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을 한 여자와 페미니즘적 주체[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황 주 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조선 후기에는 남장을 한 여자가 주인공인 여성 영웅소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등의 소설은 당시의 답답한 가부장제적 현실을 벗어나려고 했던 여성들의 열망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21세기에도 남장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커피프린스 1호점>(2007)을 시작으로, <바람의 화원>(2008), <선덕여왕>(2009), <미남이시네요> (2009), <성균관 스캔들>(2010) 등의 드라마는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방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위 시대, 알파 걸, 역차별 등의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공격하는 시대에 쏟아져 나온 남장 여자를 다루는 드라마를 우리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라오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이야기의 한 축인 러브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인 여성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남장을 하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한다. 이런저런 사건 사고 끝에 서로 호감을 갖게 된 남녀 주인공. (<선덕여왕>을 제외하면)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여주인공에게 마음을 고백하면, 여주인공은 사실은 자신이 여자였노라고 털어놓고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성녀와 창녀, 캔디같이 착한 여자와 이라이자 같은 나쁜 여자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다양해진 여성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조금씩 변주한 것에 그쳤다. 씩씩하거나 좀 남자 같은 데가 있는 여성은 꼭 한번 정도는 연약하고 순진한 면을 보이고, 혹은 진정한 사랑을 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 그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고은찬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한다.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줄곧 소위 여성스러운 면보다는 남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던 터라 남자행세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주인공과 서로의 애정을 확인 한 후, 본격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난 고은찬은 달라진 모습으로 귀국한다.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았지만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해서 훨씬 더 여성스러워진 것이다.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는 소위 4차원의 민폐형 캐릭터라서 전형적으로 얌전하고 착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해줄 남자가 필요한 약하고 순진한 여자다.

두 여자 모두 결말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의 품에 덥석 안기는 대신 각자의 삶의 계획에 따라 멀리 떠난다. 『방한림전』이나 『옥주호연』에서 여성 영웅들이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과 달리, 남장을 한 여성 캐릭터들은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고은찬과 고미녀가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뛰어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체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거나, 이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이 드라마들이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연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기 때문에 갖는 자연스러운 한계일 것이다. 현대를 사는 두 주인공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서 혹은 목숨처럼 소중한 꿈을 위해서 남장을 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달달하고 설레는 사랑 이야기에 무겁고 심각한 고민 따위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진화하는 남장 여자

하지만 남장 여자가 살아가는 무대를 먼 과거로 옮기면 오히려 여성 캐릭터는 조금 더 진화한다.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다른 한 축은 여자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이다. 조선 후기 여성영웅 소설에서처럼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역경 속에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찾게 되거나 이루게 된다. 앞의 두 드라마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사극인 <바람의 화원>, <선덕여왕>, 그리고 <성균관 스캔들>은 여자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페미니즘적 여성 주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은 소위 여성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남성적인 정치 질서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바람의 화원>의 윤복도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만 역시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반면 윤희는 이 두 인물의 한계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에 도전하는 인물이다.

윤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남동생은 병약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지금으로 치면 십대 여성 가장인 셈이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데다 스스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윤희는 남장을 하고 글을 팔아 돈을 벌었다. 과장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임금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윤희는 세 명의 꽃미남들과 동고동락 하게 된다. 물론 생계유지와 어명이라는 이유도 주요했지만, 윤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렇게 윤희가 생계와 꿈을 위해 남자의 모습으로 성균관에 들어간 상황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질서를 따라야만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윤희는 남성적 특성을 체현함으로써 남성적 질서를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비판하며 그 질서를 이겨내는 인물이다. 윤희는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성균관에서 벌어지는 체육활동에서도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자인 윤희가 남자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권위는 가부장제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개혁과 개방을 주장했던 정약용조차도 여자인 윤희가 학문을 탐하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희는 그런 스승에게 ‘남자와 동등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스승의 허를 찌르는 질문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안 된다는 말로는 절 단념시키실 수 없습니다. 계집의 몸으로 글을 알고자 한 그날부터 지금껏 전 단 한 번도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계집은 백성이 아닙니까?”

“계집에겐 관원의 자격이 없다 하셨습니다. 헌데 스승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나라 조선은 왜 이 모양일까요? 관원의 자격을 지닌 사내들이 쭉 만들어왔는데 말입니다.”

윤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사회 질서가 추구하는 보편성과 공명정대한 원칙이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즉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남성중심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윤희는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남성과 똑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는 성적 차이를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하는 여성 주체와 닮아있다.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

조선 후기의 윤희와 이 천 년대의 여성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윤희에게는 없는 권리가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교v b 육받을 수 있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활동을 할 기회를 동등하게 갖고 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윤희가 갖지 못했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만족했던 평등한 참정권, 교육, 동일임금은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것이다.

이 평등한 권리들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똑같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여성들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똑같이 야근을 할 수 있고, 결혼 후에도 아이를 낳아도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며, 부족함 없는 이성적 존재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여성들은 남성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과 가치들, 그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는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다. 여성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고, “누구에 대한 평등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지는 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해방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남성이 수립한 언어를 사용하고 법과 질서를 따라야 하는 한, 남성의 타자일 뿐 진정한 여성 주체가 아니다. 남성과 인간이 동의어인 세계에서 여성은 남성처럼 되어야만 인간으로 또는 시민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보다 뭔가 덜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또한 여성이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여성 주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남성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가레는 여성이 남성처럼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이 ‘인간’ 개념을 구성하는 기준이 되는 상황 자체를 문제 삼고, 여성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가면서 진정한 여성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여자답게’ 변하면서 정상적인 여성성을 획득하는 고은찬(커피 프린스)은 겉모습만 변했을 뿐 여전히 남성의 욕망을 반영한 여성 이미지이다. <선덕여왕>의 덕만이는 한 발 나아가, 남성과 똑같은 힘과 권리를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등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바랐던 여성의 모습이다. 이런 덕만은 성 주류화 정책에 힘입어 고위관직에 진출하고 기업의 CEO가 된 우리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이런 여성들이 가부장제적 관점을 철저히 내면화한 ‘명예남성’으로서 오히려 반여성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그렇다면 윤희는 진정한 여성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정한 여성 주체란 무엇일까?

페미니즘적 주체

이리가레와 같은 차이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진정한 여성 주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여성이 될 수 있는지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진정한 여성’의 내용을 못 박아 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가부장제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체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균관 스캔들>의 윤희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구성해 가는 여성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희는 전통적인 여성성을 고수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명예남성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남성 권력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한다. 즉 윤희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서도 그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여성인 것이다. 그리고 윤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동력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의 욕망이다. 이런 모습은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 주체와 많이 닮아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여성들의 일상적 모습과도 비슷하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모두 남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이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적 특성을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어느 정도는 남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의 탈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한다.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사회 질서에 적응하고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그 질서가 여성을 방해하고 괴롭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핵을 깨뜨리는 것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남장 여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소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이 처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은연중에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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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오키나와(沖繩) 평화여행[시대와 철학]

김재현(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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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마산 YMCA 시민사업위원회’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3박4일의 짧은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평화답사 여행이라는 테마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2004년 8월에 오키나나와의 국제(國際)대학 교내에 미군 헬리콥터가 추락한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 안에 기지가 있어 위험하니 기지를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한참일 즈음에, 한중일 국제세미나가 있어 오키나와에 갔던 적이 있었다. 이 때 세미나에서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었고 당시 참가한 일행들과 함께 기지 이전 계획 장소인 오키나와의 헤노코(?野古)에 가서 잠시 미군기지 이전 반대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의 여행은 오키나와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첫날 오후 나하(那覇)에 도착하여 수리성을 관람하면서 류큐왕국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았고 이튿날 오전에는 츄라미 수족관을 구경한 후 오후에는 사키마(佐喜眞) 미술관 방문이 있었다.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역사와 평화교육의 현장이다. 서경식 교수는 “역사와 평화를 성찰하는 이런 연수여행에도 반드시 예술감상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오키나와에 갈 기회가 있다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사키마 미술관을 찾아가 마루키(丸木)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戰圖)>를 관람하기”(2010. 10월 29일 한겨레신문)를 권한다.사키마 미술관에서 루오의 여러 그림들을 보았고, 마루키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1984)를 미술관 직원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으면서 관람했다. 이 작품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에 따른 일본 주민의 집단자결(자살) 사건을 묘사한 기록화인데, 여러 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과 집단자결의 과정에서 처참하게 죽이고 또 죽어가는 인물들의 모습, 눈을 부릅뜬 사체들의 모습이 처절하고 참혹하게 표현되어 있다. 마루키 부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키나와전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생존자들과 같이 통한(痛恨)의 현장에서 증언을 들었으므로 “저 그림은 오키나와전을 체험한 오키나와 사람들과 우리의 공동제작”이라고 말한다. 미술관 직원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후세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들이 맡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설명해 주었는데 ‘불의에 순응하지 않는 미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 옥상에서 후텐마 기지를 직접 보고, 미술관의 배려로 수장고에 있던 케테 콜비츠(독일, 1867-1945)의 판화도 볼 수 있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2. 이어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0),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의 저자이자 환경운동, 평화운동가로 알려진 더글라스 러미스의 강의가 같은 장소에서 있었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강의하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최근일본지도]라는 책에 있는 한 장의 지도를 보여주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이것은 소화3년(1928년)의 지도인데 류쿠(琉球, 오키나와), 대만,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영토이고, 만주도 앞으로 일본 영토화하려는 의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이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 정복은 대만, 조선, 만주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오키나와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계속해서 오키나와는 일본에 의해 지배된 식민지라는 사실과 일본국가의 동등한 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혼재하면서, 오늘날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오키나와인이 본토인과 다른 중요한 점은 본토에서는 ‘아사히(朝日)’, ‘마이니치(每日)’, ‘요미우리(讀賣)’신문 중 최소한 하나를 보는데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의 중앙지를 읽지 않고 ‘오키나와 타임즈’나 ‘류큐소보’를 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키나와인들이 일본 본토의 사람들(야마토인, 大和人)과는 분명히 다름을 보여준다.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의 틀을 잡아가던 일본은 1879년에 류큐왕국의 국왕과 왕세자를 도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키는 소위 ‘류큐처분’을 단행한다. 이는 근대국가 일본의 최초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기점으로 일본제국의 확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류큐사람들은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곳에 군대기지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왜냐하면 군대기지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본토의 매스컴에서는 중국, 북한의 미사일 때문에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 영토의 0.6%에 지나지 않는데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력 집중은 군사전략 상으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미군기지가 전 세계적으로 700여 군데 있지만 이렇게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오키나와가 유일하다고 한다. 미군기지는 곧 미합중국의 일부이며 미제국주의의 기지이기도 하다. 이 미군기지에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노숙자(Homeless)가 없고 노인들이 없으며, 생산노동이 없다. 군대는 전쟁을 위해 존재하므로 어떤 바람직한 것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특별한 점은 미군 안에서의 오키나와인에 대한 인식 특히 미 해병대의 1/3이 오키나와에 있는데 이들이 생각하는 또 이들의 언어 속에 있는 오키나와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병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였으므로 이들은 오키나와를 전리품으로 생각하여 오키나와 지배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1972년에 오키나와의 본토 반환이 이루어졌지만 미군기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미군기지에 있는 해병의 입장에서 보면 오키나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고 바뀐 것도 없다.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도 평화헌법 9조를 지키면서도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여 안보를 보장해 주는 것이 일본 본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생각은 모순적이지만 일본 국민은 이 모순을 별로 자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미군기지의 폐해와 이로 인한 전쟁의 위협을 늘 느끼며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는 후텐마(普天間)기지를 현외(오키나와현 바깥)로 옮긴다는 선거 공약을 하여 당선되었지만 미국과의 협상에서 결국 이를 실현시키지 못해 총리를 사임하게 된다. 일본에서 주민운동이 총리를 그만 두게 한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1960년 미일안보조약 때 기시노부스케(岸信介)의 사임이고 두 번째는 2010년 하토야마의 사임이다. 두 번 다 오키나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그만 둘 당시 ‘일미안보조약이 동아시아 안전에 공헌하는가?’라는 여론조사에서 본토에서는60% 이상이 그렇다고 답한데 반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7%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지난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후텐마기지의 헤노코 이전에 반대하는 지사 후보들이 합쳐서 97%의 지지를 받았다. 일본 정부와 도쿄에서는 헤노코에로의 이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고 중앙 일간지나 뉴스에서도 그렇게 보도하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현장인 헤노코를 중심으로 끊임없는 반대투쟁을 2000일 이상 계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차별’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는 일본 국내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이자 오키나와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서 미군기지는 철수되어야 한다.’

3. 셋째 날, 우리는 카데나(嘉手納) 기지를 방문하여 그 규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3층 학습실에 전시되어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 미군기지가 갖는 일본 본토에서의 위상과 오키나와에서의 위상이 매우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오키나와 요미탄(讀谷)촌에 있는 ‘치비치리’라는 동굴을 방문했다. 산호섬인 오키나와에는 수많은 자연동굴(일본말로 ‘가마’라고 한다)이 있는데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가마는 전쟁 때 주민들이 피난하였다가 ‘영미귀축(英美鬼畜)’으로 불리던 미군에게 굴욕적으로 살해당하기 전에 충성스러운 황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가족, 이웃, 전우끼리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한 집단자결의 장소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집단자결이 이루어졌던 이 현장에서 지역가이드연구회의 멤버인 히가료우코(比嘉?子)씨의 실감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에 대해서 온 몸으로 느끼며 전율하는 체험을 했다. 특히 마지막에 “평화라는 것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도 한국에 돌아가 이러한 평화운동에 앞서달라는 부탁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45년 3월 26일에 미군이 오키나와 본도(本島) 남서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할 때 자마미(佐間味) 섬에서 ‘집단자결’이 발생했고 곧 이어 4월 1일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중부 요미탄촌, 차탄(北谷) 촌을 점령한다. 이 때 요미탄 촌 치비치리 가마에서 집단자결이 일어나 140여명 중 82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황민화교육을 통해 미군에게 처참한 꼴을 당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젊은이가 노인을 낫이나 면도칼로 죽이고, 또 수류탄으로 함께 죽는 아비규환이 벌어진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집단자살을 하였지만 사실은 이것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학살이라는 측면이 있다. 동굴견학을 한 후 우리는 오키나와 남단에 있는 히메유리 탑과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들렀다. 평화기념공원 전시관 앞에는 오키나와에서 죽은 식민지 조선의 군인, 종군위안부, 노역자를 포함한 약 만 명의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다같이 어둡고 슬픈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인 약 19만명, 미국 군인 1만 2천여명, 조선인 약 1만명이 죽었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6만5천명의 군인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 약 3만 명과 민간인 약 9만 5천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오키나와의 인구는 50만이 안 되었다고 한다.

4. 오키나와(현청지는 나하)의 위치는 동아시아의 군사거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필리핀의 마닐라, 대만의 타이페이, 대한민국의 서울과 일본의 도쿄를 연결하면 삼각형이 생기는데 오키나와는 그 밑변의 중점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오키나와가 세 개의 삼각형(도쿄-서울 -오키나와, 오키나와-서울- 타이페이, 오키나와 – 타이페이-마닐라)을 결합하거나 분단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도미노이론에서는 오키나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공산주의 침투를 막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후부터 미군의 점령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으로서 대일 감시기지, 미·소가 대립하는 냉전 중에는 ‘태평양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고 일본에 복귀된 현재에도 변함없이 미일안보의 거점 역할을 한다. 오키나와는 특히 미국의 세계전략, 특히 동아시아 전략을 반영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이용되어 왔으므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키나와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국제정치적 군사적 지배, 일본 국가의 전략적 지배에 의한 ‘구조적 차별’에 저항하는 다양한 운동이 계속되어 왔다. 군대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인권, 환경보호, 동아시아의 역사경험, 선주민(先住民)의 권리 같은 우회로를 통해 이 운동은 국경을 넘어 넓어지고 있다. 오키나와와 한국의 관계에서는 미군기지를 둘러싼 경험이 접점이 되어 최근에 비판적 지식인 사이에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5. 2009년 8월 총선에서 집권한 일본 민주당의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이 최근에는 일본 외교정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미-일 동맹’의 심화를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작년 6월에 취임한 칸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취임 직후 국회연설에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이웃 국가와 다양한 분야에서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장래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2011년 1월 20일 도쿄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일 동맹은 유지 ·강화되어야 할 일본 외교의 기축”이라며 이의 ‘재발견’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 경제, 인재 교류를 심화시켜 올 봄 방미 때 오바마 대통령과 21세기 미-일 동맹의 비전을 내보이겠다”고 말했다.

칸 총리의 외교정책 기조 변화는 우선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다 낙마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 해 9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우다오)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양순시선의 충돌사건 이후 일본에서 커진 ‘중국위협론’도 칸 총리의 미국 중시 노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탈아입구(脫亞入歐)’가 아닌 ‘친미입아(親美入亞)’를 내세웠던 하토야마 전 총리 중심의 민주당 외교노선에서 크게 이탈하는 칸 총리의 일방적 외교정책 노선은 당내 갈등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명박정부의 대북한정책과 일방적 대일, 대미 외교노선으로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더욱 멀어져 가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반전, 평화운동을 생각할 때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러미스씨는 칸 총리도 오키나와 문제로 낙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한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부상을 고려함과 동시에 미-일 사이에서의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질서를 이해하고,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 우호, 연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사진자료로는 사키마 미술관의 <오키나와 전도>, 치비치리 동굴, 후텐마 미군기지 활주로 등 여러 사진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여행을 같이 갔다온 마산YMCA의 이윤기 부장의 블로그와 허은미선생의 블로그를 찾으시면 이번 여행과 관련된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명서]홍익학원은 홍영두 선생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성 명 서

홍익학원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홍영두 선생(건국대학교 학술연구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즉각 취하하라.

지난 10월 5일 홍익대학, 홍익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홍익대학 부속 초등학교(이하 ‘홍익학원’으로 표기)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을 통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2010년 6월 17일자 기사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이 홍익학원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이유로 글쓴이 홍영두 선생을 고소한 바 있다. 이에 대해, “e 시대와 철학”편집진 및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일동은 홍익학원의 고소 행위가 지극히 비교육적인 행위임과 비도덕적 처사임을 밝히고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당회 소속 연구자 홍영두 선생은 철학을 전공한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전적으로 공익적 목적을 위해 기사를 작성하였고, 해당 사안과 관련하여 이해관계의 당사자가 단연코 아니다.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이 홍영두 선생에게 지역문제 및 환경문제와 관련된 원고를 청탁함으로써 작성된 글로서 비합리적인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비판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게끔 하려는 교육적 실천의 일환이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의도는 결코 사익을 위해 특정 대상을 근거없이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악감정을 표출하는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될 수 없다.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하여 이미 다각적인 사회적 비판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고 각계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한겨레신문기사들(기사원문1, 기사원문2), 미디어오늘(기사원문), 경향신문(기사원문), 한라일보(2010.9.15. 한라칼럼 ‘지역공동체를 지키고,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홍익학원의 성미산 개발과 관련된 비판이 특정 집단 및 개인에 의해 악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익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이루지는 것임을 반증한다(기타 관련기사목록은 첨부 참조). ‘성미산과 홍익학원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역시 그러한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1) 소중한 도심의 자연숲을 갖춘 성미산의 무분별한 개발에 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2) 이해가 상충하는 집단들, 특히 개발주체인 홍익학원 측의 성실한 대화 및 타협 노력을 강조하며, 3) 학원 측이 점차 기업논리에 물들면서 ‘공익’, ‘정의’등 비영리 교육법인 본연의 가치를 망각해 가고 있음을 비판하고, 4) 그 해결을 위해 관련 기관의 각성과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온라인 회원 70 여명의 웹진 “e 시대와 철학”에 실린 한 연구자의 글에 대해서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여 교육법인으로서 교육자에게 막대한 개인적 피해를 주면서도 유사한 논지의 언론기사들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는 홍익학원의 대응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며, 아울러 성미산을 둘러싼 사회적 물의의 장본인으로서 성실하고 진지한 문제 해결의 노력보다 감정적이고 자의적인 행태로 일관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소속 연구자 및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일동은 홍익학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는 바이다.

1. 홍영두 선생에 대한 비상식적·비교육적·비도덕적인 명예훼손 고소행위를 즉각 철회하고 사과하라.

2. 관련된 모든 언론기사들에서 지적하였듯이 ‘홍익인간’의 가치 실현을 위해 주민들과 성실하게 대화하고 생태환경파괴행위를 중단하라.

2010년 12월 2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및 연구자 일동

# 첨부:관련기사목록

[기고]성미산마을을지켜주세요/조한혜정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8599.html

고갯마루 넘다보니 동네 생겼네/올리브 한겨레 20100907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8487.html

[수도권]홍대, 부속 초중고 성미산 이전 마포구청과 마찰 동아일보 20100901 http://news.donga.com/3/all/20100901/30879754/1

공동체라기엔 느슨한, 그러나 살가운 한겨레 20100831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437416.html

봉우리가 어딘지는 몰라도 이웃의 정은알고 삽니다 조선일보 20100829 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334.html

석달새 168억…성미산 학교터 ‘수상한 뻥튀기’ 한겨레 201008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6936.html

성미산개발분쟁다자간협의추진 서울신문 2010082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823012006

교육개선 vs “자연보전” 평행선 대치 세계일보 20100819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00818004019&subctg1=&subctg2=

성미산주민대책위 “공사취소” 행정소송 국민일보 20100818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023269&cp=nv

성미산 사업취소 소송 한겨레 20100818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443.html

성미산대책위, 홍익재단 학교이전 승인취소 행정소소 경향신문 201008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72213225&code=940100

성미산 “한밤의 나무 훼손” 경향신문 201008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101907262&code=210100

성미산 하청직원 ‘진거톱 난동’ 한겨레 2010081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5139.html

사설/’성미산 지키기’에 담긴 의미 한겨레 20100809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434070.html

마포 유일 자연숲 성미산 산 이상의 산 개발과 저항 국민일보 20100805

http://news2.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984451&cp=nv

환경파괴 논란 ‘성미산 개발’제동 세계일보 20100804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3004433&subctg1=01&subctg2

마포구, 도로점용 허가 결정 유보 한국일보 20100804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318193121950.htm

성미산지키기’인디음악회 한겨레 20100803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433221.html

홍익초중고 이전사업 법정분쟁 비화 한국일보 20100803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0217562021950.htm

성미산 마을’ 주민 생활터전 잃나 세계일보 20100802

http://www.segye.com/Articles/NEWS/WHOLECOUNTRY/Article.asp?aid=20100801002715&subctg1=01&subctg2=

야간집회 허용 한 달 ‘불법폭력시위; 한건도 없었다 경향신문 201007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91822445&code=940702

홍익대 직원들, 성미산 농성천막 ‘기습 철거’ 경향신문 20100730

http://www.paoin.com/paoweb/paper/article2.aspx?CNo=79219357&SCT=AA001&exec=viewsearch&stat=paoin

성미산 막무가내 공사 ‘사람 잡을뻔’ 한겨레 20100730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432741.html

우리의 숲, 성미산 지키자 온몸 저항 한국일보 20100722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7/h2010072202330421950.htm

홍익재단 공사강행 ‘성미산의 수난’ 경향신문 2010071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170003195&code=940701

고품질 일자리 확충이 복지 서울신문 20100708 http://client.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708005005&spage=1

광화문 강남서 첫 합법적 야간집회 경향신문 201007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020324175&code=940100

이곳만은 지키자’ 발랄한 인증샷 경향신문 20100701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society/societyothers/view.html?photoid=2831&newsid=20100701035708135&p=khan

“e 시대와 철학” 편집진 /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내가 속한 이야기가 싫다![시대와 철학]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잘못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기정당화 과정에서 나와 남, 나의 편과 남의 편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된다. 이 자기정당화와 배제를 통해서 우리는 삶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의미를 붙들고 다시 자기를 정당화하고 편을 갈라 남을 배제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이런 이야기가 싫다.

잃어버린 10년!”도덕적 개인주의자는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이 있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은 동의, 말하자면 나의 선택이나 약속의 결과이다. 따라서 나의 책임은 내가 떠맡은 일, 내가 선택하고 동의한 일에 한정된다. 이런 생각의 논리적 귀결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을 찍지 않았다. 나는 그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정부는 나와 무관하고, 그래서 그 정부가 집권한 기간은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다.”집권당인 한나라당 대표는 문자 그대로 집권당의 대표답다. 그는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나라의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온갖 대못을 박고 또 망쳐놓았다. 이명박 정권 2주년은 좌파정권 10년 동안의 비정상적인 국정을 정상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한 2년”이라고 자평했다. 여기서 나는 어느 편에 있는가?

# 장면 1 : 2008년 4월22일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2년 반 전에 차명계좌 불법자금과 삼성그룹 불법적 지배권 승계 특검 문제로 사퇴했던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2010년 3월24일 “앞으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삼성 회장직에 복귀했다. 사실 여기서 ‘복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복귀(復歸)는 본래 자리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데, 이건희 회장의 복귀가 본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그건 그가 잠시 사라졌던 2년 반 동안에도 그 자리는 그의 것이었고 언제나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건희 회장은 “내가 스스로 떠났으니, 돌아오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다. 더 인간적으로 보자면, “진심으로 사과했고,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적 개인주의자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 왕의 귀환에 일제히 복귀환영이라는 깃발을 내거는 주류는 자연스레 다른 편을 만들어내었다. 그저 잠시 걱정을 끼쳐드렸던 국민 여러분이라는 다른 편을. 그는 이전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기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는 그가 갈라낸 저편으로 분리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는 그의 짧은 재취임의 말과 함께.

# 장면 2 : 2010년 12월1일
기자 : “재벌그룹 총수신데 유독 자주 수사기관 조사를 받으신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승연 : “내가 팔자가 센 거 아닙니까?”

부당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 부실계열사 지원, 차명계좌 운용, 주식 차명보유, 조세포탈 혐의를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에 앞서 기자와 주고받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라 생년월일시의 팔자(八字)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김승연 회장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 그의 말은 마치 봉건적 군왕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두고서 ‘과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 역시 이건희 회장과 다르지 않은 도덕적 개인주의자이다.

“내가 자주 수사를 받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수사를 받게 된 것은 팔자 때문이다.”김승연 회장은 이른바 인지부조화가 싫다. 왜냐하면 자기 판단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김승연은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건 부당하고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건 팔자야!”이제 고통은 사라지고 고난 받는 순결한 인간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한 편에 운명처럼 달라붙어 그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도 그냥 이렇게 저편으로 분리되고 만다.

# 장면 3 : 2010년 12월2일
“이천만원 주셨으면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니 그것보다도요, 저 때문에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져서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돼서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질문한 기자는 논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기자를 폭력행위 처벌법(집단, 흉기 등 상해)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으러 온 최철원 M&M 전 대표가 가르친다. 그는 “어이, 기자 양반. 문제는 때린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시끄럽게 됐다는 것이지.”라고 진심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철원 전 대표 주변에서는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왜 하필 지금 문제가 될까? 그는 이런 부조리, 부조화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이게 사회적으로 시끄러워졌기 때문이야. 이건 나의 폭력적이고 반인간적인 성향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아니야.”

물론 우리도 이 같은 아주 긍정적인 자기 개념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일관적이지도 뻔뻔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최철원 전 대표는 계속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인간적이다. 이런 나를 흔들어 놓는 무엇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더 나아가 인간적으로 흔들려서 몹쓸 짓을 했다면, 그건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업을 방해했다. 나는 잘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와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사람을 그냥 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을 주기로 했다. 한 대 맞아주고 돈을 버는 아르바이트도 있지 않은가? 그것도 큰돈을 주었다. 나는 자존감을 지켰고, 그는 돈을 벌었다.”이런 그의 상상 속에서 우리는 또 어느 편으로 나눠지는가?

# 장면 4 : 까마득한 옛날이자 가까운 어제
예수께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예수가 긍정의 형식으로, 공자가 부정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모두 나와 남을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이라면 아마도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호혜(互惠 reciprocity)나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말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는 개인적 자유의 원심력이 사회적 공동체의 구심력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는 공동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공동선이 갖는 가치를 서로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가상적 이야기로 비아냥거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말하자면 “연쇄살인자와 마주친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그런데 이런 물음은 예수나 공자가 말하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므로 논증은커녕 서툰 주장에도 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나 공자 그리고 샌델의 말은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되는 사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할 수 있는 삶의 원칙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의 선택을 통해서 내가 되기로 한 개인적 존재다. 하지만 그 개인은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 구속된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수동적 조건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자 하는 능동적 나 사이의 관계 형성, 정체성의 확인이다. 나의 자부심과 수치심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라고 드러나는 사회적 속성이다.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소속된 나와, 내 인생을 나의 선택으로 꾸려나가고자 하는 나. 사회구성원이라는 구속된 나와, 내 삶을 나의 가치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나라는 현실조건이 만들어내는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바로 우리의 실존적 딜레마이다. 이런 딜레마를 예수나 공자, 샌델은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 MacIntyre)는 이런 실존적 딜레마에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self)’를 가지고서 설득력 있게 접근한다. 그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누군가는 자신을 이야기하면서 할아버지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마저 싹둑 잘라내고 시작한다. 어떤 부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식 하나를 빼고서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잘려나가거나 빠져나가는 사람의 아픔은 자기정당화의 그늘에 가려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이전 세대, 이전 사회의 다양한 빚과 의무를 물려받는다. 운 좋은 몇몇 사람일지라도 유산과 기대만을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2010년 한국 사회라는 내가 속한 이야기가 더불어 사는 사회구성원이라는 큰 이름과 함께 나의 이야기 속에 당연히 자리 잡아야 한다. 그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같이 겪으면서 시대의 지혜를 함께 배워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 어머니의 이름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입에 올리든 부끄럽게 올리든 간에 자식의 이야기에 등장해야 한다. 자식의 이야기에서 빠져나가는 부모의 이름은 사실 나의 이름을 부정하여 나만의 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면 1, 2, 3에서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한국 사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우리가 장면 4에서 느끼는 자부심과 공감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치심과 분노, 자부심과 공감은 가족과 시민처럼 ‘묶여 있는’존재가 느끼는 집단적 책임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어떤 집단에 한데 묶여 있으며, 또 우리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가진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거대한 서사(敍事)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삶의 이야기는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고 굳건해지는 공동체의 이야기에서 분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만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존재를 넘어 기꺼이 ‘부담을 감수하는’존재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존재이고, 우리 정체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장면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큰 이야기와 분리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는 다양해지고 개인의 원심력은 커졌지만, 그 다양성과 원심력은 편을 가르면서 다른 편을 겨냥하는 칼끝에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남의 삶의 이야기와 맞물려 있다. 우리는 과거의 빚과 유산과 기대와 의무를 안고 태어나고, 그걸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하는 자아’이다. 그 이야기에는 당연히 남의 이야기를 위한 몫과 자리가 있고, 그 몫과 자리는 내가 남의 이야기에서 가지고 싶은 것이고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의 잘못과 분리하고, 또 나를 현재의 잘못과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얽혀 있는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자 미래의 관계까지 내 입맛에 맞게 미리 짜놓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재취임에는 그의 이야기, 삼성의 위기 이야기는 있지만, 다른 한 편에 서 있는 남, 즉 국민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김승연 회장의 팔자(八字) 이야기에는 그의 모든 잘못이 빠져 있고, 그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무시되고 있다. 최철원 전 대표의 변명에는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며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자신의 이야기 속에 누군가를 넣고 빼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정당하다면,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빠지게 되더라도, 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들을 빼버리더라도, 그건 우리의 선택일 뿐이다. 물론 예수와 공자, 샌델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이 아니다.

마이클 샌델(M. J. Sandel)은 삶에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걱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공동체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공감과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분리된다. 불공정한 사회일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따로 놀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서로가 사라지고, 그 사라진 자리가 증오와 분노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날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날이겠지만, 아마도 그리 행복한 날은 아닐 것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까마득한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십년 동안 있었던 일을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이야기는 없어져야 한다. 식민지 지배나 억압의 당사자가 아니고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지라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의 아픈 기억을 나의 이야기에 담아야 한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해방의 기쁨, 분단의 아픔, 새마을 운동, 폭압정권, 경제성장, 민주화운동, “잃어버린 10년”에도 나눠주는 몫과 자리가 있어야 한다.

부자가 된 가난했던 사람의 이야기며, 가난해진 부자의 이야기와 가난하게 태어나 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향하는 도덕적 개인주의자의 뻔뻔한 변명과 배제의 이야기를, 남의 불편하고 비참하고 서러운 이야기를 기꺼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풀어내고자 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로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빠져도 그만인 ‘나머지’가 아니라, 누구나 “기업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도덕적 잘못인지, 사람은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잘 아는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정의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시대와 철학]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유행이 되어 버린 정의(justice)

 

세상에는 지겨운 것들이 많다. 지겹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거나 버리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어도 듣고, 듣고 또 들으면 나중에는 지겨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면 지겹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좋은 것이면서 실현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민주화, 자유, 평등, 평화, 인권, 통일, 정의 등등.

요즘 전국을 강타하면서 다시 회자되는 지겨운 것 중의 하나가 ‘정의’(justice)이다. 그렇게나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 정의인데, 왜 지겹게 느껴지는가? 지겨운 것이 다시 전국을 강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의가 전국을 강타하게 된 계기는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번역 출판 때문이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이 휴가를 갈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그렇게나 정의를 부르짖고, 그렇게나 정의를 위해 헌신하면서 무수히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정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나마 이루어 놓은 사회 정의마저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의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재발하고 있다. 마치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투기를 조장하는 것처럼, 때로는 부정의가 정의로 둔갑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정의가 지겹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휴가 때 샌델의 책을 들고 간 행동에 걸맞게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 지표를 ‘공정한 사회’로 결정했다고 한다. 국민이 정색을 하면서 반겨야 할 결정인데, 왜 이리도 지겹게 느껴진단 말인가?

부정의한 대통령이, 부정의를 은폐하는 대통령이 오히려 정의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BBK사건에서부터 병역 문제까지 해명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정의 칼을 뽑은 셈이다.

4대강 사업 때문에 농토를 갈아엎어 생긴 배추파동을 해결한답시고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먹으라고 하니, 그가 어떻게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자신이 마치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말한 마리 앙트와네트라고 착각하는가 보다.

정의의 의미가 묘연하다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논리는 일찍이 소피스트 시절에도 있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라는 주제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전개하고 이를 통해 정의관과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한 자의 이익’,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정의(불의)는 ‘약한 자의 이익’,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범하는 모순을 찾아내고 유도해 간다.

어처구니없는 소피스트 정의관이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뒤늦게나마 정의를 세우겠다고 마음먹었다니, 박수치면서 환영할 일이기도 한데, 왜 박수는 치지 않고 지겨움만 얘기하는가? 그의 발언 자체가 순수하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는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정의관의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강하고 가진 자가 약하고 못가진 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막는 데 활용된다. 정치 권력이든, 경제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부당하게 다룰 때 작동시켜야 하는 올바름이 정의이다.

그에 비해 한나라당 김희정 대변인은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내용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로 규정한다. 이 속에서 모아지는 핵심 쟁점은 무엇인가?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용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끊임없이 강조해온 무한 경쟁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한다. 성공하려면 창의적이어야 하고, 창의적이라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정의롭게 사는 것은 경쟁력이 있어서 성공하고 그로 인해 부를 거머쥐는 것으로 변질된다.

정의의 꽃은 사전, 사후 분배 정의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의와 관련하여 논쟁점이 되었던 것은 성공이나 무한 경쟁보다는 ‘분배 정의’였다. 그러나 분배는 경제 활동 이후에 행하는 ‘재분배’처럼 ‘사후 분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오해하는 것도 오랜 관행이다.

이와 달리 활동 이전에 주어지는 ‘기회의 분배’도 분배 정의에 해당된다. 사전 분배나 사후 분배 모두 분배의 공정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사후 분배만을 분배 정의로 강조하다 보니,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없는 자에게 나눠준다는 식의 재분배만 부각되고, 그래서 마치 재분배는 경쟁력이 없는 자가 경쟁력을 기르기보다는 경쟁력이 있는 자의 정당한 대가를 부당하게 취득하는 폭력이라는 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하려면 사전 분배에서부터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기회를 가로챌 때도, 가진 자가 없는 자의 결과물을 빼앗아 갈 때도 모두 사전 분배의 불공정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사전 분배가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고 용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개천이라면 그 뒤로 이어지는 공정성은 이미 불공정에 물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우리는 재벌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이제 사전 분배의 불공정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에 부장검사가 청탁 대가로 고급승용차를 받았지만 법조계에서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경제뿐만 아니라 법조계에도 분배 부정의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외교부 고위 공직자 자녀들을 특채한 사례들 때문에 전국이 들썩이고 있다. 사후 분배를 논하기 이전에 사전 분배에서부터 불공정이 작용하고 있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데, 출발부터 정의롭지 못한 개천이라면, 그런 개천에서는 아무리 뒹굴어도 높은 경쟁력을 가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한 경쟁을 한들, 창의력을 아무리 발휘한들, 출발점에서 지니는 낮은 신분 – 재벌이 아니라는, 법조계 인사가 아니라는, 고위 공직자가 아니라는 태초의 원죄 – 이 작동하여 나머지 과정에도 불공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권리 분배도, 의무 분배도, 기회 분배도, 소득 분배도, 재산 분배도, 공직 분배도, 명예 분배도, 권력 분배도 모두 문제를 야기한다.

기회의 분배 정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무슨 무한 경쟁을, 무슨 경쟁력을, 무슨 성공 시대를 요구하고, 무슨 재분배 부당성을 지적하는가? 이 속에서 낮은 신분이 성공하고 싶다면 누구처럼 ‘강한 자’에게 들러붙어서 강한 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앞에서 무슨 공정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공생을 망각하는 정의관은 버려라

 

정의는 본래 혼자 실현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난리를 펴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가 언급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타인과 관계하는 공동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타인과 부딪치고 소통하면서 나아간다.

개천에서 배출되는 용은 혼자서 용이 되지 않는다. 타인과, 공동체 구성원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하다. 자기 혼자 잘나서가 아니라 공존, 공생 구조를 잘 실현해서 용이 되며, 정의 또한 공존, 공생의 정신을 지닐 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사전 분배이든 사후 분배이든 공존 가능성을 배면에 쥐고 있는 것이 정의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한 경쟁의 개천에서 성공한 자만을 공정성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결국 경쟁을 통해 성공하라는 것이고,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를 누리라는 것이다. 분명 여기에는 물질만능주의가 깔려 있고, 물질 만능을 실현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견지하라는 강요가 숨어 있다.

현 정부는 약한 자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발부터 약한 자의 이익과 기회를 가로채는 부정의, ‘분배 부정의’가 만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왜 기회를 주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는가를 질책한다. 현 정권의 정의관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세상에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못 살 수가 있지! 열심히만 살면 다 부자가 되는데!”

“나를 봐! 열심히 사니까 이렇게 부자가 됐잖아. 이 게으름뱅이들아!”

“열심히 사니까 권력까지 얻었는데, 그 사이에 너희들은 쓸데없는 일에 소일하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

그래서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정의에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언급은 없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라는 소리가 높아지면, 마치 부지런한 자의 당연한 권리와 정당한 소득을 게으름뱅이들이 빼앗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분배 정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치부한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한국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분배조차 정립되지 않은 한국 사회, 정의관조차 왜곡하는 현 정부를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규정하는 빈곤의 의미를 인용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가치있는 삶을 선택하고 추구할 능력이 현실적으로 없다면 그것이 바로 빈곤이며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의 빈곤은 사회 불의, 사회 부정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정의가 유행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빈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상지대 사태가 보여주는 우리의 퇴행사회[시대와 철학]

최종덕(상지대교수, 철학)

 

요즘 국내 정치적 현안 가운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을 들라치면 뭐니 뭐니 해도 막무가내로 강행하는 4대강 개발사업과 억지와 의혹 가득한 천안함 사태 및 부동산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친다면 매스컴에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상지대 사태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지대 사태는 어느 한 사립 학교의 내부 문제가 아닌 현 정권의 비상식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퇴행사회의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지대학교 정이사 선임과정에서 드러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온갖 불법 행위는 사학재단의 현주소와, 나아가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교육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 상지대 사태의 전모

김문기는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니다

상지대학교 사태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1962년 원홍묵 선생은 청암학원의 이름으로 상지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 후 1974년 설립자로부터 학교재단을 인수한 김문기 씨는 학생들의 등록금을 기반으로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 상지학원을 전횡했다. 김문기 씨와 그 주변세력은 등록금 유용, 교수채용 비리와 부정입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총학생회 학생들을 불온삐라 제작살포자로 모는 용공조작까지 했을 정도로 교육비리의 백화점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문기는 상지학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자신의 권력 횡포지로 삼았다. 이 사실은 그가 20여 년 가까이 정식 이사회를 개최한 적이 없었다는 점으로 잘 드러났다. 이런 다수의 불법적 행위로 인해 결국 김문기는 1993년 교육부에 의해 이사 자격 원인 무효 판정을 받았다. 대법원은 같은 해 그를 복합적 교육 비리로 무려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이후 그는 과거 역사를 조작하여 자신이 상지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우겨왔다. 그나마도 2004년 대법원은 김문기를 상지대학교 설립자가 아닌 것으로 최종 선고했다. 결국 대한민국의 법은 김문기가 상지대학교에 대하여 그 어떤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님을 공표한 것이다.

사분위는 초법적 기구이다

그 후 2007년 사학이 개인의 사적 재산권 영역이 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학법이 개악되었다. 쉽게 말해서 김문기 씨와 같은 교육비리 전과자들도 사학을 점유할 수 있게 약간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 준비단계로 종전 국회는 법적 기구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줄여서 사분위라고 하는데, 사분위 초기에는 요즘 흔히 말하는 공정한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한 흔적도 보였다.

그런데 현 정권들어 제 2기 사분위가 재구성되면서, 사분위는 그나마 있었던 소수의 공정한 인사들을 내몰고 사학의 사적 재산권을 주장하는 편향적 인사들로 채워졌다.

2기 사분위는 2010년 들어 많은 결정을 했다. 소위 분쟁 중인 사학을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사학의 재산권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분위는 원래 사학의 구재단 인사에게 학교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김문기 같은 경우에는 재단 설립자 자격이 없다는 헌재의 판정이 나오자, 사분위는 웬 뚱딴지 같은 ‘종전 이사’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과거 비리 교육집단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사분위는 상지대를 비롯하여 조선대, 영남대 등을 비리로 점철되었던 과거로 회귀시켰다. 대구대, 광운대, 덕성여대 등도 진행 중이다.

상지대의 경우 정이사 구성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어갔다. 김문기 측 종전이사 추천 4인, 교과부 추천 2인, 정식으로 추천도 하지 않은 상지대 측 추천으로 2인, 그리고 임시이사 1인으로 상지대학교 정이사를 그들 마음대로 결정해 놓았다. 이사회 반수 이상을 종전 이사 측에게 줌으로써 사학 학원법인의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문기 씨 아들을 이사로 선임하는 등 북한의 김정일 세습정권과 같은 전형적 악습구조를 공공교육 기관에 뿌려놓았다.

정상화된 상지학원을 김문기에게 고스란히 바치고자 사분위는 초법적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사분위는 17년 동안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많은 대학을 다시 구렁텅이로 빠트려 놓은 분쟁 조장의 원흉이 되었다.

상지대와 시민사회는 끝까지 저항한다

학생, 직원, 교수, 동문 등 모든 상지대학교 구성원은 일치단결하여 김문기 사학비리세력의 학원 복귀를 반대하며 일 년여에 걸쳐 농성을 해왔다. 원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비상대책위를 구성하여 지역사회의 자존심과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하여 공동투쟁하고 있다. 특정 대학교,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민의식이 고취되면서 전국적으로 ‘비리재단 복귀반대 대학 대책위원회’, ‘비리재단 복귀반대 학생 공동대책위원회’, 및 ‘비리재단 복귀저지와 상지대지키기 긴급행동’ 등의 사회단체가 구성되어, 비리세력 복귀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불행히도 그런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사분위이며, 사분위의 그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것이 교과부 및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여당 국회위원들의 참모습이다.

속기록까지 폐기하는 불법이 횡행한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폭거를 진행하면서도 2기 사분위는 그동안 한 차례도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위한 요약문만 공지했을 뿐 기록 자체를 공개거부한 사분위는 정말 총리실이나 청와대 회의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이다. 공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숨긴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었다. 상지대 정이사 선임 관련 최근 속기록 자체를 폐기했다는 교과부의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불법적 행위가 백주 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법 행위가 공공성의 심대한 파괴라는 상식조차 아예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불법이라도 억지를 쓰면 다 넘어가는 요즘의 정치 현실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그런 위법행위를 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과부는 잘못된 상지대 정이사 선임 처분을 즉각 취소하라는 시민사회의 주장을 회피하고 있다. 교과부는 오히려 사분위의 잘못된 결정을 조장하고 있다. 교과부 사분위 담당부서는 9월 8일 민주당 등 야당 교과위원들의 자료 제공 요구에 대해 공문을 보내 “51∼52차 전체회의 속기록은 사분위 결정에 따라 폐기되었다”고 밝혔다.

사분위가 폐기한 것으로 알려진 해당 속기록은 지난 4월 29일 열린 51차 회의와 6월 29일 열린 52차 회의다. 51차 회의에서는 정이사 선임 관련 추천 비율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52차 회의에서는 이 결정에 따라 정이사를 추천하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9월8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사분위와 교과부는 야당 위원들의 당연한 요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회의록 공개는 커녕 속기록을 폐기했다는 뻔뻔한 답변이 왔을 뿐이다. 책임자인 사분위 위원장이나 전 교과부 장관 역시 증인출석을 거부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안하무인이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사분위 결정은 무효일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으로서 법에 정한 기록물 보존기간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임의로 회의록을 폐기하는 것은 초법적 권력의 대표적인 위법이다. 속기록 폐기는 국가기록물관리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형사 처벌감이며 해당 교과부 장관과 담당 간부, 사분위원장, 사분위원 등이 고발대상이지만 그들은 정권의 무한권력에 취한 채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막무가내 행정의 결과는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적 파행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불행한 사태의 핵심이다. 상지대 회의록 비공개 그리고 속기록 폐기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사분위의 의결 자체가 무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자 대상 요약본이 실제의 회의 내용 결과인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과위 소속 여당 위원들은 “교육 현안이 무척 많은데, 민주당이 사사건건 상지대 사태를 걸고 넘어져서 회의를 방해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학비리의 온상을 더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상지대와 같은 반발의 요소 자체를 싹부터 싹둑 자르거나 혹은 아예 조금도 반발할 수 없을 정도로 현행 사학법마저도 바꾸려 한다. 2007년 개악된 사학법을 더 개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공공성이 부재한 사학의 사유화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속셈이다.

 

2. 퇴행사회의 특징

 

상지대 사태는 교육계 기득권자들의 몰상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행한 사건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육 마피아들이 학교 운영권을 초법적으로 탈취한 상지대 사태는 상지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학의 퇴보와 대한민국 민주화의 퇴행이라는 병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상식, 정치적 상식이나, 나아가 윤리적 상식이 모두 무너지고 있는 현장이 상지대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정치적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주변에 횡행하는 불법과 비상식을 눈감고 넘어가는 무임승차 의식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화가 양화를 축출하는 그런 퇴행사회가 자리잡게 된다.

실은 이미 한국사회는 그런 퇴행적 관행이 자리잡은 불행한 병증을 보이고 있다. 퇴행사회는 다음과 같은 몇몇 전염병적인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퇴행사회는 사회의 민주적 기반을 강제적으로 붕괴하려 한다.

과거 비리집단이 사학을 다시 장악하면서 학생이나 교직원 할 것 없이 종래의 민주적 학교 구성원들을 보복하기 위한 근거없는 고소 사태들이 무수히 벌어지게 될 것이다. 나아가 퇴행에 공조하는 해당기관은 기존 학교에 대해 각종 억지 감사를 무자비하게 실시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과거 민주적 조직에 대해 해코지를 하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설 자리를 확보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민주 집단을 붕괴하기 위한 비리집단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강행할 수순이 될 것이다. 작년 문화체육부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관련 부서 인물들을 강제로 교체시킨 일이 그 사례이다. 비상식적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이러한 초법적 사태는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일종의 정치적 타살에 해당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졌으며 앞으로는 그 이상의 비상식적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전염병적 병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화의 가치를 떨어트리기 위해 악화의 분포를 최대화하려 한다. 결국 그들은 양화가 정말 양화가 아닌 양의 껍질을 쓴 최고의 악화라고 가짜선전에 광분하게 된다. 전교조를 빨갱이로 몰고 가고 싶은 그들의 속셈은 전형적인 악화의 광분에 해당한다.

둘째, 퇴행사회는 비상식을 상식화한다.

왕조의 왕권 승계하듯, 김정일의 정권 승계하듯, 기업의 소유권 승계하듯, 사학 역시 자손이 사학재단의 소유권을 승계해야 한다고 버젓이 천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사회의 퇴행적 자화상이다. 악화의 주범인 그대들이 좋아하는 미국사회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학이 많은 미국사회에서도 사학의 공공성은 제일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사회는 자본의 권력이 자본증식의 범주 안에서 최대화하려는 자본의 내적 가치에 충실한다. 쉽게 말해서 돈을 벌고 싶다면 기업을 통해서 돈을 벌어야지 학교를 세워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상식화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학교를 세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퇴행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그는 학생들을 솎아 내는 일이 바로 입시교육이라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했었다. 문제는 정 전 총리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많은 기득권자들의 생각과 일치된 결과일 뿐이며, 예를 들어 강남 특구지역 땅부자들의 교육관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비상식이 상식으로 전도되는 퇴행사회의 단면이다.

셋째, 퇴행사회는 이념을 도구화한다.

퇴행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우의 이념대립과 무관하게 기득권자의 사적 이익의 최대화만을 목표로 한다. 그들은 그러한 목표 외에 모든 공적 가치들을 무시하려 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럴듯한 공공적 표어를 내세우기는 한다. 그러한 수순의 전략적 절차로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대립관계를 극한적으로 약용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목청 높여 외치지만 주변상황이 그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경우, 기존의 자유 시장질서조차 드러내놓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맞춰 시장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과거(의) 비리 사학재단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리 사학재단들은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그냥 비리의 집단일 뿐이다. 비리와 부정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하여 좌파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심하게는 빨갱이라고 몰거나 혹은 전교조 악마라는 등의 온갖 현혹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비리를 마치 이념적 대립, 정쟁적 충돌의 부작용으로 비춰지도록 주변 전략을 실행에 옮긴다.

요약한다면 퇴행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그냥 자기집단적 이익에 눈먼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데 있다.

상지대학교는 이런 단면들을 모조리 안고 가는 불행한 운명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만들어진 조작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육은 억지의 조작이 진실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념의 허상, 비상식의 전염이 득세해가는 퇴행사회에서 여전히 마취상태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깨어 일어나 건강하게 살 것인지를 굳이 묻지 않고서도 우리와 후손의 행복을 찾아 당당한 행보를 할 것이다.

 

천박한 시대, 보수에 대항하는 진보의 정치[시대와 철학]

은폐된 진실, 선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문제

1990년대 초?중반 정태춘은 그의 노래 ‘건너간다’에서 우리 시대를 “천박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90년대 초?중반은 80년대의 민주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10대가 소비의 핵심적인 주체로 부상하는 등 대중소비사회의 형성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차이와 개성, 쿨함 등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 미덕이 된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96년 경제위기도, IMF 구제금융 신청도 이것을 막지는 못했다. 바야흐로 소비 욕망은 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표상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광풍을 자신의 몸에 내면화했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한국의 보수들이 주창했던 ‘잃어버린 10년’은 흔히 도덕과 법으로 상징화되는 보수의 부활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근대의 사적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이기주의와 개인적 성공이라는 사적 욕망의 부활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신화’로 변주된다. 마치 이번에 진행된 개각에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태호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는 농민의 아들, 소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1998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되었고 2004년 6?5재보선에서 최연소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명박정권은 이번에 다시 그를 김종필 이후 최연소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대선의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공신화에는 항상 감추어진 이면이 있다. 이명박대통령 본인의 BBK에서부터 고소영 내각까지, 그리고 심지어 ‘떡검’, ‘떡찰’에서 시작하여 ‘색검’과 ‘색찰’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그러하다. 강남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깊숙이 은폐된 밀실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다른 한편의 욕망은 언제나 진실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성공한 자들이 누리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결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일 뿐이다. 총리로 지명된 김태호 또한 그러하다. 그 또한 이명박대통령처럼 ‘박연차 게이트’의 관련자로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이번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출마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동한다. 한편의 성공신화에 이 정도의 구설수가 없겠는가?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은 위반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위반은 필연적이고 항상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 위반을 감추는 능력,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을 ‘선’으로 가장(假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차악을 감추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에서 ‘절대선’은 없다. 문제는 삶을 선으로 치장하는 우리의 능력이다. 따라서 문제는 ‘선’이 아니라 ‘욕망’이다. 그것도 우리의 ‘소비욕망’이다.

현대적 보수주의, 외설적인 아버지의 선

오늘날 한국의 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수도 정확히 이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은 현실의 변화에 진보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들은 어차피 도덕과 법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들은 기존의 도덕이나 법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변화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치장하는 법과 도덕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관념적으로 지켜야 할 전통적인 가치나 법 따위는 없다.

반면 오늘날 무수한 지식인들, 특히 윤리학자를 포함한 철학자들, 흔히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양심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하면서 ‘전체주의’의 공포와 사물화의 즉자성을 환기시키면서 사유와 태도 양식의 변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세계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보수’는 진보보다 더 진보적이며 현실적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세계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현대사회를 지탱해왔던 모든 삶의 양식들을 해체 또는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차원은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방식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사회의 정치-경제-문화-윤리적 양식들은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의 소유권은 이미 로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의 인신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는 자기 노동에 따른 것이다. 사적 소유권은 자신의 인신이 투여된 노동에 근거한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상은 이런 소유권을 해체하고 있다. 한편으로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생산의 자동화와 정보화가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를 전면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는 다양한 네트워크들의 전면적인 접속망의 창출은 국경과 지역을 넘으면서 공장이라는 경계를 넘는 생산의 사회화를 전면화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윤리적 가치와 전통적인 삶의 양식들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전면화하고 사람들은 ‘불안’을 넘어서 적이 명확하지 않는 ‘공포’, 바우먼이 이야기하는 실체가 모호한 기괴한 대상에 의한 공포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여기서는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 자체가 모호하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기업들도 모두가 현재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 아니다. 단지 이 상황에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소유권이다. 그들이 근대적 소유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지배력은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변화된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전면적 지배력을 가지고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법적으로 그것을 확립하고자 한다.

경제적 강제력이 아닌 소유권의 경제외적 강제력의 부활!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법 속으로 돌아온 외설적인 아버지라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한 카피본에 대한 지적 소유권이 그러하며 공적 자금 지원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대한 사적 소유권 보장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1960년대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1962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소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WI-38이라는 세포주를 유도하고 특허를 출원했다. 그러나 이것을 주도했던 헤이플릭은 연방정부의 재산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반면 1980년대 이후 미연방정부는 연방자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발명과 발견들에 대해 특허출원을 허용하는 각종 법안, ‘베이돌법’, ‘스티븐슨 와일더법’, ‘연방기술이전법’ 등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은 명백한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그들이 철저하게 당파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가치와 양식들을 고수한다. 관념적인 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자들이며 소위 관념과 가치-문화를 강조하는 관념론자들이 아니라 물질-현실-육체를 강조하는 유물론자들이다.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은 소심한 전통주의자들이며 급진주의자들은 히스테릭한 관념론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회의하며 기껏해야 ‘소통’, ‘협치’, ‘공정성’ 등등의 추상적인 가치들을 고수하고자 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보수주의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가장한 낡은 가치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욕망, 진보주의자의 길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문제는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이미 낡은 패러다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와 세계상은 변화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주의로는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했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여전히 월러스틴이 이야기하는 자유주의 헤게모니에 의해 포획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주의적인 정치는 여전히 로크적이거나 루소적인 사회계약론의 모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응하는 좌파의 정치적 양식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제도적인 것들 속에서의 투쟁이, 다른 한편에서는 제도를 벗어난 반제도적인 투쟁이 전개된다. 하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현재의 세계상이 보여주는 한계와 틈새들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면서 이를 넘어서고자 하지 않는다. 사유는 초월적인 외재성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내재성 그 자체의 표현력과 자생성에 주목하는 차원에서 멈추고 있을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현행적인 것(the actual)’ 속에서 재현의 정치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잠재적인 것(the virtual)’ 속에서 삶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제도 내에서의 좌파적 기득권을 이용하여 ‘통일’을 가장한 ‘패권’을 행사할 뿐이며 ‘자유주의자들’과의 야합을 생산할 뿐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에 대응하는 좌파들은 각기 가족적 집단성과 이데올로기적 선명성 경쟁을 할 뿐이다. 그들 중에서 진정으로 짐을 지는 자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 이 짐을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가는 자들은 보수주의자들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소비욕망’의 코드 속에서 그들의 욕망과 공포, 불안을 포획하는 정치를 창출하는 데 거침이 없다. 여기에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정치는 ‘진실’을 생산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것에 대응하여 기껏해야 그것은 ‘거짓이야! 당신은 속고 있는 거야!’라고 소리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을 사는 대중들에게 욕망은 사회 속에서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자기 존재의 긍정성과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 어떤 비전도, 힘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짐을 지지 않는다. 그 짐은 추호의 흔들림도 죄악이 될 수 있는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했듯이 정치란 권력의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이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현실적이어야 하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화된 세계상과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드러내는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이 생존하기 위해서 기댈 수밖에 없으면서도 결코 그 안으로 온전히 포섭할 수 없는 것, 즉 노동과 자연에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언제나 노동의 형태로 재생산되며 자본의 에너지원은 자연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새롭게 기획해야 할 정치는 이 양자의 틈새, 간격, 모순을 드러나는 바로 이 지점이다.

오늘날 대중들은 소비욕망에 포획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풍요는 빈곤과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욕망이 소비욕망으로 전치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불순하기 때문이 아니다.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사회, 그래서 소비욕망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이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구연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사유의 방식과 마음, 가치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가 이기적이 된다고, 그리고 노조가 실리화된다고 비판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요구되는 정치이다.

희망의 정치, 레닌을 반복하기

권력의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명박대통령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의 정치와 진보주의적 정치는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형식이다. 진보주의적 정치가 대중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공동체적 자치권력을 생산한다면 보수주의적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생산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민주노동당이 생산하는 정치는 대표-재현의 정치를 반복할 뿐이다. 반면 반제도적인 대중의 역능에 주목하는 정치는 생활을 정치로 변환시키지만 역으로 권력의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제도적 정치와 전혀 다른 형식을 가지지만 정작 그 힘을 생산하지 못한다.

이명박의 불통과 아집, 독단은 짐을 짊어짐으로써 대중이 요구하는 불안과 공포를 자신의 권력으로 총화시킨다. 반면 진보주의적 정치는 그런 선택을 거부함으로써 그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구화는 전통적인 공공적 아버지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네그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탈국민국가, 탈주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역이 힘이 작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더 강력한 권력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구차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대한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전치시키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러하며 이명박대통령의 ‘불도저’가 그러하다.

따라서 오늘날 4대강 사업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진행되는 이명박정권의 불통과 아집, 그리고 독단은 그것을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실제적인 희망과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의 정치는 더 이상 자본적일 수도 없으며 대표-재현의 정치일 수도 없다. 그것은 그 경계를 넘어서 질적으로 다른 사회-세계를 창출하는 정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나 사유, 행동 양식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레닌처럼 극한적으로 사유하고 극한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상은 이미 내재적인 자기 전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당시 맑스주의자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전쟁 반대, 평화’를 외칠 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는 성공했고 새로운 정치를 창출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레닌처럼 결단을 하고 짐을 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은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이 반복되는 것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이 아니다. 반복되는 레닌은 과거의 레닌이 아니다. 오늘날 반복되어야 하는 레닌은 새로운 레닌이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는 레닌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는 논쟁이 사라졌다. 그것은 누구도 이 시대를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권 좌파나 비제도권 좌파 모두 가릴 것이 없다. 논쟁 대신에 힘이 지배하고 책임 대신에 적절한 야합과 타협, 실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현행적인 것의 포로가 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그람시식의 정치는 생산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상력을 이야기한다. 물론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그 결단과 책임, 짐을 지지 않는 상상력은 정치가 아니라 관념적인 공상, 또는 행위 없는 개념에 머물 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 선택과 결단,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박영균(건국대 HK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