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크레인 위의 외침과 집단적 책임의 문제[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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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진(숭실대 강사)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나찌 전범재판을 참관하고 난 후, 그 과정과 함께 전범재판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냅니다.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인 나찌의 간부들이 상명하달의 조직체계 안에서 어떻게 야만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아렌트는 ‘집단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원래 서양철학 전통에서 ‘책임’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물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동기의 확인이 필요한데, 집단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런 확인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러한 동기의 확인은 더욱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국가의 구성원이나 거대조직의 구성원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렌트 이후 이런 인식은 바뀌게 됩니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나 정신분열증환자 및 정신지체아에 대한 안락사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범죄행위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법안을 통과시키는 의원들을 국민들이 뽑지 않았다면 그러한 야만적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야만적인 해악을 예방하는 어떤 일을 함께 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비로소 집단적 책임 개념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한진 중공업 경영진의 집단적 책임감의 실종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이자 민주노총 지도위원인 김진숙 씨가 4인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은 390일간 지속되었습니다. 회사 측은 수주경쟁력의 저하, 매출액의 현저한 감소, 경영실적 악화 등을 들어 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회사 측이 정리해고 발표 다음날 대주주들에게 174억을 배당하고, 이사들의 연봉을 1억원씩 올리기로 결정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상황이 회사 측이 내세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당시 경영상황이 긴박했다는 회사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사실로부터 정리해고가 자동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경영진 역시 수주경쟁력의 저하와 같은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진중공업의 경영진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게 된 데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집단적 책임을 망각한 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현실과 세대간 부정의에 대한 집단적 책임의식의 필요

그러나 경영진들의 이러한 집단적인 무책임은 보다 광범위한 집단적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보다 광범위한 집단적 무책임이란 바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집단적 무책임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명예나 OECD 가입국이라는 지위는 다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삶의 질 하락을 댓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OECD 최장 노동시간(평균치보다 600시간 이상 차이)과 OECD 최하의 최저임금 수준이라는 통계자료는 이런 주장이 근거없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 조직율이나 단체교섭적용률은 OECD 가입 이후 꼴찌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이중적인 노동통제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노사관계가 불공평한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적어도 노동분야에 관한 한 민주화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후퇴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역동적인 정치 민주화 과정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주의와 노동의 민주주의 간의 이러한 불균형을 낳은 주원인 중 하나로 국민들의 반노동적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노동적인 관점은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요인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할 때 고용주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관점이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발상이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망각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반노동적 관점은 노사관계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소유자는 생산과 투자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이를 통해 국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사회적으로 중대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오늘날 마치 상식처럼 되어버린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같은 생산에 대한 지휘권과 국내공장의 해외이전 같은 투자에 대한 지휘권이 국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노동적 관점의 또 다른 자양분은 노동상품 가정입니다. 이는 노동자가 기업주에게 파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우리가 사고 싶을 때 사고 또한 팔고 싶을 때 파는 여타의 상품과 다를 바 없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가정입니다. 이로 인해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인해 기업주에게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준강제적인 노동계약은 자발적인 계약으로 포장되며, 실업은 낮은 임금의 노동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노동귀족’의 불평으로 폄하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심각한 수준의 실업이 발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런 관점은 실업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노동적 관점이 이처럼 기업 소유자가 생산과 투자에 대한 과도한 지휘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노동자들이 불공정한 노동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면, 또 이런 반노동적 관점이 노동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주요인이라면, 노동의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전환은 정리해고나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로 인해 일어나고 있고 또한 앞으로 예상되는 피해에 대해 우리가 집단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88만원 세대보다도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할지도 모를 후속 세대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 역시 갖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의 고용기회와 고용의 질을 희생시키면서 현재 세대의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는 어떤 의미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헌법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과 민주주의 관련 조항이 때아닌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경제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시대적 화두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이중적인 불공정 노동의 족쇄가 작동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노동없는 민주주의 문제만큼 시급한 경제 민주화의 과제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85호 크레인 위의 고공농성은 일단락되었지만 너무나도 긴급한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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