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질병이 아니다! [썩은 뿌리 자르기]
자살은 질병인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노력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에스퀴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살은 정신병의 모든 특징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은 미쳤을 때만 자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사회학?정신의학?심리학 등 소위 공공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학문들은 자살을 질병 다루듯 취급한다. 그들은 우울증?조울증?자살 관련 유전자 등,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살이 질병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
질병이 원인인 자살은 분명히 있다. 우울증?조울증과 같은 증상은 충분히 자살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질병의 고통 때문에 자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자살이 질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먼저 자살은 전염성이 강하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리는 자살의 전염이 그것이다. 최진실씨가 죽었던 달에는 자살자가 전달에 비해 66% 증가했다.
부모가 자살을 하면 그 자손도 결국엔 자살을 한다는 속설은 자살이 유전 질환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라는 것도 자살을 질병화 하고픈 이유일지도 모른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자살률이 유독 높다는 것은 국가 체면과 관련된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와 윤리에서 자살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지만 자살이 질병이 아닌 시대도 있었다. 그 때 자살은 종교적 구원의 문제이자 철학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자살은 의학의 문제이며 과학의 문제다. 자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만이 자살을 질병화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러나 자살을 직접적인 질병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살은 사회적 질병이다.”, “우울증 유발 유전자”, “자살의 진화생물학”,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등 자살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얘기들이 기사화된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살을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살은 그들이 과학적인 설명에 포함하고 싶었던 윤리?도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이다. “동물도 자살을 할까?”라는 물음에 “예”라는 대답은 자살은 인간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아폽토시스(apoptosis)’라는 세포 자살 현상은 도덕과 무관한 생명현상일 뿐이다.
아직은 과학이 자살을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과학적으로 질병화 하는 이면에는 단 하나의 장점만이 존재한다. 자살을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인 경제적인 문제를 개인의 질병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경제적 빈곤의 문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보세요. 그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행복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우울증에 빠진 것입니다. 혹시 조상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타적 자살, 영웅 만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질병이 아닌 자살도 있다. 뒤르켐에 의하면 이것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불린다.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 정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 발생한다고 하지만, 사회를 강력하게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일하게 질병화되지 않은 자살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으며 영웅 만들기로 이어진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있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체제를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고, 식민지 국가들을 독립을 위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들이 조국과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침략이든 테러든 자신을 희생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희생도 학문적으로는 ‘이타적인 자살’일 뿐이고, 여기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한다. 좋은 자살과 나쁜 자살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기적 자살은 나쁜 것이고 이타적 자살은 좋은 것인가? 자살이라는 질병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면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타적 자살도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다. 가미가제를 생각하면 된다. 젊은이들이 비행기를 몰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병폐의 한 단면일 뿐이다. 21세기에는 한국에도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형 영웅 관리 모델 수립’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사회는 위대한 성취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교과서다. 교과서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형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도 한주호 준위의 이야기도 가슴 속에 기억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교과서가 아닌 다른 글에서 만나야만 한다. 아니면 서정주의 「오장 마쓰이 송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백선엽 장군처럼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서 친일을 하다가도 전쟁에 나가서 잘 싸우면 당신도 오성장군이 될 수 있고, 영웅이 되어 나중에는 국립묘지에 갈 수도 있다고 교과서에 실어 주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죽은 영웅보다 살아있는 영웅이 더욱더 모범이 되지 않겠는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자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한다. “영웅이 필요 없는 나라는 행복하다.”지금 우리에게는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면서 빈곤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는, 그래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빈곤도 질병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층의 자살이 자꾸만 증가한다. 범죄도 증가하고 있다. 빈곤층의 자살을 질병으로 파악하려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단한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의해 우울증에 빠진 빈곤층 중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약물 치료를 받으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상담을 받고, 교육을 받으면 된다. 슬그머니 우울증이 유전 요인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부탄”이라는 기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정작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의 대상인 우리의 부자들은 제외된다.
그러나 우리는 OECD 국가 중 자살률만이 1위가 아니라 저임금 근로자 비중도 1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제적인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예전에 빈곤을 사회생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끝났다. 과학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도 빈곤을 질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난하면 질병에 걸릴 수 있다. 가난하면 질병을 치료받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 가난하면 질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 자체는 질병이 아니다. 또한 빈곤에 의한 자살도 질병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과 의학의 힘으로 자살이라는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하는 것, 저임금 근로자를 줄이는 것,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바로 이것이 빈곤에 의한 자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다.
과학과 의학이 해야 할 일은 자살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치료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천해서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을 막는 것이지 ‘이타적 자살’을 미화해서 정치 의도에 맞는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나서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동물의 자살 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중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관찰한 ‘플루’와 ‘플린트’이야기가 있다. ‘플린트’는 어미인 ‘플루’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주검을 지키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독립하기 전 새끼가 어미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미의 부재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미가 없는 동물은 먹이를 얻어먹을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빈곤층일수록 가족동반자살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진정한 경제적 분배 정의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한 가난은 ‘검소하다’라는 말로 위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끼니가 없어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살이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말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만 남을 뿐이다.
강경표(중앙대학교 철학 박사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