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일본 드라마 ‘mother’ / 신우현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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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생각하기]

당신이 생각하는 모성은?

– 일본 드라마 ‘mother’를 보고 –
글: 신우현 (상지대 강사)

 

모성신화 추종자의 고백

 

지금 나는 모성신화를 믿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희생적이고도 절대적인 사랑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도 꽤나 오랫동안 이 신화의 추종자였다. 결혼 전에는 친정어머니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엄마가 이래?’ 라며 이런저런 불평을 해댔다. 엄마라면 당연히 자기희생적이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이를 낳고나서는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처음 아이를 낳고 삼 년 간은 무척 힘들었다. 이 시기에 아이는 엄마의 모든 시간과 주의력과 육체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책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좋아하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모두 허용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할 때 젖을 물려야 했으며, 수시로 찾아오는 젖몸살, 젖 먹이느라 손목이 나가서 침을 맞아야 했던 일 등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일로 육체적인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봐도 내 몸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 일본 드라마 머더mother

게다가 아이가 좀 더 크자 육체적인 고통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 끼니를 챙기는 등의 엄마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 온전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고 사회의 일원으로 규범을 익히도록 돕는 일,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바른 방법 등 모두 어려운 일 투성이였다. 매일 자기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러니 자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부족한 엄마인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일과 나만의 시간을 원하는 내가 또 있었다.

나는 현명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이기적이어서 헌신적이지도 않은 열등한 엄마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모성이 부족한 여자구나.

일본 드라마 ‘mother’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마더’는 김혜자 씨가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다던 한국의 영화가 아니다. 전해 듣기로는 모자란 아들을 지키려고 엄청나게 싸워나가는 엄마가 그려졌단다. 하지만, 가뜩이나 엄마로서 열등감에 싸여 있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평상시 즐겨가는 블로그에서 이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무척이나 짜임새가 있는 이야기가 좋았고, 특히 여덟 살 여자아이 역할을 했던 아역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희생적인 어머니를 찬양하는 모성신화를 신봉하는 작품이 아니라서 좋았다.

찾아보니 ‘mother’는 2010년 4월부터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TV 드라마였다. 진지한 소재에 비해 16%라는 상당히 높은 시청률로 보인 것으로 미루어 일본에서도 꽤나 호응이 컸던 작품이다. 게다가 아동학대와 유괴라는 선정적인 소재의 이야기라 자칫하다가는 막장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도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라는 평가받고 있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스즈하라 나오는 30대 중반의 철새를 연구하는 대학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연구소가 폐쇄되는 바람에 아이를 싫어하면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임시로 떠맡은 학급의 담임으로서 미치키 레나라는 8살짜리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레나는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어 학교로부터 아동학대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받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로 방관하던 나오는 우연히 영하 4도의 날씨에 얇은 원피스 바람으로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진 채 골목에 버려져 있던 레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나오는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여 레나를 데리고 떠난다. 하지만, 생모가 아닌 여자가 아이에게 모성을 품는 것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다. 결국 나오는 유괴범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성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나오가 레나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학대받던 아이를 보호하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아동보호소와 경찰이 부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기를 놓쳐 학대당하던 아이가 죽을 수 있다 해도, 새로운 연구소의 일자리까지 마다하고 잡히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유괴범이 되기로 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사실 나오는 생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였다.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때문에 나오는 친자식 못지않게 사랑해준 양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버려질 당시 자신이 웃는 것을 보고 안심한 생모가 자신을 떠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버려진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오가 눈앞에서 처절하게 버려진 레나를 보고 외면할 수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없다. 처음에 나오는 츠쿠미(나오가 엄마로서 레나에게 다시 붙인 이름)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하지만, 츠쿠미의 손이 커지고 키가 크는 걸 보고 기뻐하면서, 식사를 챙겨주고, 발에 맞는 편한 신발을 사주고, 도망다니는 처지에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에 보낸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오는 배 아파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게 된다. 자신이 엄마이기를 자처하면서 츠쿠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구하려 하고,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

나오는 뒤쫓아 온 레나의 생모에게 아이는 부모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니까 진짜 엄마의 품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행복이라면, 레나를 돌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만일 나오가 버린 아이를 구원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어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면, 나오가 체포된 뒤에 신문에 난 기사처럼 독신 여성의 외로운 마음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였다면, 어떤 이유로도 생모에게 츠쿠미를 돌려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츠쿠미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나오는 엄마로서의 사랑을 츠쿠미에게 쏟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오의 사랑은 기존의 모성 신화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환타지 안에서 자신이 낳지도 않은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하는 나오는 절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스스로 ‘이 아이는 내 아이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현실로 실현하여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유지된다. 아이의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을 통해서 사랑은 현실화된다.

모성은 어떻게 상실되는가

 

레나의 생모는 드라마의 중반까지도 남자에게 미쳐 자신이 낳은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이해될 수 없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레나는 감수성이 뛰어나며 명랑하고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답지 않다. 과연, 드라마 중반부에는 레나와 나오를 뒤쫓아 온 레나 생모의 과거가 나온다.

레나의 생모는 원래 다정하고 배려 넘치는 사랑을 주는 엄마였다. 뉴스에 보도되는 아동학대의 사건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레나 아빠와 이혼하면서 점점 망가진다.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집안일을 하고, 점점 커가는 아이의 양육을 담당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도움이 될 만한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전혀 없는 상황은 레나의 생모를 막다른 벽으로 몰고 간다.

숨을 돌리러 들어간 술집에서 만난 남자를 집에 들이게 되고, 그 남자는 재미로 레나를 벽장에 가두거나 목도리로 목을 조르는 등의 학대를 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만류했지만 남자가 집을 나가려 하자 레나의 생모는 레나를 방치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조숙한 레나가 엄마를 감싸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 이웃에 몸의 상처에 대해 거짓말을 하자 오히려 그 거짓말에 숨어버린다.

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레나는 어느날 밤 엄마에게 이제는 도와달라고 울면서 요청한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이를 외면했고, 다시 남자가 레나에게 원피스를 입혀 화장을 시키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는 이번에는 자신이 원피스 차림의 레나를 검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골목에 내놓고 외출을 해버린다.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을 혼자서 힘겹게 하면서 애쓰지만 결국 망가져버린 레나의 생모 이야기는 충분히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었다. 영화에서처럼 극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자신을 엄청나게 희생하는 엄마만 위대한 엄마가 아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상의 무게를 견디면서 끊임없이 아이와 자신을 위해 무엇이 좋은지 고민하고 삶을 살아온 모든 엄마들은 위대하다.

하지만, 레나의 생모는 결국 자신을 놓아버렸고, 아이도 놓아버렸다. 자신이 직접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이와의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드라마에는 레나의 생모가 쫓아와서 레나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레나가 울며 보호를 요청했을 때도 외면하고, 딸을 쓰레기봉투로 포장해 버린 엄마면서도 말이다. 자신은 사랑하기를 그만두어도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성은 상실될 수 있다. 엄마라고 해서 자연스레 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배려하고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엄마로서의 사랑은 없어진다. 가꾸지 않으면 사랑은 상실된다.

모성 신화가 극복되어야 하는 이유

 

레나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엄마라면, 좀 더 강하게 자신을 추스르고, 아이를 사랑했어야 했다고 가르치는 것도 쉽다. 하지만, 누가 레나의 생모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레나 생모의 잘못을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존을 추구하는 약한 자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풀이하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계 맺은 첫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호감의 감정이라 풀이하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현실 속에서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아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방기하고 학대하는 것은 범죄다. 하지만, 가사와 양육, 생계유지까지 혼자서 담당해야 했던 레나 생모의 실패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모성신화에 비추어 레나 생모를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모성 신화는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엄마에게 떠넘기는 전략을 수행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에 아이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주고 배려한다. 엄마의 적극적인 배려와 사랑은 성장해야 하는 아이를 제대로 돕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올바른 의미의 양육은 엄마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아빠의 사랑과 도움도 필요하고 사회의 제도적인 뒷받침도 필요하다.

현실 속의 엄마는 모성 신화 속의 엄마처럼 강하지 않다. 그저 나약한 인간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서 사랑하는 아이와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워가며 살아나갈 뿐이다. 그래서 엄마는 강해져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본래적으로 자기희생적이고도 강한 모성을 지니는 존재라고 신화로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비극을 낳는다. 레나 생모와 같은 방황하는 엄마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힘 낼 수 있었을 엄마들이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는 힘껏 아이를 사랑으로 안아 줄 수 있었을 아빠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게 되고, 아이들은 받을 수 있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모성 신화가 강조될수록 양육에 2차적인 책임이 있는 사회는 그 책임을 면하게 된다.

되돌아오는 모성신화

 

드라마의 최고 반전은 나오의 생모가 나오를 버린 이유다.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산 듯한 그녀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막다른 골목의 나오와 츠쿠미를 있는 힘껏 돕는다. 게다가 나오의 생모가 츠쿠미에 대해 쏟는 사랑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배려 깊은 할머니의 사랑이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나오를 버렸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드라마 중반에 나오의 생모는 폭력을 행사하던 남편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살인을 저지르고 딸과 도망을 다니다가 나오를 버린 뒤 경찰에 체포되어 13년을 복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결말 부분에 가면 사실은 어린 나오가 엄마를 구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고, (엄마는) 딸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암시가 나온다.

드라마를 볼 때는 이 부분을 보면서 ‘아아,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그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 마음이 불편해졌는데 제작진이 모성신화를 이야기의 절정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승부처로 사용했다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었다.

한 때 잘못한 엄마여도, 아이를 버리는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속죄하고 진심으로 아이를 대했다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저렇게까지 강한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 아니었을까? 오히려 나오의 생모가 과거에 잘못이 있었던 설정으로 딸과 화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주제의식에 맞았던 것 아닐까? 모성신화는 문화 상품 생산의 산업적 전략에서 더 부풀려져왔던 것인 걸까? 라고 부족한 엄마인 나는 계속 뇌까리고 있었다.

사랑, 그리고 또 사랑

 

나오는 츠쿠미를 엄마로서 사랑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츠쿠미를 구하고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차가운 무표정의 얼굴로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나오는 츠쿠미의 엄마가 되면서 웃음을 서서히 되찾는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욱이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게 되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게 되었고, 버림받은 상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사랑을 낳게 되었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지를 갖는 일, 그 상대인 아이를 끊임없이 지켜보면서 배려하는 일은 힘들지만 희생적이지만은 않다. 아이와 사랑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엄마이고, 소중한 사람의 존재 덕분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엄마이기 때문이다. 모성이 부족한 엄마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손발이 오그라들더라도 말해보고 싶다. 믿는다. 사랑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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