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을 읽고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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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성 (책익는 마을 주민)

 

1. 읽혀서는 절대 안 되는 책

몇 차례 쏟아지는 폭우에 결코 고개 숙이지 아니하고

제 마음 굽히지 않았더니 외꽃이 더욱 노랗다.

절대로 무릎 끓지 아니하고

제 뜻을 꺾지 아니 하였더니 능소화가 더욱 붉다.

저 꽃의 이유를 찬찬히 읽는데 가슴이 불시에 뛴다.

피가 갑작스럽게 끓는다.

단 며칠 세상에 목숨 내밀더라도

활짝 피는 것들이 生은 무기보다 더 위험하다고 한 줄도 읽지 못하게

자물쇠 단단하게 채워 놓거나

불을 지르면 지를수록 오히려 더 불온해지고 싶은 법이라네.

저 금지된 서적 같은 꽃에 물 들은 나도

짙은 빛을 내뱉으며 누군가에게 한달음에 읽혀지고 싶은 것이다.

–불온서적 (김종제님의 시)–

20 여 년 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 손에 이끌려 ‘금서’라는 책들을 읽으며 토론했다. 그 때 심장을 철커덕 거리며 읽었던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철학에세이, 맑시즘, 고리끼의 어머니라는 책들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도 광주사태로 배워왔던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며 큰 충격에 빠졌다. 그 책들은 군부 독재의 반공 교육에 길들여진 무지한 나를 변화시켰다. 군부독재가 끝나면서 금서와 금지가요들이 해금되었고 우리의 사상은 더 이상 정부에 의해 통제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몇 년 전 국방부가 군인들에게 유해하다며 불온서적을 정했다는 기사를 보면 그렇지 못하다. 얼마 전에도 온 국민을 분노로 연대하게 만든 ‘도가니’의 원작 소설가를 경찰이 조사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인권위의 얼빠진 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의 사상은 어떠하기에 국민의 사상을 검열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내가 그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싶다. 이 사회도 나도 아직까지 1980년대 이 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위정자들은 책을 두려워한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를 지니게 된다. 책은 사람의 생각을 바꿔 행동을 바꾸게 하며 현재를 바꿔 나가면서 미래까지 바꾼다. 그 사실을 위정자들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화씨 451’ 속의 위정자들도 책을 두려워한다. 책이 주는 거대한 힘을 알기 때문이다. 그 위정자들은 통치에 위험한 책을 없애기 위해 독서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책들을 불태운다. ‘유색인들은 <꼬마 검둥이 삼보>를 싫어하지. 태워버려. 백인들은 <톰아저씨의 오두막>을 싫어하고. 그것도 태워버려. 누군가가 담배와 폐암과의 관련에 대한 책을 썼다면? 담배 장사꾼들 분통이 터지겠지. 그럼 태워버려.’

지금 우리 위정자들은 어떤 책들을 불태우고 싶어 할까? 그 위험한 책들이 타기 시작하는 온도가 바로 화씨 451도 이다. 책을 태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 Fireman 이다. 그러나 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수이다. 주인공 가이 몬테그도 방화수이다. 그는 클라리셰라는 소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하는 일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화수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법의 수호자라며 자부심을 가졌다. 클라리세는 비정상인 소녀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그녀는 텔레비전 수업,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역사 수업, 운동 시간 등을 수업하는 학교에 대해 비판 한다. 그런 수업을 하는 교실을 감옥이라고 말한다. 클라리세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 아들은 감옥에서 공부하고 있다. 딱한 내 아들이다. 클라리셰는 사람들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아니에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 밖에 안 해요…..그저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기 일쑤죠. 멋있고 즐겁지만 그것뿐이죠.”

클라리셰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말초적일뿐 더 이상의 지성은 없다. 몬테그의 아내 밀드레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녀는 하루 종일 벽면 TV 앞에 앉아 일방적인 TV 방송만을 탐닉한다. 그녀가 이웃집의 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드라마 얘기뿐이다. 그녀가 소망하는 것이라곤 그저 네 벽 전체를 헐어 내고 텔레비전으로 바꾸는 것이다.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풍경이다. 텔레비전이 거실 한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우리 집, 커피를 마시며 어제 시청한 드라마로 열띠게 이야기하는 내 모습들이 겹쳐진다. 그래서 밀드레드나 이웃집 부인들을 차마 비웃지 못하겠다.

 

3. 책들을 읽으면……

클라리셰를 만나면서 몬테그는 책들을 태우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자신이 그토록 보람 있다고 생각해 온 일에 회의를 느낀다. 책 속에 어떤 것들이 있기에 모든 것을 버려가며 책을 지키고 책을 읽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 소녀가 사라진 후 몬테그는 자신들이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데도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는 그 진실은 책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 하루에 두 시간 씩만 이 책들을 읽으면, 어쩌면 …….”

이라고 절규한다. 몬테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변화 시켜 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떠나 자신이 숨겨둔 책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 곳은 책을 필사적으로 지키며 살아가는 반사회적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책을 읽고 책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사회적 범죄인들이다. 픽션이라는 소설 속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80년대 금서를 읽었던 나도 반사회적 범죄인이었다. 몬테그가 사는 사회의 위정자들이 정말 두려워 한 것은 독서를 통해 국민들이 비판적 사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사고를 지니게 되면 국민들을 멋대로 통치하기 어렵고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몬테규의 절규처럼 책들을 읽으면 ‘앎’을 갖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되어 불의에 저항하게 만든다. 그래서 방화서장 비티의 말대로 책을 소유하는 게 범죄가 아니라 읽는 게 문제인 것이다. 나는 책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읽고 있는 지 되돌아본다.

 

4. 책이 사라지고 있다?

출판사 시장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단다. 우리 아들만 보아도 그럴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아들내미가 읽는 책이라곤 교과서와 문제집, 참고서가 전부이다. 책갈피를 넘겨가며 읽는 아들의 모습이 낯설어서 걱정이다. 이렇게 독서를 하는 경우는 국어 수행평가로 독서 감상문을 쓸 때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독서를 하라고 말하면 시간이 없다는 변명만 돌아온다. 토요일에도 밤에 귀가하는 아들을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건지 책 읽을 마음이 없는 건지 헷갈린다. 그러나 TV 앞에 앉아 낄낄거리는 걸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책 읽기는 괴로우나 TV 시청은 즐겁다는 아들놈을 보며 고민한다. 아들과 비슷한 아이들이 많다면 ‘책이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기우이다. 부디 우리 아들들이 TV가 주는 감각적 유희에서 빠져나와 책 읽기가 주는 이성적 사고에 빠져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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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래이 브래드버리 지음, <화씨 451>(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 관한 장윤성 책익는 마을 주민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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