대신해 그 부인이 남편이 감추고 있는 두려움을 토마스에게 전해준다.

페르손은 개인적인 불행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페르손은 세계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파국에 대해 두려워한다. 페르손은 중국의 아이들이 증오를 먹고 자라나고 있으며 중국이 곧 핵개발을 마치게 된다 하니 언젠가 세계가 파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이 영화가 62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고려하자) 이를 믿는다. 페르손은 이런 세계적 파국을 신이 막아줄 것을 기대한다. 페르손은 침묵하는 가운데서도 간절하게 토마스를 쳐다보지만, 토마스는 그 시선 앞에서 무기력하다. 토마스는 자신이 페르손을 구하지 못하면 페르손이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실망해서 떠나려는 페르손에게 ‘무조건적으로 살아야 한다(you must live)’고 말하면서 막아 보려했지만 이 말에 담긴 토마스의 뜻을 페르손은 이해하지 못한다.

페르손이 30분 정도 뒤에 다시 온다고 약속한 다음 토마스는 안절부절못하면서(그 심정은 이 영화에서 강박적으로 들리는 시계 초침소리로 표현된다) 페르손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그는 애인인 마르타의 편지를 읽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다시 페르손을 만난다. 이제 토마스는 자신의 진심을 페르손에게 털어 놓는다.

토마스는 자신이 어릴 때는 어머니가 모든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어서, 요람 속의 아이처럼 현실의 잔인함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목사가 되어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선원들의 사목이 되었을 때 스페인 내전을 무대의 맨 앞줄에서경험하게 되었고 거기서 현실의 잔인함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보고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신의 품 안으로 도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와 신은 이 편에 특별하게 정돈된 세계에 살고 거기서 모든 것은 의미가 있었다네. 실제 삶의 참상들은 도처에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고, 오직 나의 신을 향해서만 응시했었을 뿐이었네”

토마스에게서 이 신은 ‘불가능한, 전적으로 개인적인, 아버지와 같은 신’이며 그 신은 “인류를 사랑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신”이라고 했다. 토마스에게 이 신은 “나를… 죽음의 두려움,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신”이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이미 그런 신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신이 내가 믿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이었어. 이 신은 내가 여러 전거들로부터 빌려와서, 내 손으로 주조한 신이라네. 이해하겠나?”

무릇 누군가를 보호해 주는 신이라면, 이 신은 동시에 그를 능욕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본 현실과 이런 신을 마주하게 할 때마다 나는 알게 되었네. 그가 곧 추하고, 반역적이며, 거미 같은 신(a spider god)이라는 것을. 즉 괴물이지. 그 때문에 나는 그런 신을 빛으로부터 항상 숨겨왔었어. 나의 어둠과 외로움 속에 나는 그를 꼭 껴안고 있었지. 내가 이런 신을 드러내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 내 아내였다네. 그녀는 나를 지지해 주고, 격려하고, 도와주었고, 함정에 빠진 나를 건져 올렸지. 그 함정이란 바로 나의 꿈을 말하는 것이네.”

토마스에게서 자기를 보호해 주는 신을 현실에서 대신해 주는 것이 바로 그의 아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죽은 이후, 그를 보호해 주는 신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가 부딪힌 신의 침묵이다.

토마스는 인류의 파멸 앞에선 페르손의 고뇌가 사실은 토마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신을 찾으려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페르손에게 이런 그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신의 침묵을 말하였던 것이다.

토마스는 페르손에게 이런 의미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런 신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잔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에 못지않게 행복과 평화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행복과 평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일 것이다. 토마스는 이 모든 것들은 자연에 맡겨진 질서라고 말한다. 여기에 굳이 창조자인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허공에 떠있는 별이나, 세계, 그리고 하늘,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발생하고, 서로 서로 발생시킨다네. 창조자란 없고,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조정하는 자란 없다네. 또한 우리의 머리를 돌게 만드는 불가해한 생각이란 것도 없다네.”

이윽고 토마스는 페르손에게 말한다.

“그러니 어둠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당신도 곧 당신의 딸기밭과 꽃향기를 얻을 것이니,… 멀지 않아 지상의 천국도 나타날 것이라네.”

토마스는 그래서 페르손에게 그때가 오기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토마스의 이런 고백은 페르손을 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페르손에게는 이제 그가 찾는 신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페르손은 토마스를 떠나 결국 자살하게 된다. 페르손이 떠난 다음 토마스는 절망에 사로잡혀서 마침내 이렇게 외친다.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은 신의 부재에 대한 증명이다. 그러나 그런 부재증명은 자신을 보호하는 신, 아니 자신을 능욕하는 거미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토마스 자신에게도 이런 고백은 처음이었다. 그의 고백은 그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는 생각이 비로소 뚜렷한 형상을 얻은 것과 같았다. 그러기에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유이다. 마침내 자유이다.”

토마스의 이 고백은 마치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이 사형당하면서 외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베르히만은 극적인 역설을 보여준다. 이 장면을 잘 보면, 거미 신의 부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인한 순간, 마침내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혀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처음으로 빛이 비추어진다. 하지만 이 빛은 아직 겨울 빛이다. 그의 절망은 아직도 캄캄하다.

신의 침묵과 신의 현존

죽음의 절망에 사로잡혀 있는 토마스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짝사랑하는 마르타의 고백이다.

마르타는 이미 오래 전에 토마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토마스는 지금껏 이 편지를 그의 지갑에 넣어두고 펼쳐보지 않았다. 그런데 안절부절못하며 페르손을 기다리는 중에 마치 위안을 얻으려는 듯이 그 편지를 꺼내 읽는다.

베르히만은 이 장면에서 편지를 읽는 토마스에 대한 쇼트로부터 편지의 내용을 낭독하는 마르타의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으로 바로 넘어간다. 가운데 잠시 플래시백 화면이 삽입되지만 무척이나 긴 이 장면 내내 마르타의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이 롱 테이크로 이어진다. 마르타는 정면에서 눈도 한번 깜빡거리지 않고 관객을 응시한다. 이런 브레히트적인 응시 때문에 관객은 마르타로부터 소원화될 것처럼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르타와 동일시되어 스스로가 마르타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편지에서 마르타는 자신의 누추한 삶을 고백한다. 못생긴 모습, 서투른 솜씨, 온 몸에 번지는 습진 등. 마르타는 이런 누추함 때문에 불만이다. 그녀는 자신의 누추함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주여, 나는 그렇게 스스로 말했어요, 왜 당신은 나를 영원히 불만족한 인간으로 창조하였나요? 그렇게 두려워하고 그렇게 씁쓸하도록 말이에요. 왜 나는 내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이해해야 하나요? 그리고 왜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조차 무관심하게 사는 이 지옥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그녀는 유물론자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누추한 삶에 지친 그녀는 내기를 건다. 자신에게 신이 은총을 베풀어 그녀의 손바닥의 습진을 고쳐준다면, 신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그런 기적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절망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내기를 건다. 비록 신이 자연을 뜯어고치는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렇다면 자기에게 그런 의미를 달라고 악을 쓴다.

“만일 나의 고통 속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게 뭔지 말해 주세요. 나는 내 고통을 불평 없이 참아나가겠어요. 나는 강하답니다. 당신은 나를 육체에서나 정신에서 그렇게 무섭도록 강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강함으로 할 일을 주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나의 삶에 의미를 주세요. 나는 당신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겠어요.”

결국 마르타가 포착한 의미란 바로 토마스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르타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토마스에게 강요한다.

“이 가을, 나는 내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깨달았어요. 아마 여기서 당신이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마음이 분명해지기를 기도했어요. 마침내 나는 그런 명료함을 얻었어요.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는 내 힘을 적용할 임무를 기도했어요. 그리고 그걸 얻었어요. 그건 바로 당신이에요.”

마르타의 이런 신앙도 왜곡되어 있다. 마르타는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집착한다. 그런데 이런 집착은 자신의 누추함에 대한 보상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의미는 타인의 동의 없는 일방적으로 부여한 것이며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자기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신의 명령으로 축성한다.

베르히만이 여기서 그려낸 마르타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왔지 않는가?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머니의 사랑은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그러기에 그 사랑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이다.

베르히만은 후일 마르타의 이런 사랑을 [안나의 열정]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여기서 안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사랑을 이상화한다. 그리고 그 이상이 현실에 실현되고 있다고 자기를 기만한다. 결과적으로 그 사랑에 의해 상대방은 질식하고 그가 이를 벗어나려 하자, 안나는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시도한다. 관객은 그녀의 집착과 기만이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보상이었음을 알고 그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녀의 집념을 무서워한다.

마르타의 이런 보상을 위한 사랑 앞에서, 토마스는 다시 한 번 깊이 절망에 빠진다. 토마스는 마르타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녀를 외면한다. 마침내 페르손의 자살 소식을 듣고 토마스는 서둘러 현장으로 간다. 계곡물이 굉음을 내면서 흘러가는 다리목에 페르손이 죽어 있다. 카메라는 롱 쇼트로 토마스의 움직임을 쫒는다. 주요한 것은 이 모든 사건들을 덮고 있는 굉음이다. 그 굉음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토마스는 뒤따라온 마르타와 함께 그녀가 선생으로 일하는 학교에 들른다. 여기서 토마스는 마르타에게 단절을 선언한다.

“나는 당신의 사랑과 염려에도, 나에 대한 당신의 안달에도, 당신의 좋은 충고에도, 당신의 작은 촛불자루에도 그리고 식탁보에도 지쳤소. 나는 당신의 근시, 서투르게 보이는 손, 당신의 불안과 사랑할 때의 소심함에 물렸소. 당신은 내가 당신의 신체조건, 당신의 나쁜 위장과 당신의 습진, 당신의 월경, 당신의 얼은 뺨에 압도되도록 강제했소. 단연코 이 모든 쓰레기들을 이 백치 같은 상황들의 덩어리를 나는 버리겠소. 나는 이 모든 것에 그리고 당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지쳤소.”

토마스의 이 말은 거꾸로 마르타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강요를 입증해 준다. 토마스는 마르타의 신앙이 결국 마르타 자신의 삶의 누추함을 보상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런 폭로와 더불어 토마스는 구토를 느낀다. 토마스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외친다.

“…나를 평화롭게 내버려 둘 수 없소? 입 다물어 줄 수 없소”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이렇게 단절은 선언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마치 심판을 내리는 정의의 신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혹한 심판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이 장면에서 베르히만은 토마스의 모습 뒤에 보이는 창가에 화분을 놓아두었다. 거기에는 꽃이 피어 있다.

그리고 자살한 어부 페르손이 나간 다음 성당 안에 겨울 빛이 비추어들었듯이, 이제 마르타의 보상하는 신을 폭로한 다음 교실 문을 나서려는 토마스 앞에 있는 창문틀에는 ‘아니다’를 의미하려는 듯 X 표식이 있다. 그것은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듯한 알레고리와 같이 기능한다.

토마스는 그 표식 앞에서 문득 멈추고 뒤로 돌아서서 마르타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가자고.

“나와 함께 프로스트나스 교회(오후 예배의 장소)로 가지 않을래요? 역겨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할게요”

하이데거와 신

이 영화를 통해서 베르히만은 신이 부재함을 확인한다. 이제 인간에게 안전을 확보해 주고, 보상을 제공하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신은 인간의 심리의 필연성에 따라서 만들어진 가짜 신, 곧 심리적 신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신을 코트 위에 붙은 먼지처럼 가볍게 떨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인간은 이 벌거벗은 물질적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일까?

베르히만의 대답은 ‘아니다’는 것이다. 즉 X이다. 이 물질적 현실 속에는 베르히만이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와 사랑은 비-물질적인 것 따라서 신적인 것이다.

자유와 사랑의 근거가 신이라면, 신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비로소 자유와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신은 이 지점에서 더욱 침묵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의 침묵이야말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닐까? 그가 안전과 보상의 신을 버린 이후에도 여전히 신의 침묵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깊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갈망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물질적 현실이 이런 갈망의 근거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유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다는 것은 신이 그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는 물음의 존재라고 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자들은 모두 성스러운 어둠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만이 고통스럽게도 이런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진다. 왜 그런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이 바로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존재자이면서 이미 존재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기에 그는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던질 수 있고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하고 있는 토마스에게 바로 이 절망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으로의 길이 열린다. 토마스 앞에 출현한 ‘겨울 빛’과 ‘표식 X’는 이런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토마스에게 이미 빛이 비추어져 있다. 그러나 토마스 자신은 아직 이를 모르고 있다. 마침내 토마스 자신이 자신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내적인 빛을 느끼게 된다. 이 내적 빛의 확인을 향한 최종의 길을 토마스와 마르타가 함께 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프로스트나스의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토마스는 교회지기 곱사등이 알고와 대화한다. 반면 마르타는 교회 피아니스트 블롬의 유혹을 받는다. 이 두 시컨스는 서로 교차되면서 이 사이에 마르타와 토마스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감(communion)이 이루어진다.

먼저 교회지기 알고의 고백이 이어진다. 알고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토마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즉 그는 예수의 수난은 결코 육체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육체적 고통이라면 겨우 4시간 정도에 거친 것이고, 그래서 곱사등이로 평생을 산 자기의 고통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진정한 고통은 그의 제자들이 그가 제시했던 삶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데 있다고 한다. 예수는 그의 삶이 무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에 빠졌고, 그러기에 마침내 “주여, 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알고의 설명을 토마스는 다만 듣고 있다. 신의 침묵 앞에서 절망에 빠진 그의 심정은 알고가 설명한 예수의 심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순간 그는 이 절망이야말로 곧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러기에 베르히만은 고뇌하는 그의 얼굴 위에 조그만 등불을 달아맨다.

알고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마르타는 문밖에서 알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 마르타에게 교회 피아니스트 블롬이 접근한다. 블롬은 토마스가 죽음과 부패의 손아귀에 빠져 있다고 밝히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라고 말한다. 블롬은 마르타에게 물질적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마르타는 침묵한다. 그녀의 침묵 속에는 이미 어떤 결단이 내려져 있다.
영화 [겨울 빛]의 한 장면

마르타의 사랑은 비록 처음에는 보상의 욕망에서 출현했지만 그녀의 헌신적 사랑은 이미 새로운 각성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단절 선언을 통해 마르타는 보상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난다. 아니 보상의 욕망은 실패하고 만다. 그 순간 이미 그녀는 물질의 세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토마스가 건네 온 손을 잡고 프로스타나스로 오는 내내 침묵한다. 이 침묵은 신의 침묵에 대응하는 인간의 침묵이다. 신의 침묵이 보상과 보호의 거부라 한다면, 인간의 침묵은 물질적 현실의 거부이다. 마르타의 침묵은 곧 블롬의 유혹에 대한 침묵이다. 이 침묵 속에서 마르타는 이미 사랑으로의 길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자유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신의 존재가 아닐까? 신은 인간의 사랑이며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고는 신도라고는 마르타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예배를 시작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토마스가 대답하기 전에 이미 알고는 스스로 대답하면서 예배시작을 알리는 불을 켠다. 토마스는 일어나 예배를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마르타의 깨달음과 토마스의 깨달음이 마치 연도처럼 서로 교차편집되어 있어 아름다운 화면을 이루고 있다.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교감이 전기처럼 우리 관객에게 전달되어 온다.

이병창(동아대,철학) /

하얀 리본-계몽의 진실 [철학적 인간극장]

엄숙한 정적.

이 영화는 일차 세계 대전 직전 오스트리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지주의 성관을 교회와 농장 관리인의 집,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가 둘러싸고 있다. 여기는 아직도 중세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 사회는 지주인 남작과 엄격한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다. 이 사회는 사람들이 입은 목을 채운 검은 옷처럼 숨 막힐 듯하다. 흑백 화면에 강력한 키 라이트, 고딕적 느낌이 드는 붉은 벽돌 건물들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표면적으로 엄숙한 정적이 흐르는 성관 마을의 이면에서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다 같이 고리를 이루어 지주와 교회의 지배라는 억압적 표면을 뚫고 튀어 나왔다. 그러나 다시 엄숙한 정적이 마을의 동요를 짓누르고 말았다. 그 결과 사건들은 비현실적인 꿈처럼 보이고, 무의식 속의 모호한 충동처럼 존재한다.

이 사건들은 당시 마을 선생님이었던 화자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나중에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재단사가 되었다. 그는 그때 이 마을 남작 부인의 갓난아이의 보모인 열일곱 살의 처녀를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성과 풋풋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남녀 관계에 관해 아직도 엄격했던 사회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연애는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사건들을 반조해주는 거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들을 관객에게 서술해 주는 선생님의 시선조차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건들 가운데 많은 부분에 아이들이 관련되지만 화자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사건 속에서 아이들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다가오는 사건을 다만 예감하지만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그런 사건을 저지르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화자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암시되는 그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사건은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모호함은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려 의도했던 효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작농과 목사의 아이들

사건은 세 갈래에서 일어난다. 나머지 두 가지 갈래들은 화자의 이야기에서 중심을 이루는 갈래를 덩굴손처럼 에워싼다. 우선 하나의 갈래는 한 소작농의 부인의 사고로 인한 죽음에서 비롯된다. 남작은 그 부인을 제재소에서 일하게 했는데, 제재소의 마루가 오래되어 함몰되면서 그 부인은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소작농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죽음이 남작의 책임이라 생각하면서 남작에게 분노한다. 반면 아이들의 아버지인 소작농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아이들의 분노를 억누르려 하지만 아이들의 분노는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남작과 소작농 가족 사이에 긴장상황이 벌어진다.

이 아이들의 분노와 연관하여 몇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작의 아이(이름이 ‘지기’이다)가 밤에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맞고 숲속에 내버려진다. 또한 마을 축제 날 소작농의 장남이 양배추 밭을 낫으로 베어 뭉그러뜨린다. 이어서 남작의 헛간에 누군가 불을 지른다. 영화에서 이 방화사건은 아마도 소작농의 장남에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암시된다. 그런데 소작농은 스스로 그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그의 장례 행렬에 도망갔던 장남이 돌아와 참석한다.

이런 소작농과의 긴장은 남작과 남작 부인 사이의 불화와 교착되어 있다. 약간 바람기를 보이는(가정교사와의 협주 장면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남작 부인은 권태로운 시골생활을 견디지 못한다. 부인은 자신의 아이가 관련되는 이 소작농과의 대립을 핑계로 마을을 떠나 멀리 이태리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남작의 아이 지기가 농장 관리인의 아이들과 놀다가, 관리인의 아이들이 지기가 가지고 노는 피리를 빼앗으려다가 물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한다. 남작 부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마을을 영원히 떠나겠다고 통고한다. 이때 남작 부인은 대담하게도 남작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남작 부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지배자들의 내면적인 공허를 보여준다. 이런 내면적 공허는 소작농 아이들의 이미 억누를 수 없게 된 저항과 맞물려 있다.

또 하나의 갈래는 이 마을 교회 목사의 집안에서 일어난다. 목사는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운다. 그들의 사소한 잘못조차 매로 다스려지고, 한 아이의 잘못은 형제 전체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목사의 정신적으로 엄격한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 햐얀 리본이다. 잘못을 범한 아이는 죄를 용서받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하얀 리본을 매달고 있어야 한다.

목사의 거듭된 처벌에 제일 큰 딸(“첫째 딸”이 적절할 듯.) ‘클라라’가 저항한다. 클라라는 저녁에 늦게 집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이미 한 차례 하얀 리본을 매달았다. 새해가 되어 용서받은 클라라는 이번에는 견진성사를 위한 학습에 모인 아이들이 장난치며 놀았다는 것에 책임을 지고 목사로부터 다시 한 번 처벌받는다. 자신의 무고함을 고집하면서 클라라는 저항한다. 클라라는 학교에서 벌을 서다가 쓰러진다. 병이 나은 뒤 이번에는 아버지 목사가 아끼는 새를 조롱에서 꺼내 가위로 찔러 죽인다. 새는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처럼 가위에 꽂힌 채 목사의 책상 위에 놓여진다.

이런 두 갈래 사건들은 남작이나 교회처럼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힘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이 저항은 이미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꿈틀거리는 충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그 힘은 미약하여 압도적인 억압의 힘 아래서 형체를 얻지 못하고 스러지고 만다.

세속적 유물론자

이 영화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사건은 성관 마을의 의사와 연관된다. 그는 세속적 유물론자이면서, 인간을 시니컬하게 파악하는 냉혹한 지배자이다. 이 사건은 어쩌면 피비린내 나는 선정적인 사건이다. 나중에 가서야 밝혀지지만(그것조차도 불충분하여 관객의 오랜 추리 끝에서야 비로소 짐작되는데) 그는 그를 돕던 마을의 산파와 정을 통한다. 의사에 대해 그녀는 굴종적이지만, 집착이 강한 여자이다.

그녀는 의사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이를 감추고 낙태시키려다가 잘못하여 장애아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이 ‘칼’이다. 그녀는 이 아이에게 애정을 기울여 키우지만 그녀에게서 아이는 다만 의사를 잡아두는 인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녀는 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애아의 출생의 비밀, 의사 부인의 죽음 등은 영화 속에서 소문으로 취급되지만,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된 관계, 당시 사회에서는 억압된 욕망의 관계는 마침내 수면에 떠오르면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의사가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질러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는 누군가 나무 사이에 매어둔 끈에 걸려 말이 넘어지면서 팔을 다치고 30킬로미터 떨어진 병원에 입원한다. 그러자 마을의 산파는 의사의 아이들-큰 딸인 ‘안나’와 작은 아이-을 돌본다는 이유로 의사의 집으로 들어온다. 그날 그녀는 칼을 데리러 학교로 오는데 그녀의 득의의 걸음걸이는 이미 그녀가 바로 범인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암시한다. 그녀는 학교에서 돌아가는 아이들을 인사하지 않는다고 야단치기도 한다.

얼마 지나서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돌아온다. 의사는 그 사이에 훌쩍 커버린 열네 살짜리 큰딸, ‘안나’의 모습에 놀란다. 영화는 의사가 큰딸을 어떻게 범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안나는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오히려 기뻐한다. 안나와 관계하면서 의사는 드디어 산파에게 떠나기를 명령한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이용했던 산파에게 냉혹하게 말한다. 그녀의 추한 모습 때문에 토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한다.

이렇게 모욕 받은 산파의 집착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충분한 단서를 보여주지 않고 그저 암시만 할 뿐이다. 우선 산파는 칼의 눈을 칼로 찌른다. 그것이 그녀 자신의 짓이었다는 사실은 칼의 눈을 치료하는 의사를 지켜보는 산파의 냉정한 모습에서 충분히 암시된다. 더구나 칼의 상처와 더불어 남겨진 편지는 신의 이름으로 경고하고 있다. 거기에는 칼이 대신 처벌 받는다고 적혀 있다.

이 사건 후에도 의사는 여전히 산파에게 냉혹한데 그것은 그가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산파의 집착은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바로 일차 세계 대전의 서곡을 알리는 황태자의 저격사건과 같은 날 벌어진다. 영화는 이 사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다만 사건 직후 산파가 당황하면서 영화의 화자인 선생님이 타고 가던 자전거를 빼앗아 타고 떠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어서 영화는 산파의 집이 굳게 잠겨 있고, 이어서 의사의 집도 진료 중단이라는 팻말이 걸린 채 잠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영화는 이틀 후 남작의 지시에 의해 사람들이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간 이후 집안에 가득한 정적만을 소개한다. 감독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감추어 버리고 만다.

계몽의 진실

감독은 영화에서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전쟁이 나자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모여든다. 마을 농부들 그리고 남작의 가족, 최후로 목사가 등장한다. 관객들로서는 당연히 목사가 이 교회의 앞으로 걸어와서 미사를 집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목사는 앞으로 걸어오다가 다시 신도들이 앉던 연도에 앉고 만다.

목사가 있어야 할 지점에는 아무도 없다. 그 지점에는 관객들이 대신 앉아 있다. 아니면 그 장면은 신의 심판의 장면으로 보아야 할까? 어떻든 이런 엔딩의 처리는 감독이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선언으로 생각된다. 모두들 관객이 되어(아니면 신이 되어) 이 사건들을 판단해 보라. 그런데 비평가로서는 표면적 태도와 달리 은밀하게 암시된 감독의 판단을 관객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독의 은밀한 판단은 무엇인가?

영화의 중심이 된 사건은 가공할만한 사건이다. 여기에는 근친상간적 욕망이나 도착적 살해라는 선정적 테마가 깔려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사건들을 ‘성애와 스릴의 영화’라는 장르 문법으로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심지어 사건에 대한 약간의 암시조차 감추어버릴 정도이다. 작가는 이 사건을 남작의 사회적 지배와 기독교의 정신적 지배와 고리를 맺게 한다. 그것은 작가가 이 사건을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맥락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이데올로기의 분석과 모럴의 분석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적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의 태도는 모럴의 관점으로 보인다.

사건을 보는 작가의 모럴과 연관하여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교회 목사의 태도이다. 그의 엄격한 지배적 태도에 실낱같은 틈이 벌어진다. 아버지인 목사는 클라라가 새를 죽여 책상에 놓아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견진성사를 클라라에게 베푼다. 이어서 목사의 작은 아이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키우던 다친 새를 클라라가 죽인 새의 대신으로 아버지에게 건네준다. 이는 용서와 고해 그리고 신의 은총이라는 기독교적 정신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건을 보는 작가의 모럴이다.

작가의 이런 모럴의 관점에서 볼 때, 의사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오만의 극치이다. 영화 속에서 의사가 산파에게 던지는 독설은 세속적 유물론자의 극단을 보여준다. 세속적 유물론자로서 그에게 인간이란 욕망일 뿐이다. 타인은 이런 욕망의 수단이며, 그 욕망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그는 자유이다.

세속적 유물론자의 이런 모습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에서 다루었던 계몽주의자의 모습과 닮았다. 헤겔은 계몽주의의 근본입장을 ‘유용성’이라는 모럴로 파악한다. 자신만이 유일한 자기확실성이며, 다른 모든 것(보편성)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유용성)이라는 것이다. 모든 다른 것은 그 스스로 내재적인 어떤 가치도 없는 것(허무성)이다. 헤겔은 이처럼 계몽주의를 ‘유용성’과 ‘보편성’ 그리고 ‘허무성’을 포괄하는 개념체계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장은 계몽주의를 그저 보편성(동일성)의 원리로 파악하는 데 그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보다 더욱 가까이 계몽의 진실에 다가갔다 하겠다. 헤겔이 말한 계몽의 진실이 바로 이 영화에서 의사의 모습을 통해 확인된다.

이병창(동아대,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